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연기 활동에는 공백기가 있었지만, 제 인생에서는 공백기가 존재하지 않았던 몇 년이었습니다.” 첫 에세이 ‘반은 미치고 반은 행복했으면’(달)을 최근 펴낸 배우 강혜정(41)은 21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2018년 종영한 KBS 드라마 ‘저글러스’ 이후 연기 활동을 잠시 쉬었던 그는 그동안 글을 쓰며 ‘나’를 채워나갔다. 배우이기에 앞서 강혜정 자신으로 산 시간이었을 터이다. 그렇게 4년간 휴대전화에 짬짬이 일상과 생각을 기록한 짧은 글 60편이 책으로 엮였다. 강혜정은 “언제 어디서든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으면 휴대전화를 들어 문자를 쓰듯 글을 썼다”며 “머릿속에 떠돌아다니는 말 풍선을 적은 글”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책을 낸 건 “한마디 말이 가진 힘을 나누고 싶어서”였다. 마지막 장에 실린 글 ‘말이 이끄는 힘’은 지인에게 “종종 보고 싶다”는 새해 인사 메시지를 보냈을 때 “난 자주 보고 싶다”는 예상치 못한 답장을 받고 썼다고 한다. 강혜정은 이 순간에 대해 “두 팔을 활짝 펴고 반갑게 맞아주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그가 끌어당긴 말의 힘으로 한 발짝 나아가야 한다”고 적었다. 강혜정은 “한마디 말로 갑갑한 새장 속에 사는 누군가가 마음의 문을 열 수도 있다”며 “(이 책이) 누군가에게 그런 순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애초에 출간할 계획 없이 쓴 글들이었기에 남에겐 숨기고 싶은 감정까지 가감 없이 담겼다. ‘스타트라인’이란 제목의 글에선 “또 한번의 총성이 울린다면 나는 완주해낼 수 있을까. 어쩌면 스타트라인에 서 있을 용기가 있을지 모르겠다”며 시작에 대한 두려움을 털어놓는다. ‘그런 날’에선 “당장에 결과물이 있어야 할 듯 어깨가 무거운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날 … 그냥 아무 존재도 아니었으면 하는 날”의 무기력함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는 “누구나 피하고 싶고 숨기고 싶은 생각마저 함께 나누고 싶었다”고 했다. 딸(13)이 성장하면서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고 한다. 글이 하나둘 쌓이다 보니 “단 한 명의 독자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첫 독자는 남편이자 래퍼인 타블로(본명 이선웅·43)였다. “계속 써보라”는 응원 덕에 글이 더 쌓였고, 타블로가 출판사 대표에게 원고를 보내 독자를 만나게 됐다. 강혜정은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나만 이런 생각을 갖고 사는 것이 아님’을 이해받고 덜 외로워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엄마 얼굴을 자세히 보니까 내가 생각했던 거랑 다르게 생겼어!” 서울 용산구에 있는 책방 ‘죄책감’에서 12일 엄마의 얼굴을 그리던 한 아이가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날 약 33㎡(10평) 규모의 작은 책방에서는 부모와 자녀가 서로의 얼굴을 관찰한 뒤 그림을 그리는 가족 프로그램 ‘우린 서로 잘 알지만, 잘 몰라요’가 열렸다. 한 엄마는 자신의 어깨 위로 훌쩍 커버린 딸의 얼굴을 스케치북에 그리며 “매일 봐서 몰랐는데 우리 딸 언제 이렇게 컸느냐”고 말했다. 지난해 문을 연 이 책방에서 가족이 함께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홍진일 책방 죄책감 대표(47)는 “최근 사회에서 벌어진 사건사고를 지켜보며 인간관계의 단절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됐다”며 “책방을 운영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다가 관계의 기본인 가족과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고 말했다. 동네 책방에서 독서 및 북토크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다채로운 취미 생활을 공유하고, 가족 간 대화를 장려하는 프로그램이 생겨나고 있다. 숲 해설가와 함께 동네에 있는 나무를 탐방하는 산책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종로구 책방 ‘일일호일’과 낮엔 서점, 밤엔 극장으로 변신하는 마포구 책방 ‘라블레’가 대표적이다. 책방이 단지 책을 사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을 공통의 취미로 엮고, 서로의 일상을 나누는 커뮤니티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동네 책방이 이런 프로그램을 도입한 건 대형 서점은 할 수 없는 동네 책방만의 역할을 찾기 위해서다. 관악구의 책방 ‘회전문서재’는 올해 3월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4∼6명이 모여 자신의 이야기를 적은 글을 읽는 낭독회를 열고 있다.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1인당 7만5000원(한 달 기준)을 내고 참여한 이들은 “내 얘기에 다정한 마음을 드러내줘 기뻤다” “나만의 색깔을 찾을 수 있게 됐다”며 호평을 남긴 것. 안서진 회전문서재 대표(35)는 “앞서 4년간 독서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사람들이 결국 책을 통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며 “회사나 학교, 가족에게는 말할 수 없는 개개인의 이야기를 글로 남기고 타인에게 터놓기에는 소규모 동네 책방이 제격”이라고 했다. 장은수 출판평론가는 “인간관계가 단절된 요즘, 동네 책방이 사람들 사이를 연결해주는 구심점이 될 수 있다”며 “이는 책방이 지닌 중요한 사회적 역할일 뿐 아니라 대형 서점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동네 책방만의 경쟁력”이라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김정호가 자신의 연구와 앞서 존재한 수많은 지리서를 종합해 만든 대동지지(大東地志)는 한민족 지도문화의 총화입니다.” 조선의 지리학자 고산자(古山子) 김정호(1804?∼1866?)가 집필한 지리서 ‘대동지지’를 최근 처음으로 국역한 이상태 한국영토학회 회장(80)은 18일 이렇게 강조했다. 이 회장은 30권 15책 분량에 달하는 원본을 총 8권 2170쪽으로 옮긴 ‘대동지지’(경인문화사)를 최근 출간했다. 국역에는 이 회장을 비롯해 고혜령 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 이영춘 전 국사편찬위원회 연구편찬실장 등 학자 8명이 참여했다. 대동지지는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직후인 1862년부터 죽을 때까지 집필한 유작이다. 대동지지 김정호 육필본을 소장하고 있는 서울 성북구 고려대 대학원 도서관에서 만난 이 회장은 “김정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동지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동지지엔 김정호가 앞서 편찬한 ‘동여도지(東輿圖志)’와 ‘여도비지(輿圖備志)’에는 없는 정보가 기록돼 있다. 바로 전국의 장날을 기록한 ‘장시(場市)’다. 강원도 편에서 원주목에 대해 설명하며 ‘읍내 장날은 2일과 7일’이라고 기록하는 식이다. 이 회장은 “김정호는 팔도를 돌아다니며 상업의 발달 과정을 목격했다. 백성이 무슨 정보를 원하는지 명확히 포착했고 그것이 바로 장시”라고 했다. 당대 지리서 가운데 장시 정보를 기록한 건 대동지지뿐이다. 조선에 닥친 외세의 흔적도 엿볼 수 있다. 충청도 편에선 ‘홍주목’(현재 충남 홍성)을 설명하는 대목에 “순조 32년 7월에 서양의 상선 호하미 등이 고대도에 도착하여 그 지방의 토산물을 헌납하였다. … 그 나라는 대영국(大英國)이라 칭하고 … 그 나라 서울의 지명이 란돈(蘭墩)…”이라고 나온다. 그해(1832년)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 애머스트호가 고대도에 들어온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 회장은 “대동지지에는 조선을 향해 불어오는 외세의 바람과 당대 백성들의 높아진 상업적 열망 등 격변하는 사회상이 그대로 기록돼 있다”며 “김정호는 19세기 조선에 불어닥친 변화를 알아본 선각자였다”고 말했다. 50년 넘게 김정호를 연구해온 이 회장은 “김정호를 둘러싼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어 고지도 연구를 시작했다”고 했다. 일본의 측량가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1745∼1818)에 맞설 만한 인물을 내세우기 위해 김정호가 신화화된 측면이 있다는 것. 그는 “흔히 김정호가 일일이 측량해서 지도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측량과 함께 역대 한반도에서 제작된 지도와 지리서를 총합한 편집지도를 제작했다”며 “김정호는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낸 창조자가 아니라 한민족의 역대 지도 문화를 계승한 학자”라고 평했다. 김정호가 위대한 이유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김정호가 1851∼1856년 편찬한 여도비지에는 전국 334개 군현의 모든 좌표가 기록돼 있다. 위도는 현재의 것과 같고, 경도는 북경을 기준으로 한 좌표다. 당대 조선에 유입된 서구의 기하학과 확대축소법을 토대로 과학적으로 한 단계 더 발전한 지리서를 집필한 성과라는 분석이다. 이 회장은 현존하는 ‘대동여지도 목판본’ 30여 점을 비교하면서 김정호가 기존에 잘못 새겼거나 새로 바뀐 부분을 수정한 흔적 30여 군데를 찾아내기도 했다. “김정호는 언제고 고치는 학자였습니다. 그는 세상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간토(關東)대지진 직후 통신과 교통이 모두 단절된 환경에서 제작된 오보가 오늘날 간토대지진 학살부정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사실이 아닌 가짜뉴스가 긴 시간 동안 정정되지 못한 채 방치돼 있었던 탓입니다.” 최근 신간 ‘관동대지진, 학살 부정의 진상’(삼인)을 펴낸 전 아사히신문 역사전문기자 와타나베 노부유키 씨(68)가 18일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올해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이 벌어진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1923년 9월 1일 간토대지진 직후 요코하마 등지에서 ‘무장한 조선인들이 방화를 하고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나가며 전국적으로 조직된 3689개 일본인 자경단에 의한 조선인 학살이 벌어졌다. 당시 살해된 조선인은 약 6000명에서 1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우익단체들은 조선인 학살 사건을 두고 조선인이 벌인 방화·봉기 등 범죄로부터 일본인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였다는 내용의 ‘학살부정론’을 주장하고 있다. 와타나베 씨는 신간에서 학살부정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활용되는 옛 신문 기사가 오보였음을 밝혔다. ‘조선인 폭도들의 방화 및 봉기 사건’을 가장 먼저 보도한 1923년 9월 3, 4일자 오사카 아사히신문의 기사가 대표적이다. 해당 기사에는 ‘고베의 모 무선전신으로 감청한 바에 따르면’이라는 인용 출처가 드러나는데, 이미 9월 1일 밤부터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무장한 조선인들이 방화와 봉기를 일으킨다’는 유언비어가 퍼진 뒤였다. 와타나베 씨는 아사히신문 사사(社史)를 토대로 이 기사가 쓰인 과정을 역추적했다. 그 결과 지진 발생 직후 오사카 현장으로 급파된 기자들은 4일 무렵 현장에 도착했고, 감청 정보의 팩트 체크를 충분히 하지 못한 채 당일 기사를 작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와타나베 씨는 “당시 보도된 기사는 확인되지 않은 오보였다”며 “‘조선인 학살 사건은 봉기를 일으킨 조선인으로부터 일본인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정당방위’란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간토대지진 직후 내무대신을 지낸 고토 신페이(後藤新平)가 1923년 11월 15일 조사를 토대로 남긴 ‘지진 후 형사사범 관련 사항 조사서’에 따르면 간토대지진 직후 조선인이 저지른 살상 사건은 5건으로 기록돼 있으나 피의자와 피해자 신원 모두 미상으로 확인됐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모든 나라에 헌법이 있습니다. 오직 튀르키예만 그것을 선언해 놓고 폐지하는 바람에 국민이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군인들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1908년 반란을 일으킨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술탄 압둘하미드 2세에게 보낸 글의 일부다. 당시 오스만 제국에는 러시아와 영국이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 마케도니아를 장악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전쟁의 위협에 직면했던 오스만 제국군 일부는 의회 정치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중요한 건 20세기 초 ‘이미 모든 나라에 헌법이 있다’는 인식이 지식인 집단이 아닌 가장 평범한 군인들 사이에서 싹텄다는 것이다. 반군은 민주주의적 요구로서가 아니라 외세에 맞설 더 견고한 정치체제를 갖추기 위해 헌법을 원했다. 미국 프린스턴대 역사학 교수인 저자는 “헌법은 혁명의 열기가 아닌 전쟁의 잿더미에서 태어났다”고 본다. 이는 성문 헌법의 부상을 1770년대 미국과 프랑스에서 벌어진 대규모 혁명과 연결 지어 ‘민주주의의 진보’로 평해 왔던 관점과는 다른 접근이다. 저자는 1750년대부터 20세기까지 세계 각국에서 태동한 성문 헌법의 역사를 추적하며 근대 세계의 토대가 된 헌법의 뿌리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저자는 헌법 제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1756∼1763년 슐레지엔 영유를 둘러싸고 유럽 대국이 벌인 ‘7년 전쟁’을 꼽는다. 윈스턴 처칠(1874∼1965)이 “최초의 세계 전쟁”이라고 명명한 이 전쟁 이후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다. 전쟁의 지리적 규모가 커졌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더 많은 수의 군인이 필요해졌다. 전쟁과 세수 확보에 책임 있는 군인을 양적으로 확장하기 위한 움직임이 헌법 제정을 통한 시민권 확장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저자에 따르면 실제 1776∼1870년 전 세계에 걸쳐 공식적으로 작성된 헌법 초안들에는 육군·해군·민병대·징집과 관련한 조항이 3400개에 이른다. 페루가 에스파냐의 통치에 항거한 투쟁에서 성공한 뒤 1828년 발표한 새 헌법엔 ‘군에 복무했거나 복무할 예정인 외국인’에게까지 시민권을 부여했다. 프랑스 정부는 잇따른 전쟁으로 재정적 붕괴 상태에 이르자, 새로운 수입원을 찾기 위해 1789년 어쩔 수 없이 성직자와 귀족, 평민으로 구성된 삼부회를 소집했다. 재정난을 극복할 세제 개혁안을 만들기 위해 모였던 이 회의에서 평민과 귀족 간 갈등이 분출되며 프랑스 대혁명이 촉발됐다. 성문 헌법안이 인쇄돼 널리 배포된 이유 역시 전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18, 19세기 전 세계 각국 정부는 전쟁으로 새롭게 확보한 영토에서 벌어질 내란을 우려했다. 수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국경 지역에 사는 이들에게까지 ‘자국민’이라는 관념을 심어 내적 갈등을 저지하는 일이 과제로 떠올랐다. 이 과정에서 인쇄술의 발전은 자국민으로서 누리게 될 권리를 담은 헌법을 명문화해 전역으로 퍼뜨리는 데 일조했다. 일례로 러시아 여황제 예카테리나 2세(1729∼1796)는 1767년 총 655개 조항에 이르는 훈시 ‘나카즈’를 만든 뒤 영어와 독일어본까지 만들어 러시아 접경지역에 뿌렸다. 이렇게 국경을 넘나든 헌법 초안은 세계화의 흐름 속에 각국으로 퍼져 나가며 영향을 주고받았다. 저자는 “(헌법은) 단언컨대 천진난만한 장치가 아니며, 지금껏 그랬던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성문 헌법은 처음 출현했을 때부터 권력을 제한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권력을 가능케 하는 것과 연관돼 있었다”고 말한다. 원제는 ‘The Gun, the Ship, and the Pen’.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가을 밤 서울 종로구 창덕궁 경내를 거니는 ‘창덕궁 달빛기행’ 행사가 다음 달 7일부터 10월 22일까지 매주 목∼일요일 저녁에 열린다. 기존에는 티켓을 선착순으로 판매했지만 올해부터는 추첨제로 바뀐다. 올해 14년째를 맞는 ‘창덕궁 달빛기행’은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창덕궁의 역사와 문화, 조경을 살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에서 출발해 1시간 40분 동안 진선문과 낙선재, 연경당 등으로 이어진다. 효명세자(1809∼1830)가 잔치를 베풀기 위해 지은 연경당(演慶堂)과 ‘시원한 곳에 오른다’는 뜻을 지닌 상량정(上凉亭)에서는 전통 공연도 펼쳐진다. 예매는 이달 22일 오후 2시부터 27일까지 티켓링크 홈페이지에서 할 수 있고, 티켓은 추첨 방식으로 배정된다고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밝혔다. 1인당 최대 2장까지 응모할 수 있다. 당첨이 되면 29일 오후 2시부터 다음 달 3일까지 선착순으로 관람을 원하는 날짜와 시간(오후 7시, 오후 7시 50분)을 선택해 예매하면 된다. 입장객 수는 하루 150명이다. 만 65세 이상과 장애인, 국가유공자는 별도의 응모 절차 없이 22일 오후 2시부터 1인 2장까지 하루 30명에 한해 전화로 선착순 예매할 수 있다. 관람료는 1인당 3만 원.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고(故) 이우영 작가가 ‘기영이’와 ‘기철이’ 등 1990년대 인기 만화 ‘검정고무신’ 캐릭터의 단독 저작자로 인정받았다. 한국저작권위원회는 ‘검정고무신’ 캐릭터 9종의 공동 저작자로 등록된 4인 중 이 작가를 제외한 3인에 대해 등록 직권말소 처분이 확정됐다고 16일 밝혔다. 위원회는 “2008년 검정고무신 캐릭터 9종의 저작자 등록 당시 실제 캐릭터 창작에 참여한 사람은 이 작가뿐인 것으로 확인됐다”며 “나머지 3인은 캐릭터가 창작된 뒤 참여한 만화가와 스토리 작가, 수익배분 차원에서 등록한 회사 대표”라고 설명했다. 위원회는 지난달 12일 검정고무신 캐릭터의 공동저작자로 이름을 올린 △이우진 만화가(이 작가의 동생) △이영일 스토리 작가 △장진혁 형설앤 대표의 저작자 등록을 직권으로 말소 처분하고 당사자에게 통지했다. 이후 30일간 당사자의 이의 제기가 없어 처분이 확정됐다. 앞서 올해 4월 이 작가의 유족 측은 검정고무신 캐릭터 저작자 등록 당시 창작자가 아닌 이가 공동저작자로 등록돼 있다며 위원회에 저작자 등록 말소를 요청했다. 이 작가는 형설앤과 3년 넘게 검정고무신 관련 저작권 분쟁을 벌여오다 올해 3월 11일 세상을 등졌다. 위원회가 직권으로 저작자 등록을 말소한 것은 2020년 8월 ‘직권 말소등록제도’ 도입 이후 처음이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947년 8월 조선산악회(현 한국산악회)가 남조선과도정부 독도조사단과 함께 실시한 ‘울릉도·독도 학술조사’에 미 군정청이 직접 관여했음을 보여주는 문건이 처음으로 공개된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서울 영등포구 타임스퀘어 내 독도체험관에서 17일 개막하는 기획전시 ‘1947,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를 가다’에서 제1차 울릉도·독도 학술조사 당시 작성된 문건 5건을 처음 선보인다. 조선해안경비대 손원일 총사령관(1909∼1980)이 조선산악회장이자 울릉도학술조사대장 송석하(1904∼1948)에게 보낸 ‘울릉도학술조사대 일행 해상 수송의 건’과 학술조사에 참여한 대원 이름이 적힌 ‘울릉도학술조사대 편성 명부’, 1차 학술조사를 마친 뒤 송석하가 국제보도연맹에 투고한 ‘고색창연한 역사적 유적 울릉도를 찾아서’ 초고 등이다. 특히 1947년 8월 15일 미 군정청 소속 아처 러치 군정장관이 승인한 ‘미 군정청의 출장명령서’는 독도 조사가 군정장관 명령에 따라 이뤄졌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료로 꼽힌다. 2장 분량의 이 공문에는 미 군정청이 1947년 8월 허가한 공무원들의 지방 출정 일정과 목적지 등이 기록됐는데, 송석하 등 한국인 6명의 독도 출장을 허가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홍성근 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위원은 “미 군정청이 독도를 한국의 관할구역으로 관리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제1차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는 1947년 4월 일본인이 독도에 침입해 우리 어선에 총격을 가한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추진됐다. 과도정부를 이끌던 민정장관 안재홍(1891∼1965)이 조선산악회에 의뢰해 전문가 63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민관조사단이 꾸려졌다. 10월 31일까지. 무료.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한 치의 땅도 한 명의 백성도 폐하의 사유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어찌 독단으로 나라를 주고받는 일을 필부필부가 밭과 농산물을 사고팔 듯 하실 수 있습니까.”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때 척암 김도화(1825∼1912)가 고종에게 올린 ‘합병하지 말 것을 청하는 상소’의 일부다. 당시 85세였던 척암은 대문 앞에 ‘合邦大反對之家(합방대반대지가·합방을 크게 반대하는 집)’라는 현판을 내걸고 스스로 자택 문을 걸어 잠갔다. 이후 일제의 감시를 받다가 2년 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시와 글로 일제의 침략에 맞선 유림이자 문장가였다. 경북 안동시 한국국학진흥원에서 22일 오후 2시 ‘척암 김도화의 학문과 애국활동’을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린다. 한국국학진흥원 한문교육원은 한일합방에 분개한 척암의 시와 서간, 상소문 등이 수록된 문집 총 55권을 국역해 올해 전자책으로 펴냈다. 이번 학술대회는 지난 4년간의 국역 성과물을 토대로 마련했다. 척암은 을미사변(1895년 10월 8일) 이후 1896년 1월 안동의 의병을 규합해 안동의진(安東義陣)을 결성했고 2대 의병장으로 추대됐다. 1905년 을사늑약 직후에는 ‘을사늑약을 당장 폐기하라’는 내용의 상소문 ‘청파오조약소(請破五條約疏)’를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척암은 을사오적을 두고 “그들을 용서하지 못할 죄가 셋 있으니 첫째는 나라를 팔아먹은 죄요, 둘째는 외적과 은밀히 통한 죄요, 셋째는 임금을 협박한 죄”라고 썼다. 1983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됐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이범석(한국광복군 제2지대장)과 내가 공동의 목표를 위해 조성한 평등, 존중, 협동의 분위기 속에서 뛰어난 정신을 지닌 하나의 군단이 힘을 얻었다.” 태평양전쟁 말인 1945년, 한국광복군과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이 공동 추진했던 ‘독수리작전’의 미국 측 책임자 클라이드 사전트 대위(1909∼1981)는 당시 대원들의 훈련 분위기를 회고록에서 이같이 밝혔다. 독수리작전은 한국광복군과 OSS가 합작해 한국 청년을 대일전 정보요원으로 양성한 뒤 한반도에 침투시키려 한 계획이다. 사전트 대위는 당시 한국인 청년들과 미군이 일제에 맞서기 위해 하나가 돼 합력(合力)했다고 봤다. 사전트 대위가 남긴 회고록과 관련 자료를 최근 확보한 독립기념관은 78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이를 14일 동아일보에 공개했다. 미국 메인주에 사는 사전트 대위의 아들 로버트 사전트 씨가 소장한 기록물들로 연구를 위해 일부 공유됐을 뿐 일반에 공개되는 것은 처음이다. 회고록은 독수리작전에 참여한 미군 관계자가 공식 문서 외 따로 남긴 유일한 현존 기록으로 평가된다. 김도형 전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이 자료를 번역 분석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한미 양국 군인들은 숙식과 훈련을 위해 중국 시안(西安)의 버려진 사당을 손수 고쳐 쓰는 등 훈련 준비에도 함께 힘을 모았다. 사전트 대위는 “생존과 조정을 위한 합리적인 것(결과)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도전에 직면했다”면서도 “거대한 개축과 재건, 건축에 (함께) 힘을 쏟았고, 전후 중국을 떠날 때 미국인, 중국인, 한국인들이 자랑스럽게 떠날 수 있었다”고 했다. 사전트 대위는 세상을 뜨기 한 해 전인 1980년 3월 7일 독수리작전을 회고하며 레터(Letter) 용지 10쪽 분량의 타자본으로 이 회고록을 완성했다. 학계에서는 이 회고록이 최초의 한미 동맹을 보여주는 핵심 문서라는 평가가 나온다. 김 연구위원은 “회고록은 한국과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군사기관이 펼쳤던 최초의 공동 군사작전을 입증하는 귀중한 기록으로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고 강조했다.독수리작전 1945년 미국 전략사무국(OSS)이 한국광복군과 합작해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을 대일전 정보요원으로 양성한 군사계획이다. 중국 시안에 있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가 훈련에 참여했다. 1945년 8월 4일 1기 훈련 과정이 끝나고 ‘공작반’ 편성 뒤 한반도 침투 작전이 추진됐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실행되지 않았다. “2차대전때 독수리작전, ‘최초의 한미동맹’으로 재평가해야” 사전트 대위 회고록 ‘한미공조 관점에서 본 작전’ 첫 공개작전 기획부터 해산까지 기록독수리작전, 미완으로 끝났지만…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한미 공조활동의 관점에서 본 독수리작전(Note on an aspect of U.S.-Korean collaborative activities during World War Ⅱ: The Eagle Project).’ OSS 중국전구(戰區) 비밀첩보과 소속으로 독수리작전의 미국 측 책임자였던 클라이드 사전트 대위가 쓴 회고록 제목이다. 회고록에는 △독수리작전 기획 △훈련 △광복 후 일본 전쟁포로수용소 내 미군 구출을 위한 서울 작전 등 시작부터 해산까지의 과정이 담겼다.● “대(對)일본 정보작전에 한인 청년 활용” 사전트 대위와 한국광복군의 첫 만남은 1945년 1월이었다. 이범석 한국광복군 제2지대장(1900∼1972·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은 OSS 내 중국 정보 분석가였던 사전트 대위 등 중국에서 활동하던 OSS 장교들에게 군사합작을 제안했다. 일본군에 강제 동원됐다가 중국에서 탈주한 조선 청년 수백 명을 훈련시켜 연합군의 대일전에 참여시키자는 제안이었다. 그해 1월 31일 사전트 대위는 일본군으로 중국 전선에 배치됐다가 탈출한 조선인 청년들을 중국 충칭(重慶)에서 만났다. 사전트 대위는 작전의 시작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이 계획(독수리작전)이 이범석이 중국 동부에 있는 한국 청년들의 존재를 내게 말했을 때 고안됐다고 기억하고 있다. 한국 청년들은 일본에 있는 학생들이 일본군에 징병됐다가 탈주해 중국 동부에서 발견된다고 했다. (나는) 한인 청년들을 일본에 대한 정보작전에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전트 대위는 ‘OSS-한국광복군 연합 작전 계획’을 수립했고, 그해 2월 24일 ‘비밀정보국의 한국 침투를 위한 독수리작전’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미국 국립문서관리청에 소장된 이 보고서에는 요원 60명을 선발해 3개월간 첩보·통신 훈련을 거친 뒤 이들 가운데 적격 요원 45명을 선발하겠다는 훈련 계획과 함께, 이들을 한반도 5개 전략 지점(서울, 부산, 평양, 신의주, 청진)에 침투시킨다는 계획이 담겼다.● “군사집단으로서 가장 지적인 집단” 사전트 대위는 중국에서 만난 조선 청년들에게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1945년 4월 3일 사전트 대위가 OSS에 보고한 문건에는 이날 충칭에서 25km 떨어진 지역에서 그가 만나고 온 조선인 청년 37명에 대해 “군사집단으로서 내가 본 가장 지적인 집단으로, 미군 청년 장교들과 알맞게 비교될 것 같다”며 “그들 모두를 독수리작전 훈련에 참가시키는 것을 제안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한국광복군과 OSS는 제2지대 본부가 있었던 시안에 ‘한미합동지휘본부’를 설치하고, 이범석과 사전트가 양측 지휘관을 맡아 1945년 5월 21일부터 훈련을 진행했다. 사격·폭파를 비롯한 특수훈련과 첩보활동을 위한 무선교신 훈련이 3개월간 진행됐고, 1945년 8월 4일 제1기생이 훈련을 마쳐 적격 요원 50명을 선발했다. 1945년 6월 25일 1차 훈련을 마친 뒤 사전트 대위가 OSS 측에 보고한 문건에는 “기율과 사기가 훌륭하다”며 “(한국인 청년들은) 연합군 전체의 노력에 귀중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범석의 지도력에 대해선 “경의를 표한다”고도 했다. ● 최초의 한미동맹, 독수리작전 OSS 중국본부는 1945년 3월 3일 독수리작전 훈련 계획을 승인했다. 4월 3일에는 김구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1876∼1949)이 계획을 승인했다. 김 주석과 OSS 최고책임자 윌리엄 도너번 소장(1883∼1959)은 1945년 8월 7일 중국 시안에서 만나 국내 침투 작전에 합의했다. 한미가 정식으로 한반도로 진입하는 공동 군사작전에 합의한 것이다. 도너번은 “오늘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미합중국 사이에 적 일제에 대한 공동작전이 추진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며 독수리작전은 미완으로 남았다. 광복 후 OSS는 일제의 수용소에 갇힌 미군 포로를 구하기 위해 서울에 사전트 대위와 독수리작전 대원을 파견했다. 사전트 대위는 “(독수리작전은) 1945년 9월 27일에 끝났다”고 기록했다. 독립기념관이 회고록과 함께 사전트 대위의 아들로부터 입수한 ‘기지 반환 공고문’은 독수리작전이 끝나던 날 작성됐다. 레터 용지 1장 분량의 문서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가 중국 산시성 시안에서 작전기지로 점유해 왔던 사당 두 곳의 토지와 가옥을 미국 OSS가 점유해 사용하는 구두계약을 1945년 4월 15일 체결했는데, 협정이 종결되면서 해당 토지와 가옥을 다시 한국광복군에 양도한다’는 내용이다. 양도 계약의 주체로는 “OSS에 의해 대표되는 미국 정부”가 명시돼 있다. 문서 하단에는 이범석 지대장의 한자 성명과 직인이 찍혀 있고, 증인으로 사전트 대위가 영문 서명을 남겼다. 김도형 전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은 “독수리작전과 관련된 한미 간 계약 문건은 미국 국립문서관리청에서도 지금껏 확인된 적 없다.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를 대표하는 두 군사기관이 맺은 동맹 관계를 입증하는 문건이 나온 건 처음이다”라고 했다. 그는 “일제에 맞서 한국 독립을 위해 공동의 군사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미동맹 체계의 원형이 갖춰졌다고 본다”고 했다.美 OSS “한국인들 굳건히 조국 위해 맞서 완전 독립 약속해야” “일제 지배하의 한국인들은 용감하게 그리고 굳건하게 그들의 조국을 위해 고문을 받아 왔다. 그러나 희망도 없고 궁극적인 성공에 대한 확신도 없이 그들이 집단적으로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최소한 할 수 있는 것은 그들 개인의 희생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다.” 미국 국립문서관리청이 소장한 전략사무국(OSS) 1급 기밀 보고서 ‘한국 독립 승인과 그것이 전쟁에 미치는 효과(Recognition of Korean Independence and Its Effect on the War)’의 일부다. 태평양 전쟁 당시 작성된 5쪽 분량의 이 보고서는 “한국인들에게 전적이고 완전한 독립을 약속하면, 우리는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 반대로 우리(미국)는 이 전쟁을 단축시킬 수 있고 귀중한 미국인의 생명을 아낄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김도형 전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은 ‘Project Eagle(독수리작전)’이라는 책을 2017년 미국에서 출간한 한인 2세 로버트 김 변호사로부터 이 보고서를 입수했다. 김 전 연구위원은 “미국 정보기관이 대일전 승리를 위해 한국의 완전한 독립 보장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면에서 매우 의미 있는 보고서”라고 설명했다. OSS가 ‘한국의 완전한 독립’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한 배경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한국광복군 요원들과의 두터운 신뢰 관계가 있었다는 분석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일제 지배하의 한국인들은 용감하게 그리고 굳건하게 그들의 조국을 위해 고문을 받아 왔다. 그러나 희망도 없고 궁극적인 성공에 대한 확신도 없이 그들이 집단적으로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최소한 할 수 있는 것은 그들 개인의 희생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다.” 미국 국립문서관리청이 소장한 전략사무국(OSS) 1급 기밀 보고서 ‘한국 독립 승인과 그것이 전쟁에 미치는 효과(Recognition of Korean Independence and Its Effect on the War)’의 일부다. 태평양 전쟁 당시 작성된 5쪽 분량의 이 보고서는 “한국인들에게 전적이고 완전한 독립을 약속하면, 우리는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 반대로 우리(미국)는 이 전쟁을 단축시킬 수 있고 귀중한 미국인의 생명을 아낄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김도형 전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은 ‘Project Eagle(독수리작전)’이라는 책을 2017년 미국에서 출간한 한인 2세 로버트 김 변호사로부터 이 보고서를 입수했다. 김 전 연구위원은 “미국 정보기관이 대일전 승리를 위해 한국의 완전한 독립 보장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면에서 매우 의미 있는 보고서”라고 설명했다. OSS가 ‘한국의 완전한 독립’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한 배경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한국광복군 요원들과의 두터운 신뢰 관계가 있었다는 분석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경남 진주 태생 1907년생 김○숙. 1944년 7월 24일 제233설영대(노동부대) 군속으로 티니언섬에서 식량 운반 작업 중 단총으로 사살돼 사망.’ 국사편찬위원회는 일제가 벌인 태평양전쟁 당시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조선 출신 군인·군속 사망자 약 2000명의 개인정보와 사망 원인 등이 정리된 명부를 발굴해 14일 처음으로 공개했다. 국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해당 명부는 일본 국립공문서관이 소장한 ‘전몰자등원호관계자료(戰没者等援護關係資料)’에 포함돼 있던 ‘조선사연(朝鮮死連·조선인 사망자 연명부)’, ‘사망자원부’, ‘조선육상군인군속유수명부’ 등이다. 1946∼1949년 일본 후생노동성 사회원호국에서 작성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일본 후생노동성이 전후 보상 문제 제기에 대한 기초 자료를 준비하기 위해 자료를 작성했을 것”이라고 봤다. 명부에는 사망-행방불명된 사람의 개인정보를 비롯해 사망 일시와 장소, 사후 처리 내용 등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징병된 조선 출신 인물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죽음을 맞이했는지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핵심 사료”라고 설명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학살에 가담한 일본인들의 증언에서 조선인 학살 피해자들은 잔인하게 난도질당한 시체로 그려졌습니다. 저는 총칼에 스러져간 피해자의 목소리를 되살려내 역사의 빈칸을 채우고 싶었습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다룬 소설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래빗홀·사진)를 15일 출간하는 황모과 작가가 말했다. 일본에서 유학 중인 그를 10일 화상으로 만났다. 황 작가는 2014년 일본 지바(千葉)현 다카쓰칸논지(高津觀音寺)에서 열린 간토대지진 학살 피해자 추도식에 처음 참여한 뒤 9년간 일본인 생존자 증언 자료집과 그들의 후손을 찾아 나섰다. 그는 “처음에는 관찰자로서 참석했지만 9년간 매년 추도식에 참여하며 나 역시 이 역사에 책임을 져야 하는 주체임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그가 찾아낸 증언에는 학살에 가담하거나 방관했던 일본인의 목소리만 있을 뿐, 조선인 학살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악’, ‘어머니, 아버지’, ‘아이고’와 같은 외마디 비명이 전부였다. 황 작가는 “기록되지 않은 목소리를 소설적 상상력으로 되살려내고 싶었다”고 했다. 소설은 1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1923년과 2023년을 교차한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기술을 이용해 조선인유족회 대리인인 한국 청년 민호와 일본인 유족회 대리인 일본 청년 다카야가 1923년 9월 1∼4일 학살 현장을 조사하는 이야기다. 황 작가는 “오늘을 살아가는 한일 양국의 두 청년이 100년 전 학살의 자리에 존재했던 조선 청년들을 만나게 하고 싶었다. 오늘과 과거가 얼굴을 마주함으로써 그날의 죽음이 학살이란 통칭으로서가 아니라 꿈과 재능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죽음으로 기억되길 바랐다”고 말했다. 황 작가는 학살 현장에 있었던 조선 청년들을 가장 평범한 모습으로 되살려냈다. 주인공 달출과 평세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소시민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조선인에 대한 혐오가 퍼지고 학살이 벌어지자, 죽을 줄 알면서도 위험에 처한 다른 조선인들에게 손을 내민다. 황 작가는 “이들에게도 지키고 싶은 가족과 친구가 있었다”며 “학살의 한복판에서 누군가를 지키며 같이 살고자 했던 평범한 이들을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싶었다”고 했다. ‘살아 있는’ 한 사람의 얼굴로 그날의 진실을 목격한 21세기 청년 민호와 다카야가 내린 선택은 더 이상 방관자로 살지 않는 것이다. 학살 피해를 말하는 조선인유족회 측 주장을 뒤집기 위해 현장 조사에 참여한 다카야는 달라진다. 1∼3차 조사 때만 해도 학살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외면했던 다카야가 4차 조사 땐 다른 선택을 한 것. 황 작가는 “방관자였던 다카야가 학살 현장을 반복적으로 목격하면서 학살의 역사에 책임 의식을 갖게 된 것은 작지만 큰 변화”라고 했다. “스스로를 책임의 주체로 인식하게 된 한일 양국의 미래 세대가 결국 고통스러운 과거사를 새 역사로 만들어낼 열쇠입니다. 이들이 기억하는 한 역사는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요.”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조크든요.” 배꼽이 훤히 보이는 티셔츠에 펑퍼짐한 청바지를 입은 한 20대 여성에게 리포터가 다가가 “남의 시선은 느껴지지 않느냐”고 묻자 나온 대답이다. 1994년 국내 한 방송 뉴스에 나온 이 영상은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던 ‘쿨’한 X세대를 보여주는 밈으로 떠올랐다. 미국 문화평론가가 1990년대 미국의 사회문화를 분석한 이 책의 내용은 이 같은 당대 한국 상황과도 닮은 구석이 많다. 1990년대는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길었던 냉전이 종식되면서 열렸다. 이전 세대가 전쟁과 냉전 등으로 자기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없었다면 1990년대는 달랐다. 저자가 1990년대를 대표하는 영화로 꼽은 ‘청춘 스케치’(1994년)의 명대사 “거 봐, 우린 이것만 있으면 돼. 담배 몇 개비, 커피 한 잔, 그리고 약간의 대화”처럼,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을 누리게 된 개인이 등장한 것이다. 1990년대를 대표하는 정서는 ‘냉소’와 ‘회의주의’다. 저자는 “X세대는 냉전 이데올로기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베이비붐 세대에 대해 반사적 혐오감을 가졌다”며 “1990년대 초 젊은이들의 새로운 목표는 재미없는 주류 사회로부터 감정적으로나 이성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고 봤다. 록 밴드 너바나가 1991년 발매한 앨범 ‘Nevermind’는 당대 정서를 대표한다. 싱어송라이터 커트 코베인이 무미건조하게 읊조리는 “신경 꺼”란 가사는 세상일과 거리를 두려 했던 X세대의 공감을 샀다는 분석이 나온다. 저자는 1990년대를 끝낸 결정적 사건으로 1999년 컬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과 2001년 9·11테러 사건을 꼽는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 벌어진 두 사건 이후 사람들은 세상일이 자신과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게 됐다. 너무 평범해서 때론 지루하다고 냉소해왔던 일상이 사실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쉬운 것임을 자각한 것. 한국의 X세대 영화평론가 김도훈 씨는 “지구 역사상 마지막 낭만의 시절에 바치는 사랑 고백이자 이별 노래”라며 이 책을 추천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하룻밤만 재워 달라’며 저를 찾아온 아이들의 용기가 ‘월급쟁이’였던 저를 선생으로 만들었습니다.” 최근 에세이 ‘선생 박주정과 707명의 아이들’(김영사)을 펴낸 박주정 광주 진남중 교장(60)은 8일 전화 인터뷰에서 아이들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박 교장은 1993∼2003년 광주 자신의 집에서 가난과 학교폭력 등으로 학업에 적응하지 못한 학생들과 함께 살았던 이야기를 책에 담았다. 아이들과의 첫 만남은 1993년 6월 2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2년차 교사였던 그의 집에 학생 8명이 들이닥쳤다. 그가 담임을 맡은 광주의 실업계고 학급의 ‘문제아’들이었다. 술 냄새가 났다. 오밤중에 아이들을 내쫓을 수 없어 받아줬는데, 그렇게 4개월이 흘렀다. 그는 “33㎡ 집에서 세 식구 살기도 빠듯했지만 가족마저 외면한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내쫓을 수 없었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시작한 동거가 아이들을 바꿨다. 그와 함께 산 학생들이 기말고사에서 전교 1∼7등을 차지한 것. 박 교장은 “‘문제아’들인 줄 알았는데, 사실 강한 삶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고 했다. 꿈이 생긴 아이들은 그해 10월 박 교장의 집을 떠나며 오토바이 절도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던 학생 무리를 데려왔다. “이젠 이놈들 사람 만들어 달라”면서. 박 교장은 결국 4000만 원을 대출받아 학교 근처에 방 다섯 칸짜리 전셋집을 얻었다. “10년간 그 집을 거쳐 간 학생들이 707명입니다. 제가 선택해 집으로 데려온 아이는 한 명도 없었어요. 아이들 스스로 자기와 닮은 아이들을 데려왔습니다.” 진수(가명)는 그에게 주먹을 휘둘렀던 학생이었다. 어느 날 새벽 곁에 말없이 앉아 아이가 쏟아내는 폭언을 4시간 동안 들어주자 그제야 속내를 털어놨다.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자신을 학대하는 할아버지와 살며 자살충동에 사로잡혔다는 얘기였다. 그는 “붙들고 같이 울어준 것밖에 없는데, 진수는 그날 이후 마음을 다잡고 학업에 열중해 대학을 졸업한 뒤 지금은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며 “아이들의 몸부림엔 ‘살려 달라’는 외침이 담겨 있었다”고 했다. 박 교장은 2004년부터 광주시교육청 장학사로 근무하며 학교 부적응 학생을 위한 단기 위탁교육시설 ‘금란교실’을 개설했고, 2008년엔 대안학교 ‘용연학교’를 설립했다. “제도를 만들어 사회와 함께 아이들을 지키고 싶어서”였다. 약 20년간 장학사로 일하며 교권 침해 현장을 봤던 그는 후배 교사를 향해 이렇게 당부했다. “교권 침해로 괴로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하지만 어떤 때에도 교사의 책임과 의무는 변하지 않아요. 우리의 한마디가 한 아이에게 평생의 원망이 될 수도, 희망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30년이 흐른 지금 와서 보니 제가 아이들을 살린 게 아니라 아이들이 저를 살렸어요. 그때 저는 선생이라고 볼 수 없었어요. 그냥 착실한 월급쟁이였죠. ‘하룻밤만 재워 달라’며 나를 찾아온 아이들의 용기와 의지가 저를 선생으로 만들었습니다.”학교부적응 청소년 707명과 함께 한 삶을 담은 신간 ‘선생 박주정과 707명의 아이들’(김영사)을 펴낸 박주정 광주 진남중 교장(60)이 8일 전화인터뷰에서 아이들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날은 1993년 6월 2일 늦은 밤이었다. 2년차 초보교사였던 그의 집 앞에 고등학생 8명이 들이닥쳤다. 초인종도 없는 대문 앞에서 주먹으로 문을 쾅쾅 두드리는 아이들은 이미 술에 만취한 상태였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그가 담임을 맡고 있는 광주의 한 실업계고의 ‘문제아’들이었다. 밤늦게 찾아온 아이들을 차마 내쫓을 수 없어 받아줬더니, 하루 이틀 그렇게 5개월이 흘렀다. 그 기간 그에게 “우리 아이가 어디 있느냐”고 전화하는 학부모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는 “33㎡ 남짓한 집에서 저와 아내, 딸 세 식구 살기도 빠듯했지만 가족마저 외면한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길바닥에 내쫓을 수는 없어서 시작한 일”이라고 했다.어쩔 수 없이 시작한 동거가 아이들을 변화시켰다. 그의 집에서 함께 공부한 아이들이 학기말 고사에서 전교 1등부터 7등까지 차지한 것. 박 교육장은 “새벽 4시에 일어나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하고 오후엔 그렇게 번 돈으로 기능사 자격증 학원을 다녔다”며 “‘문제아’인 줄 알았던 아이들이 사실은 생의 의지를 갖고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꿈이 생긴 아이들은 그해 10월 박 교장의 집을 떠나며, 오토바이를 절도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었던 또래 무리를 그의 집으로 데려왔다. “우린 이제 사람 됐으니 이젠 이놈들 사람 좀 만들어 달라”면서. “이 아이들을 나까지 포기하면 안 될 것 같아서 4000만 원 대출 받아 학교 근처 광주의 방 다섯 칸짜리 폐가를 전세로 얻었죠. 함께 먹고 살려고요. 그렇게 10년간 함께 지낸 학생 수가 총 707명입니다. 제가 선택해서 집으로 데려온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어요.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와 닮은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던 박 교육장은 “지금 생각해보면 늘 아슬아슬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학생들이 나를 향해 욕설을 내뱉고 주먹을 휘두르는 위험천만한 일들이 벌어졌다”고 했다. 진수(가명)는 그를 향해 “꺼져, 이 XX야”란 폭언을 달고 살았던 학생이었다.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고 늘 겉돌았다. 어느 날 새벽, 4시간 동안 아무런 말없이 진수 곁에 앉아 모든 폭언과 분노를 들어주던 그에게 진수가 속내를 털어놨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자신을 학대하는 할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늘 자살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는 “나는 진수를 붙들고 같이 울어준 것밖에 한 게 없는데, 그날 이후 진수는 마음을 다잡고 학업에 열중해 대학에서 문예창작과를 전공한 뒤 지금은 경기 용인에서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제 목을 조르면서 분노를 쏟아내던 한 아이가 어느 날 제가 와 눈물을 흘리면서 30만 원만 빌려달라더군요. 문제집을 사서 공부해보고 싶다고요. 그 아이는 2년 뒤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지금은 대령이 됐어요. 그때 아이들의 몸부림엔 ‘살려 달라’는 외침이 담겨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하지만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학생들의 식비와 교재비를 충당하기 위해 딸아이 돌 반지까지 전당포에 넘겼지만 빚이 계속 불어났다. 그는 “지금까지도 그때 진 빚이 1억4000만원 가까이 남아 있다”며 “이 일을 나 혼자 할 게 아니라 제도로 만들어 사회가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했다. 그는 2004년부터 광주광역시교육청 장학사로 근무하며 학교부적응 학생을 위한 단기 위탁교육시설 ‘금란교실’을 2004년 국내 최초로 개설했다. 2008년에는 학교부적응 학생과 학업중도탈락 학생을 전담 교육하는 대안학교 ‘용연학교’를 설립했다. 2015년엔 자살 등 위기상황에 놓인 학생들을 위해 24시간 신속 대응하는 ‘부르미’를 창설해 초대 단장을 맡았다. 20년간 교육청의 장학사로 각종 교권침해와 학교폭력, 극단선택 현장을 조사한 그는 “죽도록 노력했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자살을 시도하고 학교폭력 수는 줄지 않고 있다”며 “가만 생각해 보니 부모라는 한 축이 무너져 있던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일탈의 기로에 놓인 아이의 손을 부모가 놓아버리면 아이들은 무너져 내린다”며 “아이들에게는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믿어줄 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후배 교사들에게는 “교권침해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걸 선배로서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 어떤 때에도 교사의 책임과 의무는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아이들은 복도에서 스치듯 던진 선생님의 한마디와 눈빛을 평생 간직합니다. 우리의 한마디가 한 아이에겐 평생의 원망이 될 수도, 희망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최근 책이 출간되고 옛 제자들을 만난 박 교장은 1993년 6월 자신의 집을 찾아온 제자들에게 “그때 왜 하필 나를 찾아왔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어른이 된 제자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그때 선생님은 학교 결석 일수가 잦아서 퇴학당할 뻔한 학생들을 어떻게든 졸업시키려고 출석부를 품에 안고 살았잖아요. 혹시라도 다른 교과 선생님들이 결석 처리해 출석 일수가 모자라면 우리가 퇴학당할까 봐. 그런 ‘또라이’ 같은 선생님이라서 믿고 집을 찾아갔죠.“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우리는 조선 사람이다. … 4000년을 통하여 역사적 변천과 정치적 흥체가 반복무상하였다. 그러나 언제든지 조선인의 조선이라는 관념은 없어져 본 일이 없었으며, …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의 멸망은) 역대 왕조 자체의 정치적 흥망에 불과한 것이고 결코 조선민족 자체의 근본적 멸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925년 하와이에서 열린 제1차 태평양회의(범태평양 민족회의)에 동아일보 특파원 자격을 겸해 참석한 고하 송진우 선생(1890∼1945)이 귀국 후 동아일보에 연재한 논설 ‘세계대세와 조선의 장래’의 일부다. 그해 8월 28일∼9월 6일 10회에 걸쳐 실은 이 논설에서 고하는 비록 조선은 망했으나 조선인의 정체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조선 문제는 민족 자체의 단합이 확립하는 그날로부터 해결될 것을 확신한다”고 했다. 이 논설은 신동아가 1966년 기획한 ‘근대 한국 명논설’ 66편 중 하나로 선정돼 1967년 신동아 신년호 별책부록으로도 간행됐다. 고하 선생은 일제강점기 3·1운동을 기획한 48인 중 한 명으로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이자 동아일보 3대, 6대, 8대 사장을 지낸 언론인이었으며, 중앙학교 교장으로 일하면서 민족정신을 고취한 교육자, 광복 후 한국민주당의 초대 수석총무(당수)로 민주국가 건국에 앞장선 정치인이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재단법인 고하송진우선생기념사업회(이사장 김창식)는 1일 고하의 글 49편과 그와 관련된 인물평, 일화 등을 담은 자료 67편을 엮은 ‘거인의 숨결’(이야기의숲)을 펴냈다. 동아일보 창간 70주년과 고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1990년 출간했던 책을 33년 만에 개정증보한 것이다. 개정증보판엔 고하를 평가하는 최근의 새로운 글들이 포함됐다. 박찬욱 서울대 명예교수(정치외교학부)는 올 4월 서울 YMCA 창립 12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발표한 글에서 “고하 선생은 인류 보편의 가치가 된 자유, 평등, 민주 사상을 수용한 진보적 자유민주주의자”라고 강조했다. 고하의 민족주의와 함께 그의 사상이 지닌 근대성도 평가돼야 한다는 것이다. 좌우익의 분열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동시에 사회주의를 포용했던 고하의 중용 정신을 조명한 글도 실렸다. 박명림 연세대 대학원 지역학협동과정 교수는 2011년 고하 탄생 121주년 강연 ‘송진우의 중용적 진보와 근대국민국가 건설’에서 “고하 선생은 동아일보에 다수의 사회주의자들도 기고할 수 있도록 해 이념적 포용의 폭을 보여줬다”고 했다. 광복 후 공산주의에 대해선 분명한 반대 노선을 견지했으나,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할 공론장을 열어 뒀다는 평가다. 박 교수는 한민당의 정강정책과 ‘경제적 민주주의’를 주창한 고하의 발언을 토대로 “고하는 복지국가와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을 반세기 전 이미 천명한 선구자”라고 봤다. 이어 “중용적·통합적 개혁주의의 길을 갔던 이 뛰어난 선각의 길을 다시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고하의 마지막 논설도 실렸다. 그는 1945년 12월 29일 동아일보에 게재된 담화 ‘최후까지 투쟁하자’에서 “이 강토 위에 있는 동지는 피 한 방울이 남지 않도록 결사적 용투로서 우리가 당당히 가져야 할 민족주권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신탁통치 찬성과 반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중한 반탁론을 폈던 그는 그해 12월 30일 서울 종로구 자택에서 극우계 청년 한현우 등에게 암살됐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서울의 차이나타운’으로 불리기도 하는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은 훠궈 등 중국 현지 음식 가게 등이 유명하지만 안쪽 노후주택가는 대체로 ‘가보고 싶은 동네’에 꼽히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올해 5월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을 닮은 건물 한 채가 들어서며 동네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하 1층, 지상 6층 규모인 이 건물의 이름은 ‘로스트 스톤(Lost Stone)’을 줄인 ‘로스톤’. 너비와 생김새가 다른 콘크리트 소재 바위 기둥 48개가 고인돌처럼 층층이 천장을 받치고 있는 이색적인 모양새다. 1∼3층은 카페로, 4층은 갤러리로 운영 중인 이 건물을 보려고 최근 이 동네를 찾는 20, 30대가 적지 않다. 소셜미디어 등에는 “대림동에 이런 현대적인 건물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는 방문객들의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7일 오후 이 건물 카페에선 손님들이 굴곡진 콘크리트 바위에 기대앉은 채 창밖 동네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건물을 디자인한 정의엽 에이엔디건축사사무소 대표(47·사진)는 기자와 만나 “이곳을 찾은 이들이 바위로 둘러싸인 산 속에 들어온 것처럼 느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정 대표는 경기 파주시의 카페 ‘루버월’로 2016년 한국건축가협회상을, 전남 여수시 상가주택 ‘웨이브월’로 2018년 대한민국 신진건축사대상 우수상을 받았다. 정 대표가 처음 ‘로스톤’의 이미지를 떠올린 건 2020년 10월. 제주 가파도를 여행할 때였다. 그는 “제주 바다의 수평선과 사람이 발 딛고 설 수 있는 땅 사이에 솟아오른 바위를 보며 내가 자연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연결돼 있는 일부임을 깨달았다”며 “자연과 인간 사이의 단절을 극복할 수 있는 매개로 바위를 떠올리게 됐다”고 했다. 그때부터 그의 스케치북엔 바위에 기대거나 누워 쉬는 사람, 층층이 쌓아올린 바위 건축물의 이미지가 쌓였다. 이미지가 실현된 건 지난해 초 대림동 노후주택을 물려받은 40대 건축주를 만나면서다. 건축주는 “할아버지의 오래된 집처럼 오랫동안 이 동네에서 버틸 수 있는 건축물을 짓고 싶다”고 했다. 정 대표의 머릿속엔 바위산의 이미지가 떠올랐다고 한다. 바위를 형상화한 콘크리트 기둥들 사이엔 전면 창을 내 안팎의 시선이 단절되지 않고 통하도록 설계했다. 정 대표는 “이 건축물이 ‘차이나타운’이라는 동네의 경계를 허물고 많은 이들이 드나드는 문화공간이 되길 바랐다”고 했다. 최근엔 일본인 관광객으로부터 “서울을 여행하다가 이 건축물을 보기 위해 대림동을 처음 와 봤다”는 인스타그램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로스톤 안에서 여러 언어가 뒤섞이는 모습을 상상해 봤어요. 앞으로도 이 동네를 찾는 이들이 더욱 많아지길 바랍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코스닥 상장사인 KX이노베이션이 방송 채널 ‘리얼TV’를 인수했다. 리얼TV는 다큐멘터리와 체험·관찰 프로그램 등 사실에 기반한 다양한 장르를 방송하는 채널이다.KX이노베이션은 “최근 리얼TV 인수를 마무리하고 앞으로 한 달여 동안 프로그램 개편을 진행해 다음달 초 ‘Real New! New Real TV!’라는 슬로건으로 시청자들을 찾아간다”고 8일 밝혔다. 개편 뒤엔 먼저 로마 검투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콜로세움’을 선보일 예정이다. ‘콜로세움’은 제작비 120억 원이 투입된 기대작으로 꼽힌다. 이밖에도 오스트리아 공영방송 ORF의 명품 다큐멘터리 시리즈 등 해외 우수 다큐멘터리를 소개한다. SK브로드밴드와 공동 제작한 여행 리얼리티 프로그램 ‘트립인코리아 시즌2’도 국내에서 처음으로 방송한다.2005년 개국한 리얼TV는 다채로운 다큐멘터리와 리얼리티, 교양프로그램 등을 선보이며 유료방송 시장에서 독자적인 시청자 층을 확보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찬수 KX이노베이션 대표는 “리얼TV의 로열티 높은 시청자 층을 기반으로 다양한 장르를 선보여 채널 역량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KX이노베이션은 드라마 채널 디원, 영화 채널 엠플렉스, 버라이어티 채널 엑스원 등을 보유하고 있다. 2000년 방송 송출 사업을 시작해 현재 80여개 채널을 각 가구에 전달하며 방송 송출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950년 1월 30일 한반도의 운명을 바꾼 변심이 있었다. 1949년 12월 말까지만 해도 남한을 침공하려는 김일성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던 소련이 돌연 평양에 전보를 보낸 것. ‘소련은 수시로 김일성을 만날 준비가 돼 있고, 그를 도우려 한다’는 내용의 이 전보는 김일성이 6·25전쟁을 일으키도록 도운 결정적 신호로 꼽힌다. 소련의 변심에는 극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셈법이 깔려 있었다는 게 중국 화둥사범대 냉전사연구센터장인 저자의 분석이다. 스탈린이 전보를 보내기 직전인 1950년 1월 26일 중국은 소련군이 주둔하던 뤼순항과 다롄항의 주권을 2년 내 돌려달라고 소련에 요구했고, 소련은 이를 받아들이며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소련은 태평양으로 나아갈 전략적 거점 2곳을 잃었다. 이때부터 소련은 한반도 전쟁으로 인한 실보다 득이 더 크다고 봤다. 전쟁에서 이기면 한반도 동북 연안에 영향력을 확고히 해 눈치 보지 않고 태평양으로 나아갈 부동항을 유지할 수 있었다. 패하더라도 손해 볼 게 없었다.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 상태가 지속되면 중국 역시 소련군의 주둔을 원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미국과 소련, 중국의 기밀문서와 정부 기록물 등을 바탕으로 6·25전쟁을 둘러싼 주변국의 속내를 분석했다. 표면 위로 드러난 각국의 결정 이면에 숨겨진 의도를 드러내고, 그에 대한 평가를 담았다. 미국의 참전은 소련 때문이었다고 봤다. 전쟁 발발 이튿날 “북한의 남한 침공은 소련이 발동, 지원, 그리고 종용한 것”이라고 말한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의 발언에서도 엿볼 수 있다. 미국은 사회주의 진영의 우두머리인 소련을 저지하기 위해 참전했고, 실질적인 적은 소련이라고 인식했다. 저자는 미국이 소련에 대해선 정확한 판단을 내린 반면 중국에 대해선 오판했다고 지적한다. 당시 미국 정부는 수년간 전쟁을 지속해 온 중국 군대가 전쟁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여겼다. 그러나 저자는 중국이 전쟁 발발 초기부터 한반도 출병을 주동적으로 제기했다고 봤다. 1950년 7월 2일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는 로신 중국 주재 소련 대사를 만나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국 군대는 인민군으로 위장해 한반도에 들어가 작전할 수 있다”고 했다. 얼마 뒤 마오쩌둥은 중국군 32만 명을 북한에 원조할 수 있다는 입장을 전했다. 이 같은 정황을 토대로 저자는 “마오쩌둥 본인은 시종 반드시 출병해 북한을 원조해야 함을 주장했다”고 봤다. 이는 마오쩌둥이 참전에 대해 신중했지만 스탈린에게 끌려갔다는 통설과는 다른 것이다. 저자는 중국의 출병이 사회주의 진영에서 중국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본다. 또 중국이 전쟁 초기 소기의 목적을 이뤘음에도 1951년 1월 유엔의 정전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건 오판이었다고 말한다. 중국은 정전협정 막바지인 1953년 7월 16일에도 전투를 일으켜 7월 27일 협정 체결 직전까지 국군과 유엔군 7만8000여 명을 죽거나 다치게 했다. 이 결정 역시 중국이 막대한 대가를 치렀을 뿐 아니라 중국에 대한 미국의 불신을 키우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