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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은 유력 경영인이 화두를 던진 ‘45세 정년제’ 논란으로 뜨겁다. 지난달 9일 니나미 다케시(新浪剛史·62·사진) 산토리홀딩스 사장은 “45세 정년제 도입으로 직원이 회사에 의존하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3대 경제단체 중 하나인 경제동우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였다. 그는 “종신고용이나 연공임금제 등 일본의 과거형 고용모델에서 탈각할 필요가 있다”며 “45세 정년제를 도입하면 인재들이 성장산업으로 대거 이동할 수 있고 회사 조직의 신진대사에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45세면 잘리는 거냐” 여론 거센 반발 거두절미 ‘45세 정년’이라는 단어에 충격을 받은 여론은 엄청나게 반발했다. “젊을 때 부려먹고 45세면 자르겠다는 거냐” “45세에 이직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 “인건비를 줄이고 싶은 기업 입장을 대변한 것” 등 부정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이날 관련 뉴스를 다룬 포털사이트 야후에는 수만 개의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이에 놀란 니나미 사장은 이튿날 기자회견에서 “정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잘못일 수 있다”며 “45세는 직장인 생활에서 한 매듭이 되는 시기로 이때쯤 자신의 인생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은 중요하다. 스타트업 기업으로 옮기는 등 사회가 여러 옵션을 제공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해고하겠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고 거듭 해명했다. 일본 정부도 즉각 “국가로서는 70세까지 기업에 고용을 의무화할 것을 부탁하고 있다(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관방장관)”며 불 끄기에 나섰다. 일본 최대 경제단체인 경단련(經團連)의 도쿠라 마사카즈(十倉雅和) 회장은 “노동시장 유동화가 일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힘을 실어줬다. 그러나 “회사가 보장하는 것이 45세까지라고 한다면 젊은이들은 의욕을 잃을 것”이라거나 “스타트업은 무슨 죄냐”는 등 부정적 반향은 여전했다. “인생 플랜이 불투명해지면 젊은이들이 결혼과 출산부터 기피할 것”이라는 뼈아픈 지적도 있었다. ○‘70세까지 고용연장’이 던지는 불안감 이처럼 논란이 일파만파 번진 이유는 우선 니나미 사장의 사회적 영향력 때문이다. 그는 일본 총리 직속 자문기구인 경제재정자문회의 민간위원으로 평소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해 정책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쓰비시상사 출신으로 44세 때 일본 편의점 업계 2위인 로손의 사장으로 발탁됐고 이후 산토리홀딩스 사장으로 자리를 옮기며 승승장구한, ‘샐러리맨 신화’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4월부터 시행된 ‘70세 고용 연장’ 정책이 주는 불안감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고용형태가 자신들에게 끼칠 부작용은 없는지 의구심을 가진 젊은 세대에게 툭 던져진 ‘45세 정년론’은 이들의 막연한 피해의식을 자극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실제로 전문가들은 “니나미 발언의 배경에는 일본 정부가 정년을 70세까지 늘리려고 하는 흐름에 대한 기업 측 위기의식이 들어가 있다”고 지적한다. 심지어 “(정부 방침에 침묵하는) 경영자들 들으라고 한 발언”이란 해석도 나온다.○4월부터 모든 기업에 70세까지 취업 확보 ‘노력의무’ 부과 흔히 ‘일본의 정년이 70세로 연장됐다’는 말이 회자되지만 엄밀히 말해 현재 일본의 법적 정년 연령은 60세다. 2013년 고령자고용안정법을 개정하면서 60세 미만 정년을 금지하고 65세까지 근로자가 원할 경우 기업 측이 고용하도록 ‘의무화’했다. 정식으로 정년이 65세가 되는 시기는 2025년으로 정했다. 또 올해 4월부터는 65세 고용 이후로도 근로자가 원한다면 70세까지 취업을 보장할 것을 각 기업에 ‘노력의무’ 형태로 부과했다. 방법은 65세까지 적용해온 3가지 고용연장 조치를 70세까지로 연장하거나 취업 알선, 프리랜서 계약, 재교육 등을 지원하는 형태도 가능하다(표 참조). 이런 조치를 두고 고령자 부양을 국가가 기업에 떠넘기는 것 아니냐’는 평가가 나온다. 일본 인구에서 65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28.7%(지난해 9월 현재)다. 정부 입장에서는 인구의 3분의 1이 일하지 않고 부양받는 입장이 된다면 재정이 버텨낼 수 없다. 하지만 경영자 입장에서는 한번 직원이 되면 본인이 원할 경우 65∼70세까지 보살피라고 강요받는 셈이 된다. 한 이코노미스트는 “직원 노후 보장도 좋지만 회사가 망해버리면 모두 끝” “차라리 정년을 철폐하고 각 회사 사정에 맞는 고용을 보장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9년 전 등장했다가 사라진 ‘40세 정년제’ 정년 단축 논의는 사실 이번에 처음 나온 게 아니다. 2012년 당시 민주당 정권하에서 열린 ‘국가전략회의’ 분과회에서 ‘40세 정년제’가 제안됐다. 기업의 고용의무를 65세로 연장한 현행 고령자고용안정법 개정을 1년 앞두고 관련 논의가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당시 로손 사장이던 니나미는 이때도 분과회 위원으로서 정년 연장에 반대하고 “45세 정도부터 제2의 인생을 생각하게 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고 한다. 위원회는 보고서에서 “모든 국민이 75세까지 일할 수 있는 사회를 형성하려면 정년제 개념을 바꿀 필요가 있다. 현 60세 정년제는 기업에 인재가 고정돼 신진대사를 저해하고 있다. 정년이 65세로 연장되면 젊은이의 고용 기회가 더욱 줄어든다. …평생 2, 3번 정도 이직이 보통인 사회를 지향하려면 오히려 정년 연령을 내려야 한다. …정년 후 새로운 지식을 얻은 뒤 같은 기업에서 일할 수도 있고 창업 등을 상정할 수 있다”고 했다. 최근의 니나미 사장 발언과 그 취지가 유사하다. 이는 린다 그래튼 런던경영대 교수의 지론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는 저서 ‘100세 인생’에서 한 사람이 평생 여러 개의 직업을 갖게 되고 이를 위한 리커런트(recurrent) 교육이 활성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100세 시대에는 60세, 혹은 65세까지 일한 수입(저축 혹은 연금)으로 평생을 먹고살 수 없다”며 “인생은 과거와 같은 교육, 취업, 은퇴의 3단계가 아니라 더 긴 탐색기와 중간 휴식기를 가지며 직업을 바꾸는 과정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본 정부는 2017년 총리 산하 직속기관으로 ‘인생 100세 시대 구상회의’를 설치하고 그래튼 교수 등을 위원으로 초빙한 바 있다.○해외의 경우, 한국의 경우 미국은 1986년에 정년제를 없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퇴직시키는 것은 또 하나의 차별’이라는 이유에서다. 영국도 2011년 같은 이유로 정년을 폐지했다. 독일은 현재 65세인 정년을 2029년까지 67세로 연장할 계획이다. 연금 등 국가 재정 부담을 완화하고 숙련공의 기술 노하우를 더 활용하기 위해서다. 이들 서구권은 고용에 유연성이 있다는 점이 한국이나 일본과 다르다. 정년 연장은 연금 수급 시기와 맞물려 사회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프랑스는 2010년 정년을 60세에서 62세로 늦추고 연금 수령 시기를 65세에서 67세로 연장하려 했지만 반대 여론에 부닥쳐 원점으로 돌아갔다. 러시아도 은퇴와 연금수급 연령을 2028년까지 순차적으로 늦추려다가 반발이 커지자 여성만 상향했다. 한국은 2016년부터 법적 정년이 60세로 연장됐다. 현실에서는 대부분의 직장에서 40대 중반만 돼도 떨려나는 양상이다. 급격한 저출산 고령화에 따라 정년 연장이건, 노동시장 유연화건 논의될 법하지만 최고 수준의 청년실업률과 강경한 노조활동 앞에서 진전을 보지 못했다. 정년이 보장되는 일본식도,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있는 미국식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서 베이비붐 세대들이 정년을 맞이하고 있다. 정년제 논의는 개인이 몇 살에 일을 그만두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를 어떻게 발전시키고 고용을 어떻게 지키느냐 하는 국가전략 차원의 이야기다. 100세 시대의 정년, 정답은 없지만 지금의 형태가 지속가능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이런 인생 2막]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대표7선 정치인에서 ‘웰다잉 전도사’로 변신“70은 새 인생 시작하기에 딱 좋은 나이”“‘유언장 쓰기’ 한번 실천해보세요” 원혜영(70) 전 의원의 요즘 직함은 (사)웰다잉문화운동 공동대표다. 부천시장과 국회의원을 합해 선출직만 7선을 거친 정치인이지만 지난해 5월부로 정계를 은퇴하고 ‘웰다잉 전도사’로 변신했다. 이런 그의 인생2막은 순조롭게 진행 중일까. “정치 얘기는 안한다”는 조건으로 10일 서울 서소문 사무실에서 만났다. -30대에는 풀무원식품을 창업한 기업인이었고 40대부터 30년간은 정치인으로 사셨습니다. 인생 2막이 아니라 3막이라 하는 게 맞을 것같기도 합니다. “그렇잖아도 어제 만난 강명구 서울대 명예교수와 ‘우린 지금이 3막 아니냐’는 얘길 했어요. 30세까지 성장기, 30~60세 활동기, 그 뒤 은퇴기가 3막, 즉 서드 라이프인 거죠. 1980년대까지만 해도 평균수명이 70세였습니다. 60세 가까이에 정년하고 나면 10년쯤 살다 대충 노환으로 가는 거죠. 지금은 장수시대가 돼 버렸으니 한 막 더 늘릴 수 있지요.” -2019년 다음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하셨죠. 왜 그때였습니까. “나이 70이면 새 인생 시작하기 딱 좋은 나이 아닙니까. 제가 19대 의원에 당선됐을 때(2012년) 쯤이었을 거예요. ‘이번에 4년 일하고 한번 더하면 우리 나이로 70세, 정치 시작한 지 30년이 되는구나. 그때쯤 정리하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어요. 그래야 최소 10년은 다른 활동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다행히도 명예롭게 물러날 수 있었습니다. 큰 복이라고 생각해요.” -5선의원이신데, 국회의장을 하실 자리에 아깝게 물러나신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습니다. “아이고. 국회의장 하고 나면 다른 것 하고 싶은 욕심이 또 생기겠죠. 그럼 제 인생 3막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보통 정치인들은 명예롭게 은퇴할 기회가 없습니다. 선거에서 떨어져 사라지거나 스캔들로 인해 불명예제대하거나. 제 경우가 얼마나 복받은 건가요.”○정계은퇴도 ‘웰다잉’ 방식으로 그는 자신의 은퇴과정을 웰다잉(well-dying) 과정과 동일시했다. “웰다잉의 핵심이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인데, 저는 정치인생을 제 뜻과 계획에 따라 그만뒀어요. 자기결정권의 실천 아닙니까. 은퇴자 대부분이 생활 변화로 충격과 스트레스를 받는다는데, 전 미리 준비하던 웰다잉운동이 있었으니 충격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는 일상에서의 변화로는 ‘뚜벅이’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을 꼽았다. “자동차를 없앴습니다. 어딜 가나 지하철을 탑니다. 오늘도 부천에서 7호선 타고 온수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 시청역에서 내려 걸어왔습니다. 이러면 3500보 정도 걷습니다. 보세요. 만보계가 달린 시계도 샀습니다. 살도 좀 빠지고 몸이 가벼워졌어요.” 의원 시절 누적 주행거리 45만 km를 기록한 낡은 차는 더 이상 수리조차 어렵다는 판정을 받고 나서야 폐차했다. ‘팔 때를 놓치니 수리비 엄청 들이게 됐고 돈 들인 게 아까워서’ 유지했다는 게 그의 설명. 그 뒤로 차는 리스로 빌렸다. -대표님께 웰다잉은 무엇인가요. “살아온 날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것을 말하지요. 그러려면 자신이 결정할 일들이 많아요. 현대사회에서는 죽음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져서, 막상 닥치면 허둥대며 휩쓸려가게 됩니다. 하지만 죽음만큼 확실한 게 어디 있습니까. 그걸 받아들일 준비, 잘 마무리할 준비를 하는 게 웰다잉입니다. 노인이 무기력하게 쓸려가는 죽음은 아름다운 죽음이 아니지요. 내 죽음에 대해 내가 결정하고 준비하는 게 삶을 품위 있게 만들고 가족과 사회의 갈등을 줄여줍니다.”○웰다잉운동에 전념-말그대로 웰다잉 활동에 전념하고 계시다고요. “그밖의 어떤 일에도 나서거나 이름을 걸지 않아요. 어제는 유산기부 활성화 관련 자선단체들이 주최하는 세미나에 다녀왔습니다. 굿네이버스, 세이브 더 칠드런 등 어린이들을 돕는 단체들인데, 펀딩에 어려움을 겪던 이분들이 착안한 게 유산 기부예요. 재산을 모은 분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는데 그 일부를 좋은 일에 기부하는 문화를 만들자는 취지죠.” -영국의 레거시(Legacy) 10 캠페인 같은 건가요 “영국에서는 2011년 이래 억만장자 기업인과 정치인들이 대거 참여하고 유언장에 그 뜻을 남기고 있습니다. 기부란 게 오랜 역사적인 전통을 반영합니다. 유산의 ‘10%’라는 액수도 그래요. 교회 십일조가 대표적인데, 그야말로 신과 인간의 오랜 투쟁을 통한 타협의 산물입니다. 종교인들은 20%건 50%건 많이 받고 싶겠지만 그렇게 하다가는 지속가능성이 없죠. 1%~2%로는 교회 유지가 안되고요. 지속가능하면서 내는 사람도 큰 부담이 안 되는 정도가 10%라는 겁니다. 유산도 ‘3분의 1을 기부하라’면 부담이 되겠지만 10분의 일이라면 ‘내가 죽을 때 갖고 가는 것도 아닌데’하며 기꺼이 낼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하는 겁니다.” -상속 기부는 세금 문제가 복잡한 것 같던데요. “공익법인에 기부한 금액은 상속가액에서 빠지니까 상속세를 줄이는 효과가 있습니다. 사실 영국은 10% 이상 기부하면 나머지 재산에 대한 상속세도 10% 감면되지요. 세금공제 관련해서 우린 아직 멀었어요. 한국 관료들의 인식이 문제입니다. ‘국가가 세금 걷어 하며 되지 왜 민간이 나서냐’는 생각이 강합니다. 기부를 감독과 통제의 대상으로만 보는 거죠. 기부를 통해 민간의 봉사 영역을 늘리는 게 세금 걷어 쓰는 것보다 더 효율적인데 말입니다.”○70부터 10년 정도 새 삶을 살고자-정치인으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부천시장 시절 버스 도착시간을 알려주는 시스템(BIS)을 세계 최초로 도입한 것이 제 자랑거리입니다. 국회에서는 국회선진화법을 만드는데 힘을 기울였고 필리버스터 전면도입을 주도했습니다. 몸싸움 대신 ‘소수세력이 주장을 국민에게 충분히 호소할 기회를 주자’는 거였죠. 민주주의는 힘 있고 세력 있다고 다수결로 밀어붙이고 그러는 거 아닙니다. 이번에 여당이 선진화법이 무색할 정도로 초과의석을 얻었지만 이런 건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가 양극화되고 갈등과 분열이 구조화되는 것같아 걱정입니다. 정치의 역할은 통합인데 반대로 분열조장으로 가는 게 안타까운 일이예요.” -국회에서 웰다잉 관련 일도 많이 하셨더군요. “2015년에 여야 의원들을 모아 ‘웰다잉 문화조성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을 결성했습니다. 2016년 1월 무의미한 연명의료에 대한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법적으로 제도화하는 ‘호스피스 완화 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연명의료결정법)을 통과시켰고요. 이 법을 만들면서 크게 깨달은 것이 자기결정권 문제였습니다. 인간으로서 존엄과 품격을 잃지 않고 삶을 마무리한다는 자세, 이건 실제 생활문화에 정착시키는 게 중요하겠다. 은퇴 후 웰다잉운동에 나서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지요.” 2018년 2월부터 시작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은 8월 현재 100만 명을 넘어섰다. ○“유언장 쓰기 확산에 사명감” 말이 쉬워 ‘웰다잉’이지만 요즘은 웰다잉을 말하는 사람도 많고 영역도 다양하게 확산되는 추세다. 연명의료의향서 작성, 장기기증 서약, 간소한 장례식, 유언장 작성, 유산 기부 등, 하나하나가 책한권씩 나올 정도의 무게를 갖고 있다. 이중 그가 가장 사명감을 느끼는 분야는 ‘유언장 쓰기’다. “내 생명 내가 결정한다는 게 사전연명의료의향서라면 내 재산처리는 유언장을 통해 결정 하게 됩니다. 미국인의 절반 이상이 유언장을 쓰는데 반해 한국에서는 0.5% 정도만 쓰는 걸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이 차이가 문화의 차이 전통의 차이겠죠. 유언장을 써본다는 것은 내 삶을 한번 정리해본다는 의미입니다. 노인들이 자신의 마무리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많이 가져야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지요.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어요. 써보고 마음에 안 들면 찢어버리고 새로 쓰면 됩니다. 유언장이니 연명의료 생각하다보면 자연스레 재산의 5~10% 정도는 좋은 일, 그간 하고 싶던 일에 써보자는 생각도 할 수 있지요.” -유언장을 써두셨나요. “내가 정리하는 차원으로는 쓰고 있습니다. 공자가 일일삼성(一日三省)하라 했지만 일기 쓰기만큼 자신을 성찰해보는 기회도 없지요. 죽음도 나와 아주 먼 일, 상관없는 일이 아니란 걸 실감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내 삶을 정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달, 혹은 매년 결산 하듯이 한번씩 정리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더군요.” ○사회의 품격이란 면에서 웰다잉 중요하다. -간혹 노년에 웰빙도 힘든데 무슨 웰다잉이냐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웰빙은 먹고사는 문제, 건강 문제, 일자리 문제 그런 것들이 다 들어가 있는, 돈과 직결된 문제들이죠. 그런데 웰빙의 완성이 웰다잉입니다. 세상엔 끝이 있는 거고 드라마에서도 끝이 제일 중요하죠. 삶의 마무리가 아름다워야 인생 자체가 의미있고 아름다워지는 겁니다. 웰다잉은 내 마음의 문제입니다. 돈도 일자리도 필요없어요.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서 당연히 결정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죠.” -안락사에 대한 관심도 늘고 있습니다. “존엄사와 안락사는 용어상 혼란이 있습니다. 연명의료결정법 만들 때 가장 큰 장애가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인간이 임의로 끊겠다는 거냐’며 안락사와 같은 개념으로 보는 시각이었습니다. 안락사는 현대 의약을 동원해 약이나 주사를 통해 생명을 중지시키는 것이지만, 존엄사는 자연의 섭리대로 생명이 마무리되도록 하는 것이지요. 인공호흡 심폐소생술 같은 인위적 기술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하느님의 뜻대로 태어나 살아왔는데 하느님의 뜻에 맞서 인위적으로 삶을 연장하지 않겠다’며 연명의료를 거절하고 장기기증을 하셨습니다. 그게 자연의 섭리에 맞는 삶의 태도 아닐까요.” 다만 전세계적으로 안락사 문제는 덮어둘 일은 아니라는 점에는 그도 동의하는 듯했다. 스위스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벨기에 스페인 등 유럽 여러나라가 이미 조력자살 혹은 자살방조를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12개주에서 안락사가 허용됐고 검토중인 지역도 14개주에 달한다. -본래 문화운동이란 게 성과가 두드러지지 않는데요. “국회에서 연명의료결정법 웰다잉기본법 제정과 도입에 노력했는데 이제 정계를 은퇴했으니 문화적 확산을 하겠다는 쪽으로 제 역할을 설정한 거죠. 이런 문제는 법과 제도의 변화만으로는 안되고 문화 확산을 통해 이뤄지게 된다고 봅니다. 중장년층 이상이 1000만 명이라 치면 현재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쓰신 분이 100만 명, 약 10%입니다. 유언장도 10%를 목표로 설정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노인대상으로 한 기관 단체 초청 강연을 많이 다닌다. 웰다잉 홍보를 위해 대한노인회 고문 자리도 맡았다. 그러고보면 그에게서 처음 인터뷰에 응하겠노라는 답을 받은 것도 지난해 7월 ‘착한법만드는사람들’이 주최한 ‘존엄사 입법 촉구’ 세미나에서였다. “노인복지관이나 노인단체, 관공서 등 요즘 코로나 때문에 제한적이지만 부르는 곳이 있으면 가서 연명의료 웰다잉운동 등을 소개합니다. 장수시대 1000만 노인들이 자기결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설명하고 ‘이중에 연명의료의향서 작성하신 분 계시냐’고 물으면 반응이 아주 긍정적입니다. 비슷한 연령대인 제가 얘기하니 관심을 가져주십니다. 웰다잉 전파에 저같은 사람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린벨트로 묶인 집 한 채가 전재산 이런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기부를 실천하고 있다. “풀무원 정리하면서 만든 장학재단을 30년 가까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개인 재산은 그린벨트로 묶인 집 한 채가 전부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묶였는데 그걸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 덕분에 꼼짝없이 태어난 집에서 평생 사는 복을 누리고 있어요.” 이 집에는 원 대표가 부인에게 구애하던 시절 ‘평생 좋은 우물물로 머리 감게 해주겠다’며 자랑했다는 물 좋은 우물도 여전히 있다고 한다. 다만 용도는 마당에 물뿌릴 때 사용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원혜영 전 의원(70)의 요즘 직함은 (사)웰다잉문화운동 공동대표다. 부천시장 2선, 의원 5선 등 선출직만 7선을 거친 정치인이었지만 지난해 5월 정계은퇴와 동시에 ‘웰다잉(well-dying) 전도사’로 변신했다. 이런 그의 인생 2막은 순조롭게 진행 중일까. “정치 얘기는 안 한다”는 조건으로 10일 서울 서소문 사무실에서 만났다. ―30대에는 풀무원식품을 창업한 기업인, 40대부터 30년간은 정치인으로 사셨습니다. 인생 2막이 아니라 3막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잖아도 어제 만난 동료 교수와 ‘우린 지금이 3막 아니냐’는 얘길 했어요. 30세까지 성장기, 30∼60세 활동기, 그 뒤 은퇴기는 3막, 즉 서드 라이프인 거죠. 1980년대까지만 해도 평균수명이 70세였습니다. 60세 가까이에 정년하고 나면 10년쯤 살다 대충 노환으로 가는 거였죠. 이제 장수시대가 되다 보니 한 막을 더 늘리게 됐지요.” ―2019년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하셨죠. 왜 그때였습니까. “나이 70이면 새 인생 시작하기 딱 좋은 나이 아닙니까. 19대 의원에 당선됐을 즈음 ‘한 번 더하면 우리 나이로 70세, 정치 시작한 지 30년이 되는구나. 그때쯤엔 정리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국회의장을 하실 자리에 아깝게 물러난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습니다. “국회의장 하고 나면 다른 것 하고 싶은 욕심이 또 생기겠죠. 보통 정치인들은 명예롭게 은퇴할 기회가 없습니다. 선거에서 떨어져 사라지거나 스캔들로 인해 불명예 제대하거나. 제 경우는 얼마나 복 받은 건가요.”○정계은퇴도 ‘웰다잉’ 방식으로 그는 자신의 은퇴과정을 웰다잉 과정과 동일시했다. “웰다잉의 핵심이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인데, 저는 정치인생을 제 뜻과 계획에 따라 그만뒀어요. 은퇴자들이 생활 변화로 충격과 스트레스를 받는다는데, 전 할 일이 미리 준비돼 있어 충격도 별로 없었습니다.” 일상에서의 변화는 ‘뚜벅이’ 생활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자동차를 없애고 어딜 가나 지하철을 탑니다. 오늘도 부천에서 7호선 타고 온수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 시청역에서 내려 걸어왔습니다. 이러면 3500보 정도 걷습니다. 보세요. 만보계가 달린 시계도 샀습니다. 살도 빠지고 몸이 가벼워졌어요.” ―대표님께 웰다잉은 무엇인가요. “살아온 날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것이지요. 그러려면 자신이 결정할 게 많아요. 현대사회에서는 죽음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져서, 막상 닥치면 허둥대며 휩쓸려가게 됩니다. 사실 죽음만큼 확실한 게 어디 있습니까. 그걸 받아들일 준비, 잘 마무리할 준비를 하는 게 웰다잉입니다.”○웰다잉운동에 전념 ―말 그대로 웰다잉 활동에 전념하고 계시다고요. “그 밖의 어떤 일에도 나서거나 이름을 걸지 않아요. 어제는 유산 기부 활성화 관련 자선단체들이 주최하는 세미나에 다녀왔습니다. 굿네이버스, 세이브더칠드런 등 어린이들을 돕는 단체들인데, 펀딩에 어려움을 겪던 이분들이 착안한 게 유산 기부예요. 재산을 모은 분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는데 그 일부를 좋은 일에 기부하는 문화를 만들자는 취지죠.” ―영국의 ‘레거시(Legacy) 10’ 캠페인 같은 건가요. “영국에서는 2011년부터 억만장자 기업인과 정치인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죠. 유산의 ‘10%’라는 액수가 재미있습니다. 교회 십일조는 신과 인간의 오랜 투쟁을 통한 타협의 산물입니다. 예컨대 너무 많이 받으면 지속가능성이 없고 1∼2%로는 교회 유지가 어렵습니다. 지속가능하면서 큰 부담이 안 되는 정도가 10%라는 겁니다. 유산도 ‘3분의 1을 기부하라’면 부담 되겠지만 10분의 1이라면 기꺼이 낼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하는 겁니다.” ―상속 기부는 세금 문제가 복잡한 것 같던데요. “공익법인에 기부한 금액은 상속가액에서 빠지니까 상속세를 줄이는 효과가 있습니다. 사실 영국은 10% 이상 기부하면 나머지 재산에 대한 상속세도 10% 감면되지요. 세금공제 관련해서 우린 아직 멀었어요. 관료들의 인식이 문제입니다. ‘국가가 세금 걷어 하면 되지 왜 민간이 나서냐’는 생각이 강합니다. 민간을 감독과 통제의 대상으로만 보는 거죠.” 그는 요즘 코로나 때문에 제한적이긴 하지만 노인복지관이나 관공서 등 시니어를 대상으로 한 초청강연에 열심히 다닌다. 웰다잉 홍보를 위해 대한노인회 고문 자리도 맡았다. ○70세부터 10년 정도 새 삶을 살고자 그는 정치인으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으로 부천시장 시절 버스 도착 시간을 알려주는 시스템(BIS)을 국내 최초로 도입한 것과 국회선진화법, 특히 필리버스터 전면 도입을 주도한 것을 꼽는다. 다른 한편으로 국회에서 웰다잉 관련 법 제도 도입에도 힘썼다. “2015년에 여야 의원들을 모아 ‘웰다잉 문화 조성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2016년 1월 무의미한 연명의료에 대한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제도화하는 ‘호스피스 완화 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연명의료결정법)을 통과시켰고요. 이 법을 만들면서 크게 깨달은 것이 자기결정권 문제였습니다. 인간으로서 존엄과 품격을 잃지 않고 삶을 마무리한다는 자세, 이걸 실제 생활문화에 정착시키는 게 중요하겠다. 은퇴 후 웰다잉운동에 나서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지요.” 2018년 2월부터 시작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자는 8월 현재 100만 명을 넘어섰다.○“유언장 쓰기 확산에 사명감” 요즘은 웰다잉을 말하는 사람도 많고 영역도 다양하게 확산되는 추세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 장기기증 서약, 간소한 장례식, 유언장 작성, 유산 기부 등, 하나하나가 책 한 권씩 나올 정도의 무게를 갖고 있다. 이 중 그가 가장 사명감을 느끼는 분야는 ‘유언장 쓰기’다. “내 생명 내가 결정한다는 게 연명의료의향서라면 내 재산 처리는 유언장을 통해 결정하게 됩니다. 미국인의 50% 이상이 유언장을 쓰는 데 반해 한국에서는 0.5% 정도만 쓴다고 합니다. 유언장을 써본다는 것은 내 삶을 정리해본다는 뜻입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요. 써보고 마음에 안 들면 찢어버리고 새로 쓰면 됩니다. 저도 정리하는 차원에서 쓰고 있는데, 이보다 좋은 성찰 기회가 없습니다.” ―간혹 노년에 먹고살기도 힘든데 무슨 웰다잉이냐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내 하나뿐인 삶을 조명해보는 것은 내가 새롭게 탄생하는 일이 됩니다. 삶의 마무리가 아름다워야 인생 자체가 의미 있고 아름다워지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웰다잉은 웰빙의 완성입니다.”○그린벨트로 묶인 집 한 채가 전 재산 ―안락사에 대한 관심도 늘고 있습니다. “존엄사와 안락사는 용어상 혼란이 있습니다. 안락사는 약이나 주사를 통해 생명을 중지시키는 것이지만, 존엄사는 인공호흡 심폐소생술 같은 연명조치 없이 생명이 마무리되도록 하는 것이지요.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하느님의 뜻에 맞서 인위적으로 삶을 연장하지 않겠다’며 연명의료를 거절하고 장기기증을 하셨습니다. 그게 자연의 섭리에 맞는 태도 아닐까요.” 스위스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벨기에 스페인 등이 이미 조력자살 혹은 자살방조를 허용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12개 주에서 안락사가 허용됐고 14개 주에서 도입을 검토 중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기부를 실천하고 있으신데…. “풀무원 정리하면서 만든 장학재단을 30년 가까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개인 재산은 그린벨트로 묶인 집 한 채가 전부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묶였는데 그걸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 덕분에 꼼짝없이 태어난 집에서 평생 사는 복을 누리고 있어요. 하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실천과제△육체적 생명의 마무리: 호스피스 완화 의료,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장기기증△사회적 관계의 마무리: 엔딩노트, 장례·장묘 문화 개선, 유언장 쓰기△정신적·물질적 유산의 마무리: 성년후견제도, 사회적 기부 및 보존, 유품 사전정리웰다잉문화운동 제공서영아 기자 sya@donga.com}
“내가 상속세 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난 3월 88세의 부친을 여읜 40대 A씨. 평소 근로소득세조차 내 본 적이 없던 그는 상속세로 1억 2900만 원을 내야 한다는 변호사의 조언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고성춘 조세전문변호사(57)에 따르면 A씨의 부친이 2014년 4억 5000만 원에 산 아파트가 2018년 5억대가 되더니 2020년 8억 대, 2021년 들어 11억 원 대를 넘어서 있었다. 결국 상속세를 낼 여력이 없는 그는 아버지와 살던 이 집을 11억 2000만원에 팔기로 했다. 고 변호사는 부친이 1년 전에 돌아가셨다면 어땠을까를 가정해 봤다. 당시 실거래가는 8억 원대였고 상속세는 4700만 원만 내면 됐다. 상속세를 계산할 때 아파트는 유사매매사례가액(상속 전후 6개월간 유사한 부동산의 실거래가)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또 A씨가 상속세를 낼 여력이 있었다면 부친의 사망시점인 3월 경 거래된 매매사례가액 10억 원으로 상속세 신고를 할 수도 있었다. 이 경우 상속세는 8600만 원만 내면 된다. A씨는 세금 낼 돈이 수중에 없었던 탓에 집을 팔아야 했고 그 매매가격이 시가가 되어 세금 4000여 만 원을 더 부담하게 된 셈이다.○ 경제규모 커졌는데 20년 전 과세기준 그대로상속이라 하면 부자들만의 일로 여겨져 왔다. 아직은 맞는 말이다. 국세청 통계에 따르면 2020년 사망자 30만5000여 명 중 1만181명에게 상속세가 부과됐다. 사망자 중 3.34%다. 결정세액은 4조 2294억 원이다. 그런데 부동산가격 폭등으로 사정이 달라졌다. 한국부동산원의 전국 매매실거래 평균가격을 보면 60-85㎡ 규모 아파트 평균가는 전국이 5억 8400만 원, 서울 13억 2900만 원이다(2021년 6월 현재). 올해 들어서는 매매가 뜸한 가운데 일단 거래되면 신고가를 경신하는 경우가 많다. 별다른 재산 없이 아파트 한 채만 남기는 중산층도 상속세 과세 대상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말이 된다. 게다가 상속세가 신고까지 6개월, 이후 국세청 조사기간까지 더하면 세액결정에 1년 이상 걸린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지난해와 올해 집값폭등 분은 아직 통계에 반영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고성춘 변호사는 부동산가격 등 자산 가격 상승 탓에 상속세는 더 이상 부자들만의 세금이 아니게 됐다고 단언한다. 상속세 과세기준이 20년 전 그대로인 점도 짚고 넘어갈 만하다. 그 사이 경제규모가 커지고 부동산 가격이 급등했지만 과세기준에는 인플레조차 반영되지 않았다.○ 변동 심한 매매사례가액으로 상속가액 결정A씨의 사례는 부동산 가격 급등이 상속세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상속가액 계산에 매매사례가액을 적용하는 방식이 얼마나 불합리한지 보여준다. -상속세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모든 정책이 세금을 늘리는 쪽으로 작동된다는 불만이 적지 않습니다. “국세청은 세금을 걷는 게 존재의 이유입니다. 다만 갈수록 세수 찾아내는 데 혈안이 되고 있어요. 징세 과정에서도 납세자를 의심하고 부를 죄악시하는 태도가 보입니다. 세금 내는 국민이 세금이 징벌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면 어딘가 잘못된 겁니다.” 상속세는 피상속인(사망자)의 재산을 모두 합산해 과세한다. 배우자가 없으면 5억 원, 배우자가 있으면 10억~최대 30억 원까지 공제된다. 이 액수를 넘기면 상속세가 발생하는데, 누진세율이 적용된다(표 참조). 대부분의 상속은 갑자기 닥친다. 준비해놓지 않으면 유족이 고생하게 된다. “예컨대 상속세는 6개월 이내에 현금으로 신고 납부해야 하는데 한국인이 남기는 재산의 70%가 부동산입니다. A씨처럼 유족이 따로 상속세를 낼 돈이 없다면 살던 부동산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 되기 쉽지요. 잘 팔리지 않는 부동산은 헐값에 팔거나 경매에 내놓아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생전 10년간 증여자산 추적해 상속세에 합산더 큰 문제는 사망 전 10년 간 증여한 자산이 상속재산에 합산된다는 점이다. “사망신고가 있으면 직전 10년 치 금융거래내역이 국세청에 통보됩니다. 국세청은 어느 정도 자산규모가 되는 사람 위주로 면밀한 조사에 들어가죠. 10년간 거래내역에서 수상한 돈의 움직임이 없었는지 추적합니다. 무신고 증여를 찾아 15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합니다.” 여기서 무신고 증여가 발견되면 10년 이내 액수는 상속가액에 포함되고 증여세는 15년 전 것까지 부과된다. 사망자의 재산에서 어디에 썼는지 모르는 뭉칫돈이 빠져나갔다면 상속재산으로 간주한다. 다만 사망 전 1년간 2억 혹은 2년 간 5억 원까지는 문제 삼지 않는다. “세법에서는 특수관계자 간 재산적 법률행위는 모두 증여로 추정합니다. 그래서 가족 간 계좌이체는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증여가 아니라는 걸 본인이 증명해야 하죠. 국세청의 자세는 ‘내 의심을 0으로 만들어보라’는 겁니다. 요즘은 모든 재화의 흐름이 전산화돼 있어 빠져나갈 길이 없어요.” 최근에는 법률요건을 모두 갖추어 증여를 했음에도 증여자금의 원천을 따지는 세무조사를 당하는 사례가 늘고 있어 사계가 긴장하고 있다고 한다. 한 병원장은 20대 직장인 아들의 주택구입자금으로 4억 원을 증여해주고 증여세까지 제대로 납부했지만 자신이 운영하는 병원이 세무조사를 당했다. 주택취득자금을 조사한다는 명목이었는데 결국 소득세 탈루로 7억대 세금을 얻어맞고는 몸져누웠다고 한다. 고변호사는 이런 현실을 뒤늦게 알게 된 자산가 노인들 중 밤잠을 못 주무시는 분이 많다고 전한다. “금융실명제 이전을 살아온 지금의 70~80대들은 부부간 ‘네 돈 내 돈’ 구분 없었고 자식들에게 보태주는 걸 당연시했습니다. 전세금이나 사업자금으로 몇 억 주고 증여신고를 하지 않았다가 가산세까지 더해져 상속세가 어마어마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는 “국가가 죽음의 길목에서 기다리다가 유산의 절반을 가져가는 것이 상속세”라고 말한다. 과거 증여나 소득세 등에서 세금 낼 것을 안내고 지나갔더라도 상속세 조사에서 모두 찾아내 가산세까지 물린다는 것이다.○ 미리미리 정리해두고 떠나는 게 어른의 책임-흔히 자녀들에게 끝까지 대접받으려면 재산은 죽을 때까지 놓지 말라고 하던데요. “그걸 충실히 이행한다면 재산을 자녀들 대신 국가에 헌납하는 결과가 되지요. 굳이 그때문이 아니어도 상속은 최소한 50대부터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특히 가족의 화목을 위해서도 미리미리 정리해둬야 합니다.” 아무 대책 없이 상속을 맞게 돼 가족 간 다툼이 일어나는 얘기는 우리 주변에서도 흔하다. 특정 상속인에게 유산이 쏠리면 소송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유류분(상속인이 법률상 반드시 취득하도록 보장되어 있는 상속분)반환청구를 통해 법정상속분의 절반까지 받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집값이 뛰다보니 싸움이 더 늘었습니다. 큰 아들에게 준 집이 3억 원일 때는 조용했는데, 그게 8억, 16억이 되니 형제들이 ‘내 몫을 떼어 달라’고 들고 일어서는 식이죠. 이걸 미리 정리해두는 게 어른의 책임입니다. 그러려면 유언장을 미리 써볼 것을 추천합니다.” 여기서 절세의 원칙이 몇 가지 있다. △주식은 가치가 낮아졌을 때 증여하고 △미래가치가 높은 부동산부터 증여한다 △가업상속공제를 이용하고 △증여는 10년 단위로 계획을 세운다 △조손에게 바로 증여한다 △기부를 고려한다. “궁극의 절세는 상속할 재산을 남기지 않는 겁니다. 살아생전 자녀와 배우자에게 골고루 증여하든 사회에 환원하든 자신을 위해 써버리든 말이죠. 세금은 그때그때 제대로 내는 게 가장 낫고요. 국가에 빼앗기느니 자신의 이름으로 기부해 재단을 만드는 방법을 택하는 분도 적지 않습니다.” ○ 조세는 ‘규제’ 아니라 ‘구제’의 마인드로고성춘 변호사는 명실상부한 한국 최초의 조세 전문변호사다. 2003년 국세청 개방직 1호로 특별 채용돼 5년간 서울지방국세청 법무과장으로 일하며 법무와 조세소송을 지휘했다. 관행보다는 원칙, 주관보다는 법리가 우선시되는 과세풍토를 도입하려 애썼다. 2007년 말 국세청 퇴직 후에는 6개월간 절에 틀어박혀 세법 관련 책 6권을 저술했다. 국세청에서 다뤘던 조세소송 등의 판례와 핵심 법리 등을 쟁점별로 총정리한 그의 책은 조세 분야에서 국내 최초의 사례연구집으로 평가받는다. “조세는 규제보다 구제의 마인드로 임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 법무과장 시절, 그는 조세불복사건 결재 책임자로서 부당과세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문제제기에 대해 수많은 인용결정을 했다. “공직의 칼은 서민이 아니라 거악(巨惡)을 잡는 데 쓰여야 합니다.” 현재는 서울 송파구에서 사무실을 운영하는데 전공은 ‘조세불복’이다. 유튜브를 통해 ‘세금과 인생’이란 주제로 구독자들과 만난다. 일반인들이 알기 어려운 국세청 내부 얘기부터 매일 상담을 통해 만나는 민간인들의 속사정들을 통해 얻게 된 지식과 통찰을 나누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근로자 중 소득세 안내는 사람이 40%에 달하다보니 세금을 남의 나라 얘기처럼 여기는 경향이 크다고 아쉬움을 토로한다. 사실 미국의 독립도, 프랑스 혁명도 세금 때문에 일어났다. 세금은 나라가 뒤집어지기도 하는 문제인 것이다. 국가와 자신의 관계에 대한 자각은 얼마라도 세금을 내야 생겨난다. ○ 10년마다 증여, 자녀 종잣돈 만들어주기세상사 모두 그러하듯 세금도 아는 만큼 보인다. 요즘 일부 젊은 엄마들 사이에서는 증여세를 적극 활용해 10년 단위 증여로 자녀의 종잣돈을 만들어주는 프로젝트가 유행하고 있다. 법을 알고 철저한 계획을 세운 사례라 할 수 있다. 증여세는 미성년자녀는 10년간 2000만원, 성인자녀는 10년간 5000만원까지 비과세다. 이를 이용해 자녀가 태어났을 때와 10세 때 각기 2000만원, 20세, 30세때 5000만원씩 증여하면 자녀가 30세가 됐을 때 모두 1억 4000만 원을 세금 한 푼 없이 마련해줄 수 있다. 다만 이때 세금은 내지 않더라도 그때그때 증여세 신고는 해야 한다. 이를 응용하면 증여세의 누진세율이 10년마다 리셋되는 점을 이용해 최소한의 세금을 내면서 종잣돈을 키우는 방식도 있다. 예컨대 0세와 10세에 각기 5000만원씩을 증여하고 각 300만 원의 증여세를 낸다. 20세와 30세에는 1억씩 증여하고 각 500만원 씩 증여세를 낸다. 30세가 된 아이는 3억의 종잣돈을 손에 쥐게 된다. 그때까지 낸 세금은 모두 1600만원이다. 여기서는 물가상승률이나 기회비용은 계산에서 배제했다. 증여된 자금도 자녀명의로 우량 주식에 묻어두거나 장기투자상품에 투자해 증식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자녀가 초등학생이 되면 주식 계좌를 만들어줘 연습 삼아 증권투자를 시키며 금융교육을 하는 부모들도 늘고 있다고 한다. 금융교육에 관한한 문맹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 한국의 현실을 감안할 때 바람직한 현상인 듯도 하다. ※ ‘100세 시대’, 우리는 얼마나 준비돼 있을까요. ‘서영아의 100세 카페’에서 그 답을 찾아봅니다. 풍요로운 인생 후반전을 위해 준비할 것, 생각해볼 것, 알아둘 것 등 다양한 메뉴로 찾아뵙겠습니다. 격주로 실리는 ‘이런 인생 2막’ 코너에서는 멋진 인생 2막을 만들었거나 준비하는 독자 사례를 소개합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상속이라 하면 부자들만의 일로 여겨져 왔다. 아직은 맞는 말이다. 국세청 통계에 따르면 2020년 사망자 30만5000여 명 중 1만181명에게 상속세가 부과됐다. 사망자 중 3.34%다. 결정세액은 4조2294억 원이다. 그런데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사정이 달라졌다. 한국부동산원의 전국 실거래 평균가격을 보면 60∼85m² 규모 아파트가 전국 5억8400만 원, 서울 13억2900만 원이다(2021년 6월 현재). 매매가 뜸한 가운데 일단 거래되면 신고가를 경신하는 경우가 많다. 별다른 재산 없이 아파트 한 채만 남기는 중산층도 상속세 과세 대상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말이 된다. 고성춘 조세전문변호사(57)는 부동산 가격 등 자산 가격 상승 탓에 상속세는 더 이상 부자들만의 세금이 아니게 됐다고 단언한다. 그가 말해준 며칠 전 상담 사례가 이런 경우다.○“내가 상속세를 내게 될 줄이야” 올 3월 88세의 부친을 여읜 A 씨. 평소 근로소득세조차 내 본 적이 없던 그는 상속세로 1억2900만 원을 내야 한다는 말에 기가 막혀 했다. A 씨 부친이 2014년 4억5000만 원에 산 아파트가 2018년 5억 원대가 되더니 2020년 8억 원대, 2021년 들어 11억 원대를 넘어섰다. 결국 상속세를 낼 여력이 없는 그는 이 집을 11억2000만 원에 팔기로 했다. 고 변호사는 부친이 1년 전에 돌아가셨다면 어땠을까를 가정해 봤다. 당시 실거래가는 8억 원대였고 상속세는 4700만 원만 내면 됐다. 상속세를 계산할 때 아파트는 유사매매사례가액(상속 전후 6개월간 유사한 부동산의 실거래가)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또 A 씨가 상속세를 낼 여력이 있었다면 부친의 사망 시점인 3월경 거래된 매매사례가액 10억 원으로 상속세 신고를 할 수도 있었다. 이 경우 상속세는 8600만 원만 내면 된다. A 씨는 세금 낼 돈이 수중에 없었던 탓에 집을 팔아야 했고 매매 가격이 시가가 되어 세금 4000여만 원을 더 부담하게 된 셈이다.○변동 심한 매매사례가가 상속가액 결정 A 씨의 사례는 부동산 가격 급등이 상속세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상속가액 계산에 매매사례가액을 적용하는 방식이 얼마나 불합리한지 보여준다. ―상속세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모든 정책이 세금을 늘리는 쪽으로 간다는 불만이 적지 않습니다. “국세청은 세금을 걷는 게 존재의 이유입니다. 다만 갈수록 세수 찾아내는 데 혈안이 되고 징세 과정에서 납세자를 의심하거나 부를 죄악시하는 태도가 보입니다. 세금 내는 국민 입장에서 세금이 징벌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면 어딘가 잘못된 겁니다.” 상속세 과세기준이 20년 전 그대로인 점도 짚고 넘어갈 만하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부동산 가격이 급등했지만 인플레조차 반영되지 않았다. 상속세는 피상속인(사망자)의 재산을 모두 합산해 과세한다. 배우자가 없으면 5억 원, 배우자가 있으면 10억∼최대 30억 원까지 공제된다. 이 액수를 넘기면 상속세가 발생하는데, 누진세율이 적용된다(표 참조). ―상속 때문에 유족이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상속이 갑자기 닥치니까요. 예컨대 상속세는 6개월 이내에 현금으로 신고 납부해야 하는데 한국인이 남기는 재산의 70%가 부동산입니다. A 씨 사례처럼 유족이 따로 상속세를 낼 돈이 없다면 살던 부동산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 되죠. 헐값에 내놓아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생전 10년간 증여자산 추적해 상속세에 합산 더 큰 문제는 사망 전 10년간 증여한 자산이 상속재산에 합산된다는 점이다. “사망자의 직전 10년 치 금융거래 내역을 놓고 국세청은 면밀한 조사에 들어갑니다. 10년간 거래 내역에서 수상한 돈의 움직임이 없었는지 추적합니다. 무신고 증여를 찾아 15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합니다.” 여기서 무신고 증여가 발견되면 10년 이내 액수는 상속가액에 포함되고 증여세는 15년 전 것까지 부과된다. “세법에서는 특수관계자 간 재산적 법률 행위는 모두 증여로 추정합니다. 그래서 가족 간 계좌이체는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증여가 아니란 걸 본인이 증명해야 하죠. 국세청의 자세는 ‘내 의심을 0으로 만들어보라’는 겁니다. 요즘은 모든 재화의 흐름이 전산화돼 있어 빠져나갈 길이 없어요.” 고 변호사는 이런 현실을 뒤늦게 알게 된 자산가 노인들 중 밤잠을 못 주무시는 분이 많다고 전한다. “금융실명제 이전을 살아온 지금의 70, 80대들은 부부간에 ‘네 돈 내 돈’ 구분 없고 자식에게 보태주는 걸 당연시했습니다. 전세금이나 사업 자금으로 몇억 원 주고 증여 신고를 하지 않았다가 가산세까지 더해져 상속세가 어마어마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는 “상속세는 국가가 죽음의 길목에서 기다리다가 유산의 절반을 가져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과거 증여나 소득세 등에서 세금을 건너뛰었더라도 상속세 조사에서 모두 찾아내 가산세까지 물린다는 것이다.○미리미리 정리해두고 떠나는 게 어른의 책임 ―흔히 자식에게 끝까지 대접받으려면 재산은 죽을 때까지 놓지 말라고 하던데요. “그걸 충실히 이행한다면 재산을 자녀 대신 국가에 헌납하는 결과가 되죠. 굳이 그 때문이 아니어도 상속은 최소한 50대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특히 가족의 화목을 위해서도 미리미리 정리해 둬야 하죠.” 준비 없이 상속을 맞게 돼 가족 간 다툼이 벌어지는 얘기는 주변에서도 흔하다. 특정 상속인에게 유산이 쏠리면 소송이 벌어지기도 한다. 유류분(상속인이 법률상 반드시 취득하도록 보장된 상속분) 반환청구를 통해 법정상속분의 절반까지 받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집값이 뛰다 보니 싸움이 더 늘었습니다. 큰아들에게 준 집이 3억 원일 때는 조용했는데, 그게 8억, 16억 원이 되니 형제들이 ‘내 몫을 떼어 달라’고 들고 일어서는 식이죠. 이걸 미리 정리해 두는 게 어른의 책임입니다. 그러려면 유언장을 미리 써볼 것을 추천합니다.” 여기서 절세의 원칙이 몇 가지 있다. △주식은 가치가 낮아졌을 때 증여하고 △미래가치가 높은 부동산부터 증여한다 △가업상속공제를 이용하고 △증여는 10년 단위로 계획을 세운다 △조손에게 바로 증여한다 △기부를 고려한다. “궁극의 절세는 상속할 재산을 남기지 않는 겁니다. 살아생전 자녀와 배우자에게 골고루 증여하든 사회에 환원하든 자신을 위해 써버리든 말이죠. 세금은 그때그때 제대로 내는 게 가장 낫고요. 국가에 빼앗기느니 자신의 이름으로 기부해 재단을 만드는 분도 적지 않습니다.”○조세는 ‘규제’ 아니라 ‘구제’의 마인드로 고성춘 변호사는 명실상부한 한국 최초의 조세전문변호사다. 2003년 국세청 개방직 1호로 특별채용돼 5년간 서울지방국세청 법무과장으로 일하며 법무와 조세 소송을 지휘했다. 관행보다는 원칙, 주관보다는 법리가 우선시되는 과세 풍토를 도입하려 애썼다. 2007년 말 국세청 퇴직 후에는 6개월간 절에 틀어박혀 세법 관련 책 6권을 저술했다. 국세청에서 다뤘던 조세 소송 등의 판례와 핵심 법리 등을 쟁점별로 총정리한 그의 책은 조세 분야에서 국내 최초의 사례연구집으로 평가받는다. “조세는 규제보다 구제의 마인드로 임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 법무과장 시절, 그는 조세 불복사건 결재 책임자로서 부당과세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문제제기에 대해 수많은 인용 결정을 했다. “공직의 칼은 서민이 아니라 거악(巨惡)을 잡는 데 쓰여야 합니다.” 현재는 서울 송파구에서 사무실을 운영한다. 전공은 ‘조세 불복’. ‘세금과 인생’이란 주제로 유튜브를 운영하는데, 일반인이 알기 어려운 국세청 내부 얘기부터 매일 상담에서 만나는 이들의 속사정을 통해 얻게 된 지식과 통찰을 나누고 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오늘, 남편이 퇴직했습니다’라는 제목의 책을 우연히 접하고 읽어본 건 한참 전인데 한동안 묵혀뒀다. 아내의 입장에서 서술된 책이라 남편의 입장이 궁금했다. 자칫 너무 적나라하게 그려져 남편 입장에서는 기분 나쁠 수도 있지 않을까. 박경옥 작가에게 인터뷰 요청을 하며 혹시 부군도 함께 오시면 어떠시겠냐고 조심스레 타진하니 흔쾌히 응하겠다고 한다. 인터뷰 장소는 자택이 좁으니 밖에서 만나자고 했다. 지난달 24일 부부가 동아일보를 찾았다. 아내의 오전 수업이 끝나고 남편의 오후 출근을 앞둔 틈새시간대, 점심시간을 낀 두 시간 반 정도가 주어졌다. 그날 비가 많이 내렸다. 53세에 닥친 퇴직, 재취업과 두번째 퇴직, 그 후 2년간의 도전과 실패의 반복…. 산전수전 겪으며 어깨에서 힘을 뺀 남편은 택배 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전업주부였던 아내는 작가로 데뷔했다. 가장의 퇴직 이후 숨 가쁘게 돌아간 자신들의 삶의 기록이 책이 되었다. 이제 깜깜한 터널 같던 시기를 빠져나온 부부는 “내려놓는다는 각오를 하니 새로운 삶이 펼쳐졌다”고 말한다.○갑작스레 닥친 경영진 일괄사퇴7년전, 강찬영(60) 씨는 27년간 다닌 한진해운 임원직을 내놓았다. 아무리 임원이 ‘임시직원’의 준말이라지만, 성과가 좋았고 나이도 있어 한 번쯤은 더 할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경영이 휘청대던 회사는 주주들에게 ‘자구노력’을 보여줘야 했다. 사장을 비롯해 전 경영진이 일괄 사퇴했다. 그 2년 뒤 한진해운은 파산했다. “그래도 처음엔 여유가 있었지요. 4개월 만에 같은 계열 중소기업에 부사장으로 옮겼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주도한 외국회사와의 프로젝트가 성사 직전에 무산됐어요. 역할이 없어진 상태에서 회사에 있는 건 면목없는 일이어서 사직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어딘가에 새로 자리를 잡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수히 많은 이력서를 썼지만 다음은 없었다. 그렇게 2년이 흘러갔고 통장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가 아내에게 별 얘기 없이 택배회사 물류센터 일을 시작한 것이 그 즈음이었다.○집 줄이고,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삶박경옥(57) 씨는 그런 남편을 지켜보며 “당신이라면 할 수 있다”고 격려했다. 하지만 점차 50대의 관리직 재취업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깨닫게 됐다. 이때까지도 과거의 씀씀이를 유지하고 있었고 두 아들은 대학생이었다. 마침 유학을 떠난 둘째아들 학비까지 대주고 나니 위기의식이 들었다. “매달 고정으로 들어오는 현금이 필요했어요. 남편만 쳐다볼 수는 없다보니 저도 돈 벌 길을 백방으로 찾았죠. 감초농사도 지어보고, 고향에서 해산물을 떼어와 택배로 팔아도 보고…. 결국 집을 줄이기로 했어요.” 정든 37평 아파트를 전세로 내놓고 16평 빌라로 이사했다. 남는 전세금으로 월세가 나오는 오피스텔을 장만했다. 이사 전 중고장터에서 팔 수 있는 건 모조리 팔고 못 파는 것은 버렸다. 스페인과 네덜란드, 두 차례 해외 주재원으로 근무하며 쌓인 자잘한 세간들도 미련 없이 헐값에 팔았다. 추억만 남으면 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사 간 빌라는 공장 옆이라 먼지가 많고 비좁지만 남편 직장이 있는 오류역까지 한 번에 가는 1호선 전철역이 가깝다. 박 씨는 서울시와 구청 등 각종 구직센터에서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찾았다. 동의보감과 분노조절장애 강사로 재능기부를 하다보니 조금씩 수입도 생겼다. 최근에는 ‘퇴직은퇴설계’ 강의를 추가했다. 서울시나 구청 등에서 제공되는 공공일자리들은 어떤 일이건 월 30~40만원 정도만 벌 수 있도록 설계돼 있는데 경쟁이 치열하다. “중·노년 중에는 작은 수입이라도 얻으려 애쓰는 분이 무척 많아요. ‘학습지원단’이나 ‘상담’처럼 좀 우아한 일거리는 해외유학파나 고위공직자 등 스펙이 대단한 분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어요. 다들 품위는 유지하면서 봉사 겸 사회생활 겸해서 월 몇십만 원이라도 벌고 싶은 거죠.”○“예순 다 돼 노동의 신성함을 배우고 있습니다”강 씨는 4년 전 시작한 택배회사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매일 오후 4시부터 11시 경까지 택배 분류와 상하차일을 한다. 젊은이들도 며칠 일해보고 그만둔다는 ‘극한직업’이다. 업무량에 따라 출퇴근시간을 조절하는데 월수입은 대략 120~130만 원 정도다. “예순이 다 되어 육체노동의 신성함을 배우고 있습니다. 몸을 움직이니 잡념이 사라지고 건강해졌어요. 그렇게 노력해도 안 빠지던 체중이 8kg이나 줄었습니다.” 오전에는 온라인으로 수업을 들었다. ‘주독야경(晝讀夜耕)’인 셈이다. 원광디지털대 동양학과에 등록해 오전 내내 강의 듣고 직장까지 왕복 2시간 남짓 걸리는 전철에서 복습하는 방식으로 생활의 리듬을 만들었다. “회사생활은 영업의 연속이라 매일 밤 술 마시고 주말이면 골프 치러 다녔습니다. 그런 생활에 중독돼 있었어요. 은퇴하면 좋든 싫든 자기 시간을 갖게 됩니다. 시행착오 겪고 시달리고 바뀐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게 뭐냐’는 근원적인 질문을 시작하게 되죠. 진정한 나를 찾는 일은 처음입니다.” 그가 내민 명함의 직함은 ‘우주변화원리연구소’ 소장이다. 동양학을 함께 공부할 사람을 찾는다고 한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다양함이 있을 뿐 아내는 함께 헤쳐나온 남편의 퇴직과정을 책으로 써냈다. 2019년 7월 나온 ‘오늘 남편이 퇴직했습니다(나무옆의자)’다. 최근 5쇄를 찍었고 타이완에서 번역본이 나왔다고 한다. 난생처음 책을 쓸 용기를 낸 계기가 있었다. “남편 퇴직이후 세상이 뒤바뀌는 경험 속에서 우울증이 찾아왔어요. 그 즈음 중장년들이 본인 이야기를 털어놓는 유튜브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는데, PD와 카메라맨 두 분이 제 얘길 너무 열심히 들어주시는 거예요. 이분들이 어떤 해결책도 줄 수는 없지만 제 말을 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고 마음속 응어리가 풀어지며 후련해졌어요. 당시 책을 쓰면 어떻겠느냐는 권유도 받았죠.” -책 내용을 보면 남편이 싫어할 내용도 있는 것 같은데…. 박 씨가 “쉽지 않았어요”라며 웃기 시작하자 강 씨가 끼어든다. “은퇴하는 분들에게 제가 겪은 것을 전달하는 것도 의미있겠다 싶어서 책이 조금 과장되게 포장되더라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과정에서는 힘들었어요. ‘삼식이’란 표현이 대표적입니다. 절대 그 말을 쓰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했는데 썼더라구요. 제가 화를 냈죠.” 박 씨는 “독자들 중에 책을 낸 것 자체에 대해 비난하는 반응도 있었다”고 말한다. “대기업 임원까지 했으면 조용히 살 것이지 무슨 택배회사에서 일을 하냐는 둥의 비난이죠. 우리 사회에 직업에 대한 고정관념이 심한 것 같아요. 제가 몇 년간 일자리 찾아다니며 보면 다양한 역할 중 하나를 내가 하고 있을 뿐이예요. 우린 모두 다양성의 세계를 살고 있고 안정된 삶은 없어요. 저희를 ‘대기업 임원까지 한 친구가 왜 나락으로 떨어졌냐’는 식으로 보는데, 우린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거든요.”○은퇴 후 배우자는 보험같은 존재큰 아들은 지난 봄에 결혼했고 둘째는 유학 간 일본에서 취직해 눌러앉았다. 부부의 고난을 지켜보며 아이들은 일찍 철이 들었다고 한다. 집에는 오롯이 부부만 남았다. “긴 터널을 지나온 기분입니다. 우린 살 수 있다, 괜찮다는 자신감이 들어요. 우리 둘만 남았는데 서로가 소중한 존재입니다. 서로 스승이자 친구이자 동반자로 다중 역할을 해줘야 해요. 좋은 배우자가 가장 좋은 보험인 것 같아요.” 참고로, 이 부부가 친구처럼 놀 때 하는 것은 공부다. 돈이 적게 들고 만족도는 높기 때문이란다. 동양학이 공동의 관심사다. -흔히 남편들이 은퇴해 가정으로 돌아오면 아내들의 스트레스가 늘어나는 ‘은퇴남편증후군’을 호소하는데요. “제 나름의 생활이 있는데 갑자기 끼어드니 불편하고 거추장스럽기도 하죠. 비서와 기사를 두고 일하다가 집에 돌아온 남편은 딴나라에서 온 사람 같았어요. 집에서도 ‘oo 알아봐라’ 한마디면 다 해결되는 줄 아는 식이죠. 그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느라 애먹었어요. 그래도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는 걸 이해하고 기다려주면 조금씩 나아지던데요.” -퇴직이 갑작스러울수록 마음의 상처, 달라진 생활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혼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고위직의 비자발적 퇴직의 경우 여러 사연이 있지요. 제가 아는 모 은행 지점장은 퇴직 뒤 3주일을 앓아누우셨대요. 너무 억울해서. 가장 실적이 좋았고, 그래서 마음을 놓고 있는 상황에서 퇴직을 통보받았거든요. 평생 그 억울함을 어쩌지를 못하게 될 수도 있지요. 겪어보니 퇴직 후 마음치료 프로그램이 있어야 해요. 제가 우연히 유튜브 프로그램을 통해 마음치료 효과를 얻었듯이 말이죠. 퇴직자가 ‘난 당시 억울했어. 난 더 일할 줄 알았단 말야’라고 충분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자리가 없어요.”○은퇴 후 재취업은 기대수준 낮춰야-이제 경력을 살린 재취업은 포기한 건가요. “50세 넘어 경력을 살린 재취업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란 걸 서서히 깨달았어요. 생각해보세요. 어딜 가나 피라미드식 조직인데 그 상단에는 내부에서 올라오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있어요. 웬만큼 대단한 능력이 있거나 전관예우가 아니고서야 굳이 외부에서 굴러온 돌을 그 꼭대기에 박아넣을 이유가 없는 거죠.”(박씨) 강찬영 씨의 말은 더 현실감이 있다. “회사가 나에게 연봉 1억을 준다면 최소한 10억 정도 이익을 뽑아내야 합니다. 내가 이 회사에 10억 정도 가치를 가져다줄 수 있는가라고 자문해봐야 하는 거죠. 입장 바꿔놓고 생각하니 판단이 되더라구요.” 이런 그는 “지금이 딱 좋다”고 말한다. “이리저리 둘러보니 월급 200만 원 정도부터는 고용주나 일 그 자체에 자기 삶을 구속당해야 합니다. 제 나이쯤 되면 일은 보람될 정도로만 열심히 하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대신 소비를 줄이면 됩니다. 적게 벌어 적게 쓰니 세상 편하고 즐겁습니다.”○중장년 재테크와 경제 공부 필요책을 읽다 보면 이 부부가 경제적으로 안타까운 선택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등장한다. 예컨대 남편이 임원이 된 2013년, 부부는 갖고 있던 재건축아파트를 팔아버렸다. 이후 경제가 내리막으로 들어설 거라고 봤다. 그 뒤 이들은 다시는 그 아파트 시세를 쳐다보지 않는다고 한다. 또 퇴직 전에는 팔 수 없었던 한진해운 우리사주를 퇴직 후에도 ‘큰 회사니까’ 믿고 팔지 않았다가 회사 파산으로 수천만원이 휴지조각이 돼 버렸다. “재테크 같은 것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는데, 이제는 그러다가 큰일 날 것 같아요. 저희도 물론 그렇지만 후배들은 젊은 시절부터 경제나 금융공부도 하고 재테크도 해야 나중에 어려움을 겪지 않을 듯합니다.” 이뿐 아니다. 월세를 받기 위해 구입했던 오피스텔은 자주 말썽이 생겼고 팔려고 해도 팔리지 않았다. 2017년 정부 권장대로 임대사업자로 등록했는데 불과 몇 년 만에 분위기가 바뀌어 ‘적폐’로 몰리는 느낌마저 든다. 박 씨 개인에게 따로 부과되는 건강보험료도 없는 살림에 엄청난 부담이다. “세금 제도가 휙휙 바뀌면서 인생계획이 엉망이 되고 있어요. 남편 나이 기준 63세부터 국민연금이 나옵니다. 그 돈만으로 서울에서 살기는 어려울 텐데, 생각이 많네요.” 이런 박씨는 정부지원사업인 50플러스 보람일자리로 저소득 어르신 급식사업의 주방보조로 일하게 됐다고 기뻐하고 있다. 매일 아침 8시부터 3시간씩 일하러 나가는데 한 달 내내 일하면 최대 40만 원을 받는다. “이거 벌어서 세금 내야 해요. 하하” ※‘100세 시대’, 우리는 얼마나 준비돼 있을까요. ‘서영아의 100세 카페’에서 그 답을 찾아봅니다. 풍요로운 인생 후반전을 위해 준비할 것, 생각해볼 것, 알아둘 것 등 다양한 메뉴로 찾아뵙겠습니다. 격주로 실리는 ‘이런 인생 2막’ 코너에서는 멋진 인생 2막을 만들었거나 준비하는 독자 사례를 소개합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53세에 닥친 퇴직, 재취업과 두 번째 퇴직, 그 후 2년간의 도전과 실패의 반복…. 산전수전 겪으며 어깨에서 힘을 뺀 남편은 택배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전업주부였던 아내는 작가로 데뷔했다. 가장의 퇴직 이후 숨 가쁘게 돌아간 자신들의 삶의 기록이 책이 되었다. 이제 깜깜한 터널 같던 시기를 빠져나온 부부는 “내려놓는다는 각오를 하니 새로운 삶이 펼쳐졌다”고 말한다.○ 갑작스레 닥친 경영진 일괄 사퇴 7년 전, 강찬영 씨(60)는 27년간 다닌 한진해운 임원직을 내놓았다. 아무리 임원이 ‘임시직원’의 준말이라지만, 성과가 좋았고 나이도 있어 한 번쯤은 더할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경영이 휘청대던 회사는 주주들에게 ‘자구 노력’을 보여줘야 했다. 사장을 비롯해 전 경영진이 일괄 사퇴했다. 그 2년 뒤 한진해운은 파산했다. “처음엔 여유가 있었지요. 4개월 만에 같은 계열 중소기업에 부사장으로 갔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주도한 외국 회사와의 프로젝트가 성사 직전에 무산되면서 두 번째 퇴직을 하게 됐죠.” 그래도 어딘가에 새로 자리를 잡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수히 많은 이력서를 썼지만 다음은 없었다. 그렇게 2년이 흘러갔고 통장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가 아내에게 별 얘기 없이 택배회사 물류센터 일을 시작한 것이 그 즈음이었다.○집 줄이고,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삶 박경옥 씨(57)는 그런 남편을 지켜보며 “당신이라면 할 수 있다”고 격려했다. 하지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50대의 관리직 재취업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깨닫게 됐다. 이때까지도 과거의 씀씀이를 유지하고 있었고 두 아들은 대학생이었다. 마침 유학을 떠난 둘째 아들 학비까지 대주고 나니 위기의식이 들었다. “매달 고정으로 들어오는 현금이 필요했어요. 남편만 쳐다볼 수 없어서 저도 돈 벌 길을 백방으로 찾았죠. 감초농사도 지어보고, 고향에서 해산물을 떼어와 택배로 팔아도 보고…. 결국 집을 줄이기로 했어요.” 정든 37평 아파트를 전세로 내놓고 16평 빌라로 이사했다. 남는 전세금으로 월세가 나오는 오피스텔을 장만했다. 이사 전 중고장터에서 팔 수 있는 건 모조리 팔고 못 파는 것은 버렸다. 박 씨는 서울시 등 각종 구직센터에서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찾았다. 동의보감과 분노조절장애 강사로 재능기부를 하다 보니 조금씩 수입도 생겼다. 이런 일자리들은 어떤 일이건 월 30만∼40만 원 정도만 벌 수 있도록 설계돼 있는데 경쟁이 치열하다. “중노년 중 적은 수입이라도 얻으려 애쓰는 분이 무척 많아요. ‘상담’처럼 좀 우아한 일거리는 스펙이 대단한 분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어요. 다들 품위는 유지하면서 봉사 겸 사회생활 겸 해서 월 몇십만 원이라도 벌고 싶은 거죠.”○“예순 다 돼 노동의 신성함을 배우고 있습니다” 강 씨는 4년 전 시작한 택배회사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매일 오후 4시경부터 11시경까지 택배 분류와 상하차 일을 한다. 젊은이들도 며칠 일해 보고 그만둔다는 ‘극한직업’이다. 업무량에 따라 출퇴근시간을 조절하는데 월수입은 120만∼130만 원 정도다. “예순이 다 되어 육체노동의 신성함을 배우고 있습니다. 몸을 움직이니 잡념이 사라지고 건강해졌어요. 그렇게 노력해도 안 빠지던 체중이 8kg이나 빠졌습니다.” 오전에는 온라인으로 수업을 들었다. ‘주독야경(晝讀夜耕)’인 셈이다. 원광디지털대 동양학과에 등록해 오전 내내 강의 듣고 직장까지 왕복 2시간 남짓 걸리는 전철에서 복습하는 방식으로 생활의 리듬을 만들었다. “회사 생활은 영업의 연속이라 매일 밤 술 마시고 주말이면 골프 치러 다녔습니다. 그런 생활에 중독돼 있었어요. 은퇴하면 좋든 싫든 자기 시간을 갖게 됩니다. 시행착오 겪고, 시달리고, 바뀐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게 뭐냐’는 근원적인 질문을 시작하게 되죠. 진정한 나를 찾는 일은 처음입니다.” 그가 내민 명함의 직함은 ‘우주변화원리연구소’ 소장이다. 동양학을 함께 공부할 사람을 찾는다고 한다.○“사모님 소리 듣던 과거는 싹 잊었습니다” 아내는 함께 헤쳐 나온 남편의 퇴직 과정을 책으로 써냈다. 2019년 7월 나온 ‘오늘 남편이 퇴직했습니다’(나무옆의자)다. 최근 5쇄를 찍었고 대만에서 번역본이 나왔다고 한다. 난생처음 책을 쓸 용기를 낸 계기가 있었다. “남편 퇴직 이후 아무것도 안 풀릴 즈음 우울증이 찾아왔어요. 그 무렵 중장년들이 본인 이야기를 털어놓는 유튜브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는데, PD와 카메라맨 두 분이 제 얘길 너무 열심히 들어주시는 거예요. 비록 어떤 해결책도 줄 수는 없지만 누군가가 제 말을 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고 마음속 응어리가 풀어지며 후련해졌어요. 당시 책을 쓰면 어떻겠느냐는 권유도 받았죠.” ―책에는 남편이 싫어할 내용도 있는 것 같은데….박 씨가 “쉽지 않았다”며 웃기 시작하자 강 씨가 끼어든다. “은퇴하는 분들에게 제가 겪은 것을 전하는 것도 의미 있겠다 싶었고 책이 조금 과장되게 포장되더라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과정에서는 힘들었어요. ‘삼식이’란 표현이 대표적입니다. 절대 그 말을 쓰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는데 썼더라고요. 제가 화를 많이 냈죠.” 박 씨는 “독자들 중에 책을 낸 것 자체에 대해 비난하는 반응도 있었다”고 말한다. “대기업 임원까지 했으면 조용히 살 것이지 무슨 택배회사에서 일을 하냐는 둥의 비난이죠. 직업에 대한 고정관념이 심한 것 같아요. 일자리란 다양한 역할 중 하나를 내가 하고 있을 뿐이에요. 우린 모두 다양성의 세계를 살고 있고 안정된 삶은 없어요. ‘대기업 임원까지 한 친구가 왜 나락으로 떨어졌냐’는 식으로 보는데, 우린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거든요.”○은퇴 후 배우자는 보험 같은 존재 큰아들은 지난봄에 결혼했고 둘째는 유학 간 일본에서 취직해 눌러앉았다. 부부의 고난을 지켜보며 아이들은 일찍 철이 들었다. 집에는 오롯이 부부만 남았다. 박 씨는 “서로 스승이자 친구이자 동반자로 다중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부부가 택한 놀이는 공부다. 돈이 적게 들고 만족도는 높기 때문이란다. ―퇴직이 갑작스러울수록 마음의 상처, 달라진 생활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혼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퇴직 후 마음치료 프로그램이 있어야 해요. 제가 우연히 유튜브 프로그램을 통해 마음치료 효과를 얻었듯이 말이죠. 퇴직자가 ‘난 당시 억울했어. 난 더 일할 줄 알았단 말야’라고 충분하게 터놓을 수 있는 자리가 없어요.”(박 씨) ○은퇴 후 재취업은 기대 수준 낮춰야 ―이제 경력을 살린 재취업은 포기한 건가요. “50세 넘어 경력을 살린 재취업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란 걸 서서히 깨달았어요. 생각해 보세요. 어딜 가나 피라미드식 조직인데 그 상단에는 내부에서 올라오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있어요. 웬만큼 대단한 능력이 있거나 전관예우가 아니고서야 굳이 외부에서 굴러온 돌을 그 꼭대기에 박아 넣을 이유가 없는 거죠.”(박 씨) 강 씨의 말은 더 현실감이 있다. “회사가 나에게 연봉 1억 원을 준다면 최소한 10억 원 정도 이익을 뽑아내야 합니다. ‘내가 이 회사에 10억 원 정도 가치를 가져다줄 수 있는가’라고 자문해 봐야 하는 거죠. 입장 바꿔놓고 생각하니 판단이 되더라고요.” 이런 그는 “지금이 딱 좋다”고 말한다. “이리저리 둘러보니 월급 200만 원 정도부터는 고용주나 일 그 자체에 자기 삶을 구속당해야 합니다. 제 나이쯤 되면 일은 보람될 정도로만 열심히 하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대신 소비를 줄이면 됩니다. 적게 벌어 적게 쓰니 세상 편하고 즐겁습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한국의 베이비부머는 1955년~1974년까지 20년간 매년 90~100만 명씩 태어났다. 지난해 출생아가 30만 명이 채 안됐던 것과 비교해보면 얼마나 많은 인구인지 실감이 난다. 그 맏형격인 1955년생이 지난해부터 고령자(만 65세)에 편입됐다. 이에 따라 한국인들의 노후걱정도 늘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에서 한국의 노후빈곤율(2018)은 43.4%로 OECD 37개국중 1위다. 하지만 은퇴전문가인 김경록 미래에셋 투자와연금센터 대표(59)는 “열심히 살아온 5060세대라면 크게 걱정할 필요 없다”고 잘라말한다. 현재 1700만 명에 달하는 5060은 대부분 국민연금이 준비된 세대이자 경제성장기에 어느 정도 자산을 축적한 세대라는 것. 전쟁과 가난의 역사를 헤쳐 오느라 노후준비가 미흡했던 7080세대와는 전혀 다르다는 얘기다. “고령자라고 한 묶음으로 보기 일쑤지만 5060세대와 7080세대는 구분해야 합니다. 사실 변화가 심한 한국은 5년마다 다른 세대가 나타난다고 봐야 하지요.” ○고령화와 기술혁신이 만나는 곳에 황금어장 형성 김 대표는 미래에셋자산운용 채권운용최고책임자, 미래에셋캐피탈 대표이사를 지냈고 2013년부터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소장을 맡아 이끌어온 노후자산관리 전문가다. 이런 그가 주목하는 것은 고령화와 기술혁명이란 두가지 메가트렌트가 만나는 지점. 두 트렌드는 서로를 필요로 하며 앞으로 그 지점에서 부가 형성되는 어장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최근 펴낸 저서(‘데모테크가 온다’)에서 이를 ‘데모테크’라 명명했다. 인구를 뜻하는 ‘데모(demography)’와 기술의 ‘테크(technology)’를 합친 신조어다. “4차 산업혁명과 기술혁신으로 바이오, 로보틱스, 디지털 헬스케어, 메타버스 등에서 혁신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가장 큰 수요자는 질병치료와 건강관리, 신체의 한계를 뛰어넘고 싶은 고령자들입니다. 그야말로 수요(인구)와 공급(기술)이 모두 증가하는 시장이죠.” 여기에 5060은 윗세대와 달리 자신을 위해 돈을 쓸 능력도 의사도 있다. 인구의 30%를 차지하는 이들의 움직임이 곧 혁명이라는 것이다. “5060세대가 만들 10년 후 고령사회는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이들의 퇴직 후 15년, 액티브 시니어 시장도 무척 크죠. 이 시장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했습니다.”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 3층구조에 주택연금 추가-노후 수입의 경우 국민연금과 퇴직연금, 개인연금의 3층구조에 만년에는 주택연급까지 활용한다면 안심해도 되는 걸까요. “그렇다고 봅니다. 국민연금의 경우 세대간 형평의 문제, 퇴직연금의 경우 수익률이 너무 낮은 문제 등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는 적지 않지만 큰 틀에서는 3층 구조가 맞다고 봅니다. 요즘 주목받는 것이 주택연금입니다. 달리 돈 나올 곳이 없는 고령자에게 최후의 피난처가 될 수 있습니다. 고령자가 현재 살고 있는 주택을 금융기간에 담보로 제공하고 매월 일정액을 사망할 때까지 연금 형식으로 받는 대출인데, 분할대출해서 목돈을 갚는 형태라 ‘역모기지’라 합니다. 공시가 기준 9억 이하 주택에 해당되고 사망할 때까지 주거안전성이 유지됩니다. 집값이 많이 오르면 해약하고 대출금을 갚으면 되고 그 3년 뒤 다시 가입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 특히 부동산가격이 오르면서 해약이 많다던데요. “주택연금의 단점은 보증료 0.75%가 있고 이자 계산에서 역 복리 효과가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가입 기간이 너무 길어지면 이자가 복리로 커지죠. 그래서 상대적으로 늦게 가입하는 게 좋습니다. 흔히 ‘그래도 자식들에게 집 한채는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모님들이 많은데 요즘 부모님들 90세 넘어 돌아가시면 상속받을 자식은 60세가 넘게 됩니다. 80세 전후에 가입하셔서 부모님 생전에 충분히 활용하시는 게 좋습니다.”○부동산에 쏠린 노후자산…5년 내 포트폴리오 조정을-한국인의 노후자산 70%가 부동산입니다. 거시적 관점에서 부동산 시장이 꼭짓점일 가능성을 강조하시는데요.“물론 부동산은 좋은 자산이지만 너무 쏠려 있고 그로 인한 오버슈팅이 발생하고 있어요. 간접투자, 글로벌 투자 쪽으로 눈을 돌려 자산을 분산할 필요가 있습니다.우리 부동산은 지난 20년간 △금리 △소득 △인구의 세 모멘텀으로 상승해왔습니다. 여기에 공급 문제가 있는데 이건 5년 정도면 어떻게건 해결될 겁니다. 금리가 20년 전 8%대에서 현재 0~1%대까지 계속 내렸고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달러 대에서 3만 달러대로 올라섰습니다. 입지가 좋은 신축에 대한 수요가 몰렸죠. 인구가 늘고 가구가 분화해 또 주택 수요가 늘었습니다. 하지만 이 세가지 모멘텀은 앞으로 20년간 거꾸로 가거나 작동하지 않게 됩니다. 금리는 더 이상 내릴 곳이 없고 소득도 3만 달러에서 브레이크가 걸렸습니다. 인구는 지난 20년과 정반대로 갑니다. 소득이나 인구 등의 변수는 당장 눈에 띄지 않아도 5~10년 누적되면 반드시 영향을 줍니다. 소리 없이 쌓인 눈의 무게에 나뭇가지가 갑자기 부러지는 것처럼 말이죠. 공급부족이 5년 정도면 해결된다는 걸 감안하면 향후 5년간 서서히 포트폴리오를 조정해서 부동산과 유동성 자산의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노후, 내 돈이 돈을 벌게 하라-부동산에 쏠렸던 자산을 금융투자로 일부 돌리라는 말씀인가요. “더 이상 스스로 일해 돈을 벌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더욱 투자가 필요합니다. 5060세대도 ‘글로벌 투자자’가 돼야 합니다. 내가 잠자는 시간에도 지구 반대편에서 해외 젊은이들이 내 돈을 벌어주게 해야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데모테크 관련 투자를 눈여겨보세요. 클라우드 컴퓨팅, 바이오, 헬스케어, 배터리-환경, 디지털 보안 등이 유망합니다. 향후 30년이면 한국의 노인부양비율이 세계 1위가 될 것이라는데, 외국의 젊은 국가에 투자해 리스크를 줄여야 합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ETF와 리츠를 권하고 계시는데. “다양성을 갖춘 분산투자라는 관점에서 권합니다. 개별 종목을 가지면 리스크를 감당해야 하는데, 경쟁이 치열한 분야일수록 누가 승자가 될지 알 수 없죠. ETF(Exchange Traded Fund·상장지수펀드)는 말 그대로 인덱스펀드를 거래소에 상장시켜 투자자들이 주식처럼 편리하게 거래할 수 있도록 만든 상품입니다. ‘바이오테크’ ‘메타버스’하는 식으로 한 분야의 주식 묶음에 투자하는 것이니 상대적으로 안전합니다. 부동산에 지분투자하는 신탁상품인 리츠(Real Estate Investment Trusts·부동산투자회사)도 마찬가지죠. 실물 부동산은 덩어리가 크고 유동성이 떨어지지만 리츠는 주식처럼 작은 지분을 사고 팔 수 있고 배당도 안정적으로 나옵니다. 투자에서는 분산과 장기투자, 인내가 핵심입니다. 또 후방에 있으면서 재료를 공급하는 업종을 선택하세요. 양 진영이 갈라져 싸운다면 양쪽에 공급하는 무기상에 투자하는 것이 가장 이익이 큰 법입니다.” 그는 장수사회가 장기투자의 기회도 안겨줬다고 말한다. “친구들에게 ‘좋은 주식 2000만 원 어치만 사서 20년간 묻어두라’고 했습니다. 20년 뒤 80세에 열었봤을 때 5~10배 불어나 있으면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지요. 이렇게 권하는 이유는 그들이 80세로부터 또 20년을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 가장 큰 은퇴자산은 ‘나 자신’… 1인1기 갖춰라 -은퇴를 앞둔 세대가 가장 챙겨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친구들이 모여 얘기하다보면 ‘현금, 연금, 건강, 마누라…’ 등이 줄줄이 나옵니다만, 저는 ‘나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많은 분이 은퇴 뒤 자신의 인적 자산을 사장시키는데, 이걸 살려내야 한다. 자신에게 투자를 해서 자격증 따서 월 100만 원씩의 고정 수입을 만든다면 금리 1%로 쳐서 현금 12억 원을 보유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려면 ‘1인 1기’, 즉 한사람이 한가지 기술 정도는 갖춰야 합니다. 가까운 친구들이 요즘 노무사 감정평가사 손해사정인 자격증을 땄습니다. 감정평가사 자격증을 딴 친구는 ‘이게 수억원 가치를 가졌다’고 뿌듯해 하더군요.” 그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10여 년 전만 해도 서점가에서 ‘황혼이혼’이나 ‘성인자녀 리스크’ 등 재미있는 얘깃거리를 다룬 책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자격증을 딸 수 있는 수험서가 베스트셀러가 돼 있다고 한다. 60대 남성에서 가장 인기있는 것은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할 수 있는 주택관리사나 전기설비사 자격증이고 고령 여성에서는 요양보호사 자격증이다. 그는 5060세대는 75세까지는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을 하면 △건강해지고 △돈이 생기며 △사회적 관계망이 형성됩니다. 젊을 때처럼 하루 8시간 매여서 일할 필요도 없습니다.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면 금상첨화지요.” “7080은 6·25전쟁과 그 가난의 시기를 살아남아 자녀 키워낸 것만 해도 고마운 세대입니다. 국가가 섬기며 함께 가야 한다. 5060은 ‘나’라는 자산, 주택자산, 연금자산 등 본인이 가진 자산을 풀 활용한다면 노후가 괜찮을 거라고 믿습니다. 다만 지금 5060이라면 100세까지는 산다고 보고 40~50년 이상 장기계획을 세워야 할 겁니다.”※ 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행복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한국 베이비부머는 1955∼1974년, 20년간 매년 90만∼100만 명 태어났다. 지난해 출생아가 30만 명이 채 안 된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많은지 실감난다. 그 맏형 격인 1955년생이 지난해부터 고령자(만 65세)에 편입됐다. 한국인의 노후 걱정도 늘었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에서 노후빈곤율 43.4%(2018년)로 1위일 정도로 준비되지 않은 노후에 대한 우려가 크다. 하지만 은퇴 전문가인 김경록 미래에셋 투자와연금센터 대표(59)는 “열심히 살아온 5060세대라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현재 1700만 명에 달하는 5060은 대부분 국민연금이 준비됐고 어느 정도 자산도 축적한 세대라는 것. 전쟁과 가난의 역사를 헤쳐 오느라 노후 준비가 미흡했던 7080세대와는 다르다는 얘기다. “고령자라고 한 묶음으로 보기 쉽지만 5060과 7080은 구분해야 합니다. 사실 변화가 심한 한국은 5년마다 다른 세대가 나타난다고 봐야 합니다.”○ 고령화와 기술혁신이 만나 황금어장 형성 김 대표는 미래에셋자산운용 채권운용최고책임자, 미래에셋캐피탈 대표이사를 지냈고 2013년부터 미래에셋은퇴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노후자산관리 전문가다. 그는 고령화와 기술혁명이란 두 가지 메가 트렌드가 만나는 지점에 주목한다. 바로 거기서 부가 형성되는 어장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최근 저서 ‘데모테크가 온다’에서 이 황금어장을 ‘데모테크’라 명명했다. 인구를 뜻하는 ‘데모(Demography)’와 기술의 ‘테크(Technology)’를 합친 말이다. “4차 산업혁명과 기술혁신으로 바이오, 로보틱스, 디지털 헬스케어, 메타버스 등에서 혁신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수요자는 질병 치료와 건강 관리에 신경 쓰면서 신체 한계를 뛰어넘고 싶어 하는 고령자입니다. 수요(인구)와 공급(기술)이 모두 늘어나는 시장이죠.” 5060은 윗세대와 달리 ‘자신을 위해’ 돈을 쓴다. 인구의 30%를 차지하는 이들의 움직임이 곧 혁명이 될 수 있다. “5060이 만들 10년 후 고령사회는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이들이 퇴직 후 15년 정도 만들어갈 액티브 시니어 시장도 무척 크죠. 이 시장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습니다.”○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에 주택연금 추가 ―국민연금과 퇴직연금, 개인연금의 3층 구조에 주택연금까지 활용한다면 안심해도 됩니까. “그렇다고 봅니다. 주택연금은 달리 돈 나올 곳 없는 고령자에게 최후의 피난처입니다. 고령자가 사는 주택을 금융기관에 담보로 제공하고 매월 일정액을 사망할 때까지 연금 형식으로 받는 대출인데, 공시가 기준 9억 원 이하 주택에 해당됩니다. 사망할 때까지 주거안전성이 유지됩니다. 집값이 오르면 해약하고 대출금을 갚고 3년 후 다시 가입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자에 역(逆)복리 효과가 있으니 가급적 늦게 가입하면 좋습니다. ‘그래도 자식에게 집 한 채는 남겨야지’ 하는 부모가 많은데, 요즘 부모들 90세 넘어 돌아가시면 상속받을 자식은 60세가 넘습니다. 부모가 70대 후반에 가입해서 생전에 충분히 활용하는 게 좋습니다.”○부동산에 쏠린 자산 5년 내 포트폴리오 조정을 ―거시적 관점에서 부동산시장이 꼭지일 가능성을 지적하시는데요. “한국인의 노후자산 70%가 부동산입니다. 부동산은 좋은 자산이지만 너무 쏠려 있고 그로 인한 오버슈팅이 발생하고 있어요. 간접 투자나 글로벌 투자 쪽으로 자산을 분산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동산은 지난 20년간 △금리 △소득 △인구의 세 가지 모멘텀에 기반해 상승했습니다. 최근 공급 부족 문제가 부각됐는데 이것도 5년 정도 지나면 어떻게든 해결됩니다. 금리는 20년 전보다 7%가량 내렸고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달러대에서 3만 달러대로 올랐습니다. 입지 좋은 곳, 신축에 수요가 몰린 데다 인구가 늘고 가구가 분화하니 주택 수요가 더 늘었습니다. 하지만 이 세 모멘텀은 앞으로 20년간 거꾸로 가거나 작동하지 않을 겁니다. 금리는 더 내릴 곳이 없고 소득도 3만 달러에서 브레이크가 걸렸습니다. 인구는 지난 20년과 정반대로 갑니다. 소득이나 인구 등 변수는 5∼10년 누적되면 반드시 영향을 줍니다. 주택 공급 부족이 해결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향후 5년간 포트폴리오를 조정해서 부동산과 유동성 자산의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노후, 내 돈이 돈을 벌게 하라 ―부동산에 쏠린 자산을 금융투자로 돌리라는 말씀인가요. “5060도 글로벌 투자자가 돼야 합니다. 내가 잠자는 시간에도 지구 반대편 젊은이들이 내 돈을 벌어주게 해야 합니다. 데모테크 관련 투자를 눈여겨보세요. 클라우드컴퓨팅, 바이오, 헬스케어, 배터리-환경, 디지털 보안 등이죠. 앞으로 30년이면 한국의 노인부양비율이 세계 1위가 될 것이라는데, 젊은 외국에 투자해 리스크를 줄여야 합니다.” ―은퇴 준비하는 분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ETF와 리츠를 권하시던데요. “다양성을 갖춘 분산투자라는 관점에서 권합니다. 개별 종목은 경쟁이 치열한 분야일수록 누가 승자가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반면 상장지수펀드(ETF)는 인덱스펀드를 상장시켜 투자자가 주식처럼 편리하게 거래할 수 있도록 만든 상품입니다. ‘바이오테크’ ‘메타버스’ 하는 식으로 수십 개 주식 묶음에 투자하니 상대적으로 안전하죠. 부동산에 지분 투자하는 신탁상품 리츠(REITs)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동산은 덩어리가 크고 유동성이 떨어지지만 리츠는 주식처럼 지분을 사고팔 수 있고 배당도 안정적입니다. 투자에서는 분산과 장기투자, 인내가 핵심입니다. 또 후방에 있으면서 재료를 공급하는 업종을 선택하세요. 만약 두 진영이 싸운다면 양쪽에 무기를 공급하는 무기상에 투자하면 가장 이익이 큰 법입니다.” 그는 장수사회가 장기투자의 기회도 안겨줬다고 말한다. “친구들에게 ‘좋은 주식 2000만 원어치만 사서 20년간 묻어두라’고 했습니다. 80세에 열어봤을 때 5∼10배 불어나 있으면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지요. 그들은 80세부터 또 20년을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가장 큰 은퇴자산은 ‘나’… 1인 1기 갖춰라 ―은퇴를 앞둔 세대가 가장 챙겨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현금, 연금, 건강, 배우자…. 줄줄이 떠올립니다만 ‘나 자신’이 가장 중요합니다. 많은 분이 은퇴 뒤 사장시키는 자신의 인적 자산을 살려내야 합니다. 자신에게 투자해 자격증을 따서 월 100만 원 고정수입을 만든다면 금리 1%로 쳐서 현금 12억 원을 보유한 셈이 됩니다. 그러려면 ‘1인 1기’, 한 사람이 한 가지 기술 정도는 갖춰야 합니다. 제 친구들은 노무사 감정평가사 손해사정인 같은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감정평가사 자격증을 딴 친구는 ‘이게 몇억 원 가치’라며 뿌듯해하더군요.” ―1인 1기를 갖춰 언제까지 일하면 좋을까요. “75세까지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일을 하면 건강해지고 돈이 생기며 사회적 관계망이 형성됩니다. 하루 8시간 일할 필요도 없습니다. 파트타임으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면 금상첨화입니다. 7080은 6·25전쟁과 가난의 시기를 살아남아 자녀 키워낸 것만 해도 고마운 세대입니다. 국가가 섬기며 함께 가야죠. 5060은 ‘나’, 주택, 연금 같은 자신의 자산을 풀(full) 활용한다면 괜찮은 노후를 맞을 거라 믿습니다. 다만 100세까지 산다고 보고 40년 정도 장기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100세 시대’, 우리는 얼마나 준비돼 있을까요. ‘서영아의 100세 카페’에서 그 답을 찾아봅니다. 풍요로운 인생 후반전을 위해 준비할 것, 생각해볼 것, 알아둘 것 등 다양한 메뉴로 찾아뵙겠습니다. 격주로 실리는 ‘이런 인생 2막’ 코너에서는 멋진 인생 2막을 만들었거나 준비하는 독자 사례를 소개합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2009년 대구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끝으로 39년 공직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퇴직 고위공무원에게 으레 들어오는 민간기업의 영입 제안은 ‘쿨하게’ 거절했다. 억대 연봉에 기사 딸린 차가 나온다고 해도, 2~3년 대우받다 끝날 자리였다. 100세 시대를 바라보며 20년 이상 할 일을 찾으려 했던 그로서는 ‘아까운 인생’을 낭비할 수 없었다.이렇게 새로 시작한 일이 은퇴자의 성공적인 삶을 돕는 비영리 활동(NPO)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사장되고 있는’ 한국 시니어 세대의 기운을 북돋워 고령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도록 하는 일이다. 그로서는 평생 공직에서 해온 일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박수천 시니어 서포터 회장(71)의 인생 2막은 이렇게 시작됐다.○ “5070이 마을 생태계를 바꾼다”지난 10여 년간 그의 직함은 실로 다양했다. 숭실대 삼육대 서울사이버대 등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과천 시니어 아카데미, 시니어 코칭, 시니어 서포터, 시니어 클럽, 시니어 프로보노 공연단 등 많은 비영리단체 활동을 주도해 왔다. 요즘 가장 힘을 쏟는 일은 유튜브방송 ‘손잘TV’ 제작. ‘손잘’은 ‘손주 잘 키우자’를 줄인 말이다.토요일인 7일 오후 2시, 손잘TV 녹화가 진행되는 경기 과천청소년문화의집을 찾았다. 이날 시니어 4명분의 리허설과 녹화가 있었다. 박 회장은 현장에서는 ‘큐’ 사인을 주는 프로듀서 역할을 한다. 영상 녹화는 박송문(66) 총무가 맡았다. 그는 이 일을 해내기 위해 유튜브 촬영과 편집법을 거의 독학으로 익혔다고 한다. 인천에 사는 그는, “형님(박회장)이 오라 하면 어디든지 달려간다”며 웃었다.유튜브에서 찾아본 방송은 ‘어린이의 날’ 노래가 오프닝 음악으로 사용되는 등 조금 촌스러운 분위기인데, 박 회장은 “뉴트로 분위기를 살렸다”고 큰소리친다. 주인공 1명마다 10분 안팎 길이로, 주인공과 사회자가 대화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사회는 과천외고 방송반 학생들이 맡는다. 녹화일이 주로 토요일인 이유도 학생들 스케줄 때문이다. “학생들이 제일 바빠요. 그 친구들 시간에 맞추느라 힘들어. 학원가야 하고 시험봐야 하고…. 우리가 시간이 많으니 맞춰야죠.”(박 회장) 양육이라 해서 육아비결을 다룬 유튜브일까 했지만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자서전의 동영상판에 후세에 대한 당부를 합친 것 같은 내용이다. 어르신들 각자의 애환과 사연이 구구절절 들어 있다. ○ 양육 지혜 후대에 전하는 유튜브 방송 ‘손잘TV’예컨대 6남매의 맏딸로 태어나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했던 김명진 씨 편. 그는 뒤늦게 자녀들과 함께 공부해 50대에 대학을 졸업하고 석사까지 받았는데 “아이들이 나를 키웠고 손자들은 나를 철들게 했다”고 말한다. 대학 입시에 합격한 엄마에게 아들은 “즐기면서 하시라”고 격려해줬다고 한다. “대개 60~80대가 출연자들인데 공통점이 있어요. 6.25전쟁, 가난, 다자녀, 전통 등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랐고 이를 이겨낸 스토리라는 점이죠. 이런 성공 스토리에는 부모님의 가르침이나 가정의 전통, 양육의 지혜가 면면히 흐르고 있지요.” 손잘TV는 행정안전부의 지원에 힘입어 11월까지 50명분을 만들 예정이다. 그의 꿈은 더 크다. “노인의 지혜를 분야별로 묶어 유튜브 방송을 계속하면 빅데이터가 만들어지고 당대인들의 인생도서관이 될 수 있어요.” 그야말로 무명인들의 민중사다.그는 시니어들의 기록유산을 남기는 일을 꾸준히 해왔다. 2014년부터 수년간 과천, 판교 등지에서 시니어들의 자서전 쓰기를 지도하고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쓰시는 분도 있지만 못 쓰시는 분도 있고…. 그래서 책쓰기가 부담스러운 분들을 위해 ‘열폭 자서전’이란 것도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생애를 10페이지에 사진과 함께 정리해 담는 방식인데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지요. 이건 ‘특허를 받아야 한다’는 권유도 많이 받았습니다.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출판기념회를 열면 모두가 뿌듯해합니다.” 자서전 필자들을 중심으로 특정 주제를 모아 책을 내는 작업도 했다. 굴곡진 한국 현대사를 헤쳐온 부모세대와 자식세대 이야기를 모은 ‘자손들과 함께 쓴 민초들의 고난극복현대사’나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따로 모은 ‘위대한 어머니’ 같은 책들이 나왔다. ○ 신중년 5070세대의 활력 살려야 젊은이도 산다그는 지난해 말 과천의 퇴직자 20여 명과 함께 ‘5070시니어포럼’을 만들고 마을공동체 발전을 위한 10대 과제를 선정해 발표했다. 젊은 시니어인 5070세대가 80세 이상 선배를 돌보고 30, 40대 후배를 후원하며 행정이 못 미치는 분야의 사회적 서비스를 맡겠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50~70세대가 한국 인구의 35%입니다. 아직 건강하고 능력도 스펙도 빵빵하죠. 그런데 우리 사회가 이분들을 너무 빨리 노인 취급을 해요. 이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다시 불을 붙여줘야 합니다. 이들이 도움을 받아야 할 대상, 잉여인구로 취급된다면 본인들은 물론이고 나라 전체가 불행해집니다.” -‘시니어들의 능력이 사장되고 있다’는 지적, 크게 공감합니다. 그런데 고용연장 같은 얘기는 ‘청년 일자리도 어렵다’는 반론에 밀려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노인과 청년, 지혜로운 공존의 길은 없을까요.“생산인구가 줄고 고령자가 늘어난다고 걱정이 많은데, 5070은 생산인구로 활용할 수 있는 유력한 세대죠. 요즘 시니어들, 75세 정도까지는 일할 수 있어요. 게다가 이 분들이 일한다고 해도 젊은이들과 경쟁하는 분야는 아닐 겁니다. 시니어들이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자녀들도 부담이 줄어듭니다. 50대에 회사에서 떨려나서 노령연금이나 기다리는 복지의 대상이 가득한 사회와 60, 70대까지 활기차게 일하고 세금도 납부하는 사회, 어느 쪽을 택해야 합니까.”○ 세대공존은 ‘손주 잘 돌보기’부터-젊은 노인이 선배 노인을 돌보는 ‘노노(老老)케어’를 추진하신다고요. “5070 세대는 위아래 세대를 연결하는 서포터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우선 80세 이상 선배 노인을 보살피는 일에 가장 적합합니다. 물론 전문적인 돌봄은 요양보호사가 하겠지만 젊은 노인들이 그 전 단계 정도는 맡을 수 있어요. 예를 들어 홀몸노인의 외출을 돕고 말동무를 한다거나, 잠시 들러 물건을 사다 준다거나 하는 일이죠. 젊은이들은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고, 5070 시니어가 노인 돌봄을 맡는 게 바람직한 분업 아닐까요. 이런 서비스를 취약계층에는 무상봉사로 해드리되 여유 있는 분들께는 실비 정도로 유료화해 젊은 노인들이 작은 수입을 얻는 방안도 생각해볼 만합니다.” -인구절벽이 경제 복지 산업 등 많은 분야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고 지적됩니다. 특히 청년세대가 결혼과 출산 자체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젊은 노인들이 손주 양육을 맡아줘야 한다고 강조하는 겁니다. 사회 전체를 생각한다면 손주를 돌보고 자녀 세대의 사회 활동을 지원해주는 게 요즘 시니어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인 것 같습니다. 다만 가족간에 육아를 맡기더라도 보상은 어느 정도 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노년에는 작더라도 남을 위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활동을-노년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노년에도 꿈을 가져야 하고 꿈을 이루기 위한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아무리 작더라도 남을 위한 활동, 사회 전체에 기여하는 활동을 해야 합니다. 이때 여럿이 함께하면 재미있고 쉬워지죠. 저도 지금까지 10여 년,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이 없었다면 혼자 버티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가장 나쁜 것은 나만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그런 본인의 꿈은 무엇입니까.“궁극적으로는 시니어들이 늙어도 요양원이나 실버타운이 아니고 살던 집에서 끝까지 사는 노인마을공동체 생활(Aging In Place)을 보편화하고자 합니다. 이웃과 교류하며 ‘내 집에서 늙어가는’ 모델이죠. 인구 7만인 과천에서 시니어 모델 도시를 하나 만들면 좋겠어요.”-자신의 인생 2막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후반전 삶이 이보다 더 보람될 수 있을까 싶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나답게 마음껏 할 수 있었고 그동안 축적된 역량을 다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살면 나를 다 태워 여한이 없을 것 같아요. 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서포터’가 제 역할입니다.”박수천 프로필-육사 졸업(28기), 숭실대 대학원 행정학 석사, 일본 사회사업대학 사회복지학 박사-산업통상자원부, 보건복지부 등에서 39년 공직생활 후 2009년 대구 식약청장으로 퇴임-일본에서 주일한국대사관 상무관 3년, 일본 통상산업성, 후생노동성에서 연구관 활동 -세계 최고령국가인 일본에서 노년학에 심취해 지역에 기반한 고령화 정책을 연구 -퇴직 후 숭실대, 서울사이버대 등에서 강의하며 시니어 서포터 등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 중※ ‘100세 시대’, 우리는 얼마나 준비돼 있을까요. ‘서영아의 100세 카페’에서 그 답을 찾아봅니다. 풍요로운 인생 후반전을 위해 준비할 것, 생각해볼 것, 알아둘 것 등 다양한 메뉴로 찾아뵙겠습니다. 격주로 실리는 ‘이런 인생 2막’ 코너에서는 멋진 인생 2막을 만들었거나 준비하는 독자 사례를 소개합니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100세 시대’, 우리는 얼마나 준비돼 있을까요. ‘서영아의 100세 카페’가 매주 토요일 지면을 통해 그 답을 찾아봅니다. 풍요로운 인생 후반전을 위해 준비할 것, 생각해볼 것, 알아둘 것 등 다양한 메뉴로 찾아뵙겠습니다. 격주로 실리는 ‘이런 인생 2막’ 코너에서는 멋진 인생 2막을 만들었거나 준비하는 독자 사례를 소개합니다.》 2009년 대구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끝으로 39년 공직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퇴직 고위공무원에게 으레 들어오는 민간기업의 영입 제안은 ‘쿨하게’ 거절했다. 억대 연봉에 기사 딸린 차가 나온다고 해도, 2∼3년 대우받다 끝날 자리였다. 100세 시대를 바라보며 20년 이상 할 일을 찾으려 했던 그로서는 ‘아까운 인생’을 낭비할 수 없었다. 이렇게 새로 시작한 일이 은퇴자의 성공적인 삶을 돕는 비영리 활동(NPO)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사장되고 있는’ 한국 시니어 세대의 기운을 북돋워 고령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도록 하는 일이다. 그로서는 평생 공직에서 해온 일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박수천 시니어 서포터 회장(71)의 인생 2막은 이렇게 시작됐다.○ “5070이 마을 생태계를 바꾼다” 지난 10여 년간 그의 직함은 실로 다양했다. 숭실대 삼육대 서울사이버대 등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과천 시니어 아카데미, 시니어 코칭, 시니어 서포터, 시니어 클럽, 시니어 프로보노 공연단 등 많은 비영리단체 활동을 주도해 왔다. 요즘 가장 힘을 쏟는 일은 유튜브방송 ‘손잘TV’ 제작. ‘손잘’은 ‘손주 잘 키우자’를 줄인 말이다. 7일 오후 2시, 손잘TV 녹화가 진행되는 경기 과천청소년문화의집을 찾았다. 토요일인 이날 시니어 4명분의 리허설과 녹화가 있었다. 박 회장은 현장에서는 ‘큐’ 사인을 주는 프로듀서 역할을 한다. 유튜브에서 찾아본 손잘TV는 주인공 1명마다 10분 안팎 길이로, 주인공과 사회자가 대화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사회는 과천외고 방송반 학생들이 맡는다. 어르신들 각자의 애환과 사연이 구구절절 들어 있다. ○양육 지혜 후대에 전하는 유튜브 방송 ‘손잘TV’ 예컨대 6남매의 맏딸로 태어나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했던 김명진 씨 편. 그는 뒤늦게 자녀들과 함께 공부해 50대에 대학을 졸업하고 석사까지 받았는데 “아이들이 나를 키웠고 손자들은 나를 철들게 했다”고 말한다. 대학 입시에 합격한 엄마에게 아들은 “즐기면서 하시라”고 격려해줬다고 한다. “대개 60∼80대가 출연자들인데 공통점이 있어요. 6·25전쟁, 가난, 다자녀, 전통 등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랐고 이를 이겨낸 스토리라는 점이죠. 이런 성공 스토리에는 부모님의 가르침이나 가정의 전통, 양육의 지혜가 면면히 흐르고 있지요.” 손잘TV는 행정안전부의 지원에 힘입어 11월까지 50명분을 만들 예정이다. 그의 꿈은 더 크다. “노인의 지혜를 분야별로 묶어 유튜브 방송을 계속하면 빅데이터가 만들어지고 당대인들의 인생도서관이 될 수 있어요.” 그야말로 무명인들의 민중사다. 그는 시니어들의 기록유산을 남기는 일을 꾸준히 해왔다. 2014년부터 수년간 과천, 판교 등지에서 시니어들의 자서전 쓰기를 지도하고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쓰시는 분도 있지만 못 쓰시는 분도 있고…. 그래서 책 쓰기가 부담스러운 분들을 위해 ‘열폭 자서전’이란 것도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생애를 10페이지에 사진과 함께 정리해 담는 방식인데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지요. 이건 ‘특허를 받아야 한다’는 권유도 많이 받았습니다.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출판기념회를 열면 모두가 뿌듯해합니다.”○신중년 5070세대의 활력 살려야 젊은이도 산다 그는 지난해 말 과천의 퇴직자 20여 명과 함께 ‘5070시니어포럼’을 만들고 마을공동체 발전을 위한 10대 과제를 선정해 발표했다. 젊은 시니어인 5070세대가 80세 이상 선배를 돌보고 30, 40대 후배를 후원하며 행정이 못 미치는 분야의 사회적 서비스를 맡겠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50∼70세대가 한국 인구의 35%입니다. 아직 건강하고 능력도 스펙도 빵빵하죠. 그런데 우리 사회가 이분들을 너무 빨리 노인 취급을 해요. 이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다시 불을 붙여줘야 합니다. 이들이 도움을 받아야 할 대상, 잉여인구로 취급된다면 본인들은 물론이고 나라 전체가 불행해집니다.”―‘시니어들의 능력이 사장되고 있다’는 지적, 크게 공감합니다. 그런데 고용 연장 같은 얘기는 ‘청년 일자리도 어렵다’는 반론에 밀려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노인과 청년, 지혜로운 공존의 길은 없을까요. “생산인구가 줄고 고령자가 늘어난다고 걱정이 많은데, 5070은 생산인구로 활용할 수 있는 유력한 세대죠. 요즘 시니어들, 75세 정도까지는 일할 수 있어요. 게다가 이분들이 일한다고 해도 젊은이들과 경쟁하는 분야는 아닐 겁니다. 시니어들이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자녀들도 부담이 줄어듭니다. 50대에 회사에서 떨려나서 노령연금이나 기다리는 복지의 대상이 가득한 사회와 60, 70대까지 활기차게 일하고 세금도 납부하는 사회, 어느 쪽을 택해야 합니까.”○세대 공존은 ‘손주 잘 돌보기’부터―젊은 노인이 선배 노인을 돌보는 ‘노노(老老)케어’를 추진하신다고요. “5070 세대는 위아래 세대를 연결하는 서포터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우선 80세 이상 선배 노인을 보살피는 일에 가장 적합합니다. 물론 전문적인 돌봄은 요양보호사가 하겠지만 젊은 노인들이 그 전 단계 정도는 맡을 수 있어요. 예를 들어 홀몸노인의 외출을 돕고 말동무를 한다거나, 잠시 들러 물건을 사다 준다거나 하는 일이죠. 젊은이들은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고, 5070 시니어가 노인 돌봄을 맡는 게 바람직한 분업 아닐까요. 이런 서비스를 취약계층에는 무상봉사로 해드리되 여유 있는 분들께는 실비 정도로 유료화해 젊은 노인들이 작은 수입을 얻는 방안도 생각해볼 만합니다.”―인구절벽이 경제 복지 산업 등 많은 분야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특히 청년세대가 결혼과 출산 자체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젊은 노인들이 손주 양육을 맡아줘야 한다고 강조하는 겁니다. 사회 전체를 생각한다면 손주를 돌보고 자녀 세대의 사회 활동을 지원해주는 게 요즘 시니어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인 것 같습니다.”○ 노년에는 작더라도 사회에 기여하는 활동을 ―노년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노년에도 꿈을 가져야 하고 꿈을 이루기 위한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아무리 작더라도 남을 위한 활동, 사회 전체에 기여하는 활동을 해야 합니다. 이때 여럿이 함께하면 재미있고 쉬워지죠. 저도 지금까지 10여 년,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이 없었다면 혼자 버티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가장 나쁜 것은 나만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그런 본인의 꿈은 무엇입니까. “궁극적으로는 시니어들이 늙어도 요양원이나 실버타운이 아니고 살던 집에서 끝까지 사는 노인마을공동체 생활(Aging In Place·AIP)을 보편화하고자 합니다. 이웃과 교류하며 ‘내 집에서 늙어가는’ 모델이죠. 인구 7만인 과천에서 시니어 모델 도시를 하나 만들면 좋겠어요.”―자신의 인생 2막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후반전 삶이 이보다 더 보람될 수 있을까 싶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나답게 마음껏 할 수 있었고 그동안 축적된 역량을 다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살면 나를 다 태워 여한이 없을 것 같아요. 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서포터’가 제 역할입니다.”※알립니다.100세 카페에서는 ‘이런 인생 2막’ 제하에 멋진 인생 2막을 만들었거나 준비하는 독자 사례를 소개하는 코너를 만들고자 합니다. 살아온 길과 경력은 제각각이지만 나름의 보람을 갖고 열심히 사시는 분, 멋진 노후라고 박수 받을만한 분, 다른 분들의 노후 설계에 참고가 되거나 공유하고 싶은 분들의 사연을 소개해주십시오. 자천타천 모두 좋습니다. . ▷이메일: 100cafe@donga.com서영아 기자 sya@donga.com}
한국 중국 일본은 시간차는 있지만 모두 저출산 고령화라는 고민을 안고 있다. 가장 앞서가는 나라는 고령자 비중 28.7%(2020년)인 일본이다. 2017년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81)이 노인 모독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소비에 소극적인 일본 노인들의 성향을 지적하면서 “90세가 되고도 노후가 걱정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TV에 나오더라, 언제까지 살아있을 생각인지”라고 했다. 아베노믹스하에 경기 침체 극복을 관장하는 장관으로서 1700조 엔(약 1경8100조 원)에 이르는 개인 금융자산을 아무도 적극적으로 소비하지 않아 답답하다는 주장이었다. 이보다 앞서 아소는 사회보장 개혁이 한창이던 2013년에는 “공공선을 위해 늙고 병들어 허깨비 같은 삶은 이제 포기해야 한다”는 발언으로 전 세계적 지탄을 받았다. 그의 망언 시리즈는 미국 노년학자가 쓴 책에서 정부가 노인을 바라보는 적대적 시선을 드러낸 예로 언급됐을 정도로 비판이 거셌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2012년 말 아베 신조 정권이 출범할 때 임명된 아소의 ‘부총리 겸 재무상’ 자리는 2019년 총리가 스가 요시히데로 바뀐 이후로도 여전히 탄탄하다. 이런 소동 속에서도 일본의 제도개혁은 진척을 보여 왔다. 고령자의 부를 빨리 젊은 세대로 이전해 소비를 활성화하기 위해 상속 대신 증여를 독려했다. 손자 교육비, 자녀 출산비, 자녀 주택구입비 등의 명목으로 사전 증여할 경우 비과세 혜택을 대폭 늘려줬다. 2015년에는 30여 년 몸살 끝에 공무원연금과 직장연금을 통합하는 연금개혁을 이뤄냈다. 젊은층의 ‘우리만 손해’라는 불만을 달래기 위해서도 연금은 2004년부터 점진적으로 납입액을 늘리고 수령액을 줄이며 기대수명과 출산율에 연동해 자동 조절되도록 손질했다. 한중일 중 고령화(2019년 기준 11.5%)는 후발주자지만 인구 감소가 발등의 불이 된 중국의 대응은 더 화끈하다. 7월 하순 시진핑 정부는 저출산대책으로 고강도 사교육 금지 조치를 내놓았다. 1980년 이래의 산아제한 정책 대신 2016년부터 두 자녀, 5월에는 세 자녀까지 허용했지만 1.6명 선을 유지해온 출산율은 지난해 1.3명대로 떨어졌다. 청년들이 출산을 기피하는 이유로 교육비와 경쟁부담이 지목되자 극약처방에 나선 것이다. 심지어 학생들의 숙제 양까지 지정하는 꼼꼼함을 보여주고 있다. 해마다 출산율 새 기록(2020년 0.84)을 갈아 치우는 한국은 어떤가. 7월 통계청 추계에 따르면 앞으로 10년간 한국의 유소년 인구는 161만 명 줄고 고령인구는 279만 명 늘며 ‘일하는 인구’는 339만 명 줄어든다. 이런 인구구조 변화는 재정과 복지 고용 등 경제 사회 전반에 큰 파장을 예고한다. 세계 인구학자들이 한국을 흥미롭게 지켜볼 정도라고 하는데, 정작 한국에서는 이 ‘불편한 진실’은 외면한 채 모두가 눈앞의 일상과 대통령 선거판에만 열중한다. 퇴직연금의 쥐꼬리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법안은 수년째 국회에 멈춰 있고, 공적연금의 지속가능성을 걱정하는 건 젊은 세대뿐이다. 평균수명 60∼70세 시대에 만든 공적연금 시스템이 100세 시대에도 통용될 수 없다. 결국 더 내고 덜 받거나 늦게 받거나 해야 한다. 이는 조만간 연금 수급자가 되는 베이비붐 세대의 양보가 있어야 가능하다. 문제는 이 같은 논의를 벌일 판 자체도 깔리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래서야 자칫 한국 노인들도 일본처럼 ‘그만 좀 사라져주지’라는 눈총을 받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sya@donga.com}
최학배 하플사이언스 대표(64·전 한국콜마 대표)는 평생 제약회사 테두리 안에서 살았다. 삶의 가치를 ‘회사를 가꾸고 사원들을 챙기고 좋은 약을 만들어 사회에 기여하는 것’에 뒀다. 그런데 첫 퇴직을 전후해 마음이 헛헛해졌다. 분명 평생을 열심히, 잘 살아왔는데, 되돌아보니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다 만 장작 같은 불완전연소감이 밀려왔다. “누구나 한번 태어나서 때 되면 돌아가는 건데, 돌아보니 뭐 하나 뚜렷한 게 없었습니다. 내 존재의 가치를 뭔가 남기고 가고 싶다, 지금 그만두기엔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죠.” 현역에서 물러날 즈음 많은 사람이 느끼는 가장 허탈한 부분이 이것 아닐까. 예순을 앞둔 ‘아재’의 자아 찾기가 시작됐다. 평생의 경험을 살려 스스로를 활활 불사를 그 무엇인가가 필요했다.○“뒷방 늙은이가 되기 싫어서”최학배 대표는 서울대 약대 76학번이다. 1985년 JW중외제약에 입사해 개발본부. 마케팅본부, 글로벌사업 담당 등을 두루 거쳤다. JW중외제약과 일본 주가이제약이 합작한 C&C신약연구소 대표이사를 끝으로 2015년 퇴임했다. 현역시절에는 차세대 항암제와 아토피 치료제, 통풍 치료제 연구개발과 임상 및 라이센스 업무를 주도해왔다.C&C 신약연구소 대표이사에서 퇴임하면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라는 고민이 시작됐다. 당시 본사에서는 고문직을 제안했지만 ‘뒷방 늙은이가 되기 싫어’ 거절했다고 한다. “5개월 정도 쉬었습니다. ‘갈 곳을 마련해놓고 그만둘 걸’ 하는 후회도 잠시 있었지만, 고문이라는 식으로 2선으로 물러나는 삶 자체가 싫었습니다.”2016년부터 한국콜마의 제약사업담당 사장을 거쳐 대표이사로 일하게 됐다. 그로부터 퇴임까지의 2년여는 이런 고민을 구체화하고 대안을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그 무렵 제약기업에 근무하는 서울대 약대 동창모임인 ‘관악포럼’에서 패널을 맡게 됐습니다. 외국계회사와 대형제약사에 안주하는 후배들에게 제 심경을 말했습니다. ‘월급쟁이 생활에 안주했더니 이런 아쉬움이 생기더라. 안전한 월급쟁이 삶에만 취해 있지 말고 자신의 사업에 도전하라. 꿈을 크게 갖고 도전하는 주도적인 삶을 살라’고. 그건 저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했지요. 창업에 대한 생각이 많이 정리되고 굳어졌습니다.”○“후배들아, 월급쟁이에 안주하니 나중에 아쉬워지더라”바이오벤처와 벤처캐피탈 업체 인력들의 모임(영등포와 구로디지털단지에 있는 바이오벤처들이 중심이 돼 ‘영구모임’이라 불렸다)도 그에게 동기부여를 해줬다. 이들을 접하며 C&C신약연구소에서 진행했던 ‘퍼스트 인 클래스’(계열내 최초의 혁신신약) 개발에 대한 그리움과 갈증이 몰려왔다. 한국콜마는 아쉽게도 제네릭 개발을 통한 위탁생산 사업 중심이었다. 여기 더해 오너 중심 회사가 아닌 임직원 공동체 성격의 회사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욕구도 채워지지 않은 채였다. -한국콜마 대표이사 임기를 앞당겨 그만뒀다고 하시던데. 이번엔 ‘준비된 퇴직’인가. “그때 그만두는 게 여러모로 맞았어요. 슬슬 정리해야 할 때다,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마침 바이오벤처를 함께 만들어보자는 지인도 있어 사업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했지요.”-하플사이언스의 시작인가요. “먼저 각 대학에서 연구 중인 과제들을 조사해나갔습니다. 혁신적인 새로운 치료제를 개발해 사회에 기여하고 보람을 찾을 수 있었으면 했지요. 사업화까지 할 수 있는 아이템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서울대 약대 동기인 김대경 중앙대 교수가 노화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연구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오랜 경험으로 ‘물건’을 찾아내고 다듬는 전문가인 최 대표의 눈이 빛났다. “연구 성과물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잘 하면 노화의 근원적이고 새로운 치료방법이 될 수 있다고 봤어요. 부족하지만 내가 한번 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김 교수가 10여 년 간 쌓아온 탄탄한 학문적 기반과 연구 성과, 앞으로 추가될 성과까지를 제품개발과 연계시켜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도움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 최초의 항노화 신약 개발 벤처기업 ‘하플 사이언스’가 2018년 11월 탄생한다. 그의 두 번째 퇴직 뒤 8개월만이다.○서울대 약대 동기가 의기투합, 공동창업하플사이언스의 공동창업자이자 CSO(최고과학책임자)를 맡은 김대경 교수는 연구 외길을 걸어온 인물이다. 서울대 약대 졸업 후 도쿄대 대학원에서 생명약학 박사를 받았다. 포항공대와 하버드대 등을 거쳐 1994년부터 중앙대 약대에 적을 뒀고 지난해 8월 정년퇴임했다. 이들이 꿈을 건 신약후보물질은 하플(HAPLN1·Hyaluronan And Proteoglycan Link Protein)이란 유전자재조합 단백질이다. 김대경 교수는 인간의 노화현상을 극복할 해답이 인체 내에 있다고 보고 노화에 따른 혈액 성분 변화에 주목했다. 젊은 쥐와 늙은 쥐의 혈액이 서로 통하도록 ‘병체결합’했을 때 늙은 쥐의 피부조직이 젊어졌고, 그것을 유도하는 물질이 하플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체내에 존재하는 단백질 하플이 항노화에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콜라겐, 히알루론산을 생성해 노화로 손상된 조직을 복구시키는 것이다. 하플이 제대로 작동하면 연골이 퇴화돼 일어나는 골관절염이나 폐포가 나빠져 생기는 만성폐쇄성 폐질환(COPD) 등에서 조직을 재생시켜 원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현재 가능성을 확인한 신약 파이프라인(연구개발 프로젝트)은 골관절염, 만성폐쇄성폐질환, 모발, 피부 등 4가지. 회사는 우선 골관절염과 폐질환 두 가지에 집중하기로 했다.○“제 평생 요즘처럼 가슴 뛰고 즐거운 때는 없었습니다.”최 대표가 근무하는 하플 사이언스는 경기도 성남시 판교동에 자리해 있다. IT기업을 비롯한 신생 첨단기업들이 들어선 판교밸리 내 빌딩에 10층 사무실, 3층에 연구소가 들어서 있다. 세련되고 깔끔한 건물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대부분이 젊고, 옷차림도 가볍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도 날 기다리는 다이내믹한 일이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뜁니다. 더러 ‘뭘 그렇게 악착같이 살려 하느냐’는 분들이 있지만 이 맛을 몰라서 그러시는 겁니다. 젊은이들 틈에서 호흡하고 있으니 마음도 젊어집니다. 오늘은 이런 복장이지만 평소에는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일 때가 많습니다.” 현재 회사 인력은 31명. 이중 연구개발 인력이 24명이다. JW중외제약과 한미약품, 녹십자 등에서 근무하던 인력이 임원진으로 영입됐고 연구개발 인력은 김대경 교수가 배출한 박사 5명 중 4명이 합류하는 등 전문가들이 포진했다. ○판교밸리에서 첫 발, 2년 만에 총 327억 원 투자유치여느 회사가 그러하듯 2018년 11월 창업초기 가장 큰 어려움은 인재와 자금이었다. 그러다가 창업 반년 여만인 2019년 7월 시리즈A로 100억 원, 지난해 12월 시리즈B로 227억 원의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시리즈A, B, C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방식인데 시리즈 A는 최초 투자금이 되는 시드머니, B는 기술이 본격적으로 상품화되는 단계의 투자, C는 시장을 늘리는 단계의 투자를 말한다.업계에서는 설립 2년만에 330억 규모 대규모 자금유치는 극히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만큼 투자가치를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투자유치에 성공하니 저절로 인력 확보에도 숨통이 트였다. 회사의 장래에 기대하는 투자가들이 많다는 점에 더해 연구 인력에 대한 대우도 강화할 수 있었다. “요즘 벤처 기업은 꿈만 먹고 사는 건 아닙니다. 제대로 대우해줘야 젊은 연구 인력이 오더군요. 어찌됐건 하루빨리 고통받는 환자들을 근본적으로 치료하는 약제를 개발하고, 소중한 돈과 시간을 우리 회사에 바쳐준 임직원과 투자자들에게 확실한 보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성장하고자 합니다.” ○인류 노년의 삶 바꾸는 신약 ‘내 손으로’지난 5월 회사가 학회를 통해 발표한 그간의 동물실험 결과를 보자. 가장 앞서가고 있는 것은 골관절염 치료제(HS-101)다. 치료제를 주사한 염소에서 연골이 재생되고 관절염 증상이 개선되는 결과를 확인했다<그림1>. 만성폐쇄성 폐질환 치료제(HS-401)를 주사한 쥐에서는 손상된 폐포의 기능이 개선된 모습이 보였다<그림2>.“두 파이프라인 모두 폭발적인 성장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골관점열 발병률은 전 세계 인구의 9%에 육박하지만 연골 재생에 명실상부하게 인정받은 약물은 없는 실정입니다. 만성폐쇄성 폐질환도 전 세계에 3억 명이 넘는 환자가 있지만 시장에 유통되는 약은 점액 분비나 기관지 확장을 억제해 증상을 완화하거나 진행을 지연시키는 데 불과하죠.”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세포치료학회에서 ‘올해의 가장 우수한 재생의약품 파이프라인’ 상을 받았고 글로벌 전문지 ‘스타트업 시티’가 선정한 ‘올해의 바이오테크 스타트업(아태지역)’에 선정되는 등 해외로부터도 주목받고 있다. 회사는 올해 말 미국 FDA에 골관절 치료제 임상시험계획을 신청할 계획이다. 폐질환 치료제도 2022년 임상 1상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임상에 들어가면 천문학적 투자가 필요하므로 아예 준비단계에서 글로벌 제약사를 파트너로 하기 위해 뛰고 있다. 2024년에는 기업공개(IPO)에 도전할 계획이다.○“75세까지는 현역으로 일할 생각”21세기는 전 세계에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노인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다. 노인성 질병을 근본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약물의 수요는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반면 본래 신약 개발의 세계는 ‘모 아니면 도’다. 일반적으로 임상시험에 들어간 바이오의약품의 성공률은 15%에 불과하다.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신약 개발의 길. 예기치 않은 난관을 만나 생각대로 일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까. “제약사는 한 가지만 만드는 곳이 아닙니다. 신약개발에 매진하는 한편으로 꾸준하고 안정된 먹거리도 반드시 마련해둬야죠.”이런 그는 75세까지는 현역으로 일하고 싶다고 말한다. “CEO니 대표니, 자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 넘겨주고 고문으로 일하며 다른 바이오벤처들의 출범을 돕고 여력이 있다면 투자도 할 수 있겠죠.”사실 그는 조건이 매우 좋은 편이다. 명확한 전문성을 갖추고 평생 해오던 일에서 쓸모를 찾아냈으니 말이다. 한국의 시니어 중에는 평생 자신을 갈아넣으며 열심히 해온 일이 막상 사회에서는 별 쓸모없었다는 현실을 뒤늦게 깨닫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도 그는 열심히 말한다. “제 좌우명은 ‘인생은 언제나 지금부터’입니다. 정년이라 해서 사회적으로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을 너무 빨리 포기하는 것 아닌가요. 우린 주로 직장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살아와서 그 틀을 벗어나면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지만, 실제 도전해보면 다릅니다. 필요한 건 상상력과 호기심, 용기일 뿐이죠.”○“인생의 의미 찾기 위해 창업했다”6월 경 ‘100세 카페’에 노화에 대해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이라 규정짓고 도전하는 세계 의학계의 움직임을 모아 소개한 일이 있다(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210606/107286720/1). 기사가 나간 날 “한국에도 그런 연구를 하는 곳이 있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기사에 나오는 미국 대학처럼 자신들도 젊은 쥐와 늙은 쥐의 ‘병체결합’을 통해 노화를 이길 방법을 연구하고 있노라고…. 최학배 하플사이언스 CEO였다.그에게 “죄송하지만 잘 몰랐다. 관심을 갖고 공부해보겠노라”고 답장을 보낸 뒤 홈페이지와 관련기사들을 검색했다. 국내 최초 항노화 신약 개발기업, 골관절염·만성폐쇄성폐질환 치료제 개발 박차…. 솔직히 연구내용의 성패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기자가 판단할 수 없다. 다만 출범 만 2년 만에 누적 327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고 중외제약, 한국콜마 등 내로라 하는 제약회사의 개발자 겸 최고 경영자로 일한 분이 바이오벤처 창업에 나섰다는 점은 놀라웠다. 여기에 김대경 CSO까지, 환갑을 넘긴 대학 동기들이 아무도 도전하지 않던 분야에서 신약을 개발하겠다는 것 아닌가. 더욱 매료시킨 것은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라는 그의 창업 동기였다. 인류의 노년을 바꾸겠다는 꿈에 도전해 자신이 살아온 보람을 찾고 싶다는 것이다. 60대에 이르기까지 순탄한 길을 걸어온 그가 ‘왜 사서 고생하느냐’는 핀잔을 들어가며(그 스스로도 ‘공연히 노년의 삶이 피곤해지는 것 아닌가’라는 걱정이 들었다고 한다) 도전장을 던지는 그 마음을 잘 알 것도 같았다. 100세 카페 내에 ‘이런 인생2막’ 코너를 신설하자는 생각도 그를 비롯한 몇몇 분들을 보고 굳어졌다. 두려움을 딛고 내딛는 그들의 도전이 부디 좋은 성과로 이어지길 빈다. 그의 꿈이 실현된다면 한국의 바이오벤처 시장에도, 우리 모두의 노년의 삶에도 또다른 풍요로움을 안겨줄 테니까. 퇴직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그가 증명해줬듯, 다시 한 번 꽃피울 그 무언가를 준비하는 시니어들에게 더 큰 희망을 줄 수도 있을 테니까. ※알립니다.100세 카페에서는 ‘이런 인생 2막’ 제하에 멋진 인생 2막을 만들었거나 준비하는 독자 사례를 소개하는 코너를 만들고자 합니다. 살아온 길과 경력은 제각각이지만 나름의 보람을 갖고 열심히 사시는 분, 멋진 노후라고 박수 받을만한 분, 다른 분들의 노후 설계에 참고가 되거나 공유하고 싶은 분들의 사연을 소개해주십시오. 자천타천 모두 좋습니다. . ▷이메일: 100cafe@donga.com서영아 기자 sya@donga.com}
노년의 시간을 어디서 보내느냐는 노후 삶의 질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다. 나이 들어서도 존엄을 지키며 즐겁고 건강하게 살아갈 공간은 어디일까. 혼자 힘으로 생활할 수 있는 시니어라면 실버타운이 떠오른다. 실버타운은 노후 생활에 필요한 의료 시설과 오락 시설, 체력단련 시설 등을 갖추고 식사 관리, 생활 편의, 건강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유료 노인복지주택이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들이 재정을 지원하는 양로원이나 요양원과 달리 입주자들이 내는 돈으로 운영된다. 비슷한 개념의 유료 노인 주거시설을 일본에서는 유료 노인홈, 미국은 은퇴공동체(Retirement Community)라 부른다.○달라진 한국의 고령자, “자녀와 독립해 내 생활 즐기겠다” 6월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0년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고령자 중 노인 단독가구(독거+부부 가구)는 78.2%에 달해 2008년 같은 조사 때보다 11.4%포인트 늘었다. 같은 기간 ‘자녀와 함께 살겠다’는 고령자는 32.5%에서 12.8%로 줄어 노인과 자녀 세대가 따로 사는 추세는 가팔라질 전망이다. 이유는 고령자들의 ‘자립’과 관련이 깊다. 스스로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돼 있다며 개인 생활을 향유하기 위해 자녀와 따로 살겠다는 고령자가 2011년 39.2%에서 2020년 62%로 급증했다. 해마다 새로 고령자 층에 편입되고 있는 베이비부머 세대는 윗 세대에 비해 본인을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건강한 시니어에게 적합한 실버타운실버타운 입주를 위한 첫째 자격 요건은 ‘건강’과 자립이다. 요양보호사나 간병인 도움 없이 혼자 생활이 가능해야 한다. 만 60세 이상만 입주가 가능한데, 부부라면 한 명만 60세를 넘기면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대체로 70대 중반~80대에 입소하는 경우가 많다. 식사 청소 등 가사 노동이 부담스러워지거나 약간의 돌봄이 필요해진 시기다. 이렇게 입주한 많은 어르신이 “더 일찍 들어올 걸 그랬다”고 후회한다고 한다. 실버타운에서 제공되는 각종 시설과 취미 프로그램, 행사 등을 알차게 이용하려면 조금이라도 활력이 있을 때 시작하는 게 좋다. 입주 뒤 살면서 생긴 문제는 허용되지만 신규 회원은 받아주지 않는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가령 건강한 상태로 입주한 뒤 몇 년 살다가 인지증(치매)을 앓게 되면 어느 정도까지는 거주가 가능하지만 이미 증세가 시작된 사람이 새로 입주할 수는 없다. 다만 독립적인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악화되면 실버타운에서 퇴소해 전문 의료진이 있는 요양 시설이나 병원으로 가야 한다. 일부 실버타운은 케어 홈이나 요양 시설을 함께 운영해 돌봄이 필요한 노인을 옮길 수 있게 돼 있다. 대부분 실버타운은 아파트 전세금 개념과 비슷한 입주 보증금을 내고 매달 관리비와 식비 등 생활비를 낸다. 입주 보증금과 월 생활비는 천차만별이다. 입주 보증금은 실버타운의 위치, 평형대, 시설 수준, 운영 주체 등에 따라 달라진다.○최고가 실버타운은 보증금 9억, 생활비 월 300~500만 원한국의 실버타운 현황을 상세히 알고 싶다면 2014년 이한세 스파이어리서치&컨설팅 대표가 낸 저서 ‘실버타운 간 시어머니, 양로원 간 친정 엄마’를 참고하길 권한다. 입주민 100여 명 이상 규모의 전국 30개 실버타운을 직접 가보고 입주 보증금과 월 생활비, 위치 및 주변 환경, 생활편의 서비스 등 11개 항목에 대해 분석한 내용을 실었다. 단, 비용 등 숫자는 7년 전 자료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실버타운 중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가는 도심 속 실버타운을 표방한 ‘더클래식500’이다. 보증금 9~10억, 월 생활비 300~500만 원이 필요하다. 지난 3월 이웃들의 기부 릴레이 소식이 전해졌던 경기도 용인의 삼성 노블카운티와 함께 최고급 실버타운의 양대 산맥으로 불린다. 삼성 노블카운티도 전용 면적 25평 기준 보증금 4억6000만원에 월 생활비 285만원 정도 든다. 초창기에 입주했다가 나온 사람들 사이에서는 ‘의관정제하고 밥 먹으러 가야 하는 곳’ 등의 수군거림이 적지 않았다.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분들이 모였으니 남의 눈 의식하고 체면치레 경쟁이 벌어졌다는 얘기다. 그러는 중에도 입주민들은 계속 나이 들어갔고, 몇 차례 물갈이도 겪으면서 자연스레 적절한 질서가 잡혀나갔다. 지방으로 눈을 돌리면 보증금과 월 생활비가 가벼워진다. 경기도 가평 청심빌리지는 1년 보증금 1000만원에 월 생활비 110만원이 들고, 강원도의 동해약천온천실버타운은 보증금 1억5000만원에 월 130만원을 내면 된다(모두 1인 기준). 일부 실버타운은 같은 건물에 분양형과 임대형이 섞여 있기도 하다. 분양형의 경우 주택 수에 포함돼 취득세 양도세 등 세금 문제가 발생하므로 유의해야 한다. 대신 집을 담보로 주택연금을 받을 수 있다. 또 매달 내는 생활비는 실버타운 운영 방침에 따라야 한다. 이한세 대표는 책에서 “실버타운은 비싸다고 다 좋다고 할 수는 없다. 자신에게 맞는 곳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실버타운의 부침보건복지부 집계에 따르면 2020년 전국 노인복지주택(실버타운)은 36개소다. 입소 인원은 7925명으로 전체 고령인구 850만 명의 0.1%에도 못 미친다. 극소수만이 실버타운에서 산다는 얘기다. 한국에 처음 들어선 실버타운은 1988년 7월 경기도 수원시에서 문을 연 유당마을이다. 1993년 12월 노인복지법이 개정돼 민간에서도 유료 노인 복지시설을 운영할 수 있게 되자 전국에 실버타운 붐이 일었으나 관리 부실과 운영업체 도산 등 사고가 많았다. 역설적으로 보면 많은 실버타운들이 폐업하다 보니 지금 살아남은 곳들은 대부분 자생력을 갖게 됐다고 할 수 있다. 실버주택을 표방한 일반 아파트형도 있다. 수원 광교의 두산위브, 광교 아르데코, 용인 수지 광교산 아이파크. 용인동백의 스프링카운티 자이 등이다. 이런 아파트 중에는 주민들 사이에 분쟁이 있거나 노인복지주택 기능이 유명무실해져버린 경우가 적지 않다. 식당이나 사우나 등 공동이용 시설들을 입주민들이 비용을 줄이기 위해 폐쇄해버리는 것이다. 주변 부동산 값이 오르면서 일반 아파트처럼 그 대열에 끼기를 바라는 주민들의 염원도 커지고 있다. 정부가 노인복지법을 개정해 2015년 이후 분양형을 폐지해 아파트형 노인복지주택이 더 만들어질 길이 막혔다.○실버타운 입주를 손꼽아 기다리는 50대 부부 실버타운을 바라보는 시선은 복잡하다. 실버타운 입주를 손꼽아 기다리는 50대 부부 이야기와 노후를 의탁했던 실버타운의 갑작스런 폐쇄 소식에 막막해하는 80대 김 모 교수의 사연을 통해 명암을 살펴보자. “저희 부부는 60세가 되면 실버타운에 입주하려고 대기 타고 있습니다~.” 지난해 말부터 유튜브에 실버타운에 특화된 콘텐츠를 올리고 있는 문성택·유영란 씨 부부. 현재 53세, 52세인 이들은 60세가 되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실버타운에 입주해 노후를 즐기기 위해서다. 문성택 씨는 전북 익산에서 한의사로 일하며 주말에만 서울로 올라오는 생활 짬짬이 유튜브에 개설한 ‘공빠TV’ 채널에 콘텐츠를 올린다. 살고 싶은 실버타운을 직접 찾아다니고 공부한 내용을 공유한다. 반 년 동안 올린 실버타운 관련 콘텐츠가 100개를 넘는다. “(댓글에 드러난 시청자 반응을 보면) 처음에는 욕 많이 먹었습니다. 아직 젊은 사람이 무슨 실버타운 운운하느냐며. 요양원과 실버타운에 대한 구분이 잘 안됐어요. 지금도 어르신들 중에는 실버타운 얘길 꺼내면 ‘날 고려장 하려하느냐’는 반응이 많아요. 하지만 반년 이상 꾸준히 활동하면서 시청자들의 이해도도 높아졌고 댓글도 긍정적인 내용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곳저곳 실버타운 탐방을 가보면 ‘공빠TV 보고 입주했다’는 분들도 적잖이 만납니다.” ○가사노동에서 해방돼 건강 챙기고 여가까지 보장 이런 문 씨 부부가 실버타운에서 살고 싶은 이유는 4가지로 △식사와 건강 △가사노동 해방 △좋은 시설과 프로그램 △거주 비용 절감 등이다. 첫째 식사와 건강. “우리나라 실버타운의 가장 큰 장점은 식사가 제공된다는 점입니다. 한의원에서 매일 90대 어르신들까지 진료하면서 느끼는 게 많습니다. 나중에 (배우자가 떠나고) 혼자 남으면 식사 때문에 건강이 악화돼 결국은 요양원 신세를 지며 불행한 여생을 보내는 분들이 많아요. 외국 경우도 식사를 주는 곳들이 있지만 비용이 어마어마하죠.” 실버타운 예찬은 이어진다. “둘째 여성 시니어들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식사와 집안 청소만 없어도 여성들이 건강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습니다. 이 부분도 외국과는 다른 우리나라만의 강점이에요. 외국 실버타운 중 하우스키핑을 해주는 경우는 비용이 만만치 않죠. 셋째 건강과 여가를 위한 좋은 시설과 프로그램을 한번에 해결할 수 있어요. 어디 가서 피트니스, 문화센터, 사우나, 도서관, 동호회 등을 일일이 찾아다니려면 비용도 노력도 엄청나지요. 넷째 노후에 대부분의 돈을 집에 깔고 뭉개는 상황이 되는데, 실버타운이 비싸다 해도 서울권 20평대가 보증금 4~5억에 월 200~300만 원 정도죠. 10~20억이 넘는 아파트를 깔고 사는 것에 비하면 쌉니다. 노후를 준비하며 거주 규모를 줄이고 그 돈을 다른 곳에 투자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그는 ‘실버타운에 꼭 가야할 다섯 사람’으로 △혼자된 모든 남자 노인 △혼자되고 나이 든 여자 △어느 한쪽이 아픈 노인 부부 △해외에서 돌아온 역이민 경우 △아내에게 사랑받고 싶은 남편 등을 들었다. 이 부부가 연구한 전국 각지의 실버타운 관련 소식이 궁금하다면 유튜브 ‘공빠TV’를 찾아보길 권한다. ○13년간 잘 살아온 실버타운, 청천벽력 같은 매각 소식한편으로는 노년을 황망하게 만드는 실버타운 잔혹사가 이어지고 있다. 경남 창녕시에 위치한 대형 실버타운 더케이 서드에이지가 그런 경우다. 2007년 한국교직원공제회가 설립해 13년간 운영해왔는데, 3월 하순 공제회 측이 갑작스레 사업 중단을 선언했다. 8월 말까지만 운영하고 폐쇄하겠다는 것이었다. 여생을 이곳에서 보내려던 입주자들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대부분 평생 교직 생활을 하고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온 어른들. 6년간 이곳에서 살아온 80대의 김 모 교수는 4월 4일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입주자들의 분위기를 ‘경악’과 ‘망연자실’이란 말로 전했다. 그는 “입주 회원 연령이 상당히 높아져 90대 회원도 적지 않은데 갈 곳을 못 찾는 처지가 됐다”며 “입주자 대부분이 평생 살 생각으로 집을 처분하고 들어왔는데, 최근 10여 년간 집값 폭등으로 다시 집을 사서 나가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분들의 여생이 교원공제회 때문에 망가진다면 어떤 책임을 질 것인가”라며 재검토를 촉구했다. 방만하고 경직된 경영이 문제였다는 지적도 했다.○“어르신들, 연말까지 나가주세요”4월 말에는 언론에서도 더케이서드에이지의 매각 계획을 알렸다. 기사에 따르면 이곳의 누적적자는 약 235억 원.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업 중단을 결의했다는 것이다. 특히 코로나19 탓에 입주율이 2018년 대비 절반으로 쪼그라들었다. 교직원공제회는 이 실버타운에 683억원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교수의 5월 초 블로그에 따르면 공제회 측은 폐쇄를 연말까지로 미루고 약간의 보상금과 이주비를 지원해주기로 했다. 입주민들은 하나 둘 이주할 곳을 구해 떠날 채비를 하고 입주자들끼리 인사는 “갈 곳은 정했습니까”가 됐다. 현재는 실버타운 홈페이지도 사라진 상태다. “90이 넘은 어느 여자 회원은 큰 걱정을 하게 되었다. 십년 이상 벗하고 살던 이웃과 헤어져 혼자 어디로 가야 하는지 불안해한다.”(김 교수 블로그) 노년 끝자락에 선 그들에게 이런 처우는 어찌 보면 살아온 평생을 모독하는 일이다. 교직원공제회가 은퇴 교원들에게 이런 대접밖에 못한다는 점도 놀랍지만 당초 수익 사업으로 실버타운을 개장할 당시와 비교하면 씁쓸한 마음이 든다.○기댈 곳 없는 중산층 고령자 주거복지부모나 친지, 본인의 노후 거처를 고민해본 사람은 이렇다할 선택지가 부족하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 문 씨는 “고급 실버타운과 저소득층 노인을 위한 공공실버임대주택은 아주 잘 돼 있는데, 중산층이 이용할 만한 곳이 별로 없더라”고 지적한다. 돈이 많지도 없지도 않은 어정쩡한 중산층이 기댈 곳이 마땅치 않다는 얘기다. 다만 지금 추세대로라면 한국 인구에서 고령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2030년 30%를 넘고 2050년이 되면 40%를 넘어 일본을 앞서게 된다. 이 때가 되면 전 국토의 절반이 실버타운이 되는 셈이다. 고령자가 살기 안전하고 편리한 주거와 복지 시스템을 갖춘다는 것은 결국 전 국민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알립니다100세 카페에서는 ‘이런 인생 2막(가제)’ 제하에 멋진 인생 2막을 만들었거나 준비하는 독자 사례를 소개하는 코너를 만들고자 합니다. 살아온 길과 경력은 제각각이지만 나름의 보람을 갖고 열심히 사시는 분, 멋진 노후라고 박수 받을만한 분, 다른 분들의 노후 설계에 참고가 되거나 공유하고 싶은 분들의 사연을 소개해주십시오. 자천타천 모두 좋습니다. 이메일: 100cafe@donga.com서영아 기자 sya@donga.com}
농심은 신라면을 선보인 지 35년을 맞아 특유의 매운맛을 살려 볶음면으로 만든 ‘신라면 볶음면’을 내놓았다. 신라면 볶음면은 매운맛에 대한 소비자 선호가 높아지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신라면이 지난 35년간 ‘매운맛의 기준’으로 자리매김해 온 만큼 변화하는 트렌드에 맞춰 새로운 매운맛을 선보일 필요가 있다고 봤다. 국내외에서 국물 없는 라면이 인기를 얻고 있는 점도 반영했다. 농심 관계자는 “지난해 짜파구리가 세계적 인기를 얻었고, 온라인에서는 ‘로제 신라면’, ‘쿠지라이식 신라면’ 등 신라면을 국물 없는 라면으로 만드는 레시피가 화제가 되고 있다”며 “볶음 라면 형태의 신라면을 내놓기를 요청한 소비자들의 열기도 힘이 됐다”고 말했다. 신라면 볶음면은 자극적인 매운맛보다는 맛있게 즐길 수 있는 맛을 내는 데 중점을 뒀다. 고추 외에 후추 등 다른 재료를 함께 사용해 맛있는 매운맛을 내고 파와 고추 등으로 만든 조미유를 추가해 볶음면 특유의 매콤한 감칠맛을 살렸다. 면은 볶음면에 어울리도록 얇고 탱글탱글하게 만들고, 조리 시간을 봉지면 2분, 큰사발면 3분으로 기존 제품보다 대폭 줄였다. 불을 끄고 비비거나 약한 불에 30초간 볶아도 고유의 맛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소비자들이 취향대로 요리할 수 있도록 했다. 신라면은 35년 전 한국인이 좋아하는 매운맛을 구현해 ‘매운 라면 시대’를 연 제품이다. ‘사나이 울리는 매운맛’이라는 문구와 함께 많은 사람의 입맛을 사로잡은 신라면은 제품을 내놓은 지 5년 만인 1991년 라면 시장 1위에 올랐고, 이후 30년간 선두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2011년 면과 수프의 품질을 강화해 깊고 진한 맛을 살린 ‘신라면 블랙’을 내놓으면서 이른바 ‘프리미엄 라면 시장’을 열었다. 이어 2019년에는 튀기지 않은 면을 사용한 ‘신라면 건면’을 선보였다. 신라면은 세계 100여 개국으로 수출되며 글로벌 K푸드 열풍의 대표 주자로 성장했다. 지난해에는 코로나19 확산으로 맛과 간편성을 갖춘 신라면이 인기를 모았고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다수 매체들이 신라면 브랜드를 ‘세계 최고의 라면’으로 선정했다. 제품이 나온 뒤 올해 상반기까지 국내외에서 누적 매출 14조8000억 원, 판매량은 346억 개에 달한다. 농심 관계자는 “그간 신라면이 국민 라면으로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은 신라면 블랙과 신라면 건면 등 신제품을 선보이며 시장을 이끌어 왔기 때문”이라며 “소비자의 눈높이에 맞춰 소통하고 함께 호흡하며 농심의 새 슬로건처럼 ‘인생을 맛있게’ 하는 신라면이 되겠다”고 말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지난회에 소개한 미국의 ‘비컨힐 마을’ 모델은 고령자들이 나이 들어서도 각자 자기 집에서 살며 회원제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를 돕고 교류하는 방식이다. 이번에는 1960년대 덴마크에서 태동한 주거형태 코하우징(공동주택·Cohousing)을 살펴보자. 코하우징은 타인과 함께 살지만 자기 집이 따로 있는 ‘따로 또 같이’ 주거형태다. 시니어들끼리, 혹은 시니어와 다른 세대가 섞여 구성되는데 비컨힐마을과 달리 이사를 해야 한다.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등 북유럽에서 확산돼 미국 캐나다 일본 등으로 전파되고 있다. 집합주택(콜렉티브 하우스), 쉐어하우스 등 유사한 주거 방식도 여럿이다.○자유롭지만 외롭지 않은 독거생활코하우징 주택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일부를 공유하고 나눔으로써 사람과 사람이 느슨하게 연결되는 공동체를 만든다. 각자의 집은 독립된 보통 아파트처럼 생겼고 개인들은 자유롭게 생활한다. 특이한 점은 자신의 집 외에 갖춰진 공용 공간들에 있다. 공용 부엌, 공용 거실, 공용 정원, 어린이 공간, 세탁실 등. 주민 누구나 공용공간을 이용할 수 있고 이곳에서 서로 적극적으로 교류한다. 코하우징이 혼자 사는 노인이나 아이가 있는 맞벌이 부부, 독신자를 위한 대안주택으로 발전하는 이유다. 일본 도쿄에 있는 집합주택 ‘칸칸모리 닛포리’에서는 또래 아이들이 있는 부모들이 놀이방을 관리하고 아이들은 부모가 출근한 뒤 이집저집을 놀러다니기도 한다. 시간여유가 많은 노인들이 느슨한 형태로 아이들을 돌봐주는 일도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아이들은 각 가정에서는 외동이지만 옆집 형, 언니들과 앞집 동생을 돌보며 사람사는 세상을 배워나간다. 식사당번들이 만든 따뜻한 집밥을 공용식당에서 함께 먹는 일도 즐겁고, 뜻맞는 어른들이 식당에 남아 즐겁게 한잔하는 풍경도 흔하다. ○평일 저녁 공동식사가 커뮤니케이션 통로코하우징 주민들을 묶어주는 매개체는 공동식사다. 아침이나 점심은 각자 해결하지만 저녁식사는 함께 한다. 대부분의 코하우징 주택에서 주 2~3회부터 5회까지 생활의 중요한 일부인 식사를 함께 함으로써 커뮤니케이션 기회로 삼는다. 식사는 주민들이 돌아가며 만든다. 한 번 자신이 공용식사를 만들면 다음 10번 정도는 조리를 하지 않고 따뜻한 가정음식을 먹을 수 있다. 칸칸모리에서는 평생 요리해본 적 없던 남성 고령자가 공동식사 준비를 계기로 요리에 빠져 새 메뉴 개발에 심취하게 됐다고 한다. 코하우징은 경제적이다. 예컨대 정원가꾸기를 좋아하지만 자신의 정원을 가질 여력은 없던 사람이 이곳에서는 공유 정원에서 취미를 즐길 수 있다. 심지어 채소를 심어 모두의 식재료로 삼을 수 있다면 일석삼조다. 분리수거나 건물관리도 분담해 처리하고 카풀(Carpool)도 쉽게 할 수 있다. 유럽에서는 한동안 시니어들을 중심으로 한 코하우징이 늘었지만 구성원들이 동시에 나이를 먹다보니 일정 시기부터 활력이 떨어지는 문제에 부닥쳤다. 그래서 젊은 세대를 적극 유치해 협력과 공존을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네덜란드 호그백 마을처럼 중증 인지장애(치매)를 가진 노인들과 치료사, 관리자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며 모여 사는 ‘조금 특별한’ 코하우징도 있다. ○평생 자립의 끈 놓지 않는 고령자들스웨덴의 노인 코하우징 시설 둔데르바켄에는 60가구 70명이 모여 산다. 평균연령 70세다. 동아일보는 2019년 북유럽 4개국의 코하우징 실태를 현지 취재해 보도한 바 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이곳이 요양원과 다른 점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 꾸려나간다’는 원칙이라고 한다. 주민들이 돌아가며 식사와 청소 당번을 맡는 자율 형태로 운영되고 이들을 도울 직원을 따로 고용하지 않는다. 거주자들은 몸이 아프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 아무도 곁에 없을 것이란 생각에 코하우징을 선택했는데, 혼자 살되, 외롭지 않은 삶이 구현돼 편하다고 말한다. 거주자들은 하루를 보내며 모였다 흩어졌다를 자유롭게 한다.○“요양원에서 살던 부모님처럼 늙고 싶지 않다”핀란드에서 매매형 코하우징의 원조로 통하는 ‘로푸키리’는 ‘마지막 전력 질주’란 뜻이다. 1999년 친구 사이였던 할머니 4명이 “요양원에서 살았던 부모님처럼 늙고 싶지 않다”고 결심한 뒤, 핀란드 정부에 노인 공동 주거시설용 부지를 마련해 달라고 요구했다. 2005년 집이 완성될 때까지 할머니들은 당국과 줄다리기하듯 협상했다. 하지만 로푸키리를 벤치마킹한 두 번째 코하우징 주택 코티사타마는 이 과정을 2년으로 줄여 2015년 완공됐고, 외국 공무원들이 우수 사례로 견학 오는 곳이 됐다. 로푸키리에는 64명이 거주한다. 각자 집에 대해 소유권을 가졌는데 12평 정도 되는 작은 집이 약 2억 원대로 인근 주택시세와 비슷하거나 약간 저렴한 수준이라 한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새 거주자가 들어오려면 기존 거주자들의 면접을 통과해야 한다. 고령자들의 코하우징은 기존 요양원보다 비용절감 효과가 커 정부들이 환영할 만하다. 그래서 현지에서는 공유주택 건설에 적극적인 정부 지원을 요구하는 의견이 적지 않다. 주거난으로 청년들이 도심에서 밀려나는 상황과 관련이 깊다. 정부가 나서 노인을 위한 코하우징 주거공간을 만들면 노인들이 살던 도심의 큰 집을 젊은 세대에게 넘길 수 있고, 세대갈등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스웨덴의 경우 전체 주거의 20%가 코하우징으로 바뀌었다는 통계도 있다. ○1인 가구 증가, ‘고독’이 큰 문제1인 가구 증가는 주요 선진국들이 겪고 있는 공통 현상인데, 갈수록 노후의 ‘외로움’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꼽힌다. 예컨대 영국은 2018년 ‘외로움 담당 장관’을 신설할 정도로 1인 가구 정책을 국가 의제로 삼고 있다. 스웨덴도 코하우징에 대해 1인가구의 사회복지제도 개념으로 접근한다. 나홀로, 혹은 부부만이 생활하는 가구가 늘어난 반면 이들은 여차하면 세상과 단절돼 고립되기 쉽다. 몸이 불편해지고 질병이 늘어나는 노년기에 사회적으로 고립된다면 고독사와 연결되기도 쉽다.비컨힐 마을 회원들에게서 반응이 좋은 프로그램 중에 ‘라이즈 앤 샤인(rise and shine) 서비스’가 있다. ‘일어나서 움직이라’는 기상 콜 같은 것인데 매일 아침 노인에게 전화를 걸어 인사하고 안부를 확인한다. 고독사 방지를 겸한다. 전화를 받은 어르신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하루를 시작할 힘을 얻고 세상과 연결돼 있다고 느낀다. 고독사는 요즘 대부분의 지자체와 국가들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문제다. 일본에서는 2009년 유명 여배우 오하라 레이코가 도쿄 부촌의 자택에서 고독사한 지 사흘만에 발견돼 충격을 안겨줬다. 한국에서도 이혼 또는 사별한 대학 교수나 기러기 아빠들이 고독사한 뒤 한참만에 발견되는 일이 잇따랐다.○갓난아이부터 80대까지, 함께 사는 이웃 노인 고독사에 경계심을 가진 일본에서도 쉐어하우스나 코하우징 바람이 거세다. 일본 최초의 코하우징 주택은 2003년 도쿄 닛포리에 설립된 ‘칸칸모리 닛포리’다. 스웨덴의 집합주택을 표본으로 해 2년에 걸친 워크숍을 거치며 일본에서 가능한 형태를 모색했다고 한다. 전체 거주자 51명 중 어린이가 11명. 아이들은 엄마 아빠 외에도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둘러싸여 형제처럼 자란다. 최근 새로 아기가 태어났다. 이곳 주민인 지방출신 30대 여성은 무연고 상태로 도쿄에서 일해야 해 불안감이 컸지만 칸칸모리에 들어와 이런 불안감에서 해방됐다고 한다. 일에 지쳐 퇴근하면 누구나 ‘어서와요’라고 인사해주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풀린다는 얘기다. 70대에 이곳에 들어와 80대가 됐다는 한 남성은 “태어나서 자란 배경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매일 인사를 나누고 배려하는 이곳 생활이 안심감을 준다”고 공동블로그에 썼다. 칸칸모리를 지은 회사는 현재 일본 전역 7군데에 집합주택을 지어 운영하고 있다. 100년 전 지어진 구옥을 리모델링해 쉐어하거나 사용하지 않게 된 사원기숙사를 개조해 집합주택으로 만드는 등 현지상황에 맞는 여러 시도를 벌이고 있다. ○한국에서 잘 될까한국도 가족이 분화돼 1인가구가 대세로 자리잡아가는 중이다. 지난해 전국 1인 가구는 전체 가구 대비 30.4%를 기록했다(통계청). 보건복지부가 최근 발표한 ‘2020년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한국 노인의 78.2%가 홀몸이거나 부부만인 노인 단독가구다. 노후 주거를 생각할 때 흔히 현재 삶의 연장선만을 생각하지만 부부가 함께 지내다가 배우자가 사망한 뒤 혼자 남는 상황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 한국에서도 공동주택은 민간과 공공 영역에서 모두 시도되고 있지만, 몇가지 힘든 요소가 있어 보인다. ‘코하우징 공동체(어문학사)’의 저자 최정신 가톨릭대 명예교수는 “(민간 부문에서 건립하려 할 때) 가장 큰 장애물은 부동산에 대한 뿌리깊은 소유개념”이라고 지적한다. 한국에서는 부동산이 부를 늘리는 수단이 되다보니 ‘내 집’에 대한 애착이 크고, 그 만큼 공용부분에 대한 투자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그래서 당국이 먼저 공공임대주택 분야에 주거복지 차원에서 시니어 코하우징을 도입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둘째로는 코하우징 주택에서는 타인에 대해 배려하고 자기 일은 스스로 한다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남과 함께 살다보면 마음이 상하거나 의견이 갈라질 때가 적지 않은데 양보하고 배려하는 자세가 필수적이다. 왕년 자랑, 자식 자랑 등에 앞세워 상대를 이기려는 자세로는 이웃과 친구가 되기는 어렵다. 전문가들은 “나이 들어도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사람이 시니어 코하우징에 적합하다”며 “조금 불편하다고 세상과 어울리지 않으려 하면 고립 생활에 빠지게 된다”고 경계한다. 일본에서 고독사 예방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한 유품정리회사 사장은 “고립된 독거노인들이 사회로 복귀하는 방법은 간단하다”며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친구나 친척에게 전화하고 매일 2명 이상과 인사를 나누라”고 권한다.○‘어디서 살까’에 정답은 없다. 3회에 걸쳐 최근 부상하는 미국과 유럽의 노후 주거형태로 1)미국 플로리다의 더 빌리지, 2)보스턴 비컨힐 마을 모델에 이어 3)북유럽발 코하우징을 살펴봤다. 한국 곳곳에 들어선 실버타운들은 개인 영역과 공용 영역을 모두 가졌다는 점에서 코하우징과 유사한 면이 적지 않다. 물론 다른 점도 많아 보인다. 다음 회에는 한국의 실버타운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알립니다100세 카페에서는 ‘이런 인생 2막(가제)’ 제하에 멋진 인생 2막을 만들었거나 준비하는 독자 사례를 소개하는 코너를 만들고자 합니다. 살아온 길과 경력은 제각각이지만 나름의 보람을 갖고 열심히 사시는 분, 멋진 노후라고 박수 받을만한 분, 다른 분들의 노후 설계에 참고가 되거나 공유하고 싶은 분들의 사연을 소개해주십시오. 자천타천 모두 좋습니다. 이메일: 100cafe@donga.com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집은 부동산으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그 공간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체취와 땀, 기억이 배어있다. 주변 환경과 교통, 이웃 등도 집을 구성하는 요소다. 고령자들이 끝까지 살아갈 곳으로 ‘내 집’을 꼽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늙었다고 이사 가야 하나? 지난 100세 카페에서 소개했던 미국 플로리다 주의 ‘더 빌리지’는 특정 지역 내에서 그들만의 노년을 즐기며 사는 대규모 은퇴자공동체다. 반면 미국에는 또 다른 ‘마을’의 모델도 있다. 미국 보스턴에서 태동한 ‘비컨힐 마을(Beacon Hill Village)’ 모델이 그것이다. 진짜 ‘마을’이 아니고 2000년대부터 미국 베이비 부머들이 만들어가는 도심 속 느슨한 공동체다. 이들은 자신이 살던 집에서 이웃들과 교류하며 나이 들어가는 것을 즐긴다. 플로리다의 더 빌리지가 과거의 삶은 모두 정리하고 빌리지 안의 주택을 구입해 노후 생활로 통째로 옮겨가는 방식이라면 비컨힐 방식은 이사를 하지 않는다. 비영리단체 ‘비컨힐 마을’ 홈페이지에는 창립 회원 수잔 맥위니 모스가 쓴 글이 있다. ‘이웃 주민들이 모여 머리를 맞댔다. 늙어서 자립 생활을 하든 요양 생활을 하든 골프장이 딸린 은퇴자공동체에 들어가든 양로원에 가든, 무조건 이사를 해야 한다. 왜 안전을 위한답시고 뿌리가 뽑혀 정든 마을을 떠나야 하는가. 왜 내 삶의 역사와 친구와 정체성을 잃어야 하는가. 왜 꼭 필요하기도 전에 생활 방식을 절충해서 미리 설계해놓은 공동체에 맞춰야 하는가. 왜 일하랴 아이 키우랴 정신없이 사는 자식에게 나까지 떠맡아 달라고 부탁해야 하는가. 경제적인 문제는 또 어떤가. 이주는 여유가 있는 우리 같은 소규모 집단이나 이용할 수 있는 선택지다. 따뜻한 기후와 폐쇄적인 공동체가 어떤 이들에게는 훌륭한 선택이 될지라도 우리에겐 혹할 만한 선택지가 아니다….’ ○‘비컨힐 마을’ 이 던진 ‘에이징 인 플레이스’ 운동 비컨힐은 보스턴의 유서 깊은 부유층 거주지로 2.6㎢ 면적에 인구 1만 명이 산다. 이곳에서 2001년 ‘비컨힐 마을’이 출발했다. 처음에는 이곳에 사는 은퇴자 10여 명이 만나 허황된 꿈을 꾸는 모임이었다. 하버드대 동창생들을 주축으로 친구, 친구의 이웃 등이 모였다. 기업가, 건축가, 기업체 간부, 사회복지사, 예술가 등 경력은 다양했지만 생각이 같았다. 더 나이를 먹더라도 은퇴자 공동체나 노인전용 요양 시설에 들어가지 않고 자기 집에 머물면서 정든 친구들과 교류하고 단골 레스토랑에서 먹고 싶은 음식 먹고 좋아하는 지역문화 행사를 즐기며 힘닿는 데까지 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이들은 각자 가까운 사람이 늙어가면서 겪던 고충을 이미 본 바 있었다. 어떤 어머니는 은퇴자 공동체에서 외롭고 버림받은 기분으로 살았다. 어떤 부모님은 양로원에서 약에 절어 지내며 자신을 하찮게 여겼다. 그런 노후를 맞고 싶지 않았다.○이웃의 소소한 도움으로 노년의 고충 해결 비컨힐 마을 회원은 늙어서 겪는 소소한 불편을 서로 돕자는 데 합의했다. 과거라면 가족이 해오던 일을 이웃들을 통해 해결하자는 것이다. 비영리 단체를 만들고 사무직원을 고용했다. 2002년부터는 일반 회원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고 연회비(소득과 가입 형태에 따라 110~675달러)를 받았다. 사업이 확장되면서 지역 내 판매업자, 공급업자, 도급업자와 협력 관계를 맺었다. 회원들은 큰일을 할 때 필요한 일손을 찾도록 서로 돕는다. 회원과 젊은이로 구성한 자원봉사자들에게 장보기나 가정 방문, 반려 동물 돌보기, 가벼운 집안일, 간단한 수리 등을 부탁할 수 있다. 건강이나 간병 등 더 큰 문제나 재정 문제 등에 대해서는 믿을 만한 서비스 제공자를 추려 목록으로 작성해준다. 특정 심사를 거친 운전사도 주선해주는데, 차에 타거나 내리는 동안 특별한 배려가 필요한 노인이 이용할 때 더 도움이 된다. 장을 본다면 가게에 데려다주고 수술을 받으면 병원으로 와서 태우고 집까지 데려다준다. 일단 비컨힐 마을이 추천한 사람이라 신뢰할 수 있다. 뭐니 뭐니 해도 회원들은 비컨힐 마을 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재미’를 꼽는다. 유대관계가 확산되면서 회원들의 친목 활동 일정표가 빽빽해졌다. 월요일엔 영화 모임, 화요일엔 레스토랑 모임, 수요일에 박물관 관람 모임, 목요일엔 독서클럽 등…. 모임은 갈래 모임을 낳고, 이들은 함께 여행을 다니고 경조사를 나눈다.○“생판 모르는 이웃이 내 식사를 챙겨줬다” 비컨힐 마을의 확산과 더불어 타인에게 선행을 베푸는 자원봉사와 상부상조 정신도 미국에서 퍼져 나가고 있다. 비컨힐 마을에서는 상대적으로 젊고 건강한 회원이 80, 90대 노인을 돕는 것을 당연시한다. 이런 도움은 몹시 고된 노동도, 늘 있는 일도 아니다. 돕는 측에서는 부담 없고 기분 좋은 정도지만 도움 받는 처지에서는 큰 힘이 되곤 한다. 길게 보면 지금 돕는 측에 서 있는 노인들도 더 나이가 들면 젊은 노인들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떤 회원은 자원봉사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가입했지만 가입 직후 갑작스레 배우자가 심장 수술을 받으면서 처지가 바뀌었다. 남을 돕는 게 아니라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퇴원 뒤 단체는 검증받은 가정간호기관 추천 명단을 보내줬다. 또 그가 외출해야 하거나 전문 간병인이 오지 못할 경우 자원봉사자를 한 명 보내 환자 곁을 지키게 했다. 요리를 할 수 없을 때는 회원들이 번갈아가며 음식을 갖다 줬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우리 먹으라고 저녁을 챙겨준 거죠.” 선행은 선 순환되기 마련이다.○미국 전역에 300개 넘는 풀뿌리 ‘빌리지’ 생겨나 조지프 코글린 미 매사추세츠공대(MIT) 에이징랩 소장은 ‘장수경제학’을 다룬 저서 ‘노인을 위한 시장은 없다(The Longevity Economy)’에서 비컨힐 모델에 대해 ‘구성원이 다른 연령 집단과 여전히 소통하고 이기적으로 살지 않는 곳’이라며 ‘노인의 행복과 부양을 증진하는 가장 급진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기대한다. 그는 수십 년간 고령자 관련 최전선에서 연구해왔지만 비컨힐 마을 얘기는 주목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에이징랩에 탐방 온 영국 독일 중국의 단체들이 모두 비컨힐 마을을 언급했다. 본격적으로 내용을 알아본 뒤 그는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 바로 인근에서 이런 움직임이 있다는 걸 전혀 몰랐다고 놀라워했다. 공동체가 일상 속에서 서로 돕는 활동은 조용하고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이다. 보스턴글로브 4월 26일자에 따르면 비컨힐 빌리지 개념은 미국 전역에 퍼져나가 300개가 넘는 유사한 마을이 생겨났고, 해외에서도 7개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보스턴을 ‘노화의 실리콘밸리’라고 부르자는 주장도 나온다고 한다. 미국 내 전국 조직인 ‘빌리지 투 빌리지 네트워크’가 구성됐고,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노인 주거의 연령 통합 실험 미국은퇴자협회(AARP)에 따르면 2018년 현재 50세 이상 미국인의 76%가 나이가 들어도 자신의 집, 혹은 적어도 자신이 살던 지역사회에 머물고 싶다고 답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살던 집에서 늙어갈 수 있을 거라고 답한 사람은 59%였다. 다른 나라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런 중에도 고령자의 주거를 둘러싼 세대 통합 실험은 세계 각지에서 진행되고 있다. 독일과 스위스에는 ‘도움의 집’이라는 제도가 있다. 까다로운 심사를 통해 뽑힌 학생이 노인의 집에서 함께 살며 사소한 집안일을 도와주면 집세 보조금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영국에서는 ‘주택공유’ 형태로 비슷한 제도가 있다. 독일에서는 양로원에서 살고 싶지 않은 노인이 공유 공동주택을 짓는다면 1만 유로(약 1345만 원)까지 보조금을 지급한다. 세입자에게도 매달 200유로까지 보조금을 지급한다. 수년전부터 ‘내 집에서 최후까지’ 캠페인을 벌이는 일본에서는 고령자들의 주택 리모델링을 돕는다. 휠체어가 다닐 수 있게 문턱을 없애고 바닥을 평평하게 하고 여기저기 손잡이를 달고 바닥에는 미끄럼 방지 대책을 세우는 등의 공사가 권장된다. 지자체들이 20만 엔(약 200만 원) 한도까지 보조금도 지원해준다.○노인, 어디서 살아야 하나고령자가 한 집에서 오래오래 살아간다는 개념은 한국에서는 다른 이유로 불가능하다고 지적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최근 집값 급등으로 한 집에서 수십 년 살아온 노인들이 과도한 세금 때문에 이사를 강요당하고 있다는 지적이 적잖다. 과세 기준이 되는 공시가격이 올랐다는 이유로 재산세 종합부동산세 건강보험료까지 세금 폭탄을 맞게 되는 현실인데, 팔려고 하면 양도세의 장기보유특별공제도 깎인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보스턴에도 비슷한 고민이 있다. 비컨힐 마을에서는 보스턴을 노인친화적인 지역으로 만들기 위해 지역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예컨대 이 단체 간부가 보스턴글로브 오피니언면에 실은 기고문을 보면 “많은 주민이 보스턴의 비싼 주거비와 세금 때문에 오랜 집과 지역사회에서 늙어가는 게 어렵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한다. 기고에 따르면 2019년 보스턴 주택의 중간 값은 69만 달러(약 7억8400만 원)이고 재산세도 전국 평균보다 높다. 이 지역 노인 63%가 지원 없이는 생활비를 감당할 소득이 충분하지 않은 반면 자산을 기반으로 매기는 지원 자격에는 미치지 못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다. 기고문은 보스턴 시 당국이 노인들이 자신의 집과 지역사회에 머물 수 있도록 돕는 정책을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한국에도 내 집에서 최후까지 지내고 싶다는 수요 많아보건복지부가 7일 발표한 ‘2020년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한국 노인의 79.8%가 ‘내 집’에서 살고 있었다. 아파트가 48.4%로 가장 많고, 단독주택 35.3%, 연립·다세대주택 15.1% 순이다. 78.2%가 독거나 부부만인 노인 단독가구였다. 응답자 대다수(83.8%)가 건강할 때까지는 현재 집에서 거주하기를 원했고, 56.5%는 거동이 불편해져도 재가 서비스를 받으며 현재 집에서 계속 살기를 희망했다. 31.3%는 노인을 위한 요양시설 등을 이용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다. 가족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한 마음에서일 것이다. 이 조사에서는 많은 부분에서 한국의 고령자가 급격히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12년 전 조사 결과와 비교해 확연하게 고령자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수입이 늘었으며 현실 감각이 강하고 자립심이 커졌다. 한국에서도 비컨힐 마을 모델을 시도해볼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보이는 이유다. 노년의 주거 자립은 자발성이 우선이지만 사회나 국가가 이를 지원해줄 방안에 대해서도 연구가 필요하다.※알립니다100세 카페에서는 ‘이런 인생 2막(가제)’ 제하에 멋진 인생 2막을 만들었거나 준비하는 독자 사례를 소개하는 코너를 만들고자 합니다. 살아온 길과 경력은 제각각이지만 나름의 보람을 갖고 열심히 사시는 분, 멋진 노후라고 박수 받을만한 분, 다른 분들의 노후 설계에 참고가 되거나 공유하고 싶은 분들의 사연을 소개해주십시오. 자천타천 모두 좋습니다. 이메일: 100cafe@donga.com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지(知)의 거장’이라 불리던 일본 작가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가 향년 81세로 세상을 떴다. 그의 영향을 받은 동시대인으로서 조의를 표한다. 누군가의 부고를 접할 때마다 ‘노인 한 사람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아프리카 속담을 떠올리곤 한다. 부고 몇 글자로 요약될 수 없는 그 삶의 무게를 생각해보며, 육신의 소멸과 더불어 그 ‘노인’이 알고 사랑하고 체험했던 그 모든 기억과 네트워크가 사라져버렸다는 게 아쉽게만 느껴진다. 다치바나의 경우 특히나 규모가 큰 도서관이 사라진 것일 수 있겠지만, 그가 생전에 100권이 넘는 저서를 통해 수많은 생각들을 기탄없이 세상과 공유했다는 점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 다치바나는 2008년 릿쿄대에서 ‘자기역사(自分史) 쓰기’라는 강좌를 운영한 적이 있다. 인생 2막을 준비하는 50대 이상 시니어 세대를 대상으로 한 강좌였는데, 40여 명의 수강생이 그의 지도하에 한 학기 만에 자기역사를 써냈다고 한다. 그는 저서 ‘자기역사를 쓴다는 것’에서 “사람은 60세 정도 되면 자기역사를 쓰고 싶어 하더라”며 시니어 세대는 반드시 인생을 되돌아보고 기록하라고 권한다. 100세 시대에 인생 2막 무대를 디자인하기 위해서도 1막을 되돌아보고 ‘내 인생은 뭐였던가’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 시작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개인의 삶을 기록하는 일이다. 아사히신문사는 2014년부터 평범한 개인의 자기역사 출판을 돕는 사업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한 가이드북이 자료편과 노트편 한 세트로 나와 있다. 자료편은 1926년부터 1년에 한 쪽씩 그해의 주요 뉴스와 트렌드, 유행을 빼곡히 정리해놓아 개인 필자의 기억을 돕는다. 예컨대 해방되던 날, 혹은 성수대교가 무너진 날을 적시해주면 그날 자신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훨씬 잘 기억할 수 있다. 노트편에는 이렇게 자신의 자취를 더듬어 연표를 만들고 시기별, 주제별로 기록하게 했다. 이를 토대로 자기 역사 쓰기 작업이 시작된다. 아무도 읽지 않을 수 있는데, 개인 역사를 굳이 왜 쓰는가. 우선은 본인을 위해, 나아가 가족과 사회를 위해서다. 개인에게는 ‘내가 살았다’는 기록을 남긴다는 의미, 가족에게는 고인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을 덜어주는 일이 된다. 어지러운 역사 속에서 20세기를 거쳐 21세기를 살아낸 분들의 기록은 그 자체가 무명인들의 ‘민중사’이기도 하다. 손때 묻은 장서 10만 권이 그득한 빌딩을 남긴 다치바나의 삶은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는 철학과 통한다. 막대한 기록의 소장가답게, 그는 2000년대 초반 일본에서 미니멀 라이프 열풍을 일으킨 책 ‘버리는 기술’(국내에도 소개됐다)에 대해 혹독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당장 필요하지 않으면 버린다’는 식 접근이 개인과 사회의 잠재력, 즉 발전 가능성을 스스로 잘라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불필요한 것과 잉여, 비축 속에서 새로운 것이 창조되고 문화와 역사가 꽃피는 법인데, ‘버리기’만 강조하면 ‘소비’라는 눈앞의 쾌락에만 의존하게 된다는 얘기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오래된 것은 내치고 새것만을 추앙하는 풍조가 두드러진다. 동료들을 잘라내야 남은 자들이 배를 불리는 냉혈자본주의적 사고도 만연하다. 이럴 때일수록 자신이 걸어온 길을 긍정하고 남기는 과정이 필요하다. 인류가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던 힘은 기록과 축적에서 나왔다. 평범한 우리 모두가 각자 도서관 하나씩이다.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sya@donga.com}
《1일 오후 서울 중구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열린 제31회 삼성호암상 시상식. 사회봉사상 수상자로 이석로 방글라데시 코람톨라 병원장(57)이 호명되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 이정순 여사(85)가 막내아들의 부축으로 시상대에 올랐다. 실시간 영상을 통해 그는 “봉사란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삶의 본질”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사회자가 어머니께 한 말씀 하라고 권하자 이 원장은 “어머니 죄송합니다”를 몇 번이나 반복하다가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이런 그를 15일 ‘줌’ 영상으로 인터뷰했다.》 “딱 3년 만.” 1994년 18개월 된 아들과 부인을 대동하고 방글라데시 다카 공항에 도착한 청년의사 이석로의 이 약속은, 2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켜지지 못했다.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그해, 방글라데시 파견 의사 모집에 지원했다. 153cm 신장 때문에 병역면제를 받았으니 군대 기간만큼 봉사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벌여놓은 일들이 눈에 밟혀 ‘2년만 더, 3년만 더’ 하다가 지금에 이르렀다. 약사인 부인도 현지 일을 적극 도와줬고, 아들딸이 더 태어났다. 현재 딸은 성균관대를 나와 방글라데시에서 수학교사로 일한다. 큰아들은 미국 휴스턴대에서 박사 과정 중이고 막내아들은 연세대 재학 중 입대했다. ―열악한 교육환경인데 자제분들이 잘 컸다. 한국 학부모들이 부러워할 듯하다. “어려서부터 ‘보다시피 너희를 제대로 지원해줄 수 없는 형편이다. 스스로 알아서 공부하라’고 했어요. 각자 하고 싶은 전공을 찾아 즐겁게 공부하고 있으니 고맙죠. 딸은 맡은 일에 긍지를 느끼는 것 같아요.” 코람톨라병원은 방글라데시 수도인 다카에서 자동차로 1시간 반 걸리는 농촌에 있다. 1992년 7개 기독교병원연합단체인 한국의료해외선교회(KOMMS)가 설립했다. 의료보험조차 없어 질병에 무방비 상태인 현지인들에게 저렴하게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가 2000년대에 콤스에 보낸 ‘방글라데시에서 생긴 일’이란 보고서가 있다. 그중 한 에피소드에는 ‘위가 천공됐으니 수술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무시하고 돌아가려 하는 앙상한 아저씨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수술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의사의 말에 그는 “내가 수술하면 우리 식구는 다 죽게 된다”며 “내가 죽는 게 낫다”고 했다. 그는 이 에피소드를 ‘어린이 용돈도 안 되는 1만 원이 없어 죽음을 선택하는 곳이 방글라데시’라고 맺었다. 결국 이 환자는 수중에 가진 돈만을 내고 수술을 받아 무사했다고 한다. 이석로 원장은 이런 환경을 떨치고 돌아오지를 못했다. 가정의학 전문의인 그는 처음 몇 년간 약 처방과 간단한 처치 위주의 진료를 했지만 외과수술 수요를 외면할 수 없었다. 콤스에 “제 급여를 절반으로 나눠 외과의 한 명을 충원해달라”고 요청했다. 그에게 연 4만 달러가 지원됐는데 2만 달러로 낮춰 2명에게 달라고 한 것. 한국에서 외과의가 파견돼 수술실이 활기를 띠게 됐다. 코로나19 이전까지는 매년 전남대병원 등과 연계해 구개구순열(일명 언청이)과 선천성 기형수술을 해주는 의료봉사도 활발히 벌였다. ‘가성비 좋은 병원’으로 소문나 코로나 직전에는 하루 300여 명, 연간 8만 명을 진료했다. 의사 15명, 직원 120명이 연간 백내장 수술 1600건, 외과수술 1000여 건씩을 해냈다. 이 원장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자립’이다. 병원이 외부 지원 없이 자립할 수 있도록 체계를 갖추려 애썼다. 처음 부임했을 때만 해도 진료비는 다른 병원의 10분의 1 수준이었는데 엑스레이 장비 하나 없었다. 엑스레이와 초음파 기기 등을 하나둘 도입하고 유료 진료 비중을 늘렸다. 그래도 진료비는 다른 병원의 3분의 1 수준이다. “일방적인 도움은 오히려 독이 된다는 걸 이곳에서 배웠다. 자립하려면 최소한의 자존감을 위한 무엇인가가 필요한데, 우리가 돕는 것은 그 부분이다.” 예컨대 그는 가난해서 학업을 포기하는 청년들을 돕기 위해 장학사업을 벌이고 있는데, 장학금은 49%만 지원한다. 절반 이상은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지금은 도움을 받지만 언젠가는 너도 돕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남을 돕는 일은 직접 하는 게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고 하셨다. “요즘 선진국일수록 국가가 빈자를 돕고 사람들은 ‘정부가 해줄 것’이라며 발을 빼는 분위기다. 이러면 다들 외로워진다. 사람들은 남을 돕는 일에서 마음이 떠나고 받는 사람도 고마움을 모른다. 가능하면 국가가 하는 일을 줄이고 공동체가 돕는 일을 늘려야 사회가 더 따뜻해지고 실질적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이 원장은 선한 의지의 선순환을 꿈꾼다. “제가 이곳에서 일할 수 있게 해주는 콤스의 기금은 7개 기독교병원 직원 일부가 월급의 0.5∼1%를 떼어내 모은 돈이다. 이 병원들은 어렵던 시절 미국 선교단체의 지원을 받았다. 이제 우리가 이곳에 도움을 주고 발전시키면 이들은 더 어려운 곳을 돕게 될 것이다.” 그는 2019년 보령상(상금 5000만 원)과 아산상(3억 원) 등 상금이 따라오는 상을 연달아 받았다. 이때 그가 밝힌 솔직한 소감이 재미있다. “돈이 정말 필요했다. 수술환자를 옮길 엘리베이터가 없어 장정 네 사람이 환자 침대를 들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수술이 몰리면 침대가 없어 환자를 바닥에 눕혀야 하는 상황이다.”(보령상 수상 소감) ―그래서 엘리베이터는 만들었나. 호암상 상금 3억 원은 어디 쓸 예정인가. “첫 상금은 폐수처리장 지을 돈 7000만 원이 필요해 그리로 돌렸다. 그 뒤 늘어나는 환자를 감당하기 위해 건물 증축에 들어갔다. 2층 위에 5층으로 올릴 계획인데 뼈대만 잡아놓고 천천히 진행할 계획이다. 제일 먼저 엘리베이터를 넣으려 한다.” ―코람톨라병원은 수상 전까지는 한국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널리 후원을 요청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립할 태세를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관심을 받게 되면 오히려 병원을 망칠 수 있다고 봤다. 용돈 1만 원 받던 사람에게 2만 원 주면 좋아하겠지만 100만 원 안겨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데 이번에 거액의 상금이 들어왔을 때 우리 직원들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 이제 100만 원 관리할 수준이 됐구나…. 병원을 더 키워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병원을 확장하고 간호대학과 보건대학을 만들겠다는 장기 계획을 세웠다.” 그는 3년마다 “아직도 내가 이곳에 필요한가”를 자문해왔다. 그런데 이번엔 이런 일을 다 하려면 10년은 더 일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여기서 잃어버린 나를 발견하고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나는 내가 봉사하는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과 내가 서로 도우며 함께 성장해간다고 믿는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어머니일 듯하다. “정말 그렇다. 부모님은 닥치는 대로 일하며 5남매를 길러주셨다. 그간 별 반대를 않으셨는데 3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부쩍 ‘빨리 돌아오라’고 말씀하신다.”이석로 원장 프로필▽1964년: 광주 출생▽1989년: 전남대 의대 학사▽1994년: 광주기독병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수료▽1994∼1997년:방글라데시 코람톨라병원 과장▽1997년∼현재:방글라데시 코람톨라병원 원장▽2007년:제2회 해외봉사상 대통령표창▽2019년:제35회 보령의료봉사상 대상, 제31회 아산상 대상 수상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은퇴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노후에 어디서 살 것인지는 큰 화두다. 사는 곳에 따라 고령자의 삶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어디에서 삶의 질을 유지하고 보다 행복한 삶을 모색하며 늙어갈 것인가. 정답은 없다. 경제적 여건과 건강, 사고방식에 따라 선택은 달라진다. 누군가의 돌봄이나 간병을 필요로 하는 상황까지 검토할 필요도 있다. 요즘은 지구촌 전체가 늙어가는 시대다. 고령자들이 사는 곳에 대한 연구와 실험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다. 조지프 코글린 미국 MIT(매사추세츠공대) 에이징랩 소장은 ‘장수경제학’을 다룬 저서 ‘노인을 위한 시장은 없다(the Longevity Economy·부키)’에서 두 가지 유형의 노인 주거를 비교했다. 1980년대 시작돼 미국에서 폭풍 성장 중인 플로리다 주의 은퇴 공동체 ‘더 빌리지(the Villages)’와 2000년대 이후 미국 베이비 부머 중심으로 자신이 살던 집에서 나이 들어가며 느슨한 ‘마을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움직임이 그것이다. 우선 은퇴 공동체 ‘더 빌리지’부터 알아보자. ○지구상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은퇴자 공동체 햇살 가득한 미국 플로리다 주 중부 83㎢(약 2510만 평)에 조성된 ‘더 빌리지’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은퇴자 공동체다. 골프 코스와 어우러져 들어선 지역 내 주택들은 55세 이상(부부 중 1명)에게만 분양하고 19세 이하는 연간 30일까지만 방문을 허용한다. 말 그대로 노인전용 마을이다. 공공시설은 마치 디즈니랜드를 옮겨놓은 듯 아름답다. 주민들은 골프뿐 아니라 테니스와 수영과 낚시, 스쿼시 등 갖가지 스포츠를 즐긴다. 은퇴자들이 활기를 누리며 인생을 만끽하는 곳이라는 입소문이 퍼지며 미국에서 가장 빠른 인구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2018년 발표된 미국 인구조사 결과 이곳 인구는 2010년 9만4279명에서 2017년 12만5165명으로 32.8%가 늘었다. 더 빌리지의 아이디어는 1960년 애리조나 주에 건설한 최초의 은퇴자 공동체 ‘더 선 시티(the Sun City)’에서 얻어왔다. 세계 최초로 종합개발계획으로 건설된 선 시티는 가까운 도시와 몇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건설된 고립된 도시였지만 아름답고 주민이 3만 명 이상 모여든 덕분에 자립 운영이 가능했다.○미국에서 가장 빠른 인구 증가율 1960년대에 플로리다 주의 값싼 땅을 떠안게 된 부동산업자 헤럴드 슈바르츠는 73세가 된 1983년 ‘선 시티’를 둘러보고 온 뒤 돌파구를 찾아냈다. 플로리다식 선 시티를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유인책은 ‘무료 골프(free golf)’라는 단 두 단어. 조경사에게 인근 수박밭을 엎어 잔디를 심고 물웅덩이와 모래구덩이를 몇 군데 파게 했다. 그리곤 땅에 조그만 구멍 9개 내고 깃대를 꽂았다. ‘더 빌리지’의 초기를 회고하는 글에 따르면 1992년만 해도 ‘더 빌리지’는 8000명의 거주자와 3개의 골프코스, 슈퍼마켓 1개와 레스토랑 4개를 갖춘 곳이었는데 매일 밤 댄스파티가 벌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9홀 코스 40개가 주민에게 무료 개방돼 있고, 18홀과 27홀 코스 12개는 이용료를 할인받을 수 있다. 빌리지에서는 구불구불 뻗어나간 마을 어디서나 골프 카트가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더 빌리지 내에서만 5만여 대의 골프 카트가 돌아다닌다. 한 번은 온 동네 골프 카트를 동원해 행진을 벌여 기네스북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저속으로 달리는 골프 카트는 노인들의 교통 문제를 톡톡히 해결해줬다. 더 이상 자동차 운전면허 갱신이 어려워진 노인들도 골프 카트로 자립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골프가 아니어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레저 시설이 많다. 매주 2000개 이상의 주중 활동이 주민을 대상으로 열리며 레크리에이션 부서가 정성을 다해 운영한다. 밤에는 파티를 여는 집들로 떠들썩하고 술집과 클럽 풍경은 마치 대학촌 같다. 포도주가 맥주처럼 흘러넘치고 맥주는 물처럼 콸콸 쏟아졌다. 몇몇 레스토랑은 땅 밑에 수송관을 심어 지역 양조장과 연결돼 있다.○고령자, 정체성 고민을 잊어라 사회 관습상 나이를 기준으로 은퇴가 이뤄지는 현대 사회에서 고령자를 괴롭혀온 것은 정체성 문제다. 일을 안 하면 나는 누구인가, 내가 누군지 모르는데 뭘 할 수 있을까라는 무력감에 빠지기 쉬웠다. 은퇴라는 개념이 도입된 초기에는 ‘황금빛 노후’라는 말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수명이 늘고 기술이 진보하고 가족 구성원들은 뿔뿔이 흩어지는 상황이다. 고령자는 어느 날 갑자기 은퇴할 나이가 오면 미지의 신세계와 조우해야 한다. 은퇴 공동체는 이럴 때 ‘이런 삶도 있다’며 마음속에 숨겨둔 대안과 같다. 늙어서 어디서 뭘 하며 지낼 것인가라는 고민에 답안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은퇴자 마을의 공통점은 대부분 연금으로 생활하는 사람들로 동질감이 형성되며 다른 세대에 대해 배타적이라는 것이다. 12만 명이 넘는 더 빌리지의 주민 중 98%가 백인 노인이기도 하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안전한 성(城) 안에서 늙음을 비하하는 문화로부터 모욕감을 피하며 위안을 얻는다.○잠시도 외로울 틈 없는 활기찬 노후 생활 더 빌리지에서는 항상 즐거운 일을 만들어내고 일정표가 가득 차 있다. 예컨대 이렇다. 섣달 그믐날 오후 대장격인 리 씨가 새해 전야를 멋지게 보낼 계획을 짜느라 분주하다. “우린 여러 집에 들를 거예요. 뭔가를 꼭 들고 가야 해요. 첫 번째 집에서는 집주인이 와인을 제공할 겁니다. 우리는 와인 잔만 들고 가지요. 그 집을 나와 다음 집에 가선 간단한 요리를 집어 먹고요, 다시 우르르 다음 집으로 건너가 커피와 후식을 먹고, 마지막 집에 가서 샴페인을 들어요. 이웃을 외롭게 혼자 내버려두는 일은 없어요. 모두 밖으로 나와서 걸으며 함성을 질러요. 골프 카트를 몰고 싶은 사람은 몰고….” 주민들은 매일 이웃과 어울리며 자신의 자리가 어디쯤인지, 주어진 하루하루 무엇을 할지 알게 된다고 한다. 은퇴 후 낯선 삶의 단계와 맞닥뜨린 세대에게 이런 생활이 발휘하는 설득력은 대단하다. 은퇴자는 이곳으로 쑥 빨려 들어간다. 빌리지에 부모가 이주한 뒤 40대 자녀 부부가 정문 바로 앞에 집을 구하고 입주할 시기를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이 부부는 막 10살이 된 막내딸이 빌리지 안에서 생활할 수 있는 19세가 되기를 기다린다고 한다. ○집 한 채에 연금이면 걱정 없는 생활 이 곳에선 다양한 활동이 제공되면서도 생각보다 생활비가 싸다는 게 매력을 더한다. 빌리지 회원이 되려면 55세 이상(부부 중 1명)인 사람이 빌리지 내에 단독 주택을 구입하고 월 164달러의 시설이용료를 내면 된다. 시설 이용료를 내면 골프부터 헬스클럽, 수영장, 낚시장 등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더 빌리지 홈페이지를 보면 생활비로 시설이용료 164달러를 포함해 세금과 보험료, 수도전기료 등 월 1000달러 정도 예상하면 된다고 설명한다. 실제 생활비는 여기에 식비와 의복비가 추가돼야 한다. 집은 대부분 30평대의 방 2~3개짜리에 마당이 딸린 단층 주택들로 거실, 부엌, 차고를 갖췄다. 부동산 사이트에서 보면 우리 돈으로 1억 원대부터 8억 원대 까지 다양하다. 지역 내 멋진 레스토랑이 많은데 할인 시간대에는 맥주가 탄산음료보다 쌀 정도로 물가가 낮다고 한다. 주민들이 “집 한 채만 있으면 연금만으로 살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이유다. ○‘평생 수고한 은퇴자가 백만장자처럼 여생 즐기는 공간’ 빌리지 개발자는 이 곳에 일종의 이상을 담았다고 말한다. 직업을 갖고 열심히 일한 사람, 퇴직연금과 사회보장연금을 타는 사람들이 집 한 채만 있으면 백만장자처럼 여보란 듯 사는 공간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급진적이라 해도 될 만큼 ‘평등’이란 개념이 중시된다. 이들은 자동차보다 골프 카트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고, 집도 엇비슷하다. 환한 도로와 카트 길도, 편의 시설도 함께 누린다. 과시적 소비를 할 필요도 없다. 명품 같은 건 모두 나눠쓴다. 주민들은 수준과 교양을 갖춘 사람들이고 친절하고 행복해 보인다. 과거에 뭘 했느냐고 아무도 묻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한국이라면 절대 불가능할 듯하다). 평등이란 측면에서 보면 더 빌리지는 왕가 자제와 서민 자녀가 함께 생활하는 대학기숙사 같은 느낌이라고 한다. 여기 사는 한 퇴역 장군은 “과거에 뭘 했는지 아무도 개의치 않는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면 평생 자신의 직책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려던 욕구도 사라진다”고 했다. 과거의 자신이 아니라 현재의 자신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노인이란 인색하고 이기적인 존재’ 인식 줄 우려 빌리지의 삶의 방식은 엄청난 매력이 있고, 그곳에 사는 노인이 행복한 것도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빌리지가 성장할수록 비판도 적지 않다. 우선 빌리지가 다른 세대나 사회와 유리된 세상이라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이다. 선 시티나 빌리지는 젊은이와 아이들을 경계하고 때에 따라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은퇴 노인들이 세금이나 지역사회 공헌과 거리가 멀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은퇴 공동체에는 아이들이 거의 없다 보니 교육에 대한 투자도 관심이 없다. 실제로 1960년 만들어진 애리조나 주 선 시티 주민들이 1962년부터 수십 년간 17개 학교채권 의안(議案)을 부결시켰고 그 결과 예산 부족으로 지역교육청은 2부제로 학생을 교육해야 했다고 한다. 결국 “노인들은 차세대 교육에는 관심 없고 현역 세대가 부담하는 근로소득세 덕에 연금을 받아 펑펑 쓰며 인생을 즐기는 이기적 존재들”이라는 시선들이 적지 않은 편이다. 코글린 박사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빌리지가 발산하는 메시지가 지나치게 매력적이어서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런 메시지가 세상이 노년의 삶에 대해 이해하는 방식을 뒤틀고 노후에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이들의 사고를 한쪽으로 치우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셀프 부양의 시대 보건복지부가 7일 발표한 ‘2020년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한국 노인의 83.8%가 현재 집에서 계속 거주하기를 원했다. 자기 집에서 최후까지 지내겠다는 바람은 사실 다른 많은 선진국 노인들에게서도 확인되는 공통된 현상이다. 이런 가운데 ‘더 빌리지’처럼 눈에 확 띄지는 않지만 확산세가 두드러진, 또 다른 ‘마을’의 형태가 있다. 자신의 집에서 자식이나 가족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노후를 즐겁게 보내려 하는 또 다른 움직임이다. 다음 회에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행복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