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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서울중앙지법 558호 법정. 원고석에는 한모 씨(85)가 ‘6·25 국가유공자’라고 적힌 모자를 눌러쓰고 손을 가늘게 떨며 앉아 있었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에 포로로 잡힌 한 씨는 1953년 정전이 됐지만 돌아올 수 없었다. 평안남도 탄광에서 북한 내무성 건설대 소속으로 33개월간 강제노역을 했다. 50년간 국군포로라고 감시를 당하며 광부로 비참하게 살던 한 씨는 2001년 탈북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2016년 10월 다른 국군포로 노모 씨(90)와 함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상대로 체불임금과 위자료를 포함해 1인당 2100만 원씩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날 법정 피고석은 텅 비어 있었다. ▷이는 김정은을 상대로 한 국내 첫 손해배상 청구소송이다. 한 씨는 “돈 몇 푼 받자고 소송을 한 게 아니다. 국군포로 몇만 명이 북한에 존재한다”며 남도, 북도 외면한 국군포로 송환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호소했다. 김현 전 대한변호사협회장을 비롯한 변호인단은 승소한다면 국내에 있는 북한 재산을 배상금으로 달라고 요청할 계획이다. 한국 법원에는 북한 영상을 사용하고 낸 저작권료가 20억 원 정도 공탁돼 있다. ▷북한의 인권범죄에 대한 형사처벌은 현재로선 사실상 집행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개인이 피해 구제를 위한 민사소송에 나서면서 북한에 상당한 압박이 되고 있다. 북한에 여행을 갔다가 1년 넘게 억류됐던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 2017년 6월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으나 곧바로 숨졌다. 이듬해 그의 가족은 북한을 상대로 소송을 해 5억 달러(약 5800억 원)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아 냈다. ▷물론 북한은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웜비어 가족은 미국 정부가 압류한 북한 선박(와이즈 어니스트)의 소유권을 주장해 이를 매각했다. 스위스 계좌, 독일의 호스텔 등 세계 곳곳 북한의 재산을 찾아내 응징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앞서 2015년에도 미국 법원은 북한 인권범죄에 징벌적 손해배상금을 물린 적이 있다. 탈북자를 돕다 북한에 납치돼 사망한 김동식 목사의 유족이 북한을 상대로 소송을 냈고 3억3000만 달러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미국 법정에서 웜비어의 어머니는 “우리는 이제 무서울 것이 없다. 북한이 한 짓에 대해 절대 침묵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납북자 가족들이 가족을 되찾으려는 절박한 싸움을 시작하면서 오히려 북한이 두려움을 느끼고 침묵하는 것 같다.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생명과 권리를 소중히 여기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잠시 퇴보하는 듯해도, 어떤 독재자도 그 흐름을 거스르진 못했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사교육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고, 가장 비싼 상품은 상위권 학생을 대상으로 한 의대 진학 코스다. 최근 A기숙학원이 경기 이천시에 재수생을 위한 기숙학원 의대관을 신설했는데 매달 330만 원이라는 비용에도 정원(784명)이 조기 마감됐다. 2020학년도 정시 전형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오로지 의대를 목표로 일찌감치 재수를 선택한 것이다. 의학전문대학원이 속속 의대로 전환하면서 2021학년도 의대 입학 정원이 2977명으로 역대 최대로 늘어나게 되자 의대 열풍이 과열되는 양상이다. ▷상위권 학생의 의대 쏠림 현상은 2000년대 들어 유별나게 심해졌다. 의사처럼 보수, 안정성을 고루 갖춘 직업이 드물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인구 1000명당 임상 의사 수는 한의사를 제외하고 1.9명.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인 3.3명의 57% 수준이다. 진료수가는 낮지만 1인당 진료 횟수가 많아 적정 수익이 보장되는 셈이다.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라 사회적 존경도 따라 온다. ▷수능 공부 일년 더해서 평생 직업을 얻을 수 있다면 개인으로선 합리적 선택일지 모른다. 그런데 이런 선택이 모여 사회적으로는 인적 자원의 배분을 왜곡하는 것이 문제다. 똑똑한 인재들이 기초과학·공학자가 아닌 의사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닥터헬기를 타고 중증외상환자를 치료하거나 응급실을 지키려는 이는 많지 않다. 돈 되는 전공, 수도권에 의사가 몰리면서 응급의학과·외과 등 필수의료 분야와 지방의 의사 부족 현상이 심각하다. 바이오·뇌과학 등 신산업에 진출하는 의사도 턱없이 적다. ▷‘남편에겐 생명을 살리는 일이 자신의 모든 소중한 것들을 희생해서라도 해낼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됐어요.’ 설 연휴기간 과로로 순직한 고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의 부인 민영주 씨가 지난해 동아일보에 보내온 편지다. 고 윤 센터장의 가족이 내내 겪었을 내적 고통이 엿보인다. 의사가 헌신적인 영웅이 되기를 요구하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고 생명을 살리는 본업과 멀어진 의사를 더 자주 만나는 현실이 정상은 아니다. ▷지난해 미국 갤럽이 가장 신뢰받는 직업을 조사한 결과, 간호사 의사 약사 순이었다. 이 순위는 17년간 거의 변동이 없다. 2016년 인하대가 직업의 가치를 존경도·신뢰도 등 척도로 평가했더니 한국에선 소방관이 1위, 환경미화원이 2위였다. 의사는 그 다음이었다. 20년 전인 1996년에는 의사가 1위였다. 의대 진학 열풍은 뜨거운데 사회적인 존경은 식어가고 있다. 업(業)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의사를 만나기 힘든 것이 그 이유일 것 같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만 18세의 약 10%, 고3 학생 5만 명이 4월 총선에서 처음 투표권을 행사한다.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지지하는 선거운동도 할 수 있다. 만 18세 선거권, 언젠가 가야 할 길이라고 본다. 문제는 아무런 준비 없는 교실에 정치가 덜컥 들어왔다는 점이다. 척박한 시민교육의 풍토 속에서 교실이 겪을 후유증을 예고한 사건이 지난해 있었다. 지난해 10월 부산 A고교 교사는 조국 가족 의혹을 수사하던 검찰을 비판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글을 인용한 중간고사 문제를 출제했다. ‘보아라 파국이다… 바꾸라 정치검찰’이란 지문을 제시하고 이와 관련된 인물을 고르도록 했다. 정답은 조국과 윤석열. 이보다 한 달 앞서 B고교 교사는 수업 중 정치적인 발언이 문제가 됐다. “문재인 정부가 선전 효과를 노리고 대법원 판결에서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 손을 들어줬다” 등의 발언이 녹취돼 공개된 것이다. 특별감사에 나섰던 부산시교육청은 최근 두 교사를 징계하기로 결정했다. ‘수업과 평가’라는 교사 본연의 업무에서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지 않아 징계를 받는 첫 사례라고 한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전국 시도교육청이 정치 편향 교육을 한 교사를 징계한 선례를 찾을 수 없었다”며 “법률 자문 등 철저한 법적 검토를 거쳐 징계를 결정했다”고 했다. 이번 결정은 만 18세 선거권으로 고3 교실의 정치화, 이념화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나와 주목된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우리 사회가 갈수록 교사의 정치적 발언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지고 있다”며 “좌우를 넘어 학교 내 갈등을 불러올 이런 사건의 재발을 막으려면 징계가 불가피하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고 했다. A고교 교사 징계의 근거는 공교육 정상화 및 선행학습금지법이다. 이 법은 지필평가, 수행평가 등 학교 시험에서 학생이 배운 교육과정의 범위와 수준을 벗어난 내용을 출제·평가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수업에서 물의를 빚은 B고교 교사는 ‘교육은 정치적 파당적 또는 개인적 편견을 전파하는 방편으로 이용돼선 안 된다’는 교육기본법을 위반한 것으로 봤다. 4월 총선을 앞둔 교육계에 경종을 울린 셈이다. 그러나 교사의 정치적 편향성이 학생의 후보자 선택과 직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후 징계보다는 사전 예방이 중요하다. 2015년 일본은 선거 연령을 만 18세 이하로 내리면서 1년의 유예기간을 뒀다. 그동안 문부과학성은 선거교육 교재를 배포하고 학생 정치활동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교내 수업이나 동아리 활동을 이용한 정치활동은 금지했고 방과 후나 휴일에 학교 밖에서 실시하는 정치활동은 허용했다. 선거법처럼 연령 제한이 있는 국적법, 아동복지법 등 법령 212개와 상충하는지도 검토했다.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는 선거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사의 중립성 훼손에 대한 제재는 필요한지, 학교 내 선거운동이 허용되는 것인지, 만 19세가 성년인 민법과의 충돌은 어떻게 할 것인지…. 여당과 군소 정당은 이번 선거법 개정안을 강행 처리하며 득표 계산기만 두드렸을 뿐 이를 보완할 그 어떤 논의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차차 보완하면 된다고 한다. 입시를 앞둔 고3 교실을 실험실로 만들겠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베트남에서 휴가를 나오는 장병들이 외국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장병들 사기도 문제려니와 외화가 낭비되고 있다.” 1968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고(故)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을 청와대로 따로 불러 빚더미에 오른 공기업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달라고 부탁했다. 앞서 공매에서 응찰자가 없을 정도로 부실기업이었다. 조 회장은 사실상 강제로 떠안은 공사를 ‘대한항공’으로 이름을 바꾸고 과감한 투자에 나섰다. 민간항공사가 ‘大韓’항공을 운영하게 된 데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 ▷대한항공을 거느린 한진(韓進)그룹은 1945년 조중훈 회장이 트럭 한 대로 시작한 운수회사에서 태동했다. ‘한진’의 뜻 자체가 나라의 발전을 위한다는 ‘한민족의 전진’이다. 그 이름대로 한진해운(지금은 파산했지만)은 바닷길을, 대한항공은 하늘길을 개척해 왔다. 아들인 고 조양호 회장은 대한항공을 세계적인 항공사로 키워냈고 평창올림픽 유치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한국 기업이 압축 성장하면서 공(功)만큼 과(過)도 있기 마련일 테지만, 한진이 수송보국(輸送報國)을 이뤄낸 것은 사실이다. 이런 기업이 3세에 이르러 ‘국민 밉상’이 됐다. ▷장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은 ‘땅콩 회항’, 차녀 조현민 한진칼 전무는 ‘물컵 갑질’, 어머니 이명희 씨는 ‘사택 갑질’로 연일 뉴스를 장식했다. 장남 조원태 한진그룹 현 회장 역시 폭행 사건에 연루된 적이 있다. 한동안 조용했던 한진 일가가 다시 소란하다. 이번에는 누나와 동생이 경영권 다툼을 벌일 모양이다. 4월 조양호 전 회장 별세 이후 취임한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을 상대로 누나 조 전 부사장이 ‘공동 경영하라는 유훈과 다르다’며 공식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조 전 부사장은 경영 복귀가 무산되면서 600억 원에 달하는 상속세 납부까지 막막해졌다. 그러면서 남매간 갈등을 숨길 수 없는 지경이 됐다. ▷한진그룹 지주회사인 한진칼 지분은 3남매와 어머니가 6% 안팎씩 고루 나눠 갖고 있다. 이들이 뜻을 같이하면 최대 주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모펀드 KCGI(17.29%), 델타항공(10%)보다 적어 경영권이 위협받는다. 우리 기업사에서 경영권 다툼이 낯선 장면은 아니다. 이미 여러 기업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형제의 난이 벌어졌다. 그런데 국민들의 시선은 한진 남매의 다툼에 유독 싸늘하다. 항공업계 불황에다 한진 일가 리스크까지 겹치면서 대한항공은 구조조정이 진행 중이다. 수년간 갑질 논란으로 조부와 부친이 힘들게 키워온 회사를 만신창이로 만들고 그 와중에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도 정신을 못 차린 듯하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세계 최연소(34세) 여성 총리.’ 지난주 선출된 핀란드 산나 마린 신임 총리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그는 장관 19명 중 12명이 여성인 내각을 꾸렸다. 마린 총리와 교육 내무 재무부 등 30대 여성 장관이 나란히 선 사진을 본 순간, 영화 ‘겨울왕국 2’가 떠올랐다. 그만큼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탓이다. 겨울왕국(=핀란드)에서 할아버지(=전임 총리)의 과오를 바로잡고 왕관을 받아든 엘사와 안나 자매(=여성 각료) 아닌가. “당연한 일이 일어났을 뿐이다.” 유리천장을 깬 여성 총리에 대한 국제사회의 환호에 대해 정작 핀란드는 ‘왜 저래’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 이원집정부제를 택한 핀란드는 대통령은 선거로, 총리는 의회 투표로 뽑는다. 4월 국회의원 선거로 구성된 핀란드 의회는 의석수(200석)의 47%가 여성이다. 연립정부를 구성한 5개 정당 중 4개 정당 대표가 여성이다. 이런 의회에서 13년 동안 정치 경력을 탄탄히 쌓아 온 제1당(사회민주당)의 마린 부대표가 총리가 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김수권 전 주핀란드 대사는 “여성보다는 청년이라는 점이 이례적”이라고 했다. 밀레니얼 세대의 정치적 성공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핀란드는 이미 여성 총리 2명, 여성 대통령 1명을 배출했다. 그런데 30대 총리는 통상 있던 일이 아니다. 핀란드는 뭐가 달랐나. 마린 총리는 이혼한 엄마가 동성가정을 꾸리는 바람에 두 엄마 사이에서 자랐다. 그 가족 중 처음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시의원, 국회의원을 거쳐 총리에 올랐다. 그는 “복지국가에서 자란 나는 어려울 때 사회가 어떤 지지를 주었는지를 기억하고 감사한다”고 했다. 빈곤 청년 여성 동성 등 약자를 상징하는 그가 총리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핀란드의 복지제도가 어떻게 사회 역동성에 기여하는지를 보여준다. 남다른 출신을 배척하기는커녕 다원화된 사회를 이끌 정치인으로 보는 포용적인 문화도 인상적이다. 김 전 대사는 “핀란드인은 그의 배경과 상관없이 적임자라는 실용적 판단을 내린 것”이라고 했다. 핀란드에는 청년할당제, 여성할당제가 없다. 그런데도 의회의 인적 구성이 다양하다. 핀란드 탐페레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서현수 서울대 분배정의연구센터 연구원은 “핀란드 정당 내 청년조직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마린 총리는 21세부터 사민당 청년조직에서 활동했고 실력을 검증받은 정치인”이라고 했다. 핀란드는 만 18세면 선거권은 물론 피선거권이 주어진다.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될 수 있다. 학제가 다르니 선거권은 차치하더라도 우리나라 피선거권은 대통령은 만 40세, 국회의원은 만 25세에 부여된다. 비례대표제도 역시 돈 없고 ‘빽’ 없는 청년의 정치 진입 문턱을 낮추는 데 기여했다. 핀란드도 사람 사는 곳인데 이상적인 시민만 살겠는가. 극우정당은 마린 총리의 등장으로 반(反)페미니즘, 블루칼라 지지가 확대될 것이라며 몰래 웃는다고 한다. 그가 이끌 연립정부의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다. 인구 550만 명의 작은 국가 시스템을 한국에 그대로 이식할 수도 없다. 그래도 가난해진 청년세대를 줄기차게 제도권 밖으로 밀어내는 우리 사회, 청년을 꽃 장식으로나 소비하는 우리 정치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마린은 영영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초등생들의 장래희망에는 그 시대의 영웅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가까이서 보고 듣는 성공을 동경하고 모방하며 꿈을 찾아간다. 올해 우리나라 초등생들은 가장 선호하는 희망직업으로 운동선수를 꼽았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운동선수가 1위를 차지한 것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서 눈부신 활약을 벌인 손흥민 선수의 영향으로 보인다. 2007년부터 교육부와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발표하는 진로교육 현황조사 결과에서 운동선수가 희망직업 1위에 올랐던 해가 딱 한 해 더 있다. 류현진 선수가 메이저리그(MLB)에 진출했던 2012년이다. ▷유튜버가 의사를 제치고 3위에 오른 것도 눈길이 간다. 또래 유튜버들이 성공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들으면서 유튜버가 어엿한 희망직업이 됐다. 올해 95억 원의 강남 빌딩을 매입해 화제가 된 ‘보람튜브’의 보람이는 여섯 살, 먹방으로 구독자 87만 명을 넘긴 띠예는 열한 살이다. 유튜브 제작하는 법을 가르치는 학원은 이미 꼬마 수강생으로 성황을 이룬다고 한다. 인터넷 발달과 함께 새롭게 등장한 프로게이머(6위) 만화가·웹툰작가(11위) 등도 수위에 올랐다. 1970년대 대통령이나 장군, 1980∼90년대 과학자 등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초등생들은 희망직업을 선택한 이유로 ‘좋아하는 일이라서’를 꼽은 비율(55.4%)이 가장 높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직업 선택의 이유를 ‘돈을 벌 수 있어서’ ‘오래 일할 수 있어서’라고 꼽는 비율이 늘어난다. 중고교생의 희망직업은 12년째 교사가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유튜버는 중고교생 희망직업 명단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경찰관 군인 공무원 등 공공 부문 직업이 상위 순위를 겨룬다. ▷요즘 세상에 ‘Boys, be ambitious!’라고 하면 꼰대 취급을 받을까. 중고교생 희망직업 10개 중 4개가 공공 부문이고, 1개는 의료인이다. 모두 안정성이 높은 직업이다. 교육부는 올해 보도자료 앞단에 ‘10년 전에 비해 중고교생이 교사를 희망하는 비율이 감소하고 있다’고 굳이 홍보했으나 사실 감소된 자리는 공무원 경찰관 군인 등이 대체했다. 살기가 각박해진 탓도 클 것이고, 그만큼 진로교육이 부실하다는 뜻도 된다. 진로교육이 충실하다면 대다수 청소년의 꿈이 ‘안 잘리는 직업’에 몰리는 현상이 조금이라도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 다양한 직업을 접할 기회가 주어져야 하고 생계가 아닌 직업의 가치도 가르쳤으면 한다. 행복한 직업인이 되려면 적성이나 보람 같은 내적 보상, 연봉 같은 외적 보상이 균형을 찾아갈 수 있어야 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우리나라에 의사 수가 많다는 걸 의사 말고 누가 동의할까.’ 2월 설 연휴 응급의료 공백을 막기 위해 밤샘 근무를 하다 순직한 윤한덕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장. 그가 생전 페이스북에 남긴 글이다. 우리나라 의사 수가 공급 과잉이라고 주장한 대한의사협회 홍보물을 띄우고는 이렇게 개탄했다. 의협은 그 근거로 면적당 의사 밀도를 댔다. 10km²당 10.44명으로 의사 접근성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것. 이는 의사 수를 줄여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런 논리라면 땅덩이 작은 우리나라는 대통령이나 방탄소년단(BTS) 접근성도 세계 최고일 거다. 윤 센터장은 순직하기 직전 일주일 동안 129시간 30분을 근무했다. 의사 부족에 허덕이는 응급의료, 바로 그 현장에서. 고인의 글이라 망설이다 이를 인용한 것은 국립공공보건의료대학원의 운명이 곧 결정돼서다. 공공의대 설립 법안은 22일 공청회를 거쳤고 27, 28일 국회 보건복지위 법안소위 심사가 예정돼 있다. 4년제 의학전문대학원인 공공의대는 학비를 국가가 전액 부담해 의사를 길러내 10년간 의료 취약지역에서 근무하도록 한다. 의료계는 결사반대한다. 지역 간, 전공 간 의료 격차를 통계로 보면 공공의료 인력 양성에 반대할 명분이 없다. 인구 10만 명당 치료 가능한 사망자 수는 서울이 40.4명, 충북은 53.6명이다. 제대로 의료서비스를 받으면 살 수 있었던 환자의 수다. 응급, 외상, 분만 등 기피 전공에선 격차가 더 심각하다. 환자가 어디에 사느냐, 어디가 아프냐에 따라 수명이 달라질 수 있단 얘기다. 그래서 의료계는 의료취약지 인프라 개선 없이 의사가 가지 않는다는 논리를 편다. 속내는 공공의대가 의사 공급 확대의 단초가 될까 걱정스러운 것이지만. 지역 간 격차는 의사의 수급 불균형만으로 설명이 안 된다. 의사 총량 부족이 이런 격차를 빨리, 크게 벌어지게 했다. 우리나라 인구 1000명당 활동 의사 수는 1.89명(한의사 제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56% 수준이다. 그런데 의대 정원은 2007년부터 3058명으로 동결이다. 그동안 의사가 과로사를 하고 지방 병·의원이 사라지고 간호사가 진료보조인력(PA)으로 수술 및 처치를 대신하는 상황까지 왔다. 정부는 공공의대라는 궁여지책을 내놓고는 의대 증원은 언급조차 꺼려한다. 의사 수가 늘면 없던 의료 수요가 창출돼 건보재정에 부담이 될까 봐 우려해서다. 의료계 눈치도 보인다. 우리나라 의료체계는 건강보험이라는 공공 재원과 병·의원이라는 민간 인프라가 부부가 돼 탄생했다. 낮은 보험료로 설계된 건강보험은 낮은 수가(酬價)로 귀결된다. 정부는 의사 수를 통제해 박리다매를 허용했고 이로써 의료계의 반발을 달래 왔다. 의사 수는 세계 최저인데 국민 1인당 외래진료 횟수(16.6회)는 세계 최고인 비법이 여기 있다. 부부가 국민건강이라는 자식을 낳고 억지로 사는데 괜히 이혼 사유를 만들고 싶지 않다. 이번 국회서 공공의대가 좌초된다면 정부는 의사 정원 확대를 공론화해야 한다. 직역 논리가 국민 건강을 해칠 정도가 됐는데도 방관해선 안 된다. 전문가들은 고령화라는 사회적 요인과 바이오, 인공지능(AI) 등 산업적 요인으로 의사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한다. 의사 양성에는 10년 이상 소요된다. 이미 늦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42.195km를 달리는 동안 많은 고통이 왔다 가는 것이 인생살이와 비슷하다.’ 서울국제마라톤을 완주한 아마추어 마라토너 31명이 2002년 쓴 ‘당신이 마라톤을 알아’의 한 구절. 이처럼 마지막 희열을 위해 극한의 고통을 견뎌내야 하는 마라톤이 국민 스포츠가 된 데에는 88년 역사의 서울국제마라톤 겸 동아마라톤대회의 기여가 크다. 한국 마라톤 영웅의 산실인 동시에 마라톤의 저변을 넓혀 온 서울국제마라톤대회가 ‘플래티넘 라벨’을 달았다. 전 세계 마라토너라면 누구나 꼭 뛰고 싶은 명품 대회로 인정받은 것이다. ▷세계육상연맹은 2008년부터 일정 기준을 충족한 국제마라톤대회에 골드, 실버, 브론즈 3개 등급을 부여해 왔다. 세계 400여 개 대회 중 골드 대회가 올해 64개까지 늘어나자 플래티넘이라는 최고 등급을 새로 도입했다. 세계 랭킹 30위 이내 선수 가운데 남녀 각 3명 이상이 출전하고, 1만5000명 이상이 풀코스를 완주해야 하는 등 승격 조건이 여간 까다롭지 않다. 그래서 남녀노소 모두 참여하는 풀코스 플래티넘 마라톤대회는 보스턴 뉴욕 베를린 시카고 런던 도쿄와 이번에 승격된 서울국제마라톤 7개뿐이다. ▷먼저 플래티넘 라벨을 단 6개 대회는 심사 문턱을 한껏 높이며 텃세를 부렸다. 세계 주요 도시에서 개최되는 이들 대회는 경제적 파급효과가 크다. 수만 명의 마라토너가 머물며 쓰고 가는 돈이 막대한 대박 관광상품이다. 경쟁 도시인 서울을 그 대열에 끼워주고 싶지 않았을 터. 서울국제마라톤은 보스턴마라톤 다음으로 역사가 긴데도 참가자가 다른 대회에 비해 적다는 이유를 댔다고 한다. 이런 견제에도 플래티넘으로 전격 승격된 것은 4월 세계육상문화유산(World Athletics Heritage) 선정에 이은 한국 마라톤 역사의 경사다. ▷세계육상문화유산에 선정된 마라톤대회는 122년 역사를 가진 보스턴마라톤대회와 고대 그리스 병사의 원조 코스를 되살린 아테네마라톤대회, 그리고 서울국제마라톤대회 등 단 3개. 1931년 3월 21일 광화문과 영등포를 왕복하는 22.530km를 14명의 선수가 달리며 스타트를 끊은 88년의 역사, 그 역사성을 공히 인정받은 것이다. ▷2001년 보스턴마라톤 우승자인 이봉주 선수는 서울국제마라톤이 플래티넘 대회가 됐다는 소식에 “보스턴 런던 베를린 도쿄 마라톤 등에 출전했을 때 대회 규모는 물론이고, 시민들의 뜨거운 관심에 놀랐다”며 기뻐했다. 플래티넘 대회는 단지 마라토너의 축제가 아닌 시민의 축제로 치러진다는 것이다. 플래티넘 대회의 마지막 자격은 이를 즐기는 시민인 셈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서울대 교수노동조합이 곧 출범한다. 서울대의 교육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교수들의 교권 확보와 임금·근로조건 개선에 힘쓸 것이라고 한다. 전임교원(교수, 부교수, 조교수) 2200여 명 전원이 회원인 서울대 교수협의회가 주축이다. 교수협의회가 8월, 10월 노조 설립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물었더니 서울대 전임교원의 4분의 1이 찬성했다(응답률 38.9%, 찬성률 63.9%). 대학교수들의 노조 설립이 허용된 건 최근이다. 지난해 8월 헌법재판소가 초중고교 교사에게만 노조 설립 자격을 부여한 교원노동조합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부터다. 대학교수만 노조 설립을 허용하지 않을 합당한 이유가 없어 단결권을 침해한다고 봤다. 대학 구조조정 압박이 거세고 단기계약직 교수(비정년 트랙), 강의전담 교수가 늘어 근로조건이 악화될 가능성도 고려됐다. 지방대나 전문대 또는 비전임교수들의 사정을 염두에 둔 결정이다. 서울대 교수도 노조를 조직할 권리가 있다. 당연하다. 그런데 서울대 교수란 어떤 자리인가. 정년 65세까지 신분을 보장하고, 대략 1억 원이 넘는 연봉을 받는다. 배부르고 등 따스우니 노조를 하지 말란 뜻이 아니다. 그들의 권익은 국민의 교육권과 직결되므로 법으로 보장하는 것이고, 공동체를 수호하는 지성의 보루라는 사회적 기대가 있어 용인되는 것이다. 서울대 교수는 노조 할 권리도 있지만 그 자리에 부합하는 책임도 부여받고 있다. 지난달 교육부는 교수 부모 논문의 중고교생 자녀 공저자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서울대 수의대 A 교수 논문에 이름을 올린 고교생 아들은 해외 대학에서 국내 대학으로 편입할 때 이 스펙으로 합격했다. 서울대 의대 B 교수는 3편의 논문에 고교생 아들을 공저자로 올렸고 역시 이를 대입에 활용했다. 앞서 세 차례 중고교생 자녀 논문 공저자 실태조사에서도 서울대의 적발 건수가 많았다고 한다. 지식인의 양심은 그 사회의 도덕성의 척도인데 서울대에서 들리는 뉴스는 늘 이런 식이다. 아직까지는 시간강사를 배제한 교수노조라는 점에서도 노조 설립의 명분이 약해진다. 서울대 교수의 처우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례로 미루어 볼 수 있다. 그는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을 그만두고 복직한 뒤 40일 만에 휴직, 다시 36일 만에 복직을 반복하며 강의 한 번 하지 않고 월급을 챙겼다. 학생들의 수업권을 무시한 휴·복직을 해도 교수는 자리가 보장된다. 반면 강사법이 시행된 올해 1학기 시간강사의 20%(7834명)가 강제로 강단을 떠났다. 교수와 시간강사의 임금 격차는 따로 말할 것도 없다. 지금 같은 교수사회 이중구조에선 교수의 임금이 오를수록, 고용이 안정될수록 강사들의 처우는 열악해질 것이 자명하다. 대학교수는 초중고교 교사와 달리 정당 가입이 가능하다. 공직 진출도 흔하다. 더욱이 서울대 교수라면 정무직 공직자 임명, 위원회 참여나 정책연구 등을 통해 정부 정책에 깊숙이 개입한다. 굳이 노조가 아니더라도 대등한 교섭력이 있다는 뜻이다. 서울대 교수들은 이번에 ‘노조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셈이 됐다. 지식인이 공적인 책임은 다하지 않으면서 사적인 권익만 주장하는 사회의 미래는 참 암울하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지난달 25일 김해공항을 이륙해 김포공항으로 향하던 제주항공 비행기 안. “비상탈출 가능성이 있으니 잘되게 기도해 달라” “우왕좌왕하면 안 되고 모든 짐을 버려야 한다” 이륙 9분 만에 다급한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 184명은 회항하기까지 기체가 위아래로 요동치는 극심한 공포 속에서 43분을 보냈다. 기내 곳곳에서 숨죽인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문제를 일으킨 제주항공 비행기는 최근 미 보잉사 본사가 정밀검사 중 손톱 길이만 한 균열이 발견됐다고 발표해 세계 항공업계를 혼돈에 빠뜨린 B737NG와 같은 기종이다. 이번 회항은 고도, 속도 등을 설정하는 핵심 소프트웨어가 오류를 일으킨 탓이다. 기체 균열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하지만 항공사마다 B737NG의 안전성을 묻는 전화가 폭주하는 등 이용객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보잉사는 B737NG 노후 비행기를 여객기가 아닌 화물기로 바꾸려고 정밀검사를 하던 중에 항공기 동체와 날개를 연결하는 부분인 ‘피클포크’에서 1cm 이하의 균열을 발견했다. 이달 초 보잉사는 이를 미국 연방항공청(FAA)에 보고했고 FAA는 각국에 긴급 점검을 요청했다. 전 세계적으로 운항 중인 1133대 중 53대에서 결함이 발견됐다. ▷B737NG는 최근 잇단 추락사고로 운항 중지된 B737맥스의 전신이다. 1993년 공식 출시된 중·단거리용 항공기로 저가항공사들이 주로 구매했다. 국내에는 150대가 도입됐는데 제주항공(46대)이 보유 대수가 가장 많다. 이어 대한항공, 티웨이항공, 이스타항공 순이다. 국토교통부가 운항횟수가 많았던 42대를 긴급 점검했더니 9대에서 균열이 발견됐다. B737NG의 균열은 지난해 10월 인도네시아, 올해 3월 에티오피아 비행기 추락 사고를 일으킨 B737맥스처럼 치명적인 결함은 아니라고 한다. 정비만 잘하면 크게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사실 비행기는 인간이 발명한 이동수단 중 가장 안전하다고 한다. 그러나 만에 하나 사고가 나면 수백 명이 사망하는 대형 참사로 이어진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 하는 이유다. 더욱이 국내에 항공사가 늘어나며 하늘길 경쟁이 극심한 터라 안전이 비용에 희생되고 있는 것 아닌지 불안해진다. 경쟁사인 에어버스의 추격에 초조하던 보잉사가 B737맥스 출시를 서두르다가 기체 결함을 간과했던 것처럼. 최근 제주항공 회항 외에도 티웨이항공 이륙 중단, 아시아나항공 A380 시운전 중 화재 등 안전사고가 잇달았다. 여느 사고처럼 비행기 사고도 늘 인재(人災)였다. 차제에 철저히 점검해야 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전자담배는 담뱃잎을 쪄서 피우는 궐련형 전자담배와 니코틴을 기화시켜 흡입하는 액상형 전자담배로 나뉜다. 이 중 액상형 전자담배에 대해 정부가 사용 중단을 강력히 권고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사용 자제를 권고한 데 이어 국내에서도 액상형 전자담배와 연관성이 의심되는 폐질환 환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액상형 전자담배를 2, 3개월 동안 꾸준히 피웠던 30대 남성이 폐질환으로 입원했다가 금연 이후 호전돼 퇴원했다. 세균이나 바이러스 감염이 없는데도 폐가 염증을 일으켰다. ▷2003년 개발된 액상형 전자담배 시장은 전 세계적으로 지난해 115억 달러까지 성장했다. 특히 2015년 휴대용 저장장치(USB메모리)와 구별이 어려운 쥴(JUUL)이 출시되면서 부모나 교사의 감시를 피하려는 청소년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렸다. 미국에선 액상형 전자담배와 관련한 폐질환 사망자가 33명, 중증 폐 손상 사례가 1479건으로 집계됐는데 79%가 35세 미만이었다(10월 15일 기준). 18세 미만만 보면 15%였다. 액상형 전자담배를 청소년이 많이 피우기 때문인지, 어린 폐에 더 위험한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액상형 전자담배의 독성물질로는 대마 유래 성분(THC)과 이를 기화시키는 데 필요한 비타민E 아세테이트, 그리고 계피 버터 바나나맛 등 가향물질이 의심받고 있다. 먹으면 안전한 가향물질도 흡입하면 초미세입자로 폐에 깊숙이 침투해 염증을 일으킬 수 있다. 제2의 가습기 살균제 사태가 재발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이미 미국을 비롯해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등에서 액상형 전자담배 사용 자제를 권고했다. ▷액상형 전자담배는 보통 담배에 비해 간접흡연 폐해가 덜하다는 인식이 있어 실내 흡연을 하는 경우가 늘었다. 이런 전자담배 에티켓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액체를 기화시켜 나오는 연기(에어로졸)에는 유해 화학물질이 다수 포함돼 있다. 에어로졸처럼 입자가 작을수록 폐에는 치명적이다. 아직 유해 성분과 그 유해성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니 조심하는 것이 상책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전 세계적으로 흡연으로 인한 연간 사망자를 700만 명으로 추정한다. 이에 비하면 액상형 전자담배 사망 사례가 적은 것 아니냐는 반박도 있다. 그러나 흡연이 장기적으로 누적돼 폐질환을 일으키는 반면 액상형 전자담배는 짧은 기간 사용으로도 폐질환이 중증으로 진행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우려스럽다. 아무리 담배가 그 외형을 이리저리 바꾸어 봐도 해롭다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심리적으로 담배의 효용이 있을지 모르나 건강에는 백해무익한 것이 분명하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운명도 깨우지 못할 것 아닌가. 난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걸으며 살 것이다.’ 장애를 안고 희망을 노래하던 수필가인 고 장영희 서강대 교수가 2008년 6월 월간 ‘샘터’에 마지막으로 쓴 글이다. 아름다운 수필문학의 둥지가 됐던, 이웃들의 희로애락이 담긴 커뮤니티 같았던 샘터가 올해 12월호를 마지막으로 휴간에 들어간다. 고 김재순 전 국회의장이 첫 호를 발간한 것이 1970년 4월. 내년 창간 50주년을 앞둔 시점이다. ▷최인호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인 연재소설 가족은 1975년부터 무려 34년간 감동을 선물했다. “삶이 다하는 날까지 ‘가족’을 계속 써 나갈 것”이라고 약속했던 대로였다. 법정 스님은 산방한담(山房閑談)을 1980년부터 16년간 연재했다. 피천득 선생을 비롯해 장영희 교수와 이해인 수녀도 ‘샘터’가 키워낸 수필가들이다. 시인 강은교 정호승, 소설가 김승옥 윤후명, 동화작가 정채봉 등이 여기서 일했고 소설가 한강도 기자로 일하며 필력을 닦았다. ▷샘터는 유명 작가뿐 아니라 범인(凡人)들이 독자들을 웃고 울리는 잡지였다. 마지막 호가 될지 모를 12월호의 독자 참여 특집 주제는 ‘올해 가장 잘한 일, 못한 일’이다. 지금처럼 글을 쓸 공간이 없던 시절에는 이민 간 교포, 파독 광부나 간호사들이 그들의 애환을 전해왔다. 그러면서 인연의 징검다리가 되기도 했다. 샘터를 구하기 힘든 사람들에게 다른 독자들이 샘터를 선물해주던 코너를 통해 책을 주고받다 커플이 되고 결혼을 했다. ▷지하철 가판대마다 꽂혀 있던 샘터를 찾기 힘들어진 요즘이다. 한때 월 50만 부까지 팔렸지만 최근에는 월 2만 부도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창간 당시 책값은 100원. “담배 한 갑보다 싸야 한다”는 고 김 전 의장의 뜻에 따라 지금도 3500원이다. 2017년에는 대학로 붉은 벽돌집 사옥을 팔고 이사했으나 매년 3억 원씩 적자를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샘터’가 창간된 그해 9월 동아일보에는 ‘활력 솟는 잡지계’라는 기사가 실렸다. ‘샘터’를 필두로 잡지들이 부담 없이 읽고 들고 다니기 편한 ‘경장(輕裝)화’ 경향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종합지·여성지의 중압을 회피하면서 주간지로 익혀진 핸디블한 책을 좋아하게 된 독자들의 구미를 맞추게 된 것이다.’ 바쁜 도시인의 손을 독차지했던 샘터는 스마트폰에 자리를 내주었다. 50년간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을 속삭이던 샘터가 많이 그리울 것만 같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수술을 하고 외래를 보고, 항공 출동을 세 차례나 했다. 그중 두 번은 야간 출동이었다.’ 이국종 아주대 권역외상센터장은 자전적인 기록인 ‘골든아워’에서 그날을 ‘지옥’이었다고 회고했다. 일이 고돼서가 전혀 아니었다. 그를 힘들게 한 것은 막 날아오른 닥터헬기 안에서 받아든 ‘지금 민원이 빗발치고 있으니 소음에 각별히 유의하라’는 메시지였다. ‘이 새벽에 민원을 넣는 사람이나, 책상 앞에 앉아서 목숨 걸고 출동하는 우리에게 민원을 전달해 사기를 꺾는 자들이나 모두 경악스러웠다.’ ▷18일 열린 ‘닥터헬기 소리는 생명입니다’(소생) 캠페인 행사에서 닥터헬기 4대가 서울시청과 덕수궁 하늘을 날아올랐다. 원래 청와대 주변 상공은 민간 항공기가 비행할 수 없으나 ‘닥터헬기 소리는 이웃을 살리는 생명의 소리’라는 취지에 청와대 등이 공감해 성사된 일이다. ▷‘Sorry Sorry 소리/내가 빨리 날아올라 구해줄게/소음공해 용서해줘.’ 동아일보의 소생 캠페인은 5월 슈퍼주니어의 ‘쏘리 쏘리’를 개사한 노래 ‘소리(Sorry) 소리’와 함께 닥터헬기의 현실을 담은 동영상을 올리면서 시작됐다. 채널A ‘나는 몸신이다’에 출연했던 이 교수가 “소음 민원이 많아 닥터헬기 이착륙이 어렵다. 사람 살리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본보 이진한 의학전문기자에게 호소한 것이 계기였다. 이 홍보 동영상은 101만 뷰를 기록하며 닥터헬기에 대한 인식 개선에 기여했다. 생명을 살리는 소음을 감수하자는 뜻으로 풍선을 터뜨리는 동영상을 올리는 캠페인에 1만 명이 넘게 참여했다. ▷닥터헬기는 의료진이 탑승한 날아다니는 응급실이다. 2011년 처음 도입돼 권역별로 7대가 중증응급환자를 이송하고 있다. 그동안 약 9100번을 날아올라 8500명의 생명을 구했다. 9월에는 올 설 연휴 밤새 병원을 지키다 세상을 떠난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의 이름을 새긴 7번째 닥터헬기가 도입됐다. 산도 많고, 섬도 많은 한국에서 닥터헬기는 더 자주, 더 멀리 날아야만 한다. ▷영국은 닥터헬기가 활성화된 나라다. 유튜브에서 심근경색이 온 남자를 이송하기 위해 풋볼 경기장에 닥터헬기가 출동한 모습을 촬영한 동영상을 봤다. 경기장에 닥터헬기가 착륙하는 순간, 관중석은 박수 소리로 가득 찬다. 닥터헬기를 다룬 영국 BBC 다큐멘터리는 “힘들지만 보람된 일”이라는 구조대원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단 몇 분의 소음에 민원을 제기하는 건 그 힘든 일을 감내할 보람마저 빼앗는다.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는 업(業)을 감당하는 이들이 마치 죄인처럼 일해서는 안 된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조국 법무부 장관이 14일 사퇴했다. 그가 후보자로 지명된 이후 67일 동안 대한민국은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가 허물어진 ‘조국 아노미’에서 허우적댔다. 그 와중에도 상식의 붕괴를 막으려고 했던 분투는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해 충돌로 볼 수 있으며 직무 배제도 가능하다.” 박은정 국민권익위원장은 10일 국정감사에서 조 장관의 직무 수행과 부인 정경심 교수의 검찰 수사 간 직무관련성이 있다고 단언했다. 이어진 여당 실세 의원과의 공방에서도 원칙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조 장관의) 이해 충돌 행위는 구체적으로 수사에 관여하거나 영향을 끼쳤을 때 문제가 된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은 이상 의미가 없다.”(전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 박 위원장은 “법령상 직무관련자가 실제 권한을 행사했는지 여부를 떠나 (본인이) 신고를 하게 되어 있다”고 맞받아쳤다. 당초 권익위 내부에서는 두 가지 국감 시나리오가 있었다. ‘이해 충돌이 발생한다’고 단호히 답변하는 안과 ‘이해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지만 소관 부처(법무부)에서 판단할 문제’라고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는 안. 박 위원장은 원칙을 선택했다. 권익위 내부에서도 ‘놀랐다’는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그는 문재인 정부의 성골인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지냈다. 조 장관과 같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출신이다. 내 편으로 기울기보다 법학자로서의 신념, 시민단체에서 쌓은 소신이 앞섰던 것 같다. 같은 사례가 또 있다. 2월 청와대 특별감찰반의 민간인 사찰 의혹을 제기한 김태우 전 청와대 특감반원에 대해서도 박 위원장은 “공익신고자가 맞다”고 했다. 당시 청와대는 “아직 김 전 수사관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이 내려지지 않아 공익신고자로 볼 수 없다”고 했다. 박 위원장의 이런 해석은 단지 꼿꼿한 수장의 소신이 아니라 법이 그러한 까닭이기도 하다. 국감에 앞서 권익위는 ‘정부조직법·검찰청법·공무원행동강령을 고려하면 직무관련성이 있다’는 유권해석을 내렸었다. 공익신고자 보호법은 신고 내용이 거짓임을 알고 신고하지 않는 한 폭넓게 공익신고로 인정한다. 이런 법에 존재 근거를 둔 권익위가 자기부정(自己否定)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실 권익위는 궂은일을 도맡아하며 힘은 없는 조직이다. 공무원에게 한이 맺힌 국민들의 민원 처리, 내부 고발이나 다름없는 부패 방지 업무 등 조직을 괴롭히는 일만 한다. 검찰처럼 수사권을 가진 것도 아니고, 감사원처럼 조사권을 가진 것도 아니니 정부 안에서 그냥 ‘밉상’이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2016년 9월 부정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 시행을 앞두고, 권익위는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에 73명 증원을 요청했다가 단칼에 거절당했다. 국민 400만 명이 적용받는다는 법을 시행하면서 행자부는 1개 과, 단 5명을 늘려줬다. 정부·여당 내에서 쏟아지는 비상식적 발언에 어리둥절하던 차에 ‘천덕꾸러기’인 권익위만이 상식을 의심하던 국민을 위로했으니 기특한 일이다. ‘조국 아노미’를 헤쳐 오며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상식의 힘을 새삼 깨닫는다. 그런 상식은 제 할 일을 정직하게 하며 직업적 양심에 충실했던 사람들이 지켜왔다는 것도.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싸이월드 폐쇄 소식을 들은 지난 주말, 애플리케이션(앱)을 연신 실행시켜 봤지만 응답이 없었다. 20대를 차곡차곡 채운 추억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울컥해졌다. 미니홈피에는 젊음을 훈장으로 단 사진들이 가득했다. 젊음이 불안했던 시절, 서로를 위로했던 따뜻한 대화도 남아 있다. 싸이월드는 오늘 날짜와 동일한 날짜에 올렸던 게시글을 불러다 보여주는 ‘투데이 히스토리’라는 서비스를 제공해왔다. 그렇게 소환되는 육아일기를 아이와 함께 보며 킥킥거리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싸이월드는 1999년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창업동아리에서 잉태됐다. 2001년 미니홈피 서비스를 선보였는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라는 개념이 일반화되기도 전에 탄생한 혁신적인 플랫폼이었다. 마크 저커버그가 하버드생만의 SNS로 페이스북을 시작한 것보다 3년이나 빨랐다. 미니홈피 주인(ID)은 도토리(가상화폐)를 사서 스킨(배경화면)을 바꾸고 미니미(아바타)를 꾸몄다. 사진과 게시글을 올리면 일촌(친구 또는 팔로어)이 방문해 댓글을 올린다. 일촌의 일촌 미니홈피를 계속 연결해서 방문하는 ‘파도타기’도 있었다. ‘원조’ SNS라 불릴 만한 기능을 갖추고 2000년대 초·중반 전성기를 누렸다. 2007년 CNN이 한국을 “미국의 페이스북보다 먼저 싸이월드가 등장한 정보기술(IT) 강국”으로 소개한 적도 있다. ▷싸이월드는 이용자 폭증으로 서버 관리에 어려움을 겪다가 2003년 대기업(SK커뮤니케이션즈)에 인수됐다. 공룡이 된 싸이월드는 ‘모바일 시대’ 적응에 실패하며 쇠락의 길로 들어선다. 4년 전에 전제완 전 프리챌 대표가 인수해 재기를 꿈꿨으나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해 결국 문을 닫을 처지라고 한다. 싸이월드 도메인 만료일은 다음 달 12일이다. 예고 없는 폐쇄로 추억이 강제 삭제될 위기에 처한 이용자들은 “백업이라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호소한다. ▷아날로그 시대에 이사를 갈 때면 누구나 앨범과 편지지 묶음을 우선적으로 소중히 챙겼다. 온라인 세상이라 해서 추억이 소중하지 않을 리 없건만, 디지털에선 저장만큼 소실도 쉽다는 사실에 속이 탄다. 2013년 1세대 커뮤니티서비스 프리챌이 종료 한 달 전에 이를 공지하자 이용자들이 일일이 글과 사진을 내려받는 수고를 했다. 7월 1세대 인터넷포털 드림위즈가 이메일 서비스를 중단해 20년간 사용한 이메일이 사라지기도 했다. IT 기업의 부침으로 수난을 겪고 있는 디지털 수몰민들은 ‘잊혀지지 않을 권리’를 호소한다. 이 글이 싸이월드에 대한 조서(弔書)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비무장지대(DMZ)와 바로 맞닿은 강원 철원군 승리전망대에 오르면 오성산 일대가 펼쳐진다. 1952년 10월 14일∼11월 25일 국군·미군과 중공군이 43일간의 고지쟁탈전을 벌인 곳이다. 우리는 이를 ‘저격능선’ ‘삼각고지’ 전투로 나눠 부르고 중국은 능선과 고지 사이 고개 이름을 따서 상감령(上甘嶺) 전투라 부른다. 고지를 뺏고 뺏기는 처절한 혈투 끝에 오성산 정상은 군사분계선 북측에 편입된다. 그래서 중국은 상감령 전투를 유엔군의 북진을 저지한 승전으로 자평하고 ‘6·25전쟁에서 미국을 상대로 거둔 최대의 승리’라고 선전해왔다. ▷그 상감령 전투 때 중공군의 사진이 우리 호국영웅 포스터에 사용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국가보훈처는 9월 6·25전쟁 영웅으로 1952년 9월 13일 중공군으로부터 수도고지를 사수하다 전사한 공해동 육군하사를 선정했다. 그의 얼굴 사진도, 수도고지 전투 사진도 없어 다른 사진을 골라 썼는데 하필이면 상감령 전투의 중공군 사진이었다. “우박처럼 쏟아지는 실탄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방아쇠를 놓지 않았다”는 글귀에다 한 달 뒤 일어난 전투의, 그것도 적군 사진을 실어 추모한 셈이다. 보훈처는 포스터를 제작한 민간업체에 책임을 돌렸으나 감수책임을 회피한 구차한 변명이다. 더구나 사진의 출처가 국립서울현충원 공식 블로그였다는 게 더 충격적이다. 현충원 블로그에 중공군 사진이 국군 기록 사진인 것처럼 올라 있었던 것이다. ▷보훈처는 이미 배포한 포스터를 폐기하고, 블로그에서 사진을 내렸다. 사료 점검시스템을 구축해 철저히 검증하겠다고 한다. 단순한 실수일지라도 ‘국가유공자 및 제대 군인, 그 유족에 대한 보훈’이라는 본질적인 업무를 생각한다면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더욱이 보훈처는 근래 들어 약산 김원봉에게 건국훈장 수여를 검토하고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로 다리를 잃은 하재헌 예비역 중사에 대해 전상(戰傷)이 아닌 공상(公傷) 판정을 하는 등 불필요한 갈등의 진원지가 됐다. ▷현 정부 들어 국가보훈처장은 장관급으로 다시 격상됐고 생존 애국지사에 대한 특별예우금 인상 등 국가유공자에 대한 보상을 확대해 왔다. 나라를 위한 희생에 합당한 보상뿐만 아니라 희생자의 상처를 덧나지 않게 하는 세심한 배려도 중요하다. 하 중사는 “다리 잃고 남은 건 명예뿐인데, 명예마저 빼앗아 가지 말라”고 했다. 억울한 희생이 되지 않도록 명예를 지켜주는 것도 남은 우리의 몫이다. 고작 21세에 적군의 총탄에 스러진 공 하사가 이 포스터를 봤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났을 것 같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아이×, 주말이 더 바빠. 문법 특강 있어.” “나도 학원 있는데….” 최근 동네를 걷는 중에 앞서 걷는 초등생 둘이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주말에 만나서 놀기로 했는데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투덜거리는 소리였다. ‘얼마나 놀고 싶을까’ 안쓰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학원 정보에 어두운 직장맘은 학원명이 궁금해져 귀가 쫑긋해졌다. ▷서울시교육청이 학원 일요 휴무제를 추진한다. 단 하루만이라도 학생들의 휴식권을 보장하자는 취지다. 여론조사, 토론회 등 공론화를 거쳐 11월 중 시민참여단이 권고안을 마련한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학원 격주 휴무제를 공약했으나 ‘풍선효과’가 크고 현실성이 낮다는 여론에 부딪혀 무산됐다. 지난해 재선에 성공한 조 교육감이 학원 일요 휴무제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강조되면서 ‘스라밸(공부와 삶의 균형)’도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늘었으며, 왜 학생들만 ‘월화수목금금금’인지 안타까운 것도 사실이다. ▷2017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를 분석한 ‘학생 웰빙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학생들의 주당 학습시간은 49.4시간으로 OECD 평균(33.9시간)보다 15.5시간이 많다. 당연히 행복지수는 밑바닥이다. 학생들의 쉴 권리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서 학원 일요 휴무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 그런데 이 보고서에는 ‘한국의 역설’이 숨어 있다. 한국은 주당 60시간 이상 공부한 학생이 주당 40시간 미만 공부한 학생에 비해 학업성취도(과학 점수)와 삶에 대한 만족도가 동시에 높은 유일한 나라였다. 한국 학생들만 유독 공부를 좋아하는 유전자를 타고났을 리는 없고, 인생 단계마다 치열한 경쟁을 치러야 하는 시스템에 적응하다 보니 나타난 현상일 거다. ▷이런 사회적인 맥락을 무시하고 학원 일요 휴무제를 시행하면 기대했던 효과는 없고 괜히 행정력만 낭비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이미 10년 넘게 오후 10시 이후 학원 교습을 금지한 조례가 시행됐지만 아이들이 일찍 잔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음성적인 개인과외, 그룹과외가 성행한다는 반론도 있다. 아이가 일요일마저 학원에 매여 있는 나라도, 당국이 학원을 일제히 휴무하게 하는 나라도 지구상에 드물 것이다. 서울시내 학원 2만여 곳을 일일이 규제하고 단속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학생과 학부모의 선택권을 배제한 일률적인 법제화보다는 더디더라도 ‘잘 놀면 잘 큰다’는 당연한 이치가 통하는 사회로 이끌어야 하지 않을까.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명분만 있고 효과는 없는 ‘위선의 정책’이 수두룩하지만 교육정책은 그 괴리가 유독 심한 것 같다. 우수한, 또는 잠재력이 우수한 학생을 공정하게 선발하면서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하고 공교육 정상화에도 기여해야 하는 대입제도가 대표적이다. 이런 명분으로 지난 10년간 급격히 확대됐던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이 과연 그 사명을 다하고 있을까. 조국 법무부 장관 딸의 입시비리 의혹으로 공정한 선발과 불평등 완화라는 신화에는 금이 갔다. 그렇다면 학종이 공교육 정상화에 기여하는지를 따져볼 차례다. 그래야 대입 개편의 방향이 선다. “초등 5학년이면 수학의 정석을 시작해야 한다.” 교육 담당으로 처음 강남 사교육을 취재했을 때 선행 광풍을 확인하고도 믿기가 힘들었다. 이에 대해 교사나 교육단체의 진단은 한결같았다. 사교육의 공포 마케팅. “철수는 수학의 정석을 두 번 풀었어요. 어머니, 이러다 우리 영희 대학 못 가요”라는데 학원 문을 박차고 나올 학부모가 있겠냐는 거다. 정작 학부모들의 분석은 달랐다. 상위권 대학들이 수시전형 중에서도 교과 성적과 비교과 활동을 함께 평가하는 학종을 늘리면서 선행 광풍이 불었다고 한다. 보통 1년 정도 선행을 했는데 이제는 상급학교 공부를 미리 한다. 왜냐하면 고등학교에 가면 학종을 준비하느라 공부할 시간이 없으니까. 그 불안한 틈새를 학원이 파고들었다. 교과 성적이 좋으려면 수행평가를 잘해야 한다. 사회 과목을 예로 들면, 동아시아 역사 인식을 둘러싼 갈등과 관련된 영상을 제작하는 식으로 출제된다. 취재 중 만난 학부모는 “기말고사 앞두고 수행평가를 준비하느라 밤을 새운 딸이 울면서 학교를 갔다. 선행 안 시킨 엄마들 다 후회한다”고 했다. “옆 반에선 과학실험 보고서가 제출 당일 가방에서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들려줬다. 학교생활기록부에는 교과 성적 외에 진로, 봉사, 독서활동 등 비교과 항목이 기재된다. 고스란히 입학사정 자료로 활용된다. 만약 의대에 진학하고 싶은데 조 장관의 딸처럼 의학논문 제1저자로 무임승차할 수 없다면 병원에서 주말마다 의료봉사라도 해야 한다. 선행학습을 해 둬야만 비교과 활동을 할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얘기다. 학생부 기재 항목이 점점 줄었지만 대입과 직결되는 한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진보 진영에선 학종이 선행학습을 유발하고 공교육을 왜곡시킨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한다. 교육열을 돈으로 뒷받침하는 서울 등 일부 지역, 특목·자사고 등 일부 학교에서 빚어진 적폐라고 본다. 그런데 지방이나 일반고도 다르지 않다. 학종으로 대학에 갈 만한 아이만 교내 상을 몰아주고, 학생부를 정성껏 작성해준다. 나머지 학생들은 공교육에서 철저히 소외된다. ‘학종 신화’를 신봉하는 이들에 대해 학부모들은 이런 의심을 한다. 학생선발권을 뺏긴 대학이 그나마 재량권을 가질 수 있는 전형이고, 교사는 평가라는 권력을 놓고 싶지 않아서 아닌지. 학종이 공교육을 정상화한다는 신화는 거짓이다. 거꾸로 학교가 잘 가르친다, 공정하게 평가한다는 신뢰가 쌓일 때 학종이 안착된다. 제발 교육부가 ‘어떻게 평가할까’ 말고 ‘어떻게 가르칠까’를 논의했으면 한다. 입시는 공교육을 혁신하는 절대반지가 아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검은 테 안경에 검은 배낭을 둘러멘 앳된 모습. 올해 23세 조슈아 웡(黃之鋒) 홍콩 데모시스토당 비서장은 기존 민주화 운동 ‘스타 지도자’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다르다. 하지만 그의 민주화 운동 경력은 화려하다. 16세였던 2012년 웡은 중고생단체인 학민사조(學民思潮)를 설립해 중국식 국민교육 과목을 철회하는 시위를 이끌었다. 2014년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했던 우산혁명의 주역으로 경찰의 최루탄 물대포를 우산으로 막자고 제안한 것이 그였다. 올해 홍콩 시위는 뚜렷한 구심점 없이 수평적인 연대가 특징이지만, 웡은 국제사회를 향해 여론전을 벌이며 홍콩 시민들의 목소리를 전파하고 있다. ▷웡 비서장뿐만 아니라 데모시스토당 지도자인 아그네스 초우, 네이선 로 모두 20대 초중반이다. 이번 홍콩 시위는 시위대의 57.7%가 20대로 조사되는 등 청년의 분노가 두드러진다. 미 경제매체 CNBC는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던 이들은 부모 세대에 비해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20대는 ‘중국인이라서 자랑스럽다’는 응답이 9%에 불과할 정도로 ‘홍콩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다. 웡의 아버지는 정보기술 전문가이고,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위태로운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 앞에서 웡과 같은 20대가 느끼는 위기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이번 홍콩 시위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기반으로 연결되고 조직됐다. SNS는 중국 정부의 검열을 피해 국제사회와 소통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반(反)정부에 머물지 않고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를 상기시키는 방식으로 국제사회에 지지를 결집시키고 있다. 웡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민주화를 위해 군부에 맞서 싸운 경험이 있는 한국이 홍콩 지지 발언을 해주길 바란다. 무역을 이유로 인권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독일을 향해서는 “홍콩에 진압용 무기 수출과 판매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곧 방문할 미국에는 “미국-중국 무역협상 의제로 홍콩을 올리고 홍콩 인권·민주주의 법안을 통과시켜 달라”고 촉구한다. 30년 전 톈안먼 사태보다 한층 진화한, 세련된 저항을 하고 있다. ▷웡은 “홍콩 시위는 2047년 이후 홍콩의 미래, 우리 세대에게 주어질 미래에 관한 것”이라며 “청년들은 우리 사회의 중대한 결정마다 소외됐지만 그 결과와 가장 오랫동안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역사의 굽이굽이마다, 그 흐름을 바꾼 혁명에는 항상 미래를 스스로 선택하겠다고 나선 용기 있는 젊음이 있었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기적이 일어났다. 9일 오후 6시(현지 시간) 미국 해안경비대(USCG) 트위터에 “마지막 골든레이호 선원을 무사히 구출했다”는 소식이 올라온 것. 현대글로비스 완성차 운반선인 골든레이호가 미국 조지아주 브런즈윅항에서 12.6km 떨어진 바다에서 전도(顚倒)된 사고가 일어난 지 41시간 만이다. 승선자 24명 가운데 20명은 바로 구조됐으나 선박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구조가 중단됐다. 30도가 넘는 무더위에 화재가 겹쳐 선박 내부 온도가 50도까지 치솟았다. 남은 한국인 선원 4명은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전장 199.9m, 전폭 35.4m 크기 골든레이호는 마치 언덕이 쓰러진 듯 보였다. 화재를 진압한 해안경비대원들은 그 언덕에 올라 생존자를 찾아 나섰다. 선체를 ‘똑똑’ 두드리는 소리로 이들의 위치를 파악한 건 9일 낮. 구조는 서두르지 않되 치밀하게 이뤄졌다. 해안경비대원들은 먼저 7.6cm 구멍을 뚫어 빵과 물을 공급했고 내시경 카메라로 정확한 위치를 파악했다. 사다리를 내려보낼 선체를 뚫는 데는 드릴을 썼다. 용접은 빠르지만 불꽃이 튈지 몰라서다. 마지막으로 구조된 선원 A 씨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갇혀서 가만히 밤을 새웠지만 구조대는 (파이프 등을) 자르고 없던 길을 만들고 우리를 찾기 위해 밤을 새웠다”고 했다. ▷이번 골든레이호 구조 과정을 보며 ‘허드슨강의 기적’을 떠올렸다. 2009년 1월 뉴욕 허드슨강에 US에어웨이 비행기가 이륙 5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비상착륙했다. 승객이 전원 생존한 이 사고는 영화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으로 만들어졌다. 영화에선 기장의 기민한 판단과 헌신적인 구조 노력 등 영웅적인 행보가 감동을 줬지만 그 후 발간된 사고조사보고서는 철저한 재난 대비 덕분에 인명 피해를 최소화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보고서는 사고 직후 각 기관에 비상경보가 전파되고 구조선이 움직이고 구급차가 집결하기까지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초 단위로 기록했다. ▷골든레이호 구조작업을 지휘한 로이드 헤플린 중위는 “그들이 ‘똑똑’거리는 생존 신호를 냈을 때 밖에서 선체를 밤새워 두드렸던 건 결코 (생존자들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우리의 응답 메시지였다”며 “당신들은 혼자가 아님을 알려야 했다”고 말했다. 덕분에 ‘우리는 죽지 않는다’를 되뇌며 선체를 두드리던 생존자들은 희망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기꺼이, 묵묵히 타인의 생명을 지키는 데 사력을 다하는 이들 덕분에 사회의 안전판이 단단한 것일 터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