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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연초마다 벌어지는 쓸데없는 짓이 올해도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다. 북한 매체들은 지난해 말에 열린 노동당 전원회의 보고문헌 학습 열풍이 전국적으로 불고 있다고 연일 보도하고 있다. 학습뿐만 아니라 각 지역과 직장에서 연일 전원회의 결정 관철 궐기대회와 군중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내가 북한에서 대학을 다니던 1990년대엔 방학을 일주일 앞당겨 학생들을 대학에 소환한 뒤 신년사를 달달 외우게 하고, 학부별로 토너먼트 경연을 진행했다. 답변을 못 해 학부 탈락의 원인을 제공하면 졸업 때까지 찍혀 고생한다. 이것이 북한에서 반세기 동안 벌어져 온 일이다. 노동력이 얼마나 낭비되는지는 더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이렇게 모두에게 작년의 자랑 찬 성과와 올해의 위대한 목표를 외우게 해 만들어진 것이 오늘의 북한이다. 신년사의 성과만 종합해도 북한은 이미 공산주의는 물론이고 세계 최강국이 돼 있어야 맞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그동안 북한은 가난한 시궁창으로 열심히 달려갔을 뿐이다. 김정은은 신년사도 읽기 귀찮은지 4년째 전원회의 보고라는 문서를 만들어 전국에 하달하고 있다. 올해 보고에서도 “지난해에 괄목할 만한 성과와 진전이 이룩되었다”고 했지만 도대체 미사일 열심히 쏜 것 말고 괄목할 성과는 무엇이고 어디로 전진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올해에도 “12개 중요 고지들을 기본 과녁으로 정하고 점령 방도들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면서도 그게 뭔지 밝히진 않았다. 들으나 마나다. 방도는 늘 있었다. 다만 실천을 못 했을 뿐이다. 가령 “철도는 나라의 동맥”이라며 매년 방도를 내놓지만 현실은 기차가 다니는 게 신기할 정도로 동맥경화가 심각해졌다. 올해 김정은은 “다시 한번 1960, 70년대의 투쟁 정신과 기치를 높이 들고 혁명의 난국을 우리 힘으로 타개해 나가자”고 했다. 상황이 어려울 때마다 김일성 만세를 부르던 케케묵은 과거가 소환된다. 그런데 북한은 그 과거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시작부터 잘사는 방향과 정반대의 길을 택했는데, 다시 처음처럼 기운을 내 뛰어봐야 가난에만 더 가까워질 뿐이다. 북한이 과거에 잘못된 길을 택해 열심히 달린 것에 대한 책임을 김씨 3대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 1950, 60년대를 살았던 북한판 ‘김빠’ ‘개딸’들의 업보를 지금 그 자손들이 뒤집어쓰고 있다. 북한에서 1인 수령 체제를 강화하며 충성을 강요할 때마다 등장하는 표본 인물인 ‘태성할머니’가 대표적 개딸이다. 1950년대 후반 김일성의 독재가 저항에 직면했을 때 남포시 태성리의 할머니가 김일성에게 “종파놈들이 인민 생활에 대해 떠들어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무조건 수상님을 지지합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그 말에 힘을 얻고 반대파들을 단호하게 숙청했다고 한다. 북한판 “우리 성이 하고 싶은 거 다 해”였던 셈이다. 그런 ’묻지 마’ 지지자들을 업고 김일성은 하고 싶은 것 다 했다. 독재 체제도 만들고 자자손손 권력을 세습해도 반항도 못 하게 만들었다. 돌아보면 그때 반당·반혁명 종파분자라고 처형된 사람들이 진짜 애국자들이었다. 김정은이 바라는 1960년대의 투쟁 정신이란 무슨 짓을 해도 “우리 으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를 외치며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고 굶어 죽어도 반항하지 않는 맹목적 충성심일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엔 배급이라도 주고 일을 시켰지만, 지금은 무보수 충성을 강요하니 그런 호소가 얼마나 먹혀들진 미지수다. 이젠 북한 인민도 깨달아야 한다. 설날부터 고지 점령 방도라는 의미 없는 헛소리나 외우지 말고, 시키는 대로 다 해서 어떤 사회가 됐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자신들이 어디에서 떠나 어디로 가는지, 왜 북한이 이렇게 됐는지를 고민해봐야 한다. 과거에서 찾을 것은 투쟁 정신이 아니라 맹목적 지지가 어떤 지옥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교훈이다. 올해 북한의 상황은 매우 어렵고, 굶어 죽는 사람도 많이 나올지 모른다. 그래도 김정은은 내년 전원회의 보고에서 또 어김없이 “괄목할 만한 성과와 진전이 이룩된 2023년이었다”고 할 것이다. 죽는 날까지 반복될 이 저주의 굴레를 자손들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다면, 북한 주민들도 이젠 노예 마인드에서 벗어나야 한다. 김정은이 외우라는 것을 외우지 않고, 하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면 될 것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국내 스테인리스스틸 생산 대표 기업인 길산그룹이 이달 7일 ‘매출 1조 클럽’ 고지를 밟았다. 매출액 1조 원 이상을 기록한 기업은 지난해 기준 229개로 집계된다. 길산그룹 정길영 회장(73·사진)은 1991년 충남 논산의 허허벌판에 스테인리스스틸 파이프 공장을 세운 지 31년 만에 매출 1조 원을 달성했다. 정 회장은 “도전정신으로 모든 비전을 현실화시킨다”는 태도로 일에 매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2일 충남 계룡시 본사에서 만난 정 회장은 “국민소득이 늘어날수록 부식이 없고 깨끗한 스테인리스스틸 파이프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고 보고 시작해 한길만 묵묵히 걸어온 결과 오늘의 길산그룹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1980년대 아파트를 짓다가 처음 스테인리스스틸 파이프를 봤다. 당시엔 한국에서 스테인리스스틸 생산이 원활하지 못했는데 그걸 보자마자 이것이 앞으로 대세가 되겠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정 회장은 26세 때부터 운송업, 건축업 등 다양한 사업을 하다 42세에 스테인리스스틸 사업에 뛰어들었다. 결코 빨리 시작했다고 볼 수 없는 나이였지만 여러 사업을 통해 익힌 시장에 대한 장기적 안목은 정확했다. 스테인리스스틸 시장은 예상대로 꾸준히 성장했고, 길산그룹도 창립 이후 지금까지 30년 넘게 한 해도 적자를 기록하지 않았다. 정 회장은 이익의 대다수를 생산 설비와 우수 인력 확보에 투자했다. 현재 길산그룹은 길산파이프와 길산스틸 등 8개의 계열사를 두고 있고, 국내 최고 수준의 파이프 제조 능력을 갖춘 기술자를 다수 확보하고 있다. 또 직경이 작은 세관 파이프부터 대구경 파이프에 이르기까지 수십 종류의 파이프를 고객의 요구에 맞게 제작할 수 있는 능력도 보유했다. 매년 길산그룹이 생산하는 스테인리스스틸 구조용 강관 제품은 건축자재나 선박, 차량에 쓰이고, 판매량은 국내 시장 수요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꾸준히 길산그룹을 성장시킨 정 회장이지만 경기 침체로 인해 내년 실적에 대해서는 걱정이 적지 않다. 그는 “앞으로 2년 동안의 위기는 전례 없이 심각할 것으로 예상된다. 마음의 각오를 정말 단단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매출 1조 원을 달성했지만 다음 목표를 잡지 않고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하려 한다”고 했다. 길산그룹은 올해 하반기에 재고를 최대한 줄이고 주문생산체제를 도입하며 닥쳐오는 경제 침체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아울러 반도체와 2차전지 산업의 성장에 대비해 관련 파이프 설비의 투자를 늘리고 있다. 정 회장은 우리 사회에 대한 염려도 털어놨다. 그는 “앞으로 금융 비용 부담이 늘게 되면 많은 기업이 위기를 맞을 수 있다. 실업자도 많이 생길 것으로 예상된다. 이 위기를 이겨내려면 노사가 힘을 합치는 지혜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했다.계룡=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김여정이 북한의 첫 군사정찰위성 시험용 사진 공개에 대한 남쪽의 보도에 발끈해 노동당 부부장 명의로 20일 담화를 발표했다. ‘주둥이에서 풍기는 구린내’를 운운한 담화문의 수준이 조악하다. 굳이 구린내가 어디서 나는지를 따지고 들고 싶진 않다. “누가 일회성 시험에 값비싼 고분해능촬영기를 설치하고 시험을 하겠는가”라는 설명도 나름의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년 4월 군사정찰위성을 발사한다니 그때 가서 선명한 사진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북한은 19일에 서울과 인천을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 하루 뒤에 바로 담화가 나온 것을 보니 김여정이 북한의 기술력을 깎아내리는 ‘몹쓸 버릇 남조선괴뢰들(?)’에게 단단히 화가 난 것 같다. 하루 종일 한국 포털을 검색해 ‘동네 전문가’들의 발언까지 다 조사한 뒤 장문의 담화를 준비했으니 말이다. 2014년에 일본제 보급형 DSLR 카메라를 달고 날아왔다가 기지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남쪽 곳곳에 추락한 북한의 조악한 무인기들이 기억에 생생하다. 그런 북한이 8년 뒤 정찰위성까지 쏘겠다는데 별것 아니라고 폄훼하니 김여정이 화가 날지도 모르겠다. 제재 와중에 각종 첨단 부품을 힘들게 구해 만든 노력은 설명 없이도 눈물겨울 것이다. 김여정은 담화에서 “우리가 하겠다고 한 것을 못한 것이 있었는가를 돌이켜보라”고 큰소리를 쳐댔다. 그런데 이것이 북한의 문제다. 왜 북한이 기어이 지키겠다고 이를 악무는 것이 핵실험과 미사일 개발밖에 없는가. 군사정찰위성을 쏜다는 북한의 곳곳에선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살펴보자. 시계 배터리 하나 자체적으로 못 만드는 북한이다. 코로나로 수입까지 중단하니 가정과 손목에서 시계가 멈춰 섰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멈춰 선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성냥공장도 제대로 가동되지 못한다. 라이터돌을 수입해 오지 못하니 사람들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도, 담배를 피우기도 힘들다. 불이 없고, 해를 보고 시간을 가늠하면 원시시대나 다름없다고 할 것이다. 원시시대는 그나마 산과 들에 먹을 것이라도 풍족했지만, 지금 북한에선 주민들이 굶주림과 싸워야 한다. 농촌진흥청은 기상 악화와 비료 부족 등의 원인으로 올해 북한 식량 수확량이 수요에 비해 100만 t가량 부족할 것으로 추산했다. 이는 500만 명이 먹을 수 있는 양이다. 이런 열악한 처지에도 아랑곳 않고 군사정찰위성을 쏜다고 자랑하니 이 무슨 기괴한 부조화인지 할 말을 잃게 된다. 솔직히 북한에 왜 군사정찰위성이 필요한지도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구글어스, 항공뷰, 거리뷰 서비스로 특정 건물 간판까지 다 볼 수 있는 세상이다. 군부대의 이동을 감시할 목적이라면 이렇게 묻고 싶다. “알면 제대로 막을 수 있을까?” 북한군은 육해공 모두 반세기 전에 생산된, 뜨고 굴러가는 것조차 신기한 고물 장비로 무장하고 있다. 남북의 군사력 격차는 알고도 막지 못할 수준에 이르렀다. 여기에 미군까지 합세하면 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김여정은 “우리가 하겠다고 한 것을 못한 것이 있었는가를 돌이켜보라”라고 말했다. 굳이 그런 사례들을 일일이 설명해줘야 아는지 궁금하다. 다른 것 다 떠나 김정은이 집권 첫 연설에서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고 했던 다짐은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김여정은 잊어버렸는지 몰라도 인민들은 똑똑히 기억할 것이다. 지금 북한에서 김정은 빼고 허리띠를 풀고 사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김여정은 북한에 대한 한국의 여론만 보지 말고 다른 것도 많이 검색해 봤으면 좋겠다. 가령 이달 초 응우옌쑤언푹 베트남 국가주석의 방한도 북한에 주는 시사점이 많다. 어제의 적이었던 한국과 베트남은 지금 상생의 전략적 동반자이다. 지난 10년 동안 베트남 국민총생산액은 3배 이상, 1인당 소득은 2010년 1690달러에서 2021년 3716달러로 두 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베트남 성장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 다름 아닌 한국이다. 1988년부터 작년 말까지 외국 누적투자액 1위가 한국이다. 삼성이 215억 달러를 투자하는 등 한국 기업의 누적 투자액은 비공식 포함 900억 달러가 넘는다. 한국이 인구 1억 명의 베트남 경제를 견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궁금하다. 김여정은 악담만 퍼붓지 말고 남쪽을 향해 한번 손 내밀어 보길 바란다. 북핵만 포기한다면, 대한민국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지 않는다면 한국은 북한을 언제든 도와줄 의지와 능력이 있다.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는 첫 약속부터 지켜야 인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최근 세계적으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가(AI)가 급속히 확산되는 데 대비해 농림축산식품부가 방역 조치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미국은 올해 처음 가금농장에서 AI가 발생해 지금까지 47개 주에서 역대 최대 규모인 5054만 마리의 가금류를 살처분했다. 유럽에서도 올해 37개국 이상에서 2467건의 고병원성 AI가 발생해 약 5000만 마리의 가금이 살처분됐다고 밝혔다. 특히 영국의 경우 지난 1년간 방목 농가의 칠면조 40%가 폐사하는 등 200건 이상의 감염 사례가 보고됐고, 모든 가금류의 방사 사육이 금지됐다. 고병원성 AI는 국내에서도 심상찮게 퍼지고 있다. 10월 17일 경북 예천군 소재 종오리 농장에서 고병원성 AI가 처음 발생한 이후 이달 14일 기준 가금농장에서 총 46건이 발생했다. 올해 12월에 우리나라에서 관측된 철새 수는 지난해와 비슷한 156만 마리였지만 야생조류 고병원성 AI 검출 건수는 83건으로 작년(17건) 대비 항원 검출이 4.9배다. 올해 고병원성 AI 바이러스는 예년에 비해 병원성이 강하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특히 오리 폐사율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농식품부는 과거 사례를 고려할 때 12월은 고병원성 AI 발생 위험도가 높아 지자체와 축산농가에서 소독 조치를 예년의 2배 이상으로 늘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영산강 유역 4개 시군(나주·영암·무안·함평)과 안성 지역에서의 지역적 위험도를 고려해 추가 발생 및 확산 방지를 위해 강화된 방역 조치를 취하고 있다. 농장별 알 반출 동선 등을 파악해 관리하고 가금농장 출입 최소화 조치 및 농장별 내·외부 소독과 점검 등을 통해 산란계 농장의 차단 방역 관리를 강화하고 있다. 또 고위험 10개 하천 인근에 소독 자원을 확대 투입하는 한편 소독차량 31대를 동원해 산란계 농장 진입로 등의 소독을 기존보다 2배로 강화했다. 농식품부는 생필품인 계란 가격이 급격히 상승할 경우에 대비해 계란 수급 상황이 악화될 경우 신선란을 직접 수입 공급할 계획이다. 한편 가금류를 대량 살처분하는 상황이 와도 계란 생산 기반이 조기에 회복될 수 있도록 산란용 병아리와 종란을 수입해 살처분 농장에 우선 공급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예방적 살처분 농가에만 지원되던 긴급 경영안정자금에 고병원성 AI 발생 농가도 포함하고, 휴업 등 사유로 현재 비어 있는 산란계 농장에 새로 들어오는 농가도 지원하는 방안 등 가능한 조치를 모두 준비하고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삼성증권이 공식 유튜브 채널 ‘Samsung POP’을 통해 ‘2023년 시장 전망’ 영상을 시리즈로 제공해 인기를 얻고 있다. 삼성증권 소속 애널리스트가 출연해 2023년 전망과 이에 따른 투자전략을 소개하는 이번 시리즈는 글로벌 경제전망에서 각 산업 섹터별 전망까지 총 20여 편이 순차적으로 업로드되고 있다. 가장 먼저 공개된 영상은 ‘2023년 글로벌 경제 전망’(사진)이다. 매크로 분석을 담당하는 허진욱 팀장이 출연해 주요 국가들의 경기 전망과 함께 글로벌 시장의 주요 이슈인 인플레이션과 통화정책에 대한 전망을 소개한다. 또 주식과 채권 등 금융시장에 대한 투자전략도 제시한다. ‘글로벌 자산배분 전망’을 주제로 한 영상도 주목받고 있다. 글로벌투자전략을 담당하는 유승민 팀장이 출연해 내년의 경기 국면은 어떻게 전개될지, 그리고 이에 따른 자산배분 전략은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소개한다. 경기의 수축 국면이 이어질 상반기에는 주식보다는 채권을, 회복 국면에 접어드는 하반기부터는 채권보다 주식이 유망하다고 소개한다. 주요 국가별 전망과 주식, 채권 등 각 자산군별 전망, 그리고 반도체, 2차전지 등 각 산업 섹터별 전망이 차례로 올라가고 있다. 투자자들과의 공감 확대를 위해 유튜브를 적극 활용하고 있는 삼성증권은 올해 국내 최초로 가상인간을 활용한 ‘비주얼애널리스트’ 시대를 연 데 이어 다양한 방식의 투자정보를 제공해 월평균 90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아동권리보장원이 15일 종로구 소재 본원 대회의실에서 ‘아동 미래비전 포럼’을 열어 아동권리의 올바른 방향을 모색한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최재형, 강훈식 의원실과 공동으로 주최하는 이번 포럼에서는 ‘아동기본법’의 주체인 아동이 토론에 참여해 ‘아동기본법’의 방향을 논의한다. 어린이날 제정 100주년인 올해, 아동에 대한 정책 수립·조정 및 지원 등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을 규정하고 권리보장에 대한 국가·사회·가정의 책무를 규정하는 아동기본법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아동권리보장원은 1991년 제정된 ‘청소년기본법’, 2020년에 제정된 ‘청년기본법’에 이어 다음은 아동기본법이 제정될 차례로 보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윤혜미 아동권리보장원장은 “과거의 교훈과 우리 아이들의 현재 모습은 ‘아동기본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라며 “아동의 생존에서부터 발달, 보호, 참여의 권리와 책임을 국가 차원에서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아동권리 실현의 기초 작업이다. 보건복지부와 아동권리보장원은 아동기본법이 조속히 제정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아동권리는 아동의 행복감에 직결되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국제적으로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 아동의 행복감은 높지 않다. 2018년 조사에서 ‘거의, 전혀 행복하지 않다’고 응답한 우리나라 15세 아동의 비율은 13.3%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인 8.9% 대비 1.5배 정도 높았고, 일본(8.8%)과 미국(7.1%)에 비해서도 높았다. 2018년 한국의 아동빈곤율(12.3%)이 일본(14.0%)과 미국(21.2%)에 비해 낮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가 아동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결과는 아동의 행복이 훨씬 포괄적인 개념임을 말해준다. 아동의 행복감은 아동 일상의 균형 및 생활의 주도성과 관련이 깊다. 즉, 아동이 자신의 권리를 충분히 누릴 수 있을 때 행복감이 높아지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아동 관련 제도와 법률은 주로 문제가 발생했을 시 이를 시급히 해결하기 위한 단편적인 대응 방안이 주를 이루고 있고, 아동권리 실현을 위한 국내법이 부재한 현실이다. 아동권리보장원 관계자는 “아동은 그 어느 대상보다도 국가의 역할과 책임이 중요한 대상이라는 점에서 아동정책의 목표와 이념을 제시하고, 아동의 존엄한 가치와 행복 추구의 권리보장을 규정할 법규의 필요성은 더욱 크다”고 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만남은 우리의 꿈이었다. 만남 이후의 삶은 그려보지 못했다. 함께 산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꿈 너머에 있었다. 만남이 너무나 간절했기에 한 번만이라도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다면 더 원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그 소원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정작 행복하지만은 않다. 아이들은 훌쩍 커버렸고, 작은 일에도 상처를 받는다.날마다 일상에 쫓기며 현재를 산다. 아이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헤아리는 일에 무심했다. 우리의 만남이 지난 시간을 보상하고 상처를 치유하리라 믿었다. 가끔 아이들과의 언쟁에서, 쓸쓸한 표정에서 지난날의 상처를 발견하면 나는 한없이 무너진다. 상처는 감추어져 있을 뿐 치유되지 않았음을 느낀다. 어떻게 해야 어두운 그림자를 흔적없이 지울 수 있을까?”그는 눈물을 흘리며 자판을 두드렸다. 엄마가 겪어야 했던 굴곡의 삶을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설명해야 할까. 엄마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너희들에게 열어 보일 수 있을까.“지키기 위해 놓아야 했고, 만나기 위해 헤어져야 했던 시간을 돌아보며 의심한다. 만남은 꿈의 실현이었지만, 함께 하는 첫 시작이기도 했다. 가족이어서,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의 상처를 건드리기 겁났다. 곪은 상처는 빨리 수술해야 하지만 시간이라는 약에 기댔다. 미숙했던 자신을 탓해보지만 지난날을 되돌릴 수는 없다.”그는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지난날은 되돌릴 수 없지만 기록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엄마의 이야기가 말이 아닌 책을 통해 아이들에게 더 잘 전달되길 바랄 뿐이었다. 짬짬이 글을 썼다. 그렇게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왔다.지난달 출판된 저서 ‘엄마의 이별 방정식’의 저자 허옥희 씨는 한국에 입국한 3만5000여 탈북민 중 한 명이다. 그는 태어난 곳과 지도자를 잘못 만난 탓에 혈육과 헤어져 타향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하다가 운 좋게 한국에 입국한 2만 여 탈북 여성 중 한 명이다. 가족을 위해, 가족이 다시 모여 살기 위해 온 몸을 내던졌지만, 과거의 쓰린 상처는 그도, 가족들도 수시로 아프게 했다. 그러나 아프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치유하고 다시 일어서야 했다. 그는 어머니이기 때문이다.“우린 양반 가문이다.”허옥희 씨는 1967년 함경북도 청진 시에서 태어났다. 인민학교에 들어갈 즈음 아버지가 사회보장대상자가 됐다. 북한에서 사회보장대상자는 “나이가 많거나 병 또는 신체장애로 노동능력을 잃은 사람, 돌볼 사람이 없는 늙은이, 어린이”로 규정하고 있다. 당시 아버지의 나이는 38세에 불과했다.아버지의 아버지는 6.25전쟁 때 월남했다. 북한에선 가장 출신성분이 나쁜 계층에 속하게 된 아버지는 남들이 기피하는 청진화학섬유공장 방사직장에서 일하게 됐다. 방사직장은 실을 뽑기 전 누에고치를 삶아 가공하는 곳인데, 각종 산성물질을 쓰고 유해가스에 노출된 곳이다. 이곳에서 20년 버티는 사람은 없다.허 씨의 부친도 38세에 노동능력을 상실했다. 직장에서 나온 지 얼마 안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북한은 평양을 비롯한 대도시들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지방으로 보냈다. 명분은 전쟁 때 공습에서 보호한다는 것이지만 실제로 농촌에 내쫓긴 사람은 출신성분이 나쁘거나 허약한 사람들뿐이었다.허 씨네 가족은 회령 시내 인근의 한 농촌으로 이주했다. 이곳은 허 씨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허 씨의 외할아버지도 월남자 출신이었다.도시에 살던 허 씨는 매일 한 시간 넘게 농촌길을 걸어 학교에 갔다. 학급 학생 55명 중 20명이 그처럼 도시에 살다가 쫓겨서 온 애들이었다. 4남매 중 맏이인 허 씨는 동생들의 본보기가 되기 위해서 학교에도 결석 한 번 없이 열심히 다녔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자신이 할 일이 공부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아버지는 회령에 와서 공장 합숙에 불을 때주는 일을 했다. 딸이 “다른 애들 아버지들은 당원인데 아버지는 왜 당원이 아니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는 한참을 말 못하고 있다가 “우리 허 씨는 대대로 양반 가문이다”고 대답했다. 출신성분이 뭔지 아직 모르는 딸에게 그 말밖에 해줄 말이 없었던 것이다.북한에서 월남자의 손녀에게 허락된 직업은 노동자 밖에 없었다. 허 씨는 1983년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 근처의 제지공장에 취직했다. 화약이나 시멘트 포장지를 생산하는 곳이었다. 공장에서 허 씨는 폐수를 정제해 두만강에 흘러 보내는 직장에서 7년 동안 일했다. 그동안 노동당원이 되기 위해 일도 열심히 하고, 남들이 기피하는 돌격대도 자원해 나갔지만 의미 없는 몸부림이었다.허 씨가 취직했을 때 공장은 건설된 지 1년 밖에 안 된 새 것이었지만, 나중에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을 거치며 공장은 빈껍데기만 앙상하게 남았다. 먹고 살기 어려운 노동자들이 기계는 물론이고, 유리와 못까지 몽땅 뜯어 중국에 팔았던 것이다.국군포로 시아버지어느 덧 결혼할 나이가 되자 중매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허 씨는 고향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23세 때인 1990년 회령 세천에 있는 탄광에서 목수로 일하는 남자와 결혼했다.그가 선택한 남자의 기준은 처가를 부양할 수 있는 남자였다. 맏이인 허 씨는 세 명의 동생을 자신이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부모님이 연로할 때도 자기가 그 책임을 떠맡을 생각이었다. 결혼한 남자는 막내인데,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결혼식을 올리느라 세천으로 가면서 남편이 연애할 때 자신을 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썼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그가 살던 마을과 탄광 마을은 80리 떨어져 있고 통근열차가 다녔는데, 제 시간에 다닌 적이 한번도 없었다. 통근열차로 80리를 오는데 최소 반나절, 때로는 하루가 꼬박 걸렸다. 그 기차를 타고 남편은 회령에 와서 허 씨를 잠깐 보고 돌아가곤 했던 것이다.세천은 작은 분지를 빙 둘러싸고 1만 가구 정도의 작은 집들이 따닥따닥 붙어있는 곳이었다. 허 씨가 시아버지를 만나보니 말투가 이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국군포로 출신이었다.6.25전쟁 전 대구에서 딸 2명을 키우며 살던 시아버지 김성섭은 1951년 징집돼 싸우다가 포로로 잡혔다. 대다수 국군포로와 마찬가지로 김 씨도 함북의 열악한 탄광에 끌려와 노동을 했다.세천에는 국군포로들이 여럿 있었다. 허 씨가 결혼해 갔을 때 이들은 모두 은퇴한 늙은이들이었다. 하지만 국군포로끼리는 만나지 못했다. 북한 당국이 늘 감시했기 때문이었다. 길에서 마주치며 인사만 하는 정도였다.시아버지는 “우리 집 옆에 큰 목재공장이 있었는데”로 시작해 고향 이야기를 종종했다. “지금쯤이면 우리 고향엔 보리가 파랗게 자랄텐데” 또는 “서울대 법대 다니던 처남은 잘 돼 있을 거야”라는 식으로 고향을 떠올렸다.나중에 한국에 왔을 때 허 씨는 시아버지의 행적을 찾아보았다. 대전 현충원에 전사자 김성섭의 묘가 있었다. 딸들도 찾았다. 기차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니 할머니가 나왔다. 아들도 40대가 넘었다.다섯 살에 아버지를 잃은 딸은 힘들게 성장했다. 가슴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다. 허 씨는 자신이 갖고 간 시아버지의 사진을 넘겨주었다. 딸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아버지 사진을 보여주었다.그 사진 속엔 키가 훤칠한 와이셔츠 차림의 젊은 남자가 환한 표정으로 있었다. 허 씨가 건넨 사진 속에는 70대가 넘은 허리 구부정한 노인이 있었다. 두 여인은 사진 속 낯선 남자를 말을 잊고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시아버지가 우리 집안에서 제일 성공했을 것이라던 처남은 6.25전쟁 때 미군 통역으로 참전했고, 이후 검사로 쭉 지내다가 사망했다고 한다.담배 장사1990년대 초반부터 함북에는 배급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부업도 할 수 없는 탄광마을에선 더 이상 살기 어려웠다. 허 씨는 1991년에 태어난 어린 딸을 데리고 다시 친정집으로 내려왔다. 장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가족을 지키려면 그 길밖에 없었다. 1994년엔 둘째 딸도 태어났다.그는 처음엔 담배 장사를 하다가 이후 닥치는 대로 벌었다. 식량도 팔고 음식도 팔았다. 그래도 입에 겨우 풀칠하는 수준이었다.1990년대 중반 허 씨의 동네에는 가족이 죽지 않은 집이 없었다. 허 씨는 전쟁이 나도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죽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했다. 그의 외할머니도 자식들이 고생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지 1996년에 스스로 곡기를 끊고 단식을 하다가 12일 만에 돌아갔다.남편도 나중에 탄광을 떠나 회령에 왔지만, 북한에서 남성은 더 엄격하게 조직생활을 해야 했다. 장사는 못하고 늘 도로닦이나 외지 파견과 같은 의미 없는 동원에만 뽑혀 다녔다.장사를 하면서 허 씨는 전혀 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지금까지는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고지식하게 살아왔지만, 돈을 벌지 못하면 가족을 잃게 되는 처지로 내몰리자 죽기 살기로 돈을 벌었다.1996년부터 허 씨는 담배를 만들어 파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장마당이 정착되면서 북한도 빠르게 분업화되기 시작했는데, 허 씨네 마을은 여과담배를 만들어 파는 동네가 됐다. 누구는 평양 쪽에 가서 ‘힐튼’ ‘말보로’ 등 외국 브랜드를 찍어 인쇄한 담배 포장지를 날라 오고, 누구는 중국에서 여과필터를 들여다 팔고, 누구는 독초를 사서 담배를 말았다. 손으로 여과담배를 만드는 것은 정교한 작업이 필요하다. 특히 풀칠을 잘 해야 했고 담배와 향 배합 비율도 잘 맞춰야 했다. 허 씨네 마을에선 이렇게 담배를 만들어 파는 집이 여러 집 있었는데 수공업으로 만들다보니 집집마다 만드는 담배의 맛이 달랐다.전국에서 장사꾼들이 들어와 담배를 사갔다. 이들은 담배 포장 수준만 봐도 누구네 집 담배인줄 귀신같이 알아봤다.허 씨는 처음에는 하루에 대여섯 보루밖에 만들지 못했지만, 나중에 숙련되니 열 보루 이상 만들었다. 하루 담배 2000대를 두 손으로 말고 풀로 붙인 것이다. 대량 주문을 받으면 2~3일 밤을 자지 않고 정신이 몽롱한 채로 담배를 말았다.허 씨의 담배는 점점 맛이 좋다고 소문이 났다. 장사꾼들이 끊임없이 그의 집을 찾아왔다. 허 씨는 수요를 맞추려고 사람을 쓰기 시작했다. 허 씨의 집에서 사람들이 벽을 마주보고 앉아 하루 종일 일했다. 담배를 전문적으로 마는 사람, 붙이는 사람, 포장하는 사람으로 분업화하니 능률도 올라갔다. 2000년쯤엔 허 씨는 열 명 정도를 고용해 쓰는 자본가가 됐다.열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자기 집에 불러 일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허 씨는 그때부터 담배 무게를 저울에 달아 집집마다 나눠주며 일을 시켰다. “내일까지 이걸 다 말아서 오라”고 하면 사람들이 밤을 새서 만들어 주었다.규모가 커지니 돈도 많이 벌었다. 돈을 번 뒤 집을 샀다. 처음엔 아파트를 샀는데 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고생이 심했다. 그래서 아파트는 군대에서 제대돼 온 남동생에게 주고 단층집을 사서 따로 나왔다. 탈북장사를 해서 돈을 좀 번다는 소문이 나자 돈을 뜯어내려 찾아오는 사람도 많아졌다. 보안원이 찾아와서 “요즘 국가 담배들이 개인들에게 팔려나간다는데”라고 운을 떼기만 해도 수천 원씩 쥐어주어야 했다.누가 찾아와서 문을 두드릴 때마다 이번엔 또 누가 뜯어내려 왔을까 싶어 가슴이 떨렸다. 이중삼중의 수탈에 매일 같이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 국가에서 아무런 공급을 주지 않는 ‘미공급 시대’가 좋다는 생각도 했다. 과거엔 강냉이도 겨우 받아먹고 살았는데, 장사를 하는 시대가 되니 일한 만큼 돈을 벌고, 능력에 따라 쌀밥도 먹을 수 있고, 시장에서 금지된 책도 사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자신의 변화를 돌아보며 어떤 세상에서 사는가에 따라 인간의 운명도 바뀐다는 것을 체감했다.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그는 불빛이 훤한 중국을 건네다 보았다. 몰래 한국 영화도 보면서 “저긴 장사를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얼마나 좋을까” 부러워도 했다.어느 날 본 아동영화는 지금도 그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폭우가 쏟아지자 토끼들이 이사를 가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때 “토끼도 살기 어려우면 옆 동네로 이사를 가는데, 명색이 인간인 우리는 저런 자유도 없으니 얼마나 불쌍한가”고 한탄했던 것이다.2000년대 초반 그의 집을 찾던 장사꾼들의 발걸음이 점점 뜸해지기 시작했다. 나진 등 각지에 외국에서 들여온 기계로 위조담배를 전문 제조해 만드는 공장들이 많아진 것이다. 수제 담배는 더 이상 가격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벌어들이는 액수는 줄어드는데, 설상가상 모아둔 돈마저 많지 않았다. 그동안 번 돈 중에 상당수는 남편이 탕진했다. 아내가 돈을 좀 벌기 시작한 뒤로 남편은 돈을 몰래 빼내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몇 년 만에 지독한 알코올 중독자가 돼 버렸다. 수없이 이혼 생각을 했지만, 북한에선 이혼이 사실상 금지됐다. 남편의 증세는 점점 심해졌는데, 동네에선 다들 남편이 몇 년 살지 못한다고 걱정했다. 남편은 그 몇 년도 채우지 못하고 어느 날 겨울 술에 취해 얕은 개울을 건너다 물에 빠져 죽었다.다시 가난해지는 삶에 절망하고 있던 어느 날 공부를 잘해 수재학교인 1고등중학교에 다니던 맏딸이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엄마, 나 학교 졸업하면 중국에 갈 거야. 우리 같이 가자. 가본 사람들이 말하는데 저긴 딴 세상이래. 난 무조건 갈 거야.”허 씨는 심장이 뚝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맏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딸은 간다고 하면 무조건 가는 애였다. 2~3년 뒤 어린 딸이 중국에 팔려가는 상상을 해봤다. 그건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허 씨는 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 자신도 더 이상 북한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딸에게 말했다.“우리 다 같이 가자. 그런데 함께 가면 위험하니 엄마가 먼저 가서 자리 잡고 너희를 데리고 올 거야.”허 씨는 2006년 1월 두만강을 넘었다. 맏딸에겐 간다고 말을 했지만, 둘째에겐 말도 못했다.“나를 팔아줘.”넘어갈 때 연길에 살고 있는 동네 친구를 찾아 일자리를 부탁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연길에선 감시가 심해 자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그는 다시 과거 자신의 신세를 졌던 아는 동생을 찾아 심양으로 향했다. 과거 중국에 살다 북송돼 감옥생활을 했던 그 동생은 갈 곳이 없어 한 달이나 허 씨네 집에서 머물렀었다. 심양에 가니 동생이 식당을 소개해주었다. 그는 우선 300위안을 받기로 하고 청소하는 일을 시작했다.그런데 중국은 막연하게 상상하던 그런 곳이 아니었다. 우선 말을 모르니 안전하지 못했다. 매일같이 언제 북송될지 모르는 공포에 떨어야 했다. 국경도시인 회령에 살던 그는 북송되면 어떤 처벌을 받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어느 날 그가 일하는 식당에 공안 두 명이 신고가 들어왔다며 들어왔다. 당시 그는 1층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공안들은 어떤 신고를 받았는지 2층과 3층을 뒤지고 갔다. 천만다행으로 체포되지 않았지만, 여기에 더 머물 순 없었다. 그렇다고 어딜 가도 말을 모르기 때문에 발을 붙일 방법도 없었다. 집에서 기다리는 딸들에게 돈도 보내줘야 했다. 최악의 상황에 내몰린 그는 동생에게 말했다.“나를 팔아줘. 북송돼 고문 받고 짐승 취급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한족과 사는 게 낫다고 봐. 많은 탈북 여성들이 중국 시골에 팔려간다고 하는데, 나도 좀 팔아서 3000위안만 나를 주고 나머지는 네가 다 가져.”동생도 방법이 없었다. 허 씨를 데리고 있다간 자기도 더 위험해지는 것이다. 그는 북한 여성들을 파는 브로커를 찾아 데리고 왔다.브로커는 그를 차로 몇 시간 걸리는 외진 산골에 데리고 가더니 그곳에 이미 시집와 있는 어느 탈북 여성의 집에 맡기고 사라졌다. 이어 현지에서 다시 중매를 서주는 브로커가 나타났다. 그가 어떻게 말했는지 몇 시간이 되자 남자들이 하나 둘 나타나 그를 살펴보고 사라졌다. 저녁에 또 한 할머니가 와서 그를 살펴보더니 다음날 아침에 또 나타났다. 그리곤 브로커와 합의를 보았는지 그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30대 중반의 아들이 장가를 못 가자 모친이 나서서 북한 여자를 산 것이다. 집에 가보니 너무 기가 막혔다. 마을에서 가장 남루한 집이었고, 천정은 연기로 새까맣게 그슬려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심양의 브로커는 시골 브로커에게 허씨를 넘겨주고 1만 위안을 받았고, 이중 3000위안을 허 씨에게 주었다. 시골 브로커는 허 씨를 36세라고 속이고 1만6000위안을 받았다.당시 한족 동네에선 탈북 여성은 좀 살다가 말을 익히면 달아난다고 기피하는 분위기였다. 허 씨도 그 동네에서 계속 살 생각이 없었다. 말만 좀 익히면 도망가려 했다. 브로커도 허 씨에게 “도망치게 되면 나를 다시 찾으라”며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그가 도망가면 다시 딴 곳에 팔 생각이었던 것이다.사연을 알게 되면서 허 씨는 새 남편으로 인연을 맺은 한족 남성과 그의 어머니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이 가난한 집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1만6000위안을 들여 여자를 샀는데 내가 달아나면 이 사람들은 뭔 죄란 말인가.”시어머니와 남편은 그를 극진하게 대했다. 그렇지만 그는 북에 남겨둔 두 딸을 생각하며 늘 냉정해지려 마음을 가다듬었다.두 달쯤 지난 뒤 허씨는 시름시름 않기 시작했지만 신분증이 없어 병원으로 갈 수도 없었다. 시어머니가 동네 한약집에 가서 한 달 분 약을 사와서 하루 세 번 꼬박꼬박 약을 달여 주었다. 쓴 약을 삼키면 사탕을 입에 넣어주었다.허 씨는 북한에서 두 딸이 기다린다고 말했다. 남편은 두 말하지 않고 얼마나 필요하냐고 물었다. 1000위안이 든다고 하자 남편은 밖에 나가 친구에게서 그 돈을 빌려왔다. 그러나 돈을 보내는 브로커 비용 300위안이 더 필요한 허 씨는 밖에 나가 자신의 머리를 200위안에 팔았다.짧은 머리가 되어 나타난 허 씨를 보고 시어머니는 사연을 물었다. 그날 저녁 식탁에 앉은 세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다.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밥을 다 먹었을 때 시어머니가 슬그머니 100위안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일어섰다.그때 허 씨는 이런 사람들을 버리고 달아나려던 자신을 끊임없이 자책했다. 꽁꽁 얼었던 마음이 정에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남편은 북한에서 두 딸을 데려오면 자기가 잘 키우겠다고 말했다. 2008년 2월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가족의 완성어느 날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심양에 살던 동생이 그동안 한국에 갔던 것이다. “언니. 거기 있지 말고 빨리 여기로 와. 내가 선을 알려 줄게.”그런데 그때는 몸이 아파 갈 형편이 못됐다. 두 번째 전화가 왔을 때는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세 번째 전화를 받았을 때 아이가 6개월 정도 됐을 때였다.허 씨는 끊임없이 고민했다. 한국에 가서 새 삶을 살 수 있는데, 이렇게 낙후된 타국의 농촌에서 평생 농사짓는 아낙네로 살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북에서 데려오려는 딸들까지 그렇게 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떠나자고 하니 ‘마마’라고 부르며 방바닥을 기어 다니는 아들이 밟혔다.남편에게 몰래 “내가 한국에 가서 자리 잡고 당신과 아들을 데리고 오겠다”고 말하자 그는 눈물만 뚝뚝 흘리며 아무 말도 못했다. 탈북 여성들이 다 도망친다는 말을 들었는데, 드디어 자기에게도 그런 운명이 오는구나 싶었던 것이다.시어머니에겐 말도 꺼내지 못했다. 설득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세 번째로 거절하면 한국으로 가는 선이 영영 막힐 것 같았다.2008년 10월 허 씨는 모질게 마음먹고 데리러 온 사람을 따라 집을 나섰다. 그를 따라 동남아 국가를 거쳐 이듬해 1월에 한국에 도착했고, 5월에 사회에 나왔다.처음 정착한 곳은 대전이었다. 그의 머리 속엔 자식들을 데려와 한 집에서 살게 하겠다는 마음 밖에 없었다.닥치는 대로 일했다. 차 부품업체에 들어가 120만 원을 받고 일했다. 반찬을 살 돈도 아까워 죽만 쒀서 먹었고, 세탁기 살 돈이 가까워 손으로 빨래를 했다.집 앞에 있는 과일 가게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탐스러운 사과를 사먹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딸을 생각하며 참았다. 나중에 그는 딸이 한국에 온 뒤에야 처음으로 그토록 사고 싶었던 사과를 사먹었다. 그렇게 악착같이 일해 6개월 만에 700만 원을 모았다. 그리고 여권이 나오자마자 주변 사람들의 돈까지 빌려 1000만 원을 들고 중국으로 향했다.처음 찾아간 곳은 시어머니와 남편이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은 물론 아들까지 두고 도망간 북한 며느리에 대한 원망이 가득 차 있었다. 기어 다니던 아들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마당에서 놀고 있다가 허 씨를 보자 아버지 품으로 숨어버렸다.허 씨가 온 진짜 목적은 이들이 아니라 북한에 남겨둔 두 딸을 데려오는 것이었다. 그는 남편과 함께 연길로 갔다. 그곳에서 브로커를 찾아 딸을 데려오는 작전을 짰다.남편이 직접 두만강에 나가 강을 건너온 두 딸을 맞았다. 첫째 딸은 강을 건너면서 신발을 잃어버렸다. 남편은 자기 신발을 벗어주고, 자신은 양말만 신고 밤새 산을 함께 넘었다. 연길에서 두 딸과 상봉할 때의 그 감격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 삼촌 집에 맡겨져 자란 두 딸도 엄청나게 고생했다. 3년 10개월 만에 나타난 엄마에 대한 원망이 너무나 컸다.고마운 것은 딸들이 자기들을 맞아주고 어둠 속 산길을 함께 넘었던 남자가 엄마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허 씨는 두 딸을 데리고 직접 중국 남부 도시로 향했다. 이동을 안내하는 한족 브로커들의 손에 20살과 17살 된 딸을 차마 맡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두 딸이 동남아 국가로 가는 버스를 타는 것까지 보고 그는 한국에 들어왔다.딸들도 몇 달 뒤 무사히 한국에 들어왔다. 한국에 와서야 허 씨는 딸들에게 중국에 남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맏딸이 말했다. “엄마, 난 다 받아들일 수 있어. 동생이 있으면 좋지.”허 씨는 중국의 남편과 아들도 다시 몇 달 뒤 국제결혼으로 데리고 왔다. 드디어 허 씨가 그렇게도 꿈꾸던, 한 집안에서 모여 사는 가족이 완성된 것이다.“이게 제 잘못인가요.”그러나 그 꿈은 얼마 안돼 깨졌다. 딸은 몇 달 뒤 대학 입시를 준비한다며 입시 준비학원으로 갔고, 둘째도 대안학교에 가서 공부한다며 기숙사로 나갔다. 다시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곧 딸들은 또래와 어울려 다니며 한국 사회에 빠르게 녹아들었다.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긴 쉽지 않았다.대학에 입학해 3년쯤 다니던 맏딸은 탈북자라는 꼬리표가 싫다며 호주로 건너가 현지에서 대학을 다닌 뒤 한 회사에 다니고 있다. 둘째도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회사에 취직해 잘 다니다가 얼마 전에 결혼했다.허 씨는 집에서 16살 된 아들과 함께 산다. 세 살 때 한국에 온 아들은 이젠 중국말을 다 잊어버리고 완전히 한국 아이가 됐다. 허 씨는 한국에 온 뒤 아들의 중국 성 씨를 자신의 성으로 바꾸었다. 자라면서 “엄마, 나는 왜 누나들과 성이 달라?” “엄마, 작은 누나 방에 있는 가족사진 속 남자는 누구야” 등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질 때면 가슴이 아팠지만, 지금은 아들도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다. 이중국적자라 몇 년 뒤 성년이 되면 자신이 직접 국적을 선택해야 하는데, 한국 국적으로 선택하라는 엄마에게 “그때 가서 보자”는 말만 해 속을 썩이고 있다.남편은 아직도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한다.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건설현장에 취직해 열심히 돈을 벌고 있다. 지금도 “내가 돈을 잘 벌지 못해 당신이 나가 돈 벌게 한다”며 자책하는 착한 마음은 그대로다.허 씨는 중국에서 딸을 데리고 온지 얼마 안돼 서울로 이사를 했다. 임대아파트를 교환하기 위해 SH공사에 찾아갔을 때 여직원이 가족관계를 적으라고 했다.한족인 남편과 아들, 탈북자인 두 딸을 적어 내자 여직원이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말하려다 말꼬리를 흐렸다. 그 눈빛과 말을 허 씨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나도 내 인생이 이렇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살다 보니 이렇게 됐는데, 이게 제 잘못인가요.”허 씨와 남편은 2019년 2500만 원을 들여 중국에 사는 시어머니에게 좋은 집을 지어주었다. 허 씨가 들어갔을 때 제일 한심했던 집이 지금은 동네에서 제일 좋은 집으로 바뀌었다.“저는 북한에 있을 때 동생 두 명에게 집을 사주었어요. 그리고 중국에도 지어주고 하니 제 인생에 집을 세 채나 가족들에게 해주었네요.”본인도 지금 서울 강동구에 새 집을 분양받아 잘 살고 있다.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서울에 올라와서 허 씨가 택한 직업은 간호조무사였다. 40세가 넘으니 취직도 안 되고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평생 일할 수 있는 요양보호사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짬짬이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땄다. 이후 간호조무사로 2년, 요양원에서 1년 일한 뒤 2015년 1월 미사리 인근인 하남 신장동에 ‘114방문요양센터’를 만들어 센터장이 됐다. 지금은 사회복지사 1명과 요양보호사 25명이 센터에서 일하고 있다.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말투를 보고 보호자들이 “중국 사람이 이런 일도 하냐”며 물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러나 이젠 말투를 많이 고쳐 물어보는 사람도 많지 않다고 한다.노인들을 상대하는 직업적 특성상 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다.“나는 어떤 노인으로 늙어야 하는지 계속 생각하게 돼요. 그리고 돈이 있다고 늙어서도 행복한 것은 아니더군요. 돈이 있어 더 불행한 노인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나는 어떻게 늙어야 하는지, 자식에게 어떤 엄마가 돼야 하는지 계속 생각할수록 자식들과의 관계가 계속 걸렸다.딸들을 데려왔지만, 이들은 그들의 인생을 살게 되고, 엄마도 계속 밖으로 나가 일을 하다보니 생각만큼 서로가 다가가지 못했다. 서로 간 갈등도 많았다.“엄마의 입장에선 내가 너희들과 좋은 곳에서 살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알게 하고 싶은데, 딸들은 지금도 사춘기에 자기들을 오랫동안 두고 사라진 엄마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어요. 만나고 보니 내가 북에 두고 올 때의 그 애들이 아니었어요. 둘째 같은 경우는 엄마가 갑자기 사라지고 많은 고생을 겪다보니 충격이 컸던 것 같습니다. 자식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그 애들은 엄마가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그런데 이제 다 자라 성인이 된 딸들과 서로 마주 앉아 속을 터놓고 얘기하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생각한 것이 엄마의 마음을 담은 책을 내는 것이었다.“제가 한국에 와서 살아보니 정말 좋은 점이 많은 곳입니다. 북한에선 정부가 시키는 대로 해야 했지만, 여기선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고, 자기 주도적으로 살 수 있어요. 여기선 나를 위해 살 수 있다는 말이죠. 저를 보면 40세가 넘어서도 배울 수 있고, 또 글을 써서 책을 내고 싶으면 이 나이에 책도 낼 수 있지 않습니까. 이곳이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의 땅이니 다른 탈북민들도 북한에서처럼 수동적으로 살지 말고 꿈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인생을 살아갔으면 좋겠어요.”그가 책을 낸 동기는 또 있다.“주변에 보면 중국을 거쳐 오다보니 저와 비슷한 처지의 탈북 여성들이 꽤 많아요. 중국에서 원치 않은 삶을 살았고, 한국에 오면서 애들과 이별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삶을 두고 자신들이 큰 잘못을 한 것처럼 기를 펴지 못하고 사는데 용기를 주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우리의 잘못만은 아니거든요. 우리에게도 당당하게 살 권리가 있거든요.”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최근 북한에서 44만여 어휘가 수록된 ‘조선말대사전’ 신규 편찬 작업이 한창이라고 한다. 최신 증보판은 2017년에 발행됐지만 ‘괴뢰말찌꺼기’를 소탕하라는 김정은의 지시가 하달됨에 따라 10∼15년마다 진행하던 증보판 발행이 황급히 앞당겨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 입수된 김정은의 2020년 6월 19일 비준 방침 ‘괴뢰들의 말투를 본따거나 흉내내는 쓰레기들을 철저히 소탕해버리기 위한 대책과 관련한 제의서’에는 김정은이 한국 말투에 어떤 분노를 느끼는지가 생생하게 드러난다. 이에 따르면 김정은은 그해 5월 13일 “청년들의 일상적인 언어생활에서 괴뢰 말투를 본뜨거나 흉내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매우 심각한 국가적인 문제”라며 “괴뢰말찌꺼기들을 몽땅 불살라버리기 위한 저격전 추격전 수색전 소탕전을 전 당적, 전 국가적, 전 동맹적으로 강도 높이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또 “청년들 속에서 손전화로 말하거나 통보문을 주고받을 때 괴뢰들의 말투를 본뜨거나 흉내내는 현상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런 것들을 괴뢰들의 문화에 오염된 쓰레기들로 단정하면서 시대적으로 배척당하게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고 했다. 2020년 5월은 “북한에서 한국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퍼지고, ‘니가 장군님이네’가 유행어로 뜨고 있다”는 보도가 한국 언론에 나올 때다. 김정은이 이걸 보고 분노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해 12월 공포된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은 한국의 영상물 도서 노래 그림 사진을 유입 유포한 경우 최대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남조선식으로 말하거나 글을 쓰고 남조선 창법으로 노래를 부르면 최대 노동교화형 2년을 언도할 수 있다. 지난해 상반기엔 긴급하게 ‘괴뢰말찌꺼기 자료’라는 것이 전국에 배포됐는데, 내용이 경악스럽다.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면 괴뢰 문화에 오염된 쓰레기가 된다. 오빠는 친인척 간에만 부를 수 있다. ‘친구, 여친, 남친’은 물론이고 기존에 잘만 쓰던 ‘정상회담, 수교’ 같은 단어도 괴뢰말찌꺼기로 분류돼 ‘최고위급회담, 외교관계 수립’ 등으로 써야 한다. ‘올케, 이례적, 파격적, 차원, 퍼센트, 전전긍긍’ 등도 괴뢰말찌꺼기로 분류됐다. ‘…세요 …게요 …거야 …드립니다’로 말을 끝맺어도 처벌 대상이 된다. 이뿐만 아니라 2000년 이후 출생자가 한국이나 중국 드라마에 나왔던 이름을 쓰면 개명하라는 지시도 내려졌다. 세나, 채린, 자영 등 수십 개의 이름이 금지됐다. 북한 사전 편찬자들은 언제 김정은의 불호령이 또 떨어질지 몰라 밤을 새워 괴뢰말찌꺼기 분리 작업을 해야 하는 처지다. 남쪽에선 민족 동질성을 회복한다며 ‘겨레말큰사전’ 편찬 작업에 18년 동안 450억 원 이상의 세금을 쓰고 있는데, 북한에선 민족 이질성을 목표로 탄압이 벌어지는 것이다. 반동사상문화배격법 발표 이후 북한 거리에는 ‘대학생규찰대’ ‘여맹규찰대’ 등 각종 규찰대들이 늘어서서 ‘손전화기(휴대전화)’ 검열을 한다. 불응하면 김정은의 방침에 불응하는 반동이 된다. 학교와 직장에서도 당 비서나 담당 보위원이 수시로 휴대전화를 검열한다. 휴대전화 검열에선 제일 먼저 주소록에 ‘오빠’라고 적힌 이름이 있는지부터 보고, 이어 ‘통보문(문자)’을 검사한다. 이제 북한에선 사생활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외부의 시선이 북한 미사일 발사나 김정은의 딸 같은 이슈에 머물러 있는 동안 북한 주민들은 2년 넘게 김정은의 화풀이를 받아내고 있다. 그런데도 김정은은 고삐를 늦출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인다. 지난달 19일부터 23일 사이 평양에선 전국 공안 기관 종사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전국보위일꾼’ 대회가 열렸다. 장성택 숙청 한 달 전인 2013년 11월에 열리고 9년 만에 다시 열리는 대회다. 북한 매체들에 따르면 대회에선 “반사회주의, 비사회주의적 행위들을 분쇄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는 과정에 이룩된 성과와 경험들이 소개됐다”고 한다. 공안 기관끼리 사람을 잡아들이는 방법을 공유하고, 서로 경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반동사상문화배격법에 따르면 2018년 4월 평양 수천 명의 관객 앞에서 ‘뒤늦은 후회’라는 한국 가요를 불러줄 것을 요청한 김정은부터 사형돼야 마땅하다. ‘봄이 온다’는 이름이 붙은 그 공연이 열린 뒤 북한엔 죽음의 칼바람이 부는 겨울이 왔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현대두산인프라코어와 월드비전이 함께하는 멘토링 프로그램 ‘드림스쿨’ 사업이 11년째를 맞았다. 26일에는 ‘2022 드림스쿨 홈커밍데이’가 코로나19로 3년 만에 대면행사로 열렸다. 경기 성남시 분당두산타워에서 열린 행사에는 주호민 웹툰 작가가 100여 명의 학생과 멘토 앞에서 강연을 진행했다. 주 작가는 웹툰을 그리게 된 계기와 웹툰 작가로서 겪은 다양한 경험, 상상력과 창의력을 이용해 꿈을 향해 달려 나가는 방법 등을 학생들에게 알기 쉽게 전달했고, 이들에 대한 응원과 격려로 강연을 마쳤다. 강연이 끝난 뒤 “웹툰 작가를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자신이 가는 길이 맞지 않거나 잘못됐다는 생각으로 슬럼프에 빠지거나 힘든 적이 있었는지, 있다면 어떻게 해결했는지” 등의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다. 강연에 이어 학생들과 멘토들은 1년간의 활동을 돌아보고 서로의 친목을 다지는 시간도 가졌다. 아동·청소년들이 꿈을 포기하지 않고 진로를 찾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멘토링 프로그램인 ‘드림스쿨’은 현대두산인프라코어 임직원들과의 일대일 멘토링, 전문 멘토링 강연, 직업 체험, 문제해결능력 강화 프로젝트 등 진로를 구체화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한다. 드림스쿨은 올해 응급구조사의 심폐소생술 활동, 전문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메이크업 체험, 현대두산인프라코어 김주호 기술부장(명장)이 진행하는 드론 제작 및 조종 체험 행사를 진행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지난 3년 동안은 대면 활동이 어려웠지만, 올해는 다행히 학생들과 멘토들이 다시 한 공간에 모여 꿈을 키워 갈 수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 5년간 드림스쿨 활동을 했던 정다해 학생은 “드림스쿨이 없었다면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꿈에 도전하기 힘들었을 텐데 이 프로그램을 통해 마음껏 진로와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올해로 10년째 아동들의 멘토로 활동하고 있는 양진석 멘토는 “저의 작은 관심과 시간 투자로 변화하는 학생들을 볼 수 있어 기쁘다”며 “저에게도 새로운 꿈을 꾸며 그것을 향하여 도전하는 시간이기도 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월드비전 국내사업본부 김순이 본부장은 “아동들이 올바른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 꿈은 정말 소중하고, 또 꿈을 지지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큰 힘이 된다”며 “10년 넘게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아이들의 버팀목이 되어주신 현대두산인프라코어 임직원들에게 감사드리고 월드비전 역시 아동들의 꿈 지원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최근 북한은 한류를 차단하기 위해 잇따라 상상 이상의 혹독한 처벌이 따르는 법률을 새로 제정했다. 2020년 12월에 만들어진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은 ‘남조선 영화나 록화물, 편집물, 도서를 유입, 유포한 경우 무기노동교화형 또는 사형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집단적으로 남조선 영화나 록화물, 편집물, 도서를 시청, 열람하도록 조직하였거나 조장한 경우’에도 사형이며, 단순한 시청에도 15년 로동교화형을 선고하고 있다. 2021년 9월에도 ‘청년교양보장법’을 제정해 ‘사회주의 생활양식 확립을 위한 사업에서 청년들이 하지 말아야 할 사항들과 기관·기업소·단체·공민이 하지 말아야 할 사항, 청년교양보장법의 요구를 어기는 위법행위를 했을 때 어떤 법적 책임을 지게 되는지’를 규제했다.이제 북한에선 부부 사이에 ‘오빠’라고 하거나 애인을 ‘남친’ ‘여친’이라고 부르게 되면 괴뢰말찌꺼기를 쓴다고 보위부에 끌려가 심문을 받아야 한다. 김정은은 왜 한류 열풍에 이처럼 극도의 공포감을 갖고 있는 것일까.이달 초 한국언론진흥재단 주최 ‘KPF 디플로마 베트남 전문가’ 교육 과정의 일환으로 베트남을 방문하면서, 한류가 얼마나 무서운 바람으로 번질 수 있는지를 체감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살면 한류의 위력을 실감할 수 없지만, 해외에선 일부러 의식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북한이 ‘한류’를 막겠다고 전대미문의 강력한 처벌 제도를 새로 제정하고 있는 동안, 사회주의 베트남은 한류에 홀려 있었고, 북한이 괴뢰말찌꺼기라고 혐오하는 한국어는 베트남 사람들에겐 너도나도 배우고 싶은 언어가 됐다.2021년 베트남 정부는 한국어를 제1외국어로 지정했다. 제1외국어가 되면 초중고 10년 교육 과정 내내 한국어를 배울 수 있다. 각 학년은 주당 3시간씩, 연간 105시간의 한국어를 배우게 된다. 베트남에서 제정된 제1외국어는 영어,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6개였는데 한국어가 1외국어로 격상되면서 7개가 됐다. 내년까지 베트남의 62개교에서 1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한국어 과정에 등록해 공부할 예정이다. 현지에서 한국어의 위상은 7번째로 지정된 제1외국어 이상이다. 베트남 국립외국어대 쩐티흐엉 한국어 및 한국문화학부 학부장은 “많은 대학에서 한국어 전공 학생 입학 점수가 항상 상위에 속해있으며 우리 대학의 경우 시험에서 만점을 받아야 들어올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베트남에선 53개 대학에서 한국어학과 및 교양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한국어 열풍을 타고 외국에 대한 한국어 및 한국문화 보급을 위하여 설립된 특수법인인 세종학당도 베트남에서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베트남은 전 세계에서 세종학당이 가장 많은 나라에 속한다. 현재 전 세계에서 운영되는 244개의 세종학당 중 23개가 베트남에 있다. 2011년 베트남에 3곳으로 진출한 이후 10년 만에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 세종학당을 거쳐간 수강생만 누적으로 58만 명에 이른다.베트남에서 한국어가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이유는 한류 열풍과 더불어 월급이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 쩐티흐엉 학부장은 “한국어과를 다니면 3~4학년 때 한국 기업에서 미리 찜을 해놓고 졸업 이후 취직시키는데, 취업률이 100%”라고 설명했다.이규림 베트남거점 세종학당 소장은 “현지에서 베트남어를 하면 월급이 1배, 영어를 하면 월급이 2배, 한국어를 하면 월급이 3배라는 말이 돈다”며 그만큼 한국 기업이 선망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지 대학 교수의 월급이 300달러 좌우인데 비해 한국 기업에 취직하면 3배 정도의 월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한국어 졸업자 중 우수한 학생은 최우선적으로 한국 기업으로 가려 한다. 이 때문에 학교들에서 한국어 교사 부족 현상은 만성적인 일상이 됐다.한국 유학길에 오르는 베트남 학생들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09년 한국 내 베트남 유학생 비중은 2.3%에 불과했지만 지난해엔 23.5%로 10배 넘게 증가했다. 이런 바람을 타고 한국에 거주하는 베트남인들의 숫자도 꾸준히 늘고 있다. 외국인정책본부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에 공식적으로 등록하고 거주하는 베트남인은 약 17만9000명으로, 한국계 중국인(15만4000여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외국인 비율을 차지했다.비공식적인 체류까지 더하면 국내에 거주하는 베트남 인구는 훨씬 더 늘어나게 된다. 지난달 강원도 양양국제공항을 통해 국내에 무비자로 들어온 베트남인 100여명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이 한국에서 불법 체류를 택한 이유는 베트남에서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한국에 체류하면서 한국어를 익힌다면 나중에 강제추방이 되더라도 베트남 한국 기업에 취직해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이처럼 베트남에서 한국어를 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뿐만 아니라 한국어를 한다는 것은 베트남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한국 문화 콘텐츠를 남들과 다르게 소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베트남에서 강풍으로 커지고 있는 한국어 배우기 열풍은 언어가 갖는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를 넘어 권력이자 동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한국에 비해 모든 것이 열세인 북한은 한국어를 괴뢰말찌꺼기라는 혐오의 단어로 규정해 한국에 대한 동경과 호감을 차단하려 하는 것이다. 경제력과 문화에서 두드러지는 열등감을 혐오와 증오로 메우려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사에 사례를 찾기 힘든 무형의 언어와의 전쟁은 성공할 수 있을까. 베트남을 보니 어렵지 않게 대답을 찾을 수 있을 듯 싶다. 한국의 국력이 북한을 압도하는 한 김정은은 종전을 선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늘 전쟁 중인 나라는 언젠가는 망할 수밖에 없다.하노이·호치민=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2019년 2월 27일 북미정상회담을 위해 베트남 하노이를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공식일정을 시작하기 전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베트남은 지구상에서 번영하는 흔하지 않은 나라로 북한이 비핵화하면 베트남처럼 될 것이며, 그것도 매우 빠르게 될 것이다.”트럼프 대통령의 베트남 찬사는 시차를 두고 연이어 이어졌다.“베트남이 짧은 기간에 이룬 것을 본다면 김정은 위원장도 아주 빠른 시간에 북한을 경제 강국으로 만들 수 있다.”그 말을 접했을 때 기자는 머리를 갸우뚱했다.“개혁개방한지 30년 넘었는데 1인당 국민소득이 세계에서 130위권인 2000달러 남짓에 불과한 베트남이 북한의 롤모델이라고?”하지만 이달 초 한국언론진흥재단 주최 ‘KPF 디플로마 베트남 전문가’ 교육 과정의 일환으로 하노이와 호치민을 방문한 뒤 기자의 생각은 많이 바뀌었다.“사회주의 베트남이 긴 잠에서 깨어나고 있구나. 그것도 다름 아닌 수십 년 전 총부리를 맞대고 싸웠던 대한민국이 베트남 번영의 가장 중요한 동반자가 되고 있구나.”이제 김정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대한민국이 1억 인구의 베트남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잘 지켜보길 바란다.”베트남은 1986년 ‘도이머이 정책’을 발표했지만 오랜 기간 발전이 정체돼 있었다.세계은행에 따르면 도이머이 정책 이듬해인 1987년 베트남 국민소득은 367억 달러였는데, 15년 뒤인 2002년 국민소득은 그보다도 더 떨어진 350억 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최근 10여년 동안 베트남의 국민소득은 3배 이상 급성장했다. 2009년 1060억 달러를 기록하더니 지난해 3626억 달러에 이르렀다.1인당 국내총생산도 더불어 비약적으로 도약했다. 2010년 1690달러였지만 2021년 3716달러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이러한 성장은 한국 기업의 베트남 진출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베트남 통계청에 따르면 1988년부터 2021년 말까지 외국 기업의 누적투자액을 집계한 결과 한국(747억 달러)이 일본(644억 달러)과 싱가포르(643.6억 달러)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집계에 잡히지 않는 투자까지 포함하면 한국 기업들의 베트남 투자 금액은 900억 달러가 넘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다.현재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은 9000여개에 이른다. 베트남 호치민 공항에서 나오면 길 건너 건물에서 한국 효성과 LG 광고판이 크게 보인다. 시내로 차를 타고 달리면 곳곳에 한국 기업 광고들이 붙어있다. 베트남에서 한국 기업이 차지하는 위상을 엿볼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특히 미국과 중국 사이의 무역 전쟁이 확대되면서 한국 기업의 베트남 진출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2022년은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 30주년을 맞은 해이다. 지난달 중순 박진 외교부 장관은 베트남을 방문해 양국간 기존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기로 합의했다. 베트남이 최고 수준의 대외 협력 관계인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는 중국, 러시아, 인도 등 3개국 뿐이다. 그만큼 한국은 베트남에 중요한 경제협력 대상이 됐다. 양국이 경제와 문화 등에서 끈끈한 국가로 연결되는 것은 수치로도 확인이 된다. 베트남 관세청에 따르면 2021년 베트남 수입액에서 한국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두 번째로 많다. 베트남은 한국에서 중국(1099억 달러) 다음으로 많은 562억 달러어치를 수입했는데 이는 3위인 일본(226억 달러)에 비해서도 두 배 이상 많은 액수이다.한국의 입장에서 베트남은 세계에서 3번째의 수출시장이다. 2021년 베트남 수출액은 567억 달러로 중국(1369억 달러)과 미국(959억 달러)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베트남이 한국에 있어 일본(301억 달러)보다 더 중요한 교역국이 된 것이다.양국간의 무역 규모는 최근 10년 동안 4배 이상 급성장했다. 베트남과의 교역은 한국에 엄청난 무역흑자를 가져다주고 있다. 1965년부터 2021년까지 한국은 일본과의 무역에서 누적 무역적자 6939억 달러를 기록했지만, 베트남과는 1992년부터 2021년까지 3102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기록했다.베트남에 투자하는 한국 기업 중 선두주자는 단연 삼성그룹이다. 2008년부터 올해 말까지 삼성그룹의 베트남 누적 투자액은 215억 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올해 말까지 삼성의 1, 2차 베트남 협력업체 수는 250개에 이르고 이중 1차 협력업체만 52개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밖에도 삼성전자는 50개 베트남기업의 생산역량 향상을 위해 스마트공장 전환 및 개발을 지원하고 있다.LG그룹도 베트남에 50억 달러 이상을 투자했다.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은 올해 9월 베트남을 방문해 2030년까지 호치민시에 대형 복합 단지를 조성하고 일자리 500만 개를 창출하겠다고 약속했다. 만약 현실화되면 재계 순위 5위의 한국 기업이 인구 1억 명의 베트남 경제를 쥐락펴락하게 된다.이렇게 한국 기업들이 베트남 고속성장의 기관차 역할을 하는 것을 보면서 북한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같은 사회주의 체제를 표방하고 있고, 과거 적으로 싸운 베트남은 한국의 경제적 투자로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는데 북한은 거꾸로 한국을 핵과 미사일로 위협하면서 점점 경제가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다.인구 2000만 명에 불과하고 1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 안팎인 북한은 한국이 마음만 먹으면 10년 안에 국민소득을 몇 배로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북한은 말도 같고, 교육 수준도 높으며, 지리적으로도 붙어있다.그러나 북한과 베트남의 근본적인 차이는 핵무기 보유 여부이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이에 따른 유엔의 대북제재로 현재는 어떤 기업도 북한에 진출할 수가 없다. 또 한국 기업의 진출로 북한이 부유하게 되면 김정은은 체제 유지를 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권력 세습과 핵무기가 북한을 어떻게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는지를 베트남에서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하노이·호치민=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2006년 10월. 20세 꽃다운 나이의 정은심은 가냘픈 어깨 위에 너무나 무거운 짐을 메고 한국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북한에 남은 어머니와 여동생,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까지 다 데려오려면 큰 돈이 필요했다. 당시 한 명을 한국으로 데려오려면 600만 원이 필요했다.서울 노원구에 정착한 그는 한국 사회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어느 횟집에 종업원으로 취직했다. 그때부터 새벽에 일어나 밤 10시에 들어오는 생활이 반복됐다. 식당에선 아침 10시부터 저녁 10시까지 12시간 일해야 했지만, 컴퓨터학원과 운전학원까지 다니다보니 새벽에 일어나 5시에는 나가야 했다.그가 받은 월급은 120만 원. 한 푼도 안 쓰고 모아도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려오려면 1년은 벌어야 했다. 쉬는 날에는 다른 곳에 가서 알바로 일했다. 그걸 보고 횟집 사장이 “다른데 가서 일할 바에는 쉬는 날에도 식당에 출근하면 추가 수당을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한 달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식당에서 일했다.이듬해 4월 외할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중국에 몰래 넘어와 외손녀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벌어 모은 돈과 다음달 월급까지 다 가불해 보내주었다. 어머니와 동생을 데려오는 계획은 더욱 미뤄졌다.탈북민 관련 기사가 인터넷에 뜨면 흔히 “가족을 버리고 온 사람들”이라는 악플이 달린다. 탈북민에겐 가장 아픈 말이다. 사실 알고 보면 대다수 탈북민이야 말로 가족을 위해 목숨까지 내건 사람들이다. 탈북했다 체포돼 북송되면 목숨을 장담하기 어렵다. 가족이 함께 움직이면 더욱 위험하고, 비용도 엄청나게 들 수밖에 없다. 가족이 함께 탈북했다가 북송되면 “온 가족이 조국을 버리고 도망쳤다”며 꼼짝 못하고 정치범이 되기 쉽다. 반면 가족 중 한 명이 탈북하면, 실패해 북송이 된다고 해도 북한에 남은 가족이 구명운동을 펼 수 있고, 최악의 경우 본인만 처벌 받으면 그만이다. 그래서 보통 일가가 탈북하기 전에 그 가족 중에서 가장 젊고 용감한 사람이 먼저 탈북해 기약 없는 중국 땅에서 탈북 통로를 개척한다. 그가 성공해 한국에 오면 이후 돈을 벌어 북한 가족을 데려오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 한국에서 무사히 온 가족이 재회하는 경우도 있고, 오다가 가족이 체포돼 북송돼 영영 이별하는 비극도 발생한다.은심도 이러한 운명을 몸으로 떠안았다. 한국에 온 그의 머리 속에는 오직 가족을 데려올 생각 밖에 없었다. 하도 열심히 일하는 그를 유심히 살펴보던 김소영이라는 언니가 어느 날 그를 찾았다. “내가 10년 다니던 회사에서 퇴직해 퇴직금을 받게 되는데 그중 10분의 1을 십일조로 내려 했어. 그런데 그것보다는 사람을 살리는 게 더 낫다 싶어 그 돈을 줄 테니 가족을 데려와.”은심은 고마워 며칠을 펑펑 울었다.그 돈으로 그는 이듬해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려올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뒤 외가 식구들은 모두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는 비보를 전해 들었다.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간 외가 친척들손녀에게서 돈을 받은 외할아버지는 주거지인 양강도 혜산으로 돌아가 온 가족을 탈북시킬 준비를 했다. 북한 다른 곳에 살던 아들과 딸들에게 연락해 외손자들을 먼저 혜산으로 보내게 했다.외할아버지는 북한에서 몰래 신앙의 믿음을 지켜가던 지하교인이었다. 한국에서 기독교 신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외할아버지는 어릴 적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살았다. 그곳에서 성장해 가족을 꾸리고 살다가 1950년대 대기근을 피해 자식들을 데리고 북한으로 건너왔다. 북한에 넘어와서도 몰래 성경책을 구해 신앙생활을 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도했다.외손녀의 탈북을 계기로 더는 북한에서 살고 싶지 않았던 그는 외손자 3명과 자신이 전도했던 사람의 자식 3명을 모아 집에 데리고 있다가 브로커를 시켜 먼저 중국으로 탈북시켰다. 아이들을 먼저 보내고 어른들도 뒤따라 갈 생각이었던 것이다.하지만 동네에서 놀던 아이들이 어느 날 6명이나 사라지자 보위부가 집중 감시를 했고 어른들은 탈북하기 전에 모두 체포됐다. 보위부에선 외할아버지가 기독교인으로 주변에 전도했던 사실, 외할아버지의 딸인 은심의 어머니와 그의 자식 2명이 이미 한국에 간 사실을 밝혀냈다. 이 사건으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외삼촌과 외숙모, 이모 등이 체포돼 모두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고 이후 영영 소식이 끊겼다. 은심은 졸지에 외가를 모두 잃었다.외할아버지가 탈출시킨 아이 6명은 모두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젠 20대~30대인 그들은 여러 지역에서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다.외가의 비보에 은심은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다. 1년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하고 버텼는데 육체적 한계를 느낀 것이다. 병원에선 급성심부전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한달 넘게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그는 간호사라는 직업을 간접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사람을 살리는 그 직업에 매력을 느꼈다.탈북길에 오른 여대생2008년 3월 은심은 간호조무사학원에 등록했다. 탈북하기 전 그는 함흥제1교원대학 유아교육과 2학년 학생이었다. 한국에 와서도 유아교육을 공부할까 싶은 생각이 있었지만, 간호사라는 직업이 더 끌렸다.1986년 강원도 원산에서 태어난 은심은 1990년대 중반의 ‘고난의 행군’ 기간에조차 배고픈 걱정 없이 살았다. 원산교원대학 음악교원이었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태어나 살다가 어릴 적 북한으로 귀국했다. 그래서 중국에 가족들이 꽤 있었는데, 중국에 남은 형제 중엔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도 여럿 있었다.아버지는 일찍 중국을 드나들며 장사를 했다. 중국에서 땅콩이나 옷 등을 싣고 와 원산에 팔았다. 특히 중국제 구충제가 인기가 높았는데, 이걸 싣고 오는 날이면 원산에 살던 일본 출신 귀국자들이 은심의 집에 와서 줄을 서서 사갈 정도였다. 고난의 행군 시기 은심이 살던 교원아파트엔 먹지 못해 온 몸이 퉁퉁 부어가는 교원들이 늘어났다. 은심의 어머니는 이웃들이 불쌍해 먹을 것을 나눠주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는 “제발 잘 사는 척하지 말고 우리도 배고프게 사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그러던 아버지가 1998년 어느 날 사라졌다. 삼촌들이 정치적 발언을 잘못해 끌려갔는데 본인에게도 추궁이 돌아오자 중국으로 탈출한 것이다.아버지가 실종되자 주변에서 따가운 눈초리가 날아왔다. 더는 교원아파트에서 살 수없게 됐다. 엄마는 은심과 여동생을 데리고 외가가 있는 혜산으로 이사했다. 중국에 간 아버지에게선 초기 1~2년 동안 연락도 오고 물자도 왔는데 이후 소식이 끊겼다. 아버지가 실종되자 은심의 어머니는 장마당에서 장사를 해 두 딸을 키우다가 은심이 함흥교원대학에 입학한 것을 계기로 아예 함흥으로 옮겨와 살았다.대도시로 나온 은심은 동창들과 어울리면서 ‘천국의 계단’등 당시 돌아가던 한국 드라마를 수없이 보며 한국에 대한 동경을 키웠다. 김혜연의 ‘서울 평양 반나절’이란 노래를 들으면서 남조선은 참으로 가까운데 왜 갈 수 없을까 생각도 했다. 중국에 친척도 많은데 그까짓 반나절 거리 한국에 얼마든지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계속 자라났다. 그러다 어느 날 중국으로 가는 선이 생기자 미래가 불투명한 북한 땅을 떠났다. 중국에 있는 친척들 덕분에 3국까지 수월하게 왔다. 전염병이 도는 3국 감옥에서 4개월 동안 수감돼 생전 처음으로 큰 고생을 했지만 그것도 이겨냈다. 그렇게 도착한 한국에서 그는 가족을 위해 인생 처음으로 온몸이 부셔져라 일을 해야 했다.양로원을 창업하다1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살았던 생활은 간호조무학원에 입학해서도 이어졌다. 그는 단 한번의 결석과 지각도 없이 학원 생활을 마쳤다.학원 기간 실습을 나가 환자들을 만나보니 간호원이란 직업이 너무나 적성이 잘 맞았다. 특히 양로원에서 노인들과 만나 살아온 과거를 들어주며 어울릴 때가 가장 마음이 편안했다.22살 은심은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이 내겐 너무 잘 맞는구나. 앞으로 이 일을 쭉 하며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학원을 졸업한 뒤 그는 한 피부성형외과 병원에 취직했다. 병원 일은 적성에 맞고 재미도 있었다. 하지만 점점 1년제 교육과정을 이수한 간호조무사와 4년제 대학을 나온 간호사와의 격차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그는 열심히 준비해 2012년 단국대 천안캠퍼스 간호학과에 입학했고 2016년 졸업했다. 대학을 다니는 기간 결혼을 했고, 졸업과 동시에 아들도 낳았다.2년 정도 육아 기간을 마친 뒤 2018년 3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보건소에 보건진료 공무직으로 취직했다. 이곳에서도 그는 치매안심센터에 근무하면서 노인들과 어울렸다. 일을 하면 할수록 급속한 고령화를 맞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노인 돌봄 체계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는 오랜 꿈이었던 요양원을 지난해에 개업했다.사실 지난 13년 동안 그의 한국에서의 삶은 요양원 개업을 위한 오랜 준비 기간이었다. 그는 간호조무사를 할 때부터 언젠가는 요양원을 열겠다는 생각으로 돈을 악착같이 모았다. 대학을 다니면서도 쉬지 않고 알바를 했고, 보건소에서 받은 월급을 꼬박꼬박 모았다.요양원은 자기 건물이 있어야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노인들을 위한 재가센터나 주간보호센터는 월세나 전세 건물에서도 운영할 수 있지만 요양원은 반드시 원장이 해당 건물을 소유해야 하는 것이다. 입소자들의 안정적 생활을 위해 필요한 제도이지만, 아무 재산도 없이 이 땅에 정착한 은심에겐 가장 넘기 어려운 산이었다.다행히 2019년 안산에 2억을 주고 샀던 개인 명의의 집이 2년 뒤 2억6000만 원으로 오르자 그걸 팔아 안산에 실평 66평짜리 건물을 계약했고, 14인실 규모의 양로원을 오픈했다.집을 계약한 뒤에도 각종 규정에 맞춰 침대와 치료설비 등을 사느라 억대의 돈이 들었는데, 이때엔 어머니가 10년 넘게 꼬박꼬박 모았던 돈을 내놓았다. 모녀가 힘을 합쳐 개업한 양로원에 은심은 좋은 일들이 다 온다는 의미의 ‘다온양로원’이라는 이름을 지었다.탈북민 전용 요양원의 꿈양로원을 열었지만 성공적으로 자리 잡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처음 문을 열고 50일 동안엔 입소한 노인이 단 1명에 불과했다. 양로원은 간호조무사,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등을 반드시 고용해야 한다. 이들의 월급에 더해 관리비도 만만치 않게 들었다. 괜히 시작했나 낙심해 잠을 이루는 날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침이면 그는 어김없이 집을 나섰다. 경로당, 노인대학, 노인식당을 수시로 찾아가는 것은 물론, 직접 자전거를 타고 근처의 모든 아파트 단지들을 다 돌며 전단지를 붙였다. 얼굴이 까무잡잡하게 변하고 몸살로 수시로 쓰러졌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이런 노력 끝에 입소한 노인이 작년 12월엔 6명으로 늘어났고 지금은 19명이 입소해 있다. 장차 요양원을 100명 규모로 키우는 것이 은심의 목표다.하지만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있다.“제가 요양원을 열 때 탈북 어르신들을 위한 요양원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아직 한 명도 없어서 안타까워요.”탈북민 복지 문제는 사실 정부의 오래된 고민이다. 지난 3개월 사이에도 생활고에 시달리던 탈북민이 매달 변사체로 발견됐다. 현재 한국에 입국해 사는 탈북민은 약 3만5000명에 이른다. 그런데 이중 가장 생활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노인이다.40세 이전에만 입국해도 한국에서 직업을 잡아 돈을 벌 수 있지만, 50세가 지나 한국에 오면 일자리도 없어 막막하다. 한국 사회에 대해 좀 알만하면 60세가 넘으니 기초생활수급자 신세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다. 가족이 없이 홀로 온 노인 탈북민도 많아 쓸쓸하게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많다.은심의 꿈은 이런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탈북 노인들을 위한 요양원을 만드는 것이다.“저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능력이 있어요. 어제 들었던 말을 오늘 또 들어도 저는 좋아요. 특히 북에서 살다 왔기에 탈북민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잘 들어줄 수 있어요. 그리고 탈북 어르신들이 고향 음식을 먹고 싶다고 하면 다양한 북한 음식을 만들어 대접할 수 있거든요.”하지만 현재 많은 탈북 노인들은 요양원에 어떻게 입소 신청을 하는지도 모르고 지내는 것이 현실이다. 기초생활수급자의 경우 시설등급을 받으면 본인 부담금이 없이 요양원에 입소할 수 있는데, 은심이 만나본 탈북 노인들은 그런 사실도 모를뿐더러 서류를 어떻게 작성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저부터 잘 자리 잡으면 고향 분들 많이 모셔올 겁니다. 그러자면 다온요양원이 최고라는 소문이 나야겠죠.”그런 평판을 만들기 위해 은심은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 올해 8월 요양원 윗층이 매물로 나오자 그는 지체 없이 구입해 29인실로 요양원을 늘였다. 간호조무사와 요양보호사도 규정보다 2명 더 고용해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애쓴다.코로나 시국에 활동이 제약되자 그는 옥상에 넓은 공연 공간과 테라스를 만들어 연주회 등 각종 행사를 열기도 했다.은심의 노력이 앞으로 어떤 결실을 맺을지는 아직은 알 수 없다. 사회의 고령화 속도와 비례해 전국에 각종 노인복지 시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양로원도 모두가 유지되지는 못할 것이다.그럼에도 36세의 양로원 원장 정은심의 도전이 이제 시작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직 그는 너무 젊다. 달려갈 길이 멀지만, 반대로 달릴 힘도 충분히 남아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무수한 고난의 언덕을 포기하지 않고 넘고 또 넘어간다면, 그의 꿈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게 될 것이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9월 초 태풍 ‘힌남노’로 2조 원이 넘는 막대한 피해를 입은 포스코가 철강 제조 공정에 필요한 원료를 납품하는 국내 공급사들을 적극 지원해 화제다. 포스코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회생한 대표적인 기업이 SM한덕철광산업이다. 강원 정선군에서 국내 유일의 상업용 철광석 광산인 ‘신예미광산’을 운영하고 있는 SM한덕철광산업은 철광석 판매 매출의 70% 이상을 포스코에 의존해 왔다. SM한덕철광산업 김철홍 사장은 “힌남노 피해 때 포항 괴동역에 있는 화물 하역 장비 역시 침수돼 20일 넘게 철도 운송을 할 수 없었고, 9월 매출도 60% 이상 줄어 막막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런 딱한 사정을 들은 포스코는 포스코인터내셔널의 해외 네트워크를 활용해 신예미광산의 철광석을 중국에 수출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왔다. 그 결과 SM한덕철광산업은 9월부터 11월까지 석 달 동안 5만5000t의 철광석을 중국에 수출해 위기를 극복했다. 이 회사가 생산하는 철광석은 철(Fe) 성분이 42%로 호주, 브라질 등지의 해외 철광석(Fe 62% 이상)보다 낮다. 생산량도 해외 광산 대비 적은 편이나 포스코는 국내 광산업계 보호를 위해 1984년부터 40여 년간 거래를 해오고 있다. 김 사장은 “품질이 우수한 해외 철광석을 구매하는 것이 더 유리함에도 오랜 기간 거래를 이어온 포스코에 감사한다”며 “자원의 불모지라 불리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상업용 철광석 광산을 운영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앞으로도 포스코와 협력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했다. 포스코는 포항제철소 태풍 피해 복구 기간 중 59개 국내 원료 공급사에 일일이 연락해 입고 중단에 따른 매출 영향을 전수 조사했다. 이어 국내산 원료 구매 비중 확대, 광양제철소로 물량 전환, 조업 정상화 전 원료 선구매, 포스코 그룹사를 활용한 해외 수출 지원, 저금리 대출 지원 등 다양한 형태의 일대일 맞춤형 피해 지원을 했다. 포스코 이주태 구매투자본부장은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말처럼 더불어 함께 발전하는 기업시민 포스코로서 공급사와 동반 성장하겠다”고 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디지털 자산거래소 업비트가 자체 로그인 시스템 ‘업비트 로그인’ 서비스를 최근 도입했다 (사진). 기존 ‘소셜 로그인’ 방식이 아닌 ‘생체 인증’과 ‘PIN 번호 입력’ 방식을 적용해 보안성을 대폭 강화했다는 것이 업비트 측 설명이다. 지금까지는 ‘카카오 계정’ 및 ‘애플 ID’를 통한 로그인을 지원해 오다가 지난달 31일부터 자체 로그인 시스템을 시작했다. 새로운 로그인 시스템은 별도 프로그램이나 애플리케이션(앱) 설치 없이 업비트 앱을 통한 간편 로그인을 지원한다. 이용자 이름(아이디)과 비밀번호(패스워드)를 사용하던 기존의 인증방식은 50년 전부터 디지털 정체성(아이덴티티)과 보안을 뒷받침하는 초석이 됐다. 그러나 온라인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과 함께 기존 인증방식에 대해 불편함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문자와 숫자, 특수기호 등을 조합해 만드는 기존 비밀번호는 보안의 중요성과 함께 길이가 늘어났다. 그러나 비밀번호 관련 기준이 웹사이트마다 다르게 적용되면서 이용자가 비밀번호를 쉽게 기억하지 못하는 현상도 함께 많아졌다. 취약한 자격증명 환경도 도마에 올랐다. 기존 비밀번호 방식은 이용자의 관리 소홀 시 계정 탈취 공격을 발발했다. 글로벌 아이덴티티 솔루션 기업 옥타에 따르면 데이터 유출 사고의 80% 이상이 비밀번호 관리 문제에서 비롯됐다. 기업은 기존 비밀번호 방식의 취약점을 극복하고자 다중요소인증(MFA) 등 별도 인증 계층을 활용했다. 보안 질문 설정, 문자메시지 전송 서비스(SMS)와 같은 2차 요소가 널리 쓰인 배경이다. 이러한 인증 방식은 비밀번호가 필요 없는 ‘패스워드 리스’ 인증에 대한 수요를 키웠다. 이용자 보호와 편리한 이용자환경(UX)을 제공하기 위해 ‘생체 인증’ 방식을 도입한 서비스도 대중화됐다. 업비트의 새 로그인 서비스도 패스워드 리스 형태다. 업비트 이용자는 본인 인증을 한 후 발급받은 6자리 PIN 번호 혹은 생체 인증(페이스 아이디·지문)을 통해 디지털자산 및 대체 불가능한 토큰(NFT)을 거래할 수 있다. 업비트뿐 아니라 시중은행, 간편결제 서비스사 등이 패스워드 리스 인증을 채택한 상태다. 업비트는 새롭게 도입한 업비트 로그인을 통해 이용자들에게 보다 편리하고 안전한 투자환경을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업비트 운영사인 ‘두나무’ 관계자는 “새로운 로그인 방식을 통해 이용자가 더 쉽고 편리하게 업비트를 이용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 “보안도 더욱 강화돼 소중한 자산을 안전하게 거래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업비트는 이용자 혼란을 최소화하고자 11월 20일까지 기존 소셜 로그인도 병용한다. 11월 21일부터는 업비트 로그인을 통해서만 로그인이 가능하다. 업비트 로그인 서비스는 안드로이드 모바일앱 버전 1.19.1, 아이폰 모바일앱 버전 1.26.24 이상에서만 이용할 수 있다. 업비트 웹 이용자의 경우 QR코드 로그인 방식을 통해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농협중앙회는 2020년부터 ‘함께하는 100년 농협 구현’을 구호로 내걸고 유통 및 디지털 혁신으로 새로운 농협의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3년째를 맞이하는 올해에는 특히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과 소비자물가 상승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농축산물 도소매 유통 역량을 강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농자재 공급망 확대 등 유통혁신에 사활농협은 지난해에 유통 자회사 통합, 김치공장 통합, 스마트 산지유통시설(APC) 개발, 스마트 농기계 보급, 온라인 채널 강화 등 유통 단계별 오랜 숙원 과제들을 해소한 데 이어 올해는 작년 성과의 적용 대상을 확대하는 데 주력했다. 한국농협김치조합공동사업법인 출범, 농자재 공급망 확대를 통한 원자재 가격 상승 대응, 하나로마트의 ‘살맛나는 가격’ 행사 등이 올해 진행된 대표 사업이다. 특히 축산경제 부문의 성과가 두드러졌다. 대표적으로 축산물 전문 온라인 쇼핑몰인 농협 ‘라이블리’를 거점으로 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B2C)와 기업 간 거래(B2B)를 동시에 공략하는 ‘양손잡이 전략’을 들 수 있다. B2C에서는 라이브커머스 전문몰을 구축해 자사 몰과 대형 라이브커머스 플랫폼 동시 중계로 단시간 공격적 마케팅을 펼쳤다. 지역 농축협 축산물 브랜드 25개가 입점된 라이블리 내 지역명품관은 구매자와 판매자 모두 반응이 좋다.농협은 직가공 및 유통 물량 확대에 대비해 부천 유휴지를 통합 물류센터로 활용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수도권 서부에 범(汎)농협 신선식품 물류센터가 생겨나는 효과가 발생된다. 부천 음성 나주 고령에 위치한 축산물유통센터를 미트센터로 바꿔 한우 부분육·소포장 공급 기지로 활용하고, 계통 매장 통합구매를 단계적으로 확대해 올해 통합구매사업 매출액을 1600억 원까지 늘리는 계획도 예정대로 추진되고 있다.농산물 유통 경로 효율화로 새 가치 창출농협은 산지유통시설(APC) 스마트화, 산지농협 온라인지역센터 구축, 스마트가축시장 보급 등 농산물 유통 경로 효율화로 새로운 가치 창출을 위해서도 적극 투자하고 있다.스마트 APC는 데이터를 활용한 정보화와 설비자동화를 중심으로 APC 운영 효율화와 농산물 상품성 제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다. 농협은 올해 농협형 스마트APC 기반 조성을 위해 정보화 시스템 개발과 자동화 표준모델 구축 등을 추진한 데 이어 내년에는 데이터 연계 방식 고도화 및 거점 스마트APC를 매년 10개소씩 육성한다는 계획이다. 이는 코로나19로 인해 오프라인 매장 소비가 주를 이루던 농식품 영역까지 온라인 소비로 전환되는 상황에 맞춰 농협 또한 유통 방식의 변화를 더는 미룰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국내 농식품 온라인 시장은 올해 33조 원(소매 총매출 129조 원의 25.3%) 규모이지만 2025년에는 44조 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농협은 산지농협의 경우 온라인 인프라와 전문인력 등이 없어 온라인 사업을 쉽게 추진하지 못하는 상황을 파악하고 지역사무소 내 촬영, 상품페이지 제작, 라이브커머스 공간 제공 등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 결과 현재 전국 70개소에 온라인 지역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또한 ‘산지 온라인 지역센터’를 이끌어 갈 ‘산지 어시스턴트’를 선발해 지역 내 온라인사업을 이끌 수 있도록 온·오프라인 교육이 진행되고 있어 연말까지 100명의 온라인전문가가 탄생한다.축산부문에서는 생축거래 전 과정을 디지털화한 ‘스마트 가축시장 플랫폼’을 개발해 보급하고 있으며, 농림축산식품부와 함께 전자경매 시스템을 도입했다. 스마트 가축시장 플랫폼의 보급으로 농가가 시간과 장소의 제약 없이 스마트폰을 활용해 생축 거래에 참여할 수 있고, 생축 관련 데이터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전국 8곳 농협 참여 ‘한국농협김치’ 출범농협은 수입산 김치에 대한 위생 문제 등 식품 안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황에서 김치종주국으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작년부터 김치공장 통합을 추진해 왔다.이를 위해 올해 4월 전국 8개 농협 김치공장 운영농협이 참여해 ‘한국농협김치조공법인’이 출범해 현재 ‘한국농협김치’라는 신규 브랜드가 탄생했다.김치공장 통합으로 기존에 분산돼 있던 조직, 인력, 생산 등 역량을 하나로 집중시켜 생산 원가를 낮출 수 있게 됐다. 또 농협김치의 경쟁력 강화를 통해 매출이 증가하면 농업인이 생산한 원재료 수매량이 증가하는 선순환 구조가 창출돼 농업인 소득 증대와 수급 안정의 효과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농협은 즉석김치와 학교급식 시장에 주로 진출했기 때문에 소포장 시장점유율이 높지 않았지만 소포장 및 온라인 시장 등을 집중 공략해 올해 매출 900억 원, 2026년 매출 1300억 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또한 해외 수출도 적극 추진해 세계에 농협김치를 널리 알리고 김치 종주국의 위상을 높여 나간다는 계획 아래 5월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와 협력해 뉴욕·워싱턴 ‘김치의 날’행사에 참가했다. 7월에는 한국농협김치를 일본에 처음으로 수출했다. 농협은 향후 김치 수출 국가를 호주와 유럽 등으로 확대할 계획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3일째 굶었더니 하늘이 노랬다. 8월 초 삼복더위에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는 방에서 그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김도정 씨가 하나원을 나와 서울 양천의 한 임대주택에 도착한 것은 닷새 전인 8월 3일. 하나원에서 나올 때 초기 정착지원금 300만 원이 든 통장을 받았다.아파트에 도착해 보증금 20만 원을 내고 집에 올라왔다. 17평 임대아파트를 둘러보고 드디어 이렇게 큰 내 집이 생겼다고 기뻐한 것도 잠깐. 어떻게 알았는지 탈북 브로커가 제일 먼저 집에 찾아왔다. 브로커는 그를 차에 태우고 근처 은행에 가서 통장에 든 280만 원을 다 빼서 받은 뒤 사라졌다. 서울 생활 첫째 날에 은행에 홀로 남겨진 그는 당황했다. 차를 타고 오다보니 집을 어떻게 찾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수중에는 돈도 없었다.거리를 헤매는데 밤이 어두워졌다. 길거리에 공중전화가 보였다. 정착도우미에게 연락을 했더니 그가 와서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서울에 도착한 날과 다음 날은 정착 교육을 시킨다며 복지관에 데려가 점심은 먹여주었다. 그리고 3일째부터 그는 홀로 남겨졌다. 수중엔 한 푼도 없었다. 아는 사람 하나도 없어 돈을 빌릴 수도 없었다. 외롭게 남겨진 방에서 그는 울다 잠이 들기를 반복했다.이렇게 살다간 죽겠다싶어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며 밖으로 나섰다. 일자리를 구해야겠다 싶어 가까운 아무 식당이나 찾아 나섰다. 닷새 동안 두 끼만 먹은 터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겨우 한 식당을 찾아 들어가 일자리가 있는지 물었다. 당연히 거절당했다.밖으로 나가 이제 어디로 또 가야 할지 막막해 하늘만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돌아보니 태어나 33년 동안 이렇게 굶은 적은 처음이었다.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도 겪었고, 중국에서도 10년을 배고프지 않고 살았는데, 한국 사회에 나와 3일이나 굶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공교롭게 그는 ‘단식투쟁’을 통해 한국에 왔다. 2007년 4월 한국 언론에는 태국 수용시설에 수감된 탈북자들이 집단 단식투쟁에 돌입했다는 기사들이 나왔다. 100명 정도 수감될 수 있는 방에 340명의 여성 탈북자들이 수감돼 화장실에서까지 잠을 자야 했는데 한국행이 계속 늦춰져서 결국 단식투쟁을 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그러나 그때도 감옥에서 주는 밥만 받지 않았을 뿐, 실은 그 전에 미리 먹을 것을 숨겨두어 많이 굶지는 않았다. 단식투쟁 주도자 중 한 명인 도정 씨는 그 일로 미움을 받았는지 감방에 있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늦게 한국에 왔다.다른 식당을 찾아가는데 마침 정착도우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의 사정을 듣더니 어느 고깃집 알바 자리를 소개해주었다. 식당에 간 저녁 도정 씨는 서울에서의 세 번째 식사를 했다. 그날이 2007년 8월 7일이었다.여자축구선수였던 학창시절김도정 씨는 1974년 함북 경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1960년대 초반 군에서 1집단군 사령관이었던 오진우의 차도 몰았던 적이 있지만, 행방불명된 형 때문에 결국 군복을 벗고 고향인 경성으로 돌아왔다.형님은 6.25전쟁 전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전쟁 때에는 모스크바와 독일로 다시 옮겨가 공부했다. 그러다가 1959년에 사라졌는데 서독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훗날 도정이 탈북하려 했을 때 부친은 딸에게 부탁했다.“내 형님의 이름은 김상봉이고, 1935년생이야. 서독에 가서 성공했다는 말이 있던데 네가 가서 꼭 찾아봐라.” 탈북한지 25년이 넘었지만 아직 도정은 큰아버지를 찾지 못했다.도정은 축구와 함께 학생시절을 보냈다. 중학교 1학년에 올라갔을 때 도에 4개만 있는 축구구락부가 경성에 생겼다. 신체조건이 또래보다 훌륭했던 도정은 여자 축구선수로 선발됐다.새벽 4시에 일어나 경성역 앞 공원에 나가 6시 반까지 훈련을 하고, 8시에 등교했다가 오후에 다시 공을 차는 일상이 5년 동안 반복됐다.당시 북한은 여자축구에 큰 힘을 쏟고 있던 터라 그는 남들이 다 가는 농촌지원을 가지 않고 훈련에만 전념할 수 있었고, 전지훈련이나 시합을 나갈 때엔 학교에서도 한 달쯤 나오지 않아도 눈을 감아주었다. 하지만 중학교 졸업이 다가오면서 프로 입문 시점이 다가오자 도정은 진로를 바꾸었다. 먼저 프로선수가 된 선배들이 해외 경기에 나가 지고 오면 노동단련대로 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군에 나가 노동당원이 된 뒤 장교가 되려고 결심했다.1991년 중학교 졸업과 함께 그는 도 군사동원부에 가서 신체검사를 받는 등 입대 절차를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만 그때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는 불행이 찾아왔다. 도정의 아래엔 학생인 남동생이 셋이나 있었고, 어머니도 건강하지 못했다. 그는 군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가정을 돌보기 위해 집에 남았다.당국이 배정한 그의 첫 직장은 아버지가 뇌출혈 전에 다녔던 경성의 종자농장 노동자였다. 종자농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협동농장과 달리 농민 성분이 아닌 노동자 성분이었다. 노동자들처럼 매월 배급과 월급을 받았다. 그럼에도 하는 일은 농민과 별 다름이 없었다.농장에 첫 출근을 하게 된 날 도정은 볏단 속에 들어가 엉엉 울었다. 자신의 인생이 농사를 짓다가 끝날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었다.그래도 그는 억척스럽게 다시 일어났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 불행하더라도 그 환경 안에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열심히 일하다보니 청년위원장도 됐고 선동원이란 직책도 얻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북한에 고난의 행군이 찾아와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기 시작했다. 다행히 종자농장은 그럭저럭 배급은 보장해주어 가족이 굶어죽을 형편은 되지 않았지만 살림은 나날이 어려워졌다.사상 교육을 받으며 꿈꾼 탈북1996년 10월 어느 날 친구의 언니가 찾아와 “새별에 선보러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북한은 선을 보러 남자들이 가지 여성들이 먼저 가는 일은 거의 없다. 함북 새별군은 아오지 탄광이 있는 두만강 옆 지역으로 경성에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한참을 가야 했다. 도정은 이미 그 언니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대충 짐작하고 있었던 터라 그 제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챘다. 중국에 시집가지 않겠냐는 말이었던 것이었다.도정은 고민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22살. 25살만 넘기면 노처녀란 말을 듣던 북한에서 그는 몇 년 안에 농장의 어느 남자를 만나 결혼할 운명이었다.북한에서 농사를 지으며 평생 사는 인생을 떠올리니 막막했다. 반면 2년 전 봤던 불빛이 환한 중국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렸다.1994년 초 도정은 전국 왕재산답사단에 선발됐다. 왕재산은 북한의 유명한 혁명전적지인데, 1933년에 김일성이 건너와 항일무장투쟁을 국내로 확대시키는 전략을 제시한 ‘왕재산회의’를 열었다는 곳이다. 한국에서 왕재산은 2011년 적발된 간첩단 사건으로 유명해졌다.도정은 전국에서 200명을 선발하는 답사단에 경성군에서 유일하게 선발됐다. 농장 청년위원장으로 열심히 일한다고 당에서 인정해준 것이다.전국에서 모인 답사단은 함북 회령의 김정숙 동상 앞에 모여 충성 맹세를 다진 뒤 온성군에 있는 왕재산까지 며칠 동안 걸어서 행군했다. 회령에서 왕재산까지 가는 길옆으로 두만강이 흘렀다.도정은 그때 두만강을 처음 봤다. 책에서 배울 때는 아주 넓은 줄 알았는데 좁은 곳도 많았다. 중국이 이렇게 가까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밤에 보이는 중국은 어두운 북한과 달리 불이 훤했다. 낮에 건너다 봐도 모든 것이 풍족해보였고 잘 사는 곳 같았다.북한 당국은 청년들에게 사상교육을 시키기 위해 혁명전적지 답사단을 만들었는데, 도정은 이 답사 기간에 중국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됐다. 그런데 2년 뒤 중국으로 가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고민 끝에 그는 “미래가 없는 이 땅을 떠나 중국에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그는 언니를 따라 기차를 타고 종성까지 갔다. 맞은편은 중국 투먼(圖們)이었다. 열흘 쯤 현지에 머무르다가 브로커의 안내를 따라 강을 넘었고, 얼마 뒤 투먼에 사는 조선족 남성을 소개받았다. 국경 도시인 투먼은 경계가 삼엄했다. 그래서 그는 남자와 함께 이듬해인 1997년 연길로 들어갔다.단식투쟁 끝에 도착한 한국중국에서 만난 남자는 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 돈을 벌어 북한 가족에게 보내줘야 하는 도정은 허무하게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다.탈북한 이듬해 23살 때부터 그는 연길 중심의 서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엔 고사리를 삶아 팔았고, 더덕과 완두 장사도 했다. 말을 배우지 못해 한족은 멀리하고 조선족이 자주 찾는 식품 위주로 닥치는 대로 장사를 하면서 점차 서시장의 상인이 돼갔다. 그러다가 점차 시장에 적응하면서 김치를 전문적으로 팔기 시작했다. 1999년 아들이 태어났다. 세 식구를 먹여 살리면서 북한 가족에게 돈도 보내야 했다.하지만 북한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암울했다. 그가 탈북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뇌출혈이 재발해 쓰러졌다.도정은 중국에서 상품을 구입해 북한으로 보냈는데, 언니의 남편이 이것을 보고 처제가 탈북했다고 안전부에 가서 신고를 했다. 아버지는 끌려가 20일 동안 혹독한 취조를 받던 끝에 뇌출혈로 쓰러졌다. 언니는 이혼을 했다. 북한에선 돈 쓸 일이 계속 생겨나는데, 중국에서 체포될까봐 조심히 장사해서는 돈을 크게 벌수가 없었다. 그나마 행운이었던 것은 연길의 중심시장에서 10년이나 신분을 숨기고 장사를 했지만 한 번도 체포돼 북송된 일은 없었다는 점이었다.돈을 주고 북한 여성을 사서 그 덕으로 먹고 살려는 남자와 결별하고 싶었지만 아이 때문에 선뜻 떠날 수도 없었다. 그러는 사이 마음속엔 한국에 대한 동경이 생겨났다. 조선족들은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 그곳에 가고 싶었지만 가는 방법을 몰랐다.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다른 곳에 살던 5촌 여조카가 먼저 한국으로 간 것이다. 그는 조카가 탈북한 줄도 몰랐는데, 한국으로 간 그가 우연히 도정이 연길에 사는 것을 알고 연락해왔다.그의 소개로 그는 한국으로 오는 선을 알았고, 주저 없이 집을 떠났다. 중국을 횡단해 태국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앞서 태국에 온 탈북민들은 한 달반이면 재판 절차를 마치고 한국으로 갔는데, 도정이 태국에 왔을 때는 4개월 반을 기다려도 뽑지 않았다. 그 사이 감옥은 탈북자들로 넘쳐났다. 100명을 수감할 수 있는 공간에 340명이 선풍기도 없이 견뎌야 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던 탈북자들은 단식이란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 전에 감옥 내 매점에서 먹을 것을 사서 미리 숨기고 감옥에서 주는 밥을 거절했다. 며칠 지나자 태국 탈북자들이 단식투쟁을 한다는 뉴스가 한국 언론에 오르내렸다. 그제야 한국 정부는 부랴부랴 서두르기 시작해 몇 십 명 단위로 한국으로 데려갔다.주모자로 몰린 도정은 다른 곳으로 끌려가 20일 넘게 더 격리돼 있다가 2007년 5월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조사와 하나원 생활을 마치고 8월 사회에 나왔다. 하나원 같은 기수 100명 중 20명만 받을 수 있었던 서울에도 배정을 받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굶주림이었다.열흘 만에 쫓겨난 첫 알바서울 생활은 녹녹치 않았다. 시급 5000원을 받기로 하고 닷새 만에 자리를 얻은 식당에선 열흘 만에 쫓겨났다. 식당 사장은 70세가 넘은 홀로 사는 노인이었는데, 며칠 지나자 자기 집에 가서 빨래를 하라고 시켰다. 한국 생활을 모르는 그가 생각하기에도 이건 아닌 것 같아 거절했다. 두 번째도 거절하자 식당 사장이 배은망덕하다며 더 나오지 말라고 했다.얼마 뒤 탈북자 지원센터가 소개해 준 휴대전화 조립회사에 다른 탈북자 3명과 함께 취직했다. 하지만 그는 한 달반을 일하고 퇴사했다.하나원에선 사회에 나가면 150만 원은 번다고 교육했는데, 당시 회사에서 준 월급이 85만 원이었다. 첫 월급을 받고 계산해보니 남는 것이 별로 없었다. 당시 탈북민은 한국 정착 초기 6개월 동안은 월 38만 원이라는 기초생활수급비를 받았고, 의료보험 1종 혜택도 받았다. 취직하면 그 모든 혜택이 사라진다. 그걸 감수하면서 하루 빨리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취직했는데, 4대 보험과 임대아파트 관리비 등을 내고 나니 열심히 일한 보람이 거의 없었다.다시 일자리를 찾은 끝에 화성시 봉담읍에 있는 환풍기 조립업체에 취직했다. 양천구에서 화성까지 출근하는 데만 1시간 40분이 걸렸다. 매일 6시에 집을 나서 지하철을 갈아타고 수원에 도착해 다시 버스를 타고 회사까지 가야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월급이 170만 원이라 더 좋은 직업을 찾을 수가 없어 3년 반이나 다녔다.직장에 다니는 과정에 그는 다섯 살 연상의 남자도 만나 결혼했고 딸도 두 명 태어났다. 2009년 중국에서 아들도 데려왔다.남편은 한국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연하게 알게 됐다. 남편은 예전에 건설 관련 개인 사업을 했는데, 어느 날 인명 피해가 발생한 큰 사고가 터졌다. 그는 갖고 있던 모든 재산을 다 피해 보상으로 내놓고 노숙까지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런 시련을 이겨내고 친구와 함께 고물상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는데, 1톤 화물트럭을 뽑은 지 20일 째에 도정을 알게 됐다.서울에 가진 것이란 임대아파트 한 채만 있는 외로운 여자와 1톤 트럭 한 대만 있는 남자는 서로의 처지에 묘하게 끌렸다. 결국 서로 의지해서 한 번 잘 살아보자고 약속하고 살림을 합쳤다. 2009년 첫 딸이 태어났을 때 중국에서 데려온 10살 위의 아들이 분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면서 사실상 여동생의 보육을 맡았다. 2010년에 둘째 딸도 태어났다. 도정은 둘째를 낳고 반년쯤 회사를 더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아침 6시에 나가 밤 10시에 들어오는 일과를 하면서 애기 둘을 키우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애를 키우면서 돈을 벌 일은 찾아야했다. 그래서 찾은 것이 명태를 말려서 파는 일이었다.# 3년 연속 망한 명태사업명태 사업은 우연히 시작했다. 동해 바다 옆에서 자란 도정은 어렸을 때 많이 먹었던 황태 맛이 늘 그리웠다. 그런데 한국에서 파는 황태는 입에 맞지 않았다.그는 처음 본인이 먹으려고 경기도 가평에 있는 시댁 마당에 명태를 사서 말렸다. 주변에 나눠주니 모두 맛있다고 했다. 기회도 찾아왔다.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이 터진 뒤 한국 정부는 북한과의 모든 교류를 중단했다. 북한산 수산물 수입도 막혔다. 북한에서 말린 황태를 수입해 한국에 팔던 사람들도 장사를 포기해야 했다. 그중에서 도정이 말려 나눠준 황태를 먹어봤던 몇 명이 명태를 사서 말려달라고 제안했다. 도정은 부산에서 동태를 구입해 말린 뒤 그들에게 갖다 주었다. 직장을 다니며 번 돈과 황태를 팔아 번 돈을 모아 집 주변에 작은 식당도 열었다. 명태를 말릴 수가 없는 여름에는 식당에서 장사를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음식점은 잘 되지 않았다. 월 임대료 고민에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간 적도 여러 번이었다.도정은 2015년쯤 황태를 말려 직접 팔기로 결심했다. 큰마음을 먹고 가평에 큰 덕장을 만들고 부산에서 한꺼번에 명태를 22톤이나 사서 널었다. 식당에서 장사를 하고, 장사가 끝난 뒤 늦은 밤에 차를 타고 가평으로 가서 명태를 가공하는 일이 반복됐다.그러나 첫해는 완전히 망했다. 날씨가 갑자기 더워져 명태가 잘 마르지 않은 것이다. 손이 떨려 차마 썩어가는 명태를 버릴 수가 없었다. 죽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시부모님들이 며느리 몰래 그 명태를 모두 버렸다.인생을 포기한 듯 쓰러져 있는 도정에게 시어머니가 소리쳤다.“당장 일어나. 빈손으로 여기에 와서 학비를 안내고 부자 되는 법은 없다. 돈 버는 일이 그리 쉬우면 한국 사람들은 다 부자가 됐을 거다. 네가 쓰러져 있으면 아이들은 누가 키울 거냐.”시어머니는 그를 일으켜 세우더니 은행으로 데려가 750만 원을 찾아 건네주었다.“내가 가진 것이 지금까지 부었던 적금이 전부인데, 이 돈을 갖고 다시 해봐라.”도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래, 내가 빈손으로 왔는데 다시 빈손이 됐을 뿐이고, 돈은 이제 또 벌면 되지.”그는 그 돈으로 이듬해 다시 명태를 사서 널었다. 그러나 또 망했다. 날씨가 또 더워졌고, 명태는 또 썩었다. 세 번째 해에도 오기로 빚을 내 시작했다. 또 망했다. 3년 연속 실패하다보니 빚도 1억8000만 원이나 생겨났다. 황태 말리는 비법을 찾다하지만 실패가 학비라던 시어머님의 이야기대로, 그 과정에 배운 것도 있었다.우선 좋은 명태를 고르는 법을 익혔다. 무조건 크다고 좋은 명태가 아니었다. 말렸을 때 살이 가득한 명태는 따로 있었다.둘째로 씻는 방법을 특화시켰다. 한국의 유명 황태 덕장은 수돗물에 씻었는데, 도정은 소금을 풀어 바닷물 농도로 맞추어 씻었다. 셋째로 말리는 방법을 달리했다. 그때까진 명태는 머리를 꿰어 덕장에 매달아놓는데, 도정은 꼬리를 꿰어 거꾸로 말렸다. 이렇게 하면 소금물이 살에 더 잘 스며들어 쫄깃쫄깃해지고 맛도 좋아졌다.황태는 눈을 맞고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마른다. 그런데 서울 주변에 내리는 눈은 환경오염 물질이 섞여 있기 때문에 그는 덕장 위에 천정을 만들고, 더운 날씨를 극복하기 위해 선풍기로 찬 바람을 만들었다.이렇게 노력한 끝에 2018년 처음으로 상품이 나와 매출액 1억 원을 달성할 수 있었다. 자신감이 생기니 사업은 탄력이 붙었고, 2020년까지 이전 3년 동안 진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 그는 ‘해숨’이라는 회사를 만들고, ‘해숨청정명태’라는 브랜드로 온라인 판매도 시작했다. 코로나가 터져도 온라인 매출은 계속 성장했다.그러나 사업이 늘 평탄할 수는 없었다. 생각지 못한 변수는 늘 있다. 올해 터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그는 다시 위기를 맞았다. 전쟁 발발 후 3개월 동안 매출은 0을 찍었다. 러시아산 명태를 수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러시아 대통령 때문에 장사가 망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저장고가 고장 나 보관하고 있던 황태를 버려야 하는 불행도 찾아왔다. 그런 일이 벌어져도 이제 그는 더는 낙담만하고 있지 않는다.“울어봐야 방법이 나오는 것은 아니죠. 저는 이제 어려움이 찾아오면 이건 쉬었다 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항상 인생이 좋을 수만 있진 않거든요. 그래도 돌아보면 저는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다시 세운 인생 목표2015년 1월 9일 그는 박근혜 대통령 앞에서 ‘정착사례발표’를 했다. 통일부에서 주관하는 정착사례 경연에 수기를 냈는데 우수상을 받았고, 그걸 계기로 탈북민 대표로 선정돼 신년 통일준비 업무보고 자리에 초대돼 이야기를 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탈북민은 한국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성공입니다. 자유를 찾았으니 그 다음부터는 나의 몫입니다. 저는 중국에서 운이 좋게 10년 동안 북송되지 않았는데, 그것만 해도 축복받은 것이고, 한국에 와서 아내를 믿고 지지해주는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렸고, 할 일을 찾은 것도 축복받은 일입니다.”하나원에 들어왔을 때 그는 10년의 계획을 세웠다. “결혼을 해 내편을 만들 것이며, 이 좋은 세상에서 아이를 낳아 키울 것이며, 내 사업을 하겠다”는 3대 목표를 세웠다.지금 돌아보니 어려움이 참 많았지만 결국 원했던 것은 다 이뤘다. 요즘은 SBS에서 방영하는 ‘골 때리는 그녀들’에 북한팀을 구성해 참가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정도로 심적 여유도 생겼다. 향후 10년을 그려보면 더 큰 목표도 생겨났다. 우선 첫째 딸을 세계 정상의 태권도 선수로 키우는 것이다. 올해 13살인 딸은 학교 때 씨름선수였던 아버지와 축구선수였던 어머니의 유전자를 충실히 물려받았는지 벌써 키가 176㎝나 된다. 지난해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한 전국 태권왕 겨루기 대회에서 우승해 자기 체급 랭킹 1위를 했다. 그러니 세계적 선수로 키우는 것은 불가능한 목표만은 아니다.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태권도 학원과 시합비 등으로 매달 200만원 가까이 들어간다. 올해 매출이 없어 어렵게 되자 12살 된 막내딸이 “제가 피아노를 그만둘 거니 언니를 계속 태권도하게 밀어 주세요”라고 했다. 도정은 막내를 부여잡고 펑펑 울었다.도정은 평소 자식들에게 “부모는 빈손으로 시작해 너희들에게 물려줄 것이 없다. 너희가 잘 되게 하는데 다 쓸 것이고, 혹 남게 되면 사회에 환원하고 갈 것이니 너희의 인생은 스스로 개척하라”고 교육했다. 그런 철학으로 아들이 군에 갔다 제대한 당일 이제부터 알아서 인생을 개척하라고 아들을 독립시켰다. 하지만 막내딸이 하고 싶어하는 피아노를 돈이 없어 포기하게 만들었을 때엔 자녀들에게 한 약속도 지키지 못해 너무 괴로웠다.두 번째 꿈은 가족과 해외여행을 가보는 것이다. 한국에 정착한지 15년이 됐지만 부부는 아직 해외를 가본 적이 없다.여행을 갈 돈도 없으면서 그는 설립 10년째 되는 한 탈북민 봉사단의 단장을 4년째 맡아 지금까지 이끌고 있다.“탈북민이 처음 사회에 나오면 정말 외롭잖아요. 고향의 음식도 너무 그리울 것이고. 그래서 먼저 정착한 탈북민들이 고향 음식을 만들어 새로 온 사람을 찾아가 삶의 의욕을 불어주려고 활동하기 시작했어요.”20여명의 탈북민이 매달 한 번씩 모여 코다리조림이나 명란젓, 김치, 북한식 염장무 반찬 등을 만들어 찾아간다. 음식 만드는 과정에 교류해서 좋고, 음식을 먹으며 탈북민이 기뻐하는 모습을 봐서 또 기분이 좋단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로 최근 입국하는 탈북민이 급감해 찾아갈 집이 없어졌다. 그래서 봉사단은 요즘 홀로 사는 노인이나 생활이 어려운 지역주민들을 찾아가 북한 음식을 맛보게 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북한에 사시던 부모님들이 이제는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각하면 항상 죄스러운 마음뿐인데, 명절 때마다 한국의 어르신을 찾아가 대접하면 위로가 됩니다.”그의 세 번째 꿈은 통일이 되면 명태라는 이름이 처음 생겨난 함북 명천에 수산물가공업체를 만드는 것이다. 꼭 돈을 벌기 위해서만은 아니다.“통일되면 고향에 가서 부모님 묘에 비석을 세우고 싶어요. 한국에 오니 여긴 묘와 비석이 얼마나 좋은지 감탄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살면서 도움을 받은 분들을 큰 버스에 태워 제 고향인 경성에 모시고 가는 겁니다. 경성은 온천으로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좋은 관광거리가 참 많아요. 제가 그땐 관광 가이드를 할 겁니다. 고향 근처에 회사를 만들고 일도 하면서, 부모님 묘소를 방문하고, 다른 사람들 기분 좋게 관광가이드를 하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꿈을 말할 때 그의 얼굴이 가장 빛났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북한이 한미 연합 공중훈련 ‘비질런트 스톰’에 대응한다는 명목으로 2일부터 나흘 동안 미사일 35발을 쐈다.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미사일을 쏜 것도 이례적이거니와 북방한계선(NLL)을 넘겨 미사일을 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이런 북한의 반응에서 강력하게 복원된 한미 연합훈련에 절대 기죽지 않겠다는 결기가 엿보이는 것과 동시에 신경질적인 짜증마저 읽힌다. 매뉴얼대로라면 한미 연합군이 공중 훈련을 하면서 비행기를 100대 띄우면 북한도 최소 동수의 비행기가 떠 맞대응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원칙은 언제부터인가 사라졌다. 북한의 경제력으론 맞대응할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공중 훈련뿐만 다른 훈련도 마찬가지다. 연료난도 문제지만 고물 장비들이 훈련하다가 손실되면 보충할 능력도 없다. 그러니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응은 남쪽에서 어떤 훈련을 해도 미사일이든 포든 계속 쏘는 것뿐이다. 그런데 쏘는 것도 결국 소모다. 인건비가 거의 공짜인 북한의 미사일 생산단가를 우리 식으로 계산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렇지만 구형 스커드 미사일과는 달리 명중률이 정확한 최신 미사일은 비싼 전자부품 덩어리다. 대북 제재와 코로나로 미사일에 쓰일 반도체를 매우 어렵게 구입해야 하는 북한으로선 미사일 발사도 큰 부담이다. 특히 끊임없이 지형을 대조하며 날아가는 순항미사일은 원리상 무인기라 할 수 있는데, 전자부품이 더 많이 든다. 2017년 한국에서 자주 발견됐던 북한의 조잡한 무인기를 떠올린다면 최근 몇 년 사이에 북한이 순항미사일을 개발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긴 하다. 하지만 반도체 수급 여건상 생산 수량은 극히 제한됐을 것이다. 이런 비싼 순항미사일을 2발이나 울산 앞바다로 쐈다는데 합참이 부인해버렸으니 북한은 알아주지 않아 섭섭한 생각마저 들지 모른다. 물론 과거 북한 행태로 보면 순항미사일을 쐈다는 말을 믿기도 어렵다. 어쨌든 북한 형편에서 나흘 새 미사일을 35발이나 쐈으면 엄청난 지출을 한 셈이다. 그런데 이번에 한미 훈련에 무리하게 대응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미의 강력한 공군력이 북한을 급습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1990년대부터 2000년 초반까지 평북 창성의 김정일 특각을 지켰던 전직 974부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이 시작되면 김정일은 늘 가족을 데리고 창성으로 들어와 지냈다고 한다. 이곳은 중국과 인접해 폭격이 어렵고, 여차하면 보트를 타고 순식간에 중국으로 도망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이 핵을 보유한 뒤로는 이런 걱정은 크게 덜었다고 볼 수 있다. 핵이 없을 때도 공격하지 않았는데, 핵이 있는 지금 굳이 공격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또 경제가 거덜 난 북한을 점령해 2000만 북한 주민을 먹여 살리겠다는 의지를 가진 정치인도 없다. 이런 사실은 김정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선제공격을 받을 두려움은 과거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이 최근 대규모 군사훈련과 미사일 발사를 강행한 이유는 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의도도 있지만 한편으론 북한도 군사력을 점검할 시점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2018년 남북이 9·19군사합의를 채택한 이후 우리도 훈련을 거의 못 했지만 북한 역시 마찬가지다. 훈련을 하지 않는 군대는 군대가 아니다. 김정은 역시 지난 4년 동안 북한군이 얼마나 해이해졌는지, 싸울 준비는 어느 정도 돼 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미사일 부대 역시 점검이 필수다. 유사시 제공권을 단시간에 빼앗길 것이 뻔하기에 북한 미사일 부대가 쏠 수 있는 미사일 수량은 극히 한정적이다. 그러니 초기 몇 발을 불량 없이 확실히 쏠 수 있을지 파악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북한이 미사일을 좀 쐈다고 도발로 단정해 겁먹을 필요는 없다. 가뜩이나 없는 미사일을 바다에 스스로 버리는데 우리도 나쁠 것은 없다. 그렇지만 다른 도발의 가능성은 여전히 대비해야 한다. 가령 2018년 비무장지대 최전방 감시초소(GP)를 철수할 때 북한은 160여 개 중에 11개를 철수했지만 우리는 60여 개 중에 11개를 철수했다. 우리의 구멍이 훨씬 더 커진 것이다. 북한이 미사일을 몇 발 쏘는지에 신경을 쓰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당장 9·19군사합의로 구멍이 뚫린 전방부터 점검하는 것이 더 중요해 보인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할아버지는 한국에서 아들 7명을 낳고 6.25전쟁 직전에 월북했다. 전쟁이 끝난 뒤 북한에서 제주도 해녀 출신의 젊은 여성을 만나 또 아들을 8명이나 낳았다.남로당 출신이라 황해도 농촌으로 쫓겨나 박해를 받으며 힘들게 살았지만, 남과 북에 딸은 단 1명도 없이 아들만 15명을 남겼다.그중 한 명이 김봄희 씨(33)의 부친이다. 1989년 봄희가 원산에서 태어났을 때 부친은 화물선 기관장을 지냈다. 1995년 봄희가 인민학교에 입학할 즈음 북한은 엄혹한 ‘고난의 행군’을 겪었다. 봄희의 부모들도 장사에 뛰어들었다.봄희의 부친은 매우 엄격한 사람이었다. 어린 딸과 두 살 아래의 남동생을 새벽 4~5시에 깨워 텃밭 농사를 함께 짓게 했다. 학교에 갔다 돌아오는 길엔 절대 빈손으로 오지 못하게 했고, 하다못해 토끼풀이라도 뜯어오게 했다.봄희가 7살 나던 해 아버지는 북한돈 100원을 주면서 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오라고 했다. 어린 봄희는 그 돈으로 사탕 10알을 샀다. 그리고 주변 농촌에 나가 1개당 11원씩 팔아 10원을 남겨왔다. 어린 딸에게 부모는 간장, 된장 담구는 법부터 시작해 술을 뽑고 찌꺼기로 돼지를 키우는 법까지 각종 집안일을 가르쳤다.이렇게 엄격하게 키운 이유는 있었다. 할아버지는 남로당 출신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아들들이 북한에서 출세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아들들을 모두 기술자로 살게 했고, 세상에서 홀로 살아남으려면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게 가풍이 됐다.# “탈북하지 마세요.”봄희는 인민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뜻밖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음악선생이 “너는 노래를 참 감수성 있게 잘 부른다”고 칭찬하더니 도 보위부 반간첩기동선전대에 추천했다. 반간첩은 방첩이라는 뜻이다. 반간첩기동선전대는 5세~18세 사이의 어린 학생 13명 정도로 구성됐는데, 도의 각 지역을 다니면서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면 신고합시다”고 선전하는 활동을 했다. 그냥 구호만 외치면 재미가 없기 때문에 노래, 춤, 기악, 화술, 대화시 등을 엮어 50분 정도 공연을 했는데, 전체적인 주제는 이러이러하면 수상한 사람이니 꼭 신고를 하라는 것이었다.봄희는 탈북하기 전인 2006년까지 이 기동예술선전대에서 활동했다. 새벽에 일어나 집안일을 하고, 학교에 다녀온 뒤 오후에는 공연이나 훈련을 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했다. 주말에도 근교 농촌에 장사를 떠났다. 지방에 공연 갈 때는 청어를 사서 배낭에 메고 가 공연이 끝난 뒤 1마리를 옥수수 1㎏과 바꿔 집으로 돌아왔다.2002년부터 4년 동안은 간첩을 신고하라는 공연이 ‘불법월경(탈북)을 하지 말자’와 ‘자본주의 불법 영상물을 보지 말자’는 공연으로 바뀌었다. 봄희는 한국에 환상을 품고 탈북했다가 수모를 받고 다시 조국에 돌아오는 여성의 역을 맡았다. 남조선에 간 여성은 어느 집 가정부가 됐는데 주인집 부부는 자기들은 비싼 밥을 먹으면서 탈북한 가정부가 일을 못한다며 온갖 욕설을 퍼붓고 개밥을 먹였다. 끝내 견디지 못한 여인은 천신만고 끝에 북한으로 돌아오게 된다.이런 공연을 1년 반쯤 준비해 강원도 공장, 농장, 군부대, 학교 등 수백 곳을 다니며 진행하는데, 공연 끝나면 감동해 눈물 흘리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선전대라고 특별한 보상은 없었지만 나라에서 시키는 일이니 봄희는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 앞에 나가 공연을 하는 것이 재미있기도 했다.# 고문으로 숨진 외할아버지봄희가 15세 때인 2004년 갑자기 원산에서 같이 살던 외할아버지가 퇴근길에 승용차에 태워져 끌려갔다. 알고 보니 평소에 친한 사람에게 김정일을 독재자라고 욕을 많이 했는데, 누군가 그걸 보위부에 신고한 것이다.봄희의 외가는 중국 출신이다. 전라도 출신의 외할아버지는 해방 전 중국으로 건너가 길림육문중학교를 졸업했다. 이곳은 김일성이 다닌 학교다. 외할머니도 중국에서 태어나 처녀시절까지 살았다. 1959년부터 1961년까지 3년간 중국에는 대기근이 닥쳐서 4500만 명이 죽었다. 이를 ‘마오의 대기근’이라고 불렀는데, 이때 많은 조선족들이 북한으로 탈출했다.외할아버지는 북한으로 넘어와 김책공대를 졸업했고, 강원도의 한 공업소 기술자로 임명됐다. 두만강을 넘어 몰래 북에 들어온 외할아버지와 달리 외할머니는 공식적으로 북에 건너와 북한 국적을 받았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한국어보단 중국어가 더 편했다. 그래서 봄희는 외가에 갈 때마다 중국어를 들어야 했다.외할아버지가 끌려간 뒤 봄희는 동네에서 자신을 보는 눈초리가 달라짐을 느꼈다. 이웃들은 “저 집 할아버지가 잡혀갔다”고 수군거리며 거리를 두었다. 선전대에서도 봄희는 주연 자리를 빼앗기고 무대 뒤에서 다른 애의 립싱크를 해주는 역할을 맡았다.외할아버지는 몇 달 뒤 집에 돌아왔는데, 오자마자 눈을 감았다. 고문으로 다 죽게 되자 석방한 것이다.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뒤 장사를 하던 엄마마저 중국으로 넘어갔다. 중국에서 자란 부모를 둔 엄마는 중국에 외삼촌과 이모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활용해 북중 무역을 하다가 큰 사기를 당했다.자본금을 찾으려 몰래 도강했던 엄마는 친척들의 도움으로 선양(瀋陽)에 자리 잡아 재봉일을 시작했다. 어차피 북에 돌아와 빚쟁이들에게 쫓기느니 중국에서 돈을 벌어 북한 가족을 살리고 빚도 갚으려는 타산을 한 것이다. 엄마가 탈북한 이듬해인 2005년 봄희는 함북 회령에 가서 엄마에게서 돈을 받아오기도 했다. 그 돈을 가지고 장사를 시작했다. 음식장사도 하고, 감장사도 했다. 강원도 안변은 북한에서 거의 유일한 감 산지였는데, 이걸 함북 청진에 가서 팔았다. 생감을 사서 꼭지를 딴 뒤 술을 바르면 청진까지 가는 며칠 동안 팔기 좋게 숙성됐다. 장사를 하면서도 선전대가 부르면 나가서 공연도 했다.# 회창의 지하 금광아무리 7살 때부터 장사로 단련된 봄희지만 어른 사기꾼을 당할 순 없었다. 2005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몇 달 뒤 그는 사기를 당해 모든 돈을 잃었다. 눈앞이 캄캄했다.이때 누군가 평남 회창군의 금광에 가서 몇 달을 일하면 목돈을 모을 수 있다고 말했다. 봄희는 아버지에게 말도 하지 않고 회창으로 향했다.12월의 을씨년스러운 회창 장마당 앞에서 벌벌 떨며 누군가 자신을 데려가기만 기다렸다. 장마당 입구에는 12살부터 18살 사이 아이들이 10여명 있었다. 봄희와 같은 신세였다.금광에 돈을 댄 ‘돈주’는 장마당 앞에서 인부를 골라 가는데 아이들이 매우 인기가 좋았다. 몸집이 작아 좁은 굴에서 빠르게 움직일 수 있고, 시키는 대로 일도 잘하기 때문이다.이틀 만에 어떤 남자가 봄희를 불러 데려갔다. 먹여주고, 하루 북한돈 200~300원을 준다는 조건이었다. 당시 북한에서 쌀 1㎏은 800원이었으니 하루 일당이 쌀 300그램인 것이다.봄희는 어떤 갱도에 들어가 3개월 가까이 단 한번도 밖에 나오지 못했고 씻지도 못했다. 먹고, 자고 등 일상을 굴 안에서 해결했다. 시간도 알 수 없는 곳에서 좁은 굴을 기어가서 돌을 캐고 숙식을 해결하는 좀 넓은 공간에 메고 온 뒤 잘게 깬다. 그걸 수은에 넣어 걸쭉한 찌꺼기를 천으로 짜면 금을 머금은 수은찌꺼기가 남는다. 이렇게 며칠 일해 찌꺼기를 모아놓으면 그를 데려갔던 남자가 찾아와서 먹을 것을 주고 찌꺼기는 가져간다.이런 아동착취는 북한에서도 불법이다. 그래서 안전원들이 불법 금광 채취를 단속하기 위해 돌아다니긴 하지만, 모두가 굴속에 들어가 살고 있으니 쉽게 찾을 수가 없다. 회창은 지하에 따로 도시가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불법 금 캐기가 성행하는 곳이다. 땅 속 갱도가 수백 개인지, 수천 개인지, 불법 작업장은 또 얼마나 되는지 누구도 모른다. 전국에서 수천~수 만 명이 몰려와 그렇게 땅속으로 사라져 버린다.채광 지도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냥 들어가서 아무 방향이나 뚫는데, 수시로 옆에서 폭약을 터뜨리는 소리가 꽝꽝 울렸다. 누구도 서로 누군지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죽으면 당국에 신고도 하지 않는다. 봄희는 시신을 몇 번 보았다. 굴속에 들어간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나오지 않을뿐더러 서로를 감시한다. 누군가 잡혀 작업장이 드러나면 그동안 일한 돈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그렇게 조심했지만 어느 날 안전원이 봄희의 작업장에 쳐들어왔다. 안전부에 끌려갔더니 미성년자라며 고향에 가는 기차에 강제로 태웠다. 석 달 가까이 일한 돈은 단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아마 그를 고용한 업주는 안전원에게 막대한 뇌물을 주어야 했을 것이다.# 탈북석 달 만에 돌아오니 아버지가 아무 말도 없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돈을 사기당한 딸을 크게 혼을 냈을 것이지만, 아버지는 한숨만 쉬었다. 어머니가 탈북하고 얼마 뒤 아버지는 재혼했다. 외할아버지 사건과 어머니의 탈북으로 죄인의 집안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니 다른 여성과 결혼하는 것으로 세탁을 하려 한 것이다.봄희는 북중 국경에 가서 엄마한테서 돈을 받아오겠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말리지 않았다.“살뜰한 분이 아니셨는데, 그때는 참 이상했어요. 도중에 먹으라고 콩과 강냉이를 닦아 배낭에 넣어주고, 역전까지 배웅하려 나섰어요. 떠나면서 뒤를 보는데, 아버지가 엄청 울고 있었어요. 아버지가 우는 것을 그날 처음 봤고, 그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죠. 뭔가 예감을 했던 것 같아요.”이미 한 번 다녀왔던 경험이 있는지라, 회령에 가서 엄마와 전화 통화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엄마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봄희야, 중국에 와서 엄마랑 살지 않겠니. 예술학교도 보내주고, 밥도 배불리 먹고,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봄희는 아버지 때문에 잠시 고민했지만, 엄마에게 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머무는 집 브로커는 자꾸만 기다리라고 하면서 선뜻 두만강을 넘겨 보내지 않았다. 그렇게 거의 한 달을 보낸 어느 날 브로커가 오늘 밤 강을 건너가라고 했다.강 건너기 전 어둠 속에서 브로커가 선심을 쓰듯 옷 보따리를 주더니 “지금 두만강에 얼음이 둥둥 떠내려 오니 강을 건넌 다음에 꽁꽁 얼 거야. 이 보따리를 꼭 들고 가서 마중 나온 사람들을 만나면 갈아입어라”고 했다. 봄희는 그의 안내를 받아 두만강을 건넜다. 그때가 2006년 3월이었다.# 뜻하지 않은 필로폰 운반강을 넘어가니 봉고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서 어떤 남자가 옷 보따리를 갖고 왔냐부터 물었다. 건네주자 남자는 보따리를 이리저리 뒤져 필로폰(얼음) 봉지를 찾아내더니 봄희를 매정하게 차 밖으로 밀어버리고 떠났다.그때에야 봄희는 자기가 필로폰 운반책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둠 속에 건네받은 보따리 안에 필로폰이 숨겨져 있을 줄 꿈에도 생각 못했다.젖은 옷은 꽁꽁 얼기 시작했다.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무작정 걸었다. 몇 시간을 걷자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길을 따라 한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었다.“아저씨, 저 좀 살려주세요. 중국에 엄마가 있는데 전화 좀 하게 해주세요.” 남자는 봄희의 행색을 살펴보더니 자기 집에 데려가 옷도 주고 아침도 해주었다.“중국엔 참 착한 사람들이 사는구나” 싶어 감동했는데 얼마 뒤 남자가 엄마에게 전화해 “내가 당신 딸을 데리고 있는데, 팔아먹을 수도 있지만 안 팔고 기다릴 거니 돈 얼마를 갖고 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전화 속 엄마는 그러겠다고 했다.며칠 뒤 그 집에 정복을 입은 공안과 다른 남자 한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남자를 잡아 “인신매매범으로 감옥에 갈거냐 아니면 그냥 입 닫고 있을거냐”고 협박했다. 엄마가 그 사이 중국의 친척 인맥을 동원해 보낸 공안이었다. 그들을 따라 봄희는 선양으로 들어왔다.# 한국 도착선양에서 어머니는 월세집에서 살면서 재봉일을 하고 있었다. 시장의 옷가게 한족 아줌마가 일감을 넘겨주면 그걸 수선하는 일이었다. 한족 아줌마는 자기가 받은 돈의 절반을 주었는데, 그 돈으로도 먹고 살만은 했다.중국에 온 봄희는 엄마를 도와 다림질을 했다. 그렇게 모녀가 열심히 일해 북한에 돈을 보내주기도 했다. 시간이 가면서 봄희는 현실을 깨달았다. 엄마는 예술학교를 보내줄 능력도 없었고, 잘못하면 체포돼 북송될 위험도 있었다. 엄마는 딸을 설득했다.“봄희야, 이제 남동생도 중국에 들어오게 할 거니 그땐 한국으로 가자. 거기서 네가 하고 싶은 공부도 하고 그렇게 살자.”재혼한 아버지는 형제가 많기 때문에 자신까지 탈북하면 많은 친척들이 피해를 본다며 탈북하길 거절했다. 대신 아들은 보내주었다.엄마는 틈틈이 한국으로 가는 방법을 찾았다. 1년 반이 지난 2007년 12월 마침내 남동생도 탈북했다. 남동생이 도착하기 직전에 엄마는 봄희를 한국으로 가는 브로커에게 인계했다.“온 식구가 같이 가다 체포되면 그냥 죽는 거야. 너 혼자 가서 이 선이 안전한지 봐. 네가 잡히면 엄마가 돈을 벌어 구할 수 있지만, 엄마까지 잡히면 우리는 죽어.”한국으로 가는 일행에 합세한 봄희는 동남아 정글을 헤쳐 도착한 태국 수용소에서 몇 달 수감생활을 한 끝에 2008년 봄 한국에 도착했다.조사기간과 하나원 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나와 중국에 연락하니 엄마는 자신도 곧 따라 떠나겠다고 했다.#“연기하고 싶어요.”19세에 한국에 혈혈단신으로 온 봄희는 미성년자라 임대주택을 받지 못해 가톨릭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맡겨졌다. 봄희는 대학에서 연기를 꼭 배우고 싶었다.이곳저곳 알아봤더니 연기학원을 다니지 않고선 연기 전공으로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학원은 등록금만 100만 원이 넘었고, 노래 레슨비용도 15만 원이 넘었다. 미성년자라 집도 없고, 정착금도 받지 못한 그에게 돈이 있을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대학 입시를 앞두고 포기하긴 싫었다. 그는 무작정 연기학원에 찾아갔다.“선생님. 저는 연기가 너무 하고 싶은데, 북에서 와서 돈도 없습니다. 제가 나중에 갚을 테니 저를 제발 좀 가르쳐주시면 안 될까요?”그렇게 6~7군데를 돌아다녔다. 어느 곳에서도 돈이 없으면 배울 수 없다고 하진 않았지만, 선생이 없고, 자리가 없고 등의 이유로 거절했다.“그만큼 제가 그때 무지했던거죠.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서 말을 못하겠어요.” 봄희에겐 가장 되돌아보기 싫은 흑역사였다.그러던 가운데 엄마와 남동생도 무사히 입국해 부천에 집을 받았다.어느 날 봄희를 쭉 지켜봤던 수녀님이 부르더니 자기가 아는 목동의 한 학원 원장을 찾아가보라고 했다. “이 애를 어떻게 도와줄 수 없냐”고 부탁했던 것이다. 원장은 다시 목동의 한 연기학원 선생에게 “이 애가 어떤지 한 번 봐주라”고 부탁했다.연기선생은 구구절절 자기소개서를 6~7매나 써서 온 봄희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까무잡잡한 모습에 북한 사투리가 그대로 남아있었고, 긴장돼 말도 더듬거리는 것을 보더니 “너 같은 애는 한국에서 연기를 못한다. 여기가 얼마나 치열한 곳인줄 아냐. 나가라”고 했다.봄희는 너무 슬퍼 엄마를 찾아가 펑펑 울었다. 엄마가 딸을 다독이다가 밖에 나가 꽃 한다발을 들고 학원으로 찾아가 선생에게 사정했다. 선생이 왜 마음이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봄희는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몇 달 동안 연기를 배울 수 있었다.“선생님의 성함은 황선일인데, 제가 살면서 가장 고마운 분이었습니다. 선생님 뿐 아니라 사모님까지 부부가 저를 수양딸처럼 생각하고 아껴주셨습니다. 제 삶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친 분이죠.”이러한 과정을 거쳐 봄희는 2009년 동국대 연극학부에 입학했다.# 정체성을 찾다봄희는 한국에 와서 왜 하필 꼭 연기를 하고 싶었을까.“다른 선택이 많았다는 것을 그땐 몰랐어요. 북에서 연기를 했으니 내가 여기서도 꼭 이걸로 먹고 살아야겠다는 외골수 생각만 했던 것 같습니다. 북에서 선전도구의 어린 삶을 살았지만, 한편으로 노래와 춤을 추면 박수도 많이 받으니 그게 제 인생인줄 알았던 거죠.”대학 생활은 너무 어려웠다. 봄희는 “아름다운 날치들이 바다에서 춤을 추는데, 못생긴 꼴뚜기가 끼어든 느낌이었다“고 했다.북한에서 형성된 사고방식과 사투리도 넘기 어려운 난제였다.동기들이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놓고 작품성을 논할 때 봄희는 “자본주의 탐욕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분석했고, ‘명성황후’의 비극을 논할 때 홀로 “민비는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고도 했다. 동기들은 슬슬 이 이상한 동기를 멀리하기 시작했다.다른 탈북민들은 대학에 입학해 학년이 올라갈수록 성적이 좋아진다. 그러나 봄희는 그 반대였다. 개론을 많이 배우는 첫 학기는 열심히 외워 3.5를 받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성적이 오르지 않았다. 학년이 올라가면 실기가 점점 많아지는데, 봄희와 함께 하겠다는 동기도 없어 다른 대학에서 사정해 데리고 와야 했다.“동기들 잘못은 아니었죠. 말투나 사고방식이 너무 달랐고, 그렇다고 제가 인간관계를 잘 맺는 법을 알았던 것은 아니었죠.”그는 점점 주눅이 들어갔다. 그러다가 정부에서 국비로 미국 장학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무작정 지원했다. 구구절절 자기소개서가 먹혔는지 그는 합격 통지를 받았다.“미국에 꼭 가고 싶었어요. 다문화 국가인 미국은 어떻게 서로 다름을 조화시키며 사는지 꼭 보고 싶었어요.”그렇게 떠난 미국에서 그는 2년을 보냈다. 그리고 자신감을 다시 찾았다.“미국에 가서 내가 무조건 한국화 돼야 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났어요. 한국에 왔으니 무조건 한국인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미국인들과 어울리면서 내가 살아온 삶과 정체성 역시 중요한 것이구나. 이걸 버리기보단 잘 다듬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미국에 가기 전엔 말투도, 음식도, 옷차림도 무조건 한국식으로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다녀와선 조화시키는 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우여곡절 끝에 봄희는 2016년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 7년 만에 졸업한 것이다.# 40개의 아르바이트북한에서 어렸을 때부터 몸에 익혔던 부지런함은 큰 자산이 됐다. 그는 대학에 입학한 뒤부터 연극단 단장이 된 지금까지 단 하루도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은 날이 없다고 했다.지금까지 그가 했던 아르바이트만 40가지가 넘는다. 그중 으뜸 아르바이트는 2010년 대학로의 한 극단에 들어가 스텝으로 일했던 아르바이트였다.당연히 안 좋은 기억도 있다. 어느 아르바이트 때에는 딱 하루 조금 늦었는데, 사장이 “너 때문에 손해 본 것이 얼마나 되는지 아냐”고 으름장을 놓으며 즉시 해고했다. 한 달반 일한 일당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지금은 당장 노동부에 신고할 것이지만, 당시의 그는 그걸 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그 사장 덕분에 제가 배운 것도 있어요. 그때부터 열 받아서 계약서를 쓰는 법, 세금 계산서를 쓰는 법을 배우기 시작해서 지금은 혼자서 이런 것을 척척 해냅니다. 연극단 운영하면서 돈을 정산하는 일이 많은데, 저는 1원도 틀리지 않게 할 수 있어요.”대학을 졸업한 연극인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그도 대학을 졸업한 뒤 투잡을 뛰어야 했다.그가 찾은 투잡은 온라인 쇼핑몰이었다. 아는 사람이 출연하는 작품에 거의 무보수로 출연해 낮에는 열심히 연기 연습을 하고, 밤에는 동대문 옷시장에 나가 옷을 사서 온라인으로 팔았다. 손해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큰 돈이 떨어지는 일은 아니었다. 그 와중에 오디션 자리가 났다는 소리만 들으면 찾아다녔다.봄희는 2017년 대학로 어느 연극단에서 처음으로 탈북 여성의 역할로 주인공을 맡았다. 아들과 남편을 잃고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역이었다. 매일 연습시간보다 1~2시간 먼저 가서 청소를 하고, 오늘이 마지막인 듯 연습했다. 무대에 닷새 동안 오른 연극이지만, 잊지 못할 작품이었다.한국에선 연극만 해선 먹고 살 수가 없었다. 그는 인형극, 마당극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일했다. 자격증 공부도 열심히 해서 국가문화예술교육사 2급, 연극심리상담사 2급 등을 따기도 했다. 2017년 한 마당극에서 자리를 얻어 수백 건의 공연을 하게 됐다. 일이 바빠지니 온라인 쇼핑몰도 접었다.“마당극을 하면서 처음으로 삶을 돌아보게 됐어요. 주로 요양원에서 공연했는데, 수백 곳을 다니며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 전에는 유명해져서 김봄희라는 이름을 알리고 싶었지만, 요양원에서 황혼기의 노인들을 계속 보다보니 젊어서 얻은 명예와 부가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나는 하루하루 열심히 잘 살아야겠다, 마지막에 후회없이 가는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오늘을 포기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면서 그때부터 돈을 버는 일과 연애와 여행 등을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어요.”생각이 바뀌니 인생의 동반자도 만났다. 남편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해외에서 쭉 살았다. 친인척의 절반은 미국, 절반은 캐나다에서 사는 남편은 미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문스쿨을 나와 5개 외국어를 할 줄 알지만, 한국어는 매우 서툴렀다. 한국에 와서 대학을 다니던 남편과 봄희는 삶에 대한 서로의 가치관에 끌렸고, 올해 아들도 태어났다.# 전세 빼서 차린 극단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왜 한국에서 다뤄지는 탈북 여성의 이미지는 거의 똑같을까. 탈북하다 가족을 잃고, 인신매매로 팔려 다니다가, 한국에 와서도 북한 가족 때문에 불법도 저지르고, 늘 눈물 속에 사는 모습일까. 꼭 그렇지 않다는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결심이 서니 극단을 만들고 싶었다. 전세자금을 빼서 극단을 차리고 싶다고 하니 남편이 고맙게도 그렇게 하라고 했다.그렇게 2019년 극단 ‘문화잇수다’가 생겨났다.첫 작품 ‘환영의 선물’은 그가 직접 썼다. 자신의 삶에 대한 독백과 같은 내용이었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여성이 한국인처럼 되기 위해 애쓰다가 어느 날 꿈속에서 아버지를 만난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북한에서 살았던 삶이 꼭 부정돼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다는 내용이다.“닷새 동안 대학로에서 공연했는데, 객석이 모두 찼어요. 그리고 다들 너무 잘 만들었다고 격려해 주셔서 굉장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금전적으로는 적자였지만, 김봄희 개인적으로나 극단 차원에서나 굉장한 흑자라고 생각해요. 하지 않았다면 오늘이 없었을 겁니다.”두 번째 작품인 ‘소라게와 바다’는 신춘문예 당선자를 작가로 초대해 만들었다. 북한에서 온 사촌 형제 두 명이 한국에서 사는 사촌 형제 두 명을 만나 한 달 동안 함께 살면서 서로 알아간다는 이야기였다. 2021년 대학로에서 공연을 진행했다. 그가 직접 쓰고 연출하는 세 번째 작품 ‘벤 다이어그램’은 다음달 무대에 오른다. 벤 다이어그램은 합집합, 교집합, 차집합, 여집합 등의 개념을 쉽게 표현해 주는 그림을 말하는데, 봄희는 이 연극을 통해 문화가 다른 남북한 사람이 어떻게 어울려 살지를 그려내고 싶었다.# 인생의 반전지난 2년 동안은 코로나로 인해 문화예술인들이 큰 타격을 입은 시기였다. 하지만 봄희는 이 기간 극단은 적자를 보지 않았다고 했다. 비결이 무엇이냐 묻자 그는 지난 3년 동안 자신이 했던 일들을 보여주었다. 연극, 뮤지컬, 인형극, 신체극, 토론극, 청소년뮤지컬, 낭독극, 음악극, 마당극 등은 물론이고, 영화, 단편영화와 다큐영화 등 150가지 넘는 작품에 출연했다. 그가 맡은 역할도 연출과 극작, 기획부터 시작해, 배우, 예술감독, 조연출, 행정, 북한말 코치 등 다양했다. 지난해 화제가 된 드라마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에도 단역으로 잠깐 출연했다고 한다.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작품에 관여할 수 있을까 놀라웠는데, 라디오와 연극강사와 심리상담 보조강사도 한다고 했다.그는 갓난 애기가 있는 지금도 아침 7시 전에 일어나 오전 내내 행정 업무를 수행하고 1시에 연습실로 가 4시간 동안 개인 훈련을 하고, 저녁엔 다른 사람들과 공연 연습을 한 뒤 11시에 퇴근한다. 집에 와서는 기획 제안서를 3시까지 쓴다. 제안서를 100군데 넣으면 답이 오는 곳이 1~2곳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만둘 수는 없다고 한다. 애를 맡길 데도 없어 연습실로 늘 아들을 데리고 다닌다.그래도 그는 지금의 삶이 행복하다고 했다.“여기는 노력하면 능력만큼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잖아요. 힘닿는 데까지 가려 하면 앞으로 가게 되는 사회가 아닙니까. 제가 배우로 예쁜 것도 아니고, 또 인맥도 없는 곳에 와서 너무 모자람이 많은데 노력하지 않으면 어떻게 꿈을 이루겠습니까. 다행스럽게 지금까지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는 행운도 있었습니다.”그렇다고 그가 일에만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저의 꿈은 50%가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고, 50%는 좋은 엄마가 되는 것입니다. 요양원 다니면서 일이 다가 아니란 점을 깨달았으니 가정의 중요성도 알게 된 것이죠. 제 아들은 부족한 엄마처럼 좌충우돌 하지 않고 실수를 최대한 적게 하면서 살게 교육하고 싶습니다. 단 아들은 엄마가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알고 크게 할 겁니다.”최근 전 세계에 한류 열풍이 휩쓸면서 대한민국의 예술인으로 산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다는 그는 자신이 처음 겪었던 어려움을 잊지 않았다. ‘문화잇수다’는 3년째 연기를 하고 싶지만 학원에 갈 능력이 되지 못하는 탈북민과 다문화 청소년들을 위해 연기를 접하고 공연까지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원하면 다른 단체와 함께 프로그램 운영도 지원한다. 매년 20명 안팎의 학생을 받아 노래와 춤, 연기를 가르치는 한편 스스로 직접 연극을 만들어 공연하게 한다. 그는 이것을 무일푼 자신을 받아 키워준 스승에게 빚을 갚는 심정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지금까지 김봄희가 체험한 한국은 어떤 사회일까.“여기는 너무나 다양한 삶이 존재하고, 그걸 또 끝없이 작품으로 시도해도 되는 사회, 해도 해도 소재가 고갈될 걱정이 없는 사회라는 점이 제일 좋습니다. 북한에 있었다면 시키는 것만 무한 반복해야 하지만, 여기선 해도 해도 끝이 없을 만큼 하고 싶은 게 많고, 작품을 만들면서 또 좋은 사람들과 만나 삶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통일이 되면 북한에 가서 창의적으로 작품을 만드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걸 가르치고 싶습니다.”그녀가 북한에서 태어나 학교를 마치고, 중국을 경험하고, 한국에 와서 대학을 나와 극단 ‘문화잇수다’ 대표까지 되는 데 33년이 걸렸다. 하지만 북한 주민들 앞에서 탈북하지 말라고 선동해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던 어린 소녀의 인생 역전은 이제부터 시작됐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전투기 150여 대를 동시 출격시킨 대규모 항공 공격 종합훈련이 8일 진행됐다”고 북한이 공개했을 때 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북한에 날 수 있는 전투기가 150대가 된다고? 아무리 빡빡 긁어모아도 어려울 건데…. 만약 진짜로 150대나 떴다면 그중 몇 대가 추락했을지 그게 제일 궁금해.” 이후 북한이 발표한 150여 대는 크게 과장된 것이고, 훈련에 참가한 비행기도 추락하거나 비상착륙했다는 여러 보도가 정보 소식통을 인용해 나왔다. 게다가 “북한이 사진에 같은 전투기를 복사해 여러 번 붙여 넣은 것 같다”는 독일 훔볼트엘스비어연구소 사진 분석 전문가 토르스텐 베크 박사의 분석도 나왔다. 워낙 예전에도 군사훈련 때마다 이런 사진 조작이 많았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북한은 “합동타격훈련은 적 군사기지를 모의(가상)한 섬 목표에 대한 공군 비행대들의 중거리 공중대지상 유도폭탄 및 순항미사일 타격과 각종 근접 습격 및 폭격 비행 임무를 수행했다”고 밝혔지만 막상 공개한 사진을 보면 참담한 북한 공군의 사정이 그대로 담겨 있다. 검은 연기를 풀풀 날리는 고물 비행기들이 제2차 세계대전 때의 공습처럼 섬 상공을 저공비행하며 폭탄을 투하하고 있었다. 북한이 보유한 전투기가 중거리 공대지 미사일과 순항미사일을 탑재할 수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데, 그걸 찍은 사진은 없었다. 북한 매체는 김정은이 훈련 직후 “건군사에 전례 없는 대규모의 항공 공격 종합훈련에서 무비의 용감성과 불굴의 전투 정신을 발휘하며 인민 공군의 위용을 만방에 떨친” 비행사들과 만나 축하 격려를 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고작 출격 한 번 했을 뿐인데, 무비의 용감성과 불굴의 전투 정신을 운운한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고물 전투기들을 놓고 인민 공군의 위용을 만방에 떨쳤다니 할 말을 잃게 된다. 북한군 비행사들은 자신들이 하루살이보다 못한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을 만나면 해줄 말이 참 많지만, 하나만 고르면 1982년 6월의 ‘비까 계곡 공중전’을 설명해 주고 싶다. 역사상 가장 일방적인 공중전으로 알려진 이 공중전에선 이스라엘의 F-15, F-16 전투기와 시리아의 미그-23, 미그-25 전투기들이 격돌해 85 대 0 이라는 스코어를 냈다. 시리아 공군의 최신예 미그기 85대가 격추될 동안 이스라엘 전투기는 단 한 대의 피해도 없었다. 40년 전의 서방 전투기에도 추풍낙엽이던 러시아제 전투기들이 지금 북한 공군의 주력이다. 게다가 북한의 대다수 전투기는 환갑을 넘기거나 앞두고 있어 노후화가 심각하다. 반면 미군을 언급할 필요 없이 한국 공군의 독자적인 능력만 봐도 5세대 F-35 스텔스 전투기 40대와 4세대 전투기 수백 대를 보유하고 있다. 아무리 수천 시간 최정예 훈련을 받은 비행사라도 한 세대 차이의 전투기를 이길 수 없는데, 북한 비행사들은 항공유가 없어 지상에서 입으로 편대 훈련을 하는 수준이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더 암담해진다. 추가로 전투기를 사올 돈도 없지만, 설사 돈이 있어도 사기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세계 2위 군사력이라고 알려진 러시아는 북한보다 훨씬 더 좋은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에서 제공권 장악에 실패했다. 이미 항공기 수백 대를 잃은 러시아가 앞으로 상당 기간 북한에 항공기를 팔 여유는 없을 것이다. 김정은은 정말 고물 전투기들을 많이 띄우면 상대가 겁을 먹을 거라 믿은 것일까. 공군에 대한 상식이 조금만 있는 사람이라면 코웃음만 칠 일이다. 외부와 단절돼 무지 속에 사는 북한 주민에게 힘을 주기 위한 내부용이라면, 진심으로 바라건대 앞으로 이런 훈련 자주 하길 바란다. 전시용 창고에 고이 보관한 항공유가 바닥이 나고 비행사들은 기량을 쌓기 전에 추락해 사라질 것이다. 대규모 훈련을 몇 번만 더 하면 그나마 남아있는 북한 공군 전력의 몇십 %는 줄지 않을까 싶다. 이런 훈련은 한미 연합군에도 더없이 고마운 훈련이다. 북한 비행사들이 백날 훈련을 해봐야 그런 고물 비행기는 별 위협이 되지 못한다. 반면 유사시 북한 항공기가 뜨면 우리는 싫든 좋든 수억∼수십억 원짜리 미사일을 쏴야 한다. 그러니 날 수 있는 것은 적을수록 좋다. 김정은이 보충하기도 어려운 항공기를 셀프로 소모만 시키면 진심으로 박수를 쳐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택배 박스를 분리 배출할 때 비닐테이프와 스티커는 따로 떼어 버려야 한다. 용해되지 않는 비닐이 붙어 있으면 박스의 종이를 재활용하기 어렵다. 그런데 박스에 붙어 있는 테이프와 스티커를 떼어 내는 것은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이 때문에 최근 많은 대기업과 택배회사들이 박스와 함께 버려도 되는 종이테이프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종이테이프는 완전한 친환경이 아니어서 여전히 박스에서 떼서 버려야 한다. 현재 한국에서 박스에 붙여 배출해도 되는 친환경 종이테이프를 생산하는 곳으로는 케이더블유씨(KWC)라는 중소기업이 있다. 여느 종이테이프와 달리 물(알칼리 용액 0.5%)에 완전히 용해되기 때문에 종이테이프를 붙인 채로 배출해도 되도록 해준다. ‘환경보호를 넘어 지구를 보호하는 사업’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친환경 종이테이프는 물론이고 친환경 인테리어 자재, 친환경 식품포장재를 생산한다. KWC의 신영수 대표이사(62)를 지난달 말 충남 천안의 공장에서 만났다. ―친환경 제품 개발에 천착한다고 들었다. “1990년에 설립된 KWC는 음료수병 등에 붙는 슈링크 라벨을 만드는 수축필름 회사다. 국내 식품 대기업인 CJ, 대상, 광동 등에 납품하고 있고, 국제 시장에서도 세계 최고 기술력을 가진 일본, 독일 제품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을 빛낸 이달의 무역인상’ ‘신지식인’ ‘천만불 수출의탑’ 등 다양한 표창도 받았다. 그런데 환갑이 지나 돌아보니 결국 내가 만든 제품은 지구에 쓰레기로 남을 것이란 가책이 들었다. 그래서 인생의 마지막은 돈이 아닌, 지구를 살릴 수 있는 일에 더 매진하고 싶었다.” ―주력 상품을 친환경 종이테이프로 정한 이유는…. “우리나라 테이프 시장이 5000억 원 정도 된다. 대다수가 중국산 비닐테이프다. 돈을 주고 쓰레기를 수입하는 셈이다. 이걸 20%만 친환경 종이테이프로 바꾸어도 1000억 원어치를 덜 수입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지금까지 필름을 생산했기 때문에 이를 응용해서 앞으로도 제일 잘할 수 있는 분야를 택한 것이다.” ―친환경 종이테이프 도입의 어려운 점은…. “많은 분들이 종이테이프가 무조건 친환경이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 수지로 코팅된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것은 완전 해리가 불가능하고 발암물질도 섞여 있다. 그러나 우리 회사 종이테이프는 100% 종이로만 생산됐고, 제품 생산이나 해리 과정에 유기용제를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 회사의 큰 장점이자 자부심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환경인증을 담당한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이 ‘생산 과정에 유기용제를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기준 등을 삭제하려는 개정을 검토하고 있어 걱정이다. 엄격한 환경보호 기준에서 되레 후퇴해서야 되겠나. 유기용제는 또 다른 환경오염의 주범이다.” ―친환경 종이테이프는 상대적으로 더 비싸서 소비에 제한이 있을 듯하다. “비닐테이프보다 2배 정도 비싼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2, 3번만 리사이클링을 한다면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훨씬 더 경제적이다. 박스까지 쉽게 재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 그렇다.” ―친환경 종이테이프 외에는 어떤 제품들이 있나. “우리 회사 종이벽지는 100% 친환경 수성 점착 코팅이라 포름알데히드가 전혀 없어 아토피 피부염이 발생하지 않는다. 식품용 종이박스도 비닐코팅이 돼 있지 않아 건강에 이롭다.” ―앞으로의 계획은…. “앞으로는 친환경 제품 생산을 크게 늘리려고 한다. 최근 주식회사 GPC(대표 신효민)와 공동으로 100억 원을 들여 친환경 제품 생산설비 라인을 새로 구축했다. 환경 보존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는데 이에 맞춰 정부도 친환경 제품 생산 기업에 보다 많은 인센티브를 줘 이런 제품의 생산이 늘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란다.”천안=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