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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는 자신의 책 ‘김지은입니다’에서 사건 이후 세탁소에 옷을 찾으러 갔던 일화를 소개했다. “세탁소 주인은 PC로 김지은을 검색해 일련번호를 본 후 ‘김지은, 김지은’ 중얼거리시며 옷을 찾았다. 그동안 PC 모니터에 내 이름이 계속 떠 있었다. 갑자기 다른 손님이 불쑥 들어올까 봐 초조해졌다. 몇 번이고 마우스를 잡아 ‘김지은’ 이름을 없애고 싶었다.” 2018년 방송에 직접 출연해 피해 사실을 밝혔을 정도로 고난을 각오했던 김 씨에게도 타인에게 이름을 노출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던 것 같다. 2008년 발생한 조두순 사건의 피해자는 최근 조두순 출소 사태로 고통을 겪고 있다. 가해자가 피해자 주거 지역으로 돌아오는 게 직접적 원인이지만 사건 후 12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피해자의 이름이 회자되는 게 힘들다고 한다. 이제 성인이 된 피해자와 가족들은 “제발 잊어 달라”고 호소한다. 지난해 10월 서울 양천구에서 생후 16개월 입양아가 학대로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피해 아동의 이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이의 해맑게 웃는 얼굴도 뇌리에 생생히 새겨졌다. 그전까지 ‘방관자’에 머물던 많은 이들이 ‘목격자’로 바뀌는 효과가 있었다. 사회적 공분이 일었고 검찰은 가해 양모를 더 무겁게 처벌하기 위해 주요 죄명을 아동학대치사에서 살인죄로 바꿨다. 각종 아동학대 대책도 쏟아져 나왔다. 뒤늦게나마 여론의 조명을 받은 것은 다행이지만 이제는 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 이번 사건이 ‘피해 아동 보호’라는 중대한 가치를 후퇴시켰다는 점이다. 아이를 향한 사람들의 관심은 진심 어린 선의와 연민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의 이름과 얼굴이 앞으로 어떻게 활용될지 누구도 통제할 수 없고, 2차 피해가 생겨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가해 양부모의 친딸인 피해자의 언니는 벌써 신원이 특정되고 있다. 다섯 살인 언니 역시 부모의 학대를 간접 경험한 피해자다. 아동학대처벌법에서 피해자 신상 공개를 금지한 것은 이런 부작용 때문이다. 피해 아이는 자기 이름과 얼굴이 알려지는 것에 동의한 적이 없다. 너무 일찍 생을 마감해 의사표현 자체가 불가능했다. 아이에겐 자신을 대변해줄 가족도 없다. 아동학대 피해자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약자 중의 약자였다. 사건의 공론화를 위해 피해자의 인격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이미 많은 것을 빼앗긴 아이에게 공익을 명분으로 또다시 희생을 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토록 심각한 사건이 석 달 전 ‘생후 16개월 입양아 학대 사망사건’이란 이름으로 보도됐을 땐 왜 주목받지 못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건에 지나치게 감정을 이입하고 가해자를 악마로 부각시켜 분노의 힘으로 제도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여론의 공분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정부와 정치권의 무사안일이 이런 극약 처방을 손쉽게 동원하는 사회적 관성을 만들었다. 범죄 피해자들은 심리적 안정을 되찾아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아무리 선의라도 피해자의 이름이 언급될수록 ‘낙인 효과’가 생긴다. 사건의 이름은 길고, 밋밋하더라도 가치중립적으로 지어서 피해자를 무대 뒤로 숨겨주는 게 더욱 성숙한 선의다. 피해자는 적절한 시기에 잊혀지고, 사건의 교훈만 남도록 말이다.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
7, 8일 치르는 의사 국가시험 필기시험 응시자 중에는 합격해도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응시자가 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딸 조모 씨다. 조 씨는 어려서부터 장래 희망이 외과의사였다고 한다. 서울 강남의 외국어고와 명문 사립대를 거쳐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의전원)에서 공부하며 14년 만에 꿈에 거의 다가섰다. 그에겐 대학의 생리를 아는 교수 부모의 열성적인 지원이 있었다. 조 씨가 고교 1학년일 때 어머니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는 수첩에 이렇게 적었다. ‘방학 2주밖에 없으나 리서치 페이퍼 반드시 쓰도록 할 것. 졸업할 때까지 2개 나오게.’ 정 교수는 목표대로 의학 논문 두 건에 고교생 딸의 이름을 올렸다. 조 씨가 2013년 서울대 의전원에 지원하며 낸 자기소개서 경력란은 각종 연구소 인턴, 동양대 총장 명의 최우수봉사상 등 허위 스펙들로 줄줄이 채워져 있다. 1년 넘게 이어진 정 교수 재판은 조 씨의 ‘7대 스펙’을 한 줄 한 줄 지워가는 과정이었다. 재판이 끝났을 때 자기소개서의 풍성했던 경력란은 거의 공란이 됐다. 정 교수가 총장 표창장까지 위조하며 온갖 반칙을 감행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조 씨가 간발의 차로 서울대 의전원에 떨어지고, 역시나 간발의 차로 부산대 의전원에 붙는 과정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조 씨는 70명을 뽑는 서울대 전형에서 72등이었다. 100점 만점에 0.05점 차로 떨어졌다. 부산대에서는 불합격자 중 1등과 고작 1.16점 차였다. 시험 점수는 실력에 따라 매년 갱신되지만 잘 만든 스펙은 해를 거듭해도 감가상각이 되지 않는다는 점도 정 교수 재판에서 확인됐다. 조 씨는 대학입시에 쓴 스펙을 4년 뒤 의전원 입시 때도 요긴하게 재활용했다. 조 씨가 다녔던 외고 유학반에는 ‘학부모 인턴십 프로그램’이란 게 있었다. 엄마들이 자녀의 입시용 스펙을 쌓아주려고 남편 또는 자신이 소속된 대학이나 공공기관, 기업에서 인턴을 할 수 있게 서로 주선해줬다. 보통의 부모들은 엄두도 못 낼, 그들만의 ‘스펙 품앗이’ 시스템이었다. 숙명여고 교무부장 아버지와 함께 문제 유출 혐의로 기소된 쌍둥이 자매의 재판에서 검사는 실형을 구형하며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고 거짓에는 대가가 따른다”고 했다. 두 자매는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가장 기본적인 진리일 텐데 쌍둥이 자매와 조 씨는 교육자인 부모로부터 이런 교육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조 씨는 지난해 9월 의사 국시 실기시험을 통과해 7일 필기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가 국시 시험장에 오기까지 순수한 노력으로 이룬 결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결실은 거짓으로 덧칠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1심에서 징역 4년이 선고된 정 교수의 입시비리가 유죄로 확정되면 조 씨의 의전원 합격이 취소될 수 있고 자연히 의사 국시 합격도 무효화된다. 입시의 성공이 국시의 실패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우리가 거짓을 말할 때마다 진실에 대한 빚이 쌓인다.” 화제를 모았던 미드 ‘체르노빌’에서 정부가 원전 폭발 가능성을 알면서 숨겼다고 폭로한 과학자의 이 대사처럼, 진실에 진 빚이 불어나면 갚아야 할 때가 온다.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
“현장은 법을 모르고, 법은 현장을 모릅니다. 변호사가 현장을 제대로 알아야 의뢰인들과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고 고객의 신뢰도 깊어집니다.” 법무법인 한결의 건설부동산 그룹을 이끌고 있는 이인호(사법연수원 25기) 신길호(29기) 전성우 변호사(30기)는 현장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차별화된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노동 관련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한결은 2011년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에 새로 둥지를 튼 이후 지난 10년간 과감하게 외연을 확장해왔다. 현재는 노사 균형을 통한 수평적이고 합리적인 근로관계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건설 법무―분쟁 해결사로 전방위 활약 한결의 건설부동산 그룹은 기업법무, 금융, 인사노무, 지식재산권, 선거법컨설팅과 함께 주력 부서 중 하나다. 도시 정비, 건설 분쟁, 부동산 개발 등 핵심 분야를 망라하는 토털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도시 정비 부문을 이끄는 이인호 변호사, 건설 분쟁 부문의 신길호 변호사, 부동산 개발 부문 전성우 변호사는 해당 분야 소송과 중재 경험을 20년 이상 쌓아온 법률전문가다. 15일 광화문 한결 사무실에서 만난 신 변호사는 “건설 현장에서 직접 보고 느껴야 분쟁의 실체를 이해하게 되고 공법이나 재료 등 건설 용어에도 익숙해진다”며 현장 친화적인 접근을 강조했다. 신 변호사는 공사 지연에 따른 공동원가 분담 소송에서 동부건설을 대리해 도급공사대금을 초과해 발생한 공동원가에 대해서는 분담 의무가 없다는 승소 판결을 이끌어냈다. 또 현대엔지니어링, 대림산업, SK건설, 관세청, 한국토지주택공사 등을 대리해 민간과 공공 분야의 각종 분쟁에서 의미 있는 승소 판결을 끌어냈다. 한결은 건설 클레임 연구소와 분쟁 아카데미 등 내부 연구개발(R&D) 부서도 활발히 운영하며 건설 분쟁 해결에 참여하는 변호사, 엔지니어, 전문 감정인, 공무원들이 모이는 공론의 장을 제공하고 있다. 한결은 지방공기업이 주도하는 공공 주도 부동산개발 프로젝트뿐 아니라 대형건설사, 시행사 등 민간이 주도하는 산업단지개발사업, 도시개발사업 등 각종 사업에서 세부 단계별로 전문적인 법률자문을 제공하고 있다. 사업 공모절차와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사업시행을 위한 특수목적법인 설립, 사업 수행 등 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법률 자문을 성공적으로 제공해왔다. 과천지식산업센터 건립사업, 창원 사화공원 민간개발특례사업, 광주경안2지구 도시개발사업 등 전국의 굵직굵직한 사업들을 도맡아 하고 있다. 2020년만 해도 참여한 대형 프로젝트가 20여 개에 달한다. 전성우 변호사는 “부동산 개발은 참여 주체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있어 단계별로 면밀한 법률 검토가 필수”라며 “소송이 제기되더라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리스크를 예방할 뿐 아니라 적법하고 공정한 사업 진행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선거법 컨설팅 등 시장 개척해 ‘탄탄 성장’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법률 시장이 위축된 상황에서도 한결은 주요 분야별로 지속적인 성장을 이어오고 있다. 탄탄한 전문팀 라인업을 갖춘 23년 차 로펌의 저력이 위기 속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2018년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위해 업계 최초로 만든 선거법컨설팅팀은 지난 4·15 총선과 재보궐선거에서 다수 후보에 대한 선거법컨설팅을 진행했다. 인공지능 기반의 부동산 권리분석 서비스 역시 다방, 피터팬 등 여러 플랫폼의 유료화 성공을 지원해 법률 시장 개척에도 앞장서고 있다. 기업들은 ‘경제3법’ 등에 따른 경영 환경 악화에 고심하고 있고 국민들 또한 급변하는 부동산 금융 조세 관련 제도 변화를 따라가기 어려운 실정이다. 한결은 규제 환경과 법령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며 고객의 불안을 해소하는 체계적 전략을 제공하고 있다. 안식 한결 대표는 “한결은 1997년 설립 이래 23년 동안 한 번도 머뭇거리거나 주저한 적이 없다. 이러한 담대함과 고객의 신뢰를 바탕으로 2021년 소띠 해에도 단단하게 성장을 이어갈 것을 확신한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두 살 아이가 세상을 뜬 지난달 17일 아침, 광주 운암동의 한 아파트 단지 횡단보도로 되돌아가 본다. 주변 폐쇄회로(CC)TV에 찍힌 사고 발생 시각은 오전 8시 40분.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가는 아이들이 많은 때였다. 어린이보호구역에 놓인 횡단보도에서 유모차를 끄는 30대 여성이 네 살 딸과 함께 건너고 있었다. 유모차에 두 살 둘째딸과 생후 6개월 된 아들이 타고 있었다. 엄마와 세 자녀는 서로 꼭 붙어 있어 한 몸처럼 보였다. 이들이 신호등이 없는 왕복 4차선 도로의 횡단보도를 중간쯤 건너왔을 때였다. CCTV 화면에서 갑자기 엄마와 세 자녀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육중한 8.5t 화물트럭이 와 있었다. 트럭이 네 사람을 덮치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눈을 다시 떴을 땐 유모차가 트럭 바퀴 틈에 구겨져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영상을 10~20초 뒤로 되감았다. 이 사건의 결정적 장면 하나가 거기 있었다. 횡단보도 중앙까지 유모차를 끌고 온 엄마는 나머지 절반을 건너기 위해 우측에 차가 오는지 살피고 있었다. 네 살 큰딸은 6, 7m 떨어진 횡단보도 끝에 나와 있던 어린이집 교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엄마는 한 손으로 큰딸을 감싸고 다른 손으로 유모차를 잡은 채 남은 6, 7m를 건너갈 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들 앞으로 차량 10여 대가 무심히 지나갔다. 엄마와 세 자녀는 밀려드는 차들을 보고 뒤로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물러설수록 8.5t 트럭과 점점 가까워졌다. 곧 어떤 일이 닥칠지 알고 있어서인지 이들이 횡단보도에 갇혔던 10초가량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횡단보도 위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뒷걸음치다 급기야 트럭에 치이고 마는 장면에서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유모차에 있던 두 살 둘째딸이 숨지고, 네 살 큰딸과 엄마는 중상을 입었다. 사고 현장에 있던 한 노인은 이 참상을 바라보던 일곱 살 손자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손자는 5개월 전 같은 횡단보도에서 차에 치인 뒤 겨우 회복해 그날 처음 다시 등교하던 길이었다. 아이의 눈에 세상은 어떤 곳으로 비칠까. 경찰은 주변 CCTV와 차량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해 엄마와 세 자녀를 보고도 횡단보도를 그냥 지나간 차량 5대를 특정했다. 운전자는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도 건너려는 사람이 있으면 다 건널 때까지 무조건 정지해야 한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엄마와 세 자녀를 위험으로 내몬 운전자 5명은 사고의 간접적 원인을 제공했다. 평범한 사람도 작은 규칙을 사소히 여기면 언제든 참사의 ‘공범’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두 살 아이의 가슴 아픈 희생을 보며 절감한다. 나 역시 운전대를 잡고 횡단보도를 무심코 지나쳤던 적이 종종 있었다. 운전자 5명에게 내려진 처분은 교통 범칙금 12만 원이 전부다. 언니의 어린이집 등원길에 함께 나섰다가 숨진 두 살 아이, 중상에서 회복한 후에도 후유증과 죄책감에 시달릴 엄마와 남매의 앞날을 생각하면 씁쓸해지는 대목이다. 경찰이 ‘보행자 보호 의무 위반’으로 범칙금을 통지하면 화를 내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운전자가 많은데 그 5명은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날 아침 횡단보도로 다시 되돌아가 본다. 차 5대 중 1대만이라도 위태롭게 서성이던 엄마와 세 자녀 앞에서 멈춰 섰더라면…. 규칙을 지키는 운전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
2002년 초 경기도의 한 포병부대에서 제대하고 나왔을 때 바깥은 유승준의 병역 기피 파문으로 충격에 잠겨 있었다. 유승준은 헌정 사상 최악의 ‘괘씸죄’를 저질러 만장일치의 미움을 받고 있었다. 그 후 19년간 그의 이름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곤 했다. 지난달에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에게 쓴 편지가 도마에 올랐다. 유승준은 “이미 잊혀져도 한참 잊혀진, 아이 넷을 둔 중년 아저씨”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한국 입국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지난해 대법원에서 외교부의 비자 거부가 위법하다는 판결을 받은 뒤 다시 비자를 신청했다가 재차 거부당한 처지였다. 우리 정부의 유승준 입국 불허 의지는 여전히 물샐틈없다. 지난달 국정감사에서 강 장관은 “입국 거부는 정당하다”고 했다. “입국 금지 해제 가능성은 0.0001%도 없다”는 병무청 간부의 말도 있었다. 유승준은 2002년 공익근무요원 소집을 앞두고 미국으로 출국해 시민권을 취득하는 방식으로 병역을 회피했다. 그로 인한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병역 기피 목적으로 외국 국적을 취득한 경우 36세가 될 때까지 국내 입국을 금지하는 조항이 신설됐다. 이후 개정을 거치며 비자 발급 제한 연령은 38세, 41세로 계속 올라갔다. 올해 44세인 유승준은 나이 조건을 충족하긴 했지만 ‘대한민국의 이익을 해칠 우려가 있을 때 입국을 제한할 수 있다’는 조항을 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자타공인’ 비겁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누렸던 영향력만큼 책임이 무거워지는 게 당연하다. 공인으로서 결격 사유가 있으면 공익 자격을 박탈하면 되듯 연예인이라면 인기를 잃고 시장에서 퇴출되어야 맞다. 19년 가까이 팬들과 단절된 망각의 지대로 유배된 것은 그가 달게 받아야 할 징벌이다. 다만 정부 부처들이 ‘유승준 무기한 입국 금지’를 위해 일치 단결하는 모습에는 국민정서법에 기댄 보복 감정이 서려 있는 듯하다. 국민을 배신한 비도덕적 행위에 대한 공분이 국가적 행위로까지 거침없이 확장되는 양상이다. 유승준에 대한 비자 발급 불허가 위법이라고 본 지난해 대법원 판결에는 이에 대한 비판의식이 담겨 있다. 대법원은 “기한이 없는 입국 금지 조치는 법령에 근거가 없는 한 신중해야 한다”며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금고 이상의 형을 받아 강제 퇴거를 당한 외국인도 5년 뒤에는 입국이 가능한 것과 비교해 유승준에 대한 무기한 입국 금지는 형평이 맞지 않는다”고 했다.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도 지난달 국감에서 “유승준에 대한 인권 침해 여부를 논의해 봐야 할 시점”이라고 했다. 정부는 그의 입국을 허가할 경우 병역 의무의 신성함이 훼손되고 장병들의 사기가 저하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하지만 정부가 특정인에게 마치 화풀이하듯 병역에서 도망치면 끝까지 용서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을 보인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병역의 신성함이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병무청의 2015년 자료를 보면 고위 공직자 26명의 아들 30명이 국적 상실을 통해 병역을 기피한 사실이 확인되는데 이런 공직자들을 걸러내는 게 더 중요한 국가의 역할이다. 병역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보다 본질적인 대안을 찾는 쪽으로 나아갈 때가 된 것 같다. 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
며칠 전 한 대학병원 진료실에서 아버지는 의사와 마주 앉았다. 간호사와 어머니, 나를 포함해 진료실에 있던 5명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아버지는 10년쯤 전 청력을 거의 잃어 상대 입 모양을 봐야 겨우 알아듣는다. 의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마스크 속을 맴돌았다. “수술을 하는 게 좋겠습니다. 70% 정도 잘라내야 할 거 같네요.” 얼마 전 아버지는 위암 판정을 받고 내시경 시술로 암 조직을 떼어냈다. 하지만 암세포가 일부 남아 있어 위를 절제해야 한다는 진단이었다. 아버지는 의사와 가족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의사는 메모지에 3과 0.3이라고 써보였다. 수술을 안 할 경우 암이 번져 사망할 확률이 3%, 수술 후 합병증으로 고생할 확률이 0.3%였다. 10배 차이인 두 숫자에 아버지의 눈길이 머물렀다. 수술을 받아들이는 대가를 가늠할 수 없어 혼란스러운 눈빛이었다. “수술 대신 1년 정도 경과를 보면 안 될까요?” 의사는 말없이 친절한 표정을 유지했다. 수술의 불가피성을 이미 자세히 설명했던 터였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이날 상담은 전공의 파업으로 미뤄지다 어렵게 잡은 예약이었다. 전공의들이 복귀해 수술이 가능해진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수술해야 한다’는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의학의 답은 나와 있었지만 자신의 답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히 환자의 몫이었다. 아버지는 체념한 듯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진료실에서 나오자마자 간호사는 준비해 놓은 병원 내부 약도를 건넸다. 수술 전 받아야 할 검사가 빨간 펜으로 빽빽이 표시돼 있었다. 아버지에겐 이제는 사라질지 모를 예전의 자신을 애도할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우리는 ‘드라이브스루’ 하듯 혈액검사실, 폐·심장검사실 등을 바쁘게 통과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아버지는 가급적 이날 검사를 마쳐야 했다. 말없이 뒤따르던 아버지는 딱히 누가 들을 것이란 기대 없이 말했다. “내시경으로 끝나는가 보다 했는데 결국 잘라내야 한다고 하니까….” 아버지는 점심으로 설렁탕에 찬물을 섞어 몇 숟갈을 드셨다. 식도락을 누구보다 즐겼던 아버지에게 이제 허락되는 음식이 많지 않았다. 30년 넘게 105사이즈를 입었던 아버지는 얼마 전부터 100사이즈를 입는다고 했다. “수술하고 나면 95 입어야 된다”며 호탕하게 웃는 아버지의 웃음소리에 예전의 식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상실감이 배어 있었다. 식사 후 원무과 앞에서 입원실 예약을 할 때였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마스크 쓴 사람들 틈에선 아무 말도 들을 수 없는 아버지는 어머니의 간병이 필요했는데 동반 입원을 하려니 선택지는 1인실뿐이었다. 원무과 직원은 “코로나에 의료파업 여파로 입원실이 별로 없다”고 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다인실이 좋다고 고집을 부렸다. “1인실에 혼자 있으면 죽을병에 걸린 것 같잖아.” 어머니와 내가 입원 예약을 하는 동안 아버지는 대기석 맨 앞줄에서 TV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브라운관 속 배우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은 거의 유일한 현대인이었다. 아버지는 그들의 입을 바라보며 병원에 온 것을 금세 잊은 듯 환하게 웃었다. 어느덧 백발이 된 아버지의 어깨에 부쩍 헐렁해진 셔츠가 흘러내릴 듯 걸쳐 있었다. 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
텅텅 비어가는 마트의 생필품 진열대에서 미국의 코로나는 시작됐다. 올해 봄 나는 미국에 머물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정부의 물자 관리를 믿지 않았다. 코로나가 퍼질수록 마트 계산대 앞 카트 행렬이 길어졌다. 방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지 여부에 따라 갈렸다. 민주당 주지사들이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며 빗장을 내걸 때 텍사스, 조지아 등 트럼프 지지자가 많은 주는 영화관, 미용실 등을 열어젖혔다. 주지사들은 서로 비난했고, 트럼프는 한쪽 편을 들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정치 성향에 따라 마스크를 쓰거나 안 썼다. 이런 분열과 불신이 코로나에게 좋은 주거 환경을 제공해 준 듯했다. 요즘 거리 두기는 ‘시대정신’이 됐지만 불신으로 벌어진 거리는 코로나에게 ‘틈새시장’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 ‘악성 확진자’들이 잇따르는 건 위험신호다. 광화문 집회에 참가해놓고 동선을 숨겨 자녀와 이웃을 감염시키고, 수백 명을 진단검사로 내모는 행태에 우리는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다. 이들을 향한 분노가 커질수록 잠재적 확진자들은 낙인과 배제의 공포에 갇힌다. 그로 인해 결국은 공멸로 이어질, 자멸적 선택을 하기 쉽다. 감염자와 비감염자 간의 정서적 균열이야말로 코로나에겐 최적의 생태계다. 코로나는 비집고 들어갈 틈새를 찾으려 숙주들을 끊임없이 시험에 들게 한다. 최근 광화문 집회 허용을 두고 법원은 상반된 결론을 내놓았다. 서울행정법원의 5개 재판부가 10건의 집회 신청을 나눠서 심사해 4개 재판부가 8건을 금지했다. 다만 1개 재판부가 2건의 집회가 열리도록 허용했다. 집회 장소와 규모가 비슷했지만 재판부의 시각은 엇갈렸다. 4개 재판부가 “집단 감염 등 최악의 가능성을 차단해야 한다”고 본 것을 1개 재판부는 “집회의 자유는 최소한으로 제한해야 한다”고 봤다. 4개 재판부가 “방역상 안전하다고 확신할 근거가 부족하다”고 봤다면 1개 재판부는 “위험하다고 확신할 근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일부 집회가 허용될 경우 다른 시위대까지 몰려들어 통제가 어려워질 가능성을 과소평가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하지만 ‘집회 금지는 최후 수단이어야 한다’는 재판부의 문제의식 또한 가볍지 않다. 정치권에선 이 판결을 비난하며 또 다른 갈등을 만들고 있다. 이는 우리를 딜레마에 빠뜨린 뒤 자중지란을 부추기는 전략을 취해온 코로나가 바라던 바일 수 있다. 전공의 집단파업 역시 우리가 직면한 고난도의 시험이다. 의료인들이 ‘국민영웅’에서 이익집단으로 변질되는 프레임의 전환을 코로나는 몹시 기다릴 것이다. 코로나 사태는 의료공급 확대 필요성을 절감하게 한 결정적 계기인 동시에, 그렇다고 공급 확대를 밀어붙이면 의료 공백이 생길 수 있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인권변호사 출신인 문재인 대통령이 연일 “엄정한 법 집행” “살아있는 공권력”을 강조하는 낯선 풍경을 요즘 자주 보게 된다. 그만큼 방역은 절체절명의 국가적 과제다. 하지만 폐쇄, 추적, 구속 등의 험한 언어에 주눅 들지 않는다는 게 코로나가 가진 지독한 저력이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유명순 교수가 올 상반기 진행한 국민위험인식조사에 따르면 코로나 위기 경보가 주의→경계→심각으로 격상될수록 확진 시 돌아올 비난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고 한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2.5단계, 3단계로 올라갈수록 방역 철학도 보다 유연하고 균형을 잡는 쪽으로 성숙해져야 함을 보여주는 결과다. 단호함은 선을 긋고 누군가를 고립시킬 때보다 분열과 불신을 메우는 데 쓰일 때 더 강력할 수 있다. 코로나는 이런 ‘신뢰 방역’이 가장 두려울 것이다.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
전직 지상파 방송사 기자가 기자 시절 제보자인 여성을 모텔로 데려가 추행한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26일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서부지법 형사6단독 신진화 판사는 강제추행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전 MBC 기자 A 씨에게 올 4월 100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신 판사는 A 씨에게 80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을 이수하도록 명령했고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에 1년 동안 취업할 수 없도록 제한했다. A 씨는 MBC 기자로 근무하던 2015년 제보자였던 B 씨(29·여)를 모텔로 데려가 강제로 껴안고 신체 일부를 만진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순직한 아빠 대신 상을 받는 자리에서 일곱 살 윤성이는 내내 의연했다. 빳빳한 제복 차림의 어른들 틈에서 아빠 이름이 적힌 상패를 가슴 한가득 안고 고개를 빠끔히 내밀어 기념촬영도 했다. 시상식 팸플릿에 윤성이 아빠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교통사고 현장을 수습하다가 차량에 치여 순직한 이상무 경위였다. 윤성이는 그의 3, 5, 7세 아들 중 첫째다. 아이와 얘기를 나누게 된 건 23일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영예로운 제복상 시상식이 끝날 무렵이었다. “팸플릿 보니까 윤성이 장래 희망이 경찰관이네. 아빠처럼 훌륭한 경찰관이 되고 싶어?” 시상식에서 아빠 이름이 호명될 때도 의젓한 눈망울을 반짝이던, 경찰관인 엄마가 흐느낄 때마다 담담히 손 잡아주던 큰아들 윤성이는 그제야 어린이로 되돌아왔다. 윤성이는 엉엉 소리 내 울었다. 엄마는 무릎을 꿇고 앉아 아들의 눈가에 손수건을 갖다 댔다. 윤성이의 바람처럼 아버지가 끝내지 못한 길을 걷는 자녀들이 적지 않다. 아버지와 같은 제복을 입고, 아버지가 쓰던 장비를 들고, 아버지가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 현장에 출동하는 사람들이다. 아버지와 생전에 함께 보낸 시간이 많지 않지만 같은 제복을 입고 나서야 비로소 아버지와 교감하고 동시에 그의 부재를 실감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경남 김해서부경찰서 김도균 경사(38)는 윤성이의 30년 뒤 모습일지 모른다. 김 경사의 아버지는 2006년 도로에 자갈을 흘리는 덤프트럭을 단속하던 중 다른 차량에 치여 순직했다. 윤성이와 동갑인 김 경사의 아들 역시 “아빠처럼 경찰관이 되고 싶다”고 한다. 김 경사는 윤성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그 아이가 훗날 제복을 입게 된다면 아버지의 제복도 함께 입는 거예요. 그게 큰 힘이 될 거예요.” 순직한 아버지의 직업은 자녀에겐 애증의 대상일 수 있다. 2018년 경북 영양경찰서 김선현 경감이 조현병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순직했을 때 그의 딸은 경찰 필기시험을 두 달 앞두고 있었다. 대학에서 경찰행정학을 전공하고 시험을 준비해 왔지만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순직은 오랜 꿈을 뒤흔들 만큼 충격이었다. 딸 김성은 순경은 결국 마음을 다잡고 그해 경찰시험에 합격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제가 경찰이 되길 원하실 거 같아 힘을 냈다”고 했다. 경남 창원소방본부 김동수 소방경의 아버지는 1996년 지리산에 조난된 등산객을 구하고 돌아오다 헬기 추락으로 순직한 구조대원이었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김 소방경은 유품을 정리하다가 아버지가 헬기 옆에서 제복 차림으로 찍은 사진과 빼곡히 적은 근무일지를 보고 소방관의 꿈을 품게 됐다. 하지만 막상 성인이 되었을 땐 진로를 정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위험한 현장에 가장 먼저 뛰어들어야 하는데 저는 운동신경이 뛰어나지도 않고 겁도 많은 평범한 사람이라….” 그는 2015년 결국 소방관이 돼 화재진압대원으로 일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랑 목욕탕을 못 가본 게 아쉬웠는데 아버지처럼 방화복을 입고 호스를 들고 있으면 그때 빈자리가 채워지는 것 같아요. 불구덩이를 만나도 아버지가 옆에 계신 것 같아 덜 무섭더라고요.” 순직한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는 것은 제복 공무원의 가족으로서 불안과 빈자리를 감당했던 데 이어 아버지가 짊어졌던 위험과 책임까지 승계하겠다는 결심이다. 제복에는 책임감이 묻어 있다고 한다. 제복을 입는 순간 위험에 처한 사람이 눈에 들어오고 몸이 먼저 그쪽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제복의 DNA’가 그런 것일까. 똘똘한 한 채를 대물림하거나 각종 ‘아빠 찬스’가 적지 않은 요즘, 아버지의 못다 이룬 숙명을 이어받는 모습에 숙연해진다.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
‘신림동 강간미수 사건’ 피의자 조모 씨(30·구속)는 여성이 간발의 차로 문을 닫고 집에 들어가자 스마트폰 손전등을 켰다. 도어록에 묻은 지문을 보고 비밀번호를 알아내려 했다. 그날 새벽 여성은 현관문 너머의 낯선 남성이 비밀번호를 눌러대는 소리를 홀로 들었다. 23일 광주에서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김모 씨(39·구속)는 20대 여성을 집까지 뒤따라가 문 자물쇠를 여는 것을 훔쳐본 뒤 쪽지에 자물쇠 비밀번호를 적었다. 김 씨는 경찰 조사에서 “여성이 잠들면 문을 열고 들어가 성관계를 맺으려 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남성이 여성을 뒤따라가 집에 침입하려고 한 사건은 그동안 숱하게 있었다. 하지만 이를 중대한 범죄로 보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신림동 사건’ 현장 폐쇄회로(CC)TV에 담긴 아찔한 순간을 목격하고 나서야 여성들의 오래된 공포를 공감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피해자의 고통은 남성이 문을 열지 못하고 되돌아간 뒤 비로소 본격화된다. ‘그놈’은 여성의 집 동·호수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안식처였던 집은 그놈이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는 ‘범행 예정지’로 바뀐다. 여성들은 길을 걷거나 지하철을 타는 등 평범한 일상의 와중에도 표적이 되는 경험을 한다. 이런 일상성은 같은 사건이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는 공포로 고스란히 되돌아온다. 악몽이 곧 현실이 돼 집 근처에서 가해 남성과 마주치는 일까지 벌어진다. 이 때도 별다른 신체 접촉이 없는 한 처벌하기 어렵다. 그 결과 가해자는 활보하고 피해 여성은 멀리 이사를 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반복된다. 지난해 3월 40대 남성이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오피스텔로 들어가는 여성을 뒤따라가 엘리베이터에 함께 탔다. 그는 여성이 자기 집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재빨리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도어록이 잠기기 전 문을 열어젖혔다. 현관에서 낯선 남성과 맞닥뜨린 여성은 너무 놀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남성은 여성을 강제추행한 뒤 달아났다. 얼마 뒤 경찰에 붙잡힌 이 남성은 부인과 자녀를 둔 금융기관 간부였다. 법원은 “주거가 일정해 도주 우려가 없다”며 가해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법원은 3월 1심 판결에서도 “추행이 중하지 않고 가족들이 선처를 탄원하는 등 사회적 유대관계가 분명하다”는 등의 이유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피해 여성은 가해자가 또 찾아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결국 집을 옮겼다. 그는 사건 후 1년이 지난 지금까지 경찰의 신변보호를 받고 있다. 경찰이 ‘신림동 사건’ 피의자 조 씨를 강간미수 혐의로 구속한 것을 두고 무리한 법 적용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조 씨가 성폭행을 시도한 것으로 의심되긴 하지만 강간을 위한 ‘실행의 착수’가 이뤄졌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실행의 착수’ 여부가 모호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성이 이미 심각한 피해를 입은 이상 처벌의 공백을 방치할 수는 없다. 최근 검거된 주거침입 범죄자들은 대부분 스토킹이나 성추행 등 동종 전과를 여러 건 갖고 있다. 잠재적 성범죄자들이 서서히 수위를 높여가며 중범죄를 저지를 때까지 우리 법체계가 이들을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행의 착수’가 확인되지 않았더라도 엄중히 책임을 묻는 제도는 여러 분야에서 시행되고 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응시자가 시험을 치르는 동안 휴대전화를 갖고 있다가 발각되면 그 자체로 부정행위로 간주된다. 음주 측정에 3회 이상 불응한 운전자는 면허취소 등 만취운전과 동일한 수준의 처벌을 받는다. 현행 ‘성폭력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은 남성이 여자 화장실이나 탈의실, 목욕탕 등 에 침입하는 행위를 처벌 대상으로 본다. 예전에는 건조물 침입 정도로 여겨 훈방했지만 몰카 촬영·유포 범죄의 피해가 워낙 심각해 법이 개정됐다. 여성을 뒤따라가 주거 침입을 시도하는 행위 역시 피해의 중대성을 고려하면 성범죄를 위한 ‘예비·음모’로 간주해 처벌하는 법을 도입할 때가 됐다.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이 무턱대고 불법 시위를 하는 것은 아니다. 널리 알리고 싶은 그 나름의 주장이 있어서다. 며칠 전 법원 결정을 무시하고 현대중공업 주주총회장을 점거한 것은 조선업이 불황인 와중에 고용이 더 불안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의 표출이었다. 3월 국회 난입 사태는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리는 정책에 반대한다는 의사 표시였다. 지난해 11월 서울 마포대교를 점거해 퇴근길을 마비시켰을 땐 건설근로자 복지 개선 법안이 국회에서 홀대받자 불만을 드러낸 것이었다. 폭력 시위를 주도해 법정에 선 민노총 간부들은 “절박감에서 비롯된 우발적 행동”이라며 선처를 호소한다. 법원은 그런 사정을 감안해 양형 기준보다 낮은 형량을 선고하고 집행을 유예해준다. 민노총은 폭력 시위로 일부가 구속되더라도 곧 ‘거물’이 되어 복귀하는 패턴을 반복하며 누구도 건들 수 없는 철옹성을 만들었다. 그렇다고 불법 집회가 민노총에 ‘남는 장사’는 아니다. 폭력이 지나간 자리에는 여론의 싸늘한 시선이 남는다. 조합원들이 휘두른 폭력의 피해자는 주로 시위 현장 최전선에 있는 순경이나 의경 등 경찰 내부의 하급자들이다. 공사장 등에서 한정된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비슷한 처지의 다른 노조 조합원인 경우도 많다. 시위대의 폭력은 강한 자를 향한 저항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민노총 집회에서 현장을 통제하는 공권력은 거추장스러운 방애물 정도로 여겨진다. 민노총 시위 현장에서는 조합원들을 향한 노조 간부들의 이런 지시가 종종 들려온다. “자, 주변에 있는 경찰들 다 걷어주시기 바랍니다.”(2015년 11월 서울 민중총궐기) “지부장이 명령합니다. 완력을 행사하기 바랍니다. 경찰 무장해제시키십시오.”(2016년 6월 울산 플랜트건설노조 집회) 민노총 간부들은 법정에서 “평화로운 집회로는 여론의 관심을 끌 수 없어 과격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과격할수록 ‘깨어 있는 시민’들이 동조할 것이라는 민노총의 바람은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그럴 때면 민노총은 시위의 폭력성을 부각시킨 보도 탓이라며 언론에 화살을 돌린다. 지난달에는 ‘집회 시위를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노동보도 준칙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불법 폭력 시위가 벌어졌을 때 수단의 불법성을 문제 삼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주장에 더 귀 기울인다면 합법적으로 시위하는 대다수 시민은 설 자리가 좁아진다. 폭력은 어떤 명분으로도 포장할 수 없는 인간성을 짓밟는 행위다. 머리띠에 ‘열사정신 계승’ ‘노동인권 보장’ 같은 고귀한 문구가 적혀 있더라도 복면 차림에 각목을 든 시위대에 둘러싸인 사람은 극한의 공포를 느낀다. 지난달 22일 현대중공업 서울사무소에서 민노총 조합원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한 경찰관은 “피투성이가 된 내 모습이 너무 수치스러워 집에 갈 수 없었다”고 본보 기자에게 말했다. 민노총 시위 현장을 취재하다 보면 그들만의 전투적 언어가 생경하게 느껴지곤 한다. “오늘의 분노를 담아 끝장냅시다.” “맞짱 뜹니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똑같습니다.” “노동자의 깡다구로 박살내야 합니다.” 일상 언어와 동떨어진 이 날 선 구호에는 평범한 시민의 공감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
“제가 112 신고했는데 별일 아니에요. 돌아가셔도 돼요.” 지난해 8월 한 사내가 집 문틈으로 얼굴을 빼꼼히 내민 채 말했다. 전남 여수경찰서 최모 경위는 “친구가 술에 취해 때린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참이었다. 흔한 주취폭행 신고였다. 어느새 문은 닫히고 있었다. 최 경위가 문을 잡았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 합니다.” 사내는 목소리를 높였다. “신고자가 별일 아니라고 하잖아. 집에 아무도 없다고.” 그때 집 안에서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함께 출동한 동료가 신고자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사내는 순간 뒤를 돌아봤다. 최 경위가 내부를 힐끔 보니 바닥에 사람의 다리가 어렴풋이 보였다. 최 경위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 피범벅이 된 채 의식을 잃은 한 남자의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 벨소리가 났다. 그는 응급수술 후 목숨을 건졌다. 2월 10일 새벽 경남 창원 마산동부경찰서 문모 순경은 “언니가 어딘가에 갇혀 성폭행을 당한 것 같다”는 신고를 받았다. 휴대전화 위치추적 결과 언니는 마산의 한 시장 주변 150m 반경에 있었다. 문 순경은 불이 켜진 집들을 찾아가 현관문에 귀를 대봤다. 2층 원룸 문에 귀를 대보려는데 문손잡이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몇 번의 움직임 후 이내 안에서 불이 꺼졌다. 수상했지만 그것만으로 수색에 나서기는 어려웠다. 발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살려주….” 소리는 들릴 듯 말 듯했다. “경찰입니다. 문 좀 열어 보시죠.” 문을 몇 번 두드리자 중년 남자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뭡니까, 새벽에. 잠자는 시민을 막 깨워도 되는 겁니까.” 문 순경은 멈칫했다. 잘못 짚은 거라면 민원감이다. 그래도 감(感)을 믿기로 했다. “안 열면 강제 개방합니다.” 얼마 뒤 도어록 풀리는 소리가 났다. 문 순경은 문을 열어젖혔다. 한 여성이 손을 벌벌 떨며 털썩 주저앉았다. 3월 26일 대구지법은 가정폭력 신고를 받고 집에 들어온 경찰관에게 유리병을 던지고 주먹으로 얼굴을 때린 남성에게 1심에 이어 무죄를 선고했다. 경찰관은 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자 열려 있던 문으로 진입했다가 공격을 당했다. 법원은 허락 없이 집에 들어간 경찰의 행위가 적법하지 않다고 봤다. 이미 범행을 저질렀거나, 당장 범행을 저지를 것처럼 위급하지는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상황에선 경찰을 폭행해도 공무집행방해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게 법원의 결론이다. 긴급한 현장일수록 ‘비긴급’ 징후들로 위장돼 있는 경우가 많다.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지 않으면 현관문 너머의 피해자를 지나치기 쉽다. 현장은 살아 움직이는데 고정된 잣대로 현장 대응을 평가하면 경찰관들은 소극적인 대응을 합리적 선택으로 여길 수 있다. 그들 역시 한 사람의 가장이자 직장인이기 때문이다. 진주 방화·살해범 안인득의 난동 신고를 8번이나 받고도 범행을 막지 못한 무심함, 이영학 살인사건 때 피해 여중생이 그의 집에 갔다는 걸 알고도 즉시 집에 가보지 않은 안이함은 학습된 무기력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법정에 선 피고인은 ‘무죄로 추정’돼야 하고 수사 받는 피의자는 방어권이 보장돼야 한다. 이미 벌어진 일을 다루는 재판과 수사는 넘치지 않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한 번 놓치면 돌이킬 수 없는 경찰의 초동 대응은 모자라지 않는 게 중요하다. 위험한지 아닌지는 들어가 봐야 안다.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
열두 살 금모 양은 17일 새벽 “불이야” 소리에 잠에서 깼다. 금 양은 아빠, 엄마, 할머니와 함께 아파트 4층 복도로 뛰어나왔다. 안인득의 집인 406호가 불타고 있었다. 아빠는 세 여성을 먼저 대피시키고 이웃들을 깨우러 위층으로 향했다. 금 양은 평소 소방교육을 받은 대로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내려갔다. 안인득은 어둑한 2층 계단에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열두 살 소녀를 향해 그는 흉기를 휘둘렀다. 금 양의 엄마와 할머니가 몸으로 흉기를 막아섰다. 금 양과 할머니가 숨지고 엄마는 중상을 입었다. 수술 후 가까스로 깨어난 엄마에게 유족들은 딸의 소식을 알리지 못하고 있다. 안인득에게 2년간 괴롭힘을 당해온 윗집 506호는 지난달 폐쇄회로(CC)TV를 달았다. CCTV에 열아홉 살 최모 양이 뒤쫓아 오는 안인득을 피해 다급히 506호로 들어가는 장면이 찍혀 있다. 최 양은 시각장애인이다. 그 긴박한 순간에 자기 집을 찾아 문을 열었다. 초등학교 때 전국장애인학생체육대회에 나가 금메달 2개를 딴 적도 있다. 사회복지사가 꿈이었던 이 여고생 역시 안인득이 휘두른 흉기에 사망했다. 정신질환자인 안인득은 다른 약자들의 삶을 무너뜨렸다. 오랜 항암치료를 마치고 초등학교 안전지킴이 일을 하며 회복 중이던 74세 남성, 혼자 식당일을 해 남매를 키운 59세 여성, 그런 엄마를 위해 대입을 포기하고 스무 살에 경리로 취직해 퇴근하면 엄마 식당일을 돕던 32세 딸이 희생됐다. 이번 진주 방화·살인사건과 유사한 2008년 서울 논현동 고시원 사건 때도 조현병 환자 정모 씨는 약자에게 흉기를 겨눴다. 중국동포인 식당 아줌마 3명 등 ‘단칸방 서민’ 6명이 숨졌다. 2012년 강남역 살인사건에선 무고한 23세 여성이 희생됐다. 정신질환 범죄는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통상의 범죄 공식에서 벗어나 있다. 가정과 사회에서 소외된 정신질환자들이 그나마 접근 가능한 곳은 또 다른 힘없는 사람들의 거처다. 정신질환 범죄자들은 자신만의 세계에서 키워온 분노를 이들에게 쏟아내는 경우가 많다. 정신질환자 범죄의 피해자들은 가해자에게 책임마저 온전히 묻지 못한다. 어디다 대고 원망해야 할지 막막하다. 가해자는 심신미약 감경을 받지만 피해자는 형편이 어려운 가해자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받을 길이 없다. 지금처럼 정신질환자 범죄가 방치되면 정신질환자들은 책임질 수 없는 책임으로, 다른 약자들은 회복될 수 없는 피해로 내몰린다. 정신질환자에 대한 관리 수위를 정하는 일은 그들의 인권과 다른 사회적 약자의 생명권을 절충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다. 정신병력 정보가 적절히 공유되고 필요하면 강제입원도 가능해야 하지만 지나칠 경우 환자들이 음지로 숨어 치료 공백이 더 커질 수 있다.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유명을 달리한 임세원 서울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마음 아픈 분들이 편견 없이 진료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달라”는 뜻을 남겼다. 하지만 정신질환자의 범죄로 울분을 안고 사는 피해자들이 계속 나온다면 그들에게 편견을 갖지 말자는 고인의 뜻을 제대로 기리기 어렵다. 정신질환자들과 건강하게 공존하기 위해서라도 약자에게 집중되는 비극을 이제는 막아야 한다.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
건설업자 윤중천 씨(58)가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성접대에 동원한 여성들은 평범한 20대의 사회초년생들이었다. 이들이 윤 씨의 강원도 원주 별장으로 불려온 사연은 비슷했다. 윤 씨는 재력가 행세를 하며 이들과 안면을 튼 뒤 모처로 유인해 기습적으로 성관계를 맺었다. 그러곤 몰래 촬영한 성관계 영상을 보여주며 겁을 주고 시키는 대로 하면 도움을 주겠다며 회유했다는 게 이 여성들의 경찰 진술이다. 이런 여성들 중 일부가 김 전 차관의 접대 자리에 투입됐다. 이들은 2013년 경찰 수사 당시 “윤 씨와 김 전 차관이 요구한 성행위는 거의 성학대에 가까웠다”고 진술했다. 피해 여성 중에는 정신적 충격에 자살을 시도한 사람도 있다. 피해자들이 경찰에 했던 진술에는 분노가 서려 있다. “김학의와 대질조사시켜 주세요. 귀싸대기를 날려버리게.” “목에 칼이 들어와도 (성접대를 받은 사람은) 김학의가 맞습니다.” 문제의 ‘성관계 동영상’ 속 남성은 김 전 차관인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형사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김 전 차관으로선 윤 씨가 여성들을 제공해줘 성관계를 했을 뿐 강간은 아니었다고 주장할 소지도 있다. 검찰은 김 전 차관의 특수강간 혐의에 대해 두 차례 연속 무혐의 처분했다. 피해 여성들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고, 사건 전후 언행이 ‘피해자다움’과 거리가 멀었다는 판단에서였다. 김 전 차관은 윤 씨의 협박과 회유에 의해 반발을 못 하게 된 여성들을 상대로 성욕을 충족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경찰의 판단이다. 여성들이 검찰 고위 간부인 그의 앞에 섰을 땐 이미 저항 의사를 상실한 뒤였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성접대라는 명목으로 자행된 사실상의 ‘성학대’를 어떻게 심판할 것인지가 이번 사건의 중요한 본질이다. 김 전 차관이 성접대를 받을 수 있었던 원천은 그가 국가로부터 위임받은 공권력이었다. 윤 씨는 김 전 차관 등 권력자와의 친분을 내세워 사업자금을 끌어모았다. 성접대가 핵심 수단인 윤 씨의 비즈니스 모델에서 김 전 차관은 최상위 포식자에 가까웠다. 김 전 차관의 높은 지위가 접대를 학대의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나 그 학대는 ‘증거 불충분’으로 증발해버린 게 지금까지의 검찰 수사였다. 1일 재수사에 나선 검찰 특별수사단은 김 전 차관이 여성들에게 가했던 성폭력 의혹의 실체를 상세히 밝혀야 한다. 검찰이 그동안 두 차례 수사에서 일관성이 떨어진다고 배척했던 피해 여성들의 진술도 원점에서 다시 들어야 한다. ‘그루밍(가해자에 의한 성적 길들이기) 성폭력’ 등 새롭게 조명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김 전 차관은 그동안 검경 수사에서 “윤 씨는 모르는 사람이고 성접대를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해왔다. 그가 최근 태국으로 출국하려다 공항에서 붙잡힌 것도 지난 6년간의 언행에 비춰보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외신은 이 사건을 보도하며 그의 예전 직함인 법무부 차관을 ‘Vice Justice Minister’라고 표기했다. 그는 한때 직함에 ‘Justice(정의)’가 들어가는 한국의 최고위 공직자였다.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
‘청담동 주식부자’ 이희진 씨(33·수감 중) 부모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김모 씨(34)가 지난해 4월 ‘일본 탐정’을 사칭하며 이 씨로부터 사기당한 피해자들에게 접근해 이 씨 관련 정보를 수집하려 했던 것으로 24일 확인됐다. 경찰은 김 씨가 흥신소 직원을 동원해 이 씨 부모를 미행하고 이 씨 부모의 차량에 위치추적기를 붙여 동선을 추적하는 등 1년여 전부터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씨 사기 피해자 A 씨는 24일 본보의 통화에서 “지난해 4월 김 씨로부터 ‘이 씨 관련 제보할 게 있으니 만나자’라는 e메일을 받아 한 차례 만났다. 이후 연락이 없다가 11개월 만인 15일(김 씨 검거 이틀 전) ‘이 씨 어머니 돈을 보내주면 받겠느냐’고 전화를 걸어왔다”고 말했다. A 씨에 따르면 김 씨가 처음 연락해온 시기는 이 씨 형제의 1심 선고일인 지난해 4월 26일. 김 씨는 이날 A 씨와 통화하며 “나는 일본 탐정인데 조사해보니 언론에 나온 피해가 많이 축소돼있다. 법원에 가서 사람들(피해자들) 얼굴을 봤는데 이미 (돈을) 다시 찾으려는 의지가 없어보였다”고 말했다. 이틀 뒤 김 씨는 서울의 한 커피숍에서 A 씨와 만나 이 씨 부모가 지난해 2월 이사 간 아파트 주소를 언급하며 ‘드론을 띄워 (이 씨 부모를) 감시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씨 부모는 당시 김 씨가 거론했던 이 아파트에 거주했으며 지난달 25일 그곳에서 피살됐다. A 씨는 “김 씨가 자신이 아는 걸 흘리면서 나에게 필요한 정보를 캐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A 씨는 “김 씨가 ‘검찰 출신 청와대 고위 인사가 이 씨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식의 허황된 얘기를 해 더 이상 만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이후 김 씨는 별다른 연락이 없다가 11개월 만인 이달 15일 A 씨에게 카카오톡으로 불쑥 전화를 걸어왔다. 김 씨 등이 이 씨 부모를 살해한 지 3주쯤 지난 때였다. 김 씨가 이날 낮 이 씨의 동생(31)을 만나고 몇 시간 뒤 A 씨에게 연락한 것이었다. 김 씨는 A 씨에게 “판을 뒤집을 수 있는 걸 하려고 하는데 자문을 구하고 싶다”며 “이 씨 어머니의 돈을 보내주면 안 받으실 거냐”고 물었다. 경찰은 김 씨가 사기 피해자들을 위한 범행으로 포장하기 위해 뒤늦게 A 씨와 접촉하려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 씨는 다음날인 16일에도 A 씨에게 ‘제보하려고 전화했는데 안 받으시네요. 밀항 준비 중입니다’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며 계속 연락했다. 김 씨는 17일 밀항 브로커를 만나려다 경찰에 체포됐다. A 씨는 “제가 지난해 4월 만났던 사람이 이 씨 부모 살인 용의자라는 경찰의 연락을 받고 소름이 돋았다”고 말했다. 경찰 조사결과 김 씨는 지난달 25일 범행 당시 이 씨 부모의 돈 가방에서 이 씨 동생이 하이퍼카 ‘부가티 베이론’을 15억 원에 판매한 매매증서를 발견한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은 김 씨가 이 매매증서를 보고 돈을 더 빼앗기 위해 이 씨 동생을 만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조사 중이다. 김 씨는 15일 수도권의 고깃집에서 이 씨 동생을 만나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김 씨는 이어 16일에도 이 씨 동생과 다시 만나기로 했다가 약속을 취소했다. 김 씨 측은 “이 씨 동생에게 범행을 털어놓고 사과하려고 만났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며 “첫 만남 때 못한 사과를 하려고 또 만나기로 했는데 도저히 못 할 것 같아 약속을 취소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안양=김은지기자 eunji@donga.com조동주 기자 djc@donga.com}
‘구청에서 단속 나오면 돈 좀 찔러주면 되고.’ ‘왜 대처를 못했지? 어떻게든 보도를 막으면 되지 않나?’ ‘(수갑) 차기 전에 1000만 원 준다고 했어.’ ‘빅뱅’의 승리(본명 이승현·29)와 가수 정준영 씨(30), FT아일랜드 최종현 씨(29)가 카카오톡에서 나눈 대화에는 공권력을 만만하게 보는 대목이 자주 나온다. 이들은 각자 자랑하듯 성관계 상황을 설명하고 ‘강간이네’ ‘살인만 안 했지, 구속감 진짜 많아’ 등의 말을 농담처럼 주고받는다. 정 씨는 성관계 영상을 유출하지 말라고 사정하는 상대 여성에게 ‘동영상 지웠어’라고 카톡을 보내고는 다른 카톡방에 그 영상을 버젓이 올리기도 했다. 정 씨는 얼마 전 경찰 소환을 앞두고 “큰 죄책감 없이 행동했다”는 말로 사과했다. 그렇게 큰 잘못인지 미처 몰랐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의 태연한 범행은 죄책감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일까. 정 씨는 2016년 8월 한 여성으로부터 성관계 장면을 불법 촬영한 혐의로 고소당한 적이 있다. 그가 혐의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당시 정 씨가 얼마나 자신만만했는지, 수사기관은 정 씨의 거짓말에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당시 정 씨는 그 여성과의 성관계를 촬영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죄가 되는지는 여성이 동영상 촬영에 동의했는지에 달려 있었다. 여성은 촬영에 동의하지 않았던 증거라며 정 씨와의 성관계 상황을 녹음한 녹취록을 제출했다. 경찰은 녹취 내용만으론 동의 여부가 명확하지 않아 정 씨에게 당시 영상을 촬영했던 휴대전화 제출을 요구했다. 그러자 정 씨의 변호사는 휴대전화를 사설 포렌식(디지털 저장 매체 복구 및 분석) 업체에 맡긴 뒤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허위 서류를 냈다. 하지만 경찰은 의심하지 않았다. 정 씨 측이 휴대전화를 맡겼던 업체에 찾아가 ‘복원 불가’ 확인서를 써 달라는 황당한 요구까지 했다.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도 부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검찰은 정 씨가 뒤늦게 제출한 휴대전화를 포렌식한 결과 당시 성관계를 촬영했던 영상이 나오지 않았지만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정 씨가 성관계를 촬영한 것이 명백한 이상 설사 동영상을 지웠다고 해도 포렌식 과정에서 발견돼야 정상이다. 영상이 사라졌다면 정 씨가 사설 업체를 통해 증거를 인멸했거나 엉뚱한 휴대전화를 제출해 검찰을 속인 것으로밖에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검찰은 증거를 빼돌린 정 씨를 추궁하기는커녕 “동의 없이 촬영했다”는 여성의 주장에 근거가 부족하다고 보고 무혐의 처리했다. 검찰마저 그냥 흘려보낸 정 씨의 휴대전화에는 그와 승리 등 연예인들이 저지른 충격적인 탈법 행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때 정 씨가 경험한 공권력은 숨기면 찾지 않는 공권력이었다. ‘잘 주는 애들로 준비시켜라’라며 성접대 지시를 했던 승리는 카톡에 그 말을 남기며 나중에 발목이 잡힐 수 있다고 염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투자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접대라는 구태의연한 불법행위를 시도했던 그를 방송계에서는 ‘승츠비’(승리+위대한 개츠비)라고 치켜세웠다. 여성 착취를 사업 수완으로 미화하는 사람들 속에서 승리가 두려워할 게 있었을까. 2009년 장자연 사건, 2013년 김학의 사건은 공통적으로 성접대에 동원된 여성들이 성폭력 피해를 호소했지만 실체가 덮이고 책임자는 처벌을 면한 사건이다. 권력자가 저지른 성 착취는 피해자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무마되는 것을 보면서 승리와 정 씨는 용기와 영감을 얻었을 법하다. 부실 수사는 하나의 정의를 실현하지 못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또 다른 불의를 불러올 수 있다.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
“올해 90회를 맞는 서울국제마라톤은 한국 마라톤 신기록의 요람입니다. 기록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원경환 서울지방경찰청장(사진)은 13일 “대회 참가자들이 갈고닦은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안전 관리에 최선을 다하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원 청장은 “각종 돌발 상황과 테러 위험 등에 대비해 서울 광화문과 잠실 주경기장 주변에 경찰특공대와 경찰견을 배치할 계획”이라며 “세계인이 지켜보는 국제대회답게 안전과 질서도 최고 수준으로 관리하겠다”고 강조했다. 서울국제마라톤 중계 영상은 해외 103개국에 송출된다. 서울경찰청은 교통경찰 775명과 모범운전자 524명 등 진행요원 약 3900명을 코스 곳곳에 배치해 대회 진행에 차질이 없도록 하고 시민 불편을 최소화할 계획이다. 원 청장은 “대회 성공을 위해선 무엇보다 주변 주민들의 성원과 협조가 필수적이다. 교통통제 플래카드와 입간판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은 대회 당일인 17일 오전 5시부터 8시 40분까지 출발지인 세종대로(광화문 앞∼세종대로 사거리) 양방향 전 차로의 교통을 통제한다. 오전 7시 50분부터 오후 1시 35분까지는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잠실주경기장에 이르는 구간에서 순차적으로 진행 방향 전 차로 교통이 통제된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2012년 서울중앙지검 강력부의 한 조사실. 당시 서울 강남 유흥업계를 주름잡던 ‘룸살롱 황제’ 이경백 씨는 검사에게 진술하며 ‘월정’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논현지구대가 4개 팀인데 각 팀 총무에게 월정 200만 원씩 줬죠.” 이 씨는 총무를 맡은 고참 경찰관에게 매월 정해진 금액을 상납했다. 일원화된 수금 창구를 무시하고 따로 이 씨의 업소를 찾아오는 경찰관도 있었다. 그들은 대개 정복 차림으로 나타나 “내 이름을 못 들어봤나 보지? 깐깐한 사람이라고 소문이 났을 텐데…”라고 말하곤 했다. 이 씨는 이들을 ‘각개전투’, ‘독고다이 슈킹’ 등의 속칭으로 분류했다. 이 씨가 아무에게나 준 것은 아니다. 총무가 “팀을 정리했다”는 의사표시를 해야 부하 직원들을 컨트롤할 수 있다고 보고 거래를 텄다. 태도가 미지근하면 “다른 총무들처럼 착착 치고 나오지 않는다”며 적게 줬다. 말이 상납이지, 경찰관들을 방패로 고용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씨는 당시 룸살롱 13곳을 운영하며 5년간 약 3000억 원을 벌었다. 단속 공무원들에게 매달 수천만 원 정도 쓰는 것은 사업 리스크를 줄이는 가장 ‘가성비’가 좋은 수단이었다. 그의 상납 리스트에 오른 경찰관 중 18명이 구속되고 66명이 징계를 받았다. 이 씨는 검사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제가 자선사업가라서 돈을 줬겠습니까. 단속을 제대로 맞으면 그만큼 피해가 크고, 안 맞으면 그만큼 이익이 크니까 상납하는 거죠.” 유흥업의 경쟁력은 고객의 욕망을 채워주면서도 문제가 안 되도록 막아줄 때 극대화된다. VIP들은 그런 곳에서 돈을 뿌린다. 버닝썬, 아레나 등 유명 클럽들이 화류계의 강자로 떠오른 요즘에도 업(業)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잘되는 클럽일수록 경쟁업소의 신고가 많고, 단속에 걸려 영업정지라도 당하면 기회비용이 크다. 그때나 지금이나 단속을 차단하려는 동기가 강할 수밖에 없다. 폭행시비로 시작된 버닝썬 사건이 마약 투약과 유통, 약물 성폭행 의혹 등으로 커지면서 그동안 베일에 가렸던 욕망의 치부가 드러나고 있다. 클럽 안으로 공권력이 미치지 않도록 단속 경찰관들을 관리해야 할 절실한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실제로 버닝썬 대표가 전직 경찰관을 통해 경찰에 2000만 원을 건네려 했던 정황도 나왔다. 수익 모델을 지키려는 업주와 유혹 앞에 선 경찰관이 존재하는 이상 ‘빅딜’이든 ‘스몰딜’이든 거래는 계속된다. 유흥업주와 경찰관의 유착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경찰 수뇌부는 강수를 둬 왔다. 강남지역 관서 경찰관들을 수백 명씩 물갈이했고, 업주와 전화 통화만 해도 징계를 하기도 했다. 버닝썬 사건 수사를 지휘하는 원경환 서울경찰청장도 4일 기자간담회에서 “유착이 확인된 경찰관은 용서하지 않겠다. 연루된 직원이 아무리 많아도 모두 처벌하겠다”고 결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유착 경찰관들을 ‘썩은 사과’로 간주해 도려내는 식의 대책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업주가 단속 경찰관과 ‘직거래’하거나 경찰관이 유흥업소에 직접 투자해 수익을 챙기는 등 수법이 한층 정교해질 뿐이었다. 한때 음주단속에 걸린 운전자들이 경찰관에게 뒷돈을 찔러주는 일이 흔히 있었다. 요즘 그런 관행이 사라진 것은 둘 간의 거래가 오가던 시장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경찰은 ‘1인 단속’을 없애고 의경 등 여러 명이 공개단속을 하도록 했다. 또 음주측정기에 저장된 기록은 바로 출력해 음주운전 입건자 명단과 매일 대조하도록 의무화했다. 경찰관이 봐줄 수 있는 여지가 없으니 운전자 역시 기대할 게 없어져버렸다. 뒷돈 주고받는 사람도 잡아야겠지만 거래가 이뤄지는 시장을 잡아야 버닝썬 같은 사건이 줄어든다.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
#. 오전 9시 31분. 지난해 4월 6일 그 시각, 서울 서초구 삼성증권 본사 사무실에서 한 여직원이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컴퓨터 모니터를 향해 있는 그의 눈에 초점이 없었다. 조금 전 마우스 버튼을 눌렀던 손을 한 번씩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날은 삼성증권 주식을 보유한 자사 직원들에게 배당금을 주는 날이었다. 지급 담당인 그 여직원은 너무 ‘비싼’ 실수를 하고 말았다. 주당 1000원의 배당금을 지급해야 하는데 주당 1000주의 주식을 입고시켰다. 100주를 가진 직원이라면 배당금 10만 원 대신 한순간에 주식 10만 주(398억 원)를 갖게 됐다. #. 오전 9시 44분. 본사 12층 회의실에서 기업금융2팀 4명이 영업회의를 하고 있었다. 팀원들은 이날 아침 갑자기 자사 주가가 떨어지는 게 의아했다. C 대리는 무슨 일인가 싶어 자신의 주식 계좌를 열어봤다. “어! 이거 뭐야.” 계좌에 200억 원이 넘는 주식이 들어와 있었다. A 팀장, B 과장, D 주임도 계좌를 확인했다. 평소 잔액보다 끝자리 ‘0’이 3개 더 붙어 있었다. #. 오전 9시 47분. 사측은 내부 전산망을 통해 ‘잘못 입고된 주식이니 팔지 말라’고 3차례 전파했다. 회의실에 있던 팀원들은 이를 못 본 듯했다. B 과장은 ‘매도 주문’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팝업 창이 떴다. ‘30억 원 이상 거액 주문입니다. 주문처리하시겠습니까?’ 그는 7만 주씩(29억여 원) ‘쪼개기 주문’을 했다. C 대리, D 주임도 따라 했다.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팀원들을 A 팀장은 막지 않았다. 함께 건넜다. 불과 3분 사이 이들이 팔겠다고 내놓은 주식 가치는 각각 205억~414억 원이었다. 회사가 즉각 봉쇄 조치에 나서면서 현금화는 되지 않았다.지난달 30일 서울남부지법 304호 법정. 말끔한 정장차림 남성 8명이 모여 있었다. 잘 닦인 구두에, 가지런히 빗어 넘긴 머리칼, 뿔테안경. 20대 후반~40대 초반의 지적인 인상이었다. 다만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기업금융2팀 4명 등 주식을 팔아치우려 한 혐의로 기소된 삼성증권 직원들이었다. 검찰은 세 가지 죄명으로 이들을 법정에 세웠다. ‘나의 이익은 누군가의 손해’인 주식시장에서 불공정 경기를 한 죄, 실제 갖고 있지도 않은 주식을 팔겠다고 속인 죄, 회사가 위기에 처했을 때 돕기는커녕 일확천금을 시도한 죄가 있다고 봤다. 이들은 대부분 검찰 조사에서 “순간 욕심이 났다”고 진술했다. 카카오톡으로 ‘주식을 팔면 어떻게 될까’ ‘회사 그만두면 되지 않을까’ 하고 상의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사표로 될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 해고됐다. 회사로부터 55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도 당했다. 형사처벌까지 받을 수 있다. 실제 손에 돈을 쥐지는 않았지만 손대지 말았어야 할 ‘매도’ 버튼을 누른 대가다. 10개월 전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선망받던 ‘엘리트 증권맨’이었던 피고인들은 이날 재판에서 최후진술을 했다. “한순간의 어이없는 행동을 반성합니다. 그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두 자식의 아버지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이익을 취할 생각이 없었고 얻지도 않았습니다.” 삼성증권 오류배당 사고는 비슷한 판례를 찾기 힘든 초유의 사건이다. 담당 판사도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이 너무 어마어마해졌다. 법리를 치열하게 따져보겠다”고 했다. 그날 주식을 배당받은 직원 2018명 중 시장에 주식을 내놓은 직원은 22명이었다. 100명 중 1명꼴이다. 우리는 살면서 한번쯤 그 ‘1%의 선택’ 앞에 놓일 때가 있다.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
지난해 1월 그날은 국립암센터 정규직 필기시험을 한 달쯤 앞둔 날이었다. 이 병원 방사선과 임시직 민수(가명·28)는 직속 상사인 A 씨(44·여)의 컴퓨터 모니터 화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한 달 뒤 치르게 될 정규직 필기시험 문제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제야 민수는 A 씨가 출제위원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자신의 호출에 영문도 모른 채 달려온 민수를 앞에 두고 A 씨는 태연하게 마우스를 만지작거렸다. “민수 씨, 문제에 오탈자가 있는지 봐봐.” ‘이걸 왜 나한테 보여주지?’ 민수는 순간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A 씨에게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국립암센터 정규직은 방사선사 자격증을 가진 사회 초년생들에게 꿈의 직장이다. 하루 8시간 근무에 300만 원이 넘는 월급, 게다가 정년보장까지. 민수는 다른 종합병원에서 2년간 경력을 쌓은 뒤 어렵게 임시직 자리를 얻었다. 이때부턴 정규직이 되려고 낮에 일하고 밤에 시험 준비를 하며 1년 넘게 ‘주경야독’했다. 간부들은 민수에 대해 “착실하고 빠릿빠릿하다”며 좋게 평가했다. 정규직 입성이 코앞이었다. 모니터 화면 속 시험문제들은 순식간에 머리에 입력됐다. 묘한 흥분과 함께 죄책감이 뒤섞였다. 15분쯤 지났을까. 뒤에서 “어!”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근처를 지나던 다른 부서 간부가 모니터 화면을 보고 만 것이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민수와 A 씨를 번갈아 봤다. A 씨는 황급히 환자의 컴퓨터단층촬영(CT) 사진을 모니터에 띄웠다. 몇 초간 적막이 흘렀다. 며칠 뒤 병원에 소문이 퍼졌다. 시험문제를 미리 본 사람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민수는 공들여 쌓아올린 탑이 무너질 것만 같아 걱정이었다. 고심 끝에 다른 임시직 동료들에게 문제를 알려주기로 했다. 한 명씩 카카오톡으로 대화하며 시험문제를 보냈다. ‘고마워 오빠. 근데 이렇게 해도 돼?’ ‘야 빨리 봐. 나도 겁나.’ 필기시험은 지난해 2월 예정대로 치러졌다. ‘문제 유출’이라는 불씨를 안고 있는 이 시험에 178명이 몰렸다. 민수 같은 임시직이 12명, 외부 지원자가 166명이었다. 서울과 수도권 종합병원에서 2년 이상 근무한 방사선사 대부분이 응시할 정도로 격전이었다. 정규직 합격자는 단 3명. 그중 한 명이 민수였다. 매사에 열심이고 일처리가 꼼꼼했던 민수의 합격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의 안도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합격자 발표 한 달 뒤 정기 감사를 나온 보건복지부 관계자들에게 ‘문제 유출’ 제보가 날아들었다. 민수와 A 씨는 조사를 받았고 바로 시인했다. 민수의 합격은 취소됐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A 씨는 물론이고, 혼자만 시험을 잘 볼까봐 동료들에게 문제를 알려준 민수의 행위 역시 형사처벌 대상(업무방해)이었다. 민수 한 명을 위해 175명의 ‘민수’들을 들러리로 만든 대가는 가볍지 않았다. A 씨는 지난달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다. 18년간 일했던 직장 암센터에서도 해임됐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자책했다. “민수가 궂은일을 도맡아했어요. 그 절박한 모습에 연민이 들어서 도와주고 싶었던 건데….” 본의 아니게 ‘독이 든 사과’를 베어 문 민수 역시 재판에 넘겨질 처지다. 유죄 판결이 나면 앞으로 공립 병원에 취업하기 어렵다. 경기북부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23일 수사결과를 발표하며 A 씨와 민수 사이에 금전 등의 대가가 오간 건 없었다고 밝혔다. A 씨는 민수를 돕고 싶었을 것이고, 민수 역시 호의를 마다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기성세대의 그릇된 온정에 한 청춘이 허망하게 무너졌다. 법의 경계를 넘는 순간 이타심은 더 이상 선의가 아니다.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