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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또다시 총기의 공포에 휩싸였다. 14일 미국 플로리다주 파클랜드의 한 고교에서 한 퇴학생이 반자동 소총을 난사해 17명이 숨지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플로리다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로 선정됐던 파클랜드에서 벌어진 참사에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총기규제법의 필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하지만 전미총기협회(NRA)의 강력한 반대 로비와 미 헌법상의 총기소유권 등에 가로막혀 총기 규제는 늘 흐지부지돼 왔다. ▷남북전쟁 당시 북부군 장교들을 주축으로 1871년 결성된 NRA는 각계각층의 유명 인사를 포함한 약 500만 명의 회원과 막강한 자금력으로 정평이 나 있다. 개인 총기 소유의 정당성을 대변해 ‘포천’지가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이익단체 1위로 선정하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해 역대 미국 대통령 28명 중 9명이 회원이다. NRA는 2016년 대선 과정에서 트럼프 후보 지지에 1140만 달러, 힐러러 클린턴 민주당 후보 반대에 1970만 달러를 썼다고 한다. ▷미국이 총기 규제에 강하게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헌법과 건국 과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791년 발효된 수정헌법 2조엔 국민의 ‘무장할 권리’가 명문화돼 있다. 지금도 많은 미국인은 총기 소유가 침해할 수 없는 기본권이며 ‘나와 가족의 생명을 지키는 것은 경찰이 아니라, 내가 소유한 총’이라는 철학을 갖고 있다. 이는 의회나 정부 차원에서 개인의 총기 소유를 금지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2008년 연방대법원 판례에서도 재확인됐다. ▷영국 등 약 35개국이 개인의 총기 소유를 허용한다. 그러나 미국만큼 총기 사고가 잦은 나라는 드물다. 2015년 이후 미국에선 한 해 4만 명 이상이 총에 맞아 숨지거나 다쳤다. 트럼프 대통령은 여전히 총격범의 ‘정신이상’을 부각할 뿐, 허술한 총기 규제 시스템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고 있다. 미국에서 총기 소유가 허용된 것은 자기방어의 권리를 폭넓게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유도 없이 날아드는 총탄에 맞아 죽어야 하는 아이들과 시민의 권리는 어떻게 보호하나.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놀멍 쉬멍 꼬닥꼬닥’(놀면서 쉬면서 천천히) 걷는 제주가 손짓한다. 속도에 지친 도시인들은 바다의 속삭임 속에 일상의 지친 마음을 달랜다. 오름과 바다, 원시자연, 이름도 생경한 소박한 마을들, 물질하는 해녀들은 섬나라의 속살을 그대로 보여준다. 제주에선 나 홀로 터벅터벅 걷는 혼행족(혼자 여행하는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혼행족 열풍은 호텔과 펜션이 전부였던 제주에 수많은 게스트하우스를 탄생시켰고, 새로운 여행문화를 창출했다. ▷1인 가구 500만 시대. ‘욜로 라이프’(현재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자) 인식이 퍼지면서 아름다운 자연과 등산 스킨스쿠버 등 다양한 레포츠, 힐링 체험이 가능한 제주는 혼행족의 성지로 떠올랐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밤마다 열리는 맥주 파티는 제주를 찾은 젊은이들에게 예상치 못한 추억을 선사한다. 제주특별자치도 등에 따르면 지난해 제주도를 찾은 국내 여행객 1130만여 명 가운데 76.6%는 혼자 또는 소수로 제주를 방문한 것으로 나타났다. ▷제주에 홀로 여행을 갔던 20대 여성이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돼 충격을 주고 있다. 이번 사건은 2012년 7월 제주 올레1코스에서 40대 여성이 살해당한 사건을 떠올리게 만들면서 전국적인 관심 사건이 됐다. 살해 용의자로 지목됐다가 충남 천안의 모텔에서 자살한 한정민 씨(32)는 지난해 다른 여성 투숙객을 성폭행한 혐의로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던 중이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제주의 게스트하우스 등 민박업소는 3497개에 달한다. 2013년 1449개보다 2.4배나 늘었다. ‘제주살이’ 꿈을 안고 바다를 건넌 이주민 증가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게스트하우스는 현행 법령에서 별도의 업종으로 지정되지 않아 정확한 현황 파악이나 관리가 어렵다. 유형에 따라 농어촌민박, 휴양펜션, 관광숙박업 등 제각각으로 영업을 하고 있다. 관리인이나 직원들에 대한 정보를 주무 관청도 알 수 없다고 한다. 혼행족을 노린 끔찍한 범행은 제주의 이미지에도 치명적인 상처가 된다. 제주 여행의 꿈을 깨뜨리지 않을 대비책이 필요하다.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반딧불이 같았던 드론은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돼 밤하늘을 날았다. 스키장 상공에선 스노보드를 탄 사람의 형상이 됐다. 다시 뿔뿔이 흩어진 드론은 오륜기로 변했다. 드론 불빛쇼는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식의 명장면으로 꼽혔다. 해외에서도 “컴퓨터그래픽(CG) 아니냐”는 등 놀라움과 찬사가 쏟아졌다. 1218대로 구성된 드론쇼는 기네스북에 신기록으로 등재된다. ▷수많은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편대비행의 조종사는 한 명이었다. ‘조종사’로 불리는 요원은 사전에 설계된 비행을 시작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의 시작 버튼을 눌렀다. 세 명의 모니터 요원은 각 드론의 상태를 관찰했다. 드론쇼에는 미국의 정보기술(IT) 기업 인텔이 만든 ‘슈팅스타’ 기종이 사용됐다. 인텔 제논 프로세서가 장착된 컴퓨터 한 대가 실시간으로 각 드론과 통신하며 1218대의 움직임을 제어했다. ▷라이브 공연은 아니었다. 지난해 12월 평창에서 녹화한 영상을 생중계 영상에 덧씌웠다. 날씨가 큰 이유였다. 드론은 정해진 경로를 날면서 장착된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과 카메라 등으로 주변 드론의 위치를 확인한다. 바람에 밀려 드론이 흔들리면 주변 드론도 함께 움직이면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도록 프로그램이 짜여 있다. 한겨울 평창의 강풍과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인텔은 지난해 슈팅스타의 회전 날개를 교체하고, 핀란드에서 비행 테스트까지 거쳤다. 하지만 낮은 온도에서 성능이 떨어지는 드론의 리튬이온 배터리의 약점과 혹시 모를 돌발변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 1위 드론 생산 기업은 중국의 DJI테크놀로지다. 다만 정밀 비행 기술은 또 다른 영역이다. 각종 센서는 물론 실시간 통신 및 전파 간섭 방지, 자율 제어 시스템 등 더욱 진보된 기술이 필요하다. 이는 자율주행 차량의 핵심기술로 이어진다. 지금 평창은 드론뿐 아니라 5세대 이동통신, 가상현실(VR) 등 첨단 기술의 각축장이기도 하다. 올림픽에서 선수들이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면, 기업들은 기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또 다른 경쟁을 벌이고 있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서지현 창원지검 통영지청 검사가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지난해 10월 미국에서 시작된, 자신이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하는 ‘#MeToo(미투·나도 당했다)’ 운동의 한국판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정 의원도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변호사였을 때도 못했던 일, 국회의원이면서도 망설이는 일”이라며 #MeToo를 올렸다. 이 의원은 “서 검사 옆에 서려고 몇 번을 썼다가 지우고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며 자신도 비슷한 피해를 봤다는 뉘앙스가 담긴 글을 올렸다. ‘미투 운동’이 한국에서도 확산될 조짐이다. ▷서 검사는 29일 검찰 내부 통신망에 올린 ‘나는 소망합니다’라는 글에서 2010년 10월 벌어진 성추행 사건을 밝혔다. 동료 검사 부친 장례식장에서 안 전 국장이 술에 취해 허리를 휘감는 등 성추행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소속청 간부들을 통해 사과를 받기로 하는 선에서 정리됐지만 그 후 어떤 사과나 연락도 받지 못했다”며 사건 이후 되레 인사 불이익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서 검사는 이 8년 동안 겪었던 고통을 기술했다. 성추행 트라우마로 유산을 했다는 사실도 털어놨다. 그는 살기 위해 잊으려 노력했지만 그날 그곳에서의 행동, 숨결, 그 술 냄새가 더욱 또렷이 새겨졌다고 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다 내 탓이다. 모든 것은 다 내 잘못이다”고 절규했다. ▷이번 사건으로 최고 권력기관으로 불리는 검찰의 이중성과 폐쇄성, 성차별적 구조가 여실히 드러났다. 최고 엘리트라는 검사 역시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범죄의 대상이 됐고, “수시로 가슴이 조여 오고, 누웠다가 발딱발딱 일어날” 정도의 고통을 겪었다. 그 사이 성범죄를 단죄해야 할 검사들은 상명하복 문화에 길들어 쉬쉬했다. 성폭력 피해자의 트라우마는 가해자 처벌 등 합당한 조치가 뒤따르지 않으면 치유되지 않는 만큼 먼저 진실규명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다. 서 검사의 용기가 권력기관 곳곳에 만연한 성폭력에 대한 침묵의 카르텔을 깨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2014년 4월 미국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지는 “난자를 냉동보관하세요, 당신의 커리어를 구하세요(Freeze your eggs, Free your career)”라는 제목의 커버스토리를 게재했다. 유명 기업의 기술 마케팅을 맡고 있던 브리짓 애덤스 씨 인터뷰가 실렸다. 그녀의 얘기는 직장 경력을 위해 임신을 미룬 여성들에게 난자의 냉동보관이 새로운 선택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후 미국에선 난자 냉동보관 열풍이 불었다. 전문가들은 여성의 사회적 성공과 육아가 충돌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그해 연말 애플, 페이스북 등 글로벌 기업들은 최대 2만 달러(약 2131만 원)까지 난자 냉동보관 비용을 여성 사원들에게 지원키로 했다. 블룸버그는 “생물학적 시계에 좌우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꿈도 아기도 지킬 수 있는 방안”이라고 했다. ▷워싱턴포스트지 최근호에 따르면 30대 후반에 난자를 보관한 애덤스 씨는 45세가 되던 지난해, 임신을 시도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2개의 난자는 융해 과정에서 살아남지 못했고, 3개는 수정에 실패했다. 5개는 비정상으로 추정됐다. 마지막 한 개가 그녀의 자궁에 이식됐지만 출산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그녀는 “충분한 난자를 보관해야 한다는 언급을 하지 않는 병원들이 많다. 나쁜 결과에 대한 충고의 부족은 비양심적”이라고 분노했다. 애덤스 씨는 결국 기증받은 난자와 정자로 지난해 임신에 성공했다. 5월 출산을 앞두고 있다. ▷한국에서도 커리어 여성들의 난자 냉동보관이 크게 늘고 있다. 지난해에는 일부 여성 연예인들이 TV에서 “난자를 냉동보관하고 있다”고 고백해 화제가 됐다. 2016년 보건복지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병원 26곳에서 약 4500개의 냉동난자가 보관 중이다. 하지만 만 35세 이후 보관된 난자는 수정 확률이 크게 떨어진다고 한다. 비용도 만만치 않다. 임신과 출산은 개인과 사회의 축복이다. 커리어를 위해 생체 시계까지 인위적으로 거슬러야 하는 고통을 언제까지 여성들이 떠안아야 할까.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1·21사태가 일어난 지 50년이 지났다.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박정희 대통령 살해를 목적으로 청와대 근방까지 침투했던 1968년 그해는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등 한반도 전쟁 기운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다. 김신조 목사를 만나 그가 겪은 남과 북에 대해 들어봤다.》 1968년 1월 22일 오전 1시경. 영하 10도에 칼바람까지 몰아쳤다. 세검정계곡(서울 종로구)은 조명탄과 플래시 불빛, 확성기 소리로 가득 찼다. “나와라. 살려준다. 투항하라.” 계곡의 바위 뒤 곳곳에 자리 잡은 육군 30사단 92연대 소속 장병들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 무기는 수류탄 하나뿐이었다. 북한에서 가져온 총과 350발의 실탄, 13개의 수류탄은 도주 과정에서 인왕산 바위 밑에 숨겼다.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됐다.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 수류탄 안전핀에 손가락을 걸었다. 수년 동안 훈련받은 대로 자폭해야 할 시간이었다. 확성기 소리가 다시 귀를 파고들었다. “반드시 살려준다. 믿고 나와라.” 두 손을 들고 플래시 불빛을 향해 걸어 나갔다. 김신조 목사는 탈북자 또는 귀순용사가 아니다. 1968년 1·21사태 당시 투항한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 부대 6기지 2조 조장(소위)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지시를 받고 남파된 특수부대 장교였다. 당성과 실력을 인정받은 엘리트 군인이었다. 투항 직후 기자회견에서 “왜 내려왔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말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났다. 한국과 북한 모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남한 대통령을 직접 살해하려는 원시적인 도발이 핵개발이라는 치명적 도발로 바뀌었을 뿐 남북 간의 대치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1·21사태 50년을 사흘 앞둔 18일 서울 구로구 성락교회에서 김 목사를 만났다. 그는 “26세 젊은 총각 군인으로 한국에 왔는데 벌써 50년이 지났다. 이제 76세가 됐고 손주들을 포함해 11명의 대가족을 이뤘다. 나도 내 인생을 한번 정리할 시점이 된 것 같다”며 말문을 열었다.○ “한국, 북한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다” 1·21사태 당시 북한군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김 목사는 자리에 앉자마자 걱정부터 했다. ―50년 전과 지금의 남북 관계를 비교한다면…. “북한의 속성은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북한은 변하지 않았는데 북한을 바라보는 한국 사람들의 생각만 너무 많이 바뀌었다.” ―우리 국민의 안보 의식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나. “180도 바뀌었다. 사고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당시에는 6·25를 직접 겪었던 사람들이 많았고, 늘 북한의 위협과 도발 속에 살았다. 그런 고난 속에서 나라를 지켰고 한국이 여기까지 왔다. 요즘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북한 정권에 대해 적개심이 없다. 오히려 북한에 동조하는 사람들만 늘고 있다.” ―50년이 흘렀다. 북한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북한은 바뀐 게 하나도 없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서 예전처럼 적화통일이라는 말을 쓰지 않을 뿐이다. 요즘은 ‘한민족’이라고 강조한다. ‘한민족’에 대해 대한민국에 반대할 사람 얼마나 있겠느냐. 하지만 그게 잘못된 생각이다.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 그리고 김정은으로 바뀌었지만 북한은 한 정권이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 북한은 망할 때까지 절대 대남전략을 바꾸지 않는다.” 그가 남파됐던 1968년은 1년 내내 한반도에서 전쟁의 기운이 감돌던 시기였다. 남한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북한이 김신조 등 특수부대원 31명을 보낸 1·21사태를 시작으로 이틀 뒤인 1월 23일엔 미국 해군 소속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에 나포됐다. 승무원 83명을 태운 채였다. 미국은 동해에 항모와 함정 30여 척을 배치했다. 11월에는 경북 울진과 강원도 삼척에 북한 특수부대원 120명이 침투했다. 강원 평창군 진부면 도사리의 집에서 가족과 함께 살해당한 9세 소년 이승복도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 서울 광화문에 충무공 이순신 동상이 세워진 것도 1968년이었다. 왜구를 물리친 충무공이 북한을 막는 국가의 수호신으로 등장한 시기였다. ―남북 관계가 긴박하다. 한반도 비핵화 가능할까. “비핵화? 안 된다.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뭐라고 했나. 북한은 인민들이 풀을 먹어도 핵 포기 안 한다고 했다. 김정은과 북한 지도부는 체제가 무너지면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죽는 것이다. 김정은에게 핵은 생존이다. 북한 지도부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절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1994년 1차 북핵위기 때 (북핵시설 폭격 계획대로) 했으면 북한이 저렇게까지 가지 못했다. 이젠 붕괴가 안 된다. 북한은 이제 가질 것을 다 가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다고 보나. “2003년도 6자 회담 때부터 잘못됐다. 나는 분명히 반대했다. 난 탈북자가 아니다. 북한의 군사 전략과 전술을 훈련하고 분석한 사람이다. 6자 회담 자체가 핵 개발에 필요한 시간과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고 봤다. 필요할 때마다 빠졌다 들어갔다 하는 것이 공산주의 전략이다. 지금도 똑 같다.” ―평창 겨울올림픽에 북한이 선수단과 예술단 등 대규모 대표단을 보낸다. “북 체제를 선전하기 위해 오는 것이다. 북 체제는 선전·선동으로 유지된다. 국가적으로 선전·선동에 엄청 투자한다. 평창에 오는 것은 오래전부터 세워진 계획이라고 본다. 한국이 이명박 정부 때 겨울올림픽을 유치했을 때부터 계산한 거라고 본다. 먼저 핵 개발하고 겨울올림픽을 통해 북한의 체제와 북한이 살아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선전하려는 계획이 서 있었을 것이다.” ―평화 올림픽이다. 북한도 손님인데 어떻게 대해야 하나. “손님으로만 대해주면 된다. 박수 치고 환호하게 되면 북한은 대한민국을 자신들이 장악했다고 선전할 것이다. 김정은 체제 유지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한국은 북한의 전술을 너무나 모르는 것 같다.” ―현 정부 대북 정책은 어떻게 생각하나. “북한 문제는 많이 연구하고 분석한 전문가들 얘기를 듣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어느 정부든 내 정권에서 이걸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머리에서 빼야 한다. 다음 대로 넘긴다고 생각하고 접근해야 한다. 서두르면 실수를 하게 된다. 북한은 절대 선의를 선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원리 원칙대로 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도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체포된 공비가 아니다. 국방부 바로잡아 주길” 개인적인 얘기로 넘어갔다. 동료와 가족들 얘기를 하는 대목에선 눈가가 붉어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나. “철길을 깔아야 기차가 달릴 수 있다. 관광지도 자원도 없는 한국이 북한의 도발 등 그 어려움 속에서 여기까지 왔다. 그 철길을 만든 것이다. 잘한 건 잘한 것이다. ―한국에 왔을 때 한국군은 어떤 상태였나. “1968년만 해도 북한의 국내총생산(GDP)이 한국보다 많았고, 군 훈련 운영 시스템 등도 앞서 있을 때다. 휴전선 방어도 북쪽과 달리 남쪽은 허술했다. 나는 1·21사태 이전에 두 번이나 휴전선을 통해 한국에 내려와 정찰작전을 수행하고 돌아갔다. 당시 한국군에는 ‘유격’이라는 단어도 없었다. 방첩대에서 조사받으면서 내가 북한에서 받았던 훈련과 전술을 알려줬다. 예비군도 그 때문에 창설된 것이다.” 1·21사태는 지금과 같은 한국의 방위 체제가 새로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다. 그해 2월 육군 병사의 복무 기간이 2년 6개월에서 3년으로 늘어났다. 같은 해 4월 1일엔 예비군이 창설됐다. 모든 성인에게 12자리(지금은 13자리)의 숫자가 부여되는 주민등록증이 처음 발급된 것은 11월이었다. 2년 넘게 효자동 방첩대에서 조사받으며 지내오던 김 목사는 군에 많은 정보를 제공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0년 4월 10일 풀려났다. 자유인이 된 것이다. ―방첩대에서 풀려난 이후 사회 생활할 때 어려움은 없었나. “정부에서 한국화약에 일자리를 만들어줬다. 2, 3개월 다니다 인천에 있는 화약공장 견학을 다녀와서 바로 그만뒀다. 만약 공장이 무슨 사고로 폭파되기라도 하면 바로 내가 뒤집어쓸 것 같았다. 폭파범 누명을 씌워 희생양을 만들까 봐 걱정됐다. 그런 시절이었다. 그런데 3년 후 이리역 폭파사고가 있었다. 도시가 잿더미가 됐다. 그게 그 회사 관련 사고였다. 계속 다녔으면 난 이미 (폭파범으로 몰려) 죽었을 것이다.” ―사회에 나왔을 때 사람들 시선은 어땠나. “난 지금도 지하철을 잘 안 탄다. 얼굴 알아보고 대뜸 ‘너 김신조지? ×××’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다. ‘너 때문에 군대 6개월 더 복무했다. 엄청 고생했다’며 화를 낸다. 처음 회사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그런 욕 정말 많이 먹었다. 당시에 언론에 너무 많이 보도가 돼서 어른들 중에는 지금도 얼굴 알아보는 사람이 많다.” ―생계는 어떻게 유지했나. “이후 건설회사에 다시 취직이 됐다. 그리고 결혼을 했고, 아내 덕분에 신앙을 갖게 됐다. 1996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안보강연과 신앙생활하면서 살고 있다. 이제는 아들딸과 손주 등 10명이 넘는 가족을 이뤘다.” 이 대목에서 그는 잠깐 말을 멈췄다. 다시 입을 여는 데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한국에서 행복을 얻었는데… 경기 파주 문산 쪽에 가면 적군묘지라고 있다. 1·21사태 때 숨진 동료, 친구들이 묻혀있다. 북한이 이제 그들의 유골을 가져가야 한다. 그리고 가족 생각이 난다.” ―북한의 가족은 어떻게 됐나. “처음에 내가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다’고 했을 때는 북한에서 나를 영웅 대접했다고 하더라. 그러나 내가 안보강연 다니고 하니까 1980년쯤에 부모님을 고향인 함경북도 청진 시내 운동장에 세워놓고 1만 명이 보는 앞에서 공개처형 했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인민재판을 한 거지. 그 얘기도 몇 년 후에 청진에서 온 탈북자에게서 들었다. 7남매였는데 6명의 형제는 아예 행방을 알 수 없다. 여러 루트를 통해 수소문해 봤는데 북한에서 아예 주민등록이 말소됐다고 한다. 우리 가족의 기록 자체가 없어진 거지….” ―언젠가 고향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가보고 싶다. 그런데 통일이라는 것은 누구도 모른다. 그건 미래고. 빨리 했으면 좋겠지만 우리는 노력할 뿐이다. 아들딸과 손주들에게 고향집 약도를 그려줬다. 혹시 내가 쓰러지고 나서 통일이 되더라도 꼭 고향에 가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얘기는 없나. “50년 전 나는 분명히 투항했다. 그런데 국방부 기록은 아직도 ‘체포’로 돼있다. 당시 군인들이 자신들의 공을 내세우기 위해 그렇게 기록했을 것이다. 내 아이들은 어릴 때 내가 ‘체포된 무장공비’라는 교과서를 읽고 자랐다. 난 체포된 게 아니다. 국방부가 이제라도 바로잡아 줬으면 한다.”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연초부터 난데없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신건강이 논란이다. “핵 단추가 항상 책상 위에 있다”는 김정은 신년사에 “내 핵 단추는 더 크고 강력하며 실제로 작동 가능하다”고 쓴 트위터 글이 발단이었다. 여기에 언론인 마이클 울프의 저서 ‘화염과 분노: 트럼프 백악관의 내부’는 기름을 부었다. 울프는 트럼프 정부의 설계자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 등 측근들조차 그를 모자란 사람으로 여긴다고 폭로했다. ▷“배넌이 정신을 잃었다”고 분노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6일 트위터에 “나는 성공한 사업가, TV 스타, 그리고 미국 대통령에 올랐다. 이것은 똑똑한 것이 아니라 천재라는 걸 입증한다. 그것도 매우 안정된 천재다”라고 직접 반박했다. 미국 언론은 트럼프 대통령의 ‘인정’에 대한 집착이 다시 도졌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허약한 자존감 때문에 늘 과잉 보상을 기대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야당뿐 아니라 과거 공화당 정권 인사들마저 그의 정신건강에 대한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 ▷미국에서 대통령의 정신건강은 자주 논란의 대상이 된다. 1964년 ‘팩트 매거진’은 정신과 의사들을 상대로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배리 골드워터에 대해 설문했다. 응답한 의사의 49.2%는 골드워터가 대통령직에 부적합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골드워터는 대선에서 패배했다. 이후 ‘골드워터 룰’이 만들어졌다. 정신과 의사들이 직접 진료하지 않은 공인의 정신 상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이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 사회에서는 “대통령의 정신건강이 가져올 리스크에 대해 경고할 의무가 있다”는 목소리가 많다. ▷대통령의 정신건강은 비단 미국의 문제만은 아니다. 부모를 모두 총격으로 잃은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폐쇄성은 지난 정부를 파국으로 몰고 간 한 원인이었다. 미국 대통령은 모든 분쟁 지역에서 대화와 전쟁을 선택할 수 있는, 지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익명의 백악관 내부 인사는 최근 “역사상 모든 전쟁은 우발적 사고였다”고 말했다. 북한 김정은에 이어 트럼프 대통령의 정신건강까지 걱정해야 하나.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문재인 대통령이 3일 경남 거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를 찾았다. 6·13 지방선거가 예정된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의 새해 첫 현장방문이 거제라는 것은 시사하는 점이 많다.이념적 지역적 한계 안고 태어난 친노부산 민주화 세력에 뿌리를 두고 있는 친노(친노무현)는 한국 정치에서 비주류 중에서도 비주류였다. 한 동안 한국 정치의 주류는 보수, 진보는 비주류였다. 보수 중에서도 주류는 TK(대구·경북)고 비주류는 PK(부산·경남)였다. 반면 진보의 주류는 호남이고 비주류는 영남이었다.영남 진보인 친노는 한국정치 지형에서 지역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주류와 섞이기 쉽지 않은’ 외톨이였다. 호남 출신의 동교동계와 이들이 발탁한 수도권 86그룹이 양대 축으로 이끌던 진보진영에 어느 날 등장한 인물이 부산 출신의 인권변호사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2002년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완화되는 듯 했던 지역주의는 금방 복원됐고 지금까지 철옹성처럼 이어지고 있다. ‘지역주의’라는 한국 정치 지형을 규정하는 틀이 만들어진 것은 1987년이다. 흔히 ‘87년 체제’라고 한다. 국민 직접 선거에 의한 5년 단임 대통령제, 국회의원 소선구제가 특징이다. 지역주의가 선거 결과로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처음 치러진 1988년 13대 총선부터다. 당시까지만 해도 부산은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야당세가 강한 곳이었다. 1990년 김영삼 전 대통령은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가겠다”며 3당 합당을 결행했고, 문민정부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YS의 선택은 동시에 PK의 야성(野性)을 누그러뜨리는 결과도 가져왔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를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된 1979년 10월 부마항쟁이 발발한 PK 지역은 오랫동안 야도(野都)였지만 YS가 보수여당의 당수가 되고 대통령이 되면서 보수여권에 편입됐다. 이후 20년 넘게 PK 지역은 보수당의 아성처럼 여겨졌다. 현재 한국 정치 지형의 뿌리가 된 ‘87년 체제’의 정초선거(定礎選擧·단순히 일회적 의미를 갖는 선거가 아닌 정치 지형과 사회의 틀을 잡는 선거)는 1988년 치러진 13대 총선이었다.친노, 2020년 총선을 정초선거로 2년 전 까지만 해도 PK는 보수의 텃밭이 분명했다. 하지만 2016년 치러진 20대 총선은 보수의 텃밭이었던 PK 지역에 균열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으로 친노 진영은 드디어 PK 지역에서 ‘87년 체제’를 해체할 수 있는 결정적 기회가 왔다고 보고 있다. 문 대통령과 친노 진영은 PK 지방권력 교체야말로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이어진 필생의 과업인 지역주의 극복과 ‘87년 체제 이전으로의 복귀’를 보여주는 상징적 결과물로 여기고 있다. “저와 영남 동지들의 원대한 꿈! 오랜 염원! 감히 고백합니다. 영남의 민주주의 역사, 새로 쓰고 싶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정권교체하면, 영남은 1990년 3당 합당 이전으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그 자랑스럽고 가슴 벅찼던 민주주의의 성지로 거듭날 것입니다.” 문 대통령은 5·9 대선 때 부산 사직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영남지역 순회경선 정견발표에서 이 같이 외쳤다. 그리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님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못 다 이룬 꿈, 제가 다 하겠습니다. 다시는 정권 뺏기지 않고 다음에도 또 그 다음에도 여기 자랑스러운 후배들이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2018년 지방선거는 2020년 21대 총선의 전초전 성격이 강하다. 특히 친노 진영은 2020년 총선을 ‘87년 체제’의 해체와 새로운 정치 지형의 틀을 짜는 정초선거로 만들기 위한 교두보로 이번 지방선거를 바라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김경수 의원은 “민주 진영이 PK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1990년 3당 합당으로 인위적으로 바뀐 지역 정치를 그 이전으로 되돌린다는 뜻”이라며 “전문가들은 복원까지 한 세대가 걸릴 것이라고 했는데 다음 총선이 있는 2020년은 3당 합당 이후 딱 한 세대(30년)가 지나는 해”라고 말했다.친노 vs 홍준표 정치생명 건 한 판 승부 청와대와 민주당은 이번 PK 지방선거에서 반드시 ‘이길 수 있는 후보’를 낼 것이다. 특히 부산시장과 경남지사 등 광역단체장 후보가 누가 될지는 여권 내 위상이나 친소에 관계없이 이 같은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친노의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이다. 물론 자유한국당이 친노의 이 같은 구상을 모를 리 없다. PK를 빼앗기는 순간 정권탈환은 더욱 힘들어진다. 경남은 한국당 홍준표 대표의 텃밭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의 뿌리인 친노와 한국당, 그리고 홍준표 대표의 정치생명이 걸린 한 판 승부다. 6·13 지방선거의 최대 관전포인트는 서울이 아니다. PK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문재인 대통령의 ‘복심’인 양정철 전 대통령홍보기획비서관(사진)은 26일 “더 모질게 권력과 거리를 둘 것”이라고 밝혔다. 집권 2년 차를 맞는 문재인 정부 청와대로의 복귀설과 지방선거 출마설이 불거지자 분명하게 선을 그은 것이다. 양 전 비서관은 동아일보 등 몇몇 언론과의 통화에서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겨우 7개월 지났는데 작별인사로 남긴 편지에 잉크도 마르지 않았다. 먼발치에서 지켜보자고 판단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양 전 비서관은 문 대통령 취임 직후인 5월 중순 “제 역할은 여기까지”라는 장문의 문자메시지를 남기고 출국했다. 양 전 비서관은 뉴질랜드에 머물다 아들 입대 등으로 몇 차례 귀국한 뒤 최근에는 일본 도쿄에 머물며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여권 일각에서는 전병헌 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 사퇴 이후 양 전 비서관이 청와대로 복귀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또 대선 과정에서 호흡을 맞춘 유력 정치인들이 양 전 비서관에게 출마를 권유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내년 6월 지방선거 차출설도 거론됐다. 이에 양 전 비서관은 “내 역할은 정권을 교체한 것으로 족하다. 내 역할과 능력에 대한 과대포장이 벗겨졌으면 좋겠다”라며 부인했다. 출마 가능성에 대해서도 “체질도 아니고 적성도 아니다. 좋은 분들을 도우면 모를까 (실제 선거에 출마할) ‘선수’ 깜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과 마찰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에는 “허황된 얘기”라고 강하게 부인했다. 이어 그는 “대통령과 사사롭게 통화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문 대통령과 일절 연락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자신과 함께 이른바 ‘삼철’로 불리는 이호철 전 민정수석, 전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지방선거 출마에 대해선 “대통령과 가까운 분들이 일부러 뒤로 빠져 있는데 선출직 도전은 본인 선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잠행 중이던 양 전 비서관이 인터뷰에 나선 것에 대해 일각에선 내년 초 귀국을 앞두고 사전에 불필요한 오해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그는 내년 1월 ‘언어 민주주의’를 주제로 한 책을 출간할 예정이다. 문병기 weappon@donga.com·길진균 기자}
5월 10일 정오 국회 로텐더홀. 문재인 대통령 당선인이 처음 국민 앞에 섰다. 취임식은 30분을 넘기지 않았다. 헌정사에서 가장 작은 취임식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추구하는 ‘탈권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 행사였다. 국민은 환호했다. ‘새로운 대한민국’의 기치를 든 문 대통령은 국민과의 ‘소통’을 수차례 강조했다. “국민과 수시로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주요 사안은 대통령이 직접 언론에 브리핑하겠습니다.” 어느새 7개월이 지났다. 야당은 ‘쇼통령’이라고 비난하지만 대통령이 사회적 약자와 평범한 시민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청와대의 소통·감성 정치에 지지층은 환호했다. 문 대통령의 지지율은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이제 임기 1년 차보다 몇 배는 중요한 임기 2년 차가 시작된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 따르면 2018년은 과감한 개혁과제 이행과 정책 추진 기반을 구축하는 ‘혁신기’의 마침표를 찍는 해다. 곳곳에 벌여 놓은 적폐 청산 작업들을 시스템으로 완성해야 할 책임이 뒤따르는 시기다. ‘신한국 창조’를 앞세웠던 김영삼 전 대통령 역시 금융실명제,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 개혁, 하나회 척결 등 주요 업적을 모두 임기 1, 2년 차에 완성했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지지율이 뒷받침돼야 한다. 적어도 국민 절반 이상의 지지를 이어가는 것이 핵심이다. 소통과 홍보가 더욱 중요하다는 뜻이다. 문재인 청와대의 홍보 능력은 얘기를 꺼낼 필요가 없을 정도로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인지 “비서는 말이 없다”는 과거의 격언과 달리 청와대 비서진도 앞다퉈 대국민 홍보에 뛰어들고 있다. 공식 공보라인을 제외하고도 민정수석비서관은 국민청원을 통해 입법, 행정, 사법 각 분야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또 뉴미디어비서관은 ‘청쓸신잡’을 이끌며 청와대의 뒷얘기를 직접 전하고 있다. 틈틈이 비서실장도 마이크를 잡는다. 정작 매달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과 직접 소통하겠다고 공약했던 문 대통령은 취임 후 단 한 차례만 공식 기자회견을 했다. 미국 등 주요국들이 정책 혼선이나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메시지 창구를 대통령 또는 대변인으로 사실상 일원화하고 조율된, 정제된 언어만 내보내는 것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더불어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대통령비서진이 청와대의 ‘말’에 담기는 엄중함과 무게감을 잘 모르는 것 같아 걱정”이라고 했다. 비서진의 과도한 ‘활약(?)’이 대통령에게 약이 아닌 독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소통 대통령으로 불렸다. 한발 앞서 TV 앞에서 국민과 대화했다. 그는 8년 재임 기간에 모두 158차례 기자회견을 했다. 연평균 20회다. 한 시간 넘도록 기자들과 즉문즉답을 했다. 반면에 박근혜 전 대통령 재임 4년여 동안 공식 기자회견은 4회에 그쳤고 그나마 짜인 각본에 따른 회견이었다. 지금 청와대의 홍보는 지지층의 여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만 접근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홍보가 전면에 나서고 토론이 배제되면 소통은 불가능해진다. 주변이 적극적 지지자로 채워지면 대통령은 소외되고, 비판적 지지자들은 대통령에게 등을 돌리게 된다. 지난 정부에서도 대통령이 질문을 받지 않고 답변도 하지 않으면서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무술년에는 청와대의 홍보가 아닌 국민과 소통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자주 보고 싶다.길진균 정치부 차장 leon@donga.com}
연말 정치권이 그간 잠잠하던 개헌 이슈로 달아오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31일 활동시한이 종료되는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개헌특위) 기한 연장 문제로 25일에도 한 치의 양보 없는 설전을 벌였다. 국회는 개헌을 둘러싼 갈등으로 대법관 임명동의안과 법안 처리가 무산되는 세밑 파행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여야 공통 공약이었던 개헌을 놓고 정치권이 대립하는 진짜 속내가 무엇일지, 개헌 논의가 어떻게 전개될지 따져본다. ○ “동시 투표” vs “지방선거 이후” 현재 국회 개헌특위에서는 개헌안 국민투표를 내년 6·13지방선거와 함께 진행할지가 쟁점이 돼 있다. 민주당은 대선 때 3당 후보들이 모두 개헌을 공약했던 대로 내년 6·13지방선거 때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함께 부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한국당은 선거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만큼 내년 지방선거 이후부터 12월 사이로 개헌 국민투표를 미루자고 맞서고 있다. 국민의당은 ‘국회 개헌특위와 정치개혁특위를 통합해서 6개월 연장하고 내년 2월까지 개헌안 발의를 위해 여야가 노력한다’는 중재안을 내놓았다. 민주당은 국민의당의 중재안을 받아들였지만 한국당은 이 역시 거부했다. 한국당은 ‘2월까지 개헌안 발의 노력’에 합의했다가 개헌안 도출에 실패하면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에 명분을 줄 수 있다고 보고 계속 반발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당이 개헌안 동시 투표를 반대하는 일차적 이유는 ‘정권 심판’이라는 지방선거의 성격이 흐려진다는 것이다. 내년 지방선거는 5·9대선 이후 문재인 정부가 처음으로 중간 성적표를 받아 드는 선거다. 한국당은 또 여권이 권력구조 개편보다 지방분권에 집중하는 것이 선거 승리를 위한 전략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 1년 활동한 개헌특위 초안도 못 만들어 국회 개헌특위는 1월 출범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를 겪으면서 탄핵의 핵심 요인으로 지목된 ‘제왕적 대통령제’를 개선해 달라는 국민적 요구를 헌법에 담기 위해서였다. 특위는 1987년 제정된 현행 헌법의 틀을 바꾸는 재설계에 나섰다. 기본권과 지방분권, 경제, 재정, 권력구조, 정부형태, 정당, 선거제도, 사법부 등 다양한 분야를 대상으로 매주 화요일 23차례의 정기회의를 열고 논의를 이어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개헌안 초안도 마련하지 못했다. 세종시=행정수도 명문화, 동성동본, 동성애 찬반 등 민감한 사회적 이슈를 개헌안에 넣을지 주요 의제 선정도 하지 못했다. 개헌과 함께 다뤄져야 할 선거구제 개편 논의는 정치개혁특위 안건으로 올리지도 못했다.○ 개헌 논쟁, 결국 대통령의 손에 여야의 개헌 논의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서 여권에선 대통령 발의 개헌론이 부쩍 힘을 얻어가고 있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국회가 내년 2월까지 개헌안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면 대통령에게 개헌안 발의를 먼저 요청하는 것도 불사할 생각”이라고 밝힌 바 있다. 청와대도 대통령 직속 정해구 정책기획위원장을 중심으로 개헌안 마련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여야는 지방선거 개헌안 동시 투표를 위한 개헌안 발의의 마지노선인 내년 3월까지 국회에서 치열한 주도권 싸움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개헌 책임론 또는 무산론이 내년 지방선거의 핵심 쟁점이 될 가능성도 있다. 민주당은 개헌이 국민적 명분이 있는 이상 손해 볼 것이 없다는 기류다. 한국당이 끝까지 지방선거-개헌안 동시 투표에 반대할 경우 한국당을 ‘개헌 반대 세력’으로 묶어 압박해 나갈 계획이다. 또 개헌과 선거구제 개편을 고리로 한 민주당 국민의당 바른정당 정의당 등 4당 연대를 통해 한국당을 고립시키는 구상도 거론된다. 그렇지만 한국당이 개헌 저지선을 확보하고 있어 민주당의 압박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대통령 개헌안이 발의돼도 국회에서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지 않으면 국민투표에 부칠 수 없다. 한국당은 민주당이 실제 개헌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개헌 무산에 대한 책임을 야당에 떠넘기기 위해 대통령 발의라는 모양새만 취하는 것이라고 내심 보고 있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현실적으로 여야가 내년 초까지 개헌안에 합의하는 것은 어렵다고 본다. 대통령이 어떤 형태로든 개헌의 동력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길진균 leon@donga.com·홍수영·박성진 기자}
#장면1. 18일 오전. ‘달빛 기사단’이란 아이디를 쓰는 한 사용자가 트위터에 ‘네이버 검색 해주세예’ ‘검색어: 홍준표 아베’ ‘현재 3위’라는 글을 올렸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일본에 가서 굴욕외교를 했다는 것을 부각해 각종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에 노출시키자는 의미다. 오전 내내 네이버에서 ‘홍준표 아베’는 검색어 순위 10위권에 머물렀다. #장면2.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지난달 28일 한 강연에서 “‘대통령이 하겠다는데 네가 왜 문제 제기야’라고 하면 공론의 장이 무너진다”고 말했다. 즉각 문재인 대통령의 극성 지지자들로부터 ‘적폐세력’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최근 문 대통령의 방중을 수행 취재하다 폭행당한 청와대 수행기자단은 “맞을 짓을 한 기레기들”이라는 맹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른바 ‘문빠’들의 여론 형성 구조와 실체가 새삼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 ○ ‘좌표 찍기’와 ‘지원’이 세(勢) 과시 전략 문빠들의 주요 활동 무대는 온라인과 모바일 공간이다. 문 대통령 지지 행위는 이들만의 은어인 ‘좌표 찍기’와 ‘지원’으로 이뤄진다. ‘좌표를 찍다’란 용어는 공격해야 할 기사나 콘텐츠의 인터넷 주소를 다른 지지자들에게 알리는 행위를 뜻한다. 팬 카페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좌표가 찍히면 수백 개의 댓글이 달리는 것은 순식간이다. ‘지원’도 활성화된다. 문빠들이 단 댓글에 비슷한 맥락의 댓글을 추가하거나 특정 댓글을 ‘베스트 댓글’로 만드는 행위다.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댓글을 긍적적 댓글로 덮기 위한 시도도 있다. 16일 트위터에 한 사용자는 ‘여기 100개 넘는 댓글이 악플이에요. 부탁드립니다’란 글과 함께 전날 문 대통령과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의 회동 관련 기사 링크를 첨부했다. 현재 해당 기사의 베스트 댓글은 문 대통령을 칭찬하는 글로 바뀌었다. 문 대통령의 맹목적 지지자를 일컫는 문빠들의 공격은 정치, 사회, 문화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문빠와 공식 팬 카페는 달라” 문 대통령의 소속 정당인 더불어민주당 안에서도 문빠 현상은 논란이다. 여전한 문자폭탄 등 문빠들의 공격에 속앓이를 하는 정치인이 적지 않다. 현재 2만2000여 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는 문 대통령의 공식 팬 카페인 ‘문팬’ 집행부와 가까운 김미경 서울시의원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문팬과 그런 분(문자폭탄을 보내는 극성 지지자)들은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문팬은 문 대통령의 성공을 위해 각자 사회활동을 하는 보통 사람들이 역할을 하는 모임이다. 뭉뚱그려 문빠라고 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했다. 이성적인 지지 활동을 하는 지지자들과 일부 극성 지지자인 ‘문빠’는 문 대통령 지지 모임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활동 방식이 다르다는 얘기다. 실제 국내 유명 포털이나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에는 다양한 형태의 문 대통령 지지자 모임이 개설돼 있다. 과거 전국적 조직망을 갖추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던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와는 탄생 과정이나 구조 자체가 다르다. 청와대 관계자는 “야당에선 문빠를 자진 해체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수많은 모임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통제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여론 착시 현상도 문자폭탄을 보내는 문빠는 지지자들 가운데 일부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다. 소수 문빠의 목소리가 여론의 착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매일 500통 이상의 문자폭탄을 받은 경험이 있는 한 민주당 중진 의원은 “받은 문자를 분석해보니 한 사람이 하루에 70통을 보낸 경우도 있었다. 실제 송신자 수는 받은 문자의 10분의 1 정도에 불과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문빠들의 맹목적 팬덤이 문 대통령을 지지하는 다수 이성적 지지자까지 ‘문빠 프레임’에 가두고, 문 대통령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문빠는 대통령이 정치를 잘 이끌어 좋은 성과를 내길 바라는 보통의 지지자들과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오로지 문 대통령만 의견의 자유를 향유하길 바라고, 나머지 그와 갈등하는 의견은 없어도 좋다고 본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일당제주의자들이다”고 했다.길진균 leon@donga.com·박성진·신규진 기자}
문재인 대통령 취임 7개월이 지난 요즘, 청와대는 또렷이 보이는데 정부와 여당은 잘 보이지 않는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얼마 전 중국을 다녀왔다. 국회의 새해 예산안 처리를 앞둔 시점이었다. 추 대표는 11일 6박 8일 일정으로 다시 러시아 방문길에 올랐다. 여야의 대치 국면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당 대표의 부재가 느껴지진 않는다. 국가적 위기가 터질 때면 해당 부처 장관의 활약상이 언론에 크게 부각된다. 국민의 관심도 집중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처한 강만수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 그랬다. 하지만 북핵 위기가 장기화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지금, 주무 장관 중 한 명인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조명균 통일부 장관의 활약상을 보도한 언론 보도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청와대 비서진의 움직임만 두드러진다.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이 중동 특사로 출국하자 난데없이 대북 접촉설이 터져 나왔다. 물론 청와대는 부인했다. 10일 공개된 국제결제은행(BIS) 통계에 따르면 올 상반기 한국의 가계부채 증가 속도가 세계 주요 43개국 가운데 2위를 차지했다. 경제 곳곳에서 비상벨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다. 빠르고 효율적인 구조조정, 성장동력 발굴 등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그러나 경제팀을 이끌고 있는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또는 최종구 금융위원장의 역할이 돋보인다는 평가 역시 별로 듣지 못했다. 국회와 정부의 존재감이 뚝 떨어진 사이 많은 국민은 청와대만 바라보고 있다.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이다. 지금까지 6만 건이 넘는 온갖 청원이 올라왔다. 한 달 동안 20만 명 이상의 동의가 이뤄진 청원도 여러 건이다. 조국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은 6일 ‘조두순 출소 반대’ 청원에 대해 ‘재심 불가’를 설명하며 “정부의 역할을 계속 고민하겠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도 주무 장관인 박상기 법무부 장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정부 여당이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언젠가부터 청와대에 가려 투명인간처럼 잘 보이지 않게 됐다. 당은 ‘자발적 소외’ 상태다. 한 민주당 의원은 “민주당의 지지율이 역사상 유례없이 50%를 넘었다. 문 대통령 효과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가 잘하고 있는 만큼 애써 끼어들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박근혜 정부 때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과거에는 일반 국민도 어느 부처 장관이 누구인지 알 정도였는데, 지금은 당 대표인 저도 장관의 이름을 다 못 외울 정도로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장관의 이름이 알려지는 것과 업무 능력이 꼭 일치한다고 할 수는 없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묵묵히 일하는 장관도 있다. 하지만 국민의 뇌리에 남는 스타 장관들이 없는 정부는 어딘가 불안하다. 지난 정부에선 각 부처가 시키는 대로 실행만 하는 수동적 존재로 전락했다. 그리고 박 전 대통령이 무너지자 정부도, 새누리당도 함께 붕괴됐다. 청와대 비서진은 대통령의 스태프이다. 비서진이 전면에 서면 장관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리고 국정의 모든 부담을 대통령이 직접 지게 된다. 장수가 보초를 서는 군대는 희망이 없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7개월 전 취임사에서 “대통령부터 새로워지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최대한 나누겠다”고 약속했다.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일은 대통령과 청와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길진균 정치부 차장 leon@donga.com}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 참담했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1년 전인 지난해 12월 9일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가결을 선포했다. 정 의장은 6일 “박 전 대통령 본인은 물론이고 국가에도 재앙을 불러왔다”면서 “그러나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량이 이를 감당할 수준까지 높아진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특히 정 의장은 “대통령의 권한은 반드시 분산돼야 한다. 국회가 내년 2월까지 개헌안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면 대통령에게 개헌안 발의를 먼저 요청하는 것도 불사할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정 의장은 이날 새벽 진통 끝에 내년도 예산안을 통과시킨 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탄핵안 가결 당시 상황과 적폐청산 등 현안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정 의장은 예산안 처리에 대해 “모범이 돼야 할 국회가 예산안 처리 시한을 지키지 못해 국민들께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명분 없이 국회 의사진행을 방해한 제1야당의 행태는 비상식적이었다”고 했다. ―당시 탄핵소추안 상정 날짜를 두고 12월 2일, 9일을 놓고 논란이 많았다. “매우 중요한 날이었기 때문에 각 당 원내대표들과 의논을 거쳐 결정했다. (가결 정족수 확보 외에) 무엇보다 탄핵소추안 처리가 새해 예산안 통과에 영향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산안 상정(2일) 이후인 9일로 결정했다.” ―고민이나 고비는 없었나. “발의부터 상정과 표결까지 무척 신중하게 접근했다. 부결되면 안 하느니만 못한 것 아닌가. 부결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221표 정도를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더 많은 234표가 나왔다. 당시 새누리당에서 의외로 많은 찬성표가 나온 것이다. 촛불시민의 민주적이고 질서 정연한 노력이 뒷받침됐다고 본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혁명이 일어났다.” ―박 전 대통령이 완전한 2선 후퇴를 받아들였다면…. “박 전 대통령이 과감한 제안을 했다면 국회가 수용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박 전 대통령은 미봉책으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상황을 호도하려는 인상을 줬기 때문에 탄핵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탄핵의 원동력은 촛불시위라고 하는데 태극기를 든 시민도 대한민국 국민 아닌가. “국민은 누구나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고, 모든 국민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다만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을 부정한다든지, 상식과 완전히 다른 주장을 할 때는 어느 누구로부터도 존중받을 수 없다. 법 체계에 맞지 않는 몰상식까지 존중받기는 어렵다.” ―청와대에 촛불시위 그림이 걸린 것을 두고 논란이 일었다. 국회에 비슷한 그림을 걸자는 요구가 있으면 받아들이겠나. “미술 작품을 거는 것은 관계가 없지만 국회에는 그렇게 큰 작품을 걸 곳이 없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적폐청산이 화두다.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 멀쩡한 것을 뒤집어엎어서 보복을 하는 것은 절대 있어선 안 된다. 무리하게 파헤치는 것도 국민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적폐는 청산하는 게 당연하다.” ―미래를 만들어야 할 새 정부가 과거에만 매달린다는 지적이 있는데…. “공감한다. 그래서 적폐청산을 하더라도 조용하게 했으면 좋겠다. 너무 떠들썩하게 일을 진행하면 본말이 전도될 수 있다. 조용히 책임을 묻는 것이 좋다. 검찰도 피의 사실을 공표해선 안 된다.” ―지시를 이행한 공무원까지 적폐로 몰거나 처벌하는 것은 가혹하다는 지적이 있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었던 공직자는 응분의 책임을 지는 것이 옳다. 공직자는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해야 한다. 불법이나 탈법, 도덕적으로 비판받아야 마땅한 지시를 거부할 용기가 없다면 적어도 그 자리를 피해야지 동조해선 안 된다. 이것은 이번 정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직접민주주의 또는 공론화위원회 등이 거론되는 것은 국회가 무능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직접민주주의라는 것은 소규모, 도시국가에서나 가능하다. 현대사회, 5000만 대한민국은 대의민주주의를 근본으로 할 수밖에 없다. 다만 국회가 정치적인 이해에 매몰되거나 식물국회로 전락해 할 일을 제때 못 할 때 피해는 국민에게 간다. 그런 차원에서 하나의 돌파구 또는 보완 수단으로서의 의미는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입법부를 대체할 수는 없다.” ―국회의원 세비를 인상한 것에 비판 여론이 많은데…. “옛날에는 국회 스스로가 세비 인상률을 결정했지만, 이제는 (정부가) 모든 공무원에게 인상률을 자동적으로 적용하도록 돼 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경제도 어렵고 하니까 이걸 반납한 것인데, (올해는) 반납을 안 했을 뿐이다. 올해 또 반납하면 차관보다도 (세비가) 적어진다. 그런데도 마치 (국회가) 자발적으로 세비 인상한 것처럼 보도하는 것은 국민을 오도하는 것이다.” ―내년 지방선거 때 개헌안 국민투표 가능하다고 보나. ○×로 답한다면…. “51%로 가능하다고 본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혔다. “홍 대표는 지금은 반대하고 있지만 지난 대선 때는 지방선거 때 국민투표 의견을 서면으로 제출했다. 정당은 국민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이 설득할 것이라 믿는다.” ―5·18민주화운동 정신을 헌법 전문에 넣는 것 역시 이견이 많다. “더 많은 국민이 찬성하고 있다. 개인적으론 찬성한다. 그렇지만 이 문제가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면 다음으로 미루고 합의에 이른 것만 가지고 개헌을 해야 한다.” ―국회가 개헌안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대통령이 개헌안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대통령의 헌법상 권한이다. 국민의 4분의 3이 개헌을 원하고 있다. 국회가 못 한다면 대통령이라도 해야 한다. 지금이 개헌의 적기다. 이번에 개헌이 꼭 이뤄져야 한다.” ―연말연초 사면이 거론되고 있는데…. “국정 운영에 가장 중요한 건 균형 감각이다. 역대 정권들이 민생 사범들을 사면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 과연 온정의 손길이 어디에 필요한가. 그걸 잘 판단해야 한다.”길진균 leon@donga.com·장관석·최고야 기자}
여야는 법정 처리 시한을 넘긴 지 이틀 만인 4일 2018년도 예산안에 잠정 합의했다. 공무원 증원, 최저임금 지원, 법인세 인상 등을 뼈대로 한 문재인 정부 첫 예산안은 5일로 예정된 국회 본회의에서 표결을 거쳐 확정될 예정이다.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 의원들이 잠정 합의안에 동의할 수 없다며 반발하고 있어 진통이 예상되나 민주당(121석)과 국민의당(40석)이 과반 의석이어서 통과는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자유한국당 정우택, 국민의당 김동철 원내대표는 국회 의원회관 우 원내대표 사무실에서 오전부터 마라톤협상을 벌인 끝에 오후 4시 50분경 ‘여야 3당 잠정 합의문’을 발표했다. 최대 쟁점이던 공무원 증원 규모는 민주당과 국민의당 제시안의 중간 지점에서 절충안을 마련했다. 여야는 공무원 증원은 정부 원안인 1만2221명에서 다소 줄어든 9475명으로 합의안을 마련했다. 야당의 요구를 반영해 정부가 2018년도 공무원 재배치 실적을 2019년도 예산안 심의 때 국회에 보고하도록 했다. 초고소득자를 대상으로 한 소득세 인상안은 정부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법인세 인상의 경우 최고세율(25%) 과세표준(세금을 매기는 기준 금액) 구간을 당초 2000억 원 초과에서 3000억 원 초과로 조정했다. 과표 3000억 원 초과 초고수익 대기업은 2016년 기준으로 77곳이다. 또 야당의 주장을 수용해 모태펀드 등 중소기업 지원을 위한 세출예산을 정부안보다 1000억 원 이상 증액하기로 했다. 다만 한국당은 공무원 증원과 법인세 인상에 대한 합의 부분은 유보했다. 또 여야는 최저임금 인상 보전을 위한 일자리 안정자금 지원 예산 규모를 2조9707억 원으로 합의했다. 현행 직접지원 방식을 근로장려세제, 사회보험료 지급 연계 등의 간접지원 방식으로 전환하는 계획을 내년 7월까지 정부가 국회에 보고하도록 했다. 시행 시기를 두고 진통을 겪은 기초연금 인상과 아동수당은 지방선거 이후인 9월로 신규 지급 시기를 연기했다. 기초연금은 내년 9월부터 현행 20만 원에서 25만 원으로 인상하고 생활이 어려운 노인들에 대한 지원 수준을 높일 수 있는 중장기 기초연금 제도 개선 방안을 강구하기로 했다. 또 만 0세에서 5세 아동을 대상으로 한 아동수당은 소득 수준 상위 10%(2인 이상 가구 기준)를 수급 대상에서 제외한다. 여야는 2018년도 누리과정 일반회계 전입금 규모는 2조586억 원을 유지하되, 2019년 이후 누리과정 지원 예산은 2018년분을 초과할 수 없도록 했다. 남북협력기금과 건강보험 재정 일반회계 전입금은 정부안에 비해 각각 400억 원, 2200억 원 줄었다.길진균 leon@donga.com·박훈상 기자}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가 정부 예산안 수정을 거친 뒤 새해 예산을 확정 발표할 때 매년 들리는 대목이 있다. “여야가 힘을 모아 예산을 꼼꼼히 검토해 불필요한 부분을 상당 부분 삭감했습니다. 당초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에서 ○○○억 원 줄이면서도 민생 예산은 ○○○억 원 늘렸습니다.” 여야 의원들이 내세우는 이 같은 ‘알뜰살림’엔 숨겨진 비밀이 있다. 국회와 기획재정부는 예산안을 심의 의결하는 과정을 ‘티 안 나게 빼고 넣는 작업’이라고도 표현한다. 예를 들어 지난해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 400조7000억 원과 국회가 통과시킨 400조5000억 원은 2000억 원 삭감으로 겉보기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물밑에선 수조 원대의 돈이 빠지고, 여러 사업이 새로 들어가는 복잡한 과정을 거친 결과다. 정부가 작성한 예산안에는 사업별 소요 금액이 100만 원 단위까지 빼곡히 적혀 있다. 이 금액을 모두 합친 2018년도 예산의 지출 규모는 429조 원이 넘는다. 이 안에는 어느 정도 삭감을 예상하고 책정해 놓은 숨겨진 돈이 포함돼 있다. 국회가 예산 심의 과정에서 부풀린 예산을 깎은 뒤 그만큼의 예산을 의원들이 원하는 사업, 흔히 말하는 쪽지 예산으로 돌릴 수 있게 만들어 둔 일종의 장치다. 정치권에선 이를 ‘쿠션을 준다’고 한다. 여유 공간을 마련한다는 뜻이다. 여러 방법이 있지만 대표적이고 굵직한 것이 국채 이자율 조정이다. 정부는 해마다 외국환평형기금채권을 제외하고도 300조 원(신규와 차환 포함)이 넘는 국채를 발행한다. 정부가 설정한 내년도 국채 이자율(계획 금리)을 0.1%포인트만 낮춰도 수천억 원의 예산을 감액할 수 있다. 예산 결산 자료에 따르면 국회는 2016년도 예산에서 당초 3.5%였던 이자율을 2.8%로 0.7%포인트 내리는 방식으로 1조6834억 원을, 지난해에도 같은 방식으로 6912억 원을 감액했다. 이 돈 대부분은 각 당 또는 의원들이 원하는 사업의 재원으로 사용됐다. 국회와 정부는 “세계적인 저금리 기조를 고려해 이자율을 낮춘 것으로 문제가 없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국회가 국채 이자율 조정을 통해 많게는 조 단위의 예산을 감액한 뒤 이를 다른 사업에 쓰는 것은 저금리 기조가 본격화된 2012년 이후 이어져 온 한국만의 관행이다. 정부가 설정한 내년도 국채 이자율은 2.7%다. 올해 국채 평균이자율이 1.8% 안팎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1%포인트 가까이 상승한 수치다. 기재위 관계자는 “국채 평균 이자율이 2.7%가 되려면 현재 1.25%인 기준금리가 단계적으로 상승해 3%대에 이르러야 한다”고 했다. 국가 경제가 초호황일 때의 금리 수준이다. 이미 예결특위 소속 의원들은 “국채 이자율을 낮춰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자율을 0.2%포인트만 낮춰도 6000억 원이 넘는 감액분이 발생한다. 2.7% 이자율이 ‘쿠션을 준 것’이라는 의심을 받는 이유다. 그러나 올해는 과거와 달리 국채 이자율에 더욱 보수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국채 이자는 국가부도 사태가 나지 않는 이상 무조건 지급해야 한다. 예상 밖으로 금리가 오르면 이자를 갚기 위해 국채를 추가로 발행해야 한다. 특히 지금은 미국 금리 인상이 예상되는, 경제 여건이 무척 불확실한 비상 상황이다. 재원과 기회의 합리적 배분을 위해 예산안에 대한 정치의 판단과 개입은 필요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예정된 삭감 과정을 거친 뒤에 “국회의 노력으로 불필요한 부분을 줄였다”는 식의 자랑은 안 했으면 한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길진균 정치부 차장 leon@donga.com}
적폐청산이 국가적 어젠다로 떠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93년 2월 27일. 김영삼(YS) 전 대통령 취임 후 열린 첫 번째 국무회의에서였다. 문민정부를 연 YS는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며 스스로 자신과 직계가족의 재산 17억7822만6020원의 보유 명세를 공개했다. YS판 적폐청산의 신호탄이었다. 그는 ‘신한국 창조’를 국정지표로 제시하고 ‘한국병 치유’를 선언했다. YS는 거침이 없었다. 자신의 재산을 먼저 공개한 YS는 국회를 설득했고, 그해 5월 공직자윤리법이 개정됐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입법·사법·행정부의 1급 이상 공직자 본인과 배우자 직계가족의 재산 공개가 의무화됐다. 3월 15일엔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를 전격 방문해 정치사찰을 담당하던 제4국 폐지 등 안기부 축소 계획을 발표했고, 이듬해 1월 ‘국가안전기획부법’이 개정됐다. 국회 정보위원회가 안기부의 운영을 감독하는 제도적 통제장치가 처음 만들어졌다. YS는 또 취임 첫해인 1993년 8월 12일 오후 7시 45분 특별담화를 통해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발동했다. 이날 오후 8시부터 지금까지 금융실명거래는 상식이 됐다. 국민은 열광했다. YS에 대한 국정 지지율은 80%를 웃돌았다. ‘문민독재’라며 반발했던 군부 등 과거의 기득권층을 향해 YS는 일갈했다.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릴 수밖에 없다.” 당시 정관계 고위 인사들은 ‘재산 포기냐, 직업 포기냐’의 기로에 섰다. 등록재산에 대한 실사(검증)로 인해 부도덕성이 드러난 정관계 인사들은 국민적 지탄 속에 사퇴했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이 세간에 회자됐다. 놀라운 것은 이 같은 혁신적 시스템의 도입이 YS 취임 6개월 동안 이뤄진 성과였다는 점이다. 속전속결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적폐청산을 어떻게 보십니까.” 당시 YS의 개혁 드라이브를 조언했던 이원종 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에게 물었다. 이 전 수석은 YS 정부 이후 어떠한 관직이나 선출직에도 나서지 않은 몇 안 되는 인사다. 이 전 수석은 “적폐청산은 미래로 가기 위한 기반을 다지는 것이다. YS 정부는 시스템을 만들었을 뿐”이라고 했다. 적폐청산의 핵심은 “인적 청산이 아니라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라는 얘기였다. 문 대통령은 ‘적폐청산을 통한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을, YS는 ‘신한국 창조를 위한 한국병 치유’를 주장했다. 비슷해 보이지만 차이가 있다. YS는 시스템을 바꾸면서 그 안에서 새로운 시대에 맞지 않는 인사들을 도태시켰다. 물론 억울하게 휩쓸린 이들도 있었다. 국민은 어느 순간부터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외환위기 등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YS 정부에 등을 돌렸다. 그래도 지금까지 유용한 혁신적 시스템을 정착시킨 YS 정부 초기의 성과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문 대통령 역시 9월 야 4당 대표 초청회동에서 “적폐청산은 개인에 대한 책임 처벌이 아니다. 불공정 특권 구조 자체를 바꾸자는 것”이라고 했다. 아쉽게도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에서는 아직까지도 시스템 정비를 찾아보기 어렵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과거 방식으로 인적청산을 먼저 하고, 시스템은 나중에 봐서 바꾸겠다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시스템 정비 등 구체적인 개혁의 청사진이 동반되지 않은 인적청산은 정치보복이라는 오명을 피하기 어렵다. 문재인 정부도 미래를 보여줄 때가 됐다. 길진균 정치부 차장 leon@donga.com}
정세균 국회의장(사진)은 6일 관훈클럽(총무 박제균) 초청 토론회에 참석해 “이달 중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자문위원회가 제출할 개헌안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조문 작업에 착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 의장은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이번이야말로 헌정사상 최초로 국민, 국회, 정부 등 세 주체가 함께 민주적 개헌을 이뤄낼 수 있는 적기”라고 말했다. 또 “이번에 실패하면 상당 기간 표류할 소지가 있어 꼭 성공시켜야 한다”고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개헌 일정도 제시했다. 11월 중 개헌특위의 자문위 개헌안 접수, 헌법개정기초소위 구성, 내년 2월까지 기초소위의 개헌안 완성, 3월 국회의 개헌안 발의, 5월 국회 표결 후 6월 지방선거 때 국민투표 등이다. 정 의장은 쟁점으로 떠오른 권력구조와 관련해 “국회 신뢰가 높지 않아 내각제 추진은 지혜롭지 못하다”고 말했다. “순수한 대통령제 또는 대통령 중심 분권형 대통령제 중 하나가 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것이다. 또 문재인 대통령이 내년 초 독자적 개헌안을 제출할 가능성에 대해 그는 “국회에 제출해 국회에서 단일한 개헌안을 마련하는 절차가 바람직하지만, 국회에서 단일안을 만들지 못하면 대통령이 어떻게 할지는 열린 생각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정세균 국회의장은 2일 국회의장 비서실장(62·차관급)에 황열헌 전 문화일보 편집국장(사진)을 임명했다. 대전 출신인 황 비서실장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와 문화일보 정치부장, 논설위원, 편집국장 등을 역임했다. 동아일보 재직 시절인 1987년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사건 특종보도로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언론사 퇴사 이후 현대자동차 부사장, 현대모비스 부사장 등을 지냈다.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정의당 이정미 대표는 2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적폐 청산 작업은 너무나 상식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쓰레기 폐기물을 불법으로 매립한 곳 위에 건축물을 지으면 10∼20년 후 침출수 등이 발생할 것이고 애써 지은 건축물조차 썩어 헐어내야만 하는 상황이 올 것인데 결국 이중삼중의 비용이 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이 대표는 “정부가 적폐 청산만 하고 있으면 안 되는 만큼 최대한 빨리하고 미래로 가야 한다. 속도를 내는 것이 갈등 비용을 줄이는 길”이라고 제안했다. 이 대표는 20대 국회가 해결해야 할 핵심 과제 중 하나로 선거구제 개편을 꼽았다. 그는 “선거구제 개편 없는 개헌은 ‘앙꼬 없는 찐빵’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입법부가 충분한 신뢰를 받을 때 권력구조 개편이 이뤄질 수 있는데 신뢰 회복을 위해서는 선거구제 개편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이 대표와의 일문일답. ―문재인 정부는 잘하고 있나. “촛불을 ‘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패러다임과 사회 구조를 전면적으로 바꾸라는 국민의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변화의 속도와 폭이 더디다. 일례로 문재인 대통령이 포용적 복지 국가를 말씀하시는데 현재의 세법으로는 실현 불가능하다. 정책적 의지를 밝히는 수준에 머물 것이 아니라 실제 삶을 변화시키려면 ‘복지 증세’를 훨씬 강력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 어차피 변화라는 것은 폭이 크든 작든 저항이 있기 마련이다. 과감한 조세 정책을 펼쳐야 한다.” ―협치가 시대의 화두다. “협치가 안 된다고 보수야당만 탓하는 것은 너무 뻔한 정답이다. 문재인 정부는 더불어민주당 정권이 아니라 촛불 정권이다. 국민의 뜻을 받들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성사시키고 대선 국면을 이끌어냈던 국민의당, 바른정당, 정의당이 함께 책임져야 할 공동 정부다. 정당들 간 공동의 책임을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 책임을 나누기 위해서는 권한도 나눠야 하는데 이 지점에서 협력해 나가기 어려운 것들이 발생한다고 본다.”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정의당의 입장이 주목받고 있다. “어려움이 있다. 불법·탈법과 법 체제를 이용한 편법은 약간 결이 다르다. 거액의 재산 증여에 대한 국민의 동의 수준이 높지 않은 상황이다. 개혁 과제를 일관되게 밀고 갈 것인가에 대한 언행일치 문제도 있다. 청문회 과정에서 본인의 해명을 지켜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직전이라도 입장을 낼 수 있다.” ―정의당이 민주당 ‘2중대’라는 일각의 지적이 있다. “2중대는 본부중대가 명령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단 한 번도 그런 판단으로 당이 움직여본 적이 없다. 정의당은 집권여당보다 유일하게 왼편에 있는 정당이 됐다. 정책적 판단을 할 때는 개혁을 바라는 촛불 민심의 상식과 눈높이가 준거의 틀이다.” ―정계 개편 작업이 한창인데 어떻게 평가하는지…. “코미디다. 정치가 불신받고 외면당하는 근본 이유이기도 하다. 일관성도 명분도 가치도 없다. 국회의원이 돼서 무엇을 할지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해야 국회의원이 될 것인가에 골몰하는 행태다. 촛불 혁명 이후 많은 곳에서 개혁이 추진되고 있는데 유일하게 정신 못 차리고 변하지 않는 곳이 국회다.” ―정의당의 내년 지방선거 목표와 전략은…. “‘얼굴 있는 민주주의’의 실현이 목표다. 민주주의 제도 밖에서 얼굴 없이 살아가는 청년, 여성, 농민 등 소수자의 이야기를 정치권에서 당당하게 할 수 있도록 그들의 얼굴을 찾아주는 일이다. 주요 광역단체장 선거에는 무조건 임한다. 기초단체장 선거도 총력을 다해 집권 능력을 입증해 보이겠다.” ―실현 가능한가. “정의당은 항상 선거 이전 지지율을 결과로 뛰어넘었다. 두 자릿수 득표율을 확보해 주요 광역의회에 광역의원들을 반드시 배출할 것이다. 현역 의원 출마는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최종 카드로 남겨두고 고민하고 있다.” ―진보 진영의 선거연대를 고려하나. “당 대 당 선거연대는 하지 않는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정의당은 독자의 가치와 정책으로 국민의 선택을 받았다. 이번 지방선거도 정의당만의 색깔로 치르겠다는 뜻이 분명하다.”박성진 psjin@donga.com·길진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