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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의 망국적 포퓰리즘.” “안보·복지 포퓰리즘 심각.” 일상에서 접하는 기사, 콘텐츠에서 포퓰리즘은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다. ‘대중영합주의’ ‘인기몰이 정치’라는 부정적 어감을 내포한 이 말은 좌우 진영논리에 상관없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최근 많은 국가에서는 ‘포퓰리즘 정당’으로 일컬어지는 정치 세력이 국민의 지지를 받아 급격히 세를 불리고 있다. 일부 정치 후진국의 이야기가 아니다. 저자는 2016년 영국 국민투표에서 유럽연합(EU) 탈퇴파의 승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당선도 포퓰리즘의 일환으로 봤다. 도미노처럼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에서도 벌어진 포퓰리즘 정당의 세 확장은 국민의 열망을 반영한 선거를 통해 이뤄졌다. 저자는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포퓰리즘은 진정 민주주의의 적인가? 개혁의 희망인가?” 일본 지바대 법정경학부 교수로 유럽정치사, 비교정치학을 전공한 저자는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의 양면적 상관관계를 분석했다. 책은 포퓰리즘의 개념, 역사, 현재를 집약한 정치 학술서에 가깝다. 최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포퓰리즘의 양태를 다채롭게 소개해 기사처럼 쉽게 읽히는 편이다. 일단 포퓰리즘의 정의부터 짚고 시작한다. 그는 포퓰리즘을 크게 “고정적인 지지 기반을 넘어 폭넓게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정치 스타일” 또는 “국민의 입장에서 기성 정치나 엘리트를 비판하는 정치 운동”으로 나눠 설명했다. 책에서 그는 포퓰리즘을 ‘엘리트와 국민’의 비교를 중심으로 하는 후자의 관점을 택했다. 많은 포퓰리즘 운동이 기성 정당과 엘리트층에 대항하는 ‘아래’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다룬 주 무대는 포퓰리즘이 빠르게 진행 중인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스위스 등 유럽이다. 중남미, 미국의 이야기도 덧붙였다. 풍부한 사례들은 ‘아직까지는’ 포퓰리즘이 미약한, 그러나 곧 힘을 얻게 될 수도 있는 한국과 일본을 향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 기성 정당의 약체화, 외국인 노동자 증가로 인한 배외주의 확대, 무당파의 증가는 우파 포퓰리즘에 대한 지지를 확산시킬 수 있다. 사회 격차의 확대는 좌파 포퓰리즘이 가까운 장래에 호소력을 갖게 만들지 모른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식스팩으로 무장한 ‘상남자’ 백조들이 나타났다. 우아한 발레복 상의는 벗어던지고 그 자리를 섹시한 근육으로 채운 ‘백조의 호수’가 9년 만에 한국을 찾는다. 9일 내한공연을 앞두고 e메일로 인터뷰한 안무가 매슈 본(59·사진)은 “24년 된 작품이지만 새 게스트와 해석을 더했고, 수백 가지 디테일을 계속 손보며 신선한 변화를 주고 있다”고 했다. 매슈 본 버전의 ‘백조의 호수’는 무용계에서 신(新)고전 반열에 올랐다. 유약한 왕자와 그가 갖지 못한 강인함, 아름다움, 자유를 가진 환상 속 존재인 백조 사이의 슬픈 드라마를 담았다. 배경은 현대 영국 왕실로 옮겼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주인공이 비상하는 공연 장면이 삽입되며 작품은 더욱 유명해졌다. 그가 안무를 짜면서 꾀한 가장 큰 변화는 ‘남성 백조’였다. 그는 “남성 백조는 기억 속 ‘백조의 호수’ 이미지를 완전히 지워버릴 만큼 상징적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1995년 영국에서 상의를 벗은 남자 무용수가 무대를 뛰어다닐 때는 현실의 벽을 체감해야 했다. 통념을 깼다는 호평보다 ‘게이들의 백조’라는 비웃음이 더 컸다. 남성 백조와 왕자의 2인무를 견디지 못해 퇴장하는 관객도 많았다. 그럼에도 그는 “이미 비슷비슷한 백조의 호수가 너무 많다”며 신념을 꺾지 않았다. ‘백조의 호수=발레’라는 고정관념도 깨야 했다. 그는 “뮤지컬, 영화, 탭댄스 등 이야기 전달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표현법은 뭐든 적용했다”고 했다. 백조 영상을 보면서 치밀하게 연구했다. “막상 헤엄치는 생명체를 보니 생각보다 우아하지 않아 이를 아름답게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다”며 웃었다. 작품이 단순히 무용이 아니라 ‘댄스 뮤지컬(Dance Musical)’로 불리는 이유다. 최근 미국의 한 앵커가 “영국 조지 왕자가 발레 수업을 좋아하는데 얼마나 오래갈지 보자”고 발언한 데 대해 300여 명의 남자 무용수들은 항의 차원에서 야외 발레 군무를 펼쳤다. ‘편견을 깼다’던 그의 도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저는 춤을 통한 도전을 좋아합니다. 우리가 이 작품을 계속하는 이유죠.” 9∼20일.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 6만∼14만 원. 8세 이상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400년 동안 사랑을 기다리며 피를 마실 수밖에 없었던 ‘드라큘라’. 이 배역을 다시 맡기 위해 13년을 기다린 ‘레전드’ 신성우(51)가 무대로 돌아왔다. 서울 서초구 한전아트센터에서 최근 뮤지컬 ‘드라큘라’ 연습 중 만난 신성우는 “2006년 무대를 끝으로 제게 미완으로 남아있던 드라큘라의 비극적 사랑, 인간의 숙명, 처절한 피 맛을 보여드릴 것”이라고 했다. 신성우는 국내 뮤지컬계 ‘최장수 드라큘라’다. 1998년 국내 초연을 시작으로 연이어 무대에 올라 이번이 네 번째 도전이다. 초연 후 20년이 흘렀지만 다시 흡혈귀 변신을 택한 데에는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가수였던 제게 처음으로 연기자를 꿈꾸게 해준 작품입니다. 마지막 공연이 ‘흡혈귀’라는 선입견에만 갇혀 늘 아쉬움이 있었죠. 처절한 사랑 이야기를 언젠가 꼭 다시 하고 싶었습니다.” 작품은 브람 스토커의 동명 소설(1897년)을 각색한 체코 뮤지컬이 원작이다. 흡혈귀의 운명을 거부하고 사랑을 택했다는 이유로 저주에 고통받는 드라큘라 백작을 그렸다. 전 세계에서 500만 명이 관람한 고전이다. 올해 초 뮤지컬 ‘잭 더 리퍼’에서 연출가로 데뷔한 그는 “드라큘라가 왜 사람을 죽이고 피를 마실 수밖에 없었는지 작품 연출가, 음악 감독과 논의해 연기하는 데 집중했다”며 “캐릭터를 관객 친화적으로 그렸다”고 했다. 솔로 곡도 이번에 새로 추가됐다. 수도원 사제들이 부르던 넘버는 드라큘라와 대립하는 인물 ‘반 헬싱’의 야욕을 드러내는 곡으로 바뀌었다. 그는 “근본부터 달라진 드라큘라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동명의 뮤지컬 ‘드라큘라’와의 차별성도 강조했다. “다른 ‘드라큘라’가 팝에 기반한 브로드웨이 감성을 보여준다면 저희는 동유럽의 무겁고 클래식한 감성을 강조한 ‘진지한 드라큘라’를 작품에 녹였습니다.” 신성우를 논할 때 ‘로커’라는 정체성도 빼놓을 수 없다. 팬들이 그의 가수 복귀를 고대한다는 걸 그 역시 잘 알고 있다. ‘슬슬 시동을 걸 때가 됐다’는 마음가짐을 내비쳤다. “며칠 전 무작위로 노래를 듣는데 자꾸 제 옛날 노래들이 재생되면서 저도 모르게 푹 빠져들었어요. ‘할 때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이 왔죠. 제작자는 ‘준비됐으니 몸만 오면 된다’더라고요. 하하.” 다만 무대에서 드라큘라의 처절함을 토해낸 뒤에야 그의 록을 다시 볼 수 있을 듯하다. 록에는 다른 종류의 감성충전 시간이 필요하단다. “록 발성 덕분에 뮤지컬 무대에서 강력한 캐릭터를 맡아왔지만 음악인이 되려면 감성이 ‘찰랑찰랑’ 차오를 때까지 따로 시간이 필요해요. 먼저 드라큘라의 연기를 맛보시고 나면 로커 신성우도 새롭게 보일 겁니다.” 5일∼12월 1일. 서울 한전아트센터. 6만∼14만 원. 8세 이상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우리도 독서율 급락에 고심하고 있습니다. 해답은 독서 조기교육밖에 없어요.” 85.7%. 2015년 스웨덴의 독서율(만 15세 이상 국민 중 1년에 책을 1권 이상 읽는 비율)은 세계 1위다. 같은 해 8.4%에 그친 한국에 비하면 10배를 웃돈다. 그런데도 스웨덴 정부는 독서율 급락을 막는 것을 주요 과제 가운데 하나로 꼽고 있다. 2013년 90%였던 독서율이 빠르게 하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테보리 국제도서전에서 26일(현지 시간) 만난 아만다 린드 스웨덴 문화부 장관(39·사진)은 “유튜브, 인터넷 때문에 독서율이 떨어지는 건 세계적 흐름이라 막기가 힘들다”고 토로했다. 그는 올 1월 문화부 장관에 취임했다. 그의 말에서 스웨덴 정부가 그간 이룬 독서정책에 대한 자신감보다는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한 책임감이 무겁게 느껴졌다. “독서장려 예산에만 매년 수백만 달러를 투입해요. 도서관의 역할을 강화하고 책에서 멀어진 젊은층을 끌어들여야 하고…. 계속 고민해야죠.” 스웨덴 정부가 내놓은 정책의 핵심은 독서교육의 시작을 앞당기는 것이다. 그는 “입학 전의 프리스쿨은 물론이고 보건소에서 아기와 부모에게 책을 보급하고 있다”며 “가정에서도 부모가 책과 멀어지지 않도록 해야 독서 조기교육의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스웨덴 정부가 독서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이유는 뭘까. 그는 “독서가 곧 민주주의의 실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독서는 모두가 같은 조건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배움의 방법이자 자아실현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번 도서전에 주빈국으로 참가한 한국의 문학에 대한 기대감도 드러냈다. “번역의 어려움으로 그간 한국의 작품이 스웨덴에 많이 소개되지 않았어요. 독특한 매력을 가진 한국 문학이 스웨덴 독자들에게 소중한 보물이자 신선한 자극이 되길 바랍니다.”예테보리=김기윤 기자 pep@donga.com}
‘K-문학’이 스웨덴에서 날갯짓을 시작했다. 26일부터 29일까지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열린 ‘예테보리 국제도서전’에서 한국 문학은 “독특하면서 깊은 매력이 있다”는 평을 받으며 독서율 1위 국가에 신선한 자극을 불어넣었다. 북유럽권 최대 문화축제로 꼽히는 이번 도서전에 한국은 ‘한-스웨덴 수교 60주년’을 맞아 주빈국으로 초청받았다. 한강 김언수 현기영 신용목 등 9명의 작가는 ‘인간과 인간성’을 주제로 현지 독자와 대화하며 한국 문학의 매력을 알렸다. 28일(현지 시간) 작가와의 대담에 참석한 이들은 “한국 문학에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깊은 여운이 있는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남북 분단, 민주화운동과 ‘미투 운동’에 대한 질문도 이어졌다. 김행숙 시인은 “스웨덴 사람들이 문학 작품 속 낯선 역사적 맥락을 경청하고 이해하려는 태도가 인상적이다”고 했다. 한국관에 전시된 도서 가운데 77종은 사회역사적 트라우마, 국가폭력, 난민과 휴머니즘, 기술문명과 포스트휴먼 등 소주제와 관련된 책으로 구성됐다. 박광수 작가의 미디어아트와 헤드셋을 이용한 특별전시는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한강 작가의 인기는 뜨거웠다. 그가 향하는 곳에는 항상 긴 줄이 이어졌다. 한국 문학의 불모지였던 이곳에서 2017년 출간한 ‘채식주의자’ 스웨덴어 번역본은 K-문학의 싹을 틔운 작품이다. 오디오북, 전자책을 포함해 약 2만5000부가 팔렸다. 그에 대한 관심은 약 2주 전 현지에 출간된 ‘흰’으로도 이어졌다. ‘흰’은 소설, 시, 에세이의 성격을 복합적으로 지닌 작품이다. “지금까지 작품 중 가장 자전적인 아픔을 이야기했다”는 그의 설명에 진지하게 메모하는 관람객도 많았다. 한 관람객은 “정말 아름답게 책을 쓴 작가를 만나 큰 영광이다”고 말했다. ‘스릴러 강국’ 스웨덴에서 김언수 작가의 범죄스릴러 ‘설계자들’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도서전 주최 측이 현지 인기를 감안해 김 작가의 참석을 별도로 요청했을 정도다. 김 작가는 “한국의 국력과 문화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문학에 대한 관심도 높아진 데 따른 결과 같다”며 몸을 낮췄다. ‘설계자들’의 스웨덴어판 편집자 한스올로브 외베리는 “하드보일드한 북유럽 문학과 다르게 한국 스릴러는 서정성과 짜임새를 고루 갖춘 ‘이상한 매력’이 있다”고 설명했다. ‘말괄량이 삐삐’가 탄생한 그림책 강국 스웨덴에서 한국 그림책의 약진도 눈에 띄었다. 이수지 작가는 “작품이 아직 스웨덴어로 출간되지 않았는데도 작가를 먼저 알아볼 정도로 제법 큰 팬덤이 있어 놀랐다. 북유럽에는 ‘그림책=아동책’이라는 고정관념이 없어 성인도 독특한 서사와 그림으로 구성된 한국 그림책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 ‘몇 권이라도 팔리긴 할까’라고 걱정하며 이명애 작가가 한국에서 가져온 그림책 ‘플라스틱 섬’은 수십 권이 모두 동났다. 현지 출판 관계자들도 작가들을 찾아와 북유럽권 출간을 논의했다. 지금까지 스웨덴에 번역된 한국 문학은 33종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인기는 더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김사인 한국문학번역원장은 “과거 역사적 특수성에 갇혀 있던 한국 작품이 점차 세계적 수준의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다. 역동성과 깊은 철학을 갖춘 한국 문학이 북유럽에도 바람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예테보리=김기윤 기자 pep@donga.com}
“20세기는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에 많은 상처를 남긴 시간이었습니다.” 한강 작가(49)가 27일(현지 시간) 스웨덴 ‘예테보리 국제도서전’ 세미나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세미나는 ‘사회역사적 트라우마’를 주제로 한강 작가와 진은영 시인(49)이 스웨덴 저널리스트, 시인과 대담을 진행했다. 한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흰’은 스웨덴에서 출간돼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한 작가는 “6·25전쟁, 5·18민주화운동, 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 바르샤바에 가해진 폭격까지…. 가깝게는 2014년 봄 한국에서 (세월호가 침몰한) 비극적 사건이 있었는데 애도조차 마음대로 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진 시인도 “세월호 사건으로 상처를 겪은 청소년, 유가족을 위한 시를 집필하는 과정에는 용기가 필요했다”고 했다. 이튿날 진행된 한 작가의 개인 세미나에서도 375석의 유료 좌석이 가득 찼다. 50여 명은 끝내 입장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가 말을 시작할 때면 객석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흰’을 낭독하는 시간에 청중은 ‘낭독을 더 원한다’는 취지로 “Yes! Yes!”라고 외치며 그의 음성을 한마디라도 더 귀에 담길 원했다. 스웨덴 진행자가 ‘흰’과 관련해 “고통, 상처가 한강 작가의 시작인 것 같다”고 하자 한 작가는 “저는 그냥 썼을 뿐인데 만약 책에서 고통이 느껴졌다면 제가 느끼는 삶의 핵심에 고통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답했다. 이어 ‘흰’에 수록된 글 65편 가운데 몇 편을 더 낭독하자 청중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스웨덴에서 출간된 한 작가의 책 3권의 편집을 맡은 니나 아이뎀 씨는 “한강 작가의 작품은 어떤 책도 따라가지 못하는 ‘오리지널’이다. 그의 다른 저서와 다른 한국 작가의 작품도 출간하고 싶다”고 말했다.예테보리=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콧대 높은 독일 발레 무용수들이 한국 춤을 춘다? 독일 올덴부르크 국립극장 산하 발레단이 한국 전통춤에 기반한 창작무용 ‘달에 홀린 피에로’(Pierrot Lunaire)를 2019∼2020 시즌 정기공연으로 선보인다. 안무를 맡은 이혜경 안무가(45·사진)는 2015년 오스트리아에서 무용극 ‘결혼’의 안무를 지도하며 한국 무용가 최초로 유럽 국립극장의 시즌 공연을 맡았다. 10월 12일 첫 공연을 앞두고 독일 현지에서 안무를 지도 중인 이 안무가를 e메일로 인터뷰했다. 그는 “한국 춤을 알릴 수 있어 감격스럽다. 당당하게 실력으로 박수받겠다”고 했다. 그가 구상한 ‘달에 홀린 피에로’는 벨기에 시인 알베르 지로의 작품 ‘달에 취하여’를 한국적으로 해석한 작품이다. 그는 “지친 현대인을 상징하는 피에로에 한국적 움직임과 미장센을 입혔다”며 “무용수들은 감태나무 지팡이를 짚고 등장하는 피에로의 모습을 특히 좋아한다”고 했다. 한국 무용이 해외 축제, 투어에서 단기 공연을 한 적은 많지만 유럽 내 국립극장이 한국 춤 안무가를 공식 초청해 ‘간판 창작물’을 선보이는 건 파격이자 이례적인 일이다. 공연은 2020년 5월까지 총 15회가 예정돼 있다. 무용수들이 특히 어려워하는 건 날숨 호흡법이다. 한국 춤은 호흡을 뱉어 ‘비워진 상태’를 최고의 멋으로 여기는 반면, 힘과 기술을 강조하는 유럽의 무용은 상대적으로 날숨 운용에 서툴다. 이 안무가는 “숨을 내뱉고 근육이 이완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유독 낯설어해 이를 중점적으로 지도한다. 두 달 가까이 매일 3시간씩 가르쳤더니 무용수들이 이제 좀 춤을 이해하는 것 같다”며 웃었다. 그를 초청한 발레단장 앙투안 쥘리도 “무용수들이 한국 춤의 질감, 철학, 호흡법을 통해 움직임의 어법을 확장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유럽의 국립극장에 한국 춤 공연을 올리는 게 믿기지 않지만 부담감도 만만치 않다. 그는 “정말 소중한 기회다. 이번에 한국 춤이 인정받아야 지속적으로 우리 춤을 알릴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콧대 높은 관객도 걱정이다. 1833년 개관한 독일 올덴부르크 국립극장은 중소 도시에 있지만 수준 높은 공연을 선보이는 곳으로 유명하다. 무용 매거진 ‘탄츠(Tanz)’는 올덴부르크 발레단을 ‘올해의 5대 유럽무용단’으로 선정할 만큼 무용수의 실력도 출중하다. “매일 각오를 다질 수밖에 없다”는 말에서 그가 느끼는 무게감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목표는 원대하면서 명료하다. ‘한국의 아크람 칸’이 되는 것이다. “인도 전통춤을 현대화해 세계적인 안무가가 된 아크람 칸이 간 길을 걷고 싶어요. 한국 전통춤이라고 해서 이국적 색채만 강조하거나 보여주기식 안무에 그치지 않도록 해야겠지요. 모든 이가 공감할 수 있는 한국 춤을 만들 겁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뻔해진 북핵과 분단 문제, 이제 새롭게 볼 때도 되지 않았나요?” 영화 ‘강철비’ ‘변호인’ 등 화제작을 낳은 양우석 감독(50)이 30일부터 연재하는 다음웹툰 ‘정상회담: 스틸레인3’를 통해 ‘스틸레인’ 유니버스를 확장한다. 전작에서 핵전쟁 시나리오가 포함됐다면, 이번에는 핵잠수함에 갇힌 남북미 정상의 내밀한 대화와 상상력이 동원됐다. 그의 세계관에서 동북아는 다시금 요동친다. 양 감독을 21일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사 사옥에서 만났다. 양 감독은 “독자들이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분단이라는 실체를 새롭게 바라봤으면 한다”고 했다. 그는 8월 말부터 같은 시나리오에 기반한 영화 ‘정상회담’을 촬영하며 웹툰과 영화 제작을 병행 중이다. 작화는 김태건 작가가 맡았다. 장르는 달라도 두 작품은 모두 ‘분단의 키치화’를 경계한다. 그는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분단은 일상이 됐어요. 특히 젊은층이 북한이나 북핵 문제를 바라보는 ‘키치화’(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난)된 시선도 깰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가 그린 세계에서 한반도에 드리운 전쟁의 기운은 오롯이 남북한만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미국, 중국 등 강대국이 짜놓은 판에서 “한반도 문제는 종속변수”가 된다. 양 감독이 분단 문제에 천착한 건 어렸을 적 겪은 트라우마 때문이다. 1993년 1차 북핵 위기를 지켜본 그는 “전쟁이 실제로 날 뻔했고, 언제든 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을 평생 못 잊는다”고 했다. 이때부터 한반도 정세에 호기심이 생긴 그는 ‘닥치는 대로’ 관련 서적을 섭렵했다. 이때 체득한 지식은 요즘도 시나리오 창작의 좋은 원천이 된다. “한 사건이 발생하면 어떤 일이 뒤따라 나올지 시나리오별로 전부 시뮬레이션을 돌려봐요. 그럴듯한 시나리오가 정해지면 그 위에 상상력이 발붙일 만한 적당한 곳을 찾습니다.” 양 감독은 영화 이전 ‘브이’ ‘스틸레인’ 등의 웹툰 스토리 작가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출판만화가 초토화되고 웹툰 시장은 동호회 수준일 때 취미 삼아 웹툰 작가로 발을 들였다. 제가 구상한 세계를 표현하는 게 너무 재밌어 ‘불나방’처럼 뛰어들었다”고 했다. 취미 수준이었다지만 김정일 사망을 비롯해 그가 만화에서 그린 정세는 현실에서도 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예측가’라는 별명도 생겼다. 인터뷰 당일도 그는 “트럼프의 미국 내 상황이 핵심인데 조만간 남북, 북-미 회담이 실현될 것으로 본다”는 의견을 조심스레 드러냈다. 양 감독은 앞으로도 영화와 웹툰을 모두 놓지 않을 참이다. “내수 한계로 결국은 영화든 웹툰이든 수출형 콘텐츠가 필요하다”는 그는 한국형 무협물의 웹툰, 영화화를 구상 중이다. 다만 스트레스가 덜한 웹툰에 조금 더 마음이 간다고 했다. “웹툰 작업은 부담 없이 내 세상을 그릴 수 있잖아요. 반면 영화에서 남의 큰돈을 투자받은 걸 생각하면…. 하하. 다 열심히 해야죠.”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이 책은 한마디로 ‘책이라는 종의 기원’이라 할 만하다. 책 이전의 책부터 “종이책의 시대는 끝났다”는 사망선고가 내려진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책의 변천을 담았다. 인간이 만든 저급한 종이가 인간다움을 만드는 최고의 발명품이 되기까지 진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파이낸셜 타임스’ ‘허핑턴 포스트’ 등에 기호학, 문장부호에 관한 글을 쓰던 저자는 책의 하드웨어에 집중했다. 종이는 활자, 인쇄, 출판, 제본 기술과 만나며 훌륭한 기록물로 거듭났다. 종이책은 “과학과 기술의 최전선이 빚어낸 산물”이 됐다. 책의 역사는 약 2000년으로 잡을 수 있다. 오늘날 책의 주재료인 종이가 만들어지기까지 고대 이집트 파피루스와 양피지를 거쳤다. 문자의 출현과 인쇄술의 발명으로 지식 생산의 토대가 구축됐다. 디자인·삽화 기술까지 가미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책의 외형적 이미지가 완성됐다. 갖춰진 외형에 영혼을 꽉꽉 채워 넣은 것도 인간의 몫이었다. 필경사, 수도사, 발명가, 인쇄 장인 등 ‘출판인’은 매번 수없는 고민 끝에 책을 만들고 변천을 이끌었다. 이 때문에 책의 역사를 훑어보는 건 곧 인간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일이기도 하다. 책은 긴 시간 속에서 인간에게 많이 읽히기 위한 나름의 해답을 도출했다. 저자는 “책이 직사각형인 이유는 소, 염소, 양의 가죽이 직사각형이며 다루기 편한 적정 크기로 만든 이유는 오늘날 사람들이 이 크기의 책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서술했다. 스스로 책이라는 물건의 외형적 진화를 담고 있는 책인지라 책의 질감, 디자인도 특별하다. ‘애서가’라면 소장 욕심이 들 정도다. 표지에 판지를 그대로 노출했으며, 부제는 검정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했다. 마치 건물 설계도를 보듯 표지에 ‘책머리’ ‘표지보강재’ ‘책등’ ‘출판사 로고’ 등 명칭도 충실히 적었다. 풍성한 시각자료도 페이지를 술술 넘기게 만든다. 책 후반부에 실린 ‘콜로폰(Colophon)’도 매력 포인트다. 저자는 “책을 자연스럽게 마무리하려면 보통은 여기에 에필로그를 쓴다. … 그러나 인쇄술이 처음 선을 보인 초창기에는 독자가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 콜로폰이었다”는 설명을 붙였다. 책 뒤편 한쪽 자리 면을 뜻하는 콜로폰은 과거 인쇄업자가 회사 이름, 회사 문장(紋章), 발행 장소 등을 촘촘히 기록한 페이지다. “책은 산 성분이 없는 중성지에 인쇄, 636×900밀리미터 규격의 종이, 1제곱미터당 90그램의 무게, 경기 고양시 인쇄소에서 생산, SM신신명조체, 10.3포인트 … 포켓북 스타일의 8절판으로 누구나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가격을 책정했다.” 구구절절 이어지는 ‘책의 책’에 관한 설명은 요새 말로 ‘TMI(Too Much Information·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정보)’에 가까우나, 읽는 내내 미소를 머금게 한다. 갓 태어난 아이의 출생기록 차트를 보듯 뜨거운 생명력이 느껴진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돈이나 처먹어라(Let Them Eat Money)!” 인류의 미래에 대한 연극을 만들기 위해 ‘도이체스 테아터(DT)’와 훔볼트 포럼이 개최한 워크숍. 참가자들은 ‘인류의 미래 식량’을 주제로 토론하며 저마다 돈, 식량무역, 경제위기에 대한 생각을 말했다. 정작 인류가 씹고 맛보며 영양분을 섭취하는 식량의 본질은 잊혀진 지 오래. 이에 한 참가자가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 “돈만 얘기하면 다 해결되나요? 그럼 당신들은 차라리 돈이나 드세요!” 작품 이름이자 극 중 저항단체의 이름이 된 ‘렛 뎀 잇 머니’는 이렇게 탄생했다. 전문가, 시민의 토론을 거쳐 극본을 완성한 연극 ‘렛 뎀 잇 머니’가 한국을 찾았다. 유럽 최고의 제작극장으로 꼽히는 도이체스 테아터와 훔볼트 포럼이 2년에 걸쳐 만들었다. 작품을 연출한 안드레스 바이엘(60)은 18일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준비 과정은 토론의 연속이었다. 세대별, 계층별로 떠올린 미래는 달라도 위협에 맞서 인류의 존재론적 고민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모두 공감했다”고 밝혔다. 작품이 그린 미래는 2028년까지다. 그럴싸하면서도 ‘에이, 설마’ 하는 의구심도 들게 한다. 2020년 이방카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캘리포니아의 독립 선언. 2022년 가뭄과 내전으로 이란 난민 100만 명 발생, 유럽해역 인공섬 건설 등 모든 아이디어는 토론 중 나왔다. 극은 미래를 상상하는 재미를 주면서도 현재 우리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묵직한 화두를 투척한다. 디스토피아만 펼쳐지는 건 아니다. 바이엘은 “앞으로 나아갈 기회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유토피아적 시각도 있다. 적어도 인류가 ‘충돌시험용 마네킹’처럼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건 피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지구상 모든 문제를 열거하는 듯한 고루함은 피했다. 무대에는 인간, 생명의 본질이자 황폐함, 파괴를 동시에 의미하는 소금을 깔았다. 미래 사회를 그린 영화처럼 배우들은 와이어에 매달려 공중 연기를 펼치기도 한다. 뒤편 스크린에 배우의 라이브 방송이 중계되면서 이를 지켜보는 시민들이 올리는 댓글도 비추는 등 현대적 장치가 다양하게 활용된다. 극은 무대 밖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해외 공연을 마치는 2020, 2021년 중 전문가들이 다시 토론회에서 뭉친다. “그래서 우린 어떤 미래를 준비해야 하죠(Which Future)?” 이들이 마주할 질문이다. 20, 21일. 서울 LG아트센터. 4만∼8만 원.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끝없는 연구와 훈련 끝에 탄생한 프랑스 표 웃음이 무대에 나타났다.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스카팽’은 ‘프랑스 연극은 노잼’이라는 선입견을 보기 좋게 깨뜨린다. 극작가 몰리에르의 희곡 ‘스카팽의 간계’를 각색한 작품으로 임도완 연출(59)이 현대적 매력을 가미했다. 객석의 웃음 타율도 높다. 최근 서울 용산구 국립극단에서 만난 임 연출은 “프랑스 코미디에 녹아있는 서브텍스트(숨겨진 의미나 개념)가 어렵고 한국 정서와 맞지 않는다는 편견이 있다. 관객 맞춤형 각색과 배우들의 ‘훈련된 웃음’을 통해 편견을 깰 것”이라고 했다. 원작은 귀족 부모가 아들에게 정략결혼을 강요하자, 하인 스카팽이 꾀를 내 아들이 사랑하는 여성과 결혼하게 된다는 해피엔딩이다. 출생의 비밀이 등장하는 전형적인 통속극이다. 임 연출의 ‘스카팽’은 원작의 큰 줄거리를 따르되 귀족을 회장님으로 대체하고 난리가 났을 때 ‘태풍 링링이 온 것 같다’고 하는 등 대사 표현을 현대화했다. 또 원작에 없는 작가 몰리에르가 하나의 배역으로 직접 무대에 올라 극을 이끌도록 했다. 스카팽 배역을 맡은 이중현 배우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까불대는 원작 속 캐릭터 대신 댄디한 연기를 주문했더니 너무 어렵다며 고통스러워했다”면서 웃었다. 그는 “어떤 대상을 풍자하려면 세세한 부분에서 관객의 간지러운 곳까지 치밀하게 긁는 맛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임 연출에게는 배우의 신체가 중요한 연극 언어다. 신체극·마임의 대가로 불리는 그는 “시적인 신체를 통해야만 연극을 시적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했다. 다소 난해한 그의 말은 배우의 동작에도 함축과 상징이 십분 담겨야 한다는 뜻. 그의 극에선 배우의 동작을 곱씹는 맛이 있다. 이번에도 풍자의 대상이 되는 ‘회장님’은 늘 뒤뚱대면서 걷고,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반복한다.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소품을 던지고 받을 때도 정확한 타이밍과 각도를 강조했다. 수없이 합을 맞추고 훈련된 동작이 잔웃음을 보장한다는 것. “1988년 극단 ‘사다리’를 만들고, ‘사다리움직임연구소’에서 마임을 계속하면서도 연기에 대한 갈증을 느껴 무대 위 움직임을 더 공부하고 싶었죠. 모든 걸 내려놓고 1993년 프랑스 자크 르코크 국제연극마임학교로 유학을 떠났어요. 움직임, 가면, 오브제만을 전문적으로 배우며 움직임이 극의 구조, 텍스트, 색깔까지 표현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는 관객에게 모든 걸 던져주고 설명하는 연기를 지양한다. 서울예술대 공연학부 교수인 그는 제자들에게도 이를 거듭 강조한다. “대사와 표정으로 ‘나 화났다’고 연기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죠. 진정한 연기는 훈련을 통해 나오되 절대 설명하려고 하면 안 돼요. 배우 알 파치노가 분노를 표현하려고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본 적 있나요?” 29일까지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 2만∼5만 원. 8세 관람가.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왕이 돌아왔다. 왕좌를 내려놓은 적은 없으나, 2년 만에 새로운 ‘왕관’을 들고 스스로 시험대에 올랐다. 웹툰계 시조새이자 역사인 조석 작가(36)가 최근 네이버웹툰 신작 ‘행성인간’을 선보였다. 그는 “5, 6년 전부터 상상만 하다 ‘설마 진짜 그리겠어’라고 생각하던 내용이 정말 웹툰으로 나와 버렸다”며 웃었다.》 조 작가가 새 작품을 내놓은 건 ‘조의 영역’ 이후 2년 만이다. SF스릴러 장르로 학교폭력 피해자인 주인공 ‘정황지’와 그의 몸속에 태어나 그를 ‘행성’으로 부르는 미지의 존재가 공존한다는 줄거리다. 벌써부터 댓글에는 “신작 들고 와줘서 눈물나게 고맙고 사랑한다”는 고백이 줄을 잇고 있다.“식음 전폐해도 그리고 싶은 거 다 그릴 것”‘행성인간’ 첫 회분을 공개한 뒤 10일 서울 용산구 작업실에서 만난 조 작가는 “신작은 소년만화의 문법을 따르되 최소 2, 3년 연재를 목표로 한 장편이 될 것”이라고 했다. 2006년 9월부터 연재하고 있는 최장수 인기 웹툰 ‘마음의 소리’와 병행 연재한다. 요새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도대체 잠은 언제 자느냐’다. 매주 작품 두 편의 콘티와 작화까지 홀로 완성하는데, 전문가에게도 너무나 힘겨운 극한 작업이다. 심지어 ‘어시’(보조작가)도 따로 두지 않는다. “한 컷마다 수제쿠키를 굽듯 장인정신을 담고 싶다”는 고집 때문. 그 대신 막대한 작업량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매일 2, 3시간밖에 못 자요. 그런데 메시도 경기장에서 매주 실력을 증명하잖아요. 고 정주영 회장은 심지어 저보다 더 많이 주무시면서 ‘현대’를 만드셨더라고요. 고작 일주일에 만화 두 편 그리는 저는 식음을 전폐하고 일해야죠.” 이번 작품은 ‘마음의 소리’와는 판이하다. 초월적 존재, 인간관계라는 추상적 개념도 등장하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그만큼 “하나부터 열까지 그리고 싶은 거 다 해봐야겠다”는 열망이 담겼다. 작품을 놓고 독자 해석도 다양하다. 조 작가는 “모든 디테일마다 상징적 의미를 넣은 건 아니다. 예를 들어 ‘행성인간’의 제목 글씨체를 두고도 의견이 많은데, 그냥 장인어른이 쓰신 글씨에 내가 쓴 글자를 하나 추가했을 뿐”이라며 웃었다. 연재기간을 2년 이상으로 잡은 건 장편을 끌고 가며 작가로서 성장하고픈 욕심 때문이다. 에피소드 위주의 작품을 하다 보니 ‘장편작가는 내가 갖지 못한 뭔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부러움도 컸다고…. 유독 이번엔 “조석이 진짜 스토리 열심히 썼다”는 칭찬이 고프다. 그런 그를 움직이는 건 예나 지금이나 독자 댓글이다. “이전보다는 무뎌지고 쿨해졌다”지만 13년째 웹툰을 연재해도 떨리는 건 마찬가지다. “종종 스토리 전체를 예측하는 댓글을 보면 ‘와, 이 사람 뭐지’ 싶을 때도 있어요. 그런데 제일 좋은 건 ‘ㅋㅋㅋㅋㅋ’처럼 그냥 재밌어하는 댓글입니다. 모든 스트레스가 사라져요.” 좋은 웹툰을 묻는 질문에 그는 최근 크게 한 방 먹은(?) 경험을 꺼냈다. “얼마 전 ‘어? 어?’ 하다가 다른 웹툰을 끝까지 봐버렸어요. ‘아차, 당했다’는 생각이 스쳤죠. 억지로 보는 순간 작품의 생명력은 끝이 나요. 어영부영하다 끝까지 보게 되는 웹툰을 만들고 싶어요.”“쳇바퀴 도는 삶이라도 작가인 게 행복해”“고료 드릴 테니 새로 출시하는 게임에 맞게 만화 한 편 그려주시겠어요?”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작가들이 원고료도 없이 인터넷 게시판에 만화를 올리던 시절. 당시 조 작가는 “만화 그리면 돈 주겠다는 제안이 사기 같았다”며 웃었다. 이후에도 한 부동산사이트에서 홍보용 만화를 그려달라는 제안이 있었다. “그걸 받아들였으면 네이버 연재는 아마 못 했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2006년 9월 네이버웹툰 ‘마음의 소리’가 탄생하기 전 한국 웹툰시장은 불모지에 가까웠다. 첫 연재 때도 독자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건강상 휴재한 시기를 빼고는 지각이나 휴재 없이 13년째 한 작품을 밀고 나갔다. 이따금씩 ‘조의 영역’ ‘문유’ ‘조석축구만화’ 등을 병행했다. 그런 성실함이 그를 오늘날 한국 웹툰시장을 만들고 떠받치는 작가로 만든 게 아닐까. 그는 거창한 의미 대신 “그저 후배들을 안심시키고 싶다”고 했다. “저처럼 그림을 못 그려도 만화로 먹고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웹툰은 특정 장르가 인기면 쏠림현상이 심한데, 누구든 눈치 보지 않고 원하는 작품을 그려야죠. ‘타인은 지옥이다’가 인기라면 ‘타인은 지옥일까?’라는 개그만화를 해도 되는 풍토가 필요해요.” 매주 최장수 웹툰 신기록을 갈아 치우며 1200회를 앞둔 ‘마음의 소리’. 어느덧 연재기간도 큰 관심사다. “독자들이 그만하라 할 때까지”라고 공언한 적이 있지만, 최근 심경은 다소 복잡하다. 은연중에 ‘끝’이란 말도 나왔다. “나이 먹고 공감이라는 게 생기면서 까불며 살지 못하겠어요. 앞뒤 생각 안 했던 제가 이제 생각이란 걸 하니 만화가 이전 같지 않다고 느껴져요. 내장까지 긁어내 억지로 연장할 작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슬슬 끝날 때가 오지 않을까요. 독자의 사랑이 증오로 바뀌는 것도 한순간이잖아요?” 물론 조 작가의 웹툰 사랑이 식은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육아를 하며 사랑이 더 활활 타올랐단다. “장기휴재 중 아이와 보낸 시간이 정말 소중했다”면서도 “펜을 놓고 육아 스트레스로 초라해진 자신을 볼 땐, 작가로 쳇바퀴 도는 삶을 살던 시간이 정말 큰 행복이란 걸 느꼈다”고 했다. 그런 조 작가는 요즘 조금 ‘가벼운’ 목표가 생겼다고 한다. “얼마 전 버스 뒷자리 학생들이 ‘걔 요즘 뭐하냐?’ ‘아프대’라고 안부를 묻는 대화를 하더라고요. 그런데 듣다 보니 그게 웹툰 주인공 얘기라는 걸 알고 엄청 웃겼어요. 일상에서 모두가 지인 얘기를 하듯, 제 웹툰 주인공을 걱정하는 날이 오면 좋겠어요.” 조석이라면 실현 가능해 보이긴 하나, 그리 쉽지만은 않은 도전일 터. 그때까진 계속 그의 마음의 소리를 듣고 싶다. 시원하게 낄낄대고 싶지만, 손으로 터지는 웃음을 콱 틀어막고서라도. 13년 곁을 지켜준 ‘반려’만화니까.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짧은 추석 연휴에도 공연계는 풍년이다. 가족이 함께 즐길 만한 신나고 따뜻한 작품들이 관객을 기다린다. 뭣보다 다양한 명작 뮤지컬이 눈을 즐겁게 한다. 코가 커서 슬픈 주인공의 애절한 사랑을 그린 뮤지컬 ‘시라노’가 서울 강남구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공연 중이다. 주인공이 분장한 코와 17세기로 돌아간 듯한 무대세트가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 1940년대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누아르 속으로 빠지고 싶다면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에서 선보이고 있는 뮤지컬 ‘시티 오브 엔젤’을 추천한다. 풍부한 재즈선율로 관객의 귀 호강까지 보장한다. 뮤지컬 ‘맘마미아’는 아바(ABBA)의 멜로디로 신나는 에너지를 안긴다. 누적 관객 200만 명 기록을 세운 명작으로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에서 14일까지 공연한다. 1959년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창작 뮤지컬 ‘벤허’도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에서 연휴 기간 펼쳐진다. 화려한 무대 연출과 웅장한 군무가 빼어나다. 전국 투어 뒤 2주간 서울 앙코르 공연 중인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도 서울 송파구 샤롯데씨어터에서 만날 수 있다. 연극도 풍성하다. 서울 대학로에서는 마르판증후군에 걸린 소녀와 할머니의 가족애를 다룬 ‘안녕 말판씨’가 굿씨어터에서 막을 올린다. 늘 화제를 몰고 다니는 연극 ‘에쿠우스’는 서경대 공연예술센터 SKON 1관에서 공연한다. 짜릿한 무대를 보고 싶은 관객은 스릴러 연극 ‘미저리’가 열리는 서울 세종문화회관을 추천한다. 한편 인터파크는 ‘2019 한가위 예매보감’ 기획전에서 다양한 공연의 할인 혜택과 특별 초대권 이벤트를 진행한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억지로 눈물샘을 자극하는 뻔한 신파를 떠올렸다면 오산이다.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끝내 터지지 않는 담담한 사모곡(思母曲)이다. 연극 ‘사랑해 엄마’는 직관적 제목처럼,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다’는 무대 인트로 음악처럼 헌신적 모성애를 그린 작품이다. 생선을 팔며 홀로 아들 ‘철동’(이준헌, 류필립)을 길러낸 ‘엄마’(조혜련, 정애연)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내용이다. 예상 가능한 전개로 참신함은 부족하다. 다만,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가 이따금씩 영정 사진 밖으로 나와 상상 속에서 가족과 일상을 보내는 설정이 소소한 재미를 준다. 뻔한 전개에 힘을 싣는 건 절제된 연기다. 비슷한 주제의 타 작품과 달리 배우들은 감정을 억누르며 철저하게 일상을 연기한다. “아들을 두고 떠날 수 없다”는 엄마의 외마디 절규 외에 극은 오히려 평온하고 유쾌하기까지 하다. 그 흔한 오열 장면도 없다. 암 선고 후 어머니와 아들이 등을 돌리고 눈물을 훔치거나 웃으며 함께 식사하는 장면이 눈물샘을 더 세게 자극한다. 조혜련은 “과거 코미디 ‘울엄마’처럼 모성애에 깊게 빠지게 한 작품이다. 억척스러운 엄마로서 힘들어도 겉으로는 웃는 감정에 집중했다”고 했다. 이준헌은 “무뚝뚝하고 표현이 서툰 ‘대한민국의 아들’로서, 참고 참아도 삐져나오는 일상 속 슬픔을 끌어냈다”고 했다. 15일까지 서울 대학로 유니플렉스 2관. 4만4000∼5만5000원. 8세 관람가. ★★★(★ 5개 만점)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밭이 한참갈이괭이로 파고호미론 김을 매지요…왜 사냐건 웃지요.”(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남으로 창을 내는데 굳이 으리으리한 집이 필요할까. 넓이 6평(19.8㎡) 안팎의 미니 전원주택이나 세련된 농막이 ‘세컨드 하우스’로 각광받고 있다. 경제적 여유가 상당한 계층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전원주택에도 소형화, 실속화 바람이 부는 셈이다. 2016년 ‘젊은 건축가상’을 받은 신민재 에이앤엘스튜디오 소장(43)은 2013년 경기 양평군에 작은 농막을 설계했다. 건축주는 은퇴를 앞둔 60세 가량의 전문직 부부. 이들은 작은 밭을 장만한 뒤 농기구를 보관하고, 농사일을 하다 잠시 쉴 수 있는 저렴한 공간을 원했다. 컨테이너를 갖다 놓고 농막으로 쓰는 게 보통이지만 부부는 “모양도 예뻤으면 좋겠다”고 했다. 마침 신 소장이 다른 곳에 계획했던 창고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고 해 크기만 작게 만들었다. ‘철골 각파이프’를 바닥에 깔고 EPS 복합패널로 건물을 지은 뒤 양철 골강판으로 외부를 감쌌다. 약 18㎡ 넓이인 이 농막의 건축비는 1400만 원 가량. 신 소장은 “지붕 중앙의 선(한옥의 용마루)이 벽면과 평행하지 않고 틀어진 설계여서 작업 비용이 올라갔는데, 단순하게 만들었다면 1000만 원으로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농막은 가설건축물축조신고만 하면 지을 수 있지만 법에 따라 면적이 20㎡를 넘을 수 없다. 오수처리시설(정화조) 설치는 금지 규정이 없지만 지자체가 대체로 불허한다. 화장실을 만들 수 없다는 뜻이다. 정식으로 전원주택 건축을 결심하기 전 마치 인턴처럼 전원생활을 체험해보려는 이들에게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어린 자녀를 둔 부모가 작은 세컨드 하우스를 마련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경기 남양주에 사는 한아름 씨(39)는 지난해 양평군 서종면에 7평(약 23.1㎡)짜리 세컨드 하우스를 지었다. 주말 등 틈이 날 때 가족과 쉬다 간다. “사는 것도 아니고 시간 날 때만 오는데 굳이 큰 집이 필요하지 않더라고요. 텃밭도 가꿀 수 있고 무엇보다 아이가 잔디에서 뛰고 흙을 만지며 놀아서 정말 좋아요. 주말마다 어디로 놀러갈지 고민 안 해도 되고요.”(한 씨) 요즘은 오픈마켓 앱에서도 집을 판다. ‘이동식 주택’을 검색하면 가격도 모양도 천차만별인 집들이 상당수 나타난다. 이동식 주택은 기초 공사를 통해 고정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농막이 아니라면 주택 신·증축에 따른 인·허가를 받아야 한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건축설계기업이 거실과 주방, 화장실을 갖춘 이동식 미니 목조주택을선보이기도 했다. 건축이 만든 스타트업 간삼생활디자인은 지난해 공장에서 제작해 배달하는 20㎡안팎의 모듈 형 목조주택 ‘ODM’을 출시했다. 고기밀성 단열재를 사용했고 냉난방 설비가 포함됐으며 수납형 냉장고 등을 옵션으로 선택할 수 있다. 기본형 제작비는 4000만~6000만 원대. 여기에 운송비, 전기와 상·하·오수관 설치비용 등이 추가로 든다. 경북 구미시에 사는 노현수 씨(57)는 5년 전 제주시 구좌읍에 마련한 땅에 ODM을 구매해 올 7월 설치하고 세컨드 하우스로 쓰고 있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 땅에 예쁘고 작은 집을 지으려고 여러 곳을 알아보던 차에 판교의 쇼룸에서 ODM을 보고 그 자리에서 계약했다. 노 씨는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는데, 무엇보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며 “은퇴 후 제주도에 살기로 결정한다면 ODM을 추가로 구입해 2, 3개를 함께 놓을 생각”이라고 했다. 세컨드 하우스의 증가는 통계에서도 나타난다.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전원주택지로 선호되는 경기 양평군의 주택 수는 2015년 3만6899호에서 2017년 4만1689호로 13% 늘었다. 이는 주민등록인구(10만8316→11만5105명) 증가율(6.3%)보다 높다. 가평군도 마찬가지다. 강원 인제군은 주민등록인구는 줄었는데 오히려 주택 수가 늘었다. 이윤수 간삼생활디자인 대표(44)는 “‘5도2촌’(닷새는 도시에, 이틀은 시골에서 보내는 생활 스타일)이나 ‘4도3촌’하는 분들이 주로 ODM을 구매한다”며 “해외와 마찬가지로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서면서 작은 세컨드 하우스의 수요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이 쓰레기야. 우린 살아있는데 죽었어.”(문소리) “쳐다봐도 내 안에 아무 느낌이 없어.”(지현준) 서로를 향해 내뱉은 말이 미사일처럼 날아가 폭발한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선을 넘은 두 남녀 사이 ‘말의 전쟁’이 2시간 동안 이어진다. 가시 돋친 말로 상대에게 굴욕감을 안기는 이들은 실은 6년 동안 서로를 미칠 듯 사랑한 연인이었다. 배우 문소리(45)와 지현준(39)이 연극 ‘사랑의 끝’에서 이별을 앞둔 연인으로 무대로 돌아왔다. 지난달 29일 서울 성동구 우란문화재단에서 만난 두 배우는 “연습 때마다 공업용 대형 진공청소기가 영혼을 빨아들여 탈탈 털리는 느낌”이라고 했다. 사랑이 사라진 자리, 이별의 상흔을 그린 ‘사랑의 끝’은 지현준의 50분간의 독백이 끝나면 문소리가 다시 50분 동안 거친 독백을 쏟아내는 2인극이다. 문소리는 “이별이라는 사건을 두고 확연히 다른 이야기를 쏟아내는 언어 전쟁”을 극의 매력으로 꼽았다. 2011년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처음 소개할 당시 참신한 형식으로 극찬받아 30여 개국에서 무대에 올랐다. 이번 첫 한국어 공연은 프랑스 출신 아르튀르 노지시엘이 연출을 맡았다. 연기력이 탄탄한 두 배우에게도 이 작품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대사의 양만 각자 50여 페이지에 달한다. 대사도 거친 데다 감정의 폭도 크다. 지현준은 “사랑의 끝, 인생의 끝을 표현하면서 배우로서 연기의 끝까지 가게 만든다”고 했다. 문소리는 “가슴에 박히는 말을 하나하나 삼킨 뒤 ‘끝났어?’라는 말과 함께 후반부에서 제 감정을 모조리 터뜨린다”고 했다. 둘은 3년 전 연극 ‘빛의 제국’에서 첫 호흡을 맞추며 신뢰를 쌓았다. 이번에도 “믿고 함께할 수 있는” 동력이 됐다. 문소리는 “굵은 철사 같던 지현준 씨가 이 작품에서 너덜너덜해지는 걸 보는 재미가 있다”며 웃었다. 지현준은 “3년 전 연습실에서 감정이 ‘터져’ 스스로 주체할 수 없던 순간, 문 선배가 건넨 김용택 시인의 시를 읽고 큰 위안을 받았다”고 했다. 독하면서 ‘찌질한’ 이별을 담으려면 한국 감성에 맞게 공감 가는 단어를 선택하는 게 필수. 둘은 번역을 마친 대본을 2주 동안 붙들고 다시 ‘최적화’ 작업에 돌입했다. 지현준은 “프랑스어에서 한 단어로 표현되는 ‘수치, 굴욕, 모욕’이라는 말 중 가장 강한 어감을 가진 ‘굴욕’을 택했다”고 했다. 철학적 메시지가 강한 프랑스 작품이 관객에게 어렵진 않을까. “한국 드라마, 영화 속 이별 장면을 떠올려 보세요. 일단 말이 많잖아요.(웃음) 시시비비를 가리고 이별의 명분을 찾는 모습은 한국과 꼭 닮아 있더라고요.”(문소리) 두 배역의 이름은 ‘소리’와 ‘현준’이다. 캐릭터에 얽매이지 않되 무대 위 감정에 충실하자는 취지다. “우리도 작품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감정을 쏟아낼 뿐”이라는 두 배우가 결국 관객에게 던지는 물음은 이것이다. “저희도 누가 답 좀 알려주면 좋겠어요. 누군가 미칠 듯 사랑했던 그 마음,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요?”(문소리, 지현준) 7∼27일. 우란문화재단 우란2경. 3만 원. 17세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지금 젊은 시절로 돌아가 연출하라고 하면 연극 말고 영화 연출했을 거야.(웃음) 요즘 영화관이나 넷플릭스에 재밌는 작품이 얼마나 많은지. 그 수준도 연극 못지않아요.” 백발이 성성한 노(老)신사, 국내 연극연출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정진수 연출(75)의 입에서 “영화가 더 좋은 것 같다”는 말이 나오자 주변 사람 모두 의아한 듯 그를 쳐다봤다. 평생 희곡 대본 수십 편과 씨름하며 연출을 해 온 그의 말엔 연극이 더 진일보해야 한다는 자기반성과 염원을 담고 있었다. 그는 “연극이 살아남으려면 영화나 넷플릭스 이상으로 삶을 뒤바꿀 만한 경험과 ‘인생에 결코 거짓말하지 않는’ 진실함을 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중극단을 이끌며 50년 이상 연극계에 헌신한 정 연출을 지난달 22일 서울 종로구 한국연극인복지재단에서 만났다. 그는 올해 극 연출가로는 유일하게 ‘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채록 사업’ 대상자로 선정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관으로 예술가의 일생, 작품 활동에 대한 인터뷰를 통해 후대 예술인을 위한 기록과 경험을 남기는 게 사업 취지다. 두 달간 5번 진행한 인터뷰에서 정 연출은 이날 “시원하지 뭐. 연극계에 전할 나의 짐을 벗어던진 것 같다”며 구술채록에 참여한 소회를 밝혔다. 그는 민중극단을 이끌며 ‘아가씨와 건달들’ 등 70여 편을 연출 또는 번역했다. 또 성균관대 영문학과 교수 재직 당시 연기예술학과 창설을 주도했다. 그는 “연극, 영상을 위한 전공을 만든 시기는 내 인생에도 중대한 변곡점”이라고 했다. 꾸준한 극단 활동 외에도 윤호진 연출, 윤석화 배우와 제작사 ‘에이콤’을 1993년 공동 설립했다. 에이콤은 현재 뮤지컬 ‘명성황후’ ‘영웅’ 등을 무대에 올리는 대형 제작사. 그는 “능력보다는 이것저것 끼어들다 보니 쉼 없이 많은 작업을 한 것 같다”며 “가끔 정말 기억이 안 나는 것도 있다”고 말하고는 겸연쩍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털어놓는 에피소드에는 상상치 못한 인물도 튀어나왔다. 수녀의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 ‘넌센스’ 초연 당시 그는 다짜고짜 고(故) 김수환 추기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극을 제작한 조민 대표를 도우려고 김 추기경께 전화해 공연을 보러 오시라고 했어요. 근데 정말 오셨더라고요. ‘공연이 좋다’고 격려하셨는데 그 순간은 평생 잊히지 않아요. 김 추기경 추모 영상에 당시 옆자리에 앉은 저도 나옵니다.(웃음)” 2008년 교수직 퇴임 후 그는 암으로 큰 수술을 치렀다. 회복 후엔 현장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전에 제작한 ‘이병철, 정주영, 박정희’를 다룬 역사기록극의 연장선상에서 1987년 민주화운동부터 소련 붕괴 등 한반도의 격변기를 다룬 극을 내년에 올리고 싶다고 했다. “1910년 국권을 상실했으나 이후 7년 사이에 태어난 이병철 정주영 박정희가 대한민국 근현대의 기틀을 닦았죠. 이후 한국은 고도 경제성장과 함께 1987년 민주화, 공산권 붕괴 등을 겪으며 다양한 군상의 인물이 생겨났죠. 이들의 삶을 통해 현대사를 조명하는 것이 극작품으로 흥미롭고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 대본의 틀을 잡고 제작 준비 중입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마음의 상처를 입으면 술보다는 타이레놀? 다소 뚱딴지같이 들리는 이 처방은 실제 미국 켄터키대에서 진행한 실험을 통해 사실로 밝혀졌다. 근래에 실연을 겪은 피실험자 가운데 진통제를 복용한 사람은 가짜 약을 복용한 사람에 비해 마음의 고통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모든 심리적 고통이 약으로 다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울트라 소셜’ ‘다윈의 식탁’ 등을 집필하며 문화와 사회성의 진화에 천착한 저자가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겪는 외로움과 사회성을 진단했다. 책은 누구나 공감 가능한 “혼밥이 좋다” “‘좋아요’ 개수가 신경 쓰여요” “남의 말에 쉽게 흔들린다” 등 일상 사례로 가볍게 시작한다. 저자는 그동안 쌓아온 연구·실험 결과와 본인의 통찰을 곁들여 고민에 대한 학술적 답을 차분히 들려준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빵, 버터 굽는 냄새가 가득한 ‘달콤한 발레’ 보셨어요? 최고 무용수들의 동화 발레를 기대하세요.” 2017년 ‘죽음과 여인’을 시작으로 ‘트리플 바흐’ ‘베토벤의 천사들’의 안무를 맡았던 발레리나 김세연(40)이 올해는 달콤한 가족 동화 ‘헨젤과 그레텔’을 들고 한국을 찾았다.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를 거쳐 미국 보스턴발레단, 스위스 취리히발레단,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스페인 국립무용단 ‘프리메라 피규라’(Primera Figura·수석 무용수보다 한 등급 위인 최고 무용수)로 활동한 그는 “무대 위에서 가장 예쁜 무용수”라며 이번 작품에서 발탁한 이현정 와이즈발레단 수석무용수(27)를 소개했다. 13일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만난 두 사람의 인연은 동료 무용수로 무대에 올랐던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둘은 ‘지젤’에서 주역 ‘지젤’에 더블캐스팅됐다. “신작을 구상하자마자 무대에서 빛나던 ‘지젤’ 현정이를 바로 떠올렸어요. 관객 앞에서 뭘 할지 아는 무용수거든요.”(김세연) “사람 자체가 ‘지젤’인 선생님은 안무가로서도 칼 같은 완벽함을 요구하시죠. 가끔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돼)’처럼 일정 수준 이상의 동작만을 요구하실 때도 있어요(웃음).”(이현정) 마포문화재단·와이즈발레단과 협업한 ‘헨젤과 그레텔’은 아이들을 숲속으로 유인하는 마녀와 그에 맞서는 두 남매의 이야기로 동명의 오페라 줄거리를 기반으로 한다. 동화적 구성을 충실히 따라 뭉클한 가족애를 그린다. 클래식 발레를 토대로 무대를 꽉 채우는 군무와 주요 인물의 연기가 볼거리다. 최근까지 스페인에서 무대 연출을 공부한 김세연의 센스가 유감없이 발휘됐다. “동화 속 상징적 공간인 ‘과자로 만든 집’을 위해 무대에 흙도 뿌리고, 빵과 버터 냄새도 나게 했어요. 무의식적으로 관객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이는 거죠. 무용은 점점 세트를 줄이는 추세지만, 타 장르는 후각적 연출을 활발히 활용합니다.”(김세연) 의상과 조명도 그가 각별히 신경 쓰는 요소다. 다채로운 색감을 활용해 “그림책 읽는 듯한 느낌을 줄 것”이라고 했다. 2년 전 ‘지젤’ 리허설에서 의상의 주름, 조명의 각도 같은 디테일을 챙기는 김세연을 목격한 이현정은 “‘프로는 저런 것도 신경 쓰는구나’라는 생각에 크게 놀랐다”고 털어놨다. 김세연은 “솔직히 조명과 의상이 무용 실력의 30%는 먹고 들어간다”는 고수의 팁도 공개했다. 만나는 동안 두 사람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는 ‘프로페셔널’이다. “확실치 않은 부분을 꼭 짚고 넘어가야 속이 시원하다”는 완벽주의 성격도 닮았다. 스페인과 한국을 오가느라 “단원들과 함께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김세연의 넋두리에 이현정은 “어차피 무용은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했다. 만족을 모르는 프로들의 목표는 확고했다. “‘호두까기 인형’처럼 모든 연령층에 사랑받는 가족 발레 만들 겁니다!”(김세연·이현정) 9월 20, 21일 서울 마포아트센터 아트홀 맥. 3만∼5만 원. 48개월 이상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뮤지컬 같은 영화처럼 영화 같은 뮤지컬도 가능할까. 현실과 시나리오 세계를 오가는 ‘누아르 판타지’ 뮤지컬이 탄생했다. 대극장 특유의 화려한 무대 구성과 참신한 연출의 ‘케미’가 예사롭지 않다.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한 듯 진한 여운이 남는다. 뮤지컬 ‘시티 오브 엔젤’은 1989년 브로드웨이 작품이 원작이다. 1940년대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블랙코미디를 그렸다. 초연 당시 롱런하며 토니상 6개 부문을 석권했다. 자신의 탐정 소설을 영화 시나리오로 만들며 어려움을 겪는 작가 ‘스타인’과 시나리오 속 주인공 ‘스톤’이 극중극 형태로 교차한다. 두 배역이 서로 대화하는 장면에서 ‘스톤’은 작가 ‘스타인’의 내면이 투영된 또 다른 자아를 연기한다. 한 무대 위에서 두 개의 시공간을 동시 구현하는 작업은 쉽지 않다. 연출은 이를 조명의 색감으로 풀어냈다. 시시각각 변하는 흑백(시나리오 속), 컬러(현실) 조명은 극의 중심 매개가 된다. 다만 이를 숙지하지 못한 관객이라면 극 초반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혼란을 겪을 수 있다. 근래에 흔치 않은 대형 뮤지컬 신작이다. 무대디자인, 의상, 영상 등으로 판타지 구현에 총력을 쏟은 흔적이 보인다. 배우들의 유쾌한 입담과 무대 위 활극도 쏠쏠한 재미를 준다. 작품이 추구하는 색이 뚜렷하다. 뮤지컬의 한 축이 판타지라면 다른 한 축은 음악이다. 아쉽게도 메인 넘버 ‘너 없이 난 안돼’ 말고 다른 넘버의 강렬함은 떨어진다. 그럼에도 김문정 음악감독이 진두지휘하는 18인조 밴드와 보컬, 스캣 등의 재즈 선율은 극장의 공기를 1940년대 할리우드로 뒤바꾸는 힘이 있다. 10월 20일까지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6만∼14만 원. 중학생 관람가. ★★★☆(★ 5개 만점)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