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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 명예보유자인 남기환 씨(사진)가 6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3세. 고인은 남사당놀이 꼭두각시놀음 예능보유자였던 남운룡 선생(1907∼1978)의 아들로 어릴 때부터 남사당패에서 다양한 기예를 연마했다. 1993년 남사당놀이 보유자로 인정됐고, 2008년 명예보유자에 올랐다. 남사당놀이는 꼭두쇠를 비롯해 최소 남성 40명으로 구성된 남사당패가 조선 후기부터 전국을 돌며 행했던 공연이다. 빈소는 경기 부천시 가톨릭대 부천성모병원, 발인은 8일 오전 7시. 02-557-3880}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다니…. 보석을 찾았습니다.”(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울 최고 경관지 가운데 하나인 종로구 부암동 백석동천(白石洞天). 이곳의 정자 복원 방식을 둘러싸고 지방자치단체와 시민단체가 벌여온 논쟁을 옛날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 한 장이 해결했다. 2011년부터 백석동천 종합정비계획을 진행해 온 종로구청은 6일 “1935년 동아일보 지면에서 정자의 실물 사진을 찾았다. 신문에 실린 원형 그대로 되살리기로 했다”고 밝혔다. 북악산 북쪽 중턱에 펼쳐진 백사실 계곡은 경관이 수려하기로 이름 높다. 특히 백석동천은 흰 돌이 많고(백석) 신선이 사는 별천지(동천)라 불릴 만큼 절경이라 2008년 명승 제36호로 지정됐다. 1800년대에 조성된 별서(別墅·별장의 일종) 유적으로 연못 주위에 정자와 사랑채 터, 담장과 석축 일부가 남아 있다.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국회의 탄핵 의결로 직무가 정지됐을 때 이곳에 왔다가 감탄을 쏟아냈다. 지난해엔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소유였다는 숨겨진 역사도 밝혀졌다. 여러모로 가치가 높아 복원은 큰 관심사였다. 그러나 구청은 주춧돌만 남은 정자 원형이 어땠는지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 건축사사무소에 의뢰해 창덕궁 후원의 태극정(太極亭)과 소요정(逍遙亭)을 참조한 계획안을 수립했다. 시민단체들은 즉각 반대 의사를 밝혔다. 조선시대 문인의 정원이라면 담백해야 하는데 궁궐 정자는 과하다는 지적이었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지붕이 너무 화려하고 계자난간(鷄子欄干·닭 모양 부재로 지지한 난간)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문제는 동아일보 사진이 발견되며 한 방에 풀렸다. 1935년 7월 19일자 2면에 게재된 온전했던 정자 전경을 종로구청이 찾아냈다. 시민단체 주장대로 단아하고 소탈한 풍취가 가득한 모습이었다. 종로구청은 “실물을 확인했으니 기존 설계를 폐지하고 9월경부터 원형대로 복원하겠다”고 밝혔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민화를 통해 옛 선조가 펼친 상상의 나래를 만끽하다.’ 성보문화재단 호림박물관(관장 오윤선)이 10일부터 서울 강남구 신사분관에서 특별전 ‘상상의 나라-민화 여행’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박물관이 지난 30여 년간 모은 민화 가운데 80여 점을 엄선해 공개한다. 민화는 조선 후기 서민층에서 유행했던 그림으로 집 안 장식이나 행사에 실용적으로 쓰였다. 정통 회화와 달리 관습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는 기발한 상상력과 자유분방한 채색이 돋보였다. 박물관은 민화들을 크게 3가지 주제로 나눠 전시한다. ‘화폭에 자연이 들어오다’란 주제를 담은 제1전시실은 꽃과 나무, 영모(翎毛·새나 짐승), 어해(魚蟹·바다동물)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모았다. 그 가운데 화조도는 부부 금실이 좋아지고 자손을 많이 낳는다는 의미가 담겨 침실용으로 인기가 많았다. 제2전시실은 ‘화폭에 책과 문자를 놓다’란 주제로 꾸몄다. 책이나 문방구를 그린 책거리그림이 눈에 띈다. 백수백복(百壽百福·장수다복)과 같은 문자로 만든 민화도 함께 전시된다. 마지막 제3전시실의 ‘화폭에 옛 이야기를 담다’에서는 유교적 이상이 반영된 전경을 담은 산수화나 옛 이야기를 그림으로 옮긴 작품들에 초점을 맞췄다. 금강산이나 관동팔경을 그렸거나 삼국지연의와 구운몽을 소재로 한 민화가 눈길을 끈다. 박물관은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대중적인 미감을 맛볼 수 있는 기회”라고 소개했다. 9월 14일까지. 일요일 휴관. 3000∼8000원. 02-541-3525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부끄럽지만 고백부터 하자. 책 선정회의에서 이 두 권을 묶기로 한 것은 안일했다. 그저 워낙 육아에 관심 많으니 요즘 흐름이나 짚어보자는 취지였다. 어떻게 해야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그런데 막상 펼쳐본 책은 ‘판도라의 상자’였다. 일단 ‘엄마의 의욕이…’는 그럭저럭 예상을 벗어나진 않는다. 일본에서 꽤 잘나가는 자녀교육 전문가인 저자는 아빠 엄마의 과잉의욕이 아이를 어떻게 망치는지 강하게 비난한다. 자극적이지만 사실 이래야 정신 차린다. 그리고 작지만 적절한 부모의 변화가 얼마나 아이의 성장에 좋은 밑거름을 제공할 수 있는지를 조언해준다. 동의하건 안 하건 이 책은 대충 통과. 그런데 문제는 ‘서울대 엄마들’이다. 이 책, 어떤 육아 방법도 제시하지 않는다. 심지어 아이에 대한 책도 아니다. 물론 잘나디잘난 서울대 출신 엄마 24명에 대한 인터뷰 속에는 나름 느껴지는 바가 많다. 하지만 그 포커스는 바로 그 ‘엄마들’이다. 서울대를 나온 여성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겠지 하며 그 교육법을 훔쳐보고 싶은 마음이라면 당장 이 책을 덮길 바란다. ‘서울대 엄마들’은 말 그대로 엄마가 주인공이다. 저자들 역시 서울대 출신(평생 글에 이렇게 서울대를 많이 써본 적은 처음이다)인 책은 정말 담담하게 서울대를 나와 아이를 키우는 엄마에 주목한다. 그들은 우리와 뭐가 차이가 날까. 그들 역시 우리와 뭐가 닮았을까. 성질 급하게 결론부터 얘기하련다. 방식이나 상황은 약간 다를지언정 그들도 똑같은 엄마였다. 일단 선입견부터 버리자. 서울대 부모를 둔 아이들이 다 공부를 잘하는 건 아니다! 아, 살짝 쾌감이 드는 이 악마 근성에 축배를. 오히려 너무 대단한 엄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자녀가 많다. 최고학력을 갖췄다고 교육법이 고차원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기준이 너무 높다보니 아이의 재능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경우가 잦았다. 게다가 적당한 속물근성과 강남 지상주의, 자녀를 통한 은근한 경쟁심리도 우리와 다를 바 없었다. 맞다. 서울대도 한국 땅에 있다. 그들은 2013년 동시대를 사는 ‘한국 엄마’였다. 그렇다면 왜 그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이들도 이 땅의 진흙탕 같은 교육 현실에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걸까. 사회 탓, 정부 탓, 남편 탓…. 다 맞는 말인데 뻔히 아는 건 잠시 접어두자. 의외로 이 대답은 ‘엄마의 의욕이…’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반화의 오류일 수도 있으나, 대체로 이런 고학력 부모들은 ‘고층빌딩형 지식’에는 일가견이 있다. 반에서 1등 하고, 좋은 학교로 진학하는 ‘스킬’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허나 책이 말하는 ‘들판형 지식’에는 의외로 허술한 경우가 많다. 보기엔 쓸모없어 보이는 잡학일지 몰라도 다양한 관심과 경험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상당한 힘을 발휘한다. 어쩌면 서울대건 아니건 이 땅의 엄마 아빠들은 여기서 아이와의 관계에 낭패감을 느끼는 게 아닐까. 좋은 대학과 번듯한 직장만이 성공의 척도라고 믿는 사회에서, 조금 뒤처지거나 돌아가는 삶은 ‘낙오’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지진 않았는지. 자신의 아이 역시 이런 기준으로 평가 대상 채점하듯 바라본 것은 아닌지. 허구한 날 이 땅의 교육현실을 개탄하면서도, 그 레이스에서 뒤처질까봐 불안에 떨고 있는 건 바로 우리 자신들이지 않은가. 하지만 판도라의 상자에서 온갖 것이 쏟아져도 남은 게 하나 있다. 다들 아는 ‘희망’이다. 아마 자녀가 없는 이라면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바로 이런 모순에서 우리는 아직 희망을 본다. 왜? 우리 아이니까. 우리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니까. 부모는 그런 거다. 험한 세상의 파도를 막을 버팀목이 될 책임이 있는 한, 저 풍랑에 맞설 수밖에 없다. 다만 이젠 바깥세상만 보며 걱정하지 말고, 등을 돌려 아이들을 바라보자. 혹시 그 아이, 등 뒤에서 떨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 땅에 와준 것만으로도 기쁨이 넘쳤던 초심을 기억하자. 서울대 엄마건, 일본 엄마건 혹은 아빠건, 가족은 서로 존재하는 자체로 고마운 거다. 그리고 그거면 된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음력 7월 말. 아직 늦더위가 남았으나 환절기 밤공기는 벌써 쌀쌀하다. 뜻한 바 있어 객지로 떠났어도 어찌 부모 형제의 안부가 궁금치 않을까. 과거를 앞둔 처지에도 몇 차례나 편지를 부쳤건만 답신은 오질 않고….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온통 스산하고 아련한 마음이 전해진다. 숨이 다하던 순간도 나라를 걱정하던 충정에 감읍한 세상은 그를 성웅(聖雄)이라 불렀다. ‘신의 반열’로 존경하다 보니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다소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순신이 효성 지극한 자식이자 우애 넘치는 동생이란 것을 보여 주는 고문서(사진)가 최근 발견됐다. 지난달 28일은 충무공 탄생 468주년.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전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교수)은 1일 이순신이 젊은 시절 쓴 친필 편지로 추정되는 문서를 공개했다. 이순신이 관직에 오르기 전에 쓴 편지는 지금까지 알려진 적이 없다. 가로 40.0cm, 세로 21.5cm의 한지에 17행 149자가 적힌 편지에는 성을 뺀 ‘순신(舜臣)’이라는 서명이 명확하다. 노 소장은 “난중일기와 이전 서간에서 드러난 왕희지 초서체의 충무공 필법이 확실하다”며 “특히 이름과 ‘何(어찌 하)’ ‘之(갈 지)’ 글자가 거의 똑같다”고 설명했다. 노 소장에 따르면 편지는 이순신이 1576년 초시(初試·과거의 첫 시험)를 보기 직전인 31세 때 보낸 것으로 보인다. 맏형 이희신(1535∼1587)에게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편지에는 형님이 건강 문제로 붓을 잡는 게 힘들까 우려하는 내용도 담겼다. 마을에 전염병이 돌았다는데 가족은 무사한지, 부모와 장인의 안부는 어떠한지 걱정으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은 변변치 못하니 형이 두루 살펴 달라는 간곡한 부탁도 잊지 않는다. 이순신이 젊은 시절 조카에게 ‘과외’를 했던 사실도 드러났다. 반년 동안 논어를 가르쳐 한 권을 뗐는데, 이제 자신이 집을 떠났으니 조카의 공부가 걱정된다는 대목이 나온다. 조카는 노량해전 당시 충무공 곁을 지켰던 이완(1579∼1627)과 열세 살에 제술과(製述科·과거의 한 종류)에서 수석을 차지한 이분(1566∼1619)이 유명하나 이 중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노 소장은 최근 자신의 신간 ‘이순신의 승리 전략’을 통해 충무공이 다양한 경전과 병서는 물론이고 삼국지도 탐독했던 다독가였다고 밝혔다. 노 소장은 “젊은 삼촌이 조카에게 직접 학문을 가르쳤으니 이미 상당한 학문적 조예를 갖췄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정부 여당이 울산 반구대암각화(국보 제285호)를 보존하기 위해 암각화 일대에 임시 생태제방을 쌓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신석기 문화 유적인 반구대암각화는 인근에 사연댐이 세워진 뒤 1년에 7, 8개월은 물에 잠겨 일부 그림이 지워질 정도로 훼손이 심각하지만 해법을 놓고 울산시와 문화재청이 10년 넘게 의견 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새누리당은 지난해 대선 당시 2017년까지 반구대암각화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황우여 대표는 30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귀중한 문화유산이 지방자치단체와 해당 부처의 갈등 조정 실패로 더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장마철이 오기 전에 암각화 일대에 임시로 생태제방을 쌓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임시로 생태 제방을 쌓아 물에 잠겨 있는 암각화를 꺼내 더 훼손되지 않도록 막겠다는 것이다. 황 대표는 “암각화의 지속적인 보존을 위해 당정협의를 거쳐 예산 지원 등 필요한 조치를 단계적으로 밟아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 식수원 대책 마련뒤 댐수위 낮출 방안 검토 ▼새누리당은 2일 암각화 인근인 울산암각화박물관에서 현장 최고위원회의를 열고 암각화 보존 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암각화 보존 방법을 놓고 울산시는 생태제방 축조를, 문화재청은 사연댐의 수위를 낮추는 방안을 제시해 왔다. 하지만 울산시는 사연댐의 수위를 낮출 경우 식수원이 부족해질 수 있다는 점을 문제 삼았고 문화재청은 영구 생태제방을 쌓으면 암각화의 문화재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반대했다. 결국 새누리당은 일단 ‘임시 생태제방’을 쌓았다가 추후 식수원 대책을 마련한 뒤 임시 제방을 허물겠다는 절충안을 마련한 것이다. 4월 초 국무총리실에 암각화 관련 태스크포스(TF)를 마련한 정부도 새누리당과 함께 암각화 보존을 위해 본격적인 대책 마련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은 최근 참모들에게 “(훼손이 계속되는) 암각화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며 신속한 대책 수립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는 암각화 보존 방안을 둘러싼 갈등이 사회적 논란으로 확산될 수 있다고 보고 이 사안을 ‘조기 경보’ 대상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모철민 대통령교육문화수석비서관은 “가능한 한 빨리 암각화 보존을 위한 합의안을 도출하겠다”며 “특히 울산시민들의 식수 부족 현상이 발생하지 않도록 인근 지역 주민들의 동의를 구하는 작업도 병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의장 시절 암각화 보존대책을 정부에 촉구할 정도로 ‘암각화 보존 전도사’로 활약 중인 김형오 전 의장도 울산시와 문화재청이 갈등을 끝내고 하루빨리 암각화를 물속에서 꺼내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전 의장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고 싶으면 우선 물속에 잠긴 암각화를 꺼내 정상화해야 한다”며 “‘작살 박힌 고래’ 등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그림은 이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됐다”고 말했다.이승헌 기자 ddr@donga.com}
《 “인터뷰하는 대상이 아니라 반구대를 함께 살리는 ‘동지’로 얘기 나눕시다. 지금 반구대 암각화는 불에 타고 물고문을 당하고 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예상대로였다. 달리 ‘반(구대) 청장’이라 불릴까. 지난달 26일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취임 후 언론과의 첫 단독인터뷰를 가진 변영섭 문화재청장(62)은 자리에 앉자마자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 얘기부터 꺼냈고, 인터뷰의 거의 모든 시간을 반구대에 할애했다. 1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는 수시로 냉탕과 온탕을 오고갔다. 반구대 보존을 위한 열정은 매섭도록 뜨거웠고 대답마다 문장의 조사 하나에도 신경 쓰는 신중함도 짙게 묻어났다. 대한민국 첫 여성 문화재청장은 취임 7주 동안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 ―교수로 재직하다 처음으로 관직에 나섰다. 그것도 문화재청장이란 막중한 자리다. “여러 생각이 든다. 하지만 개인적인 소회는 중요하지 않다. 평생 문화를 공부하고 문화재에 관심을 쏟아왔으니 아주 바뀐 건 아니다. 다만 강단에선 이상을 논하고 그것을 실천할 방법론을 고민했다면, 지금은 현장에서 실행에 옮기는 입장이란 것만 다를 뿐이다. 솔직히 정치나 관직에 관심이 없었기에 지금도 거창한 포부는 없다. 하지만 문화와 문화재에 대해 좀 더 깊고 치열하게 고민할 기회를 얻어서 감사할 따름이다.” ―문화재청 역사상 첫 여성 청장이다. 느끼는 바가 사뭇 다를 텐데…. “물론 직원들은 생소하게 느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디테일한 부분에서 어려움을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남성이건 여성이건 청장으로 일하는 건 본질적으로 똑같다. 성별에 초점을 맞춰서 에너지를 써서는 안 된다고 본다. 다만 여성의 강점을 살릴 수 있다면 좋겠다. 꼼꼼하면서도 대화로 일을 풀어나가려 노력한다. 반구대 역시 울산시와 대립하는 게 아니라, 화합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반 청장’이란 별명은 들어봤나. 전담 TF(태스크포스)도 꾸렸다. “그렇게 부르는 줄 몰랐다. 그만큼 이 문제가 심각하다는 취지로 이해해 달라. 반구대는 올해 또 물에 잠긴다면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조선왕조실록을 물에 젖게 내버려둘 수 있나. 지금 반구대는 암석이 약해져 종이를 물에 넣는 것과 마찬가지다. 단지 이것이 울산시민들과의 대립으로 보일까봐 걱정스럽다. 절대 서로를 비난하거나 반대하는 게 아니다. 해결 방향에서 입장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TF는 물론 문화재청 직원들이 적극적으로 일해 줘서 감동했다. 안에 들어와 보니 정말 열심히 한다.” ―울산시와 갈등을 빚는 것은 사실 아닌가. 지난 현장설명회 때도 박맹우 울산시장이 거세게 항의를 표시했다. “박 시장도 다 시민을 위해 일하는 거 아니겠나. 그간 보여준 모습을 보면 시장으로서 존경스러운 면도 많다. 울산 역시 반구대를 지키기 위해 고민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10년 넘게 반구대 보존 운동을 해보니까 가장 큰 문제는 소통이다. 서로의 얘기를 더 귀담아 들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 역시 그간 그런 부분에서 실패했다는 걸 인정한다. 계속해서 울산과 대화하겠다. 제발 이걸 대립이나 갈등으로 보지 말아 달라.” ―박근혜 대통령도 반구대에 관심이 많은 걸로 알고 있다. 별다른 언질은 없었나. “따로 얘기할 기회는 없었다. 임명장을 받을 때 돌아가며 한마디 할 기회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 문화재의 맏형, 그림으로 쓴 역사책을 살릴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대통령이 바로 ‘반구대 암각화’ 하고 반응하시더라. 원래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지극하신 분 아닌가. 진지하게 생각하시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 감명받았다.” ―문화재청은 산적한 현안이 많다. 너무 반구대에 ‘다 걸기(올인)’하는 거 아닌가. “그만큼 시급하니까 이러는 거다. 또 취임 때부터 국보 보물 천연기념물 등은 국가가 관리해야 한다는 소신을 펴왔다. 그런 의미에서 반구대를 모범 사례로 세우고 싶다. 반구대 문제가 이렇게까지 된 데는 관리나 보존에 있어 지방자치단체와의 혼선이 한몫을 했다고 본다. 반구대를 시작으로 국가지정문화재는 국가가 관리한다는 상식적 원칙을 세우고 싶다. 반구대가 살아야 우리 문화가 산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는 고려 관음보살이 60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후손에게 그 미소를 허락했다. 그동안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던 고려불화 1점이 새롭게 모습을 드러냈다. 고려불화는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데다 지금까지 세계를 통틀어 160여 점만 확인돼 국제 경매시장에서도 진객(珍客)으로 꼽히고 있다. 게다가 이번 작품은 사상 처음으로 발견된 ‘윤왕좌(輪王坐)’ 자세의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여서 국보급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윤왕좌는 부처나 보살이 정면으로 앉은 채 세운 오른 무릎에 오른팔을 올리고 왼손은 바닥을 짚은 자세다. 정우택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는 29일 “일본 후쿠오카 현 조텐(承天)사에서 14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수월관음도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수월관음도란 달밤의 물가 바위에서 관음보살이 선재동자에게 법을 설파하는 장면을 담은 불화를 일컫는다. 고려 문화재의 윤왕좌는 조각상이나 쇠거울 선각(線刻·선으로 새긴 그림이나 무늬)으로 일부 존재할 뿐 불화에서는 유례가 없다. 지금껏 알려진 고려 수월관음도는 비스듬히 옆으로 반가좌를 튼 자세가 대부분이었다. 이 때문에 이번 불화 발견은 조선시대에 성행했던 윤왕좌 관음도가 당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기존 학설을 뒤집는 결정적 계기도 마련했다. 이 그림은 가로 47.5cm, 세로 97.1cm 크기로 비단 바탕에 채색하는 전형적인 고려불화 기법을 따랐다. 후대에 수정하거나 손댄 흔적이 없으며, 제작 당시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기존에 알려진 14세기 전반 고려불화인 일본 야마토문화관(大和文華館) 수월관음도와 비교해 보면 △의복 형태 및 착용 방식 △투명 베일의 표현법 △국화무늬 치마 문양 등이 놀랍도록 닮아 동시대나 14세기 후반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불화가 발견된 조텐사는 조선시대 양국 교류의 거점으로 이용되던 사찰로 고려 동종(1065년)과 또 다른 고려불화 반가좌 수월관음도를 소장한 곳이다. 정 교수는 “윤왕좌 수월관음도는 세련된 공간미와 차분한 주제의식이 조화를 이룬 걸작”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이번 성과를 5월 4일 동악미술사학회 전국학술대회에서 발표할 예정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굳은 입술엔 묘한 미소가 입가에 맺혔다. 정면을 바라보는 눈빛은 지긋한 듯 찌릿하다. 인도 신화 속 제왕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취했던 자세(윤왕좌·輪王坐)여서일까. 편안한 듯 다부지게 세상을 내려다본다. 그 기세를 아우르며 감싸는 천의(天衣)의 보드라움이란. 발아래 앙증맞은 선재 동자의 합장 따라 어느새 두 손이 모아진다.정우택 동국대 교수(동국대박물관장)가 올해 초 찾은 윤왕좌 수월관음도는 일본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숨겨진 존재’였다. 30여 년 전 나온 한 출판물에 자그마한 흑백 사진이 실리긴 했으나 정 교수가 이를 발견할 때까지 누구도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 14세기 후반에 그려진 관음보살은 그렇게 누군가 자신을 찾아오길 600여 년을 기다렸다.일본 후쿠오카 현 조텐(承天)사 수월관음도가 이토록 빼어난 아름다움을 갖추고도 주목받지 못한 것은 선입견 탓이 컸다. 그간 고려불화에서 관음보살은 45도쯤 왼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반가좌를 튼 자세가 대부분이었다. 정면을 향해 무릎을 세우고 한 손을 짚은 윤왕좌 관음은 18세기 조선불화에서 인기를 끌었던 자세였다. 이 때문에 이 불화도 정확한 조사 없이 흔한 조선불화 가운데 하나려니 지레짐작해 버린 것이다.하지만 고려 수월관음도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일본 야마토(大和)문화관 소장 작품(14세기 전반 추정)과 비교해 보면 조텐사 불화의 가치가 여실히 드러난다. 보살이 걸친 천의의 형상과 착의법이 거의 똑같고, 왼손으로 천 자락을 누르듯 잡은 방식도 일치한다. 투명한 베일을 바위 좌우로 흘러내리게 한 기법, 흔한 거북등무늬를 생략하고 국화무늬로만 감싼 과감성도 조선불화에선 찾기 힘들다.이 수월관음도는 이 땅의 불화 전통이 켜켜이 이어져 내려왔음을 증명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다. 윤왕좌는 조선불화에 많이 등장하고 고려불화엔 없다 보니 그동안 학계는 윤왕좌의 원류를 15세기 중국 법해(法海)사 벽화를 비롯한 명대 불화로 짐작해왔다. 하지만 조텐사 불화의 등장으로 고려와 조선을 잇는 소중한 명맥을 되찾은 셈이다.불화가 발견된 조텐사가 한반도와 역사적 관계가 많은 곳이란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양국의 교류 거점으로도 자주 이용돼 일본행록(日本行錄)을 썼던 조선통신사 송희경(宋希璟)이 이 사찰에 대한 시를 짓기도 했다. 국내에는 ‘승천사 동종(承天寺 銅鐘)’으로 유명한 1065년 고려 동종과 또 다른 고려불화를 소장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인연이 바탕이 됐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지난주 출간된 책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는 제목부터 참 의미심장했다. 누구나 놀고 싶지 일하는 게 좋을까 싶다가도, 만족스러운 이도 있을 텐데 너무 일반화시켰단 반감도 생겼다. 어쨌든 노동이 버거웠던 경험이 다들 한 번쯤은 있을 터. 혹 극복할 방도만 있다면야 책 100권이라도 읽겠다. 얼른 주사 한 방이 필요했지만, 책은 청진기부터 갖다댄다. 독일 여성 철학자인 저자는 문제의 근원을 성과주의에 물든 사회에서 찾는다. 정부와 사회조직, 그리고 구성원 스스로조차 일중독을 장려하기 때문이란다. 책은 이를 ‘향락 노동’이란 개념으로 설명한다. 쉽게 말하자면 노동은 결코 쾌락이 될 수 없다. 그런데 현대 인류는 노동이 자아실현을 이룰 행복의 수단이란 집단최면에 걸려 일에 몰두한다. 이런 자가당착이 인간을 우울하게 만드는 쳇바퀴가 되는 셈이다. 살짝 현학적이나 상당히 수긍이 간다. 주위를 둘러보자. 일 잘한단 소리 듣는 사람들, 근사하긴 한데 욕망을 마음껏 발산하고 사는 것 같진 않다. 스스로 선택했지만 자기 시간을 희생하고 억제하는 데 익숙하다. 저자는 이를 ‘강박적인 사랑’과 비슷하다고 봤다. 계속해서 뭔가를 갈구하고 인정받길 원하며. 육체적 정신적 혹사를 오르가슴 비슷한 훈장으로 받아들인다. 뭐, 아닌 사람도 있다. 말만 번지르르하거나 남한테 책임 전가하는 이가 왜 없겠나. 하지만 그들조차 ‘능력자’로 대접받으려 하지 밀려나길 바라진 않는다. 결국 책이 제시하는 처방전은 이렇다. 내려놓아라. 적극적인 과로가 존경받는 사회적 편견부터 바꾸자. 권태와 게으름에 몸을 맡길 줄도 알아야 한다. 이건 성과사회를 위해서도 올바른 방향이다. 책상머리에 앉아 서류만 들고 판다고 매번 아이디어가 샘솟던가. 때론 편안한 수다가, 가끔은 멍한 사색이, 이따금 목적 없는 휴식이 더 매력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노동이 우울하지 않으려면 한계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수영이 하고 싶은가. 그럼 일단 가만히 몸에 힘을 빼야 물에 뜨는 법을 배운다. 요즘은 대체휴일제가 꽤나 논란인가 보다. 잘못 도입하면 최대 32조 원까지 손실이 생긴다니 심사숙고하잔 의견에 동의한다. 가뜩이나 경제도 어려운데 비용절감에 밤잠 설치는 중소기업들은 더욱 걱정스럽겠다. 그런데 하나만 여쭤보자. 경영자님들, 이 고통분담 함께하는 거 맞죠. 직원들은 별 보며 일하는데, 분식회계나 저질러 뒤로 사욕만 채우는 수장들은 이 땅엔 없으니까. 휴일 늘리지 않아도 수당 덜 받아도, 분명 너도나도 신나서 출근하는 직장 만들려 애쓰고 계실 게 분명하다. 아, 우리의 노동은 우울할 틈이 없다. 대체휴일제도 내려놓자. 평일에 슬쩍슬쩍 놀면 되잖나.정양환 문화부 기자 ray@donga.com}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중국 전통 그림자극 ‘피영(皮影)’ 진품이 국내에 처음으로 전시된다. 중국국립미술관이 소장한 피영 공예작품 45점을 소개하는 특별전시회 ‘Shadow Play 피영展’이 다음 달 4일부터 서울 종로구 연건동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에서 열린다. 1세기 중국 한나라 때 시작된 피영은 가죽 인형을 이용하는 그림자 연극으로 세계 그림자극의 원형으로 인정받는다. 송과 청나라 때 특히 번성했던 피영은 18세기 유럽에 소개돼 프랑스 파리에 전용관이 생길 정도로 해외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국내에 전시되는 작품들은 모두 청나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최고 500년이 넘은 국보급 문화재. 전체 3가지 테마로 이뤄진 전시는 국내에도 친숙한 중국의 전통 문학에 기반한 작품들로 구성됐다. 첫 번째 테마는 소설이나 설화에 등장하는 중국 영웅담을 다룬 작품들. 삼국지에서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인 유비가 제갈량을 3번 찾아가는 ‘삼고초려’를 다룬 작품이 눈길을 끈다. 두 번째 테마는 중국의 매혹적인 사랑 이야기다. 당나라 소설 ‘앵앵전’의 최앵앵과 장생의 러브스토리가 담긴 ‘서상기(西廂記)’, 당나라 시인 최호의 애달픈 사랑시인 ‘제도성남장(題都城南莊)’을 배경으로 한 연극 ‘인면도화(人面桃花)’ 등이 주요 작품이다. 마지막 테마는 손오공이 주인공인 서유기의 모험이야기를 모았다. 손오공이 원숭이 대장으로 고향에서 즐겁게 살던 시절을 다룬 ‘화과산(花果山)’과 스스로 제천대성이라 부르며 옥황상제와 전쟁을 벌였던 ‘대요천궁(大鬧天宮)’ 등을 소재로 했다. 전시관에서는 피영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전시품 외에도 관련 다큐멘터리와 실제 그림자극도 상영할 예정이다. 6월 30일까지. 6000∼1만 원. 02-532-4407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출간 전부터 화제가 되는 책이 있다. 해리 포터는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이 줄을 섰다. 모니카 르윈스키의 회고록인지, 19금 폭로물인지는 출판사가 계약금만 500만 달러를 쏟아 부었다. 뭐, 에릭 슈밋(정확한 표기는 이게 맞다) 구글 회장은 이 정도 반향은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21세기 디지털 시대를 호령하는 최고경영자(CEO)의 첫 저서라니 꽤나 관심이 컸다. 그것도 구글의 싱크탱크로 알려진 ‘구글 아이디어’ 소장을 맡고 있는 제러드 코언 미국외교협회(CFR) 부선임연구원과의 공동 저작이라니. 두근두근. 머리말 첫줄부터 근사하다. “인터넷은 인류가 만들어 놓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다.” 맞다. 인터넷은 참으로 요물이다. 슬금슬금 인류의 삶에 스며들더니 이젠 인터넷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힘들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한대처럼 커지고 복잡해지는 인터넷. 저자 말처럼 “엄청난 선(善)과 무시무시한 악(惡)의 근원”이란 두 얼굴을 지녔다. 하지만 이 위험천만한 가상환경 속에서 슈밋 회장은 새로운 미래를 목격한다. 본질적으로 무정부 상태인 방대한 네트워크는 말 그대로 사상 초유의 관계망이 되어 지구에 있는 모든 사람을 연결짓고 있다. 이는 결코 정보기술(IT) 선진국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사담 후세인 정권이 몰락한 뒤로 여전히 전쟁의 포화가 끊이지 않았던 이라크를 보라. 음식은커녕 물조차 구하기 어려웠던 그 땅에서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휴대전화는 빚을 내서라도 구입했다. 연결은 이제 인류에게 먹고사는 문제만큼 중요하고 핵심적인 요소다. 이런 욕구는 공상과학(SF) 영화를 뛰어넘거나 견줄 만큼 세상을 바꾸고 있다. 집 안에 앉아 홀로그램을 이용해 세계 곳곳의 동료들과 마주 앉은 듯 회의할 날이 머지않았다. 지난해 미국 네바다 주는 역사상 처음으로 무인자동차에 면허증을 발급해 줬다. 조만간 휴대전화가 질병을 체크하고, 안경만 쓰면 눈앞에 정보가 펼쳐지는 세상이 온다. 타임머신이나 공간이동까진 아니라도, 기술 진보는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대비해야 할 일도 많다. 국가는 한층 업그레이드된 기술로 통제와 감시에 나설 게 분명하다. 시민들의 바이오메트릭(biometric·생체인증) 정보를 활용해 더 많은 세수를 확보하고 더 큰 권력을 쥐고 싶어 할 것이다. 또 그만큼 반작용도 거세지리라. 보스턴 마라톤 ‘압력밥솥 폭탄’을 보라. 인터넷 정보와 약간의 손재주만 있으면 굳이 첨단 무기를 구하지 않아도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다. 금융과 군사 정보까지 인터넷으로 연결되면서 해커들의 온라인 전쟁은 실제 현실에서 벌어지는 것만큼 끔찍하다. 기업에서 보안 유지는 이윤을 내는 본질적 목적 이상으로 중요해지고 있다. 저자들의 혜안은 매력적이다. 현장에서 뛰는 이들이라 그런지 별다른 미사여구를 쓰지 않는데도 설득력이 있다. 다만 이런 미래가 제3세계에도 희망의 빛이 될 거란 낙관은 그다지 수긍이 가질 않는다. 물론 빈국도 디지털 기술 덕분에 살림살이가 나아질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공 좀 찬다고 모두 리오넬 메시가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서구에선 축구선수 못 돼도 딴 일 하면 그만이지만, 그들에겐 생존이 걸린 문제일 수 있다. 가난한 어부도 인터넷을 이용하면 물고기를 더 많이 잡고 팔 수 있단 공염불은 접어두시길. 당신들이 지금 생선 때문에 이런 글 쓴 건 아니지 않나? 서구 자본가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대한제국 자주외교의 역사가 앞당겨졌다. 지난해 102년 만에 우리 품에 돌아온 옛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의 ‘잃어버린 3년’을 다시 찾았다.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안휘준)은 25일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가 소장한 자료를 통해 워싱턴 로건서클 역사지구에 있는 공사관 개설 시점이 1891년(고종 28년)이 아니라 3년 가까이 앞선 1889년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간 정부와 학계는 1891년 12월 1일을 ‘대조선주차 미국화성돈 공사관(大朝鮮駐箚 美國華盛頓 公使館)’의 개설일로 삼아왔다. 대한제국이 당시로선 거금인 2만5000달러에 건물을 매입했다는 건물 등기서류의 이전 날짜였다. 주차는 주재를, 화성돈은 워싱턴을 뜻한다. 하지만 재단은 이번 현지조사에서 공사관 운영이 이보다 훨씬 앞섰음을 증명하는 미국 국무부 공문을 찾았다. 당시 T F 베이야드 미국 국무장관이 이하영 서리전권공사에게 1889년 2월 13일자로 보낸 공문엔 “워싱턴의 조선(Corea) 공사관 공식 주소를 이곳으로 확정했음을 통보하게 돼 기쁘게 생각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공사관이 이름만 내건 게 아니라 다양한 외교 활동을 벌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문서도 함께 발견됐다. 당시 현지 정치외교계 인사를 초청한 연회가 몇 차례 열렸는데, 스티븐 클리블랜드 미국 대통령의 부인인 프랜시스 클리블랜드 여사도 참석했다. 당시 프랜시스 여사가 외국 공사관을 방문한 것은 처음이어서 현지 언론도 크게 보도했다. 1888년 첫 공사관으로 썼던 ‘피서옥(皮瑞屋)’ 터도 새롭게 확인했다. 피서옥은 고종 어의였던 호러스 알렌(1858∼1932)의 친구 V H 피셔가 소유해 지어진 이름이다. 그간 존재는 알려져 왔으나 정확한 위치는 이번에 처음 밝혀졌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1600년 동안 파묻혀 있던 신라 기마무사의 갑옷(사진)이 제 모습을 찾았다.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류춘규)는 24일 “2009년 경주 황오동 쪽샘 지구 덧널무덤에서 출토된 갑옷을 철갑 비늘을 두른 원래 형태 그대로 복원했다”고 밝혔다. 삼국시대 갑옷은 이전에도 복원된 적이 있지만 고구려 고분벽화나 조선시대 사료를 종합 유추해 만든 것이라 온전한 실물 복원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신라 갑옷은 출토 당시 보존 상태가 좋아 원형을 100%에 가깝게 되살린 첫 사례가 됐다. 이번에 공개된 비늘갑옷은 전체가 투구와 목가리개, 몸통가리개로 이뤄져 있다. 출토된 갑옷의 쇠로 만들어진 소찰(小札·비늘처럼 촘촘히 달린 가죽이나 쇳조각)만 1249개로 수습 자체도 쉽지 않았다. 연구소는 소찰 하나하나 번호를 매겨 일일이 정리한 뒤 먼저 3D 디지털 영상으로 복원했다. 이후 조금씩 다른 모양을 지닌 소찰을 일일이 다시 만들어 출토품과 똑같은 배열로 갑옷을 지었다. 재현에 쓰인 소찰은 모두 1270개. 3년간 공들인 끝에 실제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되살린 셈이다. 완성된 갑옷은 그 생김새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들과 전혀 달랐다. 일단 목가리개가 목에서 얼굴 쪽으로 목을 감싸듯 안으로 휘어져 있다. 이전에 확인된 삼국시대 갑옷은 반대로 마치 나팔이 입을 벌린 것처럼 바깥으로 퍼지는 형태였다. 몸통가리개도 특이하다. 이전 갑옷들은 허리 부분 소찰의 단면이 평평하거나 살짝 불룩했는데, 신라 갑옷은 요(凹)자처럼 안으로 움푹 들어간 모습이었다. 상반신 앞부분도 이전 것들은 가운데에서 여미게 제작되어 있는데 비해 신라 갑옷은 살짝 왼쪽으로 치우쳐 여미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복원에 참여한 황수진 연구원은 “원래 고위 무사의 갑옷은 기성복이 아니라 ‘맞춤옷’이기 때문에 주문자 요구에 따라 조금씩 모습이 다를 수 있지만 이 갑옷은 이전의 발굴이나 연구에서 비슷한 유형도 찾을 수 없어 가치가 매우 크다”고 설명했다. 1차 갑옷 복원을 마무리한 연구소는 현재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팔다리 가리개도 이른 시일 내에 완성품을 내놓을 예정이다. 또 무사갑옷과 함께 출토됐던 ‘말 갑옷’도 정리를 서둘러 전쟁에 나서는 기마무사의 갑옷 전체를 완성할 계획이다. 류 소장은 “이전에 옛 가야지역에서 출토됐던 갑옷과 비교 연구해 학술적인 성과도 얻으려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착하고 성스럽고 문무를 겸비했다. 자애롭고 효성스러우며 지혜롭고 인자하다. 엉큼하면서 날래고 세차면서도 사나우니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다.”(연암 박지원·1737∼1805) 연암이 극찬한 것은 선비나 장수가 아니었다. 한반도에서 수천 년 영물(靈物)로 사랑받아 온 호랑이다. 조선시대까지 산신령이자 수호신으로 추앙받던 이 땅의 아이콘. 그들은 왜 한반도에서 사라졌을까. 여러 설이 분분하지만, 그간 국내외 학계는 호랑이가 멸종된 주된 이유로 일제강점기 해수구제(害獸驅除·인간에게 해로운 동물을 없앤다) 정책을 꼽아왔다. 대표적인 한반도 호랑이 연구가인 엔도 기미오 일본 야조회(野鳥會) 명예회장도 1986년 저서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에서 당시 무분별한 포획을 핵심 요인으로 봤다. 당시 일제는 농지 개간과 짐승가죽 획득이라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렸다. 이를 위해 호랑이를 비롯한 범, 늑대 사냥을 방조 혹은 장려하면서 조선의 야생 생태계가 망가졌다는 시각이다. 일제의 횡포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호랑이가 사라진 것은 이보다 병자호란 전후에 발생한 ‘우역(牛疫·바이러스로 발생하는 소의 전염병)’을 더 결정적 요인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호랑이 사학자’로 알려진 사단법인 한국범보전기금의 김동진 인문학술이사(47·전 서울대 BK연구교수)는 “17세기 중국 심양에서 발생한 우역이 기근과 겹치며 호랑이가 조선 땅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김 이사에 따르면 일제의 남획을 원인으로 꼽는 주장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 마구잡이로 사냥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당시 총독부 자료를 보면 1919∼1924년 포획한 호랑이는 65마리였다. 1년에 10마리 안팎인데, 상당수 중국 러시아와 맞닿은 함경도(40마리)에서 잡혔다. 이는 이전 시대와 비교하면 그 수가 너무 적다. 17세기 병자호란 직전 상황을 살펴보자. 1633년 무안 현감이던 신집(申楫·1580∼1639)이 올린 보고서에는 각 군현이 해마다 호랑이 가죽 3장을 바쳤다는 대목이 나온다. 전국에 군현이 330여 개였음을 감안해 단순 계산하면 1년에 약 1000마리를 잡았다. 그런데도 이 제도를 유지할 만큼 호랑이 개체는 넉넉했다. 10 대 1000. 이 엄청난 간극을 만든 원흉이 바로 우역이었다고 김 이사는 진단했다. 인조실록(仁祖實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소현세자가 쓴 심양장계(瀋陽狀啓)를 보면 우역이 어떻게 조선에 퍼졌는지 상세히 알 수 있다. 인조 14년(1636년) 청나라 심양에서 발생한 우역은 8월 평안도에서 처음 발견됐다. 같은 해 12월 병자호란이 한반도를 휩쓰는데 이때 우역도 전국으로 퍼졌다. “한양에 소가 한 마리도 없다”거나 “소가 멸종할 처지에 놓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1670∼1671)까지 겹치며 한반도의 곤궁은 절정에 다다랐다. 국토의 황폐화는 당연히 호랑이 생존에도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호랑이가 잡아먹는 사슴의 급감이었다. 소와 같은 우제류(偶蹄類·짝발굽동물)인 사슴에게도 우역은 치명적이었다. 주요 먹잇감을 잃은 호랑이의 시련은 멈추지 않았다. 대기근에 빠진 백성들이 산림을 파헤치고 화전을 일궜다. 호랑이는 영역과 사냥감 모두 난관에 봉착했다. 이로 인해 호랑이는 안타깝게도 최악의 선택에 빠진다. 백주 대낮에도 인가를 침입해 해를 끼치는 사고가 훨씬 잦아졌다. 결국 민관은 이전까진 나라에 바칠 때나 나서던 호랑이 사냥에 총력을 쏟기 시작했다. 이런 삼중고가 겹치며 호랑이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남은 개체들도 한반도를 떠나 시베리아 등지로 영역을 옮겨갔다. 호된 시련을 겪으며 호랑이는 18세기에 이미 희귀동물로 전락했다. 영조 4년(1728년) 왕실은 호랑이 가죽을 국가에 바치던 제도를 폐지하기에 이른다. 잡히지도 않는 호랑이 탓에 백성들의 고충만 막대하다는 판단이었다. 중국에서 건너온 우역이란 돌멩이가 일으킨 파문이 한반도에서 호랑이를 휩쓸어버리는 나비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김 이사는 “병자호란 전후에 전파된 우역은 국가의 근간을 바꾸는 괴력을 발휘했다”며 “이때 호랑이는 대부분 사라졌고 겨우 명맥만 유지했는데 일제가 숨통을 끊은 셈”이라고 설명했다. 김 이사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논문을 이달 말 한국역사연구회와 대한의사학회에서 발표할 예정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11일 문을 연 경남 양산시 양산유물전시관(관장 신용철)이 개관 기념 특별기획전 ‘양산의 보물’을 개최한다. ‘양산(梁山)을 지명으로 정한(定名) 600주년’을 맞아 개관한 양산유물전시관은 7년간 준비한 끝에 양산 지역에서 출토되거나 전승된 유물 450여 점을 관람객에게 선보인다. 특히 양산의 보물 특별전은 이 지역 역사와 문화를 담은 국가지정문화재 21건을 포함해 총 50여 점의 유물을 선별해 소개한다. 특별전에서는 중국미술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조선 승려 사명당의 영정이 일반에 처음으로 공개된다. 사명당은 임진왜란 때 도난당했던 통도사의 불사리를 되찾고 관음전을 재건해 양산과 인연이 깊다. 현재 영정 30여 점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번에 공개되는 영정은 대구 동화사 영정(1786년경)과 함께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사라진 조선 태종의 어보(御寶·임금의 의례용 도장)가 찍힌 ‘양산 이씨 종손가 고문서’, 통도사가 소장한 화엄탱화(보물 제1352호) 등도 함께 전시된다. 상설전시유물 가운데서도 볼 것이 많다. ‘금제조족(金製鳥足)’은 북정동 금조총에서 발굴된 유물로 금으로 만든 새 다리다. 새가 영혼을 인도한다고 믿는 북방 유목민의 전통이 이어진 증거로 한강 이남에선 유일하게 발견됐다. 1979년 유산동에서 발굴된 반가사유상은 미세한 손동작과 부드러운 옷 주름으로 탁월한 작품성을 인정받는다. 고분실 중앙에 실제 크기로 재현한 양산의 대표적 고분 ‘부부총’도 둘러볼 만하다. 신 관장은 “1413년 양주(梁州)에서 양산으로 이름을 바꾼 지 600년이 되는 해에 종합박물관이 들어서 더욱 의미가 깊다. 유서 깊은 양산의 역사를 알리는 데 정성을 쏟겠다”고 말했다. 문의는 홈페이지(museum.yangsan.go.kr)나 전화(055-392-3313)로 하면 된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마음이 울적한 날. 길을 가다 홀로 핀 들꽃을 마주쳤다 치자. 저 꽃도 나처럼 서글퍼 보이는구나. 뭐,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뜬금없는 질문. 식물도 슬픔을 느낄까. 농부가 수확물을 자식에 빗대긴 하지만 사실 과학적으로 이런 의인화는 ‘참’이 될 수 없다. 무 자르듯 단정 짓고 싶진 않지만 식물은 감정도 지능도 없다. 왜? 중추신경계가 없으니까. 다시 말해 “몸 전체의 정보를 조정하는 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책 제목인 ‘식물은 알고 있다’는 출발부터 잘못된 게 아닐까. 하지만 그게 또 그렇지가 않다. 식물이 인식할 수 있는가는 지능이나 감정과는 별개의 문제다. 물론 인식이란 표현이 다소 거창하긴 하다. 하지만 식물이 주변 환경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생존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면, 이는 외부 자극을 인식한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결론적으로 식물은 보고, 냄새를 맡는다. 심지어 듣고 느끼기도 한다. 위치를 파악하고, 과거 정보를 기억하기도 한다. 뭐야? 뇌가 없다더니 웬만한 건 다 하잖아? 그렇다. 식물은 인간과는 다른 계통과 방식으로 진화했을 뿐이지 돌덩어리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른 계통과 방식’이다. 예를 들어 후각에 대해서 알아보자. 인간은 당연히 코로 향기를 맡는다. 이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자. 누군가 방귀를 뀌었다고 하자. 그러면 외부로 향을 유발하는 작은 화학물질(분자)이 퍼진다. 공기 흐름을 타고 당신에게로 분자가 이동하면 코 속 특정 수용체(세포)가 이를 감지한다. 그러면 뇌가 이 자극을 받아들여 반응한다. “으이그, 냄새∼!” 당연히 식물은 코도 뇌도 없다. 하지만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 워싱턴대의 데이비드 로데스와 고든 오리언스라는 학자에 따르면 서양흰버들이란 식물은 애벌레가 잎을 갉아먹으면 화학혼합물을 배출한다. 그러면 인근에 있던 서양흰버들의 잎에는 이를 감지하고 애벌레가 싫어하는 페놀성 화학성분이 급속도로 늘어난다. 즉, 공격당한 식물이 이를 경고하는 냄새를 풍기면 옆에 있던 동료 식물이 이를 맡고 방어체계를 갖춘다는 얘기다. 어떤가. 인간과는 다른 방식이지만 식물도 분명 냄새를 인식하는 셈이다. 과학책치곤 상당히 가벼운 책이다. 두께부터 사람을 압도하는 분량이 아니고, 문장 역시 크게 버겁지 않다. 그렇다고 내용이 결코 허술하지는 않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최신 과학정보를 살뜰히 전달한다. 식물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편인데도 푹 빠져서 읽게 만드는 매력이 넘친다. 꽃이나 나무라면 제 몸처럼 애지중지하는 분들은 꼭 읽어 보시길. ‘인간과는 다른’ 진짜 식물의 본모습을 만날 수 있다. 사랑한다면 알고 싶지 않은가.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조선에서 전해진 조선의 민요. 쇼와(昭和·히로히토 일왕 시대 연호) 시대부터 일본에서도 불리기 시작했다. 종류가 다양하나 ‘아리랑 아라리요’란 후렴구가 들어 있다.”(일본 고지엔 사전) 아리랑은 한반도의 혼이 담긴 가락이다. 한국인이라면 완창은 몰라도 누구나 읊조릴 수 있다. 머나먼 타향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핏줄이 이어진 곳에선 아리랑도 살아남았다. 그 끈끈함이 지난해 아리랑의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유산 등재도 이뤄냈으리라.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천진기)과 정선아리랑연구소(소장 진용선)가 공동 주최하는 해외 순회전 ‘아리랑 로드’는 이러한 발자취를 되짚기 위한 시도다. 세계 곳곳에 한민족이 뿌리내린 땅을 찾아 아리랑의 과거와 현재를 살핀다. 이 전시는 5월 2일 일본 오사카 국립민족학박물관에서 첫걸음을 내디딘 뒤 7월 도쿄 한국문화원으로 이어지고, 2014년 미국과 2015년 러시아에서도 진행된다. 향후 한국인 입양아가 많은 프랑스와 덴마크에서도 순회전을 열 계획이다. ‘아리랑-The Soul of Korea(한국의 혼)’라 명명된 오사카 전시는 6월 11일까지 열린다.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다양한 아리랑 음원과 관련 생활용품 393점을 소개한다. 배우 겸 가수로 활동했던 김연실이 1932년 부른 일본 빅타레코드 ‘아르렁’ 음반과 1931년 고바야시 지오코(小林千代子)가 부른 음반이 눈길을 끈다. 고바야시의 노래는 일본 가수가 일본어로 부른 최초의 아리랑 음반이다. 조선에서 전해진 조선의 민요가 일본에 어떻게 전파됐는지 살펴볼 수 있다. 전시기간에 다양한 아리랑 공연도 전시관에서 펼쳐진다. 이번 오사카 전시에서 주목할 것은 특별연구전시에 해당하는 ‘재일한인-아리랑은 내 삶의 존재 이유’. 민속박물관은 이 전시를 앞두고 지난해부터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교포 수십 명을 대상으로 심층인터뷰를 했다. 일본에서 태어난 이들에게 아리랑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응답자들의 반응은 가슴 한편을 찡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아리랑은 하나의 음악 그 이상”이라고 말했다. 1938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이철우 씨는 아리랑이 준 문화적 충격을 떠올렸다.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 사람을 자주 아리랑이라고 불렀다. 어릴 땐 그런 호칭이 차별로 느껴져 분하기도 했는데 스무 살 무렵 아리랑을 듣고 온몸이 떨렸다고 한다. 한국말조차 할 줄 몰랐건만 ‘우리 노래’란 걸 그의 심장이 느낀 것이다. 이후 ‘코리아음악연구소’를 차려 평생 아리랑 연구에 매진한 것도 그런 기억 때문이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부인회에서 55년 동안 일한 최금분 씨(83)에게 아리랑은 아련한 추억과 같은 말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얼큰하게 취하시면 언제나 아리랑을 불렀다. 그때마다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아리랑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노래”라고 말씀하셨다. 지금은 고인이 된 최 씨의 남편에게 아리랑은 고향이었다.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아리랑을 흥얼거리다 한숨을 내쉬곤 했다. 오사카에 사는 최갑신 씨(69)는 아리랑 덕분에 고향 친척들과 인연을 맺었다. 5년 전 아버지가 부르던 밀양아리랑이 줄곧 마음에 남아 경남 밀양을 방문했다가, 부친의 고향인 경북 영덕 친척들과 연락이 닿았다. 핏줄과 대화하고 싶어 한글도 다시 배웠다. 이젠 명절이면 당연한 듯 한국을 방문한다. 재일교포에게 아리랑은 희망이자 긍지였다. 극심한 차별에 자살을 결심했던 한 여성은 아리랑의 아름다운 선율에 자부심을 되찾았다. 도쿄 요양소에서 만난 한인 봉사자는 사경을 헤매던 노파가 아리랑 가락에 정신을 되찾았다는 기적을 들려줬다. 이역만리에서 각기 다른 풍파를 겪고 있지만 아리랑은 우리네 삶을 지탱하는 동아줄이었다. 현지 조사를 책임진 이건욱 학예연구사는 “재일교포에게 아리랑은 한민족 디아스포라(이산·離散)의 구심점”이라며 “이 전시가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신명나는 아리랑을 공유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류춘규)가 수십만 점에 이르는 신라 기와의 분류 체계와 용어 통일화에 나선다. 문화재연구소는 최근 경북 경주시 경주출토유물보관동 세미나실에서 학술심포지엄 ‘신라 기와 조사현황과 향후 연구방향 검토’를 열고 현재의 유물 관리 시스템, 자료 활용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이날 심포지엄에는 국립경주박물관과 동국대 등 국내외 학자 수십 명이 모여 신라 기와의 조사연구 과제에 대해 다각도로 토론했다. 발표자들은 모두 현재 신라 기와의 용어와 구분 체계가 학자나 연구마다 상이해 지속적인 연구발전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입을 모았다. 대표적인 신라 기와인 연화문수막새조차 현재 4, 5가지 분류 기준이 혼재하고 있다. 노윤상 동국대 경주캠퍼스박물관 학예연구원은 “그간 다양한 형식과 명칭으로 연구자 간에 혼선이 빚어졌다”며 “시기와 제작기법을 반영한 체계적 분류법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수십만 점에 이르는 신라 기와를 형태나 특성에 따라 분류 기준을 세운다면 향후 연구에 명확한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 문화재연구소는 다양한 의견 및 제안을 종합해 올해 하반기 기와의 분류 체계에 대한 1차 보고서를 내놓을 예정이다. 류춘규 소장은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신라 기와 연구에 대한 학술세미나가 열린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라며 “향후 학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통일 기준을 조속히 마련하겠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승려 학자로 꼽히는 탄허(呑虛·1913∼1983)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특별전이 문을 열었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김영나)은 “테마전 ‘한국의 큰스님 글씨-월정사의 한암과 탄허’를 6월 16일까지 상설전시관 서화관 서예실에서 개최한다”고 밝혔다. 다음 달 17일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탄허 탄생을 기리는 뜻에서 스님과 그의 스승인 한암(漢岩·1876∼1951)의 대표적 서예작품 80여 점을 소개한다. 독립운동가 김홍규(金洪奎)의 자제인 탄허는 젊은 시절 기호학파의 학통을 이어 유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인물. 그러나 한암과의 문답에 감읍해 불교에 귀의한 뒤 화엄경을 비롯한 불교경전 번역사업에 평생을 바쳤다. 특히 화엄경을 우리말로 완역한 ‘신화엄경합론’은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힌다.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의 전통 선풍을 계승한 한암은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고승. 1951년 1·4후퇴 때 오대산 상원사의 소각 위기를 온몸으로 지켜낸 일화가 유명하다. 참선을 중시했지만 계율을 지키고 경전을 연구하는 자세를 함께 갖춰야 올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요지의 가르침을 설파했다. 한국 불교의 중흥을 이끈 스승과 제자이나 필체는 사뭇 대조적이다. 한암은 단정하고 정갈해 격조 높은 선비의 글씨를 보는 듯하다. 반면 탄허의 필치는 활달하고 호방한 기세가 일품이다. 박물관은 “오대산 월정사 두 큰스님의 글씨를 비교해보고 평생 전하려 했던 가르침을 되새겨볼 기회”라고 말했다. 02-2077-9000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