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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자가 뭔지 알기 전부터 몸이 먼저 움직였고, 가락이 뭔지 알기 전부터 흥을 타기 시작했다. 1949년 동네 어귀에서 어르신이 틀어놓은 유성기의 민요에 맞춰 몸을 움직이던 아홉 살 꼬마. “뭘 하는지도 몰랐지만 잘한다니까 계속 춤만 추고 싶었다”던 그 꼬마는 무용 ‘초립동’을 시작으로 지금껏 평생 한국 춤판을 지켰다. 여든이 된 지금도 춤을 처음 배울 때처럼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무대에 오르는 명무(名舞). 월륜(月輪) 조흥동이 20, 21일 서울 종로구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서 ‘조흥동 춤의 세계’ 공연을 펼친다. 신작 ‘영가’와 안무작 ‘남성 태평무’를 선보인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한량무’도 만날 수 있다. 그의 춤 인생 80년을 기념하는 해라 의미가 깊다. 그의 제자 무용수 30여 명이 함께한다. 최근 서울 중구 신당동에 있는 월륜 조흥동 춤 전수관에서 만난 그는 공연의 세부 사항을 적어가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무대를 그려내고 있었다. 주변에선 “그 연세에 어떻게 소품, 음악, 의상을 다 보시느냐”며 걱정도 한다. 하지만 몸과 정신이 흐트러지는 순간 춤도 끝난다는 철학 때문에 손수 점검하는 건 일상이다. 그는 “아무리 좋은 쇠도 며칠 놔두면 녹이 생긴다”며 “일주일만 몸을 안 움직여도 중심이 잘 안 잡히고, 정신도 마찬가지다. 치매가 오면 춤도 끝”이라며 웃었다. 평생 예인으로 살아온 그는 살아있는 역사다. 근대 한국 무용의 거장 한성준(1874∼1942)이 만든 한량무는 제자 강선영을 거쳐 원형 그대로 조흥동에게 전수됐다. 그가 발전시킨 춤은 서울시무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됐다. 흰 도포에 갓을 쓰고 부채를 움켜쥔 무용수가 발 디딤새를 유려하게 맺고 끊는다. 선비의 기상을 마치 학(鶴)의 비상처럼 표현했다. 특히 정지 동작에서 영혼이 움직이는 듯한 묘한 매력을 갖췄다. 그는 “한량무는 젠틀맨의 춤이다. 여성의 장르로 여겨지던 전통무용에 남성성을 입힌 것”이라고 했다. 이번에 독무로 선보이는 ‘영가’는 느낌이 좀 다르다. 그는 “내 이야기이자 한풀이”라고 했다. 몇 해 전 아내를 떠나보낸 상실감과 인생의 허무함을 담았다. 그는 “내 육신을 통해 지내는 천도재다. 먼저 떠난 이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인생무상을 절규하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했다. 흰 도포를 입고 한삼(汗衫), 지전(紙錢)을 소품으로 한 서린 춤사위를 선보인다. 그는 “나의 인생 춤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남성 태평무’는 남성 무용수이자 국가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제1호 이수자로서 새롭게 안무를 짠 작품. 왕비와 여성의 춤이던 태평무에 남성적 위엄을 담았다. 주로 활달한 동작들로 구성됐다. 제자들과 함께 ‘원류한량무’ ‘신노심불노(身老心不老)’ ‘산조춤’ 등의 래퍼토리도 선보인다. 위로 누나만 넷인 그는 경기 이천 천석꾼 집안의 귀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오래만 살라”는 부모의 바람대로 하고픈 걸 하며 자랐다. 다만 무용만은 예외였다. “학원에 여학생만 30, 40명 있을 정도로 무용은 여성의 것”이었기에 집안을 설득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서울에서 중고교에 진학한 뒤에도 몰래 무용을 배웠다. 결국 들통이 난 날에는 “누님한테 호되게 맞았다”고 했다. 그는 송범 김천흥 한영숙 이매방 장홍심 등 당대 이름난 스승들은 모두 찾아다니며 춤을 배웠다. ‘조흥동’ 자체가 브랜드가 되자 국립무용단 초대 예술감독, 경기도립무용단 예술감독 등을 지냈다. 한국 무용, 특히 남성 무용의 기틀을 잡았다. 2018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긴 세월 많은 춤이 그를 거쳐 갔다. 다만 변하지 않는 게 딱 하나 있다. “몸이 추는 게 아니라 혼이 춘다고나 할까. 무아지경인 거지.”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방탄소년단(BTS)이 미국 빌보드가 선정한 ‘연도별 최고의 팝스타’에서 2020년을 대표하는 스타로 꼽혔다. 아시아 가수로는 처음이다. 연도별 최고의 팝스타는 1981년부터 매년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팝스타가 한 명 또는 한 팀씩 선정됐다. 7일 빌보드는 “방탄소년단은 미국 시장에서 K팝의 진정한 도약을 알렸다”며 “이들은 영미권 슈퍼스타들과 나란히 이 명단에 오른 첫 번째 아시아 아티스트”라고 밝혔다. 이어 “방탄소년단의 음악은 팝의 고전이 될 수도 있었지만 단지 언어장벽 때문에 놓쳐 버렸을 모든 음악들을 고통스럽게 상상하게 만든다”고 덧붙였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다음 달 6일부터 25일까지 제19회 한국소극장오페라축제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펼쳐진다. 1999년 시작한 국내 첫 오페라축제로, 120여 개의 민간 오페라 단체가 참여하며 오페라 대중화에 기여했다. 올해는 20일 동안 총 22회의 공연을 관객들에게 선보인다. 창작오페라 세 편과 번안오페라 두 편을 배치했다. 개막작은 오예승 작곡가의 ‘김부장의 죽음’(6, 10, 15일)이다. 미국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을 각색해 대기업 부장이자 가장인 주인공의 비애를 담았다. 부장 명함을 소지한 관람객에게는 티켓을 50% 할인해주는 이색 이벤트도 한다. 작곡가 도니제티의 ‘엄마 만세’(7, 11, 16일)는 극 중 리허설부터 막이 오르기까지 펼쳐지는 출연자들의 한바탕 소동을 그렸다. 코믹 오페라를 표방하는 작품이다. 최우정 작곡가의 ‘달이 물로 걸어오듯’(8, 13, 17일)은 쉰 살을 넘긴 화물차 운전사가 연인을 위해 살인죄를 덮어쓰는 비극적 서사를 담았으며, 작곡가 바일의 ‘서푼짜리 오페라’(9, 14, 18일)는 영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강도의 정략결혼 이야기를 오페라로 풀어냈다. 예술의전당이 자체 제작한 나실인 작곡가의 ‘춘향탈옥’(24, 25일)은 고전을 유쾌하게 재해석했다. 탈옥한 춘향이 천신만고 끝에 몽룡을 찾아 그를 공부시킨다는 설정이다. 공연은 전부 한국어 대사로 진행한다. 공연 시간도 평균 90분대로 잡아 관객이 쉽고 친근하게 오페라와 만날 수 있도록 했다. 출연진의 연기, 노래를 소극장에서 가까이 즐길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장수동 예술감독, 이강호 제작감독, 양진모 음악감독 등 오페라계 베테랑들이 축제를 위해 뭉쳤다. 5만∼7만 원.김기윤 기자 pep@donga.com}
198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미국 시골로 이민 가 농사를 짓는 한국 가족을 그린 영화 ‘미나리’에서 진짜 식구 같은 연기를 선보인 배우들에게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윤여정 외에도 ‘제이컵 가족’을 그린 배우들이 뿜어내는 연기력과 이들의 개인사가 시너지를 일으켜 골든글로브 수상을 일궈냈다는 분석이 나온다. 스티븐 연(한국명 연상엽)은 자신이 연기한 제이컵과 닮았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5세였던 1988년 미국으로 이민 갔다. 지난해 5월 부산국제영화제 기자회견에서 그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오니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중간에 낀 느낌이었다”며 “그래서 우리 가족끼리 훨씬 더 끈끈하게 결속했고 그런 얘기가 영화에 잘 담겨 저도 깊이 공감했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 등 해외 언론은 스티븐 연의 삶을 조명했다. 미시간주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우연히 1학년 때 본 학내 극단 공연이 그의 진로를 바꿨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로스쿨이나 의대 진학 대신 연기자의 길을 택한 그는 독립영화 ‘내 이름은 제리(My name is Jerry)’에서 조연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이후 미국 AMC의 인기 드라마 ‘워킹 데드’에서 시즌1부터 7까지 영리하고 용감한 글렌 역을 비중 있게 소화해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는 봉준호 감독의 ‘옥자’(2017년), 이창동 감독의 ‘버닝’(2018년)에 출연하며 국내 팬들에게도 눈도장을 찍었다. 한예리(모니카 역)는 미나리로 전환점을 맞았다. 배우로서 입지를 넓히고 있던 그는 이 영화로 우뚝 섰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과 재학 당시 영상 촬영에 필요한 무용을 지도하다 우연히 영화에 발을 들인 그는 2005년 단편영화 ‘사과’로 데뷔했다. 2008년 ‘기린과 아프리카’로 미쟝센 단편영화제에서 연기상을 받았고, 2012년 영화 ‘코리아’로 대중에게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2016년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로 주목받았으며 그해 영화 ‘춘몽’으로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같은 해 개봉한 영화 ‘최악의 하루’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2030 여성층 팬덤을 확보한 드라마 ‘청춘시대’도 이때 선보였다. 미국 연예 매체 ‘골드 더비’는 “미나리의 성공 열쇠는 한예리”라며 그의 연기를 호평했다. 두 아역 앨런 김(데이비드 역)과 노엘 케이트 조(앤 역)도 관심을 받고 있다. 극 중 자신을 놀리는 외할머니 역의 윤여정과 팽팽하게 대립하며 유쾌한 ‘케미’를 선보인 앨런 김은 워싱턴 비평가협회 아역배우상을 수상했다. 앨런 김은 1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에 시상식을 시청하는 영상을 올렸고, “우리가 해냈다! 정말 행복하다! 사랑해요 미나리!”라고 소감을 썼다. 연극부 활동을 한 노엘 케이트 조의 연기 역시 호평 일색이다. 실제 남동생을 둔 그는 큰딸 연기를 자연스럽게 소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팬데믹 와중에도 대학로의 저력을 보여주는 뮤지컬 신작이 나왔다. 공연장 방역수칙 완화를 계기로 해외 라이선스 작품 등이 쏟아지는 가운데 순수 창작 뮤지컬인 ‘쿠로이 저택엔 누가 살고 있을까?’가 입소문을 타고 작품성과 대중성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각종 예매사이트 상위권을 점령한 대작들 틈바구니에서 대학로 신작 중 유일하게 선전하고 있다. 지난달 18일 처음 무대에 오른 이 뮤지컬은 일제강점기 귀신들이 사는 저택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형을 잃고 방황하다 우연히 저택을 찾은 주인공 ‘해웅’이 귀신들과 대화한다는 컬트 소재를 끌어왔다. 저택의 지박령(죽은 장소를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영혼) ‘옥희’와 다른 귀신들이 주인공과 힘을 합쳐 각자의 소원을 이루는 해피엔딩이다. 큰 반전이 없는 전개로, 요소요소마다 코믹한 B급 대사와 안무를 배치했다. 사실 시놉시스만 본 관람객이라면 클리셰로 가득한 대학로 소극장 공연을 떠올릴 법하다. 하지만 작품은 상상 이상이다. 특히 감칠맛 나는 극본과 군더더기 없는 연출력이 돋보인다. 이 뮤지컬의 극본은 2018년 충무아트센터의 스토리작가 데뷔 프로그램 ‘뮤지컬 하우스 블랙앤블루’에 선정됐다. 이후에도 각색 등으로 꾸준히 손을 봐서 지난해 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에 뽑혀 무대에 올랐다. 한국 전통설화에서 끄집어낸 귀신 이야기에 독립운동가 이야기를 절묘하게 결합했다. 극작을 맡은 표상아 작가는 “뭐든 할 수 있다고 믿던 어린 시절의 내가 어딘가에 남아 나를 기다린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한 데서 이야기가 시작됐다”고 했다. 대학로 소극장 공연부터 대극장 뮤지컬까지 다양한 작품을 소화한 김동연 연출가가 가세해 짜임새를 더했다. 무엇보다 작품 공모 단계부터 국내 공연 진흥 시스템에 의해 뒷받침된 작품이라 의미가 작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탄탄한 극본이라도 출연진의 연기가 뒷받침되지 못하면 작품도 빛을 보지 못했을 터. 대학로에서 활약 중인 배우 11명이 역할에 따라 1인 2역을 맡으며 무대를 든든하게 채운다. 숨 가쁘게 무대를 휘젓는 안무를 선보이면서도 매끄럽게 넘버를 소화한다. 한국 전통음악부터 팝, 재즈풍의 다양한 음악을 선보이는 4인조 밴드는 관객들의 귀를 즐겁게 한다.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은 무대 구성. 귀신들의 모습을 표현한 홀로그램 영상을 무대 상단에 쏘아 올리며 무한한 상상력을 뻗도록 자극한다. 극의 공간적 배경인 저택을 크게 벗어나지 않음에도 무대를 얼마든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선보인다. 대학로만의 맛과 세련미를 갖추고 실험성까지 더한 수작이다. 포털, 예매사이트 평점이 모든 걸 말해주진 않지만 10점 만점에 9.8점은 괜히 나온 숫자가 아니다. 21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플러스씨어터, 2만2000∼6만6000원, 8세 관람가.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영화 ‘미나리’에서 진짜 식구를 그린 배우들에게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최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윤여정 외에도 ‘제이컵 가족’을 그린 배우들이 뿜어내는 연기력과 이들의 개인사가 시너지를 일으켜 골든글로브 수상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배우 스티븐 연(제이컵 역·한국명 연상엽)은 극중 역할과 닮았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5살 때인 1988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지난해 5월 부산국제영화제 기자회견에서 그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오니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중간에 낀 느낌이었다”며 “그래서 우리 가족끼리 훨씬 더 끈끈하게 결속했고 그런 얘기가 영화에 잘 담겨 저도 깊이 공감했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 등 해외 언론들은 스티븐 연의 삶을 조명했다. 미국 미시건주에서 유년을 보낸 그는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1학년 때 관람한 학내 극단 공연이 그의 진로를 바꿨다. 가족 반대를 무릅쓰고 로스쿨이나 의대 진학 대신 연기자의 길을 택한 그는 독립영화 ‘내 이름은 제리(My name is Jerry)’에서 조연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이후 미국 AMC의 인기 드라마 ‘워킹 데드’에 출연해 배우로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영리하고 용감한 ‘글렌’ 역을 맡아 시즌1부터 7까지 비중 있는 역할을 소화했다. 그는 봉준호 감독의 ‘옥자’(2017), 이창동 감독의 ‘버닝’(2018)에 잇따라 출연하며 국내 영화 팬들에게도 눈도장을 찍었다. 배우 한예리(모니카 역)는 미나리로 전환점을 맞았다. 배우로서의 입지를 서서히 넓히고 있었던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우뚝 섰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과 재학 당시 영상촬영에 필요한 무용을 지도하다 우연히 영화에 발을 들인 그는 2005년 단편영화 ‘사과’로 데뷔했다. 이어 2008년 ‘기린과 아프리카’로 미쟝센 단편 영화제에서 연기상을 수상했다. 2012년 영화 ‘코리아’에 출연해 대중들에게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여러 작품에서 주연과 조연을 맡았던 그는 2016년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로 주목 받았다. 그해 영화 ‘춘몽’으로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같은 해 개봉한 영화 ‘최악의 하루’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2030 여성층 팬덤을 확보한 드라마 ‘청춘시대’도 이때 선보인 작품이다. 미국 영화전문 매체 ‘골드 더비’는 “미나리의 성공 열쇠는 한예리”라는 분석을 내놓으며 그의 연기력을 호평했다. 영화 속 두 아역배우 앨런 김(데이비드 역)과 노엘 케이트 조(앤 역) 역시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다. 막내아들 역의 앨런 김은 미워할 수 없는 장난꾸러기 캐릭터 그 자체였다. 극중 자신을 놀리는 할머니 역할의 윤여정과 팽팽하게 대립하며 유쾌한 케미를 선보여 워싱턴 비평가협회 아역배우상 등을 수상했다. 연극부 활동을 한 노엘 케이트 조의 연기 역시 호평 일색이다. 실제 남동생을 둔 그는 큰 딸 연기를 자연스럽게 소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공유 오피스가 진화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장기화로 재택근무가 활성화된 데 따른 것이다. 기존 공유 오피스는 넓은 개방 공간인 라운지를 중심으로, 여러 업종의 근무자가 함께 일하는 환경이 포인트였다. 하지만 감염증 우려로 다중이 모이는 시설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면서 공유 오피스도 개인화·소형화를 꾀하고 있다. 코로나 이후 재택근무 기간이 길어져 업무효율 저하로 인해 업무와 주거 공간의 분리를 호소하는 이가 늘고 있다. 공유 오피스 업계는 이런 수요를 잡기 위해 변화를 모색하며 총력전을 펴고 있다. 업계는 코로나19가 잦아든 후에도 당분간 이 같은 흐름이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더 작게, 더 프라이빗하게 회사원 박재형 씨(32)는 요즘 서울 관악구 서울대입구역 집 근처 공유 오피스인 ‘집무실’에서 일하고 있다. 집 근처 사무실을 표방한 이곳은 회원제로 운영되는 공유 오피스. 언뜻 보면 칸막이 좌석이 빽빽이 들어찬 독서실 같기도 하고,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카페나 사무실을 떠올리게 한다. 방역과 더불어 사방이 막힌 ‘집중형’부터 정반대의 ‘개방형’ 좌석 형태를 이용자가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박 씨는 “침대와 책상이 같은 공간에 있는 방에서 오랜 시간 일하다 보니 집중력, 효율성이 떨어졌다. 집 근처에서 편하게 찾을 수 있는 업무 공간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김성민 집무실 대표는 “재택근무에 대한 사회 인식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 걸 느꼈다”며 “기존 공유 사무실이 밀집한 종로 여의도 강남 등 도심으로 이동하는 대신 거주지 근처에 자리 잡은 사무공간을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현재 운영 중인 3개 지점에 이용자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 인천 중구의 복합문화공간 ‘서담재’는 갤러리, 세미나실로 쓰이던 공간을 최근 리모델링해 ‘공유 서재’로 바꿨다. 일자별, 시간대별로 이용자가 특정 공간을 예약해 사용할 수 있다. 5개 방으로 구성된 이곳은 크기에 따라 1∼4명이 이용할 수 있다. 혼자 쓰는 좁은 방 안에는 책상 옆에 침대가 복층으로 놓여 업무 중 잠시 쉴 수도 있다. 화상회의 프로그램 ‘줌’으로 회의를 하거나, 동영상 강의를 하는 전문직 종사자들이 많이 찾고 있다. 이애정 서담재 대표는 “코로나로 지난해는 문화공간을 제대로 운영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시대가 요구하는 대로 소형화된 공간으로 리모델링했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의 집을 찾아 취향을 공유하는 ‘남의 집 프로젝트’도 있다. 남의 집 거실이나 안방으로 출근하는 개념이다. 호스트가 본인 집이나 작업실 등을 여러 사람이 일할 수 있는 장소로 내놓는 것으로, 보다 개인화한 공유 오피스다. 한옥, 빌라, 갤러리, 작업실 등 호스트가 공개하는 모든 장소가 사무실이 될 수 있다. 이용자들은 “다른 이용자들과 적정한 거리를 두고 안전하게 근무할 수 있어 좋았다”는 반응이다. 이런 공유 오피스는 서울 전역으로 확산하고 있다. 김성용 남의집 대표는 “팬데믹 이후 모임 자체에 대한 감염 우려는 있지만 사무 공간의 필요성을 호소하는 이는 확연히 늘었다”고 했다. 집에서 일하지만 아직 밖으로 나갈 준비가 안 된 이들 사이에선 이른바 ‘홈피스(홈+오피스)’ 만들기가 유행하고 있다. 최근 유튜브에는 집을 사무실로 꾸미는 방법을 설명한 홈피스 영상이 인기다. 하루 종일 일하는 장면을 촬영하거나, 홈피스 물품을 세세하게 설명하는 영상이 많다. 음성 기반 소셜미디어 ‘클럽하우스’에서도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대화방이 꾸준히 개설되고 있다. 해당 대화방에선 자신의 홈피스 모습을 설명하고 일의 효율을 높이는 방법이 소개된다.○ ‘위드 코로나’ 시대 공유 오피스 확대 예상 국내에 27개 지점을 보유한 공유 오피스 기업 ‘패스트파이브’도 개인화에 초점을 맞춰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곳도 코로나 이후 소규모 모임 혹은 개인의 이용 문의가 부쩍 늘었다. 지난해 상반기 한 달 약 40건이던 개인 입주 문의는 지난달 약 330건으로 급증했다. 이에 따라 개방 공간보다 독서실 형태의 칸막이형 좌석을 늘렸다. 패스트파이브 관계자는 “다양한 형태의 프로그램을 코로나 사태 이전부터 구상 중이었는데 팬데믹을 계기로 변화가 가속화됐다. ‘개인에게 집중하자’는 흐름이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공유 오피스 기업 ‘스파크플러스’도 100% 지정좌석제로 운영하는 ‘프라이빗 데스크’를 도입했다. 조금 더 차분하고 조용하면서 타인과의 접촉을 줄이는 콘셉트다. 재택근무로 화상회의 관련 전용 공간도 늘렸다. 감염 우려로 인해 계약 전 현장을 둘러보는 과정마저 꺼리는 고객을 위해 사무실 공간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온택트 프리(pre) 투어’도 선보였다. 사무실 출입 시 직원을 거치지 않는 무인 시스템도 모든 지점으로 확대하고 있다. 목진건 스파크플러스 대표는 “공용 공간에서 방역을 우려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분산 업무를 강화하는 사회 분위기로 인해 관련 수요가 늘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세계적 추세도 맞닿아 있다. 8개국에 걸쳐 40개 이상의 지점을 갖춘 ‘저스트코(JustCo)’는 대형 공유 오피스 기업 중 처음으로 시간제 상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도심과 교외 주거지에 배치한 1인용 소형 사무실 ‘스위치(Switch)’도 도입했다. 공유 오피스 조사기관 코워킹 리소시스(Coworking Resources)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공유 오피스 이용자 수는 약 193만 명에 달한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리서치앤드마켓은 세계 공유 오피스 시장 규모가 2019년 92억7000만 달러에서 지난해 82억4000만 달러로 줄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향후에는 관련 시장 규모가 연평균 11.8%씩 성장해 2023년 114억2000만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했다. 코로나19와의 공존을 뜻하는 ‘위드 코로나’ 흐름에 맞춰 원격근무가 확대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일단 누구든 만나라.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구독자’와 ‘조회수’는 따라온다. 유튜브에서 인터뷰 전문 채널이 최근 인기를 끌고 있다. 언론매체가 매일 수많은 인터뷰 기사를 쏟아내는 시대, 해당 채널의 인터뷰 대상자는 조금 다르다. 유명하지 않아도,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사람이라도 괜찮다. 원양어선 항해사부터 외국인 노동자, 학교폭력 피해 경험자, 한 시대를 풍미한 뒤 잊혀진 가수까지.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할 거리만 있다면 누구든 인터뷰 대상이 될 수 있다. ‘인터뷰 전문’을 내세운 유튜브 채널들은 주로 10분 안팎의 영상을 올린다. 구성은 극도로 단순하다. 채널 운영자이자 인터뷰 진행자인 한 명과 인터뷰이가 등장한다. 이들이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 내용이 하단 자막에 나올 뿐 별다른 영상 편집도 없다. 진행자는 그때그때 궁금한 걸 묻고 가만히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게 전부다.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를 누가 궁금해할까 싶은데 해당 채널에 구독자가 몰린다. 최근 2, 3년 새 만들어진 유튜브 채널 ‘까레라이스tv’ ‘직업의 모든 것’ ‘근황올림픽’ ‘잼뱅tv’의 구독자 수는 23일 기준 평균 40만 명에 달한다. 채널별 누적 조회수는 1억 회가 넘으며, 이들이 그동안 만난 인터뷰이만 평균 300명이 넘는다.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타인의 등장과 이들의 편집되지 않은 진솔한 발언에 조회수는 나날이 높아진다. 까레라이스tv는 ‘우리가 몰랐던 그 바닥’을 주제로 다양한 사람의 생활터전을 보여준다. 최근 원양어선 항해사가 등장해 “어선을 타고 22세에 2억 원을 모았다”며 지구 반대편 바다 위에서 경험한 일화를 털어놓자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고생만큼 대가를 받은 것”이라며 호응이 줄을 이었다. 채널 운영자는 “개인사업 시작 전 다양한 이를 만나며 아이디어를 얻고 인생 공부를 하려던 게 시초다. 인터뷰 전까지 어떤 소통과 조율 없이 현장에서 즉석으로 궁금한 걸 묻는다. 구독자와 같은 눈높이에서 질문하고 말을 듣는 게 인기 요인”이라고 말했다. 직업의 모든 것, 잼뱅tv에서도 직군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이가 등장한다. 정병권 잼뱅tv 운영자는 “누구든 사정이 있다는 철학을 갖고 편견 없이 인터뷰하는 게 목표다. 다듬어지지 않은 솔직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근황올림픽은 인생에서 한 번쯤은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가 잊혀진 이들을 만난다. 전직 방송인, 개그맨, 가수 등이 많다. 채널 운영자 박현택 씨는 “출연자가 후회하지 않을 인터뷰를 목표로, 방송에서 할 수 없었던 얘기를 해 재미와 감동을 노린다”고 했다. 과거엔 채널 운영자가 인터뷰 대상을 직접 발굴하고 섭외했다. 이제는 구독자가 늘면서 일부 채널의 경우 유명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이 인터뷰를 자청하기도 한다. 한 채널 운영자는 “상대가 누구든 수행원이나 보좌진 없이 일대일로 인터뷰하는 게 원칙”이라고 했다. 대중매체에서 보기 힘든 출연자를 볼 수 있는 게 장점인 동시에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누군가 자신의 과거를 미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등 검증 부족으로 인한 부작용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 채널에서 방송이 되진 않았지만 조직폭력배 등 전과자를 인터뷰한 사례가 있는 걸로 알려졌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무대 밖 현실이 너무 가혹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공연장 안에서든 밖에서든 불안한 마음을 지우기 힘들다. 객석에서도 마찬가지다. 바짝 당겨쓴 마스크 안으로 넘쳐 나오는 흥과 환호성을 꽉꽉 억누르고 참아야 한다. 이럴 때 필요한 게 판타지다. 뮤지컬이 판타지를 심는 장르라면, 뮤지컬 ‘위키드’는 관객을 환상 속으로 깊고 깊게 끌어들이는 ‘딥 판타지’다. 고된 현실을 어설프게 흉내 내지 않아 더 매력적이다. 황홀한 넘버와 무대 세트로 무장한 작품은 관객을 동화 속 다른 차원의 시공간으로 완벽히 옮겨놓으며, 잠시나마 가혹한 현실을 잊게 하는 마력이 있다. 무대에 서는 배우들도 한마음이다. “판타지로 당신들을 위로하고 싶다”고. 23일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에서 열린 뮤지컬 위키드 출연진 공동 인터뷰에서 배우들은 “공연이 이처럼 절실했던 순간은 없었다. 역경에 맞서 날아오르는 초록 마녀 엘파바처럼 긍정적 에너지와 위로를 객석에 전하겠다”고 입을 모았다. 이날 인터뷰에는 극 중 마법사 역을 맡은 남경주 배우의 사회로, 초록 마녀인 엘파바 역의 옥주현 손승연, 글린다를 연기하는 정선아 나하나, 피에로 역의 서경수 진태화 배우가 참석했다. 5년 만에 국내 무대에 오른 뮤지컬 위키드는 1995년 발표한 소설 ‘위키드: 괴상한 서쪽 마녀의 삶과 시간들’을 각색한 작품이다. 익히 알려진 동화 ‘오즈의 마법사’를 유쾌하게 뒤집은 내용이다. 초록색 피부를 가진 마녀 엘파바가 실은 거대 권력에 저항하던 선한 마법사였다는 설정이다. 무대 상단에 설치된 거대한 ‘타임 드래건’ 세트를 비롯해 비눗방울 기계, 날아다니는 원숭이, 화려한 조명까지 볼거리가 넘친다. 특히 엘파바, 글린다 역은 공중에 매달린 채 노래하는 장면이 많아 “말도 안 될 정도로 숨 가쁘고 힘든 작품”으로 꼽는다. 2003년 초연 이후 16개국에서 관객 6000만 명을 끌어모은 히트작이다. 2014년 국내 초연 후 7년 만에 작품을 맡은 옥주현은 “팬데믹으로 전 세계 위키드가 모두 멈춘 뒤 제일 처음 올라가는 게 한국 위키드라 자부심이 크다. 이번 관객과의 만남은 어느 때보다 닭살 돋았다”는 소회를 밝혔다. 앞서 세 시즌의 공연에 모두 출연한 정선아도 “우리가 어떻게 공연문화를 즐겨야 하는지 매일 새 역사를 쓰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남경주는 “한 칸 띄어 앉기로 객석 절반이 비어 있는데 배우들은 열연으로, 관객들은 무거운 박수로 빈 공간을 채우는 것 같아 감격스럽다”고 했다. 작품은 한없이 철없고 해맑은 동화를 전하는 듯하지만, 사실 극을 곱씹을수록 메시지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 극 중 인간처럼 말을 하던 동물들은 점차 말하는 법을 잊는다. 옥주현은 “이는 진실, 올바름, 선을 추구하는 존재가 점차 사라진다는 뜻으로 저 역시 주변을 돌아보게 만들었다”고 했다. 초록 마녀가 무대 꼭대기로 솟아오르며 부르는 ‘중력을 넘어서’는 극의 핵심 넘버다. 중력은 현실을 무겁게 짓누르는 팬데믹부터 진실을 감추려는 세력까지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된다. 마녀는 오늘도 노래한다. “나 중력을 벗어나 날아올라.” 5월 1일까지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 6만∼15만 원, 8세 이상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이번 앨범 홍보를 위한 세계 투어(콘서트)는 하지 않겠다.” 영국의 세계적 록 밴드 콜드플레이의 리더 크리스 마틴은 2019년 말 새 앨범을 발표하며 이같이 선언했다. 공연하는 곳 어디에서든 수천억 원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이들이 이 같은 결정을 한 이유는 다름 아닌 환경 보호. 공연과 환경이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싶은데 마틴은 꽤나 깊은 고민 끝에 진지한 답변을 내놨다. 이들이 타고 다니는 비행기부터 대형 공연 장비 운반, 공연 중 발생하는 쓰레기, 관객들이 먹고 마시고 이동하는 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이 환경 보호에 반한다는 것. 그는 “환경적으로 유익한 방법을 찾기 위해 앞으로 2, 3년 정도 공백 기간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환경단체들이 유명인의 결단에 흡족해한 것은 물론이고 아쉬워하던 팬들도 이내 그의 결정을 지지했다. 다른 해외 아티스트도 이에 공감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친환경 공연’ 실천에 동참해 왔다. 최근 국내에서도 공연 제작 과정에서 환경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태동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공연계가 초토화됐지만, 팬데믹은 지구와 환경을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지난달 김광보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에서 “공연 제작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탄소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겠다”며 “공연을 준비하는 데 제약이 따를 수 있지만 연극계도 중요하게 인식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임기 중 청사진과 운영 계획을 밝히는 자리였던 만큼 아직 구체적 방안이 마련된 것은 아니다. 공연계에서는 “국립 기관이 작품 주제가 아닌 제작 과정에서 환경 보호를 언급한 건 처음이다. 고무적이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김 감독은 최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그간 연출 작업을 하면서 무대 세트를 막판에 다 들어냈던 경험이 있다. 전부 탄소를 과다 배출하고 돈을 까먹는 일이다. 돌이켜 보면 조금 먼저, 치밀하게 움직였다면 다 막을 수 있었던 일”이라고 털어놨다. 이어 “연습 과정 중 세트, 소품을 새로 만들고 쓰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이 같은 낭비를 줄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공연계 풍토를 단번에 바꿀 수 없기에 국립극단은 작은 것부터 시도할 방침이다. 우선 소품, 세트, 장비 등을 무상으로 대여하고 공유하는 플랫폼을 구축한다. 민간 공연단체도 이를 빌릴 수 있다. 이를 위해 현재 창고에 보관 중인 소품, 의상, 장비를 점검해 목록을 작성하고 있다. 국립극단의 윤리헌장에도 환경 보호 관련 항목을 넣을 계획이다. 김 감독은 “물리적으로 이를 보관할 창고와 여력을 갖춘 국립 기관이 캠페인을 시작한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고 했다. 그간 국내 공연계에서 ‘친환경 공연’을 만들려는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공쓰재’(공연 쓰레기 재활용 커뮤니티)는 “공연과 환경이 공존하며 지속 가능한 형태로 나가는 방법”을 고민하던 일부 연극인들이 2013년 만들었다. ‘당근마켓’처럼 쓰고 남은 물품을 커뮤니티에서 교환하는 식이다. 지금도 일부 물품이 교환되고 있지만, 활성화되진 않았다. 친환경 굿즈 판매는 제작사가 곧바로 실천할 수 있는 환경 보호 방법 중 하나다. 최근 개막한 뮤지컬 ‘위키드’는 일상에서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자는 취지로 ‘친환경 에디션’ 굿즈 패키지를 17일 선보였다. 종이와 면으로 만든 파우치, 손수건으로 굿즈를 제작했다. 이는 환경, 동물이 등장하는 ‘위키드’의 메시지와도 맞닿아 있다. 하지만 여전히 현장 인식은 저조한 편이다. 지난해 7월 ‘연극in’이 공연계 관계자 5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다수는 불필요한 무대장치와 세트를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 공감하면서도 응답자의 70%는 제작 과정에서 겪은 환경 문제에 대해 ‘잘 인식하지 못하는 편’이라고 답했다. 김 감독은 “예술지상주의를 추구하는 이들을 존중하기에 절약을 무조건 강요할 순 없다. 하지만 지속 가능한 공연을 고민하는 움직임은 시대적 흐름”이라고 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식스팩의 상남자 백조들이 뛰노는 발레 ‘백조의 호수’ 마지막 장면. 고전을 파격적으로 재해석한 현대판 ‘백조의 호수’를 내놓으며 세계적 안무가 반열에 오른 매슈 본(61·사진)의 국내 미공개 작품들이 온라인으로 소개된다. 본은 영국 최고 권위의 공연예술상 ‘올리비에 어워드’를 아홉 차례나 받은 최다 수상자. 현대무용가 최초로 영국 왕실 기사 작위를 받은 거장이다. LG아트센터는 다음 달 5∼27일 매주 금, 토요일에 작품 4편을 네이버TV를 통해 유료로 상영한다. 관람료는 편당 1만 원.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그의 내한 공연이 무산된 터라 무용 팬들은 벌써부터 들썩이고 있다. 최근 유튜브 채널에서 공개한 영상과 서면 인터뷰로 만난 본은 “지난해 팬데믹으로 한국 관객과 만나지 못해 실망이 컸다. 3월 온라인 공연에서 ‘예기치 못한 것들’을 기대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의 공연은 파격으로 가득하다. 25년 전 선보인 ‘백조의 호수’에서 발레복 상의를 벗어던지고 섹시한 근육을 드러낸 남성 백조들의 점프에 세계 무용계는 열광했다. 이번에 공개하는 ‘레드 슈즈’ ‘카맨’ ‘신데렐라’ ‘로미오와 줄리엣’ 등 네 편도 신선함 그 자체다. 관객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작품들로 추렸다. 가장 먼저 선보이는 ‘레드 슈즈’(3월 5일 오후 7시 30분, 20일 오후 3시)는 지난해 무산된 내한공연에서 소개될 레퍼토리였다. 1948년 동명의 발레 영화를 각색해 무대에 올린 이 작품은 본에게 “예술로서의 발레를 처음 만나게 한 작품”이다. 위대한 무용수가 되고 싶어 하는 어린 소녀가 작곡가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그는 “무용단에 관한 이야기를 무용단이 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며 “창작에 대한 열정과 예술을 위한 희생을 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극 전체를 움직임, 연기, 마임으로 이끌어가면서 런던, 파리, 몬테카를로 등 장소에 따른 색채와 장소를 강조해 볼거리가 풍성한 작품”이라고 했다. ‘카맨’(3월 6일 오후 3시, 19일 오후 7시 30분)은 2000년대 초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오페라 ‘카르멘’을 현대적으로 각색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거칠고 원초적인 맛이 살아있는 작품으로 꼽혀 ‘댄스 스릴러’로 불린다. 그는 “일부에선 이 작품을 선정적이고 더럽다고 말하지만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움직임을 가져오고 싶었다”고 말했다. ‘로미오와 줄리엣’(3월 12일 오후 7시 30분, 27일 오후 3시)은 2019년 영국에서 초연됐다. 수많은 버전의 안무 작품들이 있지만 ‘젊은 작품’을 만들고 싶었단다. 그래서 10대 무용수들이 주인공이다. 정신병원을 연상케 하는 ‘베로나 연구소’에서 획일적 시스템에 저항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메시지를 담았다. ‘신데렐라’(3월 13일 오후 3시, 26일 오후 7시 30분)는 2017년 초연한 작품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 대공습을 배경으로 한 사랑 이야기다. 본은 “흔히 상상하는 신데렐라는 버려도 좋다. 떨어지는 폭탄과 당대 사람들이 느낀 현실도피를 음악 속에 표현했다”며 “몽상가 소녀 신데렐라를 기대해 달라”고 밝혔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연출가 오루피나(38)의 작품에선 무대 암전이 거의 없다. 주역 배우들도 좀처럼 무대 밖으로 퇴장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쉬어가는 타이밍이 거의 없다는 의미다. 혹여 잠시라도 배우가 보이지 않는다면? 무대를 조용히 빠져나온 배우는 아마도 다음 장면에서 무대 정반대편이나 세트 위로 별안간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물리적으로 이게 가능할까 싶은데, 결국 잠시 사라진 배우들이 백스테이지에서 전력 질주한 뒤 숨이 잦아들기도 전 다음 넘버를 소화하는 방법뿐이다. 출연진에게는 더없이 가혹해도, 관객 눈에는 가장 친절한 오 연출가의 지론 때문이다. 지난해 제4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대상, 연출상을 비롯해 7관왕을 거머쥔 ‘호프’의 오 연출가가 가혹하면서도 친절한 신작 ‘검은 사제들’로 돌아왔다. 최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난 오 연출가는 “팬데믹으로 모두가 우울증에 걸린 듯 힘든 시기, 눈에 보이지 않는 악귀가 마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같았다”며 “공포, 악귀에 대한 얘기보다도 인간의 내면을 고찰하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25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유니플렉스에서 개막하는 ‘검은 사제들’은 동명의 영화를 각색한 작품으로 뺑소니 교통사고 이후 의문의 증상에 시달리는 ‘이영신’을 구하려는 ‘김신부’와 ‘최부제’ 이야기를 그렸다. 클래식, 팝, 포크 장르 음악을 고루 담았으며 선과 악의 경계를 오가는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극의 핵심이다. 퇴마의식, 악귀 등을 다룬 오컬트 뮤지컬은 그간 국내 무대서 흔치 않았기에 관객에겐 반가운 장르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그럴듯하게 표현해내는 게 오 연출가와 모든 제작진의 큰 숙제다. 뮤지컬 ‘호프’에서 손발을 맞춘 강남 작가, 김효은 작곡가, 신은경 음악감독, 채현원 안무감독이 함께 머리를 맞댔다. “영화에선 마귀의 기운을 쥐와 바퀴벌레가 나타나는 컴퓨터그래픽(CG)으로 표현할 수 있잖아요. 저희에게는 제한적 무대 안에서 안무, 소품, 의상, 음향, 노래를 활용해 최대한 관객의 상상력을 끄집어내는 방법뿐입니다.” 언제부턴가 배우들 사이에선 오 연출가가 작품을 맡았다고 하면 퇴장 없는 ‘빡센’ 공연이라는 말이 돈다. 이번에도 배우들은 보이지 않는 악귀와 싸우며 쉼 없이 연기하고 노래하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그는 “연습실에서부터 각 장면이 관객 눈에 어떻게 잘 보일지 토론하고 설득한다. 때로 배우가 먼저 ‘저는 퇴장 안 해도 괜찮다’고 할 때 정말 고맙다”고 했다. 이어 “다만 제 스타일 때문에 앞으로 작품 맡기 힘들 거라는 소문도 돈다”며 웃었다. 어렸을 때부터 “살아있는 반려 피카츄를 만들고 싶어서” 유전공학과에 진학했다는 그는 “생각보다 공대 수학이 어려워서” 공연 연출로 전공 진로를 변경했다. 2008년 뮤지컬 ‘록키호러쇼’ 연출가로 데뷔해 ‘킹 아더’ ‘그림자를 판 사나이’ 등을 맡았다. 어릴 적 소망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는 마치 피카츄처럼 현실 속에 없는 판타지를 무대 위에 매일 쓴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할 수 있는, 따뜻하고 단단한 판타지를 주고 싶다”고 했다. 김경수 김찬호 이건명 송용진 등 출연. 4만4000∼8만8000원.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엄마를 무시하는 사춘기 아들의 사연이 공개된다. 이날 스튜디오에는 예비 중학생, 예비 초등생 남매를 키우는 부부가 출연한다. 엄마는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이 게임만 하고 대화를 거부한다. 돌이킬 수 없이 멀어질까 봐 걱정이다”라며 고민을 밝힌다. 이어진 영상에서는 게임 때문에 엄마와 충돌하는 금쪽이의 모습이 나타난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휴대전화, 컴퓨터 게임을 놓지 못하는 모습에 엄마는 화를 내며 경고하지만, 금쪽이도 결국 참지 못하고 폭발한다. 문제를 지켜보던 오은영 박사는 게임에 심하게 몰입하는 아이를 위한 해결책을 공개한다. 한편 사춘기 자녀와의 갈등은 부부 싸움으로도 이어진다. 육아 가치관 차이로 고충을 토로하는 아내에게 남편이 “솔직히 대화하기 싫다”고 말하자 그간 참아왔던 아내의 눈물이 터져버린다. 오 박사는 엄마의 상처를 보듬으며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를 위한 대국민 금쪽 처방을 제시한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아이콘택트에서 가장 화제를 모았던 특별한 인연들이 다시 시청자와 만난다. 첫 번째 인연은 추억의 시트콤 ‘똑바로 살아라’에서 부자(父子)로 만났던 배우 노주현과 노형욱. 10대 시절 배우로 활약하다가 한동안 TV에서 모습을 볼 수 없었던 노형욱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똑바로 살아라’에서 제 아버지 역할이셨던 노주현 선생님 생각이 많이 났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노주현은 “막막하겠지만 또 부딪치면 인생이 흘러가지 않냐”며 “잘했어. 잘 이겨냈어”라고 아버지 같은 따스한 위로를 건넸다. 두 번째 인연은 트로트 가수 진성과 50년 지기 고향 동생 ‘진현’의 만남. 진성은 할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보낸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50년 전 애틋한 과거를 떠올린다. 두 사람은 “50년이란 세월이 참 길다. 친형, 친동생처럼 서로를 위로해주던 힘든 시절처럼 앞으로 평생 친형제처럼 지내고 싶다”며 눈물을 흘리는데….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청각장애인 여성과 시각장애인 남성. 우연히 지하철 같은 칸에 탄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지하철이 멈추며 외부와 단절된다. “아무한테도 일어나지 않는 일이 왜 나한테만 일어나!”라고 자책하던 남자는 이내 같은 칸에 다른 이도 함께 있음을 깨닫는다. 수어를 쓰는 여자와 음성어를 쓰는 남자. 이들은 과연 소통이 가능할까. 그리고 서로를 도와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참신한 줄거리와 연출로 무장한 연극 ‘브레이크: BREAK’는 배리어 프리(barrier free·장애인 친화적인) 공연의 새 장을 열었다. 지난달 27일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유튜브 채널에 공개한 영상과 창작 과정을 담은 메이킹 필름은 연극계에 소소한 울림을 주고 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할 법한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의 소통은 무대 위에서 마법처럼 실현됐다. 작품이 갖는 차별성은 이해를 돕는 보조적 수단에 머물던 수어와 음성 해설을 극 내부로 깊숙이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주연 배우인 시각장애인 이동우와 청각장애인 이소별은 각자 그들의 언어로 연기하며, 극 중 ‘코러스’ 역할인 배우 도희경 송윤 김명연은 둘 사이 가교 역할을 한다. 예컨대 이동우가 목소리로 대사를 뱉으면 이를 수어로 표현하고, 이소별이 손으로 말한 수어를 목소리로 크게 외치는 식이다. ‘틴틴파이브’ 출신 가수 겸 연기자로 활동하는 이동우는 선글라스를 쓰고 지팡이를 든 채 무대에 선다. “앞을 볼 수 없으니 미래도 없다”며 실의에 빠진 ‘남자’ 역할이지만, 상대와 소통하며 변하기 시작한다. “오늘 난 아무 역에서나 한번 내려 보겠다”며 용기를 얻는다. ‘여자’ 역할의 이소별은 세상이라는 벽이 두려워도, 누군가 이를 허물고 있다는 믿음으로 세상에 나서려 한다. 러닝타임 37분 내내 주연 곁을 지키는 코러스 배우도 극 전개에 필수적 존재다. 세 사람은 단순히 전달자로 머물지 않고 주변 상황이나 사물을 표현하는 연기도 선보인다. “남자가 일어선다” “지하철 불이 꺼진다” 같은 지문 내용까지도 크게 외친다. 주연의 눈과 귀인 동시에 해설자이자 조연 배우인 셈이다. 송윤 배우는 이전부터 수어를 배웠고, 도희경 김명연 배우는 연습 중 수어를 체득했다. 언뜻 생각하면 ‘제대로 연극이 될까?’라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고된 연습과 치밀한 연출로 극은 일말의 시차나 어색함도 없이 유려하게 흘러간다. 여느 극과 마찬가지로 재미와 감동을 준다. 이날 서울 종로구 이음센터에서 만난 안경모 연출가는 “장애를 신체적 손상으로만 볼 게 아니라 사회적 차별로 인해 ‘장애화되는 것’으로 봤다. 수어와 음성 해설이 그간 극 바깥에 머무는 한계를 극복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동우는 “장애를 구체화한 이야기에 끌렸다. 대본을 음미하는 매일이 행복했다”고 했다. 세 차례 연극 무대에 오른 ‘신인’ 이소별은 “장애를 미화하지 않으며, 연극적으로 새로운 시도였기에 감흥이 컸다”고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이들은 연습 중 더욱 가혹한 파고와 맞섰다. 마스크 착용이 제일 큰 문제였다. 상대방의 입술을 보며 의중을 파악해야 하는 청각장애인에게는 특히 걸림돌이 됐다. ‘립뷰 마스크’를 착용해도 금세 차오른 입김이 입술을 가려 시간이 몇 배로 걸렸다. 텍스트-음성 변환 애플리케이션도 늘 끼고 다니는 필수품이 됐다. 하지만 이동우는 “이 정도로 어려운 게 없었나 싶을 정도로 연습부터 공연까지 우리에게 난관은 하나도 없었다”며 웃었다. 작품 제목 ‘브레이크’처럼 이들은 ‘장애의 벽’을 박살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인간계 모든 학문을 통달한 노(老)학자 파우스트. 우주를 꿰뚫는 진리를 얻으면 인간 세상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자부했지만, 그는 이내 허무주의에 빠진다. 악마 메피스토는 부유하는 그의 영혼에 은밀히 접근해 속삭인다. 당신에게 열정을 줄 테니 내게 영혼을 팔라고. “계약할까요?”라는 제안에 파우스트는 답한다. “좋다!” 신은 과연 ‘김성녀 파우스트’에게 구원의 기회를 줄까. ‘마당놀이의 여왕’ 김성녀(71)가 26일 개막하는 국립극단의 신작 ‘파우스트 엔딩’에서 파우스트 박사로 돌아온다. 신작 무대는 약 4년 만이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파우스트 배역을 여성이 맡아 주목을 받고 있다. 8일 서울 용산구 국립극단에서 만난 그는 “여성 배우가 보기에 파우스트는 참 탐나는 역할이었다. 연기 인생 30여 년 만에 기회가 왔다”며 “‘여자 파우스트’ 말고 그냥 ‘김성녀 파우스트’로 봐 달라”고 강조했다. 작품은 당초 지난해 4월 개막할 예정이었지만 연습실에서 그가 어깨 부상을 당한 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이 겹치며 무산됐다. 그는 “지난해에는 열정만 넘치던 상태였다면 지금은 차분히 작품을 들여다보고 있다. 결과적으로 ‘파우스트 박사’에겐 더 나은 상황”이라고 했다. 극은 조광화 연출가가 직접 각색했다. 큰 틀은 유지한 채 괴테의 원작을 115분 분량으로 압축하고 비틀었다. 파우스트 박사는 고뇌하는 장면 외에는 부드럽고 유쾌한 인물로, 메피스토(박완규)는 장난기 넘치는 귀여운 악마로 그렸다. 김성녀는 “고전의 본질만 전한다면 대중과 맞닿는 방법론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며 “조는 사람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는 2012년부터 7년간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을 맡으며 창(唱)의 본질과 극의 대중성을 동시에 잡은 그의 예술 지론과도 맞닿아 있다. 남성 노학자로 분한 그의 모습이 다소 신기할지 모르지만 그는 사실 남자 배역에 일가견이 있다. “고정관념 깨는 걸 즐긴다”는 그는 과거 마당놀이 ‘홍길동전’에서는 ‘홍길동’을, ‘햄릿’에서는 ‘호레이쇼’를 맡았다. 배에서 우러나오는 발성은 장군의 호령소리 같다가도 이내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돌변한다. 1인극에서는 홀로 30여 개 역을 소화하는 변신의 귀재다. 그는 “평생 롤 모델이 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판소리”라며 “한 작품에서 춘향부터 변 사또까지 모든 걸 소화해야 하는 국악이 제 단단한 연기와 소리의 토대”라고 했다. 이어 “연출가가 보기에 남자 분장이 은근히 잘 어울리는 영향도 있는 것 같다. 나도 무대 위 내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다”며 웃었다. 현실 세계에서도 그는 카멜레온처럼 늘 변신한다. 연극배우, 마당놀이 여왕, 예술행정가, 교수 등 수식어가 연기 인생만큼이나 쌓였다. 숱하게 변신하면서도 ‘완벽한 연기’라는 소망을 꿈꾸고 놓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연습 중 조금 변화도 생겼다. “파우스트 박사를 보니 꼭 제 인생 같다. 완벽함을 좇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게 인간 아니겠느냐”라고 했다. 원작 희곡과 작품의 가장 큰 차이는 결말이다. 원작에서 파우스트는 신으로부터 구원받지만, 이번 작품에선 신이 준 기회를 거절하고 스스로 책임지기 위해 지옥행을 택한다. 그는 “인간성이 말살된 오늘날, 작품은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인간들에게 전하는 일갈”이라고 했다. 극의 마지막 장, 신과 메피스토 앞에 선 ‘김성녀 파우스트’는 외친다. “지옥으로 가겠습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설 연휴를 앞두고 대형 뮤지컬들이 조심스레 기지개를 켜며 잇따라 무대에 오르고 있다. 방역당국이 공연장의 사회적 거리 두기 지침을 완화함에 따라 객석 가동률이 30%에서 50%까지 높아진 데 따른 것이다. 공연업계는 “고사 직전 가까스로 동력을 얻었다”는 반응이지만 여전히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하는 수준. 티켓 수량이 줄어든 상황에서 암표상까지 활개를 쳐 공연계의 고심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다수의 뮤지컬 제작사들이 방역당국 발표 이후 공연 재개를 결정했다. 뮤지컬 ‘명성황후’ 제작사 에이콤은 2일 작품을 개막한 데 이어 폐막일을 다음 달 7일로 늦추고 공연을 열흘간 연장하기로 했다. 앞서 세 차례나 개막일을 미뤄 공연 횟수는 크게 줄었다. 방역지침이 완화된 이후 공연 회차를 한 회라도 더 늘리려는 고육책이다. 윤홍선 에이콤 대표는 “죽을 뻔하다가 심폐소생술을 받았다. 적자가 예상되지만 관객과의 약속을 위해 공연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지난해 12월 중순부터 개막을 미루다 2일이 돼서야 관객과 처음 만났다. 배우 조승우를 비롯해 류정한, 홍광호 등 티켓 파워를 가진 스타들이 무대에 오르며 공연계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뮤지컬 ‘위키드’는 당초 16일 개막이 예정돼 있었지만 설 연휴인 12∼14일 사흘간 5회 공연을 추가했다. 사실상 공연 개막일을 앞당긴 것이다. 다음 달 초까지 티켓이 전석 매진되는 등 그간 억눌렸던 관객 수요가 몰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캣츠’ 40주년 앙코르 기념공연도 26일에서 28일로 폐막일을 늦췄으며, 뮤지컬 ‘몬테크리스토’ 역시 2일 다시 개막한 데 이어 폐막일을 다음 달 7일에서 28일로 미뤘다. 지난해 10월 개막 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중단과 재개를 숱하게 반복한 ‘고스트’를 비롯해 ‘호프’ ‘젠틀맨스 가이드’도 공연을 재개했다. 거리 두기 완화로 제작사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지만, 대극장 손익분기점이 객석 가동률 70% 수준인 걸 감안하면 여전히 수익 실현은 쉽지 않다. 통상 객석 50%를 채웠을 때 제작비에 맞춰 적자를 겨우 면하는 수준으로 본다. 정부는 현재 ‘동반자 외 두 칸 띄어 앉기’ 혹은 ‘모든 객석 한 칸씩 띄어 앉기’ 중 하나를 택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예매 시스템의 혼선과 공연장에서 동반자를 확인하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기에 사실상 모든 공연장이 ‘한 칸 띄어 앉기’를 유지하는 상황이다. 객석 가동률도 당분간 50%에 머물 것으로 예상된다. 고질적 병폐로 꼽혀온 암표도 넘어야 할 산이다. 공연 티켓 수량이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티켓 오픈 주기는 짧아졌다. 예매 취소가 반복되는 상황에서 불법 매크로 프로그램을 이용한 암표상이 그 틈을 파고들었다. 한 공연 제작사 관계자는 “코로나 시국에 어렵게 발걸음 하는 실수요 관람객과 제작진 모두에게 암표는 악순환”이라고 토로했다. ‘위키드’ ‘맨 오브 라만차’의 제작사는 “사전 통보 없이 불법 거래 티켓을 취소할 수 있다”고 밝혔으나 최근 뮤지컬 ‘위키드’의 VIP석 가격(15만 원)은 3배까지 급등했다. ‘맨 오브 라만차’도 VIP석 가격(14만 원)이 2배 이상으로 치솟았다. ‘위키드’ 출연을 앞둔 옥주현은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작품을 사랑하는 분들만 함께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줌’ 차례… 드라이브스루 성묘… 언택트 설, 마음은 한자리에다가오는 설에도 사회적 거리 두기를 지켜야 하는 마음은 안타깝고 쓸쓸하다. 특히 이번 설에는 직계 가족이라도 5명 이상 모일 수 없어서 더욱 그렇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지난 추석에 사상 첫 ‘언택트 명절’을 경험하면서 비대면으로 정을 나눌 수 있는 노하우가 생겼다는 점이다. 온라인 차례부터 드라이브스루 성묘에 이르기까지,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함께할 수 있는 현명한 방법들을 찾아봤다. 부산에 사는 김지영 씨(40·여)는 지난달 시아버지 제사를 온라인으로 지냈다. 원래는 시어머니와 4남매 가족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데, 시어머니가 모이지 말자고 하셨기 때문이다. 김 씨는 지난 추석에도 못 만나 서운해하는 가족들을 위해 ‘랜선 제사’를 제안했다. 다들 자녀의 온라인 수업으로 ‘줌’에 익숙해진 덕분에 순조롭게 진행됐다. 큰집에서 제사상을 차리되, 각자 집에서 원하는 대로 과일이나 술 등을 곁들였다. 김 씨의 세 자녀는 ‘할아버지 편히 주무세요’라고 쓴 밤하늘 그림을 그려 상에 함께 올렸다. 김 씨는 “지난 추석에는 아무것도 못 하고 지나갔는데 이번에는 이렇게라도 볼 수 있어 다들 웃음이 터졌다”면서 “서로 ‘제사에 이렇게 웃어도 되느냐’고 할 정도로 반갑고 좋았다”고 말했다. 지난해 추석에 이어 올해 설에도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지 못하게 된 데 따른 아쉬움은 크다. 그러나 지난 1년 동안 국민들의 방역 노하우가 쌓이고, 지난해 추석에 한 차례 ‘언택트 명절’을 경험한 게 큰 힘이 되고 있다. ‘온라인’ ‘드라이브스루’ ‘대리’ 등 슬기로운 방식으로 명절의 정을 나누는 ‘신예기(新禮記) 팁’을 알아봤다.○ 온라인으로 흐르는 예와 추모 경기 성남시에 사는 60대 A 씨는 지난 추석에 ‘줌(Zoom)’을 활용해 차례를 지냈다. 평소 명절이나 기일에는 서울에 사는 두 동생 가족이 A 씨 집으로 찾아오지만 언택트 명절을 위한 조치였다. 화면 너머 가족들이 “아버지 좋아하시던 보쌈 좀 많이 집어주세요” “술 한잔만 더 올려주세요”라고 말하면 A 씨는 젓가락으로 보쌈을 집고 술을 따르는 모습을 화면으로 보여줬다. A 씨는 “제사를 준비하는 정성과 마음가짐은 예전 방식이나 온라인 방식이나 똑같았다”며 이번 설 차례도 이렇게 지내겠다고 했다. 어른들을 위해 영상통화나 영상편지를 계획하는 집도 많다. 서울 강남구에 사는 류한나 씨(42·여)는 지난 추석에 강원도 시댁에 가려 했으나 시할아버지가 한사코 말려 종손인 남편만 갔다. 류 씨는 5세 된 아들과 무지개떡을 만들고 색동 한복을 입혀 영상편지를 찍었다. 아이가 “할아버지 다음에 갈게요. 왕할아버지 최고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영상편지를 보고 시할아버지와 시부모는 한참을 웃고 또 웃었다고 한다. 류 씨는 이번 설에는 간단히 차례상도 차리고 설에 맞는 콘셉트를 잡아 아들과 함께 영상편지를 만들 예정이다. 온라인 성묘도 호응이 크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추석을 앞두고 마련한 ‘e하늘장사정보시스템’에는 9월 20일부터 10월 4일까지 약 23만 명이 몰렸다. 이 시스템을 통해 지난 추석 때 100곳 정도 이용할 수 있었던 온라인 추모공원은 1일 기준 346곳으로 늘었다. 인천가족공원이 선보인 가상현실(VR) 추모 서비스는 지난 추석에 이어 이번 설에도 8일부터 21일까지 운영된다. 공원 입구 도로부터 VR로 구현돼 있기 때문에 실제로 납골함이 안치된 장소에 찾아가 차례상을 차리는 듯한 모든 과정을 진행할 수 있다.○ ‘드라이브스루 문안’에 ‘대리 성묘’도 가능 외부인 출입이 금지된 지 오래인 요양병원들은 드라이브스루 방식으로 인사를 건네거나 음식을 전하게 하는 추세다. 울산 이손요양병원은 지난 추석 때 차를 타고 온 가족들이 차창으로 명절 음식을 건네면 병원 직원들이 건네받아 병동에 전달했다. 400명이 입원한 이곳에 추석 연휴 5일간 배달된 음식 꾸러미는 165개. 이모 씨(83)는 “아이들이 만든 음식을 받으니 나를 잊지 않았구나 싶어 좋았다”고 말했다. 성묘 문화도 달라지고 있다. 양재혁 씨(54)는 지난 추석 문중에 ‘드라이브스루 성묘’를 제안했다. 예년에는 차량 몇 대에 빽빽하게 타고 다같이 선산으로 이동한 것과 달리, 각 집마다 차를 따로 타고 차에서 내려 묘소를 찾는 사람도 최소화했다. 경남 밀양추모공원도 지난 추석에 드라이브스루 성묘를 선보였다. 경기 양평군 국립하늘숲수목원에 아버지와 장인을 수목장으로 모신 김동주 씨(59)는 지난 추석 때 ‘대리 성묘’를 했다. 코로나19로 방문 자제를 권한 수목원 측의 제안에 따른 것. 수목원 측이 나무의 문패, 수목 주변 정리, 헌화 장면 등을 사진과 영상으로 보내줘 큰 위안을 얻었다. 울산 남구의 정토사는 사찰에 위패를 모신 200여 명의 추석 합동차례를 대리 진행하고 유튜브로 전달했다. 유족들은 이를 실시간으로 보면서 채팅창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평생 치르던 차례나 성묘를 생략하기에는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조상을 생각하는 마음가짐만 같다면 표현 방식은 다를 수 있다고 조언한다.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는 “논어에 따르면 조상을 감사히 여기고 애도하는 마음이 본질이며, 그 본질을 표현하는 방식은 처한 환경과 시대마다 달라진다고 했다”면서 “제사 형식이 대면인지 비대면인지 따지는 것보다 상황에 맞는 예법을 만드는 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김기윤 pep@donga.com·이소정·이지윤 기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시대 가장 마음 편한 여행 ‘차박(車泊)’이 뜨고 있다. 차박은 여행지를 찾아 차에서 먹고 자며 머무는 여행을 말한다. 주로 혼자 또는 2인이 인적 드문 곳에서 머물기 때문에 대면 접촉의 위험도 적다. 차를 몰고 야외나 캠핑장에서 야영하는 ‘오토캠핑’과는 다른 개념이다. 대형 캠핑카가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오해도 있지만, 발 뻗고 누울 공간만 있다면 소형차도 충분하다. 차박 덕후 홍유진 씨(47)는 1년 중 6개월 이상은 차에서 잠을 청한다. 한 달 동안 차로 전국을 누비기도 했다. 3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이날도 강설 일기예보를 듣고는 강원 인제군으로 홀로 떠날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는 “집 창밖으로 보는 눈과 차에서 감상하는 눈의 질감, 설렘은 차원이 다르다”고 했다. ―언제부터 차박에 빠졌나. “2019년 한일 관계 악화로 일본 여행기를 쓰려던 계획이 틀어졌다. 귀국해 지인으로부터 ‘차박’을 처음 들었다. 해보고 싶다 했는데 ‘네 소형차(미니 쿠퍼)로는 안 된다’고 했다. 오기가 생겨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2년간의 차박 노하우를 모아 책 ‘오늘부터 차박캠핑’을 냈다.” ―소형차에서 차박하는 방법이 궁금하다. “차량 1열 좌석을 앞으로 당기고, 2열 좌석을 반으로 접은 상태로 위에 매트를 깐다. 발 뻗고 누웠을 때 트렁크 문만 닫히면 어떤 차든 가능하다. 해치백(뒷좌석과 트렁크의 구분이 없는 차량), 왜건, 소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 용이하다. 쏘나타 같은 세단 차종에서 차박하는 분도 있다. 당연히 개인 체형, 키에 따라 조건은 달라지는데 제 남편은 확실히 저보다 불편해했다(웃음).” ―준비할 건 무엇인가. “침낭, 베개, 이불, 간단한 식기 등 최대한 집에서 쓰던 물건을 활용한다. 뒷좌석 ‘레그룸’(다리 공간)에 옷가지를 넣거나 아동 보호대를 깔면 바닥이 평탄해져 더 넓게 공간을 쓸 수 있다. 겨울철에는 보조 배터리로 작동하는 전기장판이나 소형 히터도 좋다. 차창 가리개는 종이상자를 잘라 만들었다.” ―식사는 어떻게 해결하나. “현지 음식을 주로 사 먹거나 간단히 장을 봐서 해결한다. 또는 집에서 조리를 마친 재료, 간편식을 가져와 소형밥솥, 전기 인덕션으로 데운다. 음식물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 게 중요하며 소형 가스레인지 등 화기류는 안전상 쓰지 않는다.” ―홀로 즐겨 찾는 여행지는 어디인가. “겨울에는 강원 춘천시 소양호 인근, 강원 인제군 원대리 인근 설경을 즐긴다. 정선군 동강 유역이나 경북 군위군 화산산성 주변도 자주 찾는다. 봄, 여름에는 강원 홍천군 밤벌유원지 경치가 최고다.” ―입문자가 유의할 점은 무엇인가. “주차가 가능한지, 안전한지, 사유지는 아닌지 따져봐야 한다. 저는 주로 동네 이장님을 찾아가 차박 가능지를 여쭤본다. 당일 차박 피크닉을 다녀오는 연습도 좋다. 머문 곳에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 건 기본이다.” ―차박의 가장 큰 매력이 궁금하다. “떠나고 싶은 순간, 바로 떠날 수 있다. 어디든 발길 닿는 곳이 여행지다. 차창 밖 밤하늘 은하수를 본 사람은 차박을 멈출 수 없다. 나중엔 차박 유럽 횡단을 꿈꾼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정말 꼴도 보기 싫은데, 제가 이 영상을 왜 자꾸 보는지 모르겠네요.” 최근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댓글이다. 채널 속 여러 콩트 시리즈에는 우리가 살면서 본 씁쓸한 인간 군상이 소름 돋을 정도로 비슷하게 녹아 있다. 후배에게 인사를 강요하는 ‘꼰대’ 복학생, 사랑에 도취된 ‘느끼남’, 등산하다가 추하게 싸워 민폐를 끼치는 산악회원…. 사람들은 보기 싫은데 또 보게 되는 ‘지옥맛’ 개그에 환호했다. 누적 조회수는 8300만 회, 구독자는 약 50만 명에 달한다. 자아를 잊고 캐릭터에 잡아먹힌 듯 연기하는 ‘피식대학’ 3인방, 개그맨 이용주(35) 정재형(33) 김민수(30)의 ‘본체’를 27일 서울 마포구 홍익대 인근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들은 “피식대학엔 ‘배꼽냄새’처럼 맡기 싫어도 자꾸 맡게 되는 중독성이 있나 보다. 여러 인물을 하이퍼리얼리즘(극사실주의)으로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채널의 매력은 시리즈별로 익살스러운 여러 캐릭터를 등장시킨 점. 맏형 이용주는 “우리가 소화하는 캐릭터들을 ‘부캐’라고 생각한다. 요즘 ‘멀티 페르소나’ ‘부캐 열풍’이라던데 우리가 하던 게 부캐 연기다”라고 했다. 최근 가장 인기를 끄는 시리즈는 ‘B대면데이트’다. 코로나19로 대면 데이트가 어려우니 남성 네 명이 비대면 영상통화로 데이트를 한다는 주제다. ‘B급’을 지향해 ‘B대면’이다. 이용주는 중고차 딜러, 정재형은 다단계 회사 영업사원, 김민수는 연하남 힙합 래퍼 역을 연기한다. 이들 외에 개그맨 김해준(본명 김민호)이 카페 사장으로 출연하며, 동료 이창호도 조만간 ‘미래전략실장’ 역으로 합류한다. 이들은 “TV에는 고시 합격자, 금수저처럼 실제 주변에 많지 않은 능력자만 출연해 현실과 괴리감이 있다”며 “채널A ‘하트시그널’이 천국맛이라면 ‘B대면데이트’는 지옥맛”이라고 했다. 정재형은 “특정 직업군을 희화화하기보다 현실에서 꺼릴 법한 남성상을 모았다”고 했다. 이 콩트로 여성 구독자 비율은 40%까지 늘었다. 반응은 뜨겁다. 광고, TV 출연, 패션화보 촬영부터 박막례 할머니 등 유명인과의 협업도 늘었다. 아이돌 영상에나 있을 법한 ‘리액션 영상’도 끊임없이 제작된다. 산악회 중년 남성들의 모습을 빼다 박은 ‘한사랑 산악회’, 05학번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대학 선배들을 그린 ‘05학번이즈백’도 대표 콘텐츠다. 과거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이 코너별로 완전히 다른 내용을 그리는 것처럼 이들 시리즈도 신맛부터 쓴맛까지 보는 맛이 쏠쏠하다. 그간 유튜브에서 비슷한 콩트물이 없던 건 아니다. 세 사람의 성공 요인은 현실을 빼다 박은 듯한 관찰력이다. 김민수는 “‘놀다 보니 영감 받았다’며 천재처럼 허세도 부리고 싶지만, 미친 듯 회의한 끝에 나온 산물이다. 결국 엉덩이 싸움”이라고 했다. 정재형은 “준비는 철저히 하되 촬영 순간부터 연기를 각자에게 믿고 맡기는 봉준호 감독 스타일”이라고 했다. 이용주도 “공식 퇴근시간은 오후 6시지만 정시 퇴근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며 웃었다. 3인방은 지상파 방송사 공채 개그맨이다. 이용주 김민수는 SBS 입사 동기로 ‘웃찾사’에서 활약했고, 정재형은 KBS ‘개그콘서트’에 출연했다. 무대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려 스탠딩 코미디도 해봤고 2019년부터 영상을 만들었다. 처음엔 환호하는 이가 없었지만 이내 변곡점이 찾아왔다. 몇몇 성대모사 영상이 그야말로 ‘터졌고’ 이들의 진가를 알아본 팬들도 움직였다. 세 사람은 개그 프로그램 폐지로 인한 실직자가 유튜브에서 성공했다는 동정 어린 시각에는 고개를 저었다. 이들은 “원래 개그맨들은 매주, 매일 새 아이디어로 도전한다. 많은 아이디어를 넣을 수 있는 유튜브로 플랫폼이 바뀐 것뿐”이라고 했다. 향후 채널의 방향성을 묻자 정재형은 다단계 영업사원 캐릭터로 변신했다. “채널을 발전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세 사람의 단단한 가치관을 공유하고, 비전을 제시하며….”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