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환

정양환 기자

동아일보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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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정양환 기자입니다.

ray@donga.com

취재분야

2024-10-02~2024-11-01
칼럼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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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일반7%
국제경제4%
국제인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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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일반2%
  • 판소리 신영희씨 등 4명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

    문화재청은 14일 신영희(71) 김청만(67) 씨를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김경배 씨(54)를 제29호 서도소리, 김각한 씨(56)를 제106호 각자장(刻字匠) 보유자로 인정했다고 밝혔다. 신 씨와 김 씨는 각각 춘향가와 고법(鼓法) 분야의 맥을 잇고 있다.}

    • 2013-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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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한말 ‘오입쟁이’ 위관 이용기 알고보니… 조선가요-요리책 쓴 재야 지식인이었다

    위관 이용기(韋觀 李用基·1870∼1933?). 구한말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위관은 한국사에서 그다지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사진 한 장 찾기 힘들 정도로 생소하다. 당시 구전되던 조선가요 1400여 편을 집대성한 ‘악부(樂府)’를 편찬한 인물임에도 별다른 연구조차 없었다. 이용기가 홀대받은 데는 크게 2가지가 작용했다. 일단 ‘오입쟁이’란 낙인이다. 민속학자 손진태 선생이 악부 원본 첫머리에 남긴 소개 글에 “풍류를 좋아하여 오입쟁이로 일생을 살았다”는 대목을 넣은 탓이다. 현대적 시각에서 바람둥이 날건달에 대한 평가가 좋을 리 없었다. 나머지는 첫 이유의 파장이 컸다. 그런 치가 쓴 악부니 당대에도 선입견이 컸을 터. 같은 시기 국립국악원 전신인 이왕직 아악부(李王職 雅樂部)가 간행한 ‘조선아악’ ‘가집’ 등을 베낀 서책 정도로 취급했다. 오죽하면 악부에만 실린 가요조차 ‘오입쟁이 격식’이라고 불렀을까. 하지만 최근 이용기에 대한 오해를 걷어내고 학문적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신경숙 한성대 국문학과 교수의 연구 결과, 이용기가 치열하게 한 시대를 살았던 재야 지식인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여럿 나왔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조선어사전’ 편찬 활동이다. 계명구락부가 시작하고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이어받은 조선어사전은 일제의 탄압으로 간행 결실을 보진 못했다. 여기엔 최남선 정인보 변영로 같은 당대 유명 지식인이 대거 참여했는데 이용기의 이름도 올라있다. 게다가 1930년 조선어사전편찬회에서 선정한 편찬원 5인에도 들어있다.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사전 편찬 사업에 당당히 참여했던 것이다. 의외의 작품에서도 이용기를 만날 수 있다. 1924년 발간된 요리책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을 쓴 이도 이용기였다. 2001년 궁중음식연구원이 한글로 재발간한 이 책은 한국 최초의 도색 요리책으로 유명하다. 19세기 실학자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중 음식을 다룬 정조지(鼎俎志)를 뼈대로 서양과 중국 일본 요리법까지 총망라한 역작이다. 음식사 연구자였던 고 이성우 한양대 교수도 “전통음식에 시대의 조류를 융화시켜 온고지신의 정신이 살아있는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신 교수는 이용기의 악부가 아류작이 아니란 사실도 새로이 밝혀냈다. 박성의 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장이 집필한 ‘악부연구’(1965년)에 따르면 악부는 이후 일부 추가되긴 했지만 1926년 거의 완성된 형태였다. 아악부의 가집은 그 후에 나왔다. 심지어 조선아악에는 참고 목록에 ‘이용기 악부’가 나온다. 아악부 출판물들이 거꾸로 악부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위관이 10여 년을 공들였다는 악부는 독창적인 창작물이었던 셈이다. 세 가지 사례엔 공통분모가 있다. 모두 조선의 고유한 전통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이다. 이용기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담긴 한글, 가요, 음식이란 주제에 천착했다.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에 이런 저술 활동을 벌인 지식인을 어찌 오입쟁이 한마디로 단정할 수 있을까. 신 교수는 “노산 이은상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풍속에 해박하고 다양한 이와 호방하게 교류한 이용기의 생애가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다”며 “문화 민족주의가 성장하던 20세기 초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개척한 재야학자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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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서 수집 명성 여승구 씨, 소장품 10만점 중 엄선한 1800여점 공개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있는 화봉갤러리는 그리 화려한 전시장은 아니다. 인사동 언저리 백상빌딩 지하 1층에 자리한 갤러리는 문패를 꼼꼼히 살피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눈 밝게 찾아간 관람객이라면 엄청난 소장 유물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고서 수집으로 명성 높은 여승구 화봉문고 대표(79)가 출판사 창립 50주년을 맞아 이달부터 본인의 컬렉션 10만여 점을 총망라하는 장기 특별전 ‘한국의 고서 1∼6’을 개최했다. 3월 ‘책으로 보는 단군 오천년’을 시작으로 △한국의 고활자(4월) △한국 문학작품 산책(5월) △한국 교과서의 역사(6월) △고문서 이야기(7월) △무속사상, 불경·성경·도교·동학 자료(8월)를 6개월 동안 6회에 걸쳐 진행한다. 전시마다 소장품 가운데 엄선한 고서 및 자료 300여 점을 공개할 계획이다. 전시회 포문을 여는 ‘책으로 보는 단군 오천년’은 제목 그대로 단군부터 반만년 이어진 한반도 역사가 담긴 고서들을 만날 수 있다. 단군 기록이 최초로 등장하는 ‘삼국유사’ 가운데 국보 306-2호로 지정된 정덕본(正德本)과 같은 판본의 일부와 단군 역사를 언급한 조선시대 고서 ‘동국사략’ ‘응제시’ ‘동사찬요’도 전시된다.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신궁건축지’에서는 최초로 인쇄된 단군 그림이 실려 있다. 이후 역사를 다룬 고서에서도 눈여겨볼 전시품이 많다. 여 대표가 처음 공개하는 ‘좌명공신녹권’ 필사본은 조선 태종이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한 뒤 자신을 도운 공신 47명을 선정해 포상한 기록을 담은 문서다. 지금까지는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 중인 보물 제1469호 ‘마천록 좌명공신녹권’(장흥마씨중앙종회 소유)이 유일본으로 알려져 왔다. 이순신 장군의 유고집 ‘이충무공전서’와 순조의 관서지역 시찰기인 ‘서순행일기’, 죽산 조봉암의 친필서명 정치논집도 놓치면 아쉽다. ‘정조대왕 마니아’로 유명한 그가 소장한 정조 시절 간행 서책도 빼놓을 수 없다. 정조가 경서에 담긴 좋은 문장을 직접 골랐다는 ‘어정제권(御定諸圈)’은 일반에 처음 공개하는 희귀본이다. 정조의 수택본(手澤本)인 ‘어제천자문서’,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며 세운 묘(廟·경모궁)와 묘(墓·영우원)에 대한 의식 절차를 담은 ‘궁원의’도 전시했다. 여 대표는 “언젠가 국립고서박물관이 세워지면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02-737-0057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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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산바위 등 ‘설악산 10경’ 명승으로 지정

    비룡폭포 계곡, 울산바위 등 ‘설악산 10경’이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名勝)으로 선정됐다. 문화재청은 11일 “설악산국립공원에 있는 10곳을 명승 제95∼104호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명승이란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예술이나 관상 측면에서 기념물이 될 만한 국가지정문화재를 일컫는다. 명승 제1호는 1970년 지정한 강원 오대산국립공원에 있는 명주 청학동 소금강이다. 문화재청은 “세계자연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설악산은 전체가 천연보호구역(1994년 지정)으로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으나 그중 특별히 웅장하고 경관이 빼어난 외설악 5곳과 내설악 5곳을 명승으로 뽑았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지정된 명승은 제95호부터 순서대로 ①비룡폭포 계곡 일원 ②토왕성폭포 ③대승폭포 ④십이선녀탕 일원 ⑤수렴동·구곡담 계곡 일원 ⑥비선대와 천불동 계곡 일원 ⑦용아장성 ⑧공룡능선 ⑨울산바위 ⑩내설악 만경대 등이다. ① ② ⑥ ⑧ ⑨는 외설악에 속하고, 나머지는 내설악에 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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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사회]근대 유럽 명문가는 왜 자녀들을 장기외유 시켰나

    “여행이란 젊은이에겐 교육의 일부며 연장자에겐 경험의 일부다.”(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 뭐, 뻔한 얘기다. 베이컨이 했으니 있어 보이지. 그 정도쯤 다들 안다. 솔직히 여행 아닌 뭘 대입해도 교육 되고 경험이 쌓인다. 그래도 여행은 가슴이 뛴다. 여유만 있다면 마다할 리 없다. 더구나 부모들은 자녀를 위해 쪼들려도 무리를 한다. 유람이건 연수건 상관없다. 내 자식 경험 키우는 거라면 빚이라도 낼 판이다. 근대 유럽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책 제목이기도 한 ‘그랜드 투어’란 젊은이들이 교육을 목적으로 장기간 해외를 돌던 풍습을 말한다. 특히 17세기 영국에선 이런 여행을 안 가면 상류층 대접 받기도 힘들었단다. 보통 2∼3년씩 당시 문화선진국으로 꼽히던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 체류하며 경험을 쌓았다. 영국에서 시작돼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18세기 후반부터는 일반 시민도 유행에 꽤 동참했다. 물론 대중교통이 보편화된 뒤였지만. 사실 그랜드 투어는 서민에겐 꿈도 꾸기 힘든 여행이다. 당시 외국에서 몇 년씩 머물 여유를 누구나 부리겠는가. 속을 들여다보면 더하다. 몸종에 보디가드, 안내인까지 거느리고 흥청망청 사치하는 재력을 감당할 부모는 극소수다. 영국 사상가 존 로크는 파리에서 첨단 패션을 좇아 하도 옷을 사 입다가 빈털터리가 됐다는 대목도 나온다. 가난했던 문학가 새뮤얼 존슨은 부자 친구 가족을 따라 늦은 나이에 겨우 그랜드 투어를 떠났다. 안하무인이던 상류층 자제들이 부모 슬하를 벗어났으니 방종도 많았던가 보다. 쾌락에 빠져 병을 얻거나 거액의 도박 빚을 지는 일이 허다했다. 외국어와 문화 배우라고 보냈더니 자기들끼리 몰려다니며 사고치는 일도 빈번했다. 여성 시인 메리 워틀리 몬터규는 “젊은이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때에는 얼마나 타락해 있을지 모르겠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요즘 언론에서 자주 문제 삼는 ‘조기교육의 폐해’쯤 되는 형국이다. 하지만 그런 잡음에도 그랜드 투어는 긍정적인 측면이 컸다. 만사 편하게 살던 ‘우물 안 개구리’들이 큰 세상을 겪어보는 건 큰 경험이다. 해외 인사들과 교류하며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한 것도 미래의 자산이 됐다. 사실 그랜드 투어는 교육 커리큘럼이 꽤 탄탄했다. 그 나라의 인문학 수업을 듣고, 예술 체육 등을 익히는 과정이 즐비했다. 당시 영국 공교육은 ‘개판 5분 전’이었다고 한다. 지금과 달리 옥스퍼드조차 한심한 수준이었다. 그러니 더 좋은 교육환경을 제공하고픈 부모에게 그랜드 투어는 매력적인 선택이었다. 이 책은 참 근사하다. 소재 자체도 신선하고, 당시 유럽 문화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이 가득하다. 연세대 사학과 교수인 저자가 책에 들인 공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자료 모으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오밀조밀 잘 엮어 읽는 맛도 풍부하다. 국내 저자가 이런 주제를 책으로 엮어 내다니, 감히 ‘별 ★★★★☆’를 드리고 싶다. 다만 별 반 개를 덜 드린 건 저자의 프롤로그 때문이다. “네 책은 어렵다”는 부모님 말씀에 받은 충격이 집필 동기라는데, 아직도 ‘먹물기’가 쫙 빠졌다고 평가하긴 어렵겠다. 조금만 더 문장이 가벼웠으면 어떨지. 책에 보면 당대 영국인들이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음식 수준을 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쩌면 그런 타박이 지금 두 나라 요리문화를 한 차원 끌어올리진 않았을까. 그런 뜻에서 괜한 트집 한번 잡아봤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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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재보존과학센터가 꼽은 문화재 5大 미해결 ‘콜드 케이스’

    《 ‘콜드 케이스(Cold Case)’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다. 오랜 미해결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길게는 수십 년 풀지 못하는 난제도 등장한다. 문화재도 콜드 케이스가 있다. 현재 기술로는 보존이나 복원이 불가능한 경우다. 그렇다고 포기했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도 많은 연구자가 해결책을 찾느라 애쓰고 있다. 문화재계 ‘CSI(과학수사대)’라 할 수 있는 국립문화재연구소 산하 문화재보존과학센터(센터장 김용한)에 자문해 우리 문화재 5대 콜드 케이스를 뽑아봤다. 경주 석굴암처럼 너무 많이 알려진 사례는 제외했다. 》[1] 황남대총 비단벌레 장식, 신비한 광채 보존법 못찾아… 40년째 수장고에1973년 경북 경주시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비단벌레 장식 말안장 뒷가리개’는 최상급 콜드 케이스다. 40년째 뾰족한 보존처리 방법을 찾지 못하고 국립경주박물관 수장고에 잠들어 있다. 비단벌레 장식은 천연기념물인 비단벌레의 금빛과 초록빛이 섞인 날개로 만들어졌다. 비단벌레 날개는 은은한 광채가 아름다워 삼국시대부터 장식 재료로 사랑받았다. 일본에선 옥충(玉蟲)이라 불린다. 황남대총 말안장 장식도 비단벌레 1000마리 이상의 날개를 촘촘히 붙여 당대 최고의 공예품으로 꼽힌다. 문제는 이 장식품이 빛에 노출되거나 건조해지면 색깔이 변한다는 점. 이 때문에 현재도 빛을 차단하고 글리세린 용액에 담아 보관하고 있다. 2011년 딱 사흘만 전시할 때도 어두운 조명 아래 용액에 담긴 채였다. 보존과학센터 측은 “최근 옛 방식으로 비단벌레 장식품을 복원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보존책을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2] 미륵사지 석탑 유리병… 풍화돼 부서진 0.04mm 조각 복원길 막막전북 익산시 미륵사지 석탑은 국보 제11호로 삼국시대 목탑에서 석탑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중한 문화재다. 백제 말 무왕 대에 세워졌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 때문에 석탑 사리장엄구(사리를 봉안하는 일체의 장치)에 들어있던 유리병도 백제 유리공예 기법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2009년 발굴 당시부터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유리병은 처음부터 복원의 난제임이 직감됐던 케이스였다. 오랜 세월 공기 중 수분이 풍화작용을 일으켜 수백 개 조각으로 부서져 있었다. 특히 두께까지 얇아져 0.04mm에 이르는 파편도 상당했다. 보존과학센터는 영롱한 무지개 빛을 띠는 유리병을 복원하려 강화 처리 등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절반의 성공만 거두었다. 지금까지 원래 형태로 짐작되는 지지물 겉면에 마개와 상반신 일부분 정도만 복원했다. 워낙 얇아진 탓에 살짝만 압력을 받아도 부서지기 쉬워 접합 자체가 현재로선 불가능하다.[3] 조선왕조실록 밀랍본… 훼손 심한 10%, 밀랍 떼내는 방식 고민중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국보 제151호)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세계의 보물. 2124책으로 이뤄진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정수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실록의 약 10%에 해당하는 밀랍본(蜜蠟本)이 심하게 훼손된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줬다. 밀랍본이란 보존을 위해 벌집에서 추출한 ‘황랍’ 성분을 종이에 입힌 책. 고려 말∼조선 초에 유행했던 방식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로 화학반응을 일으켜 일부 서책은 종이가 눌어붙는 상태까지 이르렀다. 오래도록 손상 원인을 찾지 못해 애태웠으나 조만간 해결될 가능성도 엿보인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그간 강원대 제지공학과 조병묵 교수 연구팀과 함께 모조 밀랍본을 만들어 노화 시뮬레이션 등 다양한 실험을 거친 결과 성분 분석에 성공했다. 밀랍본 종이가 100% 닥나무 섬유로 만들어졌음이 확인됐다. 연구진은 밀랍을 떼어내는 방식을 두고 다각도로 고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4] 공주 송산리 6호분 사신도… 무지한 개방에 사라지는 형상 ‘백약무효’충남 공주시 송산리에 있는 6호 고분의 백제시대 벽화 ‘사신도(四神圖)’는 희소성이 높은 문화재다. 네 방위를 맡은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그린 벽화는 주로 고구려 고분에서 발견됐다. 백제 사신도는 6호 고분과 충남 부여군 능산리 1호 고분 두 곳뿐이다. 하지만 사신도는 현재 ‘사라졌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만큼 훼손이 심각하다. 일제강점기 사진엔 비교적 뚜렷한 형태가 보이지만 현재는 흔적만 겨우 남아 있다. 1972년 고분을 개방하면서 공기 속 유해 인자에 노출돼 안료가 퇴색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출입을 막고 항온 항습장치를 가동 중이지만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재 다양한 논의와 연구가 진행 중이지만 이미 때를 놓친 게 아니냐는 탄식도 나오고 있다. 6호 고분은 인근 백제 무열왕릉과 함께 보기 드문 벽돌무덤 양식의 무덤. 1500년가량 이어졌던 소중한 문화유산이 우리 곁을 떠나가고 있다.[5] 고령 고아리 고분벽화… 퇴색된 4색 연꽃그림 최근에야 보존나서1963년 발굴된 경북 고령군 고아리 고분(사적 제165호) 벽화는 가야의 유일한 벽화로 평가받는 중요 문화재. 천장에 네 가지 색깔을 입힌 연꽃장식 그림이 유명하다. 굴식돌방무덤으로 지어진 축조양식 또한 백제의 영향을 가늠하게 해주는 역사적 자료다. 고아리 고분벽화도 상황이 썩 좋지 않다. 송산리 고분과 마찬가지로 외부에서 유입된 공기로 인해 그림이 점점 옅어지고 있다. 문화재보존과학센터 측은 “무덤 벽화는 일단 한번 개방되고 나면 훼손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며 “애초 발굴 때부터 이런 점을 감안했어야 했으나 과거엔 이런 인식이 부족했다”고 설명했다. 다행히 지방자치단체가 보존관리를 위해 팔을 걷고 나섰다. 고령군은 지난해 말 각계 연구진을 꾸려 보존사업을 체계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일단 무덤을 이룬 암석과 벽화의 안료 상태를 체크하는 작업부터 이뤄져야 한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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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수가야’… 대가야의 교두보였나 독립된 국가였나

    최근 전북 장수군에선 6세기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발굴돼 화제를 모았다. 발굴을 담당한 전주문화유산연구원에 따르면 지름 20m가 넘는 대형 고분에서 마구 장식과 항아리, 목관 꺾쇠 등 다양한 유물이 나왔다. 특이한 건 고분 형태나 출토품이 대다수 가야 양식이란 점이다. 일반적으로 삼국시대 백제권역으로 인식되는 전북에서 영남 쪽에 자리한 가야의 문화유적이 나오는 건 상식 밖이다. 당시 이 지역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백제 틈새를 노린 대가야의 야망인가 학계에서 진안고원이 펼쳐진 전북 진안 장수의 동부 산악지역이 가야 유적으로 관심을 끈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6년 발굴 조사에서 장수군 천천면 삼고리 고분군이 가야계 ‘돌덧널무덤(석곽묘)’으로 드러난 것. 호남은 백제 또는 마한의 땅이라는 고정관념이 뒤집어지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변방 들러리로 취급되던 가야가 다른 3국과 마찬가지로 주체적으로 세력 확장을 꾀했던 흔적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연구 결과로 보면 이 지역은 6가야 가운데 대가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가야 연맹은 초반 경남 김해의 금관가야가 위세를 떨쳤지만, 4∼6세기엔 경북 고령에서 출원한 대가야가 맹주로 군림했다. 가야연맹은 신라와 대결하면서 백제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에 따르면 대가야가 전북으로 진출한 결정적 계기는 5세기 초반에 일어났다. 국력이 강성해진 신라가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면서다. 예나 지금이나 강은 국가의 주요 교통로. 강이 없으면 외부와의 교역이 불가능하다. 대가야는 낙동강 대신 이 지역 섬진강 일대를 확보하기 위해 장수지역으로 진출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전북지역이 곧장 가야 땅으로 편입되진 않았다. 상당한 힘을 지녔던 토착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가야도 굳이 복속시키기보단 연대를 모색하는 방식을 택했다. 주 교수는 “어느 정도 자치권을 가진 형태로 범(汎)가야 연맹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아무리 사이가 좋았다지만 백제는 왜 가야의 진출을 묵인했을까. 당시 백제가 한강유역에서 고구려와 겨루느라 여력이 없었다. 백제 입장에서 동부 산악지역은 거리는 가깝지만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에 둘러싸여 직접 통치가 불편했다. 대가야가 일정 지분 보장을 약속해 눈감아줬을 가능성이 높다.○ 독립국가를 꿈꿨던 가야계 소국일 수도 장수 일대가 단순히 가야 영향권에 있었던 게 아니라 하나의 독립국가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학계에선 장수와 진안을 아우르는 전북 동부 산악지역이 독자적 세력을 유지했다는 시각은 어느 정도 합의를 본 상태. 여기서 더 나아가 ‘가야계 소국’이나 ‘장수가야’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최근 대두하고 있다. 이 지역을 국가로 보는 근거는 엄청난 고분의 양과 규모다. 중대형고분 200여 기가 군집을 이루는 곳은 기존 가야 영역에서도 찾기 힘들다. 왕족이 아니라면 이 정도 무덤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단 설명이다. 고분에서 발견된 ‘꺾쇠’도 이를 뒷받침한다. 곽장근 군산대 사학과 교수는 “목관의 부재인 꺾쇠는 왕실 무덤에서나 발견되는 유물”이라며 “이 정도 규모와 돈을 들인 고분이라면 낮은 단계의 고대국가는 형성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봉수(烽燧) 역시 중요한 근거다. 현재까지 이곳 주위에선 모두 42개의 고대 봉수 유적이 확인됐다. 봉수란 불과 연기로 소식을 전하는 통신시설로 이 지역 봉수로의 도착지가 장수다. 한 국가의 수도였을 가능성이 점쳐지는 대목이다. 곽 교수는 “장수가야는 세력은 약했을지언정 백두대간 영호남의 핵심 관문인 육십령(六十嶺)을 차지하고 왕국을 건설하려 했던 것 같다”며 “고구려에 패해 남쪽으로 물러난 백제가 6세기 후반 이곳을 점령할 때까지 한 시대를 풍미했다”고 강조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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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단신]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사진전 外

    박근혜 제18대 대통령의 취임식을 다룬 사진전 ‘1825일의 첫날을 기록하다’가 3월 5일까지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온에서 열린다. 이승하 씨를 비롯한 사진작가 10명이 찍은 20여 점이 출품됐다. 취임식 당일은 물론이고 5일 전부터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도 담겨 있다. 입장료 무료. 02-733-8295■ 퀼트 작품 정기전시회… 112점 선봬한국국제퀼트협회(회장 고재숙)는 3월 1∼11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 V갤러리와 갤러리7에서 정기전시회를 개최한다. 퀼트는 서양에서 발달한 섬유공예지만 한국 전통의 누비옷 및 조각보와 유사해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다. 이번 전시에서는 경력 5∼30년인 협회 작가의 작품 한 점씩 모두 112점을 전시한다. 서울 전시가 끝난 뒤에는 광주 대전 천안 수원에서도 순회전시를 연다. 무료. 02-561-9165■ 불교대학 대관음사 신입생 모집대구 남구 봉덕동 한국불교대학 대(大)관음사(회주 우학 스님)는 2013학년도 신입생을 모집한다. 우학 스님은 1992년 한국불교대학의 전신인 영남불교대학 관음사를 설립해 신도들을 교육해왔다. 강의는 우학 스님의 경전 해설 등을 위주로 대구와 경산, 구미, 미국 뉴욕, 중국 칭다오 등 국내외 도량에서 진행된다. 053-474-8228}

    • 2013-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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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룸/정양환]어떻게 살 것인가

    지난 금요일 경주에 다녀왔다. 문화재 담당이니 짐 싸서 지방 찾는 거야 당연지사. 일이라도 천년고도를 찾아가니 마음 역시 가뿐하다. 바쁘단 핑계로 자주 못 가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길 떠날 땐 책을 꼭 챙긴다. 허세가 아니라 서평 쓰는 게 업무다보니. 기차에서 책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보통은 문화재 관련 책을 집어 든다. 이번엔 달랐다. 진보정의당 소속이던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어떻게 살 것인가’(아포리아)를 담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기자로선 빵점 선택이다. 유 전 장관의 정계은퇴 선언 뒤라 책은 언론에 많이 소개됐다. 안철수 전 대선후보에 대한 언급도 다뤄졌다. 기사화할 일 없단 소리다. 근데 왜 그랬을까. 그가 어떻게 살지, 어쩌면 내가 어찌 살지 궁금했던가. 일단은 프롤로그에 꽂혔다고 해두자. “마음이 고요해진다. 비행기에서 책을 읽는 것이 도대체 얼마만인가. 50분 동안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독서에 몰입한 내가 자랑스럽다. 가슴에서 따뜻한 기운이 올라와 온몸으로 번져간다.” 온전히 작품만 갖고 얘기하겠다. 이 책, 마음에 든다. 대학 시절 유 전 장관 책을 읽긴 했는데 기억이 안 난다. 원래 이리 글을 잘 썼나.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적절한 단문이 참 담백하다. 책 내용이 맞는지 아닌지는 상관하지 않으련다. 얼마 전 다른 책에서 읽은 문장 하나를 인용한다. “내 책이니 내 맘대로 쓰겠다.” 아암, 그렇지. 뭣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권위나 경륜을 내세우지 않아 좋다. 분명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픈 얘기를 하는데 강요하질 않는다. 생업을 ‘지식소매상’이라 소개하는 저자는 하고 싶은 일에 실컷 도전해보라고 조언한다. 본인이 정치를 관두는 이유도 하고픈 일을 하기 위해서란다. 축구에 빠진 아들에게 선수로는 자질이 떨어지니 평론가를 권하거나, 학생운동 하다 잡혀가 자술서 쓰다 글 솜씨가 늘었다는 고백은 위트가 넘친다. 자살을 떠올리는 이에게 무얼 택하든 ‘인간의 존엄’에 가치를 두고 고민하길 당부하는 대목도 와 닿는다. 무턱대고 자살은 죄악이라 몰아붙이는 이들보다 훨씬 설득력 있다. 물론 색안경 쓰고 보자면 한정 없다. 정계은퇴 직후 책이 나왔으니 상업성이 짙다. ‘직업으로서’는 관뒀다고 하나, OO으로서의 정치인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좀 어떤가. 백수 된 마당에 돈 벌어야지. 말 바꾸면 그때 가서 감당하면 된다. 성급히 재단할 이유가 없다. 다만 하나, 스스로 소매상이라 부르니 ‘정보도매상 직원’으로서 한 말씀 올린다. 유 전 장관께선 이제 결코 ‘동네 점빵’ 주인이 될 수 없다. 뭘 해도 세간의 관심을 끌 거란 소리다. 사상 성향 상관없이, 지금 이 땅엔 ‘멋진’ 어른이 한 명이라도 아쉽다. 후생(後生)에게 보낸 응원 메시지, 그대로 돌려드린다. 본인이 설파한 대로 맘껏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시라”. 기왕이면 근사하게. 정양환 문화부 기자 ray@donga.com}

    • 2013-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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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마뱀이 물 위를 두 발로 달리는 까닭은?

    “자연 속 먹이사슬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끔 본질을 너무 평면적으로 접근한다. 생태계도 마찬가지다. 포식자는 그저 사냥하고, 먹이가 되는 생물은 수동적으로 잡아먹히기만 하는 줄 안다. 하지만 그 현장을 들여다보면 먹고 먹히는 관계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목숨을 건 치열한 암투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이화여대 자연사박물관(관장 최재천)에서 열리는 특별기획전 ‘생물의 방어’는 이런 점에 주목했다. 포식자와 잡아먹히는 피식자의 공격과 방어가 생물의 진화 속에서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보여준다. 25일 오후 찾은 전시전은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피식자의 경이로운 본능을 흥미롭게 다루고 있었다. 최 관장은 “피식자와 포식자의 사투는 단순히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 생태계의 균형을 이루는 진화적 산물”이라고 말했다. 방어를 위해 냄새를 내뿜는 스컹크나 몸을 부풀리는 복어는 이미 많이 알려진 동물. 바실리스크도마뱀은 평소 네 발로 걷다가 위급 상황이면 두 발로 물 위를 달리는 괴력을 발휘한다. 태평양 심해 환형동물인 스위마는 몸에 발광물질 주머니를 달고 다니다 이를 터뜨려 포식자를 혼란에 빠뜨린다. 납작등놀래기나 쥐며느리알락나방은 유독가스가 발생하는 시안화수소를 뿜는다. 식물도 앉아서 당하지만은 않는다. 옥수수는 테르펜이란 화학물질로 기생벌을 유혹해 자신을 갉아먹는 불나방애벌레를 퇴치한다. 포획에 실패하면 굶어야 하는 포식자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강한 힘과 빠른 속도만이 사냥의 묘미가 아니었다. 노란점호박돔은 조개를 입에 물고 바위에 탁탁 쳐서 깨는 ‘지혜’를 가졌다. 수염수리는 딱딱한 딱지 속 거북을 잡아먹기 위해 물고 하늘로 올라가 땅에 떨어뜨려 부순다. 이번 전시는 어린이들이 자연스럽게 생명과학에 대해 배울 수 있도록 만든 배려가 돋보인다. 서수연 학예연구원은 “아이들이 컴퓨터 터치스크린 게임을 통해 과학 상식을 배우는 e러닝 시스템과 애니메이션 영상물들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11월 30일까지. 일요일, 공휴일 휴관. 입장료 무료. 02-3277-4700, nhm.ewha.ac.kr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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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연과학]풀만 먹고 사는게 과연 해결책일까

    너무너무 반갑다. 솔직해지자. 요즘 주위에 은근히 채식주의자가 많다. 그들과 겸상하면 식도락(樂)은 식도애(哀)가 되곤 했다. 당위성마저 밥상에 오르면 더 골치 아프다. ‘생명의 존엄’이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질 않았다. 그런데 채식에 문제가 있다니. 앗싸, 대놓고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첫 장을 넘기자마자 저자는 진짜 ‘배신’을 때린다. 물론 이 책, 채식의 문제점을 샅샅이 지적한다. 그렇다고 결코 육식을 옹호하진 않는단 소리다. 굳이 순위를 매기자면, 혀의 현혹에 사로잡힌 평범한 우리네는 맨 하바리이다. 어쩌란 거야, 젠장. 지지 철회. 갈팡질팡하게 만드는 저자는 뭐하는 사람인가. 환경운동가니 페미니스트니 거창한 이력은 관심 없다. 16세부터 20년 넘게 ‘비건(vegan)’으로 살아왔단다. 비건은 우유 같은 동물성 식품조차 거부하는 극단적 채식주의자. 농사도 직접 지어 자급자족을 실천했다. 근데 2009년쯤부터 다시 고기를 먹었다. 왜? 채식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채식의 배신’이 혁파하려는 채식주의의 함정은 무엇인가. 3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자. 가장 먼저 도덕적 맹점이다. 위에서도 말했듯, 채식엔 다른 생물을 귀하게 여기는 정신이 깔려 있다. 여기에 저자는 ‘돌직구’를 날린다. 그럼 당신네가 선호하는 곡물을 키우려면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는지 아는가. 옥수수가 영글려면 동물의 뼈와 살과 분뇨가 필요하다. 질소와 무기질, 인은 경작에 필수 요소니까. 대안이 없냐고? 화학비료는 더 무수한 생명을 앗아간다. 특히 쌀과 밀 같은 주요 농작물은 대부분 일년초로 해마다 땅을 갈아엎는다. 저자가 “농업이야말로 생태계를 파괴하는 ‘인종 청소’ 수준의 범죄”라고 말하는 이유다. 정치적 근거도 희박하다. 채식주의자들은 고기를 얻으려 낭비되는 에너지와 비용을 비난한다. 세계의 기아를 해결하려면 곡식 위주로 식단을 바꿔야 하노라 목청 높인다. 그러나 저자가 볼 때 곡물은 ‘줄기에 달린 화석연료’와 다름없다. 대형화 기계화된 농업에 엄청난 석유와 천연가스가 소요된다. 마지막으로 영양학적으로 채식이 우월하단 것도 환상이다. 저자는 채식으로 퇴행성 관절 질환과 저혈당증, 우울증을 얻었다. 거짓말 같다고? 채식주의자들이 만병통치약처럼 받드는 콩을 보자. 책에 따르면 프랑스는 분유에 콩의 식물성 에스트로겐을 넣지 말라고 명령했다. 갑상샘 기능을 저해하는 탓이다. 이스라엘 보건부는 콩이 유방암 발생률을 높인다고 경고했다. 저자의 공격은 신랄하지만 설득력 높다. 20여 년 동안 자신이 그렇게 살아봤기 때문이다. 영양적 불균형을 몸으로 겪었고, 스스로 밭을 일구며 농업의 폐해를 목도했다. 저자라고 긴 세월 믿어 의심치 않던 채식의 권능을 저버리고 싶었겠는가. 하지만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을수록 절망적이었단다. 그런 이가 하는 말이니 구구절절 와 닿는다. 다만 너무 주장이 앞서가는 분위기는 아쉽다. 인구가 넘치니 아이를 갖지 말자거나 차를 더이상 몰지 말자는 결론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좀 차분하게 학술적으로 접근했으면 어땠을까. 같은 말도 강요로 느껴지면 거부감부터 생기는 게 인지상정. 살살 꼬드기는 묘미가 있었더라면. 하긴, 배신당하고 냉정하기가 어디 쉬울까.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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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보 김남준 기자 이달의 편집상

    한국편집기자협회(회장 박문홍)는 제137회 이달의 편집상 수상작으로 동아일보 김남준 기자(사진)의 ‘원칙 朴정부에 반칙 헌재소장?’(종합부문) 등 4편을 선정해 21일 발표했다. 종합부문은 김 기자와 함께 헤럴드경제 유재훈 기자(당신도 이 자리에서 당당할 수 있습니까?), 경제·사회부문은 아시아경제 권수연 차장(삼양식품, 하얀 국물 빨간 국물), 피처부문은 경인일보 김휘만 기자(첨단·스타일 타고 온 신의 한수)가 수상했다.}

    • 2013-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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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화조가’ 세자-궁녀의 로맨스?

    20세기 초까지 구전됐던 조선시대 가사(歌辭) ‘화조가(花鳥歌)’의 지은이가 확인됐다. 화조가는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세자와 궁녀의 합작품이었다.신경숙 한성대 국문학과 교수는 21일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소가 소장한 19세기 고서 ‘ㅱ가사’ 등에서 화조가가 효명세자(孝明世子·1809∼1830)와 조맹화라는 궁녀가 함께 지은 가사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를 찾았다”고 밝혔다.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하던 시절에 진찬(進饌·왕실 연회)에서 지어진 것이라는 설명이다.화조가는 4음보 1행을 이루는 한글 가사. 실린 책에 따라 차이를 보이나 일반적으로 전체 44∼48행 안팎이다. 태평성대를 맞아 왕실을 찬양하고 꽃과 새를 벗 삼아 살겠다는 내용이다. 1947년 ‘조선민요집성’에는 주로 영남에서 전해진 내방가사로 소개됐다. 다만 학계는 가사에 집춘문과 춘당대 같은 궁궐 구조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궁궐 사정을 잘 아는 이가 지었을 것으로 짐작해 왔다.그러나 신 교수는 화조가가 실린 고서 17종을 검토해 지은이를 유추할 수 있는 흔적 3가지를 발견했다. 먼저 가사 모음집인 ‘ㅱ가사’에 실린 ‘화쵸가’ 서두에 “진쟝각 죠맹화는 화쵸가를 지은지라”는 대목이 나온다. 진장각(珍藏閣)은 창덕궁 연경당 터에 있던 건물로 선대 임금과 중국 황제의 어진(御眞)을 모시던 곳이다. 또 단국대가 소장한 19세기 두루마리 필사본은 제목 자체가 ‘익종대왕(효명세자) 화소가’다.1940년 조선어학회가 발행한 ‘한글’ 8권에도 단서가 있다. “우에 두 귀글(2행)은 인종대왕(익종의 와전) 지으시고 사십육귀(46행)난 주맹희라 하는 궁녀 지은 게라”라는 부가설명이 나온다. 신 교수는 “세 자료를 종합하면 궁녀가 지어올린 가사에 세자가 화답해 두 문장을 하사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민간으로 퍼지며 출처가 불분명해졌다는 설명이다.남녀가 유별한 유교사회, 그것도 궁중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조명철 고려대 사학과 교수는 “지엄한 조선 왕실에서 세자와 궁녀가 공개적으로 함께 글을 짓는 건 불가능하다”며 “신분을 뛰어넘은 ‘은밀한 로맨스’로 읽히기도 한다”고 말했다.하지만 신 교수는 시대상을 감안할 때 이 작품은 ‘정치적 산물’이라고 해석했다. 효명세자는 순조의 맏아들로 태어나 21세에 갑작스레 훙서(薨逝)했다.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던 19세기 초, 병약한 임금을 대신해 왕권을 회복하려 애썼다. 짧은 대리청정(4년)이었지만 인재를 등용하고 법 집행이 엄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진장각 같은 주요 처소의 궁녀라면 이 상황을 모를 리 없다. 따라서 화조가는 왕실을 찬양한 ‘헌정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가사 속 “요순성대 다시차자 태평화조 잔채(잔치)한다”가 이를 뒷받침한다. 대리청정을 요순시대로 묘사한 것이다.뒷자락에 나오는 ‘대명화(大明花)’와 ‘대보단(大報壇)’도 같은 맥락이다. 대명화는 안평대군이 명나라에서 하사받은 꽃, 대보단은 창덕궁의 명 황제 제단을 말한다. 둘은 조선 임금이 ‘절대불변의 군신관계’를 강조할 때 즐겨 쓰던 정치적 아이콘이다. 명과의 의리를 지키듯 왕에게 충성하란 뜻이다. 조맹화도 이를 상기시키려는 의도였음이 분명하다.명민한 효명세자는 이를 적극 활용했다. 겨우 두 문장을 달았으나 메시지는 심오하다. ‘어와 가소롭다 남아평생 가소롭다/청츈사업 바랏드니 백두옹이 대단말가’는 얼핏 보면 노년의 한탄으로 들린다. 10대 세자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다. 신 교수는 “세월이 금세 흐르니 청춘사업(국정 쇄신의 대업)을 서두르겠다는 반어적 표현”이라고 말했다. 구전요로 묻힐 뻔한 가사에 왕권강화의 기치를 내걸었다 안타깝게 사그라진 왕세자의 복심(腹心)이 담겨있었던 것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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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쌍둥이 ‘동궐도’와의 만남

    조선시대 궁궐 회화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국보 제249호 ‘동궐도(東闕圖)’ 진본 2점이 사상 처음으로 함께 전시된다. 어쩌면 마지막 전시가 될지도 모른다.고려대박물관은 18일 “고려대가 소장한 화첩으로 된 동궐도와 부산 동아대박물관의 병풍 형태 동궐도를 전시하는 특별전 ‘동궐’을 26일부터 개최한다”라고 밝혔다. 고려대의 16권 화첩 전체와 동아대 소장본이 같이 전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해 동아대에서 열린 전시에서는 고려대 소장본 가운데 4권만 공개됐다.동궐도는 모두 펼칠 경우 가로세로 578.2×274cm에 이르는 대형 회화. 정궁(正宮)인 경복궁 동쪽에 있는 창덕궁과 창경궁 전체를 동남쪽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그려졌다. 순조 때인 1826∼1830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학계에서는 고려대 소장본에 ‘인(人)’이란 표제가 붙어 있어 천·지·인 3점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는 화첩을 병풍으로 만들면서 표제가 빠진 것으로 추정되는 동아대 소장본까지 2점만 전해진다. 두 동궐도는 건물 배치나 모양새는 거의 똑같지만 일부 채색과 궁궐 안팎 나무나 언덕 묘사에서 약간 차이가 난다.동궐도는 당시 최고의 실력을 지닌 도화서 화원들이 총동원된 역작이란 게 문화재청의 설명이다. 배경이 되는 산과 언덕은 남종화(南宗畵·문인화) 풍으로 그렸고, 궁궐 건물은 서양화의 영향을 받은 듯 원근과 비례까지 고려해 정밀하게 표현했다. 특히 교량이나 담장은 물론이고 정원에 배치한 나무와 돌까지 세밀하게 묘사해 당시 궁궐 배치나 조경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동궐도는 이번 전시를 끝으로 무기한 수장고에 보관돼 다음 관람을 기약할 수 없다. 비단에 그려진, 200년 가까이 된 그림이라 훼손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조명철 고려대박물관장은 “안타깝지만 이번 전시가 우리 세대에선 일반인이 관람하는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다.이번 특별전에는 경희궁을 그린 ‘서궐도안’(보물 제1534호)과 김정호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서울 전도인 ‘수선전도 목판’(보물 제853호), 17세기 조선 천문시계 ‘혼천시계’(국보 제230호)도 함께 전시된다. 5월 12일까지. 월요일·공휴일 휴관. 무료. 문의 02-3290-1514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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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용기타]고구마 줄기처럼 풍성한 우리 문화재 안내서

    이럴 때 난감하다. 아는 이의 책 서평 쓰기 참 거시기하다. 그것도 선밴데. 불과 며칠 전 술도 한잔 말았다(분명 섞었다). 책날개에 씩 웃는 사진이 어깨를 짓누른다. 그래도 어쩌랴. 이 양반 책, 건너뛸 수 없다. 좋으니까. 소개 그대로 “1993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우리 문화재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널리 알리는 글을” 수없이 썼다. 문화재 담당 기자가 됐을 때, 모든 선임이 권하는 첫 번째가 ‘그의 기사와 책들을 읽어보라’다. 이 책도 그런 문화재 사랑이 켜켜이 이어진 산물이다. 솔직히 처음 책을 폈을 땐 ‘또 백자철화끈무늬병이야’ 하며 입도 삐죽거렸다. 술병에 끈을 그린 보물 1060호는 저자가 무척 아껴 책마다 소개해왔다. 전작들의 개정판 수준일까 봐 우려도 됐다. 그러나 역시 공력이 어디 갈까. 페이지를 넘길수록 슬렁슬렁 빠져든다. 이 책은 ‘교차로 신호등’ 성격이 짙다. 요즘 문화답사가 많이 친숙해졌다. 안내서는 물론이고 온라인 자료도 풍부하다. 하지만 여러 갈래를 맞닥뜨린 듯 갈팡질팡할 때가 많다. 저자는 딱 그런 대목에서 어느 골목으로 꺾을지 넌지시 일러준다. 국보와 보물,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우리의 아름다움’이 서식하는 지점을 되짚는다. 그런 뜻에서 책은 고구마줄기 같은 매력이 넘친다. 일단 읽다 보면 호기심이 불끈한다. 충실한 화보가 갖춰졌지만 글로만 소개된 문화재도 꽤나 있다. 잠시 덮고 수차례 인터넷으로 실물을 찾아보게 만든다. 황집중의 ‘묵포도도’를 마주했을 땐 5만 원권 지폐를 한참 들여다봤다(이유는 책에). 서울 행당동 ‘살곶이다리’는 숱하게 지나다녔건만 무심했는데…. 뭐든 관심을 둬야 보인다는 걸 배운다. 그뿐 아니다. ‘한국미…’는 다른 책도 찾게 하는 고구마줄기다. 기억도 아련했던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꺼내들었다. 저자의 전작 ‘손안의 박물관’ ‘국보이야기’도 다시 펴봤다. 평자에 따라, 관점에 따라 문화재는 다양한 해석과 표현을 낳는다. 그걸 담백하게 일깨우니 텍스트로 이만한 입문서가 없다. 아쉬운 건 제목이다. 저자는 만나는 법을 설파하지 않는다. 강요도 단정도 않는다. 오히려 만나러 가다 들른 그늘막에 가깝다. 냉주 한잔 놓고 나누는 유쾌한 담소. 차라리 ‘한국미를 맛보는 길’이 어떨까. 갑자기 이번 주말, 충북 진천 ‘농다리’를 건너고 싶다. 5만 원 들고 쇠고기 사먹게.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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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년만에 돌아오는 국보1호 숭례문… 어떻게 달라졌나

    ‘국보 제1호’ 숭례문이 드디어 돌아왔다. 10일로 화재를 겪은 지 5년이 된 서울 중구 남대문로의 숭례문이 14일 언론에 공개됐다. 현재 숭례문 자체는 완공된 상태. 다만 방재 시설을 관리할 관리동과 잔디 공사가 남아 일반 공개는 4월쯤 이뤄진다. 화재 수습 뒤 2010년 1월부터 본격적인 복구가 시작된 숭례문은 서울시 지방비를 포함해 255억 원이 넘는 예산이 투입됐다. 2008년 화재로 무너지기 전과 무엇이 달라졌을까.○ 전통 기법에 충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변화는 숭례문에 ‘날개’가 생긴 것이다. 성곽을 동편 53m, 서편 16m가량 복원했다. 숭례문이 덩그러니 홀로 선 건축물이 아니라 서울을 드나들던 대문이라는 원 취지를 반영했다. 숭례문에 오르는 동쪽 계단의 폭도 2.9m에서 5m로 늘렸다.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옛 흔적을 따랐다. 하지만 양쪽 성곽의 길이가 달라 한쪽으로 기운 듯한 어색함이 있다. 서쪽 성곽도 비슷한 길이로 늘리자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도로는 차가 다닐 수 있게 다리나 터널 형태로 만들자는 의견도 있다. 1층 마루도 ‘조선고적도보’ 등 고증에 따라 바꿨다. 1960년대 해체 공사 당시 정사각형에 가까운 우물마루 형태로 설치했으나 긴 판재를 까는 장마루로 변경했다. 조선시대 군사시설은 원래 모두 장마루를 깔았다는 게 문화재청의 설명이다. 한때 인터넷에서 일본만화 ‘드래곤볼’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화제가 됐던 성문 천장의 ‘쌍룡도’도 해체 공사 전 사진을 기준으로 했다. 실제로 보니 엄숙함보다는 해학성이 짙었다. 문화재청 숭례문복구단의 박왕희 부단장은 “단청(丹靑)도 당시 기준에 맞춰 복원했기에 균형을 맞추려는 의도”라며 “용에는 임금의 어진 정치를 상징하는 뜻도 깃들었다”고 말했다. 쌍룡도와 맞췄다는 단청은 이번 복원에서 가장 의미 있는 성과 가운데 하나다. 이전 단청은 화학 안료(페인트)를 사용하고 무늬도 변형된 것이었다. 이번엔 조선 전기의 무늬를 넣고 돌가루로 만드는 전통 안료를 썼다. 국내에선 전통 안료 기법이 사라져 안료와 접착제로 쓰이는 아교를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했다. 기와 역시 기계로 찍어 낸 공장제 기와에서 기와 틀로 직접 구운 전통 기와로 교체했다.○ 용마루와 잡상도 변화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 채기 힘든 변화도 있다. 일단 숭례문 지반 자체가 화재 전보다 30∼50cm 낮아졌다. 발굴조사에 따라 조선 후기 지반 높이에 맞춘 것이다. 지붕의 용마루도 바뀌었다. 이전 15.7m 길이를 16.6m로 늘렸다. 용마루와 이어지는 우진각지붕의 추녀마루도 다소 각이 서고 짧아졌다. 1층 추녀마루의 잡상(雜像)은 8개에서 7개로 줄었다. 모두 옛 사진자료와 도면을 참조했다. 2층 잡상은 9개 그대로 뒀다. 이날은 천으로 덮어 뒀지만, 현판에도 변화가 있다. 복원 과정에서 기존 숭례문 현판이 6·25전쟁 때 부서진 뒤 이후 수리 과정에서 잘못 보수된 사실이 밝혀졌다. ‘崇(숭)’자 ‘禮(례)’ 자의 획이 다소 변형된 것을 바로잡았다. 이번 복원에선 양녕대군이 쓴 원형을 살리기 위해 양녕대군 사당인 서울 상도동 지덕사에 소장된 탁본 자료를 바탕으로 했다. 화재로 불탔기에 방재 시설은 문화재청이 신경을 가장 많이 쓴 부분이다. 스프링클러와 폐쇄회로(CC)TV, 화재감지기를 설치하고 이를 조정하는 관리동에만 17억 원 이상을 투입했다. 화재로 인해 모든 것을 교체한 것은 아니다. 기존 석축 가운데 쓸 만한 것은 대부분 다시 썼다. 새로 쓴 석재와 명암 차가 많지만 전쟁 때 생긴 탄환자국 역시 역사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2층 누각도 화재로 탔던 목재 가운데 90% 이상을 그대로 썼다. 불에 그슬린 흔적이 뚜렷했지만 이 역시 받아들여야 할 우리 역사다. 김찬 문화재청장은 “화재로 잃어버렸던 국보 1호를 최대한 전통 기법을 사용해 조선 말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하려 노력했다”라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강수지 인턴기자 서울대 의류학과 4년}

    • 2013-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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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밥집 된 현대미술 산실… 쪽방촌 된 3·1운동 유적지

    “미래유산으로 선정된들 뭐합니까. 수십 년째 손 못 쓰고 훼손은 계속되는데….” 지난해 서울시가 발표한 미래유산 프로젝트는 문화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시민 추천을 받은 근·현대 문화재들을 발굴, 보존하겠다는 의도에 많은 이들이 박수를 보냈다. 서울시는 접수한 1000여 건을 미래유산보존위원회에서 심사해 올 하반기 보존 대상을 확정지을 계획이다. 현재 유력 후보 가운데는 서울 종로구 창신동 ‘박수근 고택’과 행촌동에 있는 ‘딜쿠샤’도 들어있다. 고택은 화가 박수근(1914∼1965)이 거주하며 대표작 ‘농악’ ‘나무와 여인’ 등을 그린 현장. 힌두어로 ‘행복한 마음, 이상향’이란 뜻인 딜쿠샤는 일제강점기 3·1운동을 세계에 알린 미국 언론인 앨버트 테일러(1875∼1948)가 살던 집이다. 하지만 한 전문가의 넋두리처럼 두 곳 모두 훼손 상태가 심각하다. 2007년 등록문화재로 지정 예고까지 됐지만 상황이 나아지질 않는 것도 비슷하다.○ 훼손 심한 박수근 고택 6일 오후 창신동 지하철 동묘앞 역 인근. 박수근 고택을 마주한 첫 느낌은 어지간히 당황스러웠다. 스마트폰 지도를 검색해 겨우 찾았건만 대로변에 자리한 고택은 형태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국밥 차림표를 내붙인 선술집은 굵은 자물쇠가 달린 채 잠겨 있었다. 문을 두드려 봐도 기척이 없고, 소유주로 알려진 유모 씨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인근 빌딩에서 내려다보니 일부 남은 기와지붕만이 이곳이 고택임을 가늠케 했다. 박수근 고택의 보존 여론이 인 것은 어제오늘이 아니다. 화가가 1953∼1963년 살았던 자택이면서 소설가 박완서(1931∼2011)의 등단 작품인 ‘나목’의 배경무대라 문화사적 의미가 크다. 하지만 소유주가 지정을 거부해 고택은 사면초가에 빠졌다. 문화재청은 “현행법상 건물주가 응하지 않으면 강제로 지정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소유주는 고택이 재정비촉진지구(뉴타운)에 들어가 있는데 문화재로 지정되면 금전적 손해를 볼까봐 우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와 문화유산국민신탁은 고택을 사들이는 방안도 검토했으나 비용 문제로 무산된 것으로 전해졌다. 김수정 서울시 역사문화재과 조사연구팀장은 “뉴타운 담당 부서에 사업을 추진해도 고택은 존치해주길 요청한 상태”라며 “미래유산으로 선정된다면 다각도로 지원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처참한 몰골의 ‘딜쿠샤’ 딜쿠샤는 3·1운동을 해외로 알리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UPI통신 서울특파원이던 테일러는 독립선언서를 확보해 몰래 이곳에 숨겼다가 해외로 타전했다. 일본 군경이 쳐들어왔으나 출산한 아내의 침대 밑에 감춰 빼앗기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결국 테일러는 이 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고, 1942년 추방돼 미국으로 돌아갔다. 8일 점심 무렵에 찾은 딜쿠샤는 이런 역사적 의미가 무색하리만치 처참한 몰골이었다. 붉은 벽돌로 지은 2층집의 외형은 분명 한 세기 전 근대건축양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름에 담긴 행복한 마음은 손톱만큼도 묻어나질 않았다. 대낮인데도 공포영화에 나오는 폐가 기운이 풍겼다. 건물 옆에 무허가가 분명한 목조 판잣집까지 덧붙어 전경을 망쳤다. 딜쿠샤는 한국자산관리공사가 관리하는 국유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빈곤층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퇴거 요청에도 꿈쩍도 않는다. 현재 약 17가구가 살고 있으나 정확한 신원은 파악되지 않았다. 김수정 팀장은 “1년에 몇 번씩 현장을 방문해 대화를 시도하지만 문도 안 열어준다”며 안타까워했다. 강임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활용홍보실 팀장은 “소유자와 거주자에게 공적 문화재의 가치를 인식시키고 정부와 지자체가 힘을 모아 적절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강수지 인턴기자 서울대 의류학과 4학년}

    • 2013-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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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0자 다이제스트]무기력-절망에 빠진 순수는 사회악

    ‘권력’이란 말은 어쩐지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하다. 하지만 저자는 권력을 인간의 본질로 보고 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순수 역시 무기력과 절망으로 뒤덮인 ‘거짓순수’로 변질될 경우 오히려 사회에 해를 끼칠 수 있다. 단순히 선악을 분리하기보다는 균형감을 갖고 적절하게 발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게 요지. 저자는 미국에서 실존주의를 심리학에 결합해 인간 탐구의 폭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 1972년 작이라 시의성은 다소 떨어진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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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국지사 이범세 선생의 외동딸… 올해 100세 이석희 여사에 듣는 설

    “싫다는데 왜 왔소? 설이라고 특별한가. 인사는 무슨….” 7일 오전 서울 서초구 반포동 자택에서 만난 이석희 여사는 짐짓 역정부터 내셨다. 며칠째 간청해도 “신문 날 일 (한 게) 없다”며 한사코 거절하던 품 그대로였다. 근데 마침, 동아일보를 읽고 계신 게 아닌가. 따님인 이인호 전 서울대 교수가 “거기 기자예요”라고 거들기에, 냉큼 덕담을 청했더니 그제야 자리를 고쳐 앉으셨다. 구한말 규장각 부제학을 지냈고 이상설 이시영 선생 등과 친교를 쌓았던 애국지사 이범세(李範世·1874∼1940) 선생의 외동딸인 이 여사는 올해로 우리 나이 100세를 맞으셨다. 1914년 경기 양평에서 태어나 이 땅의 100년 역사를 지켜봤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올해 상반기 내놓을 이 여사의 ‘생애사(史)’에는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면서 그가 체험하고 목격한 내용이 담겼다. 그의 할아버지는 간도를 뺏으려는 청나라의 강압에 맞서 백두산정계비에 규정된 영토를 지키려 애썼던 조선 말의 문신 규당 이중하(圭堂 李重夏·1846∼1917)이다. 명문가니 어린 시절 설은 꽤나 풍성했을 터. 허나 이 여사는 고개부터 저었다. “물론 차례야 정성을 다했지. 하지만 조부나 아버지나 ‘나라 뺏기고 무슨 호사냐’며 최대한 간소하게 치르자고 하셨어요. 선조에게 부끄럽다며 1911년 양평에 낙향한 뒤엔 평소 소반에 김치만 올리게 하셨으니…. 설날 친지들이 인사 와도 사랑방에서는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어요.” 그래도 어린 이 여사에게 설은 다복함 그 자체였다. 물질이 아니라 마음이 넉넉했다. 없는 살림에도 마을 모두 서로 돕고 나눴다. 썰매 자치기 연날리기…. 아이들은 손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놀았다. 아버지의 세뱃돈도 기억이 생생하다. 이 여사가 받아서가 아니다. 가세 기운 집안 아이에겐 꼭 쌈짓돈을 푸셨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설 풍경. 그 많던 차례와 제사를 묵묵히 건사하던 어머니. “요즘 설 쇠는 건 말도 못 꺼내요. 동짓날 팥죽차례부터 설날 떡국차례, 대보름 약식차례까지 챙겼소. 강정은 한 달 전부터 준비해야 때를 맞춰. 객들은 웬만해? 이상설 이시영 선생도 수시로 드나드셨지. 손님상 마련하다 하루가 가요. 그래도 어머님은 싫은 내색이 없으셨어. 그게 본분이라 여기고 진심을 다하신 거요.” 그렇다고 설 기억이 마냥 유쾌하진 않다. 일제강점기 말에 설은 오히려 쓰라린 상처였다. 서울로 시집을 갔던 그에게 고기, 생선은커녕 설탕 한 봉지 구하기가 어려웠다. 멀건 죽으로 연명하느라 젖이 안 나와 갓난쟁이도 배를 곯기 일쑤였다. 차례상에 마음만 올리고 눈물 훔치기도 수차례. 큰아들은 광복 뒤 마을에서 잡은 쇠고기를 먹고 탈이 나기도 했다. 한의사가 진맥을 짚더니 “안 먹던 걸 먹어 몸이 놀랐다”며 혀를 찼다. “그래도 나라 찾았으니 기쁨이야 더할 나위 없죠. 이젠 살 만하려나 했는데, 덜컥 6·25사변이 터진 거라. 남편 따라 아이들 들쳐 업고 부산으로 피란 갔죠. 근데 몸져누운 시할머니 모시느라 시부모님은 서울에 남으셨어요. 어찌나 죄송스럽던지…. 3년 만에 돌아와 여쭤보니 하루같이 물 한 그릇 떠놓고 빌었답디다. 자식들 무탈하게 해 달라고.” 양가 부모님의 마음이 이어진 걸까. 이후 곡절이 없었을까만 이 여사는 3남 3녀를 번듯하게 키워냈다. 교수였던 큰딸은 주핀란드, 주러시아 대사로서 ‘한국 최초의 여성 대사’란 명예도 얻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도 이 여사는 돌을 맞은 증손주의 굴레를 재봉틀로 직접 지었다. 그런 여사에게 요즘 설 풍경은 어찌 보일까. 한사코 “시대 따라 가는 거지, 괜한 훈수는 옳지 않다”며 입을 다물었다. 슬쩍 ‘요즘은 명절에 고향 가도 마을이 썰렁하다’고 운을 떼니 한참 창밖을 내다보다 말문을 열었다. “몇 해 전인가…. 이웃에 독일인 부부가 살았어요. 근데 이 양반들이 더 한국적이야. 만나면 반갑게 안부 묻고, 어른이라고 꾸벅 인사하고. 명절엔 음식 했다며 들고 옵디다. 떠날 때도 고마웠다며 찾아왔어요. 요새 우리네는 그런가. 동네에서 눈이 마주쳐도 멀뚱멀뚱. 나누고 아껴주는 설 인심은 욕심이 되어버렸어요.” 인터뷰가 끝날 무렵, 뜬금없는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근데 선생님. 한참 아래 손자뻘인데, 왜 그리 존댓말을 쓰세요?” “보고 배운 게 그래요. 아버진 그 시절에 행랑아범도 이름을 부르며 존대했어요. 아래채 일꾼 밥도 똑같이 지어 나눠 먹었으니. 항상 말씀하셨어요. ‘뭐든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굳이 설 덕담 하자면, 어릴 때부터 그런 마음가짐을 익히는 게 중요해요. 세 살 버릇 백 살 가니까.”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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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룸/정양환]비석과 불상

    최근 국내 문화재계에선 두 가지 ‘사건’이 꽤나 시끄러웠다. 먼저 지난달 중순 중국 국가문물국은 지린 성에서 고구려 비석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열흘쯤 뒤엔, 일본에서 도난당한 국보급 불상 2점이 국내로 밀반입됐다 들통 나 이목을 집중시켰다. 두 가지 모두 학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파장이 컸다. 지금까지 지구상에 남은 것으로 확인된 고구려 비석은 광개토대왕비와 충주고구려비뿐이었다. 그런데 세 번째 비석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고고학적 대(大)발견’이란 수사도 그리 과하진 않다. 게다가 국내 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이 비석은 광개토대왕이 세운 수묘비(守墓碑)로 셋 중에 가장 이른 시기에 세운 비석일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불상은 범인이 잡힌 뒤 오히려 후폭풍이 더 거셌다. 두 불상은 일본 나가사키 현 쓰시마 시 가이진 신사와 관음사에 각각 모셔져 있던 것들이다. 문제는 금동여래입상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금동관음보살좌상은 1330년 고려시대에 조성된 우리 보물이란 점이다. 다시 말해, 일본에 ‘빼앗겼던’ 문화재인데 돌려주지 말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불교계는 물론 몇몇 국회의원까지 나서 반환을 반대하고 있다. 두 사안은 서로 결이 다르다. 하지만 묘하게도 들여다보고 곱씹을수록 입맛이 씁쓸해지는 공통점이 있다. 분명 우리 문화재인데 딱 잘라 우리 것이라 말하기 애매하다. 감정적으로 얘기하기도, 논리나 법만 갖고 따지기도 난감하다. 홍길동의 ‘호부호형’도 아니고…. 난제도 이런 난제가 없다. 일단 고구려 비석부터 되짚어보자. 아무리 역사에 단언은 없다지만, 너무 가정과 추측이 넘친다. 처음부터 끝까지 “만약 …하다면” “…으로 보인다”로 가득하다. 왜? 국내에선 실물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연구자료로 삼는 탁본도 직접 뜬 게 아니라 중국 측이 공개한 사진이다. 진품을 감정하는데 인터넷 전송 파일만으로 판단하는 격이다. 열악한 상황에도 실마리를 구하려 분투하는 국내 학자들을 비하할 의도는 전혀 없다. 하지만 중국이 비석을 보여주길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우리 신세가 왠지 딱하다. 불상도 답답하긴 엇비슷하다. 분명 우리 선조가 만든 문화재니 속내야 국내에 남겨두고 싶다. 하지만 일본에서 도난당한 게 확실하면 마냥 우기기도 께름칙하다. 물론 부당하게 강탈당한 보물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하지만 그걸 어찌 증명해야 하나. 신라인들이 호의로 선물했거나 고려가 일본의 요청에 감읍해 보냈다면? 게다가 신중치 못하게 대처하다간, 앞으로 국외소재 문화재 연구나 교류전시에 큰 걸림돌로 작용할 게 틀림없다. 물론 이런 우려가 기우에 그칠 수도 있다. 중국 정부가 흔쾌히 공개할지도, 불상 역시 곧 원만하게 마무리될지 모른다. 다만 이럴 때마다 자기 입장만 내세우는 이들의 목소리는 불편하다. 그런다고 뭐가 잘 해결된 적이 있었던가. 가끔은 열정이 참 부담스럽다.정양환 문화부 기자 ray@donga.com}

    • 2013-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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