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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회화의 산실로 꼽히는 두 집안이 있다. 전남 해남의 녹우당과 진도의 운림산방이다. 두 집안은 대를 이어 유명 예술가들을 배출해냄으로써 ‘예향(藝鄕) 호남’을 대표하는 가문으로 자리 잡았다. 남도의 정서와 전통을 잘 표현한 이들 집안의 화맥(畵脈)은 한국 회화사에 큰 줄기를 형성한 것으로 평가받는다.명가(名家)에 명인(名人)이 난다고 했던가. 어떤 집터이기에 수대에 걸쳐 걸출한 인물과 재능 넘치는 예인(藝人)들을 연이어 배출한 걸까.》 ○ 녹색 빛깔 쏟아지는 녹우당 해남읍 연동의 녹우당은 집터 규모만 1만 평에 이르는 해남 윤씨의 종가다. ‘어부사시사’ ‘산중신곡’ 등 가사문학으로 유명한 윤선도(1587∼1671)가 살았던 집으로, 그의 4대 조부인 윤효정(1476∼1543)이 처음 지은 고택이다. 5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녹우당을 찾았을 때가 4월 말. 늦봄과 초여름 사이 나뭇잎이 우거질 무렵 내리는 ‘녹우(綠雨)’를 상징하듯 주위는 온통 비처럼 쏟아지는 초록빛으로 가득했다. 윤효정이 길지를 골라 자리 잡은 녹우당은 풍수의 눈으로 보아도 명당 터다. 덕음산(192m)을 배경으로 두고 주위로 성매산 옥녀봉 호산 등 사신사(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가 녹우당이 들어선 마을(당시 이름은 백련동)을 포근하게 에워싸고 있는 모양새다. 덕음산 자락의 길지 기운을 받아서였을까. 녹우당에서는 윤효정 이후 내리 10대에 걸쳐 과거 급제자들을 배출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의병을 이끌고 나라를 지키는 데 앞장선 윤구, 가사문학의 선구자 윤선도, 사실적인 초상화와 풍속화 등으로 조선 중기 사실주의 회화를 개척한 윤두서(1668∼1715)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그런데 여러 대에 걸쳐 가문이 흥성하기 위해서는 좋은 터와 함께 전제 조건이 따른다. 바로 주위 사람들에 대한 베풂과 공덕이다.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적선하는 집안은 복이 자신뿐 아니라 자손에게도 미친다)’이라는 ‘소학(小學)’의 논리가 풍수에도 적용된다. 이곳 입향조(入鄕祖) 윤효정은 기근으로 세금을 내지 못한 농민들이 감옥에 갇히는 안타까운 사정을 보고 감옥문을 세 번이나 열어 구휼하는 적선을 했다. 이에 당시 임금 중종은 윤효정에게 ‘삼개옥문 적선지가(三開獄門 積善之家)’라는 어지를 내렸다. 현재 녹우당 앞뜰에는 그런 역사를 상징하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높이 솟아 있다. 윤효정이 과거에 급제한 아들을 기념하기 위해 심은 수령 500여 년의 나무다. ○명당 혈(穴) 체험 명소된 사랑채 녹우당 뜰 안으로 들어서면 안채와 사랑채를 중심으로 행랑채와 문간채 등 여러 건물이 들어서 있다. 전체적으로 ㅁ자형의 건축 구조인데, 안채는현재 윤효정의 18대 종손(윤형식)이 살고 있어 관람객들의 출입이 제한돼 있다. 채광과 통풍을 위해 지은 솟을지붕이 돋보이는 안채의 마당은 정확히 명당 혈에 해당한다. 이 기운이 안채 부엌 창고 등으로 동심원처럼 퍼져나가면서 식구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 빼어난 터에 자리 잡은 건물들은 포도송이처럼 여러 곳에 혈이 맺힌 경우가 많은데 녹우당도 예외가 아니다. 사랑채 마당에 인공으로 조성한 연못 부근에도 또 다른 명당 혈이 맺혀 있다. 윤형식 종손의 아들인 윤성철 씨는 “풍수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사랑채 연못가에서 장시간 머물며 명당 기운을 체험하고 간다”고 귀띔했다. 사랑채는 역사적 명소이기도 하다. 효종이 그의 스승이던 윤선도에게 하사한 경기도 수원 집을 현종 9년(1668년)에 서해 뱃길을 통해 이곳에 몽땅 옮겨 온 것이다. 혈 자리에 서서 사랑채를 바라보면 조선 사대부의 높은 품격 또한 느껴진다. 햇볕을 가리기 위한 겹처마(이중 처마)가 인상적인 사랑채에는 동국진체(東國眞體)로 유명한 옥동 이서가 쓴 ‘녹우당’ 편액을 비롯해 ‘운업(芸業·늘 곧고 푸르며 강직한 선비)’, 원교 이광사가 쓴 ‘정관’(靜觀·선비는 홀로 있을 때도 자신의 흐트러진 내면세계를 살펴 고친다)이라는 글씨가 걸려 있다. 녹우당 뒤편은 망자를 위한 공간이다. 재실인 추원당을 비롯해 윤효정의 묘와 사당, 윤선도의 사당이 배치돼 있다. 더 뒤쪽으로는 500여 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 제241호)이 조성돼 있다. 덕음산의 산향(山香)을 즐기며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명소다. 녹우당에서는 의외의 인물들이 남긴 흔적도 만날 수 있다. 녹우당 정면에서 오른편에 있는 충헌각 건물은 철학자 도올 김용옥이 태어난 생가다. 김용옥의 진외가가 바로 녹우당이어서 그가 이 터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또 녹우당 왼편 차밭으로 일구어진 터에는 다산 정약용이 그의 어머니와 함께 머물다 간 초당이 있었다고 한다. 녹우당의 종손은 “정약용의 외증조부가 공재(윤두서)인데 친정을 그리워하는 손녀를 위해 공재가 초당을 지어주었다”고 말한다. 그때의 초당을 찍은 사진도 남아 있다.○운림산방으로 이어지는 예술혼 녹우당은 윤두서 이후부터는 예술 명가로 부상하게 된다. 윤두서-윤덕희(아들·1685∼1776)-윤용(손자·1708∼1740)으로 이어지는 3대의 화풍은 17세기에서 18세기까지 호남 문인화단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 그런데 조선 회화풍을 획기적으로 바꿔 놓은 ‘녹우당 화풍’은 진도 출신의 소치 허련(1808∼1893)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 허련은 녹우당의 공재화첩을 통해 그림을 모사하며 그림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후 허련은 추사 김정희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 특유의 남종화풍을 정착시켰고, 남종화를 남도회화의 특징으로 자리 잡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허련이 1856년에 지은 진도군 의신면의 운림산방은 바로 그 남종화의 본향이다. 운림산방에서는 200년 남짓 5대에 걸쳐 허형 허건 허백련 등 10여 명의 뛰어난 화가들이 배출됐다. 운림산방 내 소치기념관은 허련과 그 후손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진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첨찰산(485m) 자락에 자리 잡은 운림산방은 아침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을 이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한 폭의 그림 속으로 빠져든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운림산방 역시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가진 터다. 녹우당처럼 앞뒤좌우의 사신사가 뚜렷한 명당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런 터에 들어서면 몸과 마음이 차분하고도 평온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운림산방의 혈 자리는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닌 자연물이 차지하고 있다는 게 특징적이다. 대표적인 게 소치 화실 바로 앞에 조성된 운림지다. 허련이 운림산방을 지으면서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을 끌어 모아 조성한 인공 연못이라고 한다. 영화 ‘스캔들’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운림지 한가운데로는 조그마한 섬과 그 중심에 서 있는 백일홍(배롱나무)이 인상적이다. 허련이 직접 심은 나무라고 한다. 바로 이 운림지 일대가 명당 혈에 해당한다. 예술가 허련은 명당 혈을 연못에 양보한 뒤 화실에서 연못을 바라보면서 그림으로 이를 표현하려 한 것은 아닐까. 또 다른 한곳은 소치기념관 앞 일지매가 서 있는 자리다. 해남 대흥사 일지암에 머물던 초의선사가 제자인 소치 허련에게 선물로 주어 심었다는 나무다. 일지매가 있는 터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운림산방의 이모저모가 한눈에 들어온다. 해남의 녹우당과 진도의 운림산방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명당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동시 여행을 권할 만하다. 단, 거리상 하루 코스로는 힘들기 때문에 해남에서 이순신의 명량해전으로 유명한 명량해협(진도대교)을 건너가 진도에서 하룻밤 묵어가는 걸 추천한다. ○가볼만 한 곳 호텔급 숙박지로는 운림산방과 ‘신비의 바닷길’을 인근에 둔 ‘쏠비치 진도’가 있다. 좋은 터에 자리 잡고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가족 여행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요즘은 밤에 갖가지 와인을 맛볼 수 있는 ‘와인 투어’를 운영하고 있는데 와인과 함께 진도 밤바다 풍경을 즐기는 재미도 있다.사진·글 해남, 진도=안영배 기자 · 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남도의 정서와 전통을 표현한 ‘남도회화’의 산실로 꼽히는 두 집안이 있다. 전남 해남의 녹우당과 진도의 운림산방이다. 두 집안은 대를 이어 유명 예술가들을 배출해냄으로써 ‘예향(藝鄕) 호남’을 대표하는 가문으로 자리잡았다. 이들 집안의 화맥(畵脈)은 호남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어 한국회화사에 큰 줄기를 형성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명가(名家)에 명인(名人)이 난다고 했던가. 어떤 집터이기에 수대에 걸쳐 걸출한 인물과 재능 넘치는 예인(藝人)들을 연달아 배출한 걸까. ● 녹색 빛깔 쏟아지는 녹우당 해남읍 연동의 녹우당은 집터 규모만 1만평에 이르는 해남 윤씨의 종가다. ‘어부사시사’ ‘산중신곡’ 등 가사문학으로 유명한 윤선도(1587~1671)가 살았던 집으로, 그의 4대 조부인 윤효정(1476~1543)이 지은 고택이다. 5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녹우당을 찾았을 때가 4월 말. 늦봄과 초여름 사이 나뭇잎이 우거질 무렵 내리는 ‘녹우(綠雨)’를 상징하듯, 주위는 온통 비처럼 쏟아지는 초록빛으로 가득했다. 윤효정이 길지를 골라 자리잡은 녹우당은 풍수의 눈으로 보아도 명당 터다. 덕음산(192m)을 배경으로 두고 주위로 성매산, 옥녀봉, 호산 등 사신사(좌청룡·우백호·남주작·북현무)가 녹우당이 들어선 마을(당시 이름은 백련동)을 포근하게 에워싸고 있다. 녹우당 앞뜰에 서서 바라보면 오른쪽(백호) 방향으로 붓처럼 끝이 뾰족하게 생긴 산봉우리(호산)가 특히 눈길을 끈다. 학자 혹은 문장가를 배출하는 기운이 있다고 해서 ‘문필봉(文筆峰)’이라고도 불리는 산봉우리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일부러 산 정상 부분을 깎아내렸다는 구전도 전해진다. 문필봉의 기운을 받아 인물이 배출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덕음산 자락의 좋은 땅 기운과 주변 산 기운을 받아서였을까. 녹우당에서는 윤효정 이후 내리 10대에 걸쳐 과거 급제자들을 배출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의병을 이끌고 나라를 지키는 데 앞장선 윤구, 가사문학의 선구자 윤선도, 사실적인 초상화와 풍속화 등으로 조선 중기 사실주의 회화를 개척한 인물인 윤두서(1668~1715) 등이 대표적 인물들이다. 그런데 여러 대에 걸쳐 가문이 흥성하기 위해서는 좋은 터와 함께 전제 조건이 따른다. 바로 주위 사람들에 대한 베풂과 공덕이다.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적선하는 집안은 복이 자신뿐 아니라 자손에게도 미친다)’이라는 ‘소학(小學)’의 논리가 풍수에도 적용된다. 이곳 입향조(入鄕祖) 윤효정은 이 원리를 잊지 않았다. 부자였던 그는 심한 기근으로 세금을 내지 못한 농민들이 감옥에 갇히는 안타까운 사정을 보고 감옥문을 세 번이나 열어 구휼하는 적선을 했다. 이에 당시 임금 중종은 윤효정에게 ‘삼개옥문 적선지가(三開獄門 積善之家)’라는 어지를 내렸다. 현재 녹우당 앞뜰에는 그런 역사를 상징하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높이 솟아 있다. 윤효정이 과거에 급제한 아들을 기념하기 위해 심은 수령 500여 년의 나무다. 빛나는 가문이 오랫동안 유지되길 바라는 윤효정의 기원이 담긴 나무다. ● 명당 혈(穴) 체험 명소된 사랑채 녹우당 뜰 안으로 들어서면 안채와 사랑채를 중심으로 행랑채와 문간채 등 여러 건물이 들어서 있다. 전체적으로 ㅁ자형의 건축 구조인데,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형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건물의 가장 중심인 안채는 현재 윤효정의 18대 종손(윤형식)이 살고 있어 관람객들의 출입이 제한돼 있다. 채광과 통풍을 위해 지은 솟을지붕이 돋보이는 안채의 마당은 정확히 명당 혈에 해당한다. 이 기운이 안채, 부엌, 창고 등으로 동심원처럼 퍼져나가면서 식구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 빼어난 터에 자리잡은 건물들은 포도송이처럼 여러 곳에 혈이 맺힌 경우가 많은데 녹우당도 예외가 아니다. 사랑채 마당에 인공으로 조성한 연못 부근에도 또 다른 명당 혈이 맺혀 있다. 윤형식 종손의 아들인 윤성철 씨는 “풍수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사랑채 연못가에서 장시간 머물며 명당 기운을 체험하고 간다”고 귀띔했다. 사랑채는 역사적 명소이기도 하다. 효종이 그의 스승이던 윤선도에게 하사한 경기도 수원 집을 현종 9년(1668)에 서해 뱃길을 통해 이곳에 몽땅 옮겨 온 것이다. 윤선도는 원래 있던 집에 덧대 이 명당 사랑채를 지었다. 사실 그는 임금에게 풍수 자문을 할 정도로 빼어난 풍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녹우당의 소장품들을 전시하고 있는 ‘윤선도기념관’에는 이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풍수 측정용 나침반이 있을 정도다. 한편으로 사랑채를 바라보면 조선 사대부의 높은 품격 또한 느껴진다. 햇빛을 가리기 위한 겹처마(이중 처마)가 인상적인 사랑채에는 동국진체(東國眞體)로 유명한 옥동 이서가 쓴 ‘녹우당’ 편액을 비롯해 ‘운업(芸業·늘 곧고 푸르며 강직한 선비)’, 원교 이광사가 쓴 ‘정관’(靜觀·선비는 홀로 있을 때도 자신의 흐트러진 내면 세계를 살펴 고친다)이라는 글씨가 걸려 있다. 녹우당 당주들의 삶과 정신세계가 담겨 있는 듯한 표현들이다. 녹우당 뒤편은 망자를 위한 공간이다. 재실인 추원당을 비롯해 윤효정의 묘와 사당, 윤선도의 사당이 배치돼 있다. 더 뒤쪽으로는 500여년 수령을 자랑하는 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 제241호)이 조성돼 있다. 덕음산의 산향(山香)을 즐기며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명소다. ‘綠雨堂(녹우당)’이라는 당호가 비자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내는 소리가 비가 내리는 듯하다 해서 지어졌다는 설에도 수긍이 간다. 비자나무 숲도 풍수와 관련 깊다. 윤형식 종손의 증언에 의하면 산에서 나무를 베어와 땔감으로 쓰던 옛날에도 마을 사람들이 비자나무만큼은 베어내지 못하도록 철저히 관리했다. 비자나무숲이 풍수 비보(裨補)로 조성됐기 때문이다. 덕음산은 원래 바위가 많은 산이었다고 한다. 허옇게 바위가 드러난 산이 있으면 그 마을이 융성하지 못한다고 보는 게 풍수적 해석이다. 그래서 녹우당 선조들이 사시사철 푸른 잎을 유지하는 비자나무를 골라 바위산을 가려버렸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녹우당 주인들은 비자나무 열매를 모아 마을사람들에게 구충제로 쓰도록 했고, 비자 열매 강정은 녹우당의 전통 다과상에 오르는 단골 메뉴가 됐다. 녹우당에서는 의외의 인물들이 남긴 흔적도 만날 수 있다. 녹우당 정면에서 오른편에 있는 충헌각 건물은 철학자 도올 김용옥이 태어난 생가다. 김용옥의 진외가가 바로 녹우당이어서 그가 이 터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또 녹우당 왼편 차밭으로 일구어진 터에는 다산 정약용이 그의 어머니와 함께 머물다 가던 초당이 있었다고 한다. 녹우당의 종손은 “정약용의 외증조부가 공재(윤두서)인데, 친정을 그리워하는 손녀를 위해 공재가 초당을 지어주었다”고 말한다. 그때의 초당을 찍은 사진도 남아 있다. 정약용이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지어낸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역작들도 녹우당의 서책을 빌릴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도 유명한 일화다. ● 운림산방으로 이어지는 예술혼 녹우당은 윤두서 이후부터는 예술 명가로 부상하게 된다. 윤두서-윤덕희(아들·1685~1776)-윤용(손자·1708~1740)으로 이어지는 3대의 화풍은 17세기에서 18세기까지 호남 문인화단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 그런데 조선 회화풍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은 ‘녹우당 화풍’은 진도 출신의 소치 허련(1808~1893)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허련은 녹우당의 공재화첩을 통해 그림을 모사하며 그림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후 허련은 추사 김정희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 특유의 남종화풍을 정착시켰고, 남종화를 남도회화의 특징으로 자리잡도록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허련이 1856년에 지은 진도군 의신면의 운림산방은 바로 그 남종화의 본향이다. 운림산방에서는 200년 남짓 5대에 걸쳐 허형, 허건, 허백련 등 10여 명의 뛰어난 화가들이 배출됐다. 운림산방 내 소치기념관에는 허련과 그 후손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이곳에서 남종화의 진수를 체험할 수 있다. 진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첨찰산(485m) 자락에 자리잡은 운림산방은 아침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을 이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한 폭의 그림 속으로 빠져든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허련이 남긴 문집인 ‘소치실록’에 의하면 큰 정원을 다듬고 아름다운 꽃과 희귀한 나무를 심어 선경을 꾸민 곳이라고 운림산방을 설명한다. 운림산방 역시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가진 터다. 녹우당처럼 앞뒤좌우의 사신사가 뚜렷한 명당 터에 자리잡고 있다. 이런 터에 들어서면 몸과 마음이 차분하고도 평온해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데 운림산방의 혈 자리는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닌 자연물이 차지하고 있다는 게 특징적이다. 대표적인 게 소치 화실 바로 앞에 조성된 운림지다. 허련이 운림산방을 지으면서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을 끌어모아 조성한 인공 연못이라고 한다. 영화 ‘스캔들’의 촬영지로 유명세를 탄 운림지 한가운데로는 조그마한 섬과 그 중심에 서 있는 백일홍(배롱나무)이 인상적이다. 허련이 직접 심은 나무라고 한다. 바로 이 운림지 일대가 명당 혈에 해당한다. 예술가 허련은 명당 혈을 연못에 양보한 뒤 화실에서 연못을 바라보면서 그림으로 이를 표현하려 한 것은 아닐까. 자신 역시 평범한 초가집에서 살며 그림에 모든 것을 바쳐온 소치의 예술가 정신을 느껴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운림산방인 것이다. 또 다른 한 곳은 소치기념관 앞 일지매가 서 있는 자리다. 해남 대흥사 일지암에 머물던 초의선사가 제자인 소치 허련에게 선물로 주어 심었다는 나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탐심에 휘둘려 하마터면 뺏길 뻔했던 일지매는 현재 운림산방을 수호하듯 서 있다. 일지매가 있는 터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운림산방의 이모저모가 한눈에 들어온다. 해남의 녹우당과 진도의 운림산방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명당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동시 여행을 권할 만하다. 단 거리상 하루 코스로는 힘들기 때문에 해남에서 이순신의 명량해전으로 유명한 명량해협(진도대교)을 건너가 진도에서 하룻밤 묵어가는 걸 추천한다. ●가볼만한 곳=호텔급 숙박지로는 운림산방과 ‘신비의 바닷길’을 인근에 둔 ‘쏠비치 진도’가 있다. 바닷가의 좋은 터에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가족 여행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요즘은 밤에 각종 와인을 맛볼 수 있는 ‘와인 투어’를 운영하고 있는데, 와인 한 잔과 함께 진도 밤바다 풍경을 즐기는 재미도 있다. 해남, 진도=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가마터는 도자기를 만들어 내는 곳이다. 가마터에서는 도자기의 원료인 태토(胎土)의 질, 적절한 불의 세기, 공기의 조합 등이 도자기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가 된다. 여기에 하나 더 보태면 가마터가 위치한 자리다. 옛 도공들은 가마터를 아무 곳에나 만들지 않았다. 풍수적으로 명당 터에다 요지(窯址·가마터)를 조성했다. 명당 가마터에서 명품 도자기가 탄생한다는 믿음에서다. 수도권에서 명당 가마터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있다. 한국의 대표적 도자(陶瓷)도시이자 2019년 유네스코 창의도시(도자기 공예 부문)로 선정된 경기 이천시의 가마터다. 특히 수광리의 오름가마는 우리나라 근현대의 가마 제작 기술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야트막한 산자락 경사진 곳에다 계단식으로 줄지어 12칸 가마를 만들어 놓은 이 오름가마(등록문화재 제657호)는 근대에 세워진 요지로는 보기 드물게 명당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도 땅에서 솟아나는 생기(生氣)를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이 가마는 1963년 고(故) 조소수 광주요 설립자가 조선 왕실에 진상하던 관요(官窯)의 전통을 잇기 위해 설립한 것이라고 한다. 설립자의 아들인 조태권 광주요 회장은 “선친이 일제강점기의 문화말살 정책으로 명맥이 끊어지다시피 한 조선 도자기를 재현하기 위해 원래 있던 이 가마터를 찾아 전통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 명당 가마터에서 명품 도자기 나와 이천에는 수광리 오름가마처럼 전통 가마를 갖춰놓고 도자기를 제작 및 판매하는 마을인 ‘사기막골 도예촌’(사음동)과, 도자기 문화에 관광과 여가 기능을 덧붙인 현대식 마을인 ‘예스파크’(이천도자예술마을·신둔면)가 있다. 사기막골 도예촌은 ‘사기그릇을 굽는 막(幕)이 있던 골짜기 마을’이라는 뜻이다. 지명답게 이곳은 산제당골산 골짜기를 따라 여러 공방이 옹기종기 들어서 있다. 역사도 깊은 편이다. 이 도예촌은 조선시대에 한창 번성했다가 일제강점기 때 침체된 이후 1970년대부터 도자기 공방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지금의 마을을 이루게 됐다고 한다. 토월요, 송월요 등 전통 가마에서 도자기를 만들어 내는 공방과 도소매 형태로 생활자기를 판매하는 가게들이 혼재돼 있다. 마을의 규모가 크지 않아 반나절 정도면 이 일대를 여유 있게 돌아볼 수 있다. 어슷비슷한 전통 가마를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또 전통 가마터란 산에서 땔감이 풍부하게 나고, 골짜기를 따라 부는 바람의 방향이 좋으며, 좋은 토질을 갖춘 곳에 자리 잡아야 한다는 점을 실감나게 해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곳 가마터는 대개 인위적으로 경사면을 조성한 뒤 오름식 가마를 하고 있다는 점이 다소 아쉽기는 하다. 역사적으로 우리의 전통 가마터는 한결같이 자연 그대로의 명당 터에 조성돼 왔다. 충북 진천 산수리의 ‘백제 요지’, 경남 창녕의 가야 시대 대형 가마터, 전남 해남의 고려청자 가마터, 전국 곳곳에 산재한 조선시대 백자 가마터 등이 대부분 그런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 심수관가(家)의 가마터 또한 명당에 조성돼 있는 점도 이를 증명한다. 규슈(九州) 남단 가고시마(鹿兒島)현 미야마(美山) 마을에 있는 이 가마터는 일본을 세계적 도자기 강국으로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는데, 지금도 조선식 오름가마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전통 가마터 여행은 도자기 예술을 즐기는 동시에 명당 기운을 체험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 도자 관광 산업의 메카, 예스파크 산의 계곡을 따라 길쭉하게 공방들이 들어서 있는 사기막골 도예촌과 달리 이천시가 최근에 조성한 예스파크(藝’s Park)는 수평으로 널따랗게 조성된 도자기 테마파크다. 이천시가 야심 차게 기획한 국내 최대 규모의 공예타운으로, 40만6000m²(약 12만3000평)의 부지에 현재 350여 개의 공방이 들어서 있다. 각 공방은 창작 활동 공간, 전시 및 판매 공간, 주거 공간을 한꺼번에 갖추고 있다. 500여 명의 예술인이 거주 생활과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건물 구조가 짜여 있다. 이 때문에 전시 공간(갤러리)에 들어서면 작가로부터 직접 작품의 창작 의도와 과정을 들을 수 있고, 작품을 감상하거나 구매할 수 있다. 마을이 워낙 크다 보니 하루를 다 써도 전체를 둘러보기가 어렵다. 마을 입구에서 한옥으로 꾸민 관광안내소에 들러 답사 계획을 짜는 게 좋다. 관광안내소에서는 테마별로 가마마을, 회랑마을, 별마을, 사부작마을 등 4개의 소마을에 분산 배치된 각 공방들의 특징과 체험 프로그램 정보를 구할 수 있다. 마을 지도를 들고 거리로 나서면 서구식 세련된 건물들과 전후좌우로 반듯하고도 깨끗한 도로가 이국적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특히 예술가들이 취향에 따라 독특하게 지은 건물들은 눈요깃거리다. 예스파크를 가로지르는 생태하천 북쪽에 조성된 가마마을은 야트막한 산등성이 자락에서 학암천을 바라보는 배산임수형 명당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중 달항아리로 유명한 신철 작가의 공방 ‘흙으로 빚은 달’에서는 전통 가마터처럼 장작으로 불을 지피면서도 실용성을 가미한 현대식 가마를 구경할 수 있다. 이 가마에서 구워낸 현대의 백자, 즉 거대한 달항아리들도 감상할 수 있다. 한편으로 예스파크에는 주축을 이루는 도예 공방 외에 유리, 고가구, 옻칠, 조각, 회화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 공예 공방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각 공방에서는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별마을의 유리 공방 ‘플럭스’에서는 일반인들을 상대로 유리 공예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회랑마을의 ‘토즈스토’는 입체 도자기 인형 위에 자신만의 캐릭터를 새겨 넣는 아트토이 프로그램을, 사부작마을의 도예 공방 ‘들꽃마을’은 작가가 도자기 교육을 하면서 전통 도자기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프로그램 참여는 예약이 필수이므로 미리 문의해야 한다. 예스파크가 종합 예술문화단지로 입소문이 나면서부터 평일에도 직접 물레를 돌려 도자기를 빚어보는 젊은 커플, 자기가 그린 그림이 새겨지는 그릇 만들기에 도전하는 어린이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예스파크에서는 각 마을마다 도자기 명장들이 빚어낸 명품 도자기를 찾아내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도자기는 그 자체의 성분과 함께 작가의 정성과 혼이 들어간 ‘기물(氣物·기운이 담긴 물건)’이라고 할 수 있다. 기운이 밴 도자기일수록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일찌감치 조선의 도자기를 흠모해온 일본인들은 이런 기운에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 특히 차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은 가마에서 깨지지 않고 변형된 채로 구워진 다완(茶碗·찻사발)일수록 높게 평가한다. 가마의 뜨거운 기운까지 버텨낸 다완은 그만큼 강력한 기운이 배어 있다는 믿음에서다. 이천시의 전통 도예촌은 한때이런 도자기를 구하려는 일본인 관광객들로 넘쳐났을 정도다. 도자기의 기운은 풍수에도 이용할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일찌감치 도자기를 공간의 기운을 보충하는 ‘비보(裨補·모자라는 것을 채움)’ 풍수 소품으로 활용해 왔다. 사대부집 사랑방과 안채 등에 장식한 청자나 백자는 예술품 감상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자기의 기운으로 실내의 공간 기운을 보충하려는 풍수적 조치이기도 했다. 이천의 도자기 마을로 여행가면 마음이 가는 도자기 하나쯤 구해 집 안에 장식해 보기를 추천한다. 이천=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풍수학 박사}
《“남아의 태(胎)가 좋은 땅을 만나면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벼슬이 높으며 병이 없을 것이요, 여아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얼굴이 예쁘고 단정하여 남에게 공경과 우러름을 받게 된다.” 당나라 때 승려이자 풍수학자인 일행(一行) 선사가 남긴 말이다. 태를 봉안하는 좋은 땅이란 어디일까. 그 모범 답안이 경북 성주군 월항면의 세종대왕자 태실(사적 제444호)이다. 선석산 자락 태봉 정상에 있는 이곳에는 세종대왕의 왕자 18명과 손자 단종 (단종이 세자로 책봉된 후에는 성주군 가천면 법전리로 이전) 등 총 19개의 태실이 조성돼 있다.》 세종대왕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이곳을 최고의 길지로 선택했다. 지형적으로도 그렇다. 선석산에서 태봉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한 줄기 맥은 산모와 태아를 이어주는 탯줄을 연상시키며, 태실이 자리한 태봉은 산모의 자궁처럼 보인다. 태아를 안전하게 지키는 자궁답게 봉우리 정상의 태실은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교차하면서 생기(生氣)가 감도는 명당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왕자들의 태실이 군집을 이룬 국내 유일한 형태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 왕들은 탯줄도 명당에 봉안돼 생명 기운이 넘쳐나는 세종대왕자 태실 주위로는 태실의 역사와 경관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볼거리도 적지 않다. 조선 영조 때 태실 수호사찰로 지정된 선석사에는 신생아의 탯줄을 보관하는 ‘태실법당’이 있고, 태실의 역사와 정보를 제공하는 태실문화관도 있다. 가족 나들이와 소풍 장소로도 좋은 생명문화공원에는 전국 각지에 산재한 조선 역대 왕들의 태실을 재현해놓고 있다. 사실 태실 풍속은 고대 한국에서 면면히 이어져 왔다. 우리 선조들은 산모와 신생아를 연결하는 태(혹은 탯줄)를 생명체 혹은 영성이 깃든 존재로 여겼다. 나아가 태를 어떻게 보관하느냐에 따라 신생아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고 보았다. 신체의 일부인 태를 길한 곳에 묻으면, 그에 감응한 태의 주인 역시 좋은 기운을 누릴 수 있다는 논리다. 이를 풍수에서는 동기감응(同氣感應)이라고 한다. 태실 풍속은 역사적으로도 증명된다.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595∼673)이 태어난 충북 진천의 태령산(胎靈山) 정상에는 김유신 태실(사적 제414호)이 있다. ‘삼국사기’는 “김유신의 탯줄을 높은 산에 묻었는데, 지금(고려)도 그 산을 태령산이라 한다”고 기록했다. 고려 때는 국가공인 지관(地官)을 뽑는 과거 과목에 ‘태장경(胎藏經·태실 조성용 풍수지리서)’이 있을 정도로 태실을 중요시했다. 조선의 역대 왕들 역시 국운 융성을 위해 태실 만들기에 심혈을 기울였고 조선 사대부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탯줄을 생명체로 보고 함부로 다루지 않던 조선의 풍속은 언제부턴가 경시됐다. 지금은 병원에서 받아온 탯줄을 냉장고 속에 넣어두고 까맣게 잊고 지내거나, 액자나 인형 등 신생아 기념품 정도로 취급하는 풍조가 만연하다. ○인재 배출한 명당 터 한개마을 성주군에서는 세종대왕자 태실이 생명 탄생의 공간이라면, 600여 년 역사를 자랑하는 한개마을(월항면 대산리·중요민속문화재 제255호)은 생기가 충만한 삶의 공간이라고 소개한다.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마을 뒤와 좌우로 산이 받쳐주고 앞으로는 물이 흐르는 지형) 명당 터인 한개마을은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왔고 격조 높은 선비문화를 지금껏 유지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가 개척한 이후 현재까지 그 후손들이 모여 사는 성산 이씨(星山李氏) 집성촌이다. 18세기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쳐 지어진 70여 채의 전통 가옥이 들어선 이곳에는 집집마다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성산 이씨가 한개마을에 입향할 당시 지어진 ‘응와종택’(1721년 창건)은 그 후손들이 모여 서책을 읽고 인격을 도야하는 등 마을의 발상지 같은 곳이다. 그 후손이 지금도 살고 있는 이 집은 잘 가꿔놓은 정원으로도 유명하다. 또 ‘한주종택’(1767년 창건)은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집으로 명성이 높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유학자 이진상을 비롯해 아들 이승희, 손자 이기원 이기인 등 일제의 국권 침탈에 저항해 독립운동을 한 국가유공자들이 배출됐다. ‘대산리 진사댁’으로 명명된 전통 가옥은 卍(만)자 문양의 특이한 문창살과 함께 아파트 발코니처럼 경관을 즐길 수 있는 2층 난간의 누마루가 설치된 새사랑채가 눈길을 끈다. 후손이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하여 ‘대산동 교리댁’으로 불리는 전통 가옥(1760년경 창건 추정) 대문 앞에는 ‘제9회 변호사시험 최상위권 합격’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보일 듯 말 듯 걸려 있다. 대대로 과거 급제를 해온 조상들을 본받아 그 후손이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것을 자부하는 글귀가 미소를 띠게 한다. 한편 이수빈 삼성경제연구소 회장도 이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이수빈 형제들이 출생한 집 안채는 인재가 태어나는 명당 터로 소문났다. 이 마을 사람들은 협동조합 형태인 ‘한개사랑방’을 운영하고 있다. 한개마을이 민속마을로 지정된 후 관광객이 늘어나자 숙박, 전통 음식, 전통 체험 등을 제공하고 있다. 명당 기운이 있는 터에 마련된 ‘한옥 스테이’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면 몸이 가볍고 기분이 상쾌해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연인들의 힐링 코스인 가야산 정견모주길 산책이나 숲속 호젓한 곳에서 하루를 보내고 싶다면 성주군 ‘성밖숲’(경산리)과 가야산 자락의 가야산역사신화공원 ‘정견모주길’을 추천한다. 성밖숲은 성주읍성 바깥에 조성한 숲으로 300∼500년 수령의 왕버들 52주가 자생하고 있다. 아름드리 우거진 왕버들이 생명의 무게감을 느끼게 해준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조성된 왕버들 산책 코스는 지역 주민들의 휴식처로 인기가 높다. 해마다 열린 세종대왕자 태실 태봉안 의식 재현 등 성주생명문화 축제도 이곳에서 개최된다. 가야산역사신화공원 일대는 계곡을 따라 격조 높은 인테리어를 갖춘 펜션들이 들어서 있는데, 젊은 부부들의 태교 여행 혹은 연인들의 힐링 코스로 인기가 높다. 이곳에는 가야산의 신화와 전설이 가득하다. 가야산의 여자 산신 정견모주가 하늘의 신인 이비가지와 혼인해 뇌질주일(대가야의 이진이시왕)과 뇌질청예(금관가야의 수로왕)를 낳았다는 전설이 대표적이다. 정견모주길에는 이런 전설을 상징하듯 폭포와 다양한 형태의 바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임신부도 편안하게 둘러볼 수 있도록 둘레길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조성돼 있다. 봄에는 연분홍빛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고, 얼레지 현호색 등 보기 힘든 야생화를 발견하는 기쁨도 누릴 수 있다. 정견모주길 곳곳에 설치된 정자 명당 터에서 허기를 달래줄 겸 성주 특산인 참외와 함께 성주 청년들이 독창적으로 개발한 참외조청, 참외빵을 맛보았다. 그러고 보니 참외에는 임신부에게 필수 영양소인 엽산이 여느 과일보다 풍부하다. 2세를 계획하는 이들에게 성주 태교여행은 안성맞춤인 듯하다. 사진·글 성주=안영배 기자·풍수학박사 ojong@donga.com}
《서해로 향하는 뱃길은 변수가 많다. 안개와 풍랑, 최근 들어서는 미세먼지까지 끼어들어 항해 여부를 좌우한다. 인천시 옹진군 대청도를 갈 때도 그랬다.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짙은 안개 때문에 배가 떠나지 못해 하루를 허비했다. 쾌속선으로 3시간 30분쯤(약 211km) 걸리는 대청도에 도착한 후 1박2일 일정으로 머물다 돌아올 쯤에는 풍랑으로 또다시 하루를 지체했다. 그런데 이 모든 불편을 감수하고도 “오길 잘 했다”며 진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곳 또한 대청도다.》 대청도는 2019년 백령도, 소청도와 함께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된 후 부상하고 있는 신흥 관광 명소다. 같은 지질공원이지만 백령도와 대청도는 땅의 성격이 좀 다르다. 대청도에서 북쪽으로 20분 거리(12.8km)에 있는 백령도는 면적이 넓고(약 50㎢) 평지가 발달한 농촌 마을이라면, 대청도는 전체 면적(15.56㎢)의 70%가 산지인 산골 동네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서해5도(백령, 대청, 소청, 대·소연평도) 중 가장 높은 삼각산(343m)을 둔 대청도는 온통 숲이 우거진 푸른 색 일색이다. 바다 속 산동네라고 할까. 중국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도 ‘푸른 섬’에 인상이 깊었던 모양이다. 그는 저서 ‘고려도경’에 “대청서(大靑嶼, 대청도)는 멀리서 바라보면 울창한 것이 마치 검푸른 색이 뭉쳐 있는 것 같다고 해서 고려인들이 이름붙인 것”이라고 기록했다. ○ 생명 기운이 충만한 산대청도의 진짜 매력은 생기(生氣)가 충만한 살아 있는 섬이라는 점이다. 비록 인구 1248명(717세대, 2020년 3월 현재)의 크지 않은 섬이지만 ‘명당 섬’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곳이다. 대표적인 게 대청도의 주산인 삼각산. 3개 봉우리로 이뤄진 삼각산은 예로부터 지역 주민들의 생명을 지켜주는 신성한 산으로 여겨왔다. 1960년대 한국군의 베트남전쟁 참전 당시 다른 섬 지역과는 달리 대청도 출신들이 대부분 무사 귀향할 수 있었던 것도 삼각산의 보살핌 덕분이라고 이곳 사람들은 굳게 믿고 있을 정도다. 산 곳곳에 현재 멸종 위기종으로 지정된 구렁이들이 서식하고 있는 것도 주민들의 믿음을 두텁게 하는 증거다. 독성을 품은 뱀들이 없는 대신, 민속신앙에서 업신(業神)으로 대접받는 구렁이가 서식하는 것은 삼각산의 신성함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대청도 출신 문화관광해설사 김옥자씨는 “지금도 구렁이를 목격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고 말했다. 옹진군에서는 삼각산의 이 같은 자연 특징과 역사성을 고려해 산행 코스마다 이색적인 이름을 붙여놓았다. 성공의 기운을 얻는 코스인 ‘황제의 길(성공氣 길)’, 애정의 기운을 북돋워주는 길인 ‘러브브릿지(사랑氣 길)’, 서해의 서풍(西風)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서풍받이 트레일’ 등 테마 로드다. 이중 대청면사무소에서 시작해 삼각산 광난두정자각(5km)까지 이어지는 ‘황제의 길’ 코스와 광난두정자각에서 서풍받이(2km) 일대를 한 바퀴 돌아보는 ‘서풍받이 트레일’을 합쳐 ‘삼서(삼각산+서풍받이) 트레킹’이라고 한다. 삼서 트레킹 코스는 690여 년 전 역사와도 연결된다. 역사 스토리의 주인공은 원나라 제11대 황제 순제(혹은 혜종, 1320~1370)로, 우리에게는 고려 여성인 기황후의 남편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제9대 황제인 명종의 장자이자 황태자였던 순제는 황실 내부의 권력 다툼에 패해 10대 초반 어린 나이에 대청도에 유배됐다. 황태자는 수행 궁인(宮人) 100여 명과 함께 유배 생활을 했다고 하니 실상은 권력 싸움을 피해 측근들과 함께 대청도로 도피했을 수도 있다. 조선왕조 기록에 의하면 그는 대청도에서 궁을 짓고 1년 여 가량 생활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얼마 후 황제에 등극했다. 지금은 그 흔적이 보이지 않지만 대청도엔 순제 관련 이야기가 많다. 김옥자 해설사는 “삼각산 ‘황제의 길’ 코스는 순제가 고향 땅을 그리워하며 자주 찾은 일화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그가 황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삼각산의 기운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해설사는 순제가 살았던 곳으로 지목되는 태자궁 터(대청초등학교, 대청면 대청리 1085)를 안내했다. 또 이 마을 노인들에 의하면 대청초등학교 아래 자락은 예부터 ‘장안(長安)’으로 불렸다고 한다. 장안은 중국 당나라의 수도 시안(西安)을 가리키는 동시에 왕이 사는 수도를 뜻하는 일반 명사이기도 하다. 풍수적으로 보아도 대청초등학교 일대는 보기 드문 명당 혈을 이루고 있으니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터무니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 섬에서 만난 사막대청도에서는 인간의 역사를 초월하는 위대한 자연의 역사도 감상할 수 있다. 먼저 옥죽동 해변의 모래사막. ‘한국의 사하라 사막’으로 불리는 ‘옥죽동 해안사구’는 오랜 세월 바닷가의 모래가 바람에 날려 이동하면서 거대한 모래 언덕을 이룬 곳이다. 지금도 계절에 따라 모래 형태가 변화하는 활동성 사구로 길이는 1.6km, 폭은 600m에 이른다. 이곳에는 낙타 조형물과 생떽쥐베리의 소설 ‘어린 왕자’의 사막 이미지 조형물이 설치돼 있는데, 외국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대청도에서는 예로부터 ‘옥죽동 모래 서 말을 먹어야 시집을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모래 바람이 거셌다. 모래 사막도 예전에 축구장 60개 규모의 크기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소나무 방품림이 조성돼 사구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한국에서도 규모가 제일 크고, 아직도 ‘살아 있는’ 모래 사막을 점점 잃어버리지 않을까 우려됐다. 옥죽동 모래 사막과 함께 농여해변 또한 대청도를 대표하는 명품 자연 관광지다. 초승달 모양으로 펼쳐진 농여해변에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걸어 다닐 수 있는 풀등이 있다. 풀등은 원래 큰 강 하구에 모래가 쌓이고 그 위로 풀이 수북하게 난 곳을 가리킨다. 낙동강 하구의 풀등이 대표적이다. 마찬가지로 바다에도 썰물 때만 모습을 드러내는 모래언덕인 풀등이 있다. 농여해변의 풀등은 배를 타야 체험할 수 있는 대이작도, 장봉도 등의 풀등과는 달리 썰물 때 직접 걸어서 체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썰물 때에 맞춰 농여해변으로 갔더니 풀등이 광활하게 형성돼 있었다. 풀등은 서해안의 질척거리는 갯벌이 아니라 단단하고 고운 모래로 돼 있어서 걷기에도 편했다. 발자국이 남지도 않고 자동차가 달려도 끄떡없을 정도였다. 김 해설사는 “지금도 풀등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면서 바다 건너 한 편에서 풀등이 ‘자라나는’ 곳을 가리켰다. 어쩌면 백령도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는 허풍이 이곳에서는 그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농여해변 바로 남쪽으로는 미아동 해변이 있다. 두 해변의 경계선 상에는 나이테 바위가 있다. 다른 시대의 지층들이 겹겹이 층을 이룬 다중지층인데, 위아래 세로 모양으로 형성된 게 신비롭다. 지하에서 가로로 차곡차곡 퇴적된 지층이 엄청난 압력을 받아 90도로 회전한 후 지상으로 돌출한 것이라고 한다. 마치 고목나무 나이테처럼 보인다고 해서 나이테바위로 불리는 이 바위는 대략 10억년의 역사를 지닌 것으로 추정된다. 나이테 바위 너머가 바로 미아동 해변. 밀물 때는 서로 떨어진 두 해변이 썰물 때만 되면 하나로 연결되는 장관을 이룬다. 미아동 해변은 바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다채로운 물결무늬 백사장이 환상적이다. 이 해변에는 빨래판 모양의 물결무늬 주름이 새겨져 있다고 해서 붙여진 주름바위도 있다. 10억 년 전에 화석화된 물결무늬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곳에서는 바람에 의해 지금도 새겨지는 모래사장의 물결무늬와 10억 년 전에 새겨진 물결무늬가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 서풍받이 산책길의 치유 기운해변의 자연사를 충분히 체험한 후 마지막 코스로 향했다. 서풍받이 산책길이다. 서풍받이는 중국에서 서해를 거쳐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섬을 지키고 서 있는 거대한 암벽을 가리킨다. 대청도의 남서쪽 광난두 정자각에서 출발해 오른쪽 산 속으로 접어들어 산 능선을 따라 걸으면 되는 코스다. 이곳에서 서해 바람을 한껏 들이키며 묵은 것을 토해낸 뒤, 모래울동 해변의 해송 숲에서 생기와 치유의 기운을 받을 수 있다. 걸을수록 몸과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다. 솔밭에서 풍겨나는 피톤치드가 건강에 도움이 되기도 하려니와 땅 자체가 아주 좋은 기운을 품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대청도 여행은 지루하지 않다. 수 억 년의 세월이 빚어낸 해변과 바위가 방향과 위치에 따라 달리 보이고, 아침저녁으로도 경치가 다르다. 길을 가다가 마주치는 흑염소 가족도 정겹고, 조개 먹이를 찾아 날아드는 철새들도 반갑고, 한반도 최북단에서 만날 수 있는 동백꽃에도 마음을 빼앗긴다. 섬답게 해산물 먹거리는 당연히 풍부하다. 대청도는 국내 최대의 홍어 주산지다. 이곳에서 잡은 홍어가 전남의 흑산도로까지 팔려나간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삭힌 홍어가 아닌 홍어회를 즐긴다. 그 맛이 일품이다. 대청도를 찾는 사람들 중에는 재방문객이 많다는 주민들의 자랑이 과장이 아님을 실감했다. 글·사진 대청도=안영배 기자·풍수학박사 ojong@donga.com}
《올해 102돌인 삼일절, 충남 홍성의 상징인 홍주성(홍주읍성, 사적 제231호)에 대형 태극기가 내걸렸다. 홍주성 동문인 조양문(朝陽門) 정면을 절반이나 가릴 정도로 큰 태극기에는 ‘대한독립만세’라는 글귀와 함께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만해 한용운 선사, 백야 김좌진 장군 그리고 수많은 민중 투사들의 희생을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다짐도 적혀 있었다. 100여 년 전 홍성(옛이름 홍주)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활동 무대가 다른 두 걸출한 독립운동가와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지금도 찾고 있을까. 한 개 군에서 무려 200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해 항일운동의 성지로 자부하는 홍성으로 길을 나섰다. 》충남 홍성군 홍성읍 중심부에 위치한 홍주성의 남문 홍화문(洪化門). 돌을 다듬어 야무지게 쌓아올린 4m 높이 성벽을 좌우로 두고 있는 이 문은 조선 초기의 성 쌓기 특징을 잘 보여준다. 원래의 성은 출입문 4개에 성곽 둘레가 1772m에 달했으나, 지금은 홍화문을 기준으로 약 800m 정도의 성곽만 남아 있다. 2013년에 복원된 홍화문 문루에 오르면 시원하게 조성된 소나무숲과 잔디밭, 홍주목사가 업무를 보던 동헌인 안회당, 서쪽으로 연못 위의 6각 모양 정자 여하정 등 아름다운 성내 풍경이 펼쳐진다. 홍성군이 선정한 홍성 12(景) 중 첫 번째 볼거리다. 그런데 역사의 눈으로 보면 홍주성에서는 또 다른 세계가 전개된다. 115년 전인 1906년 5월19일, 홍화문을 경계로 성 안쪽과 바깥쪽은 살벌한 대치 현장이었다. 남문 성벽에 의지해 성을 사수하려는 일본군과 ‘조선의 성’을 결단코 되찾으려는 의병부대간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의병부대는 민종식(1861-1917)이 이끄는 ‘홍주의병’.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1905년)에 분노한 애국지사들이 주도한 무력 결사체다. 이들은 홍성 남쪽의 홍산(부여군 내산면 금지리)에서 결집한 후 서천, 비인, 남포, 결성 등지를 점령하면서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양총(洋銃)과 구식 화포 2문 등으로 무장한 1000여 명의 의병부대는 홍주의 삼신당리에서 저항하는 일본군을 일거에 격파한 후 홍주성으로 물밀 듯이 쳐들어갔다. 그러나 정작 최종 목표지인 홍주성에서는 난관에 부딪쳤다.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튼튼했다. 일본 헌병과 경찰은 서해로 통하는 ‘충청의 관문’을 지키기 위해 성문을 굳게 닫은 채 거세게 저항했다. 마침내 홍주의병의 날랜 군사 2명이 성안으로 통하는 하수구를 발견해낸다. 이들은 몰래 성안으로 들어가 동서남북의 4대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5월20일 홍주의병은 성을 점령했다. 의병들이 일본군을 잡으려 했으나 함락 직전 이미 달아나버렸다. 이후 홍주성은 공수(攻守)가 뒤바뀐 상태에서 열흘 남짓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투지가 된다. 당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 통감은 우리측 관군까지 동원해가며 성 탈환에 나섰으나 번번이 패하게 되자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그는 기마병과 보병 등 중무장한 최정예 일본군을 대규모로 파병했다. 결국 우세한 화력과 전투 경험이 풍부한 일본군에 밀려 홍주의병은 패했다. 그해 5월30일의 일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측은 10여 명이 사망한 반면 의병 측은 수백 명의 전사자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에서는 이 홍주성 전투를 ‘2차 홍주의병’이라고 부른다. ‘1차 홍주의병’(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한 항일의병)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의병전쟁 사상 단일 전투로는 최다 희생자를 낸 2차 홍주의병은 전국적인 의병 항쟁을 촉발시키는 도화선이 됐다는 게 역사학계의 평가다. ●한날한시에 제사 지내는 홍성 사람들홍주성 홍화문에서 홍성천 개울을 따라 동북 방향으로 1km 남짓한 거리의 ‘홍주의사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홍주의병을 널리 알리는데 애써온 이종화 충남도의회 의원이 동행했다. 이 의원은 기자에게 홍성 독립운동 성지 순례를 제시하면서 취재를 요청해왔을 정도로 ‘홍성 사랑’이 대단했다. 그는 “홍주성 전투에서 사망한 의병들의 유해가 홍성천변과 남산 일대에 방치돼 있었는데, 광복 이후인 1949년 현재의 홍주의사총에 수습한 유골들을 봉안했다”고 말했다. 매년 5월 30일에는 의병들을 위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홍주의병의 숭고한 뜻으로 볼 때 이곳은 의사총이 아니라 ‘의사릉’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이 의원은 “홍성에는 같은 날 조상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았다”고 말했다. 홍주성 전투에서 홍성 출신 의병과 민간인들이 한날한시에 사망했기 때문이란다. 두 차례에 걸쳐 의병을 일으키면서 숱한 희생자를 낸 홍성 사람들이지만, 1919년 3·1만세운동 때도 분연히 나섰다. 홍성군 내 각 지역에서 횃불시위 등을 끊임없이 벌이며 일본 군경을 괴롭혔다. 홍성 만세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왕세자(순종)의 스승이던 유학자 김복한(1860~1924)이다. 그는 만세운동 당시 호서유림을 대표해 전세계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 운동을 펼치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김복한은 1894년 일제침략이 노골화되자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후, 고향 홍성에서 1차 홍주의병을 주도했고 2차 홍주의병에서도 배후인물로 지목돼 일경에게 곤장으로 두들겨 맞으며 체포되기도 했다. 왕대나무에 왕대난다고 했던가. 김복한의 유교 의리 정신과 항일투쟁 정신을 배운 게 바로 김좌진(1889~1930)이다. 청산리 전투의 명장 김좌진은 김복한과는 안동김씨 수북공파 문중의 종질과 당숙이라는 혈연도 맺고 있었다. 2차 홍주의병 당시 김좌진의 나이는 17세. 당시로는 이미 청년인 김좌진은 홍주성 전투를 직간접으로 경험했고, 그것이 그를 항일 무장투쟁의 길로 이끌었을 것으로 보인다. ● 김좌진과 한용운을 배출한 명당김좌진의 생가가 있는 갈산면으로 갔다. 김좌진의 호를 따라 ‘백야공원’으로 명명된 이곳에는 생가를 복원한 터와 사당,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생가 대문 입구에 새겨진 ‘가노를 해방시킨 것은 민족의 봄이요(家奴解放民族春), 청산리 대첩은 광복의 몸통이다(靑山大捷光復身)’라는 문구가 눈길을 끈다. 88칸 규모를 자랑하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김좌진은 청년이 된 어느날(15~17세), 바로 이곳 터에서 노비 30여 명을 불러모아 잔치를 벌인 뒤 노비문서를 그 자리에서 불태우고 소유하던 전답까지 골고루 나눠주었다. 그리고는 곧장 홍성지역의 젊고 유능한 학생들을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호명학교(현 갈산고등학교)를 설립했다. 김좌진의 생가를 살펴보니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당 교과서 같은 곳이다. 집 뒤로는 형산을 두고 앞으로는 와룡천을 둔 배산임수(背山臨水)형 터다. 땅 자체가 부자를 만들어내는 재물형 명당인데, 거기서 문인이자 무인인 인물이 태어났다는 게 이채롭다. 갈산면은 장군의 고향답게 길가 이곳저곳에 3·1운동을 기념하는 태극기가 진작부터 펄럭거리고 있었다. 갈산면사무소 앞의 장원식당에서 갈산면 주민들을 만나 김좌진의 친인척을 수소문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안동김씨가 번성했던 갈산 지역에서 어느 순간부터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됐다는 거다. 김좌진과 그의 가솔은 어디로 갔을까. 일제의 탄압을 피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 지역으로 대거 이동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린내가 나지 않고, 칼칼하면서도 달짝지근한 이 지역의 특산 ‘갈치찌게’를 먹는 것으로 아쉬움을 대신했다. 김좌진생가지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결성면에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한용운(1879~1944)의 생가지가 있다. 행정구역상 면이 다를 뿐이지, 같은 지역에서 역사에 길이 빛날 두 명의 독립운동가가 나온 것이다. 한용운 생가 터 또한 명당이다. 사방의 산들이 생가의 지기(地氣)를 보호해주는 전형적인 부잣집 명당이다. 고위 관직을 지낸 부친(한응준) 밑에서 자란 한용운은 김복한, 이설 등이 일으킨 1차 홍주의병 소식을 듣고 커다란 충격을 받은 후 조국과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뜻을 세웠다. 한용운 역시 홍주의병에 자극받아 독립운동의 길로 나선 셈이다. ●‘독도는 우리 땅’ 안용복을 살려낸 남구만 홍성 12경중 7경(한용운생가지)과 8경(김좌진생가지)에서 터의 좋은 기운과 함께 그들의 애국정신에 감화되는 체험을 한 후, 마지막 여정으로 구항면 내현리 ‘거북이마을’에 있는 약천 남구만(1629~1711)의 생가지를 택했다. 조선 최고 관직인 영의정까지 지낸 남구만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는 시조를 지은 이로 유명하지만, 그가 우리 국토를 지키기 위해 한평생을 바친 진정한 수토사(搜討使)라는 사실은 잘 드러나 있지 않다. 그는 조선의 무능한 관리들이 울릉도를 일본에 넘겨주려 했던 것을 막아냈고, 함길도(함경도) 관찰사 시절에는 세종이 설치했던 북서4군을 다시 설치하도록 주장하는 등 잊혀져 가던 북방지역을 환기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그는 일본에 가서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안용복을 살려낸 주인공이기도 하다. 당시 조선정부(숙종)가 국격을 깎은 행동이라는 죄명으로 안용복을 사형시키려 했을 때, 남구만은 “안용복을 죽이는 것은 대마도주만 기쁘게 할 뿐”이라며 적극적으로 항변해 살려냈다. 그는 만년에 고향인 홍성으로 낙향했다. 고위직을 지냈지만 아주 청렴하게 살았던 모양이다. 그가 시조에 남긴 것처럼 ‘소 치는 아이와 재넘어 밭 갈 일’을 걱정할 정도로 말이다. 그의 생가는 번듯하게 지은 현대식 집들 한쪽에 초라하게 복원돼 있다. 조국의 산하를 지키는 데 앞장서온 그는 홍성의 주권수호와 자주독립 정신의 원조로 기록될 만한 인물이다. 뒤늦게나마 갈산면 취생리 폐교 부지에 남구만에서 근대의 독립운동가에 이르기까지 조국의 땅과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애써온 이들을 기리는 내포역사박물관(가칭)이 생긴다고 하니 다행스럽다. 홍성의 독립운동 성지 순례 코스는 하루 일정으로 다녀가기엔 벅차다. 홍성 제6경인 속동마을에서 낙조를 즐기고, 홍성 명물인 광천토굴 새우젓 구경까지 할 수 있는 1박2일 코스를 추천한다. 글·사진 홍성=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하이트진로가 지역사회 소외 계층을 위한 나눔 활동 등 착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하이트진로는 ‘모두가 즐겁고 행복한 세상’이라는 슬로건 아래 2012년부터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사회공헌 활동을 해왔다. 100년 기업을 향해 가고 있는 회사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지다. 하이트진로의 사회공헌 활동은 다양하다. 매년 취약계층 지원, 이동차량 지원을 비롯해 지역사회 내 어려운 이웃을 찾아 나눔 봉사를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2012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430여 곳의 사회복지기관에 15만여 명분의 명절 음식을 후원해왔다. 하이트진로 임직원들이 설, 추석 등 명절마다 음식을 배달하고 나누는 이웃도 매년 3만여 명에 달한다. 어려운 이웃을 위한 생활 밀착형 나눔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유난히 폭설과 강추위가 잦았던 이번 겨울에는 9년간 후원을 해온 쪽방촌과 노숙인급식소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나눔의 손길을 내밀기도 했다. 1월엔 서울지역 쪽방상담소와 서울역 따스한 채움터에 핫팩 1만 개와 떡 2500명분을 긴급 제공했다. 또 설을 맞아 지역사회 내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서울역 쪽방상담소, 부산 마리아마을 등 전국 34개 사회복지기관에 떡국 떡과 만두 1만 명분을 지원했다. 지난해 추석 명절에도 45개의 사회복지기관에 송편, 한과 등 명절음식을 자체 선물상자에 포장해 2만 명에게 나눠준 바 있다. 하이트진로의 나눔 활동은 다양한 계층을 아우르고 있다. 설, 추석 등 명절과 가정의 달 기념일을 맞아 저소득층 가정의 어린이, 홀몸노인, 지체 장애인, 소방 유가족 등 어려운 이웃들에게 카네이션, 운동화, 다과를 제공하는 등 따뜻한 정을 나눈다. 지난해 가정의 달에는 18개 복지기관을 통해 장애인, 노인, 아동 등 이웃들에게 2000만 원 상당의 지역상품권을 지원해 나눔을 실천하며 ‘착한 소비자 캠페인’에도 동참했다. 올해도 나눔 활동을 통해 지역사회와 유대 관계를 지켜갈 예정이다.아름다운 나눔으로 ‘아름다운 하루’ 만들어 또한 협력사 임직원들과 함께 9년째 ‘나눔바자회’도 진행해 오고 있다. 나눔바자회는 하이트진로와 협력사 임직원들이 기증한 물건을 아름다운가게를 통해 판매한 후 수익금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기획됐다. 가장 최근 행사는 지난해 11월 아름다운가게 양재점에서 연 나눔바자회인 ‘아름다운하루’ 특별전이다. 하이트진로와 협력사 임직원들은 한 달간 가정에서 사용 가치가 있는 5000여 점의 물품을 기증했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임직원 봉사자들 대신 아름다운가게가 판매를 진행했고, 판매 수익금은 소외 이웃들에게 모두 기부했다. 자원 재사용이라는 부수적 효과도 거두었다. 하이트진로는 코로나19 피해자 지원에도 적극 나섰다. 작년 상반기에는 특별관리구역으로 지정된 대구경북 지역의 사회복지시설, 자가격리자, 의료진, 취약계층을 위해 마스크 20만 개, 손 세정제 6만 개, 생수와 블랙보리 31만9000병을 지원했고, 예방과 피해 복구를 위한 현금 등 총 12억 원을 후원했다. 회사 측은 “코로나19 확산을 막고 각 분야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지원 활동에 다각적으로 동참하고 있다”고 밝혔다. 폭염, 수해, 한파, 질병 등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고통을 겪는 이웃들을 배려하는 하이트진로의 광폭 나눔 활동으로 우리 사회가 보다 따뜻한 사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강화도 남쪽에 위치한 마니산은 고려와 조선의 사대부들이 신성한 터를 찾아가 참배하는 국토 순례인 ‘수토(搜討)’ 여행 대상지 중 한 곳이다. 봄이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켜는 입춘 절기, 선인들의 전통을 따라 강화도로 수토 여행을 떠나보자. 한반도의 배꼽자리이자 한강, 임진강, 예성강의 3강을 낀 해구(海口)인 강화도에서는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려는 수토의 진정한 뜻과 함께 당대 최대 강국 몽골에 치열하게 저항한 고려의 기개를 느껴볼 수 있다.》 강화도를 상징하는 마니산(472m)은 북녘 백두산 천지에서 직선거리로 500km 남짓, 남녘 한라산 백록담에서도 똑같이 500km 남짓한 거리에 있는 한반도 중앙부의 산이다. 백두산과 한라산처럼 마니산 정상의 참성단(사적 제136호)에서도 물이 솟아났다. 지금은 우물터만 남아 있지만, 광복 이전인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참성단에 올라 쪽박으로 물을 떠 마시곤 했다는 게 마을 노인들의 얘기다. 암반으로 이루어진 정상에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물이 있던 마니산은 이미 ‘영산(靈山)’ 반열에 오른 신성한 곳임을 암시한다. 신령한 산답게 오르는 길도 만만찮다. 마니산 입구에서 1000여 개에 달하는 돌계단 길을 1시간 넘도록 숨을 헐떡거리며 밟아가다 보면 어느덧 정상에 우뚝 선 참성단을 만나게 된다. 참성단은 높이 6m인 돌로 이루어진 제단이다. 아래 제단은 둥근 원형으로 하늘을 상징하고, 위쪽 제단은 네모반듯한 방형으로 땅을 상징한다고 한다. 오늘날 참성단은 전국체육대회를 밝히는 성화의 점화지로 유명하지만, 과거에는 국가적 차원의 제천(祭天) 의식 장소이자 하늘의 해와 별을 관측하는 천문관측소였다. 조선 정조 시기의 기상관측서 ‘서운관지(書雲觀志)’에는 천문 관측을 위해 대대로 참성단에 관상감 관원을 파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성단이 천문관측소 역할을 했다는 현장 증거도 있다. 방형의 제단 위치가 그렇다. 동행한 천문지리학자 임정규 교장(충남 문산초교)은 “동짓날이 되면 해가 방형 제단 중심부로 이어지는 돌계단 중앙으로 떠올라 제단 한가운데를 정확히 통과하는 현상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즉 일력(日曆)을 계산하기 위해 동지일출선(冬至日出線·동지 때 해가 떠오르는 방향을 표시하는 선)을 따라 방형 제단이 설계됐다는 것이다. ● 고려 왕, 참성단에 오르다 참성단은 ‘전국에서 가장 기(氣)가 센 곳’으로도 소문난 곳이다. 사실 이곳은 공중에서 맑은 기 에너지가 집중적으로 쏟아져 내리는 ‘천기(天氣) 명당’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참성단은 훼손 및 안전상의 위험으로 접근이 금지된 상태다. 그러나 제단 근처에서도 하늘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공중으로 치솟듯 뻗어 있는 주변의 기암괴석들도 마치 이 일대가 하늘로 통하는 관문임을 상징하는 듯하다. 옛 사람들도 비슷한 감흥을 느꼈던 모양이다. 고려와 조선 두 왕조를 섬긴 성리학자 권근(1352∼1409)은 마니산과 참성단을 가리켜 “바다 위의 높은 산은 저 멀리 떨어진 인간세상의 번잡과 소란을 막아주고, 제단 한복판은 하늘과 가까워 신령의 하강을 맞이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권근은 참성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문(祭文)을 짓기도 했다. ‘마리(니)산은 단군께서 제를 올리던 곳이옵고, 성조(聖祖·고려 태조 왕건)께서 백성을 위해 나라를 세운 이래로 옛것을 이어받아 결실을 맺은 곳이오며, 후대 왕이 도적들을 피해 도읍을 옮겨 나라를 보존한 곳입니다….’(권근의 ‘양촌집’ 제29권) 제문은 강화도 마니산과 고려의 인연이 건국 초부터 이어져 왔음을 알려준다. 또 고려 무신정권이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것이 단지 바다 가운데 섬이라는 지정학적 이유만으로 선택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선대의 숨결이 서린 강화도와 마니산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정신적 의지처로서의 의미도 컸다. 복기대 교수(인하대 고조선연구소장)는 “고려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가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이후 원종 임금도 참성단에 올라 단군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말했다. 참성단에서는 서해바다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한편으로 맑은 날이면 고려 수도 개성의 주산인 송악산도 보인다. 원종 역시 참성단에서 송악산을 바라보면서 환도(還都)의 그날을 애타게 기다렸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참성단으로 오르는 길은 중·노년층에게는 다소 힘이 벅찬 등반 코스다. 참성단에 가고 싶어도 험난한 돌계단 때문에 산행을 포기하는 이들이 적잖다. 유럽의 산악 모노레일처럼 환경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참성단을 쉽게 오를 수 있는 교통 시설이 아쉽다. 역사관광 자원은 사람이 많이 찾을수록 값어치가 빛나고 더욱더 보존을 잘할 수 있다는 관광전문가들의 말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 고려 개성의 축소판 강화읍 참성단에서의 수토 순례를 마치고 북상해 강화읍 시내의 ‘고려궁지’로 향했다. 1232년 고려 지배층은 천년의 요새인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면서 ‘강도(江都)’라고 이름 지었다. 개성을 송도(松都)라고 했듯이 ‘도(都)’는 임금이 사는 도읍지를 의미한다. 이후 38년간 강도(강화도)는 고려의 도읍지이자 가열한 대몽항쟁의 기지가 됐다. 강도는 개성을 그대로 본뜬 계획도시로 성장했다. ‘고려사’는 이때를 이렇게 기록한다. “구정(毬庭·격구 놀이를 할 수 있는 넓은 마당), 궁궐, 사지(寺址)의 이름은 모두 송도를 모방하고 팔관, 연등, 행향도량(行香道場)은 한결같이 옛 법식을 따랐다.” 이에 따라 궁궐의 뒷산(현재 북산)은 개경의 주산 송악산과 똑같은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매년 4월 강화도 ‘진달래축제’로 유명한 고려산은 아예 국명(國名)이 산 이름으로 사용된 경우다. 개성에 있던 흥왕사, 선원사, 왕륜사 등 주요 사찰들도 그 이름 그대로 강화도 곳곳에 들어섰다. 그렇게 2년여에 걸친 건축 작업 끝에 도성의 틀이 갖춰졌고, 마침내 개성을 빼닮은 ‘쌍둥이 도시’가 탄생한 것이다. 아쉽게도 당시 고려 궁궐의 모습을 찾아볼 순 없다. 고려 정권이 몽골과의 화친 조건으로 강화 궁궐을 허물어뜨렸기 때문이다. 궁궐의 주 건축물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곳이 현재의 고려궁지(강화읍 관청리 163, 사적133호)다. 실제로는 궁궐 규모가 이보다 훨씬 컸을 것이라고 한다. 고려 집권층에서 유행한 풍수지리를 고려해보면 송악산(북산) 자락에서부터 그 앞으로 물이 흐르던 동락천 일대까지 궁궐과 관련 있는 건물들이 들어섰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강화읍 시내를 동서로 가로질러 흐르던 동락천마저 복개돼 도로(강화대로)로 사용되고 있어서 애초 모습을 복원해내긴 힘들 것 같다. 현재 ‘고려궁지’에 지어진 건물들 역시 조선시대의 유적이다. 조선의 역대 왕들이 이곳에 행궁, 강화유수부, 외규장각(2003년 복원) 등을 세웠기 때문이다. 터가 편안치 못했던지 이곳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점령돼 약탈당하거나 소실되는 수난을 겪었다.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됐다가 영구임대 형식으로 귀환한 ‘강화 외규장각 의궤’도 이곳에서 벌어졌던 역사의 아픔이다. 강화읍 고려궁지에서 더욱 북쪽으로 올라가면 또 다른 고려의 자취가 남아 있다. 철조망 건너 북녘 땅이 지척에 보이는 승천포(강화군 송해면 당산리)라는 곳이다. 그간 안보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되는 바람에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승천포는 고려시대 개경과 강화를 잇는 뱃길이 닿는 포구였다. 도읍 이전을 결정한 고려 고종의 어가 행렬이 강화도에 첫발을 디딘 곳이기도 하다. 강화군은 2019년 이 같은 역사성을 고려해 이곳에 고려천도공원을 조성했다. 이 공원의 출입부는 고려 궁궐 만월대의 정문을 형상화한 천도문, 고종 어가행렬도를 표시한 원형 앉음벽 광장, 국난 극복의 역사를 담은 7m 규모의 팔만대장경 상징 조형물, 전망대 등이 갖춰져 있다. 특히 전망대에서는 바로 앞 물길 건너 2km 떨어진 거리에 북한 개성 땅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고려 궁궐 만월대까지가 불과 20여 km 거리다. 남한에서 가장 가깝게 북한 땅을 볼 수 있는 지역이다. 강화군은 강화도의 이 같은 지형 특성을 고려해 개성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교동도 화개산 정상에 스카이워크형 전망대를 설치하는 등으로 안보관광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다만 승천포나 교동도 모두 안보 민감 지역인 만큼 해병대의 출입증을 받아야만 차량 통행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해야 한다. 사진·글 강화도=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강남 갔던 제비가 다시 돌아오는 봄이다. 덩달아 인천 강화군 교동도 대룡마을(교동면 대룡리) 시장 상인들의 마음도 바빠지고 있다. 제비들이 찾아와 편히 머물 수 있도록 주변 환경을 손질하기 위해서다.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제비들 덕분에 관광 명소로 이름난 이곳에서는 당연히 제비가 ‘복을 가져다주는’ 길조(吉鳥)로 대접받는다. 대룡마을은 관광객들을 위한 안내소인 ‘교동제비집’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대룡마을의 역사와 마을 상징인 제비들의 사연을 들을 수 있다. 구불구불 골목길을 따라 형성된 대룡시장에는 둥지거리, 제비거리, 와글와글거리 등 제비를 연상시키는 골목 이름들이 눈길을 끈다. 이 골목거리를 따라 1960~70년대 장면들이 추억의 영화처럼 펼쳐진다. 계란을 동동 띄운 쌍화차를 파는 다방,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진관, 90세 넘은 노인이 수 십 년째 운영해온 약방 등이 자리 잡고 있다. 골목길을 따라 이곳저곳으로 늘어선 점포 처마 밑으로 제비 둥지들을 찾아내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이 마을이 제비로 유명해진 데는 사연이 있다. 마을 중심 상권인 대룡시장은 6·25전쟁 직후 황해도 연백군에서 교동도로 잠시 피신해온 사람들의 근거지가 됐다. 불과 3km 안팎 거리의 두 지역이 남북 분단으로 왕래가 끊겨버리자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연백 출신들은 고향의 연백시장을 본 따 대룡시장을 지금과 같은 골목시장으로 발전시켰다고 한다. 대룡시장은 이후 60여 년간 교동도 경제 발전의 중심축을 이뤄왔다. 한편으로 연백 출신 주민들은 해마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되돌아오는 제비들에게 특별한 정서적 공감대를 느꼈다. 그래서 고향으로 가고 싶은 실향민들의 욕구를 대리 만족시켜 주는 제비들을 적극적으로 보살펴주었다. 그 전통이 지금까지 대룡마을 사람들 사이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제비들과 아름다운 인연을 맺은 대룡마을은 강화도와 교동도를 이어주는 교동대교가 2014년 개통된 이후 찾는 이들이 부쩍 늘어났다.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이전만 해도 단체 관광버스가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곳이다. 평일에도 옛 전통시장의 향수를 즐기기 위한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데는 제비가 복을 가져다주는 길조라는 이미지도 크게 작용했다는 게 마을사람들의 얘기다. 마을사람들로부터 적극적으로 보살핌을 받아온 제비가 대룡마을 사람들에게 풍요로움으로 보답을 한 셈이다. 흥부전의 제비 이야기를 보는 듯하다. ○ ‘흥보가’에 숨겨진 제비 명당 제비가 재물과 부귀를 안겨주는 새라는 인식은 풍수적으로도 근거가 있다. 판소리 ‘흥보가(신재효본)’는 명당과 제비 이야기를 한바탕 흥미롭게 펼친다. 놀보(부) 형의 집에서 쫓겨난 흥보(부)는 극도로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불쑥 나타난 시주승이 골라준 집터에 움막을 짓고 살게 된다. 시주승은 배산임수(背山臨水; 산을 등지고 물이 가까이 있음)를 이룬 이 터에서 살면 가세(家勢)가 속히 일어나고 자손이 부귀해진다는 말을 남겼다. 이듬해 봄, 강남에서 날아온 제비가 흥보의 움막에도 찾아든다. 흥보는 튼튼하게 잘 지은 부잣집을 마다하고 자신의 집 허름한 처마 안에다 진흙으로 둥지를 튼 제비 부부를 반갑게 맞이한다. 여기에는 제비가 아무데나 집을 짓지 않는다는 명당 논리가 숨어 있다. 사람친화적인 조류인 제비는 알을 많이 낳을 수 있고 새끼를 키우는 데 최적이라고 여겨지는 곳에 둥지를 튼다. 바로 그런 곳은 사람이 살기에도 좋은 명당이다. 제비가 당연히 흥보의 움막을 선택한 배경이다. 흥보네 집에 제비새끼를 해친 구렁이가 등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구렁이 역시 좋은 기운을 갖고 있는 터에서 머문다. 우리나라 설화에는 집안의 재물을 관장하는 신인 ‘업신(재물신)’으로 구렁이, 족제비, 두꺼비 등이 등장한다. 이런 업신이 집에 들어오면 부자로 만들어준다는 속설이 있다. 사실상 이런 동물들이 찾아드는 곳은 명당 터이고, 또 이런 터에서 사는 사람들이 발복(發福)할 기회가 많다는 게 풍수적 시각이다. 동물과 명당 이야기는 외국 설화에서도 발견된다. 티베트 민담(참바와 쩨링)은 흥부전의 줄거리와도 매우 비슷한데, 제비 대신 참새가 등장한다. 불가리아 민담에는 곰이 사는 집이 등장하고, 주인공이 곰 덕분에 부자가 되는 이야기도 있다. 모두 동물을 통한 명당 구득(求得) 설화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흥부의 집과 대비되는 게 놀부의 집이다. 놀부는 흥부가 제비 덕분에 부자가 됐다는 얘기를 듣고 자기 집에다가도 제비를 키운다. 그러나 놀부집의 제비는 둥지에서 알을 낳았지만 곪아버려 한 마리밖에 부화되지 못했다. 놀부 집의 터가 좋지 않다는 뜻이다. 게다가 구렁이도 찾아오지 않는 집이다 보니 놀부는 스스로 제비 다리를 부러뜨리기까지 한다. 터가 흉하면 사람의 심성까지도 더욱 좋지 않은 쪽으로 변하게 마련이다. 이렇게 흥부와 놀부 이야기는 풍수 논리가 이야기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 명당형 식당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제비들이 찾아오는 대룡마을은 풍수적으로 어떨까. 대룡마을의 시장통은 제비들이 살기에 우호적인 환경을 갖추고 있다. 질펀한 흙으로 둥지를 만들 수 있는 드넓은 농지 벌판과 큰 저수지가 인근에 갖춰져 있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어서 위협적인 맹금류로부터 피할 수 있는 곳이다. 게다가 대룡시장 일대가 제비들이 선호하는 명당 형국을 이루고 있다. 교동도의 주산인 화개산(260m) 자락 아래의 대룡시장은 땅 기운을 받아 지기(地氣)가 널따랗게 펼쳐져 있다. 화개산은 정상이 솥뚜껑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예부터 솥이나 솥뚜껑은 부와 재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역사적으로도 화개산은 고려 때 이미 주목받은 곳이다. 화개산 자락에 자리 잡은 화개사는 고려 때 창건한 절로, 1341년 고려 신하로서의 절개를 끝까지 지킨 목은 이색이 이곳에서 머문 것으로 유명하다. 고려 충렬왕12년(1286) 안향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공자의 초상화를 가지고 돌아와 최초로 모신 곳도 바로 화개산자락의 교동향교다. 우리나라 최초로 향교가 만들어진 계기가 된 곳이 바로 여기다. 화개산 기운을 직접 받고 있는 대룡시장 곳곳에는 제비들이 사이좋게 집을 지어놓고 있다. 시장 상인들에 의하면 제비들이 철마다 떼를 지어와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고 한다. 일반 제비와 함께 보기가 힘들다는 귀제비도 있다고 한다. 대룡 시장에서도 가장 중심의 명당 혈에 자리 잡은 한 정육점은 한산한 평일임에도 손님들을 줄을 서서 생고기를 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상점 입구에는 중소벤처기업부가 선정한 ‘백년가게’라는 간판도 붙어 있는데, 고기 맛이 남다르다는 소문 때문에 외지에서 일부로 사람들이 찾아올 정도라고 한다. 지금은 건물 개조로 제비들이 보이지 않지만 이곳 역시 제비들의 훌륭한 집터였다고 한다. 대개 명당 터에 자리 잡은 식당은 손님들이 들끓는다. 이런 가게는 음식 맛이 좋다고 소문나 입구 바깥까지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경우가 많다. 풍수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좋은 터의 기운은 음식 맛에 영향을 미친다. 명당 터의 물맛이 좋은 것도 물이 터의 기운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명당 터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마음이 편안하고 스트레스도 덜 받는다. 자연히 다른 사람들에게도 너그럽고 친절해진다. 주인과 음식이 좋으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게 마련이다. 바로 그런 곳이 제비들에게도 새끼를 키우기에 좋은 명당인 것이다. 안영배 기자·풍수학박사 ojong@donga.com}
《자그마한 시골 마을에 만석꾼 부자(富者) 3명이 살고 있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간 세 부자는 딱한 형편으로 찾아오는 이들에게 경쟁하듯 베풀기를 실천했다. 일제의 가혹한 한반도 수탈 시기 때도 이 마을에서는 숟가락 하나만 들고 있으면 배고픔을 면할 수 있었다. 전북 익산시 함라면 함라마을(함열리)의 3부잣집 얘기다.함라마을 세 부자의 선행은 당시 전국에 소문났다. 동아일보는 빈한한 동포를 돕기 위해 ‘2개월간 130여 명에게 배식(配食)한 함열 3부자’ 미담을 보도했다(1932년 6월 24일자). 판소리단가 호남가에 ‘풍속은 화순이요, 인심은 함열이라’란 가사가 등장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풍요 기운 즐기는 골목길 여행 만석꾼은 지금으로 치면 재벌 반열에 오른 부자다. 불과 2.8km² 남짓한 촌락에서 만석꾼이 3명이나, 그것도 동시대에 출현한 것은 보기 드문 사례다. 대체 어떠한 마을이기에 이런 부자들을 배출해 냈을까. 함라마을은 옛 담장과 골목길로 유명하다. 직선으로 내뻗거나 곡선으로 휘어지는 골목길을 따라 토석담(흙다짐에 돌을 박아놓은 담), 전돌에 동식물을 새긴 화초담, 황토에 짚을 섞어 놓은 흙담 등 다양한 형태의 담장이 시선을 끈다. 높은 곳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면 옛 담장길 대부분이 규모가 큰 세 고택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마을 중심부에 삼각형 구도로 배치된 이 고택들이 바로 만석꾼 이배원, 조해영, 김병순 3부자가 살던 터다. 그러니까 이웃한 3부잣집 담장이 곧 마을 담장이 되고 담장 사이가 골목길이 되는 셈이다. 먼저 이배원 가옥. 3부잣집 중 가장 이른 1917년에 지은 집이다.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 정도만 남아있는데, 사랑채 일부가 원불교 교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집을 널따랗게 두른 담장과 텃밭으로 가꾼 후원이 당시 어마어마하던 집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준다. 이배원의 손자 이양몽 씨(전 익산시의회 의원)는 “누룩 장사로 부를 축적한 조부께서 금강과 한양의 서강 마포나루를 오가는 쌀 무역에도 손을 대 큰돈을 벌었다. 당시 쌀과 맞바꾼 엽전이 너무 많아 배가 가라앉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이배원은 자신이 쌓은 부에 대해 겸손했다. 매달 초사흘과 보름날이 되면 목욕재계(沐浴齋戒)한 후 집 뒤 장독대에서 하늘에 감사드리는 제를 올렸고, 적선(積善)과 적덕(積德)을 실천해 왔다고 한다. 이배원 고택(古宅) 대문에서 오른편으로 조해영 가옥이 있다. 1918년에 지은 이 집은 출입문만 열두 개여서 ‘열두 대문 집’으로 불렸다. 궁궐 짓는 도편수를 불러 3년 걸려 지었을 정도로 가세가 대단했다. 조해영은 농장 경영과 광산 등에 투자해 떼돈을 벌었다. 부를 쌓기까지는 근검과 절약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농사용 거름으로 쓰이는 오줌이 그냥 버려지는 게 아까워 오줌통에 오줌 누는 아이들에게 대추 한 알씩 주는 식으로 거름을 모았다고 한다. 조해영 가옥은 현재 안채와 일본식 별채, 문간채 정도만 남아있으나 정원과 연못, 집안에 둔 농장 사무실 등이 화려했던 옛 시절을 증언하고 있다. 조해영 가옥에서 특이한 것은 헛담인 꽃담. 헛담은 집안 여성을 위해 안채를 가리는 용도인데, 헛담 바깥벽이 경복궁 전각의 꽃담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이배원, 조해영 두 집안은 사돈 간이기도 하다. 경주 이씨 이배원의 여동생이 임천 조씨 조용규(아들 조해영) 집안에 시집을 간 것이다. 현대의 재벌 혼맥과도 비슷하다고나 할까. 마지막으로 제일 나중에 지은 김병순 고택(1922년)은 전북에서 제일 크다고 소문난 99칸 대가옥이다. 김병순이 백두산 소나무를 가져와 안채와 사랑채를 지었다고 하는데, 세 집 중 유일하게 국가민속문화재에 이름을 올렸다. 현재도 후손이 살고 있지만 집 내부를 잘 개방하지 않는다. 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공산주의 계열 친인척을 두었다는 이유로 심한 박해를 받은 집안 내력도 이유일 듯하다. 이 집도 길가에 높다랗게 세운 담장이 일품이다. 대문을 중심으로 양편에 굴뚝과 어우러진 점선무늬 회벽꽃담이 인상적이다. 3부잣집 담장을 끼고 한 바퀴 돌면 얼추 동네 한 바퀴를 다 도는 셈이다. 그러는 사이 부자 터의 풍요로운 기운도 즐길 수 있다. 좋은 터에 있다 보면 굳이 기운을 느끼려 애쓰지 않더라도 기분이 상쾌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여행에 동행한 풍수학자 최낙기 박사는 “함라마을은 전형적인 부자 터”라고 말한다. 마을 뒷산 함라산이 명당 터를 받쳐주고 있다는 것이다. 함라마을은 동쪽 저 멀리 익산미륵사지가 있는 미륵산 줄기가 평지로 내려와 보일 듯 말 듯 서쪽 함라산까지 이어지는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이에 따라 함라산을 등진 채 동향(東向·동쪽을 바라보는 향)하고 있는 함라 3부잣집은 자신의 뿌리인 미륵산 쪽을 바라보는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 형국을 이루게 된다. 최 박사는 “풍수학에서 회룡고조형 명당은 부(富)의 발복이 크다고 믿는데, 바로 경제인들이 선호하는 터”라고 평했다. 함라마을의 부는 우선 호남평야의 너른 들판이 기본이 됐다. 대지주를 배출할 만한 땅이 넘쳐나는 곳이다. 3부잣집 모두 땅에서 소출한 농산물이 부의 원천이 됐다. 이들 집안의 부가 나중에 쇠퇴하게 된 것도 8·15 광복 후 이승만 정부의 토지개혁으로 땅이 수용됐기 때문이다. 명당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마련이다. 시골마을 인구가 갈수록 줄어가는 추세에도 이 마을만큼은 예외다. 함열현 관아 터 뒤편으로는 주로 외지인들이 지은 호화스러운 주택들이 여기저기 들어서 있다. 이 마을이 부자 명당일 뿐만 아니라 조선 24대 헌종의 계비인 효정왕후를 배출한 길지(吉地)라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효정왕후는 아버지 홍재룡이 함열현감으로 재직할 때인 1831년 이곳 함열현 관사에서 태어났다. 함라마을 지킴이 역할을 자처한 남궁승영 익산시의정회 이사는 “함열 남궁씨의 성지(聖地)로 여겨지는 이 마을은 명당 터 덕분인지 가뭄과 홍수의 피해가 다른 곳보다 현저히 적다”고도 말했다.○ 곰개나루의 물길 따라 함라마을을 충분히 즐긴 후 함라산 뒤편, 금강변의 곰개나루로 향한다. 예로부터 수관재물(水管財物), 즉 물길은 재물을 관장한다고 했다. 물길을 따라 사람과 재화가 몰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함라마을의 부를 일구는 데도 한몫한 곳이 바로 금강 곰개나루다. 이곳에서 함라 부자 이배원은 해운업으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금강 물을 마시고 있는 곰 머리의 형상’이라 하여 웅포(熊浦)로 불리는 곰개나루는 예전엔 물산과 사람들로 흥성했으나, 지금은 금강의 노을빛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일몰을 촬영하기 위해 전국에서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아온다. 역사적으로는 고려 우왕 6년(1380년) 최무선 장군이 왜구의 배 500여 척을 격침시켰던 진포대첩의 현장 터로도 알려졌다. 곰개나루에서 강경포구로 이어지는 금강변을 따라 난 도로는 드라이브 코스로도 좋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근처에 나바위성당(전북 익산시 망성면)이 자리 잡고 있다. 납작한 바위가 널려 있다고 해서 ‘나바위’로 불린 이곳은 한국 천주교의 성지로 불린다. 1845년 한국인 최초로 사제가 된 김대건 신부가 고국으로 돌아와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또 1907년에 완공된 나바위성당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옥과 고딕 양식이 조화를 이룬 건축물로 평가된다. 나바위성당 부지 내 야트막한 화산(華山)에는 ‘평화의 성모’상이 있는데, 안내 간판이 재미있다. 원래 이 터에 암자를 짓고 살던 스님이 스스로 떠나게 된 사연을 적으면서 이 터가 ‘전라북도 3대 명당자리 중 하나’라는 것이다. 아직도 화산 바위 뒤편에는 부처상을 새긴 마애삼존불상이 그대로 남아있고, 성당 측은 간판에 이를 소개하고 있다. 두 종교의 상징물이 같은 곳에 있는 것도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조화의 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나바위성당의 너른 바위는 대단한 종교 명당 터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응험함이 매우 빠를 수 있다. 함라마을이 속세의 기운을 받는 곳이라면 나바위성당은 성스러운 기운을 받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성속(聖俗)의 세상을 동시에 체험하는 여행이 바로 함라산 둘레길 코스다.사진·글 익산=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백제 고도(古都) 부여의 역사를 상징하는 정림사지오층석탑. 660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사비(부여)백제 도성이 온통 불바다가 됐을 때도 살아남은 국보 제9호 유적이다. 이 탑을 찾았을 때는 때마침 내리는 눈으로 탑 전체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백설은 오해와 왜곡으로 점철된 백제 역사를 백지 상태에서 다시 한 번 살펴보라는 신호인 듯했다. 백제의 참역사를 증언하는 석탑에서부터 부여여행을 시작한다.》○백제 왕기 솟아나는 정림사지오층석탑 나무를 깎아놓은 듯 세련되면서도 장중한 정림사지오층석탑(8.33m) 탑신부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남긴 글이 기둥 4면을 둘러가며 빼곡히 새겨져 있다. 이름하여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 즉 당나라가 백제를 정벌했다는 기념비다. 여기에는 깜짝 놀랄 만한 문구도 있다. 멸망 당시 사비백제는 24만 호(戶)에 620만 인구를 가졌고, 지방관을 파견하는 성만 무려 250개를 거느린 대국이었다는 사실이다. 백제는 패망 직전까지도 대단한 국력을 자랑하는 나라였음을 적국 장수(將帥)가 공개적으로 밝혀놓은 것이다.정림사지오층석탑은 사비백제 당시 도성 한복판에 건립된 정림사(고려 때 불린 사찰 이름) 경내에서도 가장 핵심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백제 왕실 또는 나라의 상징적 존재였던 이곳은 백제의 융성을 비는 기도터로 활용됐다. 실제로 백제인의 꿈을 담은 이 석탑 주변을 탑돌이 하거나 탑 한쪽에 가만히 서 있다 보면 강렬한 에너지를 감지할 수 있다. 명당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기운 현상이다. 이 탑의 왕기(旺氣)는 탑 뒤의 북쪽 강당 터와 탑 앞의 남쪽 연못(연지)으로도 이어진다. 3곳의 명당 혈(穴)에 중요 건물을 배치한 백제인들의 뛰어난 풍수 감각을 엿볼 수 있다. 현재 강당 터는 고려시대의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을 안치한 전각으로 꾸며져 있는데, 시대를 초월한 불교 미술을 덤으로 체험할 수 있다. 정림사지오층석탑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는 국립부여박물관이 있다. 사비백제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538년 백제 성왕은 공주에서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새로운 백제를 표방했다. 국호는 ‘남부여’. 대륙에 있던 고조선의 적장자 부여를 계승한 유일한 나라임을 선포했다. 한반도에서 ‘부여’라는 단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후 사비백제는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다. 사비백제의 황금기를 알려주는 상징물이 백제금동대향로다. 앞발을 치켜든 용 한 마리가 연꽃 모양의 몸체를 받쳐주고 활짝 날개를 펼친 봉황이 산봉우리 모양의 뚜껑 위에 장식된, 모양 그대로 용과 봉황이 새겨진 향로다. 우리나라 금속공예사를 통틀어 한 번도 보지 못한 진귀한 예술품이자, 중국에서 유명한 한나라 시대 박산향로보다 조각 수법이 뛰어난 국보(제287호)로 평가받는다. 박물관에 전시된 백제금동대향로의 출토지인 부여 능산리고분군으로 발길을 옮긴다. 1300여 년간 이 향로를 원형 그대로 간직해 온 터 역시 예사로운 땅이 아닐 것이다. 향로는 왕릉급 무덤인 능산리고분군의 왼편 사찰 터(능산리사지)에서 1993년 발견됐다. 능산리사지에는 향로가 출토된 곳을 감상할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지도 간판이 설치돼 있다. 능산리사지 또한 전체적으로 빼어난 기운을 간직한 터다. 정림사지처럼 백제 고유의 가람 배치 양식인 1탑1금당(탑 하나에 금당 하나) 구도를 하고 있는데, 금당지가 정확히 명당 혈에 자리 잡고 있다. 백제 왕들의 명복을 비는 의례에 사용됐을 향로 또한 원래는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부소산의 궁궐터가 초승달 모양인 이유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기 전 사비도성은 어땠을까. 다사다난했던 웅진(공주)백제 시절을 마감하고 도읍을 옮긴 성왕은 계획도시를 건설했다. 전체 지역을 방위에 따라 5부로 구분하고, 부마다 5개의 주요 거리를 뜻하는 5항을 두었다. 이렇게 되면 사비도성은 가로 세로로 도로가 구획되는 ‘바둑판형’ 선진 도시가 된다. 중국의 역사서 ‘북사’는 당시 백제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1만 가구가 운집한 도읍지는 신라, 고구려, 왜, 중국 등 외국 사람들도 섞여 사는 국제도시였다. 백제인들은 문(文)과 무(武)를 고루 중시했고 의약, 상술(相術), 풍수 등 음양오행법에도 능했다. 나라에서는 그해의 수확 사정에 따라 세금을 걷으면서 민심을 얻었다. 이웃 나라와 전쟁만 없다면 태평성대의 시대나 다름없었다. 부소산 자락 아래의 궁궐 터 또한 이채롭다. 부여의 주산인 금성산에 올라 바라보면 부소산 아랫자락이 초승달 모양으로 펼쳐진다. 실제로 부여여고를 중심으로 왼편의 관북리유적지와 오른편의 쌍북리유적지를 연결 지으면 초승달 지형을 이룬다. 관북리는 일찌감치 궁궐지로 추정돼 ‘관북리유적’으로 지정됐다. 최근 쌍북리에서도 궁궐지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쌍북리유적의 경우 이대현 부여군의회 부의장, 임병고 백제사적연구회장 등 지역 인사들이 적극 나서 발굴 작업에 기여하고 있다. 풍수적 시각에서 볼 때 성왕은 처음부터 초승달형 궁궐을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궁궐지 경주 월성이 초승달 지형에 위치한 것처럼 새로 출범하는 남부여국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보름달은 장차 저물어 가는 일만 남았지만 초승달은 앞으로 커 나가는 기운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초승달형 지형에서 가장 핵심적인 터 기운은 부여여고 주변에 집중돼 있다. 백제 궁궐 기운을 느끼기에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꿈꾸는 백마강에서 부소산 앞쪽의 사비성이 화려한 백제를 상징한다면 백마강이 흐르는 부소산 뒤쪽, 즉 낙화암과 고란사가 있는 곳은 슬픈 백제를 대변하는 곳이다. 1940년대 가수 남인수가 불러 공전의 히트를 친 ‘꿈꾸는 백마강’은 낙화암에서 뛰어내린 삼천궁녀와 고란사의 사무치는 종소리를 애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노래는 사실 백제의 역사를 왜곡시킨 것이다. 정찬국 부여문화원장은 “낙화암은 나당연합군에 쫓긴 백제 왕족과 궁인들이 잡혀서 치욕을 당하느니 절개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장소였다”며 “사서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 삼천궁녀는 의자왕을 폄훼하는 과장된 표현”이라고 말했다. 망국의 군주 의자왕은 승자에 의해 방탕과 무능한 지도자의 대명사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의자왕은 ‘해동증자’로 불릴 정도로 효와 예를 갖춘 인물이었고, 중국 사서에는 지혜로운 군주로 묘사됐다. 휘하 장수의 배신으로 어쩔 수 없이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의자왕은 백마강 나루터에서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뒤로한 채 배를 타고 당나라로 끌려갔다. 의자왕은 백마강의 구드래나루 혹은 왕포리 포구에서 금강을 따라 내려간 뒤 군산포를 거쳐 서해로 나가는 물길을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물길은 일본(왜) 및 중국의 사신들이나 머나먼 이국 상인들이 즐겨 찾던 교통로이기도 하다. 바로 사비백제의 ‘백가제해(百家濟海·100가가 바다를 건너오다)’의 길인 것이다. 부여군은 구드래 나루터에서 황포돛배를 띄워 백마강 뱃길 관광 상품을 만들어 놓았다. 백마강의 물길이 백제의 슬픈 역사가 아니라 동북아 해상강국의 주 무대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다. 겨울 매서운 추위로 강이 얼어붙어 황포돛배를 타보지 못한 것이 사비백제 여행의 아쉬움으로 남았다.글·사진 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신축년, 소띠 해의 봄맞이를 위해 강원 춘천시 우두동의 우두산(牛頭山)을 찾아간다. 우수산(牛首山)으로도 불리는 우두산은 이름 그대로 ‘소머리산’이니 소를 상징한다. 또 우두산 소재지인 춘천(春川)은 이름에 ‘봄(春)’이 들어가 있어 새해 봄맞이 장소로 제격이다. 이렇게 특정한 시점에 안성맞춤형 지명(地名)을 찾아가는 여행은 우리 선조들이 즐겨 하던 국토 기행법이기도 하다. 조선의 식자층은 선대의 유적지, 신비한 기운이 서려 있는 길지 등을 찾아 살피거나 외적으로부터 신성한 땅을 지키는 행위를 ‘수토(搜討)’라고 표현했다. 길한 소의 기운을 받아 새해 원동력으로 삼아 보는 현대판 수토 기행을 춘천 우두산에서 시작한다.》 우두산은 춘천시 북쪽 용화산의 줄기가 뻗어내려 넓은 들판인 우두벌(평야)에서 우뚝 멈춘 산이다. 산의 생김새가 하늘에서 내려온 소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산의 외형은 동네 뒷산이라 할 정도로 평범한 야산(133m)이다. 산 정상까지 곧장 자동차로 올라갈 수 있고, 입구에서부터 걸어도 10분이면 바로 도착할 수 있다. 그러나 내력만큼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산이다. 이 산에 깃든 전설 같은 얘기가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까지 불러들였다. 산 정상에 있는 소박한 무덤 하나가 바로 그 국제적 전설의 주인공. ‘소슬묘’로 불리는 묘 바로 옆에는 조선시대에 지은 누각 조양루(朝陽樓)가 있는데, 전설도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 중국과 일본인 관광객 끌어들인 소슬묘 조선 후기의 문신 이유원은 청나라 황제의 조상 묘로 소문난 이곳을 답사한 후 저서 ‘임하필기’(1871년)에 이렇게 기록했다. “우두산에 옛 무덤 하나가 있는데 주민들이 청조(淸祖)의 묘라고 부른다”고 하면서 주민들의 전언을 소개했다. “묘를 파보았더니 정황기(正黃旗)만 나와 모두들 두려워하면서 봉분을 다시 만들려 했는데 하룻밤 사이에 봉분이 저절로 전과 같이 솟아 나왔다. 그 후로 소나 말이 와서 무덤을 짓밟아 놓아도 다시 전과 같이 솟아 나왔다. 그래서 이 무덤을 스스로 솟은 산이라고 해서 ‘솟을뫼(自聳山·자용산 혹은 소슬묘)’라고 부른다.” 이유원은 우두산에 대한 조망(眺望) 평도 남겼다. 그는 춘천시의 진산인 봉의산 소양정(현 강원도문화재자료 제1호)에 올라 소양강을 사이에 두고 직선거리로 불과 2.7km 남짓한 우두산 정상을 바라보면서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좋은 자리임은 의심할 게 없다”고 했다. 우두산이 풍수지리적으로 살펴봐도 길한 대지라는 뜻이다. 이 터는 일본과도 얽혀 있다. 조선시대까지 중국 황제의 조상 묘로 알려졌던 이곳이 일제가 한반도를 침탈한 후에는 일본 조상신의 묘로 ‘둔갑’했다. 일제는 이 묘가 일본의 시조신 아마테라스오카미(天照大神)의 남동생 스사노오노미코토(素殘嗚尊)의 묘역이라고 강변했다. 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는 스사노오노미코토가 신라(한반도)의 소시모리에 강림했다고 기록돼 있는데, 소시모리가 바로 소머리, 즉 우두산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스사노오노미코토는 우리의 국조인 단군이라고까지 우겼다. 이렇게 되면 여신 아마테라스오카미의 나라 일본은 맏이가 되고, 우리나라는 동생이 되는 격이다. 일본 정한파들은 이런 식으로 한반도 침략의 명분을 찾으려 했고, 1930년대에는 우두산 고적화 작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런데 우두산 소슬묘는 무덤으로 보기도 어렵다. 1940년대에 발간된 ‘강원도지’는 이 무덤을 파보니 오래된 기와가 나왔을 뿐 별다른 것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고(故) 전신재 한림대 교수는 이곳이 과거 천신을 모신 제단이라고 추론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장소라는 것이다. 분명한 건 우두산의 소슬묘는 한중일 삼국이 주목한 신비롭고도 신성한 땅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땅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현재는 코로나19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로 중국인 관광객들이 눈에 띄지 않지만, 그 전만 해도 이곳은 중국인들이 찾아와 기도하던 명소였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 관리들이 춘천을 방문하는 길에 들러 참배하곤 했다.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인기가 절정일 때 우리나라를 찾은 일본인 관광객들이 이곳에 들러 절을 했다고 한다. 국제적 상징성을 갖춘 이곳에서 새해의 다짐과 소원을 빌어보는 것도 남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두산은 6·25전쟁 초기 전선에서 아군의 승전보를 울렸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국군과 연합군이 이곳에서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그때를 기리는 충렬탑이 소슬묘 근처에 세워졌다. 겨울 추위를 무릅쓰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추념하기 위해 충렬탑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기운이 알찬 소양강 하중도 우두산에서 내려와 소양강 물줄기를 따라가 보면 강변에 세워진 소양강 처녀상(높이 7m·춘천시 근화동)을 만나게 된다. 2005년 춘천시가 소양강과 국민 애창곡인 ‘소양강 처녀’(반야월 작사, 이호 작곡)를 알리기 위해 세운 동상이다. 조선 초기에 이미 등장하는 소양강의 지명 유래는 확실치 않다. 시인이자 언론인인 노산 이은상(1903∼1982)은 춘천의 상징인 우두산의 ‘소’ 이름과 소양강의 ‘소’가 연결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춘천의 옛 이름 자체가 ‘우수’, ‘우두’라고 했으니 소양강에 소의 의미를 부여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소양강은 우두산 들판을 풍성히 적셔주며 춘천을 관통하고 있는데, 조선 후기의 인문지리학자 이중환은 강을 끼고 발달한 고을 중 평양 다음으로 살 만한 곳으로 춘천을 꼽기도 했다. 춘천의 풍요로움을 대표하는 곳 중 하나가 강 가운데 떠있는 섬 하중도다. 하중도에서는 청동기시대 지석묘(고인돌)와 국내 최대 규모의 집터 등이 발굴돼 역사학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땅에 블록 완구, 즉 레고를 주제로 한 테마파크인 ‘레고랜드’를 짓는 사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대개 청동기시대 유적이 발굴되는 곳은 좋은 터라고 볼 수 있다. 하중도에서 특히 유물이 대량 발굴된 레고랜드 테마파크 부지와 고급 호텔 부지 등은 풍수적 시각으로 보면 명당 중에서도 핵심인 혈(穴) 자리에 해당한다. 이런 곳에서 대지의 기운을 감각이나 분위기로 즐겨보는 것도 좋은 취기(取氣·기운을 취함) 방법이다. 아쉽게도 건설 현장은 철저히 통제돼 있어 출입이 어렵다. 그 대신 춘천대교를 거쳐 하중도 둘레 도로를 한 바퀴 돌아보거나, 소양강 처녀상 인근의 소양강 선착장에서 오리보트나 모터보트를 타고 하중도를 바깥에서 감상할 수 있다. 소양강 선착장에서는 연중무휴로 보트 체험을 할 수 있다.글·사진 춘천=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중국 재계의 요즘 화두는 국진민퇴(國進民退)다. 국영기업은 승승장구하는 반면 민영기업은 퇴보하고 있다는 말이다. 최근에는 중국 류허 부총리가 자국 내 민간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당에 순응하고 당과 함께 가자’는 이념 교육 강화 지침까지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 알리바바와 금융 기업 앤트그룹의 창업자인 마윈마저 중국 공산당 앞에 ‘순한 양’이 되고 말았다는 소식이 글로벌 비즈니스계에서 화제다. ▷마윈은 11월 초 중국 금융당국에 소환된 자리에서 “국가가 필요로 하면 앤트그룹이 보유한 어떠한 플랫폼도 내줄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앤트그룹의 자산 일부를 중국 공산당에 헌납하겠다는 ‘항복 선언’인 셈이다. 한 달 전인 10월만 해도 중국 최고위 금융당국자들이 참석한 행사에서 “금융당국은 담보가 있어야 대출해주는 ‘전당포 영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던 그다. ▷마윈이 최대주주인 앤트그룹은 정보기술을 활용하는 금융 서비스 기업이다. 마윈의 발언 1주일 뒤인 지난달 5일 앤트그룹은 홍콩과 상하이 증권거래소에 역대 최대인 340억 달러(약 37조 원) 규모의 기업공개(IPO)를 하려다가 무산되는 사태를 겪었다. 마윈이 이런 사정을 감안해 유화책을 쓴 것으로 보이지만 중국 당국의 태도는 여전히 냉랭하다. 런민은행과 증권감독관리위원회 등 4개 감독기관은 26일 앤트그룹 경영진을 불러 면담을 진행하면서 “규정을 위반한 대출·보험 등 금융상품 판매 활동은 엄격히 바로잡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앤트그룹의 핵심적 수익 창출원인 소액 대출과 각종 투자상품 판매를 제한하라는 뜻으로 해석됐다. ▷마윈 사태는 최근 중국이 겪고 있는 위기감의 표출이라는 지적도 있다. 18일 폐막된 중앙경제공작회의에서는 글로벌 경제에서 중국을 배제하려는 미국에 대응하기 위한 ‘중국식 홀로서기’ 정책이 쏟아져 나왔다. 외부 세력의 도전으로부터 자립, 자강하려는 정책에 대해 위반되는 행동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을 안팎에 내비친 것이다.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지난 40여 년간 기적 같은 경제 부흥을 일으켰다. 민진국퇴(民進國退)라고 할 만큼 도전적이고 발 빠른 민영기업의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윈은 바로 그 성장 신화의 상징이었다. 영국의 싱크탱크인 경제경영연구소(CEBR)는 2028년이면 중국 경제 규모가 미국을 앞설 것으로 전망했다. 이 연구소가 1년 전 예상했던 시점보다 5년이나 빨라진 것이다. 하지만 덩치가 커지는 것과는 반대로 중국이 규모에 걸맞은 성숙한 경제체제를 갖추는 시기는 오히려 늦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마윈 사태’가 보여준다.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인구 125만 명인 수원시가 곧 ‘수원특례시’로 변신한다. 이달 초 수원을 특례시로 지정하는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함으로써 수원시는 2022년부터 새 이름을 갖게 된다. 특례시는 인구 100만 명을 넘어선 도시 가운데 기초자치단체 지위를 유지하면서도 광역시급 위상의 자치권한과 재량권을 행사하는 도시를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도시의 급이 한 단계 올라간다는 뜻이다. 수원은 역사적으로 조선 후기에 가장 주목받는 도시였다. 정조 임금은 한양 다음 가는 신도시를 만들기로 하고, 대상지로 수원을 선택했다. 1793년 수원도호부를 유수부로 승급시키고, 1796년 이곳에 화성(華城)과 행궁(行宮)을 지었다. 그러나 건물을 완공한 지 4년 만에 정조는 갑자기 숨을 거뒀다. 더불어 수원을 최고의 신도시로 만들겠다는 정조의 꿈도 수장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번 수원특례시 지정 조치는 220여 년 동안 잠자고 있는 정조의 꿈을 다시 일깨울 수 있을까. ● 정조가 꿈꿨던 계획 신도시 수원은 정조가 철저히 계산해 만든 계획도시다. 정조는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 묘를 양주 배봉산(현 서울시립대 뒷산)에서 수원 화산(현 경기 화성시 융릉)으로 이장했다. 수원에 아버지를 모신 정조는 곧장 수원 화성(華城)과 행궁을 축조했다. 실학자 정약용이 설계하고 재상 채제공이 총감독을 맡았다. 총력전을 펼친 결과 1794년에 착공한 지 불과 2년 9개월 만에 거대 성곽을 갖춘 계획도시가 탄생한다. 화성이 완공되자 정조는 백성들의 이주를 권했다. 수원으로 이주해온 거상(巨商)들에게는 인삼전매권을 부여하는 등 특혜도 줬다. 이에 따라 상인들이 모여들고 한양의 종로처럼 시전이 들어서는 등 도시는 번창해갔다. 수원시내 행궁 앞 도로가 ‘종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수원 상인들의 상술이 전국에 소문나고, 수원에서 알부자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정조의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정조는 상업과 함께 농업도 발전시켰다. 농민들을 위해 황무지를 개간해 농지를 만들어 주고, 둑을 막아 저수지를 조성하고, 농사지을 때 필요한 소까지 나눠주었다. 이후 수원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농업 기술의 메카로 자리 잡았다. 농촌진흥청(현재는 전주시로 이전), 서울대 농대 등이 이곳에 둥지를 튼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이처럼 수원화성은 자족 기능을 갖춘 조선 후기 최고의 계획도시였다. 생산과 상업 기능을 고루 갖춰야만 도시가 성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수원화성이 완성된 날인 10월 10일을 ‘도시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수원화성은 오늘날의 수도권 신도시와 유사한 기능도 갖고 있었다. 지정학적으로 수원은 한양과 삼남지방을 연결하는 길목에 자리한 거점도시였다. 따라서 수원화성이 성공한다면 서울(한양)의 기능을 남쪽으로 확장하고 범(凡) 한양권(수도권)을 구축하는 위성도시로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다. 정조는 또 이런 성과를 전국적으로 확대 적용하려는 의지까지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정조의 풍수 안목 정조는 수원 화성과 행궁 조성 과정에서 당시로서는 첨단 과학 기법을 적극 도입하면서 동시에 지형지세를 이용한 풍수지리설도 적극 활용했다. 정조 자신이 뛰어난 풍수지리 이론가이기도 했다. 그가 직접 쓴 ‘홍제전서’에는 웬만한 지관을 뺨칠 만한 수준의 풍수이론이 담겨 있다. 정조의 풍수 실력은 팔달산 아래에 지은 행궁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화성행궁은 건립 당시 21개 건물 576칸 규모의 정궁(正宮) 형태로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정조는 재위 중 12년간 13차례나 이곳에 내려와 머물렀고, 어머니 혜경공 홍씨의 회갑연도 이곳에서 가질 정도로 애착을 보였다. 정조의 풍수안(風水眼)으로 행궁을 살펴보자. 행궁은 서쪽의 팔달산을 주산(主山)으로 삼아, 동쪽을 바라보는 형태다. 동쪽 맞은편으로는 직선거리로 600m 남짓한 지점에 봉돈(烽墩·동2포루와 동2치성 사이)이 들어선 언덕이 있다. 나지막한 언덕은 한 일(一) 자 모양으로 가로로 길게 누워 있는 모양새다. 지금은 행궁 앞으로 많은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어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풍수에서는 이런 모양을 일자문성(一字文星)이라고 한다. 특히 앞산이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매우 귀하게 여긴다. 정조 역시 ‘홍제전서’에서 일자문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행궁이 풍수적 이유로 서좌동향(西坐東向·서쪽에 자리 잡고 동쪽을 바라봄)으로 배치됐음을 알 수 있다. 행궁의 좌청룡과 우백호는 어떠할까. 정조는 수원화성의 동북쪽에 있는 용연(龍淵)에 직접 행차한 뒤 북쪽 용두암(龍頭巖)과 남쪽 귀암(龜巖)을 가리키며 “거북과 용이 상대하고 있으니 이는 정기의 신령함이 있다”고 칭찬했다. 행궁을 기준으로 보면 북쪽 용두암은 왼쪽을 보호해주는 좌청룡이 되고, 남쪽 귀암은 오른쪽을 보호해주는 우백호가 된다. 용과 거북이 서로 상대하면서 행궁을 지켜주니 길하다고 본 것이다. 용두암은 지금도 그 모습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수원 광교산 줄기가 용이 꿈틀거리듯 뻗어내려 자그마한 둔덕을 이룬 곳이 용두암이다. 바로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는 정자가 들어선 곳이다. 수원화성의 성곽 구조물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히는 방화수류정에는 수원천이 휘돌아나가는 연못인 용연도 있다. 정조가 직접 지휘해 만든 용연은 연못 가운데 작은 섬이 있고, 뱃놀이를 즐길 수 있을 만큼 규모가 크다. 이곳은 1919년 수원 3·1독립운동의 발원지로서, 역사적 의미도 갖고 있다. 용과 상대하는 구암은 어디일까. 1872년에 작성된 수원부지도를 보면 팔달문 근처에 야트막한 언덕인 구산(龜山·거북산)이 표시돼 있는데, 이것이 귀암(거북바위)으로 추정된다. 구산이 팔달산에서 보면 마치 거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용두암이 있는 방화수류정을 지나 흘러내리는 수원천이 구산 근처에서는 구천(龜川)으로 불린다는 점도 이런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다만 지금은 도시 개발로 산이 깎여 그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화성행궁은 조선시대 지형지세를 중심으로 풍수를 반영해 지은 풍수적인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 팔달산 앞면의 행궁과 뒷면의 경지지사 관저의 풍수 길흉 수원의 주산이기도 한 팔달산은 동쪽에 행궁이 있고, 바로 산 정상 너머 서쪽에는 경기지사 관저가 있다. 관저는 9225㎡ 부지에 지상 2층 규모의 철근콘트리트로 지은 단독주택인데,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역대 경기지사들이 머무는 이 관사 터는 정조가 수원화성을 조성할 당시만 해도 나병환자를 격리하거나 시신을 안치했던 자리였다. 일제강점기 때도 전염병 환자를 격리 수용하던 곳이었다. 이곳은 풍수적으로 봐도 좋지 않은 터다. 산을 끼고 마을이나 건물이 들어설 때는 대체로 산의 얼굴인 앞면에 자리잡게 마련이다. 산의 등에 해당하는 뒷면은 지형이 가파르거나 땅 기운이 험해 보통 꺼린다. 정조가 수원화성을 축조할 때 팔달산의 동쪽으로 행궁을 앉힌 것도 이곳이 산의 앞면이기 때문이었다. 반면 팔달산 뒷면 부위에 앉은 경기지사 관저는 역대 경기지사들이 대권 도전에 나섰다가 모두 실패하거나 구설에 휩싸였다. 그만큼 좋지 않은 터라 해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이인제 민선 초대 경기지사와 민선 3기 손학규 지사는 도지사 경력을 무기로 대권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다. 2기 임창렬 지사는 부부가 구속되는 파란을 겪었다. 이를 의식한 민선 4기 남경필 지사는 관사를 게스트하우스로 운영하면서 아예 사용하지 않았다. 남 지사와 대결에서 승리한 이재명 5기 지사는 다시 이곳을 관사로 사용하고 있다. 만약 이재명 지사가 경기지사 역할을 잘 수행하고, 차기 대권에서도 승리한다면 ‘풍수보다는 사람이 우선’이라는 새로운 공식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정조의 꿈을 담고 있는 수원의 발전 가능성은 무한히 크다. 한반도의 배꼽자리, 단전(丹田) 혈자리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수원이 새롭게 부활한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미래가 그만큼 밝다는 뜻이기도 하다.안영배 논설위원ojong@donga.com}
최근 신라 여성 왕족의 무덤에서 200여 점의 바둑돌이 발굴돼 ‘바둑 두는 공주’로 유명해진 경주시 쪽샘지구 44호 고분. 1500여 년 동안 도굴되지 않은 채 온전하게 보존된 이 고분은 신라의 독특한 풍수 문화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 최상위층(왕족과 귀족) 고분들과 뚜렷하게 차이가 나는 데다, 풍수에 대한 고정 관념까지 허물어뜨리기 때문이다. 신라 공주를 만나보기 위해 경주를 찾았다. 돔식 지붕에 둘러싸인 쪽샘지구 44호 고분은 경주시내 황남대총, 천마총 등이 있는 대릉원 동쪽 편에 바짝 붙어 자리 잡고 있다. 2007년 예비조사를 시작해 2014년부터 본격 발굴에 들어간 이곳은 국내 단일고분으로는 최장기간 조사해 거의 완벽한 수준으로 원형을 복원하고 있는 공간이다. 지금도 현지에서는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5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고분의 주인공은 150cm 남짓한 키에 10대 나이의 여성 왕족으로 추정된다. 현장에서는 유골만 보이지 않을 뿐 공주가 누워 있던 흔적이 확연하게 눈에 띄었다. 머리 부위에는 출(出)자 모양의 자그마한 금동관이 있었고, 양쪽 귀 부위에는 금귀걸이, 팔과 손에는 금은으로 만든 팔찌와 반지, 허리로는 은허리띠 장식이 원형 그대로 발굴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심현철 연구원은 “신라 최상위층 무덤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이 이 고분에서도 대량 발굴되고 있다”며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밝혀주는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땅속이 아닌 지상에다 묘를 만들어 공주 고분은 풍수적 시각에서 보아도 중국식 풍수와는 확연하게 다르다. 우선 공주의 유해는 땅속이 아닌 지표면(지상)에 누워 있는 특이한 구조다.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 한족(漢族) 무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한족계 무덤은 거의 대부분 땅을 파서 매장한 형태다. 공주의 무덤 구조 또한 만리장성 이북의 북방문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적석분(돌무지 무덤) 형식이다. 유해를 목곽(木槨·덧널)으로 감싼 뒤 그 주변을 돌들을 쌓아 얹혀 놓았고, 다시 그 위를 흙으로 덮어 둥그렇게 봉분을 만드는 적석목곽묘(돌무지덧널무덤)인 것이다. 역사학계에서는 신라왕이 마립간으로 불리던 초기 신라 시기(356~514년)에 이런 무덤이 집중적으로 나타났다고 본다. 일반인에게도 익숙한 금관총, 서봉총, 황남대총, 천마총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적석목곽묘들이다. 특히 천마(天馬) 그림으로 유명한 천마총은 관람객들이 직접 무덤 내부를 볼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복원된 천마총 고분의 주인공(소지왕 혹은 지증왕으로 추정)도 공주 고분처럼 평지에 누워 있는 모습이다. ‘천마총발굴조사보고서’는 “지상에 관을 놓은 평지 묘라는 점으로 보면 지맥(地脈)에 의한 지덕(地德)을 받고자 하는 생각은 적었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적고 있다. 땅속으로 흐르는 지맥을 통해 땅기운의 혜택을 누린다는 사상은 중국식 풍수의 기본 개념이자 지금도 다수 풍수인들 사이에 금과옥조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평지에 조성된 무덤을 보고 초기 신라 때는 풍수 개념이 없었다는 주장까지 제기된다. 그러나 이는 오해다. 신라는 건국 초기부터 풍수 설화가 등장한다. ‘삼국유사’는 지리술에 밝은 탈해가 토함산 정상에 올라갔다가 초승달 모양의 땅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집으로 차지했다고 전한다. 탈해가 지목한 터가 현재 경주의 왕성인 월성(月城)이다. 또 탈해왕은 죽어서 소천구(疏川丘)에 장사 지내게 됐는데 신령으로 나타나 “내 뼈를 조심해서 묻어라”라고 명령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신라가 건국 초기부터 풍수적 관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무덤에서 나오는 기운을 살펴보아도 신라인들이 풍수 문화에 깊게 젖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7대 내물 마립간에서 22대 지증 마립간 시기에 조성된 공주 고분은 지금도 강한 기운이 뻗쳐 나오고 있다. 그 핵심 지점이 바로 공주가 누워 있는 곳이다. 천마총이나 황남대총에서 느낄 수 있는 천기형(天氣形·공중에서 기운이 하강하는 형태) 같은 기운을 공주가 누워 있던 자리에서 체험할 수 있다. 이로 보면 하늘 숭배 사상이 깊었던 신라인들은 무엇보다도 하늘 기운을 중요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죽어서도 하늘 기운이 하강하는 지표면에 유해를 안치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전통은 23대 법흥왕 이후 중국 문화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변화가 일어난다. 무덤 구조에서도 땅기운을 중시하는 중국식 묘제(墓制)로 점차 바뀌게 된 것이다. ○ ‘신성한’ 동쪽을 향해 눕다 마립간 시대의 신라인들이 하늘 기운을 중요시했다는 또 다른 ‘증거’도 있다. 공주의 머리가 향하는 방위다. 공주는 동두서족(東頭西足·동쪽으로 머리를 두고 서쪽으로 발을 둠)으로 누워 있는데, 이는 천마총 같은 다른 적석목곽묘의 두향(頭向) 배치와도 같다. 동쪽은 해가 떠오르는 곳이다. 한반도 동쪽 끝에 위치한 경주의 사람들은 사후에도 머리를 동쪽으로 두어 태양의 신성한 하늘 기운(빛)을 받아들이기를 원했던 것 같다. 경주의 왕성인 월성과 첨성대 등 주요 유적들이 매년 태양의 힘이 세지기 시작하는 동지(낮의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시점) 때 해가 떠오르는 방위선인 동지일출선(冬至日出線)에 위치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경주의 주산이자 ‘신유림(神遊林·신이 노니는 숲)’이라 불리는 낭산도 동지일출선 상에 있기 때문에 신성한 산으로 받들어졌을 것이다. 사실 중국에서 태동된 풍수이론은 초기만 해도 하늘 기운과 땅기운을 같이 중시했다. 풍수의 본디 말이 ‘감여(堪輿)’인데 ‘감’은 하늘의 도(道)를, ‘여’는 땅의 도를 가리킨다. 초기 감여학(풍수학)은 굳이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땅보다는 하늘 기운을 기준으로 삼았다. 즉 하늘 기운이 하강하는 곳을 기본으로 삼아 땅의 지형지세를 살펴 풍수적 배치를 설계했던 것이다. 바로 그 점을 실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공주 묘 같은 신라 고분이다. ○ 불로장생의 선약 운모 공주 고분에서는 운모도 발견됐다. 공주의 머리와 가슴 사이에서 발견된 50여 점의 운모는 도교와 연관이 있다는 점에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운모는 장기간 복용하면 불로장생을 할 수 있다고 해서 도교에서는 선약(仙藥)이라고 부른다. 운모는 손톱으로 긁어내면 마치 물고기 비늘처럼 일어난다고 해서 ‘돌비늘’로 불리는 광물질이다. 중국 의학서인 ‘신농본초경’에는 사악한 기운을 제거하고 오장(五臟)을 안정케 하는 효과가 있다고 소개돼 있다. 이런 운모는 공주 고분 외에 신라의 여러 고분에서도 발견되고 있고, 한성백제 시기의 고분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운모는 풍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운모는 ‘도교 풍수’에서 비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비보(裨補·풍수적 결함을 인위적으로 보완) 물질 중 하나다. 운모가 건강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오는 유해한 기운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재도 운모 같은 광물질을 살기 차단용 비보 풍수로 활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 역시 비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한국 고유의 풍수 문화로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경주 쪽샘지구 공주 고분은 신라 풍수의 특징적인 모습을 포괄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공주 고분을 비롯해 경주 시내 평지에 조성된 고분들은 땅기운 위주의 중국 풍수 시각으로는 해석하기가 어렵다. 경주 고분들은 신라 고유의 천문풍수 문화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수도 한양이 하늘의 중심인 3원(자미원, 태미원, 천시원)의 별자리를 본뜬 도시라면, 신라의 수도 경주는 하늘의 기운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이는 또 다른 천문도시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런 하늘 기운을 통해서 경주는 1000년 남짓 수도의 지위를 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경주=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경기 수원시와 삼성가의 인연은 뿌리가 깊다. 수원은 삼성그룹을 대표하는 삼성전자가 시작된 곳이자, 삼성가 선영들이 자리한 곳이다. 지난 10월 말 타계한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도 수원 이목동에 장지를 마련하고 영면에 들었다. 애초 이 회장은 부모(이병철·박두을) 묘소가 있는 용인 에버랜드에 묻힐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다. 풍수학계에서는 몇몇 지관들이 이건희 회장의 음택(陰宅·묘) 후보지를 고르기 위해 용인을 훑고 다녔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이런 예상을 깨고 수원으로 장지가 정해졌다. 이 과정에 이 회장의 배우자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의 뜻이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살아서는 진천 땅(生居鎭川), 죽어서는 용인 땅(死居龍仁)’이라는 속설까지 있는 용인 대신 수원을 고른 이유는 무엇일까. ● 삼성 창업주 이병철, 풍수로 수원과 인연 맺다 삼성가가 수원을 중시하는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1967년 삼성그룹 창업주 고(故) 이병철 회장은 경남 의령에 있던 모친의 묘소를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에 위치한 산으로 옮겼다. 바로 직전 해인 1966년, 그는 큰 고초를 겪는다. 그가 경영하던 한국비료공업주식회사가 일본에서 사카린을 밀수입한 사실이 밝혀져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회사를 국가에 헌납한 일이다. 풍수에 관심이 많았던 이병철 회장은 당시 처한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한 방편으로 풍수가의 조언을 따라 묘를 이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풍수 고전인 ‘장서’에서는 이런 조치를 ‘탈신공 개천명(奪神功 改天命·신이 하는 일을 빼앗아 천명을 바꿈)’이라고 한다. 묘터와 집터 등을 옮겨 불운(不運)을 극복한다는 뜻인데, 적극적인 운명 개척 사상을 표현한 것이다. 풍수를 매개로 한 삼성그룹과 수원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묘를 이장한 이듬해인 1968년, 조상이 지켜보는 수원에서 새로운 삼성을 준비했다. 수원 영통구 일대에 약 149만㎡(45만 평) 규모의 터를 확보한 것이다. 이후 1969년 1월 삼성전자공업㈜을 창립했다. 1938년 대구에서 농수산물을 취급하던 삼성상회로 출발한 회사를 30년 만에 기술 집약 산업인 전자업체로 바꾸는 한국 기업사에 가장 혁신적인 프로젝트였다. 라디오와 TV생산 라인을 갖추고 불과 36명의 인력으로 시작한 삼성전자는 이후 고속 성장을 거듭해 글로벌 초일류기업으로 거듭났다. 현재 삼성전자가 위치한 곳은 총 면적 172만㎡(약 52만평) 규모의 ‘삼성디지털시티’로,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할 만큼 크게 달라졌다. 삼성전자는 이후 반도체 생산라인을 경기 기흥, 화성, 평택 등으로 이전시켰다. 현재 삼성디지털시티에는 기술 혁신과 창조를 위한 정보통신연구소(R3)와 디지털연구소(R4), 모바일연구소(R5) 등 핵심 연구소들이 남아 있다. ● 좌청룡 삼성디지털시티, 우백호 삼성 선영 이달 초 삼성의 그림자가 짙게 밴 수원 일대를 찾았다. 경기 의왕시와 경계를 이루는 산자락에 위치한 이목동 선영에는 이건희 회장의 묘소를 기준으로 증조부모 묘와 조부모 묘가 상하로 가지런하게 조성돼 있었다. 이병철 회장이 SK 소유였던 땅을 매입해 모친 묘를 옮겨온 이후 삼성가는 1970년대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조상 묘들을 이곳으로 모신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이곳은 일반인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아 묘역을 자세히 살펴볼 순 없지만 사신사(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가 아름다운 명당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목동 선영은 수원 중심부인 팔달산 건너편에 위치한 삼성디지털시티와는 직선거리로 불과 10km 떨어진 거리에 있다. 그 배치가 묘하게 짝을 이룬다. 수원의 진산(鎭山)인 광교산을 기준으로 동쪽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자락 아래에 삼성디지털시티가 있고, 서쪽의 우백호에 해당하는 산자락에 삼성가 선영들이 자리하고 있다. 마치 새의 양 날개 같은 모양새다. ● 영(靈)이 통(通)하는 터에 나타난 기적 삼성디지털시티는 선영 못잖게 양택(陽宅·사람이 거주하는 집 혹은 일터) 명당으로 꼽히는 곳이다. 삼성디지털시티가 들어선 영통구 매탄동 일대는 과거 ‘산드래미’로 불렸던 곳이다. 지금은 그 흔적이 많이 사라졌지만, 개발되기 전까지만 해도 주변에 자그마한 산들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산둘레미→산드래미)이다. 북쪽으로 매봉 서쪽 자락의 원천호수(원천저수지)와 동쪽 자락의 신대호수(신대저수지)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원천천(遠川川)을 이뤄 삼성디지털시티를 감싸듯이 돌아나간다. 생태하천으로 복원된 원천천은 삼성디지털시티에 끊임없이 좋은 기운을 불어넣고 있다. 한마디로 배산임수(背山臨水)가 조화롭게 갖춰져 있는 길지다. 삼성디지털시티는 38층 규모의 오피스 타워를 중심으로 연구실, 사무실, 복지시설, 게스트하우스 등 130여 개 건물에서 50여 개 국적을 가진 3만5000명의 임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다(2018년 기준). ‘시티’라는 이름에 걸맞게 임직원들을 위한 건강, 육아, 교육, 문화, 예술 관련 각종 시설물들이 갖춰져 있다. 일반인들이 이곳을 방문하려면 사전 예약과 승인을 거쳐야 한다. 삼성디지털시티에서 가장 핵심적인 혈처(穴處)는 공원인 센트럴파크(3만7699㎡)를 곁에 둔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이 바로 삼성전자 본사다. 삼성전자는 서울 강남 서초동에 마천루 같은 사옥을 마련해 놓고서도 본사 주소를 한 번도 수원에서 옮기지 않았다. 삼성전자는 위기 때마다 수원 본사에 모여 난국을 돌파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삼성전자의 주력인 스마트폰 사업도 이곳에서 시작됐다. 휴대전화 ‘애니콜 신화’에 젖어 있던 삼성은 미국 애플사가 출시한 스마트폰에 대비하지 못해 고전하다가 2010년부터 갤럭시S 시리즈를 선보이며 전세를 역전시켰다. 삼성이 전세계 스마트폰 시장을 장악하는 기적을 이룬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지만, 이건희 회장 체제에서 삼성전자의 수원 본사가 모든 역량을 집중시킨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흔히 반도체 기술이 접목된 스마트폰은 글로벌 도술문명(道術文明)을 상징하는 신물(神物)에 비유된다. 스마트폰으로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실시간 알 수 있고, 동영상과 통화 등을 통해 세계인들과 교류할 수 있어서다. 즉 누구나 천리안(千里眼)을 가진 도인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이와 관련, 수원 사람들은 ‘사람과 사람의 영혼을 통하게 해주는’ 스마트폰을 만들어낸 삼성디지털시티가 영통구(靈通區)에 자리 잡게 된 것을 범상치 않게 여긴다. 영통지역은 이름 그대로 ‘신령한 영(靈)이 통(通)하는’ 곳이다. 지명의 유래도 특이하다. 삼성디지털시티의 뒷배가 되는 청명산(191m) 봉우리의 우물 속에 영과 통하는 신비한 보물이 숨겨져 있다거나, 신비스런 도인(혹은 산신)이 사람들 눈에서 사라졌다 보였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전해져 내려온다. 이런 이유로 영통동 주민들은 매년 단오날이면 청명산 산신제와 신령스러운 느티나무(영통동 1047-3) 아래서 당산제를 지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다. 풍수적으로 해석해도 청명산 아래 삼성디지털시티는 풍성한 재물을 뜻하는 토(土)의 기운과 영통, 교감, 창의 등을 뜻하는 화(火)의 기운이 적절히 배합된 터다. ‘최고의 두뇌들이 모여 혁신과 창조의 산실을 추구한다’는 삼성디지털시티의 목표와 어울린다. 삼성이 디자인 혁명을 강조하며 건립한 서울 우면동의 ‘서울R&D캠퍼스’도 수원으로 내려올 경우 더 빛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우면동 연구소는 터와 기운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반도체와 스마트폰 신화를 주도했던 이건희 회장도 이런 이유로 수원을 지키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안영배 논설위원ojong@donga.com}
‘삼십년하동 삼십년하서(三十年河東 三十年河西)’라는 중국의 유명한 속언이 있다. 누런 황토물이 흐르는 중국의 황허(黃河)가 잦은 범람으로 지형이 변해 강 동쪽에 있던 것이 서쪽으로 위치가 바뀌었다는 뜻이다. 청나라 때 만들어진 ‘유림외사(儒林外史)’에 소개돼 있는 말이다. 30년이 강조된 것은 지운(地運)의 변화에는 일정한 주기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990년대 초 수도권 1기 신도시로 출발한 경기 성남시 분당과 고양시 일산도 올해로 30년 역사를 꽉 채워가고 있다. 한때 ‘천당 아래 분당’ ‘천하 제일 일산’으로 불리며 쌍벽을 이루던 두 도시였지만, 30년이 지난 현재 그 위상은 크게 다르다. 여기에도 지운의 ‘30년 법칙’이 작용했기 때문일까. 동양의 상수철학(象數哲學)에서도 3, 30, 300 등의 수는 변화를 일으키는 ‘신성한 숫자’로 본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란 말도 3일이 지나면 변화가 생긴다는 표현이다. 특히 30년은 지운(地運)의 변화를 살펴보는 기본적인 ‘시간 단위’로 활용된다. 땅의 기운은 30년이 꽉 차고 나면 변화가 일어나고, 새로 30년 주기를 시작하면 더 발전적으로 진화하거나 반대로 쇠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당과 일산은 어떻게 될까. ● 장터 분당과 농촌 일산의 예고된 미래 분당과 일산은 똑같이 수도권 신도시로 개발됐지만 땅의 생김새와 쓰임새가 완전히 다르다. 광주산맥의 두 산줄기가 동서 양쪽에서 허리춤처럼 두르고 있는 분당은 예전부터 교통 요지였다. 서울과 영남 지방을 연결하는 영남대로가 있던 이 지역은 일찌감치 낙생역, 판교원 등 먼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교통수단과 쉼터가 마련돼 있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답게 일찌감치 상권이 발달했다. 분당이라는 이름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분당은 일제강점기에 광주군 돌마면의 분점리(盆店里)와 당우리(堂隅里)를 합쳐 지어졌다. 분점리는 질그릇인 동이를 팔던 옹기점들이 있던 마을이고, 당우리는 불당 서낭당 등 당집이 들어선 동네였다. 주막과 장터 등이 들어서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매우 번창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기찻길인 철로에 밀려 한참 주춤했고, 광복 후에도 그린벨트에 묶여 개발이 더뎠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지나다 “앞으로 긴요하게 쓸 땅이니 개발하지 말라”고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그러던 분당은 1기 신도시로 개발되면서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서울 강남과 가까운데다 판교 테크노밸리와 인접해 있어 지속적인 성장 동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른바 ‘자족형 신도시’에 걸맞은 조건을 갖췄다는 것이다. 지운이 제대로 발동한 셈이다. 반면 일산은 역사적으로 전형적인 농촌지역이었다. 신도시로 바뀌기 전 대부분 절대농지였던 이곳은 일산평야로 불렸고, 지역주민의 50%가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들이었다. 일산은 바로 옆에 한강을 두고 있어 장마철만 되면 침수가 되는 저지대인데다, 북한 침략에 대비한 군사 시설이 많다는 이유로 신도시 지정 때까지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신도시가 조성된 이후 한때 분당보다 높은 녹지율을 가진 쾌적한 전원도시로, 또 남북통일시대의 미래 성장도시로 주목받으며 분당과 어깨를 겨뤘다. 안타깝게도 현재 일산은 서울 출퇴근자를 위한 베드타운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새로운 30년 주기를 앞두고 변신을 꾀하고 있다.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A노선 등 각종 교통개선 대책과 일산동구 일대의 테크노밸리와 영상밸리 조성 등을 통해 일자리를 갖춘 자족도시로 거듭나려 애쓰고 있다. ● 분당, 탄천의 기운으로 재물 얻기에 유리 30년에 걸쳐 달라진 분당과 일산의 위상은 집값에서 두드러진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에 따르면 올 10월 기준 분당구 서현동 시범한신 아파트(전용면적 84㎡, 1991년 입주)는 평균 13억 원에 거래됐다. 비슷한 시기에 입주한 같은 면적의 일산동구 마두동 강촌마을 아파트(라이프)는 평균 5억6000만 원에 매매됐다. 무려 2배 넘게 차이가 난다. 국토부가 발표한 2020년 아파트 공시가격 변동률도 두 도시의 격차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분당은 전년 대비 7.31% 오른 반면 일산지역은 오히려 2~4% 떨어졌다. 수년째 이어지는 전국적인 집값 상승에도 일산 아파트 주민들은 자산가치 하락을 우려하고 있다. 이런 변화의 원인을 풍수적 시각에서 찾으면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분당과 일산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물의 세력, 즉 수세(水勢)라고 할 수 있다. 분당은 도시를 남북으로 휘돌면서 한강으로 빠져나가는 탄천이 아름답다. 경기도 용인 법화산에서 발원한 탄천은 분당으로 들어온 뒤 여러 개울들과 만나 수량을 풍성히 하고 있다. 탄천은 지하철 수인분당선인 죽전역 부근에서 성복천(수원 광교산자락 발원)과 만나 합수(合水)하고, 다시 북상하면서 구미동 구미공원 부근에서 동막천(낙생저수지 발원)을, 야탑초등학교 인근에서 여수천(성남시 갈현동 발원)을 만나 더 큰 물줄기를 이룬다. 물이 맑고 수량이 풍부할수록 도시의 부를 살찌우는 데 이롭다. 또 재물을 뜻하는 물길이 이중삼중으로 모인 곳일수록 재물의 크기가 커진다고 해석한다. 결국 탄천은 분당지역 부의 원천인 셈이다. ● 일산, 마두산의 지기 활용한 문화예술도시로 거듭나길 일산은 이와 반대다. 주변에 낮은 구릉성 산과 도시 중앙의 정발산(86.5m)을 제외하면 전체가 평탄한 지형이고, 제대로 된 물줄기는 없다. 도촌천, 한산천, 한류천 등 자그마한 개울이 있으나 서로 합수되지 못한 채 제각기 흘러 남쪽의 한강으로 빠져나간다. 도시의 물길이 한 데 모이지 못해 수량이 적은 데다, 한강도 일산신도시를 포근하게 감싸주지 못한 채 파주 쪽으로 곧장 빠져나가는 모양새다. 결국 물줄기가 일산신도시 전체의 부를 키우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일산의 주변 산들 역시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지 못한다. 찬바람이 부는 겨울이 유독 춥게 느껴지는 이유다. 방풍이 잘 되지 않는 일산은 높은 빌딩과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는 도시건축 시스템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산은 주거 환경이 매우 쾌적하다. 드넓은 평지에 위치했다는 점 때문에 분당보다 아파트 동간 거리가 넉넉하고, 호수공원 등 접근성이 높은 공원들이 곳곳에 있다. 1980년대 젊은이들이 즐겨 찾았던 애니골 카페촌 등 문화적 명소도 많다. 서울로의 출퇴근 문제만 없다면 평생 살고 싶은 정도로 주민들의 주거 만족도가 높은 곳이다. 일산은 도심 가운데 불끈 솟은 정발산(중앙공원)이 인상적이다. 주민들에 따르면 인근 고봉산(206.3m)의 한 지맥이 평지에서 솟아난 형태인 정발산이 말의 모습이며, 현재 일산동구청이 위치한 마두동(馬頭洞)은 말의 머리에 해당한다. 이 말이 머리를 길게 내밀어 한강의 물을 마시는 형상이다. 일산 일대가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목이 마른 말이 물을 들이키는 형상) 명당이라는 해석의 배경이다. 특이하게도 정발산 바로 앞에 조성된 인공호수도 말이 물을 마시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평지 위에 야무지게 돌출한 정발산은 일산이 새로운 30년 주기를 맞아 문화성과 예술성을 갖춘 전원도시로 변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말(午)은 불을 뜻하면서 창조적 문화·예술 활동의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서울 쪽으로 더 가까운 거리에 조성되는 고양창릉신도시, 고양덕은지구, 고양향동지구 등과 경쟁해 일산신도시가 돋보이는 비책이 되지 않을까.안영배 논설위원ojong@donga.com}
동남권 신공항 건설 후보지를 놓고 부산·경남 지역은 물론 정치권이 들끓고 있다. 공항 건설은 지역 경제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내년으로 예정된 부산시장 보궐선거의 표심도 크게 자극받을 수 있다. 특히 부산시는 정부가 신공항 후보로 기존의 김해공항 확장안 대신 가덕도 신공항 건설에 무게를 싣는 분위기에 한껏 들떠 있는 모양새다. 풍수에서는 항만, 공항, 역 등을 통칭해서 득수처(得水處·물을 얻는 곳)로 본다. 물길, 즉 수(水)는 재물의 의미다. ‘수관재물(水管財物)’이라는 말도 있다. 이런 곳에서 경제적 번영과 부의 축적이 쉽게 이뤄진다는 뜻이다. 이는 현대 도시공학적인 관점에서도 일정 부분 타당하다. 공항이 대표적이다. 하늘의 물길인 ‘천로(天路)’를 따라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공항은 현대사회에서 가장 주목받는 물류거점이다. 공항은 안전이나 소음 등을 고려해 도심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진다. 하지만 인근 지역 도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지자체들이 너도나도 공항을 유치하려는 이유도 막대한 경제적 파급 효과를 기대하고 있어서다. 공항은 자연의 작품인 바다나 강과는 달리 사람의 의지가 개입한 ‘인작(人作)’이다. 따라서 공항은 사람이 땅의 기운을 개조해 만든 최고의 인위적 명당이라고 할 수 있다. ● 용, 기러기, 태양 등 담은 지명, 예언된 공항 터 공항은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고 국가 안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중앙정부 차원에서 입지를 정하고, 건설하고, 관리한다. 특히 입지 선정 과정에서 경제적 환경적 교통적인 요소 등을 두루 따지게 된다. 그렇게 복잡하고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선정된 국내 공항들을 보면 대개 땅 이름에서 공통점이 발견된다. 대체로 예전부터 하늘(天), 날짐승(鳥), 움직임(陽), 흐르는 물(水) 등의 뜻을 지닌 마을이름을 사용해오던 곳이다. 이런 지명과 무관한 곳에 세워진 공항은 아쉽게도 쇠퇴하거나 적자에 허덕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국내 최초 공항은 1916년 일제가 군용 비행장으로 조성한 서울 여의도공항이다. 하지만 종합적인 의미에서 제대로 된 공항을 고른다면 김포공항이 첫손에 꼽힌다. 1939년 너른 평야지대에 3개의 활주로를 갖춘 비행장으로 시작한 김포공항은 광복 후인 1958년 국제공항으로 지정됐다. 이후 2001년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할 때까지 대한민국 하늘길의 관문으로서 맹활약했다. 김포공항 일대의 옛 지명을 보면 이곳이 하늘 물류기지로 바뀔 것임을 선조들이 예견한 것처럼 보인다. 고려 때부터 이곳은 양천(陽川)으로 불렸다. 풍수에서는 움직이지 않는 산을 음(陰)으로, 움직이는 물은 양(陽)으로 구분한다. 양천은 움직이는 ‘양’에다 유동성을 뜻하는 ‘천(川)’까지 더했으니, 이동과 물류의 극대화가 이뤄지는 곳임을 암시한 셈이다. 땅 이름이 공항 터로 부합한다는 의미다. 강원도 양양(襄陽)군 손양(巽陽; 양의 동남방)면의 양양공항도 마찬가지다. 한자어대로 하면 ‘양(陽)이 오르는(襄)’ 곳, 즉 ‘해가 솟아오르는 곳’이다. 여기서 조금 확대하면 앞서 살핀 대로 비행기가 뜨는 곳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한국땅이름학회 배우리 회장은 “양양공항이 들어선 손양면 학포리(鶴浦里)는 ‘학이 날아드는 포구’라는 뜻으로 비행기(학)가 들어설 곳임을 예견한 지명”이라고 해석할 정도다. 김포공항이나 양양공항보다 더 노골적으로 공항이 들어설 곳임을 암시하는 터가 있다. 바로 인천국제공항이다. 인천국제공항 부지는 영종도(永宗島)와 용유도(龍遊島) 2개 섬 사이를 흙으로 메워 만들었다. 과거 소금을 굽던 평범한 섬 마을이 졸지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제공항으로 변신한 것이다. 공항 조성 당시 풍수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영종도는 천혜의 공항터’라는 얘기가 나돌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거론됐는데 지명(地名)도 포함됐다. 영종도는 고려 때 제비가 많이 살아 자연도(紫燕島·제비섬)로 불리다가 조선 효종 때인 1653년 ‘긴(永) 마루(宗)’라는 뜻의 영종도로 개명됐다. 두 이름에서 비행기(제비)와 활주로(긴마루)를 연상할 수 있다. 영종도와 이웃한 용유도는 말 그대로 ‘용이 노니는 섬’이다. 항공기가 없던 시절 날아다니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비유물은 용이다. 또 비행기 배기가스 분출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염은 용이 입에서 불을 토해내는 모습과 닮았다. 결국 용유도는 비행기가 이착륙할 운명을 타고난 지역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1978년 공군비행장으로 시작해 1990년대 말 국제공항으로 변신한 청주공항도 마찬가지 이유로 화제가 됐다. 당시 언론에서는 청주공항 인근에 비상리(飛上里·청원구 내수읍)와 비하리(飛下里·청주시 강서동)라는 마을이 있어, 비행기가 뜨고 지는 곳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고 보도했다. 청주공항이 들어선 지역은 인근에 문필봉, 삼두봉 등의 산세가 날아가는 기러기를 닮았다고 해서 비홍리(飛鴻里)로 불리던 곳이다. 그러다 일제 강점기 때 비홍 지역 위쪽을 비상리, 중간을 비중리, 아래쪽을 비하리로 불리게 됐다. 날아가는 기러기를 비행기와 연관시켜 해석하는 것 역시 지명풍수(地名風水)로 볼 수 있다. ● 이용률 낮은 무안 원주 군산 등 공항과 지명 인연 작아 현재 국내에는 8개의 국제공항을 포함해 모두 15개의 공항이 있다. 이중 흑자를 기록하는 곳은 인천 김포 김해 제주 공항 정도다. 나머지 공항은 만성 적자에 허덕인다. 특히 원주 사천 군산 포항 무안 공항 등은 올 들어 지난 8월말까지 공항 활주로 이용률이 1%를 넘지 못했다.(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병훈 의원실) 특히 무안공항은 상황이 심각하다. 국제공항 가운데 최근 5년간 당기 손익이 최하위(-618억 원) 수준인데다 올해엔 코로나19까지 겹쳐 개점휴업 상태다. 무안공항은 일제 때 안개가 적게 끼고 산이 별로 없다는 점 등 때문에 군용 비행장으로 선정됐다가 김대중 정부 시절 국제공항으로 바뀌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무안공항이 위치한 무안군 망운면이 비행장과는 무관한 지명이라는 점이다. 이밖에 원주 군산 등도 지명에서 공항과의 인연을 찾기가 쉽지 않다. 땅의 이름만으로 공항의 적정성을 따지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명에는 땅의 형상과 토양의 특징, 역사적인 전통과 풍습, 환경과 기후, 교통과 교역 등 여러 요소를 고려한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 있기 마련이다. 특히 오래된 지명일수록 그런 경우가 많다. 따라서 마냥 무시할 일만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부산 강서구에 소속된 가덕도는 어떨까. 부산과 거제도를 이어주는 길목의 섬 가덕도는 ‘더덕이 많이 나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아쉽게도 전형적인 어촌인 이곳에서 공항이나 비행기를 연상시키는 지명의 역사를 찾긴 어렵다. 현재 가덕도는 건설비용, 이용 인구 등 경제성과 관련해 공항 부지로서 적합한지 논란이 적잖다. 가덕도가 공항으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궁합’을 맞추기 위해 지명 비보(裨補·모자라는 것을 보태 채움)를 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네모 반듯하게 조성된 도로 양쪽으로 고급 고층 건물과 아파트 단지가 즐비하게 늘어선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마곡동, 가양동 일대). 이 달 중순 찬바람이 몸에 스며드는 무렵 이곳을 찾았더니 옛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10년 전만 해도 이곳은 서울 변두리에 있던 평범한 논밭 지대에 지나지 않았다. 서울시가 2005년 ‘서울의 경쟁력 회복, 세계도시로의 도약’이라는 비전을 걸고 이 일대 366만6644㎡(약 100만 평)의 땅을 도시개발지구로 지정한 이후 그야말로 ‘강산이 변한’ 것이다. 미니 신도시급에 해당하는 마곡지구는 단순히 생활 거주지를 제공하는 택지지구로만 계획된 게 아니다. 지구내 조성된 마곡산업단지는 한국의 미래 먹거리를 책임질 첨단 연구개발(R&D) 단지가 들어서 있다. LG, 롯데, 이랜드, S-Oil, 넥센, 코오롱, 대웅제약 등 민간 기업들이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2022년까지 모두 150여 개 기업이 입주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마곡지구는 서울식물원, 공원, 전시 및 문화 공연 시설 조성 등 자연과 문화가 접목된 그린시티를 꿈꾸고 있다. 특히 마곡지구의 랜드마크로 꼽히는 서울식물원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선을 보이는 보타닉공원(공원과 식물원의 결합)으로 2019년 5월에 개장했다. 축구장 70개 규모(50만4000㎡)에 이르는 이곳은 열린숲, 호수원, 습지원, 주제원 등 4개 구역으로 구성돼 사람들이 즐겨찾는 명소로 부상했다. 서울시는 애초에 마곡단지를 개발하면서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염두에 두고, 서울판 실리콘밸리인 ‘마곡밸리’를 구상했다고 한다. 평지돌출 형 명당 마곡산업단지 경제의 젖줄인 기업들이 들어서면 당연히 인구 유입과 주거지, 상업지구의 발달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이는 도시가 발달 혹은 진화한다는 뜻이고, 땅으로 풀이하자면 지운(地運;땅의 운세)이 발동된다는 의미다. 역사적으로 마곡지구는 사람의 손을 거의 타지 않았던 곳이다. 산업단지가 들어선 마곡동(麻谷洞)은 한자 이름 그대로 삼을 많이 심은 골짜기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 정도다. 이 일대에서 그나마 사람이 모여 소도시(양천현)를 이룬 곳은 마곡지구 중심부에서 다소 떨어진 궁산(74.6m) 아랫자락의 평지였다. 이곳에는 지금도 조선시대 양천현 현령이 머물던 관아 터, 지방 공립학교인 향교, 공무를 수행하는 관리들이 묵던 객사 등의 자취가 남아 있다. 궁산자락에 도시가 들어선 것도 군사적 이유가 컸다. 동쪽에서 흘러오는 한강과 남쪽에서 올라온 안양천이 합류되는 지점에서 솟아난 궁산은 한강 건너편으로 마주 보이는 덕양산의 행주산성과 더불어 한강 하구를 경계하는 중요 전략지역이었다. 이 산 정상부에는 삼국시대에 조성한 산성(양천고성지)의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는 행주대첩의 주인공인 권율 장군이 수원에서 행주산성으로 들어가기 전 이곳에 머무르며 왜군을 물리칠 작전을 짰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그러던 땅이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최첨단 스마트 도시로 변신하고 있다. 풍수의 지기쇠왕설(地氣衰旺說)에 따라 사람의 손길과 발길이 닿으면서 지기가 왕(旺)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마곡지구는 지형과 지세를 살펴 명당 여부를 판별하는 전통풍수적 시각에서 볼 때는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기가 어렵다. 무엇보다도 땅의 배경, 즉 뒷심이 되어주는 주산(主山)이 마땅찮다. 조선시대 양천현의 주산으로 인정된 궁산은 나지막한 야산에 불과하고, 마곡지구 남쪽의 수명산 역시 해발 72m에 불과해 마곡지구의 수호산 역할을 하기가 어렵다. 동쪽의 검덕산이나 서쪽의 개화산도 위치상 주산으로 인정되기 힘들다. 그러니 마곡지구는 어느 산에 기대지 못한 채, 평지에서 자체적으로 돌출한 명당을 이룬 모양새다. 그런데 마곡산업단지를 동서남북으로 둘러싸고 있는 네 개 산을 동서축(검덕산-개화산)과 남북축(수명산-궁산)으로 선을 그어보면 교차해 만나는 지점이 있다. 바로 LG 계열 연구소들이 입주한 ‘LG사이언스파크’와 ‘코오롱 one&only타워’가 들어선 곳이다. 이 지점은 위치상 4개 산의 중심점인데, 이곳을 중심으로 지기가 자기장처럼 넓게 펼쳐져 있다. 바로 이 기운이 마곡산업단지의 미래를 이끌어갈 주 에너지원이 될 것이라고 본다. 연구와 예술에 좋은 터마곡산업단지의 지기는 어떤 속성이 강할까. 풍수에서는 기를 크게 5가지로 분류한다. 산을 그 생김새에 따라 목형산·화형산·토형산·금형산·수형산 등 오행(五行) 산으로 분류하거나 땅의 기운을 오행으로 구분하는 방식이다. 이런 분류법에 따르면 마곡산업단지의 땅 기운은 ‘목기(木氣)’와 ‘화기(火氣)’가 강한 터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목기는 교육, 연구, 성장 등에 유리한 기운이고, 화기는 예술, 문화, 창조 활동에 도움이 되는 기운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마곡산업단지는 기업체 연구소가 들어서면 큰 연구 업적을 낼 수 있고, 창의성을 펼치는 공간으로서도 딱 들어맞는 터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이 터에서 가장 큰 혜택을 받고 있는 기업은 LG그룹이다. LG는 2018년 17만여㎡의 부지에 LG전자 등 8개 그룹 계열사의 연구기능을 모은 ‘LG사이언스파크’ 문을 열었다. LG 주력기업의 연구단지들이 대부분에 여기에 집합돼 시너지 효과도 기대된다. 다음으로 롯데그룹과 코오롱그룹을 꼽을 수 있다. 롯데그룹은 2017년 영등포구 양평동에 있던 중앙연구소를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규모를 5배 키운 ‘롯데 R&D센터’를 개설했다. 코오롱그룹의 연구개발센터인 ‘코오롱원앤온리(One&Only)타워’도 이곳에 들어섰는데, 건물 유리 외벽에 섬유 직조패턴을 형상화한 패널을 전면에 두른 독특한 형태로 주위의 시선을 끌고 있다. 마곡단지에 아쉬운 점은 있다. 주변 산이 낮다보니 한강 변의 바람을 막아주는 장치가 없다. 뒷 배경이 부족하다보니 등받이 없는 의자처럼 안정감을 기대하기 힘들고, 특히 겨울에는 찬바람을 막아주지 못해 황량함을 느낄 수 있다. 또 마곡지구 인근의 김포국제공항은 비행기의 잦은 이착륙으로 인해 주변에 불편감을 줄 수 있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거리 곳곳에 나무 숲 같은 방풍림을 조성하는 게 필요하다. 그러나 마곡지구는 이런 약점을 충분히 보완하고도 남을 만큼 미래적 가치가 크다. 육해공의 교통길이 뚫려 있는 이곳은 기업의 성장에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상전벽해가 된 마곡 땅은 지운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는 모범적 사례라는 점에서 마곡의 미래를 기대해본다.안영배 논설위원ojong@donga.com}
경복궁을 상징하는 건물인 근정전은 온통 불그스름한 자주색이다. 건물을 지탱하는 내외부의 기둥, 왕이 앉는 용상 주변이 모두 붉은 색이다. 반면 근정전 내 넓은 바닥은 한결같이 거무스름한 빛깔을 띠고 있다. 흙을 네모반듯하게 구운 방전(方塼)을 깔아놓은 것으로, 조선왕실을 대표하는 근정전에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여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는 오해다.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근정전은 하늘의 으뜸 별자리인 자미원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전각이다. 근정전을 오르는 돌계단의 소맷돌에 새겨진 구름무늬부터 근정전이 구름 위의 하늘 궁전임을 암시한다. 근정전의 돌계단 사방에 동쪽하늘의 별자리를 상징하는 청룡, 서쪽 하늘의 별자리 백호, 남쪽 하늘의 별자리 주작, 북쪽 하늘의 별자리 현무 조각상을 배치한 것도 같은 이유다. 근정전 내부를 들여다보면 바닥이 마치 어둑한 허공처럼 보인다. 근정전 돌바닥이 북극성과 북두칠성이 있는 자미원 공간임을 거무스름한 색(玄)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공간에 세워진 불그스름한 나무기둥과 용상은 자미원(紫薇垣)의 이름 그대로 자색(紫色)을 상징한다. 중국 명나라 때 건설된 베이징의 자금성도 자미원을 모방해 자색이 주류를 이룬다. 한반도의 통치자들은 오래전부터 천손(天孫)이라는 의식이 강했다. 삼국과 고려에서도 당시 왕들은 자색 옷을 입고, 자신이 하늘임금의 대행자임을 알렸다. 자색을 임금의 색깔로 표현한 것은 서양도 마찬가지다. 로마제국 시절 자색은 ‘임페리얼 퍼플(imperial purple, 황제 자주)’로 불리며 오로지 황실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동로마제국 황제의 자식들은 대대로 콘스탄티누스 황궁의 자주색 건물 방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고귀한 태생(born in the purple)’으로 불리기도 했다.● 근정전 일월오봉도에 나타난 메시지근정전을 자미궁궐로 보면 전각 내 많은 구조물의 숨은 뜻이 드러난다. 근정전 용상 바로 뒤에 펼쳐진 ‘일월오봉도(일월오악도)’가 대표적이다. 하늘의 자미원에 사는 천제(天帝)는 북두칠성이라는 수레를 타고 사방에 포진한 28수 별자리를 살피고 다스린다. 이를 칠정(七政)이라고 한다. 칠정은 대체로 28수를 관할하는 북두칠성을 상징하며, 태양계의 해와 달과 오행성(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운행을 가리키기도 한다. 천제의 지상 대행자인 임금은 우주의 운행질서인 칠정을 본받아 올바른 정치를 펼쳐야 한다. 그게 일월오봉도의 숨겨진 뜻이다. 실제로 일월오봉도에서 보이는 청록색 다섯 봉우리의 산 및 해와 달을 합치면 칠정을 의미하는 숫자 7이 나온다. 풍수에서는 산을 성봉(星峰)이라고 보고 별의 화신으로 여기는데, 일월오봉이 7개의 별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일월오봉을 자미원의 북두칠성으로 이해하는 이도 있고, 일월(日月)과 오행성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혹은 자미원의 임금 별자리(오제좌) 뒤를 병풍처럼 가려주는 화개성(華蓋星·7개 별로 구성)으로 보는 이도 있다. 어느 것이든 일월오봉도가 하늘의 별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근정전 천정에는 황제나 임금을 상징하는 황금색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희롱하는 그림(이룡희주·二龍戱珠)이 새겨져 있다. 이 역시 우주를 표현한 것이다. 용의 발톱이 그 단서다. 근정전의 용 두 마리는 발마다 7개의 발톱을 가지고 있어 ‘(七爪龍)’으로 불린다. 용 두 마리의 발톱은 모두 합쳐 28개(4X7)다. 바로 조선의 왕(용)이 천하(하늘의 28수 별자리)를 통치하고, 조선이 천자국임을 보여주는 ‘비표’인 셈이다. 근정전을 지나쳐 북쪽으로 직진하면 왕이 평상시 머물면서 정사를 돌보는 사정전과 왕의 잠자리인 강녕전이 있고, 강녕전 바로 뒤에 왕비의 처소인 교태전이 있다. 자미원 궁궐 중에서도 가장 고갱이가 교태전인데, 우주의 중심에 해당하는 별인 북극성을 상징한다. 왕비의 처소를 중심에 둔 것에서 고대인들의 독특한 하늘 세계관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북극성이 뭇 생명을 주관하는 삼신(혹은 삼신할미), 마고신, 북신묘견 등 여성을 상징한다고 여긴다. 풍수적 관점에서도 경복궁에서 최고의 명당 혈자리는 교태전이다. 경복궁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에 설치된 영제교 다리 밑으로 흐르는 물도 경복궁이 자미원의 궁궐임을 보여준다. 이 물 도랑은 인왕산 자락의 물과 궁궐 북쪽의 물을 끌어들여 궁궐 남쪽을 동서로 흐른 뒤 동십자각 옆 수구(水口)로 빠져나가도록 설계돼 있다고 한다. 이 물도랑을 어구(御溝)라 부른다. 고전 풍수서 ‘인자수지’는 “자미원 가운데로 물이 지나가고 있는데 이름을 어구라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어구가 있는 곳이 자미원이라는 뜻이다.● 태미원은 세종대로, 천시원은 종로와 남대문길한양에 도읍지를 정한 조선왕조는 경복궁과 4대문 안쪽 즉 한양도성 내부를 자미원으로 설정하고, 그 외곽으로 천시원(광진구 일대)과 태미원(은평구 일대)을 배치함으로써 서울이 3원을 갖춘 하늘도시라는 점을 드러냈다. 조선왕실은 또 한양도성 내 자미원 영역에도 3원을 뒀다. 먼저 임금과 그 가족이 사는 경복궁은 자미원 궁궐에 해당한다. 자미원 하단의 태미원은 궁궐의 남쪽에 해당한다. 경복궁 남쪽 정면의 육조거리, 지금의 세종대로 일대가 당시 행정을 집행하는 정부기관이 들어선 태미원 영역이다. 태미원은 하늘나라의 정부종합청사가 있는 곳이다. 이론과 실제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문제는 백성들의 경제 활동지인 천시원 자리였다. 유교적 배치법에는 ‘궁궐 뒤쪽에는 시장(後市)’이 들어서야 한다. 하지만 경복궁 뒤가 바로 북악산으로 이어져 시장을 조성할 공간이 없다. 종로와 청계천 일대에 시전과 육의전 등 시장 구역이 만들어진 이유다. 하지만 천시원 자리 역시 천문도상의 3원 배치법에 따라 조성됐다. 천문도에서 천시원은 자미원의 왼쪽에 붙어 있는데, 이것이 지상으로 투영되면 자미원 오른쪽에 해당된다. 바로 종로와 청계천 일대가 경복궁(자미원)의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 태종 때 만들어진 한양의 대표적인 상가인 운종가(雲從街)는 조선시대 경제의 핏줄 같은 역할을 했다. 사람과 재화가 구름같이 몰린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 운종가는 T자형으로 설계됐다. 종로 1가부터 동대문으로 이어지는 동서방향의 종로 거리와 종로 2가의 종루(종각)에서 명동을 거쳐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남북방향의 도로가 핵심구역이었다. 상인들은 길 좌우로 기다랗게 시전행랑을 짓고, 경제활동을 했다. 종로와 명동 일대는 600년 넘는 현재에도 서울의 경제 핵심지로서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이 일대는 풍수적으로 보아도 재물 기운이 왕성한 터다. 하늘의 이치와 땅의 지리가 이처럼 맞아떨어지는 곳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지상에 최고의 천문도시를 조성한 자미궁궐인 경복궁은 아직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지 못했다. 경복궁보다 늦게 지어진 중국의 자금성은 이미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경복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지 못한 데에는 자금성에 비해 규모가 작고 자금성과 유사한 건축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 경복궁의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우리의 책임이 크다. 경복궁은 평평한 평지에다가 인공으로 상징 조작한 자금성과는 달리 산세와 지형을 최대한 살려 진정한 하늘 궁전의 세계를 지상에 펼쳐놓은 자연과 인간의 위대한 합작품이다.안영배 논설위원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