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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보수논객 전원책 변호사의 정치 비판서를 읽으며 몇몇 대목에서 공감하는 내용이 적지 않았다. ‘온전한 선의를 가진 권력자는 없다’라는 첫 장부터 그랬다. 정치학을 전공하고 오랜 시간 정치부 기자를 한 필자에게 누군가가 “정치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선한 권력은 없다”고 답변할 작정이었던 터다. “민주주의는 처음부터 없었다. 통치와 복종만이 있을 뿐이다. 정치는 그걸 민주주의로 각색한 거대한 사기극(詐欺劇)이다.” “만약 투표라는 형식으로 벌이는 선택의 결과를 ‘무지(無知)한 다수’가 좌우한다면 그런 민주주의를 찬양하다 못해 왜 우리는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가?” 그는 시종 민주주의 자체에 대해 도발적인 의문을 던진다. 투표, 즉 다수결로 정책이나 인물을 결정하는 민주주의는 ‘가난한 다수’가 주도할 수밖에 없다고 일갈한 그는 “가장 저급하지만 효과적인 대중조작 수단은 대중을 두 편으로 갈라서 한 편에서 다른 편을 공격하게 하는 ‘편 가르기’다”고 썼다. 그가 ‘잡초’라고 표현한 대중은 안타깝게도 ‘우상’으로 명명된 소수 권력의 끊임없는 조작 대상이다. 왜? 늘 빈자(貧者)의 수가 부자의 수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견해가 다른 부분도 있지만 중우(衆愚)정치와 포퓰리즘에 대한 강력한 경고, 또 대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차원에서 쓴 걸로 보이는 책의 내용을 장황하게 소개한 데는 물론 이유가 있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브렉시트(Brexit)가 전 세계에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 불확실하다는 것만 확실하다고 할 정도로 미지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엄습하고 있다. 그런데, 더 두려운 건 민주주의의 본산이자 선진국이라는 영국의 유권자 1741만여 명(51.9%)이 자신들도 어디로 갈지 모르는 길을 국민투표라는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택했다는 점이다. 세계화에 대한 저항, 양극화에 따른 분노와 불만의 표출, 신(新)고립주의, 국수주의, 이민과 난민에 대한 반감…. 브렉시트와 미국의 트럼프 열풍을 이해하기 위해 전문가들이 내놓은 키워드들이다. 한마디로 “우아하게 남 일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나부터 살고 보자”는 생존 심리라는 것이다. 대체로 동의한다. 다만 브렉시트 확정 후 영국 내 구글에서 두 번째로 많이 검색된 문장이 ‘EU가 뭔가요?(What is the EU)’이고 ‘EU를 떠나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등의 질문도 검색 상위에 올랐다니 머리가 더 하얘진다. 브렉시트에 찬성표를 던진 그들은 ‘합리적 무지’(복잡한 공적 사안을 깊이 이해하려 하지 않는 상태), 즉 무지한 다수였을까. 분명한 건 그들 중 상당수가 스스로 감정적 선택이 아닌 이성적 선택이라고 믿고 찍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모르긴 몰라도 양극화 실태를 포함해 우리나라의 사정이 영국보다 심하면 심했지 좋을 것 같지 않다. 많은 전문가가 1997년 외환위기 사태 때는 외과적 수술로 그나마 위기를 넘길 수 있었지만 지금은 핵심 장기들의 심각한 손상으로 위기 극복이 쉽지 않다고 우려하고 있다. 반세계화 보호무역주의로 대외 경제 환경은 더욱 나빠질 조짐이다. 어쩌면 작금의 경제 안보 위기는 대선이란 국민투표가 치러지는 2017년 정점에 다다를 수도 있다. 대선 승리를 위해 각 후보와 정당은 단순히 퍼주기 공약을 뛰어넘는, 나라의 명운이 걸린 양자택일 공약을 유권자들에게 던질 수도 있다. 한낱 잡초의 오만한 생각이겠으나 브렉시트 사태를 보며 시종 머리에서 맴돌고 있는 주제다. 어떤 상황이든 우리 국민은 역대 선거에서 발휘해온 ‘집단 지성’을 유지할 것인가.정용관 정치부장 yongari@donga.com}
2002년 대선을 1년여 앞둔 어느 날. 개신교계 원로인 강원용 목사(2006년 별세)가 당시 김대중(DJ) 대통령을 만났다. 강 목사가 “대선후보로 누구를 생각하느냐”며 넌지시 고건 전 총리 얘기를 꺼내자 DJ는 “그 사람은 안 돼요. 호남 출신이잖아요”라고 단박에 잘랐다고 한다. DJ의 비토(?)를 당한 고 전 총리가 다시 유력한 대선주자 반열에 오른 건 알려진 대로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정국이 계기가 됐다.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보여준 안정적 리더십에 따른 ‘고건 현상’은 2년 이상 지속됐다. 그러나 고 전 총리는 출마를 포기했다.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결론은 ‘당선 가능성’이었다. DJ가 내다본 호남 후보 한계론은 2007년 대선에서도 유효했다. 결정적 한 방은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이었다. 지금은 핵실험이 4차까지 이어져 둔감해진 부분이 있지만 당시의 충격은 엄청났다. 햇볕정책과 대북 포용정책을 견지해 온 진보정권의 연장은 불가능해 보였다. 고 전 총리는 진보정권의 틀을 넘어 합리적 보수까지 아우르는 ‘새로운 지평’을 모색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떨어지더라도 출마한다? 평생 대권욕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모를까, 고 전 총리로선 합리적 선택이 아니었다. 대선에서 패배하더라도 당을 다시 추스르고 다음 대선을 준비하면 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2012년이면 만 74세가 되는 나이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화려한’ 5박 6일 고국 방문 행보를 놓고 대선 출마 의지를 굳혔다는 해석이 많다. 그의 대선 출마는 상수(常數)로 봐야 한다는 거다. 필자의 생각은 좀 다르다. 세간의 관심은 “반 총장은 과연 대선에 출마할까”에 꽂혀 있지만 반 총장의 관심은 여전히 “과연 당선될까”에 쏠려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잃을 게 많으면 생각이 복잡한 법이다. 반 총장의 5박 6일은 대선주자로서의 당선 가능성을 정밀 탐색하는 ‘간보기’ 시간이었다고 보는 게 더 맞지 않을까. 마음껏 정치 행보를 해놓고는 출국 기자회견에서 언론의 과장 보도 운운하며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제가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 것도 그런 뜻으로 이해한다. 반 총장이 고 전 총리처럼 중도 하차할지, 끝까지 갈지를 지금 시점에서 말하는 건 무의미하다. 다만 분명하게 짚을 수 있는 건 현직 대통령과의 관계다. 고 전 총리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관계와 달리 반 총장과 박근혜 대통령의 관계는 ‘현재까지는’ 순항 중이다. 반 총장의 갑작스러운 일정 추가에 청와대는 헬기를 내줬고, 반 총장은 유엔 NGO 콘퍼런스에서 해외 순방 중인 박 대통령을 치켜세웠다. 반 총장이 잠재적 여권 대선주자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보수정권 재창출 기대 심리로 레임덕 방지에 도움이 되는 측면도 있다. 현직 대통령과의 관계는 늘 양날의 칼이다. 반 총장도 대선 출마를 결심하더라도 박 대통령, 혹은 박 대통령을 추종하는 세력에 얹혀 여당 대선후보가 되는 그림을 그리지는 않을 것이다. 꽉 막힌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열어 금의환향하겠다는 게 그의 1차 목표인 것 같지만 쉽지는 않아 보인다. 반 총장의 당선 가능성은 정치공학적 지역 연대가 아니라 ‘대통령감’으로서의 자체 발광 여부에 더 달려 있다. 충북 음성에서 한약방을 하는 할아버지 집에서 태어난 그는 의사가 되라는 부모의 권유를 뿌리치고 평생 외교관의 길을 걸어 최고 자리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런 성공신화 자체가 희망인 시대는 끝났다. 7개월 후 그는 ‘우아한 외교’가 아닌 ‘치열한 생존’에 대한 답을 갖고 올 것인가.정용관 정치부장 yongari@donga.com}
김종인 카드는 ‘신의 한 수’까진 아니더라도 올 초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던 문재인에겐 사활이 걸린 승부수였던 건 분명하다. 4·13총선까지는…. 문재인은 2012년 대선 전 발간한 포토에세이 ‘문재인이 드립니다’에서 바둑의 가르침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청년 세대를 대상으로 쓴 짧은 에세이에서 그는 “복기(復棋)는 가장 효과적인 바둑 공부”라며 “바둑보다 수백, 수천 배 인생이 중요하다면 바둑보다 수백, 수천 배 열심히 복기를 해야 한다”고 했다. 아마 3단 실력으로 숱한 승부에 대한 복기를 해봤기 때문이었을까. 문재인이 대선 패배 직후 박근혜 캠프의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지낸 김종인을 직접 찾아가 대선 과정을 복기하며 쓰라린 교훈을 되새기곤 했다는 배움의 자세는 인정할 만하다. 특유의 통제하기 힘든 리더십으로 안종범 강석훈 등 경제 참모들과 마찰을 빚다 박근혜 캠프에서 ‘팽’을 당한 김종인의 눈도 이미 그때부터 2017년 대선을 향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 뒤 상황은 알려진 대로다. 더불어민주당의 4·13총선 결과가 절묘하게 나왔다. 수도권 압승을 기반으로 원내 1당이 됐지만 호남 3석의 참패와 국민의당의 약진으로 떨떠름한 승리였던 것이다. “호남은 왜 더민주당을 외면했나?”를 놓고 책임 문제가 뒤따르자 친노(친노무현) 진영은 “호남이 지지를 거두면 대선에 불출마하겠다”고 했던 문재인 방어벽 치기에 골몰했다. 문재인으로 향할 책임 추궁의 칼날을 교묘하게 김종인으로 튼 건 예견된 수순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아침과 저녁이 다르다. 문재인 측은 수권비전위원장으로 적당히 예우를 갖춰 김종인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이미 박근혜 캠프에서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하다 팽을 당한 경험이 있는 김종인이 호락호락 넘어갈 리가 없다. 오히려 “당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려던 찰나에 1당을 만들어 줬더니…”라며 배은망덕 논리를 펴는가 하면 “대선후보는 문재인만 있는 게 아니다”라며 다른 대선후보군의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거명하기도 한다. 김종인으로부터 “큰일을 해야지”라는 전화를 받았다고 전한 한 중진 인사는 “그런 전화를 나한테만 했겠느냐. 김종인을 대놓고 비난하지 않는 이들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문재인과 김종인은 동지 관계라기보다는 동업 관계에 가깝다. 총선이 끝나자 그 동업 관계의 손익계산서가 복잡해졌다. 두 사람의 신뢰는 무너졌으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시각도 많다. 그러나 두 사람의 거래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라고 생각한다. 일반 기업도 대주주라 해서 최고경영자(CEO)를 마음대로 자를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김종인은 좋든 싫든 친노 색채를 지우고 경제 담론으로 포장을 해야 하는 문재인에겐 플러스가 되는 보완재다. 김종인의 정치 야심(野心)도 깊이를 알기 힘들다. 느닷없이 호남 연고를 강조하고 나선 그는 2일 전북에선 “전북이 신뢰할 대권주자를 준비해야 한다”며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발언을 내놓기도 했다. 지금껏 관찰해온 김종인은 누구 못지않게 권력게임에 능한 인물이다. 정체성이 헷갈릴 때가 많지만 분명한 건 어디로 가야 살 수 있는지를 잘 본다는 것이다. 총선 직후 경제 구조조정으로 선수를 치더니 ‘정치 구조조정’이라는 개념까지 들고 나온 건 국민의당 안철수도 허를 찔린 한 수였다. 그런데, 여권엔 그런 ‘선수’가 잘 보이지 않는다. 위기의 보수정권 10년, 새누리당은 야권에 경제성장 담론까지 빼앗기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정용관 정치부장 yongari@donga.com}
4·13총선은 ‘박근혜 선거’인가? 박근혜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이 일부 있다는 점에서, 또 박 대통령이 지난해부터 국회심판론을 지속적으로 제기하며 장외 플레이어 역할을 해 왔다는 점에서 박근혜 선거의 성격도 있다. 하지만 이번 선거는 국내 정치에 발을 담글지 안 담글지 모르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제쳐 놓더라도 대선을 1년 8개월여 앞둔 상황인 만큼 ‘김무성 선거’이자 ‘문재인 선거’이며 ‘안철수 선거’라는 측면이 더 강하다고 본다. 그런 맥락에서 김무성, 문재인, 안철수 3인의 정치 행보를 지켜보자니 아쉬움을 느낄 때가 적지 않다. 옥새 파동과 영도 회군을 놓고 이런저런 긍정 부정의 해석이 많지만, 김무성에 대해 느끼는 답답함은 ‘김무성이 그리는 세상’이 뭔지가 도통 안 보인다는 것이다. ‘보수의 혁신’을 말하고 있지만 대체 뭘 어떻게 혁신해서 ‘보수정권 10년’을 더 연장하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얼마 전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그는 “국가 운영은 권력게임이다. 권력의 생리를 잘 알아야 하고 권력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 순간 ‘박 대통령과의 권력게임은 잘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어부바 퍼포먼스가 중요한 게 아니다. 아직 저서가 없는 김무성은 자기 자랑으로 점철된 ‘자서전’이 아닌 다른 방향의 책을 하나 쓰려고 준비 중이다. 아마도 대선을 염두에 둔 책일 것이다. 김무성의 고민과 철학, 권력게임 그 자체가 아니라 권력게임의 목표, 즉 그만의 국가 비전을 담아내지 못한다면 지금껏 해온 대로 차라리 안 쓰느니만 못하다. 문재인도 그렇다. 김종인에게 비상 대권을 부여한 것을 놓고 한때 야권 진영에서 신의 한 수라는 평가를 받았다가 진짜 오너는 자신이라는 조급함을 금세 드러내고 말았다는 세간의 평가는 논외로 치자. 점점 보폭을 넓히고 목소리를 높여 존재감을 입증하려는 것도 이해는 간다. 다만 더불어민주당의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직접 나서서 안철수를 향해 공개적으로 단일화 공세를 펴는 건 영 보기 불편하다. 총선에서 패할 경우 책임론을 피하려는 포석인지는 모르나 마치 “나는 홀로 설 수 없는 정치인”이라고 스스로 외치는 것처럼 들린다. 2012년 대선후보 단일화 과정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안철수에 대한 단일화 압박은 염치(廉恥)의 영역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문재인이 안철수를 위해 양보한 게 하나라도 있었던가? 당장 계란을 맞더라도 당당하게 호남부터 찾고, 눈앞의 총선이 아니라 자신의 시대정신을 만드는 것부터 고민할 일이다. 안철수는 모처럼 고집스러운 면모를 보이며 두 덩치의 틈에서 존재감을 상실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선 평가할 만하다. 그의 목표대로 40석에 육박할지, 원내 교섭단체를 간신히 구성할지, 그 밑으로 추락할지 예단할 수 없지만 3당 정립체제 구축에 어렵사리 성공하더라도 ‘의석의 질’이 문제다. 그는 어제 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서 “대권병이라는 말은 저한테는 해당되지 않는다”면서도 대통령 결선투표제 도입을 주장했다. 글쎄다. 권력의 생리를 아직 깊이 터득하지 못한 것 같다는 느낌이다. 권력의 이동은 계절의 변화와 같다고 어느 정치평론가는 말했다. 청와대는 가능한 한 차기 주자들의 부상을 늦추고 싶겠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런데 대통령감이 잘 안 보인다는 말이 많다.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국가지도자의 자질, 즉 비르투(Virtu)를 지닌 대통령감 말이다. 3인 중에 국민의 마음을 다시 얻을 사람이 나올지, 새로운 다크호스가 등장할지 궁금하다. 만 30년을 맞는 1987년 권력구조의 변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분출할지도 모르겠다. 유례없는 공천 파동을 겪은 정치부 기자들은 총선 이후 더 바빠질 것임에 틀림없다. 정용관 정치부장 yongari@donga.com}
“사방에 적뿐인 광야에서 죽을 수도 있지만…”이라며 독자 노선의 결기를 보인 그의 얼굴을 직접 보고 싶었다. 그제 동아일보와의 단독 인터뷰 자리에서 만난 안철수는 짐짓 여유를 보였지만 속은 타들어가는 듯했다. 대뜸 “반전카드가 뭐냐”고 묻자 그는 “김종인 위원장께서 기회를 주셔서…”라고 했다. 야권 통합 제안 공세에 비교적 잘 버티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고 하자 또 “그 노회한 분이 이렇게 기회도 주시네요”라고 했다. 머릿속이 온통 ‘노회한 김종인’에 대한 불편함으로 가득 차 보였다. 그가 ‘김종인 착시현상’을 언급하며 임시사장이라는 표현을 다시 꺼낸 건 그때였다. 더불어민주당의 주주는 따로 있는데, 임시사장이 들어와서 통상적인 대표 권한 이상의 막강한 파워를 행사하고 있고, 정작 주주들은 침묵하는 현상은 굉장히 기형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살짝 책상을 치기도 했다. 더민주당의 진짜 주인은 문재인이냐고 묻자 그는 “세력이죠”라고 짧게 답했다. 짧은 대화였지만 그에게서 ‘문재인 콤플렉스’를 느꼈다. 열등감이 아니다. 사전적 용어 그대로 현실적인 행동이나 지각에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의 감정적 관념이다. 2012년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단둘이 최종 담판을 벌였을 때 문재인에게 느꼈던, 하지만 누구에게도 속 시원히 얘기하지 않았던 바로 그 농축된 불신의 덩어리 같은 게 여전히 그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것 같았다. 공교롭게도 안철수가 더민주당의 진짜 주인이라고 내심 여기는 문재인은 같은 날 경남 양산에서 한겨레 기자와 만나고 있었다. 대표직 사퇴 후 공식 인터뷰였다. 내용을 보면 그는 더 이상 짐 보따리 싸들고 양산으로 낙향할 때의 ‘문재인 일병’이 아니었다. 김종인 카드는 신의 한 수라고 판단한 듯 “안철수는 실패했다”고 일갈했을 뿐 아니라 이번 주부터 강원 경북 등 이른바 험지 쪽으로 직접 지원을 나가겠다고 했다. “김종인 지도부가 (문재인 체제 시절 만든) 시스템 공천을 허물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답변에선 더민주당을 장악한 김종인 체제를 존중하면서도 공천 과정에서 역린을 건드리는 것까지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메시지가 느껴졌다. 그러나 비례대표 4선의 김종인은 역시 고수다. 같은 날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한 그는 특유의 시니컬한 어투로 “대통령 꿈꾸는 사람들과 얘기해 보면 대번에 아는데 지금 (야권에선) 전혀 안 보인다”고 염장을 질렀다. 자신을 비대위원장으로 영입한 문재인도 대통령감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상 ‘데드라인’이 지난 야권 통합을 전격 제안해 안철수를 뒤흔든 데 이은 2탄 격이다. ‘착시’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김종인 현상은 좀 특이해 보이긴 한다. 더불어 야권 지형, 정치 지형 전반을 휘젓고 있는 김종인 파워는 영속할 것인지, 본질은 과연 무엇인지도 궁금하다. 100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경제민주화가 실체가 있는 건지, 옳은 해법인지를 떠나 적어도 그가 이번 총선의 핵심 이슈가 경제라는 걸 정확히 꿰뚫고 있고 집요하게 그 이슈를 물고 들어가고 있다는 데 주목한다. 사석에서 총선과 대선 전망을 묻는 이들이 많지만 이번만큼 대답하기 어렵고 머리가 뿌연 적도 드물다. 오랜 정치부 기자의 습성대로 선거구도가 어쩌고 공천전쟁이 어쩌고 하는 정치공학만 생각하니 답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1992년 미국 대선 때 빌 클린턴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고 했던 바로 그 ‘바보’였다. 나는 적어도 바보라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바보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이 여의도 정치권이다. ‘바보들의 섬’에서 김종인이 활개를 치고 있다. 여권에는 착시라도 일으킬 책사나 대통령감이 있던가?정용관 정치부장 yongari@donga.com}
동네북. 요즘 내 신세다. 나는 사실 축복 없이 태어난 사생아였다. 2012년 5월 2일, 임기가 거의 끝난 18대 국회의원 127명의 동의 덕분에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지만 주위의 냉랭한 시선부터 온몸에 느꼈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나를 잉태한 씨앗은 해머, 전기드라이버, 소방호스 등이었다. 2008년 12월 당시 한미 FTA 비준동의안 상정을 저지한다며 국회 외통위 회의장 출입문을 해머로 부수던 민주당 문학진 의원의 당당함 기억나는가? “도둑을 잡을 때 필요하면 저는 몽둥이를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 최루탄도 빼놓을 수 없다. 국회의장석 앞에서의 최루가루 살포는 폭력국회의 화룡점정이었다. 나는 그 와중에 태어났다. 이른바 몸싸움 방지법, 국회선진화법이란 화려한 이름으로…. 당시 초선이던 홍정욱 의원이 초안을 만들었고, 쇄신파와 가까웠던 황우여 원내대표 등이 앞장섰지만 4·11총선 직후 선거에서 승리한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의 한마디가 결정적이었다. “지금 선거가 끝났다고 우리가 선거 전의 그 마음을 잊는다면 국민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최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권력자’ 발언이나 정의화 국회의장의 “나야말로 식물국회를 우려했던 당사자였다”는 항변은 논외로 치자. 내 생각엔 총선 때 국회선진화법 통과를 공약까지 했는데 과반수를 차지했다고 입을 딱 씻는 것은 ‘박근혜 스타일’이 아니었던 듯하다. 이후 상황은 알려진 그대로다. 19대 국회에서 야당은 슈퍼 갑 행세를 했고 사사건건 국정의 발목을 잡았다. 청와대의 높은 담장을 넘어 들려오는 박 대통령의 깊은 한숨 소리에 작금의 입법 마비 사태는 모두 나,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벌어진 일인 것 같아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다. 괜히 말 못 하는 동물과 식물한테도 미안한 마음까지 든다. 국회에서 법이 잘 통과되지 않을 때마다 “18대 국회가 동물국회였다면 19대 국회는 (식물인간 상태에 빗대) 식물국회”라고 하는데, 오히려 나름대로의 위계와 룰을 갖고 돌아가는 동물의 왕국과 식물의 세계에선 ‘인간국회’라는 비아냥거림이 통용될지도 모르겠다. 넋두리가 길었지만 살려 달라고 애원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나를 만든 모든 이들에게 되묻고 싶은 건 있다. 나는 선천적으로 괴물이었던 건지, 태어난 지 채 4년도 안 돼 후천적으로 괴물이 된 건지…. 외과의사 출신 국회 수장이 더 늦기 전에 수술 부위를 정해 준다고 해서 내심 기대를 해 본다. 하지만 걱정부터 앞서는 걸 어쩌랴. 수술대에 올릴지 말지, 수술대에 올릴 경우 어디부터 뭘 어떻게 수술할지를 놓고 여야가 티격태격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무엇보다 4·13총선을 앞두고 여야의 속셈도 다를 테니 ‘게임의 룰’ 변경에 대한 해법도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남는 건 국회의장의 결자해지밖에 없을 것 같은데, 직권상정 요건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법을 직권상정으로 해결하겠다는 것도 영 찜찜하다. 새누리당은 꼭 1년 전 선진화법의 ‘5분의 3’ 규정이 위헌이라며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했다. 헌재는 심리를 미루다 최근 첫 공개 변론을 열었지만 “국회 일을 왜 헌재에 가져왔느냐”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사생아이긴 하지만 나도 법으로서 국회가 아닌 법의 심판 절차를 밟고 싶다. 나를 둘러싼 논쟁을 말끔히 끝낼 곳은 딱 한 곳, 헌재라고 믿기 때문이다, 헌재는 국회가 자율적으로 해결할 일 아니냐고 힐난 하지 말고 결정을 서둘러 주길 바란다. 또 여야는 헌재 결정이 나오면 더 이상 나처럼 불행한 법이 탄생하지 않도록 머리를 맞대 주길 호소한다. 이번 총선에서 누가 다수당이 되고 소수당이 되든지!정용관 정치부장 yongari@donga.com}
김한길 의원의 탈당 회견을 생방송으로 듣다가 귀가 쫑긋했다. “어렵사리 모셔온 안철수 의원을…”이라는 대목에서였다. 김 의원은 “(2014년 3월 합당 당시) 국민을 믿고 공동대표로서 함께 노력하면 (친노 패권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약속드렸다. 하지만…”이라고도 했다. 정치인 이전에 글 쓰는 사람인 김 의원이 ‘모셔온’ ‘약속드렸다’ 등과 같은 높임말까지 써가며 한참 연배가 아래인 안 의원을 신경 쓴 이유가 궁금했다. 단지 안 의원을 모셔온 당사자로서의 미안함 때문만은 아닐 테니…. 한 사람은 ‘신당 디자이너’로서, 다른 한 사람은 차기 대권까지 노리는 ‘신당의 오너’로서 함께 손잡고 가기로 한 것 아니냐고 하면 쉽게 설명은 된다. 김 의원이 탈당 하루 전 안 의원을 만나 탈당 계획을 통보할 정도로 두 사람 사이엔 오래전부터 신당 플랜이 짜여 있었고, 그 밑그림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는 거다. 김 의원의 공개 예우를 접하며 필자는 오히려 ‘두 사람의 생각에 차이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실제 안 의원과 김 의원의 탈당 회견문을 뜯어봤더니 닮은 듯 다른 결정적인 게 도드라져 보인다. 한쪽은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는 정치세력을 만들겠다”며 시종 정권교체를 강조했지만, 다른 쪽은 “총선 승리와 정권교체를 위해 새로운 정치질서 구축에 헌신하겠다”고 결론지었다. 안 의원 회견문엔 어디에도 ‘총선 승리’라는 네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안 의원은 야권 분열에 대한 비판을 무릅쓰고라도 ‘문재인당’과의 정면승부를 거쳐 내년 대선으로 직행하겠다는 태세지만, 김 의원의 생각은 어떻게 하면 친노 배제를 전제로 호남의 ‘천정배 신당’까지 포괄하는 야권 통합을 이뤄 총선에서 최대한 살아남느냐에 꽂혀있는 셈이다. 김 의원으로선 문재인 대표의 ‘마이웨이’ 못지않게 안 의원의 ‘마이웨이’도 걱정이고, 그래서 안 의원에게 최대한 공손한 태도로 “정권교체를 위해선 총선 승리도 중요하다”고 호소한 건 아닐까. 그러나 야권 사정을 잘 아는 정치권 인사는 “안 의원은 이미 김 의원의 컨트롤 밖에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부산고 출신 K 교수 등 ‘6인방’의 조언을 받아 움직이고 있으며, 새누리당을 포함한 중도 보수 성향 인사들의 영입에 공을 들이고 있다는 전언도 있다. 안 의원이 탈당 후 ‘뉴DJ’를 표방한 천정배 의원과 따로 만났다는 소식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안철수 신당의 간판으로 물갈이 여론을 돌파해 보려는 몇몇 호남 의원들 사이에선 “안철수 신당의 그림을 잘 모르겠다. 호랑이굴 피하려다 사자굴 만나는 것 아니냐”는 자조 섞인 얘기도 나온다. 안철수 신당은 이름을 뭐라 붙이든 ‘안철수당’이다. 새해 초 안철수당의 기세는 일단 예사롭지 않다. 문재인당과 안철수당의 힘의 균형이 어디로 기울 것인지가 최대 관전 포인트가 됐다. 그 사이 ‘문-안-박’의 한 축이었던 박원순 서울시장은 대권 링에서 밀려난 형국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PK 비주류와 손을 잡았던 호남이 이번엔 PK 출신이긴 하지만 지역 색채가 덜하고 중도 가치를 지향하겠다고 밝히고 있는 안 의원을 등에 태울 것인가. 꼭 20년 전 총선에서 ‘DJ당’은 수도권에서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에 1당을 내주고 야권 분열 비판을 들었지만, DJ는 이듬해 대선에선 승리했고 진보정권 10년의 길을 텄다. 역사는 반복될 것인가. 무엇보다 안 의원이 2012년 정치 입문 전 ‘안철수 생각’에서 밝힌 대로 여전히 ‘선한 권력’을 꿈꾸고 있는지 궁금하다. 아직은 친노-친박 패권주의 틈새에서 어부지리를 얻고 있는 수준은 아닌가.정용관 정치부장 yongari@donga.com}
“권력이란 게 원래 그런 겁니다. 내가 죽거나 아니면 상대가 죽죠.”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은 좌의정 김종서를 척살한 뒤 두려움에 벌벌 떠는 단종에게 이렇게 말한다. “소신을 유배 보내라고 명하셨지요. 성공했다면 제 목은 떨어졌을 겁니다”라고 윽박지르며….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한 단종과 29세 김정은, 단종의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과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 역사적 배경과 등장인물의 성격은 다르지만, 순전히 ‘권력투쟁’의 관점에서만 보면 1453년 10월 조선왕조의 두 사람과 2013년 12월 북한왕조의 두 사람의 운명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석탄 이권 다툼’이 직접적 계기가 됐다는 국가정보원 분석이 나오기도 했지만 수양대군이 먼저 ‘호랑이(김종서) 사냥’에 나섰던 것처럼 장성택이 선수를 쳤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북한의 주장대로 장성택이 ‘당과 국가의 최고 권력을 찬탈할 야망 밑에 갖은 모략과 비열한 수법으로 국가 전복 음모의 극악한 범죄를 감행한’ 천하의 만고역적이라는 게 사실이라면 말이다. 그랬다면 북한은 지금쯤 장성택의 세상이 돼 있을 것인가. 하긴, 장성택이 쿠데타에 성공했다 한들 본질적으로 북한 사회가 달라질 건 없다. 생전의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장성택에 대해 “북한을 개방·개혁으로 이끌기에 가장 합리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했다고는 하나 피를 부르는 권력투쟁의 속성과 북한 체제의 불안정성으로 미뤄 볼 때 오히려 혼돈으로 치닫고 있을 게 분명하다. 북한의 암울한 현실을 보노라니 조지 오웰의 소설 ‘1984’가 절로 떠오른다. 북한만큼 조지 오웰이 예고한 디스토피아에 딱 들어맞는 나라가 과연 있을까 싶다. ‘1984’를 탈고한 1948년에 북한이라는 정권이 탄생한 건 오웰도 감지하지 못한 운명의 장난일 수도 있다. 북한의 장성택 흔적 지우기를 보라. 사진에서, 글에서, 영상에서 장성택은 철저히 사라지고 있다. ‘1984’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가 ‘진리부’에 근무하며 당에 조금이라도 불리한 기록들을 ‘기억구멍’ 속에 넣어 없애 버리는 일을 했던 것처럼 북한의 누군가는 노동신문의 웹사이트나 대외 선전용 인터넷 홈페이지인 ‘우리민족끼리’, 조선중앙통신 홈페이지 등에서 장성택의 흔적을 깨끗이 지우고 있다. 북한 대학생들이 ‘역적’ 장성택을 성토하는 대회를 열고 있는 사진에선 특정 대상을 향해 집단 광기를 보이도록 하는 소설 속 ‘2분 증오의 시간’이 오버랩된다. ‘1984’의 마지막 문장은 소름을 돋게 한다. “그는 빅 브러더를 사랑했다.” 한때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라고 강요하는 당의 명령에 일말의 의심을 품고 저항을 꿈꿨던 주인공 윈스턴은 전기 고문과 쥐 고문, 집요한 세뇌 끝에 완벽하게 바뀐다. 그는 총알이 자신의 머리통을 뚫고 들어오는 순간 불필요한 오해를 갖고 빅 브러더의 사랑이 넘치는 품을 떠나려 했던 스스로를 책망하며 눈물을 흘린다. 장성택 지우기를 하고 있을 북한의 ‘윈스턴’도 소설 속 윈스턴과 똑같은 길을 걸을까. 모든 주민으로 하여금 ‘뜨뜻미지근한 복종’이나 ‘비겁한 굴복’이 아니라 ‘자발적 굴종’을 하게 만들 수 있는 권력이란 게 과연 가능할까. ‘1984’의 결론은 우울하지만,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왕조 독재 정권’인 북한이라 하더라도 그건 불가능할 것이라 믿는다. 김정은은 빅 브러더가 아니다.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 아니라 넷이다. 수많은 북한의 윈스턴이 “나는 김씨 왕조를 증오한다”고 소리 없이 아우성치는 것만 같다.정용관 채널A 정치부장 yongari@donga.com}
박근혜 대통령이 내년 1월 취임 이후 첫 사면을 단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박 대통령은 23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서민들의 어려움을 경감해 줄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해 순수 서민생계형 범죄에 대한 특별사면을 고려하고 있다”며 “내년 설 명절을 계기로 특사가 될 수 있도록 준비해 달라”고 지시했다. 박 대통령은 “대상과 규모는 가급적 생계와 관련해 실질적인 혜택이 국민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전례에 비춰볼 때 상당히 큰 규모가 될 것”이라며 “이미 법무부가 선정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다만 “부정부패와 사회지도층 범죄는 사면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못을 박았다. 박 대통령은 대선 때부터 수차례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부조리를 해소하기 위해 “대통령의 사면권을 제한해 사용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다른 관계자는 “이번 사면은 노점상, 화물차 운전사 등 생계형 직업을 가진 국민들을 우리 사회가 껴안는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대통합 차원에서 취임 후 첫 사면을 추진하는 것이란 설명이다. 또 박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대통령이 신년 구상과 어젠다, 정책 방향 등에 대해 매년 새해 국민 앞에 밝혀오곤 했다”며 “새해에 신년 기자회견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취임 이후 처음이다. 청와대는 역대 대통령이 신년에 해 온 국정연설, 대국민담화, 국민좌담회 등도 고려했으나 처음 마련되는 자리인 만큼 국민들이 궁금해하는 각종 현안에 대해 진솔하게 밝힐 수 있는 방식을 택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 대통령의 사면 및 신년 기자회견 방침을 놓고 최근 다시 불거진 불통 논란을 의식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처형된 장성택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측근들 가운데 현재 정보당국과 망명을 구체적으로 논의 중인 사람은 10명 이내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정부 당국자가 20일 밝혔다. ‘70명가량의 대규모 망명 추진’ 등 각종 망명설이 난무하고, 정부는 공식적으로 망명설을 부인하는 가운데 나온 첫 정부 당국자의 비공식 확인이다. 정부 당국자는 “장성택 측근들의 망명이 추진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실제로 구체적인 논의가 오가는 사람은 10명 이내”라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망명 대상자가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 지금 단계에서는 밝힐 수 없다”고 덧붙였다. 망명자 수는 더 늘어날 수 있다. 이 당국자는 “지금은 10명이 채 안 되지만 망명을 하려는 북한 인사들의 움직임이 군뿐 아니라 사회 전 분야, 전 전선에서 감지되고 있다”면서 “내년 상반기에 대규모 망명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김관진 국방부 장관이 17일 전군 주요지휘관 화상회의에서 “내년 1월 하순에서 3월 초순 사이에 북한이 도발할 가능성이 크다”고 밝힌 것도 대규모 망명에 따른 북한의 ‘보복성’ 도발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관측이다. 이와 관련해 정부 고위 관계자는 “최근 언론에서 제기되는 무더기 망명설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한 뒤 북한 고위급 장성 1∼3명의 망명설이 나오는 데 대해서는 “나는 모른다”며 구체적 언급을 피했다. 일부 외교안보 소식통들은 정보당국이 장성택 실각설이 처음 제기된 3일 전후 망명과 관련해 이미 장성택 측근들과 접촉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한편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장인 새누리당 안홍준 의원은 이날 “지난해 장성택 쪽에서 이영호 총참모장 집을 급습해 20여 명을 사살하고 이영호를 체포했다”며 “이후 이영호는 모든 직에서 은퇴(해임)했고, 당의 주도권이 장성택에게 넘어갔다”고 말했다. 이어 “(권력이 군에서 당으로 넘어가자) 최룡해가 역쿠데타를 해서 장성택을 처형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민혁 채널A 기자 mhpark@donga.com}
“출판기념회를 열면 출마한다고 소문이 날 것 같아서….” 그제 언론계 몇몇 후배와 만난 고건 전 국무총리는 이렇게 말하며 허허 웃었다. 경복궁 근처에 있는 단골 음식점에서 오찬을 겸해 가진 조촐한 출판보고회였다. ‘국정은 소통이더라’라는 제목으로 곧 출간될 이 회고록은 550여 쪽 분량으로 그의 ‘공인(公人) 50년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책 저변에 흐르는 화두는 ‘공인이란 무엇인가, 무엇이어야 하나’이다. “공동체의 가치를 우선한다고 해서 획일적으로 집단의 의사를 강요하는 것은 집단주의, 파시즘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에 공인에겐 소통이야말로 주된 수단이자 목적이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 스스로를 놓는 역지사지(易地思之)야말로 필수 자세이자 방법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역지사지의 소통.’ 이젠 다시 공직을 맡을 일이 없어 보이는 그가 후배 공인들에게 남기고 싶은 메시지가 이 한마디에 농축돼 있다. 그는 평소에도 “소통은 입으로 하는 게 아니라 귀로 하는 것”이라고 강조해왔다. 그의 ‘공자님 말씀’이 던지는 울림이 유독 크게 느껴지는 이유는 정국 상황과 무관치 않다. 국가정보원 댓글 의혹과 서해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등을 둘러싼 정치권의 한 치 양보 없는 다툼 속에 어느덧 박근혜 정부 1년차가 서서히 저물고 있다. 일각에선 대선 후 1년 가까이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부정선거 타령이고, 어느 원로신부라는 이는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미사까지 열더니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은 당연하다고 목청을 높인다. 이에 대통령의 입에서 “용납하거나 묵과할 수 없다”는 말까지 나오는 게 요즘 현실이다. 여야는 적대적 공존을 넘어 ‘공멸의 길’로 접어들기로 작정한 듯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정기국회가 열린 지 3개월이 지났지만 여야가 뭘 합의해 처리했다는 기억이 없다. 오죽하면 김황식 전 총리가 국회의원들 앞에서 “헌법에 왜 국회해산제도가 없는지…”라며 “국회해산제도가 있었으면 국회를 해산시키고 다시 국민 심판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일갈했을까. 문득 조너선 스위프트의 풍자소설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기상천외한 발상이 떠오른다. 각 정당에서 100명의 지도자를 뽑은 뒤 2명의 훌륭한 외과의사로 하여금 이들의 머리를 반으로 잘라 반대편 정당 지도자의 머리에 붙이자는 거다. 그렇게 하나의 두개골 속에서 논쟁을 하게 되면 서로를 잘 이해하고 조화와 중용을 찾게 되지 않겠느냐는 얘기다. 이 책에는 좀 더 현실적인 방안도 나온다. 의원들이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거나 변호한 뒤 정반대 방향으로 투표를 하도록 하면 국민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의회가 움직일 거라는 주장이다. 걸리버가 신랄하게 비꼰 300년 전의 영국 의회나 요즘 한국 국회나 본질적으로 다를 게 뭐가 있을까 싶다. 누군가는 소통의 요체를 해통(解痛)으로 풀이했다.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얘기를 마음으로 듣고 체감한다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설명이다. 그런 자세로 꽉 막힌 국정을 풀 방법은 정녕 없는가. 첨언 하나.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키가 15cm도 채 안 되는 작은 사람들의 나라에선 ‘계란의 넓고 둥근 쪽의 끝부분을 깨어 먹는 파’와 ‘좁은 쪽의 끝부분을 깨어 먹는 파’가 36개월째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인다. 그들보다 12배가 큰 걸리버가 보기에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걸리버가 환생해 표류하다 2013년의 대한민국에 도착한다면 쓸거리가 참 많을 것 같다.정용관 정치부 차장 yongari@donga.com}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소속 박창신 원로신부가 22일 “(서해) NLL(북방한계선)에서 한미 군사운동을 계속하면 북한에서 쏴야죠. 그것이 연평도 포격이에요” “종북주의자가 적입니까”라고 외치자 이정현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은 다음 날 “그 사람들의 조국이 어디인지 의심스럽다”고 맞받았다. 종교단체와의 대립각에 부담을 느끼던 청와대와 여당이 박근혜 대통령 사퇴 촉구 미사 때 나온 일부 신부들의 발언이 여론과 동떨어졌다는 판단에 따라 강한 반격에 나섰다. ○ 與, “지방선거 겨냥한 야권의 조직적 움직임” 야권이 일부 신부들의 발언을 신호탄으로 내년 6월 지방선거 때까지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고 흠집 내려는 조직적인 움직임을 시작했다는 게 여권이 긴장하며 반격하는 가장 큰 이유다. 지난해 대선 때 문재인 후보를 공개 지지했던 일부 목사들이 동참의 뜻을 밝혔고, 22일 미사 전후로 ‘나는 꼼수다’의 김용민 씨나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 작가 공지영 씨 등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활동을 통해 이들에게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는 데 여권은 주목하고 있다. 김 씨는 트위터에 “이 정권은 불법 정권임을 자인하는 꼴이다. 하긴 그 애비도 불법으로 집권했으니. 애비나 딸이나”라고 박 대통령을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 새누리당 김태흠 원내대변인은 24일 “정의구현사제단의 일부는 ‘종북구현사제단’에 가깝다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며 “민주당이 대선 불복에 대한 마음이 굴뚝같지만 국민적 역풍이 두려워 직접 하지 못하고 일탈된 사제들의 입을 빌려 대선 불복을 하려는 것이라면 국민의 준엄한 비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승민 국방위원장은 “가톨릭계에서 종북 신부들을 척결하는 자정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야 한다”며 박 신부를 규탄하는 결의안 채택을 제안했다. 새누리당 내 군 장성 출신 의원들은 “사제 신분을 악용해 대한민국의 안보를 흔드는 것은 누구를 도우려고 하는지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며 이들의 발언을 북한과 연결지었다.○ 연평도 포격 유족들, “하필 3주기 전날에…” “23일은 아들이 전사한 지 3년째 되던 날인데 평생 아들을 잃은 고통 속에 살아야 하는 부모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지….” 2010년 11월 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로 순직한 해병대원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 부모들은 박 신부의 연평도 포격 발언에 말을 잇지 못했다. 서 하사의 어머니 김오복 씨(53)는 23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연평도 포격도발 3주기 추모행사에 참석한 뒤 귀가하던 길에 본보 기자와 통화하며 눈물을 흘렸다. 김 씨는 “연평도 등 대한민국 영토에서 우리 군인들이 훈련을 하는 게 뭐가 잘못된 것이냐”고 반문하면서 “박 신부의 발언은 국방의 의무를 다하다 희생된 사람들에게 해선 안 될 말이었다”며 울먹였다. 문 일병의 아버지 문영조 씨(50)는 “박 신부가 조국을 지키다 산화한 장병들을 위해 애도 기도를 한 번이라도 해줬는지 묻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우리 영토인 연평도에 북한이 포격 도발을 해도 가만히 있으라는 말인가”라며 “박 신부가 연평도 성당에서 현지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안보 상황을 직접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입장자료를 내 “최근 일부 단체의 발언은 북한의 도발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국가 안보의식 및 군의 사기를 저하시킴은 물론, 우리 국민의 NLL 수호 의지에 악영향을 초래하는 것”이라며 “국가안보를 위해 헌신한 장병과 국민 희생자, 그리고 유가족들에게 모욕감을 주는 비이성적인 행위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우파 성향의 시민단체들은 반발했고 진보 성향의 시민단체들은 침묵했다. 대한민국어버이연합 회원 150여 명은 24일 서울 중구 명동성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제단의 해산을 요구하며 “(사제단은) 김정은교의 하수인이자 또 다른 RO(혁명 조직)”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한국자유총연맹과 바른사회시민회의도 논평을 내 사제단을 비판했다.동정민 ditto@donga.com / 광주=이형주 / 이은택 기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전북지부 박창신 원로신부(사진)가 22일 박근혜 대통령 사퇴 촉구 미사에서 북한이 연평도를 포격한 건 당연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논란을 빚었다. 그는 24일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엊그제 생각 그대로다”라며 “이번 일(연평도 포격 관련 발언)이 여론화 이슈화됐으면 좋겠다. 민족과 남북한을 위해서도 그렇다”고 했다. 박 신부의 강론 중 정치와 관련된 내용을 요약 소개한다. “이 시대의 징표 중에 제일로 화나는 것이 있어요. 바로 종북몰이입니다. 산업화를 위해 온몸을 바친 노동자와 농민의 권리를 지켜주자고 하면 빨갱이가 됩니다. 그게 요즘은 고상해져서 종북주의자예요. 왜 종북주의자냐? 북한이 노동자와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정책이기 때문에, 너희들은 북한과 닮았다고 해서 종북주의자입니다. 종북주의자가 적입니까? 노동자 농민이 적입니까? 반공교육으로 뇌가 꽉 절어 가지고 ‘앗, 종북주의자가 빨갱이야? 그럼 죽여야지. 그런 사람이 어떻게 정치를 하고 대통령이 돼?’라고 해요. (중략) 여러분, 대통령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기업만 살리고 서민을 죽이는 대통령을 뽑을 것이냐, 서민을 살리고 기업을 살리는 대통령을 뽑을 거냐 했을 때 정권교체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정권교체가 이뤄져야 되는데 국가정보원이 대선에 개입한 겁니다. 캐면 캘수록 엄청난 국가 기관들이 개입한 거예요. 국가보훈처, 군인, 심지어 여행사에서 땅굴 구경시키고 하면서 종북몰이를 한 거예요. 이랬을 때에 정권교체가 이뤄지겠습니까? 이런 부정선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앞으로 정권교체 없습니다. 더군다나 부정선거 백서 있어요. 컴퓨터로 개표 부정한 거. 국정원뿐만 아니라 컴퓨터로 조작해 가지고 선거를…. 그런 것이 엄청 드러났어요. 부정선거는 엄청난 문제인 거예요. 재임 시에 모든 국가기관에서 대선 개입하도록 한 전두환 대통령은 구속 수사해야 합니다. 아! 이명박. 죄송해요.(웃음) 이명박은 구속해야 합니다. 구속 수사해야 합니다. 그거를 이용한 박근혜는 퇴진해야 합니다. 여러분 옳죠? 그런데 우리가 퇴진하란다고 퇴진하겠어요? (중략)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 만났잖아요. 그때 6·15 공동선언 했습니다. ‘우리 같이 살자, 통일 문제는 우리 민족끼리 하자, 평화통일로 하자’ 이렇게 세 가지 조건이 있어요. 그래서 통일과 화해의 길을 갑니다. 그런데 천안함 사건이 났죠. 천안함 사건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요. (서해) NLL(북방한계선)에서 한미군사합동훈련 한단 말이에요. 이지스함이 1000개 이상의 눈을 가지고 있다는데 북한 함정이 어뢰를 쏘고 갔다니 이해나 갑니까.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니까 이것이 북한이 했다고 만드는 거예요. 왜냐하면 북한을 적으로 만들어야 종북 문제로 백성을 칠 수 있으니까. NLL이 뭡니까? NLL은 유엔군사령관이 북한으로 못 가게 하려고 잠시 그어 놓은 거예요. 북한과는 아무 상관없고 휴전협정에도 없어요. 군사분계선도 아니에요. 북한에서는 ‘NLL은 우리 해상이다. 공해상으로 보면 NLL이 우리 해상인데 왜 너희들이 와서 훈련하냐’고 합니다. 여러분 독도는 우리 땅이죠? 일본이 자기 땅이라며 독도에서 훈련하려고 하면 우리 대통령이 어떻게 해야 해요? 쏴버려야 하지. 안 쏘면 대통령이 문제 있는 거죠. 그러면 NLL, 문제 있는 곳에서 한미군사훈련을 하면 북한에서 어떻게 해야 하겠어요? 북한에서 쏴야죠. 그것이 연평도 포격사건이에요. 그래놓고 북한을 적으로 만들어서 지금까지 이 난리를 치르고 선거에 이용한 겁니다. 이명박 대통령 책임져야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이 아닙니다. 정말 책임져야 합니다.”○ 박창신 신부(71)는 누구 문정현 문규현 형제 신부와 함께 천주교 전주교구 안에서 진보적 시각을 대표해 온 인물이다. 전북 익산의 모태 신앙 집안에서 태어나 전북대를 졸업한 뒤 뒤늦게 1973년 사제품을 받았다. 5·18민주화운동 한 달 뒤인 1980년 6월 25일 전북 여산성당 금마공소에서 괴한들의 칼에 찔려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박 신부는 지금까지 다리를 절게 됐다. 전북민족민주운동연합과 민주주의민족통일전북연합 공동의장을 10년 이상 지냈다. 그는 30여 년 동안 집회와 시위 현장을 다니며 찍은 사진으로 2006년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권오혁 hyuk@donga.com / 전주=김광오 기자}
민주당 강기정 의원과 청와대 경찰경호대 소속 현모 순경은 19일 몸싸움 상황을 놓고 다른 증언을 내놓고 있다. 당시 현장은 폐쇄회로(CC)TV의 사각지대였다. 사건의 전말을 담은 영상기록물이 없는 상태에서 서로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현 순경은 이날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야 이 새×야 차 빼’라는 소리를 들었고 ‘쿵쿵’ 큰 소리로 발길질하는 소리를 두세 차례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강 의원은 이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손으로 좀 문 두드리고 정식항의를 하면 되지 왜 발로 그러셨어요?”라는 진행자의 질문에 “어제 추웠습니다. 차문이 열려 있어서 이렇게 차문으로 툭 치면서 발로 치면서 야, 차 좀 빼라. 이런 거죠”라고 말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민주당 전순옥 의원은 “강 의원이 욕이나 폭언을 하나도 하지 않았고 차량도 한 차례 세지 않게 찼다”고 설명한 바 있다. 욕설을 하지 않았고, 한 차례 툭 찼다는 것으로 사건의 발단부터 양측의 주장이 엇갈리는 셈이다. 몸싸움 상황에 대한 양측의 설명도 다르다. 현 순경은 “(운전을 맡고 있던 내가) 버스에서 내려 그 분의 왼팔을 잡고 ‘왜 차를 발로 차느냐’고 먼저 물었다”고 했다. 이어 “나를 뿌리치고 가려고 하기에 옷깃을 잡게 됐다. 누군가가 나를 뒤로 당기는 바람에 그 분(강 의원)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다 균형을 잃어 어깨를 잡은 것 같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목덜미를 잡아끌었다는 강 의원 측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현 순경은 “(강 의원이) 고의적으로 고개를 앞으로 젖혔다가 뒤로 세게 쳐서 이렇게 심하게 다치게 되었다”며 “입술이 터져 10바늘 정도 꿰맸고 허리 통증으로 현재 거동이 불편한 상태”라고 말했다. 그는 “나는 공무수행 중이었고 내가 맡은 차량을 누군가 발로 차고 가는데 설사 국회의원이라 하더라도 말도 하지 않고 제지하지 않을 수 있겠나”라며 “피해를 입은 데 대해 법적 대응을 하겠다. 고소장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 순경은 “강 의원이 국회의원이라는 사실을 처음엔 전혀 몰랐고 강 의원의 머리에 부딪혀 부상을 입고 강 의원을 놓친 뒤에 알았다”고 했다. 강 의원은 금배지를 달고 있지 않았으며, 몸싸움 도중 주변에 있던 민주당 의원들이 “누가 국회의원을 잡고 그래!” 등의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강 의원은 자신을 비판한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강기정입니다. 어제 일에 대해서는 청와대 얘기보다는 저의 얘기를 들었어야죠. 유감입니다. 어제 상황은 제 얘기가 진실입니다. 제가 전과자란 것 때문에 인식이 달라지나요”라는 문자를 보냈다. 권오혁 기자 hyuk@donga.com}
전자인사관리시스템(e사람), 외교정보전용망 등 각 부처가 운영하는 전자정부시스템의 설계도가 아무런 보안장치가 없는 외장하드에 담긴 채 노무현 정부 말기 청와대에 넘겨진 것을 놓고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노무현재단은 11일 “참여정부 역점사업의 하나였던 전자정부 사업이 어느 정도 진척됐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한국정보사회진흥원(현 한국정보화진흥원)으로부터 전자정부 사업 산출물 현황을 하드디스크로 받았고, 참고한 후 원본 그대로 진흥원에 돌려줬다”고 밝혔다. 이어 “이명박 정부는 물론이고 박근혜 정부에서도 보안에 문제가 있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며 “전자정부 시스템은 인터넷망과 분리된 내부 업무망으로 운영되고 있어 외부 접속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노무현 청와대는 임기 종료 한 달여를 앞두고 진흥원에 보관돼 있던 각 부처 및 지방자치단체, 국회 등에서 사용하는 36개 국가 전자정부시스템의 설계도 및 시스템 구성도, 보안구성 등을 외장하드 형태로 제출받았다. 이에 대해 이진복 새누리당 의원은 “국가 전자정부시스템의 설계도 등 핵심 보안자료가 노 전 대통령 퇴임 후 2008년 상반기 중에 반환됐고 외장하드 2개 중 1개는 훼손됐다고 한다”며 “핵심 보안자료들이 외부로 유출돼 있었던 5, 6개월 동안 복사 또는 출력 등으로 재생산돼 유출됐을 가능성은 여전한 만큼 검찰 수사를 통해 유출 여부와 법 위반 행위가 있었는지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노 전 대통령 측의 설명대로 전자정부사업 성과 확인을 위해서라면 굳이 전(全) 국가 전자정부시스템의 설계도와 보안 관련 세부자료들이 왜 필요했는지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진흥원 측은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행정관을 지낸 인사가 직접 자료를 진흥원 담당자에게 반환했다”며 “반환 시기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해 현재 파악 중”이라고 밝혔다. 한 보안업체 관계자는 “외장하드에 담긴 내용은 수없이 복사해도 아무런 로그기록이 남지 않는다”며 “국가 전자정부시스템의 ‘유전자 지도’라고 할 수 있는 설계도 등 핵심 내용 전부를 외장하드에 모은 것도, 그 외장하드가 이리저리 떠돌았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김대중 정부 시절 어느 날, 박지원은 군의 최고 수장 A 씨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A 씨가 “군에 보기 드문 ‘진짜 군인’이 하나 있다”는 얘기를 하자 그는 “누구인지 보고 싶으니 부르자”고 했다. 호출을 받은 그 군인은 몇 차례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거절하다 상관의 계속되는 요구에 결국 응한다. 얼마 뒤 술집에 들어선 이 군인. 자신의 상관에게 큰 소리로 경례를 붙이고는 자리에 앉아 입을 다문다. 박지원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박지원이 누구인가. 당시 말 그대로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실세 중 한 명이었다. 나중엔 ‘소통령’이란 말도 들었다. 그런 박지원 앞에서 별 셋의 이 군인은 조금도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상관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불려온 것뿐’이라는 듯한 ‘당당한’ 태도였다. 군인 시절의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에 관한 이런 일화는 한둘이 아니다. 그는 강단 있는 군인이었다. ‘정치군인’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자타가 인정하는 ‘원칙적 보수주의자’로 박근혜 대통령과도 코드가 완벽하게 일치한다. ‘깐깐하다’는 점만 빼놓고는 박 대통령의 머릿속에 진작부터 국정원장 0순위로 있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올 3월 국정원장 내정 발표 일주일 전, 몇몇 새누리당 고위 관계자가 사석에서 “설마 국정원장에 군인을 시키겠어?”라고 말한 건 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은 얘기였다. 취임식 때 “나는 전사(戰士)가 될 각오가 돼 있다. 여러분도 전사가 될 각오를 다져 달라”는 짧은 당부를 남긴 남 원장은 이후 6개월여 동안 국정원뿐만 아니라 여권 내에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내뿜어 왔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 공개 등과 같은 민감한 이슈의 최종 결정권은 그의 몫이었다. 권력 코어그룹 내에서의 목소리도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는 전언이다. 청와대에서 열리는 외교안보장관회의에서 남 원장이 국정원의 정보를 바탕으로 강한 톤으로 말을 꺼내면 다른 참석자들은 이견을 내지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는 타고난 군인이다. 전쟁의 관점, 아군과 적군의 시각에서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데 익숙하다. 국가관, 안보관이 투철하다는 얘기다. 국정원 내부 행사 도중 간부들이 애국가를 우물우물 부르자 마이크를 잡고 “애국가부터 크게 부르라”고 질책한 적도 있다고 한다. 국정원의 기강을 바로잡고 혼(魂)을 불어넣는 데 적임자일 수도 있지만 최종 평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MB의 심복이라는 이유만으로 무려 4년 동안 정보기관 수장을 지낸 뒤 요즘 ‘동네북’ 신세가 된 원세훈 전 원장도 재임 중 인사권 독점을 통해 조직을 확실히 장악하긴 했다. 대체 무엇을 위한 장악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남 원장이 전임 원장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국정원은 뭐 하는 곳이다”라는 정체성 확립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그 점에서 국정원 일부 직원의 대선 개입 의혹 사건에 대한 남 원장의 태도는 의아했다. 혹시 대북 심리전과 대선 개입의 모호한 경계선에 있는 이번 사건을 ‘이적행위’라는 잣대로만 바라봤던 것은 아닐까. 좀 더 선제적으로 철저한 진상 규명 의지를 밝혔어야 했다. 한 가지 더. 박 대통령은 창조경제를 내세웠지만 창조와 창의가 소리 없이, 보이지 않게 구현돼야 할 곳이 바로 정부 공식 라인 뒤에서 움직이는 국정원일 수 있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성공시키려면 사고의 경직성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이석기 사건에서 보듯 종북세력 척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그것만이 국정원 업무의 전부는 아니다.정용관 정치부 차장 yongari@donga.com}
《 경북 포항 남-울릉 국회의원 재선거는 경기 화성갑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고 있다. 전통적 여권 강세 지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상회담 회의록 실종 논란 국면에 목소리를 내면서 새누리당 공천을 따낸 박명재 후보와 민주당 지역위원장 출신인 허대만 후보는 지난 국회의원 선거에서 나란히 낙선한 아픔을 곱씹으며 양보할 수 없는 맞대결을 펼치고 있다. 두 후보의 선거 전략을 들어본다. 》▼ 새누리 박명재 “특별법 만들어 독도 지원… 압승 자신” ▼“압도적 승리를 거둬 정국 안정의 지렛대 역할을 하겠습니다.” 새누리당 박명재 후보(66·사진)는 15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이미 각종 여론조사에서 상대후보에게 큰 격차로 앞서고 있다”고 주장했다. ‘본선보다 어렵다’는 당내 예선을 거치고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은 박 후보는 당의 대통합을 강조했다. 박 후보는 “공천 결과가 나온 후 하루만에 모든 경쟁후보들을 선거캠프에 영입했다”면서 “우리 지역에는 친박계, 친이계 같은 구분 없이 새누리당만 있다”고 말했다. 새누리당은 이병석 국회부의장과 경북도당위원장인 이철우 의원에게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겨 박 후보에게 힘을 실어줬다. 박 후보는 핵심 공약으로 독도 인근 지역에 대해서 ‘서해 5도 특별법’ 같은 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밝혔다. 노무현 정부 시절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낸 그는 과거 열린우리당 당적 논란에 대해 “공천 과정에서 완벽히 소명됐다”고 일축했다.권오혁 기자 hyuk@donga.com ▼ 민주당 허대만 “유권자들 여당에 큰 실망… 이변 기대” ▼민주당 허대만 후보(44·사진)는 15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여야의 균형’부터 강조했다. 그는 “대구·경북(TK)은 국회의원 26명 전원(포항 남-울릉 제외)이 새누리당 소속”이라며 “여당 의원 한 사람 더 나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6선을 지낸 이상득 전 의원이 (구속 등으로) 몰락하고 지난해 4·11 총선에서 선출된 분(김형태 전 의원)이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으면서 지역민의 자존심과 명예가 무너졌다. 여당에 대한 실망감이 큰 만큼 해볼 만하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허 후보는 대학 졸업 직후 1993년 포항 경실련 집행위원을 시작으로 20년 동안 지역에서 활동해왔다. 전국 최연소 시의원(26세·1996년)을 지냈고 지난해 4월 총선과 2010년 포항시장 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했다. 새누리당 박명재 후보가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경북도지사 선거(2006년)에 나섰을 때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던 인연이 있다. 허 후보는 “박 후보와 선의의 경쟁을 펼칠 것”이라고 말했다.황승택 기자 hstneo@donga.com}
양건 전 감사원장과 진영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후임 인선이 구체화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석이거나 임기가 끝난 공공기관장 인선이 미뤄지고 있어 정부 정책 집행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는 비판이 거센 가운데 일부 공공기관장 인선도 조만간 이뤄질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13일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이 감사원장과 보건복지부 장관 검증 작업을 진행해 왔으며 1차 검증 결과를 순방에서 복귀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곧 보고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박 대통령이 그 결과를 받아들여 당장 임명할지 여부는 예단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다른 관계자는 공공기관장 인선 상황에 대해 “100곳 정도의 인선이 필요했다. 이 중 70%는 이미 임명 절차가 끝났고, 20%는 후보 추천이 끝나 검증 단계에 들어가 있는 상태로 조만간 발표할 예정이다”면서 “나머지 10%는 공모나 후보 추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민주당 이인영 의원이 이날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공기업(30개), 준정부기관(87개), 기타 공공기관(178개) 등 295개 정부 산하 공공기관 가운데 24개 공공기관의 기관장이 공석이거나 임기가 지났는데도 후임자가 임명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공기업의 경우 한국도로공사, 한국수자원공사, 한국지역난방공사, 한국마사회, 여수광양항만공사 등 5개 기관의 수장이 공석이다. 공기업뿐 아니라 준정부기관 4개와 기타 공공기관 4개 역시 기관장이 없어 모두 13개 공공기관이 대행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이미 임기가 끝난 기관장이 그 역할을 이어 가고 있는 공공기관도 11개(공기업 1개, 준정부기관 3개, 기타 공공기관 7개)에 이르고 있다. 박근혜 정부 들어 현재까지 기관장이 새로 취임한 공공기관은 69개다. 청와대 관계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15명 안팎의 기관장 인선이 조만간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공공기관장 등의 인선이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이면서 대선 캠프 출신 인사들이 ‘자리’를 받을 수 있을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윤상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는 이날 기자들에게 “당에서 (명단을) 갖다 드렸는데 아직 피드백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인영 의원은 “보은 성격의 낙하산 인사를 강행할 경우 지금의 공공기관에 대해 요구되는 무거운 과제들을 올바르게 수행할 수 없다”고 말했다.길진균·동정민 기자 leon@donga.com}
“정치인은 선거로 말하지만, 지금이 몸을 던질 때인지 의문”이라며 양 갈래의 자락을 깔았던 손학규는 결국 칼을 빼지 않았다. 대선 패배의 책임자로 지금은 자숙할 때라는 게 공식 불출마의 변이었다. 내심 손학규와 서청원이 30일 열리는 경기 화성갑 보궐선거에서 한판 붙었으면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 7개월에 대한 중간 평가가 어떤지, 여권의 친박 실세 공천에 대한 민심 흐름이 어떤지, 손학규는 분당(을) 승리의 저력을 한 번 더 보여줄 수 있을지 등 정치부 기자로서의 ‘무거운’ 궁금증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청원의 표현대로 “과거 좋은 관계였는데 웃통 벗고 한판 붙는” 상황이 실제 벌어지면 어떨까 하는 ‘가벼운’ 호기심이 마음 한구석에서 꿈틀댄 것 같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발탁으로 정계에 입문한 손학규는 한때 YS 비서실장 출신으로 정무장관을 지낸 서청원과 한솥밥을 먹은 민주계 후배다. 손학규가 2002년 경기지사에 도전했을 때 서청원은 당 대표로 당선을 도왔고, 그런 서청원에게 손학규는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당시 “캠프 좌장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청원은 완곡하게 고사했지만 손학규 경선 캠프를 찾아 조직 운영 등 선거 노하우에 대한 강의를 했었다고 한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정치권의 한 인사는 “만약 둘이 붙었다면 서로 마음이 편치는 않았을 것”이라며 “본인은 물론이고 당의 운명까지 좌지우지할 유례를 볼 수 없는 큰 싸움이 벌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판에선 사적 인연을 뛰어넘어야 할 때가 많다. 손학규도 2008년 총선 때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동문수학한 후배인 박진 전 의원과 맞대결을 펼친 적이 있다. 다만 서청원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손학규가 출마 결심을 내리지 못할 것으로 확신했던 것 같다. 대선을 노리는 사람이 지역구를 네 번째 바꿔가며 이겨봐야 본전인 불확실한 게임을 선택하진 않을 것이라고 본 듯하다. 손학규의 선택이 옳았는지는 앞으로 시간이 밝혀줄 것이다. 서청원이 7선으로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가 말하듯 ‘신선(神仙)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지도 지켜봐야 한다. 다만 궁금한 건 독일로 가기 전의 손학규와 돌아온 이후의 그는 뭐가 달라졌느냐는 점이다. 손학규는 불출마 선언 후 8일 자신의 싱크탱크인 동아시아미래연구소 창립 심포지엄 기조연설에서 “과연 내가 이 사회, 이 나라에서 진정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 저 안에 끊임없이 그 질문을 하는 손학규와 방어하는 손학규가 싸우고 있었다”고 했다. “나 자신의 권력과 명예를 위해 욕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끊임없이 되뇌었다”고도 했다. 그동안 무슨 욕심을 부렸다는 건지, 또 무슨 욕심을 내려놓겠다는 것인지…. 진정성이 느껴지는 듯 하면서도 알쏭달쏭하다. 독일에서 8개월간 성찰과 모색의 시간을 보냈다지만 그는 여전히 ‘고민의 늪’에 빠져 있는 걸까. 이 국면에서 흥미로운 건 박지원의 행보다. 그는 8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서청원에 대해 “리더십도 있고 마음씨가 아주 좋은 분”이라며 한껏 치켜세우더니 같은 날 저녁 손학규의 싱크탱크 행사에 가서는 “독일처럼 통합의 정치가 필요하다”며 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주장하고 나섰다. 안철수와 힘을 합쳐 뭔가 대선을 향한 모색을 해보려는 손학규, 그의 면전에서 내각제 개헌 운운한 박지원, 친박의 맹주로 자리하려는 서청원…. 4년 뒤를 향한 정치판 수 싸움은 벌써 시작된 것 같다.정용관 정치부 차장 yongari@donga.com}
전직 국회의원 모임인 헌정회가 요즘 시끌시끌하다.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 차원에서 7월 국회를 통과한 ‘대한민국헌정회육성법’ 개정안에 따라 헌정회가 최근 ‘의원연금’으로 불리는 연로회원 지원금 수급 자격 여부 조사에 나서면서 불협화음이 일고 있는 것이다. 6일 현재 생존 전직 의원은 1111명. 국회는 올해 헌정회 지원 예산으로 모두 128억여 원을 책정했고 이 가운데 117억여 원이 65세 이상 연로회원 810여 명을 위한 지원금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의원 연금 수급 대상자는 내년부터 500명 안팎으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헌정회 관계자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1일부터 10일까지 전직 의원들을 상대로 재산과 소득명세 등을 신고받고 있다”며 “일부 전직 의원이 신고를 거부하고 있어 정확한 추계는 어렵지만 개정안이 적용되는 내년 1월 1일부로 수급 대상자가 지금보다 300명가량 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개정된 헌정회육성법과 헌정회 정관에 따르면 △국회의원 재임기간이 1년 미만인 경우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은 뒤 사면 복권되지 않은 경우 △가구 월평균 소득이 전년도 도시근로자 가구당 월평균 소득액(2인 가족 기준 월 약 294만 원) 이상인 경우 △부채를 제외한 자산이 18억5000만 원 이상인 경우 등은 월 120만 원의 지원금을 받을 수 없도록 했다. 18억5000만 원은 19대 국회에서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을 제외한 전체 국회의원 평균 자산을 기준으로 정했다. 또 내년 1월 1일을 기준으로 만 65세에 이르지 못한 전직 국회의원들은 앞으로도 지원금을 받을 수 없다. 만 65세에서 1개월이 모자라 지원금을 못 받는 전직 의원도 있다. 이 때문에 내부적으론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150여 명의 전직 의원은 재산 및 소득신고를 거부하며 “지원금을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는 등 불협화음이 커지고 있다. 김봉호 전 의원(5선)은 “자존심이 상해 아예 신청을 안 했다”고 말했다. 그는 “광복 후 격동기 때 헌법이 만들어진 이후 6·25전쟁, 민주화 투쟁 등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선배 의원들은 헌정질서를 이어가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며 “이제 머리가 허옇게 세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선배들에게 ‘조국의 발전에 대해 고맙다’는 보은 차원도 아니고 ‘불쌍하니 도와주자’는 식의 시혜성 연금마저 ‘주겠다 말겠다’ 하는 논란을 벌이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고 말했다. 재직 기간이 1년 미만인 전직 의원(31명)들을 지급 대상에서 제외한 것을 놓고 내부적으로 ‘헌법소원’ 등 법률적 대응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윤수 전 의원(3선)은 “이런 식이라면 초선 의원과 재선, 3선 의원들에게 지급하는 세비도 차등 지급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일각에선 의원연금 자체에 대한 비판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만큼 어느 정도 재산이 있는 전직 의원들이나 재직 기간이 아주 짧은 전직 의원들을 수급 대상에서 배제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현실론도 제기된다. 10∼13대 국회의원을 지낸 유경현 헌정회 정책위원장은 “생계가 정말 어려운 전직 의원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지원책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길진균·권오혁 기자 le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