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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 벚꽃이 만발했다’는 문장을 ‘공원에 벚꽃이 만개했다’로 바꿔 쓸 수 있을까? 두 문장 모두 비문이 아니지만, 엄연히 의미가 다르다. ‘만발’을 쓰면 공원이 수많은 벚꽃으로 뒤덮였다는 뜻이지만 ‘만개’를 쓰면 벚꽃의 개화가 최고조에 이르렀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도 일상에서는 유의어를 동의어인 양 서로 바꾸어 쓰는 경우가 잦다. 국어사전에서도 종종 발견되는 오류다. 의미가 비슷해 헷갈리는 단어들을 한데 모아 뜻풀이한 유의어 사전이 출간됐다. ‘우리말 어감 사전’(유유)에서 저자 안상순 씨(사진)는 ‘고독’과 ‘외로움’, ‘시기’와 ‘질투’ 등 비슷해 보이지만 미묘하게 어감이나 뉘앙스, 말맛, 쓰임이 다른 단어 90개 묶음의 의미를 구별했다. 안 씨는 1985년 사전전문편집회사인 신원기획 편집자로 출발해 금성출판사와 국립국어원을 거치며 34년간 사전을 만들었다. 유의어 의미 분별에 특별한 비법은 없다. 신문이나 출판물, 방송 등에서 드러나는 한국어 사용자의 언어 사용 양태, 즉 ‘말뭉치’를 풍부하게 수집한 뒤 그 차이를 일일이 솎아 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가령 ‘고독을/외로움을 술로 달래다’와 같은 문장에서 ‘고독’과 ‘외로움’은 같은 뜻으로 어색하지 않게 쓰이고 있지만, ‘예술가는 운명적으로 고독과/외로움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문장에서는 ‘외로움’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저자는 여기에서 ‘고독’은 ‘쓸쓸함’이라는 의미에 더해 ‘자발적 고립’의 요소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해 낸다. ‘시기’와 ‘질투’는 어떨까. ‘영우는 찬경이를 질투했다/시기했다’는 문장에는 두 표현이 모두 쓰일 수 있지만 의미가 서로 달라진다. ‘질투’는 자기보다 우월한 상대에게 언짢은 기분을 느끼는 것이고, ‘시기’는 그런 상대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을 뜻한다. 저자는 순환정의에 빠진 단어 뜻풀이도 바로잡고자 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모습’을 ‘사람의 생긴 모양’으로, ‘모양’을 ‘겉으로 나타나는 생김새나 모습’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경우 두 단어의 의미를 모두 모르는 사람은 사전을 찾아도 뜻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저자가 볼 때 ‘모습’은 표정, 동작 등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형상을 가리키지만 ‘모양’은 추상적이고 유형적인 형상을 뜻해서 맥락이나 상황과는 무관하다. ‘산 위로 둥근 달이 떠오르는 모습’, ‘달 모양이 둥글다’는 두 문장은 각각의 단어가 모두 알맞게 쓰인 용례다. 저자가 유의어 분별 작업을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에게 직접 물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다. 지병을 앓던 안 씨는 집필 작업을 마친 직후 올해 1월 6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이 책은 그가 만든 마지막 사전이다. 그의 아내 박모 씨(61)는 “앞으로 2주 남았다는 주치의의 말을 듣고 남편이 가장 먼저 한 말이 ‘원고를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다. 가제본 된 책을 받고 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저자 주변인들의 설명을 통해 그가 어떤 신념으로 책을 썼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국어를 오래 다룬 자가 빠지기 쉬운 실수가 스스로를 써도 되는 표현과 쓰지 말아야 할 단어를 구분 짓는 언중(言衆)의 선도자로 여기는 것이다. 저자는 반대였다. 언중의 한가운데에 머무르며 말과 글이 막힘없이 흐를 수 있도록 길을 내는 사람이기를 자처했다. 금성출판사에서 함께 일했던 한 동료는 “철저히 말뭉치에 근거해 단어를 수집하는 선배였다. ‘얼짱’과 같은 신조어도 언중이 널리 사용한다면 사전에 등재돼야 한다고 생각했던 분”이라고 말했다. 이번 책은 2017년 ‘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사계절)을 집필하면서 안 씨를 인터뷰했던 웹사전 기획자 정철 씨의 제안으로 기획됐다. 정 씨는 “외래어를 우리말로 순화하는 국립국어원의 우리말 다듬기 회의 때도 안 선생님은 언제나 언중의 입장에서 아이디어를 내곤 했다”고 말했다. 여러 사람이 공간과 기기 등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뜻하는 ‘메이커 스페이스’가 ‘제작자 공간’이 아닌 ‘열린 제작실’이 된 것도 안 씨의 의견이었다. 저자는 책머리에 “이 책이 언어 규범서는 아닙니다. 언어 현실을 규범의 틀로 재단하기보다는 그 실상을 최대한 존중하고 싶었습니다”라고 적었다. 이 책을 절대 원칙이 아닌 현재의 언어문화를 잘 담은 가이드북 정도로 읽는다면 저자의 바람과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 같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어린이가 갑자기 놀이를 ‘시시해’하고 마음은 ‘싱숭해’한다. 함께 놀아주지 않는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섭섭해’하다 이내 ‘소심해’져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심심해’하더니 번뜩 이런 결론을 내린다. 심심하면 어떡하지? 상상해!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출간돼 어린 독자들을 사로잡은 이색 그림책들이 있다. 7일 출간된 그림책 ‘내 마음 ㅅㅅㅎ’(사계절)은 참신한 콘셉트와 재치 있는 삽화로 인기다. 이 책은 출간 약 열흘 만에 알라딘 유아 분야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책은 한 어린이에게 일어난 마음의 변화를 따라가며 초성이 ‘ㅅㅅㅎ’인 단어를 그림과 함께 소개한다. ‘ㅅ’자를 기울여 만든 ‘ㄱ’자로 ‘궁금해’라는 단어를 만들기도 하고, 반대로 뒤집어 ‘냠냠해’라는 단어도 만든다. 다양한 방식으로 조어를 하던 그림책 속 어린이는 ‘ㅅ’자를 하나씩 더 붙여 ‘씩씩해’지고 ‘쌩쌩해’진다는 행복한 결말이다. 이 책은 글자를 그림에 적극 활용했다는 점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작가 김지영은 어린이 얼굴의 눈썹과 귀를 각각 ‘ㅅ’자와 ‘ㅎ’자로 그리는 등 글자를 재미있게 시각화했다. 출판사는 지난해 이 작품에 사계절그림책상을 수여하며 “언어를 물성과 의미의 차원에서 유희적으로 풀어내는 솜씨가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독자들은 “자녀와 함께 해당 초성의 단어를 얘기하는 게임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김 작가는 “초등학교 1, 2학년 자녀 둘을 키우다 보니 자연스레 어린이들의 마음, 감정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이 책도 자녀가 ‘시시해’, ‘심심해’ 등 초성이 ‘ㅅㅅㅎ’인 말을 유독 많이 해서 착안하게 됐다”고 말했다. 어린이들에게 화를 다스리는 법을 알려주는 그림책도 아이와 부모의 마음을 끌고 있다. 이달 초 출간된 ‘화가 호로록 풀리는 책’(위즈덤하우스)의 주인공 어린이는 엉엉 울기, 편지 쓰기, 친구들과 이야기하기, 혼자 있기 등 방법으로 화를 푸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림체가 익살맞아 책을 읽기만 해도 화가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다. 어린이들의 ‘화’에 대한 그림책은 많지만 이 책은 아이들이 화를 푸는 과정에 집중했다는 점이 독특하다. 김숙영 위즈덤하우스 그림책팀 편집자는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판매량이 빠르게 늘고 있는 편”이라며 “보통 화에 관한 그림책 속 어린이들은 대부분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인상을 쓰거나 짜증내지 않고도 화를 풀 수 있다는 점을 알려주는 그림책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그릇과 책과 연인.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 사는 주인공 아델라이다 팔콘이 잃어버린 것들은 의미심장하다.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 통치 시절의 베네수엘라를 떠올리게 하는 심각한 경제 위기 상황은 팔콘으로부터 삶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까지 앗아갔다. 잔혹한 폭력이 일상이 된 도시는 음식을 마음대로 먹는 것도, 무언가를 읽고 배우는 것도, 서로 사랑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차베스’라는 이름이 언급되지 않지만 베네수엘라의 정치·경제적 역사를 아는 독자라면 누구나 이 소설이 차베스 정부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차베스는 빈곤 해방과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을 약속했지만 포퓰리즘 정책을 펼친 탓에 결국 베네수엘라의 경제와 민주주의를 파탄 낸 통치자다. 차베스가 이끌었던 사회주의 혁명인 ‘볼리바르 혁명’의 신봉자들은 정부에 헌신하며 막강한 권력과 이익을 챙겼고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끝없는 폭력에 일상적으로 노출됐다. 팔콘 역시 ‘혁명의 아이들’ 또는 ‘보안관’으로 불리는 혁명 세력의 피해자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어머니를 잃은 팔콘에게 보안관들은 집마저 앗아간다. 팔콘이 ‘스페인 여자의 딸’로 알려진 아우로라 페랄타의 집에 들어가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곳에서 페랄타의 시신을 발견한 팔콘은 절대적 빈곤과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페랄타가 돼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계획을 세운다. 과연 팔콘은 무사히 베네수엘라를 탈출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이름과 삶을 훔치는 설정은 일본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화차’가 그랬던 것처럼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마련이다. 화차는 실종된 약혼녀가 다른 사람의 신분을 훔쳐 살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혼란에 빠지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렸다. 하지만 팔콘의 선택은 베네수엘라의 잔인한 현실과 교차되며 미스터리한 분위기나 박진감을 자아낸다기보다 그저 처절하게만 그려진다. 베네수엘라의 지독한 현실을 정교한 서사와 접목한 이 소설은 단숨에 22개국에 판권이 판매되며 세계적으로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차베스 대통령이 집권한 20년 동안 200만 명 이상의 국민이 베네수엘라를 떠났다. 저자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역시 결국 베네수엘라를 떠났다. 언론에서만 단편적으로 등장하는 베네수엘라의 진짜 모습이 궁금한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제가 40대로 접어들다 보니 기성세대가 ‘기성’으로서 저지르는 실수들을 직접 반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30대 때는 분노에 그쳤던 것 같아요. 이번에 묶은 단편들 중 여러 편이 기성세대의 무지와 오만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쓰게 된 작품들입니다.” 최근 4번째 소설집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창비)를 발표한 김금희 소설가(42·사진)가 말했다. 이번 소설집은 지난해 김승옥문학상 수상작인 ‘우리는…’을 표제작으로 ‘마지막 이기성’(2020년 이효석문학상 우수작품상), ‘기괴의 탄생’(2019년 김유정문학상 수상후보작) 등 평단의 주목을 받았던 단편 7편을 묶었다. 12일 서울 마포구 창비에서 김 작가를 만났다. 단편 ‘우리는…’은 주인공 ‘나’가 대학교 선배 ‘기오성’과 함께 노교수의 종택에서 족보 정리 아르바이트를 했던 3개월을 그렸다.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와 탄탄한 물질적 사회적 토대를 가진 노교수를 병치하며 그 격차를 짚어낸다. 동년배의 세 주체인 나, 기오성, 노교수의 손녀인 ‘강선’의 위계도 각자 다르다는 점을 드러낸다. 김 작가에게 이 소설은 가장 고통스럽게 써서 애착이 가는 작품이다. 처음부터 소설의 모든 세부를 결정한 뒤 쓰기를 시작하지 않는다는 그는 “처음에는 ‘강선’이 너무 미웠지만 쓰는 동안에 그를 이해하게 됐다. 그래서 발표 직전까지 소설을 뜯어고쳤다”고 말했다. 첫 번째 수록작인 ‘우리가 가능했던 여름’에는 청년 세대가 감내하고 있는 팍팍한 세상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대학 삼수생과 학교 적응에 실패한 의대생 두 주인공을 앞세워 젊은 세대가 느끼는 빈곤과 무기력을 그렸다. 그는 “청년 세대에게 ‘목적과 목표를 잃었다’는 비판을 많이 하는데 그들이 원하는 걸 성취하기에 세상이 이미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식의 재단이 기성세대의 오만이라는 생각에서 쓴 소설”이라고 설명했다. 김 작가에게 이번 소설집은 작가로서의 삶에서 두 번째로 맞은 슬럼프를 극복하게 해준 책이기도 하다.(그가 꼽는 첫 번째 슬럼프는 5년간 책을 내지 못했던 등단 직후의 시기다) 그는 2018년 발표한 첫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이 7만 부 이상 판매되며 한국 문단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했다. 하지만 이게 또 다른 부담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앞으로 더 잘 쓰지 않으면 시장 논리에 휩쓸렸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고 충고하는 문단 선배들도 있었다. ‘마지막 이기성’은 그런 부담을 안고 쓰기 시작했다. 연인인 일본 유학생과 재일 한국인을 통해 외국인으로서 겪는 차별과 불안한 청춘의 모습을 그렸다. 김 작가는 “장편을 마무리하고 좀 쉬어야 했는데 부담감 때문에 2019년부터 계속해서 단편들을 써 나갔다. ‘마지막…’은 정말 울면서 썼다”며 웃었다. 김 작가 소설의 애독자라면 그가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참 따뜻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유를 물었더니 “소설을 쓰며 작품 속 인물들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될 수밖에 없다. ‘경애의…’도 원래는 좀 더 비관적인 결말이었는데 자꾸만 경애가 소설 속에서 힘을 발휘하는 바람에 이야기를 바꿨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문단에서 자신이 ‘과장’급 정도의 연차가 쌓였다는 우스갯소리를 자주 한다. 소설을 쓰면 쓸수록 점점 품이 커진다는 점이 그가 꼽는 가장 큰 성장이다. “세상에서 성장한 김금희가 더 성숙한 소설을 쓰게 되는 게 아니라, 소설 속에서 김금희가 더욱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대중에게 과학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는 이른바 ‘과학 커뮤니케이터’의 책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복잡한 과학 개념을 쉽게 풀어쓴 시리즈나 과학계 뒷이야기를 다룬 에세이 등이 대표적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과 후쿠시마 원전 사태 등을 거치며 일상에 파고든 과학의 영향력을 대중이 실감하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과학 전문 출판사 MID는 ‘강석기의 과학카페’ 10번째 시리즈(‘과학의 향기’)를 7일 펴냈다. 2011년 첫 번째 시리즈가 출간된 후 10년 만이다. 저자 강석기 씨는 정통 과학자가 아니다. 그는 학부와 대학원에서 화학 및 분자생물학을 전공한 뒤 기업 연구원을 거쳐 과학 전문지 기자로 활동했다. 출판계에선 대중을 상대로 정보를 전달하는 언론인으로서 그의 이력이 고정 독자층을 형성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시리즈는 과학 배경지식이 부족한 일반 독자들도 관심을 가질 법한 일상 속 소재를 앞세우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의 트로트 열풍과 관련해 좌뇌 및 우뇌가 소리 정보를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설명하는 식이다. 설명 방식이 쉽다고 다루는 정보의 깊이가 빈약한 건 아니다. 저자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실린 뇌 과학 관련 최신 논문의 주요 내용을 책에 담았다. 올 3월 출간된 ‘기발한 천체 물리’(사이언스북스)도 미국의 대표적인 과학 커뮤니케이터인 닐 디그래스 타이슨이 쓴 책이다. 미국 하버드대와 컬럼비아대에서 천체물리학을 전공한 그는 학자라기보다 방송인에 가깝다. 칼 세이건의 후계자로 불리는 그는 세계적인 우주과학 다큐멘터리 ‘코스모스’의 후속작 ‘코스모스: 스페이스타임 오디세이’(내셔널지오그래픽·2014년) 내레이터를 맡았다. 이어 이듬해부터 교양과학 방송 토크쇼 ‘스타토크’를 진행하고 있다. 다양한 우주 사진을 통해 독자들이 천체물리학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한 이 책은 출간 한 달 만에 중쇄를 찍었다. 천문학자 심채경 박사의 과학 에세이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문학동네)도 2월 출간 후 한 달 만에 1만3000부가 팔려 눈길을 끌고 있다. 현재도 독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며 상승세를 유지하는 중이다. 심 박사는 한국천문연구원에서 달 탐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과학자다. 책에는 망원경이 아닌 연구실 컴퓨터와 씨름하는 천문학자의 일상과 더불어 우주과학계 뒷이야기를 담았다. “막연하게 동경해온 천문학자의 진면모를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과학자들의 학문을 향한 순수한 열정이 인상적”이라는 독자들의 반응이 잇따르고 있다. 출판계에선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의 역할이 갈수록 중요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출판계 관계자는 “한국은 오랫동안 고교 때 문·이과를 나눠 왔기에 과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이들의 갈증이 있다”며 “전문가와 일반 독자를 연결하는 과학 커뮤니케이터에 대한 수요는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런 흐름에 따라 과학책 저자들의 출신이나 연령대가 다양해지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노의성 사이언스북스 주간은 “과거 과학책은 은퇴한 학자들이 자신의 학문 성과를 정리하기 위해 쓰는 경우가 많았다”며 “최근에는 과학 커뮤니케이터의 길을 가는 젊은 저자나 준전문가들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식물세밀화가 이소영 씨(37)의 작업실 한쪽에는 영국, 프랑스, 일본에서 건너온 식물세밀화 서적이 빼곡히 꽂혀 있다. 이 씨가 해당 국가에서 직접 구매했거나 경매에 올라왔던 희귀 서적들이 대부분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식물도감도 이 씨의 책장에 꽂혀 있다. 식물세밀화 책 사는 데 도대체 돈을 얼마나 쓴 거냐고 물었더니 이 씨가 웃음을 터뜨렸다. “책 써서 번 돈 전부 식물세밀화 책 사는 데 쓴 것 같아요.” 이 씨는 식물의 시간과 면면을 한 폭의 그림에 담아내는 식물세밀화가다. 식물을 좋아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대학에서 원예학을 전공했다. 미술을 배워본 적이 없지만 대학생 때 우연히 들은 수목학 강의 시간에 식물 해부도를 그리다가 식물세밀화에 관심이 생겼다. 이에 식물화 그리는 사람을 수소문해 1년간 그림을 배운 후 2009년부터 3년간 산림청 국립수목원에서 식물세밀화를 그렸다. 식물에 대한 관심이 직업으로까지 이어진 것. 지금은 식물원 등 식물 관련 기관뿐 아니라 제약회사, 화장품 제조사와 같이 식물세밀화가 필요한 곳의 요청을 받아 그림을 그리는 프리랜서다. 식물세밀화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 ‘식물 산책’(글항아리), ‘식물의 책’(책읽는수요일) 등 저작 활동도 활발히 벌이고 있다. 10일 경기 남양주에 있는 이 씨의 작업실에서 식물세밀화의 매력을 물었다. ―식물을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기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진은 어느 한 개체를 선택해서 촬영하기 때문에 해당 식물 종의 보편적인 특성을 모두 담아내기 어렵다. 그래서 어떤 식물의 가장 보편적인 모습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식물세밀화가 필요하다. 식물세밀화는 여러 지역에서 자라는 식물을 오랜 기간 관찰해서 그 식물의 고유한 특징은 살리고 외부적 요인에 의한 변이는 축소해 그린다.” ―도구는 어떤 걸 쓰나. “펜촉이 얇은 게 중요하다. 나무로 된 펜대에 펜촉을 끼우고 잉크를 묻혀 그리는 편이다. 요즘엔 로트링사의 제도용 펜도 0.03mm까지 생산되고 있어 그림 그리기에 좋다. 모두 5000원 이하의 저렴한 도구들이다. 채색은 수채 물감이나 수채 색연필을 사용한다. 화가에 따라 유화 물감을 쓰거나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식물을 그리는 ‘보태니컬 아트’를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식물이나 꽃, 가드닝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식물 그림을 그리는 것은 식물을 가장 자세히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이다. 사진을 찍을 때도 식물을 그렇게 오래 들여다보지는 않는다. 식물을 사랑하는 다양한 방식을 찾아내고 있는 것 같다.” ―시작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제일 좋은 건 집이나 근처 화단에 있는 식물들을 대상으로 식물 관찰 일지를 쓰는 거다. 식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식물이 살아온 역사를 이해하게 되고 그림을 그릴 때에도 어떤 지점을 강조해야 할지 알게 된다. 식물도감을 휴대하면서 일상에서 발견한 식물들을 해당 식물이 소개된 페이지에 수집하는 것도 재밌는 방법이다.” ―식물세밀화를 그리는 것만이 주는 매력이 있을 것 같다. “각 개체의 현재 생김새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면서 좀 더 너그러운 사람이 되는 것 같다. 주변의 다양성에 눈을 뜨면서 세상을 보다 다층적으로 감각하게 됐다는 점이 제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이다.”남양주=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1991년 3월 1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슈퍼마켓. 오렌지주스를 사려고 들어온 15세 흑인 소녀가 주스 병을 집어 배낭 안에 넣었다. 소녀가 손에 쥔 지폐를 미처 보지 못한 50대 한국인 상점 여주인은 계산대로 다가오는 소녀를 도둑으로 오인해 멱살을 잡았다. 소녀는 이에 맞서 주인의 얼굴을 때려 쓰러뜨렸다. 소녀가 계산대에 주스 병을 올려둔 채 가게를 빠져나가려는 찰나 주인은 권총을 집어 들었다. 소녀는 뒤통수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 이 사건은 삽시간에 흑인들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당시는 백인 경찰 4명이 교통 단속 중 흑인 청년 로드니 킹을 무자비하게 폭행한 ‘로드니 킹 사건’ 직후였다. 이 두 사건은 미국 내 흑인들이 한인 가게에 불을 지르고 아시아계 인종을 무차별 폭행한 ‘LA 폭동’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소설이 황금가지에서 최근 출간됐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 스테프 차(35)는 장편소설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에서 유색인종 간 인종 범죄에 얽힌 가해자와 피해자 가족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묘사했다. 11일 저자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스테프 차는 “백인의 인종 혐오에 관한 책은 이미 아주 많다. 나는 유색인 커뮤니티 간의 갈등을 살피고 싶었다”고 밝혔다. 신간은 28년 전 벌어진 가상의 인종 범죄 사건을 다룬다.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은 LA 폭동의 시발점이 된 한인 상점에서의 상황과 같다. 인종 범죄 가해자의 딸인 한국계 미국인 그레이스 박과 피해자의 동생인 흑인 남성 숀 매슈스가 화자로 번갈아 등장하며 각자의 가족을 조명한다. 그레이스는 인종 혐오 반대 시위에 수차례 참여할 정도로 유색인종의 인권에 관심이 많은 자신의 언니가 가해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고 혼란스러워한다. 숀은 그 사건 이후 흑인으로서의 삶에 좌절한 가족들이 반복적으로 범죄의 길에 빠지는 것을 보고 영원히 누나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에서 헤어 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자는 “죄책감과 수치심을 물려받아야 했던 소수 인종 가해자 가족과 분노를 물려받은 피해자 가족을 조명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가 그레이스와 숀을 화자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레이스 자매는 죄가 없지만 ‘한인 가해자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숀은 살인이라는 폭력의 피해를 직접 당하지 않았음에도 새로운 방식의 고통에 시달린다. 저자는 “소수 인종이 수치심이나 분노, 죄책감을 경험하는 과정에 집중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한인과 흑인 간 갈등의 역사가 이어진 LA에서 자란 저자는 유색인종 간 갈등에 관심을 깊이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인종 갈등과 혐오가 매우 다층적이며 어떤 인종도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유색인종 간의 혐오 범죄는 굉장히 사적인 공간에서 벌어진다. 저마다의 문화와 편견이 서로 다르고 갈등이 매우 다양한 양태로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미국 내 인종 갈등 해소에 대한 그의 전망은 밝지 않다. 그는 “공개적인 인종차별 발언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분위기를 만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으로 인해 인종 혐오가 더 심각해졌다. 행정부가 바뀌어 이런 분위기가 잦아들 수도 있지만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인종 혐오 범죄를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을까. 더디더라도 다양한 인종의 문화와 역사를 지속적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게 저자의 견해다. “무고한 아시아인들이 거리에서 공격당하는 걸 지켜보기가 힘듭니다. 인종 간 역학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계속 해나가야 합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1987년 고 이한열 열사 영결식에서 ‘한풀이’ 춤을 춰 유명해진 이애주 경기아트센터 이사장이 10일 별세했다. 향년 74세. 경기아트센터는 지난해 10월 암 진단을 받은 후 투병해 온 이 이사장이 이날 오후 5시 20분경 경기 성남시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국가무형문화재 승무 보유자인 이 이사장은 전통무용 거장인 고 한성준과 그의 수제자 고 한영숙의 뒤를 이어 정통 승무의 맥을 지킨 인물로 평가된다. 지금껏 무형문화재 승무 보유자는 고인을 포함해 총 5명이 지정됐다. 고인은 딸을 예술인으로 키우고자 한 어머니 손에 이끌려 다섯 살 때부터 무용가 고 김보남을 사사했다. 1969년 한영숙의 첫 제자가 돼 본격적으로 승무와 태평무, 살풀이를 배웠다. 서울대 체육교육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1970∼1980년대 대학가에서 문화운동가들과 함께 춤을 췄다. 고인은 1987년 6월 민주화 대행진 출정식에 이어 같은 해 7월 민주화 시위 중 사망한 이 열사의 영결식에서 넋을 달래는 춤을 춰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았다. 이 때문에 한때 ‘민주화 춤’ 혹은 ‘시국 춤’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 고인은 무용계 후학 양성과 전통 춤 복원에 힘썼다. 그는 고분 벽화에 남아있는 우리 춤의 원형을 찾기 위해 중국 동북지역에 흩어진 고구려 무덤을 여러 차례 답사했다. 전통 춤인 영가무도(詠歌舞蹈·주역을 재해석해 노래와 춤으로 표현한 전통예술)를 복원하기도 했다. 주역 대가로 알려진 대산 김석진 선생으로부터 동양사상을 배워 대학로에서 춤과 철학을 연계한 강의를 진행했다. 1996년 서울대 체육교육과 교수로 임용돼 2013년 정년퇴직했다. 심정민 무용평론가는 “우리 춤의 정신을 잇는 한국의 대표 춤꾼”이라고 평가했다. 최해리 무용역사기록학회장은 “거리에서 맨발로 추는 춤을 인정하지 않던 1970∼1980년대 예술계의 보수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전통 춤을 재창조하기 위해 노력한 분”이라고 말했다. 한국전통춤회 예술감독, 한영숙춤보존회장 등을 역임한 고인은 2019년 9월 경기아트센터 이사장에 취임했다. 전통 춤의 명맥을 잇겠다는 일념으로 최근까지도 제자들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빈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 발인은 13일 오전이고 조문은 11일부터 가능하다. 02-2072-2010전채은 chan2@donga.com·김기윤 기자}
“우리는 사랑의 계절에 있고, 저는 곧 열일곱 살이 됩니다. 흔히 말하듯이 희망과 몽상의 나이지요. 그리하여 여기 저는, 뮤즈의 손가락이 닿은 아이로서, 진부하다면 죄송합니다, 제 신실한 믿음, 저의 희망, 저의 감각, 시인들의 것인 이 모든 것들을 말하고자 합니다. 저는 그걸 봄의 것들이라고 부릅니다.”(1870년 5월 24일, 테오도르 드 방빌에게 보낸 편지) 프랑스의 젊은 천재 아르튀르 랭보(1854∼1891)는 16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문단에 오르기 위해 당대의 거장 시인 방빌에게 자신의 습작 몇 편을 보냈다. 여기에 시에 대한 사랑을 듬뿍 담은 편지를 동봉했다. 이 편지에는 열정에 들뜬 랭보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문학가들의 사상과 세계관을 들여다볼 수 있는 문장은 작품에만 있는 게 아니다. 작가들이 남긴 각종 메모와 편지에서 오히려 더욱 진솔한 그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읻다가 지난해 10월부터 펴내고 있는 문학인들의 서한집(書翰集) 시리즈 ‘상응’은 그래서 눈길을 끈다. 나쓰메 소세키(1867∼1916)를 시작으로 다자이 오사무(1909∼1948), 랭보까지 현재 문학가 3명의 서한집이 출간됐다. 남수빈 읻다 편집자는 “번역자가 문인들의 편지를 모두 읽고 문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편지들을 선별했다”고 말했다. 랭보는 시인 폴 베를렌(1844∼1896)과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와 나눈 편지에서는 랭보가 썼으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랑에 빠진 평범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난다. 랭보는 연인과 다툰 후 “돌아와, 돌아와, 소중한 친구, 유일한 친구, 돌아와. 네게 맹세해, 착해질게”(1873년 7월 4일)라며 애걸하기도 하고, “내가 가서 너와 함께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넌 범죄를 저지르는 거야, 그리고 그에 대해 너는 세세연년 회한을 느낄 거야”(1873년 7월 5일)라며 겁박을 하기도 한다. 나쓰메 서한집을 보면 곳곳에서 돋보이는 그의 재치에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다. 1900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당시 친구였던 시인 마사오카 시키(1867∼1902)에게 영국인들의 큰 키에 대해 이렇게 토로한다. “이런 나라에서는 사람 신장에 세금이라도 매겨야 조금 더 검소한 작은 동물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 맞은편에서 유독 키 작은 녀석이 온다. 잘됐군, 생각하며 스쳐 지나는데 나보다 5센티는 크다. 이번엔 얼굴색 묘한 웬 난쟁이가 다가오는가 싶었는데, 웬걸, 이 몸의 그림자가 거울에 비친 것이었다.”(1901년 4월 20일) 말년에 젊은 문인들에게 문학에 대한 조언을 건네는 편지에서는 진지함이 느껴진다. 그는 젊은 소설가이자 극작가였던 구메 마사오(1891∼1952)에게 “서두르면 안 됩니다. 머리를 너무 괴롭혀서도 안 됩니다. 끈기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끈기 앞에서는 머리를 숙이지만 불꽃 앞에서는 짤막한 기억밖에 허락하지 않습니다”(1916년 8월 24일)라고 썼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문학을 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자이의 편지에는 한 인간이 10여 년에 걸쳐 죽어가는 과정이 몹시 정직하게 그려져 있어 쉬지 않고 읽기가 어렵기도 하다. 수차례 자살을 시도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는 문우(文友)를 비롯한 지인들에게 300통에 이르는 편지를 남겼다. “살아 있는 동안은 비참해지고 싶지 않다”(1935년 10월 31일)던 다자이는 “자살한 뒤에 ‘귀띔이라도 해주지’ 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다”(1936년 9월 19일)고 하더니 목숨을 끊기 두 해 전에는 “살아간다는 것은 원래 시시한 일”(1946년 8월 10일)이라고 썼다. 김현우 읻다 대표는 “작가와 사상가들이 남긴 편지는 작품의 밑그림을 좇는 단서가 되며 그들이 마주했던 시대와 정서를 드러낸다”고 밝혔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헤어질 때 ‘잘 가요’ 대신 ‘돌아와요’라고 인사하는 부족이 있다. 떠나는 이에게 꼭 돌아오라고 인사하는 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수두룩해서다. 이 책은 빨리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도 돌아오지 않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인도네시아 렘바타섬에 거주하는 ‘라말레라’ 부족은 1500명가량으로, 현존하는 수렵채집 집단 중 가장 작은 규모에 속한다. 이들은 고래사냥에 의존해 생계를 잇는 탓에 생태계 보호주의자들의 비판 대상이 되곤 한다. 땅이 메말라 농작물을 재배할 수 없는 외딴 섬에 사는 이들은 목숨을 걸고 앞바다로 나가 떼 지어 다니는 향유고래를 사냥한다. 저자는 2011년 이곳을 처음 방문한 뒤 2014∼17년 여섯 번에 걸쳐 라말레라 부족을 밀착 취재했다. 그는 이들과 함께 사냥에 수십 차례 참여했고, 민가에서 숙식을 같이 했다. 그래선지 책에 수차례 등장하는 고래사냥 장면은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숨 막히게 생생하다. 저자는 고래잡이의 결정적 순간에 힘껏 뛰어올라 작살을 아래로 내리꽂아야 하는지, 체중을 실어 옆에서 밀어 넣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이들을 면밀히 관찰했다. 책은 이들의 미시생활사를 세세히 기록하며 건조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산업사회가 잊어버린 자연을 향한 경외나 특정한 가치에 대한 극진한 믿음 같은 것들을 목도할 때 독자들은 숭고한 감정에 사로잡히리라. 작살 하나를 손에 들고 바다에 훌쩍 뛰어드는 주민의 맨발이 찍힌 사진이 그러했다. 한 인간이 자기 몸무게의 1000배에 이르는 고래를 향해 몸을 던지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지만, 사진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건 그의 연약한 맨살이다. 그가 고래잡이에 무엇을 걸었는지 알 것도 같다. 책을 읽는 내내 몇 년 전 배가 부풀 대로 부풀어 오른 채 육지로 떠밀려온 고래 사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고래는 부패로 발생한 가스를 이기지 못하고 며칠 뒤 굉음을 내며 터져버렸다. 이때 배 속에 담긴 온갖 쓰레기들이 새빨간 피와 함께 사방으로 튀었다. 인간 대 자연의 대립구도는 이런 장면에 적용될 수 있는 게 아닐지. 책장이 넘어갈수록 라말레라 부족은 자연의 편에 훨씬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근 다른 부족들이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고 있지만 이들은 고래잡이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기술을 앞세워 전통을 버리게 하려는 외부의 요구는 인간의 폭력성과 닮아 있다. 저자는 “전통문화는 특정 환경에서 최선의 생존방법을 결정하기 위해 수세기 동안 자연실험을 해온 결과물이며, 그 과정에서 서양의 과학이 짐작조차 못 하는 지식이 축적됐다”고 말한다. 외딴 렘바타섬에서 자연을 정작 훼손하고 있는 이들이 누군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1890∼1945) 선생 탄생 131주년 추모식이 7일 서울 동작구 현충로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에서 열렸다. 재단법인 고하 송진우 선생 기념사업회(이사장 김창식)가 주최하고 광복회와 국가보훈처, 동아일보가 후원한 추모식은 고하 선생의 손자인 송상현 전 국제형사재판소장(서울대 명예교수), 김황식 전 국무총리, 양홍준 서울남부보훈지청장, 현병철 전 국가인권위원장 등 각계 인사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고하 선생은 1916년 중앙학교 교장을 지냈고 국내외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3·1운동을 주도했다. 동아일보 3대, 6대, 8대 사장을 지냈다. 1963년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됐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예술가가 장르를 가로지르는 순간이 마치 번역과 같다고 생각했어요. 이 책은 에세이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사실 여러 예술가들의 작품을 시의 언어로 옮긴 번역서랍니다.” 최근 예술 에세이 ‘예술의 주름들’(마음산책)을 펴낸 나희덕 시인(55)이 말했다. 등단 32년을 맞은 나 시인이 예술을 주제로 산문집을 엮은 건 처음이다. ‘시인이 웬 예술 평론에 나섰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의 시를 읽어 온 독자들에겐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는 ‘쇠라의 점묘화’, ‘섶섬이 보이는 방’, ‘음계와 계단’ 등 자신의 시에서 장르를 막론하고 예술을 향한 사랑을 끊임없이 드러내 왔다. 우연한 기회로 쓰기 시작한 예술 에세이지만 쓰면서 오히려 큰 위로를 받았다는 나 시인을 4일 서울 마포구 마음산책에서 만났다. “팬데믹 상황에서 백신이 중요하다고 하잖아요. 이 책을 쓰면서 ‘마음의 백신’ 역할은 예술이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 시인이 처음 예술 작품에 대한 글을 쓰게 된 건 2004년 조각가 김인경의 전시에서였다. 김 작가는 당시 자신의 전시를 시인의 눈으로 읽어줬으면 하는 생각에 나 시인에게 짧은 평론을 부탁했다고 한다. 갑작스레 받은 부탁이라 공부를 해 볼 새도 없이 느낀 점을 그대로 글로 풀었다. 본 것을 토대로 쉽게 접근해야 오히려 작품을 더욱 깊고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이를 계기로 나 시인은 종종 기록하고 싶은 예술 작품은 짧은 평론이나 산문으로 남겨뒀다. 이번 에세이에는 그렇게 모은 17년간의 기록이 담겼다. 아녜스 바르다, 짐 자무시와 같은 영화감독부터 마크 로스코, 데이비드 호크니 등 화가, 사카모토 류이치나 글렌 굴드 등 음악가까지 여러 장르를 시인의 시선으로 새롭게 읽었다. 그래서 책은 친절하면서도 참신하다. 나 시인은 ‘수영장’ 시리즈로 유명한 호크니에 대해선 판화 연작에 드러난 문학적 요소에, 조각가 케테 콜비츠에 대해선 그에 대해 쓴 다른 여성들의 시에 주목했다. 그는 “예술 언어가 시적인 것으로 몸을 바꾸는 경험이 흥미로웠다”고 했다. 2012년 영국 런던에서 한 해를 보낸 나 시인은 그곳에서 만난 서양 미술사 강사에게 미술을 배웠다. 중학생 때 미술 교사가 미대 진학을 권유할 정도로 미술에 소질을 보였던 그에게는 꿈같은 시간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강사의 집을 찾아 무릎이 아파오는 것도 모를 정도로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던 경험은 현재의 글쓰기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한다. 예술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쉬운 길을 물으니 나 시인은 이렇게 답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직접 그리고, 연주하고, 만들어보는 게 가장 소중하고 바람직한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작자의 자리에 한 번이라도 앉아본 사람은 예술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지기 마련이거든요.”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영원히 늙지 않는 건 축복일까. 적어도 사랑을 하기에는 불멸만큼 나쁜 게 없을 것 같다. 고작해야 수십 년을 살다가 사라져버리는 인간과 사랑을 나누려면 영생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이 소설은 저주 받은 두 존재에 대한 이야기다. 2009년 ‘위저드 베이커리’로 등단한 후 탄탄한 독자층을 다져온 구병모의 여섯 번째 장편소설이 출간됐다. 마법의 빵이 만들어지는 베이커리를 배경으로 인간의 욕망을 들춰낸 ‘위저드 베이커리’를 통해 그의 청소년 소설은 성장소설이라는 공식을 파괴하며, 정밀한 서사와 판타지 요소를 두루 갖췄다는 평을 받았다. 구병모는 이후 피그말리온 아이들(2012년), 버드 스트라이크(2019년)를 통해 자신만의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발전시키면서도 문체를 시니컬하게 다듬어왔다. 이번 신작에서는 한층 더 깊고 짙어진 구병모의 스타일을 감상할 수 있다. 몽환적 분위기에 차가운 문장들을 수놓으면 외로움이 그려진다는 걸 그의 소설이 아니라면 알기 어려웠을 테다. 소설은 동화 ‘구두장이 요정’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발가벗은 요정들이 가난하지만 정직하고 성실한 구두장이를 도운 끝에 구두장이는 부를, 요정들은 옷을 얻게 되는 이야기다. 행복한 결말을 상징하는 요정의 옷에서 작가는 영생을 누리는 존재가 인간의 외피를 입는 상상을 했다. 행복이 저주로 바뀌는 전복의 지점에서 구병모식 소설이 시작된다. 한 사람은 기꺼이 사랑에 빠지며 예견된 불행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지만 다른 한 사람은 누구와도 오래 사랑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사랑을 포기한 ‘안’이 자신과 똑같은 불멸의 존재인 ‘미아’로부터 그의 연인 ‘유진’을 소개받으며 시작된다. 안과 미아는 과거 함께 신발을 만들며 지낸 사이다. 안은 결코 사랑을 모르지 않는다. 오래전 미아를 사랑했지만 혼자의 삶을 원했던 미아를 떠나보낸 적이 있다. 억겁의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난 미아가 유진과 함께 미래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안은 혼란에 빠진다. 유진의 등장을 계기로 안은 사랑에 빠지려고 하면 부러 관계를 끊곤 했던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게 된다. 소설은 단순하지 않다. 흔한 사랑찬가처럼 ‘사랑은 어떤 시련도 극복하고 쟁취해야 할 가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중반부에 등장하는 안이 40년 전 사랑했던 여자의 아들은 이야기를 보다 다층적으로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시인이자 안의 구두공방 수강생인 그는 조산된 아기의 신발을 끝끝내 완성해낸다. 조산기가 있다는 것을, 아기가 떠날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신발을 만드는 모습은 마치 유진을 사랑하는 미아의 모습과 닮았다. 하지만 “더는 쓸데없어진 것이라는 이유로 아름답게 완성시키면 안 되나?”라는 시인의 질문과 그가 완성해 낸 멀끔한 신발은 미처 가닿지 못한 사랑 역시 충분히 아름답다는 걸 시사하는 것 같다. ‘위저드 베이커리’와 비슷한 분위기를 기대하는 독자라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적게나마 스며 있던 경쾌함을 이번 소설에선 찾아볼 수 없다. 전작 ‘아가미’(2010년)와 같이 흡입력이 강한 소설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절반 이상의 문장이 현재형으로, 소설 전체가 마치 안의 독백처럼 읽힌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 특히 안의 내면을 가만가만 쫓아가는 재미가 꽤 크다. ‘위저드 베이커리’를 읽느라 밤잠을 설쳤던 어린이들도 이제는 삶의 유한함과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이 됐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문재인 대통령이 ‘이건희 컬렉션’ 기증과 관련해 “국민들이 좋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거나 특별관을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함에 따라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기증품을 위한 전용 미술관 건립이 추진될 예정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만1600여 점을, 국립현대미술관은 1400여 점을 삼성으로부터 각각 기증받았지만 이들을 전시할 별도 공간이 없다. 현재 보유한 작품들만으로도 포화 상태여서 기존 시설에 기증품만을 위한 상설관을 만들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앞서 28일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현재 전시 공간이 매우 부족해 ‘이건희 컬렉션’을 위한 수장고 등이 필요한 상황이다”고 밝힌 바 있다. 미술계에서는 이건희 컬렉션은 미술사적 흐름에 맞춰 수집돼 왔기 때문에 한자리에서 모아 볼 수 있어야 의미 있는 관람이 이뤄질 수 있다는 목소리가 계속 나왔다. 문체부도 이런 점을 감안해 관련 기관들과 다각도로 논의하겠다는 입장이다. 단 아직 구체적인 시기나 용지가 거론되는 단계는 아니다. 문체부 관계자는 “미술계와 박물관계의 의견을 들어보고 구체안을 만들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한편 ‘이건희 컬렉션’ 기증작들은 다음 달부터 전국 곳곳에서 명작의 향연을 펼친다. 많은 명작들이 수도권 국립기관뿐 아니라 지방 미술관에도 대거 기증됨에 따라 지역 간 문화 격차 해소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누구나 온라인으로 소장품을 볼 수 있는 디지털 아카이브도 활발하게 추진돼 장애인 등 소외계층의 문화 향유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건희 컬렉션을 기증받는 4개 지방 미술관은 관련 특별전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강원 양구군의 박수근미술관은 다음 달 6일부터 10월 17일까지 여는 ‘박수근 작고 56주기 추모 전시’에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1세대 서양화가 박수근(1914∼1965)의 대표작 18점을 선보인다. 올 6월과 8월에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을 각각 여는 국립중앙박물관 및 국립현대미술관보다 관련 작품을 먼저 관람할 수 있는 것. 기증작에는 ‘아기 업은 소녀’ ‘농악’ ‘한일’ ‘마을풍경’ 등 박수근의 대표작이 포함됐다. 이번 기증으로 박수근미술관은 박수근의 유화 17점과 드로잉 112점을 소장하게 됐다. 전남 광양의 전남도립미술관은 전남 출신 거장들의 작품 21점을 기증받았다. 김환기(1913∼1974)의 ‘무제’, 천경자(1924∼2015)의 ‘꽃과 나비’ ‘만선’, 오지호의 ‘풍경’ 등이 포함됐다. 이 미술관은 9월 1일부터 약 두 달간 기증작 전시회를 개최하는 한편 이건희 컬렉션을 모은 별도 전시실을 마련할 계획이다. 제주 서귀포시 이중섭미술관에는 이중섭(1916∼1956)의 대표작 12점이 기증됐다. 미술관은 9월부터 이 작품들의 전시를 시작한다. 이중섭이 1951년 서귀포에 머물 당시 남긴 ‘섶섬이 보이는 풍경’을 비롯해 ‘해변의 가족’ ‘비둘기와 아이들’ ‘아이들과 끈’ 등 유화 6점과 수채화 1점이 포함됐다. 이중섭은 1951년 1∼12월 6·25전쟁을 피해 서귀포로 피란을 떠났다. 그가 일본에서 활동할 때 연인 이남덕 여사에게 보낸 1940년대 엽서화 3점과 1950년대 제작한 은지화 2점도 들어있다. 이번 기증으로 이중섭미술관은 그림 59점과 유품 등 총 96점의 이중섭 관련 전시품을 소장하게 됐다. 이인성(1912∼1950)의 ‘노란 옷을 입은 여인상’, 이쾌대(1913∼1965)의 ‘항구’ 등 총 21점을 기증받은 대구미술관은 12월 기증작들을 선보이기로 했다. 해당 기증품 작가 8명 중 4명(이인성 변종하 서동진 서진달)이 대구 출신이다. 최은주 대구미술관장은 “이번 기증으로 지역 대표 작가들의 대표 작품을 완성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전채은 chan2@donga.com·손효림 기자}
‘이건희 컬렉션’ 기증작들이 다음달부터 전국 곳곳에서 명작의 향연을 펼친다. 많은 명작들이 수도권 국립기관뿐 아니라 지방 미술관에도 대거 기증됨에 따라 지역간 문화격차 해소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누구나 온라인으로 소장품을 볼 수 있는 디지털 아카이브도 활발하게 추진돼 장애인 등 소외계층의 문화 향유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건희 컬렉션을 기증받는 6개 지방 미술관들은 관련 특별전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인성(1912~1950)의 ‘노란 옷을 입은 여인상’, 이쾌대(1913~1965)의 ‘항구’ 등 총 21점을 기증받은 대구미술관은 다음 달 ‘대구근대미술전-때와 땅’ 전시회에 이 작품들을 선보이기로 했다. 올 6월과 8월에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을 각각 여는 국립중앙박물관 및 국립현대미술관보다 관련 작품을 먼저 관람할 수 있는 것. 해당 기증품 작가 8명 중 4명(이인성 변종하 서동진 서진달)이 대구 출신이다. 대구근대미술전은 이 미술관이 개관 10주년을 맞아 올 2월 9일부터 진행하고 있는 전시다. 대구미술관은 삼성으로부터 기증품을 인수받는 대로 전시 작품에 포함시킬 예정이다. 최은주 대구미술관장은 “이번 기증으로 지역 대표 작가들의 대표작품을 완성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1세대 서양화가 박수근(1914~1965)의 대표작 18점도 그의 고향인 강원 양구군으로 가게 됐다. 유화 4점, 드로잉 14점이다. 이 작품들을 기증받는 박수근미술관은 다음 달 6일부터 10월 17일까지 여는 ‘박수근 작고 56주기 추모 전시’에 ‘아기 업은 소녀’ ‘농악’ ‘한일’ ‘마을풍경’ 등 박수근의 대표작을 선보인다. 이번 기증으로 박수근미술관은 박수근의 유화 17점과 드로잉 112점을 소장하게 됐다. 전남 광양의 전남도립미술관은 전남 출신 거장들의 작품 21점을 기증받았다. 김환기(1913~1974)의 ‘무제’, 천경자(1924~2015)의 ‘꽃과 나비’ ‘만선’, 오지호의 ‘풍경’ 등이 포함됐다. 이 미술관은 올 9월 1일부터 기증작 전시회를 개최하는 한편 이건희 컬렉션을 모은 별도 전시실을 마련할 계획이다. 제주 서귀포시 이중섭미술관에는 이중섭(1916~1956)의 대표작 12점이 기증됐다. 이중섭이 1951년 서귀포에 머물 당시 남긴 ‘섶섬이 보이는 풍경’을 비롯해 ‘해변의 가족’ ‘비둘기와 아이들’ ‘아이들과 끈’ 등 유화 6점과 수채화 1점이 포함됐다. 이중섭은 1951년 1~12월 6·25 전쟁을 피해 서귀포로 피난을 떠났다. 그가 일본에서 활동할 때 연인 이남덕 여사에게 보낸 1940년대 엽서화 3점과 1950년대 제작한 은지화 2점도 들어있다. 이번 기증으로 이중섭미술관은 그림 59점과 유품 등 총 96점의 이중섭 관련 전시품을 소장하게 됐다. 2만1600여 점의 문화재를 기증받는 국립중앙박물관과 1600여 점의 근현대 미술품을 받는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들의 이미지를 디지털화해 인터넷에 공개할 방침이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품 48만2000점을 온라인으로 공개한 것처럼 이건희 컬렉션의 이미지를 온라인을 통해 무료로 공개하겠다는 것. 이에 따라 박물관에 직접 찾아가지 않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수준 높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을 전망이다. 정부는 이건희 컬렉션을 한 곳에 모아 관리하고 전시하는 별도 전시관 건립을 검토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이건희 전시관을 만드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면서 “다만 구체적인 부지나 일정이 거론되는 단계는 아니다. 미술계 등으로부터 여러 의견을 들어볼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28일 황희 문체부 장관은 “(이건희 컬렉션을 위한) 수장고 건립은 검토할 수밖에 없다”며 “전시와 관리 방식을 즉답하긴 어렵지만 이건희 컬렉션이 국내외에 마케팅 돼 많은 이들이 한국을 찾고 이를 향유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술을 못 마시는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흔히 듣는 질문을 나 역시 줄곧 들어왔다. ‘왜 안 마셔?’ 하는 질문. (…) 그렇게 묻는 사람은 아마도 애주가는 아닐 것이다. 애주가라면 자기가 마시는 술과 기분이 중요하니 굳이 마시지 않는 사람에게 관심을 둘 이유가 없다.” 에세이 ‘술과 농담’(시간의 흐름)의 저자로 참여한 소설가 편혜영은 술과 관련한 자신의 단상을 이렇게 썼다. 이어서 ‘잘 마시지도 못하는 사람이 억지로 술을 축내는 걸 서운히 여겨야 진짜 애주가’라는 농담 같은 주장을 진지하게 펼친다. 이어지는 두 번째 저자인 소설가 조해진은 이런 ‘농담론’을 펼친다. “내게는 농담이 거짓말의 동의어가 아니라 진담의 다른 버전일 뿐이다.” 최근 독자와 출판계 관계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는 시리즈가 있다. ‘말들의 흐름’ 시리즈다. 출간된 책 전부가 3쇄 이상을 찍을 정도로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술과 농담’은 7번째 책이다. 두 소설가 외에 시인과 소설가 4명이 각자 술과 농담에 대한 생각을 여러 편의 산문으로 풀어놨다. 저자 한 명이 쓴 이전 시리즈와 달리 유명 작가들이 여럿 참여하며 더 큰 관심을 받았다. 1일 출간된 이 책은 인터넷서점 알라딘 에세이 분야 판매 17위를 차지하고 있다. 독자들에게 아직 낯선 1인 출판사에서 출간되고 있는 이 시리즈가 회차가 거듭되며 입소문을 타게 된 이유는 ‘제목으로 하는 끝말잇기’라는 독특한 콘셉트 때문이다. 앞 저자가 두 개의 낱말을 제시하면 그 다음 저자는 뒤의 낱말에다 새 낱말을 이어 붙이는 식이다. 지난해 3월 ‘커피와 담배’(정은)로 시작한 시리즈는 ‘담배와 영화’(금정연), ‘영화와 시’(정지돈) 등으로 이어져 7번째 책까지 왔다. 이번 책 뒤의 낱말에 이어지는 다음 책 제목은 ‘농담과 그림자’(김민영)다. 한 출판계 관계자는 “콘셉트나 디자인과 같은 겉포장에만 치중하지 않았다는 게 시리즈가 이어지며 증명됐다. 소설가 정지돈의 책은 단행본으로 출간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깊이 있는 예술 에세이”라고 말했다. 최선혜 시간의흐름 대표는 “짐 자무시 감독의 영화 ‘커피와 담배’에서 영감을 얻어 기획한 시리즈다. 미등단 작가도 많이 소개하고 싶었는데, 실제로 미등단 에세이스트인 한정원 작가의 ‘시와 산책’이 2만 부 넘게 팔리며 가장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 현암사에서 펴내고 있는 인문서 시리즈 ‘예술가들의 파리’도 호응을 얻고 있다. 이 시리즈는 지난해 출판문화 연구단체 ‘책을만드는사람들’이 ‘올해의 책’ 대상으로 선정했다. 이 단체는 매년 9개 부문에서 ‘올해의 책’을 꼽고 있다. 현암사는 수상 이후 지난달 4번째 책을 출간했다. 시리즈는 예술사상 가장 역동적이었던 시기로 꼽히는 19세기 말∼20세기 초 프랑스 파리를 무대로 하고 있다. 1870년대 파리 코뮌 당시 빅토르 위고가 어떤 정치적 행보를 걸었는지,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이 지나고 친구 관계였던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의 관계가 어떻게 엇갈리는지 등 역사 속 인물로서의 소설가, 시인, 화가들의 면면을 상세히 서술했다. 책의 저자 메리 매콜리프는 미국 메릴랜드대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딴 역사학자다. 김호주 현암사 성인팀 편집자는 “인문서라 재쇄만 찍어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일부 책은 4쇄까지 찍을 정도로 인기가 좋다. 좋은 책을 출판계와 독자 모두가 알아봐주신 것 같다”고 말했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지독히도 건조한 시상식에 윤여정은 신의 선물(godsend)이었다.” 한국 배우 최초로 25일(현지 시간) 아카데미 트로피를 안은 윤여정의 수상 소감에 대해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26일 이런 평가를 내놓았다. NYT는 “윤여정은 시상식에 영화 ‘미나리’에서 보였던 것과 같은 익살스러운 에너지(comic energy)를 가지고 왔다”고 보도했다. 윤여정의 매력적인 언변은 해외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다. 해외 주요 언론과 온라인에선 윤여정의 수상 소감이 ‘시상식 최고의 연설’이라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트위터에 따르면 윤여정이 상을 받은 당일 하루 동안 #윤여정, #YuhJungYoun 등 그를 언급한 트윗이 66만 건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다. CNN은 윤여정의 수상 소감 주요 대목을 편집한 영상을 홈페이지에 게재하면서 윤여정이 “쇼의 인기를 독식했다(steals the show)”고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최고의 연설을 한 수상자는 윤여정”이라며 “그가 한 말 중 가장 재치 있는 부분은 그의 이름을 잘못 발음해 온 수많은 사람들에게 짓궂게 구는(teasing) 대목”이었다고 전했다. 영국 가디언은 “윤여정은 밤새 승리했다”며 “시상식의 진짜 챔피언(What a champion)”이라고 전했다. 더타임스 역시 “윤여정은 올해 영화제 시상식 시즌에 우리가 뽑은 공식 연설 챔피언”이라고 꼽았다. 해외 소셜미디어에서도 윤여정의 발언들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한 트위터 이용자는 “윤여정은 수상 소감으로 오스카상을 한 번 더 수상해야 한다”고 썼다. 또 다른 누리꾼은 “감히 누가 브래드 피트를 놀려대는 윤여정을 막을 수 있을까?”라는 게시물을 올리기도 했다. 윤여정이 기자회견 중 한 소신 발언들에 대해서도 각국 누리꾼들은 “환상적인 철학이다”, “흥미로운 생각을 가진 배우”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편 시상식 이후 인터뷰에서 윤여정에게 “브래드 피트에게 무슨 냄새가 났느냐”고 물어 여론의 질타를 받았던 미국 엑스트라TV 리포터의 영상은 해당 언론사 유튜브 계정에서 27일 삭제됐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장르문학이 아니라면 좀처럼 접근하기 어려운 방식의 전복이 공상과학(SF) 소설에선 가능하다.” 최재천 아작 편집장(50)은 26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SF는 상상도 못 한 세계를 창조해 일상을 뒤집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경외감을 느낄 수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2015년 10월 SF 전문 출판사를 표방하며 설립된 아작은 100번째 책 ‘중력의 노래를 들어라’를 12일 출간했다. 설립 초만 해도 1년에 10권 정도 내면 많이 내는 걸로 봤지만 국내 SF 팬층이 두꺼워진 덕에 매년 평균 약 16권을 선보이고 있다. 최 편집장은 “출판사를 차리기 전 편집 디자인 회사에서 10여 년간 일했다. 3000권 넘게 책을 디자인하다 보니 직접 책을 펴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가 처음부터 SF 전문 출판사를 세우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었다. 역사가 오랜 출판사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신생 출판사가 새로 개척할 수 있는 분야를 찾다 보니 SF를 선택하게 됐다. 어린 시절 좋아하던 프랑스 만화가 장 지로(1938∼2012)의 SF 만화 ‘아르작’에서 출판사 이름을 따왔다. 그는 “일반 독자들처럼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재밌게 읽는 수준이었지 SF를 특히 좋아하진 않았다. 초기에는 교정이나 교열부터 SF 분야까지 공부할 게 많았다”고 했다. 프랑스 작가 베르베르는 ‘개미’ ‘신’ 등 베스트셀러 장르소설로 큰 인기를 끌었다. “10만 부짜리 한 권을 만들려고 애쓰기보다 3000부 정도 나가는 책 30권을 만들자”는 그의 성실함에 독자들도 반응했다. 그는 “첫 2∼3년은 책을 팔아서 번 돈을 책을 만드는 데 모두 투입했다”며 “지금은 100권이 모두 무난하게 2000∼3000부씩 판매되고 있다”고 말했다. 초기에는 코리 닥터로, 코니 윌리스 등 해외 작가의 번역서를 주로 펴냈다. 하지만 국내 SF 저변이 넓어지면서 국내 작품 비율이 최근 약 30%까지 높아졌다. 최 편집장은 앞으로도 꾸준히 국내 SF 팬이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SF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닌 가까운 미래 혹은 현재의 이야기로 읽히는 시대가 온 것 같아요. 과거에는 SF에서나 볼 수 있던 초유의 팬데믹 상황을 직접 경험한 이후에는 더 그렇겠지요.”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영화 ‘기생충’으로 지난해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이 26일 시상식에선 라이브 화상연결을 통해 시상자로 나섰다. 그는 지난해 아카데미 등 각종 시상식과 언론 인터뷰에서 통역을 맡은 최성재(샤론 최) 씨와 함께 서울시내 극장에서 이날 시상했다. 봉 감독은 “감독이라는 직업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정색되고 오그라든다. 오늘은 이 질문을 아카데미 후보에 오른 다섯 명의 감독들에게 던졌다”고 말했다. 이어 감독상 후보에 오른 ‘미나리’의 리 아이작 정(정이삭) 감독 등의 답변이 녹화 영상으로 소개됐다. 이 영상은 봉 감독의 한국어 내레이션과 영어 자막, 해당 감독의 인물 사진, 영화 스틸 컷으로 구성됐다. 정 감독은 “영화는 삶에 대한 응답이어야 한다.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며 “진정 사람들에게 가까워지는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스토리텔러는 늘 우리의 실제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미나리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스티븐 연은 이날 시각효과상 시상자로 나섰다. 그는 시각효과의 패러다임을 바꾼 영화로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언급하며 “1991년 영화를 함께 본 어머니가 침착한 체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해 참석자들의 웃음을 유도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최근 이적표현물 논란을 빚고 있는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대해 교보문고가 판매를 중단했다. 25일 출판계에 따르면 교보문고는 이 책의 신규 판매를 중단한 동시에 온라인 서점에서도 검색이 되지 않도록 조치했다. 교보문고 측은 “대법원이 이적표현물로 판단한 책을 산 독자도 처벌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 고객 보호 차원에서 신규 주문을 받지 않기로 했다”며 “간행물윤리위원회의 판단이 내려지면 이에 따라 주문 재개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출판사 민족사랑방이 1일 출간한 이 책은 총 8권짜리 세트로, 북한 조선노동당 출판사의 원전을 그대로 펴내 국가보안법 위반 논란이 벌어졌다. 이후 일부 시민단체와 개인들이 법원에 판매 및 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통일부도 국가보안법 위반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