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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예술감독 강수진)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자가 격리 지침을 어기고 해외여행을 다녀온 단원을 해고하는 등 정단원 3명에 대해 중징계를 내렸다고 16일 밝혔다. 정단원을 해고한 것은 국립발레단 사상 처음이다. 국립발레단은 이날 징계위원회를 열고 자가 격리를 해야 하는 때에 일본 여행을 다녀온 나모 씨(28)를 해고했다. 자가 격리 기간 여자친구와 함께 여행을 다녀온 나 씨가 이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면서 지침을 어긴 사실이 알려졌다. 같은 기간 특강을 한 김모 씨(33)와 이모 씨(29)에 대해서는 각각 정직 3개월과 1개월 처분을 내렸다. 앞서 국립발레단은 지난달 14, 15일 대구 공연을 마친 뒤 대구 지역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자 24일부터 이달 1일까지 전 단원이 자가 격리에 들어갔다. 국립발레단 측은 “엄중한 시기에 국립 단체로서 물의를 일으켜 다시 한 번 깊이 반성한다. 발레단을 쇄신하는 기회로 삼고 기강 확립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2월에 취소된 공연 회차만 409회, 극단 400개 이상이 피해를 봤습니다. 현재까지 추산한 피해액만 45억 원입니다. 3월이 지나면 더 늘어나겠죠.”(김관 한국연극협회 사무총장) “무대에 출연진만 여섯 팀이 올라오는데 관객은 10명도 안됐어요. 바이러스 걱정하며 무대에 서느니 관객이 아예 없는 게 속 편할 지경입니다.”(이철진 무용수)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던 연극, 무용 등 기초예술계와 독립영화계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큰 타격을 입고 있다. 공연이 줄줄이 취소되면서 무용수, 제작진은 ‘집단 실업’에 처했다. 소극장을 운영하는 극단들은 대관료를 지불하기조차 버겁다. 독립영화계는 개봉 날짜를 미루고 싶어도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개봉하고 있다.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이번 사태를 피해 올 하반기로 상영 일정을 변경하면서 몇 달 뒤에는 상영관을 확보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정부와 관련 단체들이 긴급지원책을 내놓고 있지만 예산 편성과 심사에 걸리는 시간을 감안하면 예술인들이 혜택을 받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기초예술계는 과거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때보다 더 큰 규모의 지원을 호소하고 있다. 이번 사태를 기점으로 긴급지원책 정비와 예술계 계약 관행을 돌아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공연 매출, 추락 또 추락 올해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한 ‘연극의 해’다. 문체부는 블랙리스트, 미투 등으로 홍역을 치른 연극계를 살리기 위해 21억 원을 편성했다. 하지만 당장 살아남는 것을 걱정하는 상황이다. 이에 현장에서는 ‘연극 생존의 해’가 됐다는 자조 섞인 우스갯소리마저 나온다. 오태근 한국연극협회 이사장은 “지금 같은 위기에서 연극의 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배우, 스태프 피해를 최소화하는 정책에 예산을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5일 공연예술 통합전산망(KOPIS)에 따르면, 코로나19 사태로 최근 5주 사이 공연 예매건수와 매출액은 곤두박질쳤다. 2월 2주 차 공연 전체 예매건수는 13만6831건에서 3월 2주 차에는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4만4183건으로 급감했다. 같은 기간 연극은 3만6847건에서 1만5844건으로, 무용도 5503건에서 345건으로 크게 줄었다. 무용 공연은 3월 2주간 딱 두 편만이 무대에 올랐다. 매출액은 더 큰 폭으로 줄었다. 연극은 5억6000만 원 수준에서 1억5000만 원대로, 무용은 3억4000만 원대에서 1200만 원대로 쪼그라들었다. 집계에서 누락된 일부 취소 표와 소극장 공연 상황을 감안하면 하락폭은 더 클 것으로 보인다. 배우, 제작진은 당장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연극배우는 “3, 4월 잡혀있던 차기작 연습과 공연이 모두 무기한 연기됐고 5, 6월 공연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당장 소일거리, 아르바이트를 찾아나서는 배우도 많다. 지춘성 서울연극협회장은 “연극계는 평소에도 워낙 힘들지만 이번엔 생존 자체를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남규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은 “제작감독, 무용수 다수가 프리랜서여서 경제적 타격에 상당히 민감하다. 공연 회차를 줄이더라도 공연을 올리는 방법을 강구 중이다”고 했다. 소극장 운영자들도 수익을 포기한 지 오래다. 당장 대관료조차 감당하기 힘들어 긴급지원이나 대출을 알아보는 이가 많다. 최윤우 한국소극장협회 사무국장은 “다수 소극장 공실률이 100%에 육박하는 수준이라 월세를 마련할 방법이 필요하다”고 했다. 공연 기획, 제작, 연습까지 평균 두 달 정도를 잡는 것을 고려하면 코로나19 사태가 끝나더라도 실제 작품을 무대에 올릴 때까지 최소 석 달은 걸릴 것으로 보인다. 최 사무국장은 “여름인 6, 7월까지 6개월 넘게 수익이 없는 소극장도 속출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복 없는’ 독립영화계 독립영화들은 하루 극장 관객 수가 4만∼5만 명으로 떨어진 최악의 상황에서도 개봉을 강행하고 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상 등 3관왕에 오른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예정대로 이달 5일 개봉했다. ‘찬실이는…’의 배급사 찬란의 이지혜 대표는 “개봉을 코앞에 두고 며칠 동안 개봉 일정을 끝까지 고민했다. 개봉을 미룬 50여 편의 상업 영화들이 하반기 한꺼번에 극장에 몰리면 독립영화는 상영관을 구하기 더 어렵다”고 했다. 코로나19 사태로 가뜩이나 영화관을 기피하는 상황에서 신작 개봉까지 크게 줄어든 것도 악순환을 심화시키고 있다. 영화관들의 휴관으로 인한 어려움도 크다. 평소에도 상영관을 확보하기 어려운데 휴관으로 인해 상영관을 잡기가 더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코로나19 감염자가 집중된 대구경북 지역의 독립영화관 중 임시휴관을 결정한 곳이 많다. 대구 중구의 독립영화 전용관 ‘오오극장’은 지난달 20일부터 무기한 휴관에 들어갔고, 동성아트홀 역시 지난달 24일부터 3주간 휴관한 뒤 이달 12일부터 문을 열었다. 전북 유일 예술영화 전용관인 전주 디지털 독립영화관도 이달 9일부터 잠정 휴관했다. 독립영화 ‘기억의 전쟁’은 당초 35개 상영관에서 관객과 만날 예정이었지만 결국 절반 수준인 17개관에서 개봉했다. 배급사 시네마달 관계자는 “이길보라 감독이 현재 상황을 굉장히 안타까워하고 있다. 개봉을 미루고 싶어도 마케팅 비용 지출이 끝난 상태라 어쩔 수 없다. 차라리 4, 5월까지 영화를 계속 상영하는 장기전도 생각 중이다”고 했다. 제작 중이거나 제작을 앞둔 영화 촬영 일정이 연기되면서 일자리도 대폭 줄었다. 영화업계 관계자는 “프리프로덕션(사전제작) 일정이 연기되면서 스태프 일자리가 지난해에 비해 확연히 줄었다. 광고촬영 같은 부업마저 뚝 끊겼다”고 했다. 송창근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사무국장은 “지역 일정, 행사도 모두 취소되면서 조연, 단역급 연기자는 일거리가 없어 대리운전, 퀵 서비스를 알아보고 있다”고 토로했다. ○ 공연계 시스템 정비 목소리도 “매일 지원금 문의 전화만 50통씩 옵니다.” 코로나19 관련 공연예술분야 지원 정책을 안내하는 예술경영지원센터 ‘코로나19 전담창구’에는 요즘 매일 수십 통씩 전화가 걸려온다. 문체부를 비롯해 고용노동부,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등이 약 15개의 지원책을 내놓으면서 급한 불이라도 꺼보려는 예술인들이 이곳을 찾는다. 문체부는 긴급 생활안정자금 융자, 창작준비금 지원, 예술단체 대관료 지원, 소규모 공연장 방역물품 지원을 내놓았다. 서울문화재단은 ‘2020 서울예술지원’ 사업의 심의 일정과 지원금 교부를 앞당긴다고 발표했다. 문체부 공연전통예술과 관계자는 “피해보전, 대관료 지원을 긴급한 사안으로 판단했다. 총 피해액은 구체적으로 산정하기 어려운 단계지만 메르스 사태 당시 시행한 ‘1+1티켓’(티켓 한 장을 사면 정부 지원으로 두 장을 주는 정책) 등 사태가 진정된 후 공연계를 지원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스스로 예술 활동과 피해 내용을 증빙해야 하는 절차부터 심사까지 막막함을 호소하는 예술인이 많다. 신청이 폭주하면서 접수 절차만 4주가량이 걸린다. 한 극단 예술감독은 “융자 지원의 경우 신용도 심사와 서류절차까지 다 끝나야 하기 때문에 당장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계약서를 뒤늦게 작성하거나 구두계약만 체결하는 공연계의 고질적 관행도 지원을 어렵게 만든다. 황승경 연극평론가는 “주·조연 배우는 물론이고 음악, 무대감독급 제작진도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계약서를 쓰지 않거나 공연 후에 작성하는 일도 많아 점검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제작진, 배우 등 예술인에게만 집중된 지원 대상의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대학로 ‘성균소극장’ 관계자는 “소극장들은 벌벌 떨면서 공연을 강행하거나 무기한 휴업을 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공연이 취소되면 피해를 보는 건 마찬가지인데 지원책은 예술인들에게 편중돼 아쉽다”고 지적했다. 코로나19 사태로 관객 없이 공연을 온라인으로 생중계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주로 국공립단체를 중심으로 진행되는데, 티켓 수익은 내지 못하더라도 예술인이 무대에 설 수 있고 관객들은 무료로 공연을 볼 수 있다. 자체 기획공연을 유튜브 채널로 생중계한 경기아트센터는 “최근 연극 ‘브라보, 엄사장’ 생중계는 실시간 접속자를 비롯해 조회수가 7000회를 넘었다”고 밝혔다. 네이버를 통해 공연 생중계를 진행한 최정호 아르코예술기록원 과장은 “이번 사태로 공연 생중계, 영상 아카이브 작업이 보다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기윤 pep@donga.com·김재희 기자}
일본 도쿄(東京)에서 600km 떨어진 도쿠시마(德島)현. 공항에서 차로 다시 1시간을 달려야 도착하는 가미야마(神山) 산골 마을에는 언제부턴가 정보기술(IT) 기업인이 모여든다. 시냇물에 발 담근 채 노트북으로 일하고, 해먹에 누워 프로그래밍 하는 직장인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마을을 찾은 사람들은 광통신망, 쾌적한 업무 환경을 마음에 들어 했다. 무엇보다 “마을에 설레는 분위기가 있다”고 했다. 이 고즈넉한 지방 소도시가 IT 종사자들에게 이토록 매력적인 마을로 진화한 비결은 뭘까.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에서 지역 문제를 다뤄 온 저자는 개방적인 분위기, 해외 교류, 지방재생 정책 등을 꼽았다. ‘왜 이곳으로 왔느냐’는 질문에서 시작해 현재 진행 중인 대규모 프로젝트, 공동주택 이야기 등을 소개했다. 도농 격차 심화, 농촌 인구 이탈로 고심하는 한국에도 솔깃한 해법이 될 수 있어 보인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아버지는 그 시절에 맨날 동아일보만 봤다. 우리도 ‘소년 동아일보’만 구독해줬고 달마다 ‘월간 신동아’도 빼먹지 않으셨지.” 연극 ‘알리바이 연대기’의 1막 5장. 극 중 형은 아버지 손에 항상 들려 있던 신문을 떠올리며 동생 ‘재엽’에게 이 대사를 던진다. 작품 속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구독했던 동아일보는 세상을 읽는 그의 눈이자 정체성이나 마찬가지였다. 한 가족 이야기를 통해 한국 현대사를 조명한 ‘알리바이 연대기’는 김재엽 연출(47·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100% 실화에 기초한 자전적 이야기다. 최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사옥에서 만난 그는 “평생 구독자였던 아버지(고 김태용) 덕분에 이 작품을 쓸 수 있었다”며 아버지 사진을 어루만졌다. 김 연출의 작품은 2014년 제50회 동아연극상에서 작품상, 희곡상, 연기상을 수상하며 2대에 걸친 인연을 이어갔다. “아버지는 평생 한 번도 신문을 바꾸지 않으셨어요. 믿음과 신뢰가 있었으니까요.” 김 연출은 “‘알리바이 연대기’를 집필하면서 아버지 병 수발을 들며 임종까지 지켰다. 대구경북 지역에 평생 사시며 꿋꿋하게 동아일보만 고집했던 아버지의 애정은 각별했다”고 회고했다. “유신정권의 언론탄압으로 백지광고 사태가 났을 때 아버지가 익명으로 후원금을 보내셨더라고요. 워낙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으시고, 검소하셔서 어디 돈을 보내거나 후원할 분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후원 감사 메달’까지 집에 보관하셨던 걸 보면 그만큼 특별하게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평생 한번도 신문을 안바꾸셨죠” ▼ 김재엽 연출은 작품 ‘알리바이 연대기’에서 “(동아일보)신문에 다 나온 겁니다. 인제 사람들 다 아는 거예요” “아버지, 이거 ‘동아’일보지요? ‘동쪽’ 할 때 ‘동’ 자, ‘아세아’ 할 때 ‘아’ 자, 맞지요?” 등 아버지와 형의 실제 발언을 대사로 썼다. 작품은 2014년 동아연극상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연극대상, 한국연극평론가협회상 등 그해 연극상을 휩쓸었다. 김 연출도 ‘소년동아’를 보고 자랐다. 그는 “요새 웹툰 보는 아이들처럼 ‘강가딘’ ‘돌배군’ 등 연재만화를 좋아했다. 마당에서 신문을 가져오면 매일 누나와 이불 속에서 신문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한자, 학습섹션, 책 소개, 직업군 인터뷰까지 빠짐없이 읽은 뒤에도 늘 ‘지면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하고 아쉬워했다. TV에 아는 인물이나 특정 이슈가 나오면 아버지는 “저분이 저 때 어떤 일이 있었냐면” 하고 아들에게 스크랩해 둔 연관 기사를 건넸다. 김 연출은 “재일교포로 태어나 한국사회에 적응해야 했던 아버지에게 신문은 세상을 읽는 생존 수단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문화부 기자나 PD를 꿈꾸던 김 연출은 연세대 국문과에 입학해 우연히 ‘문우극회’ 활동을 하며 연극에 발을 들였다. ‘혜화동 1번지’ 동인을 거쳐 현재 극단 ‘드림플레이 테제21’의 대표를 맡고 있다. “10년은 연극에 매진해야 동아연극상 수상작이 될 만한 작품이 하나 나오는 것 같았다”는 그는 용산 참사를 다룬 ‘여기, 사람이 있다’ 공연 후 1년간 독일로 떠났다. 베를린 예술대학 방문교수로 지내며 겪은 자전적 이야기는 귀국 후 연극 ‘생각은 자유’로 재탄생했다. 그가 만난 재독 간호사들의 삶은 연극 ‘병동소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가 되어 2017년 무대에서 피어올랐다. 자전적 경험을 시대적 상황과 연결시켜 풀어내는 솜씨가 탁월하다고 평가받는 김 연출은 “남성성에 대한 반성을 담아 ‘알리바이 연대기’에서 소외된 어머니와 누나, 둘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요즘 어머니를 열심히 인터뷰하고 있다”며 웃었다. 그는 “동아연극상은 군사정권 시기에 검열 받을 만한 사회비판적 작품에도 상을 주는 전통과 힘이 있었다. 재정적으로 상을 유지하기 쉽지 않았겠지만 연극인들에게 큰 의미가 있다”고 고마워했다. 본보에는 “아버지께 평생 신뢰감을 준 것처럼 진실의 무게를 가진 보도를 계속 부탁한다”며 “동아 100년 역사가 가진 정체성과 다양성이 둘로 나뉜 한국사회의 틀을 깨버릴 힘이 있다고 믿는다”고 당부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올해 1월 그의 연기상 수상 소식에 곳곳에서 축하 인사가 잇따랐다. 지인 가운데 일부는 데뷔 34년 차 배우 강지은(53)이 “상을 늦게 받은 것 아니냐”고 했다. 동료들의 농담 섞인 반응은 상을 받을 만한 이가 드디어 수상했다는 안도감에 가까웠다. 1987년 연극 ‘비’로 데뷔해 30년 넘게 줄곧 연극 무대를 지킨 강지은을 서울 종로구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5일 만났다. 그는 “생각지도 못한 상에 너무 기뻤다. 연극 준비 작업만으로도 힘들 때가 많은데 ‘연극하느라 애쓴다’고 상을 받아 위로받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그는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감칠맛 나게 표현하는 배우로 정평이 나 있다. 지난해 연극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에서 맡은 어머니 배역이 호평을 받아 수상으로 이어졌다. 희생하는 전통적 어머니상에서 한발 더 나아가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고 가정을 보듬으며 생명력과 희망까지 표현했다는 평을 받았다. 최근작 ‘해방의 서울’에서는 시대에 굴복한 친일 배우 ‘지화정’을 매력적으로 그렸다. ‘철가방 추적 작전’에서는 비행 청소년을 몸소 뒤쫓는 교사 ‘봉순자’로 변신했다. 그는 “사람이 모여서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게 연극이다. 보는 사람들이 멀게 느끼는 남 얘기가 아니라 지금 살아가는 우리 이야기에 눈길이 가고 욕심이 난다”고 했다. 그는 박근형 연출가의 최근 작품에 모두 출연할 정도로 박 연출가의 극단 골목길과 ‘케미’가 좋다. 그는 “배우, 연출가 등 단원 모두가 연기, 표현력을 포착하는 능력이 빨라 서로 신뢰한다”고 했다. 박 연출가가 직접 집필한 작품에서 보여주는 정확한 지향점도 그가 골목길을 선호하는 이유다. 강지은은 2002년부터 서울시극단에서 10년 넘게 단원으로 활동하다가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원하는 작품과 역할보다는 고전 희곡 작품이 먼저였다. 답답한 유럽풍 드레스를 자주 입어 힘들 때도 있었고, 연극에 대한 근본적인 갈증을 느꼈다”고 했다. 틀에 얽매이지 않은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 그는 “세상과 동떨어지지 않은 지금, 여기의 얘기가 고팠다”고 했다. 강지은은 요즘 고등학생 시절을 종종 떠올린다. “설명할 수 없는 울렁이는 마음”만 안고 김포공항 인근 집에서부터 버스를 탔다. 무대가 펼쳐지는 광화문 마당세실극장과 대학로 소극장을 찾았다. “그 시절 암전된 무대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만 해도 설렜어요. 무엇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 좋았던 제 초심을 돌아보고 나이를 더 먹어도 거침없이 연기하고 싶어요.”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캐나다 출신의 연극계 거장 로베르 르파주는 가족사를 다룬 자신의 작품에 대해 “소문자 h로 된 역사(history)를 탐구함으로써 대문자 H로 시작하는 역사(History)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정설’로 여겨지는 하나의 ‘History’ 안에 무수히 많은 인간, 사건들의 ‘history’가 담겨 있고, 이를 조명할 때 비로소 진정한 ‘History’에 도달한다는 의미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앞두고 ‘여성들의 역사(Herstory)’를 돌아보는 책이 출간됐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남성 서사로 덧칠된 역사(History) 안에 감춰졌던 ‘2등 시민’ 여성들의 목소리를 100가지 물건을 통해 되짚는다. 영국 우스터대와 버밍엄대에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연구한 두 저자는 역사 속 여성의 삶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재정립됐는지에 초점을 맞춰 집필했다. 이들이 역사 속에서 끄집어 낸 100가지 물건은 상징물, 그림, 기록, 기구, 유품 등으로 다양하다. 이 물건들을 여성의 몸, 사회적 역할 변화, 미의식과 소통, 정치 등 총 8가지 분야로 나눴다. 각 물건에 얽힌 짤막한 소개와 함께 물건의 역사적 의의가 술술 읽힌다. 전반부에는 남성이 여성을 타자화하고 억압한 사례들을 소개한다. 16세기 스코틀랜드에서 사용한 ‘잔소리꾼 굴레’는 여성의 입에 재갈을 물리듯 채우는 도구다. 가부장적인 규범에 맞지 않게 ‘불손한’ 말을 하는 여성의 입에 채웠다. 물을 마실 수도 없게 혀를 고정시킨다. 오늘날 여성 억압의 상징물로 여겨지는 코르셋은 기원전 2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대 용도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으나 15세기까지만 해도 코르셋은 속옷이 아니었다. 뻣뻣한 소재로 만들어져 일을 하기 불편했고, 노동하지 않는 상류층 여성의 기품을 상징하는 의류였다. 이후 극도로 졸라매는 방식이 개발되며 건강을 해치는 수준이 됐다. 훗날 특정 물건을 통해 성적 쾌감을 얻는 페티시(fetish)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다. 18, 19세기 영국에서는 대중적으로 아내를 사고파는 관행이 있었다. 심지어 공공장소에서 판매가 이뤄지거나 광고 포스터로 제작돼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아내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지만, 판매가 성사되면 변호사를 통해 영수증을 작성했다. 가난한 계층에게는 아내 판매가 일종의 이혼이었다. 대부분의 여성에게는 이혼을 선택할 권리가 없었다. 1700년부터 1857년까지 남편과의 이혼에 성공한 여성은 여덟 명뿐이었다. 책은 여성 억압에만 머물지 않는다. 여성이 스스로 권리를 어떻게 쟁취했으며 여성사의 의의도 강조한다. 자동차 ‘미니(MINI)’는 여성이 가정 공간을 벗어나게 한 혁신이다. 남성 전유물이던 자동차가 더 작고 저렴하게 보급되며 여성도 이동의 자유가 생겼다. 1990년 잡지 ‘오토카’에서 100인의 전문가도 20세기 가장 의미 있는 차로 미니를 택했다. 미니의 성공에 자극받은 다른 자동차 회사들도 잇따라 여성 소비자에게 눈을 돌렸다. 여성 운전자가 더이상 낯설지 않은 오늘날 ‘여성의 공간지각력이 부족하다’는 통설을 반박하는 과학적 연구가 있음에도 여성 운전자에 대한 농담과 비판은 여전하다.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나라에서는 여성을 위해 ‘특별하게’ 넓은 주차공간을 제공한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뭐 보러 오셨어요?” “‘인비저블맨’ 9시 반 한 장요.” 3일 오후 8시 반 서울 송파구 탄천공영주차장 내 잠실자동차극장 매표소 앞에는 영화 시작 1시간 전부터 차량 7대가 늘어서 있었다. 지난달 26일 개봉한 미국 공포영화 ‘인비저블맨’ 표를 사기 위한 차량들이었다. 공영주차장을 가득 채운 자동차들 앞에 설치된 스크린에서는 영화 ‘정직한 후보’가 한창 상영 중이었다. 자동차극장 티켓 가격은 차량 한 대당 2만2000원. 탑승자 수에 관계없이 차량 기준으로 받기 때문에 두 명이 올 경우 일반 영화관 티켓(1인당 약 1만1000원) 가격과 비슷하다. 5분 사이에 ‘인비저블맨’ 티켓 5장이 팔려나갔다. 정신없이 손님을 받던 자동차극장 매표소 직원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 2월을 기점으로 손님 수가 전달보다 20%가량 늘었다. 극장에 약 100대의 차량이 들어가는데 매일 60∼70대는 찬다. 오늘도 60대 넘는 차량이 찾았다”고 말했다. 경기 안산시에서 약 2시간을 운전해 남편, 강아지와 함께 잠실자동차극장에 온 직장인 남정화 씨(43)는 “코로나19 확진자가 방문해 영화관이 폐쇄되는 사태를 보면서 무서워서 영화관은 못 가겠다. 내 차를 타면 사람들과 접촉할 일도 없으니 안전하겠다 싶어서 왔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사태가 문화생활 방식을 빠르게 바꿔 놓고 있다. 사람들은 타인과 접촉하지 않고도 여가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섰다. ○집, 자동차에서 즐긴다 서울 시내 영화관에서는 자동차극장과 상반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2일 오후 8시 반 서울 서대문구 신촌아트레온 CGV에서 올해 아카데미 각색상을 수상한 ‘조조래빗’의 상영관에는 127석 중 단 18석만 찼다. 관객 모두 마스크를 쓰고 옆자리는 비워 둔 상태였다. 이날 극장을 찾은 직장인 이모 씨(31·여)는 “집에만 있는 게 너무 답답해 왔다. 지난주 토요일 저녁에도 ‘1917’을 시작 10분 전에 예매했는데도 자리의 3분의 1이 채 안 찼다. 관객이 거의 없으니 영화관이 오히려 바깥보다 안전하게 느껴질 정도”라고 했다.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3일 전체 관객은 5만9895명으로 16년 만에 최저 수준이었다. 5일도 6만5530명으로 6만 명을 겨우 넘겼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신작 영화들의 연이은 개봉 연기, 영화관 폐쇄를 비롯해 뮤지컬, 연극, 전시 등이 ‘올 스톱’되면서 문화 콘텐츠를 ‘자가 격리’된 상태로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자동차극장을 이용하거나 집에서 인터넷TV(IPTV),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해 영화나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이다. 치량 500여 대를 수용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자동차 극장인 경기 파주시 자유로자동차극장은 이용자의 증가세가 확연하다. 윤혜정 자유로자동차극장 운영실장은 “자동차극장은 기존 고객이 재방문하는 경우가 많은데 코로나19 확산 이후 처음 방문한 고객이 대폭 늘었다. 고객 거주지도 경기도가 대부분이었는데 서울이나 타 지역에서도 손님이 온다”고 말했다. OTT를 통한 콘텐츠 소비도 급증했다. 국내 스트리밍 플랫폼인 왓챠플레이는 코로나19의 경보 단계가 ‘경계’에서 ‘심각’으로 격상된 2월 23일 하루 시청 시간이 1월 중순에 비해 약 14% 늘었고, 3월 1일에는 약 37% 늘었다. OTT 대표주자인 넷플릭스 역시 이용자 수가 늘었다.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분석 서비스 ‘앱마인더’가 전국 만 20∼59세 스마트폰 이용자 1만여 명의 로그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1월 첫째∼셋째 주와 2월 첫째∼둘째 주 사이 넷플릭스 앱 이용자 수는 92만 명에서 104만 명으로 늘었다. 지상파 3사 연합 OTT 플랫폼인 웨이브도 지난달 18∼25일 영화 단건 구매 건수가 5만3000건으로 전주 대비 7% 증가했다. 전염병을 다룬 콘텐츠가 특히 인기를 끌고 있다. ‘컨테이젼’과 ‘감기’가 대표적이다. 2011년 개봉한 영화 컨테이젼은 박쥐의 배설물을 먹은 돼지를 만진 요리사와 악수한 미국 여성이 감염돼 전염병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내용으로, 코로나19 사태와 깜짝 놀랄 만큼 닮았다. 컨테이젼은 왓챠플레이에서 2월 한 달간 가장 많이 본 영화였다. 2013년 치사율 100%의 바이러스가 발생하면서 정부가 도시를 폐쇄하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 ‘감기’도 2월 8번째로 많이 본 영화였다. 드라마로는 재난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정부를 비판하는 ‘체르노빌’이 1위였다. 영화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극한 직업’, ‘미드소마’, ‘돈’이 2∼5위를 차지했다. 왓챠플레이 관계자는 “컨테이젼과 감기는 50위권 밖의 영화들인데 코로나19 확산 이후 시청 시간이 급증했다. 아카데미 수상 이후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 순위가 뛰었는데 전염병 공포를 다룬 ‘괴물’의 상승폭이 가장 높다”고 설명했다. 넷플릭스의 6일 기준 인기 콘텐츠는 ‘이태원 클라쓰’, ‘사랑의 불시착’,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이바이 마마!’, ‘연애의 참견’ 순이었다. 넷플릭스는 지난달 25일부터 ‘오늘 한국의 톱10 콘텐츠’를 매일 공개하고 있다. ○온라인으로 즐긴다 공연계에도 접촉을 피하는 ‘언택트’가 확산하고 있다. 공연 기관, 제작사는 공연을 온라인으로 중계하며 돌파구를 찾고 있다. 티켓 판매 등 수익을 올리지 못하더라도 배우, 무용수, 제작진의 노력을 살리자는 취지다. 팬들은 생중계, 녹화중계 등을 시청하며 갈증을 달래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창작공연 지원 사업인 ‘창작산실’ 선정작들을 네이버 공연전시판을 통해 꾸준히 소개해 왔다. 6일에도 무용 ‘히트&런’을 무관중 생중계했고, 12일에는 연극 ‘의자 고치는 여인’을 선보인다. 경기아트센터 역시 12일 개막 예정이었던 연극 ‘브라보 엄사장’ 공연을 취소하는 대신 유튜브로 온라인 생중계하기로 결정했다. 작품 연출가인 박근형 씨도 무관중 생중계는 처음이다. 공연 중계를 담당한 한 관계자는 “공연 영상화 사업, 아카이브 작업에 대한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됐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작업이 탄력을 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공연 팬들은 “화면으로 보면 무대의 매력이 반감하지만 ‘내 방 1열’에서 조금이나마 갈증을 달랠 수 있을 것”이라는 반응을 보인다.김재희 jetti@donga.com·김기윤 기자}
“뭐 보러 오셨어요?” “‘인비저블맨’ 9시 반 한 장이요.” 3일 오후 8시 반 서울 송파구 탄천공영주차장 내 잠실자동차극장 매표소 앞에는 영화 시작 1시간 전부터 차량 7대가 늘어서 있었다. 지난달 26일 개봉한 미국 공포영화 ‘인비저블맨’ 표를 사기 위한 차량들이었다. 공영주차장을 가득 채운 자동차들 앞에 설치된 스크린에서는 영화 ‘정직한 후보’가 한창 상영 중이었다. 자동차극장 티켓 가격은 차량 한 대당 2만2000원. 탑승자 숫자에 관계없이 차량 기준으로 받기 때문에 두 명 이상 올 경우 일반 영화관 티켓(1만 1000원) 가격과 비슷하다. 5분 사이에 ‘인비저블맨’ 티켓 5장이 팔려나갔다. 정신없이 손님을 받던 자동차극장 매표소 직원은 “신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 2월을 기점으로 손님 수가 전달보다 20% 가량 늘었다. 극장에 약 100대의 차량이 들어가는데 매일 60~70대는 찬다. 오늘도 60대 넘는 차량이 찾았다”고 말했다. 경기 안산시에서 약 두 시간을 운전해 남편, 강아지와 함께 잠실자동차극장에 온 직장인 남정화 씨(43)는 “코로나19 확진자가 방문해 영화관이 폐쇄되는 사태를 보면서 무서워서 영화관은 못 가겠다. 내 차를 타면 사람들과 접촉할 일도 없으니 안전하겠다 싶어서 왔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사태가 문화생활 방식을 빠르게 바꿔놓고 있다. 사람들은 타인과 접촉하지 않고도 여가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섰다. ●집, 자동차에서 즐긴다 서울 시내 영화관에서는 자동차극장과 상반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2일 오후 8시 반 서울 서대문구 신촌아트레온 CGV에서 올해 아카데미시상식 각본상을 수상한 ‘조조래빗’의 상영관에는 127석 중 단 18개석만 찼다. 관객 모두 마스크를 끼고 옆 자리는 비워 둔 상태였다. 이날 극장을 찾은 직장인 이 모씨(31·여)는 “집에만 있는 게 너무 답답해 왔다. 지난주 토요일 저녁에도 ‘1917’을 시작 10분전에 예매했는데도 자리의 3분의 1이 채 안 찼다. 관객이 하나도 없으니 영화관이 오히려 바깥보다 안전하게 느껴질 정도”라고 했다.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3일 전체 관객은 5만9895명으로 16년 만에 최저 수준이었다. 5일도 6만5530명으로 6만 명을 겨우 넘겼다. 코로나 19의 여파로 신작 영화들의 연이은 개봉 연기, 영화관 폐쇄를 비롯해 뮤지컬, 연극, 전시 등이 ‘올 스톱’되면서 문화 콘텐츠를 ‘자가 격리’된 상태로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자동차극장을 이용하거나 집에서 인터넷 TV(IPTV),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해 영화나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이다. 치량 500여 대를 수용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자동차 극장인 경기 파주시 자유로자동차극장은 이용자의 증가세가 확연하다. 윤혜정 자유로자동차극장 운영실장은 “자동차극장은 기존 고객이 재방문하는 경우가 많은데 코로나19 확산 이후 처음 방문한 고객이 대폭 늘었다. 고객 거주지도 경기도가 대부분이었는데 서울이나 타 지역에서도 손님이 온다”고 말했다. OTT를 통한 콘텐츠 소비도 급증했다. 국내 스트리밍 플랫폼인 왓챠플레이의는 코로나19의 경보 단계가 ‘경계’에서 ‘심각’으로 격상된 2월 23일 하루 시청 시간이 1월 중순에 비해 약 14% 늘었고, 3월 1일에는 약 37% 늘었다. OTT 대표주자인 넷플릭스 역시 이용자 수가 늘었다.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분석 서비스 ‘앱마인더’가 전국 만 20~59세 스마트폰 이용자 1만여 명의 로그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1월 첫째~셋째 주와, 2월 첫째~둘째 주 사이 넷플릭스 앱 이용자 수는 92만 명에서 104만 명으로 늘었다. 지상파 3사 연합 OTT 플랫폼인 웨이브도 지난달 18~25일 사이 영화 단건 구매 건수가 5만3000건으로 전주 대비 7% 증가했다. 전염병을 다룬 콘텐츠가 특히 인기를 끌고 있다. ‘컨테이전’과 ‘감기’가 대표적이다. 2011년 개봉한 영화 컨테이전은 박쥐의 배설물을 먹은 돼지를 만진 요리사와 악수한 미국 여성이 감염돼 전염병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내용으로, 코로나19 사태와 깜짝 놀랄 만큼 닮았다. 컨테이젼은 왓챠플레이에서 2월 한 달 간 가장 많이 본 영화였다. 2013년 치사율 100%의 바이러스가 발생하면서 정부가 도시를 폐쇄하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 ‘감기’도 2월 8번째로 많이 본 영화였다. 드라마로는 재난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정부를 비판하는 ‘체르노빌’이 1위였다. 영화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극한 직업’, ‘미드소마’, ‘돈’은 2~5위를 차지했다. 왓챠플레이 관계자는 “컨테이전과 감기는 50위 밖의 영화들인데 코로나19 확산 이후 시청 시간이 급증했다. 아카데미 수상 이후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 순위가 뛰었는데 전염병 공포를 다룬 ‘괴물’의 상승폭이 가장 높다”고 설명했다. 넷플릭스의 6일 기준 인기 콘텐츠는 ‘이태원 클라쓰’, ‘사랑의 불시착’,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이바이 마마!’, ‘연애의 참견’ 순이었다. 넷플릭스는 지난달 25일부터 ‘오늘 한국의 톱 10 콘텐츠’를 매일 공개하고 있다. ●온라인으로 즐긴다 공연계에도 접촉을 피하는 ‘언택트’가 확산하고 있다. 공연 기관, 제작사는 공연을 온라인으로 중계하며 돌파구를 찾고 있다. 티켓 판매 등 수익을 올리지 못하더라도 배우, 무용수, 제작진의 노력을 살리자는 취지다. 팬들은 생중계, 녹화중계 등을 시청하며 갈증을 달래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창작공연 지원사업인 ‘창작산실’ 선정작들을 네이버 공연전시판을 통해 꾸준히 소개해왔다. 6일에도 무용 ‘히트&런’을 무관중 생중계했고, 12일에는 연극 ‘의자 고치는 여인’을 선보인다. 경기아트센터 역시 12일 개막 예정이었던 연극 ‘브라보 엄사장’ 공연을 취소하는 대신 유튜브로 온라인 생중계하기로 결정했다. 작품 연출가인 박근형 씨도 무관중 생중계는 처음이다. 공연 중계를 담당한 한 관계자는 “공연 영상화 사업, 아카이브 작업에 대한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됐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작업이 탄력을 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공연 팬들은 “화면으로 보면 무대의 매력이 반감하지만 ‘내 방 1열’에서 조금이나마 갈증을 달랠 수 있을 것”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거주지는 한국, ‘인터넷주소(IP주소)지’는 인도, 아르헨티나, 미국, 일본…? 인터넷상 국경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남들보다 더 싸게, 더 먼저 콘텐츠를 즐기려는 ‘콘텐츠 유목민’이 늘고 있다. 이는 전 세계에 서비스하는 유튜브, 넷플릭스,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가 국가별 가격, 콘텐츠 공개 범위, 공개 시점에 차이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콘텐츠 유목민들은 실제 거주지와 상관없이 IP주소를 옮겨가며 영상, 게임, 음악 콘텐츠를 소비한다. 대학생 송모 씨(23)의 IP주소지는 인도 뉴델리다. 그는 최근 광고 없이 영상을 볼 수 있는 ‘유튜브 프리미엄 서비스’를 싸게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았다. 가상사설망(VPN)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한 뒤 서비스 비용이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인도로 IP주소를 옮기고 현지 통화로 결제하는 방식이다. 실제 국내에서 8690원(부가세 포함)인 월정액 이용료는 인도에서 약 2100원(129루피)으로 떨어진다. 6명까지 사용 가능한 ‘가족 요금제’로 결제하면 1인당 약 500원에 서비스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송 씨는 “약관상 안 되는 행동인 데다 번거롭지만 더 싸게 콘텐츠를 시청할 수 있어 만족도가 높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이용료가 저렴한 아르헨티나 등도 ‘각광’을 받고 있다. 이처럼 국가마다 차이가 나는 것은 이용료가 각국의 광고 단가, 동영상 수익구조, 물가 수준을 고려해 책정되기 때문이다. 해당 국가의 시장 점유율을 높이려는 OTT 업체 간 저가 경쟁도 이용료 인하 요인으로 작용한다. 남보다 일찍 본다는 만족감도 콘텐츠 유목민을 유인한다. 직장인 이모 씨(34)는 넷플릭스를 켜기 전 매번 IP주소지를 일본으로 옮긴다. 이용료에는 큰 차이가 없어도 국내에 공개되지 않은 일본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를 먼저 볼 수 있어서다. 일부 콘텐츠는 한국 페이지에도 공개되지만 다른 이용자보다 더 빨리 최신 해외 콘텐츠를 시청하는 쾌감을 즐긴다. 이 씨는 “해외 콘텐츠가 영상물등급심의위원회를 거쳐 국내에 공개되려면 최소 2, 3주 더 걸린다. 실시간으로 따끈따끈한 콘텐츠를 즐기고 싶다”고 말했다. 콘텐츠 유목민은 영상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서비스하지 않는 게임이나 음원 서비스로도 영역을 넓히고 있다. 박모 씨(33)는 “제작사에 따라 한국에 서비스를 하지 않더라도 내용만 좋다면 인터넷 국경을 뛰어넘는 건 큰 문제가 아니다”라고 했다. IP주소지 변경은 더 정확한 검색 결과를 찾으려는 사람이나 외국어 학습을 위해 현지어 콘텐츠를 찾는 이에게도 유용한 수단이 된다. 역으로 한국의 콘텐츠에 갈증을 느끼는 해외 거주자들도 IP주소지를 한국으로 바꾸기도 한다. 하지만 IP주소지 변경은 약관을 위배하는 편법이나 사기 행위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튜브 측은 유료 서비스 약관에 ‘사용자는 국가를 허위 기재하지 않고, 액세스 제한을 우회하는 시도를 하지 않기로 동의한다’고 명시했다. 이를 위배한 사례를 적발하면 계정을 차단하는 ‘접근 제한 조치’를 취한다. 결제금액 손실 등 불이익도 따른다. 넷플릭스도 저작권을 이유로 우회 접속을 허용하지 않는다. 업계 관계자는 “편법임은 분명하지만 ‘콘텐츠 국경’이 점차 희미해지는 시대에 수억 명의 소비자를 일괄 제재하기는 기술적으로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연극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우리네 인생을 무대 위에 펼쳐내며 관객을 울고 웃게 만든 제56회 동아연극상 수상자의 인터뷰, 에세이를 싣습니다. 연극인의 치열한 고민과 땀 냄새를 전합니다.》 “며칠 전 삼킨 임플란트(치아)를 오늘 아침 화장실에서 기적적으로 찾았습니다. 상도 받고 치아도 찾은 이날을, 살면서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올 1월 제56회 동아연극상 시상식에서 연기상을 받은 배우 성노진(48)의 수상 소감은 좌중을 크게 웃겼다. 시상식을 며칠 앞두고 밥을 먹다가 빠진 임플란트를 삼켜버린 그는 치과를 찾았다. 의사는 새 의치(義齒)를 권했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이후 매일 오전 화장실에서 시간을 보내던 그는 시상식 날 변기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그것’을 찾았다. 최근 서울 광화문 인근 카페에서 만난 성노진은 “말썽을 일으킨 임플란트를 치약으로 잘 닦아 보관하다 지금은 다시 잇몸에 끼웠다. 두 가지 기적이 한꺼번에 일어난 그날은 연기를 하다 지칠 때 큰 디딤돌이 될 것”이라며 웃었다. 성노진은 선천적으로 치아와 잇몸이 약했다. 그의 주치의는 “배우를 하기엔 하관이 버텨내기 힘들 것”이라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소리치며 대사를 뱉거나 어금니를 꽉 깨물며 힘쓰는 연기를 할 때 남들보다 몇 배의 에너지를 내야 했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의사의 잔소리는 오히려 연기에 대한 열망을 부채질했다. 장기공연과 연습을 마친 뒤에는 습관처럼 병원을 찾아 무너져 내린 잇몸을 치료했다. 고교 연극반 단원으로 처음 무대에 오른 지 약 30년. 그는 마침내 극단 골목길의 연극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에서 ‘창호’ 역으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모든 권위를 내려놓은 가부장의 절망과 한탄을 깊이 있게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제가 작품에서 빛나거나 연기가 탁월해서 상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배우로서 꾸준히 무대에 올랐던 것이 플러스알파가 돼 인정받지 않았을까요.” 한없이 몸을 낮추던 그도 수상 이후 주변의 반응을 묻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는 동아연극상의 ‘미덕’이라고 표현했다. “술자리에서 후배 하나가 ‘동아연극상 받은 선배 처음 봤다’며 저를 신기하게 쳐다보더라고요. 저를 잘 모르던 선배들도 ‘너 조명도 달고 망치질도 하더니 연기도 하네’라며 제가 배우라는 걸 아셔서 좋습니다.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거친 동아연극상에 제가 포함된다고 생각하면 어깨도 쫙 펴지죠.” 연극은 끝이 없고, 연극을 정의하기도 힘들다는 그도 ‘늘 하던 대로’라는 연기 지론만큼은 확고했다. 그는 지난달 막을 내린 초연작 ‘마트료시카’에 이어 6월 국립극단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연습에도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적어도 ‘동아연극상 (받은 거) 맞아? 왜 연기를 저렇게 하지’라는 말은 듣지 말아야죠. 저는 늘 하던 대로 무대를 지킬 겁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극복을 위한 각계각층의 기부가 이어지고 있다. 연예계 인사들이 앞장서 기부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배우 전지현은 1일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에 1억 원을 기부했고 가수 황치열도 이 단체에 5000만 원을 전달했다. 배우 김수현과 정해인은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각각 1억 원을 기탁했다. 가수 아이유는 거주 중인 서울 서초구에 3000만 원을 전달해 방역물품 구매에 힘을 보탰다. 봉준호 감독과 배우 송강호 김혜수 정우성, 방송인 강호동도 나눔에 동참했다. 그룹 슈퍼주니어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마스크 1만 개를 기부했고 멤버 은혁은 전국재해구호협회에 성금 1억 원을 쾌척했다. 그룹 레드벨벳의 아이린과 웬디 역시 각각 1억 원을 기부했다. 방탄소년단(BTS)의 멤버 슈가가 1억 원을 기탁한 데 이어 팬클럽 아미는 4월 콘서트가 취소되자 환불받을 콘서트 티켓 금액을 기부하는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기업들의 통 큰 기부도 줄을 잇고 있다. 엔씨소프트는 지난달 28일 성금 20억 원을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에 기부했다고 밝혔다. 넥슨은 대한적십자사에, 네이버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각각 성금 20억 원을 기탁했다. 넷마블과 코웨이도 각각 10억 원을 전국재해구호협회에 전달했다. 하이트진로는 대구경북 지역에 방역 물품과 성금 등 총 12억 원가량을 지원하기로 했다. 글로벌 기업도 나섰다. 메르세데스벤츠 사회공헌위원회는 사회복지법인 아이들과미래재단을 통해 10억 원을 기부하기로 했다. 또 3∼5월 판매 차량 1대당 10만 원의 기부금을 적립해 10억 원 이상 누적되면 추가로 기부를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더본코리아는 전국 1480여 개 가맹점을 대상으로 2개월 치 로열티를 전액 감면하기로 했다. 임시 휴업한 매장에서 발생한 폐기 식자재 비용도 본사에서 부담하기로 했다. 한편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등 서울 소재 대학에서도 대구경북 지역 주민을 위한 대학생 모금 행렬이 잇따르고 있다. 대학생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의 고려대 게시판에서는 학우들의 자발적인 기부 모금이 시작돼 1일 오후까지 약 400만 원이 모였다. 고려대의 한 학생이 “대구 의료시설에 보내질 기부금을 모금하자”고 글을 올리면서 시작된 모금에는 150명 이상이 참가했다. 연세대 커뮤니티 ‘세연넷’에서도 기부금 모금 운동이 펼쳐져 1일까지 약 770만 원이 모였다. 대학생 자원봉사단체 ‘십시일밥’의 성균관대 지부도 지난달 25일부터 소외계층 학우에게 마스크를 기부하기 위한 ‘성균관대학교코로나19펀딩’을 진행해 약 400만 원을 모금했다. 유근형 noel@donga.com·김기윤·전채은 기자}
199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고 ‘눈먼 자들의 도시’ ‘수도원 비망록’ 등을 남긴 환상 리얼리즘의 거장, 주제 사라마구가 소년의 눈으로 돌아갔다. 2010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 4년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집필한 유년기 회고록이다.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20세기 초 포르투갈 리스본과 아지냐가의 풍경이 잔잔하게 묻어난다. 책에는 그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 어린 시절부터 단어와 이야기에 푹 빠져 지내던 문학 소년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가 인터뷰에서 “나라는 사람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독자들이 알기 바란다”고 밝혔듯 저자의 사상적, 정신적 원천으로 향하는 에세이다. “늘 풍경 속에 들어가 있었다”는 한 소년의 모습은 1920년대 포르투갈 골목길과 강변을 따라 유려한 필체로 묘사된다. 그를 길러낸 부모의 모습과 이웃들의 얘기도 초상화처럼 남아 있다. 물론 좋은 기억만 있던 건 아니다. 전쟁, 쿠데타를 겪으며 그가 느낀 두려움, 상처도 보인다. 매번 등장인물과 상황이 달라지는 수많은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세기의 대문호라지만 타지에서 자란 한 이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줄까. 옮긴이는 원작의 가치를 “소년기의 기억이 우리 삶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찾았다. 저자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한 소년 안에서 우리 모두의 유년기 모습을 발견할지 모른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암흑을 떠올렸을 때 연상되는 것을 과거 현재 미래의 입장에서 서술한다면? 구시대적 산물이라 생각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당신의 일상 속 초월적 현실이란?” 머리를 쥐어짜내야 하는 철학이나 논술고사 문제가 아니다. 여느 안무 스튜디오와 다를 것 없는 서울 서초구의 한 연습실에서는 신창호 안무가(43·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가 ‘비욘드 블랙’에 출연하는 무용수들에게 이 같은 질문을 먼저 던진다. 무용수들은 20개의 형이상학적 물음에 각자의 답을 내놓고 안무 연습 전부터 토론을 벌인다. 신창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인공지능(AI)을 현대무용 무대로 끌어왔다. 무용과 연관짓기 힘든 소재를 인간의 몸으로 풀어내는 ‘질문하는 안무가’ 신창호가 신작 ‘비욘드 블랙’을 4월 무대에 올린다. 서울 마포구의 한 전시장에서 25일 만난 그는 “무용이 무대에만 갇히면 관객과 대화할 수 없다. 과학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담아 어떻게 하면 변하는 사회상을 표현할 수 있을지 늘 질문한다”고 했다. 그의 행보를 꾸준히 지켜본 이라면 이번 실험도 낯설지만은 않다. 그는 2002년 이라크전쟁을 소재로 한 ‘노코멘트’를 발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국예술종합학교 현대무용 전공자들로 구성된 LDP무용단 대표를 2009년 최연소로 맡아 고령화시대 ‘노화’를 주제로 작품을 냈다. 최근작 ‘맨메이드’ ‘IT’는 신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한 작품이다. 시의성, 대중성, 실험성을 갖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창단 10주년을 맞는 국립현대무용단의 시즌 개막작 ‘오프닝’에서 선보일 ‘비욘드 블랙’ 역시 그 연장선에 놓였다. 블랙은 AI가 불러온 미지의 세계를 뜻한다. 그는 “미지의 영역을 넘어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했다. AI를 활용한 안무 작업 특성상 세 단계를 거친다. 크로마키를 배경으로 무용수의 움직임을 촬영해 그 데이터를 AI에 입력하면 AI는 무용수 8명의 패턴을 분석해 움직임을 모방 생산한다. 무용수들은 이를 다시 작품에 맞게 재해석한 ‘AI적 동작’을 내놓는다. 그는 “AI를 활용한 안무는 아마 세계 최초일 것”이라며 웃었다. “기억력이 안 좋아 모든 걸 메모한다”는 그의 휴대전화 메모장에는 신체역학, 매체과학, 미학 이론 등이 빼곡히 적혀 있다. 순간 떠오르는 아이디어와 학술서에서 찾은 이론을 일목요연하게 직접 정리한다. “언젠가는 작품에 꼭 담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리서치 겸 메모는 습관이 됐고, 작품 세계의 단단한 토대가 됐다. 단순히 ‘이색적인 소재만 좇는다’고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발레를 전공한 어머니가 그에게 현대무용을 권하며 던진 말은 지금도 큰 지침이 됐다. “틀에 갇히지 않는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춤을 추라고 하셨어요.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 있지만 관객이 가상현실 속에서 무용수의 땀과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날도 오지 않을까요?”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누군가를 쉽게 설명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 인물의 색채가 뚜렷하지 않거나 그가 가진 색채가 다양해 쉽사리 규정할 수 없는 경우다. 김풍 작가(42)는 후자에 가깝다. 웹툰 작가로 데뷔해 ‘야매 요리’ 거장, MC, 방송인, 단역 배우 등 수많은 수식어가 따르는 그가 최근 뮤지컬에 재능을 ‘올인’하고 있다. 직접 공연 카툰 포스터도 그리더니, 얼마 전에는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신메뉴도 개발했다. 그가 운영하는 서울 마포구의 ‘N카페’(N은 이름 ‘풍’을 뒤집은 글자)를 13일 찾았다. 그는 “웹툰이 자식 같은 존재라면, 요리는 설렘 가득한 첫사랑, 뮤지컬은 삶에 에너지를 주는 여행”이라며 “막이 내릴 때까지 제 멱살을 잡고 끌고 가는 공연의 느낌이 좋다”고 했다. 그의 멱살을 잡아챈 뮤지컬은 7년 만에 한국을 찾은 ‘오페라의 유령’이다. 9일 부산에서 막을 내렸고, 3월 14일 서울 공연을 앞두고 있다. 부산 드림씨어터에서 공연을 관람한 그는 “처음 봤을 때 팬텀 캐릭터는 ‘또라이’ 같은 데다 무대 위 상황이 다 가짜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넘버, 연기, 몰입감이 굉장했다. 보고 난 뒤 ‘기 치료’를 받은 것처럼 압도적 에너지를 받았다”고 털어놨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공연 덕후다. 과거 한 연극에 배우로 출연했으며, 대학로 뮤지컬 ‘찌질의 역사’의 웹툰 원작자이기도 하다. 학창 시절부터 뮤지컬을 즐겼다. “그분이 요새 정말 잘하더라”며 인상 깊었던 배우와 최신작 이름을 꿸 정도다. “가수 이기찬 씨 뮤직비디오에서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라는 공연을 봤어요. 알 수 없는 호기심에 끌려 공연장에 갔는데 그때 눈을 떴죠. ‘토요일 밤의 열기’ ‘맘마미아’ ‘라이온킹’ 등 닥치는 대로 뮤지컬을 보는 회전문 관객이 됐습니다.” 웹툰 작가, 셰프, 방송인으로 이름을 날릴 때도 그는 틈틈이 공연장을 찾았다. 그리고 자신의 재능과 끼를 뮤지컬에 쏟기 시작했다. 얼마 전 개발한 ‘N페라 메뉴’는 ‘오페라의 유령’ 테마인 하양, 빨강, 검정 세 가지 주요 색감을 피자와 커피 음료에 녹여냈다. 밀가루 반죽을 유령이 쓰는 가면 모양으로 튀겨 피자 위에 얹었다. 손님에게 음식값보다 더 비싼 공연 티켓을 제공하는 이벤트도 직접 기획했다. 지난해 내한 뮤지컬 ‘스쿨 오브 락’을 인상 깊게 보고 난 뒤에는 심윤수 작가와 카툰 포스터도 제작했다. 그는 “포스터 작업은 제 본업인 웹툰을 활용한 것”이라며 웃었다. 요리와 공연 얘기를 한참 늘어놓던 그는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아차’ 하며 잊고 있던 본업으로 돌아왔다. “신작 웹툰 작업이 자식을 낳는 것처럼 고되지만 재미있어서 계속 붙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작가니까요.”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조선시대 영조는 한 해 20여 근의 인삼을 챙겨 먹는 인삼 애호가였다. 그가 82세까지 살며 최장수 왕이 된 비결로 인삼을 꼽는 이가 많다. 베트남 황제의 이름을 딴 전통 보양주 ‘민망탕’의 주재료는 인삼인데, 지금도 고려인삼이 들어간 민망탕을 일등급으로 친다. 일찌감치 고려인삼의 효능을 알아본 동아시아 지역에는 개성상인들이 부지런히 이 상품을 사방으로 유통했다. 이들이 구축한 네트워크 안에서 인삼은 오랜 기간 동양 왕실 최고 진상품이자 희귀품의 지위를 누려 왔다. 흙 속의 진주 같은 이 약재만 비밀스럽게 찾아나서는 심마니들도 자연스레 생겨났다. 값지고 비밀스러운 인삼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덧 서양에도 흘러들어 갔다. 서양과 교류가 시작된 17세기에 인삼은 유럽과 처음 만났다. 효능을 체험한 유럽인들은 “인삼은 만병통치약”이라는 입소문을 냈고 교역 속도에는 불이 붙었다. 심지어 영국 소도시의 지역신문에도 “씨는 3월에 심고 모판에 옮겨 흙 위로 12인치 정도 자랄 때까지 키운다. 그 뒤로 옮겨 심어 4피트가 될 때까지 그늘막을 친다”는 한국 인삼밭의 정경을 묘사한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책은 이 지점에서 본격 시작한다. 저서 ‘소비의 역사’ ‘그랜드 투어’ ‘지도 만드는 사람’을 비롯해 문화사, 미시사(微視史) 분야에 천착해온 저자가 이번에는 인삼을 조명했다. 서양 문헌 기록을 샅샅이 훑으며 인삼이 동서양을 잇는 거대한 교역 네트워크의 주요한 축이었음을 밝혀낸다. 문헌 연구뿐만 아니라 답사, 인삼 관련 종사자 인터뷰를 통해 세계사 속 인삼의 발자취를 되짚었다. “서양 역사 속 인삼의 존재를 스스로 말하게 하라”는 게 저자의 집필 목적이다. ‘인삼 종주국’을 자처하는 한국에서 인삼 연구가 약리, 효능 같은 이공계 분야에만 치중해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 비대칭성을 극복하려는 저자의 사명감도 저술에 한몫했다. 책은 한마디로 인삼의 인문사회학적 가치를 돌아보는 여정인 셈이다. 1부에서는 본초학(本草學)을 중심으로 인삼에 대한 동서양의 지적 교류를 담았다. 1617년 런던 동인도회사 본부에 도착한 고려인삼은 처음으로 서양 지식체계에 편입됐다. 예수회를 통해 인삼 관련 지식을 접한 영국 왕립학회나 프랑스의 왕립과학원은 인삼 연구를 시작했다. 2부에서는 인삼이 아메리카대륙, 유럽을 넘나들며 세계적으로 유통된 궤적을 살핀다. 후에 한반도를 둘러싸고 경쟁하는 열강의 눈에도 가장 중요한 자원은 인삼이었다. 인삼의 역사와 궤적을 따라가는 데서 한 발 더 나간다. 오늘날 서양에서는 인삼을 값비싼 상품으로 거래하면서도 효능이 과학적이지 않다거나 인삼을 좇는 심마니들이 미개하다는 이중적 잣대를 지니고 있다. 저자는 이를 ‘인삼을 타자화’한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으로 규정하고 인삼이 ‘동양의 전유물’이 된 배경을 3, 4부에서 짚는다. 18세기 후반 서양 의학계는 인삼의 유효 성분 추출에 계속 실패하는데, 동양이 가진 우수한 추출 기술에 열등감을 갖고 인삼의 약성을 폄하하기 시작한 게 타자화의 시초가 됐다는 것이다. 치밀한 문헌 연구가 돋보이는 학술서이면서도 누구나 쉽게 읽어 내려갈 수 있다. 저자가 직접 찾은 고문헌과 화려한 시각 자료가 책장을 술술 넘기게 만든다. 오늘날 흔히 접하는 인삼이 한때 전 세계가 열광했던 ‘세계 상품(global commodity)’이었음을 깨닫고 나면 아침에 마신 홍삼즙에서 더 깊은 맛을 느낄지도 모른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몇 년 전 해외에 나갈 때였다. 출입국심사 서류의 직업란에 무얼 적을지 고민하던 그는 영어로 ‘Soriggun(소리꾼)’이라고 적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소리꾼이 뭐냐’고 묻는 외국심사관 앞에서 그는 “라이크 어 싱어, 액터, 믹스!(Like a singer, actor, mix!)”라고 콩글리시를 구사했다. 국내 심사관에게는 “판소리 하는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사람들이 그를 신기하게 바라볼 때는 남모를 자부심을 느꼈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어디서 뭘 하든 난 천생 소리꾼이다.’ 밴드 ‘이날치’의 보컬, 힙(hip)한 소리꾼, 개그 내레이터, 소리꾼 래퍼, 실험적 아티스트 등 숱한 수식어가 따르는 소리꾼 안이호(40)가 뮤지컬에 도전한다. 최근 서울 중구 정동극장에서 만난 안이호는 “모든 일은 한 번만 해봐도 면역이 생기는데 공연만큼은 그런 게 없어 좋다”며 “어떤 무대, 장르에 도전하든 저는 판소리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동극장의 대표 래퍼토리인 뮤지컬 ‘적벽’에서 ‘조조’를 연기한다. 작품은 판소리 ‘적벽가’ 속 ‘적벽대전’ 대목을 다뤘다. 흥겨운 판소리 합창과 부채를 주요 오브제로 활용한 역동적인 안무가 특징이다. 판소리로 먼저 ‘적벽가’를 익힌 덕에 극의 줄거리나 캐릭터는 친숙한 편이다. 특히 “무게감이 있으면서도 희화화된 조조 캐릭터”를 구현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각종 공연을 섭렵하며 쌓은 무대 내공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뮤지컬 장르는 소리꾼인 그에게 만만치 않다. “판소리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소리 내고 연기할 수 있어요. 반면 뮤지컬에서는 연출 및 동료 배우와 약속된 호흡을 맞춰 가는 게 힘들면서도 색다른 맛이 있어요. 무대 위에서 제 끼를 좀 줄이고 ‘연습 때와 공연이 너무 다르다’는 말을 덜 듣는 게 목표입니다.” 서울국악예술고와 서울대 국악과를 졸업하며 이른바 국악 엘리트 코스를 밟은 그가 정통 판소리에서 살짝 비켜나 여러 장르에 뛰어든 건 ‘어쩌다’였다. “한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다가 간주 부분에서 즉흥적으로 춤도 추면서 끼를 뿜어냈죠. 그걸 식장에서 본 안은미 안무가와 연출이 ‘구상 중인 작품에 괜찮겠다’며 캐스팅했어요. 그때부터 다양한 실험적 무대에 서는 ‘판소리 여정’이 시작됐죠.” 안이호가 중학생 시절 판소리에 입문한 계기 역시 ‘어쩌다’였다. 국악을 들어본 적도 없던 그는 친구의 고모이자 지금은 스승이 된 김영자 명창의 집에 우연히 놀러 갔다. 이후 친구들 사이에서 그가 판소리를 배운다는 소문이 돌았고 얼마 뒤 초대받아 보러 간 김 명창의 공연에서 운명적인 끌림을 느꼈다. ‘이 이상한 기분은 뭘까’ 하는 의문이 들면서 머릿속이 하얘졌다. 진짜 소리를 배우고 싶어졌다. 그는 “지물포를 하셨던 부모님의 고객이자 친구의 고모인 김 선생님 댁에 놀러 갔다가 소리를 시작했다니,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며 웃었다. 그가 스스로 생각하는 강점도 판소리를 시작한 계기와 닮았다. “일단 되든지 안 되든지 소리를 내고 봅니다. 위험하고 무식한 방법일 수 있지만 계산하기보다는 닥치는 대로, 되는 대로 소리를 내다 보면 어느새 목표에 도달해 있죠. 그게 안이호의 소리라고 생각해요.” 4월 5일까지 서울 중구 정동극장. 4만, 6만 원. 8세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봉준호 감독 말말말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을 목전에 둔 1월 30일(현지 시간) 영국 런던에서 열린 런던비평가협회 시상식. 미국에서 바쁜 일정을 소화하던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의 감독상과 작품상 수상 소감을 동영상으로 대신했다. 동영상 수상 소감임에도 불구하고 봉 감독의 말솜씨에 시상식장은 폭소와 박수로 가득 찼다. “머릿속에서 영원히 빠져나가지 않는 기생충처럼 ‘패러사이트(기생충)’가 여러분의 기억 속에 오래오래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영상만으로도 좌중을 휘어잡는 봉 감독 화법의 특징은 유머와 촌철살인, 그리고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함이다. ‘오스카 레이스’ 동안 500여 차례 인터뷰, 100여 차례 관객와의 대화(GV)에서 그가 말한 발언들이 오스카 시상식이 끝난 뒤에도 유튜브 등 인터넷에 오랫동안 회자되는 이유다. 봉 감독의 숱한 어록을 통해 ‘기생충’의 여정을 되짚었다. ▽유머 봉 ―(‘‘설국열차’는 ‘윈터 솔져’ 2편 아니었나. 거기엔 캡틴 아메리카인 크리스 에번스가 출연했으니까’라고 묻자) “에번스는 (영화에서) 생선을 밟고 미끄러집니다. 그런 건 마블의 감성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지난해 11월 버라이어티 인터뷰) ―“LAFCA(LA비평가협회)를 들으니 갑자기 AFKN이 생각납니다. 주한미군방송인데, 한국 문화가 정말 보수적일 때 AFKN은 유일하게 야한 거, 폭력적인 걸 볼 수 있던 곳이었어요. 아홉 살 때 부모님이 주무시면 혼자 나와서 금요일 밤에 영화를 봤습니다. 그땐 몰랐지만 정말 유명한 감독님들의 영화였어요. 그 당시엔 영어도 몰라서 영상만 봤는데 그때 몸속에 영화적인 세포들을 만든 것 같습니다.”(지난해 12월 LA비평가협회 시상식 수상 소감) ―(‘한국 선거에 나가도 될 것 같다’는 질문에) “저와 여기 모든 배우분들은 오로지 예술에만 미친 사람들로서 정치와는 아주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지난해 10월 뉴욕 영화제 인터뷰) ―(‘많은 사람들이 셀카를 찍자고 했었다. 기억나는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에) “재밌는 분위기의 어떤 여자분이 와서 셀피를 찍으려고 했는데 화면 플립이 계속 안 돼서 1분 동안 헤매다가 그냥 갔습니다. 그때가 제일 안타까웠어요.”(2월 오스카 레드카펫 인터뷰) ―“제가 습관이 좀 이상하게 들어가지고 집이나 사무실에서 시나리오를 못 쓰고 항상 카페나 커피숍에서 쓰거든요. 막상 이제 그 시나리오를 썼던 커피숍이 영화 개봉할 때쯤 가보면 망해서 없어진 적이 많아요. 제가 좋은 시나리오를 쓸 수 있게 해준 커피숍 주인분들께 이 상을 바칩니다.”(1월 할리우드비평가협회 수상 소감) ―“(영화가) 왜 잘된 것 같냐고 물으셨는데… 저도 잘 모르겠지만 그날 비 오는 밤에 가정부(이정은)가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인 것 같아요.”(1월 샌타바버라 영화제 관객과의 대화) ―“오늘은 비건 버거를 맛있게 먹으면서 시상식을 즐기고만 있었거든요. 살면서 예상치 못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 것 같아요. 이제 내려가서 반쯤 남아 있는 비건 버거를 먹어야겠습니다.”(1월 크리틱스 초이스 수상 소감) ▽촌철살인 봉 ―“한국은 겉으로는 K팝, 초고속인터넷, 정보기술(IT) 등으로 매우 부유하고 매력적인 나라처럼 보이지만 부유층과 빈곤층의 빈부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절망에 빠져 있고요.”(1월 영국 가디언 인터뷰) ―“세상이 오히려 혁명으로부터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습니다. 혁명이란 것은 부서뜨려야 할 대상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게 뭔지 파악하기가 힘들고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기생충’은 그 복잡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1월 샌타바버라 국제영화제 인터뷰) ―“이 가족들이 멍청하거나 무능력하거나 게으른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다 멀쩡히 일을 하잖아요, 막상 부잣집에 들어가면. 멀쩡하고 분명 능력 있는 사람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자리가 없다는 것, 그게 이 영화의 출발점이에요. 그거 자체가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양극화 시대에 대해서.”(지난해 10월 뉴욕 영화제 인터뷰) ―“관객들이 이야기에 완전히 빨려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들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거죠. 영화가 끝나고 집에 가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을 때 비로소 영화가 전달하고자 했던 지적이고 논쟁적인 메시지가 와 닿으면서 한 방 먹은 느낌이 드는 것, 영화의 메시지에 완전히 매료돼 계속 그 생각만 하게 되는 것. 그런 경험을 관객에게 선사하고 싶습니다.”(1월 뉴욕타임스 인터뷰) ―(‘기생충’은 왜 한국어로 만들었냐는 황당한 질문에) “‘설국열차’에도 부자와 가난한 사람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번에는 좀 더 내 이웃, 내 주변에서 정말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고 싶어 자연스럽게 한국이라는 지역, 한국어를 선택했다.”(2월 오스카 레드카펫 인터뷰) ▽겸손 봉 ―“나흘간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님을 세 번 보고 있고 벤, 조슈아 사프디 형제, 타란티노 감독님을 세 번 만나 인생에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없을 것 같습니다.”(지난해 12월 전미비평가위원회 외국어영화상 수상 소감) ―“제가 비록 지금 골든글로브에 와 있긴 하지만 BTS(방탄소년단)가 누리는 파워와 힘은 저의 3000배는 넘는 거니까요. 그런 아티스트들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나라인 것 같아요. 감정적으로 격렬하고 다이내믹한 나라거든요.”(1월 골든글로브 레드카펫 인터뷰) ―“최근 자주 뵙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님을 보니까 25년 후에 제가 그분의 나이가 되거든요. 오늘 이후 25년간 진정한, 아웃스탠딩한 감독이 될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1월 샌타바버라 영화제 수상 소감) ―“제가 쓴 대사와 장면들을 훌륭하게 펼쳐준 배우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살아있는 배우들의 표정과 보디랭귀지야말로 가장 유니버설한 만국 공통어란 생각이 들어요. … 혼자 외롭게 카페에서 보낸 시간이 많았어요. 시나리오를 커피숍에서 쓰는데 이렇게 런던 한복판 로열 앨버트홀에 서게 될 날이 올 줄 정말 상상도 못 했던 거죠.”(2월 영국 아카데미·BAFTA 시상식 수상 소감) ▽긍정주의자 봉 ―“저 자신이 BAFTA나 오스카의 다양성에 공헌하고 있는 건지…. 저는 20년간 만들어 오던 영화가 영광스럽게 초대돼서 와 있는 거니까요. 여성이나 인종, 성적 정체성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의도적으로 그걸 의식하지 않더라도 균형들이 자연스럽게 맞춰지는 날들이 올 거라고 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면에서 하고 있는 노력에 의해서요. 저는 긍정적입니다( I’m optimistic).”(2월 영국 아카데미 수상 후 기자회견) ―(현재의 디스토피아적 특성에 대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그 어떤 모습도 디스토피아라고 정의 내리고 싶지 않습니다. (영화의 결말에서 최우식이 소주 한잔을 부르는 장면을 언급하며) 가사가 엄청나게 긍정적이진 않지만, 분명히 그 안에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담겨 있습니다.”(지난해 10월 타임지 인터뷰) 배우들 말말말 봉준호 감독과 오스카 일정을 함께한 배우들도 봉 감독 못지않은 입담을 과시했다. 미국 텔루라이드 영화제부터 약 5개월간 배우 송강호 이선균 박소담 최우식의 유쾌한 인터뷰, 수상 소감을 모았다.○ 송강호 “(봉 감독을) 처음 만났을 때는 배우 티모테 샬라메처럼 날씬했는데 지금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과 더 닮았다.” “한국에서 나를 잘생겼다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나를 보고 한국 배우들이 나처럼 생겼을 거라 생각하면 큰 실수다. 예를 들면 주드 로가 50명, 브래드 피트가 50명 항상 대기하고 있다.”―이상 지난해 12월 LA비평가협회 시상식 수상 소감 “(봉 감독의) 다섯 번째(영화 출연)는 제가 확신을 못 하겠다. 너무 힘들다. 계단도 많이 나오고 반지하에 살고 비도 맞아야 된다. 다음에는 (기생충 속) 박 사장 역이면 생각해 보겠다.”―아카데미 시상식 직후 기자간담회 ○ 이선균 “본의 아니게 할리우드에 기생하게 된 것 같아 민망하다. 사업과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상생하고 공생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올 1월 미국 배우조합상(SAG) 시상식 수상 소감 “너무 기쁘고요. 저희가 엄청난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오스카가 선을 넘은 것 같네요.”―아카데미 시상식 수상 소감 ○ 박소담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오늘 밤에도 열심히 많은 기사와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게시물 찾아보면서 온몸으로 느껴봐야 할 것 같다. 아마 잠 못 이루지 않을까….”―아카데미 시상식 수상 소감 ○ 최우식 “‘계획에 없던 건데’라는 대사가 있는데 계획하지 못한 큰 이벤트가 있어서 행복하다. 봉준호 감독과 아버지(송강호)가 미국 프로모션을 하며 고생이 많으셨는데 앞으로 평생 원동력으로 삼겠다.”―아카데미 시상식 수상 소감 “아시아에는 전설적인 영화들이 많다. 다음 해, 그 다음 해에 더 많은 영화들이 왔으면 좋겠다.”―올해 1월 SAG 시상식 수상 소감 김기윤 기자 pep@donga.com·이서현 baltika7@donga.com·김재희 기자}
영화광 셋이 모여 아카데미 시상식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1986년 작품상을 놓고 ‘아웃 오브 아프리카’ ‘컬러 퍼플’ ‘거미 여인의 키스’, 여우주연상을 놓고 메릴 스트립, 우피 골드버그 등으로 의견이 갈렸다. 대화는 돈을 건 내기로 이어졌다. 한 명이 위키피디아에서 정답이 ‘아웃 오브 아프리카’와 배우 제럴딘 페이지임을 찾아낸다. 누구도 데이터의 타당성, 정확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결과에 승복했고, 승자는 돈을 챙겼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이는 “각각의 내기꾼은 수상작, 수상자에 대해 가설을 내세웠다. 데이터를 찾아냈고 데이터의 권위를 인정했다. 데이터를 증거로 활용해 결론을 정당화”한 결과다. 그런데 우리가 논하는 대상이 이 같은 단편 정보가 아니라 복잡한 이론이나 연구자료라면? 과연 우리는 이 데이터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현대사회에서 가장 가치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여겨지는 ‘데이터’는 생각보다 쉽게 흔들린다. ‘아웃사이더(Outsiders)’를 통해 낙인 이론의 기초를 제공하며 사회학 권위자로 꼽히는 저자가 데이터를 활용한 수많은 주장에 얼마나 많은 오류가 도사리는지 짚었다. 여론조사, 영화 박스오피스, 인구조사, 빅데이터 등 일상 속 많은 데이터는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는 주요 잣대가 된다. 하지만 오류, 왜곡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은 쉽게 잊힌다. 저자는 통계, 설문, 연구자료 등 데이터를 생산하는 연구자들이 오류를 줄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논하며, 연구자들이 데이터를 통해 기존 이론을 검증하고 뒤집는 데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짚었다. 일반 독자들에게는 데이터의 집계·생산 과정을 보여주며, 데이터 독해력을 높이는 혜안을 던져준다. 1부에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분야에 쓰이는 연구방법과 데이터가 증거가 되기까지 과정을 이론적, 역사적 관점에서 설명한다. 2부에는 인구조사, 정부기관의 데이터 연구, 정성 연구의 한계점 등을 담았다. 유명 사회과학자들의 이름과 이론이 종종 등장해 다소 어려운 부분도 있다. 하지만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예시와 저자의 독창적 아이디어가 눈길을 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반지하 창밖으로 보이는 모든 풍경은 다 세트죠. 표면에 보이는 간판이나 재료들은 만든 게 아니라 (실제 가난한 동네에서) 진짜 떼어온 겁니다.”(봉준호 감독)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과 최우식 배우 콤비가 미국 매체 배니티페어에서 촬영한 ‘Notes on a scene with 봉준호, 최우식’ 영상에서 풀어낸 영화 뒷얘기가 화제다. 13분가량의 이 영상은 영화 오프닝 장면 구성부터 영화 속 상징물, 의도, 제작과정, 배우와의 인연을 두 사람이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들려준다. 지난해 11월 촬영된 이 영상은 ‘기생충’의 오스카 4관왕 이후 다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봉준호 팬덤을 일컫는 ‘봉하이브(BongHive)’는 영상에 “자막이라는 1인치 장벽을 뛰어넘으면 우리는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는 봉 감독의 소감을 인용한 댓글을 남기며 축하를 보내고 있다. 영상에서 봉 감독과 최 배우는 영어로 관객들에게 차분히 영화를 설명한다. 이따금씩 구체적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한국어도 튀어나온다. 봉 감독은 특히 송강호 배우가 나온 장면을 가리키며 “이번에 무려 네 번째, 17년간 같이 일해 온 ‘그레이트 액터 송강호’”라고 애정 어린 설명을 덧붙였다. 초반부 등장하는 ‘수석’에 대한 설명도 나온다. 봉 감독은 “영화에 아주 중요한 선물(수석)이 등장한다. 한국에서 누구도 요즘에 이런 돌을 선물하지 않는다. 아주 이상한 상황인데 영화에서는 중요한 기우의 열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장면에 관객이 집중하길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이 밖에도 영화 속에서 최우식의 여드름, 헤어스타일, 옷과 대비해 그의 친구 역할 박서준의 값비싼 스쿠터, 시계, 의상을 소개하며 봉테일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안겼다. 봉 감독은 “의상, 분장 디자이너와 충분히 상의를 거쳤고 모든 게 다 의도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영상 막바지에 “한국 영화 100주년을 위해 만든 건 아니었고, 나라는 외로운 창작자 입장에서 영화를 찍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한국영화 100주년에 공헌할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1990년대부터 서울지하철 홍대입구역 8번 출구 인근을 지키던 ‘만화 덕후들’의 성지. 만화 전문서점인 ‘한양문고’를 15년 넘게 들락거리던 한 단골이 있었다. 그는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다닐 때도, 2000년 첫 장편영화 ‘플란다스의 개’를 구상할 때도 이곳에 있었다. 2005년 그가 구입한 프랑스 그래픽 노블 ‘설국열차(Le Transperceneige)’는 2013년 영화가 돼 세상으로 나왔고, 2020년 그는 오스카 4관왕을 거머쥔다. 감독 이전 만화가, 만화 수집가였던 봉준호 감독을 이곳에서 오래도록 지켜본 김기성 전 한양문고(한양툰크) 대표(61·사진)는 “부스스한 머리로 만화에 심취해 있던 한 청년이 오스카상을 탔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재정난으로 지난해 서점이 문을 닫고, 현재 온라인서점으로 전환하기까지 김 전 대표는 18년간 한자리를 지켰다. 서점에는 “한양문고 덕분에 ‘설국열차’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감사!!!!”라는 봉 감독의 친필 사인과 문구가 자랑거리처럼 걸려 있었다. 봉 감독은 이 만화를 접한 순간에 대해 “나의 위험천만한 영화적 모험은 그때 이미 시작됐다”고 밝혔다. 김 전 대표가 떠올린 봉 감독의 첫인상은 만화에 푹 빠진 평범한 덕후였다. “고독하게 서점을 찾아와 생각에 잠기던 청년이었어요. 영화감독이라는 얘기를 듣고, 그가 작품을 구상한다는 걸 알게 됐죠. 골격이 커서 항상 눈길이 갔습니다.” 봉 감독은 매달 서점에 들러 한 시간 이상 책에 빠져들던 과묵한 청년이었다. “어디에 무슨 책이 있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고, 여러 책을 끄집어내느라 늘 책장을 어지럽혔어요.(웃음) ‘이 전집 다 주세요’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요. 신중하게 몇 권을 추려냈죠.” 봉 감독은 매번 10만 원어치 이상 만화책을 사는 ‘큰손’이었다. “웃음기 없이 무표정한데 사고 싶은 만화책들을 계산대에 아무 말 없이 올려놓을 때는 꼭 오스카상을 탔을 때처럼 함박웃음을 지었어요. 만화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죠.” 봉 감독의 만화 취향은 영화 취향으로도 이어졌다. 나루토, 원피스 등 일본 인기 시리즈보다는 유럽, 국내 작가의 단편을 즐겼다. 김 전 대표는 “확실히 유럽 작가의 단편 만화나 국내 작가들의 향토적, 인디적 작품을 선호했다”며 “평범한 소재에서 독특한 걸 들춰내는 그의 영화를 보면 만화들이 토대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봉 감독은 한 출판 캠페인에서 “만화책은 웹툰과 달리 한 장, 한 장 샷을 넘기는 맛이 있다”며 앙꼬 작가의 ‘나쁜 친구’와 찰스 번스 작가의 ‘블랙홀’을 명작 만화로 꼽았다. 봉 감독이 한양문고 단골이었다는 사실을 잘 아는 주변 출판인들은 김 전 대표에게 ‘오스카 수상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봉 감독 영화에 제가 기여한 바는 없지만 뿌듯합니다. 만약 봉 감독이 한양문고에서 샀던 만화책들을 안 버리고 모아 놨다면 방이나 창고 하나는 가득 찼을걸요?” 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