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애란

한애란 기자

동아일보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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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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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3~2024-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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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고용 미스터리 풀렸다…불법이민의 경제학[딥다이브]

    미국 고용시장은 왜 이렇게 계속 뜨거울까. 고용이 이렇게 뜨거운데, 왜 물가는 다시 급등하지 않을까. 지난 1년여 동안 미국 경제학자들을 대혼란에 빠지게 했던 수수께끼입니다.너무 뜨거운 고용시장은 주식시장엔 악재로 통하기도 하죠. 고용이 급증하면 보통은 물가가 들썩거리기 마련인데요. 혹시 이를 우려해서 미국 중앙은행이 금리인하를 주저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그런데 최근 이 ‘고용 미스터리’가 풀린 듯합니다. 해답은 바로 이민에 있었죠. 불법이민과 미국 경제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23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고용 서프라이즈의 진짜 이유지난 5일 미국 노동통계국(BLS)이 발표한 3월 고용보고서에 시장이 깜짝 놀랐습니다. 비농업 고용이 전달보다 무려 30만3000건이나 늘었기 때문인데요. 예상치(21만건)를 훌쩍 넘어선 기록이었습니다.이런 ‘고용 서프라이즈’ 미국에선 한두 번이 아닙니다. 2023년 이후 15번의 고용 보고서에서 무려 11번이 전망치를 웃돌았고요. 그 차이가 10만명 넘는 경우도 5차례나 됐는데요. 어떻게 고용이 이렇게 계속 서프라이즈일 수 있을까요. 매달 수십만 개의 추가되는 일자리를 채우는 건 도대체 누구일까요. 고용이 급증했는데 소비자물가상승률은 어떻게 3%대로 안정돼 있을까요.이에 대해 미국 씽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가 3월 낸 연구보고서가 화제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게 다 ‘불법이민의 효과’라고 합니다.이 연구의 기초자료는 올 1월 미국 의회예산국(CBO)이 발표한 이민자수 추정치인데요. CBO는 지난해 미국의 순이민자수가 무려 330만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했죠. 이게 얼마나 많은 건지 감이 잘 안 잡힐 텐데요. 기존 최고 기록이 2005년 190만명인데, 이걸 140만명이나 초과한 겁니다. 어마어마하죠.특히 이 중 240만명은 불법 이민자라고 합니다. 무단으로 국경을 넘었거나(밀입국자), 비자기간을 초과했거나, 이민 법원 절차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죠. 이런 불법 이민자 중 상당수가 저임금 블루칼라 노동자로 채용되고 있는 건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런 자료를 바탕으로 브루킹스연구소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강력한 이민이 계속된다면 미국의 신규고용이 얼마나 늘어날지를 계산했는데요. 그 결과가 꽤 놀랍습니다.과거 미국에선 월 6만~10만명 정도 일자리가 증가하는 게 적정선으로 통했습니다. 인플레이션을 자극하지 않는 신규 취업자 수 균형점이 그 정도라는 뜻이었는데요. 최근의 이민 물결을 반영한 결과, 그 수치가 월 16만~20만명으로 확 늘어납니다. 신규고용이 기존 전망의 두 배로 늘어나도 물가가 들썩거릴 일이 없다는 거죠. 이민자 급증이 미국 노동시장의 공식을 바꿔놓은 셈입니다. 다시 말해, 월 20만명쯤의 고용 증가는 이제 ‘뉴노멀’이 됐습니다.이 연구를 담당한 웬디 에델버그 브루킹스연구소 이사(전 연준 이코노미스트)는 악시오스 인터뷰에서 연구결과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연준의) 통화정책이 노동시장을 둔화시키기 위해 생각만큼 많은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파월도 믿는 이민자 효과브루킹스연구소는 이민 증가가 고용시장뿐 아니라 소비 호황에도 한몫한다고 분석합니다. 밀려든 이민자들이 지난해 미국의 실질 소비자지출을 0.2%포인트 끌어올렸다는 추정인데요. ‘왜 이렇게 소비 지출이 계속 늘지?’에 대한 답 역시 이민에서 찾을 수 있단 겁니다. 요약하자면 미국 경제가 잘 나가는 건 여러모로 이민 급증 덕분입니다.이렇게 생각하실 분도 있을 겁니다. 혹시 브루킹스연구소는 진보 성향이라 이민에 대해 긍정적인 연구 결과를 내놓은 게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볼 건 아닙니다. 고용시장 활황이 이민자 덕분이란 이야기를 하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이를테면 FHN파이낸셜과 모건스탠리는 이민 증가를 반영해 고용시장 균형점(물가 상승 없는 고용 증가폭)을 월 26만5000명으로 높여 잡았습니다. 글로벌 신용평가사 피치는 11일 보고서에서 “이민이 일자리와 경제성장에 크게 기여했고, 이런 추세는 2024년까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죠. 하버드대학의 제이슨 퍼먼 교수는 최근 블룸버그 라디오에서 노동시장 강세 원인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말합니다. “한 단어, 이민자.”무엇보다 세계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이 ‘불법이민자 효과’를 믿고 있는 듯합니다. 바로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인데요.파월 의장은 이달 초 스탠퍼드대학 연설에서 “미국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다”고 말했죠. 아울러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경제는 더 커졌지만 더 타이트하진 않습니다. 정말 예상치 못한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는 지난달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에 출석했을 때도 이민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래를 위해 어떤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하진 않을 겁니다. 이민과 노동력 참여가 지난해 우리가 이룬 매우 강력한 경제성장에 기여했다고 말하는 건 사실을 보고하는 것뿐입니다.”“더 많은 이민자” 외치는 기업들만약 이민 급증이 정말 미국 경제를 강하게 만든다면, 나아갈 방향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민자에 문을 더 활짝 열어야죠.그리고 이를 열렬히 주장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주로 기업들인데요. 미국인 근로자를 구하기 어려운, 그래서 이민자 없이는 굴러갈 수 없는 업종에서 특히 목소리를 내고 있죠. 예컨대 이런 업종입니다. 건설·운송·창고·숙박·식품서비스.플로리다주에서 44개 호텔을 경영하는 잔 가우텀 CEO는 AP뉴스 인터뷰에서 객실 청소와 세탁 일을 맡을 미국인 근로자를 찾을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경제를 부흥시키려면 확실히 더 많은 이민자가 이 나라로 와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죠.텍사스주 건설사 CEO인 에디 마틴은 CNN 인터뷰에서 “우리는 사업을 잃고 있다. 숙련된 근로자가 노령화됐고, 이를 대신할 사람이 없다”고 하소연합니다. 인력부족으로 주택 건설 기간이 9개월에서 14개월로 늘어났는데요. 그는 의회가 더 많은 이민자 고용을 위해 새로운 취업비자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타이슨푸드는 미국 최대의 육류가공업체인데요. 지난달 뉴욕시의 비영리 난민지원단체와 협업해 남미 출신 망명신청자 80여 명을 테네시주 훔볼트 공장에 채용했죠. 고기를 세척하고 자른 고기를 담고, 뼈를 검사할 미국인 근로자를 구하는 게 너무 힘들기 때문인데요. 이 회사 관계자는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만약 우리가 그들을 찾을 수만 있다면 추가로 4만2000명을 고용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연방정부가 취업허가만 내준다면 이민자를 대거 채용할 준비가 되어있는 건 기업만이 아닙니다. 일부 주 정부도 구인난 해소를 위해 이민자 채용 문을 활짝 열고 있는데요. 지난해 캘리포니아와 콜로라도, 일리노이주는 미국 시민권이 없는 이민자도 경찰로 채용할 수 있게 법을 바꿨죠. 그만큼 경찰 할 사람 구하기가 어렵다 보니 만든 고육책인데요. ‘외국인이 미국 시민을 체포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식의 비판도 나왔지만, 점점 비슷한 정책을 추진하는 주 정부가 늘어만 갑니다.좋은 정치와 나쁜 경제이민자에 대한 이 강력한 수요를 채워주는 방법은 사실 간단합니다. 현재 미국 연방법에 따라 법원에 망명신청을 하면 180일이 지난 뒤에야 취업허가가 나오는데요. 이 기간을 대폭 줄여주면 됩니다. 난민이 몰려들어 골치인 도시는 혼돈에서 벗어나고, 일할 사람이 없어서 골치인 지역은 구인난을 해소할 수 있으니 윈윈이죠. 이는 에릭 아담스 뉴욕시장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이민자에 신속한 법적 허가를 부여해서 수많은 뜨거운 노동시장 중 한 곳으로 보내는 것이 이민자와 고용주, 그리고 미국 경제에 승리를 제공할 겁니다.”하지만 11월 대선을 앞둔 바이든 행정부가 그런 선택을 하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지금 미국 대선의 가장 큰 이슈가 바로 이민문제이기 때문이죠. 밀려드는 불법 이민자들로 인해 지난해부터 국경 지역엔 비상이 걸렸죠. 공화당 출신 주지사들은 이민자들을 민주당이 집권한 뉴욕, 시카고 등으로 실어 날랐고요. 대도시 곳곳이 이민자 수용소가 돼버린 혼란상이 언론에 연일 보도됐죠. 여론은 돌아섰고 바이든 대통령의 이민 정책엔 이미 ‘실패’라는 딱지가 붙었는데요.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혐오를 부추기는 공세(‘이민자가 피를 오염시킨다’)까지 이 틈을 파고들고 있습니다.갤럽은 매달 ‘미국이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한 여론조사를 진행하는데요. 올해 2월과 3월, 두 달 연속으로 이민(28%)이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이민이 경제(14%)나 인플레이션(11%)보다 더 중대한 문제라니. 놀라운데요. 갤럽 여론조사에서 이민이 1위에 오른 건 5년 만에 처음입니다. 그만큼 이민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이례적으로 커진 겁니다.이런 상황에서 ‘이민은 경제에 좋다’는 경제학자 말이나, ‘더 많은 이민자를 달라’는 기업의 목소리가 잘 통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조급해진 바이든 대통령은 “국경 폐쇄 가능성”을 운운하며 최근엔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섰는데요.투자회사 록펠러 인터내셔널의 루치르 샤르마 회장은 파이낸셜타임스 칼럼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민 단속은 좋은 정치지만 나쁜 경제입니다.(…) 정치적 반발이 (경제적) 횡재를 위태롭게 합니다.(…) 현명한 정치인은 혼란스러운 불법 이민 통제와 반이민 정책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 제한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합니다.” 물론 균형 잡기란 어렵습니다. 특히 대선을 앞둔 시점에는. By.딥다이브얼마 전 딥다이브 네덜란드 반이민 정책 편에서 “이민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경제를 파괴하는 것”이란 이민 전문가 발언을 전해드렸는데요. 이민의 나라, 미국은 어떤 길을 선택하게 될까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고용이 이렇게 빠르게 급증하는데 왜 물가 상승률은 안정돼있을까. 미국 경제학자들을 지난 1년간 혼란에 빠뜨렸던 ‘고용 미스터리’인데요. 이제 그 답을 찾아가는 듯합니다. 브루킹스연구소에 따르면 이는 불법이민 효과입니다.-연구에 따르면 이민으로 노동력 공급이 급증하면서 전보다 고용시장 균형점이 한층 높아졌습니다. 물가를 자극하지 않고도 월 20만명의 취업자 수가 추가될 수 있는 겁니다. 뜨거운 고용시장을 식히려고 연준이 그리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죠. 투자자들 입장에선 다행스러운 소식입니다.-이미 건설, 숙박, 식품 관련 기업에선 ‘더 많은 이민자를 채용하게 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일부 주 정부는 경찰 구인난 해결을 위해 이민자를 경찰로 채용하려 합니다.-문제는 정치입니다. 대선을 앞두고 이민에 대한 거부감이 유례없이 커졌습니다. 초조해진 바이든 대통령이 국경 폐쇄를 운운하기 시작했는데요. 이러다 ‘이민 대박’의 기회를 망치는 건 아닐까요.*이 기사는 23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4-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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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빅테크 실적 나온다…뉴욕증시, 일제히 반등[딥다이브]

    실적시즌의 하이라이트를 앞두고 뉴욕증시가 반등에 성공했습니다. 22일(현지시간) 3대 지수가 모두 상승 마감했는데요. 다우지수 0.67%, S&P500 0.87%, 나스닥지수 1.11% 상승했죠. S&P500과 나스닥 지수는 6일 연속 하락세를 끝내고 상승 전환한 겁니다. 지난주 전 세계를 긴장케 했던 중동지역의 긴장은 한층 완화됐습니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보복공격에 대응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기 때문이죠. 이에 국제유가와 금 가격은 이날 하락했는데요. 이제 시장의 관심은 주요 기업의 실적 발표로 쏠립니다.‘매그니피센트 7’ 기업 중 마이크로소프트와 메타 플랫폼, 알파벳(구글), 테슬라가 이번 주에 실적을 발표할 예정이죠. 블랙록은 주간논평에서 이번 주 나올 기업 실적이 높은 금리 환경에서도 주식 선호도를 계속 높일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기준이 될 거라고 분석했는데요. 주가 상승으로 이미 크게 높아진 시장의 눈높이에 부합하는 실적과 전망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시장의 기대감은 높은 편입니다. 블룸버그의 전문가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63%는 1분기 기업 실적이 S&P500에 활력을 불어넣을 거라고 내다봤습니다. 아폴로 글로벌 매니지먼트의 토르스텐 슬록 이코노미스트는 이날 메모에서 “기업 수익이 둔화할 조짐은 전혀 없다. 경제는 계속 힘을 얻고 있다”고 전했죠. HSBC의 미국주식 전략가 니콜 이누이는 “1분기 실적시즌은 미국 주식에 지지를 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다만 2024년의 남은 기간의 실적 전망도 높여 잡을 수 있느냐가 관건인데요. 씨티그룹은 1분기 기업 이익이 예측치를 초과할 확률은 76%이지만, 올해 남은 기간 실적이 상승할 가능성은 49%에 그친다고 분석합니다. 기업이 실적 전망을 높이는 걸 주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이번 주 금요일에는 3월 개인소비지출(PCE) 물가지수도 발표됩니다. 연준이 선호하는 인플레이션 지표이지요. 연준의 FOMC 정례회의는 4월 30일과 5월 1일 열릴 예정입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23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4-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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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욕망의 교차점, 아파트 재건축의 역사(feat. 용적률 마법)[딥다이브]

    재건축 불패신화 깨졌다. 황금알 낳던 재건축이 돈 먹는 하마가 됐다. 재건축은 이제 끝이다.요즘 이런 기사가 쏟아져 나옵니다. 재건축 시공사 선정이 줄줄이 유찰되고, 수억대 추가 분담금 갈등으로 멈춰 선 현장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죠.그런데 궁금합니다. 도대체 아파트 재건축 시장은 언제부터 열렸을까요. ‘재건축=대박’ 공식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지금 같은 혼돈은 이전엔 없었을까요. 과거 신문기사를 자료 삼아, 재건축의 긴 역사를 일부 들여다봤습니다.*이 기사는 1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국식 정비사업, 재건축의 시작재건축. 토지 소유자들이 조합을 결성해서, 기존 아파트를 헐고 새 아파트를 다시 짓는 걸 말하죠. 그 재건축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이곳이 나옵니다. 마포주공아파트.얼마 전 ‘마포주공아파트’란 제목의 책이 출간됐습니다. 그만큼 국내 아파트 역사에선 빼놓을 수 없는 곳인데요. 정부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일환으로 마포형무소 농장터에 지은 국내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였습니다.1962년 준공된 10개 동 6층짜리 마포주공아파트(642가구) 당시로선 보기 드문 고급 현대식 아파트였습니다. 입식 부엌과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건 물론, 단지 안에 놀이터와 운동장, 분수대까지 있었죠. ‘연예인 아파트’라 불리는 대표 부촌으로 자리 잡으면서 각종 영화 배경이 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습니다.세월이 지나 아파트가 노후화되자 준공 25년이 된 1987년 마포아파트 입주민들이 뭉쳐서 ‘가옥주모임’을 결성합니다. 국내 첫 재건축 추진 위원회였죠. 사실 그땐 우리나라에 재건축에 관한 규정조차 없었을 때인데요. 그해 12월 재건축 규정(주택건설촉진법)이 생겨났고, 이듬해인 1988년 12월 마포아파트가 처음으로 재건축사업 승인을 받습니다.노태우 정부가 ‘주택 200만호 건설’을 약속하고 주택공급에 한창 열을 올리던 시기입니다. 마포아파트 용적률은 87%밖에 되지 않았죠. 이를 고층 아파트로 재건축하면 집주인은 건축비를 충당할 수 있으니 좋고, 정부는 서울 시내에 주택 공급을 늘릴 수 있으니 윈윈이었습니다.물론 재건축 추진 과정엔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습니다. 세입자 반발이 극심했고, 철거반원과 물리적 충돌까지 빚었는데요. 1994년 7월 16, 17층짜리 아파트 14개 동(982가구)의 마포삼성아파트로 재건축됩니다. 국내 최초 재건축 단지로 기록됐죠. 이제 그 마포삼성아파트가 준공 30년을 눈앞에 두고 있군요. 만약 국내 최초의 ‘재재건축’ 아파트가 탄생할 수 있다면, 그 유력한 후보지입니다.용적률 마법과 강남 불패신화1987년 주택건설촉진법에서 처음에 정한 재건축 연한은 20년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20년이 지나면 아파트가 너무 낡아서, 수리하느니 새로 짓는 게 낫다고 봤기 때문입니다.그래서 1990년대에 접어들자 서울 강남 일대에도 재건축 바람이 솔솔 불어옵니다. 강남지역은 1963년 경기도에서 서울로 편입돼 개발이 시작됐죠. 이 지역에 처음 들어선 아파트가 1972년 논현동 영동공무원아파트였고요. 길동시영·구반포·삼성AID 아파트 준공이 1974년, 잠실3단지가 1975년이었습니다. 초창기 아파트들이 20년을 채워가면서 집주인들도 재건축 꿈을 키우게 됐는데요. 모두 용적률 90% 안팎 저층아파트였습니다.당시 정부가 법으로 정한 재건축 아파트 용적률은 무려 400%. ‘200만호 건설’ 계획의 일환으로 1990년 정부가 300%이던 제한을 400%로 확 풀어놨는데요. 자고로 정비사업에서 용적률이란 ‘헌법’과 같은 존재이죠. 용적률 100%도 안 되는 저층 아파트에 400% 용적률을 적용한다는 건 사실상 ‘재건축 투기’ 길을 열어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게다가 이런 기대감에 불을 붙이는 정책이 발표됩니다. 1993년 2월 건설부가 준공 후 20년이 채 되지 않았더라도 아파트가 낙후됐거나 도시미관을 크게 해치면 재건축을 할 수 있게 기준을 더 완화했죠. 그해 1월 청주 우암상가아파트가 붕괴되는 사고가 일어나자, 곧이어 출범한 김영삼 정부가 아파트 붕괴사고를 막겠다며 재건축을 더 쉽게 만든 겁니다.어떻게 됐을까요. 재건축 투자 열기가 확 달아오릅니다. 당시는 이미 200만호 건설이 끝난 뒤, ‘서울엔 이제 아파트 지을 땅이 없다’는 얘기가 나오던 시점입니다. 그런데 수익성 있는 노른자위 입지에 자리 잡은 기존 아파트를 재건축할 길이 열렸으니, 투자자들이 몰려듭니다. 지은 지 15년 넘어 재건축을 바라보게 된 아파트값이 급등했고요. 건설사들이 재건축 수주전에 앞다퉈 뛰어들어 무이자로 1억원 넘는 이주비를 제시하기 시작합니다. 전례 없는 과열 경쟁이 벌어졌죠.용적률 낮은 저층 아파트를 골라 사서 재건축하면 1억원 이상도 남길 수 있다는 공식이 이때 자리 잡습니다. 지방에서 서울 재건축 아파트를 사러 올 정도로 투자 열풍이 불었는데요.1995년 동아일보는 이렇게 전합니다.“새집보다도 지은 지 오래된 아파트가 값이 더 많이 오른다. 준공 후 5년에서 10년 사이인 집값은 오히려 떨어지기도 한다.(…)이미 15년 이상 된 아파트들은 재건축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되고 있기 때문에 투자이익을 기대하긴 곤란하다.”1996년 도곡 주공1단지 2억에 샀으면…하지만 ‘강남 재건축 대박’을 가로막는 마지막 장벽이 남아 있었습니다. 잠실, 반포, 청담·도곡 지역 저층아파트 단지 대부분이 ‘저밀도 아파트 지구’로 묶여 있었던 거죠. 애초 도시계획 단계에서부터 6층 이상 아파트를 지을 수 없게 서울시가 못 박아 놓은 단지였습니다.아파트가 좁고(15평 내외), 배관도 낡아서 못 살겠다며 주민들은 아우성이었습니다. 잠실 시영아파트나 주공1단지는 임시 조합을 설립해 시공사까지 미리 선정해놓고 압박했죠. 한동안 서울시 입장은 완고했습니다. “도로, 상수도, 주차장 등 주변 도시기반시설을 확충하려면 엄청난 예산이 든다”는 이유였는데요.그렇게 수년에 걸친 줄다리기 끝에 1996년 11월 마침내 서울시가 총 5개 지구(잠실, 반포, 청담·도곡, 화곡, 암사·명일동)의 고층 재건축을 허가한다고 발표합니다. 총 5만여 가구를 7만 가구로, 용적률 90% 안팎이던 걸 285%로 대폭 늘린다는 계획이었죠.부동산 시장은 ‘강남의 얼굴이 바뀐다’며 환호했고요. 언론과 전문가들은 ‘3난’이 닥칠 게 뻔하다고 비판했습니다. 3난이란 자재난, 교통난, 전세난이었죠. “재건축이 완료되면 강남·송파구 교통량은 현재(1996년)의 2.3배, 서초구는 2.1배가 될 것”이라는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추정이 나왔습니다. 지금 강남 교통난을 그때 이미 예견한 셈이죠. 당시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좀 살펴볼까요. 재건축 예정인 저밀도 단지 중 도곡 주공1단지가 가장 투자가치가 높다는 기사가 실렸는데요. 그때 당시 ‘13평형 매매가 2억+금융비용 9600만원+추가분담금 1억5000만원’으로 계산하면 2001년 완공 시 43평 입주까지 드는 비용이 약 4억5000만원이었습니다. 인근 럭키아파트 45평형(4.9억~5.3억원) 시세보다 저렴했죠.실제로는 이 단지는 예정보다 늦은 2006년에나 완공됐는데요. 그래도 남는 장사였던 건 틀림없어 보입니다. 도곡 주공1단지를 재건축한 도곡렉슬 43평의 현재 시세는 32억원 안팎입니다.IMF 때 죽었다 부활한 재건축여기까지만 보면 규제가 재건축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물론 사업 승인권이 지자체에 있으니 당연히 지자체 역할은 매우 중요한데요. 그렇다고 규제만 왕창 풀어준다고 재건축 사업이 다 되는 건 아닙니다. 건설경기와 금리 같은 외부환경이 다 받쳐줘야만 계속 나아갈 추진력이 있죠. 1996년 환호했던 재건축 시장은 이듬해 바로 고꾸라집니다. IMF 외환위기가 닥쳤죠.시장엔 한파가 몰아칩니다. 주택건설사가 잇따라 부도에 처했고요. 살아남은 건설사는 재건축사업에서 손을 떼겠다며 줄줄이 기존 계약을 취소합니다. 할부금융사가 중도금대출을 전면 중단하면서 돈줄도 막혔고요. 무엇보다 정리해고 피바람이 부는 상황에서 분양받을 사람이 없죠. 재건축은 올스톱됩니다.흔히 공급 위축은 2~3년 시차를 두고 부동산 가격 급등으로 이어진다고 얘기하죠. 2000년대 초반이 딱 그랬는데요. 죽어있던 재건축 시장이 2년 만에 다시 깨어납니다. 재건축 수주를 위해 건설사들이 상품권과 전자제품을 뿌리고, 제주도 여행을 보내주는 등 수주경쟁은 더욱더 극성스러워졌죠. 계속 규제를 풀기만 했던 정부가 본격적으로 재건축 규제 강화에 나선 것도 이 시점입니다. 소형주택 건설 의무제(2001년), 후분양제 도입(2003년), 용적률 25% 임대아파트 의무화(2005년), 재건축 연한 40년 연장과 초과이익 환수법 제정(2006년) 등이 줄이어 나옵니다.욕망의 시장에서 패배자는 누구?시대와 관계없이 이런 재건축 수주 활황기가 한바탕 지나가고 나면 꼭 불거져 나오는 이슈가 있습니다. 재건축 조합과 시공사 간 분쟁입니다. 달콤한 약속을 쏟아냈던 시공사들이 착공을 앞두고는 각종 비용 발생이 추가됐다며 공사비를 올려달라고 하죠. 건설사가 출혈경쟁을 불사하며 달려든 사업장일수록 공사비 갈등이 벌어지는 법입니다. 지난 30여년간 재건축 사업에서 건설사는 결코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아 왔죠.공사비 증액 분쟁의 승리자는 물론 건설사였습니다. 그럼 최대 피해자는 누구일까요. 조합원일 것 같지만, 대체로 아니었습니다. 바로 일반 분양자를 포함한 무주택자들이죠.잠실 저층 단지 중 가장 처음 재건축에 성공한 잠실 주공4단지(레이크팰리스) 사례를 볼까요. 2003년 시공사가 3년 만에 공사비를 37% 올린다고 통보하면서 조합원 반발이 상당히 컸던 곳이죠. 34평의 추가부담금이 6890만원으로 불어났기 때문이었는데요. 결과적으로는 이 금액이 327만원으로 쪼그라들었습니다. 대신 일반 분양가가 평당 1200만원에서 1990만원으로 대폭 상승했죠. 공사비 증액 부담을 일반 분양에 떠넘긴 겁니다.도대체 그렇게 비싸게 주고 누가 사냐는 말이 나왔지만, 막상 2004년 분양 당시 경쟁률은 최고 335대 1. 그 가격에도 팔린다는 신호를 주면서 이후 나머지 단지 분양가 역시 비슷한 수준에 맞춰졌습니다. 높은 분양가는 연쇄적으로 주변 시세까지 들썩이게 만들었죠.일부의 욕심이 부동산 시장 전체를 교란시켰다고도 볼 수 있는데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예나 지금이나 재건축은 철저한 ‘욕망의 시장’입니다. ‘각자 욕망에 충실할 것’ 이외의 다른 규칙이란 거의 없다시피 하죠. ‘사인 간 계약’이라며 추가 부담금을 둘러싼 조합과 시공사 갈등에 대해 행정당국이 수수방관하는 것 역시 30년째 그대로이고요.재건축은 한국만의 독특한 시스템입니다. 수백, 수천 세대가 사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를 한 번에 허물고 다시 짓는 건 다른 데선 찾아보기 어렵죠. 용적률을 끌어올려 사업 수익성을 극대화하는 ‘용적률의 매직’ 덕분에 꽤 오랫동안 이 신기한 시스템이 유지됐는데요. 그 마법의 수명이 이제 다 되었을지 모른다는 분석이 최근 이어집니다. 이제 재건축을 재건축할 시점이 된 걸까요. 그렇다면 다음엔 무엇이 올까요. By.딥다이브옛 아파트 단지 사진을 찾다 보니, 재건축이 만든 풍경의 변화가 정말 놀랍다는 생각이 듭니다. 천지개벽, 상전벽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인데요. 동시에 좋은 새 아파트에서 살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을 과연 재건축이 아닌 무엇이 채워줄 수 있을지도 궁금합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한국식 정비사업인 재건축의 시작은 마포주공아파트입니다. 1987년 당시 노태우 정부의 ‘200만호 주택 건설’ 정책과 맞물려, 서울 요지에 신규 주택공급을 늘리는 수단으로 재건축이 시작됐죠.-1990년대가 되자 20년 연한을 채운 강남지역에 재건축 바람이 불어옵니다. ‘용적률 높여 재건축하면 1억원은 번다’는 용적률 게임의 공식이 자리 잡으면서 투기 열풍이 일었고요. 정부의 규제 완화가 힘을 실어줬습니다.-이후에도 건설경기와 금리 흐름, 규제 변화에 따라 재건축 시장은 호황과 불황을 반복했는데요. 호황기가 지나가면 어김없이 시공사와 조합의 공사비 갈등이 불거지곤 했습니다. 지금도 비슷한 상황이 또다시 반복되고 있는데요. 다만 용적률의 마법이 점점 수명이 다해간다는 점이 이전과는 달라진 점이죠.*이 기사는 1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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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스닥 5일 연속 하락…넷플릭스는 ‘깜짝 실적’ 발표[딥다이브]

    뉴욕증시에서 대형주 위주의 S&P500과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 지수가 5거래일 연속 하락했습니다. 연준 인사의 매파적 발언이 이어지면서 금리 인상이 미뤄질 수 있다는 우려를 자극했기 때문인데요. 18일(현지시간) S&P500은 0.22%, 나스닥지수는 0.52% 하락했고 다우지수는 0.06% 상승 마감했습니다. 이날 시장이 주목한 건 연준 인사들의 공개 발언이었죠. 존 윌리엄스 뉴욕 연은 총재는 ‘세마포 세계 경제 서밋’에서 금리 인상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받자 “추가 금리 인상은 기본 입장이 아니다”라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데이터가 우리 목표 달성을 위해 더 높은 금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또다른 공개행사에 참석한 래티얼 보스틱 애틀랜타 연은 총재의 발언도 시장의 금리인하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우리는 올해 연말 무렵까지 기준금리를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라고 말했죠.이에 통화정책에 민감한 미국 국채 2년물 금리는 0.058%포인트 오른 4.99%를 기록했고요. 금리 영향이 큰 기술주 주가는 약세를 보였습니다. 테슬라는 3.55%, 마이크로소프트는 1.84% 하락을 기록했죠.이날 장 마감 뒤엔 넷플릭스 1분기 실적이 발표됐는데요. 신규 가입자 수와 매출·영업이익 모두 예상치를 훌쩍 뛰어넘는 깜짝 실적을 거뒀습니다. 특히 1분기에 무려 933만 명의 가입자가 추가됐는데요.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5배 넘게 늘어난 겁니다. 비밀번호 공유를 제한하려는 노력이 신규 가입자수 증가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죠. 넷플릭스가 현재 전 세계적으로 확보한 유료 고객 수는 2억6960만 명에 달합니다.다만 넷플릭스 주가는 시간외 거래에서 4% 넘게 빠졌는데요. 회사 측이 올해 연간 매출 성장이 13~15%에 그칠 거라는 다소 약한 가이던스를 내놓은 영향입니다. 또 내년 1분기부터는 분기별 가입자 수를 더이상 공개하지 않겠다고도 밝혔는데요. 이 역시 투자자들에겐 실망스러운 점입니다. 지금의 가입자 증가 물결이 끝나갈 수 있다는 신호이니까요.이날 미국 백화점 기업 노드스트롬은 창업자 가족이 회사를 비공개로 전환하려 한다는 소식에 주가가 4.4% 뛰었습니다. 뉴욕상품거래소에서 코코아 선물 가격은 이날 9.6% 급등해 t당 1만1035달러까지 치솟았습니다. 또 신기록이네요. By.딥다이브*이 기사는 1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4-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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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값싼 플라스틱의 공습…이 산업이 위험해 보인다[딥다이브]

    플라스틱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환경 이야기냐고요? 아니, 산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플라스틱을 생산하는 석유화학 공장이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글로벌 플라스틱 시장의 공급과잉이 위험수준이란 경고음이 커지는데요.왜 플라스틱 공장은 빠르게 커지고 있을까요. 더 많은 플라스틱, 더 값싼 플라스틱은 얼마나 위험할까요. 오늘은 플라스틱 시장의 역사적 공급과잉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6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물질소비의 민주화 시대플라스틱은 너무 흔해서, 기술 진보나 혁신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고요? 플라스틱의 화려한 과거를 모르시는군요. 1959년 동아일보 기사 속 표현을 인용하자면, 플라스틱은 ‘20세기의 총아’이자 ‘세기의 혁명’을 일으킨 놀라운 신소재입니다.플라스틱은 유연하고 강합니다. 얇은 필름부터 단단한 케이블까지, 모든 형태로 만들 수 있죠. 닳지도 않아요. 얽힌 종이클립처럼 반복되는 분자 사슬로 이뤄진 ‘중합체’이기 때문입니다.당구공용 코끼리 상아를 대체하기 위한 최초의 플라스틱(셀룰로이드)이 개발된 건 1869년이지만, 대량생산이 시작된 건 제 2차 세계대전부터이죠. 군인들이 플라스틱 헬멧과 비닐 비옷을 착용하고, 나일론 낙하산을 타면서 플라스틱 생산량이 급증했고요. 전쟁이 끝난 뒤엔 소비자 시장에서 플라스틱이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플라스틱 포장재는 식품산업, 합성섬유는 의류산업의 혁명을 가져왔고요. 플라스틱 덕분에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는 저렴한 제품이 끝없이 넘쳐나게 됐습니다. 누구나 플라스틱 제품을 누릴 수 있는 ‘물질소비의 민주화’ 시대가 열렸죠.싸고 편리한 플라스틱에 인류는 금세 중독됐습니다. OECD 보고서(2022년)에 따르면 전 세계 플라스틱 소비량은 지난 30년 동안 4배로 불어났죠. 그 소비량이 앞으로 줄어들 거란 예측이나 조짐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OECD는 2060년엔 플라스틱 소비량이 2019년(4.6억 톤)의 3배 수준(13.2억 톤)으로 증가할 거라고 내다봅니다. 그 어떤 다른 소재보다도 더 빠르게 성장할 겁니다.빨대·비닐봉지 같은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을 제한하는 국가가 많지 않느냐고요? 하지만 나머지 대부분 플라스틱은 규제 논의를 피해 가고 있습니다. 자동차 범퍼나 사무실 깔개, 주택의 PVC 파이프와 창호를 무엇이 대체할 수 있을까요. 합성섬유 혼방을 모두 제외한다면 옷장의 옷이 과연 몇벌이나 남을까요.역대급 플라스틱 공급과잉인류는 플라스틱 소비를 멈추지 못할 겁니다. 앞으로도 점점 더 많은 플라스틱을 소비하게 되겠죠. 환경엔 암울할지 몰라도 플라스틱을 만드는 화학 기업엔 좋은 소식인데요.하지만 글로벌 석유화학 업계는 잔뜩 가라앉아있는 상태입니다. 2022년 시작된 다운사이클(하락기) 한복판에 있죠. 물론 사이클은 늘 있었고, 보통 3~4년 주기로 반복되기 마련인데요. 문제는 이게 그냥 지나가는 사이클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지금 같은 암흑기가 꽤 오래 지속될 수 있단 비관적 전망이 점점 힘을 얻고 있습니다.일상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대표적인 플라스틱이 폴리프로필렌(PP)과 폴리에틸렌(PE)이죠. 원자재시장 분석기업 ICIS이 지난달 웨비나에서 이 산업을 전망했는데요. 핵심 내용은 이렇습니다.폴리프로필렌(PP) = 앞으로 5년(2024~2028년) 동안 글로벌 수요가 연평균 4.2% 성장할 겁니다. 아시아 신흥국의 인구 증가와 경제성장이 전 세계 PP 수요를 주도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같은 기간 생산능력도 크게 늘면서 공장 가동률은 지난해(79%)보다 더 낮아질 전망입니다. 2019~2021년 87% 안팎이었던 가동률이 급락한 뒤 회복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PP 시장의 공급과잉은 구조적입니다. 경쟁 심화로 생산업체는 과거의 마진 수준을 회복하기 어려울 겁니다.폴리에틸렌(PE)= 글로벌 PE 수요는 계속 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산능력이 더 빨리 증가하면서 공장 가동률이 급격히 떨어집니다. 지난해 가동률은 81%였고요. 올해 이후에도 계속 내려가 2028년엔 74%까지 떨어질 전망입니다. 과잉생산이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라 점점 악화할 거란 뜻입니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운영비용이 높은 곳(유럽)부터 영향을 받을 겁니다.요약하자면 플라스틱 수요는 늘지만, 그보다 공급이 훨씬 더 빨리 늘어나서 큰일입니다. 당분간 공급과잉은 점점 더 심해질 겁니다. 수년 동안 유례없는 수준으로 공장 가동이 멈추고, 마진이 쪼그라들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ICIS의 존 리처드슨 컨설턴트는 이렇게 분석합니다. “장기 데이터는 시장이 사상 최고 수준의 공급과잉에 직면해 있음을 알려줍니다. 이는 우리가 직면한 석유화학의 뉴노멀입니다.”플라스틱이 석유의 미래?지금의 공급과잉 사태는 중국 영향이 큽니다. 코로나 이전엔 중국의 플라스틱 수요가 연평균 10% 이상 증가해, 끝없이 팽창할 것만 같았죠. 중국을 포함한 각국 기업들이 이를 믿고 투자를 왕창 벌여놨는데요. 2021년 중국 부동산 거품이 터지기 시작하면서 수요가 크게 둔화하고 말았습니다. 공장은 지어놨는데 팔 곳은 없고, 제품 가격은 뚝뚝 떨어지는 상황입니다.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계 최대 화학회사인 독일 바스프는 지난해 2600명(전체 직원의 2%)을 해고한 데 이어, 올해 또다시 추가 감원 계획을 발표했죠. 단기간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보고 허리띠를 조이는 건데요.하지만 대부분 기업은 공장설립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전히 많은 공장이 세계 곳곳에서 지어지고 있죠. 미국 석유회사 셸(Shell)은 2022년 11월부터 단계적으로 펜실베이니아 폴리에틸렌 단지를 열고 있습니다. 완공되면 축구장 300개 크기로, 총비용이 무려 140억 달러에 달하는 거대 프로젝트라고 합니다. 엑손모빌은 중국 광둥성에 총 100억 달러를 들여 건설 중인 석유화학 단지를 2025년 완공할 예정이고요. 셰브런은 지난해 합작사인 셰브론필립스케미칼을 통해 미국 텍사스와 카타르에 대형 화학 플랜트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영석유회사 아람코는 지난해 사우디 주베일에 대규모 석유화학단지 ‘아미랄’ 을 착공했죠.업황이 이미 바닥인데, 왜 이렇게 공격적인 투자가 이어지는 걸까요. 치킨게임이라도 벌이겠다는 걸까요. 이와 관련한 배런스의 최근 분석이 눈에 띄는데요. 대형 석유회사들이 휘발유에서 플라스틱으로 선회하고 있다는 겁니다.기관마다 약간 차이는 있지만 세계 휘발유 소비는 곧 정점을 지날 가능성이 크다고 하죠(JP모건은 정점을 2025년으로 예상). 천천히, 하지만 영구적으로 전 세계 휘발유 소비가 줄어들 거란 전망이 대세인데요. 석유회사 입장에선 이대로 앉아서 두고 볼 수만은 없죠.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하는데 그게 바로 플라스틱인 겁니다. 적어도 휘발유처럼 몇 년 안에 수요가 줄어들 거나 하는 일은 없으니까요.플라스틱은 대부분 화석연료로 만들어지죠. 천연가스와 석유를 값싸게 얻을 수 있는 지역과 기업이 비용 측면에서 단연 유리한데요. 미국과 중동의 석유기업은 그런 면에서 경쟁력이 월등합니다. 즉, 플라스틱은 화석연료를 수익화하기에 또 다른 좋은 방법이 됐습니다.플라스틱을 포함한 화학제품 시장은 연료(휘발유·디젤·제트유) 시장의 5분의 1밖에 되지 않습니다. 과연 덩치 큰 대형 석유회사들이 이 작은 시장에 뛰어들어서 뭘 얼마나 얻을진 의문이죠. 먹을 게 있긴 할까요. 이를 두고 배런스는 “마치 덩치 큰 사람(대형 석유회사)이 욕조(플라스틱 시장)에 뛰어들어 대포를 쏘는 것과 같다”고 평하는데요. 다른 경쟁자를 밖으로 밀어내고 시장을 잡아먹을 거란 뜻이 담겨있습니다. 아마도 비용 경쟁력에서 불리한 유럽과 아시아(중국 제외) 기업이 될 가능성이 크죠.아무리 봐도 생산이 문제이건만플라스틱 생산 과잉과 가격 급락은 석유화학 업계에만 큰일이 아닙니다. 환경 측면에서도 재앙이죠. 썩지 않는 쓰레기가 더 넘쳐나는 결과를 가져올 테니까요. 매립지에서 종이는 분해되는데 2~6주, 오렌지 껍질은 6개월이 걸리지만 플라스틱은 수백, 수천 년이 걸립니다.재활용하면 된다고요? 분리수거 열심히 하고 있다고요? 그런데 전 세계 플라스틱 폐기물 중 9%만 재활용되는 것 아시나요. 모든 종류의 플라스틱이 다 녹여서 새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죠. 또 플라스틱은 재활용하면 품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최대 두 번까지만 재활용이 가능합니다. 결국 언젠가는 매립·소각될 운명입니다.무엇보다 재활용하는 것보다 새 플라스틱을 만드는 게 훨씬 더 쉽고 저렴한데 재활용이 과연 크게 늘 수 있을까요.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지난해 새로 만든 고밀도 폴리에틸렌 현물가격은 t당 943달러, 재활용한 고밀도 폴리에틸렌 가격은 1631달러입니다. 2019년만 해도 재활용 가격이 더 저렴했지만 이후 역전돼 가격 차이가 벌어지는 추세이죠. 새 플라스틱 가격이 갈수록 떨어지면서 재활용은 점점 더 경제성 없는 일이 되고 있습니다. 기업의 약속과 착한 소비에 기대는 데는 한계가 있죠.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플라스틱은 폐기물과 재활용이 문제가 아니라 결국 생산이 문제입니다. 생산을 어떻게 줄일지를 논의하긴커녕, 반대로 갈수록 공급이 더 넘쳐날 거라니 걱정스러운데요. 싸구려 플라스틱의 공습이 무섭습니다. By.딥다이브플라스틱 산업이 지금 불황인 건 틀림없습니다. 다만 다운사이클이 얼마나 이어질지를 두고는 의견이 엇갈리죠. 여기에선 비관론에 초점 맞춰 살펴봤지만, 낙관론(중국 경제가 살아나면 조기에 회복될 수 있다)도 있다는 점 참고로 말씀드립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지금은 플라스틱 시대입니다. 30년 동안 4배로 늘어난 플라스틱 사용량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계속 늘어갈 겁니다. OECD는 2060년이면 지금의 3배가 될 거라고 내다봅니다.-문제는 수요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플라스틱 공급이 늘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이 때문에 시장 가격이 하락하고 공장 가동률도 급격히 떨어지고 있습니다. 역대급 공급과잉은 앞으로 5년 이상 이어질 전망입니다.-플라스틱 공급 확대를 주도하는 건 중국, 그리고 미국과 중동의 대형 석유회사입니다. 플라스틱이 석유의 미래라고 여기고 새로운 공장을 앞다퉈 건설 중인데요. 이들은 비용 경쟁력에서 앞서기 때문에 우리에겐 위험 요인입니다.-값싼 플라스틱이 지금보다 더 넘쳐나게 된다니, 환경 측면에선 너무나 암울한 소식입니다. 과연 인류는 플라스틱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나요.*이 기사는 16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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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채금리 왜 이래…나스닥 1.8% 급락[뉴욕증시]

    국채 금리가 뛰면서 뉴욕증시가 일제히 하락 마감했습니다. 15일(현지시간) S&P500은 1.2% 하락해 5100선 아래로 밀려났고요. 다우지수는 0.65%, 나스닥지수는 1.79% 하락으로 거래를 마쳤습니다.변동성이 심한 날이었습니다. 이날 증시는 상승세로 출발했죠. 주말 사이 이란의 이스라엘 영토 직접 공격이란 유례없는 일이 일어났는데요. 증시는 이스라엘이 당장 보복에 나서진 않은 만큼, 확전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실제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반격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죠.하지만 국채금리가 급등하면서 반등하던 주가지수를 끌어내렸습니다. 이날 미국 국채 10년물 금리는 0.128%포인트 오른 4.627%를 기록했죠. 지난해 11월 이후 최고치로 치솟은 건데요. 예상보다 강력한 소매판매 지표가 나오면서 연준이 금리인하를 더 미룰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 영향입니다. 이날 미국 상무부가 발표한 3월 소매판매는 전월보다 0.7% 증가해 예측치(0.3%)를 크게 웃돌았습니다. 여전히 미국 소비자들은 강력한 소비로 경제를 떠받치고 있습니다.중동에서 군사적 충돌이 발생했는데 안전자산인 국채 가격은 오히려 크게 하락하다니(=금리 상승), 좀 이상해 보이기도 하는데요. 주식시장이 요동치면서 ‘공포지수’로 불리는 시카고옵션거래소의 변동성 지수(VIX)는 5개월 여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이날 눈에 띄는 종목은 테슬라입니다. 실적 부진으로 전 세계 인력 10%를 감축한다는 소식에 주가가 5.59% 급락했죠. 통상 인력감축은 비용 절감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주가엔 호재인 경우가 많은데요. 테슬라의 경우엔 회사가 정말 어렵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지면서 주가가 떨어진 겁니다. 일론 머스크 CEO는 직원들에게 보낸 e메일에서 “조직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전 세계적으로 10% 이상 인력을 감축하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면서 “이것(감원)보다 더 싫어하는 일은 없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밝혔는데요. 테슬라의 핵심 경영진인 드루 배글리노 수석부사장도 회사를 떠났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투자자 불안감을 자극했습니다.지금은 실적시즌이죠. 이날 예상치를 훌쩍 뛰어넘는 1분기 실적을 발표한 골드만삭스 주가는 2.92% 상승했습니다. 매출과 순이익 모두 추정치를 한참 웃돌았는데요. 성과를 내지 못하던 소매금융 비중을 줄이고, 원래 잘하던 투자은행과 자산관리 쪽에 집중한 게 통했다는 평가입니다. 이번 주엔 모건스탠리·뱅크오브아메리카·존슨앤존슨·유나이티드항공이 16일, 넷플릭스 18일, P&G가 19일 실적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16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4-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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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I=반도체+구리? AI발 전력위기가 다가온다[딥다이브]

    인공지능(AI)과 에너지. 요즘 가장 큰 관심 산업 분야가 아닐까 싶은데요. 이 둘이 결합되기 시작했습니다. ‘AI발 전력 부족’이 전 세계적 이슈로 떠오른 겁니다.‘전기 인프라 혁명이 시작됐다’는 이야기는 사실 오래됐죠. 에서 소개한 적도 있고요. 당시엔 ‘탄소제로로 가려면 전력망 확충이 시급하다’는 논리였는데요. 그 스토리가 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AI 기술이 발전하려면’으로 말이죠. 그리고 AI가 앞에 붙자 갑자기 시장의 관심도가 확 높아집니다. 오늘은 이 AI와 전력망의 상관관계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머스크의 전기 걱정전기가 부족해서 큰일 났다는 얘기를 몇 년째 해온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이죠. 그는 지난해 8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속가능한 에너지 미래로 전환하려면 (미국은) 전기 출력이 (지금의) 3배가 필요합니다. 가장 큰 걱정은 긴급성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전기 수요가 얼마나 될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그때만 해도 그의 말은 이런 식으로 해석됐습니다. ‘전기차를 많이 팔려면 충전할 전기가 더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말대로 긴급성은 떨어져 보였습니다. ‘전기가 모자라? 그럼 내연기관차를 더 타면 되지’라고들 생각하니까요.그런데 머스크의 발언 내용이 최근 좀 바뀌었습니다. 지난 2월 말 그는 보쉬 커넥티드 월드 컨퍼런스에서 또다시 전력 부족을 지적하며 이렇게 말합니다.“AI 컴퓨팅에 대한 제약은 매우 예측가능합니다. 1년 전엔 칩이 부족했습니다. 그럼 다음 부족은 전기와 변압기가 될 거라고 예측하는 건 매우 쉽습니다. 내년이면 모든 칩을 구동할 만큼의 충분한 전력을 찾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전기차와 AI의 동시 성장은 전력설비와 전력 생산에 엄청난 수요를 창출합니다.”머스크만이 아닙니다. AI 업계 경쟁자인 오픈AI의 샘 올트먼 CEO는 1월 다보스포럼에서 이렇게 말했죠. “우리가 이전에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이 기술(AI)의 에너지 수요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획기적인 돌파구를 찾아야 합니다.”지멘스에너지의 크리스티안 브루흐 CEO의 지난달 연례 주주총회 발언도 참고할 만합니다. “AI 사용 증가로 전력수요가 급증할 겁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건 하나입니다. 전력이 없으면 AI도 없다는 겁니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전기 없인 발전도 없습니다.”구릿값은 22개월 만에 최고어떤가요. AI발 전력수요 폭증이 실감 나시나요? 일단 금융시장은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이미 엔비디아의 놀라운 주가 급등세(1년 동안 220% 상승)를 목도한 터라 더 그런데요.우선 구릿값이 들썩거립니다. 구리는 전선과 변압기에 모두 들어가는 핵심 재료이기 때문이죠. 중국 경제 둔화로 떨어졌던 구릿값이 두 달 전부터 다시 뛰더니 어느새 22개월 만에 최고(9일 t당 9417달러)를 기록했는데요. 씨티은행과 골드만삭스는 벌써부터 내년 상반기 구릿값 t당 1만2000달러를 외치고 있습니다. 사모펀드 칼라일 그룹의 제프 커리 에너지 부문 최고전략책임자는 지난달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AI는 반도체와 구리다.”미국에선 발전회사 주가가 급등했죠. 발전회사 비스트라 주가는 올해 들어 85%, 콘스텔레이션 에너지는 65%나 뛰었는데요. 지난 15년 동안 제자리였던 미국 전력소비량이 다시 1990년대 수준의 빠른 성장세를 보일 거란 기대감 때문입니다.덩달아 국내 주식시장이 들썩거립니다. 이미 지난해 미국 수출 성장에 힘입어 많이 올랐던 변압기 제조사 주가는 최근 더 치솟았고요. 3월부터는 국내 전선기업 주가까지 뛰기 시작합니다. 대한전선 주가는 한 달 새 43%, 일진전기는 51%, 가온전선은 36%나 올랐죠. 지루했던 뿌리 산업에 모처럼 활력이 돕니다.전기를 얼마나 쓰길래실제 챗GPT 같은 생성형AI 서비스의 전력 소모량은 엄청납니다. 구글 검색엔 평균 0.3Wh의 전력이 쓰이는데요. 챗GPT는 한 번에 2.9Wh를 소모합니다. 10배 차이죠. AI를 개발해서 사용하려면 천문학적 용량의 데이터를 보관하고 처리할 초대형 데이터센터 가동이 필요한데요. 데이터센터는 원래 전기 먹는 하마입니다. 컴퓨팅은 물론 온도 유지를 위해 냉각시키는 데도 막대한 전력이 필요하죠.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운영 중인 데이터센터가 쓰는 전력량이 2022년 연간 460테라와트시(TWh)에 달했습니다. 이는 프랑스의 2022년 전력소비량(425TWh)과 맞먹는 용량인데요.AI 기술 개발이 가속화되면서 데이터센터도 빠르게 늘어만 갑니다. 여기에 들어가는 전력량도 따라서 급증할 수밖에 없죠. 예컨대 마이크로소프트와 오픈AI는 얼마 전 무려 1000억 달러를 들여 AI 전용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발표했는데요. 이 초대형 데이터센터의 수전용량(변압기 용량)은 5기가와트시(GWh)로 국내 최대인 네이버 데이터센터 ‘각 세종’(270MWh)의 18배에 달합니다. 규모가 어마어마하죠.지난 1월 나온 IEA 예측도 이런 추세를 반영했는데요. ‘2024년 전기 보고서’에 따르면, 2026년엔 전 세계 데이터센터의 전기사용량이 지금의 두배가 넘는 1050TWh가 될 수 있습니다. 불과 4년 만에 독일(490TWh)만큼의 전력사용량이 추가되는 거죠.자, 그래서 머스크도 지적한 전력부족 문제가 현실로 다가옵니다. 데이터센터 건물 짓고, 엔비디아 GPU 칩도 (어렵겠지만) 대량 확보할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많은 전기는 어떻게 끌어오죠?그냥 기존 전력망에 추가로 연결하자고요? 가뜩이나 수십년 된 노후 전력망인데, 과부하로 초대형 정전사태라도 일어나면 어쩌려고요. 아니면 이제라도 얼른 송전망을 깔자고요? 전력망을 새로 계획해서 허가받고 깔려면 보통 5~15년이 걸리는 걸요. 게다가 요즘 대형 변압기 공급이 딸려서, 미국에선 최소 3년은 대기해야 한다는데요.데이터센터란 연중무휴 24시간 전기가 통해야 하는 곳입니다. 아무리 데이터센터 건물을 짓고 AI용 반도체를 깔아놔도 송전선이 연결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죠. 만약을 대비해 디젤 발전기를 설치하고 저장장치(배터리)를 추가한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보조 수단입니다. 전력망이 받쳐주지 못하면 데이터센터도 없고, AI도 없는 겁니다.이미 곳곳에서 전기 때문에 데이터센터 설립이 차질을 빚습니다. 부동산 회사 CBRE에 따르면 미국에선 이미 신규 데이터센터 설립이 2~6년씩 지연되고 있습니다. 낮은 법인세율로 데이터센터를 끌어들였던 아일랜드에선 최근 더블린시가 전력 문제를 이유로 데이터센터 설립 계획을 불허했죠.전기요금은? 탄소중립은?언뜻 보면 AI발 전력부족 사태는 새로운 ‘골드러시’ 기회처럼 보입니다. 각국에서 전력망 관련 투자가 늘어날 거고, 수혜를 보는 기업도 생겨날 테니까요. 그런데 따져볼 게 있습니다. 그 투자비는 과연 누가 부담하게 될까요.일반적으로 전력망 업그레이드 비용은 결국 소비자에 전가되기 마련입니다. 결국 전기요금을 올려야 하는 거죠(아니면 전력 공기업의 대규모 부채). AI 기술 발전은 환영하지만, 그것 때문에 자기가 내는 전기요금이 올라가는 걸 좋아할 소비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전력망 확충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이유입니다.또 어떤 전기를 늘리느냐도 문제입니다. 전 세계 주요국은 2050년 넷제로(탄소중립)로 가자고 약속했죠. 미국은 ‘2035년 100% 청정 전력’이란 야심 찬 목표도 세웠고요. 그럼 앞으론 데이터센터도 신재생에너지로 가동되는 게 맞는 방향이긴 한데요. 그럴 것 같지가 않습니다. 외딴곳에 짓는 풍력·태양광 발전소와 연결되는 송전망 구축하려면 보통 10년 넘게 걸리기 때문이죠.다시 말해 급증하는 데이터센터 수요에 맞추려면 석탄·천연가스 같은 화석연료 의존도를 오히려 높여야 합니다. 이미 미국에선 석탄화력발전소를 폐쇄하려던 계획이 속속 뒤로 미뤄지고 있다는데요. 더 똑똑한 AI 개발이 지구온난화와 맞바꿀 정도로 시급한 일 맞을까요.AI 기술 개발 경쟁에 이미 불붙었고, 거기에 천문학적인 투자금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얘기가 통하진 않겠죠. 별 소용은 없겠지만 친환경 AI 기술을 연구하는 피렌체대학 로베르토 베르데치아 교수의 뉴욕타임스 인터뷰 내용을 소개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친환경) 솔루션을 적용하려면 이상적으로 (기술 발전) 속도를 조금 늦춰야 할 수 있습니다. 정확성과 속도만 향상시키기 위해 새로운 모델을 만들진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환경 자원을 얼마나 많이 소모하고 있는지 한 번 크게 숨을 쉬며 살펴봐야 합니다.” By.딥다이브사실 구리가 앞으로 부족할 수 있다, 전력케이블 수요가 급증할 거다, 이런 전망은 이전부터 나왔죠. 이전엔 시큰둥했던 투자자들이 AI 테마와 엮이자 급 열광하고 있는데요. 이런 흐름이 얼마나 이어질지, 정말 수요의 변곡점에 온 건지 궁금해집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AI 기술 발전이 전력 부족에 가로막힐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됩니다. 기술 진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지금의 전력망으론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죠. 이런 전망에 힘입어 구릿값과 전력 관련 기업의 주가가 뜁니다.-당장 2026년까지 데이터센터의 전력사용량이 2배로 불어날 거란 전망이 나옵니다. 문제는 전력망이라는 게 그렇게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란 거죠.-따져볼 점도 있습니다. 전력망 업그레이드에 드는 투자비는 누가 부담하게 될까요. 결국 전기요금이 올라가는 것 아닐까요. 또 탄소중립 목표는 어떻게 되나요. 더 똑똑한 AI 개발에 몰두하느라 정작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이 기사는 1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4-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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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플 4% 급등, 아마존 신고가…‘매그니피센트 7’이 돌아왔다[딥다이브]

    빅7 대형 기술주가 모처럼 일제히 상승하며 증시를 밀어 올렸습니다. 11일(현지시간) 다우지수는 0.01% 하락했지만, S&P500은 0.74%, 나스닥은 1.68% 올랐는데요. 나스닥 지수는 사상 최고 기록을 경신했습니다.‘매그니피센트 7’로 불리는 7개 종목(MS·애플·아마존·알파벳·메타·테슬라·엔비디아)이 이날 모두 상승 마감했는데요. 특히 애플이 4.33%나 뛰었습니다. 인공지능(AI) 기능에 중점을 둔 차세대 프로세서 M4 생산이 임박했다는 블룸버그 보도 영향인데요. 올해 말~내년 초에 출시할 맥(Mac) 제품군 전체에 이 M4칩을 탑재할 거라고 합니다. AI 경쟁에서 뒤진다는 평가를 받던 애플이 AI 전략에 속도를 내고 있는 거죠.아마존은 이날 주가가 1.67% 상승한 189.05달러로 마감했는데요. 2021년 7월의 종전 최고가(186.57달러)를 넘어선 사상 최고가입니다. 올해 들어서만 주가가 24% 뛰었는데요. 비용 절감과 사업구조 개편으로 투자자 마음을 사로잡았다는군요.최근 주가가 고점보다 10% 빠졌던 엔비디아는 이날 4.11% 급등했고요. 마이크로소프트(1.1%), 알파벳(2.09%), 테슬라(1.65%), 메타(0.64%) 주가도 상승 마감했습니다.금요일(12일)부터 뉴욕증시는 본격적인 실적시즌에 들어갑니다. 모건스탠리, 웰스파고, 씨티그룹이 이날 실적을 발표하죠. 탄탄한 미국 경제가 기업의 이익 성장으로 얼마나 이어질지가 관심거리인데요. 블룸버그에 따르면 월스트리트는 S&P500 기업의 1분기 주당순이익이 1년 전보다 3.9% 성장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특히 매그니피센트 7 기업 이익은 38% 증가할 걸로 예상되죠.이미 올해 들어 주가가 많이 오른 상태이기 때문에, 기업 실적이 월가의 예측치에 부합하느냐에 따라 주가는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코메리카 웰스 매니지먼트의 존 린치 CIO는 “주식이 충분히 평가되고, 시장 금리가 오르고, 연방준비제도(Fed) 금리 인하에 대한 합의된 기대가 줄어들고 있다”면서 “현재의 주식 가치 평가와 투자 심리를 정당화하려면 기업 이익이 계속 확대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말합니다. 샌더스모리스의 조지 볼 회장은 “시장을 앞으로 이끄는 건 연준의 금리인하가 아니라 기업 수익이 될 것”이라며 “기업이익은 예상보다 훨씬 더 좋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1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4-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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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I 발전 걸림돌은 전기 부족”… 전력망 확충 전세계 비상 [딥다이브]

    “인공지능(AI) 발전을 제약하는 건 변압기와 전력 공급이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의 최근 발언이다. AI 기술 발전 속도를 지금의 전력망이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란 뜻이다. 그의 경고대로 AI발 전력 부족 사태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AI 열풍이 몰고 온 전력 부족 전력 수요 급증을 경고하는 건 머스크만이 아니다. 오픈AI의 샘 올트먼 CEO는 1월 다보스포럼에서 “AI 기술엔 이전에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면서 “획기적인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독일 지멘스에너지의 크리스티안 브루흐 CEO도 지난달 연례 주주총회에서 “전기 없이는 AI 기술 발전이 없다”며 전력 수요 급증을 예고했다. 챗GPT 같은 생성형 AI를 개발해 사용하려면 천문학적 용량의 데이터를 보관하고 처리할 대규모 데이터센터가 필요하다. AI 열풍은 곧 데이터센터 붐을 뜻한다. 이미 전 세계엔 약 8000개의 데이터센터가 있지만, 앞으로 훨씬 더 많이 추가돼야만 한다. 문제는 AI용 데이터센터가 전기 먹는 하마라는 점이다. 챗GPT 같은 생성형 AI 서비스 이용엔 구글 검색보다 3∼30배나 많은 전력이 필요하다. 국제에너지기구는 ‘2024년 전기보고서’에서 전 세계 데이터센터가 사용하는 전력량이 2022년 460TWh에서 2026년 최대 1050TWh로 급증할 거라고 내다봤다. 이는 일본 전체의 전력소비량(2022년 939TWh)을 넘어서는 규모다. 데이터센터는 연중무휴 24시간 전기가 통해야 한다. 아무리 데이터센터 건물을 짓고 AI용 반도체를 깔아놔도 송전선이 연결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하지만 전력망은 금세 확장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새로운 전력망을 계획해서 구축하는 데는 보통 5∼15년이 걸린다.‘전기 먹는 하마’ AI 데이터센터 경쟁… 전선 재료 구리값 껑충“AI 발전 걸림돌은 전력”천문학적 용량의 데이터 처리-보관… 신설 센터에 연결할 전력망도 필수구리 선물가격, 2달 만에 15% 올라… 구리 대체할 초전도케이블 개발도 복잡한 인허가 절차와 전력설비의 부족, 지역 주민의 반발과 전기요금 인상 우려 등. 전력망 업그레이드를 지연시키는 요인은 한둘이 아니다. 대부분 국가에서 데이터센터 용량이 이미 포화상태이지만, 추가 건설이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는 이유다. 부동산회사 CBRE는 “전 세계적으로 가용전력이 부족해서 데이터센터 성장을 저해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전력망은 과부하가 걸리면 자칫 대규모 정전 사태로 이어진다. 이 때문에 곳곳에서 신규 데이터센터 설립이 미뤄지고 있다. 미국 애리조나주의 최대 전력회사 APS는 초대형 데이터센터 신규 사업을 당분간 보류한다고 밝혔다. 아일랜드 더블린시 역시 전력이 부족하단 이유로 이달 초 신규 데이터센터 설립 계획을 불허했다.● 국내 전선기업 주가 들썩 전력 부족은 AI 기술기업엔 걱정거리이지만 다른 산업엔 호재이다. 전력 인프라를 위한 투자가 당분간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미 원자재 시장에선 구리 가격이 뛰기 시작했다. 8일 런던금속거래소에서 구리 선물 가격은 t당 9411달러. 두 달 만에 15% 상승으로, 9400달러 선을 돌파한 건 22개월 만이다. 구리 가격에 영향을 주는 중국 부동산 경기가 침체한 상황에서 이례적인 상승세다. 구리는 전선과 변압기에 모두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재료이다. 전력망 확장은 구리 수요 급증을 의미한다. 사모펀드 칼라일그룹의 제프 커리 에너지 부문 최고전략책임자는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AI를 발전시키려면 구리가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원자재 중개업체 트라피구라의 사드 라힘 이코노미스트는 AI로 인해 구리 수요가 2030년까지 100만 t 추가될 거라고 전망한다. 씨티그룹과 골드만삭스는 최근 내년 상반기 구리 가격 전망치를 t당 1만2000달러로 높여 잡았다. 미국에선 발전회사 주가가 덩달아 활기를 띤다. 지난 15년간 제자리였던 미국 전력 수요가 AI 붐을 타고 빠르게 증가할 거란 전망 때문이다. 발전회사 비스트라 주가는 올해 들어 82.6%, 콘스텔레이션 에너지는 63.2% 뛰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AI 물결을 타고자 하는 투자자들이 이제 발전회사로 눈을 돌렸다”고 전한다. 국내에선 변압기 제조사에 이어 전선기업 주가가 최근 들썩인다. 전선기업 실적이 구리 가격에 연동되는 구조인 데다, 전력 케이블의 내수와 수출 수요 모두 빠르게 증가하고 있어서다. 대한전선 주가는 한 달 새 46.7%, 가온전선은 39.5%, 일진전기는 50.3%나 상승했다. 이유진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2000년대 중반 이후 20년 만에 전선 업계에 사이클이 돌아왔다”고 평가한다. AI발 전력난을 기회 삼아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전선기업도 있다. LS전선은 구리 대신 초전도체를 사용하는 초전도케이블을 데이터센터에 설치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초전도케이블은 구리선보다 가격이 비싼 대신 변압기·변전소가 필요 없다는 게 장점이다. LS전선 류철휘 박사는 “초전도케이블은 전자파를 발산하지 않기 때문에 민원 염려도 적다”면서 “엄청난 전기를 공급해야 하는 AI용 데이터센터 시장을 공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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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우디가 돈이 부족하다고? 네옴시티 야망이 주춤한 이유[딥다이브]

    홍해 바다에서 사막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 반짝이는 거대한 벽. 사우디아라비아의 야심 찬 신도시 프로젝트 ‘네옴(NEOM)’의 주거지구 ‘더 라인(The Line)’ 조감도를 기억하시나요.최근 이 더 라인과 관련해 엇갈린 소식이 들려옵니다. 한편에서는 성공적으로 공사가 착착 진행 중이라는 홍보 영상이 눈길을 끌고요. 다른 한편에선 더 라인 프로젝트의 중간 계획이 크게 축소됐다는 보도가 나왔죠. 한국 기업도 관심이 큰 프로젝트라서 과연 어떻게 진행될지가 궁금한데요. 오늘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네옴 프로젝트를 중간점검해보겠습니다.*이 기사는 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2030년 첫 단계 완성”광활한 사막을 가로지르는 흙길 위를 한 줄로 달리는 덤프트럭들 모습이 마치 개미들의 행진처럼 느껴집니다. 분주히 움직이는 수십 대 굴착기를 미니어처로 착각할 정도로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공사판. 지난 2월 네옴이 공개한 ‘더 라인’ 공사 현장의 항공촬영 영상입니다.더 라인은 사우디아라비아 서북부 타북 지방에 건설 중인 신도시 ‘네옴’의 주거지구이죠. 길이 170㎞, 폭 200m의 부지에 500m 높이 고층 건물 두 개를 나란히 짓는다는 계획인데요. 서울 송파구와 비슷한 면적(34㎢)에 총 900만명을 수용하는 대단히 효율적인 도시를 추구합니다.공개된 영상에 따르면 더 라인에선 ‘세계 최대 토공사(Earthwork)’가 현재 진행 중입니다. 또 매주 200만㎥가 넘는 흙이 옮겨지고 있고, 260대의 굴착기와 2000대의 트럭이 연중무휴로 24시간 작업 중이라고도 공개했죠.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솔직히 잘 감이 잡히진 않는 모호한 숫자이긴 한데요. 영상에서 이 프로젝트의 최고개발 책임자인 데니스 히키는 이렇게 말합니다. “더 라인의 첫 번째 단계는 2030년에 완료됩니다. 우리가 약속합니다.”목표치 대폭 하향?영상에 대한 반응은 극과 극입니다. “정말 대단하고 흥미롭다”는 찬사와 “이것이 바로 디스토피아”라는 한탄이 동시에 나오는데요(비중은 3대 7 정도). 어쨌거나 영상을 통해 말하려는 건 이거죠. ‘터무니없이 야심 차다고 평가받았던 더 라인, 진짜로 땅 파고 공사 진행 중이다.’그런데 순조롭게 공사가 진척되는 줄 알았던 더 라인에 대해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더 라인의 1단계 목표치를 원래 계획보다 크게 낮춰 잡았다는 뉴스이죠. 지난 6일 블룸버그가 익명의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했는데요.당초 더 라인은 2030년까지 150만명 주민이 거주하는 도시가 된다는 1단계 목표를 잡았죠. 하지만 이젠 2030년 기준으로 거주민이 30만명 미만이 될 것으로 예상치를 조정했다고 합니다. 전체 170㎞ 길이의 선형도시 중 겨우 2.4㎞만 그때까지 완료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죠.7일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도 이를 확인합니다. 익명의 네옴 전 임원을 인용해 더 라인의 추정인구와 규모가 이전 계획보다 축소됐다고 전하는데요.네옴 측은 늘 그렇듯 보도와 관련해 아무 입장도 밝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정확히 계획이 어떻게 축소됐는지는 알 수 없는데요. 하지만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원대한 계획이 삐그덕거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은 커집니다.“수학 법칙에 어긋나는 프로젝트”더 라인 프로젝트를 두고 회의론이 불거지는 이유는 무엇보다 규모가 커도 너무 큰 공사이기 때문이죠. 네옴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 있는 마넬 산로마 스페인 로비라 이 비르길리대학 교수가 최근 링크드인에 남긴 글이 인상적인데요. 그는 더 라인을 두고 “물리학, 경제학, 간단한 수학의 법칙에 어긋나는 프로젝트”라며 이렇게 지적합니다.“엔지니어, 건축가, 컨설턴트는 필요 없고 중학생만 있으면 됩니다. 길이 170㎞×너비 200m×높이 500m의 더 라인은 뉴욕시의 원월드 트레이드센터(높이 541m) 8000개를 지을 수 있는 규모를 자랑합니다. 원월드 트레이드센터 건설엔 7년이 걸렸고 39억 달러 비용과 하루 3500명의 근로자가 소요됐습니다. 더 라인 건설에 5만6000년이 걸리진 않을 수도 있죠. 하루 350만명의 근로자를 투입하면 56년 안에 할 수 있습니다.”물론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돈이 넘치는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인데, 돈을 퍼부어서라도 하겠다면 할 수 있는 것 아닌가?그런데 바로 이 부분에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네옴 프로젝트 전체 공사비용은 5000억 ~1조 달러라고 보통 얘기하죠. 1단계에 들어가는 비용만 3190억 달러로 추정됐고요. 빈 살만 왕세자는 그중 절반을 사우디 국부펀드인 공공투자기금(PIF)이 댈 거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나머지는 투자를 받든, 어디서 빌려오든 방법을 찾아야 하죠. 그런데 생각보다 이 자금 조달이 만만찮습니다. 즉, 계획대로 진행하기엔 돈이 모자랄 수 있습니다.너무 펑펑 써버렸나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계 최고 갑부 중 하나라는 빈 살만 왕세자가 하는 사업인데 돈이 부족해서 걱정이라니. 좀 이상하게 들리나요?하지만 사실입니다. 투자은행 자드와인베스트먼트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제임스 리브는 “(네옴을 포함한) 비전 2030 프로젝트 전체에서 가장 큰 문제는 자본 부족”이라고 말합니다.일단 네옴 프로젝트 비용의 절반을 책임져야 하는 사우디 공공투자기금의 현금이 말라가고 있습니다. 2022년 말 500억 달러였던 현금보유 규모가 지난해 9월 말 150억 달러로 줄어들었는데요. 데이터를 공개한 2020년 12월 이후 최저이죠,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동안 기금을 펑펑 써버렸죠. 각종 스포츠(축구·골프·e스포츠·테니스 등)와 함께 항공·전기차·관광·건강 등 참 다양한 사업에 돈을 쏟아부었는데요. 지난해 전 세계 국부펀드 중 가장 많은 지출규모(315억 달러)를 기록했을 정도이죠.공공투자기금이 손댔던 사업이 대박이 난다면 걱정 없겠지만, 그렇지가 않죠. 사우디 국부펀드는 이미 54억 달러를 투입한 전기차 기업 루시드가 위기에 몰리자, 최근 10억 달러를 추가로 출자했습니다. 대박은커녕 돈 들어갈 일이 너무 많데요. 공공투자기금이 올해 들어 채권 매각으로 조달한 금액만 이미 70억 달러라고 합니다. 빚으로 메우고 있는 거죠.또 흔히 사우디 하면 석유수출이 화수분처럼 오일머니를 무한정 퍼주는 줄로 아는데요. 생각과 달리 지난해 사우디 재정수지는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올해도 재정적자규모가 GDP의 1.9%에 달할 걸로 전망된다고 하죠. 예상보다 국제유가가 낮게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사우디 재정수지는 거의 전적으로 기름값에 달려있죠. 브렌트유가 최근 배럴당 90달러를 돌파했다고는 하지만, 사우디가 재정 균형을 이루기엔 한참 부족합니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에 따르면 배럴당 108달러는 돼야 재정 적자를 피할 수 있다는데요. 당분간은 재정수지도 적자 탈출이 쉽지 않단 뜻입니다. 사우디 정부는 재정적자가 2026년까지 지속될 거라고 내다보죠. 그동안은 빚(국채 발행)을 내서 버텨야 한다는 뜻입니다.해외 투자 유치 나서지만그럼 돈 나올 구멍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사우디 입장에서 최선은 해외 투자를 받는 겁니다. 사우디 정부는 투자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죠. 2030년까지 외국인 직접투자를 연 1000억 달러로 늘리겠다는 목표인데요. 하지만 지난해 외국인 직접투자 금액은? 2023년 목표치(220억 달러)에 미치지 못한 190억 달러에 그쳤습니다.가만히 앉아서 투자자를 기다리고 있을 순 없죠. 사우디는 최근 투자유치를 위한 마케팅에 한층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2월엔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 네옴 사무실을 열고 월스트리트 투자자 공략에 나섰고요. 이달 중순엔 네옴의 나드미 알 나스르 CEO가 직접 중국 본토와 홍콩을 찾아가 로드쇼를 열 예정입니다. 앞서 소개한 더 라인 홍보 영상 공개도 다 투자 유치를 위한 거죠.하지만 블룸버그에 따르면 아직까지 해외 투자 유치에서 의미 있는 진전은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고금리와 함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중동지역 정세가 불안한 것이 투자자들이 선뜻 투자를 결정하기 어려운 이유로 꼽히죠. 이코노미스트는 이를 두고 이렇게 꼬집습니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아직까진 자기 돈을 사우디에 투자하는 것보다는 사우디 돈을 가져가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결국 이런 자금 상황이 더 라인 목표 수정으로 이어진 게 아닐까 추측할 수 있는데요. 혹시 그럼 네옴 프로젝트 자체가 이대로 흔들릴 수도 있으려나요?물론 시니컬한 의견은 예전부터 워낙 많긴 했는데요(가디언 “더 라인은 결코 완료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도 사우디가 단기간에 공사비를 대지 못할 지경이 될 거라고 보는 이는 현재로서 없는 듯합니다. 빈 살만 왕세자가 쓸 카드가 아직 남았기 때문이죠.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 지분을 시장에 더 내다 팔 수도 있고요(현재 정부가 지분 82%, 국부펀드가 16% 보유).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아직 매우 낮기 때문에(27%), 국채를 한참 더 찍어내도 되죠. 무엇보다 석유 가격이 어쩌면 오를지도?빈 살만이 ‘탈 석유’를 위해 추진하는 네옴 프로젝트의 성패가 사실 석유 가격에 달려있다는 게 아이러니입니다. 네옴은 과연 두바이를 잇는 또 다른 사막의 기적이 될 수 있을까요. By.딥다이브사우디는 벌려놓은 일이 많습니다. 2029년엔 네옴의 산악지역 트로제나에서 동계올림픽을 열기로 했고요(인공눈 스키장을 만들 예정). 2030년엔 리야드에서 엑스포를 개최합니다. 우리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이 초대형 프로젝트들을 어떻게 이끌어나갈지가 궁금하군요.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사우디 신도시 네옴에서 ‘더 라인’ 공사가 한창 진행 중입니다. 2030년에 첫 번째 단계 공사를 완료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계획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2030년 거주자가 150만명이 아닌 30만명 미만으로 조정됐습니다. 전체 170㎞ 중 2.4㎞만 완공될 거라고 합니다.-그럴 수밖에 없는 게 더 라인은 규모가 커도 너무 큽니다. 수학적으로 보면 말이 안 되는 프로젝트이죠.-사우디는 현금이 많지 않습니다. 유가가 90달러 수준에 머물러서 재정적자 상태이죠. 해외 투자 유치를 위해 뛰고 있지만 아직은 큰 진전이 없습니다. 어쩌면 네옴의 성패는 석유 가격에 달렸을지도.*이 기사는 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4-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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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슬라 5% 뛰었다…국채금리 상승에 뉴욕증시는 보합[딥다이브]

    뉴욕증시가 거의 변동 없이 마감했습니다. 소비자물가지수 발표를 앞두고 투자자들이 신중한 모습입니다. 8일(현지시간) 다우지수와 S&P500은 각각 0.03%와 0.04% 하락, 나스닥지수는 0.03% 상승으로 거래를 마쳤습니다.국채금리 상승이 이날 주식시장을 억눌렀습니다. 미 국채 10년물 금리가 0.44%포인트 오른 4.422%를 기록했죠. 지난해 11월 이후 최고치인데요. 심리적 기준선인 4.5% 수준에 바짝 다가선 겁니다. 블룸버그는 “올해 연준의 세차례 기준금리 인하에 대한 투자자들의 확신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면서 “시장은 이제 단 두차례 금리인하를 내다본다”고 분석합니다.그래서 10일 발표될 미국의 3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수치가 특히 중요합니다. 연준의 금리인하 시점을 가늠할 잣대가 될 수 있어서인데요. 블룸버그에 따르면 식품과 에너지비용을 제외한 근원 물가지수가 전년 동월보다 3.7% 상승할 걸로 추정됩니다. 전월(3.8%)보다는 상승률이 약간 둔화할 거란 기대이죠. 노무라캐피탈의 매트 로우 포트폴리오 책임자는 “주식 상승 대부분이 올해 일련의 금리인하에 대한 희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나쁜 소식이 주식시장에 좋다는 생각이 계속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이날 눈에 띄는 종목은 테슬라입니다. 지난주 금요일 일론 머스크 CEO가 로보택시를 8월 8일 공개한다고 밝혔죠. 이날 테슬라 주가는 4.9% 뛰었습니다. 자율주행 기능은 오랫동안 테슬라 주식이 높은 가치 평가를 받게 만드는 핵심 원동력이었죠. 판매부진과 값싼 중국 전기차와의 경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테슬라가 로보택시로 다시 투자자의 열광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요. 다만 테슬라가 신차를 ‘공개’한다고 해서 꼭 그 모델을 조만간 상업적으로 출시된다는 뜻은 아니긴 합니다.지난주 GE에서 분사된 에너지 회사 GE버노바의 주가는 5.92% 급등했습니다. JP모건이 “현재 할인된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면서 GE버노바의 투자의견을 중립에서 비중확대로 상향 조정한 영향입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4-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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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2년 역사 GE의 쇠퇴와 잭 웰치 유산의 끝[딥다이브]

    미국 대기업 제너럴일렉트릭(GE)이 창립 132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4월 3일 자로 3개 회사로의 분사(GE에어로스페이스, GE버노바, GE헬스케어)가 완료됐기 때문입니다. 주식시장에서 ‘GE’라는 티커명은 GE에어로스페이스가 물려받긴 하는데요. 회사 이름이 ‘제너럴일렉트릭(GE)’인 그 대기업은 이제 어디에도 없습니다.GE의 종말은 곧 이 사람 이야기에 종지부가 찍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은퇴한 지 20여 년, 사망한 지 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강렬한 이름. 잭 웰치 전 회장과 GE의 흥망성쇠를 들여다봅니다.*이 기사는 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카리스마 넘치는 세기의 경영자여러분은 잭 웰치 전 GE CEO 겸 회장을 어떤 인물로 기억하나요. 가장 널리 알려진 수식어는 이겁니다. ‘세기의 경영자’. 1999년 미국 포춘지가 그렇게 선정했죠.잭 웰치는 그 시대 최고의 스타 CEO였습니다. 그 인기는 지금의 일론 머스크보다 더했죠. 월스트리트는 그를 사랑했고, 경영인들은 그를 존경했습니다. ‘CEO 우상화’의 시작이라 할 만했는데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CEO 재임 기간(1981~2001년) 만들어낸 놀라운 경영성과(=숫자들) 때문이죠. 몇 가지 소개하자면.GE 주가는 잭 웰치 재임 기간 약 3000% 상승했습니다. 기업가치가 140억 달러에서 4500억 달러까지 뛰었죠. 이는 같은 기간 S&P500 상승률(약 330%)의 9배에 해당합니다.GE는 1993년 9월 미국기업 중 시가총액 1위에 올랐습니다. 그 뒤로도 꽤 오래 선두권이었죠. 1999년 마이크로소프트에 1위 자리를 뺏긴 뒤 엎치락뒤치락했고, 2004년에 마지막으로 1위를 기록했습니다.GE는 놀랍도록 안정적인 수익성장을 보여줬습니다. 1995년부터 2004년까지, 경기가 나쁠 때도 좋을 때도, GE는 매 분기 실적발표에서 애널리스트 추정치를 충족하거나 웃돌았습니다.그의 뛰어난 경영성과와 카리스마 넘치는 경영 스타일은 찬탄의 대상이었죠. 퇴임 직후 그가 쓴 책(Jack: Straight from the Gut)이 당시 사상 최고 원고료(1000만 달러)를 받았을 정도인데요. 아마 GE 성공모델 이야기를 한때 지겹게 들었던 분도 많을 겁니다. 식스 시그마라고 들어보셨죠?카리스마 넘치는 세기의 경영자좀 더 옛날, 웰치 시대 이전의 GE를 기억해볼까요. 에디슨의 전구 회사를 전신으로 하는 GE는 전구와 가전으로 유명한 제조업체였습니다. 발전용 터빈과 항공 엔진 같은 산업재에서도 명성이 높았고요. 동시에 가족적이면서 관료주의적인 전형적인 미국 대기업이었죠. 1970년대를 이끈 레지날드 존스 CEO는 직원이 상을 당하면 직접 전화 걸어 위로하는 온화한 리더십이었습니다.그리고 존스는 놀랍게도 본인과 정반대의 호전적인 인물 잭 웰치를 후임자로 낙점합니다. 유명한 일화가 있죠. 존스가 후임자 웰치를 사무실로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잭, 자네에게 퀸 메리(세계 최대 유람선)를 주겠네. 이것은 침몰하지 않도록 설계됐다네.” 그러자 웰치는 이렇게 대꾸합니다. “난 퀸메리를 폭파할 계획입니다. 나는 쾌속정을 원해요.”그리고 잭 웰치는 CEO에 오르자마자 GE를 폭파하다시피 흔들어 놓습니다. ‘빠르고 솔직한 조직’을 만들겠다며 칼질을 시작한 건데요.우선 ‘스택랭킹(Stack Ranking, 층을 쌓듯이 서열화)’을 도입합니다. 모든 직원을 A(20%), B(70%), C(10%) 등급으로 평가해서 C등급은 해고한 거죠. 초기 5년 동안 전체 직원 중 4분이 1인 10만명이 잘렸습니다. 그의 별명 ‘중성자탄 잭(Neutron Jack)’은 이때 생겼죠.실적이 저조한 사업장은 매각이나 공장 폐쇄로 과감히 정리했습니다. 토스터부터 탄광까지, 무려 408개 사업체가 재임기간 중 매각됐죠. “모든 사업이 세계 시장에서 1위 또는 2위를 한다”는 전략에 따른 겁니다.아웃소싱도 이용했습니다. 경비원이나 단순 업무는 임금이 낮은 파견 계약직으로 바뀌었죠. 제조업 관련 일자리 중 상당수는 저임금 노동력이 풍부한 해외로 옮겨갔습니다.이런 경영방식 어떤가요. 너무 무자비한가요? 아니면 생산성을 높이려면 불가피한가요?평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확실한 건 이런 방식이 단기 실적과 주가를 끌어올리는 데 꽤 효과적이었다는 겁니다. 지금도 미국 기업들은 주주를 만족시키기 위해, 종종 정리해고 카드를 꺼내 들죠. 40년 전의 잭 웰치에게서 배운 겁니다.제조업에서 금융회사로잭 웰치의 경영 목표는 단순 명확했습니다. 시장 기대에 걸맞는 실적을 보여주는 거죠. 왜? 주주가 그걸 원하니까요. 주식시장은 늘 좋은 ‘숫자’를 원하고, 그 숫자는 경영을 통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이를 위해 그는 무자비한 비용 절감과 동시에 과감한 영토확장에 나섭니다. 재임 동안 약 1000건에 달하는 인수를 성사시켰는데요. 의료서비스와 미디어, 통신, 금융 같은 새로운 분야가 추가됐죠. 세탁기와 냉장고로 유명했던 GE의 정체성은 제조업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GE의 전직 마케팅 임원 베스 컴스탁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잭이 가지고 있던 모델은 ‘팩맨(Pacman, 쿠키를 먹는 게임) 모델’이었습니다. 기업을 먹어 치우고 성장을 획득하라.”성장하는 산업을 먹어 치울 수 있는 건 대단한 능력과 선구안 아니냐고요? 네, 물론 당시 그렇게 평가받았는데요. 그럼 GE는 어떻게 그 많은 돈을 동원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GE캐피탈로 대표되는 금융의 힘이었습니다.GE캐피탈은 원래 항공기 엔진이나 발전용 터빈 구매자금을 조달해주는 역할을 하는 작은 사업부였죠. 잭 웰치는 이를 주택담보대출부터 신용카드와 보험까지, 거의 모든 금융서비스를 포괄하는 강자로 변모시켰습니다.은행과 달리 캐피탈사는 각종 규제에서 면제됩니다. 대신 캐피탈사는 고객 예금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대체로 자금 조달 비용이 많이 드는데요. 든든한 GE의 우산 아래 있는 GE캐피탈은 예외였습니다(신용등급 AAA). 사실상 규제받지 않는 은행이나 마찬가지였던 GE캐피탈은 ‘세계 최대의 비은행 금융회사’로 급성장합니다. GE캐피탈은 GE를 떠받치는 가장 큰 수익원이 됐죠. 잭 웰치가 은퇴할 무렵 GE 전체 매출의 40%, 이익의 60%를 금융 부문이 차지합니다. GE는 제조 대기업이 아닌 금융회사로 변신했습니다. 잭 웰치는 “공장을 지을 필요도 없다”면서 이를 뿌듯해했습니다.숫자 게임의 극적인 결말앞에서 언급했듯이 잭 웰치는 숫자, 즉 단기성과에 집착했죠. 그리고 보기 좋은 숫자를 만드는 데 가장 유용한 수단 역시 GE캐피탈이었습니다.2000년 CNN머니 매거진은 “GE의 엄청난 수익은 미스터리하다”면서 GE의 ‘숫자 게임’을 저격하는데요. GE가 너무 이상할 정도로 꾸준한 수익 성장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게 다 금융 기법을 이용한 숫자 끼워맞추기란 지적이었습니다. 수익이 너무 높을 땐 GE캐피탈이 ‘대출 준비금’ 명목으로 예비금을 숨겨두고, 실적이 부진할 땐 갑자기 분기 말에 모기지 담보증권을 대량 발행해서 분기 수익을 끌어올리는 식이었죠. 일종의 ‘실적 마사지’였습니다.경기가 좋든 나쁘든 탄탄한 실적을 내주는 GE에 투자자들은 열광했습니다. 주식시장에선 실적이 한해 30% 증가한 뒤 이듬해 10% 줄어드는 기업보다는 매해 꼬박꼬박 10%씩 성장하는 기업을 선호하는 법이죠. 잭 웰치는 주주가 원하는 걸 만들어내는 법을 알았습니다.하지만 이런 방식이 지속 가능할 순 없습니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결국 터지고 말았죠.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직격탄을 맞은 겁니다. 순식간에 파산 위기에 처한 GE캐피탈은 연방정부의 구제금융을 받는 신세로 전락했고요. 그룹의 돈줄이었던 GE캐피탈이 무너지자 GE 전체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잭 웰치의 후계자였던 제프리 이멜트 CEO가 다시 뿌리로 돌아가겠다면서 GE캐피탈 사업 대부분을 매각한 건 2015년이었죠.보잉과 잭 웰치의 후예들그토록 잘 나가던 GE는 몰락은 기술의 진보나 시대 변화 탓이 아니었습니다. 단기 이익에 대한 근시안적 집착이 누적된 결과였죠. 본인은 한 번도 인정한 적 없지만(대신 후계자를 ‘shit’이라고 욕함) 잭 웰치가 GE 몰락의 씨앗을 뿌렸습니다.그리고 여전히 그의 실패를 반복하는 잭 웰치의 후예들이 있습니다. 미국 항공기 제조사 보잉이 그 대표 사례이죠. 데이비드 칼훈 현 CEO를 포함해 무려 3명의 전현직 CEO가 정통 GE 출신, 즉 ‘잭 웰치 키즈’이거든요.지난 1월 보잉 737맥스 항공기 문짝이 비행 중 뜯어져 나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알고 보니 조립 과정에서 아예 나사를 빼먹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줬는데요. 앞서 2019년 737맥스의 기체 결함 이슈로 한바탕 난리를 겪고도 달라진 게 없다는 점도 놀라웠습니다. 보잉이 지난 20년 동안 비용 절감을 위해 아웃소싱 대폭 확대하면서 숙련된 엔지니어들이 떠났고, 결국 심각한 항공기 품질 저하로 이어진 겁니다. 제품 품질과 안전보다는 주주 이익 극대화에 매진하는 경영진. 바로 잭 웰치의 유산입니다.칼훈 보잉 CEO는 올해 연말에 사임하겠다고 지난주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 GE는 세 개의 회사로 완전히 해체됐죠. 마지막 남은 잭 웰치의 흔적까지 싹 지워진 느낌인데요. 이제 GE.com 사이트에 접속하면 대문에 이런 문구가 뜹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시작한다(Today we begin again)’. 그리고 GE 역사를 다룬 페이지 어디에서도 잭 웰치라는 이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전임자인 레지날드 존스는 사진까지 있음). 잭 웰치는 이제 정말 안녕입니다. By.딥다이브개인적으로 잭 웰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한국 기업 대부분이 채택하는 상대평가식 직원 평가제도를 퍼뜨린 당사자이기 때문인데요. 정작 GE는 이미 9년 전에 평가방식을 절대평가로 바꿨다고 하죠. 잭 웰치의 후예는 어쩌면 미국보다는 한국에 남아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미국을 대표하던 대기업, 제너럴일렉트릭이 지난 3일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세기의 경영자’로 불렸던 잭 웰치 전 GE 회장의 이야기가 완전히 끝났습니다.-잭 웰치는 놀라운 경영 성과와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으로 추앙받던 인물입니다. 하위 10% 저성과자는 해고하고 성과가 저조한 사업장은 폐쇄해버린 그는 ‘중성자탄 잭’으로 불렸습니다.-그는 제조업 기반의 GE를 사실상 금융회사로 탈바꿈시키며 눈부신 성과를 이뤘습니다. 숫자로 찍히는 탄탄한 실적에 월스트리트는 환호했죠. 하지만 금융기법이 만들어낸 허상이었습니다.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치자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잭 웰치가 전파한 단기성과 위주의 경영 방식은 그 이후에도 꽤 오래 남아 기업의 장기성과를 저해하고 있습니다. 나사 빠진 문짝 사태로 얼마 전 CEO가 사임을 발표한 보잉이 대표적이죠. 부디 이게 잭 웰치 유산의 마지막 실패 사례이길 바랍니다. *이 기사는 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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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리인하 신중론에 뉴욕증시 1%대 급락[딥다이브]

    뉴욕증시 3대 지수가 일제히 1% 넘게 하락했습니다. 연준의 금리 인하가 미뤄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4일(현지시간) 다우지수는 1.35%, S&P500 1.23%, 나스닥지수는 1.40% 하락으로 거래를 마쳤죠.장 초반엔 주간 실업수당 청구 건수가 예상치를 웃돌면서 증시가 강세로 시작했는데요. 연준 관계자들의 매파적 발언이 잇따라 나오면서 방향을 바꿨습니다. 닐 카시카리 미니애폴리스 연은 총재는 인플레이션이 계속 횡보한다면 “우리가 (올해) 금리를 인하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들 것”이라고 말했고요. 톰 바킨 리치먼드 연은 총재는 “연준이 시간을 갖는 것이 현명하다. 아무도 인플레이션이 다시 나타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국제유가가 상승하는 것도 인플레이션 걱정을 키우는 요인입니다. 벤치마크인 브렌트유 가격이 지난해 10월 이후 최고치인 배럴당 90.65달러를 기록했는데요.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안보내각회의에서 이스라엘이 이란과 그 대리인에 맞서 작전을 수행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 중동지역의 긴장을 고조시켰기 때문입니다. 자산운용사 밀러타박의 수석 시장전략가 매트 말리는 “만약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에 직접적인 갈등이 발생한다면 중동에서 오는 석유공급을 제한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습니다.금요일엔 3월 고용보고서가 발표됩니다. 다우존스 조사에 따르면 이코노미스트들은 3월엔 비농업 신규 고용이 20만 개 증가하고, 시간당 평균 임금 인상률은 연간 4.1%로 전보다 낮아질 전망입니다. 모건스탠리의 크리스 라킨은 “투자자들은 연준이 금리인하를 연기할 이유를 주지 않으면서도 노동시장이 심각한 침체를 겪고 있음을 암시하지도 않는 ‘골디락스’ 수치를 기대하고 있다”고 전하는데요. 특히 임금 인상 속도가 예상대로 둔화하느냐에 따라 시장 참가자들은 민감하게 반응할 것으로 보입니다.이날 눈에 띄는 기업은 포드자동차입니다. 2025년에 양산할 예정이었던 3열 전기 SUV 출시 시기를 2년 늦춘다고 발표했는데요. 미국 전기차 시장의 수요가 둔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조치입니다. 포드는 보도자료에서 “신흥 배터리 기술”을 활용해 전기 SUV 가격을 낮추려고 한다고도 밝혔는데요. 포드는 SK온과 배터리 합작법인 블루오벌SK를 설립하고 2022년부터 미국에 배터리 공장을 건설 중이죠. 당초 3열 전기 SUV를 생산하는 캐나다 온타리오 오크빌 공장에도 이 배터리가 들어갈 계획이었는데요. 이번 양산 계획 변경으로 국내 배터리 업계도 영향을 받을 전망입니다. 포드 주가는 이날 3.22% 하락으로 마감했습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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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기저항 0, 전자파도 없다…초전도케이블은 꿈의 전선일까[딥다이브]

    초전도체를 아십니까. 지난해 여름 국내 주식시장을 아주 뜨겁게 달궜던 테마였죠. 초전도체가 ‘전기저항이 0’인 물질이라는 건 이미 아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도대체 전기저항이 0이라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그게 왜 그렇게 대단할까요. 초전도체 열풍이 지나간 이후이지만 궁금증은 남는데요.산업현장에서 이 초전도체를 오랫동안 다뤄온 전문가를 인터뷰했습니다. 주식시장이 열광했던 상온 초전도체와는 좀 다르지만, 고온 초전도케이블을 개발해 세계 최초로 상용화까지 성공시킨 LS전선의 류철휘 박사입니다.‘옴의 법칙’ 깬 새로운 현상의 발견-초전도 현상이라는 게 전기저항이 0이 된다는 뜻이라고 알고 있는데, 맞나요?“반만 맞췄습니다. 초전도체는 크게 두 가지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해요. 첫 번째는 전기저항이 제로가 되는 거고요. 두 번째는 내부로 침입하는 자기장을 밖으로 밀어내는 특징입니다. 저희는 그중 전기저항이 0이 되는 현상을 극대화해서 초전도케이블을 개발했습니다.”-전기저항이 제로인 게 왜 그렇게 획기적인 건가요?“지금 쓰는 전력케이블은 주로 구리나 알루미늄 같은 금속 도체를 쓰는데, 이런 물질은 고유 저항이 있습니다. 이런 저항 때문에 전기를 다 흘려보내지 못하는 현상이 생기죠. 그런데 전기저항이 0이면 이런 손실 없이 전류를 100% 다 보낼 수 있습니다.또 초전도 모터도 만들 수 있는데요. 금속 도체 대신 초전도체로 모터를 만들면 아주 큰 힘을 낼 수 있습니다. 고출력 모터가 필요한 선박이나 항공기, UAM(하늘을 나는 자동차)에 초전도 모터를 쓸 수 있고요. 핵융합 발전기에도 초전도체를 쓸 수 있습니다.”-전류의 세기는 전압에 비례하고 저항에 반비례한다는 옴의 법칙이 있죠. 이에 따르면 저항이 0이라는 게 성립하지 않는데요?“그렇죠. 전기저항이 제로가 되는 초전도체 특성은 기존 물리법칙과는 맞지 않는 현상인데요. ‘저온 초전도체’는 전기저항이 0이 되는 현상을 물리학자들이 증명해서 노벨상까지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쓰는 ‘고온 초전도체’는 아직 증명되진 않았습니다. 현상이 먼저 발견되고, 그다음 그 현상을 일으키는 물질을 발견하고, 그 이후에 물리적 원인을 규명해가는 과정에 있죠.”-말씀하신 대로 저온과 고온 초전도체가 있죠. 또 지난해 주식시장이 열광한 상온 초전도체가 있고요. ‘상온’은 일상의 온도이니까 뭔지 알겠고요. ‘고온’의 경우엔 영하 196도를 유지해야 초전도 현상이 나타나더라고요. 그게 왜 고온이죠?“초전도 현상이 인류에 모습을 드러낸 게 190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세계 최초로 발견된 초전도체가 수은이었죠. 수은이 약 4켈빈, 영하 269도에서 갑자기 전기저항이 사라지는 현상이 발견됐고, 이후 금속 계열 초전도체가 속속 발견됩니다. 그 온도가 약 영하 260도 수준이었고요.그렇게 약 60~70년간 답보 상태를 유지하다가 1980년대 갑자기 영하 200도 안팎 온도에서 초전도 특성을 가진 물질이 발견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처음 발견된 상대적으로 낮은 온도의 초전도체는 저온, 또 일상에선 아주 낮은 온도이지만 상대적으로는 높은 영하 200도에서 초전도 특징을 갖는 물질은 고온 초전도체라고 명명했죠. 그리고 상온 초전도체는 이미 발견이 완료돼 있습니다.”-그래요? 이미 발견됐다고요?“상온 초전도체는 주로 수소 화합물인데요. 2020년 영상 15도에서 초전도 특성을 발현하는 물질이 발견됐고, 저명한 저널에 공개됐습니다. 문제는 이 물질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소화합물을 금속화하는 과정이 필요해요.”-수소를 어떻게 금속화하죠?“아주 큰 압력을 가해줘야 합니다.”-‘상온’이지만 ‘상압’은 아니군요.“그래서 상온 초전도체와 상압 초전도체는 있지만, 아직 상온·상압 초전도체는 없고요. 상온·상압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사는 일반 환경에서 초전도체를 쓸 수 있다는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적용할 수 있는 분야가 무궁무진한 거죠. 그래서 그 발견이 지난해 잠깐 이슈가 됐고요.”20년 후발주자에서 세계 선두 국가로-LS전선이 2001년 고온초전도체를 이용한 초전도케이블 프로젝트를 시작했죠. 박사님은 2010년에 거기 합류하셨고요. 처음 맡으셨을 때 어떠셨나요? 너무 막막하지 않았나요?“2001년 국책과제에 LS전선이 참여하면서 시작됐는데요. 제 앞에 계셨던 선배님들이 일궈놓으신 연구성과들이 있었죠. 지금 돌아보면 개발에 큰 어려움은 없었던 것 같네요. 사실 그때 당시엔 하루하루가 어려웠는데 말이죠(웃음).”-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었을 거 같아요. 우리나라가 늦기도 했고요.“그렇죠. 현재 경쟁 구도에 있는 국가와 기업들은 우리보다 20년 이상 앞서서 시작했거든요. 선행 국가는 초전도체를 개발한 뒤에 이걸 상용화했는데, 우리나라는 초전도체 개발과 제품 개발을 동시에 시작했어요. 그래서 초기에 상당히 어려움이 많았고요. 그런데 2007년 세계에서 세 번째로 초전도케이블 개발에 성공합니다. 일본, 미국 다음이었죠.”-개발은 세 번째였고, 초전도케이블 상용화는 2019년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였죠?“그렇죠. 상용화하려면 어딘가에 설치해서 써봐야 하는데, 그게 쉽진 않습니다. 이미 설치돼있는 전력 계통에 기존에 없던 제품을 넣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한전이 전력 공급을 위해 변전소를 곳곳에 지어야 하는데, 신규 변전소를 짓지 않고 초전도케이블로 대용량 전류를 송전하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 사업이 2019년 완료되면서 세계 최초 상용화라는 명칭을 얻었죠.”-해외 경쟁사는 놀랐겠네요. ‘쟤네 왜 저렇게 빨리빨리 하지?’라고요.“제가 이 개발에 참여하면서 1년에 10번 이상 학회를 다녔습니다.우리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세계에 알려야 해서였어요. 처음엔 발표하는데 사람들이 듣지도 않더라고요.”-‘한국? 저건 들을 필요 없어’라고 한 거군요.“그런데 지속적으로 가서 발표하고, 인맥을 쌓고, 각국 전문가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2014년부터 초청이 오더라고요. 와서 너희 성과를 발표 좀 해달라고요. 처음엔 무시당하는 것 같고, 이렇게 계속 변방으로 있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개발을 지속할수록 자신감이 생기고 세계 최초의 성과를 내다 보니, 그다음부터는 저희가 기술을 주도한다는 느낌을 확실히 받게 됐죠.”-지금은 우리가 일본·미국·유럽 국가와 비교했을 때 기술적으로 앞서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그렇죠. 여러 지표를 종합해 봤을 때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제품군을 보유하고 있고, 성능도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고요. 또 실증과 상용 실적도 가장 많이 보유했기 때문에 지금은 세계 최고 기술력이라고 자부할 수 있죠.”변압기·변전소가 필요 없다-영하 200도 가까이 되는 엄청 낮은 온도를 유지해야 초전도케이블이잖아요. 그 온도를 어떻게 계속 유지하죠? 냉각기를 돌리나요?“네, 맞습니다. 초전도케이블이라고 하면 단순히 케이블만 생각하는데요. 실제로는 극저온 냉각 시스템과 제어 시스템, 그걸 무인 운전할 수 있는 기술력까지 확보해야 상용화할 수 있죠.”-냉각장치는 어떻게 생겼나요. 요만하게 작나요? 아니면 이만큼 커다란가요?“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컨테이너 2개 정도 크기입니다.”-엄청 크군요.“네, 하지만 일반적인 전력 설비들이 다 그렇게 큽니다(웃음). 따라서 냉각시스템이 특별히 크다고는 할 수 없고요. 냉각시스템이 필요한 이유는 케이블 내부의 초전도체가 ‘도체(전류가 흐르는 물질)’로서 역할을 하려면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하나라도 그 영역을 벗어나면 초전도체는 ‘절연체(전기가 통하기 어려운 물질)’가 돼요. 그 세 가지 조건이 전류밀도·자기장·온도인데요. 이 온도를 유지해주기 위해 고온 초전도케이블은 내부로 액체질소를 순환시킵니다. 액체질소가 케이블 내부에서 발생하는 열을 뺏어오면, 온도가 높아진 액체질소를 다시 냉각시킬 냉각시스템이 필요한 거죠.”-송전량을 기준으로 할 때 초전도케이블 한 개가 일반 케이블 몇 개와 맞먹는다고 볼 수 있을까요?“단순히 표현하자면 초전도케이블 한 가닥이 일반 케이블의 최대 10배의 전력을 송전할 수 있는데요. 말씀드렸듯이 초전도체는 직류 전류를 흘리면 전기저항이 0입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가 쓰는 전기는 대부분 교류 전기(전류 크기가 시간에 따라 변화)이거든요. 초전도케이블도 직류가 아닌 교류 전류를 흘리면 자기장이 발생합니다. 그 자기장에 의해 송전손실이 발생하는데, 손실량이 일반 케이블과 비교하면 5%가 채 되지 않아요.”-송전 손실이 아예 0은 아니지만 20분의 1 수준이어서, 여러 가닥 구리선이 필요했던 걸 초전도케이블 한 가닥으로 대체할 수 있는 거군요. 그런데 초전도 케이블을 쓰면 변압기, 변전소 설비를 대폭 줄일 수 있다고요?“맞습니다. 발전소에서 전기를 만들면 전기를 쓰는 곳까지 멀리 보내야 하잖아요. 전기를 멀리 보내려면 전압이 높아야 합니다. 물을 높은 곳에서 부으면 더 멀리 흘러가듯이, 전기도 전압을 높여줘야 더 멀리 가죠. 이 전압을 높이는 이유는 송전 손실을 줄이기 위해서입니다.그런데 초전도체는 손실이 거의 없기 때문에 굳이 전압을 높일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변압 과정, 즉 발전한 뒤 전압을 높여서 보냈다가 몇 단계 변압 과정을 거쳐 다시 전압을 낮추는 과정이 이론적으로는 필요 없죠.”-아예 변압 과정이 필요 없군요. 그럼 변압기 제조사 입장에선 너무 재앙인데요?(웃음) 대신 변전소, 변압기가 사라져도 똑같은 전기를 공급할 수 있다면 훨씬 더 효율적이네요.“그렇죠. 그런데 그건 초전도체가 범용으로 다 설치됐을 경우에 가능한 얘기이고요. 지금 단계에선 발전부터 수용가까지 다 초전도케이블로 설치할 순 없어서요. 특수한 구간, 예를 들어 신도시가 생겨서 새로 전기를 공급하려면 변전소를 설치하거든요. 그런데 초전도케이블을 사용하면 변전소를 짓지 않아도 됩니다.보통은 154kV 전기를 끌어온 뒤, 신규 변전소에서 이걸 22.9kV로 전압을 낮춰서 전봇대에 있는 가공선이나 땅속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초전도케이블을 쓰면 낮은 전압으로 많은 전류를 흘릴 수 있기 때문에, 기존 22.9kV를 직접 인근 변전소에서 끌고 와서 보내면 돼요. 중간에 변전소가 하는 역할이 사라지죠. 단순히 전기를 끊었다가 이었다가 하는 개폐소 역할만 하면 되는 건데요. 이 사업을 지금 한전과 같이 진행하고 있어요.”-변전소를 새로 만들면 부지도 필요하고 주변 민원도 많잖아요. 상당히 경제적이면서 절차를 간소화할 수 있겠네요.“맞습니다. 지금 얘기한 사업이 ‘초전도 스테이션’입니다. 기존 154kV 변전소를 22.9kV 개폐소로 바뀌는 거죠. 기존 변전소 면적의 약 10분의 1~20분의 1 정도로 아주 작게 만들 수 있고요. 결정적으로 초전도케이블은 전자파를 발산하지 않습니다.”-고압 송전선이 지나가면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가 전자파 때문이잖아요. 그런데 전자파가 아예 없어요?“네, 제로예요. 초전도케이블은 케이블 내부에서 전자파를 상쇄합니다. 그래서 외부로 전자파가 나가지 않고요. 케이블 원재료도 다 100% 재활용이 가능한 재료라서 친환경 제품이라 할 수 있죠.”AI 기술과 초전도케이블의 상관관계-여러모로 너무 좋은데, 당연히 이런 반응이 있을 듯해요. ‘생산단가가 훨씬 비싸겠지’란 반응이요. 가격은 어느 정도 차이 나나요?“일반 케이블보다 지금은 많이 비쌉니다. 2배에서 많게는 10배까지 비싼데요. 그 이유는 극저온 냉각 시스템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재료인 초전도체 자체가 비쌉니다.”-아직은 대량 생산이 안 되나 봐요.“그렇죠. 아직 기존 케이블 시장만큼 규모의 경제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상만큼 수요가 증가하고 있진 않은 상황이에요. 핸드폰 같은 건 몇 년에 한 번씩 바뀌지만, 전력기기는 기본 수명이 30년이거든요. 그런데 초전도케이블은 세계 최초로 상용 설치한 게 2019년이니까 이제 5년 차에 접어들었어요. 그런 면에서 이걸 선뜻 전력 인프라에 적용하자고 결정하기가 쉽지 않죠.만약 규모의 경제가 이뤄지면 초전도케이블은 일반 케이블과 비슷한 수준까지 가격 형성될 걸로 예상이 됩니다. 이것 한 가닥으로 일반 케이블 10가닥을 대체할 수 있으니 경제성이 확보될 수 있죠.현재는 단순히 케이블만으론 경제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초전도 스테이션 같은 전력 계통 사업으로 경제성을 확보해서 사업을 진행 중입니다. 또 유럽에선 바닷속에 깔리는 해저 초전도케이블을, 미국에선 하늘에 설치된 가공선을 개발 중인데 모두 저희와 기술 협력 중입니다.”-제품군이 넓어져서 수요가 확대되면 생산량도 늘고 원가도 떨어지겠네요.“사용처가 많아지면 당연히 가격은 내려갈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이제 초전도케이블이 빛을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국내 말고 다른 해외시장으로 나갈 가능성도 있을까요?“최근엔 베트남과 초전도케이블을 상용화하기 위한 협력 체계 구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MOU를 체결하면 제가 가서 베트남 전력 계통 어디에 초전도케이블이 필요할지를 찾아주고, 설치하면 어떤 효과가 생기는지에 대해 기술협력을 할 거고요. 그리고 나면 베트남에도 초전도 케이블을 깔게 될 것 같습니다.”-최근 유럽에서 풍력과 태양광 발전을 늘리면서 전력망이 부족하다고 하더라고요. 전 세계적으로 전력망 수요가 급증한다던데, 그걸 느끼시나요?“네. 아까 말씀드린 유럽의 해저케이블도 해상풍력 단지에서 만든 전기를 육상으로 끌고 오기 위한 케이블이 초전도케이블로 설치되는 것이고요. 독일에선 도시 전체 인프라를 초전도로 바꾸는 사업도 시작됐어요. 미국은 몇 년 전 텍사스에서 겨울에 이상한파로 전력 설비가 동파돼 전기가 끊기면서 수십명이 얼어 죽은 사건이 있었거든요. 이후 텍사스의 전력회사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초전도케이블을 설치해서 계통을 보강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싶다고요. 그래서 2022년부터 관련 사업도 기술협력을 하고 있어요.또 LS일렉트릭의 초전도 전류제한기와 저희 초전도케이블을 같이 묶어서 급격하게 성장하는 인터넷데이터센터(IDC) 시장에 설치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기존 IDC는 (수전 용량이) 20~40MW 정도 수준인데요. 갈수록 AI(인공지능)나 IoT(사물인터넷) 산업이 발달하면서 데이터양이 급증하잖아요. 그래서 IDC도 점점 규모가 커져야 하는데, 이건 전기 먹는 하마와 같거든요. 엄청난 전기를 공급해야 하는데, 거기엔 초전도케이블이 적합하다고 보는 거죠. 전기를 멀리서 끌어올 수 있고, 끌어오는 과정에서 전자파가 발생하지 않으니까 민원 염려도 없고요.”-그럼 결론적으로 박사님이 보셨을 때 초전도케이블의 미래는 아주 밝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될까요?“필연적이라고 봅니다.” By.딥다이브전 세계적으로 전력망 구축이 핫 이슈라고 전해드린 적 있죠(). ‘전기 인프라 혁명’ 시대가 도래했다는 분석까지 나오는데요. 과연 신기술 초전도케이블이 이 기회를 틈타 도약할 수 있을까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초전도체란 전기저항이 제로이고 자기장을 밖으로 밀어내는 물질입니다. 기존 물리학 법칙을 깬 이 새로운 물질로 전력케이블 또는 전기모터를 만들면 엄청난 고효율을 낼 수 있습니다.-한국은 2001년 뒤늦게 초전도케이블 개발에 뛰어들었습니다. 후발주자이지만 이젠 세계적으로 기술을 선도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초전도케이블 하나가 최대 10개의 구리케이블을 대체할 수 있습니다. 전기를 멀리 보내기 위해 전압을 높일 필요가 없기 때문에, 변전소와 변압기도 불필요합니다. 전자파도 발산하지 않죠.-규모의 경제를 이루지 못해서 가격은 아직 매우 비쌉니다. 하지만 한국뿐 아니라 유럽과 미국에서도 초전도케이블 사용처를 넓히기 위한 기술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죠. AI 시대를 맞아 급증한 데이터센터 수요 역시 초전도케이블 필요성이 부각되는 이유입니다.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4-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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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한애란]당신은 아이를 낳아 행복하십니까

    당신은 부모가 되어서 행복한가. 도발적인 질문이지만, 돌아올 대답은 뻔하다. 아마 대부분이 ‘당연히 그렇다’라고 답할 것이다. 지난해 퓨리서치가 미국 부모 3757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도 그랬다. 미성년 자녀를 둔 부모 대다수는 육아가 즐겁고(82%), 보람차다(80%)고 응답했다. 육아가 피곤하거나(41%) 스트레스(29%)라는 부정적인 응답을 크게 웃돌았다. 부모가 된 것이 자신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라고 답한 이는 무려 87%에 달했다. 아름답고 희망적인 결과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은 대부분 사람에게 여전히 가치 있고 중요한 일임을 보여준다. 때론 지치고 힘들 수 있지만 그렇다고 부모 됨의 즐거움은 사라지지 않는다.“내 자녀 삶에 중요한 건 아이보다 일” 그런데 반전이 있다. 같은 설문조사에서 자녀 인생에서는 무엇이 가장 중요하냐고 묻자 부모들은 딴소리를 했다. 재정적으로 독립하고(88%),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직업을 갖는 것(88%)이 매우 중요하다고 답했다. 아이를 갖는 것이 자녀 인생에 매우 중요하다는 응답은 고작 20%. 오히려 부모가 되는 것은 자녀에게 그다지 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46%)는 답변이 훨씬 더 많았다. 아이를 낳아 기른 게 행복의 원천이라던 사람들이 정작 자녀에겐 아이보다 일과 돈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왜 부모들은 자신이 누린 행복을 자녀에게 물려줄 생각이 없는 것일까. 이 수수께끼에 관한 물음표가 쌓이던 중 책에서 답을 찾았다. 구글 검색어를 연구한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의 저서 ‘모두 거짓말을 한다’이다. 빅데이터 분석 결과, ‘아이 가진 것을 후회한다’라고 구글에서 검색한 건수는 ‘아이 갖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보다 35배 많았다. 인구 비율을 고려해도 자녀를 가진 사람이 구글 검색창에 ‘후회한다’고 고백할 확률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3.6배 더 높다. 즉, 생각보다 많은 부모가 실제로는 아이 가진 것을 후회한다. 주변인은 물론 익명의 설문조사에도 털어놓지 못하는 진짜 속마음이다. 과연 한국은 다를까. 후회의 감정을 직면하거나 들춰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또 아이 낳은 것을 후회한다고 해서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그들이 종종 소중한 자녀에게 건네는 솔직하면서 비밀스러운 조언이 이거다. “너는 애 낳지 마라.”“너는 애 낳지 마”라는 솔직한 조언 아들딸에게 이렇게 입버릇처럼 말한다는 40, 50대 부모들이 주변에 참 많다. 그들에게 ‘당신은 부모가 된 것을 후회하고 있다’라고 지적하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펄쩍 뛸 것이다. 하지만 ‘애 낳지 마라’는 그 말은 사실 과거의 본인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 아닌가. 말을 한 본인조차 미처 깨닫지 못한 후회의 메시지를 듣는 자녀는 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자녀에게 부모는 가장 가까이서 관찰해온 유자녀자이다. 출산과 관련한 자녀의 가치관에 부모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미래세대가 아이를 낳고 싶어 하게끔 만들려면 그 부모 세대 생각부터 바뀌어야 한다. 이미 부모가 된 이들이 자기 인생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생각을 바꾸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아이 낳으면 돈 주는 식의 저출산 대책이 당장 2∼3년 안에 극적인 효과를 거두긴 어려운 이유다. 그럼 돈 많이 드는 출산 장려책을 그만둬야 하느냐고? 아니, 그 반대다. 아이를 낳고 기르고 독립시키기까지 모든 기간으로 지원을 더 넓혀야 한다. 꾸준한 지원으로 부모 됨의 만족도를 높여가야 한다. 그렇게 10년, 20년 이어간다면 달라질 수 있다. ‘너도 나처럼 행복한 부모가 되렴’이란 조언을 자녀에게 건네는 미래 부모들이 점점 많아졌으면 한다.한애란 경제부 기자 haru@donga.com}

    • 2024-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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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조업이 왜 이리 강하지…국채금리 뛰고 뉴욕증시 혼조세[딥다이브]

    미국 국채 금리가 뛰면서 뉴욕증시가 혼조세로 마감했습니다. 1일(현지시간) 다우지수와 S&P500은 각각 0.60%와 0.20% 하락으로 거래를 마쳤습니다. 나스닥지수는 0.11% 상승했습니다.이날 시장은 지난주 금요일에 나온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의 라디오 인터뷰 발언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최근의 경제지표를 두고 “우리가 금리를 인하하기 위해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아울러 “우리가 과잉 반응하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죠. 상당히 신중한 입장이었죠. 이날 발표된 제조업 지표도 예상보다 강했습니다. 공급관리협회(ISM)는 3월 미국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가 50.3으로 전달(47.8)보다 상승했다고 발표했는데요. 이 지수가 기준선인 50을 넘긴 건 18개월 만이라고 합니다. 제조업 경기가 확장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의미이죠.예상외로 강력한 제조업 지표는 연준이 금리인하 시점을 뒤로 미룰 수 있다는 신호로 작용했습니다. 이날 미국 국채 10년물 금리는 0.122%포인트 뛴 4.312%를 기록했습니다. 시카고상품거래소의 페드워치에 따르면 6월 FOMC에서 금리를 인하할 가능성은 58%입니다. 일주일 전 70%대에서 후퇴한 거죠. 인터랙티브 브로커스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호세 토레스는 블룸버그에 “투자자들은 연준이 매파적으로 돌아설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면서 “연준의 금리인하는 결국 (6월이 아닌) 하반기에나 이뤄질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시장은 이번 주에 발표될 고용지표에 주목합니다. 3월 고용보고서가 5일 나올 예정인데요. 전문가들은 지난달 비농업 신규 고용이 20만5000건 증가해 전달(27만5000건)보다 둔화했을 것으로 전망합니다. 한동안 뜨거웠던 노동시장이 식어가는 모습을 보일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립니다.이날 눈에 띄는 종목은 트럼프 미디어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만든 소셜미디어인 트루스 소셜의 모회사인데요. 지난주 상장 후 폭등했던 주가가 이날은 21.47% 폭락했습니다. 2023년 연간실적에서 5820만 달러의 순손실을 보고한 영향이죠.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들의 투자 열기에 힘입어 79달러까지 치솟았던 주가가 이날 48달러대로 밀렸는데요. 트럼프 전 대통령이 보유한 지분가치가 10억 달러 이상 증발했다고 합니다. 역시 ‘밈(Meme) 주식’다운 흐름입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4-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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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유하지만 이민자는 싫어…네덜란드 ‘부의 역설’[딥다이브]

    성매매·안락사·동성애 결혼을 합법화한 관용의 나라, 종교박해를 피해온 위그노를 받아들인 자유의 나라, 세계 최초 다국적 기업 동인도회사를 탄생시킨 세계화 원조 국가. 어디인지 아시겠죠? ‘세계에서 가장 개방된 부자 나라’로 불려 온 네덜란드입니다.이런 네덜란드가 요즘 급격하게 반이민 정책으로 유턴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민자 유치가 경제성장 원동력이라고 자부해왔던 네덜란드인지라, 전 세계가 놀라고 있는데요. 오늘은 왜 네덜란드처럼 부유한 국가에서 반이민 정책이 지지받는지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2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이민자·난민·유학생, 이제 그만네덜란드가 외국인을 향해 활짝 열렸던 문을 빠르게 닫고 있습니다. 최근 시행됐거나 시행 예정인 정책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①외국인 근로자 위한 세금감면 혜택을 대폭 줄입니다=네덜란드는 ‘30% 룰링’이라 부르는 고학력 외국인 근로자를 대상으로 하는 세금감면 혜택이 있었습니다. 5년 동안 급여의 30%를 소득공제(과세표준에서 제외)해주는 파격적인 제도였는데요. 올해 1월 1일부터 혜택을 크게 축소합니다. 5년을 20개월씩 세 구간으로 나눠, 단계별 소득공제 비율을 30%-20%-10%로 점차 줄이는 거죠.30% 룰은 네덜란드가 해외 인재를 끌어당기는 매력적인 유인책이었습니다. 네덜란드 기업인 반도체 업계 ‘슈퍼을’ ASML의 경우 네덜란드 직원 2만3000명 중 40%가 외국인이라, 이 제도가 사라지면 영향이 꽤 큰데요. 이 때문에 지난 1월 ASML의 페터르 베닝크 CEO가 본사 이전 가능성까지 들먹이며 반발했죠. 당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덜란드가 문을 닫아도 괜찮습니다.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회사가 성장할 수 있도록 우리가 가야 할 곳이면 어디든 가겠습니다.”②망명 신청 절차가 까다로워집니다=누군가가 네덜란드에 망명을 신청했을 때, 그가 실제 위험에 빠졌는지를 어떻게 확인할까요. 지금까진 이민귀화국이 신청자의 진술을 듣고 난민 지위를 줄지 말지를 판단했는데요. 올해 여름부터는 절차가 바뀝니다. 망명 신청자 본인이 자국에서 위험에 처해있다는 증거를 직접 제출해야 하죠. 그냥 단순히 위협받는 집단에 속한다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자신이 개인적으로 위협 당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죠. 한층 까다로워지는 건데요.이렇게 바꾸는 이유는 뻔합니다. 망명 신청자들이 네덜란드행을 포기하고 다른 유럽 국가로 가게 하려는 거죠. 지난해 11월 선거에서 극우정당인 자유당(PVV)은 “망명 신청자의 유입으로 인해 네덜란드 납세자들이 연간 240억 유로의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 “망명 신청자들은 고급 유람선에서 무료 뷔페를 즐기는 반면, 네덜란드 가족들은 식료품 지출을 줄여야 한다” 같은 극단적인 주장을 펼쳤습니다.③유학생을 줄이기 위해 네덜란드어 강의를 늘립니다지난달 네덜란드 대학 14곳이 유학생을 줄이는 데 합의했습니다. 이를 위해 영어로 진행되는 학사 프로그램을 대폭 줄이고, 유학박람회를 통해 외국 학생을 모집하는 것도 자제하기로 했죠. 또 주요 전공(예-경제학이나 심리학) 학사 프로그램은 네덜란드어로 진행하겠다는 계획인데요. 이에 더해 네덜란드 교육부는 영어로 진행하는 학사 코스의 최대 학생 수 상한선을 정해놓는 법안 제정도 추진 중입니다. 일종의 ‘유학생 쿼터제’를 도입하려는 거죠.네덜란드는 지난 12년 동안 대학 학생 수(대학원 포함)가 25%나 증가했는데요(2011년 65.6만명→2023년 82.1만명). 현재 전체 학생의 4분의 1이 외국 국적이라고 하죠. 학사 프로그램의 30%는 영어로만 제공됩니다. ‘대학의 영국화’라는 비판과 함께, 강의실·거주지가 심각하게 부족하다는 불만이 커졌습니다. 그러자 이젠 급격한 ‘대학의 네덜란드화’로 돌아선 건데요. 네덜란드 대학 교수 중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외국인 교수들은 네덜란드어를 하지 못해서 일자리를 잃을까 떨고 있다고 합니다.외국인 때문에 살기 어렵다고?개방적인 국가로 유명했던 네덜란드는 왜 돌변했을까요. 흔히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민자가 최근 들어 너무 급증해서, 네덜란드 사람들이 살기 팍팍해졌다고요. 주택공급 부족과 치솟는 임대료, 이게 다 외국인이 밀려들어 온 탓이라는 거죠.이런 대중의 불만을 극우 포퓰리즘이 파고듭니다. 지난해 11월 네덜란드 하원 선거에서 극우정당인 자유당(PVV)이 37석을 확보하며 제1당으로 올라섰죠. ‘다시 네덜란드를 네덜란드인에게 돌려주겠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는데요. 자유당 대표 헤이르트 빌더르스는 온갖 혐오 발언으로 유명한 정치인이죠. ‘네덜란드판 트럼프의 승리’였습니다.그런데 팩트를 좀 따져보자고요. 정말 최근 들어 네덜란드에 이민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을까요. 2022년 수치를 보면 그렇죠. 순이민자 수(유입-유출)가 전년의 두 배인 22만명에 달하니까요. 하지만 2023년엔 이 수치가 다시 14만명으로 줄었습니다. 팬데믹으로 억눌렸던 이민 수요가 2022년 일시적으로 폭발했다가 정상화되고 있다고 보는 게 더 맞을지 모릅니다.네덜란드 경제상황은 어떨까요. 보통 경제상황을 보여주는 게 실업률과 1인당 GDP 성장률이죠. 그런데 네덜란드 실업률은 역사적 최저점에 머물러있고요(2023년 3.5%). 2022년 1인당 GDP 성장률은 3.5%로, 다른 유럽국가보다 더 강력한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2022년 네덜란드 주민 1인당 GDP는 5만3200유로, EU 국가 중 4위를 기록했죠(2021년엔 5위). 네덜란드는 전반적으로 점점 더 부유해지고 있습니다.그래서 생기는 의문은 이겁니다. 도대체 왜 이 경제 번영의 시기에 네덜란드 사람들은 반이민 극우 정당에 끌리는 걸까요.경제 번영기에 극우정당은 득세반이민을 내세운 극우 포퓰리즘 정당의 부상은 네덜란드만의 일이 아니죠. 사실 유럽 국가 중 이런 정당이 없는 나라가 드물 정도인데요. 일반적으로는 이렇게들 생각합니다. 경제상황이 나빠지고 일자리 경쟁이 치열해질 때, 즉 경기침체기에 반이민 정당 지지도가 높아진다고요. 먹고 살기 어려워진 가난한 유권자들이 이민자나 소수민족을 배척한다는 거죠. 자기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요.그런데 이런 전통적인 설명에 도전하는 정치사회학 연구 결과들이 속속 나옵니다. 네덜란드 틸뷔르흐 대학의 타케 시프마 연구원의 2021년 논문도 그중 하나인데요. 2009년과 2014년, 유럽 10개국의 선거 데이터를 비교해봤더니, 경기침체기엔 이민 문제를 앞세운 극우 정당 지지율이 떨어지더라는 거죠. 실업률이 치솟고, 1인당 GDP 성장률이 낮을 땐 반이민 주장이 되레 먹히지 않더라는 겁니다. 반대로 경제가 좋아지고 나서는 반이민 정당이 더 지지받고요. 상식과는 정반대이죠.시프마 박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경제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을 땐 유권자들은 경제 자체를 가장 중요한 이슈로 인식하기 때문에 극우정당에 투표할 확률이 낮아집니다. 경제가 상대적으로 좋아지면 이민 문제가 부각되고 극우정당이 지지를 얻을 가능성이 생깁니다.”경제가 정말 나쁠 때, 유권자의 최우선 관심은 경제 살리기이죠. 주구장창 ‘반이민’만 외치는 극우 포퓰리즘 정당은 설득력 있는 경제정책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경제침체기에 그들이 외면받는 이유입니다.반면 경제가 괜찮고 먹고살 만하면 오히려 반이민 주장이 귀에 쏙쏙 박힙니다. 프랭크 몰스 미국 퀸즈대학 연구원은 2017년 ‘부의 역설’이란 용어로 이를 설명했는데요. 경제적으로 어려워서가 아니라, 혹시 자신이 가진 부를 잃게 될까 봐 두려워서 이민에 반대한다는 겁니다.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얻지 못할까 봐, 지위가 떨어질까 봐 불안해서 반이민 정책에 표를 던지는 거죠. 부유해지면 관대해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잃을 게 많아지는 셈입니다. 네덜란드뿐 아니라 호주·노르웨이·오스트리아·스위스처럼 경제가 탄탄한 국가에서 국수주의적 포퓰리즘 정당이 급부상한 건 대체로 경제적 번영 이후라고 합니다.이민 막으려면 경제를 파괴하라‘이민자들은 집과 일자리를 뺏어가고 임금 수준을 떨어뜨리고 복지국가를 훼손한다. 나라의 정체성과 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위협이다.’반이민 세력의 흔한 주장이죠. 하지만 지난해 ‘How Migration Really Works’ 책을 낸 암스테르담대 사회학과 하인 데 하스 교수가 30년 동안 이민을 연구한 결론은 다릅니다. 그에 따르면 노동 수요가 외국인 이주를 이끄는 진짜 동인입니다. 부유하고 번영하는 개방형 경제는 많은 노동 이주자를 끌어들이기 마련입니다. 즉, 이민자 급증은 나라 경제의 성공 신호이죠.데 하스 교수는 이렇게 일갈합니다. “고학력·고령화는 노동자 부족을 심화시키는 구조적 요인입니다. 우리가 완전고용과 최대의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민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경제를 파괴하는 겁니다.”그는 전체주의 국가가 아닌 한 어떻게 해도-세제 혜택을 줄이고, 망명자를 추방하고, 대학에서 네덜란드어로 가르쳐도-노동시장의 자연스러운 흐름인 이민을 막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민을 막겠다’는 정치권 공약 자체가 환상 또는 거짓말이란 거죠. “이민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이 주제를 얘기하는 건 무의미해요. 마치 ‘시장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라는 것과 같아요.”물론 아무리 많은 증거와 연구결과를 들이대도 고정관념을 깨기란 쉽지 않습니다. 시간이 꽤 오래 걸리죠. 어쩌면 일단 한번 극단으로 쏠린 뒤에야 제자리를 다시 찾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캐나다 출신 네덜란드 기업가 알리 닉남은 블룸버그에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네덜란드를 보면 정말 살기 좋은 나라 중 하나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여요. 우리가 그토록 열심히 일해서 얻은 위대한 것들을 모두 잃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By. 딥다이브지난해 호주 임대주택난을 전해드리면서, 사실 누적된 주택정책 실패 탓인데 극우정당은 이를 이민자 탓으로 호도한다고 설명드린 적 있습니다(). 네덜란드도 마찬가지 상황인데요. ‘이게 다 이민자 때문’이란 프레임을 씌움으로써 지난 10년간의 주택공급 정책 실패를 가리고 있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외국 인재를 끌어들이는 개방된 국가로 통하던 네덜란드가 최근 빠르게 문을 닫고 있습니다. 고숙련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세제 혜택을 대폭 줄이고, 망명 신청 절차를 까다롭게 바꾸고, 유학생을 줄이겠다며 네덜란드어 대학 강의를 늘리고 있죠. -심지어 지난해 11월 하원 선거에선 ‘네덜란드를 네덜란드인에게 돌려주겠다’고 선언한 극우 포퓰리즘 정당이 제1당이 됐는데요. 먹고 살기 어려워져서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네덜란드는 경제적으로 번영의 시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경제 침체기엔 구호뿐인 ‘반이민’ 정책보다는 실질적인 경제 정책에 유권자 관심이 쏠리기 때문에 극우정당 지지율이 오히려 떨어집니다. 반면 경제가 번영하고 사람들이 부유해지면 반이민 주장이 귀에 쏙쏙 들어오죠. 가진 걸 잃으면 어쩌나 하는 막연한 불안감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부의 역설’입니다.-이민자가 급증하는 건 사실 경제 성공의 신호입니다. 유입을 정말 막으려면 경제를 파괴하는 방법밖엔 없습니다. ‘이민자를 막겠다’는 정치인 약속의 허구성을 깨달아야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이 기사는 2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4-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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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500, 1분기 10% 올랐다…5년 만에 최고[딥다이브]

    다우지수와 S&P500지수가 나란히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습니다. 28일(현지시간) 다우지수는 0.12%, S&P500은 0.11% 상승으로 거래를 마쳤고요. 나스닥지수는 0.12% 하락 마감했습니다. 29일 뉴욕증시가 휴장이라서, 이날이 1분기의 마지막 거래일이었는데요. 올 1분기에 S&P500은 10.2% 상승했습니다. 2019년 이후 1분기 상승률로는 최고라고 합니다. 랠리를 주도한 건 엔비디아였습니다. 지난해 말 495.22달러였던 엔비디아 주가는 올해 들어 82.5% 뛰어 이날 종가 903.56달러를 기록했죠. 엔비디아 시가총액은 석 달 동안 1조 달러 넘게 불어났는데요. FT는 엔비디아 시총 증가분이 “같은 기간 글로벌 주식시장(MSCI 기준) 총 이익의 약 5분의 1에 해당한다”고 설명합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이번 분기에 미국주식 가치는 총 4조원 넘게 늘어나서 월가의 비관론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이날 나온 경제지표는 투자자의 낙관론을 부추겼습니다. 미국 상무부가 발표한 지난해 4분기 GDP는 연율로 3.4% 증가했는데요. 이는 시장 예상치 3.2%를 웃돌았습니다. 또 미시간대학이 조사한 3월 소비자 심리지수는 79.4로, 2021년 7월 이후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인플레이션이 완화될 거란 기대감이 커진 거죠.29일엔 연준이 선호하는 인플레이션 지표인 2월 개인소비지출(PCE) 물가지수가 공개될 텐데요. 시장에선 전년 대비 2.5% 상승해 1월(2.4%)보다 증가율이 높아질 걸로 내다 봅니다.엔비디아 말고 1분기에 눈에 띈 주식은 뭐가 있을까요. 디즈니 주가는 이번 분기에 35% 이상 상승했습니다. 테마파크와 소매판매를 중심으로 실적이 강화되고 있다는 분석인데요. 디즈니의 4월 3일 주주총회를 앞두고 행동주의 투자자 넬슨 펠츠가 경영권을 취득하기 위해 공세를 벌이고 있죠. 표대결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도 주목됩니다.테슬라는 1분기에 주가가 약 29% 하락했습니다. 2022년 4분기 이후 최악의 실적이라는데요. 지난 1년 동안 테슬라 주가는 6.7% 하락한 반면, 같은 기간 S&P500은 32% 상승했습니다. 전기차 수요부진과 중국업체와의 경쟁 심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요. 테슬라는 4월 2일 1분기 생산·인도 실적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2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4-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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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공급과잉이 낳은 ‘유통 교란종’ 테무… 1년반만에 50개국 상륙 [딥다이브]

    불과 1년 반 만에 전 세계 50개국에 진출한 온라인 쇼핑몰이 있다. 중국 쇼핑 플랫폼 테무(Temu). 초저가와 무료 배송, 광고 공세로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유럽 유통 시장까지 뒤흔든다. 중국 공급 과잉 시대가 탄생시킨 생태 교란종에 대한 경계심이 커지고 있다.● 파격 초저가로 충동구매 조장 중국 전자상거래 기업 핀둬둬(拼多多)가 20일 깜짝 실적을 발표했다. 지난해 4분기(10∼12월) 매출액이 1년 전보다 123%나 증가해 전망치를 한참 웃돌았다. 경쟁사인 중국 알리바바·징둥닷컴의 소매부문 매출 증가율이 불과 2∼3%대인 것과 대비된다. 매출 급성장의 원동력은 핀둬둬의 해외용 플랫폼 테무다. 2022년 9월 미국에 처음 출시된 테무는 유럽을 거쳐 지난해 7월 한국에 상륙했다. 테무의 지난해 상품 거래액은 약 164억 달러(약 22조 원). 지난해 세계에서 가장 많이 다운로드한 쇼핑 애플리케이션 1위(3억3800만 건)에 올랐다. 한국에선 지난달 월간 활성이용자 수에서 G마켓을 제치고 쇼핑앱 4위(581만 명)를 기록했다. 전 세계 소비자가 테무에 열광하는 건 파격적으로 싼 가격 때문이다. 중국산 제품을 웬만한 쇼핑몰의 반값 이하에 판다. 주문 제품은 중국 내 창고에 모아서 포장한 뒤 해외로 배송되는데, 일정 금액(한국은 1만3000원) 이상이면 배송비는 무료다. ‘억만장자처럼 쇼핑하라’란 광고 문구처럼 싼 맛에 하는 충동적인 쇼핑을 부추긴다. 오동환 삼성증권 수석연구위원은 “국내 판매자가 정식으로 상품을 수입하면 관세는 물론이고 안전인증 비용까지 내야 해 가격으론 경쟁 자체가 어렵다”고 지적한다. ● 공급 과잉과 무한 가격 경쟁 싸게 팔면 많이 팔리는 건 당연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테무는 중국의 중소·영세업체를 끌어모아 효율적인 초저가 공급망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그 전략 중 하나가 주 1회 최저가 입찰이다. 유사 제품에 대해 가장 낮은 입찰가를 제시한 판매자에게만 테무에서 제품을 팔 권리를 준다. 낙찰받기 위해 판매자는 울며 겨자 먹기로 가격을 내릴 수밖에 없다. 엄격한 벌금 규정도 운영한다. 배송이 지연되거나 고객 불만이 접수되면 판매자에게 벌금을 부과한다. 벌금과 가격 인하 압박에 시달리다가 테무 판매를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테무는 끄떡없다. 지금 중국은 공급 과잉 시대이기 때문이다. 일부 업체가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도 제품을 공급할 중소업체는 여전히 넘쳐난다. 중국 경기 둔화로 내수 소비가 위축된 상황이라 더 그렇다. 중국 매체 36kr은 “테무는 공급 과잉 환경에 맞는 게임 규칙을 설계했다”면서 “압박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판매자는 공장 또는 대형 공급업체가 될 것”이라고 분석한다.● 광고 폭탄에 올해도 적자 테무는 막대한 광고비를 쏟아붓는다. 지난해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만 약 12억 달러(약 1조6000억 원)의 광고비를 써서, 메타의 최대 광고주가 됐다. 테무는 거래 수수료로 돈을 번다. 소비자 판매가격에서 제품 공급가격과 물류비용, 마케팅 비용을 제하고 남는 게 있어야 이익이 난다. 현재는 물론 적자다. 골드만삭스는 지난해 테무가 주문당 7달러의 손실을 봤을 것으로 추정한다. 테무는 올해 투자를 더 확대해 나가겠다는 계획이다. 핀둬둬는 초기 3년은 계획된 적자 구간이라고 보고 테무를 열었다. 남효지 SK증권 연구원은 “지난해 미국 시장에 집중했던 중국 이커머스 플랫폼이 올해는 한국 시장 확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서 “상품과 서비스에 차별성이 없는 국내 중소사업자에는 특히 위협적”이라고 말했다. 테무가 언제쯤 흑자로 돌아설지는 전망이 엇갈린다. HSBC는 “차별화되는 초저가 전략으로 테무의 강력한 성장이 이어질 것”이라며 2025년 흑자 전환을 전망한다. 이와 달리 JP모건체이스는 “테무가 저가·저품질 이미지에서 점차 벗어나야 2027년 흑자로 전환할 것”이라며 신중한 입장이다.● 규제 위험으로 주가는 주춤 테무의 강세로 핀둬둬는 지난해 4분기에 기대 이상의 실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주가는 실적 발표 직후 반짝 상승한 뒤 내리막이다. 13일 미국 하원을 통과한 ‘틱톡 금지법’이 중국 앱 테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골드만삭스는 최근 이런 이유로 핀둬둬의 투자등급을 매수에서 중립으로 하향 조정했다. 전면 금지까진 아니더라도 유통 생태계 교란을 막기 위해 각국이 규제를 강화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난다. 미국 정치권에선 800달러 이하 수입품엔 관세를 면제해주는 제도를 재검토하자는 목소리가 커진다. 한국 공정거래위원회는 테무 같은 해외 온라인 플랫폼도 국내에 의무적으로 대리인을 두도록 규제를 강화하기로 했다. 조철군 NH투자증권 연구원은 “미국이 글로벌 공급망을 재편 중인 상황에서 다시 중국 제조업 의존도가 커진다면 또 다른 마찰과 규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4-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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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독점 소송은 제국을 무너뜨릴까? 26년 전 MS 사건이 남긴 것[딥다이브]

    미국 법무부가 애플을 상대로 반독점 소송을 제기했다는 소식, 지난주 전해드렸죠. 과연 애플의 폐쇄적 생태계 구축은 경쟁과 혁신을 저해하는 불법 행위일까요. 이제 막 시작된 세기의 소송에 전 세계 관심이 쏠리는데요.이를 계기로 26년 전 미국 법무부가 마이크로소프트를 상대로 벌인 독점 금지 투쟁이 재소환됩니다. 구글·애플의 성장, MS의 쇠퇴와 부활이란 이야기의 시작점이라 할 정도로 역사적인 사건이었죠. 기술 세계의 획기적인 전환점, 1998년 마이크로소프트 반독점 소송을 들여다봅니다.*이 기사는 26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넷스케이프와 익스플로러현재 세계 시가총액 1위인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그런데 1990년대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위상은 어찌 보면 지금보다 더 엄청났습니다. 그 당시 MS는 전 세계 그 어느 기업보다도 부유하고 강력한데다, 다른 영역으로까지 지배력을 넓혀가는 야심 찬 기업이었죠. 특히 세계 최고 부자였던 빌 게이츠 창업자는 성공과 혁신의 아이콘으로 통했습니다. 지금의 구글과 애플, 테슬라까지 합쳐놓은 느낌이랄까요.MS 지배력의 기반은 PC 운영체제 윈도우였습니다. 윈도우가 얼마나 핫한 제품이었는지 혹시 기억하시나요. 1990년대 말 개인용 PC의 90% 이상이 MS 윈도우를 사용했습니다. 2000년대 후반까지도 윈도우 새 버전이 나올 때마다 대대적인 론칭 행사가 전 세계적으로 열리곤 했죠. 뉴욕에선 댄서들이 건물 벽을 타고 다니며 신제품 출시를 알렸고요. 한국에선 코엑스 행사장에 신제품을 한시라도 빨리 사고 싶은 사람들이 줄을 섰습니다. 마치 지금의 아이폰처럼요.미국 정부는 1990년부터 연방거래위원회가 독점 혐의로 MS를 조사해왔습니다. 그리고 1998년 5월 미국 법무부가 20개 주 정부와 함께 MS를 독점금지법(셔먼법)을 위반했다며 소송을 제기했죠.소송의 핵심은 MS의 웹브라우저 익스플로러에 있었습니다. PC 산업의 절대 강자인 MS였지만 인터넷 대응은 한발 늦었죠. 빌 게이츠는 뒤늦게 1995년에야 인터넷의 상업적 잠재력을 깨닫고 ‘인터넷 해일’이란 메모를 회사 경영진에 보냅니다. MS는 부랴부랴 익스플로러1을 내놨지만, 반응이 시원찮았죠. MS는 경쟁 웹브라우저인 넷스케이프를 뛰어넘을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익스플로러를 윈도우에 무료로 끼워 넣습니다. 그리고 PC 제조사에 윈도우 운영체제와 익스플로러를 기본으로 설치해 PC를 출시하도록 압력을 가했죠. 훗날 재판에서 공개된 MS 내부 e-메일에선 ‘넷스케이프의 공기 공급을 차단한다’ 같은 노골적인 표현이 나왔습니다. 생존 위기에 몰린 넷스케이프는 이런 MS의 반경쟁 행위에 대한 기밀 보고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합니다. 이는 반독점 소송의 근거가 됩니다.가격보다 혁신이 훨씬 중요하다9개월 동안 이어진 1심 재판에 대한 관심은 대단히 뜨거웠습니다. 당시 재판을 취재했던 뉴욕타임스 기자는 OJ 심슨 사건 수준으로 기사가 쏟아졌다고 회고하죠. 특히 ‘이걸 독점금지법 위반으로 볼 수 있느냐’를 두고 논쟁이 불붙었습니다. 기존에 봐왔던 반독점 소송과는 여러모로 달랐기 때문입니다.일반적으로 독점기업은 M&A로 몸집을 불립니다. 앞서 미국 정부의 반독점 소송으로 쪼개졌던 스탠더드오일이나 AT&T가 모두 그런 경우죠. 그런데 MS가 독점적인 지위를 획득한 건 M&A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윈도우가 소비자 선택을 받았을 뿐이었죠.전통적으로 독점을 규제해야 하는 이유는 소비자 후생의 감소, 즉 가격 때문입니다. 기업이 독점적 지위를 남용하면 가격이 올라갈 것을 걱정하죠. MS의 경우는 이 공식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제품 복사본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이 사실상 0인 소프트웨어 기업이기 때문이죠. 오히려 제품 가격 인상 없이 익스플로러를 번들로 묶어 제공했습니다. 소비자들은 MS의 독점으로 손해를 입고 있다고 느끼지 못했습니다. 당시 여론조사(1999년 12월 포트레이트 오브 아메리카)에서 MS의 해체를 원한다는 응답은 12%에 불과했죠.그러나 결론은 MS의 완전한 패배였습니다. 1심 법원은 MS가 독점금지법을 반복적으로 위반했다며 회사를 2개로 분할하라고 명령합니다.당시 빌 게이츠 MS 회장은 이렇게 발끈했습니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들이 알고 있는 현실, 즉 우리 소프트웨어가 수백만 미국인이 PC를 더 저렴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왔다는 현실을 뒤집는 것입니다.” MS가 익스플로러를 윈도우에 공짜로 집어넣은 덕분에 대중들이 인터넷을 이용하게 됐으니, 처벌이 아닌 칭찬받을 일이란 주장입니다.하지만 미국 정부와 법원은 인터넷 시대 반독점 사건의 규칙이 바뀌었다고 봤습니다. 이젠 가격보다 혁신이 훨씬 중요하다고 본 거죠. 만약 MS의 반경쟁 행위가 넷스케이프를 방해하지 않았다면, 인터넷 소프트웨어 혁신이 훨씬 더 빠르게 진행되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쟁과 혁신을 방해하는 것이 당장 눈에 보이진 않더라도 결과적으로 소비자 피해(더 좋은 소프트웨어를 쓸 수도 있었는데 못 쓰게 됨)로 이어지죠. 2000년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스탠퍼드대 경제학자 로버트 홀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책의 목표는 차세대 넷스케이프, 즉 시장에 혁신을 가져올 새로운 진입자들에게 문을 열어주는 겁니다.”윈도우의 문이 열리다1심 판결 결과와 달리 MS는 쪼개지지 않았습니다. 2001년 항소심 재판부는 회사분할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요. 미 법무부는 분할 대신 MS가 경쟁사의 진입장벽을 대폭 낮추도록 하는 데 합의했습니다. PC 제조사가 MS 이외 기업의 소프트웨어도 자유롭게 탑재할 수 있도록 계약 내용을 바꾸게 했죠.이를 두고 맹탕 합의라는 비판이 이어졌습니다. “MS가 윈도우 라이선스에 대한 특별한 독점금지 면책권을 얻었다”(앤드류 친 노스캐롤라이나대 교수)고 꼬집었죠. MS의 지배적인 지위는 한동안 이어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평가가 달라졌습니다. 하버드 비즈니스스쿨의 데이비드 요피 교수는 독점금지 관련 강의를 이 MS 합의 판결로 시작합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합의 판결로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조치가 많았습니다. 그것은 어느 각도에서든 새로운 기업을 쫓는 MS의 능력을 제한했죠.”더 개방적인 환경이 도래하자 신기술과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갖춘 MS 경쟁사들이 수혜를 입었습니다. 대표적인 기업으로 두 곳이 꼽힙니다. 구글 그리고 애플입니다.구글과 애플의 아이러니2012년 구글 크롬이 MS 익스플로러를 제치고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1위에 오릅니다. 2008년 첫 출시 이후 불과 4년 만의 일이죠. 단순한 디자인과 빠른 속도, 강력한 보안. 고성능으로 무장한 크롬은 익스플로러를 무너뜨립니다. 이후 익스플로러는 급격히 쪼그라들었고, 결국 사망선고(지원 종료)를 받았죠.20여 년 전 MS 합의 판결이 없었다면 브라우저 시장의 이런 혁신은 가능했을까요. ‘차세대 넷스케이프’를 키우겠다면 반독점 소송의 목표가 현실이 된 셈입니다.애플도 마찬가지이죠. 애플의 미디어 플레이어 아이팟(iPod)은 2001년 처음 출시됐지만, 판매량이 크게 늘어난 건 윈도우 운영체제용 아이튠즈(iTunes) 버전이 나온 이후입니다. 뉴욕타임스는 “MS 합의판결이 없었다면 애플이 이런 성공을 거두고 궁극적으로 아이폰을 출시하는 건 어려웠을 것”이라고 설명하죠.아이러니한 건 26년 전 MS 반독점 소송 덕을 톡톡히 본 이들 기업이 이젠 미국 법무부의 반독점 소송의 대상이 됐다는 점입니다. 미 법무부는 이미 구글을 상대로 검색엔진 반독점 소송을 벌이고 있고요. 지난 21일엔 “애플이 스마트폰 시장에서 불법적으로 독점적 지위를 행사한다”며 애플에 소송을 제기했죠. 참고로 구글의 전 세계 검색 엔진 시장 점유율은 91%(2월 기준, 2위 빙은 3%)에 달합니다. 애플은 미국 내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이 64%(2위 삼성은 18%)이고요(전 세계적으로 애플 시장 점유율은 20%).구글과 애플 소송의 결과는 예측하기 너무 이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MS 사건과는 좀 다른 점이 여럿 있죠. 다만 분명한 건 이들 기업이 앞으로 법정에서 싸우느라 몇 년을 소비하게 될 거란 겁니다. 소송 비용이 많이들 뿐 아니라, 기업이 AI 혁신을 위해 치고 나가는 데 걸림돌이 될지도 모릅니다. 26년 전보다 지금은 기술의 발전 속도가 훨씬 빠르니까요.독점 깬 건 소송 아닌 기술 변화실제로 MS는 반독점 소송 이후 꽤 오랫동안 헤맸습니다. 빌 게이츠 창업자는 2019년에 이렇게 말했죠. “반독점 소송이 MS에 나쁜 것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소송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모바일 운영체제를 만드는 데 더 집중했을 거고, 오늘날 안드로이드 대신 윈도우 모바일을 사용하게 됐을 것입니다.”2월 현재 전 세계 전체 플랫폼(휴대폰·태블릿PC·데스크톱) 기준으로 운영체제 시장점유율 1위는 구글 안드로이드(43.74%)입니다. 2위 MS 윈도우(27.39%), 3위 애플 iOS(17.82%) 순이죠. 2010년 중반까지 점유율 90%대를 기록했던 윈도우가 왜 이렇게 쪼그라들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모바일 장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데스크톱이 컴퓨팅 세계에서 훨씬 덜 중요해졌기 때문이죠. 이제 PC는 개인용 컴퓨팅 세계의 중심이 아닙니다. 윈도우 독점은 무너졌다기보다 무의미해졌습니다.하지만 냉정하게 따져보자고요. MS의 모바일 전환이 늦은 게 정말 반독점 소송 탓일까요. 소송이 끝난 건 2001년, 애플 아이폰이 나온 건 2007년인데?글쎄요. 과거 인터뷰에서 MS 전 CEO 스티브 발머는 아이폰을 처음 봤을 때 반응을 이렇게 전했죠. “아이폰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휴대폰으로(499달러), 비즈니스 고객에게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키보드가 없어서 그다지 좋은 e-메일 기기가 아니기 때문이죠.” 스마트폰을 e-메일 기기 정도로 여기다니. MS가 왜 이 시장에서 그토록 뒤처졌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윈도우 모바일폰은 왜 실패했는가는 긴 이야기기 때문에 생략하고요. 요점은 이겁니다. (빌 게이츠 말과 달리) MS의 독점적 지위를 깨뜨린 건 소송이 아니라 기술의 변화(그리고 경영진의 오판)였습니다.아시다시피 MS의 그 이후 스토리는 해피엔딩입니다. 2014년 취임한 사티아 나델라 CEO는 종말을 향해 달려가던 MS를 기사회생시킵니다. 윈도우에 대한 집착의 고리를 끊고, 클라우드 컴퓨팅과 AI라는 새 영역을 과감히 개척해 나간 덕분입니다. MS는 더 이상 PC라는 플랫폼에 갇히지 않은 채 자유롭게 날아다닙니다.MS 사례는 현재 미국 정부로부터 반독점 소송에 걸려있는 다른 빅테크 기업들(애플·구글·아마존·메타)에도 메시지를 줍니다. 정부가 칼을 빼 들었다는 건 달리 보면 그 시장이 이미 포화상태란 신호라는 것, 다른 성장 동력을 빨리 찾아내는 게 진짜 살길이란 것 말이죠. By.딥다이브이번에 애플에 소송을 제기한 미국 법무부 조나단 캔터 차관의 발표문 중 눈에 띄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경쟁은 오늘날의 시장과 기술뿐만 아니라 내일의 혁신도 보호합니다.” MS 사건을 보면 무슨 뜻인지 알 것도 같군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미국 법무부가 애플에 대해 독점금지법 위반으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26년 전 마이크로소프트 반독점 소송이 다시 소환되고 있습니다. -윈도우로 PC 시대를 평정했던 MS. 웹 브라우저 시장까지 지배하기 위해 익스플로러를 윈도우에 공짜로 끼워팔았는데요. 이는 넷스케이프를 비롯한 경쟁사를 질식시키는 불법적인 독점 행위라는 게 법원 판결이었습니다. -이 판결 덕분에 윈도우가 경쟁사에도 열리면서 구글과 애플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이젠 구글과 애플이 다시 반독점 소송 대상이 됐으니, 세상사는 돌고 돕니다.*이 기사는 26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4-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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