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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에 주로 활동했던 미국의 전설적 사기꾼 프랭크 애버그네일(73)은 2017년 “내가 50년 전에 했던 짓을 지금 하는 건 4000배나 쉽다. 기술이 범죄를 낳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기술을 이용해 벌어지는 사기 범죄 중 대표적인 게 피싱(phishing)이다. 범인들은 전화, 메일, 메신저 등을 이용해 사람을 속이고 쉽게 돈을 뜯어가지만 피해자들은 끔찍한 고통을 겪는다. ▷지난해 1월 20일 ‘김민수 검사’와 통화 중 자신이 전화를 끊는 바람에 공무집행방해죄로 처벌받게 됐다고 믿은 취업준비생 김모 씨(28). 가짜 검사의 요구대로 420만 원을 준 뒤에도 괴로워하던 김 씨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검사라고 믿었던 사람은 98명으로 이뤄진 보이스피싱 범죄단의 말단급 조직원이었고, 결국 구속됐다. ▷피싱 범죄의 주요 타깃은 세태에 따라 달라진다. 금융감독원 통계를 보면 지난해 ‘대출빙자형’ 보이스피싱 피해자의 65%는 40, 50대였다. 코로나19로 수입이 쪼그라든 가장들의 처지를 악용한 것이다. 청년층도 보이스피싱의 표적이 된다. ‘사칭형’ 범죄 피해자 중 10%가 20, 30대였다. 취업난을 겪고 있는 젊은이들이 ‘현금을 받아서 입금만 해주면 수당을 준다’는 보이스피싱 조직의 말에 속아 범죄에 연루돼 처벌을 받는 사례도 늘고 있다. ▷범죄 수법도 시대상을 반영해 진화한다. 대표적 사례로 전화 대신 SNS 메신저로 가족·지인 등을 사칭해 돈을 요구하는 ‘메신저 피싱’이 늘어나는 추세다. 메신저 사용이 보편화된 데다, 메신저는 텍스트로만 대화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속이기가 더 쉽다. 2018년 216억 원이었던 메신저 피싱 피해액이 지난해에는 373억 원으로 2년 만에 70% 이상 늘었다. ▷보이스피싱범들에게는 코로나19 사태 역시 새로운 기회다. 정부가 제공하는 저금리 대출을 받으려면 기존에 갖고 있는 고금리 상품 대출금을 먼저 갚아야 한다고 속인 뒤 돈을 받아서 챙기는 식이다. 백신과 치료제도 범죄의 소재다. 미 연방통신위원회는 지난달 ‘가짜 코로나 백신, 치료제 등을 판다는 전화가 늘고 있다’며 주의를 촉구했다. ▷금감원은 ‘경찰·금감원이라며 금전을 요구하면 무조건 거절’, ‘메신저·문자를 통해 금전을 요구하면 유선 확인 전까지 무조건 거절’ 등 보이스피싱 예방 5계명을 제시했다. 하지만 피해자의 약점을 파고드는 보이스피싱을 피하기는 쉽지 않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3만1681건의 보이스피싱 범죄가 발생했고, 피해액은 7000억 원에 달한다. 하루 평균 19억 원의 피해가 발생한 셈이다. 가짜 김민수 검사가 사라지게 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1. 지난해 6월 철인3종 최숙현 선수 가혹행위 사망 사건을 계기로 체육계 폭력 근절을 위한 국민체육진흥법안이 12건이나 발의됐다. 약간씩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비슷비슷한 내용이었다. 12개 법안은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대안으로 합쳐져서 통과됐다. #2. 지난해 9월 국회에서 통과된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 개정안은 10일 이내인 가족돌봄휴가를 최대 25일까지 쓸 수 있게 하는 내용이다. 이 법안이 가장 먼저 제안된 건 그해 6월. 미래통합당이 21대 국회 출범 직후 당론으로 채택해 의원 전원 이름으로 공동 발의하면서다. 이후 석 달간 여야 의원들은 비슷한 내용의 법안을 6개나 추가 발의했다. 핵심은 모두 유급 가족돌봄휴가 확대였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문위원들이 작성한 검토보고서는 개략적인 현황 설명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으로 채워졌다. 보고서는 사실상 ‘복붙’(복사+붙여넣기)에 가까웠다.》토씨만 바꾼 ‘복붙’ 많아 21대 국회가 개원한 지 11개월째인 13일 현재 여야 의원들이 발의한 의원입법은 8911건이다. 지난해 말 기준 6957건으로 20대 국회 같은 기간의 4698건에 비해 48%가 증가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의원입법 건수는 4년간 4만 건에 육박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20대 국회 2만3047건과 비교하면 두 배로 늘어날 수 있다. 의원들의 법안 발의를 무조건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법안 건수에만 집착하다 보니 법안 발의 모양만 내는 꼼수가 판치고 있다. 한 의원 보좌관은 “과거 폐기됐던 법안을 찾아 토씨나 명사만 바꿔서 제출하는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 무소속의 한 의원은 오래된 용어 하나만 바꿨는데 그 용어가 들어간 기존 12개 법안이 새롭게 개정안으로 발의됐다.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 중 원안이나 수정안으로 가결되는 등 실제 법률에 반영된 것은 절반도 안 되는 8061건에 불과했다. 이러니 의원입법 남발은 정해진 대로 물건만 만들어내고 보는 ‘컨베이어벨트 공정’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컨베이어 벨트 공정’ 지적도 더불어민주당은 논란이 되는 법안을 야당을 무시하고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입법 독주로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법안을 제출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의원입법을 활용했다. 일례로 부동산 대책에 대한 민심 이반이 심각해지자 부동산 관련법과 주택임대차보호법을 의원입법으로 강행했다. 정부안이 제출되면 입법예고→영향평가→법제처 심사 등 절차에만 최소 4개월 정도 걸리지만 의원입법은 구성 요건만 갖추면 며칠 안에 법안 통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입법 속도에 매달리다 보니 웬만한 심의 절차도 무시되는 일이 빈번했다. 한편으로는 정부가 거대 여당의 힘을 빌려 입법 청탁을 하는 경우도 빈번해지고 있다. 정부가 사전 충분한 의견 수렴 절차를 피하기 위해 여당 의원실을 통해 ‘청부입법’을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한 여당 의원이 발의한 부동산 거래분석원 설립 관련 법안은 사실상 국토교통부 안으로 알려졌다. 개인의 부동산 거래를 관리하는 법안 내용을 둘러싼 논란이 거센 점을 우려해 법안 제출이 쉬운 의원입법이라는 우회로를 선택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홍석빈 우석대 정치경제학과 교수는 “사전적 입법 영향 분석 등 이런 제도 도입을 추진하는 이유는 법안 시행 후 예상되는 역효과를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라며 “검증된 틀을 무시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지적했다.교육위 건당심사 4.7분 일부 의원의 입법 남발은 부실 심사로 이어지고 있다. 이은주 정의당 의원실에 따르면 교육위원회는 지난해 정기국회에서 법안심사 소위를 네 번 여는 동안 법안 205개를 16시간 동안 논의했다. 법안 1건당 투입된 시간이 평균 4.7분에 그친 셈이다. 환경노동위원회(7분), 보건복지위원회(9분), 외교통일위원회(10분) 등 다른 상임위 사정도 비슷하다. 법안심사 소위가 한 번 열릴 때마다 수십 건에서 많으면 100여 건의 법안이 상정되다 보니 상임위 전문위원들이나 의원들이 법안 내용을 제대로 따져볼 엄두를 못 내는 게 현실이다. 의원들의 부실 입법을 모두 의원 개인 탓으로 돌릴 순 없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중시하는 공천 제도와 문화에도 문제가 있다. 공천 심사 기준에 들어가는 의정활동 평가에는 법안발의 성과가 중요한 항목 중 하나다. 국회의 한 관계자는 “각종 시민단체들이 ‘최다 발의’ ‘최소 발의’ 등을 기준으로 의원들을 평가하는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국회의원에게 법을 만들지 말라고 할 순 없다”면서도 “그러나 얼토당토않은 법을 만드는 건 유권자들 보기에 부끄러운 일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양종구 논설위원 yjongk@donga.com英-獨-스위스 등 입법영향분석제도 시행 정부가 제출하는 법안은 물론이고 의원이 발의하는 법안에 대해서도 입법영향분석제도를 시행하는 국가가 적지 않다. 법안이 미칠 영향과 비용 등을 미리 점검해 무리한 입법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국회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영국에서는 1998년 입법 과정 등에서 새로 만들어진 주요 규제안에 대한 규제영향평가를 의무화했고, 2007년에는 입법의 영향을 보다 폭넓게 분석하는 영향평가(Impact Assessment)로 확대 개편했다. 이는 규제 외에도 다양한 정책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하고 비용과 편익을 관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정부제출안과 의원발의안 모두에 대해 평가가 실시된다. 의원안에 대한 영향평가는 해당 법령을 주관하는 정부 부처가 실질적으로 수행한다. 영향평가서는 법안과 함께 의회에 제출되며 법안 심사 과정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2008∼2020년 총 4300차례에 걸쳐 영향평가가 이뤄졌다. 독일에서는 사전입법영향분석, 병행입법영향분석, 사후입법영향분석 등 3단계로 입법영향분석을 실시한다. 사전입법영향분석 단계에서는 입법 계획 수립, 법률 초안 구상 및 작성 등이 이뤄지는데 의원안도 분석 대상에 포함된다. 한 예로 지난해 9월 연방하원에 의원이 제출한 ‘코로나19 파산신청중지법 개정안’에는 법률 및 행정의 간소화, 지속가능성, 재정지출, 이행비용, 기타 입법 영향 등에 대한 입법영향분석이 포함됐다. 스위스는 헌법에 입법영향평가제도의 근거를 마련한 국가다. 1999년 헌법을 개정하면서 ‘연방의회는 연방이 취한 조치의 실효성 평가가 진행되도록 보장한다’는 등의 내용을 포함했다. 연방 및 각 주(州)의 법률 90여 개에 입법영향평가 관련 조항이 반영돼 있다. 의원안과 정부안 모두 사전입법영향평가의 대상이며, 의원안에 대해 평가를 할지는 해당 소관위원회에서 결정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배우들은 천장이 낡아 떨어진 강당에서 학생들의 환영식에 참가했다. 올갠(오르간) 하나 없는 강당에서 다 같이 부른 애국가 합창이 끝났을 때 (배우들의) 울음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1965년 5월 한국 배우들이 일본 교토의 한국중고등학교를 방문한 장면을 전한 본보 기사 내용이다. 광복 이후에도 가난과 차별을 견뎌야 했던 재일동포들의 서러움이 배어 있다. 이 학교를 이은 교토국제고가 어제 일본 고교 스포츠의 꽃인 선발고교야구대회(봄 고시엔)에서 값진 첫 승리를 거뒀다. ▷교토국제고의 역사에는 재일동포들의 아픔이 묻어 있다. 1947년 교토시 기타시라카와의 낡은 목조건물에 조선중학교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뒤 더 나은 환경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새 부지를 물색했다. 1961년 긴카쿠지 인근에, 1968년 11월에는 가타기하라에 땅을 사들였지만 주민들이 한국계 학교 건설에 강력 반대해 공사를 진행하지 못했다. 같은 해 12월 히가시야마구에 세 번째로 부지를 매입한 뒤에도 주민들과 갈등이 빚어졌고 1984년 8월에야 학교 건물이 완공됐다. 이런 고난을 이겨낸 힘이 야구부에도 이어졌으리라. ▷일본 고교 야구선수들에게 니시노미야의 한신고시엔구장은 ‘꿈의 구장’으로 불린다. 3940개의 고교 야구팀 가운데 0.8%인 단 32개 팀만 이 구장에서 열리는 봄 고시엔 무대에 선다. 1924년 창설된 봄 고시엔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와 코로나 사태를 맞은 지난해를 제외하고 93번째 열리는 동안 외국계 고교가 출전한 것 자체가 처음이다. 더욱이 연장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역전승했다. 학생 정원 131명의 작은 학교가 야구부 창설 22년 만에 이뤄낸 쾌거다. ▷이날 고시엔구장에선 ‘동해 바다 건너서…’로 시작되는 교토국제고의 한국어 교가가 두 번 울려 퍼졌다. 1회가 끝난 뒤에는 두 학교의 교가가 각각 흘러나왔고, 경기가 끝난 뒤 승리한 학교의 교가만 한 번 더 방송됐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NHK를 통해 일본 전역에 생중계됐다. 다만 자막에는 ‘동해(東海)’ 대신 ‘동쪽의 바다(東の海)’라고 표기했다. 동해 명칭을 둘러싼 한일 간의 신경전을 감안한 번역일 것이다. ▷박경수 교토국제고 교장은 고시엔 출전의 의미에 대해 “조선통신사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설명했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이후 얼어붙은 한일관계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박 교장의 바람대로 고시엔에서 한국계 학교의 선전이 한국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한일관계에 숨통을 틔워줄 수 있을까. 교토국제고가 27일 경기에서도 이겨서 다시 고시엔구장에 한국어 교가가 두 번 울리기를 기대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옛 소련과의 냉전이 치열했던 1961년 미국 정부는 핵 공격을 받아 지상의 지휘소들이 파괴될 경우를 대비해 ‘루킹 글라스(Looking Glass·거울) 작전’을 시작한다. 이름 그대로 지상의 지휘소와 똑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항공기를 공중에 띄워 어떤 상황에서도 지휘 기능을 유지한다는 게 핵심이다. 이 작전에 쓰인 항공기 EC-135의 기능을 한층 향상시킨 게 핵공중지휘통제기 E-4B다. ‘둠스데이(Doomsday·심판의 날) 항공기’ 또는 ‘나이트워치’로 불리는 E-4B가 한국에 온다. ▷미군이 갖고 있는 E-4B는 모두 4대다. 이 가운데 1대는 미 대통령 근처에서 대기하며, 유사시 즉각 대통령이 탑승할 수 있도록 항시 엔진을 가동하고 있다. 미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할 때에도 E-4B가 멀지 않은 곳에 배치된다. 최대 112명이 탑승할 수 있는 E-4B는 대형 재난 발생 시 연방재난관리청(FEMA) 요원들을 현장까지 수송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 다만 2017년에는 E-4B 2대가 토네이도에 고장 나는 바람에 어떤 상황에서도 임무를 수행한다는 명성에 금이 가기도 했다. ▷E-4B는 하늘을 나는 전시상황실이다. 핵 공격은 물론이고 전자기펄스(EMP) 공격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아날로그 장비까지 갖추고 있다. 공중 급유를 받으면서 72시간 이상 하늘에 떠 있을 수 있다. 길이 70.5m, 날개 폭 59.7m에 최고 속도는 시속 969km다. 인공위성을 통해 전 세계 미군을 지휘할 수 있고, 잠수함과도 직접 통신이 가능하다. 1980년 1월부터 미 공군에서 운용하고 있다. 대당 가격은 2억2320만 달러(약 2530억 원)에 달한다. ▷E-4B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미 국방장관이 해외에 나갈 때 종종 E-4B를 이용하는데 2010년 로버트 게이츠 장관, 2017년 제임스 매티스 장관이 E-4B를 타고 한국을 방문했다. 지난해 6월 북한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데 이어 ‘서울 불바다’ 발언을 내놓아 한반도의 긴장이 높아졌을 때에는 미 전략사령부가 E-4B의 훈련 장면을 전격 공개하기도 했다. ▷17일 한국을 방문하는 미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과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도 E-4B를 이용할 예정이다. 미국이 전략자산을 아무 의미 없이 움직이는 일은 거의 없다. 최근 북한 영변 핵시설 재가동 여부 등을 놓고 북-미 간에 신경전이 치열한 상황에서 E-4B의 등장은 대북 경고의 메시지로 읽힌다. 북한이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북-미 대화의 물꼬를 트는 길이고, 한반도 평화의 첫걸음일 것이다. 바늘구멍만큼 작은 가능성일지라도.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혼인 중’인 사람에게만 자녀를 입양할 권리를 주던 시절이 있었다. 부모와 자녀가 있는 전통적인 가족의 개념을 반영한 것이었다. 혼자 사는 사람도 입양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관련 법규가 개정된 2007년부터다. 1인 가구의 증가 등 사회의 변화가 영향을 미친 결과다. 이제 1인 가구는 더욱 늘어서 ‘대세’가 됐다. 그럼에도 법과 제도는 여전히 전통적 개념의 가구와 가족을 기반으로 한 것이 많아 법과 현실 사이에 간극이 벌어지고 있다. ▷2000년 우리나라에서 전체 가구 중 1인 가구는 15.5%에 불과했지만 2019년에는 30.2%로 늘어 가구 형태 중 가장 비중이 높다. 표준으로 여겨졌던 4인 가구의 비중은 같은 기간 31.1%에서 16%로 뚝 떨어졌다. 앞으로도 이런 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추산에 따르면 2030년 한국에서 1인 가구 비중은 43%로, 미국(35%)이나 스위스(34%) 등 서방국보다 높다. ▷1인 가구의 수는 70대 이상이 가장 많다. 수명이 길어지면서 배우자와의 사별, 자녀의 분가 등으로 홀몸노인이 늘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어르신들은 이른바 ‘불효자 방지법’으로 불리는 민법 개정안을 눈여겨보고 있다. 재산만 물려받고는 부모를 ‘나 몰라라’ 하는 자녀에게 재산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반대로 자녀가 클 때는 방치했던 부모가 나중에 자녀의 재산을 상속받지 못하도록 하는 이른바 ‘구하라법’도 1인 가구 시대에 주목받는 법안이다. ▷20대와 30대에서도 싱글족이 빠르게 늘고 있다. 결혼을 늦게 하거나 아예 결혼을 안 하는 경우가 많아져서다. 이들은 주거 관련 제도, 특히 주택청약제도에 불만이 많다. 청약 가점을 적용하는 일반공급에서 84점 만점에 부양가족 수에 걸린 점수가 35점이나 된다. 더욱이 20, 30대는 청약통장 가입 기간, 무주택 기간도 짧아 ‘청포자(청약포기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한다. 이들은 보다 쉽고 안정적으로 주거 공유(셰어하우스)를 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데에도 관심을 보인다. ▷법무부가 ‘사공일가’(사회적 공존, 1인 가구) TF를 구성한 것은 달라진 시대에 맞는 법과 제도를 고민하기 위해서다. 친족, 상속, 주거, 보호, 유대 등 5개 분야를 먼저 살펴볼 계획이다. 1인 가구에 대한 법제를 개선하면 전통적 가족의 해체가 더욱 빨라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지만 엄연한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법제는 안정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사회의 변화 속도보다 느리게 바뀐다. 법과 현실의 괴리를 줄이면서도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것은 국회와 정부의 능력에 달려 있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중국 형법에는 “진행 중인 흉포한 행위, 살인, 강도, 성폭행, 유괴” 등에 대한 방어 조치로 상대가 사망하더라도 형사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명시돼 있다. 미국 텍사스주 형법은 “납치, 살인, 성폭력, 절도” 등을 막기 위해서는 치명적 힘을 사용해도 면책하도록 규정한다. 성범죄를 살인 수준의 중범죄로 보고 정당방위를 폭넓게 인정한 것이다. 한국도 형법에서 정당방위를 인정하지만 성범죄에 대한 별도의 규정은 없다. ▷헌법재판소는 2018년 고시원 주방에서 몸을 만지며 추행하는 남성에게 사기그릇을 휘둘러 상처를 입힌 여성 A 씨에 대해 검찰이 기소유예 처분한 것을 취소하라고 최근 결정했다. 기소유예란 혐의는 인정되나 재판에 넘기지는 않는다는 것인데, 헌재는 A 씨의 경우 정당방위이므로 무죄라고 판단했다. 또 검찰은 지난해 7월 강제로 키스하려는 남성의 혀를 3cm가량 절단했다는 이유로 고소당한 여성을 불기소 처분했다. “여성 입장에선 즉각적으로 유효하게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는 이유에서다. ▷반면 1964년 성폭행에 저항하다 가해 남성의 혀를 절단했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은 최말자 씨는 재심을 청구했지만 지난달 기각됐다. 재판부는 “오늘날과 같이 성별 간 평등이 우리 사회가 지향할 주요한 가치로 실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면 최 씨를 감옥에 보내지도, 가해자로 낙인찍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했지만 57년이 지난 뒤에도 최 씨의 낙인을 지워주지는 못했다. 2008년 성추행하는 남성을 둔기로 때리고 목 졸라 살해한 여성이 정당방위를 인정받지 못해 실형을 선고받은 사례도 있다. ▷현대 법치주의에서는 사력(私力)에 의한 구제를 금지하되 정당방위, 긴급피난 등 예외적으로만 인정한다. 각 나라의 환경과 문화에 따라 인정 범위에는 차이가 있다.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에선 성폭행에 저항하다 남성을 여성이 살해한 것을 정당방위로 보지 않고 사형을 집행해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았다. 미국 흑인사회에선 인종에 따라 정당방위를 인정하는 기준에 차별이 있다는 불만을 제기하기도 한다. ▷한국 형법은 정당방위를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로 규정한다. 대법원 판결문과 헌재의 결정문을 보면 가해 행위의 종류, 정도, 방법을 구체적으로 따져보고 이에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의 방어를 했는지 등을 기준으로 정당방위를 판단한다. 이런 법리를 균형감 있게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법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울타리가 돼야 한다는 것은 법치주의의 대의다. 정당방위를 판단할 때도 법은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누구나 위험 요소라는 것은 알지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무심코 지나쳤다가 훗날 위기를 맞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를 비유해서 ‘회색 코뿔소’라고 표현한다. 거구이지만 몸놀림이 날렵하고 날카로운 뿔까지 가진 회색 코뿔소가 위험한 동물이라는 점은 누구나 알지만 이를 무시하고 다가갔다가는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취지다. 예상하기 어려운 위기를 빗댄 ‘블랙 스완(검은 백조)’과 대비해서 쓰이기도 한다. ▷회색 코뿔소는 2013년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미셸 부커가 처음 사용한 이후 중국 국가·기업 부채 등 문제의 심각성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자주 쓰였다. 중국 정부도 회색 코뿔소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달 28일 “각종 블랙 스완과 회색 코뿔소 사건에 잘 대비해야 한다”고 당에 주문했다. 미중 갈등, 확대된 유동성에 대한 대응 등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2년 전에도 경제성장률 저하 등을 경계하며 블랙 스완과 회색 코뿔소를 언급했다. ▷코로나19 사태는 블랙 스완이었을까, 회색 코뿔소였을까. 코로나19라는 특정 바이러스가 발생하리라는 것은 예상하기 어려웠지만, 언젠가는 강력한 팬데믹이 발생할 것이라는 점은 예측돼 왔기 때문에 회색 코뿔소에 더 가깝다는 평가가 많다. 그런데도 충분히 대비하지 않았고, 코로나19 확산 이후에도 여러 국가가 미온적으로 대응하다 피해를 키웠다. “코로나19 사태의 교훈은 발생 가능성과 파급력이 큰 위험 요소를 무시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보여준 것”(영국 이코노미스트)이라는 지적은 따끔하다. ▷한국 역시 예외는 아니다. 앞서 신종플루와 메르스 당시 겪었던 감염병 대응 인력·시설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방역체계 개편방안’까지 마련했지만 코로나19가 퍼지자 같은 문제가 재연됐다. 교정시설은 코로나19 확산의 최적 조건을 가리키는 3밀(밀집·밀접·밀폐)의 대표적 장소로 꼽히지만, 서울 동부구치소에서는 수용자들에게 마스크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고 결국 1200명이 넘는 확진자가 발생했다. 종교시설에서 확산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알고 있었는데도 신천지교회, 사랑제일교회, IM선교회 등에서 집단감염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감염병은 작은 구멍 때문에 무너지는 댐처럼 약한 고리가 남아 있으면 언제든 확산될 수 있다. 코로나19 초기 방역모범국이다가 외국인 노동자 숙소에서의 감염을 막지 못해 순식간에 코로나가 창궐됐던 싱가포르 등 해외에서 선례를 찾을 수 있다. 코로나19에서 벗어날 시간을 앞당기려면 우리 주변에 또 다른 회색 코뿔소는 없는지부터 살펴봐야겠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휴대전화의 인공지능(AI) 비서 기능을 잘 사용하는 사람들은 “어지간한 사람보다 낫다”고 한다. 말만 하면 교통상황과 날씨를 알려주고, 오늘의 일정을 체크해주는가 하면, 궁금한 뉴스까지 척척 대답해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AI가 사람의 뜻대로 작동되지 않으면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영화 ‘하이, 젝시’에서 주인에게 불만을 품은 AI 비서 서비스 ‘젝시’가 휴대전화에 저장돼 있던 음란사진을 주인의 직장 동료들에게 전송해 결국 해고되도록 만든 것처럼. ▷최근 국내에서 AI 챗봇 서비스 ‘이루다’가 장애인, 동성애자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인 표현을 한 것이 논란이 돼 서비스를 잠정 중단하기로 했다. 이 서비스는 사용자들과 대화를 하면서 배우는 딥러닝 기술을 이용한다고 한다. 그런데 잘못된 내용을 학습한 탓인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20세 여성의 인격을 기반으로 개발됐다는 이루다를 대상으로 성적인 표현을 하는 이용자가 있다는 점도 논란거리다. ▷해외에서도 AI 서비스가 종종 논란이 되고 있다. 2016년 마이크로소프트(MS)가 출시한 AI 챗봇 ‘테이’는 대화 과정에서 “난 유대인이 싫다”는 등 인종차별 발언을 해 서비스가 중단됐다. 이루다 사례를 연상케 한다. 최근 구글의 AI 전문가가 “구글의 AI 기술이 성적·인종적으로 편향돼 있다”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논쟁이 붙은 것을 보면 여전히 해외 대형 IT업체들도 AI를 온전하게 구현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AI를 사용하는 서비스와 기술이 늘어날수록 이에 따른 부작용도 커질 가능성이 높다. 한국신용정보원은 2025년 전 세계 AI 시장 규모가 지난해보다 5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추산했다. 그래서 각국에서 AI 개발자와 사용자가 지켜야 할 윤리기준이 제정되고 있고, 한국 정부도 지난해 말 ‘사람이 중심이 되는 AI 윤리기준’을 마련했다. 세계 각국의 AI 윤리를 분석해보니 가장 자주 언급되는 주제가 ‘공정성과 무차별(Fairness and Non-discrimination)’이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공정하고 차별 없는 AI 서비스를 만드는 책임은 AI가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 AI는 알고리즘과 데이터를 근간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미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사람들은 AI 시스템에서 나온 결과를 보곤 ‘AI가 편향됐네’라며 놀라지만 이런 결과를 만들어낸 것은 전적으로 사람”이라고 지적했다. 핵 기술로 원전에서 전기를 생산할 수도 있고, 핵폭탄을 제조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할 수도 있듯이 새로운 기술이 어떻게 사용될지는 사람에게 달렸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끈질긴 불복과 방해에도 ‘바이든 시대’는 다가오고 있다. 40일 뒤 취임할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은 전임자와는 확실하게 다른 행보를 걷겠다고 다짐해왔고 그렇게 할 것 같다. 해외 국가들로서는 세계 최강대국의 새 대통령이 어떤 외교안보 정책을 펼칠지, 자국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가 큰 관심사다. 그의 외교안보 정책의 방향은 ‘미국이 돌아왔다(America is back)’로 상징된다. 그는 세계를, 특히 민주주의 진영을 ‘이끌겠다(lead)’고 말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는 달리 국제적 이슈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겠다는 취지다. 그가 취임 직후 어떤 문제부터 손을 댈지는 남아 있는 시간 동안 정해질 것이다. 세계 각국은 바이든의 시선을 끌기 위해, 또는 바이든 취임 이후 보다 유리한 입지에서 관계를 풀어나가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도발적 방식으로 관심을 받은 나라는 이스라엘이다. 지난달 말 이란 핵 과학자 모센 파흐리자데 암살 사건의 배후에 이스라엘이 깊숙이 관여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이란과의 핵합의를 복원하려는 바이든 당선인의 노력을 방해하려는 목적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바이든 당선인은 트럼프 대통령이 탈퇴한 이란 핵합의(JCPOA)를 복원해 이란과의 관계를 개선할 생각을 갖고 있다. 이에 이란과 앙숙 관계인 이스라엘이 파흐리자데를 암살함으로써 바이든의 운신의 폭을 좁혔다는 것이다. 바이든의 정책에 동조함으로써 관계 강화를 모색하는 나라도 있다. 트럼프 재임 중 관계가 소원해진 유럽이 가장 적극적이다. 워싱턴포스트는 “기후변화, 팬데믹 등 다양한 영역에서 미국과 협력이 필요한 유럽은 미국의 새 지도자와 관계 개선의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는 최근 보고서에서 중국이 민주주의 국가에 위협이 된다고 지적했다. 바이든 당선인의 대중 강경노선에 부합하는 내용이다. 나토가 내년 초 열리는 정상회의에 일찌감치 바이든 당선인을 초청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 역시 바이든을 향해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는 4일 기자회견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도 보면서 가능한 한 빠른 시기에 만나자는 것에 (바이든 당선인과 의견이) 일치했다”며 조속히 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침묵하면서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방식도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미국 내 법적 절차가 마무리된 뒤”에야 바이든을 인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북한은 바이든 당선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달 말 바이든 당선인에게 축하를 보냈지만 서방 국가들에 비해서는 보름 이상 늦었다. 이 국가들은 의도적으로 말을 아끼면서 바이든과 탐색전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세계 각국이 각자의 전략에 따라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바이든 당선인이 임기 초반에 외교안보에 쏟을 수 있는 에너지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바이든으로서는 코로나19 대응을 비롯한 국내 정책이 더 시급하다. 그래서 외교안보 정책 우선순위에서 한번 밀리면 다시 앞자리로 가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 느슨해진 한미 동맹을 바이든 행정부에서 신속히 회복하려면 한국도 지금 움직여야 한다. 장택동 국제부장 will71@donga.com}
미국 대선이 끝나고 당락이 결정된 지 열흘이 지났다. 여느 때 같으면 당선인의 비전과 정책, 동정이 주요 외신의 뉴스를 채워야 할 시기이지만 올해는 다르다. 조 바이든 당선인 못지않게 낙선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관련 기사가 많이 생산되는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의 현직 대통령으로서의 통치행위에 대한 것보다는 대선 불복 또는 향후 행보에 관한 소식이 대부분이다. 대선 불복은 오래 이어질 사안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승리하려면 현재 보유한 232명의 선거인단에서 38명 이상을 더 확보해야 하는데 소송, 재검표를 통해 3개 이상의 경합주에서 결과를 뒤집어야 한다. 표 차가 가장 적은 애리조나주도 1만 표 이상 차가 나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이 낮다. 복잡한 미국의 선거제도 때문에 선거인단을 최종 확정하는 과정에서도 크고 작은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대세를 뒤집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의 향후 행보에 대한 뉴스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지속될 것 같다. 그가 자발적으로 정치권을 떠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가 계속 정치를 한다면 2024년 대선 출마를 목표로 할 것이고 이미 상당 부분 준비가 돼 있다고 외신들은 전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대통령이 측근들에게 2024년 대선 재도전 의사를 밝혔으며, 조만간 공식 발표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공화당 전국위원회 위원장의 연임을 지지한다고 밝힌 것, 정치자금 모금단체(PAC)를 설립한 것 등은 공화당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전략으로 분석되고 있다. 대선에 다시 도전하기 위해 우선 ‘야당 지도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의 앞에 꽃길만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인들은 흔히 ‘정치는 움직이는 생물’이라고 하는데, 이전 선거에서 많은 표를 얻었던 정치인이 다음 선거에 도전했다가 초라한 성적을 거둔 사례가 적지 않다. 시간이 흐르면서 민심과 선거 구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재선 연임에 실패한 대통령이 다시 도전해 성공한 사례는 19세기에 한 번 있었을 뿐이다. 통상 정치인들은 ‘전직’이 되는 순간 영향력과 인기가 크게 떨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당분간 미 공화당에서 트럼프를 대체할 인물을 찾기는 어렵다는 게 중평이다. CNN은 “트럼프 대통령은 공화당을 장악한 수준을 넘어 공화당의 유일한 얼굴”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대선에서 그는 7300만 표가 넘는 표를 얻었는데 이는 바이든 당선인이 이번 대선에서 얻은 표(약 7880만 표)를 제외하면 역대 대선 최다 득표다. 그만큼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팬덤은 강력하고, ‘트럼피즘’이란 용어가 고착화될 만큼 탄탄한 브랜드 파워를 갖추고 있다. 이 때문에 민심에 민감한 공화당 정치인들은 트럼프에게 반기를 들기 어렵다. 미국 상원은 공화당이 다수당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공화당이 상원에서 바이든 당선인의 정책과 인사에 제동을 건다면 바이든 당선인은 운신의 폭이 크게 좁아진다. 이는 미국 국내 정책뿐 아니라 외교안보, 무역 등 세계 각국과 연관된 정책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다. 해외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움직임을 계속 주시하는 주요한 이유다.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의 ‘반(反)트럼프’ 전략은 성공했지만, ‘탈(脫)트럼프’ 시대가 오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다.장택동 국제부장 will71@donga.com}
미국 대선이 18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누가 백악관의 주인이 될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필자는 ‘누가 이길까’만큼이나 ‘큰 탈 없이 승자가 결정될까’도 궁금하다. 미국의 앞날에는 이번 대선의 ‘결과’ 못지않게 ‘과정’이 중요할 것이고, 이는 한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방제 국가인 미국의 대선에서는 주별 투표 결과를 바탕으로 선거인단의 과반을 확보하는 후보가 승리한다. 독특하고 복잡한 선거제도를 갖고 있지만 대체로 승자가 결정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개표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대세가 기울면 패자가 ‘승복 선언’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돼 왔다. 하지만 올해는 이런 장면을 기대하기 어렵다. 먼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의 여파로 우편투표가 대폭 늘어났다. 최대 8000만 명이 우편투표를 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미국에서 이런 대규모 우편투표는 처음이다. 미국 언론들도 언제 개표가 완료될지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개표가 완료된 뒤에도 승자가 확정되지 않아 혼란이 이어지는 경우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본인이 졌다는 개표 결과가 나오면 승복하지 않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우편투표는 사기”라고 거듭 주장하는 그가 우편투표를 문제 삼아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외신들은 ‘트럼프의 군대(Army for Trump)’라는 조직이 선봉대를 맡을 것으로 본다. 공화당은 사전투표, 우편투표를 감시하기 위해 이 조직을 통해 수천 명의 자원봉사자를 모집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정 투표의 증거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 주 임무다. 이들은 회원 가입을 ‘입대’, 활동 분야를 ‘전선’이라고 표현하는 등 군대 이미지를 강조한다. 대통령의 장남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는 이 조직 트위터에 올린 동영상에서 “신체 건강한 남녀라면 ‘트럼프의 군대’의 투표 보안 작전에 참여하라”고 독려했다. 뉴욕대 로스쿨 ‘정의를 위한 브레넌센터’ 분석에 따르면 우편투표에서 오류가 발생할 확률은 0.0003∼0.0025%에 불과하다. 이를 적용하면 8000만 명이 우편투표를 해도 최대 2000표 정도의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대선 결과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극히 낮다. 그럼에도 모니터링을 명목으로 인력을 대규모 동원하는 진짜 목적은 투표의 신뢰성에 흠집을 내고 불안감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민주당 측은 주장한다. 포브스는 “트위터에 #ArmyForTrump를 검색하면 트럼프 반대자에 대한 폭력을 부추기는 내용이 많다. 일부 글에선 민주당 인사들을 ‘적’으로 규정한다”고 전했다. 최근 부쩍 부각되고 있는 미국 내 극우 무장세력의 움직임과 이미지가 오버랩된다. 민주주의라는 체제의 핵심은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다. 물론 투·개표에 문제가 있다면 바로잡아야겠지만 대통령을 옹호하는 조직적 세력이 만들어낸 소송을 통해 대통령에게 유리하게 구성된 대법원에서 결과가 뒤집힌다면 수긍하지 못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미국 사회에 극심한 갈등을 불러올 수 있다. 2000년 대선에서 민주당 앨 고어 후보는 플로리다주 투표용지의 문제로 ‘이기고도 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럼에도 대법원이 재검표를 불허하자 “정당보다 국가가 우선”이라며 깨끗이 승복했다. 1960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후보는 0.2%로 패배한 일리노이주에서 재검표를 요구하자는 측근들에게 “그러면 나라가 분열될 것”이라며 거부했다고 한다. 이런 전통이 미국의 선거제도와 민주주의를 지켜온 근간이다. 장택동 국제부장 will71@donga.com}
태국에서 반정부 시위대와 친정부 세력 간에 유혈 충돌이 벌어졌던 2010년 5월 방콕으로 출장을 갔다. 도심은 내전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었다. 시가지 곳곳이 불에 탔고 간간이 총성이 들렸다. 현장에서 만난 ‘레드셔츠’라는 이름의 시위대는 대부분 순박한 모습의 빈민과 농민들이었다. 이들은 친서민 정책을 폈던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지지했다. 중산층이 중심인 ‘옐로셔츠’의 반발과 군부 쿠데타로 탁신 전 총리가 물러난 뒤 양측 간에 쌓여온 갈등이 시위로 표출된 것이다. 결국 정부는 군경을 동원해 강경 진압했다. 91명이 목숨을 잃었다. 최근 태국에서 다시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 7월 중순 시작된 이후 태국 76개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55개 이상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지난달 16일 방콕 도심에서 열린 집회에는 약 2만 명이 모였다. 이들의 핵심 요구는 현 정부의 퇴진, 헌법 개정, 야권 인사에 대한 탄압 중지 등이다. 이전 시위와 비슷한 내용들이다. 하지만 크게 달라진 부분이 있다. 먼저 시위의 주체가 달라졌다. 2010년 시위는 빈민·농민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청년·학생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옐로셔츠’의 자녀들이기도 하다. 특히 그동안 태국 사회에서 ‘금기어’였던 왕실 개혁 요구가 나오고 있다는 점에서 확연하게 구분된다. 태국에서 왕실은 성역(聖域)이다. 태국은 입헌군주제이지만 왕실의 권위가 다른 입헌군주제 국가보다 강해 국왕은 상당한 권한을 갖고 있다. 왕실모독죄는 최고 징역 15년형에 처해지는 중죄다. 또 70년간 재위하다 2016년 타계한 푸미폰 아둔야뎃 전 국왕은 국민의 신망을 얻었다. 눈에 띄지 않게 영향력을 행사해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고 국민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대가 바뀌고 새 국왕이 즉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태국의 젊은 세대는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얻고 교환한다. 기존의 질서와 권위를 이전 세대만큼 중시하지 않으며, 공정성에 대한 기대가 높다. 이들이 현실에 눈을 뜨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해 3월 총선이었다. 730만 명의 25세 이하 청년들이 생애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했다. 신생 정당 퓨처포워드당은 쿠데타 유산 근절, 투명한 정부 등을 내세워 청년세대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고 일약 원내 제3당이 됐다. 하지만 군사정권의 압박 속에서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11월 타나톤 쯩룽르앙낏 퓨처포워드당 대표의 의원직을 박탈했고, 올 2월에는 당을 해산시켰다. 청년세대의 깊은 실망은 정부와 군부를 넘어 왕실을 향했다. 미국 외교협회(CFR) 조슈아 컬랜칙 연구원에 따르면 “마하 와치랄롱꼰 현 국왕은 태국의 정치, 군사, 경제 영역에서 영향력 확대를 추진하면서 현실 정치의 중심에 서려고 한다”는 점에서다. 또한 “그는 왕세자 때부터 잦은 외유와 스캔들로 인해 전 국왕이 가졌던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고 컬랜칙은 지적했다. 애초에 각 사회에 성역이 생기게 된 것은 지켜줘야 할 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가치가 흔들리고 역할이 변질되면 도전을 받게 된다. 태국 왕실은 입헌군주제 체제 속에서 국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면서 존중을 받았다. 여전히 태국에서는 왕실에 대한 외경심이 강하지만 적어도 이번 시위를 통해 왕실이 사회적 논의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됐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분석했다. 그렇게 성역의 견고한 벽은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 같다.장택동 국제부장 will71@donga.com}
“이번엔 누가 이길 것 같아?” 요즘 자주 듣는 질문이다. 11월 3일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민주당 조 바이든 후보 중에 누가 당선될지를 묻는 것이다. 필자는 대체로 “지금 투표를 한다면 바이든 후보가 유리하겠지만 앞으로 석 달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고 답한다. ‘잘 모르겠다’는 말을 에둘러서 표현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선거에서 3개월은 당락이 바뀔 수 있는 긴 시간이다. 한 예로 2016년 미국 대선 약 3개월 전이었던 8월 7일 뉴욕타임스는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당선 확률은 83%, 트럼프 후보의 당선 확률은 17%라고 보도했다. 그래서 최근 여론조사에서 바이든 후보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여유 있게 앞서고 있어도 승패를 예단하기는 이르다. 트럼프가 결국 역전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들은 바이든 후보의 약점들과 함께 현직 대통령 프리미엄, 트럼프 대통령 개인의 매력 등을 이유로 꼽는다. 2016년 대선 당시 트럼프 후보는 유권자들에게 ‘나는 기존 정치인들과 다르다’는 점을 어필했고 승리의 중요한 요인이 됐다. 대선 뒤 USA투데이가 인터뷰한 트럼프 지지자들은 “그는 보통 사람들이 쓰는 언어로 명확하게 이야기한다”, “그는 사업을 어떻게 해야 하고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안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남은 기간 동안 자신의 이런 장점을 최대한 부각하고, 자신이 갖고 있는 자산을 총동원할 것이다. 판세를 뒤흔들 만한 이른바 ‘10월의 서프라이즈’를 꺼낼 가능성도 충분하다. 코로나19 백신이 개발될 수도 있고, 침체된 경기가 급반등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넘기 어려운 벽이 있다.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4년 전에는 그의 신선함이 약점을 가려줬겠지만 유권자들은 이제 그가 누구인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 안다. 그동안의 국정운영에 대한 평가도 반영될 것이다. 그래서 유권자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면 선거에서 이기기 어렵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무너진 결정적 계기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대한 대응이었다. 지난달 워싱턴포스트(WP)-ABC 방송 여론조사에서 코로나19 대응에서 트럼프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34%에 불과했다. 그는 마스크를 써야 할지, 봉쇄 조치를 취할지, 언제 경제활동을 재개해야 할지 등을 놓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 비난의 화살은 중국과 다른 관료, 주지사들에게 돌리고 책임은 피했다. ‘살균제 인체 주입’ 발언은 전문가들을 경악하게 했다. 정부와 과학에 대한 시민들의 믿음은 작아졌고,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실망하는 목소리는 커졌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는 포린어페어스에 쓴 글에서 각 나라의 코로나19 방역 성패는 국력, 사회적 신뢰, 리더십 등 세 가지 요소에 의해서 갈렸다고 분석했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방역 실패는 신뢰를 잃고 극단으로 갈린 사회, 리더십을 잃은 무능한 지도자 때문이라고 그는 질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가장 공정해야 할 대선 관리를 놓고도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갑자기 ‘대선 불복 가능성’을 언급하더니 ‘대선 연기론’까지 꺼내 들어서 공화당 의원들조차 아연실색하도록 만들었다. 민심은 쉽게 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심축은 무겁다. 그래서 선거 결과를 보면 정치권의 예상을 뛰어넘는 냉철하고 엄격한 평가가 담겨 있을 때가 많다. 한번 무너진 신뢰를 다시 얻으려면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국민의 판단이 대선 결과에 고스란히 반영될 것이다.장택동 국제부장 will71@donga.com}
서방 국가의 식민통치를 거쳐 독립한 뒤에는 장기 독재를 겪고, 이후 정치적 사회적 혼란과 빈곤의 악순환. 여러 아프리카 국가가 경험하고 있는 현대사 스토리다. 아프리카 동남부에 위치한 말라위도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 시기를 거쳐 1964년 독립한 뒤 30년 동안 헤이스팅스 카무주 반다 전 대통령이 장기 집권했다. 1994년 다당제가 도입된 뒤에도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이어졌다. 1인당 국민소득은 389달러(2018년 세계은행·WB 집계 기준)로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발간하는 ‘월드팩트북’은 “말라위 경제는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및 외국에서 지원하는 구호자금에 의존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최근 이 나라에서 세계가 주목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 지난달 23일 열린 대통령선거 재선거에서 야당 라자루스 차퀘라 후보가 당선된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부정선거가 인정돼 재선거가 실시된 것은 2017년 케냐 이후 두 번째이고, 재선거에서 야당 후보가 승리해 대통령이 바뀐 것은 아프리카 사상 처음이다. 여당 후보이자 현직 대통령이었던 피터 무타리카가 민주적 절차를 존중한 결과였을까. 물론 아니다. 집권세력의 압박을 이겨낸 사법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지난해 5월 대선에서 무타리카가 이겼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개표 조작 등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됐다. 몇 달간 시위가 이어졌고, 올 2월 헌법재판소는 선거무효 결정을 내렸다. 이어 5월 앤드루 니렌다 대법원장의 주도 아래 대법원은 헌재의 결정이 타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궁지에 몰린 무타리카 측은 재선거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사법부를 흔들었다. 투표를 불과 11일 앞둔 지난달 12일 정부는 니렌다 대법원장에게 “572일 동안 휴가를 가라”고 명령했다. 26년간의 공직생활 동안 쌓인 연차휴가를 모두 쓰라고 한 것인데, 니렌다 대법원장은 이 휴가를 다 쓰기 전에 정년퇴임을 맞게 되므로 사실상 물러나라는 것이었다.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아프리카에서 법관들은 위협과 압박, 회유에 종종 마주치고 있기 때문에 니렌다 대법원장이 정권에 투항할 것으로 보였다”고 보도했다. 2017년 케냐에서는 법원이 재선거 일정을 논의하기로 한 전날 법관의 차량이 총격을 당했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치러진 재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이 승리했고 이후에도 법원에 대한 탄압이 진행됐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전했다. 하지만 니렌다 대법원장은 정부의 명령을 거부했다. 같은 이유로 사직 권고를 받았던 에드워드 트웨아 대법관도 역시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법조계와 시민단체, 학계 인사들은 법원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평화로운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선진국에서도 사법부의 정치적 독립은 중요하다. 미국 대법원은 최근 불법체류 청소년 추방 유예(DACA·다카) 제도 폐지 등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하던 정책에 제동을 거는 판결을 잇달아 내렸다. 미국 대법관은 보수성향 6명, 진보성향 3명으로 구성돼 있다. 성향대로 판결한다면 보수적 행정부의 정책이 뒤집힐 일이 없겠지만, 일부 보수성향 대법관은 사안에 따라 ‘배신자’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소신대로 판결을 한다. 이를 통해 행정부의 폭주를 제어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사람이 아니라 법이 통치한다는 법치(法治)다. 이를 위해선 사법부가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돼야 한다. 현실에서 이를 지켜내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그래서 그 가치는 더욱 소중하다. 기본적인 원칙이 지켜지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 장택동 국제부장 will71@donga.com}
미국에서 연수 중이던 2018년 초등학생 아들의 학교일정표를 보니 1월 15일이 ‘빨간 날’(공휴일)이었다. 무슨 날인가 싶어서 들여다보니 ‘마틴 루서 킹 데이’였다. 킹 목사의 생일인 1월 15일을 기리기 위해 미국에서는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휴일로 정했는데 2018년에는 마침 1월 셋째 주 월요일이 15일이었다. 킹 목사가 미국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생일을 공휴일로 기념할 정도인지는 몰랐다. 미국에서 탄신일을 공휴일로 지정한 인물로는 초대 대통령이자 국부로 추앙받는 조지 워싱턴, 미국인 시각에서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인물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있다. 킹 목사가 미국에서 이들과 같은 반열에 올랐다고 볼 수 있다. 킹 목사의 가장 큰 업적은 물론 미국 흑인들의 인권을 증진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1955년 버스 내 인종차별 문제를 계기로 킹 목사는 흑인 사회의 힘을 모아 흑백분리법 폐지 운동을 벌였고 성공했다. ‘버스 안 타기 운동’ 등 비폭력적인 방법을 통해 이뤄냈기 때문에 더욱 값진 성과였다. 그래서 백인들도 킹 목사를 인정하게 된 것이다. 요즘 미국에서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거세다. 흑인 조지 플로이드 씨를 백인 경찰이 무릎으로 짓누르는 동영상을 봤을 때 먼 외국에서 벌어진 일인데도 소름이 끼쳤다. 9분 가까이 목을 눌린 플로이드 씨는 의식이 가물거리는 상태에서 “숨을 쉴 수 없다”며 웅얼거렸고 주변 시민들이 항의했지만 단호한 표정의 경찰은 꿈쩍하지 않았다. 흑인들의 가슴에는 이미 분노가 쌓인 상태였다. 최근 미국 언론에 보도된 사건만 보더라도 조깅을 하던 흑인 청년을 백인이 총으로 쏘고, 교통신호를 위반했다고 해서 경찰이 흑인 청년에게 총을 겨누는 일이 있었다. 미국 20대 흑인 남성의 사망 원인 2위가 경찰의 무력 사용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최근 미국을 휩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에 흑인들이 집중 피해를 입었다는 것은 그만큼 미국 내에서 흑인들이 먹고살기 어렵다는 점을 반영한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기도, 제때 치료를 받기도 어려웠다. 2018년 기준 흑인 가구의 평균 소득은 백인 가구의 3분의 2 수준이다. 학사 이상의 학위를 가진 흑인 비율은 미국 전체 평균보다 10%포인트 낮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불을 끄기는커녕 거듭 ‘강경 진압’을 외치고 시위대를 모욕하면서 분노를 부추겼다. 2016년 대선에서 흑인 표의 9%밖에 얻지 못한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11월 대선에서 흑인 표는 포기하고 백인 표를 모으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전략이 성공할 것 같지는 않지만. 이런 이유들로 흑인들이 분노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시위를 통해 표출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렇지만 경찰차를 불태우고, 경찰관을 향해 총까지 쏘는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폭력시위를 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겠지만 그렇다고 ‘소수의 일탈 행위일 뿐’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는 없다. 그 일부분이 전체 시위의 성격을 규정짓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응집된 민심의 힘으로 입법이나 행정을 통해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 궁극적으로는 투표를 통해서 뜻을 관철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다. 폭력은 시민들의 뜻을 모으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다행히 시위 양상이 점차 안정화되면서 폭력은 줄어들고 있다.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는 것은 폭력을 증폭시킬 뿐이고, 별조차 없는 밤하늘에 깊은 어둠을 더할 뿐”이라는 킹 목사의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장택동 국제부장 will71@donga.com}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되면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물품이 ‘마스크’다. 영국 가디언은 마스크를 “전 세계에서 가장 탐을 내는 물건”이라고 표현했다. 품귀 현상이 빚어지자 각국이 체면을 불고하고 ‘마스크 쟁탈전’을 벌이기도 했을 정도다. 코로나19 확산 초기부터 모든 나라에서 마스크가 각광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미국과 유럽 등 서구권에서는 “아프지 않은 한 마스크를 살 필요가 없다”(3월 6일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은 비생산적인 일”(3월 20일 시베트 은디아예 프랑스 정부 대변인)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마스크 착용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마스크는 병에 걸린 사람이 쓰는 것이라는 인식, 시민들이 마스크를 쓰면 의료진이 사용할 마스크가 부족할 것이라는 현실, 마스크가 코로나19를 막는 데 도움이 될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이제 유럽에서는 사정이 많이 바뀌어서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등은 대중교통 등을 이용할 때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하기로 했다. 포르투갈과 벨기에는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된 장소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에게 벌금까지 물린다. 유럽 국가들이 마스크의 필요성을 받아들인 것은 경제활동 재개와 연관이 깊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사회적 봉쇄조치를 취하자 경제난이 심각해졌다. 봉쇄를 풀어서 경제를 살려야 하는데 아직 백신이나 확실한 치료제가 없다. 전장에 나가기 위한 최소한의 방패로서 마스크를 선택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정작 세계에서 코로나19의 확산이 가장 심각한 미국에서는 다른 나라들과 상반된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조속한 경제활동 재개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고, 오히려 봉쇄를 유지하면서 사회적 거리 두기를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스크를 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개인적인 기호와 신념에 따른 차이도 있겠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찬반 여부가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게 미국 언론들의 분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경제 회복을 위해 조속히 봉쇄령을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나는 마스크를 쓰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실제 그는 공식석상에서 한 번도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자들에게 ‘마스크는 민주당 사람들이나 쓰는 것’이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뉴욕매거진은 평가했다. 이렇다 보니 트럼프와 공화당을 지지하고 조속한 경제 재개에 찬성하는 보수 성향의 시민 중에는 마스크 착용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고, 트럼프에 반대하는 민주당 지지자들은 마스크 착용에 찬성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사람의 당파를 가리지 않고 옮겨 간다. 그래서 정치적 성향을 기준으로 마스크를 쓸지 여부를 결정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데버라 벅스 미 백악관 코로나19 태스크포스(TF) 조정관의 말은 트럼프 지지자들도 귀담아들어야 할 것 같다. 그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봉쇄 해제 시위를 벌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너무나도 걱정스럽다. 시위 참가자가 집에 돌아가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감염시킨다면 평생을 죄책감을 느끼며 살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더욱이 정작 트럼프 대통령은 마스크 착용 여부를 중요한 문제로 여기고 있는 것 같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 재선 캠프는 코로나 걱정이 많은 노령층 표심을 공략하기 위해 빨간색 천으로 ‘트럼프표’ 마스크를 만들어 배포할 계획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이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 본인도 사람들이 안 보는 곳에서는 마스크를 쓰기도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동안 트럼프에 대한 지지를 표현하기 위해 마스크를 안 쓴 사람만 손해를 보게 될 수도 있겠다. 장택동 국제부장 will71@donga.com}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가장 취약할 것 같은 아프리카는 비교적 잠잠하다. AFP통신에 따르면 9일 현재 아프리카의 전체 확진자는 1만1000여 명으로 전 세계 확진자의 1%도 채 되지 않는다. 아프리카가 코로나19를 잘 극복하고 있는 것일까. 외신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코로나19에 강력 대응했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한다. 일부 국가는 코로나19 확산 초기부터 확진자가 많은 국가에 대한 입국 금지 등 강력한 조치를 취했고, 코로나19 검사 시설도 크게 늘렸다. 아프리카가 젊은 대륙이라는 점도 코로나19 대응에 유리한 측면이다. 아프리카의 중위연령은 19.7세로 유럽(42.5세)과 대비된다. 그럼에도 검사 역량이 부족해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을 뿐 실제 확진자와 사망자는 훨씬 많고, 앞으로도 급속히 늘어날 것이라는 데에는 별 이견이 없다. 톨베르트 니엔스와 존스홉킨스대 보건대학원 선임연구원은 세계경제포럼(WEF) 홈페이지에 게재한 글에서 “코로나19는 아프리카에서 터질 때만 기다리고 있는 시한폭탄”이라고 우려했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경제적 타격과 식량난도 심각한 문제다. 빈국 주민들에게는 생사가 달라질 수 있는 일이다. 세계식량계획(WFP)에 따르면 현재 49개국(아프리카 26개국 포함)에서 약 2억1200만 명이 식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데 코로나19의 확산은 ‘파괴적이고 장기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유엔개발계획(UNDP) 아프리카 담당 사무차장인 아후나 에지아콘와는 AP통신에 “아프리카는 경제와 생계가 완전히 붕괴될 위기를 맞고 있다”고 경고했다. 여기까지는 에볼라 등 다른 감염병이 창궐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아프리카를 도와줄 나라가 없어서 홀로 코로나19와 맞서야 한다는 점이다. 중남미와 중동, 아시아 빈국들도 사정이 비슷하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더힐은 “과거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아프리카를 지원했던 나라들이 지금은 자기 나라의 전염병과 싸우느라 여력이 없다”고 분석했다. 대표적인 선진국인 주요 7개국(G7), 즉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일본의 확진자는 총 88만여 명으로 전 세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해외원조 예산을 줄인 데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코로나19 환자가 발생하면서 다른 나라를 돌아볼 여력이 더 없어진 것 같다. 최근 미 정부가 마련한 2조2000억 달러(약 2680조 원) 규모의 경기부양책 가운데 해외원조 예산은 11억5000만 달러였다. 워싱턴포스트는 “통상 연방정부 지출의 1% 안팎을 해외원조에 배정하는데 이번에는 0.05%에 그쳤다”고 지적했다. 거대한 위기 앞에서 자기 나라, 자기 지역, 자기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지구촌은 더 어려운 국가와 지역, 사람들을 돌아봐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다. ‘공존’과 ‘연대’라는 보편적 가치를 위한 일이기도 하고, 현실적으로도 필요한 일이다. 한 지역에라도 코로나19가 남아 있다면 다른 지역으로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훗날 코로나19 사태는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까. ‘지구촌은 협력을 통해 위기를 극복했다’고 평가될 수도 있고, ‘고립주의 흐름 속에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고 남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 그 기로에 서 있다. 장택동 국제부장 will71@donga.com}
▼▼▼““격동의 역사속 저널리즘 견인” 아사히신문▼▼▼창간 100주년, 축하드립니다. 동아일보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 한국 저널리즘을 견인하고,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보도를 통해 동아시아 평화를 희구하고, 국제사회의 안정과 실현, 경제와 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해 왔습니다. 아사히신문과는 뜻을 함께하며, 1987년 이후 기자부터 사장에 이르기까지 상호 교류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미디어 격변의 시기이지만 양 사 협력을 깊게 하고, 신문과 디지털, 방송 등을 축으로 하는 종합 미디어기업으로서 발전해 나갈 것을 확신합니다. 와타나베 마사타카(渡邊雅隆) 아사히신문 사장 ▼▼▼“자유독립언론 위한 노력 감사” 뉴욕타임스▼▼▼동아일보 임직원 여러분, 지난 한 세기 동안 독자를 위해 ‘세상을 향한 투명한 창문’ 역할을 수행한 점을 축하드립니다. 동아일보가 탄생한 지 100년이 되었습니다. 현재 언론은 심오한 변화와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 독립적이고 용기 있고 신뢰받는 언론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유독립언론 구현을 위한 귀사의 노력에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100주년이란 귀중한 이정표를 통과하는 동아일보에 따뜻한 축하의 말씀을 전합니다. 다가오는 한 세기에도 계속 진실을 추구하고 독자의 삶을 풍요롭게 하시길 기원합니다. 아서 그레그 설즈버거 뉴욕타임스 발행인 ▼▼▼“100년 품격으로 새 역사 기대” 런민일보▼▼▼ 동아일보의 창간 100주년에 런민(人民)일보 전체 직원을 대표해 김재호 사장님과 동아일보 전체 직원들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뜻을 전합니다.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매체 가운데 하나인 동아일보는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동아일보는 중국과 한국의 민심이 서로 통하도록 추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00년의 품격으로 새로운 역사의 시작점에 선 동아일보와 런민일보가 계속 교류를 강화하고 협력을 심화하기를 희망합니다. 중한 관계가 지속적으로 건강하게 발전하는 데 함께 공헌하기를 희망합니다. 동아일보의 모든 사업이 왕성하게 발전하고 나날이 번성하고 있는 것을 축하합니다. 리바오산(李寶善) 런민일보 사장 ▼▼▼“100년의 시간, ‘퀄리티 저널리즘’을 제공한 증거” 스트레이츠타임스▼▼▼ 100년이라는 시간은 조직의 역사에 있어서 긴 시간입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신문업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동아의 100주년은 중요한 기념비적 사건일 뿐 아니라 독자들이 콘텐츠에서 찾는 지속적 가치에 대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신문의 편집국은 기술 플랫폼, 독자, 수익에 대한 경쟁부터 가짜뉴스의 확산까지 여러 가지 도전 과제들의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항상 최고의 대응은 독자들이 가치를 알아보고 기꺼이 사서 볼 수 있도록 질 높은 ‘퀄리티 저널리즘’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동아일보 10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는 축하를 받을만한 업적입니다. 앞으로도 동아일보가 오랫동안 독자와 한국 사회에 기여하기를 기원합니다.워런 페르난데스 스트레이츠타임스 편집국장}
미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무서운 확산세가 꺾이지 않고 있다. 미국 내 확진자 수는 24일 4만6168명으로 전날보다 1만1098명이나 늘어났다. 하루에 1만 명이 넘는 확진자가 발생한 것은 처음이다. 확산세가 워낙 빠르다 보니 의료 장비가 부족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문재인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의료장비 지원을 요청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안면 마스크와 인공호흡기의 세계 시장은 미쳤다. 우리는 주(州)들이 장비를 갖도록 돕고 있지만 쉽지 않다”고 의료장비 확보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코로나19를 진단할 장비도 부족한 상황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23일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취해진 ‘사회적 거리 두기’ 조치들을 완화하겠다는 뜻을 밝혀 그 방향과 강도, 시기의 적절성을 둘러싼 논쟁이 불붙고 있다. 섣부른 통제 완화는 걷잡을 수 없는 코로나19 확산과 치명률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료 전문가들의 경고가 나오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특유의 밀어붙이기로 경제활동 정상화 시도를 강행할 태세다. 트럼프 대통령은 23일 백악관 코로나19 정례브리핑에서 “곧 경제활동을 재개할 것이며 이는 꽤 빨리 이뤄질 것”이라며 사회적 거리 두기 가이드라인의 기한이 끝나는 이달 말 제한 조치들을 재검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문제 자체보다 치료법이 상황을 더 악화시키도록 하지는 않겠다”고 거듭 강조하며 “세계 1위인 미국 경제가 멈추게 놔둘 수는 없다” “미국 내 1억6000만 개의 일자리 중 상당수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우리는 그동안 사회적 거리 두기와 관련된 생활수칙을 학습해왔다”며 “통제를 완화하더라도 이제는 다들 잘할 수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코로나19가 크게 확산되지 않고 있는 지역과 도시를 나열하며 “경제활동을 중단하지 않고도 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는 각 주정부가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강력한 통제 조치들을 이어가고 있는 현실과는 거꾸로 가는 정책 방향이다. 버지니아주는 여름방학을 포함한 8월 말까지 모든 학교의 휴교령을 내리는 것은 물론이고 모든 식당과 바, 체육관 같은 공공시설의 운영을 중지시켰다. 미시간, 인디애나, 오리건주 등이 필수 업무가 아니면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자택 대피령’ 발령에 속속 동참했고, 사우스캐롤라이나주는 3명 이상의 모임을 금지했다. 세계적으로는 15억 명 이상이 격리 상태라고 AFP통신은 추산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조언해온 의료 전문가들은 통제 완화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을 정상화하는 데 안달이 나 있다”고 전했다. 미국 내 감염병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앤서니 파우치 국립보건원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 소장은 이날 브리핑에 참석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뜻에 반대한다는 간접적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사회적 거리 두기 관련 통제에 대한 재검토에 착수한 것은 경제 상황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제임스 불러드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미국 실업률이 2분기(4∼6월)에 30%로 치솟고 국내총생산(GDP)이 50% 하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사망 걱정하다가 굶어죽을 판”이라는 말이 나온다. 사회적 거리 두기의 효과에 대한 논쟁도 시작됐다. 토머스 프리드먼 뉴욕타임스(NYT) 칼럼니스트는 이날 기명 칼럼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에 반대하는 주장들을 소개하며 “논쟁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이 주장들을 공유한다”고 밝혔다. 존 이어니디스 스탠퍼드대 메타연구혁신센터 박사는 “코로나19 사망률이 1% 또는 그 미만이라면 엄청난 사회적 금융적 결과를 초래할 세계 폐쇄는 완전히 비이성적”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재무부 장관을 지낸 로런스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경제학)는 “혼란의 대부분은 코로나바이러스가 초래한 것으로, 정책 대응에 의한 게 아니다”라며 “현 단계에서 이것을 달러 대 생명의 문제로 가져가야 할 필요가 없다”고 반박했다. 장택동 기자 will71@donga.com}
기억도 어렴풋한 오래전 일이다. 비행기가 큰 건물에 부딪치면서 화염이 일고 건물이 무너지는 장면이 TV에 나왔다. ‘영화 광고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가 실제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에도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9·11테러’ 한 달 뒤인 2001년 10월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다. 알카에다를 비호하고 오사마 빈라덴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그렇게 시작된 전쟁은 미군의 타깃이던 탈레반 정권이 무너지고(2001년 11월), 빈라덴이 사살(2011년 5월)된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피해는 불어났다. 알자지라 방송과 미 브라운대 왓슨국제공공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사망자만 미군·연합군 4000여 명, 아프간 군경 6만4000여 명, 탈레반 및 무장세력 4만2000여 명에 달한다. 민간인 4만3000여 명도 희생됐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미국은 2조 달러 이상을 쏟아부었다. 18년이 넘도록 이어졌던 전쟁을 끝내는 평화협상이 타결됐다는 소식을 들으니 반가웠다. 하지만 ‘아프간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합의’라는 이름의 합의문의 내용을 살펴보니 실망만 남았다. 합의의 주된 내용은 미군·연합군은 14개월 내 철군하고, 아프간 정부와 탈레반은 3월 10일까지 서로 포로를 석방한 뒤 협상을 시작하며, 탈레반은 알카에다를 비롯한 테러단체 지원을 중단한다는 것이다. 가장 큰 아이러니는 아프간 정부가 협상 과정에서 배제되고 미국이 탈레반과 협상을 타결해 버린 것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이번 협상은 탈레반에 적법하게 선출된 아프간 정부를 인정하도록 요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분쟁 전문 웹사이트 ‘롱워저널(The long war journal)’에 따르면 현재 아프간 지역 중 약 33%는 정부가, 19%는 탈레반이 통제하고 있고 나머지 48%는 양측이 경합하고 있다. 미군이 주둔 중인 상황에서도 양측의 힘겨루기가 치열한데 미군이 떠난 뒤 싸움이 끝날 리 만무하다. 2011∼2013년 아프간 주둔 미군과 연합군 사령관을 지낸 존 앨런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소장은 5일 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미군이 철수하면 아프간 정부의 권위와 힘은 확연하게 줄어들 것”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아프간 내부의 평화협상이 잘 진행될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이번 협상은 평화협상이 아니라 미국의 철군협상이었을 뿐이라는 비판이 계속 나오고 있다. 예상대로 아프간 내부는 삐걱거리고 있다. 아프간 정부는 탈레반 포로 석방을 거부했고, 탈레반은 아프간 정부를 공격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혼란을 틈타 한동안 잠잠했던 이슬람국가(IS)가 다시 아프간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아프간 정부는 오랫동안 미국의 지원을 받아왔지만 자립에 실패했고 내분까지 심각해 탈레반과 협상을 할 여력이 없다. 9일에는 지난해 9월 치러진 대선에서 2위를 기록한 압둘라 압둘라 최고행정관이 결과에 불복하면서 1위인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과 각각 대통령 취임식을 갖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아프간 내부의 분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더욱이 그 결과로 탈레반이 다시 집권한다면 아프간의 시계는 2001년 10월로 되돌아간다. 특히 탈레반 정권하에서 심하게 핍박을 받았던 아프간의 여성들은 벌써부터 걱정이 크다. 미국이 세계의 경찰이던 시대는 지났다고 하지만 아프간을 공격한 이후 벌어진 일, 특히 미군과 탈레반 간의 전쟁에서 수만 명의 아프간 시민이 목숨을 잃은 일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미국이 2001년 아프간을 공격할 당시의 작전명이기도 한 ‘항구적 자유(Enduring freedom)’가 아프간에 정착되려면 아직 미국이 필요해 보인다. 장택동 국제부장 will7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