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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 출판사인 김앤김북스가 지난해 8월 번역 출간한 ‘헨리 키신저의 외교’(원제 Diplomacy)는 어렵게 세상에 나왔다. 외교의 대가 키신저가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은 이 책은 약 9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내용도 난해해 1994년 발간 이후 30년 가까이 국내에 소개되지 못했다. 그러다 현직 외교관인 김성훈 씨가 3년간 공을 들인 끝에 최근에야 번역서가 나올 수 있었다. 최근 키신저 별세를 계기로 이 책은 3쇄를 찍으며 독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1970년대 미중 수교의 주역으로 여러 차례 한국 대통령과 만난 저자가 쓴 책답게 미중 갈등이 격화된 가운데 최근 북한의 무력도발로 긴장이 높아진 한반도 정세에도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남북 관계에 큰 파장을 몰고온 미중 화해는 1960년대 사회주의 대국 소련과 중국의 이데올로기 갈등이 국경 분쟁으로 번지면서 가능했다는 게 키신저의 시각이다. 중국 입장에서 소련의 안보 위협이 미국보다 커져 미국이 ‘쐐기전략(wedge strategy·경쟁국과 그 동맹국의 관계를 벌리기 위한 이간책)’을 쓸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1972년 2월 방중한 닉슨은 저우언라이에게 “소련이 미국의 서유럽 동맹국들에 맞서 배치한 군대보다 더 많은 병력을 중소 국경에 배치했다”고 강조했다. 닉슨은 또 “미중 양국이 각자의 동맹국(남·북한)을 억지하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미중 양국이 각각 한미동맹과 조중동맹을 통해 남북한의 ‘군사 모험주의’를 억제하자는 얘기였다. 실제로 당시 중국은 미국과 합의한 ‘한반도 현상 유지’를 위해 북한의 무력도발을 억제했다. 예컨대 북한은 미중 화해 국면을 맞아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을 일으켰지만, 중국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대미 위협 인식을 둘러싼 북-중의 견해차는 양국 사이에 긴장을 초래해 북한은 외교적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예를 들어 허담 북한 외상은 1973년 2월 방중해 미국과의 접촉 가능성을 타진해 달라고 저우언라이에게 요청했지만, 그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북한과의 직접 대화에 부정적이던 미국 역시 허담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반대로 미중 갈등이 심화되면서 대미 위협 인식을 고리로 한 북한의 대중(對中) 외교정책은 힘을 받게 됐다. 2018년 김정은과 트럼프의 싱가포르 정상회담처럼 북-미 양자 대화는 중국의 고립감 혹은 조바심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미중 데탕트 국면과는 반대로 중국이 북한의 무력도발을 억제할 유인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실제로 북한은 중국의 한반도 비핵화 방침에도 불구하고 2006년 이후 여섯 차례나 핵실험을 벌였지만, 안정적인 북-중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점증하는 미중 갈등의 근원에는 냉전 시절 소련에 대한 인식처럼 미국이 중국의 사회주의 독재체제에 품고 있는 혐오가 자리잡고 있다. 이는 키신저의 시각에서 미국의 도덕주의 외교원칙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중소 갈등 같은 돌발변수가 나타나지 않는 한 미중 갈등이 쉽사리 해소되기 어렵다는 얘기다. 바꿔 말하면 미중 데탕트로 억제됐던 북한의 ‘군사 모험주의’가 미중 갈등과 더불어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북한의 최근 해상 무력도발을 예의주시해야 하는 이유다.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미중 갈등이 격화되는 가운데 북한의 무력도발로 한반도에서 긴장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북한은 5일 서해 백령도, 연평도 부근 북방한계선(NLL) 북쪽 해상에 약 200발의 포탄을 쏜 데 이어 6일에도 연평도 북서쪽 해상에 60여 발을 발사했습니다. 앞서 김정은은 노동당 회의에서 “남조선 전 영토 평정을 위한 대사변을 준비하라”고 위협했죠.역사적으로 미중관계는 남북관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컨대 미중관계가 원만할 때는 북한의 군사 모험주의가 중국에 의해 억제됐습니다. 반대로 미중의 상호 불신이 컸던 1950년대에는 북한이 남침을 감행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요.이를 이해하려면 한국전쟁에서 약 4만 명을 잃은 미국이 20년도 안 돼 중국과 전격적으로 손잡은 배경부터 짚어야 합니다. 미중 데탕트 주역으로 최근 별세한 헨리 키신저(1923~2023)의 시각에서 한국전쟁의 원인을 분석한 13회에 이어 이번에는 당시 전쟁이 소모적인 제한전으로 흐른 배경과, 미중수교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때 역사를 잘 들여다보면 현재의 극심한 미중갈등과 이에 따른 한반도의 영향에 대해 의미 있는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키신저의 대표작 ‘Diplomacy(1994)’를 비롯한 국내외 문헌들을 참고했습니다.)美 도덕주의 원칙이 제한전 수렁으로제2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으로 일관한 미국은 국익보다 도덕주의 외교원칙에 입각해 한국전쟁에 개입합니다(시리즈 참고·) 미국 관점에서 지정학적 이익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한반도에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본 공산 진영의 예상을 뒤엎는 행보였죠. 이른바 윌슨주의 도덕 원칙에 따라 참전을 결정한 만큼 미국의 전쟁 수행 방식도 이런 맥락에서 결정됩니다.1, 2차 대전과 같이 특정국들끼리 군사동맹을 맺어 대항하는 유럽식 세력균형을 혐오한 미국은 우드로 윌슨,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등을 거치며 집단안보(collective security)를 중시합니다. 편을 갈라 싸우기보다는 무력 침략 등 국제법을 위반한 국가와 맞서기 위해 나머지 국가들이 힘을 합쳐 안보를 보장하겠다는 거였죠. 이는 한국전쟁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미국은 즉각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고 이틀 뒤 유엔의 대북 군사제재를 규정한 ‘안보리 결의안 제1511호’를 이끌어냅니다. 당시 거부권을 쥔 소련의 유엔대사가 안보리 회의에 불참한 덕분이었죠. 이 결의안에 따라 미국 등 21개 연합국이 동참하면서 한국전쟁은 국제전 성격을 띠게 됩니다. 공산주의 침략국에 맞서 자유진영의 집단안보를 보장하겠다는 원칙을 내세운 거죠.명확한 국가이익보다는 도덕주의 외교 원칙에 따라 뛰어든 전쟁인 만큼 미국에게 한국전쟁의 목표는 모호했다는 게 키신저의 시각입니다. 특히 1950년 10월 19일 중국이 전격적으로 참전한 직후 미국은 전면적 승리에서 한발 물러나 확전을 경계하는 ‘제한전(limited war)’ 논리에 갇히게 됩니다. 2차대전에서 미국 등 연합국이 초기 수세에도 불구하고 나치의 무조건 항복과 완전 승리라는 명확한 목표를 추구한 것과 대비됩니다.미국의 제한전 추구는 한국전쟁에서 소련의 능력과 의도를 과대평가한 영향이 컸습니다. 공산 진영이 한반도를 기점으로 세계적 차원의 총공세를 계획하고 있다고 오판한 거죠. 하지만 전후 소련의 실제 군사력은 미국보다 취약했기에 스탈린은 붉은 군대의 한반도 파병을 회피할 정도로 한국전에서 확전을 두려워했습니다(하지만 중부 및 동부유럽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허세를 부렸죠: 참고)미국의 제한전 방침은 전선의 교착 상태를 장기화해 소모전으로 흐르는 요인이 됐습니다. 이는 총사령관 맥아더가 우려한 부분이었죠. 맥아더는 “군사작전을 자제한다고 확전 위험이 낮아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교착상태가 전쟁을 질질 끌기 때문에 더 위험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맥아더는 만주 지역 폭격 등 중국과의 전면전이 불가피하다고 봤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이보다 봉쇄정책의 핵인 유럽에서 소련의 공세를 막는 게 우선이라고 봤습니다. 결국 소련에게 전면전의 빌미를 주면 안 된다는 트루먼의 강력한 방침에 부닥쳐 맥아더는 전쟁 도중 해임됩니다.키신저는 미국의 전쟁 목표가 트루먼과 맥아더의 중간지점에서 절충됐다면 합리적이었을 거라고 봤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도취된 트루먼이 북중 접경지대인 압록강까지 맥아더가 진격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게 패착이었다는 겁니다.키신저는 평양 북쪽 청천강과 함흥만을 잇는 선에서 미군이 진격을 멈췄다면 중국의 개입을 억제하면서 남북한 인구의 90%를 흡수하는 성과를 얻었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는 오랜 세월 백두산 등 청천강 이북 지역을 역사적 터전으로 삼아온 한국인들의 민족주의 시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대안일 겁니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 소모전에 빠지자, 서방 주요국이 우크라이나에 동부지역 일부를 러시아에 양보하는 절충안을 제안한 것과 유사합니다. 키신저의 현실주의 외교에 대해 철저히 강대국 중심의 세력균형 시각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중소갈등으로 촉발된 미중 화해한국전쟁에서 총부리를 맞댄 미중관계에 훈풍이 불기 시작한 건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출구전략을 모색하던 197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월터 리프먼의 예견대로 대소련 봉쇄정책에 발이 묶여 한반도, 베트남 등 주변부에 연루돼 국력을 소진하는 늪에 빠지게 됩니다(13회 참고) 핵심 전략지역이던 유럽에서 소련과의 일전을 상정한 봉쇄정책에 함몰돼 아시아에서 공산진영의 도발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겁니다.그런데 이때 수세에 몰린 미국에게 ‘기회의 창’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사회주의 대국 소련과 중국의 이데올로기 갈등이 마침내 국경분쟁으로 번지고 있었던 겁니다. 이에 따라 중국 입장에서 소련의 안보 위협이 미국을 능가하는 상황이 벌어지죠.미국으로서는 ‘쐐기 전략(wedge strategy·경쟁국과 그 동맹국의 관계를 벌리기 위한 이간책)’을 쓸 수 있는 길이 열린 겁니다. 실제로 1972년 2월 미국 대통령 중 최초로 중국을 방문한 닉슨은 저우언라이를 만나 소련군의 중소 국경 배치 정보를 제공하며 “소련이 미국의 서유럽 동맹국들에 맞서 배치한 군대보다 더 많은 병력을 중소 국경에 배치했다”고 강조합니다.( 참고·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30618/119820195/1)사실 2차대전 무렵만 해도 스탈린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제스를 카이로회담에 당사자로 초청할 정도로 본래 미중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 종전 후 열린 1954년 제네바회의에서 덜레스 국무장관이 저우언라이 총리의 악수를 면전에서 거절할 정도로 양국 관계가 극도로 악화됐죠.미국이 소련에 대한 봉쇄주의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중국을 팽창주의와 공산주의 세계혁명에 골몰하는 국가라고 본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여기에 소련 전문가들은 미중 화해가 소련의 의구심을 증폭시켜 미소 관계를 악화시킬 거라고 주장했습니다.그러나 키신저가 포진한 닉슨 행정부는 이런 시각을 거부하고 철저히 세력균형 시각에서 중국에 접근하기로 결정합니다. 중국을 끌어들이는 외교 카드가 소련의 공세를 누그러뜨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상은 현실에서 적중합니다.1971년 7월 키신저의 비밀 방중 전까지 소련은 1년 넘게 미소 정상회담을 일부러 지연시켰습니다. 회담 개최에 앞서 여러 조건을 내걸며 미국의 양보를 압박하기 위한 거였죠. 하지만 키신저가 중국을 방문한 지 한 달도 안 돼 소련은 입장을 바꿔 닉슨을 모스크바에 초대합니다. 미중 화해에 자극을 받고 미국에 유화적인 자세로 돌아선 겁니다.미중 데탕트의 발단은 1969년 봄 시베리아 우수리강에서 시작됩니다. 당시 이곳의 소련-중국 국경지대에서 교전이 벌어져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당초 미국은 중국이 싸움을 걸었을 거라고 지레짐작했지만, 미소 접촉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을 접하게 되죠. 소련 당국이 당시 교전 상황을 상세히 알려주면서 중국과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미국의 대응 방향을 물은 겁니다.이에 미국 정보기관이 우수리강 일대를 샅샅이 훑으면서 교전 지역이 소련의 보급기지와 가깝고 중국 통신기지에서는 먼 곳임을 알아냅니다. 소련이 먼저 도발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증거였죠. 게다가 7000km에 이르는 중소 접경지대에 소련군 40여 개 사단이 무더기로 배치된 정황도 확인됩니다.사회주의 양대 대국 간 전면전 가능성에 직면한 초유의 상황에서 닉슨은 미중 데탕트 국면으로 이어질 결정적 조치를 취합니다. 중국을 공격하면 미국이 개입할 수 있다는 의사를 소련에 전달한 겁니다. 미소 간 세력균형을 위해서는 아무리 공산국가라도 중국이 소련에 점령되는 걸 막아야한다고 본 거죠.1969년 9월 5일 닉슨은 엘리엇 리처드슨 국무부 차관을 통해 “우리는 소련과 중국 간의 적개심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활용할 생각이 없다. 두 공산주의 대국 간의 이념적 차이는 우리 관심사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반복이 고조돼 국제평화와 안보를 심각하게 파괴하는 것에는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메시지를 소련에 보냅니다. 한국전쟁 종전 후 약 20년 동안 외교관계를 단절한 중국에 대해 지원 의사를 밝힌 겁니다. 이에 대해 키신저는 미국이 전후 봉쇄정책과 결별하고, 현실주의 세력균형 외교로 복귀한 거라고 평가합니다.미중갈등으로 고삐 풀린 북한의 ‘군사 모험주의’미중 데탕트는 한반도 정세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닉슨은 1972년 중국 방문 당시 “중요한 건 미중 양국이 각자의 동맹국(남·북한)을 억지하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미중 양국이 각각 한미동맹과 조중동맹의 결박(tethering) 기능을 통해 남북한의 모험주의적 군사행동을 억제하자는 거였죠. 동행한 키신저 역시 저우언라이에게 “미군이 주둔하는 한 남한이 군사분계선을 넘으려는 어떤 시도에 대해서도 미국은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중국은 미중 데탕트를 계기로 대미(對美) 위협인식을 크게 완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과 합의한 ‘한반도 현상 유지’를 깨는 북한의 무력도발을 억제하고자 했죠. 예컨대 북한은 미중화해 국면을 맞아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을 일으켰지만, 중국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합니다.대미 위협인식을 둘러싼 북중의 견해 차이는 양국 사이에 긴장을 초래해 북한은 외교적 운신의 폭이 좁아집니다. 예를 들어 허담 북한 외상은 1973년 2월 방중해 미국과의 접촉 가능성을 타진해 달라고 저우언라이에게 요청했지만, 그의 반응은 미지근했죠. 북한과의 직접 대화에 부정적이던 미국 역시 허담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습니다.북한은 1974년 8월 키신저 집무실을 방문한 바실리 풍간 루마니아 대통령 특사를 통해 접촉 의사를 재차 전달했지만, 키신저는 “북미 대화의 성사 여부는 미국이 원하는지에 달렸다. 충분한 검토와 논의를 거쳐야 한다”며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미중 화해 이후 북미 직접 대화를 통해 새로운 국면을 조성하고자 한 북한의 시도가 양국 모두로부터 차단된 겁니다.숙적 ‘미제’와 화해한 중국에 대해 북한 지도부는 강한 불만을 품었지만, 미중 데탕트는 중국과 소련 모두를 향하고 있었기에 북한은 중국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 수 없었습니다. 중소갈등을 이용한 북한의 등거리 외교 공식이 먹히기가 어려워진 거죠.반대로 미중갈등이 심화되면 대미 위협인식을 고리로 한 북한의 대중(對中) 외교정책은 힘을 받게 됩니다. 2018년 김정은과 트럼프의 싱가포르 정상회담처럼 북미 양자 대화는 중국의 고립감 혹은 조바심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죠.이는 미중 데탕트 국면과는 반대로 중국이 북한의 무력도발을 억제할 유인이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북한은 중국의 한반도 비핵화 방침에도 불구하고 2006년 이후 여섯 차례나 핵실험을 벌였지만, 안정적인 북중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미중갈등이 대미 위협인식을 고리로 북중관계를 밀착시키는 결과를 낳은 겁니다.지금까지 한국전쟁이 미중 간 제한전으로 흐른 배경과, 양국이 세력균형 관점에서 전격적으로 손을 맞잡은 미중 데탕트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키신저는 닉슨이 2차 대전 후 미국을 강하게 옭아맨 봉쇄정책에서 벗어나 ‘현실주의 세력균형 외교’에 입각해 미중 데탕트를 이뤄냈다고 평가했습니다. 미소 세력균형이 무너지는 걸 막기 위해 과거 전쟁을 치른 공산주의 국가와도 협력했다는 겁니다. 이는 도덕, 가치를 지향하는 미국의 ‘전통적인 자유주의 외교’와 대척점에 있는 결정이었습니다.둘 중 무엇이 더 우월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최근 점증하는 미중갈등의 근원에는 과거 소련에 대한 시각처럼 미국이 중국의 사회주의 독재체제에 품고 있는 혐오가 자리잡고 있다는 겁니다. 이는 미국의 도덕주의 외교 원칙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중소갈등 같은 거대변수가 나타나지 않는 한 쉽사리 해소되기 어려운 이슈일 겁니다.이것은 미중 데탕트로 억제됐던 북한의 ‘군사 모험주의’가 미중갈등과 더불어 확대될 가능성이 높아졌음을 의미합니다. 5, 6일 북한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근처에서 감행한 포격 도발을 예의주시해야 하는 이유입니다.[참고 문헌]-Henry Kissinger 〈Diplomacy〉 (1994, Simon & Schuster)-Henry Kissinger, 김성훈 역 〈헨리 키신저의 외교〉 (2023, 김앤김북스)-The National Security Archives 〈Nixon‘s Trip to China〉 (https://nsarchive2.gwu.edu/NSAEBB/NSAEBB106/#1)-최명해 〈1960년대 북한의 대중국 동맹딜레마와 ‘계산된 모험주의’〉 (2008, 국제정치논총 제48집 3호)-최명해 〈중국 북한 동맹관계-불편한 동거의 역사〉 (2009, 오름)-김상운 〈미중관계와 북한 대중(對中) 정책의 상관성에 관한 연구〉 (2020, 북한대학원대)“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국은행이 정부로부터는 독립적이지만,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로부터는 그렇지 않다.” 2022년 8월 이창용 한은 총재의 이 발언은 국제 금융시장이 돌아가는 현실 논리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미국에서 물가가 뛰면서 2022년 3월부터 지난해 7월까지 기준금리를 5%포인트나 끌어올리자, 같은 기간 한은도 경기침체를 감수하며 1.25%에서 3.5%로 금리를 대폭 높였다. 한미 기준금리 차이가 벌어질수록 외국인 투자자들이 안전자산인 달러를 찾아 국내 금융시장에서 돈을 뺄 가능성이 높아져서다. 대부분의 무역, 금융결제가 달러로 이뤄지는 글로벌 경제에서 외자 이탈은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일본 경제 전문 언론인이 쓴 이 책은 달러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의 ‘위안화 띄우기’를 최근의 국제 정치 흐름과 맞물려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세계 역사에서 통화는 군사력과 더불어 패권 확보에 핵심적 역할을 해왔다. 강대국들이 지구를 절멸시킬 수 있는 핵무기를 실전에 사용하기 힘든 상황에서 패권 유지 수단으로서 통화의 중요성은 클 수밖에 없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실제로 미중 갈등이 격화되면서 양국 간 통화전쟁도 심화되고 있으며,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 20일 전 체결된 러-중 공동성명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미국과 유럽의 러시아산 원유 및 천연가스 수입 금지에 대비해 중국이 이를 수입하는 대신 달러가 아닌 위안화나 루블화로 결제하기로 했다. 저자는 “서방의 제재로 지쳐가는 러시아는 중국의 위성국가나 다름없는 상황으로 전락할 운명”이라고 내다봤다. 중국의 위안화 확대는 러시아에 그치지 않는다. 시진핑은 2022년 12월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석유에 대한 위안화 거래를 제안했다. 산유국들이 받는 위안화는 달러보다 유동성이 떨어지지만, 막대한 물량의 중국산 상품 수입에 사용될 수 있다. 저자는 러시아를 지원하는 중국에 대해 금융제재를 주저하는 미국 바이든 정부의 올해 대선 승리 여부가 미중 통화전쟁의 핵심 변수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960, 70년대 ‘한강의 기적’을 이끈 경제정책을 하나만 꼽는다면 ‘수출 주도 성장 전략’을 들 수 있다. 한국 산업의 고도화로 이어진 이 정책의 중심에는 상공부(산업통상자원부의 전신)가 있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전직 경제관료 모임인 재경회와 함께 발간한 ‘코리안 미러클’(2013년·나남)에 따르면 1964년 3월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차 일본 도쿄를 찾은 김정렴 당시 대일청구권 대표위원(훗날 대통령비서실장)이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에게 “일본처럼 수출지향 공업화를 해야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제안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로부터 두 달 뒤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임명된 장기영은 김정렴을 상공부 차관에 발탁했다. 이후 소비재 수입품을 국산화하는 수준에 머물던 한국 경제는 수출 주도형으로 바뀌면서 매년 40%가 넘는 고도 성장을 거듭했다. 이는 장 부총리가 박 대통령으로부터 경제부처 각료 임명권을 위임받아 김정렴 등 실력 있는 테크노크라트들을 대거 기용했기에 가능했다. 박정희의 경제각료 용인술은 ‘장기적 시각’과 ‘전폭적 위임’으로 요약된다. 상공부 장관을 거친 김정렴은 9년 3개월간 비서실장으로 일하며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고, 남덕우 경제기획원 장관은 9년 3개월(재무부 장관 포함) 동안 경제정책을 총괄했다. 또 경제부처 장관은 비서실이 전문성을 검증해 추천한 인사 중 대통령이 지명하고, 차관 이하 인사는 장관에게 전적으로 위임해 부처 장악력을 보장했다. 반백 년 전 이야기를 꺼내 든 것은 내년 총선 차출을 위해 방문규 산업부 장관, 김완섭 기획재정부 2차관, 김오진 국토교통부 1차관, 박성훈 해양수산부 차관 등 주요 경제부처 장차관 4명을 임명 3∼5개월 만에 교체하기로 한 대통령실의 인식이 우려스러워서다. 방 장관의 임기 3개월은 박정희 정부 당시 남덕우 장관 재임 기간의 2.7%에 불과하다. 대통령실과 집권여당의 판단에 따라 장관 휘하의 현직 차관 3명이 총선에 한꺼번에 차출된 것도 이례적이다. 차관 이하 인사를 장관에게 일임한 박정희의 용인술과 비교된다. 내년 총선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대통령실과 여당의 다급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방 장관 교체에 대해 “국가 전체로 봤을 때는 크게 ‘데미지’라고 할 건 없다”(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라고 말하기에는 현재 산업부가 처한 상황이 엄중하다. 우리 경제는 역대급 무역적자가 이어지는 가운데 미중 갈등으로 공급망 위기를 맞고 있다. 여기에 최근 홍해에서 일어난 예멘 반군의 공격으로 수출 차질이 우려된다. 산업부 산하 공기업인 한국전력은 2021년 2분기부터 올 2분기까지 누적 적자가 47조 원에 달한다. 한전의 천문학적 적자를 해소하기 위한 전기료 인상 등 공공요금 상승 여파로 10월 소비자물가 상승률(3.8%)은 6년 2개월 만에 미국(3.2%)을 앞질렀다. 이 같은 전방위 위기에 산업정책 사령탑은 사실상 공백 상태다. 최근 보호무역주의가 확산되면서 개발경제 시대의 주역이던 산업정책이 선진국에서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지금의 1등 수출 품목인 반도체 산업은 상공부 주도로 1969년 입안된 ‘전자공업진흥법’과 ‘전자공업진흥 기본계획’에 뿌리를 두고 있다. 3개월짜리 단명 장관으로는 인공지능(AI) 산업혁명과 미중 갈등의 고차 방정식을 풀 수 있는 산업정책을 내놓을 수 없다. 김상운 경제부 차장 sukim@donga.com}
미국 현실주의 외교의 거두로 미중 데탕트 주역인 헨리 키신저(1923~2023)는 한국전쟁을 어떻게 봤을까요. 미국과 중국이 한국전쟁의 주요 교전국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미국은 물론 중국 외교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의 시각이 더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최근 키신저 별세를 계기로 그의 현실주의 외교가 학문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것이 현실정치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 ()에 이어 이번에는 그 연장선상에서 한국전쟁의 원인과 배경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미국 외교 특유의 도덕주의적 원칙주의에 주목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키신저의 시각에서 한국전쟁을 보면 전쟁 당사자였던 미국의 움직임이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의 행태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도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죠. 그럼, 한국전쟁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짚어야 하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로 시계를 돌려보겠습니다(키신저의 대표작 ‘Diplomacy(1994)’를 비롯한 국내외 문헌들을 참고했습니다.)동지에서 적으로…. 미국의 소련관(觀) 변화2차 대전 종전 직후인 1945년 미국에서는 나치에 맞서 함께 등을 맞대고 싸운 전시 동맹 소련의 실체를 놓고 논란이 벌어집니다.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1945년 2월 얄타회담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나치 패망 후에도 유럽에서 소련과 공존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죠. 아직 일본이 무너지기 전이었기에 극동지역에서 소련의 군사적 도움이 필요한 현실적인 이유도 영향을 미쳤습니다.미국식 이상주의와 도덕 원칙에 따라 전후 문제를 처리하고자 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통적인 세력균형 외교를 거부하고, 집단안보로 평화를 보장하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반면 여우처럼 눈치가 빨랐던 처칠 수상은 팽창주의 욕구로 들끓던 스탈린의 속내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죠.처칠은 소련이 나치의 군사적 압박에서 완전히 해방되기 전에 중부 및 동부유럽에서 자유진영의 세력권을 공고히 함으로써 스탈린의 야욕을 꺾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처칠의 주장이 소련과의 불필요한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면서 이를 거부합니다.하지만 처칠의 우려는 곧 현실화하죠. 스탈린이 동유럽 적화(赤化)를 목표로 헝가리, 불가리아, 폴란드 등에서 잇따라 공산주의 독재정권 수립에 나선 겁니다. 소련은 인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민족주의자 등 좌우를 망라한 연립정권을 세운 뒤 테러 등을 통해 반공 세력을 제거 혹은 흡수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공산당 특유의 기만전술로 이른바 ‘사이비 연립단계’를 거쳐 공산주의 독재정권을 세운 겁니다( 참고: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30813/120687443/1)여기에 스탈린이 독소전쟁과 비효율적인 사회주의 체제로 취약해진 국력을 가리기 위해 소련의 군사력을 과대 포장하며 공세적인 자세를 취한 것도 미국의 위협인식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스탈린의 허장성세는 미국이 핵무기를 독점적으로 보유한 상황에서도 계속되죠. 1945년 6월 포츠담회담에서 트루먼이 핵무기 개발 사실을 넌지시 알리자, 스탈린은 “개발 소식을 기쁘게 생각하며 핵무기가 일본에 쓰이기를 바란다”며 별것 아닌 것처럼 응수합니다.하지만 사실 소련은 미국, 영국 내 스파이들을 통해 미국의 핵무기 개발 상황을 몰래 정탐하며 자체 핵개발에 전력투구하는 등 바싹 긴장한 상태였죠. 미국에 꿀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중부 및 동부유럽에서 세력권을 양보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센 척’을 한 겁니다.서구 독점 자본주의 국가들이 이권을 둘러싸고 서로 전쟁(3차 세계대전)을 벌일 거라고 본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 혁명관이 서구와 대결 구도를 형성한 배경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문제는 미국이 스탈린의 ‘센 척’을 곧이곧대로 믿었다는 겁니다(미국은 전략폭격을 빼면 유럽대륙에서 소련의 육군력이 서방보다 우세하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죠)냉전시대 연 ‘봉쇄정책’의 기원스탈린의 공세적인 태도에 당황한 미국에서는 소련이 친구가 될 수 있는지 아니면 나치처럼 또 하나의 적인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집니다. 이때 소련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주니어 외교관의 보고서 한 통이 워싱턴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죠. 미국 대소련 봉쇄정책의 시발탄이 된 조지 케넌(George Kennan)의 1946년 2월 보고서 ‘the long telegram(긴 전보)’입니다.케넌은 제정시대까지 소급해 러시아의 역사 전통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으로 보고서를 시작합니다. 그는 러시아가 유럽부터 중앙, 극동아시아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끊임없이 추구한 이유를 몽골족 등 아시아 유목민의 침략에 시달린 농경민 특유의 불안에서 찾았습니다. 제정 러시아에서 귀족 등 엘리트 집단이 프랑스어를 공용어처럼 사용한 데에서 알 수 있듯 서유럽보다 근대화에 뒤처진 열등감도 러시아의 불안을 더한 요소였죠.또 거대 인구를 통제하며 전제 군주정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외적 위협을 끊임없이 조장한 행태가 소련의 사회주의 독재체제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고 봤습니다. 이에 따라 소련의 팽창주의는 내부 체제에서 기인한 것이기에 미국의 회유가 먹힐 수 없다는 게 케넌이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자유 민주주의 질서에 뿌리를 박고 있는 미국은 철학이나 목적에서 소련과 양립할 수 없다고 본 거죠. 케넌은 미국이 소련과의 긴 투쟁에 나설 채비를 갖춰야한다며 봉쇄정책의 필요성을 주장합니다.이에 대해 키신저는 케넌의 견해가 세력균형을 통한 공존이 아닌, 자유를 억압하는 소련체제 자체의 붕괴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전통적인 이상주의 외교 원칙과 잘 맞는다고 평가합니다. 어찌 보면 이런 행태는 과거 미국이 핵무기로 ‘벼랑 끝 외교’에 나선 북한에 대해 정권교체(regime change)를 검토한 것과도 일맥상통합니다. ‘타협은 없다.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라는 식의 미국 특유의 외교원칙이랄까요.케넌의 주창으로 트루먼 행정부가 채택한 봉쇄정책을 놓고 미국 내에서 다양한 비판이 제기됩니다. 미국 언론인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 등 현실주의자들은 봉쇄정책이 시간을 끌면서 미국의 국력을 서서히 소진시킬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특히 소련의 도발로 미국이 멀리 떨어진 주변부에 연루돼 국력을 낭비할 수 있다고 우려했죠. 사실 이런 그의 주장은 한국전쟁이나 베트남전쟁으로 어느 정도 현실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리프먼은 미국이 주변부에서 힘을 빼지 말고, 미국의 핵심 이익이 걸린 유럽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키신저는 이런 시각이 미국의 도덕주의 외교원칙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평가합니다. 리프먼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 관점에서 지정학적 이익이 상대적으로 낮은 한반도에 개입한 것은 국력 낭비에 불과합니다. 현재의 우크라이나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도 리프먼의 관점에선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하겠죠.처칠은 봉쇄정책의 전반적인 취지는 이해했지만 그 방법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 무한정 시간을 보낼 게 아니라, 미소 간 군사력 격차가 극대화된 시점(2차대전 종전 직후)에 미국이 대소 견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그는 소련이 경제적으로 안정화되고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면 미소 간 격차가 좁혀져 갈수록 서방의 협상력이 낮아질 거라고 봤습니다.키신저는 케넌의 소련 인식이 정확했다고 봤지만, 방법론에 있어서는 처칠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리프먼의 예견대로 봉쇄정책이 미국의 국력을 소진시킨 측면이 있고, 특히 베트남전쟁에 와서는 국내 여론 분열과 미국의 안보 보장에 대한 신뢰성을 실추시켰다는 겁니다.키신저가 본 한국전쟁의 원인키신저는 미국과 공산권의 상호 오인(misperception)이 서로 얽히면서 냉전시대 첫 열전인 한국전쟁이 발발했다고 보았습니다. 우선 소련은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의 승리를 사실상 묵인한 미국이 상대적으로 전략적 가치가 떨어지는 한반도 분쟁에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봤습니다. 키신저는 “미국에게는 침략에 대한 저항이라는 도덕적 의무가 전략적 이익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소련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지적했습니다.당시 스탈린의 맞상대였던 트루먼은 철저한 반공주의와 미국 예외주의의 도덕 원칙으로 무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상원의원 시절 독소전쟁이 일어나자 “만약 독일이 이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 우리가 소련을 도와줘야 하고, 소련이 이기고 있다면 우리가 독일을 도와줘야 한다. 그런 식으로 둘이 서로 최대한 많이 죽이게 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소련 사회주의 독재체제가 나치 못지않게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봤죠.한국전쟁 발발 이틀 만에 2차대전 종전으로 병력이 대폭 감축된 데다 훈련도 부족했던 주일미군을 한반도로 급파하는, 막중한 결정을 트루먼이 내린 배경입니다. 소련이 제대로 임자를 만난 셈이죠(남한으로선 하늘이 도운 시나리오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하지만 트루먼 이상으로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을 추동한 건 사실 미국 외교정책의 도덕주의 원칙이었습니다. 전쟁 발발 2개월 전 작성된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 보고서(NSC-68)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죠.당시 미국의 냉전 전략을 규정한 이 보고서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화를 언급하면서 “자유로운 정치제도가 패배한다면 모든 곳에서 패배하는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 붕괴에서 우리가 받은 충격은 이 나라가 지닌 물질적 중요성의 잣대로 잴 수 있는 게 아니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런 도덕주의 외교원칙을 가진 미국이 한반도에서 공산권의 일방적인 무력 침략을 방관하는 건 총체적 외교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공산권뿐 아니라 미국도 오판을 범합니다. 유럽 중심의 봉쇄정책에 함몰돼 아시아 등 주변부에서 공산권의 도발을 예상치 못한 겁니다. 앞서 리프먼이 예견한 우려가 현실화돼 미국으로선 불의의 일격을 당한 거죠.한국전쟁 5개월 전 애치슨 국무장관이 태평양 방위선에 일본, 필리핀을 포함하면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 것도 유럽 이외 지역의 안보에 대한 미국의 안일한 인식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는 스탈린과 김일성이 남침 시 미국의 무력 개입이 이뤄지지 않을 거라고 오판한 근거가 되죠( 참고: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30903/120996577/1)이와 함께 소련, 중국 등 공산권이 자유주의 진영에 대한 총공격의 서막으로서 한국을 침략했다는 트루먼 행정부의 오인이 과잉 대응으로 이어져 중국의 개입을 초래했다는 게 키신저의 시각입니다. 미 7함대를 대만 해역으로 급파하고, 베트남 독립전쟁을 무력으로 대응한 프랑스에 군사원조를 해준 게 대표적입니다.제2차 국공내전에서 막 승리한 직후였던 마오쩌둥에게 미국의 이 같은 조치는 아시아에서 중국을 포위해 장제스의 본토 복귀를 도우려는 의도로 비쳤다는 겁니다. 키신저는 “마오쩌둥으로서는 만약 한국에서 미국을 막지 못하면 중국에서 미국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고 결론을 내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고 말합니다.사실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결정 시점과 동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초기 북한군 주도의 전황이 일시에 뒤집힌 인천상륙작전을 참전의 계기로 보는 시각이 있고, 이미 그 전에 결정했다는 주장도 있죠.그런데 앞서 키신저의 지적대로 당시 중국이 국공내전 직후여서 정권 안보가 아직 불안정한 시기였다는 데 대해선 이견이 없습니다. 예컨대 김동길 베이징대 교수는 한국전쟁 당시 중공 정권이 무너지고 장제스가 재집권할 거라는 ‘변천사상’이 기승을 부리자, 미군이 38선을 넘기도 전에 마오쩌둥이 조기 파병 의사를 김일성과 스탈린에게 전달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동유럽 세력 확장에 우선순위를 둔 스탈린이 미국의 손발을 동아시아에 묶어놓기 위해 마오쩌둥의 조기 파병에 부정적이었다는 겁니다.지금까지 2차 세계대전 직후 스탈린의 공세적 태도 등으로 인해 미국의 대소련관이 적대적으로 바뀌면서 봉쇄정책이 발생한 과정과, 이것이 한국전쟁에 끼친 영향을 자세히 들여다봤습니다. 미국의 봉쇄정책이 상정하는 유럽 중심의 전략적 사고로 인해 한반도에서 공산권으로부터 불의의 일격을 당한 것이 한국전쟁이라는 게 키신저의 시각입니다.하지만 그 봉쇄정책을 낳은 미국의 도덕주의 외교원칙으로 인해 소련, 중국의 예상과는 다르게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만합니다. 다음 회에서는 이런 한국전쟁이 소모적인 제한전(limited war)으로 흐른 배경과 더불어 이로부터 18년 뒤 미국이 적국이던 중국과 전격적으로 손을 맞잡은 ‘미중 데탕트’로 나아간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참고 문헌]-Henry Kissinger 〈Diplomacy〉 (1994, Simon & Schuster)-Henry Kissinger, 김성훈 역 <헨리 키신저의 외교> (2023, 김앤김북스)-Henry Kissinger, 이현주 역 <헨리 키신저의 세계 질서> (2016, 민음사)-김동길, 박다정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전후 및 한국전쟁 초기, 중국의 한국전쟁과 참전에 대한 태도 변화와 배경> (2015, 역사학보)“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최근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부 장관의 죽음을 계기로 ‘현실주의 외교’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미중갈등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지정학의 시대가 다시 도래한 요즘 국제정치 환경도 이런 움직임에 힘을 보태고 있죠. 도덕이나 가치보다는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을 통한 질서 구축을 중시하는 키신저식 현실주의 외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국제정치 분야 석학이자 고위 관료였던 키신저는 자신의 이론을 현실정치에 적용하며 미국 외교의 핵심 원칙을 세운, 희귀한 경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중동과 유럽뿐 아니라 미중 데탕트, 북미관계 등 한반도 문제에까지 폭넓게 개입했죠.그래서 키신저의 사상과 삶을 이해하는 건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여러 부고 기사들을 통해 관료로서 그의 삶이 잘 알려진 만큼, 이번 글에선 ‘Diplomacy’ 등 키신저의 대표 저작을 비롯한 국내외 문헌을 통해 그의 학문과 사상이 현실정치에 끼친 영향을 집중적으로 다뤄보겠습니다.키신저 외교관(外交觀)의 뿌리, ‘빈 체제’키신저의 현실주의 외교관은 그의 1954년 하버드대 박사학위 논문(Peace, Legitimacy, and the Equilibrium: A Study of the Statesmanship of Castlereagh and Metternich) 주제인 19세기 유럽 역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논문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수상과 영국의 캐슬레이 외무장관이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의 질서를 회복한 과정을 분석했는데 나중에 ‘회복된 세계’라는 책으로 발간됐습니다.키신저는 탈냉전 이후 세계질서가 양극체제에서 벗어나 다수의 강대국들이 각축전을 벌이며 세력균형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19세기 유럽의 ‘빈(Wien) 체제’와 유사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죠.나폴레옹 전쟁으로 초토화된 직후인 19세기 초반 유럽에서는 무너진 평화를 복원하는 동시에 공화정이라는 전염병을 차단하고 군주정으로 회귀하는 게 지상과제였습니다. 이것이 유럽 주요 강대국들이 1814년 오스트리아에 빈에 모여 새로운 국제질서를 논의한 목적이었죠(‘빈 회의’)당시 빈 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은 동상이몽을 품고 있었는데요. 나폴레옹을 굴복시킨 최강국 러시아의 차르(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 이목이 쏠립니다. 독실한 러시아 정교도였던 그는 1812년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치세를 앞당기는 대의를 위해 세속의 모든 영광을 바칠 것”이라고 쓸 정도였죠.그는 빈 회의에서 형제애라는 기독교 원리에 따라 상호 적대적인 세력균형을 포기하고 공동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신성 동맹(Holy Allance)’을 주창합니다. 이에 대해 키신저는 “원칙에선 월슨 미국 대통령의 구상과 정반대이지만 이것은 월슨이 구상한 세계질서의 전신(前身)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알렉산드르 1세의 구상이 공동의 대의와 도덕 원칙에 입각한 윌슨주의(자유주의 외교)와 흡사하다고 본 거죠.이에 비해 키신저가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꼽았던 오스트리아 수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1773-1859)는 도덕 원칙이 아닌 상호이익 관점으로 접근합니다. 나폴레옹 전쟁을 일으킨 프랑스에 맞서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 프로이센의 ‘4국 동맹’을 주도하면서 세력균형의 회복을 시도한 겁니다.키신저는 메테르니히가 ‘군주정 회복’이라는 공통의 보수적 가치 아래 각국의 이해관계를 적절히 조율해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약 100년에 걸친 장기 평화를 이뤘다고 봤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아무리 불완전한 동맹이라고 해도 협력을 통해 ‘힘의 균형’을 유지하며 세계질서를 지키는 것이 혼돈과 혁명보다 낫다는 키신저의 ‘현실정치(Realpolitik)’는 메테르니히에서 출발했다”는 분석을 최근 내놓았죠.빈 체제가 비교적 장기 평화를 가져온 데에는 세력균형을 위해 패전국 프랑스까지 동맹으로 끌어들인 실리 외교도 한몫했습니다. 빈 회의에서 4국 동맹은 나폴레옹이 해외 원정을 시작하기 직전의 프랑스 국경선을 인정해줬을 뿐 아니라, 빈 체제가 성립된 지 불과 3년 만인 1818년에는 프랑스를 포함한 ‘5국 동맹’을 출범시키죠.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베르사유 조약에서 패전국 독일의 국경선을 대폭 축소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려 2차 대전의 불씨를 남긴 것과 비교됩니다.이에 대해 키신저는 “메테르니히가 생각한 질서는 자국의 이익을 다른 국가들의 이익과 연결시키는 것이었다”며 “빈 체제의 5국 동맹이 2차 대전 종전 후 독일이 ‘대서양 동맹’에 가입한 사건의 선례(先例)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미국은 2차 대전 최대 피해국 중 하나인 프랑스의 반발에도 독일 재무장과 나토 가입을 추진하죠. 종전 후 미소 냉전이 본격화됨에 따라 소련의 안보 위협에 대한 대처가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태평양전쟁 피해 당사국인 미국이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해 면죄부를 준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당시에도 한국 등 일본 식민지배 피해국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미국은 일본의 신속한 전후 복구와 경제성장을 지원하기 위해 전후 배상 책임을 면제해주죠. 동아시아에서 미국을 대신해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할 국가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이른바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강력한 미일동맹을 형성해 동아시아 평화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36년에 걸쳐 식민지배를 겪은 한국으로서는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도 일본의 과거사 반성이 미진한 건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영향도 있다는 분석도 있죠.키신저는 다양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냉엄한 국제정치 현실에서 빈 체제의 효용성은 크다는 입장입니다. 특히 19세기 유럽처럼 5, 6개의 강대국들과 많은 약소국들로 이뤄진 탈냉전 이후 국제체제에서는 세력균형을 통해 상호 경쟁하는 국익을 조정하는 과정이 필수라는 겁니다.현실주의 거부한 미국의 외교 전통키신저는 빈 체제의 절묘한 세력균형을 예찬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은 전통적으로 현실주의 외교와 거리를 뒀습니다. 이는 미국 특유의 지정학적 이점에서 연유하는데요. 오랜 세월 국경을 맞댄 여러 나라들이 전쟁을 벌인 유럽 대륙과 대양을 사이에 두고 멀찍이 떨어져 있는 데다, 주변에 대적할 만한 경쟁국이 없던 덕분에 미국은 세력균형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유럽 입장에선 천혜의 요새를 갖춘 신생국의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도 있는 대목이죠.여기에 종교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세계로 떠난 청교도 정신이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로 발현되면서 도덕주의 외교를 추구하게 됩니다. 종교의 자유 등 미국식 민주주의 가치를 외교 원칙으로 관철해야 한다는 정서가 엘리트뿐 아니라 평범한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보편화된 겁니다(이는 윌슨 대통령이 “세계 민주주의를 위해 나서야 한다”며 미국 국민의 여론을 1차 대전 참전으로 이끄는 데 성공한 배경입니다)이런 이유들로 키신저는 “미국 같은 이상주의 전통을 가진 나라는 세력균형을 자국 정책의 핵심 기반으로 삼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면서 “미국이 자국 이익에 대해 사용 가능한 정의를 내릴 수 있도록 현실에 대한 사려 깊은 평가를 이상주의와 결합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죠. 미국의 이상주의 전통을 상수(常數)로 보고, 여기로 경도됐을 때의 폐해를 막기 위해 자신이 주장한 현실주의 외교를 절충해야 한다고 본 겁니다.키신저는 미국이 이상주의로만 기울었을 때의 폐해로 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 처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가 독일, 체코 등 중부 유럽을 점령한 미군을 철수시킨 사례를 듭니다. 당시 처칠은 얄타 회담 이후 노골화된 스탈린의 팽창주의에 맞서려면 미군의 유럽 철수를 최대한 늦춰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루스벨트는 소련과의 갈등을 피하고 국민들의 철군 여론을 충족시키기 위해 철수를 단행합니다▶시리즈 5회 참고이에 대해 키신저는 루스벨트가 전후 승전국 간 경쟁 가능성을 대비하지 않은 건 세력균형의 복원을 피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세력균형을 혐오한 루스벨트가 전시 동맹국들이 함께 참여하는 ‘집단안보’ 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다는 겁니다.하지만 이는 키신저가 보기에 나이브한 구상에 불과했습니다. 군주정 회귀라는 공동의 보수적 가치로 엮인 빈 체제와 달리 2차 대전 직후 승전국들은 사회주의,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 갈등을 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게다가 팽창주의에 젖어있던 스탈린이 독일이라는 최대 위협이 제거되자, 연합국에 협조할 의사가 거의 없었던 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스탈린은 종전 직후 연합국 반대에도 동유럽 국가들을 잇달아 점령합니다) 키신저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기 전에 영국의 캐슬레이가 약소국의 자유에 대한 동맹국들의 약속을 받아냈던 것처럼, 스탈린이 연합국의 도움을 필요로 했을 때 전후 처리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냈어야 했다”고 본 이유입니다.키신저 외교에 대한 다양한 비판들미중 데탕트와 중동 셔틀외교 성공 등 키신저식 현실주의 외교의 성과가 컸지만 반대로 그 한계도 존재합니다. 특히 그가 강조한 세력균형이 강대국 중심의 시각에 치우쳐 약소국들의 이익을 무시했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실제로 키신저가 미중수교 통로였던 파키스탄의 무자비한 반란 진압(방글라데시 독립 반란)을 지원하고, 1969년 캄보디아 침공에 관여해 크메르루주 살인 정권이 들어서는 데 일조하는 등 미국의 전략적 이익을 위해 약소국들을 희생시켰다는 거죠.키신저의 현실주의 외교가 전략적 이익에 집중한 나머지 비윤리적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예컨대 키신저가 1969년 닉슨 행정부에 참여하기 전부터 베트남전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미국의 대외 위신 때문에 3년 뒤에야 미군 철수 협상에 나서 희생을 키웠다는 비판이 대표적입니다(2년 전 미군의 아프간 철수가 미국 패권 약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 걸 떠올리면 이해하기가 쉬울 겁니다).결국 1973년 파리 평화협정으로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완전히 손을 뗀 뒤 1975년 남베트남 패망에 이르기까지 약 2년의 간격을 확보해 최소한의 체면을 세울 수 있게 됐죠. 키신저는 국내외 비판에 직면하자, 파리 평화협정 덕에 받은 노벨평화상을 자진 반납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습니다.1975년에는 러시아 작가로 소련 체제를 비판하며 망명한 솔제니친과 포드 대통령의 면담 당시 백악관에서 만나면 안 된다고 주장해 레이건 등 공화당 강경론자들의 비판을 샀습니다. 솔제니친이 소련 체제의 폭압에 용기 있게 저항한 자유주의의 상징이지만, 소련과의 데탕트 정책에 부정적 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게 이유였습니다.철저한 국익 중심의 현실주의 외교는 키신저 자신의 태생적 뿌리를 외면하는 결과도 초래합니다. 소련 정부가 유대인의 해외 이민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미국이 소련과 정상 무역관계를 맺도록 규정한 1974년 ‘잭슨-바닉 법안’에 키신저가 반대한 겁니다. 본인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이었음에도 키신저는 “소련과의 데탕트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며 자유를 찾아 이주하기를 원하던 유대인들을 외면합니다.키신저의 이 같은 외교 전략에 대해 같은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인 한스 모겐소조차 “도덕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며 비판에 가세했죠. 사실 모겐소는 미국 외교가 도덕주의에 너무 경도돼 성전(聖戰)을 벌이려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한 장본인이었습니다(도덕외교의 한계를 지적한 키신저의 입장과 일치합니다).키신저 전기를 쓴 저명 저널리스트 월터 아이작슨도 “키신저는 미국 민주주의 체제의 개방성에서 파생되는 힘이나, 미국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의 원천인 ‘도덕적 가치’에 대해서는 무신경했다”고 평가합니다.그가 금과옥조로 여긴 세력균형에 대해서도 이견이 존재합니다. 학계 일각에선 과도한 세력균형의 집착이 적대적 동맹을 형성해 1차 대전을 일으켰다고 지적합니다. 이에 대해 키신저는 1차 대전을 초래한 건 오히려 세력균형의 포기였다고 반박합니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동맹관계를 조정한 빈 체제의 교훈을 1차 대전 당시 유럽 지도자들이 망각했다는 겁니다(키신저의 미중 데탕트와 한반도에 끼친 영향은 다음 회에 다룹니다)[참고 문헌]-Henry Kissinger 〈Diplomacy〉 (1994, Simon & Schuster)-Thomas W. Lippman 〈Henry Kissinger who shaped world affairs under two presidents, dies at 100> (Washingtonpost, 11/ 29)-헨리 키신저, 이현주 역 〈헨리 키신저의 세계 질서〉 (2016년, 민음사)-마상윤 〈1970년대 초 한국외교와 국가이익: 모겐소의 국익론을 통한 평가〉 (2012년, 국제·지역연구 21권 2호)“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슈링크플레이션’ ‘스킴플레이션’ ‘번들플레이션’ ‘스트림플레이션’…. 요즘 온갖 물가가 뛰면서 생긴 다양한 신조어들이다. 제품 용량이나 성분 함량을 줄이는 게 각각 슈링크플레이션(shrinkflation), 스킴플레이션(skimpflation)이라면 낱개보다 묶음 제품의 값을 올리는 건 번들플레이션(bundleflation)이다. 동네 마트에서 목격할 수 있는 고물가 시대의 천태만상이다. 여기에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구독료가 일제히 오르는 스트림플레이션(streamflation)까지 가세했다. ‘꼼수’ 가격 인상은 인플레이션을 잡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은행은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가격 및 임금 설정 행태의 변화가 디스인플레이션(물가 상승 둔화)을 더디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사실 현재의 인플레이션 기조는 세계적 추세다. 인구 고령화에 따른 생산인구 감소와 기후변화에 의한 농산물 가격 급등, 탈세계화에 따른 생산비용 상승 등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대부분의 국가들이 물가 압박을 받고 있다. 저명 경제학자 찰스 굿하트 영국 런던정경대(LSE) 명예교수는 “지난 30년은 저금리 시대였지만 향후 30년은 인구 고령화로 인해 저축은 줄고 소비는 늘 것”이라며 고금리, 고물가가 장기간 이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물가 상승의 주된 요인이 나라마다 다르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에 대한 대응은 차별화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한국의 10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8%(전년 대비)로 미국(3.2%)을 앞질렀다. 한미 물가 상승률이 역전된 건 2017년 8월 이후 6년 2개월 만이다. 지난해 물가 정점 이후 올 9월까지 월평균 하락 폭도 한국(0.19%포인트)이 미국(0.36%포인트), 유럽(0.57%포인트)보다 작아 물가 상승률 둔화 속도가 느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에너지·식량 자급도가 높은 미국에 비해 한국은 대외 의존도가 높은 데다 환율 상승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동안 억누른 전기·가스료 등 공공요금 인상 압박 영향도 적지 않다. 미국에 비해 노동시장이 경직되고 시장 경쟁이 덜 치열한 한국의 경제 구조도 고물가의 원인이라는 지적이 있다. 최근 식품 가격 등을 중심으로 물가가 반등하자, 한은은 30일 기준금리를 동결하면서 올해와 내년 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각각 3.6%와 2.6%로 올려 잡았다. 내년 말까지도 물가 목표인 2% 달성이 어려운 것이다. 고물가 국면이 길어지는 이른바 ‘끈적한(sticky) 인플레이션’이 본격화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인플레는 결코 만만한 적이 아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올 9월 보고서에 따르면 1970년부터 현재까지 56개국에서 발생한 인플레이션 111건 중 64건(57.6%)만 5년 내 잡혔다. 인플레가 1년 안에 진정된 사례는 12건(10.8%)에 불과했다. IMF는 “고물가를 잡기 위해선 긴축 정책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는 게 핵심”이라며 “인플레이션 완화 징후가 보인다고 섣불리 긴축 강도를 풀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대표적인 인플레 파이터인 폴 볼커 전 미 연준 의장의 회고록 제목 ‘Keeping at it(긴축 지속으로 버티기)’은 우리 통화당국도 주목해야 할 교훈 아닐까. 김상운 경제부 차장 sukim@donga.com}
팬데믹에 이어 전쟁과 경제 불안이 커지는 가운데 각국에서 포퓰리즘이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워 반(反)이민정책과 동맹 파괴에 나선 트럼프가 대선 지지율 1위를 달리고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유럽 주요국에서도 반이민정책을 내건 극우 포퓰리즘 정당이 선거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최근 아르헨티나 대선에서는 중앙은행 폐쇄, 장기매매 허용 등의 과격한 공약을 내건 하비에르 밀레이가 승리했습니다. 각종 보조금을 남발해 140%에 달하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낳은 페론주의 정권에 대한 심판이 우파 포퓰리즘 정권을 낳았다는 분석입니다.내년 총선을 앞둔 한국도 ‘메가 서울’ ‘은행 횡재세 도입’ ‘공매도 금지’ ‘대구-광주 고속철도 건설’ 등 여야를 가리지 않고 포퓰리즘 정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민주주의가 정착된 나라들에서도 포퓰리즘이 활개를 치는 이유는 무얼까요. 과연 일각의 지적처럼 한국의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있는 걸까요. 수천년을 아우르는 포퓰리즘의 역사를 통해 그 실체와 원인을 알아보겠습니다(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등 국내외 주요 문헌을 참고했습니다)2400년 전 고대 그리스 포퓰리즘과 닮은꼴라틴어 ‘populus(민중)’를 어원으로 하는 포퓰리즘(populism)의 사전적 의미는 대중에 영합해 정책을 펴고 권력을 강화하는 행태를 말합니다. 정치학자 얀 베르너 뮐러는 포퓰리즘을 “국민이 직접 통치하는 민주주의 최고 이상을 실현해주겠다고 약속하는 ‘타락한’ 형태의 민주주의”라고 정의합니다. 또 “포퓰리스트들은 기득권 엘리트 집단이 부도덕하며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할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강변한다. 그들이 쓰는 언어는 거칠고 태도는 무례하며 반대 세력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취한다”고 합니다.포퓰리스트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에는 포퓰리스트 대신 ‘데마고고스(demagogos)’라고 불렸죠. 이 말은 민중을 뜻하는 ‘dema’와 지도자를 가리키는 ‘agogos’가 합쳐져 ‘민중 지도자’를 의미했습니다. 원래는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치가’라는 중립적 의미였는데 페리클레스 사후 정치 혼란을 겪으면서 ‘민중을 선동하는 정치꾼’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덧씌워지게 되죠.아리스토텔레스는 데마고고스를 이상적인 민주 정치의 적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 ‘정치학’에서 “민중이 법 위에 군림하는 민주정체에서는 데마고고스가 부자들과 전쟁을 벌여 나라를 늘 둘로 나눈다”면서 이들이 밑 빠진 독에 물붓기 식으로 민중들에게 생산잉여를 분배하는 ‘무절제(aselgeia)’에 빠진다고 했죠. 현대의 ‘복지 포퓰리즘’을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도시국가(폴리스) 아테네에서 본격적인 데마고고스의 시대를 연 정치가는 클레온(?~기원전 422년) 입니다. 피혁업자 가문 출신으로 귀족이 아니었던 그는 페리클레스 사후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권력자로 부상합니다.기록에 따르면 그는 예의를 중시한 기존의 명문귀족 출신 정치가들과는 달리 “겉옷을 걷어부치고 고함을 지르며 허벅다리를 철썩철썩 때리면서 상소리로 연설하는” 다소 공격적인 성향의 지도자였죠. 공격적인 언사로 상대를 당황케하는 트럼프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평민 출신 정치지도자의 혜성 같은 등장을 이해하려면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의 상황을 파악해야 합니다. 페리클레스 치세 하에 아테네는 압도적 해군력을 바탕으로 주변 도시국가들을 복속하며 제국주의 체제를 공고히 합니다. 이 과정에서 전함의 노를 젓는 등 많은 노동력을 제공한 평민들의 정치적 입지가 높아진 것도 데모고고스 등장의 배경이 됩니다.당시 아테네는 라이벌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에 맞서 전쟁(펠레폰네소스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숱한 안보위기를 맞습니다. 스파르타의 공격을 틈타 아테네에 칼을 들이대는 동맹들이 생긴 겁니다. 전쟁으로 인해 해외로부터 식량공급이 어려워지는 등 경제난에도 봉착합니다. 여기에 기원전 430년과 426년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아테네 총인구의 약 3분의 1이 사망하는 재난까지 덮치죠. 코로나 팬데믹에 이어 고금리, 고물가의 경제난에 직면한 요즘 각국의 상황과 비슷합니다.이런 다중 위기를 맞아 클레온은 전임자인 페리클레스의 정책을 비판하며 공격적인 제국주의 정책으로 민중의 지지를 얻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기원전 427년 뮈틸레네 반란에 대한 그의 강경한 주장입니다. “예속국들의 복종은 아테네의 양보가 아닌 ‘힘’에 의해 확보되는 것”이라는 클레온의 강경론에 아테네 민회는 뮈틸레네의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여성과 어린이를 노예로 만들기로 결정합니다.하지만 이때 디오도토스가 “예속국에 대한 초강경 처벌은 오히려 아테네의 이익에 반한다”며 반론을 제기하죠. 향후 반란을 일으키는 동맹국들이 뮈틸레네의 전례를 보고 결사항전에 나설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이에 따라 반란에 책임이 있는 이들만 처형하는 것으로 민회 결정이 번복됩니다.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민회의 뮈틸레네 처벌 논의를 다루면서 “클레온이 아테네에서 가장 ‘폭력적’이었고 당시 민중들에게 가장 설득력이 강했다”는 코멘트를 달았습니다. 이때 그가 쓴 단어 ‘Beacóratos(폭력적)’는 당시 고대 그리스에서 휼륭한 정치가의 속성과는 거리가 먼 부정적인 뜻을 내포했죠.민중들에게 설득력이 가장 강했다는 투키디데스의 말대로 비록 뮈틸레네 처벌이 관련자(1000명) 처형으로 일부 완화되긴 했지만, 클레온의 강경론은 이후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실제로 기원전 423년 스키오네에서 반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테네는 결국 스키오네 시민 전체를 도륙하고 도시를 통째로 파괴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이 같은 클레온의 강경 외교는 결국 아테네에 부메랑으로 돌아옵니다. 펠레폰네소스 전쟁으로 국력이 소진된 상황에서 무리하게 시칠리아 원정을 감행하다 몰락의 길에 들어선 겁니다. “일인자가 되려는 열망 때문에 도시의 사안을 민중의 즐거움에 맡긴 지도자”라고 투키디데스가 클레온을 비판한 이유입니다.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차이사실 포퓰리즘과 민주주의는 모두 ‘민중(demos)’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구분하기가 어려운 때가 많습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반(反)엘리트주의와 이분법 ▲반의회주의 ▲카리스마 지도자에 대한 의존 ▲단순화를 통한 선동 ▲대중매체의 효율적 이용 등을 포퓰리스트의 특징으로 꼽습니다. 다시 말해 부패한 엘리트와 선량한 인민의 대립 구도를 가지고 의회를 우회해 대중을 직접 동원하는 행태입니다. 이 과정에서 대의제 민주주의나 법치주의의 기본원리가 훼손되는 결과를 초래하죠.적과 우리를 구분하는 이분법의 논리는 요즘 국내 정치에서도 종종 목격됩니다. 문재인 정부 당시 여당이 친일 프레임을 동원해 야당을 ‘토착 왜구’로 몰아붙이거나, 윤석열 정부에서 여당이 반공주의를 소환해 야당을 ‘주사파 용공세력’으로 규정했죠.포퓰리스트들이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좌파 혹은 우파 포퓰리즘으로 구분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우파 포퓰리즘은 민족이나 문화 정체성을 중심으로 대중을 동원하는 행태로 히틀러와 트럼프가 대표적 인물입니다. 예를 들어 히틀러는 독일 민족의 부흥이라는 미명 하에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부추겼습니다. 트럼프는 ‘아메리카 퍼스트’라는 가치를 내세워 백인 블루칼라를 동원하기 위해 이민자 혐오를 이용했죠.이에 비해 좌파 포퓰리즘은 계급 정체성을 중심으로 극단적 평등을 추구하는 행태를 보입니다. 각종 보조금을 쏟아내 국가부채를 급증시킨 20세기 남미의 페론주의나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추진한 베네수엘라의 차베스가 대표적인 예입니다.히틀러를 봐도 알 수 있듯 카리스마를 갖고 민중을 동원하는 지도자에게 국가사회가 좌우되는 상황은 결국 전체주의 파시즘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시작은 민중이지만 그 끝은 전체주의 독재로 나아가는 모순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포퓰리즘 발생의 원인앞서 아테네가 포퓰리즘에 빠져든 배경에서 알 수 있듯 현대에서도 빈곤은 포퓰리즘 발생의 요인입니다. 히틀러는 대공황으로 어려움을 겪던 당시 독일인들에게 독일 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허상을 제시해 권력을 잡았죠.예속국에 대한 클레온의 강경론에 아테네 시민들이 넘어간 것도 예속국에서 거둬들이는 공납금이 늘어야 퍼주기식 복지가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클레온은 노령층 평민들의 생활비로 요긴하게 쓰인 배심원 수당을 하루 2오볼로스에서 3오볼로스로 인상해 지지를 얻었습니다(한국에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압박하는 등 동맹국을 쥐어짠 트럼프의 외교가 연상됩니다)주요 이슈에 대해 당파적 갈등이 심화되는 ‘정치 양극화’도 포퓰리즘이 발생하기 쉬운 환경을 제공합니다. 앞서 언급한 포퓰리스트의 이분법 선호가 정치 양극화와 맞물리기 때문이죠. 이것이 기존 제도권 정치의 무능과 결합되면 폭발력은 매우 커집니다. 재벌 유착 등 박근혜 정부의 부패상이 진영 갈등과 맞물려 대통령 탄핵이라는 전무후무한 빅뱅으로 이어진 게 한 예일 겁니다.갈수록 심화되는 한국 정치 양극화, 원인은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의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정치 양극화 지수(0~1 사이로 1에 가까울수록 정치적 의견이 다른 사람들의 상호작용이 적대적)는 권위주의 시대에 0.75로 높았으나 1987년 민주화 이후 0.5로 내려갔습니다.그런데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 이후 양극화 지수가 0.75로 다시 높아졌습니다. 탄핵정국을 거친 박근혜, 문재인 정부를 통과하면서 정치 양극화가 이전 권위주의 시대와 같은 수준으로 높아진 겁니다.실제 정치 현장을 살펴보면 이 같은 추세를 확실히 체감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국회 관계자들에 따르면 국회 상임위원회의 해외시찰을 여야 의원들이 따로 가는 행태가 21대 국회 들어 확산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일정상 운영위원회 정도만 그런 행태를 보였지만 이제는 다른 일반 상임위도 여야 ‘따로 국밥’으로 해외시찰을 다닌다는 겁니다. 국회 관계자는 “상임위 시찰은 국비 지원을 받아 국회 공무원까지 동원되는 공적인 업무”라며 “정당끼리 따로 갈거면 당비를 써야지 국비를 받고도 저런 행태를 보이는 건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2020년 21대 총선 직후 윤호중 당시 민주당 사무총장이 “타당 출신 보좌진 임용시 업무능력 외에 정체성 및 해당 행위 전력을 검증해야 한다”는 공문을 보낸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과거에는 능력있는 보좌진을 채용하기 위해 상대 정당에서 필요한 인력을 구하는 게 일반적이었죠. 하지만 21대 국회에서는 보좌진 채용마저 피아를 식별하는 이분법 구도에 함몰되고 말았습니다.현 정부 들어서도 상황은 마찬가집니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지난해 8월 당대표 취임 이후 영수회담을 8번 요청했지만, 대통령실과 여당은 ‘여야 대표 회동이 먼저’라는 등의 논리로 이를 모두 거부했습니다.그렇다면 한국 정치에서 이처럼 양극화가 심화되는 원인은 무얼까요. 한국 정치의 양극화는 식민경험, 분단 체제, 군사독재라는 특수한 역사경험에서 연유하는 바가 크지만 승자독식의 정치 제도에도 원인이 있다는 게 학계 시각입니다. 득표율이 의석 수에 비례적으로 반영되지 않는 현행 선거제도가 양당 제도를 고착화하면서 정치 양극화로 이어진다는 겁니다.예컨대 위성정당이라는 꼼수가 동원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2020년 총선에서 민주당은 49.9%, 미래통합당은 41.5%를 지역구에서 득표했지만 의석 수는 각각 163석과 84석으로 크게 벌어졌습니다. 이런 구조에서는 제3당이 들어서기가 힘들어 양당정치의 파당적 폐해를 견제하기 힘들죠.이른바 ‘개딸’이나 ‘태극기 부대’ 같은 강성 지지층에 양대 정당이 포획된 구조도 양극화의 원인으로 꼽힙니다. 공직자 선거에서 당내 경선이 확대되면서 강성 지지층의 당원 투표 영향력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표를 얻어야하는 정치인들은 이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선명성 경쟁을 벌이며 포퓰리즘의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결국 승자독식의 선거제도를 바꾸고, 강성 지지층에 휘둘리지 않는 정당 지배구조를 구축하는 것이 포퓰리즘의 기반이 되는 정치 양극화를 막을 수 있는 방안일 수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국민을 선동해 권력을 차지하려는 포퓰리스트의 행태를 견제할 수 있는 건강한 시민사회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요.[참고 문헌]-권혁용 <한국의 민주주의 퇴행> (한국정치학회보 57집 1호, 2023년 봄)-장시은 <뮈틸레네 논전에 나타난 아테네 민주정과 제국주의> (인간.환경.미래 22호, 2019년)-김봉철 <‘데마고고스’ 클레온> (역사학보 113집, 1987년)-채진원 <포퓰리즘의 이해와 이재명 현상에 대한 시론적 논의> (사회과학논집, 2019년 봄)“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공매도를 일시 금지하는 긴급명령은 시장에 균형을 회복시켜 줄 겁니다.”(2008년 9월 19일) “위원회가 공매도 금지를 다시 시행하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 (공매도 금지의) 비용이 이익보다 더 큰 것으로 보입니다.”(2008년 12월 31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크리스토퍼 콕스 위원장은 공매도 금지를 발표하면서 해당 조치가 주식시장에 균형을 가져올 거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불과 3개월 뒤 로이터통신과 인터뷰에서 콕스 위원장은 공매도 금지 결정을 후회하는 발언을 남겼다. 공매도 금지가 주가 부양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유동성 확보에 지장을 초래하는 등 부작용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사실 주식 공매도는 주가 하락에 베팅하는 속성상 대부분의 개인 투자자들에게 절대 환영받을 수 없는 존재다. 누군가 돈을 잃고 피눈물을 흘릴 때 웃는 투자 방식이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하지만 선진 자본시장에서 공매도가 보편적인 투자 방식으로 인정받는 상황에서 이를 무조건 죄악시할 순 없는 노릇이다. 사실 국내외 주요 연구들은 공매도와 주가 하락의 상관관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2006년 1월 2일부터 국내에서 공매도 금지 조치가 내려지기 전날인 2008년 9월 30일까지 678일간 215개 종목의 일별 공매도 및 주가를 분석한 논문(‘주가와 공매도 간 인과관계에 관한 실증 연구’)에 따르면 “증시 전체나 개별 종목 차원 모두에서 공매도로 인한 주가 변화의 증거는 없거나 미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즉, 공매도가 주가에 영향을 미치기보다 주가 변화가 공매도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논문 저자들은 “실증 분석 결과는 2008년 전격적으로 취해진 전면 공매도 금지 조치에 대한 논리적 반박의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고 썼다. 해외 사례 연구도 비슷한 맥락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 1월∼2009년 6월 공매도 금지 혹은 제한 조치를 시행한 30개국 1만6491개 종목의 일일 데이터를 분석한 해외 저명 학술지 논문(‘Short-Selling Bans Around the World: Evidence from the 2007∼09 Crisis’)에 따르면 △공매도 금지가 시가총액이 작고 변동성이 높은 주식 유동성에 악영향을 미치고 △약세장에서 가격 발견을 늦추며 △미국 금융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종목에서 주가를 부양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에 비해 시가총액이 훨씬 작고 주가 변동성이 높은 한국 등 이머징 시장에서 공매도 금지의 부작용이 더 클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16일 ‘공매도 제도 개선 방향’을 발표하면서 공매도 금지 기간을 연장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시장 혼란을 키울 수 있는 무차입 공매도 등 불법행위를 엄단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증권가에선 공매도 금지 연장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역행해 한국 증시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외국인 투자자 이탈을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로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은 수년 전 한국의 중소형주 공매도 금지를 이유로 관련 평가를 ‘++’에서 ‘+’로 내렸다. 외국인 투자자 이탈 등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하지 않고, 증시 유동성을 확보하는 공매도의 순기능은 살릴 수 있는 합리적 방안을 찾아야 할 때다.김상운 경제부 차장 sukim@donga.com}
최근 국가정보원에서 인사 파동이 다시 불거지면서 김규현 원장과 1, 2차장 등 지휘부를 전격 경질했습니다. 정권 교체 이후 국정원 간부들을 대거 갈아치우는 과정에서 잡음이 일어난 데 따른 겁니다. 업무 속성상 인사, 예산 등이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야 하는 정보기관에서 인사 잡음이 외부로 알려진 건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최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계기로 이스라엘의 ‘정보 실패(intelligence failure)’ 원인을 짚은 ()에 이어 이번에는 국내외 정보 실패 사례를 통해 정보기관 개혁 방향을 다뤄보겠습니다(크리스토퍼 앤드루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저서 등 국내외 주요 문헌을 참고했습니다)국정원의 ‘대북(對北) 정보 실패’ 사례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사망 사건은 국정원의 대표적인 정보 실패 사례로 꼽힙니다. 이명박 정부 당시 원세훈 원장이 이끌던 국정원은 김정일이 사망하고 이틀이 넘도록 이를 알지 못하다 북측의 보도 이후에야 파악했습니다. 물론 CIA 등 서방 주요 정보기관들도 김정일 사망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이들이 갖지 못한 고급 휴민트(인간 정보 자산)를 보유했다는 국정원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파가 컸습니다.스탈린주의식 유일 지배체제 국가인 북한에서 수령의 일거수 일투족은 가장 중요한 정보 가치를 지닙니다. 예컨대 북한은 2018년 북미 정상회담 때 수령의 신체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김정은 전용의 이동식 변기까지 싱가포르에 공수해갔죠.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통제국가에서 수령의 신상 정보를 얻는 건 지극히 어렵습니다. 설사 평양에 외교공관을 둔 국가라도 이중, 삼중의 감시구조가 작동하는 북한 현지에서 협조자를 구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죠.이런 북한에서 수령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면 권력 핵심에 딥스로트를 갖고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 당시 국정원(당시는 국가안전기획부)은 휴민트를 동원해 이 사실을 파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17년 후에는 왜 수령의 사망 사실을 적시에 포착하지 못했을까요. 이를 두고 이명박 정부 직후 국정원 개편 과정에서 대북전략국을 해체하면서 대북 정보망에 구멍이 뚫렸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왔습니다.역대 정부서 반복된 ‘정보기관의 정치화’전문가들은 정권 교체 시기마다 국정원(이전 안기부)의 인적 청산이 대규모로 이뤄져 전문성이 떨어지는 폐해가 반복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한 분야를 오랫동안 담당하며 쌓아놓은 정보망(인적 네트워크)이 대규모 조직개편 과정에서 사라진다는 얘기입니다. 이명박 정부에서 대북전략국이 해체돼 대북 정보망이 흔들린 사례가 대표적입니다.윤석열 정부는 신임 국정원장이 임명되기도 전인 지난해 5월 11일 문재인 정부 때 임명된 박지원 원장을 해임하고, 그 다음달 1급 보직국장 27명 전원을 대기 발령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선 국정원에 ‘적폐청산 TF’를 설치하고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넘기는 등 대대적인 조직개편에 나섰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안기부 명칭을 국정원으로 바꾸고 전체 직원의 약 11%를 구조조정했고, 김영삼 정부에선 안기부 직원 약 300명을 대기 발령했습니다. 12.12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부에선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을 직접 겸임하면서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단행해 약 300명의 요원들을 내보냈습니다.역대 정부들에서 이런 현상이 반복되는 건 국정원을 정권의 친위기관으로 여겨 ‘내 사람’을 심어야한다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에서도 다룬 ‘정보기관의 정치화’ 문제입니다. 정책 결정자가 정보기관을 길들이려는 정보기관의 정치화는 정보 실패로 이어집니다. 정보기관이 인사, 예산권을 틀어쥔 권력자의 입맛에 맞게 정보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정세를 왜곡하기 때문이죠.사실 이는 비단 한국 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최근 하마스 기습을 예측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정보 실패를 네타냐후 총리의 극우 행보에서 찾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가 사법부를 무력화하는 비민주적 정책을 강행하면서 여기에 반대한 군부 및 정보기관을 적대시하고 불신한 게 정보 실패로 이어졌다는 거죠.냉전이 한창 벌어지던 1950, 60년대 서구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케임브리지 파이브(Cambridge Five)’ 사건도 권력자의 왜곡된 시각이 정보 실패를 촉진한 사례입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출신으로 영국 정보기관에서 활동한 킴 필비, 도널드 매클레인, 가이 버지스 등 5인은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자진해서 소련에 정보를 제공한 일종의 이중 스파이였습니다. 이들은 서방의 고급 정보를 대거 전달했지만, 소련의 최고지도자 스탈린의 마음을 얻지는 못했죠. 이들은 본질적으로 영국의 스파이라는 스탈린의 섣부른 판단으로 인해 케임브리지 파이브가 제공한 일급정보 상당수가 사장돼 버립니다.오판 줄이기 위한 견제 필요성정보 실패는 기본적으로 적의 의도와 능력에 대한 오인(misperception)에서 비롯됩니다. 최근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하마스의 평화공세에 속아 이들의 적대적 의도를 직시하지 못한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사실 하나의 현상에 대한 상이한 정보보고들 속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시계를 제2차 세계대전 때로 돌려보죠. 1933년 집권 후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재무장에 박차를 가한 히틀러가 1938년 3월 오스트리아에 이어 그해 9월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자, 영국에선 대응 방향을 놓고 논란이 벌어집니다. 히틀러와 적당히 타협하자는 주장과 더 이상의 침략을 저지하려면 무력개입까지 불사해야한다는 주장이 맞섰죠.이때 영국 국내정보국(MI5)은 독일 내 핵심 정보원의 보고를 토대로 히틀러에 대한 강경 노선이 필요하다는 보고를 올립니다. 이 정보원의 이름은 나치에 반대한 독일 외교관 볼프강 추 푸틀리츠였습니다. 독일 내부 정세에 밝았던 그는 유화책은 히틀러를 공격적으로 만들 뿐이며, 그를 막는 유일한 길은 강경 노선이라고 확언했습니다. 1938년 푸틀리츠는 MI5에 “영국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인다면 히틀러의 엄포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독일군은 아직 큰 전쟁을 치를 준비가 안 돼 있다”고 보고했습니다.그의 말처럼 독일군은 1938년 3월 12일 오스트리아 침공 당시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는데도 차량 고장으로 진군이 지연될 정도로 전쟁 준비에 빈틈이 많은 상태였죠. 그러나 이후 체코를 병합하며 전쟁물자를 추가로 확보한 뒤 전력을 더 끌어올릴 수 있었습니다. 전쟁사가들은 독일의 체코 침공 당시 영국이 프랑스 등과 연합해 히틀러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강경론을 고수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습니다.그런데 당시 해외 정보를 책임진 영국 비밀정보부(MI6)의 보고는 MI5와 달랐습니다. MI6는 체코가 독일어권인 주테텐 지방을 독일에 내주면 히틀러의 폭주가 멈출 거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MI6의 예상과 반대였죠. 결국 MI5의 보고대로 영국 정부의 유화정책에 따른 뮌헨협정은 히틀러의 야욕을 키우는 결과를 낳습니다.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MI6의 잘못된 판단에 대해 MI5가 견제구를 날렸다는 겁니다. 하지만 두 기관의 정보가 적시에 공유, 조정되는 시스템이 당시 갖춰져 있지 않은 게 문제였죠. 정보의 다양한 해석과 기관간 견제를 유도하면서도 동시에 여러 정보가 공유, 조정되는 시스템의 보완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정보기구는 국내와 해외, 대북 정보기능이 국정원 한 곳에 통합돼 있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 국군정보사령부, 국군방첩사령부, 경찰 정보국 등 여타 정보기관들의 업무를 조정하고 예산을 관리하는 기능까지 국정원이 맡고 있죠. 이에 따라 기관간 견제 차원에서 국내 정보와 해외 정보 기능을 분리해야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사실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 등을 둔 미국이나 MI5와 MI6를 둔 영국, 연방보안국(FSB)과 대외정보국(SVR)을 둔 러시아, 연방헌법수호청(BFV)과 연방정보원(BND)을 둔 독일 등 주요국들은 국내와 해외 정보기관을 복수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 콘트롤타워로 미국 국가정보장실(ODNI)을 신설해 각 정보기관들의 업무를 조정하고 정보를 공유토록 하고 있습니다.‘정보 공유’ 실패로 패전한 나치6.25 전쟁 때로 시계를 잠시 돌려보겠습니다. 당시 북한의 기습공격에 남한이 허를 찔린 것은 정보 실패에서 비롯됐습니다. 전쟁 전 남한에 파견된 CIA 요원이 불과 2~3명에 불과했던데다 이들의 정보 수집 및 분석 역량이 낮다 보니 정보의 질이 떨어졌다는 게 학계 분석입니다.게다가 남한에서 미군 철수로 한반도까지 커버해야했던 도쿄 극동군 사령부의 비협조도 한몫했죠. 정보기관의 기능을 무시한 맥아더 사령관이 CIA와의 정보 공유를 차단했기 때문입니다(CIA 본부는 1950년 5월 이후에야 극동군 사령부의 정보에 완전히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북한군에 대한 CIA의 정보 역량은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죠.정보기관 간 견제와 더불어 통합 조정과 정보 공유가 중요하다는 것은 2차 대전에서도 확인됩니다. 전쟁 초기 독일 유보트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영국 해군은 궤멸적 피해를 입는 최대 위기에 봉착합니다.그런데 이때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이 독일군 암호체계(에니그마)를 해독한 데 이어 영국 정부통신본부(GCHQ)를 중심으로 독일군의 시긴트(신호정보)를 통합 수집하면서 판세를 뒤집는데 성공하죠(앨런 튜링의 일대기는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2015년)에 실감나게 묘사돼 있습니다) 당시 영미 연합군의 신호정보가 적시에 취합 공유돼 GCHQ가 집중 분석한 시스템이 효과를 발휘한 겁니다.반면 독일에선 국방군 최고사령부 암호국, 외무부 체트(Z)국, 헤르만 괴링의 조사국, 나치 친위대(SS) 산하 보안국(SD), 육해공군 정보기관들이 각기 신호정보를 수집, 분석하고는 이를 공유하지 않아 시너지를 내지 못합니다. 독일이 GCHQ 중심의 통합 정보체계를 구축하지 않은 건 히틀러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각 정보기관들의 충성 경쟁을 유도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효율성 대신 권력집중을 선택한 겁니다.정보 공유의 중요성은 2001년 9.11 테러 때도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미 의회 9.11 진상조사위원회는 최종보고서에서 미국이 정보 통합관리에 실패해 테러를 무산시킬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쳤다고 결론 내렸습니다.예컨대 NSA는 2000년 1월 테러 감행 전 항로 답사차 쿠알라룸푸르를 방문한 범인 3명의 통화를 감청해 이들이 수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챘지만 FBI, CIA 등 관련 정보기관에 이를 알리지 않았습니다. 또 CIA는 2001년 3월 태국 정부로부터 테러범 중 한 명이 LA행 항공기에 탑승했다는 정보를 전달받았지만 이를 FBI와 공유하지 않았습니다. FBI는 비행훈련을 하던 아랍인을 체포해 추방 조치만 내리고 CIA와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죠. 조사위에 따르면 당시 체포된 아랍인의 신상 정보를 CIA의 알카에다 데이터베이스와 연계시켰다면 용의자 심문을 통해 테러 모의 정보를 사전에 입수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종합하면 NSA, CIA, FBI, 국무부, 군 등 관련 정보기관들이 수집한 정보를 제때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의 미비가 9.11 테러를 막지 못한 결정적 요인이었던 겁니다. 이에 따라 조사위는 정보기관 간 정보공유를 확대하고, 이들을 통제하는 국가정보장실(ODNI) 신설을 제안했습니다. 그 결과 CIA, FBI, NSA 등 16개 정보기관을 통솔 조정하고, 이들의 예산을 통제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의 국가정보장실(ODNI)이 생기게 됩니다.지금까지 각국 정보 실패 사례를 통해 정보기관의 정치화를 막고, 정보 왜곡을 줄이기 위한 기관간 견제(예컨대 해외, 국내 정보의 분리)를 유도하되 취합된 정보를 적시에 공유할 수 있는 ‘조정 시스템’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정권 교체기마다 반복되는 국정원의 인사 파동을 근절하려면 국정원을 최고 권력자의 친위기관으로 여기는 행태에서 벗어나는 등 정보기관의 정치화를 차단할 필요가 있습니다.미중 갈등으로 야기된 신(新)냉전 와중에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잇달아 터지며 대북 안보 위협이 커진 이때 국정원의 역할은 막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정원이 정권교체에 따른 부침(浮沈)에서 벗어나 정보 실패를 예방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안을 찾아야 할 때 아닐까요.[참고 문헌]-크리스토퍼 앤드루·박동철 역, 〈스파이 세계사〉 1, 2, 3 (한울·2021년)-전웅, <9/11 테러, 이라크 전쟁과 정보실패>(세종연구소, 2005년)-석재왕, <한국전쟁 발발과 미국 트루먼 행정부의 정보실패>(국가안보와 전략 63호, 2016년)-Foreign Policy 〈What Israeli Intelligence Got Wrong About Hamas〉(2023.10.11)-월간조선 〈흔들리는 국정원 향해 작심한 염돈재 전 국정원 차장 “국정원장들이 국정원 다 망쳐 놨다”〉(2014년 8월호)“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최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계기로 ‘정보 실패(intelligence failure)’가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우방국에서도 거침없이 적국 요인을 암살하는 등 과감성과 실행력, 주도 면밀함에서 세계 최강으로 꼽히는 모사드(해외 정보), 신베트(국내 정보) 등 이스라엘 정보기관들이 하마스의 기습에 전혀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정보 실패란 정보 수집부터 분석, 배포, 정책결정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서 적시에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는 걸 말합니다. 정책 결정권자의 정보 무시 내지 왜곡에 의한 ‘정책 실패(policy failure)’도 크게 봐선 정보 실패로 볼 수 있습니다.그렇다면 군사, 정보, 재정 모두에서 하마스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이스라엘이 이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한 이유는 무얼까요. 한 국가의 사활이 오간 정보 실패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 해답이 보입니다. 16세기 대영제국 초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 6·25 전쟁, 9.11 테러, 중동전쟁까지 정보 실패의 역사를 두 회에 걸쳐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정보사 분야의 거장 크리스토퍼 앤드루 영국 캠브리지대 교수의 저서 등 국내외 주요 문헌을 참고했습니다)‘거울 이미지’에 따른 오판주요 정보 실패 사례들을 보면 기습의 단서를 어느 정도 사전에 인지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언제, 어느 장소로, 어떻게 침입해 들어올지를 몰랐을 뿐 기습이 곧 도래하리라는 신호는 어느 정도 포착했다는 얘깁니다.예컨대 하마스 기습 직전 이집트 정보기관이 이스라엘 정부에 경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지구만 주시하고 가자지구 위협은 무시한 걸로 알려졌습니다. 역사상 다른 정보실패 사례도 마찬가집니다.6·25 전쟁 1년여 전인 1949년 2월 28일 CIA는 “미군 철수 이후 북한의 침공 가능성이 매우 높다(highly probable)”고 경고했죠. 9.11 테러 당시에도 미국 NSA가 2000년 1월 테러범 3명의 통화를 감청해 불순한 정황을 포착하고도 범행을 사전에 막지 못했습니다. 돌다리도 수십번을 두드려본다는 정보의 세계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학자들은 이에 대해 여러 요인을 꼽지만 그 중에서도 자국 관점에서 적국을 분석하는 이른바 ‘거울 이미지(mirror image)’ 효과를 듭니다. 철저히 상대국의 입장에서 의도를 분석해야 함에도 무의식 중에 자국 입장을 투영시킨다는 얘깁니다. 보통 사람들도 자신의 시각에서만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드니 소통이 잘 안되는 이치와 비슷합니다.이번 전쟁에서는 첨단무기로 도배한 아이언돔(iron dome)과 아이언월(iron wall)이 있는 한 하마스가 국경을 정면 돌파하는 기습을 시도하지는 않으리라는 예단이 화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하마스는 이런 이스라엘의 시각을 간파하고 다량의 로켓과 드론, 행글라이더 부대 등으로 정면 침투를 감행해 허를 찔렀죠. 이스라엘이 무인 첨단기기라는 자국의 방어전략에 갇혀 적의 동태를 제대로 살피지 않은 겁니다.이스라엘이 망국 직전까지 갔던 50년 전 제4차 중동전쟁(욤키푸르 전쟁)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정부는 자국의 압도적 공군력에 대응할 수 있는 방공망이 구축되지 않는 한, 이집트가 공격하지 못할 거라고 봤습니다. 또 시리아는 이집트 도움 없이는 경거망동 할 수 없을 거라고 예상했죠.하지만 결과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협공에 따른 초기 참패였습니다. 기습 직전 후세인 요르단 국왕이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를 만나 위험을 경고하고,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의 사위 아슈라프도 모사드에 비슷한 신호를 보냈지만 이스라엘의 오판은 끝내 바뀌지 않았죠.과거사 경험으로 독소전쟁 오판한 스탈린시계를 제2차 세계대전 때로 돌려보죠. 나치에 밀려 연전 연패하던 영국에 한줄기 서광이 비친 건 1941년 6월 발발한 독소전쟁이었습니다. 그해 12월 미국의 2차 대전 참전과 더불어 전쟁의 거대한 흐름을 바꾼 대사건이죠. 그 2년 전인 1939년 8월 히틀러와 불가침조약을 맺은 스탈린은 독일군의 기습 공격에 크게 당황합니다. 나치 침공 당시 소련이 보낸 지원열차가 독일을 향하고 있을 정도로 전혀 예상치 못한 일격이었습니다.그런데 이때도 소련 정보당국이 독일군의 침공 가능성이 높다는 사전 보고를 84차례에 걸쳐 올렸지만, 스탈린은 이를 무시합니다. 20년 전 러시아 내전 당시 영국, 일본 등 열강이 백군을 지원한 역사적 기억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죠. 영미 등 자본주의 제국이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 혁명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볼셰비키 혁명관도 영향을 미칩니다.이에 스탈린은 독일 침공 정보를 자신과 히틀러를 이간질하려는 처칠의 음모로 규정하고, ‘역(逆) 정보’에 속지 말라고 지시합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수령의 지시에 소련 정보기관은 그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죠. 과거의 역사적 경험과 사회주의 혁명관이라는 ‘거울 이미지’가 정보 실패로 이어진 겁니다.2차 대전 때 진주만 공습 당시 정보 실패는 인종주의 편견이라는 거울 이미지가 작동한 사례입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 해군 항공기 360대가 일시에 기습을 감행해 미 해군 전함 5척, 경순양함 1척, 항공기 480대 등이 한꺼번에 파괴되는 큰 피해를 입자 루스벨트와 처칠은 충격에 빠집니다.이들이 “조그마한 황색인”이라고 비하한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동양인을 멸시한 더글러스 맥아더도 “진주만을 공격한 조종사들이 백인 용병일 것”이라고 주장할 정도였습니다. 인종적 편견이라는 ‘거울 이미지’에 빠져 일본에 대한 정보활동을 소홀히 한 대가로 미국은 태평양전쟁 초기 항모 부족에 시달려야 했습니다.6·25 전쟁은 소련과 북한의 진의(眞意)를 오판한 미국의 정보실패 사례로 꼽힙니다. 당시 소련과 중국이 압도적인 핵 공격능력을 가진 미국과 전면전을 벌이기 힘든 상황에서 소련의 위성국인 북한이 쉽사리 전쟁을 벌이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겁니다.이에 따라 CIA는 게릴라전 같은 제한 전쟁(limited war) 가능성만 백악관에 보고했습니다. 딘 러스크(Dean Rusk) 국무성 차관보가 전쟁 닷새 전인 1950년 6월 20일 “우리는 북한이 전면전을 일으킬 의도가 없다고 보고 있다”고 단언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전면전 감행이었습니다. 미국이 자국의 핵 무장력을 앞세워 소련, 중국, 북한의 의도를 지레짐작한 실수는 전쟁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기는 참사로 이어지게 됩니다.정보기관의 정치화가 낳은 실패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이번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네타냐후 총리의 강한 당파성이 정보기관 불신을 낳아 정보 실패로 이어졌다고 분석했습니다. 네타냐후가 사법부를 무력화하는 비민주적 정책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이에 반대한 군부와 정보기관을 적대시한 데 따른 겁니다.권위주의 정권에서 정책 결정자들은 정보기관을 길들이려는 행태를 보이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선호에 부합하지 않는 정보기관에 대해 충성심이 부족하다고 간주하는 거죠. 이에 따라 정보기관은 인사, 예산권을 틀어쥔 권력자의 입맛에 맞게 정보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정세를 왜곡하기 쉽습니다. 이 같은 정보기관의 정치화는 첩보의 세계에서 가장 피해야 할 현상 중 하나입니다.조지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 당시 WMD(대량살상무기) 정보 실패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미국 싱크탱크인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은 2004년 1월 8일 보고서에서 “이라크가 WMD를 폐기 또는 이동하거나 은닉했을 가능성은 없다.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의 WMD 위협을 조직적으로 왜곡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한마디로 9.11 테러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일으킨 이라크 침공 명분을 얻기 위해 정보기관이 나서 WMD 위협을 조작했다는 겁니다.예컨대 CIA는 2001년 이라크가 암시장에서 알루미늄 튜브를 구입하려고 한 것을 핵무기 개발 증거라고 보고했습니다. 해당 알루미늄 튜브의 크기, 모양, 재질이 핵무기 부품과 전혀 다르다고 밝힌 타 정보기관의 분석은 무시했습니다. 결국 나중에 구성된 조사위원회는 해당 알루미늄 튜브가 재래식 로켓용 부품이며, 핵무기와 무관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또 CIA의 WMD 정보 출처 중 하나는 이라크인 망명자들이었는데 이것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사담 후세인 축출을 염원한 망명자들이 미국의 개입을 유도하기 위해 WMD 존재를 허위로 보고했기 때문이죠.이와 관련해 16세기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 정보기관 수장이던 프랜시스 월싱엄(1532~1590)은 정보의 정치화에서 벗어나 지배 이념과 어긋나는 인재를 과감히 등용해 성공한 사례입니다. 그는 영국 왕실을 피해 대륙으로 망명한 잉글랜드 구교도 인사들도 스파이로 고용해 정보 수집력을 키웠죠. 당시 영국과 주도권 경쟁을 벌인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가 스페인 내 신교도 세력을 제거하는 데 골몰한 것과 비교됩니다. 덕분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대영제국의 빛나는 서막을 열 수 있었습니다.기만 전술과 정보실패최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하마스의 기만 전술도 이스라엘 정보 실패의 원인으로 지목됩니다. 로이터 등 외신들에 따르면 하마스는 2년에 걸쳐 이스라엘과 화해 무드를 조성하면서 은밀히 군사 훈련을 진행했습니다. 2021년 이스라엘 정부가 가자지구 주민들이 이스라엘에서 일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발급하자, 이를 받아들이며 2년간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자제한 겁니다. 가자 지구의 또 다른 무장단체 이슬람 지하드도 이 같은 위장 평화 공세에 가세했죠.그러곤 가자 지구에 이스라엘 정착촌 모형을 만들어 놓고 침투 훈련을 실시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정황을 포착하고도 하마스가 노동자 파견 제안을 수용하는 등 유화적 자세로 돌아선 만큼 정면전을 감행하지는 않을 거라고 오판했습니다. 이스라엘군 관계자에 따르면 정보기관 고위관계자가 기습 몇 주 전 ‘하마스는 대규모 공격에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6·25 전쟁에서도 기만 전술은 정보 실패를 초래했습니다(: https://www.donga.com/news/List/Series_70020000000428/article/all/20231015/121676906/1 참고) 예컨대 북한은 전쟁 직전 해인 1949년 4월 세계평화옹호대회에 참가해 군비경쟁 및 전쟁예산 증가 반대를 주장하고, 그해 6월 29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결성해 평화통일 방안을 남한에 제안했습니다.전쟁 석달 전인 1950년 3월에는 스톡홀름 평화대회에 참가해 군비 축소 주장에 찬성하고 북한 전역에서 서명 운동까지 벌였죠. 6월 19일에도 남한 국회가 동의한다면 통일 방안을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재차 제안합니다.이와 함께 군사적 기만 작전도 벌입니다. 북한은 휴전선 부근으로 부대 배치 등 남침 준비를 대규모 야외 훈련으로 위장했죠. 또 일선 군인들에게는 공격 개시가 임박해서야 작전 지침을 통보하는 등 보안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6·25 전쟁 직전 남한과의 빈번한 소규모 군사 충돌은 북한의 전면전 남침 징후를 위장하는데 활용됩니다(정보기관의 오판과 정보공유 실패에 대한 내용은 다음 10회에서 다룹니다)[참고 문헌]크리스토퍼 앤드루·박동철 역 〈스파이 세계사〉 1, 2, 3 (한울·2021년)Foreign Policy 〈What Israeli Intelligence Got Wrong About Hamas〉 (2023.10.11)석재왕 〈한국전쟁 발발과 미국 트루먼 행정부의 정보실패〉(국가안보와 전략 63호, 2016년)전웅 〈9/11 테러, 이라크 전쟁과 정보실패〉 (세종연구소, 2005년)“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네가 정말 애국자다.” 2년여 전 늦둥이 셋째를 보고 주변에서 지겹도록 들은 말이다. 선의(善意)로 건넨 말이지만 듣는 입장에선 좀 의아했다. 개인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의 한 과정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이나 군부 독재시절 민주화 운동에나 어울릴 법한 ‘애국’이라는 단어와 등치될 수 있다는 것이 희한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2020년대를 사는 한국인에게 출산과 육아는 애국에 비견될 정도로 비장하고 지난(至難)한 것인가. 그런데 요즘 아이 셋을 키우면서 지인들의 출산 인사에 깔린 무게감이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고물가, 고금리와 겹쳐 고등학생 첫째와 초등학생 둘째 아이의 학원비만 월급의 30%를 넘는다. 기자는 대입을 준비하는 첫째에게 서울 강북 일반고 재학생 평균 수준의 학원비만 지출하고 있다. 과외는 언감생심이다. 얼마 전 자사고에 다니는 아이를 둔 친구가 방학마다 학원비로만 월 500만 원가량을 쓴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그러곤 몇 해 전 자녀 교육을 위해 해외 격오지 근무를 고민한 지인 이야기가 떠올랐다. 과거 중동 오일머니를 벌러 바다를 건넌 산업역군(産業役軍)이 출산역군(出産役軍)으로 화(化)하는 순간이었다. 최근 한국의 올해 잠재성장률이 처음 1%대로 떨어지고 내년에는 1.7%로 추가 하락할 거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전망이 나왔다. 우리보다 경제 규모가 15배나 크고, 자본주의 역사가 훨씬 긴 미국의 내년 잠재성장률(1.9%)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이 정도면 ‘잠재성장률 쇼크’라고 할 만하다. 원인은 저출산 고령화와 생산성 저하다. 사실 이 두 요소는 별개가 아니라 서로 맞물려 있다. 교육개혁, 노동개혁 등 생산성 제고 노력이 결실을 맺지 못하면 결국 고착화된 저출산 구조를 깰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막대한 사교육 비용을 줄이고 인공지능(AI) 시대로의 산업구조 변화에 적합한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교육개혁이 이뤄지지 않으면 생산성과 경제 성장률을 높일 수 없다. 혹자는 이민 확대를 대안으로 제시하지만, 프랑스의 이민자 폭동 같은 부작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생산성을 높이고 저출산 구조를 타파할 수 있는 각종 구조개혁이 확실한 답안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좋은 약이 입에 쓰듯, 개혁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점이다. 기존 사회 구조에서 이득을 얻는 기득권 집단의 저항이 대표적이다. 개혁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정치권이 이익집단을 꾸준히 설득하는 정공법 외에는 방법이 없다. 최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기자간담회에서 “어떻게 하면 저성장을 탈출하는지는 다 안다. 다만 못 하는 건 사안마다 이해 당사자가 달라서”라며 “구조개혁을 하면 잠재성장률은 2% 이상으로 올라간다. 선택은 정치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는 3대 개혁 중 하나로 추진 중인 연금개혁안을 내놓으며 보험료율조차 적시하지 못해 ‘맹탕’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 백년지대계인 연금개혁을 내년 총선과 결부시킨 것이라면 이전 정부처럼 포퓰리즘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원격의료, 의대 정원 확대, 국민연금 등 산적한 구조개혁을 좌고우면하지 말고 강단 있게 추진할 수 있는 정치 리더십이 절실하다. 김상운 경제부 차장 sukim@donga.com}
최근 한중 정부 관계자들이 ‘인천상륙작전’을 두고 자극적인 설전을 벌였습니다. 지난달 15일 인천상륙작전 73주년을 맞아 한국, 미국, 캐나다 해군이 함정 20여 척, 항공기 10여 대를 동원해 전승 기념행사를 열자, 중국 국방부 대변인이 “미국이 동맹국들을 모아 중국의 문 앞에서 도발적인 군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좌시하지 않겠다”고 도발한 겁니다. 이에 박민식 보훈부 장관이 “상대 국가에 대해 지켜야 할 선을 넘었다”며 맞받았죠.이른바 ‘전랑 외교’를 펼치며 주변국에 막말을 서슴지 않는 중국인지라 그러려니 할 수도 있지만, 인천상륙작전 행사에 유독 발끈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세계사에서 역대 최대 상륙작전으로 꼽히는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비견되는 인천상륙작전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 해답의 단초가 보입니다. 자, 그럼 시계를 1940, 50년대로 돌려볼까요.인천상륙작전 직후 돌변한 마오쩌둥1950년 9월 15일 오전 6시 33분 미 제5해병 연대 제3대대의 월미도 기습으로 막이 오른 인천상륙작전은 6.25 전쟁의 흐름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게임 체인저’였습니다. 그 전까지 유엔군은 북한군의 속도전에 밀려 전쟁 발발 한 달여 만에 수도를 빼앗긴 채 낙동강까지 후퇴한 상태였죠. 낙동강전선 사수를 위해 유엔군이 버티기에 돌입한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그런데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배후를 때리면서 수도권과 낙동강전선 양쪽에서 협공을 가하는 형국으로 전세가 확 바뀝니다. 특히 한미 해병대가 상륙 닷새 만에 한강 도하 준비에 들어가는 등 순식간에 수도를 탈환하는 데까지 이릅니다. 전황을 뒤집으려면 수도를 점령해야한다는 맥아더의 구상이 현실화된 거죠.재미있는 건 당시 중국 최고 지도자 마오쩌둥의 태도가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돌변한 사실입니다(이하 김동길 등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전후 및 한국전쟁 초기, 중국의 한국전쟁과 참전에 대한 태도 변화와 배경> (역사학보, 2015년) 참고)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승전을 거듭하던 1950년 7, 8월까지만 해도 마오쩌둥은 중국군의 조기 파병 의사를 김일성과 스탈린에게 전합니다. 하지만 동유럽에서 미국의 개입을 막고 아시아에서 전쟁의 수렁에 빠져있기를 원한 스탈린이 이에 부정적으로 반응하죠.그런데 막상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직후 북한군이 수세에 몰리자, 마오쩌둥은 온갖 핑계를 대며 파병 불가 의사를 밝힙니다. 심지어 유엔군의 38선 돌파가 임박한 10월 1일 스탈린과 김일성의 다급한 파병 요청에도 그는 3차 세계대전 가능성과 국내의 부정적 여론 등을 이유로 파병 불가를 통보하죠. 그러나 이후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하는 상황에서 마오쩌둥은 마음을 돌려 10월 13일 참전을 결정하고 18개 사단 20만여 명의 중국군을 투입합니다.상륙작전의 군사적 의미사실 바다를 건너 대규모 병력을 이동시키는 상륙작전은 예측 불가의 바다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군사 전략적으로 매우 까다로운 작전에 속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대륙을 제패한 히틀러가 영국을 끝내 굴복시키지 못한 것이나, 대서양과 태평양에 둘러싸인 미국이 9.11 테러를 제외하곤 개국 이래 본토 공격을 당한 전례가 없다는 것, 13세기 몽골의 동아시아 침공에서 일본 열도가 살아남은 것도 모두 ‘바다’라는 천혜의 장벽이 가로 막고 있었기에 가능했죠.그만큼 바다는 공격자 입장에서 전력을 투사하는데 최대의 장애물이 됩니다. 이것이 저명 국제정치학자이자 군사전략가인 존 미어셰이머가 “세계의 대부분이 바다로 덮여 있다는 사실은 어떤 국가가 지구 전체의 패권국이 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말한 이유입니다.특히 2차대전 당시 15만6000명의 대군을 유럽대륙으로 실어 날라야 했던 초유의 상황에서 처칠과 루스벨트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죠(이하 윈스턴 처칠 〈제2차 세계대전〉 (까치, 2016년) 참고) 히틀러의 소련 침공으로 엄청난 살육전을 겪은 스탈린이 독일군의 분산을 위해 영미 연합군의 서부전선 진격(상륙작전)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양국이 이를 실천에 옮기는 데에는 그로부터 1년이 넘는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전쟁 발발 후 불과 3개월 만에 단행된 인천상륙작전이 얼마나 기적적으로 이뤄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대규모 병력과 전차, 대포 등 중화기를 한꺼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전차상륙함(LST)을 개발하고, 이를 수 백대 양산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수심이 얕은 연안에 침투하려면 LST의 바닥이 평평해야하는데, 이러면 높은 파도가 칠 때 배가 쉽게 뒤집힐 수밖에 없죠. 이 같은 기술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영미 양국이 치열하게 노력한 끝에 바닷물을 채우거나 빼는 평형수 방식으로 무게중심을 잡는 LST를 개발하는데 성공합니다.해안의 자연 조건도 상륙작전의 어려움을 가중시킵니다. 예컨대 밀물 때는 상륙 시 기뢰와 같은 수중 장애물에 당할 위험이 커지고, 썰물 때는 상륙부대가 해변을 가로질러 이동하는 거리가 길어져 적의 공격에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는 달빛을 받으면서 야간에 이동할 수 있는 시간까지 감안해 만조 3시간 전 상륙을 결정하죠.특히 인천의 경우 조수간만의 차이가 크고 갯벌이 펼쳐지는데다 해안이 상대적으로 협소해 상륙작전에 어려움이 컸습니다. 실제로 작전 당일 돌격용 장갑차들이 갯벌에 발목이 잡혀 가까스로 우회 기동을 하는 난관에 부닥치기도 했죠. 상륙작전 장소로 인천을 지목한 맥아더의 결정에 미 합참이 반대하고 나선 이유입니다.인천으로 결정되기까지맥아더는 개전 초부터 인천 상륙작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이하 김대성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요인에 대한 군사전략적 분석>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8년) 참고) 전국 도로와 철도가 집중된 서울이 북한군 병참선의 핵심인데다, 수도 점령의 높은 상징성이 적군의 전투의지 무력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죠.이에 따라 전쟁 발발 한 달도 안 된 7월 22일에 미 해병대와 제1기병사단을 인천에 상륙시키는 내용의 작전명 ‘블루하트(Blue Hearts)’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의 남진이 전광석화처럼 이뤄져 1기병사단을 방어 전선에 투입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7월 10일경 블루하트 작전을 일단 접습니다.하지만 맥아더는 일거에 판세를 뒤집으려면 상륙작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관련 계획을 다시 추진합니다. 이에 따라 미군 합동전략기획작전단은 인천, 군산, 진남포, 해주, 원산, 주문진 6곳의 상륙작전 가능성을 검토한 뒤 인천(l00-B),군산(100-C),주문진(l00-D) 상륙계획을 각각 세웁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작전명 ‘크로마이트(Chromite, 크롬철광)’ 입니다. 크로마이트는 은백색의 광택이 나는 단단한 금속으로 제철 원료로 쓰이는 물질이죠.당시 미 합참은 인천상륙의 위험이 크다고 보고 이를 중단시키기 위해 육군 및 해군 참모총장을 맥아더에게 보냈지만, 도리어 맥아더는 이들을 설득시켜 자신의 뜻을 끝까지 관철시킵니다. 결국 미 제1해병사단이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해 서울로 진격하는 동시에 낙동강전선의 미 8군이 동시에 압박하는 작전이 확정됩니다.인천과 노르망디 닮은꼴: ① 성공적 기만 작전인천이나 노르망디 상륙작전 모두 적군에 의해 어느 정도 예상됐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시기와 장소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허를 찔린 거죠. 이것이 가능했던 건 철저한 기만 작전이 먹혔기 때문입니다. 상륙지가 아닌 엉뚱한 곳을 공격하거나, 공격할 것처럼 보이도록 속이는 게 대표적입니다.6.25 전쟁에서는 인천상륙 이틀 전 미군 함정이 강원도 삼척과 함경남도 마양도를 포격하는 등 정반대편의 동해안 일대로 시선을 끕니다. 통상 상륙 직전 해안지대를 향해 함포 사격을 가하는 수순을 감안한 거죠. 이와 함께 크로마이트 계획 중 한곳이었던 군산에 상륙한다는 역정보를 흘리고 이곳을 향해 함포 사격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군산시민들을 대상으로 해안에서 대피하라는 전단을 살포하고 군산 주변 도로와 교량, 철도에 대한 공중폭격도 실시합니다. 상륙 바로 전날(14일)에는 포항 북쪽 장사동에 상륙작전을 벌여 100여 명의 아군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죠.언론 보도도 이용했습니다. 10월 이후 인천에서 상륙작전이 실시될 수 있다는 전망 기사를 흘린 겁니다. 이는 작전 개시 일자를 속이는 동시에 언론에 공개된 인천은 상륙지가 아니라는 확신(역정보)을 적군에게 심어주기 위한 포석이었죠.2차 대전에서도 노르망디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300km 떨어진 빠드깔레로 상륙지점을 속이기 위한 기만 작전이 실시됩니다. 빠드깔레는 도버 해협에서 최단 거리에 위치한 곳이라 이전부터 유력한 상륙 거점으로 여겨졌죠. 연합군은 빠드깔레 맞은 편인 켄트와 서식스에 상륙부대를 집결시킨 것처럼 꾸미고, 빠드깔레 등에 대한 항공정찰 횟수를 늘립니다.이에 따라 독일군은 노르망디는 연합군의 양동작전 대상에 불과하며, 주력부대의 상륙지는 빠드깔레라고 믿게 됩니다. 그래서 노르망디가 아닌 빠드깔레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는 결정적 실책을 범하게 되죠.인천과 노르망디 닮은꼴 ②: 기습적 vs 소모전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전술은 적의 후방을 갑자기 때리는 ‘기습전’과 장시간 정면전을 벌여 상대를 탈진시키는 ‘소모전’으로 나뉩니다. 어느 것이 최적의 전술인지는 아군과 적군이 처한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상륙작전은 적의 후방을 갑자기 공격한다는 점에서 기습전에 가까운 전술입니다.6.25 전쟁 당시 북한군은 낙동강전선에서 전면전을 벌이며 장시간 대치하는 소모전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인천상륙작전이라는 기습전으로 불의의 일격을 당하자, 중국 총리였던 저우언라이는 낙동강전선의 북한군 병력을 줄여 서울로 투입하고, 나머지 부대들도 북쪽으로 이동시켜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는 전략을 권고합니다.일시 후퇴를 통해 차후를 기약하자는 현실론이었는데, 김일성은 정반대의 선택을 합니다. 낙동강전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기존의 소모전을 유지한 거죠. 이는 결국 서울 탈환에 이은 연합군 북진이라는, 북한으로선 재앙적인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2차 대전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당시 소련과 동부전선에서 소모전을 벌이던 독일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따른 연합군의 기습전으로 후방이 위태롭게 됩니다. 이에 1944년 6월 17일 히틀러는 프랑스 수아송 근처에서 서부전선 사령관 롬멜, 룬트슈테트를 불러 긴급회의를 엽니다. 이 자리에서 두 장군은 병력을 동쪽의 센강으로 일단 후퇴해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자고 제안하죠. 하지만 히틀러는 프랑스 서부지역을 한 뼘도 포기할 수 없다며 이를 거부해 화를 키우게 됩니다.인천이나 노르망디 상륙작전 모두 기습전에 당한 상대국 지도자가 기존 전술을 과감히 버리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다 뼈아픈 패배에 이른 공통점이 있습니다. 특히 북한군의 패주로 6.25 전쟁에 개입한 중국은 북한이라는 완충 지대를 얻는 대신 대만 수복의 기회를 잃고, 이후 미중수교까지 20년 넘게 미국 등 서방진영으로부터 고립돼 저성장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코앞에서 핵 실험을 벌이며 수십년간 원조를 받아가는 ‘골칫덩어리’ 동맹국을 얻은 건 덤이었죠. 이런 측면에서 중국이 6.25 전쟁의 전환점이 된 인천상륙작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국은행 총재가 기획재정부 장관을 요즘처럼 거의 매주 본 적이 없다.” 통화, 금융정책 엇박자로 가계부채 위기가 심각해진 게 아니냐는 지적에 최근 만난 한국은행 고위 관계자가 기자에게 건넨 말이다. 그는 “이창용 총재와 추경호 부총리가 이명박 정부 시절 금융위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어서 호흡이 잘 맞는다”고도 했다. 그러나 정책은 결과와 숫자로 말한다. 최근 각종 경제지표는 두 경제 수장의 ‘호흡’만큼이나 한은과 정부가 가계부채를 일관성 있게 관리한 게 맞느냐는 의문을 제기하기에 충분하다. 정부의 뒤늦은 대출 규제 강화에도 불구하고, 지난달 말 주택담보대출 잔액은 전달보다 2조8591억 원 늘어 2021년 10월 이후 최대 폭으로 증가했다. 일부 주담대 금리가 최고 7%대로 치솟은 상황에도 가계대출은 계속 늘고 있다. 고금리와 맞물린 가계부채 위기는 소비를 위축시켜 경제 성장을 위협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 2분기 가계의 이자비용 지출액은 월평균 13만1000원으로 2006년 이후 분기 기준 최대였다. 이에 따라 올 2분기 가처분소득은 1년 전보다 2.8% 줄어 2006년 이후 최대 감소율을 기록했다. 가계의 빚 부담으로 쓸 돈이 부족해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8월 소매판매액 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4.8% 줄어 코로나가 확산되기 시작한 2020년 3월 이후 최대 감소 폭을 보였다. 올해 수출이 급감한 상황에서 소비마저 꺾이면 경제성장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최근 JP모건 등 주요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은 한국이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1%대 저성장에 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무엇이 문제일까. 1차적으로는 문재인 정부에서 집값이 폭등한 영향이 크다. 여기에 올 들어 정부가 특례보금자리론 등 대출 규제를 완화하고, 각종 부동산 규제를 풀면서 집값 상승 기대감을 키웠다. 추 부총리는 5일 기자간담회에서 특례보금자리론 등의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가계부채를 안정적으로 관리해 나가야 한다는 방향성을 갖고 일관성 있게 대응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정책 파트너인 한은은 통화, 금융정책의 엇박자가 문제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최근 내놓았다. 한은은 ‘9월 통화신용정책보고서’에서 “은행의 가계대출이 4월 이후 증가로 전환된 것은 은행의 완화적 대출 태도, 여신금리 하락, 특례보금자리론 공급 등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며 “관련 정책은 긴 시계에서 일관되게 수립돼 시행될 필요가 있다”고 꼬집었다. 한마디로 고금리 기조의 통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대출 규제를 푼 정부 금융정책(거시건전성 정책)의 엇박자로 가계부채가 늘었다는 얘기다. 실제로 한은에 따르면 주요국 사례에서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과 정부의 거시건전성 정책이 같은 방향이면 가계대출 억제 효과가 뚜렷했다. 그러나 두 정책의 기조가 서로 다르면 가계대출 억제 효과가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각에선 정부가 내년 총선을 의식해 부동산 경기 부양을 시도하면서 가계부채 정책의 일관성을 무너뜨린 게 아니냐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 기자는 지난달 14일자 같은 지면에서 전기요금 등 에너지 정책의 ‘탈(脫)정치’를 강조했다. 가계부채 정책도 마찬가지다. 포퓰리즘의 유혹을 떨쳐내고 통화, 금융정책의 일관성을 지켜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김상운 경제부 차장 sukim@donga.com}
최근 한미일 3각 동맹에 맞서 북러중 3각 구도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김정은과 푸틴이 9월 13일 정상회담에서 무기거래와 군사기술 제공을 협의하는 등 탈냉전 이후 유례없는 밀착을 보여주었죠.그러자 열흘 뒤 시진핑이 한덕수 총리에게 방한 의사를 먼저 내비치며 북러 밀착에 미묘한 견제구를 날렸습니다. 앞서 러중은 미국에 맞서 공동으로 보조를 취하는 모습을 보여왔죠. 역사적으로 북러중 3각 구도를 결정한 변수는 무엇이고, 이것이 향후 동아시아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미중 데탕트와 北中 균열북러중 3국 관계는 냉전시대 사회주의 당-국가(party state)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른바 ‘미 제국주의’에 맞서는 사회주의 형제국이라는 국가관계가 형성된 거죠. 미국이라는 공통의 적, 다시 말해 대미(對美) 위협인식이 냉전 당시 3국 관계의 핵심 변수였습니다. 이는 미중갈등과 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며 신(新)냉전이 본격화 된 요즘도 마찬가집니다. 이런 프레임을 바탕으로 대미 위협인식이 극명한 대조를 이룬 1970년대 미중 데탕트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중갈등 시기의 북중관계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1979년 미중 수교로 북한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습니다. 아마도 이 시기는 6.25 전쟁 종전 이래 중국에 대한 북한의 방기(abandonment) 우려가 극대화된 시점 중 하나였을 겁니다. 방기란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의 비대칭 동맹에서 안보위기에 빠진 약소국이 강대국의 도움을 받지 못할 수 있는 위험을 말합니다. 반대로 강대국 입장에선 동맹으로 인해 원치 않는 갈등(전쟁 등)에 휘말릴 수 있는 위험(연루·entrapment)을 떠안게 되죠(·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230903/120996577/1 참조)‘미제와의 투쟁’을 앞세워 통치 정당성을 확보한 김일성으로서는 사회주의 맹방인 중국과 미국의 전격적인 수교를 인민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곤혹스러웠습니다(이종석 <북한-중국관계 1945-2000> (중심, 2000년) 참조)미중 데탕트에 대한 김일성의 인식은 미중수교 1년 뒤인 1980년 10월 10일 그가 조선로동당 제6차 대회에서 한 연설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당시 김일성은 중국을 직접 거명하진 않았지만, 사실상 중국을 겨냥한 신랄한 비판을 쏟아냈죠.“신흥세력 나라들은 온갖 외세의 간섭을 철저히 배격하여야 하며, 남의 장단에 춤을 추거나 남의 대리인 노릇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흥세력 나라들은 다른 나라의 자주성을 존중하여야하며 남의 내정에 간섭하거나 남의 이익을 침해하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하 김일성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서 한 중앙위원회 사업총화보고> (김일성 저작집 35권, 1987년) 참조)여기에서 김일성이 언급한 ‘대리인’은 미국에 접근한 중국을 가리키며, 내정 간섭이나 이익침해 운운은 미중이 북한을 둘러싼 적대 구조를 청산하고 한반도를 공동 관리하기로 한 방침을 정면으로 거부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됩니다. 김일성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중국의 행위가 사회주의 근본 원칙을 훼손했으며, 북중동맹을 위태롭게 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제국주의자들과 원칙적 문제를 가지고 흥정하여서는 안 되며 제국주의자들에게 혁명의 근본 이익을 팔아먹어서는 안됩니다. 사회주의 나라들과 쁠럭 불가담 나라들은 제국주의 나라들과 국가관계를 좋게 가지기 위하여 반제적 입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며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나라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이 연설에서 김일성은 중국이 미국과 맞선 종전의 대결 구도로 복귀해야한다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가 언급한 혁명의 근본 이익에는 미제와의 대결을 통한 한반도 통일이 포함됩니다. 따라서 중국이 자국의 외교적 이익을 위해 조선의 안보이익을 침해해선 안 된다는 메시지를 중국에 보낸 겁니다.그런데 김일성은 북중동맹의 균열 위험에 대한 경고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중국이 미국과의 데탕트에 나선 결정적 배경이자 중국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수 있는 ‘중소 갈등’까지 은연 중 언급하고 있습니다.“오늘 사회주의 나라들과 공산당, 로동당들은 의견 상이(相異)로 하여 통일단결을 이룩하지 못하고 있으며 세계혁명에서 마땅히 놀아야 할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형제당, 형제 나라들 사이의 의견 상이가 더는 확대되지 말아야 하며 사회주의 역량과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통일 단결은 하루빨리 실현되어야 합니다.”김일성이 이 국면에서 중소갈등 해소와 미제에 대한 공동투쟁을 강조하고 나선 건 단순히 원칙적인 대의를 표명한 게 아닙니다. 중국이 미국과 손을 잡는다면 북한도 소련과 손잡을 수 있다는 일종의 경고가 아닐까요. 이처럼 김일성이 중소갈등 국면에서 소련으로 접근 가능성을 내비칠 정도로 미중 데탕트는 북한에 다급한 안보 위협을 가져온 겁니다.미중갈등과 北中 밀착역사적으로 미중관계의 진전이 북중관계에 균열을 일으킨 것과는 반대로 미중갈등은 북중 밀착으로 이어졌습니다. 탈냉전 이후 미중관계는 미묘한 균열을 일으키게 됩니다. 소련 붕괴로 유일 패권국이 된 미국으로서는 과거처럼 소련 견제를 위해 중국과 협력할 필요가 사라졌기 때문이죠.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중갈등이 격화되기 시작합니다. 미국의 경제력이 점차 쇠퇴한 반면, 중국 경제는 안정적 성장을 이어가면서 미국의 중국 견제가 노골화되었기 때문이죠.미중갈등에 따른 북중 밀착은 1, 2차 북핵 실험 직후 양국 움직임의 확연한 차이에서 드러납니다. 중국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을 강행하자, 중국 외교부는 이례적으로 ‘제멋대로(悍然)’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북한을 공개 비난합니다. 이어 UN 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안(1718호)에 처음 찬성하죠. 그해 9월에는 북한의 대포동 2호 발사에 맞서 대북 석유수출을 중단했죠. 2008년 3월 김정일이 북한 주재 중국대사관을 방문하기까지 북중관계 회복에 1년 5개월이 걸렸습니다.그러나 미중갈등이 본격화 된 이후인 2009년 5월 25일 북한의 2차 핵실험 직후 중국의 대북 메시지는 현저히 완화됐습니다. ‘제멋대로’와 같은 거친 문구는 사라졌고, 그해 8월 우다웨이 한반도사무 특별대표가 방북하는 등 핵실험 3개월 만에 양국 고위층 접촉이 이뤄졌죠. 10월에는 원자바오 총리가 북중수교 60주년을 맞아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1년 5개월의 긴 냉각기를 가진 1차 핵실험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습니다.2010년 3월 천안함 사건은 미중갈등과 북중밀착을 촉진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중국은 천안함 침몰이 북한 소행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온 이후에도 “냉정과 절제” “대화를 통한 외교적 타결”을 운운하며 북한을 감쌌습니다. 이에 오바마가 그해 6월 G20 정상회담에서 후진타오에게 “자제를 발휘하는 것과 계속적인 문제에 대해 의도적으로 눈을 감는 것은 별개”라며 중국을 강하게 비판했죠.2016년 1월 6일 4차 핵실험 직후 중국은 주중 북한대사를 초치하고 대북 수출금지 목록을 발표했지만, 안보리 제재 수위를 낮추려고 노력합니다. 이에 따라 북한 민생이나 인도주의를 위한 예외 조항을 안보리 결의안 2270호에 반영시키죠. 이에 호응하듯 북한은 같은 해 9월 9일 5차 핵실험을 실시하기 사흘 전 최선희를 중국에 보내 이를 사전에 통보합니다. 중요 외교사안에 대한 정보 공유를 규정한 조중동맹 조약을 의식한 조치였죠.트럼프 집권 이후 미중갈등이 한층 격화된 가운데 2018년 3월 양국은 정상회담을 열고 냉전시대 북중동맹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연출합니다. 당시 김정은은 시진핑에게 “북중 친선을 대를 이어 목숨처럼 귀중히 여기고 이어나가는 것은 숭고한 임무”라고 말합니다. 시진핑도 “북중친선은 피로써 맺어진 친선이며 세상에 유일무이한 것”이라고 화답했죠.같은 해 5월 개최된 2차 북중 정상회담은 6월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미묘한 시점에 열렸습니다. 비핵화 협상에 대한 사전 정보공유 성격이 짙다는 점에서 역시 조중동맹 조항에 충실한 모습을 보인 겁니다. 이에 트럼프는 “김정은이 시진핑을 만난 이후 달라졌다”며 대놓고 불쾌함을 표시합니다.중소갈등과 북한의 선택북한은 사회주의 혈맹인 중국과의 관계에서 미중관계의 영향을 일방적으로 받은 반면, 중소갈등을 통해선 외교적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냉전시기 사회주의 양대 강국인 소련과 중국을 넘나들며 실익을 취한 거죠. 북한은 1960년까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무상원조의 43.17%와 30.75%를 각각 받아냈습니다. 자, 그럼 1960, 70년대로 시계를 돌려 보겠습니다.사회주의 종주국 지위를 둘러싼 중소의 갈등은 무력충돌로 이어져 1964~1969년 양국은 4189회에 걸쳐 국경분쟁을 벌입니다. 1969년 3월 우수리강 젠바오섬에서 교전이 벌어져 상당한 인명 피해가 발생하자, 소련은 중국 핵시설에 대한 공격을 검토하죠. 같은 해 8월 아나톨리 도브리닌 주미 소련대사가 미국 측에 중국에 대한 공격을 암시하며 지원을 요청할 정도였습니다(마상윤 “적에서 암묵적 동맹으로: 데탕트 초기 미국의 중국 접근” (국가안보패널 연구보고서, 2013년) 참조)미국은 이 같은 중소갈등을 적극적으로 파고듭니다. 닉슨이 1972년 2월 베이징을 방문해 소련군의 중소 국경 배치 정보를 중국에 제공한 게 대표적입니다(·https://nsarchive2.gwu.edu/NSAEBB/NSAEBB106/#1 참조) 닉슨은 당시 저우언라이에게 “소련은 서유럽 국가들에 맞서 배치한 군대보다 더 많은 병력을 중소 국경에 배치했다”고 강조했습니다. 중소관계 악화가 미중 데탕트로 이어진 순간입니다.북한은 중소갈등 국면에서 적절히 균형을 잡으면서 실리와 자율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합니다. 미중 데탕트에 맞서 소련과의 밀착 가능성을 암시한 김일성의 1980년 연설도 이런 맥락으로 볼 수 있죠.하지만 1970년대 미소 간에도 화해무드가 조성되면서 북한의 이런 줄타기 외교는 한계를 보이게 됩니다. 소련이 1970년대 초반부터 북한에 대한 고성능 무기판매와 지원을 줄인 게 대표적입니다. 1979년에는 북한에 대한 원유공급 혜택마저 대폭 축소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북한은 1970년대 중소갈등 상황에서 소련으로 편승을 시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중국을 소극적으로 지지하는 외교행태를 보이게 됩니다.탈냉전 이후 NATO의 동진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는 중국과의 관계회복을 서두릅니다. 1996년 4월과 1997년 4월 러중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은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 수립과 ‘다극체제’ 선언을 통해 미국 견제에 합의합니다.하지만 러중 관계는 미일동맹 같은 군사동맹 수준이 아닌 전략적 제휴 단계에 머물러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특히 과거의 영토분쟁에서 알 수 있듯 양국의 지리적 인접성으로 인해 상호 위협인식이 잠복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역외 균형자(offshore balancer)인 미국이 한국, 일본과 맺고 있는 양자 동맹에 비해 결합력이나 신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북중러 3각 구도 미래는북핵사태와 미중갈등,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북중러의 대미 위협인식은 과거 어느 때보다 커진 상황입니다. 이는 3국간 밀착이 당분간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뜻합니다. 하지만 러시아가 동아시아에서 지역 패권국으로 부상하고자 하는 중국의 의도를 100% 지지하리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극동지방에 영토를 둔 러시아가 역사적, 지정학적으로 동아시아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푸틴은 2001년 “역사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 한반도는 항상 러시아의 국가이익의 영역 내에 있다”고 선언한 게 대표적입니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에 대한 위기감이 팽배했던 이유입니다. 이승만은 1904년 저술한 ‘독립정신’에서 “속히 러시아의 무도함을 꺾어 동양으로 뻗어 나오는 세력을 막아야 동양 각국도 안전함을 얻을 것”이라고 썼죠(·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230813/120687443/1 참조)자주 외교를 유독 강조하는 북한이 과거 냉전시대처럼 러시아, 중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미국의 대북제재 이후 북한의 중국에 대한 경제의존도가 거의 100%에 달하는 상황에서 북한이 러시아를 일종의 대체재로 활용하는 시나리오입니다.하지만 이 경우 러시아의 경제, 외교적 여건이 녹록치 않은 게 한계입니다. 러시아도 북한의 편승에 부담을 느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최근 푸틴-김정은 정상회담에서 공동선언이나 성명을 남기지 않는 등 러시아가 북한과 일정한 거리두기를 시도하고 있는 게 이와 무관치 않을 겁니다. 결국 동아시아에서 중국, 러시아의 미묘한 경쟁관계 등을 감안할 때 북러중 3각 구도가 한미일 3각 동맹에 맞서기는 역부족일 것으로 보입니다.“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최근 ‘홍범도 장군 논란’을 계기로 공산주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평가가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국방부가 육사 충무관 앞에 설치된 홍 장군의 흉상을 이전하겠다고 밝히자, 이종찬 광복회장이 장관 사퇴를 요구하며 거세게 반발했죠.6·25 전쟁 이후 반공(反共)을 국시로 내건 대한민국에서 이들에 대한 평가는 참으로 미묘할 수밖에 없는데요. 하지만 이들의 항일활동에만 주목하고 공산주의 경력은 못본 채 하는 것도 온전한 역사적 평가는 아닐 겁니다. 앞서 ()가 이승만의 반공주의를 다뤘다면 6회에서는 그 대척점에 있던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살펴보겠습니다.좌익 독립운동가들 그들은 누구였나일제강점기 공산주의 운동가들은 지금 북한의 주체사상 신봉자들과는 달리 다양한 사상적 스펙트럼을 갖고 있었습니다. 일본 유학생, 기자, 러시아·만주 이주민 등 공산주의를 처음 접한 경로가 다양했던데다 ‘민족 해방’이 우선이냐, ‘노동계급 해방’이 우선이냐를 놓고도 각자 생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후자는 1980년대 운동권의 이른바 NL-PD 논쟁을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이처럼 다양한 배경은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서울청년회’ ‘화요회’ ‘북성회’ 등 숱한 공산주의 파벌을 낳은 원인이 되죠. 사실 분단 이후 북한에서 공산주의 패권을 차지한 김일성은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항일운동 세력 중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김일성이 항일 무장투쟁 경력이 있기는 하지만, 홍범도·김좌진 등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죠. 따라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현재의 관점으로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운동가를 평가한다면 편견이 작용할 소지가 있습니다.흥미로운 건 북한이 김일성을 제외한 나머지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운동가들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북한 역사학계는 “1920년대 후반 들어 노동운동과 민족해방 운동이 급속히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제약성과 결함들로 인해 노동자들의 혁명적 진출을 통일적으로 지도하지 못했다. 이런 결함과 약점들이 생긴 기본적 원인은 바로 공산당의 무원칙한 파벌투쟁 때문”이라는 비판을 내놓고 있습니다(김인걸 <1920년대 맑스〮레닌주의의 보급과 로동운동의 발전> 1964년, 조선로동당출판사)한마디로 공산주의 세력간 파벌투쟁으로 인해 민족해방 및 노동해방 전선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겁니다. 김일성이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거치며 소련파, 연안파 공산주의자들을 모두 숙청하고 유일 지배체제를 수립한 뒤에야 이런 평가가 북한에서 나온 건 우연이 아닙니다.남한 역사학계는 북한의 지적이 사실에 부합하는 측면(파벌 투쟁에 따른 운동 역량 약화)도 있지만, 이보다는 만주에서 활동한 김일성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국내 공산주의 운동을 부정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큰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이하 심지연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인식과 논리> 2015년, 백산서당 참조) 이는 항일 무장투쟁의 적통을 김일성으로 단일화함으로서 김정일의 권력세습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됐죠.이들은 왜 공산주의에 빠졌나좌익 독립운동가들은 왜 공산주의 사상에 몰두하게 되었을까요. 20세기 초반 당시 조선뿐 아니라 반식민지 상태에 놓인 중국,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 등 서구 제국주의 침략을 받은 아시아 민족 상당수가 공산주의를 받아들였습니다. 민족 해방, 노동 해방을 기치로 내건 공산주의가 제국주의 타파를 위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 거죠. 여기에는 세계 공산화를 추구한 소련의 지원도 한몫했습니다.일례로 1922년 1월 소련 코민테른(국제 공산당)은 모스크바에서 ‘극동 민족대회’를 열고 서구 제국주의를 성토하며 아시아 민족 해방을 지지합니다. 이 대회에는 총 136명의 아시아 각국 대표가 참석했는데, 이 중 조선이 52명으로 중국(37명), 일본(16명), 몽골(14명), 부리야트(4명), 자바(1명) 칼미크(1명) 등을 제치고 가장 많은 인원을 파견했습니다.조선이 이처럼 극동민족대회에 높은 관심을 쏟은 건 직전 미국에서 열린 1921년 11월 워싱턴회의에 대한 실망감이 작용한 영향도 있었습니다() 워싱턴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국제질서를 규정하는 중요한 국제회의였습니다. 일본의 막강한 해군력을 억제하고 동아시아에서 힘의 균형을 추구하고자 한 미국의 의도가 반영된 회의였던 만큼, 이승만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를 독립 외교의 기회로 삼으려고 했죠.그러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가 1차대전 승전국인 일본을 의식한 탓에 이승만을 비롯한 한국 대표단이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고, 한국 문제가 공식 의제로 다뤄지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상당수 독립운동가들이 미국에 대한 기대를 접고 소련의 지원을 얻고자 공산주의에 접근하는 결과를 낳게 되죠.소련도 이 같은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당초 1921년 11월로 예정돼 있던 극동민족대회 일정을 일부러 이듬해 1월로 연기하죠. 아시아인들에게 실망스런 결과를 안길 미국 워싱턴회의를 지켜본 뒤 이를 비난할 기회를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미국 등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을 공격할 수 있는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셈이죠. 이후 소련은 조선 공산주의자들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모스크바 유학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코민테른을 중심으로 운동 지침까지 내리게 됩니다.소련 추종이 낳은 비극여러 지원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소련은 일제강점기 조선 공산주의 독립운동에 결정적인 해악을 끼쳤다는 게 학계의 평가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신간회 해체와 자유시 참변입니다.1927년 2월 창립된 신간회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처음으로 손을 잡은 ‘민족 유일당’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큰 조직이었습니다. 일제에 대한 투쟁 역량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양 진영이 대립하기보다 힘을 합쳐야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죠. 조선일보 계열 신석우와 사회주의 계열 신채호 등 34명이 모여 조선 민족의 정치·경제적 해방을 목표로 신간회를 발족합니다.이후 1929년 광주학생운동 당시 민족차별을 성토하며 법률 지원에 나서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쟁취, 여성 형평운동, 동양척식회사 반대 등 다양한 활동을 벌입니다. 이에 1930년 무렵 전국 약 140개 지회에 걸쳐 4만 명에 육박하는 회원을 확보하면서 일제의 본격적인 감시와 탄압에 직면하게 되죠.결정적인 위기는 1929년 12월에 찾아옵니다. 신간회가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확산시키려 한다는 걸 눈치 챈 일제가 허헌, 홍명희, 조병옥 등 지도부 44명을 한꺼번에 잡아들인 겁니다. 이에 상대적으로 온건한 노선의 민족주의자들로 새로운 지도부가 꾸려졌는데, 이때 공산주의 운동가들이 이들을 개량주의자라고 비판하며 신간회 해체를 주장하죠. 그런데 이때 이들이 해체의 근거로 삼은 게 소련 코민테른과 프로핀테른(국제 노동조합)의 지침이었습니다.코민테른은 1928년 12월 테제에서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분파주의를 비판하면서 조선공산당 해체와 민족주의자의 우유부단함에 대한 폭로를 지시합니다. 이어 프로핀테른도 1930년 9월 테제를 통해 광주학생운동 등의 대중 투쟁을 저지하기 위해 일제가 자치를 약속하며 민족개량주의 부르주아를 매수하고 있다고 주장하죠.이에 코민테른 노선을 추종한 신간회 내 공산주의자들은 일제에 타협적인 개량주의자들이 지도부를 장악해 투쟁 의욕이 사라졌다면서 해체론을 제기합니다. 결국 신간회는 1931년 5월 본부 대의원회의 투표를 거쳐 창립 4년 만에 전격 해체되는 비운을 맞습니다.일제 타도를 외치던 코민테른이 일제가 그토록 집요하게 탄압한 신간회 해체에 일조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거죠. 일제와 코민테른 모두 조선인들을 자신들 마음대로 통제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행동했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이후 일제가 무너질때까지 신간회와 같은 좌우 합작의 독립운동 단체는 출현하지 못합니다. 좌우 분열로 독립운동 역량이 약화되는 결과를 빚은 거죠.소련의 이런 일방주의적 행태는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에서도 드러납니다. 러시아화 된 고려인들 위주로 구성돼 소련의 지지를 확보한 고려혁명군정의회가 통합 부대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이에 반기를 든 독립군을 공격한 사건입니다. 당시 일본군에 쫒기던 간도 독립군 부대들은 무기와 식량을 공급받고, 연해주에 있는 고려인 부대와 힘을 합치기 위해 러시아 땅으로 들어온 상황이었죠(이하 윤상원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2017년 한국사연구 178집 참조)참변 직후 소련은 홍범도 장군을 재판위원으로 끌어들여 생존한 독립군 부대원들을 처벌합니다. 홍 장군은 공정한 판결이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재판에 참여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생존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당시 그의 결정을 간도 독립군부대에 대한 배신으로 여긴 조선인 2명이 1923년 8월 하바로프스크에서 홍 장군을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홍 장군은 레닌에게 하사받은 권총으로 이들을 사살한 뒤 감옥에 갇혔다가 레닌의 증명서를 받고 석방됩니다. 하지만 이후 다시는 독립군 부대를 이끌지 못하죠.사실 일제강점기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소련 추종은 이웃 중국 공산주의자들과는 대조적인 현상이었습니다. 물론 중국 공산주의자들도 초기에는 모스크바 유학파를 중심으로 코민테른 노선을 충실히 따르는 행태를 보입니다. 하지만 1935년 1월 ‘쭌이(遵義) 회의’에서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한 토종파가 소련파를 제압하고 당권을 쥐면서 독자 노선을 걷게 되죠(이하 박노자 <조선 사회주의자 열전> 2021년, 나무연필 참조)마오쩌둥은 당시 당권을 쥔 왕밍 등 소련파의 노선이 중국 실정에 맞지 않는 비현실적이고 비대중적인 방침이라고 강하게 비판합니다. 이후 마오쩌둥은 국민당과 통일전선을 구축하라는 스탈린의 요구를 거부하고 내전을 벌이게 되죠.결국 중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소련 추종은 독자 노선이나 방침이 없었던 영향이 컸다고 생각됩니다. 이는 조선 공산주의자로서 중국공산당 간부로 활동한 한위건의 발언에서도 확인됩니다. 한위건은 “조선의 마르크스주의는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외국의 선진 이론을 재빨리 수입한 것이지, 노동운동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낸 게 아니다”라고 지적했습니다.소련 ‘패권주의’에 이용된 측면사실 소련은 조선 공산주의자들을 자신들의 패권 추구에 이용한 측면이 있다는 게 학계의 시각입니다. 12월 테제로 신간회 해산을 지시한 코민테른이 불과 7년 뒤 1935년 7차 대회에서 민족 부르주아와의 협력으로 노선을 다시 변경한 게 대표적입니다.이에 대해 소련이 극동지역에서 일제와 패권을 다투는 과정에서 자국 이익을 중심에 놓고 조선 공산주의 운동에 접근했다는 해석이 나옵니다(이하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2015년, 돌베개 참조)실제로 1922년 일본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군대를 철수하는 등 극동지역에서 안보 위협이 해소되자, 소련은 고려공산당과 독립 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로 돌아섰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들어 일본이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극동에서 팽창주의를 추구하자, 위협을 느낀 소련은 기존 노선을 바꿔 조선 공산주의자들에게 민족 부르주아와의 통일전선 구축을 지시하죠. 당시 조선 공산주의 운동에서 핵심이던 ‘좌우 합작’ 노선을 조선의 내부 사정보다는 소련의 국익을 앞세워 결정한 겁니다.이처럼 소련의 자국 이기주의와, 이런 소련의 방침을 추종한 행태로 인해 일제강점기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은 난관에 부닥친 게 사실입니다. 여기에 네 차례에 걸친 일제의 대대적인 지도부 검거 등 강력한 탄압으로 인해 조선공산당은 해방 전까지 재건되지 못하죠. 그러나 일제의 극심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항일투쟁을 벌인 데 대해선 김일성과는 별도의 평가가 필요하지 않을까요.“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요즘 신재생에너지 행사에서 정부 관계자 얼굴을 보기가 어려워졌다.”최근 기업계 인사가 “신재생이 현 정부의 ‘적폐’로 낙인찍힌 사실이 실감난다”며 건넨 말이다. 실제로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에너지 정책을 총괄하는 강경성 2차관은 지난달에만 ‘원전 수출 일감 설명회’ 등 원전 관련 행사 3곳을 직접 방문했다.하지만 이 기간 강 차관은 신재생에너지 관련 행사에는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의 비현실적인 탈원전 정책을 폐기하고, 태양광 보조금 비리 등 신재생에너지 거품을 제거하겠다는 정책 방향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그러나 에너지 주무 부처인 산업부 고위 당국자의 신재생에너지 행사 참여가 뜸할 정도로 관련 정책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식은 것은 우려되는 대목이다. 폭염 등 세계적 기후 위기로 ‘탄소중립’이 각국 에너지 정책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어서다.당장 다음 달부터 유럽연합(EU)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시행됨에 따라 철강, 알루미늄, 시멘트, 비료, 전력, 수소 등 6개 품목을 유럽에 수출하려면 분기별로 탄소배출량을 당국에 보고해야 한다. 원전과 신재생은 국가 에너지 정책의 쌍두마차로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에너지 정책의 정치화가 낳은 폐단은 이명박 정부의 ‘자원 외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부는 석유공사, 광물자원공사 등을 동원해 해외 주요 유전, 광산 등에 대해 공격적인 투자에 나섰다. 그러나 장기 투자가 필수인 광물자원 특성상 조기에 수익을 거두지 못하자, 문 정부는 자원 외교를 ‘적폐’로 규정하고 광물자원공사의 11개 해외 자산을 한꺼번에 매각했다. 2012년 219개였던 해외 광물 개발사업은 2021년 94개로 급감했다. 이 과정에서 우량 광산이 헐값에 팔렸다는 지적이 나왔다.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은 해외 자원개발은 최근 효자로 거듭나고 있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12년 가스공사가 약 2조 원을 투자한 호주 프렐류드 가스전은 2019년 생산 개시 이후 2020년까지 적자였지만 이듬해 흑자로 바뀌었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액화천연가스(LNG) 값이 급등해 이 가스전의 가치는 크게 올랐다.2009년 확보해 총 8500억 원이 투입된 파나마 코브레파나마 구리 광산도 최근 자원무기화 흐름과 맞물려 매년 1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내고 있다. 이 광산 역시 문 정부가 매각을 추진했지만 2021년부터 수익이 나자 이를 철회했다. 미중 갈등과 맞물려 공급망 안정화가 중요해지는 상황에서 해외 광물자원 개발은 이제 필수가 됐다.에너지 정책의 정치화는 전기요금 책정에까지 마수를 뻗고 있다. 문 정부 내내 국제 에너지 가격 상승에도 여론을 의식해 전기료 인상을 억제한 결과, 한전은 부채만 201조4000억 원(올 6월 말 기준)에 이르는 부실 덩어리가 됐다. 전문가들은 원가를 반영한 요금 인상 외에는 한전 부실을 털어낼 묘안이 없다고 말한다.그러나 내년 총선을 앞둔 정부와 여당이 올 4분기 전기요금을 올리기 힘들 것이라는 얘기가 벌써부터 나온다. 문 정부가 넘어간 포퓰리즘이라는 ‘악마의 유혹’이 현 정부의 전기요금 정책에도 넘실거리고 있는 것이다. 에너지 정책만은 정권의 부침(浮沈)과 상관없이 ‘탈(脫)정치’의 영역에 속해야 국가 미래가 보장될 수 있다.김상운 경제부 차장 sukim@donga.com}
“철통같은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으로 이어진 우리 각각의 양자관계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며, 우리의 3자 관계도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다.”“우리는 한미동맹과 미일동맹 간 전략적 공조를 강화하고, 3국 안보 협력을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이다.” (굵은 글씨는 기자가 표시)지난달 18일(현지 시간)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3국 정상이 발표한 공동성명(The Spirit of Camp David: Joint Statement)의 일부입니다. 한미일의 첫 정상회의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이번 회의에서 3국 협력의 핵심 기반은 한미·미일동맹임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78년 동안 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역외 패권국인 미국이 한국, 일본, 필리핀, 호주 등 지역국들과 개별적으로 맺은 양자조약을 중심으로 구축됐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미동맹은 1953년 6.25 전쟁 휴전 이후 70년간 한반도에 장기 평화를 가져온 역사적 산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또 미국의 안보 보장을 바탕으로 국방비에 투입되어야 할 재원을 경제개발로 돌려 1970년대 고도 성장을 달성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죠. 실제로 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에 따르면 1970년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방비 비중은 남한(3.7%)이 북한(11%)의 약 3분의 1에 불과했습니다. 북한의 대규모 군비 지출은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당시 수십 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주요 원인이 됩니다.그렇다면 한미동맹의 실체인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어떤 과정을 거쳐 체결되었을까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반공투사로 나아가는 과정을 다룬 에 이어 5회는 예고해 드린 대로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과정에서 그의 역할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겠습니다.한국 경시, 일본 중시의 美 동아시아 전략관역사를 들여다보면 한국 입장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쟁취했다’는 표현이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종의 대한제국부터 6.25 전쟁 직전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에 이르기까지 미국과의 동맹은 우리의 일방적인 구애에 가까웠습니다. 미국 정부는 고종과 이승만의 동맹 요청을 거듭 뿌리치며 한사코 거부합니다. 왜 그랬을까요.이는 미국이 19세기 개항 이후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중시한 반면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는 낮게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고종은 러시아와 일본의 팽창주의에 맞서기 위해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交通商條約)을 맺습니다. 고종은 이 조약의 제1조 거중조정(居中調停·Good offices) 조항(‘만일 각국이 일방 정부에 대해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는 타방 정부는 그 사건의 통지를 받는 대로 원만한 타결을 가져오도록 주선함으로서 우의를 표해야 한다’)을 조선이 외세의 침략을 받을 경우 미국이 군사·외교적으로 도와준다는 뜻으로 확대 해석합니다(이하 유영익 <한미동맹 성립의 역사적 의의: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중심으로> 한국사연구휘보 제128호, 2005 참고)이에 따라 고종은 1885년 영국 해군의 거문도 점령과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당시 미국 정부에 거중조정을 거듭 요청했지만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존 셔먼 미 국무장관은 1897년 11월 19일 조선 주재 미국공사 앨런에게 “우리 정부는 한국의 국가 운명에 관계되는 문제에 대한 상담역이 될 수 없다. 또 한국과 어떠한 종류의 ‘보호 동맹’도 맺지 않을 것”이라고 통보합니다. 고종이 미국을 동맹으로 여기지 않도록 철저히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라고 지시한 거죠.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미국의 ‘배신’을 직접 경험하게 됩니다. 러일전쟁 이듬해인 1905년 8월 4일 이승만은 고종의 특사로 미국에 파견돼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납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입각해 일본의 조선 침략을 막아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죠.이에 루스벨트는 “정식 외교 경로로 문서를 제출하면 러일 강화회의 때 이를 내놓겠다”며 우호적으로 답하지만 그건 한낱 외교적 수사에 불과했습니다. 이승만이 루스벨트와 만나기 5일 전 미국은 이미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를 인정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험으로 인해 이후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미국 정부의 조미수호통상조약 불이행을 틈날 때마다 언급해 도덕 외교에 호소하는 전략을 취합니다.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본 미국의 태도는 해방 이후에도 유지됩니다. 6.25 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 6월 미군의 남한 철수가 대표적입니다. 이미 1947년 후반부터 미 군부가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하면서 주둔비용 부담을 들어 조기 철군을 주장한 데 따른 겁니다(이하 김일영 <이승만 정부에서의 외교정책과 국내정치: 북진 반일정책과 국내 정치경제와의 연계성> 국제정치논총, 2000 참고) 당시 이승만은 북한의 남침 위협을 들어 미군 철수를 강하게 반대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이에 그는 대안으로 상호방위협정 체결을 요구하지만 이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죠.6.25 전쟁 발발의 도화선이 된 1950년 1월의 ‘애치슨 라인’ 발표도 같은 맥락입니다. 미국은 태평양 방위구역선에 일본과 필리핀을 포함하면서 한국과 대만은 제외합니다. 이는 김일성과 스탈린이 전쟁을 계획하면서 남침 시 미국의 개입이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오판한 근거가 됩니다.미국이 상호방위조약 체결 꺼린 이유미국이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부정적이었던 것은 ‘비대칭 동맹조약’의 속성에서 비롯된 측면도 큽니다. 강대국과 약소국 간에 체결되는 비대칭 동맹조약은 이른바 ‘방기(abandonment)와 연루(entrapment)의 딜레마’를 겪기 마련입니다. 동맹을 맺고도 안보위기 시 도움을 받지 못할 수 있는 위험이 방기라면, 연루는 동맹으로 인해 원치 않는 갈등(전쟁 등)에 휘말릴 수 있는 위험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양자 동맹에서 상대적 약소국이 방기의 위험을 두려워한다면, 상대적 강대국은 연루의 위험을 두려워하죠. 미국은 약소국 조선(해방 이후 대한민국)과의 동맹조약 체결에 따른 비용(연루의 위험)이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보다 더 크다고 판단하고, 이를 거부한 겁니다.대외관계에서 개입과 고립을 오간 미국의 외교 전통도 한몫했습니다. 1823년 먼로 독트린으로 유럽에 대해 고립주의 외교를 천명한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계기로 개입으로 급선회합니다. 하지만 늘 실리를 따지는 미국답게 과도한 개입을 통한 군비 확장 등의 비용은 경계하죠.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 처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 체코 등 중부 유럽을 점령한 미군을 철수시킨 게 대표적입니다(윈스턴 처칠 <제2차 세계대전> 까치, 2016 참고) 당시 처칠 영국 총리는 얄타 회담 이후 노골화된 스탈린의 팽창주의에 맞서려면 미군의 유럽 철수를 최대한 늦춰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루스벨트 대통령은 소련과의 갈등을 피하고 국민들의 철군 여론을 충족시키기 위해 철수를 단행합니다.양자동맹의 근간인 현실주의 외교에 대한 미국의 혐오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사국 누구도 예상치 못한(그리고 누구도 원하지 않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많은 인명 피해를 입은 미국은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현실주의 외교를 혐오하게 됩니다(이하 헨리 키신저 <Diplomacy> 2013 참고)대신 국제법과 국제기구를 통한 국제평화를 추구하면서 집단안보를 통해 공동의 적에 대응하는 자유주의 접근을 선호하게 되죠. 이에 따라 미국은 양자동맹을 통한 세력균형이라는 유럽 대륙의 전통적인 안보 보장을 기피하게 됩니다. “내가 아는 한 미국은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 시대 이래 어느 국가와도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일이 없다”는 1949년 5월 초대 주한 미국대사 존 무초의 발언이 나온 배경입니다.승부사 이승만의 ‘벼랑 끝 전술’자 그럼 대한제국 시절부터 미국에 줄기차게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부당한 동맹조약이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후 71년 만에 체결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는 미소 냉전이 주변부에서 최초의 열전 형태로 발화한 6.25 전쟁과 더불어 이승만의 집요한 외교적 노력이 결합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계를 6.25 전쟁 발발 전후로 돌려보겠습니다.이승만은 1948년 정부 수립 직후부터 북진통일을 강하게 주장합니다. 당시 북한과 상대가 되지 않은 남한의 군사력에 비춰보면 허황된 발상이라는 반발을 사죠. 하지만 그의 북진통일론은 국내 정치 목적과 대미 외교용의 두 가지 포석을 노린 전략이었다는 게 최근 학계의 평가입니다. 국내 정치 측면에서는 당시 한독당 등이 주장한 남북협상론에 대응해 국민들을 동원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겁니다. 동시에 미국에 대해서는 미군 철수를 늦추거나, 철수에 따른 안전보장을 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반도의 긴장을 높였다는 거죠.무엇보다 6.25 전쟁 이후 이승만의 ‘벼랑 끝 전술’(brinkmanship)이 미국을 움직이는 데 크게 이바지합니다. 그의 승부사 기질은 북중 연합군과 유엔군 사이에 휴전 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진 1952년 3월부터 발휘되기 시작합니다.당시 그는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만이 한국인들에게 휴전을 납득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만약 미국이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한국군은 단독으로라도 북진 통일에 나서겠다고 위협합니다. 중공군 참전에 따른 전사자 급증으로 반전 여론이 강해진 미국은 휴전 등 출구전략을 모색 중이었는데, 이승만의 발언에 적지 않은 압박을 느낄 수밖에 없었죠.아이젠하워 집권 직후인 이듬해 5월 브리그스 주한 미국대사가 상호방위조약 대신 한국군 증강을 대안으로 제시하지만, 이승만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유엔군을 철수시켜도 좋다.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며 재차 미국을 압박합니다. 이에 아이젠하워는 그해 6월 6일 휴전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면서 필리핀과 맺은 조약에 준하는 방위조약 체결 협상 개시를 통보합니다. 아이젠하워의 양보에도 이승만은 더 강하게 밀어붙이죠. ‘미군 주둔’을 규정한 미일 안보조약 수준의 강력한 방위조약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이에 그는 아이젠하워의 서한을 받고 열흘 뒤인 1953년 6월 16일 미국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반공포로 2만7000여 명을 일방적으로 석방하는 강수를 둡니다. 한국이 원하는 수준의 안보 보장 없이는 휴전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겁니다.당시 치열한 이데올로기 선전의 각축장이었던 반공포로 이슈에서 이승만의 독단적인 결정에 직면한 미국 정부는 극도의 분노에 휩싸입니다. 쿠데타를 통해 이승만을 제거하는 작전계획(Plan Ever-ready) 실행까지 검토할 정도였죠. 하지만 결국 미국은 다시 한번 물러섭니다. 월터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를 서울로 급파해 상호방위조약 체결 협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겁니다.당시 로버트슨은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이승만은 상황 판단이 빠르고(shrewd) 지략이 뛰어난(resourceful) 인물이다. 그는 한국을 국가적 자살행위(national suicide)로 몰고 갈 수 있는 광적인 인물(fanatic)이지만 회유와 압력을 통해 협력을 얻어내는 게 가능하다”고 보고했습니다.하지만 이승만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로버트슨이 제시한 조약 초안에 한국이 무력 공격을 당할 경우 미국의 즉각적이고 자동적인 지원을 약속하는 조항이 빠진 사실을 지적하면서 다시 한번 미군 주둔을 허용한 미일 안보조약 수준의 안보 공약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비대칭 동맹조약에서 약소국의 ‘방기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였죠.결국 미국은 이승만의 요구를 수용합니다. 로버트슨은 본국 훈령을 받아 한국 내 미군 주둔 조건을 수용하기로 하고, 대신 한국군의 단독 행동 포기와 휴전 협조를 이승만에게 요구합니다. 이와 함께 전후 복구를 위한 경제 원조와 한국군 전력 증강 등을 약속하죠. 이승만이 그토록 원한, 대한제국 시절부터 숙원이었던 미국과의 동맹조약이 사실상 이뤄진 순간입니다.이승만이 줄기차게 강조한 미국의 자동 개입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제4조의 미군 주둔 조항(‘상호적 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을 통해 사실상 달성됩니다. 주한미군의 ‘인계철선(引繫鐵線)’ 기능을 통해 유사시 미국이 자동으로 개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기 때문이죠.미군 주둔 조항이 독립국의 주체성과 자존심을 침해했다는 진보 진영의 비판도 있지만, 사회주의 양대 강국이던 소련, 중국을 등에 업은 북한의 침략에 맞서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을까요.“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일당 독재국가 오세아니아에서 과거의 신문기사를 수정, 조작하는 일을 한다. 당과 수령(빅브러더)의 ‘무오류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오웰은 기록 조작, 문서 검열, 감시의 일상화 등 스탈린 지배하의 소련 사회주의 체제를 비판하기 위해 이 작품을 썼다. 사실 사회주의 독재국가들에서 최고 지도자의 무오류성에 대한 집착은 공통된 현상이다. 북한에서는 2013년 장성택이 반역 혐의로 처형된 후 신문, 방송 등에서 그의 사진과 기록이 삭제됐다. 당과 군을 주무르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2인자가 하루아침에 존재하지도 않은 인물이 된 것이다. 후계체제 구축의 일등공신인 장성택에게 권력을 몰아준 김정은이 입장을 180도 바꿔 그를 제거한 통치 모순을 해소하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지난해 10월 3연임을 확정하며 장기 집권의 길을 연 시진핑의 중국도 최고 지도자의 무오류성이라는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 ‘제로 코로나’ 정책이 대표적이다. 상하이 등 중국 주요 도시 봉쇄로 지난해 2분기 경제성장률이 0.4%로 급락하는 등 위기에 직면했지만 시진핑은 기존 방역 정책을 고수했다. 방역 완화가 필요하다는 중국 내 전문가들의 의견도 소용없었다. 오히려 시진핑은 올 초 연설에서 “3년간 코로나에 대한 관리를 엄격히 시행한 것은 ‘정확한 선택’이었다”고 못 박았다. ‘시 황제의 무오류성’은 이제 대가를 치르고 있다. 3년의 팬데믹 기간에 과도하게 위축된 소비와 생산이 리오프닝(경제 활동 재개) 이후에도 살아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중국의 지난달 소매판매와 산업생산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2.5%, 2.7% 증가에 그쳐 시장 기대치를 크게 밑돌았다. 이에 7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0.3%로 2년 5개월 만에 마이너스 전환하는 등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 징후가 뚜렷해지고 있다. 문제는 경기 부양에 나서야 하는 중국 정부의 ‘거버넌스 리스크’다. 중국 정부는 올 6월 청년실업률이 역대 최고인 21.3%에 달하자 지난달부터 해당 통계를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국가경제에서 가장 기본인 고용통계조차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차단한 것이다. 앞서 팬데믹 기간 중국의 코로나 확진자 및 사망자 통계가 부정확하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지난해 12월부터 관련 통계를 발표하지 않겠다고 해 논란이 됐다. 지배집단의 무오류성을 위해 기록(통계)마저 은폐, 왜곡하는 사회에서 건전한 정책 비판을 통한 환류(feedback)는 불가능하며, 이는 정책 실패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최근 중국 부동산발 경제위기도 같은 맥락이다. 국제금융센터의 보고서(중국 부동산시장 전망 및 리스크 평가)에 따르면 중국 정부가 발표한 은행 부실채권(NPL) 비율은 2018년 3분기 1.9%에서 올 1분기 1.6%로 낮아졌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실제 부실 규모가 정부 통계의 약 5배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외신들은 부동산 대출이나 지방정부 채무에 숨겨진 리스크가 상당하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우리나라는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높은 만큼 사회주의 독재체제의 무오류성에 감춰진 리스크를 직시하고 더 철저히 대비해야 할 것이다. 김상운 경제부 차장 sukim@donga.com}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둘러싼 재평가 논란이 뜨겁습니다. 9일에는 백범 김구와 이승만의 관계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이 눈길을 끌었죠. 이날 독립유공자 오찬에서 김미 김구재단 이사장(백범 손녀)이 “이승만 전 대통령과 김구 선생이 힘을 합쳤었는데 후세 일부가 이간질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하자, 윤 대통령이 “백범은 공산주의에 가장 강하게 반대하신 분이다. 어떻게 이 전 대통령의 적이 될 수가 있었겠느냐”고 답했다는 겁니다.지난달에는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열린 이승만 동상 제막식을 놓고 논란이 일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등 일부 단체들이 “4.19 혁명으로 쫓겨난 독재자를 기리는 건 역사 부정”이라고 반발한 거죠.이명박 정부 당시 건국절 논란과도 이어지는 이승만 재평가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뜨거운 감자 중 하나입니다. 1960년대 그의 장기 독재와 하야는 교과서에도 자세히 수록된 만큼 상대적으로 덜 조명된 그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이후 6.25 전쟁 시기까지의 행적을 역사학계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들여다보겠습니다.유라시아 공산화와 이승만의 반공주의“비록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3년 동안 인민군의 확장을 중지하고, 그동안 남쪽에서 모든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대응할 만한 병력을 (남한이)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소련인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 병력을 남한으로 투입시키고 한순간에 여기에서 정부가 수립되고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백범-류위완(劉馭萬) 대화록)1948년 7월 11일 김구가 자택을 찾아온 류위완 유엔한국위원회 중국 대표공사에게 건넨 대화입니다. 여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유라시아 대륙에서 급속하게 진행된 공산화의 파고가 한반도에도 들이닥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본 백범의 시각이 담겨있습니다.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그해 백범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김일성을 만나러 38선을 넘은 것도 이 같은 정세 판단에 기인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죠. 이런 백범의 현실 판단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습니다.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영미 연합국과 미묘한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 소련은 동유럽 적화(赤化)를 목표로 헝가리, 불가리아, 폴란드 등에서 ‘인민전선 전술’을 동시다발로 구사합니다(이하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북한체제의 수립과정> (1991) 참조)소련은 인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민족주의자 등 좌우를 망라한 연립정권을 세운 뒤 테러 등을 통해 반공 세력을 제거 혹은 흡수하는 과정을 거쳤죠. 공산당 특유의 기만전술로 이른바 ‘사이비 연립단계’를 거쳐 공산주의 독재정권을 잇달아 수립한 겁니다.이 같은 소련의 적화 방식은 북한에도 적용됩니다. 소련 군정이 초창기 조만식 선생 등 민족주의 세력을 끌어들이려고 한 시도(소련군은 건준 대신 세운 임시정치위원회 위원장으로 조만식을 추대)가 대표적입니다.이에 대해 이미 해방 전부터 확고한 반공 노선을 견지한 이승만은 김일성과의 타협을 일절 거부하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나아갑니다. 그는 미국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벌일 당시인 1923년 에 기고한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에서 “공산당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사유재산 부정, 자본가 부정, 지식계급 부정, 종교 부정, 국가 부정은 부당한 것”이라고 못 박습니다.해방 직후 소련군이 미군보다 먼저 한반도에 진주한 가운데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을 포함한 많은 지식인들이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상황에서 이승만은 꿋꿋이 반공을 고수하죠. 그의 이런 확고한 반공 원칙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요.‘반공 투사’ 이승만의 탄생이승만의 인생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딱 두 가지만 고른다면 아마도 ‘미국’과 ‘기독교’가 아닐까 싶습니다. 양녕대군 16대손으로 유학(儒學)을 신봉하는 양반가 자제였던 그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인생의 항로가 바뀌기 때문이죠. 사실 반공주의 원칙은 이 두 요소에서 비롯됐다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미국’, ‘기독교’와의 첫 조우는 1895년 그의 나이 스물에 입학한 배재학당에서 이루어졌습니다(이하 유영익,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 비전> (2019, 청미디어) 참고) 연이은 과거 낙방으로 잠시 방향을 잃은 그에게 1894년 청일전쟁은 커다란 충격을 안깁니다. 갑오경장으로 과거제가 폐지된 데다 일본이 대국 청나라를 꺾는 모습을 보고 유학 공부를 중단한 뒤 서양 신학문 학습에 나서죠.미국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가 1885년 한양에 설립한 배재학당은 각국 외교관, 무역회사 자제들이 공부하는 일종의 미국식 국제학교였습니다. 이곳에서 이승만은 영어학습에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해 입학 6개월 만에 영어반 보조교사로 발탁됩니다.특히 당시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의사 면허증을 따고 배재학당에서 특강을 맡았던 서재필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죠. 이승만은 배재학당의 개신교 선교사들, 서재필 등과 교유하면서 미국식 민주주의에 눈을 뜨게 됩니다. 평생에 걸친 미국과의 깊은 인연이 여기에서 시작되죠.배재학당 졸업 후 1899~1904년까지 5년 7개월 동안 대한제국 한성감옥에 수감된 경험도 이승만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됩니다. 당시 중추원 의관이던 그는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이강을 새로운 군주로 옹립하려는 급진 개화파 박영효의 정치개혁에 가담했다가 종신형을 선고 받습니다.목에 10kg에 달하는 무거운 칼을 쓰고 사형의 위기를 맞은 한계 상황에서 이승만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입니다. 그는 동료 죄수들과 성경 공부를 하면서 40여 명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데 이어 옥중학교를 세우고 죄수와 간수들을 대상으로 한글, 한문, 영어, 수학, 국사, 지리 등을 가르치죠. 평생 정치인이자 기독교 교육가로 활동한 그의 이력이 이 감옥에서 처음 시작된 겁니다.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옥중 도서실을 만들어 영어, 한문으로 쓰인 많은 책들을 탐독하고 400쪽에 이르는 책(<독립정신>)을 저술하기도 합니다. 그는 훗날 영문 자서전에 “나는 감옥살이에서 얻은 축복에 대해 영원히 감사한다”고 썼습니다.당시 극동지역으로 팽창하던 러시아에 대한 지정학적 위기감도 그를 반공투사로 만든 요인 중 하나입니다(이하 김명섭 등 <20세기초 동북아 반일(反日) 민족지도자의 반공(反共): 이승만과 장개석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34권 2호(2013) 참고)그는 <독립정신>에서 “1859년 러시아-터키 전쟁에 서양 열강들이 간섭해 서쪽으로 길목이 막히자 러시아가 동쪽으로 눈을 돌려 우리의 위급함이 조석에 달렸다. 속히 러시아의 무도함을 꺾어 동양으로 뻗어 나오는 세력을 막아야 동양 각국도 안전함을 얻을 것”이라고 썼습니다. 당시 러시아의 팽창주의에 대한 위기감은 조선뿐 아니라 청, 일본 지식인들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 제국을 잇는 소련 공산당의 팽창주의도 이승만의 시각에선 ‘제국주의 침탈’로 해석됐고, 이는 2차 대전 이후 동유럽 각국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입니다.일제강점기 이승만의 ‘독립 외교’이승만은 무장항쟁 이상으로 외교전이 독립 쟁취에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태평양전쟁 직전까지 세계 3위의 해군력을 보유한 강대국 일본에 소규모 무장항쟁으로 맞서는 건 한계가 있다고 보고,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각국에 설득하기로 한 거죠.이는 일찍이 1920년대부터 일본이 반드시 미국과 전쟁을 벌일 거라고 내다본 그의 전망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딴 그의 식견은 약 20년 뒤 역사적 사실로 나타납니다.그는 특히 대미 외교전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미국이 여론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 민주주의 국가라는 점에서 언론, 시민사회를 통해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꾸준히 설득하면 미국 정부의 정책도 바뀔 수 있다고 본 거죠(이하 김명섭 등 <워싱턴회의 시기 이승만의 외교활동과 신문 스크랩, 1921-1922> (한국정치학회보 51집 2호, 2017) 참고)이 과정에서 배재학당 때부터 구축된 기독교 네트워크는 그의 민간, 공공외교에서 큰 자산이 됩니다. 청교도 정신으로 건국된 기독교 국가답게 미국 정치권은 기독교계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죠.그렇다면 한국독립을 국제적으로 처음 보장한 1943년 카이로선언이 나오기까지 일제강점기 이승만의 독립 외교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요. 1920, 30년대 이승만의 외교전은 1921~22년 워싱턴회의와 1933년 만주사변에 대한 국제연맹 특별회의를 핵심 축으로 전개됩니다. 그럼 시계를 당시로 돌려보겠습니다.워싱턴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국제질서를 규정하는 중요한 국제회의였습니다. 일본의 막강한 해군력을 억제하고 동아시아에서 힘의 균형을 추구하고자 한 미국의 의도가 반영된 회의였던 만큼, 이승만을 비롯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를 독립 외교의 기회로 활용하고자 했습니다.이에 따라 이승만은 먼저 1921년 3월~1922년 1월까지 약 1년간 267개 미국 신문에 게재된 1009개의 한국 관련 기사들을 수집합니다. 미국 정부의 외교 방침을 명확히 이해하고 현지 언론을 외교전에 활용하기 위한 포석이었습니다. 또 한국 독립문제를 미 의회에서 다룬 바 있는 토마스 찰스 전 상원의원 같은 정계 인사를 특별고문으로 영입합니다.그러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목표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미 정부가 1차대전 승전국이던 일본을 의식한 탓에 이승만을 비롯한 한국 대표단이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고, 한국 문제가 공식 의제로 다뤄지지도 않은 겁니다.하지만 성과가 아주 없지는 않았습니다. ‘한일병합이 한국의 자발적 의지에 따라 이루어졌고, 일본의 식민 지배는 한국에 혜택을 주었다’는 일본 주장에 맞서 “한일병합은 강제로 이뤄졌고, 한국인들은 일본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다”는 임정의 입장이 미국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습니다. TV가 없던 시절 신문의 대중 영향력이 매우 컸기에 독립 외교에서 의미 있는 첫발을 내디딘 것으로 평가됩니다.1931년 일본의 만주 침략을 계기로 열린 1933년 국제연맹 특별회의에서 이승만의 외교전은 워싱턴회의 때보다 성공적이었습니다. 이때는 일본의 아시아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미국과의 대립 구도가 확연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미일 갈등이 심화되면서 일본 대륙 침략의 교두보인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가 재평가될 수 있었죠.이승만은 이 같은 미일 간 균열을 독립 외교에 활용하려고 노력했습니다(이하 김정민 등 <만주사변 발발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연맹 외교: 이승만의 외교활동을 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보, 2019) 참고) 그의 이런 의도는 국제연맹 회의가 열린 제네바로 출국하기 직전에 가진 언론 인터뷰에서 잘 드러납니다.“극동 문제는 한국인의 권리와 요구를 다루지 않고는 결정적 해답을 찾을 수 없다. 한국은 일본이 대륙으로 가는 교두보(stepping stone)이므로 일본은 극동에서의 전략적 거점을 차지한 것이다. 한국 문제는 현재 극동이 당면한 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을 결정할 때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현재 한국은 일본의 완전한 통치하에 있으며 만주 문제의 현안 범위에 속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일본의 아시아 대륙 침략 문제는 열강들의 보장 하에 완충국 한국이 정상적인 위치로 회귀 되지 않는 한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1933년 2월 ‘The Korean Student Bulletin’의 이승만 인터뷰)당시 이승만에 대한 임정의 태도가 바뀐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앞서 임정은 워싱턴회의 외교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에 대한 불신임안을 가결한 뒤 1925년 3월 11일 그를 대통령직에서 탄핵합니다.그랬던 임정이 국제연맹 회의 직전, 이승만을 특명전권 수석대표로 임명하고 그를 지원하게 됩니다. 미일갈등 구도 등 당시의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감안해 그를 재신임한 겁니다. 여기에는 만주사변 이듬해인 1932년 4월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를 계기로 한국 문제가 장개석의국민당 정부와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게 된 것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이승만은 중국 국민당 정부(중화민국)와 접촉해 한국 독립에 대한 협조를 약속받습니다. 국제연맹 회의 당사국으로 참여한 중화민국을 통해 한국의 독립 의지를 각국에 알리겠다는 의도였죠.흥미로운 건 10여년 전 워싱턴회의 때만 해도 이승만을 푸대접한 미국 정부의 태도가 이때는 180도 바뀐 사실입니다. 미국 체류 당시 무국적 신분이던 그에게 외교 여권을 발급해준 데 이어 제네바 주재 미국 영사(길버트 프렌티스)가 각국 대표들을 소개해주고 국제연맹 사무국의 정보도 알려줍니다.이뿐 아니라 이승만이 만든 외교 문건을 검토해주고, 그의 편지를 미 국무장관 및 소련 대표단에 전달해주기도 하죠. 이 같은 미국의 변화는 앞서 말한 미일 대립 구도가 본격화된 데 따른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결국 이승만과 임정은 만주 거주 한인들의 피해를 호소하고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1933년 2월 22일 국제연맹 특별회의에서 공식 회람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1931년 만주사변이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 문제를 이슈화할 수 있는 기회가 된 셈입니다. (6.25 전쟁 전후 이승만의 행적은 다음 편에서 다룹니다)“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