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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는 집이 있느냐 없느냐,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6개의 계급이 있다고 한다. 노동운동가 출신 손낙구 씨가 2008년 출간한 ‘부동산 계급사회’에서 내놓은 이론이다. 제1계급은 다주택자, 제2계급은 자기 집에 사는 1주택자를 말한다. 제3계급은 자기 집을 세 내주고 남의 집에서 셋방살이하는 1주택자다. 제4계급은 현재 집은 없지만 잠재적인 구매력이 있는 내 집 마련 예비군들이다. 제5계급은 내 집 마련의 희망이 전혀 없이 셋방살이를 전전하는 사람들, 제6계급은 그나마 제대로 된 셋방에 살 형편도 안 돼서 지옥고(지하실 옥탑방 고시원)에 기거하는 사람들이다. 주거 문제에 대한 이해를 체계화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한 이 이론의 틀에서 보면 현 정부 부동산정책이 안고 있는 문제점이 잘 드러나 보인다. 부동산정책은 6개 계급의 이해를 조화시킬 수 있는 폭넓은 시야와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정책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다주택자 때리기에만 매몰돼서, 정책이 제2∼6계급에 미치는 풍선효과나 고통 전가(轉嫁)효과를 간과하고 있다. 집값이 오르는 책임을 다주택자에게 떠넘기는 정책은 정치적 효과는 있을지 모르지만 집값과 주거를 안정시키는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지난해 8·2대책 이후 서울 주택시장에서 나타난 2번의 폭등기를 자세히 뜯어보면 오히려 의도와는 정반대의 효과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첫 번째 폭등기는 작년 11월 하순부터 올해 2월 말까지다. 정부가 다주택자를 때리고 재건축을 옥죌수록 강남의 똘똘한 한 채는 더욱 빛을 발할 것이라는 기대심리가 상승 에너지를 폭발시켰다. 이 기간(약 14주) 동안 강남 4구의 아파트 값은 무려 7.6%나 올랐다. 두 번째 폭등기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용산·여의도 개발계획을 발표한 7월 10일부터 지금까지로, 강북도 ‘똘똘한 한 채’ 대열에 합류하려는 보상심리가 서울 전체 집값을 밀어 올렸다. 용산 성동 강북 마포 양천 영등포 동작 등 7개구는 서초구를 능가하는 상승률을 보였다. 편협한 다주택자 때리기 정책의 부작용이 풍선효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금 부담이 무주택자인 4∼6계급에 전가되는 효과도 있다. 정부는 작년 말 도입했던 다주택 임대사업자에 대한 세제 혜택 확대 조치를 이달 초 철회하고 9·13대책에서 다주택자들의 종부세율을 크게 올렸는데 늘어난 세금 부담이 세입자들에게 떠넘겨질 가능성이 적지 않다. 정부도 이런 전가효과의 존재를 충분히 알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다주택자를 투기꾼과 동일시하는 현 정부가 애초에 다주택자들에게 세금 혜택을 줬을 이유가 없다. 현 정부의 부동산정책이 잡으라는 집값은 못 잡고 전 계층에 상실감을 안기는 방향으로 꼬이게 된 원인은 서울 아파트 공급이 부족하다는 명백한 사실을 애써 부정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사철 등 일시적인 수요 증가 요인을 고려하면 주택 보급률이 110%는 돼야 적정 수준인데, 2015년 현재 서울의 주택 보급률은 96%에 불과하다. 더구나 전 국민의 80%가 아파트에서 살고 싶어 하는 취향을 고려하면, 아파트에 대한 수급의 괴리는 주택 보급률 수치로 나타나는 것보다 훨씬 크다. 정부는 지난주 9·13대책을 발표하면서 서울 지역은 아파트 공급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자인하고 21일 그린벨트 해제 등을 통한 공급 확대 방안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담길지는 아직 미지수여서 그 효과 또한 가늠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시장의 기대치에 못 미치는 정책이 내성(耐性)만 키운다는 사실만큼은 현 정부 출범 이후 1년 4개월여 간의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iam@donga.com}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대장성(한국의 기획재정부에 해당)은 전쟁비용을 마련하는 데 혈안이 됐다. 소득세와 주세 등 기존 세금을 닥치는 대로 늘렸지만, 그래도 재원이 부족하자 이듬해인 1905년 상속세를 도입했다. 당초에는 임시로 도입한 제도였지만 러시아가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자 고정적인 세목(稅目)으로 격상시켰다. 한국에 상속세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33년이다. 조선총독부가 도입 주체였으니 군국주의 일본의 제도적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시작이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의 상속세 제도는 일본과 흡사한 점이 많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상속세율이 높기로 세계 1위를 다툰다. 최고세율은 일본이 55%, 한국이 50%다. 하지만 한국은 대주주 경영권 승계에 대해서는 최고세율이 65%까지 치솟기 때문에 난형난제다. 흔히 상속세와 관련해서는 혈연의식이 약하고 기부문화가 뿌리를 내린 서양에서는 조세저항이 약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기 쉬운데 현실은 반대다. 영국의 경제전문 잡지 이코노미스트 2017년 11월 23일자에 따르면 영국인과 미국인들은 소득의 많고 적음을 불문하고 상속세를 공평성이 가장 결여된 세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 의회가 지난해 말 상속세를 대폭 삭감하는 법안을 가결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서양에서는 상속세를 폐지하는 나라도 많다. 1970년대에는 캐나다와 호주가, 1980년대에는 뉴질랜드가, 2000년 이후에는 포르투갈 스웨덴 오스트리아 노르웨이가 상속세를 없앴다. 세계에서 유독 높은 세율과 경직된 구조를 가진 상속세는 앞으로 우리 경제에 큰 짐이 될 가능성이 높다. 기업 현장에서 과중한 상속·증여세 부담 때문에 매각이나 폐업을 고려하는 경영자가 적지 않다. 물론 우리나라도 외국처럼 가업 승계를 하면 상속세를 깎아 주는 제도를 1997년 도입해서 운영하고 있지만 더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 중소기업계의 목소리다. 여당 일각에서는 가업 승계에 대한 상속세 감면을 축소하려는 움직임도 있는데, 이는 가뜩이나 좋지 않은 일자리 사정을 급속히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 제조업은 이 분야에서 일자리가 1만 명 감소하면 다른 산업에서 일자리 1만3700명이 연쇄적으로 줄어들게 만드는 파급효과를 갖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높은 세율과 함께 동전의 양면 관계인 상속세와 증여세의 구조도 문제다. 영국에서는 죽어서 물려주는 상속세보다 살아있을 때 물려주는 증여세의 부담이 훨씬 작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일본은 물려주는 금액이 같으면 상속세나 증여세나 큰 차이가 없다. 이 같은 구조 때문에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고령자들이 자신의 사망 시점까지 재산을 꼭꼭 끌어안고 있게 되고, 결과적으로 투자와 소비의 활력이 떨어지는 부작용이 생겨나게 된다. 일본에서는 치매환자들이 갖고 있는 금융자산이 지난해 기준으로 143조 엔(약 1443조 원)에 이르러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일본에서는 또한 고령자들을 상대로 한 보이스피싱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젊은 범죄자들이 경찰에서 “나는 세대 간 부의 이전에 기여하는 사람”이라고 큰소리를 치는 일이 적지 않다고 한다. 황당한 궤변이지만 부(富)가 고령 세대에서 젊은 세대로 이전되지 않는 데 대한 젊은층의 반감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예다. 우리나라는 고령화 측면에서 빠른 속도로 일본의 뒤를 쫓고 있다. 일본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상속·증여세제를 손질하지 않으면 한국도 비슷한 문제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iam@donga.com}
1980년대 중반 경제 관료로 입문해 슈퍼 엘리트 코스를 걸어온 A 씨를 최근 사석에서 만났다. 좌중의 화제가 최저임금과 일자리 문제로 향하자, A 씨는 갑자기 자신의 아내 얘기를 꺼냈다. 30년 넘게 경제 관료로 일하는 동안 그의 부인이 경제정책을 언급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올해 들어 변화가 생겼다. A 씨가 집에서 TV를 보고 있으면 아내가 슬그머니 다가와서 이런 말을 건넨다는 것이다. “최저임금이 너무 올라서 경제가 큰일이라는 말을 당신한테 꼭 좀 전해 달라는 제 친구들이 많아요.” 지난해 월평균 31만 명 수준이던 취업자 증가 수가 올해 2월부터 급감하더니 7월에는 5000명 선까지 떨어졌다. 30만5000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구걸’ 논란 속에 작년 말부터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신세계 등 대기업을 돌며 약속받은 일자리가 월평균으로 환산하면 4306개다. 5개 그룹이 정부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비상한 결심으로 한 달 동안 만들어낼 수 있는 일자리의 70배가 7월 한 달 동안 사라진 셈이다. 어떤 사람은 대기업들이 만들어내는 양질의 일자리와 음식점 종업원이나 편의점 아르바이트 자리를 어떻게 단순 비교할 수 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생계를 유지해야 하고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절박함의 무게를 따지면 식당에서 잡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대기업의 번듯한 정규직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 취업자 증가 수가 글로벌 금융위기 때 수준으로 줄어들게 된 원인은 대부분 국민이 피부로 체감하고 있다. 단골 식당이나 집 근처 편의점만 가 봐도 모를 수가 없다. 친숙하게 눈인사를 주고받던 ‘식당 이모님’이 언제부터인가 안 보이기 시작했고, 주인한테 물어보면 “최저임금 때문에 월급 주기 힘들어서 내보냈다”는 한숨 섞인 대답이 바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심각한 고용위기의 원인을 모르는 사람들은 청와대와 경제부처, 여당에 몸담고 있는 이들뿐이다. 진짜 몰라서 모르는 것이 아니다. 소득주도성장론에 생채기가 날까봐서 현실에 눈을 감은 채 이달은 인구구조 탓, 다음 달은 날씨 탓, 그 다음 달은 공무원시험 탓, 또 그 다음 달은 자동화 탓을 하면서 군색한 핑계 돌려 막기를 하고 있다. 당정청의 이 같은 모습은 충격적인 7월 고용동향이 발표된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17일에는 김 부총리를 비롯한 장관들과 청와대 관계자들이 모여 긴급 경제현안 간담회를 열었으나 최저임금 인상과 관련해서는 “영향이 일부 업종과 계층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좀더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는 데 그쳤다. 우리나라의 경제활동에는 5000만 국민 모두가 참여한다. 하나의 경제현상에도 환율과 금리 등 수백 가지 외생 변수가 작용하고, 경제주체의 심리적 동기까지 가세한다. 그래서 올바른 진단 없이, 올바른 처방이 나올 가능성은 제로(0)에 가깝다. 로또 복권을 사는 타이밍은 늦을수록 좋다고 한다. 길을 걷다가 죽을 확률이 로또에 당첨될 확률보다 높기 때문에, 가능한 한 막판에 사야 살아서 당첨금을 받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만큼 희박하게 벌어지는 일이라는 뜻이다. 정확한 원인 진단 없이 내놓은 고용대책이 일자리를 늘려주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어쩌면 로또를 사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합리적인 선택일지도 모른다. 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iam@donga.com}
영국의 위대한 지도자 윈스턴 처칠은 민간기업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 즉 기업관(觀)을 3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어떤 사람들은 기업을 쏴 죽여야 하는 맹수로 간주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기업이 끊임없이 우유를 짜낼 수 있는 젖소라고 생각한다. 오로지 현명한 사람들만이 기업은 수레를 끄는 말이라는 사실을 안다.” 처칠이 활동했던 때로부터 반세기가 훨씬 더 지난 지금 민간기업의 역할이나 위상은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기업은 2009년 기준으로 전 세계 인구의 81%에게 일자리를 제공했으며 총생산량의 94%를 창출했다. 세계 10대 기업의 총매출을 합하면 경제 규모가 작은 나라 100개의 국내총생산(GDP)을 전부 합친 것보다 많다. 기업이 경제에서 맡고 있는 역할이 이처럼 크기 때문에, 경제 정책의 성과는 정부가 기업 정책을 얼마나 잘하는지에 따라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정부가 기업 정책을 잘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기업관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 정부가 경제와 민생 분야에서 낙제점을 받고 있는 가장 큰 이유도 경제 정책의 첫 단추에 해당하는 기업관이 뒤틀려 있기 때문이다.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달 한 포럼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삼성이 글로벌 1위 기업이 된 것은 1∼3차 협력업체들을 쥐어짠 결과다. 삼성이 작년에 60조 원의 순이익을 냈는데 여기서 20조 원만 풀면 200만 명한테 1000만 원씩 줄 수 있다.” 처칠의 분류에 따르면 홍 원내대표의 기업관은 맹수론과 젖소론이 뒤섞인 것이다. 현명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기업관과는 거리가 멀다. 사실 정치인의 말이라는 게 때와 장소에 따라 절반쯤 깎아서 듣기도 하고 더해서 듣기도 해야 하는 것이어서 홍 원내대표의 말에 지나치게 시비를 걸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정작 걱정스러운 대목은 현 정부가 내걸고 있는 핵심 정책들이 ‘현명하지 못한’ 기업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참여연대 출신의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주도하고 있는 경제민주화 정책들은 대기업이라는 존재를 ‘을(乙)을 착취하고 압박하는 부당한 갑(甲)’으로 상정한다. 이 틀 안에서 보면 기업, 특히 대기업은 한시도 눈을 떼선 안 되는 감시와 개혁의 대상이다. 이 맹수(대기업)를 때려잡으려면 때때로 엘리엇과 같은 해외 투기자본의 편을 들어주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국민연금이 도입하기로 한 스튜어드십 코드도 제도 자체보다는, 기저에 깔린 이런 발상과 정서가 위험한 것이다. 경제민주화 정책이 맹수론적 기업관에서 나온 것이라면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정책은 젖소론적 기업관 위에 서 있다. 노동생산성이 떨어지거나 말거나, 2년간 29%라는 인상 폭이 과하거나 말거나 정부가 인상률을 결정하면 기업은 군소리 없이 따라야 한다. ‘대기업 젖소’는 그래도 견딜 만하다.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의 아우성은 마른 젖을 쥐여짜이는 고통에서 나오는 비명이다. 전 세계 어디를 둘러봐도 경제민주화 정책이나 최저임금 파격 인상을 앞세운 소득주도 성장론처럼 잘못된 기업관에서 파생한 정책으로 경제가 살아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경제가 잘 돌아가고 민생이 윤택한 나라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세금 부담을 낮추고 규제를 풀어 기업이 마음껏 뛸 수 있게 해주는 곳들이다. 경제가 움직이는 원리는 단순하다. 말이 가면 수레도 가고, 말이 멈추면 수레도 멈춘다. 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iam@donga.com}
벼랑 끝에 간신히 발끝을 걸치고 서 있는 사람을 밀어서 떨어뜨리는 데는 많은 힘이 필요하지 않다. 손가락 하나로도 충분하다. 오랜 불경기와 씨름하면서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상당수 중소기업과 영세자영업자들에게는 현 정부의 최저임금 정책이 바로 그 손가락에 해당한다. 사용자 측이라고 해서 최저임금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최저임금 못 올려주니 차라리 나를 잡아가라”는 아우성이 나오는 이유는 감당 능력을 벗어난, 가파른 인상 속도와 경직된 결정 구조 때문이다. 한국의 최저임금이 얼마나 급격하게 올랐는지는 미국 일본 등과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한국의 최저임금은 2010년 4110원에서 2018년 7530원으로 83.2% 올랐다. 내년 인상률을 감안하면 10년 만에 꼬박 2배가 되는 셈이다. 이에 비해 미국의 연방최저임금은 2009년 이후 줄곧 7.25달러로 제자리걸음을 하는 중이다. 연방최저임금보다 높은 최저임금을 적용하는 주(州)도 많지만, 연방 기준을 그대로 따르는 주도 펜실베이니아 등 22개에 이른다. 일본의 최저임금은 2010년 713엔에서 2018년 848엔으로 올랐다. 인상률이 한국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단순 환율로 계산하면 한국의 최저임금은 2018년 현재 일본의 88% 수준이지만, 구매력을 감안한 환율로는 이미 일본을 추월한 상태다. 최저임금이 아무리 가파르게 올라도 경제가 미국이나 일본만큼 좋아졌다면 문제 될 것은 없다. 현실은 정반대이기 때문에 중소상공인들 사이에서 궁여지책으로 나오는 요구가 업종과 기업 규모에 따라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해 달라는 것이다. 주요 선진국 가운데 한국처럼 최저임금 제도를 획일적, 경직적으로 운영하는 나라는 없다. 미국은 많은 예외를 둬서 제도를 유연하게 운영한다. 일례로 소규모 신문사나 농업 분야의 경우 경영난을 감안해 최저임금을 적용하지 않는다. 신문배달원의 경우도 예외다. 10대들의 일자리가 줄어들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작은 배려다. 네덜란드는 최저임금을 15, 16, 17, 18, 19, 20, 21, 22세 이상으로 나눠서 연령별로 차등 적용한다. 일본은 각 지역마다 생계비가 다른 점을 감안해 47개 광역지자체가 제각각 최저임금을 결정한다. 여기에 병행해서 특정 지역 내 특정 산업은 별도의 최저임금(특정최저임금)을 설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현재 233개의 특정최저임금이 존재한다. 주요 선진국 중 경제구조가 우리와 가장 유사한 일본이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하는 것을 보면 한국이 못 할 까닭이 없다. 노무현 정부 시절이던 2004년 11월 경영난에 시달리던 음식점 업주들이 서울 여의도 한강둔치에 모여 솥단지 400여 개를 내던지며 항의시위를 벌인 일이 있다. 여기에서 싹이 보인 자영업 문제는 노무현 정부가 가장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난제였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최저임금을 둘러싼 자영업자들의 반발이 가장 큰 원인이 돼서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이 취임 후 가장 큰 폭으로 하락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자영업 문제가 현 정부에도 최대 난제 중의 하나가 될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정부가 최저임금 차등화 문제에 대해서는 최저임금위원회 뒤에 숨어서 입을 다물고 있으면서 변죽을 울리는 지원책만 내놔서는 제대로 된 해법이 나오지 않는다. 정부가 지금이라도 진지한 대화의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 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iam@donga.com}
바이오제약 산업에는 ‘이룸(Eroom)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신약을 개발하는 데 드는 비용이 9년마다 2배씩 증가한다는 법칙이다. 개발비가 급증하다 보니 바이오신약의 가격은 상식을 넘어서는 수준이다. 미국에서 관절염치료제 엔브렐의 1년 약값은 2000만 원, C형간염치료제 소발디의 12주 치료프로그램 약값은 9000만 원에 이른다고 한다. 이룸의 법칙이 지배하는 신약 시장은, 축적된 브랜드력이 없는 한국 기업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다. 하지만 이 법칙이 거꾸로 한국과 같은 후발 주자에게 ‘기회의 창’을 열어주는 측면이 있다. 바이오신약이 비싸다 보니 가격이 싼 바이오시밀러(복제약) 시장이 커지고, 분업화가 진행되면서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CMO) 시장도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이 시장은 우수한 인력과 정밀한 공정기술이 핵심 경쟁력이어서 반도체나 화학 업종처럼 한국 기업들의 강점이 빛을 발할 수 있는 분야다. 삼성은 국내 대기업 중 바이오산업의 가능성을 비교적 일찍 간파하고 과감한 투자를 해왔다. 2011년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설립해 CMO에 뛰어들었고, 2012년 삼성바이오로직스와 미국의 바이오젠 합작 형식으로 삼성바이오에피스를 설립해 바이오시밀러에 진출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경우 시험가동 중인 3공장이 본격 가동되면 생산 규모에서 스위스의 론자 등을 제치고 세계 1위에 등극하게 된다. 삼성바이오의 미래에, 시장이 거는 기대도 크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시가총액은 지난주 종가 기준 27조1277억 원으로 삼성물산이나 삼성생명을 제치고 그룹 내 2위다. 삼성이 어렵게 개척한 바이오 사업은 현재 비즈니스 외적인 곳에서 암초를 만나 성패의 기로에 서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바이오젠의 콜옵션(특정 조건에 주식을 살 수 있는 권리) 행사 가능성을 이유로 자회사인 삼성바이오에피스에 대한 회계처리 기준을 변경한 데 대해 금융감독원이 상위기관인 금융위원회에 고의적인 분식회계라며 제재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고의라는 결론이 나면 최악의 경우 상장 폐지로까지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금융위는 고의가 아닌 과실에 무게를 두고 있는 분위기다. 당초 삼성바이오로직스의 회계처리에 대해서는 감사를 맡은 회계법인들이 적정 의견을 냈고, 한국공인회계사회도 2016년 10월 감리를 했으나 문제가 없다고 결론을 낸 바 있다. 더구나 핵심 쟁점 중 하나였던 바이오젠의 콜옵션 행사 가능성은, 바이오젠이 지난달 실제로 콜옵션을 행사하면서 일단락이 됐다. 그럼에도 금융위가 이례적으로 시간을 끌면서 고심하는 이유는 일부 시민단체의 압박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처리 논란은 현 정부 들어 권력의 정점에 선 참여연대가 주도해 왔고, 일부 시민단체가 “감리위원 중에서 분식회계가 아니라고 표결하거나 상장 폐지에 준하는 징계 요구를 하지 않는 감리위원은 처벌해 달라”고 검찰에 고발장까지 내놓는 상황이다. 전방위적인 ‘재벌 때리기’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금융위가 느낄 압박감은 쉽게 짐작이 간다. 하지만 금융위는 자신들의 결정이 삼성뿐 아니라 한국 바이오 산업 전체의 신뢰성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고급 일자리의 보고(寶庫)이자, 반도체를 능가하는 미래 먹거리가 될 수 있는 바이오 산업이 정치 외풍에 휩쓸려 싹도 틔우지 못하고 시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 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iam@donga.com}
이달 10일 북-미 정상회담을 위해 싱가포르를 찾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전용기가 착륙한 곳은 파야 르바르 공군기지다. 싱가포르는 여기 외에도 공군기지를 3곳이나 갖고 있다. 공군력은 F-15SG 등 4세대 전투기 100대를 운용하는 등 동남아시아에서 단연 최강이다. 국토 면적이 서울과 비슷한 작은 나라, 싱가포르가 이처럼 공군력에 엄청난 투자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싱가포르의 군사전략을 일명 독(毒)새우 전략이라고 한다. 독새우는 ‘나를 잡아먹으면 내 몸 안에 있는 맹독 때문에 너도 같이 죽는다’는 경고를 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한다. 싱가포르가 오늘날 눈부신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은 독새우 전략에 기초한, 튼튼한 안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국가의 안보에 해당하는 것이 기업으로 치면 경영권이다. 경영권이 흔들리는 기업은 안보가 불안한 국가와 다르지 않다. 경영권이 불안하면 기업은 투자와 고용 등 일상적인 경영활동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온 것이 포이즌필(poison pill)이라는 경영권 방어제도다. 포이즌필은 거대 투기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M&A) 공격이 있을 경우 이사회가 기존 주주들에게 주식을 싼값에 인수할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할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적대적 M&A를 시도하는 측의 부담을 늘려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제도이다. 미국과 일본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보편적인 경영권 방어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포이즌필을 도입하는 것은 우리 기업들의 숙원이다. 이 제도는 2010년 국무회의를 통과하는 등 시행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국회에서 무산된 적이 있는데, 산업계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도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지난달에도 상장회사협의회와 코스닥협회가 호소문을 냈다. 정부가 기업들의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한국 기업을 먹잇감으로 삼는 외국 투기자본의 공세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대표적인 행동주의펀드인 엘리엇매니지먼트는 최근 현대자동차그룹이 추진한 지배구조 개편을 무산시켰고,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보았다며 한국 정부를 상대로 7000억 원대 소송을 진행 중이다. 엘리엇 같은 투기자본은 한 국가를 부도상태로 몰아넣을 만큼 막강한 힘을 가진 괴물이 된 지 오래다. 둘째, 외국 투기자본의 공세로부터 경영권을 지켜줄 안전판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해온 국민연금공단마저 기업의 내실 있는 발전보다는 단기적인 주주이익을 우선시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특히 국민연금이 예정대로 7월부터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 지침)를 도입하면 엘리엇 같은 투기자본의 공세에 날개를 달아줄 가능성이 크다. 스스로의 손발을 묶어 행동주의펀드 등과 ‘코드 맞추기’를 하겠다는 것이 스튜어드십코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현재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등을 포함해 290개에 이르는 국내 알짜 상장사의 지분을 5% 이상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수 기업이 경영권 위협 공포에 떨어야 하는 상황이다. 선진국에서도 광범하게 활용되는 포이즌필은 기업에 대한 특혜가 아니다. 삼키려는 물고기에게는 치명적이지만 그 밖의 다른 물고기에게는 아무 해를 끼치지 않는, 독새우의 독과 같은 존재이다. 우리 기업들이 해외 투기자본들이 가장 만만하게 보는 먹잇감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최소한의 방어용 독을 품을 수 있는 자유를 줘야 한다. 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iam@donga.com}
명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국내 5대 그룹 계열사를 다닌 K는 40대 초반에 명예퇴직을 했다. 직장에서 크게 출세할 전망이 안 보이고 명예퇴직금 3억 원을 손에 쥘 수 있어서 한 선택이었다. K는 정보기술(IT) 분야에서 오래 일한 경력을 살려 조그만 사무실에 PC 1대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작은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사업이라는 게 막연히 생각했던 것만큼 녹록지 않았다. 실적이라고 할 만한 게 거의 없이, 빈 사무실만 꾸려가다가 언제인지도 모르게 사업을 접었다. 내 친구 K와 오랜만에 소주잔을 기울인 것은 작년 이맘때쯤이다. K는 술이 몇 잔 들어가자 이렇게 말했다. “반(半)백수 생활을 몇 년 해 보니, 동네의 조그만 구멍가게 주인이건 노점상이건 스스로 벌어서 가족을 먹여 살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존경할 만한 대상인지 알겠더라.” K의 진지한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K의 말처럼 한 집 건너 한 집꼴로 커피숍, 치킨집, 빵집이 즐비한 한국에서 자영업으로 가족을 먹여 살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통계를 보면 창업해서 5년을 버티는 곳은 10곳 중 3곳에 불과하다. 7곳은 5년 안에 문을 닫는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뼈 빠지게 일해서 번 돈의 대부분은 임차료와 원료비로 나간다. 장사가 안 돼도 거르는 법이 없는 세금 공과금 신용카드 수수료, 한 달이 멀다 하고 오르는 대출이자까지 내고 나면 살아남기만 해도 잘한 것이다. 장사가 조금이라도 된다 싶으면 이번에는 건물주가 나타나서 “임대료 올려줄래? 짐 싸서 나갈래?”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정부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영업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정책을 줄줄이 쏟아내는 중이다. 일례로 금융권은 3월 말부터 대출 건전성 강화를 명분으로 자영업자 대출을 바짝 조이고 있다. 이것만으로 부족했던지 금융당국과 은행이 태스크포스를 꾸려 개인사업자 대출에 대한 점검을 강화하기 위한 검토 작업을 하고 있다. 말이 좋아서 ‘점검 강화’이지, 돈 떼일 위험이 높은 자영업자들에게는 대출을 덜 해주고 이자는 더 받으려는 준비운동이다. 금리가 1%포인트 오르면 자영업자 부도 확률은 3배가 높아지는 경제구조를 가진 나라에서, 학식 있는 관료들과 금융 엘리트들이 지금 벌이고 있는 일이다. 최저임금 인상은 어떤가. 인건비 부담이 늘어난 것은 둘째 치고 자영업자에 대한 정부의 인식이 가슴을 후벼 판다. “최저임금 인상의 긍정적 효과가 90%”라는 청와대의 황당한 현실 인식은, 560만 자영업자를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그림자 인간’으로 보고 있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올 초부터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했지만, 누구 하나 귀 기울이는 당국자가 없다. 왜 장하성 정책실장을 비롯한 청와대 참모들의 귀에는 자영업자들의 비명이 들리지 않는 것일까. 내 친구 K에게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 같다. “면면을 봐.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순탄하게 명문 대학을 졸업했고, 65세까지 정년이 보장된 교수직에, 가진 재산도 노후 걱정 하지 않을 만큼 넉넉한 사람들이잖아. 그들은 본인들이 경제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경제란 게 책상머리에서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이러다가 평생 모은 퇴직금을 날리지 않을까’, ‘잘못해서 가족을 굶기지 않을까’, ‘은행에 찾아가 무릎이라도 꿇으면 직원들에게 줄 월급을 마련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안 해본 사람들은 모르는 거야.” 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iam@donga.com}
최근 SNS에 돌아다니는 유머 중에 “핑계로 성공한 사람은 김건모밖에 없다”는 말이 있다. 가수 김건모는 ‘핑계’라는 노래가 히트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지만, 세상만사 어느 경우에도 핑계를 대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기의 실책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같은 실패를 두 번 세 번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일자리 창출 부진이나 소득분배구조 악화의 원인을 인구구조의 탓으로 돌리려는 최근 경제 관료들의 움직임은 우려스럽다. 이달 20일에는 청와대 일자리수석이 취업자 증가세가 둔화된 원인을 인구 감소세가 빠르게 진행된 탓으로 돌렸고, 24일에는 기획재정부 경제정책국장이 올해 1분기(1∼3월) 하위 20% 가구의 소득이 8% 줄어든 이유가 인구구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불과 1년 사이에 인구구조에 지각변동이 온 것도 아닌데 실적이 부진한 원인을 여기에서 찾는 것은 핑계를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 최근 우리나라의 고용과 분배 사정이 악화된 것은 산업구조나 체력에 맞지 않게 최저임금을 너무 가파르게 올린 것이 원인이다. 한국은 선진국에 비해 치킨집 사장과 편의점 점주 등 영세 자영업자의 비율이 유독 높은 나라다. 가파르게 오르는 임금을 감당할 수 없는 영세 자영업자들은 종업원을 해고하거나, 아예 문을 닫는 것이 요즘 숫자로 나타나고 있는 경제현상이다. 자명한 이유를 제쳐두고 인구구조를 들먹이는 경제 관료들의 행동에는 문재인노믹스의 간판 경제정책인 소득주도성장에 흠집을 내지 않으려는 동기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해외의 유사한 정책과 비교할 때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임금인상을 통해 경제성장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일본의 아베노믹스도 소득주도성장과 유사한 점이 많은데, 성과 면에서는 큰 차이를 보인다. 일본의 노사는 매년 봄 교섭을 통해 한 해의 임금인상률을 정하는 춘투(춘계생활투쟁) 전통이 있는데, 2014년부터 노조들은 굳이 힘들게 투쟁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노조를 대신해서 기업들에 임금을 올리도록 압박하는 이른바 ‘관제(官製) 춘투’를 해왔기 때문이다. 아베노믹스 덕분에 일본은 2012년 12월 이후 지금까지 역사상 두 번째로 긴 호황을 구가하고 있다. 최장(最長) 경기상승 기록까지 갈아 치울 기세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취업 걱정을 해야 하는 한국 대학생들과 달리 일본 대학생들은 사실상 ‘전원(全員) 취업시대’에 살고 있다. 아베노믹스에 비해 문재인노믹스가 성과가 미흡한 원인은 무엇일까. 두 노믹스의 성패를 가른 근본적인 차이는 정책 믹스(mix)에 있다. 아베 총리는 임금 인상을 압박하는 ‘채찍전략’과 함께 기업들의 법인세 부담을 과감하게 줄여주는 ‘당근전략’을 함께 구사하고 있다. 그러나 문재인노믹스는 기업에 대해 당근 없는 채찍으로 일관하고 있다. 지난해 법인세 최고세율을 22%에서 25%로 올리고 기업의 연구개발에 주는 세제 혜택까지도 줄였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해서인지 검찰 공정거래위원회 금융감독원 등 사정기관들이 총동원돼서 기업들의 사소한 흠집까지도 샅샅이 뒤지고 있다. 문재인노믹스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최저임금 인상이 우리 경제에 2차 충격을 주지 않도록 속도 조절을 해야 한다. 동시에 채찍 일변도의 기업 정책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미물인 나귀조차도 채찍만으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iam@donga.com}
행정고시 출신으로 과거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A 씨는 책임 회피의 달인으로 통한다. 그는 나중에 탈이 날 소지가 있는 일은 하위기관에 절대 문서로 지시하지 않았다. 전화로 한 다음, 그 내용을 건의 형식으로 정리해서 팩스로 보내게 했다. 우리 공직사회에는 이와 비슷한 ‘면피용 꼼수’가 다양하게 존재해 왔다. 정부기관의 위력을 행사해 초법적 조치를 강요하는 창구지도나, 거수기 역할을 하는 각종 위원회 등이 대표적인 수단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최고의 한 수는 규제 대상의 팔을 비틀되 겉으로는 자율이나 자발 포장을 씌우는 것이라고 한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지난주 10대 그룹 경영자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 매각 등을 포함한 지배구조 조정을 주문했다. 그는 “결정은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해야 한다”며 자율을 앞세웠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김 위원장보다 앞서 삼성전자 지분 처리 방안을 ‘자발적으로’ 마련하라고 삼성을 두 차례나 압박했다.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 보유는 과연 문제가 있는 것일까.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주식을 매입한 것은 1980년 이전이다. 취득원가는 5690억 원이었는데, 삼성전자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주식가치가 27조669억 원(2017년 말 현재 시가 기준)으로 불어났다. 실패한 투자였으면 아무 문제가 안 됐을 텐데, 역설적으로 성공한 투자여서 일각에 시빗거리를 제공했다. 보험업법에 따르면 삼성생명은 삼성전자의 주식을 총자산의 3%를 초과해 보유할 수 없지만 취득원가 기준으로 0.2%에 불과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시가로 치면 9.5%가 되지만 이렇게 할 이유가 없다. 3% 초과 금지 조항은 부실 계열사에 대한 대규모 자금 지원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입법 취지상 취득원가를 적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시가를 적용하면 고객 돈을 부실 계열사에 투자하는 것은 괜찮고 우량 계열사에 투자하면 안 된다는 황당한 모순이 생긴다. 금융위원회도 이런 전후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줄곧 시가가 아닌 취득원가를 적용해 왔다. 최 위원장은 지분 매각 논리 중 하나로 ‘자산 편중 리스크’를 들었다. 풀어서 말하면 삼성전자가 망하면 주주나 계약자들이 피해를 보게 되니 주식을 팔라는 이야기다. 국제 신용평가회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매긴 삼성전자의 신용등급은 AA―로 일본과 중국의 국가신용등급보다 한 단계 높다. 일본 정부나 중국 정부가 파산할 가능성보다 삼성전자가 파산할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 초우량자산을 팔아치우고 B, C급 주식으로 다양하게 포트폴리오를 짜는 것이 좋은 투자라고 정말로 생각하는지 최 위원장에게 묻고 싶다.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 매각에는 또 다른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 20조 원이 넘는 매도 물량이 주식시장에 쏟아지면 공급 과다로 인한 주가 폭락 등 엄청난 후폭풍이 따를 수밖에 없다. 국민들의 노후자금을 삼성전자 주식에 23조 원 이상 묻어둔 국민연금도 안녕하지 못할 것이다. 삼성의 자율과 자발을 강조하는 정부 당국자들의 뇌리에 ‘이런 부작용에 대한 책임을 나는 지고 싶지 않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 자기책임이라면, 행정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권한과 책임의 조화다. 자율과 자발로 포장된 ‘팔 비틀기 행정’은 시급히 사라져야 할 후진(後進) 행정의 유산이다. 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iam@donga.com}
이달 10일이면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지 꼬박 1년이 된다. 참여정부 2기에 해당하는 문재인 정부는 경제정책 기조 등의 측면에서 노무현 정부와 공통점이 많지만 경제 환경이나 성과는 크게 다른 것 같다. 2003년 2월 취임한 노 전 대통령은 자칫 금융시스템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 LG카드 사태와 씨름하면서 집권 첫해를 보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을 둘러싼 거시경제 환경은 좋은 편이다. 반도체 ‘슈퍼 호황’ 등에 힘입어 코스피 상장 기업들(12월 결산법인 기준)은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순이익 100조 원 시대를 열었다. 돈을 많이 번 기업들이 예상보다 많은 세금을 낸 덕분에 나라 곳간은 차고 넘친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대응력도 참여정부 때보다 나아진 모습이다. 참여정부가 냉탕 온탕을 오가면서 5년 내내 부동산에 끌려다녔던 반면 현 정부는 1년 만에 집값의 미친 상승세를 일단 꺾어 놨다. 너무 노동계에 편향돼 있다는 문제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감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금호타이어 노조가 해외 매각을 무산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문 대통령이 “절대 정치적 논리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 것”이라고 메시지를 던져 제동을 건 것이 비근한 예다. 적시에 나온 이 메시지는 한국GM의 노조가 정상화 협상의 판을 깨지 않도록 하는 데도 일조했다. 문제는 자영업자와 실업자, 중소기업 등 민생 분야로 눈을 돌리면 닮은꼴이 펼쳐진다는 점이다. 문 대통령이 청와대에 일자리 상황판까지 갖다 놓고 챙기고 있지만 3월 실업자 수는 18년 만에 최고 수치까지 치솟았다. 지난해 한국 경제는 3.1%의 비교적 견고한 성장세를 보였지만 영세자영업자가 몰려 있는 도소매 및 음식숙박업은 0%대의 미미한 성장률을 보였다. 역설적인 사실은 선의(善意)에서 나온 문재인 정부의 정책들이 민생고를 가중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최저임금이 급등하면서 채산성을 맞출 수 없게 된 식당이나 소매점들이 폐업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집값을 잡기 위해 도입한 대출규제정책은 신용도가 낮은 영세자영업자들을 사채시장으로 내몰고 있다. 집을 담보로 맡기고 사업자금을 빌리는 것이 많은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주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기업 때리기로 변질된 경제민주화 정책들은 기업 하려는 의욕을 꺾어 청년들의 일자리를 줄이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자부심이 매우 강한 성격이었다. 경제적 공과에 대한 비판이 나오면 정책의 미흡한 점을 성찰하기보다 평가에 인색한 언론을 탓했다. 하지만 그랬던 노 전 대통령도 한없이 약한 모습을 보였던 말이 민생이다. 노 전 대통령은 집권 4년 차 신년 특별연설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민생이라는 말은 송곳이다. 지난 4년 동안 가슴을 아프게 찌르고 있다.” 자신만만했던 노 전 대통령조차도 실패를 뼈저리게 자인했을 만큼 민생정책은 어렵다. 노 전 대통령은 집권 초기 코드가 맞는 전문가들을 동원해 로드맵을 253개나 만들었지만 민생을 개선하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명분이 거창하고, 포장이 아름다운 정책 일수록 민생에는 거꾸로 독이 되는 경우가 많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최저임금 인상이나 대출규제, 경제민주화는 시대 흐름상 필요한 정책들이다. 다만 이런 정책들이 민생에 주름살을 주고, 문 대통령을 찌르는 송곳이 되지 않게 하려면 세심한 완급 조절과 선제적인 부작용 예방 조치가 필요하다. 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iam@donga.com}
1980년대 중반에 있었던 일로 식품업계에 잘 알려진 이야기다. 국내 간장제조업체의 중간간부였던 A는 맛이 좋기로 유명한 일본의 Y간장㈜이 메주를 발효시킬 때 어떤 곰팡이를 쓰는지 궁금해서 현지 견학을 갔다. Y간장㈜이 영업기밀을 쉽게 알려줄 리 만무했다. A는 몇 번에 걸쳐 통사정을 한 끝에 메주 발효실에 잠깐 들어가 볼 기회를 얻었다. A는 발효실에서 나오자마자 코를 풀었고, 코 묻은 휴지를 곱게 싸서 한국으로 가져왔다. 휴지에는 발효실 공기 중에 떠다니던 곰팡이 포자가 묻어 있었고, A는 분석 작업 끝에 Y간장㈜이 쓰는 곰팡이를 알아낼 수 있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영업비밀이나 지식재산권에 대한 개념이 느슨한 시절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지금은 시대가 완전히 바뀌었다. 하지만 공기처럼 사소한 것에도 중요한 영업비밀이 담겨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앞선 기술이 집적된 시설을 꼽으라고 한다면 삼성전자 평택공장도 유력한 후보일 것이다. 이곳에서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중 최첨단인 4세대 3차원(3D) V낸드플래시가 생산된다. 핵심 기술이 집약된 만큼 이곳의 보안시스템과 절차는 철통같다. 임직원들조차도 휴대용 저장장치는 물론 종이 한 장도 가지고 출입할 수 없다. 안에서는 특수처리된 보안용지만 사용해야 한다. 보안용지를 갖고 나가려 하면 입구에 설치된 감지기가 바로 적발해낸다. 그런데 삼성전자의 영업비밀 보호 시스템이 통째로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는 일이 최근 벌어지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삼성전자 평택공장 등의 작업환경측정보고서를 ‘일반 공개’하겠다는 방침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측정보고서에는 공정 순서와 개별 장비 배치도, 사용하는 화학제품 종류와 사용량 등 “30년 노하우가 들어 있다”고 한다. 측정보고서를 ‘일반 공개’한다는 것은 산업재해 소송의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에게도 보고서 복사본을 통째로 준다는 것을 뜻한다. 누군가가 이 복사본을 홈페이지에 올려놔서 중국 등의 경쟁업체들이 자유롭게 볼 수 있게 해도 처벌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산업재해를 다투려는 노동자의 권리는 존중받아야 한다. 노동자가 소송을 하는 데 필요한 정보라면 영업기밀이라는 이유로 노동자의 권리에 제약이 가해져서는 안 된다. 삼성전자 측도 반도체 관련 직업병 당사자나 가족, 변호사 등 관계자들이 해당 보고서를 열람하고 그 결과에 대해 공증을 받는 것에는 전혀 반대하지 않고 있다. 쟁점은 ‘일반 공개’ 여부다. 기업 간 첨단기술 쟁탈전이 심해지면서 각국은 영업비밀을 보호하기 위한 움직임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은 1996년 제정된 ‘경제스파이법’의 벌칙을 2012년 크게 강화했고, 2016년에는 영업비밀을 침해당하는 기업의 권리를 더 강화한 영업비밀보호법을 발효시켰다. 일본도 2015년 관련법을 개정해 영업비밀 침해에 대한 처벌 범위를 크게 확대했다. 자기 나라 첨단기업의 영업비밀을 정부부처가 나서서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하겠다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달 16∼18일에는 보고서 공개 여부를 둘러싸고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권익위원회 수원지방법원 등의 결정 절차가 잇따라 예정돼 있다. 우리가 5년 뒤, 10년 뒤 뭘 해서 먹고살아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국가기관이 한 곳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iam@donga.com}
현대자동차그룹 정몽구 회장은 경영이 중대한 상황을 맞을 때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승부수를 던져 위기를 타개해 왔다. 1998년 안팎의 반대를 무릅쓰고 법정관리 중인 기아차를 인수해 글로벌 메이저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하고, 그 이듬해 미국에서 상식을 뛰어넘는 ‘10년, 10만 마일 보증제도’를 도입해 현대차의 품질에 대한 인식을 일거에 바꿔놓은 것 등이 대표적인 예다. 현대차그룹이 지난달 28일 내놓은 지배구조 개편안에서도 ‘승부사 정몽구’의 면모가 드러난다.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고리를 끊어내겠다는 내용은 시장이 예상했던 바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순환출자가 재벌그룹 총수 일가의 지배권을 유지하고 승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그룹은 현대차그룹 하나뿐”이라며 콕 찍어 압박을 해오던 터이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깜짝 놀란 것은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예상해온 지주회사 체제 대신 사업지배회사 체제를 선택한 점이다. 정 회장이 양도세를 1조 원 이상 절약할 수 있는 지주회사 카드를 버린 결정적인 이유는 두 가지로 보인다. 첫째, 지주회사는 금융계열사를 거느릴 수 없다는 규제 때문에 현대캐피탈을 매각해야 하는데, 현대캐피탈은 현대·기아차의 판매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할부금융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둘째, 현대모비스가 지주회사로 바뀌면 자회사인 현대차와 손자회사인 기아차는 투자와 인수합병에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된다. 이렇게 되면 M&A를 통해 격렬한 지각변동이 이뤄지고 있는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현대·기아차의 설 자리가 없어진다. 지주회사는 지배구조의 유일한 정답도 아니고, 경영 성과를 담보하는 제도는 더더욱 아니다. 지난해 10월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롯데그룹은 롯데카드 등 8개 금융계열사 처분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다. 롯데카드를 처분하면 유통사업에 적지 않은 타격이 올 수밖에 없다. 일본에는 중간금융지주회사 제도가 있어서 소니 같은 제조업체들이 은행과 보험사 등 금융계열사를 ‘지주회사 우산 아래’ 거느리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지주회사 제도는 이런 유연성이 없다. 기업의 경쟁력을 중시하는 관점에서 볼 때 정 회장이 지주회사 체제를 피한 것은 불가피하면서도 바람직한 선택이다. 현대·기아차의 이번 지배구조 개편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정 회장의 아들인 정의선 부회장이 지배구조의 정점인 현대모비스의 대주주로 처음 이름을 올렸다는 점이다. 이로써 정 부회장은 그룹 내에서 활동공간이 크게 넓어졌다. 지금까지 정 부회장의 조심스러운 행보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지만, 시장에서는 “승계 준비가 가장 안 된 그룹”이라는 부정적 인식을 생산해왔다. 정 부회장의 역할 확대는 시장의 걱정을 덜어주는 동시에 사업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요즘 현대차와 기아차의 품질에 대해서는 “벤츠나 렉서스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승차감에 비해 하차감(차에서 내릴 때 주위에서 던지는 부러운 시선에 대한 느낌)이 떨어진다”는 것이 아직은 대체적인 평가다. 승용차를 살 때 브랜드 평판과 디자인 등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경향은 젊은 층일수록 강하다. 품질에 대한 정 회장의 집념에 정 부회장의 젊은 감각이 더해져야만, 승차감보다 하차감을 중시하는 소비자 시류(時流)에 현대·기아차가 올라탈 수 있다. 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iam@donga.com}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로 유명한 프라다는 ‘지적이면서 독립심이 강한 여성의 이미지’를 가진 이탈리아의 고가 패션 브랜드다. 프라다가 한국에 직접 진출한 것은 1995년 말이다. 이때만 해도 프라다가 겨냥한 고객층은 한국인이 아니라 한국의 면세점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들이었다. 1990년대 말 한국 상류층의 사치품 수요가 급증하자 프라다는 내수시장으로 눈을 돌린다. 한국시장이 얼마나 황금어장이었는지는 프라다코리아의 재무제표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1999년 이후 16년간 영업적자를 낸 것은 2006년이 유일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자 한국 내수기업들은 실적이 곤두박질쳤지만 프라다는 예외였다. 2010년 이후 5년간 프라다코리아는 한국시장에서 총 1조4524억 원의 매출을 올려 3382억 원을 영업이익으로 남겼다. 영업이익률로 치면 23.3%. 2014년 한국 100대 상장사 영업이익률(5.3%)의 4.4배에 이르는 수치다. 또 5년간 프라다코리아가 모회사에 배당한 돈은 1961억 원에 이른다. 한국시장에서 이렇게 ‘단물’을 빨아먹은 프라다가 한국에서 기부한 돈은 얼마나 될까. 재무제표로 보면 5년간 3218만 원이다. 매출액의 0.0022%다. 프라다코리아의 연평균 매출을 100만 원이라고 친다면, 23만2848원을 영업이익으로 남겨서, 13만5051원을 모회사에 배당했고 22원을 기부금으로 낸 셈이다. 프라다뿐만이 아니다. 사회공헌에 인색하면서 모회사로 돈 빼내기에 급급한 행태는 대부분의 명품업체가 갖고 있는 공통점이다. 한국시장에서 수백억, 수천억 원의 영업이익을 남기면서 기부금을 땡전 한 푼 내지 않는 곳도 수두룩하다. 명품업계에서 한국인들이 ‘글로벌 호갱(호구 고객이라는 뜻의 은어)’으로 통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한국소비자원이 명품 가방류 50개의 가격을 분석했더니, 한국에서 팔리는 제품의 가격을 100이라고 했을 때 주요 선진국에서 팔리는 제품의 가격은 70.5에 불과했다. 한국 소비자들에게 평균적으로 30%가량 바가지를 씌운다는 이야기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팔리는 것과 똑같은 제품이 한국시장으로 들어올 때 가격이 2배, 3배로 뻥튀기 되는 사례도 흔하다. 명품업체들이 호구로 여기는 것은 한국의 소비자들뿐만이 아니다. 정부도 ‘핫바지’로 안다. 8월 정부가 소비를 활성화하기 위해 개별소비세를 깎아주자, 명품업체들은 오히려 가격을 올려 인상분과 세금감면액을 이중으로 챙겼다. 아무리 콧대가 높은 기업도 정부는 무서워하는 것이 세계적인 상례인데, 한국에서만은 예외인 것이다. 해외 명품업체들의 속물근성과 오만한 버르장머리를 고치려면 정부가 나서야 한다. 첫째, 한국소비자원은 명품업체들이 한국 소비자들에게 얼마나 바가지를 씌우는지를 더 자주, 더 상세히 조사해서 공개해야 한다. 둘째, 유한회사도 외부감사를 받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 개정안’의 입법을 서둘러야 한다. 루이뷔통 구치 샤넬 등 대부분의 명품업체들이, 주식회사가 아닌 유한회사는 외부감사를 받지 않아도 되는 법 규정을 이용해, 한국에서 얼마나 이익을 남기고 사회공헌은 얼마나 하는지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국세청이 명품업체들의 세금 납부 실태를 면밀히 들여다봐야 한다. 개별소비세 소동에서 보여준 행태로 볼 때 명품업체들이 법인세 등 다른 세금은 제대로 내는지, 의심을 지우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부가 국내기업에는 호랑이처럼 굴면서 해외 명품업체들에 핫바지 노릇을 하는 것은 국민적인 자존심이 더이상 용납하지 않는다.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정부가 지난 주말 오후 7시 시내면세점사업자 선정 결과를 발표했다. 서울에서는 신세계와 두산이 새롭게 자격을 얻었다. 반면에 롯데와 SK는 각각 현재 운영 중인 월드타워점과 워커힐점의 문을 6개월 안에 닫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이로 인해 가장 당혹스러운 이들은 퇴출 예정 면세점 2곳에서 일하는 2200여 명의 종업원일 것이다. 새 사업자들이 고용승계를 약속했지만 전례 등을 볼 때 상당수는 직장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들에게는 퇴출 통보가 정부발 ‘일자리 테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면세점이 사양업종도 아닌 마당에, 더구나 “일자리 창출”을 힘주어 외치고 있는 정부 아래서 왜 이런 일이 벌어져야 할까. 현행 면세점 허가제도는 사업자들이 사업계획서를 써내면 정부가 심사해서 한정된 티켓을 나눠주는 방식이다. 종전에는 기존 사업자의 경우 10년마다 한 번씩 재허가를 받았고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으면 허가가 자동으로 갱신됐지만 2013년부터 절차가 크게 까다로워졌다. 재허가 기간이 5년으로 단축됐을 뿐만 아니라 운영에 별문제가 없어도 서류 써내기 경쟁에서 밀리면 수천억 원을 투자한 사업을 하루아침에 접어야 하는 구조가 된 것이다. 한국은 미국 중국 일본 등에 비해 경제규모가 훨씬 작은데도 불구하고 면세점 시장 규모에서 2010년 이후 줄곧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관광산업에 대한 기여는 절대적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 1만202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중복 응답)를 한 결과 쇼핑(72%)이 자연풍경(49%)이나 역사·문화유적(25%)을 제치고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면세점이 ‘관광 한국’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 것은 기존 면세점업체 임직원들의 혁신적 아이디어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눈물 어린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술, 담배나 팔던 곳에 루이뷔통, 에르메스, 샤넬 같은 명품업체들을 입점시켜 면세점이라는 업(業)의 정의(定義)를 바꿔놓은 곳이 바로 한국 업체들이다. 수천억 원대의 마케팅 비용을 써가면서 초기 한류(韓流) 확산에 결정적 공헌을 한 곳도 면세점업체들이다. 물론 성장하는 면세점 시장을 일부 업체가 과점한 구조에는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한화, 신세계, 두산 등 새로운 사업자들을 참여시켜 시장의 경쟁 메커니즘을 활성화시키려는 정책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수천 명이 생계를 기탁하고 있는 기존 점포에 대해 심사위원들이 밀실에 모여 단 이틀 심사하고 퇴출 도장을 찍는 것은 행정권의 횡포에 가깝다. 지금까지 면세점은 혁신적 아이디어로 시장을 개척해온 한국 업체들의 ‘블루오션’이었지만 앞으로는 그렇지 않다. 중국은 면세점업계의 큰손인 중국인 관광객(유커)들의 쇼핑 수요를 국내로 돌리기 위해 내국인이 출입할 수 있는 면세점을 공세적으로 늘리려 하고 있다. 지난해 8월 하이난(海南) 섬에 세계 최대 규모인 싼야면세점을 개장했고, 베이징(北京) 시내 중심지에 면세점을 짓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일본에서도 노른자위 중의 노른자위 상권인 긴자(銀座) 미쓰코시백화점에 첫 시내면세점이 1, 2개월 내에 문을 연다. 중국과 일본이 중국인 관광객을 겨냥한 시내면세점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마당에 ‘5년 시한부 허가’라는 결정적 핸디캡을 안고서는 제대로 된 경쟁을 하기 어렵다. 5년 뒤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한화 신세계 두산 등 신규 사업자들에도 과감한 투자를 망설이게 만들 것이다. 면세점 사업의 승자와 패자를 밀실 속의 정부가 아닌, 공개된 시장이 결정하게 할 수 있도록 면세점 허가제도를 다시 손질해야 한다.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출산장려 정책에는 오랜 역사가 있다. 기원전 5세기 전반 중국 월(越)나라를 다스린 구천은 남자가 20세, 여자가 17세를 넘어도 결혼하지 않으면 그 부모를 처벌했다.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25∼60세의 남자나 20∼50세의 여자가 결혼하지 않으면 독신세(稅)를 물렸다. 1960∼80년 루마니아를 통치한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콘돔 판매와 낙태를 금지하고, 심지어 중학생의 출산까지 권장했다. 여성들의 직장으로 찾아가 임신검사를 하는 공무원, 일명 ‘생리(生理)경찰’까지 뒀다. 이 정책들의 성패는 반반으로 갈린다. 구천의 정책은 국력을 키우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은 로마의 인구 감소에 제동을 걸지 못했다. 차우셰스쿠의 정책은 출산율을 올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고아가 급증하는 부작용을 낳았고, 결국 정권이 패망하는 한 원인이 됐다. 이런 강제 수단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지금은 인구구조를 바꾸기가 훨씬 어렵다. 한국보다 먼저 저출산 문제를 경험한 일본의 사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1989년 합계출산율이 1.57로 떨어지자 집단 쇼크를 받은 일본은 이후 ‘에인절플랜’ ‘신에인절플랜’ ‘신신에인절플랜’ 등을 쏟아내며 출산율 끌어올리기에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했다. 하지만 1.2대이던 합계출산율은 2006년 이후 1.3∼1.4대로 소폭 오르는 데 그쳤다. 이마저도 출산장려 정책이 아니라 경기회복 덕분이라는 게 냉정한 평가다. 한국은 저출산 현상을 일본보다 ‘약간 늦게’ 맞았지만 정책 대응은 ‘많이’ 늦었다. 인구구조가 재생산되려면 합계출산율이 2.1 이상이 되어야 하는데, 합계출산율이 1983년 이미 2.1 아래로 떨어졌고 이후 계속 내리막 곡선을 그려 왔다. 30년이 넘게 저출산 현상이 지속돼온 것이다. 이에 비해 정부가 제1차 저출산·고령사회기본계획을 내놓고 본격적으로 대응을 시작한 것은 2006년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의 총인구는 2031년부터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일견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구절벽’이 바로 코앞에 와 있다. 경제적으로 봤을 때 총인구만큼이나 중요한 지표인 생산가능인구(15∼64세)가 내년 정점에 이른 뒤 2017년 감소 국면으로 접어든다. 인구재앙이 눈앞에 닥치고 있는데도 우리 정부의 대응은 한가하기만 하다. 정부가 최근 내놓은 제3차 저출산·고령사회기본계획 시안은 ‘지금까지의 인구정책이 총체적으로 실패했으며 앞으로도 뾰족한 해법이 없다’는 고백과 다름없다. 시안은 2013년 기준 1.19명인 합계출산율을 2020년까지 1.5명으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는데 자료를 아무리 뜯어봐도 이를 실현할 만한 대책은 보이지 않는다. 설령 1.5로 올리더라도 2.1에는 못 미치고, 만약에 만약을 더해 2.1로 끌어올리더라도 신생아들이 생산가능인구에 편입되기까지는 15년의 세월이 추가로 걸린다. 선진국들의 사례를 보면 인구감소의 충격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이민(移民) 허용이다. 미국이 저출산 문제를 겪지 않고 끊임없이 경제적 역동성을 유지하는 원인은 이민에 대해 개방적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일본이 출산율을 올리려고 안간힘을 써도 급속한 인구감소 쇼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이민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민은 정치·사회적 갈등 등 많은 문제를 낳는다. 하지만 인구감소의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실현 가능한 다른 대책이 없기 때문에 ‘제한적이고 단계적’으로라도 이민을 허용하는 방안을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독일의 한 여론조사업체가 몇 달 전 독일인 1000명에게 ‘어떤 사람(또는 사물)이 독일을 대표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요한 볼프강 괴테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한 응답은 폴크스바겐이었다. 폴크스바겐은 배출가스 조작 스캔들로 자사뿐 아니라 독일차 브랜드 전반에 깊은 흠집을 남겼다. 소비자들의 불신은 폴크스바겐을 넘어 ‘클린(Clean) 디젤’의 기치(旗幟)를 들어온 메르세데스벤츠와 BMW 등으로도 확산되는 중이다. 일각에서는 ‘디젤게이트’가 현대·기아차에 반사이익을 안길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긴 안목으로 봤을 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미국 정부가 폴크스바겐 비리를 발표한 당일, 미국에서는 자동차산업과 관련해서 또 하나의 빅뉴스가 언론을 탔다. 애플이 전기차 시장 참여를 사실상 공식화한 것이다. 애플이 약 600명의 연구진을 고용해 전기차 개발을 해온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기는 했지만, ‘애플 카’의 출시 시기를 2019년으로 못 박는 등 본격 출사표를 냈다는 점에서 종전과는 양상이 바뀌었다. 세계 자동차시장에서 전기자동차의 점유율은 1% 미만으로 아직 미미하다. 하지만 충전 문제 등 결정적인 약점들이 빠른 속도로 극복되고, 높은 연료소비효율과 싼 유지비라는 강점은 더욱 강화되고 있어 전기차 시장이 곧 고속 성장기에 접어들 것이라고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전기차 분야의 선두주자인 테슬라는 지난해 1월 자사 제품으로 미국 대륙을 4일 만에 횡단하는 이벤트를 연출했다. 랠리팀은 테슬라가 미국 전역에 설치한 무료태양광초고속충전소만을 이용해 ‘장거리 주행+연료비 제로+배출가스 제로’가 허황된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였다. ‘에너지혁명 2030’의 저자인 토니 세바는 테슬라 등의 사례를 들어 2025년경에는 내연기관 자동차들이, 필름회사 코닥이 디지털카메라에 밀려 겪었던 것과 같은 순간을 맞게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세계 최대 자동차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은 전기차 기반시설에 막대한 투자를 하면서 관련 기업들이나 구매자들에게 파격적인 지원책을 쏟아내고 있다. 전 세계 자동차회사들이 갖고 있는 현금을 모두 합한 것보다 훨씬 많은 현금을 갖고 있으면서, 브랜드에 대한 광적인 충성고객까지 확보하고 있는 애플까지 전기차 진영에 가세한다면 기존 자동차업체들이 맞아야 할 ‘코닥의 순간’은 훨씬 앞당겨질 것이다. 요란한 악대(樂隊)를 앞세운 행렬에 마차와 사람이 몰리는 밴드왜건(Band Wagon) 효과 때문이다. 디젤게이트는 전기차에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비춰 이 밴드왜건 효과를 극대화할 것이다. 지금까지 현대·기아차는 수소연료전지차에 집중적인 투자를 해왔다. 유럽 시장을 잡기 위해 ‘클린 디젤’에도 많은 투자를 했다. 반면 전기차 투자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현대·기아차가 내놓은 양산 전기차는 기아의 쏘울EV와 레이EV뿐이다. 다만 최근에는 전기차에 대한 소극적인 자세를 바꿔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고 있다. 현대차와 기아차가 모두 내년에 준중형급 전기차를 출시하겠다는 계획도 내놓았다. 한국 정부는 2020년까지 전기차 20만 대를 보급한다는 장밋빛 청사진을 내놨지만, 올해 상반기(1∼6월) 한국 시장의 전기차 출하대수는 823대에 불과하다. 같은 기간 중국에 비하면 1.1%에 불과한 수치다. 말만 앞서고 실행이 뒤따르지 않은 결과다. 한국이 전기차 분야에서의 부진을 만회하려면 제조업체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공기업들도 전국적인 충전망 구축과 초기 수요 견인에 하루빨리 발 벗고 나서야 한다.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나중에 배임에 걸릴지 모른다는 공포는 상상 이상이다. 이사회 출석 여부를 묻는 담당자에게 ‘해외출장을 가서 연락이 안 된다고 해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기업에서 사외이사를 지낸 적이 있는, 현 정부의 한 장관급 공직자가 최근 사석에서 한 말이다. 어쩌다 한 번씩 이사회에 참석하는 사외이사가 이 정도이고, 일상적으로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기업오너나 사내이사가 느끼는 공포는 훨씬 크다. 배임죄에 대한 공포는, 기업을 자신의 사유물로 착각하는 일부 기업인의 해사(害社) 행위를 예방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기업의 신속한 의사결정을 가로막고 투자의욕을 꺾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양면이 모두 있지만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에서는 후자의 측면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배임죄 규정을 갖고 있는 나라는 많지 않다.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배임’이라는 말은 있지만 ‘배임죄’라는 용어는 없다. 배임을 당사자 간에 풀어야 할 민사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고의성이 없더라도 배임죄로 ‘걸어서 잡아넣을 수 있게’ 돼 있는 나라는 한국이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다. 우리 형법의 배임죄는 문구상 일본의 형법을 베낀 것이지만 내용 면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일본 형법에서는 배임죄의 성립 요건으로 ‘자기 또는 제삼자의 이익을 꾀하거나 또는 본인에게 손해를 가할 목적으로’라는 표현이 들어 있지만, 우리 형법에는 이런 문구가 없어서 의도와는 상관없이 결과만으로 처벌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배임죄 그물을 너무 넓게 치려다 보니 법조문이 애매해졌다는 점에 대해서는 법조계에서도 공감을 표시하는 의견이 많다. 이코노믹리뷰라는 잡지가 2013년 2월 교수와 변호사 등 법률 전문가 52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한 결과 82.7%가 “배임죄의 범죄성립 판단기준이 애매하다”고 지적했다. 배임죄 조항으로 인한 억울한 피해자도 양산된다. 2005∼2008년 우리나라의 무죄율은 1.2%인 데 비해 배임죄의 무죄율은 5.1%에 이른다. 더구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죄의 무죄율은 11.6%로 평균의 10배에 육박한다. 외국에서는 전혀 죄가 되지 않는 일로, 한국의 기업인들은 수사기관 조사실과 재판정 문턱을 수도 없이 들락거려야 하는 현실인 것이다. 설령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더라도 기업의 신용도는 땅에 떨어지고, 경영은 만신창이가 된 다음이다. 하소연할 곳도 보상받을 곳도 없다. 이런 환경에서는 경제성장과 발전의 원동력인 ‘기업가정신’이 싹트려고 해도 싹틀 길이 없다. 글로벌 경제의 통합이 진행되면서 나타나는 기업경영 환경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불확실성과 위험(risk)의 증대다. 노키아처럼 특정 분야에서 세계 최강으로 꼽히던 기업들도 의사결정이 경쟁 기업에 한발만 뒤처지면 한순간에 패망하는 것이 글로벌 경쟁의 현주소다. 한국 경제가 글로벌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고 과감하고 신속하게 대규모 투자를 결정할 수 있는 기업가정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때마침 국회 부의장인 새누리당 정갑윤 의원이 지난달 말 배임죄의 조항을 일부 손보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개정안은 배임죄를 없애자는 게 아니다. 고의성이 있을 때만 배임죄를 적용할 수 있게 하자는, 온건하고 타당한 내용이다. 배임죄 규정이 기업가정신과 건전하게 동행할 수 있도록 과유불급의 문제점을 이 기회에 꼭 고쳐야 한다.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여러분, ‘경포대’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이다.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이라고….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이 (실제로는) 경제를 매일 들여다보고 있다.” “지지율 29%짜리 대통령과 함께 우리의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가에 대해 국민적 토론이 필요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기 반환점에 해당하는 2005년 8월 25일 KBS의 특별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한 말이다. 자신은 경제를 잘 챙겼지만 기득권 세력의 반발과 언론의 비우호적 보도로 인해 잘못된 평가를 받고 있다는 불만을 특유의 반어법과 독설로 표현한 것들이다. 이런 생각 때문인지 노 전 대통령은 경제를 살리는 데보다는, 경제가 나쁘지 않다고 강변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집권 후반부를 보냈다. 박근혜 대통령이 다음 주 임기 반환점을 맞는다. 경제정책 책임자로서 박 대통령이 받는 평가는 최소한 ‘포기’라는 수식어가 붙는 정도는 아니다. 지지율도 노 전 대통령에 비해 10%포인트가량 높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처한 경제현실은 훨씬 더 심각하다. 당시만 해도 전자 화학 조선 등 우리 주력 산업에 대한 중국의 위협은 잠재적인 것이었지만 지금은 가시적인 형태로 눈앞에 닥쳐 있다. 또한 ‘고용 없는 성장’이 체질화하면서 청년실업은 비탈길에서 절벽으로 치닫는 중이다. 경제적 난제들을 잔뜩 안은 박 대통령이 참고할 만한 전례는 노무현 정부 외에도 두 가지 정도가 더 있는 것 같다. 먼저 또 다른 반면교사로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례다. 기업 친화적인 MB노믹스를 앞세워 당선된 이 전 대통령은 집권 초기 규제 완화를 통한 경제 활성화에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정치력과 소통능력 부족으로 ‘부자감세’ ‘영리병원’ ‘귀족학교’ 등 좌파진영의 낙인찍기 전술에 발목이 잡혀 반환점도 돌기 전에 자신의 정책 컬러를 완전히 포기했다. 그러면서 들고나온 것이 친서민, 공정사회, 동반성장 등의 구호들이다. 물론 이것들이 진정으로 서민과 중소기업을 위한 정책이었다면 좋았겠지만, 문제는 빈 깡통처럼 소리만 요란한 포퓰리즘 정책이었다는 데 있다. “기름값이 묘하다”는 발언에 이은 알뜰주유소 도입, ‘배춧값 국장’으로 통하는 물가관리책임실명제 시행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명박 정부가 포퓰리즘의 단맛에 빠져 집권 후반기를 허송한 결과 한국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채 박근혜 정부로 고스란히 상속됐다. 박 대통령에게 벤치마킹이 될 만한 것은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의 사례다. 1998년 집권한 슈뢰더 전 총리는 노사정 대타협이 무산되자 집권 중반경인 2002년 경직적인 노동시장을 개혁하기 위한 ‘어젠다2010’을 자체적으로 마련해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여야 정치권과 노동계가 거세게 반발했지만 그는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인기 없는 개혁안을 강행한 결과 그는 2005년 총리 자리에서 밀려났다. 당시에는 그의 개혁안이 싸구려 일자리를 양산한다고 비판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대다수가 슈뢰더 전 총리를, ‘유럽의 병자(病者)’라고 불리던 독일의 경제를 되살려 오늘이 있게 한 주역이라고 칭송한다. 슈뢰더 전 총리는 5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개혁을 추진하고 성과가 나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정치가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그 긴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의지다.” 노동 공공 교육 금융 등 4대 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내건 박 대통령이 남은 2년 반 동안 두고두고 되새겨 봐야 할 말이다.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1969년 8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샌프란시스코로 박정희 대통령을 초청해 취임 후 첫 한미 정상회담을 가졌다. 미국 정부가 외국 정상을 서부 해안으로 초청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정상회담은 이 밖에도 여러 가지 화제를 낳았다. 닉슨 대통령이 당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던 샌클러멘티에서 같이 휴가를 보내자고 박 대통령 부부에게 제안한 것도 그중 하나다. 참모들 사이에서는 “한미관계를 튼튼히 할 좋은 기회”라는 의견이 많았지만, 육영수 여사가 “우리가 지금 한가롭게 휴가를 즐길 때가 아니지 않으냐”고 반대해서 결과적으로는 없던 일이 됐다. 대통령의 휴가는 단순한 휴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앞의 사례에서 보듯 때로는 중요한 외교수단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국내적으로 유·무언의 정치적 메시지를 발신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27일부터 닷새간 여름휴가에 들어갔다. 현재로선 외부 일정 없이 관저에서 조용한 휴가를 보낼 것이라는 게 청와대의 설명이다. 번잡스러운 일정에서 벗어나 푹 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익하고 의미 있는 휴가라고 생각한다. 다만 닷새 중 하루 정도는 박 대통령이 경제 살리기를 위해 ‘가벼운 나들이’에 나서 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침체의 늪에서 헤매온 내수산업은 올해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라는 복병까지 만나 최악의 불황에 허덕이고 있다. 중소기업청 등이 지난달 9일부터 5일 동안 전국 2000여 중소상공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절반 이상이 “지난해 세월호 사고 때보다 국내 경기에 미치는 영향이 클 것”이라고 예상했고, 전통시장 매출은 지역에 따라 최대 80%까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메르스가 ‘끝물’이라고 하지만 해외관광객들의 방문이 정상화되기까지는 시차가 있을 수밖에 없어 휴가 성수기인 8월 말까지는 많은 관광지들이 파리를 날려야 할 처지다. 동아일보와 경제 5단체가 ‘국내 휴가로 경제 살리자’ 캠페인을 진행하는 이유도 소상공인들의 고통을 온 국민이 조금씩이라도 나눠 가졌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이 캠페인에는 현재 경찰청이나 국세청 같은 대형 정부기관이나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같은 대기업들이 동참하겠다고 앞다퉈 선언했다. 더 의미 있는 것은 국내 여행지로 휴가를 가거나 전통시장을 찾아가서 물건을 산 뒤 인증샷을 올리는 이벤트에 일반인들의 참여가 줄을 잇고 있다는 점이다. ‘인증샷’ 이벤트가 처음 시작된 13일부터 20일까지 약 일주일 동안에만도 1003장의 인증샷이 올라왔고 그 다음 일주일 동안에는 3배 가까운 2941장이 올라왔다. 지방으로 휴가를 떠나는 것만이 이 캠페인의 취지는 아니다. 서울에 있는 전통시장을 찾아 떡볶이를 사먹거나 생필품을 구입하는 것도 훌륭한 실천이다. 물론 박 대통령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전통시장을 많이 찾았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국내 휴가로 경제 살리자’는 열기가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박 대통령이 전통시장을 찾는다는 것은 평상시와는 다른 각별한 의미가 있다. 청와대 안팎에서는 박 대통령이 휴가 이후 경제 살리기에 매진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혹시라도 경제 살리기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관저에서 외롭게 휴가를 보내는 동안 결정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흔히 경제는 심리고, 답은 늘 현장에 있다고 한다. 한 달 뒤면 임기반환점을 돌게 될 ‘박근혜노믹스’의 성공을 위해서도 박 대통령이 이번 휴가 기간 중 전통시장을 꼭 찾아 상인들의 투박한 손을 맞잡았으면 한다.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