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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 커피 그라인더가 30초면 커피가루를 곱게 갈아내고, 이마저 기다리기 힘들어 조지 클루니가 ‘10초 완성’ 캡슐커피를 마시며 “왓 엘스(What else·뭐가 더 필요해)?”를 외치는 시대. 누군가는 수동 그라인더에 커피콩을 넣고 5분 넘게 드르륵 드르륵 콩이 갈리는 감촉과 소리의 거친 질감을 즐긴다. ‘커피 그라인더 덕후’ 이승재 씨(50)는 직접 갈아 마시는 커피 맛에 빠져 한때 수동 그라인더 3000여 점을 갖고 있었다. 일부를 처분해 현재 약 1600점을 소장 중이다. 서울 중구의 도움을 받아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근처에 만든 전시관 겸 카페 ‘말베르크(Malwerk)’에서 그라인더의 매력을 알리고 있다. 말베르크는 독일어로 그라인더 핵심 부품 ‘원뿔형 분쇄추’를 뜻한다. 이 씨는 “콜라만큼 세계적 음료가 된 유럽 커피의 역사는 그라인더를 보면 된다. 프랑스 자동차회사 푸조도 원래 그라인더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물론 저도 바쁠 땐 전동 그라인더를 쓴다”며 웃었다. 그에게 그라인더 ‘입덕(덕후 입문)’ 이야기 등을 들었다. ―왜, 언제부터 그라인더에 빠졌나. “국회의원 비서관을 하다가 1998년 독일로 사회학 공부하러 떠났다. 정작 사회학 대신 바이오매스 산업에 눈을 떠 2005년 관련 사업체를 냈다. 거주하던 도르트문트는 석탄과 철광이 많이 나는 공업지대였는데 벼룩시장에 수동 그라인더가 많아 인테리어용으로 하나둘 사들였다. 2012년 알고 지내던 독일 어르신의 18세기 수집품 여러 점을 1800만 원에 산 것이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멍 때리면서’ 커피콩을 갈면 근심걱정이 사라진다.” ―주요 수집품을 꼽는다면…. “푸조의 1840년 제품, 2차 세계대전 때인 1939년 포탄과 탄피로 만든 독일제 황동 그라인더, 1900년대 초 가정용 벽걸이형 그라인더, 독일 레나르츠(LEHNARTZ)사 시리즈가 있다. 1차 세계대전 때 제작된 보리차용 그라인더도 있다.” ―주로 어디서 구매하나. “2018년 귀국 전까지는 유럽의 벼룩시장에서 주로 샀다. 관광지 인근 벼룩시장 말고 소도시의 깊숙한 장터에 가면 ‘진짜 물건’이 많다. 2010년대 들어 중국인들이 그라인더를 찾으면서 꽤 줄었다. 요즘엔 이베이 등 온라인 사이트에서 주요 판매자를 찾는다. 유럽이나 미주의 웬만한 제품은 다 있는데 포르투갈 제품만 아직 못 찾았다.” ―입문자를 위해 추천한다면…. “먼저 사용 빈도를 따져야 한다. 혼자 사용하면 아무래도 빈도가 낮아 청소나 관리가 힘들다. 혼자 쓴다면 소형 ‘핸드밀’이 적당하다. 여럿이 자주 사용한다면 큰 나무 그라인더도 괜찮다. 녹슬지 않게 관리할 수 있다면 쇠로 된 제품도 추천한다. 한 손으로 들거나 다리 사이에 낀 채로 쓰는 것보다는 수평 상태에서 편하게 고정할 수 있는 것이 적합하다.” ―그라인더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주기적으로 생쌀을 한 줌씩 넣고 갈아주면 커피 찌꺼기가 나오는 게 보인다. 쌀 자체에 지방을 제거하는 성질이 있다. 습기 있는 데에 보관하지 말고, 안 쓸 때는 그라인더 안에 방습제를 넣으면 녹스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전동 커피 그라인더가 30초면 커피가루를 곱게 갈아내고, 이마저도 기다리기 힘들어 배우 조지 클루니가 ‘10초 완성’ 캡슐커피를 마시며 “왓 엘스?(What else?·뭐가 더 필요해?)”를 외치는 시대. 누군가는 수동 그라인더에 커피콩을 넣고 5분 넘게 드르륵 드르륵 콩이 갈리는 감촉과 소리의 거친 질감을 즐긴다. ‘커피 그라인더 덕후’ 이승재 씨(50)는 직접 갈아 마시는 커피 맛에 빠져 한때 수동 그라인더 3000여 점을 갖고 있었다. 현재는 일부를 처분해 약 1600점을 소장 중이다. 놓아둘 공간이 부족해 서울 중구의 도움을 받아 지하철3호선 동대입구역 근처에 전시관이자 카페 ‘말베르크(Malwerk)’를 만들어 그라인더의 매력을 알리고 있다. 말베르크는 독일어로 그라인더 핵심 부품인 ‘원뿔형 분쇄추’를 뜻한다. 최근 말베르크에서 만난 이 씨는 “콜라만큼 세계적 음료가 된 유럽 커피의 역사는 그라인더를 보면 된다. 프랑스 자동차회사 푸조도 원래 그라인더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물론 저도 바쁠 땐 전동 그라인더를 쓴다”며 웃었다. 그에게 그라인더 ‘입덕(덕후 입문)’ 이야기와 구매 및 관리법 등을 들어봤다. ―왜, 언제부터 그라인더에 빠졌나. “국회의원 비서관을 하다 1998년 독일로 사회학 공부를 위해 떠났다. 정작 사회학 대신 바이오매스 산업에 눈을 떠서 2005년 관련 사업체를 냈다. 거주하던 도르트문트는 석탄과 철광이 많이 나는 공업지대였는데 벼룩시장에 수동 그라인더가 많았다. 인테리어용으로 하나둘 사들였다. 2012년 알고 지내던 독일 어르신의 18세기 수집품 여러 점을 1800만 원에 산 것이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멍 때리면서’ 커피콩을 갈면 근심걱정이 사라진다.” ―주요 수집품을 꼽는다면…. “푸조가 만든 1840년 제품, 2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된 1939년 버려진 포탄과 탄피로 만든 독일제 황동 그라인더, 1900년대 초 가정용 벽걸이형 그라인더, 독일 레나츠(LEHNARTZ)사 시리즈가 있다. 1차 세계대전 때 제작된 보리차용 그라인더도 있다.” ―주로 어디서 구매하나. “2018년 귀국 전까지는 유럽의 벼룩시장에서 주로 샀다. 관광지 인근의 벼룩시장 말고 소도시의 깊숙한 장터에 가면 ‘진짜 물건’들이 많다. 2010년대 들어 중국인들이 그라인더를 찾으면서 물건이 꽤 줄었다. 요즘엔 e베이 같은 온라인사이트에서 주요 판매자를 찾는다. 유럽이나 미주 국가의 웬만한 제품은 다 있는데 포르투갈 제품만 아직 못 찾았다.” ―입문자를 위해 추천한다면…. “가장 먼저 사용 빈도를 따져야 한다. 혼자 사용하면 아무래도 빈도가 낮아 청소나 관리가 힘들다. 혼자 쓴다면 소형 ‘핸드밀’이 적당하고 여럿이 자주 사용한다면 큰 나무 그라인더도 괜찮다. 녹슬지 않게 관리할 수 있다면 쇠로 된 제품도 추천한다. 한 손으로 들거나 다리 사이에 낀 채로 사용하는 제품보다는 수평상태에서 편하게 고정할 수 있는 것이 적합하다.” ―그라인더는 어떻게 관리해야 하나. “주기적으로 생쌀을 한줌씩 넣고 커피 대신 갈아주면 좋다. 그러면 커피 찌꺼기가 나오는 게 보인다. 쌀 자체에 지방을 제거하는 성질이 있다. 습기 있는 데에 보관하지 말고, 안 쓸 때는 그라인더 안에 방습제를 넣으면 녹스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김기윤기자 pep@donga.com}
올해로 20돌을 맞은 ‘공연 명가’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와 LG아트센터가 실감 나는 영상으로 랜선 관객들의 감성을 촉촉이 적시고 있다. 20주년을 맞아 대면 공연 축제를 기획했던 SPAF는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온라인으로 전환했다. LG아트센터 역시 기획공연들을 영상 상영으로 바꿨다. 12일 개막한 SPAF의 작품들은 29일까지 온라인으로 볼 수 있다. 네이버TV를 통해 후원 개념으로 최소 5000원 이상만 내면 된다. 23일 누적 후원자 수는 2200여 명이다. 해외 초청 공연을 취소한 대신 영상에 공을 들였다. 기존에 촬영을 끝낸 작품 외 공연들은 ‘연두 픽처스’가 촬영을 맡았다. 무대 중앙을 휘젓는 카메라 워크의 생동감이 뛰어나 “마치 NT LIVE(영국 국립극단의 연극 영상 작품)를 보는 것 같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28, 29일 공개 예정인 프랑스 안무가 제롬 벨의 ‘갈라’는 최대 기대작이자 유일한 해외 안무가의 작품이다. ‘농 당스(non-danse)’라는 장르, 말 그대로 ‘춤이 아닌 춤’을 추구한다. ‘저자로부터 부여받은 이름’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등이 대표작. 새로운 춤 접근법을 제시하며 비전문가 20여 명의 ‘행위’로 작품을 꾸렸다. 비전문 무용수들은 영상을 통해 자신의 몸짓을 벨에게 선보였고, 국내 김윤진 임소연 안무가의 협업 끝에 작품을 완성했다. 27일 안무가 안은미는 SPAF 20주년을 기념해 ‘나는 스무살입니다’를 선보인다. 20년간 축제 참여작들의 기억을 모아 형상화했다. 26일 공개하는 음악극 ‘13 후르츠케이크’는 성 소수자 13인의 삶을 조명한다. 25일 최진영 안무가의 ‘NOT FOR SALE’은 산업화로 인한 변화를 돌아보며 인간, 인공지능(AI), 디스토피아를 그렸다. 시대적 화두인 여성 서사도 담겼다. 24일 김혜진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 ‘딸에 대하여’가 공개된다. 혐오와 배제가 익숙해진 엄마와 딸들의 이야기다. 28일 허성임 안무가의 ‘넛 크러셔’는 여성의 몸이 어떻게 상품화되는지 보여주며 ‘여성이 아닌 자유로운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해 묻는다. 앞서 21일 ‘1일 1범’ 신드롬을 일으킨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기가 막힌 흥’도 화제였다. 무당이 작두 위에 올라서는 굿에서 영감을 받아 오금저림과 흥을 표현했다. 극단 신세계의 ‘나는 광인입니다’를 비롯해 김성훈 안무가의 ‘Pool’과 ‘판소리 필경사 바틀비’도 호평을 받았다. LG아트센터는 앞서 온라인 공연 시리즈인 ‘컴온’의 시즌 1, 2를 통해 42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공연 팬들 사이에서 검증받은 온라인 공연 명가로 통한다. 이 시대 가장 핫한 안무가이자 ‘무용 천재’로 꼽히는 크리스탈 파이트의 ‘검찰관’은 27, 28일 네이버TV를 통해 유료로 중계된다. 검찰관 공연 영상은 올해 초 아르테TV의 촬영팀이 작업을 마쳤으며, 5월 BBC를 통해 방송됐다. 처음부터 방송용으로 촬영돼 무용수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생생함을 자랑한다. 다음 달 11, 12일 상영하는 티모페이 쿨랴빈 연출가의 연극 ‘오네긴’은 러시아에서 상을 휩쓴 작품. 쿨랴빈 연출가는 교과서적 원작 해석에서 탈피해 무채색 무대 위에서 19세기 고전 캐릭터들을 현대 인물로 되살려냈다. 영상은 2018년도 러시아 공연 플랫폼인 ‘스테이지 러시아’를 위해 제작됐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펍에 들어간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에 일단 메뉴판을 볼 것도 없이 생맥주 한 잔을 주문한다. 뽀얀 거품이 살짝 덮인 노란 빛깔의 이 음료가 테이블에 도착하면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탄산의 따끔함과 목을 꽉 채우는 포만감이 느껴질 때까지 한 모금, 두 모금 쭉 들이켠다. 갈증이 해소됐다고 느껴질 때쯤 “크아” 소리를 뱉으며 잔을 내려놓는다. 그때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지 모른다. ‘이 신묘한 음료는 도대체 어떻게, 누가 처음 만들었을까?’ 책은 맥주의 참맛을 아는, 그리고 맥주를 마시며 이 의문을 품은 맥주 ‘덕후’가 썼다. 저자는 현재 덕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맥주 비평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전 세계 맥주 공장을 누빈다. 맥주 맛을 평가하고 찬양하며 돈도 버는 부러운 직업을 가졌다. 월스트리트저널, 잡지 GQ에 그가 맛본 맥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런데 여기서 만족하지 못했다. 집에서 직접 원하는 맛의 맥주를 만들어 마시는 ‘홈 브루어’이기도 하다. 수천 가지 맛의 맥주에 탐닉하던 어느 날 그는 다시 근본으로 돌아간다. ‘맥주는 어디서 시작됐는가.’ 맥주는 “인류가 존재해온 시간만큼” 똑같이 존재했다. 그의 맥주 탐구 여정은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술을 빚던 사원 노동자의 삶에서 시작한다. 이어 약초를 맥주에 접목한 북유럽의 샤먼, 수도승, 농부, 맥주 공장을 세운 런던의 기업가, 미국 이민자, 라거를 미국으로 가져온 독일 이민자, 맥주 광고인까지. 맥주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운 여덟 개 집단의 흔적을 찾아 기록한 ‘맥주 역사서’라 할 만하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로 꼽히는 바빌로니아의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야만인 부하 엔키두의 이야기가 나온다. “엔키두는 배가 부를 때까지 음식을 먹었다네. 맥주를 일곱 잔을 마셨다네. 그의 정신은 느슨해졌고 익살스러워졌다네. 그의 마음에는 기쁨이 가득했고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네.”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한 바빌로니아에서는 곡물로 빵을 만드는 중간 과정에서 맥아(malt)가 탄생했다. 이를 활용한 수백 가지 레시피도 나왔다. 맥주도 그중 하나. 저자는 과거 방식을 재현한 양조장을 찾아 고대인이 했던 방식으로 야자수, 홉, 꿀 등을 넣어가며 우여곡절 끝에 맥주를 만든다. 신맛이 강하던 맥주도 점차 먹을 만한 수준으로 다듬어진다. “맥주 맛을 표현할 때 널리 인정된 133개의 ‘맥주 단어’”로 표현하기 힘든 맥주도 세계 곳곳에서 만들어진다. 미국 캘리포니아에는 ‘나무 맛이 나는’ 맥주도 있다. 북유럽 게르만족 샤먼들은 썩은 보리, 기생 곰팡이, 버섯도 맥주에 넣었다. 강한 맛을 가진 맥주는 이들에게 마법 물약이나 마찬가지였다. 벨기에 수도원, 영국 런던의 펍을 찾아 특수한 맥주에 탐닉하는 모습도 나온다. 초기 미국에서 유행하던 ‘감 맥주’를 찾다가 저자가 직접 만들어보는 장면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요소요소마다 그가 드러낸 해박한 맥주 상식은 ‘맥주에 미치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하는구나’라는 감탄이 나올 정도다. 이야기는 맥주에서 그치지 않는다. 로마제국, 서유럽, 북유럽, 미대륙을 거치며 변천한 맥주는 서양 역사를 관통한다. 수도승과 이민자들이 물처럼,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묘약처럼 만들어 마셨던 맥주는 인류사와 맞닿아 있다. 저자는 지금도 맥주를 찾아 나선다. 그는 맥주 전성시대가 앞으로도 계속되리라 전망했다. “애주가들은 여전히 목마르다. 브루어가 더 많은 스타일을 만들어낼수록 애주가들은 더 다양한 맛을 떠올리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리라.”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객석에서 자는 사람이 없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어요.” ‘123 12 123 12 123 123.’ 무용수들이 어딘가 ‘불편한’ 느낌의 칠채 장단을 입혔다. 전문 무용수도 이해하기 힘든 이 홀수박(拍) 장단은 징을 일곱 번 친다고 해 칠채라는 이름이 붙었다. 굿판이나 웃다리 농악에서 주로 쓰며 끝날 듯 멈추지 않는 역동성이 특징이다. 칠채는 이재화 안무가(32·사진)를 만나 처음 무용 무대에 올랐다. 2018년 쇼케이스 때부터 ‘조선의 EDM(일렉트로닉댄스음악)’ ‘록 페스티벌’이라 호평받은 작품은 흥을 최고조로 터뜨릴 채비를 마쳤다. 20∼22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무대에서 선보일 국립무용단 ‘가무악칠채’의 이 안무가를 11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만났다. 이 안무가는 “어려서 장구를 배워 칠채 장단은 알고 있었는데 박자가 잘 맞아떨어지지 않아서 그런지 무용에서는 좀체 쓰이질 않더라. 한 장단으로만 작품을 만든다면 절대 질리지 않을 장단이 필요했고, 그게 칠채였다”고 했다. 그의 안무에 무용수 7인과 악사 7인, 음악감독 허성은, 정가(正歌) 보컬 박민희, 소리꾼 김준수가 합류해 ‘가무악칠채’를 완성했다. 2010년 제40회 동아무용콩쿠르 일반부 한국무용창작 부문 금상을 받은 그는 2014년 국립무용단에 입단했다. 2018년 그가 호기롭게 이 작품을 만든다고 하자 우려도 많았다. “박자가 너무 어려워 포기하고 싶었다”는 그에게는 무용수들과 합을 맞춰볼 음원도 없었다. “포털 사이트에서 북과 징 소리를 직접 내려받아 음원과 박자도 만들었죠.” 그를 믿고 ‘한번 해보자’며 의기투합한 무용수, 악사들 덕에 작품은 빛을 봤다. 기존 30분짜리 작품은 정가 음악을 추가해 1시간으로 늘어나 풍성함을 더했다. “30분 동안 숨 막혀 죽을 만큼의 긴장감과 타격감을 객석에 주고 싶었어요. (그러면서도) 길이를 늘려 공연을 잠시 ‘비우는’ 정가도 넣었고, 후반부에 가장 강한 드럼과 기타 소리를 더해 무용수와 연주자가 반(半) 미친 상태로 보이는 강렬함을 표현했습니다.” 무용수로도 참여해 루프스테이션(소리의 일정 구간을 반복 재생하는 기기)까지 연주하는 그는 전통의 현대화에 목마르다. ‘이재화 안무가님’이라는 호칭이 세상에서 가장 어색하다는 그이지만 무대에 쓰일 소품, 레이저 장비까지 꼼꼼히 챙기며, 연출 욕심도 많다. “모르는 게 더 많지만 답습하는 것을 넘어 제 생각을 소박하게 정리해 표출하는 무대면 만족해요.”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난 나쁜 남자입니다. 팬들은 무대 위 나를 죽도록 미워하겠죠.” 깊은 눈동자, 처진 눈꼬리, 풍성한 백발에 푸근한 미소를 날리는 ‘꽃중년’ 같은 이 남자. 하지만 진한 분장에 검은 사제복을 입고 미간을 팍 찌푸리는 순간, 마치 스위치를 켜듯 사랑에 미친 나쁜 남자로 돌변한다. 10일 개막한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권력의 상징이자,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를 탐하는 대주교 ‘프롤로’ 역의 다니엘 라부아(71)가 한국 무대에 처음 선다. 그는 이번 출연진 중 ‘노트르담 드 파리’ 초연에 참여했던 유일한 배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원조 프롤로의 내한 소식에 일찌감치 기대감을 모았다. 그를 보러 유럽, 중국, 대만으로 ‘원정 덕질’에 나서야 했던 국내 팬들도 환호하고 있다. 현재 프랑스에 체류 중인 그는 개인 일정 변경으로 12월부터 공연에 합류한다. “제일 고통스러운 건 다른 배우들보다 늦게 관객과 만나는 것”이라는 그를 최근 e메일로 만났다. 다니엘은 “모든 공연장이 멈춘 지금, 한국은 유일하게 라이브 공연을 지속하는 걸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먼저 한국을 경험한 리샤르 샤레스트(그랭구아르 역)와 안젤로 델 베키오(콰지모도 역)가 ‘절대 놓쳐선 안 되는 멋진 곳’이라고 극찬했다.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의 파리’를 각색한 작품은 1998년 프랑스 파리 초연부터 메가 히트였다. 기네스북에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첫해를 보낸 공연’으로 등재됐으며 연이어 세계 공연장을 휩쓸었다. 혼란한 사회상, 이방인의 소외를 시적 가사로 표현한 ‘성스루 뮤지컬’(대사 없이 노래로만 극을 전개하는 작품)로 OST 앨범은 1000만 장 이상 팔렸다. 프롤로가 다른 주인공들과 부른 노래 ‘Belle’(아름답다)은 프랑스 차트에서 44주간 1위를 지켰다. 당시를 떠올리던 다니엘은 “음악은 좋아도 유행하던 노래 스타일이 아니라 솔직히 금세 망할 줄 알았다. 긴 여정을 함께해 자랑스럽다”고 했다. 이번 공연은 20주년을 기념해 의상, 안무, 무대 등에 변화를 준 새 버전이다. 그는 “원작의 감성을 유지하는 게 관건이다. 안무도 조금 바뀌었는데 한번 찾아보면 흥미로울 것”이라며 숙제도 내줬다. 다니엘은 프롤로를 ‘나쁜 남자’로 정의했다. 종교적 권위와 힘으로 모든 걸 지배하던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정작 자신의 마음은 통제하지 못한다. “사랑, 감정 앞에 무너지기 쉬운 인물입니다. 나쁜 남자지만 사실 인간적이죠. 우린 주어진 대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약점을 갖고 있잖아요. 그는 우리의 ‘다크 사이드(dark side)’입니다.” 캐나다 프랑스어권 지역에서 자란 그는 뮤지컬 배우 외에도 가수, 작가, 시인, 작곡가로 활동한 종합예술인이다. 특히 가수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캐나다 퀘벡의 ‘펠릭스 상’을 수상했으며, 미국 월드뮤직어워즈(WMA)와 프랑스 음악 시상식(Victoire de la Musique)에서도 수상했다. 프롤로와 무대 밖 다니엘을 비교해 달라고 하자 “저는 엄격한 금기나 규율과는 거리가 먼 자유로운 사람이다. 특권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 ‘프롤로’와는 다르다. 그저 노래하고, 책 읽고, 운동하며 행복한 일상을 보내는 인간”이라고 했다. 그는 “팬이야말로 저를 가치 있게 만드는 존재”라며 고마움을 표했다. 하지만 그가 ‘무대를 찢는다’고 평가받는 1막 마지막 넘버에서 그는 객석을 바라보며 절규한다. “당신은 나를 파멸시킬 거야!” 내년 1월 17일까지 서울 블루스퀘어. 6만∼16만 원, 8세 관람가,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난 나쁜 남자입니다. 팬들은 무대 위 나를 죽도록 미워하겠죠.” 깊은 눈동자, 처진 눈 꼬리, 풍성한 백발에 푸근한 미소를 날리는 ‘꽃중년’ 같은 이 남자. 하지만 진한 분장에 검은 사제복을 입고 미간을 팍 찌푸리는 순간, 마치 스위치를 켜듯 사랑에 미친 나쁜 남자로 돌변한다. 10일 개막한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서 권력의 상징이자,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를 탐하는 대주교 ‘프롤로’ 역의 다니엘 라부아(71)가 한국 무대에 처음 선다. 그는 이번 출연진 중 ‘노트르담 드 파리’ 초연에 참여했던 유일한 배우. 세계서 가장 유명한 원조 프롤로의 내한 소식에 일찌감치 기대감을 모았다. 그를 보러 유럽, 중국, 대만으로 ‘원정 덕질’에 나서야 했던 국내 팬들도 환호하고 있다. 현재 프랑스에 체류 중인 그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일정 변경으로 12월부터 공연에 합류한다. “제일 고통스러운 건 다른 배우들보다 늦게 관객과 만나는 것”이라는 그를 최근 e메일로 만났다. 다니엘은 “모든 공연장이 멈춘 지금, 한국은 유일하게 라이브 공연을 지속하는 걸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먼저 한국을 경험한 리샤르 샤레스트(그랭구와르 역)와 안젤로 델 베키오(콰지모도 역)가 ‘절대 놓쳐선 안 되는 멋진 곳’이라고 극찬했다.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의 파리’를 각색한 작품은 1998년 프랑스 파리 초연부터 메가 히트였다. 기네스북에 ‘역사상 가장 성공적 첫 해를 보낸 공연’으로 등재됐으며 연이어 세계 공연장을 휩쓸었다. 혼란한 사회상, 이방인의 소외를 시적 가사로 표현한 ‘송스루 뮤지컬(대사 없이 노래로만 극을 전개하는 작품)’로 OST 앨범은 1000만 장 이상 팔렸다. 프롤로가 다른 주인공들과 부른 노래 ‘Belle(아름답다)’은 프랑스 차트에서 44주간 1위를 지켰다. 당시를 떠올리던 다니엘은 “음악은 좋아도 유행하던 노래 스타일이 아니라 솔직히 금세 망할 줄 알았다. 긴 여정을 함께 해 자랑스럽다”고 했다. 이번 공연은 20주년을 기념해 의상, 안무, 무대 등에 변화를 준 새 버전이다. 그는 “원작의 감성을 유지하는 게 관건이다. 안무도 조금 바뀌었는데 한 번 찾아보면 흥미로울 것”이라며 숙제도 내줬다. 다니엘은 프롤로를 ‘나쁜 남자’로 정의했다. 종교적 권위와 힘으로 모든 걸 지배하던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정작 자신의 마음은 통제하지 못한다. “사랑, 감정 앞에 무너지기 쉬운 인물입니다. 나쁜 남자지만 사실 인간적이죠. 우린 주어진 대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약점을 갖고 있잖아요. 그는 우리의 ‘다크 사이드(dark side)’입니다.” 캐나다 프랑스어권 지역에서 자란 그는 뮤지컬 배우 외에도 가수, 작가, 시인, 작곡가로 활동한 종합예술인이다. 특히 가수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캐나다 퀘벡의 ‘펠릭스 상’을 수상했으며, 미국 월드뮤직어워즈(WMA)와 프랑스 음악 시상식(Victoire de la Musique)에서도 수상했다. 프롤로와 무대 밖 다니엘을 비교해달라고 하자 “저는 엄격한 금기나 규율과는 거리가 먼 자유로운 사람이다. 특권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 ‘프롤로’와는 다르다. 그저 노래하고, 책 읽고, 운동하며 행복하한 일상을 보내는 인간”이라고 했다. 그는 “팬이야말로 저를 가치 있게 만드는 존재”라며 고마움을 표했다. 하지만 그가 ‘무대를 찢는다’고 평가받는 1막 마지막 넘버에서 그는 객석을 바라보며 절규한다. “당신은 나를 파멸시킬거야!”내년 1월 17일까지 서울 블루스퀘어. 8세 관람가김기윤기자 pep@donga.com}
캄캄한 무대, 막이 오르고 조명이 켜졌을 때 관객이 가장 먼저 보는 것? 배우의 몸이다. 연기나 대사보다 관객은 배우의 몸을 통해 직관적으로 캐릭터를 읽기 시작한다. 구석에 쭈그려 앉은 배우를 보면 말이 없어도 처연함을 느끼듯 몸도 정서와 감정을 드러낸다. 극에서 배우의 몸짓, 동작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연극계 ‘움직임 감독’의 활약이 돋보인다. 다양한 작품에서 배우의 움직임을 지도하는 남긍호(57) 김윤규(49) 이윤정(44) 감독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인간의 몸이라는 질료에서 움직임을 끌어내 (역의) 존재감을 살려내는 역할”이라며 “서고 앉는 자세에 따라서도 목소리 톤, 감정, 눈빛이 달라진다”고 입을 모았다. 각각 마이미스트, 무용수, 안무가 출신으로 ‘몸 쓰기의 달인’인 이들은 특정 장면의 대본에만 ‘갇혀’ 있던 움직임을 무대 위로 소환하고 있다. 최근에는 대사만으로 뭔가 부족할 때 몸 연기나 군무를 짤 정도로 극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전체적 움직임은 물론이고 배우의 이미지와 동선을 살피며 그에 어울리는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공연 중인 국립극단 ‘발가락 육상천재’의 남 감독은 “달리는 장면을 슬로모션으로 비사실적이며 익살스럽게 그렸다. 같은 의상을 입은 배우 두 명을 무대 여기저기서 빠르게 등장시켰다가 퇴장시켜 한 사람인 듯 보이게 하는 트릭도 넣었다”고 했다. 연극깨나 본 관객에게도 움직임 감독이라는 호칭은 생소하다. 프로그램 북의 제작진 크레디트에 ‘움직임 지도’ ‘움직임 디자이너’로 표기되거나 ‘안무’ ‘안무 감독’으로 뭉뚱그려질 때도 있다. 다만 무용이나 뮤지컬 안무와 달리 연극의 몸짓을 설명하기엔 ‘움직임’이 더 적절한 표현이라는 게 중론이다. 국립극단의 차기작 ‘햄릿’을 맡은 김 감독은 “연극에선 ‘배우가 움직인다’는 느낌이 튀지 않아야 한다”며 “배우의 신체조건 성별 연령 경험에 따라 천차만별인 동작이 장면 안에서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했다. 움직임 감독의 역할 확장은 몸을 통한 이미지와 메시지를 중시하는 현대 연극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이 감독은 “옛날엔 ‘이 장면을 그냥 현대무용처럼 만들어 달라’고 주문하거나 ‘왜 움직여야 하느냐’고 반문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걷고 뛰고 숨쉬는 움직임 모두 디자인 대상”이라고 했다. 김 감독은 “대본의 텍스트 뒤에 숨은 연극 말고 몸을 전면에 내세운 연극이 세계적 추세”라고 덧붙였다. 이는 오늘날 드라마투르그(dramaturg·극작술 연구자)의 분화 과정과 비슷하다. 창작부터 제작, 캐스팅, 리허설, 공연 후 평가까지 관여하는 드라마투르그의 일은 과거 연출이나 프로듀서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전문성이 강조되며 각각 나뉘게 됐다. 국내 첫 드라마투르그는 1999년 ‘파우스트’의 김미혜 한양대 명예교수다. 사례비도 없었고 팸플릿에서 이름조차 빠졌다. 움직임 감독의 역할은 아직 부수적이다. ‘있으면 좋다’고 생각은 하지만 따로 비용을 지불할 여력은 없다. 국·공립극단이나 대형극 또는 신체극 중심의 극단에서만 일을 맡겼다. 김, 이 감독은 “‘이 장면만 봐달라’거나 무료로 품앗이하듯 해달라고 요구할 때도 있지만 연출과 협력하는 부분이 점차 늘고 있다. 그래도 재미있어서 하는 일”이라고 했다. 남 감독은 “몸 잘 쓰는 한국 배우가 많다. 움직임 감독의 역할은 배우의 개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점차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캄캄한 무대, 막이 오르고 조명이 켜졌을 때 관객이 가장 먼저 보는 것? 배우의 몸이다. 연기나 대사보다 관객은 배우의 몸을 통해 직관적으로 캐릭터를 읽기 시작한다. 구석에 쭈그려 앉은 배우를 보면 말이 없어도 처연함을 느끼듯 몸도 정서와 감정을 드러낸다. 극에서 배우의 몸짓, 동작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연극계 ‘움직임 감독’의 활약이 돋보인다. 다양한 작품에서 배우의 움직임을 지도하는 남긍호(57) 김윤규(49) 이윤정(44) 감독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인간의 몸이라는 질료에서 움직임을 끌어내 (역의) 존재감을 살려내는 역할”이라며 “서고 앉는 자세에 따라서도 목소리 톤, 감정, 눈빛이 달라진다”고 입을 모았다. 각각 마임이스트, 무용수, 안무가 출신으로 ‘몸 쓰기의 달인’인 이들은 특정 장면의 대본에만 ‘갇혀’ 있던 움직임을 무대 위로 소환하고 있다. 최근에는 대사만으로 뭔가 부족할 때 몸 연기나 군무를 짤 정도로 극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전체적 움직임은 물론 배우의 이미지와 동선을 살피며 그에 어울리는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공연 중인 국립극단 ‘발가락 육상천재’의 남 감독은 “달리는 장면을 슬로모션으로 비사실적이며 익살스럽게 그렸다. 같은 의상을 입은 배우 두 명을 무대 여기저기서 빠르게 등장시켰다가 퇴장시켜 한 사람인 듯 보이게 하는 트릭도 넣었다”고 했다. 연극깨나 본 관객에게도 움직임 감독이라는 호칭은 생소하다. 프로그램 북의 제작진 크레디트에 ‘움직임 지도’ ‘움직임 디자이너’로 표기되거나 ‘안무’ ‘안무 감독’으로 뭉뚱그려질 때도 있다. 다만 무용이나 뮤지컬 안무와 달리 연극의 몸짓을 설명하기엔 ‘움직임’이 더 적절한 표현이라는 게 중론이다. 국립극단의 차기작 ‘햄릿’을 맡은 김 감독은 “연극에선 ‘배우가 움직인다’는 느낌이 튀지 않아야 한다”며 “배우의 신체조건 성별 연령 경험에 따라 천차만별인 동작이 장면 안에서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했다. 움직임 감독의 역할 확장은 몸을 통한 이미지와 메시지를 중시하는 현대 연극의 흐름과도 맞닿아있다. 이 감독은 “옛날엔 ‘이 장면을 그냥 현대무용처럼 만들어 달라’고 주문하거나 ‘왜 움직여야 하느냐’고 반문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걷고 뛰고 숨쉬는 움직임 모두 디자인 대상”이라고 했다. 김 감독은 “대본의 텍스트 뒤에 숨은 연극 말고 몸을 전면에 내세운 연극이 세계적 추세”라고 덧붙였다. 이는 오늘날 드라마투르그(dramaturg·극작술 연구자)의 분화 과정과 비슷하다. 창작부터 제작, 캐스팅, 리허설, 공연 후 평가까지 관여하는 드라마투르그의 일은 과거 연출이나 프로듀서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전문성이 강조되며 각각 나뉘게 됐다. 국내 첫 드라마투르그는 1999년 ‘파우스트’의 김미혜 한양대 명예교수다. 사례비도 없었고 팸플릿에서 이름조차 빠졌다. 움직임 감독의 역할은 아직 부수적이다. ‘있으면 좋다’고 생각은 하지만 따로 비용을 지불할 여력은 없다. 국·공립극단이나 대형극 또는 신체극 중심의 극단에서만 일을 맡겼다. 김, 이 감독은 “‘이 장면만 봐 달라’거나 무료로 품앗이하듯 해달라고 요구할 때도 있지만 연출과 협력하는 부분이 점차 늘고 있다. 그래도 재미있어서 하는 일”이라고 했다. 남 감독은 “몸 잘 쓰는 한국 배우가 많다. 움직임 감독의 역할은 배우의 개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점차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김기윤기자 pep@donga.com}
2014년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의 13부작 다큐멘터리 시리즈 ‘코스모스’에 닐 타이슨 박사가 처음 등장했을 때 대중의 반응은 엇갈렸다. 누군가는 칼 세이건의 후계자로 등장한 이 인물에게 환호했지만, 다른 이들은 낯선 흑인 남자의 모습에 어리둥절했다. 말솜씨는 웃기고 유려했으며 때론 대중 앞에서 거리낌 없이 춤도 췄다. 이전까지 점잖게 우주를 설명하던 백인 아저씨 칼 세이건과는 아무래도 결이 달랐다. 하지만 그는 지금 ‘칼 세이건의 후계자’라는 별칭을 넘어 ‘가장 유명한 과학 커뮤니케이터’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그의 통찰과 대중 눈높이에 맞춘 친절한 설명에 미국이 매료됐다. 1400만 트위터 팔로어를 보유한 그가 팟캐스트 ‘스타토크’를 진행하며 대중과 주고받은 편지글 101편을 책으로 엮었다. 닐 타이슨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그에게 던져진 질문은 우주를 넘어 종교, 철학, 삶으로 확장한다. 마치 그에게 몰려든 전 세계인의 사상 철학 인생의 고민거리에 대한 구루(guru·종교적 현자)의 말씀을 모아놓은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 하지만 그의 답변은 제목이 보여주듯 철저히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연구와 합리적 추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를 ‘우린 왜 여기 존재하는가’ ‘죽은 아버지가 제게 말을 걸었다’는 질문부터 ‘당신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과거 욕한 적이 있다’는 고백에도 그는 과학에 기초해 ‘친절히’ 답한다. 실제 그가 받는 e메일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팬레터를 빼면 그의 이론에 대한 맹목적 비난도 많다. 그럼에도 상대의 오류를 쉽고 유쾌한 방식으로 바로잡아내는 탁월함을 드러낸다. 대중이 비과학적 오류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사고할 힘을 갖게 하고 싶다는 책의 궁극적 목표를 달성한 듯싶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앞이 안 보이는데 댓글은 어떻게 다냐고요?” 최근 빠르게 인기가 상승한 유튜브 채널 ‘원샷한솔’의 운영자 겸 진행자인 김한솔 씨(27)가 댓글로 종종 받는 질문이다. 김 씨는 1급 시각장애인이다. 마주앉은 사람의 형체조차 식별하기 힘들다. 김 씨 같은 시각장애인 유튜버의 활약이 근래 눈에 띄게 늘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이 장기화하자 장애인의 일터, 쉼터인 안마원, 복지관 운영이 불안정해졌다. 이에 유튜브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이들이 많다. 최근 1만7000명까지 구독자가 늘어난 채널 ‘원샷한솔’은 장애인 일상에 관한 궁금증을 말 그대로 한 방에 풀어주며 호평받고 있다. ‘시각장애인은 어떻게 고기를 구워먹나’ ‘카페에서 어떻게 주문할까’ 등 장애인 일상을 조명했다. 27일 서울 광진구 작업실에서 만난 채널 운영자 김 씨와 제작PD 김소희 씨(25)는 “유튜브에서 이제 시각장애는 불편이 아닌 개성”이라고 입을 모았다. 지난해까지도 구독자 수가 1만 명이 넘는 시각장애인 유튜버는 단 1명에 불과했다. ‘누구나 방송한다’는 모토를 가진 유튜브마저도 이들에게는 큰 벽이나 마찬가지였다. 김 PD는 “유튜브가 시각장애인에게는 미지의 영역일 것이라는 편견이 있다. 하지만 영상을 제작하는 과정은 비장애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는 “적절한 효과음이나 배경음악은 저보다 한솔 씨가 잘 찾고, 자막 타이핑도 한솔 씨가 전담한다 ”고 설명했다. 김한솔 씨는 영상에 달린 댓글도 직접 확인한다. 보이스오버(voiceover·목소리 해설) 기능을 통해서다. 김 씨는 “영상이 많은 이들에게 힘이 된다는 반응을 보면 뿌듯하다”고 했다. 비장애인이 제작한 영상과 가장 큰 차이는 눈 대신 귀로 검증한다는 것. 보지 않고 듣기만 해도 영상을 이해할 수 있는 ‘배리어프리 영상’이 콘텐츠의 특징이다. 김 씨는 “소리만 들어서 내용이 연결되지 않는다고 느끼면 영상 순서를 재배열한다. 소리 없이 화면만 나오는 부분엔 내레이션을 넣는다”고 설명했다. 해외에선 시각장애인 유튜버들이 일찌감치 큰 호응을 얻었다. 구독자 10만 명 이상의 시각장애인 채널도 많다. ‘Molly Burke’는 구독자 203만 명을 보유한 채널이다. 메이크업, 야외 스포츠 등 시각장애인의 일상을 담아낸 영상이 큰 인기다. 시각장애인 대상 동영상 제작 강좌를 연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의 유현서 평생교육팀장은 “국내서도 시각장애인 유튜버가 늘어나는 추세다. 유튜버 수업도 꾸준히 수요가 늘고 있다”고 밝혔다. 김 PD는 “유명한 시각장애인 유튜버가 나오면 다른 이들도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어 연쇄적으로 세상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김한솔 씨는 “코로나19로 일상이 단절된 시대, 유튜브는 단순한 대화수단을 넘어 장애인이 세상과 마주하고 힘을 얻는 매력적인 소통창구”라고 답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이지윤 인턴기자 연세대 생활디자인과 4학년}
“왜 내 작품을 자꾸 이렇게 난도질하는 거냐.” 최근 방송 중인 Mnet의 힙합 오디션 예능 ‘쇼미더머니’ 시즌9에 출연한 래퍼 스윙스는 지난달 2화 방송이 끝난 후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악마의 편집’에 대해 불만을 표출했다. 제작진은 프로그램 막바지에 그의 경연 무대를 배치하면서 전체를 다 보여주는 대신 일부 장면만을 편집한 채 방송을 마무리했다. 언뜻 보면 다음 에피소드를 궁금하게 만들지만 시청자 대부분은 그가 경연에서 큰 실수를 저지른 듯한 분위기로 받아들였다. 실제 상황은 달랐다. 그가 심사위원들의 호평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무대를 마친 것. 스윙스는 방송 다음 날 “날 예능적으로 이용하는 거 좋다. 다 돈 벌고 보는 사람도 할 말 많아지면 그게 엔터테인먼트”라면서도 “그런데 내 음악을 있는 그대로 좀 내보내주면 시청률이 내려가냐. 왜 그렇게 과욕을 부리냐”며 제작진을 비판했다. 다음 화 방송에 이어 무삭제 버전 유튜브 영상을 접한 시청자들도 “일부러 논란인 것처럼 만드는 건 진짜 옛날 스타일이다. 촌스럽다”며 배신감을 나타냈다. 몇몇 해외 시청자 역시 “각본이 짜여진 예능 편집은 드라마랑 다를 게 없다”고 밝혔다. 한편으로는 이 프로그램에 수차례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며 흥행의 키를 쥔 스윙스의 불만 표출이 짜여진 각본에 따른 ‘노이즈 마케팅’의 일환이라는 견해도 있다. 동시에 덜 유명한 참가자였다면 편집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 공개적으로 문제 제기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결과적으로 제작진의 작전이 통한 걸까. 프로그램의 클립 영상 조회 수는 네이버 유튜브 등에서 2000만 회를 넘어섰다. 이는 지난 시즌 영상에 비해 회당 300만 회를 크게 웃도는 수치다. 경연,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 속 악마의 편집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특히 과도한 편집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피해자들이 잇따라 유튜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실상을 폭로하고 있고 시청자들은 악마의 편집에 흥미보다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악마의 편집은 본래 상황을 오해하도록 왜곡하는 편집을 비판하는 인터넷 용어에서 나왔다. 촬영한 순서를 재배치하고 자막 및 배경음악을 삽입하며 주변 반응을 짜깁기하는 등 편집을 할 때 의도를 갖고 특정 분위기로 몰아간다. 2010년 Mnet의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에서 한 출연자가 악의적 편집으로 비판을 받았던 사실이 알려지며 악마의 편집이라는 말이 널리 알려졌다. 악마의 편집은 출연자들의 경쟁심을 유발하는 서바이벌 예능이나 관찰·리얼리티 예능에서 주로 사용된다. 극적 상황이나 갈등을 연출하거나 출연자별 캐릭터를 설정하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한 출연자의 공연이 끝난 후 이와 상관없이 재채기를 하다 인상을 찌푸린 다른 참가자의 얼굴을 비춤으로써 ‘무대를 심각하게 망쳤다’는 의미를 전달하는 식이다. 여러 화면을 병치시킬 때 맥락, 연결 장면에 따라 같은 장면이라도 전혀 다른 정서적 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쿨레쇼프 효과’로 불리기도 한다. 최근 유튜브 채널 ‘VOTUS’에는 2015년 방송된 Mnet의 ‘언프리티 랩스타’의 래퍼 ‘졸리브이’가 등장해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는 래퍼 ‘치타’와 함께 오른 합동 공연에서 실력이 없어 무대를 망친 장본인에 비호감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져 비판받았다. 그의 영상은 수차례 편집, 확대 재생산되면서 놀림거리가 됐다. 그가 공연하는 사이사이 찌푸린 심사위원들의 얼굴이 나가면서 무대가 엉망인 것같이 보이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저는 ‘랩 대결 최강자’라는 캐릭터로 설정됐다. 무대가 떨려 과도하게 흥분했던 건 맞다”면서도 “방송을 보면 다른 래퍼의 공연에는 심사위원들이 화색인데 제가 공연할 때만 심하게 정색한다. 제 앞에 있는 사람이 저렇게 정색하며 공연을 보는데 어떻게 제가 그걸 무시하고 공연을 하겠냐. 좀 이상하지 않냐”고 해명했다. 실제 촬영 중 몇몇 심사위원들이 그에게 따뜻한 조언을 건네는 장면도 있었지만, 그 장면은 방송되지 않았다. 과거 MBC ‘진짜사나이 여군 특집’에 출연했던 맹승지도 대표적 피해자다. 그는 훈련소 입소 과정에서 배꼽티에 핑크색 트렁크를 들고 간 ‘무개념녀’로 전파를 탔다. 고된 훈련 과정 중 “원래 여자는 이렇게 하는 겁니다”라는 발언은 편의를 봐달라는 요청으로 비치며 뭇매를 맞았다. 유튜브 채널 ‘까레라이스TV’에 출연한 그는 “소속사에서 어떤 프로그램 출연인지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다른 참가자처럼 고데기, 인형, 트렁크 등 특정 소품을 지참하라고 전해 들었다”고 밝혔다. 또 훈련에 대해선 “헬스장에서 배운 대로 무릎을 댄 채 팔굽혀펴기를 하면 훈련을 완수할 수 있을 것 같기에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한 말인데 ‘난 여자니까 우대해 달라’는 식으로 편집돼 인생 최대의 욕을 먹었다”고 말했다. Mnet의 쇼미더머니 시즌5에 출연했던 래퍼 ‘원썬’도 유튜브 채널 ‘근황올림픽’에서 웃음거리가 된 과거를 털어놨다. 그는 방송에서 자신의 연륜, 경력만 강조하는 ‘꼰대’로 비치며 대중의 욕설과 비난을 감내해야 했다. 그는 “누군가 희생양으로 삼을 베테랑 1세대 래퍼가 필요했던 것 같다. 제가 맡았던 역할은 쇼미더머니에서 바보였다”고 했다. 숱한 논란, 폭로, 비판에도 악마의 편집이 계속되는 이유는 뭘까. 화제성과 시청률이 도덕적 논란이나 무관심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한 방송국의 예능PD는 “시청자에게 기대감도 줘야 하고, 화제성도 얻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다. 비판이 있더라도 일정 수준의 편집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악마의 편집은 유독 약자에게 가혹하다. 인지도가 있는 사람은 사전 조율을 거치는 편이지만 출연 기회 자체가 중요한 약자들은 전권을 제작진에 맡기기 때문에 피해가 반복된다”고 분석했다. 이어 “원칙상 출연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방송에 나갈지 사전 동의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잘못된 방송 관행으로 모든 연출권이 PD에게 있고, 출연자는 이에 이의를 제기하면 눈치를 봐야 하는 풍토가 만들어졌다”고 지적했다.:: 쿨레쇼프 효과 ::소련의 영화감독 겸 이론가 레프 쿨레쇼프가 주창한 ‘숏(shot)’ 편집의 효과. 숏과 숏을 병치시키는 과정에서 편집에 의해 맥락에 따라 색다른 의미와 정서적인 효과를 유발할 수 있다고 말한 이론. 똑같은 표정의 인물도 함께 보여지는 이미지에 따라 완전히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애니메이션 ‘슬램덩크’의 강백호, ‘원피스’의 샹크스, 할리우드 영화 속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톰 크루즈까지…. 이들의 목소리를 연기한 사람은? 매력적 중저음에 때때로 터지는 감칠맛 나는 고음의 홍시호 성우(61)다. 그가 오디오 드라마에 도전한다. 인기 네이버웹툰 ‘가담항설’의 장면에 성우들이 등장인물마다 목소리를 입혀 대사를 읽어 내려가는 오디오 드라마를 홍 성우가 제작하고 있다. 과거 성우 전성시대를 이끌던 라디오 드라마에 이어 대중에게 다가가려는 노력 끝에 탄생했다. 최근 서울 여의도 인근의 스튜디오에서 만난 그는 “많은 외국 영화, 애니메이션이 방송되고 라디오 드라마가 인기를 끌던 성우의 황금 시절이 있었지만 올해는 명절에도 외화가 편성되지 않을 정도로 영역이 좁아졌다. 오디오 드라마는 성우들의 새 활동 무대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가담항설은 2016년부터 네이버웹툰에서 연재됐다. 성우 20명이 등장인물별로 웹툰 말풍선 대사에 소리를 입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성우들이 한곳에 모일 수 없어 따로따로 녹음했다. 드라마 일부는 그의 유튜브 채널 ‘홍쇼’에서 공개했다. 이달 중 제작을 마치는 대로 프로젝트 펀딩 플랫폼인 텀블벅 후원자에게 오디오 드라마 파일이 담긴 휴대용저장장치(USB메모리)를 발송할 예정이다. 오디오 드라마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지 반신반의했지만 텀블벅에서 당초 목표 후원액 1억5000만 원을 훌쩍 넘는 5억8000만 원을 모으며 확신이 생겼다. 그는 “원작이 인기 있다 해도 이렇게 목표액을 초과할 만큼 ‘목소리 연기’에 열광할 줄 몰랐다”며 “제 목소리에 비교적 익숙한 30대 이상보다 10대, 20대의 폭발적 호응을 얻은 점이 제일 짜릿하다”고 했다. 앞으로는 같은 날, 한 장소에 모여 녹음해 연기의 완성도를 높일 생각이다. KBS 공채 성우 출신인 그는 프리랜서 성우이자 유튜브 채널 제작자로 활동 중이다. 한양대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개그맨 공채 시험에 떨어진 뒤 별생각 없이 지원했는데 덜컥 성우가 됐다. “목소리 연기 트렌드도 딱 5년”이라는 그는 “성우는 끝없이 콘텐츠를 발굴하고 연기를 가다듬어야 하는 크리에이터”라고 말했다. “그동안 제가 연기한 작품은 대부분 일본 미국의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였어요. 오디오 드라마는 한국 웹툰을 기반으로 작가와 제작진 모두 ‘국산’이라는 점도 뜻깊습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 이지윤 인턴기자 연세대 UIC경제학과 졸업}
“왜 내 작품을 자꾸 이렇게 난도질하는 거냐.” 최근 방송 중인 Mnet의 힙합 오디션 예능 ‘쇼미더머니’ 시즌9에 출연한 래퍼 스윙스는 지난달 2화 방송이 끝난 후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악마의 편집’에 대해 불만을 표출했다. 제작진은 프로그램 막바지에 그의 경연 무대를 배치, 전체를 다 보여주는 대신 일부 장면만을 편집한 채 방송을 마무리했다. 언뜻 보면 다음 에피소드를 궁금하게 만들지만 시청자 대부분은 그가 경연에서 큰 실수를 저지른 듯한 분위기로 받아들였다. 실제 상황은 달랐다. 그가 심사위원들의 호평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무대를 마친 것. 스윙스는 방송 다음날 “날 예능적으로 이용하는 거 좋다. 다 돈 벌고 보는 사람도 할 말 많아지면 그게 엔터테인먼트”라면서도 “그런데 내 음악을 있는 그대로 좀 내보내주면 시청률 내려 가냐. 왜 그렇게 과욕을 부리냐”며 제작진을 비판했다. 다음 화 방송에 이어 무삭제 버전 유튜브 영상을 접한 시청자들도 “일부러 논란인 것처럼 만드는 건 진짜 옛날 스타일이다. 촌스럽다”며 배신감을 나타냈다. 몇몇 해외 시청자 역시 “각본이 짜여진 예능편집은 드라마랑 다를 게 없다”고 밝혔다. 한편으로는 이 프로그램에 수차례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며 흥행의 키를 쥔 스윙스의 불만 표출이 짜여진 각본에 따른 ‘노이즈 마케팅’의 일환이라는 견해도 있다. 동시에 비교적 유명세가 덜한 참가자였다면 편집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 공개적으로 문제 제기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결과적으로 제작진의 작전이 통한 걸까. 프로그램의 클립 영상 조회 수는 네이버 유튜브 등에서 2000만 회를 넘어섰다. 이는 지난 시즌 영상에 비해 회당 300만 회를 크게 웃도는 수치다. 경연,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 속 악마의 편집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특히 과도한 편집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피해자들이 잇따라 유튜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실상을 폭로하고 있고 시청자들은 악마의 편집에 흥미보다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악마의 편집은 본래 상황을 오해하도록 왜곡하는 편집을 비판하는 인터넷 용어에서 나왔다. 촬영한 순서를 재배치하고 자막 및 배경음악을 삽입하며 주변 반응을 짜깁기하는 등 편집을 할 때 의도를 갖고 특정 분위기로 몰아간다. 2010년 Mnet의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에서 한 출연자가 악의적 편집으로 비판을 받았던 사실이 알려지며 악마의 편집이라는 말이 널리 알려졌다. 악마의 편집은 출연자들의 경쟁심을 유발하는 서바이벌 예능이나 관찰·리얼리티 예능에서 주로 사용된다. 극적 상황이나 갈등을 연출하거나 출연자별 캐릭터를 설정하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한 출연자의 공연이 끝난 후 이와 상관없이 재채기를 하다 인상을 찌푸린 다른 참가자의 얼굴을 비춤으로써 ‘무대를 심각하게 망쳤다’는 의미를 전달하는 식이다. 여러 화면을 병치시킬 때 문맥, 연결 장면에 따라 같은 장면이라도 전혀 다른 정서적 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쿨레쇼프 효과’로 불리기도 한다. 최근 유튜브 채널 ‘VOTUS’에는 2015년 방송된 Mnet의 ‘언프리티 랩스타’의 래퍼 ‘졸리브이’가 등장해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는 래퍼 ‘치타’와 함께 오른 합동 공연에서 실력이 없어 무대를 망친 장본인에 비호감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져 비판받았다. 그의 영상은 수차례 편집, 확대 재생산되면서 놀림거리가 됐다. 그가 공연하는 사이사이 찌푸린 심사위원들의 얼굴이 나가면서 무대가 엉망인 것 같이 보이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저는 ‘랩 대결 최강자’라는 캐릭터로 설정됐다. 무대가 떨려 과도하게 흥분했던 건 맞다”면서도 “방송을 보면 다른 래퍼의 공연에 심사위원들이 화색인데 제가 공연할 때만 심하게 정색한다. 제 앞에 있는 사람이 저렇게 정색 하며 공연을 보는데 어떻게 제가 그걸 무시하고 공연을 하겠냐. 좀 이상하지 않냐”고 해명했다. 실제 촬영 중 몇몇 심사위원들이 그에게 따뜻한 조언을 건네는 장면도 있었지만, 그 장면은 방송되지 않았다. 과거 MBC ‘진짜사나이 여군특집’에 출연했던 맹승지도 대표적 피해자다. 그는 훈련소 입소 과정에서 배꼽티에 핑크색 트렁크를 들고 간 ‘무개념녀’로 전파를 탔다. 고된 훈련 과정 중 “원래 여자는 이렇게 하는 겁니다”라는 발언은 편의를 봐달라는 요청으로 비춰지며 뭇매를 맞았다. 유튜브 채널 ‘까레라이스TV’에 출연한 그는 “소속사에서 어떤 프로그램 출연인지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다른 참가자처럼 고데기, 인형, 트렁크 등 특정 소품을 지참하라고 전해 들었다”고 밝혔다. 또 훈련에 대해선 “헬스장에서 배운 대로 무릎을 댄 채 팔굽혀펴기를 하면 훈련을 완수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한 말인데 ‘난 여자니까 우대해 달라’는 식으로 편집돼 인생 최대의 욕을 먹었다”고 말했다. Mnet의 쇼미더머니 시즌5에 출연했던 래퍼 ‘원썬’도 유튜브 채널 ‘근황올림픽’에서 웃음거리가 된 과거를 털어놨다. 그는 방송에서 자신의 연륜, 경력만 강조하는 ‘꼰대’로 비춰지며 대중의 욕설과 비난을 감내해야 했다. 그는 “누군가 희생양으로 삼을 베테랑 1세대 래퍼가 필요했던 것 같다. 제가 맡았던 역할은 쇼미더머니에서 바보였다”고 했다. 숱한 논란, 폭로, 비판에도 악마의 편집이 계속되는 이유는 뭘까. 화제성과 시청률이 도덕적 논란이나 무관심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한 방송국의 예능PD는 “시청자에게 기대감도 줘야하고, 화제성도 얻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다. 비판이 있더라도 일정 수준의 편집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악마의 편집은 유독 약자에게 가혹하다. 유명세가 있는 사람은 사전 조율을 거치는 편이지만 출연 기회 자체가 중요한 약자들은 전권을 제작진에 맡기기 때문에 피해가 반복된다”고 분석했다. 이어 “원칙상 출연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방송에 나갈지 사전 동의를 거쳐야한다. 하지만 잘못된 방송 관행으로 모든 연출권이 PD에게 있고, 출연자는 이에 이의를 제기하면 눈치를 봐야하는 풍토가 만들어졌다”고 지적했다.김기윤기자 pep@donga.com}
당신은 굴욕 앞에 어떻게 행동하는가. 누군가는 와신상담하며 복수를 떠올리고, 누군가는 이를 참지 못해 바로 분개할지 모른다. 묵묵히 인내하거나, 굴욕적 경험마저 긍정한 채 여유로운 반응을 보이는 이도 있다. 17세의 한 소년은 어느 날 아침 아버지가 환관의 꾐에 넘어가 모질게 고문당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옥고를 치른 그의 아버지는 결국 숨을 거둔다. 소년은 슬픔과 절망 속에서 역사책을 집어 들었다. 얼마 뒤 나라가 적의 침공을 받자, 그는 아버지를 죽게 한 나라임에도 분연히 맞섰다. 적은 그의 재산, 나라까지도 빼앗았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책과 붓을 집어 들었다. 그 소년은 훗날 중국 전제군주제의 폐단을 지적하는 저서 ‘명이대방록’을 지은 대학자 황종희(黃宗羲)다. 굴욕에 맞선 ‘불굴의 의지’가 그를 만들었다. 동양사학을 전공한 두 저자가 홍범도, 대조영, 주더, 정도전, 광무제 등 한중 역사 속 인물들의 굴욕 일대기를 모았다. 부제는 ‘역사를 움직인 16인의 굴욕 연대기’. 이들이 굴욕을 딛고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를 과감함, 불굴, 긍정, 인내, 신뢰, 인정, 애민, 확신이라는 여덟 가지 주제어로 정리했다. 발해를 건국한 고구려 유민 출신의 대조영, 서요를 건국한 야율대석(耶律大石)은 굴욕 앞에 도리어 과감함을 보였다. 두 사람은 각각 당나라와 금나라의 공격에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잃은 이들. 속절없이 유랑하거나 적국의 신하가 되거나 죽는 길밖에 없었다. 그 순간 그들은 과거의 부활이 아닌 새 나라를 세우기로 결심한다. 굴욕이라는 신선한 테마로 이야기를 엮은 듯 하나, 사실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이들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인물들의 익숙한 일화와 영웅적 면모가 여럿 소개된다. 결국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하다. 위기와 굴욕을 지혜롭게 극복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 굴욕 없는 역사는 없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인생 경력 220년, 연극 경력 150년. 경기 수원시 경기아트센터 소극장에서 19일 개막하는 경기도극단의 신작 연극 ‘저물도록 너, 어디 있었니’에서 연출가 한태숙(70), 배우 손숙(76), 작가 정복근(74)이 의기투합했다. ‘저물도록…’은 집을 나간 운동권 딸을 찾아 헤매는 한 고위 공직자의 아내 ‘성연’을 통해 ‘존재는 사라져도 기억은 남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5일 만난 세 사람은 “조곤조곤하게 대신 지독하고 치열하게 싸우며 만든 작품”이라고 했다. 한 연출가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디테일과 방향성을 논할 때만큼은 날카롭게 토론했다”며 “특히 진보와 보수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달라 육탄전만 안 했을 뿐, 세 시간씩 다퉜다”며 웃었다. 정 작가가 극의 주제를 원칙적으로 흔들림 없이 표현하려 했다면, 한 연출가는 극의 리듬과 서사를 유연하게 흔들고 싶어 했다. 이 작품은 정 작가가 오랫동안 다듬어 왔다. 큰 야망 없이 보통 사람으로 살던 중년부부의 삶이 사회 문제 앞에 어떻게 무너지는지 세밀하게 그렸다. 정 작가는 “사회가 늘 싸우고 갈등하다 여기까지 왔는데 과연 지금 좋은 세상에 살고 있는지 생각했다. 진영 갈등이 심한 오늘날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했다. 손 씨는 성연이 마주치는 낯선 여자 ‘지하련’을 맡는다. 성연에게 불안함, 초조함과 동시에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인물이다. 그는 “매년 한두 편씩 연극을 해왔어도 선 굵은 작품에 대한 갈증이 컸다. ‘악바리’인 한 연출가, 정 작가와 함께한다고 해서 ‘얼씨구나 좋다’며 연습을 시작했다”고 했다. 세 사람의 의기투합은 경기도극단 단원들에게도 큰 자극이 됐다. 단원들은 “매일 에베레스트산을 오르는 기분인데 하산할 때 얼마나 뿌듯할지 궁금하다”는 반응이다. 한 연출가는 “연극은 신비한 생존력이 있다. 이념 갈등이 불거진 2020년이 훗날 어떻게 기록될지 관객과 소통하고 싶다”고 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오롯이 혼자 관객을 맞이하는 무서운 공연입니다.” 42년 전 서울 중구 남산예술센터 연습실. 연극을 동경하던 대학생이 뚜벅뚜벅 들어왔다. 무대에 대한 열망은 들끓어도 연극은 아무것도 몰랐다. 이 청년은 42년 후 같은 연습실에 다시 섰다. 그 사이 누군가의 연기 스승, 국민배우, 아티스트로 불렸지만 이곳에서 흘린 땀의 농밀함은 이전과 똑같다. 다만 이번엔 철저히 혼자다. 그에게 꽂히는 관객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7일 개막하는 1인극 ‘콘트라바쓰’의 배우 박상원(61)이다. 2014년 ‘고곤의 선물’ 이후 약 6년 만의 연극 무대 복귀이며, 첫 1인극 도전이다. 1일 남산예술센터에서 만난 그는 “연기를 40년 해도 관객은 늘 무섭다. 이기적이고, 까다롭고, 건방질 자격이 있는, 끝내 저를 용서하지 않을 자격이 있는 존재”라며 “그 잣대에 맞추려면 땀으로 승부하는 방법뿐”이라고 말했다. 작품은 독일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희곡을 각색했다. 오케스트라에서 비중이 적은 더블베이스 연주자로 나오는 그는 주목받지 못하는 악기와 그 연주자의 삶을 통해 인간 소외를 그린다. 작품은 3년 전부터 준비했다. 최근 코로나19 확산으로 공연 성사가 불투명했다. “종합운동장에서 달리기하듯 9월부터 두 달간 매일같이 ‘런(공연 시연)’을 했기에 연습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고 느꼈어요. 대면 공연을 앞두고 있어 기적 같죠. 하하.” 홀로 오르는 무대에는 든든한 친구이자 또 다른 자아, 콘트라베이스가 놓여 있다. 그는 “콘트라베이스는 애증의 존재다. 주인공의 생계를 책임지면서 어딘가 쓸쓸하고 소외된 모습은 닮았다. 현란하진 않아도 누군가를 ‘백업’해주는 소중한 존재”라고 했다. 이번 공연은 ‘박상원 종합선물세트’나 마찬가지다. ‘한국 남자 현대무용수 1호’인 그가 뛰놀며 춤도 춘다. 풀어헤친 머리와 동그란 뿔테 안경이 색다른 매력을 느끼게 한다. 그에게는 자신을 내려놓고 깊게 탐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제게 연극은 그냥 삶 자체죠. ‘나’라는 자아가 눈뜨면서부터 하고 싶은 일을 평생 할 수 있던 ‘덕업일치’죠. 인테리어, 사진, 무용, 음악, 그림, 모든 건 다 연기와 맞닿아 있습니다.” 29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5만, 7만 원. 14세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오뚜기 3세’ ‘연예인 주식부자’ 등 타이틀을 가진 함연지(28)가 본업인 뮤지컬 배우로 대중과 만난다. 지난달 29일 공개한 트레일러 영상을 시작으로 20~22일 케이블TV 방송과 네이버 온라인 상영을 계획 중인 웹뮤지컬 ‘킬러파티’서 ‘나조연’ 역을 맡는다. 양준모, 신영숙 등도 출연한다. 최근 서울 강남구 샌드박스네트워크 사무실서 만난 그는 “이 시기에 관객 앞에서 노래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진심으로 행복하다”며 밝게 웃었다. 초등학교 시절, 사촌 언니가 붓을 잡는 모습에 반해 예원중학교에 입학했다. 매일 목탄을 쥐고 살아 코를 풀 때마다 검은 콧물이 나올 정도였다. 목욕탕에 갈 때면 온몸에 묻은 검댕을 보고 아주머니들이 “너 어디 탄광에서 왔니?”라고 물을 정도였다. 하지만 디즈니에 푹 빠져있던 소녀는 뮤지컬이란 장르를 알게 된 뒤 새 목표가 생겼다. ‘뮤지컬 무대에 서야겠다!’ 3년이 흘러 외국어고등학교에 가면 유학을 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미국서 뮤지컬을 배우기 위한 단계였다. 우수한 성적으로 돌연 대원외고에 진학하더니, 졸업 후 미국 뉴욕대학교에 입학해 연기를 배웠다. 하고픈 것도 많았고 ‘재능 부자’였어도 꿈은 늘 확고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미국 미시건에서 열린 ‘뮤지컬 캠프’ 오디션에 혼자 갔어요. 통나무집에 뮤지컬 덕후인 또래들이 모여 하루 종일 뮤지컬 얘기만 했죠. 캠프 첫째 날 밤에 침대에 누웠는데 너무 행복해 천장에서 막 별이 보였어요.” 대학 시절엔 누구나 꿈꾸는 브로드웨이 문도 두드려봤다. 그는 “미국 영주권이 없어 배우 노조 가입도 안 되고, 오디션도 볼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도 “노래하고 춤추는 환상적인 느낌이 좋았다”며 국내로 발길을 돌렸다. 뮤지컬을 결코 멈출 수 없었고 지금도 ‘덕업일치’의 삶을 산다. 이번 작품은 한 저택 파티 중 벌어진 살인 사건이 배경이다. 현장에 도착한 수사관이 배우 9명을 각자 다른 방에 넣고 신문한다. 배우들이 한 연습실, 무대에 모이지 않고도 집에서 촬영을 진행하면서도 스토리와 어우러진 뮤지컬을 만들어냈다. ‘자가격리 뮤지컬’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함연지는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고 상대역 삼아 연기했다. 종종 옆에 있는 스태프가 상대역 대사를 읽어주기도 했다”고 했다. 이는 그야말로 실험에 가까웠다. 마냥 신기한 생각도 들었지만 넘버와 연기를 이어붙인 촬영·편집 결과물을 본 그는 “웹뮤지컬의 가능성을 봤다”고 했다. 낮에는 공인중개사로 일하고 밤에는 주연 배우를 꿈꾸는 ‘나조연’ 배역은 다소 노출이 있는 의상도 소화해야 했다. 극 안에 펼쳐진 또다른 상황극에선 ‘사자 조련사’ 역할을 맡기 때문. 집 안에서 무대의상을 소화했다. 가족은 이번에도 그의 든든한 우군이다. “아버지는 이미 제 대학시절 공연부터 쭉 보시면서 훨씬 노출이 심한 의상에 트월킹(골반을 흔드는 춤)까지 보셨죠.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이번 의상을 보고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아 하세요. 하하.” 뮤지컬 음악보단 팝, 가요를 더 좋아한다는 그의 남편도 “내 눈에는 네가 천생 배우로 보인다”며 응원한다. 평소에도 힘든 일이 있으면 함연지는 퇴근한 남편을 보고 한바탕 크게 울며 스트레스를 푼다. “눈물에 순화 기능이 있잖아요. 제겐 울음이 제일 좋은 스트레스 해소법입니다. 숨도 못 쉴 것처럼, 꼭 누가 죽은 것처럼 남편을 부여잡고 엉엉 울어요.” 캐릭터를 혼자 연구하고 대본을 분석하는 과정은 늘 짜릿하다. “다 큰 어른들이 모여 나름의 규칙과 장면을 만들고, 특정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꼭 어린이들의 소꿉놀이 같은 거잖아요.” 이번엔 공인중개사 역할을 위해 극의 배경이 된 양수리 일대 지도를 훑으며, 실제 본인이 일하고 있을 법한 부동산 사무소를 정해 캐릭터에 몰입했다. 웹뮤지컬이 마냥 신나기도 했지만, 엄연히 새로운 장르라 연기 고민도 있었다. 그는 “드라마처럼 연기해야하는지, 웹툰처럼 딱딱 찍히는 연기를 해야 하는 건지 처음엔 감이 잘 안 왔다”고 했다. 그는 연구 끝에 함연지만이 가질 수 있는 자연스런 매력을 배역에 입히기로 했다. 톡톡 튀고 발랄한 연기에 캐릭터가 가진 ‘백치미’를 살리며 생동감 넘치는 넘버를 선보인다. 그는 사실 대중에게 ‘오뚜기 창업주 손녀’로 먼저 각인됐다. 최근 예능, 유튜브서도 활발히 활약하고 있어 배우 자체보다는 인간 함연지의 모습이 더 주목받고 있다. 이미지 소비가 많아 배역에 큰 제약이 따를 수 있겠다는 고민도 있었다. 때로는 대중의 따가운 눈초리도 받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움츠러드는 대신 한 발 더 앞으로 나서기로 했다. “속상하게 생각하면 솔직히 한도 끝도 없죠. 숨기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결국 뮤지컬을 꾸준히 하면서 스스로 증명하는 게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저를 지켜봐주시는 건 배우로서 저를 알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버티면 승리한다는 말을 믿어요!”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장기화로 극장, 공연장, 무대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그나마 생긴 일자리도 갑자기 없어지기 일쑤다. 지난달 26일 제작사 대표가 잠적해 일찍 막을 내린 한 연극은 황폐화된 예술계 현실을 잘 보여준다. 이 현실은 무명의 예술인들에게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이다. 무력감이 밀려오지만 예술을 위해서라면 버텨야 한다. 코로나19로 본래 일터를 떠나 생계 전선에 뛰어든 배우, 인디밴드, 스태프 등 8명을 만났다. 볼멘소리를 꺼내기도 이들은 조심스러워 했다. “저희만 힘든가요. 예술인의 숙명인가 봅니다.”○연극배우의 ‘코로나 하루’ 지난해 국립극단 시즌제 단원으로 뽑혀 매일 연습실에 가던 배우 김한 씨(42)는 서울 마포구 집에서 경기 화성시 한 빵집으로 출근한다. 지난달 21일 오전 6시, 눈을 비비며 승용차에 오른 그는 동틀 무렵까지 1시간 20분을 달렸다.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을 지날 즈음 “여기서 얼마 전까지 공연했는데…. 11월까지 꽉 찼던 스케줄이 줄줄이 끊겼다”고 입을 뗐다. “배우는 몸 쓰는 직업이라 사고 위험이 있는 장거리 운송 알바는 가급적 안 할 생각이었는데….” 오전 7시 40분, 빵집에 도착하자 하얀 근무복으로 갈아입은 그가 빵을 진열하고 포장한다. 첫 손님이 들어오자 힘차게 “어서 오세요!” 외친다. 배우 활동이 아예 끊긴 건 아니다. 오디션이 가뭄에 콩 나듯 열린다. “다행히 강릉에서 촬영하는 영화 단역을 맡아서 다음 주엔 오전 4시쯤 일어나야 할 것 같다”며 엷게 미소 지었다. 최근엔 충남 천안에서 마당극 공연도 했다. 오전 10시, 빵집 건물 6층 빵 공장에서 인천에 배송할 빵을 받아 트럭에 옮겨 싣는다. 매일 경기 화성과 인천을 오가며 다른 매장에 배달한다. 일이 많은 때는 서울, 화성, 인천, 천안을 오가느라 일주일에 2000km를 달린다. “연기할 자리가 생기면 사장님께 양해를 구해 일정을 조율하는 게 더 힘들죠. 마당극도 사장님이 배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오전 11시를 넘겨 인천 남동구의 한 매장에 빵을 내려놓고 2차 배송이 예정된 화성으로 향한다. 끼니를 챙길 시간도 마땅치 않다. 2차 배송이 끝나면 서울에 가서 저녁 알바를 해야 한다. 그는 “예측조차 할 수 없는 공연계의 미래 때문에 더 힘들다”고 했다. 랜선 공연이 늘면서 배우로서의 정체성도 고민이다. “10년 후에도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요?” 오후 5시, 두 번째 직장으로 출근한다. 한 달 전부터 서울문화재단의 예술인 공공지원사업에 뽑혀 극장에서 일한다. 하루 8시간 언제 재가동할지 모르는 무대와 극장을 정비한다. 일을 마치고 침대에 누우면 다음 날 오전 1시. ○“돈을 바라면 못 한다는 일이지만, 그래도…” 생활고는 늘 함께였다. “돈을 바라면 예술을 오래 못 한다”는 말에 수긍해 왔지만 올해는 뼈아프다. 인디밴드 트레봉봉의 드러머 김하늘은 “경제적 어려움은 몸에 익었다. 관객을 못 만나는 상황이 더 힘들다”고 했다. “꿈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는 7년 차 뮤지컬 배우 김주왕 씨(34)도 고됨의 연속이다. 해외 할리우드 연예인 대상의 운동 수업도 병행했지만 일이 끊기자 스크린골프장 아르바이트를 했다. 스크린골프장 손님이 줄어 해고된 뒤 동창에게 부탁해 지금은 방역업체에서 일한다. 산업용 마스크에 방호복 차림으로 공연장 사무실 헬스장에 소독약을 뿌린다. 퇴근 후엔 뮤지컬 넘버 커버곡 유튜브 영상을 만든다. 예술을 이어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무대가 간혹 열리면 무대에 굶주린 이들이 모여든다. 올 9월 온라인 ‘인천 펜타포트 음악축제’에 설 수 있는 ‘펜타 유스스타’ 경연에 299개 밴드가 몰렸다. 1, 2등만 무대에 설 수 있어 경쟁률은 150 대 1이었다. 지난해 경쟁률은 20 대 1 수준이었다. 트레봉봉 리더 성기완(53)은 “3등을 해서 기회는 놓쳤지만 뮤지션들의 절박함을 느꼈다”고 했다. 11년 차 음향감독 김병주 씨(32)는 넓이 90m² 남짓한 창고로 출근해 음향장비를 쓸고 닦고 점검한다. 그는 “장비 상자에 거미줄 쳐진 거 처음 봤다. 너무 신기해서 사진도 찍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원래 9월부터 연말까지 성수기지만 지금은 대출로 버틴다. 2년 차 조명감독 이정수 씨(30)는 최근 대리운전을 시작해 오전 4시까지 일한다. 그는 “이건 기본”이라고 했다. 오랜만에 공연 현장에 일감이 생겨 충북 괴산에 1박 2일 다녀왔다. “집에 가면 씻고 바로 대리 뛰어야 합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이지윤 인턴기자 연세대 UIC 경제학과 졸업 이지윤 인턴기자 연세대 생활디자인과 4학년}
이달 20∼22일 케이블TV 방송과 온라인 상영 예정인 웹뮤지컬 ‘킬러파티’는 코로나19가 낳은 독특한 뮤지컬이다. 이 작품은 저택의 파티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다뤘다. 초대받은 9명의 손님을 수사관이 각자의 방에서 신문한다. 배우들이 실제 본인의 집에서 연기를 하고, 이 촬영본을 편집해 작품을 만들고 있다. 이렇게 제작된 10분 안팎의 웹뮤지컬은 ‘자가 격리 뮤지컬’이라고도 불린다. 여기서 나조연 역을 맡은 배우 함연지(28)는 최근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카메라를 상대역 삼아 연기하는 것이 이색적 경험이었다. 넘버와 연기를 이어 붙인 촬영과 편집기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봤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덕업일치’(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된 것)의 삶을 살아왔다. 과거 사촌언니가 붓을 잡은 모습에 반해 예원학교에 입학했고 3년 뒤 돌연 대원외고에 진학했다. 미국 뉴욕대에서 연기를 전공했다. 하고픈 게 많았지만 그에게 확고한 꿈은 뮤지컬 배우였다. 이번 작품에서도 캐릭터에 몰입하기 위해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이번 배역이 공인중개사인데 뮤지컬 배경인 경기 양수리 지도를 훑으며 실제 일할 법한 부동산사무소를 상상하고 연기를 고민했어요.” 이번 작품에서 그는 다소 노출이 있는 의상도 소화했다. 가족은 항상 든든한 그의 우군. “대학 공연 때부터 훨씬 몸을 드러내고 트월킹(골반을 자극적으로 비트는 동작)까지 보신 아버지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아 하세요. 뮤지컬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남편도 ‘내 눈엔 네가 천생 배우’라며 응원해주고요.” 그는 ‘오뚜기 창업주의 손녀’로 유튜브 채널에서 먼저 알려졌다. 발랄한 매력으로 호평받지만 따가운 시선도 있다. “(그 시선이) 속상해도 숨기만 하면 안 되죠. 뮤지컬로 실력을 증명하는 게 답입니다. 끝까지 버텨 대중으로부터 인정받겠습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