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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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신광영 논설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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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4-10-23~2024-11-22
칼럼100%
  • 그 일본계 청년은 왜 6·25전쟁서 피를 흘렸나

    “당신이 미야무라 상병입니까?”6·25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 20일 중공군 트럭에서 내린 히로시 미야무라 상병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키가 178cm인 미야무라는 45kg도 안 되는 야윈 몸을 일으켜 세웠다. 포로교환이 진행되던 비무장지대(DMZ)의 흙길을 가로질러 온 한 백인 장교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교의 군복에 박힌 성조기(미국 국기)를 보자마자 미야무라는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2년 반 전인 1951년 4월 24일 밤, 서서히 커져오던 중국군의 꽹과리 소리를 미야무라는 잊지 못했다. 미 육군 소속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그는 서울 근교의 전초기지를 지키고 있었다. 그날 밤 1000여 명의 중공군 부대는 바로 옆 분대를 초토화시킨 뒤 그의 분대를 포위해 오고 있었다. 분대장이던 미야무라는 전멸을 피하기 위해 분대원 15명을 모두 후퇴시켰다. 그러곤 혼자 남아 중공군을 향해 기관총을 쐈다. 총알이 바닥나자 총검을 들고 적진에 뛰어들었다.며칠 뒤 의식을 회복했을 때 미야무라는 중공군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쓰러진 적군이 던진 수류탄에 맞아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28개월간 포로로 잡혀 있다 미국으로 귀환한 그는 한미 양국에서 최고무공훈장을 받았다. 훈장에는 ‘총알이 떨어지기 전까지 50명이 넘는 중공군을 사살했다’고 쓰여 있다.미야무라처럼 6·25전쟁에 참전한 일본계 미국인은 5600여 명에 달했다. 이 중 255명이 전사했다. 이들은 1900년대 초 미국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의 자손이었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 미 해군기지를 공격했을 때 미야무라는 열여섯 살이었다. 진주만 공습으로 일본이 미국의 적국이 되면서 미국 내 일본인들은 시련을 맞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행정명령 9066호에 따라 일본계 이민자 12만여 명은 미 서부의 강제수용소에 갇혔다.미야무라는 열차에 실려 수용소로 보내지는 이웃들을 보며 입대를 결심했다. 미국을 위해 싸우는 충성스러운 미국인임을 증명하는 것은 당시 일본계 청년들이 공유한 생존 본능이었다. 이들은 미국에선 일본과 내통하는 스파이로 의심받고, 일본에선 조국의 배신자로 낙인찍혀 있었다. 일본계 중심으로 구성된 미 육군 100보병대대와 442연대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유럽으로 파병돼 나치 독일군에 맞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두 부대는 미 육군 역사상 가장 많은 무공훈장을 받았다. 1942년부터 3년간 운영된 일본인 강제수용소는 미국 각지에 흩어져 살던 일본인들이 ‘일본계 미국인’으로 새롭게 각성하며 연대하는 계기가 됐다. 미국 내 중국 이민자들 역시 ‘중국계 미국인’이란 정체성을 정립하게 된 분수령이 있다. 1982년 ‘빈센트 친 사건’이다. 당시 27세였던 빈센트는 결혼식을 앞두고 미국 디트로이트의 술집에서 파티를 하다 백인 남성들에게 살해됐다. 자동차공장 근로자였던 이들은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우리가 일자리를 잃었다”며 야구방망이로 빈센트의 머리를 집중 가격했다. 명백한 인종 증오 범죄였지만 주범은 집행유예 3년, 공범은 3000달러 벌금형에 그쳤다.재미 한인들은 1992년 로스앤젤레스(LA) 폭동을 기점으로 ‘한국계 미국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미 정부의 외면 속에 목숨과도 같은 상점들이 불타고 한인들이 죽어가자 각자도생해 온 교포들은 단결된 목소리의 필요성을 절감했다.일본인 강제수용소가 생긴 지 80년, 빈센트 사건 40주년, LA 폭동 30주년인 올해는 미국에서 아시안 증오 범죄가 극에 달한 한 해였다. 수많은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총에 맞거나 칼에 찔렸고, 지하철을 기다리다 뒤에서 떠밀려 선로로 떨어졌다.미국 사회에 조용히 순응해 온 아시안들은 ‘모범적 소수인종’인 동시에 ‘보이지 않는 이민자’로 비쳐왔다. 이런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이 코로나19 이후 중국인을 분노의 표적으로 삼자 아시안들은 만만한 희생양이 됐다. 공교롭게도 증오 범죄의 잠재적 피해자라는 공통분모는 한국계, 중국계, 일본계 미국인들을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결집시키고 있다. 지난해 발효된 아시안 증오범죄 방지법은 중국계·일본계 의원들이 공동 발의했고, 앤디 김 등 한국계 하원의원 4명이 동참해 만들어졌다.6·25전쟁에서 돌아온 미야무라는 지난달 29일 97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모국의 식민통치 피해국에 와서 피를 흘렸던 것은 미국 내 이방인으로서 존재가치를 증명하려는, 미국을 향한 투쟁에 가까웠다. 당시 그가 느꼈을 불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공포를 요즘 미국 내 아시안들은 여전히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2022-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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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민 가정-성소수자 38세 한인 청년, 美 주류사회에 도전장[글로벌 포커스]

    《악조건을 두루 갖췄다. 돈도 배경도 없는 정치 신인에 소수인종, 성정체성 장벽까지…. 주민 다수가 히스패닉인 지역에서 히스패닉 출신 3선 의원에게 도전한 한국계 데이비드 김. 그는 이번 미국 중간선거에서 누구보다 드라마틱한 승부를 펼쳤다.》한인 청년의 美하원의원 도전기 선거는 이제 40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미국 연방하원에 출마한 한국계 미국인 데이비드 김(38)은 다음 날 유권자들에게 나눠줄 퍼즐의 조각을 하나씩 맞춰 봤다. 30개 조각이 다 채워진 퍼즐에는 두 손에 돈다발을 쥔 거인과 그를 올려다보는 작은 청년이 그려져 있었다. 데이비드 선거 캠프의 20대 봉사자들이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이 연상되도록 만든 홍보물이었다. 데이비드는 “저희 지역엔 아이에게 늘 미안한 부모가 많아요. 어린이용 퍼즐을 드리면 도움이 될 거 같았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에서 아동복지 전문 국선변호사로 일하며 취약 가정을 자주 접했다. 부모들은 대개 투잡, 스리잡을 뛰며 주 6, 7일 일을 했다. 자녀들은 집에 방치되기 일쑤였다. 그가 출마한 캘리포니아(CA) 34지구는 연방하원 지역구 435개 중 가장 가난한 20곳 중 하나다. ○ 히스패닉 근거지에서 거물과 맞서다퍼즐에서 거인으로 묘사된 인물은 상대 후보인 이 지역 3선 현역의원(민주당) 지미 고메즈였다. 주민 70만 명 중 히스패닉(중남미계 이주민) 인구가 65%에 달하는 CA 34지구는 고메즈 같은 민주당 히스패닉 정치인들의 근거지였다. 그와의 대결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데이비드는 2년 전인 2020년에도 이곳에 출마했다. 당시 고메즈는 선거운동 내내 데이비드의 이름을 언급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그를 경쟁 상대로 보지 않았다. LA한인타운이 34지구에 있긴 했지만 데이비드는 한인타운에도 알려지지 않은 정치 신인이었다. 현지 한국계 언론마저 고메즈를 공식 지지했다. 당시 데이비드는 낮엔 피켓을 든 채 주민들을 만나고 밤엔 우버 기사로 일할 때 쓰던 구형 소나타를 몰고 다니며 벽보를 붙였다. 그가 유일하게 앞섰던 것은 200여 명에 달하던 자원봉사자 수였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모두를 놀라게 했다. 데이비드는 47%의 지지를 얻어 고메즈에게 6%포인트 차로 패했다. 이 지역 연방하원 선거에서 표차가 이렇게 근소했던 것은 1976년 이후 44년 만이었다. 데이비드의 2020년 선거 과정은 최근 국내 개봉한 영화 ‘초선’(감독 전후석)에 상세히 담겼다. 이 영화는 당시 연방하원에 출마한 한국계 후보 5명의 도전을 그렸다.○ 한인 이민자의 험난한 성장기“제 부모님은 1982년 미국으로 이주하셨어요. 아버지가 목사여서 개척교회를 하셨는데 이민자로 살면서 고생을 많이 하셨죠.” 데이비드가 청소년기를 보낸 워싱턴주 터코마에는 주한미군과 결혼한 뒤 남편을 따라 이주한 한국인 여성이 많았다. 한국에서 ‘흑인의 아내’ ‘혼혈’이라며 천대받았던 이 여성들과 자녀들은 미국에서도 멸시를 받았다. 이들은 아버지의 교회에 와서 위안을 찾았다. “부모님이 영어를 못하셔서 영어가 필요한 집안일은 어떻게든 제가 처리했어요. 공과금에 연체료가 너무 많이 붙으면 제가 관공서에 따라가 대신 따졌죠. 어려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한 한국분들 대신해서 목소리를 내야 할 일도 많았어요.” 데이비드는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를 거쳐 뉴욕 예시바대 로스쿨을 졸업했다. 변호사가 돼 미국의 주류로 들어가라는 아버지의 뜻을 충실히 따랐다. 그가 사회로 나온 2010년 미국 법률시장은 금융위기 여파로 얼어붙어 있었다. 그는 낮에는 경력을 쌓기 위해 공짜 변호사로 일하고 밤에는 우버 기사, 엑스트라 배우, 학원 강사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땐 하루빨리 변호사로 자리를 잡아 학자금 빚 20만 달러(약 2억6000만 원)를 갚아야 했어요. 가까스로 소니픽처스 사내변호사로 취업이 됐어요.” 소니픽처스는 LA 교외의 부유한 지역인 컬버시티에 있었다. 데이비드는 빈민가에 있는 집에서 출퇴근하며 완전히 다른 두 세상을 매일 오갔다. “미국에 힘들게 정착했던 경험 때문인지 주 7일을 일해도 생활이 안 되고, 병원에 못 가 죽어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데이비드는 결국 소니에서 나와 아동복지와 이민 사건을 맡는 국선변호인으로 일했다. “변호사나 열심히 하지 무슨 정치냐 하는 생각도 들긴 해요. 하지만 변호사만 해서는 사람들 삶이 나아지는 진도가 너무 슬로해서 답답했어요.” 그가 공약으로 내건 기본소득, 전 국민 건강보험, 이민 규제 완화 등은 소수자로 살아오며 절실하다고 느낀 것들이었다.○ 2년 만의 재도전데이비드가 2년 만에 다시 도전장을 냈을 때 고메즈는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미 연방하원은 2년마다 새로 뽑는다). 방심하다 질 뻔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했다. 제약회사와 군수업체 등에서 받은 수백만 달러의 후원금으로 정책 홍보집과 각종 전단을 만들어 등록 유권자 32만 명에게 여러 번 발송했다. 고메즈는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비롯해 민주당 거물들의 공개 지지도 받았다. 민주당의 한국계 하원의원인 앤디 김(뉴저지)과 매릴린 스트리클런드(워싱턴)마저 고메즈를 지지했다. 미국엔 현역 의원들끼리 지지 선언을 주고받으며 의석을 방어하도록 상부상조하는 관행이 있다. 데이비드 역시 민주당 후보였다(캘리포니아주는 같은 당이라도 예비선거 2위 후보까지 출마할 수 있다). 하지만 기득권의 벽 앞에선 장외 선수였다. 2년 전 59%였던 히스패닉 인구 비율은 이번 선거 직전 선거구가 조정되면서 65%로 늘어나 고메즈에게 더 유리해졌다. 아시안은 한국계(13%)를 포함해 20% 정도였고, 백인이 10%, 흑인이 5%였다. 데이비드의 선거 캠프에는 봉사자들이 일일이 손으로 접은 편지 8만여 통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공약과 포부를 담은 이 편지들은 각각 영어와 한국어, 스페인어, 중국어, 태국어 등 여러 언어로 쓰여 있었다. “저희 지역구의 왼쪽과 위쪽 지역구는 백인이 대다수이고, 오른쪽 지역구는 중국인, 아래쪽은 흑인이 대부분이에요. 저희 지역만 모든 인종이 살아요. 우리 지역을 대표하는 의원이라면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데이비드는 영어로만 소통했던 고메즈와 달리 히스패닉 동네에선 스페인어로, 코리안타운에서는 한국어로 말했다. 광고판을 세울 때도 해당 지역 출신 시의원이나 활동가들과 나란히 찍은 사진을 넣었다. 상대의 물량 공세에 맞서 데이비드는 ‘맞춤형’ 전략을 폈다.○ 거절의 상처데이비드가 출마를 결심하면서 가장 두려워했던 건 그의 성정체성이 알려지는 것이었다. 그는 2018년 부모에게 동성애자임을 털어놓았을 때 뼈아픈 거절의 상처를 받았다. 영화 ‘초선’에는 공화당 지지자인 아버지가 데이비드에게 모멸적인 내용의 보이스 메시지를 수시로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너나 네 보이프렌드를 뭘로 보느냐. 그저 애니멀(동물)로 봐. 그런 짓들을 하는 애들일 뿐이지.” ‘이렇게 살면 너는 72시간 안에 죽을 것’이란 메시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데이비드가 2020년 선거 때 한인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했던 것도 교회 중심의 한인 커뮤니티가 동성애에 특히 보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저는 성정체성을 숨긴 채 다른 모든 면에서 부모님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을 갖고 성장했어요. 한인 사회를 대할 때도 그런 부담이 있었던 거 같아요. ‘초선’이 상영되면서 제 성정체성이 알려져 이번 선거에선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죠. 한인들이 제가 동성애자라는 걸 알고 ‘저리 가’ 할까봐 무서웠어요.” 데이비드는 여러 한인 대표들과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지지를 호소했다. 다행히 상당수 한인들이 그를 받아들였다. 2020년엔 선거자금 18만 달러 중 한인 후원금이 500달러에 불과했지만 이번엔 22만 달러 중 5만 달러가 한인 후원금이었다. “하원의원이 되면 한반도 평화에도 기여하고 싶어요. 미국은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대북 정책이 출렁거려요. 그래서 종전 70년이 되도록 아무 변화가 없는 거 아닐까요. 제 뿌리인 한국의 생존을 한반도 평화에 진지한 관심이 없는 백인 정치인들 손에 맡겨 둬선 안 되잖아요.”○ 고메즈의 흑색 공격선거를 8일 앞둔 10월 31일, 데이비드는 가깝게 지내던 유니시스 허낸데즈 LA 시의원으로부터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지역 활동가 출신의 히스패닉 여성인 허낸데즈는 고메즈 측 운동원들이 집집마다 다니며 인종차별적 언행을 한다고 알려왔다. 그날 허낸데즈는 집에 찾아온 고메즈 측 운동원이 가족들에게 투표를 독려하며 “상대 후보가 아시안인 거 알죠, 그렇죠?”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허낸데즈는 집 밖으로 나서던 운동원을 멈춰 세웠다. “그런 말을 왜 하는 거죠? 그런 게 인종차별인 거 몰라요?”(허낸데즈) “그냥 사실을 전했을 뿐이에요.”(운동원) 허낸데즈는 트위터에 이날 일을 올리며 “충격적이고 실망스럽다. 우리는 적어도 이렇게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데이비드는 “그녀가 같은 소수인종으로서 다른 집단이 겪는 부당함에 함께 분노해 줬다는 게 고마웠다”고 했다. 선거가 다가올수록 히스패닉과 당원들을 결집시키려는 고메즈 측 공세는 거세졌다. 구글에 ‘데이비드 김’을 치면 고메즈 측이 만든 웹사이트가 여러 개 떴다. 사이트에는 데이비드가 18세 때 아버지의 요구로 6개월가량 공화당에 가입했던 기록을 제시하며 민주당원으로 위장한 공화당원이며 열렬한 트럼프 지지자라는 등의 허위 사실이 나열돼 있었다.○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며선거 후 2주쯤 지난 11월 21일, 데이비드는 LA공항에서 서울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 세계 한인들이 모이는 ‘디아스포라 다이얼로그’ 행사에 초청을 받아 가던 길이었다. 탑승을 10여 분 앞두고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데이비드는 커밍아웃 이후 아버지의 연락을 피해 왔지만, 7월 두 부자는 한인타운의 한 식당에서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 그날 아버지는 “네가 그렇게 태어난 것을 어떻게 하겠느냐.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너에게 쏟아지는 비난이 있다면 내가 대신 받겠다”고 했다. 데이비드가 한인타운의 대형 교회에서 연설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놔준 것도 아버지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기까진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번 선거도 질 거 같은데 동성애자라는 게 세상에 알려지고 이게 무슨 망신이냐. 이제라도 그 영화에서 동성애 부분은 빼달라고 해.” 데이비드는 아슬아슬한 개표 상황보다 아버지의 말에 더 기운이 빠졌다. 데이비드는 서울에 5일간 머물며 한국의 청년 정치인들과 재외동포로부터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개표 결과가 매주 2번씩 업데이트되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롤러코스터예요. 영화를 보신 어느 분이 ‘데이비드는 지더라도 이긴 것’이라고 격려해 주셔서 용기가 나더군요. 떨어지더라도 어려운 분들을 도울 수 있는 포지션에 있고 싶어요.” 이번 중간선거에서 연방하원에 출마한 한국계 후보는 데이비드를 포함해 총 5명이다. 이 중 현직 의원인 4명은 모두 재선에 성공했다. CA 34지구는 아직 개표가 끝나지 않았다. 11월 말 기준(개표율 98%)으로 데이비드는 49%의 지지를 받아 고메즈를 3000여 표 차로 추격하고 있다. 최종 결과는 12월 5일 확정된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2022-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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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세 한국계 정치 신인, 美 연방하원 3선 거물을 떨게 하다

    선거는 이제 40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미국 연방하원 선거에 출마한 한국계 미국인 데이비드 김(38)은 다음날 유권자들에 나눠줄 퍼즐의 조각을 하나씩 맞춰봤다. 30개 조각이 다 채워진 퍼즐에는 두 손에 돈다발의 쥔 거인과 그를 올려다보는 작은 청년이 그려져 있었다. 데이비드 선거 캠프의 20대 봉사자들이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이 연상되도록 만든 홍보물이었다. 데이비드는 “저희 지역엔 아이에게 늘 미안한 부모들이 많아요. 자녀들에게 줄 퍼즐을 보내드리면 도움이 될 거 같았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LA에서 아동복지 전문 국선변호사(Child Dependency Attorney)로 일하며 취약 가정을 자주 접했다. 부모들은 대개 투잡, 쓰리잡을 뛰며 주 6, 7일 일했다. 자녀들은 집에 방치되기 일쑤였다. 그가 출마한 LA 34지구는 연방하원 지역구 435개 중 가장 가난한 20곳 중 하나다. ● 히스패닉 근거지에서 거물과 맞서다퍼즐에서 거인으로 묘사된 인물은 상대 후보인 이 지역 3선 현역의원(민주당) 지미 고메즈였다. 주민 70만 명 중 히스패닉(중남미계 이주민) 인구가 65%에 달하는 LA 34지구는 고메즈 같은 민주당 히스패닉 정치인들의 오랜 근거지였다.그와의 대결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데이비드는 2년 전인 2020년에도 이곳에 출마했다. 당시 고메즈는 선거운동 내내 데이비드의 이름을 언급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그를 경쟁상대로 보지 않았다. 세계 최대규모 한인 커뮤니티인 LA한인타운이 34지구에 있긴 했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한인타운에도 알려지지 않은 ‘정치 신인’이었다. 현지 한국계 언론마저 고메즈를 공식 지지했다.당시 데이비드는 낮엔 피켓을 든 채 주민들을 만나고 밤엔 우버 기사로 일할 때 쓰던 구형 소나타를 몰고 다니며 벽보를 붙였다. 그가 유일하게 앞섰던 것은 200여 명에 달하던 자원봉사자 수였다.하지만 선거 결과는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데이비드는 47%의 지지를 얻어 고메즈에 6%포인트 차로 패했다. 이 지역 연방하원 선거에서 표차가 이렇게 근소했던 것은 1976년 이후 44년 만이었다. 데이비드의 2020년 선거 과정은 최근 국내 개봉한 영화 ‘초선’(감독 전후석)에 상세히 담겼다. 이 영화는 당시 연방하원에 출마한 한국계 후보 5명의 도전을 그렸다.● 한인 이민자의 험난한 성장기“제 부모님은 1982년 미국으로 이주하셨어요. 아버지가 목사여서 개척교회를 하셨는데 이민자로 살면서 고생을 많이 하셨죠.”데이비드가 청소년기를 보낸 워싱턴주 터코마에는 주한미군과 결혼한 뒤 남편을 따라 이주한 한국인 여성이 많았다. 한국에서 ‘흑인의 아내’ ‘혼혈’이라며 천대받았던 이 여성들과 자녀들은 미국에서도 멸시를 받았다. 이들은 아버지의 교회에 와서 위안을 찾았다.“부모님이 영어를 못하셔서 영어가 필요한 집안일은 어떻게든 제가 처리했어요. 공과금에 연체료가 너무 많이 붙으면 제가 관공서에 따라가 대신 따졌죠. 어려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한 한국 분들을 대신해서 목소리를 내야 할 일도 많았어요.”데이비드는 UC버클리대를 거쳐 뉴욕 예시바대 로스쿨을 졸업했다. 변호사가 돼 미국의 주류사회로 들어가라는 아버지의 뜻을 충실히 따랐다. 그가 사회로 나온 2010년 미국 법률시장은 금융위기 여파로 얼어붙어 있었다. 그는 낮에는 경력을 쌓기 위해 공짜 변호사로 일하고 밤에는 우버 기사, 엑스트라 배우, 학원 강사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그 땐 하루빨리 변호사로 자리를 잡아 학자금 빚 20만 달러(약 2억6000만 원)을 갚아야 했어요. 가까스로 소니픽처스 사내 변호사로 취업이 됐어요.”소니픽처스는 LA 교외의 부유한 지역인 컬버시티에 있었다. 데이비드는 빈민가에 있는 집에서 출퇴근하며 완전히 다른 두 세상을 매일 오갔다. “미국에 힘들게 정착했던 경험 때문인지 주 7일을 일해도 생활이 안 되고, 병원에 못 가 죽어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더군요.”데이비드는 결국 소니픽처스에서 나와 아동복지와 이민 사건을 맡는 국선변호인으로 일했다. “변호사나 열심히 하지 무슨 정치냐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하지만 변호사만 해서는 사람들 삶이 나아지는 진도가 너무 슬로우해서 답답했어요. 제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맥시마지이즈(극대화)하고 싶었어요.” 그가 공약으로 내건 기본소득, 전 국민 건강보험, 이민 규제 완화 등은 미국에서 소수자로 살아오며 절실하다고 느낀 것들이었다.● 2년 만의 재도전데이비드가 2년 만에 다시 도전장을 냈을 때 고메즈는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미 연방하원은 2년 마다 새로 뽑는다). 방심하다 질 뻔했던 2020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했다. 2년 간 제약회사와 군수업체 등 대기업에서 받은 수백만 달러의 후원금도 있었다. 그 돈으로 두툼한 정책 홍보집과 각종 전단을 만들어 등록 유권자 32만 명에게 여러 번 발송했다.고메즈는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비롯해 민주당 거물들의 공개 지지를 받았다. 민주당의 한국계 하원의원인 앤디 김(뉴저지)과 매릴린 스트리클런드(워싱턴)마저 고메즈를 지지했다. 미국엔 같은 당 현역 의원들끼리 지지 선언을 주고받으며 의석을 방어하도록 상부상조하는 관행이 있다.데이비드 역시 민주당 후보였다(캘리포니아주는 같은 당이라도 예비선거 2위 후보까지 출마할 수 있다). 하지만 기득권의 벽 앞에 선 장외 선수였다. 2년 전 59%였던 히스패닉 인구 비율은 이번 선거 직전 선거구가 조정되면서 65%로 늘어나 고메즈에게 더 유리해졌다. 아시안은 한국계(13%)를 포함해 20% 정도였고, 백인이 10%, 흑인이 5%였다. 데이비드의 선거 캠프에는 봉사자들이 일일이 손으로 접은 편지 8만여 통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공약과 포부를 담은 이 편지들은 각각 영어와, 한국어, 스페인어, 중국어, 태국어 등 여러 언어로 쓰여 있었다.“저희 지역구의 왼쪽과 위쪽 지역구는 백인들이 대다수이고, 오른쪽 지역구는 중국인, 아래쪽은 흑인들이 대부분이예요. 저희 지역만 모든 인종이 살아요. 우리 지역을 대표하는 의원이라면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데이비드는 영어로만 소통했던 고메즈와 달리 히스패닉 동네에선 스페인어로, 코리안타운에서는 한국어로 말했다. 광고판을 세울 때도 해당 지역 출신 시의원이나 활동가들과 나란히 찍은 사진을 넣었다. 상대의 물량 공세에 맞서 데이비드는 ‘맞춤형’ 전략을 폈다.● 거절의 상처데이비드가 출마를 결심하면서 가장 두려웠던 건 그의 성정체성이 알려지는 것이었다. 그는 2018년 부모에게 동성애자임을 털어놓았을 때 뼈아픈 거절의 상처를 받았다. 영화 ‘초선’에는 공화당 지지자인 아버지가 데이비드에게 모멸적인 내용의 보이스 메시지를 수시로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너나 네 보이프렌드를 뭘로 보느냐. 그저 한낱 애니멀(동물)로 봐. 그런 짓들을 하는 애들일 뿐이지.” ‘이렇게 살면 너는 72시간 안에 죽을 것’이란 메시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데이비드가 2020년 선거 때 한인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했던 것도 교회 중심의 한인 커뮤니티가 동성애에 특히 보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저는 성정체성을 숨긴 채 다른 모든 면에서 부모님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을 갖고 성장했어요. 한인 사회를 대할 때도 그런 부담이 있었던 거 같아요. ‘초선’이 상영되면서 제 성정체성이 알려져 이번 선거에선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죠. 한인들이 제가 동성애자라는 걸 알고 ‘저리 가’ 할까봐 무서웠어요.”데이비드는 여러 한인 대표들과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지지를 호소했다. 다행히 상당수 한인들이 그를 받아들였다. 2020년엔 선거자금 18만 달러 중 한인 후원금이 500달러에 불과했지만 이번엔 22만 달러 중 5만 달러가 한인 후원금이었다.“30년 전 LA폭동 때 미국 사회에서 철저히 고립됐던 재미교포들은 그제야 한인을 대변해줄 정치가 절실하다는 걸 깨달았지만 아직도 한국계 정치인이 너무 없어요. 한국에 계신 분들에겐 저희가 미국인으로 보일 수 있지만 저는 한국이 제 뿌리라는 걸 잊어본 적이 없어요. 한국어를 말하고 한국 음식을 먹으며 자랐으니까요. 하원의원이 되면 한반도 평화에 꼭 기여하고 싶어요. 미국은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대북 정책이 출렁거립니다. 그래서 종전 70년이 되도록 아무 변화가 없는 거 아닐까요. 한국의 생존을 한반도 평화에 진지한 관심이 없는 백인 정치인들 손에 맡겨둬선 안 되잖아요.”● 고메즈의 흑색 공격선거를 8일 앞둔 10월 31일, 데이비드는 가깝게 지내던 유니세스 에르난데스 LA시의원으로부터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지역 활동가 출신의 히스패닉 여성인 에르난데스는 고메즈 측 운동원들이 집집마다 다니며 인종차별적 언행을 한다고 알려왔다.그날 에르난데스는 집에 찾아온 고메즈 측 운동원이 가족들에게 투표를 독려하며 “상대 후보가 아시안인 거 알죠, 그쵸?”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에르난데스는 집 밖으로 나서던 운동원을 멈춰 세웠다.“그런 말을 왜 하는 거죠? 그런 게 인종차별인 거 몰라요?”(에르난데스) “그냥 사실을 전했을 뿐이에요.”(운동원)에르난데스는 트위터에 이날 일을 올리며 “충격적이고 실망스럽다. 우리는 적어도 이렇게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데이비드는 “그녀가 같은 소수인종으로서 다른 집단이 겪는 부당함에 함께 분노해줬다는 게 무엇보다 고마웠다”고 했다.선거가 다가올수록 히스패닉과 당원들을 결집시키려는 고메즈 측 공세는 거세졌다. 구글에 ‘데이비드 김’을 치면 고메즈 측이 만든 웹사이트가 여러 개 떴다. 사이트에는 데이비드가 18세 때 아버지의 요구로 6개월가량 공화당에 가입했던 기록을 제시하며 민주당원으로 위장한 공화당원이며 열렬한 트럼프 지지자라는 등의 허위 사실이 나열돼 있었다.●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며선거 후 2주쯤 지난 11월 21일, 데이비드는 LA공항에서 서울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 세계 한인들이 모이는 ‘디아스포라 다이얼로그’ 행사에 초청을 받아 가던 길이었다. 탑승을 10여 분 앞두고 아버지한테 연락이 왔다.데이비드는 커밍아웃 이후 아버지의 연락을 피해왔지만, 7월 두 부자는 한인타운의 한 식당에서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 그날 아버지는 “네가 그렇게 태어난 것을 어떻게 하겠느냐.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너에게 쏟아지는 비난이 있다면 내가 대신 받겠다”고 했다. 데이비드가 한인타운의 대형 교회에서 연설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놔준 것도 아버지였다.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기까진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번 선거도 질 거 같은데 동성애자라는 게 세상에 알려지고 이게 무슨 망신이냐. 이제라도 그 영화에서 동성애 부분은 빼달라고 해.” 데이비드는 아슬아슬한 개표 상황보다 아버지의 말에 더 기운이 빠졌다.데이비드는 서울에 5일간 머물며 한국의 청년 정치인들과 재외동포로부터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개표 결과가 매주 2번씩 업데이트가 되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롤러코스터에요. 영화를 보신 어느 분이 ‘데이비드는 지더라도 이긴 것’이라고 격려해주셔서 용기가 나더군요. 떨어지더라도 어려운 분들을 도울 수 있는 포지션에 있고 싶어요.”이번 중간선거에서 연방하원에 출마한 한국계 후보는 데이비드를 포함해 총 5명이다. 이중 현직 의원인 4명은 모두 재선에 성공했다. LA 34지구는 아직 개표가 끝나지 않았다. 11월 말 기준(개표율 98%)으로 데이비드는 49%의 지지를 받아 고메즈를 3000여 표 차로 추격하고 있다. 최종 결과는 12월 5일 확정된다.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

    • 2022-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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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신광영]“내 예일대 로스쿨 졸업장은 15센트짜리였다”

    미국 연방대법관 9명 중 유일한 라틴계인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이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던 1978년 가을에 있었던 일이다. 소토마요르가 로펌 인턴 면접을 보던 날이었다. 파트너 변호사가 그에게 물었다. “소수 인종 우대 정책(Affirmative Action)에 찬성하나요?” 대학입시나 채용 등에서 흑인, 라틴계 등 소수 인종을 우대하는 이 정책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1961년 도입해 미국 사회에 정착되어가던 때였다. 그 정책의 수혜로 아이비리그 대학에 진학했던 소토마요르는 당당히 답했다.“네.” 면접관은 못 마땅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로펌도 그 정책을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로펌이 꼭 필요하지도 않은데 고용하고 몇 년 있다가 해고해야 한다면 그게 오히려 소수 인종 지원자에게 안 좋지 않을까요?” 프린스턴대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예일대 로스쿨을 마친 소토마요르는 그날 파트너 변호사의 무례한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고 자서전에 밝혔다. 그보다 5년 앞서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했던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흑인인 토마스는 부인과 자녀를 부양하려면 일자리가 절실했지만 로펌 면접에서 번번이 낙방했다. 백인 동기들은 골라서 로펌에 갔지만 그에겐 “흑인이 아니었다면 예일대가 받아주지 않았을 것”이란 선입견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토마스는 훗날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나는 예일대에 다녔지만 예일대 출신은 아니었다. 같은 졸업장이라도 백인과 흑인은 가치가 달랐다. 나는 담뱃갑에서 떼어 낸 15센트짜리 가격표를 예일대 로스쿨 졸업장에 붙여 지하실에 처박아버렸다.” 소토마요르와 토마스는 둘 다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소토마요르는 알콜중독이던 아버지를 아홉 살에 여의었다. 간호사인 어머니가 라틴계 저소득층이 모여 살던 뉴욕 브롱크스에서 남매를 길렀다. 토머스 역시 인종차별이 심한 조지아주에서 부모 없이 할아버지 손에 자랐다. 가난과 차별은 두 사람의 공유했던 ‘공기’였다. 어렵게 명문 로스쿨을 나왔는데도 여전히 척박한 세상에서 두 사람은 다르게 적응해갔다. 소토마요르는 정면 대결했다. 로펌 측의 인종 차별적 태도를 학교에 신고하고 다른 소수 인종 학생들과 연합해 로펌에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그는 프린스턴대 재학 시절에도 소수인종 학생회장으로 활동하며 라틴계 교직원이 ‘0명’인 불공정을 시정하라고 학교 측을 압박하기도 했다. 반면 토마스는 속으로 삭였다. 소수 인종 우대 정책이 그간의 모든 노력과 업적을 더럽혔다고 느꼈다. ‘의지할 수 있는 건 나 하나뿐’이란 믿음이 더 강해졌다. 부모가 어린 토마스를 조부모 집에 두고 떠난 뒤 그가 의지했던 할아버지는 자주 이런 말을 했다. “인종을 탓해봐야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오직 네 피와 땀으로 일어서야 한다.” 토마스는 예일대 캠퍼스에서도 일꾼들이 입는 멜빵바지에 검정부츠 차림으로 보통 혼자 다녔다고 한다. 둘 다 인종 차별 사회에서 ‘선택받은 생존자’였지만 소토마요르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다리를 놓는 방식으로, 토마스는 자신을 지키려 벽을 쌓는 방식으로 활로를 찾으려 했다. 토마스는 흑인 사회와 등진 채 백인들의 논리를 옹호하는 보수적 법조인으로 활약하며 레이건 정부에 중용됐고, 1991년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 대법관이 됐다. 소토마요르 역시 2009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지명으로 대법관에 오르며 두 사람은 동료가 됐다. 둘은 올 6월 커탄지 브라운 잭슨 신임 대법관이 합류하기 전까진 연방대법원에서 2명뿐인 유색인종 대법관이었다. 하지만 낙태권, 총기규제 등 주요 판결 때마다 서로 대척점에 섰다. 지난달 말 대법원은 하버드대 등의 소수 인종 우대 정책이 백인 지원자에 대한 역차별이란 주장의 적법성 여부를 가리는 심리를 시작했다. 이 사안에서도 두 대법관은 찬반 양측을 대표하고 있다. 이번 재판은 올 6월 대법원의 낙태권 폐지 판결 못지않은 미국 사회의 뜨거운 이슈다. 낙태권이 최근 중간선거의 성패를 가른 핵심 쟁점이었듯 몇 달 뒤 판결이 나면 미국이 또 다시 갈라질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시행되는 대학 농어촌 특별전형, 공무원 양성평등 채용목표제, 장애인 고용할당제 등 비슷한 취지의 제도들도 도전을 받을 수 있다. 토마스 등 소수 인종 우대 정책에 비판적인 대법관들은 “헌법은 인종에 근거한 분류 자체를 배격한다”며 특정 인종에 대한 차별을 중단하는 방법은 모든 인종에 대한 차별을 중단하는 것이라고 본다. 토마스 대법관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인종적 온정주의는 다른 어떤 형태의 차별만큼이나 해롭다. 억지로 짜 맞춘 다양성은 현실을 왜곡할 뿐이다. 흑인들이 대학 측의 지원 없이도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도 했다. 소토마요르 등 찬성 대법관들을 이 정책을 폐지한 일부 명문대에서 소수 인종 입학생 비율이 급감한 사실을 근거로 “인종 간 교육 격차가 여전한 현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고 반박한다. 출발점이 다른 현실을 애써 무시하는 것은 인종 차별이 만연했던 1950년대에 통용됐던 ‘separate but equal(분리하더라도 평등하다면 합법)’ 정책을 옹호하는 것과 같다고 지적한다. 당시 대법원은 흑인의 백인 학교 입학을 금지한 조치에 대해 “백인 역시 흑인 학교에 가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형평성에 문제가 없다”고 결론지었고, 이 판결은 미국 사법부의 치욕적 역사로 남았다. 소수 인종 우대 정책의 수혜 대상에 흑인이나 라틴계보다 소수인 아시안은 포함되지 않아 학업 능력이 뛰어난 한국계 학생들이 역차별을 본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올해 ‘아시아계 미국인 유권자 설문조사(Asian American Voter Survey)’ 결과 한국계의 82%, 인도계의 80%가 이 정책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백인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해 아시아계를 방패막이로 끌어들인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2003년 미시간대 로스쿨에 불합격한 백인 여성이 “역차별을 받았다”며 대학 측을 상대로 건 소송에서 다수 의견을 집필한 샌드라 D. 오코너 전 대법관은 “미시간의 소수 인종 우대 정책은 합헌”이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대학이 지원자의 판단할 때 인종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25년 전인 1978년 대법원이 소수 인종 우대 정책의 합법성을 처음 인정한 이후 25년 동안 소수 인종 학생들의 명문대 진학이 늘어났는데, 앞으로 25년 후에는 이런 정책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를 기대한다.” 오코너 전 대법관의 예상대로 소수 인종 우대 정책은 약 2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법의 심판대에 올랐다. 현재 연방대법관 9명 중 6명이 보수 성향이어서 낙태권에 이어 이 정책도 폐지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번 재판은 미국의 인종 간 ‘기울어진 운동장’이 얼마나 평평해졌는지 치열하게 따져 묻는 험난한 여정이 될 것 같다.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

    • 202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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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예일대 로스쿨 졸업장은 15센트짜리였다”

    미국 연방대법관 9명 중 유일한 라틴계인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이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던 1978년 가을에 있었던 일이다. 소토마요르가 로펌 인턴 면접을 보던 날이었다. 파트너 변호사가 그에게 물었다. “소수 인종 우대 정책(Affirmative Action)에 찬성하나요?” 대학입시나 채용 등에서 흑인, 라틴계 등 소수 인종을 우대하는 이 정책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1961년 도입해 미국 사회에 정착되어가던 때였다. 그 정책의 수혜로 아이비리그 대학에 진학했던 소토마요르는 당당히 답했다.“네.” 면접관은 못 마땅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로펌도 그 정책을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로펌이 꼭 필요하지도 않은데 고용하고 몇 년 있다가 해고해야 한다면 그게 오히려 소수 인종 지원자에게 안 좋지 않을까요?” 프린스턴대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예일대 로스쿨을 마친 소토마요르는 그날 파트너 변호사의 무례한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고 자서전에 밝혔다. 그보다 5년 앞서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했던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흑인인 토마스는 부인과 자녀를 부양하려면 일자리가 절실했지만 로펌 면접에서 번번이 낙방했다. 백인 동기들은 골라서 로펌에 갔지만 그에겐 “흑인이 아니었다면 예일대가 받아주지 않았을 것”이란 선입견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토마스는 훗날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나는 예일대에 다녔지만 예일대 출신은 아니었다. 같은 졸업장이라도 백인과 흑인은 가치가 달랐다. 나는 담뱃갑에서 떼어 낸 15센트짜리 가격표를 예일대 로스쿨 졸업장에 붙여 지하실에 처박아버렸다.” 소토마요르와 토마스는 둘 다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소토마요르는 알콜중독이던 아버지를 아홉 살에 여의었다. 간호사인 어머니가 라틴계 저소득층이 모여 살던 뉴욕 브롱크스에서 남매를 길렀다. 토머스 역시 인종차별이 심한 조지아주에서 부모 없이 할아버지 손에 자랐다. 가난과 차별은 두 사람의 공유했던 ‘공기’였다. 어렵게 명문 로스쿨을 나왔는데도 여전히 척박한 세상에서 두 사람은 다르게 적응해갔다. 소토마요르는 정면 대결했다. 로펌 측의 인종 차별적 태도를 학교에 신고하고 다른 소수 인종 학생들과 연합해 로펌에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그는 프린스턴대 재학 시절에도 소수인종 학생회장으로 활동하며 라틴계 교직원이 ‘0명’인 불공정을 시정하라고 학교 측을 압박하기도 했다. 반면 토마스는 속으로 삭였다. 소수 인종 우대 정책이 그간의 모든 노력과 업적을 더럽혔다고 느꼈다. ‘의지할 수 있는 건 나 하나뿐’이란 믿음이 더 강해졌다. 부모가 어린 토마스를 조부모 집에 두고 떠난 뒤 그가 의지했던 할아버지는 자주 이런 말을 했다. “인종을 탓해봐야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오직 네 피와 땀으로 일어서야 한다.” 토마스는 예일대 캠퍼스에서도 일꾼들이 입는 멜빵바지에 검정부츠 차림으로 보통 혼자 다녔다고 한다. 둘 다 인종 차별 사회에서 ‘선택받은 생존자’였지만 소토마요르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다리를 놓는 방식으로, 토마스는 자신을 지키려 벽을 쌓는 방식으로 활로를 찾으려 했다. 토마스는 흑인 사회와 등진 채 백인들의 논리를 옹호하는 보수적 법조인으로 활약하며 레이건 정부에 중용됐고, 1991년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 대법관이 됐다. 소토마요르 역시 2009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지명으로 대법관에 오르며 두 사람은 동료가 됐다. 둘은 올 6월 커탄지 브라운 잭슨 신임 대법관이 합류하기 전까진 연방대법원에서 2명뿐인 유색인종 대법관이었다. 하지만 낙태권, 총기규제 등 주요 판결 때마다 서로 대척점에 섰다. 지난달 말 대법원은 하버드대 등의 소수 인종 우대 정책이 백인 지원자에 대한 역차별이란 주장의 적법성 여부를 가리는 심리를 시작했다. 이 사안에서도 두 대법관은 찬반 양측을 대표하고 있다. 이번 재판은 올 6월 대법원의 낙태권 폐지 판결 못지않은 미국 사회의 뜨거운 이슈다. 낙태권이 최근 중간선거의 성패를 가른 핵심 쟁점이었듯 몇 달 뒤 판결이 나면 미국이 또 다시 갈라질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시행되는 대학 농어촌 특별전형, 공무원 양성평등 채용목표제, 장애인 고용할당제 등 비슷한 취지의 제도들도 도전을 받을 수 있다. 토마스 등 소수 인종 우대 정책에 비판적인 대법관들은 “헌법은 인종에 근거한 분류 자체를 배격한다”며 특정 인종에 대한 차별을 중단하는 방법은 모든 인종에 대한 차별을 중단하는 것이라고 본다. 토마스 대법관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인종적 온정주의는 다른 어떤 형태의 차별만큼이나 해롭다. 억지로 짜 맞춘 다양성은 현실을 왜곡할 뿐이다. 흑인들이 대학 측의 지원 없이도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도 했다. 소토마요르 등 찬성 대법관들을 이 정책을 폐지한 일부 명문대에서 소수 인종 입학생 비율이 급감한 사실을 근거로 “인종 간 교육 격차가 여전한 현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고 반박한다. 출발점이 다른 현실을 애써 무시하는 것은 인종 차별이 만연했던 1950년대에 통용됐던 ‘separate but equal(분리하더라도 평등하다면 합법)’ 정책을 옹호하는 것과 같다고 지적한다. 당시 대법원은 흑인의 백인 학교 입학을 금지한 조치에 대해 “백인 역시 흑인 학교에 가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형평성에 문제가 없다”고 결론지었고, 이 판결은 미국 사법부의 치욕적 역사로 남았다. 소수 인종 우대 정책의 수혜 대상에 흑인이나 라틴계보다 소수인 아시안은 포함되지 않아 학업 능력이 뛰어난 한국계 학생들이 역차별을 본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올해 ‘아시아계 미국인 유권자 설문조사(Asian American Voter Survey)’ 결과 한국계의 82%, 인도계의 80%가 이 정책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백인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해 아시아계를 방패막이로 끌어들인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2003년 미시간대 로스쿨에 불합격한 백인 여성이 “역차별을 받았다”며 대학 측을 상대로 건 소송에서 다수 의견을 집필한 샌드라 D. 오코너 전 대법관은 “미시간의 소수 인종 우대 정책은 합헌”이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대학이 지원자의 판단할 때 인종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25년 전인 1978년 대법원이 소수 인종 우대 정책의 합법성을 처음 인정한 이후 25년 동안 소수 인종 학생들의 명문대 진학이 늘어났는데, 앞으로 25년 후에는 이런 정책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를 기대한다.” 오코너 전 대법관의 예상대로 소수 인종 우대 정책은 약 2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법의 심판대에 올랐다. 현재 연방대법관 9명 중 6명이 보수 성향이어서 낙태권에 이어 이 정책도 폐지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번 재판은 미국의 인종 간 ‘기울어진 운동장’이 얼마나 평평해졌는지 치열하게 따져 묻는 험난한 여정이 될 것 같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202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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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악의 자충수, 강제로 히잡 씌우기 [글로벌 이슈/신광영]

    요즘 이란 수도 테헤란의 거리에는 히잡을 벗고 뭉텅뭉텅 잘려나간 생머리를 드러낸 여성이 적지 않다. 어색하게 잘린 머리칼은 히잡 착용을 강요하는 정부에 저항하는 영광의 상처들이다. 이란 여성들의 ‘히잡 시위’는 1970년대에도 있었다. 그때는 검은 히잡을 쓰는 게 저항의 표시였다. 당시 친미 성향의 팔레비 왕조는 서구화를 밀어붙이며 히잡을 금지했다. 40∼50년의 시차를 두고 정반대 시위가 벌어지는 듯하지만 여성들의 요구는 달라진 게 없다. 히잡을 강제로 씌우거나 벗기지 말고 선택의 자유를 달라는 것이다. 히잡은 머리를 가릴 때 쓰는 천 조각이다. 쓸지 말지를 자율에 맡겼더라면 히잡은 자연스러운 이슬람 문화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정권이 각자 목적에 따라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악용하면서 히잡은 첨예한 정치적 상징으로 변질됐다. 1979년이 중대한 분기점이었다. 서구화·세속화를 위해 히잡을 못 쓰게 했던 팔레비 정권이 이슬람혁명으로 축출되고, 율법학자 출신인 호메이니가 집권한 해였다. 새 정권은 타락한 여성들을 ‘해독시킨다’며 히잡 의무화를 꺼내들었다. 눈에 쉽게 띄는 히잡이야말로 ‘이슬람 원칙을 바로 세운다’는 정체성을 피부로 와 닿게 해줄 최적의 소재였다. 그런데 미니스커트를 입던 여성들에게 억지로 히잡을 씌우자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타났다. 여성들의 대학 진학률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만연했던 서구화의 흔적이 제거되고 엄격한 이슬람 사회로 뒤바뀌자 보수적인 부모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딸들이 집을 떠나 대학에 가더라도 서구 문화에 물들 우려 없이 안전해졌다고 느끼게 됐다. 이후 여성의 대학 진학률은 계속 올라 지금은 남성보다 높은 70%에 달한다. 고학력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자 부조리에 눈뜨는 여성이 많아졌다. 스포츠 경기장에 여성 출입을 금지하는 등의 성차별적 악습은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히잡 강제화에 반대하는 시위도 꾸준히 벌어졌다. 게다가 히잡을 똑바로 썼는지 단속하는 도덕경찰은 강자에겐 느슨하고 약자에겐 가혹했다. 이들은 부자나 정부 관리의 가족이 사는 지역을 거의 순찰하지 않는다. 이런 불공정은 다른 모든 종류의 차별을 경험한 사람들을 거리로 불러들였다. 한 달 사이 100여 개 도시로 퍼진 시위에는 1970년대 ‘히잡 착용 금지’에 저항했던 중년 여성들이 ‘히잡 착용 강제’에 맞서는 딸과 손녀를 위해 합류하고 있다. 테헤란 시위에 나온 20대 여성은 말했다. “엄마뻘인 분들이 히잡을 쓰고 나온 걸 보면 눈물이 나고, 싸울 용기가 나요. 여기는 체포, 부상,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전쟁터란 말이에요.” 지난 수십 년간 시위가 벌어질 때마다 무력으로 진압해온 이란 정권은 이미 200명이 넘게 숨진 이번 시위도 잠재울 수 있을까. 이란 역사상 처음으로 2030 여성이 주축인 이번 히잡 시위에는 젊은 남성들과 서민층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40년 넘게 이어진 미국의 제재로 일자리가 없는데 물가는 10년 새 7배가 뛰고, 빈곤층이 인구 절반을 넘어선 상황에서 “더는 잃을 게 없다”며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 유례없는 속도로 늘고 있다. SNS에 올라오는 시위 영상을 보면 진압작전에 투입된 경찰관들이 며칠째 잠을 못 자 길가에 주저앉은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누이, 연인, 친구, 엄마 같은 사람들에게 최루탄을 쏘고 곤봉을 휘둘러야 하는 그들 역시 지쳐가는 듯 보인다. 무엇보다 지금의 사태를 “미국과 이스라엘이 기획한 폭동”이라고 일축하는 이란 최고지도자의 억지는 이란을 지탱해온 시민들의 신앙심을 치명적으로 손상시키고 있다. 시위에 나온 한 중년 여성은 “나는 신실한 이슬람 신자이지만 이 정권이 우리 보통 사람들을 먼지처럼 취급하는 위선에 질렸다”고 했다. 히잡이 의무가 되는 순간 히잡 착용은 더 이상 종교적 믿음에 따른 것이 아닌, 수동적 행위로 전락한다. 요즘 테헤란 쇼핑가에선 손님과 히잡을 파는 상인이 조롱 섞인 대화를 나눈다. “사장님, 장사 이제 접으시죠. 히잡은 끝났어요.” “사세요. 사서 태우지 그래요(웃음).” 이란 정권은 국제적 고립과 망가진 경제를 해결하기에도 벅찬 와중에 고급 인적 자원인 여성과, 중산층, 다수의 온건한 이슬람 신자들을 내부의 적으로 돌려세웠다. 히잡의 상징성을 활용해 권력을 공고히 하려다 오히려 ‘히잡의 힘’으로 결집한 전 국민적 저항에 봉착했다. 강제와 억압으로 뭔가를 이루려 하면 결국 최악의 좌충수로 돌아온다는 것을 벼랑 끝에 놓인 이란을 보며 다시 떠올리게 된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

    • 2022-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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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악의 자충수, 강제로 히잡 씌우기

    요즘 이란 수도 테헤란의 거리에는 히잡을 벗고 뭉텅뭉텅 잘려나간 생머리를 드러낸 여성들이 적지 않다. 어색하게 잘린 머리칼은 히잡 착용을 강요하는 정부에 저항한다는 영광의 상처들이다.이란 여성들의 ‘히잡 시위’는 1970년대에도 있었다. 그 때는 검은 히잡을 쓰는 게 저항의 표시였다. 당시 친미 성향의 팔레비 왕조는 서구화를 밀어붙이며 히잡을 금지했다. 40~50년의 시차를 두고 정반대 시위가 벌어지는 듯하지만 여성들의 요구는 달라진 게 없다. 히잡을 강제로 씌우거나 벗기지 말고 선택의 자유를 달라는 것이다. 히잡은 머리를 가릴 때 쓰는 천 조각이다. 쓸지 말지를 자율에 맡겼더라면 히잡은 자연스런 이슬람 문화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정권이 각자 목적에 따라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악용하면서 히잡은 첨예한 정치적 상징으로 변질됐다.1979년이 중대한 분기점이었다. 서구화·세속화를 위해 히잡을 못 쓰게 했던 팔레비 정권이 이슬람혁명으로 축출되고, 율법학자 출신인 호메이니가 집권한 해였다. 새 정권은 타락한 여성들을 ‘해독시킨다’며 히잡 의무화를 꺼내들었다. 눈에 쉽게 띄는 히잡이야말로 ‘이슬람 원칙을 바로 세운다’는 정체성을 피부로 와 닿게 해줄 최적의 소재였다.그런데 미니스커트를 입던 여성들에게 억지로 히잡을 씌우자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타났다. 여성들의 대학 진학률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만연했던 서구화의 흔적이 제거되고 엄격한 이슬람 사회로 뒤바뀌자 보수적인 부모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딸들이 집을 떠나 대학에 가더라도 서구 문화에 물들 우려 없이 안전해졌다고 느끼게 됐다. 이후 이란 여성들의 대학진학률은 계속 올라 지금은 남자보다 높은 70%에 달한다. 고학력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자 부조리에 눈 뜨는 여성들이 많아졌다. 스포츠 경기장에 여성 출입을 금지하는 등의 성차별적 악습은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히잡 강제화에 반대하는 시위도 꾸준히 벌어졌다.게다가 히잡을 똑바로 썼는지 단속하는 도덕경찰은 강자에겐 느슨하고 약자에겐 가혹했다. 이들은 부자나 정부 관리의 가족들이 사는 지역을 거의 순찰하지 않는다. 테레란 북부의 고급 식당가에선 맨 머리의 여성들이 히잡 쓴 여종업원들의 서빙을 받으며 식사를 즐기지만 단속되지 않는다. 도덕경찰이 탄 흰색 승합차는 주로 시내와 공원, 지하철역, 서민 주거지역을 돈다. 언제 어디서든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느껴지도록 규칙적으로 순찰한다. 체포된 여성들은 순결 여부에 대해 질문을 받고, 공개 채찍질을 당하기도 하며, 때론 징역형에 처한다. 이런 불공정은 다른 모든 종류의 차별을 경험한 사람들을 거리로 불러들였다.한 달 사이 100여 개 도시로 퍼진 시위에는 1970년대 ‘히잡 착용 금지’에 저항했던 중년 여성들이 ‘히잡 착용 강제’에 맞서는 딸과 손녀를 위해 합류하고 있다. 테헤란 시위에 나온 20대 여성은 말했다. “엄마뻘인 분들이 히잡을 쓰고 나온 걸 보면 눈물이 나고, 싸울 용기가 나요. 여기는 체포, 부상,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전쟁터란 말이에요.”지난 수십 년 간 시위가 벌어질 때마다 무자비하게 진압해온 이란 정권은 이미 200명이 넘게 숨진 이번 시위도 무력으로 잠재울 수 있을까. 이란 역사상 처음으로 2030 여성들이 주축인 이번 히잡 시위에는 젊은 남성들과 서민층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40년 넘게 이어진 미국의 제재로 일자리가 없는데 물가는 10년 새 7배가 뛰고, 빈곤층이 인구 절반을 넘어서는 상황에서 “더는 잃을 게 없다”며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 유례없는 속도로 늘고 있다. 시위에는 정권 수호에 강경한 혁명수비대와 바시즈 민병대 뿐 아니라 일반 경찰관들이 대거 동원된 상태다. SNS에 올라오는 영상을 보면 진압작전에 투입된 경찰관들이 며칠 째 잠을 못 자 길가에 주저앉은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누이, 연인, 친구, 엄마 같은 사람들에게 최루탄을 쏘고 곤봉을 휘둘러야 하는 그들 역시 지쳐가는 듯 보인다. 무엇보다 지금의 사태를 “미국과 이스라엘이 기획한 폭동”이라고 일축하는 이란 최고지도자의 억지는 지금껏 이란을 지탱해온 시민들의 신앙심을 치명적으로 손상시키고 있다. 시위에 나온 한 중년여성은 “나는 신실한 이슬람 신자이지만 이 정권이 우리 보통 사람들을 먼지처럼 취급하는 위선에 질렸다”고 했다. 히잡이 의무가 되는 순간 히잡 착용은 더 이상 종교적 믿음에 따른 것이 아닌, 수동적 행위로 전락한다. 요즘 테헤란의 쇼핑가에선 손님과 히잡을 파는 상인이 조롱 섞인 대화를 나눈다.“사장님, 장사 이제 접으시죠. 히잡은 끝났어요.”“사세요. 사서 태우지 그래요(웃음).” 이란 정권은 국제적 고립과 망가진 경제를 해결하기에도 벅찬 와중에 고급 인적자원인 여성과, 중산층, 다수의 온건한 이슬람 신자들을 내부의 적으로 돌려세웠다. 히잡의 상징성을 활용해 권력을 공고히 하려다 오히려 ‘히잡의 힘’으로 결집한 전 국민적 저항에 봉착했다. 강제와 억압으로 뭔가를 이루려 하면 결국 최악의 좌충수로 돌아온다는 것을 벼랑 끝에 놓인 이란을 보며 다시 떠올리게 된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2022-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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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프간 여자 축구 국가대표의 목숨 건 탈출기[글로벌 이슈/신광영]

    지난해 8월 말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철수하던 마지막 48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다. 수도 카불을 장악한 탈레반을 피해 카불공항으로 몰려든 탈출 인파 중에 아프간 여자축구대표 선수들이 있었다. 10대 후반인 이 여자선수들은 탈레반의 주요 표적이었다.탈레반의 눈에 유니폼 차림으로 축구하는 여성은 코란과 율법을 배반한 반동분자였다. 히잡을 쓰고, 긴 소매 상의에 바지를 입더라도 남성이 여성의 몸매를 볼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축구 소녀’들을 매춘부라고 불렀다. 가족에 불명예를 안긴 죄로 처벌해야 한다고 아버지와 남자형제들을 겁박하기도 했다.골키퍼인 파티(19)는 여자 축구대표팀 주장이다. 파티는 카불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집 뒤뜰에 60cm 깊이로 땅을 팠다. 그 안에 국가대표 유니폼 4벌과 골키퍼 장갑 모양의 황금색 트로피 5개를 묻었다. 그녀는 구덩이를 파면서 자기 무덤을 파는 듯한 참담함이 들었다. 평소에 파티는 트로피를 집어 들며 엄마에게 말하곤 했다. “이게 나를 살아있게 하는 것들이에요.”파티네 가족은 아프간에서도 핍박받는 소수 민족인 하자라족이다. 탈레반에게 이 종족은 ‘인종 청소’ 대상이다. 파티는 축구장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웠다. 늘 전쟁 중인 조국, 여성, 소수민족 같은 족쇄가 그곳엔 없었다. 하지만 탈레반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지금, 나를 살아있게 한 것들의 흔적을 지우는 게 살 길이었다.● 유니폼과 트로피를 땅에 묻었다 카불공항은 어떻게든 비행기를 얻어 타고 고국을 탈출하려는 수만 명의 군중들로 가득했다. 탈레반 병사들은 하늘로 계속 총을 쏘아댔다. 출국 게이트로 몰려드는 사람들에겐 채찍으로 내리쳤다. 곳곳에 화약 냄새와 땀 냄새가 진동했다.파티는 1차 접선지인 공항 밖 주유소 앞에서 여자축구 대표팀 선수들에게 여권을 나눠줬다. 며칠 전 여자축구협회 사무실에 있던 선수 명부, 얼굴 사진 등 탈레반이 찾을 수 있는 증거들을 모두 불태우면서 여권만은 챙겨 놨다. 살해 위협 탓에 아프간에선 경기를 못하고 인도, 우즈베키스탄 등을 떠돌며 경기를 해왔기 때문에 선수들에겐 여권이 있었다. 파티는 자기를 둘러싼 선수 10여 명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약속 하자. 우리 중 한 명이라도 탈출에 성공하면 그 사람이 남은 사람들을 꼭 구해주기.”파티의 팔뚝에는 전화번호가 하나 적혀있었다. 휴대전화를 도난당하거나 압수당할 경우에 대비해 적어둔 것이었다. 3년 전까지 아프간 여자축구 국가대표팀 코치였던 카터의 번호였다. 당시 카터는 미국 텍사스에 살고 있었다. 해병대 여군 장교 출신인 그는 이라크전 파병 경력이 있었다. 이 때 경험을 살려 아프간 내 미군과 정보를 공유하며 선수들을 군용기에 태우려 했다.카터에게 함께 구출작전을 펴자고 설득한 사람이 있었다. 전 아프간 여자축구대표팀 주장 포팔이다. 2007년 여자대표팀 창단 멤버인 포팔은 공격수로 맹활약했다. 하지만 끊임없이 살해 위협에 시달리다 2011년 덴마크로 이주했다. 그녀는 아프간의 후배 선수들을 구해달라며 미국, 호주 정부와 인권단체에 도움을 청했다.카터와 포팔은 파티에게 어디로 움직일지 전화와 채팅 앱으로 실시간 지시를 했다. 파티는 선수들 중 거의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알았다.● 탈레반 병사가 나에게 걸어왔다“북쪽 게이트로 가. 사람이 나와 있을 거야.”카터는 파티에게 암호와 비밀번호 말하면 들여보내 줄 거라고 했다. 암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병 영웅인 존 바실론, 비밀번호는 해병대 창설일인 1775년 11월 10일에 특수문자를 결합한 것이었다.북쪽 게이트 앞에는 마침 미군 병사가 서 있었다. 파티는 그에게 다가가 카터가 일러준 암호와 메시지를 여러 번 말했다. 하지만 병사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 누구야? 무슨 국가대표?” 그는 미국 여권이 있는 사람만 통과시킨다는 말을 반복했다. 이 장면을 근처의 탈레반 병사들이 유심히 노려보고 있었다.파티가 상황을 알리려 카터와 포팔에게 다급히 메시지를 보냈다. 그 때 파티는 바로 옆에서 거대한 총성을 들었다. 순간 귀와 눈이 멍해졌다.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파티는 어딘가에서 날아온 발길질에 쓰러졌다. 공항에 함께 왔던 파티의 오빠(23)가 급히 달려왔다. 오빠는 몸으로 발길질을 막아내며 생수통을 꺼내 실신한 동생의 얼굴에 물을 뿌렸다.정신을 차린 파티는 답장을 확인하려 휴대전화부터 살폈다.‘너무 당황하지 마. 남쪽 게이트 호주 군인들한테 상황을 알릴게.’(카터)‘포기해선 안 돼. 계속 싸우면 반드시 살아남을 거야.’(포팔)파티와 선수들은 남쪽 게이트로 방향을 바꿨다. 그곳까지는 탈레반 병사들이 지키는 검문소 두 곳을 통과해야 했다. 첫 번째 검문소 앞은 빽빽한 인파로 한 걸음 내딛기 것조차 어려웠다. 서로를 주스 쥐어짜듯 밀치며 절박하게 나아갔다. 6, 7살쯤 보이는 소녀들이 어른들 틈에 짓눌려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밀지 마세요. 저희도 살고 싶어요.” 파티는 4살 막내 여동생이 떠올랐다. 그녀는 소리쳤다. “어린 애들이잖아요. 숨 좀 쉬게 해주세요.” 오빠는 소녀 중 한 명을 들어올려 어깨에 태웠다.옴짝달싹 못하는 군중들을 상대로 탈레반은 전기 채찍을 휘둘렀다. 일부 선수들은 단톡방에 “너무 아파. 더 이상 못 가겠어”라고 올렸다. 여자국가대표 선배인 포팔이 단톡방에 연이어 메시지를 올렸다.‘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인 것처럼 움직여.’‘레드카드만 받지 말고 어떻게든 이기겠다는 마음으로.’‘팔꿈치를 사용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뚫고 가야 돼.’파티와 선수들은 가까스로 두 번째 검문소 앞에 닿았다. 차량과 인파가 수백m 줄지어 있었다. 경비는 더욱 삼엄했다. 총을 든 탈레반 병사들이 한 명 씩 신원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 때 군중 틈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저기 봐요. 여자 축구선수예요!”한 탈레반 병사가 파티에게 총을 겨누며 다가왔다. 겁에 질린 그녀 앞으로 군중 수백 명이 에워싸듯 몰려들었다. 병사는 총구를 그들에게 돌렸지만 순식간에 밀려드는 인파에 휩쓸려 넘어졌다. 파티는 무조건 앞으로 내달렸다. 흙먼지 속에 짓밟힌 채 피범벅이 된 탈레반 병사의 앳된 얼굴이 어깨 너머로 보였다. 다른 탈레반 병사들은 군중들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넌 나처럼 노예로 살면 안 돼” 대표팀 주전 골키퍼인 파티는 경기 중 날아오는 공을 다이빙해서 막아 내거나, 상대편 쪽으로 공을 뻥 차올려 포물선으로 날아갈 때 통쾌함을 느꼈다. 주변의 집요한 반대와 위협에도 파티의 엄마만큼은 축구선수인 딸은 지지했다. 엄마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고 13세에 결혼해 5남매를 낳았다. 엄마는 파티에게 “너는 나처럼 되면 안 된다. 집안의 노예가 되지 말고, 부엌 너머의 삶을 찾아가라”고 자주 말했다.파티와 동료 선수들은 ‘너희들을 죽여서 축구 골대에 매달겠다’는 위협을 수시로 받았다. 극단주의자들에게 납치되거나 집단 구타를 당한 선수들도 있다. 그럼에도 축구를 향한 열망을 계속 타올랐다. 그들은 수많은 숨죽인 여성들의 희망이었다.파티는 탈레반의 총알을 피해 간신히 두 번째 검문소를 통과했다. 이제 남쪽 게이트가 눈앞에 있었다. 동료들의 안전을 확인하려 뒤를 돌아보니 10여m 앞에 오빠가 넘어져 있었다. 탈레반 병사가 소총 개머리판으로 오빠의 머리와 어깨를 내리치고 있었다. 땅바닥에 고꾸라진 오빠는 고개를 쳐들며 부르짖었다.“빨리 가, 어서 도망가, 넌 잡히면 안 돼”.파티는 온몸이 마비되는 듯 했다. 공항에 함께 왔던 파티의 가족들은 48시간 동안 탈출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사이 뿔뿔이 흩어졌다. 아버지는 공항 앞에서 4살 여동생을 가슴에 끌어 앉은 채 탈레반의 전기 채찍을 맞고 주저앉았다. 10대인 두 동생은 공항 어딘가에서 사라져 행방을 알 수 없었다. 평소에 파티가 축구를 계속 할 수 있도록 ‘보디가드’ 역할을 해줬던 오빠마저 눈앞에 무너졌다.파티는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얹는 것을 느꼈다. 대표팀 동료인 친한 친구였다. 그녀는 파티에게 울지 말라고 했다. 동료 선수들의 눈길이 모두 파티를 향해 있었다. 머리와 옷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이 10대 여성들은 시커멓게 된 손으로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파티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돌처럼 단단해져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는 주장이다.’남쪽 게이트 앞에는 호주 군인들이 있었다. 선수들은 여권을 흔들며 ‘국가대표 선수’ ‘축구’ 같은 영어 단어를 미친 듯이 외쳤다. 군인들은 오라고 손짓을 보냈지만 중간에 있던 탈레반 병사들이 또 다시 막아섰다. 파티와 선수들 10여 명은 서로 팔짱을 꽉 끼어 ‘인간 사슬’을 만들었다. 하도 꽉 끼어서 양팔에 찌릿찌릿 전기가 통하는 듯 했다. 한 몸이 된 채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오는 선수들을 향해 탈레반은 차마 총을 쏘지 못했다.군 수송기(C-130) 안은 하수구 냄새와 땀 냄새가 섞여 코가 시큼했다. 탑승자 중 일부는 공항 하수구를 통해 게이트에 접근한 뒤 탈레반의 총탄과 채찍질을 뚫고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기내를 가득 채웠다. 화물칸 구석에 동료 선수들과 앉아있던 파티 역시 이제 아프간으로는 다시 돌아올 수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잘 가, 나의 국가대표 유니폼과 트로피들. 이제 땅속에서 안전할거야. 나의 어린 시절도 안녕.’● 호주에서 보낸 힘겨웠던 1년아프간 여자 축구대표 선수들은 두바이 등을 거쳐 지난해 9월 초 호주에 도착했다. 사지에서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낯선 나라에 정착하기 위해 힘겨운 투쟁이 1년 째 이어지고 있다.파티는 카불공항에서 잃어버린 초등생인 두 동생을 두바이공항에서 극적으로 상봉했다. 기쁨도 잠시,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고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역할이 기다리고 있었다. 파티는 다른 가족들을 아프간에 두고 왔다는 죄책감에서도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했다. 동생들은 탈출 몇 시간 뒤 카불공항에서 자살 폭탄테러가 벌어져 자신들을 하수구 밖으로 꺼내준 미군 병사를 포함해 130명이 희생됐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아프간 여자선수들은 축구 때문에 고향에서 도망쳐 와야 했지만 축구는 그들을 자유롭고 안전한 곳으로 이끌었다. 파티와 선수들은 호주 멜버른의 한 여자 프로축구팀에 소속돼 다시 축구를 시작했다.이들의 유니폼 뒷면에는 이름 없이 등번호만 있었다. 선수들 신원이 알려지면 아프간의 가족들이 보복을 당할 수 있어서다. 파티는 유니폼 뒤에 조그맣게 재봉된 아프간 국기를 발견했을 때 손으로 국기를 매만지며 고국을 대표한다는 것의 자랑스러움을 새삼 떠올렸다.파티는 망명 중인 선수단을 국가대표로 인정하지 않는 국제축구연맹(FIFA)을 상대로 아프간 국가대표팀으로 인정해달라는 투쟁도 시작했다.파티는 호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축구를 하면서 제가 사람이라는 것을, 제게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저에게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축구는 절대 포기 못해요. 축구를 통해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고 싶어요.”아프간을 떠난 지 8개월 만인 4월 말, 선수들은 한 여자 프로팀과 처음으로 경기를 치렀다. 0대0 무승부였다. 아프간 팀이 한골을 넣었지만 오프사이드에 걸려 무효가 된 것을 선수들은 못내 아쉬워했다. ‘아프간 여성들은 원래 축구 할 운명이 아니어서 팀이 형편없다’는 악평을 하도 많이 들어서 선수들은 한 번의 승리가 늘 간절했다.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파티는 선수들에게 말했다.“우리 슬픈 얼굴 하지 말자. 여기 이렇게 살아서 공을 차고 있잖아.”※QR코드를 스캔하면 보다 생생한 아프간 선수들의 탈출기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

    • 2022-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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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레반 채찍질에도…아프간 ‘축구 소녀’들은 자유 향해 달렸다

    지난해 8월 말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철수하던 마지막 48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다. 수도 카불을 장악한 탈레반을 피해 카불공항으로 몰려든 탈출 인파 중에 아프간 여자축구대표 선수들이 있었다. 10대 후반인 이 여자선수들은 탈레반의 주요 표적이었다. 탈레반의 눈에 유니폼 차림으로 축구하는 여성은 코란과 율법을 배반한 반동분자였다. 히잡을 쓰고, 긴 소매 상의에 바지를 입더라도 남성이 여성의 몸매를 볼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축구 소녀’들을 매춘부라고 불렀다. 가족에 불명예를 안긴 죄로 처벌해야 한다고 아버지와 남자형제들을 겁박하기도 했다. 골키퍼인 파티(19)는 여자 축구대표팀 주장이다. 파티는 카불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집 뒤뜰에 60cm 깊이로 땅을 팠다. 그 안에 국가대표 유니폼 4벌과 골키퍼 장갑 모양의 황금색 트로피 5개를 묻었다. 그녀는 구덩이를 파면서 자기 무덤을 파는 듯한 참담함이 들었다. 평소에 파티는 트로피를 집어 들며 엄마에게 말하곤 했다. “이게 나를 살아있게 하는 것들이에요.” 파티네 가족은 아프간에서도 핍박받는 소수 민족인 하자라족이었다. 탈레반에게 이 종족은 ‘인종 청소’ 대상이었다. 파티는 축구장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웠다. 늘 전쟁 중인 조국, 여성, 소수민족 같은 족쇄가 그곳엔 없었다. 하지만 탈레반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지금, 나를 살아있게 한 것들의 흔적을 지우는 게 살 길이었다.● 유니폼과 트로피를 땅에 묻었다 카불공항은 어떻게든 비행기를 얻어 타고 고국을 탈출하려는 수만 명의 군중들로 가득했다. 탈레반 병사들은 하늘로 계속 총을 쏘아댔다. 출국 게이트로 몰려드는 사람들에겐 채찍으로 내리쳤다. 곳곳에 화약 냄새와 땀 냄새가 진동했다. 파티는 1차 접선지인 공항 밖 주유소 앞에서 여자축구 대표팀 선수들에게 여권을 나눠줬다. 며칠 전 여자축구협회 사무실에 있던 선수 명부, 얼굴 사진 등 탈레반이 찾을 수 있는 증거들을 모두 불태우면서 여권만은 챙겨 놨다. 살해 위협 탓에 아프간에선 경기를 못하고 인도, 우즈베키스탄 등을 떠돌며 경기를 해왔기 때문에 선수들에겐 여권이 있었다. 파티는 자기를 둘러싼 선수 10여 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약속 하자. 우리 중 한 명이라도 탈출에 성공하면 그 사람이 남은 사람들을 꼭 구해주기.” 파티의 팔뚝에는 전화번호가 하나 적혀있었다. 휴대전화를 도난당하거나 압수당할 경우에 대비해 적어둔 것이었다. 3년 전까지 아프간 여자축구 국가대표팀 코치였던 카터의 번호였다. 당시 카터는 미국 텍사스에 살고 있었다. 해병대 여군 장교 출신인 그는 이라크전 파병 경력이 있었다. 이 때 경험을 살려 아프간 내 미군과 정보를 공유하며 선수들을 군용기에 태우려 했다. 카터에게 함께 구출작전을 펴자고 설득한 사람이 있었다. 전 아프간 여자축구대표팀 주장 포팔이다. 2007년 여자대표팀 창단 멤버인 포팔은 공격수로 맹활약했다. 하지만 끊임없이 살해 위협에 시달리다 2011년 덴마크로 이주했다. 그녀는 아프간의 후배 선수들을 구해달라며 미국, 호주 정부와 인권단체에 도움을 청했다. 카터와 포팔은 파티에게 어디로 움직일지 전화와 채팅 앱으로 실시간 지시를 했다. 파티는 선수들 중 거의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알았다. ● 탈레반 병사가 나에게 걸어왔다 “북쪽 게이트로 가. 사람이 나와 있을 거야.” 카터는 파티에게 암호와 비밀번호 말하면 들여보내 줄 거라고 했다. 암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병 영웅인 존 바실론, 비밀번호는 해병대 창설일인 1775년 11월 10일에 특수문자를 결합한 것이었다. 북쪽 게이트 앞에는 마침 미군 병사가 서 있었다. 파티는 그에게 다가가 카터가 일러준 암호와 메시지를 여러 번 말했다. 하지만 병사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 누구야? 무슨 국가대표?” 그는 미국 여권이 있는 사람만 통과시킨다는 말을 반복했다. 이 장면을 근처의 탈레반 병사들이 유심히 노려보고 있었다. 파티가 상황을 알리려 카터와 포팔에게 다급히 메시지를 보냈다. 그 때 파티는 바로 옆에서 거대한 총성을 들었다. 순간 귀와 눈이 멍해졌다.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파티는 어딘가에서 날아온 발길질에 쓰러졌다. 공항에 함께 왔던 파티의 오빠(23)가 급히 달려왔다. 오빠는 몸으로 발길질을 막아내며 생수통을 꺼내 실신한 동생의 얼굴에 물을 뿌렸다. 정신을 차린 파티는 답장을 확인하려 휴대전화부터 살폈다. ‘너무 당황하지 마. 남쪽 게이트 호주 군인들한테 상황을 알릴게.’(카터) ‘포기해선 안 돼. 계속 싸우면 반드시 살아남을 거야.’(포팔) 파티와 선수들은 남쪽 게이트로 방향을 바꿨다. 그곳까지는 탈레반 병사들이 지키는 검문소 두 곳을 통과해야 했다. 첫 번째 검문소 앞은 빽빽한 인파로 한 걸음 내딛기 것조차 어려웠다. 서로를 주스 쥐어짜듯 밀치며 절박하게 나아갔다. 6, 7살쯤 보이는 소녀들이 어른들 틈에 짓눌려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밀지 마세요. 저희도 살고 싶어요.” 파티는 4살 막내 여동생이 떠올랐다. 그녀는 소리쳤다. “어린 애들이잖아요. 숨 좀 쉬게 해주세요.” 오빠는 소녀 중 한 명을 들어올려 어깨에 태웠다. 옴짝달싹 못하는 군중들을 상대로 탈레반은 전기 채찍을 휘둘렀다. 일부 선수들은 단톡방에 “너무 아파. 더 이상 못 가겠어”라고 올렸다. 여자국가대표 선배인 포팔이 단톡방에 연이어 메시지를 올렸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인 것처럼 움직여.’ ‘레드카드만 받지 말고 어떻게든 이기겠다는 마음으로.’ ‘팔꿈치를 사용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뚫고 가야 돼.’ 파티와 선수들은 가까스로 두 번째 검문소 앞에 닿았다. 차량과 인파가 수백m 줄지어 있었다. 경비는 더욱 삼엄했다. 총을 든 탈레반 병사들이 한 명 씩 신원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 때 군중 틈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저기 봐요. 여자 축구선수예요!” 한 탈레반 병사가 파티에게 총을 겨누며 다가왔다. 겁에 질린 그녀 앞으로 군중 수백 명이 에워싸듯 몰려들었다. 병사는 총구를 그들에게 돌렸지만 순식간에 밀려드는 인파에 휩쓸려 넘어졌다. 파티는 무조건 앞으로 내달렸다. 흙먼지 속에 짓밟힌 채 피범벅이 된 탈레반 병사의 앳된 얼굴이 어깨 너머로 보였다. 다른 탈레반 병사들은 군중들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넌 나처럼 노예로 살면 안 돼” 대표팀 주전 골키퍼인 파티는 경기 중 날아오는 공을 다이빙해서 막아 내거나, 상대편 쪽으로 공을 뻥 차올려 포물선으로 날아갈 때 통쾌함을 느꼈다. 주변의 집요한 반대와 위협에도 파티의 엄마만큼은 축구선수인 딸은 지지했다. 엄마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고 13세에 결혼해 5남매를 낳았다. 엄마는 파티에게 “너는 나처럼 되면 안 된다. 집안의 노예가 되지 말고, 부엌 너머의 삶을 찾아가라”고 자주 말했다. 파티와 동료 선수들은 ‘너희들을 죽여서 축구 골대에 매달겠다’는 위협을 수시로 받았다. 극단주의자들에게 납치되거나 집단 구타를 당한 선수들도 있다. 그럼에도 축구를 향한 열망을 계속 타올랐다. 그들은 수많은 숨죽인 여성들의 희망이었다. 파티는 탈레반의 총알을 피해 간신히 두 번째 검문소를 통과했다. 이제 남쪽 게이트가 눈앞에 있었다. 동료들의 안전을 확인하려 뒤를 돌아보니 10여m 앞에 오빠가 넘어져 있었다. 탈레반 병사가 소총 개머리판으로 오빠의 머리와 어깨를 내리치고 있었다. 땅바닥에 고꾸라진 오빠는 고개를 쳐들며 부르짖었다. “빨리 가, 어서 도망가, 넌 잡히면 안 돼”. 파티는 온몸이 마비되는 듯 했다. 공항에 함께 왔던 파티의 가족들은 48시간 동안 탈출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사이 뿔뿔이 흩어졌다. 아버지는 공항 앞에서 4살 여동생을 가슴에 끌어 앉은 채 탈레반의 전기 채찍을 맞고 주저앉았다. 10대인 두 동생은 공항 어딘가에서 사라져 행방을 알 수 없었다. 평소에 파티가 축구를 계속 할 수 있도록 ‘보디가드’ 역할을 해줬던 오빠마저 눈앞에 무너졌다. 파티는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얹는 것을 느꼈다. 대표팀 동료인 친한 친구였다. 그녀는 파티에게 울지 말라고 했다. 동료 선수들의 눈길이 모두 파티를 향해 있었다. 머리와 옷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이 10대 여성들은 시커멓게 된 손으로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파티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돌처럼 단단해져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는 주장이다.’ 남쪽 게이트 앞에는 호주 군인들이 있었다. 선수들은 여권을 흔들며 '국가대표 선수’ ‘축구’ 같은 영어 단어를 미친 듯이 외쳤다. 군인들은 오라고 손짓을 보냈지만 중간에 있던 탈레반 병사들이 또 다시 막아섰다. 파티와 선수들 10여 명은 서로 팔짱을 꽉 끼어 '인간 사슬'을 만들었다. 하도 꽉 끼어서 양팔에 찌릿찌릿 전기가 통하는 듯 했다. 한 몸이 된 채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오는 선수들을 향해 탈레반은 차마 총을 쏘지 못했다. 군 수송기(C-130) 안은 하수구 냄새와 땀 냄새가 섞여 코가 시큼했다. 탑승자 중 일부는 공항 하수구를 통해 게이트에 접근한 뒤 탈레반의 총탄과 채찍질을 뚫고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기내를 가득 채웠다. 화물칸 구석에 동료 선수들과 앉아있던 파티 역시 이제 아프간으로는 다시 돌아올 수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잘 가, 나의 국가대표 유니폼과 트로피들. 이제 땅속에서 안전할거야. 나의 어린 시절도 안녕.’● 호주에서 보낸 힘겨웠던 1년 아프간 여자 축구대표 선수들은 두바이 등을 거쳐 지난해 9월 초 호주에 도착했다. 사지에서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낯선 나라에 정착하기 위해 힘겨운 투쟁이 1년 째 이어지고 있다. 파티는 카불공항에서 잃어버린 초등생인 두 동생을 두바이공항에서 극적으로 상봉했다. 기쁨도 잠시,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고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역할이 기다리고 있었다. 파티는 다른 가족들을 아프간에 두고 왔다는 죄책감에서도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했다. 동생들은 탈출 몇 시간 뒤 카불공항에서 자살 폭탄테러가 벌어져 자신들을 하수구 밖으로 꺼내준 미군 병사를 포함해 130명이 희생됐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프간 여자선수들은 축구 때문에 고향에서 도망쳐 와야 했지만 축구는 그들을 자유롭고 안전한 곳으로 이끌었다. 파티와 선수들은 호주 멜버른의 한 여자 프로축구팀에 소속돼 다시 축구를 시작했다. 이들의 유니폼 뒷면에는 이름 없이 등번호만 있었다. 선수들 신원이 알려지면 아프간의 가족들이 보복을 당할 수 있어서다. 파티는 유니폼 뒤에 조그맣게 재봉된 아프간 국기를 발견했을 때 손으로 국기를 매만지며 고국을 대표한다는 것의 자랑스러움을 새삼 떠올렸다. 파티는 망명 중인 선수단을 국가대표로 인정하지 않는 국제축구연맹(FIFA)을 상대로 아프간 국가대표팀으로 인정해달라는 투쟁도 시작했다. 파티는 호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축구를 하면서 제가 사람이라는 것을, 제게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저에게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축구는 절대 포기 못해요. 축구를 통해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고 싶어요.” 아프간을 떠난 지 8개월 만인 4월 말, 선수들은 한 여자 프로팀과 처음으로 경기를 치렀다. 0대0 무승부였다. 아프간 팀이 한골을 넣었지만 오프사이드에 걸려 무효가 된 것을 선수들은 못내 아쉬워했다. ‘아프간 여성들은 원래 축구 할 운명이 아니어서 팀이 형편없다’는 악평을 하도 많이 들어서 선수들은 한 번의 승리가 늘 간절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파티는 선수들에게 말했다. “우리 슬픈 얼굴 하지 말자. 여기 이렇게 살아서 공을 차고 있잖아.”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2022-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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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Z세대의 반중 ‘분노 버튼’을 누른 것은[글로벌 이슈/신광영]

    “중국어 하나만 제대로 해도 먹고살 걱정 없다”는 말이 통하던 시절에 필자는 대학입시를 치렀다. 당시 중어중문과는 ‘핫하게’ 떠오르는 학과였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몇 년이 흘러 중국 시장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던 때였다. 20여 년이 지난 요즘은 달라졌다. 여러 대학에서 중어중문과가 폐과되고 중국 관련 교양강좌는 폐강되고 있다. 중국어를 배우는 중고교생도 줄어 지난해 중고교 교사 임용시험에서 중국어 과목 선발 인원은 ‘0명’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수교 당시엔 우리와 규모가 비슷했던 중국 경제는 30년 새 한국의 10배로 커졌다. 한중 무역 규모 역시 47배로 늘어 중국어 능통자를 찾는 수요가 많아질 법한데 중국어의 인기는 식어버렸다. 며칠 전 동아일보가 2030세대를 대상으로 중국에 대한 인식 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달라진 세태를 더욱 실감하게 된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일본은 물론이고 북한보다도 중국을 더 싫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취재팀은 한중 MZ세대 10명씩 총 20명을 심층 인터뷰하기도 했는데 한국 청년들의 말에는 중국을 바라보는 3가지 관점이 녹아 있었다. 우선, 중국이 강대국인 건 맞지만 ‘강대국의 국격’을 갖췄다고는 보지 않는다. 탈권위주의 시대에 태어나고 자란 한국의 2030세대는 경제·문화적 영향력을 가진 선진국 시민의 눈으로 중국을 바라본다. 공산당 일당 체제하에서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고, 홍콩 대만을 위협하는 중국을 보며 ‘가치의 거리’를 느끼는 것을 넘어 국가화된 ‘꼰대’에 가깝다고 여긴다. 둘째, 중국에 대한 비호감이 많지만 경제·안보 분야 영향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미국의 70%를 넘어섰고, 북한의 후원자 역할을 하고 있어 한반도 정세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대하다는 걸 2030세대는 잘 알고 있다. 중국이 2016년 한국에 ‘사드 보복’을 자행한 것 역시 그들은 직접 목격했다.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만 같아 답답하지만 국익을 생각하면 중국에 등 돌릴 수도 없다는 ‘현타’(현실 자각 타임)에 직면하는 게 2030세대의 세 번째 감정 경로다. 여기에 과거 수세기에 걸친 중국과의 비대칭적 관계, 6·25전쟁 때 서로 총을 겨눴던 역사적 기억까지 겹쳐지면 무력감은 적대감으로 번진다. 본보 인식 조사에서 2030세대가 중국에 비호감인 이유로 ‘김치와 한복이 중국에서 기원했다는 주장’을 가장 많이 꼽은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우리를 고압적으로 대해 온 중국이 전통문화마저 빼앗으려 한다는 심리적 마지노선을 건드린 것이다. 2030세대의 반중 정서는 이처럼 구조적으로 누적된 감정이다.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다. 이들에게 반일 감정은 깊이 잠재해 있으면서도 일상에서 체감되지 않는 ‘휴화산’이라면 반중 정서는 언제든 용암이 솟구칠 수 있는 ‘활화산’이다. 본보 심층 인터뷰에 응한 중국 2030세대 10명의 답변에는 눈에 띄는 공통점이 있었다. 중국에 대한 한국 청년들의 ‘분노 버튼’은 달궈져 있는 데 비해 중국 청년들은 비교적 평정심을 유지하며 차분하게 한국을 바라본다는 점이다. 이들은 한국의 사드 배치에 대해 “중국엔 위협이지만 각자 자국 이익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란 취지로 말했다. 김치·한복 논란에 대해선 “문화란 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마련이다. 기원을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며 무덤덤해했다. 한국인들의 비판을 부정하진 않으면서도 ‘그래도 내 생각엔 변함이 없다’는 태도는 간극을 좁히기 어려운 ‘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문제는 ‘우리는 뜨겁고, 상대는 차가운’ 한중 미래세대의 구도가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것이다. 미중 갈등 격화로 우리 정부가 어느 한쪽의 선택을 요구받는 상황에서 반중 감정은 균형 있고 냉철한 외교 전략을 추진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로선 국내 여론을 완전히 무시하기 어렵고, 반중 여론이 정치적으로 악용될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3연임을 시도하는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은 애국주의 교육을 강화하고 있어 반중 감정이 반한 감정을 자극해 한국 기업들에 불똥이 튈 수 있다. MZ세대의 반중 정서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24일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는 우리 정부는 엄중한 국제 정세에 대응하고 현명하게 중국을 활용하기 위해 반중 감정을 관리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여러 대안이 필요하겠지만 중국과 대등한 외교를 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저자세 외교’는 타오르는 반중 감정에 기름을 부을 수 있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

    • 2022-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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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Z세대의 반중 ‘분노 버튼’을 누른 것은

    “중국어 하나만 제대로 해도 먹고살 걱정 없다”는 말이 통하던 시절에 필자는 대학입시를 치렀다. 당시 중어중문과는 ‘핫하게’ 떠오르는 학과였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몇 년이 흘러 중국 시장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던 때였다. 20여 년이 지난 요즘은 달라졌다. 여러 대학에서 중어중문과가 폐과되고 중국 관련 교양강좌는 폐강되고 있다. 중국어를 배우는 중고교생도 줄어 지난해 중고교 교사 임용고시에서 중국어 과목 선발 인원은 ‘0명’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수교 당시엔 우리와 규모가 비슷했던 중국 경제는 30년 새 한국의 10배로 커졌다. 한중 무역 규모 역시 47배로 늘어 중국어 능통자를 찾는 수요가 많아질 법한데 중국어의 인기는 식어버렸다. 며칠 전 동아일보가 2030세대를 대상으로 중국에 대한 인식 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달라진 세태를 더욱 실감하게 된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일본은 물론 북한보다도 중국을 더 싫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취재팀은 한중 MZ세대 10명씩 총 20명을 심층 인터뷰하기도 했는데 한국 청년들의 말에는 중국을 바라보는 3가지 관점이 녹아 있었다. 우선, 중국이 강대국인 건 맞지만 ‘강대국의 국격’을 갖췄다고는 보지 않는다. 탈권위주의 시대에 태어나고 자란 한국의 2030세대는 경제·문화적 영향력을 가진 선진국 시민의 눈으로 중국을 바라본다. 공산당 일당 체제하에서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고, 홍콩 대만을 위협하는 중국을 보며 ‘가치의 거리’를 느끼는 것을 넘어 국가화된 ‘꼰대’에 가깝다고 여긴다. 둘째, 중국에 대한 비호감이 많지만 경제·안보 분야 영향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미국의 70%를 넘어섰고, 북한의 후원자 역할을 하고 있어 한반도 정세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대하다는 걸 2030세대는 잘 알고 있다. 중국이 2016년 한국에 ‘사드 보복’을 자행한 것 역시 그들은 직접 목격했다.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만 같아 답답하지만 국익을 생각하면 중국에 등 돌릴 수도 없다는 ‘현타’(현실 자각 타임)에 직면하는 게 2030세대의 세 번째 감정 경로다. 여기에 과거 수세기에 걸친 중국과의 비대칭적 관계, 6·25전쟁 때 서로 총을 겨눴던 역사적 기억까지 겹쳐지면 무력감은 적대감으로 번진다. 본보 인식 조사에서 2030세대가 중국에 비호감인 이유로 ‘김치와 한복이 중국에서 기원했다는 주장’을 가장 많이 꼽은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우리를 고압적으로 대해 온 중국이 전통문화마저 빼앗으려 한다는 심리적 마지노선을 건드린 것이다. 2030세대의 반중 정서는 이처럼 구조적으로 누적된 감정이다.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다. 이들에게 반일 감정은 깊이 잠재해 있으면서도 일상에서 체감되지 않는 ‘휴화산’이라면 반중 정서는 언제든 용암이 솟구칠 수 있는 ‘활화산’이다. 본보 심층 인터뷰에 응한 중국 2030세대 10명의 답변에는 눈에 띄는 공통점이 있었다. 중국에 대한 한국 청년들의 ‘분노 버튼’은 달궈져 있는 데 비해 중국 청년들은 비교적 평정심을 유지하며 차분하게 한국을 바라본다는 점이다. 이들은 한국의 사드 배치에 대해 “중국엔 위협이지만 각자 자국 이익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란 취지로 말했다. 김치·한복 논란에 대해선 “문화란 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마련이다. 기원을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며 무덤덤해했다. 한국인들의 비판을 부정하진 않으면서도 ‘그래도 내 생각엔 변함이 없다’는 태도는 간극을 좁히기 어려운 ‘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문제는 ‘우리는 뜨겁고, 상대는 차가운’ 한중 미래세대의 구도가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것이다. 미중 갈등 격화로 우리 정부가 어느 한쪽의 선택을 요구받는 상황에서 반중 감정은 균형 있고 냉철한 외교 전략을 추진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로선 국내 여론을 완전히 무시하기 어렵고, 반중 여론이 정치적으로 악용될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3연임을 시도하는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은 애국주의 교육을 강화하고 있어 반중 감정이 반한 감정을 자극해 한국 기업들에 불똥이 튈 수 있다. MZ세대의 반중 정서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24일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는 우리 정부는 엄중한 국제정세에 대응하고 현명하게 중국을 활용하기 위해 반중 감정을 관리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여러 대안이 필요하겠지만 중국과 대등한 외교를 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저자세 외교’는 타오르는 반중 감정에 기름을 부을 수 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2022-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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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신광영]절친인 미국-영국도 얼굴 붉히는 강제송환

    미국 뉴욕 맨해튼 남쪽에 ‘조지프 도허티 코너’라는 교차로가 있다. 뉴욕시 의회가 1990년 미국 정부를 상대로 ‘영국 송환 거부’ 투쟁을 벌인 아일랜드인의 이름을 따서 개명한 것이다. 그가 영국으로 송환되기 전까지 수감돼 있었던 교도소가 이 교차로 옆에 있었다. 도허티는 살인 탈주범이었다. 1980년 영국군 장교를 총으로 살해했다. 그는 영국령인 북아일랜드를 독립시키려는 아일랜드 무장단체(IRA) 병사였다. 범행 후 붙잡혔다가 탈옥한 뒤 여권을 위조해 미국으로 도주했다. 영국은 그에게 ‘부재중 유죄 판결’을 내리고 종신형을 선고했다. 도허티는 3년 뒤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체포됐다. 영국이 송환을 요구하자 미국 정부는 동의했다. 거부할 경우 미국이 테러범들의 피난처가 될 수 있고, 미국인을 살해한 테러범을 처벌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 송환을 요청할 때 협조를 받기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국 법원이 제동을 걸었다. “도허티는 미국 독립투사들이 200년 전 영국 통치에 맞선 것처럼 정치범에 가깝다”며 1985년 ‘송환 불가’ 판결을 내렸다. 이후 도허티 송환 문제는 미 행정부와 사법부가 맞붙는 뜨거운 감자가 됐다. 정부는 어떻게든 판결을 무력화시키려 했고, 도허티는 송환을 막아 달라고 법원에 호소했다. 여야도, 여론도 둘로 갈렸다. 7년의 논쟁 끝에 1992년 미 연방대법원이 “영국에서 부당한 재판을 받을 우려가 적다”며 추방을 결정했다. 도허티는 영국으로 송환돼 6년간 복역했다. 2019년에는 미국과 영국의 처지가 뒤바뀌었다. 이때는 인질 4명을 납치 살해하는 데 가담한 2명의 이슬람국가(IS) 대원 처리가 문제였다. 영국 국적인 이들은 영국식 억양 때문에 수사관들로부터 ‘비틀스’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이들 손에 처형된 인질 중에는 제임스 폴리 기자 등 미국인 희생자가 많아 미국 내에서 엄벌 여론이 높았다. 미국은 2018년 시리아에서 이들을 생포해 왔으나 유죄 판결을 하려면 영국으로부터 증거를 넘겨받아야 했다. 영국 정부는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고려해 이들의 테러 가담 증거를 넘기려 했다. 하지만 이번엔 영국 대법원이 가로막았다. 테러범의 어머니가 정부 방침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내 승소한 것이다. 대법관들은 두 IS 대원에 대해 “그 어떤 살인보다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괴물”이라면서도 미국이 사형을 선고하지 않겠다고 보증하지 않는 한 형사소송에 사용될 개인정보를 넘겨선 안 된다고 판결했다. 미국은 이들에 대한 최고 형량을 종신형으로 제한하는 데 동의하고 나서야 증거를 넘겨받을 수 있었다. 국가 간 범죄인 송환은 이처럼 해외에서도 치열한 논쟁을 불러온 사례가 많다. 국익과 정의, 외교와 정치가 뒤섞여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민주주의 국가들의 송환 사례들을 관통하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정부가 단독으로 결정하기보다 사법부의 판단을 거쳐 결론을 내리고, 중범죄자라도 고문과 사형이 자행되는 국가로는 거의 보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범죄자의 인권을 그렇게까지 지켜줘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관례의 근거가 되는 ‘범죄인 인도조약’이나 ‘유엔 고문방지협약’은 인권 보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건 아니다. 범죄인 송환에 관한 여러 국제조약은 대량학살이나 전쟁범죄를 저지른 반인륜 범죄자의 경우 국경을 초월해 심판하는 ‘보편적 관할권(Universal Jurisdiction)’ 개념에서 시작됐다. 범죄자가 어느 나라에 있든 반드시 찾아내 죗값을 치르게 하자는 것이다. 다만 공정한 재판을 위해 고문과 사형이 만연한 나라에는 송환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더해졌다. 그래야 추후 이뤄질 엄중한 처벌에 정당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사마 빈라덴 같은 수천 명을 살상한 테러조직의 수괴라도 고문·사형 가능성이 높은 곳에는 송환하지 않는 게 이 원칙에 부합한다. 세계 각국이 범죄인 송환 여부를 결정할 때 사법부의 판단을 받는 것은 절차적 정의가 전제돼야 더 큰 정의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송환 결정을 행정부에만 맡겨두면 국익이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원칙을 포기할 수 있어 견제 장치를 둔 것이다. 미국과 영국이 IS 테러범 재판 문제로 줄다리기를 하던 2019년 말, 우리 정부는 살인 혐의가 있는 북한 어민 2명을 나포 5일 만에 강제북송 했다. 북송이 정당한지를 두고 이들이 우리 정부와 법적으로 다툴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흉악범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절차적 정의를 희생시켜 지켜낸 가치는 이내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

    • 2022-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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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친인 미국-영국도 얼굴 붉히는 강제송환[글로벌 이슈]

    미국 뉴욕 맨해튼 남쪽에 ‘조지프 도허티 코너(Joseph Doherty Corner)’라는 교차로가 있다. 뉴욕시 의회가 1990년 미국 정부를 상대로 ‘영국 송환 거부’ 투쟁을 벌인 아일랜드인 조지프 도허티의 이름을 따서 개명한 것이다. 그가 영국으로 송환되기 전까지 수감돼 있었던 교도소가 이 교차로 옆에 있었다. 도허티는 살인 탈주범이었다. 1980년 영국군 장교를 총으로 살해했다. 그는 영국령인 북아일랜드를 독립시키려는 아일랜드 무장단체(IRA) 병사였다. 범행 후 붙잡혔다가 탈옥한 뒤 여권을 위조해 미국으로 도주했다. 영국은 그에게 ‘부재중 유죄 판결’을 내리고 종신형을 선고했다. 도허티는 그로부터 3년 뒤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체포됐다. 영국이 송환을 요구하자 미국 정부는 동의했다. 거부할 경우 미국이 테러범들의 피난처가 될 수 있고, 미국인을 살해한 테러범을 처벌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 송환을 요청할 때 협조를 받기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국 법원이 제동을 걸었다. “도허티는 미국 독립투사들이 200년 전 영국 통치에 맞선 것처럼 정치범에 가깝다”며 1985년 ‘송환 불가’ 판결을 내렸다. 이후 도허티 송환 문제는 미 행정부와 사법부가 맞붙는 뜨거운 감자가 됐다. 정부는 어떻게든 판결을 무력화시키려 했고, 도허티는 송환을 막아 달라고 법원에 호소했다. 여야도, 여론도 둘로 갈렸다. 7년의 논쟁 끝에 1992년 미 연방대법원이 “영국에서 부당한 재판을 받을 우려가 적다”며 추방을 결정했다. 도허티는 결국 영국으로 송환돼 6년간 복역했다. 2019년에는 미국과 영국의 처지가 뒤바뀌었다. 이때는 인질 4명을 납치 살해하는 데 가담한 2명의 이슬람국가(IS) 대원 처리가 문제였다. 영국 국적인 이들은 영국식 억양 때문에 수사관들로부터 ‘비틀스’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이들 손에 처형된 인질 중에는 제임스 폴리 기자 등 미국인 희생자가 많아 미국 내에서 엄벌 여론이 높았다. 미국은 2018년 시리아에서 이들을 생포해 왔으나 유죄 판결을 하려면 영국으로부터 증거를 넘겨받아야 했다. 영국 정부는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고려해 이들의 테러 가담 증거를 넘기려 했다. 하지만 이번엔 영국 대법원이 가로막았다. 테러범의 어머니가 정부 방침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내 승소한 것이다. 대법관들은 두 IS 대원에 대해 “그 어떤 살인보다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괴물”이라면서도 미국이 사형을 선고하지 않겠다고 보증하지 않는 한 형사소송에 사용될 개인정보를 넘겨선 안 된다고 판결했다. 미국은 이들에 대한 최고 형량을 종신형으로 제한하는 데 동의하고 나서야 증거를 넘겨받을 수 있었다. 국가 간 범죄인 송환은 이처럼 해외에서도 치열한 논쟁을 불러온 사례가 많다. 국익과 정의, 외교와 정치가 뒤섞여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민주주의 국가들의 송환 사례들을 관통하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정부가 단독으로 결정하기보다 사법부의 판단을 거쳐 결론을 내리고, 중범죄자라도 고문과 사형이 자행되는 국가로는 거의 보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범죄자의 인권을 그렇게까지 지켜줘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관례의 근거가 되는 ‘범죄인 인도조약’이나 ‘유엔 고문방지협약’은 인권 보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건 아니다. 범죄인 송환에 관한 여러 국제조약은 대량학살이나 전쟁범죄를 저지른 반인륜 범죄자의 경우 국경을 초월해 심판하는 ‘보편적 관할권(Universal Jurisdiction)’ 개념에서 시작됐다. 범죄자가 어느 나라에 있든 반드시 찾아내 죗값을 치르게 하자는 것이다. 다만 공정한 재판을 위해 고문과 사형이 만연한 나라에는 송환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더해졌다. 그래야 추후 이뤄질 엄중한 처벌에 정당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사마 빈 라덴 같은 수천 명을 살상한 테러조직의 수괴라도 고문·사형 가능성이 높은 곳에는 송환하지 않는 게 이 원칙에 부합한다. 세계 각국이 범죄인 송환 여부를 결정할 때 사법부의 판단을 받는 것은 절차적 정의가 전제돼야 더 큰 정의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송환 결정을 행정부에만 맡겨두면 국익이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원칙을 포기할 수 있어 견제 장치를 둔 것이다. 미국과 영국이 IS 테러범 재판 문제로 줄다리기를 하던 2019년 말, 우리 정부는 살인 혐의가 있는 북한 어민 2명을 나포 5일 만에 강제북송 했다. 북송이 정당한지를 두고 이들이 우리 정부와 법적으로 다툴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흉악범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절차적 정의를 희생시켜 지켜낸 가치는 이내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2022-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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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신광영]냄비 속 개구리 신세가 된 독일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는 ‘석유 앞에 장사 없는’ 국제 질서가 녹아있는 길이다. 1970년대 중동이 담합해 유가를 올린 ‘오일쇼크’의 위력을 실감한 우리는 당시 주요 산유국인 이란과 가까워지려 했다. 서울시는 이란의 테헤란시장을 초청해 자매결연을 맺고 서울엔 테헤란로를, 테헤란에는 서울로를 만들었다. 박정희 정권이 1973년 미국의 만류에도 “이스라엘은 점령 지역에서 철수하라”는 친아랍 성명을 낸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당시 이스라엘이 미국을 등에 업고 아랍국들과 영토 분쟁 중인 상황에서 우리가 산유국인 아랍 쪽 편을 든 것이다. 일본도 성명에 동참했다. 아무리 가까운 혈맹이라도 석유 앞에선 후순위인 것이다. 20세기 이후 대부분의 전쟁에서 석유는 승패의 결정적 변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미국 진주만을 공습한 것은 석유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이 동남아 석유 운송로를 확보하려 인도차이나를 침공하자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금지시켰다. 일본은 이를 풀기 위해 진주만을 기습했는데, 보복에 나선 미국이 일본의 원유 수송선을 대거 침몰시켰다. 일본은 원유 부족에 허덕이다가 패망으로 내몰렸다. 히틀러 역시 에너지 수급 실패로 패했던 1차 대전을 교훈 삼아 2차 대전 때는 석탄을 액화시켜 연료로 만드는 석탄액화공장 가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독일에 맞선 연합군이 승기를 잡은 건 1944년 5월 대공세로 독일 전역의 석탄액화공장을 폭격해 히틀러의 급소를 격파하면서다. 이후 공장 가동률이 3%까지 떨어지자 두 달 만에 독일은 항복했다. 에너지를 쥔 쪽이 유리한 것은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도 다르지 않다. 요즘 우리는 전쟁을 일으켜 전 세계를 위기로 내몬 러시아가 나 홀로 승승장구하는 아이러니를 목도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은 고유가 고물가에 신음하는데, 러시아는 천연가스와 원유 수출로 호황을 누리고 있다. 그 돈으로 우크라이나에 미사일과 포탄을 퍼붓는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나라가 독일이다. 독일은 2월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에 가장 많은 돈을 보낸 서방 국가다. 3, 4월 두 달간 지급한 에너지 대금만 11조3000억 원(83억 유로)이다. 독일은 천연가스의 55%, 석탄의 52%, 석유의 34%를 러시아에서 수입한다. 전체 에너지원 중 약 25%가 러시아산이다. 독일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전 폐기를 선언했고 석탄발전도 줄이면서 풍력 태양력 등 재생에너지 비율을 전체 전력의 40% 가까이 높여 왔다. 그로 인한 전력 생산의 공백은 러시아 에너지로 메웠다. 독일을 수식해온 ‘신재생에너지 강국’은 러시아 에너지 중독이라는 치명적 결함 위에 세워진 허망한 명성이었던 것이다. 독일의 러시아 에너지 수입은 좋은 명분에서 시작됐다. 냉전이 한창이던 1970년대 빌리 브란트 총리는 소련과의 경제 교류를 통해 긴장을 완화한다는 동방정책을 추진했다. 후임인 헬무트 슈미트 총리도 “무역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총을 쏘지 않는다”며 에너지 수입을 늘렸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뒤이어 소련이 붕괴하자 독일 정치인들은 “상호의존 전략이 철의 장막을 걷어냈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소련 붕괴의 실질적 원인은 석유였다. 소련은 원유 판매가 전체 수출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절대적이었는데, 미국이 이 약점을 파고들었다.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서방 국가들과 연대해 소련산 석유와 천연가스 수입을 줄이면서 사우디아라비아 등 산유국들을 부추겨 대대적인 석유 증산에 나서게 했다. 1985년 배럴당 28달러였던 국제유가는 6개월 새 3분의 1로 폭락했다. 석유 판 돈으로 연방국을 지원하고 해외 전쟁을 감당하던 소련은 이때 입은 치명상에서 회복하지 못했다. 독일은 탈냉전 후 러시아 에너지 의존 상태를 바로잡을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푸틴이 2008년 조지아 침공,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병합 등 야욕을 드러낼 때도 독일은 러-독 천연가스 송유관 건설을 멈추지 않았다. 권위주의 국가를 변화시킨다는 자기만족, 탈탄소 선도국이 되겠다는 포부, 값싼 천연가스라는 눈앞의 달콤함에 현혹돼 안보 위기를 직시하지 않은 것이다. 러시아는 최근 독일로 보내는 천연가스를 60%나 줄였다. 비상이 걸린 독일은 가장 더러운 에너지인 석탄 발전소를 재가동하며 과거로 퇴행하고 있다. 러시아가 가스관을 완전히 잠그면 제조업 중심인 독일의 경제성장률은 5%포인트 하락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지금 독일은 러시아가 언제 물을 끓일지 몰라 속 태우는 ‘냄비 속 개구리’ 신세다. 설익은 이상주의가 에너지 정책을 좌우하면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 돌아보게 된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

    • 2022-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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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냄비 속 개구리 신세’…독일은 어쩌다 러 에너지에 중독됐나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는 ‘석유 앞에 장사 없는’ 국제 질서가 녹아있는 길이다. 1970년대 중동이 담합해 유가를 올린 ‘오일쇼크’의 위력을 실감한 우리는 당시 주요 산유국인 이란과 가까워지려 했다. 서울시는 이란의 테헤란시장을 초청해 자매결연을 맺고 서울엔 테헤란로를, 테헤란에는 서울로를 만들었다. 박정희 정권이 1973년 미국의 만류에도 “이스라엘은 점령 지역에서 철수하라”는 친아랍 성명을 낸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당시 이스라엘이 미국을 등에 업고 아랍국들과 영토 분쟁 중인 상황에서 우리가 산유국인 아랍 쪽 편을 든 것이다. 일본도 성명에 동참했다. 아무리 가까운 혈맹이라도 석유 앞에선 후순위인 것이다. 20세기 이후 대부분의 전쟁에서 석유는 승패의 결정적 변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미국 진주만을 공습한 것은 석유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이 동남아 석유 운송로를 확보하려 인도차이나를 침공하자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금지시켰다. 일본은 이를 풀기 위해 진주만을 기습했는데, 보복에 나선 미국이 일본의 원유 수송선을 대거 침몰시켰다. 일본은 원유 부족에 허덕이다가 패망으로 내몰렸다. 히틀러 역시 에너지 수급 실패로 패했던 1차 대전을 교훈 삼아 2차 대전 때는 석탄을 액화시켜 연료로 만드는 석탄액화공장 가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독일에 맞선 연합군이 승기를 잡은 건 1944년 5월 대공세로 독일 전역의 석탄액화공장을 폭격해 히틀러의 급소를 격파하면서다. 이후 공장 가동률이 3%까지 떨어지자 두 달 만에 독일은 항복했다. 에너지를 쥔 쪽이 유리한 것은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도 다르지 않다. 요즘 우리는 전쟁을 일으켜 전 세계를 위기로 내몬 러시아가 나 홀로 승승장구하는 아이러니를 목도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은 고유가 고물가에 신음하는데, 러시아는 천연가스와 원유 수출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 그 돈으로 우크라이나에 미사일과 포탄을 퍼붓는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나라가 독일이다. 독일은 2월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에 가장 많은 돈을 보낸 서방 국가다. 3, 4월 두 달간 지급한 에너지 대금만 11조3000억 원(83억 유로)이다. 독일은 천연가스의 55%, 석탄의 52%, 석유의 34%를 러시아에서 수입한다. 전체 에너지원 중 약 25%가 러시아산이다. 독일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전 폐기를 선언했고 석탄발전도 줄이면서 풍력 태양력 등 재생에너지 비율을 전체 전력의 40% 가까이 높여 왔다. 그로 인한 전력 생산의 공백은 러시아 에너지로 메웠다. 독일을 수식해온 ‘신재생에너지 강국’은 러시아 에너지 중독이라는 치명적 결함 위에 세워진 허망한 명성이었던 것이다. 독일의 러시아 에너지 수입은 좋은 명분에서 시작됐다. 냉전이 한창이던 1970년대 빌리 브란트 총리는 소련과의 경제 교류를 통해 긴장을 완화한다는 동방정책을 추진했다. 후임인 헬무트 슈미트 총리도 “무역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총을 쏘지 않는다”며 에너지 수입을 늘렸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뒤이어 소련이 붕괴하자 독일 정치인들은 “상호의존 전략이 철의 장막을 걷어냈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소련 붕괴의 실질적 원인은 석유였다. 소련은 원유 판매가 전체 수출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절대적이었는데, 미국이 이 약점을 파고들었다.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서방 국가들과 연대해 소련산 석유와 천연가스 수입을 줄이면서 사우디아라비아 등 산유국들을 부추겨 대대적인 석유 증산에 나서게 했다. 1985년 배럴당 28달러였던 국제유가는 6개월 새 3분의 1로 폭락했다. 석유 판 돈으로 연방국을 지원하고 해외 전쟁을 감당하던 소련은 이때 입은 치명상에서 회복하지 못했다. 독일은 탈냉전 후 러시아 에너지 의존 상태를 바로잡을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푸틴이 2008년 조지아 침공,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병합 등 야욕을 드러낼 때도 독일은 러-독 천연가스 송유관 건설을 멈추지 않았다. 권위주의 국가를 변화시킨다는 자기만족, 탈탄소 선도국이 되겠다는 포부, 값싼 천연가스라는 눈앞의 달콤함에 현혹돼 안보 위기를 직시하지 않은 것이다. 러시아는 최근 독일로 보내는 천연가스를 60%나 줄였다. 비상이 걸린 독일은 가장 더러운 에너지인 석탄 발전소를 재가동하며 과거로 퇴행하고 있다. 러시아가 가스관을 완전히 잠그면 제조업 중심인 독일의 경제성장률은 5%포인트 하락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지금 독일은 러시아가 언제 물을 끓일지 몰라 속 태우는 ‘냄비 속 개구리’ 신세다. 설익은 이상주의가 에너지 정책을 좌우하면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 돌아보게 된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2022-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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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은 총으로 막을 수 있다’는 환상[글로벌 이슈/신광영]

    미국 텍사스주 유밸디의 총기 난사 희생자 추모행사에는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자원봉사를 온 주민들이 적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2번 연속 지지할 정도로 공화당 텃밭인 유밸디는 총기 소지에 관대한 전형적인 텍사스 시골이다. 소총이 복권 경품으로 자주 내걸리는, 미국에서 가장 중무장한 지역 중 하나다. 이런 마을에서 지난달 24일 총기 사고로 초등학생 19명과 교사 2명이 숨지자 무장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민들의 오랜 신념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희생된 아이의 삼촌이 “더 이상의 참사를 막으려면 교사들을 총으로 무장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 다른 희생자의 할아버지가 “총기 소지의 자유가 과연 무엇을 지켜줬나. 그 자유가 결국 사람을 죽였다”며 반론을 편다. 총기 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총기 규제 강화에 곧잘 찬성할 것 같지만 오히려 반대인 경우도 많다. 사건 당시 총을 갖고 있었다면 맞서 싸울 수 있고 애초에 범죄자가 총을 들고 위협할 엄두를 못 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총기 규제를 집요하게 막아온 전미총기협회(NRA) 등이 주관하는 사격대회에선 마트나 피자집에 총을 든 괴한이 난입한 상황을 가정해 괴한 복장의 표적을 먼저 명중시키는 참가자가 우승컵을 쥔다. ‘총을 든 악당을 막는 건 오직 총을 든 선한 시민’이라는 총기 옹호론자들의 세계관이 투영된 것이다. 무장의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2조까지 굳이 안 가더라도, 나와 가족의 생명을 언제 도착할지 모를 경찰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지키자는 주장은 피부에 와닿는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총은 총으로 막을 수 있다는 집단 심리는 현실에선 ‘환상’에 가깝다. 이번 유밸디 총기 난사범인 18세 고교생은 학교로 진입하자마자 4학년 교실에 난입해 100여 발을 쐈다. 마침 교사들이 총을 갖고 있어 곧바로 대응 사격을 했다면 피해를 줄일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발생한 희생은 되돌릴 수 없다. 이번 사건에서 유밸디 경찰은 학교로 진입하고도 1시간 넘게 범인을 제압하지 못했다. 경찰은 “용의자의 위치를 특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섣불리 움직이면 대원들이 총에 맞거나 학생들 피해가 더 커질 수 있었다”고 했다. 경찰이 부실 대응을 했다면 잘못이지만 이는 무장한 경찰도 총기범을 단숨에 제압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총기가 확산되면 공권력의 화력은 더 강해지고, 그에 맞서 범죄자들 역시 더욱 치명적인 무기를 동원하면서 총기 성능이 상향 평준화된 결과다. 총기범이 총을 든 시민에 의해 현장에서 제압된 사례도 극히 드물다. 교사나 경비원이 무장한다고 해서 총기 테러범들이 범행을 포기할 가능성도 높지 않다. 그들은 대부분 범행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사살된다. 죽기로 마음먹은 이들을 상대로 ‘힘의 균형’을 통한 억제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실제 위험 상황이 벌어졌을 때 총을 가진 사람이 총이 없는 사람보다 죽거나 다칠 확률이 5배가량 높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자신의 대응 능력을 과대평가해 총이 없었다면 회피했을 위험을 무릅쓰기 때문이다. 실효성 있는 총기 규제 도입이 가장 확실한 해법일 텐데 미국인들은 거의 절반씩 찬반으로 갈려 접점을 찾는 데 번번이 실패해왔다. 2012년 26명이 숨진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 사건처럼 다른 나라라면 역사에 각인될 참사가 숱하게 이어져도 미국은 달라지는 게 없다. 미국 역사에서 총은 자유와 독립의 상징이었다. 총을 든 민병대가 영국군과 맞서 싸워 독립을 쟁취했고, 이후에도 연방정부의 폭정에 대비하기 위해 시민들의 자기방어권을 보장했다. “국민을 무장해제 시키는 것은 그들을 노예화하는 가장 효과적 방법”이라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 조지 메이슨의 말은 당대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문명시대 이전의 전통으로 흘려보냈어야 할 관습이 200년 넘게 기형적으로 살아남아 미국을 반으로 쪼개 놓는 분열의 상징이 됐다. 미 언론에선 ‘정체성의 저주’ ‘총이라는 전염병(Gun Epidemic)’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개탄한다. 상당수 미국인들은 아침에 자녀를 등교시키며 안아줄 때 이 순간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공포를 매일같이 느낀다고 한다. 총기에 대해선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머물러 있는 미국은 구습을 제때 청산하지 못하고, 정치가 분열을 봉합하지 못할 때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를 보여준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

    • 2022-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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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사 총기무장해야”…美, 총은 총으로 막을 수 있다는 환상

    미국 텍사스주 유밸디의 총기 난사 희생자 추모행사에는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자원봉사를 온 주민들이 적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2번 연속 지지할 정도로 공화당 텃밭인 유밸디는 총기 소지에 관대한 전형적인 텍사스 시골이다. 소총이 복권 경품으로 자주 내걸리는, 미국에서 가장 중무장한 지역 중 하나다. 이런 마을에서 지난달 24일 총기 사고로 초등학생 19명과 교사 2명이 숨지자 무장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민들의 오랜 신념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희생된 아이의 삼촌이 “더 이상의 참사를 막으려면 교사들을 총으로 무장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 다른 희생자의 할아버지가 “총기 소지의 자유가 과연 무엇을 지켜줬나. 그 자유가 결국 사람을 죽였다”며 반론을 편다. 총기 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총기 규제 강화에 곧잘 찬성할 것 같지만 오히려 반대인 경우도 많다. 사건 당시 총을 갖고 있었다면 맞서 싸울 수 있고 애초에 범죄자가 총을 들고 위협할 엄두를 못 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총기 규제를 집요하게 막아온 전미총기협회(NRA) 등이 주관하는 사격대회에선 마트나 피자집에 총을 든 괴한이 난입한 상황을 가정해 괴한 복장의 표적을 먼저 명중시키는 참가자가 우승컵을 쥔다. ‘총을 든 악당을 막는 건 오직 총을 든 선한 시민’이라는 총기 옹호론자들의 세계관이 투영된 것이다. 무장의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2조까지 굳이 안 가더라도, 나와 가족의 생명을 언제 도착할지 모를 경찰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지키자는 주장은 피부에 와 닿는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총은 총으로 막을 수 있다는 집단 심리는 현실에선 ‘환상’에 가깝다. 이번 유밸디 총기 난사범인 18세 고교생은 학교로 진입하자마자 4학년 교실에 난입해 100여 발을 쐈다. 마침 교사들이 총을 갖고 있어 곧바로 대응 사격을 했다면 피해를 줄일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발생한 희생은 되돌릴 수 없다. 이번 사건에서 유밸디 경찰은 학교로 진입하고도 1시간 넘게 범인을 제압하지 못했다. 경찰은 “용의자의 위치를 특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섣불리 움직이면 대원들이 총에 맞거나 학생들 피해가 더 커질 수 있었다”고 했다. 경찰이 부실 대응을 했다면 잘못이지만 이는 무장한 경찰도 총기범을 단숨에 제압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총기가 확산되면 공권력의 화력은 더 강해지고, 그에 맞서 범죄자들 역시 더욱 치명적인 무기를 동원하면서 총기 성능이 상향 평준화된 결과다. 총기범이 총을 든 시민에 의해 현장에서 제압된 사례도 극히 드물다. 교사나 경비원이 무장한다고 해서 총기 테러범들이 범행을 포기할 가능성도 높지 않다. 그들은 대부분 범행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사살된다. 죽기로 마음먹은 이들을 상대로 ‘힘의 균형’을 통한 억제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실제 위험 상황이 벌어졌을 때 총을 가진 사람이 총이 없는 사람보다 죽거나 다칠 확률이 5배가량 높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자신의 대응 능력을 과대평가해 총이 없었다면 회피했을 위험을 무릅쓰기 때문이다. 실효성 있는 총기 규제 도입이 가장 확실한 해법일 텐데 미국인들은 거의 절반씩 찬반으로 갈려 접점을 찾는 데 번번이 실패해왔다. 2012년 26명이 숨진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 사건처럼 다른 나라라면 역사에 각인될 참사가 숱하게 이어져도 미국은 달라지는 게 없다. 미국 역사에서 총은 자유와 독립의 상징이었다. 총을 든 민병대가 영국군과 맞서 싸워 독립을 쟁취했고, 이후에도 연방정부의 폭정에 대비하기 위해 시민들의 자기방어권을 보장했다. “국민을 무장해제 시키는 것은 그들을 노예화하는 가장 효과적 방법”이라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 조지 메이슨의 말은 당대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문명시대 이전의 전통으로 흘려보냈어야 할 관습이 200년 넘게 기형적으로 살아남아 미국을 반으로 쪼개 놓는 분열의 상징이 됐다. 미 언론에선 ‘정체성의 저주’ ‘총이라는 전염병(Gun Epidemic)’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개탄한다. 상당수 미국인들은 아침에 자녀를 등교시키며 안아줄 때 이 순간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공포를 매일같이 느낀다고 한다. 총기에 대해선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머물러 있는 미국은 구습을 제때 청산하지 못하고, 정치가 분열을 봉합하지 못할 때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를 보여준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2022-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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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신광영]‘품격 외교’ 기회를 흑역사로 만든 국회

    우크라이나의 시골에는 좁은 숲길과 넓은 평야가 번갈아 이어지는 지형이 많다. 러시아군과 우크라이나군은 광활한 평야를 사이에 두고 양 끝의 숲에 몸을 숨긴 채 총격전을 벌인다. 며칠 전 우크라이나군이 주둔해 있는 숲에 30, 40대 여성들이 찾아왔다. 서부 도시인 르비우 인근에 사는 이들은 남편들이 속한 부대를 수소문해 동부전선인 이곳까지 차를 몰고 왔다. “우리 남편들, 지금 어디에 있나요?” 부대장은 참담한 표정으로 수백 m 앞 평야를 가리켰다. “저기에 있습니다. 3일째.” 평야 너머의 숲에서 러시아군이 총을 겨누고 있어 시신 수습을 못 하고 있던 참이었다. 여성들은 부대장의 만류에도 적막한 평야로 걸어 나갔다. 언제든 맞은편 숲에서 총탄이 날아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여성들은 평야에 널린 시신들의 얼굴을 하나씩 확인했다. 그러곤 각자의 남편을 등에 지고 넘어졌다 일어서길 반복하며 아군 쪽 숲으로 되돌아왔다. 남편들은 서로에게 이웃이자 전우였다. 러시아의 침공 직후 함께 군에 자원해 같은 부대로 배치됐다. 마을에 남겨진 부인들은 최근 갑자기 연락이 끊긴 남편들을 찾아보자며 맨몸으로 전장에 온 것이었다. 이들은 남편의 주검을 싣고 고향으로 돌아와 합동 장례를 치렀다. 요즘 우크라이나 각지에서 이런 비극이 벌어진다. 70일째를 맞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영토의 상당 부분을 포기하며 완전히 굴복하기 전까진 전쟁을 끝낼 생각이 없어 보인다. 저항 의지를 꺾기 위해 갈수록 잔인하게 우크라이나인들을 살해하며 핵 공격 등 위협 수위를 높이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지원해 온 미국은 군사 원조 등에 42조 원(약 330억 달러)을 추가 투입하기로 했다. 전쟁이 아무리 길어져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크라이나가 이 정당한 항전에서 승리하길 바라고 있다. 동시에 하루빨리 전쟁이 끝나 죽음의 행렬이 멈추기를 바란다. 안타까운 것은 이 두 바람이 현재로선 양립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푸틴의 제국주의적 야심을 충족시켜 주지 않는 이상 전쟁을 빨리 끝내기 어렵고, 그렇다고 끝까지 결사 항전할 경우 희생은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정한 평화가 옳은 전쟁보다 낫다’는 독일 격언이 있다. 어떤 명분에도 피하는 게 상책일 만큼 전쟁은 너무도 처참하다는 의미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며칠 전 우크라이나 추가 지원을 발표하며 그와는 대척점에 있는 말을 했다. “싸움의 비용이 싸지는 않지만, 공격에 굴복하는 대가는 더 비쌀 것이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부정한 평화 대신 굴복하지 않는 길을 택했다. 지난달 전장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은 한 여성은 “소련 밑에서 살아봐서 그게 어떤 건지 알고 있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러시아에 점령당한 땅에서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 등 일부 점령지에서 벌써부터 레닌 동상을 다시 세우고 문화재를 약탈하는 등 민족성을 말살하고 있다. 화폐도 루블화로 바꾸고 휴교 상태인 학교를 열어 사상 교육을 준비하고 있다. 그 지역 청년들은 러시아 군복을 입고 동족이나 다른 약소국 시민들에게 총을 겨누게 될까 봐 치를 떤다. 20여 년 전 러시아의 대량 학살 피해자였던 체첸인들은 이번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인을 학살하는 데 동원되고 있다. 나라를 빼앗긴 대가란 그런 것이다. 지난달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화상연설을 했을 때 참석한 의원은 불과 50명 남짓이었다. 예정된 오후 5시에 맞춰 화상에 등장한 젤렌스키 대통령은 의원들이 서로 악수를 건네고 잡담하는 것을 한참 지켜보다 연설을 시작했다. 그날의 휑한 국회 강당 사진은 “우크라이나의 주장에 다른 국가들은 아무 관심이 없다”는 러시아 언론의 선전에 요긴하게 쓰였다. 미국 영국 일본 등 다른 나라 의원들처럼 전원 참석해 기립박수를 쳤어야 했다고 따지려는 것은 아니다. 나라마다 사정은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사정을 고려하면 제국주의 역사를 가진 강대국들보다 더욱 세련된 방식으로 항전 중인 국가의 원수에게 존중과 공감을 표했어야 했다. 지금 우크라이나인들은 어떻게든 저항하지 않을 수 없고, 저항하자니 너무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우리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며 뼈저리게 실감했던 딜레마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국회 연설은 ‘굴복하지 않는 길’을 먼저 걸었던 우리가 품격 있는 외교를 선보일 기회였지만 국제적 망신을 자초한 흑역사가 되어버렸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

    • 2022-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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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신광영]전쟁의 여러 얼굴들

    박완서의 첫 소설 ‘나목’은 6·25전쟁 중이던 1951년 미군 PX에서 함께 일한 화가 박수근을 모티브로 쓴 작품이다.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곧 전쟁통에 가족을 잃고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박완서는 초상화와 영화 간판을 그려 가족을 부양하는 박수근에게 큰 위로를 느꼈다. ‘그는 간판쟁이 중에서도 가장 존재감 없는 간판쟁이로 일관했다. 밑바닥 인생으로 보이는 사람들 안에 별의별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청소부 중 중학교 선생님이 있는가 하면, 고관의 미망인도 있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었다.’ 우리에겐 먼 과거인 전쟁이 지금 우크라이나에선 40일째 이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인들이 들려주는 생존 스토리는 전쟁의 여러 얼굴을 들춰낸다. “집에서 대피한 저는 엄마, 쌍둥이 여동생, 이모, 사촌과 함께 히치하이킹을 했어요. 사람이 많아 아무도 태워주지 않았어요. 포성 속에 밤을 꼬박 새고 다음 날 겨우 차 한 대를 잡았어요. 제가 타고 나니 엄마랑 동생이 앉을 자리가 없는 거예요. 제가 내리면서 엄마한테 타라고 하니까 안 타겠다고 버텨서 서로 껴안고 울었어요. 보다 못한 차주분이 자기 짐을 버리고 그 자리에 포개서 타라고 했어요. 추리고 추린 짐일 텐데….”(아나스타샤·22) “산부인과가 폭격을 당해 임신부 수십 명이 제가 있던 마리우폴 극장으로 왔어요. 붐벼서 다들 힘들었지만 임산부들에게 건물 우측 탈의실을 내줬어요. 거기가 가장 덜 추웠거든요. 하지만 그 배려가 너무 후회돼요. 러시아가 미사일로 건물 오른쪽을 때려서 임신부들은 살아남지 못했어요. 먼지 안개를 헤치고 탈출을 하려는데 아는 꼬마가 넋이 나가 있었어요. 아이 어깨를 흔들면서 소리쳤죠. ‘네 아빠가 돌아가셨어. 너는 살아야 한다. 아빠를 위해 살아야 해!’”(나디야·50대) “마리우폴에선 시신을 보면 담요로 덮어줘요. 누군지 알면 이름 적은 종이를 병에 넣어 시신 옆에 두고요. 저와 간신히 이 죽음의 도시를 빠져나온 남자친구는 못 데리고 온 외할머니를 걱정했어요. 남겨진 이들이 러시아로 끌려간다는 소문이 돌았거든요. 저희는 마리우폴에 다시 들어가게 해달라고 경비병에게 사정했어요. 죄책감을 안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어요.”(안나·21) “30년 간 마취과 의사로 일하다 은퇴하면서 유튜브로 자수를 배웠어요. 집에서 대피할 때 그동안 만든 자수 수백 점을 가방에 넣어 나왔죠. 급할 때 팔아서 비상금 벌려고요. 근데 너무 무거워서 가방을 버렸어요. 지금은 우리 군인들 입을 방탄조끼를 바느질해요.”(부텐코·65) “체첸인인 저는 전쟁이 뭔지 알아요. 23년 전 러시아의 포탄이 쏟아지던 날, 그로즈니(체첸의 수도)에 있던 집에서 잠옷 바람으로 동네 벙커까지 어둡고 탁 트인 길을 내달리던 기억이 생생해요. 동생은 그날 밤 죽어서 체첸의 공동묘지에 묻혔어요. 미국 내 반전 시위에서 우크라이나인을 만났는데 제가 러시아 국적이어서 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했어요. 수치심과 죄책감이 들더군요. 체첸인 친구는 동생이 러시아 군복을 입고 이번 전쟁에 투입됐는데도 우크라이나를 지지했어요. 그 친구는 며칠 뒤 동생이 전사한 것 같다는 연락을 받고 많이 울었어요.”(밀라나) “한 달 전 입대했어요. 누굴 해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지만 총을 안 들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그놈(러시아군)들이 여기 와 있는 게 정말 화가 나요. 그래도 이 전쟁에서 죽는 사람이 최대한 없었으면 해요. 러시아 군인들도요.”(우크라이나 병사) “손녀의 부축을 받으며 피란 열차를 기다리는데 독일군이 쳐들어왔던 1941년이 떠오르더군요. 머리 위로 죽음이 날아다니는 느낌…. 81년 전 그때와 똑같아요. 저는 역사가이고 홀로코스트 관련 책까지 썼는데 평생을 바친 일이 증발해버린 것 같아요. 이번엔 러시아를 피해 독일로 피란을 왔어요. 아이러니하죠.”(보리스·86) “제가 몰던 노란색 스쿨버스를 사람들 대피시키는 데 씁니다. 한 할머니가 버스에 오르질 못하고 강아지를 안고 울었어요. 반려동물까진 못 태우거든요. 도로에 간간히 보이는 차량 뒤창에는 ‘baby(아기)’ ‘people(민간인)’라고 쓰인 도화지가 큼직하게 붙어있어요. 공격하지 말아달라는 뜻으로 문손잡이 4곳에 흰 헝겊을 묶어 놓은 차도 많고요. 이제 마을은 버려진 영화 세트장처럼 황량해요. 공포영화 속에서 사는 기분이죠. 다음 포탄은 어디로 떨어질까. 이 생각이 떠나질 않아요.”(세르기·57) “하루 한 번 수프 한 그릇을 받아와 2, 4, 6세 딸을 먹여요. 큰딸은 이곳 지하철역으로 오기 전날 제가 해준 롤케이크가 꿈에 나온대요. 제 직업이 제빵사인데 아이들에게 먹을 걸 못 줘서 가슴이 찢어져요. 잠시나마 배고픔을 잊게 해주려고 동화책을 읽어줘도 아이들 눈빛이 더 이상 반짝이지 않아요. 어떤 분이 꿀 한 병을 줘서 겨우 살아있어요. 한 끼에 꿀 한 스푼…. 러시아 군인이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려 해서 처음엔 거절하다가 저도 모르게 ‘사탕 줘, 설탕’이라고 말했어요.”(율리야·33)요즘 우크라이나 지하철역은 하나의 작은 마을이다. 멈춰선 에스컬레이터는 어린이들이 서로를 뒤쫓는 놀이터가 됐고, 경사진 난간에 빨래가 널려 있다. 열차 지연 방송이 나왔을 역내 스피커에선 공습 사이렌이 흘러나온다. 선로 주변 대형 볼록거울 앞에서 10대 소녀들은 얼굴을 비추며 머리를 빗는다. 열차는 문이 활짝 열린 채 숙소로 쓰인다. 차창 앞 생수병에 꽂힌 분홍 튤립 다발이 지상의 세상을 떠올리게 한다.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

    • 2022-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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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크라 전쟁 40일째… 우크라 지하철역은 마을이 됐다

    박완서의 첫 소설 ‘나목’은 6·25전쟁 중이던 1951년 미군 PX에서 함께 일한 화가 박수근을 모티브로 쓴 작품이다.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곧 전쟁통에 가족을 잃고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박완서는 초상화와 영화 간판을 그려 가족을 부양하는 박수근에게 큰 위로를 느꼈다. ‘그는 간판쟁이 중에서도 가장 존재감 없는 간판쟁이로 일관했다. 밑바닥 인생으로 보이는 사람들 안에 별의별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청소부 중 중학교 선생님이 있는가 하면, 고관의 미망인도 있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었다.’ 우리에겐 먼 과거인 전쟁이 지금 우크라이나에선 40일째 이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인들이 들려주는 생존 스토리는 전쟁의 여러 얼굴을 들춰낸다. “집에서 대피한 저는 엄마, 쌍둥이 여동생, 이모, 사촌과 함께 히치하이킹을 했어요. 사람이 많아 아무도 태워주지 않았어요. 포성 속에 밤을 꼬박 새고 다음 날 겨우 차 한 대를 잡았어요. 제가 타고 나니 엄마랑 동생이 앉을 자리가 없는 거예요. 제가 내리면서 엄마한테 타라고 하니까 안 타겠다고 버텨서 서로 껴안고 울었어요. 보다 못한 차주분이 자기 짐을 버리고 그 자리에 포개서 타라고 했어요. 추리고 추린 짐일 텐데….”(아나스타샤·22) “산부인과가 폭격을 당해 임신부 수십 명이 제가 있던 마리우폴 극장으로 왔어요. 붐벼서 다들 힘들었지만 임산부들에게 건물 우측 탈의실을 내줬어요. 거기가 가장 덜 추웠거든요. 하지만 그 배려가 너무 후회돼요. 러시아가 미사일로 건물 오른쪽을 때려서 임신부들은 살아남지 못했어요. 먼지 안개를 헤치고 탈출을 하려는데 아는 꼬마가 넋이 나가 있었어요. 아이 어깨를 흔들면서 소리쳤죠. ‘네 아빠가 돌아가셨어. 너는 살아야 한다. 아빠를 위해 살아야 해!’”(나디야·50대) “마리우폴에선 시신을 보면 담요로 덮어줘요. 누군지 알면 이름 적은 종이를 병에 넣어 시신 옆에 두고요. 저와 간신히 이 죽음의 도시를 빠져나온 남자친구는 못 데리고 온 외할머니를 걱정했어요. 남겨진 이들이 러시아로 끌려간다는 소문이 돌았거든요. 저희는 마리우폴에 다시 들어가게 해달라고 경비병에게 사정했어요. 죄책감을 안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어요.”(안나·21) “30년 간 마취과 의사로 일하다 은퇴하면서 유튜브로 자수를 배웠어요. 집에서 대피할 때 그동안 만든 자수 수백 점을 가방에 넣어 나왔죠. 급할 때 팔아서 비상금 벌려고요. 근데 너무 무거워서 가방을 버렸어요. 지금은 우리 군인들 입을 방탄조끼를 바느질해요.”(부텐코·65) “체첸인인 저는 전쟁이 뭔지 알아요. 23년 전 러시아의 포탄이 쏟아지던 날, 그로즈니(체첸의 수도)에 있던 집에서 잠옷 바람으로 동네 벙커까지 어둡고 탁 트인 길을 내달리던 기억이 생생해요. 동생은 그날 밤 죽어서 체첸의 공동묘지에 묻혔어요. 미국 내 반전 시위에서 우크라이나인을 만났는데 제가 러시아 국적이어서 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했어요. 수치심과 죄책감이 들더군요. 체첸인 친구는 동생이 러시아 군복을 입고 이번 전쟁에 투입됐는데도 우크라이나를 지지했어요. 그 친구는 며칠 뒤 동생이 전사한 것 같다는 연락을 받고 많이 울었어요.”(밀라나)“한 달 전 입대했어요. 누굴 해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지만 총을 안 들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그놈(러시아군)들이 여기 와 있는 게 정말 화가 나요. 그래도 이 전쟁에서 죽는 사람이 최대한 없었으면 해요. 러시아 군인들도요.”(우크라이나 병사) “손녀의 부축을 받으며 피란 열차를 기다리는데 독일군이 쳐들어왔던 1941년이 떠오르더군요. 머리 위로 죽음이 날아다니는 느낌…. 81년 전 그때와 똑같아요. 저는 역사가이고 홀로코스트 관련 책까지 썼는데 평생을 바친 일이 증발해버린 것 같아요. 이번엔 러시아를 피해 독일로 피란을 왔어요. 아이러니하죠.”(보리스·86) “제가 몰던 노란색 스쿨버스를 사람들 대피시키는 데 씁니다. 한 할머니가 버스에 오르질 못하고 강아지를 안고 울었어요. 반려동물까진 못 태우거든요. 도로에 간간히 보이는 차량 뒤창에는 ‘baby(아기)’ ‘people(민간인)’라고 쓰인 도화지가 큼직하게 붙어있어요. 공격하지 말아달라는 뜻으로 문손잡이 4곳에 흰 헝겊을 묶어 놓은 차도 많고요. 이제 마을은 버려진 영화 세트장처럼 황량해요. 공포영화 속에서 사는 기분이죠. 다음 포탄은 어디로 떨어질까. 이 생각이 떠나질 않아요.”(세르기·57) “하루 한 번 수프 한 그릇을 받아와 2, 4, 6세 딸을 먹여요. 큰딸은 이곳 지하철역으로 오기 전날 제가 해준 롤케이크가 꿈에 나온대요. 제 직업이 제빵사인데 아이들에게 먹을 걸 못 줘서 가슴이 찢어져요. 잠시나마 배고픔을 잊게 해주려고 동화책을 읽어줘도 아이들 눈빛이 더 이상 반짝이지 않아요. 어떤 분이 꿀 한 병을 줘서 겨우 살아있어요. 한 끼에 꿀 한 스푼…. 러시아 군인이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려 해서 처음엔 거절하다가 저도 모르게 ‘사탕 줘, 설탕’이라고 말했어요.”(율리야·33) 요즘 우크라이나 지하철역은 하나의 작은 마을이다. 멈춰선 에스컬레이터는 어린이들이 서로를 뒤쫓는 놀이터가 됐고, 경사진 난간에 빨래가 널려 있다. 열차 지연 방송이 나왔을 역내 스피커에선 공습 사이렌이 흘러나온다. 선로 주변 대형 볼록거울 앞에서 10대 소녀들은 얼굴을 비추며 머리를 빗는다. 열차는 문이 활짝 열린 채 숙소로 쓰인다. 차창 앞 생수병에 꽂힌 분홍 튤립 다발이 지상의 세상을 떠올리게 한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2022-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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