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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19일 난중일기와 새마을운동 기록물이 새로 등재된 세계기록유산에는 인류 역사를 아우르는 다양한 기록물이 포함돼 있다. 제11차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IAC)는 54개국에서 신청한 유산 84건을 심사해 54건의 등재를 결정했다. 독일과 네덜란드는 카를 마르크스의 메모가 달린 ‘자본론’ 초판(사진),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선언’ 친필 초안을 함께 신청해 등재 목록에 올렸다. 유네스코는 홈페이지에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19세기 저작물로 19, 20세기 전 지구적 사회변혁을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볼리비아와 쿠바가 공동 신청한 ‘체 게바라의 삶과 작품들’도 등재됐다. 록 스타에 버금가는 신드롬을 일으켰던 혁명의 아이콘이 직접 쓴 글과 그의 일생과 관련된 기록물 1000여 점이 포함됐다. 포르투갈 탐험가 바스코 다가마가 1497∼99년 처음으로 인도를 항해하며 남긴 기록물,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유명한 아르메니아 작곡가 아람 하차투리안의 작곡 노트, 1967년 시작돼 세계 최대의 음악 축제로 자리 잡은 스위스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 관련 자료도 기록유산으로 결정됐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2개씩 신청했던 중국과 일본도 모두 등재에 성공했다. 중국은 원(元) 왕조의 티베트 기록물과 중국 이민자 서신 및 송금 기록물을, 일본은 미치나가 일가의 일기 원본과 게이조 시대 유럽 사절단 기록물(스페인과 공동 신청)을 목록에 올렸다. 세계기록유산은 아시아에선 한국이 11건으로 가장 많이 등재됐고, 중국 일본은 각각 9건, 3건으로 늘었다. 세계적으론 독일이 모두 17건으로 가장 많이 등재하고 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불세출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의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결정됐다. 다소 전망이 불투명했던 ‘새마을운동 기록물’도 심사를 통과해 한국은 신청 목록이 모두 등재되는 경사를 맞았다. 유네스코 정보사회국 산하 국제자문위원회(IAC)는 18일 오후 광주에서 열린 제11차 심사 회의를 거쳐 난중일기와 새마을운동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권고했다. 지금까지 IAC가 권고한 유산은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모두 유네스코 사무총장의 승인을 거쳐 등재 목록에 오르게 되고 세계기록유산은 유네스코 홈페이지에 게재하는 것으로 발표를 대신한다. 국보 제76호인 난중일기는 임진왜란(1592∼1598년) 당시 이순신 장군이 전장에서 직접 쓴 7책으로 구성된 진중일기다. 전쟁 중 지휘관이 직접 쓴 기록물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데다 문장이 탁월하고 시대상도 잘 반영돼 신청 이전부터 등재가 확실시됐다. 게다가 난중일기는 동북아의 운명을 휘저어 놓은 임진왜란을 다뤄 사료적 가치도 높고, 사가(私家)에서 14세대(415년)를 이어 보관해 왔다는 특별함도 지녔다. 박영근 문화재청 문화재활용국장은 “당시 동아시아 역사적 상황과 구도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기록물이란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새마을운동 기록물은 1970∼1979년 새마을운동과 관련된 사업공문과 운동교재, 새마을지도자 편지 및 영상자료 등을 일컫는다. 새마을운동보존회에서 2만2000여 건의 자료를 수집해 보존하고 있다. 앞서 이달 초 난중일기는 예비 등재 판정을 받은 반면 새마을운동은 해외 사례 비교 자료를 보충해 달라는 보완 판정이 나와 일각에선 등재가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은 개발도상국의 정부와 국민이 협력해 빈곤을 퇴치한 성공모델로 제3세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는 독창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김귀배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문화커뮤니케이션팀장은 “세계기록유산은 보존은 물론이고 이를 활용해 세계에 문화를 전파하는 데 큰 의미를 둔다”고 말했다. 난중일기와 새마을운동 기록물이 등재되면서 한국은 모두 11개의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1997년 ‘훈민정음 해례본’과 ‘조선왕조실록’을 시작으로 ‘승정원일기’ ‘직지심체요절’(2001년),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경판’과 ‘조선왕조의궤’(2007년), ‘동의보감’(2009년), ‘일성록’과 ‘5·18민주화운동 기록물’(2011년)이 앞서 등재됐다. 이로써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기록유산을 보유한 국가’라는 상징적 지위도 유지하게 됐다. 이날 회의 이전까지 중국과 일본은 각각 7건과 1건의 기록유산을 등재했다. 겹경사를 맞은 한국은 연말에 또 다른 좋은 소식도 기다리고 있다.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를 신청한 ‘김치와 김장문화’가 12월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리는 제8차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에서 심사를 받는다. 세계문화유산으로는 남한산성이 올해 1월 등재를 신청해 내년 6월경 심사를 받게 되며, 백제문화유적지구(문화유산)와 서남해안 갯벌(자연유산)도 내년 등재 신청을 준비하고 있다.정양환 기자·광주=이형주 기자 ray@donga.com}
근대 이전 한국과 중국, 일본 등지에서 사랑받았던 목판화는 한때 갖은 ‘재활용’ 도구로 전락했다. 20세기 초반 중국에선 목판을 뜯어 닭장을 만들었고, 일본은 나무 화로나 분첩을 만들었다. 국내에서도 비가 와 진흙탕이 생기면 목판을 깔거나 불쏘시개로 썼다. 강원 원주시 치악산 명주사 부설 고판화박물관(관장 한선학)은 이렇게 천대받던 목판의 가치를 일찍이 알아보고 이를 꾸준히 모아온 곳이다. 박물관은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수집한 한국 중국 일본 티베트 몽골 작품 4000여 점을 보유하고 있다. 어렵사리 한길을 걸어온 고판화박물관이 올해로 개관 1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해 그간 수집한 작품 가운데 가히 명품이라 부를 만한 작품을 엄선해 23일부터 ‘아시아 고판화 명품 30선’을 개최한다. 한국 고판화 가운데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인 조선시대 ‘오륜행실도’가 눈에 띈다.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4각 일본 화로로 만들어 훼손됐으나 당시 오륜행실도의 원형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유물이다. 강원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과 조선 선비들이 시나 편지를 쓰기 위해 만든 시전지(詩箋紙) 목판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중국 소장품으로는 중국 학자들이 국보급으로 평가하는 ‘불정심다라니경(佛頂心陀羅尼經)’을 비롯해 명나라 고씨화보나 청나라 개자원(芥子園) 등 당대에 명성을 떨쳤던 판화 화보 등을 만날 수 있다. 일본은 호코사이 북악 36경을 비롯한 우키요에(浮世繪) 회화가 소개된다. 우키요에란 일본 무로마치부터 에도시대 사이에 서민생활을 그린 풍속화로 대부분 목판화로 제작됐다. 박물관은 8월 30일까지 열리는 특별전 기간에 문화 체험 템플스테이와 결합한 숲속판화학교도 개최한다. 문의 033-761-7885, 홈페이지(www.gopanhwa.or.kr) 참조.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올해로 19회를 맞은 서울국제도서전이 19일부터 닷새 동안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다. 국내 최대 책 전시회인 이번 도서전은 ‘책, 사람 그리고 미래’를 주제로 총 20개국 500여 개 출판사가 참여해 다양한 이벤트를 선보인다. 도서전을 주최하는 대한출판문화협회는 △한국 출판의 세계화 △출판 산업의 경쟁력 강화 △독서하는 사회 분위기 정착 △국민 문화 향유의 기회 확대라는 목표 아래 다채로운 문화행사와 특별전을 준비했다. 올해 도서전 주빈국은 인도. 2008년부터 주빈국 행사를 시작한 도서전은 중국(2008년)과 일본(2009년) 프랑스(2010년) 사우디아라비아(2012년) 등을 초대해 세미나 및 관련 도서 전시를 진행했다. 주빈국과는 별개로 한국-캐나다 외교수립 50주년을 맞아 캐나다를 초청해 작가 초빙 프로그램과 세미나, 현지도서 판매 등도 마련했다. 특별 전시로는 ‘조선 활자 책 특별전’을 눈여겨볼 만하다. 2011년 ‘우리의 찬란한 기록문화 유산’, 지난해 ‘잃어버린 한글 활자를 찾아서’에 이은 옛 활자 책 관련 전시다. 올해는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등 옛 활자 책 100여 종을 선보인다. 또 소설 ‘무녀’ ‘등신불’의 작가 김동리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그의 문학 세계를 조명하는 전시도 준비하고 있다. 도서전 동안 매일 열리는 ‘저자와의 대화’ 행사에는 첫날 올해 도서전 홍보대사를 맡은 박범신 소설가와 ‘백치들’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을 쓴 김숨 작가가 참가한다. 이 밖에 함민복 원재훈(20일) 신달자 정지아(21일) 정이현 김혜나 이원복 정유정 조경란(22일) 등 많은 저자가 초청됐다. ‘인문학 아카데미’에서는 유시민 전 국회의원과 광고인 박웅현 씨, 한의사 고은광순 씨 등이 강의를 펼친다. 출판에 관심 있는 일반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부대행사도 마련된다. ‘북 멘토 프로그램’에서는 이정록 시인과 강주헌 번역가, 오진경 북디자이너가 각 분야에 대한 현장 이야기를 들려준다. 초등학생, 중학생이 자신의 책을 만들어보는 체험 코너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www.sibf.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슈퍼맨? 신선하진 않지. 왠지 조상님 뵙는 기분?” 맞다. 슈퍼맨은 식상하다. 한창완 세종대 교수가 쓴 ‘슈퍼 히어로’(커뮤니케이션북스)에 따르면 슈퍼맨은 1932년 구상돼 6년 뒤 공식적으로 세상에 선보였다. 일제강점기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투척한 해에 태어난 셈이다. 하지만 슈퍼맨은 돌아왔다. 13일 영화 ‘맨 오브 스틸’이 개봉하며 81세 고령에도 여전히 망토 두른 채(‘빤스’는 벗었다!) 젊디젊은 ‘청춘’으로 복귀했다.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이 노병은 뭔 화장품을 쓰기에 이다지도 탱탱할까. DC코믹스의 슈퍼맨 그래픽노블(만화)을 모두 출간한 시공사와 인터넷서점 예스24의 도움을 받아 다양한 슈퍼맨 스토리를 살펴봤다.○ 슈퍼맨의 세계에 빠져들다 일단 영화제작사가 이번 영화의 모티브를 얻었노라 밝힌 그래픽노블부터 살펴보자. ‘슈퍼맨 포 투모로우’와 ‘올스타 슈퍼맨’이다. ‘슈퍼맨 포 투모로우’는 슈퍼맨이 행방불명된 ‘아내’ 로이스 레인을 찾아다니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사실 이 책은 슈퍼맨 그래픽노블에 익숙지 않은 이들에겐 난해할 수 있다. 악에 대항하는 초인 연합체 ‘저스티스 리그 오브 아메리카’나 ‘팬텀 존’ 등에 대한 사전 정보가 필요하다. 하지만 슈퍼맨을 둘러싼 다양한 역학관계를 두루 살펴보기에 좋다. 특히 영화의 주적 조드 장군이 등장한다. ‘올스타 슈퍼맨’은 팬들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얘기를 다룬다. 슈퍼맨이 죽기 때문이다. 우주 방사선에 심하게 노출돼 세포의 사멸이 시작된다. ‘강철 사나이’가 인류와 똑같은 숙명을 맞이하다니…. 하지만 만화는 이 충격적 소재를 매우 담담하게 다뤄 더 매력적이다. 초인은 과연 죽음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영화와 직접 연관은 없지만 ‘슈퍼맨 레드 선’과 ‘슈퍼맨 시크릿 아이덴티티’도 인상적이다. ‘레드 선’은 슈퍼맨을 태운 우주선이 미국이 아니라 소련에 떨어져 공산당의 아들로 자란다는 전복적인 설정을 내세웠다. 가슴에 소련 깃발을 달고 스탈린 옆에서 공산주의 수호자로 활약하는 슈퍼맨을 만날 수 있다. ‘시크릿 아이덴티티’는 슈퍼맨과 같은 이름을 가진 청년이 우연히 초인이 되며 겪는 일들을 다뤘다. 외계인이 아닌 평범한 인간이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되면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슈퍼맨, 철학-물리학으로 진화하다 슈퍼맨을 다룬 책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숫자만 보자면 배트맨한테 인기가 밀리는 형국이다. 그나마 있는 책도 ‘무엇이든 해내는 슈퍼맨 실천법 30’(김영사) ‘회사를 뛰어넘는 슈퍼맨들의 비밀’(에세이퍼블리싱)처럼 슈퍼맨을 내세운 자기계발서적이 많다. 한창완 교수의 ‘슈퍼 히어로’는 미국 대중문화에 나오는 초인 10명을 뽑아 정리해 입문서로 적당하다. 너무 간략해 아쉽다면, ‘슈퍼 히어로 미국을 말하다’(잠)를 읽어 보길 권한다. 초인을 통해 다양한 철학적 사유를 제공한다. 특히 슈퍼맨이 자신의 능력을 타인을 위해 쓰게 된 원인을 ‘사회적 관계 형성’으로 풀어 낸다. 외계인이라는 타자 신분인 그가 지구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역할’을 맡아야 했었다는 해석이다. ‘슈퍼맨, 그게 과학적으로 말이 되니?’(지식나이테)는 미국 미네소타대 물리학 교수인 저자가 슈퍼맨을 통해 물리학을 가르치는 발상이 신선하다. 슈퍼맨 만화 제1호에 보면 슈퍼맨이 한 번 점프해 200m를 뛰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물리학의 질량 가속도, 중력 등을 고려해 계산하면 슈퍼맨의 고향 크립턴 행성은 지구보다 중력이 15배 강하다는 답이 나온단다. 움베르토 에코의 ‘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열린책들)는 원제가 ‘대중의 슈퍼맨’이다. 하지만 현혹되지 마시길. 하늘을 나는 슈퍼맨 얘기는 하나도 안 나온다. 대중문화의 슈퍼히어로는 대체로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는 보수적 성향이 깔려 있음을 넌지시 일깨워 준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지난주 이탈리아에 다녀왔다. 10여 년 만에 찾은 로마제국은 여전히 멋졌다. 도시마다 빼곡한 문화재에 근사한 먹거리들, 청량한 포도밭과 그윽한 올리브 향…. 도떼기시장처럼 사람이 몰려든 바티칸박물관도 관광대국의 위용을 보는 듯해 짐짓 부러웠다. 악명 높은 소매치기도 당하질 않았으니 관광객으로선 만 점짜리 방문. 그런데 왠지 모르게 묘한 이질감이 밀려들었다. 6월이면 땡볕을 자랑했던 날씨가 이상기후 영향으로 영국마냥 변덕스러웠던 탓일까. 돌아오고 나서도 영 시차 적응이 되질 않았다. 해답은 우연히 한 책을 뒤적이다 실마리를 찾았다. 올해 초 발간한 ‘2033 미래 세계사’(휴머니스트)를 보면 유럽을 한 단어로 정의하는 대목이 나온다. “노(老) 대륙.” 그랬다. 이탈리아, 아니 유럽은 늙어 있었다. 현지에서 그런 인상을 받았던 건 딱히 숱하게 보수공사에 들어간 문화재 때문만은 아니다. 솔직히 로마건 피렌체건 가림막에 둘러싸인 건물이 많긴 많았다. 그런데 그거야 어쩔 수 없지 않나. 낡으면 손봐야 하고, 문제 생기면 고쳐야 한다. 아쉽긴 했어도 애정 어린 문화재 사랑으로 봐줄 만했다. 문제는 사람이었다. 어딜 가도 이민자가 넘쳐났다. 아프리카 혹은 인도, 중동 등지에서 온 이들이 거리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젊었다. 반면 ‘오리지널’ 이탈리아인들은 이상하게 중년 이상이 많았다. 아시시나 친퀘테레 같은 작은 마을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래 세계사에 따르면 이는 결코 외지인의 속단이 아니다. 1950년 유럽은 세계 인구의 20%를 차지했지만 2030년 8%로 떨어진다. 65세 이상 인구 비중은 2010년 17%에서 20년이 흐르면 25%로 늘어난다. 재밌는 건 이탈리아나 프랑스는 그때 다소 인구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단다. 유입 이민의 수가 유출되는 수보다 많기 때문이다. 단언하건대 이민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먹고살려고 조국을 떠나 타향살이하는 심정이야 오죽할까. 버스에서 잠시 얘기 나눴던 에티오피아 난민도 차림새는 궁색하나 멋진 청년이었다. 좌판 노점을 할지언정 당당하고 친절했다. 문제는 오리지널들의 태도다. 난민이건 뭐건 그 땅에 정착한 이상, 그들은 똑같은 사회구성원이다. 길바닥에서 세월을 보내도록 내버려둘 일이 아니다. 유럽은 자체적으로 젊은 노동력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나. 출신과 피부색을 따지지 말고 그들을 교육시켜야 한다. 그래야 설령 그 돈 벌어 고국에 보낼지언정 최소한 거리의 낭인이 돼 해 끼치진 않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메이드 인…’에 집착하지 말고, ‘메이드 바이…’의 세상에 대비할 때다. 늙은 한국은 왠지 서글프다. 정양환 문화부 기자 ray@donga.com}
좌선한 석가모니는 오른손을 무릎에 얹고 다섯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켰다. 전형적인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자세. 이는 수행을 방해하는 악마를 항복시키고 얻은 정각(正覺·올바른 깨달음)의 표현이다. 석존의 불안(佛眼)엔 갸름한 얼굴선과 눈매를 따라 엷은 미소를 머금어 품격이 우러났다. 석가영산회도(가로 90cm, 세로 104.5cm)는 42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그렇게 우리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팽팽한 어깨선과 가슴, 상대적으로 잘록한 허리는 건장하면서도 유연한 조선 전기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광배(光背·머리나 등 뒤에 광명을 표현한 것)의 청록색이 세월에 다소 바랬고, 금을 바른 몸체가 옅어지고 주름지긴 했어도 그림의 원형은 대부분 살아있다. 이번 석가영산회도는 그림 가운데 아래 부분에 화기(畵記·조성기록)가 명확히 남아 연원을 밝히기가 어렵지 않았다. ‘만력(萬曆) 20년 임진년 원월(元月·1월)에 백족산(百足山) 석남사(石楠寺)에서 완성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즉,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3개월 전에 불화가 그려진 것이다. 왜군이 북상하며 석남사가 불타 없어진 점을 감안하면 이때 그림을 일본으로 강탈해갔음이 확실하다.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한국미술사연구소장)는 “1592년에 조성된 불화는 역사상 처음으로 발견됐다”고 말했다. 화기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시주(施主)로 올라있는 인물이다. 관여한 승려들 위에 ‘강 씨 상궁(上宮) 양위(兩位·2명)’라고 기록돼 있다. 문 교수에 따르면 상궁(上宮)은 상궁(尙宮)과 혼용해 쓰곤 했다. 왕이나 왕비를 모시는 상궁이 자기 마음대로 불화를 조성했을 리가 없다. 선조 때라면 유교문화가 팽배했던 시절. 상궁들이 주군의 명을 받든 ‘왕실 발원 본’이라 보는 게 타당하다. 이렇게 상궁이 발원한 경우는 19세기 말기엔 종종 있으나 조선 전기에는 매우 드물었다. 불화의 사천왕 가운데 다문천(多聞天·북방 수호신)이 오른손에 작은 탑을 올려놓고, 백의(白衣) 관세음보살이 진영 왼쪽에 배치된 점은 당대보다 앞선 고려시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풀이된다. 문 교수는 “조선 전기 영산회도 가운데 국보에 오른 경우가 없다”며 “사료로서 명확한 기록이 남아있는 데다 예술적으로도 독특한 매력이 풍부해 최소 보물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다”고 평했다. 문 교수는 이 같은 연구 결과가 담긴 논문을 다음 달 초 ‘강좌 미술사’에 발표할 예정이다. 영산회도가 일본에서 환수됐다는 점도 의의가 크다. 일본에는 고려·조선 불화를 비롯해 많은 우리 문화재가 산재해 있지만 대부분 현지에서 대를 물려 신품(神品)으로 모시고 있어 접근조차 어렵다. 문 교수와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는 “이번 사례처럼 조용하고 차분하게 공을 들이는 게 문화재를 되찾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입을 모았다. 주승진 고미술연구소 무유헌 대표도 “무조건 강탈했으니 돌려달라고 몰아세우면 거사를 망친다”며 “신뢰를 쌓아 ‘태어난 땅으로 돌려보내자’고 순리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귀한 문화재에 가격을 매겨선 안 되겠지만 이런 정도의 조선 불화는 얼마나 가치를 지닐까. 고미술계에 따르면 1990년대엔 적게 잡아도 고려 불화는 30억 원, 조선 불화는 10억 원부터 거래를 시작했다. 지금은 유통되는 물량이 적어 기준가를 잡기가 쉽지 않다. 한 전문가는 “지금도 완성도가 높고 희귀하면 조선 불화도 몇십억 원으로 훌쩍 뛴다”고 귀띔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베를린 대왕(호어스트 에버스 지음·은행나무)=대필 작가와 독일 굴지의 기업 최고경영자(CEO)의 죽음.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두 사건이 점차 촘촘하게 연결되는 과정이 흥미로운, 코믹과 스릴러가 접목된 이색 장편소설. 1만4000원.저녁 무렵에 면도하기(무라카미 하루키 지음·비채)=아내가 과자에서 땅콩만 골라먹는다고 하소연하는 것을 비롯해 작가의 소소한 일상이 유쾌하게 그려진 에세이. 1만3000원.북한에 대한 불편한 진실(윤대규 지음·한울아카데미)=경남대 북한대학원장을 지낸 법학과 교수인 저자가 딜레마에 빠진 대북정책을 전면적으로 고찰했다. 1만4000원.시의 깊이갈이와 응축의 묘미(황송문 지음·국학자료원)=일제강점기부터 발표된 다양한 현대시들을 시인이자 소설가인 저자가 세세히 평가했다. 특히 시 언어를 어떻게 응축했는가에 초점을 맞췄다. 5만9000원.메이커스(크리스 앤더슨 지음·알에이치코리아)=‘롱테일 경제학’을 썼던 저자가 디지털과 제조업의 공존이 가져올 10년 뒤 미래를 예측했다. 새로운 산업 패러다임에 대한 고찰을 담았다. 1만6000원.원자력 트릴레마(김명자 최경희 지음·까치)=한미 원자력협정의 개정과 사용후 핵연료의 중간관리방안에 대해 다뤘다. 여성 과학자로서 국회의원과 환경부 장관을 지냈던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1만5000원.}
제목에 낚였다. 원래 현대미술에 하등 관심 없다. 한참 들여다봐도 뭐가 뭔지 헷갈리는 게 태반이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고전미술 옹호론자’로 살아왔다. 쥐뿔도 모르긴 하지만, 다비드상은 분간이라도 하니까. 하지만 어쩌다 마주친 ‘가장 비싼’이란 단어에 혹해 버렸다. 속물들은 그렇다. 샤넬 백도 가격표에 한 번 더 쳐다본다. 할리우드 영화도 얼마 투자했다는 소리에 귀가 쫑긋 선다. 다행히 장미셸 바스키아나 제프 쿤스, 애니시 카푸어라는 이름은 어디서 들어본 것도 같다. 자 그럼, 그들은 얼마나 그리고 왜 비싼지 한번 알아보자. 근데 이 책, 정말 낚인 게 맞다. 진짜 궁금한 것을 안 가르쳐 준다. 제일 비싼 것은 얼마인지, 도대체 그치들은 얼마나 돈을 긁어모았는지가 나오질 않는다. 자꾸 인터넷을 찾아보게 만든다. 흠…. 스코틀랜드 화가 피터 도이그의 ‘하얀 카누’란 그림은 570만 파운드(약 96억 원)에 팔렸구먼. 쩝, 로또를 서너 번쯤 때려 맞아야 할 액수다. 하지만 다행이다. 나머지 ‘왜 비싼가’라는 궁금증에 대해선 꽤 많은 힌트를 제공한다. 프랑스 파리 고등사회과학대학원에서 철학·인문학 박사를 따고 현재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는 2010년 기준으로 세상에서 제일 비싼 작가 10명을 설득력 있게 카테고리로 묶어서 정리했다. 저자가 보기에 이런 예술가들이 각광받는 이유는 그들의 작품에 적확한 시대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21세기는 사이버 세상의 침공으로 현실 속 자아에 대한 만족도가 급격히 떨어져 있다. 국내에서 성행하는 학력 위조나 키 높이 깔창, 성형 열풍도 이런 범주에서 해석된다. 자신을 우둔한 당나귀로 묘사했던 이탈리아 조각가이자 행위예술가인 마우리치오 카텔란, 피부색에 대한 고민을 평생 지고 살았던 ‘미국의 검은 피카소’ 장미셸 바스키아는 현대인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대변했기에 공명(共鳴)이 컸다. 인도 출신 영국 작가인 카푸어나 중국의 천이페이(陳逸飛)와 쩡판즈(曾梵志)는 현대미술에서도 ‘친디아(Chindia·중국과 인도의 합성어)’ 바람이 불고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디지털 시대도 한몫했다. 미국 화가이자 사진작가인 리처드 프린스는 복사와 붙여넣기가 무한 반복되는 컴퓨터의 일상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반면 도이그는 ‘반(反)디지털’의 기치 아래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미술계를 매료시켰다. 게다가 이들은 이전 세대와 달리 자신과 작품을 브랜드화해서 어떻게 몸값을 올리는지를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영국 현대미술의 거장 데이미언 허스트(48)는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지자 프랭크 던피라는 매니저와 계약을 체결했다. 던피는 쇼 비즈니스 분야에서 배우들을 관리하며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그는 관례적으로 경매에 작품을 내놓을 때 화랑을 거치는 방식을 건너뜀으로써 작가에게 훨씬 많은 돈을 안겼다. 갤러리 쪽과도 예술가가 좀 더 나은 조건으로 거래할 수 있도록 협상했다. 쿤스나 카푸어 등도 이런 매니저를 고용하고 있어 요즘 추세라고 한다. 사뭇 진지하게 작가들을 통찰한 책이지만 틈틈이 재밌는 뒷얘기도 만날 수 있다. 2011년 독일작가 마르틴 키펜베르거(1953∼1997)의 작품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기 시작할 때’는 바닥에 그려 놓은 그림을 미술관 환경미화원이 얼룩인 줄 알고 깨끗이 지워 버렸다. 110만 달러(약 12억 원)짜리 예술을 청소해 버린 그 심미안이란…. 2001년 허스트의 설치작품도 관리인이 지저분한 오물이라 판단해 몽땅 치워버렸다. 하긴, 현대미술이 종종 쓰레기 수준이란 소리도 듣지 않는가. 약간 씁쓸한 대목도 있다. 책 속 10대 작가엔 중국 예술가가 2명이나 포함돼 있다. 그런데 1년 뒤인 2011년을 기준으로 하면 다섯 명으로 늘어난다. 일본 미술가도 1명 눈에 띈다. 물론 중국시장의 거품이라느니, 가격은 작품성과 다르다느니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다. 높은 평가를 받는 한국 작가도 많다고 한다. 그래도 왠지 약이 오른다. 어디 ‘세계에서 돈 주고도 못 사는 비싼 한국작가 10’이라는 책은 없을까. 또 인터넷 뒤져 봐야겠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4월 8일 마거릿 대처(1925∼2013)가 사망한 이후 영국 미디어는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이 여성을 집중적으로 추억했다. 미국 영화배우 메릴 스트립이 대처 총리 역을 맡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영화 ‘철의 여인(The Iron Lady·2011년)’의 장면들이 뉴스에서 연일 소개됐다. 그의 일생과 정치 여정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도 쏟아졌다. 출판계도 그에 대한 책들을 다시 내놓으며 분주히 움직였다. 대처의 저서와 전기들이 앞 다퉈 재출간됐다. 그 가운데 단연 수위를 차지한 책은 대처가 유일하게 인정한 전기였다고 알려진, 찰스 무어 작가가 쓴 ‘마거릿 대처’였다. 4월 23일 출간된 이 책은 영국의 거의 모든 일간지에서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이 덕분인지 현재 영국 아마존의 정치 과학 분야에서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무어는 유일하게 공인받은 전기작가로서 대처의 사생활에 대한 자료는 물론이고 그가 총리로 재직했던 당시 정부 기밀문서에 대한 열람도 허락받았다. 영국 역사상 최장 기간 총리를 지낸 대처의 일생은 한 권으로 펴내기에는 너무 방대했던 모양이다. 책 한 권이 890여 쪽인데도 두 권으로 출간됐다. 인디펜던트의 제인 메릭 기자는 “무어의 글 솜씨는 우아하고 생생하다. 종종 지나치게 길고 자세한 묘사들도 있긴 하다. 하지만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대처의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해줄 만큼 자료가 풍부하고 상세하다. 이런 깊이 있는 취재가 모든 지루함을 상쇄하고도 남을 재미를 주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첫 권의 상당 부분은 정치가가 되기 이전 대처의 삶에 할애됐다. 무어는 대처와 언니 뮤리엘 사이에 주고받은 150여 통의 비밀편지들을 넘겨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토대로 대처가 남편 데니스를 만나기 전 다른 남자친구가 있었으며, 이 남자친구가 나중에 언니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또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대처와 데니스의 결혼생활이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도 폭로했다. 데니스는 조용한 성격으로 평생 대처를 다정하게 도왔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론 대처의 정치에 대한 집착 탓에 부부는 1960년대에 이혼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대처는 강한 논리력과 설득력을 지녔지만 타인의 감정엔 다소 무관심했다고 지적했다. 혹자는 그녀의 공감하는 능력 부족이 그의 퇴진을 초래했던 내각 갈등의 원인으로 꼽을 정도였다. 둘째 권에서 무어는 포클랜드전쟁, 아일랜드공화국군(IRA)과의 대립, 공공기관 사유화 논란 등 대처의 정치 여정을 촘촘히 그려 나간다. 데일리메일의 크레이그 브라운 기자는 이 작품을 가리켜 “성실함의 승리”라고 말했다. 이제껏 출간된 정치인 전기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란 찬사도 덧붙였다. 실제로 이 책은 이제껏 알려지지 않았던 몇몇 사실을 들려주는 재미가 있긴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건은 이미 기정사실화됐던 역사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는다. 책을 읽는다고 해서 대처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바꿀 만큼 신선하거나 파격적이라고 보긴 어렵다. 대처는 영국 내에서조차 호불호(好不好)가 뚜렷이 갈리는 인물이다. 그러나 영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가장 오랜 기간 재임한 총리라는 기록을 가진 정치인이다. 그런 인물의 일생을 엿본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읽어 볼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런던=안주현 통신원 jahn80@gmail.com}
《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 ‘끈질긴 삶과 신명, 경상남도’(6월 24일까지)엔 유독 눈에 띄는 전시품이 있다. 경남 민속 탈놀음(가면극)인 ‘오광대’에 쓰이는 탈과 깃발들이다. 오광대는 ‘다섯 광대가 탈을 쓰고 노는 다섯 과장(판소리의 마당이나 현대극의 막에 해당)의 놀음’이다. 보통 다섯 명의 광대가 양반 말뚝이 할멈 등 1인 2역 이상을 맡아 공연한다. 지역에 따라 과장의 구성도 조금씩 다르다. 》오광대는 다른 탈놀음과 달리 경남 지역에서만 전승돼 왔다. 오광대를 처음 연구한 민속학자 석남 송석하(1904∼1948)에 따르면 오광대는 초계 밤마리(현재 합천군 덕곡면)에서 시작돼 경남 각지로 퍼졌다. 19세기부터 경남의 지방 민속으로 자리 잡았고, 그 가운데 통영과 고성, 가산 오광대는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6호, 제7호, 제73호로 지정돼 있다. 민속박물관의 박수환 학예연구사는 “하나의 탈놀음이 같은 도내에서만 전파되어 내려온 유일한 사례”라고 설명했다. 도대체 오광대의 어떤 면이 경남 백성을 사로잡아 그들만의 문화를 형성한 걸까. ① 말뚝이는 조선의 스파르타쿠스? 오광대의 가장 큰 특징은 양반에 대한 비난과 풍자가 강하다는 점이다. 다른 탈놀음도 사회비판적 성격이 없진 않다. 하지만 오광대는 계급사회에 대한 조롱이 극 전체의 주제의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 중심엔 ‘말뚝이’가 있다. 오광대는 ‘말뚝이 탈놀음’이라 불릴 정도로 말뚝이의 존재감이 크다. 말뚝이의 어원은 분명치 않으나 양반이 타는 말을 다루는 하인으로 추정된다. 오광대의 ‘양반 과장’에서 말뚝이는 권위만 내세우는 양반을 철저히 망신 주는 주인공이다. 다른 지역 탈놀음은 세속종교인을 비꼬는 ‘중 과장’의 비중이 높으나 오광대는 중 과장을 없애거나 축소하고 양반 과장에 힘을 실었다. 말뚝이는 가면 자체도 코를 강조해 ‘남성적 힘’을 과시한다. 반면 양반은 언청이나 곰보 등 나약한 얼굴로 만들었다. ‘영노 과장’도 눈여겨봐야 한다. 영노란 양반을 잡아먹으면 용이 된다는 상상의 동물이다. 양반을 먹잇감으로 삼아야 승천할 수 있는 이무기. 그 존재만으로도 가히 체제전복적인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② 오광대는 페미니즘과 외세저항의 원조 오광대의 얼개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점도 묘미다. 이 중 고성오광대는 ‘할미영감 과장’을 강조한 게 특징. 다른 오광대는 이 과장에서도 양반 비판을 주제로 다루지만, 고성오광대는 가부장제에 희생되는 여성에 초점을 맞춘다. 내용은 이렇다. 조강지처 할미는 우연히 둘째 부인을 얻어 집을 나간 영감과 마주친다. 할미와 둘째 부인이 다투던 중 할미가 넘어져 죽는다. 상여꾼들이 할미의 상여를 메고 나가며 곡을 하는 것으로 과장은 마무리된다. 지아비에게 버림받고 생까지 마감하는 여인네의 기구한 운명을 보여주는 가면극은 조선시대에 희귀하다. 반면 통영오광대는 ‘포수사자 과장’을 중시한다. 담비를 잡아먹는 사자를 총으로 쏴 죽이는 포수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박 연구사는 “사자는 한반도에서 전통적으로 정화의 의미를 지니는 동물이나 오광대에선 해를 끼쳐 죽여야 하는 대상”이라며 “여기서 사자는 악독한 외세를, 포수는 이를 물리치는 민족 영웅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③ 오광대는 자생적 예술인가 제례적 행사인가 오광대는 민초의 한과 희망이 담긴 예술이다. 하지만 오로지 민중의 의지로 조선시대에 이런 발칙한 공연이 경남 곳곳에서 성행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공연을 유치할 금전적 비용을 일반 백성들이 감당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정상박 동아대 명예교수는 오광대의 흥행을 공연이 지닌 ‘토착신앙’과의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마을 제사나 대형 굿이 있을 때 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탈놀음을 벌였다는 시각이다. 실제로 정착보다는 떠도는 습성을 지닌 놀이패를 공식 연회에 초대하는 것은 지방관아나 유지들의 몫이었다. 정 교수는 “기존에 지역마다 뿌리내린 샤머니즘과 새로이 전파된 탈놀음이 융화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오광대에 들어있는 ‘오방신장무 과장’과 ‘문둥이 과장’은 이런 개연성을 높여준다. 오방신장은 동서남북과 중앙을 상징하는 방위신으로 춤을 추며 정화의식을 벌인다. 문둥이 과장은 문둥병에 걸린 주인공이 춤으로 한을 풀고 몸과 마음의 병을 고친다. 이런 주술성은 지역 제례와 오광대를 잇는 연결고리로 이해된다. ④ 오광대 전파의 공로자는 향리(鄕吏) 오광대 공연은 지방관청이 주로 유치했다. 여기서 실무를 담당한 것은 향리들이다. 이훈상 동아대 사학과 교수는 “지방 말단공무원인 이들 계층이 오광대를 퍼뜨린 숨은 주역”이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오광대에 날카로운 저항의식이 담긴 것도 계급적 역학관계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향리는 양반과 백성 사이의 중간자로서 온갖 부정부패의 주범으로 공격받았다. 입장이 난처했던 그들에게 오광대의 사회비판은 여러모로 요긴했다. 백성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줌으로써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한편 사회 모순의 책임이 향리가 아니라 양반에게 있음을 은연중에 교육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금전을 관할하는 향리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에 오광대의 일탈도 가능했던 셈이다. 그렇다고 오광대가 가진 민중적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광대는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어 비판정신을 공연문화로 승화시킨 결과물이다. 이 교수는 “무엇보다 오광대의 예술성이 계급을 뛰어넘어 지역에 안착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했다.정양환·최고야 기자 ray@donga.com}
대한제국 외교의 상징이었던 건물이 미국의 수도에서 소중한 역사의 현장으로 소개된다. 지난해 102년 만에 되찾은 옛 주미대한민국공사관은 시대적 역경을 딛고 대한제국이 자주외교를 일구었던 상징성이 담긴 곳. 그 공사관이 ‘워싱턴의 북촌’ 로건서클 역사지구의 핵심 랜드마크로 대접받으며 한국 근현대사를 소개하는 명소로 발돋움한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안휘준)에 따르면 현지 로건서클보존회는 이달 초 “한미 외교사의 상징인 공사관 건물을 로건서클 역사탐방 프로그램에 대표적 관람 코스로 소개하고 7월 열릴 예정인 지역 페스티벌에서 오픈하우스 행사를 하고 싶다”고 요청해 왔다. 특히 로건서클보존회를 이끄는 팀 크리스텐슨 회장은 공사관 홍보 차원에서 올해 축제에 한국 전통공연을 유치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뜻을 재단 측에 전달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워싱턴 북서쪽에 있는 로건서클은 서울의 북촌 한옥마을처럼 오랜 전통가옥들이 밀집한 지역이다. 19세기 초 빅토리아풍 건축물이 즐비하고, 교육자이자 인권운동가로 존경받는 메리 맥러드 베순(1875∼1955)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1930년 시 의회가 그 가치를 인정해 역사지구로 지정했다. 로건서클보존회는 자체 제작한 안내책자 ‘로건서클 역사탐방 루트’에서 꼭 들러야 할 역사적 명소 15곳에 공사관 건물을 포함시켰다. 책자에는 1903년 공사관으로 사용하던 시절 대형 태극기가 걸린 내부 사진을 실었다. 설명문에는 “1891년 조선왕조(Joseon Dynasty)가 첫 번째 주미 공사관으로 매입한 건물(최초 개설 시기는 3년 앞선 1889년으로 확인됨)”이라며 “1910년 한일 강제병합 뒤 일본 정부가 억지로 소유권을 빼앗았다”고 적혀 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130주년이 되던 2012년 대한민국 정부가 다시 사들여 관리하고 있다는 설명도 들어 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보존회 측의 요청에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로건서클은 해마다 찾아오는 관광객도 상당하지만, 워싱턴과 인근 초중고교 학생들도 현장학습을 위해 즐겨 찾는 곳이다. 미국 10대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공사관에 들러 한국의 근현대사를 배우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다음 달 보존회와 상의해 공사관 앞에 대형 안내판도 설치할 예정이다. 다만 오픈하우스는 건물 보존이 최우선인 만큼 신중하게 검토할 방침이다. 이성원 재단 사무총장은 “현지 주민들이 창립한 로건서클보존회는 정부가 지역 운영 방안을 먼저 협의해 올 정도로 영향력이 크다”며 “그런 단체가 먼저 옛 공사관을 중요 역사현장으로 대접하겠다고 제안한 것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설명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현 시점에서 공산주의를 거론하는 것은 시대착오일 수 있다. 물론 몇몇 공산국가는 아직 남아 있긴 하다. 하지만 거의 자본주의나 진배없거나 봉건세습의 왜곡된 형태로 명맥만 이어갈 뿐이다. ‘진짜 공산주의 국가’는 사라졌다는 소리다. 그리 따지면 카를 마르크스나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꿈꿨던 이상사회는 존재한 적이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호불호를 떠나 공산주의는 19, 20세기를 뒤흔들었던 사상이었다. 그리고 그 붉은 깃발 아래엔 혁명의 투혼으로 세계를 변혁하려던 이들이 있었다. ‘마르크스에서 시진핑까지, 세계 공산주의자들의 삶과 죽음’이란 부제처럼 책은 다양한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인물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 일찍이 ‘러시아혁명사’를 집필한 저자는 오랜 기간 세계 현장을 누비며 이 방대한 작업에 천착했다. 1997, 98년 동아일보사에서 출간한 ‘붉은 영웅들의 삶과 이상’과 ‘동아시아 공산주의자들의 삶과 이상’의 합본이지만 상당한 분량을 개정 증보해 새로이 선보였다. 20세기 공산주의자 열전이라 분량은 만만찮다. 하지만 문장이 간결하고 매끄러워 읽을 맛이 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혁명가들에 대한 적확한 평가가 주는 삶의 교훈도 낙낙하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문화재청(청장 변영섭)이 여당을 중심으로 정치권에서 제시한 울산 반구대 암각화(사진) ‘임시제방 설치안’에 대해 사실상 반대 의견을 나타냈다. 문화재청은 16일 ‘반구대 암각화, 최선의 보존방안을 찾아야 합니다’라는 보도자료에서 “현재 암각화 상황에선 어떤 제방을 설치하든 심각한 피해를 줄 가능성이 있음을 관계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암각화 암석은 진흙이 퇴적돼 만들어진 이암(泥巖·shale)으로 물에 취약한 성질”이라며 “매년 4∼7개월간 침수와 노출이 반복되면서 훼손이 진행 중”이라고 우려했다. 이 같은 발표는 최근 함인선 한양대 건축학과 교수의 ‘케네이택 댐’ 건설을 제안할 계획이던 새누리당과는 상당한 시각차를 보여준다. 케네이택 댐이란 조립식 구조로 댐 형태의 투명 막을 만들어 물을 차단하는 것.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도 15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당 차원에서 하 교수가 제안한 안을 보고받았는데 새로운 구조라 경청할 내용이 많다”며 “문화재청에 함께 고려할 것을 제안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변 청장은 16일 기자간담회에서 “정부기관으로서 의견을 제시했을 뿐 반대나 대립으로 비치면 곤란하다”면서도 “임시 제방은 검증이 되지 않아 암각화 침수를 100% 막을 수 있다고 단언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대책 마련을 위해 “관련 기관들과 다각도로 상의하겠다”면서도 수위를 낮추는 방안을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대곡천 수위를 조절해야 한다는 기존 방침을 바꿀 뜻이 없음을 우회적으로 밝힌 셈이다. 한편 변 청장은 최근 논란이 된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미국 뉴욕 전시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냈다. 변 청장은 “소중한 국보가 너무 자주 해외로 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취임 전부터) 추진돼 왔던 사안이라 꼭 나가야 한다면 비교적 해외전시가 덜했던 제78호 반가사유상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고 말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0월부터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히는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제83호 반가사유상을 비롯한 국보 12점 등을 선보이는 특별기획전 ‘황금의 나라, 신라’전을 개최할 예정이었다.정양환·이승헌 기자 ray@donga.com}
건너서 아는 지인의 친구 얘기다. 나이도 지긋한데 유독 미국 의류 ‘갭(GAP)’만 즐겨 입으셨다. 애도 아니고 커다란 로고 찍힌 옷 부담되지 않냐 물으니 이리 대답했단다. “웬걸? 그래도 ‘갑’이잖아.” 요즘 갑을(甲乙) 관계가 이슈다. 갑의 횡포, 을의 설움…. 자극적이나 공감하는 이가 많다. 살다 보면 주눅 드는 처지에 놓였던 적 대부분 있으니까. 최근 조선시대 평생 을이길 고집한 선인을 알게 됐다. 정민 한양대 교수가 2011년 쓴 ‘삶을 바꾼 만남’(문학동네)이란 책에서다. 스승인 다산 정약용(1762∼1836)과 제자 치원 황상(1788∼1870)의 고귀한 인연을 다룬 멋진 작품. 허나 저자 의도와 달리, ‘갑을’ 잣대를 들이댄 건 읽은 놈 심성이 꼬여서다. 방귀 낀 김에 쭉 삐딱하면, 황상은 태생부터 을이었다. 시골 아전의 자식이니 봉건사회에서 대성하긴 글렀다. 오죽하면 귀향 온 죄인인 다산에게 글을 배웠겠나. 사대부라면 나중에 ‘갑 커뮤니티’ 진출에 누가 될까 꺼렸을 게다. 스승에게도 한결같이 을이었다. 정약용에게 배우고도 등진 이 숱했으나 그만은 의리와 본분을 지켰다. 초서(抄書·책의 중요 부분을 옮겨 씀)에 치중하란 조언을 칠순 넘어서까지 따랐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엔 자제에게도 극진했다. 치원에게 다산의 가르침은 금이고 옥이었다. 단 하나, 스승 뜻을 거스른 게 있었다. 도통 과거를 응시하지 않았다. 황상의 재능이라면 뭐가 되어도 됐을 텐데, 스스로 을의 삶을 자처했다. 그의 꿈은 탁한 세상을 피해 조용히 사는 ‘유인(幽人)’이었다. 스승이 모의고사로 짓게 한 부(賦·한자 여섯 자로 한 글귀씩 짓는 글)에서 열여덟 소년은 탈속의 행복을 노래했다. “천지의 기운이 드넓게 퍼져/ 허공에 춤을 추며 뒤섞이누나/ 산비탈 타고서 솟아올라서/ 푸른 하늘 끝까지 내달린다네 … 밭두둑서 겨자 싹을 따가지고 와/ 뜨락에서 약 모종을 바라본다네/ 이미 곳을 얻어서 즐거워하니/ 내 장차 세상 피해 숨어 살리라.” 누구나 황상처럼 살긴 어렵다. 을보단 갑이 되고픈 욕망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하지만 을로 자신을 낮춰도 이만한 품격을 갖추면 갑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치원은 공부와 인성에서 ‘슈퍼 갑’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갑을의 칡넝쿨을 을의 수양 부족 탓으로 떠넘기면 곤란하다. 세상이나 조직이 만든 저울을 개인에게 책임 돌릴 순 없다. 다만 갑입네 거들먹거리는 분들, 상대가 당신네보다 훨씬 상질일 수 있다는 걸 잊지 마시라. 하긴 그걸 알 만한 인격자라면 첨부터 갑을 운운하는 소리 나오게도 안 했겠지. 깜냥은 병정(丙丁)쯤 되나, 행여 누구에게 유세 떨진 않았는지. 나부터 반성하련다.정양환 문화부 기자 ray@donga.com}
“한국 사람, 새마을운동 덕에 먹고살만해졌지. 허나 잃은 것도 많소. 전엔 굿하면 마을 축제였거든. 남정네도 목욕재계하고 도래떡(초례상에 놓는 큼직하고 둥글넓적한 흰떡)을 찧었지. 그런데 미신타파다 허례허식이다, 우리 문화요 전통인데 죄인 대하듯…. 피란 내려와 배곯던 때도 그리 속 끓진 않았어.” 곱게 빗어 쪽 찐 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한숨에 밴 떨림은 세월의 주름일까. 얘기를 잇든 말든 연분홍 저고리는 하늘하늘. 뒤편 제단 일월성신(日月星辰) 천지신명은 울긋불긋 무심하다. 12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무당’ 김금화 선생(82)의 집은 꽤 후덥지근했다. 뙤약볕 마당 복슬강아지는 연신 혀를 날름날름. 날씨도 한몫했지만 좁다란 방에 대여섯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으니. 그 열기가 허공으로 피어올랐을까. 잠시 먼 곳을 보던 김 선생이 한복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담담하니 말을 이어갔다. 이날은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중요무형문화재 구술채록 세 번째 날. 제82-2호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 명예보유자인 그가 6·25전쟁 뒤 남한 정착 시절을 풀어놓을 차례였다. 배연신굿이란 황해도 해주, 옹진 지방에서 행해지던 일종의 풍어제. 출항을 앞두고 고깃배의 안전과 만선을 기원하는 굿이다. 처음엔 “내세울 일 없다”며 손사래 쳤다던 그도 이젠 익숙해져서일까. 대담을 진행하던 홍태한 중앙대 민속학과 강사가 내미는 물잔을 편안히 받아들었다. “고향 떠난 무일푼 아낙이 뭔들 쉬웠겠어. 게다가 무당인데. 피죽 한 그릇, 누울 자리 마련도 눈치를 봤지. 그래도 알음알음 이북사람 연이 닿아 일이 들어옵디다. 없이 살아도 배 나려면 굿하는 게 당연했던 때니까. 별비(別備·무당에게 주는 돈)야 주는 대로 받지. 그러나 어디 돈보고 굿 치르나. 마음으로 하지. 보리 한 되라도 정성만 지성이면 목포 군산도 내려갔소. 그리 조금씩 소문나서 살림을 꾸렸어. 새끼 입에도 겨우 풀칠이나마 했지.” 하지만 인생사 원래 그런가. 먹고살 숨통이 트이자 마음이 갈수록 시렸다. 십수 년 정붙였던 지아비도 곁을 떠났다. 하긴 무당 ‘남편살이’가 어디 쉬웠을까. 가까운 벗이 혼인해도 식장은 들지도 못했다. 민간신앙은 냉대하면서 부정 탄다는 속설은 왜 그리 철석같은지. 새마을운동은 옹골찬 대못이었다. 무당을 혹세무민 사기꾼으로 몰아갔다. 무구(巫具)고 작두고 다 때려치울까…. 신 내림 받은 업보가 한스러웠다. 세상 시선이 바뀐 건 의도치 않은 곳에서 시작됐다. 명창 박동진 선생(1916∼2003)의 주선으로 우연히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참가했다. 설움이나 풀어보려 신명나게 춤을 췄다. 헌데 이게 웬걸. 천대는 어디 가고 예인(藝人)이라 극찬이 쏟아졌다. 특히 외국인 반응이 뜨거웠다. ‘토속 샤머니즘의 정수’ ‘전통종합예술의 정찬’. 해외로 초청공연까지 나갔다. 1985년 마침내 나라에서 무형문화재(당시는 ‘인간문화재’)로 지정했다. 그의 어머니는 덩실덩실 춤을 췄다. 이젠 바라는 거 없다고. 맺힌 거 다 풀렸다고. 맘에 걸리는 게 없진 않다. 사람들이 굿을 대하는 태도다. 홍태한 강사에 따르면 굿은 현재 서울에서만 한 해 20여만 건이 열린다. 하지만 대부분 쉬쉬 하며 몰래 치른다. 홍 강사는 “무대에선 예술이 되었건만, 실생활에선 여전히 저급문화로 홀대 받는다”고 말했다. 김 선생은 마을 모두 불 밝히고 흥에 취하던 고향, 손 맞잡고 이웃을 챙기던 인정이 그립다. 정부도 문화재 지정으로 그치지 말고 좀 더 현장의 어려움을 살펴주길 당부했다. 문화재청이 무속 채록에 많은 신경을 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당은 ‘삼국유사’에 등장할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녔다. 그럼에도 예우는 여전히 소홀한 게 현실. 국립문화재연구소 무형문화재연구실의 황경순 학예연구사는 “현재 무속 종목은 김 선생과 함께 중요무형문화재 제9호 은산별신제와 제82-3호 위도띠뱃놀이를 구술채록하고 있다”며 “앞으로 동해안별신굿 서울새남굿 등 다양한 무속 문화재도 진행해 그 가치를 높여가겠다”고 설명했다. “사실 무형문화재라고 뭔 영화가 생겼겠어? 그래도 고마운 거지. 다 학자님들, 나라님들 공이야. 우리야 배운 가락대로 꿋꿋하니 버텼을 뿐이고. 그걸 민속이다 문화재다 연구하고 아껴주는 세상이 옵디다. 구술채록에 응한 것도 그래서야. 한 자라도 더 남기면 보살펴주겠구나. 이제 떠나도 굿은 남겠구나.”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북한에 있는 고려시대 유적인 개성역사유적지구가 다음 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것으로 전망된다. 13일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 따르면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는 최근 공개한 보고서에서 “개성역사유적지구에 ‘등재 권고’ 판정을 내리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세계유산은 이코모스가 권고하면 본회의에서 이변이 없는 한 등재된다. 다음 세계유산위원회(WHC)는 6월 16∼27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다. 이번에 등재될 개성역사유적지구는 핵심지역 면적만 4942km²로 왕건릉 만월대 첨성대 개성남대문 고려성균관 숭양서원 선죽교 표충사 등을 아우른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이케아(IKEA) 관련 책 서평을 쓴다니 의외로 주위에서 관심이 크다. “한국엔 언제 들어와?” “반발이 심하다던데….” “난 뭐 만드는 거에 약해서 별로.” “가격이 착하잖아!” 놀라운 건, 아직 국내엔 정식으로 문도 안 연 이 가구 브랜드(스스로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라 부른다)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거다. 들어오기도 전부터 엄청난 화제였던 애플의 아이폰처럼. 국내에서의 성공 여부를 떠나 도대체 이케아는 왜 이리 주목받을까. ‘이케아, 불편을 팔다’는 어쩌면 제목부터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핵심은 바로 소비자가 받아들일 수 있고, 심지어 기꺼이 즐기고자 하는 ‘불편’을 팔기 때문이다. 자, 이 광활한 매장을 직접 돌아다니며 당신의 보물을 찾아보시라. 낑낑대며 자동차 트렁크에 실었다면, 이젠 땀깨나 쏟아가며 직접 조립해 보라. 그 대신 가격은 어디보다 싸다. 왜? 당신이 직접 만드니까. 그 가구는 아버지 혹은 남편(아내 혹은 독거인일 수도)의 손때가 묻은 당신만의 가구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이케아를 흔히 ‘스웨덴산(産) 디즈니랜드’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애들도 좋아할지 의문이나, 어른에겐 환상의 놀이동산이다. 저렴한 비용으로 어릴 적처럼 조립장난감을 완성해 보는 기쁨. 게다가 실용성도 탁월하다. 실제로 해외 이케아 매장을 가보면 몇 시간이고 신나서 쇼핑하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이케아 ‘복음서’로 취급하면 곤란하다. 오히려 저자 의도와 상관없이, 이케아에 대해 약간 ‘불편함’이 생길 수도 있다. 창업주 잉바르 캄프라드가 어릴 적부터 타고난 장사꾼이었고, 탁월한 현지 적응력이나 뛰어난 위기대처능력을 갖췄다는 용비어천가는 잠시 접어두자. 이케아란 이름은 ‘잉바르 캄프라드 엘름타리드 아군나리드(Ingvar Kamprad Elmtaryd Agunnaryd)’의 약자. 창업주와 자기가 살던 농장, 마을의 이름을 합친 것이다. 이름에서 느껴지듯, 이 기업은 지금도 창업주가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1인 기업’ 성향이 강하다. 게다가 캄프라드는 할머니와 아버지가 열렬한 나치추종자였고, 자신도 젊은 시절 히틀러를 숭배했다. 이후 이케아가 포름알데히드를 방출하는 환경문제로 곤욕을 치렀고, 제3세계 아동 노동을 착취한 경력도 있었다는 건 책 속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하시라. 물론 이케아는 이런 문제를 나름 잘 해결해 왔다. 약점을 덮을 만큼 장점도 많다. 하지만 아이폰을 보라. 그렇게도 열광했던 애플 제품인데 어느 순간 약간 시큰둥해지지 않았나. 이유는 간명하다. 소비자는 변한다. 취향도 제각각이다. 이케아가 이 땅에서도 성공하려면 상당한 공부가 필요할 것이다. 그건 그들과 경쟁해야 할 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이케아를 기다리는 소비자나 앞으로 맞닥뜨릴 경쟁사 모두 읽어볼 가치가 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중요무형문화재 제61호 은율탈춤 명예보유자인 민남순 씨(사진)가 7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3세. 고인은 1969년 은율탈춤에 입문해 탁월한 기량으로 은율탈춤의 다양한 배역을 소화해 왔으며, 대학과 사회단체에서 탈춤 보급에 힘써 왔다. 2002년 은율탈춤 예능보유자로 인정됐고 2012년 명예보유자가 됐다. 은율탈춤은 황해도 은율 지방에서 이어져 내려온 탈춤으로 양반사회를 비판하는 사회 풍자의 요소가 강하다. 빈소는 인천 남구 주안사랑병원, 발인은 9일 오전 7시. 032-875-9963}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의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돌아왔다. 그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지리학과 교수로 국내에서도 인기가 높은 저술가다. 1998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책 ‘총, 균, 쇠’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14만 권 가까이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해 서울대 도서관 대출순위에서 숱한 소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1994년 미 과학전문지 ‘디스커버’에 한글의 우수성을 극찬하는 논문을 실어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그는 생리학 진화생물학 조류학 문화인류학 등 다방면으로 연구 활동을 벌였고 6개 언어에 능숙할 정도로 언어 구사력이 뛰어나다. 때문에 풍부한 연구와 세련된 필력이 버무려진 그의 책은 나올 때마다 화제를 모았다. 필명 ‘로쟈’를 쓰는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는 “저자는 ‘21세기의 다윈’이라 불릴 정도로 넓은 시야와 이론적 토대를 갖췄다”며 “그의 ‘박람강기(博覽强記·여러 책을 널리 많이 읽고 기억함)’는 학자로서 본받아야 할 미덕”이라고 말했다. 그런 다이아몬드 교수의 최신작 ‘어제까지의 세계(The World until Yesterday)’가 9일 국내에서 정식 출간된다. 현지에서 지난해 12월 출간된 이 책은 ‘총, 균, 쇠’ ‘문명의 붕괴’(2005년)와 함께 교수의 ‘문명 대(大)연구 3부작’에 해당한다. 앞선 ‘총, 균, 쇠’가 서구 문명이 궁극적으로 세계를 지배하게 된 이유를 통해 인류 역사의 탄생과 진화 과정을 짚었다면 ‘문명의 충돌’은 여러 문명의 위기와 종말을 고찰함으로써 자연 자원을 남용하는 문명은 붕괴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3부작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는 ‘어제까지의 세계’에서 교수는 전통사회로 눈을 돌린다. 위험천만한 현재 세계의 생존 해법을 찾기 위해 알래스카 이누피아크족이나 아마존 야노마모족, 필리핀 아그타족 등 국가 사회 이전의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소수부족들을 살핀다. ‘문명의 붕괴’ ‘어제까지의 세계’를 번역한 강주헌 씨는 “서구 문명이 세계를 지배했다고 모든 면에서 다른 문명보다 우월하단 뜻은 아니다”며 “지속가능한 세계를 만들려면 오히려 전통사회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제시한 책”이라고 설명했다. 3권 모두 700쪽이 넘는 분량인 데다 방대한 내용이 담겨 읽기에 수월하진 않다. 하지만 세계적 석학이 오랫동안 공들인 연구과정과 결론을 찬찬히 따라가 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올해 3월 특별판으로 재출간한 ‘총, 균, 쇠’에서 ‘한국 독자에게 드리는 편지’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게 고안된 문자 체계인 ‘한글’로 책이 번역돼 영광”이라고 소감을 밝혔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