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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주목하는 ‘군백기(군대+공백기)’가 예고됐다. 방탄소년단(BTS) 일곱 멤버가 맏형 진부터 순차적으로 입대한다고 발표한 것. 막내 정국이 2027년까지 입대를 미룰 수 있는 점을 감안하면 BTS의 군 복무로 인한 공백기는 2025년, 늦어질 경우 2029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100개국 1800만 다국적 ‘아미’를 팬으로 거느린 BTS가 사병 복무를 선언하자 주요 외신도 일제히 속보를 전했다. ▷‘BTS 병역특례법’을 놓고 논쟁하던 국회가 머쓱해졌다. 국위를 선양한 체육인과 예술인에게 주어지는 병역 면제 혜택을 대중문화인에게도 적용하는 내용의 법안인데 설문조사를 하면 찬성 여론이 약간 높게 나온다. 국위 선양으로 치자면 BTS만 한 인물이 있느냐는 것이다. BTS는 세계 5대 음악 시장에서 앨범 차트 정상을 찍었다. 미국 빌보드 핫100 1위에 6곡을 올린 한국 가수는 BTS가 유일하다. 2020년엔 한국어 노래로 1위를 차지했는데 영어 가사가 아닌 노래가 발매 첫 주 정상에 오른 것은 빌보드 62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BTS의 누적 앨범 판매량은 3000만 장이 넘는다. 포브스는 2019년 BTS의 경제적 생산유발효과를 연간 46억5000만 달러(약 6조6200억 원)로 추산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BTS가 2014년 데뷔한 후 2023년까지 창출할 경제적 효과가 56조 원이라고 했다. 구글 검색량으로 측정한 인지도가 1포인트 올라갈 때마다 외국인 관광객 수와 옷, 화장품, 음식 수출액이 0.18∼0.72%포인트 증가하는 것으로 나왔다. 한마디로 BTS는 총 대신 마이크를 잡는 게 국익에 훨씬 이득이라는 주장이다.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다. 입영 대상이 줄어들고 있어 특례 확대는 무리인 데다 앨범 판매량 등으로 뽑는 대중음악상은 경연대회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아미들 사이에선 ‘깔끔하게 다녀오면 장수 아이돌이 될 것’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샤이니의 민호는 해병대 제대 후 주연급 배우로 활약 중이다. 군대에 가려고 미국 영주권을 포기한 2PM 옥택연은 허리 디스크로 군 대체 복무 판정을 받았지만 현역 복무를 자원했고 제대 후에도 잘나가고 있다. ▷BTS는 국내에선 ‘반듯한 아이돌’, 해외에선 ‘소셜 캠페이너(사회운동가)’로 통한다. 방황하는 청춘들이 ‘Love yourself’로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전 세계 민주화 시위대가 ‘Not today’를 들으며 ‘우리가 지는 날이 오겠지만 오늘은 아니야’를 합창한다. 가장 성공한 7명의 청년들이 성취에 기대어 특혜를 바라지 않고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지겠다고 선언했다. 세계 정상급 노랫말과 춤사위 못지않은 선한 영향을 줄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세계 청년들이 선호하는 기업의 대명사는 한동안 구글이었다. 높은 지명도에 멘토링 기회, 호텔 뷔페 수준의 공짜 구내식당, 근무시간의 20%를 자기 계발에 쓸 수 있는 자유로운 조직 문화가 지원자들을 자석처럼 빨아들이면서 2700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한 적도 있다. 그런데 구글보다 더 선망 받는 직장이 있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최근 발표한 ‘세계 최고의 직장’ 순위에서 삼성전자가 3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57개국의 다국적 기업 임직원 15만 명을 대상으로 4000여 개 기업의 영향력과 이미지, 인재 육성 프로그램, 임금 수준, 근무 여건을 평가하게 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상위 800개 기업을 추려낸 결과다. 2∼5위는 마이크로소프트, IBM, 알파벳(구글 모회사), 애플 순으로 모두 미국계 IT 기업이다. 알파벳은 이 조사가 시작된 2017년부터 3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가 2020년부터 삼성전자에 자리를 내주고 밀려났다. ▷삼성전자의 부상은 미국 실리콘밸리의 유연하고 수평적인 기업 문화를 따라잡기 위해 수차례 인사혁신에 나선 결과다. 우선 직급별 표준 체류연한이나 승격 포인트제를 없앴다. 능력만 있으면 누구든 팀장으로 발탁된다. 직원 간 호칭은 ‘님’, ‘프로’로 통일해 서로 존댓말을 쓴다. 법정 한도의 2배를 쓸 수 있는 육아휴직 제도로 9년 연속 여성가족부의 ‘가족친화 인증 기업’으로 선정됐고, 미국 법인은 민간재단의 ‘기업평등성지수’ 평가에서 3년 연속 만점을 받았다. 역량 개발의 기회도 많다. 반도체 사내 기술대학으로 시작한 삼성전자공과대학과 사내 대학원을 졸업한 학사가 1045명, 석박사가 858명이다. ▷알파벳의 지난해 연봉 중간값은 29만5884달러(약 4억2000만 원)로 삼성전자 평균 연봉(1억4400만 원)의 약 3배다. 그럼에도 삼성전자 순위가 높은 건 ‘고용 브랜드’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글로벌 취업포털 글래스도어에 따르면 고용 브랜드에 영향을 주는 3대 요소는 조직문화, 워라밸, 일을 통한 성장이다. 세계 최고의 인재들과 좋은 기업문화 속에서 경력을 쌓을 수 있으면 연봉을 높여 부른다고 쉽게 다른 회사로 옮겨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삼성은 시작부터 인재 욕심이 많았던 기업이다. 창업주는 “1년 계획은 곡식을, 10년 계획은 나무를, 평생 계획은 사람을 기르는 일이다”는 중국 고전을 자주 인용했다고 한다. 코로나 이후 ‘대퇴직의 시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제는 좋은 인재 앞에선 기업이 ‘을’인 시대다. ‘세계 최고의 직장’ 800위 안에 든 한국 기업이 지난해 38개에서 올해는 16개로 줄어들었다. 삼성전자의 약진이 기업 간 고용 브랜드 높이기 경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여인들은 남자의 위안물로 창조되었다’ ‘유리와 처녀는 항상 위험하다’ ‘여자의 아량 중 하나는 허락하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문장을 동서양의 ‘금언’이라며 정부 관보 자투리 지면에 소개하던 말도 안 되는 시절이 있었다. 1990년의 일이다. 32년이 지난 지금은 여성가족부 폐지를 놓고 논쟁하고 있다. 성인지 감수성의 퇴행일까, 여성정책 성공의 역설일까. 여가부 폐지 찬반론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용하는 데이터가 있다. 세계경제포럼 젠더격차지수(GGI)로 한국은 캄보디아보다 뒤지는 99위다. 한쪽에선 여성행정 전담 조직을 신설한 때가 1988년인데 아직도 GGI가 하위권을 못 벗어나고 있으니 여가부 아닌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쪽에선 구조적 성차별이 여전한데 여가부 폐지가 웬 말이냐고 한다. GGI는 여성 지위의 절대적 수준이 아닌 남녀 격차만을 따지므로 해석엔 신중해야 하지만 고용 부문에서 성차별이 심각하다는 평가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GGI 4개 부문 중 순위가 가장 뒤지는 부문은 ‘여성의 경제적 참여’로 에티오피아보다 못한 115위다. 이제는 아들딸 차별해서 키우는 집은 없다. 여학생의 대학 진학률은 2010년부터 남학생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졸업하고 사회에 나서는 순간 이등시민이 된다. 여성 경제활동참가율(60%)은 경제협력개발기구 35개 회원국 중 31위다. 남성보다 20% 낮다. 남성이 시간당 2만2637원을 받는 동안 여성은 1만5804원을 받는다. 올해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설문조사에서 남녀 응답자 모두 강화해야 할 여가부 기능 1위로 꼽은 것이 ‘여성의 경제활동 지원’이었다. 이제 여성정책의 최대 목표는 경제활동 젠더 격차 해소이고, 여가부 조직 개편의 적절성도 이 기준으로 따져봐야 한다. 정부 개편안에 따르면 여가부의 경력단절여성 업무는 여성고용 업무를 맡고 있는 고용노동부로 이관된다. 비슷한 업무를 한데 모으는 건 효율적이고, 그 업무를 고용부에 두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본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하려면 여성 인력 활용이 필수적이다. 여성 고용을 여성 문제가 아니라 경제정책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이 81%가 넘는 스웨덴도 고용부가 양성평등 업무를 한다. 문제는 고용부 이관 이후의 청사진이 없다는 점이다. 성별 고용률과 임금 격차 해소를 중요한 노동개혁 과제로 다룬다는 의지를 이번 개편안에 담았더라면 설득이 쉬웠을 것이다. 여가부의 나머지 업무는 보건복지부에 신설되는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로 통합된다. 지금처럼 아동과 노인은 복지부, 청소년과 가족은 여가부가 맡는 건 정책 수요자를 무시한 억지 나누기다. 여성은 결혼과 동시에 고용률이 확 떨어져 이를 회복하기까지 21년이 걸린다. 자녀가 한 명 생기면 취업 유지율이 30%포인트 감소한다. 일과 육아의 병행을 돕는 돌봄, 여성권익, 저출생 대책을 아울러 시너지를 내는 본부가 돼야 할 것이다. 덩치 큰 본부를 독일처럼 독립 부처로 떼어 놓을지, 복지부에 둘지는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 여가부 폐지 못지않게 조직 이름에서 ‘여성’이 빠지는 걸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2001년 신설된 여성부 영문명을 지을 때도 비슷한 논란이 있었다. 당시 한명숙 장관은 남성들의 반감을 의식해 ‘Women’ 대신 ‘Gender Equality’로 정했다. 헌법상 남녀평등 이념을 실천하는 부처라는 자부심도 담았다고 한다. 영문명에서 앞서갔던 시대정신을 한글명에서도 따라야 할 때라고 본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1Q84’ 남자 주인공의 어릴 적 별명은 ‘NHK’다. 주말마다 NHK 수신료 징수원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다 왕따가 돼 얻은 별명. 그만큼 NHK 징수원은 악착같이 수신료를 걷는 직업으로 악명 높다. 다른 나라와 달리 일본에선 수신료 미납자 처벌 규정이 없어 징수원의 역할이 크다. 덕분에 수신료가 꾸준히 올라도 납부율은 80%대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2000년대 중반 내부 스캔들이 터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2004년 인기 프로인 ‘가요홍백전’ PD와 NHK 서울지국장을 지낸 직원이 거액의 제작비를 빼돌린 비리가 폭로됐다. 이듬해엔 2001년 방송된 ‘전시 성폭력을 묻는다’가 집권 자민당의 외압으로 일본에 불리한 내용이 삭제된 사실이 드러났다. 수신료 납부 거부 움직임이 거세게 일었고, 재원의 거의 100%를 수신료에 의존하는 NHK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수신료 거부를 공약으로 내건 ‘NHK당’도 2005년 내부 비리를 고발했던 NHK 직원 출신이 만든 당이다. ▷결국 NHK는 직원 감축과 임금 삭감 등 구조조정과 방송 공정성 확보 방안을 담은 ‘신생플랜’을, 2008년엔 창사 이래 처음으로 ‘2012년 수신료 7% 인하’ 계획을 발표했다. 이후로도 수신료는 인하를 거듭해 현재는 월 1275엔(약 1만2000원)이다. 최근엔 내년 10월 추가 인하안까지 발표했다. 5년 새 3번째 인하다. 수신료 인하로 인한 적자는 적립된 잉여금과 군살빼기로 메운다는 계획이다. ▷일본에서도 NHK의 안정적인 재원 확보를 위해 수신료 미납자 처벌 조항을 두자는 제안이 나온 적이 있다. 하지만 공영방송이 제구실을 못할 때 시청자들이 수신료 거부권으로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반대 논리를 넘지 못했다. 젊은층이 다양한 민영 방송으로 옮겨가면서 ‘안 보는데 왜 내느냐’는 여론이 일기 시작한 것도 걸림돌이다. 결국 NHK는 시청자들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지속적으로 경영을 합리화하고 수신료를 인하하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KBS는 국회에 수신료를 월 3800원으로 올려 달라면서 경비 절감 등을 약속했다. 그런데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억대 연봉을 받는 직원이 51.3%로 1년 새 4.9%포인트 늘어났다. 지상파 중간광고까지 허용되자 지난해 광고 판매액은 2705억 원으로 전년도보다 16.7% 증가했다. 막대한 광고 수입에 수신료 수입까지 보장되니 방만 경영과 편파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KBS와 한전의 3년 주기 수신료와 전기료 통합 징수 계약이 2024년 끝난다. 전기 끊길까 억지로 수신료를 내는 징수제도를 손봐야 시청자 무서운 줄 알고 공영방송의 질도 경영도 나아질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내 취향에 맞는 영화와 책을 골라준다. 학생 수준에 따라 맞춤형 개별 지도가 가능하다. 손떨림 없이 수술하고 지치지 않고 간병해주는 로봇 상용화도 머지않았다. 이 모든 것이 인공지능(AI) 덕분이다. 그런데 AI 기술에서 앞서가는 미국에서는 부작용도 속출하고 있다. ▷AI는 공정하리라는 기대와 달리 편향적이다. 아마존은 AI 채용 프로그램을 개발했다가 남성 지원자를 과대평가하는 편향을 발견하고 폐기했다. AI는 직원들의 축적된 인사고과 자료를 기준으로 판단하는데 고과를 잘 받는 핵심 부서엔 남성이 많았던 것. AI 재판 지원 시스템에서는 흑인의 재범 가능성을 높게 예측하는 편향이, AI 의료 검사장비에서는 여성과 유색인종의 이상 징후를 못 잡아내는 편향이 포착됐다. 백인 남성 신체가 오랫동안 표준이 돼왔기 때문이다. 기존 데이터에 의존하는 AI의 판단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AI를 의도적으로 악용할 경우 위험성은 더욱 커진다. 딥페이크 기술을 활용한 가짜 영상이 대표적이다. 소셜미디어의 여성 사진을 누드로 편집하는 AI가 등장했고, 오바마 대통령이 “트럼프는 머저리”라고 욕하거나,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이 러시아에 항복을 선언하는 딥페이크 영상이 돌았다. 최근에는 가방이나 열쇠 같은 물건에 붙여두면 실시간 위치를 확인해 분실 걱정을 덜어주는 애플의 에어태그가 스토킹 범죄에 활용돼 논란이다. AI를 탑재한 자율살상 로봇 시장이 커지는 것도 큰 문제다. ▷미국 백악관은 5개조로 구성된 ‘AI 권리장전(Bill of Rights)’ 청사진을 4일 발표했다. 차별받지 않을 권리, 개인정보를 보호받을 권리,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사용할 권리, AI 작동 방식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들을 권리, AI 대신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다. 하지만 수정헌법 10개조로 구체화된 1791년 ‘권리장전’과 달리 법적 구속력이 없어 ‘이빨 없는’ 지침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유럽연합은 2018년 개인정보보호법을 제정한 데 이어 AI로부터 피해를 입으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법안을 마련 중이다. ▷정부가 내년에 ‘디지털사회 기본법’을 제정하고 ‘디지털 권리장전’도 만든다고 한다. 최근 발표 내용을 보면 디지털 권리장전은 디지털 기술을 보편적 권리로 규정해 디지털 격차를 해소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윤리적 활용에 대한 고민은 빠져 있다. 기술은 빠르게 변화하는데 기본 인권을 지켜낼 제도 정비의 속도는 너무나 더디다. AI가 사람을 해치는 기술이 되지 않도록 입법과 기업 활동에 지침이 되는 정부 가이드라인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서울 신당역 화장실 살인사건은 2016년 5월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과 비슷하다. 강남역 사건도 통행량이 많은 주점 건물 화장실에서 발생했고, 남성이 죄 없는 여성을 무참히 살해했으며, ‘여자라서 죽었다’는 분노 섞인 추모와 함께 ‘여성혐오 범죄’ 논쟁이 뜨거웠다. 한국과 달리 미국과 유럽의 다인종 국가들은 인종, 민족, 종교, 성적 정체성 등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된 범죄를 따로 분류해 관리한다. 혐오범죄방지법이 있는 미국에서 혐오 범죄는 가중처벌감이다. 코로나 시기 아시아계를 겨냥한 범죄가 대표적인 혐오 범죄다. 구체적으로는 가해자가 특정 인종이나 종교 등에 대해 비뚤어진 신념을 가졌다는 증거가 명확하고, 이 신념이 범죄와 인과관계가 있으며, ‘아시아인이면 다 싫다’는 식으로 피해자가 대체 가능할 때 혐오 범죄로 규정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신당역 사건은 현재로선 여성혐오 범죄로 단정하기 어렵다. 경찰에 따르면 피의자 전주환은 스토킹으로 고소당해 중형을 선고받을 처지가 되자 보복 살인을 저질렀고, 여성혐오적 신념을 갖고 있다는 증거는 아직 없으며, 오랫동안 스토킹해온 피해자만 겨냥했다. 전주환이 범행 전 피해자를 닮은 여성을 뒤쫓는 영상이 공개됐는데,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여성혐오 범죄였다면 그 여성을 상대로 범행을 저질렀을 것”이라고 했다. 강남역 사건도 많은 사람들이 여성혐오 범죄로 기억한다. 범인은 흉기를 들고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남자 여섯을 그대로 보내고 여자가 들어오자 바로 범행을 저질렀다. 처음 보는 여성이었다. 검거 직후엔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그랬다”는 진술까지 했다. 하지만 경찰이 프로파일러 5명을 투입해 수사한 결과 내린 결론은 ‘정신질환에 의한 묻지마 범죄’였다. 범인은 2009년 조현병 진단을 받고 입원한 적이 있는데 사건이 발생한 2016년 초 약을 끊어 증상이 악화된 상태였다. 여성혐오가 아니라 악화된 정신질환 탓에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검찰도 범인을 입원시켜 장기간 정신감정을 실시한 후 같은 결론을 내렸다. 1심 법원도 전문의 감정을 통해 ‘여성혐오가 아니라 남성을 무서워하는 성격 및 망상으로부터 영향받은 피해의식으로 상대적 약자인 여성을 대상으로 범행했다’고 보고 30년형을 선고했다. 이는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됐다. 사건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대책이 달라진다. 정부는 강남역 사건 이후 범죄취약지역 폐쇄회로(CC)TV 확충, 신축건물 남녀 화장실 분리 설치와 함께 정신질환자 범죄 방지 대책을 발표했지만 ‘여성혐오 범죄라는 본질을 간과하고 물리적 환경 개선에만 치중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중증 정신질환자의 범죄라는 대목에 집중했더라면 어땠을까. 정신질환자들의 인권을 보호하되 자해나 타해 우려가 있는 경우 선진국처럼 법적인 절차를 밟아 강제 입원시켜 치료받게 하는 제도를 마련했더라면 ‘임세원 교수 사건’이나 ‘안인득 방화 살인사건’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강남역 신당역 사건이 여혐 범죄든 아니든 많은 여성이 공유하는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은 존중받아야 한다. 강력사건 피해자의 절대 다수는 여성이다. 하지만 성차별적 사회구조에 집중하느라 범죄의 재발을 막아줄 현실적 대책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여혐 범죄냐를 따지기보다 어디에서 놓치고 실패했는지 차분하게 복기해야 할 때다. 그래야 앞으로 막을 수 있었던 불행은 막고, 살릴 수 있었던 사람은 살릴 수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서울 신당역 여자화장실에서 발생한 스토킹 살인은 여러모로 충격적이다. 역무원인 피해자는 제복 차림으로 순찰 중이었다. 공격당한 직후 곧바로 비상벨을 눌러 1분 만에 동료 역무원들이 달려왔고, 119구조대가 8분 만에 도착했다. 하지만 제복도, 적시의 대응도 참사를 막지 못했다. 스토킹이 얼마나 무서운 범죄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번 사건은 스토킹 범죄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스토킹 가해자는 대부분 피해자와 아는 사이다. 피해자 A 씨(28)와 가해자 전모 씨(31)도 서울교통공사 입사 동기였다. 일반 범죄의 경우 특별한 원한 관계가 아니면 동일인을 상대로 반복해서 저지르진 않는다. 하지만 스토킹은 상대가 마음을 받아주거나, 물리적으로 스토킹을 못 하게 되는 경우가 아니면 장기간에 걸쳐 반복된다. A 씨는 입사 이듬해인 2019년부터 전화와 문자로 300차례 이상 스토킹을 당했다. ▷스토킹의 세 번째 특징은 갈수록 피해가 커진다는 점. 전 씨는 처음엔 ‘만나 달라’ ‘친구로 지내자’고 했다가 ‘불법 촬영물을 유포하겠다’며 협박하는 단계로 갔다. A 씨는 지난해 10월 불법 촬영과 협박 혐의로 전 씨를 고소했지만 이후로도 피해가 계속되자 올 1월 스토킹 혐의로 재차 고소했다. 징역 9년을 구형받은 전 씨는 결국 A 씨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1심 선고 하루 전날이었다. 범행 당일 법원에 두 달 치 반성문을 제출하고도 신당역에서 1시간을 기다렸다가 범행을 저질렀다. ▷그래서 스토킹은 초기에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데 바로 경찰에 신고하기란 쉽지 않다. 괜히 자극했다가 더 큰 봉변을 당할까 겁도 난다. 가족이나 직장에 피해가 갈까 숨기는 경우가 많아 주변에서 도와주기도 어렵다. A 씨도 피해가 3년 가까이 이어진 후에야 경찰을 찾았다. 법의 보호도 허술했다. 법원은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전 씨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그가 회계사 자격증을 가진 점도 참작했을 것이다. 경찰은 피해자가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신변보호 조치를 소홀히 했다. ▷이번 사건은 지난해 10월 스토킹방지법이 시행된 후 발생했다. 스토커 김태현의 서울 노원구 세 모녀 살해 사건이 발생한 직후 통과된 법이다. 예전엔 과태료 10만 원의 경범죄로 처벌하던 스토킹 범죄를 이제는 5년 이하 징역이나 5000만 원 이하 벌금형으로 다스린다. 하지만 무거운 형벌이 범죄를 막아주진 못한다. 스토킹을 사소한 범죄쯤으로 여기는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신당역 같은 일상의 공간은 “살아서 퇴근하고 싶다”는 메모로 가득한 두려움의 공간으로 남게 될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모든 시상식의 주인공은 수상자다. 그제 열린 미국 에미상 시상식에선 아시아 최초로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받은 ‘오징어게임’의 황동혁 감독과 배우 이정재가 특히 주목받았다. 그런데 시상식 뒤풀이를 뒤집어 놓은 건 조연배우 오영수(78)였다. ▷에미상 뒤풀이 참석자가 소셜미디어에 올린 35초짜리 영상엔 ‘오영수 꺾기 춤’ 현장이 담겼다. 점잖게 정장을 차려입은 백발의 신사가 뜻밖에 관절을 꺾어가며 격렬하게 춤추자 사람들이 박수치고 환호하는 영상은 시상식 하이라이트 장면 못지않게 화제가 됐다. 해외 누리꾼들도 “깐부 할아버지의 대변신” “78세 배우에게 이런 에너지가 나오다니”라는 댓글을 달며 놀라워했다. 그가 요즘도 매일 아침 집 근처 남한산성 밑에서 평행봉 50개를 하며 속 근육을 단련하는 줄 모르나 보다. ▷오영수는 팔순 가까워 찾아온 전성기를 누리는 중이다. 오징어게임에서 ‘1번 참가자’ 오일남 연기를 선보인 후로는 마스크를 쓰고 나가도 “사인해 달라”며 줄을 선다. 에미상 남우조연상 수상은 불발됐지만 올해 1월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한국 배우로는 처음으로 TV부문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이제 세계 속의 우리가 아니라 우리 속의 세계입니다”라는 그의 수상소감은 명대사 “우린 깐부잖아”와 함께 해외 언론도 보도했다. ‘글로벌 스타’의 티켓 파워는 다르다. 오징어게임 이후 출연작인 연극 ‘라스트 세션’은 전석 매진이었다. ▷시작은 미미했다. 월남한 흙수저 집안에서 ‘오세강’으로 태어나 막노동 하다 1967년 극단 광장에서 ‘오영수’로 배우 인생을 시작한다. 연기가 좋아서가 아니었다. 학력이 보잘것없어 번듯한 직장을 구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존재감 없던 내가 무대에선 관객을 웃기고 울리는 황홀한 경험”을 하는 맛에 50여 년간 200편 넘는 연극에 출연했다. 동아연극상(1980년)과 백상예술대상(1994년) 연기상을 수상한 실력자이지만 데뷔 45년 차에도 언더스터디, 즉 주연배우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투입되는, 무대에 선다는 기약도 없는 배역을 마다하지 않았다. 빛나지 않아도 무대에 진심이었던 시간은 내공으로 쌓였다. ▷그는 에미상 시상식 후 기자간담회에서 “전에는 민족의 나약한 면을 느꼈는데, 이제는 자신감을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45달러이던 시절 연기를 시작해 3만5000달러였던 지난해 오징어게임으로 전 세계 미디어업계를 흔들어 놓았다. 가난한 나라의 ‘딴따라’였던 그가 이제는 대중문화의 최강국에서 ‘명배우’로 대접받는다. 오영수는 흥이 날 만도 한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서른일곱에 얻은 늦둥이여서일까. 사춘기 반항이 한창이라는 남의 집 중2와 달리 아들은 엄마와 꼭 붙어 다니는 ‘엄마 껌딱지’였다. 폭우가 쏟아지던 6일 새벽도 그랬다. ‘차를 옮기라’는 관리사무소 방송에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엄마를 따라나섰다. 그날은 따라오지 말라고, 엄마 혼자 가겠다고 끝까지 말렸어야 했다. ▷그날 새벽 태풍 ‘힌남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날이 개고 있던 수도권과 달리 경북 포항의 수해 상황은 심각했다. 인근 하천이 범람해 모자가 사는 아파트 지하주차장으로 물이 밀려들었다. 엄마는 차를 빼려다 포기하고 나오려 했지만 수압에 차 문이 열리지 않았다. 밖에 있던 아들이 문을 열어줬다. 이미 걷기 힘들 정도로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몸이 약해 탈출할 자신이 없었던 엄마는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들을 어렵게 돌려세웠다. “너라도 살아서 나가. 수영 잘하잖아.” ▷기독교인인 엄마는 천장 모서리 배관 위에 엎드려 구조될 때까지 15시간을 기도하며 버텼다. 늦둥이를 살아서 보겠다는 의지로 체온이 35도까지 떨어지는 상황을 견뎠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아들이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기력을 회복할 즈음에야 남편이 믿기 어려운 말을 했다. “마음을 단디 먹어야 우리 아이 마지막을 볼 수 있다.” 아, 이 지옥을 보라고 신은 나를 어렵게 살려낸 건가. 왜 늙은 내 몸을 거두어가지 않고 축구와 떡볶이를 좋아하던 열다섯 어린아이를 데려가셨나. ▷고인이 된 박완서 소설가는 26년간 자랑스럽게 키워온 의사 아들이 사고로 앞서 갔을 때 묵주를 집어 던지며 신을 원망했다. “그 애 없는 세상의 무의미함도 견디기 어렵거니와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벌을 받나 하는 회답 없는 죄의식은 더욱 참혹하다”고 썼다. “참척(慘慽)을 당한 어미에게 하는 조의는 그게 아무리 조심스럽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위로일지라도 모진 고문이다.” ▷그날 물 빠진 지하주차장에서는 늦둥이 김 군과 함께 해병대를 갓 전역한 서 씨(22), 20년 넘게 홀어머니를 모셔온 홍 씨(52), 33년간 장손집 살림을 꾸려온 허 씨(55), 베트남 참전 용사 안 씨(76), 자식에 손 벌리기 싫어 퇴직 후에도 지게차를 몰던 남 씨(71)와 아내 권 씨(65)가 발견됐다. 성실했던 이들의 황망한 죽음을 보고서야 매뉴얼을 뜯어고치고, 차수벽을 세우고, 배수펌프를 설치하느라 부산하다. 포항의 비극 이후 세상은 좀 더 안전해지겠지만 그리운 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100년 만에 가장 둥근 보름달이 뜬다는 올 추석, 엄마는 선물인 듯 비수인 듯 늦둥이의 마지막 인사를 뇌고 또 뇌며 통곡할 것이다. “엄마. 키워줘서 고마워요.”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정부가 지방소멸 방지 대책을 가동했다. ‘무인(無人)촌’으로 전락할 위기의 지역에 10년간 10조 원을 투자하는 프로젝트다. 고향을 등지는 청년을 붙잡기 위해 시군구가 내놓은 계획들을 보면 의문이 든다. 이렇게 한다고 대도시로 빠져나간 젊은이가 돌아올까. 설사 성공하더라도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 아닌가. 감사원이 지난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도 소멸위기다. 25년 후엔 서울 강북과 도봉구가 소멸 고위험, 종로 서초 송파 등 23개구는 소멸 위험 단계에 진입한다. 95년 후가 되면 전체 인구는 일제강점기보다 적은 1510만 명으로 쪼그라드는데 이 중 절반 이상이 65세 이상이다. 저출산 고령화로 요약되는 인구위기는 시차가 나고 정도가 다를 뿐 모든 선진국들이 겪는 문제다. 의료기술의 발달로 영아 생존율이 높아지고 기대수명이 길어지면서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었다가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 합계출산율이 2명 이하로 뚝 떨어진다. 해법은 두 가지, 출산을 장려해 고령화 속도를 최대한 늦추는 동시에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국의 인구학자 폴 몰런드는 서구 선진국의 인구 변동을 색깔로 표현한다. 젊은 이민자 유입으로 고령화가 완화돼 ‘회색’은 옅어지고, 백인 인구 감소로 ‘흰색’은 ‘유색’으로 대체된다. 대표적 이민국가인 미국의 백인 인구 비중은 지난해 60% 아래로 떨어졌다. 영국의 백인 비중도 2050년이면 60%대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런던 시장은 파키스탄계 이민자 출신이고, 보수당 총리 후보 8명 중 4명이 아시아와 아프리카계 이민자다. 프랑스의 무슬림 인구 비중은 10%에 육박한다. 호주도 출산율이 급락하자 ‘백호주의’를 버렸다. 한국은 일본과 함께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회색화’가 진행 중인데 이는 보수적인 이민 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이대로 가면 12년 후엔 일할 사람보다 일자리가 많아진다. 제조업과 농업, 간병 분야는 이미 외국인이 아니면 돌아가지 않는다. 부족한 일손을 정년 연장으로 해결하자고? 일하는 노인 비중(34%)은 이미 선진국의 2배가 넘는다. 더 이상 저출산 대책에만 매달릴 수는 없다. 인구 대비 4%도 안 되는 체류 외국인 수를 늘리되, 취업 외국인의 11%에 불과한 전문인력 비중을 키우는 쪽으로 이민 정책을 수정해야 한다. 김동욱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숙련된 이민자가 국내총생산 증가에 기여하는 정도가 비숙련 인력의 2배라는 연구 결과들을 인용하면서 젊은(Young) 고학력(Educated) 숙련 근로자(Skilled)인 ‘YES족(族)’ 유치에 적극 나서자고 제안한다. 고급 두뇌 쟁탈전은 이미 뜨겁다. 반도체 인력의 절반을 인도 중국 멕시코 중미에 의존하는 미국은 반도체 육성법 통과 후 해외 인재 추가 영입을 위해 이민법을 만지작거리는 중이다. 중국도 ‘반도체 굴기’를 위한 부족 인력 20만 명을 찾아 한국과 대만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한국은 매년 대졸 반도체 인력만 6000명이 모자란다. 이를 꼭 국내에서만 조달해야 할까. 노인이 많은 사회는 범죄율이 낮아 평화롭고, 젊은 인구가 늘면 폭력과 범죄가 늘어난다고 한다. 젊은 이민자가 몰려오면 문화의 차이로 갈등 지수가 더 높아질 것이다. ‘국가소멸’이라는 시한폭탄이 터지기 전에 결정해야 한다. 평화롭게 소멸할 것인가, 갈등 요소를 관리해가며 활력 있게 살 것인가.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항일 무장투쟁사엔 여성의 자리도 있다.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만주에서 암살단원으로 활약한 남자현, 장제스가 ‘중국 장병 1000명보다 낫다’고 극찬한 여성 광복군 1호 신정숙 지사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항일 무장투쟁의 최전선에 섰던 ‘조선의 짠타크(잔다르크)’ 김명시(金命時·1907∼1949) 장군이 있다. ▷경남 마산에서 태어난 그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다. 1925년 배화여고 중퇴 후 고려공산청년회 유학생으로 선발돼 러시아 유학을 떠났다. 본격적인 무장투쟁에 뛰어든 건 20세부터다. 중국 상하이에 파견돼 일본 영사관 경찰서 기차역 공격을 주도했다. 1932년 국내로 잠입해 활동하다 조봉암 등과 ‘조선공산당 재건 사건’ 주모자로 붙잡혀 7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엔 중국으로 망명해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여성부대를 지휘하며 무장투쟁을 이어갔다. 한 손에는 총, 다른 손에는 확성기를 들고 싸우는 그를 사람들은 ‘백마 탄 여장군’이라고 불렀다. ▷광복 후 그는 개선장군이 돼 돌아왔다. 1945년 12월 23일자 동아일보는 여장군의 귀국 소식을 1면에 전하고 있다. “부하 2000명을 가지고 항일전에 활동하여 무훈을 세운 우리 조선의 ‘짠타크’ 여장군 김명시 여사.” 독립신보는 기획 ‘여류 혁명가를 찾아서’에서 김 장군을 이렇게 묘사했다. “크지 않은 키, 검은 얼굴, 야무지고 끝을 매섭게 맺는 말씨, 항시 무엇을 주시하는 눈매, 온몸이 혁명에 젖었고 혁명 그것인 듯이 대담해 보였다.” ▷하지만 좌우 대립이 극렬했던 해방 정국에서 그는 신탁통치 반대 활동을 하다 체포돼 부평경찰서 유치장에서 입고 있던 치마를 뜯어 혁명가의 삶을 제 손으로 마감했다. 향년 42세였다. 그의 부고 기사에는 ‘북로당 정치위원 김명시’로 나온다. 한 시민단체가 2019년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을 두 차례 했지만 ‘북로당 정치위원’ 이력이 발목을 잡았다. 결국 북로당에 ‘정치위원’ 직책이 없고, 고인이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한 기록이 없다는 사실이 인정돼 올해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사후 73년 만이다. ▷잊혀진 여성 항일 운동가를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유관순 열사와 함께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에서 옥고를 치른 6인의 생애가 영화로 제작됐고, 여성 운동가 200명의 삶을 다룬 책도 나왔다. 지금까지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1만7285명 가운데 여성은 3.28%. 서대문형무소 수형 기록에 나오는 4837명 가운데 여성이 180명(3.72%)임을 감안하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불꽃처럼 살다 간 여성들을 발굴하는 정부의 노력이 더 필요할 것 같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초등학교 입학 연령을 만 5세로 낮춘다는 정부 발표에 맘카페가 뒤집힌 건 이해할 수 있다. 역대 정부마다 검토해 왔다지만 국정과제에도 없던 정책을 밑도 끝도 없이 ‘2025년 시행 추진’이라고 시기까지 못 박았으니 체감도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이 “당장 철회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건 5년 전 상황을 돌아보면 이해하기 어렵다. 학제개편을 주장해온 대표적 정치인은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이다. 그는 전 국민의당 공동대표 시절이던 2017년 2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도 학제개편을 제안했다. 유치원 2년 과정을 의무화하고, 만 5세에 초등학교에 입학해 5년, 중학교 5년, 진로탐색 또는 직업학교 2년을 다닌 뒤 17세엔 졸업하도록 하자는 내용이었다. 이에 우상호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는 “상당히 의미 있는 제안”이라며 “지금의 학제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져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했다. 또 “안 의원의 학제개편안은 교육 전문가들이 이미 주장해온 안이니 국회에서 본격적으로 검토하자”며 새누리당(현 국힘)에 적극 동참을 촉구하기까지 했다. 당시 국회에서는 취학연령을 1년 앞당기는 학제개편과 선거연령을 만 18세로 낮추는 방안을 연동해 논의하고 있었다. 같은 민주당이라면 이번 개편안에 대해 졸속 추진은 비판하더라도 공론화를 주장해야지 철회를 요구할 일은 아니다. 학제개편을 하려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기저귀 떼자 벌어지기 시작하는 사회 격차를 줄여보자는 취지다. 유치원 취원율은 서울도 60%가 안 된다. 대학 등록금의 2∼5배 되는 영어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월 20만∼30만 원대인 사립유치원 비용도 부담돼 어린이집에 가는 아이들이 여전히 많다. 정부가 만 5세부터 무료로 책임지고 돌봐주겠다고 하면 반길 부모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쪼그라들고 늙어가는 인구 구조다. 지금의 학제는 인구가 증가하던 시기엔 작동했지만 총인구는 이미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로 접어든 상태다. 생산가능인구(15∼64세) 비중이 2060년이면 48.5%로 폭락하고, 잠재성장률도 22년 후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꼴찌가 된다. 그래서 온갖 저출산 대책과 함께 나온 것이 일하는 기간을 늘리자는 아이디어다. 노무현 정부는 직장 생활을 시작하는 입직 연령을 2년 앞당기고 퇴직은 5년 늦추는 ‘인적자원 활용 2+5 전략’을 발표했다. 이런 큰 틀에서 만 5세 취학이 검토된 것이다. 국회예산정책처도 입직을 1년 앞당기면 첫아이 출산 확률이 1.9%포인트 높아진다며 2020년 학제개편을 제안한 바 있다. 과거 정부는 취학 연령을 낮추면 한 해 두 개 학년을 수용해야 하는 수십조 원의 부담 때문에라도 엄두를 못 냈다. 그런데 지금은 교사와 교실을 늘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출생아 수가 급감하고 있다. 조기 입학이 싫다면 유치원 교육 의무화로 유아기 격차를 줄이고, 고교 직업교육을 내실화하는 한편 고졸과 대졸 취업자 간 임금 격차를 해소해 입직 연령을 앞당기는 방법도 있다. 취학연령 조정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학부모나 유아단체가 거리로 나오는 건 그럴 만하다. 하지만 나라의 장래를 내다봐야 하는 정치인들까지 하루살이처럼 시위에 편승해 정치적 재미를 보려는 행태는 설익은 정책으로 혼란을 야기한 정부만큼이나 무책임하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지금이라도 ‘상당히 의미 있는 제안’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기 바란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서울아산병원은 미 뉴스위크의 ‘2022 세계 최고 병원’ 평가에서 30위를 기록한 세계 의료 선도 병원이다. 국내에선 4년 연속 1위다. 그런 병원에서 일하던 간호사가 뇌출혈로 쓰러졌으나 수술할 의사가 없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뇌를 진료하는 ‘신경’ 분야에서 세계 8위라는 평가를 받는 병원에서 발생한 일이다. 정부는 병원의 대처 과정을 조사한 후 근본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서울아산병원 의사 1659명 중 신경외과 의사는 25명인데 이 중 머리를 여는 개두(開頭) 수술이 가능한 의사는 2명이다. 간호사 A 씨가 일요일인 지난달 24일 오전 출근 직후 심한 두통으로 쓰러졌을 때 2명 중 한 명은 해외 학회에, 다른 한 명은 지방에 갔다고 한다. 골든타임 내 조치가 결정적인 분야 의사가 동시에 자리를 비워야 했을까. A 씨는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진 후 지난달 30일 사망했다. ▷A 씨가 특별히 운이 나빴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뇌졸중 응급의료 체계는 허술하다. 고령 인구 급증으로 개두 수술 환자는 증가하고 있지만 뇌혈관 외과의는 146명에 불과해 지방 대학병원의 경우 아예 없는 곳도 많다. 정부의 뇌졸중 적정성 평가에서 최고등급을 받은 서울아산병원에도 의사 2명이 1년 365일 ‘퐁당퐁당’ 당직을 설 정도다. 머리를 여는 어렵고 위험한 수술임에도 의료수가가 가산료까지 합쳐 400만 원도 안 된다. 성형수술 비용 수준이다. 병원에선 장사가 되지 않으니 적정 인력을 두지 않고, 이 분야 지원자도 줄고 있어 젊고 유능한 뇌혈관 외과의는 멸종 위기라고 한다. ▷왜곡된 의료수가 체계로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등 생명과 직결되는 ‘바이털(필수의료)’ 분야는 붕괴 직전이다. 메스를 잡아야 할 외과의는 요양병원으로, 신경외과 의사는 MRI 찍는 척추통증 클리닉으로, 흉부외과 의사는 하지정맥 클리닉으로 간다. 산부인과 전공의 10명 중 6명은 전문의 수료 후 분만을 포기하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출생아 10만 명당 모성 사망자 수는 2017년 7.8명에서 2020년 11.8명으로 증가했다. ▷의사 수를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국내 의사 수는 인구 1000명당 2.5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3.7명보다 적다. 의대 정원은 17년째 동결이다. 그 빈자리를 약 1만 명의 간호사가 ‘PA(Physician Assistant)’라는 직함으로 의사 업무를 대행하며 불법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저출산 고령화 추세를 반영해 적정 의료 인력을 다시 계산하고, 수가 체계를 바로잡아 어렵게 생명을 살리는 일에 보람을 느끼는 의사들이 많아져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과학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이 과학자의 부정행위다. ‘천동설’의 프톨레마이오스는 그리스 천문학자의 관찰 자료를 가져다가 직접 관찰한 것처럼 썼다. 뉴턴은 가설에 맞게 적도의 기울기 같은 수치를 조작했고, 멘델도 완두콩 실험 데이터가 너무 딱 떨어져 ‘데이터 마사지’ 의혹을 받았다. 20세기 과학 윤리가 확립된 후로도 부정행위는 근절되지 않았다. ▷저서 ‘도덕적 마음’으로 국내에서도 유명한 하버드대 심리학과 마크 하우저 교수는 2010년 대학의 자체 조사에서 논문 8편을 조작한 사실이 드러났다. 2019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그레그 서멘자 존스홉킨스대 교수의 논문 30여 편에선 그림 변조 등의 흔적이 발견됐다. 2018년엔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가 소장으로 있는 일본 연구소 내에서 유도만능줄기세포 논문을 날조한 사실이 확인됐고, 2014년엔 일본 노벨상의 산실인 이화학연구소 연구원이 ‘제3의 만능세포’ 논문을 조작한 것으로 드러나 공동 저자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연구 부정행위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저명 학술지에 논문이 실리고 인용되는 횟수에 따라 승진과 연구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특히 인기 연구 분야는 선점 경쟁이 치열해 연구자가 설정한 가설에 맞춰 데이터를 손보려는 유혹이 강하다. 표절 같은 부정행위는 상호 감시로 쉽게 발각되는 데 비해 데이터 조작은 내부 고발이 아니면 드러나기 어렵다. 부정행위가 확인돼 논문이 철회되는 경우는 1만 편 중 약 2편에 불과하다고 한다. 2005년 ‘황우석 사태’도 내부자의 고발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학술지 ‘사이언스’는 2006년 ‘네이처’에 게재된 후 16년간 알츠하이머 치매 치료제 연구에 가장 많이 인용된 미네소타대 연구팀의 논문 조작 의혹을 21일 제기했다. 문제의 논문은 뇌에 축적되는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 덩어리가 알츠하이머의 주요 원인이라는 내용. 사이언스는 6개월간 조사한 결과 그림을 짜깁기하거나 데이터를 조작했음을 보여주는 “놀라울 정도로 명백한” 증거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논문은 2300회 인용됐고,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이 연구에 2억8700만 달러(약 3700억 원)를 지원했다. ▷과학계는 논문 조작이 사실일 경우 이 논문을 출발점으로 삼은 그동안의 연구와 치료제 개발 노력이 헛일이 되고 만다며 들끓고 있다. 반면 조작이 있었다 해도 전체 연구 성과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라는 반론도 나온다. 뉴턴과 멘델의 데이터 마사지로 만유인력이나 유전 법칙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듯 말이다. 이번 사태가 ‘과학적으로 사고하되 윤리적으로 행동하라’는 과학계 금언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gna.com}
인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변호사가 비상한 기억력과 상상력으로 장애를 극복하고 승승장구한다는 판타지다. 최근 미국에서 열린 제1회 장애인 US오픈에서는 ‘우영우’ 못지않은 꿈같은 드라마가 펼쳐졌다. 발달장애 프로골퍼 이승민(25)이 연장 접전 끝에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골프 역사의 일부가 됐다. ▷이승민은 두 살 무렵 자폐성 발달장애 진단을 받았다. 지능지수(IQ)는 6, 7세 수준인 66으로 평균(85∼115)보다 낮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냄새만으로 종류를 알아맞힐 정도로 잔디를 좋아했고, 커서는 푸른 잔디 위를 나는 하얀 공까지 사랑하게 됐다. 중1 때 골프채를 잡고, 고2 때 세미 프로골퍼 자격증을 땄으며, 3년 후인 2017년엔 비장애 선수들도 힘든 ‘골프 고시’ 1부 투어 프로 선발전을 통과했다. 발달장애 선수로는 처음이었다. ▷자폐성 장애인이 운동을 잘하기는 어렵다. 감각과 운동을 담당하는 뇌의 시상(視床)과 신경세포의 집합체인 대뇌피질을 연결하는 경로가 손상돼 있다. 통합운동능력이 떨어져 걸음걸이나 손동작이 부자연스럽고 자전거 타기를 힘들어한다. 머리로는 자전거의 작동 원리를 아는데 발로는 페달을 굴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승민 선수의 어머니는 “배우고 나면 금방 잊어버려 끝없이 반복 훈련했다. 공에 집중하고 그 집중력을 유지하도록 가르치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고 전했다. ▷장애인 복지가 발달한 미국에서도 우영우 같은 변호사는 드물다. 우영우의 실존 모델로 지목된 헤일리 모스는 2019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을 때 ‘플로리다 최초의 자폐증 있는 변호사’로 소개됐다. 운동선수도 마찬가지다. 2018년 타릭 엘 아보어가 자폐성 장애인으로는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선수가 됐다. 의사소통의 어려움에도 팀 스포츠에서 거둔 성공이라 더욱 주목받았다. 국내에서는 2005년 세계장애인수영대회 배영 200m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운 김진호가 유명하다. 김진호도 엄마가 24시간 붙어 지내면서 탈의실 사용법, 샤워하는 법, 수영장 예절 등을 비디오 촬영까지 해가며 반복해 가르쳤다. ▷장애인 US오픈에선 15세 소녀부터 80세 할아버지까지 골퍼 96명이 참가해 장애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코스에서 3라운드 54홀 경기를 펼쳤다. ‘자폐증’은 유사 장애와 합쳐 2013년부터 ‘자폐스펙트럼’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장애는 있고 없고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인 것이다. 국내 자폐성 장애인은 3만4000명. 이들의 부모는 자녀가 우영우나 이승민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 제 모습대로 제 필드에서 자립할 수 있는 사회를 꿈꿀 뿐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민노총의 대우조선해양 불법 점거 사태가 어제까지 49일째 이어졌다. 노사는 정부의 중재로 밤늦게까지 협상을 진행했는데 민노총은 이번에도 불법 파업에 대한 민형사상 소송 취하를 요구하고 있다. 이번 사태로 누적 피해액이 7000억 원이 넘는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 5년을 거치며 법 위의 기득권 집단이 된 민노총 벽을 윤석열 정부는 어떻게 넘을까. 정부는 지난달 화물연대 총파업이라는 첫 시험대에서 좌절을 맛봤다. 화물연대는 8일간의 파업 끝에 안전운임제 연장이라는 요구를 관철시켰다. 안전운임제란 운송비 변동에 따라 정부가 최저운임을 정하는 일종의 물가연동제다. 어떤 자영업자가 원가가 오른 만큼 상품이나 서비스 가격을 강제적으로 올려 받을 수 있겠나. 시장 원리에도, 형평성에도 맞지 않는 요구였지만 정부는 맥없이 굴복했다. 정부의 노동개혁은 시작도 하기 전에 동력을 잃은 듯하다. 노동개혁의 핵심은 노조가 보호하는 대기업 정규직의 양보를 끌어내 불평등과 비효율을 고착시키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손보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첫 개혁 과제로 근로시간제와 직무급제 개편이라는 ‘곁가지’를 내놨다. 그것도 당장 ‘추진’이 아니라 미래노동시장연구회를 구성해 ‘연구’한다고 한다. “노동개혁의 목표도 전략도 의지도 없다”는 혹평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민노총에 밀리면 노동개혁만 어려워지는 게 아니다. 대통령의 3대 개혁과제인 연금개혁과 교육개혁도 끝이다. 연금개혁의 최대 걸림돌 역시 민노총이다. 연금개혁을 위한 각종 위원회는 노동계 추천 인사가 당연직으로 들어가 큰 목소리를 내는 구조다. 장외투쟁의 화력은 더 막강하다. 문 정부 시절인 2018년 민노총은 ‘국가 지급보장 명문화’와 ‘소득대체율 삭감 중단’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벌였다. 연금이 고갈되든 말든 소득대체율은 양보할 수 없으니 기금이 없으면 미래 세대에게 세금을 걷어서라도 달라는 주장이었다. 결국 무산되기는 했지만 문 정부의 4가지 개혁안 어디에도 소득대체율 삭감은 없었고, 당시 여당은 국민연금 지급보장을 명문화한 국민연금법 개정안까지 앞다퉈 발의했다. 민노총의 ‘간보기’ 파업에도 밀리는 맷집으로 연금개혁을 할 수 있을까. 정부는 교육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 않았지만 학령인구 급감이라는 변수를 피해 갈 방법은 없다. 지난 21년간 초중고교 학생 수가 33% 줄어드는 동안(795만2000→532만3000명) 교사 수는 거꾸로 29% 증가했다(33만6000명→43만5000명). 학생보다 교사가 많은 학교가 늘고 있고, 임용고시에 합격하고도 자리가 없어 마냥 기다리는 ‘임용 절벽’도 심각한 상태다. 교원 구조조정이 불가피하지만 노무현 정부 때도 부적격 교사 퇴출을 위한 교원평가제를 연가투쟁에 전방위 압박으로 무산시킨 전교조다. 이번이라고 가만히 있겠나. 3대 개혁을 하지 않으면 그 피해는 미래 세대에게 돌아간다. 많은 청년들이 노조 기득권의 진입장벽에 가로막혀 임금도 처우도 열악한 일자리를 전전하고, 이렇게 번 돈의 상당 부분을 기성세대의 연금으로 내놓으며, 예비 교사들은 교단에 설 기회를 잃고, 학생들은 양질의 교육을 받을 권리를 박탈당하게 될 것이다. 대우조선해양 파업 현장에서 한 노조원은 좁은 철골 구조물 속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그가 해방되길 바라지만 그 대가가 기회도 출구도 없는 좁은 구조물 안에 미래 세대를 가두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유엔이 정한 ‘세계 기초과학의 해’인 올해 한국 과학계는 겹경사를 맞았다. 국내 기술로 개발한 우주발사체 누리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한 데 이어 허준이 미 프린스턴대 교수(한국고등과학원 석학교수·39)가 한국계 처음으로 필즈상을 받았다. 필즈상은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지만 40세 미만 수학자들에게 4년 주기로 수여해 노벨상 받기보다 어렵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인 최초의 노벨과학상 수상도 먼 얘기만은 아니지 않을까. 한국 과학자들 중 노벨상에 가장 가까이 간 사람은 4명. 세계적 학술정보회사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가 유력 수상 후보(Citation Laureates)로 발표한 학자들이다. 유룡 한국에너지공대 석학교수(67), 박남규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62), 현택환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석좌교수 겸 기초과학연구원(IBS) 나노입자연구단장(58), 5일 향년 94세로 별세한 이호왕 고려대 명예교수다. 고인은 ‘한탄 바이러스’를 최초로 발견한 후 백신과 치료법까지 개발해낸 공로로 지난해 유력 후보 명단에 올랐다. 살아있는 ‘노벨 클래스’ 과학자 3인에게 물었다. “언제쯤 한국 최초의 노벨과학상을 받게 될까.”》“화학 수상 분위기 무르익어” 2014년 한국인 최초로 유력 후보 명단에 오른 유 교수는 “노벨상을 받는 시기가 빨리 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유력 후보로 발표될 당시 KAIST 화학과 교수 겸 IBS 나노물질 및 화학반응연구단장이던 유 교수는 약물 전달, 촉매, 에너지 저장 용도로 활용될 수 있는 기능성 메조다공성물질 설계 분야의 권위자다. “노벨상은 가장 훌륭한 연구를 했다고 주는 게 아니다. 인류 공헌도도 높아야 하는데 그건 운이 좋아야 한다. 유력 후보 명단에 오른 한국 학자가 20명 정도 나오고 운도 따른다면 그때 받게 될 것이다.” 2002년부터 매년 유력 후보 명단을 발표해온 클래리베이트는 피인용 세계 상위 0.01%에 속하는 논문을 쓴 학자들 중 연구의 독창성과 인류 공헌도를 따져 후보를 선정한다. 선정된 학자들 가운데 실제 노벨상을 받은 비율은 17%다. 확률적으로는 이 명단에 오른 한국인이 6명 이상 되면 수상자가 나올 수 있는 셈이다. 2020년 유력 후보로 꼽힌 현 교수는 수상 후보로 예측되는 시기와 실제 수상 간의 시차가 4∼5년임을 감안하면 “화학 분야는 한국인 수상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것 같다”고 했다. 현 교수는 나노 입자를 균일하게 합성하는 방법을 개발해 QLED 디스플레이 등의 상용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클래리베이트가 유력 후보로 발표한 그해에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2013년 물리학상 수상자인 영국의 피터 힉스가 유일하다. 2019년 화학상 수상자 3명 중 2명은 4년 전인 2015년, 2020년 화학상 수상자는 2015년 유력 후보 명단에 올랐다.”노벨상 근접 학자 17명 2017년 유력 후보가 된 박 교수도 “노벨상으로 가기 전 단계로 알려진 국제적 상을 받거나 해외 학계에서 수상 후보로 점치는 한국 학자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며 “이것이 상서로운 징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예측을 해본다”고 했다. 박 교수는 세계 최초로 안정적인 페로브스카이트 태양전지를 개발하고 효율을 높여 상용화도 이룬 공을 인정받았다. “일본이 노벨상을 많이 받아서인지 정보가 빠르다. 2018년 도쿄대 방문 교수로 갔는데 이차전지가 노벨상을 받을 거라는 얘기를 하더라. 놀랍게도 2019년 이차전지를 개발한 학자들이 화학상을 받았다. 당시 그 자리에서 10년 후엔 태양전지가 받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첫 한국인 수상자가 언제 나올지는 모르지만 이후로는 봇물 터지듯 많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박세리 선수 이후 한국 여성 골퍼들이 줄줄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에서 우승했듯 말이다.” 이상 3명은 모두 화학상 부문 수상 후보들이다. 이 밖에 생리의학상에 가장 근접한 학자로 RNA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김빛내리 서울대 생명과학부 석좌교수 겸 IBS RNA연구단장(53)이 있다. 김 교수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세계 최고 권위의 학술원인 미국국립과학원과 영국 왕립학회에 모두 회원으로 선정됐다. 2020년엔 코로나의 RNA 전사체를 세계 최초로 분석해 진단 기술을 개선하고 새로운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기여했다. 한국연구재단은 2019년 유, 박, 현, 김 교수를 포함해 ‘노벨과학상 수상자의 연구업적에 근접한 한국 연구자’ 17명의 명단을 발표한 적이 있다. 화학 분야가 9명으로 가장 많았고, 생리의학 분야가 5명, 물리학은 김필립 하버드대 교수 등 3명이었다.“한국 과학 기적적으로 발전” 현 교수는 “피겨 여왕 김연아, 축구 선수 손흥민, 영화 감독 박찬욱이 나올 동안 과학계는 뭐 했느냐는 말을 많이 듣는다”며 “하지만 한국 과학은 기적적으로 발전했다”고 평가했다. 한국 과학기술의 역사는 길게 잡아도 70년이 채 안 된다. 한미 원자력협정을 체결하고 문교부에 원자력과를 설치한 때가 1956년, 산업기술 연구개발을 주도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설립은 1966년, 산업기술에서 기초과학 육성으로 정책 전환을 한 시기가 1989년, 노벨상 수상자 배출을 목표로 IBS를 설립한 건 2011년이다. IBS가 벤치마킹한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와 일본 이화학연구소가 1911년과 1917년 설립됐으니 100년 늦은 셈이다. 출발은 늦었지만 지난해 한국의 과학기술혁신역량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 회원국 중 5위로 올라섰다(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누리호가 세계 7대 우주강국의 역사를 쓰며 솟아오를 때 같은 과학하는 사람으로서 눈물이 났다. 우주발사체는 과학 기술이 집대성된 종합 과학이다. 누리호가 성공했다는 건 전반적인 과학기술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증거다.”(박 교수) 한국 과학기술의 도약 비결로 유 교수는 경제성장과 국가적 과학기술 진흥 노력을 꼽았다. 유 교수는 1973년 대학에 입학했는데 3학년이 될 때까지 시골집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에 머리 태워가며 공부했다고 한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 비중이 0.5%에도 미치지 못했던 시절인데 지난해는 4.64%로 이스라엘에 이어 세계 2위의 연구개발 투자 강국이 됐다. 박 교수는 한국인 특유의 향상심과 교육열 덕분이라고 했다. “한국인에겐 1등 하고 싶어 하는 DNA가 있다. 우리의 교육제도와 과열된 교육열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창의성도 어느 정도 기초가 만들어진 다음에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필즈상을 받은 허 교수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 받은 교육이 바탕이 됐다고 본다.”“실적주의 연구풍토 벗어나야” 유 교수는 ‘노벨 클래스’의 학자층이 두꺼워지려면 앞으로 초중등 교육도 연구 문화도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제를 잘 만드는 사람이 필요한데 우리 교육은 문제를 잘 푸는 사람, 틀리지 않는 사람을 영재로 뽑는다. 엉뚱한 호기심을 격려하는 사회 분위기가 필요하다. 연구는 고유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실적을 많이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순수한 호기심에 연구해서 좋은 논문을 썼더니 남들이 인용을 해가는 식이어야 하는데 우리는 처음부터 인용이 많이 되는 연구, 그럴듯한 연구에 매달린다. 그래야 승진도 하고 연구비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실적 위주의 사회가 돼 가는 건 경계해야 한다.” 박 교수는 “요즘 젊은 과학자들은 새로운 걸 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간섭 덜하고 자유롭게 놀도록 놔두면 잘될 것”이라고 낙관했다. “기초다 응용이다 나눌 필요도 없다. 기초 없이는 응용이 안 되고, 응용을 생각하지 않는 기초도 없다.” 현 교수는 과학 영재들이 의대로 몰려가는 현상을 우려했다. “천재 한 명이 큰 문제를 해결하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여러 연구자들이 협업해 해법을 찾는 추세다. 아인슈타인이나 퀴리 시대는 논문 저자가 한 명이었지만 지금은 논문 한 편에 저자가 10명이 넘는다. 남들이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을 시도하고 만들어내는 작업에 흥미를 느끼는 젊은 연구자들이 없으면 안 된다. 우리나라가 이만큼 성장하기까지는 다른 나라 과학자들의 연구 성과가 있었다. 이제는 우리가 인류에 기여하는 과학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해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세계를 뒤흔든 대예측 가운데 빗나간 대표적 사례가 1798년 맬서스의 인구론이다. 인구가 식량보다 빨리 증가해 지구에 종말이 온다는 그의 예언은 ‘인구 폭발론’으로 이어져 20세기 중후반까지 위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지금은 ‘인구 절벽론’이 대세다. 실제로 세계 인구 증가세가 꺾일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다. ▷유엔이 11일 세계 인구의 날을 맞아 발표한 ‘세계인구전망 2022’에 따르면 2020년과 2021년 세계 인구 증가율은 1950년 이후 처음으로 1% 미만으로 떨어졌다. 유럽을 포함한 61개국에서 인구가 줄어드는 ‘인구학적 천이’가 시작됐다. 올해 인구는 80억 명을 넘어서고, 2080년대엔 104억 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내려올 것으로 전망된다. 유엔이 인구 감소 전망을 내놓은 것은 처음이다. 세계 인구의 3분의 2가 현재 인구 유지를 위해 필요한 출산율(2.1) 미만인 나라에 산다. 세계 최대 가톨릭 국가 브라질의 출산율도 1.7에 불과하다. ▷인구 축소 못지않게 큰 변화를 몰고 올 변수는 중국의 인구 감소와 세계적인 고령화 추세다. 현재 세계 1위 인구 대국은 중국(14억3000명), 2위는 인도(14억1000명)지만 내년에는 이 순위가 바뀐다. 세계는 빠르게 늙어가고 있는데 2030년이면 65세 이상 인구가 10억 명, 80세 이상은 2억10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영국 경제학자 찰스 굿하트는 저서 ‘인구 대역전’(2020년)에서 이 두 가지 변수의 결합만으로도 인플레이션 시대가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따르면 세계는 중국의 인구 증가와 세계 시장 편입이라는 ‘스위트 스폿(최적의 조합)’ 덕분에 고성장 저물가 시대를 구가했다. 1990∼2017년 미국과 유럽의 생산가능인구가 6000만 명 증가하는 동안 중국은 2억4000만 명이 늘었다. 그런데 세계 시장에 노동력을 공급하던 중국이 인구 절벽으로 가고 있다. 소비량보다 생산량이 많은 ‘디플레이션적’ 노동자는 줄어드는 반면, 생산하진 않으면서 소비하는 ‘인플레이션적’ 은퇴자는 늘어나는 구조다. 중국 의존도가 높은 데다 고령화 속도가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에 더 무겁게 다가오는 경고다. ▷1993년 세계적정인구회의는 인류가 지속 가능한 인구 상한을 20억 명으로 봤다. 기후위기와 빈부격차가 있기는 하지만 기술 발달로 생산력을 높여온 덕분에 그 4배 되는 인구를 감당하고 있다. 이제 인구 팽창 대신 인플레적 인구구조라는 새로운 도전이 닥쳤다. 부지런히 생산성을 높이고, 오래도록 일하며, 지속 가능한 의료 복지체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응전해야 할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얼마 전 유명 여배우가 여행지에서 아들과 찍은 사진들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5세 아들이 알몸으로 찍은 뒷모습 컷이 문제였다. “아이가 커서 보면 기분이 어떻겠느냐”는 비난이 쇄도하자 배우는 사진을 삭제했다. 요즘은 아이 사진을 잘못 올렸다가는 몰지각한 ‘셰어런팅’으로 비난받기 십상이다. ▷셰어런팅은 ‘육아(parenting)’를 ‘공유(share)’한다는 뜻의 합성어로 아이를 키우며 찍은 사진과 영상을 SNS에 공유하는 행위를 뜻한다. SNS에 익숙한 젊은 부모들은 자녀가 먹고 자고 웃고 떼쓰는 모든 일상을 ‘파파라치’처럼 따라붙어 찍고 공개한다. 영국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요즘 아이들은 걸음마를 배우기 전부터 ‘디지털 흔적’을 남기기 시작해 5세가 될 무렵이면 약 1500개 이미지의 주인공이 되어 온라인을 떠돌게 된다. ▷셰어런팅은 부모에겐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행위지만 아이에겐 사생활과 정보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일이다. 셰어런팅을 통해 공개된 어릴 적 기행이나 병력 정보들이 입시 취업 결혼을 앞둔 자녀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지금의 청소년이 2030년경 당하게 될 신원 도용 범죄의 3분의 2는 셰어런팅으로 인한 것이며 피해 규모가 연간 9억1400만 달러(약 1조2000억 원)라는 경고도 나왔다. EBS는 셰어런팅이 유괴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다큐를 방송한 적이 있다. 셰어런팅에서 아이의 동선과 정보를 파악한 낯선 여성이 “돌잔치 때 필통 집었지?” 같은 질문으로 아이를 안심시켜 따라나서게 하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해외에선 셰어런팅이 아동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보호대책을 강화하는 추세다. 유럽연합은 17세 미만의 ‘잊힐 권리’, 즉 개인정보 삭제 요청권을 인정하고 있다. 프랑스는 프라이버시법에 따라 자녀의 동의 없이 이미지를 공개했다가는 징역 1년이나 4만5000유로의 벌금형을 각오해야 한다. 영국도 개인정보법에 자녀가 셰어런팅한 부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었다. ▷정부는 아동·청소년에게 잊힐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부모 등 제3자가 인터넷에 올린 개인정보를 삭제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했다. 2024년까지 법제화할 ‘아동·청소년 개인정보보호법’에는 부모가 올린 개인정보를 성인이 된 후 삭제할 수 있는 조항도 담을 계획이다. 셰어런팅은 자녀가 디지털 정체성을 스스로 형성해갈 기회를 빼앗는 것이다. 미래에 어떤 기술이 나와 무심히 올려놓은 부스러기 정보들을 악용하게 될지 알 수 없다. 자녀에게 ‘디지털 문신’을 남기는 일에는 극히 신중해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한국계 최초로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39)를 수학의 길로 안내한 사람은 히로나카 헤이스케 하버드대 명예교수(91)다. 스승과 제자는 닮은 점이 많다. 둘 다 음악과 글쓰기를 좋아한다. 두 사람 모두 어려서는 신통치 않았지만 뒤늦게 수학적 재능을 발휘한 늦깎이 천재들이다. ▷1970년 필즈상 수상자인 히로나카 교수는 일본 벽촌 장사꾼의 열다섯 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공사장에서 알바 뛰고 밭에서 거름통 메고 일하느라 중학교도 대학도 재수해서 갔다. 피아니스트가 꿈이었지만 교토대 이학부에 진학했는데, 3학년 때 대학을 방문한 하버드대 수학과 교수를 만나면서 수학의 아름다움에 눈떴다. 허 교수도 글쓰기와 작곡에 빠져 고교를 자퇴했고, 서울대 물리학과에 들어가 D, F학점을 맞으며 6년을 다니다 마지막 학기에 석좌교수로 온 히로나카 교수를 만나면서 인생이 달라졌다. ▷천재의 유형을 설명할 때 타이거 우즈와 로저 페더러를 곧잘 예로 든다. 우즈는 생후 7개월 때 골프채 쥐고 조기교육을 받아 세 살 때 골프장 9홀을 돌면서 11오버파를 쳤다. 반면 페더러는 스키 레슬링 수영 야구 핸드볼 탁구 배드민턴 축구를 전전하다 뒤늦게 테니스를 시작했는데 또래 선수들은 근력 코치, 스포츠 심리학자, 영양사를 따로 두고 훈련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설적 테니스 선수들이 은퇴할 나이를 훌쩍 넘겨서까지 테니스 황제 자리를 지켰다. 여러 스포츠를 접한 것이 손과 눈의 조화로운 발달에 도움이 됐다고 한다. ▷늦깎이 천재들의 자산은 지름길 놔두고 둘러가느라 겪은 다양한 경험이다. 히로나카 교수는 저서 ‘학문의 즐거움’에서 “여러 가지가 통합돼 창조가 이뤄진다”며 “중학교 시절 음악에 열중한 것이 헛되지 않았다”고 썼다. “상아탑에 틀어박혀 수학만 생각했다면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지진 않았을 것”이라고도 했다. 허 교수도 완전히 다른 수학 분야인 대수기하학과 조합론을 연결해 난제를 풀었다. 그는 문제를 잘 푸는 비결에 대해 “두뇌에서 끊임없이 다양한 종류의 ‘무작위 연결’이 일어난다”고 했다. ▷세계적 과학자들이 100년 넘게 매달리고도 해결 못 한 것이 식품 저장 기간 늘리기였다. ‘통조림’ 발명으로 난제를 풀어낸 사람은 식품업계를 두루 거친 만물박사 니콜라 아페르였다. 한 우물만 깊게 파다 보면 바로 옆의 해결책도 보이지 않는 법. 예측 불허의 미래일수록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허 교수는 “내가 지나온 매우 굽은 길이 실제로는 최선의 경로였던 것 같다”고 했다. 늦더라도 넓게 파야 깊어질 수 있다는 뜻일 게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