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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 도중 당시 69세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와 60세의 3선 상원의원 린지 그레이엄은 유치원생도 안 할 유치하고 졸렬한 싸움을 벌였다. 2008년 대선후보 존 매케인의 정치적 아들로 꼽혔던 ‘주류’ 그레이엄은 ‘아웃사이더’ 트럼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레이엄이 트럼프를 ‘내가 본 가장 멍청한 인간’이라고 혹평하자 트럼프는 ‘미치광이’로 응수했다. 급기야 그레이엄의 지역구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찾은 트럼프는 유세장에서 앙숙의 휴대전화 번호를 공개해 버렸다. 트럼프 지지자의 비난 문자가 쇄도하자 그레이엄 역시 전화를 믹서에 갈고 골프채 목검 식칼 등으로 내리치는 동영상을 제작해 뿌렸다. 누가 봐도 타격 대상은 전화가 아닌 트럼프였다. 이랬던 둘의 관계는 트럼프 집권 후 극적으로 변했다. 그레이엄은 두 차례의 대통령의 탄핵 위기 때 공화당 어떤 의원보다 적극적으로 엄호에 나섰다. 늘 주군의 직무수행 능력과 유머 감각을 칭송했고 그 옆에서 ‘내가 이 순간 미국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란 낯간지러운 말까지 했다. 민주당 집권을 저지하기 위해서란 이유를 대긴 했지만 정치는 생물이며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음을 보여줬다. 그레이엄의 참전용사 선배이자 정치 멘토인 매케인은 2018년 타계할 때까지 끝내 트럼프와 화해하지 않았다. 반면 그레이엄은 트럼프 집권 1기 내내 대통령의 복심 노릇을 하며 정계 실력자로 군림했다. 언론은 늘 대통령 전용기에 동승하고 같이 골프를 즐기는 그를 트럼프의 ‘보컬 서포터(vocal supporter)’로 불렀다. 말 그대로 높은 목소리를 내는 요란한 지지자란 뜻이다. 하지만 다음 달 3일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그레이엄 역시 같은 날 상원 선거에서 본인의 4선이 위태로운 상황에 몰렸다. 몇 달 전만 해도 70%가 넘는 지지율로 흑인 법조인 출신인 40대 정치 신예 제이미 해리슨 민주당 후보에게 넉넉히 앞섰지만 최근 조사에서 지지율이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선거자금 모금은 오히려 크게 뒤져 막판 선거전에서 쓸 실탄이 부족한 상태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백인 보수층이 많은 미 남동부를 뜻하는 ‘딥사우스’의 핵심 지역으로 아직도 스스로를 ‘미국인’ 이전에 ‘남부인’으로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다. 2015년 공화당 소속 니키 헤일리 당시 주지사가 공공장소에서 남북전쟁 당시 남군의 상징이었던 남부연합기를 퇴출할 때도 거센 반발이 있었다. 또 매케인, 밋 롬니, 밥 돌 등 백악관 주인이 되지 못한 공화당 대선후보조차 이곳에서는 민주당 후보를 쉽게 이겼을 정도로 공화당 텃밭으로 꼽힌다. 이런 곳에서 집권당 중진이 야당의 무명 정치인에게 고전한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해리슨 후보는 그레이엄을 공격할 때 주(州) 내 경제 상황 등이 아닌 트럼프 행정부의 인종차별 정책,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처 등을 소재로 사용하고 있다. 한마디로 “트럼프 아바타를 몰아내자”는 식이다. 반박하자니 지난 4년간 대통령 지근거리에 있었던 게 사실이라 “나와 대통령은 다르다”고 받아치기도 민망한 상황이다. 즉 대통령과 거리가 가까울수록 특정 정치인이 누릴 수 있는 권력도 커지지만 동시에 자신만의 브랜드는 휘발되고 대통령 수족이라는 이미지만 남는다. 주군의 인기가 높을 때는 큰 상관이 없으나 대통령의 인기가 떨어지면 이것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본인의 정치 생명마저 갉아먹는다. 아직은 그레이엄 의원의 4선과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여부를 알 수 없다. 만약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고 그가 낙선하면 그레이엄이 어떤 말을 할까. 이번에는 ‘가장 멍청한 인간’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 여파로 공화당이 상원 다수당 지위를 잃는다면 대통령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사람이 그레이엄 혼자만도 아닐 것이다. 인기를 잃은 권력자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야당도 언론도 아닌 당내 반대파이며 어떤 권력자의 인기도 영원하지 않음을 역사가 보여준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2014년 3월 미국 진보 성향 법학자 어윈 처머린스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법과대학원 교수가 로스앤젤레스타임스에 도발적 기고문을 게재했다. 그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을 존경하지만 민주당 대통령이 현직에 있을 때 후임자를 뽑아야 한다.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상원 다수당 지위를 잃을 수 있고 2년 후 대선에서 패할 수도 있다. 올여름 사퇴해 달라”고 썼다. 공화당이 집권하면 긴즈버그가 신봉해온 가치와 완전히 다른 이념을 지닌 이가 대법관에 뽑혀 미 사회를 좌지우지할 가능성이 크니 본인의 신념을 위해서라도 지금 물러나라는 호소였다. 당시 처머린스키 교수 말고도 진보 진영에서 이런 주장을 펴는 인사가 적지 않았다. 본인이 사퇴를 거부하면 대통령이라고 해도 미 헌법이 보장한 대법관의 종신 임기를 바꿀 수 없으니 스스로 용단을 내리라는 압박이 상당했다. 긴즈버그는 여성지 엘르 인터뷰를 통해 “내가 물러난다 해도 대통령이 나 같은 사람을 또 임명할 것이란 생각은 잘못됐다”며 사퇴 요구를 일축했다. 자신 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 당당함의 발로였다. 그는 이달 18일 타계할 때까지 대법관으로 재직하며 종신(終身) 임기를 지켰다. 하지만 자신과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 이가 후임으로 지명됐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재집권 첫해인 2013년부터 긴즈버그의 사퇴를 내심 바랐다. 1993년 60세로 대법관에 오른 그가 이미 20년을 봉직했고 수차례 암 수술을 받아 건강 우려도 큰 만큼 젊고 건강한 진보 성향 대법관으로 대체하겠다는 속내가 강했다. 민주당 중진이자 긴즈버그와 가까운 패트릭 레이히 상원의원을 보내 이런 뜻을 전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집권 후 대법관 지형이 보수 우위로 바뀌면서 진보 진영 전체가 “하루라도 더 살아 달라”며 그의 장수를 기원했지만 오바마 시절에는 욕심이 과하다는 평가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4번의 암 수술과 수차례 낙상 사고에도 87세까지 종신 임기를 지킨 긴즈버그 대법관의 선택은 물론 존중받아야 한다. 자진사퇴 논란이 불경스럽게 느껴질 만큼 그가 미 사회와 세계 여성계에 엄청난 족적을 남겼다는 점도 변하지 않는다. 다만 공공연히 반트럼프 성향을 드러내며 ‘새 대통령이 내 후임자를 지명했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긴 긴즈버그의 결정은 상원 다수당 위치를 이용해 평균 70일이 걸리는 대법관 인준을 약 한 달 만에 해치우려는 트럼프 대통령 못지않게 당파적이고 정치적이라는 평가가 있다. 미국은 국민의 기대수명이 38세에 불과했던 1776년 건국 당시 사법권 독립을 위해 대법관 종신제를 택했다. ‘지혜의 아홉 기둥’이라 불릴 정도로 대법관 9명이 절대적 존경을 받고, 공화와 민주 양당이 집권할 때마다 최대한 많은 대법관을 새로 임명하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것 역시 개개인의 잘잘못이 아니라 종신제란 제도 때문이다. 2020년 현재 기대수명은 78.9세로 늘었고 18세기에 상상할 수 없었던 성소수자, 이민, 건강보험 등 각종 복잡다단한 문제도 속출하고 있다. 무엇보다 대통령 1명이 3억3000만 명의 미국인을 대표할 9명을 고른다는 것, 미 대법원이 다른 나라와 달리 최종심과 헌법재판소의 기능을 동시에 지녀 이들의 판결이 엄청난 파급 효과를 낳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사회 변화에 발맞춰 종신제 변화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한다는 지적이 상당하다. 공영 PBS방송의 조사에서 응답자의 77%가 “대법관 임기를 제한해야 한다”고 답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워싱턴 정계에서는 ‘대법관 임기를 18년으로 정하자’ ‘대법관 수를 13명으로 늘리자’는 주장도 심심찮게 제기된다. 민주당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4년 임기 중 단 한 명의 대법관도 지명하지 못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같은 기간 벌써 3명의 대법관을 골랐다. 특정 대통령이 ‘운’에 의해 사법부를 좌지우지할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대법관 종신제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져야 할 것 같다.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꿈에 나타나 두 가지 조언을 했다. “적을 모두 죽이고 크렘린궁을 파랗게 칠하라.” 푸틴이 물었다. “왜 푸른색이죠?” 스탈린의 답이 걸작이다. “첫째 조언은 반대하지 않을 줄 알았어.” 푸틴의 권위주의 통치 방식에 대한 영국 이코노미스트의 신랄하고 섬뜩한 비평이다. 블랙 유머로 치부하기엔 집권 20년간 사라진 그의 반대파가 너무 많다. 총격, 탈륨 및 폴로늄 중독, 폭발, 의문사 등 죽음에 이른 방식도 제각각이다. 민주주의 전통이 서구보다 약하다지만 러시아 역시 대통령을 직접선거로 뽑는 21세기 문명국이다. 전제군주 시절이라 해도 군왕의 정적이 이 정도로 무더기 공개 암살을 당했다면 민란이 일어났어도 이상하지 않다. 현실은 어떨까. 되레 지지율이 오른다. 여론조사회사 레바다센터가 지난달 27일 발표한 푸틴의 8월 지지율은 66%로 올 들어 가장 낮았던 4월(59%)보다 높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100만 명을 넘고, 메르스 백신을 살짝 바꿔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했다 우겨대고, 8월 한 달에만 알렉세이 나발니와 예고르 주코프 등 2명의 반체제 활동가가 테러를 당해도 최소 60%의 콘크리트 지지층이 있다는 의미다. 대체 왜? 가디언 등은 서방에 뒤처졌다는 ‘열등감’과 대국의 ‘자존심’을 동시에 지닌 러시아의 특성을 교묘히 이용한 결과라고 분석한다. 포르투갈 등이 신대륙 탐험에 나서던 15세기 러시아는 제국(帝國)에 공물을 바치는 공국(公國)에 불과했다. 17세기 말∼18세기 초 표트르 대제가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이미 서유럽보다 200∼300년이 늦었다. 19세기에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과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도 지배층이 모국어 대신 프랑스어를 썼다. 이를 한 방에 날려준 사람이 레닌과 스탈린이다. 최초의 공산혁명을 주도했고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의 상당 부분이 영토로 편입됐고 국가는 개개인의 후견인 노릇을 했다. 표트르 대제에 이어 두 번째로 ‘위대한 러시아’의 자부심이 각인된 시기였다. 소련이 무너지고 친서방 노선을 편 ‘알코올 중독자’ 보리스 옐친이 권좌에 있던 1990년대는 악몽이었다. 국가 부도로 빈곤과 범죄가 만연했고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은 추락했으며 체첸 등 소수민족 테러도 기승을 부렸다. 이 와중에 떼돈을 번 신흥 재벌 ‘올리가르히’는 향락을 즐겼다. 이때의 악몽으로 러시아에는 ‘서방’ ‘민주주의’ 등을 가난, 혼란, 부패의 동의어로 인식하는 이가 적지 않다. 보리스 넴초프 전 부총리 등 푸틴의 정적은 대부분 옐친계여서 국민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들은 집권하자마자 올리가르히를 숙청하고 체첸과 마피아를 제압한 푸틴을 질서와 규율의 상징으로 인식한다. 그 과정에서 푸틴 정권이 자행한 각종 인권 침해를 모를 리 없지만 ‘러시아의 자존심을 살린 공이 과보다 더 크다’고 여긴다는 의미다. 푸틴 역시 ‘혼돈에 빠진 러시아를 구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을 전략적으로 내세운다. 특히 스탈린 미화 같은 ‘역사 세탁’에 열심이다. 그는 2년 전 스탈린 탄생 140주년을 맞아 곳곳에 동상을 세우고 추모 행사를 열었다. “스탈린을 악마화하려는 시도는 러시아를 공격하려는 서방의 음모”라고도 주장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스탈린의 철권통치가 불가피했듯 서방의 인권 탄압 비판이 거세지는 지금 자신의 반대파 척결 또한 자연스러운 수순임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7월 개헌을 통해 84세가 되는 2036년까지 집권할 기반을 마련한 그가 언제까지 권좌를 지킬까. 올해 68세인 그는 2018년 기준 러시아 남성의 평균 수명(66.4세)을 이미 넘어섰다. 그의 궁극적 목표가 레닌, 스탈린처럼 죽을 때까지 권좌를 지키고 사후 밀랍인형으로 안장되는 지도자로 남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변변한 야권 지도자 한 명 없는 현실을 감안할 때 본인 건강만 유지하면 종신 집권 자체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분명한 점은 영원한 권력은 없으며 종신 집권에 성공해도 그에 대한 평가가 찬양 일색은 아닐 것이란 사실이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1975년 이혼소송 중이던 24세 미국 여대생이 33세 상원의원을 만났다. 남자는 3년 전 차사고로 부인과 딸을 잃었고 당시 차에 동승했던 6세, 5세 두 아들을 돌보는 것을 힘겨워 했다. 남의 아이를 키우는 것도, 일거수일투족이 노출되는 정치인 아내의 삶도 부담스러웠던 여자는 청혼을 네 번 거절했고 다섯 번째 청혼에서야 받아들였다. 1977년 결혼한 그는 아직까지 현역인 남편을 내조하며 딸을 낳았고 교육학 석박사와 영문학 석사 등 학위 3개도 땄다. 조 바이든 미 민주당 대선후보의 부인 질 여사다. 미 언론이 ‘바이든 박사(Dr. Biden)’로 표기하는 그는 정치인 배우자의 새 상(像)을 제시했다는 평을 얻고 있다. 2009년 남편이 부통령이 됐을 때 그는 유급 일자리를 가진 최초의 부통령 부인이란 타이틀을 얻었다. 남편이 상원의원 36년, 부통령 8년을 지낸 워싱턴 정계의 실력자였음에도 교사란 본인의 직업을 포기하지 않고 독립 생계를 유지한 결과였다. 당시 30여 년간 공립 고등학교, 2년제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영작문 등을 가르친 그는 학생들이 “바이든 의원과 무슨 관계냐”고 물으면 줄곧 “친척”이라고 했다. 2007년 56세에 박사 학위를 딸 때도 논문에 미혼 시절 성을 앞세운 ‘제이컵스-바이든’이란 이름을 썼다. 부통령 부인이 되자 4년제 명문대에서 출강 요청이 빗발쳤지만 “커뮤니티 칼리지가 좋다”고 응하지 않았다. 남편의 위상과 영향력을 감안할 때 세 아이를 키우며 직장생활과 학업을 병행한 그가 유무형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본인 의지 없이 남편 후광만으로 될 일도 아니다. 그는 공영라디오 NPR 인터뷰에서 “내 정체성은 교사이며 남편의 삶과 내 삶은 별개”라고 했다. 남편 또한 “취재진이 가득한 부통령 전용기에 탑승해서도 늘 시험 채점을 했다”며 아내의 독립성을 높이 평가했다. 그간 동서양을 막론하고 권력자의 배우자로 각광받았던 유형은 ‘그림자 내조형’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 없이 지내니 구설에 오를 일도 없고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는다. 부시가(家)의 안주인인 미국 영부인 바버라 부시와 로라 부시 여사,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남편 요아힘 자우어 박사 등이 대표적이다. 정반대 지점에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이 있다. 그는 1993년 남편이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백악관 동관의 영부인 집무실을 남편 집무실이 있는 서관으로 옮겼다. 의료보험 개혁도 추진했다. 고용주가 피고용인을 위해 더 많은 돈을 부담해야 한다는 개혁안 취지에는 많은 이가 공감했지만 “선출직도, 의료 전문가도 아닌 영부인이 왜 설치느냐”며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았다. 결국 의회 통과에 실패했고 이때 형성된 ‘똑똑하지만 잘난 척하는 여자’ 이미지는 훗날 그의 대권 가도에 결정적 장애물로 작용한다. 영부인은 물론 선출직이 아니다. 그렇다고 권력자 배우자의 영향력을 간과하는 것도 현실적이진 않다. ‘급’이 안 되면 모를까 역량과 의지가 있다면 뒤에서 베갯머리송사를 하게 놔두느니 공개 활동을 허용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실제 클린턴 전 장관의 의료 개혁안은 훗날 오바마케어의 뼈대가 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란 전대미문의 보건 위기까지 맞은 지금 이 법안이 나왔다면 훨씬 많은 지지를 얻었을 것이다. 바이든 후보가 백악관 주인이 될지 알 수 없지만 그가 권좌에 오르면 질 여사가 전공을 살려 교육 양극화 해소에 기여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미 교육사령탑인 베치 디보스 장관은 53억 달러(약 6조4000억 원)의 재산을 지닌 자산가이며 취임 전부터 교육 민영화만 강조해 논란을 빚었다. 또 코로나19 재확산 위험에도 주군의 뜻을 받들어 각 학교에 9월 정상 개학을 밀어붙이느라 여념이 없다. 질 여사가 수십 년간 저소득층 공립학교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면서 정치인 남편을 위한 표심 계산을 단 한 번도 안 했다면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표심을 위해 그 오랜 세월 동안 교사 직업을 유지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이런 영부인이 미 교육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족벌 정치의 좋은 예로 남지 않을까. 최소한 클린턴 전 장관의 영부인 시절처럼 비전문가 논란은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최근 야권으로부터 ‘서렌더 모디’로 조롱받고 있다. 각각의 머리글자인 ‘N’과 ‘S’를 제외하면 이름 나렌드라와 ‘항복(surrender)’를 뜻하는 영어 단어의 발음이 비슷해 붙은 별명이다. 야권은 지난달 15일 라다크 갈완 계곡에서 중국과의 국경 분쟁으로 최소 20명의 군인이 숨졌는데도 그가 중국에 저자세로 일관한다고 주장한다. 이달 3일 라다크를 찾은 모디 총리는 “팽창주의는 끝났다”며 말로는 중국에 엄포를 놨다. 현실적으로는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힘의 외교’를 구사하는 중국에 맞설 카드가 많지 않다. 무엇보다 대중(對中) 경제 종속을 개선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힌두스탄타임스 등에 따르면 2019 회계연도(2019년 4월∼2020년 3월) 인도의 대중 무역적자는 487억 달러(약 58조4400억 원)였다. 사상 최고였던 2017년의 630억 달러 적자보다 나아졌는데도 약 60조 원을 밑졌다. 이 불균형은 전자제품, 중장비, 화학제품, 의약품 등 비싼 물품을 수입하고 농산물 등 싼 제품을 수출하는 구조에서 온다. 중국 제품에 높은 관세를 물린다 해도 적자를 줄일 여지가 많지 않다. 역시 중국에 농산물을 수출하는 미국 브라질 등은 대기업과 맞먹는 부농(富農)이 대부분이지만 인도 농가는 영세 소작농이 많아 ‘규모의 경제’ 효과를 거두기도 어렵다. 더 큰 문제는 모디의 2014년 첫 집권과 지난해 재선을 가능케 했던 제조업 육성책, 즉 ‘메이크 인 인디아(Make in India)’가 좌초 위기에 처했다는 점이다. 그는 활발한 해외투자 유치 등을 통해 2014년 국내총생산(GDP)의 약 14%였던 제조업 비중을 2022년까지 25%로 늘리겠다고 공언했다. 2016년 미국 애플의 생산시설을 유치하는 등 가시적 성과를 내며 8.2%의 고성장을 구가할 때만 해도 인도가 중국을 능가하는 ‘세계의 공장’이 될 것으로 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복잡한 토지 매입 절차, 해고가 거의 불가능한 고용 관행, 28개 주마다 다른 조세 체계, 더딘 일처리, 악명 높은 관료주의와 부패 등의 문제가 불거졌다.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는 인도 특유의 취약한 인프라가 성장의 한계로 작용한 것이다. 한국 포스코, 미국 월마트, 호주 BHP빌리턴 등 인도 진출을 시도했던 세계적 대기업이 줄줄이 포기를 선언한 이유다. 14억이란 거대한 내수시장은 매력적이나 일부 매장에서는 제품의 진열 및 판매 방식조차 고객의 카스트에 맞춰 응대해야 하는 현실을 극복하는 게 쉽지 않았다는 의미다. 세계 3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국이 된 인도의 상황은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해 4.2%를 나타냈던 인도 성장률이 올해 ―4.5%에 그쳐 1979년 이후 41년 만에 역성장을 보일 것으로 내다봤다. GDP 대비 제조업 비중 역시 아직 약 16%에 불과하고 실업률은 25%에 육박한다. 3월 말부터 이어진 석 달간의 코로나19 봉쇄, 4월부터 수도 델리 인근을 초토화시킨 메뚜기 떼의 공습 및 흉작 등으로 국민 불만 역시 하늘을 찌른다. 다급해진 모디는 5월 외자 유치 대신 내수 부양에 주력하겠다는 ‘자립 인도(Atmanirbhar Bharat)’ 캠페인을 들고 나왔다. 교역과 외자가 없어도 내수만으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내수를 부양할 재원 마련이 쉽지 않다. 모디 정권은 줄곧 재정적자를 GDP의 3% 수준으로 맞추겠다고 공언해 왔지만 벌써 6%를 넘었다. 특히 ‘자립 인도’가 이란의 ‘저항 경제’와 유사하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핵개발로 서방의 각종 제재에 직면한 이란 정부가 “내수로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생필품 품귀, 물가 급등, 화폐가치 하락 등만 나타났다는 의미다. 이를 감안할 때 역설적으로 국경 분쟁이 일정 부분 모디의 통치 기반을 강화해주는 면이 있다. ‘이게 다 중국 탓’이라며 화살을 외부의 적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난을 해결하지 않는 한 민족 감정만 자극하는 미봉책이 오래갈 리 만무하다. 지도자의 최우선 과제는 먹고사는 문제 해결임을 모디 총리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1842년부터 1997년까지 155년간 홍콩을 통치한 영국은 총 28명의 총독을 보냈다. 이 중 27명은 공식석상에서 견장과 칼이 달린 흰 제복, 즉 ‘윈저 유니폼’을 입었다. 주민과도 거의 교류하지 않았다. 반환이 코앞으로 다가온 1992년 7월 부임한 마지막 총독 크리스 패튼만 달랐다. 제복을 거부하고 경호원 없이 길거리를 활보했다. 달동네, 정신병원 등 음지도 즐겨 찾았다. 무엇보다 부임 3개월 만에 중국의 격렬한 반대에도 선거개혁안을 밀어붙였다. 패튼이 오기 전 한국 국회 격인 홍콩 입법회 의원 70명은 간선제로 선출됐다. 그는 투표 연령을 21세에서 18세로 낮추고 270만 명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등 부분 직선제를 도입했다. 중국 관영언론이 ‘매춘부’ ‘머리 두 개 달린 뱀’으로 비난하고 영국 일각에서조차 중국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패튼은 2017년 가디언 인터뷰에서 총독 재직 당시 정신질환자로부터 “영국은 세계 최고(最古) 민주주의 국가라면서 왜 홍콩인 의견을 묻지 않고 전체주의 정권에 홍콩을 넘기느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홍콩에서 받은 질문 중 가장 완벽했지만 답을 할 수 없었다. 홍콩 민주화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했어야 했다”고 자책했다. 이는 그의 개인사와도 관련이 있다. 그의 부친은 아일랜드 출신의 무명 음악가였다. 또 가족 모두 가톨릭이었다. 입지전적 성공을 거뒀지만 패튼은 앵글로색슨 성공회 국가에서 일종의 ‘2등 시민’으로 사는 기분을 이해했다. 자신이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지 않으면 중국에 넘어간 홍콩이 2등 시민은커녕 피지배자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인지한 셈이다. 지금 홍콩 사람들이 누리는 실낱같은 민주주의와 식민통치 시절의 좋은 기억은 패튼의 유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환 후 홍콩은 4명의 행정장관을 맞았다. 파란 눈의 외국인은 아니었지만 시민과의 거리는 패튼 때보다 멀었다. 초대 둥젠화(董建華) 장관은 공산혁명을 피해 홍콩으로 건너온 부모를 뒀지만 내내 중국 눈치만 보다 경질됐다. 이번에 논란이 된 국가보안법을 강행하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도널드 창 장관은 퇴임 후 부패 혐의로 구속됐다. 렁춘잉(梁振英) 장관은 2010년 중국 인권운동가 류샤오보(劉曉波)가 노벨 평화상을 타자 “덩샤오핑(鄧小平)에게 줘야 한다”는 말로 세계를 아연실색하게 했다. 2017년 7월부터 집권 중인 캐리 람 장관은 중국 입맛에 쏙 맞는 행보로 현 위치에 올랐다. 2014년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하는 ‘우산혁명’을 진압했고 지난해 송환법 반대 시위를 탄압하는 와중에는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꼽았다. 일각에서 그를 ‘톈안먼 사태를 유혈 진압한 리펑(李鵬) 전 중국 총리의 재림’ ‘홍콩을 중국에 팔아넘긴 매국노’ 등으로 거칠게 비판하는 이유다. 그의 정무 감각과 ‘운영의 묘’ 또한 부족하다. 지난해 시위대의 요구 사항 중 체포된 시위대의 석방, 경찰 강경 진압에 대한 독립 조사 등은 굳이 중국의 ‘윤허’를 얻지 않아도 본인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람은 초강경 대응만 천명하다 시위대 기세에 눌려 송환법을 철회했다. 결과적으로 중국에도 정치적 부담을 안겼다. 중국이 수차례 경질설이 제기된 그를 놔둔 이유는 예뻐서가 아니라 서방이 역이용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봐야 한다. 람 장관은 과거 지하철을 탈 줄 몰라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고 “화장실 휴지가 떨어져 옛 관저에서 몇 통 가져왔다”는 어설픈 ‘서민 코스프레’로도 큰 비판을 받았다. 그는 올해 7월부터 지난해보다 2.4% 오른 521만 홍콩달러(약 8억2400만 원)의 연봉을 받는다. 야권이 경제난을 이유로 인상 철회를 요구했지만 거부했다. 홍콩 젊은이들은 살인적 집값과 빈부격차로 신음하지만 영국 국적을 지닌 그의 장남은 샤오미에 취직해 고액 연봉을 받고 있다. 반환 직전 패튼 총독의 지지율은 70%에 육박했다. 국가보안법 논란이 일기도 전인 올해 2월 람 장관의 지지율은 9.1%였고 지금은 더 낮을 가능성이 크다. 두 지도자에 대한 상반된 반응이 단순히 과거에 대한 향수와 복고주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2014년 11월 미국 인디애나주 오스틴 지역에서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가 발병했다. 마약 중독자가 대부분인 감염자들이 주사기를 공유해 인구 4200명의 작은 마을에서 들불처럼 HIV가 번졌다. 당시 주지사는 ‘마약 복용자가 깨끗한 주사기를 쓰면 HIV와 C형 간염의 발병이 감소한다’는 연구 결과를 무시했다. 주사기를 보급하면 중독자만 늘어날 뿐이라는 본인 주장을 고집하며 주삿바늘 교체 의무화 명령을 질질 끌었다. 임산부 및 고령 환자가 등장하고 보건당국자들이 긴급사태 선포를 촉구해도 “감염자가 집에 가서 기도하면 된다”는 상식 이하의 발언을 했다. 그는 최초 발생 후 반년이 흐른 2015년 5월에야 ‘뒷북’ 바늘 교체를 명했다. 불과 30일짜리 한시적 조치였고 주 정부 예산은 안 쓴다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이미 인구의 5%가 넘는 215명이 감염됐다. 전문가들은 교체 명령이 빨랐다면 127명의 감염을 막을 수 있었다고 개탄했다. 문제의 주지사는 최강대국의 2인자 겸 미국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총책임자인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이다. 폴리티코 등이 전한 이 사례는 과학을 불신하는 지도자가 그 어떤 바이러스나 질병보다 위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2000년 연방정부의 돈이 동성애자를 이성애자로 전환시키는 치료에 쓰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해 뒤 담배와 암의 상관관계도 부정했다. 이런 주장을 하면서 과학적 근거를 내세우지도 않았다. 지난달 28일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대형병원을 활보해 큰 논란을 빚은 그의 행보가 단순 부주의였을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독실한 복음주의 개신교도인 그는 6선(選) 하원의원과 주지사를 거쳐 부통령에 올랐다. 정계 입문 후 내내 반(反)낙태·동성애 행보로 일관했다. 주지사 시절 낙태를 희망하는 여성이 반드시 사전에 초음파 검사를 받고 낙태 후 장례식까지 치르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다. 연방대법원에서 가로막혔지만 굴하지 않고 수정란을 사람으로 인정하는 법 등 유사 법안을 발의했다. 의회에서 진화론을 부정하는 연설도 했다.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미국인의 25%는 ‘최고 존재가 진화를 인도한다’고 믿는다.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로 규정한 유권자도 35%다. 집권 공화당 주류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던 ‘아웃사이더’ 도널드 트럼프가 대선 후보를 거쳐 백악관 주인에 오른 이유 중 하나도 복음주의 유권자의 절대 지지를 받는 펜스를 부통령으로 골랐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종교적 신념은 물론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자연인이 아닌 지도자가 자신의 뜻에 동의하지 않는 대중에게 그 신념을 강조하는 건 다른 얘기다. 특히 보건 위기에 과학보다 종교를 우선시하면 사회 전체가 피해를 입는다. 인디애나 HIV 사태 때 펜스 주지사가 보인 행보는 코로나19 위기를 맞이한 트럼프 대통령의 모습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전문가 무시, 늦은 대처, ‘살균제 주입’ 같은 황당무계한 언급…. 둘의 차이는 한 사람은 ‘돈’, 다른 이는 ‘신념’에 의해 움직인다는 데 있다. 많은 이들이 트럼프 대통령이 초기 코로나19 사태를 오판한 이유로 ‘중국의 손해가 미국에는 이익’이란 단순 논리에 기댔기 때문으로 본다. 특히 탈(脫)중국을 선언한 각국 대기업이 미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재선에 기여할 것이란 기대가 컸다. 미국 사망자가 7만 명에 육박했는데도 전문가 경고를 무시하고 경제 정상화를 서두르는 이유 역시 그래야 재선 유세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세계의 중심에 ‘돈’이 있다면 펜스에겐 ‘신(神)’이 있다. 그는 자신을 ‘기독교인, 보수주의자, 공화당원’ 순서로 소개한다. 이런 그가 내린 결정이 온전히 과학적 증거와 의료 전문가의 조언에 기반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올인할수록 코로나19 대응을 관장하는 부통령의 입지가 커진다. 세계 최대 감염국인 미국의 확산세가 끝나야 세계도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펜스의 행보를 우려할 수밖에 없다. 미 초대 부통령 존 애덤스는 ‘인간이 발명한 가장 하찮은 자리가 부통령’이라고 자조했지만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영향력이 큰 부통령을 만난 것 같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1960년대 말 미국 뉴욕 퀸스의 저소득층 주거지 코로나가 들썩였다. 코로나바이러스와 철자가 똑같은 이 동네는 이민자가 많은 특성상 현재 옆 동네 엘름허스트와 함께 뉴욕시에서 코로나19 피해가 가장 큰 지역이 됐다. 당시 낡은 집을 헐고 학교를 짓겠다는 당국에 몇 년째 반발하던 주민들은 1972년 시(市)가 분쟁조정 위원으로 뽑은 마리오 쿠오모란 변호사의 설득에 타협을 택했다. 이를 통해 명성을 얻은 그는 1983년 주지사가 됐다. 1991년 12월 20일 뉴욕주 주도(州都) 올버니 공항. 한 해 전 3선(選)에 성공한 쿠오모 주지사를 이웃 뉴햄프셔주로 데려갈 비행기가 활주로에 등장했다. 다음해 2월 민주당의 뉴햄프셔 대선 예비경선에 나서려면 이날 오후 5시까지 등록해야 했다. 지도부는 그의 등판을 원했다. 그는 1984년 전당대회에서 명연설로 이름을 날렸고 1988년에도 출마를 권유받았다. 또 뉴욕 주지사는 45명의 미 대통령 중 4명을 배출했을 정도로 부통령, 국무장관 못지않은 위상을 자랑한다. 49세 젊은 나이도 강점이었다. 쿠오모는 마감 90분을 앞두고 등록을 포기했다. 여행을 싫어하는 그는 1년 내내 미 전역을 떠돌며 허름한 숙소에서 쪽잠을 자고 지역 유지에게 아부하는 일이 내키지 않았다. 그가 ‘뉴욕 소황제’에 안주할 때 무명의 아칸소 주지사 빌 클린턴이 뉴햄프셔 경선에서 깜짝 1위를 차지했다. 기세를 몰아 백악관 주인이 된 클린턴은 1993년 종신인 연방대법관직을 제의했다. 쿠오모는 워싱턴행을 망설이며 또 거절했다. 그 대타가 ‘미국의 살아있는 양심’으로 불리는 루스 긴즈버그 대법관이다. 폴리티코 등이 전한 일화는 쿠오모의 별명이 왜 뉴욕주를 관통하는 허드슨강에서 유래한 ‘허드슨의 햄릿’인지 보여준다. 본인은 장고 끝 묘수라 여겼을지 모르나 결과적으로 보신과 무사안일의 극치였다. 그는 4선에 실패했고 2015년 타계 전까지 어떤 공직도 맡지 못했다. 마리오 쿠오모가 대권 도전을 포기한 지 29년이 흐른 지금 그의 장남이자 역시 3선 뉴욕 주지사인 앤드루(63)가 민주당의 구원투수로 부상했다. 11월 대선에 나설 후보는 조 바이든 전 부통령으로 사실상 굳어졌지만 코로나19 국면에서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앤드루는 전쟁터 같은 뉴욕의 상황을 가감 없이 알리고 ‘불평하고 싶으면 나를 탓하라’는 책임감 있는 태도로 호평을 받고 있다. 일각에서는 그의 매일 아침 기자회견을 2차 세계대전 당시 라디오 연설로 승전 의지를 북돋운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노변담화(爐邊談話)에 비유한다. 루스벨트 역시 뉴욕 주지사를 발판으로 전무후무한 4선 대통령에 올랐다. 평범한 가문의 여성과 결혼해 평생 해로한 부친과 달리 아들은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조카 겸 로버트 케네디 전 법무장관의 딸인 인권운동가 케리와 15년간 부부로 지냈다. 케네디 전 장관은 민주당 대선후보 선출이 사실상 확정됐던 1968년 6월 친이스라엘 행보에 불만을 품은 팔레스타인계 남성에게 암살됐다. 부친, 전 장인과 전 처삼촌이 대통령이거나 대권을 노렸던 만큼 앤드루의 백악관 도전 역시 어느 정도 예정된 수순일 수 있다. CNN 앵커인 그의 동생 크리스는 지난달 말 형을 인터뷰하며 대권 도전 여부를 집요하게 물었다. ‘출마 계획이 있냐’ ‘지금 없으면 훗날 고려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아홉 번 ‘노(No)’를 외쳤다. 프라임타임에 전국으로 생중계된 이 장면을 보면서 그가 정말 대권에 도전하지 않을 것으로 여긴 순진한 유권자가 있을까. ‘쿠오모’ ‘대통령’이란 단어만 각인됐다. 무엇보다 전대미문의 위기를 맞아 대규모 조직 관리와 예산 집행, 복잡다단한 이해관계 조율, 대국민 소통을 해본 경험은 백악관 주인이 되기 위한 최고의 선행학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친이 코로나란 동네의 분쟁을 해결하며 사실상 정계에 입문했고 아들은 코로나19 위기에서 전국적 인지도를 얻었다는 점도 묘하다. 대권 도전이 가능한 상황이 왔을 때 아들이 좌고우면하던 부친과 달리 과감하게 행동할지도 관심이다. 그가 난세 영웅이 될지, 반짝 스타로 끝날지 아직 알 수 없다. 분명한 점은 코로나19 위기가 세계 지도자의 민낯을 여과 없이 드러냈고 진정한 지도자는 위기 때 자신의 역량을 입증한다는 사실이다. 아들 주지사의 진짜 인생 역정은 이제부터 시작인지 모른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지난해 9월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주 포자 출신의 28세 여성이 북부 밀라노에서 집을 구하려 했다. 집주인은 그의 출신지를 알게 되자 임대를 거부했다. “남부인은 흑인, 집시와 같다. 나는 100% 인종주의자”라고 쏘아붙였다. 날벼락을 맞은 그는 밀라노 외곽에 다른 집을 구했다. 하지만 이사 2주일을 앞두고 같은 이유로 취소 통보를 받았다. 안사통신 등이 전한 이 사건은 이탈리아의 남북 갈등이 얼마나 심한지 보여준다. 양측은 한 나라에서 사는 국민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적대시한다.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1385년간 이탈리아 전체가 수십 개의 도시 국가로 쪼개져 지내는 동안 북부는 신성 로마제국, 합스부르크 왕조 등 주로 독일의 지배를 받았다. 남부는 스페인, 아랍 등이 거쳐 갔다. 드러내놓고 말은 안 하지만 서로를 반(半)독일인, 반유색인종 쯤으로 치부하는 분위기가 있다. 1861년 통일 역시 피에몬테 등 북부 일부가 주도한 일종의 흡수합병 방식으로 이뤄지면서 점령군 대 피점령군 구도가 연출됐다. 현격한 경제 격차도 빼놓을 수 없다. 2017년 기준 롬바르디아(3만8500유로), 에밀리아로마냐(3만5800유로), 베네토(3만3500유로) 등 북부 주요 주의 1인당 소득은 3만 유로를 훌쩍 넘는다. 남부 풀리아(1만8700유로), 시칠리아(1만7700유로), 칼라브리아(1만7400유로)는 절반에 불과하다. 북부인은 ‘내 세금으로 이탈리아 전체를 먹여 살린다. 남부인은 경제적으로 무능하다’고 여긴다. 남부인은 ‘철도 등 인프라를 독식하고 북부 위주 경제정책을 편 탓이다. 돈밖에 모르는 족속’이라고 받아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양측 갈등을 더 부추기고 있다. 이탈리아 핵심을 자처하던 북부 롬바르디아와 베네토는 ‘바이러스 온상’이라는 오명에 휩싸였다. 8일 정부가 북부에 봉쇄령을 내리기에 앞서 계획이 사전 유출돼 일부 북부인이 남부로 대거 이동했다. 당시 미켈레 에밀리아노 풀리아 주지사는 “돌아가라. 당신들이 바이러스를 운반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단순히 주민 건강을 우려한 수준이 아니라 오랫동안 억눌린 분노와 한이 담긴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돈 좀 있다고 남부를 무시할 땐 언제고 바이러스가 창궐하자 이곳으로 도망을 오느냐’는 힐난일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남부의 낙후된 의료 환경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에밀리아로마냐와 롬바르디아에는 인구 1000명당 병상이 각각 4.0개, 3.7개씩 있다. 반면 칼라브리아는 2.9개, 캄파니아는 3.0개만 있다. 즉 남부에 코로나19가 퍼지면 북부보다 훨씬 큰 충격이 닥칠 수 있다. 잘사는 북부에서조차 병상이 부족해 80세 이상 고령 환자를 사실상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방정부 재정이 취약하고 의료진과 용품도 적은 남부에서 환자를 제대로 치료할 리 만무하다. 마시모 스쿠라 전 칼라브리아 보건책임자는 “중환자를 치료할 만한 체계가 전혀 갖춰져 있지 않다”고 우려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2010년 남유럽 재정위기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사태가 지나간 후 실업, 파산 등 남부의 경제적 피해가 북부보다 더 클 가능성도 거론된다. 2007∼2014년 이탈리아에서는 94만3000명의 실업자가 발생했는데 70%가 남부인이었다. 지난해 말 비영리단체 스비메즈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2002∼2017년 남부의 인구 유출은 200만 명에 달했다. 인구 유출이 남부 경제를 어렵게 하고 이것이 남북 격차를 증가시키는 악순환이 나타난 셈이다. 1991년 롬바르디아와 베네토에는 ‘잘사는 북부가 모여 독립 국가를 만들자’고 외치는 극우정당 ‘북부리그’가 출현했다. 난민선 입항 금지 등 강력한 반난민 정책을 편 마테오 살비니 전 부총리가 이 북부리그 출신이다. 한때 같은 나라에 묶인 것조차 싫다던 북부가 코로나19로 남부의 온정을 바라는 처지가 됐으니 세상은 참 요지경이다. 이번 사태가 양측의 해묵은 갈등을 해소해줄 계기가 될지, 더 큰 갈등 요인으로 작용할지 알 수 없다. 분명한 점은 대형 위기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해당 국가와 국민의 경쟁력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9개월 앞으로 다가온 미국 대선 과정을 보고 있으면 유체이탈에 빠진 듯한 기분이 든다. ‘선언 대의원’ ‘승자다식’ ‘위성 코커스’ ‘폐쇄형 프라이머리’ 같은 용어는 난수표가 따로 없고 간접선거의 중층 구조인 제도 자체도 너무 복잡하다. 무엇보다 이렇게 기술이 발달한 시대에 사표(死票)가 발생하고 여론 왜곡 위험이 있는 간선제를 왜 유지하는지 의문이다. 지난해 6월부터 발발한 홍콩 반중 시위의 궁극적 목적이 행정장관 직선제이고 수많은 독재국가에서 직선제를 도입하기 위해 ‘피’를 흘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민주주의 본산을 자처하는 최강대국이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뽑는다는 자체가 모순처럼 느껴진다. 이달 3일과 11일 미 중부 아이오와와 북동부 뉴햄프셔에서 열린 집권 공화당과 야당 민주당의 후보 선출 과정을 지켜보며 어렴풋하게나마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여행작가로 유명한 아이오와 출신 저술가 빌 브라이슨은 베스트셀러 ‘발칙한 미국 횡단기’에서 고향을 ‘전화번호부 두 권을 놓고 서면 다 보이는 곳’으로 묘사했다. 산과 고층 빌딩이 거의 없고 사방이 지평선일 만큼 평평하며 옥수수밭이 가득한 아이오와의 상황을 익살스럽게 평했다. 뉴햄프셔 역시 엑서터나 세인트폴 같은 명문 사립학교,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다트머스대가 유명하다. 공부밖에 할 게 없는 곳이란 뜻이다. 뉴욕, 로스앤젤레스 같은 동·서부 해안 대도시의 관점에서 보면 두 곳 모두 ‘깡촌’ 이미지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민주당의 지지율 선두권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모두 최대 도시 뉴욕 출신이다.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의 고향도 보스턴이다. 주요 후보 중 시골 태생은 인구 10만 명의 소도시인 인디애나주 사우스벤드에서 나고 자란 피트 부티지지 정도. 그조차 성인이 된 후엔 보스턴 근교의 하버드대를 다니고 매킨지컨설팅의 시카고 사무소에서 일하며 상당 기간 대도시에서 살았다. 3억3000만 미국인을 대표하겠다는 후보 대부분이 소수 대도시에만 익숙한 상황인데 대도시 아닌 곳에서 대형 정치 행사라도 치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인구가 적은 주의 소외 현상이 점점 심해질 것이다. 이곳 유권자들이 후보를 가까이서 마주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언론의 관심이 줄어 아이오와와 뉴햄프셔가 진짜 옥수수와 단풍만 유명한 곳인 줄 아는 과소 재현(Under-representation)이 나타난다는 뜻이다. 50개 주 538명의 대통령 선거인단을 단순히 인구 비례로만 배분하지 않고 아무리 작은 주라 해도 최소 3명을 보장해준 이유도 마찬가지다. 인구 1위 캘리포니아(3950만 명)는 50위 와이오밍(58만 명)보다 주민이 68배 많지만 선거인단은 55명 대 3명으로 약 18배 수준이다. 이처럼 미국인들은 현 대선 제도가 후보들에게 거대한 영토의 모든 유권자와의 접점을 넓혀주고 일부 대형 주가 국가 대사를 좌지우지하지 않도록 하는 ‘견제와 균형’의 근간이라고 믿는다. 양당이 굳이 수도 워싱턴에서 먼 아이오와와 뉴햄프셔에서 대선 후보 선출 과정을 시작하고, 민주당이 아이오와 코커스 때 사상 초유의 개표 지연 사태를 겪었음에도 ‘빠르고 투명하며 효율적인 직선제를 도입하자’는 여론이 높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얼핏 민주주의에 반하는 듯한 간선제가 갖가지 논란에도 240여 년간 유지된 비결이자 헌법 2조가 간선제를 보장하는 이유다. 교통과 통신 수단의 발달로 극소수 대도시의 집중 현상이 점점 심해지는 것도 소수 주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현 제도가 상당 기간 이어질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1인 1표 직선제가 도입되면 양당 후보들은 캘리포니아, 텍사스, 플로리다, 뉴욕, 펜실베이니아 등 인구 1000만 명 이상인 주만 뻔질나게 찾고 버몬트, 와이오밍, 알래스카 같은 곳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가능성이 크다. 4년 전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는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위스콘신(580만 명)에서의 승리를 자신한 나머지 이곳을 찾지 않았고 선거인단 10명 및 백악관 주인 자리를 도널드 트럼프 후보에게 넘겨줬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선출 절차와 집권당의 변경이 각종 제도와 법규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상황으로 이어지지 않는 안정된 사회 구조야말로 간선제 유지의 최대 배경이 아닐까. 미국인도 아니면서 미국인 이상으로 대선 판세와 결과를 늘 주시해야 하는 타국적자의 소감이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1967년 이란 왕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가 자신을 황제 ‘샤한샤’, 아내 파라를 황후 ‘샤바누’로 추대했다. 두 사람은 자크 다비드의 그림으로 유명한 프랑스 나폴레옹 황제와 조세핀 황후의 1804년 대관식을 재연했다. 그는 무릎을 꿇은 아내의 머리에 1541개의 보석이 박힌 관을 씌웠다. 뒤로는 비밀경찰 사바크를 통해 반대파를 탄압하고 살해했다. 12년 후 2500년 역사의 페르시아 군주제가 이슬람 혁명으로 무너졌다. 이제 부패와 폭정을 일삼는 전제군주는 없다. 4년 임기의 대통령도 직접 뽑는다. 이면의 실상은 지금의 이란이 당시와 얼마나 다른지 돌아보게 한다. 대표적 예가 혁명 원로의 후손, 즉 이란판 금수저 ‘아가자데(Agazadeh)’의 행태다. 계속된 서방의 경제 제재로 민중의 삶은 피폐해졌지만 최고급 자동차와 장신구, 음주와 향락이 난무하는 호화 파티를 즐긴다. 특히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이를 과시하는 몰상식함으로 큰 공분을 사고 있다. 국부(國父)격인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의 증손녀 아테페는 영국 런던에서 3800달러(약 440만 원)짜리 돌체앤가바나 가방을 들었다. 사에드 톨루이 전 혁명수비대 장군의 아들 라술은 딸의 생일 파티를 위해 애완용 호랑이를 동원하고 캐딜락을 몰았다. 아흐마드 소바니 전 베네수엘라 주재 이란 대사의 아들 사샤는 세계 각지에서 반라의 여자들을 대동하고 파티를 즐긴다. 그의 인스타그램 추종자만 약 120만 명. 몇몇 아가자데도 ‘테헤란의 부유한 아이들(Rich kid in Tehran)’이란 인스타 계정을 만들어 부를 자랑하기 바쁘다. 내로남불과 언행불일치는 필수. 통신 재벌 하미드 아레프(42)는 우정·통신·전화담당 장관, 부통령 등을 지낸 무함마드 레자 아레프의 아들이다. 그는 2017년 인터뷰에서 성공 비결로 ‘좋은 유전자’를 꼽았다. 한 해 뒤 하산 로하니 대통령도 33세 사위를 정부 연구소장에 임명했다가 비판이 커지자 사퇴시켰다. 부모도 한결같다. 로하니 대통령은 사과하지 않았고 아레프 전 부통령은 “왜곡된 인터뷰”라고 주장했다. 톨루이 전 장군은 아들의 호화 생활을 폭로한 성직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극소수 왕족이 ‘독점’하던 부가 소수의 혁명 주역과 후손이 ‘과점’하는 체제로 바뀌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이란은 8000만 인구 가운데 71.6%가 39세 이하인 젊은 나라다. 이슬람혁명과 이어진 8년간의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정부가 출산을 적극 장려한 결과다. 왕조 시절의 1세대는 대부분 고인이 됐고 혁명 주역 2세대는 아직도 신정일치 이념만 부르짖는다. 절대다수의 2030 젊은이들은 ―9.5%로 추정되는 지난해 성장률, 20%를 넘나드는 고물가와 고실업, 생필품 품귀가 나아지기만을 바란다. ‘제3세대’를 뜻하는 페르시아어 ‘나슬레 세봄’으로 불리는 이들은 2009년 강경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당선 당시 선거 부정 의혹 시위, 2017년 말과 지난해 11월 경제난에 따른 시위, 정부의 우크라이나 민항기 오인 격추로 인한 이번 달 시위를 모두 주도했다. 나슬레 세봄의 더 큰 분노가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 불의(不義)로 가득 찬 정권을 전복시키는 건 일종의 시대정신이다. 41년 전의 혁명은 명분이 있었다. 그렇다 해도 새 집권세력이 늘 정의(正義)를 뜻하지 않음을 현재의 이란이 보여준다. 미국에 망명 중인 팔레비왕의 장남은 15일 워싱턴에서 “이란 상황이 혁명 3개월 전과 비슷하다. 몇 달 안에 정권이 무너질 수 있다”고 연설했다. 특히 왕정복고를 바라지 않으며 민주 정부 수립에 기여하겠다고 했다. 쫓겨난 왕족이 민주주의를 거론하며 정권 타도를 외치는 건 희극일까 비극일까. 경위야 어찌됐든 그 토양을 마련해준 건 먹고사는 문제를 내팽개친 현 정부다. 지난해 11월 시위는 유류세 인상으로 발발했다. 세계 4위 원유보유국이 정제시설 부족으로 일부 휘발유를 수입하는 상황까지 몰린 탓이다. 당시 비무장 시위대를 향한 발포로 1500명 이상이 숨졌다. 팔레비 정권의 정적 탄압과 무엇이 다른가. 이래도 혁명 후 41년간 늘 그랬듯 ‘이게 다 미국 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1979년 8월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은 워싱턴 백악관 집무실에서 차기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으로 거론되는 폴 볼커 뉴욕 연준 의장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구직자 ‘을’은 세계 최고 권력자 ‘갑’ 앞에서 당당했다. 2.01m의 큰 키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궐련을 피웠고 동석한 윌리엄 밀러 의장을 가리키며 “나를 의장으로 임명하면 저 친구보다 엄격한 통화정책을 펴겠다”고 했다. 찜찜했지만 대안이 없었던 카터는 그를 낙점했다. 같은 해 10월 6일 토요일 밤. 초짜 의장 볼커는 돌연 취재진을 연준 본부로 불렀다. 주말인 데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해 전 언론이 교황만 쫓고 있었다. 한 방송사가 “사람이 없다”고 하자 대변인은 “안 오면 후회한다”고 했다. 볼커는 취재진 앞에서 “인플레이션이란 용(龍)을 잡겠다”고 외쳤다. 8일 타계한 볼커 전 의장을 두고 뉴욕타임스(NYT)가 소개한 일화는 그가 왜 ‘세계 최고 중앙은행장’으로 불리는지 짐작하게 한다. 오일쇼크 후폭풍으로 당시 미국은 고물가와 경기둔화에 시달렸다. 물가를 잡으려면 금리를 올려야 하고 경기를 살리려면 금리를 내려야 하지만 어느 하나 쉽지 않았다. 볼커는 과감히 물가 잡기를 택했다. 취임 때 11%였던 기준금리를 19세기 남북전쟁 이후 최고치인 20.5%까지 끌어올렸다. 유례없는 고금리는 농업, 건설업, 제조업의 단기 경색을 초래했다. 분노한 농민과 건설업자들은 트랙터를 몰고 연준 앞에 모여 퇴비와 원목을 던졌다. 경호가 삼엄한 연준 본부로 출퇴근하면서 권총까지 차야 했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소신을 유지했다. 결국 1980년 한때 15%에 육박했던 물가는 1983년 3%대로 떨어졌다. 그의 뚝심이 무시무시한 ‘용’을 잡은 것이다. 1990년대 장기 호황의 발판을 마련한 순간이었다. 진가를 입증했지만 백악관의 새 주인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그를 마뜩잖아 했다. 1984년 여름 볼커는 백악관의 호출을 받았다. 레이건과 제임스 베이커 비서실장은 모든 대화가 녹음되는 집무실이 아닌 옆방으로 안내했다. 베이커는 “대통령이 재선을 위해 11월 대선 전까지 금리를 올리지 않기를 원한다”며 노골적으로 압박했다. 볼커는 지난해 말 회고록을 통해 “원래 금리를 인상할 계획이 없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예’ 하면 굴복한 듯 보일까 봐 답 없이 백악관을 떠났다”고 밝혔다. 두 번째 의장 임기를 두 달 남겨둔 1987년 6월 사의를 표했다. 레이건은 말리지 않고 후임자로 앨런 그린스펀을 골랐다. 볼커의 청렴은 그의 소신만큼 빛난다. 당시 볼커의 월급은 뉴욕 연준 의장의 절반 수준이었다. 연준 의장은 공무원이고, 지역 연준 의장은 아니기 때문이다. 당뇨와 관절염을 앓는 아내, 뇌성마비 아들도 돌봐야 했지만 워싱턴행을 택했다. 워싱턴에 와서도 학생들이 사는 저렴한 주거지, 구겨진 값싼 양복, ‘말똥에 담뱃잎을 섞은 것 같다’는 싸구려 궐련을 고수했다. 그의 딸은 “아버지가 운전석이 다 부서진 낡은 포드를 몰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하급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최고위 관료가 된 그는 이처럼 공직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났다. 두 대통령의 연이은 압박, 갖가지 논란에도 소신대로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공직이 어떤 소명보다 위대하며 이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자부심에서 연유했을 것이다. 그에게 ‘도덕, 용기, 청렴, 지혜, 신중함, 봉사정신 등 로마 시대의 덕목을 갖춘 인물’(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삶 전체가 고귀한 이상으로 가득했다’(제롬 파월 현 연준 의장) 등 찬사가 쏟아진 이유다. 말 그대로 사회의 심부름꾼, 즉 공복(公僕)이었던 그는 말년에 일신의 영달만 좇는 사복(私僕), 관의 이름으로 도적질을 하는 관비(官匪)가 넘치는 워싱턴 관가에 크게 실망했다. 회고록에서 “과거에는 공직자의 책임감이 투철했고 존경도 받았지만 그런 정신을 찾아보기 어렵다. 지금은 아무도 정부, 대법원, 대통령, 연준을 존경하지 않는다. 공직자를 길러내는 엘리트 교육기관도 정부를 어떻게 운영하는지 가르치지 않는다. 이러니 어떻게 민주주의를 유지하겠나”라고 개탄했다. 어디 미국만의 일이겠는가. 또 공직자만의 문제도 아닐 것이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미국 중부 오클라호마의 서민 가정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건물관리인, 모친은 백화점 점원이었다. 빠듯한 살림에 한 푼이라도 보태려 13세 때부터 친척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했다. 19세에 첫 남편과 결혼했고 29세엔 두 아이를 둔 싱글맘이 됐다. 미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의 선두권에 있는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70)의 과거와 지금을 비교하면 그의 인생이 ‘아메리칸 드림’ 자체임을 알 수 있다. 세계 최고 하버드대의 파산법 교수라는 화려한 커리어, 하버드대 동료 교수인 자상하고 헌신적인 두 번째 남편, 2012년 11월 첫 선거에서 곧바로 상원의원에 뽑히고 두 번째 의원 임기 중 대권 후보 반열에 오른 순탄한 정치 역정, 1200만 달러(약 141억 원)의 재산까지…. 부족한 점을 찾을 수 없다. 상아탑의 백면서생을 백악관 코앞까지 데려다놓은 정책은 부유세(wealth tax)다. 5000만 달러 이상의 순자산을 보유한 가계에 연 2%, 순자산 10억 달러에 6%의 세금을 물려 전 국민 건강보험 정책 ‘메디케어포올’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겠다는 공약이다. 1월 대선 출사표를 낼 때만 해도 10억 달러 부자에 대한 세율을 3%로 주장했지만 최근 “예상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며 2배로 올렸다. 그는 이달 14일부터 리언 쿠퍼먼 헤지펀드 오메가 창업자, 조 리케츠 온라인 증권사 TD아메리트레이드 창업주, 로이드 블랭크파인 전 골드만삭스 최고경영자(CEO), 피터 틸 페이팔 공동창업자 등 4명을 거악(巨惡)으로 규정한 1분짜리 ‘저격 광고’도 내보내고 있다. 이들이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와중에도 엄청난 돈을 벌었고, 일부는 내부자 거래 등의 혐의에 직면했으며, 이들의 부는 그들만의 성과가 아니라 사회 인프라와 이들의 밑에서 일한 근로자 덕이라며 부유세 도입을 외쳤다. 지목된 이들은 “정파성만 다를 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식 ‘분열의 정치’와 뭐가 다르냐. 부자가 죄냐”며 격렬히 반발하고 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주,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CEO, 스티븐 슈워츠먼 블랙스톤 CEO 등도 부유세 비판에 가세했다. 주류 경제학계에서도 부유세의 이중과세 및 징벌적 성격, 호화 요트·미술품·보석 등에 대한 가치평가의 어려움, 부자들의 자산 해외 이전 가능성, 사생활 침해 논란, 독일 아일랜드 등 부유세를 도입했다 폐지한 국가의 사례를 들어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한다. 흥미로운 점은 워런 의원이 자신이 그토록 비판하던 월가와 일종의 ‘악어와 악어새’ 관계를 맺어왔다는 사실이다. 경제전문매체 포브스는 납세 기록을 바탕으로 그의 재산 형성 과정을 분석했다. 그가 재산의 83%인 1000만 달러를 2008∼2018년에 벌었으며 핵심 수입원이 각종 자문 및 저술료였다고 전했다. 그는 트래블러스보험, 씨티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비자카드 같은 거대 금융사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자문, 상담, 전문가 증인 등을 맡아 건당 20만 달러 내외의 보수를 받았다. 2013∼2018년에는 맥밀런 출판사로부터 320만 달러의 관련 저술 선불금도 받았다. 대형 금융사로부터 고통받는 서민과 중산층을 도왔다는 대의명분이야 있겠지만 교수치고 적지 않은 재산이 월가 관련 업무에서 나왔다는 점까지 부인할 순 없다. 꼭 부유세는 아닐지라도 날로 심각해지는 양극화와 불평등 해소를 위한 논의는 반드시 필요하다. 또 세계 각국에서 이 문제를 두고 다양한 해결책을 찾으려는 움직임의 배후에 ‘정치인 워런’의 공이 존재한다는 점도 분명하다. 다만 본인 또한 기성체제로부터 상당한 수혜를 입었으면서 자신보다 재산이 더 많은 사람들을 무조건 몰아붙이고 체제를 비판하는 것이 얼마나 큰 공감을 가져올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월가 거물의 재산이 그들의 힘만으로 일군 게 아니라면 식당 접시를 나르던 소녀가 1200만 달러 자산가가 된 것 또한 오로지 본인의 능력 덕분이라고 치부하긴 어려울 것이다. 어차피 서민에겐 그의 ‘1200만 달러’나 거부의 ‘10억 달러’나 꿈꿀 수 없는 돈이긴 마찬가지다. 워런 의원이 “나는 운이 좋았지만 미래 세대에게는 이런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부유세 도입 기준을 1000만 달러 이상으로 낮추고 나부터 상응하는 세금을 내겠다”고 하면 그의 진정성을 믿는 유권자들이 훨씬 많아지지 않을까.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시점이 또 미뤄졌다. 올해만 세 번째. 원래 3월 29일이 예정이었지만 4월 12일, 10월 31일, 내년 1월 31일로 주야장천 밀렸다. 벌써부터 내년 1월 말 일정의 연장 가능성도 거론된다. 이러다 10년 후에도 기한 연장만 할 판이다. 2016년 6월 브렉시트 국민투표 가결 후 영국 정치는 사실상 뇌사 상태에 빠졌다. 최대 책임은 집권 보수당에 있지만 제1야당 노동당도 비전을 제시하진 못했다. 현재 하원 650석 중 보수당과 노동당의 의석은 각각 288석, 244석이다. 1월에는 63석 차이였지만 보수당의 자중지란 및 잇단 탈당에 44석으로 줄었다. 10여 개의 군소정당을 잘 규합하면 수권(受權)이 가능했겠지만 노동당은 하지 못했다. 브렉시트 정국에서 보수당 대표는 데이비드 캐머런, 테리사 메이, 보리스 존슨으로 바뀌었다. 노동당은 2015년 9월부터 지금껏 제러미 코빈 대표(70)가 이끌고 있는데도 왜 그럴까. 이는 코빈의 ‘같기도’ 리더십에 기인한다. 그는 찬성도 반대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만 취했다. “EU는 모든 문제의 근원도, 번영의 원천도 아니다. 브렉시트로 모든 문제를 풀 수 없지만 브렉시트를 한다고 영국이 나락으로 떨어지지도 않는다.” 개그 프로그램에선 웃길지 모르나 정계 2인자의 발언으로는 초라하고 군색하다. 우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코빈파’(극좌파)와 ‘블레어파’(온건좌파)로 쪼개진 당 상황도 이를 부추긴다. 노조가 최대 지지 기반인 코빈파는 EU 체제가 저소득층 일자리를 뺏고 대도시 엘리트의 배만 불렸다고 본다. 국민투표 때 당론이 EU 잔류였는데도 코빈이 지지 연설을 주저했던 이유다. 성장과 분배를 결합한 ‘제3의 길’로 1997년부터 10년간 집권했던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국민투표 재실시를 통한 EU 잔류’를 외친다. 아직 상당한 세력이 있는 그는 자신의 재단을 통해 잔류파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 왔다. 그가 비밀리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 EU 수뇌부에 영국의 잔류 방안을 지도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두 파는 반(反)보수당, 반존슨을 제외하면 한배에 있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서로 적대시한다. 코빈은 둘 사이에서도 우왕좌왕했다. 9월 코빈파 평당원들이 EU 잔류를 주장한 톰 왓슨 부대표를 내쫓으려 했다. 논란 끝에 축출을 위한 표결은 취소됐지만 이때도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차마 자신이 직접 못했던 반대파 제압의 깃발을 당원들이 들었다면 못 이기는 척 표결을 실시해 부대표를 쫓고 자신의 노선을 강화해도 됐다. 그게 아니라면 당의 수장으로서 반대파를 다독여야 했다. 그 대신 그는 블레어 전 총리가 폐기했던 국유화 관련 당규 부활을 거론해 블레어파와 더 멀어졌다. 기간산업 국유화, 부유세, 평등 및 무상교육을 주장하는 코빈은 노동당에서도 가장 왼쪽에 있다. 2016년 출간된 그의 평전 제목도 ‘코빈 동지(Comrade Corbyn)’. 콤래드는 공산당이나 사회당원들이 서로를 부르는 명칭이다. 1983년부터 36년째 런던 저소득층 지역인 이즐링턴 의원으로 재직하고 있는 그는 남의 집 페인트칠까지 해주며 주민과 동료를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하지만 아들을 사립학교에 보내려 한다는 이유로 두 번째 아내와 이혼했다. 인간적으로는 선량하고 자상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외골수에 타협을 모른다. 당 안팎으로 집토끼와 산토끼를 다 잡으려다 집토끼마저 잃을 처지에 몰린 그의 성향이 어디서 연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국인들은 코빈이 보인 애매함이 정치공학적 계산에 기반한 고도의 전략이 아닌 일종의 결정장애임을 알아 버렸다. 20, 21일 유고브 여론조사에서 43%는 ‘총리로 존슨이 최선’이라고 했다. 코빈을 말한 이는 20%에 그쳤다. 존슨 총리가 7월 취임 후 파국이 뻔한 노딜 브렉시트(합의안 없는 EU 탈퇴) 및 조기 총선만 고수하며 혼란을 더 부추겼는데도 코빈을 그 대체재로 안 본다는 얘기다. ‘영국의 트럼프’ 존슨 총리는 각종 막말과 기행, 계속되는 악수에도 지리멸렬한 야당을 둔 덕에 굳건히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일반 영국인, 지루한 브렉시트 논란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세계 경제는 무슨 죄일까. 집권 가능성이 낮은 불임 정당은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만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존재일지 모른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내년 11월 3일 대선을 앞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탄핵 위기를 맞았다. 그렇다고 탄핵 정국에서 꼭 민주당이 승리할까. 또 ‘제2의 트럼프’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을까. 친(親)민주당 성향의 백인 지식인 저자 두 명의 책을 보고 아니라는 생각을 굳혔다. 페미니스트 법학자인 조앤 윌리엄스 미 헤이스팅스 소재 캘리포니아대 교수(67)는 ‘화이트워킹클래스(WWC·White Working Class)’에서 최고 학력 백인들이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나머지 백인들을 너무 모른다고 지적했다. ‘먹물’ 백인이 보는 ‘기타’는 정부 식량 보조에 의존하는 극빈층, 레드넥이나 힐빌리로 불리는 저학력·저소득층 노동자 정도가 고작이다. WWC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경찰, 간호사, 비서, 영업직 등인 이들은 가방끈이 짧을지언정 저소득층은 결코 아니다. 연 소득은 4만1000달러(약 4920만 원)에서 13만2000달러(약 1억5840만 원) 사이. 미슐랭 식당에서 최고급 와인을 마신 적도, 자신의 주(州) 밖을 벗어난 적도 거의 없다. 라틴어와 프랑스어도 잘 모르고 양성평등과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도 적다. 그래도 성실히 살면서 세금을 꼬박꼬박 냈다. 이들의 바람은 현재의 직업을 최대한 오랫동안 영위하는 것이다. 이들이 보기에 뉴욕, 워싱턴, 샌프란시스코 등 대도시의 고학력 백인들은 위선의 결정체다. 늘 정치적 올바름, 불평등 해소, 난민 보호를 외치는데 정작 본인은 어떤 희생과 헌신을 했는지 도통 알 수 없다. 유기농 음식이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고 한국어로 치면 직조, 핍진성, 형해화 같은 말만 쓰는 것도 볼썽사납다. 특히 소득이 더 적은 대학강사, 시민단체 직원, 프리랜서 작가 등이 학벌과 문화적 취향을 앞세워 자신들을 깔보는 것에 분노한다. 진보 성향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의 리처드 리브스 선임연구원(50)은 ‘20 vs 80의 사회’에서 최상위 1% 부자가 아닌 석·박사 학위를 지닌 전문직 종사자들을 양극화 주범으로 지목했다. 이들은 동문 자녀 우대 같은 불공정한 대학 입학 절차, 알음알음으로 이뤄지는 인턴 분배 등을 통해 계층 이동을 막아버렸다. 영국 태생인 그는 발음만으로도 계급이 드러나는 사회가 싫어 미국에 귀화했다. 군주가 있는 옛 조국보다 겉으로는 능력 본위 사회임을 자랑하는 새 나라의 심각한 불평등에 놀랐다. 자신과 주변의 ‘먹물’들부터 달라져야 한다며 이 책을 썼다. 굳이 비유하자면 트럼프 대통령은 ‘돈 많은 WWC’다. 패스트푸드를 즐기고 ‘그레이트(Great)’ ‘굿 잡(Good job)’ 같은 쉬운 말만 한다. 그래서 WWC들이 좋아한다. 이들에게 부유세 도입, 탄소 배출 제로(0) 등을 외치는 민주당의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하원의원 등은 ‘멀어도 너무 먼 당신’이다. 이들은 늘 유리천장 타파를 외치는데 WWC는 그 이유를 모른다. 천장 근처에 간 적이 없어서. WWC는 경합주 판세를 좌우하는 대선의 핵심 변수이기도 하다. 538명의 선거인단 중 캘리포니아(55명), 텍사스(38명), 뉴욕(29명)은 사실상 승자가 정해져 있다. 트럼프가 성 평등론자로 변한들 캘리포니아와 뉴욕에선 공화당 승리 확률이 낮다. 워런이 국경장벽을 지어도 텍사스 표심 역시 민주당을 거부할 것이다. 4년 전처럼 플로리다(29명), 펜실베이니아(20명), 오하이오(18명), 미시간(16명), 위스콘신(10명) 5개 주의 선거인단 93명이 또 대통령을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 이 중 플로리다를 제외한 나머지 4개 주, 즉 쇠락한 공업지대(러스트 벨트)에는 WWC가 넘쳐난다. 위스콘신주 밀워키에 사는 은퇴 기술자 앨런 빙겐하이머 씨(71)는 탄핵 조사가 본격화한 지난달 27일 로이터에 “민주당은 완전히 미쳤다”고 했다. 아직은 내년 대선 승자를 알 수 없다. 다만 민주당이 또 패한다면 WWC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한 탓이 클 것이다. 윌리엄스 교수의 파이낸셜타임스(FT) 인터뷰가 인상적이다. “때로 여성을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별 문제를 벗어나는 거다. 그러니 민주당 대선 후보로 힐러리 클린턴에 이은 또 다른 여성을 뽑진 말자. 미국 여성에게 가장 필요한 건 트럼프 연임 저지 아닌가.”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지난달 반중 시위대를 지지하는 듯한 광고로 큰 주목을 받은 홍콩 최고 부자 리카싱 전 청쿵홀딩스 회장. 그는 1928년 광둥성 동부 차오저우(潮州)에서 태어났다. 인근 산터우(汕頭)와 함께 흔히 차오산으로 불린다. 차오산 사람들은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한 화상(華商) 집단 ‘상방(商帮)’ 중에서도 불타는 성공욕, 단결력과 의리 등으로 유명하다. 이는 차오산의 지정학적 위치와 관련이 있다. 광둥성에 있지만 중심 도시 광저우와 꽤 멀어 주민들은 광둥어가 아닌 인근 푸젠성의 민난어를 쓴다. 다만 발음은 주류 민난어와 상당히 다른 방언이다. 즉 표준어, 광둥어, 민난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소수 언어를 쓰며 경계인으로 살다보니 절로 잡초 같은 생존력과 개척 정신을 갖게 됐다는 의미다. 3월 포브스 기준 266억 달러(약 32조 원)의 재산으로 세계 28위 부자인 리 전 회장은 물론이고 마화텅 텐센트 창업주, 쑤쉬밍 태국 창맥주그룹 회장 등 세계적 거부들이 차오산 출신인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사업은 크게 부동산, 항만, 통신 분야로 나뉜다. 부동산과 항만업에는 중국과 홍콩의 근현대사가 짙게 녹아있다. 플라스틱 조화를 만들던 중소기업인이 거부로 도약한 시점은 1960년대 말. 문화대혁명 여파로 홍콩 부동산 값까지 급락하자 그는 알짜배기 부동산을 사들여 떼돈을 벌었다. 이후 1980년대 초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추진하자 본토에서 거의 최초로 사업을 벌였다. 경제 성장에는 물류 인프라가 필수다. 그는 상하이 컨테이너 터미널, 광저우∼주하이 고속도로, 선전 매립지 개발 등 주요 사업에 모두 관여했다. 특히 1989년 톈안먼 사태로 서구 자본이 덩의 개혁 의지를 의심하자 자신의 화상 인맥을 동원해 대규모 투자도 이끌었다. 덩의 후임자 장쩌민과는 그야말로 ‘아삼륙’이었다. 장은 1997년 홍콩 반환 당시 중국 최고 권력자 최초로 홍콩을 찾았다. 이후 수차례 홍콩을 방문했고 그때마다 청쿵의 최고급 호텔 하버플라자에 묵었다. 리카싱 부자와 조찬을 즐겼고 두 살 어린 리 전 회장을 ‘친구’로 불렀다. 2013년 3월 시진핑이 국가주석에 오르자 권력자와의 밀월이 끝났다. 둘은 오랜 악연이 있다. 시 주석은 1985∼2002년 푸젠성에서 근무했다. 당시 인프라 건설과 노후 지역 개발을 위해 청쿵 산하 회사와 계약도 맺었다. 하지만 새 국제공항 건설 예산이 과다 책정됐다는 비판에 계약이 틀어졌고 그의 경력에도 오점을 남겼다. 2012년 3월 홍콩 행정장관 선거 때도 시진핑은 중국이 내세운 렁춘잉 후보를 지지해 달라고 했지만 리 전 회장은 기업가 출신인 헨리 탕 후보를 밀었다. 2014년 9월 홍콩 민주화시위 ‘우산혁명’이 발발하자 시위대를 비판해 달라는 당국 요구도 거부하다 몇 달 후 마지못해 살짝 비판했다. 이 와중에 집권 후 내내 장쩌민의 상하이방 세력을 사실상 숙청해온 시 주석의 노선까지 겹쳐 둘의 사이는 알려진 이상으로 나쁘다는 것이 홍콩 및 중국 매체의 중론이다. 리 전 회장은 2010년대 들어 눈에 띄게 중화권 사업을 줄였다. 청쿵 본사를 조세피난처 케이맨제도로 옮겼고 과거 홍콩을 통치했던 영국 투자를 부쩍 늘렸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해 청쿵 전체 매출 중 홍콩의 비중은 10%에 그쳤다. 3년 전(16%)보다 꽤 줄었다. 본토도 9%에 불과했다. 그 자리를 유럽(47%), 호주·아시아(14%), 캐나다(12%) 등이 채웠다. 2016년 6월 브렉시트 국민투표 가결 이후 현재까지 영국 런던 증시에 상장된 청쿵 주가는 24% 하락했다. 같은 기간 홍콩 항셍지수는 23% 올랐다. 그런데도 지난달 영국 음식점 체인 그린킹을 또 33억 달러에 샀다. 돈보다 안정을 택한 셈이다. 돈 냄새를 귀신같이 맡는 91세 ‘재신(財神)’은 왜 탈(脫)홍콩에 여념이 없을까. 3년째 브렉시트 논란으로 아사리판인 영국이 사실상 독재 체제인 본토, 중국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양극화까지 심한 홍콩보다 훨씬 낫다고 본 때문이 아닐까. 중국과 홍콩 경제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평생 성공만 이어온 노(老)기업인의 촉이 또 맞을지 궁금해진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1991년 1월 헬무트 콜 당시 독일 총리 겸 집권 기독민주당 대표가 37세의 동독 여성 과학자를 여성청소년부 장관에 앉혔다. 누가 봐도 남성 위주의 보수 가톨릭 정당인 기민당의 색채를 옅게 하려는 구색 맞추기 용도였다. 언론은 냉담했다. 새 장관의 수수한 외양, 동독 발음, “통일 후 신용카드 사용법을 배웠다”는 소박한 경험담은 조롱의 대상이었다. 이상한 단어를 연상케 하는 ‘콜의 여자(Kohl’s Girl)’란 표현까지 등장했다. 이 당시 그를 ‘4선(選) 총리’ 재목으로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2005년 11월 최고 권좌에 오른 그는 3명의 미국 대통령, 5명의 영국 총리, 4명의 프랑스 대통령을 상대한 서방 세계의 지도자가 됐다. 고실업과 저성장에 시달리던 ‘녹슨 전차’ 독일 경제를 되살렸고 미국의 일방통행, 중국의 급부상, 틈만 나면 몽니를 부리는 러시아, 옛 영광을 외치는 영국, 흥청망청 남유럽, 극우 민족주의가 휩쓰는 동유럽을 상대로 고군분투하며 독일과 유럽연합(EU)을 이끌어왔다. ‘무티(Mutti·독일어로 엄마) 리더십’의 결정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다. 영국 저술가 제임스 호스는 3월 출간한 ‘독일의 가장 짧은 역사’에서 2013∼2014년의 독일을 ‘민주주의 이상향’으로 평했다. 당시 메르켈은 우크라이나 휴전 및 그리스 부채 협상 등 국제 현안을 주도했다. 현직 총리 최초로 나치가 독일 땅에 세운 첫 상설 수용소인 다하우도 찾았다. 그는 오바마케어로 정쟁에 빠졌던 버락 오바마 당시 미 대통령을 대신한 명실상부한 자유세계의 최고 권력자였다. 2014년 독일이 24년 만에 월드컵 우승컵을 들어올린 것도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영광의 정점에서 위기가 왔다. 2015년 시리아 내전으로 난민 사태가 발발하자 그는 ‘100만 명 수용’을 외쳤다. 좋은 의도였지만 후폭풍이 엄청났다.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밀어닥친 난민들은 곳곳에서 주민들과 충돌했고 각국은 서로 부담을 떠넘겼다. 2016년 영국의 EU 탈퇴 국민투표와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 출범까지 겹쳤다. 자국 우선주의, 보호무역,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가 기승을 부렸고 민주적 절차로 선출됐지만 독재를 일삼는 각국 스트롱맨도 곳곳에서 출현했다. 난민 문제로 독일 내 지지율은 하락세지만 역설적으로 이때부터 그의 주가는 더 올랐다. 그는 민주주의와 다자주의를 중시하며 예측 가능한 중도·온건 노선을 표방하는 거의 유일한 국제사회의 지도자다. 그가 아니면 누가 첫 만남에서부터 악수를 거부한 트럼프 미 대통령, 정상회담 장소에 집채만 한 대형견을 풀어놓고 협상이 삐걱대면 연필을 부러뜨리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상대할까. 이런 그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이미 “4번째 총리 임기가 끝나는 2021년 9월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밝혔지만 최근 건강 이상이 심상치 않다. 지난해 말 기민당 대표직을 물려받은 ‘미니 메르켈’ 아네그레트 크람프카렌바워 국방장관은 아직 저조한 당 지지율을 되살리지 못했다. 당에서는 “총리 없는 조기총선은 필패”라며 반드시 잔여 임기를 채우라고 종용한다. 아프지만 퇴진조차 쉽지 않다. 독일 밖에서도 그의 부재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벨기에 싱크탱크 유럽정책연구소의 야니스 에마누일리디스 소장은 블룸버그에 “불확실성의 시대에 안정은 위대한 자산”이라며 그의 퇴장을 우려했다. 즉, EU 최장수 지도자의 은퇴 가시화는 국제 정치가 중요한 변곡점에 서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유럽은 난민, 저성장, 극우·극좌 득세로 골머리를 앓고 있고, 아시아는 미중 갈등의 한복판에 있다. 미국과 유럽, 서유럽과 러시아,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아주던 그가 사라지면 세계 정치 흐름은 지금보다 더 포퓰리즘 일변도로 쏠릴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2017년 그가 4연임에 성공하자 공영방송 도이체벨레는 “빌리 브란트 전 총리는 동방정책으로 데탕트(긴장 완화)를 이끌었고, 콜 전 총리는 통일을 이뤘다”며 4연임에 걸맞은 유산을 남기라고 독촉했다. ‘메르켈 없는 세상’을 우려하는 이가 많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유산은 차고 넘치는 듯하다. 투박했지만 우직하고 묵묵했던 한 지도자가 많이 그리워질 것 같다.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미 시사주간지 뉴요커는 최신호(8∼15일자)에서 민주당 1위 대선주자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의 외아들 헌터(49)에 관한 14쪽짜리 기사를 실었다. 유력 매체가 왜 후보 본인도, 공직자도 아닌 아들에게 이 많은 분량을 할애했을까. 기사 제목대로 헌터의 사업 및 사생활 논란이 부친의 대권 가도를 위태롭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0년 미 대선판이 ‘아들들의 전쟁’ 양상을 띠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측은 “헌터가 부친의 부통령 재직 때 이해상충 논란이 있는 사업으로 막대한 돈을 벌었다”며 맹비난한다. 이를 주도하는 사람이 바로 정계 진출설이 끊이지 않는 대통령 장남 트럼프 주니어(42)다. 민주당 측은 트럼프 주니어의 러시아 스캔들(러시아의 2016년 미 대선 개입설) 연루 의혹이 가시지 않았고, 부친 사업을 물려받은 그도 다를 게 없다고 맞선다. 1996년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한 헌터는 아버지의 선거 자금을 후원하던 금융사 MBNA 아메리카의 변호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부친이 부통령이 된 2009년 사모펀드를 세워 막대한 돈을 주무르고 있다. 의혹은 크게 두 가지다. 2013년 12월 헌터가 부친의 중국 방문에 동행한 지 10일 만에 국영 중국은행은 그의 펀드에 무려 15억 달러(약 1조8000억 원)를 투자했다. 골드만삭스와 블랙스톤 같은 쟁쟁한 금융사도 이 정도의 차이나머니를 쉽게 유치하지 못했다. 지난달 18일 부친의 재선 출정식에 연사로 나선 트럼프 주니어가 “내가 중국에서 1.5달러만 받았어도 사람들이 난리쳤을 것”이라고 비꼰 이유다. 헌터는 2014년 4월 우크라이나 천연가스사 부리스마홀딩스 이사로도 선임됐다. 6일 후 그의 부친은 우크라이나를 찾아 “러시아에 대한 천연가스 의존도를 줄일 수 있도록 미국이 돕겠다”고 했다. 의회전문매체 더힐 등은 바이든 전 부통령이 2016년 3월 페트로 포로셴코 당시 대통령에게 “미국의 대출 보증 10억 달러 철회”를 운운하며 부리스마 비리를 수사하던 빅토르 쇼킨 전 검찰총장의 해임을 종용했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바이든 측은 둘 다 음모론이라 주장하지만 ‘오얏나무 밑에서 갓끈을 고쳐 맸다’는 의혹까지 불식시킬까. 보수 논객 피터 슈바이처는 “이런 거래는 검증도 어렵고 대부분 합법이다. 정치인 가족과 친구들이 해외에서 쉽게 돈을 버는 ‘대리인 부패(corruption by proxy)’”라고 주장한다. 그의 알코올중독과 약물 복용, 첫 부인과의 지저분한 이혼, 부친의 정치적 후계자로도 평가받았지만 2015년 뇌종양으로 숨진 형 보의 부인 할리와의 공개 연애, 또 다른 재혼 한 달 만에 제기된 20대 여성의 친자확인 소송…. 사인(私人)의 사생활이라지만 ‘대가족 가치를 신봉하는 아일랜드계 가톨릭’임을 강조하는 부친의 백악관행에 도움을 주긴 어려운 요인들이다. 트럼프 주니어도 만만찮다. 그는 “전 세계에 트럼프호텔을 짓겠다”며 아랍에미리트(UAE), 캐나다, 인도, 우루과이, 도미니카공화국, 파나마 등을 누볐다. 개인 사업을 영위하는 대통령의 성인 자녀지만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경호하느라 상당한 세금이 쓰였고 각국 미대사관도 그의 행사 및 사업에 직간접적으로 동원됐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 그가 트럼프타워 홍보차 인도를 찾았을 때는 “아파트 구매 예약금 약 4000만 원을 내면 미 대통령 아들과 만찬을 할 수 있다”는 낯 뜨거운 홍보물까지 등장했다. 그의 푼돈 벌이에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위신이 망가졌다는 비판이 나온다. 그는 지난달 말 또 다른 민주당 유력 후보이자 인도계와 자메이카계 혼혈인 카멀라 해리스 상원의원에 대한 인종차별적 트윗을 공유해 설화에 휩싸였다. 둘을 보며 유력 정치인에게 자녀가 ‘자산(asset)’일지 ‘부채(liability)’일지 생각해본다. 가족만이 가능한 정서적 유대, 지지, 신뢰를 주지만 후보 못지않게 서슬 퍼런 검증을 받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제기되는 의혹이 결국 후보 본인을 겨눈다는 점에서 독이 될 요소도 충분하다. 분명한 것은 세상이 투명해진 만큼 권력자는 물론 그 주변인도 높아진 기준에 부응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2002년 ‘피아니스트’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유대계 폴란드 감독 로만 폴란스키(86). 반미 성향으로 유명한 그는 2010년 미국과 영국의 관계를 신랄하게 풍자한 ‘유령 작가(The ghost writer)’를 만들었다. 이 영화에는 여론을 거스른 이라크전 참전 후폭풍으로 사퇴한 전직 영국 총리 애덤 랭이 등장한다. 그는 재직 중 미국의 요구로 테러 용의자인 무슬림계 영국인을 불법 고문한 사실이 드러나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될 처지다. 대부호가 소유한 외딴섬에서 사실상 유배 생활을 하지만 군인 아들을 전쟁에서 잃은 한 아버지가 이곳까지 찾아와 그를 죽인다. 놀라운 사실은 랭의 죽음 후 드러난다. 그의 부인은 대학생 때 미 중앙정보국(CIA)에 포섭된 요원이었다. 그는 아내의 조종하에 미국 꼭두각시 노릇만 하다 저세상으로 갔다. 두 아이를 낳으며 수십 년을 함께한 동반자가 미 스파이란 사실도 모른 채. 랭의 실제 모델은 누구나 짐작하듯 조지 W 부시 전 미 대통령의 ‘푸들’로 불린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다. 2004년 그와 부시의 공동 기자회견 때 한 기자가 “진짜 푸들이 맞느냐”는 돌직구를 날렸다. 그는 부시가 입을 열기도 전 “맞다고 답하면 내가 곤란해진다”는 농으로 받아쳤다. 블레어인들 미 대통령의 애완견 노릇이 좋았을까. 하지만 냉엄한 국제 정치의 현실을 그 순간보다 생생히 알려주기도 힘들 것이다. ‘정치적 연인(戀人)’ 로널드 레이건 전 미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관계도 비슷했다. 생전 둘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공식 석상에서 다정하게 춤을 췄다. 반(反)공산주의, 작은 정부란 가치도 공유했다. 그런 둘 사이에도 분명한 서열이 존재했다. 1983년 미국은 카리브해 작은 섬나라 그레나다를 침공했다. 영연방인 이곳에 소련과 쿠바의 지원을 받은 공산 쿠데타가 일어났다. 침공 후 레이건은 대처에게 “우리 쪽 보안을 믿을 수 없어 미리 알려주지 못했다”고 했다. 대처는 이렇게 말했다. “이 전화도 도청 위험이 있으니 빨리 끊자. 전화해줘 고맙다.” 미국의 뒤늦은 ‘통보’에 영국은 ‘감동’했다. 3∼5일 영국을 국빈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곳곳에서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자신에게 적대적인 메건 마클 왕손빈과 사디크 칸 런던 시장에 대한 막말, 4명의 자녀와 그 동반자까지 대동한 호화 가족 여행 논란은 새롭지 않다. 내정 간섭은 다르다. 영국에 합의 없는 유럽연합(EU) 탈퇴, 즉 노딜 브렉시트를 종용하고 ‘영국의 트럼프’ 보리스 존슨 전 외교장관을 차기 총리로 미는 건 명백한 주권 침해다. 하는 사람도 당하는 쪽도 다 문제다. 그는 왜 존슨 전 장관을 두둔할까. 금발의 백인 남성, 유복한 가정환경, 난잡한 사생활 등 둘의 공통점에 동질감을 느껴서? 국빈방문 하루 전인 2일 우디 존슨 주영 미국대사가 BBC와 가진 인터뷰에 답이 있다. 존슨 대사는 현재 EU가 수입을 금지한 염소(鹽素)로 소독한 미국산 닭고기, 호르몬제를 먹인 미국산 쇠고기 등을 브렉시트 후 미영 무역협상 의제에 포함시키라고 포문을 열었다. “매년 500만 명의 영국인이 미국에 오지만 치킨에 대한 어떤 불만도 들어본 적 없다. 미국산 식품은 완벽히 안전하다”는 말과 함께. 즉, 하루라도 빨리 EU를 벗어나지 못해 안달인 ‘골수 브렉시트 지지자’ 존슨이 런던 다우닝가 10번지(영국 총리관저)의 새 주인이 될수록, 미국은 영국을 미국산 농식품의 새로운 시장으로 만들 수 있다. 영국 식료품의 EU 의존도가 30%에 달하기 때문. 특히 미중 무역 갈등으로 중국이 미국산 대두 수입을 금지하겠다고 난리치는 상황에서 핵심 지지층인 농가의 불만을 잠재우면 트럼프 본인도 4년 더 백악관 주인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나라면 EU에 500억 달러(약 60조 원)의 이혼 분담금을 내느니 하루라도 빨리 노딜 브렉시트를 선택하겠다”는 트럼프의 발언은 영국의 정치 혼란마저 자신의 재선 도구로 삼겠다는 노골적 바람이다. 존슨은 트럼프의 기대에 부응할까. 4월 한 설문조사에서 영국인의 54%는 “법을 어기더라도 강력함을 보여주는 지도자를 원한다”고 했다. 영국인이 브렉시트 혼란에 진저리를 칠수록 ‘영미 트럼프’가 ‘꿀 케미’를 보여줄 날이 머지않은 듯하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1996년 1월 스페인 북부 부르고스에서 교도관 한 명이 납치됐다. 바스크 독립을 외치는 무장단체 ‘바스크조국과자유(ETA)’가 호세 안토니오 오르테가 라라(당시 38세)를 그의 집 차고에서 낚아챘다. ETA는 석방을 대가로 로그로뇨 감옥의 ETA 수감자들을 바스크 교도소로 이송하라고 요구했다. 다음 해 7월 경찰이 구조할 때까지 라라는 532일간 창문도 없는 좁은 지하 감옥에서 지냈다. 1평(약 3.3m²)이 채 안 되는 길이 3.0m, 너비 2.5m의 공간. 세 걸음만 걸으면 방 끝에 닿았고 몇 미터 밖에 강이 있어 습기도 엄청났다. 체중만 23kg이 줄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 불안, 우울증도 얻었다. 몸이 회복되자 그는 정치인으로 나섰다. ETA는 파시스트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전 총통의 바스크 탄압에 반발한 좌파 민족주의자들이 주축이 되어 1959년 탄생했다. 당연히 라라는 우파를 택했다. 2003년 국민당 후보로 부르고스 시장에 나서려다 당내 경선도 통과하지 못했지만 ‘납치 피해자’의 정계 진출 시도는 주목을 끌었다. 그는 2006년 중도좌파 사회당을 이끌던 호세 루이스 사파테로 당시 총리가 ETA와의 휴전을 발표하자 격렬히 반대했다. 언론 노출을 삼가던 그가 첫 TV 인터뷰에 나서 “ETA 타도”를 외쳤다. 이 주장에 동의하건 하지 않건 18개월을 ‘생지옥’에서 보낸 사내의 외침은 상당한 반향을 불렀다. 라라는 2008년 5월 국민당의 온건 노선에 불만을 품고 탈당했다. 오랫동안 야인으로 지내며 잊혀지는 듯했지만 11년이 흐른 2019년 지금 중앙 정계의 주역이 됐다. 그는 2013년 말 비슷한 이유로 국민당을 뛰쳐나온 전 동료 산티아고 아바스칼(43) 등과 반(反)분리독립·이민·이슬람의 극우정당 ‘복스’를 창당했다. 복스는 지난달 말 총선에서 1975년 프랑코의 죽음으로 찾아온 민주화 후 44년 만에 극우정당의 첫 원내 진입을 이뤘다. 설립 5년이 갓 넘은 초짜 정당이 350석 중 24석(6.8%)을 얻었을 뿐 아니라 독재의 상흔으로 사실상 ‘극우 무풍지대’였던 스페인 정치 지형도 바꿨다. 일각에서는 대표 아바스칼을 복스의 ‘얼굴’, 라라를 ‘정신’으로 표현할 정도로 그의 비중은 상당하다. 별다른 당내 직함도 없지만 정강, 노선, 지지층 공략 정책 등에 모두 그의 입김이 반영됐다. 아바스칼은 바스크 거점도시 빌바오, 라라는 바스크와 가까운 부르고스 출신이다. 하지만 이들은 익숙한 근거지 대신 최남단 안달루시아를 집중 공략하기로 했다. 모로코, 알제리 등 북아프리카와 가까워 이민자 유입이 많고 농업 등이 기반이라 유달리 가난한 곳이다. 지난해 안달루시아 1인당 소득은 1만8360유로(약 2386만 원)로 스페인 17개 자치주 중 끝에서 두 번째였다. 마드리드(3만1000유로), 바스크(3만 유로), 카탈루냐(2만7000유로) 등에 비하면 격차가 더 두드러진다. 안달루시아는 과거 사회당 텃밭이었다. 하지만 잘사는 북부와의 빈부 격차, 나아지지 않는 경제, 사회당의 난민포용 정책에 불만을 가진 민심은 복스로 쏠렸다. 복스는 지난해 12월 안달루시아 지방의회 선거에서도 전체 109석 중 12석(11%)을 차지했다. 극우 정당의 지방의회 진입도 민주화 후 최초다. 총선에서의 약진을 지난해 말 이미 예고했던 셈이다. 피카소의 걸작 ‘게르니카’에서 보듯 프랑코 정권의 바스크 민간인 학살은 인류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범죄다. 당시 ETA가 ‘자위’ 차원의 무장투쟁을 벌인 점도 일정 부분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왜 프랑코 사후 21년이 흘러 지방 하급관리에 불과한 젊은 교도관을 납치했을까. 그때 ETA가 라라를 납치하지 않았다면 평범한 생활인이 ‘스페인 민족주의’를 운운하는 극우 선동가로 변신하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ETA의 맹목적이고 의미 없는 테러는 23년 후 의도치 않게 무덤 속 프랑코의 망령을 되살리고 말았다. 무엇보다 라라의 주 공격대상이 프랑코 압제로 피해를 본 바스크와 카탈루냐라는 점이 씁쓸함을 더한다. 피는 언제나 더 큰 피를 부른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