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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창력, 무대에 임하는 열정만큼은 이미 월드 클래스!” 흥행에는 다 이유가 있다. 2007년 ‘명성황후’를 시작으로 ‘맘마미아’ ‘오페라의 유령’ ‘지킬앤하이드’ 등이 연이어 100만 관객을 돌파한 ‘밀리언클럽 시대’를 열기까지. 한국은 현재 세계가 주목하는 뮤지컬 시장이다. 이 같은 폭발적 성장과 흥행 비결엔 한국 뮤지컬 배우들의 힘이 있다. 최근 한국을 찾은 뮤지컬 ‘레베카’ ‘아이다’ ‘보디가드’ ‘빅 피쉬’의 제작진은 “한국 배우들의 능력은 브로드웨이에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최고 수준”이라고 극찬했다. 미국, 유럽 등 뮤지컬 본고장에서 다양한 프로덕션을 거친 해외 연출진은 한국 주·조연 배우들의 고른 가창력을 가장 높이 샀다. ‘빅 피쉬’의 스콧 슈워츠 연출은 “배우들이 스토리를 노래로 풀어내는 실력이 뛰어난데, 뭣보다 앙상블, 조연배우들의 실력이 주연 못지않게 훌륭해 놀랐다”고 했다. ‘레베카’의 각본, 작사를 맡은 미하엘 쿤체는 “다른 국가의 경우 대개 한 프로덕션 안에서 배우 1∼2명 정도만 돋보이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선 출연하는 모든 배우의 기량이 고루 뛰어나다. 전체적 기량만 본다면 브로드웨이보다 낫다”고 평가했다. 작곡가 실베스터 르베이는 “박효신, 옥주현, 김준수 등 팝 가수가 뮤지컬을 통해 배우로 성장해 놀랄 만한 실력을 뽐내는 점도 인상적”이라고 했다. 안무, 소화 능력도 좋은 평가를 받는다. ‘아이다’의 안무를 맡은 트레이시 코리아는 “2005년 ‘아이다’를 맡았을 땐 캐릭터를 생동감 있는 안무로 표현할 수 있는 배우가 많지 않았다. 14년 사이 한국 배우들이 빠르게 성장해 완벽한 군무를 펼치는 걸 보면 놀랍다”고 했다. 이들이 눈여겨본 또 다른 장점은 작품에 임하는 배우들의 태도다. 한국 배우들은 정해진 연습시간이 끝나도 자발적으로 연습실에 남는 ‘연습벌레’들로 유명하다. 슈워츠 연출은 “늘 준비된 자세로 제작진의 말을 메모해 기억하고, 이 노력들이 결과로 나타나는 편이다. 해외에서 연습 시간 뒤에도 배우들이 남아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털어놨다. ‘보디가드’의 제인 맥머트리 안무가는 “한국 배우들은 의지가 정말 강하다. 연습 첫째 날부터 고난도 안무를 주문했고, 몇 주간 강행군을 거쳤다. 모두 포기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강한 앙상블이 완성됐다”고 밝혔다. 아쉬운 점도 없진 않다. 소극적 감정 표현, 자신감 부족 등은 이들이 털어놓은 한국 배우들이 보완해야 할 부분이다. ‘보디가드’를 맡은 제이슨 케이프웰 연출은 “키스 장면, 애정 표현 장면 등에서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감정을 원하는 수준까지 끌어내기 위해 배우들이 지나야 할 문턱이 생겨 아쉽다”고 했다. 맥머트리 안무가는 “연습 때도 실전처럼 긴장감을 갖고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게 중요하다. 더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 배역에 여러 명의 배우가 동시에 캐스팅되는 한국 뮤지컬의 특징은 장점이자 단점이다. 슈워츠 연출은 “한 배역을 맡은 배우들에게 다 똑같은 디렉션을 할 수 없어 캐릭터 구현에 다소 어려움이 따른다”면서도 “관객 입장에서는 한 작품 안에서 여러 가지 매력을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원로 연극배우 손숙 씨(예술의전당 이사장)가 드라마 예술학 발전에 평생을 헌신한 공로로 5일 오후 3시 서울사이버대(총장 이은주) 차이콥스키홀에서 러시아 알렉산드르 페도소프 하바롭스크주 문화장관으로부터 하바롭스크 국립문화대가 주는 드라마예술학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손 씨는 박사학위 수여 소감을 통해 “연극 배우로 성장하면서 러시아 작가 연출가 음악인 등 문화 예술인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아무런 인연도 없는 대학에서 제게 명예 박사학위를 주신데 대해 크게 감사한다. 한시도 이 명예와 과분함을 잊지 않고 아름답게, 무대에서 후배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이어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신 어머니께 이 학위를 바친다. 양반 딸이 딴따라가 된 것을 안타까워 하셨는데 박사학위모와 가운을 입은 지금 제 모습을 보면 하늘나라에서도 크게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이어 “박사학위도 좋지만, 박사보다는 배우가 윕니다”라고 말해 큰 환호와 박수를 받았다. 이 날 학위수여 식장에는 이순재 신구 박정자 정진수 윤호진 손진책 정동환 안성기 박중훈 장사익 강수진 박인자 박형식 박명성 안호상 정재왈 이성열 오지혜 씨 등 문화 예술계 인사들과 안드레이 쿨릭 주한러시아대사, 이세웅 학교법인 신일학원 명예이사장, 이상균 서울사이버대학교 이사장, 허묘연 전 총장, 정몽준 아산재단이사장, 오지철 단국대문화예술대학원장, 진선미 전 여성가족부장관, 신현택 전 예술의전당사장 등 30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손숙 예술의전당 이사장(사진)이 러시아 하바롭스크 국립문화대학교 명예박사학위를 받는다. 손 이사장은 5일 서울 강북구 서울사이버대학교 차이콥스키홀에서 알렉산드르 페도소프 러시아 하바롭스크 주 문화장관으로부터 드라마 아트 박사(Doctor of Drama Arts) 학위를 수여 받는다. 손 이사장은 1963년 데뷔한 뒤 57년 간 꾸준히 연극무대에 올랐으며, 연극분야 발전과 문화예술을 진흥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학위수여식에는 안드레이 쿨릭 주한 러시아 대사, 백규성 극동지역 한인회장, 서울사이버대학교 이상균 이사장, 서울사이버대 이은주 총장 등이 참석한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 ‘구지가(龜旨歌)’를 따라 가야의 신화에서 역사 속으로 걸음을 내디디면 허황옥이 바다 건너 가져왔다는 ‘파사석탑’이 처음 관객을 맞이한다. 붉은 빛깔이 감도는 석탑의 암질은 한반도 남부에서 찾기 힘든 석영질 사암(砂巖). 이 돌들은 먼 타국에서 건국설화 같은 무수한 이야깃거리를 안고 가야 땅에 이르렀다. 해양문화, 다양성을 기반으로 공존과 화합을 꿈꾼 한반도의 은은한 ‘흑진주’, 가야인의 진짜 모습이 펼쳐진다. 국립중앙박물관(서울 용산구)은 3일부터 내년 3월 1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특별전 ‘가야본성―칼과 현’을 연다. 이번 특별전은 1991년 ‘신비한 고대왕국 가야’에 이어 28년 만에 가야를 주제로 개최한 전시다. 현 정부의 ‘가야사 문화권 조사·정비’ 추진과 맞물려 30여 년간 새롭게 발굴한 유적·유물을 소개한다. 아울러 비약적으로 늘어난 가야 연구를 토대로 가야사가 지니는 역사적 의의를 짚는 데 중점을 뒀다. 삼성미술관 리움, 국립경주박물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등 국내외 31개 기관이 문화재 2600여 점을 출품했다. 전시는 부제인 ‘칼과 현’이라는 가야의 두 가지 축을 충실히 구현한다. ‘칼과 현’은 각각 가야를 상징하는 ‘강성한 힘’과 가야금으로 대표되는 ‘조화’를 뜻한다. 영어 부제로 ‘Iron and Tune(철과 선율)’을 택해 가야의 강력한 철기 문화와 토기, 교역품을 통한 조화의 의미를 되새기는 데 방점을 뒀다. 네 곳으로 구성된 전시관의 소주제는 각각 공존, 화합, 힘, 번영이다. 여러 장의 긴 철판을 연결해 만든 종장판 갑옷과 투구들은 묵직한 존재감을 뽐낸다. 삼국시대 갑옷 중 가장 화려하다고 평가받는 판갑옷은 가야의 뛰어난 제련술을 여실히 보여준다. 경북 고령에서 출토됐다고 전해지는 금관(국보 138호), 말 탄 무사 모양 뿔잔(국보 275호)에 녹아있는 세련된 가공술은 ‘삼국에 비해 가야는 힘이 없었다’, ‘가야는 한 번도 빛나지 않았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전시관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가야’ 대신 역사성을 고려해 ‘가락국’ ‘가라국’이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했다. 공존과 조화의 의미는 주로 다양한 무덤, 고분군 출토품을 통해 드러난다.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배 모양 토기, 집 모양 토기를 비롯해 이웃 국가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다양한 양식의 토기들은 개방과 연맹체의 공존을 택한 가야인의 중심 가치를 보여준다. 가야 토기로 만든 높이 3.5m의 ‘가야토기탑’도 주요 볼거리다. 전시관의 조도를 낮춘 건 가야의 은은한 매력을 전하고자 한 국립중앙박물관의 고민이 담겼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2일 언론 공개회에서 “가야의 철, 토기 문화를 강조하기 위해 전시관 색조를 검은색에 가깝게 했다. 공존을 꿈꾸며 번영했던 가야의 가치를 다시 깨닫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 3월 1일 전시를 마치면 부산박물관, 일본 지바현, 후쿠오카현 국립박물관에서 순회전을 개최하고 내후년 국립김해박물관에서 마지막 전시를 연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미국 보수 경제학자와 억만장자들이 은밀하게 결합했다. 이들은 서서히 사회를 오른쪽 끝으로 몰고 간다. 노조를 없애고 공교육을 사유화하며, 투표율까지 낮추는 미국의 변화가 모두 이들 손을 거친 일이라면 어떨까. 미국 듀크대에서 역사학, 공공정책학 교수인 저자는 6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미국을 변화시킨 보수주의자들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그가 꼽은 이 변화의 두 가지 핵심 축은 1986년 ‘공공선택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제임스 맥길 뷰캐넌과 ‘코크 인더스트리즈’의 억만장자 오너 찰스 코크다. 사상과 자본으로 무장한 이들은 자본주의를 민주주의로부터 구할 소명을 공유했다. 사회적 책임과 평등주의적 가치를 신봉했던 미국 대중도 이들에게 휘둘리기 시작했다. 변화는 모세혈관처럼 사회 곳곳으로 뻗어나간다. 노동계약 기간은 점차 줄어들었고, 노조 가입률은 현저히 낮아졌다. ‘오바마 케어’의 예산을 깎기 위한 전국 규모의 시위도 “잘 기획되고 조정된 전국적 운동”이었다. 저자는 이를 “막대한 권력자들이 특권에 어떤 간섭도 들어오지 않게 하기 위해 인구 집단을 병리적이고 왜곡된 방식으로 분할하려는 운동”이라며 “민주주의의 퇴행”이라고 일갈한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카페모카로 주세요.” 잔혹한 광기(狂氣)에는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160분 동안 무대에 피와 눈물을 뿌리며, 살인마 이발사의 광기를 쏟아낸 ‘은토드’ 박은태(38)는 공연을 마치자마자 달달한 것부터 찾았다. 최근 서울 샤롯데씨어터 인근에서 만난 그는 출연작 ‘스위니토드’에 대해 “도저히 제 정신에 노래를 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작품”이라며 극한의 체력, 감정 소모를 호소했다. 그러면서도 “배우로서 꼭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드디어 이뤘다”며 본심을 숨기지 못했다. 뮤지컬 ‘스위니토드’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 런던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한 이발사의 복수극이다. 복수의 시작점은 아내와 딸을 빼앗아 가정을 파탄 낸 권력자다. 이발사의 칼날은 약자를 짓밟는 부조리한 사회까지 건드린다. 분위기는 스릴러인데, 군데군데 블랙코미디 요소가 녹아있어 웃음도 자주 터진다. 박은태는 “1979년 초연 후 40년이 지나 머나먼 한국 땅에서도 작품이 ‘먹히는’ 메시지를 던지는 걸 보면 원작의 힘이 위대하다”고 평했다. 그는 뮤지컬 ‘지킬앤하이드’ ‘모차르트!’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등에서 광기 어린 캐릭터를 도맡았다. 하지만 살인마가 된 이발사의 광기에 더 감정이입이 잘 됐다. 그는 “누군가의 남편이자, 세 아이의 아버지인 저도 캐릭터가 겪은 아픔을 절절히 느낄 수 있어 실감나는 광기가 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오열 연기 장인으로 유명한 그는 이번 작품에서는 눈물 포인트를 딱히 정하지 않고 철저히 극의 흐름에 내맡긴단다. “같은 대사를 해도 어떤 날은 화가 났다가, 눈물도 나오고, 다른 날엔 쌓인 웃음이 터질 때도 있어요. 휘몰아치는 게 많은 작품이라 매일 무대가 롤러코스터처럼 짜릿해요.” 그래도 ‘눈물 바보’의 천성은 속이지 못한다. 무대 때마다 객석을 등지고 관객 몰래 눈물을 훔치는 장면이 있다. “이발소 아래층에서 극 전개상 제가 죽여야 하는 한 여인의 모습을 올려다볼 때, 그리고 그 정신 나간 여자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춤출 때는 꼭 눈물이 펑펑 흘러요. 안 들키려면 매번 닦고 무대에 올라가야죠.” 작품은 그에게 발성 측면에서도 새 도전이다.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한 고음역대 발성으로 정평이 난 그는 “중저음 넘버가 많은 작품은 목이 상하기도 쉬워 기피하기도 했는데 5, 6년 전부터 저음을 갈고 닦은 덕분에 ‘저음 끝판왕’ 스위니토드도 도전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가 작품에서 가장 좋아하는 넘버는 처음과 끝에 깔리는 ‘발라드 오브 스위니토드’다. “1막에서 ‘들어는 봤나 스위니토드’는 2막 마지막에서 ‘잘 봤지, 그 스위니토드’가 됩니다. 잔혹한 운명을 지켜본 여러분. 이 미친 블랙코미디를 정말 보고 웃을 수 있나요?” 내년 1월 27일까지 서울 샤롯데씨어터. 6만∼14만 원. 14세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어떤 자리에 있든, 객석에 지진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어요.” 지난해 언론·문화 부문 인촌상(32회)을 수상한 한태숙 연출(69·사진)이 최근 경기도립극단 예술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평생 내 안에 고여 있던 이야기, 연극이 해야 할 이야기만 해왔다”며 “더 큰 목표와 책임이 따르겠지만 작품으로 객석을 뒤흔들겠다는 지향은 같다”고 강조했다. 최근까지 극본 집필에 몰두한 한 연출에게 예술감독은 부담스러운 제안이었다. ‘맞지 않는 옷’ 같았다. 가족도 나이를 걱정하며 말렸다. 수차례 고사했지만 결국 극단의 끈질긴 ‘오고초려(五顧草廬)’에 넘어갔다. 그는 “저도 모르게 달리는 열차에 올라타 버렸다. 새로운 관객, 배우와 작업하며 더 흔들고픈 욕심이 생겼다”고 했다. 첫 공연은 이달 27일부터 30일까지 경기 양평군민회관에서 열리는 김낙형 연출의 연극 ‘몽양, 1919’다. 부임 전부터 예정된 공연이지만 “걱정이 늘어난 걸 보면 예술감독의 심정을 알게 된 것 같다”고 털어놨다. 한 연출은 확고한 비전도 제시했다. 그는 “2년 이상 지속할 수 있으며, 관객이 매력을 느끼는 레퍼토리 공연을 안정적으로 가져갈 필요가 있다”고 했다. ‘끝까지 가본 연극’을 갈구하는 마음은 변함없었다. “예술성을 갖추고 인생을 깊게 파헤치는 작품들도 소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내년엔 연극 ‘파묻힌 아이’와 ‘오네긴’을 계획하고 있다. 주어진 자리는 달라도 그에게는 연극인으로서의 욕심과 소명이 가장 중요했다. “한태숙 작품은 ‘지독한데 좋았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관객의 마음을 충만하게 채울 수 있는 극단이 되면 전국에서 공연을 보러 오시지 않을까요?” 전석 무료. 8세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책장이 높아 손에 안 닿던 책도 이제는 제 맘대로 꺼내 볼 수 있어요.” 아파트로 겹겹이 둘러싸인 경기 성남시의 4층짜리 청소년수련관. 오전 내내 조용한 이 건물은 매일 오후 학교 수업이 끝나면 초등학생들로 붐빈다. 이달부터는 건물 내 1층 작은도서관이 새 단장을 마치고 개관해 더 많은 학생들이 즐겨 찾는 ‘핫 플레이스’가 됐다. 도서관에서 친구, 부모님과 함께 책을 고르던 청소년들은 “높이가 낮은 책꽂이가 많아져서 사다리를 이용해 올라가지 않아도 보고 싶은 책들을 다 볼 수 있다. 도서관이 집보다 더 편하고 재미있다”며 웃었다. 22일 정식 개관한 분당서현청소년수련관 작은도서관이 지역의 지식 사랑방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날 열린 개관식에는 은수미 성남시장, 김수연 사단법인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 대표를 비롯해 학부모, 청소년 100여 명이 참석했다. 은 시장은 “부모, 아이, 지역사회가 모두 함께할 수 있는 지식공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설립된 지 16년이 지나 노후했던 도서관은 올해 7월 KB국민은행이 주최한 작은도서관 조성 사업의 리모델링 분야에 선정됐다. 1억 원의 사업비를 후원받아 두 달간 새 단장에 심혈을 기울였다. 179m²(약 54평) 규모인 도서관에는 2만6000여 권의 책을 비치하고 70개의 원목 서가를 새로 들여놓았다. 열람 책상 9개, 의자 60개, 정보 검색대, 수납장도 있다. 개관식에 앞서 이달 초 학생들에게 일부 공개한 도서관은 이미 반응이 뜨겁다. 리모델링 전 일주일에 한 번씩 도서관에 왔다는 공지후 양(초등학교 3학년)은 “요즘 일주일에 3, 4번씩 책을 보러 온다. 깨끗하고 편한 새 의자에 앉아 책을 읽을 때가 제일 즐겁다”고 했다. 정제하 군(초등학교 4학년)은 “학교, 학원 숙제를 마치면 꼭 친구들과 이곳에 온다. 책꽂이에 보고 싶은 만화책이 정말 많다”고 말했다. 학부모들에게도 작은도서관은 인기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이희옥 씨(47)는 “집에서 5분 거리에 최고로 훌륭한 독서 환경이 갖춰져 있다. 같이 책을 읽으러 가도 좋고, 아이가 책을 읽는 동안 장을 볼 수도 있어 많은 학부모들이 이곳을 좋아한다”고 했다. 개관식에 참석한 뒤 도서관 구석구석을 둘러본 김수연 대표는 “아이든 성인이든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행복이 책”이라며 “친환경적이고 좋은 원목을 엄선해 더 친근한 독서 공간을 하나라도 더 짓는 게 소명”이라고 밝혔다.성남=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손수 무언가를 만드는 뿌듯함을 어디 비할까. 제품을 직접 만들어 쓰며 생산자로 변하는 소비자들이 점차 늘고 있다. 하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손수 하기에는 힘든 일이 많다. 어느 정도 손질된 재료나 ‘반(半)제품’을 활용해 수고는 최소화하고 만드는 기쁨은 최대한 누리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 ‘중간부터’ 만드는 셈이다.》 2년 전부터 취미로 전통 목공을 배우는 김상진 씨(58)는 식탁, 사방탁자(사방이 트이고 여러 층으로 된 전통 탁자), 의자, 휴대전화 거치대, 좌탁(坐卓) 등 웬만한 목조 가구를 만들었다. 초심자 시절부터 지금까지 난관은 단연 나무를 정확히 재단하는 것. 마름질이 잘못되면 ‘짜맞춤’(못을 쓰지 않고 목재를 연결)을 하는 건 바라기 어렵다. 그래서 재료는 마름질한 채로 공방 ‘난가소목’(경기 과천시)에서 받는다고 한다. 난가소목의 정종상 소목장(51)은 “개인이 기계톱을 갖고 있기는 어려우니,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기까지는 다듬은 재료를 활용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했다. 요즘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클릭 몇 번 하면 원하는 치수에 맞춰 재단한 목재를 배달해주기도 한다. 역시 목재로 쓰레기통, 수납장 등을 만들어 쓰는 송인석 씨(40)는 “원목부터 손질하면 가장 좋겠지만 다듬어진 목재로 만들어도 내 손으로 가구를 만들었다는 기쁨은 별 차이가 없다”고 했다. 다듬어진 재료나 반제품 시장은 자수, 액세서리, 인테리어 소품, 옷, 데스크톱 컴퓨터 등 생활용품 전반에서 형성돼 있다. 만드는 ‘손맛’을 알게 되면 기성품의 품질을 뛰어넘는 심오한 세계에 들어서기도 한다. 약 10년 전부터 취미로 천체망원경을 만들고 있는 한승환 씨(44)가 그런 경우다. 한 씨는 해외에서 렌즈용 특수 유리를 구입해 반사망원경의 핵심 부품인 반사경을 20nm(나노미터) 단위의 정밀도를 얻을 때까지 손수 오목하게 깎는다. 최대 직경 355mm(약 14인치)의 반사경을 만들고 경통 등 다른 부속을 결합하는데, 초점 조절 장비는 기성품을 쓰고, 망원경 앞뒤를 막는 금속 부품은 온라인으로 도면을 보내면 배달해준다. 이렇게 만든 망원경은 보급형보다 정밀도가 높고, 행성 사진을 고배율로 촬영할 수 있다. 한 씨는 “상상하던 망원경을 정성 들여 현실로 만들면 희열과 성취감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이마저도 귀찮은 소비자를 위해 80∼90% 완성된 제품에 약간의 수고만 더하면 되는 제품 시장도 활짝 열리고 있다. ‘만드는’ 느낌만 주는 것이다. 워킹맘 이연서 씨(36)의 집에는 요즘 아침마다 갓 구운 빵의 향기가 피어오른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구매한 냉동생지(빵 반죽)를 에어프라이어로 굽는 냄새다. 빵 만들기를 좋아해 베이킹을 배우기도 했지만 시간을 내기 어렵던 차에 아쉬운 대로 ‘굽는다는 느낌’이라도 즐긴다는 것이다. 이 씨는 “잠잘 시간도 부족한데 어느 세월에 반죽을 하고 있겠나”라며 “특히 갓 구운 향과 바삭한 느낌이 중요한 크루아상의 만족도가 높다. 때로 반을 잘라 햄, 치즈를 넣어 샌드위치를 만들면 느낌만은 마치 처음부터 손수 빵을 만든 듯하다”고 했다. 냉동생지 소비가 늘자 대형마트의 상품 출시도 잇따르고 있다. 롯데마트에 따르면 집에서 간편히 조리해 먹을 수 있는 가정간편식(HMR)의 매출이 올해 11월 20일까지 전년 동기보다 7.4% 늘었다. 호떡 등을 만드는 믹스 제품도 마찬가지다. 반제품 시장은 꾸준히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배경에는 취미와 여가로 ‘DIY’를 즐기는 층의 확대와 불경기 속 ‘가성비’ 소비문화가 맞물려 있다. 한국소비자원장을 지낸 이승신 건국대 글로벌비즈니스학과 교수는 “다듬은 재료나 반제품을 공급하는 틈새시장에서 다양한 창조적 스타트업 기업이 등장할 수 있을 것”이라며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자인 이들을 위한 시장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조종엽 jjj@donga.com·김기윤 기자}
손수 무언가를 만드는 뿌듯함을 어디 비할까. 제품을 직접 만들어 쓰며 생산자로 변하는 소비자들이 점차 늘고 있다. 하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손수 하기에는 힘든 일이 많다. 어느 정도 손질된 재료나 ‘반(半)제품’을 활용해 수고는 최소화하고 만드는 기쁨은 최대한 누리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 ‘중간부터’ 만드는 셈이다. 2년 전부터 취미로 전통 목공을 배우는 김상진 씨(58)는 식탁, 사방탁자(사방이 트이고 여러 층으로 된 전통 탁자), 의자, 휴대전화 거치대, 좌탁(坐卓) 등 웬만한 목조 가구를 만들었다. 초심자 시절부터 지금까지 난관은 단연 나무를 정확히 재단하는 것. 마름질이 잘못되면 ‘짜맞춤’(못을 쓰지 않고 목재를 연결)을 하는 건 바라기 어렵다. 그래서 재료는 마름질한 채로 공방 ‘난가소목’(경기 과천시)에서 받는다고 한다. 난가소목의 정종상 소목장(51)은 “개인이 기계톱을 갖고 있기는 어려우니,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기까지는 다듬은 재료를 활용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했다. 요즘에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클릭 몇 번 하면 원하는 치수에 맞춰 재단한 목재를 배달해주기도 한다. 역시 목재로 쓰레기통, 수납장 등을 만들어 쓰는 송인석 씨(40)는 “원목부터 손질하면 가장 좋겠지만 다듬어진 목재로 만들어도 내 손으로 가구를 만들었다는 기쁨은 별 차이가 없다”고 했다. 다듬어진 재료나 반(半)제품 시장은 자수, 액세서리, 인테리어 소품, 옷, 데스크톱 컴퓨터 등 생활용품 전반에서 형성돼 있다. 만드는 ‘손맛’을 알게 되면 기성품의 품질을 뛰어넘는 심오한 세계에 들어서기도 한다. 약 10년 전부터 취미로 천체망원경을 만드는 한승환 씨(44)가 그런 경우다. 한 씨는 해외에서 렌즈용 특수 유리를 구입해 반사망원경의 핵심 부품인 반사경을 20nm(나노미터) 단위의 정밀도를 얻을 때까지 손수 오목하게 깎는다. 최대 직경 355mm(약 14인치)의 반사경을 만들고 경통 등 다른 부속을 결합하는데, 초점 조절 장비는 기성품을 쓰고, 망원경 앞뒤를 막는 금속 부품은 온라인으로 도면을 보내면 배달해준다. 이렇게 만든 망원경은 보급형보다 정밀도가 높고, 행성 사진을 고배율로 촬영할 수 있다. 한 씨는 “상상하던 망원경을 정성 들여 현실로 만들면 희열과 성취감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이마저도 귀찮은 소비자를 위해서 80~90% 완성된 제품에 약간의 수고만 더하면 되는 제품 시장도 활짝 열리고 있다. ‘만드는’ 느낌만 주는 것이다. 워킹맘 이연서 씨(36)의 집에는 요즘 아침마다 갓 구운 빵의 향기가 피어오른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구매한 냉동생지를 에어 프라이어로 굽는 냄새다. 빵 만들기를 좋아해 베이킹을 배우기도 했지만 시간을 내기 어렵던 차에 아쉬운 대로 ‘굽는다는 느낌’이라도 즐긴다는 것이다. 이 씨는 “잠 잘 시간도 부족한데 어느 세월에 반죽을 하고 있겠나”라며 “특히 갓 구운 향과 바삭한 느낌이 중요한 크로아상의 만족도가 높다. 때로 반을 잘라 햄, 치즈를 넣어 샌드위치를 만들면 느낌만은 마치 처음부터 손수 빵을 만든 듯 하다”고 했다. 냉동생지 소비가 늘자 대형마트의 상품 출시도 잇따르고 있다. 롯데마트에 따르면 집에서 간편히 조리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대체식품(HMR)의 매출이 올해 11월 20일까지 전년 동기 대비 7.4% 늘었다. 호떡 등을 만드는 믹스 제품도 마찬가지다. 반제품 시장은 꾸준히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배경에는 취미와 여가로 ‘DIY’를 즐기는 층의 확대와 불경기 속 ‘가성비’ 소비문화가 맞물려 있다. 한국소비자원장을 지낸 이승신 건국대 글로벌비즈니스학과 교수는 “다듬은 재료나 반제품을 공급하는 틈새시장에서 다양한 창조적 스타트업 기업이 등장할 수 있을 것”이라며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자인 이들을 위한 시장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김기윤 기자 pep@donga.com}
#1. 한 여성이 천식이 심한 7세 딸을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 딸은 반려동물의 털, 바퀴벌레, 독한 세제 등 천식을 유발하는 어떤 외부 요인에도 노출되지 않았다. 약물치료를 병행했지만 병세는 차도가 없었다. 뚜렷한 원인을 찾지 못하던 의사는 어느 날 소녀의 어머니로부터 뜻밖의 얘기를 듣는다. “애 아빠가 주먹으로 벽을 칠 때마다 천식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아요.” #2. 주말마다 등산, 자전거를 즐길 정도로 건강했던 43세 남성. 자다가 갑작스레 몸이 마비돼 응급실에 실려 간 그는 뇌졸중 진단을 받는다. 평소 검진에서 ‘비흡연자, 뇌졸중 위험요인 없음’ 같은 정상 결과를 받아왔던 그는, 치료 과정에서 가족조차 모르던 유년기 트라우마를 털어놓는다. 어린 시절 겪은 마음의 상처가 평생 몸에도 새겨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유년기 스트레스는 신경계, 면역계, 호르몬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올해 초 미국 캘리포니아주 공중보건국장으로 부임해 주민의 스트레스 치유·예방 정책에 힘을 쏟고 있는 저자는 수많은 환자의 차트 뒤에 감춰진 유년기 트라우마에 주목했다. 특히 소아과 의사, 공중보건의로 일할 당시 만난 수많은 환자의 데이터와 사례를 차근히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내며 유년기 스트레스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의사생활 내내 그는 트라우마와 질병 사이에 어떤 보이지 않는 끈이 있음을 확신했으나 마땅한 근거를 찾진 못했다. 그러다가 1998년 발견한 ‘ACE 연구(the Adverse Childhood Experiences study)’ 논문은 그에게 커다란 실마리를 제공했다. 1만7000여 명의 임상 데이터에는 아동기 경험을 묻는 10가지 항목(학대, 방임, 가정 내 약물 남용, 정신질환, 어머니의 폭력 피해, 부모의 이혼 또는 별거, 가정 내 범죄 등)을 분석한 환자의 ‘ACE지수’ 통계가 담겨 있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ACE지수가 4점 이상이면 0점인 사람에 비해 심장병과 암에 걸릴 가능성이 2배 높다. 만성폐쇄성 폐질환은 3.5배나 많았다. 뇌졸중 발병 가능성은 2.4배 높은 것으로 조사됐으며, 기대수명이 20년가량 짧을 수 있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저자는 “일반적 건강검진 절차에 ‘ACE지수 검사’가 포함됐더라면 더 많은 환자의 질병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앞선 연구에서 강력한 실마리를 얻은 그의 여정은 결국 ‘예방’으로 향한다. 그는 후반부에 ‘ACE 검사’가 일상적으로 시행되는 2040년 미래상을 묘사했다. 학교, 병원, 가정 등에서 ACE 검사는 일종의 예방접종처럼 자리 잡아 주민의 정신·신체 면역 증진에 큰 기반이 된다. 물론 여전히 의학계에서 그의 논리는 ‘100% 옳다’고 받아들여지진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도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대목이 없다고 말하긴 힘들다. 하지만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강조했다. “프레임을 바꾸고 렌즈를 바꾸면 어느 순간 갑자기 감춰졌던 세계가 드러나 보이고, 그때부터는 모든 게 달라진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19일 ‘국민이 묻는다-2019 국민과의 대화’에서 첫 질문자로 나선 고(故) 김민식 군의 부모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민식이법’ 통과를 눈물로 호소했다. 김 군은 9월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다 차에 치여 숨졌다. 김 군의 어머니 박초희 씨는 이날 영정사진을 들고 “스쿨존에선 아이가 차량에 치여 사망하는 일이 없어야 하고 놀이공원 주차장에서도 차량이 미끄러져 사망하는 아이가 없어야 한다”며 “희생된 아이들 이름으로 법안을 만들었지만, 단 하나의 법도 통과 못 하고 국회 계류 중이다. 어린이가 안전한 나라가 이뤄지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어머니가 보는 가운데 사고가 나서 더욱 가슴이 무너졌을 것 같다. 국회와 협력해서 법안이 빠르게 통과되도록 하고, 스쿨존에서 아이들의 안전이 더 보호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했다. 앞서 김 군의 부모는 18일 방송된 채널A 프로그램 ‘아이콘택트’에서 아픈 심경을 전하며 시청자들을 울렸다. 눈맞춤을 통해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아이콘택트’에서 박 씨는 “세상을 떠난 아들을 더 좋은 곳으로 보내주기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민식이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런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며 눈물을 흘렸다. ‘민식이법’은 스쿨존 내 무인 과속 단속 장비와 횡단보도 신호기의 설치를 의무화하고 구역 내 교통사고 사망 발생 시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19일 오후 문재인 대통령의 대국민 소통을 위해 마련된 ‘2019 국민과의 대화’가 미숙한 진행과 기획으로 인해 도마에 올랐다. 방송이 끝난 뒤 행사를 주관했던 MBC 제작진에 대한 성토가 이어지며 행사 취지를 살리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산만한 진행이 가장 큰 문제로 꼽혔다. MBC 시청자 게시판 등 온라인에선 이를 비판하는 글이 속출했다. 한 시청자는 “사전에 질문 순서를 정하지 않고 완전히 자유롭게 진행한 취지는 좋지만, 진행이 너무 산만하고 효율성이 떨어졌다”며 “대통령에게 고지하지 않더라도 주제의 연속성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사회자들이 방송 중간 패널의 질문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거나 진행을 바로잡아야 하는데 오히려 함께 대화에 휩쓸려 소중한 시간을 허무하게 날렸다”는 비판도 나왔다. 다른 시청자는 “생방송이라지만 준비를 하나도 안 한 것 같다. 개개인의 한탄, 하소연 들어주다 시간만 허비했다”며 “이 정도면 방송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시말서를 써야 한다”고 평가했다. 또 다른 시청자는 “아나운서들이 마이크를 건네주기 위해 들러리로 참여한 느낌”이라고 했다.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든 채 박수를 쳐 ‘둥둥둥’ 소리가 울렸다는 지적도 나왔다. 특히 질문시간은 한정돼 있는데 300명이나 참석하다 보니 서로 질문을 하기 위해 손을 들고 소리치는 바람에 분위기가 흐려지고, 질문하지 못한 참석자들의 항의가 이어지기도 했다. 진행자인 배철수 씨도 방송 막바지에 “이런 진행 처음인데 3년은 늙은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행사의 취지에 대해서는 긍정적 평가도 있었다. 한 시청자는 “대통령에게 사전 고지된 질문 내용, 순서 없이 완전히 자유로운 방식으로 터놓고 국민의 의견을 듣는 취지는 혁신적”이라고 평가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제이 개츠비 씨가 보낸 파티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드레스 코드는 정장입니다.” 이것은 연극인가, 파티인가. 공연장에 들어선 순간, 관객들은 개츠비가 주최한 미국 대저택 무도회 속 귀빈이 된다. 오직 초청받은 이에게만 허락된다는 초호화 파티. 관객들은 재즈 선율에 맞춰 소설 ‘위대한 개츠비’ 등장인물과 춤을 춘다. 배우와 4층짜리 극장 건물을 같이 돌아다니고 대화도 나눈다. 이쯤 되면 공연이라기보단 한바탕 축제에 가깝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에선 금주법을 시행하지만, 비밀(?)스럽게 가벼운 술도 허락된다. 전통적 관극(觀劇)에 반기를 든 연극 ‘위대한 개츠비’가 다음 달 21일 서울을 찾는다. 영어 제목이 원작의 ‘The Great Gatsby’가 아니라 ‘Immersive Gatsby’인 대목은 이 연극의 지향점을 분명히 한다. 14일 서울 중구 그레뱅뮤지엄에서 만난 알렉산더 라이트 총연출(45)은 “개츠비 파티에 초대받았는데 가만히 앉아만 있을 건가요?”라며 웃음 지었다. ‘위대한…’은 영국 역사상 ‘관객참여형(이머시브) 연극’ 가운데 가장 롱런하는 작품이다. 2015년 요크시에서 흥행에 성공한 뒤 현재 런던에서도 인기가 멈추지 않는다. 아일랜드와 벨기에, 호주 등에서 공연했으며, 한국 라이선스 공연은 아시아 국가 가운데 처음이다. 이 작품은 라이트가 고향 친구들과 어울리다 우연히 탄생했다. 영문학을 전공한 뒤 연출과 PD, 극작가, 작곡가로 활동하던 그는 어느 날 술을 마시다 “지금 있는 3층짜리 펍이 곧 폐업할 것”이란 얘길 들었다. 어차피 문 닫을 곳이라면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에 평소 도전하기 힘든 실험극을 떠올렸다. 술과 흥겨움이 넘치는 펍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극의 메인 테마는 고전 ‘위대한 개츠비’를 택했다. “곧 망할 가게라 건물을 공짜로 쓸 수 있었던 덕분이죠, 하하. 작업에 착수한 뒤 우리가 내린 결론은 객석에 가만히 앉아 박수만 치는 전통적인 공연 관람은 ‘진짜’ 소통하는 방식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친구와 대화할 때 가만히 듣고만 있나요?” ‘위대한…’은 태생부터 정식 공연장에서 출발한 게 아닌 만큼, 한국에서도 4층짜리 박물관인 그레뱅뮤지엄을 택했다. 배우나 관객의 동선이 복잡해 공연장 특성에 따라 극을 전개하는 건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공연장을 옮길 때마다 극은 완전히 새로운 작품이 됩니다. 서울 공연장은 4층 구조에 다양한 공간이 있어 활용도가 높아요. 통로는 원형 구조라 관객이 돌아다녀도 결국 한곳에 쉽게 모이는 특성이 있죠. 파티에 ‘딱’입니다.” 공간 구상과 활용에 도가 튼 라이트에게 진짜 난관은 따로 있었다. 한국어였다. 영어권 국가에선 소설 원작의 영어 대사를 그대로 살렸다. 그런데 한국에서 쓰는 번역 대사는 반말과 존댓말이 존재해 뉘앙스 차이가 상당했다. 그는 “개츠비가 관객에게 존댓말로 할지, 반말로 할지 지금도 고민하고 있다”며 웃었다. 라이트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한국 공연도 관객에게 ‘정장 드레스 코드’를 권할 방침이다. 다른 나라 공연도 일부 관광객을 제외하면 90% 이상이 구두와 정장을 제대로 갖춰 입고 온단다. 그는 “관객과 배우 모두가 같은 시공간 속으로 떠나는 경험을 선사하고 싶다”며 “집에서 옷을 갖춰 입고 나온 순간부터 관객은 이미 극의 일부가 되는 여정을 시작한 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말끝을 흐리던 라이트는, 결국 한마디 덧붙였다. “위대한 개츠비는 전통적 공연장의 권위적인 행동수칙이나 격식을 극복하려는 작품이죠. 그런데 정작 제 공연에서 드레스 코드를 요구할 줄은 몰랐네요, 하하.” 12월 21일부터 내년 2월 28일까지 서울 중구 그레뱅뮤지엄. 전석 7만7000원. 17세 이상.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거대한 나무 벽을 설치한 텅 빈 무대.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이 한 차례 들리면 모든 시공간이 뒤엉킨다. 배우들은 절규하듯 소설 속 문장을 외치거나, 최루가스 같은 밀가루를 던지고 스스로 뒤집어쓴다. 형언하기 어려운 동작을 반복하다 이윽고 벽에 부딪힐 때까지 내달리는 자기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온몸으로 바닥을 쓸어내듯 무대를 나뒹구는 배우들 뒤로 뚝, 뚝 끊어지는 피아노 건반 소리만 울려 퍼진다. 연극 ‘휴먼 푸가’는 배우의 신체 언어와 오브제로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 속 문장을 되살려낸 작품이다. 한 작가의 작품을 무대화한 건 이번이 국내 최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숨을 거둔 15세 소년 ‘동호’와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했다. 제목의 ‘푸가(fuga)’는 멜로디가 반복, 교차하며 규율적으로 모방 변주되는 작곡법. 수많은 삶 안에서 지금도 5·18의 고통이 반복, 변주되고 있다는 뜻을 지녔다. 작품은 관객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다. 난해함에 당혹감마저 들 수 있다. 하나의 일정한 서사 대신 예기치 못한 사건이 하나 던져지면 그 위엔 몸부림과 오브제만 남는다. 원작 텍스트가 있다 해도 배우들이 선보이는 35개의 움직임, 라이브 푸가 연주, 증언 같은 대사들을 열심히 쫓는 게 쉽지 않다. 알 수 없는 불편함이 객석까지 전이된다면 “고통의 소리를 마주해야 한다”는 원작자와 연출의 의도가 꽤나 맞아떨어진 셈이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한다”는 작품의 태생적 어려움이 불편하더라도 작품은 마주할 가치가 있다. 어떠한 고통이 실재했고, 지금도 이어진다는 걸 감각적으로 일깨우기 때문이다. 물론 이 미제(謎題)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공은 객석으로 넘어온다. “당신은, 나와 같은 인간인 당신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17일까지 서울 중구 남산예술센터. 전석 3만 원. 14세 관람가. ★★★★(★ 5개 만점)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넌 헤르만(남편)을 많이 닮았어. 너도 불행해질 거야.” 한 여인이 처음 본 소년에게 저주 섞인 말을 내뱉는다. 작품 내내 한 무대에 있지만, 마주 보지 못했던 여인과 소년은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서로의 눈을 바라본다. ‘이미 너를 잘 알고 있다’는 듯 덤덤한 말투지만 팽팽하던 긴장감이 이 순간 폭발한다. 연극 ‘맨 끝줄 소년’에서 이를 연기한 두 배우는 ‘연극계 찰떡 남매’ 우미화(45)와 전박찬(37)이다. 최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이들은 “이 짧고 강렬한 장면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했다. 작품은 현실과 허구가 혼재된 글을 쓰는 소년 ‘클라우디오’(전박찬, 안창현)와 소년의 작문 실력에 빠져 점점 위험한 글쓰기를 주문하는 교사 ‘헤르만’(박윤희), 그리고 이들을 위태롭게 바라보는 아내 ‘후아나’(우미화)의 이야기다. 극적 사건은 없어도 대사와 연극적 상상력으로 묘한 스릴러를 구현해냈다. 유명 극작가 후안 마요르가의 희곡으로, 손원정 연출가가 2년 만에 무대에 다시 올렸다. 우미화가 “작품은 우리 삶 속 허구와 실재의 경계를 묻는다”고 하자 전박찬은 “그 물음 끝에서 끔찍함을 느꼈다”고 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2008년 시작됐다. 사흘짜리 워크숍 공연에서 연인 역으로 처음 만났다. 우미화는 “아기 같았던 전박찬 씨가 어느덧 믿고 기댈 정도로 내공이 단단한 동료가 됐다. 조금 더 기름진 배우가 된 것 같다”며 웃었다. 전박찬은 “처음에는 대학로에서 유명한 선배와 호흡을 맞추는 게 너무 떨렸다. 요즘에는 연습이 끝나면 술이 고플 때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술자리로 데려가는 좋은 선배”라고 맞장구쳤다. 이후에도 둘은 연극 ‘말들의 무덤’ ‘아유 오케이’ ‘썬샤인의 전사들’ ‘낫심’에서 동고동락했다. 이들은 ‘연극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야 한다’는 철학을 공유해 왔다. 오래도록 같은 작품에서 땀을 흘릴 수 있었던 이유다. 우미화는 “근현대사의 아픔으로부터 연극인도 자유로울 수 없으니 늘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답했다. tvN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에 출연해 존재감을 드러낸 전박찬은 “사회적 참사를 담은 이야기여서 배우로서 좋은 기회였다”고 답했다. “작품이 매번 새롭다”며 토론을 이어가던 두 사람은 인터뷰 후 “산책을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옮겼다. ‘연극의 맨 끝줄’까지 도달하고자 하는 이들 덕택에 오늘도 객석에서는 ‘명품 연기’라는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12월 1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2만∼5만 원. 14세 이상 관람가.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뮤지컬 프로듀서, 다시 태어나면 절대 못 할 일이죠.” 남들은 “이젠 좀 쉬엄쉬엄 하라”지만 그의 채찍질은 정상에서도 멈출 줄을 모른다. 엄홍현 EMK뮤지컬컴퍼니 대표 겸 총괄프로듀서(43)는 올해 상반기 대형 창작뮤지컬 ‘엑스칼리버’를 올렸고, 현재 ‘마리 앙투아네트’를 공연하고 있다. 16일 개막하는 ‘레베카’와 내년 초 ‘웃는 남자’까지 대작 공연을 줄줄이 앞두고 있다. 서울 종로구 EMK사옥에서 최근 만난 그의 입에서는 정작 푸념이 먼저 튀어나왔다. 그는 “‘죄송하다’며 사과할 일이 더 많고 작품에 대한 책임과 욕까지 다 프로듀서의 몫”이라고 손사래 치면서도 “얼마 전 김준수 씨 팬 3명이 공연장 밖에서 제게 ‘고맙다’고 할 때는 좀 짜릿했다”며 웃었다. 2010년 EMK를 설립한 엄 대표는 영미 뮤지컬이 주를 이루던 국내에 유럽 뮤지컬을 들여왔다. 대본과 음악을 구입해 재창작하는 ‘스몰 라이선스’ 형태로 무대에 올려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엘리자벳’ ‘모차르트!’ ‘몬테크리스토’ ‘황태자 루돌프’가 대표적이다. 거의 매해 대형 창작뮤지컬을 선보이며 연 400∼500억 원대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나름 고집이 생기더라. 그런데 모든 게 빨리 변하는 문화계에서는 잘되는 공식만 고집하는 순간 곧 죽는 길임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공연을 앞두고 마음에 드는 장면이 나올 때까지, 음악이 귀에 꽂힐 때까지 작업한다. 사람들은 그를 ‘완벽주의자’라고 하지만 엄 대표는 스스로를 ‘구멍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빈틈이 정말 많아요. 공연을 앞두고 작품에 성에 차지 않는 부분이 많이 보이면 예민해져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데, 공연 후 이를 챙기는 것도 프로듀서의 일이더라고요.” 그의 또 다른 별명은 ‘미다스의 손’. 뮤지컬 배우 발굴에 일가견이 있다. 김준수, 박효신을 주연으로 기용해 스타로 키웠고, 최근에는 세븐틴의 도겸, 뉴이스트의 황민현을 무대에 올렸다. “무대 위 그림을 상상했을 때 잡지책 넘기듯 술술 대본이 넘어가는 캐릭터가 있어요. 제 자랑 같지만 딱 촉이 와요. 물론 그 촉이 틀린 적도 있지만 외모, 연기, 가창력 등 뮤지컬 배우의 가능성을 보는 눈이 제게 있다고 믿습니다.” 뮤지컬 때문에 힘든 적이 정말 많다지만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뮤지컬에 대한 애정이 더 커 보였다. 특히 관객의 박수에서 그 사랑을 느낀다고 했다. “무대 위 배우에게로 향하는 관객의 박수 깊숙한 곳에는 제 지분도 조금은 있지 않을까요?”(웃음)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민족공동체가 이 유전병 환자에게 일생 동안 써야 하는 돈이 6만 마르크다. 국민 동지여. 이 돈은 그대의 돈이기도 하다.” 과거 독일 나치는 장애인이 국가의 경제 부담을 가중시킨다고 여겼다. 선천성 질환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국가가 세금으로 지출하는 비용이 건강한 일가족의 하루 생활비라고 구구절절 설명하는 선전물까지 배포했다. 지금 보면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얘기라 생각하겠지만, 불과 약 90년 전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발상이다. 그리고 이 같은 차별논리는 지금도 우리 사회 속에 교묘히 파고들어 있다. 장애인 운동에 앞장서 온 김도현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가 인간 사회 내 뿌리박힌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편협한 사고를 지적했다. 저자는 복지재단 비리에 반발해 청각장애인들이 직접 농성을 벌인 1996년 ‘에바다복지회’ 사태 때부터 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장애학 함께 읽기’ 등 전작에 이어 비(非)장애인 중심 사회의 단면을 조목조목 짚는다. 특히 본인이 직접 현장에서 겪은 경험과 느낀 바를 얘기하듯 풀어내며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고 일갈한다. 책은 ‘장애학(學)’의 연원을 짚는 학술서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 장애를 인식하는 철학적 관점과 장애학의 흐름에 대해서도 깊게 조명했다. ‘격리’ ‘구분’ 등을 내포한 우생학은 앞선 나치 사례처럼 차별의 근거가 됐다. 국가가 주도한 ‘장애인 안락사 프로그램’ ‘유전적 결함을 지닌 자손의 예방에 관한 법률’ 같은 정책은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신자유주의와 공모하는 우생주의”와 맞물려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저자는 “한 인간을 ‘장애인’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환원하는 것은 곧 장애인차별주의”라고 비판했다. 또한 저자는 ‘모든 사람은 예비 장애인’이라는 식의 논리도 오히려 장애 차별의 본질을 흐린다고 봤다. 본질은 차별받는 대상이 아니라 이를 차별하는 사회의 문제라는 것. 나아가 “장애인은 자립적 존재라고 맞서는 대신, 자립과 의존이란 이분법 자체를 깨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대학로식 코미디가 오페라와 버무려졌다. 농도 짙은 대사, 슬랩스틱 코미디에 오페라 곡이 곁들여진 전개에 객석에서는 웃음이 빵빵 터진다. 연극 ‘테너를 빌려줘’는 소극장에서 오페라 곡이 울려 퍼지는 독특한 코미디다. 뮤지컬 거장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1986년 영국 초연 당시 프로듀싱한 음악을 활용했으며, 25개국에서 공연한 히트작이다. 국내에서도 여러 극단이 각색해 꾸준히 무대에 올렸다. 이탈리아 출신의 유명 테너 ‘티토’의 미국 공연 당일. 오페라 단장과 그의 조수 ‘맥스’는 공연을 앞두고 술과 약에 취해 잠든 티토를 보고 죽은 것으로 오해한다. 이들은 공연을 취소하는 대신 맥스를 티토의 배역 ‘오셀로’로 분장시켜 무대에 세운다. 어이없게도 오페라는 대성공으로 마무리되고 뒤늦게 깨어난 티토와 대타 오페라 배우를 둘러싸고 소동이 벌어진다. 박준규, 성병숙, 정수한 등은 능청스럽게 배역을 소화한다. 극의 매력은 속도감이다. 예상 가능한 전개에 억지웃음을 끌어내는 과장된 연기도 있지만 빠른 장면 전환으로 이를 만회한다. 무대 위 문, 벽으로 구분된 연극적 공간을 자연스레 오가는 배우들의 연기에 객석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온다. 호흡이 빠른 대사는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12월 29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자유극장. 전석 5만5000원. 14세 이상 관람가. ★★★(★ 5개 만점)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무대 연기자들의 전성시대다. 극장 무대를 벗어나 영화, 드라마로 옮긴 연극·뮤지컬 배우들이 주인공을 꿰차 성공하는가 하면 ‘신 스틸러’로 거듭나고 있다. 최근 몇 년 새 드라마 PD 및 작가, 영화감독 및 캐스팅디렉터들이 ‘숨은 보석’을 찾기 위해 연신 서울 대학로 연극무대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tvN ‘응답하라’ 시리즈와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연출한 신원호 PD는 내년 상반기 신작 ‘슬기로운 의사생활’ 여주인공으로 연극배우 전미도를 전격 캐스팅했다. 전미도의 상대 배우는 조정석과 유연석이다. 전미도는 시청자들에게는 다소 낯선 배우다. 주로 연극과 뮤지컬 무대에 섰던 그는 공연계에서는 “압도적일 정도로 탄탄한 연기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뮤지컬 ‘닥터지바고’ ‘스위니토드’ ‘맨 오브 라만차’ ‘베르테르’에서 전미도와 상대역으로 호흡을 맞췄던 조승우가 “전미도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배우이자 가장 닮고 싶은 배우”로 꼽았을 정도다. 신원호 PD는 전작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도 주인공 제혁 역에 연극배우 박해수를 기용했었다. 신 PD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시청률과 화제성을 감안한다면 스타 배우를 쓰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지만, 기존 작품들을 보면 새로운 인물이 주는 영향이 결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신 PD는 박해수가 주인공을 맡은 연극 ‘남자충동’을 관람하고 그 자리에서 박해수를 드라마 주인공 제혁 역으로 캐스팅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의 옛 직장 상사 ‘김 팀장’ 역을 맡은 배우 박성연, 직장 동료 혜수 역의 이봉련 역시 연극배우 출신이다. ‘82년생 김지영’의 김도영 감독은 이들을 캐스팅한 이유로 ‘현실감’을 꼽았다. 김 감독은 “연기력은 출중하지만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두 배우의 출연으로 관객들에게 ‘우리의 이야기’로 더 다가갈 수 있게 현실감을 높여줬다”고 평했다. 최근 종영한 tvN 드라마 ‘호텔 델루나’에서도 무대 출신 배우들의 활약이 컸다. 마고신 역의 서이숙, 객실장 최서희 역의 배해선, 사신 역의 강홍석이 대표적이다. 강홍석은 오디션 없이 그가 출연한 뮤지컬을 본 연출가의 제안으로 출연하게 됐다. 강홍석의 소속사 씨제스 관계자는 “오충환 PD가 강홍석 씨가 출연한 뮤지컬 ‘데스노트’를 관람한 뒤 캐스팅 제안을 했다”고 전했다.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의문의 일승’ ‘녹두꽃’ 등을 연출한 신경수 PD 역시 연극배우를 자주 캐스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드라마 ‘쓰리데이즈’에서 배우 진선규를,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박해수, ‘의문의 일승’과 ‘녹두꽃’에서는 윤나무와 김정호를 각각 발탁했다. 신 PD는 ‘공연 덕후’라 불릴 정도로 많은 연극을 관람하고 다양한 배우를 선별해 자신의 작품에 세운다. 신 PD는 “새롭고 실력 있는 배우를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연극무대”라고 강조했다. 대학로 극단에서 연기를 시작해 영상매체에서 성공을 거둔 배우들은 과거에도 있었다. 황정민 김윤석(극단 학전), 송강호 이성민 문소리(극단 차이무), 유해진(극단 목화), 손현주(극단 미추)가 1세대라면, 주로 뮤지컬 무대에서 활동하다 영화배우로 변신한 조정석, 강하늘, 김무열이 이런 계보를 잇는 2세대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종합편성채널, 케이블 등 방송 채널이 늘면서 20, 30대 젊은 배우들은 물론이고 영화 ‘기생충’의 이정은, 드라마 ‘나의 아저씨’, ‘쌉니다 천리마마트’의 박호산 등 잔뼈 굵은 중견 배우들 역시 무대와 드라마 영화를 왕성하게 오가며 활약 중이다. 김정은 kimje@donga.com·김기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