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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9월 에리히 호네커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의 서독 방문은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에겐 결코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회고록 ‘나는 조국의 통일을 원했다’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양독 간 국경의 문을 더 활짝 열기 위해 나는 호네커의 방문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호네커 방문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그때까지 내 입장이었기에 그 결정은 정말 어려웠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그의 방문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됐다.” 콜에게 동독은 다른 국가가 아닌 통일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런 콜이지만 일단 방문을 수용한 만큼 ‘저쪽에서 오는 손님’의 요구에 따라 국가원수에 준하는 의전으로 예우했다. 하지만 의전은 말 그대로 형식적 의례일 뿐이었다. 공항 분위기부터 싸늘했다. 호네커를 영접 나온 사람은 총리비서실장, 그리고 녹색 베레모 쓴 군인들이 전부였다. 환영 현수막도, 환호성도 없었다. 공항에서 본 시내로 가는 고속도로 표지판에는 경찰이 서둘러 지운 나치 문양과 ‘호네커 살인자’라는 얼룩이 남아 있었다. 총리실 바깥에선 기민당 우파들이 ‘독일 통일조국’이란 현수막을 펼쳐 들었다. 의장대 사열 땐 호네커와 콜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걷다가 뒤늦게 방향을 바로잡는 일도 벌어졌다. 웃음기 없는 얼굴로 악수도 하는 둥 마는 둥이었다. 외신은 ‘의전행사 내내 콜과 호네커는 각기 다른 사람이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뻣뻣했다’고 전했다. 만찬에서도 두 사람은 날을 세웠다. 콜은 분단의 고통을 강조하며 장벽의 제거를 주장했고, 호네커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불과 물처럼 결코 화해할 수 없다”고 응수했다. 방문 마지막 날, 호네커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 마을을 방문해 누이동생과 옛 이웃들을 만나고 부모의 묘지에도 참배했다. 주민들은 복잡한 감정 속에 호네커를 맞았다. 경호용 바리케이드 바깥에서 몇몇 사람은 “장벽을 철거하라”고 외쳤다. 한편에선 “에리히”를 외치며 동독 국기를 흔드는 사람도 한두 명 있었다. 서독의 차가운 대접은 호네커의 자업자득이었다. 그의 서독 방문이 콜의 우파 정부 이전인 사민당 총리 시절에 이뤄졌더라도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전임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1981년 12월 동독의 소도시를 방문했을 때 주민들은 난데없이 예비군훈련에 동원되거나 외출이 금지됐다. 거리는 비밀경찰 요원들로 꽉 차 있었고 “우리 서기장 만세!” 소리만 요란했다. 이런 삼류 코미디가 연출된 것은 1970년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독 방문 때 주민들이 저지선을 뚫고 들어가 “빌리, 빌리!”를 외쳤던 기억이 선명했기 때문이다. 우리와는 사정도 다르고 이미 30년이 지난 동·서독 얘기가 길어진 것은 벌써 김정은 답방 대비에 들어간 정부나 일부 찬반 세력을 제외한 많은 이가 북쪽 손님을 어떻게 맞을지 마음의 준비가 돼 있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나 모든 국민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을 믿는다는 대통령의 발언에 놀란 이들에게 요즘은 더없이 답답하고 수상한 시절일 것이다. 평양에서 받은 격한 환대에 감격했을 대통령으로선 그에 상응하는 환대를 준비하겠지만, 국민 상당수의 ‘북쪽 수괴’에 대한 심정적 거부감도 엄연한 현실임을 직시해야 한다. 격한 반대는 진작 예고돼 있다. 김정은도 “태극기 부대가 데모 좀 해도 괜찮다”고 했다. 물론 일부 격한 환영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는 차분히, 어쩌면 무심한 듯 지켜볼 것이다. 그게 우리의 성숙한 자유민주주의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 식으로 응대하면 된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올해 3월 20일 미국 백악관 집무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들 앞에서 전투기 미사일 전함 등 각종 무기 사진들 위에 숫자가 적힌 패널을 꺼내 들었다. “보세요. 30억 달러, 5억3300만 달러, 이거 당신에겐 껌값(peanuts)이죠. 더 늘렸어야죠. 8억8000만 달러, 6억4500만 달러, 60억 달러, 그건 호위함용이고. 8억8900만 달러, 6300만 달러, 그건 포병용이죠.” 트럼프 옆에 앉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민망한 표정으로 간간이 억지웃음을 지었다. 트럼프는 사우디가 약속한 무기 구매 액수를 줄줄이 열거한 뒤 “이건 많은 일자리를 의미한다. 미국 내 일자리 4만 개…”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진짜 멋진 관계”라며 껄끄러웠던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와 다르다는 점도 빠뜨리지 않았다. 무함마드는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으로 불리는 33세의 막강 실권자. 일찍부터 트럼프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와 절친 관계를 맺고 지난해 5월 트럼프의 첫 해외 방문지로 사우디를 선택하게 만든 인물이다. 트럼프의 사우디 방문 이후 무함마드는 사촌형에게서 왕세자 자리를 빼앗고 왕자들을 대거 구금하는 ‘왕자의 난’을 통해 권력을 굳혔다. 그의 무한질주는 결국 반정부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으로 이어졌다. 트럼프는 그제 “왕세자가 이 사건에 대해 알았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미국은 사우디의 변함없는 동반자(steadfast partner)로 남을 것이다”라고 했다. 사우디에 대한 단호한 조치를 요구하는 의회의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내 편이라면 일단 감싸고 보겠다는 태도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예측 불허의 트럼프라지만 한번 꽂힌 사람에겐 시종 애정을 쏟는 일관성은 새삼 놀랍기만 하다. 이런 트럼프를 보면서 누구보다 안도할 이가 김정은일 것이다. 트럼프가 사랑에 빠졌다는, 무함마드보다 한두 살 많은 또 다른 총아(寵兒)가 김정은이다. 11·6 중간선거가 끝난 뒤에도 트럼프는 여전히 김정은과 “매우 좋은 관계”라고 했다. 북한이 비밀 미사일기지를 운영하며 ‘큰 속임수(great deception)’를 쓰고 있다는 보도에도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런 보도를 믿지 않는다”고 했다. 사우디 왕세자의 암살 배후설에 대한 대응과 다르지 않다. 트럼프의 한없는 관대함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어려울 때 도와주면 더 큰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협상가의 계산법일 것이다. 사우디 왕세자에게 거는 기대는 분명하다. 사우디가 미국에 투자하기로 한 4500억 달러 가운데 계약이 확정된 것은 145억 달러로 전체의 3%에 불과하다. 트럼프는 이제 ‘고마운 후원자’ 입장에서 미수금을 챙기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우디처럼 석유 부국도, 지역 강국도 아닌 북한에 트럼프는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트럼프의 관심은 이제 온통 2020년 대통령선거에 있다. 북핵 문제 해결은 오바마를 비롯한 전임 행정부가 모두 실패했지만, 자신이 이뤄낸 위대한 외교적 성과가 될 터다. 북한을 중국 견제용 균형추로 만들 수 있다는 기대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 엄청난 돈이 드는 주한미군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자신의 오랜 주장을 관철할 기회로 보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트럼프의 너그러움이 마냥 이어지진 않을 것이다. 적어도 두 번째 정상회담이 열리면 김정은은 2년 안에 완전한 비핵화를 완료하겠다는 로드맵을 들고 와야 하고, 트럼프의 정치 일정에 맞춰 비핵화 이벤트로 조응해줘야 한다. 세상사가 모두 그렇지만 국제정치에서 무조건적 사랑은 결코 없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찬 바람 부는 겨울밤 이불 속에서 귤을 까먹다 보면 껍질만 한 바구니 수북이 쌓이는 것은 순식간이다. 지금은 귤이 우리네 겨울 간식을 대표하는 과일이 됐지만, 예전엔 제주도에서도 매우 귀한 존재였다. 박정희 정부 시절 감귤 산업을 진흥하기 전까지 제주도에선 ‘대학나무’라고 불렸다. 흔히 농촌에서 소를 팔아 자식을 대학에 보낸다지만, 제주도에선 귤나무 한두 그루만 있으면 자식 대학 공부까지 시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청와대가 어제 평양 정상회담 때 북측의 송이버섯 선물에 대한 답례로 제주산 귤을 북한에 보냈다. 우리 군 수송기가 이틀간 네 차례에 걸쳐 제주공항에서 평양 순안공항까지 10kg짜리 상자 2만 개, 모두 200t을 실어 나른다. 북한에서도 귤은 귀한 ‘수령님 하사품’이었다. 노동당 간부나 공로자들에게, 그리고 집단체조에 동원된 학생들에게도 귤 몇 개씩을 쥐여줬다고 탈북자들은 전한다. 다만 2000년대 중반 이래 중국산 귤이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장마당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청와대의 제주산 귤 답례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서울 답방, 나아가 한라산 등정까지 염두에 둔 선택으로 보인다. 평양 정상회담 때 ‘백두산 환대’를 받은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기자들과의 산행에서 “백두에서 한라까지, 이런 말도 있으니 한라산 구경도 시켜줄 수 있다”고 했고, 청와대 여야정 회동에선 한라산에 헬기장이 없어 걱정이라는 얘기도 했다. 과거 북한에 귤을 보내는 ‘비타민C 교류사업’을 했던 제주도의 기대는 한층 큰 듯하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10일 한라산 정상을 찾아 헬기 착륙이 가능한지 살펴보기도 했다. ▷제주도와 김정은의 인연도 새삼 관심을 끈다. 김정은의 생모인 재일교포 출신 무용수 고용희의 아버지, 즉 김정은의 외조부 고경택은 제주 출신이다. 몇 해 전 고경택의 허묘(虛墓)가 제주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김정은의 서울 답방도 아직 불투명한데, 제주도 방문까지 거론하는 것은 이른 감이 있다. 경호나 일정도 문제겠지만, 김정은 자신이 백두혈통이 아니라 ‘째포(북송교포)의 자식’으로 부각되는 것을 과연 달갑게 여길지 의문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북한 리선권의 ‘냉면 목구멍’ 막말 논란에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가 “좋은 의도에서 웃자고 한 말일 수 있다. 이 정도 수준에서 정리하자”고 나선 것은 평소 그의 대북 강경론에 비춰 보면 꽤나 의외였다. 많은 이들이 ‘웬 변심(變心)이냐’며 고개를 갸웃했지만, 통일부 관계자들 사이엔 돌연 화색이 돌았다고 한다. 가뜩이나 대북 저자세 논란에 시달리던 통일부로선 예상치 못한 지원사격에 화들짝 반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데 태영호 주장의 핵심은 다른 데 있다. 그는 북한의 ‘센 농담’보다 진짜 ‘오만무례’를 문제 삼아야 한다고 했다. 평양 정상회담 때 공항 행사장에 인공기만 높이 띄우고 두 정상의 기념촬영 때 한반도 지도 위에 노동당 마크가 있는 배경을 사용한 것에 공식 사죄를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적화통일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런 행위야말로 “북남 관계를 통일로 가는 특수관계라고 합의한 기본합의서의 난폭한 유린”이라고 했다. 고위 외교관 출신 탈북자에게서 나온 ‘남북 특수관계’ 발언은 요즘 우리 정부의 사용법과는 사뭇 달랐다. 통일부가 탈북민 출신 기자를 회담 현장 취재에서 배제하면서, 북한의 몰상식과 결례를 매번 변호하면서, 그리고 청와대가 공동선언문의 국회 패싱을 놓고 무모한 법리(法理)까지 동원해 해명하면서 거론하던 그런 쓰임새는 아니었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 ‘쌍방 사이의 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생겨나는 특수관계’라고 규정한 이래 이 특수관계론은 남북 간엔 어디든 적용될 수 있는 오묘한 존재가 됐다. 따져 보면 그건 어떤 식으로든 정의하기 어렵다는 실토와 다름없지만 어느덧 만능의 변명거리가 된 것이다. 이런 특수관계에 국가 간 관행을 적용해 보려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1년 9·11테러 직후 금강산에서 열린 장관급회담의 수석대표는 홍순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었다. 평생 외교관으로 잔뼈가 굵은 홍순영은 남북회담도 ‘국제기준’에 따라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협상에 임했고, 북한의 회담 자세에 넌더리를 내며 결렬을 선언하고 돌아왔다. ‘인내심을 갖고 합의문을 만들라’는 게 서울의 훈령이었지만 그는 수석대표의 재량권을 내세웠다. 결과는 무참한 실패였다. 야당에선 박수를 받았지만, 그는 취임한 지 불과 4개월여 만에 경질되면서 1998년 통일부가 부(部) 체제로 개편된 이래 최단명 장관으로 기록됐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관계를 주도한 임동원 당시 대통령특보의 회고에선 날 선 분기마저 읽힌다. “어렵게 성사시킨 회담을 우리가 파탄시켰으니 대통령의 상심과 분노가 클 수밖에 없었다. 통일·안보 문제는 대통령이 직접 관장해야 할 국가 중대사이며 다른 누군가가 마음대로 결정할 분야가 아니었다. 이 사건을 통해 통일 문제를 담당하는 장관이 수석대표로 협상하는 경우에도 반드시 협상자로서 상부 훈령에 따라야 한다는 원칙을 새삼 되새기게 했다.” 이 사건이 이후 남북회담에 던진 학습효과는 컸다. 똑 부러지고 강단 있는 태도는 그 누구든 회담 대표에게 권장할 미덕이 결코 아니게 됐다. 어떻게든 회담을 깨뜨리지 않고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숙명처럼 됐다. 지금 대통령의 주문도 예나 다를 게 없다. “유리그릇 다루듯 하라.” 하지만 언제까지 남북관계를 군색하기 짝이 없는 특수관계라는 영역으로 계속 남겨둘 것인지 고민할 때가 됐다. 햇볕정책의 목표도 북한의 변화 유도인데, 그들의 태도에 변함이 없다면 그 운용방식이라도 바꿔야 한다. 리선권의 입단속부터 다짐받는 게 그 시작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반(反)유대주의의 뿌리는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신교 문명권에서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들에 대한 주변 민족의 오랜 혐오는 기독교 문명의 확산 속에서 ‘예수를 죽인 민족’에 대한 격리와 차별로 이어졌다. 유대인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해 집단학살한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는 반유대주의 악행의 정점이었다. 그런 고난의 역사를 지닌 유대인들에게 미국은 새로운 피난처였고, 그들은 미국에 안착해 사회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런 미국 땅에서 유대인들을 향한 총기난사 사건이 27일 일어났다. 극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을 자주 표출해온 40대 범인은 피츠버그의 한 유대교 회당에 자동소총 1정과 권총 3정을 들고 난입해 “모든 유대인은 죽어야 한다”고 외치며 무차별 난사했다. 이로 인해 11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경찰을 포함해 6명이 다쳤다.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로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사건은 반트럼프 진영 인사들을 겨냥해 ‘폭발물 소포 테러’를 기도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열성 지지자가 체포된 지 하루 만에 벌어졌다. 범인은 SNS 자기소개란에 “유대인은 사탄의 자식들”이라고 썼고, 미국 국경으로 향하는 수천 명의 중남미 이민자 행렬인 ‘캐러밴’에 극도의 반감을 드러냈다. 그는 “트럼프가 유대인에게 둘러싸여 있다”며 친(親)유대 정책을 비판하긴 했지만, 국경 장벽 건설 등 트럼프의 강경한 반이민 정책 지지자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사건을 ‘인류에 대한 공격’이라고 규정하며 “증오를 극복하기 위해 단결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통합 메시지는 당장 반트럼프 진영의 코웃음을 사고 있다. 지난 대선 때부터 외국인 혐오와 인종차별적 언사를 남발했던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등장 이후 정신적 트라우마에 빠져 불안·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사람이 늘면서 ‘선거 후 스트레스 장애’ ‘트럼프 후 스트레스 장애’ 같은 용어까지 생겼다. 열흘도 남지 않은 투표일까지 또 어떤 증오범죄가 일어날지 미국인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주 유럽 순방에서 얻은 최대 성과는 “두려워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격려였을 테지만, 프랑스의 보수 일간지 르피가로에서 뜻밖의 선물도 받았다. 파리정치대 교수이기도 한 저명 언론인 르노 지라르가 쓴 ‘한국 대통령의 용기’라는 제목의 칼럼이다. 칼럼은 문 대통령의 평화 프로세스, 나아가 대북제재 완화 주장에도 전폭적인 지지를 나타냈다. “문재인은 순진한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카다피의 몰락을 지켜본 김정은이 확실한 보증 없이 하루아침에 핵무기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실용주의자 문재인은 이걸 완벽히 이해했다. 이제 그는 서방이 제재 완화를 통해 북한에 상응하는 제스처를 취하도록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가 옳다.” 국제사회에 대북제재 완화론을 설파했지만 그다지 공감대를 얻지 못한 문 대통령에겐 큰 위안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칼럼은 이렇게 끝맺는다. “(샤를) 드골 장군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처럼, 외교에선 때때로 큰 위험을 감수할 줄 알아야 한다. 바로 문재인이 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이미 역사에 들어섰다.” 프랑스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드골 전 대통령에 견준 최고의 헌사였다. 한데, 바로 그 대목이 의미를 곱씹게 만들었다. 왜 하필 드골의 외교인가. 불굴의 전사였던 드골은 외교에서도 비타협적 강경 독자 노선을 폈다. 드골은 늘 앵글로색슨, 미국과 영국이 프랑스를 이류 국가로 취급한다고 생각했다. 독자적인 핵무기를 보유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통합지휘체계에서 탈퇴한 것도 이런 편집증 같은 인식에서 비롯됐다. 그런 ‘자존심 외교’는 국가 명성을 끌어올렸고, 이후 전통처럼 굳어졌다. 프랑스 언론의 칼럼 하나에 문 대통령이 고무됐을 리는 없겠지만, 최근 거침없는 남북관계 행보를 보면 묘하게도 드골의 ‘마이 웨이’를 연상시킨다. 유럽 순방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는 자평에서, 그리고 국회 동의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한 평양공동선언 비준에서,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것은 끝까지 밀고 가겠다는 드골 같은 태도가 엿보인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요즘 문 대통령 심기를 이렇게 전했다. “대통령은 낙관적이다. 참모들이 걱정을 말하면 오히려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큰 틀에서 맞는 길로 가고 있다는 확신과 자신감이 있는 것 같다.” 이런 대통령의 자기 확신이 남북관계 속도전으로, 그리고 미국을 향해선 ‘이젠 잡아끄는 데 지쳤다. 먼저 갈 테니 알아서 해라. 결국 우리를 따라오겠지만…’이라는 자세로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연내 종전선언과 김정은 답방이라는 시간표를 짜놓은 문 대통령이나 정부로선 마냥 미적대기만 하는 듯한 미국에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그래선지 요즘 ‘동맹 피로감’을 거론하는 얘기가 부쩍 늘었다. 일각에선 “한국은 언제까지 한미동맹의 을(乙)이어야 하느냐”며 미국의 ‘갑질’도 거론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드골의 길’은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다. 물론 문 대통령 스타일로 볼 때 드골식 외교를 펴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한국의 처지를 당시 프랑스와 비교하는 것부터가 당치 않다. 하지만 혹시라도 대통령이나 주변에서 그런 독자 노선에 끌렸다면, 드골 외교를 놓고 지금껏 이어지는 논란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드골의 NATO 이탈은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그가 원했던 동서 진영 사이의 조정자 역할은 물론이고 서유럽 지도자로서의 역할마저 축소되는 결과를 낳았다. 콧대 높은 프랑스라는 이미지와 함께. 그리고 프랑스는 2009년 다시금 NATO에 복귀했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북한의 핵신고를 미루고 영변 핵시설 폐기와 6·25 종전선언을 맞바꾸자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미국 워싱턴포스트(WP) 인터뷰는 아마도 처음으로 외교수장으로서 존재감을 드러낸 발언이 아닐까 싶다. 강 장관도 “우리 내부의 협의, 미국과의 협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했으니, 이 발언을 두고 다시 “말이 앞섰다면 죄송하다”며 번복하는 일은 없을 듯하다. 향후 북-미 협상 결과를 두고 봐야겠지만 북한 비핵화가 신고→검증→폐기라는 일반적 절차대로 흘러갈 것 같진 않다. 당장 미국에서도 핵신고 얘기가 나오지 않는 걸 봐선 고심하는 흔적이 역력하다. 이쯤에서 북한 외교의 승리를 점쳐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북한은 그동안 미국을 상대로 굴신(屈身)과 공갈 사이를 능수능란하게 오가며 자기네 방식을 관철해왔다. 특히 거부를 분명히 한 사안에 대해선 대화의 파탄도 불사했고, 미국이 끝내 손들게 만들었다. 백악관에서 아시아정책을 담당한 마이클 그린이 일찍이 털어놓은 그대로다. “북한은 미국의 전략을 망쳐놓는 데 불가해(不可解)한 능력을 지녔다.” 그간 미국의 대북정책에서 사라진 단어만 살펴봐도 북한의 외교 성적은 놀랍다. 5월 북-미 정상회담 취소 소동까지 야기하며 북한이 삭제 대상 목록에 올린 단어는 ‘리비아식 해법’과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 비핵화(CVID)’였다. 리비아식 해법은 진작 사라졌고, CVID도 어느덧 다소 생뚱맞은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로 바뀌었다. 북한은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이 끝나자마자 핵 신고 요구를 완강히 거부했다. 7월 초 방북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뒤통수에 대고 “CVID요, 신고요, 검증이요 하면서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 들고 나왔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또다시 취소 소동이 벌어진 뒤 폼페이오의 4차 방북이 이뤄진 지금, 미국 행정부 누구도 핵신고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그동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동의했다는 ‘새로운 방식’을 내세웠지만 자신들의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 적은 없다. 다만 ‘핵개발 초기 단계였던 리비아와 엄연한 핵보유국인 북한은 다르며, 미국의 이전 행정부가 써먹다 백전백패한 케케묵은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는 북한의 일관된 주장에서 유추할 수밖에 있다. 북한은 우선 이미 보유한 핵무기고(핵탄두, 핵물질, 미사일)와 핵능력 확장수단(생산·개발시설)을 철저히 분리한다. 이미 핵무장을 완성한 이상 핵시설은 포기할 수 있지만 그 방식은 ‘주동적 폐기 이후 검증 허용’ 순서로 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핵무기는 상호 군축(軍縮) 방식으로 해결하겠다는 속셈인 듯하다. 남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 핵사찰과 전략자산 전개 금지, 핵우산 공약 폐지, 주한미군 철수 또는 위상 조정까지 염두에 뒀으리라. 물론 각 비핵화 단계에는 종전선언과 제재 완화, 평화협정 체결, 북-미 수교 같은 상응 조치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종전선언도 이뤄지지 않은 지금, 핵신고 요구는 대북 선제공격 목표물의 좌표를 찍어 달라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게 북한의 주장이다. 리용호 외무상이 유엔에서 수없이 ‘신뢰’를 내세우며 “일방적 핵무장 해제는 없다”고 강변한 이유다. 이런 ‘북한의, 북한에 의한, 북한을 위한 비핵화’는 먹혀들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적극 동조해 공동전선을 구축했다. 우리 정부마저 암묵적 수긍을 넘어 미국 설득에 나선 분위기다. 미국은 불만이겠지만 당장 ‘트럼프 리스크’부터 걱정이다. 북한이 내밀 이벤트에 혹하기 쉽고 주한미군도 연합훈련도 돈 문제로 여기는, 독재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대통령이니 말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미국은 언제나 국익에 따라 행동한다. 우리는 미국의 주권(主權)을 글로벌 관료주의에 넘겨주지 않는다. 미국은 미국인이 통치한다. 우리는 글로벌리즘을 거부하고 애국주의를 환영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25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주권’을 10번, ‘독립’을 6번 언급했다. 더는 글로벌 리더라고, 세계의 경찰이라고 추켜세우면서 미국을 뜯어먹지도, 이래라저래라 하지도 말라고 했다. 미국의 슈퍼파워 포기 선언, 트럼프판 주권 독립 선언이었다. 최대 해외원조국 자리도 거부했다. 그는 “우리를 존중하는, 솔직히 말하자면 우방국들에만 원조를 하려고 한다”고 했다. 이런 트럼프의 연설에 유엔총회장은 뜨악한 침묵이 지배했다. 환호도 박수도 없는 좌중의 반응에 트럼프도 다소 흥을 잃은 듯 뚱한 표정으로 프롬프터만 따라 읽었다. 그나마 연설 초반에 터져 나온 웃음조차 없었다면 시종 교장 선생의 삭막한 훈시로만 들렸을 것이다. “나의 행정부는 채 2년도 안 돼 미국 역사상 거의 모든 행정부보다 많은 성과를 이뤄냈다.” 그 순간 어디선가 흘러나온 웃음소리에 트럼프는 “정말 진짜다”라고 정색했다. 이내 키득거림이 폭소로 변하자 트럼프는 머쓱한 듯 혀를 날름 내밀고는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래도 괜찮다”며 연설을 이어갔다. 세계 언론들은 ‘트럼프가 장황한 자기 자랑을 하다 국제사회의 비웃음을 샀다’고 평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외려 “좀 웃기려고 일부러 그런 것”이라고 했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에겐 미국의 위상이나 책무는 그저 위선일 뿐이다. 그는 가식을 떨지 않는다. 그에겐 유엔 무대도 국내 유세장의 일부일 뿐이다. ‘군왕은 무치(無恥)’라는 옛말은 동서양을 관통한다. 트럼프의 강안(强顔)은 묘하게 일주일 전 김정은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백두산 천지에 오른 김정은이 한마디 했다. “춥다더니 춥지가 않네.”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의 답변이 걸작이다. “백두산에 이런 날이 없습니다. 오직 국무위원장께서 오실 때만 날이 이렇단 말입니다. 백두산의 주인이 오셨다고 그러는 겁니다.” 수령의 최측근이란 지위를 그냥 얻은 게 아님을 웅변해준다. 북한에서 아부는 생존의 기술, 아니 예술 경연이다. 그런데 의외였던 것은 김정은이 보인 반응이었다. 그는 머쓱한 듯 고개를 돌려 멀찍이 가버렸고, 그런 김정은을 부인 리설주가 다소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측근의 아부엔 이골이 났을 젊은 독재자지만 손님 앞에선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이것도 손님을 혹하게 만드는, 트럼프의 뻔뻔함을 능가하는 속임수일까. 남쪽 대통령을 2박 3일 시종 수행하다시피 하며 “초라하다”고 겸손을 떤 김정은이다. 그런 그는 “우리가 속임수를 쓰면 미국이 강력하게 보복을 할 텐데, 그 보복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느냐”며 이번에야말로 비핵화의 진정성을 믿어 달라고 했다고 한다. 김정은은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도 트럼프를 그렇게 깍듯이 대접했을 것이고, 트럼프도 그런 김정은을 “믿는다”고 거듭 말했다. 외교관계에서, 특히 정상 간에는 진짜 믿어서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신하더라도 신뢰를 공언해야 한다. 못 믿겠다고 하는 순간, 외교는 사라지고 대결을 각오해야 한다. 머지않아 두 사람이 다시 만난다. 없는 진실도 우기며 만들어가는 트럼프와 외면하고픈 현실에 진정성을 호소해야 하는 김정은이다. 사자와 여우의 만남이다. 국제정치에선 파워가 정의이고, 상황이 진실에 앞선다. 믿는다지만 못 믿는 상황을 두 사람이 믿음직한 현실로 만들어낼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1991년 걸프전쟁 때 미군 전차 ‘M1 에이브럼스’ 한 대가 진창에 빠져 고립된 채 이라크군 T-72 전차 세 대의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M1은 옴짝달싹 못한 상태에서도 T-72 세 대를 모두 격파했다. 그중 한 대는 모래언덕 뒤에 숨어 있었지만 살아남지 못했다. M1에는 T-72가 쏜 포탄에 가볍게 긁힌 자국만 남아 있었다. 주포의 긴 사정거리와 디지털 사격통제체계, 혁신적인 보호 장갑(裝甲)으로 무장한 M1은 단 한 대의 손실도 없이 걸프전을 마무리 지었다. ▷이런 무패의 신화를 자랑하는 M1 전차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차 지휘관으로 활약한 크레이턴 에이브럼스 장군(1914∼1974)의 이름을 땄다. 그는 ‘기갑의 명장’ 조지 패튼 장군 휘하에서 화려한 전공을 쌓았다. “내가 육군 최고의 전차 지휘관이겠지만, 나에 견줄 만한 유일한 동료는 에이브럼스다. 그는 세계 최고다.” 패튼이 한 말이다. 그러니 미군의 2세대 주력 전차 ‘M60 패튼’이 3세대 전차 ‘M1 에이브럼스’에게 자리를 내주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주베트남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에이브럼스 장군은 ‘육군 명가(名家)’를 이뤘다. 여섯 자녀 가운데 세 아들 모두 육군 장성이 됐고, 세 딸도 모두 육군 장교와 결혼했다. 그와 세 아들이 단 별이 모두 13개다. 그의 셋째 아들 로버트 에이브럼스 육군전력사령관(57)이 최근 빈센트 브룩스 한미연합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의 후임으로 지명됐다. 이달 말 상원 인사청문회를 거쳐 이르면 다음 달 한국에 부임할 것이라고 한다. ▷에이브럼스 지명자는 한국에서 근무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6·25전쟁 말기에 참전해 1, 10, 9군단의 참모장으로 일했고, 지난달 작고한 둘째형은 1990년대 주한 미2사단장으로 의정부에서 근무했다. 2사단의 부대마크를 산뜻하게 다시 디자인한 사람이 형 존 에이브럼스 전 육군교육사령관이다. 한미동맹의 미래를 놓고 말이 많은 요즘이다. 에이브럼스 일가가 한국과 맺은, 그리고 계속 이어갈 인연이 한미 간 굳건한 버팀목이 되길 기대해 본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뜬금없었다. “특사단이 다시 평양에 갑니다. 우리 스스로 새로운 조건과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는 간절함을 안고….”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이 3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어쩌다 한 번쯤 띄우던 가벼운 단상이나 소회가 아니었다. 그가 ‘판문점선언이행추진위원장’도 맡고 있다고는 하지만 뭔가 거슬렸다. 임 실장이 글을 올린 것은 특사단 방북을 이틀 앞두고 특사 명단을 발표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자신이 평양에 가지 못하는 데 대한 아쉬움으로 읽혔다. 수석특사로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대신 그를 보내는 방안이 떠오르고 있다는 얘기가 나왔던 터다. 그는 2월 김여정의 서울 방문 때 환송만찬을 주재했고 4·27 판문점 회담 때도 김여정의 카운터파트였다. 그로선 의욕을 보일 법도 하다. 그리고 여드레 뒤인 11일, 난데없었다. 그는 페이스북에 대통령의 평양 동행 요청을 거절한 국회의장단과 야당 대표들을 향해 ‘올드보이가 아닌 꽃할배의 면모를 보여 달라’고 썼다. 호소라지만 그렇게 읽히지 않았다. 격한 실망감이 묻어났다. 성과를 내야 한다는 조급증도 드러냈다. 그는 “저도 일찍 제도권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다”며 ‘중진들의 힘’을 강조했다. 사실 초선 국회의원 시절 그는 선배 중진 의원이 밤늦은 술자리에 호출하면 금세 달려오는 붙임성 좋은 소장파였다. 그렇게 재선 의원에 서울시 부시장을 거친 현실 정치인이 됐지만, 이번에 그의 의욕은 앞섰고 일처리는 서툴렀다. 30년 전 그의 모습마저 어른거리게 만들었다. 임종석 전대협 의장이 집회에 등장하면 학생 수천, 수만 명이 일제히 기립해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을 외치며 전대협 진군가를 불렀다. 대중스타 못지않은 인기였다. 경찰 포위망이 좁혀지면 학생 수백 명이 그를 에워싸 전경과 공방을 벌였고, ‘가짜 임종석’ 수십 명이 “내가 임종석이다” 외치며 그의 탈출을 도왔다.(박찬수 ‘NL 현대사’) 당시 그의 이름은 북한에서도 회자됐다고 탈북자들은 전한다. 전대협의 평양축전 파견자 임수경 못지않게 ‘파쑈도당과 싸우는 신출귀몰 임길동’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그러니 이번에 자신이 전면에 나서 역할을 한다면 북한을 설득해 꼬인 한반도 정세를 푸는 데 한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여겼을지도, 또 주변에서 그렇게 권유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게 맞을까. 가뜩이나 쌍심지를 켜고 청와대를 바라보는 보수 야당과 일부 국민의 눈초리는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일까. 남북관계는 물론이고 민주국가에서 모든 대외정책의 종착지는 국내 정치다. 아무리 훌륭한 국가 간 합의를 이뤄도 국민과 의회를 설득하지 못하면 모든 게 없던 일이 되고 만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한 미국 두 전직 대통령의 경험은 그 성패를 여실히 보여준다. 대학총장 출신의 이상주의자 우드로 윌슨은 파리평화회의에서 국제연맹 창설을 관철시켰지만 상원을 장악한 고립주의 야당의 반대를 끝내 넘어서지 못했다. 반면 뼛속까지 정치인이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윌슨의 실패에서 철저히 배웠고 얄타회담 참석에 앞서 유력 야당 의원과 비공식적 동맹도 맺었다. 그의 사후에도 집단안보체제 유엔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다. 지금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아래선 북-미 협상이 타결되더라도 과연 의회 관문을 넘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온통 중간선거에만 신경이 곤두선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과의 협상보다는 당장의 상황 관리에만 치중할 가능성도 높다. 그러면 내주 평양에서 나올 성과도 비핵화를 빼곤 대부분 잠정적 합의에 그친다. 지레 의욕을 앞세워 논란을 일으킬 이유도 없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동서로 7700km에 걸친, 시차가 11시간이나 되는 러시아는 명실공히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유라시아 대국이다. 150년 전 알래스카를 미국에 매각하지 않았다면 러시아는 지금 북미까지 포함한 ‘유라시아메리카’ 국가를 자처했을지 모른다. 광대한 영토만큼 러시아의 역사적 문화적 경계는 모호하다. 유럽 국가를 지향해온 오랜 역사 속에 지금은 유럽 강국의 하나로 자리 잡았지만, 번번이 유럽과 충돌을 일으키는 불청객 신세를 면치 못했다. ▷‘21세기 차르’를 꿈꾸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신(新)동방정책’도 이런 역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2014년 크림반도 강제합병 이후 서방과의 관계가 냉전 수준으로 치달으면서 러시아는 동아시아, 특히 중국과의 연대를 통해 피난처를 찾으려는 노력을 펴야 했다. 자연스럽게 2015년 시작된 ‘동방경제포럼’에 힘이 실릴 수밖에 없었다. 푸틴 대통령이 3기 정권 출범과 함께 내세운 ‘강한 러시아’ 전략에서 이제 동아시아는 중요한 한 축이 됐다. ▷올해로 네 번째를 맞는 동방경제포럼이 오늘부터 사흘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다. 이 포럼을 계기로 푸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만나 연쇄 회담을 한다. 가뜩이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 일방통행으로 심기가 불편한 스트롱맨 3인의 대화에 관심이 쏠린다. 특히 러시아는 올해 같은 기간에 군사훈련 ‘보스토크(동방) 2018’도 실시한다. 병력 30만 명과 각종 군사장비가 총동원되는 37년 만의 최대 규모 훈련으로 중국과 몽골 군대도 참여한다. ‘동방의 근육’을 과시하는 무력시위인 셈이다. ▷북-미 비핵화 협상만 잘 풀렸다면 이번 포럼은 북핵 외교 무대가 될 수도 있었다. 북한과 가까워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참석이 용이하고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합류하면 종전선언의 장이 될 수 있다는 기대였다. 그게 어그러지면서 남북미가 빠진 북핵 게임의 ‘2부 리그’ 정상들만 모이지만, 중-일-러 3국은 북핵 본게임이 시작되면 결코 빠질 수 없는 주역들이다. 내년엔 북핵 6자 정상회담이 열릴 수 있을지, 이 또한 헛된 기대로 끝날까.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가을이 왔다. 연일 비바람에 스산하기만 하다. 지난 봄 평양에서 열린 남측의 ‘봄이 온다’ 공연을 관람한 김정은의 말이 새삼 생생하다. “이번에 ‘봄이 온다’고 했으니 여세를 몰아 가을엔 결실을 가지고 ‘가을이 왔다’고 (공연을) 하자.” 그리고 어느덧 5개월, 가을이 다가왔다. 하지만 결실은커녕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게 지금의 한반도 정세다. 북한의 시간표대로라면 9월은 ‘김정은의 달’이다. 김정은은 신년사에서 “공화국 창건 일흔 돌을 대경사로 기념한다”고 예고한 대로 9·9절에 대규모 열병식을 열어 자신의 ‘주동적 조치’로 이룬 업적을 자축할 예정이다. 그 앞뒤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문재인 대통령을 평양으로 맞아들이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2차 정상회담도 꿈꿨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 주역의 연쇄 이벤트에 조역으로 들러리나 서줄 트럼프가 결코 아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4차 방북을 발표한 지 하루 만에 트럼프는 이 계획을 전격 취소시켰다. 여차하면 판을 깰 수도 있다는 북한 김영철의 서한이 원인이었다지만, 여기엔 9월을 내다보는 트럼프의 불편한 심사가 크게 작용했으리라. 이에 못지않은 결정적 요인은 트럼프의 ‘거래 본능’이었을 것이다. 트럼프는 폼페이오 방북 취소를 알리는 트위터에 “비핵화에 충분한 진전이 없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북한을 직접 겨냥하진 않았다. 그 대신 김정은에게 ‘따뜻한 안부’를 전하며 “곧 만나길 고대한다!”고 했다. 타깃은 이번에도 중국이었다. 트럼프는 “중국과의 무역에 관한 우리 입장이 훨씬 강경해졌기 때문에 그들이 예전만큼 비핵화 과정을 돕지 않는다”고 불만을 드러내며 폼페이오 방북은 미중 무역분쟁이 해결된 이후가 될 것이라고 했다. 마치 떼쓰는 아이를 달래거나 야단치느니 부모를 학교로 부르는 게 낫다는 교사 같은 태도다. 북핵 문제와 미중 무역전쟁을 하나로 엮은 트럼프의 머릿속 회로는 좀체 이해하기 어렵지만 트럼프식 ‘거래의 기술’로 보면 뭐든 끄집어내 주도권을 잡는 협상전략일 수 있다. 구미는 당기지만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아예 판을 흔들어 예측불허로 만들거나 판을 더 키워 덤까지 챙기는 고약한 방식이다. 사실 거슬러 올라가면 그 시작은 지난해 4월 플로리다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에서였다. 트럼프가 만찬장에서 시진핑에게 시리아 폭격을 깜짝 통보하는가 하면, 시진핑이 ‘한반도는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했다던 바로 그 자리다. 트럼프는 당시 시진핑에게 이렇게 말했다. “큰 거래를 해보고 싶은가? 그러면 북한 문제를 풀어라. 그것은 무역적자를 감당할 만한 가치가 있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면 무역적자는 눈감아 주겠다는 주고받기 제안이었다. 그게 통했는지 이후 중국은 대북제재에 적극 동참했고, 그 결과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냈다고 트럼프는 믿고 있다. 그런데 미국이 무역전쟁을 시작하면서 시진핑이 변심했다는 게 트럼프의 인식이다. 중국이 은근슬쩍 제재를 완화하면서 북한의 탈선을 부추기고 있다고 의심하는 것이다. 트럼프는 어제도 중국의 대북 원조를 경고하며 ‘무역분쟁과 기타 이견들’을 시진핑과 함께 해결할 것이라고 했다. 북한을 걸어 무역전쟁의 출구를 찾아보자는 은근한 초청장으로 읽힌다. 트럼프의 거래 유혹에 시진핑이 호응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두 나라의 ‘대국(大國) 기질’이 맞아떨어진다면 한반도는 미중 거래의 협상 칩이 되고 만다. 김정은이 더는 허튼 고집을 부려서도, 우리 정부가 엉뚱하게 북쪽만 바라보며 딴청을 부려서도 안 되는 이유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13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북측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은 모두발언에서 또다시 ‘회담 공개’를 들고나왔다. 아예 ‘회담 문화’를 바꾸자는 거창한 주장까지 내세우며 “골뱅이 갑(껍데기) 속에 들어가서 하는 것처럼 제한되게 하지 말고 투명하게 공정하게 알려질 수 있게 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제가 수줍음이 많아서 말주변이 리 단장보다 많이 못하다”며 완곡히 거절했지만, 리선권은 “그러면 북측 기자들이라도 놔두자”고 억지를 부렸다. 결국 조 장관은 “그러면 남측 기자들한테 혼난다”며 엄살을 떨어야 했고, 리선권은 못 이기는 척 “다음부터는 꼭 기자들 있는 자리에서 하자”고 물러섰다. 리선권은 과연 공개 회담을 원하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그럴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으면서 남측 대표를 군색한 처지로 몰고 남측 언론을 은근히 조롱하기 위해 회담 때마다 으레 써먹는 수법일 뿐이다. 리선권은 1월, 6월에도 같은 주장을 했다. 남측이 무슨 책잡힐 일을 했는지, 회담을 비공개로 해야 할 말 못할 이유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북측의 그런 어처구니없는 행태를 쩔쩔매듯 받아줘야 하는 남측 대표의 처지가 안쓰러울 따름이다. 북측 주장대로 회담을 공개한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과거 남북 대화 역사에서 벌어진 의도된 불상사만 떠올려 봐도 그 결과는 쉽게 유추할 수 있다. #1972년 9월 7·4공동성명 발표 2개월 만에 북한 적십자 대표단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6·25전쟁 이후 최초로 서울을 방문한 북측 대표단은 연도에 몰려와 손을 흔드는 수십만 인파의 열띤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이 서울을 떠날 때 시민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이들이 차창 밖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었지만 누구도 응답하지 않았다. TV로 생중계된 북측 대표 윤기복의 개막 연설 때문이었다. 그가 연설에서 “우리 민족의 경애하는 김일성 수령” “영광스러운 민족의 수도 평양” 운운하자 항의전화 수백 건이 방송국과 경찰서에 빗발쳤다. TV 중계는 박정희 정부가 북측 인사의 언행이 우리 국민의 비위를 건드릴 것이라는 계산 아래 결정한 것이었고, 그 기대대로 사회 분위기는 일순간 희망에서 분노로 돌변했다.(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1994년 3월 북핵 위기가 고조되던 시점에 열린 남북 특사 교환을 위한 판문점 실무접촉. 양측 간에 거친 말들이 오간 끝에 북측 대표 박영수는 이렇게 위협했다. “서울은 여기서 멀지 않다. 전쟁이 나면 서울은 불바다가 될 것이다.” 한반도를 소용돌이로 한 걸음 더 깊숙이 빠져들게 만든 ‘서울 불바다’ 발언이었다. 이 협박 장면은 그대로 방송에 나갔다. 북한의 막말에 여론은 들끓었고 여당에선 “바보같이 당한 남측 대표를 경질하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그동안 회담 화면을 공개하지 않던 관례를 깬 것은 김영삼 정부였다. 폐쇄회로(CC)TV에 찍힌 54분 회담 중 자극적인 2분 40초 분량의 테이프를 방송사에 넘겼고, 방송사는 반말 섞인 격앙된 1분을 편집해 내보냈다.(김연철 ‘70년의 대화’) 이렇듯 회담 공개는 판을 깨자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움직일 여론이라는 게 없는 북측 대표라고 자유로울까. 북측 회담일꾼의 신경은 온통 뒤통수에 몰려 있다. 회담은 오로지 1인의 관객, 즉 수령을 향한 연극일 뿐이기에. 그래서 진짜 속내는 카메라도, 마이크도 없는 사각지대에서 나온다. 안 보이는 곳에선 구걸에 가까운 읍소도 불사한다. 앞말 다르고 뒷말 다른 북측의 허튼 수작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이제 젊은 수령의 시대에도 변함이 없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기무가 떴다, 하면 사무실엔 일순 정적이 흐르고 이내 부산스러워진다. 책상 위 서류들이 날렵하게 치워지고, 책임자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난다. “난 보고하러 가야 해서….” 자신보다 훨씬 아래 계급인 기무요원의 눈길을 애써 외면하는 그 책임자의 평소 지론은 이랬다. “×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군에서 기무는 그만큼 불편하고 거슬리는 존재다. ▷국방장관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현역 대령이 국회의원들 앞에서 장관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도 그가 국군기무사령부의 100기무부대장, 즉 장관 감시역이 아니었으면 가능했을지 싶다. 100기무부대는 국방부 청사 1층 꽤 좋은 위치에 있다. 부대장 방은 차관보급 사무실 수준의 넉넉한 크기다. 그 바로 위 2층에 장관실이 있다. 옛 청사 시절엔 장관실과 같은 2층의 맞은편 쪽에 있었다. 아무리 군의 수장이라도 자신 가까이 있으면서 언제든 청와대에 직보하는 그곳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리 없다. ▷기무사의 새 이름이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정해졌다. 보안·방첩을 주 임무로 하는 정보부대의 명칭이 왠지 어색한 것은 그 자랑스럽지 못한 역사 때문일 것이다. 기무사의 모체는 1948년 만들어진 국방경비대 육군정보처 특별조사과였다. 이후 특별조사대, 방첩대, 특무부대, 방첩부대라는 이름으로 이어지다가 1968년 육군보안사령부로, 1977년엔 국군보안사령부로 확대됐다. 보안사는 12·12쿠데타의 주축 역할을 했고 그 결과 대통령을 두 명이나 배출했다. 하지만 윤석양 이병의 민간인 사찰 폭로 파장으로 1991년 기무사로 바뀌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여름휴가 중 ‘기무사 해편(解編)’을 지시했다. 해체 후 재편한다는 생소한 용어까지 사용했지만, 기무사개혁위원회가 건의한 3가지 방안(사령부 체제 유지, 국방부 산하로 흡수, 외청 형태로 창설) 중 첫 번째인 사령부 존치를 선택한 것이다. 조직 이름이 바뀌고 대대적 물갈이가 이뤄져도 그 직무는 크게 변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 대목이다. 결국 통수권 행사를 위해선 군 내부에 대통령의 눈귀가 필요하다는 판단이었을까.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2004년 11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칠레로 가는 길에 들른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포럼 연설에서 작심발언을 했다. “핵무기가 자위 수단이라는 북한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북한은 안전만 보장되면 핵무기를 포기할 것으로 확신한다.” 북핵 6자회담 출범 1년이 넘도록 아무 진전을 보지 못하던 상황에서 미국인들에게 북한을 대변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것에 보좌진이 나서서 만류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더욱이 조지 W 부시 대통령과의 칠레 회담을 앞둔 터라 그 파장을 우려한 한승주 주미대사는 부랴부랴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만나 이 발언이 정상회담 의제가 되지 않도록 사전 협의를 해야 했다. 실제로 부시는 이 발언을 거론하지 않았다. 한데 정작 그 얘길 다시 꺼낸 것은 노무현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의 발언은 미국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대북 강경책을 주장하는 전문가들을 겨냥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새삼 오래전 일이 생각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달 싱가포르 발언 때문이다. 북한이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세 번째 방북 직후 ‘강도적 요구’라고 비난한 데 대해 문재인은 이렇게 말했다. “자신들은 성의를 다하는데 미국이 상응하는 조치를 하지 않는다는 불평이다. 협상 과정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전략이라고 본다.” 북한을 이해해줄 필요가 있다는 동정론이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북-미) 정상이 직접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국제사회로부터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도 했다. 북-미 교착상태를 풀기 위한 중재 외교를 다시 가동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고 실제로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서훈 국가정보원장의 잇단 방미로 이어졌다. 그런데 북한이 이 발언을 정면으로 비난하고 나설 줄이야. 노동신문은 “그 누구가 갑자기 재판관이나 된 듯 감히 입을 놀려댄다”며 ‘무례무도한 궤설’ ‘쓸데없는 훈시질’이라고 원색적 비난을 퍼부었다. 각종 선전매체들을 총동원해 “미국 눈치나 보는 제재압박 놀음에서 벗어나라”며 개성공단, 금강산관광 재개를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군사회담에 나온 북측 대표는 “우리가 미국을 흔들다가 잘 안 되니까 남측을 흔들어 종전선언을 추진할 거라고 (남측 언론이) 보도하더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비아냥조로 본심을 드러냈다. 이런 대남 폭언에 비하면 북한은 미국에 대해선 점잖기 그지없다. “미국의 부당한 입장과 태도는 조미관계 개선의 장애가 된다”는 볼멘소리가 전부다. 그러면서 미국 인공위성에 노출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미사일 공장 주변에 각종 차량들의 움직임을 대폭 늘렸다. 허공에 대고 무언(無言)의 종주먹질을 하는 셈이다. 한 세기 전 무성영화에나 나올 법한 신파극 배우 흉내 내기가 아닐 수 없다. 요즘 우리 정부는 영락없이 중매 잘못 섰다가 뺨 맞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여기에 미국마저 북한을 편든다고 눈을 흘기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북한의 상투적 수법을 그저 응석으로 받아넘겨온 오랜 관성 탓인지, 우리 정부는 북한의 험구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드러나는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인 국제관계의 특성상 공개 못할 막후 속사정이나 의외의 반전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모든 대외정책이 그렇듯 성패의 절반 이상은 국민 지지에 달려 있다. 말 많고 탈 많은 대북관계는 더더욱 그렇다. 마냥 저자세로 비쳐선 안 된다. 방자함을 내버려두면 엉뚱한 오판을 낳는다. 이제 따끔하게 한마디 할 때도 됐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Jerry, Don‘t Go(제리, 가지 마).’ 1975년 7월 23일자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의 사설 제목이다. 제리는 제럴드 포드 당시 대통령의 애칭. 유럽과 북미 정상 30여 명이 모이는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참석차 핀란드 수도 헬싱키 방문을 준비하던 그에게 대놓고 가지 말라고 요구한 것이다. 언론만이 아니었다. 공화·민주 양당에서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CSCE 정상회의가 채택한 헬싱키협약은 미국과 소련을 포함한 동서 양 진영이 긴장 완화를 위해 안보, 경제, 인권에 걸쳐 협력하기로 포괄적 합의를 이룬 것으로, 외교사적으로 냉전을 녹인 데탕트의 분수령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미국에선 소련의 발트3국 병합과 동구권 지배를 인정해준 굴욕적 합의라는 비판이 들끓었다. 포드는 헬싱키협약 내 인권 조항의 잠재적 파괴력을 믿었고, 국내적 반대를 무릅쓰고 헬싱키로 향했다. 그런 그가 출국연설에서 결정적 실수를 범한다. 소련의 반발을 의식한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의 조언을 받아들여 연설문 초안에 있던 한 문장을 빼버린 것이다. ‘미국은 결코 소련의 발트3국 병합을 인정하지 않았고 인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언론은 그 실종된 한 줄을 찾아냈고 여론은 더 악화됐다. 포드는 헬싱키에서 “역사는 우리가 하는 약속이 아닌, 우리가 지킬 약속으로 평가할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지만 이미 돌이키기엔 늦은 상황이었다. 이렇게 헬싱키는 포드의 무능을 상징하는 도시가 돼 버렸다. 하지만 이후 동구권 저항운동과 소련의 붕괴로 이어진 ‘헬싱키 프로세스’의 결과는 포드의 판단이 옳았음을 보여줬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리처드 닉슨의 잔여 임기 2년 5개월밖에 재임하지 못한 포드에게 헬싱키 외교는 사실상 그의 유일한 업적으로 남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이런 역사를 알고 헬싱키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회담 장소로 정했을 것이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같은 민감한 이슈를 다루는 만큼 리스크도 만만치 않지만 핵 군축 같은 더 큰 주제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고, 싱가포르 북-미 회담에 이은 헬싱키 미-러 회담은 ‘스트롱맨이 만드는 세계평화’라는 자못 인상적인 큰 그림에 잘 어울린다고 여겼으리라. 하지만 트럼프의 충동적 처신이 참사를 불러왔다. 푸틴과 나란히 서서 자신에게 걸려 있는 러시아 스캔들 연루 의혹을 씻어내는 계기로 삼으려다가 미국 정보기관의 판단을 부정하는 발언으로 “푸틴의 호주머니 속에서 놀아났다” “수치스러운 반역적 행위다”라는 비난까지 들었다. 급기야 트럼프는 “이중부정 어법을 썼어야 하는데…”라며 ‘not’을 빠뜨린 말실수라고 해명해야 했다. 매사에 공사(公私)가 불분명하고 외교도 한낱 개인기(個人技)쯤으로 여기는 트럼프식 ‘나 우선주의(Me First)’가 빚은 대형 사고였다. 그렇다고 트럼프의 ‘본능 외교’가 여기서 멈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천성적 속물근성을 오히려 ‘위선 떨지 않는 정치상품’으로 만든 트럼프 아닌가. 그러니 우리에겐 이런 트럼프의 노골적 현실주의가 한반도의 미래에 미칠 영향부터 다시 한 번 따져보는 게 급선무일 것이다. 동북아판 헬싱키 프로세스 같은 멋진 그림보다는 차라리 미국의 부담이 없는 비핵화라는 조악한 차트 그림이 나을지 모른다. 나아가 그런 트럼프를 두고 “초강대국 미국이 쇠퇴하는 징조 아니냐”고 개탄하거나 “그가 한국 좌파를 도울 줄은 몰랐다”고 배신감을 토로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그러는 사이 정작 트럼프의 눈귀는 김정은이 사로잡은 게 아닌지도 의심해볼 문제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올해 초까지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를 맡았던 조셉 윤은 최근 인터뷰에서 북한은 지금까지 6·25전쟁 종전선언에 관해 얘기한 적이 없다고 했다. 미국이 제기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그럴 리 없다”고 잘라 말했다. 북한도 미국도 아니라면, 한국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했다는 얘기다. 사실 종전선언이란 화두를 처음 꺼낸 것은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었다. 2006년 11월 베트남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는 안전보장협정, 평화협정, 종전선언, 전쟁종식 같은 용어를 별다른 구분 없이 사용하며 “북한이 핵 포기 결단을 내린다면 나와 각하, 그리고 김정일이 함께 한국전쟁을 완전히 종결짓는 평화협정에 서명하고 싶다”고 말했다. 부시 발언에서 종전선언을 포착해낸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노무현은 이듬해 9월 호주에서 다시 만난 부시의 입에서 공개적인 종전선언 발언을 끄집어내려 했다. 그러다 두 정상이 언쟁하는 것으로 비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백악관이 나서 “부시 대통령은 한국전쟁의 완전 종식을 지지했다”고 설명하면서 해프닝은 수습됐지만, 그 배경엔 양측 간 큰 인식 차가 있었다. 다만 노무현과 부시 모두 임기 말 업적 만들기엔 이해가 일치했다. 노무현은 이를 토대로 한 달 뒤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한반도 평화체제 포럼을 출발시키는 것이 필요하고, 협상 개시에 도움이 된다면 부시 대통령이 제안한 방식대로 3국 정상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평화체제 협상의 시작을 알리는 이벤트로 종전선언을 내놓은 것이다. 김정일의 답은 이랬다. “조선전쟁에 관련 있는 3자나 4자가 개성이나 금강산 같은 데서 모여 전쟁이 끝나는 것을 선포한다면 평화 문제를 논의하는 기초가 마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노 대통령께서 관심이 있다면 부시 대통령하고 미국 사람들과 사업해서 좀 성사시켜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은가 생각한다.” 아무래도 뜨뜻미지근한 반응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10·4 정상선언 4항 ‘3자 또는 4자 정상의 종전선언 추진’이다. 하지만 미국은 비핵화 진전이 없는 종전선언에 난색을 표했다. 북한마저 호응해주지 않으면서 종전선언 논의는 허망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10년이 지나 4·27 판문점선언에서 소생했다. 아직은 미생(未生)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6·12 북-미 회담 직후 남북미 3자 회담이 열릴 것으로 기대했지만 무산됐다. 합의문에도 종전선언 얘기는 없었다. 정부는 연내 추진하겠다며 한발 물러섰지만 여전히 정전협정 65년을 맞는 이달 27일, 또는 9월 뉴욕 유엔총회에서 가능성을 엿보고 있다. 정작 문제는 종전선언의 내용이다. 정부는 전쟁을 끝냈다는 선언인지, 전쟁을 끝내겠다는 선언인지조차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의 대북정책 멘토인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마저 “정치적 선언으로 평화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법적 효력을 갖춘 종전협약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한다. 종전선언을 최악의 악몽이라 여기는 보수 쪽은 더 얘기할 필요도 없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전쟁은 곧 끝날 것”이라며 관심을 보이는 만큼 종전선언이 성사될 가능성도 낮지 않다. 다만 트럼프는 최소한 김정은의 과감한 비핵화 선제 조치와 함께 종전선언을 하자는 생각인 듯하다. 성사된다면 비핵화 촉진제가 될 수도 있다. 문재인도 못다 이룬 노무현의 꿈에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용물도 없는 빈 그릇에 집착해선 될 일도 안 된다. 일단 떨쳐내면 의외로 쉬 다가오기도 한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국방부 취재를 담당한 지 얼마 안 되던 시절, 한 육군 장성을 따라 용산 미군기지로 들어가 볼 기회가 있었다. 빨간 별판을 단 승용차를 타고 별다른 제지 없이 곧장 들어선 용산기지는 시끄럽고 북적대는 서울 도심 속에 숨어있던 별천지, 고즈넉한 휴양지처럼 느껴졌다. 벌써 20년 전 일인지라 그곳 풍경은 아련하기만 하지만, 미군 레스토랑에서 호탕하게 스테이크를 주문하던 그 장성의 자못 우쭐해하던 표정은 여전히 기억에 또렷하다. ▷주한미군사령부가 어제 용산을 떠나 평택기지로 이전했다. 미군이 용산에 주둔한 지 73년, 주한미군사령부가 창설된 지 61년 만이다. 1945년 광복과 함께 들어온 미 24군단 예하 제7사단 병력은 이전까지 일제의 총독관저와 사단사령부, 사단장관저 등 병영시설이 있던 용산에 일장기 대신 성조기를 내걸었다. 이후 세계 유일의 도심 속 군사기지 용산은 사실상 한국 안의 미국으로서 ‘용산합중국’ ‘용산공화국’으로 불렸다. ▷용산에 외국 군대가 주둔한 역사는 약 7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말 한반도를 침략한 몽골군은 한강과 가까운 용산을 일본 정벌을 위한 병참기지로 삼았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과 명군이,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 군대가 주둔했다. 구한말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이 끌려왔던 곳이 바로 용산기지 맨 위쪽에 있던 청군 지휘소였다. 이후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용산은 일제의 대륙 침략을 위한 전초기지가 됐다. 우리 역사의 치욕이자 아픔의 땅이었던 것이다. ▷광복 후에도 오랜 기간 수도 한복판을 미군에 내준 이유는 북한의 위협 때문이었다. 그래서 주한미군이 옮겨가면서 유사시 미군의 자동 개입을 뜻하는 ‘인계철선’ 기능이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여전하다. 하지만 전후방이 따로 없는 현대전에서 인계철선 개념은 의미가 없고, 더 크고 좋은 새 둥지로 옮겨간 주한미군은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미군이 떠난 용산, 과거 행세깨나 하던 이들이나 들어갈 수 있던 그곳은 이제 모두에게 열린 생태공원으로 탈바꿈한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어르신 세계에서 30대 청년이란 대개 ‘시건방진 것들’쯤 아닐까 싶다. 어쩌다가 싹싹하고 곰살궂은 청년이라도 볼라치면 ‘저런 기특한 녀석도 있네’ 하며 쉽게 반색하기 마련이다. 서른넷의 김정은을 만나본 72세 어르신 도널드 트럼프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듯하다. 만난 지 몇 시간 만에 ‘특별한 유대관계’를 형성했다며 폭풍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는 재능이 많다. 26세에 국가를 맡아 터프하게 운영한다. 그 나이에 그 정도 할 수 있는 사람은 만 명 가운데 한 명이나 될까.” 김정은의 재능을 ‘터프한 국가 운영’에서 찾는 대목에선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같은 권위주의 통치자도 수없이 칭송했던 트럼프이니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65세 시진핑과 문재인도 ‘기특한 젊은이’를 만난 어르신처럼 보인다. 세 번씩이나 중국을 찾아온 깍듯한 청년을 바라보는 시진핑의 표정은 더없이 흡족해 보였다. 문재인도 이렇게 칭찬했다. “아주 젊은 나이인데도 상당히 솔직담백하고 침착한 면모를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연장자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아주 예의바른 모습도 보여줬다.” 이쯤 되면 김정은은 적어도 한미중 정상 사이에선 ‘말이 통하는 젊은이’로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나이 지긋한 원로들 앞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우고, 최측근마저 굽신굽신 입을 가리고 보고하게 만든 북한의 절대 권력자로부터 어느 결엔가 예의바른 지도자로 180도 변신했으니, 김정은의 데뷔는 일단 큰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의 새파란 나이는 부지런함과 예의바름이 덧붙여지면서 오히려 장점이 됐다. 김정은은 지난 석 달 새 정상회담을 여섯 차례나 했다. 가까이는 판문점, 멀리는 싱가포르까지 다녀왔다. 이곳저곳 부지런히 발품을 파는 ‘게릴라 외교’도, 어려운 처지에 두루 환심을 사기 위해 ‘저팔계 외교’도 해야 하는 생계형 외교 행태라고만 보아 넘기기는 어렵다. 최고 권력자의 셋째 아들, 그것도 ‘째포’(북송 재일교포) 출신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김정은이 후계자가 된 것은 무엇보다 형들에게 결격 사유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아버지와 권력층의 눈에 들기 위한 그 자신의 치열한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최소한 ‘싹수가 있다’는 평가를 받아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사람을 어르고 구슬리는 특별한 재주도 키웠으리라. 김정은은 어르신들에게서 직접 예절 학습을 받기도 했다. 트럼프와 시진핑이 이심전심으로 김정은을 지도했음을 보여주는 단서도 있다. 트럼프는 5월 초 국무장관을 평양으로 보내 북-미 회담 장소를 싱가포르로 확정지은 직후 “시 주석이 이틀 전 매우 구체적인 뭔가로 큰 도움을 줬다”고 시진핑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 도움이란 바로 전용기 대여였을 것이다. 당초 김정은은 안전을 이유로 장거리 외출을 한사코 거부했을 테지만 트럼프의 요청으로 시진핑이 전용기를 내주면서 일단 체면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문재인의 개인과외도 한몫했다. 한번 튕겨 보자며 북-미 회담 ‘재고려’를 꺼냈다가 전격 ‘취소’라는 강수에 놀란 김정은이 황급히 판문점에서 한 수 지도를 청한 어르신이 문재인이었다. 이런 김정은의 염치 불구 행보는 ‘아직 젊으니까’라는 이유로 양해도 받고 칭찬도 받는다. 하지만 아직은 테스트 기간일 뿐이다. 마냥 격려나 칭찬을 받을 순 없다. ‘싹수없는 어린 녀석’으로 전락하는 것은 한순간이다. 제각기 요구도 다르고 시샘도 많은 어르신들이다. 모두에게 다 잘해줄 수도 없다. 특히 트럼프의 변덕이란. 김정은의 진짜 시험은 이제부터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요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난수표에 가깝다. 중학생 수준의 쉬운 어휘를 구사한다지만 도무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그것이 일부러 예측불허의 불확실성을 노린, 그래서 무한한 상상력을 낳게 만드는 고도의 협상가 언어라고 한다면 더 할 말이 없지만 세계 유일의 슈퍼파워 미국 대통령의 말이니 꼼꼼히 살펴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트럼프는 지난 주말 백악관에서 ‘북한의 두 번째 권력자’ 김영철을 만난 직후 기자들 앞에 섰다. 그 자리에서 그는 ‘프로세스(과정)’라는 단어를 9차례나 사용했다. “그건 프로세스다. 12일 뭔가에 서명하진 않을 것이다. 프로세스를 시작하는 거다. 그 프로세스는 싱가포르에서 시작된다. 정상회담은 무척 성공적인, 종국엔 성공적 프로세스가 될 거다.” 그동안 강조하던 비핵화의 신속한 일괄이행(all-in-one) 요구는 자취를 감췄고, 일괄타결식 합의도 한 번 만나선 어려울 수 있다며 “천천히 갈 수 있다”고도 했다. 심지어 ‘최대의 압박’이란 용어도 사용하고 싶지 않다고까지 했다. 이렇게 북한에 너그러운 언사를 쏟아냈으니 당장 여기저기서 걱정과 지청구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트럼프의 발언은 늘 상황과 맥락을 따져봐야 한다. 트럼프는 일부 심리학자가 진단했듯 ‘극단적 현재 쾌락주의자’다. 오직 현재의 순간에만 살면서 자아를 한껏 부풀리고 과거의 진실도, 미래의 결과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에서다. 당시 트럼프는 큰 봉투에 담긴 김정은 친서를 건네받은 뒤였다. 그래선지 다소 흥분상태라 할 만큼 득의만만했다. 친서의 내용이 뭔지, 김영철과는 어떤 얘기를 나눴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김정은이 이미 일주일 전 김계관의 입을 빌려 내놓은 담화와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트럼프도 이를 “따뜻하고 생산적인 담화”라고 칭찬했다. 담화의 영문본은 한글본보다 훨씬 공손하게 읽힌다. 회담 취소 사태에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We can not but feel great regret for it)’며 사실상 사과했고, ‘만나서 첫술에 배가 부를 리는 없겠지만(The first meeting would not solve all, but…)’이라며 추가 회담 의사도 밝혔다. ‘유감’은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때 김일성이 최초로 미국에 보낸 사과의 표현과 같다. 처음에 미국은 ‘유감’ 메시지가 잘못을 시인한 게 아니라며 거부했지만 사과와 마찬가지라는 한국통의 해석을 받아들여 위기를 수습했다. 공개되지 않은 김정은의 친서에는, 나아가 진사(陳謝) 사절로 간 김영철의 입에선 유감보다 더한 사죄 표현이 있었을지 모른다. 전격적인 두 번째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코치까지 받은 터이니 가히 반성문 수준이었으리라. 트럼프의 오랜 측근은 그 상황을 “김정은이 넙죽 엎드려 간청했다”고 전했다. 이런 맥락에서 트럼프 발언을 다시 살펴보면 북한의 태도를 확인한 만큼 보다 현실적 접근을 해보겠다는 수준이지, 그간의 기조가 크게 바뀌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불미스러운 사태’는 좌초 위기의 정상회담을 다시 궤도에 올려놓았다. 트럼프는 차제에 김정은의 버르장머리를 고쳤고, 당분간 어깃장 걱정은 덜게 됐다. 김정은도 체면은 구겼지만 트럼프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사는 계기는 됐다. 그렇다고 마냥 낙관만 하긴 어렵다.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걱정은 나흘 뒤 회담에서 트럼프의 충동적 협상 본능을 과연 제어할 수 있느냐에 모아진다. 특히 굴신(屈身)도 마다않는 김정은을 상대하는 일이니 말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