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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콧물을 훌쩍거려도, 눈이 간지럽다고 비벼도, 피부 발진이 생겨도 쪼르르 병원에 달려갔다. 동네 병원이 상가 건물마다 들어서 있으니 평소 의사 부족을 실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개구쟁이인 아이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피가 줄줄 흐르는데 병원을 찾지 못해 크게 당황한 적이 있다. 흉터 제거를 하는 성형외과는 보였지만 봉합 수술을 하는 외과는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상급병원 응급실로 가서 꿰맸다. ▷일은 고되고 의료사고 위험이 큰 필수의료 분야의 의사 부족 현상은 심각하다. 응급의료·중증외상센터는 만성 구인난에 시달린다. 지방 산모들은 산부인과를 찾아 원정 출산을 간다. 의료계는 의사 수는 충분하나 낮은 수가로 배분이 왜곡된 수급 불균형의 문제라고 본다. 하지만 건강보험 적용 확대 및 고령화에 따른 의료 수요를 의사 수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당청은 2006년부터 3058명으로 동결된 의대 정원을 공공의료 중심으로 500명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정부가 지난해 발표한 보건의료인력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인구 10만 명당 의대 졸업자 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1.9명)보다 적은 7.9명,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OECD 평균(3.3명)보다 적은 2.3명(한의사 제외하면 1.9명)이었다. 반면 의료계는 연평균 의사 증가율이 3.1%로 OECD 평균(1.2%)보다 2.6배 높다는 것을 근거로 의대 정원을 늘리는 데 반대한다. 이런 속도면 의사 수가 곧 OECD 평균을 웃돌 것이라는 주장이다. ▷의대 정원 확대는 정부와 의사, 국민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린다. 의료계 내에서도 입장이 조금씩 다른데 특히 낮은 수가를 박리다매로 보충하던 개원의들은 반발할 것이다. 전문의가 되기까지 10년 동안 투입한 비용과 노력을 생각하면 납득 못 할 일도 아니다. 우수 학생들의 의대 편중이 심화되고 사교육 시장도 들썩거릴 수 있다. 이렇게 복잡한 함수다 보니 어느 정부도 의대 정원을 공론화하지 못했다. ▷코로나19는 우리 보건의료 시스템의 관성을 깨는 충격을 가했고 그 방향을 틀 것을 요구하고 있다. 임상의사뿐 아니라 기초의학과 제약이나 의료기기 산업 분야에서 연구의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월드 스타’가 된 우리 진단키트 업체들의 기술력 뒤에는 의사가 있었다. 우리는 코로나19 사태에서 우수한 인재들이 모인 의료계의 실력을 봤다. 의료계가 의대 정원 문제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갈 것으로 본다. 정원이 늘더라도 의사로 배출되기까지는 10년이 걸릴 테니 그럴 시간은 충분하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사랑이 넘치고 늘 사랑을 속삭였던 사람’ ‘소고기 스튜로 가족들에게 이름을 날렸던 사람’. 미국의 코로나19 사망자가 10만 명에 근접한 24일 뉴욕타임스(NYT)는 1면을 비롯한 4개 면에 사망자 1000명의 이름과 각각 설명을 단 부고 기사를 게재했다. ‘헤아릴 수 없는 손실’이라는 제목처럼 이들은 사망자 1, 2, 3…이 아니라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과 친구들이었다. NYT가 긴긴 부고 기사를 작성 중이었던 22, 23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본인 소유 골프장인 버지니아주 ‘트럼프 내셔널’에서 골프를 치고 있었다. ▷코로나19로 골프를 중단했던 트럼프 대통령이 76일 만에 필드에 나간 것은 경제 재개 의지를 보여주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2014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에볼라 사태 당시 골프를 쳤던 것을 비판한 그의 트윗 글이 회자되고 있다. 이런 ‘내로남불’ 행태가 없다. ▷문제는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트럼프식 정의가 미국 공직사회를 지탱하는 가치인 정직과 신뢰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세금으로 인맥 관리용 만찬을 즐기고, 보좌관에게는 반려견 산책과 세탁물 수거 등 사적인 심부름을 시켜 ‘갑질’ 논란으로 도마에 올랐다. 윌리엄 바 법무장관은 ‘러시아 스캔들’ 위증으로 유죄가 인정된 마이클 플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기소를 취소해 사법 정의를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부동산 사업가 출신인 트럼프는 취임 이후 외국 정상과의 회담을 본인 소유 플로리다 리조트에서 열고, 그 호텔·리조트에 연방공무원을 1600박 이상 묵게 하는 등 공사 구분이 없다. 딸과 사위가 버젓이 국정을 휘젓는다. 그의 눈높이에선 ‘부하 직원에게 개 산책시킨 게 뭐가 문제냐’ 싶었을 것 같다. 트럼프는 국무장관의 갑질 논란에 대해 “그는 (보좌관에게) ‘내 개를 산책시켜 줄 수 있느냐. 나는 김정은과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했을 것”이라고 감쌌다. ▷트럼프와 골프를 쳤던 이들을 인터뷰해 ‘커맨더 인 치트(Commander in Cheat·속임수 사령관)’란 책을 쓴 스포츠 기자 릭 라일리는 “트럼프가 골프를 치듯, 그러니까 규칙은 마치 다른 이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처럼 대통령직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한다”고 했다. 골프에서 속임수를 써서라도 그저 이기는 데만 몰두하는 것처럼 국정을 운영한다는 것이다. 국민의 안전은 안중에 없고 가족을 잃은 슬픔에는 공감하지 못하는 그의 행보가 곱게 보이지 않는다. 공직자로서 책임과 윤리, 헌신이 없는 대통령 한 명이 공직사회 전체를 오염시킨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주로 5세 미만 영유아들이 걸리는 가와사키병은 혈관에 염증이 생기는 급성 질환이다. 1967년 이를 처음 발견한 일본 소아과 의사의 이름을 따왔다. 해열제가 듣지 않는 고열이 5일 이상 계속된다. 눈이 충혈되고 입술이 붉게 변한다. 혀가 붓고 빨갛게 변해 마치 딸기처럼 된다. 피부 발진도 나타난다. 아직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주로 일본 한국 등에서 나타나는데 한국의 경우 2014∼2016년 연간 5000명가량이 발병했다. ▷서구사회에선 생소한 이 질병을 코로나19가 소환했다. 유럽과 미국에서 가와사키병과 유사한 증상을 보이는 어린이 괴질(怪疾) 환자가 급증하고 있는 것. 이탈리아 베르가모, 미국 뉴욕처럼 코로나19가 창궐했던 지역에서 환자가 속출했다. 다만 가와사키병과 달리 10대에서도 발병하고 혈관뿐 아니라 심장 신장 등 장기에도 염증을 일으킨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14일 이를 ‘소아 다기관 염증 증후군(MIS-C)’으로 명명했다. 미국 뉴욕 110명 등 15개 주에서 환자가 보고됐고 유럽에서도 영국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등에서 환자가 발생했다. ▷영국 미국 이탈리아 의료진은 코로나바이러스가 그 원인이라고 사실상 결론을 내렸다. 앤드루 쿠오모 뉴욕주지사는 13일 “어린이 MIS-C 환자들의 60%는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았으며 나머지 40%는 항체를 갖고 있었다”고 했다. 코로나19는 고령 환자의 치명률이 높아 ‘부머 킬러(Boomer Killer)’로 불리는 반면 어린이와 청소년은 비교적 가볍게 앓는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어린이들에게 이런 심각한 합병증을 유발한다면 전적으로 다른 이야기가 된다. ▷우리 보건당국은 “현재까지 (MIS-C 환자가) 국내에서 확인되거나 알려진 바 없다”고 했다. 그러나 신종 인플루엔자A(H1N1)가 유행했던 2010년에도 가와사키병 환자가 늘었었다. 가와사키병은 유전적 요인을 갖고 있거나 바이러스 침투 시 면역체계가 이상 반응해 발병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감염병 사태 속에서 마냥 안심할 일은 아니다. ▷‘어린이 괴질’이라는 용어가 공포심을 야기하지만 코로나19에 감염된 어린이와 청소년에서 MIS-C의 발병 비율이 높지는 않은 데다 조기 발견하면 치료가 가능하다고 한다. 코로나19는 무증상 감염자가 숨은 전파자가 되고, 증상이 발현하기 직전에 전파력이 왕성하다. 바이러스가 온몸 이곳저곳을 공격해 합병증을 일으키고 사이토카인 폭풍이나 염증 증후군처럼 면역체계의 빈틈을 파고든다. 인류가 만나보지 못한 아주 고약하고 끈질긴 바이러스임에는 분명하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왜 학교에 다니니.” 아이에게 물어본다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엄마가 가라고 하니까’ ‘꼭 다녀야 한다면서’ 같은 답을 하거나 아니면 뚱한 표정으로 쳐다볼 것이 분명하다. ‘미래를 위해서’ 같은 정답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 대다수 아이들은 법으로 강제된 의무교육이라서 학교에 다닌다. 대학입시를 치르기까지 초중고교 12년 시간표는 배워야 할 과목과 내용, 수업시수 등이 빈틈없이 짜여 있다. 아이들은 그에 따라 똑같은 수학 문제를 풀거나 영어 단어를 외운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그런데 코로나19가 공교육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공교육 수요자인 학생과 학부모가 수업 및 등교를 선택하는 전례 없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온라인 개학을 하고 원격 수업을 하는 동안 학생들은 재미있는 수업을 먼저 듣거나, 재미없는 수업을 1.5배속, 2배속으로 빠르게 돌려 들었다. 틀어만 두기도 한다. 공부에 의욕이 있다면 같은 내용을 다룬 인터넷 강의를 찾아 들었다. 반드시 이수해야 할 수업이 정해져 있어도 교실에 꼼짝없이 앉아 있는 것에 비하면 상당한 자율성을 갖는다. 온라인 수업을 학교 밖 강의와 비교할 수 있다는 점도 교육 수요자인 학생에게 힘을 실어준다. 여기에 더해 학생과 학부모는 등교 개학 이후 학교를 갈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게 됐다. 가정학습을 하면 연간 2주 내외는 등교하지 않아도 출석으로 인정해 준다. 사실상 등교 선택권이 주어진 셈이다. 이태원발(發) 집단 감염으로 코로나19의 지역사회 확산 우려가 큰 상황에서 입시가 임박한 고3과 중3을 제외하고는 가정학습을 선택하는 비율이 꽤 높을 것이다. 애초에 학교에 왜 가야 하는지 몰랐던 학생들과 이들의 건강을 걱정하는 학부모의 이해가 일치할 가능성이 크다. ‘학교의 미래, 미래의 학교’의 저자 김재춘 영남대 교수(전 교육부 차관)는 “학교가 자생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나. 강제로 다니게 하고 그래야 상급 학교 진학 자격을 주므로 유지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200년 전 탄생한 근대 학교의 유효기간이 코로나19 사태로 더 짧아질 것 같다”고 했다. 등교가 미뤄진 두 달여 동안 학교는 온라인 개학을 했고 교사는 원격 수업을 제공했다. 누구도 총대를 메지 않으려던 미래 교육이 최소한 5년은 앞당겨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개인적으로는 수업·등교 선택권이 원격 수업만큼이나 학교를 바꿀 것이라 생각한다. 지난해 학업을 중단한 초중고교생은 5만2539명. 이미 탈(脫)학교 흐름이 거센데 코로나19로 ‘꼭 학교에 가야 하나’는 의문이 커지기 시작했다. 수업과 등교의 선택권을 경험한 학생들은 획일적인 공교육에 코로나 이전처럼 순응하기 어려울 것이다. 혁신이 두려운 교육 공급자도, 입시 경쟁으로 앞만 보던 수요자도 코로나19 사태로 깨달았다. 네모난 교실에 모여 책상 줄을 맞춰 앉아 똑같은 교과서를 배우는 것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식이라면 학교 밖에도 배울 곳이 널려 있다. 코로나 이후, 학교의 기능과 역할이 재정립되지 않는다면 학생들은 영영 학교로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포항의료원에 두 달 넘게 입원 중인 104세 최모 할머니는 국내 최고령 코로나19 확진 환자다. 어제 최 할머니의 가슴에는 붉은색 카네이션이 곱게 달렸다. 가족들과 만날 수 없어 쓸쓸히 어버이날을 보낼 할머니를 위해 의료진이 달아드렸다. 혹시라도 외로움과 상심이 깊어져 최 할머니의 병세가 악화될까 준비한 것이다. “고맙습니다.” 다행히 최 할머니는 두 손을 모아 인사하며 연신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전국의 요양병원·요양시설에서 오매불망 자식들 보기만을 기다리는 어르신이 많다. 6일부터 생활방역 체제로 전환됐음에도 고위험군인 어르신과 기저질환자가 밀집한 생활을 하는 요양병원·요양시설은 아직 외부인에게 문을 열지 않았다. 방역당국은 “올해는 면회를 자제하고 영상통화로 안부를 살피는 게 좋겠다”고 권고하고 있다. 자식들은 속이 타들어간다. ▷코로나19 사태 초기 요양병원·요양시설을 중심으로 집단감염이 다수 발생했고, 고령일수록 치명률이 높아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면회를 허용하기가 조심스럽다. 최 할머니 역시 요양시설 내 집단감염으로 확진 판정을 받았다. 일부 시설은 유리벽을 사이에 두거나, 야외에 비닐 천막을 설치해 면회를 하도록 한다. 동영상을 찍어 가족들에게 보내주거나 어버이날 당일 예약시간을 정해두고 화상통화를 연결해 주는 곳도 있다. ▷자식들이 두려워하는 최악의 상황은 코로나로 격리되거나 면회가 금지돼 임종을 지키지 못할 경우다. 특히 확진 환자는 감염 우려가 있어 화장이 끝나고 한 줌의 재로 만나게 된다. 작별 인사를 나눌 기회도 없이 허망하게 떠나보낸다면 그 상실감이야 이루 말하기 어려울 터다. 이에 대구가톨릭대병원은 음압병실을 임종실로 만들어 가족 중 1명이 레벨D 방호복을 입고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도록 했다. 화장 순서가 밀려 있거나 드라이브스루 장례식을 치르는 해외에 비하면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엄격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행되던 지난달 주말, 옆집 노부부 댁에 마스크를 쓰고 장갑을 낀 아들이 ‘딩동’ 벨을 누르고는 장바구니를 내려놓고 발길을 돌리는 모습을 봤다. 버선발로 뛰어나온 할머니는 아파트 복도 창밖을 내다보며 장성한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주위에선 ‘대구에 계신 부모님께 매일 새벽배송 업체를 통해 음식 재료를 배달시켰다’ ‘요구르트를 정기 배달시키고 안부를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 등 코로나 효도법이 공유된다. ‘거리는 멀어도 마음은 가까이’. 어느 시대든 효도는 충분치 못하고 자식들의 가슴은 후회로 차오르기 마련인데, 코로나 시대는 효도의 법칙마저 바꿔버렸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2005년 4월 5일 ‘천년고찰’ 낙산사가 시뻘건 불길에 휩싸였다. 전날 강원 양양군 임야를 태우고 남은 불씨가 낙산사 주변 소나무 숲으로 날아든 것이다. 원통보전(圓通寶殿)을 비롯해 경내 목조건물이 대부분 전소됐고 조선 예종이 아버지 세조를 기려 만들었다는 동종(보물 479호)이 녹아내렸다. 소방차마저 불타버렸다. 초속 32m의 양간지풍(襄杆之風)을 타고 번진 불길은 미처 손쓸 틈도 없이 낙산사를 삼켜버렸다. ▷양간지풍은 봄철인 3∼5월 양양과 고성(간성) 사이에 부는 국지적 강풍을 일컫는다. 양양과 강릉을 따서 양강(襄江)지풍이라고도 한다. 남고북저(南高北低) 기압 배치로 부는 서풍이 태백산맥을 넘으며 고온건조해지고, 산과 산 사이 좁은 지형을 지나며 속도가 빨라지고 사나워진다. 그 바람의 세기가 초속 20∼30m로 작은 태풍에 버금가고 여기 올라탄 불티는 2km 떨어진 곳까지 날아간다. ▷자고로 양간지풍을 화풍(火風)이라고 불렀다. 낙산사 화재에 앞서 1996년 4월 사흘 동안 강원 고성군 일대 3763ha를 태운 산불이 있었다. 바람의 세기는 초속 27m. 2000년 4월에는 고성군 군부대 소각장에서 발화한 불길이 9일 동안 강원 삼척 강릉 동해와 경북 울진까지 내려가며 동해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더 거슬러 조선왕조실록 1804년(순조 4년) 3월 21일자에는 ‘강원 감사 신헌조가 이달 3일 사나운 바람이 일어나 산불이 크게 번졌는데, 삼척 강릉 양양 간성 고성에서 통천에 이르는 바닷가 여섯 고을에서 민가 2600여 호가 불에 타고 타 죽은 사람이 61명이었다고 보고하니 순조가 놀라 백성들을 구휼하라고 명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1일 발생한 고성 산불은 다행히 인명 피해 없이 12시간 만에 진화됐다. 지난해 4월 산불이 났던 곳에서 약 4km 떨어진 곳에서 발생한 이번 불은 야산 인근 주택 보일러가 과열돼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밤새 불이 번질 것으로 예상되는 길목마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예비 살수를 했고 동이 트자 소방헬기 39대, 소방차 500대를 투입해 하늘과 땅에서 동시에 진화를 했다. 지난해 고성 산불의 학습효과였다. ▷발화 지점 가까이 저수지가 있어 물을 쉽게 끌어오고 수분을 머금은 수풀이 무성해 불길 잡기가 수월했던 것도 행운이다. 바람도 지난해 초속 30m보다 약한 초속 20m를 기록했다. 불씨를 키우는 건 강풍이지만 사람의 실수가 발화의 원인인 경우가 많았다. 평소 화재를 감시하고 초기 진화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비용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재난이 반복되는데 바람 탓만 할 수는 없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최근 미국 스탠퍼드대와 서던캘리포니아대(USC) 등은 미 전역에 분포한 메이저리그 27개 구단 선수와 직원 1만여 명을 대상으로 코로나19 항체 검사를 시행했다. 손가락 끝을 콕 찔러 나온 피로 10분 안에 항체 생성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미국 내 코로나19가 얼마나 퍼져 있는지를 파악하는 전국 단위의 연구다.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활약 중인 추신수 선수도 참여했다. ▷항체 검사는 바이러스 감염 여부를 알려주는 진단 검사와는 다르다. 증상 없이 또는 가볍게 앓고 지나가 항체가 생겼는지 알 수 있어 실제 감염자를 추정할 수 있다. ‘자유 아니면 코로나를 달라’며 봉쇄 해제를 요구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지는 미국은 항체 검사에 적극적이다. 지난달 미 식품의약국(FDA)은 90개가 넘는 항체 검사 도구를 왕창 허가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항체 검사는 누가 훌륭하고 아름다운 면역력을 확보했는지 보여줘 미국인들을 일터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고 했다. ▷유럽도 길어지는 코로나19 사태의 출구전략으로 광범위한 항체 검사를 선택했다. 항체를 가진 사람에게 ‘면역 여권(immunity passports)’을 발급하고 이동제한령에서 예외로 두겠다는 것. 이탈리아는 다음 달 15만 명, 영국은 연내 30만 명의 항체 검사를 하기로 했다. 이 결과가 경제 재개 범위와 속도를 결정할 것이다. ▷항체 검사 결과는 코로나19가 얼마나 무증상 또는 경증 감염이 많은지를 짐작하게 한다. 네덜란드에서는 헌혈된 혈액을 분석했더니 항체를 가진 사람 비율이 3%로 나타났다. 확진자 비율에 비해 17배나 높은 것이다. 미국 뉴욕주의 경우는 확진자 비율보다 10배나 많은 13.9%의 항체 생성률을 보였다. 즉, 확진자보다 10배나 많은 사람이 코로나19에 감염됐던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면역 여권’ 발급에 거듭 부정적이다. 현재로선 완치 판정을 받았거나 항체가 생긴 사람들이 반드시 재감염되지 않는다는 증거가 없다. 국내에서도 완치 뒤 양성 판정을 받은 사례가 263명이다(25일 기준). 항체가 생겼더라도 변이가 일어난 바이러스에는 무력해 일회성 검사가 면역력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면역 여권이 경계심을 낮춰 재확산이 될까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우리 정부도 조만간 항체 검사를 시작할 계획이다. 방역당국은 초기부터 왕성하게 환자를 찾아냈기 때문에 기존 확진자와 실제 감염자 수 차이가 크지 않을 것이라 본다. 항체 검사가 꼭 필요한지는 논란이 있지만 조용히 전파되는 코로나19의 정체를 밝히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최근 문재인 대통령과 빌 게이츠 빌앤드멀린다게이츠재단 이사장이 코로나19 대응을 논의한 통화 가운데 생소한 이름이 언급됐다. 바로 글로벌헬스기술연구기금(Research Investment for Global Health Technology)의 머리글자를 딴 ‘라이트(RIGHT)펀드’. 저개발국 감염병 해결책을 찾기 위해 한국 보건복지부(250억 원)와 바이오기업(125억 원), 빌앤드멀린다재단(125억 원)이 공동 투자한 민관 협력 기금으로 2018년 7월 출범했다. 현재 국내 5개 기업이 이 펀드의 지원으로 연구 중이다. 왜 라이트펀드는 글로벌 제약사를 가진 바이오 강국이 아닌 한국을 선택했을까. 김윤빈 라이트펀드 대표는 한국 기업의 약점으로 평가됐던 추격자(Fast follower) 모델이 오히려 강점으로 통했다고 설명했다. 바이오산업은 추격자 모델로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원천 기술과 거대 자본이 필요한 신약 개발 대신 제네릭(복제약)과 제형 및 용법을 달리한 개량 신약에 집중했다. 김 대표는 “한국 기업이 후발 주자로서 개발한 기술이 저개발국 백신 지원에 경쟁력이 있다”고 했다. 저개발국은 백신을 구매할 경제력이 없다. 의료진은 부족하고 유통시설도 갖춰지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 바이오기업은 효율적인 생산 공정으로 약의 단가를 낮추거나 간단한 투약이 가능하도록 개선한 약, 유통 기한을 늘린 약을 만드는 데 경쟁력이 있다. 저개발국에 보급할 백신에 꼭 필요한 기술이다. 김 대표는 “이미 개발된 약이 있어도 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접근성을 보장하는 기술도 신약 개발만큼 혁신적”이라고 평가했다. 선도자(First mover)를 따라가는 과정에서도 혁신은 생겨나는 것이었다. 한국의 정보통신기술(ICT)도 그 이유였다. 코로나19 사태에서 ICT와 결합한 진단검사는 정확하고 신속했다. ICT는 슈퍼 전파자를 찾아내는 등 역학조사에도 활용됐다. 라이트펀드는 한국 ICT와 의료기술이 접목되면 저개발국의 감염병 환자 발생 추이를 예측하고, 맞춤형 약을 추천하는 등 효과적인 공중보건 플랫폼이 나올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한국의 사회 시스템은 대부분 민관 협력으로 움직인다. 가난한 나라는 공공과 민간의 자본을 모아 될성부른 떡잎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경제 개발을 했는데 아예 사회 시스템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빛과 그늘이 있는 방식이지만 감염병 연구에는 정석이라고 한다. 이번에도 한국은 코로나19 치료제와 백신 개발을 지원하는 민관 합동 범정부 지원단을 구성했다. 김 대표는 “감염병 연구에 대한 투자는 보험 들기와 같아 정부와 민간 기업의 협업이 중요하다”고 했다. 민간은 감염병 유행이 끝나면 물거품이 될 백신 개발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기 망설인다. 차 사고가 나지 않아도 보험료를 붓는 것처럼 혹시 모를 막대한 피해를 대비해 정부가 보험료를 내줘야 기업의 리스크가 줄어든다. 김 대표가 언급한 추격자의 빠른 적응력, ICT 경쟁력, 민관 협력 시스템 등은 한국의 코로나19 대응에서도 통했다. 코로나19 이후에도 똑같은 성공 법칙이 통할지, 뉴노멀 위기에서 변칙이 통한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하지만 이런 성공을 경험하기 이전과 이후 우리 사회가 달라질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정부가 코로나19 생활치료센터 안에 오늘, 내일 사전투표소를 설치하는 데 이어 15일 선거 당일 자가 격리자가 일반 유권자와 시간과 동선을 달리해 투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4·15총선에서 코로나19 확진 환자와 의료·지원인력 900여 명, 자가 격리자 5만1836명(8일 기준)의 투표권이 실종될 위기였는데 뒤늦게나마 대책을 마련한 것이다. 이번 총선은 대규모 감염병 사태 속에서 치르는 첫 선거다. 정부는 유권자들이 감염을 두려워해 소중한 한 표를 포기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방역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특히 사전투표, 본투표, 개표에 이르는 과정에 사람이 몰릴 수밖에 없다. 자칫 이번 총선이 집단 감염의 온상이 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번 선거에서 발열이나 기침 증상이 있는 투표자나 자가 격리자는 일반 기표소와 거리를 두고 별도로 설치한 임시 기표소에서 투표를 한다. 특히 자가 격리자의 경우 투표소를 오가는 동안 밀접 접촉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동선을 통제하고, 투표 대기 시간 동안 거리 두기 간격도 충분하게 해야 한다. 투표자 간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는 한편 투표소 및 개표소 방역도 빈틈이 없어야 할 것이다. 선거일 내내 투·개표를 돕는 투·개표 사무원과 투·개표 참관인의 안전 관리에도 결코 소홀해서는 안 된다. 비례정당이 난립해 길어진 투표용지 탓에 밤새워 일일이 손으로 개표해야 할 개표 사무원과 참관인만 8만5000여 명이다. 밀폐된 공간에서 오랜 시간 작업이 이뤄지는 만큼 면밀한 대비가 필요하다. 방역당국뿐만 아니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행정안전부 지방자치단체도 방역의 둑을 지킨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
우리가 의료비 부담 없이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누리는 줄은 알았다. 그런데 이 정도였나. 코로나19 사태는 한국 의료시스템이 세계 최고 수준임을 새삼 깨닫게 해줬다. 위기에서 진짜 실력이 드러나듯, 바이러스가 각국 의료시스템에 등수를 매기고 있다. 한국 코로나19 방역의 핵심은 신속한 대량 진단을 통한 환자 치료와 접촉자 격리다. 어제까지 누적 검사 수는 무려 39만5194건. 이런 대량 진단은 신종인플루엔자, 메르스를 거치며 유전자 증폭(PCR) 진단산업이 발달한 덕분에 가능했다. 검체 채취-검사-폐기에 이르는 표준화된 기술이 보급됐고 훈련된 인력도 양성됐다. 이런 뛰어난 진단 능력이 없었다면 국경 폐쇄도, 도시 봉쇄도 않는 ‘민주주의 방역’은 실패했을 것이다. 진단 능력이 환자 폭증을 막아냈다면, 우수한 의료 인프라와 의료진이 코로나19 치사율을 1%대에 묶어뒀다. 지금까지 감염병 사태에는 수익을 따지지 않고 즉각 동원이 가능한 공공의료시스템이 효과적일 것으로 봤다. 이번에 한국이 그 상식을 깼다. 한국의 의료 인프라는 전적으로 민간에 의존한다. 전체 병의원 중 95%를 차지하는 민간 병의원은 시설 및 서비스 경쟁을 벌여 왔다. 의사는 실력으로 선택받는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의료진이 국가적인 보건 위기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반면 공공의료의 모범이었던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에선 사망자가 속출했다. 민간 바이오기업, 병의원과 의료진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토양은 역설적으로 건강보험이라는 공공 재원이었다. 만약 건강보험이 코로나19 진단검사비를 부담하지 않는다면 그 비싼 검사를 누가 선뜻 받겠는가. 수요가 창출되지 않으면 이를 개발한 회사는 막대한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건강보험은 민간 기업이 ‘안전한 도전’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마찬가지로 병원비가 비싸면 환자들은 아파도 가급적 병원을 가지 않는다. 건강보험이 진료비를 통제하니 환자들이 쉽게 병원을 찾고, 의사는 많은 임상 경험을 축적할 기회를 얻었다. 낮은 수가를 보전하기 위해 ‘3분 진료’ 같은 부작용이 나타났지만 덩달아 한국의 의료 경쟁력이 커진 것도 사실이다. 결국 한국의 의료 경쟁력은 민관 협력, 곧 공공성과 효율성이 조화를 이뤄 낳은 결과라 할 수 있다. 코로나19에 급습당한 대구의 경우 민간 의료가 공공 의료로 순식간에 전환됐다. 민간 병원인데 코로나19 전문병원을 자청한 대구동산병원. 계명대 캠퍼스 내로 이전하면서 마침 비어 있던 원래 병원의 수백 병상을 통째로 내놓았다. 이곳으로 각지에서 의료진이 달려왔다. 이성구 대구시의사회장은 “관군이 밀리니 의병이 모인 것”이라며 “공공은 공공성이 있고, 민간은 이윤만 추구한다는 이분법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위기에서 민간 바이오기업은 혁신의 씨앗을 심었고, 드라이브스루 검사 같은 의료진의 창발성이 발현됐다. 정부가 그 덕을 봤다. 이 위기가 지나더라도 민간 기업을 옥죄는 좀스러운 규제도 풀어주고, 목숨을 걸고 감염병과 싸운 의료진이 자부심을 갖도록 대우했으면 한다. 그래야 다음 감염병이 창궐해도 국민 건강을 지켜낼 수 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모두 각자 위치에서 번호!’ ‘하나, 둘, 셋…57, 58 번호 끝!’ 모두 100명이 넘어야 하는데 거기까지였다…. 나는 보이지 않는 동기와 후임병들의 이름을 미친 듯이 불러대기 시작했다.” 천안함 생존 장병인 전준영 씨(33)의 기억 속에 박제된 2010년 3월 26일 폭침 직후 순간이다. 그날 이후 전 씨는 예전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천안함 10주년인 올해 1월부터 그는 같은 아픔을 겪는 천안함 생존 장병 58명을 찾아다녔다. 이 가운데 17명을 인터뷰해 그들의 삶을 추적한 책 ‘살아남은 자의 눈물’을 썼다. 다음 달 초 출간된다. ▷천안함 생존 장병들은 지난 10년간 몸과 마음에 새겨진 상처가 덧나고 곪았다고 증언했다. 국가로부터 치료와 재활을 제대로 받지 못해 장애를 얻었고, 전우를 잃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 밤마다 흐느꼈다. 천안함 생존 장병 중 33명이 전역했는데 이들 중 10명만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한 달 전상 수당은 2만3000원. 나머지는 덜 다쳤다는 이유로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해 그조차도 받지 못한다. ▷특히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가 심각했다. 2년 전 발표된 김승섭 고려대 교수팀의 ‘천안함 생존자 건강 실태조사’에 따르면 조사에 응한 생존 장병 24명 중 절반이 자살을 심각하게 생각했고, 21명이 PTSD를 진단받거나 치료를 받았다. 이로 인해 정상적인 일상을 유지하기 어려웠고 취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이런 숨어 있는 질병은 각종 지원에서 배제된다. ▷천안함 폭침을 두고 두 동강 난 우리 사회에 이들을 냉소로 대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김정원 씨(31)는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전우를 버리고 살아 돌아온 놈”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김윤일 씨(32)는 “패잔병이니 사형시켜야 한다는 댓글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대부분 천안함 생존 장병이란 사실을 가급적 숨기고 산다고 한다. “진실을 숨기려 말 맞추기를 했다” “군에서 거짓말하라고 지시받았다”는 끈질긴 의혹의 눈초리도 견디기 힘들었다. ▷천안함 폭침이라는 국가적인 재난의 피해자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실력이 형편없었다. 그 이후라고 달라졌을까. 전 씨는 책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 “천안함 생존 장병들이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서”라고 말했다. 짐작하다시피 책 제목 ‘살아남은 자의 눈물’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빗댄 것이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미움 받고 아프지 않으려면 우리가 따뜻하게 품어줘야 한다. 우리는 이들의 스러진 젊음과 희생에 빚을 지고 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국민 60%가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집단 면역이 형성될 수 있다.” 패트릭 밸런스 영국 수석과학보좌관은 최근 코로나19 환자 상당수가 가볍게 앓고 지나가므로 서서히 유행하도록 해 ‘집단 면역’을 만들자는 충격적인 방역 전략을 주장했다. 그 후 영국 임피리얼칼리지 연구진은 이런 논리의 위험성을 경고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코로나19 확산을 방치한다면 영국에서 51만 명이 사망한다는 것. “강력한 통제를 하면 사람들의 삶이 혼란스러워진다”던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도 입장을 바꿔 23일 사회적 거리 두기를 강제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면역이란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완쾌돼 항체를 갖게 됐다는 뜻이다. 집단 면역은 면역을 획득한 개인이 늘어나면 바이러스가 옮겨 다닐 숙주를 잃어버려 사라지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 용어는 1930년대 홍역이 자연적으로 감소한 현상을 두고 처음 사용됐다. 홍역을 앓고 면역을 획득한 어린이들이 늘어나자 발병률이 급감한 것이다. 예방접종은 인위적으로 집단 면역을 만드는 방법이다. 1963년 예방접종이 도입된 홍역은 거의 사라졌다가 근래 들어 세계적으로 다시 유행했다. 2000년대 들어 홍역 백신에 대한 가짜뉴스가 퍼지면서 예방접종률이 현저히 떨어진 탓이다. ▷국내서도 코로나19 집단 면역이 처음 거론됐다. 민관 전문가로 구성된 신종감염병 중앙임상위원회는 23일 기자회견에서 “인구 60%가 면역을 가졌을 때 코로나19 확산을 멈출 수 있다”(오명돈 위원장·서울대 교수), “기저질환이 없는 30대 이하 젊은이들은 치명률이 낮다. 일단 (이들에게) 집단 면역이 형성되면 고령자 등이 안전해질 수 있다”(신형식 국립중앙의료원 교수)고 밝혔다. 중앙임상위가 그동안 정부 정책에 미친 영향 때문에 정부가 방역 완화로 선회하려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제기됐다. 부랴부랴 정부는 24일 “우리 인구 70%가 감염되고 치명률 1%라 치면 35만 명이 사망한다”며 선을 그었다. ▷중앙임상위가 그런 견해를 밝힌 것은 확진자를 찾아내 격리시키는 데 총력을 투입하는 현 방식으로는 궁극적인 사태 종식은 요원하며, 집단 면역 생성은 더 늦어질 수밖에 없는 의학적인 딜레마를 설명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일상과 방역의 균형에 대한 질문을 던진 셈이다. 하지만 백신이 없는 상태에서의 집단 면역론은 자칫 ‘더 많은 사람을 빨리 감염시켜야 사태가 종식된다’는 위험한 논리로 해석될 수 있다. 코로나19는 변이를 거듭하는 바이러스다. 섣부른 방역 정책 수정은 환자 폭증을 불러올 것이다. 무엇보다 집단 면역을 위해 먼저 아파도 되는 생명이 있을 수 없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한국 학생이 외국 학교로 전학하거나 진학하면 한 학년을 건너뛰거나 한 학기를 더 다녀야 한다. 외국 학생이 한국에 와도 마찬가지다. 한국만 3월에 새 학년을 시작하는 독특한 학기제를 운영하는 까닭이다. 미국 중국 유럽 등 북반구 나라들은 긴 여름방학을 보내고 보통 9월 새 학년을 시작한다. 호주는 2월 개학이지만 남반구에 위치하므로 가을학기제다. 그나마 일본이 봄학기제인데 3월이 아닌 4월에 시작한다. ▷전국 유치원과 초중고교의 개학일이 4월 6일로 다시 미뤄진 가운데 9월 신학기제 도입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코로나19가 쉽게 물러날 기세가 아니라 4월 개학도 장담할 수 없다. 이참에 국제 표준에 맞춰 9월에 새 학년을 시작하는 가을학기제 도입을 검토해 보자는 청와대 국민청원도 여럿 올라왔다. ▷갑오개혁 시기인 1895년 발표된 교육법령 ‘한성사범학교규칙’에 따르면 새 학년은 원래 7월부터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을 따라 4월, 미군정기에는 미국을 따라 9월에 새 학년을 시작했다가 1950년 다시 4월 학기제로 돌아왔다. 1962년 4월에서 한 달 앞당긴 현재의 3월 학기제가 도입됐다. 겨울방학이 가장 추운 12∼2월로 앞당겨지면 난방비 예산이 절약된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역대 정부는 1997년, 2007년, 2015년 세 차례 9월 학기제 시행을 검토했지만 58년 동안 굳게 뿌리를 내린 학기제를 바꾸려니 사회적 비용이 커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났다. 학사 및 입시 일정을 조정하면 애꿎게 피해를 보는 학생이 발생한다. 시행 첫해에는 초등 신입생이 두 배 가까이 는다. 이에 따른 시설과 교사 확충, 입시 조정 등에 비용이 드는데 12년간 최대 10조 원이라는 연구도 있다. 기업 채용 및 공무원 시험 등 고용에도 파장을 미친다. 2007년 교육인적자원부 차관이던 이종서 대전대 총장은 “난제 중의 난제라 교육부 안에서 초안을 만드는 데 이르지 못했다”고 했다. ▷장기화된 코로나19 사태가 학기제 변경의 난제를 풀 실마리를 제공한 측면이 있다. 모든 학년, 모든 학생이 한 학기를 쉬게 되면 3월과 9월 각각 신학기를 시작한 학생들이 섞여 공부하는 일이 없게 된다. 초등 신입생이 폭증하거나, 어느 해 고3만 수능 일정이 바뀌는 혼란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모든 청소년이 6개월 늦게 사회에 진출하는 등 사회적 시계가 한꺼번에 조정되므로 혼란과 반발이 따를 것이다. 효과와 비용을 차분히 따져봐야 할 일이지만 전례 없는 감염병 사태가 학기제 변경 논의의 수문을 연 것은 사실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마스크 5부제 시행 첫날인 9일. 약국마다 혼란은 여전했다. 마스크 공급 부족에 따른 고육지책이다 보니 마스크를 사기까지 여간 까다롭지 않다. 구매 요일을 착각하거나, 품절 안내를 보고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그 정책적 효과는 차차 검증되겠지만 마스크 대란이 쉽게 진정될 것 같진 않다. 마스크 배급제의 원조는 대만이다. 한국에 넘어오며 홀짝제가 5부제로 변형됐을 뿐. 우리의 사나운 민심과는 달리 대만 언론들은 ‘대만의 국력을 보여줬다’고 평가하고 있다. 꼭 닮은 제도인데 무엇이 달랐나. 대만은 코로나19 사태 초기인 1월 24일 마스크 해외 수출을 금지했고 1인당 구매 수량을 일주일에 성인 3장씩, 아동 5장씩으로 제한했다. 막상 정부가 나서자 마스크 생산량이 줄어든다. 결국 시행 열흘 만에 건강보험증 끝자리에 따라 홀수일, 짝수일을 나눠 일주일에 성인 2장씩, 아동 4장씩만 구매를 허용하는 추가 대책을 발표했다. 여기까지는 섣부른 정부 개입이 실패로 끝나는 뻔한 전개였다. 한 달 뒤 반전이 일어난다. 하루 390만 개였던 대만의 마스크 생산량이 820만 개로 뛰었다. 다음 달이면 1300만 개로 늘어나는데 대만 인구의 절반이 넘는 수준이다. 일주일 구매량을 1인당 5장으로 늘릴 것이라고 한다. 이는 마스크 증산을 유도한 정부의 인센티브 덕분이다. 정부는 2억 대만달러(약 80억 원)를 들여 마스크 제조업체에 생산설비 60대를 기증했다. 민간 설비업체 30곳, 정부 연구소 3곳이 협업해 한 달 만에 60대를 뚝딱 만들었다. 앞으로 예산 9000만 대만달러(약 36억 원)를 더 투입해 30대를 추가 지원한다. 군인을 마스크 제조업체에 파견해 인력 부족과 비용 부담도 덜어줬다. 우리 정부는 마스크 제조 인력이 아니라 감시 인력을 내려보냈다. 마스크 대란이 끝나면 빚더미가 될 생산설비는 자비로 사야 하고, 그마저도 구하기가 어렵다. 마스크 구매 단가를 올린다고 했으나 세계적인 마스크 대란 속에 원재료 값과 인건비가 상쇄될지 모르겠다. 디테일의 차이는 더 있다. 대만 정부는 마스크 생산량을 전부 사들여 구입가보다 판매가를 낮춰 팔았다. 개인은 장당 200원이면 살 수 있다. 반면 우리는 장당 1500원에 사야 한다. 한국 정부는 900∼1000원에 구입한다. 다시 도매업체→소매약국을 거치므로 폭리라고는 볼 수 없으나 뒤늦은 시행으로 이미 단가가 오를 대로 올랐다. 대만 정부는 전시 상황에 준해 긴박하게 움직이며 정책의 디테일을 솜씨 있게 다뤘다. 여기에 민간이 호응했다. 우리 정부는 ‘감염병과의 전쟁’을 선언하고도 전시 대응을 하지 않았다. 마스크 생산량 증대가 관건인데 후방 기지라던 마스크 제조업체에 지원군도, 보급품도 도착하지 않았다. 심지어 물자 배분도 민간 기관인 약국에 맡겼다. 공적판매라는데 이윤 없이 팔 수 있는 주민센터는 제외했다. 성난 민심을 피하고 보려는 비겁함으로 비친다. 마스크 5부제를 결정한 5일 국무회의. 노란색 민방위복을 입고 보건용 마스크를 낀 채 참석한 국무위원들을 보며 궁금해졌다. 단 한 명이라도 직접 마스크를 돈을 내고 사 본 적이 있을까. 그 대답에서 양국 마스크 정책의 디테일 차이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지금 동성로 상황입니다. 이곳에 계신 자영업자분들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21일 대구 맛집을 소개하는 페이스북 ‘대구 맛집일보’에는 텅 빈 대구 동성로 거리를 촬영한 동영상이 올라왔다. 페이스북 운영자는 식당들이 남은 식자재라도 처분할 수 있게 돕자고 호소했다. ‘유창동 고깃집에 고기 500인분 남았다’ ‘동성로 연어집에 연어 사시미 70접시가 남았다’는 식으로 손님이 끊긴 식당을 소개하고 평소보다 싼값에 팔도록 했다. 잠시 후 식당을 찾는 발길이 이어졌다. 매진 행렬 속에 제값보다 더 주고 사가는 손님도 많다고 한다. 따뜻한 위로를 받은 식당 주인들이 다시 용기를 내고 있다. ▷코로나19로 일상이 마비되면서 자영업자들의 고통이 가중되자 대구 서문시장과 중구 서구 등 일부 건물주가 상가 임대료를 받지 않기로 했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시작된 자발적인 임대료 인하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서울에서도 남대문시장 내 점포 33%(4000여 곳)가 임대료를 3개월간 20% 낮추기로 했다. 점포 4300곳이 자리한 동대문종합상가도 임대료와 관리비를 20% 인하한다. ▷우리는 사회적인 재난 때마다 환난상휼(患難相恤·어려운 일이 생기면 서로 돕는다)을 실천했던 DNA가 있다. 2007년 12월 충남 태안 만리포 앞바다에서 유조선과 바지선이 충돌해 기름이 바다를 뒤덮었다. 겨울바람을 맞으며 돌과 모래를 흡착포로 일일이 닦은 자원봉사자 123만 명이 기적을 만들었다. 바다가 제 빛깔을 되찾았다. 18일 17주기를 맞은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당시에도 전국에서 온정의 손길이 답지했다. ▷1960년대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정착한 펜실베이니아주 로세토 지역. 이 마을 사람들은 술, 담배를 즐기고, 소시지를 자주 먹는데도 유독 심장병 발병률이 평균보다 낮았다. 스튜어트 울프와 존 브룬 박사는 30년간 추적 조사를 통해 가족과의 이별, 경제적인 파산 등 개인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이웃사람들이 따뜻한 도움을 주는 문화가 심장병 발병률을 낮춘 원인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공동체가 나를 지켜 주리란 신뢰가 있을 때 개인은 건강해진다는 것, 바로 ‘로세토 효과’다. ▷감염병과 같은 사회적인 재난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더욱 가혹하다. 취약계층은 감염도 걱정이지만 당장의 생계도 직접적 타격을 받는다.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이 먼저 쓰러진다. 동네 곳곳 자영업자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불안정한 일자리 종사자가 그러하다. 홀몸노인은 끼니조차 위태로워졌다. 함께 고통을 나눠 서로의 건강을 지켜내는 ‘로세토 효과’가 절실한 지금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2009년 6월 세계보건기구(WHO)는 멕시코에서 시작된 신종인플루엔자A(H1N1)에 대해 경보단계 최고 등급인 ‘대유행(Pandemic)’을 선언했다. 1년 2개월이 지나 WHO가 대유행 종식을 선언하기까지 214개국을 휩쓸고 1만8449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이렇듯 막강한 전염력을 가진 신종플루가 종식된 건 백신 덕분이었다. 그해 9월 신종플루 백신 대량 생산에 성공한 호주가 대대적인 예방접종을 처음 시작했고 미국, 유럽, 일본, 한국이 뒤를 이었다. ▷당시 미국이 호주에 신종플루 백신 3500만 도스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던 사실이 공개됐다. 피터 나바로 미국 백악관 무역제조업 정책국장이 23일 폭스뉴스에 출연해 “이런 (감염병) 위기 때에는 동맹이 없다”며 “신종플루 사태 당시 우방인 호주, 영국, 캐나다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말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건 사적 관계에서는 미덕일지라도 공적 관계, 더욱이 냉혹한 국제사회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마스크를 놓고도 미중 간에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나바로 국장은 “시급한 문제는 N95 마스크”라며 “중국이 마스크에 대한 수출을 규제하고 있고 중국 내 미국 마스크 공장을 국유화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코로나 치료에 필요한 물품뿐 아니라 필수 의약품까지 공급망을 해외로 지나치게 많이 이전했다”며 뒤늦은 후회를 했다. ▷중국의 우방인 북한, 러시아는 코로나19 사태 초기 국경을 닫아버렸다. 우리 정부는 중국에 마스크 보내기 운동을 지원하며 위로했고, 중국으로부터의 입국을 막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한국에서 확진자가 급증하자 중국에서는 한국을 한심하게 여기는 듯한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관영매체 환추(環球)시보는 사설에서 “한국, 일본, 이란, 이탈리아의 방역 통제 조치가 부족하다”고 훈수를 뒀다. 한국의 방역이 후베이(湖北)성 외에 다른 중국 성(省) 가운데 감염 상황이 중간 정도인 곳의 방역 조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중국 공항들은 한국으로부터의 바이러스 ‘역(逆)유입’을 우려한다고 하고, 주한 중국대사관은 중국인 유학생에게 한국 입국 연기를 권고했다. ▷국제사회가 국익이 달린 치열한 전쟁터라는 점에서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 “중국의 어려움이 우리의 어려움” 등 당청에서 쏟아지는 발언들이 너무 안이하게 들린다. 친한 친구라면 병문안도 가고, 병원비도 보태는 것이 선(善)한 행위이다. 하지만 국가 대 국가의 관계는 다른 가치가 앞선다.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절대 선(善)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메르스) 학습효과가 있기 때문에 훨씬 (대응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 성동보건소를 찾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코로나19 대응을 물은 데 대한 박원순 서울시장의 대답이다. 신종인플루엔자, 메르스 취재를 상기해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단, 주어가 바뀌었다. 정부가 아니라 민간이 잘하고 있다. 2015년 38명이 사망한 메르스 사태 이후 감염병 예방법이 개정됐다. 정부, 지방자치단체, 의료기관 각각의 역할이 정리됐다. 감염병 환자가 역학조사와 격리조치에 협력하도록 강제됐다. 환자 동선과 진료한 병의원도 공개해야 한다. 이번에 전국적인 방역체계가 즉각 가동됐던 이유다. 메르스 학습효과는 거기까지였다. 정부의 대응은 한 템포씩 늦었다. 확진 환자 11명이 중국 후베이(湖北)성 우한 입국자다. 대부분 지난달 24∼27일 설 연휴 직전 입국했으나 정부는 4일에야 입국을 제한했다. 우한 교민 수송은 결정을 미루다 중국 눈치 보기 논란을 자초했고, 이들을 격리할 시설을 번복해 지역의 반발을 불렀다. 그럼에도 코로나19 방역이 선방하고 있다면 그건 민간의 힘이 크다. 태국 여행을 다녀온 16번 환자. 보건당국은 이 환자를 중국을 방문한 적이 없다며 검사 대상에서 제외해 확진 판정이 늦어졌다. 그동안 광주21세기병원은 코로나19 감염이 의심된다는 소견서를 발급했고 환자를 이송받은 전남대병원은 음압병실에 격리하고 끈질기게 검사를 요구했다. 이후 보건당국은 의사 재량에 따른 검사를 허용했다. 덕분에 숨은 환자가 드러났다. 고려대안암병원 응급실 의사가 컴퓨터단층촬영(CT) 사진을 보고 해외에 간 적도, 환자와 접촉한 적도 없는 29번 환자를 찾아낸 것이다. 하마터면 지역사회 ‘슈퍼 전파자’가 될 뻔했다. 코로나19 환자 2명(3번, 17번)을 완치시킨 명지병원은 민간병원이다. 2013년 국가지정 입원격리병상이 됐다. 감염병 환자가 입원하면 외래환자가 줄기 마련이라 민간병원은 음압병상을 기피한다. 이왕준 이사장은 13일 통화에서 “누구라도 해야 한다는 심정으로 맡았다”고 했다. 이제 감염병 치료 경쟁력을 갖게 됐고 직원들의 자부심도 크다. 전쟁터라면 야전병원인 선별진료소는 전국 548곳에 설치됐는데 절반 이상이 민간 의료기관이다. 병원 내 감염을 예방하려는 자구책일지라도 인프라와 실력이 없으면 차릴 수 없다. 감염을 무릅쓰고 야전을 누비는 의료진은 어떠한가. 우한 교민 곁에 남은 의사, 충남 아산 격리시설에 자원한 의사, 방역복을 입고 음압병상을 지키는 간호사를 보면 절로 숙연해진다. 정작 이 이사장은 시민들에게 공을 돌렸다. 명지병원이 코로나19 환자 입원을 공지했으나 입원 환자 모두가 남았다(내원 환자는 줄었다). 환자들의 신뢰에 울컥했다고 한다. 인근 주민들은 의료진을 응원하는 편지와 함께 간식을 보내왔다. 메르스 당시 병원이 텅텅 비고, 지역주민이 외면했던 것과 상반된다. 마스크 착용과 손 씻기 같은 개인위생수칙 준수율도 크게 개선됐다. 아산·진천 주민과 우한 교민의 상처를 보듬은 것도 결국 성숙한 시민의식이었다. 국민 복(福)이 많은 정부라고 생각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5일 세네갈 수도 다카르. 중국 후베이(湖北)성 우한에서 공부하는 유학생 13명의 가족들이 “우리 아이들을 대피시키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라며 울먹였다. 세네갈 대통령이 “가난한 서아프리카 국가들이 큰 나라들과 비슷한 긴급조치를 취할 수 없다”고 선언하자 가족들이 구출을 호소한 것이다. 우간다 잠비아 수단 등도 자국민 수송을 포기했다. ▷아프리카에서는 아직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우한 폐렴) 확진 환자가 나오지 않았다. 세계 시장에 편입이 더딘 아프리카는 자생적인 감염병이 아니면 그 유행을 용케 비켜가곤 했다. 2003년 사스(SARS) 확진 환자는 1명, 2015년 메르스(MERS) 확진 환자는 5명이었다. 하지만 중국이 ‘일대일로(一帶一路)’를 추진하는 과정에 발생한 이번 우한 폐렴은 예전과는 그 위험 정도가 다르다. 중국 기업이 2005∼2018년 아프리카에 투자한 돈은 약 3000억 달러. 현재 아프리카에는 중국인 100만 명이 거주하고 있고, 중국에서 공부하는 아프리카 유학생은 8만여 명이다. ▷자국민을 어렵게 데려온다 한들 진단할 능력도 부실하다. 지난달 코트디부아르에서 우한 폐렴 의심 환자가 발생했을 때 의료진은 약 7000km 떨어진 프랑스 파리로 바이러스 검체를 보냈다. 아프리카 내 우한 폐렴 진단을 내릴 수 있는 기관은 단 6곳. 격리·치료시설 등 보건의료 인프라도 열악하다. 의료진이 말라리아 홍역 등 다른 감염병과 총력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방역망이 뚫리면 우한 폐렴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수 있다.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들도 떨고 있긴 마찬가지다. 아시아의 확진 환자는 싱가포르(43명) 태국(32명) 말레이시아(18명) 베트남(14명) 등에서 나왔다. 반면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등 상대적으로 더 가난한 나라들은 중국 접경국임에도 확진자가 없다. 진단 및 검역체계가 미흡해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된다. ▷‘인천에는 날마다 20명의 사망자가 생겨 발인 없는 날이 없고, 각 절에는 불시에 대번망(大繁忙)을 이룬다….’(매일신보·1918년 11월). 스페인독감이 한국에 상륙했던 1918년 인구의 38%인 288만 명이 감염돼 14만 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2020년 한국, 우한 폐렴이 상륙했다. 미국 일본 프랑스처럼 전세기를 띄워 자국민을 실어올 수 있는 나라가 됐고, ‘PCR 기법’ 시약을 다른 나라보다 앞서 개발해 감염 여부를 신속히 진단하는 등 첨단 방역 시스템으로 대응하고 있다. 국력에 따라 그 국민은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마침내 진단받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우한 폐렴)의 출현을 처음 세상에 알린 34세 안과 의사 리원량(李文亮) 씨는 지난달 30일 자신의 우한 폐렴 감염 사실을 웨이보에 공개했다. 중국 우한(武漢)의 중심병원에서 일하는 그는 한 달 전 폐렴 환자 7명에게서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와 유사한 바이러스가 검출됐다는 보고서를 봤다. 감염병이 우려됐던 그는 의과대학 동창들과의 위챗 대화방에 이를 공유하고 주의를 당부했다. ▷7일 결국 리 씨가 세상을 떠났다. 5세 아들과 임신한 아내를 남겨둔 채. 중국 정부가 발병 사실을 은폐하기 급급할 때 홀로 진실을 알린 영웅의 죽음에 중국민은 슬픔에 잠겼다. 그가 ‘제2 사스’를 경고한 뒤 공안이 들이닥쳤다. 사실이 아닌 얘기를 퍼뜨렸다는 잘못을 인정하는 훈계서에 서명을 하고서야 풀려났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서 의사 리외가 페스트 가능성을 제기하자 “이 병이 페스트인 것처럼 대응하는 데 책임을 져야 한다”며 추궁당하는 장면과 겹친다. ▷바이러스와의 전쟁, 그 최전방에서 싸우는 건 의료진이다. 시에라리온에서 첫 에볼라 환자가 발생하고 4개월 만인 2014년 9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에볼라바이러스의 염기서열을 분석한 논문이 실렸다. 그 덕분에 에볼라를 무찌를 무기가 신속하게 개발됐고, 대유행을 막아냈다. ‘우리는 그들의 넋을 기린다.’ 이 논문 말미에는 셰이크 후마르 칸 박사를 비롯한 시에라리온 연구팀 5명에 대한 추모사가 실렸다. 의사와 간호사인 이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환자 78명의 혈액 샘플을 모았고, 이 과정에서 에볼라에 감염돼 논문 출판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중국 정부는 리 씨가 경고하기 전에 우한 폐렴 발생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최전방에 선 의료진에게 침묵을 강요해 초기 방역에 실패했고 이는 더 큰 재앙으로 돌아왔다. 리 씨의 죽음에 공명한 슬픔과 분노가 이제 ‘시진핑 체제’를 향하고 있다. 영국 BBC는 중국 정부가 ‘정부가 사과해야 한다’ ‘언론의 자유를 원한다’는 등 해시태그(#)가 달린 SNS 글을 삭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리 씨는 격리치료 중에 중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진실이 중요하다. 건강한 사회는 하나의 목소리만 있으면 안 된다”고 했다. 바이러스와 맞닥뜨린 우리 몸의 면역세포는 이 바이러스와 싸울 항체, 즉 지원군을 긴급하게 늘려 방어한다. 사회로 치면 최전방에 선 의사들이 바이러스 침입을 알리면 정부는 공중보건 시스템을 가동해 지원해야 한다. 우한 폐렴이 강한 것이 아니라 중국 사회가 건강하지 않았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현 정부에서 법령으로 설치돼 장관급 위원장을 가진 위원회는 5곳. 이 중 공정거래위원회 국민권익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 3곳의 수장이 여성이다. 공교롭게도 최근 뉴스의 중심에 세 명이 차례차례 소환됐다. 아무래도 여성 리더십을 유심히 관찰하게 된다. 실력으로 승부하기를, 위기에 맞서 ‘우리가 남이가’ 같은 관행과 타협하지 않고 원칙을 지키길 기대하면서. 박은정 국민권익위원장은 석 달 전 이 칼럼에서 다룬 적이 있다. 박 위원장은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가 검찰 수사를 받는 것과 관련해 “이해 충돌로 볼 수 있으며 직무 배제도 가능하다”고 밝혔다. 법대로 유권해석을 내린 권익위만이 상식의 힘을 보여주며 국민을 위로했다고 썼다.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은 ‘타다 금지법’을 두고 정부 내에서 유일하게 소비자 편에 섰다. 렌터카의 운전자 알선을 막아 타다를 콕 집어 금지한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안에 대해 “경쟁 촉진 및 소비자 후생 측면에서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냈다. 당정청의 전방위 압박에 “경쟁 당국의 의견일 뿐 법안 반대가 아니다”라며 바로 물러서긴 했다. 설령 빈말일지라도 택시업계의 위력에 밀린 소비자의 편익을 상기시킨 것은 공정위뿐이었다. 두 위원장의 발언은 학자로서의 소신, 삶의 궤적과 일치했다고 본다. 가장 최근에는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이 소환됐다. 청와대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검찰 수사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 침해를 조사해달라’는 국민청원을 두 차례 공문으로 보내면서 뒤늦게 인권위가 조국 사태에 휘말렸다. 당초 인권위는 청와대의 공문을 받자마자 바로 반송했다. 인권위법은 익명·가명으로 제출된 진정은 각하하도록 되어 있는데 국민청원이 이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진정 요건을 문제 삼아 반송하는 형식을 취했으나 사실상 완곡한 거절이었다. 그런데 청와대가 9일 다시 국민청원을 이첩하면서 파장이 커졌다. 청와대가 직접 이를 공개하자 ‘내 편’이라 여겼을 인권단체가 인권위의 독립성을 침해했다고 반발했다. 청와대는 “착오로 송부돼 폐기 요청을 했다”고 수습했으나 인권위의 독립성은 이미 훼손됐다. 약자의 권리 보호를 위한 인권위 진정이 검찰 압박 수단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최 위원장은 줄곧 침묵을 지켰다. 뜻밖이었다. 그는 평생 차별과 싸운 인권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이다. 1991년 한국성폭력상담소를 설립하고 여자친구를 성폭행한 의붓아버지를 살해한 김보은-김진관 사건 등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했다. 진보진영이 외면한 탈북자 인권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정무적인 판단이 개입된 의도적인 침묵은 그가 그려온 삶의 궤적과는 거리가 있다. 조국 진정은 제3자를 통해 결국 접수됐다. 최 위원장의 인권위는 이번 진정을 각하 또는 기각해야 한다. 대다수 국민은 조 전 장관을 약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마음의 빚’을 진 사람이고, 그와 가족이 받게 될 수사의 공보준칙을 바꾼 사람이다. 최 위원장은 2018년 9월 취임 당시 “인권위의 독립성을 확보하려면 우리 스스로 그 필요성을 증명해야 한다”고 했다. 스스로 증명해야 할 때가 지금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