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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를 에너지원으로 쓰기 시작한 19세기 말. 인간은 이때부터 석유가 주는 뜨거움을 갈망했고 이를 쟁취하기 위해 지독하게 싸웠다. “신은 하필 미개한 중동에 석유를 남겨줬다”는 극 중 영국 장교의 대사처럼 제국주의 국가들은 석유를 얻기 위해 침략, 약탈도 정당화했다. 석유를 빼앗긴 땅은 차갑고, 황폐하게 식어갔다.1일 개막해 9일까지 서울 용산구 한남동 더줌아트센터서 공연하는 신작 ‘OIL(오일)’은 19세기 말부터 석유가 고갈될 것으로 예상되는 2051년까지 역사를 두 모녀관계를 통해 그린 작품이다. 영국서 주목받는 극작가 엘라 힉슨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국 연극계 대모 박정희 연출가가 국내 초연을 맡았다. 계급주의, 여성주의, 제국주의, 환경까지 광범위한 이야기를 다룬다. 또한 극단 ‘풍경’의 3개년 프로젝트인 ‘작가展’ 3부작 중 마지막 극으로, 소리꾼 이자람이 ‘메이’ 역할을 맡아 첫 정극에 도전했다. 또 국악 팝 밴드 ‘이날치’의 프로듀서 겸 베이스를 맡은 장영규가 음악을 맡아 화제가 됐다.풍부한 서사를 품은 이 작품서 전반적 연기 톤을 잡고 배우들을 이끈 건 베테랑 남기애 배우(60)다. 그는 앞서 프로젝트의 첫 작품인 ‘장 주네’서 어머니 역할을 맡았으며, 이번에는 엄격한 시어머니 ‘마 싱거’를 연기한다. 1부에서 열연한 뒤 마지막 5부에 마치 환영(幻影)처럼 등장해 무대를 관조한다. 배우 박명신과 번갈아 역을 소화한다. 최근 더줌아트센터서 만난 남 배우는 “여성의 모습을 방대한 시공간에 녹여낸 극은 볼수록 매력적이다. 개인적으로 프로젝트를 마감하는 작품이라 의미가 크다”고 했다. 작품은 영국 콘월과 햄스테드, 이란 테헤란, 이라크 바그다드 등 4개 도시와 200년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삼았다. 남 배우는 “인물의 구체적 나이보다는 각자 그 시대에 살고 있을 법한 여성의 모습을 연기했다”고 밝혔다. 극 중 며느리는 “엄마는 아기에게 가장 좋은 걸 줘야 해”라고 말하자 시어머니는 “엄마는 가족 모두에게 가장 좋은 걸 줘야한다”며 맞받아친다. 시어머니 역할은 전통적 어머니상이자 고향을 상징하는 존재다. 남 배우는 “기댈 곳 없을 때 찾는 어머니 이미지를 떠올렸다. 인간이 골몰하는 석유도 땅과 자연에서 나오는 산물인데 모든 걸 퍼주는 어머니와 닮았다”고 덧붙였다. 작품서 첫 호흡을 맞춘 이자람 배우에 대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서있기만 해도 믿음이 가고 에너지가 정말 큰 배우”라며 “아직 어머니로서 경험이 없는 그에게 자녀를 키워본 현실적 경험을 들려줬더니 이를 영민하게 잡아내 작품에서 소화했다”고 했다.중앙대 연극영화과 출신인 남 배우는 졸업 후 결혼, 출산으로 꽤 오랜 시간 무대와 담을 쌓고 살았다. 서른일곱인 1997년도에야 뒤늦게 데뷔했다. “잊고 살던 무대에 선다니 얼마나 좋았던지….” 육아와 연극을 병행하던 그는 6~7년 전부터 매체연기에 도전했다. 송혜교 배우가 “실제 제 어머니보다 더 많이 보는 것 같다”고 할 정도로 송 배우의 어머니로 대중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그는 “연극에선 늘 착한 엄마를 맡았는데 매체에선 조금은 독특한 엄마를 맡아 좋았다”고 했다. 공연 초반, 후반에 등장하는 그는 준비과정서 후배들의 모습을 객관화해 바라봤다. “작가는 이 순간 왜 이 인물을 등장시켰나”를 떠올리며 제작진, 연출과 상의를 거쳤다. 불필요한 장면을 걷어내기로 했다. 배우라면 조금이라도 오래 무대에 서고픈 건 인지상정. 논의 끝에 그는 결단을 내렸다. 마치 모든 걸 퍼주는 어머니처럼. “제 분량을 제일 많이 줄이기로 했어요(웃음). 작품을 위해서라면….”김기윤기자 pep@donga.com}
국내 최장수 현대무용축제에서 40번째 춤의 향연이 펼쳐진다. 국제현대무용제(MODAFE·모다페)가 오는 5월 25일부터 6월 13일까지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서강대 메리홀 등에서 열린다. 올해는 ‘All About Contemporary Dance. This is, MODAFE!(현대무용의 모든 것, 이것이 바로 모다페!)’라는 주제를 내걸고, 현대무용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조명한다. 1982년 ‘제1회 한국현대무용협회 향연’으로 시작한 축제는 올해 40돌을 맞아 어느 해보다 압도적 무대를 예고하고 있다. 한국 현대무용계를 이끌어 온 유명 안무가들을 조명하는 ‘레전드 스테이지’에선 육완순, 최청자, 이숙재, 박명숙, 박인숙, 양정수, 안신희 등 7명 안무가의 작품을 조명한다. 미국 현대무용을 국내에 처음 들여와 선보인 1세대 현대무용가 육완순(88)의 ‘수퍼스타예수그리스도’를 비롯해 ‘해변의 남자(최청자)’ ‘훈민정음 보물찾기(이숙재)’ ‘디아스포라의 노래(박명숙)’ 등 7개 작품을 각각 10분 남짓한 분량으로 선보인다. 국공립 무용단체들이 참여하는 공연들도 반갑다. 국립현대무용단 국립무용단 국립발레단 대구시립무용단 등이 참여한다. 국립현대무용단은 남정호 예술감독의 대표 안무작 ‘빨래’를 통해 노동, 연대감, 공동체 의식을 조명한다. 농악 행진에 쓰이던 ‘칠채’ 장단에서 모티브를 얻어 안무작을 만든 국립무용단 이재화의 ‘가무악칠채’도 무대에 선다. 지난해 말 공연에서 탁월한 리듬감과 테크닉을 활용한 구성으로 주목받은 작품이다. 국립발레단은 솔리스트 강효형의 ‘요동치다’와 솔리스트 박나리의 ‘메멘토 모리 : 길 위에서’를 비롯해 올해 초 발레마스터로 승급한 이영철의 ‘더 피아노’ 등을 선보인다. 대구시립무용단은 김성용 예술감독의 ‘월훈(月暈)’과 안무가 이준욱의 ‘샷(shot)’을 공연한다. 모다페의 위상을 대표하는 가장 주목하는 안무가 3명의 무대도 준비됐다. 전미숙 안무가는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토대로 한 ‘Talk to Igor-결혼, 그에게 말하다’를 선보이며 안성수 안무가는 ‘Short Dances’를 선보인다. 안은미 안무가는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 이밖에도 고블린파티, 아트프로젝트보라 등 젊은 무용단의 무대도 눈여겨볼 만하다. 모든 공연은 거리두기 좌석제로 운영된다. 티켓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국립극장 홈페이지에서 구매 가능하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이 사람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는 무대에서 줄곧 춤을 춰왔고, 직접 안무도 짠다. 춤 출 때 쓰는 음악 대부분을 직접 작사·작곡하며, 춤을 추면서 말도 하고 노래도 한다. 2장의 정규 앨범과 20여 곡의 싱글을 발표한 가수이기도 하다. 한때는 1년 간 꼬박 철학에 빠져 지내기도 했다. 자신이 ‘표현가’라고 불리길 원했던 그는 “다시 마음이 바뀌었다. 말, 노래도 결국 다 춤이자 안무였더라”라며 “그냥 안무가로 불러 달라”고 했다. 한국 현대 무용계의 독보적 아이콘 김재덕 안무가(37)가 대표작 ‘다크니스 품바’와 솔로작품 ‘시나위’를 서울 LG아트센터에서 7일, 8일 이틀간 공연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한 차례 미뤄진 끝에 재성사된 무대다. 1일 서울 서초구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계속된 공연 취소로 이전처럼 작품에 몰입하기 쉽지 않았다. 갑자기 공연이 취소될지 모른다는 걱정에 매사에 긍정적인 저도 몇 시간동안 허무주의에 빠져 ‘멍 때린’ 적도 있다”고 털어놨다. 배고픔, 결핍을 몸으로 그린 ‘다크니스 품바’는 무대에 대한 그의 갈증과 허기를 표현하기에 제격일지 모른다. 작품엔 그가 2013년 창단한 ‘모던 테이블’의 남성 무용수 7명이 검은 정장을 입고 등장한다. 이들이 현대판 무당으로 변신해 표현하는 배고픔은 “학대와 멸시를 춤과 노래로 풀어내던 전통적인 품바 타령을 재해석”한 몸짓이다. 김재덕은 공연 중 마이크를 잡아 노래하고, 마치 불경을 외듯 알아들을 수 없는 지베리쉬(Gibberish·횡설수설 말하는 대사)도 한다. 그는 “가수 고 신해철 씨의 ‘모노크롬’ 앨범에서 ‘품바가 잘도 돈다’라는 구절이 한 번 나온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이걸 듣고 나중에 뭘 하든 이 대목을 살려보겠다고 다짐했다”는 창작동기를 밝혔다. 그는 이 구절에 무한 변주를 주면서 작품 음악을 작곡했다. 그는 “다 잘 되라고 기원하는 내용이지만 솔직히 큰 의미는 없다. 모든 비언어적인 춤, 대사 등은 관객이 받아들이고 느끼기 나름”이라며 웃었다. 당초 25분 길이의 작품은 60분으로 확장하면서 서사와 구성을 갖췄다. 2006년 첫 선보인 ‘다크니스 품바’는 무용계에서 꽤 유의미한 역사를 써왔다. 2019년엔 25일 동안 총 30회 공연했다. 대부분 3~4일 공연이 최대인 무용계에선 이례적이었다. 그는 “당시 한 원로 무용가가 ‘존경스럽다’고 전화를 주셔 놀랐다”며 “다만 매일 무대에 섰던 단원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부상위험이 있다’고 털어놨다. 장기공연은 최소 두 팀으로 나눠서 해야할 것 같다”며 멋쩍게 웃었다. 작품은 일찌감치 세계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무용수가 동경하는 영국 ‘더플레이스’, 미국 ‘케네디센터’ 등에도 올랐다. 22개국 38개 도시에서 공연했다. “안무가로서 운 좋게도 비교적 어린 나이에 작품을 인정받았다. 남이 만든 춤보다는 저만의 춤이 통했던 것 같다”고 했다. ‘시나위’는 김재덕 그 자체를 이해하기 좋은 작품이다. 즉흥적으로 알 수 없는 대사를 내뱉으며 격정적으로 움직인다. 그는 “큰 틀은 정해져있지만 작품 중 절반은 즉흥이다. 그때 그때 생각나는 걸 내뱉느라 ‘불가리 향수’ ‘전설의 용사 다간’이라는 말도 내뱉었다”고 했다. 그는 “우린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비언어적인 표현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 그에게 예술이란 “레고처럼 뭔가 끼워 맞춰보고 섞어 무대에서 시험해 보고픈 놀이”에 가깝다. 남보다 뒤늦은 16세 때 무용을 시작했지만 “즐거워서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노는 것을 그만두는 사람은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재즈가수였던 어머니의 영향도 컸다. 김 안무가는 “인간 몸에서 나오는 가장 완벽하고 이상적 움직임이 춤이기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꿈은 소박하다.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단원들과 같이 춤추고 싶어요.” 김기윤기자 pep@donga.com}
우리나라에서 대도시는 물론 중소도시에서도 눈만 돌리면 보이는 게 아파트다. 우리에겐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지만 외국인들 눈에 밀집한 아파트 단지 풍경은 꽤나 신선한 모양이다. 한국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물로 이들은 아파트를 꼽는다. 스웨덴 출신의 한 유명 사진작가는 한국 아파트의 매력에 빠져 이를 렌즈에 담았다. 사각형 모양의 삭막한 콘크리트 건물 사진에는 우리도 미처 몰랐던 아파트만의 미학이 담겨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국민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 살아도 이곳의 문화와 건축, 공간에 대한 입체적인 연구는 많지 않다. 아파트가 투기의 대상으로 떠오른 지 오래인 상황에서 다른 가치들은 쉽게 잊힌 탓이 크다. 저자들은 현재의 아파트 공화국을 이해하기 위해 아파트가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한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경성으로 눈을 돌렸다. 건축학과 교수, 설계 전문가, 주거문화 연구자 등으로 구성된 이들은 도쿄로부터 경성으로 아파트 문화가 전해진 과정과 설계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일본 측 자료를 깊게 연구하기 위해 국내 도시를 답사하며 글을 써온 일본인 저자도 공동 연구에 합류시켰다. 1930년대는 ‘아파트의 시대’라고 불릴 만했다. 경성에서만 약 70곳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한국, 일본, 미국 등에서 모은 아파트 관련 문헌과 기사, 지도, 사진, 도면자료에 따르면 당시 부동산 법령 및 체계는 현재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각종 오락시설이 아파트 안에 들어서는 등 아파트 공간구조와 거주자 구성 변화도 눈길을 끈다. 당초 도시민의 거주난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 아파트이지만 점차 이곳에도 진입장벽이 생기기 시작한다. 높은 집세로 서민들이 어려움을 겪었던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본인 집주인이 집세를 올려 폭리를 취했으며, 인구 급증으로 인해 아파트에 대한 시장 수요는 갈수록 커졌다. 아파트는 점차 늘었지만 학생이나 직장인이 머물 만한 곳은 늘 부족했다. 일제강점기 때 경성 주민들의 주택난이 오늘날의 아파트 대란과 겹쳐 보이는 건 왜일까.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근친상간, 살인, 매장…. 연극 ‘파묻힌 아이’에서는 차마 입에 담기 꺼려지는, 상상조차 버거운 일들이 1970년대 미국의 한 가정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어머니 ‘핼리’와 첫째 아들 ‘틸든’의 충동적 관계로 태어난 한 아이. 이 생명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던 집안의 가장 ‘닷지’는 아이를 죽여 뒷마당에 매장한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흘려보낸 30년. 외부인 ‘셸리’가 이 가정을 방문하면서 가족들은 비로소 쓰디쓴 진실과 마주할 상황에 놓인다. 세상은 과연 이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줄까. 비극의 정점에 선 닷지는 죄를 범하고, 끝내 고백하는 인물. 타고난 이야기꾼, 배우 손병호(59)가 배역을 맡아 끔찍한 서사를 펼쳐낸다. 21일 경기 수원시 경기아트센터에서 만난 그는 ‘40년차 악역 전문 배우’답게 “대본을 보자마자 재밌을 것 같았다. 해석, 연기에 따라 참담한 비극 또는 희비극이 될 수도 있는 여지가 있어 매력적”이라고 했다. 이어 “출연료까지 제대로 받으면서 꿈꾸던 작품에 설 수 있으니 진짜 감사한 일”이라며 웃었다. 작품은 경기도립극단 예술감독인 한태숙 연출가가 맡았다. 국내에선 처음으로 선보이는 라이선스 극이다. 원작은 미국의 유명 배우이자 극작가인 샘 셰퍼드가 썼다. ‘가족 3부작’으로 불리는 시리즈 중 두 번째인 이 작품으로 그는 1979년 퓰리처상 드라마 부문을 수상했다. 강렬하고 야만적인 무대 언어가 작품의 특징. 원시적이면서 무책임한 인물 군상을 통해 가족 붕괴와 ‘아메리칸 드림’의 종말을 말한다. 배우 예수정이 어머니 ‘핼리’를 연기한다. 무대, 스크린, 브라운관을 오가며 일명 ‘악마력’을 쌓은 손병호에게도 배역은 결코 만만찮다. 무대 중앙의 소파에 앉았다 기댔다 누우면서 절대 소파를 벗어나지 않는다. 소파는 그가 지키려는 가정의 권위와 권력을 상징한다. 손병호는 “생명을 유기한 뒤에도 가장으로서 끝내 가정을 부여잡으려 한다. 한편으론 모두 속죄해 털어버리고 새 시작을 바라는 복합적 인간상”이라고 했다. 번역극 특성상 “대사마다 어감, 문맥이 잘못 표현되지 않도록 매일 동료, 제작진과 토론하는 게 숙제”라고 했다. 현실에서도 수많은 비극이 속보로 쏟아지는 시대. 굳이 무대 위에서도 우리가 이 이야기를 봐야 하는 이유는 뭘까. 그는 “현실 속 ‘정인이 사건’이든 극 중 영아 유기든 인간성 말살의 핵심에는 자본주의의 폐해가 있다. 돈 앞에선 가족도 해체되고 도덕과 규범도 쉽게 묻어버리는 게 현실”이라고 짚었다. “비극의 끝까지 치달아봐야 화해도 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1981년 극단 ‘거론’을 시작으로 ‘목화’에서 줄곧 무대에 올랐던 그는 첫 작품인 성극(聖劇) 무대를 떠올리며 “이상하게 그때부터 악역이었다”고 털어놨다. 이후 연극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 ‘블루사이공’ 등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척하지 말자”는 게 그의 연기 지론. 다만 “정답은 없기 때문에 10명 중 7명이 연기에 공감하면 잘하는 게 아니겠냐”고 답했다. 짐승 같은 연기를 벼르는 그는 사실 무대 밖에선 누구보다 유쾌한 이야기꾼이다. 넘치는 끼와 에너지를 발산하는 긍정적 모습이 조명 받으며 ‘예능 블루칩’으로도 통했다. 스스로 “광대 역할은 배우인 제 삶의 목적이자 이유”라고 했다. 그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모두가 즐거워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다고 털어놨다. “국민적 술자리 게임이 된 ‘손병호 게임’도 그래서 탄생한 게 아닐까요.” 5월 27일부터 6월 6일까지 경기아트센터 소극장. 3만, 5만 원. 14세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넷플릭스는 2022년 말까지 온실가스 순 배출 영점화를 달성할 것입니다.” 최근 넷플릭스가 내놓은 환경보호 계획은 2022년까지 탄소 순 배출량을 ‘0’으로 수렴시키겠다는 프로젝트다. 지속가능경영(ESG)이 최근 기업들의 화두라지만, 우리가 보는 드라마·영화가 환경과 크게 무슨 상관인지 의문이 생길 터. 이 때문에 여느 기업들처럼 피상적인 환경보호 구호에 그칠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하지만 넷플릭스가 밝힌 계획을 찬찬히 뜯어보면 사뭇 진지하고 구체적이다. 우선 내부 온실가스 배출량 저감에서 시작한다. 탄소 배출이 불가피하다면 대기에 탄소 유입을 막는 프로젝트에 투자해 올해 말까지 배출량을 완전히 상쇄한다. 마지막 단계서는 초지, 맹그로브, 토양 복원 사업에 직접 투자해 완전한 ‘탈탄소화(decarbonize)’를 계획했다. 60여 명의 과학자들이 머리를 맞대 내놓은 구상은 공허한 외침이라기보다는 꽤 실현 가능해 보이는 목표에 가깝다. 과학자 출신인 에마 스튜어트 넷플릭스 지속 가능성 책임자도 “자연은 넷플릭스가 드리는 약속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콘텐츠 기업들이 환경을 외치고 있다. 기업의 정체성과 환경을 엮어내려는 시도다. 특히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콘텐츠 소비가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면서 배출되는 ‘탄소 발자국’도 급격히 늘어나는 상황. 업계의 위기의식이 커지며 콘텐츠 제작 과정에서도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궁극적으로 기후 위기에 맞서되, 사회적 가치를 고려해 소비하는 MZ세대를 고객층으로 확보하기 위함이라는 분석이다. 글로벌 콘텐츠 기업이자 정보기술(IT) 기업인 구글은 일찌감치 탄소 발자국 줄이기에 앞장서 왔다. 1998년 창사 이래 발생한 모든 온실가스를 지난해 9월까지 모두 제거했다고 밝혔다. 10년 뒤 2030년까지 온실가스를 발생시키지 않는 에너지로 운영할 계획이다. 세계 주요 도시의 디즈니랜드를 중심으로 적극적 행보를 보인 디즈니는 재생에너지 사용 확충에 힘쓰고 있다. 세계적 게임 기업 EA는 게임 제작 과정에서 탄소 발생을 줄이며, 데이터센터에서 발생하는 에너지와 물 사용량을 관리 중이라고 밝혔다. 국내 콘텐츠 기업의 경우 콘텐츠 내용에 직접적인 환경 이슈를 반영하는 추세다. 주로 캠페인적 성격이 강하다. ‘핑크퐁 아기상어’를 만든 스마트스터디의 경우 홍콩, 싱가포르 등지의 비영리단체나 국영기업과 협업해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한 유튜브 영상, 출판물, 뮤지컬 공연 등을 제작 중이다. 콘텐츠 기업의 환경보호 투자는 데이터 사용이 온실가스 배출에 직접적 영향을 준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프랑스 비영리단체 시프트 프로젝트는 유튜브를 비롯한 온라인 동영상을 30분 시청하면, 자동차로 6.3km를 운전할 때 발생하는 이산화탄소와 같은 양이 배출된다고 밝혔다. 넷플릭스를 1시간 스트리밍 하면 자동차로 400m 거리를 운전할 때와 맞먹는 탄소가 발생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기업들의 이 같은 움직임은 팬덤 형성에도 긍정적 영향을 준다. 특히 콘텐츠의 주 소비층이자 잠재적 고객인 MZ세대가 중시하는 가치 소비와 맞닿아 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자신의 가치관을 소비로 표현하는 MZ세대가 콘텐츠 주 소비층으로 부상하고 있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콘텐츠 기업의 모습은 충성 고객 확보에 팬덤 형성에도 긍정적”이라고 설명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닮고 싶은 찐어른”…솔직담백 롤모델, 윤여정에 빠졌다 “노년에 저렇게 멋진 사람이 될 수 있구나”, “고통을 통해 경지에 오른 푸르른 감각”, “또박또박 성실하게 살아온 삶에 경의를 표한다”…. ‘윤여정 신드롬’이 뜨겁다. 한국인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윤여정(74·사진)에게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내는 글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달구고 있다. 윤여정의 매력은 솔직하고 매사 최선을 다하며 남을 배려하는 ‘찐어른’의 모습에서 나온다. 남을 속이거나, 자기의 일을 떠넘기거나, 내로남불에 젖은 ‘무늬만 어른’이 많은 시대에 윤여정은 솔직하다 못해 투명하다. 2018년 SBS ‘집사부일체’에서 “나도 맨날 실수하고 화도 낸다. 인품이 훌륭하지도 않다”며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 살면 된다. 어른이라고 해서 꼭 배울 게 있느냐?”고 한 게 대표적이다. 윤여정은 한발 물러서며 다른 이를 빛내기도 한다. 올해 tvN에서 방영한 ‘윤스테이’에서 외국인 손님들이 음식을 칭찬하자 “(요리를 한) 친구들이 최선을 다했다. 셰프와 훈련을 했고, 집에서도 연습을 많이 했다”며 후배들에게 공을 돌렸다. ‘진짜 어른’의 면모를 발산하는 그를 보며 젊은이들은 힘을 얻고, 자신도 멋진 어른이 되는 길을 그려보기도 한다. 윤여정은 젊은이들도 어려워하는 도전과 소통에도 거침없이 뛰어든다. 남녀, 세대, 국적을 뛰어넘어 그에게 빠져드는 이유다. 사람들이 윤여정을 보며 마음을 열고 열광하는 지점은 가장 중요하지만 실상 지켜지기 어려운 기본 가치에 대한 것들이다. 약속대로 행동하고 권위주의에 물들지 않는 그를 보며 많은 이들이 존중받는다고 느낀다. 전에 없던 롤모델을 찾아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사람들은 인간사 여러 풍파를 온몸으로 겪어낸 한 여성의 모습에 때론 동질감을, 노력과 품격을 잃지 않는 프로의 모습에 때론 동경을 품는다. 윤여정이라는 인간 자체가 가진 탄탄한 스토리텔링이 사람들을 끌어들인다는 평가다. 그는 영화 ‘화녀’로 충무로 최고의 배우로 떠올랐지만 홀연히 결혼해 미국으로 떠났고, 이혼 뒤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제로 상태였다. 배우로서 경력이 단절됐던 그가 다시 바닥부터 시작해 아카데미 트로피를 들고 자신을 일하게 만든 자녀들에게 감사를 전한 것은 다양한 위치에 놓인 사람들의 감정선을 건드렸다. 위로를 받았다는 워킹맘과 경력단절여성들, 감사를 느꼈다는 누군가의 아들딸들이 많았다. 원로 배우이기에 편안하게 많은 걸 누릴 수 있지만 낮은 자세로 연기에 임하는 윤여정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일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돌아보기도 한다. 그는 ‘미나리’ 촬영에 참여하기로 한 후 제작비가 빠듯하다는 얘기를 듣고는 미국행 비행기표를 직접 구입했다. 윤여정은 올해 SBS 웹예능 ‘문명특급’에서 미나리 촬영 당시에 대해 “미국 애들한테 ‘왓(What)?’ 소리 들으면서 난 여기서 진짜 노바디(Nobody)구나, 연기를 잘해서 얘네한테 보여주는 길밖엔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작품을 해야 도전이지”라고 했다. 이어 “감독들한테 ‘이렇게 오래 찍으면 나 간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면 발전을 못 한다”고 말했다. 2013년 예능 ‘꽃보다 누나’에서는 “똥 밟았다 생각할 수 있는 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내가 원치 않는 경험에서도 얻는 것이 있다”고 했다. 움츠러든 이들은 낯설고 거친 상황도 피하지 않는 그를 보며 나아가 보라는 용기를 얻는다. “세상은 서러움 그 자체고, 인생은 불공정, 불공평이다. 그런데 그 서러움은 내가 극복해야 한다. 나는 극복했다”(2017년 tvN ‘택시’)는 말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윤여정은 나이를 막론하고 격의 없이 어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소통하고 관계 맺는 것을 어려워하는 젊은층이 특히 닮고 싶어 하는 모습으로 꼽는다. tvN ‘윤식당’에서 “어른들이 젊은이들에게 ‘너희들이 뭘 알아?’라고 하면 안 된다. 남북통일도 중요하지만 세대 간 소통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한다”고 한 말은 큰 호응을 얻었다. 인생의 숱한 굴곡을 헤쳐 온 그이기에 한마디 한마디에서 진심을 느낀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내 인생만 아쉬운 것 같지만 다 아프고 다 아쉽다”(tvN ‘꽃보다 누나’), “젊을 때는 아름다운 것만 보이겠지만 아름다움과 슬픔이 같이 간다”(tvN ‘택시’)는 말이 공감을 자아내는 이유다. 특히나 젊은이들이 윤여정에게 열광하는 이유가 이런 굴곡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윤여정은 늘 1등 자리에 머물며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배우가 아니라 지나칠 정도의 굴곡이 있었던 사람”이라며 “최근 박탈감이나 좌절감을 많이 느끼는 젊은 세대들이 꾸준히 노력해 자기 분야에서 끝내 성공하는 윤여정의 모습을 보면서 위안을 얻고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형적인 틀을 거부하는 행보도 신선함을 선사한다. 2005년 일일드라마 ‘굳세어라 금순아’에서 그는 주인공 금순(한혜진)의 할머니 역을 맡았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결혼을 반대하는 시어머니 역에 머무르지 않겠다. 뻔한 역을 할 거면 어머니 역을 건너뛰고 할머니 역을 해도 괜찮다”고 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윤여정은 자신의 생각대로 선택하되 이를 강요하지 않고 각자 판단하게 한다”며 “젊은층이 기성세대에 대해 가졌던 편견을 깨게 돼 즐거워하고 환호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윤며들다.’ 사람들이 윤여정에게 스며드는 현상을 의미하는 말이다.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온 그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노년에 저렇게 멋진 사람이 될 수 있구나”, “고통을 통해 경지에 오른 푸르른 감각”, “또박또박 성실하게 살아온 삶에 경의를 표한다”…. ‘윤여정 신드롬’이 뜨겁다. 한국인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윤여정(74·사진)에게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내는 글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달구고 있다. 윤여정의 매력은 솔직하고 매사 최선을 다하며 남을 배려하는 ‘찐어른’의 모습에서 나온다. 남을 속이거나, 자기의 일을 떠넘기거나, 내로남불에 젖은 ‘무늬만 어른’이 많은 시대에 윤여정은 솔직하다 못해 투명하다. 2018년 SBS ‘집사부일체’에서 “나도 맨날 실수하고 화도 낸다. 인품이 훌륭하지도 않다”며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 살면 된다. 어른이라고 해서 꼭 배울 게 있느냐?”고 한 게 대표적이다. 윤여정은 한발 물러서며 다른 이를 빛내기도 한다. 올해 tvN에서 방영한 ‘윤스테이’에서 외국인 손님들이 음식을 칭찬하자 “(요리를 한) 친구들이 최선을 다했다. 셰프와 훈련을 했고, 집에서도 연습을 많이 했다”며 후배들에게 공을 돌렸다. ‘진짜 어른’의 면모를 발산하는 그를 보며 젊은이들은 힘을 얻고, 자신도 멋진 어른이 되는 길을 그려보기도 한다. 윤여정은 젊은이들도 어려워하는 도전과 소통에도 거침없이 뛰어든다. 남녀, 세대, 국적을 뛰어넘어 그에게 빠져드는 이유다.김기윤 pep@donga.com·김태언 기자}
절실했다. 먹고살아야 했다. 두 아이가 엄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를 혹독하게 담금질했다. 역경과 도전, 때로는 삐딱한 시선 속에 55년 연기 인생을 달려온 윤여정(74)은 마침내 배우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사랑하는 아들들아, 이게 엄마가 열심히 일한 결과란다”라고 말했다.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상 트로피를 손에 쥐고 활짝 웃으며. 1966년 데뷔해 90여 편의 드라마, 33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한국에서는 대체 불가능한 배우로 자리매김한 윤여정은 이제 세계무대의 중심에 섰다. 25일(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그의 할리우드 데뷔작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다. 지난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까지 4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지만 배우상은 넘어서지 못한 영역이었다. 윤여정은 스스로를 ‘생계형 배우’라고 칭해 왔지만 이제 명실상부한 오스카의 여왕이 됐다. 그는 “운이 좀 더 좋았을 뿐”이라고 겸손한 수상 소감을 밝혔다. 그러나 이날의 영예는 그저 운이나 우연이 아니었다. 윤여정은 시상식 이후 기자회견에서 “한순간에 이뤄진 게 아니다. 나는 경력을 쌓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노력했다”면서 “세상에 펑(BANG) 하고 일어나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향후 계획에 대해 “살던 대로”라며 “민폐가 되지 않을 때까지 이 일을 하다 죽으면 좋을 것 같다”고 담담하게 밝혔다. 윤여정의 ‘위대한 여정’은 진행형인 셈이다. 한편 윤여정의 수상은 아시아계 배우 중에서는 1957년 ‘사요나라’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우메키 미요시(일본)에 이어 두 번째다. “‘1등’ ‘최고’만 고집말고 다같이 ‘최중’이 되면 안되나” 배우 윤여정의 솔직하고 재치 있는 언변은 또다시 세계를 들었다 놨다. 유머로 아카데미를 폭소케 했으며, 진심 어린 고백으로 영화계를 감동시켰다. 윤여정은 25일(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유니언스테이션, 돌비극장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 수상 소감에서 “많은 유럽 사람들이 제 이름을 ‘여영’이라거나 ‘유정’으로 부르는데 오늘은 모두 용서하겠다”며 좌중을 웃게 했다. 그는 이어 “제가 운이 조금 더 좋았을 뿐”이라며 같은 부문에 오른 후보들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특히 ‘힐빌리의 노래’에 출연한 배우 글렌 클로스에 대해 “제가 어떻게 글렌 클로스를 이길 수 있겠나. 그의 영화를 정말 많이 봤다. 5명 후보가 모두 각자 영화에서의 수상자”라고 했다. 윤여정이 수상 소감에서 브래드 피트를 언급한 뒤 그를 당황케 하는 질문도 있었다. 시상식 백스테이지에서 한 외국 기자가 윤여정에게 ‘브래드 피트에게서 무슨 냄새가 났느냐(What did Brad Pitt smell like)’고 물은 것. 윤여정은 “나는 그의 냄새를 맡지 않았다. 나는 개가 아니다”라고 재치 있는 답을 날렸다. 일각에서는 ‘smell like’가 냄새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유명인을 만났을 때의 기분을 묻는 뜻으로 쓰인다는 해석도 있지만 공식 석상에서 부적절한 질문이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뒤이어 열린 한국 언론과의 간담회에서 윤여정은 보다 깊은 속내를 털어놨다. 배우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때에 도리어 “최고의 순간이 싫다”고 했다. 그는 “이게 최고의 순간인지 잘 모르겠다. 아카데미가 전부는 아니다”라며 “굳이 너무 ‘1등’ ‘최고’만 고집하지 말고 다 같이 ‘최중’이 되면 안 되나?”라고 반문했다. 향후 계획에 대해 “계획 없다. 오스카상을 탔다고 해서 윤여정이 김여정이 되는 건 아니다”라며 웃었다. 그는 “주변에서 제가 상을 받을 것 같다고 했는데 솔직히 안 믿었다. 요행수도 안 믿는 사람이고 인생을 오래 살며 배반을 많이 당해 봤기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연기 철학에 대해선 “열등의식에서 시작됐다. 열심히 대사를 외워 남에게 피해를 안 주는 게 시작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절실하게 연기했다. 대본이 저한테는 성경 같았다”고 회고했다. 윤여정은 영화 ‘미나리’가 세계적으로 호평받는 이유를 잘 쓴 대본과 제작진의 공으로 돌렸다. 그는 “부모가 희생하는 건 국제적으로 보편적인 이야기인 데다 모두가 진심으로 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어 “정말 진심으로 얘기를 썼다. 그게 늙은 나를 건드렸다”고 덧붙였다. 리 아이작 정 감독에 대한 신뢰도 묻어났다. 그는 “우리 아들보다도 어린 감독인데 현장에서 누구도 업신여기지 않고 차분하게 여러 사람을 존중하며 일했다. 그에게 존경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작품을 선정하는 기준에 대해 그는 “전에는 성과가 좋을 것 같은 작품을 했는데 환갑 넘어서부터 혼자 약속한 게 있다. 사람이 좋으면 한다는 것.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사치스럽게 사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말하기 어려운 돈 이야기도 거침없이 했다. 그는 “브래드 피트가 우리 영화의 제작자여서 다음에 영화 만들 때는 돈 좀 더 써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조금 더 쓰겠다고 하더라. 크게 쓰겠다고는 안 하고”라고 해 웃음을 자아냈다. 시상식에서는 브래드 피트에게 “드디어 만났네. (미국) 털사에서 우리가 (‘미나리’를) 촬영할 땐 어디 있었던 거예요?”라고 물어 폭소가 터졌다. 그는 수상 직전까지 2002 한일 월드컵 대표팀, 김연아 선수 등 운동선수의 심정에 이입했다고 했다. “아무 계획도 없이 영화를 찍으며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어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응원하니까 몸에 힘이 들어가 눈 실핏줄이 다 터졌어요. 상을 타서 성원에 보답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고 영광스러워요.”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김기윤 기자 pep@donga.com / 로스앤젤레스=유승진 특파원}
배우 윤여정의 솔직하고 재치 있는 언변은 또다시 세계를 들었다 놨다. 유머로 아카데미를 폭소케 했으며, 진심 어린 고백으로 영화계를 감동시켰다. 윤여정은 25일(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유니언스테이션, 돌비극장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 수상 소감에서 “많은 유럽 사람들이 제 이름을 ‘여영’이라거나 ‘유정’으로 부르는데 오늘은 모두 용서하겠다”며 좌중을 웃게 했다. 그는 이어 “제가 운이 조금 더 좋았을 뿐”이라며 같은 부문에 오른 후보들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특히 ‘힐빌리의 노래’에 출연한 배우 글렌 클로스에 대해 “제가 어떻게 글렌 클로스를 이길 수 있겠나. 그의 영화를 정말 많이 봤다. 5명 후보가 모두 각자 영화에서의 수상자”라고 했다. 윤여정이 수상 소감에서 브래드 피트를 언급한 뒤 그를 당황케 하는 질문도 있었다. 시상식 백스테이지에서 한 외국 기자가 윤여정에게 ‘브래드 피트에게서 무슨 냄새가 났느냐(What did Brad Pitt smell like)’고 물은 것. 윤여정은 “나는 그의 냄새를 맡지 않았다. 나는 개가 아니다”라고 재치 있는 답을 날렸다. 일각에서는 ‘smell like’가 냄새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유명인을 만났을 때의 기분을 묻는 뜻으로 쓰인다는 해석도 있지만 공식 석상에서 부적절한 질문이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뒤이어 열린 한국 언론과의 간담회에서 윤여정은 보다 깊은 속내를 털어놨다. 배우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때에 도리어 “최고의 순간이 싫다”고 했다. 그는 “이게 최고의 순간인지 잘 모르겠다. 아카데미가 전부는 아니다”라며 “굳이 너무 ‘1등’ ‘최고’만 고집하지 말고 다 같이 ‘최중’이 되면 안 되나?”라고 반문했다. 향후 계획에 대해 “계획 없다. 오스카상을 탔다고 해서 윤여정이 김여정이 되는 건 아니다”라며 웃었다. 그는 “주변에서 제가 상을 받을 것 같다고 했는데 솔직히 안 믿었다. 요행수도 안 믿는 사람이고 인생을 오래 살며 배반을 많이 당해 봤기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연기 철학에 대해선 “열등의식에서 시작됐다. 열심히 대사를 외워 남에게 피해를 안 주는 게 시작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절실하게 연기했다. 대본이 저한테는 성경 같았다”고 회고했다. 윤여정은 영화 ‘미나리’가 세계적으로 호평받는 이유를 잘 쓴 대본과 제작진의 공으로 돌렸다. 그는 “부모가 희생하는 건 국제적으로 보편적인 이야기인 데다 모두가 진심으로 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어 “정말 진심으로 얘기를 썼다. 그게 늙은 나를 건드렸다”고 덧붙였다. 리 아이작 정 감독에 대한 신뢰도 묻어났다. 그는 “우리 아들보다도 어린 감독인데 현장에서 누구도 업신여기지 않고 차분하게 여러 사람을 존중하며 일했다. 그에게 존경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작품을 선정하는 기준에 대해 그는 “전에는 성과가 좋을 것 같은 작품을 했는데 환갑 넘어서부터 혼자 약속한 게 있다. 사람이 좋으면 한다는 것.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사치스럽게 사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말하기 어려운 돈 이야기도 거침없이 했다. 그는 “브래드 피트가 우리 영화의 제작자여서 다음에 영화 만들 때는 돈 좀 더 써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조금 더 쓰겠다고 하더라. 크게 쓰겠다고는 안 하고”라고 해 웃음을 자아냈다. 시상식에서는 브래드 피트에게 “드디어 만났네. (미국) 털사에서 우리가 (‘미나리’를) 촬영할 땐 어디 있었던 거예요?”라고 물어 폭소가 터졌다. 그는 수상 직전까지 2002 한일 월드컵 대표팀, 김연아 선수 등 운동선수의 심정에 이입했다고 했다. “아무 계획도 없이 영화를 찍으며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어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응원하니까 몸에 힘이 들어가 눈 실핏줄이 다 터졌어요. 상을 타서 성원에 보답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고 영광스러워요.”김기윤 기자 pep@donga.com / 로스앤젤레스=유승진 특파원}
윤여정은 미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큰 갈등을 빚고 있는 인종 문제에 대해 소신 발언을 내놓았다. 25일(현지 시간) 시상식 후 미국 아카데미 측이 마련한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최근 아시아 영화의 약진과 할리우드의 다양성 확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윤여정은 “사람을 인종으로 분류하거나 나누는 것은 좋지 않다. 심지어 무지개도 7가지 색깔이 있다. 모든 색을 합쳐서 더 예쁘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고 백인, 흑인, 황인종으로 나누거나 게이와 아닌 사람을 구분하고 싶지 않다. 서로를 끌어안아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날 국내 언론 간담회에서는 “우리가 지금 너무 안됐지 않나. 동양 사람들에게 아카데미의 벽은 너무 높다. 아카데미의 벽이 ‘트럼프 월’보다 높은 벽이 됐다고 할 정도”라고 말했다. 인종 차별을 다룬 여러 영화 중 ‘미나리’만의 차별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이탈리아 사람으로 성공하고 인종 차별을 극복한 이런 영화를 우리 너무 많이 보지 않았느냐”며 “그에 비해 심심하고 MSG도 안 들어간 영화를 누가 좋아할까 걱정했다. 우리의 진심으로 만든 영화고, 그 진심이 통한 것 같아서 기쁘다”고 했다. 앞서 다른 시상식에서도 그는 인종 문제에 대한 여러 발언으로 공감과 호응을 얻어왔다. 11일 열린 영국 아카데미상(BAFTA) 여우조연상 수상 소감은 모두를 웃게 했지만 뼈가 있는 발언이었다. 윤여정은 “모든 상이 의미 있지만 이번 상이 특별히 고마운 이유는 콧대 높고, 고상한 체하는 영국 사람들이 나를 좋은 배우로 알아봐줬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표현한 영단어 ‘snobbish’는 ‘콧대 높은’ ‘고상한 체하는’ ‘젠체하는’의 의미를 지닌 형용사다. 이날 시상식 방송 주관사인 BBC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우리가 가장 좋아한 수상 소감”이라고 밝혔다. 이후 미국 매체 버라이어티와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아시아 여성으로서 (영국 사람들은) 고상한 체한다고 느꼈다. 그게 내 솔직한 느낌”이라고 덧붙였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윤여정은 미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큰 갈등을 빚고 있는 인종 문제에 대해 소신 발언을 내놓았다. 25일(현지시간) 시상식 후 미국 아카데미 측이 마련한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최근 아시아 영화의 약진과 할리우드의 다양성 확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윤여정은 “사람을 인종으로 분류하거나 나누는 것은 좋지 않다. 심지어 무지개도 7가지 색깔이 있다. 모든 색을 합쳐서 더 예쁘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고 백인, 흑인, 황인종을 나누거나 게이와 아닌 사람을 구분하고 싶지 않다. 서로를 끌어안아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날 국내 언론 간담회에서는 “우리가 지금 너무 안됐잖아요. 동양 사람들에게 아카데미의 벽은 너무 높다. 아카데미의 벽이 ‘트럼프 월’보다 높은 벽이 됐다고 할 정도”라고 말했다. 인종 차별을 다룬 여러 영화 중 ‘미나리’만의 차별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이탈리아 사람으로 성공하고 인종 차별을 극복한 이런 영화를 우리 너무 많이 보지 않았느냐”며 “그에 비해 심심하고 MSG도 안 들어간 영화를 누가 좋아할까 걱정했다. 우리의 진심으로 만든 영화고, 그 진심이 통한 것 같아서 기쁘다”고 했다. 앞서 다른 시상식에서도 그는 인종 문제에 대한 여러 발언으로 공감과 호응을 얻어왔다. 11일 열린 영국 아카데미상(BAFTA) 여우조연상 수상 소감은 모두를 웃게 했지만 뼈가 있는 발언이었다. 윤여정은 “모든 상이 의미 있지만 이번 상이 특별히 고마운 이유는 콧대 높고, 고상한 체 하는 영국 사람들이 나를 좋은 배우로 알아봐줬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표현한 영단어 ‘snobbish’는 ‘콧대 높은’ ‘고상한 체하는’ ‘젠체하는’의 의미를 지닌 형용사다. 이날 시상식 방송 주관사인 BBC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우리가 가장 좋아한 수상 소감”이라고 밝혔다. 이후 미국 매체 버라이어티와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아시아 여성으로서 (영국 사람들은) 고상한 체 한다고 느꼈다. 그게 내 솔직한 느낌”이라고 덧붙였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당신은 이 그림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앙상한 두 팔로 힘겹게 몸을 지탱한 여성. 그녀는 마른 풀이 무성한 들판에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외롭게 앉아 있다. 미묘하고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 그림에서 누군가는 동경을 읽어냈고, 다른 이는 동정심을 떠올렸다. 혹자는 인간 불굴의 의지와 정신력까지도 느꼈다고 한다. 미국 국민화가로 불리는 앤드루 와이어스(1917∼2009)가 명성을 얻게 된 건 그가 31세인 1948년에 내놓은 이 그림 ‘크리스티나의 세계(Christina‘s World)’ 덕분이다. 그림 속 모델은 미국 메인주에 살던 애나 크리스티나 올슨(1893∼1968)으로 와이어스가 알고 지내던 이웃이자 친구였다. 퇴행성 근육 질환을 앓던 그녀는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악화했지만 휠체어 사용을 거부했다. 그는 두 팔로 하체를 끌며 기어 다니는 것을 선호했다. 와이어스가 영감을 받아 화폭에 담은 그림은 현재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대표 소장품 중 하나다. ‘미국의 모나리자’로도 불리며 지금껏 많은 이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그림은 저자에게도 꽤나 큰 영감을 준 모양이다. 영국 태생으로 미국에서 소설가로 활동한 저자는 2013년 소설 ‘고아 열차’로 이름을 알렸다. 다음 작품을 위해 소재를 찾던 중 이 그림을 떠올렸다. 그림에 담긴 이야기와 직접 취재한 실존 인물의 삶을 토대로 거침없이 상상력을 뻗어냈다. 공교롭게도 미국 메인주에서 유년을 보내 그림 속 풍경이 익숙했던 저자는 후에 ‘크리스티나’라는 같은 이름을 가졌던 그림 속 모델에 묘하게 이입했다고 밝혔다. 책은 크리스티나가 세 살 때인 1896년에 시작하는 과거와 화가 앤드루 와이어스와 그녀가 만난 1939년 현재가 교차하며 진행된다. 소설은 그녀의 삶을 상상해 그린 일대기다. 동시에 그녀 마음속 여러 심경의 갈래를 훑어가는 지도를 보는 듯하다. 어린 시절 열병을 앓은 주인공 크리스티나는 장애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하고 활기가 넘쳤다. 왕복 5km가 넘는 거리를 걸어 등교했고 학업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큰 농장을 짓고 살았던 그녀의 가족에겐 노동력이 더 절실했다. 학업을 중단한 채 그녀는 결국 집안일을 도맡았다. 와이어스와의 만남은 휴가 차 메인주 쿠싱에 놀러왔던 소녀 뱃시의 소개로 성사됐다. 처음엔 인근 풍경, 집 그리기에 관심이 있던 그는 크리스티나 내면에 숨쉬고 있던 세상에 대한 갈망을 포착했다. 그녀에겐 매일 보는 집, 언덕, 들판이 세상의 전부였다. 하지만 와이어스의 그림에서 그녀는 더 넓은 세상을 외치고 있는 듯하다. 미국 농가의 목가적 풍경 속에 묻어나는 인간의 세심한 감정선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최근 영화 ‘미나리’에서 의상감독을 맡은 한국계 디자이너 수재나 송도 그림 속 크리스티나로부터 영감을 받아 극 중 모니카(한예리) 캐릭터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고 밝혔다. 그림이 갖는 형언할 수 없는 매력을 활자로 느껴보고 싶다면 책이 도움을 줄 수 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이 채널은 자막 보려고 구독합니다.” 유튜브 ‘디스커버리 서바이벌’은 이른바 ‘자막 맛집’으로 유명한 채널이다. 채널 특성상 ‘인간과 자연의 대결’, ‘고독한 생존가’ 등 외국 자연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주로 편집해 방송한다. 소수 마니아층이 선호하는 ‘건조한’ 프로그램이 많지만, 채널은 자막의 날개를 달고 구독자가 120만 명에 이를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해외 다큐멘터리에서 자막은 출연자의 발언을 전달하는 수단이었지만 이 채널에선 새로운 맛을 입힌다. 영국 출신 탐험가 베어 그릴스가 사냥에 실패해 힘들어하는 상황에서 “형, 오늘 분량 부족하다”는 편집자의 속마음을 자막으로 넣는다. 그가 사냥한 물고기를 먹기 전 말없이 웃는 장면에는 하단에 “헿♥”라는 자막을 삽입해 보는 재미와 몰입도를 높인다. 시청자들은 “위험한 상황에서도 자막은 늘 유쾌하다”, “편집자 자막이 프로그램 살렸다”는 반응이다. 자막이 진화하며 프로그램에 재미와 의미를 더하는 독자적 콘텐츠로 거듭나고 있다. 특히 유튜브 플랫폼은 기존 방송 매체에 비해 심의가 적어 편집자의 재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편이다. 출연자의 숨소리, 먹는 소리부터 실제 편집자의 속마음까지 프로그램과 관련한 모든 게 자막이 될 수 있다. 최근 인기를 끄는 유튜브 채널은 자막의 역할이 크다. 특히 의성어 활용이 눈에 띈다. 유튜브 채널 ‘네고왕’에서는 장영란이 떡볶이를 먹는 장면에서 “호롭 짭 쭈압 Z”이란 자막을 쓰거나 “먹어봐↘요”처럼 말의 억양까지도 구현했다. 개그맨 이창호, 이은지가 출연한 웹예능 ‘해장님’에서는 세수하는 장면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푸르frfrrrrfr”라고 표현했다. 웃음은 “으Y하하”라고 적고 술에 취한 연기를 하면서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는 출연자의 말은 “한 꿔 이ㅏㅏㄹ”라는 식으로 쓴다. 출연자가 한 발언과 전혀 반대의 의미의 자막을 사용해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유튜브 채널 ‘하승진 HASEUNGJIN’을 운영 중인 전 농구선수 하승진은 한국 프로농구팀의 회식 문화를 설명하는 콘텐츠를 촬영했다. 그는 “우승한 뒤 갖는 회식 자리는 위계질서가 전혀 없는 날이다. 심지어 감독님한테 형이라고 부르는 애들도 있다”고 한 뒤 “나는 물론 안 그랬지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화면 하단엔 “내가 그랬어”로 자막이 나갔다. 시청자들은 “속마음을 읽는 자막”이라는 댓글을 남겼다. 형식, 문법에도 제약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과거 출연자의 얼굴 모양을 활용하는 자막이 인기를 끌다 최근에는 신체 여러 부위도 활용된다. 출연자의 웃음소리를 형상화한 글자가 화면 여기저기로 날아다니는 효과도 구현한다. ‘워크맨’은 숫자, 기호, 이미지도 자막으로 활용해 인기가 높은 채널이다. 유튜브는 물론 방송사 제작진도 자막에 더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한 지상파 예능 PD는 “유튜브 콘텐츠는 자막에서 승부가 난다고 할 정도로 재기 넘치는 자막 편집이 돋보인다”며 “자막이 화제가 되는 콘텐츠를 공유하며 논의하고 시청자들의 댓글도 면밀히 살펴보며 참신하고 재미있는 자막 아이디어를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무대에 대한 애정이 큰 만큼 쓴소리로 대학로를 때린다. 원래 고됐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더 팍팍해진 공연계를 향해 전·현직 배우들이 책과 유튜브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 주인공은 배우 김윤후(34)와 전병준(33). 이들이 털어놓는 이야기엔 배우로서 겪은 부당하고 억울한 일도 많다. 하지만 억울함과 보상을 논하기보다는 동료, 선후배들이 기쁘고 떳떳하게 무대에 오를 날을 꿈꾼다. 12년 차 대학로 연극·뮤지컬 배우인 김윤후는 ‘나는 대학로 배우입니다’를 펴냈다. 그는 연극 ‘작업의 정석’ ‘루나틱’ 등에 출연했다. 최근 서울역 인근 카페에서 만난 그는 “운 좋게도 10년 넘게 무대에 섰다. 대학로 임대료가 오르며 제작자도 힘겨워하는 걸 봤다. 코로나19까지 겹치자 배우 임금은 더 줄었고, 설 무대도 사라지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주중 무대에도 오르던 그는 요즘엔 연극 ‘연애하기 좋은 날’의 금·토·일 공연에만 출연한다. 그 외 시간엔 배달이나 다른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는 “제 경험담으로 대학로가 다시 조명받고, 부활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했다. 책에는 제작자가 두 달간 연습을 시키고는 공연이 갑자기 취소됐다며 연습 수당도 지불하지 않은 사례가 나온다. 배우들이 제작자의 집 앞에 찾아가 울며 사정했지만 돌아온 답은 “어쩔 수 없다”는 말뿐이었다. 수년간 동고동락하다 다단계 영업사원이 되거나 유흥업소로 떠나는 동료 배우들의 모습도 그려졌다. 그는 “임금 미지급, 공연 취소 통보, 캐스팅 변경, 생활고로 숱한 동료들이 무대를 떠났다”며 “하루아침에 모든 게 바뀌진 않아도 불공정한 관행에 상처받아 꿈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삼총사’를 비롯해 여러 뮤지컬 무대에 오르던 전병준은 자신의 유튜브 채널 ‘전병준의 Our Records 아워 레코즈’에서 애정 어린 쓴소리를 전한다. 그는 현재 배우 활동은 중단한 채 공연계와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있다. 유튜버이자 가수로 활동하며, 뮤지컬 넘버 커버 영상도 올린다. 그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해외에서는 임금이 미지급되면 배우들이 전부 공연을 보이콧하거나 제작사 관계자를 추방할 정도로 큰 일로 여기지만 한국에선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며 “배우의 힘이 약하고, 제작자가 너무 쉽게 작품을 만들어 손익분기점만 넘기려 하는 관행 때문이다”라고 일침을 가했다. 공개 오디션을 진행하면서 감독이나 제작자가 교수로 있는 학교 학생들을 캐스팅한 사례도 있다고 밝혔다. 그는 뮤지컬 배우 지망생들에게도 애정 어린 조언을 하기로 유명하다. 그는 “너무 간절하면 안 된다. 무대가 간절한 배우들은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화려해 보이고 돈을 잘 벌 것 같은 겉모습에만 빠져선 안 된다”고 충고했다. 배우의 목소리는 공연계 밖으로 나오기 쉽지 않다. 극소수의 톱 배우를 빼고는 연출자, 제작자에게 선택받아야만 하는 배우들의 특성상 비판은 캐스팅 과정에서 보복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 익명으로 목소리를 내더라도 ‘판이 좁아’ 금세 색출당하는 일도 많다. 김 배우는 “경험담을 ‘순한 맛’으로 표현했는데도 동료들은 ‘이렇게 적나라해도 괜찮겠냐’며 걱정했다”며 “시련을 안 겪는 게 제일 좋겠지만 이왕이면 꿈을 포기하지 말고 함께 시련을 이겨내자는 취지”라고 했다. 전 배우는 “돈 문제와 인맥으로 얼룩진 대학로가 바뀌길 바란다”고 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웃음을 잃은 시대. 웃음거래소 ‘웃지모텔’에선 방문객이 한 번 웃을 때마다 돈을 지불한다. 금액은 1000만 원. 웃지 못하는 당신, 돈으로라도 웃음을 구매하시겠습니까? 유튜브 채널 ‘유병재’는 최근 웃지 못하는 모텔 ‘웃지모텔’이라는 콘텐츠를 선보였다. 빌린 실제 모텔 건물 한 채를 유병재가 돌아다니며 방마다 머무는 개그맨, 출연진의 코미디를 관람하는 콘텐츠다. 유병재는 “나는 절대 못 웃긴다. 여러 번 웃길 수 있으면 몇천만 원, 몇억이라도 낼 자신 있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건물을 다 돌았을 때쯤 그의 현금 가방서 수천만 원이 탈탈 털렸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 코미디 ‘전유성을 웃겨라’를 묘하게 섞은 이 콘텐츠는 서사와 실험성을 갖춰 마지막 7회까지 큰 호응을 얻었다. 이 웃음판을 깔고 기획한 건 코미디언이자 방송작가인 유병재(33)와 ‘밈의 달인’ 김성하 샌드박스네트워크 PD(32). 14일 서울 용산구 샌드박스 사옥에서 만난 두 사람은 “개그 전문가들이 잘 짜놓은 ‘웃음실험관’에 유병재라는 염산 한 방울을 떨어뜨려 화학반응을 지켜보는 마음이었다”고 밝혔다. 발단은 올해 1월 유병재가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누가 나 좀 웃겨줬으면 좋겠다” “웃기면 1000만 원도 주겠다”는 발언이었다. 이 ‘실언’을 들은 그의 매니저 유규선과 김 PD는 바로 내기를 걸고 작당을 시작했다. 판을 점점 키우더니 유병재는 사비 총 1억 원을 준비해 모텔로 입장했다. 유병재는 “워낙 잘 웃지 않는 데에 자부심 아닌 자부심이 있었다”고 했다. 김 PD는 “도전의식이 생겼다. 개그 달인들을 섭외하는 게 관건이었다”고 했다. 콘텐츠에는 김준호, 윤성호, 안일권 등 기성 개그맨부터 최근 인기를 끈 ‘피식대학’의 멤버 이용주 정재형 김민수와 이창호를 비롯해 유병재의 친누나까지 출연한다. 방법이야 어떻든 그를 웃게 해 1000만 원을 타는 게 목적. 이들 앞에서 안면근육을 부여잡고 웃음을 참는 유병재를 보는 것도 웃음 포인트다. 유병재는 개그맨 하준수, 최우선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최우선은 미모의 여성이 자신을 악착같이 따라다닌다는 상황극을 연출했다. 무릎 꿇고 바지 끝에 매달린 여성에게 “셋을 셀 때까지 손을 놓으라”고 하다 막상 손을 놓으면 “아니, 진짜 놓진 말고” 식의 역할극을 감칠맛 나게 했다. 1970년대 유랑극단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흉내 낸 피식대학 개그맨들도 웃음을 이끌어냈다. 유병재는 “봉준호 감독이 말한 ‘삑사리의 미학’이 웃음에도 있다. 의도치 않은 실수에서 웃음이 터져버렸다. 1억 원짜리 객기를 부린 게 후회스럽지만, 코미디를 즐기는 입장에서 고마운 콘텐츠”라고 했다. 김 PD는 ‘밈(meme·인터넷에서 유행하는 특정 문화 요소나 콘텐츠)’을 잘 활용하는 편집자로 인기가 높다. 그는 “시청자들은 유튜브 댓글에 콘텐츠의 웃긴 포인트, 배경지식을 설명해둔다. 그 덕분에 밈의 활용이 자유롭다”고 답했다. ‘웃지모텔’을 본 후 “고맙다” “따뜻하다”는 반응도 많다. 설 자리가 줄어든 개그맨이 재조명받도록 돕는다는 맥락에서다. 유병재는 “제가 누군가를 돕는다는 표현은 건방지다. 채널이 다 같이 재밌게 놀 수 있는 플랫폼이 되길 바랄 뿐”이라고 했다. 2019년 ‘카피추’라는 캐릭터로 사랑받은 개그맨 추대엽도 그의 채널을 통해 조명받기 시작했다. 시즌2 제작 요청에 이들은 “시즌2 준비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출연자를 공개모집하거나 유병재가 타인을 웃기는 방식도 고민 중이다. 김 PD는 “개그 능력을 평가하는 자리가 아니라 같이 웃음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답했다. 왜 이들은 매일 웃음에 골몰하는가. 유병재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분들도 누군가를 웃기고 싶어 하는 모습을 자주 봤다. 웃음은 우리 상상보다 큰 존재”라고 답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모두가 웃음을 잃은 시대. 웃음거래소 ‘웃지모텔’에선 방문객이 한 번 웃을 때마다 그 대가로 돈을 지불한다. 금액은 1000만 원. 웃지 못하는 당신, 돈으로라도 웃음을 구매하시겠습니까? 유튜브 채널 ‘유병재’는 최근 웃지 못하는 모텔 ‘웃지모텔’이라는 콘텐츠를 선보였다. 경기 파주에 있는 실제 모텔 건물 한 채를 빌린 뒤 유병재가 이곳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방마다 머무는 개그맨, 출연진의 코미디를 관람하는 콘텐츠다. 요즘 웃음을 잃었다는 유병재는 촬영 전 “나는 절대 못 웃긴다. 여러 번 웃길 수 있으면 몇 천만 원, 몇 억이라도 낼 자신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그가 건물을 다 돌았을 때쯤엔 사비 수천만 원이 탈탈 털렸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 코미디 ‘전유성을 웃겨라’를 묘하게 섞은 이 콘텐츠는 기존 유튜브에서는 볼 수 없던 서사와 실험성을 갖췄다. 마지막 7회까지 큰 인기를 끌었으며, 시즌2를 요구하는 구독자들의 목소리도 많다. 이 웃음의 판을 깔고 기획한 건 코미디언이자 방송작가인 유병재(33)와 ‘밈의 달인’ 김성하 샌드박스네트워크 PD(32). 14일 서울 용산구 샌드박스 사옥에서 만난 두 사람은 “코미디 전문가들이 잘 짜놓은 ‘웃음 실험관’ 안에 유병재라는 염산 한 방울을 떨어뜨려 화학 반응을 지켜보는 마음이었다”며 “전 국민이 열광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만족할 만한 뜨거운 반응을 얻어 감사하다”고 밝혔다. 콘텐츠의 발단은 1월 유병재가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누가 나 좀 웃겨줬으면 좋겠다” “웃기면 1000만 원도 주겠다”는 발언이었다. 이 ‘실언’을 들은 그의 매니저 유규선과 김 PD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내기를 걸어 작당을 시작했다. 판을 키워 유병재는 사비 총 1억 원을 준비해 모텔로 입장했다. 유병재는 “감정이 뜨겁거나 잘 웃는 성격이 아니다. 워낙 잘 웃지 않는 데에 자부심 아닌 자부심이 있다”고 했다. 김 PD는 “유병재 씨가 워낙 웃지 않는 걸 알고 있어 도전의식도 생겼다. 여러 개그 달인들을 섭외하는 게 관건이었다”고 했다. 콘텐츠에는 다수의 개그맨, 방송인, 배우를 비롯해 유병재의 친누나까지 출연한다. 웃기는 방법이야 어떻든 유병재가 이빨을 드러내고 웃기만을 기다렸다가 1000만 원을 받아가는 게 이들의 목적. 개그맨 김준호, 윤성호, 안일권부터 최근 인기를 끄는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 멤버도 나왔다. 이들의 개그와 안면근육을 부여잡고 웃음을 참는 유병재를 지켜보는 게 시청자들의 웃음 포인트다. 유병재는 “봉준호 감독님이 말씀하신 ‘삑사리의 미학’이라는 게 웃음에서도 있는 것 같다. 개그맨 윤성호, 최우선 씨가 출연한 에피소드처럼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실수들을 보고 웃음이 육성으로 터져버렸다”고 했다. 이어 “1억 원짜리 객기를 부려 후회스럽기도 하지만, 코미디를 즐기는 참가자 입장에서 고마운 콘텐츠였다”고 했다. 김 PD는 앞서 ‘디스커버리 채널 코리아’ ‘사사로운 스튜디오’ 등에서 ‘밈(meme·유행하는 특정 문화 요소나 콘텐츠)’을 잘 활용하는 편집자로 인기가 높았다. 그가 맡은 프로그램만 따라다니는 마니아 시청자도 생겼다. 그는 “유튜브에서는 시청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콘텐츠의 웃긴 포인트, 배경지식, 감상법을 댓글로 설명한다. 댓글 덕분에 밈의 활용이 자유롭다. 앞으로도 여러 소재, 코드를 적극 활용할 것”이라고 답했다. ‘웃지모텔’을 접한 시청자들의 반응 중에는 웃음과는 별개로 “고맙다” “따뜻하다”는 반응도 많다. 방송사의 공개 코미디 무대가 점차 사라지며 설 자리가 좁아진 개그맨들이 다시 조명받을 수 있도록 유병재가 돕는다는 맥락에서다. 유병재는 “제가 감히 누군가를 돕는다는 표현은 건방지다. 코미디를 하는 사람으로서 제 채널이 다같이 재밌게 놀 수 있는 장이자 플랫폼이 되길 바랄 뿐”이라고 했다. 2019년 ‘카피추’라는 캐릭터로 사랑받은 개그맨 추대엽도 그의 채널을 통해 처음 조명받기 시작했다. 이날 인터뷰 자리에는 유병재의 매니저로 대중에 얼굴을 알린 샌드박스네트워크 유병재 스튜디오팀의 유규선 매니저도 참석했다. 그는 이번 콘텐츠의 출연자인 동시에 기획도 맡은 주역이다. 그는 “개그맨 김준호 씨처럼 콘텐츠 취지에 공감하는 많은 분들이 출연료도 먼저 낮춰주신 덕분에 다른 TV 프로그램에 비하면 적은 제작비로 훌륭한 콘텐츠를 만들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시즌2 제작을 바라는 구독자들 요청에 이들도 “시즌2 준비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조만간 머리를 맞댈 계획이다. 이번 시즌에 출연자들을 직접 섭외했다면, 앞으로는 출연자를 공개모집하는 방식도 고민 중이다. 김 PD는 “사실 많은 개그맨, 방송인들에게 접촉했을 때 웃기지 못 했을 때의 리스크에 큰 부담을 느끼셨다. 웃기는 능력을 평가하는 자리가 아니라 같이 웃음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웃음이 좋다는 걸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터. 하지만 무엇 때문에 이들은 매일 웃음에 골몰하는가. 유병재는 “굳이 누군가를 웃길 필요가 없는, 이미 사회적으로 성공한 분들도 누군가를 웃기려고 노력하는 걸 자주 봤다. 웃음은 우리 상상 이상의 큰 존재”라고 말했다. 이에 김 PD는 “행복과 가장 친한 단어가 웃음이다. 그만큼 행복하시다는 거지”라고 답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팬데믹으로 예술축제가 일상과 멀어진 지 오래. 서울에서 원격으로 프랑스 아비뇽 무대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LG아트센터가 세계 공연계에서 꿈의 무대로 불리는 ‘아비뇽 페스티벌’을 극장으로 들여왔다. 이 축제의 영상 상영은 국내에서 처음이다. 28일부터 다음 달 2일까지 LG아트센터는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에서 5편의 공연을 총 10회 상영한다. 프랑스 독일 벨기에 출신 연극, 무용계 거장들의 작품을 추렸다. 아비뇽 페스티벌은 매년 7월 50만 명의 관객이 찾는 예술축제로,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무대를 지향한다. 주로 야외공연이 많다. 특히 옛 교황청 건축물의 안뜰인 ‘명예의 뜰(Cour d‘Honeur)’에서 펼쳐지는 공연은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한다. 이번 상영작 중 네 편은 명예의 뜰에서 펼쳐진 작품을 촬영했다. 시대의 연출가로 불리는 독일 출신 토마스 오스터마이어의 ‘햄릿’(28일, 5월 1일·2008년 공연)이 첫 상영작이다. 비디오카메라를 손에 들고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독백하는 햄릿의 모습이 스크린을 채운다. 배우 6명이 등장인물 20여 명을 연기한다. 최근 프랑스 연극계에서 각광받는 연출가 토마 졸리의 ‘티에스테스’(29일, 5월 1일·2018년)는 왕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형제의 갈등과 잔인한 복수극을 그린다. 거대 석상과 다양한 음악으로 압도적 스펙터클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연출가가 주인공 아트레우스 역도 맡아 광기 어린 연기를 선보인다. 아비뇽 축제의 예술감독이자 연출가인 올리비에 피의 ‘리어왕’(30일, 5월 2일·2015년)도 상영한다. 원작을 생동감 넘치는 현대 시어로 옮겼다. 파멸을 향해 돌진하는 인물들을 그려낸다. 오전 4시 반 교황청 무대에 그린 큰 원 안에서 심호흡하며 시작을 알리는 무용극 ‘체세나’(30일, 5월 2일·2011년)는 무용단 로사스의 아너 테레사 더케이르스마커르의 작품이다. 어떠한 악기, 세트, 조명도 없이 19명의 무용수와 가수가 목소리와 몸짓만으로 극을 이끈다. 연극 ‘콜드룸’(5월 1, 2일·2011년)은 상영작 중 유일하게 실내에서 공연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극작가 겸 연출가 조엘 포므라의 작품으로 인간 내면을 세밀한 관찰과 탁월한 언어로 구현했다. 불치병을 앓는 직장 상사의 삶을 직원들이 연극으로 표현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전석 2만 원.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세월호 참사의 고통과 참상을 몸짓으로 그려내는 발레 ‘빛, 침묵, 그리고…’가 16∼18일 사흘간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무대에 오른다. 김용걸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가 안무·연출한 이번 작품은 2014년 9월 초연, 2015년 재연을 거쳐 6년 만에 관객과 만난다. 김 교수는 세월호 참사에 대해 “5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보고 겪은 수많은 일들 중 가장 비참했던 사건”이라며 “가장 비열한 인간들의 모습과 그들로 인해 고통스럽게 절규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동시에 봤다”고 밝혔다. 이어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될 참상을 통해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품은 2014년 4월 16일 참사 현장에서 시작한다. 구명조끼를 입은 채 울부짖는 여자아이가 등장하며, 아이는 검은 남자에 이끌려 지하로 내려간다. 무용수들의 처절하면서도 강렬한 안무는 비극과 숙연함을 불러일으키며, 객석에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 묻는다. 베를린국립발레단 출신의 이승현을 비롯해 김용걸댄스씨어터 무용수 19명이 무대에 나선다.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를 거쳐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단에서 동양인 첫 솔리스트로 활동한 1세대 스타 발레리노인 그는 한예종 무용원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안무가로도 활발히 활동해왔다. 특히 2011년부터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만든 김용걸댄스씨어터를 통해 ‘수치심에 대한 기억들’ ‘Work’ ‘Inside of life’ ‘Bolero’ ‘Les Mouvement’ 등의 작품을 선보였다. “발레가 가진 제한적 움직임과 표현의 한계를 확장한다”는 지론을 갖고 움직임에 집중해왔다. 발레 대중화와 현대화에도 힘썼다. 김 교수는 “이번 공연은 참사 후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사건과 우리 자신에 대한 기록이자 되새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보다 많은 이가 공연을 볼 수 있도록 전석 무료로 진행된다. 아르코예술극장 홈페이지에서 1인 1장씩 예매가 가능하다. 8세 이상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무대 위 가로 18m, 세로 12m의 대형 수조. 보일 듯 말 듯 잔잔하게 차있는 물은 무용수들의 격정이 더해질수록 조금씩 차오른다. 만물의 근원인 동시에 역경을 상징하는 물에 몸을 맡기듯 무용수들은 몸을 치켜세웠다가도 금세 앉았다 엎드리며 역동적 동작을 선보인다. 대표적인 댄스 영화 ‘스텝업’에서 물 위에서 현란한 군무를 선보이는 댄서들을 연상케 한다. 서울시무용단이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16, 17일 신작 ‘감괘(坎卦)’를 선보인다. 물을 소재로 삼아 진리를 풀어낸 작품으로 거대한 수조와 무용수 44명으로 구성된 대형 창작무용극이다. 감괘는 역학(易學)의 팔괘 중 하나로 하나의 양(陽)이 두 개의 음(陰)에 빠져있는 형상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고난을 헤쳐 나가려는 노력과 긍정의 메시지를 몸짓으로 표현한다. 정혜진 서울시무용단 단장은 “물에 갇혀 험난한 운명을 상징하는 괘의 모양이 모두가 처한 팬데믹의 고통을 뜻하는 것 같았다”며 “오래전부터 자연물을 소재로 삼은 작품을 구상했는데 감괘를 알게 된 순간 바로 작품을 떠올렸다”고 했다. 이어 “비바람 속에서 날갯짓하다 끝내 비상하고야 마는 인간의 모습을 선보일 것”이라고 했다. 정 단장이 총괄안무를 맡았고 전진희, 한수문 지도단원과 아크람칸 무용단 출신의 김성훈이 안무가로 참여했다. 통상 무대 여건과 부상 위험으로 물 위에서 무용수들이 춤추는 건 진귀한 풍경이다. 하지만 “신선한 공연을 위해 힘들어도 물을 사용해보자”는 정 단장의 의지가 반영됐다. 극 초반 발만 살짝 적실 수준으로 잔잔히 차있던 물은 극이 고조되며 4cm까지 찬다. 연습과정도 만만치 않다. 연습실에 물을 채우고 빼는 데만 몇 시간씩 걸린다. 한 번 춤추고 나면 무용수들이 땀과 물로 흠뻑 젖어 실제 공연처럼 하는 리허설인 ‘런스루’는 하루 한 번뿐이다. 맨바닥에서 추는 전통무용도 쉽지 않은데, 물의 무게감과 미끄러움을 감내하느라 동작 연습도 버겁다. 단원들은 차츰 적응 중이다. 고무재질의 특수신발도 고안했다. 8장의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된 작품은 활기찬 일상을 뜻하는 1장 ‘수풍정(水風井)’에서 시작한다. 2장 ‘수택절(水澤節)’에서 차츰 기미를 보이던 역경은 6장 ‘중수감(重水坎)’에 이르러 몰아친다. 무용수들도 격한 반복동작을 선보이며 숨을 거세게 몰아쉰다. 마지막 8장 ‘수화기제(水火旣濟)’에서 무용수들은 비로소 서로를 바라보며 필연적 상생을 표현한다. 정 단장은 “모두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작품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