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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출신 세계적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1856∼1950)가 말년에 쓴 희곡 ‘세인트 조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1337∼1453년) 당시 프랑스를 구한 잔 다르크(1412∼1431)가 주인공이다. 버나드 쇼에게 이 작품은 특별하다. ‘세인트 조앤’은 가장 독창적인 잔 다르크 이야기란 평가를 받으며 ‘인간과 초인’ 등 여러 희곡을 발표한 그가 192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조앤은 잔을 영어로 표기한 것으로 ‘세인트 조앤’은 ‘성녀(聖女) 잔 다르크’란 뜻이다. 다음 달 5일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세인트 조앤’이 개막한다. 국내에서 이 작품이 무대에 오르는 건 1963년 국립극단 초연 후 59년 만이다. 김광보 국립극단 예술감독(사진)이 3년 만에 연출하는 신작이기도 하다. ‘세인트 조앤’에서 신(神)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프랑스 왕세자 샤를 7세를 찾아가 전쟁에 나선 뒤, 백년전쟁을 승리로 이끈 조앤 역은 배우 백은혜(36), 샤를 7세는 이승주(41)가 맡았다. 2015년부터 이 작품을 준비한 김광보 감독은 “두 사람에게 수년 전부터 배역을 제안했다”고 귀띔했다. 두 배우를 26일 서울 용산구 국립극단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작품에 대한 이야기부터 풀어 나갔다. “1400년대를 살았던 인물에 대해 1900년대 작가가 쓴 희곡을 ‘지금’ 공연하는 것의 의미를 생각했어요. 시간은 흘렀지만 사람과 현상은 그대로인 게 아닐까. 조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당시 상황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고 봐요.”(백은혜) “‘우리 사회는 비범한 인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질문하는 작품이에요. 2500년에도 유효한 질문이지 않을까요?”(이승주) 극 중 전쟁에 나간 조앤은 말한다. “내 가슴은 분노가 아니라 용기로 가득 차 있어요.” 17세 소녀를 추동한 힘은 분노가 아닌 용기라는 것. 신념과 용기로 무장한 조앤을 만난 사람들은 서서히 변화했고 결국 역사를 바꿔 놓았다. “작가는 서문에 ‘조앤은 자신이 내뱉는 말이 무슨 일을 야기할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썼어요. 조앤은 계산과 타협 없이 돌진하는 사람이었죠. 세상을 알았다면 그렇게 희생당하진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도 못했겠죠.”(백은혜) 국내에서 59년 만에 재연되는 작품이다 보니 두 배우는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드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이승주는 “역사적 지식보다 버나드 쇼가 만들어낸 샤를 7세를 연기한다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겁쟁이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지만 욕망은 내재된 인물이라 생각해요. 제 안에도 샤를 7세와 비슷한 모습이 분명 있거든요. 이를 극대화해 표현하려 합니다.” “뚜렷한 목적을 향해 돌진해 나가는 조앤의 모습을 잘 그려내고 싶어요. 신화적인 존재이지만, 조앤의 인간적인 면을 더 부각하고 싶습니다.”(백은혜) 성악을 전공한 백은혜는 뮤지컬 ‘밑바닥에서’(2007년)로 데뷔한 후 연극, 뮤지컬, 방송을 오가며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연극 ‘쉬어매드니스’(2008년)로 데뷔한 이승주 역시 꾸준히 연극 무대에 오르고 있다. 개막을 앞둔 두 배우는 “막연한 영웅, 성인으로 추대된 잔 다르크를 아주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공연”이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또 “조앤의 신념을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왜곡하는 과정을 보며 관객들이 많은 걸 생각하고 느꼈으면 좋겠다”고 했다. 다음 달 30일까지, 3만∼6만 원.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1930년대 일제강점기부터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대, 1980년대 민주화운동 그리고 한일 월드컵이 개최된 2002년까지…. 굴곡진 70년의 한국사와 함께해 온 연인들의 이야기가 무대에 오른다. 다음 달 4일부터 23일까지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 선보이는 주크박스 뮤지컬 ‘백만송이의 사랑’이 바로 그것. 총 여섯 쌍의 연인의 만남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를 한국 근현대를 아울렀던 대중가요 41곡에 녹여 풀어냈다. 첫 곡은 가수 심수봉의 ‘백만송이의 장미’.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생이별하게 된 남편 임인수(라준)와 아내 함순례(강하나)가 함께 부르는 곡이다. 회한의 세월이 지나 등 굽은 노인이 된 두 사람이 노래를 부르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첫 연인은 임인수의 부모 세대이자, 작품에서 가장 오래된 연인으로 등장하는 1930년대 독립운동가 임혁(정평)과 기생 김향화(신진경). 애틋한 사랑을 나눴던 두 사람은 임혁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떠나면서 이별한다. 이후 굵직한 시대적 역사를 배경으로 평범한 갑남을녀의 삶과 사랑을 주인공 삼아 극을 풀어낸다. 1960년대 군부독재 타도 시위에서 우연히 만난 규섭(김도완)과 희자(금보미), 1980년대 운동권 대학생 민철(문남권)과 미희(진초록)의 사랑 등이다. 시대를 가로질러 어디선가 봤을 법한 연애담을 친근하게 만드는 건 귀에 익은 넘버들이다. 193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본 익숙한 가요들이 극의 처음과 끝을 장식한다. 1막에선 ‘빈대떡 신사’ ‘다방의 푸른 꿈’ ‘사의 찬미’ ‘낭랑 18세’ ‘임과 함께’ 등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명곡을 담는다. 아파트 공화국이 된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2막은 윤수일의 ‘아파트’로 시작해 ‘사계’ ‘어젯밤 이야기’ ‘빙글빙글’부터 ‘취중진담’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너의 의미’로 이어진다. 세대와 성별을 넘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이야기에 친숙한 노래가 결합돼 대중성과 오락성을 겸비했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2015년),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2014년), 뮤지컬 ‘광주’(2021년) 등 장르를 넘나들며 활약해 온 고선웅(54·사진)이 연출을 맡았다. 그는 “한국사의 중요한 사실을 기억하고 영웅을 기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굴곡진 세월을 묵묵히 견뎌낸 민초들의 삶을 기억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공연을 보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대를 이어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걸 느끼고 서로를 이해하게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연대순으로 전개된 연인들의 이야기가 기승전결을 이루지만 극을 관통하는 하나의 서사가 없어 몰입감은 덜하다. 배우들의 감칠맛 나는 희극 연기도 매력적이다. 4만4000∼8만8000원.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서울 서초구 ‘양재시민의숲’이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1908∼1932)의 호를 딴 ‘매헌시민의숲’(사진)으로 바뀌었다. 매헌(梅軒)은 윤봉길 의사의 아호다. 26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에 따르면 국토교통부 산하 국토지리정보원은 양재시민의숲 이름을 매헌시민의숲으로 23일 최종 개정했다. 서울 서초구 우면동에서 강남대로로 진입하는 영동1교 앞 사거리 역시 ‘매헌시민의숲 사거리’로 바뀐다. 영동1교는 현재 개통을 앞두고 있다. 명칭을 바꾼 표지판 등 시설물은 곧 교체될 예정이다. 25만8991m² 규모의 양재시민의숲은 매헌로를 가운데 두고 두 구역으로 나뉜다. 남쪽에는 6·25전쟁에 참전한 유격대백마부대 충혼탑과 1987년 미얀마 안다만해협 상공에서 북한 테러로 폭파당한 대한항공 희생자 위령탑,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희생자 위령탑이 있다. 북쪽에는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과 동상, 추모비가 있다.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1930년대 일제시대부터 6·25전쟁, 경제 개발, 민주화를 겪으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70년 굴곡진 한국사를 함께한 연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 무대에 오른다.다음달 4~23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극장 용에서 선보이는 주크박스 뮤지컬 ‘백만송이의 사랑’은 한국의 근·현대를 아울렀던 대중가요 41곡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낸 작품이다. 지난해 11월 경기 의정부예술의전당에서 초연된 후 이번엔 서울에서 선보인다. 첫 곡은 심수봉의 ‘백만송이의 장미’. 6·25전쟁이 터지면서 생이별하게 된 남편 임인수(라준), 아내 함순례(강하나)가 함께 부르는 곡이다. 회한의 세월이 지나 등이 굽은 노인이 된 두 사람이 ‘백만송이의 장미’를 부르며 ‘백만송이의 사랑’이 담긴 이야기는 시작된다. 임인수의 부모이자 작품에서 가장 오래된 연인으로 등장하는 1930년대 독립운동가 임혁(정평)과 기생 김향화(신진경)의 사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6·25전쟁과 군사독재, 민주화 운동, IMF 외환위기, 2002 한일 월드컵…. 한국사의 대표적 사건들이 배경에 깔리고 그 속을 살아가는 평범한 갑남을녀의 삶과 사랑이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장식한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귀토’, 뮤지컬 ‘광주’ 등으로 유명한 고선웅이 연출을 맡았다. 그는 “한국사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고 독립투사, 영웅을 기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변을 살아냈던 민초들의 굴곡지고 신선한 삶을 기억하고 싶었다”고 연출의도를 밝혔다. 시대를 가로질러 어디선가 봤을 법한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를 더욱 친근하게 만드는 건 귀에 익은 넘버들이다. 193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인이라면 한 번 쯤은 들어본 익숙한 가요가 극의 처음과 끝을 장식한다. 1막에선 ‘빈대떡 신사’ ‘다방의 푸른 꿈’ ‘사의 찬미’ ‘낭랑 18세’ ‘님과 함께’ 등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명곡을 담았다. 아파트 공화국이 된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2막은 윤수일의 ‘아파트’로 시작된다. ‘사계’ ‘어젯밤 이야기’ ‘빙글빙글’부터 ‘취중진담’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너의 의미’까지. 세대와 성별을 넘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에 귀에 익은 노래가 결합돼 대중성과 오락성을 확실히 잡았다는 평가다. 고선웅 연출은 “일제시대부터 미군정, 경제 개발, 민주화를 겪으면서 우리가 같이 힘들게 견디고 살아오긴 했는데 그 과정에서 다른 세대의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건 부족했던 것 같다”며 “이 공연을 보고 저런 삶을 살아온 할아버지 할머니의 대를 이어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걸 느끼고 서로를 이해하게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여러 연인의 서사가 병렬적으로 전개되어 작품을 장식하지만 극을 관통하는 하나의 이야기는 없어 몰입감은 덜하다. 하지만 친숙한 노래가 계속 흘러나와 관객을 무대로 당긴다. 고선웅 작품에서만 볼 수 있는 배우들의 감칠맛 나는 희극 연기도 매력이다. 4만4000~8만8000원.이지훈기자 easyhoon@donga.com}
1893년 도쿄대학 의학부 교수 나가이 나가요시(長井長義)가 최초로 합성한 메스암페타민, 이른바 ‘필로폰’은 원래 노동자의 피로해소제로 널리 쓰였다. 원기를 회복하는 데에 쓰였던 필로폰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역할이 바뀐다. 군인의 각성제로 사용된 것. 특히 좁고 더운 탱크 안에서 여러 날 잠도 못 자고 진격해야 했던 기갑부대의 전차부대원에게 많이 지급됐다. 전투기에 폭탄을 싣고 적군의 전함에 충돌하는 공격 작전을 벌인 가미카제 특공대도 자살 비행 전 필로폰 차를 마셨다고 한다. 전쟁과 약은 서로 맞물린 바퀴처럼 역사에 존재해왔다. 19세기 중반 미국 남북전쟁 당시 모르핀은 진통제로 쓰였지만, 모르핀의 원료 아편은 영국과 중국이 벌인 아편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2001년 미국과 아프가니스탄이 벌인 전쟁에선 미국 공군이 번쩍이는 불빛을 보고 아군에게 폭탄을 투하한 사건도 있었다. 해당 공군은 각성 효과를 위해 암페타민을 복용했는데, 이것이 지나치게 빠른 반응과 공격성을 유발한 것. 전쟁과 약의 역사를 ‘기나긴 악연’이라 명명한 저자는 경상국립대 약학대 교수이자 천연물과 의약품 합성 연구를 통해 파킨슨병 치료제를 개발하는 연구자다. 저자는 페니실린, 타이레놀, 아스피린 등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약의 개발 과정을 알아보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한다. 연구자의 합리적 설계를 통해 개발된 약보다는 ‘특별한 계기’로 인해 개발된 약이 훨씬 많다는 것이었다. 전쟁은 이 특별한 계기에 포함된다. 그렇다고 전쟁과 약의 악연에만 주목하진 않는다. 전쟁을 통해 인간에게 이로운 약을 발견한 사례도 다수 담겼다. 2003년 시작된 이라크전쟁 당시 미군에게 보급된 마약류 진정제는 우울증이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치료제로 개량돼 사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지금 당장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약일지라도 어떤 용도로 쓰이느냐에 따라 언제든 독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많은 세계적인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춤추는 광경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감화가 돼서 흔들었어요. 춤을 따로 배운 건 아니고…, 연기 생활을 하며 무대에서 여러 모습을 보이다 보니 자연스레 (춤추는) 모습이 나왔습니다.(웃음)” 제74회 에미상 6관왕에 오른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오영수 배우(78)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열린 시상식 애프터파티에서 선보인 ‘관절 꺾기 춤’에 대해 살짝 멋쩍은 듯 설명했다. 당시 그의 예사롭지 않은 춤 실력은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다. 그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와중에도 공연예술축제 ‘2022 웰컴 대학로’의 홍보대사로 나섰다. 서울 종로구 서경대 공연예술센터에서 21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대학로가 공연예술의 메카로 인식될 때가 왔다. 이번에 해외를 다니며 ‘한국 문화콘텐츠가 세계화 차원을 넘어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날 간담회엔 오 배우와 함께 홍보대사를 맡은 댄서 모니카를 비롯해 이재원 웰컴 대학로 예술감독이 참석했다. 오 배우는 대학로와의 인연에 대해 말했다. “대학로에 공연장이 조성된 1970년대부터 이곳 무대에 섰습니다. 설익었던 배우가 여무는 과정을 여기서 거쳤죠.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벽엔 ‘예술은 삶을 예술보다 더 흥미롭게 하는 것’이란 문구가 쓰여 있어요. 그 앞을 지나가며 생각했습니다. 예술처럼 삶을 살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요.” 그는 1963년 극단 광장 단원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그는 “대학로는 열정을 가진 자유분방한 젊은이들이 허둥대고 충돌하는 장소다. 여기 오면 누구나 아름다운 세상과 사람을 만난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다만 “영국 런던에는 500년 넘은 셰익스피어가 아직 공연장에 머무르고 미국 뉴욕엔 브로드웨이가 살아 숨쉰다. 하지만 우리의 대학로는 아직 해외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며 아쉬워했다. 올해로 6회를 맞는 ‘웰컴 대학로’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관광공사와 한국공연관광협회가 공동 주관한다. 대학로 일대에 있는 공연장과 거리에서 연극과 뮤지컬, 퍼포먼스 등 다양한 공연을 만날 수 있다. 올해는 뮤지컬 ‘전설의 리틀 농구단’과 ‘브람스’, 연극 ‘아버지와 살면’ ‘건달은 개뿔’ 등 150개 작품을 선보인다.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거실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는 김지영(소유진 임혜영 박란주)의 뒷모습으로 연극은 시작된다. 돌이 채 지나지 않은 딸아이의 울음소리가 무대를 가득 채운 가운데, 무색무취한 표정으로 집안일과 육아를 하는 지영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 죽은 친구, 갓난아기, 친언니, 친정엄마…. 지영은 타인에게 빙의되는 이상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병의 원인을 찾고 싶어하는 남편 정대현(김승대 김동호)의 시점으로 ‘82년생 김지영’의 삶이 연대순으로 펼쳐진다. 2016년 출간된 후 국내에서만 138만 부 넘게 팔리고 미국, 일본 등 31개국에 수출된 조남주 작가의 베스트셀러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원작으로 한 동명 연극이 서울 강남구 백암아트홀에서 공연되고 있다. 주인공 지영은 남아선호사상이 공고했던 1980년대에 삼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난 여성. 언니 은영(도율희 안솔지)과 달리 지영은 막내 남동생을 편애하는 남존여비 가풍에 순응하는 편이었다. 대학 졸업반이던 지영은 아버지에게 “얌전히 있다 시집이나 가라”는 핀잔도 듣는다. 입사 후엔 회식자리에서 성희롱을 당하고 곧 출산·육아를 할지 모른단 이유로 인사상 불이익을 받는다. 출산 후엔 경력이 단절된 채 아이를 돌보던 지영에게 사람들은 ‘맘충’이라며 손가락질한다. 크고 작은 차별에 시달리던 지영은 “세상이 지영이를 지워간 것처럼”(대현의 극중 대사) 자신이 아닌 타인 행세를 하게 된 것이다. 지영은 산후우울증 진단을 받지만 출산과 육아 후유증이 병의 모든 원인인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작품은 30여 년간 이어진 지영의 삶을 보여주며 그 병이 지영이 살아온 총체적 세월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지영의 이상증세가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되긴 힘들 거란 비관적 결말을 그렸던 소설과 달리 연극은 지영의 회복에 초점을 맞춘다. 방관자이자 구조적 차별에 가담하는 인물로 그려졌던 남편은 지영의 아픔에 공감하고 치유를 위해 노력하는 조력자로 그려진다. 원작이 남성을 차별적 구조의 수혜자이자 공범으로 일반화했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이를 피하기 위한 의도다. 제작진은 “육아 휴직을 하려는 남편이 직장에서 차별받는 에피소드를 원작보다 비중 있게 다뤄 새로운 시선을 제공하려 했다”고 밝혔다. 100분간 이어지는 연극은 장면 전환이 빠르고 늘어지는 대목이 없어 몰입감이 강하다. 연대순으로 흐르는 개별적 사건을 창의적으로 잇는 연출도 돋보인다. 주연뿐 아니라 1인 다역을 맡은 조연 배우들까지 흡인력 있는 연기를 보여준다. 11월 13일까지, 5만5000∼7만7000원.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거실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는 김지영(소유진 임혜영 박란주)의 뒷모습으로 연극은 막이 오른다. 돌이 채 지나지 않은 딸 아이의 울음소리가 무대를 가득 채운 가운데, 무색무취한 표정으로 집안일과 육아를 하는 지영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 죽은 친구, 갓난아기, 친언니, 친정엄마... 지영은 타인에 빙의되는 이상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병의 원인을 찾고 싶어하는 남편 정대현(김승대 김동호)의 시점으로 ‘82년생 김지영’의 삶이 연대순으로 펼쳐진다. 2016년 출간 뒤 국내에서만 130만 부 넘게 팔렸고 미국, 일본 등 30여 개국에서도 출간된 조남주 작가의 베스트셀러 ‘82년생 김지영’을 원작으로 한 동명 연극이 1일 서울 강남구 백암아트홀에서 개막했다. 주인공 지영은 남아선호사상이 공고했던 1980년대에 삼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난 여성. 두 딸보다 막내 남동생을 끔찍이 여기는 할머니, 아버지가 있었던 지영은 남존여비 가풍이 강한 집에서 자랐다. 대학 졸업반이던 지영은 취업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에게 “얌전히 있다 시집이나 가라”는 핀잔도 듣는다. 입사 뒤에는 회식자리에서 성희롱을 당하기도 한다. 젊은 여성이니 출산·육아를 할지도 모른단 이유로 인사 불이익마저 받는다. 딸을 낳은 뒤인 경력단절이 돼 아이를 돌보던 지영에게 사람들은 ‘맘충’이라며 손가락질한다. 세월을 거듭하며 크고작은 차별에 시달리던 지영은 “세상이 지영이를 지워간 것처럼”(대현의 극중 대사) 자신이 아닌 타인 행세를 하게 된 것이다. 극중 지영의 질병은 ‘산후우울증’으로 진단받지만, 출산과 육아 후유증이 병의 모든 원인인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작품은 30여 년간 이어진 ‘82년생 김지영’의 삶을 차례로 보여주며 그 병이 어쩌면 지영의 살아온 총체적 세월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지영의 이상증세가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되긴 힘들 것이라는 비관적 결말을 그렸던 소설과 달리, 연극은 지영의 회복에 초점을 맞춘 엔딩으로 마무리된다. 방관자이자 구조적 차별에 가담하는 무심한 남성으로 그려졌던 남편은 다소 부족할 순 있어도 지영의 아픔에 공감하고 치유를 위해 노력하는 조력자로 그려진다. 원작이 남성을 차별적 구조의 수혜자이자 공범으로 일반화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한 의도로 읽힌다. 제작진은 “육아 휴직을 쓰려는 남편들이 직장에서 차별 받고 도태되는 현실을 그린 대현의 에피소드를 원작보다 비중 있게 다뤄 새로운 시선을 제공하려 했다”고 밝혔다. 100분간 이어지는 연극은 장면 전환이 빠르고 늘어지는 대목이 없어 몰입감이 강하다. 연대순으로 흐르는 개별적 사건을 창의적으로 잇는 연출력도 돋보인다. 주연뿐 아니라 1인 다(多)역을 맡은 조연 배우들까지 흡입력 있는 연기를 보여주는 것도 장점. 11월 13일까지, 5만5000~7만7000원.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보편적인 노래’ ‘유자차’ ‘앵콜요청금지’…. 인디밴드 ‘브로콜리너마저’는 차분한 멜로디에 담은 진솔한 가사, 소박하고 절제된 감정선의 곡들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밴드의 리더 윤덕원(40)이 데뷔 17년 만에 연극 무대에 도전한다. 다음 달 14∼30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하는 연극 ‘일의 기쁨과 슬픔’을 통해서다. 윤덕원은 열심히 노력하지만 좀처럼 잘 풀리지 않는 무명 가수 장우 역을 맡았다. 연극의 원작은 2019년 출간된 장류진 작가의 동명 단편소설집이다.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은 인터넷에 연재될 때부터 좋아했어요. 게다가 제게 들어온 배역은 인디뮤지션이고요. 연기는 낯설지만 소설과 배역 자체는 익숙했어요. 흥미로운 작업이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들은 직장인이 겪는 성취와 애환을 정확하게 그려냈다는 평을 받았다. 연극은 표제작인 ‘일의 기쁨과 슬픔’을 비롯해 ‘잘 살겠습니다’ ‘다소 낮음’ 등 총 7편을 옴니버스 식으로 엮었다. 친하지 않은 동료에게 축의금을 낼지 고민하거나 회사의 부당한 대우에 좌절하는 등 직장인이 경험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냈다. 장우 역의 윤덕원을 포함해 회장의 심기를 건드려 월급을 현금 대신 카드 마일리지로 받는 ‘거북이알’ 역의 배우 김유진, 중고거래 스타트업 대표 데이빗 역에 정원조, 포털 사이트 댓글 모니터링을 하는 윤정 역에 손성윤이 출연한다. “책을 읽을 때 모든 직장인의 마음속엔 있지만 누구도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를 이끌어낸 소설이란 느낌을 받았어요. 연극에선 책 속의 문장이 배우 목소리로 재현되거든요. 아무도 꺼내지 않았던 말을 누군가의 목소리로 들을 때 느껴지는 울림이 있는 공연입니다.” 음악을 업(業)으로 삼고 싶지만 매번 좌절하는 장우는 장면과 장면 사이에 등장해 에피소드를 매끄럽게 연결한다. 대사보단 노래와 연주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역할이다. 라이브 기타 연주와 함께 그가 부르는 솔로곡은 총 3곡이다. 싱어송라이터인 그가 타인이 만든 노래를 공개석상에서 부르는 건 처음이다. “‘나만의 작은 밤’이란 곡을 좋아해요. 직장에서 어려움을 겪다 집에 돌아오면 나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회복하잖아요. 그 시간의 소중함을 말하는 노래라 더 와 닿았습니다.” 류지(보컬·드럼), 잔디(건반)와 함께 3인조로 활동하는 ‘브로콜리너마저’는 그가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재학 시절인 2005년 결성했다. 졸업 후 다니던 회사를 1년 만에 그만두고 발표한 정규앨범 1집 ‘보편적인 노래’(2008년)가 히트를 치면서 본격적인 뮤지션의 길을 걸어왔다. “나이를 먹어가며 경험한 것을 노래로 만들고 싶었어요. 경험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걸 정확한 언어로 표현하는 게 어렵잖아요. 연극에 도전하며 함께 공연하는 배우들처럼 뛰어난 표현력을 갖고 싶단 꿈이 생겼어요.” 3만∼5만 원.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보편적인 노래’ ‘유자차’ ‘앵콜요청금지'. 또박또박한 멜로디에 담은 진솔한 가사, 소박하고 절제된 감정선의 곡들로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인디밴드 ‘브로콜리너마저’의 리더 윤덕원(40)이 연극에 첫 도전한다. 다음달 14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개막하는 연극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열심히 노력하지만 좀처럼 풀리지 않는 무명의 아티스트 장우로 무대에 서는 것. 작품은 소설가 장류진의 동명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13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그는 “배우로서 인터뷰는 처음”이라며 웃었다.“원작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은 인터넷에 연재될 때부터 읽었을 정도로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게다가 제게 들어온 배역은 인디뮤지션 장우 역이고요. 연극과 연기는 낯설지만 원작 소설과 배역은 익숙했어요. 흥미로운 작업이 될거라 생각했습니다.” 장 작가가 판교 IT회사에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써내려간 원작은 ‘테크노밸리의 고전’이라 불릴 정도로 2019년 출간 당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2030 평범한 직장인이 겪는 일상의 성취와 애환을 정확하고 사려깊게 그려냈다는 평을 받았다. 공연은 단편 소설집에 수록된 8편의 단편 중 7편을 ‘직장인의 일과’를 주제에 맞춰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었다. 지난해 초연과 달리 올해는 ‘다소 낮음’이란 단편이 새로운 에피소드로 추가됐다. “장류진 작가의 글을 읽을 때, 직장생활을 하는 모든 이의 마음엔 있지만 누구도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를 정확하게 끌어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저희 공연에선 책 속의 그런 문장들이 배우의 목소리로 재현되거든요. 모두 아는 이야기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것을 실제 목소리로 들을 때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있잖아요? 그런 울림이 있는 공연입니다.” 그가 맡은 인디뮤지션 장우는 지난해 공연된 초연 때는 없던 배역이다. 음악을 업으로 삼고 싶지만 좀처럼 자리는 잡히지 않고 열심히 노력해도 마음 먹은대로 풀리지 않는 인생을 사는 30대 청년. 극중 장우의 역할은 장면과 장면, 에피소드와 에피소드를 라이브 기타 연주와 노래로 연결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대사보다는 노래와 연주로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게 된다. 그가 무대에서 부르는 솔로곡은 3곡. 싱어송라이터인 그가 타인이 만든 노래를 공개석상에서 부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소설 속 장우는 다른 인물을 만나 스토리를 전개시키기 보단 내면의 심정이 주로 묘사되거든요. 공연에서 장우는 다른 배우들과 대화하기보단 주로 노래와 연주로 감정을 표현해요. 장우의 솔로곡 중에선 ‘나만의 작은 밤’이란 곡을 특히 좋아해요. 우리 모두 밖에서 어려움을 겪다가 집에 돌아오면 나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회복하잖아요. 그 시간의 소중함을 말하는 노래라 와 닿았습니다.” 지금은 류지(보컬·드럼), 잔디(건반)과 3인으로 활동하는 ‘브로콜리너마저’는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재학 시절인 2005년 그가 결성한 밴드다. 잠시 회사에 다니다 1년 만에 그만두고 만든 정규앨범 1집 ‘보편적인 노래’(2008년)가 엄청난 히트를 치면서 본격적으로 뮤지션의 길을 걷는다. 이후 2집 ‘졸업’(2010년), 3집 ‘속물들’(2019년)까지 3장의 정규앨범과 싱글을 발매한 14년차 인디밴드의 리더로 살고 있다. “곡을 쓸 땐 ‘어떤 이야기를 할까’가 가장 중요해요. 나이를 먹어가며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의미 있는 노래로 만들고 싶었어요. 경험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걸 정확한 언어로 표현하는 게 어렵잖아요. 함께 공연하는 배우들처럼 뛰어난 표현력을 갖고 싶단 꿈이 생겼어요. 내년 발표를 목표로 준비 중인 다음 앨범에 이번 공연이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요? 무척 기대됩니다. 하하.”30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3만~5만 원.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감독님, 저 늙는 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웃음). 열심히 관리하겠습니다.” 아시아 국적 배우 최초로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이정재(50)가 18일 인천국제공항으로 귀국하며 말했다. 앞서 16일 열린 ‘오징어게임’ 에미상 수상 기자간담회에서 황동혁 감독(51)이 “시즌2가 늦으면 배우들이 확 늙어버릴 수 있으니 빨리 제작을 서둘러야겠다”고 말한 것에 화답한 것. 이정재는 에미상 수상에 대해 “개인적 차원보다 한국 콘텐츠가 세계 관객들과 소통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며 “앞으로도 (작품을) 열심히 잘 만들어 여러 관객들을 만나겠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영화 제작과 연출도 꾸준히 할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연기를 더욱 잘하는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이날 이정재는 연두색, 주황색 무늬가 화려한 점퍼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고 흰색 운동화를 신었다. 에미상 트로피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올리기도 했다. 이날 그의 귀국길엔 절친한 배우 정우성(49)이 함께했다. 둘은 영화 ‘헌트’ 홍보를 위해 제47회 캐나다 토론토 국제영화제에 참석했다. 정우성은 “토론토 호텔에서 TV로 (이정재가) 에미상을 받는 걸 봤다. 시상식 당일은 정신이 없을 것 같아 전화 통화를 못 했고, 이후 (이정재가) 토론토에 와 합류했을 때 축배를 들었다”고 말했다. 향후 행보에 대해 이정재는 “오징어게임 시즌2는 감독님이 한창 집필 중인 단계라 구체적 일정은 알 수 없다”고 했다. 한국인 최초로 미국 할리우드 ‘스타워즈’의 드라마 시리즈 ‘어콜라이트’(디즈니플러스 제작)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데 대해 “당장은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긴 어렵다”며 말을 아꼈다. 배창호 감독 데뷔 40주년 기념으로 29일 재개봉하는 영화 ‘젊은 남자’에 대해서는 깊은 애정을 나타냈다. 이정재는 “소중한 작품과 캐릭터를 물어보면 어느 자리에서나 ‘젊은 남자’의 이한이라 대답할 정도로 애착이 큰 작품이다. 재미삼아 봐주시면 감사하겠다”고 말했다. 1994년 개봉한 ‘젊은 남자’는 이정재의 영화 데뷔작이다. 한편 이정재가 연출, 시나리오, 주연, 제작을 맡은 영화 ‘헌트’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16일(현지 시간) 이정재와 정우성이 참석한 관객과의 대화 행사는 극장 전석(522석)이 매진됐다. 이정재는 “북미 첫 상영회에서 반응이 매우 좋았다”며 “토론토 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미국에서도 좋은 성과를 내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몸의 온 근육을 사용하는 데다 신체의 선(線)을 중시하는 발레리나에게 출산은 곧 은퇴 선언으로 여겨졌다. 무용계에선 출산 후 골반이 벌어지거나 틀어지면서 발레리나의 점프력이 약해지고 다리를 길게 뻗는 동작이 어려워진다는 속설도 존재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출산 후 주역으로 활약하는 ‘워킹맘 발레리나’가 늘고 있다. 2020년 출산 후 4개월 만에 복귀한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한나래(32)가 대표적이다. 그가 다음 달 12∼15일 공연하는 전막 발레 ‘백조의 호수’에서 주인공 오데트와 오딜 역으로 14일 무대에 오른다. 2019년 출산 후 100일 만에 국립발레단에 복귀해 오데트와 오딜을 맡아 무대에 선 수석무용수 김리회(35)와 같은 행보다. ‘백조의 호수’에서는 백조 오데트와 흑조 오딜 역을 한 명의 발레리나가 맡는다. 한나래는 ‘백조의 호수’에서 발레리노 김기완(지크프리트 역), 구현모(로트바르트 역)와 호흡을 맞춘다.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15일 만난 그는 “결혼 전이었던 2015년에도 오데트와 오딜 역으로 무대에 섰던 적이 있다. 엄마가 된 후에도 이 역할로 무대에서 춤출 수 있어 무척 설레면서도 긴장된다. 기승전결을 갖춘 ‘저만의 백조’를 보여드리는 것이 목표다”라고 했다. 한나래는 지난해 12월 ‘호두까기 인형’의 마리 역으로 복귀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팬데믹으로 일부 공연 회차가 취소되면서 무대에 서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무대가 그에겐 더욱 뜻깊다. “당시 제 공연 회차만 취소돼 너무 속상했어요. 출산 후에는 무대에 빨리 서고 싶은 마음에 아이를 낳고 2주 후부턴 몸을 열심히 움직였거든요. 집에서도 토슈즈를 신고 기본 발레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했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발레를 한 그는 임신 및 출산 기간에 처음으로 1년 남짓 발레를 쉬었다. 가장 긴 휴식기였다. 하지만 발레를 놓을 수 없었다. 누워 있는 아이 옆에서 플리에(무릎을 구부리는 동작)와 탕뒤(발끝을 오므린 채 바닥을 미는 동작)를 수없이 반복했다. “평생 몸을 써왔기에 출산 후 달라진 몸 상태를 바로 느낄 수 있었어요. 갈비뼈 위치는 틀어졌고 골반 관절은 늘어났죠. 근육도 원체 가는 편이어서 회복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운동이란 운동은 다 해본 것 같아요.” ‘엄마 발레리나’가 되면서 몸은 다소 흐트러졌을지 몰라도 감정의 폭은 깊어졌다. 아이의 존재는 출산 전 느끼지 못했던 많은 감정을 알게 해줬다. 아이가 응급실에 실려 갔을 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불안과 고통을, 천천히 말을 배워 가는 아이를 볼 때면 과거엔 느끼지 못했던 벅차오르는 기쁨을 경험했다. “엄마가 된 후에 제가 느끼는 감정이 다양하고 커졌어요. 예전엔 완벽한 테크닉과 동작으로 작품에 임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면 이젠 풍부한 감정을 담은 저만의 춤을 보여드리는 게 중요해요.” 서울예고, 이화여대에서 무용을 전공한 그가 국립발레단에 입단한 건 2012년. 어느덧 입단 10년 차 ‘선배 발레리나’의 대열에 들어섰다. 무대에 서지 못했던 임신 기간엔 국민대 대학원에 진학해 무용 이론을 공부했고, 7월엔 국립발레단 안무가 양성 프로젝트 ‘KNB 무브먼트 시리즈’에 참여해 발레 안무가로서 첫발을 뗐다. “발레와 안무, 공부까지…. 아직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육아와 병행하는 요즘엔 1분 1초가 소중해요. 김리회 언니가 제게 좋은 본보기가 돼 줬던 것처럼 저도 후배들에게 좋은 선례를 남기고 싶어요.”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5000∼10만 원.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워낙 (수상소감을 말하는) 시간이 짧아서 어머니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는데 못했습니다. 시상식 직후 어머니와 통화했는데 울고 계셨어요. 그게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비영어 드라마 최초로 에미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 6관왕을 거머쥔 ‘오징어게임’의 황동혁 감독(51)이 15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해 소감을 밝혔다. 그는 어머니에게 “저를 키워 주시고 항상 믿고 지지해 주시고 제 길을 응원해 주셔서 감사드린다”고 했다. 황 감독은 홀어머니, 할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배우 박해수(41) 정호연(28)과 함께 귀국한 황 감독은 수많은 취재진 앞에서 에미상 감독상 트로피를 번쩍 들어 보였다. 청바지에 흰색 티셔츠를 입고 검은색 재킷을 입은 황 감독은 “지난해 11월부터 (시상식) 레이스를 같이했는데 벌써 10개월이나 됐다”며 “너무 오래 해외에서 레이스를 같이해 (오징어게임 배우들이) 가족 같은 생각이 들 정도”라고 말했다. 이어 “에미상이 마지막 레이스인데 모두가 상을 받은 건 아니지만 의미 있는 상을 많이 타고 돌아왔다. 멋진 1년간의 여정을 잘 마무리한 것 같아 즐거웠다. 많이 성원해 주신 국민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 남녀조연상 후보에 올랐던 박해수 오영수 정호연의 수상이 불발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하는 동시에 감사 인사를 전한 것이다. 그는 트로피를 들고 다양한 포즈를 취해 달라는 기자들의 요청에 응하면서 “트로피가 너무 무겁다”며 웃었다. 그는 오징어게임 시즌2로 더 많은 상을 받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앞서 12일(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에미상 시상식 당일에도 에미상 최고상인 작품상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이날 “시즌2도 시즌1처럼 많이 사랑받았으면 한다”며 “또 기회가 된다면 시즌2로도 시상식 레이스에 참가해 골든글로브, 에미상, 미국배우조합(SAG)상 무대에 서 보고 싶다”고 했다. 황 감독은 에미상 시상식 에피소드도 전했다. 그는 “감독상 수상자로 무대에 오를 경우 주최 측이 감사 인사 명단을 자막으로 내보내 주기로 했는데 실수로 나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가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어머니의 영향도 컸다. 서울대 신문학과 재학 시절, 어머니가 지인에게서 받은 카메라는 호기심을 자극했다. 황 감독은 지난해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주부 교실에서 촬영법을 배우신 후 영상을 찍어 틀어 주셨는데 신기했다. 그래서 카메라를 들고 학교 축제 등을 찍어 상영하자 사람들이 아주 좋아했다. 영상을 찍는 게 재미있다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어머니와의 기억을 오징어게임의 마지막 장면에 녹이기도 했다. 상우(박해수)의 “어릴 때, 형이랑 이러고 놀다 보면 꼭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아무도 안 부르네”라는 대사가 그것. 황 감독은 “어머니가 당부하셨던 말들이 내 안에 쌓여 작품 곳곳에 피어났다”고 했다. 이날 박해수와 정호연도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검은색 바지와 티셔츠를 입은 박해수는 “어제 숙소에서 오징어게임 팀과 마지막 자리를 하는데 너무 아쉬웠다. 하지만 다시 시작일 것 같은 느낌이어서 기대를 안고 있다”고 말했다. 정호연은 “좋은 추억이었다”며 “오징어게임을 지지해 주신 한국 관객 여러분께 감사드린다”고 했다. 정호연은 에미상 시상식 참가자 중 베스트드레서로 꼽힌 소감을 묻자 “행복합니다”라며 웃었다. 그는 여러 색상의 비즈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조선 시대 쪽머리 가르마에 하는 장신구 ‘첩지’를 떠올리게 하는 꽃 장식을 달아 주목받았다.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이정재(50)는 캐나다 토론토국제영화제에 참석한 뒤 이르면 18일 귀국할 것으로 알려졌다. 황 감독은 “시상식 후 이정재와 ‘시즌2를 더 잘해서 더 멋진 작품을 만들어 보자’는 덕담을 주고받았다”고 밝혔다. 한편 오영수(78)는 앞서 14일 귀국했다. 황 감독은 에미상 게스트여배우상을 받은 배우 이유미, 오징어게임 제작사인 싸이런픽쳐스의 김지연 대표, 채경선 미술감독 등과 16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한다.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워낙 (수상소감을 말하는) 시간이 짧아서 어머니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는데 못했습니다. 시상식 직후 어머니와 통화했는데 울고 계셨어요. 그게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비영어 드라마 최초로 에미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 6관왕을 거머쥔 ‘오징어게임’의 황동혁 감독(51)이 15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해 소감을 밝혔다. 그는 어머니에게 “저를 키워주시고 항상 믿고 지지해주시고 제 길을 응원해주셔서 감사드린다”고 했다. 황 감독은 홀어머니, 할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배우 박해수(41) 정호연(28)과 함께 귀국한 황 감독은 수많은 취재진 앞에서 에미상 감독상 트로피를 번쩍 들어 보였다. 청바지에 흰색 티셔츠를 입고 검정색 재킷을 입은 황 감독은 “지난해 11월부터 (시상식) 레이스를 같이 했는데 벌써 10개월이나 됐다”며 “너무 오래 해외에서 레이스를 같이 해 (오징어게임 배우들이) 가족 같은 생각이 들 정도”라고 말했다. 이어 “에미상이 마지막 레이스인데 모두가 상을 받은 건 아니지만 의미 있는 상을 많이 타고 돌아왔다. 멋진 1년간의 여정을 잘 마무리한 것 같아 즐거웠다. 많이 성원해주신 국민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 남녀조연상 후보에 올랐던 박해수 오영수 정호연의 수상이 불발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하는 동시에 감사 인사를 전한 것이다. 그는 트로피를 들고 다양한 포즈를 취재 달라는 기자들의 요청에 응하면서 “트로피가 너무 무겁다”며 웃었다. 그는 오징어게임 시즌2로 더 많은 상을 받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앞서 에미상 시상식 당일에도 에미상 최고상인 작품상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이날 “시즌2도 시즌1처럼 많이 사랑받았으면 한다”며 “또 기회가 된다면 시즌2로도 시상식 레이스에 참가해 골든글로브, 에미상, 미국배우조합(SAG)상 무대에 서보고 싶다”고 했다. 황 감독은 12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에미상 시상식 당일 에피소드도 전했다. 그는 “감독상 수상자로 무대에 오를 경우 주최 측이 감사 인사 명단을 자막으로 내보내주기로 했는데 실수로 나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가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어머니의 영향도 컸다. 대학시절, 어머니가 지인에게서 받은 카메라는 호기심을 자극했다. 황 감독은 지난해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주부 교실에서 촬영법을 배우신 후 영상을 찍어 틀어주셨는데 신기했다. 그래서 카메라를 들고 학교 축제 등을 찍어 상영하자 사람들이 아주 좋아했다. 영상을 찍는 게 재미있다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어머니와의 기억을 오징어게임의 마지막 장면에 녹이기도 했다. 상우(박해수)의 “어릴 때, 형이랑 이러고 놀다 보면 꼭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아무도 안 부르네”라는 대사가 그것. 황 감독은 “어머니가 당부하셨던 말들이 내 안에 쌓여 작품 곳곳에 피어났다”고 했다. 이날 박해수와 정호연도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검정색 바지와 티셔츠를 입은 박해수는 “어제 숙소에서 오징어게임 팀과 마지막 자리를 하는데 너무 아쉬웠다. 하지만 다시 시작일 것 같은 느낌이어서 기대를 안고 있다”고 말했다. 정호연은 “좋은 추억이었다”며 “오징어게임을 지지해주신 한국 관객 여러분께 감사드린다”고 했다. 정호연은 에미상 시상식 참가자 중 베스트드레서로 꼽힌 소감을 묻자 “행복합니다”라며 웃었다. 그는 여러 색상의 비즈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조선 시대 쪽머리 가르마에 하는 장신구 ‘첩지’를 떠올리게 하는 꽂 장식을 달아 주목받았다. 한편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이정재(50)는 캐나다 토론토국제영화제에 참석한 뒤 이르면 18일 귀국할 것으로 알려졌다. 황 감독은 “시상식 후 이정재와 ‘시즌2를 더 잘해서 더 멋진 작품을 만들어보자’는 덕담을 주고받았다”고 밝혔다.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SM엔터테인먼트가 H.O.T., 보아, 소녀시대 등을 키워낸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와 맺었던 프로듀싱 용역 계약을 종료할 지 검토 중이다. 15일 SM엔터테인먼트는 “이수만 프로듀서의 개인 회사인 ‘라이크기획’과의 프로듀싱 계약을 조기 종료할 지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수만 총괄이 SM 측에 프로듀싱 계약을 금년 말 조기 종료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다”며 “당사는 총괄 프로듀서와의 프로듀싱 계약 조기 종료가 당사의 사업에 미칠 영향 등에 대해 주요 이해관계자들과 깊이 논의해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입장을 정리해 추후 발표할 계획”이라고 했다. 라이크기획은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의 개인회사이자 SM의 최대주주다. SM은 그간 라이크기획에 프로듀싱 외주를 맡기고 이에 대해 매년 수백억 원의 인세를 지급해왔다. SM의 주식 지분 1.1%를 보유한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에 따르면 SM이 상장 이후 지난해 3분기까지 라이크기획에 1427억원을 인세로 지급해왔다고 지적했다. 이번 공시는 SM이 그간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의 개인회사에 과도한 인세를 지급한 것에 대해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 등 주주들의 반발과 압박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자신을 구매한 인간을 살해한 안드로이드(인간형 로봇)가 있다. 로봇을 어떻게 처벌할 수 있을까. 인간 아닌 로봇을 법정에 세울 순 있을까.’ 지난해 출간된 소설 ‘인간의 법정’은 이런 질문을 던지며 전개된다. 주인공인 안드로이드 ‘아오’는 자신을 구매한 인간 ‘한시로’를 살해한다. 결국 아오는 살인죄로 법정에 서게 되고, 작품은 인간성의 본질과 경계를 탐구한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 뮤지컬이 28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아트원씨어터에서 초연된다. 뮤지컬 각본은 소설의 작가이자 28년 경력의 변호사인 조광희 씨(56)가 맡았다.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6일 그를 만났다. “처음엔 살인을 저지른 안드로이드가 재판을 받는 이야기를 쓰려 했어요. 근데 제가 법률가잖아요. ‘안드로이드는 인간이 아닌데 법정에 세울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들었습니다. 결국 ‘안드로이드의 재판 받을 자격’ ‘인간의 자격은 무엇일까’로 생각이 이어졌죠.” 첫 장편소설 ‘리셋’(2018년)을 포함해 장편소설 두 편을 출간한 그가 뮤지컬 각본을 쓰는 건 처음이었다. 뮤지컬 ‘그날들’ ‘투란도트’를 만든 장소영 음악감독이 ‘인간의 법정’ 뮤지컬 판권을 구입하면서 그에게 각본도 써달라고 요청했다. “처음엔 이걸 무대에서 어떻게 구현한다는 건지 감이 안 왔어요. 무대와 음악을 잘 모르는 제가 할 수 있을까 난감했죠.” 뮤지컬은 시간순으로 전개되는 원작 소설과 달리 과거 사건과 현실 법정을 오간다. 첫 장면에서 로봇 아오(이재환 유태양 류찬열 최하람)가 살인을 저지른 후 변호사 호윤표(박민성 임병근 오종혁)를 찾아가 변호를 요청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극적 전개와 무대 동선을 감안해 소설과 구성을 바꿨어요. 소설 속 사건과 인물도 핵심 위주로 추렸습니다.” 소설과 영화는 물론이고 뮤지컬까지 넘나드는 작가가 된 그는 법무법인 원에 몸담고 있다. 주로 문화예술 분야의 법률 자문을 해온 그는 영화계에서 쓰는 표준계약서 대부분을 초안했고 2001년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영화등급 분류 보류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도 이끌어냈다. “‘후문학파’라는 말이 있대요. 선(先)인생, 후(後)문학. 삶을 산 후에 글을 쓴다는 거죠. 변호사로서 지낸 경험이 지금의 제가 이야기를 쓰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요?” 12월 4일까지, 4만4000∼6만6000원.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자신을 구매한 인간을 살해한 안드로이드(Android·인간의 모습을 한 로봇)가 있다. 그 로봇은 어떻게 처벌해야 할까. 인간 아닌 로봇을 법정에 세울 수 있을까.’ 지난해 출간된 소설 ‘인간의 법정’은 이 물음에서 시작한다. 인간을 살해한 안드로이드를 법정에 세우면서 역으로 인간성의 본질과 경계를 탐구한다. 22세기를 배경으로 SF와 법정물을 결합한 소설 ‘인간의 법정’이 무대로 재탄생한다. 28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에서 초연되는 동명의 뮤지컬에서다. 소설 원작뿐 아니라 뮤지컬 각본까지 쓴 조광희 작가(56)를 6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그는 올해 28년 경력의 변호사이기도 하다. “처음엔 살인을 저지른 안드로이드가 재판을 받는 이야기로 쓰려 했어요. 근데 제가 법률가잖아요. ‘안드로이드가 인간이 아닌데 법정에 세울 수 있을까’에서 생각이 멈추더라고요. 그러다 ‘안드로이드의 재판 받을 자격’에 대해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자격은 무엇일까’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됐습니다.” 2018년 첫 장편소설 ‘리셋’을 내고 지난해 ‘인간의 법정’까지. 장편소설 두 편을 출간한 작가지만 뮤지컬 각본을 쓴 건 처음이었다. 뮤지컬 ‘그날들’ ‘투란도트’ 등을 만든 장소영 음악감독이 직접 ‘인간의 법정’ 판권을 구입하면서 시작됐다. 장 감독은 그에게 각본도 함께 써달라고 요청했다. “처음엔 이 이야기를 어떻게 무대에서 구현한다는 건지 감이 안 왔어요. 그런데다가 각본까지 써달라는 거예요. 무대나 음악을 잘 모르는 제가 과연 할 수 있을까 난감했죠.” 영화 ‘멋진 하루’ ‘밤과 낮’ 등을 제작한 경험이 있던 그에겐 뮤지컬 각본보다 영화 시나리오가 익숙했다. 처음엔 시나리오를 쓴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소설의 장면을 ‘씬’으로 만들고 10여 명이 넘는 등장인물도 6명으로 줄였다. 뮤지컬 넘버의 가사도 직접 썼다. “한때 문학청년을 꿈꾸며 시를 썼는데 대학 졸업 후 30년 동안 한 번도 시를 쓴 적이 없었어요. 다시 시를 써보자는 마음으로 가사를 써내려갔죠. 메인 넘버 ‘내 피는 파랑’은 제일 먼저 떠오른 가사입니다.” 소설과 뮤지컬. 글을 쓴다는 건 같지만 완전히 다른 작업이다. 소설을 쓸 때 작가는 홀로 남게 된다. 혼자 하는 일이기에 장점도 있지만 외로울 때도 많다. 하지만 뮤지컬은 음악과 배우, 스태프와 협업해야 한다. 고려사항은 많지만 협동이 주는 즐거움도 있다. “제가 쓴 글을 배우들이 말하고 노래하면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걸 보면서 굉장히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혼자 쓰는 소설하고는 또 다른 작업이었어요. 이런 즐거움이라면 뮤지컬 작업을 계속 할 수 있겠다 싶기도 하더군요.” ‘인간의 법정’은 영상화 판권도 팔린 상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을 만든 나우필름과 영화 ‘부산행’ ‘반도’의 레드피터가 ‘인간의 법정’을 드라마로 공동 제작한다. 이를 위해 그는 현재 ‘인간의 법정’ 후속편을 쓰고 있다. 가제는 ‘인간의 도시’다. 소설, 뮤지컬, 드라마를 넘나드는 작가로 살지만 그는 지금도 법무법인 원에 소속된 현직 변호사다. 1990년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후엔 주로 영화를 비롯한 문화예술 분야에 법률자문을 해왔다. 현재 영화 산업 분야에서 사용되는 표준 계약서 대부분을 초안했고 2001년 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등급 분류보류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도 이끌어냈다. 한때 잠시 변호사를 그만두고 영화사 봄의 대표이사로도 활동한 적도 있었다. “영화 일을 오래 해왔지만 결국 본업은 변호사입니다. ‘후문학파’라는 말이 있대요. 선(先)인생, 후(後)문학. 인생을 먼저 살고 글은 나중에 쓴다는 거죠. 4년 전에야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니 본격적으로 글을 써온 시간은 짧았지만 변호사로서 여러 삶을 경험했기에 지금 글 쓰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요? 글은 계속 쓰겠지만 변호사 일도 꾸준히 하려고 합니다.”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넷플릭스 오리지널 한국 드라마 ‘오징어게임’이 비영어 드라마 최초로 미국 방송계 최고 권위를 지닌 에미상을 수상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마이크로소프트 극장에서 12일(현지 시간) 열린 제74회 에미상 시상식에서 황동혁 감독(51)이 감독상을, 배우 이정재(50)가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며 세계 드라마 역사를 다시 썼다. 앞서 4일 열린 드라마 기술진 등에 대한 에미상 시상식에서 게스트 여배우상(이유미), 스턴트 퍼포먼스상 등 4개 상을 받은 데 이어 감독상, 남우주연상까지 수상하며 오징어게임은 에미상 6관왕에 올랐다. 2020년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 지난해 그룹 방탄소년단의 빌보드·아메리칸뮤직어워즈 수상에 이어 오징어게임까지 에미상을 받으면서 K콘텐츠가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장르별 상을 휩쓸며 주요상 수상 퍼즐을 완성했다. 황 감독은 오징어게임 1화 ‘무궁화 꽃이 피던 날’로 아시아 국적 감독 최초로 에미상 감독상을 받았다. 그는 이날 시상식에서 “에미상 14개 후보에 오른 뒤 사람들은 내가 역사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나 혼자 만든 역사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이 역사를 만든 것”이라고 말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황 감독은 함께 후보에 오른 미국 HBO ‘석세션’의 마크 마일러드, 애플TV플러스 ‘세브란스: 단절’의 벤 스틸러 등 쟁쟁한 감독들을 모두 제쳤다. 이정재 역시 아시아 국적 배우 최초로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특히 그는 올해 1월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자신을 제치고 남우주연상을 받았던 ‘석세션’의 제러미 스트롱 등 세계적인 스타들을 꺾고 상을 차지했다. 이정재는 영어로 짧게 소감을 밝힌 뒤 우리말로 “대한민국에서 보고 계실 국민 여러분과 기쁨을 나누겠다”고 힘줘 말했다. 그는 기자간담회에서도 “언어가 다르다는 것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성기훈’(이정재 배역)의 수상으로 증명됐다”고 말했다. 이날 외신도 시상식 결과를 앞다퉈 보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세계적으로 엄청난 흥행을 거둔 오징어게임이 에미상 역사를 다시 썼다”고 보도했다. 뉴욕포스트는 “오징어게임이 최초의 비영어 수상작이 되면서 74년 역사의 에미상에서 엄청난 승자가 됐다”고 평가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13일 축전을 보내 “불평등과 기회의 상실이라는 현대 사회 난제에 대한 치밀한 접근과 통찰이 세계인의 큰 공감을 얻었다”며 축하했다.“자본주의 묵직한 풍자”… 74년 에미상, 非영어 작품에 문열다 ‘오징어게임’ 美에미상 새 역사황동혁 “비영어 마지막 수상 아니길”‘빈부격차 심화’라는 사회적 메시지… 세련되고 과감한 연출에 세계 공감黃 “올림픽 아닌데 국가대표된 느낌, 오징어게임2로 작품상에도 도전” “오징어게임이 에미상을 받은 마지막 비영어 드라마가 아니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저의 에미상 수상 역시 마지막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고요.” 12일(현지 시간) 에미상 시상식이 열린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마이크로소프트 극장. ‘오징어게임’으로 감독상을 받은 황동혁 감독이 영어로 소감을 밝히자 객석에선 웃음과 환호가 터져 나왔다. 1949년 시작된 에미상 역사상 비영어 드라마가 에미상을 수상한 건 처음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날 ‘오랜 세월의 승리-2022 에미상에서 가장 놀라운 일’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오징어게임의 역사적인 승리”라고 보도했다. 황 감독은 시상식에서 “역사를 만든 건 오징어게임의 문을 연 바로 여러분이고 여러분이 나를 오늘 여기 에미상에 초대해줬다”며 세계 시청자에게 감사를 표했다. 뒤이은 기자간담회에서도 “영어가 아닌 드라마로 처음 에미상의 벽을 넘었다”며 “올림픽이 아닌데 국가대표가 된 느낌”이라며 기뻐했다. 황 감독에 이어 아시아 국적 배우로는 처음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받은 이정재는 상기된 표정이었다. 영어로 “매우 감사하다”고 연이어 말한 그는 “황 감독이 현실 문제들을 멋진 각본과 비주얼로 스크린에 옮겨줬다”며 고마워했다. 이날 이정재는 정호연과 함께 버라이어티 스케치 시리즈 부문 시상자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무대 한쪽에는 드라마 속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에 나온 영희 인형이 놓여 있었고, 이를 본 이정재와 정호연은 게임을 하듯 잠시 멈춰서는 퍼포먼스를 선보여 웃음을 자아냈다. 지난해 9월 17일 ‘오징어게임’이 190여 개국에 동시 공개되자 세계 시청자들은 열광했다. 공개 후 28일간 ‘오징어게임’의 시청 시간은 16억5000만 시간. 세계인 3명 가운데 1명이 오징어게임을 1시간 이상 시청한 셈이다. 2위인 미국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4’(13억5200만 시간), 3위인 스페인 드라마 ‘종이의 집 파트5’(7억9200만 시간)를 압도한다. 오징어게임은 현재 시즌2 제작이 진행 중이고 드라마가 공개된 9월 17일을 LA시가 ‘오징어게임의 날’로 지정하는가 하면 넷플릭스가 리얼리티쇼 ‘오징어게임: 더 챌린지’ 제작을 발표하는 등 파급력은 1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김숙영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연극학과 교수는 “지금도 미국에서는 오징어게임에 나온 게임을 직접 해보거나 디자인을 따라하는 등 인기가 지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비평서 ‘서바이빙 스퀴드 게임’을 집필한 그는 “미국에서 가난을 표현하는 방식은 홈리스를 통한 방식이 많은데 오징어게임은 친숙한 주제로 낯선 시공간에서 신선함과 재미를 더했다”고 평가했다. 드라마에 담긴 메시지가 묵직했던 점 역시 에미상이 오징어게임을 선택한 요인으로 꼽힌다. 빈부격차가 심화되며 절망에 빠진 시대를 세련되면서도 과감한 방식으로 그려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 드라마 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미국은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국가지만 이에 대한 풍자가 기생충이나 오징어게임만큼 잘 드러난 작품은 정작 미국에 없었다”며 “에미상은 감독의 날카로운 현실 인식과 예술적 성취에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황 감독은 기자간담회에서 “팬데믹을 겪고 있는 와중에 빈부격차, 자본주의 사회가 갖는 문제점 등을 지적한 주제의식에 (세계인이) 공감했던 것 같다”고 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오징어게임이 다룬 문제는 국제적인 인플레이션과 겹쳐 세계에 메아리쳤다”고 수상 이유를 분석했다. 작품상은 ‘석세션’에 돌아갔다. 황 감독은 기자간담회에서 “오징어게임 시즌2로 작품상을 노려보고 싶다”고 말했다.로스앤젤레스=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곧 시즌2로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74회 에미상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받은 황동혁 감독이 수상 소감 말미에 ‘오징어게임’ 시즌2를 언급했다. 올 6월 넷플릭스는 오징어게임 시즌2 제작을 최종 확정했다. 전체 에피소드의 절반인 6화까지 집필을 완성했다는 황 감독은 시즌1과 가장 큰 차이점으로 주인공 성기훈 캐릭터를 꼽았다. 그는 “시즌1에서 기훈(이정재)은 실수를 많이 하고 순진무구한 아이 같은 인물이었으나 시즌2에선 진지한 역할로 변한다”고 말했다. 그가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했던 시즌2 시놉시스에서 “프런트맨(이병헌)이 돌아온다. 딱지를 든 양복남(공유)도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 영희(1화 에피소드 ‘무궁화꽃이 피던 날’에 나온 대형 인형 캐릭터)의 남자친구 철수도 만나볼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시즌2는 서바이벌 게임에서 살아남은 기훈이 벌이는 복수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황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기훈이 프런트맨과의 마지막 통화에서 ‘나는 말이 아니다’라고 하는데 시즌2는 그 대화 이후 두 사람에게 일어나는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에미상 시상식 후 백스테이지 인터뷰에서 황 감독은 “시즌2는 복수에 관한 이야기라 시즌1처럼 루스하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기대치를 뛰어넘어야 노력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기대치만큼만 하는 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지난달 기자간담회에서) 456억 원(‘오징어게임’ 우승상금)을 뛰어넘는 위대한 밤이었다. 연기력 논란이 꼬리표처럼 달렸던 20세기 청춘스타 이정재(50)는 21세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배우로 우뚝 섰다.○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세상을 거머쥐다12일(현지 시간) 아시아 국적 배우 최초로 제74회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받은 이정재는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모델로 연예계에 발을 들였다. 1993년 드라마 ‘공룡선생’으로 데뷔할 때부터 외모는 ‘언터처블’이었다. 특히 당시 시청률 64.5%를 기록하며 ‘귀가시계’로 불렸던 드라마 ‘모래시계’(1995년)에서 묵묵히 목검을 휘두르는 보디가드 백재희로 남녀노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대사가 안 돼 말 없는 역할을 맡겼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연기로는 평가받지 못했다. 이정재는 세간의 인식을 정면 돌파했다. 배우 김학철과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최형인 교수를 스스로 찾아가 연기 지도를 받는가 하면, 데뷔 6년 차에 동국대 연극영상학과에 입학해 석사과정을 마쳤다. 이후 평생의 친구가 된 배우 정우성과 출연한 영화 ‘태양은 없다’(1999년)는 그의 변신을 예고하는 전조였다. ‘오징어게임 성기훈의 청년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사기꾼 홍기 역으로 제20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도 거머쥐었다. 세기말을 지나며 다소 주춤했던 행보는 2010년 또 한 번 커다란 변곡점을 맞는다. 임상수 감독의 영화 ‘하녀’에서 ‘주인 남자, 훈’을 연기한 건 당시 신선한 충격이었다. 남자 주인공만 도맡아온 이정재에게 훈은 전도연과 윤여정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에 가까운 역이었다. 당시 그는 “앞으로 캐릭터의 변화가 익숙한 배우로 기억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다짐은 허투루 던진 공염불이 아니었다. 영화 ‘도둑들’(2012년) ‘신세계’(2013년) ‘관상’(2013년) ‘암살’(2015년) ‘신과 함께-죄와 벌’(2017년) ‘신과 함께-인과 연’(2018년)…. ‘천만영화’만 4편에 이르는 흥행 보증수표이자 “내가 왕이 될 상인가”(‘관상’)라는 대사가 유행어로 퍼지는 연기 보증수표가 됐다. 오징어게임의 성공은 그런 그가 끝없는 담금질을 통해 내놓은 결과물이었다.○ 배우에서 감독, 월드스타로…신세계를 열다“연기자는 꼭 언어로만 표현하는 게 아닙니다. 언어가 다르다는 게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오늘 수상으로 증명된 거 같습니다.” ‘영어가 아닌 연기로 어떻게 에미상을 받을 수 있었는가’라는 해외언론의 질문에 의연히 대처하는 모습은 이정재가 그간 얼마나 공력을 쌓아 왔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에미상 시상식이 열린 미 로스앤젤레스(LA) 마이크로소프트극장 인근 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이야기나 주제로 소통하는 방법이 있기에 (그걸 전하는) 메시지나 주제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이날 에미상 무대에서 마지막 소감을 한국말로 전한 것도 그의 뚝심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한국의 관객과 시청자들에게 항상 감사하게 생각해왔다. 흥행이 잘될 때도, 관객의 마음에 안 들어도 다음 작품을 위해 노력하기에 (한국 관객에게) 꼭 인사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오징어게임에서 보여준 성기훈의 연기는 이정재가 30년 가까이 걸어온 배우 인생의 총체와도 같았다. 정의로운 염라대왕(신과 함께)과 비열한 친일파 배신자(암살)를 넘나들며 온갖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스크린에 담아온 그에게, 도박중독에 빠진 이혼남이지만 마지막까지 인간성을 지키는 기훈은 이정재라는 배우의 역사 한 페이지를 확실하게 매조지하는 연기였다. 이정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최근 감독으로 첫 연출을 맡은 영화 ‘헌트’는 올해 칸영화제에 초청돼 기립박수를 받았다. 13일 기준으로 420만 명이 관람했다. 할리우드에서 ‘스타워즈’의 드라마 시리즈인 ‘어콜라이트’(디즈니플러스 제작)에 주인공으로도 캐스팅됐다. “대한민국 관객에게 고맙다”고 했던 이정재는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워하는 대체불가 배우로 자리 잡았다.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로스앤젤레스=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