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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량 깡패’의 재림(再臨). 188cm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극장을 뚫을 듯 뻗는 발성이 매력인 배우 최재림(34)이 뮤지컬 ‘아이다’로 돌아왔다. 그가 맡은 주역 ‘라다메스’는 아이다를 사랑하는 이집트 장군. 전투에 능하고 용맹하나 사랑 앞에선 누구보다 약한 인물이다. 최근 서울 서초구 한 연습실에서 만난 최재림은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퍼주는 ‘사랑 바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다른 게 안 보이는 점이 좀 닮았다”며 웃었다. ‘아이다’는 누비다 공주 아이다와 이집트 파라오 딸 암네리스, 그리고 두 여인의 사랑을 받는 장군 라다메스의 운명을 다뤘다. 엘턴 존이 넘버를 작곡해 팝 색채가 강하며 화려한 조명과 무대 장치를 곁들여 ‘눈 호강’ 뮤지컬로 유명하다. 2005년 국내 초연부터 2016년 네 번째 시즌까지 73만 관객을 끌어모았다. 실은 이런 사랑 연기는 최 배우에게 꽤나 낯설다. 2009년 뮤지컬 ‘렌트’로 데뷔한 11년 차 배우지만 첫 로맨스 도전이기 때문. “괴팍한 할머니 교장, 흑인 여장 남자처럼 이른바 센 역할이나 ‘상 남자’만 주로 맡았죠. 비교적 정상적(?)인 로맨스 연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어요. 그래도 ‘최재림은 평범한 역은 안 어울릴 것’이란 시선을 극복할 기회로 여깁니다.” 도전을 즐기는 성격 덕에 그는 마치 요즘 신인으로 돌아간 것처럼 연습실에서 설렘을 느낀다. “이전에는 무대에 올라 박수를 받을 때 짜릿했는데, ‘아이다’는 연습실에서부터 짜릿짜릿한 순간이 와요. 아직 설익은 상태지만 우연히 감정과 노래, 연기 모든 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딱 와요. 오늘도 한 번 있었어요. 이 맛에 합니다.” ‘아이다’와는 숨겨진 인연도 있다. 2010년 ‘아이다’ 공연 때 라다메스의 언더스터디(주연 대신 출연하는 배우)로 연습에 참여했다. 아쉽게 무대에 오를 기회는 없었지만, 늘 마음 한구석에 라다메스를 품고 지내왔다. “잊은 줄 알았는데 드문드문 10년 전 연습 장면이 기억나요. ‘내가 진짜 하고 싶었구나’ 새삼 느끼고 있죠. 연습을 하면 할수록 팝 감성이 짙은 넘버가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약 9년이 흘러 주연을 맡은 그는 “배우로서 더 성장한 지금 라다메스를 연기해 다행”이라고 했다. KBS 예능 ‘남자의 자격’에 출연하는 등 인지도는 올라갔지만, 줄곧 자신의 연기에 대한 불만이 컸다. 결국 다시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에 진학했다. “뮤지컬 배우에게 춤과 연기, 노래, 무대 동화능력 등의 능력치가 1부터 10점까지 있다면, 그때 저는 마이너스 5점 수준이었죠. 그래도 지금은 이전보다 경험과 배움이 쌓여 조금은 더 나은 배우가 됐다고 생각해요.” ‘아이다’는 제작사인 디즈니 시어트리컬 프로덕션이 올해를 끝으로 브로드웨이 레플리카 공연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본의 아니게 최 배우는 ‘문을 닫는’ 마무리투수가 됐다. “수많은 선배들이 선보인 아이다의 명성에 조금이라도 흠이 되지 않도록 잘 마무리하고 포장해야죠. 물론 관객이 나중엔 저만 기억할 겁니다. 하하.” 13일부터 2020년 2월 23일까지.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 6만∼14만 원. 8세 이상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방금 했던 대사, 주변에 보이는 물건을 아무거나 활용해서 진짜처럼 연기해 보실래요?” 면접관의 기습 질문에 지원자의 입에선 “네?”라는 당혹감이 먼저 튀어나온다. 하지만 이 상황마저도 능청스럽게 연기해야 하는 게 배우의 숙명. 뮤지컬 ‘렌트’의 ‘마크’ 역에 지원한 이들은 몇 초 만에 텅 빈 오디션장을 뉴욕 재개발 지역에 있는 한 낡은 다락방으로 뒤바꿔 놓는다. 방을 활보하며 둘러보던 배우들은 다시 ‘진짜’ 연기를 시작한다.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에서 열린 뮤지컬 ‘렌트’ 2차 공개오디션 현장. 배우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렌트’의 1막 첫 장면이 수십 번씩 재탄생하고 있었다. 한 지원자는 오디션장 창문 커튼을 들추며 대사 속 ‘로큰롤 포스터’가 있는 듯 손으로 가리켰다. “난방을 할 돈이 없어 곧 얼어 죽고 말 겁니다”라는 대사를 뱉으며 마임으로 가상의 벽난로를 표현해내는 이도 있었다. 반주자의 피아노 위에 놓인 작은 펜이나 악보 보면대도 즉석 연기소품이 됐다. 극 중 주역 ‘마크’ ‘로저’의 1막을 연기한 지원자들은 “잘 봤습니다”라는 심사위원들의 말과 함께 땀을 닦고 퇴장했다. 올해 ‘렌트’ 오디션에선 8개 주요 배역과 앙상블 총 23명을 선발하는데 1300여 명이 지원했다. 서류, 자유곡 심사를 통과한 지원자들은 2차 오디션에서 지원 배역에 따라 지정곡을 1∼4개 선보인다. 최종 3차까지 통과한 23명의 배우가 내년 6월 무대에 오른다. ‘렌트’ 오디션장에는 벽을 바라본 채 혼자 말하듯 노래하고, 목을 푸느라 고함을 치는 지원자가 유독 많다. 대사 없이 발라드, R&B, 록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로 구성된 ‘송 스루(Song-through)’ 뮤지컬이기 때문. 많은 가창으로 목도 쉽게 건조해지므로 물 한 통도 필수품이다. “○○○번 ‘마크’, 들어오세요”라는 말에 떨지 않는 강심장이 얼마나 될까. 오디션장 안에선 연출, 음악감독, 안무감독, 기록 스태프, 반주자 등 10명의 시선이 한 명의 지원자에게 꽂힌다. 2차 오디션 심사에 참여한 앤디 세뇨르 주니어 해외 협력연출(45)은 “당신이라는 인간을 보여 달라”는 가장 어려운 주문을 내놓았다. 작품 속 에이즈, 동성애, 죽음 등 무거운 주제를 얘기하려면 겉으로 보이는 연기 기술로는 한계가 있다는 취지다. ‘자신을 보여주기 위한’ 지원자들의 자기 고백이 줄을 이었다. “제 배역 ‘마크’는 잃는 게 많은 사람”이라는 나름의 배역 분석도 내놓고, “요즘에는 자기만 사랑하는 사람만 가득한 것 같다”며 사회 이슈를 두고 토론도 벌어졌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묻는 질문에 한 남성 지원자는 “군 생활”이라고 답해 심사위원들 사이에 웃음도 터졌다. “상대 배역과 같이 연기해 보라”는 기습 요구에 ‘마크’ ‘로저’ 역에 지원한 생면부지의 두 배우는 “어, 왔네”라는 즉흥 대사와 함께 하이파이브를 했다. “원래 친구냐”는 질문이 나올 정도로 자연스럽게 연기한 것. 한편 아쉬움이 남은 이들은 “다른 넘버도 해보겠다”며 1초라도 더 어필하려고 했으나 면접관은 “필요한 건 충분히 본 것 같다”며 돌려보냈다. 제작진은 “가능성이 보이는 배우에게 더 많은 걸 끌어내는 게 목적”이라고 했다. ‘렌트’의 무게감도 지원자들을 긴장케 한다. 1990년대 말 브로드웨이를 휩쓸고 토니상을 거머쥔 이 작품은 많은 배우가 “렌트 때문에 뮤지컬 배우가 되기로 했다”고 할 정도로 배우들의 로망으로 꼽힌다. ‘미미’ 역할에 지원한 한 배우는 “렌트는 설명이 필요 없다. 미칠 듯 무대에 서고 싶다”고 했다. “다른 곡도 해볼 수 있겠냐”는 면접관의 질문에 “준비가 안 됐다”며 고개를 푹 숙인 한 지원자는 “내로라하는 기성 배우들과 오디션에서 ‘렌트’ 넘버로 호흡을 맞춘 것만으로도 너무 소중하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9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른다. 남경주, 최정원, 조승우 등이 거쳐 갔다. 오디션 후 만난 앤디 세뇨르 주니어 연출은 “지원자가 어떤 인간인지 아는 게 핵심”이라며 “자신의 모습에 뭔가 더하려는 사람보다 덜어내려는 지원자에게 눈길이 갔다”고 했다. 그가 오디션 중 유독 “왜?” “어떤 상처를 받았나”라는 질문을 반복해 내면을 끌어내려 했던 이유다. 그는 1997년 ‘렌트’에서 ‘엔젤’ 역할로 데뷔한 뒤 2011년부터 연출로 나섰다. “렌트는 곧 저 자신”이라 할 만큼 애정이 깊다. 쿠바계 이민자 가정 출신이자, 동성애자로서 미국 사회 주변부가 안고 있는 아픔을 몸소 겪었다. 원작 연출 마이클 그리프로부터 연출 지도를 받은 그는 “미국 청년들의 불안감을 그렸지만 미국보다 요즘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표현력이 풍부한 한국 배우들이 잘 소화해낼 것”이라고 했다. 매일 렌트 공연의 조각을 맞춰 나가야 하는 그에게 일정이 고되지 않으냐고 묻자 웃으며 답했다. “삶에도 렌트에도 내일은 없어요, 오늘뿐입니다(No day, but today).”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내가 밥 먹고 공만 찼으면 저것보단 낫겠다.” “발만 대면 골인데 저걸 날려?” 월드컵 시즌이면 모두가 TV 앞에서 ‘입 축구’계 메시가 된다. 이 각도에서 접고 감아 찼어야 한다는 둥 패스가 아니라 슛을 쐈어야 한다는 둥 탄성이 빗발친다. 과거 한 선수가 질책에 못 이겨 “답답하면 너희들이 뛰든가”라는 말을 뱉어도 진짜 대신 필드로 나갈 순 없는 노릇. 그렇다면 우리가 잘하는 ‘입 축구’를 조금 더 고급지게 즐길 방법은 없을까. ‘조널 마킹(Zonal Marking)’은 이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다. 제목은 ‘지역 방어’라는 의미인 동시에, ESPN 등에서 활약하는 유명 칼럼니스트인 저자가 운영하는 축구전술 사이트 이름이다. 책은 30년간 변화한 유럽축구 전술의 흐름을 짚었다. 책은 선수의 순간적 선택이나 결과보다는 그 선택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전술적 움직임에 집중한다. 나아가 당대 축구판에서 ‘먹히는’ 전술 트렌드도 볼 수 있는 총체적 시야를 선사한다. 수백 개의 선수·감독·구단 이름이 등장해 입문서라기엔 다소 버겁다. 다만 생생한 필치와 실감 나는 장면 묘사 덕분에 마니아에겐 더할 나위 없이 빼어난 ‘텍스트로 된 유튜브’이자 축구 역사서라 할 만하다. 저자는 1992년부터 2020년까지 28년을 4년 단위로 쪼갰고, 분기별로 7개 국가에 타이틀을 부여했다.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독일, 잉글랜드 순이다. “최근 국제대회 성적과 자국 리그 경쟁력을 고려해 7개국이 유럽축구를 주도했다”는 기준을 밝혔다.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다. 네덜란드가 ‘토털 사커’를 바탕으로 1990년대 현대 유럽축구를 주도했고, 이탈리아는 수비 중심의 전술 논의를 심화시켰다. 프랑스는 특정 유형의 선수를 꾸준히 배출하며 유럽을 제패했고, 포르투갈은 까다로운 윙어들을 배출해 강국으로 도약했다. 이윽고 ‘티키타카’로 요약되는 스페인이 국제무대를 휩쓸었고, ‘게겐프레싱(전방압박)’과 재창조를 통해 거듭난 독일은 최강자가 됐다. 현 시기 타이틀을 거머쥔 잉글랜드는 타 국가의 다양한 전술을 수용하며 최고의 리그를 보유했다. 4년 단위 작위적 구분에 ‘그때 그 나라가 정말 최강자였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프랑스(2000∼2004년)의 경우 1998 월드컵, 유로 2000 타이틀을 거머쥐었지만 2002, 2004년엔 쓴맛을 봤다. 저자는 “이민자로 구성된 다양한 선수단 색채, 천재성을 가진 ‘10번’ 플레이어, 이를 떠받치는 수비형 미드필더”가 당대 유럽축구를 주도한 흐름이라고 봤다. 책은 각 장이 끝날 때마다 ‘전환기’라는 챕터를 넣어 한 국가의 주도권이 다른 국가로 넘어가는 장면을 설명했다. 어느 학문이든 업계든 시간이 지나면 강자를 꺾는 신흥 강호가 등장하는 법. 저자의 구분법처럼 축구판 주기가 4년 단위로 유독 짧은 건, 그만큼 선수나 감독의 치열한 고민이 필드 위에서 시시각각 반영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내가 밥 먹고 공만 찼으면 저것보단 낫겠다.” “발만 대면 골인데 저걸 날려?” 월드컵 시즌이면 모두가 TV 앞에서 ‘입 축구’계 메시가 된다. 이 각도에서 접고 감아 찼어야 한다는 둥 패스가 아니라 슛을 쐈어야 한다는 둥 탄성이 빗발친다. 과거 한 선수가 질책에 못 이겨 “답답하면 너희들이 뛰든가”라는 말을 뱉어도 진짜 대신 필드로 나갈 순 없는 노릇. 그렇다면 우리가 잘하는 ‘입 축구’를 조금 더 고급지게 즐길 방법은 없을까. ‘조널 마킹(Zonal Marking)’은 이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다. 제목은 ‘지역 방어’라는 의미인 동시에, ESPN 등에서 활약하는 유명 칼럼니스트인 저자가 운영하는 축구전술 사이트 이름이다. 책은 30년 간 변화한 유럽축구 전술의 흐름을 짚었다. 책은 선수의 순간적 선택이나 결과보다는 그 선택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전술적 움직임에 집중한다. 나아가 당대 축구판에서 ‘먹히는’ 전술 트렌드도 볼 수 있는 총체적 시야를 선사한다. 수백 개의 선수·감독·구단 이름이 등장해 입문서라기엔 다소 버겁다. 다만 생생한 필치와 실감나는 장면 묘사 덕분에 마니아에겐 더할 나위 없이 빼어난 ‘텍스트로 된 유튜브’이자 축구 역사서라 할 만하다. 저자는 1992년부터 2020년까지 28년을 4년 단위로 쪼갰고, 분기별로 7개 국가에 타이틀을 부여했다.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독일, 잉글랜드 순이다. “최근 국제대회 성적과 자국리그 경쟁력을 고려해 7개국이 유럽축구를 주도했다”는 기준을 밝혔다.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다. 네덜란드가 ‘토털 사커’를 바탕으로 90년대 현대 유럽축구를 주도했고, 이탈리아는 수비중심의 전술 논의를 심화시켰다. 프랑스는 특정 유형의 선수를 꾸준히 배출하며 유럽을 제패했고, 포르투갈은 까다로운 윙어들을 배출해 강국으로 도약했다. 이윽고 ‘티키타카’로 요약되는 스페인이 국제무대를 휩쓸었고, ‘게겐프레싱(전방압박)’과 재창조를 통해 거듭난 독일은 최강자가 됐다. 현 시기 타이틀을 거머쥔 잉글랜드는 타 국가의 다양한 전술을 수용하며 최고의 리그를 보유했다. 4년 단위 작위적 구분에 ‘그때 그 나라가 정말 최강자였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프랑스(2000~4년)의 경우 1998월드컵, 유로2000 타이틀을 거머쥐었지만 2002, 2004년엔 쓴 맛을 봤다. 저자는 “이민자로 구성된 다양한 선수단 색채, 천재성을 가진 ‘10번’ 플레이어, 이를 떠받치는 수비 형 미드필더”가 당대 유럽축구를 주도한 흐름이라고 봤다. 책은 각 장이 끝날 때마다 ‘전환기’라는 챕터를 넣어 한 국가의 주도권이 다른 국가로 넘어가는 장면을 설명했다. 어느 학문이든 업계든 시간이 지나면 강자를 꺾는 신흥 강호가 등장하는 법. 저자의 구분법처럼 축구판 주기가 4년 단위로 유독 짧은 건, 그만큼 선수나 감독의 치열한 고민이 필드 위에서 시시각각 반영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한국무용협회가 주최하는 서울무용제가 올해로 40주년을 맞았다. 현대무용, 한국무용, 발레가 어우러지는 행사로 132개 단체, 1100여 명의 무용수가 참가한다. 10월 12일부터 사전행사가 시작됐으며 11월 13일 본격적으로 개막해 11월 29일까지 이어진다. 서울 아르코예술극장, 이화여대 삼성홀, 상명아트센터 대신홀 등에서 다양한 무대가 펼쳐진다. 무용계 창작 산실로 기능해온 서울무용제는 무용계만의 잔치라는 지적도 받았다. 하지만 2017년부터 시민이 참여하는 ‘4마리 백조 페스티벌’ 등을 통해 대중과 함께하는 축제로 변신했다. 11월 13일 개막공연으로는 역대 서울무용제 최고상 수상자 김화숙 이정희 최은희 안신희가 ‘무.념.무.상.’ 파트1을 선보인다. 17일 ‘명작무극장’에서는 김백봉의 ‘부채춤’, 은방초의 ‘회상’, 조흥동의 ‘한량무’, 배정혜의 ‘풍류장고’, 국수호의 ‘장한가’ 등이 관객과 만난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아빠, 나도 죽는 거야? 나도 좀비가 된 거야?” 딸이 좀비가 됐다. 믿기 힘들지만 딸은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니다. 좀비의 급작스러운 출현으로 초토화될 뻔했던 대한민국은 사태를 빠르게 진정시키며 공식적으로 좀비가 없는 안전한 땅이 됐다. 돼지혈액으로 인한 감염, 임상실험 부작용 등 온갖 유언비어가 퍼졌지만, 확실한 건 이를 치료할 백신이 없다는 것. 그런데 알고 보니 마지막 좀비가 살아남아 있었다. 그 좀비는 누군가의 딸이기도 했다. 좀비는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으며 삶을 이어간다. 최근 연재 중인 네이버웹툰 ‘좀비딸’은 한 아버지가 좀비인 딸을 죽이려는 이웃으로부터 지킨다는 설정으로 부성애와 혐오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최근 좀비 소재의 웹툰이 독자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면서 ‘좀비 웹툰 전성시대’라는 말까지 낳았다. 좀비, 뱀파이어 등의 소재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놓여 있다는 매력적 특징 때문에 고전소설, 영화, 게임 등 콘텐츠 소재로도 활용됐다. 동시에 일부 마니아층만 찾는 컬트적인 소재라는 한계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 독자 접근성이 높은 웹툰 속으로 좀비가 파고들고 있다. 비교적 친숙한 그림체나 다양한 스토리텔링 방식을 택하며 사회의 부조리를 다각도로 보여준다는 분석이 나온다. 현재 네이버웹툰, 다음웹툰, 카카오페이지 등 대형 플랫폼을 비롯해 유료웹툰 플랫폼에서 연재 중인 좀비 소재 웹툰은 10여 편에 달한다. 최근 연재를 마치거나 별도 연재 중인 작품을 더하면 20편 이상이다. 작품 대다수가 조회수, 인기도 순위에서 좋은 성적을 냈고 영화, 드라마로 제작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연재 중인 좀비 웹툰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키워드는 ‘고립’이다. 현대인의 고립과 그로 인한 공포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네이버웹툰 ‘극야’는 남극 한중일 합동 연구기지로 파견을 간 한 안전요원이 좀비들과 맞닥뜨린다는 설정이다. 오랫동안 해가 뜨지 않고 밤이 계속되는 남극에 폭설, 강풍과 같은 극한 상황이 더해지며 외부와의 고립은 심화한다. 카카오페이지에 연재 중인 ‘1호선’은 감기에 걸려 외부와 고립돼 있던 주인공이 좀비와 좀비처럼 약탈을 일삼는 인간들과 마주한다는 내용이다. 어둡고, 기괴한 좀비물과는 달리 친숙한 그림체나 현실적 소재로 좀비를 표현한 점은 최근 눈에 띄는 변화다. 다음웹툰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는 가벼운 ‘일상 웹툰’을 보듯 단순화한 그림체를 택했다. 70세 할머니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해 자살을 시도하려다 한 소녀와 만나 서로 의지하게 되고, 좀비가 가득해진 세상을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좀비딸’은 가족애는 물론 개그코드도 넣어 좀비물에서 찾기 힘든 독자의 웃음을 뽑아낸다. 이윤창 작가는 “제 몸을 무는 모습마저도 사랑스러울 정도로 반려 고양이가 제 자식처럼 소중한 존재가 됐다. 이를 보며 아버지의 헌신적 사랑에 좀비물을 입힌 작품을 떠올렸다”고 했다. 좀비 웹툰의 인기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 좀비로 재현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웹툰 속 좀비로 재현되는 괴물의 양상’에서 김은정 만화연구가는 “좀비라는 메타포를 통해 한국사회에 커다란 이슈가 되고 있는 여러 소외계층을 상기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좀비물은 단순 유희를 넘어 사회의 고립, 혐오 같은 어두운 단면을 내포하고 있어 한동안 좀비물의 인기는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아빠, 나도 죽는 거야? 나도 좀비가 된 거야?” 딸이 좀비가 됐다. 믿기 힘들지만 딸은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니다. 좀비의 급작스런 출현으로 초토화될 뻔했던 대한민국은 사태를 빠르게 진정시키며 공식적으로 좀비가 없는 안전한 땅이 됐다. 돼지혈액으로 인한 감염, 임상실험 부작용 등 온갖 유언비어가 퍼졌지만, 확실한 건 이를 치료할 백신이 없다는 것. 그런데 알고 보니 마지막 좀비가 살아 남아있었다. 그 좀비는 누군가의 딸이기도 했다. 좀비는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으며 삶을 이어간다. 최근 연재 중인 네이버웹툰 ‘좀비딸’은 한 아버지가 좀비인 딸을 죽이려는 이웃으로부터 지킨다는 설정으로 부성애와 혐오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최근 좀비 소재의 웹툰이 독자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면서 ‘좀비 웹툰 전성시대’라는 말까지 낳았다. 좀비, 뱀파이어 등의 소재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놓여있다는 매력적 특징 때문에 고전소설, 영화, 게임 등 콘텐츠 소재로도 활용됐다. 동시에 일부 마니아층만 찾는 컬트적인 소재라는 한계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 독자 접근성이 높은 웹툰 속으로 좀비가 파고들고 있다. 비교적 친숙한 그림체나 다양한 스토리텔링 방식을 택하며 사회의 부조리를 다각도로 보여준다는 분석이 나온다. 현재 네이버웹툰, 다음웹툰, 카카오페이지 등 대형 플랫폼을 비롯해 유료웹툰 플랫폼에서 연재 중인 좀비 소재 웹툰은 10여 편에 달한다. 최근 연재를 마치거나 별도 연재 중인 작품을 더하면 20여 편 이상이다. 작품 대다수가 조회수, 인기도 순위에서 좋은 성적을 냈고, 영화, 드라마로 제작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연재 중인 좀비 웹툰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키워드는 ‘고립’이다. 현대인의 고립과 그로 인한 공포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네이버웹툰 ‘극야’는 남극 한·중·일 합동 연구기지로 파견을 간 한 안전요원이 좀비들과 맞닥뜨린다는 설정이다. 오랫동안 해가 뜨지 않고 밤이 계속되는 남극에 폭설, 강풍과 같은 극한 상황이 더해지며 외부와의 고립은 심화한다. 카카오페이지에 연재 중인 ‘1호선’은 감기에 걸려 외부와 고립돼 있던 주인공이 좀비와 좀비처럼 약탈을 일삼는 인간들과 마주한다는 내용이다. 어둡고, 기괴한 좀비물과는 달리 친숙한 그림체나 현실적 소재로 좀비를 표현한 점은 최근 눈에 띄는 변화다. 다음웹툰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는 가벼운 ‘일상 웹툰’을 보듯 단순화한 그림체를 택했다. 70세 할머니가 마을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해 자살을 시도하려다 한 소녀와 만나 서로 의지하게 되고, 좀비가 가득해진 세상을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좀비딸’은 가족애는 물론 개그코드도 넣어 좀비물에서 찾기 힘든 독자의 웃음을 뽑아낸다. 이윤창 작가는 “제 몸을 무는 모습마저도 사랑스러울 정도로 반려 고양이가 제 자식처럼 소중한 존재가 됐다. 이를 보며 아버지의 헌신적 사랑에 좀비물을 입힌 작품을 떠올렸다”고 했다. 좀비 웹툰의 인기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 좀비로 재현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웹툰 속 좀비로 재현되는 괴물의 양상’을 연구한 김은정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연구원은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 사회로부터 배척당하거나 ‘비인간’으로 규정되는 존재들이 슬픔과 분노에 가득 차 곧 좀비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좀비물은 단순 유희를 넘어 사회의 고립, 혐오 같은 어두운 단면을 내포하고 있어 한동안 좀비물은 인기가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김기윤기자 pep@donga.com}
“자막 보려고 구독해요.” “자막이 제 취저(취향저격)입니다.” 유튜브에서 자막이 새 생명을 얻었다. 출연자의 발언을 있는 그대로 화면 하단에 옮겨 적거나 인물의 감정을 설명하던 자막은 인터넷에서 그 자체로 콘텐츠가 됐다. 문법이나 글자 형태를 파괴, 해체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의 얼굴을 활용하는 등 변화 양상을 보인다. 일부 지상파, 케이블 채널도 영향을 받아 유튜브 자막문법을 이용한 유머코드를 썼다. 수많은 채널이 경쟁하면서 자막이 혁신 중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출연자의 얼굴을 활용한 자막이다. 출연자의 대사나 감탄사, 속마음 등을 설명할 때 얼굴 모양을 활용하는 형태다. 주로 동그란 머리 모양이나 입 모양을 자음 ‘ㅇ’ 또는 ‘ㅎ’으로 활용한다. 구독자가 288만 명에 달하는 인기 유튜브 채널 ‘백종원의 요리비책’에는 최근 백종원의 얼굴을 활용한 자막 장면이 화제가 됐다. “넣을까요?”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자막 ‘을’ 속 ‘ㅇ’을 그의 얼굴로 활용한 자막을 넣어 웃음을 줬다. 방탄소년단(BTS)의 얼굴도 자막 유머코드에 활용됐다. 팔로어가 1500만 명에 이르는 네이버의 ‘VLIVE’ BTS 채널에서는 멤버 진이 “우와”라고 감탄하는 장면이나 “아침 9:00”시를 설명하는 장면에서 그의 머리, 코 등 신체 부위가 활용됐다. 화면 하단 혹은 해당 출연자 바로 옆이던 자막의 위치도 변화했다. 인물 얼굴을 뒤덮어버리는 자막은 물론이고 몸짓, 발짓을 따라 자막이 움직인다. 심지어 화면 밖으로 날아가는 물체 옆에도 움직이는 자막이 사용된다. ‘하승진’ 유튜브 채널에서는 웃음 포인트에서 “ㅋㅋㅋㅋㅋㅋㅋㅋ”를 화면 전체에 뒤덮는 편집도 사용됐으며, 하승진의 동작에 따라 움직이는 자막이 활용됐다. 한글 표기나 문법에서도 유튜브 채널은 비교적 자유로운 모습을 보인다. 출연자의 발음이 부정확하더라도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해 웃음을 준다. 한글과 영어 알파벳을 섞은 표기도 쓰인다. 감탄사 ‘Aㅏ’ 또는 한글 ‘혹시’ 대신 ‘HOXY’ 등을 쓰는 것이 용례다. GOD 멤버 박준형의 ‘와썹맨’, ‘하승진’ 채널 등에서 활용이 많다. 한 유튜브 채널 편집자는 “이전엔 자막의 디자인, 형태에 신경을 썼다면 최근에는 영상과 연관성을 갖추면서도 자막 자체에 ‘애드리브’나 ‘개그’를 넣는 것을 고민하게 됐다”고 했다. 이에 영향을 받아 지상파, 케이블 채널에서도 자막의 변화가 감지된다. MBC나 tvN 채널에서도 유튜브식 자막문법을 활용하고 있다. 한 지상파 방송 PD는 “유튜브보다 시청층이 넓다 보니 정신없이 들어가는 유튜브식 자막을 그대로 쓰긴 어려우나 이를 참고해 전보다 자막 양을 늘리고, 크기도 키우고 있다”고 했다. 한 종편방송 PD 역시 “유튜브에서 일어난 자막 혁신이 방송 편집에도 영향을 미치는 게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자막을 보다 자유롭게 사용하면서 맞춤법 외에 아직까지 자막의 형태, 활용에 대한 논란은 적은 편이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부수적 역할에 그치던 자막이 컴퓨터그래픽(CG) 기술과 맞물려 유희성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더 인기를 끌고, 자막 양도 늘어날 것”이라며 “다만 자막의 남발로 프로그램의 깊이까지 떨어뜨리는 수준은 지양해야 한다”고 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피할 수 없다면 누군가에게 대신하게 하라.’ 껄끄러움, 민망함, 미안함, 귀찮음…. 이 같은 감정을 ‘스킵(Skip)’할 수는 없을까. 불편한 감정을 감내하는 대신에 돈을 지불하고 이를 타인에게 맡기는 이들이 늘고 있다. 감정 대행을 주문받은 업체들은 퇴사 등 전문 절차부터 이별, 사과, 역할 대행 등 업무를 세분하며 생활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대면 접촉과 감정 소모에 피로감을 느끼는 세태가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퇴사 대행 평균 10만∼20만 원에 해결 “껄끄러운 퇴사, 다 맡기세요” “쓰던 노트북 퀵으로 보내요.” 한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김모 씨(40)는 최근 택배 한 건을 전달받았다. 퇴사한 후배 A 씨가 보낸 노트북과 사무기기였다. “직장 분위기가 맞지 않는다”던 A 씨는 사직서 발송부터 퇴직금, 실업급여 정산 등을 대행업체를 통해 진행하고 있다. 김 씨는 “처음엔 사무실이 술렁일 정도로 모두 당황했지만 나름의 고민이 많았을 A 씨 심정도 이해가 간다”고 했다. 최근 늘고 있는 퇴사 대행 절차는 대략 이렇다. 희망퇴직일을 정하면 퇴사플래너와의 상담을 거쳐 사직서 등 문서를 작성한다. 대행업체는 고객 대신 사직 의사를 전달하고 사직서와 반납할 물품을 발송한다. 사직서가 수리되면 퇴직금 정산, 근로소득원천징수영수증 등 서류를 전달받는다. 추가 요청에 따라 사무실 짐을 대신 빼는 경우도 있다. 한 퇴사 대행 서비스 이용자는 “상사의 폭언과 과도한 업무 지시로 사직서를 냈지만 수리조차 안 됐다. 서비스를 이용해 회사를 찾거나 인사팀과 얼굴을 맞대지 않아도 잘 조율됐다”고 했다. 다른 이용자는 “회사 입장만 강요해 퇴사일도 정하기 어려웠다. 서비스 이용 후 번거로운 일이 사라져 이직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가격은 보통 10만∼20만 원 선이다. 회사 관계자와의 대면 접촉 같은 추가 대행 업무가 필요하면 50만 원까지 오르기도 한다. 한 퇴사플래너는 “회사 규모, 긴급성, 근로 형태에 따라 비용 차이가 나며 2030세대와 여성 직장인 이용비율이 높다”고 설명했다. 흰 봉투에 사직서를 넣어 직접 전달하는 기존 사표 제출 공식도 변화하고 있다. 사직서 발송만을 대행하는 ‘립(Leave) 서비스’ ‘출근길 사직서’ 같은 애플리케이션(앱)에서는 양식에 맞게 부서, 이름, 사유만 기입하면 PDF파일 사직서가 e메일로 발송된다. 제출 예정일도 설정할 수 있다. ‘깔끔하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표방하며 ‘입사와 동시에 사표를 작성한다’는 그 나름의 규칙도 적혀 있다.○ 내밀한 영역까지 침투, 이별·사과·질투심 유발도 대행 “택배 보내듯 감정도 대신 전달” 이별, 사과, 질투심 유발 등을 대행하는 서비스도 인기 있다. 이 업무만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업체는 따로 없으나, 주로 역할 대행 업체들이 맡는다. 과거 애인·하객 대행 등을 주로 수행했다면 최근 이별, 사과 통보 등 좀 더 감정적인 영역의 일을 대행하는 게 특징이다. 의뢰인 대신 유선으로 이별을 통보하기도 하지만 업체 직원들이 상대를 만나 부모, 친인척 역할을 하며 정중히 의사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연인의 과도한 집착, 안전한 이별, 집안 반대 등이 주된 서비스 이용 사유다. 가격은 보통 10만∼30만 원대. 요구 사항에 따라 수백만 원까지 높아지기도 한다. 역할대행119 대표는 “대학생, 여성 이용객이 많다. 시기적으로 크리스마스,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를 앞두고 깔끔한 이별을 원하는 일이 많은데, 대면 접촉을 꺼리고 이별 과정에서 상대 반응이 두려운 이들이 저희를 찾는다”고 했다. 사과 대행의 경우 과실 때문에 ‘진상’ 손님을 상대하기 힘들어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이 많다. 또 돈을 제때 갚지 못할 때 공손하고 정중하게 갚지 못하는 불가피한 이유와 사과를 전해 달라고 의뢰하는 경우도 있다. 역할극을 통해 연인 사이에서 질투심을 유발해 달라는 요청도 꽤 들어온다. 전문가들은 대면 접촉이 점점 사라지는 사회에서 대행 서비스가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서이종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인간관계를 맺고 끊는 능력이 떨어진 현대인이 정신적 압박감, 상처로부터 탈피하고픈 심리가 반영된 현상이다. 서비스는 향후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이명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누군가와 마주하는 것 자체를 불편해하고 감정 전달에 서툰 사회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가 정해주는 과외, 학원에 맞춰 살아온 젊은층은 앞으로도 대리인을 내세운 서비스를 쉽게 이용할 것”이라고 했다.김기윤 pep@donga.com·조종엽 기자}
‘피할 수 없다면 누군가에게 대신하게 하라.’ 껄끄러움, 민망함, 미안함, 귀찮음…. 이 같은 감정을 ‘스킵’(Skip) 할 수는 없을까. 불편한 감정을 감내하는 대신 돈을 지불하고 이를 타인에게 맡기는 이들이 늘고 있다. 감정 대행을 주문받은 업체들은 퇴사 등 전문절차부터 이별, 사과, 역할대행 등 업무를 세분화하며 생활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대면 접촉과 감정소모에 피로감을 느끼는 세태가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퇴사 대행 평균 10~20만 원에 해결 “껄끄러운 퇴사, 다 맡기세요.” “쓰던 노트북 퀵으로 보내요.” 한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김모(40) 씨는 최근 택배 한 건을 전달받았다. 퇴사한 후배 A 씨가 보낸 노트북과 사무기기였다. “직장 분위기가 맞지 않는다”던 A 씨는 사직서 발송부터 퇴직금, 실업급여 정산 등을 대행업체를 통해 진행 중이다. 황 씨는 “처음엔 사무실이 술렁일 정도로 모두 당황했지만 나름 고민이 많았을 A 씨 심정도 이해가 간다”고 했다. 최근 늘고 있는 퇴사대행의 절차는 대략 이렇다. 희망퇴직일을 정하면 퇴사플래너와 상담을 거쳐 사직서 등 문서를 작성한다. 대행업체는 고객 대신 사직의사를 전달하고 사직서와 반납할 물품을 발송한다. 사직서가 수리되면 퇴직금 정산, 근로소득원천징수 등 서류를 전달 받는다. 추가요청에 따라 사무실 짐을 대신 빼는 경우도 있다. 한 퇴사대행 서비스 이용자는 “상사 폭언과 과도한 업무지시로 사직서를 냈지만 수리조차 안됐다. 서비스를 이용해 회사를 찾거나 인사팀과 얼굴을 맞대지 않아도 잘 조율됐다”고 했다. 다른 이용자는 “회사 입장만을 강요해 퇴사일도 정하기 어려웠다. 서비스 이용 후 번거로운 일이 사라져 이직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가격은 보통 10만~20만 원선이다. 회사 관계자와의 대면접촉 같은 추가 대행 업무가 필요하면 50만 원까지 오르기도 한다. 한 퇴사플래너는 “회사규모, 긴급성, 근로형태에 따라 비용 차이가 나며, 2030세대와 여성 직장인 이용비율이 높다”고 설명했다. 흰 봉투에 사직서를 넣어 직접 전달하는 기존 사표 제출공식도 변화 중이다. 사직서 발송만을 대행하는 ‘립(Leave) 서비스’ ‘출근길 사직서’ 같은 애플리케이션(앱)에서는 양식에 맞게 부서, 이름, 사유만 기입하면 PDF파일 사직서가 e메일로 발송된다. 제출 예정일도 설정할 수 있다. “깔끔하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표방하며 “입사와 동시에 사표를 작성한다”는 나름의 규칙도 적혀있다. ● 내밀한 영역까지 침투, 이별·사과·질투심 유발도 대행 “택배 보내듯 감정도 대신 전달” 이별, 사과, 질투심 유발 등을 대행하는 서비스도 인기다. 이 업무만을 전문 수행하는 업체는 따로 없으나, 주로 역할대행 업체들이 맡는다. 과거 애인·하객 대행 등을 주로 수행했다면 최근 이별, 사과 통보 등 보다 감정적 영역의 일을 대행하는 게 특징이다. 의뢰인 대신 유선상으로 이별을 통보하기도 하지만 업체 직원들이 상대를 만나 부모, 친인척 역할을 하며 정중히 의사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연인의 과도한 집착, 안전한 이별, 집안 반대 등이 주된 서비스 이용 사유다. 가격은 보통 10만~30만 원대. 요구사항에 따라 수백만 원까지 높아지기도 한다. 역할대행119 대표는 “대학생, 여성 이용객이 많다. 시기적으로 크리스마스,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를 앞두고 깔끔한 이별을 원하는 일이 많은데, 대면접촉을 꺼리고 이별과정에서 상대 반응이 두려운 이들이 저희를 찾는다”고 했다. 사과대행의 경우 과실 때문에 ‘진상’ 손님을 상대하기 힘들어 느껴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이 많다. 또 돈을 제때 갚지 못할 때 공손하고 정중하게 갚지 못하는 불가피한 이유와 사과를 전해달라고 의뢰하는 경우도 있다. 역할극을 통해 연인 사이에서 질투심을 유발해달라는 요청도 꽤 들어온다. 전문가들은 대면접촉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사회에서 대행 서비스가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서이종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인간관계를 맺고 끊는 능력이 떨어진 현대인이 정신적 압박감, 상처로부터 탈피하고픈 심리가 반영된 현상이다. 서비스는 향후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이명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누군가와 마주하는 것 자체를 불편해하고 감정전달에 서툰 사회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가 정해주는 과외, 학원에 맞춰 살아온 젊은층은 앞으로도 대리인을 내세운 서비스를 쉽게 이용할 것”이라고 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집 밖으로 몇 걸음만 나가도 운동장, 길거리, 화단, 놀이터에서 흔히 밟히는 게 모래다. 집에 돌아올 때면 모래는 더러운 흙먼지쯤으로 여겨져 깨끗하게 털어내고 일상생활과 분리해야 하는 껄끄러운 존재가 된다. 그런데 지구 한편에서는 이 모래 때문에 싸움이 난다. 한 줌이라도 더 모래를 차지하려고 도둑질, 살인까지 난다는 사실이 믿어지는가. 이는 흔해 빠진 줄 알았던 모래가 지구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모래시계 속 모래가 다 떨어져 간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모래가 사라진다는 건, 인간이 그 위에 쌓아올린 인간 문명에도 위기가 닥쳤음을 뜻한다. 미국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모래가 유한한 자원임을 일깨우기 위해 책을 썼다. 뉴욕과 플로리다는 물론이고 인도, 아랍에미리트, 중국 내몽골 등 모래를 둘러싼 세계 이곳저곳을 취재하며 우리가 몰랐던 모래의 진짜 모습을 들려준다. 책은 모래를 찾아 떠나는 가이드북이자 인간의 문명을 짚은 역사서인 동시에 알찬 환경서이기도 하다. 모래라고 다 같은 모래는 아니다. 입자 크기, 재질, 성분 구성비에 따라 인간에게 더 유용한 모래가 있다. 지질학 척도에 따르면 모래는 통상 0.0625mm에서 2mm 크기의 단단한 알갱이를 말한다. 보통 200만 년에 이르는 일정 주기를 반복하며 생성된다. 지질학자 레이먼드 시버는 “모래 알갱이는 영혼은 없지만 환생한다. 침전, 퇴적, 융기, 침식 과정에서 새로 태어나고 조금 더 둥글어진다”고 썼다. 지금 밟고 지나간 모래의 출생을 되짚어 올라가다 보면 인류의 역사도 초월할 가능성이 높다. 모래의 70%는 석영이라는 광물로 이뤄져 있다. 반도체, 스마트폰, 유리 등에 활용하는 이 물질은 ‘실리카(silica)’로도 불리며 현대문명에서 쓰임새가 많다. 석영은 지구상에서 가장 풍부한 산소와 규소의 화합물이다 보니 모래를 사실상 무한한 자원으로 여기는 것도 틀린 건 아니다. 미 하와이대의 한 연구원은 세계 해변에 각각 1mm³의 모래가 뒤덮여 있다고 가정해 모래 알갱이가 750경(京)에 이를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써도, 써도 남아돌 것 같은 모래의 고갈은 현실이 됐다. 인간이 그만큼 모래를 무분별하게 채취했기 때문이다. 채취한 모래 대다수는 급속한 도시화와 맞물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에 쏟아부어졌다. “지구상 사람 한 명당 콘크리트가 40t씩 존재한다”는 지적처럼 인류의 70%가 콘크리트 건물에 살며, 도시 인구는 매년 6500만 명씩 늘고 있다. 인류가 연간 소비하는 모래와 자갈은 500억 t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주를 덮을 수 있는 양이다. 두바이, 카타르에서 진행한 인공 섬 프로젝트는 모래 소비의 신기원이 됐다. 그뿐만 아니라 나라의 역사 자체가 곧 간척의 역사인 네덜란드, 한국 서해안에서도 간척사업은 활발하다. 저자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만들어진 새로운 대지에서는 공기를 제외한 모든 게 인공”이라고 말한다. 모래의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자 모래는 곳곳에서 역습을 벌인다. 모래 해변은 사라졌고, 채취장 인근 생태계는 망가졌다. 지난 10년간 인도, 스리랑카에서는 물에서 숨쉴 수 없게 된 악어들이 강변에 출몰해 6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모래로 땅을 매립한 베트남 난사군도 등은 영토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모래 위에 세운 누각을 뜻하는 ‘사상누각(沙上樓閣)’이란 말은 어쩌면 인간 문명 그 자체를 일컫는 말일지 모른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한국연극협회는 15일 한국문화예술위원회(문예위)가 지역 문화예술계의 균형적인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협회는 이날 성명을 통해 “문예위의 올해 공연예술 중장기 창작지원사업 공모에 지원한 전국 226개 연극단체가 지원했으나 선정된 23개 단체 중 21개가 서울 소재이며 나머지 2개 단체도 활동 영역이 서울”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사업 목적이 국내 문화예술생태계의 상생과 안정적 제작 환경기반 조성이라는 데에 있음에도 서울 지역의 단체만 선정한 것은 지역 단체에 성장의 기회가 간절하다는 사실을 무시한 행태”라고 지적했다. 협회는 이번 사업 심의위원으로 서울 지역에서 활동하는 전문가로만 구성된 점에도 문제를 제기하며 “지역 배제 의도가 있는 게 아닌지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고 했다. 협회는 정확한 선정 사유, 문제 해결방안을 비롯한 문예위의 입장 표명을 요구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오프라인과 극장 인근에서 주로 진행되던 공연 마케팅이 점차 온라인과 장소 불문으로 진화하고 있다. 극장 안팎에 옥외 광고물을 걸거나 공연장 인근에 포스터를 붙이는 전통적 마케팅에서 탈피해 투자상품, 전자책, 포토존, 웹툰 등과 결합하고 있다. 최근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가 공연 중인 서울 구로구 디큐브아트센터. 이곳에서는 공연 전 스마트폰을 통해 공연 소개 도슨트북을 읽는 관객들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제작사 EMK뮤지컬컴퍼니는 최근 월정액 독서 애플리케이션(앱) 밀리의 서재와 협업해 뮤지컬 도슨트북을 출시했다. 국내에서 전시용이 아닌 공연용 도슨트북이 서비스된 건 처음이다. 관객들은 앱을 통해 관람 전 알아야 하는 배경지식을 10분 안팎이면 찾아볼 수 있다. 극 중 ‘마리 앙투아네트’ 역의 김소현과 ‘페르젠’ 배역의 손준호가 직접 녹음에 참여했다. 밀리의 서재 회원이라면 누구든 도슨트북을 이용할 수 있다. 12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월드투어 내한공연을 앞둔 클립서비스는 최근 카카오페이와 협업해 투자 상품을 내놨다. 총 모집금액은 20억 원으로 투자하면 6개월 뒤 ‘오페라의 유령’ 수익금을 돌려받는데 예상 수익을 10%(세전)로 내다보고 있다. 문화콘텐츠 투자 상품으로는 카카오페이 포트폴리오에 처음 올라왔다. 극장 안에서만 볼 수 있던 포토존은 이젠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12월 초연하는 뮤지컬 ‘빅 피쉬’의 제작사 CJ ENM은 서울 을지로, 광화문, 이태원에 ‘움직이는 포토존’ 마케팅을 들고나왔다. 박종환 CJ ENM 공연커뮤니케이션팀장은 “‘일상에서 만나는 판타지’를 주제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카페, 식당의 한편에 포토존을 마련해 뮤지컬 분위기를 느끼도록 하는 게 포인트”라고 설명했다. 웹툰과 공연의 컬래버레이션도 활발하다. 국립발레단은 창작발레 ‘호이 랑’의 서울 공연을 앞두고 ‘약치기 그림’으로 유명한 양경수 웹툰 작가와 ‘인스타툰’을 선보일 예정이다. 김현아 국립발레단 홍보팀장은 “문턱이 높은 발레를 일반 관객이 친숙하게 느낄 수 있도록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을 통해 웹툰을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앞서 김풍 웹툰 작가도 뮤지컬 ‘스쿨 오브 락’의 홍보 웹툰을 제작했으며, ‘유미의 세포들’로 인기를 끌고 있는 이동건 웹툰 작가도 뮤지컬 ‘시라노’를 앞두고 ‘시라노의 세포들’을 공개했다. CJ ENM은 업계 최초로 ‘시라노’의 뮤지컬 홍보용 웹드라마 ‘잘빠진 연애’를 제작해 선보인 바 있다. 3년 전부터 뮤지컬 티켓 등을 팔아온 홈쇼핑도 달라지고 있다. 쇼호스트가 설명을 늘어놓는 대신 소형 뮤지컬쇼나 야외 생방송으로 시청자를 불러 모으고 있다. 공연 마케팅의 진화는 공연시장 침체와 맞물려 전통 홍보수단에 한계를 느낀 제작·기획사의 고민이 녹아 있다. 또한 보는 사람만 계속 보는 ‘회전문’ 관객에게 의존하는 시장구조가 한계에 봉착하면서 새로운 관객 발굴이 공연계의 당면 과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원종원 뮤지컬 평론가는 “공연은 영화나 드라마처럼 사전 완성자료가 상대적으로 적을뿐더러 가공할 수 있는 콘텐츠가 부족해 전통적 마케팅을 선호해왔다. 단기 공연 위주인 국내 공연계가 외부 관객층을 끌기 위한 새로운 시도가 늘어날 것”이라고 밝혔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적어도 현대무용이 관객들을 ‘의문의 방’으로 이끌진 말아야죠.” 현대무용을 한 편 보고 난 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하고 빠졌던 고뇌는 관객의 몫이자 큰 숙제였다. 그만큼 현대무용은 일반 관객층이 다가가기 어려운 불친절한 장르라는 인식이 강했다. 다행히 최근 국립현대무용단을 필두로 이런 분위기가 서서히 변화하고 있다. 2016년 말 안성수 예술감독(57) 부임 후 국립현대무용단 공연 객석에는 ‘생기가 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른바 ‘무용 좀 즐기는’ 일반 관객층이 늘고 있기 때문. 10일 서울 서초구 국립현대무용단에서 만난 안 감독은 “무용계 저변을 확대하려면 뭣보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재미있는 무용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변화는 수치로도 나타난다. 2011년부터 2016년까지 77.6%를 기록하던 무용단의 평균 객석점유율은 그가 부임한 뒤 96.2%까지 껑충 뛰었다. 유료 객석 점유율도 같은 기간 평균 66%에서 86%로 높아졌다. 일반 관객에게 한 발 더 다가가려는 그의 노력이 통한 셈이다. “공연장에 나가 보면 알아요. 자주 보던 무용계 관계자 얼굴보다 낯선 얼굴을 볼 때 참 반갑더라고요. 하하.” 안 감독은 “국립현대무용단이 해야 할 것, 하지 않아도 될 것, 해서는 안 될 것을 철저히 구분해 지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안무가 육성과 해외무용단과의 교류에 힘썼다. ‘오픈―업 프로젝트’ 등을 통해 일반 관객과의 접점을 꾸준히 찾았다. 예술교육은 타 기관의 몫으로 남겨 두고, 친목 도모 성격의 공연은 과감히 배제했다. “무용계의 친선 도모는 고질적 병폐이자 단점이죠. 무용계가 프로페셔널이 되려면 이를 넘어서야 해요.” 그는 뒤늦게 미국에서 무용에 입문한 ‘늦깎이 무용수’였다. 영화를 공부하러 떠난 미국에서 우연히 발레를 수강하다 매력에 빠졌단다. “군대에서 다친 허리 때문에 근력을 키우려고 발레 수업을 들었어요. 그런데 남자 무용수들을 보니 ‘나도 할 수 있겠는데?’라는 자신감이 불쑥 생겼죠.” 이후 줄리아드대학에서 무용 공부를 마치고, 무용단을 결성했다. 안무가로 활동하며 귀국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를 맡았다. 그는 “2분 동안 장면에 진전이 없으면 재편집에 들어가는 영화의 ‘2분 룰’을 무용 안무에도 적용해 속도감을 추구한다. 먼저 배운 영화가 은근히 도움이 됐다”고 했다. 해외 교류도 그가 중시하는 포인트다. “한국 무용수의 기량을 알릴 필요가 있다”는 그는 최근 초청을 받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새 안무 작 ‘검은 돌: 모래의 기억’을 먼저 선보였다. “겹겹이 쌓이는 시간과 흔적 끝에 남은 우리의 존재를 무용으로 표현했다”는 작품은 국악기를 베이스로 한 음악 위에 무용수들의 몸짓을 녹였다. 11월 국내 관객과도 만난다. “이번 작품만큼은 그동안 제가 하고 싶었던 모든 걸 다 쏟아부었습니다. 재밌는 몸의언어를 느껴보세요.” 11월 1∼3일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1만∼5만 원. 8세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저가 티켓 마케팅을 앞세운 ‘상업연극’이 대학로를 점령하고 있다. 상업연극은 오락이나 흥행에 초점을 맞춘 작품으로, 예술성에 치중한 ‘순수연극’과 구분하는 개념. 그런데 인건비마저 충당하기 힘든 요즘 세태에, 그나마 이윤을 남기며 연극판을 버티는 작품은 대다수가 상업연극이다. 전문가들은 최근 작품 수준도 비교적 높아졌고, 저렴하게 즐길 수 있다는 걸 장점으로 꼽는다. 하지만 과도한 저가경쟁과 호객행위가 연극계의 질적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없지 않다.○ 상업연극 전성시대… 퀄리티도 나쁘지 않아 12일 서울 대학로 한 소극장. 수년째 ‘오픈런’(끝나는 날짜 지정 없이 이어지는 공연) 코미디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이날 100석 규모인 객석은 절반이 좀 못 미치는 자리만 채워졌다. 공연이 임박하자 일부 극장 관계자가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행인들에게 “싸게 드릴게. 진짜 재밌어요”라며 파격적인 저가 티켓을 제안했다. 막이 오르자 ‘분위기 메이커’가 무대에 올라 박수와 함성을 유도했다. 관객을 중간 중간 무대로 불러내 극에 참여시킬 때도 있다. 극의 짜임새는 살짝 엉성했지만 그래도 진정성 있는 배우들의 열연에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리거나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한 남성은 “저렴한 비용으로 연극을 보다 보니 웬만한 ‘흠’은 넘어가주게 되더라”고 했다. 또 다른 소극장에서는 선정적 ‘성인 코미디’를 무대에 올렸다. 꽤나 수위 높은 대사가 오가는데 커플로 보이는 관객이 많다. 배우들은 짓궂은 질문으로 관객들을 당혹시키기도 했다. 역시 관객들의 만족도는 나쁘지 않았다. 상업연극의 인기몰이가 물론 최근에 벌어진 기현상은 아니다. 사실 비용을 덜 들이되 싼 티켓 값으로 관객을 유혹하는 방식은 이미 대학로의 오랜 관행. 입장료를 대폭 깎더라도 수익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공연계 관계자는 “잘나가는 공연은 지방공연을 포함해 한 달에만 수천만 원대의 매출을 올리기도 한다. 정부나 예술계 지원 없이도 이미 독자적 생존법을 갖춘 작품이 많다”고 했다. 상업연극의 장르 다변화도 한몫했다. 코미디, 공포나 멜로, 성인물 등으로 세분화했다. 관객 참여를 유도하고, 퀴즈를 통해 초대권이나 상품도 나눠준다. 한 연극계 원로는 “과거엔 상업연극을 ‘뒷골목 연극’이라 폄하하기도 했다”며 “요즘은 딱히 비난하기 어려울 정도로 배우 연기나 짜임새의 수준이 올라와 놀랐다”고 했다.○ 과도 경쟁으로 ‘제 살 깎아먹기’가 되진 말아야 당연히 이런 흐름이 장기적으로 옳다고 볼 순 없다. 저가 티켓 마케팅은 결국 ‘제 살 깎아먹기’다. 한 연출가는 “‘연극=저가’라는 인식이 고착화되면 연극계의 전반적 질적 저하를 불러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현재 소셜커머스 사이트에는 공연 티켓이 4900원인 작품도 여럿이며, 1만 원대 이하 티켓도 많다. 평일 평균 할인율은 70∼80%에 이른다. 한 극단 관계자는 “대다수 관객이 소셜커머스를 통해 티켓을 구입하기 때문에 가격 경쟁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 털어놨다. 몇몇 극장 대표가 ‘최저 가격선’을 논의하기도 했으나 공염불이 됐다. 만연한 호객행위도 문제다. 이날 대학로 인근에선 잠깐 서 있는 동안 티켓 호객꾼 7, 8명이 말을 걸어왔다. “저한테 오시면 더 싸게 드려요. 제가 수당도 받으니 꼭 다시 와 주세요”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이은경 연극평론가는 “상업성에 치중한 작품들을 무조건으로 비판할 수도 없고, 소셜커머스 경쟁을 막을 방법도 없다”면서도 “다만 배우에게 시급을 지급하며 공장에서 작품을 찍어내듯 만드는 상업공연이 기존 관객층마저 떠나보내지 않도록 최소한의 예술성, 대중성은 담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는 “연극적 품위를 고민하되 가격 경쟁을 위해 싼 좌석만으로 관객을 모으는 시장 교란 행위는 지양할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제목이 직관적으로 내용을 관통한다. 평화보다 전쟁을 택했던 독일 미국의 자본과 권력자 히틀러의 공생 관계를 다뤘다. 포드, IBM, 제너럴모터스(GM) 등 미국 대표 기업의 이름이 나치와 함께 서술된 대목에서는 낯선 느낌마저 든다. 이들의 은밀한 공조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귀결됐다. 캐나다 토론토대, 워털루대 등에서 유럽사를 연구한 저자는 대자본가와 파시즘의 결합을 조명해왔다. 전작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에서도 미국의 참전이 정의 때문이 아니라 이익 때문이었다고 지적했다. 미국과 독일은 전쟁에서 적국으로 만나 희생을 치렀지만, 사실 양국 자본가에게 전쟁은 공동의 이익을 추구할 기회였던 셈이다. 저자에 따르면 히틀러의 등장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히틀러는 자본에 의해 ‘고용된’ 독재자에 가까웠다고 말한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폴란드 소설가 올가 토카르추크(57·여)와 오스트리아 소설가 페터 한트케(77)가 2018년과 201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각각 선정됐다. 스웨덴 한림원은 지난해 한림원 미투 파문으로 수상자를 내지 않아 10일(현지 시간) 올해 2명을 함께 발표했다. 한림원은 토카르추크에 대해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열정과 서사적 상상력을 갖췄다. 소소한 일상을 파고드는 동시에 멀찍이서 삶을 바라보는 작가”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한트케에 대해서는 “소설, 에세이, 단편,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했다. 언어학적 독창성을 지닌 작품으로 인간 경험의 특수성과 그 경계를 탐구했다”고 설명했다. 파문을 겪은 한림원의 수상자 선정을 놓고 문학계에서는 “동유럽권의 여성 작가와 소수자성을 지향하는 작가의 조합”이라고 해석했다. 심하은 은행나무 해외문학팀 편집장은 “폴란드 수상자는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96년) 이후 20여 년 만이다. 지역 안배 기준에는 적합하지만 비교적 젊은 나이라 의외”라고 했다. 안장혁 동의대 문학인문학부 교수는 “한트케의 정체성은 ‘시대의 비주류’다. 전위적 문학을 추구하는 논쟁적 작가지만 한림원이 저항 정신에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여성 작가로는 15번째 수상자인 토카르추크는 대중성과 작품성을 두루 인정받고 있다. 바르샤바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뒤 1993년 장편소설 ‘책의 인물들의 여정’을 출간했다. 심리치료사로도 활동하다 시로 데뷔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사실주의에 신화와 전설, 비망록 등 다양한 장르를 덧입혀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평을 받는다. 대표작으로는 장편 ‘E.E’ ‘태고의 시간들’ ‘낮의 집, 밤의 집’ ‘방랑자들’과 단편집 ‘옷장’ ‘여러 개의 작은 북 연주’가 있다. ‘방랑자들’로 2018년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했다. 국내에는 여성의 삶을 충실히 복원해낸 장편 ‘태고의 시간들’이 올해 처음 출간됐다. 단편 ‘눈을 뜨시오, 당신은 이미 죽었습니다’가 수록된 동명의 단편집도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한트케는 소설, 희곡 등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논란을 일으켰다. 오스트리아 그라츠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한트케는 첫 소설 ‘말벌들’(1965년)이 출간되자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전업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한트케는 기존의 문학적 가치와 방법을 거부하며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쓴다. 시에 미학적인 문구를 넣는 것은 구역질이 난다”고 말했다. 가장 많이 읽힌 책은 1972년 발표한 ‘소망 없는 불행’으로 어머니가 자살한 후 쓴 작품이다. 전쟁과 가난으로 몸과 마음이 병들자 목숨을 끊은 어머니를 보며 한 인간이 자아에 눈뜨는 과정을 그렸다. 영화감독 빔 벤더스와 함께 ‘베를린 천사의 시’(1987년) 각본을 썼다. 줄거리 없이 배우들이 관객에게 욕설을 퍼붓는 희곡 ‘관객모독’(1966년)은 국내에서도 자주 공연된다. 소설 ‘페널티 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반복’ 등이 국내에 출간됐다. 한편 한트케는 2006년 세르비아의 독재자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장례식에서 그를 옹호하는 연설을 발표해 비판을 받았다. 한트케는 “밀로셰비치는 영웅이 아닌 비극적인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2014년에는 오스트리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노벨상은 문학의 잘못된 성역화”라며 “폐지돼야 한다”고 했다. 한림원은 그가 “훌륭한 예술성으로 숨겨진 영역과 경계를 탐험했다”고 평가했다.이설 snow@donga.com·김민·김기윤 기자}
‘뮤지컬은 안 봤어도 넘버는 다 안다’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7년 만에 한국에 온다. ‘오페라의 유령’ 월드투어팀은 12월부터 관객과 만난다. 서울 중구 한 호텔에서 10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주역 배우들과 연출진은 “‘오페라의 유령’을 보고 나면 머릿속에서 다른 작품 생각은 싹 사라질 것이다. 한국 관객들이 잠시 다른 뮤지컬과 사랑에 빠졌더라도 7년 만에 옛 연인 ‘오페라의 유령’에게 돌아와 달라. 우린 헤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입을 모았다. 간담회에는 ‘유령’ 역의 조너선 록스머스, ‘크리스틴’ 역의 클레어 라이언, ‘라울’ 역의 맷 레이시를 비롯해 라이너 프리드 협력연출가, 데이비드 앤드루스 로저스 음악감독이 참석했다. ‘오페라의 유령’은 뮤지컬 역사의 한 획을 그은 메가 히트작이다. 1986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된 후 41개국에서 1억4000만 명의 관객을 끌어 모았다. 올해는 브로드웨이 최초로 1만3000회 공연을 돌파했다. 지난해 뉴욕 브로드웨이 공연 30주년을 맞아 월드투어를 시작했고 이스라엘을 거쳐 한국에 왔다. 연출진은 30년이 넘는 작품의 성공비결로 ‘완성도’를 꼽았다. 프리드 협력연출가는 “초연부터 모든 게 탄탄하게 잘 맞아떨어졌다. 30년 동안 크게 수정할 필요도 없이 완성도가 높았다”고 떠올렸다. 무대 기술적인 부분만 보완했을 뿐 이번 공연에서도 원작의 탄탄함을 그대로 보여줄 예정이다. 한국에서 이 작품의 의미는 각별하다. 2001년 초연 당시 대형 뮤지컬의 전성기를 연 작품으로 ‘팬텀 신드롬’까지 일으키며 꾸준히 사랑받았다. 7년 전 한국 무대를 경험한 배우들과 연출진의 한국 사랑도 각별하다. ‘오페라의 유령’을 제작한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뮤즈’로 불리는 라이언은 “아직 한국 문화를 경험하지 못한 배우들을 데리고 서울에 있는 제 단골 식당과 찜질방에도 데려갈 생각”이라며 웃었다. 이번 투어는 12월 13일 부산 드림씨어터에서 시작한다. 내년 3월 서울 블루스퀘어에서 공연한 뒤 7월부터 대구 계명아트센터 무대에 오른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집 천장이 낮아서 차마 리프팅(들어올리기) 연습까지는 못 하겠더라고요.” 직장 동료가 배우자라 좋은 점은 24시간 함께하며 최고의 호흡을 선보일 수 있다는 것. 물론 나쁜 점도 없지 않겠지만. 집, 연습실, 무대를 오가며 12년째 발레 파트너로 호흡을 맞춰 온 유니버설발레단의 간판 무용수 강미선(36), 콘스탄틴 노보셀로프(34) 부부가 3년 만에 창작발레 ‘심청’으로 돌아왔다. 최근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발레단에서 만난 이들은 “리프팅 동작만큼은 발레단에 와서 할 수밖에 없겠더라. 배우자와 안무 연습을 원 없이 할 수 있는 건 큰 장점이자 단점”이라며 웃었다. ‘심청’은 한국 발레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며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심청의 우아한 안무와 심청전에 바탕을 둔 탄탄한 스토리가 강점이다. 올해 강미선은 심청을, 노보셀로프는 캐스팅 일정에 따라 선장과 용왕 배역을 맡는다. 두 무용수가 같이 무대에 오를 때 쏟아지는 관심이 부담스러울 법도 하다. 그럼에도 “심청이 주는 무게감이 남달라 새 각오를 다지게 만든다”고 했다. 강미선은 “학창 시절부터 평생을 꿈꿔 오던 작품이다. 꼭 하고픈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코 심청”이라고 했다. 노보셀로프는 “한국 문화의 영혼, 슬픔, 행복이 함께 녹아 있는 심청은 보물 같다”고 했다. 처음 ‘심청’으로 두 사람이 무대에 설 때 강미선에게는 별도 과제가 있었다. ‘심청전’의 장면별 상세한 의미를 러시아 태생인 남편에게 잘 설명해 이해시켜야 했다. “심청이가 제물로 팔려갈 때 ‘순결’을 위해 심청을 보호하는 대목이 있어요. 코스차(노보셀로프의 애칭)를 비롯한 외국 단원들이 ‘선원이 심청을 좋아한다’고 잘못 생각하더라고요.”(강미선) 노보셀로프는 “의미를 다 알진 못했어도 감동적 서사라는 건 충분히 느꼈다. 보통 남녀의 사랑을 말하는 발레와 달리 심청은 특별하다”고 했다. 공연을 앞두고 심적, 체력적 부담이 큰 두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건 뭣보다 서로의 존재다. 강미선은 “힘들어도 남편에게 의지하면 다시 에너지가 생긴다”고 했다. 그래도 아쉬운 점은 없을까. 강미선은 “연습 때 지적을 하면 남편은 ‘잔소리’로 듣는 것 같다. 더 젠틀해졌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반면 노보셀로프는 묘하게 웃으며 완벽한 모범답안을 내놓았다. “아쉬운 건 절대 없어요. 제 아내는 모든 게 완벽해요.” 11∼13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3만∼12만 원. 8세 관람가.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사회의 부조리, 전쟁과 재난, 여성에 대한 억압…. 우리 시대의 불안을 다룬 세계 공연 거장의 작품들이 서울로 몰려온다. 3일 개막한 제19회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는 20일까지 ‘시대를 조명하다’라는 주제로 작품 19편을 선보인다. 덴마크, 러시아, 이스라엘, 벨기에, 독일, 프랑스 등 10개국 작품이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세종문화회관, 한국예술종합학교 일대에서 무대에 오른다. 연극과 무용이 각각 9편씩 선정됐고 장르가 복합된 다원극도 1편 있다. 한국의 대표적 공연예술 축제인 SPAF는 예술경영지원센터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공동 주최한다. 벨기에 연극 ‘잊혀진 땅: 포인트 제로’(18∼20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는 19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정면으로 마주한 작품이다. ‘자연방사능보호구역’이라는 이름이 붙은 불가사의한 지역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유령도시처럼 방사능에 오염된 농작물, 동물, 그리고 일부 지역민만이 사는 곳을 그리기 위해 연출진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를 직접 방문했다. 원전의 위험성을 조명하기 위해 체르노빌 사고로 고통받는 지역민들을 만났고 이들의 증언과 기억을 토대로 작품을 만들었다. 2018년 한 벨기에 언론은 이 작품을 최우수 공연으로 선정하며 “기억 속으로 사라진 진실, 알 수 없는 미래의 두려움을 그린 한 편의 시”라고 설명했다. 일본 연출가 히라타 오리자의 연극 ‘그 숲의 심연’(19∼20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는 한국 프랑스 일본의 배우들이 함께 무대에 오른다.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소재 연구실에서 영장류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을 통해 다문화, 공생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일본의 수출 규제를 비롯해 8월 일본 아이치트리엔날레에서 벌어진 소녀상 전시 중단으로 한일 관계가 급격히 경색되면서 주최 측은 작품을 초청하는 과정에서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국 한국 무대에 올리기로 결정했다. 김도일 예술경영지원센터 대표는 “예술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양국 간에 정치 경제로 인한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이를 문화적 현상으로 논의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내 연극 작품도 눈여겨볼 만하다. 극공작소 마방진의 ‘낙타상자’(17∼20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는 인력거꾼의 비참한 인생을 담은 작품이다. 1937년 발표된 중국 장편소설을 각색했다. 극단 떼아뜨르 봄날의 ‘해피투게더’는 1980년대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일어난 일을 적나라하고 속도감 있게 그렸다. 극단 서울괴담의 ‘보이지 않는 도시’는 평생 가꿔온 집을 재개발로 잃게 된 노인이 철거에 맞서는 이야기를 통해 추억을 담은 공간인 집의 의미와 도시 개발을 돌아보게 한다. 무용 작품도 탄탄하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차세대 안무가 인발 핀토는 신작 ‘푸가’(12∼13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로 한국을 찾는다. 다양한 색상과 감각, 소리를 통해 잃어버린 과거와 세계, 내면의 소리를 찾아가는 작품이다. 유럽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핀란드 출신 무용가 수산나 레이노넨의 ‘네스티: 여성, 억압과 해방’(12∼13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은 여성의 몸을 주제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일상적 잔인함을 폭로한다. 왕 라미레즈 컴퍼니의 ‘보더라인: 경계에서’(18∼19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는 프랑스와 독일 안무가의 합작품으로 애크러배틱한 움직임을 기반으로 중력을 거스르는 이색적인 무대를 선보인다. 최상철 SPAF 무용 프로그래머는 “국가 간의 분쟁, 이민자로서 정체성, 뜨거운 이슈인 여성의 몸 등 지금 이 시대에 대해 무용가들이 어떤 고민을 하는지 보여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에 처음 선보였던 개막작 ‘카프카’는 러시아 고골센터의 작품으로, 카프카의 글에 나타난 부조리와 20세기의 광기를 연결지었다.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공연자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을 연구하는 ‘연극인류학’의 창시자인 에우제니오 바르바 연출가와 그가 이끄는 오딘극단의 ‘크로닉 라이프’도 5일까지 무대에 오르며 뜨거운 환호를 받았다. 2031년 제3차 세계대전 이후를 상상해 전쟁, 실업, 경제적 위기를 그렸다. 한국을 찾은 에우제니오 바르바 연출가는 “불확실성과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체험이 이해 불가능한 것들을 수용하게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