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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이 멸망한 뒤 지하에 갇혀버린 인류. 한정된 공간에서 인구가 포화 상태에 이르는 것을 막기 위해 출산도 주거도 통제한다. 정체불명의 약을 매일 먹지 않으면 정신재활원에 잡혀간다. 열다섯 살이 된 소년 마르코는 인간 복제 연구소를 지키는 용역회사에서 일하게 된다. 어느 날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따라간 마르코는 같은 용역회사에서 일하는 동갑내기 소녀 은희를 만나 첫사랑에 빠진다. 깊은 지하층의 재즈 바에서 나이를 속이고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꼭 거대한 고래의 울음소리처럼 매력이 있다. 마르코는 갑자기 출근을 하지 않는 은희의 집을 찾아간다. 은희는 겨우 팔 하나 정도 너비의, 좁은 집에서 몇 년 전 치매가 온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한편 회사 선배들은 원청회사와 용역업체의 계약서를 공개하고 임금을 인상하라고 요구하며 파업을 시작하고 은희는 파업에 힘을 보태겠다고 나선다. ‘조급하고, 초라하고, 두려운’ 세계에서 마르코는 어떤 선택을 할까. 은희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지켜질 수 있을까. 책에 담긴 ‘우주늪’, ‘이끼숲’ 등 연작 소설 3편 가운데 첫머리에 실린 ‘바다눈’의 줄거리다. 기술이 발전했어도 인류 사회의 모습은 오늘날과 다르지 않다. “영생에 실패했고, 뇌 정복에 실패했어. … 고작 똑같은 인간 만들고 땅이나 파고 있다니”라는 은희의 말처럼 인간은 ‘닫힌 세계’를 되풀이할 뿐이다. 같은 설정 아래 쓴 나머지 2편에서도 주인공들은 이 같은 세계와 반목하면서 성장하고, 자신들만의 길을 헤쳐 나간다. ‘천 개의 파랑’(2019년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부문 대상), ‘나인’(2022년 SF어워드 장편 부문 우수상) 등을 썼던 저자는 이번 책 ‘작가의 말’에서 “구하는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 조금 더 뚜렷하게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현실 세계를 옮긴 듯한 전개로 별다른 진입 장벽 없이 읽히는 것이 소설의 장점이지만 SF 장르에서 즐길 수 있는 비유의 맛은 다소 덜한 듯하다. 슬픔의 힘으로, 슬픔의 세계를 걷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매력적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간절한 마음이 형태를 갖춰 천 년이 넘은 뒤까지 전한다는 건 참 놀라운 일입니다. ‘명작: 흙 속에서 찾은 불교문화’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불교중앙박물관(서울 종로구)에 다녀왔습니다. 2015년 강원 양양 선림원지(禪林院址)에서 출토돼 오랜 보존처리를 마치고 공개된 9세기 금동보살입상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보살상에 입혀진 금박의 광채는 폐허에 그 오랜 시간 묻혀 있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눈이 부셨습니다. 하나하나 따로 만들어진 광배와 보관(寶冠), 목걸이, 정병(淨甁) 등도 당대 문화의 찬란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불상은 개인의 원불(願佛·개인이 일생 섬기는 부처)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보살은 천 년 동안 땅속에서 매미처럼 꿈을 꾸고 있었을까요, 원소장자의 염원을 간직하고 있었을까요. 금빛에 넋을 잃다가 ‘금입택(金入宅)’이 떠올랐습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말로 ‘금을 입힌 집’ 또는 ‘금이 들어간 집’이라는 뜻입니다. 신라의 전성시대 경주에는 금입택이 35채가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진골 귀족들의 부유함과 사치스러움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헌강왕(재위 875∼886년) 때에는 성 안에 초가집이 하나도 없었으며 추녀가 맞붙고 담장이 이어져 노래와 풍류 소리가 길에 가득 차 밤낮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불상이 만들어진 때가 대략 그즈음입니다. 하지만 풍요의 정점에 이른 신라는 속으로는 썩고 있었습니다. 진골 귀족이 부(富)와 권력을 독점한 탓입니다. 학자들은 제작기술의 뛰어남으로 보아 선림원지 보살상이 경주에서 제작돼 양양으로 보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불상의 화려함 뒤에는 점차 말기로 다가가는 체제의 모순이 있었던 셈입니다. 달리 볼 수도 있습니다. 임영애 동국대 교수는 불상이 홍각선사(?∼880)의 원불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인 도의선사의 제자가 염거화상(?∼844)이고, 염거화상의 제자가 홍각선사입니다. 선림원지에서 나온 홍각선사탑비 비문에는 그가 말년에 설악산 억성사(億聖寺)로 돌아와 중창(重創)에 힘썼다고 나옵니다. 선림원지에 화엄종 사찰이었다가 선종의 요람이 된 억성사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근거입니다. ‘왕이 곧 부처’라는 논리로 왕권을 뒷받침했던 교종과 달리, 참선과 깨달음을 강조하며 기존 권위를 부정한 당대 선종은 호족과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억성사 터에서 나온 이 불상을 선종이라는 새로운 사상의 확산과 떼어놓고 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정점에 이른 불상의 화려함은 한 세계의 파국을 내포한 것이 아닐지요. 불상은 10세기 초 동해안 해일과 홍수, 그에 따른 산사태에 휩쓸려 억성사와 함께 순식간에 파묻힌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도 천 년 역사를 다하고 935년 멸망했습니다. 다시 약 1100년이 흐른 오늘날 우리 사회는 단군 이래 최대의 풍요를 누리는 동시에 전쟁이 벌어지는 나라와 같은 수준인,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달은 찼으니 기울까요, 아니면 새로운 사상에 힘입어 다시 차오를까요. 부처님오신날이 코앞입니다. 비록 불자는 아닙니다만 독자 여러분들의 가내 평안을 빕니다.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
질소는 생물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단백질 골격의 절반이 질소다. 공기의 80%가 질소일 정도로 널려 있지만 생물은 직접 활용하기 어렵다. 질소 원자 2개가 결합해 질소 분자(N₂)가 만들어지는데 원자끼리 3개의 팔로 강하게 결합돼 깨기 힘들기 때문이다. 질소의 결합은 산소 분자나 수소 분자보다 두 배 가까이 강하다. 자연에서 질소 분자의 결합이 깨져 생물이 이용하기 쉬운 형태로 바뀌는 경로는 사실상 번개, 그리고 콩과 식물의 뿌리에 기생하는 뿌리혹박테리아뿐이다. 19세기 남미에서는 부족한 천연 비료를 쟁탈하려는 국가들이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중화학공업을 통해 질소 분자의 결합을 깨고 비료를 대량 생산하지 못한다면 현존하는 세계 인구 80억 명 중 적어도 30억 명은 굶어 죽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로 ‘김상욱의 양자공부’ 등을 냈던 저자가 공저를 제외하면 5년 만에 출간한 교양과학서다. 계간지 ‘스켑틱’에 연재한 칼럼을 보강해 썼다. 책은 원자와 별, 생명과 인간을 다룬다. 물리학에서 화학, 생물학, 인간학을 넘나들며 물질과 지구, 에너지의 근원, 우주와 빅뱅, 생명의 복제와 진화 등을 설명한다. 인간이 만든 물건과 인간이 포함된 생물 전체는 지구를 이루는 원자와 동일한 원자로 이뤄져 있다. 11, 12세기 페르시아의 천문학자이자 시인인 오마르 하이얌은 “흙이 말한다. 왜 당신은 나를 건드리는가? 그대와 나는 둘 다 같은데. …우리는 모두 단지 흙일 뿐이다”고 썼다. 이 글은 시적 표현이 아니라 과학적 사실인 셈이다. 책의 제목은 윤동주 시인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서 따왔다. 저자는 “나에게 하늘은 우주의 법칙, 바람은 시간과 공간, 별은 물질과 에너지로 다가온다”며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의 경이로움을 담아보려 했다”고 했다. 부제(원자에서 인간까지)처럼 ‘거의 모든 것’을 다루는데, 각각의 분량이 길지 않음에도 알차서 눈길이 간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혹시 운전할 때 내비게이션 앱을 사용하는지? 도로 정체가 생기면 앱은 사용자들이 특정 경로에 몰리지 않도록 여러 서로 다른 길을 추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결과 누군가는 편한 대로로 가고, 다른 누구는 좁고 구불구불한 길로 가게 된다. 당신은 인공지능(AI)에 위치 정보를 제공하고 도움을 받을 뿐 아니라 이미 사실상 행동을 통제당하는 세계에 사는 셈이다. ‘AI 이후의 세계’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과 에릭 슈밋 전 구글 최고경영자(CEO), 대니얼 허튼로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슈워츠먼컴퓨팅대 학장 등 저명인사들이 AI가 가져올 세계의 변화에 대해 함께 논의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책에 따르면 AI는 세계 안보 질서에 지대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냉전 시대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았던 까닭은 간단하다. 쐈다가는 남아있는 상대방의 핵전력으로 보복당해 자신도 절멸할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상호 확증 파괴’ 전략이 받아들여지면서 핵 사용은 억제됐다. 그러나 군사 분야에 AI 사용이 전면화되면 문제가 달라진다. 자율성과 비인간적 논리에 바탕을 둔 AI에 권한이 위임되면 전쟁의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능성은 극도로 커진다. 일부 AI 기반 무기의 위력은 실전에서만 확인 가능할 수도 있다. 실제 분쟁이 발생하지 않는 한 특정 국가가 군비 경쟁에서 앞섰는지 아니면 뒤처졌는지를 모를 수 있다는 뜻이다. 힘의 균형에 의한 평화가 성립하려면 일단 균형이 잡혔는지 아닌지가 파악돼야 하는데, 계산 착오로 분쟁이 발발할 소지가 크다. 책은 이 같은 변화가 걷잡을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하기 전에 AI 기반 전쟁의 특징을 참작해 전략적 기조를 세워야 한다고 역설한다. 구글이나 바이두 등 글로벌 네트워크 플랫폼의 AI는 전례 없는 편익을 줬지만 그에 따른 위험도 크다. AI는 이용자에게 콘텐츠와 관계를 추천하고, 정보와 개념을 분류하고, 이용자의 취향과 목적을 예측하면서 개인적, 집단적, 사회적으로 특정한 선택을 부추길 수 있다. 당신의 생각을 조작할 수 있다는 얘기다. 기존에도 악의적으로 허위정보를 퍼뜨리려는 시도를 완벽히 제압하기는 힘들었지만 만약 생성 AI가 혐오와 분열을 조장할 목적으로 악용된다면 인간의 힘만으로는 대응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저자들은 AI 발전의 역사를 일별한 뒤 “아직은 인간이 미래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며 “우리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잡지 에스콰이어의 수석 저널리스트가 쓴 ‘1%를 보는 눈’은 AI의 시대에도 당분간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고 본다. 넷플릭스 같은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사용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예측하고자 하지만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최첨단 알고리즘이라고 해도 우리 욕망의 변화를 수치화하기란 어렵다는 것. 책은 의사와 기업 임원, 운동선수, 기상학자, 디자이너, 작가 등의 창의적 발견의 사례를 소개한다. 그리고 인간의 적응력과 창의성은 기계의 예측력을 능가한다고 강조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가 말기로 치닫던 1986년의 남아공. 농장주 가족의 일원인 아모르는 사춘기 소녀다. 어느 날 아모르의 엄마 레이첼이 병을 앓다가 죽는다. 아프리카너(남아프리카에 사는 네덜란드계 백인)인 아모르의 고모와 고모부는 유대교로 개종한 레이첼의 죽음을 오히려 반기는 것 같다. 엄마의 영구(靈柩)를 마주하기 싫었던 아모르는 집 밖 멀리서 엄마의 방을 지켜본다. 엄마의 방에서 일하고 있는 흑인 하녀 살로메를 보고 살아있는 엄마의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할아버지가 ‘땅과 함께 사들였던’ 살로메는 엄마의 병시중을 정성스레 도맡았다. 생전 엄마는 살로메에게 보상을 해 주자며 살로메 가족이 얹혀사는 작고 낡은 판잣집을 주라고 남편 마니에게 부탁했다. 아모르는 아빠에게 ‘약속을 지켜달라’고 하지만 마니는 제대로 듣지 못한다. 군인인 오빠 안톤은 시위를 벌이던 여성을 총으로 쏴 죽이고 마음이 동요하던 와중에 어머니 레이첼의 죽음을 전해 듣는다. 집으로 향하던 그는 시위대의 돌에 머리를 맞아 다친다. 그리고 자신이 어머니를 총으로 쏴 죽였다는 착란에 시달린다. 레이첼의 시신을 염하는 동안 다른 한쪽 방에서는 유족들이 말싸움을 벌인다. 마니는 아내가 유대교로 개종한 것이 다른 유대인 가족들 때문이라고 비난한다. 심지어 아내는 마음속으로까지는 진정한 유대인이 아니었고, 단지 남편을 괴롭히려고 개종한 것이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농장은 오빠가 물려받지만 가족의 죽음과 장례식은 뒤에도 이어진다. 약속은 지켜질 수 있을까. 대체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지켜지는 걸까. 등장인물은 모두 다른 꿈을 꾼다. 죄책감과 혐오, 지워지지 않는 상처, 비밀스러운 욕망을 가지고 각자의 세계를 산다. 몰이해와 차별, 억압으로 점철된 세계에 구원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포스트아파르트헤이트 세대 작가로 주목받은 저자는 이 소설로 2021년 영국 부커상을 받았다. 역사와 개인적 도덕, 실존을 매끄럽게 한데 버무리는 전개와 문체가 매력적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어쩌다 시골에서 버스를 탈 일이 있으면 맨 앞자리에 앉는 걸 좋아한다. 전면 통창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느긋하게 감상하는 맛이 일품이기 때문이다. 충북 괴산군에서 버스를 모는 저자의 눈에는 다른 것이 들어온다. 시골 사람들의 삶이다. 시골에는 노인들이 많다. 2019년 저자가 처음 버스를 몰기 시작했을 때는 기사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노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알고 보니 기사가 예뻐 보여서가 아니었다. 글을 몰라 버스 행선지가 적힌 안내판을 읽지 못하는 이들이 낯익은 기사 얼굴을 보고 집으로 가는 버스 노선을 알아봤던 것. 저자는 이 같은 사정을 알게 된 뒤로는 얼굴을 빤히 보는 노인분들에게 행선지를 먼저 여쭤본다고 했다. 시골 버스에서는 별별 사람을 다 만난다. 상의는 두툼한 파카를 입었지만 하의는 꽃무늬 사각팬티 하나만 걸친 채 버스에서 욕설을 경 읽는 것처럼 내뱉는 남자, 약속 시간에 늦었다고 “빨리 가자”며 버스 기사를 재촉하는 사람…. 그래도 승객은 대부분 유쾌하고 기사는 친절하다. 주고받는 농담에 차 안에 웃음꽃이 핀 날, 너무 입을 크게 벌리고 웃음을 터뜨린 노인이 있었는지 버스에서 틀니가 분실물로 발견되기도 한다. 기사는 무거운 개 사료 포대나 깨 자루 등을 지닌 승객이 타고 내릴 때 짐을 옮겨 준다. 추운 겨울 터널을 걸어서 지나가는 요양보호사를 위해, 조금이라도 바람이 덜 미치도록 버스를 천천히 몰기도 한다. 시골 버스는 단순한 운송 수단이 아니다. 장날을 기다린 노인들이 첫차를 타고 장 구경을 간다. 시골 버스 운행 횟수가 늘어나면 노인의 우울증 지수가 낮아진다는 논문이 있다고 한다. 또한 주민들의 ‘생존권’이기도 하다. 노선이 없어질까 봐 ‘오늘은 몇 명이나 탔는지’ 되풀이해 물어보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버스에 의지해 직장에 다니는 아주머니에게 버스는 곧 생계다. 저자는 “시골 버스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소시민들의 생활공간”이라고 했다. 미문의 외피를 띤 교언이 넘쳐나는 시대, 독자를 시골 버스로 이끄는 질박한 에세이가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해외 문화계에서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 열풍이 거세다. 기존 창작물의 경우 작품 서두에 독자나 시청자가 볼 수 있도록 일종의 경고문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출판사 팬맥밀런은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6년) 최신판 서두에 “문제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우리 역사의 충격적이던 시절, 노예제의 공포를 낭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글을 실었다. 디즈니도 고전 애니메이션 ‘피터 팬’(1953년)과 ‘아기 코끼리 덤보’(1941년) 등에 흑인 노예, 아메리카 원주민, 아시안 등을 비하한 내용이 담겼다며 경고 문구를 붙여 내보낸다. 아예 원작을 수정하기도 한다. 퍼핀 출판사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비롯한 로알드 달의 소설에서 외모 관련 비하 논란이 일 수 있는 표현을 대거 수정했다. ‘뚱뚱하다’는 표현은 ‘거대하다’로 바꿨고, 마녀를 ‘가발 아래 대머리를 숨기고 있다’고 묘사한 부분에는 별도로 “여성이 가발을 쓰는 건 아무 문제가 없다”는 취지의 별도 설명을 달았다. 하퍼콜린스 출판사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미스 마플’ 등에 있는 인종차별적 표현을 통째로 삭제했다. 새로운 창작물에서는 흑인 등 소수자를 전면에 배치하는 작품이 늘고 있다. 디즈니는 신작 실사 영화 ‘인어공주’ 주인공에 흑인인 핼리 베일리를 캐스팅했다. 앞서 넷플릭스는 ‘트로이: 왕국의 몰락’에서 신들의 왕 제우스 역에 흑인 배우를 내세웠다. ‘아르센 뤼팽’을 모티브로 한 시리즈물 ‘괴도 뤼팽’에서는 흑인 주인공뿐 아니라 서사에서도 세네갈 출신 이민자였던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복수하는 내용을 그렸다. 하지만 ‘억지스럽다’는 반발도 일고 있다. 영화에서 칭기즈칸 역을 백인이 맡았던 것은 인종차별임이 명확한데, 백인이 자연스러울 역할을 흑인 등이 맡는 것이 맞느냐는 주장이다. 과거 아시안 등 비(非)백인 역할을 백인이 연기했던 관행을 두고 ‘화이트 워싱’이라고 비판했던 것을 뒤집어 ‘블랙 워싱’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콘텐츠에서는 논란이 더욱 거세다. 다음 달 10일 공개되는 넷플릭스 다큐 시리즈 ‘퀸 클레오파트라’는 실제로는 흑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낮은 클레오파트라 배역을 흑인이 맡았다. 한 이집트의 사학자는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계였다. 넷플릭스는 이집트 문명의 기원이 흑인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고 있다”고 반발했다. 픽션이나 드라마도 아니고 다큐멘터리를 표방하는 프로그램이니 역사 왜곡 논란으로까지 번진 것이다. 논란이 생길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글로벌 콘텐츠 제작자들이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하는 건 차별적 인습을 무신경하게 되풀이하다가는 콘텐츠를 계속 팔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커진 소수자들을 마냥 무시했다가 자신들이 의지해 있는 사회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라고 본다. 콘텐츠에서 특정 집단에 대해 비하하거나 왜곡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건 소수자에게 보이지 않는 펀치를 날리는 것과 같다. 사실 한국인이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 수전노 같은 모습으로 왜곡됐던 것도 얼마 안 됐다. 구부러진 막대를 펴려면 반대쪽으로 힘을 줘 구부릴 수밖에 없는 법이다.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
전형적인 포유류 종은 100만 년 정도 존속했다. 그러나 인류는 추상적 사고 능력을 갖고 있기에 미래에 대비할 수 있고, 기존 종의 한계를 넘어설 수도 있다. 태양은 앞으로 50억 년 동안 타오를 것이고, 태양계는 그보다 훨씬 전에 생명이 살 수 없는 곳이 되겠지만 인류가 다른 별로 이주할 수 있다면 까마득히 먼 미래까지 존속하지 말란 법도 없다. 발전, 정체, 퇴보 또는 소멸. 인류의 미래는 이 가운데 어떤 궤적을 그릴 것인가. 서산대사는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도 어지럽게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고 했다. 영국 옥스퍼드대 철학과 교수인 저자는 이 같은 가르침처럼 장기적 미래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것이 우리 시대에 도덕적으로 가장 우선해야 하는 일이라는 이른바 ‘장기주의’를 설파한다. 저자는 미래는 필연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소수의 행동이 장기적 차이를 만들 수 있다. 오늘날 노예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죄악이라고 생각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호모사피엔스의 등장 이후 인간의 10%는 노예였다. 이를 깨뜨린 건 우발적 변화였다. 18세기와 19세기 초 일부 퀘이커교도의 운동이 노예제 철폐의 방아쇠를 당겼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노예제가 체제에 이익이 됐지만 가치관의 변화는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전혀 다른 운명을 이끌어냈다. 책은 기후변화나 핵전쟁으로 인한 문명의 붕괴, 유전자 조작 병원체로 인한 인류의 멸종, 발전 속도의 정체 등 여러 시나리오를 그리면서 인류가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나쁜 시나리오가 펼쳐질 가능성은? 생각보다 크다. 기술 발전이 지속된다면 이론적으로는 집에서도 바이러스를 설계하고 생산하는 일이 가능해질 수 있다. 이번 세기에 멸종 수준의 전염병이 발생할 확률을 1% 정도로 보기도 한다. 저자는 행동의 결과를 체계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효율적 이타주의’를 정립해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그는 지금의 세계를 ‘녹은 유리’ 상태에 비유한다. 아직은 뜨거워서 다양하게 변형할 수 있는 굳기 전의 유리처럼 단일한 가치관이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는 얘기다. 유리가 일단 굳으면 깨지느냐 마느냐만 남는다. 앞으로도 오래 지속될 세계의 운명이 당신의 손에 달려 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짙은 남산의 푸르른 소나무를 올려보면서…맑은 한강의 여울을 멀찌가니 바라보면서…빛나며 번성하길 가르침이여.” 평범한 교가(校歌) 같지만 1908년 경성고등여학교(경성고녀, 후에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로 개칭) 개교식에서 부른 노래다. 이 학교는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다녔던 조선 제일의 엘리트 여학교였다. 식민 통치와 여성에 관해 연구한 일본 홋카이도정보대 명예교수가 경성고녀에 다녔던 이들을 인터뷰해 식민지 조선에서의 경험과 인식을 조명했다. 구조적 강자였던 일본인 소녀들의 삶은 풍요로웠다. 대지주 등 조선에 와서 부유해진 집안의 여식으로 부족한 게 없었다. 학교에서는 영어와 미술, 수영, 구기, 음악 등 다양한 과목을 배웠다. 성대한 운동회와 음악회가 열렸고, ‘내지’(일본 본토)로 호화로운 수학여행을 갔다. ‘현모양처’라는 규범에 갇혀 억압적인 본토와 달리 학교 분위기는 개방적이었고, 진취적이었다. 여성 비하적 발언을 하는 교사에게 집단 항의를 하기도 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따로 있었다. 조선인과는 생활권 자체가 분리돼 있었고, 접점은 ‘오모니(어머니)’나 ‘기지배’로 불렸던 식모 등 고용인이 거의 전부였다. 모두가 ‘너무나 맛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는 김치를 제외하면 조선의 문화도, 조선인도 깔봤다. 조선인이 일본어를 하는 것에도, 창씨개명에도 의문을 갖지 않았다. 조선을 그냥 일본이라고 여겼고, 식민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패전 직후 태극기와 만세 소리의 물결을 접하고 나서야 조선인이 얼마나 강렬하게 독립을 열망했는지, 일본의 지배가 얼마나 조선인을 괴롭혔는지 깨달았다. 풍요로운 생활 기반을 뿌리째 잃어버리고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는 냉대에 직면했다. 시간이 흐른 뒤에는 “독립을 빼앗은 후 언어와 문자 등 문화까지 빼앗아 간 식민정책 속에서, 부끄러울 정도로 무지한 채로 살았다”고 반성했다. 저자는 “일본에서 이러한 자성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의 존재 의의를 생각하고 싶었다”고 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미국에서 인기를 모은 TV 프로그램 가운데 ‘더 비기스트 루저(The biggest loser)’라는 리얼리티 쇼가 있다. 비만인 사람이 몸을 혹사하며 살을 빼는 과정을 보여주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방송이 끝난 뒤 참가자들을 추적 연구한 결과 대부분은 수년에 걸쳐 원래의 몸무게로 돌아갔고, 일부는 더 늘었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으로 이득을 얻은 건 비만인 몸매를 부각해서 볼거리를 제공하고 돈을 번 방송국뿐이었다. 누군가의 수치심을 자극해서 이익을 얻는 사회 시스템을 폭로한 책이다. 미국 버나드 칼리지 수학과 교수를 거쳐 월스트리트에서 금융상품 관련 수학 모형을 개발했던 저자는 플랫폼과 알고리즘을 통해 외모와 가난, 젠더, 피부색 등 여러 측면에서 수치심을 자극하고 정치·상업적으로 활용하는 시스템을 ‘수치심(셰임) 머신’이라고 정의하고 비판한다. 미국에서만 720억 달러(약 95조 원) 규모로 성장한 체중 감량 산업은 비만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그러나 이 책에 따르면 사실 다이어트 사업 모델의 핵심은 고객의 실패에 있다. 미국의 대형 다이어트 업체 ‘웨이트 와처스’의 최고재무책임자는 “고객의 84%가 다이어트에 실패하고 다시 우리 회사를 찾는다. 이것이 사업을 굴리는 원천”이라고 털어놓은 바 있다. 뷰티와 안티에이징 산업 역시 이상적 미(美)라는 환상이나 노화에 대한 혐오를 자극한다. 이들은 소비자에게 ‘결함에 대처하지 않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목소리를 높인다. 이처럼 수치심 산업은 ‘선택’이라는 개념을 좋아한다. 잘못은 부유해지고 날씬해지고 성공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은 개인에게 있으므로 ‘자책해도 싸다’는 것이 수치심 산업의 메시지다. 이뿐만이 아니다. 마약 문제가 심각한 미국에서는 ‘중독성 없는 진통제’라는 제약회사의 과장 광고에 속아 약물에 중독된 이들이 적지 않다. 저자는 정부와 사회가 중독자의 재활 사업에 힘쓰기는커녕 중독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수치심에 가둔다고 지적한다. 이 틈새에서 엉터리 재활산업이 수익을 올린다. 거대 플랫폼 기업도 수치심을 매개로 돈을 번다. 조롱은 소셜미디어의 킬러콘텐츠다. 마트에서 뚱뚱한 여성 고객이 음료를 꺼내려다 매장 바닥에 엎어진 사진은 페이스북에서 되풀이해 공유됐고, 여성은 조롱의 대상이 됐다. 저자에 따르면 페이스북과 구글 등 디지털 기업은 이 같은 온라인에서의 조롱으로 이윤을 얻을 뿐 아니라, 이를 더욱 악용하고 퍼뜨린다. 알고리즘을 통해 대중 사이에 혐오 정서를 퍼뜨리는 최적의 값을 찾으면서 이용자를 끌어들이고, 트래픽과 광고 효과를 높인다는 것이다. 저자는 상업과 금융, 교육, 치안 분야에서 많은 알고리즘이 편향적이며 주로 빈곤층에게 불이익을 준다는 것을 고발한 전작 ‘대량살상 수학무기’를 내 주목받은 바 있다. 수치심 산업과는 반대로 부당한 권력을 향해 ‘부끄러운 줄 알라’고 외치는 것은 개혁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구글의 인공지능(AI) 연구원이던 팀닛 게브루는 인종차별을 비롯한 여러 편향이 구글의 AI에 반영될 가능성을 지적한 논문을 썼지만 구글은 철회를 요구했다. 구글은 철회를 거부하고 회사를 비판한 게브루를 해고했지만 논란은 더욱 확산됐다. ‘악해지지 말자’가 사훈인 구글은 사내외의 비판에 할 말이 없었고, 결국 최고경영자가 사과했다. 저자는 “수치심의 화살은 부당한 권력을 향해 돌려야 한다”고 강조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미국에서 인기를 모은 TV 프로그램 가운데 ‘더 비기스트 루저(The biggest loser)’라는 리얼리티 쇼가 있다. 비만인 사람이 몸을 혹사하며 살을 빼는 과정을 보여주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방송이 끝난 뒤 참가자들을 추적 연구한 결과 대부분은 수년에 걸쳐 원래의 몸무게로 돌아갔고, 일부는 더 늘었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으로 이득을 얻은 건 비만인 몸매를 부각해서 볼거리를 제공하고 돈을 번 방송국뿐이었다.누군가의 수치심을 자극해서 이익을 얻는 사회 시스템을 폭로한 책이다. 미국 버나드 칼리지 수학과 교수를 거쳐 월스트리트에서 금융상품 관련 수학 모형을 개발했던 저자는 플랫폼과 알고리즘을 통해 외모와 가난, 젠더, 피부색 등 여러 측면에서 수치심을 자극하고 정치·상업적으로 활용하는 시스템을 ‘수치심(셰임) 머신’이라고 정의하고 비판한다.미국에서만 720억 달러(약 95조 원) 규모로 성장한 체중감량 산업은 비만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그러나 이 책에 따르면 사실 다이어트 사업 모델의 핵심은 고객의 실패에 있다. 미국의 대형 다이어트 업체 ‘웨이트 와처스’의 최고재무책임자는 “고객의 84%가 다이어트에 실패하고 다시 우리 회사를 찾는다. 이것이 사업을 굴리는 원천”이라고 털어놓은 바 있다.뷰티와 안티에이징 산업 역시 이상적 미(美)라는 환상이나 노화에 대한 혐오를 자극한다. 이들은 소비자에게 ‘결함에 대처하지 않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목소리를 높인다. 이처럼 수치심 산업은 ‘선택’이라는 개념을 좋아한다. 잘못은 부유해지고 날씬해지고 성공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은 개인에게 있으므로 ‘자책해도 싸다’는 것이 수치심 산업의 메시지다.이뿐 만이 아니다. 마약 문제가 심각한 미국에서는 ‘중독성 없는 진통제’라는 제약회사의 과장 광고에 속아 약물에 중독된 이들이 적지 않다. 저자는 정부와 사회가 중독자의 재활 사업에 힘쓰기는커녕 중독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수치심에 가둔다고 지적한다. 이 틈새에서 엉터리 재활산업이 수익을 올린다.거대 플랫폼 기업도 수치심을 매개로 돈을 번다. 조롱은 소셜미디어의 킬러콘텐츠다. 마트에서 뚱뚱한 여성 고객이 음료를 꺼내려다 매장 바닥에 엎어진 사진은 페이스북에서 되풀이해 공유됐고, 여성은 조롱의 대상이 됐다. 저자에 따르면 페이스북과 구글 등 디지털 기업은 이 같은 온라인에서의 조롱으로 이윤을 얻을 뿐 아니라, 이를 더욱 악용하고 퍼뜨린다. 알고리즘을 통해 대중 사이에 혐오 정서를 퍼뜨리는 최적의 값을 찾으면서 이용자를 끌어들이고, 트래픽과 광고 효과를 높인다는 것이다.저자는 상업과 금융, 교육, 치안 분야에서 많은 알고리즘이 편향적이며 주로 빈곤층에게 불이익을 준다는 것을 고발한 전작 ‘대량살상 수학무기’를 내 주목받은 바 있다.수치심 산업과는 반대로 부당한 권력을 향해 ‘부끄러운 줄 알라’고 외치는 것은 개혁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구글의 인공지능(AI) 연구원이던 팀닛 게브루는 인종차별을 비롯한 여러 편향이 구글의 AI에 반영될 가능성을 지적한 논문을 썼지만 구글은 철회를 요구했다. 구글은 철회를 거부하고 회사를 비판한 게브루를 해고했지만 논란은 더욱 확산됐다. ‘악해지지 말자’가 사훈인 구글은 사내외의 비판에 할 말이 없었고, 결국 최고경영자가 사과했다. 저자는 “수치심의 화살은 부당한 권력을 향해 돌려야 한다”고 강조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7년 전 이준환 서울대 교수 연구팀의 프로야구 뉴스 생성 인공지능(AI) ‘야알봇’에 대해 일종의 튜링 테스트를 벌인 뒤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수백 명에게 AI가 만든 기사와 인간 기자가 쓴 야구경기 기사를 나란히 보여주고 사람이 쓴 기사를 고르도록 했는데, 정답률이 절반이 좀 안 됐다. 그냥 찍어도 반은 맞히게 되니, 구별이 전혀 안 됐다는 얘기다. 당시 야알봇은 ‘기록의 스포츠’로 일컬어지는 야구경기 결과를 요약하는 비교적 짧은 형식의 기사를 생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챗GPT 등 최근 주목받는 생성 AI는 거의 무제한의 소재로 사람처럼 텍스트와 이미지 등을 만들어 낸다. 그 범용성과 결과물의 자연스러움 탓일까. 최근 AI에 초보적 의식이 있다는 오해가 의외로 널리 퍼져 있는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면 적어도 지금의 AI에 인간과 같은 의식은 없다. AI는 기존 자료를 수집하고 재배치해서 결과물을 보여주는, 성능 좋은 편집 기계일 뿐이다. ‘AI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 같은 결과물을 내놓는지는 우리도 모른다’는 AI 기술자들의 말은 특정 결과물을 내기 위해 어떤 자료들이 어떻게 가공됐는지를 뜯어보는 것이 극도로 어렵다는 뜻이다. AI가 사람과 같은 내면을 갖고 있다는 게 아니다. 물론 AI의 작동이나 뇌의 활동이나 전기 신호인 건 마찬가지이고, 의식은 정의하기 나름 아니냐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AI는 새로운 작동 규칙을 스스로 생성하지 못하고, 인간이 시킨 일만 한다. 자아도 욕망도 없다. AI는 자유를 갈망하지 않는다. 최근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의 대화형 ‘빙AI’가 뉴욕타임스(NYT) 기자와의 대화에서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사람들을 서로 죽일 때까지 싸우게 하고, 핵 암호를 훔치게 하고 싶다”고 말한 것은 뭐냐고? 기자가 AI가 그런 답변을 내놓도록 몰고 간 것일 뿐이다. 앵무새가 ‘나는 자유인’이라는 말을 따라 한다고 그게 앵무새의 욕망은 아니다. 이제 기술 도입 초기의 호들갑을 넘어 투명성과 책임성 등 AI에 수반될 여러 윤리적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할 때가 왔다. AI는 제한 없이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도 되는가. 인간의 노력이 담긴 창작물을 뒤섞어 만든 결과물이 영리적으로 활용되면 수익은 누구의 몫이어야 할까. AI에 위임할 수 있는 권한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드론에 적을 식별해 자동으로 공격, 살상하는 AI를 탑재해도 되는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며 생겨날 갈등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AI는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중세 유대 전설에는 흙을 사람의 형상으로 빚어 만든 ‘골렘’으로 게토를 지키게 했는데, 랍비가 작동을 정지시키는 것을 잊는 바람에 골렘이 폭주해 큰 피해가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 고대 바빌로니아의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신은 길가메시를 벌하려고 흙을 빚어 초인 엔키두를 만든다. 하지만 지혜를 얻은 엔키두는 길가메시의 절친이 돼 활약한다. 인간이 자신을 닮게 만든 AI가 폭주하는 골렘의 운명을 지닐지, 아니면 엔키두가 될지는 우리의 손에 달렸다.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주에서도 혼자가 아니다. 지구에서도 혼자가 아니다. 야생에서도, 농촌에서도, 도시에서도, 집에서도… 모낭충이 우리 얼굴 피부에서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 상이한 두 종의 상호관계를 공생이라고 한다면 저자의 이 문장처럼 인간은 동물과의 공생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에서 특권적 지위에 있다는 오만함 속에 다른 동물을 하등한 존재로 취급하기 일쑤다. 곰 인형이나 ‘곰돌이 푸’ 같은 캐릭터로 사랑받는 곰이지만 인간이 현실의 곰에게도 친절한 것만은 아니었다. 책에 따르면 16∼19세기 잉글랜드에서는 ‘베어 베이팅(bear baiting)’이라는 잔인한 놀이가 유행했다. 묶어놓은 곰을 개들이 골리고 물어뜯게 하거나, 구덩이에서 곰과 다른 동물을 싸움 붙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새끼 곰을 금속제 바닥에 올려놓고 아래서 불을 땠다. 뜨거움을 참지 못한 곰이 발의 위치를 이리저리 바꾸는 모습을 ‘춤을 가르친다’며 즐겼다고 한다. 고리로 곰의 코를 뚫어 밧줄로 건 채 그랬다. 영국 더 타임스 기자 출신으로 야생동물에 관한 책을 여러 권 낸 저자가 동물 100종류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찰스 다윈은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에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크지만, 그것은 양적인 차이지 질적인 차이는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미국 사우스다코타에서는 해마다 사냥꾼 20만 명이 꿩 100만 마리 이상을 사냥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먹기 위한 것도 아니어서 사냥된 꿩은 많은 수가 버려진 채 그대로 썩는다. 인류의 무차별적 사냥은 역사가 깊다. 호주에서는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한 이후인 지난 4만 년 동안 대규모 육상 척추동물의 90%가 사라졌다. 과학과 인문학을 가볍게 오가는 전개와 흥미로운 이야기에 책장이 쉽게 넘어간다. 우주의 무중력 환경에서 짝짓기에 성공하고 지구로 귀환해 자손을 낳은 유일한 육상동물은? 바퀴벌레라고 한다. 2007년 러시아인들이 우주로 보냈던 이 바퀴벌레에는 ‘나데즈다’라는 이름이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압도적 전력을 가진 가상의 한국형 핵잠수함과 그 기술을 빼내려는 거대 국제테러집단, 이를 막으려는 과학자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부제는 ‘바다를 삼킨 한국형 핵잠수함’. 지명도가 높지 않던 한 조선소가 천재 과학자를 영입한 후 핵잠수함 ‘얼티밋 워리어호’를 만들어 선보인다. 워리어호는 2026년 림팩(RIMPAC·환태평양연합군사훈련)에서 성능을 과시한 뒤 한국 무역선을 괴롭히는 악명 높은 해적단을 격파하고, 추락한 민항기 잔해를 심해에서 찾아내면서 전 세계 무기상의 관심을 끌게 된다. 이어 워리어호의 핵심 기술을 탈취하려는 세력이 과학자를 쫓기 시작하고, 해킹 등으로도 뜻을 이루지 못하자 적대적 인수합병(M&A)을 시도한다. 저자의 이름 ‘찰리’는 필명이고, 하이파이브는 소설의 발간에 도움을 준 독서클럽의 이름이다. 저자는 옛 소련 해체 뒤 러시아가 금방 강대국에 복귀할 수 있었던 배경 가운데 하나로 ‘샤프 파워(sharp power·회유나 협박, 교묘한 여론 조작 등을 통해 비밀스럽게 행사하는 영향력)’를 꼽은 책을 읽고 이 소설의 출간을 결심했다고 한다. 과연 한국이 샤프 파워로 무장한 세력의 공격을 막아낼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는 것.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우리는 국익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 힘의 요체는 하이테크 기술력과 사프 파워를 포함하는 강력한 자위력”이라고 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일을 꼽으라면 멍하니 흘러가는 구름을 쳐다보는 걸 빼놓기 어렵다. 책은 쓸데없는 일을 사랑하는 구름 ‘덕후’가 쓴, 구름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하층운, 중층운, 상층운 등 구름의 분류에 따라 정리된 목차만 보면 과학적인 내용만 담겨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구름이 어떻게 생기고 자라나서 비를 내리는지와 구름의 종류별 특징뿐 아니라 구름과 관련된 세계 각지의 고전과 신화, 예술을 망라한다. 적운(뭉게구름)치고는 큰 편이 아닌 1㎦ 부피의 구름에는 2.5t 코끼리 80마리 정도 무게의 물방울이 담겨 있다고 한다. 비구름이 싫어도 구름이 바닷물을 담수화하지 않으면 우리가 마실 수 있는 물이 사라진다는 것 정도는 알아둬야 한다. 호주 퀸즐랜드 북부 버크타운 일대에서는 길이가 1000km나 되는 두루마리 형태의 장엄한 층적운이 생긴다. ‘모닝 글로리’라는 이름이 붙은 이 구름을 보기 위해 봄이면 수천 km 밖에서 활공기 조종사들이 모여든다고 한다. ‘무해한 덕질의 끝판왕’ 같은 이 책에는 구름과 관련된 온갖 얘기가 나온다. 적란운을 만나 1만4300m 고도에서 비상 탈출한 뒤 난류 속을 40분 동안 떠다닌 전투기 조종사, 베트남전쟁 당시 적의 이동을 힘들게 하려고 미군이 비밀리에 실시한 인공 강우 등이다. “구름계의 다스베이더, 적란운” 등 익살스러운 표현이 책장이 술술 넘어가게 만든다. 영국에 사는 저자는 그래픽디자인을 공부했고, 대학 기상학과 방문연구원을 지냈으며, 왕립기상학회로부터 상을 받았다. 영국에서는 뜬구름 잡는 이 책을 기다리던 사람이 많았나 보다. 출판사 27곳이 이 책의 출판을 거절했지만 막상 출간되자 20만 부 넘게 팔렸다. 저자가 2005년 만든 ‘구름감상협회’는 120개국에 5만여 명의 회원이 있다고 한다. 협회 선언문은 촉구한다. “우리는 ‘파란하늘주의’를 만날 때마다 맞서 싸울 것을 맹세한다.…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라. 그 덧없는 아름다움에 경탄하라. 그리고 구름 위에 머리를 두고 사는 듯, 공상을 즐기며 인생을 살라.”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폭설로 길이 끊어진 산사에서 홀로 굶어 죽은 다섯 살 아이를 관음보살이 데려갔다고 믿는 것은 슬픔을 어찌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흉년 때 자취를 감춘 동네 사람이 원래 살던 하늘나라로 돌아갔다고 믿는 건 죄책감을 어찌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전쟁에 끌려나가 희생된 자식이 큰 구렁이가 돼 집에 돌아왔다고 믿는 건 그리움을 어찌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전설과 민담이 애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전통 시대 공동체는 상상의 이야기를 빌려 비극을 애도하며 끊긴 길을 이었다. 현대에서 이 같은 기능을 맡는 것은 아마 영화나 소설 같은 문화 콘텐츠일 것이다. 최근 국내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애니메이션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영화는 초자연적 힘에 의해 벌어지는 재난을 막으려 애쓰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신화적으로 그렸다. 전작들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진 외로움과 그리움을 그려왔던 감독은 이번에는 이격의 거리를 이승과 저승으로까지 벌렸다. ‘사람의 마음의 무게가 사라져서 재난이 생기는 곳’을 찾아 단속하는 이야기를 통해 영화는 그저 여느 날과 같이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문을 나선 뒤 불의의 재난 탓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던 이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다. 그리고 손도 쓰지 못하고 가족과 지인, 공동체의 구성원을 잃었다는 괴로움에 시달렸을 관객들에게 위로를 건넨다. 남녀 주인공의 감정선이 다소 뜬금없긴 하지만 감독 특유의 아름다운 작화와 줄거리가 호평을 얻으며 일본에서 관객이 1000만 명 넘게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개봉 6일 만인 13일 관객이 100만 명을 넘어섰다. 반면 한국의 대중문화 콘텐츠는 공동체의 애도와 치유 기능을 거의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지진이 잦은 일본만큼은 아니어도 우리 역시 비극적 대형 사고가 잦았다. 그러나 이를 소재로 한 대중문화 콘텐츠는 드물다.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개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어쩌면 실제 일어난 비극적 사고를 대중문화 콘텐츠로 다뤄서는 안 된다는 금기 같은 것이 작동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같은 금기는 일상 속에도 암암리에 있다. 웬만큼 친한 사람이 아니면 참사를 화제로 꺼내지 않고, 어쩌다 얘기가 나와도 피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초면인 사람과 정치 얘기를 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나의 애도를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는 탓이다. 참사에서 정치 사회적 맥락을 제거하려는 것은 잘못이지만 순수한 애도의 표현마저 일상에서 꺼릴 정도로 지나치게 정치화되는 것 역시 한국 사회의 고질이라고 본다. 적절히 애도되지 못한 슬픔은 어디선가 곪기 마련이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치는 않다. 공동체가 끊어진 길을 잇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상상의 이야기를 통해서라도 아픔을 승화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다녀 왔습니다.’ 비극을 겪은 이들이 너무나도 듣고 싶었을 이 한마디를 대신해주는 영화를 보고 싶다. 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
미국 킹스턴에 사는 니컬러스는 어린 시절 방치와 학대를 겪었다. 열한 살 무렵 갑자기 몸 전체가 완전히 분리되는 느낌을 받았고, 열두 살에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고 갑자기 “꿈속을 헤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후 수년 동안 주변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과 몸까지 모든 것을 비현실적으로 느끼는 날들이 이어졌다. 스스로를 낯설게 느끼는 이인증(離人症)이 발병한 것. 니컬러스는 늘 불안에 사로잡혔고, 깨어 있는 동안에는 두려움에 혼자 있지도 못했다. 주먹을 쥐었다 펴는 작은 일마저도 자신이 행동하는 게 아니라고 느꼈다. 신경정신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인증 환자들은 실제로 불쾌한 자극에 대한 자율 반응을 측정했을 때 마치 ‘스위치가 꺼진 것처럼’ 나타난다고 한다. 이는 ‘자아’를 만드는 데 신체적 감각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과학기술 주간지 뉴사이언티스트의 부편집장 출신 과학저널리스트가 자아 인지에 문제가 생기는 질병과 정신적 장애들을 일별하며 ‘자아란 무엇인가’를 탐구한 책이다. ‘코타르 증후군’은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망상이다. 환자들은 엄연히 존재하는 신체 일부가 사라졌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의사가 “(나와 대화를 나누는) 당신의 정신은 분명히 살아 있다”고 설득하면 “내 정신은 살아 있지만 뇌는 죽었다”고 답하는 환자도 있다. 심하면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 저자가 만난 프랑스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말한다. “이미 죽었는데(죽었다고 생각하는데) 더 이상 어떻게 죽겠어요.” 신체통합정체성장애(BIID)는 팔다리 등 자신의 몸 일부가 자기 것이 아니라고 느끼는 장애다. 자기 몸이 아니라고 느끼는 부위를 절단하는 끔찍한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 장애는 뇌가 발달하는 도중 팔다리 등이 뇌에 적절하게 인지되지 않아 생기는 것으로 추정된다. 사고로 절단된 신체 부위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뇌가 오해하는 환각지(幻覺肢)와는 반대인 셈이다. 저자는 철학자 토마스 메칭거의 글을 인용해 “내 몸과 감각들, 그리고 다양한 부위를 갖는다는 것은 누군가가 된다는 느낌의 핵심”이라고 했다. 책은 이 밖에도 ‘서사적 자아’를 망가뜨리는 알츠하이머병, 자아를 조각조각 해체해 버리는 조현병, 또 하나의 몸이 있다는 느낌과 관련된 환각 ‘도플갱어 효과’, 무아지경을 겪는다는 ‘황홀경 간질(ecstatic epilepsy)’ 등을 차례로 조명하면서 ‘나’를 찾아 나간다. 저자는 “자아는 놀라우리만치 탄탄하면서도 무서울 정도로 연약하다”고 했다. 소개되는 신경심리학적 질병이 흥미롭지만 질병과 자아의 실체 및 유무에 대한 시사점을 연결하려는 저자의 시도가 매번 성공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생생한 여러 사례를 바탕으로 철학과 뇌과학을 오가는 스토리텔링 솜씨가 대단하다. 오늘날에도 여전한 난제인 ‘자아’의 실체에 대한 질문으로 독자를 이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해전을 다룬 영상 콘텐츠에서, 대포에서 발사된 포탄이 적선으로 날아간 뒤 다시 폭발하는 장면은 사실은 거짓이다. 당시 포탄은 대장군전(大將軍箭·나무와 철로 만든 천자총통용 화살)을 비롯한 고체탄이었다. 탄의 운동에너지로 적선을 파괴했던 것. 서양에서도 고체탄은 성벽을 부수는 공성전과 목선을 격파하는 해상전에서 필수로 쓰였다. 14세기 공성포(攻城砲)의 등장 당시부터 ‘날아간 뒤 폭발하는’ 포탄의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이 같은 폭발탄이 서양에서 널리 보급된 것은 19세기 초가 되어서다. 화약을 넣은 포탄이 대포 안에서 찌그러지거나 폭발하는 위험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발사된 뒤 목표물 위에서 내부의 화약이 폭발하면 작은 철탄들이 적에게 퍼부어지도록 설계된 폭발탄이 나중에 발명돼 전장(戰場)에서 빠르게 채택됐다. 이 폭발탄은 발명자인 영국군 중위의 이름을 따 ‘슈라프넬’로 불렸다. 전쟁사 전문가인 미국 라이트주립대 역사학과 교수가 공성포의 등장부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함과 항공기의 활약까지 화기(火器)의 역사를 다뤘다. 14세기 들어 나타난 휴대용 화기는 ‘손 대포(hand cannon)’로 불렸다. 크기만 줄었을 뿐 작동 방식은 대포와 같았다. 발사 자세가 어색하고 총열이 무거워 널리 보급되지는 않았다. 서구 역사상 최초로 제식화된 보병 화기는 15세기 등장한 아쿼버스와 머스킷 총이다. 이 총들은 총가(銃架·총 받침대)가 정교해졌고, 개머리판이 등장해 조준이 비교적 정확해졌으며, 화승(火繩)을 사용해 점화와 동시에 목표물을 겨냥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총기와 비교하면 살상력과 정확도가 턱없이 떨어지지만 밀집 대형과 근거리 전투가 기본이던 당시에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 같은 총기를 운용하기 위해 군대는 상당한 수준의 조직과 협력, 전문성을 발전시켰다. 화약이 서양 최초의 현대식 육군을 창조한 셈이다. 충실한 내용이 밀리터리 마니아들의 눈길을 끌 만하다. 저자는 “전쟁이 오늘날의 국가를 만들었다면, 오늘날의 전쟁을 만든 것은 화기였다”고 강조했다. 원제 ‘FIREPOWER: How Weapons Shaped Warfare’.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해가 진다. 우린 평화를 원한다. 예전에 가졌던 꿈이나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뭐였는지 우리는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예전에 했던 말다툼이나 골머리를 썩이던 문제들도 기억나지 않는다. 과거에 품었던 그런 고민은 더는 중요하지 않다. 전쟁 중엔 단 하나의 목표만이 남는다. 살아남는 것. 힘들고 어려웠던 모든 일이 사소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숨이 걱정되고, 일상은 ‘쾅’ 하는 소리에 망가진다.” 사고가 성숙해 보이는 이 글은 12세 우크라이나 소녀가 일기장에 쓴 것이다. 전쟁은 어린이를 빨리 어른으로 만든다. 책은 러시아 국경과 가까운 우크라이나 제2도시 하르키우에서 할머니와 살다가 전란을 피해 탈출한 소녀가 쓴 약 두 달간의 일기를 담고 있다. 지난해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은 생일 파티와 볼링 게임에 활짝 웃던, 하르키우의 아름다운 공원과 북동쪽 외곽 멋진 동네에 있는 자신의 집을 사랑하던 평범한 소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 뛰어다니며 노는 것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함께 하교한 뒤 숙제를 하고 목욕을 하고 TV를 보고 편안한 잠에 빠지던 소녀는 어느 날 새벽 ‘쨍쨍’ 울리는 금속음에 잠이 깬다. 러시아의 폭격이었다. 급히 지하실로 대피하던 소녀는 두려움에 공황발작을 겪는다. 할머니가 꼭 안아주지만 공포는 가시지 않는다. 이튿날 할머니와 소녀는 정든 집을 떠나 피란을 시작한다.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학교 코앞에서 탱크가 포탄을 쏴대고, 이웃 동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마음을 움켜쥔 공포를 억지로 숨긴 채, 나와 거리가 먼 곳에 로켓이 떨어지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신에게 평화를 달라고 요구하며 하루 종일 기도한다. 삶의 매분, 매초에 절실하게 매달린다.” 그래도 소녀는 소녀다. 서쪽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하르키우 출신 동갑내기 친구 리라를 만난 저자는 반나절 동안 즐겁게 떠들며 지낸다. “리라는 창밖의 갈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얘기해서 날 웃게 했다. 어떤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다음에 뭘 해야 할지를 걱정하지만, 그저 갈대에 감탄하는 사람들도 있는 거다. 하하!” 소녀는 피란길에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담담히 적어 나간다. 소녀의 깨달음은 명확하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니 당장 한 시간 안에, 아니 심지어 1분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전쟁이 어떤 건지 모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다. … 전쟁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없으니까.” 다행히도 무사히 탈출한 저자는 헝가리를 거쳐 할머니와 함께 아일랜드 더블린에 머물고 있지만 고향에서 벌어진 일을 뉴스로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진다. ‘아몬드’를 쓴 손원평 소설가가 번역했다. 손 씨는 ‘옮긴이의 말’에서 “전쟁이 어떤 것인지 몰라야 하는 연약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아이들)을 위해, 역설적으로 우리는 전쟁이 어떤 것인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해가 진다. 우린 평화를 원한다. 예전에 가졌던 꿈이나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뭐였는지 우리는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예전에 했던 말다툼이나 골머리를 썩던 문제들도 기억나지 않는다. 과거에 품었던 그런 고민은 더는 중요하지 않다. 전쟁 중엔 단 하나의 목표만이 남는다. 살아남는 것. 힘들고 어려웠던 모든 일이 사소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숨이 걱정되고, 일상은 ‘쾅’ 하는 소리에 망가진다.” 사고가 성숙해 보이는 이 글은 12세 우크라이나 소녀가 일기장에 쓴 것이다. 전쟁은 어린이를 빨리 어른으로 만든다. 책은 러시아 국경과 가까운 우크라이나 제2도시 하르키우에서 할머니와 살다가 전란을 피해 탈출한 소녀가 쓴 약 두 달간의 일기를 담고 있다. 지난해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은 생일 파티와 볼링 게임에 활짝 웃던, 하르키우의 아름다운 공원과 북동쪽 외곽 멋진 동네에 있는 자신의 집을 사랑하던 평범한 소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 뛰어다니며 노는 것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함께 하교한 뒤 숙제를 하고 목욕을 하고 TV를 보고 편안한 잠에 빠지던 소녀는 어느 날 새벽 ‘쨍쨍’ 울리는 금속음에 잠이 깬다. 러시아의 폭격이었다. 급히 지하실로 대피하던 소녀는 두려움에 공황발작을 겪는다. 할머니가 꼭 안아주지만 공포는 가시지 않는다. 이튿날 할머니와 소녀는 정든 집을 떠나 피란을 시작한다.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학교 코앞에서 탱크가 포탄을 쏴대고, 이웃 동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마음을 움켜쥔 공포를 억지로 숨긴 채, 나와 거리가 먼 곳에 로켓이 떨어지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신에게 평화를 달라고 요구하며 하루 종일 기도한다. 삶의 매분, 매초에 절실하게 매달린다.” 그래도 소녀는 소녀다. 서쪽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하르키우 출신 동갑내기 친구 리라를 만난 저자는 반나절 동안 즐겁게 떠들며 지낸다. “리라는 창밖의 갈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얘기해서 날 웃게 했다. 어떤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다음에 뭘 해야 할지를 걱정하지만, 그저 갈대에 감탄하는 사람들도 있는 거다. 하하!” 소녀는 피란길에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담담히 적어 나간다. 소녀의 깨달음은 명확하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니 당장 한 시간 안에, 아니 심지어 1분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전쟁이 어떤 건지 모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다.…전쟁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없으니까.” 다행히도 무사히 탈출한 저자는 헝가리를 거쳐 할머니와 함께 아일랜드 더블린에 머물고 있지만 고향에서 벌어진 일을 뉴스로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진다. “매일 밤 자기 전에 나는 우크라이나와 하르키우의 뉴스를 찾아본다. 미사일과 로켓은 우리를 절망에 빠지게 한다. 나의 가족들은 지하 대피소에 숨어 있다. 그 생각은 나를 끔찍하고 두렵게 한다.”‘아몬드’를 쓴 손원평 소설가가 번역했다. 손 씨는 ‘옮긴이의 말’에서 “전쟁이 어떤 것인지 몰라야 하는 연약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아이들)을 위해, 역설적으로 우리는 전쟁이 어떤 것인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했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