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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경기 광명시 일직로에 공룡이 출현했다. ‘가구 공룡’ 이케아(IKEA)의 한국 첫 매장이 문을 연 것이다. 첫날부터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매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7, 8년 전만 해도 기자는 이케아가 수백만 원짜리 침대, 수천만 원짜리 소파를 파는 업체라고 생각했다. 4년 전 큰아이 책걸상을 알아보던 아내는 “이케아도 모르냐”며 면박을 줬다. 주부나 학부모에게 이케아 제품은 ‘꿈의 가구’다. 화려하지 않지만 단순하고 멋스러운 북유럽 스타일이 잘 살아 있다는 이유에서다. 가격 영향도 크다. 이케아는 종류별로 차이가 나지만 대체로 국내 제품에 비해 저렴하다. 물론 모든 제품이 ‘파격적’으로 싸진 않고 배송 조립을 직접 해야 하는 불편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가구는 비싸다’는 인식이 이케아에서는 100% 진실로 통하지 않는다. 이케아 개장 뒤 국내 업계는 대폭 할인 등 자구책을 마련했지만 시장 잠식은 불가피해 보인다. 문제는 가구업계에 떨어진 불똥이 앞으로 다가올 변화의 신호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이케아를 가구업체로만 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는 에너지기업 가운데 하나다. 이케아는 7개 국가에 풍력발전기 96대를 직접 설치해 전기를 생산한다. 광명점 3000개를 비롯해 전 세계 100여 개 매장에 패널 55만 개를 설치했다. 생산된 전기는 공장과 매장에서 쓴다. 한걸음 나아가 상당수 매장에서 태양광 패널을 직접 판매 중이다. 패널 한 세트(약 1000만 원)를 팔면 20만 원짜리 옷장 50개 매출과 맞먹는다. 태양광 패널 설치 때 각종 혜택을 주는 영국 정부의 정책에 발맞춰 신청 대행부터 설치, 보조금 수령까지 행정절차를 대신하는 마케팅도 펼치고 있다. 주한영국대사관의 김지석 선임기후변화에너지 담당관은 “이 시스템의 혜택을 본 고객은 이케아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가 더욱 높아질 것”이라며 “기후변화를 둘러싼 국제적 트렌드에 적극 대응하는 기업들은 생존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2류, 3류 기업으로 도태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달 미국과 중국은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공동 노력에 전격 합의했다. 이 문제에 줄곧 비협조적이었던 두 나라가 손을 맞잡자 국내외 전문가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기후변화를 피할 수 없다는 절박함과 함께 앞으로 벌어질 에너지시장의 치열한 주도권 전쟁을 예고했다는 평이다. 반면 한국은 어떤가. 실효성 논란을 떠나 이명박 정부가 앞세웠던 ‘녹색성장’은 뒷전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탄소 배출량에 따라 보조금과 부담금을 부과하는 저탄소차협력금제 시행은 내년에서 2020년으로 연기됐다. 정부와 기업 어느 한쪽이 앞장서면 다른 한쪽이 들고 일어나 발목을 잡는 엇박자가 반복되고 있다. 20년, 아니 10년쯤 지나 우리는 ‘에너지 공룡’ 이케아의 국내 상륙을 목격할지도 모른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아마 그때도 지금처럼 공룡의 출현을 손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버린다고 버렸는데도 아직 많네요.” 4일 오후 휴대전화로 전해진 이금형 전 부산지방경찰청장(56·여)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마침 그는 전날(3일) 퇴임하면서 가져온 책을 정리 중이었다. 1977년 시작된 이 전 청장의 경찰 생활이 37년 만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경찰로서 그의 인생은 화려했다. 역대 세 번째 여성 총경, 두 번째 여성 경무관, 첫 번째 여성 치안감 및 치안정감(치안총감인 경찰청장 바로 아래 계급)까지…. 이 전 청장은 경찰 생활 내내 ‘여경(女警)의 대모’라는 타이틀을 달고 살았다. 그의 존재감이 더욱 큰 이유는 경찰의 말단인 순경 출신이기 때문이다. 하위직 시절 치안 현장의 밑바닥을 경험한 것은 이 전 청장이 자랑하는 가장 큰 자산이다. 이때 경험을 바탕으로 서울 마포경찰서장 때 ‘발바리(연쇄 성폭행범) 사건’을 해결했고 여성 및 학교폭력 피해자 원스톱지원센터도 만들었다. 승진시험 때 치열한 경쟁을 뚫고 1등도 했다. 이 전 청장은 “(진급할 때마다) ‘여자가 순경으로 들어와서 그 정도 하면 됐지’라는 말을 질리게 들었다”며 “후배뿐 아니라 사회 곳곳의 나 같은 여성들을 생각해 정말 독하게 일했다”고 털어놨다. 이 전 청장은 하위직 출신으로서 유리천장을 깨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모습을 마냥 기분 좋게 볼 수가 없다. 그의 퇴임으로 현재 치안감 이상 경찰 고위직에는 순경 출신이 없다. 그보다 한 계급 아래인 경무관 중에도 순경 출신은 고작 2명이다. 물론 순경 출신이라고 무조건 특혜를 주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조직 안팎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이들조차 아예 검증 후보군에 끼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때마다 경찰이 내세우는 이유는 비슷하다. “승진을 시키려 해도 마땅한 사람이 없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승진 효과가 낮다”는 것. 현재 순경 출신은 전체 경찰(약 11만 명)의 약 97%다. 이들이 경위 계급장을 다는 데 걸리는 기간은 평균 15년. 극소수이지만 총경(경찰서장)이 되기까지는 30년 가까이 걸린다. 경찰대, 간부후보, 고시특채 등 이른바 3대 경로 출신은 경위나 경감 경정에서 시작한다. 순경과 3대 경로 출신은 애초에 출발선이 다른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일정 기간이 지나야 승진이 가능한 ‘승진 소요 기간 제한’ 등을 똑같이 적용하면 앞으로 순경 출신 고위직은 구경하기 힘들어진다. 조만간 단행될 경무관 승진 후보군에도 순경 출신이 한 명도 없다는 소문이 안팎에서 돌고 있다. 무조건 특혜를 주자는 것이 아니다. 97%의 직원들이 더 큰 꿈을 갖고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하자는 것이다. 이루기 힘들더라도 희망을 갖고 뛰어다니는 경찰이 현장에 많아져야 치안이 바로 서기 때문이다. 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어제까지 흰꼬리수리가 있던 곳에 대신 참수리가 앉았다.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그래도 어색해 보였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내 꺼인 듯 내 꺼 아닌’ 모습이랄까. 20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서 열린 해경 인수인력 임용식 분위기가 그랬다. 흰꼬리수리는 해양경찰의 상징 마크다. 참수리는 경찰(육상경찰)의 상징이다. 이날 전국적으로 열린 임용식에서 해경 200명이 어깨에 참수리 마크를 새로 달았다. 어제까지 흰꼬리수리 마크가 붙어있던 곳이다. 임용식에서 자꾸 어깨를 쳐다보며 어색해하던 일부 경찰의 모습이 사진에 찍히기도 했다. 올해 5월 19일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구조 실패의 책임을 물으며 해체를 선언한 지 185일 만에 이날 해경 내 정보수사인력 200명이 경찰로 전입했다. 800명 남짓한 해경 정보수사인력의 4분의 1가량이다. 나머지 600명은 국민안전처 산하 해양경비안전본부로 갔다. 경찰로 전입한 200명 중 대부분은 어촌지역 비리 수사 등 기존 업무와 비슷한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소속은 해경이 아닌 육경의 각 지방경찰청 및 경찰서로 바뀌었다. 바다에서 육지로 건너온 흰꼬리수리들의 심경은 복잡하다.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이 하루아침에 문을 닫은 것에 대한 허탈감에, 새로운 조직에 적응해야 한다는 불안감이 겹쳤다. 이는 나이가 많을수록, 직위가 높을수록 크다. 실제로 전입을 희망하는 하위직은 2 대 1의 경쟁률을 보였지만 간부급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인력 배치 등 물리적인 결합은 이뤄졌지만 과연 화학적으로도 잘 결합할지도 미지수다. 이번에 전입한 해경 인력은 기존 경찰(약 11만 명)에 비해 턱없이 적다. 자칫 조직 내에서 ‘왕따’를 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심지어 전입을 앞두고 해경 내부에서는 “서자(庶子) 신세를 면할 수 있겠냐”는 걱정스러운 의견이 많았다. 이런 불안과 우려를 해결할 의무는 결국 경찰에 있다. 해경 출신 인사들의 조직 안착 여부는 향후 경찰을 평가할 또 하나의 잣대가 될 것이다. 그나마 경찰이 이들의 조기 안착을 최우선 과제로 꼽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지방경찰청마다 태스크포스(TF)가 꾸려져 이들의 적응을 도울 예정이다. 강신명 경찰청장도 “따뜻하게 맞아 주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하지만 말로 외치는 화합에는 한계가 있다. 2000년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통합(KB국민은행), 2009년 한국토지공사와 대한주택공사의 통합(한국토지주택공사·LH)에서 봤듯이 화학적 결합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들 통합 기관은 출신별로 나뉘어 사업마다 기 싸움을 벌였고 인사철만 되면 잡음이 불거졌다. 경찰이 이런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당장 경찰은 연말 대규모 인사를 앞두고 있다. 필요하면 능력을 갖춘 해경 출신 직원들도 함께 승진시켜야 한다. “평가의 기준이 다르다”는 이유로 미루면 오히려 조직 내 갈등이라는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 2, 3년이 지나서도 ‘한 지붕 두 가족’ 소리를 듣게 된다면 그 책임은 온전히 경찰이 져야 한다.이성호 사회부 차장}
8월 중순경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 수사관들이 경남 창원시의 한 가정집을 급습했다. 수사관들이 집주인 A 씨(46·회사원)의 컴퓨터를 켜자 무려 4만 건 가까운 아동음란물이 쏟아졌고 경찰은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A 씨를 입건했다. 아동음란물을 유포하거나 판매한 사람이 경찰에 적발된 사례는 종종 있다. 그러나 수만 건의 아동음란물을 단순 소지한 사람이 붙잡힌 일은 극히 드물다. 경찰이 A 씨를 알게 된 건 미국 국토안보수사국(HSI)이 한국지부를 통해 건넨 정보가 결정적이었다. 앞서 HSI는 6월 A 씨가 미국의 한 호스팅업체에 도메인을 개설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A 씨는 자신이 갖고 있던 수만 건의 아동음란물을 도메인에 게시했다. 그의 불법행위를 처음 발견한 건 돈을 받고 도메인을 개설해준 호스팅업체였다. 업체는 자사를 통해 만들어진 모든 도메인을 필터링하고 있었다. A 씨가 올린 아동음란물이 확인되자 업체는 발 빠르게 해당 도메인을 차단하고 그가 결제 때 사용한 신용카드 정보를 ‘사이버팁라인(CyberTipline)’에 신고했다. 미국은 연방법에 따라 온라인 서비스 사업자가 아동음란물을 발견하면 반드시 신고하도록 하고 있다. 이때 신고를 접수해 수사기관에 제공하는 곳이 바로 사이버팁라인이다. 국립 실종·착취아동센터(NCMEC)가 운영한다. 처음 설치된 1998년부터 지난해까지 약 200만 건의 관련 신고를 처리했다. NCMEC는 민간 비영리기관이다. 사이버팁라인 역시 미 연방수사국(FBI) 이민세관단속국(ICE), 법무부 등 공공기관과 민간 사업자들의 적극적인 공조를 바탕으로 운영된다. 사업자는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같은 유명 업체를 비롯해 호스팅업체,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개별 기업도 포함된다. 이들은 아동음란물 게시 여부를 수시로 확인해 사이버팁라인에 관련 정보를 제공한다. 한국에서는 민간 사업자가 자신의 정보통신망에서 아동음란물을 발견하면 즉각 삭제하거나 차단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수사기관에 게시자를 신고할 의무는 없다. 삭제나 차단에 비해 신고가 훨씬 ‘적극적 조치’임이 분명하지만 업계에서는 개인 사생활 침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논란이 있다. 이 때문에 게시물을 일일이 들여다보는 대신 아동음란물의 디지털지문(Hash·해시)을 데이터베이스(DB)에 구축한 뒤 같은 게시물을 자동으로 걸러내는 방식으로 논란을 줄이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2008년 6건에 불과했던 아동음란물 단속 현황은 지난해 2418건으로 급증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인터넷 메신저를 통해 낯 뜨겁다 못해 충격적인 아동음란물이 오가고 있다. 아동음란물 피해자의 나이도 점점 어려지고 있다. 이를 막는 것은 수사기관의 노력만으로 힘들다. 미국처럼 민간 사업자의 노력이 절실하다. 하루빨리 한국판 사이버팁라인이 탄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끝까지 싸워야죠.” 표현은 비장했지만 휴대전화 속 목소리는 차분했다. 오히려 전화를 건 기자가 머쓱해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2년 전 경기 수원시에서 발생한 ‘오원춘 사건’ 피해자 A 씨의 남동생이다. 그와 통화한 것은 2일 서울고법의 판결이 내려진 다음 날이었다. 경찰의 늑장수사로 무고한 생명이 희생됐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한 유족들에게 2130만 원을 배상하라고 결정한 바로 그 판결이다. 재판부가 결정한 배상 금액은 처음 유족들이 제기한 3억6100여만 원은 물론이고 1심에서 결정된 1억800만 원에 비해서도 크게 줄어든 액수다. 이미 살해범 오원춘의 무기징역형 확정으로 유족들의 마음은 갈가리 찢긴 바 있다. 이번 판결은 아물지 않은 그들의 상처를 다시 짓이겼다. “돈 때문이 아니잖아요.” A 씨의 남동생은 속상해했다. 유족들이 재판에 매달리는 이유가 거액의 배상금 때문이 아니냐는 시선 때문이다. 이들을 절망에 빠지게 한 것은 돈이 아니라 경찰의 부실 수사 여부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재판부는 처음 피해자의 112 신고를 받은 경찰이 현장에 출동한 경찰에게 제대로 정보를 전달하지 않은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정보가 제대로 전달됐더라도 피해자가 무사히 구출될 가능성은 낮다고 봤다. “오원춘의 난폭성과 잔인성을 고려할 때 생존 상태에서 구출 여부를 장담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유다. 법조계에서는 이번 판결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이가 많다. 국가 배상 판례의 경우 의무 위반 여부를 규명한 뒤 책임의 비율을 따져 배상을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 변호사는 “문제가 된 경찰의 조치 가운데 일부가 피해자 사망과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다고 본 것 같다”며 “오원춘의 난폭성을 다소 과장되게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번과 달리 앞서 1심 재판부는 경찰의 조치와 피해자 사망의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다만 경찰이 모든 범죄를 완벽하게 막을 수 없다는 점에서 30%가량의 책임만 지운 것이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서영교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은 “피해자가 생존해 구출될 수 있었던 가능성 또한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며 재판부 결정을 반박했다. 2년 6개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A 씨의 유족들은 사건 전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A 씨 아버지는 사건 이후 더 이상 일을 못하고 있다. 피해자와 함께 수원에 살던 언니는 사건 직후 근처로 이사했다가 얼마 전 남편 아이들과 함께 아예 친정이 있는 고향으로 집을 옮겼다.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남동생은 상처 입은 가족들을 대신해 각종 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뛰어다니고 있다.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잖아요. 남은 가족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의지하며 살아가야죠.” A 씨 남동생의 바람은 그저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내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그들에게 더 잔인한 나라로 기억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화투판의 ‘쌍피’가 아니다. 여기서 쌍피는 ‘쌍방 피해’의 줄임말이다. 싸움이 발생했을 때 ‘누가 먼저냐’에 상관없이 일단 양측을 같은 피해자 신분으로 분류할 때 쓰는 말이다. 이를 가해의 기준으로 표현하면 ‘쌍방 폭행’이다. 고스톱 게임에서 쌍피는 유리한 판세로 이끄는 패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쌍피의 주인이 되면 이길 공산도 크다. 그러나 폭력사건에서 쌍피의 주인공이 되면 골치만 아프다. 시비를 건 사람과 함께 입건되고 원인 제공의 여부보다는 피해 정도의 크기에 따라 처벌받는 경우가 많다. 결국 진단서에 적힌 치료기간만 따져서 울며 겨자 먹기로 화해할 수밖에 없다. 만약 자기 일도 아닌 남의 싸움에 휘말린 사람들은 더 억울할 수밖에 없다. 17일 발생한 세월호 유가족 대리기사 폭행 사건과 관련해 경찰은 26일 현장에 있던 목격자 정모 씨(35)를 폭행 혐의로 입건했다. 세월호 참사 가족대책위원회 김형기 전 수석부위원장이 ‘쌍방 폭행’의 상대방으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졸지에 쌍피의 당사자가 된 정 씨 측은 “오히려 싸움을 말렸을 뿐”이라며 펄펄 뛰고 있다. 여론도 들끓었다. “집단폭행 말린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 대한민국 현실”이라는 비판이 줄을 이었다. “불의를 봐도 그냥 모른 척하라는 것”이라며 꼬집는 목소리가 많았다. 경찰은 절차상 불가피성을 강조하며 억울해하는 모습이다. 진위를 떠나 상대방(김 전 수석부위원장)의 주장이 있고 폐쇄회로(CC)TV 영상에서 정 씨의 폭행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정 씨의 폭행이 확인돼도 정당방위가 인정되면 무혐의 처분이 가능하다. 실제로 경찰은 올해 4월부터 이른바 ‘선한 사마리아인 규칙’으로 불리는 새로운 폭력사건 수사 지침을 마련해 시행 중이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강도를 당해 큰 부상을 입고 길가에 쓰러진 행인을 모두 지나쳐 갔지만 한 사마리아인이 나서서 도와줬다는 성경 내용이다. 정당방위는 △상대방의 침해행위에 방어하기 위한 것 △먼저 폭력을 휘두르지 않을 것 △폭력행위의 정도가 상대방보다 덜할 것 △흉기나 위험한 물건을 사용하지 않을 것 등의 요건을 갖추면 인정된다. 특히 새로운 지침에는 상대방의 피해가 자신보다 커도 사회통념상 필요한 한도 내의 행위로 인정되면 정당방위로 판단하도록 하고 있다. 이런 경찰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정 씨의 입건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여전히 불신이 가득한 편이다. 서로의 주장이 엇갈리고 증거마저 충분치 않은 경우 정당방위 입증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많은 사람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사건 초기에 소위 ‘봐주기’ 논란을 일으킨 경찰의 소극적인 모습도 불신을 부채질하고 있다. 정 씨가 억울한 쌍피의 당사자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는 남은 수사에서 경찰이 밝혀야 할 내용이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까지 거론할 필요도 없다. 그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지침에 있는 그대로 수사하면 될 일이다. 이성호 사회부 기자 starsky@donga.com}
어느 날 주택가 골목길에서 당신이 운전을 한다고 치자. 차량 2대가 나란히 가기 힘든 좁은 길이다. 이런 길에서 당신은 늘 시속 30km를 유지하는 ‘착한 운전자’다. 잠시 뒤 네 갈래 골목길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사고가 났다. 옆 골목에서 승용차 한 대가 쏜살같이 달려와 당신의 승용차 옆을 받은 것이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아 명함을 주고받고 헤어졌다. 하지만 박살난 범퍼와 전조등을 쳐다볼 때마다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당신을 더 열 받게 하는 것은 보험사의 사고 처리 결과다. 보험사는 과실의 책임을 정확히 절반씩 나눴다. 각각 똑같은 너비의 길을 운전하다 동시에 교차로에 진입했다는 이유에서다. 항의해도 어쩔 수 없다. 사고가 난 길은 제한속도가 무려 시속 60km이기 때문이다. 30km로 서행한 당신이나 59km로 달린 상대방이나 책임은 ‘오십 보 백 보’인 것이다. 사고에 이르지는 않아도 운전자라면 이와 비슷한 상황을 한두 번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분을 삭인 채 손해를 감수한다. 경찰이 서울지역 이면도로의 제한속도를 낮추기로 한 가장 큰 목적은 바로 이런 억울한 피해를 줄이는 것이다. 이는 억울한 보행자도 마찬가지다. 보행자가 차에 치였을 때 가해 차량의 과속 여부는 과실의 크기를 정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합의해도 교통사고처리특례법에 따라 과속이 확인되면 반드시 형사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현재 서울지역의 이면도로는 전체 도로 연장(8174km)의 80.2%인 6558km에 이른다. 이 글을 읽고 어디에 있는 길인지 두리번거릴 필요가 없다. 큰 도로로 둘러싸인 대규모 아파트 단지 등을 제외하고 내 집 앞, 내 회사 뒤편의 골목길이 대부분 해당된다. 그런데 이런 중앙선도 없는 좁은 길의 제한속도가 대부분 시속 60km에 맞춰져 있다. 경찰이 편도 1차로 이하 이면도로의 제한속도를 기본적으로 시속 30km로 낮추겠다고 하자 이런저런 말이 많다. 정부는 ‘손톱 밑 가시’를 빼자며 규제 완화에 나서는데 오히려 대못을 박고 있다는 것이다. 세수가 부족해지자 경찰이 제한속도를 낮춘 뒤 단속을 강화해 범칙금을 걷어 들이려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면도로의 교통 정체가 더 심해질 것이라는 불만도 적지 않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한속도를 낮춰도 단속은 지금보다 늘어나기 쉽지 않다. 현재 서울지역에서 교통 업무에 종사하는 경찰관은 약 2100명. 이 가운데 현장 단속에 투입되는 인력은 1100여 명이다. 도심 교통난 정리하기도 바쁜 마당에 이면도로의 속도위반까지 일일이 단속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또 경찰은 교통량이 많은 이면도로의 경우 정체가 심해질 것에 대비해 부분적으로 제한속도를 높일 방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운전자의 심리적 저항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제한속도를 낮추려는 곳은 도심 한가운데 왕복 8차로 도로나 고속도로가 아니다. 바로 내 아이가 뛰어노는 골목길이다. 그리고 이곳의 속도를 낮추는 것은 당신처럼 규정 속도를 지키는 ‘착한 운전자’를 위한 ‘착한 규제’일 뿐이라고. 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정부는 서울지방경찰청장에 구은수 대통령비서실 사회안전비서관(56)을 승진 내정하는 등 치안정감 3명을 포함한 경찰 고위직 인사를 29일 단행했다. 경찰청 차장에는 홍익태 경찰청 경무인사기획관(54), 경찰대학장에는 황성찬 대구청장(52)이 각각 승진 내정됐다. 구 신임 서울경찰청장은 충북 옥천 출신으로 충남고, 동국대 경찰행정학과를 졸업했다. 간부후보 33기다. 강신명 경찰청장의 뒤를 이어 청와대에서 사회안전비서관으로 근무했다. 홍 신임 차장은 전북 부안 출신으로 중앙대사대부고, 동국대 경찰행정학과를 졸업했으며 간부후보 32기다. 황 신임 학장은 경남 창원 출신으로 마산고를 졸업했으며 경찰대 1기다. 3명의 출신지역이 각각 충청 호남 영남으로 지역안배를 고려한 인사로 보인다. 나머지 치안정감 자리인 경기경찰청장과 부산경찰청장은 현 최동해 청장(54)과 이금형 청장(56)이 각각 유임됐다. 이번 인사로 치안정감 5명이 모두 강 청장보다 나이가 많은 것도 눈길을 끈다. 정부는 이날 치안정감 아래인 치안감 및 경무관급 인사도 단행했다.이성호 기자 starsky@donga.com}
흥겨운 축제였다. 순교자 124인을 복자(福者)로 선포하는 성스러운 의식이었지만 마치 축제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시복식 이야기다. 25년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찾았던 여의도광장의 분위기와는 분명히 달랐다. 물론 학생 시절 TV로 시청한 세계성체대회와 현장에서 지켜본 시복식의 느낌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 여부를 떠나 이날 현장을 찾은 많은 사람들은 비슷한 느낌을 안고 돌아갔을 것이다. 축제 같은 시복식의 배경에는 이른바 ‘파파(PAPA)’ 효과가 있다. 이는 온전히 프란치스코 교황의 힘이다. 카퍼레이드를 수시로 멈춰 가며 아이들의 이마에 입을 맞출 때마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단식 중인 세월호 희생자 유족의 두 손을 맞잡은 모습에서는 감동을 넘어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지난해 3월 즉위 이후 파격적인 행보로 화제를 모았던 교황이지만 한국에서 보여준 모습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경제효과에 대한 기대도 덩달아 커지고 있다. 지난해 7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브라질을 방문했을 때 브라질관광공사는 경제효과를 5000억 원대로 추산했다. 또 2008년 호주 시드니상공회의소는 교황 베네딕토 16세 방문 때 2500억 원의 효과를 예상했다. 아직 국내에서는 교황 방한의 경제효과를 분석해 발표한 곳이 없다. 다만 2005년 부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4700억∼6700억 원), 2009년 제주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2600억 원) 등 과거 국제행사에 비춰 볼 때 ‘상당한 효과’가 기대된다. 그러나 최근 온라인에서는 이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교황 방한의 경제적 효과를 언급한 의견이나 언론 보도에 누리꾼들의 뭇매가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역사적 방한의 의미를 돈으로만 따진다”는 것. 사실 국제행사나 외국 VIP 방한 때 경제효과를 예측하는 것은 흔한 편이다. 문제는 이런 분석을 거친 경제효과가 늘 가진 자들의 몫이었다는 점이 반감을 불러왔다. 보통 경제효과는 방한 일행의 체류비, 시설 투자비, 고용 창출 규모 등을 더해서 계산한다. 사실상 일반인이 체감하기 어렵다. 특히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대외 이미지 개선’은 서민들에게 뜬구름이나 다름없다. 이는 역설적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져온 경제효과에 더욱 기대를 걸게 하는 이유다. 수행원이나 외국인 신자의 방한 규모를 따지는 대신 교황의 메시지를 현실 속에서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소통과 치유, 물질주의를 멀리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하라는 교황의 말씀이 반영된 파파 효과가 어떤 것보다 한국 사회에 필요하다. 그래서 교황이 떠난 이후가 더욱 중요하다. 파파 효과가 한국 사회 곳곳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일은 결국 정부와 정치인들의 몫이다. 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신비주의’ 삶을 살아온 노(老)사업가가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춘다. 곧이어 국가 최고의 수사·정보기관이 총동원돼 그의 뒤를 쫓는다. 수천 명의 인력과 갖가지 첨단 장비가 투입된다. 가족 지인을 상대로 정부기관의 은밀한 감시와 추격전이 펼쳐진다. 그로부터 얼마 뒤 잠적했던 사업가는 야산에서 홀로 숨진 채 발견된다. 그러나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쯤 되면 얼추 시나리오의 얼개는 갖춘 것 같다. 여기에 최고는 아니지만 끈질긴 형사(또는 검사) 1명만 끼워 넣으면 어지간한 할리우드 영화 못지않아 보인다.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73)에 대한 수사 과정과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은 이처럼 한 편의 영화를 연상케 한다. 3개월에 걸친 유 전 회장의 도주 행각은 그 자체만으로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분위기가 느슨해질 듯하면 ‘조연’들이 차례로 잡히며 다시 긴장의 고삐를 조였다. 유 전 회장의 시신이 발견되자 도주 과정과 죽음을 둘러싼 갖가지 의혹이 제기됐다. 남은 건 의혹의 실체를 하나씩 찾아가는 영화 같은 전개였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의혹은 넘쳐났지만 실체는 허탈했다. 이 중에서도 새정치민주연합 박범계 원내대변인은 압권이었다. 그는 베일 속 ‘경찰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시신의 주인은 유 전 회장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사실이라면 영화 ‘식스센스’(주인공이 알고 보니 귀신이었다는…) 이후 가장 극적인 반전카드인 셈이다. 하지만 제1야당 원내대변인이 제기한 ‘가짜 시신’ 의혹은 불과 하루도 안 돼 뒤집혔다. 중요한 근거로 꼽았던 시신의 키 차이가 현장 수습 때 잃어버린 목뼈 3개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잘 만들어진 듯한 미스터리 영화가 졸지에 B급 코미디로 바뀐 셈이다.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시신 바꿔치기설, 정부의 암살설, 유병언 생존설 등이 퍼지고 있다. 호기심을 유발하는 ‘미스터리’라는 표현도 빠지지 않는다. 미스터리는 ‘도저히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이상야릇한 일이나 사건’(표준국어대사전)을 뜻한다. 하지만 지금 떠도는 의혹들은 대부분 과학적 분석을 통해 입증이 됐거나 어느 정도 설명이 된 내용들이다. 상당수는 근거 없는 소문에 불과한 셈이다. 이런 ‘가짜 미스터리’가 쏟아진 이유는 부실 공조 등 검경의 연이은 ‘헛발질’ 탓이 크다. 31일 경찰이 악의적 허위사실에 대한 엄정 대응 방침을 밝힌 것에 대해 많은 이들이 냉소를 보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이미 검증된 내용조차 부정하는 의혹들에 대해서는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법은 결국 수사를 통해 실체를 규명하는 것이다. 앞으로 남은 수사 과정에서 국민들이 공감할 정도의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면 엉터리 의혹들마저 진짜 역사 속 미스터리가 될 것이다.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73)의 장남 대균 씨(44)가 25일 경기 용인시의 한 오피스텔에서 경찰에 검거됐다. 5월 13일 A급 지명수배자 신분이 된 지 73일 만이다. 인천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25일 오후 7시경 경기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G오피스텔에 은신 중이던 대균 씨를 검거했다고 밝혔다. 또 그의 ‘호위무사’로 알려진 ‘신엄마’의 딸 박수경 씨(34)도 현장에서 함께 붙잡았다. 앞서 경찰은 오피스텔을 임차해 거주하던 하모 씨(35·여)도 체포했다. 하 씨는 대균 씨와 함께 조각가로 활동한 측근의 여동생이다. 경찰에 따르면 하 씨는 5월 초까지 오피스텔을 사용하고 한동안 비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대균 씨 주변 인물의 연고지를 수사하던 중 하 씨의 오피스텔에서 수도와 전기가 계속 사용되는 것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날 오후 5시경 오피스텔을 급습했다. 박 씨는 태권도 유단자이지만 검거 과정에서 두 사람 모두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경찰은 현장에서 도피자금으로 보이는 현금 약 1500만 원과 3600유로(약 496만 원)도 압수했다. 이들은 곧바로 인천경찰청 광역수사대로 압송돼 신원 확인을 거쳤다. 이어 인천지검으로 옮겨져 계열사 자금 횡령 등 구체적인 혐의 내용에 대해 조사를 받은 뒤 밤늦게 인천구치소에 수감됐다. 검찰은 27일 구속영장을 청구할 예정이다. 이에 앞서 검찰은 이날 오후 4시 “대균 씨가 자수할 경우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인 권윤자 씨(71)가 구속된 사정을 참작해 최대한 관용을 베풀어 처분하겠다”고 밝혔다. 검찰이 ‘선처’ 방침을 발표한 지 약 3시간 만에 대균 씨는 경찰에 붙잡히면서 자수할 기회를 놓쳤다. 대균 씨는 오피스텔 은신 기간 내내 휴대전화나 컴퓨터를 전혀 사용하지 않아 아버지 유 전 회장의 사망 사실을 몰랐다가 검거 직후 경찰로부터 처음 전해 들었다. 한편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25일 오전 서울 양천구 신월동 서울분원에서 유 전 회장 시신의 감정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감정에서 유 전 회장의 신체 특징인 금니, 왼손가락 일부 변형 등이 확인됐다. 사인의 하나로 의심됐던 독극물은 검출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청산가리나 농약, 뱀독 등 독극물에 의한 타살이나 음독자살 가능성은 배제됐다. 그러나 국과수는 시신의 부패 정도가 워낙 심해 질식사나 지병, 외부 충격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확인하지 못했다. 강신몽 가톨릭대 법의학교실 교수는 “현장이 훼손되지 않았다는 조건에서 사진만 놓고 볼 때 저체온에 따른 사망으로 볼 수 있다”며 체온 하강에 따른 자연사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했다.이성호 starsky@donga.com·강은지인천=차준호기자}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 제1차관을 지낸 한만희 서울시립대 국제도시과학대학원장(58·사진)이 24일 오후 5시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클럽에서 열린 한국교통문화포럼 임시총회에서 신임 회장으로 선출됐다. 임기는 2년이다.}
이른바 ‘매일기록부’가 세간의 화제다. 매일기록부는 올해 3월 발생한 서울 강서구 재력가 살인사건의 피해자 송모 씨(67)가 남긴 장부다. 현직 서울시의원의 살인교사 혐의로 주목받던 사건은 장부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정관계 로비 의혹으로 번지고 있다. 이미 현직 검사의 이름이 확인됐고 지역 정치인, 전현직 경찰관, 구청 공무원, 세무서 직원 등의 이름도 거론되고 있다. 이제 송 씨의 장부는 ‘판도라의 상자’가 됐다. 컴퓨터 문서작성 프로그램인 ‘아래아한글’이 개발된 지 25년이 됐지만 송 씨는 오랜 기간 깨알 같은 손글씨로 장부를 채웠다. 복사비 2000원, 주차비 1만2000원, 아귀탕집 4만2000원 등 자신과 관련된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적었다. 보통 이런 장부를 적는 사람은 존재 자체를 숨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잘못하면 자신의 은밀한 일상이 고스란히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밀장부’라는 이름이 당연하게 붙는다. 하지만 송 씨의 매일기록부는 달랐다. 지역 정치인 A 씨는 “송 씨가 장부를 쓰는 건 소문이 나서 다들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10년 전쯤 송 씨가 명절 떡값을 가져 왔기에 ‘당신이 장부 쓰는 걸 다 알고 있는데 어떻게 받냐’며 돌려보냈다”고 털어놨다. “장부가 없었으면 받으려 했느냐”는 질문에 A 씨는 “그건 아니고 ‘장부 때문에 더욱 안 된다’는 취지였다”고 해명했다. 송 씨 지인들에 따르면 매일기록부가 작성되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와 가까운 사람이라면 장부의 존재를 알아챌 수 있는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을 것이다. 송 씨 자신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장부에 대해 묻는 주변 사람들에게 ‘치부책(置簿冊)’이라며 직접 설명했다고 한다. A 씨의 말대로라면 적어도 10년 전 무렵부터 강서구 지역에서는 매일기록부의 존재가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셈이다. 물론 A 씨의 말이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송 씨의 남다른 습관을 미리 알았던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이 장부에 오르내리는 것을 사전에 막으려 했을 것이다. 짐작하건대 현재 거론되는 장부 속 인사들은 아예 장부의 존재 자체를 몰랐거나 알면서도 돈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는 살인교사 혐의를 받고 있는 김형식 서울시의원도 있다. 금고 속에 있던 장부가 세상으로 나오면서 이 가운데 어떤 이는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을까 밤잠을 설칠지도 모른다. 또 다른 이는 공소시효(뇌물수수 혐의는 5년이다)를 계산해보고 가슴을 쓸어내렸을 수도 있다. 아직까지 수사를 맡고 있는 검찰과 경찰은 모두 엉거주춤한 모습이다. 살인교사 혐의 입증이 더 시급하다고 입을 모으면서도 자칫 제 살 도려낼 가능성을 걱정하는 모습도 엿보인다. 사실 장부의 주인이 없기 때문에 진실 규명이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과거 수많은 리스트(장부) 수사처럼 덮고 가기에는 지금 떨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아 보인다.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실연이나 사별(死別)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사람들은 ‘망각(忘却)’을 꼽는다. 아픈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망각은 신의 선물’이라는 말까지 있을까. 특히나 요즘처럼 정보가 쏟아지는 세상에서는 적당한 망각이 경쟁력이 될 수 있다. 머릿속을 잘 비워야 돈이 되는 좋은 정보를 채워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점에 가면 이런 망각의 능력을 예찬하는 책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망각이 항상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개인의 망각이 더해져 집단망각으로 발전할 경우 위험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세월호 침몰은 바로 집단망각이 초래한 참사다. 한국 사회는 1993년 292명이 숨진 서해훼리호 침몰을 겪고서도 깡그리 잊고 있다가 판박이 같은 사고를 당했다. 기억은 몇 명 안 되는 생존자와 유족들에게 남겨진 몫이었다. 집단망각의 대가는 고작 추모비(또는 추모공원)와 백서였다. 집단망각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서해훼리호 사고 이후에도 한강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화성 씨랜드 화재, 대구지하철 방화 등 참사가 이어졌다. 참사의 기억은 짧게는 2, 3개월에서 길어야 1, 2년을 가지 못했다. 그저 기념일 챙기듯 5주기 10주기 때 참사의 옛 기억을 떠올리며 애써 망각을 부인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망각은 습관을 넘어 ‘불치의 병’으로 자리 잡았다. 집단망각이 가져오는 폐해는 또 있다. 선거 때만 국민을 찾는 한국의 정치다. 국민들은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의 공약(公約)을 놓고 갑론을박한다. 그러나 몇 년 뒤 이것이 공약(空約)으로 바뀌어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파렴치범 수준의 잘못이 아니라면 어지간한 정치인의 실수는 기억 속에 남겨놓지 않는다. 많은 국민이 한국의 후진적 정치문화를 비판하지만 이처럼 유권자들의 망각 탓도 크다. 기억해야 올바른 선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4일 치러졌다. 세월호 참사의 여파로 후보들은 앞다퉈 안전공약을 내걸었다. 공약을 지키는 것은 당선자들의 의무이지만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국민들의 몫이다. 지금 세월호 희생자 유족과 실종자 가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망각이다. 한 실종자 가족은 “선거 같은 게 없었으면 좋겠다. 앞으로 월드컵, 인천아시아경기대회도 열리는데 세월호가 잊혀지면 어떡하냐”며 하소연했다. 이들에게 세월호가 잊혀진다는 것은 단순히 관심이 옅어지는 것이 아니다. 희생된 가족과 자신들의 존재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여긴다. 그동안 수많은 참사 뒤 우리 사회는 집단망각을 선택했지만 생존자와 유족들은 설 곳을 잃고 스스로를 ‘기억의 방’에 고립시킨 채 지내왔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의 망각문화를 다시 한 번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 또다시 길고 긴 망각의 시간을 되풀이할지는 우리 모두에게 달렸다.이성호 사회부 기자 starsky@donga.com}
4일 치러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6·4지방선거)에서 전국적인 관심을 모은 곳이 바로 경기 안산시다. 단원고등학교가 있는 안산은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은 곳. 이 때문에 세월호 참사가 안산지역 표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정치권은 물론 일반인의 이목이 집중됐다. 안산은 반월공단을 중심으로 중소기업이 많은 곳이다. 호남 출신 주민들의 비율도 다른 곳에 비해 높은 편이다. 이 때문에 역대 선거 때마다 당선 여부와 상관없이 야권 후보들이 선전했던 곳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개표 초반 야권 후보들이 앞서갔다. 경기도지사 선거의 경우 안산에서는 5일 오전 2시 현재 김진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가 남경필 새누리당 후보를 6%포인트 안팎의 차로 앞서갔다. 같은 시각 경기도 전체에서 남 후보가 3%포인트가량 앞서는 것과 정반대다. 안산시장 선거에서는 제종길 후보(새정치민주연합)가 38.32%로 새누리당 조빈주 후보(38.19%)를 근소하게 앞섰다. 새정치연합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현 시장 출신 김철민 후보의 득표율(22.23%)을 감안하면 야권 지지표가 60%를 넘는 셈이다. 투표율만 놓고 보면 세월호 참사의 영향은 크지 않아 보인다. 6·4지방선거 전국 투표율은 56.8%. 안산의 투표율은 단원구 47.8%, 상록구 48.3%로 전국 평균보다 8∼9%포인트 낮았다. 5회 지방선거 때도 단원구와 상록구의 투표율은 각각 45.8%, 46.6%로 비슷했다. 세월호 참사의 영향으로 야권 지지자들이 대거 투표에 나설 것이라는 예측은 일단 빗나간 셈이다. 일부에서는 안산 지역에 많이 사는 중소기업 근로자들이 선거일에도 출근했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실제로 역대 선거에서 안산지역 투표율은 전국 평균을 크게 밑돌았다. 하지만 2012년 12월 제18대 대통령선거 때 단원구와 상록구의 투표율은 각각 72.2%와 72.3%로 전국 투표율(75.8%)에 근접했다. 세월호 참사가 오히려 안산시민의 정치 무관심을 키운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단원구 고잔동에서 자영업을 하는 조모 씨(51·여)는 “그런 일(세월호 참사)이 있긴 했지만 막상 선거에 사람들의 관심이 많지 않아 보였고 실제 참여도 저조한 것 같다”며 “일 때문에 투표 못했다는 사람도 꽤 있었다”고 말했다.이성호 starsky@donga.com안산=곽도영·최혜령 기자}
잇따른 참사로 대한민국이 패닉(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28일 전남 장성군 삼계면 효실천사랑나눔요양병원에서 난 화재로 21명이 숨졌다. 대부분 치매 노환 등으로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었다. 병원 폐쇄회로(CC)TV를 확인한 경찰은 80대 치매 환자 김모 씨(82)를 유력한 방화 용의자로 지목하고 조사하고 있다. 이날 서울에서도 아찔한 사고가 이어졌다. 오전 10시 51분경 지하철 3호선 매봉역을 출발해 도곡역으로 진입하던 오금행 전동차 안에서 불이 났다.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 결과에 불만을 품은 승객 조모 씨(71)가 시너 11병과 부탄가스 4통 등 인화물질이 든 가방에 갑자기 불을 붙였다. 마침 같은 칸에 탔던 서울메트로 직원 권순중 씨(47)가 소화기를 꺼내 불을 껐고 다른 승객이 119에 신고하면서 초기 진화에 성공해 부상자는 1명에 그쳤다. 지난달 16일 세월호 참사에 이어 2일 지하철 2호선 전동차 추돌, 26일 경기 고양종합터미널 화재 등 연이은 대형 재난에 국민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주부 박혜진 씨(40)는 “무엇보다 어디가 안전하고 어디가 위험한지 모른 채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 무섭다”고 말했다.장성=조종엽 jjj@donga.com / 이건혁 기자 ▼ 공중시설 점검하라 ▼백화점-콘서트장 등도 안심 못해… 방화셔터-비상구 원점서 재점검을28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백화점 의류매장. 화재 때 불길과 연기를 차단하는 방화셔터 바로 아래에 마네킹들이 서 있었다. 식품매장 내 방화셔터 자리에는 아예 판매시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내 체조경기장은 가수들의 콘서트 무대로 인기가 많다. 23∼25일 국내 최고 인기 남성그룹 ‘엑소’의 콘서트도 여기서 열렸다. 그러나 이곳은 전문 공연장이 아니다. 한번에 최대 1만5000명의 관객이 들어차지만 객석 측 출입구는 단 세 곳이다. 개방되는 문은 폭 3m짜리 7개뿐이다. 사고가 났을 때 탈출이 쉽지 않고 2차 사고마저 우려된다. 28일 둘러본 서울 도심의 한 요양병원 복도에는 각종 재활기구와 의료장비가 쌓여 있었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이 부축을 받거나 휠체어를 이용해 대피할 때 장애물이 될 수 있다. 크고 화려한 디자인의 다중이용시설이 속속 등장하고 고령화로 인해 요양시설이 급증하고 있지만 안전의식이나 정부의 점검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동호 인천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다중이용시설 안전등급제를 도입해 이용객들이 안전한 곳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고 제안했다.김범석 bsism@donga.com·임희윤 기자 ▼ 국민들도 훈련하자 ▼재난대피훈련 대부분 대충대충… 내 안전 지키려면 실전같이 해야“불이야”를 외치고 비상벨을 누른다→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대피한다→물에 적신 담요나 수건으로 몸과 얼굴을 감싼다→연기가 많을 때는 낮은 자세로 이동한다…. 소방방재청이 밝힌 화재 발생 시 행동 요령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정도야 다 아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그러나 시뻘건 불길과 매캐한 유독가스에 한 번이라도 맞닥뜨린 사람들은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종이 속 요령이 몸에 배지 않은 탓이다. 방화 설비를 제대로 갖춰도 이를 제대로 활용할 줄 모르면 무용지물이다. 미리 내용을 알려주고 실시하는 ‘친절한 훈련’은 진짜 재난 때 목숨을 위협하는 독이 된다. 방화셔터 스프링클러의 수와 작동 여부나 따지는 형식적 점검 대신 유독가스의 움직임과 속도, 대피자의 이동 속도를 시뮬레이션하고 이를 바탕으로 진짜 훈련을 해야 한다. 정재희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세월호 참사로 안전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지만 현실에서 개개인이 노력하고 있는지 묻는다면 대답은 ‘아니다’일 수밖에 없다”며 “각자의 몸에 배지 않고서는 안전 매뉴얼이나 수칙은 절대로 지켜질 수 없다”고 말했다.이성호starsky@donga.com·신광영 기자}
“매표소 앞에 서 있는데, 갑자기 천장이 까매졌어요. ‘정전됐나’ 싶어서 둘러보는데 뒤쪽 에스컬레이터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어요.” 충남 서산에 있는 기독교 대안학교 ‘헤브론원형학교’를 다니는 김서준 군(16)은 주말을 집에서 보내고 학교에 가기 위해 26일 오전 경기 고양종합터미널을 찾았다. 무심코 김 군이 시계를 본 건 오전 9시 2분. 바로 그때 솟아오르는 불길을 보고 김 군은 옆에 둔 짐을 챙길 새도 없이 건물 밖 버스승차장으로 뛰어나갔다. 곧 건물은 검은 연기로 휩싸였다. 지하 1층 푸드코트의 CJ푸드빌 리모델링 공사현장에서 발생한 불길은 순식간에 2층까지 퍼졌다. CJ푸드빌은 올해 초 고양종합터미널 지하 1층 임대사업자로 선정돼 종합 관리해 왔으며 이곳에 자사 외식 브랜드뿐만 아니라 미용실 등 여러 가지 편의시설을 입점시켜 7월부터 영업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지하 5층, 지상 7층의 고양종합터미널은 연면적 14만6000여 m² 규모로 시외버스 터미널을 비롯해 영화관과 대형마트 등이 입점한 대형 다중이용시설이다. 불이 났을 때는 지하 2층에 있던 대형마트 홈플러스가 영업을 막 시작하려던 시간이라 손님이 거의 없었고 터미널을 이용하는 출근 승객들도 대부분 빠져나간 뒤였다. 많은 이용객이 붐비는 시간대였다면 엄청난 대형 참사로 번질 뻔했다. 세월호 침몰 사고의 영향인 듯 시민들은 “불이야” “피해”라고 서로 외치며 대피를 독려했다. 경기도소방재난본부는 이날 버스터미널과 대형마트, 영화관 등 건물 안에 모두 700여 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사상자를 제외한 650여 명이 검은 연기를 보자마자 신속히 건물 밖으로 대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화재 직전인 오전 9시 1분경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3층 주차장으로 가던 문용찬 씨(33)는 지하 2층에서 덜컹거리며 연기가 조금씩 들어왔고, 지하 3층에 도착해 문이 열렸을 때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뿌연 연기가 들어왔다고 했다. “무작정 ‘닫힘’ 버튼을 눌렀어요. 지상 3층에 도착해서 연기와 함께 기침하며 주차장과 연결된 통로로 뛰어나왔습니다.” 문 씨가 엘리베이터에서 연기와 함께 뛰어나올 땐 3층에서 공사 작업을 하던 인부들이 어리둥절해하며 장비를 챙기고 있었다. 화재 경보가 울리며 대피 방송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화재의 경우 ‘화재가 났으니 대피해 주십시오’란 안내 방송이 제때 나와 피해가 더 커지지 않았다. 2층 대합실에 앉아 있던 서지숙 씨(47·여)는 “녹음된 여자 목소리로 ‘화재가 났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주변에 앉아 있던 20여 명이 함께 외부로 뛰어나갔다”고 했다. 스프링클러도 작동해 지하 2층 매장에 있던 사람들 중엔 천장에서 물이 떨어져 뛰어나온 이도 있다. 건물 5∼7층에 있는 메가박스에서 영화를 보던 관객들은 비상등이 켜지고 타이어 타는 냄새가 퍼지자 “불이야”를 외쳤고, 직원들이 관객들을 대피시켜 피해는 없었다. 메가박스 측에 따르면 오전 9시 전체 8개 관(1224석) 중 2개 관에서 30여 명이 영화를 보던 중 9시 5분에 화재 사이렌이 울렸다. 지하 2층 홈플러스에선 보안요원들이 “대피하라”고 안내했다. 외부 인도와 연결된 지상 1층, 버스승차장과 연결된 지상 2층, 터미널 뒤편 주차장과 연결된 지상 3층, 옥상 공원과 연결된 지상 5층 등 건물 구조가 비교적 대피하기 수월한 상태였다는 분석도 있다. 다만, 지상 2층 매표소 사무실 안과 화장실에서 사망자가 발생한 데 대해 소방 관계자는 “(사망자가) 매표소 안쪽에 있었고, 화장실에 있던 피해자는 유독가스를 피해 피신하다 고립된 것 같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면적이 워낙 넓고 연기가 순식간에 퍼져 출구를 찾는 데 애를 먹은 시민도 적지 않았다. 오전 9시 15분경 버스터미널과 연결된 백석역에서 내린 회사원 이혁재 씨(28)는 “지하철 내부에 연기가 가득해 카드로 찍고 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앞이 안 보였다”고 했다. 이 씨는 목이 아프고 어지러워 병원을 찾았다. 이승연 씨(34·여)도 2층 대합실에서 가방 정리를 하다 조금 늦게 나오며 출구를 찾아 헤맸다. 이 씨는 “출구 방향을 봐놓지 않았으면 나오는 데 더 시간이 걸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씨의 옷과 얼굴에는 그을음이 묻어 있었다. 사망자와 부상자들은 일산병원, 일산백병원, 명지병원, 일산동국대병원 등으로 나뉘어 이송돼 치료를 받았다. 고양=강은지 kej09@donga.com·박성진 기자 ◇사망자 명단 △이강수(50·KD운송 고양권 지사장) △김선숙(48·여·KD운송 터미널 매표소 직원) △김점숙(56·여) △김탁(37·중국인) △신태훈(46) △ 정연남(49·여) △이일범(65)}
세월호 침몰로 300여 명의 목숨을 잃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현장의 안전불감증은 여전했고 또 아까운 생명들을 앗아갔다. 26일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백석동 고양종합터미널에서 “불이 났다”는 신고가 소방서에 접수된 것은 오전 9시 2분. 불은 출동한 소방관들에 의해 9시 29분경 진화됐다. 그러나 27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7명이 숨지고 4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망자는 모두 유독가스에 질식했다. 사고가 난 고양종합터미널은 버스 승하차 시설을 중심으로 아웃렛 대형할인마트 음식점 영화관으로 이뤄진 복합건물로 지하 5층, 지상 7층 규모다. 지하 1층에서는 대형 푸드코트(CJ푸드빌) 입점을 위한 가스 수도 등 기초시설물 공사가 한창이었다. 불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됐다. 경기소방재난본부와 경기지방경찰청은 공사 현장에서 진행 중이던 용접 작업을 사고 원인으로 보고 있다. 용접 불티가 액화천연가스(LNG)를 공급하는 배관에 튀면서 불이 붙었고 다시 인화물질로 옮겨지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장 근로자들은 도시가스가 완전히 차단됐는지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공사현장에서 용접 작업은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다. 올해 2월 16일 서울 송파구 제2롯데월드 47층에서의 화재도 용접 과정에서 일어났다. 2008년 12월 7명이 숨진 경기 이천시 서이천물류창고 화재의 주범도 용접 불티였다. 불이 나더라도 방화시설만 제대로 작동되면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소방관계자는 “지하 1층 공사현장의 방화셔터가 대부분 제거됐거나 작동하지 않았다. 지상층에서도 일부 작동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곳의 방화셔터는 3월 말 실시된 자체 점검에서 특별한 이상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지하에서 발생한 유독가스가 막힘 없이 지상으로 올라가면서 지하 1층 희생자 외에 2층에서만 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또 고양종합터미널은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정부 당국이 전국 주요 시설에 대해 실시하고 있는 ‘총체적 안전점검’ 대상에서 제외됐던 것으로 드러났다.이성호 starsky@donga.com·조영달 기자}
19일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는 한마디로 ‘적폐(積弊·오랫동안 쌓인 폐단)’를 향한 전쟁 선포였다. 해양경찰청의 해체, 안전행정부 및 해양수산부의 조직·기능 축소 등은 가히 파격적이다. 관피아(관료+마피아) 등 퇴직 공직자의 낙하산 취업에 대한 대대적인 ‘수술’ 방침도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여기에 박 대통령은 사회 전반의 고질적 병폐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개혁을 강조했다. 이쯤에서 생각나는 또 다른 전쟁이 있다. 노태우 정부 중반 무렵에 선포된 ‘범죄와의 전쟁’이다. 당시 노 대통령은 임기 3년차인 1990년 10월 폭력조직에 대한 일제 소탕을 지시했다. “헌법이 갖고 있는 모든 권한을 동원하겠다”며 불법과 무질서를 추방하고 과소비 투기 퇴폐 향락까지 고치겠다는 거였다. 그야말로 국가 개조 수준의 내용이었다. 물론 두 전쟁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기는 어렵다.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될 무렵은 군사정권에 대한 불신, 국군보안사령부(현 국군기무사령부)의 민간인 사찰 등으로 대통령 지지율이 크게 떨어졌을 때였다. 이 때문에 다분히 ‘정치적 판단이 고려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정부는 범죄와의 전쟁을 통해 대부분의 폭력조직이 와해되고 흉악범은 줄어들었으며 퇴폐·향락 분위기가 해소됐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국민의 공감을 얻지는 못했다. 실제로 범죄와의 전쟁 선포 2년 뒤 살인 등 5대 범죄는 이전에 비해 6%가량 줄어드는 데 그쳤다. 검거된 폭력조직원의 절반은 1년 만에 집행유예 등으로 풀려났다. 실적 쌓기용 수사에서 비롯된 당연한 결과였다. 그때도 세월호 참사 때처럼 뿌리 깊은 민관 유착 의혹이 불거졌다. 1991년 3월 국회 내무위원회는 슬롯머신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불법이 적발돼 허가가 취소된 경우 같은 장소에서 영업을 재개할 수 있는 제한기간을 3년에서 2년으로 줄인 것이다. 승률 조작 등을 확인하기 위해 슬롯머신 기계를 수거하는 조항도 삭제했다. 폭력조직의 개입 의혹을 가장 많이 받던 슬롯머신업계를 오히려 도와준 것이다. 이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지 불과 5개월 만의 일이었다. 전투가 한창인데 이적(利敵)행위를 한 셈이다. 이처럼 ‘적폐’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어지간한 공격에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공격의 칼날이 무뎌질 때까지 잠시 동안 몸을 숨길 뿐이다. 그동안 여러 정부가 수많은 불법·비리와의 전쟁에서 번번이 패한 이유이기도 하다. 박근혜 정부가 적폐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앞서 치러진 범죄와의 전쟁 등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를 통해 적폐의 위력을 절감했을 것이다. 이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4대악 척결’ ‘안전한 대한민국’ 같은 공약도 공염불에 그칠 수밖에 없다. 적폐와의 전쟁에서 또다시 무릎 꿇지 않으려면 대통령의 말대로 ‘명운(命運)’을 걸어야 한다.이성호 사회부 기자 starsky@donga.com}
“많은 기대를 안고 왔는데 결과적으로 아쉽다.” 16일 청와대를 찾은 세월호 참사 유가족 대표단은 박근혜 대통령과의 면담을 이렇게 평가했다. 대표단은 면담 후인 오후 5시 40분경 청와대 앞 분수대 근처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대표단은 “늦은 감이 있지만 면담을 할 수 있게 해준 대통령과 청와대에 감사드린다”고 했다. 그러나 긍정적 표현은 사실상 이게 전부였다. 어렵게 성사된 면담이라 유가족들의 기대가 컸지만 이번에도 정부의 호응은 이에 미치지 못한 셈이다. 정부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가 여전히 크다는 것만 다시 확인됐다.○ 진상 규명 방식에 온도 차 이날 면담은 오후 3시 50분부터 5시 30분까지 1시간 40분간 이뤄졌다. 대표단은 이 자리에서 세월호 관련 특별법 제정을 요청했다. 박 대통령은 “저도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한다”며 “검경 수사를 하고 있는 것 외에도 진상규명을 하고 특검도 해야 한다”고 공감을 표시했다. 박 대통령이 ‘세월호 특검’에 공감을 표시함에 따라 국회에서 특검 논의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표단이 요구한 추가적인 진상조사 방안에 대해 박 대통령은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현재 유가족들은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춘 진상조사기구가 이번 참사의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날 면담에서도 대표단은 “진상조사위원회에 충분한 조사권이 주어져야 한다. (필요하면) 민간인에게도 수사권을 일시적으로 부여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박 대통령은 “과연 그런 방식이 효과적일까요?”라고 반문하며 “검찰이 열심히 수사하고 있으니 수사 과정을 유족과 공유하고 유족 뜻이 반영되게 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세월호 사건 정치적 이용 막아 달라” 대표단은 구조 초기 해양경찰청의 부실한 대응과 해경에 대한 철저한 조사 등을 요청했다. 박 대통령은 유가족들의 추모비 건립 요청과 관련해 “추모비라든가 추모공원이라든가 많은 의견을 들었다”며 “유가족들께서 더 많은 의견을 달라”고 답했다. 또 박 대통령은 “4월 16일 세월호 사고가 있기 전과 그 후의 대한민국이 완전히 다른 나라로 태어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고귀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또 대한민국이 새로 태어날 수 있도록 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려고 한다”고 말했다. 대표단은 또 “여야가 세월호 사고를 자꾸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는데 그런 것 좀 안 했으면 좋겠다. 돈벌이 수단으로 하려는 사람도 많다. 대통령께서 그런 것을 막아주고 여야 정치인들에게도 꼭 당부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대표단은 “부정부패를 막을 수 있는 기관을 별도로 세워 달라”는 요청도 했다. 이에 박 대통령은 “제가 앞장서서 대한민국이 부패나 기강 해이, 유착과 같은 이상한 고리를 끊어낼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한 유가족은 “아이들이 공부했던 교실에 가서 한 번이라도 ‘너희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다. (너희들은) 영웅이다’라고 말씀해달라”고 요청했고, 박 대통령은 “알았다”고 답했다.○ 매끄럽지 못한 면담 진행 과정 유가족들은 면담 진행 과정에서부터 불만이 적지 않았다. 면담은 전날 오후 주광덕 대통령정무비서관을 세월호 사고 가족대책위원회로 보내면서 추진됐다. 당초 주 비서관은 “면담을 비공개로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면담 추진이 성급하게 이뤄진 데 대해서는 “대통령의 일정상 보안 문제 등으로 불가피했다”며 유가족들의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날 오전 유가족들은 회의를 거쳐 가족대책위 임원진과 경기 안산시 단원고 반 대표까지 포함해 모두 17명의 대표단을 구성해 면담을 진행하되 언론에 공개할 것을 청와대에 요청했다. 이어 변호사도 면담에 함께 참여하기를 원했지만 청와대는 유족들을 만나는 자리라며 거절했다. 진행 과정부터 매끄럽지 않으면서 유가족들은 면담 내용에도 크게 호응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면담 후 청와대와 유가족 측은 각자 대화 내용을 발표했다. 이어 청와대 측은 오후 8시 40분경 유가족 측의 양해를 얻어 전체 대화 내용을 추가로 공개했다. 가족대책위 법률자문을 맡은 대한변호사협회 소속 박종운 변호사는 “앞으로 대통령과 유가족들이 다시 진솔한 대화를 나누며 충분한 시간을 두고 협의했으면 좋겠다”면서 “며칠 후 담화에서 기대했던 답변이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박 대통령은 면담 도중 눈물을 흘렸고,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도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이재명 egija@donga.com·이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