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아

서영아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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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100세 시대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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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5~2024-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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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움큼 노인의 약, 누구에게 정리받아야?[서영아의 100세 카페]

    “고향에 혼자 계신 팔순 노모가 매일 한웅큼씩 약을 드신다. 의사들이 준 것이니 다 드셔야 몸에 좋다고 믿으시는데 걱정이 된다. 이걸 어디 물어봐야 할지도 막막하다.” 노인의학에 대한 기사에 달린 이런 댓글을 보며 노인 약에 대한 안전관리 시스템이 궁금해졌다. 한움큼 노인의 약, 어떻게 다뤄야 할까.● 약 부작용 치료 위해 또다른 약 처방하는 ‘처방연쇄’실상을 알기 위해 우선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에 내원한 케이스를 가져왔다. 낙상으로 누워 지내게 된 85세 여성 A씨의 병력을 보면 부작용을 치료하기 위해 새로운 약이 처방되는 ‘처방연쇄’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시작은 고혈압 약이었다. 그가 먹던 약은 칼슘채널차단제(CCB) 계열인데, 노인에서는 심하게 붓고 변비와 무기력증을 가져오는 부작용이 잦다. 다리가 퉁퉁 부어 병원을 찾은 그에게 의사는 강력한 이뇨제를 처방했다. A씨는 그 뒤 너무 자주 화장실에 가다보니 요실금이라 생각해 비뇨기과에서 요실금 치료제를 처방받았다. 이 약은 변비와 인지기능 저하를 유발했다. A씨는 이번에는 신경과에 가서 치매진단을 받고 치매약과 뇌영양제를 받았다. 치매약은 요실금을 악화시킨다. 밤에 소변 때문에 4번씩 깨다보니 다시 비뇨기과를 찾은 A씨에게 의사는 더욱 강한 항콜린성 약을 처방했다. 항콜린성 약은 졸음과 무기력증을 가져와 낙상 위험을 높인다. A씨에게 결국 낙상이 찾아왔다. 이처럼 증상만을 쫓아 내과와 비뇨기과, 신경정신과를 돌다보면 처방의 원인과 결과가 꼬리를 무는 무한반복이 일어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환자의 심신은 만신창이가 된다. 노년내과에서는 이런 상태를 ‘약으로 떡이 진’ 상태라 표현한다. 일본 고령자 의료에서는 흔히 ‘약 절임(藥漬け)’이라고 부른다. 이같은 연쇄의 악순환을 끊는 데는 ‘약을 걷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탈(脫)처방이라고 한다. 쇠약증으로 병원에 입원한 78세 여성 B씨 사례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시행중인 ‘다제약물 관리사업’에 포함돼 있었다. B씨는 그간 정형외과와 신경과, 내과에서 혈압약과 어지러움약, 위장약 등을 처방받아 먹어왔다. 서행성 보행과 손떨림 등 파킨슨병과 유사한 증세를 보였는데, 신경과 검사에서 B씨가 보이는 파킨슨병 증세가 약물유발성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정형외과에서 처방한 위장운동조절제에 유사 파킨슨병 유발 성분이 들어 있었던 것. 이 약을 끊자 환자는 점차 회복 양상을 보였다. 전신무기력 증세도 신경안정제와 근육이완제, 수면제 등 중추신경계 억제약이 처방돼 있는 것과 관련이 깊다고 판단해 근육이완제는 중단하고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는 감량했다. 이런 사례들은 요행히 전문가의 검토를 받은 경우지만 비슷한 처지에 이유도 모르고 시름시름 앓고 있을 고령자가 더 많을 것임은 불 보듯 뻔하다. 또 입원할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점진적으로 건강을 잃어가는 고령자들도 우려된다. 지역사회에서 진행되는 ‘다제약물 관리사업’의 대상이 된 노인 중에는 한사람이 30종 이상 약물을 복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예컨대 의원 3군데에서 각기 다른 위장약을 처방받아 모두 복용하거나 처방약과 동일한 일반의약품을 구매해 이중으로 복용하는 등 다양한 사례가 있었다. 또 기초생활수급을 받는 독거 노인이나 요양원 입소자들에서 약물 남용이 눈에 띄었다. ● 한국 노인 260만 명, 5개 이상 약제 90일 이상 복용고령화와 만성질환 증가로 다약제(polypharmacy) 복용인구는 갈수록 늘고 있다. 한국의 65세 이상 고령자 중 5개 이상 약물을 복용하는 사람이 약 260만 명, 10개 이상 약물을 복용하는 고령자는 81만 5000여명에 이른다. 복용약물 개수가 늘면 약물 상호작용과 중복처방의 위험도 커진다. 고령자는 약물대사능력이 떨어져 늘 먹던 약에 다른 반응을 나타내는 당혹스런 일도 생긴다. 약물로 인한 부작용은 흔히 인지기능저하, 낙상, 섬망, 욕창, 배뇨장애 등 노인증후군으로 나타난다. 노인의 다약제를 부추기는 원인 중심에는 진료과 중심의 의료제도가 있다. 환자는 증상에 따라 각기 다른 병원을 찾아가야 한다. ‘3분 진료’에 쫓기는 의사들은 각기 자기 과에 초점을 맞춰 약물처방을 하면 그뿐, 환자가 다른 과에서 어떤 약을 처방받아 복용하고 있는지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결국 각 진료과에서 그때그때 처방해주는 약들이 쌓이게 된다. 반대로 환자가 진료에 만족하지 않으면 쉽게 다른 의사를 찾아나서는 의료쇼핑도 약을 늘리는 이유가 된다. 이런 때는 누군가가 약물을 점검해 중복되거나 과다한 약물 복용을 줄이게 해야 하는데, 이같은 약물조정 작업은 전문성이 필요하고 상당한 수고가 따르지만 의료수가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현실적 문제가 있다. 쉽게 말해 무보수인 것.● 의료 선진국선 주치의가 걸러주고 연 1~2회 약국에서 약 정리받아고령화가 서서히 진행된 선진국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을까. 영국에서는 1940년대부터 주치의 제도를 기반으로 한 의료시스템을 구축했다. 2005년부터는 지역약사가 환자의 약물복용 상황을 점검해주는 시스템이 가동됐다. 두가지 이상 약물을 복용하거나 고위험 약물(비스테로이드 항염증제, 항응고제, 항혈전제, 이뇨제) 중 하나를 복용하는 고령자는 1년에 한번씩, 10개이상 약물을 복용하는 고위험군의 경우 연 2회 약물검토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약사는 28파운드(약 4만 3800원) 가량의 수가를 받는다. 캐나다 호주 등 과거 영연방이던 국가들에서 비슷한 제도를 운영중이다. ‘노인 부적절 약물’을 따로 지정하는 움직임도 늘고 있다. 미국에서는 1991년 비어스(Beer‘s) 지침이 개발돼 업데이트를 거치며 사용된다. 노인에게 사용하면 효과가 없거나 부작용 위험이 높은 약물에 대해 사용하지 말 것을 권하는 목록이다. 2008년 아일랜드는 비어스 지침의 한계점을 보완한 노인주의약품 사전점검지침(STOPP)을 개발해 발표했다. 2003년 개정된 비어스 기준에 33개 약물을 추가하고 계통별로 65개의 항목으로 정리했다. 처방과 투여기간의 적절성, 약물-약물 상호작용, 약물-질병 상호작용, 약물 중복처방까지 범위를 확장했다. 캐나다와 프랑스 노르웨이 독일 등에서도 유사한 지침이 나왔다. 한국에서는 식품의약품 안전청이 2009년 낸 ’노인에 대한 의약품 적정사용 정보집‘이 첫시도라 할 수 있으나 국내 실정에 맞는 내용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5년 10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의약품안전사용서비스(DUR)을 통해 노인 주의(注意) 의약품 20개 성분(벤조다이아제핀 13개, 삼환계 항우울제 7개 대상)을 지정했고 지난해 7월 이를 102개 성분까지 확대했다. ● 갈 길 먼 한국의 다약제 관리 사업최근 노인의 다약제 관리를 위한 노력이 다방면에서 이뤄지고 있지만 갈 길은 멀다. 분당서울대병원 서울아산병원 신촌세브란스 등 대형병원들은 노년내과를 중심으로 탈 처방을 시도하고 있다. 특히 서울아산병원은 2018년 ’약물조화클리닉‘을 만들어 환자별 맞춤형 약물 최적화를 도모한다. 클리닉 전담약사가 노년내과 교수와 함께 외래진료실에 들어가 환자의 복약 현황과 병력을 듣고 의사와 함께 약물관리 방안을 짜는 방식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2018년부터 약사회와 함께 ’다제약물 관리사업‘을 시작했는데, 이 또한 시범사업 단계다. 첫해 9개 지역에서 약사가 가정방문을 통해 약물복용 지도를 시작해 지난해 106개 지역까지 확대됐다. 지난해에는 35개 병원도 참여했다. 다만 시범사업인 만큼 관리 대상은 한정적이다. 46개 만성질환자, 상시 복용하는 약 성분이 10개 이상이거나 마약성 진통제, 항응고제 등 ’집중관리약제‘를 처방받은 환자가 포함된다.건강보험공단 다제약물 관리사업-대상 만성질환(46개) 고혈압, 지질대사 장애, 만성 요통, 고도 시력 감퇴, 무릎 관절증, 당뇨병, 만성 허혈성 심질환, 갑상선 이상, 심부정맥, 비만, 대사교란/통풍, 전립선 비대증, 하지 정맥류, 간 질환, 우울증, 천식/만성 폐쇄성 폐질환, 비염증성 부인과 질환, 죽상동맥 경화증/말초동맥 폐색 질환, 골다공증. 신기능 부전, 만성 뇌졸증, 심부전증, 고도 청각손실, 만성 담낭염/담석, 신체형 장애, 치핵, 장 게실증, 류마티스 관절염, 심장 판막 질환, 신경장해, 어지럼증, 치매, 요실금, 요로 결석, 빈혈증, 불안, 건선, 편두통/만성 두통, 파킨슨병, 암, 알레르기, 만성 위염/위-식도 역류질환, 성기능 장애, 불면증, 담배 남용, 저혈압-집중관리약제(1) 마약성 진통제, (2) 항응고제, (3) 인슐린, (4) 삼환계 항우울제, (5) 중추신경계 억제약물 3성분. (6) 항콜린성 약제 2성분, (7) NSAIDs 2성분, (8) 부신피질호르몬제 (9) 경구 혈당 강하제 3성분, (10) 고혈압 약제 3성분, (11) 소화기관용 약제 3성분, (12) 흡입기다약제 관리사업 참여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고민은 “의사와 약사 간 소통의 통로가 없다”는 점이다. 영국 약사들은 주치의에게 처방 변경을 요청할 수 있지만, 한국은 제도화된 통로가 없다보니 처방변경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서울아산병원 이미리내 약사는 “고령자의 다약제 관리는 의사와 약사가 각기 다른 관점에서 환자의 병력청취와 현황파악을 통해 연관관계를 평가한 뒤 종합적 검토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며 의사와 약사의 협력을 강조한다. 배민숙 건보공단 만성질환관리실 의료이용지원부장은 “만성질환을 가진 고령자일수록 이 병원 저 병원에서 증세만 가지고 관리해서는 안된다”며 “환자를 온전히 포괄적 통합적으로 관리해주는 주치의같은 존재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1월 ’노인의 다약제 사용 관리방안‘ 보고서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국내에서는 ’다약제 사용‘ 혹은 고위험 의약품을 정의하는 기준조차 명시적으로 합의된 바가 없다”는 것. “노인에게 위험도가 높은 다약제 사용 조합에 대해 기준을 도출해야 한다”는 얘기다.● 노인의 약 관리, 국가차원 로드맵 필요그러면 지금 당장 고향 어머니의 한움큼 약은 어디에 자문을 구해야 할까. 우선 노년내과가 설치된 병원들에 가서 의뢰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지만 매우 한정적이다. 서울시에서 운영중인 ’세이프약국‘을 찾아가는 것도 방법이다. 5개 이상 약물을 복용하거나 2가지 이상 만성질환을 앓는 사람의 약물상담과 복약지도를 해준다. 현재 400여개 약국이 등록돼 있는데 인터넷 서울열린데이터광장에서 검색하면 가장 가까운 약국을 찾을 수 있다.무엇보다 환자 스스로 똑똑해져야 한다. 자신이 복용하는 모든 약을 목록화하거나 처방전을 보관해두고, 필요시 병원이나 약국에 알려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운영하는 DUR의 ’내가 먹는 약! 한눈에‘ 서비스에 들어가면 자신의 투약이력을 들여다볼 수 있다. 한국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에서도 가장 빠르게 늙어가는 나라다. 궁극적으로는 노인의 약 관리를 위한 국가 차원의 로드맵이 필요하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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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작용 막는 약까지 한 움큼… 중복-과다복용 피할 ‘정책처방’ 절실[서영아의 100세 카페]

    “고향에 혼자 계신 팔순 노모가 매일 한 움큼씩 약을 드신다. 의사들이 준 거니 다 드셔야 한다는데 걱정이 된다. 이걸 어디 물어봐야 할지도 막막하다.” 노인의학에 대한 기사에 달린 이런 댓글을 보며 노인 약에 대한 안전관리 시스템이 궁금해졌다. 한 움큼 노인의 약, 어떻게 다뤄야 할까.○ 약 부작용 치료 위해 또 다른 약 처방 ‘처방연쇄’ 실상을 알기 위해 우선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에 내원한 케이스를 가져왔다. 낙상으로 누워 지내게 된 85세 여성 A 씨의 병력을 보면 부작용을 치료하기 위해 새로운 약이 처방되는 ‘처방연쇄’의 폐해를 볼 수 있다. 시작은 고혈압 약이었다. 그가 먹던 약은 칼슘채널차단제(CCB) 계열인데, 노인에게서는 심하게 붓고 변비와 무기력증을 가져오는 부작용이 잦다. 다리가 퉁퉁 부어 병원을 찾은 그에게 의사는 강력한 이뇨제를 처방했다. A 씨는 그 뒤 너무 자주 화장실에 가다 보니 요실금이라 생각해 비뇨기과에서 요실금 치료제를 처방받았다. 이 약은 변비와 인지기능 저하를 유발했다. A 씨는 이번에는 신경과에 가서 치매 진단을 받고 치매 약과 뇌 영양제를 받았다. 치매 약은 요실금을 악화시킨다. 밤에 소변 때문에 4번씩 깨다 보니 다시 비뇨기과를 찾은 A 씨에게 의사는 더욱 강한 항콜린성 약을 처방했다. 항콜린성 약은 졸음과 무기력증을 가져와 낙상 위험을 높인다. A 씨에게 결국 낙상이 찾아왔다. 이처럼 증상만을 좇아 내과와 비뇨기과, 신경정신과를 돌다 보면 처방의 원인과 결과가 꼬리를 무는 무한반복이 일어나게 된다. 환자의 심신은 만신창이가 된다. 이 같은 연쇄의 악순환을 끊는 데는 ‘약을 걷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탈(脫)처방이라고 한다. 쇠약증으로 병원에 입원한 78세 여성 B씨 사례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시행 중인 ‘다제약물 관리사업’에 포함돼 있었다. B 씨는 그간 정형외과와 신경과, 내과에서 혈압약과 어지러움약, 위장약 등을 처방받아 먹어 왔다. 서행성 보행과 손떨림 등 파킨슨병과 유사한 증세를 보였는데, 신경과 검사에서 B 씨가 보이는 파킨슨병 증세가 약물유발성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정형외과에서 처방한 위장운동조절제에 유사 파킨슨병 유발 성분이 들어 있었던 것. 이 약을 끊자 환자는 점차 회복 양상을 보였다. 전신무기력 증세도 신경안정제와 근육이완제, 수면제 등 중추신경계 억제약이 처방돼 있는 것과 관련이 깊다고 판단해 근육이완제는 중단하고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는 감량했다. 고령화와 만성질환 증가로 다약제(polypharmacy) 복용 인구는 갈수록 늘고 있다. 한국의 65세 이상 고령자 중 5개 이상 약물을 복용하는 사람이 약 260만 명, 10개 이상 약물을 복용하는 고령자는 81만500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한국에서 노인의 다약제를 부추기는 원인에는 진료과 중심의 의료제도가 있다. 환자는 증상에 따라 각기 다른 병원을 찾아가야 한다. ‘3분 진료’에 쫓기는 의사들은 각기 자기 과에 초점을 맞춰 약물처방을 하면 그뿐, 환자가 다른 과에서 어떤 약을 처방받아 복용하고 있는지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결국 각 진료과에서 그때그때 처방해 주는 약들이 쌓이게 된다. ○ 선진국선 주치의가 걸러주고 약국에서 약 정리 고령화가 서서히 진행된 선진국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을까. 영국에서는 1940년대부터 주치의 제도를 기반으로 한 의료시스템을 구축했다. 2005년부터는 지역 약사가 환자의 약물 복용 상황을 점검해 주는 시스템이 가동됐다. 두 가지 이상 약물을 복용하거나 고위험 약물(비스테로이드 항염증제, 항응고제, 항혈전제, 이뇨제) 중 하나를 복용하는 고령자는 1년에 한 번씩, 10개 이상 약물을 복용하는 고위험군은 연 2회 약물검토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약사는 28파운드(약 4만3800원) 정도의 수가를 받는다. 캐나다 호주 등 과거 영연방이던 국가들에서 비슷한 제도를 운영 중이다. ‘노인 부적절 약물’ 지정도 늘고 있다. 미국에서는 1991년 비어스(Beer‘s) 지침이 개발돼 업데이트를 거치며 사용된다. 노인에게 사용하면 효과가 없거나 부작용 위험이 높은 약물에 대해 사용하지 말 것을 권하는 목록이다. 2008년 아일랜드는 비어스 지침의 한계점을 보완한 노인주의약품 사전점검지침(STOPP)을 개발해 발표했다. 2003년 개정된 비어스 기준에 33개 약물을 추가하고 계통별로 정리했다. 처방과 투여기간의 적절성, 약물-약물 상호작용, 약물-질병 상호작용, 약물 중복처방까지 범위를 확장했다. 캐나다와 프랑스 노르웨이 독일 등에서도 유사한 지침이 나왔다. 한국에서는 2015년 10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의약품안심서비스(DUR)를 통해 노인 주의 의약품 20개 성분(벤조다이아제핀 13개, 삼환계 항우울제 7개 대상)을 지정했고 지난해 7월 이를 102개 성분까지 확대했다.○갈 길 먼 한국의 다약제 관리사업 최근 노인 다약제 관리를 위한 노력이 다방면에서 이뤄지고 있지만 갈 길은 멀다. 대형병원에서는 노년내과를 중심으로 탈처방이 시도되고 있다. 특히 서울아산병원은 2018년 ‘약물조화클리닉’을 만들어 환자 맞춤형 약물 최적화를 도모하고 있다. 클리닉 전담 약사가 노년내과 교수와 함께 외래진료실에 들어가 환자의 복약 현황과 병력을 듣고 의사와 함께 약물관리 방안을 짜는 방식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2018년부터 약사회와 함께 ‘다제약물 관리사업’을 시작했는데, 이 또한 시범사업 단계다. 첫해 9개 지역에서 약사가 가정방문을 통해 약물복용 지도를 시작해 지난해에는 106개 지역으로 확대됐고 35개 병원도 참여했다. 다만 시범사업인 만큼 관리 대상은 한정적이다. 46개 만성질환자, 상시 복용하는 약 성분이 10개 이상이거나 마약성 진통제, 항응고제 등 ‘집중관리약제’를 처방받은 환자가 포함된다. 사업 참여자들은 “의사와 약사 간 소통의 통로가 없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한다. 영국 약사들은 주치의에게 처방 변경을 요청할 수 있지만, 한국은 제도화된 통로가 없다 보니 처방 변경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서울아산병원 이미리내 약사는 “고령자의 다약제 관리는 의사와 약사가 각기 다른 관점에서 환자의 병력 청취와 현황 파악을 통해 연관관계를 평가한 뒤 종합적 검토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며 의사와 약사의 협력을 강조한다. 배민숙 건보공단 만성질환관리실 의료이용지원부장은 나아가 “만성질환을 가진 고령자일수록 이 병원 저 병원에서 증세만 가지고 관리해서는 안 된다”며 “환자를 온전히 포괄적 통합적으로 관리해 주는 주치의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1월 ‘노인의 다약제 사용 관리방안’ 보고서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노인에게 위험도가 높은 다약제 사용 조합에 대한 명시적 기준부터 도출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당장 고향 어머니의 한 움큼 약은 어디서 자문을 구해야 할까. 우선 노년내과가 설치된 병원들에 가서 의뢰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매우 한정적이다. 서울시에서 운영 중인 ‘세이프약국’을 찾아가는 것도 방법이다. 5개 이상 약물을 복용하거나 2가지 이상 만성질환을 앓는 사람의 약물상담과 복약지도를 해준다. 현재 400여 개 약국이 등록돼 있는데 서울열린데이터광장에서 검색하면 가까운 약국을 찾을 수 있다.환자 스스로도 똑똑해져야 한다. 자신이 복용하는 모든 약을 목록화하거나 처방전을 보관해 두고, 필요시 병원이나 약국에 알려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운영하는 DUR의 ‘내가 먹는 약! 한눈에’ 서비스에 들어가면 자신의 투약 이력을 볼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노인의 약 관리를 위한 국가 차원의 로드맵이 필요하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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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퇴 후 수입공백, 연금투자 상품이 ‘효자손’

    50대 평범한 직장인 S 씨. 2년 전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법정 퇴직 연령이 10년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회사에서 이때까지 간신히 버틴다 해도 퇴직 후 국민연금이 나오기까지는 5년간의 소득 없는 기간이 기다린다. 노후 준비를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한 S 씨는 모바일을 통해 KB증권 IRP와 연금저축 계좌에 가입했다. 지금은 퇴직 때까지 장기 투자를 목표로 ELB, ETF, 리츠, 펀드 등 다양한 상품에 분산투자하고 있다.연금투자 3년차가 된 이제는 제법 주변 사람들에게 연금에 대한 아는 척하며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수준이 됐다. 그는 퇴직 후 보릿고개 시기에 이 연금이 효자 노릇을 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정년 이후 40년간 수입 공백 대비해야세상은 ‘100세 시대’를 논하지만 한국인의 법정 정년은 만 60세다. 정년을 꽉 채웠다 해도 재취업 기회가 생기지 않는 한 40년 동안 수입 공백이 생긴다. 한 달 생활비를 200만 원으로 가정하면 단순 계산으로 9억6000만 원의 노후 자산이 필요하다는 뜻이다.현실이 이런데도 직장인들의 노후에 대한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커지고 있다. 상당수 직장인이 ‘원금 보장’이란 가치를 쉽게 포기하지 못해 퇴직연금을 연 1% 수준 원금보장형 상품에 두고 있다.연금에 대한 무관심도 문제다. 처음 가입한 퇴직연금 상품을 ‘한 번도 바꾼 적 없다’고 답한 직장인이 68.4%나 된다는 통계가 있다. 자신이 직접 투자 상품을 고를 수 있는 계좌를 갖고 있는데도 이런저런 이유로 투자를 기피하곤 한다.하지만 연 1% 수준의 원금보장형 상품 수익률로는 물가상승률조차 따라가기 어렵다. 연금 운용 방법을 바꿔야 하는 이유다. 연금 투자는 다양한 상품에 분산투자하고, 경제 위기 등이 닥쳐 등락이 있다 해도 10년 이상 장기 투자하면 그만큼 리스크는 줄어든다. 증권업계 퇴직연금 사업자 중 최고 신용등급직장인이 현명하게 연금 투자하는 방법은 뭘까. 일단 노후 준비와 세액 공제 혜택을 위해 두 가지를 활용해야 한다. 첫째 연금저축펀드. 1인당 연간 1800만 원까지만 납입하도록 한도가 정해져 있다. 최소 5년을 납입하고 최소 55세 이후 인출하는 상품이다. 투자 상품이기에 중도해약 시 기타소득세가 매겨지며, 원금 손실 가능성도 있다. 다만 1800만 원 중 400만 원은 13.2%¤16.5%의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 주식형펀드에 투자해 손해 보더라도 50만¤60만 원은 돌려받는다는 얘기다.둘째 소득이 있는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IRP다. IRP로만 700만 원을 채워 세액 공제를 받거나, 연금저축 400만 원과 IRP 300만 원을 채워 같은 혜택을 받을 수도 있다. IRP 또한 55세 이후에 납입금을 받는다. 그전에 해지하면 세액 공제 받았던 걸 환급해야 한다. 금융기관을 선택할 때는 무엇보다 안정성을 따져봐야 한다. KB증권은 11개 증권업계 퇴직연금사업자 중 가장 높은 신용등급(AA+)을 보유하고 있으며, 해외 신용등급까지 획득했다. KB금융지주의 100% 자회사로 브랜드 인지도와 안정성을 가진다. 은행 증권 간 복합 점포를 중심으로 전국에서 108개 영업망을 제공한다. 경쟁력 있는 수수료율도 고려 대상이다. 대부분 증권사들이 계좌 개설과 상품운용 지시를 비대면으로 할 것을 조건으로 수수료 무료 혜택을 주는데, KB증권은 지난해 6월부터 비대면으로 IRP 계좌 개설만 해도 운용 지시 방법에 상관없이 전액 무료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KB증권 IRP, 리츠·ETF 등 다양한 투자 전략연금 계좌는 적립하고 불리고 수령하는 긴 안목이 필요한 계좌다. 자산 관리 관점에서 적립 시기와 인출 시기에 따라 변동하는 시장에 대응하며 수익률을 높여야 한다. IRP는 다양한 상품을 포트폴리오로 운영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 물가상승률과 수수료 등을 참고해 원리금 보장 상품 중에서도 수익률이 높은 저축은행예금이나 증권사 ELB, 보험사 GIC 상품 등으로 주기적으로 상품을 변경해가며 운용하는 것이 좋다. IRP는 상품 변경에 제한이 없고, 하나의 IRP 계좌에 본인이 원하는 상품들을 구성할 수 있어 운용의 묘를 살릴 수 있다.배당 이익과 시세 차익을 모두 원하다면 소액으로 부동산에 투자하고 언제든지 현금화도 가능한 상장 리츠도 있다. 최근 인플레이션과 금리 상승이 예상되면서 리츠는 고정 소득이 필요한 은퇴자에게 적합한 상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최근 4년간 국내 리츠 평균 배당수익률이 7.6%¤9.5%에 달한다.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수준이다.KB국민은행 계열사도 은퇴 자산관리 전문 컨설팅KB국민은행은 전국 11개 지역에 시니어전용 은퇴 자산관리 전문 상담센터로 ‘KB골든라이프센터’를 운영 중이다. KB생명보험은 기존 종신보험의 패러다임을 전환해 ‘고객 이익 최우선’ 가치를 반영한 ‘7년의약속 무배당 KB평생종신보험Ⅱ’를 비롯해 라이프 사이클에 맞춰 다양한 노후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했다. 푸르덴셜생명보험은 VIP 자산가들에게 체계적인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WM(STAR Wealth Management)’을 운영한다. 전문 자격을 보유한 종합금융 전문가들이 자산 성장과 상속, 은퇴, 노후 설계 등의 금융 서비스를 제공해 노후 준비를 충실하게 돕는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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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EO 은퇴한 60대, 교사가 되다 [서영아의 100세 카페]

    19일 오후 2시 경 경기도 안산시에 자리한 특성화고 경일관광경영고의 한 교실. 나이 지긋한 교사의 말에 학생들이 귀 기울이고 있다. 이대호 교사(62)가 진행하는 ‘비서학’ 수업이다. 해외 출장을 준비할 때의 행정업무에 대해 강의 중인데, 항공권이나 호텔 예약법 등 설명은 매우 구체적이다. 이 교사가 갑자기 물었다. “이 중에 해외여행 가 본 사람?” 교실 안은 조용하다. “요즘은 취직만 하면 무조건 최저임금은 보장받아요. 연봉으로 2300여 만 원은 받는 거죠. 여러분이 나중에 휴가 받아서 여행갈 때도 오늘 배운 것들을 써먹을 수 있지요.” 컴퓨터 앞에서 검색에 열중하는 학생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교사 정년 훌쩍 넘긴 기간제 교사 2년차 이 씨는 이 학교의 취업전담 교사다. 지난해 초 경기도 교육청 공모에 응해 기간제 교사로 채용됐다. 그의 인생 2막이 극적인 반전처럼 찾아왔다. 산전수전 다 겪은 끝에 “어, 여기 내 천직이 있었네?”라고 깨닫는 느낌이랄까. “제 인맥과 정보, 경험을 총동원해서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일자리를 매칭시키는 일을 합니다. 30여 년 간 다양한 직장을 경험해왔지만 가장 보람이 느껴집니다.” 주 4시간씩 수업하고 나머지 시간은 학생들의 취업처 발굴과 현장실습 운영, 취업 지원에 바친다. 안산 일대는 반월·시화공단과 안양·가산 벤처단지 등 지속적으로 일손수요가 많은 지역. 하지만 중소기업들은 구인난에 시달리고 학생들은 구직난에 힘들어한다. 그는 이런 미스 매치를 해결한다는 보람을 느끼고 있다. “지역 특성상 다문화 가정도 많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도 있습니다. 가장이나 다름없는 학생들을 취업시키고, 열심히 회사 생활 하는 것을 보면 뿌듯하기 그지없죠.” 매일 아침 7시면 학교에 출근해 취업정보실을 개방한다. 집에서 컴퓨터 작업을 못한 학생들을 받아주기 위해서다. 본인도 취업정보를 검색해 학생들에게 맞는 것들을 추려 공지한다. 대졸 위주인 정보의 바다 속에서 ‘고졸’을 위한 취업정보를 솎아내는 작업이다. 다문화 가정 자녀들이 졸업과 동시에 취업할 수 있도록 F4 비자 발급도 돕고 있다. “제 자신이 지방에서 상고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대학과 대학원을 마쳐 학생들의 고충을 잘 아는 편입니다.” 간혹 학생들이 인터넷에서 그의 신상을 검색해 ‘대표이사’ ‘벤처기업인’ 등의 수식어를 찾아 들고 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과거를 잊고 산 지 오래”라고 말한다. 그는 고교 졸업 직후부터 여러 회사를 거쳤다. 10여 년간 근무했던 회사는 외환위기(IMF) 때 해체됐다. 2002년 당시 방과후학교 회사인 ‘에듀박스’(현 골드앤에스)에 들어가 대표이사까지 올랐다. 당시 그가 런칭시킨 초등학생 말하기 영어학원 ‘이보영의 토킹클럽’은 한때 전국에 500개까지 늘어나며 ‘대박’을 쳤다. 2017년부터는 다른 회사로 자리를 옮겨 코딩교육사업을 벌이기도 했지만 2년 만에 사업을 접게 됐다. 동시에 그의 직장생활도 끝났다. ●구인과 구직의 미스매치그와 손발 맞춰 일하는 안산시청 일자리센터 소속 박상임 취업지원관은 “학교들도 대개 정년이 지난 사람은 잘 안 쓰려 하지만 이 분은 특별케이스”라고 귀띔한다. 교사들보다 회사를 잘 이해하기 때문에 기업 대응에서 유연하고 인맥을 살릴 수도 있다는 것. 그는 인맥을 활용해 골프장 등 새로운 취업처를 발굴하는가 하면 취업처 발굴을 위해 화성 용인 당진 등 원거리 출장을 도맡아 동료교사들의 수고를 덜어주고 있다고 한다. 그는 늘 면접에는 학생을 자신의 차에 태우고 함께 간다. “길도 잘 모를 거고, 선생이 있으면 아이들이 안심도 되지요. 머뭇거릴 때 추임새도 좀 넣어줄 수 있고요. 또 고용주 측도 조심하게 되죠.” -청년들이 취업시장에서 홀대받는 모습만 봤는데 우리 학생들이 복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직 온실에서 자란 새싹들인데 그냥 내놓으면 다 죽죠. 보호해줘야죠. 늘 사장님들에게 ‘학생들을 내 가족이라 생각하면서 가르쳐달라’고 당부드립니다. 그는 한국 프랜차이즈산업협회 부회장, 코스닥협회 자문위원 같은 일을 오래 해서 큰 회사 대표나 임원들 사이에 발이 넓다. 여차하면 도움을 요청할 곳이 많은 것. 직장생활할 때 사용하던 마케팅 기법을 응용해 한번 학생들을 보낸 곳일수록 자주 방문해 관심을 보이고 거기서 추가채용이 일어나도록 애쓴다고 한다. 요즘은 특성화고라 해도 졸업생 절반은 진학을 택한다. 지난해 이 학교 졸업생 270여 명중 40%가 취업했고 40%는 상급학교에 진학했다. 취업은 2~3개월의 현장실습을 거쳐 이뤄지는데 학교 측은 사전에 기업 측으로부터 ‘특별한 일 없으면 채용한다’는 약정서를 받는다. 학교와 교육청, 학부모 학생들이 약정이 지켜지는지 수시로 감시한다. ”지역사회와 학교가 ‘빽’이 되는 셈이죠. 정부도 든든히 받쳐줍니다. 업체 입장에서도 특성화고 학생들을 많이 받으면 정부로부터 혜택이 늘어나니 서로가 ‘윈윈’이지요.“●“얘들아. 딱 3개월만 참아보자” 가장 큰 고민은 애써 취직시키면 1년 안에 30% 정도가 그만둬버린다는 점. 기업 측으로부터도 강력한 항의가 들어온다. “일껏 일할 만하게 가르쳐놓으면 그만두는 경우가 많거든요. 아예 ‘공부 못해도 좋으니 10여 년 이상 일할 착실한 직원을 원한다’며 ‘우리가 시집도 보내고 학교도 보내주겠다’고 말해오는 회사도 있어요.” -요즘 인력송출업체를 통해 젊은 인력을 2년 쓰고 버리는 식의 고용이 많은데, 이 지역은 안 그런가보네요.“저희는 정규직 아니면 보내지 않습니다. 젊은이의 기회비용을 소중히 여겨야지요. 그런만큼 저는 학생들에게 ‘힘들고 어려운 것 많겠지만 딱 3개월만 참고 버텨보자’고 말하곤 합니다. 3개월을 버티고 나면 1년을 버틸 힘이 생기고 1년을 일하면 자리를 잡을 수 있지요. 3년을 근무하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재직자 전형’도 있어요. 인근 한양대(에리카) 한국공학대 등 좋은 대학 가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그는 반 년 전 서울 청담동의 회원제 고급레스토랑에 취업시킨 졸업생으로부터 최근 받은 문자 얘기를 꺼냈다. “‘아직 잘 다니고 있다. 감사하다’고. 집에서 출근하려면 전철 3개 노선을 갈아타고 1시간 반 걸리는데, 잘 버티고 있네요. 그런 친구는 분명히 성공할 거라 봅니다. 출퇴근 왕복 3시간을 견뎌낼 정도 뚝심이라면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이겨낼 수 있어요.”●“죽는 날까지 일하고 싶다” -인생 2막에 즈음해 중장년들의 가장 큰 고민이 적절한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는 점일 겁니다. 드물게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자리를 찾으신 듯합니다. 비결은 뭘까요. “귀를 열어둔 게 도움이 된 것 아닐까요. 우연히 나간 모임에서 이런 직업이 있다는 얘길 듣게 됐습니다. 마침 대학 다닐 때 교사자격증을 따놓았거든요. 평생 꿈꾸던 교직 생활을 했으니 더 이상 욕심이 없어야 하는데 초롱초롱한 학생들을 보며 그들의 꿈과 희망을 어떻게건 돕고 싶은 의욕이 마구 솟구칩니다. 올초 교사정년 나이가 지나 걱정했지만 기간제 교사로 재계약 됐을 때는 무척 기뻤습니다.” 그는 2019년 마지막 직장을 정리한 뒤 1인출판사를 준비했지만 코로나 상황이 겹치면서 아무것도 못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자기자본 들여서 하는 일에 집안의 반대가 컸다고. “IMF 이후 회사 차렸다가 망하고 자사주 매입했다가 손해보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거든요.” 부천 자택에서 학교까지 25km를 운전해 출퇴근한다. 국민연금이 올 2월부터 나오고 학교에서 받는 급여는 과거 수입의 3분의 1 수준이지만 대만족이다. -노후준비는 괜찮으신지요? “많지는 않지만 국민연금도 있고, 개인연금도 조금 있어요. 집 한 채 있으니 여차하면 주택연금 받으면 됩니다. 이제 돈 쓸 일도 많지 않죠. 그래도 안 되면 더 줄여 살면 되죠.”- 이 일은 언제까지? “매년 재계약해야 하고 그것도 만 65세면 끝납니다. 제 인생 목표는 평생 일하다 일터에서 죽는 거예요. 앞으로도 보수 안 받더라도 공공기관이나 학교 등에서 사회에 도움되는 일을 하고 싶어요.”-혹시 한국의 중장년 남성에게 많은 ‘일중독’ 아니신지? “글쎄요. 한국인 대부분이 그런 것 같습니다. 놀 줄 모른다고 해야 할까요. 논다면 골프 정도 하는 거고, 혼자서 힐링하거나 휴식하거나 하는 경험은 생소해요. 저는 뭔가 놀 때도 바쁘더라구요.”● 솔선수범하면 ‘꼰대’가 아니다 그의 일터인 취업정보실은 종일 개방돼 있다. 인터뷰 중 여학생 두 명이 “쌤, 상담 좀….”하고 찾아왔다가 쪼르르 사라졌고 1명이 컴퓨터 작업을 위해 잠시 머물다가 나갔다. 그는 “학교에서 제가 제일 나이가 많고 직급은 제일 낮습니다.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매사 낮은 자세로 임합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다보면 일이 재미가 있어요”라고 말한다. 감수성 예민한 학생들에게 ‘꼰대’가 아닌 존재로 다가가기 위해 솔선수범에 애쓴다.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는 대신 실천으로 보여줘서 뭔가 느끼게 하는 식이다. “학생들 생일날이나 명절이면 카카오톡으로 인사카드를 보냅니다. 절반 정도는 답이 와요. ‘감사하다’거나 ‘어떻게 아셨어요?’라거나. 이런 것들은 제 나름의 교육이예요. 직장 상사건 부모님이건, 다른 분들께 이렇게 해보라는 메시지죠. 때때로 카드라도 보내 인사하고 긍정적인 관심을 보여드리면 그분들도 너희를 그렇게 대할 거라는. ‘이렇게 하라’고 대놓고 말하면 잔소리가 되겠지만 솔선수범해 느끼게 하면 다르죠. 그러니 저는 늘 바쁩니다.” 각자의 인생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다. 더 좋은 인생은 남의 인생도 소중하게 여기고 키워주려 애쓰는 인생 아닐까. 거창할 것 없지만 나름의 보람을 찾아 분주한 한 교사의 인생 2막이 거기 있었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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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년 경험 살려 일자리 찾아주는 ‘취업 마스터’… “내 인생 가장 큰 보람”[서영아의 100세 카페]

    19일 오후 2시경 경기 안산시에 자리한 특성화고 경일관광경영고의 한 교실. 이대호 교사(62)가 진행하는 ‘비서학’ 수업이 한창이다. 해외 출장 준비에 대해, 항공권이나 호텔 예약법 등 설명은 매우 구체적이다. 이 교사가 갑자기 물었다. “이 중에 해외여행 가본 사람?” 교실 안은 조용하다. “요즘은 취직만 하면 무조건 최저임금은 보장받아요. 연봉 2300여만 원이죠. 오늘 배운 것들은 여러분이 휴가 여행 갈 때도 써먹을 수 있지요.” 컴퓨터 앞에서 검색에 열중하는 학생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교사 정년 훌쩍 넘긴 기간제 교사 2년 차 이 씨는 이 학교 취업전담 교사다. 지난해 초 경기도교육청 공모에 응해 기간제 교사로 채용됐다. 인생 2막이 극적인 반전처럼 찾아왔다. “제 인맥과 정보, 경험을 총동원해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일자리를 매칭시키는 일을 합니다. 30여 년간 다양한 직장을 경험해왔지만 가장 보람이 느껴지네요.” 주 4시간씩 수업하고 나머지는 학생들의 취업처 발굴과 현장실습 운영, 취업 지원에 바친다. 면접 때면 학생을 자신의 차에 태우고 함께 갈 정도로 정성을 쏟는다. 안산 일대는 반월·시화공단과 안양·가산의 벤처단지 등 일손 수요가 많은 지역. 중소기업은 구인난에 시달리고 학생들은 구직난에 힘들어하는 가운데, 이런 미스 매치를 해결한다는 보람을 느끼고 있다. “지역 특성상 다문화 가정도 많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도 있습니다. 가장이나 다름없는 학생들을 취업시키고, 열심히 회사 생활 하는 것을 보면 뿌듯하기 그지없죠.” 매일 오전 7시면 학교에 출근해 취업정보실을 개방한다. 집에서 컴퓨터 작업을 못 한 학생들을 받아주기 위해서다. 다문화 가정 자녀들이 졸업과 함께 취업할 수 있도록 F4 비자 발급도 돕고 있다. “저 자신이 상고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대학과 대학원을 마쳐 학생들의 고충을 잘 아는 편입니다.” 사회에서 여러 회사를 거쳤다. 10여 년간 근무했던 회사는 외환위기 때 해체됐다. 2002년 당시 방과후학교 교육서비스 회사인 ‘에듀박스’(현 골드앤에스)에 들어가 대표이사까지 올랐다. 당시 그가 론칭한 초등학생 말하기 영어학원 ‘이보영의 토킹클럽’은 한때 전국에 500개까지 늘었다. 2017년부터 시작한 코딩교육 사업을 2년 만에 접으면서 그의 직장생활도 끝났다.○구인과 구직의 미스매치 그와 함께 일하는 안산시청 일자리센터 소속 박상임 취업지원관은 “학교들은 대개 62세 정년이 지난 사람은 잘 안 쓰려 하지만 이분은 특별 케이스”라고 귀띔한다. 교사들보다 기업계 생리를 잘 알고 있어 대응에 유연하고, 인맥을 살려 새로운 취업처를 발굴해준다는 것. 과거 한국 프랜차이즈산업협회 부회장, 코스닥협회 자문위원 같은 일을 오래 해서 도움을 요청할 큰 회사 대표나 임원들을 많이 안다. 한번 학생들을 보낸 곳은 자주 방문해서 관심을 보이고 거기서 추가 채용이 생길 수 있도록 애쓴다. 요즘은 특성화고라 해도 졸업생 절반은 진학을 택한다. 이 학교도 지난해 졸업생 270여 명 중 40%가 취업했고 40%는 진학했다. 취업은 대개 2∼3개월의 현장실습을 거쳐 이뤄지는데, 실습 전에 기업 측으로부터 ‘특별한 일 없으면 채용한다’는 약정서를 받는다. 학교와 교육청, 학부모, 학생들이 약정이 지켜지는지 수시로 감시한다. “지역사회와 학교가 학생들의 든든한 ‘빽’이 되는 셈이죠. 정부도 든든히 받쳐줍니다. 업체 입장에서도 특성화고 학생들을 많이 받으면 정부 혜택이 늘어나니 서로 ‘윈윈’이지요.” 가장 큰 고민은 애써 취직시켜도 1년 안에 30% 정도가 그만둔다는 점. 기업 측으로부터도 강력한 항의가 들어온다. “일껏 일할 만하게 가르쳐놓으면 그만두는 경우가 많거든요. 아예 ‘공부 못해도 좋으니 10년 이상 일할 착실한 직원을 원한다’며 ‘우리가 시집도 보내고 학교도 보내주겠다’고 말해 오는 회사도 있어요.” 인력송출 업체를 통해 젊은 인력을 2년 쓰고 버리는 식의 고용은 이들에게는 턱도 없는 얘기다. “저희는 정규직 아니면 보내지 않습니다. 젊은이의 기회비용을 소중히 여겨야지요. 그런 만큼 저는 취직하는 학생들에게 ‘힘들고 어려운 것이 많겠지만 딱 3개월만 참고 버텨보자’고 말하곤 합니다. 3개월을 버티고 나면 1년을 버틸 힘이 생기고 1년을 일하면 자리를 잡을 수 있지요. 3년을 근무하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재직자 전형’도 있어요. 인근 한양대(에리카캠퍼스), 한국공학대 등 좋은 대학에 가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그는 반년 전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회원제 레스토랑에 취업시킨 졸업생으로부터 최근 받은 문자 얘기를 꺼냈다. “‘아직 잘 다니고 있다. 감사하다’고. 집에서 출근하려면 전철 3개 노선을 갈아타고 1시간 반 걸리는데, 잘 버티고 있네요. 그런 친구는 분명히 성공할 거라 봅니다. 출퇴근 왕복 3시간을 견뎌낼 정도 뚝심이라면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이겨낼 수 있어요.” ○“죽는 날까지 일하고 싶다” ―인생 2막에 즈음해 중장년들의 가장 큰 고민이 적절한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는 점일 겁니다. 드물게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자리를 찾으신 듯합니다. 비결은 뭘까요. “귀를 열어둔 게 도움이 된 것 아닐까요. 우연히 나간 모임에서 이런 직업이 있다는 얘길 듣게 됐습니다. 마침 대학 다닐 때 따놓았던 교사자격증이 톡톡히 역할을 했고요. 올해 초 교사 정년 나이가 지나 걱정했지만 기간제 교사로 재계약됐을 때는 무척 기뻤습니다.” 부천 자택에서 학교까지 25km를 운전해 출퇴근한다. 국민연금이 올 2월부터 나오고 학교에서 받는 급여는 과거 수입의 3분의 1 수준이지만 대만족이다. ―노후 준비는 괜찮으신지요. “많지는 않지만 국민연금도 있고, 개인연금도 조금 있어요. 집 한 채 있으니 여차하면 주택연금 받으면 됩니다. 이제 돈 쓸 일도 많지 않고, 그래도 안 되면 더 줄여 살면 되죠.” ―이 일은 언제까지…. “매년 재계약해야 하고 65세면 끝납니다. 제 인생 목표는 평생 일하다가 일터에서 죽는 거예요. 앞으로도 보수 안 받더라도 공공기관이나 학교 등에서 사회에 도움 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솔선수범하면 ‘꼰대’가 아니다 그의 일터인 취업정보실은 종일 개방돼 있다. 인터뷰 중 여학생 두 명이 “쌤, 상담 좀…” 하고 찾아왔다가 쪼르르 사라졌고 1명이 컴퓨터 작업을 하기 위해 잠시 머물다가 나갔다. 그는 “이 학교에서 제가 제일 나이가 많고 직급은 제일 낮습니다.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모든 일에 사명감을 갖고 임하면 일 자체가 재미있어요”라고 말한다. 감수성 예민한 학생들에게 ‘꼰대’가 아닌 존재로 다가가기 위해 솔선수범에 애쓴다.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도 이를 대신 실천으로 보여줘 뭔가를 깨닫게 하는 식이다. “학생들에게 생일날이나 명절이면 카카오톡으로 인사카드를 보냅니다. 절반 정도는 답이 와요. ‘감사하다’거나 ‘어떻게 아셨어요?’라거나. 이런 것들은 제 나름의 교육이에요. 직장 상사건, 부모님이건 다른 분들께 이렇게 해보라는 메시지죠. 평소 긍정적인 관심을 보여드리면 그분들도 너희를 그렇게 대할 거라는. ‘이렇게 하라’고 대놓고 말하면 잔소리가 되겠지만 솔선수범으로 느끼게 해주면 다르죠. 그러니 저는 늘 바쁩니다.” 각자의 인생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다. 더 좋은 인생은 남의 인생도 소중하게 여기고 키워주려 애쓰는 인생 아닐까. 거창할 것 없지만 나름의 보람을 찾아 분주한 한 교사의 인생 2막이 거기 있었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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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잡하게 바뀐 노인의 몸, 질병만 봐서는 치료 어렵다[서영아의 100세 카페]

    4월16일자 ‘100세카페’에 실린 정희원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 인터뷰에 대해 독자들의 반응이 각별했다. 인터뷰 계기는 그가 최근 낸 저서 ‘지속가능한 나이듦(두리반)’이었지만, 다중질환에 시달리는 노인일수록 환자 위주의 종합적인 진료가 필요하다는 노년의학의 취지에 적잖은 응원 댓글이 달렸다. 정교수로부터는 기사를 보고 노년내과를 찾아와 약의 처방연쇄에서 벗어난 환자분이 여럿 계시다는 얘기도 들었다. 초고령사회로 치닫는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노년의학은 어떤 모습일까. 지난번 인터뷰에서 소화하지 못했던 의료현장의 움직임을 서울아산병원 사례를 중심으로 소개해본다. 다음 기회에는 노인의 약에 얽힌 문제도 다뤄보고자 한다. ● 폐렴 생겼는데 섬망이…노년의 몸은 다르게 반응한다 권영혜 서울아산병원 간호사는 병원 내 유일한 ‘노년전담간호사’다. 매일 새로 입원하는 65세 이상 환자들의 진료기록을 점검한 뒤 노쇠와 질환이 겹친 환자를 찾아가 적절한 지원프로그램과 연결해주는 일을 한다. 1년 전 병원 측이 시니어 환자관리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이 일을 시작했다. 그는 노년 환자의 임상적 특성을 ‘비전형성’이라고 말한다. “이쪽에 문제가 생겼는데 엉뚱한 데서 증세가 나타납니다. 예컨대 뇌경색으로 입원한 80대 환자가 식사량이 줄고 섬망(갑자기 의식과 주의력이 흐려지고 인지 기능이 떨어지는 상태) 증세를 보이는데, 원인을 추적해보면 폐렴이 와 있는 식입니다. 폐에 염증이 생겼지만 열이 나거나 호흡에 문제가 생기는 대신 축 처지고 섬망이 나타난 거죠. 다행히 환자가 입원중이라 원인을 찾아 치료할 수 있었지만 집에서 이런 일이 생기면 보호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어요.” 이 환자는 뇌경색을 앓은 뒤 안면이 마비되고 음식물을 제대로 삼키지 못하는 연하장애가 왔다. 연하보조식을 먹었지만 음식물이 조금씩 폐로 넘어가 흡인성 폐렴을 일으킨 것. 노인환자에서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고 한다. “노인의 몸은 아주 복잡하게 변합니다. 노쇠가 쌓인 위에 더 큰 스트레스가 오면 가장 취약한 곳에서 터집니다. 댐에 물이 한방울씩 차오르다가 일정 수위를 넘기면 넘쳐흐르는 것과 비슷하죠. 예컨대 같은 폐렴이 생겼다 해도 평소 근력이 약했던 노인은 넘어져 낙상을 당하고 인지기능이 약했던 노인에게는 섬망이 옵니다. 비뇨기계가 안 좋았던 노인에겐 실금(失禁)이 오지요. 노년의학 의사들은 의료기록과 현재 환자의 모습, 말, 보호자 증언 등 데이터를 조각조각 모아 종합판단을 해야 합니다.” 정희원 교수의 말이다. ● 각 과 뺑뺑이 돌던 환자, “내 말 들어주는 의사가 없었다” 노년내과 외래 환자들의 케이스만 살펴봐도 종합판단이 도외시된 노인 진료가 얼마나 위험한지 금새 드러난다. 휠체어에 의지해 찾아온 80대 여성환자 A씨는 1년 반 동안 체중이 16kg나 빠져 40kg이 됐다. 항우울제를 복용한 지도 반년이 돼 간다. 그의 처방이력을 약물조화클리닉 이미리내 약사가 면밀하게 조사했다. 정교수가 이런 기록들과 A씨 진찰을 통해 내린 진단은 이렇다. 평소 먹는 고혈압약이 부종과 변비를 불렀다. 여기 더해 골다공증에 대처하기 위해 먹은 칼슘약도 변비를 일으켰다. 메스껍고 못 먹고 체중 빠지고…. 이때 내과에서 준 소화제에는 항콜린성 성분이 있었다. 이 성분은 온몸의 민감도를 낮추다보니 노인들을 처지게 만든다. 우울증으로 찾은 병원에서는 체중증가 효과가 있는 우울증 약을 처방해줬다. 그런데 약을 먹으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견딜 수가 없었다. 약을 못 먹겠다고 의사에게 호소하자 연배가 있는 이 의사는 “환자가 약을 먹어야지 무슨 소리냐”고 꾸짖으며 계속 그 약을 처방했다. 심지어 다른 약도 추가했다. A씨는 이 모든 약을 먹고 돌덩이같은 변을 보며 점점 더 우울해졌고, 활동감소와 식욕저하의 악순환 속에 결국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됐다. 정 교수는 “환자의 처방전과 병력을 살펴본다면 어떤 의사라도 약을 바꿔보고 변비를 해결해줄 필요를 느꼈을 겁니다. 가장 안타까운 건 환자가 그간 많은 의사를 만났지만 본인의 병력에 대해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의사들을 탓할 수도 없습니다. 저마다 ‘3분 진료’에 쫓기는 의사들이 다른 병원 다른 과의 처방내용이나 병력을 살펴볼 여력은 전혀 없었을 테니까요.”● 연령친화적 의료시스템 만들기 서울아산병원의 환자 중 65세 이상이 40%를 차지한다. 병원에서는 의사와 약사, 간호사, 의료사회복지사가 협력하는 시니어환자위원회를 중심으로 연령친화의료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모색이 한창이다. 그 시범사업이 권 간호사가 하고 있는 일이다. 고령 환자가 입원에서 퇴원까지 순조롭게 치료할 수 있도록, 환자를 전체로 파악하고 환자의 말을 들어주는 창구가 되는 것이다. “먼저 차트를 본 뒤 직접 환자를 찾아가 신체적인 노쇠 정도를 파악하고 복용약물에 문제는 없는지 살펴봅니다. 또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없는지, 퇴원 뒤 돌봄 여부, 치료비용 문제까지도 종합적으로 물어봅니다.”(권 간호사) 이때 사용하는 것이 ‘4M’ 개념이다(표 참조). △상황 관리(What Matters) △약제 관리(Medication) △정신 관리(Mentation) △거동 유지(Mobility)의 4M의 영역을 두루 물어보고 파악한다. 질환을 살펴보고 약을 관리하고 인지와 우울 등 정신적인 부분을 해결하며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 개념은 미국에서 개발한 연령친화의료시스템 내용을 노년내과에서 번안해 한국의료시스템에 맞게 디자인했다. 약물조화클리닉도 같은 맥락에서 운영된다. 다중질환을 가진 노인환자들은 노년내과의 표현대로라면 여러 약물로 ‘떡이 져’ 있다. 증상에 따라 대응하며 다양한 전문과를 돌다보면 처방연쇄가 일어나 증상의 무한반복이 벌어지게 된다. 이 연쇄의 악순환을 끊고 약을 걷어내는 일을 맡는다. ● 노쇠 정도에 따라 치료법 달리 적용 지난해 가을부터는 환자의 노쇠 정도를 점수로 객관화하는 방법을 도입했다. 임상노쇠척도(CFS)는 1-9점까지 나뉘는데(표 참조), 서 있던 사람이 점점 침대로 다가가는 과정을 점수화한 것과 비슷하다. CFS 척도에 따라 치료방법이 확연히 달라진다. 가령 같은 77세 환자라 해도 CFS 7점인 환자와 3점인 환자는 딴판으로 다르다. 7점은 휠체어에 의지해 간신히 온 환자인데 이송부터 시작해 기저귀와 간병인이 필요하고 밤에 섬망을 일으킬 수 있고 욕창이 생길 가능성에 대비해 체위변경도 해줘야 한다. 약을 조심해서 써야 하고 대변을 파내야 할 수도 있다. 반면 3점은 어느 정도 젊은 성인에 준한 치료를 해도 큰 문제가 없다. 임상에서는 ‘경미한 노쇠’인 CFS 5점 이상 환자는 작은 실수만 있어도 순식간에 6점 이상으로 상태가 나빠지기 때문에 신중하게 접근한다고 한다. “노쇠는 노화의 축적된 결과입니다. 노쇠의 원인과 결과가 상호작용하며 악순환 사이클에 들어섭니다. 노인환자의 치료는 이 악순환을 끊어내고 하나씩 선순환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과정이죠. 궁극적으로는 4M, 즉 질환과 약, 정신상태, 움직임을 모두 선순환으로 되돌려야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몸이 안 좋으니 식욕 떨어지고 우울해지는데, 우울하고 잘 안 먹으면 몸은 더 안 좋아지죠. 밥을 못 먹는 원인도 여러 가지입니다. 소화기관에 질병이 있을 수도 있고 약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배우자의 사망으로 슬픔에 잠겼을 수도 있고, 심지어 밥을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서일 수도 있지요. 전체적으로 봐야 하고 해결도 전체적으로 해야 합니다. ‘노인의학적 중재’가 필요한 이유죠.”● 급성기 퇴원환자, 요양병원 아닌 집으로 시니어환자위원회가 지향하는 것은 노쇠가 진행된 어르신들이 급성기 병원을 이용한 뒤에도 기능을 잃지 않고 퇴원해 살던 곳으로 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관절 골절 환자에 대해 과거 병원에서는 뼈를 붙이면 할 일 다 했다고 생각했고, 이후 환자 대부분이 요양병원으로 전원했습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돌봄 모델들이 개발되고 있지만요. 집에서도 자활할 수 있지만 케어해줄 환경이 안 돼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기저질환이라도 있으면 더욱 엄두를 못 내죠. 하지만 이렇게 요양병원으로 보내진 노인 중 완쾌해 집으로 돌아가는 분이 얼마나 될까요.” 그래서 시니어위원회는 가용한 모든 자원을 동원해 시범케이스를 만들어내려 노력한다. 1월 고관절 골절과 탈수 증세로 입원했던 80대 여성환자를 본인과 딸의 희망에 따라 집으로 돌려보냈다. 콧줄과 소변줄이 필요한 환자였지만 딸에게 간단한 가정간호법을 가르쳤고 데이케어센터 간호사와 연결해줘 수시로 상의할 수 있게 했다. 방문간호사가 정기 방문하고 요양보호사가 매일 방문해 낮시간에는 딸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요즘 환자는 많이 호전돼 의자에 앉아 지내며 인지기능도 좋아져 입원 전의 ‘귀여운 할머니’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런 시스템이 작동하면 기능이 떨어진 분들도 걱정 없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지요. 연령친화 의료시스템은 궁극적으로는 병원 의료뿐 아니라 약, 커뮤니티 케어 등을 묶어서 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만이나 싱가포르, 영연방 국가들에서 이런 개념의 노인의학이 시행되고 있습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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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폐렴인데 섬망 증세… 고령환자는 증상만으로 진단 어려워[서영아의 100세 카페]

    4월 16일자 ‘100세 카페’에 실린 정희원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 인터뷰에 대해 독자들의 반응이 각별했다. 인터뷰 계기는 그가 최근 낸 저서 ‘지속가능한 나이듦’(두리반)이었지만, 다중질환에 시달리는 노인일수록 환자 위주의 종합적인 진료가 필요하다는 노년의학의 취지에 적잖은 응원 댓글이 달렸다. 정 교수는 기사를 보고 노년내과를 찾아와 약의 처방 연쇄에서 벗어난 환자분이 여럿이라는 얘기도 전해줬다. 지난 인터뷰에서 소화하지 못했던 노년의학의 의료 현장 움직임을 서울아산병원 사례를 중심으로 소개해 본다.○ 같은 질병에도 노년의 몸은 다르게 반응한다 권영혜 서울아산병원 간호사는 병원 내 유일한 ‘노년 전담 간호사’다. 매일 새로 입원하는 65세 이상 환자들의 진료기록을 점검한 뒤 노쇠와 질환이 겹친 환자를 찾아가 적절한 지원 프로그램과 연결해 주는 일을 한다. 1년 전 병원 측이 시니어 환자 관리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이 일을 시작했다. 그는 노년 환자의 임상적 특성을 ‘비전형성’이라고 말한다. “이쪽에 문제가 생겼는데 엉뚱한 데서 증세가 나타납니다. 예컨대 뇌경색으로 입원한 80대 환자가 식사량이 줄고 섬망(갑자기 의식과 주의력이 흐려지고 인지기능이 떨어지는 상태) 증세를 보이는데, 원인을 추적해 보면 폐렴이 와 있는 식입니다. 다행히 환자가 입원 중이라 원인을 찾아 치료할 수 있었지만 집에서 이런 일이 생기면 보호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어요.” 이 환자는 뇌경색을 앓은 뒤 안면이 마비되고 음식물을 제대로 삼키지 못하는 연하장애가 왔다. 연하보조식을 먹었지만 음식물이 조금씩 폐로 넘어가 흡인성 폐렴을 일으킨 것. 노인 환자에게서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노인의 몸은 복잡하게 변합니다. 노쇠가 쌓인 위에 더 큰 스트레스가 오면 가장 취약한 곳에서 터집니다. 같은 폐렴이 생겼다 해도 평소 근력이 약했던 노인은 넘어져 낙상을 당하고 인지기능이 약했던 노인에게는 섬망이 옵니다. 비뇨기계가 안 좋았던 노인에겐 실금(失禁)이 오지요. 노년의학 의사들은 의료기록과 현재 환자의 모습, 말, 보호자 증언 등 데이터를 조각조각 모아 종합 판단을 해야 합니다.” 정 교수의 말이다. ○ 각 과 뺑뺑이 돌던 환자, “내 말 들어주는 의사가 없었다” 노년내과 외래 환자들의 케이스만 살펴봐도 종합 판단이 도외시된 노인 진료가 얼마나 위험한지 금세 드러난다. 휠체어에 의지해 찾아온 80대 여성 환자 A 씨는 1년 반 동안 체중이 16kg이나 빠져 40kg이 됐다. 항우울제를 복용한 지도 반년이 돼 간다. 그의 처방 이력을 약물조화클리닉 이미리내 약사가 면밀하게 조사했다. 정 교수가 이런 기록들과 A 씨 진찰을 통해 내린 진단은 이렇다. 평소 먹는 고혈압약이 부종과 변비를 불렀다. 여기 더해 골다공증에 대처하기 위해 먹은 칼슘약도 변비를 일으켰다. 메스껍고 못 먹고 체중 빠지고…. 이때 내과에서 준 소화제에는 항콜린성 성분이 있었다. 이 성분은 온몸의 민감도를 낮추다 보니 노인들을 처지게 만든다. 우울증으로 찾은 병원에서는 체중 증가 효과가 있는 우울증 약을 처방해 줬다. 그런데 약을 먹으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견딜 수가 없었다. 약을 못 먹겠다고 의사에게 호소하자 연배가 있는 이 의사는 “환자가 약을 먹어야지 무슨 소리냐”고 꾸짖으며 계속 그 약을 처방했다. 심지어 다른 약도 추가했다. A 씨는 이 모든 약을 먹고 돌덩이 같은 변을 보며 점점 더 우울해졌고, 활동 감소와 식욕 저하의 악순환 속에 결국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됐다. 정 교수는 “환자의 처방전과 병력을 살펴본다면 어떤 의사라도 약을 바꿔보고 변비를 해결해줄 필요를 느꼈을 겁니다. 가장 안타까운 건 환자가 많은 의사를 만났지만 본인의 병력에 대해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연령 친화적 의료 시스템 만들기 서울아산병원 환자 중 65세 이상이 40%를 차지한다. 병원에서는 의사와 약사, 간호사, 의료사회복지사가 협력하는 시니어환자위원회를 중심으로 연령 친화 의료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모색이 한창이다. 그 시범사업이 권 간호사가 하고 있는 일이다. 고령 환자가 입원에서 퇴원까지 순조롭게 치료할 수 있도록 환자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환자의 말을 들어주는 창구가 되는 것이다. “먼저 차트를 본 뒤 직접 환자를 찾아가 신체적인 노쇠 정도를 파악하고 복용 약물에 문제는 없는지 살펴봅니다. 또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없는지, 퇴원 뒤 돌봄 여부, 치료 비용 문제까지도 종합적으로 물어봅니다.”(권 간호사) 이때 사용하는 것이 ‘4M’ 개념이다. △상황 관리(What Matters) △약제 관리(Medication) △정신 관리(Mentation) △거동 유지(Mobility)의 4M의 영역을 두루 물어보고 파악한다. 지난해 가을부터는 환자의 노쇠 정도를 점수로 객관화하는 방법을 도입했다. 임상노쇠척도(CFS)는 1∼9점으로 나뉘는데, 서 있던 사람이 점점 침대로 다가가는 과정을 점수화한 것과 비슷하다. CFS에 따라 치료 방법이 달라진다. 가령 같은 77세 환자라 해도 CFS 7점인 환자와 3점인 환자는 딴판으로 다르다. 7점은 휠체어에 의지해 간신히 온 환자인데 이송부터 시작해 기저귀와 간병인이 필요하고 밤에 섬망을 일으킬 수 있고 욕창이 생길 가능성에 대비해 체위 변경도 해줘야 한다. 약을 조심해서 써야 하고 대변을 파내야 할 수도 있다. 반면 3점은 어느 정도 젊은 성인에 준한 치료를 해도 큰 문제가 없다. 임상에서는 ‘경미한 노쇠’인 CFS 5점 이상 환자는 작은 실수만 있어도 순식간에 6점 이상으로 상태가 나빠지기 때문에 신중하게 접근한다고 한다. “노쇠는 노화의 축적된 결과입니다. 노쇠의 원인과 결과가 상호작용하며 악순환 사이클에 들어섭니다. 노인 환자의 치료는 이 악순환을 끊어내고 하나씩 선순환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과정이죠. 궁극적으로는 4M, 즉 질환과 약, 정신 상태, 움직임을 모두 선순환으로 되돌려야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몸이 안 좋으니 식욕이 떨어지고 우울해지는데, 우울하고 잘 안 먹으면 몸은 더 안 좋아지죠. 밥을 못 먹는 원인도 여러 가지입니다. 소화기관에 질병이 있을 수도 있고 약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배우자의 사망으로 슬픔에 잠겼을 수도 있고, 심지어 밥을 챙겨 주는 사람이 없어서일 수도 있지요. 전체적으로 봐야 하고 해결도 전체적으로 해야 합니다. ‘노인의학적 중재’가 필요한 이유죠.”○ 급성기 퇴원 환자, 요양병원 아닌 집으로 시니어환자위원회가 지향하는 것은 노쇠가 진행된 어르신들이 급성기에 병원을 이용한 뒤에도 기능을 잃지 않고 퇴원해 살던 곳으로 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관절 골절 환자에 대해 과거 병원에서는 뼈를 붙이면 할 일 다 했다고 생각했고, 이후 환자 대부분이 요양병원으로 전원했습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돌봄 모델들이 개발되고 있지만요. 집에서도 자활할 수 있지만 케어해줄 환경이 안 돼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기저질환이라도 있으면 더욱 엄두를 못 내죠.” 그래서 시니어위원회는 가용한 모든 자원을 동원해 시범 케이스를 만들어 내려 노력한다. 1월 고관절 골절과 탈수 증세로 입원했던 80대 여성 환자를 본인과 딸의 희망에 따라 집으로 돌려보냈다. 콧줄과 소변줄이 필요한 환자였지만 딸에게 간단한 가정간호법을 가르쳤고 데이케어센터 간호사와 연결해줘 수시로 상의할 수 있게 했다. 방문 간호사가 정기 방문하고 요양보호사가 매일 방문해 낮 시간에는 딸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요즘 환자는 많이 호전돼 의자에 앉아 지내며 인지기능도 좋아져 입원 전의 ‘귀여운 할머니’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런 시스템이 작동하면 기능이 떨어진 분들도 걱정 없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지요. 대만이나 싱가포르, 영연방 국가들에서 이런 개념의 노인의학이 시행되고 있습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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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토록 준비했어도…눈앞에 닥친 퇴직은 두렵기만 하더라”[서영아의 100세 카페]

    5월 말 퇴직을 앞둔 박성하 씨(57)는 요즘 부쩍 심란하다. 올 초부터 석 달 정도 알 수 없는 복통에 시달렸다. 병원에서는 온갖 검사 끝에 역류성 식도염이라고 했다. 여기 더해 자주 신경질적이 되고 숙면을 취할 수 없었다. 책이나 신문도 차분히 읽기 힘들 정도. 스스로 찾아낸 원인은 코앞으로 다가온 퇴직이었다. ‘내가 아침마다 출근할 곳이 사라진다는 사실에 불안해하고 있구나….’○ 스스로 정한 퇴직, 슬금슬금 찾아오는 우울과 불안퇴직은 온전히 자신의 결정이었다. 32년 간 한 회사에 다녔고 지난해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정년을 3년 반 정도 당겼고, 지금은 퇴직 전 1년의 휴가를 쓰는 중이다. 회사는 급여는 물론 자기계발 휴직비까지 지급해줬다. 그는 이 기간 책(‘직장인 자기경영 프로젝트’··바이북스)도 한 권 썼다. 책에서도 “내 퇴직 시기는 내가 정한다”며 큰소리쳤는데, 정작 퇴직을 한달 앞둔 지금 자꾸 우울하고 불안해진다. “경제적으로 준비돼 있고 퇴직 후 일거리들도 장만해놨는데, 이런 심리 상태는 뜻밖이었습니다. 자유를 갈망하던 과거의 제가 무색했죠. 회사를 완전히 떠난다는 것이 마치 긴 시간을 함께 한 가족이나 친구와 헤어지는 느낌이랄까. 비슷한 처지 아니라면 공감하기 어려울 거예요. 저도 불과 1년 전까지도 퇴직하는 선배들의 하소연이 체감되지 않았으니까요.” 사실 박씨만큼 퇴직을 제대로 준비한 사람도 드물다. 퇴직 준비하는 기간 쓴 책이 그 증거물이다. 퇴직 후 사용하려 마련한 컨테이너 사무실에서, 21일 그를 만났다. -제목 그대로, 직장인들에게 자기 경영을 권하는 내용이죠? “32년을 돌아보며 제가 얻은 결론은 ‘자기 삶은 스스로 경영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걸 직장에 몸담고 있을 때부터 하라는 거죠. 경력 관리하고, 스펙 쌓고, 재테크도 시도하고…. 쉽게 말해 ‘딴짓’을 많이 해보라는 얘기입니다. 저는 그렇게 해왔고 후회가 없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파이어족’을 말하지만 ‘경제적 자유’도 직장에 몸담고 누리면 됩니다.” ○ 대기업이라는 큰 우산1984학번인 그는 말하자면 386(586) 세대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포스코에 입사해 홍보, 신사업기획, 해외영업, 일본주재원, 국내영업, 물류, 건설, 교육, 안전부문 등 다양한 업무를 경험했다. 재직 중 일본 쓰쿠바대와 리츠메이칸대에서 2년간 유학했고, 고려대에서 석사와 박사학위(한일 원자력 안전정책 비교)를 받았다. 만 50세인 2015년 학위에 도전해 2019년 박사모를 쓴 만학도였다. 포스코에서는 팀장(차장)까지 올랐는데, 그는 스스로 성공한 직장인이라고 자부한다. “잘나가는 동료들처럼 승승장구하며 임원이 되지는 못했지만, 제 자신이 꽉 찬 인생을 살았다고 느낍니다. 여느 중년들과 달리 제 시간을 충분히 제 것으로 운영했습니다. 직장에 다니며 오랜 꿈이던 박사학위를 땄고 유학도 다녀왔습니다. 4년간 일본 오사카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하며 충분한 해외생활을 누렸고 재테크에도 나름 성공했습니다. 두터운 인간관계도 만들었다고 자부합니다.” -모든 직장이 포스코처럼 좋은 조건은 아니라는 반론이 있을 듯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저희 회사에서도 저처럼 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회사란 무엇인가요. “고마운 존재죠. 제게 일터를 제공해주고 급여를 줘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게 해줬습니다. 회사는 속박도 하지만 제가 세상을 배우고 성장할 많은 기회를 줬습니다. 다만 막상 회사 밖에서의 삶을 준비하려 하니 32년간 해온 업무 중에 가지고 나와 쓸모 있는 것은 하나도 없더군요. 관리직이라 더 그럴 겁니다. 포스코의 생산직 선배들은 정년 퇴직 후 거의 100% 재취업을 하더군요.”○ 성공적인 재테크는 당당한 직장인 생활에 도움그는 직장인에게 적극적인 재테크를 권한다. 이유는 “꿈을 이루고 여유를 즐기고 현실에서 당당해지기 위해서”. -재테크에 성공했다고 하시는데 어느 정도인가요. “부동산과 연금으로 노후 걱정 안 해도 될 정도는 됩니다. 퇴직 앞두고 현역시절의 2~3배가량 소득이 들어오도록 재무설계를 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는 개인적 성장배경이 작용한 듯하다. 그는 6살 때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 혼자 5남매를 키워내는 모습을 보며 일찌감치 경제적 자립심을 키웠다. 학생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다. 대학 때 친구가 집을 사는 모습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고 ‘나도 어서 재산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친구의 친척이 운영하는 부동산에 시간 날 때마다 놀러가 이런저런 조언과 정보를 얻었다고 한다. 그는 직장인의 재테크는 레버리지를 활용한 시간과의 싸움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가급적 팔지 않을 생산자산을 매입하되 10년 뒤를 바라보고 대출을 이용해 장기 투자해야 합니다. 시장은 이런 투자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특히 부동산의 경우 짧은 미래는 예측하기 힘들어도 결국은 물가가 오르듯 그 가치가 올라갑니다. 유동성이 낮으니 불필요한 낭비를 줄일 수 있어요. 주식처럼 수익이 날 때마다 팔아서 돈으로 바꾸기 쉽지 않으니까요. 매달 월급 받는 직장인들은 굳이 서둘러 수익을 실현할 이유가 없죠.” 실제로 그가 20대 후반에 회사 대출과 전세를 끼고 산 개포동의 15평짜리 아파트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보유중이다. 현재 재건축에 들어가 내년 2월 입주할 예정인데, 그 사이 시장가치는 30~40배 올랐다. 그는 이후로도 기회 닿을 때마다 부동산을 사 모았다. 모두 10년 이상 장기투자였고 시간은 배신하지 않고 수익을 가져다주었다.○ 직장인 재테크는 레버리지를 이용한 시간과의 싸움“‘돈을 버는 방식’보다 ‘돈을 쓰는 방식’이 돈을 벌게 해준다고 봅니다. 돈을 쓴다는 게 ‘소비습관’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가격이 오를 수 있는 것에 돈을 쓰느냐, 가격이 떨어지거나 비용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에 돈을 쓰느냐의 차이입니다. 가격이 오늘 수 있는 것은 생산 자산인데, 부동산, 주식, 미술품, 저작권 같은 게 대표적이죠. 저는 생활비 제외하고 남은 돈을 부동산과 연금저축에 투자했습니다. 가치가 오르고 자본소득이 생기면서 부동산을 하나 둘 늘려 자산 덩어리를 키워갔죠. 이런 자산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내 노력과 상관없이 무언가를 생산해주는데 그 생산물의 가치는 내 것입니다. 내가 그 자산의 주인이기 때문이죠.” -일하지 않고 소득을 얻는 구조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내 돈이 돈을 벌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항간에서는 죄악처럼 말하는 ‘불로소득’이 생산자산이 창출하는 소득인 셈이죠. 비근로소득은 특히 노후를 생각할 때 중요합니다. 비근로소득까지 가려면 △절약과 저축을 통해 시드머니를 만드는 단계, △시드머니로 생산자산을 사는 단계, △투자규모를 키우는 단계, △소득 구조를 만드는 4가지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야 합니다.” -늘 새 부동산에 투자하느라 가족에게 근검절약만 강조했다는 반성을 하셨던데요. “아내의 불만이 컸습니다. 지나고 보니 저도 후회가 되고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잊었던 건 아닌가. 잘 살려고 재테크하는 건데 재테크를 위해 삶의 질을 포기한다는 건 본말이 전도된 거죠. 이제부터는 쓸 때는 쓰면서, 자산도 지켜가는 길을 찾으려 합니다.”○ “너무 일찍 승진 포기한 것 후회”이런 그가 직장생활을 마감하며 가장 아쉬운 점은 승진을 너무 일찍 포기했다는 점. 그는 과장급이 된 30대 후반에 이미 정년이나 승진, 임원 같은 것은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남을 딛고 일어서는 것도,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것도 적성에 맞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부터 끊임없이 사내벤처에 응모해 사내에서는 ‘곧 떠날 사람’이라는 인식이 퍼졌고 그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일찌감치 재테크에 성공한 게 알려져 “뭐 하러 직장 다니냐”는 말도 자주 들었다. 여하튼, 출세에 대한 마음을 접으니 주변이 다 편안해졌다. ‘이건 아닌데’ 싶은 지시에는 당당하게 의견을 피력했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웠고 돈 잘 쓰는 그를 동료후배들은 좋아해줬다. 하지만 인사철이 되면 우울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와 보니 저도 조금만 버텼으면 지금쯤 임원이 되었겠더라구요. 한 30년 별 무리 없이 일하면 대부분 관계사에서라도 임원을 시켜주는 구조였어요. 물론 이건 저희 회사만의 특징일 수 있습니다. 여하간 너무 일찍 포기했다는 생각이고, 후배들에게는 자신의 삶을 챙기되 승진도 챙기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회사. 퇴직을 바라보는 직장인들에게 그는 당부한다. “퇴직 후에는 ‘갈 곳’이 중요합니다. 경제적 준비와는 별도로, 현업에 있을 때 한 달에 한 번 꼴이라도 나갈 수 있는 곳을 세 곳 정도 만들어놓으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사회단체나 봉사활동 등 가치 있는 일이면 더 좋겠죠. 퇴직한 뒤 시작하려면 스스로 자격지심이 생긴다고 할까, 쉽지 않습니다. 가령 어떤 봉사단체에 50대 회사원이 가입하는 것과 60대 퇴직자가 가입하는 건 다르게 느껴진다는 거죠. 그 회사원이 퇴직 후에도 활동을 계속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요.” 일본에서는 그걸 예비은퇴자의 ‘지역사회 데뷔’라고 표현한다. 대개 자신이 사는 지역과는 연을 끊고 살아온 ‘회사인간’들이 퇴직을 전후해 지역사회나 이웃과 연대의 고리를 만들어나가는 노력을 말한다. ○ 퇴직 후에는 ‘갈 곳’이 중요하다정작 그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까. 그가 내민 명함에는 재난안전 벤처기업 ‘위드 세이프티(with safety)’의 대표이사, 문학박사라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고려대 글로벌일본연구원 객원연구원(사회재난안전연구센터), 포항시 문화재단 문화재생활동가, 재난안전연구(원자력 안전), 에세이 작가라는 소개가 나열돼 있다. 그는 휴직 중에도 매달 두 차례 포항에 내려가 문화재단 일을 보고 포스텍 내에 마련된 벤처보육센터 ‘체인지업 그라운드’에서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 교육부 산하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연구교수에 지원했고 포항에서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어린이들에게 안전문화를 깨우쳐 주는 비영리단체를 출범할 계획이기도 하다. 일본 고베에서 어린이 안전교육 노하우를 배워와 전수할 계획이다. 블로그를 통해 그가 직장인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수첩쓰기’ 노하우도 공유하려 한다. “직장 퇴직이 사회에서의 은퇴는 절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인생 2막은 남을 돕는 일,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작게는 직장인들에게 제 노하우를 나눠주는 일부터 시작해, 지금 준비 중인 어린이 안전교육 단체도 제대로 키워볼 생각입니다. 퇴직을 앞두고 의식적으로 많은 준비를 했지만 몸이 직장을 떠나는 두려움을 드러냈듯, 앞으로도 어려움이 적지 않겠지요. 그래도 언제나처럼 열심히 살아야지요.”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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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장 다니면서도 스펙 쌓기-재테크 등 끊임없이 자기경영 해야”[서영아의 100세 카페]

    5월 말 퇴직을 앞둔 박성하 씨(57)는 요즘 부쩍 심란하다. 올해 초부터 석 달가량 알 수 없는 복통에 시달렸다. 병원에서는 역류성 식도염이라고 했다. 자주 신경질적이 되고 숙면을 취할 수 없었다. 책이나 신문도 차분히 읽기 힘들 정도다.○ 스스로 정한 퇴직, 슬금슬금 찾아오는 우울과 불안퇴직은 온전히 자신의 결정이었다. 32년간 한 회사에 다녔고 지난해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지금은 퇴직 전 1년의 휴가를 쓰는 중이다. 그는 이 기간 책(‘직장인 자기경영 프로젝트’·바이북스)을 한 권 썼다. “경제적으로 준비돼 있고 퇴직 후 일거리들도 장만해 놨는데, 이런 심리 상태는 뜻밖이었습니다. 마치 긴 시간을 함께한 가족이나 친구와 헤어지는 느낌이랄까.” 사실 박 씨만큼 퇴직을 제대로 준비한 사람도 드물다. 최근 낸 책이 그 증거물. 그가 퇴직 후 사용하려고 마련한 컨테이너 사무실에서 21일 그를 만났다. ―제목 그대로, 직장인들에게 자기경영을 권하고 있네요. “32년을 돌아보며 제가 얻은 결론은 ‘자기 삶은 스스로 경영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걸 직장에 몸담고 있을 때부터 하라는 거죠. 경력 관리하고, 스펙 쌓고, 재테크도 시도하고. 쉽게 말해 ‘딴짓’을 많이 해보라는 얘기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파이어족’을 말하지만 ‘경제적 자유’도 직장에 몸담고 누리면 됩니다.” ○ 대기업이라는 큰 우산1989년 고려대를 졸업하고 포스코에 입사해 신사업기획, 해외영업, 국내영업, 일본주재원, 건설, 안전 등 다양한 업무를 경험했다. 재직 중 일본 쓰쿠바대 등에서 2년간 유학했고, 고려대에서 석사와 박사학위(한일 원자력 안전정책 비교)를 받았다. 만 50세에 도전해 2019년 박사모를 썼다. 포스코에서는 팀장(차장)까지 올랐는데, 스스로 성공한 직장인이라고 자부한다. “잘나가는 동료들처럼 승승장구하며 임원이 되지는 못했지만, 제 자신이 꽉 찬 인생을 살았다고 느낍니다. 여느 중년들과 달리 제 시간을 충분히 제 것으로 운영했습니다. 직장에 다니며 오랜 꿈이던 박사학위를 땄고 유학도 다녀왔습니다. 4년간 일본 오사카에서 근무하며 해외생활을 누렸고 재테크에도 나름으로 성공했습니다. 두터운 인간관계도 만들었다고 자부합니다.”―모든 직장이 포스코처럼 좋은 조건은 아니라는 반론이 있을 듯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저희 회사에서도 저처럼 한 사람은 많지 않죠.”―자신에게 회사란 무엇인가요. “고마운 존재죠. 제게 일터를 제공해주고 급여를 줘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게 해줬습니다. 회사는 속박도 하지만 세상을 배우고 성장할 많은 기회를 줬습니다. 다만 막상 회사 밖 삶을 준비하려니 업무경험 중 쓸모 있는 게 하나도 없더군요. 관리직이라 더 그럴 겁니다.”○ 성공적인 재테크는 당당한 직장인 생활에 도움그는 직장인에게 적극적인 재테크를 권한다. 이유는 “꿈을 이루고 여유를 즐기고 현실에서 당당해지기 위해서”.―재테크에 성공했다고 하시는데 어느 정도인가요. “노후 걱정 안 해도 될 정도는 됩니다. 퇴직 앞두고 현역 시절의 2∼3배가량 소득이 들어오도록 재무설계를 했습니다.” 여기까지 오기에는 개인적 성장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 6세 때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 혼자 5남매를 키워내는 모습을 보며 일찌감치 경제적 자립심을 키웠다. 대학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다. 대학 때 친구가 집을 사는 모습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고 ‘나도 어서 재산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친구의 친척이 운영하는 부동산에 시간 날 때마다 놀러가 이런저런 조언과 정보를 얻었다고 한다. 그는 직장인의 재테크는 ‘레버리지를 활용한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요약했다. “팔지 않을 생산자산을 매입하되 10년 뒤를 바라보고 대출을 이용해 장기 투자해야 합니다. 시장은 이런 투자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특히 부동산은 짧은 미래는 예측하기 힘들어도 물가가 오르듯 그 가치가 올라갑니다. 유동성이 낮으니 불필요한 낭비도 줄일 수 있어요. 매달 월급 받는 직장인들은 굳이 서둘러 수익을 실현할 이유도 없죠.” 실제로 그가 20대 후반에 회사 대출과 전세를 끼고 산 서울 강남구 개포동의 15평짜리 아파트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보유 중이다. 재건축이 완공되는 내년 2월 입주할 예정인데, 그 사이 시장가치는 30∼40배 올랐다. 그는 이후로도 기회 닿을 때마다 부동산을 사 모았다. 모두 10년 이상 장기 투자였고 시간은 배신하지 않고 수익을 가져다주었다.―늘 새 부동산에 투자하느라 가족에게 근검절약만 강조했다고 반성하셨던데요. “아내의 불만이 컸습니다. 저도 후회가 되고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잊었던 건 아닌가. 잘살려고 재테크하는 건데 재테크를 위해 삶의 질을 포기한다는 건 본말이 전도된 거죠. 이제부터는 쓸 때는 쓰면서, 자산도 지켜가는 길을 찾으려 합니다.”○“너무 일찍 승진 포기한 것 후회”직장생활을 마감하며 가장 아쉬운 점은 승진을 너무 일찍 포기한 것. 그는 과장급이 된 30대 후반에 이미 정년이나 승진, 임원 등은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남을 딛고 일어서는 것도,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것도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 무렵부터 끊임없이 사내벤처에 응모해 ‘곧 떠날 사람’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일찌감치 재테크에 성공한 게 알려져 “뭐 하러 직장 다니냐”는 말도 자주 듣고 다녔다. 여하튼, 출세에 대한 마음을 접으니 주변이 편안해졌다. ‘이건 아닌데’ 싶은 지시에는 당당하게 의견을 피력했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웠고 돈 잘 쓰는 그를 동료 후배들은 좋아해줬지만 인사철이 되면 우울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와 보니 저도 조금만 버텼으면 지금쯤 임원이 되었겠더라고요. 한 30년 별 무리 없이 일하면 대부분 관계사에서라도 임원을 시켜주는 구조였어요. 물론 이건 저희 회사만의 특징일 수 있습니다. 여하간 너무 일찍 포기했다는 생각이고, 후배들에게는 자신의 삶을 챙기되 승진도 챙기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회사. 퇴직을 바라보는 직장인들에게 그는 당부한다. “‘갈 곳’이 중요합니다. 경제적 준비와는 별도로, 현업에 있을 때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나갈 수 있는 곳을 세 곳 정도 만들어 놓으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퇴직한 뒤 시작하려면 스스로 자격지심이 생긴다고 할까, 쉽지 않습니다. 가령 어떤 봉사단체에 50대 회사원이 가입하는 것과 60대 퇴직자가 가입하는 건 다르게 느껴진다는 거죠. 그 회사원이 퇴직 후에도 활동을 계속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요.”○ 퇴직 후에는 ‘갈 곳’이 중요하다정작 그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까. 그가 내민 명함 앞면에는 재난안전 벤처기업 ‘위드 세이프티(with safety)’ 대표이사, 문학박사라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고려대 글로벌일본연구원 객원연구원, 포항시 문화재단 문화재생활동가, 재난안전연구(원자력 안전), 에세이 작가라는 소개가 나열돼 있다. 그는 휴직 중에도 매달 두 차례 경북 포항에 내려가 문화재단 일을 보고 포스텍 벤처보육센터인 ‘체인지업 그라운드’에서 창업을 준비했다. 교육부 산하 한국연구재단 학술연구교수에 지원했고 포항에서 어린이들에게 안전문화를 깨우쳐 주는 비영리단체를 출범할 계획이기도 하다. 블로그를 통해 직장인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수첩쓰기’ 노하우도 공유하려 한다. “직장 퇴직이 사회에서의 은퇴는 절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인생 2막은 남을 돕는 일,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작게는 직장인들에게 제 노하우를 나눠주는 일부터 시작해, 지금 준비 중인 어린이 안전교육 단체도 제대로 키워 볼 생각입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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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강했던 노인, 쇠약해진 이유가 약?…“꼬인 줄 풀듯 정리, 일상 돌아갔죠”[서영아의 100세 카페]

    꽃이 피었다 지듯 사람도 시간이 흐르면 늙고 죽어가는 게 자연의 섭리.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늙음, 나이듦은 극도로 환영받지 못하는 대상이 돼 있다. 이런 가운데 노년내과 전문의 정희원 서울아산병원 교수가 최근 낸 책 ‘지속가능한 나이듦(두리반)’이 눈에 띄었다. 필자는 아직 노화와는 거리가 먼 38세. 서울대병원에서 전문의가 된 걸로 모자라 노화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의과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7일 만나본 정 교수는 “나이듦은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과정”이라며 “나이듦을 극복대상이 아닌 내 편, 우리 사회 편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화를 맞이하더라도 삶의 질에 문제가 없도록 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나이듦’이고 이는 개인 삶뿐 아니라 복지사회 정책, 고령화된 한국사회 전체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인문사회적 지식에 시사, 예술까지 관심영역이 다양하고 해박했다. 노년의 몸은 복잡계, 콧물약 한 알로 위독해지기도-노인의학이 왜 필요합니까. “노인의학은 생물학적 노화의 결과인 노쇠(frailty)와 여러 질병이 혼재된 상태에서 환자에게 맞춤 의료를 제공하는 전문분야입니다. 노화가 축적되면 몸이 바뀌는데, 사람의 몸이 ‘복잡계’로 변합니다. 각 질환들이 상호작용을 해서 예측불허의 결과를 낳기도 하고 같은 약 처방에도 성인과 다른 반응이 나타나죠. 그래서 소아과가 따로 있듯이 노인과도 따로 있어야 합니다.” -대략 어느 연령대가 진료대상입니까. “평균적으로 보자면 77세 정도입니다. 물론 개인차는 있습니다. 1990년대만 해도 약 65세였는데 엄청나게 개선됐지요. 간혹 가속노화(accelerated aging)를 일으키는 질병이 있는데, 이렇게 노쇠가 일어난 분들도 진료대상입니다.”- 다약제 정리를 무척 강조합니다. “한국 고령자의 73%가 두 가지 이상 만성질환을 가지고 있고 평균 4.1가지 약을 복용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약이 많을수록 부작용도 늘어납니다. 환자가 복용하는 모든 약을 점검하고 꼭 필요한 약물만 취하도록 하는 것을 ‘약을 정리한다’고 하는데, 극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아요. ‘잠재적 노인부적절 약제’ 리스트도 만들었습니다.”‘약을 정리한다’는 뜻은다약제 정리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정 교수의 진료사례를 하나 살펴보는 게 좋을 듯하다. 70대 후반 A씨는 1년 여 간 대형병원들을 찾아다니다가 그에게 왔다. 온몸이 떨리고 잘 걷지 못하는 증상 때문에 온갖 검사를 받았지만 원인을 찾지 못했다. 여기 더해 음식을 먹으면 구토하는 증상이 반복돼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비교적 건강했던 A씨는 불과 6개월만에 거동조차 자유롭지 않을 정도로 쇠약해져 버렸다. 정 교수는 우선 여러 의료기관을 오가며 두터워진 A씨의 의무기록 사본을 읽는 것부터 시작했다. 움직임과 떨림으로 도파민 부족을 완화시키는 약을 처방받았던 A씨의 구토증세가 심해졌고, 내과에서는 위장약 처방이 하나둘 늘어갔다. 그간의 처방약 목록을 들여다보니 문제가 선명해졌다. 시작은 진통소염제 한 알이었다. 약사가 함께 처방했던 소화제에 도파민 뉴런기능을 떨어뜨리는 특성이 있었다. 이런 부작용은 일반인에게는 별 영향을 주지 않지만 노쇠가 진행된 A씨에게는 달랐다. A씨가 떨리는 증상에 대해 신경과에서 처방받은 파킨슨 약의 부작용도 구역과 구토였다. 구토에 대해 내과의사는 소화제를 늘려갔다. A씨가 구토증상으로는 내과의사를 찾고 떨림에 대해서는 신경과 의사를 찾았으니 두가지 치료약이 뱅글뱅글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었다. 이를 전문용어로 ‘처방연쇄’라고 한다. 정교수는 ‘꼬인 이어폰 줄을 푸는 심정으로’ 10가지가 넘는 약 중 소화제와 소염제, 파킨슨 약을 포함해 3분의 2 정도를 정리했다. 그로부터 2주 뒤, A씨는 지팡이 없이 진료실에 걸어 들어와서는 ‘반년만에 밥을 먹었다’고 감격스러워했다. 약을 정리한 덕에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 돈은 안되지만, 꼭 필요한 진료과정교수는 이런 문제가 생긴 이유로 한국의 의료시스템을 들었다. “한국은 주치의제도가 정착되지 않아 환자가 곧바로 전문의와 만나는 시스템입니다. 여러 질병을 가진 노인의 경우 각기 다른 의사를 만나야 하는 문제가 생기죠. 의사들은 각자 약 처방을 하지만, 환자의 전체적인 질병과 처방 상황은 아무도 알기 어렵습니다. 노인의학은 개인별 맞춤 치료가 필요합니다. 사람마다 상태가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A씨 같은 환자를 치료하면 할수록 병원 입장에서는 손해가 난다는 점이다. 환자의 이모저모를 다 챙기다보면 환자 당 진찰시간이 30분을 넘긴다. 한국에서 노인과를 운영하는 곳이 많지 않은 이유다. 고령화사회와 실버산업이 여론에 오르내리던 2003년 경 분당서울대병원이 급성기 노인의료 시스템을 도입했고 2009년 서울아산병원이 노인내과를 신설했다. 이후 신촌세브란스, 전남대병원 등 노인과를 개설하는 병원이 몇 군데 더 생겼지만 병원내에서 주류 진료과라 보기는 어렵다. 공공의료가 발달한 영국에서는 1950년대부터 노인병학을 중시해 현재는 내과의의 10%가 노년내과 간판을 걸고 진료한다. 의사협회는 반대했지만 영국 정부가 강력하게 밀어부쳤다. 정부 입장에서 보자면 각 과별 진료처방보다 노인병 전담이 있는 것이 효율적이고 재정을 낮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캐나다 호주 등 영연방계통 국가들도 노인의학이 매우 발달해 있다. 노년내과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기적노년 내과에서는 다른 진료과 컨설팅을 통해 날마다 ‘기적’이 일어난다. “노쇠가 진행된 환자의 경우 진료과에서 문제해결이 잘 안되면 저희에게 문의가 옵니다. 오늘도 재활의학과에서 의뢰가 있었습니다. 혼수상태에 빠진 노인인데, 차트를 보니 노인에게 절대 쓰면 안 되는 항콜린성 약을 쓰고 있었어요. 그 약을 끊게 했는데 3일 지나면 깨어나신다고 단언할 수 있어요.” 그가 노년내과를 지망하게 된 계기도 수련의시절 응급실에 실려온 노인환자에 대해 선배의사가 특정약을 처방에서 뺀 것만으로 며칠 만에 멀쩡해지는 모습을 본 거였다. “속도가 빠르고 효과가 드라마틱해서, 재미있다고 생각했지요. 노인환자들은 아주 사소한 요소로도 상태가 나빠져요. 의식 떨어뜨리는 약 하나 잘못 쓰면 못 먹고 못 움직이고 그러다보면 금방 와상 상태가 되고 그럼 또 욕창이 생기고…. 생명 위독해지는 데까지 일주일이면 될 겁니다. 반대로 그 직전에 원인을 찾아내 제대로 해결해놓으면, 깨어나서 먹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3개월 내에 평소대로 회복되는 선순환 사이클도 만들 수 있지요. 힘들고 돈이 안 되도 노인의학이 재미있고 보람되다고 느끼는 순간이죠.” -그런 보람의 순간이 자주 있나요. “거의 매일 있어요. 이게 지적인 쾌감을 줍니다. 환자가 어려움을 겪는 꼬인 곳을 ‘탁’ 풀어내면 환자가 ‘뿅’ 좋아져서 며칠 뒤 외래에 걸어서 들어오시는 거예요. 하하. 그런 환자들일수록 굉장히 고마워하시기 때문에 저도 버텨나갈 힘이 되지요.”노화지연의 비결은 더하기보다 덜어내기-노쇠를 늦추고 싶은 중장년에게 조언을 주신다면. “노화 속도를 줄이는 것은 대개 무언가를 더하는 게 아니라 빼는 겁니다. 먹는 것, 번뇌, 스트레스, 영양제도 늘리는 것보다 줄이는 것이 내 몸에 득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대신 채워야 할 것은 잠, 운동, 섬유질 채소, 머리 비우는 시간이죠. 이것들은 노화와 동반되는 만성염증이나 대사적 이상과 연관이 있고, 가속노화와 악순환을 거꾸로 돌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노화지연에는 절제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작은 것 덜어내서 얻는 효과가 생각보다 큰데 사람들은 그에 대해 너무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자꾸 새로운 것을 보태고 찾는데 시간과 돈을 많이 쓰죠. 사실 술을 매일 마신다는 것은 꼬박꼬박 혈압 올리는 약을 먹는 것과 같죠. 술 마시고 혈압 조절약 먹고…. 이게 다 노화를 가속화하는 겁니다.” -모두가 절식을 말하지만 실천이 쉽지 않습니다. “시작은 간단합니다. 단순당과 정제곡물만 줄이면 됩니다. 이 상태를 몸이 경험하게 하는 거죠. 단순당이나 정제곡물로 식사를 하면 체내에 당도가 올라갔다 내려가면서 코티솔이 나와 다시 식욕을 당깁니다. 그런 악순환이 사라지게 되면 칼로리 섭취는 무조건 줄어듭니다. 환자들에게 설명해드리면 쉽게들 실천하세요. 그러면 한두 달이면 효과가 나타나고 6개월마다 약 하나씩 끊을 수 있어요. 선순환 사이클을 만드는 겁니다.” 다만 그는 노화지연을 위한 절제는 젊어서부터 30~40년 간 실천해야 할 일이라고 못박았다. 가끔 노쇠가 온 어르신들이 뒤늦게 실천하시면서 근육이 더 빠져서 진료실로 오는 경우가 있다는 것. 그는 요즘 우리 사회가 가속노화를 재촉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고 진단한다. “요즘 유행하는 ‘욜로족(한번 태어난 인생, 현재를 즐기며 산다)’도 ‘파이어족(하루빨리 경제적 자유를 얻고 은퇴한다)’도 일종의 가속노화라고 생각해요. 과도한 것은 좋지 않아요. 과도한 운동도, 과로도, 스트레스도 가속노화를 일으키죠. 그는 이 대목에서 ‘호르메시스’(가벼운 스트레스나 소량의 독이 오히려 건강에 이로움을 주는 현상)에 대해 긴 설명을, 정말 성의있게 이어갔다. 더 건강해진 노인들이 사회 구성원 역할해야-지속가능한 사회시스템은. ”항간에서 한국의 급속한 고령화를 논하며 마치 우리 사회에 종말이 올 것처럼 분위기를 띄우지만, 고령 사회구성원이 늘어나는 게 파멸적인 것은 아닙니다. 다만 복지정책은 지금같은 방식은 곤란합니다. 65세가 약자인 것은 수십 년 전 얘기입니다. 노년내과 기준으로 보자면 한국인의 건강상태는 워낙 좋아 평균적으로 77세까지는 경제할동을 할 수 있습니다. 노인빈곤율이 높아서가 아니라 그분들의 기능이 좋아서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에 맞춰 사회보장도 서구선진국처럼 뒤로 미뤄야 합니다. 지금 추세에서, 65세 이상을 복지의 대상으로만 간주하면 폭증하는 부양비 탓에 미래 세대의 삶이 지속가능하지 않아요.“ 결론은 자연스레 노인의학의 중요성으로 귀결된다. ”이를 위해서도 노인의학이 제대로 기능해야 합니다. 고령자들의 기능저하와 간병부담을 막는 게 중요하죠. 병은 치료했는데 사람은 쇠약해져 와상상태로 만들어서는 곤란합니다. 더 건강한 노인이 많아지면 이 분들이 부양 대상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 참여해 생산인구로 기능해주실 수 있지 않을까요.“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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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수 藥만 처방하는 맞춤형 노년의학 필수… 노화를 우리편으로 만들어야”[서영아의 100세 카페]

    꽃이 피었다 지듯 사람도 시간이 흐르면 늙고 죽어가는 게 자연의 섭리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나이 듦은 환영받지 못하는 대상이다. 이런 가운데 노년내과 전문의 정희원 서울아산병원 교수가 쓴 ‘지속가능한 나이듦’(두리반·사진)이 눈에 띄었다. 필자는 아직 노화와는 거리가 먼 38세. 서울대병원에서 전문의가 된 걸로 모자라 노화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KAIST에서 의과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7일 만나본 정 교수는 “나이 듦은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과정”이라며 “나이 듦을 극복 대상이 아닌 내 편, 우리 사회 편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문사회적 지식은 물론이고 시사 예술까지 관심 영역이 다양하고 해박했다. ○노년의 몸은 복잡계, 콧물약 한 알로 위독해지기도 ―노인의학이 왜 필요합니까. “노인의학은 생물학적 노화의 결과인 노쇠(frailty)와 여러 질병이 혼재된 상태에서 환자에게 맞춤 의료를 제공하는 전문 분야입니다. 노화가 축적되면 몸이 바뀌는데, 사람의 몸이 ‘복잡계’로 변합니다. 각 질환들이 상호작용을 해서 예측불허의 결과를 낳기도 하고 같은 약 처방에도 성인과 다른 반응이 나타나죠. 소아과가 따로 있듯 노인과도 따로 있어야 합니다.” ―다약제 정리를 강조합니다. “한국 고령자의 73%가 두 가지 이상 만성질환을 가지고 있고 평균 4.1가지 약을 복용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약이 많을수록 부작용도 늘어납니다. 환자가 복용하는 모든 약을 점검하고 꼭 필요한 약물만 취하도록 하는 것을 ‘약을 정리한다’고 하는데, 극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아요. ‘잠재적 노인부적절 약제’ 리스트도 만들었습니다.” 다약제 정리의 중요성은 정 교수의 진료 사례를 살펴보면 이해하기 쉽다. 70대 후반 A 씨는 1년여간 대형병원들을 찾아다니다가 그에게 왔다. 온몸이 떨리고 잘 걷지 못하는 증상 때문에 온갖 검사를 받았지만 원인을 찾지 못했다. 여기에 더해 음식을 먹으면 구토하는 증상이 반복돼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비교적 건강했던 A 씨는 불과 6개월 만에 거동이 자유롭지 않을 정도로 쇠약해져 버렸다. 정 교수는 우선 여러 의료기관을 오가며 두꺼워진 A 씨의 의무기록들을 읽는 것부터 시작했다. 움직임과 떨림으로 도파민 부족을 완화시키는 약을 처방받았던 A 씨의 구토 증상이 심해졌고, 내과에서는 위장약 처방이 하나둘 늘어갔다.○‘약을 정리한다’ 그간의 처방약 목록을 들여다보니 문제가 선명해졌다. 시작은 진통소염제 한 알이었다. 약사가 함께 처방했던 소화제에 도파민 뉴런 기능을 떨어뜨리는 특성이 있었다. 일반인에게는 별 영향이 없지만 노쇠가 진행된 A 씨에게는 달랐다. A 씨가 떨리는 증상에 대해 신경과에서 처방받은 파킨슨병 약의 부작용도 구역과 구토였다. 내과 의사는 소화제를 늘려갔다. A 씨가 구토 증상으로 내과 의사를 찾고 떨림에 대해서는 신경과 의사를 찾았으니 치료약들이 뱅글뱅글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었다. 이를 전문용어로 ‘처방연쇄’라고 한다. 정 교수는 ‘꼬인 이어폰 줄을 푸는 심정으로’ 10가지가 넘는 약 중 소화제와 소염제, 파킨슨병 약을 포함해 3분의 2 정도를 정리했다. 그로부터 2주 뒤, A 씨는 지팡이 없이 진료실에 걸어 들어와서는 ‘반 년 만에 밥을 먹었다’며 감격스러워 했다. 약을 정리한 덕에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 정 교수는 이런 문제가 생긴 이유로 한국의 의료시스템을 들었다. “한국은 환자가 곧바로 전문의와 만나는 시스템입니다. 여러 질병을 가진 노인의 경우 그만큼 여러 의사를 만나야 하고 그들이 각기 약을 처방합니다. 아무도 환자의 전체적인 질병과 처방 상황을 모르는 거죠. 노인의학은 개인별 맞춤치료가 돼야 합니다.” 문제는 A 씨 같은 환자를 치료하면 할수록 병원 입장에서는 손해가 난다는 점이다. 환자의 이모저모를 다 챙기다 보면 환자당 진찰시간이 30분을 넘긴다. 한국에서 노인과를 운영하는 곳이 많지 않은 이유다. 2003년 분당서울대병원이 급성기 노인의료 시스템을 도입했고 2009년 서울아산병원이 노인내과를 신설했다. 이후 신촌세브란스, 전남대병원 등 몇 군데 더 생겼지만 병원 내에서 주류 진료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공공의료가 발달한 영국에서는 1950년대부터 노인병학을 중시해 현재 내과의의 10%가 노년내과 간판을 걸고 진료한다. 과별 진료보다 노인병 전담이 있는 쪽이 효율적이고 재정을 줄인다는 것을 영국 정부가 일찍 간파했기 때문이다.○노년내과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기적 노년내과에서는 다른 진료과 컨설팅을 통해 날마다 ‘기적’이 일어난다. “노쇠가 진행된 환자의 경우 진료과에서 문제 해결이 잘 안 되면 저희에게 문의가 옵니다. 오늘도 재활의학과에서 의뢰가 있었습니다. 혼수상태에 빠진 노인인데, 차트를 보니 노인에게 절대 쓰면 안 되는 항콜린성 약을 쓰고 있었어요. 그 약을 끊게 했는데 3일이 지나면 깨어나신다고 단언할 수 있어요.” 그가 노년내과를 지망하게 된 계기도 수련의 시절 응급실에 실려 온 노인 환자에 대해 선배 의사가 특정약을 처방에서 뺀 것만으로 며칠 만에 멀쩡해지는 모습을 본 것이 계기였다. “속도가 빠르고 효과가 드라마틱해서, 재미있다고 생각했지요. 노인 환자들은 아주 사소한 요소로도 상태가 나빠져요. 의식 떨어뜨리는 약 하나를 잘못 쓰면 못 먹고 못 움직이고 그러다 보면 금방 와상 상태가 되고, 그럼 또 욕창이 생기고…. 생명이 위독해지는 데까지 일주일이면 될 겁니다. 반대로 그 직전에 원인을 찾아내 제대로 해결해놓으면, 깨어나서 먹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3개월 내에 평소대로 회복되는 선순환 사이클도 만들 수 있지요. 힘들고 돈이 안 돼도 노인의학이 재미있고 보람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죠.” ―그런 보람의 순간이 자주 있나요. “거의 매일 있어요. 이게 지적인 쾌감을 줍니다. 환자가 어려움을 겪는 꼬인 곳을 ‘탁’ 풀어내면 환자가 ‘뿅’ 좋아져서 며칠 뒤 외래에 걸어서 들어오시는 거예요. 하하. 그런 환자들일수록 굉장히 고마워하시기 때문에 저도 버텨 나갈 힘이 되지요.”○노화 지연의 비결은 더하기보다 덜어내기 ―노쇠를 늦추고 싶은 중장년층에게 조언을 주신다면…. “노화 속도를 줄이는 건 대개 무언가를 더하는 게 아니라 빼는 겁니다. 먹는 것, 번뇌, 스트레스, 영양제를 줄여야 내 몸에 득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 대신 채워야 할 것은 잠, 운동, 섬유질 채소, 머리 비우는 시간이죠. 이것들은 노화와 동반되는 만성염증이나 대사 이상과 연관이 있고, 가속 노화와 악순환을 거꾸로 돌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모두가 절식을 말하지만 실천이 쉽지 않습니다. “시작은 간단합니다. 단순당과 정제곡물만 줄이면 됩니다. 이 상태를 몸이 경험하게 하는 거죠. 단순당과 정제곡물로 식사를 하면 체내에 당도가 쭉 올라갔다 내려가면서 코르티솔이 나와 다시 식욕을 당깁니다. 그런 악순환이 사라지면 칼로리 섭취는 무조건 줄어듭니다. 환자들에게 설명해드리면 쉽게들 실천하세요. 한두 달이면 효과가 나타나고 6개월마다 약 하나씩 끊을 수 있어요.” ―지속가능한 사회시스템은…. “노년내과 기준으로 보자면 한국인은 77세까지 경제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맞춰 사회보장도 서구 선진국처럼 뒤로 늦춰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도 노인의학이 제대로 기능해야 합니다. 더 건강한 노인이 많아지면 이분들이 부양 대상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 참여해 생산인구로 기능해주실 수 있지 않을까요.”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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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퇴후 망망대해, 연금으로 노후 준비

    《우리 앞에 펼쳐진 장수와 고령화가 축복인지 재앙인지 고민해야 하는 시대다. 법정 정년 연령(60세)을 꽉 채워 은퇴하더라도 남은 인생이 30~40년이다. 조금 일찍 은퇴한다면 절반 이상 인생이 망망대해(茫茫大海)처럼 펼쳐지게 된다. 과거 세대가 은퇴에서 사망까지 5~10년, 그 기간 다자녀들의 십시일반(十匙一飯) 도움으로 별 부담 없이 지낼 수 있었다면 요즘 은퇴 세대의 노후는 시간은 늘어난 반면 누구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다. 은퇴 이후 삶을 대비하고 설계하는 것은 현대인에게 빼놓을 수 없는 일이 됐다. 특히 정기적인 수입을 확보하는 것은 필수다. 연금이 주목받는 이유다. 》노후 준비 시간은 갈수록 빨라지고 범위와 방법은 다양해지고 있다. 한국인의 은퇴 설계와 노후 준비를 말할 때 창업 초기부터 ‘연금 강자’라 불린 미래에셋그룹은 좋은 인사이트를 제공한다.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은 지난해 1월 미래에셋증권 유튜브 채널 ‘스마트머니’에 출연해 미래 세대의 노후 준비 핵심 키워드로 연금과 변액보험을 제시했다. 노후 준비는 은퇴에 즈음해서가 아니라 사회 생활을 하면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며 기본은 글로벌 분산 투자라고 강조했다.TDF 시장점유율 44%연금은 대부분 장기 투자를 전제로 한다. 연금 자산을 운용한다는 것은 소비자가 노후 생활 안정을 위해 평생에 걸쳐 차곡차곡 쌓아올린 소중한 자산을 잘 운용해 안정적인 수익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수익성과 안정성이 고려돼야 하는 데다 자산 배분 차원에서 국내뿐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 대한 투자도 필요하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2월 말 기준 업계 전체 연금펀드 수탁액은 41조 원 수준이다. 지난해에만 7조 원가량 늘었다. 이 중 미래에셋자산운용에 맡겨진 개인연금과 퇴직연금펀드 규모는 각각 4조4663억 원, 6조8653억 원이다(총 11조3316억 원). 연금펀드 시장 전체에서 점유율 27.6%를 차지한다. 미래에셋은 2011년 ‘미래에셋자산배분TDF’를 통해 선제적으로 타깃데이트펀드TDF(Target Date Fund)를 선보였다. 그러나 TDF는 상당 기간 주목받지 못하다가 2019년 처음으로 국내 운용사 중 설정액 1조 원을 넘어섰다. 타겟데이트펀드는 투자자가 은퇴 준비 자금 마련 등 특정 목표 시점(Target Date)을 가진 펀드에 투자하면 운용 기간 동안 자동으로 위험 자산과 안전 자산 비중을 조절하는 상품이다. 자율주행차처럼 목표 시점에 맞춰 포트폴리오 재조정이 이뤄진다.미래에셋 자산배분TDF와 전략배분TDF 설정액은 3월 14일 종가 기준 각각 5231억 원, 3조1416억 원으로 1년간 1조6000억 원 가까이 늘었다. 전체 수탁액은 3조6000억 원이 넘는다. 시장 가치를 반영한 순자산 가치는 4조8000억 원을 웃돌고, 시장 점유율은 44%에 달한다. 특히 단일 TDF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미래에셋전략배분TDF2025’는 설정액이 최근 1조 원을 돌파(1조129억 원)했다.현재 ‘미래에셋전략배분TDF’를 비롯해 총 14개의 TDF 라인업을 구축했다. 외국 운용사에 위탁하는 게 아니라 자체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직접 운용해 성과를 내고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지난달 14일 기준 미래에셋전략배분TDF2045와 2040은 2년 구간 수익률 업계 각각 2위(48.45%), 3위(45.70%)이고, 3년 수익률 1위(30.78%)와 2위(30.26%)를 기록하고 있다.잘 모으는 것 못지않게 잘 꺼내 써야현역 시절 열심히 모으고 굴린 퇴직금은 언젠가 꺼내 써야 한다. 최근 금융권에 또 하나의 선택지가 나타났다. 목돈 투자와 인출 시점에 특화된 ‘타깃인컴펀드(TIF)’가 그것이다. TDF 등 금융투자 상품이 대개 은퇴라는 목표 시점을 타깃으로 해 은퇴 자산을 만들어가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면 TIF는 노후에 목돈을 투자해 정기적인 소득을 얻도록 설계돼 있다. 대개 매년 원금의 3¤4%를 정기적으로 받아쓰면서 원금을 최대한 보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수익원은 주식 배당, 채권 이자, 부동산 임대 수익 등 원금을 최대한 덜 갉아먹도록 설계된 방어형 상품이다. 미래에셋평생소득TIF(Target Income Fund)는 지난 1년 동안 3000억 원 넘게 늘어나 3월 14일 기준 설정액은 5717억 원에 이른다. TIF는 현금 흐름에 중점을 둔 인컴 전략을 위해 미래에셋자산운용의 대표 펀드에 전략 배분을 통해 투자한다. 특히 국내 최초로 부동산과 인프라 자산에 투자해 임대 수익을 포함시키는 등 꾸준한 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설계됐다. 2020년 미래에셋전략배분TDF2025 및 2045, 미래에셋평생소득TIF 3종은 근로복지공단의 퇴직연금 대표 상품으로 선정됐다. 근로복지공단은 고용노동부 산하 공공기관으로 30인 이하 기업의 퇴직연금 운용관리 업무를 맡고 있다. 사업주는 확정급여형(DB)을 제외한 확정기여형(DC)과 개인형퇴직연금(IRP)을 퇴직연금 사업자에게 위탁해 운영하게 된다. ‘투자하는 연금’으로 옮겨오는 계좌들2021년 ‘투자하는 연금’ 시대가 본격화했다. 은행과 보험사에서 연금을 운용하던 연금 투자자들이 대거 증권사로 이전했다. 수익률과 다양한 상품군에 끌린 것이다. 미래에셋증권에는 지난해 1년간 5만여 명의 연금 고객이 1조4700억 원 상당의 계좌를 옮겨왔다. 지난해 12월 증권업계 최초로 연금자산 24조 원을 돌파했다. 지난해 확정기여형(DC)과 개인형퇴직연금(IRP) 적립금은 각각 1조6697억 원, 1조8588억 원 늘었다. 이는 증권업계 전체에 들어온 돈 7조9199억 원의 44.5%에 해당한다.미래에셋증권 퇴직연금 계좌는 다양한 실적배당형 상품과 ETF, 상장리츠에 투자된다. 올 상반기 개인연금에서 리츠 매매가 허용될 예정이다. 리츠는 안정적인 배당소득이 가능해 연금 투자자들의 관심이 크다. 개인연금 리츠 매매가 시작될 경우 증권업으로의 연금 ‘머니 무브’는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금융감독원이 발표한 2021년 4분기 퇴직연금 공시수익률에서 미래에셋증권은 DC 5.77%, IRP 5.91%로 퇴직연금 사업자 적립금 상위 10개사 중 DC/IRP 제도에서 7분기 연속 수익률 1위를 기록했다. 변액보험 가입자도 노후 자산 준비에 가장 관심미래에셋생명은 투자성 상품인 변액연금을 중심으로 차별화된 연금 솔루션을 제공한다. 현재 23개 생보사 중 국내 변액보험 신계약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생명보험협회 최근 공시에 따르면 2021년 1월부터 11월까지 총 2조8533억 원의 변액보험 초회보험료를 거두며 60%에 달하는 시장 점유율을 보였다. 미래에셋생명이 지난해 모집한 자사 변액보험 12만여 건의 신계약을 분석해 3월 17일 발표한 바에 따르면 이들이 가장 많이 선택한 상품은 변액연금(41%)이고, 이어 변액유니버셜(36%), 변액종신(23%) 순이었다. 변액연금은 노후 대비용 저축성 보험이고, 변액종신은 사망과 질병에 대비한 보장성 보험이다. 변액유니버설보험(VUL)은 보장성과 저축성의 혼합 상품으로 입출금이 자유롭다.사회의 중추를 이루는 4050세대, 회사원, 주부 등을 중심으로 변액보험 가입이 활성화된 반면 가입자 3명 중 1명은 MZ세대로 나타났다. 소득 창출 시기에 가계를 책임지는 계층에서 변액연금을 중심으로 가입자가 늘어나는 것을 볼 때 변액보험 가입 목적이 안정적 노후자금 마련임을 유추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사회적 책임은 ‘한국 은퇴설계 시장의 건전한 육성’생명보험협회 공시에 따르면 미래에셋생명은 2021년 12월 말 기준 3년 총자산 수익률 47.2%로 국내 23개 생명보험사 중 1위였다. 미래에셋생명 변액보험의 핵심 엔진은 MVP펀드 시리즈가 꼽힌다. 2014년 업계 최초로 탄생한 일임형 자산배분형 펀드다. 기존 변액보험이 계약자가 알아서 선택하는 소극적 운용을 한다면 MVP펀드는 보험사가 직접 관리하는 포트폴리오 전략을 구사한다.미래에셋생명은 2005년 출범 첫해에 업계 최초로 금융프라자를 열고 고객에게 펀드, 보험 등 금융 서비스를 원 스톱으로 제공했다. 또 국내 최초 퇴직연금 사업자 인가를 딴 뒤엔 생보업계 1호로 퇴직연금 계약을 체결했다. 2009년에는 ‘은퇴 설계의 명가’, 2015년 ‘행복한 은퇴 설계의 시작’이라는 슬로건을 선포하는 등 한국 은퇴 시장의 건전한 육성을 사회적 책임으로 인식하는 기업으로 발돋움하고 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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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는 낡아버린 내 지식…그래도 평생 근학(勤學)을 권합니다”[서영아의 100세 카페]

    “배우며 살았고 살아보니 늙었지만 죽을 때까지 배움은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근학(勤學·부지런히 공부하여 학문에 힘씀)은 교직자였던 진기환 씨(75)가 평생 추구해온 가치다. 1953년 6,25 전쟁 중 국민(초등)학교에 입학한 이래 70년간 공부를 이어왔고, 그 기록을 담은 자서전 ‘도연근학칠십년(陶硯勤學七十年)’을 최근 펴냈다. 도연(陶硯)은 그가 좋아하는 도연명의 이름에서 따온 아호다.○ “도연 진기환은 열심히 살았다!”실업계 고등학교에서 34년간 역사 교사와 교장까지 역임한 뒤 2009년 2월 정년퇴직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14년간 배우고 42년간 가르치며 머물렀던 학교라는 울타리를 이때 처음 떠났다. 하지만 그로서는 별반 달라질 게 없었다. 중국 고전 번역이라는 평생의 과업이 눈앞에 있었다. 재직 중 중국 고전 역서를 15권 출간했고 퇴직할 때 인생목표를 ‘내 키만큼 내 책을(等身書)’ 펴낸다는 것으로 삼았다. 그리고 정년퇴직 후 13년 만에 자신의 키(170cm)를 훌쩍 넘는 37종 81권을 출간해 인생 목표를 달성했다. 자서전에서 그는 “이 책은 ‘도연 진기환은 열심히 살았다’는 기록”이라며 “이름없는 민중의 기록에 불과하지만 이 세상에 쓸모없는 삶은 없다”고 썼다. ○ 운명과의 타협, 끊임없는 개선 모색충남 홍성군 넉넉지 않은 농부 집안의 6남2녀 중 장남. 늘 그를 따라다닌 이 현실은 진로에도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가정 형편 때문에 원하던 약대나 화학전공 대신 2년제 교대에 진학하는 것으로 아버지와 타협했다. 고교 2학년때부터 화학실험실 조수로 일하며 화학에 빠져들었던 그였지만 “동생들도 최소한 중학교까지는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다.“아버지로서는 농사일에서 2년이나 제외해주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때가 1965년인데, 전교에서 날고 기던 아이들도 집안형편이 어려우면 대학진학은 언감생심, ’5급 을류‘(현재의 9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는 시절이었어요. 아버지에게 원망은 없었지만 진로를 갑자기 전환하다보니 혼란스러웠습니다. 교대에서 뭘 배우는지도 전혀 몰라 입학 뒤에도 애를 먹었지요. 상실감에 빠져 흘려보낸 시기였지요.” 그는 주어진 운명에 순응했지만 가능하다면 자신의 노력으로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가려고 애썼다. 초등학교 교사로 임용된 지 1년만에 군에 입대했고 제대 뒤 2년만에 중고교 교사가 되기 위한 준교사 고시검정에 합격해 고등학교 역사교사로 부임했다. 그 몇 년 뒤인 1975년에는 서울 순위고사에 합격해 대동상업고등학교(현 대동세무고등학교)에 부임해 정년퇴직까지 봉직했다. ○ 모수자천‘모수자천(毛遂自薦)’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우화다. 전국시대 조나라 평원군에게 식객 모수가 사신의 일행으로 끼워달라고 자신을 천거했고, 다른 사람의 비웃음을 샀지만 정작 큰일을 해냈다는 일화다. 진 씨가 자신을 취재해달라며 보내온 메일 제목이 모수자천이었다. 마악 나왔다는 자서전을 받아 뒤적이는 사이 뭔가 숙연한 기분이 든다. 학창시절 성적표에서부터 그가 낸 책들의 머리말까지, 정직하고도 시시콜콜한 기록이 빼곡한 책갈피에서 한인생의 무게가 오롯이 전해져왔다. 행간에 숨어있을 사연들도 헤아려졌다. 예컨대 결혼 이후 1987년 현재의 25평 아파트에 안착하기까지 조금씩 넓혀가며 이사다닌 집의 주소와 평수, 가격이 기록돼 있다. 초중고 생활기록부나 성적표까지 실물이 나온다. 자서전 앞부분에는 대략 10년마다 찍은 증명사진들이 실렸다. 고 3때 입학원서 사진, 군대 제대말년, 결혼식 직후….“10년 단위로 보면 사람이 이렇게 늙어가는구나 하는 게 보이죠. 저는 역사선생입니다. 역사는 기록이죠. 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으로서 기록을 남기는 것은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기록을 남기는 습관은 이어졌다. 교장으로 재직한 5년간 근무일지를 작성해 3권의 책으로 제본했다. 아들 결혼에 ‘혼사기’를 썼고, 자신의 여행기록을 ’도연유기(陶硯遊記)‘로 남겼다, 손자가 태어난 이후부터 시작한 ‘조손일기’를 16년째 쓰고 있다.‘혼사기’에는 며느리 후보를 처음 만난 날부터 결혼준비과정의 모든 기록이 담겼는데, 5부를 제본해 아들내외에도 주고 사돈댁에도 보냈다고 한다. 훗날 사람들에게는 이 시대 한국의 보통 가정에서 혼사를 어떻게 치렀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민속사료가 될 거라고 믿는다. ○ 낡은 것의 슬픔개인적으로 그의 자서전에서 눈에 확 띤 대목이 있다. ‘내 낡은 지식, 이제는 쓰레기’라는 글이었다. 내 책은 이제 한 시대의 슬픈 잔영이다. 내 책은 곧 도서관 수장고 속에 처박히거나 고물상에 폐지로 팔려 파쇄기에 들어갈 것이라고 그는 보고 있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요.“세상은 새로운 것들로 넘쳐나고 학문도 그렇습니다. 제 작업은 종이책을 뒤적거리고 사전을 펼치며 만들어냅니다. 주제도 책쓰는 방법도 옛날식이고 주로 옛날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읽지요. 지식에도 수명이란 게 있는 법인데 제 시대는 이제 저문 것이죠. 책을 군말없이 내주는 출판사도 고맙긴 하지만 가끔 보기에 답답하기도 합니다.” 동양고전 전문 출판사인 명문당은 1990년 그의 첫 책 유림외사 3권을 내 준 이래 지금까지 그의 책 70% 이상을 출간해줬다. 그는 자신의 책은 찍을수록 손해일 거라고 보고 있다.“제 책은 대개 처음에 500부 찍어서 2~3년에 걸쳐 팔아요. 잘 팔리는 책에서 돈 벌어 이런 인기 없는 책 찍어주는 거겠지요. 많지는 않아도 원고료도 줍니다. 제 막걸리값 정도는 되니까요. 하하.” -쓰레기가 될 거라 생각하면서도 굳이 애써 작업하는 심경은 어떤 걸까요.“서글프죠. 몇 년 전부터 느꼈어요. 인공지능(AI)에 대한 신문칼럼을 전혀 이해를 못하겠더군요. 이미 나는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데도 장애를 느끼는구나. 내 지식은 쓰레기가 될 수밖에 없구나…. 세상은 변하는데 따라가지 못할 것 같은, 밀려나고 있다는 느낌이죠. 애써 일한 것들이 쓰레기가 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거니까. 그냥 열심히 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지요.”○ 내 70년 공부는 뭐였을까…그래도 열심히 했으니 족하다그는 가르치는 데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배우려 했다. 재직 중에 국역연수원(현 고전국역원)과 방송통신대 중국어과, 교원대 대학원에서 도합 10년 간 학업을 병행했다. 어려운 주머니 사정 때문에 학비 없이 공부할 길을 찾아다닌 결과였다. 빠듯한 교사 월급으로 집을 장만하고 아들 둘을 키우고 동생들 학비도 일부 지원해야 했다. 어쩌면 퇴직 후는 인생에서 가장 여유로운 시기였다.“연금이 나오고 자식들도 장성했으니 돈쓸 일도 사라졌죠. 하지만 저는 62세 퇴직 이후 공부와 번역을 쉰 날이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배움은 그만둘 수 없어요.” 번역서들은 중국의 문사철(文史哲)에 집중됐다. 예컨대 역사서로는 정사 한서(漢書·전 15권), 후한서(전 10권), 정사 삼국지(전 6권), 십팔사략(전 3권) 등이, 문학으로는 당시대관(唐詩大觀· 전 7권), 당시 300수(전 3권) 등이, 철학서로는 공자가어(전 2권), 안씨가훈(전 2권), 논어명언 300선 등이 있다. ‘국내최초 역서’라는 타이틀이 붙은 것이 적지 않다. -앞으로 계획은.“지금 ‘수당(隋唐)연의’라는 청나라때 소설을 번역 중인데 500~600쪽 5~6권 분량입니다. 이걸 마지막 작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퇴직한 뒤 10여 년, 남보다 적게 일하지 않았고, 이제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별로 아쉬운 게 없어요.” -100세 시대인데, 앞으로 20여 년은 더 사셔야 할 텐데요.“공자는 73세, 맹자는 84세에 돌아가셨으니 당시에 대단히 장수한 겁니다. 전 올해 우리나이로 76이니 공자님보다 더 살았어요. 평생 나름대로 근학했으니 언제 염라대왕을 만난다 해도 후회는 없습니다. 맹자처럼 84세까지 산다면 좋겠지만, 글쎄요. 제 건강이 그렇게 될지 모르겠네요.”○ ’평생근학‘을 권함 그가 ‘모수자천’이라며 취재를 원한 이유는 우리나라 교사들에게 ‘학문을 해야 한다, 적어도 공부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전하고 싶어서라고 했다.“흐르지 않는 물은 곧 썩고 칼은 갈지 않으면 녹이 슬죠. 교사가 공부하지 않으면 교사의 본분을 다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일군 것들이 헛된 것으로 돌아갈 운명임을 잘 알고 있는 그가, 그럼에도 후배들에게 평생 근학을 권하고 있다. 결국 이게 인생 아닐까.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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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퇴직해도 공부-번역… 내 지식, 이젠 낡았지만 평생 근학 권합니다”[서영아의 100세 카페]

    “배우며 살았고 살아보니 늙었지만 죽을 때까지 배움은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근학(勤學·부지런히 공부하여 학문에 힘씀)은 교직자였던 진기환 씨(75·사진)가 평생 추구해 온 가치다. 1953년 전쟁 중 국민(초등)학교에 입학한 이래 70년간 이어온 공부 기록을 담은 자서전 ‘도연근학칠십년(陶硯勤學七十年)’을 최근 냈다. 도연(陶硯)은 도연명의 이름에서 따온 아호다.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34년간 역사 교사에 이어 교장까지 지낸 뒤 2009년 2월 정년퇴직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14년간 배우고 42년간 가르치며 머물렀던 학교를 이때 처음 떠났다. 하지만 삶은 별반 달라질 게 없었다. 중국 고전 번역이라는 평생 과업이 눈앞에 있었다. 재직 중 중국 고전 역서를 15권 출간했고 퇴직할 때 인생 목표를 ‘내 키만큼 내 책을(等身書)’ 펴내는 것으로 삼았다. 그리고 정년퇴직 후 13년 만에 자신의 키(170cm)를 훌쩍 넘는 37종 81권을 출간해 인생 목표를 달성했다. 자서전에서 그는 “이 책은 ‘도연 진기환은 열심히 살았다’는 기록”이라며 “이름 없는 민중의 기록에 불과하지만 이 세상에 쓸모없는 삶은 없다”고 썼다.○운명과의 타협, 끊임없는 개선 모색 충남 홍성에서 넉넉지 않은 농부 집안의 6남 2녀 중 장남. 늘 그를 따라다닌 이 현실은 진로에도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가정 형편 때문에 원하던 약대나 화학 전공 대신 2년제 교대에 가기로 타협했다. 고교 2학년 때부터 실험실 조수로 일하며 화학에 빠져들었던 그였지만 “동생들도 중학교까지는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다. “아버지로서는 농사일에서 2년이나 빼주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때가 1965년인데, 전교에서 날고 기던 아이들도 집안 형편이 어려우면 ‘5급 을류’(현재의 9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는 시절이었어요. 원망은 없었지만 진로를 갑자기 전환하다 보니 혼란스러웠습니다. 교대에서 뭘 배우는지도 전혀 몰라 입학 뒤에도 애를 먹었지요.” 그는 주어진 운명에 순응했지만 가능하다면 자신의 노력으로 조금이라도 개선하려 애썼다. 초등학교 교사로 임용된 지 1년 만에 군에 입대했고 제대 뒤 2년 만에 중고교 교사가 되기 위한 준교사 고시검정에 합격해 고등학교 역사 교사로 부임했다. 그 몇 년 뒤인 1975년에는 서울 순위고사에 합격해 대동상업고등학교(현 대동세무고등학교)에 부임해 정년퇴직까지 봉직했다.○모수자천 ‘모수자천(毛遂自薦)’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우화다. 전국시대 조나라 평원군에게 식객 모수가 사신의 일행으로 끼워 달라고 자신을 천거했고, 남들의 비웃음을 샀지만 정작 큰일을 해냈다는 일화다. 진 씨가 자신을 취재해 달라며 보내온 메일 제목이 모수자천이었다. 막 나왔다는 자서전을 받아 뒤적이는 사이 뭔가 숙연한 기분이 든다. 학창 시절 성적표에서부터 그가 낸 책들의 머리말까지, 정직하고도 시시콜콜한 기록이 빼곡한 책갈피에서 한 인생의 무게가 오롯이 전해져 왔다. 행간에 숨어 있을 사연들도 헤아려졌다. 예컨대 결혼 이후 1987년 현재의 25평 아파트에 안착하기까지 조금씩 넓혀가며 이사 다닌 집의 주소와 평수, 가격이 기록돼 있다. 초중고교 생활기록부나 성적표까지 실물이 나온다. 자서전 앞부분에는 10년마다 찍은 그의 증명사진들이 실렸다. 고3 때, 군대 제대 말년, 결혼식 직후…. “저는 역사 선생입니다. 역사는 기록이죠. 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으로서 기록을 남기는 것은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기록을 남기는 습관은 이어졌다. 교장으로 재직한 5년간 근무일지를 작성해 3권의 책으로 제본했다. 아들 결혼에 ‘혼사기’를 썼고, 자신의 여행 기록을 ‘도연유기(陶硯遊記)’로 남겼다. 손자가 태어난 이후부터 시작한 ‘조손일기’를 16년째 쓰고 있다. 개인적으로 그의 자서전에서 눈에 확 띈 대목이 있다. ‘내 낡은 지식, 이제는 쓰레기’라는 글이었다. ‘내 책은 이제 한 시대의 슬픈 잔영이다. 내 책은 곧 도서관 수장고 속에 처박히거나 고물상에 폐지로 팔려 파쇄기에 들어갈 것’이라고 그는 보고 있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요. “세상은 새로운 것들로 넘쳐나고 학문도 그렇습니다. 제 작업은 주제도, 책 쓰는 방법도 옛날식이고 주로 옛날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내 책을 읽지요. 지식에도 수명이란 게 있는 법인데 제 시대는 이제 저문 것이죠. 책을 군말 없이 내주는 출판사도 고맙긴 하지만 가끔 답답하기도 합니다.” 동양 고전 전문 출판사인 명문당은 1990년 그의 첫 책 유림외사 3권을 내준 이래 지금까지 그의 책 70% 이상을 출간해줬다. 그는 자신의 책은 찍을수록 손해일 거라고 보고 있다. ―쓰레기가 될 거라 생각하면서도 굳이 애써 작업하는 심경은 어떤 걸까요. “서글프죠. 몇 년 전부터 느꼈어요. 인공지능(AI)에 대한 신문 칼럼을 전혀 이해를 못 하겠더군요. 이미 나는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데도 장애를 느끼는구나. 내 지식은 쓰레기가 될 수밖에 없구나…. 애써 일한 것들이 쓰레기가 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거니까. 어쩔 수 없지요.”○ 내 70년 공부는 뭐였을까…그래도 열심히 했으니 족하다 그는 가르치는 데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배우려 했다. 재직 중에 국역연수원(현 한국고전번역원)과 방송통신대 중국어과, 교원대 대학원에서 도합 10년간 학업을 병행했다. 어려운 주머니 사정 때문에 학비 없이 공부할 길을 찾아다닌 결과였다. 교사 월급으로 집을 장만하고 아들 둘을 키우고 동생들 학비도 일부 지원해야 했다. 어쩌면 퇴직 후는 인생에서 가장 여유로운 시기였다. “연금이 있고 자식들도 장성했으니 돈 쓸 일도 사라졌죠. 하지만 저는 62세 퇴직 이후 공부와 번역을 쉰 날이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배움은 그만둘 수 없어요.” 지금까지 펴낸 번역서들은 중국의 문사철(文史哲)에 집중됐다. 예컨대 역사서로는 정사 한서(漢書·전 15권), 후한서(전 10권), 정사 삼국지(전 6권), 십팔사략(전 3권) 등이, 문학으로는 당시대관(唐詩大觀·전 7권), 당시 300수(전 3권) 등이, 철학서로는 공자가어(전 2권), 안씨가훈(전 2권), 논어명언 300선 등이 있다. ‘국내 최초 번역서’라는 타이틀이 붙은 것이 적지 않다. ―앞으로 계획은…. “지금 ‘수당(隋唐)연의’라는 청나라 때 소설을 번역 중인데 500∼600쪽 5, 6권 분량입니다. 이걸 마지막 작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퇴직한 뒤 10여 년, 남보다 적게 일하지 않았고, 이제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별로 아쉬운 게 없어요.” ―100세 시대인데, 앞으로 20여 년은 더 사셔야 할 텐데요. “공자는 73세, 맹자는 84세에 돌아가셨으니 당시에 대단히 장수한 겁니다. 전 올해 우리 나이로 76세이니 공자님보다 더 살았어요. 평생 나름대로 근학했으니 언제 염라대왕을 만난다 해도 후회는 없습니다. 맹자처럼 84세까지 산다면 좋겠지만, 글쎄요. 제 건강이 그렇게 될지 모르겠네요.”○ ‘평생 근학’을 권함 그가 취재를 원한 이유는 우리나라 교사들에게 ‘학문을 해야 한다, 적어도 공부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전하고 싶어서라고 했다. “흐르지 않는 물은 곧 썩고 칼은 갈지 않으면 녹이 슬죠. 교사가 공부하지 않으면 교사의 본분을 다할 수 없습니다.”자신이 일군 것들이 헛된 것으로 돌아갈 운명임을 잘 알고 있는 그가, 그럼에도 후배들에게 평생 근학을 권하고 있다. 결국 이게 인생 아닐까.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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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향땐 稅감면 등 ‘특혜세트’… 베이비부머 인생 2막 무대로[서영아의 100세 카페]

    2020년 한국의 인구구조는 두 가지 분기점을 맞았다. 저출산 고령화로 인구의 자연감소가 시작됐고 수도권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어섰다. 2020년 한 해 동안 27만 명이 태어나고 30만 명이 사망했다. 같은 해 베이비붐 세대의 맏형인 1955년생 68만 명이 고령자로 편입했다. 이후 1974년생까지 20년간 1600여만 명이 순차적으로 고령자 대열에 들어가게 된다. 지방은 텅텅 비어가는데 인구 절반이 국토의 12.6% 면적 수도권에 몰려 바글대는 통에 집값은 올라가고 경쟁은 격화됐다. 문제는 수도권 집중이 저출산과 지방소멸을 더욱 촉진시킨다는 점이다. 세계 최저 수준인 한국의 합계특수출생률은 2020년 0.84명을 찍은 데 이어 2021년에는 0.81명(잠정)으로 떨어졌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대한민국은 지속가능할까.○턴 어라운드(Turn Around), 고향으로 돌아가자! 고향을 떠나 서울에 뿌리를 내린 재경 지방향우회가 문제 해결에 발 벗고 나섰다. 은퇴세대의 ‘턴 어라운드(Turn Around)’, 즉 귀향을 통해 고향의 기사회생을 도모해보자는 취지다. 재경 7개 도와 4개 광역시 향우회를 대표해 2019년 설립된 사단법인 대한민국시도민회연합(공동 대표회장 강보영 최대규)이 지난해 지방소멸의 국가적 위기대응을 위한 특별법안 초안을 내놓았다. 이들은 3년간 100여 차례 회의를 열고 전문가 자문을 거쳐 이 초안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강보영 공동대표 회장(80)은 “다양한 시도민 행사에 참석해보면 고향보다 서울에서 더 많이 모인다. 다른 지역도 사정은 마찬가지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고향이 비어간다면 머잖아 대한민국은 공멸할 수밖에 없다. 민간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동대표인 강 회장은 재경 대구경북시도민회 회장이고 최 회장은 재경 광주전남향우회 회장. 지방 소멸에 대한 위기감은 영호남이 한마음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특별법안은 수도권 인구와 기업의 지방 전입에 대해 지금까지 해온 것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지원과 특례를 담고 있다. 관건은 ‘사람이 움직이게 한다’는 것. 이 초안에 기초해 지난해 11월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추경호 국민의힘 의원이 각각 특별법안을 대표 발의해 국회에 계류 중이다. 초안이 같으니 내용도 유사하다.○지방소멸대응 특별법안에 담긴 내용 특별법안은 정부의 지방소멸대응 마스터플랜 책정을 의무화하고 대통령 소속 지방소멸대응특위를 설치할 것을 규정한다. 또 지방소멸위기 특별지역을 지정하고 이곳으로 이주하는 개인과 기업에 각종 특혜를 준다는 내용을 담았다. 예컨대 특별지역에 전입하는 주민에게는 양도소득세 취득세 상속세 증여세 감면 혜택이 주어진다. 전입하는 기업에도 법인세 취득세를 감면하고, 기업 상속 요건도 대폭 완화한다. 건강보험료 전부 또는 일부를 지원한다거나 관내 문화 관광시설 입장료, 골프장 입장료를 낮춰주는 등 풍요로운 문화생활을 위한 지원책도 포함됐다. 또 노년층의 지방살이에 가장 큰 걸림돌인 의료문제 해결을 위해 지역 의료 인프라에 대한 폭넓은 지원책도 담겼다. 법안 초안의 산파 역할을 한 강 회장은 “관건은 실효성”이라고 강조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의 혜택이 있어야 한다. 지방 이전 결심이 가능할 정도가 되려면 최소한 20∼30년 이상 자신의 삶을 그려볼 수 있어야 한다.” 지원이 너무 파격적이면 역차별 논란이 있지는 않을까. “그동안 정부와 지자체가 출산장려금, 정착지원금, 농어촌 살리기 등의 명목으로 엄청난 예산을 투입했지만 인구절벽은 오히려 가속화하고 있다. 지방이전 결심이 가능할 정도로 혜택이 있어야 한다. 고향을 지키러 가는 선택에 어느 정도 인센티브를 줘도 되지 않을까.” ○은퇴 베이비부머가 지방 살릴 주인공 초안을 만들면서 이들은 베이비부머와 젊은층의 공간 분업론을 주창한 마강래 중앙대 교수(도시계획부동산학)에게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마 교수는 2020년 저서 ‘베이비부머가 떠나야 모두가 산다’에서 지방을 살릴 주역으로 은퇴를 맞는 베이비부머에 주목했다. 1차와 2차 베이비붐 세대를 합한 1955∼1974년생은 대략 1680여만 명, 그 절반이 수도권에 살고 있고 그중 절반은 산업화와 함께 이촌향도(離村向都)한 지방 출신이다. 약 60% 이상이 자기 주택을 갖고 있다. 이들이 은퇴와 함께 지방으로 내려가 제2의 인생을 꾸린다면 수도권 과밀을 해소하고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지방도시의 쇠퇴를 막고 국토균형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로 인해 지역 생활환경이 좋아지면 젊은 인구를 끌어들일 수도 있고 이들을 정기적으로 찾는 ‘관계인구’도 늘어난다. 베이비부머들에게도 귀향은 새로운 기회일 수 있다. 지방에는 중장년이나 노년층이 인생 2막을 시도할 일자리가 상대적으로 많고 조금 덜 벌더라도 생활비를 아낄 수 있다. 도시에서 얻지 못할 친구와 동료들과 함께 여가를 즐기고 사회에 기여하며 늙어갈 수 있는 노후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문제는 귀향을 실천에 옮기는 베이비부머가 얼마나 되느냐다. 마 교수에 따르면 베이비부머들은 다양한 조사에서 적게는 30%, 많게는 50∼60%까지 귀향 의사를 밝히고 있다. 현재 수도권에 사는 지방 출신 베이비부머 440만 명 중 10%만 이동해도 수도권에서 44만 명이 빠져나가고 이들이 살던 집은 매매나 임대시장에 나오게 된다. 지방 출신이 대도시에서 살다가 근처 중소도시로 가는 J턴, 대도시 토박이가 연고 없는 지방 중소도시로 가는 I턴 등을 합치면 지방 이주 인구는 더 늘어날 수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국토 균형발전 정책에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갔지만 수도권→지방 인구이동은 미미했다. 예컨대 세종시와 10개 혁신도시로의 공공기관 이전이 가장 활발했던 2013∼2016년 ‘수도권→지방’의 순인구 이동은 5만8000명 정도에 불과했다. ○민간이 나선 이유 “이러다가 다 죽어” 강 회장은 지방소멸 대응법안 작성에 적극 나선 이유에 대해 “개인과 기업 등 수요자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지는지를 알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지방소멸 문제는 분야별 칸막이가 있는 국회나 정부가 융합적 관점에서 법안을 마련하기는 어렵다는 점에 착목했다. 수요자는 이런 제약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초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28일에는 법안의 국회발의 보고회를 열어 여야 대선후보들로부터 법안이 조속히 통과될 수 있도록 힘쓰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물론 정부도 손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간 국가균형발전, 지방자치분권을 내세운 정책을 펼쳐왔지만 가시적 성과를 얻는 데 미흡했다. 행정안전부는 지난해 10월 전국 89곳(기초단체)을 인구감소지역으로 지정 고시하고 올해부터 10년간 10조 원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13일 윤석열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산하에 지역균형발전 특별위원회(위원장 김병준)가 설치돼 향후 기대를 모으기도 한다. 그럼에도 강 회장은 걱정이 많다. 시간이 많지 않고, 국회 통과 과정에서 법안이 손질되면서 실효성을 잃을 가능성에 대한 걱정도 크다. “우선은 국회 통과가 급선무다. 가급적 현재의 상임위가 흩어지기 전인 4월 임시국회에서는 진전이 있기를 기대한다. 아니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니까. 이러다가 다 죽는다.” 법안 발의자이자 국회 행정안전위원장이기도 한 서영교 의원은 “4월 임시국회가 끝나기 전에 어떻게든 처리하려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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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0세까진 인생여행 워밍업… 100세에도 캐리어 끌고 싶어요”[서영아의 100세 카페]

    “살아보니 인생은 60부터였습니다.” 72세 여행작가 김원희 씨는 이렇게 잘라 말한다. 60세부터 ‘진짜 내 인생’을 살게 됐다는 것. 시어머니와 남편, 아들 딸 가족을 건사하며 컴퓨터 강사 일을 이어온 그가 ‘해방’을 선언한 계기는 아들의 결혼이었다. 서른 넘기고도 짝을 찾지 못했던 아들이 예비신부를 데려온 날, 그는 기쁨에 차 “난 이제 여행이나 다니겠다”고 선언했다. 늦깎이 작가의 인생 2막 스토리가 궁금해 지난달 28일 부산을 찾았다. 그의 표정에서는 생기가 넘쳐 첫 저서에 쓴 ‘할매’라는 호칭이 민망할 정도였다.○60부터 시작한 나만의 시간 손주까지 본 60세 할매가 넓은 세상 탐험에 나섰다. 50대 초반에 친구들과 난생처음 떠났던 유럽 패키지여행이 주마간산으로 끝나 너무도 아쉬웠다. 한곳에 오래 머물며 그 지역을 천천히 체험하는 자유여행을 계획했다. 출발 전 자료를 뒤지고 숙소와 티켓 등도 일일이 예약했다. 그런 식으로 10여 년간 유럽 20여 개국을 누볐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모스크바에도 다녀왔다. ‘맑고맑은’이란 필명으로 여행기를 블로그에 올렸다. 12년간 쌓인 콘텐츠는 4일 현재 2494개. 5000명이 넘는 이웃이 있다. 서툰 영어로 해프닝을 겪고 현지 실정에 어두워 실수를 하는 좌충우돌 여행기에는 후배들을 위한 깨알 정보와 노하우가 가득했다. “(팁 문화가 발달한) 유럽 식당에서 밥값 24유로를 계산하려 50유로 지폐를 내밀었다. 웨이터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맙다고 인사하는 순간 ‘아차’ 했지만 이미 늦었다.” 블로그 평판이 좋다 보니 출판사와 연결돼 2017년 67세에 첫 책 ‘할매는 파리여행으로 부재중’(봄빛서원)을 냈다. 인생 2막에 ‘여행작가’ 타이틀이 붙었다. 2020년에 낸 ‘진짜 멋진 할머니가 되어버렸지 뭐야’(달)는 최근 11쇄에 들어갔고 1월 대만의 출판사로부터 번역출판 제안이 들어왔다. 지난해 11월 말에는 국내 곳곳에 산재한 35개의 간이역을 찾아다닌 기록 ‘나는 간이역입니다’(봄빛서원)를 냈다. ―가족은 잘 이해해 주시나요. “남편에게 입버릇처럼 ‘아들 장가만 보내면 난 여행 다닐 거야’라고 말해왔어요. 그렇다고 가정에서 손떼고 여행만 다니는 것도 아니에요. 길어야 한 달이고 1년에 한두 번 정도니까요.” 김 씨와 달리 남편은 게이트볼에 푹 빠져 있다. 출근하듯 나가는 게이트볼 팀에서 동네 할머니들의 리더 역할을 한다고. ―해외여행 다닐 만큼 경제적으로 여유 있냐는 말을 많이 들으셨을 텐데…. “그런 오해를 많이 받았죠. 그런데 자유여행은 미리 준비를 잘하면 절약할 수 있어요. 제 식으로 하면 유럽에서 한 달 여행에 300만 원 정도 듭니다. 그리고 제가 끊임없이 일을 하잖아요. 지금도 주 3일 노인복지관에서 컴퓨터 강의를 합니다. 전에는 구청 강의도 했었고 10여 년간 중증장애인 방문 강사일도 했어요. 그렇게 모은 돈을 오롯이 자신에게 투자하는 거죠.” ―코로나19 탓에 해외여행길이 막혔는데요. “그 대신 국내 간이역들을 찾아다녔습니다. 2016년에 1년간 코레일 시민명예기자로 일했는데 그때 사라져가는 간이역의 매력에 빠졌어요. 오래 묵은 동네, 그곳에 남겨진 간이역의 과거를 공부하는 게 너무 재밌었어요. 활동 끝내고서도 혼자 여행을 다녔죠.” ―책을 보니 하루에 한두 명 찾는 역, 아예 인적이 끊어진 역이 많더군요. “이런 역들은 무궁화호를 타야 갈 수 있어요. 운임이 싼 데다 경로할인까지 되니 나이 들어 여행하기 좋습니다. 시대의 변화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이런 역들은 초라하지만 그 모진 세월을 견뎌낸 힘도 느껴지죠. 그런 간이역이나 무궁화호가 마치 나를 닮은 것 같아서 더욱 정이 가더군요.” 그는 나이 들어 여행하는 것은 어쩌면 아직은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날 때는 아니라는 것을, 지금의 내 시간을 확인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할머니 작가의 글은 감수성이 남달라 포근하게 느껴집니다. “책 낼 때 나이 든 분들이 읽어줄 것을 기대했는데, 출간한 뒤 딸이 ‘엄마 책은 노인보다 젊은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하더군요. ‘100세 시대라는데, 나이 들어 뭐 할까 걱정인데 나도 충분히 할 게 있겠구나’라며 좋아한다는 거예요.” 문득 몇 년 전부터 일본에서 ‘아라한’(around hundred)이라 하여 100세 전후 할머니 작가들이 조명 받는 현상이 떠올랐다. 그들만의 경험과 감수성, 감각이 묻어나는 책들이 밀리언셀러가 됐는데, 장수시대 롤모델을 찾는 50∼70대 여성들이 열심히 사서 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출판사들은 “80대도 젊다”며 90대 이상 신진 작가를 백방으로 수소문한다. 문화도 수요와 공급이 상호작용하며 발전한다. ○‘나이 들수록 새로운 일을 벌여보라’ “나이 들수록 뭔가 새로운 일을 벌여야 해요. 저로서는 몇 년 새 책을 3권 냈으니 나름대로 새로운 일을 벌인 셈인데, 소소하지만 돈도 벌고 활력도 얻을 수 있었어요. 노년은 할 수 있느냐, 못하느냐를 가르는 나이가 아니라 내 마음, 내 의지가 관건인 시기인 거죠. 적어도 재미있게 시간은 보낼 수 있어야죠.” ―‘시간을 보낸다’고 표현하시네요. 나이 들면 시간이 버겁고 때워야 할 대상처럼 되는 걸까요. “현실은 현실이죠. 전 아직 바쁘게 지내지만, 뭘 할지 몰라 하는 제 나이대 분들도 많아요. 6년 전 돌아가신 시어머니도 80대 들어서면서 부쩍 ‘사는 게 지루하다’고 하시더군요. 늘어나는 수명을 어쩔 수 없다면 기왕이면 보람되고 생산적인 일을 하며 그 시간들을 덜 지루하게, 스스로가 충만하게 보내는 게 좋지 않을까요. 흔히 노후를 말하면 사람들이 경제만 생각하는데 사실 나이 먹으면 돈 쓸 일이 많지 않아요. 병원비도 한국의 의료제도가 생각보다 잘돼 있고요. 저는 경제보다 시간이 문제인 것 같아요. 고독, 무료함, 이런 데서 우울증 불면증도 생기죠.”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살아보니 60∼75세가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라고 했는데…. “동감합니다. 그 전에는 결혼이건 아이건 누군가를 책임져줘야 하는 시간이었다면 이제 자기만의 시간, 오롯이 나를 책임져야 할 시간이 온 거죠. 자기를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지요. 아직 60대가 안 되신 분들은 지금 워밍업이라고 생각하시고 너무 힘 빼지는 마세요. 무슨 일이건 연습처럼 가볍고 즐겁게 하세요.” ―60세쯤 은퇴하는 사람들에게 지금 얘기가 위로가 될까요. “세상도, 생각도 자꾸 바뀌는 것 같아요. 이제는 100세까지 산다는 것을 전제로 인생설계를 해야 하지요. 그러니 60대 이후로도 무슨 일이건 하셔야 할 겁니다. 전 오히려 젊은이들에게 쉬어가면서 일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너무 빡빡하게 열심히 살지 말라고. 100세까지 살아야 하는데 너무 지치면 안 되는 거죠. 전 30대 후반인 제 딸에게도 쉬면서 하라고 얘기해요. 이제 자식들에게 ‘열심히, 부지런히‘를 강요하면 안 됩니다.” ○언젠가는… ‘할매는 천국으로 여행 중’ ‘100세에도 지팡이가 아닌 캐리어를 끌고 싶다’는 그의 요즘 블로그 문패는 ‘할매는 항상 부재중’. 그는 언젠가 세상에서의 마지막 시간이 왔음을 직감하는 날, ‘할매는 천국으로 여행 중’이라는 문패를 내걸 생각이라고 한다. 그러면 아이들이 많이 슬퍼하지 않을 것 같다고. “여느 때처럼 엄마는 멋진 곳을 여행 중이구나 하지 않을까요. 이런 생각을 하니 재미있더라고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지는 것 같고요. 사는 것도 여행이요 떠나는 것도 여행이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갑니다.”부산=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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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건은 버리고 자신을 찾는다… 5060부터 홀가분한 여행 준비[서영아의 100세 카페]

    노인은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한다. 살아온 세월만큼 많은 물건들이 생기고 그것들마다 켜켜이 사연이, 추억이 쌓이기 때문이다. 전쟁과 가난 등 결핍의 시대를 겪어온 세대일수록 물건 버리는 것을 죄악시하기까지 한다. 장수시대에는 물건도 장수하기 쉬운 것이다. 초고령사회 일본에서는 ‘부모님의 집 정리’가 화두가 되고 있다. 대개 80∼100대 부모가 남긴 집의 정리를 50∼70대 자녀들이 맡게 되는데, 꽉꽉 들어찬 물건들에 경악하고 부모의 손때 묻은 물건들을 함부로 버릴 수 없어 난감해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자신과 가족을 위한 생전정리 지난해 출간된 ‘부모님의 집 정리’(즐거운상상)에는 일본의 50, 60대 자녀 15명이 고령에 접어든, 혹은 이미 세상을 떠난 부모님의 집을 수개월에서 수년에 걸쳐 정리한 경험담이 담겨 있다. 치매가 진행 중인 부모님을 그룹홈(양로원)에 모신 뒤 월셋집인데도 5년이 걸려서야 집 정리를 완수한 50대 딸이 있는가 하면, 어머니 생전에 함께 정리를 시도했지만 물건을 버리면 도로 주워 오는 어머니의 완고함을 이기지 못하고 포기했던 딸도 있다. 물건으로 꽉 차 창문도 열 수 없게 된 집에서 생활하던 80대 노모가 입원한 틈을 타 정리한 딸의 얘기도 있다. 한결 깔끔해진 집에서 노모는 가끔 없어진 물건을 찾으며 불평을 하면서도 편안한 표정이라고 한다. 80대부터 “쓸 사람이 있으면 주고 싶다”며 물건들을 정리했던 할머니가 99세에 돌아가신 뒤, 최소한의 물건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며 감탄하는 며느리 사례도 있다. 누군가의 자식이지만 누군가의 부모이기도 한 이들은 훗날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미리미리 물건을 줄이겠다고 다짐한다.○사망이 많은 일본의 ‘종활’ 붐 매년 약 130만 명이 사망하는 ‘다사(多死)사회’로 접어든 일본에서는 10여 년 전부터 삶의 마무리를 스스로 준비하는 종활(終活·슈카쓰)이 확산되고 있다.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단사리(斷捨離·끊고 버리고 떠난다는 뜻)’라는 말도 유행했다. 자신이 마주한 생활 속에서 진정 필요한 것만을 선택하는 일을 말한다. 남은 가족의 부담을 줄이고 자신의 쾌적한 삶을 위해 노인 스스로가 미리미리 자신의 물건과 관계를 정리해 가는 것이다. 종활은 ‘엔딩노트’ 작성에서부터 유언장 작성, 상속과 증여, 기부에 대한 준비, 주거와 물건 정리, 장례 절차와 방식의 결정 등 여러 활동이 망라된다. 생전에 물건을 정리하는 노인이 늘면서 한국의 당근마켓이나 중고나라와 유사한 중고거래 플랫폼 ‘메루카리’의 60대 이상 이용자도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대형 유통체인이 전국을 돌며 ‘종활 페어’를 열기도 한다. 2018년 도쿄 인근에서 열린 종활 페어를 취재했는데 입관 체험부터 장묘 시설과 장례용품 소개, 집 정리, 상속, 후견인 지정 등의 법적 문제까지 생의 마무리를 위한 모든 정보가 집결돼 있었다. 이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게 인형들의 집단장례식이다. 주최 측에 따르면 가장 반응이 뜨거운 코너라고 했다. 일본인들은 눈이 두 개 달린 것은 모두 영혼이 있다고 믿어 그냥 버리지 못하고 장례를 치러줘야 한다고 믿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장례식이 마련됐다는 것. 행사는 1000엔에 5점까지 내놓을 수 있는 유료 서비스로, 각자 내놓은 인형을 예쁘게 전시해 작별하는 시간을 갖는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스님이 독경을 해주고 주인들은 마치 장례식에 참석하듯 인형의 극락왕생을 기원한다. 인형들은 다음 날 절에서 불태우는 다비식을 거쳐 한줌의 재로 돌아간다고 한다. 자녀가 태어나면 전통인형을 장만해 건강과 성장을 기원하는 풍습이 있다 보니 수십만 원을 호가(呼價)하는 값비싼 인형이 적지 않았다. 출가한 두 딸을 위해 장만했던 인형들을 내놓았다는 70대 부부는 “딸들이 갖지 않겠다고 하고 저희도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며 “이런 기회가 있어 반가웠다”고 말했다. 자신들의 삶을 조금씩 버리고 정리하는 작업의 일환이다. 한국에는 없는 감수성이지만 훗날을 생각해 인형을 자신들의 손으로 장사지내 주려는 마음이 느껴졌다.○‘유언장 썼더라면’ 이 같은 웰다잉(well-dying) 운동은 아직 한국에서는 익숙지 않은 편이지만 일부 시니어들 사이에서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공동대표는 우선 자신과 가족을 위해 유언장 쓰기를 해볼 것을 권한다. “‘내 삶의 마무리는 내가 결정한다’는 마음으로 써보세요. 써보기 전과 후, 삶에 대한 마음가짐이 달라집니다”. 그는 나아가 “상속에 대해 내가 결정해 놓지 않으면 자식 간, 형제간에 싸움이 일어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일정액을 사회에 기부하는 방안도 함께 생각해 볼 것을 당부했다. 한국에서 상속분쟁은 해마다 늘고 있다. 2020년 사법연감에 따르면 소송으로 번진 상속분쟁은 2019년 3만301건에서 2020년 4만3799건으로 늘었다. 연간 사망자가 30만 명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비율이다. 유언 없이 사망한 피상속인의 유산은 본인 의도와 다르게 처리될 수 있다. 웰다잉 연구 유튜브 사이트 ‘다섯가지결정’은 최근 유언장을 쓰지 않은 어느 부녀의 안타까운 사례를 소개했다. 나이 든 딸이 병든 홀아버지를 모시며 오랫동안 간병을 했다. 수십 년 전 미국으로 이민 간 두 오빠는 이미 사망했다. 평소 아버지는 함께 사는 아파트를 딸에게 물려주겠노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유언 등 법적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사망한 뒤 딸이 아파트 명의를 받으려면 공동상속권자 전원의 동의가 필요했다. 어렵사리 미국의 조카들에게 연락을 취했는데 이들은 변호사를 통해 ‘법대로 상속하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조카들이 할아버지의 자산을 법정상속분대로 형제들이 3등분 하면 각자 아버지의 상속분을 대습(代襲·법정상속권자가 사망한 경우 직계비속이 대신 상속하는 것)으로 받겠다고 나선 것이다. 결국 이 딸은 조카들과 아버지 재산을 3분의 1씩 나눠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공평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으려면 아버지가 사망 전에 유언을 하고 공증까지 받아뒀어야 했다는 얘기다. 노인들 사이에는 “늙어서 자식들에게 찬밥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재산을 끝까지 움켜쥐고 있으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고성춘 조세전문변호사는 이런 경우를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처럼 1000만 달러(약 120억 원)까지 상속세가 없는 나라라면 모를까, 한국의 상속공제는 5억 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배우자가 없는 노인이 10억 원을 남긴다면 상속세는 약 9000만 원, 20억을 남긴다면 4억 원 넘게 내야 한다.○사후정리보다 생전정리, 생전정리보다 노전정리 시니어 라이프 오거나이저 국내 1호인 김민주 씨는 “시니어에게 정리란 노전(老前)정리, 생전정리, 유품정리가 있다”며 “가능하면 생전정리를 해 홀가분하게 생활할 환경을 갖추고, 더 가능하다면 조금이라도 젊을 때 물건을 줄이고 나누는 노전정리를 시작하라”고 권한다. 역할이 끝난 물건, 방치된 물건, 설레지 않는 물건은 40대부터 정리를 시작하라는 것. 이를 위해 비움-나눔-채움의 3단계 정리법을 제안하기도 한다. 그는 유품 정리를 하다 보면 인생이 뭔지 묻게 된다고 한다. “좋은 가방이나 값진 의류들은 고이 모셔 놓고 쓰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아끼다가 짐만 된 경우들이죠.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 해도 누리고 쓰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안 쓸 거라면 주변의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 주는 것도 방법이고요.” 한국은 2020년 사망자가 출생자보다 많은 시대에 돌입했다. 고령층과 1인가구가 급격히 늘면서 노인의 집 정리는 앞으로 사회적 이슈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적어도 5060세대부터 그 준비를 해야 할 듯하다. 관건은 인생에서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인지, 다시 보는 자세가 아닐까.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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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처럼…은퇴후 도전한 예술가 명함이 3장 됐다[서영아의 100세 카페]

    자칭 ‘예술 덕후’ 김영균(75) 씨는 명함이 세 가지다. 직업란에 수채화가, 사진작가, 서예가라 붙은 명함들을 때와 장소에 맞춰 내놓는다. 금융감독원을 정년퇴직한 뒤 민간기업 감사 등을 거쳐 2008년 모든 직책을 내려놓을 당시, 그가 돌연 손에 잡은 것이 붓과 카메라였다. ‘남은 인생 30년은 예술을 따라가겠노라’며 ‘예술 덕후’를 선언했다. 그로부터 14년 간, 수채화와 사진, 서예를 연마했고 지난달 초에는 자신의 공부내용을 집대성한 책을 펴냈다. 제목은 ‘은퇴자의 예술 따라가기(바른북스)’. 글과 사진은 물론, 편집까지 손수 공을 들였다. 지난달 27일 그를 만났다.○ 30+30+30의 인생, 가장 중요한 건 마지막 30년은퇴생활을 시작할 무렵, 오랜 의무와 책임에서 해방됐지만 마음은 뒤숭숭했다. 허탈감 상실감 무기력 등이 몰아쳐왔다. 그가 책머리에 쓴 글에 당시 상황이 요약돼 있다. “사회활동을 하는 동안에는 그 지위가 어떻든 버틸 수 있는 재간이 있다. 자신의 지위에서 벌어진 이야기, 자신의 처지에서 비롯되는 여러 이야기들이 있다. 하지만 은퇴 이후에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아진다. 기껏해야 과거 얘기가 중심이 된다. 은퇴는 노인을 죽이는 최고의 암살자다.” 그 무렵 신문칼럼에서 본 ‘어느 95세 어른의 수기’가 그에게 큰 자극이 됐다. 95세 생일을 맞이한 어른이 뒤늦게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얘기다. 63세로 퇴직할 때까지 충실한 인생을 살아온 이 어른은, 은퇴후 삶은 ‘덤’이라 생각하고 그저 고통없이 죽음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살았다. 그렇게 덧없고 희망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95세 생일을 맞이한 것이다. 인생의 3분의 1을 비통하게 보내버렸다는 참담함에 이 어른은 그날부터 평소 하고 싶었던 외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10년 뒤 105세가 되어 다시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이제 웬만하면 90세까지 사는 시대입니다. 30년을 배우고 익히며 살았고, 30년은 돈벌고 가정 꾸렸지만, 앞의 두 30년보다 더 중요한 게 마지막 30년 아니겠습니까. 전 고민 끝에 예술을 선택했지요.” 자신만의 행복을 찾기 위한 김씨의 여정은 이렇게 시작됐다.○ 예술은 값비싼 취미라는 오해그는 요즘도 단국대와 동서울대 평생교육원과 수원 서예박물관에 다니며 수채화와 사진, 서예를 연마하고 있다. 관련 협회 회원이면서 개인전과 그룹전, 공모전 등에도 부지런히 참여한다. 2010년부터 모두 합쳐 48회 출품했고 이런저런 상도 받았다. 그를 만난 서울 중구 동성케미컬 서울사무소 라운지에 그의 작품이 한점 걸려 있었다. 모로코에서 본 가죽염색공장을 수채화로 그린 작품인데, 2016년 한국수채화협회 우수상을 받았다고 했다. -늦깎이 예술가가 되는 데 성공하셨네요. “은퇴하신 분뿐 아니라 현역이나 젊은 세대도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있을 때 창작 활동을 시작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예술은 값비싼 취미가 아니예요. 거창한 지식이 있어야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요. 누구나 배우지 않아도 그림을 그리고 지식이 없어도 예술작품을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잠재적 예술가예요. 무언가를 시작하면 무뎌진 자신의 감각을 추스르고 삶과 예술을 새롭게 즐길 수 있어요.”-시작은 어떻게 하셨나요? “그림은 성남아트센터에서, 붓글씨는 도서관에서 시작했어요. 사진은 전문가에게 배우기도 했습니다. 무언가를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주민센터건 평생교육원이건 아트센터건 배울 곳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실천에 옮기는 게 중요합니다.” -예술은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보는 시각이 적지 않습니다. “아내 말이 친구들에게 책을 주면 ‘너희 정말 잘 사나보네’란 반응이 돌아온대요. 집 한 채에 연금뿐인데 말이죠. 자랑질하는 것처럼 느껴지나 봐요. 하지만 행복은 물질적 측면에서 찾다보면 한이 없어요. 아무리 잘 먹는다해도 하루 세끼 이상 먹을 수 있나요. 행복을 느끼는 주체는 자신입니다. 스스로 행복을 어떻게 찾느냐가 중요하지요. 돈을 더 벌지 못하더라도 예술을 즐기고 따라가면서 여유로운 마음을 갖는 것, 그게 더 행복한 것 아니냐. 이게 제 결론입니다. 제 아내도 같은 의견이고요.” 그는 금융계에서 오래 일했지만 재테크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했다. “제가 IMF 외환위기 때 금융감독원에서 구조조정 책임을 맡고 있었어요. 돈벌이에 신경 썼다가는 아마 감옥에 갔을 거예요. 일체 관심을 끊는 게 속이 편했죠.”○ ‘노인과 바다’의 노인처럼그는 예술을 하는 자세로 ‘여조삭비(如鳥數飛)’를 수시로 강조했다.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 자주 날갯짓하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논어 학이(學而)에 나온다. 배우기를 쉬지 않고 끊임없이 연습하고 익히는 자세를 말한다. 특히 노년에 새로운 시도를 할 때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권한다. “노년기의 기억체계는 밀려드는 새 지식을 쌓기보다 살아온 궤적과 경험치에 대한 가중치를 증가시키는 연륜이 늘죠. 예술하기에 적당한 뇌입니다.” 이렇게 여조삭비의 매일을 보내며 정진하다보면 예상치 못한 기쁨과 마주하게 된다고 한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늙은 어부 산티아고 아시죠. 84일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하다가 85일째 되는 날 드디어 큰 청새치를 낚은 기쁨. 그런 투쟁과 같은 기쁨을 매일 느낄 수 있어요.” 저서 ‘은퇴자의 예술따라가기’는 한자의 기원과 서체부터 중국 문화예술 탐방기, 한국화와 서양화 감상, 미술사의 흐름, 사진과 회화 등 동서양과 과거 현대를 종횡무진 넘나든다. 무엇보다 그가 직접 다녀온 세계 각국의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얻은 생생한 사진과 정보로 가득하다. 그는 기대는 안 하지만 혹시라도 책에서 인세가 들어오면 안나의 집에 갖다주려 한다고 말한다. 김하중 신부가 운영하는 성남의 노숙인 무료급식소 안나의 집과의 관계는 8년여 전부터 이어지고 있다. 그는 매달 회비를 내고 가끔 노력봉사를 하러 간다. ○ “남과 비교하지 말자”난생처음 작품으로 상을 받은 건 2008년 6.25전쟁 기념 공모전에 출품한 수채화였다. ‘지울수 없는 추억 개성’이란 제목에 폭격맞은 장난감을 생각하며 그린 상상화였다. ‘동행(同行)’을 금문으로 쓴 글씨도 상을 받았다. 2016년 수채화협회 우수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남과 비교하지 말자”고 마음 먹었다.“인정욕구가 어느 정도 채워지고 나면 자기만족이 더 중요해집니다. 큰 상을 받고 나니 욕심이 생기려 하더군요. 그때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스스로 즐기려 하는 건데, 욕심 부리지 말자고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30년 금융맨이 30년 예술가로 살기에 도전하는 셈인데요, 앞으로 계획은. “날개짓을 계속할 뿐입니다. 가능한 제가 가진 것들을 나누면서 하고 싶어요. 지난해 용인시 도서관사업소에 ‘휴먼북(지식과 경험을 나눠주는 자원봉사자)’으로 등록했는데, 코로나 상황이라 그 또한 여의치 않네요. 미국에 그랜마 모지스(1860 ~1961)라는 할머니 화가가 있었습니다. 평생 농부의 아내로 살았는데 나이 70이 다 되어 건강상 움직이기 곤란해지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101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작품활동을 했어요. 산골 교회 마을 등 토속적인 풍경을 그렸는데 작품은 주로 연말연시 카드그림에 실렸죠. 저도 그런 할머니처럼, 소박하게 할 수 있는 자리에서 일하며 스스로 행복을 찾을 뿐입니다.” 오래 살아본 분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는 60세에서 75세라고. 백수를 누리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를 비롯해 서구나 일본의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얘기다. 그러고 보면 김영균 씨의 이 시기는 예술로 더욱 빛이 났던 듯하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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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번째 30년엔 예술 즐기기 좋아… ‘노인과 바다’의 청새치 매일 낚는 기분”[서영아의 100세 카페]

    자칭 ‘예술 덕후’ 김영균 씨(75)는 명함이 세 가지다. 직업란에 수채화가, 사진작가, 서예가라 붙은 명함들을 때와 장소에 맞춰 내놓는다. 금융감독원을 정년퇴직한 뒤 민간기업 감사 등을 거쳐 2008년 모든 직책을 내려놓을 당시, 그가 돌연 손에 잡은 것이 붓과 카메라였다. ‘남은 인생 30년은 예술을 따라가겠노라’며 ‘예술 덕후’를 선언했다. 그로부터 14년간, 수채화와 사진, 서예를 연마했고 지난달 초에는 자신의 공부 내용을 집대성한 책을 펴냈다. 제목은 ‘은퇴자의 예술 따라가기’(바른북스 ·사진). 글과 사진은 물론, 편집까지 손수 공을 들였다. 지난달 27일 그를 만났다.○30+30+30의 인생, 가장 중요한 건 마지막 30년 은퇴생활을 시작할 무렵, 오랜 의무와 책임에서 해방됐지만 마음은 뒤숭숭했다. 허탈감 상실감 무기력 등이 몰아쳐왔다. 그가 책머리에 쓴 글에 당시 상황이 요약돼 있다. “사회활동을 하는 동안에는 그 지위가 어떻든 버틸 수 있는 재간이 있다. 자신의 지위에서 벌어진 이야기, 자신의 처지에서 비롯되는 여러 이야기들이 있다. 하지만 은퇴 이후에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아진다. 기껏해야 과거 얘기가 중심이 된다. 은퇴는 노인을 죽이는 최고의 암살자다.” 그 무렵 신문칼럼에서 본 ‘어느 95세 어른의 수기’가 그에게 큰 자극이 됐다. 63세로 퇴직할 때까지 충실한 인생을 살아온 이 어른은, 은퇴 후 삶은 ‘덤’이라 생각하고 그저 고통 없이 죽음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살았다. 그렇게 덧없고 희망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95세 생일을 맞이한 것이다. 인생의 3분의 1을 비통하게 보내버렸다는 참담함에 이 어른은 그날부터 평소 하고 싶었던 외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10년 뒤 105세가 되어 다시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이제 웬만하면 90세까지 사는 시대입니다. 30년을 배우고 익히며 살았고, 30년은 돈 벌고 가정 꾸렸지만, 앞의 두 30년보다 더 중요한 게 마지막 30년 아니겠습니까. 전 고민 끝에 예술을 선택했지요.” 자신만의 행복을 찾기 위한 김 씨의 여정은 이렇게 시작됐다.○예술은 값비싼 취미라는 오해 그는 요즘도 단국대와 동서울대 평생교육원과 수원 서예박물관에 다니며 수채화와 사진, 서예를 연마하고 있다. 관련 협회 회원이면서 개인전과 그룹전, 공모전 등에도 부지런히 참여한다. 2010년부터 모두 합쳐 48회 출품했고 이런저런 상도 받았다. 그를 만난 서울 중구 동성케미컬 서울사무소 라운지에 그의 작품이 한 점 걸려 있었다. 모로코에서 본 가죽염색공장을 수채화로 그린 작품인데, 2016년 한국수채화협회 우수상을 받았다고 했다. ―늦깎이 예술가가 되는 데 성공하셨네요. “은퇴하신 분뿐 아니라 현역이나 젊은 세대도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있을 때 창작 활동을 시작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예술은 값비싼 취미가 아니에요. 거창한 지식이 있어야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요. 누구나 배우지 않아도 그림을 그리고 지식이 없어도 예술작품을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잠재적 예술가예요. 무언가를 시작하면 무뎌진 자신의 감각을 추스르고 삶과 예술을 새롭게 즐길 수 있어요.” ―시작은 어떻게 하셨나요. “그림은 성남아트센터에서, 붓글씨는 도서관에서 시작했어요. 사진은 전문가에게 배우기도 했습니다. 무언가를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주민센터건 평생교육원이건 아트센터건 배울 곳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실천에 옮기는 게 중요합니다.” ―예술은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보는 시각이 적지 않습니다. “아내 말이 친구들에게 책을 주면 ‘너희 정말 잘사나 보네’란 반응이 돌아온대요. 집 한 채에 연금뿐인데 말이죠. 자랑질하는 것처럼 느껴지나 봐요. 하지만 행복은 물질적 측면에서 찾다 보면 한이 없어요. 아무리 잘 먹는다 해도 하루 세 끼 이상 먹을 수 있나요. 행복을 느끼는 주체는 자신입니다. 스스로 행복을 어떻게 찾느냐가 중요하지요. 돈을 더 벌지 못하더라도 예술을 즐기고 따라가면서 여유로운 마음을 갖는 것, 그게 더 행복한 것 아니냐. 이게 제 결론입니다. 제 아내도 같은 의견이고요.” 이런 그는 금융계에서 오래 일했지만 재테크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했다. “제가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때 금융감독원에서 구조조정 책임을 맡고 있었어요. 돈벌이에 신경 썼다가는 아마 감옥에 갔을 거예요. 일체 관심을 끊는 게 속이 편했죠.”○‘노인과 바다’의 노인처럼 그는 예술을 하는 자세로 ‘여조삭비(如鳥數飛)’를 수시로 강조했다.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 자주 날갯짓하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논어 학이(學而)에 나온다. 배우기를 쉬지 않고 끊임없이 연습하고 익히는 자세를 말한다. 특히 노년에 새로운 시도를 할 때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권한다. “노년기의 기억체계는 밀려드는 새 지식을 쌓기보다 살아온 궤적과 경험치에 대한 가중치를 증가시키는 연륜이 늘죠. 예술 하기에 적당한 뇌입니다.” 이렇게 여조삭비의 매일을 보내며 정진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기쁨과 마주하게 된다고 한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늙은 어부 산티아고 아시죠. 84일 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하다가 85일째 되는 날 드디어 큰 청새치를 낚은 기쁨. 그런 투쟁과 같은 기쁨을 매일 느낄 수 있어요.” 저서 ‘은퇴자의 예술 따라가기’는 한자의 기원과 서체부터 중국 문화예술 탐방기, 한국화와 서양화 감상, 미술사의 흐름, 사진과 회화 등 동서양과 과거 현대를 종횡무진 넘나든다. 무엇보다 그가 직접 다녀온 세계 각국의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얻은 생생한 사진과 정보로 가득하다. 그는 기대는 안 하지만 혹시라도 책에서 인세가 들어오면 안나의 집에 갖다 주려 한다고 말한다. 김하종 신부가 운영하는 성남의 노숙인 무료급식소 안나의 집과의 관계는 8년여 전부터 이어지고 있다. 그는 매달 회비를 내고 가끔 노력봉사를 하러 간다. ○“남과 비교하지 말자” 난생처음 작품으로 상을 받은 건 2008년 6·25전쟁 기념 공모전에 출품한 수채화였다. ‘지울 수 없는 추억 개성’이란 제목에 폭격 맞은 장난감을 생각하며 그린 상상화였다. ‘동행(同行)’을 금문으로 쓴 글씨도 상을 받았다. 2016년 수채화협회 우수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남과 비교하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인정 욕구가 어느 정도 채워지고 나면 자기 만족이 더 중요해집니다. 큰 상을 받고 나니 욕심이 생기려 하더군요. 그때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스스로 즐기려 하는 건데, 욕심 부리지 말자고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30년 금융맨이 30년 예술가로 살기에 도전하는 셈인데요, 앞으로 계획은…. “날갯짓을 계속할 뿐입니다. 가능한 제가 가진 것들을 나누면서 하고 싶어요. 지난해 용인시 도서관사업소에 ‘휴먼북(지식과 경험을 나눠주는 자원봉사자)’으로 등록했는데, 코로나 상황이라 그 또한 여의치 않네요. 미국에 그랜마 모지스(1860∼1961)라는 할머니 화가가 있었습니다. 평생 농부의 아내로 살았는데 나이 70이 다 되어 건강상 움직이기 곤란해지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101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작품활동을 했어요. 산골 교회 마을 등 토속적인 풍경을 그렸는데 작품은 주로 연말연시 카드 그림에 실렸죠. 저도 그런 할머니처럼, 소박하게 할 수 있는 자리에서 일하며 스스로 행복을 찾을 뿐입니다.” 오래 살아본 분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는 60세에서 75세라고. 백수를 누리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를 비롯해 서구나 일본의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얘기다. 그러고 보면 김영균 씨의 이 시기는 예술로 더욱 빛이 났던 듯하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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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퇴자산 지키면서 ‘따박따박’… 노후 정기소득 확보해주는 TIF

    한국의 고령화 속도는 세계 최고다. 올해 17.3%인 65세 이상 고령자 비율은 2025년이면 20%를 넘어 초고령 사회에 들어선다. 이 비율이 2045년에는 37%에 이르러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로 올라설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은퇴자들의 노후 준비는 미흡하기 짝이 없다. 국민연금공단의 2020년 말 조사에 따르면 은퇴를 앞둔 세대가 밝힌 노후 적정 월 생활비는 부부 268만 원, 1인 가구 165만 원이다. 국민연금만으로는 이를 커버하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여기다 은퇴 후 국민연금 수령 시기인 65세까지 소득 공백기도 짧지 않다. 현역 시절 열심히 모으고 굴린 퇴직금을 어떻게 꺼내야 할까. 최근 금융권에서는 또 하나의 선택지를 제시하고 있다. 목돈 투자와 인출 시점에 특화된 ‘타깃 인컴 펀드(TIF)’가 그것. 다른 금융투자 상품이 은퇴 자산 형성에 초점을 맞췄다면 TIF는 노후에 목돈을 투자해 정기적인 소득을 얻도록 설계됐다. 매년 원금의 3∼4% 금액을 정기적으로 받아 쓰면서 원금을 최대한 보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수익원은 주식 배당, 채권 이자, 부동산 임대수익 등으로 원금을 최대한 덜 갉아먹도록 설계된 방어형 상품이다. 류경식 미래에셋자산운용 WM연금마케팅부문 대표는 “현역 기간에는 ‘타깃 데이트 펀드(TDF)’를 통해 최대한 자산을 불리고 은퇴 시점에는 노후 자금을 TIF에 맡겨 정기적으로 생활비를 받는 투자 패턴이 정착될 것”이라고 내다봤다.●모을 땐 TDF, 목돈 투자와 인출할 땐 TIF로2017년 3월 미래에셋자산운용이 처음으로 ‘미래에셋 평생소득 TIF’를 선보인 이래 5개 대형 운용사의 TIF 상품이 나와 있다. 미래에셋 1종, 한국투자 2종, 삼성 3종, 신한 1종, KB 2종 등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TIF 수탁액은 2021년 말 5533억 원으로 전년 대비 두 배 이상 늘었다. 이중 미래에셋에 전체 자금의 80% 이상이 몰려 있다. 김근호 WM연금마케팅1본부장은 그 이유로 “미래에셋 TIF는 최초 설계부터 은퇴자금의 투자와 인출에 방점을 두어 설계했으며 단 1종의 펀드만 출시했다”는 점을 들었다. 위험자산 비중에 따라 다양한 펀드를 출시하지 않고 위험자산 노출도를 20∼30% 수준에서 조절하면서 글로벌 우량 자산들에 분산 투자하는 길을 택하고 있다는 것. 또 “전통 자산들과 상관관계가 낮고 상대적으로 높은 소득이 발생하는 부동산 인프라 자산을 편입해 펀드의 변동성을 낮추고 안정적인 누적 수익을 달성하도록 했다”고 강조했다. TIF는 투자 성과를 사전에 확정할 수 없는 실적배당형 투자 상품이지만 시뮬레이션을 통해 합리적 범위내에서 인출액과 원금변동을 가늠해 볼 수는 있다. 예컨대 미래에셋 TIF에 노후 자산 5억 원을 맡긴 60세 A 씨가 30년 뒤 80%를 남기는 전략으로 매달 받을 액수를 계산해 봤다. 수익률 연 6%를 설정한다면 A 씨는 매달 260만 원씩 받고 90세에 남은 원금 4억 원을 손에 쥐게 된다. 조금 더 보수적으로 연 4% 수익률을 적용하면 월 180만 원씩 인출하고 30년 뒤 4억 원을 받게 된다(물가상승률은 미반영). 실제 미래에셋 TIF의 출시 이래 연평균 수익률은 6.3%, 지난해 수익률은 9.48%였다. 다만 김 본부장은 “과거 성과가 미래 성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고 주의를 달았다. 글 싣는 순서1. 자율 주행하는 펀드2. 기지개 켜는 한국 퇴직연금 3. 자산-정기수입 TIF 시장도 시동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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