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배

안영배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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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안영배 기자입니다.

ojong@donga.com

취재분야

2024-10-23~2024-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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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두집 선, 순례자 섬… 예술과 ‘썸’

    ‘천사(1004)의 섬’이라 불리는 신안군 별명과 썩 어울리는 섬이 있다. 최근 ‘순례자의 길’로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진 전남 신안군 증도면 기점소악도다. 이름도 낯선 5개 작은 섬(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 딴섬 병풍도)이 썰물 때만 노둣길로 이어져 한 몸처럼 변신하는 곳이기도 하다. 노둣길은 서해 갯벌 지대에서 나타나는 ‘모세의 기적’ 체험 현장이다. 이곳 섬 사람들은 썰물 때 이 섬 저 섬으로 건너다니기 위해 갯벌에다 징검다리를 놓듯 바윗돌로 노둣길을 만들어 놓았다. 하루 두 차례 서너 시간 노둣길로 이어졌던 섬들은 밀물 때가 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서로 갈라선다. 이 노둣길을 따라 순례자의 길이 설치돼 있다. 한겨울에 걸어도 춥지 않은 데다 대부분 평지여서 걷기 좋은 순례길이다. 2021년 행정안전부가 선정한 ‘국내 찾아가고 싶은 33섬’ 중 ‘걷기 좋은 섬’으로도 뽑히기도 했다. 전국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힘들어하는데도 이 섬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는 게 권성옥 전남문화관광해설사의 말이다. 순례길은 신안군 압해도 송공항에서 출발하는 여객선을 타고 대기점도 선착장에서 내리면서부터 시작된다. 선착장에는 그리스 산토리니풍의 둥글고 푸른 지붕에 흰 회벽이 인상적인 ‘건강의 집’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밤에는 등대 역할을 하고, 대합실이 없는 대기점도의 휴게소 역할도 하는 이 집에는 순례길의 출발을 알리는 작은 종이 설치돼 있다. 순례자들은 겸손한 마음으로 몸을 낮춰 이 종을 치면서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순례하기를 빈다. 여기서부터 총 12km 거리의 순례길 곳곳마다 12개의 작은 집이 설치돼 있다. 1km 안팎으로 떨어진 집들은 우리나라와 프랑스, 스페인의 건축·미술가 10여 명이 그리스도 12제자를 모티브로 삼아 건축한 작품들이다. 그래서 이 순례길은 ‘12사도 순례길’ 혹은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따라 ‘섬티아고 순례길’ 등의 별칭도 갖고 있다. 그런데 이곳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예배당이 되고, 불자에게는 조그만 암자가, 가톨릭교인들에게는 자신만의 작은 공소가 된다. 종교가 없는 이들에겐 잠시 쉬면서 명상과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작은 성소(聖所)인 것이다. 각 성소는 저마다 자연 환경에 맞는 독특한 건축미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 맞는 성소’를 찾아다니는 재미도 있다. 대기점도에는 모두 5개의 성소가 있다. 선착장의 제1성소(건강의 집)에서 대기점도 해안 길을 따라가면 병풍도로 이어지는 노둣길을 만나게 되는데, 그 초입에 제2성소(생각하는 집)가 자리 잡고 있다. 해(밀물 상징), 달(썰물 상징) 등 별을 의미하는 구조물이 인상적인 이 성소는 특히 푸른 눈의 고양이 석상(石像)이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는 게 눈에 띈다. 지붕 첨탑 위의 두 마리 고양이 조형물도 저 멀리 해변을 감시하고 있는 듯하다. 오래전 대기점도 사람들의 쉼터였던 이곳 성소가 고양이를 상징물로 채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대기점도에는 사람보다 고양이가 더 많이 살고 있다고 할 정도로 고양이 천국이다. 30여 년 전 마을이 들쥐로 인해 막대한 농사 피해를 입게 되자 쥐를 퇴치하기 위해 고양이를 섬으로 들여와 키우기 시작한 게 계기가 됐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고양이를 해치는 개들은 퇴출시킨다는 내부 규칙도 있다고 한다. 밤에 이동하다 보면 여기저기서 불쑥 나타나는 길고양이들 때문에 깜짝깜짝 놀랄 정도다. 숲속 작은 오두막집을 연상시키는 제3성소(그리움의 집)는 우리나라 전통미를 강하게 풍긴다. 붉은 기와와 통나무로 된 처마에다 실내는 신라 성덕대왕신종의 ‘비천상’에서 영감을 얻은 부조가 설치돼 있다. 제4성소(생명평화의 집)는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원통형의 구조물이 인상적이고 제5성소(행복의 집)는 메타세쿼이아 나무를 물고기 비늘 문양으로 잘라 겹겹이 얹은 첨탑형 지붕이 독특하다. 장미셀, 파코 슈발 등 프랑스 출신 작가들이 툴루즈 지방의 건축 전통을 따라 지은 성소라고 한다. 특히 제5성소에서는 계절과 시간, 물때에 따라 변화하는 바다와 노둣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대기점도의 제5성소에서 노둣길을 건너면 바로 소기점도로 이어진다. 그런데 섬과 섬을 연결하는 노둣길이 밀물이면 잠기기 때문에 미리 국립해양조사원의 조석 예보를 확인해 시간을 잘 맞춰야 건너갈 수 있다. 소기점도엔 제6성소(감사의 집)와 제7성소(인연의 집)가 있다. 집 전체가 스테인드글라스로 제작된 제7성소는 유일하게 접근이 불가능하다. 호수 중앙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호수 각 위치와 햇빛에 따라 작품의 색이 달라 보여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살아 있는 갯벌 소기점도를 지나 소악도로 넘어가는 노둣길 중간에는 제8성소(기쁨의 집)가 설치돼 있다. 밀물 때는 당연히 바다 위에 떠 있는 집이 된다. 이슬람 사원을 연상시키는 금빛 돔 지붕이 인상적인 이곳은 놀랍게도 지기(地氣) 또한 배어 있다. 이곳에서는 신안 갯벌의 생생한 모습도 감상할 수 있다. 올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신안갯벌은 면적이 약 1100km²에 달해 국내 최대를 자랑한다. 신안갯벌은 육지의 강에서 모인 퇴적물이 조류에 밀려 1004개 섬 주변에서 형성됐다.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형성되고 있는 ‘살아 있는’ 갯벌이다. 반면 다른 나라의 갯벌들은 대개 바다에 쌓여 있던 퇴적물이 조류에 의해 육지로 밀리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갯벌에서는 굴, 조개, 망둑어, 칠게, 농게, 짱뚱어, 갯고둥, 낙지 등이 잡히고 있다. 간석지엔 대나무나 참나무 가지가 우뚝우뚝 서 있다. 이 가지에 김이 달라붙어 자라게 하는 양식이다. 이 방법은 김을 날마다 일정 기간 동안만 햇빛을 받을 수 있도록 조절하기 때문에 다른 양식으로 기른 김보다 비타민A, B, B2가 많이 함유돼 있고 단백질, 식이섬유, 무기질 등 영양소가 풍부하다고 한다. 아무튼 노둣길의 제8성소를 지나 소악도(연륙화한 진섬 포함)로 진입하면 제9성소(소원의 집), 제10성소(칭찬의 집), 제11성소(사랑의 집)가 기다리고 있다. ‘어부의 기도소’로 고안된 제9성소에는 안방처럼 편히 누울 수 있는 나무 마루가 깔려 있어 한잠 늘어지게 자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삼각형의 뾰족지붕이 돋보이는 제10성소, 파리 개선문을 빼닮은 제11성소를 참배하고 나면 마지막으로 남은 제12성소(지혜의 집)가 노둣길 건너 딴섬에서 기다리고 있다. 예수를 배반한 가롯 유다를 상징하는 이 집은 꼭 유배의 섬 같은 분위기가 난다.○바다 위의 맨드라미 꽃동산 성소 순례를 마치면 기운을 북돋워주는 병풍도로 가볼 일이다. ‘불타는 사랑’ ‘시들지 않는 열정’이라는 꽃말을 가진 맨드라미꽃으로 유명한 섬이다. 기점소악도에서 가장 긴 노둣길을 따라 병풍도로 들어서면 마을 첫 관문인 보기 선착장에서 맨드라미 꽃동산까지 4km 구간에 맨드라미꽃 정원이 조성돼 있다. 이 섬의 상징색 또한 핑크빛이다. 그래서 마을 지붕도 모두 빨간색을 하고 있다. 가을 절정기를 맞아 12만 m²에 40여 품종 200만 송이의 맨드라미가 화려하게 피어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닭 볏 모양부터 촛불 모양, 여우 꼬리 모양 등 다양한 형태와 여러 색깔의 맨드라미를 볼 수 있다. 아담한 섬마을 가옥의 붉은 지붕들과 바다 위에 핀 맨드라미 꽃동산을 감상하면서 꽃말처럼 우리 모두의 사랑과 평화를 기원해본다. 글·사진 신안=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21-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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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요로움 샘솟는 두 물줄기… 천재 기르고 ‘한강의 기적’ 낳다

    《‘해변 개가 산골 부자보다 낫다’는 속담이 있다. 산에서 생산되는 물산이 아무리 풍부하다 해도 강가나 바닷가에서 이뤄지는 재화의 규모를 따라갈 수 없다는 비유다. ‘물길은 재물을 주관한다(水管財物)’는 풍수 이론도 이런 배경을 깔고 있다. 물길이 풍요로운 삶과 밀접한 관계에 있기에 한강을 ‘서울의 젖줄’이라고도 한다. 그러니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본격적으로 한강이 시작되는 경기 양평 양수리는 풍요로움의 원천지가 되는 셈이다. 두 강이 하나되는 두물머리(兩水里)는 아름다운 절경까지 빚어내 한강8경 중 제1경으로 꼽히는 명소이기도 하다.》 한강은 서울, 나아가 한국 경제를 풍성하게 살찌워주는 ‘재물의 강’이다. 오죽하면 우리 경제의 발전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를까. 그 기운을 제대로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양평군 두물머리 일대다. 저 멀리 금강산에서 흘러온 북한강과 강원도 금대봉 기슭에서 발원한 남한강 두 물줄기가 굽이굽이 흘러와 합쳐지는 곳이다 보니 그 기세가 장엄하고도 신비롭게 느껴진다. 운길산 자락의 수종사에서는 도도하게 흐르는 두 강이 하나로 합쳐지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조선 전기의 문신 서거정은 수종사에 올라 한강의 두물머리를 내려다보면서 ‘동방의 절 중 제일가는 전망’이라고 격찬하기도 했다. 수종사는 조선 중·후기엔 차를 즐기는 ‘차꾼’들의 거점지이기도 했다. 정약용, 초의선사, 김정희 등 내로라하는 차 마니아들이 즐겨 이곳을 찾곤 했다. 지금도 서울 일대의 차꾼들은 으레 이곳 삼정헌(三鼎軒)에 들러 차 한 잔 마시며 두물머리 풍경을 즐기곤 한다.○합수처 물 기운 받은 정약용 유적지 일교차가 심해지는 초가을, 새벽녘의 물안개와 일출 및 일몰이 멋진 두물머리는 인문지리학의 눈으로는 합수처(合水處) 명당이다. 두 물이 합쳐 하나가 되면서 지형을 감싸듯 돌아 흐르는 땅에는 에너지(기운)가 강력한 혈(穴)이 존재한다는 게 풍수 논리다. 이곳 두물머리 명당 기운을 제대로 받아 누린 이로 다산 정약용(1762∼1836)을 꼽을 수 있다. 정약용은 팔당호숫가 마재마을(마현마을·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나고 또 생을 마감했다.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 인근 수종사에서 공부하는 등 젊은 시절을 보냈고, 전남 강진에서 17년 넘게 유배 생활을 마친 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현재 마재마을에는 다산문화관, 다산기념관 등 ‘정약용 유적지’가 조성돼 있다. 유적지 한쪽 드넓은 마당이 펼쳐지는 곳에 정약용이 태어난 집이 있다. 그가 ‘여유당(與猶堂)’이라고 이름 지은 생가다. 본래 생가는 1925년 을축대홍수로 한강이 범람했을 때 유실됐고, 지금 모습은 1986년 전통 한옥 구조로 복원한 형태다. 원생가는 유적지 주차장 부근이라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새로 복원한 생가 터가 명당임은 분명하다. 이 터는 목화토금수 오행론(五行論)으로는 수, 즉 물 기운이 풍성한 곳이다. 정약용도 느낌으로 알았던 것일까, 자신의 집을 ‘수각(水閣)’이라고도 불렀다. 수는 지혜와 창조적 활동 등을 상징하며, 수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사람도 이런 특성이 도드라진다는 게 동양인문학의 논리다. 실제로 정약용은 창조적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는 정조 임금이 수원 화성으로 갈 때 한강을 쉽게 건널 수 있도록 목선들을 연결한 ‘배다리’를 고안하고, 무거운 돌을 들어올리는 거중기를 설계하는 등 창의적 행동들로 유명했다. 정약용 생가를 한가로이 거닐다 보면 지혜와 창조의 에너지가 몸으로 스며드는 느낌을 받게 된다. 땅에서 기운을 얻는 일종의 취기법(取氣法)이다. 그의 생가 바로 뒤편 동산에는 그의 묘가 있다. 그가 직접 점지한 ‘사후의 집’인데, “지관(地官·풍수사)에게 물어보지 말라”는 유언을 자손에게 남겼다. 생전에 길흉화복만 강조하는 풍수설을 불신한 그는 ‘산과 물이 거듭 둘러싸서 좋은 기상을 이룬 곳이 좋은 땅’이라고 밝힌 주자의 풍수론은 그대로 따랐다. 그의 묘가 바로 그런 곳이다.○두물머리에서 한강을 품다 정약용 유적지에서 두 강이 만나는 현장인 두물머리(양평군 양서면)까지는 차로 10여 분 걸린다. 두물머리의 상징은 수령 400년 된 늙은 느티나무다. 원래 두 그루가 있었는데 한 그루는 1972년 팔당댐 건설로 수몰됐고, 지금의 느티나무만이 남아 마을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도당할아버지 나무’라고 해서 마을의 안녕을 위한 제를 지낸다고 한다.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는 높이 26m, 둘레 4.8m로 방문하는 이들에게 휴식과 안정을 선사하는 힐링 명소이기도 하다. 느티나무 바로 옆에는 청동기 시대의 작품인 고인돌 한 기도 자리 잡고 있다. 고인돌 덮개돌 윗면에는 크고 작은 홈구멍이 있는데, 북두칠성 등 별자리를 상징하는 성혈로 알려져 있다. 고인돌이 조성됐다는 것은 이곳이 고대부터 성스러운 장소이자 명당 터였음을 암시한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은 거의 대부분 명당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초가을 한낮의 무더위를 피해 느티나무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면 한강의 물 기운과 터의 명당 기운을 동시에 쐬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이때 강물이 흘러나가는 쪽보다는 흘러오는 쪽으로 시선을 두는 게 좋다. 흘러오는 곳은 그 기운을 취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느티나무 쉼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특별히 물안개를 잘 감상할 수 있는 물안개 쉼터가 있다. TV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로 인기를 끌고 있는 곳이다. 이른 새벽 물안개 절경과 저녁노을을 담으려는 사진가들이 즐기는 쉼터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더 전진하면 두물머리 나루터가 나온다. 한때 강원도 산골에서 나무 등을 싣고 온 뗏목꾼들과 한양(서울)을 오가던 길손들로 시끌벅적하던 나루터였다. 그러나 팔당댐 건설과 함께 두물머리는 나루터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렸다. 그 대신 지금은 가족이나 연인들이 평일에도 찾아와 북적북적한 나루터 분위기를 살려준다. 소원을 들어준다 하여 ‘소원나무’로 불리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나루터의 감초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 이건필의 ‘두강승유도’와 겸재 정선의 ‘독백탄’으로도 남겨져 있는 명승지 두물머리에서 물 기운을 충분히 누린 후, ‘물과 꽃의 정원’으로 유명한 세미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두물머리에서 세미원 후문까지는 산책하듯 걸어갈 수 있는 거리다. 물로 막혀 있던 두 장소를 이어주는 ‘배다리’가 인상적이다. 아버지 사도세자 묘를 참배하러 한강을 건너가는 정조 임금의 효와 배다리를 설계한 정약용의 지혜를 기리기 위해 조성한 ‘열수주교(烈水舟橋)’라고 한다. ‘경기도 제1호 지방정원’으로 지정된 세미원은 삼면이 물로 둘러싸인 물의 정원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의 전통 정원 양식과 수생식물 등 볼거리가 풍성하다. 8월 중순까지만 해도 활짝 핀 연꽃을 감상할 수 있지만, 지금의 저문 연꽃 또한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또 다른 운치를 자아낸다. 드문드문 핀 화려한 수련 꽃, 항아리 모양의 ‘장독대 분수’, 갈대밭이 무성한 오솔길 등은 세미원 입장료(5000원)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지친 일상생활에서 물의 기운을 받아 회복 에너지로 삼는 여행지로서는 두물머리 일대가 제격이다. ○가볼 만한 곳 ▽남양주 물의 정원: 두물머리에서 북한강 쪽 풍광을 즐기고 싶다면 남양주 ‘물의 정원’을 추천한다. 물의 정원은 국토교통부가 2012년 한강 살리기 사업으로 조성한 수변생태공원(48만4188m²)이다. 북한강변을 따라 펼쳐지는 광대한 정원에는 산책로와 자전거도로가 잘 조성돼 있다. 물의 정원을 상징하는 다리인 뱃나들이교를 건너면 강변 산책로를 따라 대규모 초화(草花) 단지가 조성돼 있다. 9월에는 울긋불긋한 코스모스가 장관이다. ▽능내역 폐역: 남양주 조안면에 있는 능내역 폐역은 옛 기차역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덕지덕지 때 묻은 간판, 코딱지만 한 대합실, 역사 안팎에 걸린 낡은 흑백사진, 입구에 나무로 만든 빨간 우체통 등이 있는 이 폐역은 최근 복고 열풍을 타고 인기를 끌고 있다. 능내역은 1956년 개통돼 지역 주민들의 서울 통학·통근용으로 애용되다가 2008년 경의중앙선 철도 노선이 변경되면서 폐역이 됐다. 철로변에 자전거 전용도로가 놓이면서 북한강변을 즐기는 자전거 동호인 사이에 입소문이 난 이후 관광객들의 추억여행지로 부상했다. 글·사진 양평=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21-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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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십만 년이 차곡차곡… 굽어보니 복주머니 올려보니 현무암 커튼

    《명소에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아름다운 경관, 뛰어난 건축미, 역사적 인물들의 스토리가 묻어 있는 장소일수록 그렇다. 거기에 명소 자체의 좋은 터 기운이 보태진다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더욱 강해진다. 경기 포천시엔 그런 명소 명당이 적잖다. 지루한 가을장마, 잠깐 날이 갠 틈을 타 명소를 찾는 ‘번개 여행’을 했다.》 ○복주머니 명소, 한탄강변의 비둘기낭 폭포 포천에는 서로 경쟁을 하듯 대비되는 두 곳의 명소가 있다. 2020년 7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된 ‘한탄강 세계지질공원’과 폐채석장을 문화예술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포천아트밸리’가 바로 그곳이다. 하나는 자연이 빚어낸 천혜의 명소이고, 다른 하나는 인위적으로 조성한 명소다. 한탄강 세계지질공원은 불과 물이 빚어낸 자연의 조각품이다. 북한 강원도 쪽에서 폭발한 화산 용암이 서쪽 임진강까지 흘러가면서 곳곳에 거대하고도 평평한 현무암질 용암대지를 만들었는데, 그 위로 오랜 세월 강물이 흐르면서 20∼40m의 깊은 협곡을 만들어놓은 지형이다. 한탄강 세계지질공원은 지상에서 푹 꺼진 현무암 협곡과 기둥 모양의 주상절리 등 지질학적 특성과 아름다운 경관 덕분에 세계로부터 인정받은 문화유산이 됐다.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비둘기낭 폭포’다. 협곡으로 떨어지는 폭포와 옥색 물 빛깔이 인상적인 곳이다. ‘비둘기낭’은 산비둘기들이 이곳에 형성된 하식동굴 및 수직 절벽에 크고 작은 둥지를 틀어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1950년대 6·25전쟁 당시에는 사람들의 은밀한 피란처로 사용됐고, 1970년대에는 5군단 휴양지로 장군들의 비밀스러운 피서지가 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TV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 각광받고 있다. 비둘기낭 폭포는 건기에는 마른 폭포이기 쉽다. 마침 가을장마가 한바탕 스친 후 찾았을 때는 콸콸 내리는 물줄기가 시원하고도 장쾌했다. 거기다 웅덩이처럼 움푹 파인 협곡 일대로 햇빛이 비치는 모습은 마치 빛 기둥을 탄 선녀가 호수에 하강하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협곡 아래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분이 상쾌해짐을 느끼는 체험을 하곤 한다. 바로 이곳이 지기(地氣), 즉 천연의 터 기운이 부드럽고도 강하게 서린 곳이기 때문이다. 비둘기낭 폭포는 풍수적으로도 복조리형 혹은 둥지형 명당이라고 할 수 있다. 비둘기낭 폭포 인근에는 한탄강의 뛰어난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몇몇 포인트가 있다. 먼저 비둘기낭 폭포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걸리는 ‘한탄강 하늘다리’는 한탄강 협곡을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명소다. 주상절리를 이룬 한탄강 양쪽 수직 절벽 사이에 높이 50m, 길이 200m로 설치한 출렁다리다. 다리 바닥 일부에는 투명유리가 설치돼 있는데, 출렁거리는 다리 위에서 유리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강물은 아찔함을 선사한다. 이어 하늘다리 건너 산등성이를 따라 10분 남짓 계단을 타고 걷다 보면 또 다른 매력을 가진 ‘마당교’를 만나게 된다. 마당교를 지나 왼쪽으로 야자매트 길을 따라 5분 정도 걸으면 또 다른 풍광이 펼쳐진다. 메밀꽃이 군락을 이룬 들판이다. 탁 트인 공간에서 눈송이처럼 흰 메밀꽃이 활짝 만개한 모습은 절로 탄성을 지르게 한다. 아직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한탄강의 숨은 명소다. 이곳에서는 협곡에서 느낄 수 있는 장엄함과 신비함과는 달리 평화로움과 여유를 즐길 수 있다.○인공미의 절정, 포천아트밸리 사람의 손을 탄 인공적 자연미가 압권인 포천아트밸리는 원래 화강암 채석장이었다. 1960년대부터 무려 30년간 이곳에서 채석된 화강암은 재질이 단단하면서도 아름다워 청와대, 국회의사당, 대법원, 인천국제공항 등 국가 주요 기관 건축물 재료로 사용됐다. 그러다가 1990년대 들어 양질의 화강암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폐채석장으로 방치된 후 포천시가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친환경 복합예술문화공원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천주산 정상 부근에서 병풍처럼 깎아지른 화강암 절벽, 그 아래 그림같이 펼쳐진 에메랄드빛 호수(천주호)는 언뜻 인작(人作)이 아닌 자연의 천작(天作)으로 착각할 정도다. 이곳에는 밤하늘의 별을 관찰할 수 있는 천문과학관, 포천 화강암을 이용한 30여 점의 조각품을 전시한 조각공원, 45m 화강암 직벽을 활용해 다양한 공연이 펼쳐지는 호수공연장(미디어 파사드) 등이 있다. 포천아트밸리로 오르는 길은 너무 경사져서 대부분 모노레일을 이용하는 편이다. 그리고 정상엔 화강암 직벽을 조망할 수 전망카페가 있는데 놀랍게도 이곳이 명당 터다. 30여 년간 폭약과 망치로 훼손된 채석장 한 모퉁이에서 지기가 사라질 법도 한데, 지금까지 좋은 땅 기운을 유지해오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정상에 오르느라 흘린 땀을 카페에서 판매하는 팥빙수로 식히면서 명당 기운을 쐬고 나니 한결 기운이 살아나는 듯했다. ○부부 화합 다지는 직두리 부부송 가족여행으로 포천을 찾는다면 직두리 부부송(군내면 직두리 191)과 포천향교(군내면 구읍리)도 둘러보길 권한다. 먼저 2005년 천연기념물 제460호로 지정된 직두리 부부송. 얼핏 보면 한 그루 우거진 소나무처럼 보이지만 두 그루의 소나무 가지가 서로 얽혀 마치 하나처럼 이어진 모습이다. 이 부부송은 가지의 끝부분이 아래로 처지는 특징을 가진 품종으로서 수령은 약 300년, 높이는 약 7m에 달한다. 부부송 앞에서 부부가 소원을 함께 빌면 이뤄진다는 전설도 전해 내려온다. 실제로 부부송을 보며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덱까지 설치해 놓았다. 현재도 부부송의 전설을 좇아 매년 적잖은 부부 혹은 연인들이 찾아온다는 게 현지 주민들의 말이다. 부부송 앞에서 무작정 빈다고 해서 소원이 이뤄질까 싶지만 이곳이 기운이 응축된 명당이라고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기(氣) 에너지가 넘치는 곳에서의 간절한 기도는 당사자의 마음과 육체에 긍정적 영향을 주고, 결국 기도에 부응하는 행동으로 이어져 좋은 결실을 가져올 수도 있지 않을까. 부부송 앞에서 부부가 한마음으로 소원을 비는 것만으로도 부부의 사랑과 가정의 화목을 다지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부부송에서 차로 5분 거리인 수원산 정상에는 부부송을 형상화한 전망대도 있다. 이곳에서는 포천의 수려한 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부부송이 부부 혹은 연인을 위한 자연 경관이라면 포천향교는 자녀들을 위한 명소다. 고려 명종 3년(1173년)에 처음 지어진 포천향교는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현재의 모습은 6·25전쟁 때 파괴된 것을 1962년에 고쳐 세운 것이다. 포천향교 내 가장 눈여겨볼 곳은 대성전이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중국 유학자들과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등 한국의 위대한 학자 18현(賢)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터 자체도 학문 기운이 출중한 곳이다. 이 기운은 향교 뒤편의 산줄기와도 이어진다. 바로 반월성이 자리한 청성산(283m) 자락이다. 삼국시대에 축성된 반월성은 둘레가 1080m인 성곽인데, 포천 시내가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이곳은 후고구려를 세우고 스스로 미륵을 자처한 궁예와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궁예는 반월성을 남진을 위한 주요 군사 거점으로 삼아 병사들을 지휘했다. 이처럼 반월성을 머리에 두르고 있는 청성산은 산 자체가 무(武)의 기상이 강한 곳이다. 그러니 청성산 자락의 포천향교는 문(文)의 기운과 무의 기상이 함께 녹아든 곳이라고 할 수 있다.글·사진 포천=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21-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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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 내려온다’ 비둘기낭…소원 들어주는 부부송…武의 기운 품은 포천[안영배의 도시와 풍수]

    명당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거기에 아름다운 경관, 뛰어난 건축, 역사적 인물들의 향기까지 덧붙여지면 흡인력이 더욱 강해진다. 경기도 포천시엔 그런 ‘명소 명당’이 적잖다. 주상절리와 협곡 등 내륙에서는 보기 힘든 현무암 지질대, 빼어난 화강암 등으로 유명한 포천은 특히 무(武)의 기상이 출중한 곳이기도 하다. 코로나19로 인한 스트레스와 일상에 지친 삶에서 힘이 빠짐을 느낀다면 포천을 찾아볼 일이다. 복주머니 명소, 한탄강변의 비둘기낭 폭포 포천에는 서로 경쟁을 하듯 대비되는 두 곳의 명소가 있다. 2020년 7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된 ‘한탄강 세계지질공원’과 폐채석장을 문화예술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포천아트밸리’가 바로 그곳이다. 하나는 자연이 빚어낸 천혜의 명소이고, 다른 하나는 인위적으로 조성한 명소다. 먼저 한탄강 세계지질공원은 불과 물이 빚어낸 자연의 조각품이다. 북한 강원도 쪽에서 폭발한 화산 용암이 서해안쪽 임진강까지 흘러가면서 곳곳에 거대하고도 평평한 현무암질 용암대지를 만들었는데, 그 위로 오랜 세월 강물이 흐르면서 20~40m의 깊은 협곡을 만들어놓은 지형이다. 지상에서 푹 꺼진 현무암 협곡과 기둥 모양의 주상절리 등 지질학적 특성과 아름다운 경관 덕분에 세계로부터도 칭찬받는 문화유산이 됐다. 그 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비둘기낭 폭포’다. 협곡으로 떨어지는 폭포와 옥색 물 빛깔이 인상적인 곳이다. ‘비둘기낭’은 산비둘기들이 이곳에 형성된 하식동굴 및 수직 절벽에 크고 작은 둥지를 틀어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또는 동굴이 비둘기 둥지 같은 모양이어서 그렇게 불린다는 얘기도 있다. 비둘기들만 이곳을 애용했던 것은 아니다. 1950년대 6·25전쟁 당시에는 사람들의 은밀한 피난처로 사용됐고, 1970년대에는 5군단 휴양지로 장군들의 비밀스런 피서지가 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TV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 각광받고 있다. 비둘기낭 폭포는 건기에는 마른 폭포이기 쉽다. 마침 가을 장마가 한바탕 스친 후 찾았을 때는 콸콸 내리는 물줄기가 시원하고도 장쾌했다. 거기다 웅덩이처럼 움푹 패인 협곡 일대로 햇빛이 비추이는 모습은 마치 빛 기둥을 탄 선녀가 호수에 하강하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협곡 아래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분이 상쾌해짐을 느끼는 체험을 하곤 한다. 바로 이곳이 지기(地氣), 즉 천연의 터 기운이 부드럽고도 강하게 서린 곳이기 때문이다. 비둘기낭 폭포는 풍수적으로도 복조리형 혹은 둥지형 명당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복을 듬뿍 받아간다는 마음만으로도 즐거워진다. 비둘기낭 폭포 인근에는 한탄강의 뛰어난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몇몇 포인트들이 있다. 먼저 비둘기낭 폭포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걸리는 ‘한탄강 하늘다리’는 한탄강 협곡을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명소다. 주상절리를 이룬 한탄강 양쪽 수직 절벽 사이에 높이 50m, 길이 200m로 설치한 출렁다리다. 다리 바닥 일부에는 투명유리가 설치돼 있는데, 출렁거리는 다리 위에서 유리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강물은 아찔함을 선사한다. 하늘다리에서는 저 멀리로 ‘포천 밀리터리 서바이벌 게임장’이 보인다. 시가지를 연상시키는 모형물에서 벌이는 전투 게임장으로 요즘 젊은층 사이에서 유행이라고 한다. 무의 성격이 강한 포천 땅과 어울리는 문화 체험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같다. 이어 하늘다리 건너 산등성이를 따라 10분 남짓 계단을 타고 걷다 보면 또다른 매력을 가진 ‘마당교’를 만나게 된다. 주상절리를 형상화한 입구가 돋보이는 마당교는 하늘다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마당교를 지나 왼쪽으로 야자매트 길을 따라 5분 정도 걸으면 또다른 풍광이 펼쳐진다. 메밀꽃이 군락을 이룬 들판이다. 탁 트인 공간에서 눈송이처럼 흰 메밀꽃이 활짝 만개한 모습은 절로 탄성을 지르게 한다. 아직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한탄강의 숨은 명소다. 이곳에서는 협곡에서 느낄 수 있는 장엄함과 신비함과는 달리 평화로움과 여유를 즐길 수 있다. 인공미의 절정, 포천아트밸리사람의 손을 탄 인공적 자연미가 압권인 포천아트밸리는 하늘다리에서 남쪽으로 자동차로 30분(약 25km) 남짓 걸리는 거리에 있다. 이곳은 원래 화강암 채석장이었다. 1960년대부터 무려 30년간 이곳에서 채석된 화강암은 재질이 단단하면서도 아름다워 청와대, 국회의사당, 대법원, 인천국제공항 등 국가 주요 기관 건축물 재료로 사용됐다. 그러다 1990년대 들어 양질의 화강암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폐채석장으로 방치된 후, 포천시가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친환경 복합예술문화공원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천주산 정상 부근에서 병풍처럼 깎아지른 화강암 절벽, 그 아래 그림같이 펼쳐진 에메랄드빛 호수(천주호)는 언뜻 인작(人作)이 아닌 자연의 천작(天作)으로 착각할 정도다. 이곳에는 밤하늘의 별을 관찰할 수 있는 천문과학관, 포천 화감암을 이용한 30여 점의 조각품을 전시한 조각공원, 45m 화강암 직벽을 활용해 다양한 공연이 펼쳐지는 호수공연장(미디어 파사드) 등이 있다. 코로나19 이전엔 연인원 40만 명이 찾아든 포천의 대표적 명소였다. 포천아트밸리로 오르는 길은 너무 경사져서 대부분 모노레일을 이용하는 편이다. 그리고 정상엔 화강암 직벽을 조망할 수 전망카페가 있는데 놀랍게도 이곳이 명당 터다. 30여 년 간 폭약과 망치로 훼손된 채석장 한 모퉁이에서 지기(地氣)도 사라질 법도 한데, 지금까지 좋은 땅 기운을 유지해오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은 정도다. 정상에 오르느라 흘린 땀을 카페에서 판매하는 팥빙수로 식히면서 명당 기운을 쐬고 나니 한결 기운이 살아나는 듯했다. 부부 화합 다지는 직두리 부부송 가족여행으로 포천을 찾는다면 직두리 부부송(군내면 직두리 191)과 포천향교(군내면 구읍리)도 둘러보길 권한다. 먼저 2005년 천연기념물 제460호로 지정된 직두리 부부송. 얼핏 보면 한 그루 우거진 소나무처럼 보이지만, 두 그루의 소나무 가지가 서로 얽혀 마치 하나처럼 이어진 모습이다. 이 부부송은 가지의 끝부분이 아래로 처지는 특징을 가진 품종으로서 수령은 약 300년, 높이는 약 7m에 달한다. 부부송 앞에서 부부가 소원을 함께 빌면 이뤄진다는 전설도 전해져 내려온다. 일제강점기에 범상치 않은 이 소나무를 보고 일본인들이 나뭇가지 열 개를 잘라냈다는 얘기도 있다. 실제로 부부송을 보며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데크까지 설치해 놓았다. 현재도 부부송의 전설을 좇아 매년 적잖은 부부 혹은 연인들이 찾아온다는 게 현지 주민들의 말이다. 부부송 앞에서 무작정 빈다고 해서 소원이 이뤄질까 싶지만, 이곳이 기운이 응축된 명당 이라고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흔히 소원을 잘 들어주는 것으로 소문난 기도처는 땅 기운이 충만한 곳이 많다. 기(氣) 에너지가 넘치는 곳에서의 간절한 기도는 당사자의 마음과 육체에 긍정적 영향을 주고, 결국 기도에 부응하는 행동으로 이어져 좋은 결실을 가져올 수도 있지 않을까. 부부송 앞에서 부부가 한마음으로 소원을 비는 것만으로도 부부의 사랑과 가정의 화목을 다지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부부송에서 차로 5분 거리인 수원산 정상에는 부부송을 형상화한 전망대도 있다. 이곳에서는 포천의 수려한 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부부송이 부부 혹은 연인을 위한 자연 경관이라면 포천향교는 자녀들을 위한 명소다. 고려 명종3년(1173)에 처음 지어진 포천향교는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현재의 모습은 6·25전쟁 때 파괴된 것을 1962년에 고쳐 세운 것이다. 포천향교 내 가장 눈여겨볼 곳은 대성전이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중국 유학자들과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등 한국의 위대한 학자 18현(賢)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터 자체도 학문 기운이 출중한 곳이다. 이 기운은 향교 뒤편의 산줄기인 구읍리 석불입상으로도 이어진다.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불은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미륵불로 불린다. 그 앞에는 이곳에 찾아온 이들이 쌓아놓은 돌탑도 보인다. 바로 이곳이 명당의 혈을 이루고 있으며, 향교의 대성전 터와도 연결된 것이다. 한편 향교의 뒷산 즉 주산(主山)인 청성산(283m) 정상에는 반월성이 있다. 삼국시대에 축성된 반월성은 둘레가 1080m인 성곽인데, 포천 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이곳은 후고구려를 세우고 스스로 미륵을 자처한 궁예와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궁예는 반월성을 남진을 위한 주요 군사 거점으로 삼아 병사들을 지휘했다. 이 때문인지 구읍리 석불입상을 흔히 ‘궁예미륵’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이처럼 반월성을 머리에 두르고 있는 청성산은 산 자체가 무(武)의 기상이 강한 곳이다. 그러니 청성산 자락의 포천향교는 문(文)의 기운과 무의 기상이 함께 녹아든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곳에서 위대한 학자들과 용맹한 장군들의 행적을 자녀에게 알려주는 것으로도 알찬 명소 여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글·사진=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21-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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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od&Dining]동서식품 ‘맥심 티오피’… 커피 본연의 맛 그대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면서 구매 후 바로 즐길 수 있는 RTD(Ready To Drink) 커피 수요가 꾸준히 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RTD 커피 시장 규모는 1조3230억 원으로 2024년까지 연평균 6%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커피전문기업 동서식품이 선보인 RTD 커피 ‘맥심 티오피(Maxim T.O.P)’도 이 같은 상승세를 타고 있다. 회사 측은 “맥심 티오피가 최고급 아라비카 원두 100%를 사용하고 자체 노하우로 개발한 에스프레소 추출 방식을 통해 커피 본연의 맛과 향을 그대로 담아낸 전략이 소비자의 만족도를 높여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회사는 또한 맥심 티오피를 구매한 고객을 대상으로 친환경 프로모션인 ‘맥심 티오피 열정 마일리지 2021 Passion for the Green!(시작해요, 친환경을 향한 열정)’을 10월 말까지 진행한다. 맥심 티오피 제품 라벨 뒤에 인쇄된 난수 번호를 모바일을 통해 입력하면 스탬프가 적립되고 스탬프 10개를 모으면 맥심 티오피 캔 275mL 1개를 받을 수 있는 모바일 교환권을 증정한다. 또 친환경 소재인 타이벡, 원목 및 친환경 재생가죽 상품 등 경품 응모권도 준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21-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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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od&Dining]무라벨-경량 페트병 출시… 동원F&B, ESG경영 박차

    동원F&B는 최근 페트병 몸체와 뚜껑에 라벨을 없앤 친환경 생수 ‘동원샘물 라벨프리’를 내놓았다. 페트병에서 비닐 라벨을 떼어내는 번거로움 없이 분리 배출할 수 있게 해 재활용 편의성을 높인 제품이다. 페트병 무게도 크게 줄였다. 동원샘물 500mL 페트병의 경우 2013년엔 19g이었으나 26% 줄어든 14g으로 업계 최경량 수준이다. 회사 측은 2013년 환경부와 페트병 경량화를 위한 실천협약을 맺은 후 올해도 4g을 추가로 줄이는 등 플라스틱 저감화를 꾸준히 이어 갈 계획이다. 동원샘물 라벨프리를 활용한 친환경 프로모션도 추진하고 있다. 페트병에 기아의 전기차 EV6 브랜드 로고를 새겨 특별 제작한 동원샘물 라벨프리 30만 병을 기아 측에 제공했다. 캠페인 기간 동안 전국 750여 곳의 기아 매장을 방문한 고객들은 해당 제품을 무료로 시음할 수 있다. 회사 측 관계자는 “동원샘물 라벨프리와 EV6를 이용하는 것만으로도 일상 속에서 친환경 활동을 실천할 수 있다”며 “기아 측과 함께 기업의 환경 책임을 다하는 ESG 경영을 지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21-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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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도기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태양 움직임 관찰하는 관측 도구였다”

    각도를 재는 각도기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반원형 각도기의 180이라는 숫자는 무얼 근거로 한 걸까. 최근 각도기가 180일 동안 하루 1°씩 움직이는 해를 관측한 결과라는 흥미로운 과학 실험 결과가 발표됐다. 한국초등과학교육학회 제80차 하계학술대회에서 충남 문산초등학교 임정규 교장은 ‘각도기 기원에 관한 연구’ 논문에서 ‘해 그림자 관측을 통해 달력 및 해시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각도기가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가설을 처음으로 입증했다. 고대인들은 막대기를 이용해 아침 저녁으로 해 그림자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방법인 입간측영(立竿測影)을 통해 180일간 해가 하루 약 1°씩 움직이는 현상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 임 교장은 이 방식으로 직접 실험한 결과 이같은 결론을 얻었다고 밝혔다. 이에 의하면 지구 북반구에서는 동절기 180일간(추분~춘분) 태양 그림자가 매일 일정 간격으로 움직여 180° 각도를 이루는데, 동짓날(매년 12월22일 경)이 되면 각도기의 정점인 90°를 가리켰다. 반면 하절기에는 185일간(춘분~추분) 태양이 약 180° 움직였다. 이같은 현상은 타원형의 지구 공전 현상으로 발생하는 차이다. 360° 원형을 중시하는 고대인들이 동지 전후 180일간을 채택해 각도기로 사용한 것이나, 하지보다 동지를 귀중히 여긴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한편 이러한 사실은 미국해양대기국에서 제공한 프로그램을 활용, 최근 120여 년간의 천문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서도 입증됐다. 임 교장은 “이 실험은 반원형 각도기가 360° 원을 기반으로 한 수학 지식에서 나온 게 아니라 자연계에서 나타난 현상을 이용한 것임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논문 교신저자인 인하대 복기대 교수는 “인류가 해시계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각도기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고(古)천문 연구에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하대 물리학과 이병찬 교수는 “고천문 기원에 관한 연구에서 현대물리학을 융합해 각도기 기원을 제시한 것은 놀라운 성과”라고 평가했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21-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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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에서 내려온 병풍… 무더위마저 한 폭의 그림 같구나

    《상속세 문제로 세간의 화제가 된 삼성가의 미술품 컬렉션 중 ‘병진년 화첩’(보물 782호)에는 ‘사인암도(舍人巖圖)’라는 그림이 있다. 조선 후기의 천재 화가 김홍도가 그린 산수화다. 우람하면서도 장대한 암벽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그 아래로는 계곡물이 유유히 흐르는 이 그림에서는 기운이 살아 꿈틀거리는(氣運生動) 듯하다. 김홍도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현지에서 열흘 남짓 머무르고 1년여 동안 마음에 담아둔 끝에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명작의 모델은 충북 단양군 단양8경 중 하나인 사인암(명승 제47호). 추사 김정희도 하늘에서 내려온 한 폭의 그림 같다고 찬탄했던 곳이다. 사인암은 여름 무더위를 식히는 계곡 물놀이 장소이자 명당 기운까지 덤으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힐링 명소로 부상했다. 단양 여행은 사인암에서 시작하기를 추천하는 이유다.》○‘여름 보양’ 명소 사인암 오랜 세월 풍화가 빚어낸 사인암은 50m에 이르는 암벽이 검붉은 색을 띠고 있는 형태다. 마치 누군가가 암벽을 네모지게 조각해 차곡차곡 쌓아올린 듯한 신비스러운 모습이다. 절경과 함께 암벽 자체가 명당 혈(穴)을 이루고 있다. 조선의 풍류객들이 암벽 이곳저곳에다 자신들의 이름을 새겨놓음으로써 이곳과 하나됨을 느끼고 싶어 했을 만하다. 사인암 밑으로는 맑디맑은 남조천(운계천)이 시원하게 흐르고 있다. 살갗이 따가운 여름 햇볕을 식히려는 물놀이 피서객들로 계곡은 다소 붐볐다. 물안경을 쓰고, 고무보트를 타며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피서를 즐기는 동시에 사인암 암벽의 명당 기운까지 누리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을 편안하고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에너지가 방출되는 곳이니, ‘여름 보양’으로 제격이다. 사인암 아래 물가 편편한 너럭바위 두 곳에는 바둑판과 장기판이 각각 새겨져 있다. 바둑판이 그려진 너럭바위를 ‘난가상(爛柯牀)’이라고 표기한 것도 재미있다.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도 모르는(爛柯) 평상(牀)’이라는 뜻이다. 이곳이 바둑이나 장기를 두며 세월을 즐기는 신선의 공간임을 비유한 듯하다.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현세와 동떨어진 이상적인 공간)의 세계인 사인암은 고려 때부터 이미 소문났다. 단양이 고향인 고려 말 유학자 우탁(1262∼1342)도 이곳을 즐겨 찾았다. 우탁은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는 시조 ‘탄로가’의 저자다. 특히 역학(易學)에 매우 뛰어난 실력을 보여 ‘역동(易東)선생’으로도 불렸다. ‘고려사’에서는 우탁이 ‘역학에 조예가 깊어 점을 치면 틀림이 없었다’고 기록했을 정도다. 후에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를 지낸 임재광이 ‘사인(舍人)’이라는 벼슬을 지낸 우탁을 기리기 위해 이곳을 ‘사인암’이라고 이름 지었다. 사인암을 온전히 감상하기 위해서는 남조천을 가로지로는 출렁다리를 건너가 암벽 뒤쪽까지 챙겨봐야 한다. 암벽 틈에 숨은 듯이 들어선 작은 전각, 삼성각이 있기 때문이다. 청련암의 부속 건물인 삼성각은 원래는 서벽정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우탁 못지않게 단양을 사랑한 조선의 문인화가 이윤영(1714∼1759)이 은거하던 곳이다. 삼성각을 둘러싼 암벽에는 이윤영이 남긴 각자(刻字)가 있다. ‘독립불구 둔세무민(獨立不懼 遯世無悶·홀로 서도 두렵지 않고 세상을 등져도 걱정이 없다)’이라는 전서체 글씨인데 난국을 극복하는 지혜를 알려주는 괘를 가리킨다. 이 터는 사인암의 강력한 혈 기운을 직접 누릴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인암 문화관광해설사는 “현재도 많은 사람이 기도나 명상을 하기 위해 삼성각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선계로 통하는 석문 사인암을 충분히 음미한 후 또 다른 여름 보양 명소로 도담삼봉(국가명승 제44호)과 석문(국가명승 제45호)을 꼽을 수 있다. 두 곳 모두 단양8경에 속하는 곳으로 서로 지근거리에 있다. 먼저 도담삼봉은 단양강(남한강)이 휘돌아 나가면서 이룬 깊은 못에 세 봉우리(남편봉, 처봉, 첩봉)가 운치 있게 자리 잡고 있는 형태다. 배신한 남편이 미운 처봉은 남편봉을 외면한 반면에 첩봉은 남편봉에게 교태를 부리는 듯한 모습이라는 설명이 재미있다. 도담삼봉은 단양8경 중 으뜸으로 손꼽힐 정도로 경치가 뛰어나다. 정선, 김홍도 등 조선 유명 화가들의 작품에 단골 모델로 등장했다. 한편으로 조선 개국공신인 정도전의 호인 ‘삼봉’과 이름이 같아서 정도전 관련 얘기가 전해 오고 있으나 확인할 순 없다. 그 대신 퇴계 이황, 농암 김창협 등 조선의 대학자들은 이곳을 신선 세상과 연결시킨 시를 많이 남겼다. 이곳의 안내 표지판은 도담삼봉이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봉래, 방장, 영주 삼신산(三神山)의 형태를 보여준다고 소개한다. 그래서일까, 남편봉 혹은 장군봉으로 불리는 가운데 봉우리는 명당 기운이 서려 있고 그 한쪽 귀퉁이에는 이를 즐길 수 있도록 정자가 세워져 있다. 삼신(三神)의 흔적은 이웃한 석문(石門)에도 있다. 석문은 석회동굴이 무너진 뒤 동굴 천장 일부가 구름다리 모양으로 남은 카르스트 지형이다. 뻥 뚫린 문을 통해 보이는 남한강과 그 건너편 도담마을 풍경이 마치 사진 프레임처럼 다가온다. 추사 김정희는 ‘백 척의 돌 무지개가 둥그렇게 열렸네(百尺石霓開曲灣)’라는 시로 아름다운 석문을 찬탄했다. 이와 함께 석문 바로 아래쪽에는 마고할미가 살았다는 동굴이 있다. 마고할미는 전통신앙에서 등장하는 삼신할머니를 가리킨다. 석문의 툭 트인 공간을 바라보다 보면 온몸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운도 느껴진다. 석문과 얽힌 마고할미 전설 때문인지 소원을 빌기 위해 석문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정감록’ 십승지지에서의 하룻밤 단양은 아름다운 명소와 함께 좋은 기운을 갖춘 명당들이 곳곳에 있다. 이런 명당 기운을 충분히 체험하기 위해서는 하룻밤 정도 묵어가는 체류 관광이 좋다. 단양 북동쪽 소백산자연휴양림 내에는 ‘정감록 명당체험마을’(영춘면 하리방터길)도 있다. 15개 동으로 구성된 숙박시설인데, 조선시대 예언서인 ‘정감록’에 등장하는 십승지지(十勝之地·전쟁과 질병 등 환란을 피하고 거주 환경이 좋은 10개 지역)를 스토리텔링해 지어놓은 곳이다. 웅장한 소백산의 절경이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에 풍수 감상에도 좋다. 숙소는 독채형으로 구성돼 코로나19로부터 좀 더 안심하며 휴식을 즐길 수 있다. 실제로 몇몇 숙소는 명당 혈에 자리 잡고 있어서 명당 기운을 체험하기에도 좋다.○둘러볼 만한 곳△만천하스카이워크: 남한강 수면에서 90m 높이의 수직절벽 위에 세워진 만천하스카이워크 ‘만학천봉전망대’에서는 단양읍과 주변에 펼쳐진 소백산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삼중유리가 깔린 전망대 바닥 아래로는 남한강 물이 넘실거리는데, 살얼음판 위를 걷듯 가슴이 울렁거리고 조마조마하다. 전망대까지는 무료 셔틀버스를 이용해 갈 수 있다. 전망대에서는 총길이 980m의 집와이어를 이용해 활강하듯이 내려갈 수 있다. 또 다른 익스트림 체험 시설인 알파인코스터(모노레일 썰매)도 이용할 수 있는데, 운행 여부를 미리 문의하는 게 좋다. △수양개빛터널: 일제강점기에 단양의 석회석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건설된 길이 200m, 폭 5m의 지하 시설물이다. 1985년까지 철도로 이용하다가 방치된 후 수양개빛터널이란 관광 시설물로 재단장됐다. 형형색색의 조명을 설치한 터널을 따라가면 환상 속 동화마을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단양의 밤을 즐길 수 있는 명소로 이름났다. 글·사진 단양=안영배 기자· 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21-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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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구 줄어도 방문자는 늘어나…단양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안영배의 도시와 풍수]

    거주 인구는 갈수록 줄어들지만 찾는 사람은 갈수록 늘어나는 지역이 있다. 충청도를 통 털어 인구가 가장 적은 충북 단양군(2만9000여 명)이다. 줄어드는 거주 인구 때문에 소멸위기 지역으로 꼽히는 곳이지만,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인 2019년 단양을 찾은 관광객 수는1000만 명을 돌파했다. 군 규모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단양에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특별한 것이 있다. 바로 사람의 기운을 북돋우는 명당들이 관광상품처럼 전시돼 있기 때문이다. ○ ‘기운 보양’의 명소 사인암상속세 문제로 세간의 화제가 된 삼성가의 미술품 컬렉션 중 ‘병진년 화첩’(보물 782호)에는 ‘사인암도(舍人巖圖)’라는 그림이 있다. 조선 후기의 천재 화가 김홍도가 그린 산수화다. 우람하면서도 장대한 암벽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그 아래로는 계곡물이 유유히 흐르는 이 그림에서는 기운이 살아 꿈틀거리는 듯하다. 산수화에서 최고로 치는 기운생동(氣運生動)의 경지다. 명당 기운을 담고 있는 실물을 화폭으로 담으면 그림에서도 그 기운을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김홍도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현지에서 열흘 남짓 머무르고 1년 여 동안 마음에 담아둔 끝에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명작의 모델은 충북 단양군 단양8경중 하나인 사인암. 추사 김정희도 하늘에서 내려온 한 폭의 그림 같다고 찬탄했던 곳이다. 현재 사인암은 여름 무더위를 식히는 계곡 물놀이 장소이자 명당 기운까지 덤으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힐링(healing) 명소로 부상했다. 단양 여행은 사인암에서부터 시작하기를 추천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오랜 세월 풍화가 빚어낸 사인암은 50m에 이르는 암벽이 검붉은 색을 띠고 있는 형태다. 마치 누군가가 암벽을 네모지게 조각해 차곡차곡 쌓아올린 듯한 신비스런 모습이다. 절경과 함께 암벽 자체가 명당 혈(穴)을 이루고 있다. 조선의 풍류객들이 암벽 이곳저곳에다 자신들의 이름을 새겨놓음으로써 이곳과 하나됨을 느끼고 싶어했을 만하다. 사인암 밑으로는 맑디맑은 남조천(운계천)이 시원하게 흐르고 있다. 살갗이 따가운 여름 햇볕을 식히려는 물놀이 피서객들로 계곡은 다소 붐볐다. 물안경을 쓰고, 고무보트를 타며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피서를 즐기는 동시에 사인암 암벽의 명당 기운까지 누리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을 편안하고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에너지가 방출되는 곳인 만큼 ‘여름 기운 보양용’으로 제격이다. 사인암 아래 물가 편편한 너럭바위 두 곳에는 바둑판과 장기판이 각각 새겨져 있다. 바둑판이 그려진 너럭바위를 ‘난가상(爛柯牀)’이라고 표기한 것도 재미있다. ‘신선 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도 모르는(爛柯) 평상(牀)’이라는 뜻이다. 이곳이 바둑이나 장기를 두며 세월을 즐기는 신선의 공간임을 비유한 듯하다.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현세와 동떨어진 이상적인 공간)의 세계인 사인암은 고려때부터 이미 소문났다. 단양이 고향인 고려말 유학자 우탁(1262-1342)도 이곳을 즐겨 찾았다. 우탁은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는 시조 ‘탄로가’의 저자다. 특히 역학(易學)에 매우 뛰어난 실력을 보여 ‘역동(易東)선생’으로도 불렸다. ‘고려사’에서는 우탁이 ‘역학에 조예가 깊어 점을 치면 틀림이 없었다’고 기록했을 정도다. 아마도 ‘신선 자격증’ 중 하나인 예지력까지 갖춘 우탁은 이 땅의 범상치 않은 기운을 눈치채 사인암을 즐겨 찾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에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를 지낸 임재광이 ‘사인(舍人)’이라는 벼슬을 지낸 우탁을 기리기 위해 이곳을 ‘사인암’이라고 이름지었다. 사인암을 온전히 감상하기 위해서는 남조천을 가로지로는 출렁다리를 건너가 암벽 뒤쪽까지 챙겨봐야 한다. 암벽 틈에 숨은 듯이 들어선 작은 전각, 삼성각이 있기 때문이다. 청련암의 부속 건물인 삼성각은 원래는 서벽정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우탁 못지 않게 단양을 사랑한 조선의 문인화가 이윤영(1714-1759)이 은거하던 곳이다. 삼성각을 둘러싼 암벽에는 이윤영이 남긴 각자(刻字)가 있다. ‘독립불구 둔세무민(獨立不懼 遯世無悶; 홀로 서도 두렵지 않고 세상을 등져도 걱정이 없다)’이라는 전서체 글씨다. 주역 67괘 중 28번째 괘인 택풍대과(澤風大過)에서 나온 말인데, 총제적 난국을 극복하는 지혜를 알려주는 괘를 가리킨다. 이 터는 사인암의 강력한 혈 기운을 직접 누릴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다 보면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얻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인암 문화관광해설사는 “현재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나 명상을 하기 위해 삼성각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 선계로 통하는 석문 사인암을 충분히 음미한 후 또다른 여름 보양 명소로 도담삼봉(국가명승 제44호)과 석문(국가명승 제45호)을 꼽을 수 있다. 두 곳 모두 단양8경에 속하는 곳으로 서로 지근거리에 있다. 먼저 도담삼봉은 단양강(남한강)이 휘돌아 나가면서 이룬 깊은 못에 세 봉우리(남편봉, 처봉, 첩봉)가 운치있게 자리잡고 있는 형태다. 배신한 남편이 미운 처봉은 남편봉을 외면한 반면, 첩봉은 남편봉에게 교태를 부리는 듯한 모습이라는 설명이 재미있다. 도담삼봉은 단양8경중 으뜸으로 손꼽힐 정도로 경치가 뛰어나다. 정선, 김홍도 등 조선 유명 화가들의 작품에 단골 모델로 등장했다. 한편으로 조선 개국공신인 정도전의 호인 ‘삼봉’과 이름이 같아서, 정도전 관련 얘기가 전해져 오고 있으나 확인할 순 없다. 대신 퇴계 이황, 농암 김창협 등 조선의 대학자들은 이곳을 신선 세상과 연결시킨 시를 많이 남겼다. 이곳의 안내 표지판은 도담삼봉이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봉래, 방장, 영주 삼신산(三神山)의 형태를 보여준다고 소개한다. 그래서일까, 남편봉 혹은 장군봉으로 불리는 가운데 봉우리는 명당 기운이 서려 있고 그 한쪽 귀퉁이에는 이를 즐길 수 있도록 정자가 세워져 있다. 삼신(三神)의 흔적은 이웃한 석문(石門)에도 있다. 석문은 석회동굴이 무너진 뒤 동굴 천장 일부가 구름다리 모양으로 남은 카르스트 지형이다. 뻥 뚫린 문을 통해 바라보이는 남한강과 그 건너편 도담마을 풍경이 마치 사진 프레임처럼 다가온다. 추사 김정희는 ‘백 척의 돌 무지개가 둥그렇게 열렸네(百尺石霓開曲灣)’라는 시로 아름다운 석문을 찬탄했다. 이와 함께 석문 바로 아래쪽에는 마고할미가 살았다는 동굴이 있다. 마고할미는 전통신앙에서 등장하는 삼신 할머니를 가리킨다. 원하는 일이 뜻대로 이뤄짐을 의미하는 ‘마고소양(麻姑搔痒)’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때의 마고가 바로 그 삼신 할머니이다. 석문의 툭 트인 공간을 바라보다 보면 온몸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운도 느껴진다. 석문과 얽힌 마고할미 전설 때문인지 소원을 빌기 위해 석문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정감록’ 십승지지에서의 하룻밤 단양은 아름다운 명소와 함께 좋은 기운을 갖춘 명당들이 곳곳에 있다. 이런 명당 기운을 충분히 체험하기 위해서는 하룻밤 정도 묵어가는 체류 관광이 좋다. 단양 북동쪽 소백산자연휴양림내에는 ‘정감록 명당체험마을’(영춘면 하리방터길)도 있다. 15개 동으로 구성된 숙박시설인데, 조선시대 예언서인 ‘정감록’에 등장하는 십승지지(十勝之地; 전쟁과 질병 등 환란을 피하고 거주 환경이 좋은 10개 지역)를 스토리텔링해 지어놓은 곳이다. 웅장한 소백산의 절경이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에 풍수 감상에도 좋다. 숙소는 독채형으로 구성돼 코로나19로부터 좀더 안심하고 휴식을 즐길 수 있다. 실제로 몇몇 숙소는 명당 혈에 자리잡고 있어서, 명당 기운을 체험하기에도 좋다. 이외에도 단양에는 상선암, 사선대 등 명당 터가 관광상품으로 꾸며져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된 곳이 적잖다. 인구 적은 단양에서 유동 인구만큼은 풍성한 이유다.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21-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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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선이 사랑한 서해의 보석… 내 마음까지 붉게 물들이네

    《군산 앞바다에 둥둥 뜬 섬들인 고군산군도로 간다. 군산과 부안을 연결하는 세계 최장의 방조제(33.9km)가 있는 곳이자 신시도 무녀도 선유도 대장도 등 여러 섬이 다리로 연결돼 한 몸처럼 된 곳이다. 임진·정유 전쟁 당시 이순신 장군이 머문 수군 진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수군 진지가 지금의 군산으로 옮긴 이후 이 섬들은 ‘옛 군산도’, 즉 고군산군도가 됐다. 자금은 개벽 천지가 된 고군산군도로의 여행은 이곳과 인연이 깊은 역사적 인물과 함께한다. 동행하는 ‘스토리 여행’의 주인공은 유선(儒仙·유학자 신선)으로 추앙받는 고운 최치원(857∼?). 우리나라 각지에는 1000여 년 전 통일신라 말기의 인물인 최치원이 남긴 흔적이 적잖게 있다. 그런데 유독 군산과 고군산군도 일대에서 그의 탄생 설화를 비롯해 진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 내려온다.》 ○자천대에 숨겨진 최치원 문서 최치원의 자취를 좇아 처음 찾은 곳은 자천대(紫泉臺). 최치원이 노닐던 정자로 소개한 조선의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서해안에 있으며, 지세(地勢)가 평평하고 넓으며, 샘과 돌을 즐길 만한 곳”이라고 설명한다. 고군산군도가 눈앞에 보이는 하제포구(군산시 옥서면 선연리)가 바로 그곳이다. 원래는 섬이었다. 일제강점기 대규모 간척공사(1920∼1923년)로 육지로 변한 후, 1934년 일본군이 군산비행장을 건설하면서 하제포구 바위산에 있던 자천대는 옥구향교로 이전했다. 원봉연 군산 문화관광해설사는 이 일대에 아직도 남아 있는 한 바위산을 가리키며 “원래의 자천대와 비슷한 형태”라며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택리지’(1751년)의 저자 이중환도 자천대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는 “작은 산기슭 한 줄기가 바닷가로 뻗어 들어가는데 그 위에 두 개의 돌함이 있었다. 신라 때 최치원이 태수가 돼 함 속에 비밀문서를 감춰두었다고 한다”고 소개했다. 최치원이 자천대 돌함에 숨겨놓았다는 문서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최인학의 ‘조선전설집’(1977년)에서는 석룡(石龍)으로 불리는 이 돌함은 가뭄을 물리치는 효험이 있어서 많은 이들이 구경하러 왔다고 전한다. 유학자이면서도 신선의 면모를 강하게 풍긴 최치원이기에 가능한 설화인 듯하다. 그는 경주 출신 6두품 집안, 당나라에서 성공한 중국 유학파, 부패한 신라를 개혁하려던 정치인, 필력으로 ‘황소의 난’을 물리친 대문장가 등 이력이 화려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교, 불교, 도교에 통달해 3교 모두에서 두루 흠모하는 선각자라는 점, 우리 고유 문화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났던 시대의 풍류가라는 점이 그의 진짜 매력일 것이다. 그는 ‘난랑비서’(화랑 난랑을 위해 세운 비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이른다. 이는 3교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한다”고 했다. 삼교의 핵심적 가르침이 이미 우리 고유의 풍류도(風流道)에 담겨 있다는 파천황적인 선언이다. 그러나 최치원 당대의 세상은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백성들을 잘살게 하고 싶었던 그의 노력은 부패한 정치권력에 의해 좌절됐다. 이후 전국 방방곡곡을 노니는 풍류 생활이 시작됐다. ‘옥구구지(沃溝舊誌)’에서는 “최치원이 모국에 돌아왔을 때 세상이 극도로 어지러워 민심이 흉흉해지자 그 홀로 자천대에 올라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독서삼매로 시름을 달랬다”고 전한다. 최치원은 망해가는 신라를 보면서 “계림(鷄林·신라)은 황엽(黃葉·누런 잎)이고, 곡령(鵠嶺·고려)은 청송(靑松·푸른 솔)”이라고 말했다고 한다(‘삼국사기’). 고려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누군가가 지은 도참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망국의 길을 가던 당나라를 현장에서 목격한 바 있는 최치원이 시대의 변화를 모를 리 없었다. ○황금돼지와 하늘 별자리 규성(奎星) 최치원은 자천대에 올라 눈앞에 펼쳐지는 미래의 고군산군도를 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일까. 고군산군도에는 최치원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최치원은 뗏목 같은 풍선(風船)을 타고 섬으로 들어갔지만, 지금은 자동차로 새만금방조제 도로를 쭉 따라가면 야미도를 거쳐 신시도로 바로 이어진다. 신시도는 최치원이 한때 거주했던 곳으로 알려진 섬이다. 그는 신시도에서 우뚝 솟아 있는 월영봉(198m)을 명산이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산 정상 부근에 돌담으로 거처를 만들어 월영대라 이름 짓고 글을 읽었는데 그 소리가 중국에까지 들렸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월영봉은 고군산군도 ‘선유 8경’ 중 하나로 가을 단풍이 장관을 이루는 명승지이기도 하다. 최근 신시도에는 국립신시도자연휴양림이 개관했다. 고군산군도에서 유일하게 대형 숙박시설을 갖춘 이곳에 묵으면 휴양과 함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또 전동 스쿠터 등을 이용해 최치원 관련 설화가 담긴 고군산군도 곳곳을 찾아다녀보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 신시도에는 월영대 외에도 최치원이 크게 깨달음을 얻은 곳이라고 하는 대각산(大覺山)과 지풍금 마을 뒷산의 최치원 신당 터가 있다. 신시도 주민들은 최치원 신당에서 매년 제를 올렸다고 한다. 이 신당의 존재를 기록한(‘조선무속고’) 이능화는 “섬사람들이 선생의 인격을 사모해 사당을 세우고 천신(天神)처럼 받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즉, 최치원을 신으로 받든 전국 유일의 신당인 것이다. 아쉽게도 신당은 고군산군도 연결도로 건설로 인해 쪼개진 절개지 위에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신시도에서 섬 연결도로를 이용해 무녀도를 거쳐 선유도로 들어가면 최치원의 탄생 설화가 담긴 금도치굴이 있다. 이곳은 군산 내륙의 내초도(섬이었으나 육지로 변함) 금돈시굴(金豚始窟)과 함께 최치원을 시조로 받드는 경주 최씨가 ‘돼지 최씨’로 불리게 된 설화와 연결된다. 최치원이 황금빛 돼지가 사는 굴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사람이 돼지 어미에게서 태어날 수는 없는 법이다. 이는 최치원이 동양의 별자리 중 하나인 규성(奎星·안드로메다 별자리)의 기운을 이곳에서 받아 태어난 것을 비유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16개 별로 구성된 규성은 ‘하늘 돼지(天豕)’로 불리는데 문장과 문인을 주관하는 별자리로 취급됐다. 결국 최치원이 돼지 어미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은 최치원이 문장가의 기운을 타고났음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미래의 희망 고군산군도를 바라보다 풍수에도 밝았던 최치원은 고군산군도의 특이한 배치에 주목했을 수도 있다. 고군산군도는 선유도 망주봉을 중심으로 여러 섬이 빙 둘러싸고 있는 형상이다. 선유도와 연결된 대장도 대장봉(142.8m) 정상에서 굽어보면 이런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치 선유도 망주봉이 연꽃 봉우리이고 주위 섬들이 연잎으로 감싸고 있는 듯하다.흥미롭게도 암벽으로 된 암·수 봉우리가 치솟아 있는 망주봉에는 천년 도읍을 건설할 왕을 기다린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새 나라를 건설할 왕이 북쪽에서 선유도로 온다는 말에 젊은 부부가 나란히 서서 기다리다 지쳐 바위로 굳어졌다는 전설이다. 또 망주봉을 중심으로 천년왕국의 궁궐이 들어선다는 예언은 이곳 사람들에겐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됐다. 새 궁궐의 서문(西門)은 관리도 쇠코바우가 되고, 북문(北門)은 방축도 구녕바위, 동문(東門)은 선유도 나매기(남악리)의 금도치굴, 남문(南門)은 신시도의 구녕바위로 설정됐다.그러나 섬이 왕국의 도읍지가 되기는 어렵다. 이곳이 육지가 돼야 한다. 조선시대 전라감사 이서구(李書九·1754∼1825)는 이 일대가 앞으로 뭍으로 변한다고 예언했다. 그는 “수저(水低) 30장(丈)이요, 지고(地高) 30장(丈)이라”고 했다. 군산과 변산의 앞바다가 30장(약 90m) 깊이로 물이 빠지고 해저의 땅이 30장 위로 솟구친다는 뜻이다. 전북 사람들은 새만금방조제가 놓인 바다가 육지(서울 면적의 3분의 2 크기)로 변하게 됨으로써 이서구의 예언이 들어맞았다고 놀라워들 한다. 명사십리로 유명한 선유도해수욕장에서 선유 8경 중 제1경인 낙조를 감상하면서, 이 일대가 육지로 변신했을 모습을 상상해본다. 어쩌면 천년왕국 전설이 불가능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바다가 땅으로 개벽되는 새 세상을 최치원은 미리 보았던 걸까. 글·사진 군산=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21-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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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od&Dining]청년들에 ‘창업의 날개’… 200억 원 쏜다

    국내 최대 치킨 프랜차이즈 기업 제너시스BBQ그룹(회장 윤홍근)이 2030세대들의 꿈과 희망을 펼쳐주기 위해 마련한 ‘청년스마일 프로젝트’가 사회 진출을 앞둔 청년들로부터 주목받고 있다. ‘청년스마일 프로젝트’는 취업난과 고용 불안정 등으로 사회 진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년들이 사업가로 성공할 수 있도록 포장·전송(배달) 전문 매장인 BSK(BBQ Smart Kitchen)가 사업 기반과 기회를 제공하는 창업 프로젝트다. 30일까지 2인 1개 팀으로 응모 가능… BBQ, 채널A, 잡다 홈페이지 통해 지원이 프로젝트는 6일 모집을 시작한 후 2030세대들의 지원이 대거 몰렸다. 하루 100여 건의 문의와 접수 일정 연장 요청이 잇따라 제너시스BBQ는 채널A, 마이다스인 등 프로젝트 파트너사와 상의해 30일까지 모집 기간을 연장키로 했다. BBQ, 채널A, 잡다(JOBDA) 홈페이지를 통해 지원 신청할 수 있다. 프로젝트 참여 자격은 2인 1팀을 기준으로 하되, 2030세대가 팀의 대표자로 지원한다면 파트너의 연령은 제한을 두지 않는다. BBQ는 서울과 경기, 강원, 충청, 영남, 호남 6개 권역으로 나눠 참가자를 모집하며 최종 200팀을 선정한다고 밝혔다. 회사 측은 신청자들의 스펙과 배경을 배제한 상태에서 참가자들의 성공하고자 하는 간절함과 열정을 주로 평가할 계획이다. 공정한 선발을 위해 HR 전문기업인 마이다스인의 지원을 받아 인공지능(AI) 역량검사를 도입하기로 했다. 최종 합격자는 8000만 원 상당 지원받아… 고기 잡는 법 배울 것 프로젝트에 최종 선정된 팀은 BSK 매장을 비롯해 인테리어, 시설, 초기 운영자금 등 8000만 원 상당을 지원받게 된다. 프로젝트에 200억 원 이상을 지원하는 제너시스BBQ그룹은 청년들에게 단순히 금전적인 도움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청년들이 경제적 자립 기반을 다져 성공한 사업가로 성장해 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제너시스BBQ그룹 윤홍근 회장은 “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침체와 청년 취업난으로 사회에 걸음을 내디뎌야 할 청년들이 제대로 된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좌절하는 것이 안타까웠다”며 “물고기를 잡아주기보다는 잡는 법을 가르쳐줘 청년들이 패기와 열정을 가지고 도전할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 배달과 포장 전문매장으로 론칭한 BSK는 1년 만에 300호점을 돌파하는 등 순항하고 있다. 제너시스BBQ그룹은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해 BSK와 하나은행이 손잡고 1% 초저금리 대출인 ‘하나은행 프랜차이즈론‘을 통해 현재까지 100여 명의 2030세대가 혜택을 받도록 하는 등 창업 지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21-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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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생들의 정신 갈증 풀어주는 깨달음의 두레박

    《코로나19가 불러온 비대면 온라인 사회,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4차 산업혁명 시대, 가늠되지 않는 미래…. 혼돈스러운 세상에서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새 시대를 살아갈 혜안과 지혜가 간절한 요즘이다. 바로 그럴 때 찾는 곳 중의 하나가 충남 서산(瑞山)의 ‘상서로운 기운(瑞氣)’이 밴 땅이다. 지금보다 더 고통스럽고 험난했던 일제강점기, 사회의 정신적 등불 역할을 했던 경허(鏡虛·1846∼1912)와 만공(滿空·1871∼1946) 선사 등 선지식(善知識·선종에서 수행자들의 스승을 이르는 말)들의 체취가 강하게 묻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당시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았던 ‘큰어른’들의 행적을 더듬어보는 동안 절로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끼게 된다. 또 그들이 머물고 수행했던 터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힐링할 수 있는 최고의 명당이기도 하다.》 ○고승들이 알아본 명당 수행 터 선지식을 만나는 순례는 충남 서산시 천장사(天藏寺)에서 시작한다. 633년 백제 때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이 사찰 입구에 들어서자 ‘최인호 문학의 금자탑 ‘길없는 길’의 무대―천장암’이라는 표지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과거 천장암(天藏庵)으로 불린 천장사의 내력도 함께 기재돼 있다. ‘이곳 연암산 천장암은 경허 대선사께서 18년(1886∼1904년)간 주석하신 정신적 도량으로서 그의 수법 제자인 수월, 혜월, 만공이 수행했던 곳입니다. 작가 최인호(1946∼2013)는 그 내용을 주제로 하여 소설 ‘길없는 길’을 썼고, 이로써 천장암은 한국문학사에 길이 전하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천장사가 근현대 한국 불교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고승들을 배출한 절이라는 자부심이 느껴지는 글이다. ‘천장암’이라고 표기된 인법당(因法堂·승려가 거주하는 공간에 불상을 함께 봉안한 전각)의 공양간 쪽에는 ‘경허 열반 100주년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조선의 억불숭유 정책과 일제의 조선불교 말살정책으로 숨이 끊기기 직전의 한국 불교를 중흥시킨 경허를 기리는 탑이다. 그리고 이 탑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곳이 ‘깨달음의 방’이다. 경허가 1년 동안 방문을 틀어막은 채 장좌불와(長坐不臥·결코 눕지 아니하고 꼿꼿이 앉은 채로 수행하는 방법)한 끝에 깨달음을 원만히 이루었다고 해서 원성문(圓成門) 또는 원구문(圓求門)으로 불리는 방이다. 창문 하나 없는 방 안은 가로 2.3m, 세로 1.3m로 1평(3.3m²) 크기도 되지 않았다. 홀로 눕기에도 비좁아 보이는 방이지만 경허의 수행 향기가 지금도 가득 배어 있는 듯했다. 경허의 방 바로 왼쪽으로는 만공 등 제자들이 스승을 시봉했던 월면당(月面堂)이 있다. 월면당과 바로 붙어 있는 공양간은 경허의 맏상좌인 수월(1855∼1928)이 불을 때다가 삼매에 들어 방광(放光)을 한 곳으로 유명하다. 산 밑 사하촌 사람들이 절에서 나오는 방광 현상을 발견하고 화재가 난 줄 알고 몰려들었다는 얘기가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고승이 명당을 알아보고 거기서 수행하는 걸까, 아니면 명당 터가 고승을 배출해내는 걸까. 사실 연암산 중턱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천장암 자체가 대단한 에너지를 갖춘 명당 길지다. 종교를 떠나 누구든 이곳에서 명상이나 수행을 하다 보면 깨침을 얻을 것 같다. 하늘이 숨겨 놓았다는 이름답게 곳곳에 명당이 숨은 듯이 자리 잡고 있는 천장암을 뒤로 하고 비탈길을 따라 하산했다. 그런데 길목에서 만난 표지판을 보고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경허와 만공의 바랑이쉼터’라는 표지판에 적힌 내용은 이랬다. 경허와 만공이 탁발을 다녀오는 길, 바랑을 멘 만공은 경허의 뒤를 힘겹게 따르고 있었다. 갑자기 경허가 물동이를 인 동네 아낙에게 입을 맞추고 줄행랑을 쳤다. 만공도 정신없이 줄달음쳤다. 산길로 접어든 경허가 길가 널찍한 바위에 걸터앉으며 입을 열었다. “만공아! 아직도 바랑이 무거우냐?” 스승은 무거운 바랑에다 짚신까지 해어져 불평하는 제자에게 축지법으로 편히 가주겠다고 약속했던 참이었다. 그리고 절 아래 마을의 김씨 처녀(김광조 천장사문화해설사 증언)에게 입맞춤한 뒤 마을 사내들로부터 봉변을 피하기 위해 ‘걸음아 날 살려라’ 하는 줄행랑 축지법을 썼다. 바랑이쉼터의 널찍한 바위는 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쳐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의 현장이다. ○ 한국,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중심 될 것 천장사에서 자동차로 30분 남짓한 거리의 간월암(看月庵)으로 갔다. 경허의 애제자 만공의 기도 기운이 서려 있는 곳이다. 간월암은 밀물 때는 바닷물에 갇혔다가 썰물 때 육지와 연결되는 지형에 있다. 조선 창업주 이성계의 왕사인 무학대사가 득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만공은 1942년 쇠락한 간월암을 중창불사했다. 간월암 현판도 만공이 쓴 것이다. 만공은 이후 천일기도에 들어갔다. 태평양전쟁 시기 승려에게까지 창씨개명과 징집을 강요하는 일제에 맞서 만공은 일본 순사들의 접근이 어려운 섬의 절집에서 일제의 죄악 7가지(우리말 못 쓰게 한 죄, 징용·징병을 자행한 죄 등)를 멈추게 하고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염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간월암에서 올린 간절한 기도가 통했을까. 천일기도를 마친 지 3일 후인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았다. 법당 옆 우거진 나무 그늘 아래 명당 기운이 왕성한 의자에 앉아 그때를 회상해본다. 만공과 함께 기도에 동참했던 이들은 바로 이 절 마당에서 태극기를 들고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감격의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광복 다음 날인 1945년 8월 16일, 만공은 나라의 상징 꽃인 무궁화의 꽃잎에 붓으로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글씨를 썼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다. 머지않아 이 조선이 ‘세계일화’의 중심이 될 것이다. 지렁이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저 미웠던 왜놈들까지도 부처로 봐야, 이 세상 모두가 편안할 것이다.” 그가 남긴 해석이다. ○‘뜬 바위’ 검은여의 전설 간월암에서 자동차로 18km 거리에 있는 서산 부석사(浮石寺)에도 경허와 만공의 자취가 남아 있다.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한 이후 조선의 무학대사가 중창한 부석사에는 만공이 수행하던 토굴이 있다. 또 부석사가 위치한 도비산(351.6m)의 지맥(地脈)이 간월암까지 이어진다. 두 절은 땅 인연으로도 이어지는 것이다. ‘제2의 원효’라고 불릴 정도로 무애행(無애行)을 하던 경허는 만공이 수행하던 부석사를 즐겨 찾았다고 한다. 부석사 내 심검당(尋劒堂·지혜의 칼을 찾는 곳)과 목룡장(牧龍莊·용처럼 비범한 인재를 키워내는 곳) 현판 글씨는 경허가 직접 썼고, 부석사 현판은 만공의 작품이다. 경허가 머물렀다는 심검당 툇마루에 앉았더니 만공의 토굴 기도 터 못지않게 기운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심검당 돌계단 바로 아래쪽 약수터 또한 명당의 기운을 받은 덕분인지 물맛이 남달랐다. 부석사 도량 자체가 퍼질러 누운 소의 형상으로 지어졌고, 약수터는 소의 젖가슴에 해당한다는 풍수적 해석도 있다. 이에 따르면 약수는 유즙(乳汁)에 해당할 것이다. 부석사는 절의 규모는 작지만 역사가 깊은 절이다. 경북 영주의 부석사와 이름 및 창건설화마저 똑같다. 사찰의 산신각에는 이를 증명하듯 중앙에 산신, 우측과 좌측에 각각 선묘 낭자와 용왕을 모셨다. 일반 사찰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배치다. 선묘 낭자는 부석사 창건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의상을 흠모했으나 사랑 고백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바다에 몸을 던졌고 이후 용이 돼 의상의 불사(佛事)를 도왔다는 중국 당나라 때 여인이라고 한다. ‘공중에 뜬 돌’이라는 의미를 가진 ‘부석’사의 전설을 뒷받침하는 바위도 있다. 천수만 간척지역에 있는 검은여(검은 바위·서산시 부석면 갈마리 소재)다. 간척이 되기 전까지 서해 바닷물은 밀물 때 도비산 아래까지 이르렀는데, 그때 검은여가 마치 바다에 떠 있는 듯하다 해서 ‘부석’이라고 지어졌다고 한다. 검은여 소재지인 부석면의 지명도 여기서 유래한다. 부석사는 2012년 일본 쓰시마섬 관음사에서 절도범에 의해 국내로 밀반입된 금동관음보살좌상의 원 소장처다. 현재도 소유권 문제로 한일 간 재판이 진행 중인 불좌상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모든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유물은 원래 터에 있을 때 제 빛을 발할 수 있다. 명당에는 그에 걸맞은 주인이 자리를 잡아야 하는 게 순리다. 글·사진 서산=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21-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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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뜨거운 가슴이 있어 외롭지 않은 서해의 독도

    일본이 호시탐탐 노리는 독도만큼이나 중국이 군침을 흘린 서해의 외딴섬. 충남 태안군 신진도항(안흥외항)에서 직선거리로 55km, 중국 산둥반도와는 268km 떨어진 충남 최서단의 섬 격렬비열도다. 사람이 살지 않다 보니 행정선이나 낚싯배를 이용해야만 가볼 수 있는 섬이다. 그것도 하늘과 바다가 날씨를 ‘허락할’ 경우에만 출입이 가능하다. 깎아지른 해안 절벽과 바위 동굴, 기암괴석들마저 독도를 연상시키는 격렬비열도! 이 섬으로 ‘수토(搜討·신성한 땅을 지키기 위한 국토 순례) 여행’을 하는 이유가 있다. 지금도 서해를 자국의 내해(內海)로 만들려는 중국의 야욕에 맞선 ‘서해의 독도’이기 때문이다. ○ 중국 서해공정 침략의 현장 여름 못지않은 열기를 품은 6월의 태양이 떠오르는 새벽, 뱃멀미 약으로 단단히 무장한 뒤 신진도항에서 태안군 어업지도선(태안격비호)에 몸을 실었다. ‘격렬비열도 지킴이’를 자처하는 ‘사단법인 대한사랑’ 회원들과 함께였다. 제법 거친 풍랑을 뚫어가며 2시간 남짓 망망대해를 달리자 멀리서 3개 섬이 시야에 들어왔다. 바다 안개 속에서 희미한 자태를 드러낸 격렬비열도는 마치 구름 위에 두둥실 떠 있는 섬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격렬비열도는 암초 9개가 달린 큰 섬 3개가 나란히 늘어선 모습이 마치 새가 열을 지어 날아가는 것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섬이다. 3개 섬을 따로 떼서 부를 때는 ‘격렬비도(혹은 격비도)’라고 하는데, 북격렬비도가 좌우로 동·서격렬비도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다. 2015년부터 유인 등대가 운영되고 있는 북격렬비도는 국유지, 무인도인 동·서격렬비도는 사유지다. 이 중 가장 서쪽에 있는 서격렬비도가 우리나라 해양 국경선을 결정짓는 섬이다. 선상에서 섬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태극기가 새겨진 영해기점 표시 시설물이 눈에 들어왔다. 바위 절벽에 등대 모양으로 조성한 이 시설물은 이곳이 대한민국 관할 해역의 획정 기점이며, 여기서부터 더 서쪽으로 12해리(약 22km)까지가 우리 해역이라는 뜻이다. 이런 시설물이 들어선 데는 섬 이름처럼 ‘격렬’했던 사연이 숨어 있다. 서격렬비도는 2014년 조선족을 앞세운 중국 자본에 의해 20억 원에 팔려나갈 뻔했다. 국토교통부가 그해 말 부랴부랴 이 섬에 대한 외국인토지거래제한조치를 내려 거래를 막았지만 여전히 말썽의 소지는 있다. 한국인을 내세운 중국 자본이 섬을 사들인 뒤 어장권 등 어업 권리를 주장하거나, 위장 매입한 섬을 중국인들이 사는 유인도로 만들어 점유권을 주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은 서해를 자국 안바다로 설정한 ‘서해공정(西海工程)’ 정책을 고집하고 있다. 중국은 이미 2013년에 우리 군에 동경 124도 서쪽은 자신들의 작전구역이므로 넘어오지 말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동경 124도선을 한중 해양 경계선으로 설정할 경우 서해의 70% 이상이 중국 관할에 들어가고 만다. 서해공정을 멈추지 않는 중국이 우리나라 23개 영해 기점 중 하나인 이 섬을 소유했을 경우 남중국해 못지않은 영토 분쟁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게 해양 군사 전문가들의 경고다. 이처럼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서격렬비도는 뛰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섬이기도 하다. 파도의 침식으로 생성된 해식 동굴과 절벽이 안개와 어우러져 신비한 자태를 뽐낸다. 촛대처럼 생긴 바위섬도 눈길을 끄는데, 해안가 암석이 파도의 영향으로 기둥 모습으로 변형된 시스택(sea stack) 현상이다. 인접한 동격렬비도는 서격렬비도와는 또 다른 풍광을 보인다. 서격렬비도가 우아한 여성적 느낌을 준다면, 동격렬비도는 세 섬 중 가장 큰 데다 깎아지른 듯한 주상절리, 벌집처럼 구멍이 난 암석인 타포니(풍화혈), 빛이 들어오는 거대한 동굴 등으로 웅장한 남성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동격렬비도는 1978년 겨울 태안 주민 12명이 44일 동안 대한민국 최장기 무인도 조난사고를 기록한 곳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봉우리가 가장 높아(133m) 등대가 설치된 북격렬비도는 서해의 밤바다를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맡고 있다. 이 섬은 유일하게 배를 댈 수 있는 임시 선착장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풍랑이 너무 거세 보트로 상륙할 수 없었다. 외로운 등대지기를 격려하기 위해 육지에서 가져온 수박 한 통도 전달하지 못한 채 선상에서 섬을 둘러봐야 했다. 유채꽃과 동백나무가 섬을 장식하고 있는 가운데 하늘에서는 무리지어 나는 바닷새들의 비행이 장관을 이루었다. 섬 정상에는 높이 107m에 이르는 흰 콘크리트 구조물인 등대가 우뚝 서 있다. 약 7000만 년 전 화산 분출로 생겨난 바위섬인 격렬비열도는 우리나라 최초의 화산섬으로 꼽힌다. 460만 년 전에 생긴 독도나 100만 년 전에 생긴 제주도보다 오랜 섬이다. 고려·조선시대에 왜구가 자주 출몰해 노략질을 하자 주민들을 철수시킨 후 지금처럼 무인도가 됐다고 한다. 그 대신 가마우지, 괭이갈매기, 박새 등이 둥지를 트는 바닷새들의 보금자리가 됐다. 멸종위기종인 매의 번식지이기도 하다.○ 한중 바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세 섬을 찬찬히 안내해준 태안격비호 이주봉 선장은 “격렬비열도는 중국 산둥반도와 직접 연결되는 해상 교통로인 데다 주변 해역이 농어, 광어, 가리비, 옥돔 등 고급 어종이 풍부해 중국 어선들의 불법 조업으로 우리 해경과 잦은 충돌이 벌어지는 현장”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이 섬이 한중 해상 마찰의 한가운데에 있지만, 과거엔 한중 외교와 교역의 중요한 교통로였다. 백제와 중국 남북조, 고려와 송나라, 조선과 명·청나라 등 양국 사신들이 계절풍을 이용해 왕래할 때 거쳐 가던 곳이 바로 격렬비열도 앞바다였다. 선상 탐방을 마친 뒤 격렬비열도를 뒤로하면서 한중을 오가던 사신들을 생각해본다. 산둥반도에서 출발한 사신들은 목숨을 걸고 험하고도 멀디먼 대양을 건너오면서 격렬비열도를 만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을 것이다. 이어 육지 쪽으로 안내하듯 점점이 뻗어 있는 난도와 궁시도, 석도, 병풍도, 옹도, 가의도 등을 좌표 삼아 안흥항에 닿게 된다. 당시 민가가 있던 궁시도 등 몇몇 섬들은 바다 고속도로 휴게소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 신진도는 고려 말부터 조선 후기까지 중국과의 무역이 활발하였던 곳이다. 안흥내항에서 바로 눈앞에 바라다보이는 신진도의 후망봉은 송나라로 떠나는 고려 사신이 산제를 지내며 청명한 날씨를 기다린 곳이며, 안흥8경 중 하나인 능허대 백운정은 중국 사신들이 안흥의 가을 달을 즐기던(능허추월·凌虛秋月) 명소였다. 한편 안흥내항 뒷산에 있는 안흥진성(안흥성·태안군 근흥면 정죽리)에도 해상 교역의 흔적이 남아 있다. 중국에서 온 사신을 영접하던 곳이던 이 성은 “조선에 가거든 안흥성을 보고 오라”는 말까지 생겼다고 할 정도로 번성했던 조선의 대표적 수군진성(水軍鎭城)이다. 또 성 정상에 있는 태국사는 백제 무왕 때 지어진 사찰인데, 울돌목처럼 물살이 거세기로 유명한 안흥 앞바다(관장목)를 오가는 배들이 무사히 항해하기를 기원하는 기도도량이었다고 한다. 안흥항을 지나는 내외 사절단도 출항 전후로 절에 들러 무사 항해를 기원했다. 태국사에서는 안흥포구와 앞바다가 툭 트여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임을 실감케 한다. 격렬비열도에서 신진도와 안흥성에 이르는 바다 고속도로 역사를 이대로 묵히기는 아깝다. 격렬비열도를 국가관리연안항으로 예비 지정하는 데 앞장서온 가세로 태안군수는 “격렬비열도와 인근 섬들을 연계한 관광자원을 개발하고,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안흥진성도 복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태안이 신해양도시로 다시 주목받게 될지 지켜볼 일이다. 글·사진 태안 격렬비열도=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21-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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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이 노리는 ‘서해 독도’ 격렬비열도를 가다[여행 이야기]

    일본이 호시탐탐 노리는 독도만큼이나 중국이 군침을 흘린 서해의 외딴 섬. 충남 태안군 신진도항(안흥항 외항)에서 직선 거리로 55km, 중국 산둥반도와는 268㎞ 떨어진 충남 최서단의 섬 격렬비열도다. 사람이 살지 않다 보니 행정선이나 낚싯배를 이용해야만 가볼 수 있는 섬이다. 그것도 하늘과 바다가 날씨를 ‘허락할’ 경우에만 출입이 가능하다. 깎아지른 해안 절벽과 바위 동굴, 기암괴석들마저 독도를 연상시키는 격렬비열도! 이 섬으로 ‘수토(搜討:신성한 땅을 지키기 위한 국토 순례) 여행’을 하는 이유가 있다. 지금도 서해를 자국의 내해(內海)로 만들려는 중국의 야욕에 맞선 ‘서해의 독도’이기 때문이다. 중국 서해공정 침략의 현장여름 못지 않은 열기를 품은 6월의 태양이 떠오르는 새벽, 뱃멀미약으로 단단히 무장한 뒤 신진도항에서 태안군 어업지도선(태안격비호)에 몸을 실었다. ‘격렬비열도 지킴이’를 자처하는 ‘사단법인 대한사랑’ 회원들과 함께였다. 고속정이 제법 거친 풍랑을 뚫어가며 2시간 남짓 망망대해를 달리자 멀리서 3개 섬이 시야에 들어왔다. 바다 안개 속에서 희미한 자태를 드러낸 격렬비열도는 마치 구름 위에 두둥실 떠 있는 섬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격렬비열도는 암초 9개가 달린 큰 섬 3개가 나란히 늘어선 모습이 마치 새가 열을 지어 날아가는 것 같다고 이름 붙여진 섬이다. 3개 섬을 따로 떼서 부를 때는 ‘격렬비도(혹은 격비도)’라고 하는데, 북격렬비도가 좌우로 동·서격렬비도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다. 2015년부터 유인 등대가 운영되고 있는 북격렬비도는 국유지, 무인도인 동·서 격렬비도는 사유지다. 이중 가장 서쪽에 있는 서격렬비도가 우리나라 해양 국경선을 결정짓는 섬이다. 선상에서 섬을 한바퀴 돌아보는데 태극기가 새겨진 영해기점 표시 시설물이 눈에 들어왔다. 바위 절벽에 등대 모양으로 조성한 이 시설물은 이곳이 대한민국 관할 해역의 획정 기점임을 알리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부터 더 서쪽으로 12해리(약 22km)까지가 우리 해역이라는 뜻이다. 이런 시설물이 들어선 데는 섬 이름처럼 ‘격렬’했던 사연이 숨어 있다. 서격렬비도는 2014년 조선족을 앞세운 중국 자본에 의해 20억 원에 팔려나갈 뻔했다. 국토교통부가 그해 말 부랴부랴 이 섬에 대한 외국인토지거래제한조치를 내려 거래를 막았지만 여전히 말썽의 소지는 있다. 한국인을 내세운 중국 자본이 섬을 사들인 뒤 어장권 등 어업 권리를 주장하거나, 위장 매입한 섬을 중국인들이 사는 유인도로 만들어 점유권을 주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은 서해를 자국 안바다로 설정한 ‘서해공정(西海工程)’ 정책을 고집하고 있다. 중국은 이미 2013년에 우리 군에게 동경 124도 서쪽은 자신들의 작전구역이므로 넘어오지 말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동경 124도선을 한중 해양 경계선으로 설정할 경우 서해의 70% 이상이 중국 관할에 들어가고 만다. 서해공정을 멈추지 않는 중국이 우리나라 23개 영해 기점 중 하나인 이 섬을 소유했을 경우 남중국해 못지 않은 영토 분쟁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게 해양 군사 전문가들의 경고다. 러시아가 크림반도내 러시아계 주민보호라는 명목으로 크림반도를 무력으로 장악한 후 자국 영토로 합병시킨 전례가 이곳에서도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서격렬비도는 뛰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섬이기도 하다. 파도의 침식으로 생성된 해식 동굴과 절벽이 안개와 어우러져 신비한 자태를 뽐낸다. 촛대처럼 생긴 바위섬도 눈길을 끄는데, 해안가 암석이 파도의 영향으로 기둥처럼 변형된 시스텍(sea stack) 현상이다. 인접한 동격렬비도는 서격렬비도와는 또 다른 풍광을 보인다. 서격렬비도가 우아한 여성적 느낌을 준다면, 동격렬비도는 세 섬 중 가장 큰 데다 깎아지른 듯한 주상절리, 벌집처럼 구멍이 난 암석인 타포니(풍화혈), 거대한 동굴 등으로 웅장한 남성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동격별비도는 1978년 겨울 대한민국 최장기 무인도 조난사고를 기록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무인도에 갇힌 태안 주민 12명은 44일 동안 풀뿌리와 조개를 채취해 허기를 채우고, 절벽에서 한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아먹고, 한때 간첩으로 오인돼 사살 명령이 내려지기도 하는 등 영화 같은 장면을 경험했다. 마지막으로 봉우리가 가장 높아(133m) 등대가 설치된 북격렬비도는 서해의 밤바다를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맡고 있다. 이 섬은 유일하게 배를 댈 수 있는 임시 선착장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풍랑이 너무 거세 보트로 상륙할 수 없었다. 외로운 등대지기를 격려하기 위해 육지에서 가져온 수박 한 통도 전달하지 못한 채 선상에서 섬을 둘러봐야 했다. 유채꽃과 동백나무가 섬을 장식하고 있는 가운데 하늘에서는 무리지어 나는 바닷새들의 비행이 장관을 이루었다. 섬 정상에는 높이 107m에 이르는 흰 콘크리트 구조물인 등대가 우뚝 서 있다. 약 7000만년 전 화산 분출로 생겨난 바위섬인 격렬비열도는 우리나라 최초의 화산섬으로 꼽힌다. 460만 년 전에 생긴 독도나 100만년 전에 생긴 제주도보다 오랜 섬이다. 고려·조선 시대에 왜구가 자주 출몰해 노략질을 하자 주민들을 철수시킨 후 지금처럼 무인도가 됐다고 한다. 대신 가마우지, 괭이갈매기, 박새 등이 둥지를 트는 바닷새들의 보금자리가 됐다. 멸종위기종인 매의 번식지이기도 하다. 한중 바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세 섬을 찬찬히 안내해준 태안격비호 이주봉 선장은 “격렬비열도는 중국 산둥반도와 직접 연결되는 해상 교통로인 데다 주변 해역이 농어, 광어, 가리비, 옥돔 등 고급 어종이 풍부해 중국 어선들의 불법 조업으로 우리 해경과 잦은 충돌이 벌어지는 현장”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도 중국 어선들이 떼로 몰려와 ‘조업전쟁’이 벌어졌는데, 우리 해경과 어부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중국인들의 서해 영해 불법조업의 약 60%가 격렬비열도 인근에 집중돼 있다고 한다. 지금은 이 섬이 한중 해상 마찰의 한가운데에 있지만, 과거엔 한중 외교와 교역의 중요한 교통로였다. 백제와 중국 남북조, 고려와 송나라, 조선과 명·청나라 등 양국 사신들이 계절풍을 이용해 왕래할 때 거쳐가던 곳이 바로 격렬비열도 앞바다였다. 선상 탐방을 마친 뒤 격렬비열도를 뒤로 하면서 한중을 오가던 사신들을 생각해본다. 산둥반도에서 출발한 사신들은 목숨을 걸고 험하고도 멀디먼 대양을 건너오면서 격렬비열도를 만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을 것이다. 이어 육지 쪽으로 안내하듯 점점이 뻗어 있는 난도와 궁시도, 석도, 병풍도, 옹도, 가의도 등을 좌표 삼아 신진도항에 닿게 된다. 당시 민가가 있던 궁시도 등 몇몇 섬들은 바다 고속도로 휴게소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중 바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는 전설같은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현재 태안군에서 유일한 유인도이자 몽돌해변으로 유명한 가의도에는 “중국에서 가의라는 사람이 이 섬으로 귀양살이(혹은 피신) 해서 가의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며 태안 가씨(賈氏)가 그 후손이라고 한다. 또 신진도는 고려 말부터 조선 후기까지 중국과의 무역이 활발하였던 곳이다. 안흥내항에서 바로 눈앞에 바라다보이는 신진도의 후망봉은 송나라로 떠나는 고려 사신이 산제를 지내며 청명한 날씨를 기다린 곳이며, 안흥8경 중 하나인 능허대 백운정은 중국 사신들이 안흥의 가을 달을 즐기던(능허추월·凌虛秋月) 명소였다. 한편 안흥내항 뒷산에 있는 안흥진성(안흥성,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에도 한중 교류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중국에서 온 사신을 영접하던 곳이던 이 성은 “조선에 가거든 안흥성을 보고 오라”는 말까지 생겼다고 할 정도로 번성했던 조선의 대표적 수군진성(水軍鎭城)이다. 또 성 정상에 있는 태국사는 백제 무왕 때 지어진 사찰인데, 울돌목처럼 물살이 거세기로 유명한 안흥 앞바다(관장목)를 오가는 배들이 무사히 항해하기를 기원하는 기도도량이었다고 한다. 안흥항을 지나는 내외 사절단도 출항 전후로 절에 들러 무사 항해를 기원했다. 태국사에서는 안흥포구와 앞바다가 툭 트여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임을 실감케 한다. 격렬비열도에서 신진도와 안흥성에 이르는 바다 고속도로 역사를 이대로 묵히기는 아깝다. 격렬비열도를 국가관리연안항으로 예비 지정하는 데 앞장서온 가세로 태안군수는 “격렬비열도와 인근 섬들을 연계한 관광자원을 개발하고,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안흥진성도 복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태안이 신해양도시로 다시 주목받게 될지 지켜볼 일이다. 태안 격렬비열도=안영배 기자·풍수학박사 ojong@donga.com}

    • 2021-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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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포공항 이전하면 한강 서해안 시대 열릴까[안영배의 도시와 풍수]

    서울 강서구 서쪽 끝단에서 여의도 면적 3배 크기 규모로 자리 잡고 있는 김포국제공항(863만5937㎡). 공항 측의 유휴 부지까지 합치면 여의도 10배 크기라는 이곳이 최근 정치권의 도마에 올랐다.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 등 여권 일부 정치인들이 김포공항을 인천국제공항으로 이전하고, 김포공항 부지에 20만 가구 규모의 스마트시티를 건설하자는 주장을 제기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서울 및 수도권의 주택난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고, 서부권 균형발전도 가능해진다는 이유에서다. 1939년 김포평야 지대에 자리 잡은 후 1958년 국제공항으로 지정된 김포공항은 그간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상징과도 같은 위상을 가졌던 곳이다. 공항 인근 지역인 서울 서부권(강서구·양천구·구로구 일부)과 경기 서남부권(김포시·부천시·인천시 일부) 사람들은 고도 제한에 따른 재산권 침해, 항공소음 등의 불편도 감수해야 했다. 공항 관련 업종과 종사자들에 의한 지역경제 성장 외에도 김포공항이 대한민국 하늘 길의 관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2001년 영종도에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한 이후 김포공항은 ‘애물단지’ 취급을 받게 된다. 일대 주민들의 경제적, 신체적 피해를 호소하는 집단 민원이 급격히 증가한 것도 이때부터다. 인천공항이 개항하면서 한때 통합 논의가 거론됐던 김포공항이 20년 만에 존립 문제가 불거진 것은 지운(地運:땅 기운의 흐름)의 변화라는 시각에서 보면 흥미롭다. 사실 김포공항은 우리나라 항공물류의 중심이라는 순기능적 역할에도 불구하고 수도 서울이 균형적인 발전을 하는 데 지장을 준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지형적으로 서울은 동쪽과 북쪽이 산으로 막혀 있어 도시 확장이 어려운 반면 남쪽과 서쪽은 트여 있는 구조다. 트인 곳으로 도시 확장이 이뤄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에 따라 서울은 도로와 철도 등을 이용해 남쪽 위주로 도시 확장을 해왔다. 반면 한강을 따라 뻗어나갈 수 있는 서쪽은 도시 확장에서 상대적으로 뒤처졌다. 북한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안보상 이유와 함께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는 김포공항이 확장성에 제동을 걸었다. 지운의 흐름이 인위적인 환경에 의해 방해를 받았던 셈이다. 실제로 김포공항이 도시개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상당히 컸던 것으로 평가된다. 2015년에 조사한 보고서(‘김포국제공항 주변지역의 고도제한 완화 연구’)에 의하면 서울의 대표적 인구 밀집 지역인 강서구 총면적의 97%가 고도제한 규제로 건축 행위에 제한을 받고 있고, 양천구는 57% 이상, 경기도 부천시는 43% 이상이 규제 대상 지역에 해당한다. 또 공항을 중심으로 24.6㎢ 지역이 항공기 소음으로 피해를 받고 있었다. 이는 여의도 면적의 3배나 해당되는 것이다. 세계인 모여드는 한강의 국제 경기장만약 지운의 자연스런 흐름에 따라 김포공항이 이전하면 어떻게 될까. 공항 인근 지역은 물론 서울의 발전축이 한강을 따라 동서축으로 다시 한번 크게 발전할 것으로 예상된다. 즉 조선시대 경상·호남·충청 등 삼남 지방의 물산이 한강을 따라 몰려들어 한강변 포구가 크게 발전한 것과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당시 배를 통한 물품들이 쌓이고 덩달아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번성했던 한강변 포구가 공암나루(행주대교 부근), 양화나루(양화대교와 성산대교), 서강나루(서강대교 부근), 마포나루(마포대교 부근), 삼전나루(잠실대교 부근), 광나루(광진교와 천호대교 부근) 등이다. ‘물길은 재물을 관장한다’는 풍수의 논리가 그대로 맞아떨어진 현장이다. 현대에서는 어떨까.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칭할 만큼 여전히 한강은 서울과 수도권을 먹여 살려주는 중요한 물길이다. 이 물길을 따라 세계인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바로 한강변에 들어선 국제스포츠경기장이다. 1984년 잠실대교 인근에 들어선 서울올림픽주경기장(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하계올림픽이 개최됐다.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던 강남 잠실 지역은 이후 경기장을 중심으로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뤘다. 이어 2001년 성산대교 인근에 완공된 서울월드컵경기장(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는 2002년 FIFA월드컵 대회가 열렸다. 세계 축구팬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이곳에 전용 축구장이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강남권에 비해 낙후된 서북권역을 개발해야 한다는 서울 균형발전론이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난지도 쓰레기 처리장으로 불리던 이곳은 이후 완전히 딴 세상으로 변신했다. 경기장 일대로는 디지털미디어시티로 불리는 국제 업무단지가 들어섰고, 현재 국내 주요 언론 및 방송사, 엔터테인먼트 관련 시설들이 속속 들어서 있다. 이런 추이에 따른다면 한국이 세계적 체전(體典)을 개최할 경우 주경기장이 들어설 유력한 후보지로 또다시 한강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서울이 다시 올림픽을 개최하게 된다면 아마도 지역 균형발전론에 따라서 김포공항이 있는 강서구 한강변에 또 다른 경기장이 들어설 가능성이 있다. 올림픽을 두 차례 이상 개최한 그리스 아테네,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등이 매 올림픽을 치를 때 주경기장으로 각기 다른 운동장을 사용했다는 전례도 있다. 서울이 아닌 경기도라면 한강 하류 쪽으로 더 내려가 김포한강신도시가 건설되고 있는 김포시(한강 남쪽)나 일산신도시가 들어선 고양시(한강 북쪽)가 유력 후보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김포한강신도시내 걸포지구는 한강으로 빠져나가는 고창천, 나진포천, 계양천 등 여러 수로가 감싸고 있는 곳이다. 이렇게 물길이 여러 겹으로 교차하는 지역은 풍수의 수관재물(水管財物; 물은 재물을 주관함)의 기운이 더욱 강해진다고 본다.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힘이 강력하다는 뜻이다. 한강 서해안 시대 열린다 한강변을 따라가는 경기장 논리가 아니더라도 한국은 이미 ‘서해안 시대’를 맞고 있다. 사실 서해안 시대의 백미는 한강을 따라 서해 바다로 향하는 김포시와 파주시, 그리고 서해 바다와 맞닥뜨리고 있는 인천시 강화군에서 맞이할 가능성이 높다. 수도권에 속하는 이들 지역은 안보상 이유로 일정 부분 발전이 막혀 있는 곳이지만 본격적인 남북 협력시대가 열리면 성장 동력이 무한한 곳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한강이 서해안으로 막힘없이 열린다는 것은 서울이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한강 동쪽 하남시 위례신도시에서부터 잠실, 서울 여의도, 마곡 지구를 거쳐 김포시 한강신도시와 강화도까지 연결되는 거대한 한강벨트는 한강이 서울에 선사하는 마지막 선물이 될 것이라는 게 땅기운적 관점에서 본 해석이다. 여기에 김포공항 이전은 그런 한강 서해안 시대를 여는 트리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김포공항 이전 문제는 지자체와 정책 담당자, 그리고 이해 당사자간 수많은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다만 시대의 흐름과 서울 및 수도권의 균형발전이라는 거시적 시각에서 짚어봐야 할 시점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안영배 기자(풍수학박사) ojong@donga.com}

    • 2021-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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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가락지 연못과 장수 샘물… 마르지 않는 富의 생명줄

    《부자를 배출하는 곳의 조건을 확인해 보기 위해 조선팔도 360여 고을을 샅샅이 살펴본 이가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1690∼1756)은 실사구시형 인문지리학자답게 흥미로운 답사 결과를 내놓았다. “물은 재물과 복을 맡은 것이므로 큰 물가에는 부유한 집과 유명한 마을이 많다”는 것이다. 또 “바닷가 주거지보다는 강가 주거지가 낫고, 강가보다는 시냇가 주거지가 더 좋다”고도 했다. 이중환이 제시한 부자 터는 당시 조선 양반층 사이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책 ‘택리지’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중환이 시냇가 주거지로 극찬한 곳 중 하나가 지리산 자락 구례 구만(九萬·현재 전남 구례군 토지면) 일대다. 바로 호남 명가로 불리는 운조루(국가민속문화재 제8호)와 ‘비밀의 정원’으로 유명한 쌍산재(전남 민간정원 5호)가 자리한 곳이다.》 ○ 집터에서 나온 금빛 돌거북 조선 영조 때인 1776년 지어진 운조루(토지면 오미리)는 24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양반가 주택이다. 낙안군수를 지낸 창건주 류이주(1726∼1797)가 집을 지을 당시 상황을 묘사한 글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사람들이 이 터를 본디 이름난 길지(吉地)라고 하였으나 바위가 험난해 감히 터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류이주는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겨둔 곳(천장지비·天藏地秘)이 나를 기다렸다’고 하면서 수백 명의 장정을 동원해 며칠 만에 집터를 닦았다.”(삼수공행장·三水公行狀) 운조루가 위치한 구만(혹은 구만들)은 앞서 이중환이 점찍은 명당으로 소문난 곳이었고, 이런 풍수설에 따라 류이주가 집을 지었다는 것이다. ‘금구몰니(金龜沒泥·금빛 거북이 진흙 속에 묻힌 터)’라는 명당 이름답게 실제 터에서 돌거북상도 출토됐다. 류씨 집안의 가보로 소중히 보관돼온 이 거북상은 아쉽게도 1989년 도난당해 지금은 사진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구만에 99칸 집(현재는 73칸)을 마련한 류이주와 그 후손들은 이후 부와 명예를 동시에 누리게 된다. 운조루 주인들은 막대한 농지와 함께 한때 25가구의 노비들을 거느린 지역 최고 부호(富豪)가 됐다.과연 운조루는 부자가 나는 시냇가 집의 조건을 갖추고 있을까. 우선 운조루 대문 앞으로 바짝 붙어서 흐르는 개울물이 눈에 띈다. 인위적으로 조성한 돌 도랑을 따라 개울물이 콸콸 흐르고 있다. 운조루의 동쪽 문수저수지 방면에서 흘러온 개울물이 운조루 앞을 지나 서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양새다. 이를 ‘동출서류 내당수(東出西流 內堂水)’라고 한다. 서울로 치면 경복궁 앞으로 흐르는 청계천쯤이 될 것이다. 이에 더해 그 바깥으로 서출동류(西出東流·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물) 외당수(外堂水)가 감싸주면 금상첨화다. 운조루에서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2km 남짓한 거리의 섬진강이 그런 물줄기다. 서울의 한강에 해당한다. 이처럼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서로 교차하는 두 물줄기는 터의 좋은 기운을 활성화하는 역할을 한다. 땅이 한층 더 풍요로워진다는 뜻이다. 운조루 주인의 재치 있는 ‘풍수 인테리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대문 앞마당에 해당하는 곳에 아예 연못(동서 45m, 남북 15m)을 만들어 놓았다. 네모진 연못 가운데로는 인위적으로 만든 동그란 섬이 하나 있다. 연못 터 자체가 금환락지(金環落地·금가락지가 떨어진 터) 명당이라고도 전해지는데, 실제로 연못 가운데 섬은 대단한 기운이 응집돼 있다. 운조루는 물을 이용한 가택 개운(開運)의 절정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운조루에 숨은 5개 ‘보물’ 찾기 운조루에서는 일상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진귀한 ‘보물’들을 찾아내는 재미도 있다. 첫 번째가 출입구인 솟을대문 상단에 숨겨 있듯 걸린 두 개의 뼈다. 호랑이 뼈와 말 뼈다. 원래는 둘 다 호랑이 뼈였는데 머리뼈를 도둑맞는 바람에 말 뼈로 한쪽을 대체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집안의 액운과 살기를 막아주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호랑이 뼈는 조선시대에도 구하기 힘든 비방으로 통했다. 두 번째는 큰 사랑채와 안채에 있는 둥근 기둥이다. 하늘을 의미하는 둥근 기둥은 권력과 권위를 상징하기 때문에 궁궐 바깥에서는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운조루는 당당히 우주의 중심임을 자부하듯 둥근 기둥을 사용한 것이다. 세 번째는 바깥사랑채 마당에 심어진 위성류(渭城柳)다. 명나라에 다녀온 사신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위성류는 1년에 두 차례 꽃이 피는 희귀한 나무로 운조루와 운명을 함께할 것이라는 얘기가 집안 내력으로 전해져 온다. 네 번째는 위풍당당한 건물채에 비해 현저히 낮게 만든 굴뚝이다. 안채와 사랑채의 마루 밑 기단에 낸 굴뚝 구멍은 밥 짓는 연기가 새나가지 않도록 설계한 것으로 끼니를 거르는 이웃들의 마음까지 배려한 조치다. 운조루의 주인들은 베풂과 나눔의 미학을 실천해 왔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마지막 ‘보물’인 운조루의 뒤주(쌀독)이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통하는 중간에 배치한 뒤주 하단엔 한 주먹만큼 들어갈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다. 거기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다른 사람도 열 수 있다’는 뜻으로 주변의 배고픈 사람들이 아무 때나 와서 쌀을 퍼가도록 한 장치다. ○별서정원이 돋보이는 쌍산재 구례에서 운조루와 비교되는 고택이 쌍산재다. 전국 최장수 마을로 꼽히는 마산면 사도리 상사마을 중심부에 자리한 이곳은 운조루와는 불과 2km 남짓한 거리에 있다. 방송사 프로그램인 ‘윤스테이’ 촬영지로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이곳 역시 물과 인연이 깊다. 지리산 화엄사 계곡에서 흘러나온 작은 시냇물이 집을 휘돌아 나가고 그 바깥으로 섬진강이 유유히 흐른다는 점은 운조루와 비슷하다. 그런데 쌍산재의 백미는 우물에 있다. 2004년 한국관광공사에서 전국 10대 약수터 중 하나로 지정한 ‘당몰샘’이다. 10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당몰샘은 가뭄에도 마르는 법이 없고 신비한 효능을 지닌 것으로 알려졌다. 마을 사람들은 상사마을이 장수마을이 된 데는 이 우물이 역할을 했다고 믿는다. 이를 자랑이라도 하듯 우물을 씌운 지붕에는 ‘지존지미(至尊至味)’라는 현판까지 달려 있다. 최고의 맛을 지닌 우물이라는 뜻이다.그런데 쌍산재 주인은 사랑채 앞쪽 마당에 있는 우물 명당을 이웃들에게 내주었다. 우물터가 집안에 있지 않고 집 담장 바깥의 주차장에 있다. 쌍산재 주인이 마을 사람들이 물을 불편하지 않게 길어 가도록 담장을 새로 고쳐 우물을 바깥으로 배려한 것이다. 쌍산재의 넉넉한 마음씨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쌍산재 역시 운조루처럼 안채에다 ‘베풂의 뒤주’를 운영했다. 춘궁기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뒤주에서 쌀과 보리를 꺼내 갔고, 다음 해 다시 채워 넣는 방식으로 함께 고난을 이겨갔다고 한다. 2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쌍산재는 크게 두 개의 공간으로 분리된다. 살림집(안채, 사랑채, 건너채)이라는 생활공간과 서당을 갖춘 별서정원(別墅庭園)이 대나무 숲을 경계로 나뉘어 있다. 그렇다 보니 쌍산재를 방문한 사람들이 앞쪽의 살림집을 보고서는 명성에 비해 소박한 규모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나무 숲을 지나 뒤쪽에 자리 잡은 어마어마한 정원을 보고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기 십상이다. 풍수에서 명당 집의 조건 중 하나로 꼽는 전착후관(前窄後寬·앞은 좁고 뒤는 넓음)의 전형적인 사례다. 담양 소쇄원 느낌을 주는 별서정원은 갖가지 화초와 나무, 연못, 돌들이 하나로 어울려 선계(仙界)에 들어선 듯하다. 이곳에는 집안의 자제들과 동리 아이들이 학문을 닦던 서당채, 별채 성격의 경암당 등이 있다. 경암당 바로 옆에 있는 영벽문(暎碧門)은 쌍산재 비경의 정수라고 불린다. 바깥으로 통하는 샛문인 영벽문을 열면 또 다른 공간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네모난 문 틀 사이로 펼쳐지는 옥빛 사도저수지(농업용수)와 지리산 풍경이 마치 액자에 걸린 그림 같은 장관을 연출한다. 쌍산재는 2004년 일반에 개방한 이후 관람 및 한옥 체험 숙박 운영을 해왔지만, 현재는 코로나19로 사전 예약한 경우에만 관람할 수 있다. 운조루와 쌍산재는 수백 년에 걸쳐 그 명성을 자랑해온 진정한 명가다. 주변 사람들에게 넉넉한 마음을 베풀어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자나 귀족 가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가문의 영속성을 위해서도 필요함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글·사진 구례=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21-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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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계-명성황후의 염원 깃든 ‘영험무쌍’ 龍의 기운 불끈

    《1871년 고종의 왕비이자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는 절박한 상황에 몰려 있었다. 명목만 국왕이지 실권은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뺏긴 남편의 처지도 딱하려니와 그해 11월 왕위를 이을 아들마저 생후 5일 만에 잃고 말았다. 흥선대원군은 아예 고종과 궁녀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완화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다. 세자를 배출하지 못한 왕비는 권력에서 밀려나게 마련이다. 명성황후는 신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기도의 대상은 바로 ‘영험한’ 계룡산.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염원이 녹아 있는 계룡산에서 명성황후는 득남(得男)과 왕실의 번영을 빌었다. 계룡산은 조선 왕조의 창업과 몰락 과정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의 무대이자 온갖 전설과 신화의 중심이 되는 산이다. 계룡산 남쪽 자락에 있는 중악단(中嶽壇·공주시 계룡면)과 제석사(계룡시 신도안면) 등이 특히 그러한 곳이다.》 ○계룡산 자락의 작은 궁궐 명성황후가 기도한 장소로 알려진 공주시 계룡면 계룡산 자락의 신원사 중악단을 찾았다. 신원사는 백제 의자왕 때인 651년 고구려 출신 승려인 보덕화상이 창건한 이후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 무학대사에 의해 크게 중창됐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이곳에 산신각(현재 중악단)을 지어 계룡산신에게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말했다는 전설도 뒤따른다. 유교를 숭상한 조선왕실과 토속 신앙인 계룡산신의 ‘은밀한’ 관계는 역사 기록에서도 간간이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의 아들인 태종 이방원이 내시를 보내 계룡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게 했고(1413년 9월 18일),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의 질환 치유를 빌기 위해 신하를 계룡산에 파견했다(1494년 12월 23일자)고도 전한다. 명성황후 또한 선조들의 뒤를 따랐다. 황후의 간절한 기도가 통했던 덕분일까. 1873년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을 섭정에서 끌어내리고 남편 고종과 함께 권력을 장악한 데 이어 이듬해인 1874년 3월 아들(순종)을 낳는 경사를 맞았다. 고종도 계룡산신을 모신 신원사를 각별히 대우했다. 고종은 1880년 “신원사는 다른 절과 다르니 중수하는 일을 마땅히 돌보아야 할 것”이라는 신하의 요청에 따라 공명첩(空名帖·국가가 부유한 사람들에게 재물을 받고 형식상의 관직을 부여하는 백지 임명장) 500장을 하사해 기금을 모으도록 조치했다(승정원일기). 이듬해인 1881년에는 계룡산신을 위한 중악단이 건립됐다(중악단 상량문). 앞서 1879년(고종 16년)에 명성황후의 배려로 중악단이 건립됐다는 기록(1959년에 발간된 ‘공주군지’)도 있는데, 대략 1880년 전후로 중악단 설립 계획 및 건설이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악단은 예사로운 명칭이 아니다. 그전까지 계룡산신에게 제사 지내던 제단은 계룡산사(鷄龍山祠), 계룡단(鷄龍壇) 등으로 불렸다. 그런데 이 제단이 공식적으로 중악단으로 불리게 되면 국가 차원의 제단으로 위상이 격상된다. 이후 계룡산 중악단은 북한 쪽의 묘향산 상악단(6·25전쟁 때 소실 추정), 남쪽의 지리산 하악단(소재 불명)과 함께 조선의 3대 사전(祀典) 장소가 됐다. 중악단은 위상에 걸맞게 조선 궁궐 양식의 건축 구조를 하고 있다. 출입구부터가 다르다. 세 개의 출입문으로 구성된 솟을대문이 이중으로 버티고 서 있는데, 가운데 문은 궁궐의 어간문처럼 왕만이 출입이 가능한 통로라고 한다. 첫 번째 솟을대문을 지나면 좌우로 행랑채 비슷한 요사채가 있는데, 왕 혹은 왕비가 오면 머물던 곳이라고 한다. 구전은 명성황후가 중악단에서 머물다 갔다고 전하는데, 명성황후 본인이든 황후의 명을 받든 내명부 궁인이든 이곳에서 치성을 드린 것은 분명하다. 궁중에서 쓰는 물품 목록 등을 기록한 ‘궁중발기’에 신원사에서 공양을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중악단의 팔작지붕 위 네 귀퉁이에는 사람과 동물 형상의 잡상(雜像)이 각각 7개씩 올려져 있다. 나쁜 기운이나 살(煞)을 막는 장치인 잡상 역시 경복궁 창경궁 등 궁궐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장식 기와다. 경복궁 교태전에서나 볼 수 있는 꽃담도 있다. 중악단을 둘러싼 4면 담장은 궁궐 양식인 꽃담으로 치장돼 있다. 만수무강(萬壽無疆)과 수복강녕(壽福康寧)이란 전서체 한자가 꽃담 사이사이에 새겨져 있다. 중악단은 1999년에 보물 제1293호로 지정됐다. 현전하는 산신각 중 최대 규모라는 점, 하나밖에 남지 않은 국가 차원의 제단이라는 점, 토속 신앙과 유교적 건축 양식의 조합이라는 점이 높이 평가됐다.○국태민안만 기도하는 계룡대 제석사 중악단 못지않게 조선 왕조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곳이 계룡시 신도안이다. 이성계가 조선 개국의 첫 도읍지로 지목했던 신도안은 실제로 1년 남짓 궁궐 축조 공사가 진행되었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도 궁궐 공사에 쓰인 주초석과 입석 등이 곳곳에 남아 있고 대궐터, 종로터란 지명이 아직도 살아 있다. 현재 주초석을 모아둔 대궐터는 군부대인 계룡대 영내에 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민간인들의 출입이 전면 금지된 상태다. 신도안면 용동리에 있는 괴목정도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전설이 서린 곳이다. 현재 시민들의 휴식 공간인 무궁화동산으로 유명한 이곳에는 수령 500년이 넘는 느티나무 세 그루(보호수)가 나란히 서 있다. 워낙 나무가 웅장하고 커 정자 역할을 한다고 해서 괴목정으로 불리는데, 궁궐 조성과 관련된 나무라고 한다. 이성계가 신도안을 도읍지로 정하고 주변 형세를 살필 때 동행한 무학대사가 이곳을 지나가다 무심코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나무가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성계는 즉위 이듬해인 1393년 무학대사 등 여러 신하들을 데리고 신도안에 행차해 5일간 도읍지 조성 현장을 시찰한 바 있다. 괴목정뿐만 아니다. 계룡대 영내에 있는 제석사는 맞은편 산자락의 계룡산 삼신당과 함께 이성계의 기도처로 유명한 곳이다. 삼신당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위한 기도처로 썼다고 알려져 있다. 제석사는 이성계가 신도안을 조선의 도읍지로 삼기 위해 기도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제석사 뒤쪽 자연 석굴이 바로 그 설화의 무대다. 계룡산 상봉(천황봉)에서 제자봉으로 이어지는 산 기운이 바로 제석사 일대에서 큰 명당 혈(穴)을 이루는 형세이다 보니 신라 말의 고승 도선국사와 조선의 무학대사가 이 터에서 수도했다거나 이성계가 기도했다는 등의 전설이 내려오는 듯하다. 신도안에서도 가장 은밀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제석사는 마치 선경(仙境) 세계로 들어선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계룡산에서 절경으로 꼽히는 암용추와 숫용추가 절 좌우에서 호위하듯 두르고 있고, 주위 산들과 기암괴석이 갖가지 동물 형상으로 살아 꿈틀거리는 듯하다. 어마어마하게 큰 석굴 암반에서 한 방울 한 방울씩 떨어져 고인 약수는 감미로운 향기가 나는 듯하다. 사찰이지만 마치 도교의 무릉도원의 세계를 보는 것 같았다. 대웅전 격에 해당하는 ‘각왕전(覺王殿)’은 제석사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임금이 깨우침을 얻는 전각’ 혹은 ‘깨달은 임금의 전각’이라는 의미다. 각왕전 내부에는 부처상과 함께 나라를 위해 애쓴 국신(國神)들을 모시고 있다. 절을 지키는 도현 비구니 스님은 제석사는 오로지 국태민안(國泰民安·나라가 태평하고 국민이 편안함)과 평화통일만을 기도하는 도량이라고 말했다. 이곳에서는 사찰의 주 수입원 중 하나인 천도재나 신도들의 소원을 빌어주는 스님 기도 등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계룡대 관할 지역인 이곳에서 제석사가 어떻게 남아 있을까. 1983년 3군 본부 이전 사업인 ‘6·20사업’으로 신도안에 거주하던 6300여 명의 민간인과 130여 종교단체가 철거됐다. 당시 이 절을 지키던 해봉 스님(2015년 입적)은 제석사가 국가의 안녕만을 기도하는 특수한 도량임을 들어 사찰을 수호했고, 군 당국도 결국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현재 제석사는 일반인의 출입이 자유롭지 않다. 1년에 단 한 차례 사월초파일(부처님오신날)에만 사찰을 개방하고 있다. 기도발이 남다른 곳으로 알려진 제석사에서 기도를 원하는 사람들이 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릴 정도라고 한다. 제석사, 괴목정 등이 들어선 신도안은 한때 각종 무속신앙과 신흥종교의 요람으로 꼽혀 왔다. 조선시대에 유행한 도참서 ‘정감록’ 등에서 미래 800년 신도읍지로 신도안을 꼽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성계의 계룡산 천도 계획이 무산된 후 한양에 도읍지를 마련한 조선은 문을 닫을 때까지 ‘계룡산 정씨 왕국 도읍설’에 시달렸다. 이씨의 나라가 아닌 새 나라, 새 시대를 열망하는 민중은 계룡산 왕국설에 희망을 걸었기 때문이다. 신도안은 일제강점기엔 일본을 배격하고 새 나라 건국을 꿈꾸던 독립운동가들의 숨은 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현대에서도 수도 이전론이 거론될 때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언급되는 곳 또한 계룡산 일대다. 이처럼 계룡산은 역사와 신비한 전설. 미래 비전이 혼재하고 있는 특이한 여행지다. 글·사진 공주=안영배 기자·풍수학박사 ojong@donga.com}

    • 2021-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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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od&Dining]동원F&B, 한식 브랜드… ‘양반’제품군 확장

    동원F&B가 36년 전통을 자랑하는 국내 최초 프리미엄 한식 브랜드 ‘양반’을 리브랜딩해 한식 카테고리 전반을 아우르는 브랜드로 확장한다. 동원F&B는 기존의 김, 죽, 국탕찌개, 김치에서 나아가 즉석밥, 전통 음료, 적전류까지 제품군을 넓혀 ‘양반’ 브랜드를 한식 HMR를 대표하는 메가 브랜드로 키울 계획이다. ‘양반’의 새로운 브랜드 슬로건은 ‘일상풍류식’이다. 믿을 수 있는 전통 방식으로 맛있게 만든 한식 HMR로 바쁜 현대인들의 삶을 여유롭고 풍요롭게 만들겠다는 철학이 담겨 있다. 한식의 본질적인 가치인 맛과 품격은 물론 HMR의 핵심인 간편성에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양반’의 다양한 제품을 상황과 취향에 따라 조합하면 맛과 영양이 풍부한 제대로 된 한 상 차림을 뚝딱 차려낼 수 있다. 주식(主食)인 밥과 죽을 비롯해 김, 김치, 국탕찌개, 만두, 장조림 등 다양한 부식을 갖추고 디저트로 식혜, 수정과, 오미자차 등 전통 음료와 김부각까지 곁들이면 부족함이 없다. 동원F&B는 ‘양반’ 브랜드를 소비자들에게 적극 알리기 위해 신규 CF를 최근 공개했다. ‘양반으로 풍류가 산다’는 주제로 공개된 CF 영상에는 배우 정해인이 다양한 일상 속에서 ‘양반’ 제품으로 풍류를 만끽하고 여유를 즐기는 모습이 담겨 있다. 가수 송창식의 히트곡 ‘가나다라’가 배경 음악으로 활용돼 풍류와 흥을 돋운다. 회사 측은 “리브랜딩을 통해 ‘양반’의 프리미엄 한식 HMR 이미지를 공고히 하고 소비자들에게 더 많은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 브랜드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밝혔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21-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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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늑하고 평안한 땅의 기운… 가슴엔 여유와 푸근함 가득∼

    호남과 영남에 걸쳐 있는 지리산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정립하던 삼국시대에 어느 한 나라가 온전히 차지해본 적이 없던 땅이다. 지리산 자락은 각 나라 백성들이 삶의 터를 공유하는 무대였다. 정치적 압박이나 관리의 횡포, 전쟁 등 환란(患亂)을 피하려고 찾아드는 사람들을 품어주는 포용의 산이기도 했다. 그 중심지가 전남 구례군이고, 지리산의 넉넉한 품처럼 화합과 관용의 정신을 실천해온 곳이 구례 화엄사라 할 수 있다. 지리산 노고단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화엄사는 불교 경전인 ‘화엄경’을 수행의 근본으로 삼는 사찰이다. 화엄경은 세상 사람들에게 대립과 항쟁 대신 화합과 통합을 가르친다. 사월초파일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화엄 사상의 무대인 구례를 찾았다. ● 너그러이 포용하는 땅 ‘구차례’ 구례는 북쪽으로는 전북 남원, 서쪽과 남쪽으로는 전남 곡성 광양 순천, 동쪽으로는 경남 하동과 접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구례군 석주관성(토지면 송정리)이 영남에서 호남으로 통하는 길목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7세기 후반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영호남 만남의 길목인 구례를 주목했다. 여기에는 불교가 큰 역할을 했다. 백제인들이 많이 살던 구례를 무대로 의상 대사(625∼702) 등 신라 승려들은 화엄 사상을 펼쳤다. 우주의 모든 사물과 사단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가 원인이 돼 일어나는 것이며, 결국 대립을 초월해 하나로 융합한다는 ‘법계연기(法界緣起)’론이 핵심이었다. 갈라진 나라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논리로 백제 망국민들을 토닥거렸을 것이다. 구례는 지리적으로도 화엄 사상을 펼치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조선 후기의 인문지리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사람 사는 곳에 경치가 아름답고, 물산이 풍부하여 소출이 넘쳐나면 인심 또한 자연스레 넉넉해진다”고 하면서 “구례는 이 세 가지(경치, 물산, 인심)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고 기술했다. 한반도 각 지역에 대한 ‘명당 점수’를 매기는 데 있어 다소 인색했던 이중환조차 극찬한 땅이 구례였다. 노자의 가르침에 ‘인법지(人法地·사람은 땅을 본받음)’라는 말이 있다. 땅이 넉넉하면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심성도 여유롭고 푸근해진다. 백제 시절 구례가 구차례(求次禮)로 불린 설화에서도 이런 흔적이 나타난다. 백제 시대에 사이가 좋지 않던 두 정승이 있었다. 성격과 생각이 너무 다른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며 싸웠다. 그러다 한 정승이 먼저 벼슬에서 물러나 구례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다른 정승도 은퇴 후 말년을 보낼 거주지를 물색하고 있었다. 두 정승은 구례에서 우연히 만나게 돼 구원(舊怨)을 풀고 함께 노년을 보내기로 했다. 두 정승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백제 왕은 ‘원수가 서로 예를 찾은 곳’이라는 의미로 ‘구차례’라는 지명을 지어주었다고 한다.(‘전남의 전설’에서) ● 화엄사를 빛낸 고승들 산 좋고 물 맑은 곳이 명당이라는 말을 느껴보기 위해 화엄사 산내 암자인 연기암(해발 560m)을 먼저 찾았다. 노고단 중턱쯤 자리한 이곳에서 조망해본 구례는 지리산의 굳센 땅기운과 섬진강의 풍요로운 기운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듯했다. 특히 하동으로 흘러나가는 섬진강 줄기가 구례를 휘감아 도는 모습은 낙동강이 안동 하회마을을 감싸듯 돌아나가는 것과 흡사하다. 산과 강과 마을이 빚어낸 아름다운 풍광을 보기 위해 일부러 연기암을 찾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산수가 아름다우면 사람도 아름다워진다. 이 지역 출신 장길선 전 구례교육장은 “구례는 외지인들에 대한 편견이나 텃세가 거의 없는 편이어서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편안히 살기에 좋다”고 말했다. 연기암은 본사인 화엄사와 밀접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544년 화엄사를 창건한 서역 출신 승려 연기 조사가 맨 처음 수행하던 토굴 터가 연기암이라는 것이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깊은 산속에 숨겨진 명당 터를 콕 집어 수행 터전으로 삼은 솜씨를 보면 도력이 높은 수행자임은 분명해 보인다. 연기암은 임진왜란 등 전쟁 통에 소실된 후 오랜 세월 묻혀 지내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 복원 작업이 이뤄져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초대형 문수보살상과 국내 최대 규모의 마니차(불교 경전을 넣어둔 원통형의 신앙도구)가 자랑거리인 연기암에서 화엄사로 연결되는 산책로(2km)는 ‘치유의 숲길’로도 유명하다. 계곡 물에서 방출하는 음이온과 숲에서 뿜어 나오는 피톤치드가 풍부해 건강을 챙기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코스라고 한다. 산책로를 따라 내려와 화엄사로 들어서니 경내는 마치 큰 행사를 앞둔 듯 분주했다. 화엄사 주지 덕문 스님은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대웅전에 모신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이 국보로 지정 예고되는 경사까지 겹쳐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 화엄사상에 기반해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 석가모니불의 삼신불(三身佛)로 구성된 이들 목조 좌상은 3m가 넘는 초대형 불상으로 앞서 2008년 보물로 지정됐다. 조선 왕실 사람들과 승려 580명 등 총 1320명이 시주에 참여해 조성한 이 불좌상은 17세기 불교 사상과 미술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대웅전 삼신불 조성에는 화엄사가 겪은 아픈 역사가 담겨 있다. 1592년 왜군이 도발한 임진왜란과 1597년 2차 전쟁인 정유재란으로 온 국토가 전란(戰亂)에 시달릴 때 화엄사 승려들은 승병(僧兵)을 조직해 왜군에 대항했다. 화엄사의 윤눌 대사는 조선 수군에 가담해 이순신 장군을 도왔고, 진주성 전투에도 참가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정유재란 때는 화엄사 주지 설홍 대사가 300여 승군을 이끌고 구례 의병들과 함께 요충지인 석주관에서 왜군들과 격렬하게 싸웠다. 그러나 압도적인 왜군 군사력 앞에 승군들은 모두 장렬히 전사했다. 이후 화엄사 승려들에 대한 왜군의 보복은 잔인했다. 화엄사를 잿더미로 만들고 승려들을 학살했다. 지리산 골짜기 이곳저곳에 숨은 듯이 있던 작은 암자들까지 찾아가 불 질러 없애버렸다. 그만큼 화엄사 승려들은 왜군들에게 골치 아픈 존재였던 것이다. 덕문 주지 스님은 “각황전의 사방 벽을 장식했던 신라 시기의 석경(石經·돌에다 화엄경을 새겨놓은 경전)들도 그때 상당 부분 훼손되거나 왜군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갔다”면서 “일본 교토박물관 측은 당시 건너간 석경의 존재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안 하는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파괴된 화엄사 중창은 1630년대 벽암 대사에 의해 이뤄진다. 승병으로서 뛰어난 활약을 한 벽암 대사는 조선 정부로부터도 공로를 인정받아 ‘팔도도총섭’이라는 직책을 부여받은 뒤 사찰 중창에 힘을 쏟았다. 대웅전에 걸려 있는 ‘大雄殿’과 일주문의 ‘智異山 華嚴寺(지리산 화엄사)’ 한자 편액은 당시 화엄사의 위격(位格)을 말해준다. 이 편액은 선조의 왕자이자 인조의 숙부인 의창군이 써준 글씨인데, 숭유억불(崇儒抑佛) 체제에서 눌려 있던 불교가 전쟁 이후 위상이 높아졌음을 상징한다. 화엄사는 대웅전 외에도 국보 및 보물급 문화재들이 즐비한 곳이다. 경복궁 근정전을 연상시키는 듯한 웅장한 목조 건물인 각황전(국보 제67호)과 각황전 앞의 초대형 석등(국보 제12호), 각황전 뒤쪽 언덕배기의 4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은 국보급 문화재이고, 대웅전 동오층석탑과 서오층석탑, 원통전 사자탑 등은 보물로 지정돼 있다. ● 사성암에서 만난 도선 국사 화엄사를 뒤로하고 화엄사 말사 중 하나인 사성암으로 갔다. 구례군 문척면 오산(541m) 정상에 자리한 사성암 역시 화엄사 창건주인 연기 조사가 조성한 곳이라고 한다. 원래는 산 이름을 따 오산사(鼇山寺)로 불렸으나, 이후 신라의 원효 대사와 의상 대사, 신라 말기의 도선 국사, 고려의 진각 국사 등 4명의 고승이 수행한 곳이라 하여 사성암이라고 불리게 됐다. 사성암은 영험한 기도처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지난해 여름 집중호우로 구례 지역이 피해를 입었을 당시 10여 마리의 소 떼가 침수된 축사를 피해 사성암 꼭대기의 유리광전 앞마당으로 몰려와 목숨을 건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일화 때문인지 사성암은 이후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명당인 사성암은 우리나라 풍수지리설의 원조로 유명한 도선 국사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그가 사성암 내 석벽 동굴(도선굴)에서 수행하면서 풍수지리설을 깨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도선은 이곳에서 한 이인(異人)을 만났다고 한다. 이인은 그에게 풍수지리에 대한 이치를 얘기하고 마을 앞 강변에다 모래로 산천을 그리고 사라졌다. 도선은 이후 모래 그림(沙圖)에서 산천지세(山川地勢)를 보고 풍수의 원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사성암 인근에 사도리(沙圖里)라는 마을도 있다. 즉,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는 우리나라 ‘도선 풍수’의 출발지이자 전승지인 것이다. 구례는 역사적 인물과 전설적 스토리가 풍부한 곳이다. 그런 한편으로 곳곳에 힐링 명소가 있다. 사성암 근처의 섬진강 대나무 숲길과 천은사의 소나무 숲길 및 상생의 길 등은 평소 구례 사람들도 즐겨 찾는 산책길이다. 이런 친환경적인 길을 걷다 보면 구례의 아늑하고도 평안한 땅기운이 온몸을 휘감는 듯한 느낌도 맛볼 수 있다.구례=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21-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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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안한 땅의 기운-가슴엔 푸근함…구례 화엄사를 빛낸 고승들

    호남과 영남에 걸쳐 있는 지리산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정립하던 삼국시대에 어느 한 나라가 온전히 차지해본 적이 없던 땅이다. 지리산 자락은 각 나라 백성들이 삶의 터를 공유하는 무대였다. 정치적 압박이나 관리의 횡포, 전쟁 등 환란(患亂)을 피하려고 찾아드는 사람들을 품어주는 포용의 산이기도 했다. 그 중심지가 전남 구례군이고, 지리산의 넉넉한 품처럼 화합과 관용의 정신을 실천해온 곳이 구례 화엄사라 할 수 있다. 지리산 노고단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화엄사는 불교 경전인 ‘화엄경’을 수행의 근본으로 삼는 사찰이다. 화엄경은 세상 사람들에게 대립과 항쟁 대신 화합과 통합을 가르친다. 사월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화엄 사상의 무대인 구례를 찾았다. ○ 너그러이 포용하는 땅 ‘구차례’구례는 북쪽으로는 전북 남원, 서쪽과 남쪽으로는 전남 곡성 광양 순천, 동쪽으로는 경남 하동과 접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구례군 석주관성(토지면 송정리)이 영남에서 호남으로 통하는 길목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7세기 후반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영·호남 만남의 길목인 구례를 주목했다. 여기에는 불교가 큰 역할을 했다. 백제인들이 많이 살던 구례를 무대로 의상대사(625~702) 등 신라 승려들은 화엄 사상을 펼쳤다. 우주의 모든 사물과 사단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가 원인이 돼 일어나는 것이며, 결국 대립을 초월해 하나로 융합한다는 ‘법계연기(法界緣起)’론이 핵심이었다. 갈라진 나라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논리로 백제 망국민들을 토닥거렸을 것이다. 구례는 지리적으로도 화엄 사상을 펼치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조선 후기의 인문지리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사람 사는 곳에 경치가 아름답고, 물산이 풍부하여 소출이 넘쳐나면, 인심 또한 자연스레 넉넉해진다”고 하면서 “구례는 이 세 가지(경치, 물산, 인심)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고 기술했다. 한반도 각 지역에 대한 ‘명당 점수’를 매기는 데 있어 다소 인색했던 이중환조차 극찬한 땅이 구례였다. 노자의 가르침에 ‘인법지(人法地·사람은 땅을 본받음)’라는 말이 있다. 땅이 넉넉하면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심성도 여유롭고 푸근해진다. 백제 시절 구례가 구차례(求次禮)로 불린 설화에서도 이런 흔적이 나타난다. 백제 시대에 사이가 좋지 않던 두 정승이 있었다. 성격과 생각이 너무 다른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며 싸웠다. 그러다 한 정승이 먼저 벼슬에서 물러나 구례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다른 정승도 은퇴 후 말년을 보낼 거주지를 물색하고 있었다. 두 정승은 구례에서 우연히 만나게 돼 구원(舊怨)을 풀고 함께 노년을 보내기로 했다. 두 정승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백제 왕은 ‘원수가 서로 예를 찾은 곳’이라는 의미로 ‘구차례’라는 지명을 지어주었다고 한다.(‘전남의 전설’에서) ○화엄사를 빛낸 고승들 산 좋고 물 맑은 곳이 명당이라는 말을 느껴보기 위해 화엄사 산내 암자인 연기암(560m)을 먼저 찾았다. 노고단 중턱쯤 자리한 이곳에서 조망해본 구례는 지리산의 굳센 땅 기운과 섬진강의 풍요로운 기운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듯했다. 특히 하동으로 흘러나가는 섬진강 줄기가 구례를 휘감아 도는 모습은 낙동강이 안동 하회마을을 감싸듯 돌아나가는 것과 흡사하다. 산과 강과 마을이 빚어낸 아름다운 풍광을 보기 위해 일부러 연기암을 찾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산수가 아름다우면 사람도 아름다워진다. 이 지역 출신 장길선 전(前) 구례군교육장은 “구례는 외지인들에 대한 편견이나 텃세가 거의 없는 편이어서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편안히 살기에 좋다”고 말했다. 연기암은 본사인 화엄사와 밀접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544년 화엄사를 창건한 서역 출신 승려 연기조사가 맨 처음 수행하던 토굴 터가 연기암이라는 것이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깊은 산속에 숨겨진 명당 터를 콕 짚어 수행 터전으로 삼은 솜씨를 보면 도력이 높은 수행자임은 분명해 보인다. 연기암은 임진왜란 등 전쟁 통에 소실된 후 오랜 세월 묻혀 지내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 복원 작업이 이뤄져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초대형 문수보살상과 국내 최대 규모의 마니차(불교 경전을 넣어둔 원통형의 신앙도구)가 자랑거리인 연기암에서 화엄사로 연결되는 산책로(2km)는 ‘치유의 숲길’로도 유명하다. 계곡 물에서 방출하는 음이온과 숲에서 뿜어 나오는 피톤치드가 풍부해 건강을 챙기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코스라고 한다. 산책로를 따라 내려와 화엄사로 들어서니 경내는 마치 큰 행사를 앞둔 듯 분주했다. 화엄사 주지 덕문스님은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대웅전에 모신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이 국보로 지정 예고되는 경사까지 겹쳐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 화엄사상에 기반 해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 석가모니불의 삼신불(三身佛)로 구성된 이들 목조 좌상은 3m가 넘는 초대형 불상으로 앞서 2008년 보물로 지정됐다. 조선 왕실 사람들과 승려 580명 등 총 1320명이 시주에 참여해 조성한 이 불좌상은 17세기 불교 사상과 미술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대웅전 삼신불 조성에는 화엄사가 겪은 아픈 역사가 담겨 있다. 1592년 왜군이 도발한 임진왜란과 1597년 2차 전쟁인 정유재란으로 온 국토가 전란(戰亂)에 시달릴 때 화엄사 승려들은 승병(僧兵)을 조직해 왜군에 대항했다. 화엄사의 윤눌 대사는 조선 수군에 가담해 이순신 장군을 도왔고, 진주성 전투에도 참가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정유재란 때는 화엄사 주지 설홍대사가 300여 승군을 이끌고 구례 의병들과 함께 요충지인 석주관에서 왜군들과 장렬하게 싸웠다. 그러나 압도적인 왜군 군사력 앞에 승군들은 모두 전사했다. 이후 화엄사 승려들에 대한 왜군의 보복은 잔인했다. 화엄사를 잿더미로 만들고 승려들을 학살했다. 지리산 골짜기 이곳저곳에 숨은 듯이 있던 작은 암자들까지 찾아가 불 질러 없애버렸다. 그만큼 화엄사 승려들은 왜군들에게 골치 아픈 존재였던 것이다. 덕문 주지 스님은 “각황전의 사방 벽을 장식했던 신라 시기의 석경(石經; 돌에다 화엄경을 새겨놓은 경전)들도 그때 상당 부분 훼손되거나 왜군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갔다”면서 “일본 교토박물관측은 당시 건너간 석경의 존재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안하는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파괴된 화엄사 중창은 1630년대 벽암대사에 의해 이뤄진다. 승병으로서 뛰어난 활약을 한 벽암대사는 조선 정부로부터도 공로를 인정받아 ‘팔도도총섭’이라는 직책을 부여받은 뒤 사찰 중창에 힘을 쏟았다. 대웅전에 걸려 있는 ‘大雄殿’과 일주문의 ‘智異山 華嚴寺(지리산 화엄사)’ 한문 편액은 당시 화엄사의 위격(位格)을 말해준다. 이 편액은 선조의 왕자이자 인조의 숙부인 의창군이 써준 글씨인데, 숭유억불(崇儒抑佛) 체제에서 눌려 있던 불교가 전쟁 이후 위상이 높아졌음을 상징한다. 화엄사는 대웅전 외에도 국보 및 보물급 문화재들이 즐비한 곳이다. 경복궁 근정전을 연상시키는 듯한 웅장한 목조 건물인 각황전(국보 제67호)과 각황전 앞의 초대형 석등(국보 제12호), 각황전 뒤쪽 언덕배기의 4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은 국보급 문화재이고, 대웅전 동오층석탑과 서오층석탑, 원통전 앞 사자탑 등은 보물로 지정돼 있다. ○ 사성암에서 만난 도선국사화엄사를 뒤로 하고 화엄사 말사중 하나인 사성암으로 갔다. 구례군 문척면 읍에서 오산(541m) 정상에 자리한 사성암 역시 화엄사 창건주인 연기조사가 조성한 곳이라고 한다. 원래는 산 이름을 따 오산사(鼇山寺)로 불렸으나, 이후 신라의 원효대사와 의상대사, 신라 말기의 도선국사, 고려의 진각국사 등 4명의 고승이 수행한 곳이라 하여 사성암이라고 불렸다. 사성암은 영험한 기도처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지난해 여름 집중호우로 구례 지역이 피해를 입었을 당시 10여 마리의 소 떼가 침수된 축사를 피해 사성암 꼭대기의 유리광전 앞마당으로 몰려와 목숨을 건져 화제가 되기도 했던 곳이다. 이런 일화 때문인지 사성암은 이후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명당인 사성암은 우리나라 풍수지리설의 원조로 유명한 도선국사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그가 사성암내 석벽 동굴(도선굴)에서 수행하면서 풍수지리설을 깨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도선은 이곳에서 한 이인(異人)을 만났다고 한다. 이인은 그에게 풍수지리에 대한 이치를 얘기하고 마을 앞 강변에다 모래로 산천을 그리고 사라졌다. 도선은 이후 모래 그림(沙圖)에서 산천지세(山川地勢)를 보고 풍수의 원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사성암 인근에 사도리(沙圖里)라는 마을도 있다. 즉 구례군 사도리는 우리나라 ‘도선 풍수’의 출발지이자 전승지인 것이다. 구례는 역사적 인물과 전설적 스토리가 풍부한 곳이다. 그런 한편으로 곳곳에 힐링 명소가 있다. 사성암 근처의 섬진강 대나무 숲길과 천은사의 소나무 숲길 및 상생의 길 등은 평소 구례 사람들도 즐겨 찾는 산책길이다. 이런 친환경적인 길을 걷다 보면 구례의 아늑하고도 평안한 땅 기운이 온몸을 휘감는 듯한 느낌도 맛볼 수 있다.화엄사 주지 덕문스님 “화엄의 땅에서 상생 공동체 문화 모범 보일 것” 화엄사 경내 한쪽엔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지지한다’는 플래카드가 있다. 화엄사는 조계종 교구본사 가운데 최초로 미얀마 민주화운동 지지 성명을 냈다. 부처의 가르침을 권력 같은 상위가 아닌 대중과 함께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듯하다. 이를 주도한 화엄사 주지 덕문스님은 ‘화엄의 땅’ 구례에서 화엄의 이상향인 상생 공동체를 구현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특히 지역사회와의 상생을 강조하는 그를 만나보았다. -구례와 화엄사의 상생을 실천한 사례라면? “과거 구례는 화엄사를 찾는 관광객들 덕분에 인구가 늘고 번성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화엄사 주지로 부임(2017년)한 후 구례군민들이 화엄사 말사인 천은사 입장료 때문에 욕을 먹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 마음이 아팠다. 지리산 노고단에 오르려면 천은사 매표소에서 1인당 문화재구역 입장료를 내야 했다. 노고단으로 오르는 길 자체가 사찰 소유의 사유지이기 때문에 천은사로서는 불법적으로 입장료를 받는 게 아니었지만 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도 있었다. 그래서 구례가 인색한 동네가 아니며, 또 구례군민의 자존심을 회복해 드리고 싶어서 입장료를 폐지했다. 이 때문에 천은사 살림살이가 좀 어려워지긴 했지만 천은사가 국민과 군민들의 사랑을 받는 곳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됐다.”-화엄사 터가 명당인 데다 구례 땅 자체가 포근하면서도 편안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통일신라 시기에 동서화합을 위한 화엄사상을 펼치기에 가장 좋은 지역이 구례였다. 영남과 호남의 관문이라는 지정학적 특성, 좋은 터의 기운 등에 힘입어 화엄사가 그 역할을 중심적으로 수행했다. 과거에 그랬듯이 화엄사는 동서화합 뿐 아니라 보수와 진보의 상생 문화 등을 구축하는 데 힘쓰고 있다. 현재도 화엄사는 경북 영천 은해사와 자매 인연을 맺고 꾸준히 교류한다. 화엄사 주지로 부임하기 전 동화사 주지로 봉직한 인연 때문인지 대구 경북 지역 불자들이 자주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사람들이 오가다 보면 소통과 상생의 마음이 절로 생기게 마련이다.” -화엄사가 중점적으로 염두엔 두고 있는 일은?“화엄사 각황전을 장식했던 ‘화엄 석경(石經)’을 복원하는 일이다. 경전을 종이에 옮겨 쓴 사경(寫經) 작품은 많지만 돌에다 음각한 석경은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파괴된 석경 1만3000여 점의 파편이 현재 성보박물관에 보관돼 있는데 이를 세상에 드러내 우리의 우수했던 석경 문화를 알리고자 한다. 중국의 방산 석경이 우리의 화엄 석경보다 조잡한 것을 보고 그런 사명감이 들었다. 한편으로 그간 잊힌 사경(寫經) 수행문화도 널리 보급하고자 한다. 사경은 신앙적으로 공덕을 쌓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수행의 훌륭한 방편이기도 하다.” <끝> 구례=안영배 기자 · 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21-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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