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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 상징 도미노 1000개 바웬사 처음 손대 무너뜨려한국인 3명 분단국대표 참여“마음속 장벽도 무너뜨리자” 젊은 세대들 희망의 목소리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이 되는 9일(현지 시간),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오는데도 브란덴부르크 문 주변은 축제 열기에 휩싸였다. 쇠네펠트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운터 덴 린덴에 내려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향했으나 동쪽(옛 동독지역)에서 서쪽(옛 서독지역)으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이곳은 바로 옛 베를린 장벽이 서 있던 곳. 형형색색의 그림이 그려진 1000개의 스티로폼 도미노 패널이 다시 장벽을 이루고 기자의 갈 길을 막아섰다. 물론 이 모형 장벽은 북쪽으로는 독일 국회의사당, 남쪽으로는 포츠담 광장에서 끝난다. 그러나 평소 같으면 한 걸음이면 건널 수 있는 곳을 몇백 m씩 돌아가야 하니 20년 전 장벽에 가로막힌 독일인들의 신세가 가슴에 와 닿았다. 옛 동독인들은 한 걸음이면 건널 수 있는 이곳을 헝가리로, 체코로, 폴란드로 수백 수천 km씩 돌고 돌아 탈출을 시도했다. 이날 포츠담 광장에서 국회의사당까지 1.5km에 걸친 스티로폼 모형 장벽이 무너지는 데는 2분이 조금 넘게 걸릴 뿐이었지만 실제 ‘철의 장벽(Iron Curtain)’이 무너지는 데는 약 40년이 걸렸다. 교사를 하다 은퇴했다는 지빌레 헤르타 씨(60)는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과하려는 사람은 모두 같은 불편을 겪고 있지만 오늘은 독일인에게는 더 없이 행복한 날”이라며 감격해했다. 그는 “처음 통독이 되고 나서는 동서독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다”며 “교육 분야만 하더라도 서독은 개인주의적으로 가르치는데 동독은 집단주의적으로 가르쳤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여기 도미노에 그림을 그린 많은 어린 학생의 작품을 보면서 기성세대가 아닌 새로운 세대의 마음속에서는 동서독의 차이가 서서히 사라져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동서독 간의 물리적 장벽은 무너졌지만 아직도 심리적 장벽은 무너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통일둥이’들이 20세를 맞는 지금 그들은 심리적 장벽도 젊은 세대들로부터 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 슈테파니라고만 밝힌 여대생(22)은 두 살 때 베를린 장벽 붕괴를 맞았다. 그에게 동독 시절의 추억은 없다. 베를린 장벽 붕괴 후에는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옮겨와 살았고 서독의 또래들과 같이 성장했다. 그에게 동서독 출신의 차이를 느끼느냐고 물었더니 “많은 친구가 서베를린 출신이지만 말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별로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서독 출신인 슈테판 로케 씨(27)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일곱 살이었는데 특별한 기억은 없다”며 “단지 아버지가 독일 축구국가대표팀이 훨씬 강해질 것이라고 말한 것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자유의 축제’라고 불린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높이 2.3m의 도미노 패널 1000개를 넘어뜨리는 행사. 첫 도미노를 밀어뜨린 영광의 주인공은 자유노조 운동을 이끌며 동유럽 공산주의 붕괴의 물꼬를 튼 레흐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이었다. 도미노 패널은 독일의 어린 학생들과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이 맡아 만들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를 배경으로 한 소설 ‘오래된 정원’을 쓴 소설가 황석영 씨, 독일에서 유학한 조각가 안규철 씨와 화가 서용선 씨 등 3명도 분단의 상징국가 대표로 참여했다. 이날 행사에 황 씨는 감기로 참석하지 못해 안 씨와 서 씨 두 사람만 참석했다. 독일인은 이날 행사에서 냉전으로 인한 최후의 분단국가 한국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이 무너뜨린 도미노 패널은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전시된 안 씨의 패널 앞에서 한 번 멈춰 섰는데 그 자리에서 독일 공영방송 ZDF가 안 씨를 인터뷰했다. 안 씨가 선정된 것은 물론 그가 분단국가인 한국의 예술가라는 이유에서다. 안 씨는 “통독 전에 슈투트가르트에서 유학하면서 서베를린에 와본 적이 있다”며 “그때는 장벽 앞에서 세계의 끝에 와 있다는 서늘한 느낌을 가졌는데 지금 이런 뜨거운 축제분위기에서 이곳을 찾으니 감회가 특별하다”고 말했다. 이번 베를린 장벽 붕괴 축제는 유럽연합(EU)의 정치적 통합을 강화한 리스본조약 발효를 눈앞에 두고 EU의 쌍두마차인 독일과 프랑스가 각별한 우의를 과시하며 열렸다.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는 ‘프랑스가 함께 축하한다(Frankreich feiert mit)’는 커다란 플래카드가 내걸려 눈길을 끌었다. 또 프랑스 파리의 콩코드 광장에서는 베를린 ‘자유의 축제’와 같은 시간 축하공연이 펼쳐졌다. 유럽의 저명한 바이올리니스트 27명이 출연해 프랑수아 피용 프랑스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축하 연주를 하며 통독의 기쁨을 같이 나눴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사르코지 대통령은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바웬사 전 대통령과 함께 축제의 자리를 지켰다. 20년 전 브란덴부르크 문은 기관총과 철조망에 둘러싸여 외롭게 서 있었다. 하지만 이날 저녁엔 10만여 명의 군중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상전벽해한 브란덴브루크 문을 바라보는 기자는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 착잡한 심정이 들었다. 베를린=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독일 통일이 공산당 압제에 도전해 시위를 일으킨, 평범하지만 용감한 동독 주민들에 의해 시작된 것처럼 한반도 통일도 북한의 억압받는 주민들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의 외교안보보좌관을 지낸 호르스트 텔치크 씨는 8일 베를린장벽 붕괴 20주년을 앞두고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텔치크 씨는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로부터 1990년 10월 3일 통일까지 긴박했던 329일을 다룬 ‘329일-내부에서 본 통일’(1996년)이란 책을 썼다. 이 책은 당시 내무장관으로 통일 협상을 이끈 볼프강 쇼이블레 현 독일 재무장관의 ‘조약-나는 통일을 어떻게 협상했나’(1991년)와 함께 독일 통일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필독서로 꼽힌다. 본보는 지난달 17일 쇼이블레 장관과의 인터뷰를 게재한 데 이어 독일 뮌헨에 거주하고 있는 텔치크 씨를 인터뷰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없었다면 통일이 가능했다고 생각하는가. “그는 독일 통일의 열쇠를 쥐고 있었다. 1989년만 해도 그는 독일 통일에 찬성하지 않았다. 독일 통일은 50년이나 100년 후에나 가능한 일이라고 수차례 언급했다. 심지어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뒤에도 콜 총리가 독일 의회 연설을 통해 발표한 10개조 통일안을 ‘일방적인 명령’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결국 몇 주 후인 1990년 2월 10일 모스크바에서 콜 총리를 만나 독일 통일에 동의했다. 이미 동독 주민의 과반수가 통일을 원하고 있고 수십만 명이 서독으로 달아났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말이다. 그는 단지 현실을 인정한 것이었고 더는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실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동독에 배치된 35만 명의 소련군을 동원하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됐다면 피의 대학살이 일어났을 것임에 틀림없다.” ―독일이 당시 운이 좋았던 것인가. “정말로 운이 좋았다. 통일은 아주 갑자기 일어났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1차적으로 고르바초프가 자기 나라에서 시작한 개혁 정책과 1989년 폴란드와 헝가리의 자유화에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 이런 변화의 물결이 결국 동독으로 흘러들어갔고 1989년 10월 동독 전역에서 군중시위가 일어났다. 마찬가지로 아무도 북한에서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 정치국원이었던 귄터 샤보스키가 11월 9일 장벽이 무너진 날 기자회견에서 동독이 국경을 즉각 개방한다고 말한 것은 역사적 실수였나. “SED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분명 큰 실수를 저질렀다. 왜냐하면 새로운 여행규칙은 사실 그 다음 날 발표될 예정이었는데 그 내용인즉 동독 주민은 우선 신청서를 제출하고 그 다음에 해외로 나가도록 허가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샤보스키 발표 때문에 동독 주민은 즉각 국경검문소로 몰려가 국경을 통과해버렸다. 동독 주민들이 주도권을 쥐고 성공으로 이끌었다.” ―장벽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유혈사태가 시작됐을 개연성이 아주 높다. 국경 경비대원 중 한 명이 총을 발사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유혈 대학살로 이어졌을 것이다. 다행히 국경경비대는 아주 이성적으로 행동했고 바리케이드를 치웠다.” ―베를린장벽 붕괴로부터 통일까지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왜 통일을 서둘렀나. “콜 총리가 1989년 11월 21일 10개조 통일안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통일까지 5년에서 10년이 걸릴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였다. 그러나 동독 주민은 조속한 통일을 원하고 이를 압박했다. 1989년 주민 10만 명 이상이 서독으로 넘어갔다. 여기에 4만 명이 동독을 떠나겠다고 공식 신청서를 냈다. 1990년 초에도 매일 점점 더 많은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떠났다. 이런 식의 탈출은 동독으로서도 서독으로서도 지탱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동독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재정적으로 파산상태였다. 단지 콜 서독 정부만이 동독을 지원할 수 있는 상황에 있었고 결국 그 책임을 떠맡기로 한 것이다.” ―한국의 많은 지식인은 독일 통일이 일방적 흡수통일이라고 비판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시위 도중 ‘우리는 한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라고 외치면서 통일을 먼저 요구한 것은 동독 주민이었다. 그들은 수만 명씩 서독으로 넘어가면서 이미 발로 투표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대안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동독은 파산상태였다. 누가 동독의 경제를 안정시키고, 그들의 빚을 갚아주고, 산업과 인프라를 현대화시켜 줄 수 있는지는 동독인들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장벽 붕괴 20년 후 얼마나 많은 동독인이 통일에 만족한다고 생각하는가. “여론조사에 따르면 3분의 2가 통독에 만족하고 3분의 1이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동독에는 200만 명 이상의 공산당원이 아직 남아있다. 그들은 모든 특권을 잃었다. 그들이 통일에 만족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파리=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호르스트 텔치크는… 1940년 체코 슈테텐 출생 1945년 독일 바이에른 정착 1962∼1967년 베를린자유대에서 정치학 전공 1968∼1979년 베를린자유대 오토쥐르연구소에서 정치학 강의 1983∼1990년 헬무트 콜 총리 외교안보보좌관 1991∼1993년 베텔스만재단 총재 1993∼2000년 BMW 이사 2003∼2006년 보잉 독일법인 사장 1999∼2008년 뮌헨국제안보정책회의 의장 2009년 3∼9월 한독미디어대학원대 총장 현재 미국 뉴욕 외교관계위원회 국제자문위원}
독일 통일 이후 옛 동독 지역 재건을 위해 약 1조3000억 유로(약 2260조 원)가 투입된 것으로 집계됐다고 독일 주간지 벨트암존타크가 7일 독일 할레 경제연구소(IWH)의 보고서를 인용해 보도했다. 울리히 블룸 IWH 소장은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놀라운 것은 총액 자체가 아니라 매년 그 금액이 줄지 않고 오히려 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엘베 강이 범람한 2003년을 예외로 하더라도 특히 1999년부터 2005년까지 많이 늘었다”고 말했다. 그러난 블룸 소장은 “이 비용은 단순히 통일 비용으로 계산해 서독인이 동독인의 복지를 떠맡고 있다는 식으로 해석해선 안 된다”며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의 경우 많은 전문인력이 서유럽 국가로 이주해 일하기 때문에 낭비가 되지만 동독인은 서독에서 일하면서 독일 내에서 한해 약 60억∼70억 유로의 가치를 창출한다”고 덧붙였다.파리=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대북특사인 자크 랑 하원의원이 9일 북한을 방문한다고 AP통신이 4일 전했다. 랑 특사는 방북기간에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동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랑 특사는 이번 방북을 통해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북한 핵문제의 해결 방안을 중점적으로 탐색할 것으로 보인다. 또 북핵 문제의 진전을 전제로 유럽연합(EU)이 대북 경제 지원에 나서는 방안도 강구할 것으로 전해졌다. 파리=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바츨라프 클라우스 체코 대통령이 유럽의 정치 통합을 이끌 리스본 조약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리스본 조약은 다음 달 1일 발효되며 유럽 통합은 급물살을 타게 됐다. 클라우스 대통령의 서명은 체코 헌법재판소가 3일 유럽연합(EU) 리스본 조약은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린 뒤 몇 시간 뒤에 이뤄졌다.체코는 EU 27개 회원국 중 비준 절차를 마무리 짓지 않은 마지막 나라다. 조약 서명을 거부해 온 클라우스 대통령은 “헌재에서 합헌 결정이 내려지면 더는 비준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클라우스 대통령은 “비록 나 자신은 동의하지 않지만 헌재의 결정을 존중한다”며 조약에 서명했다. 체코 의회는 이미 오래전에 조약을 비준했지만 지난달 상원의원 17명이 위헌심판을 청구하고 클라우스 대통령이 “헌재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는 서명하지 않을 것”이라는 태도를 고수해 비준 절차가 마무리되지 못했다.EU 정상들은 체코의 헌재 결정에 앞서 지난달 29일 체코를 위한 타협안을 마련해 합헌 결정을 유도했다. 리스본 조약은 기본권 헌장을 통해 EU 회원국 국민의 재산권을 보호하고 있는데 타협안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체코에서 추방된 독일인 후손들이 토지 반환을 요구할 수 없도록 체코에 예외적으로 기본권 헌장 적용 배제를 인정한 것. 2차 대전 당시 독일 나치 정부는 체코 슈체친에 사는 독일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체코를 침공했고 체코는 전쟁이 끝난 뒤 보복조치로 이 지역 독일인을 추방하고 재산을 압류했다. 클라우스 대통령은 리스본 조약의 발효로 쫓겨난 약 200만 독일인의 재산반환 소송이 촉발될 것을 우려해왔다. 리스본 조약은 소위 ‘EU 대통령’으로 불리는 2년 6개월 임기(1회 연임 가능)의 이사회 상임의장과 외교장관직을 신설하는 등 EU의 정치적 통합을 강화한 것이 핵심 내용이다.EU 순회의장국인 스웨덴은 체코 대통령이 리스본 조약에 서명함에 따라 EU 초대 대통령 선출에 대한 공식 논의를 시작할 예정이다. 파리=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고르비 “처음엔 독일통일 반대 입장… 콜총리에 미안”콜 “고르비는 핵심 파트너… 기분나쁠땐 부시에 전화”부시 “역사는 탄압받던 사람들 가슴속에서 이뤄진것”20년 전 베를린 장벽 붕괴를 이끌었던 주역 3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79),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85),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78)은 베를린 장벽 붕괴 기념일을 약 일주일 앞둔 지난달 31일 베를린에서 만나 당시 상황을 회고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행사를 가졌다. ‘통일 재상(宰相)’ 콜 전 총리는 이날 미클로시 네메트 전 헝가리 총리,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 전 폴란드 총리 등 18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옛 베를린 장벽 터 바로 동쪽에 위치한 프리드리히슈타트팔라스트 극장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부시 전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독일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였다”고 회고했다. 지난해 2월 허리 수술 이후 휠체어에 의존하고 있고 뇌중풍(뇌졸중)으로 인한 안면마비로 발음도 어눌해진 콜 전 총리는 “병 때문에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했다”며 “당신들이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부시 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면 금방 기분이 좋아질 것”이라고 말해 청중의 폭소를 자아냈다. 역시 2년 전 허리 수술 이후 어렵게 비행기 여행을 한 부시 전 대통령은 “든든한 바위와 같은 콜 전 총리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 중의 한 명”이라고 칭찬한 뒤 “그러나 우리가 기념하기 위해 만난 이 역사적 사건은 본이나 모스크바, 워싱턴이 아니라 오랫동안 천부인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이뤄졌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와 1996년 작고한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을 거론한 뒤 “대처, 미테랑 그리고 나는 당시 두 개의 독일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며 “이에 대해 콜 총리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콜 총리와는 처음에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며 후일담을 전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최근 프랑스는 영국이 독일 통일에 적대적이었고 프랑스도 독일 통일을 불안하게 여겼다는 내용의 외교 문서를 공개한 바 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9일에는 ‘자유의 페스티벌’이란 행사가 열린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이 자리에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과 레흐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 등을 초청했다. 미국에서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대신해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다.파리=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최근 프랑스 독일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한국 연구와 한국어 배우기 등 ‘한국 바람’이 크게 일고 있다. 대학에서 한국어를 배우거나 나아가 한국의 정치 경제와 역사를 공부하려는 학생이 급증하고 있는 것. 유럽에서 삼성 LG 현대 기아 등 한국 기업의 이미지가 높아지고 젊은이들이 한국 대중문화에 친숙해지면서 일어나는 새로운 현상이다. 프랑스 리옹3대학의 이진명 한국학 교수는 30일 “지난해에는 50명 한 반으로 한국어 강의를 꾸렸으나 올해는 70명으로 늘어나 35명씩 두 반으로 진행한다”고 말했다. 파리7대학의 한국학 강의도 맡고 있는 이 교수는 “지난해 54명이던 파리7대학 한국학과 등록생은 올해 70명으로 늘었다”며 “내가 강의하는 한국근현대사도 올해부터는 30∼40명이 들어가는 일반 강의실이 비좁아 대강당으로 옮겨서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에 따르면 파리7대학의 경우 1990∼2009년 중국어과 학생 수는 약 2.5배, 일본어과는 2배 증가한 데 비해 한국어과는 4배가량 증가했다. 특히 최근 5년 새 중국어나 일본어과의 학생 수는 정체를 보이거나 줄어든 데 비해 한국어과는 크게 늘었다. 독일 베를린자유대의 이은정 한국학 교수는 “지난해 한국학과 지원자가 32명에 불과했으나 올해는 지원자가 68명으로 2배가량 늘었다”며 “정원(28명)을 초과한 40명을 어쩔 수 없이 탈락시켰다”고 했다. 이 교수는 또 “한국정치입문, 한국경제입문, 한국역사입문 등의 과목은 50∼80명이 몰려 강의실을 가득 메우고 있다”고 덧붙였다. 영국 셰필드대 동아시아연구소 제임스 그레이슨 석좌교수는 “셰필드대와 런던대 등에서 한국학 학위를 원하는 학생이 꾸준히 늘고 있다”며 “지난해 셰필드대의 경우 270명이 한국학 과목을 수강했다”고 말했다. 한국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동기는 매우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한국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실제적인 동기가 많았다. 이진명 교수가 파리7대학 한국어학 학생 60여 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약 80%가 한국 기업에서 일하거나 양국 간 문화 교류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고 응답했다. 학생들은 한국이 강한 산업 분야로 전자 자동차 조선 분야를 거론했고 삼성 LG 현대 기아 등 한국의 대표 기업 브랜드를 잘 알고 있었다. 학생들은 영화 가요 등 한국 대중문화에도 친숙했다. ‘올드 보이’나 김기덕 감독 등 국제적으로 유명한 영화나 영화감독도 잘 알고 있었지만 ‘엽기적인 그녀’ ‘미녀는 괴로워’ ‘달콤한 인생’ 등 세계 영화제와 별 관련이 없는 영화나 ‘풀하우스’ 등 TV 드라마가 더 친숙하다고 꼽는 학생도 많았다. 또 비, 빅뱅, 소녀시대, 이효리, 원더걸스 등 가수들에게 관심이 많은 학생도 적지 않았다.파리=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지난해 한국 기업 STX가 인수한 STX유럽이 28일 사상 최대 크루즈선 ‘대양의 오아시스(The Oasis of the Seas·이하 오아시스)’호를 건조해 크루즈 해운업체인 ‘로열캐리비언크루즈라인(RCCL)’에 인도했다.》STX유럽은 이날 핀란드 투르쿠 조선소에서 오아시스 호의 건조를 마무리 짓고 강덕수 STX그룹 회장, 리처드 페인 RCCL 회장, 신상호 STX유럽 대표, 마르틴 란트만 STX핀란드 사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도식을 열었다.이 배는 최대 6360명의 승객과 2100명의 승무원을 태울 수 있는 규모. 약 8500명이 함께 사는 작은 도시가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옆에서 보면 축구장 3개 반을 이어 붙여놓은 것과 같은 361m 길이에 객실이 아파트 16층 높이(72m)로 차곡차곡 쌓여있다.이 배는 기술적으로도 ‘오픈 카 형태의 크루즈선’이라고 할 만한 혁신적인 방식을 도입했다. 기존 크루즈선과는 달리 선박 내부공간을 비워 배 한가운데에 100m 길이의 ‘센트럴파크’라는 거대 공원을 조성하고 배 테두리 쪽에 선실을 배치한 형태. 2700여 개의 객실 중 75%에 베란다가 있어 조망이 좋다. 센트럴파크에는 이날 인도된 배가 30일 투르쿠를 떠나 목적지인 미국에 닿는 대로 2200여 그루의 열대 나무를 바로 현장에서 옮겨 심을 예정이다. 이 배에서는 바다가 보이는 객실보다 공원을 바라보는 객실 요금이 더 높게 책정된다. 이와 함께 배 위에는 분수 쇼 등 각종 공연이 펼쳐지는 수영장 형태의 ‘아쿠아 시어터’, 스케이팅을 즐길 수 있는 아이스링크, 1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극장, 3100명이 동시에 식사할 수 있는 대형 식당 등도 갖추고 있다. 승객들이 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내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이미 12월부터 미국 플로리다 포트로더데일을 출항해 카리브 해를 유람하는 첫 항해의 예약은 모두 매진됐다. 신상호 대표는 이날 인도식에서 “오아시스호는 STX가 보유한 세계 최고 건조 기술력 및 디자인이 집약된 선박”으로 “STX유럽이 크루즈선 건조 분야에서 차지하고 있는 세계 1위의 확고한 입지를 다시 한 번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고 자평했다.지난해 11월 ‘아커야즈’에서 이름을 바꿔 STX그룹에 편입된 STX유럽은 현재 건조됐거나 건조 중인 크루즈선 중 크기 기준으로 1위부터 14위에 해당하는 선박들을 싹쓸이하는 등 대형 유람선 분야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자랑하고 있다. 이탈리아 핀칸티에리, 독일 마이어베르프트와 함께 세계 3대 크루즈선 건조사로 꼽히는 STX유럽은 모두 16개의 조선소 중 핀란드와 프랑스 내 5개 조선소에서 크루즈선을 생산하고 있으며 세계시장에서 수주 잔량 기준으로 30% 이상의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오아시스호와 똑같은 크기의 ‘얼루어 오브 더 시스’호도 현재 투르쿠 조선소에서 50%의 공정을 보이고 있으며 내년 11월 인도될 예정이다.한편 크루즈산업은 세계적인 인구 고령화와 이에 따른 여행 수요의 증가로 발전 가능성이 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유럽의 경우 크루즈 관련 산업이 직접적으로 창출한 경제규모가 2005년 기준으로 107억 달러였으며 2010년까지 15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투르쿠(핀란드)=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독일 역사상 첫 아시아계 장관이 탄생했다. 독일 기민당(CDU)-기사당(CSU) 연합과 자민당(FDP)은 24일 연정구성을 위한 마라톤 협상을 끝냈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등 현지 언론은 협상결과 기민당 당수 앙겔라 메르켈과 자민당 당수 기도 베스터벨레를 각각 총리와 외교장관으로 하는 새로운 내각이 구성됐으며 자민당 몫이 된 보건장관에 베트남계 정치인으로 니더작센 주 자민당 당수인 필리프 뢰슬러 씨(36·사진)가 내정됐다고 보도했다. 베트남에서 태어나 아홉 달 만에 독일로 입양된 뢰슬러 내정자는 독일의 첫 아시아계 장관이자 최연소 각료가 된다. 의사 출신인 그는 새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할 공공의료보험 개혁작업을 이끌 예정이다. 뢰슬러 내정자는 1992년 하노버 ‘루터슐레’ 김나지움(고등학교)에서 대학입학자격시험(아비투어)을 획득한 뒤 연방군에 들어가 군의관 후보생이 됐다. 이후 하노버 의료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함부르크 군병원에서 전문의 과정을 밟아 군의관으로 일하다가 지난해 16년간의 의무복역기간이 끝난 뒤 연방군을 떠났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자민당 청년당원으로 입당했으며 2000∼2004년 니더작센 주 자민당 사무총장을 지낸 데 이어 2006년부터 니더작센 주 자민당 당수를 맡아 올 2월에는 니더작센 주 경제·노동·교통장관이 됐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기도 한 그는 독일가톨릭중앙위원회의 일원이다.파리=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