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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회에 우리 기업들의 탈중(脫中)이 적당히 이뤄지는 건 오히려 잘된 거라고 본다.”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법 시행을 계기로 기업들의 중국 투자가 제약을 받고 있는 데 대해 최근 만난 고위 경제관료는 이런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는 “그동안 대외경제에서 대중(對中)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았는데 이제는 정부가 나서지 않아도 기업들이 알아서 중국 리스크를 줄일 것”이라고 했다. 사실 중국 경제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위험하다는 경고는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그런데도 이제 와서야 미국의 중국 견제에 기대 리스크를 해소하려는 건 손 안 대고 코 풀려는 행태 아닌가. 사실 그동안 정부와 산업계는 이른바 ‘중국 특수(特需)’에 취해 그 이면의 위험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달 14일 대한상의 포럼에서 “국내 산업이 지난 10년 동안 중국 특수에 중독돼 구조조정 기간을 놓쳤다”고 지적했다. 중국의 저임금 특수를 누리면서 국내 제조업 비중이 유지되는 등 산업 패러다임의 변화가 늦어졌다는 것이다. 이 총재는 “최근 대중 수출이 줄어드는 것도 단순히 미중 갈등 때문이 아니라 이 같은 구조적 원인이 숨어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중국 특수 중독은 이미 우리 경제에 작지 않은 부담이 되고 있다. 올 상반기(1∼6월) 대중 수출이 26% 급감하면서 올 들어 지난달 20일까지 무역적자가 약 278억 달러(약 35조4172억 원)나 쌓였다. 중국의 경기침체가 심화되면서 주력 품목인 반도체 등의 대중 수출이 급감한 데 따른 것이다. 최근 한은 보고서(‘최근 우리 수출의 특징 및 시사점’)에 따르면 올 1∼4월 각국의 수출 증가율을 비교한 결과 한국, 대만, 베트남 등 대중 의존도가 높은 나라일수록 수출이 부진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중 갈등이 심화되는 국면에서 대중 수출 의존은 앞으로 더 큰 부담이 될 것이다. 국가 간 안보 갈등이 커지는 국면에서 경제적 상호 의존은 도리어 상대국에 취약점이 될 수 있다. 중국의 사드 경제 보복이 대표적이다. 7년째 중국을 최대 교역국으로 두고 있는 독일은 올 6월 국가안보전략을 발표하면서 원자재나 에너지 공급 등에서 대중 의존을 줄이고, 공급처를 다변화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하물며 중국과 영공·영해를 맞대고 있고 73년 전 전쟁까지 치른 한국의 대중 리스크는 지구상의 그 어떤 나라보다 크다. 그럼에도 한국의 높은 대중 의존도는 여전하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중국산 요소 수입 비율은 2021년 71.2%에서 지난해 66.5%로 떨어졌으나 올 상반기 89.3%로 도리어 높아졌다. 2021년 10월 중국이 요소 수출을 막아 차량용 요소수 품귀로 ‘물류 대란’이 벌어졌는데도 중국 수입 의존은 오히려 확대된 것이다. 중국산 요소수의 가격 대비 품질이 우수하다는 게 이유다. 이제 중국은 희토류에 이어 갈륨, 게르마늄 등 여타 희소금속에 대한 수출 통제도 강화하고 있다. 중국의 일방적인 핵심광물 통제에 대응할 수 있도록 관련국과의 네트워크 구축이 시급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건 눈앞의 이익에만 휘둘리지 않고, 장기적인 차원에서 중국 리스크를 줄이겠다는 국가적 의지다. 김상운 경제부 차장 sukim@donga.com}
“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임천일 외무성 부상은 이번에 로씨야(러시아의 북한식 표기)에서 발생한 무장반란 사건이 로씨야 인민의 지향과 의지에 맞게 순조롭게 평정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로씨야 지도부가 내리는 임의의 선택과 결정도 강력히 지지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6월 25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전날(6월 24일) 오전 6시 59분 러시아 용병기업 바그너그룹의 로스토프나노두 군사령부 점령 발표로 러시아 연방에 대한 첫 쿠데타 시도가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로부터 3시간 후인 오전 10시 “반역자를 처벌하겠다”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가 발표된 바로 다음 날 북한은 신속히 푸틴 지지를 선언했죠.세계 자유진영이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가운데 북한은 친러 국가들 중 처음으로 이 같은 성명을 냈습니다. 이를 두고 바그너그룹을 푸틴의 친위 세력으로 보고 무기를 지원한 북한이 미묘한 상황에 봉착하자 푸틴 지지를 재빨리 밝힌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일각에서는 일인 독재체제인 양국을 비교하면서 북한의 무장 반란 가능성을 거론하기도 했습니다.역사를 돌이켜보면 북한은 건국 초기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를 이식하면서 군 지휘체계도 모방했습니다. 더구나 이번 러시아 반란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흥미롭게도 푸틴과 북한 수령들(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군 운영방식이나 용인술에서 흡사한 요소들이 발견됩니다.푸틴 반란 이면에는 ‘분할통치’와 ‘충성경쟁’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6월 24일자 ‘푸틴의 요리사가 반역을 서빙했다(‘He went nuts’: howPutin’s caterer served a dish of high treason)’ 제목의 기사에서 “푸틴이 정규군 대신 사병 조직을 만드는 바람에 위기를 자초했다”는 러시아군 관계자의 코멘트를 실었습니다. 푸틴이 총리 재직 시절 즐겨 찾던 요리점 주인 출신으로 이른바 올리가르히(자본주의 이행 과정에서 거액을 모은 신흥 재벌집단)인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2014년 바그너그룹을 세웠습니다. 그해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과정에서 국제여론 등을 의식해 사병 집단을 대리로 내세우기 위한 목적이었죠. 이후 바그너그룹은 시리아와 모잠비크에서도 러시아군 대신 활동을 벌입니다.바그너그룹은 푸틴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막대한 국방예산을 지원 받으면서 점차 러시아 군부와 경쟁을 벌이게 됩니다. 수익성 높은 군수 계약을 놓고도 양측이 신경전을 벌였다는 게 서방 정보기관의 전언입니다.전차부터 헬기까지 사병조직치고는 정규군 이상의 강력한 무기를 확보한 바그너그룹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둡니다. 이로 인해 전공(戰功)을 두고 러시아 군부와 한층 치열한 갈등을 벌이게 되죠. 우크라이나의 강력한 반격에 맞서 하나로 똘똘 뭉쳐도 모자란 판국에 아군끼리 적전 분열에 이른 겁니다. 이번 전쟁에서 러시아가 고전하게 된 원인을 정규군-용병 부대의 이원적 전투 체제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그렇다면 푸틴은 이런 비효율에도 불구하고 바그너그룹을 만들고 여기에 힘을 실어준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결과적으로 강력해진 바그너그룹의 반란에 직면했다는 점에서) 자신의 절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포석이었습니다.서방 분석가들에 따르면 푸틴은 바그너그룹을 통해 막강한 러시아 군부의 권력을 견제하고자 했습니다. 국방예산의 상당 부분을 바그너그룹에 몰아줘 군부와 경쟁시키고, 자신은 일종의 중재자 역할을 하면서 권력의 누수를 막으려고 한 것이죠. 군부에 대해 일종의 분할 통치(divide and rule) 전략을 구사한 겁니다.푸틴은 자신에 대한 충성심은 높지만 혼자서는 권력을 추구할 수 없다고 판단한 프리고진을 바그너그룹 수장에 앉힙니다. 9년간 옥살이를 한 전과자 출신의 요식업자가 감히 자신 만의 권력을 추구할 수는 없을 거라고 본 거죠. 하지만 이것은 푸틴의 오판이었습니다.푸틴은 프리고진에 대해 두 가지의 결정적 오판을 저지른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 프리고진은 푸틴의 꽁무니만 조용히 쫓는 캐릭터가 아니었죠.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 기간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 발레리 게라시모프 총참모장(한국의 합참의장)을 대놓고 비난하며 자신의 권력을 추구하는 행태를 보입니다.그리고 두번째는 텔레그램 등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여론을 주도한 프리고진의 정치력입니다. 우크라이나 격전지를 촬영한 동영상에 자신의 메시지를 담은 그의 SNS 홍보는 큰 위력을 발휘해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팬덤을 형성하기에 이릅니다. 이는 프리고진이 모스크바로 진군하면서 세를 키우면 승산이 있다고 잘못 판단한 밑바탕이 되었죠.푸틴과 닮은 북한의 군 지휘체계북한은 김일성 집권 이래 군령기관(작전권 행사)인 총참모부(한국의 합참에 해당)와 군정기관(인사, 군수 등의 조직권 행사)인 총정치국(조선로동당의 지도를 군에 관철하는 기관)의 이원적 지휘체계가 확립돼 있습니다(이하 장달중 등 <현대 북한학 강의> (사회평론, 2013) 참고)국방부가 군령 및 군정권을 일괄적으로 갖고 이를 합참 등에 위임하는 우리와 다른 시스템이죠. 이는 조선로동당을 중심으로 일인 수령 독재를 실시하는 북한의 통치구조에서 기인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군령, 군정권이 나뉜 게 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실질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군정 기능을 담당한 총정치국이 당의 입장을 내세워 군령권에도 깊숙이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북한 군부에서 군사 간부와 정치 간부 사이의 갈등은 일종의 고질병이 된지 오래죠.그 역사적 연원을 자세히 들여다보려면 시계를 1960년대로 돌려봐야합니다.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통해 1차적으로 연안파(해방 이전 중국에서 활동한 공산주의자)와 소련파를 제거한 김일성은 일인 독재체제의 정점을 찍기 위해 유일하게 남은 갑산파 숙청에 나섭니다(1967년 조선로동당 제15차 전원회의 갑산파 숙청 사건)이듬해인 1968년에는 민족보위상, 총참모장 등 군 수뇌부도 대거 숙청합니다. 그러곤 1969년 각급 부대의 작전명령서에 군 지휘관과 함께 정치위원의 서명을 받도록 제도를 바꿉니다. 야전 지휘관의 판단만으로 군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자신을 정점으로 한 조선로동당의 군부 통제를 대폭 강화한 겁니다. 김일성은 “중대장이 맏형이라면 정치 지도원은 맏누이와 같다”고 했죠.이에 따라 북한군은 김정일 시절에는 무력부(한국의 국방부 격)와 총정치국, 총참모부가 김정일과 국방위원회에 각자 보고하는 ‘3중 통제체제’를 갖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보위사령부(한국의 기무사 격)와 국가안전보위부(국가정보원 격), 인민보안성(경찰 격)에 의한 군부 통제도 이뤄졌죠.마치 푸틴이 바그너그룹으로 군부를 견제한 것처럼, 북한도 수령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반란을 막을 수 있도록 인민군을 분할 통치한 겁니다. 선군(先軍) 정치 등을 통해 거대한 병영 국가가 돼 버린 북한에서 정권 안보의 위협이 될 수 있는 군부를 틀어쥐려는 의도입니다. 푸틴이 요식업자 프리고진을 군부 견제세력으로 활용한 것처럼, 김정일도 군내 서열을 무시하고 충성도에 따라 측근에 힘을 실어주는 방식의 용인술을 구사했습니다.김정은 세습 과정에서 충성경쟁과 장성택 숙청사실 러시아나 북한과 같은 독재체제에서 충성경쟁은 정권교체기(북한의 경우 권력세습기)에 한층 격화됩니다(이하 북한연구학회 <김정은 시대의 정치와 외교> (한울아카데미, 2014) 참고) 독재국가에서 권력승계는 기존 통치연합 내 엘리트간 권력과 이권이 대규모로 재편되는 과정으로, 이를 둘러싼 경쟁과 갈등이 치열해지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경우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권력이 세습될 당시 군부에 속한 막대한 이권, 특히 와크(무역 특권)를 놓고 장성택 세력과 군부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양상을 보입니다.시계를 김정일 생전인 2008년로 돌려볼까요. 그해 8월 김정일은 뇌경색에 빠져 죽음 직전까지 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이전에 군부에서 제기했으나 김정일에 의해 중단된 후계 논의가 재개되고, 이듬해 1월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됩니다.김정일은 자신이 죽고 나서 후계체제를 안착시킬 측근으로 매제인 장성택을 선택하죠.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당시 선군 체제로 위기를 돌파하면서 몸집이 커진 군부를 장성택을 세워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겁니다. 이후 선군시대를 이끈 3인방 조명록 총정치국장, 김일철 인민무력부장, 김영춘 총참모장이 배제되고 리영호 총참모장, 김영철 총정치국장 등으로 대체됩니다. 이어 군부의 대표적인 외화벌이 업체인 승리무역합영회사를 장성택 휘하의 조선로동당 행정부로 편입합니다. 그 외에도 군부의 각종 이권사업을 빼앗죠.하지만 군부도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이후 수령에 오른 김정은은 크게 확대된 장성택 세력을 의심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지배연합 내 엘리트들 사이의 힘의 균형을 끊임없이 유지해야하는 수령 독재체제의 기본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한 거죠.이런 흐름을 군부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군부와 당 조직지도부 인사들이 연합한 반(反) 장성택 세력이 2013년 12월 8일 조선로동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장성택을 ‘반당 반혁명 종파행위자’로 낙인 찍고 닷새 뒤 그를 처형합니다. 장성택 처형 이후 행정부는 조직지도부에 흡수되고, 군부의 무역사업 제한 조치는 폐기됩니다. 북한에서 반란 일어날 가능성은앞에서 살펴본 대로 북한 군부를 둘러싼 3중, 6중의 내·외부 감시체제는 전쟁 시 전투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 있지만 쿠데타를 막는 데는 효율적인 구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북한 수령 독재에서는 정권안보(regime security)가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에 우선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군부 이외 다른 엘리트 계층의 반발도 지배연합에서 이권과 권력을 조정해 경쟁을 유발하는 북한의 통치구조상 어려워 보입니다. 김정일~김정은 권력세습기 군부와 장성택 세력 간의 갈등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그렇다면 아래로부터의 반발이나 외부세력의 음모 정도가 남을텐데 주체사상의 유일 지배체제에 세뇌된 북한 인민들이 조직적 저항을 벌이기는 힘든 게 현실입니다. 또 외부에 대해 극도로 폐쇄적인 북한 여건상 외부세력이 침투하기도 어렵습니다.결국 군 지휘체계나 엘리트층에 대한 용인술에서 푸틴과 북한의 수령들은 독재체제 속성상 유사한 점이 많지만, 구성원들을 틀어쥐는 장악력 측면에선 북한이 한 수 위라고 봐야할까요.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각종 문헌 속 역사적 사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려고 합니다.최근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 논란과 관련해 사망한 지 100년이 넘는 근대 중국인이 느닷없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오만 방자한 청나라 말기 외교관의 상징,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입니다. 싱 대사가 “중국의 패배에 베팅하는 이들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한다”며 우리 정부에 사실상 협박성 발언을 한 데 대해 윤 대통령은 비공개 국무회의에서 “싱 대사의 언행이 1880년대 (조선의) 국정을 농단한 위안스카이를 떠올리게 한다는 사람들이 많다”고 일갈했죠.싱하이밍 대사 발언에 이어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티베트 관제 행사 참석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낸 도종환 의원 등이 티베트 라싸에서 열린 ‘티베트 관광문화 국제박람회’에 참석했는데, 이것이 중국 정부의 티베트 점령 정당화에 이용당했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싱하이밍 대사 발언과 티베트 박람회 참석 논란은 개별적인 해프닝이라기보다는 중국 ‘패권주의’ 흐름 안에서 서로 연결돼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럼 하나씩 역사를 통해 그 근거를 살펴보겠습니다.위안스카이 ‘갑질’ 이면에 도사린 ‘중국 패권주의’자 그럼 위안스카이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고, 그가 활동할 당시 중국은 조선에 어떤 의도를 갖고 있었을까요. 시계를 19세기 말 조선으로 돌려보죠.청의 군기대신(軍機大臣)을 거쳐 훗날 중화민국 대총통, 중화제국 황제에까지 오른 위안스카이는 소싯적 학문에는 별 소질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하 구선희 <조선을 근대 식민지로 만들려 했던 중국인, 위안스카이>(역사비평·2009) 참고)수차례 과거에 낙방한 끝에 아버지 지인(우장칭 조선파견군 사령관) 찬스로 어렵사리 관직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장칭의 막료에 불과했던 그에게 출세 길을 열어준 건 실각했던 대원군을 복귀시킨 1882년 임오군란이었습니다.청나라가 군대를 급파해 반란 세력을 제거하는데 참여한 위안스카이는 정5품의 관직을 얻습니다. 이후 그는 조선 주둔군 3000명을 뒷배경으로 온갖 세도를 부렸죠. 본래 조선 궁궐에서는 왕을 제외하곤 누구도 가마를 탈 수 없지만 그는 예외였습니다.정부 주최 연회에선 각국 외교사절과 달리 조선 외아문독판(현 외교부 장관)과 나란히 상석에 앉아 각국 외교관들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싱하이밍 대사가 외교 관례에 맞지 않게 주재국 정부를 거침없이 비판하는 모습과 겹쳐 보입니다)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위안스카이 개인의 오만함에서만 비롯된 행태가 아니라 그 이면에 청 당국의 전략적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조선이 전통적으로 청의 조공국이었음을 내세워 국가주권을 기본으로 하는 근대 국제사회를 향해 조선이 자신의 속국임을 주입시키고자 한 겁니다(2017년 4월 시진핑 주석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양자회담에서 “사실 한국은 과거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을 일으킨 게 연상됩니다)아편전쟁을 계기로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에 놓였던 청이 도리어 조선을 근대 식민지로 만들고자 한 겁니다. 실제로 1882년 8월 23일 청은 조선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면서 ‘조선은 청의 속방(屬邦)’이라는 조항을 넣었죠. 또 조선의 각국 주재 외교관이 청나라 현지 외교관의 지시를 받도록 하는 등 외교권 침탈까지 벌입니다.이런 청 정부의 전략에 따라 위안스카이는 조선 당국을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 흔들기 위한 책략을 획책합니다. 고종 주변 중신들을 친청파로 채우는 동시에 궁궐 내 동정을 자신에게 몰래 알려주는 환관까지 심어 놓았습니다(최근 국가정보원이 중국 정부와 내통한 혐의로 내부 직원을 감찰 중인 사실이 알려졌습니다)이 중 민비 외척세력으로 위안스카이의 비호를 받은 민영준은 1894년 동학란 당시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위안스카이의 뜻에 따라 청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자충수를 두게 됩니다. 이것은 결국 청과 위안스카이의 자충수이기도 했습니다.당시 위안스카이는 청군을 조선에 보내더라도 일본은 병력을 보내지 않을 거라고 짐작했는데 이는 완전한 ‘오판’이었습니다. 청과 전쟁을 벌이기 위한 빌미를 찾고 있던 일본에 청군의 한반도 진입은 일종의 호재가 된 겁니다.위안스카이의 판단과는 달리 일본은 즉시 군대를 한반도에 상륙시키고 경복궁에 침입합니다. 그러고선 1894년 6월 23일 오전 7시 일본 군함이 아산만 앞바다에서 청나라 순양함을 공격하면서 ‘청일전쟁’이 발발합니다. 일본의 한반도 침략 및 식민지배가 본격화되는 서막이 열린 겁니다. 이로서 조선을 자신의 근대 식민지로 만들려고 한 청의 계획은 물거품이 됩니다. 중국은 언제부터 패권주의로 돌변했는가많은 이들이 중국의 패권 추구가 미국과 더불어 G2로 부상하며 ‘중국몽(中國夢)’을 내세운 시진핑 집권 이후 본격화됐다고 말합니다. 그전까지는 덩사오핑의 도광양회(韜光養晦·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 전략에 따라 이런 속내를 감췄다는 것이지요.국제정치학자인 데이비드 강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교수와 같은 일부 학자들은 과거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조공 질서가 안정적으로 운영됐으며, 부상하는 중국과 주변국의 협력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김기혁 전 UC데이비스대 교수는 중국은 이미 19세기 후반 청나라때부터 동아시아에서 팽창주의로 돌변했다고 말합니다(이하 김기혁 <동아시아세계질서의 종막> (글항아리·2022) 참고) 당시 청은 종주국으로서 의례적인 권한만 행사할 뿐, 조공국 내정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동아시아의 조공체제 전통을 어기고 팽창주의를 추구했다는 겁니다(정치·외교적으로 독립한 조공국은 속국과는 다른 개념입니다)앞서 언급했듯 중국이 일본, 러시아에 맞서 조선을 확보하기 위해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조선 내정에 깊이 개입한 게 대표적입니다. 당시 리훙장(李鴻章)은 대원군이 재집권할 경우 청의 가교로 조선이 서양 열강과 체결한 조약을 폐기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습니다.이렇게 되면 서구 열강을 끌어들여 러시아를 견제하고 한반도에서 청의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진다고 본 겁니다. 리훙장은 임오군란 직후 청군 파병과 대원군 납치를 주도하며 수도 베이징과 가까운 한반도는 자국 안보에서 ‘핵심 완충국’이라는 논리를 내세웠습니다(이로부터 68년 후 6·25전쟁 때 주변 참모들의 반대에도 마오쩌둥(毛澤東)이 참전을 결정한 이유와 정확히 같습니다.)티베트는 중국 패권주의의 압축판민주당 의원들의 방문으로 도마에 오른 티베트는 중국 정부의 아킬레스건이자, 안보위협 요소로 꼽힙니다(이하 이동률 <중국 정부의 티베트에 대한 중국화 전략: 현황과 함의> (동북아역사논총 13호·2006) 참고)티베트는 1950년 중국의 침공 이전까지 오랜 독립의 역사를 영위한 데다, 한족(漢族)화 된 나머지 소수민족들과는 달리 종교, 언어 독립성을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티베트인들의 항거는 이미 1959년 3월부터 본격화 돼 중심지인 라싸에서 벌어진 반중 시위로 8만7000명의 사망자(중국 정부 통계 기준)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티베트 불교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 14세가 1000여명의 추종자를 이끌고 인도로 넘어가 1960년 망명정부를 수립하게 되죠.이뿐이 아닙니다. 극좌 공산주의 운동이 극에 달한 1960, 70년대 문화대혁명 때는 티베트 전통문화와 종교에 대한 파괴가 절정에 이릅니다. 한때 6259곳에 달하던 불교 사원이 8곳으로 줄고, 승려 59만 명 중 11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티베트의 비극은 중국의 개혁, 개방이 본격화 된 1980년대에도 이어져 1989년 라싸 사건 30주기 때는 티베트인 400여 명이 사망하고, 3000명이 체포되는 유혈참사가 벌어져서 중국 정부가 처음으로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티베트인들의 강력한 저항에 당황한 중국 정부는 티베트 일대에 경제개발(서부개발)을 통해 티베트인들을 회유하고자 했지만, 정부에 대한 티베트들의 깊은 불신은 여전합니다. 예컨대 정부가 경제개발 명목으로 한족 이주를 적극 장려한데 대해 티베트인들은 내몽골처럼 한족화를 통해 티베트의 전통문화와 언어를 압살하려는 의도로 보고 있습니다.실제로 중국 소수민족 정책의 근간인 ‘중화민족다원일체론(中華民族多元一體論)’은 다민족 국가의 일체화를 지향한다는 뜻으로,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의 한화(漢化)를 추구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한족이 중국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데다 공산당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런데 티베트는 단순히 중국 내정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는데 주목해야 합니다. 코소보 사태와 9.11 테러를 거치면서 중국 정부가 서방 세력이 자신들을 흔드는데 티베트 이슈를 이용한다는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실제로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은 1999년 한 회의석상에서 티베트 문제와 관련해 “서방의 일부 적대세력이 국내 분열주의 세력과 긴밀히 연계해 민족, 종교문제로 중국의 빈틈을 파고 들어 분열시키려는 정치적 음모를 도모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티베트인을 비롯한 55개 중국 내 소수민족 중 하나가 조선족이라는 점에서 티베트 독립은 우리와 완전히 무관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조선족은 티베트와 같은 분리독립 움직임은 없지만,이들이 사는 중국 동북지역은 티베트처럼 상대적으로 낙후된 변경 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티베트 등 소수민족에 대한 중국 정부의 정책은 동포인 조선족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민주당 일부 인사의 주장처럼 70년 전의 남의 일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죠.싱하이밍-티베트 논란 이면엔 중국의 ‘갈라치기’ 전술?싱하이밍 대사의 전랑 외교성 발언과 티베트 참석 논란은 그 1차 대상이 공교롭게도 민주당 인사들이었습니다. 미중갈등에서 비롯된 탈중국이 화두로 떠오른 상황에서 이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요.민주당은 현 정부의 외교정책이 ‘친미 반중’이며 이것이 도리어 국익을 훼손한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한-미-일 삼각동맹 강화에 불만을 품은 중국으로서는 이런 주장을 펴는 민주당을 끌어들여 일종의 ‘갈라치기’ 전술을 시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야로 나뉘어 지지자들이 극렬히 대립하는 한국의 정치환경을 이용해 탈중 노선을 둘러싼 여론전을 벌이고 있는 거죠.‘하나의 중국’에 집착하는 중국이 티베트 관제 행사에 민주당 의원들을 초청한 것도 갈라치기와 무관치 않아 보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중국은 티베트 이슈가 국제화되면서 이를 미국 등 서구세력이 이용하려고 든다는 의심을 갖고 있는데, 미국의 혈맹인 한국 정치인들을 여기에 끌어들인 겁니다.미국 입장에서는 한국 정치인들이 티베트 관제 행사에 동원돼 ‘하나의 중국’을 지지한 것처럼 보인 데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싱하이밍 대사와 티베트 참석 논란은 구한말 위안스카이의 행태처럼 단순한 해프닝이 아닌, ‘중국 패권주의’ 행태의 흐름 속에서 읽어야하지 않을까요.이것이 바로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갖고 있는 한국이 이른바 ‘가치 외교’ 원칙에 따라 싱하이밍 대사 발언 등에 단호하게 대응해야하는 이유입니다. 강경 노선으로 중국과 갈등을 벌이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개인끼리도 결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지켜야하듯, 중국도 한국을 과거의 조공국이 아닌 강력한 자유 민주주의 진영의 일원임을 인식하도록 하자는 겁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각종 문헌 속 역사적 사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려고 합니다.“쌍방은 반도체 산업 공급망에서 대화와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로 동의하였다.(双方一致同意加强半导体产业链供应链领域对话与合作.)”▶5월 27일 중국 상무부 보도자료안덕근 통상교섭본부장과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장이 APEC 장관급 회의에서 만난 뒤 중국 상무부는 이 문장이 들어간 보도자료를 최근 홈페이지에 띄웠습니다. 마치 의도한 듯 보도자료 맨 끝부분에 ‘반도체’ 공급망을 운운했죠(학자들도 진의가 담긴 민감한 내용은 논문 각주나 뒷부분에 넣곤 합니다).그런데 같은 날 한국 산업통상자원부의 보도자료에는 반도체의 ‘반’자도 나오질 않습니다. 다만 ‘중국 측에 교역 원활화와 핵심 원자재, 부품 수급 안정화를 위한 관심과 지원을 요청했다’는 문구 정도가 나오죠. 양자 회담에서 각국이 강조 내지 주장하는 바가 보도자료에서 다르게 표현되는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그런데 이 미묘한 차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각국이 원하는 것 혹은 원치 않는 것(眞意)이 살짝 드러나죠. 다시 말해 이번 한중 장관급 회담에서 첨예한 이슈는 미중 갈등이 격화되고 있는 ‘반도체’ 공급망 이슈였던 겁니다.이 양국 간 입장 차이를 두고 일부 국내 언론들은 미국의 압박으로 다급해진 중국이 반도체 강국 한국과의 협력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과연 그럴까요.중국 속셈은 ‘쐐기 전략’우선 반도체 수급이 다급해졌다면 얼마 전 중국 정부가 미국 반도체 회사 마이크론을 제재한 사실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마이크론의 중국 D램 시장 점유율(2022년 기준)은 14.5%로 삼성전자(43.2%), SK하이닉스(34.6%)에 이어 3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반도체 수급 문제로 자동차 생산에 지장이 초래될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무시할 수 있는 물량은 아닙니다.무엇보다 상무부의 발표 시점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마이크론 제재를 발표(5월 21일)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반도체 공급망’을 언급했죠. 이는 마이크론 제재와 상무부 발표에 어떤 연관성 내지 흐름이 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저는 이것이 중국의 ‘쐐기 전략(wedge strategy)’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쐐기 전략이란 경쟁국과 그 동맹국의 관계를 벌리기 위한 일종의 ‘이간책’을 말합니다. 이번 건의 경우 중국은 마이크론 제재로 부족해질 중국 반도체 물량을 둘러싸고 한미 간 균열점을 만들어 놓았습니다.실제로 미국 정부가 마이크론 물량을 한국 반도체 기업이 채우지 말 것을 한국 정부에 요청한 데 이어 미 의회 고위 인사도 이를 압박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했습니다(마이크 갤러거 미 하원 미중전략경쟁특위 위원장 “미국 상무부는 중국에서활동하는 외국 메모리 반도체 회사에 대한 미국의 수출 허가가 중국의 경제적 강압을 경험한 한국이 마이크론의 빈자리를 채우는 데(backfilling) 사용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이런 상황에서 중국 상무부장이 한국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만나 반도체 공급망에서 협력을 운운한 건 마이크론 물량 공백을 둘러싼, 나아가 미국의 반도체 규제를 둘러싼 한미 간 균열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미국의 반도체 규제 방침과 관련해 한국 정부와 업계가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는 5월 26일 자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도 이런 맥락에서 예사롭지 않죠. WSJ은 미국의 반도체법 시행으로 인해 대만과 더불어 중국에 대규모 사업장을 둔 한국의 타격이 특히 크다고 지적했습니다. 실제로 국책 연구기관인 KDI는 반도체법 등 미국, EU가 추진 중인 공급망 재편 전략으로 인해 한국 경제 성장률이 최대 0.641%포인트 감소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습니다.1972년 미중 데탕트로 시계 돌리면그럼 과연 이런 ‘쐐기 전략’은 역사적으로 효과가 있었을까요. 시계를 1972년 2월로 되돌려 봅시다. 당시 미국 대통령 중 최초로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이 베이징에서 저우언라이 총리를 만나면서 중요한 첩보를 하나 제공합니다. 소련군의 중소 국경 배치 상황에 대한 정보였죠(The NationalSecurity Archives, “Nixon‘s Trip to China”: )그러면서 닉슨은 저우언라이에게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소련은 우리의 서유럽 동맹국들에 맞서 배치한 군대보다 더 많은 병력을 중소 국경에 배치했소.”미중 데탕트는 미소 냉전 국면에서 중소 갈등에 쐐기를 박은 신의 한수로 통합니다. 소련을 고립, 봉쇄하고자 한 미국의 대외전략에서 사회주의 양대 대국인 소련과 중국의 분열은 긴요했죠. 미중 데탕트 설계자로 불리는 헨리 키신저는 중국과의 데탕트가 소련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이런 맥락에서 1972년 방중한 닉슨은 중국의 최대 안보 위협이던 소련 군사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중소 갈등을 이용하려는 행태를 보인 겁니다. 결과적으로 미중 데탕트는 사회주의권에서 소련의 입지를 좁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쐐기 전략’으로 평가됩니다.1960년대 북한으로 시계 돌리면그렇다면 ‘쐐기 전략’은 강대국 간에 말을 움직이는 그레이트 게임에 국한된 걸까요. 역사를 거슬러보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시계를 1960년대로 돌려보죠. 당시 중소 갈등이 국경 분쟁으로까지 격화된 상황에서 북한은 양국 사이에서 일종의 등거리 외교를 펼치며 경제, 외교적 실익을 얻습니다. 이른바 북한식 자주외교라는 명목하에 계산된 줄타기를 한 거죠.북한은 6.25 전쟁 직후부터 1960년까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전체 무상원조의 43.17%와 30.75%를 각각 받아냅니다. 이를 두고 북한이 중소 갈등 구조를 이용해 양국으로부터 경제적 실익을 취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옵니다(박동훈·이성환, “북중관계 변화의 동인과 시진핑 시대의 대북정책”, 『국제정치연구』, 제18집 1호, 2015)때론 김일성이 직접 나서 중국을 겨냥해 소련과의 협력 가능성을 내비치는 압박성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오늘 사회주의 나라들과 공산당, 로동당들은 의견 상이(相異)로 하여 통일 단결을 이룩하지 못하고 있으며 세계혁명에서 마땅히 놀아야 할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형제당, 형제 나라들 사이의 의견 상이가 더는 확대되지 말아야 하며 사회주의 역량과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통일 단결은 하루빨리 실현되어야 합니다.”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제6차 대회에서 한 중앙위원회 사업 총화보고’)미중 데탕트가 한창 무르익던 당시 중국이 미제와 손을 잡는다면 북한도 소련과 손잡을 수 있다는 일종의 협박인 셈입니다. 비록 소국이지만 사회주의체제 내 분열을 이용해 강대국을 쥐고 흔든(꼬리가 몸통을 흔든) 사례죠.중국 ‘쐐기 전략’ 어떻게 대응하나그렇다면 쐐기 전략에 대해선 어떻게 대응하는 게 현명할까요. 동맹국과의 분열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국익을 지킬 수 있는 묘안을 짜내야 할 텐데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상대국의 진의(이간책)를 꿰뚫고 있다면 과잉 반응을 자제하고 사태를 냉정하게 파악할 수는 있죠.그럼 서두의 마이크론 사태로 돌아가 보죠. 중국의 마이크론 제재 이후 공백을 우리 기업들이 채워야 할까요, 말까요? 그런데 바로 이런 질문이야말로 중국이 원하는, 동맹(미국)과의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일도양단의 논리로 흐를 수 있습니다. 공백을 메운다면 미국에, 그렇지 않으면 중국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으니까요.이런 이분법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상황을 다시 살펴볼까요. 전문가들은 반도체 유통구조상 마이크론 물량을 대체한 주문에 대해 이것이 과연 그것인지를 콕 짚어 판별하기는 힘들다고 말합니다. 예컨대 전자제품을 만드는 세트업체인 A사가 삼성전자, 마이크론, 난야 테크놀로지(대만)의 반도체를 각각 주문해 사용한다고 칩시다. A사가 어느 날 마이크론과 난야 부품을 줄이고 삼성 것을 늘리면 이것이 마이크론을 대체한 것인지, 난야를 대체한 것인지 애매모호합니다.이처럼 독점 시장이 아닌 이상 복수 제품들의 조달 현황을 꼬리표를 붙여 일일이 추적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죠. 결국 한국 반도체를 둘러싼 미국, 중국 정부 간 핑퐁 게임은 사실상 ‘레토릭’에 불과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마이크론의 공백을 채우느냐, 마느냐의 이분법 프레임에서 벗어나 상황을 관망하면서 조용히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쐐기’에 걸려들지 않으면서도(한미동맹 유지 및 강화)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 아닐까요.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로 알려진 영원무역 성래은 부회장이 신간 ‘영원한 수업’(은행나무)을 최근 펴냈다. 부친이자 창업자인 성기학 회장의 경영수업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부친으로부터 배운 경영인의 태도와 경영의 본질은 물론 저자가 21년째 기업현장에서 경험한 일화 등을 기록했다.신간에는 대학시절 산악부에서 활동한 창업자가 1970년대 초반 설악산 등반 당시 구스다운 재킷을 입은 일본인과 만난 후 기능성 아웃도어에 관심을 갖게 된 일화가 소개돼 있다. 당시 국내에는 일반 소비자들을 위한 스포츠웨어가 거의 없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한 우물을 파고 있는 성 회장은 “섬유업은 반도체나 IT에 비해 대중의 주목을 덜 받는 사업이다. 사양 산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 꼭 필요한 의식주 중 하나인데 어떻게 사양산업이 되겠는가”라고 되묻는다.이처럼 우직하게 한 길을 걷은 결과 방글라데시, 베트남, 에티오피아 등 국내외에 9만 명의 임직원을 거느린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빠른 속도로 시시각각 변하는 경영상황에서 장기플랜을 세우느라 시간을 쓰기보다 현재에 충실 하는 게 중요하다는 창업자의 경영철학도 곱씹을만하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교보생명은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에 앞장서고 있다. 이 중 환경부와 함께 벌이는 환경교육 분야의 사회공헌 활동이 눈길을 끈다. 교보생명은 지난해 6월 환경부와 ‘지속가능한 미래 실현을 위한 환경교육 협력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보험, 금융, 유통, 식품, 항공, 교통 등 국민 일상생활과 밀접한 업계의 9개 기업이 협약을 맺었는데, 이 중 교보생명은 보험분야 대표 기업으로 참여했다. 교보생명은 환경교육 활성화와 탄소중립 실천 확산에 나서고 있다. 임직원 대상으로 다양한 환경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 기후변화에 따른 위기의식을 일깨우고, 환경보호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겠다는 것. 지금까지 교보생명 임직원 3350명이 환경보호 실천 다짐서약에 참여하고 환경보호 교육을 이수했다. 교보생명은 교육을 이수한 임직원 명의로 총 6700그루의 ‘환경 희망나무’를 베트남 빈곤 농가에 지원했다. 농가의 지속가능한 소득원 마련과 경제적 자립을 돕고 탄소중립을 실천하기 위한 취지다. 생활 속 환경보호 실천을 위해 임직원들이 참여하는 ESG 프로그램도 눈길을 끈다. 교보생명은 지난해 10월 편정범 사장 등 임직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플로깅(조깅을 하면서 쓰레기를 줍는 활동) 캠페인’을 진행했다. 강화도 동막해변을 시작으로 강화도 독립운동길을 걸으며 주변 쓰레기를 줍는 봉사활동을 펼쳤다. 연말 기부 프로그램 ‘굿윌마켓’을 통해서는 임직원들이 의류, 잡화, 도서 등 사용하지 않은 물품 3700점을 기부하는 리사이클링 환경보호 활동을 벌였다. 여기에서 거둔 수익은 장애인 경제자립 지원에 쓰였다. 교보생명은 올 6월 환경의 날과 환경교육 주간을 시작으로 ‘대국민 4대 환경교육 캠페인’을추진할 계획이다. 환경부와 함께 청소년과 일반시민이 참여하는 ‘환경미션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해 운영할 예정이다. 초중고생들이 앱 기반의 참여형 프로그램을 통해 환경보호 미션을 수행하는 프로그램이다. 교보생명은 우수학교를 선정해 시상하고, 나무 기부를 지원한다. 청소년들이 참여하는 ‘환경위기 지구본 만들기 공모전’도 개최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삼성생명은 업무 프로세스 전반에 걸쳐 디지털 혁신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고객 편의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가입, 유지, 지급 경험 개선에 집중했다. 올해도 각종 디지털 채널과 인공지능(AI) 기술 및 데이터를 활용해 고객 경험을 개선하는 데 집중할 계획이다. 삼성생명은 보험 가입과 계약 유지, 보험금 청구 등 각 단계에서 디지털화를 진행하고 있다. 먼저 가입 단계에서는 컨설턴트 상담 후 고객이 직접 계약 체결을 진행할 수 있는 ‘모바일 청약’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이를 통해 고객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보험 가입을 최종 확인하고 진행할 수 있다. 그 결과 태블릿 전자서명을 포함해 모바일 기기를 통한 개인보험 계약이 전체 계약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연간 청약에 필요한 종이 약 3800만 장을 절감하는 효과가 있어 ‘친환경 경영’에도 일조하고 있다. 올 6월부터는 컨설턴트가 태블릿PC뿐 아니라 스마트폰에서도 고객 등록부터 청약까지 가입 프로세스 전체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지난해 7월에는 비대면으로 보험을 선물하는 ‘보험 선물하기’ 서비스를 개시했다. 고객이 보험을 계약하고 지인에게 카카오톡 등을 통해 선물을 보내는 방식으로, 선물을 받은 사람이 해당 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한 번에 최대 30명까지 선물이 가능하고, 선물을 받은 사람이 전송받은 인터넷 주소를 누른 뒤 간단한 정보 입력과 본인인증을 마치면 별도 심사 없이 즉시 가입이 완료된다. 보험계약 유지 단계에서는 과거 플라자나 지점을 방문해 처리하던 업무를 고객이 직접 비대면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모니모(삼성 금융계열사 통합 애플리케이션)와 모바일 웹을 개선했다. 편리한 인증 방식, 빠른 속도, 쉬운 화면 구성으로 고객이 플라자를 방문하지 않아도 다양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보험료 납입도 모바일 웹이나 카카오페이 등을 통해 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통해 보험 가입 이후 모바일 웹에서 이뤄지는 고객의 디지털 업무처리율이 2020년 27.6%에서 2022년 42%로 높아졌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금 1g을 10개로 쪼개 살 수 있는 실물 기반의 대체불가토큰(NFT) 골드 교환권이 나왔다. 실물 기반으로 발행돼 투기를 막고, 금 거래 투명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상대적으로 값싸게 금을 살 수 있다는 것도 이점이다. 한국조폐공사는 1g의 카드형 골드바를 10개로 나눈 0.1g 미니골드 상품권을 시범 출시한다고 3일 밝혔다. 조폐공사 쇼핑몰에 접속해 미니골드(0.1g) 상품권을 구입하면 PIN 번호가 발급된다. 발급 사이트에 접속해 PIN 번호를 입력하면 NFT 골드교환권을 받을 수 있다. 교환권에는 고유번호가 매겨져 있으며, 교환권(0.1g) 10장을 모으면 카드형 골드 1g으로 바꿀 수 있다. 미니골드(0.1g) 상품권은 조폐공사가 처음으로 NFT를 적용한 디지털 제품교환권이다. NFT 골드교환권은 다른 NFT와 달리 실물기반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된다는 평가다. 조폐공사가 보유한 위변조 방지 및 정품인증 기술이 적용돼 보안이 한층 강화됐다. 특히 적은 금액으로 금 거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시장의 관심을 끌 것으로 보인다. NFT는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지만 기존 가상자산과 달리 디지털 자산에 별도의 고유 값을 부여해 대체 불가능하다. NFT 골드교환권(0.1g)은 전자 형태로 발급돼 실물을 소지할 필요가 없다. 또 10개 교환권을 확보하면 고객이 원할 때 실물로 바꿀 수 있다. NFT골드교환권(0.1g) 10장으로 바꿀 수 있는 ‘디지털 제품교환권 카드형 골드’에는 중량 1g, 순도 99.99%로 정품임을 보증하는 잠상(숨겨진 이미지) 기술이 적용됐다. NFT골드교환권(0.1g)을 발급받을 수 있는 미니골드(0.1g) 상품권의 판매가는 1만4900원으로 조폐공사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조폐공사는 국내 금 거래소에서 거래되는 금 품질 인증을 전담하고 있다. 반장식 조폐공사 사장은 “실물 기반의 디지털 미니골드 상품권은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고 소액 거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금시장 투명화에 기여할 것”이라며 “화폐와 여권제조를 통해 구축한 공사의 위변조 방지 노하우를 디지털 세계에서도 적용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뉴질랜드 교포 골프 선수 리디아 고(25)가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의 아들 정준(27) 씨와 올해 말 결혼한다. 27일 금융업계에 따르면 두 사람은 올 12월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정준 씨는 현재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현대자동차 계열 법인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의 부친 정태영 부회장은 고 정경진 종로학원 설립자의 장남으로,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의 둘째 사위다. 리디아 고는 LPGA 투어 최연소 우승기록을 보유하고 있다.김상운기자 sukim@donga.com}
브렉시트와 샤이 트럼프의 공통점. 분노한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결집해 예상치 못한 정치적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와 트럼프 집권 모두 ‘설마…’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생존경쟁에 시달려 온 이들의 거센 반격에 이는 현실이 돼 버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복지국가의 꿀을 빨며 비교적 고분고분하게 살아온 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영국으로 이주해 현지인과 결혼한 일본인 여성 저자는 노동계층에 속하는 베이비붐 세대 이웃들을 세밀히 관찰하고 이 책을 썼다. 먹물 냄새 풍기는 학자들의 글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생생한 현실 묘사가 압권이다. 트럭을 모는 저자의 남편이 대처리즘과의 일전을 선포하며 생병을 앓는 대목이 특히 눈길을 끈다. 남편은 급작스러운 두통으로 국민보건서비스(NHS)의 무료 진료 서비스를 이용하려고 하지만 대기인원이 너무 많아 수개월째 병원 문턱조차 넘지 못한다. 저자는 돈을 써서라도 민간병원에 가자고 설득하지만 남편은 “NHS를 잃으면 영국이 복지국가였던 시절의 유산을 잃는 거다. 대처한테 지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린다. 그는 의료재정이 지금보다 풍족하던 시절 NHS 병원에서 말기 암을 치료한 경험이 있다. 저자는 몸뚱이가 전부인 영국 블루칼라 계층에게 무상진료 혜택은 큰 부분을 차지했지만, 신자유주의 정부의 재정긴축이 이를 앗아갔다고 주장한다. 우려스러운 건 이런 흐름이 외국인 혐오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 NHS 병원을 찾는 내국인 대비 이주민 수가 늘어난 데 따른 현상이다. 영국인들이 돈을 내고 의료서비스 질이 좋은 민간병원으로 몰리는 반면, 대출 여력조차 없는 이주민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NHS 병원을 이용하고 있어서다. 사정이 이런데도 극우 인사들은 NHS 재정을 외국인들이 축내고 있는 것인 양 사실을 왜곡하며 블루칼라 계층을 선동한다. 이들이 이민자 통제를 외치며 브렉시트를 지지하고 나선 배경이다. 복지와 경제효율이 상충하는 혼돈 속에서 노동계층과 이주민 사이의 간극이 벌어지는 비극은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남미의 대문호 마르케스가 냉전 초기 동유럽을 직접 둘러보고 쓴 책이라면 한 번쯤 호기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거다. 그의 소설 ‘백년의 고독’(1967년)과 ‘콜레라 시대의 사랑’(1985년)을 통해 현실과 환상이 절묘하게 결합된 ‘마술적 리얼리즘’에 빠져든 독자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언론인 출신답게 1950년대 동유럽 사회와 인간 군상의 민낯을 날카롭게 포착한 솜씨가 돋보인다. 시작은 한낮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나른한 카페에서 결행한 객기였다. 그의 이탈리아인 친구가 새로 뽑은 프랑스제 자동차를 어떻게 활용할까를 고민하다 “철의 장막 뒤에 무엇이 있는지 보러 가자”는 제안이 튀어나온 것. 아직 베를린 장벽이 들어서기 전이라 이들은 국경을 통과해 동독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한반도 분단과 맞물려 냉전 최전선이었던 베를린 기행이 특히 눈길을 끈다. 저자의 눈에 자유 진영의 서베를린과 공산 진영의 동베를린 모두 기묘하게 뒤틀린 도시로 비친다. 서베를린은 미국의 막대한 원조에 힘입어 거대한 ‘자본주의 선전장’이 돼 있었다. 거리마다 미국 수입품이 넘쳐나고 새로 건설된 건물들이 마구 들어서는 서베를린을 보며 저자는 “가짜 도시 같다”고 말한다. 동베를린에서는 ‘가짜 사회주의’의 폐해를 목도한다. 저자는 이곳에서 자본가 계층으로 분류돼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직후 자산을 빼앗긴 동독 남성 볼프를 만난다. 볼프는 자신의 사업체가 국유화된 뒤 정부로부터 자식에게 상속할 수 없는 조건의 배상금을 받는다. 볼프는 이 돈으로 외국인들이 이용하는 호텔, 바 등을 드나들며 의욕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는 저자와 밤새워 술을 퍼마시며 사회주의 정부를 욕하지만, 경찰이 감시하는 선거 때마다 결국 찬성표를 던졌다고 고백한다. 저자는 동독 시민들이 혐오하는 소련 주둔군에 대해서도 연민의 시선을 드러낸다. 이들과 우연히 가진 파티에서 정부 명령으로 낯선 땅에 파견되고서 모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고대하는 모습을 발견한 것. 결국 당시 냉전을 겪은 모두가 정치 체제의 희생양 아니었을까.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에세이의 힘은 자신의 치부마저 드러내는 ‘진솔함’에서 나온다.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한 유명인의 그것보다 생활인의 진심이 담긴 에세이 한 편이 훨씬 값진 이유다. 여기에 깊은 성찰이 담긴 시적인 문장까지 더해지면 더할 나위 없다. 이 모든 상찬은 오로지 이 책에 해당된다. 저자는 강원 속초시에서 8년째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장이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그는 “서점 한번 해보겠느냐”는 부친의 제안을 받고 20대 후반에 귀향한다. 그리고 거기서 아내를 만나 딸을 얻는다. 저자는 서점이라는 소우주에서 가족, 손님들과 겪은 일들을 자신이 추천하는 책 소개와 엮어 흥미롭게 풀어냈다. 유명 작가에게 북토크를 제안하는 장문의 편지를 썼지만 끝내 아무 답신을 받지 못하고 수치심에 빠진 일화가 눈길을 끈다. 이 문제로 고민하던 그는 그 속에서 자신의 마음에 똬리를 튼 ‘욕심’을 발견한다. 편지에 속초 산불로 침체에 빠진 지역 경기를 운운했지만, 결국 자신의 서점을 띄우기 위한 욕심이었음을 순순히 고백한 것. 그러면서 일본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통해 한순간의 잘못된 마음이 가져온 파국을 이야기한다. 딸을 어린이집에 보내기 전 서점에서 보살피며 매일 힘겹게 놀이터에 데려간 이야기는 묵직한 부정(父情)을 일깨운다. 서점에서 부부싸움을 하던 중 책을 추천해달라는 손님에게 줌파 라히리의 소설 ‘축복받은 집’을 소개한 뒤 아내와 화해한 이야기도 따스하게 다가온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2년 전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포드자동차 기자간담회를 취재한 적이 있다. 앨런 멀럴리 포드 회장 등 주요 경영진이 참석한 가운데 저녁식사를 겸한 자리였는데 만찬 장소에 놀랐다. 이 미술관의 백미(白眉)인 디에고 리베라(1886∼1957)의 걸작 벽화 ‘디트로이트 산업’(1933년) 바로 앞에 음식 테이블이 차려진 것. 미 연방정부의 국가사적(national historic landmark)으로 지정된 이 작품은 가로 23m, 세로 5m 벽면에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사실적으로 그린 대작이다. 1930년대 미국 자동차 산업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작품인 만큼 당시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벗어나 옛 위상을 되찾고자 한 포드의 목표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기업 주최 간담회를 많이 다녀봤지만 지금까지도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이유다. 만약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이건희 컬렉션 전시회에서 삼성전자가 이와 비슷한 행사를 치른다고 하면 어떨까. 당장에 “기부만 하면 다냐”며 국립박물관을 특정 기업이 사용하는 데 대한 ‘특혜 비판’이 쇄도할 것이다. 오래전 기억을 장황하게 꺼내든 것은 지난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공식 만찬을 놓고 불거진 논란 때문이다. 만찬 사흘 전에야 휴관을 통보해 사전에 예약한 일반 관람객들에게 피해를 끼쳤다는 비판이 나왔다. 일각에서는 1급 국가 유물이 즐비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높으신 분’들이 식사를 즐기는 게 온당하냐는 지적도 있었다. 이에 대해 K팝과 한국 영화의 위상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요즘 ‘문화 외교’ 차원에서 박물관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사실 대통령실의 서울 용산구 이전을 계기로 지척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의 국가 행사 활용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국빈 접대에서 장소가 주는 상징성이 작지 않아서다. 예컨대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흑해 연안 크림반도의 차르 여름궁전(리바디아궁)을 회담장으로 고집한 건 제2차 세계대전 승전 후 이곳과 연접한 동유럽 일대를 수중에 넣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었다. 한국 문화의 얼과 정수를 상징하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의 외교 만찬은 반만년 고유문화의 소프트파워를 각국 정상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다. 단, 국민들의 관람권 침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묘안이 필요하다. 예컨대 최소 일주일 전 임시휴관을 공지하거나, 가급적 폐관 시간 후 행사를 여는 식의 ‘국립박물관 및 미술관 활용 매뉴얼’을 만들어 대비하는 방안이 있겠다. 국빈 만찬 시 문화재 훼손을 막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유물들을 정상들의 동선상에 이동 전시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 만찬의 경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동문으로 입장해 만찬장인 으뜸홀로 이동하는 짧은 시간에 고려 전시실과 신라 전시실을 드나드느라 황남대총 금관 등 서너 점밖에 감상하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관람객 동선과 분리된 별도 행사 공간을 박물관 경내에 두자는 아이디어도 나온다. 문화재는 성물(聖物)이라는 고리타분한 생각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활용 방안을 찾아야 할 때다. 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바야흐로 ‘지정학의 귀환’ 시대다. 미국과 각을 세우는 중국은 ‘일대일로’ 정책을 앞세워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러시아는 흑해 연안의 요충지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공했다. 첨단기술로 통신혁명이 이뤄졌지만 지리는 여전히 세계정치와 경제를 규정하는 핵심 요인이다. 약 100년 전 쓰인 지정학의 고전을 꺼내 봐야 하는 이유다. 영국 지리학자이자 정치인인 저자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듬해인 1919년 이 책 1부를 썼다. 당시는 유럽에서 장기 평화를 가능케 한 ‘빈 체제’가 붕괴되고, 대규모 살육전이 벌어진 직후라 지식인들이 1차 대전의 원인과 재발 방지에 골몰하던 때다. 그런데 저자는 지리 관점에서 베르사유 체제를 분석하며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가능성을 점치는 선견지명을 보여줬다. 자연환경과 자원이 편재된 탓에 지정학적 요지를 차지하려는 팽창주의 경쟁이 재현될 수밖에 없다고 본 것. 저자는 북극해와 고비·티베트 사막, 알타이·힌두쿠시 산맥에 둘러싸인 유라시아 중심부(러시아 서부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티베트·몽골까지 포함)를 ‘심장지대(heartland)’라고 부르며 중시하고 있다. 해양세력에 맞서 대륙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천혜의 요새인 이곳을 반드시 차지해야 한다는 것. 공교롭게도 구소련의 영토와 거의 겹친다. 2차 대전 종전 후 해양세력인 미국에 맞서 소련이 유라시아 대륙의 절대 강자로 부상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런데 바다, 산맥, 사막의 자연방벽에 둘러싸인 심장지대가 서쪽으로 동유럽에 열려 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심장지대를 뚫을 수 있는 일종의 급소인 셈. 2차 대전 때 히틀러가 독소 불가침조약을 깨고 동유럽을 침공한 이유다. 이는 현재에도 유효한 이야기다. 심장지대 서쪽 경계에 있는 흑해 연안에 우크라이나가 자리 잡고 있어서다. 결국 우크라이나 전쟁은 서방과 러시아의 갈등에서 지정학적으로 예정된 비극일 수 있다는 사실이 슬프게 다가온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야사(野史)는 언제 읽어도 재밌다. 여기에 마치 영화를 보듯 생생한 사람 이야기가 더해지면 게임 끝이다. 더구나 베일에 싸인 정보기관 이야기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영화로도 제작돼 큰 인기를 끈 베스트셀러 ‘남산의 부장들’ 저자가 속편을 냈다. 이번에는 저자 표현대로 시작부터 ‘유혈 낭자했던’ 제5공화국의 국가안전기획부장들 이야기다. 베테랑 언론인 출신답게 전직 안기부 요원부터 청와대 관계자, 외국 학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인터뷰를 통해 1980년대 한국 정보기관의 민낯을 생생히 드러냈다. 5공 안기부의 서막은 12·12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쿠데타 직후 중앙정보부(안기부의 전신) 부장에 ‘셀프 취임’한 전두환이 열었다. 그는 1980년 6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장에 취임하기 전까지 약 한 달간 중정을 직접 이끌며 연간 예산의 15%에 달하는 120억 원을 통치자금으로 쓴다. 국가안보 예산을 정치자금으로 전용한 것이다. 책에서는 검찰, 경찰, 군 수사기관 등 모든 사정기관 위에 군림하며 초법적 권한을 행사한 안기부의 파워게임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이 중 1982년 6월 터진 대원각 외화 밀반출 사건을 계기로 안기부가 검찰과 사법부를 옥죈 사례가 눈길을 끈다. 당대 유명 요정 대원각을 소유한 이경자 씨 등이 27만 달러를 해외로 빼돌리려다가 적발됐는데도 보석으로 석방된 데 이어 검찰이 항소를 포기한 것. 뭔가 수상한 냄새를 맡은 안기부가 대법원장 비서관과 변호사를 남산 지하실로 끌고 가 이 씨로부터 뇌물을 받고 사건을 무마했다는 자백을 받아낸다. 안기부는 이창우 서울지검장의 방을 몰래 뒤져 이 씨의 남편에게 받은 호텔 숙박권도 찾아낸다. 이로 인해 당시 검찰과 법원 간부들이 대거 옷을 벗었다. 저자는 증인들의 입을 빌려 안기부가 각종 시국사건에서 마찰을 빚은 검찰, 법원을 길들이고 조직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벌인 공작이었다고 분석한다. 이 과정에서 고문 수사의 명수였던 안기부가 대검 중앙수사부의 가혹행위를 고발한 대목은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떠올리게 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나의 가장 왕성한 활동기에 초점을 맞춰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음을 반성한다.” 김진현 전 과학기술처 장관(86)이 공직에서 물러나 1995년 서울시립대 총장으로 재직할 당시를 돌아보며 남긴 글이다. 동아일보 기자를 지낸 그는 당시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추진위원회 위원장과 한국경제신문 회장을 겸직했다. 통상 자화자찬이나 미화 일색인 고위공직자 회고록과 달리 저자는 이 책에 자기반성과 더불어 신랄한 정치·사회 비판을 담았다. 1992년 각 부처 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월성 원전 2호기 건설허가를 위해 열린 원자력위원회 회의 기록도 당시 공직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날 회의가 끝나자마자 한 장관이 “김 장관, 왜 인사가 없어”라고 소리쳤단다. 원전 공사 수주업체가 관행상 돌리던 뇌물이 왜 안 들어오느냐고 공개적으로 다그친 것. 나중에 해당 업체가 저자에게 억 단위의 수표를 보냈지만 이를 돌려보낸 일화도 남겼다. 저자는 “6·29선언 이후 정치 형식만 민주화되었지 비정도(非正道)의 관행은 건재했다”고 썼다. 이 책은 근대화와 민주화를 거치며 현존 세대 중 특히 역동적인 경험을 가진 1930년대생 원로의 일대기를 담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은 저자는 일제와 미군정, 대한민국, 북조선의 네 가지 통치 체제를 경험했다. 언론계와 관계, 학계를 두루 거친 그의 회고록을 되새겨 볼 만한 이유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윈스턴 처칠, 스탈린, 호찌민…. 국가도 인종도 다르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절체절명의 전쟁에서 역전에 성공한 지도자라는 사실이다. 처칠이 총리에 오를 당시 영국은 고립무원 그 자체였다. 러시아를 제외한 전 유럽대륙을 정복한 히틀러는 “영국의 독립만은 보장해주겠다”고 했다. 스탈린은 1941년 독소 불가침 조약을 깬 히틀러의 침공으로 연일 참패를 거듭했다. 호찌민은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를 가까스로 이겼지만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의 전쟁에 직면한다. 이들은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을까. 일본의 경영학, 군사학 전공학자들은 이 책에서 전쟁사를 통해 적을 이길 수 있는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손자병법부터 노장사상, 후설의 현상학에 이르기까지 동서양 고전에 담긴 지혜도 폭넓게 응용한다. 저자들에 따르면 처칠 등 역전의 명수들은 상황과 맥락의 변화에 따라 구체화된 전략을 실천하는 이른바 ‘지략(智略)’에 능했다. 과거의 승리 공식을 금과옥조로 여기다 새로운 국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 예컨대 저자들은 전작 ‘실패의 본질’에서 일본이 러일전쟁의 승전 경험에 집착한 탓에 태평양전쟁에서 패했다고 주장한다. 상황 변화에 따라 대립적 전술을 적절히 혼합 구사하는 유연성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전술의 양대 축인 소모전과 기동전 중 하나만 택하면 실패하기 쉽다는 것.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미국과 노르망디에서 제2전선을 구축할 때는 기동전을 구사했지만, 그 전까지는 독일의 런던 공습에 소모전으로 임했다. 독일의 도발에도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는 ‘전략적 인내’를 택했다. 그 결과 미국이 참전하기까지 시간을 벌면서 후일을 도모할 수 있었다. 호찌민도 베트남전 초기에는 방어전을 벌이다 이후 게릴라전으로 버티며 소모전을 벌였다. 막판에 전쟁이 장기화돼 미국 내 반전 여론으로 적의 사기가 꺾이자, 총반격을 가하는 정규전으로 전환해 승리할 수 있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맛집은 광화문 방면을 추천드립니다.” 12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춘추문 앞. 정장에 선글라스를 낀 대통령경호처 직원이 청와대 전면 개방 행사를 찾은 관람객에게 나긋한 목소리로 안내했다. 대통령 관저 뒤편 오운정(五雲亭·서울시 유형문화재)에서도 “이게 뭐냐?”는 관람객 질문에 다른 직원이 마치 문화해설사처럼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때 지은 건물”이라고 친절하게 답했다. 수년 전 문재인 대통령 집무실이 있던 ‘여민 1관’ 앞에서 굳은 표정으로 주위를 경계하던 직원들의 모습이 떠올라 순간 격세지감을 느꼈다. 최고 권부(權府)에서 국민 관광지로의 대격변이다. 이날 대통령실은 청와대 관람 신청 인원이 231만2740명에 이르자, 신청 기간을 연장하기로 했다. 국민의 관심이 이처럼 뜨겁지만 역사문화 공간으로서 청와대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마스터플랜은 아직 없다. 이곳은 고려시대 남경의 이궁부터 조선시대 경복궁 후원, 일제강점기 총독 관저를 거쳐 광복 후 경무대와 청와대에 이르기까지 약 900년의 장구한 역사를 품고 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청와대 안팎에 보물, 국가사적 등 61점의 문화재가 있다. 특히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관가(官街)가 들어선 광화문 육조거리를 비롯해 북촌, 서촌, 한양도성을 아우르는 역사 공간의 의미는 대통령실 이전 후에도 여전히 각별할 수밖에 없다. 문화계를 중심으로 문화유산으로서 청와대 활용 방안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현존 문화재와 건축물을 놓고 볼 때 조선시대 경복궁 후원과 권부로서 근현대 건축물의 두 가지 성격에 주목하고 있다. 전자를 우선시한다면 1990년 시작된 경복궁 복원사업과 연계해 국가사적으로 관리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사적으로 지정되면 주변 개발이 제한돼 주민 불편이 따를 수 있다. 청와대 본관이나 대통령 관저와 같은 현대 건물을 박물관 등으로 활용하는 데도 제약이 생긴다. 이에 따라 보존과 개발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근대역사문화공간’ 지정 방안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거론되고 있다. 기자는 수년 전 휴가를 맞아 전남 목포시 근대역사문화공간을 가족들과 둘러본 적이 있다. 구시가지 거리를 끼고 옛 일본영사관(현 근대문화역사관 1관)과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근대문화역사관 2관) 등 경제, 외교 침탈의 생생한 역사 현장이 늘어서 있어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역사관 내부는 각종 자료와 사진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꾸려졌다. 일제강점기를 책으로만 본 이들도 동양척식회사 건물 안의 거대한 금고를 보며 수탈의 실체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청와대 공간 활용과 관련해 참고할 만한 사례다. 지난달 한국건축역사학회가 주최한 ‘경복궁 후원의 역사적 가치와 현실적 의미’ 학술회의에서 전문가들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청와대 활용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직까지 고려시대 이궁 터 위치조차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자칫 열띤 분위기에 휩쓸려 일을 조급하게 추진하지 않기를 바란다.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숨겨진 1인치를 찾았다.’ 26년 전인 1996년 큰 주목을 받은 삼성전자 TV 광고 문구입니다. 축구 경기에서 화면에 보이지 않던 선수가 슛을 성공시키는 모습을 보여주는 명장면이죠. 유물도 눈에 당장 보이지 않는 가치가 더 빛날 때가 있습니다. 동아일보는 ‘이건희 컬렉션’ 기증 1주년을 맞아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유물 및 작품에 담긴 사연을 통해 숨은 가치를 발견하는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지난달 28일 개막한 국립중앙박물관의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에는 유독 중년 여성들이 몰리는 전시품이 있다. 자식 키우는 어머니 입장에서 280년 전 빛바랜 책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는 애틋함이 묻어 있다. 2부 중간 통로에 자리 잡은 ‘경현당 갱재첩(景賢堂 갱載帖)’이다. 1741년(영조 17년) 마흔일곱의 왕이 4년에 걸친 춘추집전(春秋集傳) 경연을 마친 것을 기념해 일곱 살의 사도세자와 신하 13명을 불러 경희궁에서 벌인 잔치(선온)를 그림과 글로 남긴 책이다. 전시장 벽면에는 ‘아들을 못 미더워하는 아버지의 불안함이 훗날 비극의 씨앗이 되고 말았습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문구가 붙어 있다. 그런데 과연 이때부터 부자간의 비극이 시작된 걸까. 가로 38.5cm, 세로 27.5cm의 이 작은 책에 담긴 진실은 무엇일까.○ 집착인가, 부정(父情)인가 “세자의 덕스럽고 총명한 모습은 근엄하고, 나라를 도울 공부에 박차를 가하니 국가의 끝없는 복이 참으로 여기 달렸습니다.”(좌승지 김상성) “세자가 노는 데 정신이 팔려 얼굴색이 매우 검다. 너는 여러 신하와 대면하면서 공부한 책을 읽을 수 있는가?”(영조) 갱재첩에는 영조가 지금의 대통령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承政院), 학문 및 정책 연구기관인 홍문관(弘文館) 관리들과 더불어 사도세자에 대해 대화하는 장면이 기록돼 있다. 자식 자랑을 하면 팔불출이 될까봐 그랬을까. 영조는 사도세자의 영민함을 칭찬하는 신하들에게 “노는 데 정신이 팔려 공부를 게을리한다”며 세자 앞에서 면박을 준다. 그러곤 잔치를 벌이기 전 학습교재(동몽선습)를 가져오게 한 뒤 세자가 배운 부분을 읽도록 했다. 세자는 이를 막힘없이 읽었다. 우승지 이도겸이 “1장을 강의한 지 100여 일이 지났는데도 잊은 곳이 없다. 어린 나이에 기억력이 뛰어나다”고 거듭 칭찬하지만 영조는 다른 시험을 낸다. 한자음 3개를 들려주고 해당 글자를 책에서 가리키도록 했는데 세자는 이번에도 통과한다. 영조는 그제야 “동궁(세자)이 처음에 3번 정도 읽고 겨우 음과 토에 익숙해지자 곧 암송할 수 있었다”며 은근히 자식자랑을 한다.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조선후기사)는 “아들이 자만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엄한 교육을 시킨 것이지 이때부터 사도세자와의 비극이 시작됐다고 보는 건 무리”라고 말했다. 반면 학문이 높았던 영조가 아들을 자신의 눈높이까지 끌어올리려 한 집착이 이 대목에서 읽힌다는 견해도 있다. 서자 출신으로 숙종의 적통이 아니라는 콤플렉스가 세자에 대한 과도한 훈육으로 이어졌다는 것. 허문행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영조는 유독 신하들 앞에서 어린 세자가 공부 못한다는 소리 듣는 걸 용납하지 못했다. 사도세자가 왜 비극적인 상황을 맞았는지에 대한 단초가 갱재첩에 담겼다고 보고 이를 전시에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통치 정당성’ 확보에 올인 사실 이날 잔치는 차기 권력인 세자에게 미래의 집권층을 형성할 젊은 관료들을 소개하고, 이들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리였다. 영조는 세자에게 “여기 있는 신하의 할아버지와 부친은 모두 역대 임금들을 섬겼다. 그리고 이들의 자식과 손자도 모두 너와 함께 늙어갈 사람이니 너는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날 등장하는 신하들 상당수는 40세 전후의 젊은 청요직(淸要職·언로 역할을 한 중하위직) 관리들로 당파 싸움에서 한발 떨어진 이들이었다. 흥미로운 건 이날 영조가 특별히 ‘당습(黨習·당파 싸움)’을 경계하는 발언을 한 사실이다. 왕권 강화를 위해 당쟁을 막은 자신의 강력한 탕평책이 세자 집권 후에도 유지돼야 함을 강조한 것. 이는 노론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과 소론 일부 세력이 일으킨 ‘이인좌의 난’(1728년)으로 영조가 즉위 4년 만에 위기에 빠진 경험이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상황은 영조의 콤플렉스는 물론 권력 기반과도 엮여 있었다. 이인좌의 난 때 반대파가 주장한 영조의 ‘경종 시해설’이 통치의 정당성을 훼손했기 때문이다. 이에 영조는 탕평책을 실시하며 자신의 이복형 살해 혐의를 벗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경종 시해 혐의로 노론 인사들이 대거 숙청된 1722년(경종 2년) 임인옥사(壬寅獄事)를 무고에 의한 억울한 옥사라고 판정한 1740년(영조 16년) 경신처분(庚申處分)이 대표적이다. 갱재첩이 발간되기 바로 직전 해에 벌어진 일이다. 이근호 충남대 교수(조선후기사)는 “영조는 자신이 형의 죽음과 관련이 없다는 걸 경현당 갱재첩이 발간된 1741년까지 강조한다”며 “갱재첩은 영조가 신하들과 더불어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천명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수년 전 이탈리아 피렌체 국립복원연구소(OPD)를 취재할 때 15세기 르네상스 거장 도나텔로의 ‘막달라 마리아’(1455년)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나무 조각상 곳곳을 채색해야 할 정도로 색이 바랬지만, 구도자의 처연한 표정과 몸짓에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나무의 물성 안에 500여 년 전 작가의 감성이 생생히 살아 숨쉴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작품을 다룬 이 책을 보며 예전 기억이 떠오른 건 저자가 피렌체에서 미술품 복원을 전공한 미술사학자여서다. 책에는 10년 넘게 유학 생활을 한 그의 경험이 작품 설명과 곁들여져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저자는 이성과 감성의 균형을 추구한 르네상스의 지성이 미술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도나텔로의 ‘다비드’ 청동상(1440년).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구약성경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은 서사보다 ‘몸’ 자체에 주목하고 있다는 게 그의 견해다. 다양한 표현 기법을 통해 매끄럽게 빛나는 인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했다는 것. 이에 비해 다비드의 모자에는 지성을 상징하는 그리스 신 헤르메스를 조각했다. 저자는 “야수적 본능을 상징하는 골리앗을 제압한 뒤 다비드가 짓는 미소는 인간 지성의 발견을 기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도나텔로를 비롯한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이 파고든 지성은 고대 그리스 문화로부터 깊은 영감을 받았다. 여기에는 피렌체를 다스린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의 영향도 컸다. 그는 1439년 동로마제국에 살던 그리스 석학들을 대거 초청해 피렌체 예술가, 학자들과 교류하도록 했다. 복원사 출신답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1494∼1498년)이 후세 복원 과정에서 오히려 훼손된 사례도 소개했다. 요즘에는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언제든 지울 수 있는 수채화로 미술품을 복원한다는 사실은 국내 문화재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