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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은 무조건 ‘직관’만 한다? 극장, 집, 폰 ‘1열’에 앉아서 본다! 영화관, 브라운관, 온라인 플랫폼에서 공연을 상영하며, 공연장의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는 콘텐츠가 늘고 있다. 공연계는 기존에도 마케팅 차원에서 연극, 뮤지컬 등을 공연장 밖에서 꾸준히 선보여 왔다. 하지만 최근 공연 생중계, 녹화, 상영 콘텐츠 자체만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데다, 다양한 영상 플랫폼의 증가로 공연의 ‘무대 밖 나들이’가 본격화되고 있다. EMK뮤지컬컴퍼니는 ‘웃는 남자’의 9일 개막을 앞두고 1일 카카오TV를 통해 ‘시츠 프로브(Sitz Probe)’ 무대를 생중계했다. 시츠 프로브는 배우와 오케스트라가 호흡을 맞춰 보는 리허설로 시청자에게 생생한 공연 넘버를 전했다. 생중계를 본 시청자는 20만 명, 동시 접속자 수는 최대 1만5000명에 달했다. 관객들은 “접근이 어려운 리허설 영상을 내 방 1열에서 앉아 볼 수 있으니 짜릿하다”며 호응했다. 예술의전당은 최근 LG유플러스와 협약을 맺고 ‘싹 온 스크린(SAC on Screen)’ 콘텐츠로 가정 내 TV 공략에 나섰다. ‘싹 온 스크린’은 2013년 시작한 예술의전당 영상화 사업의 일환으로, 촬영한 공연을 생동감 있게 편집해 상영한다. 현재까지 약 3000회를 상영해 45만 명의 관객이 관람했다. 이번 협약을 통해 클래식, 발레, 뮤지컬 등 4개 공연이 무료 VOD 서비스에 추가됐다. 방송 플랫폼과 통신 기술을 결합해 공연 실황 중계, VOD 서비스, VR 콘텐츠 제작까지 영역을 확장할 방침이다. 창작공연의 영상화 진출도 활발하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지난해 12월 CJ CGV와 업무협약을 맺고 본격적 영상화 사업 추진 계획을 발표했다. ‘영상화를 통한 대중화’를 목표로 연극, 뮤지컬, 무용, 전통예술, 오페라 등 5개 장르의 창작 공연 25편 중 4개 작품을 선정해 CGV 극장에서 상영할 계획이다. 서울 대학로에서 공연을 마치는 3월 말부터 지역 주요 거점인 영남권(부산)·호남권(광주)·충청권(청주) 3개 권역 상영관에서 진행된다. 창작산실과 아르코예술기록원이 각각 추진한 네이버 공연전시판 생중계도 그간 고무적 성과를 낳았다. 2016년부터 시범적으로 공연 생중계를 시작한 창작산실은 올해 18개 창작공연을 네이버를 통해 생중계할 계획이다. 최정호 아르코예술기록원 과장은 “장르에 따라 편차는 있지만, 2만∼3만 명이 생중계를 시청하면서 공연장 접근성이 떨어지는 지방 거주지에게 톡톡한 효과를 내고 있다”고 했다. 2014년 시작한 국립극장의 ‘NT Live’도 2월 세 작품을 국립극장에서 선보인다. ‘NT Live’는 영국 국립극장이 영미권 공연계 화제작을 촬영해 전 세계 공연장, 극장에서 상영하는 콘텐츠다. 탄탄한 마니아 층을 형성해 상영 때마다 큰 호응을 받고 있다. 한국 공연계의 영상화 사업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확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나, 단순 기록을 넘어 차별화를 꾀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원종원 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교수는 “영국에서 지역민들을 위해 기획된 ‘NT Live’가 세계적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하듯이, 공연계의 영상화 사업은 필수적이고 고무적 현상”이라면서도 “단순 기록을 넘어 콘텐츠 자체로 재미를 줄 수 있는 영상 사업화가 돼야 지속성이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20년 전 만화를 시작할 때 생각했어요. 만화 종주국 일본에서 내 작품을 연재하면 어떤 기분일까? 마치 K팝 가수가 빌보드에 진입한 기분이랑 비슷하지 않을까?” 다음웹툰 ‘랑데부’가 지난해 11월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 연재를 시작했다. 국내 웹툰 시장에서 인기가 검증된 극소수 완결 작품을 수출하는 경우는 많다. 하지만 기획 단계부터 양국 동시 연재를 목표로 작품을 구상하고, 동시 연재로 이어진 사례는 처음이다. 이를 성사시킨 주인공은 ‘은밀하게 위대하게’ ‘나빌레라’로 유명한 HUN(본명 최종훈) 작가다.》 최근 경기 부천시의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똑같은 작품이라도 세밀한 표현을 다르게 다듬느라 일이 1.5배로 늘었다”는 행복한(?) 고민을 털어놨다. 이어 “늘 동경하던 일본 만화계가 작품 준비 과정에서 제게 웹툰 노하우를 묻는 경험이 무척 신선했다. 한국의 작가와 만화계에 대한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랑데부’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주인공 이연이 외계인의 침공으로 무너진 세상을 발견하고, 자신을 괴롭혔던 ‘일진’ 학생들에게 복수하는 내용이다. 장르를 구분하자면 공상과학(SF) 학원물. HUN 작가가 연출 및 스토리 작가로 참여했고, ‘나빌레라’에서 호흡을 맞춘 지민 작가가 작화를 맡았다. 국내에서는 다음웹툰과 카카오페이지에서, 일본에서는 만화 플랫폼 픽코마(piccoma)에서 연재 중이다. HUN 작가에 따르면, 양국 동시 연재를 진행하는 데 있어 그가 던진 ‘떡밥’이 가장 주효했다고 한다. “일본 만화계에서 토론회를 열 때 종종 저를 협조토론자로 초청했어요. 발언 기회를 얻으면 ‘한일 양국이 새 작품을 같이 협업하고 동시 연재를 해도 좋겠다’는 의견을 은근히, 그리고 자주 흘렸죠. 일본 연재에 대한 ‘로망’은 있어도, 제 이름값으로 우길 수는 없잖아요. 하하하.” 일본 측이 반응한 건 시기적 변화, 운도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만화 강국인 일본도 웹에서 페이지를 넘겨 보는 방식에서 스크롤을 이용해 내려 보는 형태로 시장이 재편되고 있었다. 그는 “20년 가까이 스크롤 연출 노하우가 축적된 한국과 달리 일본은 만화 스크롤화에 대한 노하우가 적은 편”이라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동시 연재는 닻을 올렸다. 그런데 “신경 쓸 게 너무 많다. 일이 생각보다 커져버렸다”는 토로가 이어졌다. 특히 단어의 뉘앙스, 편집 방향이 난관이었다. 그는 “대사가 과하게 의역이 되는 것도 막아야 한다. 만화를 읽는 방향도 한국(왼쪽 위부터)과 일본(오른쪽 위부터)이 다르기 때문에 연출의 흐름, 말풍선 위치, 효과음 적는 곳, 컷의 간격 배치도 일일이 따져야 한다”고 했다. 필요에 따라 그림을 다르게 그리는 일도 있다. 간판 이름이나 차선 위치도 달라진다. “떡볶이를 먹는 장면이 있어요. 일본판에서 다코야키, 오코노미야키로 바꿔야 하나 고민한 적도 있죠. 하지만 모든 걸 현지에 맞추거나, 일본 만화인 척할 필요는 없다는 게 제 결론입니다.” 앞선 히트작에서 “소재는 달라도 결국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그는 “이번만큼은 가장 ‘만화적 만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권선징악’ 주제의 학원물이 주는 재미는 물론이고 좋은 액션, 컷을 잘 쌓아서 ‘꽤 괜찮은 만화’라는 타이틀을 얻고 싶다는 것. 작가생활 20년 만에 그는 일본 무대에서 다시 신인의 마음으로 돌아갔다. “저라는 작가는 일본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잖아요. 속된 말로 양국에서 ‘깔 수 없는 작품’을 만들어야죠.”부천=김기윤 기자 pep@donga.com}
“20년 전 만화를 시작할 때 이런 생각을 했어요. 만화 종주국 일본에서 내 작품을 연재하면 어떤 기분일까? 마치 K팝 가수가 빌보드에 진입한 기분이랑 비슷하지 않을까?” 다음웹툰 ‘랑데부’가 국내와 일본에서 동시 연재를 시작했다. 국내 웹툰 시장에서 인기가 검증된 극소수 완결 작품을 해외로 수출하는 경우는 많다. 하지만 기획 단계부터 양국 동시연재를 목표로 작품을 구상하고, 동시연재로 이어진 사례는 처음이다. 이를 성사시킨 주인공은 ‘은밀하게 위대하게’ ‘나빌레라’ 등 인기작을 만든 HUN(본명 최종훈·42) 작가다. 최근 경기 부천의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똑같은 작품이라도 세밀한 표현을 다르게 다듬느라 일이 1.5배로 늘어났다”는 행복한(?) 고민을 털어놨다. 이어 “늘 동경하던 일본 만화계가 작품 준비 과정에서 제게 웹툰 노하우를 묻는 경험이 무척 신선했다. 이번을 계기로 한국 작가, 만화계의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웹툰 ‘랑데부’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주인공 ‘이연’이 외계인의 침공으로 무너진 세상을 발견하고, 자신을 괴롭혔던 ‘일진’ 학생들에 복수하는 내용을 그렸다. 장르를 구분하자면 SF 학원물. HUN작가가 연출 및 스토리 작가로 참여했고, 앞서 ‘나빌레라’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지민 작가가 작화를 맡았다. 국내에서는 다음웹툰과 카카오페이지에서, 일본에서는 만화 플랫폼 픽코마(piccoma)에서 연재 중이다. HUN 작가에 따르면, 양국 동시연재를 진행하는 데 있어 그가 던진 ‘떡밥’이 가장 주효했다고 한다. “일본 만화계에서 종종 토론회를 열며 저를 협조토론자로 초청했어요. 제가 발언기회를 얻으면 ‘한일 양국이 새 작품을 같이 협업하고 동시연재를 해도 좋겠다’는 의견을 은근히 그리고 자주 흘렸죠. 일본 연재에 대한 ‘로망’은 있어도, 제 이름값으로 우길 수는 없잖아요. 하하하.” 그의 떡밥에 일본 측이 반응한 건 시기적 변화, 운도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출판만화 시장이 강세인 일본도 점차 ‘페이지’에서 ‘스크롤’로 시장 재편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그는 “20년 가까이 스크롤 연출의 노하우가 축적된 한국과 달리 일본은 만화 스크롤화의 필요성을 느껴도 이에 대한 노하우가 적은 편”이라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동시연재는 닻을 올렸다. 그런데 “신경 쓸 게 너무 많다. 일이 생각보다 커져버렸다”는 토로가 이어졌다. 특히 단어의 뉘앙스, 편집방향 등이 난관이었다. 그는 “대사가 과하게 의역이 되는 것도 막아야 한다. 만화를 읽는 방향도 한국(왼쪽 위부터)과 일본(오른쪽 위부터)이 다르기 때문에 연출의 흐름, 말풍선 위치, 효과음 적는 곳, 컷의 간격배치도 일일이 따져야 한다”고 했다. 필요에 따라 그림을 다르게 그리는 일도 있다. 간판 이름이나 차선 위치도 달라진다. “캐릭터가 떡볶이를 먹는 장면이 있어요. 일본판에서 타코야끼, 오꼬노미야끼로 바꿔야하나 잠시 고민한 적도 있죠. 모든 걸 현지에 맞추거나, 일본만화인 척 할 필요는 없다는 게 제 결론입니다.” 앞선 히트작에서 “소재는 달라도 결국 사람, 인간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그는 “이번만큼은 가장 ‘만화적 만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권선징악’ 주제의 학원물이 주는 재미는 물론 좋은 액션, 컷을 잘 쌓아서 ‘꽤 괜찮은 만화’라는 타이틀을 얻고 싶다는 취지다. 작가생활 20년 만에 일본 무대에서 그는 다시 신인의 마음으로 돌아갔다. “저라는 작가는 일본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잖아요. 속된 말로 이름값 다 빼고 양국에서 ‘깔 수 없는 작품’을 만들어야죠.”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휴대전화, 기저귀, 콘돔, 란제리 세트, 금붕어, 주삿바늘, 귀금속, 생리대, 오토바이 부품…. 각양각색의 이 물건들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곳은? 정답은 하수도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잡동사니들은 모두 변기나 맨홀을 거쳐 매일 하수도로 집결한다. 믿기 어렵지만 영국에서는 1년에만 약 85만 개의 휴대전화가 변기 안으로 휩쓸려 들어간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하수도에서 값진 물건을 건져내는 사냥꾼을 일컫는 ‘토셔(tosher)’라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다. 미국 시사주간지 ‘더 네이션’ 기자 출신의 저자는 문명사회에서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던 하수도와 화장실의 뒷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파헤쳤다. 책은 화장실의 인문학적 변천을 짚은 역사서인 동시에 분변학과 위생학을 논하는 보건서이기도 하다. 세계보건기구(WHO)가 필독서로 선정했고, 저자가 이 주제로 펼친 TED 강연은 큰 인기를 끌었다. 선진국의 경우,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물을 내린 뒤의 세계는 예상보다 훨씬 체계적으로 구축돼 있다. 저자가 직접 찾은 영국, 미국 하수도에서는 고약한 냄새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청결한 곳도 있다. 지하에서 일하는 하수도 노동자들의 삶은 숭고했으며, 이들의 자부심도 대단하다. 물론 예상치 못한 사고가 언제든 발생할 수 있기에 지하세계는 생각보다 위험하다. 바로 폭발 가능한 수류탄이 하수도에서 발견되는 경우다. 하지만 화장실의 국가별 격차를 생각한다면, 하수도 체계의 존재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임을 알 수 있다. 저자가 맞닥뜨린 코트디부아르의 한 화장실에는 바닥에 흰 타일만 깔려 있을 뿐 변기도, 어떠한 구멍도 없다. 각자 알아서 해결, 처리해야 한다. 우리에게 당연한 화장실 칸막이도 지구 한 편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영국, 미국,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탄자니아의 각양각색의 배변시설을 접하면 “10명 중 4명은 재래식 화장실, 변기, 양동이, 심지어 상자 같은 것조차 거의 이용하지 못한다. 화장실은 분명 특권”이라는 주장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저자가 ‘분변 도착증환자’라는 오해를 들으면서도 똥, 화장실, 하수도에 천착하는 건 화장실이 인간 생명과도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수인성 질병은 분변에 오염된 음식을 섭취할 수밖에 없는 열악한 위생체계에서 비롯된다. 몇몇 국가에서 소녀들은 뱀과 강간범의 위협을 피해 오전 3∼4시마다 풀숲으로 숨어들어 위험천만한 배변활동을 한다. 궁극적으로 저자는 “가장 자연스러운 기능을 지칭하는 단어(배변, 똥)가 현대사회에서 섹스보다도 터부시됐다”며 “똥을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으면 위생, 보건을 논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화장실에서 살기’ vs ‘화장실이 없는 곳에서 살기’. 저자가 서두에 던지는 이 질문에 ‘어떻게 똥, 오줌 냄새 나는 화장실에 사느냐’던 사람이라도, 책을 읽고 나면 오늘 아침 다녀온 화장실이 더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래도 화장실은 도저히 안 되겠다고? 당신이 좋든 싫든 인간은 평생 3년은 화장실에서 보낸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장소: 모르는 사람의 집. 준비물: 마음속 스트레스를 꺼내 놓을 열린 마음.’ 28일 오후 서울 성동구의 한 아파트. 직장인 5명이 정해진 시간에 맞춰 ‘남의 집 프로젝트’를 위해 모였다. ‘호스트(집주인)’는 자신의 집에서 간단한 먹을거리를 준비한 뒤 참석자들을 기다렸다. 먼저 도착한 이들은 다른 참석자가 도착할 때마다 반갑게 맞았다. 여느 연말 송년회, 친교모임과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이 모임의 가장 큰 특징은 모두 이날 처음 본 사이라는 점. 준비물은 대화할 ‘열린 마음’이면 충분했다. ‘소통 불능의 시대’라는 요즘, 의외로 처음 보는 사람이나 전혀 모르는 사람과 소통하는 일회성 모임이 늘고 있다. 상대가 누구든 공감할 의지와 말할 거리만 있다면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하다는 게 모임의 취지다. 이들은 친구나 지인, 가족처럼 끈끈한 관계와 달리 관계에 강제성이 없는 ‘느슨한 관계’가 오히려 소통에 장점이 된다고 본다.○ ‘느슨한 관계’의 매력 ‘남의 집 프로젝트’는 이런 시류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날 참석자가 다 도착하자 호스트는 “이제 다 오신 것 같으니 시작할까요?”라며 포문을 열었다. 모임의 주제는 ‘직장인 번아웃(일에 몰두하다 극도의 신체·정신적 피로로 무기력해지는 현상) 증후군’. 호스트는 ‘번아웃 증후군 자가 테스트’ 종이를 건넸고, 참석자들은 ‘일이 재미가 없다’ ‘점점 냉소적으로 변한다’ 등 17개 문항의 체크리스트에 점수를 매겼다. 일정 점수를 넘겨 심각한 수치를 보인 참석자도 나왔다. 자연스레 직장에서 힘들었던 각자의 경험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야근이 너무 잦아 일과 생활이 구분이 안 됐다” “퇴사를 자주 하고 싶다” “상사와의 관계가 너무 힘들다” “상사보다 더 어려운 건 후배다” 등 성토가 이어졌다. “주변 친구, 가족에게 이유 없이 짜증을 내는 일이 늘었다”는 대목에서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증권회사 애널리스트, 게임회사 디자이너, 식품무역업 종사자 등으로 구성된 참석자 조합은 얼핏 보기엔 어색했다. 하지만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 힘들고, 내 고민 역시 위로받기 힘들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처음 보는 이에게 속내를 터놓고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며 놀라워했다. 모임은 정해진 세 시간을 조금 넘기고 끝났다. 참석자들은 기회만 있다면 앞으로도 모르는 사람과의 소통에 나서겠다며 긍정적인 반응. 작별 인사와 새해 덕담을 나눴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이런 모임은 직업군, 나이와 상관없이 다양하게 이뤄지지만 대체로 연속적 모임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강제성이 전혀 없어 부담감이 적은 게 장점. 독서, 공예 등 특정 취미를 테마로 한 모임과는 달리 ‘대화’ 자체가 목적이다. 김성용 ‘남의 집 프로젝트’ 대표는 “현대인들은 모르는 이들과도 시시콜콜한 주제건 깊이 있는 테마건 얘기를 나누고 싶은 욕구가 있다. 이 수요는 더욱 커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모임에 자주 참석한다는 30대 직장인 정모 씨는 “끈끈한 관계에서는 어떤 얘기로 시작하든 결국엔 깔때기처럼 직장, 집, 결혼, 육아 얘기로만 귀결된다. 반면 느슨한 관계에서는 다양한 주제를 다룰 수 있는 편안한 매력이 있다”고 했다.○ 자존감 회복에는 모르는 관계가 더 낫다? 온라인에서 인기인 대화형 커뮤니티 ‘라이프쉐어’도 비슷한 분위기다. 모르는 이와 소통하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인생관, 자존감을 발견하도록 만들자는 목표. 여기서는 주변 사람에게 터놓기 어려운 다소 오글거리는(?) 질문도 모르는 사람과 주고받아야 한다. “당신에게 가장 행복했던 하루는?” “우리의 사랑은 어떻게 다를까?” 등 질문에 쭈뼛거리던 참가자들도 몇 분 뒤 거리낌 없이 인생 가치관을 말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애플리케이션 ‘트로스트’도 모르는 사람과의 소통 욕구를 겨냥했다. 상담사 자격증을 가진 이들에게 간단한 자기소개와 고민 글을 보내면, 상담사들이 조언을 건넨다. 지인, 친구 수준이 해줄 수 있는 위로나 대안 제시를 넘어 전문적 해결 방법을 제시한다는 점이 특징. 트로스트 측은 “정신과를 방문하기 어렵거나, 친구들에게 꺼내놓기 힘든 고민도 비대면 방식으로 숱하게 접수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모르는 사람과의 소통이 자존감 회복에 더 도움이 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퇴사 뒤 작가로 변신한 곽모 씨는 “주변에선 새로운 도전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많았다. 반면 처음 만난 이들은 도전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응원해줘 힘을 얻었다”고 했다. 30대 사업가 이주호 씨는 “나이, 직장에 따른 사회적 편견 없이 누군가 있는 그대로 저를 바라볼 때 더 큰 위로와 자극을 받는다. 뼈 있는 조언이나 생각지 못한 혜안을 들을 때도 많다”고 했다.김기윤 pep@donga.com·조종엽 기자}
장소 : 모르는 사람의 집. 준비물 : 마음 속 스트레스를 꺼내 놓을 열린 마음. 28일 오후 서울 성동구의 한 아파트. 5명의 직장인이 정해진 시간에 맞춰 ‘남의집 프로젝트’의 한 장소에 모였다. ‘호스트(집주인)’는 자신의 집에서 간단한 먹거리를 준비한 뒤 참석자들을 기다렸다. 먼저 도착한 이들은 다른 참석자가 도착할 때마다 반갑게 맞았다. 여느 연말 송년회, 친교모임과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이 모임의 가장 큰 특징은 이날 모두 처음 본 사이라는 것. 준비물은 대화할 열린 마음이면 충분했다. 참석자가 다 도착하자 호스트는 “이제 다 오신 것 같으니 시작할까요?”라며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이날 모임의 주제는 ‘직장인 번아웃(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 정신적 피로감으로 무기력해지는 현상)’. 호스트는 ‘번아웃 증후군 자가테스트’ 종이를 건넸고, 참석자들은 ‘일이 재미가 없다’ ‘점점 냉소적으로 변하고 있다’ 등 17개 문항으로 구성된 체크리스트에 점수를 매겼다. 일정 점수를 넘겨 ‘번아웃 증후군’으로 판정된 참석자도 나왔다. 자연스레 직장에서 힘들었던 각자의 경험을 꺼내놓아야 했다. “야근이 너무 잦아 일과 내 생활이 구분이 안됐다” “퇴사가 자주 마렵다” “일도 일이지만 상사와의 관계가 너무 힘들다” “상사보다 더 어려운 건 후배다” 등 성토가 줄을 이었다. “번아웃을 겪고 주변 친구, 가족에게 이유 없이 짜증을 내는 일이 많아졌다”는 대목에서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 증권회사 애널리스트, 게임회사 디자이너, 식품무역업 종사자, 마케터, 전업 작가로 변신한 이 등 참석자의 조합은 언뜻 봐도 어색하다. 하지만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고, 내 아픔이나 고민 역시 위로받기 힘들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처음 보는 이들에게 속내를 터놓고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 놀랍다”며 모두 입을 모았다. 참석자들은 기회만 있다면 앞으로도 모르는 사람과의 소통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정해진 세 시간을 조금 넘겨 모임은 끝났다. 작별 인사와 새해 덕담을 나눴고, 모두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느슨한 관계’의 매력 ‘소통 불능의 시대’ 처음 보는 사람, 전혀 모르는 사람과 소통하는 일회성 모임이 늘고 있다. 상대가 누구든 서로의 말에 공감할 의지와 말할 거리만 있다면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하다는 게 모임의 취지다. 친구, 지인, 가족과의 끈끈한 관계와 달리 관계에 강제성이 없는 ‘느슨한 관계’는 오히려 소통에서 장점이 된다. 직업군, 나이와 상관없이 다양한 이들이 모이며 한 번 모였다고 해서 연속적 모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친교 활동에 대한 강제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부담감이 적은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또한 독서, 공예, 서핑 등 특정 취미를 테마로 목적이 분명한 모임과는 달리 모여서 대화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점이 특징이다. 20대부터 40대까지 가장 활발히 참여한다. 김성용 ‘남의집 프로젝트’ 대표는 “1인가구가 늘며 현대인들에게는 모르는 이들과도 시시콜콜한 주제부터 인생얘기까지 나누고 싶은 욕구가 분명히 있다. 이 수요는 더 커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모임에 자주 참석한다는 30대 직장인 정모 씨는 “끈끈한 관계에서는 어떤 얘기로 시작하든 나중에 깔때기처럼 직장, 집, 결혼, 육아 얘기로만 귀결된다. 반면 느슨한 관계에서는 다양한 주제를 말할 수 있는 편안한 매력이 있다”고 했다. ○자존감 회복에는 모르는 관계가 더 낫다? 모르는 사람의 소통이 자존감 회복에 더 도움이 된다는 의견도 많다. 퇴사 후 작가로 변신한 곽모 씨는 “주변 사람들은 제 새로운 도전을 걱정하거나 회의적으로 바라볼 때가 많았다. 반면 처음 만난 분들이 제 도전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심으로 응원해 힘을 받았다”고 했다. 대화형 커뮤니티 ‘라이프쉐어’도 인기다. 모르는 이와 소통하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인생관, 자존감을 발견하도록 만드는 취지다. 이곳에서는 주변 사람에게 터놓기 어려운 다소 오글거리는(?) 질문을 모르는 사람과 주고받아야 한다. “당신에게 가장 행복했던 하루는?” “우리의 사랑은 어떻게 다를까?” 등 질문에 쭈뼛거리던 참가자들도 몇 분 뒤 거리낌 없이 인생 가치관을 말하기 시작한다. 30대 사업가 이주호 씨는 “나이, 직장에 따른 사회적 편견 없이 누군가 있는 그대로 저를 바라볼 때 더 큰 위로와 자극을 받는다. 제게 뼈있는 조언을 하거나 생각지 못한 혜안을 들을 때도 많다”고 했다. 애플리케이션 ‘트로스트’도 모르는 사람과의 소통 욕구를 겨냥했다. 상담사 자격증을 가진 이들에게 간단한 자기소개와 고민 글을 보내면, 상담사들이 조언을 건넨다. 지인, 친구 수준이 해줄 수 있는 위로, 대안 제시를 넘어 전문적 해결방법을 제시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트로스트 측은 “정신과를 방문하기 어렵거나, 친구들에게 꺼내놓기 힘든 고민도 비대면 방식으로 숱하게 접수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조종엽 기자 jjj@donga.com}
2표씩 받은 책이 무려 9권이었다. 대기과학자 조천호의 ‘파란하늘 빨간지구’(동아시아)는 “기후가 인간 역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그레타 툰베리가 구호를 외쳤다면 조천호는 이론을 제공했다”(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는 평가를 받았다. 유정연 흐름출판 대표는 ‘다시, 책으로’(어크로스)를 택하면서 “순간 접속의 시대에 깊이 읽을수록 뇌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지적에 공감한다”고 했다. ‘맹자, 마음의 정치학’(사계절)에 대해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는 “‘한글세대’ 독자들을 위한 적확하고 맥락 있는 고전 읽기의 안내서”라고 추천했다.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대변동’(김영사)은 “한일 관계 등 외교관계에 의미 있는 시사점을 준다”(이상욱 한양대 철학과 교수), “저자의 가장 미래지향적인 책”(박영규 교보문고 대표)이라는 지지를 받았다. 역사서도 두 권 있다. ‘제국대학의 조센징’(휴머니스트)은 “한국의 지배 엘리트들이 지닌 근대의 개념이 왜 ‘일본’과 등가를 이루는지 그 기원을 보여주는 책”(김형보 어크로스 대표)으로 평가받았다.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까치)은 “역사 밖에서 본 한국사를 어떻게 조명해야 할지 일깨운 점”(박혜숙 푸른역사 대표)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델리아 오언스의 장편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살림)에 대해 백선희 번역가는 “감동스러운 성장 이야기이자 순정한 사랑 이야기. 반전이 거듭되는 법정 스릴러이자 생태학자가 그리는 풍경화”라고 했다. 산문집으로는 ‘여행의 이유’(문학동네)와 ‘참 괜찮은 눈이 온다’(교유서가)가 꼽혔다. 각각 “하나의 브랜드가 된 김영하 작가가 인생에서 여행이 갖는 의미를 인문학적 성찰로 들려준다”(서영택 밀리의서재 대표), “한지혜는 소설가이기 전에 진심을 전하는 산문가다. 자신의 지나온 ‘한때’를 떠올리게 한다”(윤희영 현대문학 월간지팀 팀장)는 평을 들었다.이설 snow@donga.com·김민·김기윤 기자}
“한국 무용수들은 잘 훈련돼 있고, 눈빛에서 강한 열정을 느낄 수 있어요. 지금 잘하고 못하고는 중요치 않습니다. 갖고 있는 재능과 가능성을 보러 왔어요.”(크리스토퍼 파우니 영국 로열발레학교 교장) 18일 오후 서울 중구 예원학교에서 열린 발레 오디션 현장. 90명의 어린 무용수들(만 11∼17세)이 연령별로 조를 나눠 입장했다. 이들 앞에 앉은 심사위원들은 파우니 교장과 사미라 사이디 교수(로열발레학교 인텐시브 프로그램 대표)였다. 파우니 교장은 “누군가를 관찰할 때 얼굴 표정이 원래 굳는 편이다. 학생들은 절대 겁먹지 말고 자연스럽게 춤을 춰 달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그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떨지 않을 무용수가 과연 얼마나 될까. “심장이 너무 떨린다” “아, 어떡해…”라며 긴장감을 숨기지 못하던 무용수들은 발레 클래스 형태의 오디션에서 시범안무가의 동작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작은 실수들이 이어졌고 일부는 자책하듯 바닥을 내려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긴장도 잠시. 피아노 반주가 시작되자 이들의 눈빛과 동작은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실수해도 괜찮으니 동작을 이어가라. 모두 잘하고 있다”는 응원에 힘입어 어린 무용수들은 ‘하나라도 더 보여 주겠다’는 열정으로 제 실력을 찾아갔다. 심사위원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로열발레학교가 오디션을 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로열발레학교는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주인공 ‘빌리’가 그토록 염원하다가 백조가 돼 날갯짓한 곳. 최근 한국 무용수들이 세계 곳곳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그간 홍콩 싱가포르 일본에서만 진행하던 오디션을 한국에서도 하게 됐다. 파우니 교장은 “한국 출신 김기민, 박세은, 강효정, 최영규 등 현역 무용수들과 현재 본교 재학 중인 박하나, 졸업 후 로열발레단에 입단한 전준혁 등 재능이 출중한 무용수들이 적지 않다”며 “오디션을 위해 직접 영국으로 와야 했던 학생들의 수고를 덜고, 유망주를 직접 보고 판단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번 오디션은 사전에 정해진 선발 인원이 없다. 사이디 교수는 “발레는 고통스러운 스포츠이다. 고된 훈련을 버틸 정신적 자세가 돼 있고, 신체적 가능성, 잠재력만 있다면 몇 명이든 기회를 줄 것”이라고 했다. 내년 1월 중순 합격한 학생이 발표된다. 이들은 3월 런던에서 23개국 학생들과 겨루는 최종 오디션에 참가한다. 여기서 최종 선발되면 로열발레학교의 일원이 된다. 사이디 교수는 “입학한 뒤에도 부상을 당해 발레를 그만두거나 발레가 싫어져 학업을 택하는 학생도 많다”며 “춤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교육기관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학생들의 다양한 미래를 위해 지원한다”고 했다. 16∼18일 치러진 3일간의 발레 강습과 오디션을 마친 파우니 교장과 사이디 교수는 “실력이 뛰어난 한국 무용수들을 보기 위해서 매년 서울에 오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역사학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넓은 의미에서 ‘오리엔탈리즘’을 “서양이 동양에 관계하는 방식”으로 정의했다. 언뜻 보기에 꽤나 가치중립적인 듯한 이 개념은 주체가 ‘서양’, 객체가 ‘동양’이라는 점에 방점이 있다. 인종, 국가, 문명권이라는 모호한 기준에 따라 주체와 객체가 구분되면서 서양과 동양의 관계 맺기는 일방적 폭력이 됐고, 식민주의 정당화 논리로 이어졌다.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조화하고 동양에 대한 권위를 갖기 위한 서양의 스타일”이 모두 그가 비판한 오리엔탈리즘이다. 사이드가 던진 문제의식은 21세기에도 많은 학자,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중 한 명이 이 책의 저자 클라이브 폰팅이다. 영국 마거릿 대처 행정부에서 고위 공무원으로 근무했으며, 스완지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쳤던 그는 크림 전쟁, 윈스턴 처칠에 관한 저서와 수정주의적 역사관에 기초한 ‘진보와 야만’ ‘녹색 세계사’ 등 역사서로 이름을 날렸다. 오늘날 ‘빅 히스토리’(지구, 우주적 관점의 역사관)의 개척자로 불린다.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다룬 두 권의 책에서 그는 집필 방향에 대해 “유럽 중심적인 관점은 거부하고, 세계의 그 어느 지역에도 편중되지 않는 훨씬 폭넓은 세계사의 관점”이라고 반복해 강조한다. 그래서인지 그리스의 폴리스 국가,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에서 시작해 중세 유럽의 기독교 왕조를 거쳐 르네상스로 이어지는 뻔한 세계사 서술은 보이지 않는다. 이들 사이에는 지구 곳곳에서 흔적을 남기며 삶을 영위하던 다양한 국가, 문명의 이름이 빼곡하다. 중동지역 이슬람 왕국, 중국, 몽골, 인도, 일본, 한반도, 동남아시아, 신대륙(북·남아메리카)의 문명도 세계사의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한다. 한반도에서 발생한 한글 창제와 조선 왕조의 인쇄술 발달은 세계사에서도 주목할 만한 사건으로 꼽았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중국에 대한 방대한 서술이다. 그는 11세기를 ‘중국의 세기’로 봤다. 송나라는 프랑스 면적의 일곱 배에 달하는 지역을 하나로 묶어 통일했고, 통치했다. 나아가 이 시기에 중국이 유럽보다 앞서 산업혁명, 상업혁명을 달성할 뻔했다고 주장한다. 송나라가 누렸던 부, 철의 생산량이 그의 판단 기준이 됐다. 1076년 송나라의 철 생산량은 12만5000t에 이르렀던 반면, 1788년 산업혁명 태동기 잉글랜드에서의 생산량은 7만6000t에 그쳤다. 또 유럽의 언어가 그리스어, 라틴어, 독일어, 영어 등으로 갈라져 언어로 인한 ‘상실’을 겪은 데 반해, 중국은 한자를 유지하며 방대한 양의 지식과 전통을 지킬 수 있던 점도 중국이 누린 풍요의 토대가 됐다. 근세로 넘어오며 그는 “세계사의 주역이 뒤바뀌었다”고 봤다. 세계사의 주변부에 머물던 유럽은 이때부터 세계사의 중심부로 도약한다. 하지만 그에 따르면 이마저도 오래가진 못했다. 1940년 이후로 유럽의 영향력은 쇠약해졌고, 현재 아시아, 특히 중국이 잃었던 지위를 되찾고 있다고 봤다. 그는 “세계는 좀 더 정상적인 균형 상태로 돌아오는 듯 보였다”고 설명했다. 앞서 책이 처음 출간된 2000년 영국에서 저자의 견해는 획기적 발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약 20년이 지난 오늘날 책의 내용이 더는 충격적이거나 신선한 견해는 아닐지라도, 화려한 수사나 문장이 많지 않더라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오늘날 학계에서 그의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은 건, 어쩌면 우직하고 묵묵히 세계사를 서술한 그의 패기 덕분인지도 모른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팝을 좋아하는 오빠들을 따라 어릴 때부터 노랫말을 흥얼거리던 소녀.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1999년 첫 무대에 올랐다. 올해로 무대에 선 지 딱 20년이 됐다. ‘뮤지컬 여왕’이 된 소녀는 평생 꿈꾸던 ‘팝의 여왕’ 휘트니 휴스턴으로 변신했다. 김선영(45)이 뮤지컬 ‘보디가드’에서 팝스타 ‘레이첼 마론’ 역을 맡았다. 마론은 동명의 원작 영화(1992년)에서 휘트니 휴스턴이 가창력을 유감없이 선보인 역할.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16일 만난 그는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이렇게 원 없이 불러볼 기회가 또 있을까. 몇 차례 공연을 했는데 모든 순간이 감격스럽고, 개인적으로도 큰 추억이 될 것”이라고 했다. 작품은 스토커의 위협을 받는 최고의 팝스타와 보디가드의 사랑을 그렸다. 원작 영화를 각색해 치밀한 서사보다는 휘트니 휴스턴의 명곡에 무게를 둔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특히 마론 역은 넘버의 80%가량을 소화한다. 2012년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초연한 뒤 2016년 한국에 상륙했고 3년 만에 다시 관객을 찾았다. 김선영은 ‘도전’이란 말을 자주 했다. 그중 하나는 태닝. 배역과 외향적으로 더 닮기 위해, 그리고 무대에서 휘트니 휴스턴의 모든 걸 흡수하고픈 열망에 공연 전부터 태닝숍을 수시로 찾았다. 그는 “데뷔작 ‘페임(Fame)’에서도 태닝을 했는데, 꼭 20년 만에 다시 피부를 태웠다”며 갈색으로 그을린 손목을 들어 보였다. 의상도 새로운 도전이다. 남들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그의 눈에는 노출이 심하단다. “무대에서 이런 옷을 입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처음에는 버거웠지만 그냥 저를 놔버리고 즐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하는 건 체력 소모. 장면 전환 때마다 의상을 빨리 갈아입어야 하고 노래와 함께 역동적 안무를 해야 해 쉴 틈이 없다. 그는 “춤, 안무 욕심이 없던 제가 40대에 이런 배역을 하는 건 확실히 쉽지 않다. 나이를 더 먹으면 이런 역할을 언제 해 보겠냐”며 웃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다른 배우들도 함께 체력적 고통을 호소한다. 그 덕분에 전우애로 뭉친 출연진은 연습실과 백 스테이지에서도 어느 때보다 분위기가 좋다. 김선영은 “‘보디가드’에서 유달리 모두 끈끈하게 뭉쳐 있다. 무대에서도 ‘찰떡 케미’가 잘 발휘되고 있다”고 했다. 2008년 즈음 팬들이 지어준 ‘퀸선영’이라는 별명은 지금도 여전하다. “‘팬들도 몇 년 이러다 말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출산 후 무대에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사랑해 주셔서 감사해요. ‘왕관의 무게’가 늘 새로운 도전의 동력이 된답니다.” 그가 이번 작품에서 가장 좋아하는 넘버는 ‘One Moment in Time’. 극 중 의지하던 이들이 떠난 후의 애절함과 화려함 뒤에 숨겨진 외로움이 담겼다. 그는 “인물의 서사와 감정이 쌓이다 보니 이 넘버를 부를 때 가장 감정이 벅차다”고 했다. 그는 같은 디바로서, 배우로서 휘트니 휴스턴에게서 자신을 발견했다. ‘자신을 노래한다’는 느낌 때문에 이번 작품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배우는 외로운 직업입니다. 가장 유명하지만 가장 쓸쓸한 일이거든요. 김선영 버전의 휘트니 휴스턴을 연기하며 한번 더 성장하고 싶어요.” 내년 2월 23일까지 서울 LG아트센터. 6만∼14만 원. 8세 이상 관람가.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일본인 조 하루카 씨(46·사진)는 한국 여행을 떠날 때면 늘 세 가지를 예약한다. 첫 번째는 비행기 탑승권, 두 번째는 호텔, 세 번째는 뮤지컬 티켓이다. 제일 많은 비용을 지출하는 건 바로 뮤지컬 티켓. 그도 그럴 것이 최근 2년 동안 한국에서 본 뮤지컬 공연이 100회가 넘는다. 최근 e메일로 만난 조 씨는 “검색만 잘해도 일본 신칸센 열차보다 싼 한국행 비행기 티켓은 많다”며 “한국 뮤지컬 때문에 예금 잔액이 많이 줄었지만, 또 서울에서 훌륭한 퍼포먼스를 즐기고 싶다”고 했다. 그가 바다 건너 공연장까지 찾으며, 한국 ‘뮤덕(뮤지컬 덕후)’이 된 이유는 뭘까. 그가 처음 한국을 찾은 건 지난해 1월. 신시컴퍼니의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를 보기 위해서였다. 일본에서 먼저 접한 ‘빌리 엘리어트’에 크게 감동한 그는 서울에서도 같은 작품의 공연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저 없이 한국행 티켓을 끊었다. 그가 공연장에서 처음 마주한 한국 배우들은 상상 이상이었다. “뮤지컬에 음악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한국 배우들의 가창력은 정말 대단해요. 주연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도 매력적입니다.” 이날을 기점으로 그의 ‘덕질’이 시작됐다. 뮤지컬 ‘시카고’ ‘마틸다’와 내한 공연인 ‘스쿨 오브 락’까지 한국 공연장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작품들을 사랑하게 됐다. 본격 회전문 관객이 되면서 그가 본 공연 횟수는 100회를 벌써 넘었다. 그는 “공연을 보고 일본에 돌아가도 다시 한국에 오기 전까지 또 여러 편의 공연을 예약한다”며 “주변 가족, 친구도 제 한국 뮤지컬 사랑을 더는 말리지 못한다”고 웃었다. 조 씨는 “한국의 뮤지컬 컴퍼니도 매력적”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는 “일본에는 회전문 관객을 위한 마케팅이 많지 않은데 한국에는 스탬프 카드에 도장을 찍어주고 할인티켓, 굿즈, 팬 미팅 등 혜택을 준다”고 했다. 또 “급한 일이 있으면 빠르게 티켓을 취소할 수 있는 온라인 티케팅 시스템과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공연문화도 부럽다”고 했다. 한국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그는 공연 속 넘버와 연기를 그저 마음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다만 일본에서 같은 공연이 있다면, 작품을 외우다시피 숙지한 뒤 한국을 찾는다. 공연이 없어도 영화, 책, 인터넷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 미리 공부한다. 여전히 한국어는 서툴지만 “심현서, 정우진, 최정원, 김영주 등 배우의 광팬”이라며 출연진 이름만큼은 또박또박 한글로 적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코미디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맹활약하는 ‘웃음 사냥꾼’들이 잇따라 TV 밖 무대로 향하고 있다. 코미디 연극, 소극장 개그 쇼부터 마이크 하나만 덩그러니 놓은 채 작은 펍에서 펼치는 스탠드업 코미디까지 방식도 각양각색이다. 대중에게 개그를 선보일 프로그램이 점차 줄고, 영화나 넷플릭스 등에서 스탠드업 코미디가 각광받으며 개그맨들은 무대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있다. 이들은 ‘정통 코미디’에 대한 갈증을 무대 러시의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14일 서울 대학로의 한 소극장. 코미디 연극 ‘잇츠 홈쇼핑 주식회사’ 무대에는 낯익은 얼굴이 많다. 조혜련, 장동민, 김영희, 김승혜 등 유명 개그맨이 대거 배우로 출연한다. 홈쇼핑 방송 현장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룬 극 안에서 이들은 100분 동안 서사에 맞게 대사를 소화한다. 이따금씩 거친 욕설과 애드리브로 웃음을 뽑아내기도 했다. 대표 예능인 이수근도 ‘윤형빈의 개그 쇼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인 ‘이수근의 웃음팔이 소년’을 현재 공연 중이다. 텅 빈 무대에 기타 하나만 들고 올라 동료 개그맨들과 선보이는 음악 콩트는 관객으로부터 “개그콘서트에서 보여주던 정통 콩트를 떠올리게 한다”며 반응이 뜨겁다. 이 밖에 김대희, 김준호, 윤형빈, 김대범 등도 아예 직접 소극장을 차려 오랜 기간 동료 선후배들에게 무대를 제공해왔다. 자체 정기공연은 물론 새로운 개그 쇼도 기획한다. 이들이 무대로 눈을 돌리게 된 건, 일단 개그 프로그램이 과거보다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현재 KBS ‘개그콘서트’와 tvN ‘코미디빅리그’, comedy TV ‘스마일킹’만이 개그를 선보일 방송 플랫폼으로 살아남았다. 대부분은 시청률이 떨어지고 화제성도 부족하단 이유로 사라져갔다. 이런 상황은 개그맨들에게 직접 아이디어를 내고 온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정통 코미디’에 대한 갈증을 더욱 커지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윤형빈은 “레트로 개그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잘 짜인 악극 같은 쇼를 선보이고 싶다”고 밝혔다. 몇 안 남은 개그 프로그램에 출연해도 아쉬움은 여전하다. 수년째 서울 홍익대 인근에서 소극장을 운영하는 정태호는 “일주일 동안 머리를 싸매고 회의해도 방송에 나가는 건 고작 2∼3분이 전부다. 무궁무진한 아이디어를 가진 개그맨들에게는 무대가 오롯이 자신을 표현할 해방구”라고 했다. 마침 영화나 유튜브 등에서 먼저 주목을 받은 스탠드업 코미디의 약진은 이들의 무대 러시를 부채질했다. 스탠드업 코미디 쇼 ‘코미디 헤이븐’을 운영하는 정재형은 “스탠드업 코미디는 한 명이 5분 넘는 시간을 사용하며, 관객과 즉각적으로 소통하는 매력이 있다. 관객의 웃음을 걸고 개그맨으로서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신랄한 사회 풍자, 수위가 높은 성적 농담 등 표현 수위에서 비교적 자유롭다는 것도 개그 무대만의 장점이다. 넷플릭스와 스탠드업 코미디를 선보인 박나래는 “방송에서 할 수 없던 성(性) 얘기를 쿨하게 풀어놓을 자리가 없었다. ‘59금, 69금’이라는 리뷰도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조금 더 가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연극 무대와 스탠드업 코미디를 병행하고 있는 김영희는 “언더 개그 무대나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장에서는 표현 제약이 적고, 애드리브도 훨씬 자유롭다”고 밝혔다. 이런 분위기는 언제까지 이어질까. 이수근은 “공연만이 주는 긴장감도 있고, 다양한 연령층이 쉽게 웃을 수 있는 무대를 만들고 싶다. 단순히 쇼만 보여드리는 게 아니라 관객과 많이 소통하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조혜련은 “코미디 연극은 27년 전 신인 개그맨이 됐을 때처럼 얼굴을 맞대고 소통하는 짜릿함이 있다”고 했다. 아직은 불씨 수준이지만, 어쩌면 그들의 목마름은 들불처럼 번질지도 모른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별거 아닙니다. 마음에 담아 가지고 다니는 한 어린 녀석이지요.” 1942년 미국 뉴욕의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던 생텍쥐페리는 흰 냅킨에 장난삼아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함께 식사하던 이가 그에게 무엇을 그리는지 묻자 그가 이같이 답했다고 한다. 그가 끄적끄적 그리던 어린 녀석은 훗날 ‘어린 왕자’가 되어 전 세계 독자들과 만났다. 작품의 줄거리와 문학적 의의를 구태여 설명하는 건 시간 낭비일지 모른다. 현재까지 250여 개 언어로 번역돼 1억 권 이상 팔린 명작의 특별판 ‘갈리마르 에디션’이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내년은 작가 탄생 120주년이어서 의미가 더 깊다. ‘갈리마르 에디션’은 프랑스어 초판을 낸 갈리마르 출판사의 이름을 딴 특별판이다. 2013년 출판사는 작품 출간 70주년을 기념해 작가의 삶과 작품 탄생을 조명하는 책을 냈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장은 작가에 관한 신문, 삽화 자료, 문헌, 편지 등을 가득 넣어 작품의 탄생 과정을 촘촘히 짚었다. 두 번째 장에는 원작을 옮겨 담았고, 마지막 장에는 이른바 ‘어린 왕자’ 팬이자 전문가라 불리는 프랑스어권 교수, 작가의 평론이 실렸다. 흥미로운 건 한국에서 접하기 힘든 자료들을 망라한 첫째, 셋째 장이다. 첫째 장에는 작가가 끄적이던 삽화, 메모, 연습노트부터 그가 미국에서 활동할 당시 겪은 에피소드와 주변인들의 증언이 빼곡하다. 생텍쥐페리와 교제했던 미국 기자 실비아 해밀턴은 “그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어린 왕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생텍쥐페리는 내게 검토와 비판적 지적을 부탁했다”고 밝혔다. “작품 안에 그림도 같이 그려보라”는 조언을 건넨 해밀턴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작품에 공헌한 바가 클지도 모른다. 셋째 장에서는 학술적으로 작품의 주제, 관계, 문명을 논한 리뷰가 담겼다. 학술적이지만 책 속 장면들을 예로 들며 설명해 술술 읽히는 편이다. 정작 작품이 실린 두 번째 장이 홀대받는다 생각할지 모른다. 그래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른 장을 먼저 읽고 나면 자연스레 두 번째 장으로 손이 간다. 아름답고 동화적인 삽화가 읽는 맛을 더하며, 프랑스 문학 전공자이자 미술평론가인 번역자가 덧붙인 풍부한 주석이 이해를 돕는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제56회 동아연극상 작품상으로 서울시극단의 ‘와이프’와 극단 ‘돌파구’의 ‘날아가 버린 새’가 선정됐다. ‘와이프’는 신유청 연출과 황은후 배우가 각각 연출상과 유인촌신인연기상을 수상하며 3관왕에 올랐다. 또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도 성노진, 강지은이 각각 연기상을, 김은우가 유인촌신인연기상을 수상하며 3관왕에 올랐다. 올해 대상 수상작은 나오지 않았다. 동아연극상 심사위원회(위원장 윤광진)는 서울 서대문구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에서 12일 최종 심사를 진행해 이같이 결정했다. 올해 본심에 오른 심사위원 추천작은 모두 20편이었다. 심사위원들은 “다양한 주제와 새로운 분야의 연극도 많았으며 창작산실 지원 작품이 늘어나 연극계는 양적으로 성장한 한 해였다. 젊은 창작진, 배우들의 활약이 돋보였다”고 총평했다. 반면 “대상으로 꼽힐 정도의 특출한 작품이 없었고, 눈에 띄는 창작극도 많지 않아 아쉽다. 연극계가 질적으로는 과도기에 놓인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서울시극단의 ‘와이프’는 영국 희곡 작가 새뮤얼 애덤슨의 작품으로 1959년 헨리크 입센의 연극 ‘인형의 집’이 끝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어 1988년, 2019년, 2042년 네 시기의 커플을 통해 성소수자를 조명하고 젠더의 벽을 허무는 작품이다. 영국에서도 뜨거운 반응을 낳았다. 심사위원들은 “시대마다 다른 성소수자들의 디테일한 감수성을 밀도 있게 잘 그려냈다”며 “비어 있는 무대 공간 안에 스토리를 압축적으로 담아낸 올해의 수작”이라고 입을 모았다. 함께 작품상을 수상한 극단 ‘돌파구’의 ‘날아가 버린 새’는 신진 작가 장지혜의 희곡. 발음대로 읽으면 ‘나라가 버린 새’로도 해석된다. 새는 비행청소년을 은유한 것. 이들을 통해 한 인간의 깨달음을 전하는 작품이다. 심사위원들은 “청소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각을 다양하게 조명했다. 희곡 연출, 무대, 배우들의 합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면서 희곡의 미덕이 무대에서 드러난 수작”이라고 평가했다. 작품은 국립극단 사무국 산하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가 선정한 2016년 공연 후보작이었지만, 블랙리스트 사태로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국립극단은 10월 장지혜 작가를 상대로 사과문을 낸 바 있다. 연기상은 모두 극단 ‘골목길’의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에서 나왔다. 극 중 ‘창호’ 역을 맡아 열연한 성노진과 ‘어머니’ 역의 강지은이 각각 연기상을 받았다. 심사위원들은 “성노진은 가부장으로서의 모든 권위를 내려놓은 아버지의 절망과 한탄, 그리고 모든 걸 초월한 아버지의 모습을 깊이 있게 표현했다. 강지은은 전형적 한국 어머니의 모습에서 한발 더 나아가 생명력이 넘치는 어머니를 탁월하게 연기했다”고 평했다. 신인연출상은 ‘인정투쟁; 예술가편’의 이연주 연출가가 받았다. 장애인 이슈를 끝없이 질문하며 탄탄한 연출을 선보였다. 유인촌신인연기상은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에서 ‘창식’을 맡은 김은우와 ‘와이프’에서 ‘데이지’, ‘클레어’를 연기한 황은후가 각각 수상했다. 무대예술상은 국립극단의 작품 ‘스카팽’에서 음악감독을 맡은 김요찬에게 돌아갔다. 배우의 움직임을 리듬감 있게 음악으로 구현해냈다. 특별상은 순수예술 분야 젊은 연출인들을 지원한 공로를 인정해 두산연강재단 두산아트센터에 돌아갔다. 올해 새개념연극상과 희곡상은 수상작이 나오지 않았다. 시상식은 내년 1월 20일에 열린다. ▼‘와이프’ ‘녹천에는 똥이 많다’로 연출상 수상 신유청 씨…“무대위의 평범한 일상 잘 돌보며 살것”▼“생각지 못한 풍년입니다. 주변에서 ‘낫 대고 슥슥 추수만 잘하면 되겠다’고 하는데 전 얼떨떨하네요.” 연극 ‘녹천에는 똥이 많다’와 ‘와이프’로 제56회 동아연극상 연출상 수상자로 선정된 신유청 연출가(38·사진)는 “작품을 올리지 못하던 ‘어두운 시기’도 있었다”면서도 “그 시기를 잘 이겨낸 덕분에 동아연극상 연출상을 받게 된 것 같아 기쁘다”는 소감을 전했다. 그는 희곡, 소설을 공간화하는 힘이 뛰어나며 관객과도 무리 없이 소통한다는 평을 받는다. 올해 활발한 활동으로 연극계에서는 ‘신유청의 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신 연출은 두 작품에서 동시대성을 화두로 삼았다. 동명의 이창동 소설을 각색한 ‘녹천에는 똥이 많다’는 1980년대 물질적 욕망을 ‘아파트’라는 공간에 투영했다. 세대가 지나도 어김없이 반복되는 현대인의 욕망과 어리석음을 짚었다. 그는 “내 안에 남아있는 부모 세대의 애환, 욕망을 보여줌으로써 ‘과거를 내포한 동시대성’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와이프’는 올 6월 영국에서 초연한 작품. 약 80년 동안 벌어지는 네 커플의 이야기를 유기적으로 그렸다.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해 인간의 정체성을 깊이 파고든다. 신 연출은 ‘와이프’에 대해 “유럽 이야기가 원작이다 보니, 제 생각보다는 앞선 미래의 모습 같아 ‘미래를 내포한 동시대성’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신 연출은 과거 작품 활동이 더뎠던 ‘다크 에이지’에 개인적 공부를 놓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기회가 없었고, 질투도 많았다”며 “돈이 없어도 표현 영역이 무궁무진한 음향과 소리에 대해 새롭게 깨달았다”고 설명했다. 2007년 ‘동물원 이야기’ 연출로 데뷔한 신 연출은 “모든 일은 작은 일상이 모여 만들어진다. 늘 하던 대로 무대 위 평범한 일상을 잘 돌보며 살겠다”고 말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기 싫다. 그래도 맛집에는 가고 싶고, 정신적 만족감도 필요하고, 연애도 하고 싶다. 과한 욕심일까. 그런데 이 모두를 손가락만 움직여 간접 체험할 수 있다면? ‘먹툰’(음식, 먹거리가 주요 테마인 웹툰)이 포털 사이트 내 요일별 순위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먹툰은 주로 청년층의 이별, 불안, 취업난 등 공감 가능한 줄거리 위에 먹을거리를 토핑처럼 얹은 장르다. 주 독자인 2030은 방송이나 유튜브에서 유행하던 무차별적 먹방 대신 먹툰에서 소소한 만족감과 위로를 얻으며 ‘푸드 로맨스’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실감나는 작화법도 독자의 식욕을 자극하는 데 한몫하고 있다. 치즈 작가의 네이버웹툰 ‘백수세끼’는 제목처럼 백수인 주인공이 먹는 일상 음식을 그렸다. “이별 뒤에도 밥은 넘어간다”는 작가의 설명처럼 주인공은 이별, 취업난으로 힘들어하면서도 음식으로 큰 위로를 얻는 인물이다. 아르몽 작가의 ‘정순애 식당’은 따뜻한 집밥을 내어주는 힐링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업무, 일상의 스트레스에 이별까지 겪어 맛을 느끼지 못하는 주인공이 정순애 식당에서 계속 밥을 먹으며 입맛을 찾아간다는 내용이다. 이 밖에도 네이버웹툰 ‘밥 먹고 갈래요?’는 주말 힐링용 먹툰을 표방했다. ‘공복의 저녁식사’는 여고생인 주인공을 내세워 달콤한 군것질에 대한 독자들의 갈증을 대리 해소하는 작품으로 인기가 높다. 먹툰의 원조로 꼽히는 조경규 작가의 다음 웹툰 ‘오무라이스 잼잼’은 먹방이 유행하기 전인 2010년부터 맛깔 나는 먹거리를 웹툰에 녹여냈다. 음식 레시피와 전 세계의 맛집 정보까지 더해져 현대판 ‘식객’으로 불리기도 했다. 먹툰의 독자들은 댓글을 통해 음식을 주제로 토론을 벌이거나 음식을 통해 줄거리를 추론하기도 한다. 독자들은 “족발은 저렇게 먹으면 안 된다”, “주인공이 치킨 다리를 양보했으니 착한 캐릭터일 것”이라는 감상을 내놓고 “이별한 연인과 먹은 음식이 떠오른다. 당시 감성을 잘 표현했다”며 메뉴에 얽힌 각자의 추억도 털어놓는다. 먹툰 독자들의 궁금증 하나. 콘티를 짤 때 작가들은 음식과 이야기 중 어느 것을 먼저 구상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가마다 다르다. 치즈 작가는 “음식을 먼저 생각하고 완결까지 큰 스토리와 메뉴를 정해 놓았다. 다만 작품이 연재되는 계절이나 기획 방향과 너무 맞지 않는 음식은 지양한다”고 했다. 아르몽 작가는 “이야기를 먼저 구상한 뒤 해당 회차에 잘 어울리는 음식을 정한다. 음식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마트에서 장을 보며 메뉴를 생각한다”고 했다. 독자들의 궁금증 둘. 실감나는 음식 그림은 어떻게 표현할까. 치즈 작가는 “사진 속 음식 색을 그대로 쓰면 그림이 탁해지기 때문에 사진을 찍고 그 위에 선을 따서 새롭게 색을 칠한다. 음식의 질감, 색감 표현이 먹툰의 핵심”이라고 했다. 아르몽 작가는 “색감이 먹음직스럽게 잘 드러난 사진이나 ‘삼시세끼’ ‘수미네 반찬’ 등 먹방을 즐겨 보며 참고한다”고 했다. 세심한 음식 작화 덕분에 ‘다이어트 중 먹툰 구독 금지’라는 불문율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댓글에는 “와, 결국 이거 보고 치킨 시켰다”는 팬들의 자기 고백이 줄을 잇고 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격렬하게 아무 것도 하기 싫다. 그래도 맛집에는 가고 싶고, 정신적 만족감 필요하고, 연애도 하고 싶다. 과한 욕심일까. 그런데 이 모두를 손가락만 움직여 간접 체험할 수 있다면? ‘먹툰(음식, 먹거리가 주요 테마인 웹툰)’이 포털 사이트 내 요일별 순위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먹툰은 주로 청년층의 이별, 불안, 취업난 등 공감 가능한 줄거리 위에 먹거리를 토핑처럼 얹은 장르다. 주 독자인 2030은 방송이나 유튜브에서 유행하던 무차별적 먹방 대신 먹툰에서 소소한 만족감과 위로를 얻으며 ‘푸드 로맨스’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실감나는 작화법도 독자의 식욕을 자극하는 데 한 몫하고 있다. 치즈 작가의 네이버웹툰 ‘백수세끼’는 제목처럼 백수인 주인공이 먹는 일상 음식을 그렸다. “이별 뒤에도 밥은 넘어간다”는 작가의 설명처럼 주인공은 이별, 취업난으로 힘들어하면서도 음식으로 큰 위로를 얻는 인물이다. 아르몽 작가의 ‘정순애 식당’은 따뜻한 집밥을 내어주는 힐링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업무, 일상의 스트레스에 이별까지 겪어 맛을 느끼지 못하는 주인공이 정순애 식당에서 계속 밥을 먹으며 입맛을 찾아간다는 내용이다. 이 밖에도 네이버웹툰 ‘밥 먹고 갈래요?’는 주말 힐링용 먹툰을 표방했다. ‘공복의 저녁식사’는 여고생인 주인공을 내세워 달콤한 군것질에 대한 독자들의 갈증을 대리 해소하는 작품으로 인기가 높다. 먹툰의 원조로 꼽히는 조경규 작가의 다음웹툰 ‘오무라이스 잼잼’은 먹방이 유행하기 전인 2010년부터 맛깔 나는 먹거리를 웹툰에 녹여냈다. 음식 레시피와 전 세계의 맛집 정보까지 더해져 현대판 ‘식객’으로 불리기도 했다. 먹툰의 독자들은 댓글을 통해 음식을 주제로 토론을 벌이거나 음식을 통해 줄거리를 추론하기도 한다. 독자들은 “족발은 저렇게 먹으면 안 된다”, “주인공이 치킨다리를 양보했으니 착한 캐릭터일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이별한 연인과 먹은 음식이 떠오른다. 당시 감성을 잘 표현했다”며 메뉴에 얽힌 각자의 추억도 털어놓는다. 먹툰 독자들의 궁금증 하나. 콘티를 짤 때 작가들은 음식과 이야기 중 어느 것을 먼저 구상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가마다 다르다. 치즈 작가는 “음식을 먼저 생각하고 완결까지 큰 스토리와 메뉴를 정해 놓았다. 다만 작품이 연재되는 계절이나 기획방향과 너무 맞지 않는 음식은 지양한다”고 했다. 아르몽 작가는 “이야기를 먼저 구상한 뒤 해당 회차에 잘 어울리리는 음식을 정한다. 음식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마트에서 장을 보며 메뉴를 생각한다”고 했다. 독자들의 궁금증 둘. 실감나는 음식 그림은 어떻게 표현할까. 치즈 작가는 “사진 속 음식 색을 그대로 쓰면 그림이 탁해지기 때문에 사진을 찍고 그 위에 선을 따서 새롭게 색을 칠한다. 음식의 질감, 색감 표현이 먹툰의 핵심”이라고 했다. 아르몽 작가는 “색감이 먹음직스럽게 잘 드러난 사진이나 ‘삼시세끼’ ‘수미네 반찬’ 등 먹방을 즐겨 보며 참고한다”고 했다. 세심한 음식 작화 덕분에 ‘다이어트 중 먹툰 구독 금지’라는 불문율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댓글에는 “와, 결국 이거 보고 치킨 시켰다”는 팬들의 자기 고백이 줄을 잇고 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Nugu=듣보잡.’ 외계어 같은 이 정체불명의 수식은 사실 한국어로 구성됐다. ‘Nugu’는 한국어 ‘누구’를 소리 나는 대로 옮겨 적은 영단어로, 해외 K팝 팬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 활발히 사용되고 있다. 다만 Nugu는 원 단어의 뜻에서 확장해 ‘누구인지 잘 모른다’는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놈)’의 의미로 더 많이 쓰인다. 그래서 특정 K팝 가수를 겨냥한 ‘He is a Nugu’라는 문장은 해당 가수 팬들에게 꽤나 공격적이고 무례한 표현이 될 수 있다. 전 세계 BTS, K팝 팬덤이 한국어를 새롭게 해석·재생산한 ‘아민정음(아미+훈민정음)’이 큰 인기다. 아민정음은 대개 K팝 가수들이 즐겨 말하는 단어나 직역이 쉽지 않은 한국어를 발음과 비슷하게 알파벳으로 옮겨 적는 것을 뜻한다. 팬들은 SNS상에서 K팝에 대해 토론하거나 실시간으로 뉴스를 공유할 때도 이를 적절히 섞어 활용한다. 아티스트와 노랫말에 대한 관심이 한국 문화는 물론 한국어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아민정음은 영어 단어와 혼합돼 쓰일 때가 많다. ‘Lack of Noonchi(또는 Nunchi)’와 ‘No Noonchi’ ‘Ain‘t got Noonchi’는 ‘눈치가 없다’는 뜻으로, 눈치 없는 행동을 한 특정 가수를 가리킬 때 쓰인다. ‘눈치’가 때로는 아이돌 그룹 내 팀 분위기를 살리는 역할을 한다는 긍정적 뉘앙스로도 쓰인다. 최근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은 한국인의 ‘눈치’를 조명하며 “행복과 성공에 이르는 한국인의 비밀”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앞서 설명한 Nugu의 경우에도 ‘신인’ ‘루키’라는 의미가 추가되면서 ‘Half-Nugu(조금 인지도가 있는 가수)’, ‘How Nugu is(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지)’라는 복합 표현도 등장했다. 아민정음의 주된 특징은 번역 시 적확한 영단어가 없다는 것. 한국 특유의 감성과 문화가 녹아 있는 한국어를 직역하더라도 그 느낌과 맛이 살지 않기 때문에 한국어를 소리 나는 대로 적어 활용한다. 영단어 ‘Feeling’만으로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기분(Kibun)’을 비롯해 ‘막내(Maknae)’ ‘연습생(Yeonseupseng)’ ‘띠동갑(Tteedonggab)’ ‘썸타다(Sseomtada)’ 등이 이에 해당한다. 웃음소리를 표현한 의성어도 한국화됐다. 한 K팝 가수의 유튜브 라이브 영상에는 해외 팬들이 ‘ㅋㅋㅋㅋ’나 ‘ㅎㅎㅎㅎ’를 사용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한 영국 K팝 팬은 “영어식 웃음 표현인 ‘hahaha’ ‘lol’보다는 한글의 ‘ㅋ’ 소리가 실제 웃음소리와 더 비슷하고, 재밌다”며 “팬들은 이를 위해 한국어 버전 자판을 내려받아 ‘ㅋ’과 ‘ㅎ’을 즐겨 쓴다”고 설명했다. 처음부터 아민정음의 의미를 100%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때문에 해외 팬들은 K팝 사전 등을 제작하며 한국어 학습에도 열을 올린다. 팬들이 아민정음을 정리해 만든 K팝 사전은 새로 K팝에 발을 들인 이들에게 입문 필독서다. 필리핀에서 K팝 팬 사이트를 운영하는 조네사 갈로 씨는 “아티스트가 사용하는 한국 단어와 그 단어의 정확한 뜻까지 알아야 진정한 K팝 팬이라는 인식이 있다”고 설명했다. 유튜브에서도 한국어 학습 콘텐츠에 대한 인기가 뜨겁다. ‘아미를 위한 한국어 가이드’ 등 한국어 교육 콘텐츠를 제작한 한 유튜버는 최근 영상의 자막을 8개 언어까지 확대했다. 그는 “세계 각국 팬들로부터 한국어를 공부할 수 있도록 자국 언어 버전의 자막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가 컸다”고 설명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Nugu=듣보잡” 외계어 같은 이 정체불명의 수식은 사실 한국어로 구성됐다. ‘Nugu’는 한국어 ‘누구’를 소리 나는 대로 옮겨 적은 영단어로, 해외 K팝 팬들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활발히 사용되고 있다. 다만 ‘Nugu’는 원 단어의 뜻에서 확장해 ‘누구인지 잘 모른다’는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놈)’의 의미로 더 많이 쓰인다. 그래서 특정 K팝 가수를 겨냥한 ‘He is a nugu’라는 문장은 해당 가수 팬들에게 꽤나 공격적이고 무례한 표현이 될 수 있다. 전 세계 BTS, K팝 팬덤이 한국어를 새롭게 해석·재생산한 ‘아민정음(아미+훈민정음)’이 큰 인기다. 아민정음은 대개 K팝 가수들이 즐겨 말하는 단어나 직역이 쉽지 않은 한국어를 발음과 비슷하게 알파벳으로 옮겨 적는 것을 뜻한다. 팬들은 SNS상에서 K팝에 대해 토론하거나 실시간으로 뉴스를 공유할 때도 이를 적절히 섞어 활용한다. 아티스트와 노랫말에 대한 관심이 한국 문화는 물론 한국어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아민정음은 영어 단어와 혼합돼 쓰일 때가 많다. ‘Lack of Noonchi(또는 Nunchi)’와 ‘No Noonchi’ ‘Ain’t got Noonchi‘는 ’눈치가 없다‘는 뜻으로, 눈치 없는 행동을 한 특정 가수를 가리킬 때 쓰인다. 하지만 ’눈치‘가 때로는 아이돌 그룹 내 팀 분위기를 살리는 역할을 한다는 취지로 긍정적 뉘앙스로도 쓰인다. 최근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은 한국인의 ’눈치‘를 조명하며 “행복과 성공을 위한 한국인의 비밀”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앞서 설명한 ’Nugu‘의 경우에도 ’신인‘ ’루키‘라는 의미가 추가되면서 ’Half-Nugu(조금 인지도가 있는 가수)‘, ’How nugu is(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지)‘라는 복합 표현도 등장했다. 아민정음의 주된 특징은 번역 시 적확한 영단어가 없다는 것. 한국 특유의 감성과 문화가 녹아있는 한국어를 직역하더라도 그 느낌과 맛이 살지 않기 때문에 한국어를 소리 나는 대로 적어 활용한다. 영단어 ’Feeling‘만으로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기분(Kibun)‘을 비롯해 ’막내(Maknae)‘ ’연습생(Yeonseupseng)‘ ’띠동갑(Tteedonggab)‘ ’썸타다(Sseomtada)‘ 등이 이에 해당한다. 웃음소리를 표현한 의성어도 한국화됐다. 한 K팝 가수의 유튜브 라이브 영상에는 해외 팬들이 “ㅋㅋㅋㅋ”나 “ㅎㅎㅎㅎ”를 사용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한 영국 K팝 팬은 “영어식 웃음표현인 ’hahaha‘ ’lol‘ 보다는 한글의 ’ㅋ‘ 소리가 실제 웃음소리와 더 비슷하고, 재밌다”며 “팬들은 이를 위해 한국어 버전 자판을 다운받아 ’ㅋ‘과 ’ㅎ‘를 즐겨 쓴다”고 설명했다. 처음부터 아민정음의 의미를 100%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때문에 해외 팬들은 K팝 사전 등을 제작하며 한국어 학습에도 열을 올린다. 팬들이 아민정음을 정리해 만든 K팝 사전은 새로 K팝에 발을 들인 이들에게 입문 필독서다. 필리핀에서 한 K팝 팬 사이트를 운영 중인 조네사 갈로 씨는 “아티스트가 사용하는 한국 단어와 그 단어의 정확한 뜻까지 알아야 진정한 K팝 팬이라는 인식이 있다”고 설명했다. 유튜브에서도 한국어 학습 콘텐츠에 대한 인기가 뜨겁다. ’아미를 위한 한국어 가이드‘ 등 한국어 교육 콘텐츠를 제작한 한 유튜버는 최근 영상의 자막을 8개 언어까지 확대했다. 그는 “세계 각국 팬들로부터 한국어를 공부할 수 있도록 자국 언어버전 자막 요구가 컸다”고 설명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눈앞으로 검은색 벌레 한 마리가 휙 날아간다. 대개 그냥 날벌레쯤으로 여기고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벌레 몸통에 검은색과 노란색이 뒤섞여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면? 아마도 순간적으로 본능적 위험을 감지하고, 자리를 피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자연에서 ‘위험’을 뜻하는 노랑과 검정의 배합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각인됐기 때문이다. 노랑 검정의 배합은 주의를 요하는 도로 표지판에도 활용된다. 저자는 응용색채심리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로 20여 년간 색과 삶의 관계를 파헤쳐 왔다. 그는 일상에서 색을 활용해 심리마저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색채이론을 내세우고 있다. 그는 “색이야말로 내 삶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언어다. 색은 상상 이상의 에너지를 지니며, 삶에 큰 영향을 준다”고 강조한다. 흔히 ‘밝다’ ‘어둡다’ ‘예쁘다’ 정도로 색이 주는 추상적 느낌도 그 연원을 파헤치면 묘한 심리가 숨어 있다. 색에 대한 인류의 지적 욕구는 과학과 맞닿아 있다. 처음 색채이론을 창시한 이는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색을 신이 하늘에서 보내는 ‘신성한 빛’으로 여겼다. 모든 색을 자연의 4대 원소인 불, 흙, 공기, 물과 연관지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색에는 일정한 규칙과 질서가 필요했다. 그의 색채이론은 한낮의 흰색에서 시작해 한밤중 검은색으로 마무리되는 선형적 체계로 구성됐다. 이 색채구분법은 무려 2000여 년 뒤 뉴턴이 등장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뉴턴은 현재 알려진 색에 대한 개념을 정리했다. 그는 무지개에 호기심을 느껴 색의 스펙트럼을 과학적으로 분석했다. 시인이자 소설가로 유명한 괴테도 색채 연구에 도전했다. 그는 색을 “사람들이 각자 다르게 인식하는 감정 경험”으로 봤다. 현대에 와서 스위스 심리학자 카를 융은 파란색을 ‘객관, 분석’, 초록색을 ‘평온, 진정’ 등의 키워드로 분류하며 현대 색채심리학의 토대를 마련했다. 하지만 이 같은 색채 구분이 지구상 모든 곳에 일괄적으로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색이란 문화, 관습에 따라 가변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서구 국가에서 사별, 애도의 의미가 강한 검은색은 아프리카에서 경험과 지혜를 뜻한다. 중국에서 황제의 색을 뜻하는 노랑은 유럽에서 나약함과 배신을 상징한다. 과거 남성성을 상징하던 분홍색은 현대로 넘어오며 여자아이와 더 어울린다는 고정관념이 생겼다. 색의 역사와 의미를 충분히 짚었다면, 이제 이를 활용할 차례다. 저자는 후반부에 직접 색채 코디네이터로 나서 삶에서 활용 가능한 소소한 팁을 제시한다. 개인 성향에 따라 어울리는 면접 의상, 업무 효율을 높이는 사무실 색채 배치, 성격이 유별난 구성원들과 조화롭게 살기 위한 인테리어법 등은 당장 도전해 볼 만하다. 책은 얼핏 보면 우리가 느끼는 색의 이미지를 한데 정리해 놓은 모음집 수준으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색을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해 버리기에 우린 너무도 많은 색에 둘러싸여 있다. “색은 곧 인생”이라는 저자의 말도 밑져야 본전 아닐까. 그의 말에 따라 당장 월요일에는 자신감을 극대화해 주는 붉은 계열 옷으로 월요병을 없애 보자.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신문을 집이 아니라 사무실, 상가 등에서 구독하는 독자가 전체 유료 구독자 중 절반 이상인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ABC협회(회장 이성준)는 6일 일간신문 172개사의 2018년 발행부수와 유료부수 인증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유료부수의 가구 독자와 비(非)가구 독자의 비율도 함께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비가구 독자가 신문 유료부수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010년 38.56%에서 꾸준히 증가해 2014년 46.77%, 2019년 54.99%에 달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신문구독 시장이 비가구 독자 중심으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ABC협회가 신문 유료부수의 가구와 비가구 구독자의 구체적 비율을 공개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ABC협회는 일간지의 발행부수와 유료부수를 실사해 집계하는 국내 유일의 공인기관이다. ABC협회는 신문 유료부수를 조사할 때 가구 독자와 함께 영업장(관공서, 사무실, 상가), 가판 등 신문사의 모든 유통망을 조사하고, 전국 읍면동 단위까지 조사한다. 반면 일부 조사 기관에서는 비가구 독자(영업장, 기관)를 제외하고 가구 독자만을 합산한다. ABC협회 측은 “신문 매체력 평가에서 유료부수 규모는 중요한 기준인 만큼 영업장 독자를 제외하고 있는 조사는 신문 시장의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한편 이날 발표된 유료부수 인증 결과에 따르면 동아일보의 유료부수는 73만7342부로 집계돼 전체 언론사 중 2위를 차지했다. 동아일보는 3년 연속 유료부수가 증가했다. 동아일보의 발행부수 역시 96만5286부로 전년보다 6026부 늘었다. 스포츠동아(유료부수 10만7567부)는 스포츠신문 가운데 2년 연속 1위를 차지했으며 종합 순위에서도 13위에 올랐다. 또 어린이동아의 유료부수는 전체 19위(6만9468부)로 어린이 신문 중 가장 순위가 높았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