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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24년 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당시 얻은 개발도상국(Developing country) 지위를 포기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7월 26일 “WTO가 중국 등 20여 개국의 개도국 혜택을 90일 이내 철회하지 않으면 미국이 일방적으로 그 대우를 중단하겠다”고 트윗글로 압박했고, 그 시한이 다음 달 23일이다. 미국과 중국의 고래 싸움에 등 터질까 봐 이미 대만과 브라질 싱가포르 아랍에미리트가 개도국 지위를 자진 반납했다. ▷원조를 받다가 원조를 주는 나라, 1인당 국민총소득이 1953년 67달러에서 지난해 3만 달러가 넘어선 나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70여 년간 한국이 유일하다. 워낙 압축성장을 하다 보니 개도국이 아니라는 데 심리적 저항감이 있지만 경제지표로만 보면 선진국이라 봐도 무방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개도국 지위를 철회하는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주요 20개국(G20) 회원, 고소득 국가(세계은행 기준 1인당 국민총소득 1만2056달러 이상) 등 네 가지 기준을 제시했는데 한국은 이 기준에 모두 해당한다. ▷세계 자본주의 역사에서 한국은 독특한 길을 걸어왔다. 3일 세상을 떠난 이매뉴얼 월러스틴 미 예일대 석좌교수는 개별 국가가 아닌 세계를 하나의 단위로 삼아 자본주의 발전 과정을 분석했다. 앞서 근대화를 이룬 중심부 국가들이 주변부 국가를 착취하는 구조인 세계 분업 체제에서 주변부 국가들은 저발전 상태에 고착된다. 예외가 있다. 바로 한국과 대만이다. 월러스틴 교수는 이를 ‘미국의 초청에 의한 발전’이라고 했다. 미국은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국가가 충돌하는 지점에 놓인 두 나라에 막대한 원조를 했고 자유무역질서로 편입시켰다.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도 “한국과 대만의 경제적 성공은 매우 특수한 경험으로 다른 개도국들의 모델이 될 수 없다”며 ‘한강의 기적’이 전파될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다. ▷개도국 지위 포기는 상징적인 선언에 가까워 별도의 절차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농업 부문은 낮은 관세, 높은 보조금을 적용받고 있어 농민들의 반발이 예상된다. 그동안 누리던 특혜를 당장 뺏기는 것은 아니고 새로 협상을 통해 결정한다. WTO 내 다자간 무역협상은 지지부진하고 양자간 자유무역협정(FTA)이 대세라 ‘우리 하기 나름’이라고 정부는 판단하는 모양이다.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세계 무역 질서가 재편되고 있다는 것. WTO 가입으로 고속 성장의 티켓을 끊었듯, 이번 개도국 지위 포기가 농업을 혁신할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어쩌면 일본을 한참 아래로 보며 자란 첫 세대일 터다. 밀레니얼 세대보다 늦게,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 태어난 Z세대 얘기다.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된 1998년 이후 태어난 Z세대는 한국 문화의 저력을 실감하고 있다. 한일 관계가 악화 일로를 걷는 사이에도 방탄소년단의 일본 투어 공연은 21만 명이 관람했고, 싱글 앨범은 돌풍을 일으켰다. 일본 영화 가요 만화 수입을 앞두고 마치 문화 침략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경계했던 시대에는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다. 경제적으로는 한일이 비등비등한 싸움을 벌이는 것을 보며 자랐다.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이라 불리는 장기 불황을 겪는 동안 우리 경제는 승승장구했다. 한국과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격차는 3배로 좁혀졌고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달러로 엇비슷한 수준이다. Z세대는 삼성 스마트폰을 쓰고, 모토로라 휴대전화는 알지 못한다.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며 민족주의 정서가 희박할 것 같은 Z세대가 반일(反日) 감정을 드러내며 불매운동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Z세대 대학생 8명을 인터뷰해 이들이 생각하는 ‘반일’에 대해 들어봤다.○ Z세대 8명에게 물어보니 Z세대는 일본 여행은 물론이거니와 일본인 친구를 사귀거나 함께 공부한 경험이 있었다. 일본과 직접 접촉하면서 역사 교과서 속 일본과 밖 일본이 다르다고 느꼈다고 한다. 통계적으로도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적대감이 낮게 나타났다.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일본인에게 호감이 간다’는 응답이 가장 많은 건 Z세대(51%)였다. ‘호감이 가지 않는다’는 응답(29%)의 1.8배나 됐다. 물론 이웃 국가로서 일본에 대한 호감도는 매우 낮았다. 여느 세대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호감이 가지 않는다’는 비율만 떼어 보면 Z세대(69%)가 가장 낮았다. 배민석 씨(20·한국외국어대)는 “한일 분쟁이 개인 대 개인 간 갈등은 아니지 않으냐”며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하지만 단절되어 살 수 없는 양국 국민이 서로 적대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불매운동은 꾸준히 참여하고 있었다. 같은 조사에서 Z세대 불매운동 참여율은 7월 둘째 주 66%였으나 7월 넷째 주에는 76%로 뛴다.(※한국갤럽은 8월 해당 문항을 조사하지 않았다. 한국리서치 등 다른 여론조사에서는 참여율이 더 높아졌다.) 인터뷰에 응한 8명 모두 일본 여행을 접거나 일본 제품을 사지 않고 있었다. 이병창 씨(25·연세대)는 “불매운동은 소비자의 선택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그는 “외국 여행을 가는 친구가 일본 경유조차 꺼리기에 그 이유를 물었더니 ‘강제징용을 부인하는 일본이 싫어서’라고 하더라”며 “감정적인 반응이든, 이성적인 판단이든 소비자로서 마음이 시켜서 사지 않았다는데 이를 비난할 수 없다”고 했다. 일본 기업이든 한국 기업이든 돈을 쓰면서 마음이 불편해진다면 소비자는 사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반일감정 SNS상에서 증폭됐지만 2000년대 스마트폰 대중화와 함께 자라난 Z세대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연결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다. SNS에서 한일 분쟁에 관한 정보나 불매운동 정보를 얻었고 ‘일본 제품 보이콧’ 같은 푯말을 찍어 올리거나 #(해시태그)를 통해 의견을 드러냈다. 김지원 씨(20·이화여대)는 “SNS를 보면 자주 보고, 관심 있는 주제를 걸러서 보여준다. ‘인권’ ‘대학’과 같은 커뮤니티에서 추천해주는 게시물을 통해 주로 정보를 얻게 된다”고 했다. 반일에 관한 정보를 편식하면서 극단적인 쏠림 현상이 나타나는 건 아닌지 물었다. 이에 대해 김민수 씨(20·연세대)는 “강경론이 SNS상에서 과다 대표되는 경향이 있는 건 맞는 것 같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불매운동에 대한 체감 정도가 다르다”며 “일본 제품을 (한 개도 쓰지않는) 사람을 실제로 마주치는 경우는 드물다”고 했다. 반면 김나연 씨(19·연세대)는 “굳이 일본 제품을 사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방적인 여론 몰이에는 거리를 둔다”며 “‘토착왜구’ 같은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는 프레임도 위험해 보인다. 1920년대 일본이 조선 분열 책략을 썼던 것과 뭐가 다른가”라고 비판했다. ○ “일본, 불공정한 게임 하고 있다” 이들이 불매운동에 나선 배경에는 일본이 먼저 게임의 룰을 깼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최다은 씨(19·부산대)는 “일본은 이번 경제보복 조치에 대해 징용 판결 때문이다, 전략물자를 반출했기 때문이다 등 오락가락하며 일관된 설명을 하지 못했다. 일본의 부당한 조치는 국제무역의 ‘룰’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박재원 씨(20·고려대)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부터 2015년 위안부 합의까지 한일 관계의 불균형이 누적돼서 터진 것 같다”며 “과거 잘못을 부인하는 일본의 태도가 한국인이 인내할 수준을 넘어섰다. 일본이 한국을 동등한 이웃 국가로 대한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반일과 우리 정부의 반일 기조를 지지하는 것은 별개라고 봤다. 배민석 씨는 “합리적인 대안 없이 반일, 혐한 감정을 부추겨서 이익을 보는 사람이 누구인가. 소수 정치인들의 정파적 이익에 이용당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김민수 씨도 “일본 정부의 조치는 시정돼야 하지만 우리 정부가 외교적 노력을 충분히 했는지, 그건 다른 문제”라고 했다. Z세대는 특히 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한 분노가 컸다. 이들은 1991년 김학순 할머니 증언으로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뒤에 태어났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시민운동을 동력 삼아 국제적인 이슈가 된 만큼 그 활동에 다수가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위안부 피해자를 만나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인권동아리에서 위안부 피해자를 돕는 배지를 팔고, 모의유엔총회 등에서 토론하는 식이다. 김나연 씨는 “위안부 피해자는 민족주의 차원이 아닌 보편적인 인권 측면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류의 역사다. 과거에 매여서도 안 되지만 이를 잊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노승현 씨(20·경희대)는 “배상도 사과도 중요하지만 일본이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라고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Z세대가 말하는 진정한 반일은 그렇다면 진정한 반일이란 뭔가. 극일이란 가능한가. 김민수 씨는 “삼성이 소니를 넘어선 것처럼 실력으로 이기는 것이 극일이다. 실리적인, 실용적인 접근이 필요한데 과거 조선처럼 명분에만 집착해선 넘어설 수 없다”고 말했다. 노승현 씨도 “작은 나라인 만큼 경제로 강대국이 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 경제력이 압도적이었다면 독도나 위안부 문제에서 일본에 밀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일본을 배울 때 일본의 실력에 대해 배운 적은 없는 것 같다. 일정 수준 기술 자립도 필요하고 이참에 일본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반면 극일이 국가적인 목표가 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병창 씨는 “일본보다 경제력이 커지고, 일본이 망했으면 하는 게 우리의 목표이라는 게 이상하다”며 “그런 목표를 위해 희생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일본보다 살기 좋은 나라가 되면 자연스럽게 극일이 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 Z세대는 이웃 국가의 부당한 대우에 대해 당당하게 항의했다. 한 달 뒤에는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딸의 입시비리 의혹에도 촛불을 들었다. 정정당당하게 뛴다. 그러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뛰라고 하면 참지 않는다. 그것이 Z세대를 관통하는 가치관으로 보였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제도가 나쁜가요. 악용하는 게 나쁜 거죠.”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딸의 입시 의혹이 불거진 뒤 서울 강남 대치동 입시컨설턴트와 나눈 대화다. 지금이라면 조 후보자의 딸은 제1저자로 오른 의학 논문을, 이정옥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의 딸은 인도 대통령 추천사가 적힌 저서를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에 쓸 수 없다. 이처럼 입시제도를 계속 손질해도 반칙을 시도하는 사람은 있을 것이란 뜻이다. 그는 교육부의 지침을 “하지 말라는 것만 빼고 다 하란 얘기”라고 해석했다. 여전히 아버지가 뭐 하시는지 등 ‘부모 스펙’은 통한다는 것. 부모 재력이나 인맥이 동아리나 진로 활동을 뒷받침하면 쉽게 ‘예비 과학자’ ‘예비 법조인’이 만들어진다. 문재인 대통령은 1일 조 후보자의 딸 입시 의혹과 관련해 “(조 후보자) 가족 논란 차원을 넘어서 대학입시제도 전반에 대해 재검토해 달라”고 했다. 교육부는 부랴부랴 차관 주재로 대입제도 개편 방안 회의를 열었다. 공론화를 통해 대입을 둘러싼 갈등을 얼기설기 봉합한 지 겨우 1년이 지났다. 국가교육위원회가 출범하면 슬쩍 대입 개편을 미룰 참이었는데 대통령 지시가 떨어졌으니 버틸 재간이 없다. ‘벌집 쑤시기’인 입시를 다시 만지려니 교육부로선 이런 날벼락이 없을 게다. 공정하고 단순한 입시. 문 대통령은 대입을 언급할 때마다 일관된 주문을 해 왔다. 이번 지시는 이를 뒤집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입시가 공정하려면 예측 가능해야 한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사교육이 기승을 부리고 ‘부모 스펙’이 빵빵한 아이들의 기회가 늘어난다. 부모의 경제·사회·문화 자본이 배합돼 최적의 결과를 낳은 조 후보자 딸의 입시 과정이 대표적이다. 그가 대학생이 된 2010학년도는 입학사정관제 전형이 갑자기 확대되며 선발 인원이 10배 이상 늘었던 해다. 입시가 어떻게 요동을 치든지 부모 스펙을 갖춘 아이들은 대학에 간다. 정시 비율이 늘든, 수시 비율이 늘든 자신에게 유리한 전형을 찾아낸다. 여의치 않으면 해외 유학을 간다. 교육부의 교수 논문의 중고교생 공저자 실태 조사를 보면 2007년 이후 10년간 교수 102명이 논문 160편에 자신의 자녀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학생부에 논문 기재가 금지된 2014학년도 이후에는 그 수가 급감했다. 반대로 부모 스펙이 없는 아이들은 어느 입시에서든 불리한 게임을 한다. 일반고에선 학종으로 대학 갈 아이 한두 명에게 상이나 성적을 몰아준다. 특목고·자사고생이 아니거나 부모가 챙길 여력이 없는 아이들의 학생부는 텅 비어 있다. 수능 역시 사교육 도움 없이는 고득점이 어렵다. ‘100% 노력’만으로 아이 실력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공정한 입시란 공교육 내실화가 전제돼야 하고, 수년간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예측 가능해야 한다. 2일 사교육업체 주가가 일제히 고공 행진했다. 현 정부 들어 대입제도 개편이 혼선을 빚으면서 고1, 고2, 고3이 각각 다른 입시를 치르게 됐는데 또 바뀐다고 하니 그 불안을 파고든 것이다. 반칙을 한 사람을 퇴장시키면 되는데 경기 규칙을 공정하게 바꾼다고 한다. 앞으로 대입을 치러야 하는 학생, 그들을 키우는 평범한 학부모들은 정말 울고 싶을 따름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원인 미상 폐손상 질환.’ 가습기 살균제의 독성 물질로 인한 폐질환의 첫 진단명이다. 2011년 4월 서울아산병원에 20, 30대 임산부 등 8명이 이 진단명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폐가 딱딱하게 굳는 섬유화 현상이 빠르게 진행돼 급성호흡부전을 겪다가 4명이 사망했다. 도통 원인을 알 수 없던 서울아산병원 호흡기내과 의료진은 신종 감염병을 의심했고 질병관리본부가 역학조사에 나섰다. 이들의 예리한 진단과 정직한 신고가 없었다면 ‘원인 미상’인 억울한 죽음이 계속됐을 것이다. ▷그해 8월 질병관리본부는 가습기 살균제와의 인과관계가 의심된다고 발표했고 11월 살균 효과를 지닌 화학물질의 독성이 잠정 확인됐다. 17년간 가습기 살균제 998만 개가 팔린 뒤였다. 현재 공식적인 피해신고자는 6309명, 전체 사용자의 1% 수준으로 추정된다. 원인은 밝혀졌으나 피해자와 그 가족은 길고 긴 고통의 터널로 들어섰다. 2011년 3월 결혼 9년 만에 어렵게 첫딸을 얻은 정모 씨는 3개월 뒤 아내를 잃었다. 임신으로 배가 불러 숨이 가쁜 줄만 알았지 건강을 위해 가습기 살균제를 꼼꼼히 챙겨 쓴 것이 비극을 낳을 줄이야. 가족을 잃은 슬픔, 내 손으로 가습기를 틀어줬다는 죄책감에 정상적인 삶을 꾸릴 수 없었다. 가습기 사용이 잦은 임산부나 영·유아 피해가 커서 가정이 해체된 경우가 많다. ▷사회적 재난에 대처하는 우리 사회의 실력은 형편없었다. 피부에는 안전한 화학물질이 흡입하면 독성물질이 된다는 것을 몰랐다. 아니, 기업은 알려고 하지 않았다. 기업에서 돈을 받은 교수는 유해성 실험을 버젓이 조작했다. 공산품으로 분류돼 안전성을 검증하는 체계도 미비했다. 그 사실은 되레 정부에 면죄부를 줬다. ‘살균 99.9%’라는 광고를 믿고 구입했던 피해자들은 기업과 정부가 책임을 미루는 상황에서 법적 다툼에도 연이어 패소하며 절망에 빠져들었다.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에 따르면 피해자와 가족들의 66.3%가 지속적인 울분을 경험했고, 27.6%가 자살을 생각했다. ▷8년이 지난 27일 가습기 살균제 참사 청문회. 이 원료를 제조한 SK케미칼 최창원 전 대표이사와 제품을 만든 애경산업 채동석 부회장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처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산소호흡기를 끼고, 휠체어를 타고 이를 지켜보던 피해자들 사이에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2년 전에야 피해구제 특별법이 시행됐고, 이제야 기업들이 사회적 책임을 거론한다. 원인 규명도, 사과도, 법적 처벌과 보상도 지연되며 무력하고 아팠을 이들에게 너무 늦지 않는 사과이기를.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중국인 임신부들은 해외여행을 온 것처럼 하와이로 입국한 뒤 로스앤젤레스(LA)로 이동했다. 입국심사를 통과하기 위해 헐렁한 옷을 입어 부른 배를 감췄다. 머물 숙소로는 미리 외운 대로 와이키키 해변 5성급 호텔인 트럼프 호텔을 콕 집어 답했다.’ 올해 1월 미국 LA 연방검찰은 중국인 원정출산 알선업체 대표 등 20명을 비자 사기와 자금세탁 혐의로 기소했는데, 이 기소장에 쓰인 수법이다. 이 업체들은 미국 시민권 획득을 위한 원정출산 상품을 1인당 4만∼8만 달러를 받고 팔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1일 “국경을 넘어와 아기를 낳으면 ‘축하해요, 이제 아기는 미국 시민이네’라고 말하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솔직히 웃기는 일”이라며 출생시민권 제도 폐지를 언급했다. 미국에 불법 이민자 부모나 원정출산을 온 부모가 낳은 출생아 수가 연간 30만 명 수준이다. 이 가운데 원정출산이 차지하는 비율이 10%가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출생시민권 폐지는 ‘캐러밴’(중남미 3개국 이민자)을 막기 위한 반(反)이민정책이지만 중국 한국 등에서 온 부유층들이 원정출산을 통해 학업·취업에서 혜택을 누리는 것도 겨냥했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간선거를 한 달 앞둔 지난해 10월 인터넷 언론 인터뷰에서 “미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완전한 미국 시민이 되고 85년 동안 모든 편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이런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끝낼 때가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불법 이주의 닻을 내리는 아기들(앵커 베이비·anchor babies)”이라고 했다. 원정출산으로 태어난 아이에게 시민권이 부여되고 나중에 부모나 형제를 초청해 연쇄 이민이 이뤄진다는 점을 조롱한 것이다. 그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미 상원을 장악했다. 사실상 ‘트럼프의 승리’라는 평가가 나왔었다. ▷출생시민권 폐지는 ‘미국에서 출생하거나 귀화한 사람, 관할권 내에 있는 모든 사람은 미국 시민’이라고 규정한 미 수정헌법 제14조와 배치된다. 이른바 ‘속지주의’는 1868년 남북전쟁 이후 노예제에서 해방된 흑인들에게 시민으로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비준됐다. 이후 미국 시민권자가 아닌 부모를 둔 이민자 자녀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됐다. ‘관할권’을 물리적인 영토가 아니라 합법적인 체류를 기준으로 보는 극소수 의견도 있긴 하지만 출생시민권을 폐지하려면 먼저 수정헌법 제14조를 개정해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 때문에 대선을 앞둔 정치적 행위라는 분석이 많다. 그럼에도 그의 반이민 구호가 통하는 것을 보면 미국의 인심이 사나워진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2011년 ‘이만갑’을 처음 시작할 때 남한에선 UFO(미확인 비행 물체) 같은 프로그램이었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의 매거진M이 2017년 2월 종합편성채널 채널A의 ‘이제 만나러 갑니다’(이만갑)를 분석한 글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 이방인으로 살던 탈북민들이 당당히 얼굴을 드러내고 TV 예능의 주인공이 된 ‘이만갑’은 그 자체로 파격이었다. 탈북민들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자신만의 언어로 풀어놓았다. 그 ‘이만갑’이 18일로 400회를 맞았다. ▷‘이만갑’ 속 재기 넘치는 탈북 여성들의 수다에는 웃다가 울리는 유머 코드가 있었다. 지금까지 600명이 넘는 탈북민이 출연했다. ‘북한 김태희’ ‘북한 심은하’가 탄생했다. ‘북한 심은하’로 불리며 7년간 출연 중인 신은하 씨와 그의 언니 은희 씨 자매는 고운 외모에선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우여곡절을 겪고 한국에 왔다. ‘이만갑’을 탄생시킨 채널A 이진민 PD는 “보통 20대 아가씨가 경험할 수 있는 고통의 총량이 넘는 기억을 갖고 있는데도 참 밝았다”며 “온갖 고초를 겪은 탈북민들이 삶에 대한 희망, 가족에 대한 사랑을 순수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토크쇼’로도 통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들의 사연을 듣고 있자면 다른 체제 아래서 억압받던 삶이 안타까우면서도 사람 사는 게 어디서나 비슷하구나 싶다. ‘이만갑’은 폐쇄적인 북한 사회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과 같았다. 탈북민들 사이에서도 인기 프로그램이다. 탈북민에 대한 편견을 의식해 또는 북한에 남은 가족들을 위해 신분 노출을 꺼리던 이들이 당당히 세상 밖으로 나오는 계기가 됐다. 2016년 한국으로 망명한 태영호 전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는 한국 언론과의 첫 기자간담회에서 해외 체류 북한 외교관들과 주민들이 ‘이만갑’을 즐겨 본다고 했다. 북한을 들여다보는 창인 동시에 남한을 들여다보는 창이 된 ‘이만갑’은 남북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데 일조하고 있다. ▷첫 방송부터 ‘이만갑’을 진행해 온 MC 남희석 씨는 “언젠가 두만강, 백두산에서 북한을 바라보며 방송하고 싶다”며 400회를 맞이한 소회를 밝혔다. 아마 출연자들은 더욱 간절할 것이다. ‘이만갑’ 5주년 특집에 출연했던 최종숙 씨는 “통일이 딴 게 있겠느냐. 어디든 맘대로 가고, 누구든 맘껏 만나고. 하루빨리 평양 가서 이만갑 찍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만갑’ 출연자들이 북녘에서 마음껏 웃고 떠들며 끼를 발휘하는 그날,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미리 저축을 좀 해 둬요.” 재테크에 대한 조언이 아니다. 올해 첫째를 동네 일반고에 보낸 엄마에게 ‘아이가 학교에 잘 다니느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학기 초에 학교를 갔더니 수업 받는 아이들 태반이 자고 있고, 따라올 아이만 들으라는 식”이라며 “학교는 배우는 곳이 아니라 내신시험 치르는 곳”이라고 했다. 대학에 가고 싶으면 학원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 사교육비가 여간 부담이 아니니 아이가 초등생일 때 아껴 두라고 했다. 이런 일반고에 생기가 돌게 될까. 교육부는 이달 중 일반고 역량 강화 방안을 발표한다. 자율형사립고를 폐지하기에 앞서 일반고 수준을 높여 달라는 요구에 대한 교육부의 첫 답변이다. 올해 25년 차 박성은 고교 교사. 비평준화 지역 입시 명문고에서 9년간 재직했고 지난해부터 농촌 소재 인문계고(일반고)에서 가르친다. 최근 두 고교에서 과학실험수업을 진행한 경험을 공유한 그의 글을 읽었다. 그는 ‘교육을 학교에 의존하는 아이들과 지내는 것이 교사로서 행복하다. 하지만 사교육으로 빈틈없이 관리된 아이들에 비해 학업 역량 부족이 누적된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고 적었다. 아이들의 학업 역량을 키우려면 맞춤형으로 대응해야 하는데 학교 자원도, 교사의 에너지도 부족하다고 느껴서다. 이른바 명문고에선 과제를 주면 아이들이 내용물을 완벽하게 채워 냈다. 일반고에선 교사의 손길이 ‘훨씬 많이’ 필요했다. 정성을 쏟아도 아이들의 결과물은 성기었고, 박 교사는 진심 어린 감탄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다가와 “스스로 끝까지 해내는 수업에서 성취감을 느꼈다” “배움의 기쁨을 알겠다. 힘들었지만 재미있다”고 속삭였다. 학업 능력이 우수한 아이들보다 뒤처지는 아이들을 성장시키려면 역량 있는 교사의 헌신이 필수적이란 얘기다. 아무리 교과서를 새로 써도, 입시를 바꾸어도, 교실을 꾸며 봐도 우리 교육은 그대로였다. 박 교사의 수업이 아이들에게 성취동기를 부여했듯이 일반고가 바뀌려면 교사가 변화해야 한다. 역대 교육 정책은 수업을 하는 교사가 아니라 평가를 받는 학생을 바꾸려고 했기 때문에 실패를 답습했다고 본다. 이번 정책의 목표는 교사가 뛰게 할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돼야 한다. 박 교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교사를 움직이게 할 방법을 물었다. “충분한 합의를 통해 미래 교육에 대한 방향을 정하고 교사들 마음에 불을 질러야 한다. 교사는 월급을 많이 받기 위해서 선택한 직업이 아니다. 아이를 가르치고 그 삶에 올바른 변화를 일으키고 싶어서다. 막상 고교에 근무하면 입시에 대한 압력과 경직된 문화 안에서 꼼짝하기 어렵다.” 물론 성과급 등으로 교사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그의 답변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는다. 인간의 욕망이 움직이는 데 교사라고 예외일까 싶지만 그런 신념을 가졌기에 원칙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일 터다. 박 교사는 ‘우리 교육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되물었다. 교육부의 일반고 대책에는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이 담겨야 한다. 표류하는 배 안에서 똑바로 물건을 쌓을 수 없듯이, 방향 없이 방법만 덧칠한 교육 정책은 학교 현장을 어지럽게 만들 뿐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할머니가 허리와 팔다리가 아프다고 하시는데 퇴행성관절염입니다.” 강원 춘천시 보건소 황모 의무과장이 화상시스템 속 최모 할머니를 진찰하고 진단을 내린 뒤 동네 진료보건소 간호사에게 처방전을 띄웠다. 배를 타고 소양강댐을 건너 다시 버스를 타는 등 3, 4시간이 걸리는 보건소 방문 대신 집 근처서 약을 탈 수 있게 된 최 할머니 사연을 다룬 이 기사는 원격의료를 다룬 최근 기사가 아니다. 1999년 6월 ‘춘천 오지마을 첫 영상진료’라는 연합뉴스의 보도다. 당시에도 가능했던 원격의료는 20년 동안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한 채 원점을 맴돌고 있다. ▷20년 동안 3개 정부가 원격의료 시범사업을 했다. 하지만 대형병원 쏠림 현상이 심해지고 동네의원들이 몰락할 것을 우려한 의료계 반발을 넘지 못하고 그저 시범사업으로 끝났다. 현 정부도 지난달 23일 강원도를 의료법상 원격의료 규제를 면제받는 ‘디지털헬스케어’ 규제자유특구로 지정했다. 현행 의료법은 의사와 환자 간이 아닌 의사끼리만 원격의료를 허용한다. 이 예외로 도서벽지 같은 격오지(隔奧地), 군부대, 교도소 등만 뒀다. 규제자유특구에선 고혈압·당뇨 재진환자가 집에서 의사로부터 원격진찰을 받고, 간호사가 방문하면 원격진단과 처방도 가능하다. ▷이 원격의료 사업에 동네의원만 참여하도록 했는데 단 한 곳이 응했다고 한다. 강원도의사회는 “원격의료의 문제점을 홍보했지만 불참을 강요하지는 않는다”고 선을 그었지만 아무래도 서로 동료 의사들의 눈치가 보였을 것이다. 대한의사협회는 우리나라처럼 병원 근접성이 뛰어난 곳에서 원격의료는 시기상조라고 주장한다.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아 국민의 생명권을 침해할 수 있고, 의료사고가 발생했을 때 의료기기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으니 오진의 책임 소재도 분명하지 않다는 것. 단지 ‘밥그릇 지키기’가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런데 기술 발달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빠르다. 만성질환자의 스마트폰에는 투약 및 식생활 기록이 꼬박꼬박 남는다. 의사가 구글 글래스를 착용한 구급요원이 보내는 영상을 보며 응급조치를 한다. 2월 세계 최대 모바일 행사인 ‘MWC19 바르셀로나’에선 세계 최초로 5km 떨어진 환자에 대한 원격수술이 시연됐다. 5세대(5G) 이동통신 시대에는 응급 상황에서도 실시간 원격수술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빅데이터 기반의 인공지능(AI) 의사 왓슨의 진단은 얼마나 정확한가. 자칫 강원도 규제자유특구 실험조차 무산된다면 이런 기술혁명 속에 우리만 ‘의료 갈라파고스’에서 살게 될까 우려스럽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타협은 더러운 말이 아니다. 절대주의자들은 다른 합리적인 견해를 수용하는 것을 거부하지만, 정치의 가치는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데 있다.” 어제 영국 보수당 신임 대표로 선출된 보리스 존슨 전 외교장관에게 총리직을 물려줄 테리사 메이 총리의 말이 여운을 남긴다. 존슨 차기 총리는 10월 31일 유럽연합(EU) 탈퇴를 공언하고 있어 EU와 아무런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노딜 브렉시트’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상황이다. 물러나는 메이 총리는 이를 예상한 듯 17일 마지막 연설에서 존슨 등 보수당 내 강경파를 겨냥했다. ▷메이 총리는 2016년 7월 브렉시트발(發) 혼란을 헤쳐 나갈 구원투수로 취임하면서 “모두를 위한 영국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가 재임한 3년 동안 영국은 EU에 남지도, 떠나지도 못한 채 격랑 속에서 표류했다. 매년 부담금을 내고 EU 단일시장에 남는 ‘소프트 브렉시트’ 방안은 의회에서 세 차례나 부결됐다. 결국 스스로 물러나면서 메이 총리가 타협의 미덕을 강조한 건 브렉시트 강경파와 세계적 포퓰리즘 흐름에 맞서 브렉시트 연착륙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3년의 경험이 응축된 말일 터다. ▷메이 총리가 ‘유리절벽’에서 떨어진 것이란 평가도 나온다. ‘유리절벽’은 조직에 막다른 위기가 닥쳐야 여성에게 고위직이 돌아가고, 그 위기를 돌파하지 못하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현상을 빗댄 말이다. ‘유리천장’을 돌파해 보니 절벽인 셈이다. 메이 총리는 브렉시트를 국민투표에 부쳐 이 혼란을 만든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당시 EU 탈퇴에 앞장서던 보리스 존슨 전 외교장관이 당 대표 경선에서 돌연 사퇴해 버리면서 얼떨결에 당선된 측면이 있다. 그래서 “남성들이 만든 쓰레기를 치우게 됐다”는 소리를 들으며 취임했는데 이제 임기 내내 메이 총리를 흔들던 존슨이 차기 총리로 등극했고 캐머런 전 총리도 정계복귀설이 솔솔 흘러나온다. ▷“정치에는 승자와 패자가 나뉘지 않는다”는 메이 총리의 말도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협에 처한 상황에서 곱씹어 보게 된다. 국민에게 이분법적 선택을 강요하는 정치가 세계 곳곳에서 기승을 부린다. 민주당 초선 의원 4인방에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인종차별 발언을 퍼부은 다음 “이 정치적 싸움에서 이기고 있다”고 되레 큰소리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나, “브렉시트 협상에서 백기만 나부낀다”며 대안 없는 강경론을 밀어붙이는 존슨 차기 총리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국민연금 개혁안의 윤곽이 처음 그려진 건 약 1년 전. 지금은 우리 사회가 그 방향을 두고 시끌벅적했던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논의 자체가 실종됐다. 종적을 감춘 국민연금 개혁안의 행적을 따라가 봤다. 지난해 8월 국민연금 제도발전위원회는 국민연금이 현행대로 운영되면 2057년 고갈될 것이라는 재정추계 결과를 발표하고, 매달 내는 보험료율을 최소 3∼4%포인트 이상 올리는 2개 방안을 제안했다. 보건복지부가 이를 두고 여론 수렴에 나섰지만 5년마다 국민연금 재정추계를 하는지도 모르던 국민들에게는 난데없이 지갑 터는 소리로 들릴 수밖에. ‘더 받고 싶지만 더 내긴 싫다’는 국민들의 마음을 읽고 달랜 것이 문재인 대통령이다. 3개월 뒤 복지부의 연금 개혁안 초안을 보고받은 문 대통령은 “보험료 인상(폭)이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며 재검토를 지시했다. 연금 개혁안의 비극적인 결말이 예고된 순간이었다. 도저히 ‘더 받고 덜 내는’ 마법을 부릴 수 없었던 복지부는 지난해 12월 현행 제도대로 유지하는 방안을 포함한 4개 방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둔 국회에선 폭탄이 투하됐다는 반응을 보였다. 국회는 재빠르게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단일안을 만들어 오면 처리하겠다”며 경사노위에 폭탄을 넘겨 버렸다. 노사 간 ‘오늘’의 이해관계가 팽팽히 맞서는 경사노위에서 ‘미래’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해 달라니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이번 국회뿐 아니라 20년 넘게 국회는 한 번도 국민연금 보험료 인상에 찬성한 적이 없다. 2007년 단 한 번 소득대체율을 60%에서 50%로 깎았는데 당시에도 보험료는 그대로 뒀다. 그것도 국민연금법은 쏙 빼고 기초노령연금법만 처리했다가 거센 여론의 반발로 궁지에 몰려 통과시켰다. 정부→국회→경사노위가 서로 폭탄을 돌리는 사이 4월 경사노위 내 국민연금 특위는 활동이 종료됐다. 국민연금 개혁안이 그렇게 실종되나 싶었는데 정부가 불씨를 다시 피우는 모양이다. 박능후 복지부 장관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8월 말까지 경사노위에서 최종 결론을 내주기를 바란다고 요청했고 그 논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9월 정기국회에서 국민연금 개혁안 논의의 물꼬를 트기 위해 복지부가 물밑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박 장관은 국민연금이 처음 시행된 1988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전신인 한국인구보건연구원 내 국민연금 연구팀이 꾸려질 당시 연구자로서 참여했다. 그만큼 국민연금에 대한 소신이 뚜렷하고, 올해 초 “국민연금법을 처리해야 하지 않냐”고 청와대에 얘기했다가 퇴짜를 맞았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럼에도 주무 부처 장관이 개각 교체 명단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나서야 뒤늦게 움직인다는 비판을 피할 순 없을 것 같다. 국민연금 제도 설계에 참여했던 박남훈 전 대통령정책비서관은 ‘보험료 인상이 정치적 문제가 됐다’는 질문을 받고 “정치인은 그렇다고 할지라도 전문가들이 그렇게 말하는 건 양심불량”이라고 일침을 놓았다(‘한국의 사회보험, 그 험난한 역정’). 장관을 비롯한 정부 내 전문가들이 침묵했던 지난 1년 동안 국민연금 개혁안은 표류했고, 다음 세대의 부담은 또 늘어났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지금까지 이런 대통령은 없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14일 유색인종 여성 민주당 하원의원 4인방을 향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Go back to your country)’고 트윗 글을 날렸다. ‘이민자의 나라’ 미국에서 인종차별 발언은 금기어 중 금기어고 이런 발언이 들통난 공직자는 물러나는 게 당연했다. 한데 그는 “내 몸에는 인종차별주의자의 뼈가 없다”고 우기더니 17일 미국 하원에서 그의 발언을 규탄하며 발의된 탄핵 결의안이 부결되자 “위대한 경제 부흥을 일으킨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돌아가(Go back)’ 경험담 고백이 쏟아지며 ‘반(反)트럼프 연대’가 형성됐다. 이른바 ‘허드투(Heard Too·나도 들었다)’ 운동. 파키스탄계 배우 쿠마일 난지아니는 “난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아주 많이 들어봤다. 한 달 반 전에 로스앤젤레스에서도 들었다”고 했고,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법무차관을 지낸 변호사 닐 카티얄은 “3세 때부터 거의 매일 그 말을 듣는다”고 썼다. ▷뉴욕타임스는 비슷한 경험을 한 독자 제보를 받았는데 하루 만에 4800여 통이 접수됐다. ‘인종 용광로’라 불리는 미국이지만 인종차별 정서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보여준다. 과거의 일이지만 미국에선 1798년 적대국 출신이거나 위험하다고 간주되는 외국인의 추방을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된 적이 있고, 1882년에는 중국인 노동자의 수를 제한하는 중국인배척법이 발의됐었다. ▷남성 대 여성, 백인 대 흑인, 부자 대 빈자….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와 타자를 구별 짓기 함으로써 정체성을 만든다. 인간의 역사에서 차별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이 때문에 학교와 가정, 사회에서 ‘차별은 옳지 않다’는 교육을 통해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세워 차별에 맞서 왔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차별의 언어’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위기마다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과감한 이민정책으로 인재를 끌어들여 성장했고, 민주주의와 자유무역이라는 국제질서를 주도해온 미국이 어느새 세계와 연결된 문을 닫고 내부적으로는 ‘닫힌 사회’를 지향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 흐름 선두에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는 트럼프 대통령이 서 있다. “만약 우리가 새로운 ‘아메리칸’에게 문을 걸어 잠근다면, 우리는 세계의 리더로서의 지위를 곧 잃고 말게 될 것이다.” 1989년 1월 임기 마지막 날 ‘원조 보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남긴 연설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2002년 2월 2일 새벽 인천공항. 미국 시민이 되어 20여 일 만에 돌아온 가수 유승준 씨가 ‘STEVE SEUNG JUN YOO’라는 이름이 적힌 여권을 입국심사대에 내밀었다. “스티브 유, 입국이 금지됐습니다.”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은 “우리나라의 이익이나 공공의 안전을 해칠 행동을 할 염려가 있는 경우 입국을 금지시킬 수 있다”고 영어로 통보했다. 공항에서 6시간 넘게 대기하던 유 씨는 다시 미국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그리고 17년 동안 예비 장인상을 치른 3일을 제외하곤 한국 땅을 밟을 수 없었다. ▷1997년 샛별처럼 등장해 ‘가위’ ‘나나나’ 등 여러 히트곡을 부른 인기 절정의 댄스가수가 그렇게 사라졌다. 평소 반듯한 언행으로 ‘아름다운 청년’이라 불렸던 그는 “대한민국 남자라면 군대는 당연히 가야 한다”고 공언했다. 막상 사회복무요원으로 입대하게 되자 귀국보증제도를 통해 해외 공연을 핑계 삼아 출국했다가 돌연 한국 국적을 버렸다. 국민정서법에 딱 걸렸고 여론이 들끓었다. 법무부는 “국방의 의무 기피 풍조를 심어주는 악영향이 우려된다”며 입국 금지를 결정했다. ▷2015년 유 씨는 주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에 재외동포 비자를 신청했다가 거부당한 뒤 소송을 냈다. 당시 만 38세로 병역이 면제되는 해라 그의 입국 시도는 더욱 논란이었다. 그해 5월 인터넷 방송을 통해 “떳떳한 아버지가 되고 싶다”며 무릎까지 꿇고 사과했으나 여론은 싸늘했고 1, 2심에서도 잇달아 패소했다. 그런데 대법원이 11일 “비자 발급 거부가 위법”이라며 원심을 파기 환송했다. 전화로 비자 발급 거부 사실을 통보하는 등 절차가 적법하지 않고, 그 행위에 비해 비자 거부가 과하다는 취지다. 정부는 유 씨의 비자 발급 여부를 다시 판단해야 한다. 한국에 들어올 가능성이 생겼다는 소식에 유 씨는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최근 강원 철원 군부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이른 더위에 두꺼운 저격수용 위장복을 입은 앳된 군인이 유독 힘들어 보여 눈길이 갔다. 힐끔힐끔 그를 보며 이들이 바치는 귀한 젊음을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것 아닌지 자꾸만 미안해졌다. 유 씨의 행적은 이처럼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젊음을 조롱한 것이나 마찬가지라 그 분노가 깊고 오래가는 것일 터. 병역을 기피한 고위공직자 자녀나 연예인이 수두룩한데 가혹하다는 여론도 있지만 최근 여론조사에서도 ‘입국을 허가하면 안 된다’는 응답이 68.8%였다. 43세 그에게 입국심사대의 문이 열리더라도 국민 마음의 문까지 열리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2017년 11월 문재인 대통령은 아세안과 한국의 관계를 한반도 주변 4강(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신(新)남방정책’을 발표했다. 지난해 8월 대통령 직속으로 ‘신남방정책 특별위원회’를 설치한 데 이어 올해 5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대표부를 신설했다. 신북방정책과 더불어 핵심 외교정책의 한 축인 셈이다. 그런데 신남방정책의 최전방 기지인 베트남과 말레이시아에서 탈이 났다. 외교부와 삼성에서 근무했던 김도현 주베트남 대사와 산업통상자원부 출신인 도경환 주말레이시아 대사가 비위에 연루돼 두 달 전 소환됐다. 김 대사는 지난해 10월 현지 기업으로부터 항공권과 숙소를 제공받은 사실이 인정돼 청탁금지법 위반 등으로 최근 해임됐다. 도 대사는 직원에게 폭언을 하고 식자재 구입비를 부풀려 공금을 횡령했다는 의혹으로 인사혁신처 중앙징계위에 회부됐고 징계위의 결정 통보를 기다리고 있다. 아세안 10개국 중 특임대사가 부임했던 2개국 모두 대사가 연루된 ‘대형 사건’이 터진 것이다.‘新남방정책’ 특임대사 2명 좌초○ “재외공관이 일을 너무 안 한다” 노무현 정부 당시 자주파로 분류돼 동맹파와의 갈등의 중심에 있던 김 전 대사는 지난해 4월 특임대사로 부임했다. 처음에는 코드 인사 논란 속에 불거진 사건이려니 했는데 그가 소환된 이후 베트남 일부 교민 사이에서 그의 구명 운동이 벌어졌다. 사유가 있다면 징계를 받아야 마땅하겠지만 그 속사정이 궁금해졌다. 중앙징계위가 열리기 직전인 5월 16일 김 전 대사를 만났다. 지난주 소청심사까지 마무리됐기에 그의 주장 중 ‘재외공관의 문제점’에 대한 대목들을 지면에 싣는다. ―직원에게 폭언을 하는 등 이른바 ‘갑질’ 의혹이 있다. “다른 부처에서 파견된 주재관들과 갈등이 컸다. 양국 간 외교는 늘 하던 일이다. 현지 기업의 애로를 해소하고, 교민들의 교육이나 비자 문제 등을 다루려면 이들이 움직여야 한다. ‘3년 쉬러 왔는데 왜 일이 많아지지’라는 불만이 있었다. 재외공관에 파견 나오면 일을 하나, 안 하나 평가는 똑같다는 거다. 사실 인사고과에 영향이 없는 게 맞다. 기업에서 온 입장에서는 ‘이렇게 일을 안 할 수가 있나’ 싶었다. (※그는 2013년부터 삼성전자에서 5년간 근무했다) 일이 진척되지 않다 보니 화를 낸 것도 사실이다. ―부정청탁금지법 위반으로 중징계를 받았는데…. “지난해 2월 다낭, 10월 냐짱 출장에서 베트남 기업으로부터 항공권과 숙박을 지원받은 게 문제가 됐다. 냐짱 출장의 경우 KN골프클럽 개관식이었는데 가족 동반으로 참석했다. KN그룹 부회장이 딸만 넷이다. 우리 아이들이 다섯인 걸 알고 반가워하며 초청했다. 공무상 출장으로 결재받은 사안이다.”(※그의 해명은 징계위서 수용되지 않았다.) “주재관들 ‘일 많아졌다’며 반발” ―정상적인 외교 활동이라면 왜 직원들이 반발했나. “신남방정책 추진이라는 특명을 받고 임명됐다. 관행대로만 일한다면 특임대사가 왜 필요한가. 그런데 이런 관행을 바꾸려면 저항이 따른다. 외교관이든 주재관이든 열심히 일해 특임대사에게 인정받아도 인사상 이익이 별로 없다. 아주 유력한 정치인이 온다면 모를까 조직 장악이 어렵다. 요즘 아래 직원들이 ‘화난 말투였다’ ‘눈빛이 쏘아봤다’며 갑질이라고 하면 움츠러든다. 민간기업과 공무원 문화가 다른데 빨리 적응을 못 한 것은 잘못이라 생각한다.”○ “교민들 만나면 골치 아프니 만나지 말라고 해” 김 전 대사가 다른 부처 출신 주재관들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반면 산자부 출신인 도 대사는 외교부 직원 4, 5명의 집단적인 저항에 부딪혔다고 주장한다. 지난달 27일 도 대사와 통화를 했다. ―외교부 출신들과 불화가 있었다는 건가. “신남방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가자마자 신남방정책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 한류 열풍을 경제와 연계하고, 할랄푸드 시장에 진출하는 로드맵을 만들어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외교부 출신들이 ‘안 된다’며 지시 거부를 하더라. 대사관 예산 결재 권한을 외교부 출신인 차석 대사한테 위임해 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이를 거부했더니 갈등이 점점 커졌다. 인사권이 없으니 이런 상황을 통제하기 어려웠다.” ―재외공관이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는 것인가. “처음 부임해서 직원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교민들을 만나면 골치 아프니 만나지 말라’는 것이다. 해외공관이야말로 공무원 복지부동의 전형이다. 주거비 학비 통신비 등 각종 수당이 포함돼 본부보다 3, 4배 급여를 많이 받는다. 그에 상응하는 일을 하기보다 안락한 생활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다.”○ “적지에서 집안싸움으로 자멸한다” 두 대사의 해명은 자신들의 부적절한 처신을 변명하기 위해 조직에 책임을 돌리는 것일 수 있다. 또는 그들의 주장처럼 나태한 조직을 바꿔보려다 반감을 산 상태에서 허물을 잡힌 것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진위는 차차 드러나겠지만 두 대사의 해명에는 공통점이 있다. ‘고립된 왕국’인 재외공관에서 외교관과 주재관 사이 해묵은 갈등이 우리 외교 역량을 해치고 있다는 점이다. 전·현직 외교관, 주재관과 통화해 보니 “외교관과 주재관이 그저 한 공간에 머물 뿐, 전혀 시너지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각 부처에서 파견한 주재관들은 ‘쉬러 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기수나 승진 순서대로 파견을 나오니 긴장감 없이 업무에 임한다. 반면 외교관들은 권위적인 관행, 폐쇄적인 문화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외교관은 주재관을 향해 “남 일 보듯 일한다”고 하고, 주재관은 외교부 출신을 향해 “자기들끼리만 뭉쳐 다닌다”고 하며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다고 한다. “국익을 수호하는 최전방이 재외공관인데 집안싸움으로 원팀 대응이 어렵다”고도 했다.외교관-주재관, 편갈라 집안싸움 현재 재외공관 수는 166곳이다. 공관당 인원은 수 명에서 수십 명까지 편차가 크지만 3, 4인 공관이 35%를 차지한다. 실질적인 외교력을 발휘하기에는 규모가 작아 통폐합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대사 자리를 위해 공관을 늘리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상황이다. 외무고시 출신이면 정년까지 공관장 두 번은 나간다는 암묵적인 공식이 아직도 통한다. 공관장이 굳이 성과를 내거나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다. 더욱이 미국 중국같이 대형 공관들은 업무량도 많고 각종 감사도 정기적으로 받지만 이런 소형 공관들은 감시 사각지대에 있다. 주재관은 각 부처에서 인사를 한다. 그러다 보니 공관장에 대한 충성도가 낮고 외교 업무의 전문성도 부족한 경우가 없지 않다. 공관장은 인사권이 없는 대신 이들에 대한 지휘 책임 역시 지지 않는다. 기강 해이를 막을 제도적 장치는 없는 것이다.특임공관장 자질 검증 강화해야 외교관 출신이 아닌 공직자 학자 정치인 등 전문가를 선발하는 특임대사는 더욱 고립되기 쉽다. 이번에 특임대사 공관만 사고가 난 것을 두고 “순혈주의를 깨려다 자질과 조직 관리 능력이 제대로 검증이 안 된 상태에서 공관장을 내보낸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정부는 현재 19%인 특임대사 비율을 30%까지 늘리겠다고 했지만 공관장만 바꿔서는 ‘무사안일’ 외교 관행을 깨기가 어렵다.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외교관과 주재관 사이 불신의 벽은 더 높아집니다. 이들 사이 화학작용이 일어나도록 재외공관 개혁이 필요합니다. 적지에서 우리끼리 자멸해서야 되겠어요.” 전직 외교부 출신의 고언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강원 춘천시 구봉산 자락 카페거리는 춘천 시내 전경을 볼 수 있는 명소다. 축구장 7배 규모(5만4229m²)라는 네이버 1호 데이터센터 단지도 조망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원유로 통하는 데이터는 모이고 쌓일수록 양질의 원유가 된다. 구글 MS 등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앞다퉈 데이터센터를 짓고 있는 까닭이다. ▷지난달 13일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된 경기 용인시 네이버 2호 데이터센터 설립 계획에 최근 며칠 사이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 군산 의정부 인천 파주 포항 등이 센터 유치를 위해 물밑 경쟁에 나선 데 이어 어제 백군기 용인시장도 “새 부지로 아이들이 영향받지 않는 3, 4곳을 물색하고 있다. 네이버와 협상을 이어가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용인시가 (네이버와 주민 간) 중재 역할을 다하지 못해 아쉬웠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 센터는 구축비용만 5400억 원이라니 지역에선 탐낼 만하다. 하지만 주민들은 학교 인근에 세워질 데이터센터에서 발생할 전자파를 우려했다. 서버를 식히는 냉각수의 수증기도 문제가 됐다. 네이버는 1호 데이터센터의 사례를 들어 검출된 전자파가 일반 가전제품 수준이고, 냉각수 수증기도 수돗물 수증기와 같다는 자료를 제시했지만 설득에 실패했다. 요즘은 데이터센터를 둘러싼 갈등만이 아니다. 5G 시대가 열렸으나 통신사의 새 기지국은 전자파 공포로 곳곳에서 설치가 지연되고 있다. 이른바 신(新)산업 님비(NIMBY·Not In My Backyard) 현상이다. ▷우리 사회에 본격적으로 님비가 나타난 것은 1990년대부터다. 지방자치가 시작되면서 주민의 목소리가 커졌고, 환경에 대한 감수성도 높아졌다. 원자력발전소, 핵폐기물 처리장, 쓰레기 소각장·매립장 부지 선정을 두고 갈등을 빚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임대주택, 장애인학교 및 시설 등 사회적 약자와 분리하려는 현상이 생겨났다. 그 대상과 정도를 달리할 뿐 새로운 형태의 님비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새 기술이 등장할 때 동반되는 대중의 두려움을 무조건 님비라고 손가락질할 수 없다. TV·전자레인지 전자파 유해 논란이 한창일 당시 소금물이나 선인장을 옆에 두기도 했다. 그런 두려움이 전자파 감소의 기술 발달도 이끌었다. 다만 막연한 불안이나 실체 없는 공포심에 휘둘려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기업은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신뢰를 쌓고 정부 등은 주민 참여를 통한 의사 결정의 투명성을 확보할 때 소모적인 갈등을 줄여나갈 수 있을 것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상산고 한 학년이 360명인데 재수생 포함해 275명이 의대로 간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지난달 26일 국회 교육위원회에 출석한 김승환 전북도교육감의 발언을 듣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상산고가 입시교육만 한다는 근거로 의대 진학률을 들었는데 우선 사실이 아니다. 올해 상산고 졸업생 386명 중 48명(12%)이 의대에 진학했고, 재수·삼수생(71명)을 포함해도 119명이다. 치대·한의대 진학생을 포함해도 김 교육감이 말한 숫자보다 97명이나 적다. 그리고 설령 사실이라 한들 의대에 많이 보내면 ‘나쁜 학교’란 말인가. 우리 사회에서 의사는 부와 명예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업이다. 외환위기 이후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부모 세대를 보고 자란 자식 세대는 안정을 추구하게 됐고, 이런 선택의 집합이 의대 열풍이다. 사회 기저의 흐름을 외면한 채 고교 한 곳에 책임을 물을 일이 아니다. 10년 전 홍성대 상산학원 이사장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상산고를 설립한 목적은 우리나라에서도 퀴리 부인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훌륭한 과학자를 길러내고 싶었던 것이지 의사들만 잔뜩 양산해 내려던 게 아니다”라며 의대 열풍을 걱정했다. 두 달 전 인터뷰에선 “의대를 안 보내려고 발버둥치는데 꾸역꾸역 간다”고 했다. 김 교육감의 논리대로라면 의대 진학률이 높은 과학고, 영재학교도 문을 닫아야 한다. 의대 재수를 선택하는 이공계 재학생이 속출하는 서울대나 KAIST도 없어져야 한다. 나랏돈으로 세운 곳은 의대를 많이 보내도 괜찮고 사학은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자율형사립고를 폐지하면 오히려 강남 8학군이 부활할 것이란 우려가 나오지만 이에 대한 대책도 들어본 적이 없다. 이 정부의 자사고 폐지 공약이 이념적인 구호일 뿐 실질적인 정책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다. ‘평등 교육’을 내세운 북한에서도 우리와 이름만 다를 뿐 과학고 외국어고 예술고가 존재한다. 최근 만난 김일성종합대학 출신 탈북 교수는 “3대가 정권을 세습하는 동안 재능이 뛰어난 학생을 조기 발굴해 수재교육을 한다는 방침은 변한 적이 없다”며 “인적 자원 없이는 체제 유지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1958년 개교한 평양외국어학원은 태영호 전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 등 엘리트 외교관을 배출했다. 태 전 공사는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어머니가 ‘간부 집 아이들은 다 외국어학원 시험을 준비한다’고 권해 응시했다”고 썼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부인 리설주가 졸업한 금성학원은 예술영재교육기관이다. 평양제1중학교는 우리 과학고에 해당한다. 출신성분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이들 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과외가 성행할 정도라고 한다. 키 작은 아이는 까치발을 서고, 키 큰 아이는 무릎을 굽혀 키를 맞춰 서는 것이 평등 교육은 아닐 터다. 키 큰 아이든, 작은 아이든 생긴 대로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면 된다. 수월성 교육과 평준화 교육에 금을 ‘쫘악’ 그어 놓고 배척해선 인재를 키울 수 없다. 다르게 생긴 학교는 단 한 곳도 용납할 수 없다는 발상, 그래서 위험하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어느 학교에서 근무하다 오셨는지 물었는데, 대답을 피하시더라고요. 아마 처음 발령받으셨나 봐요.” “선생님이 먼저 나이를 밝히시더라고요. 보기보단 나이가 있다고 알리고 싶었던 것 같아요.” 매 학기 초 학부모 면담에서 담임교사와 학부모 간 이런 기 싸움이 종종 벌어진다. 교사의 권위가 예전 같지 않다 보니 새내기 교사끼리 경험 부족을 드러내지 않는 방법이 공유된다고 한다. 4년 차 중학교 교사 A 씨는 부임 첫해를 “아무것도 모른 채 던져진 상태였다”고 했다. “임용시험에 합격한 뒤 일주일간 받은 연수와 학교에서 받은 매뉴얼이 실제로는 무용지물이었다.” ▷서울시교육청이 임용시험에 합격했더라도 일정 기간 수습교사로 평가를 거쳐 임용하는 수습교사제 도입이 필요하다는 연구용역 결과를 내놓았다. 서울지역 교사 및 공무원 506명을 대상으로 ‘수습교사제’ 찬반을 물었더니, 찬성(60.1%)이 반대(20.9%)보다 많았다. 현재 새내기 교사는 통상 40시간가량 교육을 받고 바로 학교에 배치된다. 이론과 현장 간 괴리가 커서 자신감을 잃거나 학부모, 학생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수습 기간을 두면 교사로서 사명감이 부족하거나 인성에 결함 있는 부적격자를 걸러낼 장치가 될 수도 있다. ▷1998년 대전시교육청이 39명을 수습교사로 발령 냈으나 교사단체의 반발로 반년 만에 폐지됐다. 해외에서는 수습 기간 운영이 일반적이다. 핀란드와 영국은 1년, 프랑스와 호주는 1, 2년 정도 수습 기간을 두고 평가를 해서 임용에 반영한다. 다만 이들 나라는 임용시험을 따로 치지 않는다. 대학·대학원에서 교육을 전공하고 받는 교원자격증만 있으면 된다. 우리와 같이 임용시험을 보는 일본 역시 1년간 초임자연수제도를 운영한다. 평가보다 연수에 무게를 두고 있으나 정식 채용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교사가 되려면 교대·사범대 등 양성기관을 졸업하고 어렵게 임용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졸업 전에 교생실습은 필수이고 임용이 지연되면 기간제 교사로 일을 한다. 여기에 수습 기간까지 두겠다니 예비교사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공정한 평가자 및 평가방법 등 수습교사제 도입 여건이 마련됐는지 의문도 제기된다. 그럼에도 교사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감안하면 ‘시험 성적만 좋고 준비가 덜 된 교사’를 뽑는 현행 제도는 개선할 필요가 있다. 새내기 교사에게 생활지도교사나 담임 같은 기피 업무부터 맡기는 잘못된 관행도 바뀌어야 한다. 어느 회사도 신입사원에게 높은 숙련도가 요구되는 일부터 시키지 않는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강의 영상을 다시 찾아봤다. A대학 교수로부터 ‘하버드대에 강사법을 적용하면 어떻게 되겠냐’는 질문을 받고 나서다. 웅장한 규모의 계단식 강의실에 수강생 수백 명이 빼곡히 앉아 있고, 샌델 교수는 지휘를 하듯 그들의 질문을 조율했다. 한국으로 옮긴 하버드대가 이 강의를 유지한다면 한 해 1조4000억 원을 나눠 주는 재정지원사업에서 탈락할 것이다. 총 강좌 수, 강의 규모, 강사 담당학점 등 평가지표마다 낙제점이다. 이를 피하려면 강의를 쪼개 강의 수를 늘려 강사에게 맡겨야 한다. 하버드대 산하 ‘버크먼 클라인센터’는 기술 발달로 바뀔 미래사회를 예측하고, 필요한 규범을 연구한다. 주제마다 정보기술(IT) 기업 전문가나 타 대학 교수들과 협업이 이뤄진다. 강사법은 겸임·초빙 교수를 공개 채용하도록 했다. 쟁쟁한 전문가들이 채용시험에 응할 리 없으니 버크먼센터는 존폐 위기에 놓일 것이다. 교육부가 하버드대도 부실 대학으로 만드는 ‘슈퍼 규제’를 내놓은 이유가 있다. 강사법이 강사해고법이 될 판이기 때문이다. 대학 역시 강사 채용을 기피하는 사정이 있다. 그저 선한 정책을 반대하는 악한 행위자라서가 아니다. 생존 본능에 가깝다. 3년 안에 학령인구 급감 쇼크가 덮친다. 인공지능(AI) 시대에는 상위 1% 인재가 머신러닝 등을 활용해 수백 명을 가르치는 게 낫다. “구조조정이 초읽기인 상황”이라고 했다. ‘보따리 장사’로 불리던 강사의 신분 보장과 처우 개선, 강사법의 핵심은 이 두 가지다. 대학들이 4대보험 등 처우 개선으로 늘어나는 재정 부담을 들어 반발하지만 깊은 속내는 다르다. 신분 보장이 더 부담스럽다. 강사가 대학 강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수요가 넘쳤던 것은 비용도 덜 들지만 고용이 유연해서였다. 대학은 재임용 절차 3년 보장을 ‘3년 임용’이 아닌 ‘평생 임용’으로 해석한다. 강사법 시행으로 강사가 교수처럼 교원의 지위를 얻게 되는데 해고가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한다. 전공 수요에 따라 강의를 개설하거나 폐쇄하는 일도 어려워질 것이다. 대학강사제도개선협의회의 강사실태조사 자료를 보면, 2017년 평균 강의료가 시간당 5만8400원이었다. 전임교원의 5분의 1 수준이라고 한다. 얼마나 열악한지 미국과 비교해 보면 금방 안다. 직장평가사이트인 ‘글래스도어’에 따르면 미 대학 강사(Lecturer), 조교수(Assistant Professor), 교수(Professor)의 평균 연봉은 각각 5만3425달러, 7만2172달러, 9만4352달러다. 연봉 격차가 단계마다 2만 달러 수준이다. 그런데 강사법은 ‘정규직’ 교수와 ‘비정규직’ 강사 간 이런 차별적인 구조를 바꾸기보다 강사들을 기득권 구조에 편입시킬 뿐이다. 대학은 갈수록 강사 고용을 꺼릴 것이고 새로 배출되는 청년 박사만 희생될 가능성이 높다. 오랜 산통을 겪은 강사법 시행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고 교육부 안대로 시행되면 원래 취지 달성이 어렵다. 대학들은 학교마다, 학과마다 강사 수요나 쓰임이 다른 사정을 살펴봐 달라고 한다. 교육부가 강사법을 준수했는지 평가할 때 획일적인 막대자 대신 유연한 줄자를 들이대야 그나마 대학에 던진 시한폭탄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촉촉한 감성으로 마음을 적시던 사랑 노래, 그 노래를 부른 가수가 나에게 비닐봉지를 씌워 조롱하던 학교폭력 가해자라면…. 최근 유명 밴드 멤버인 유영현의 학교폭력을 폭로한 글이 SNS를 통해 퍼졌다. 글을 쓴 피해자는 11년 전 기억인데도 ‘손과 등이 식은땀으로 젖고 숨이 가빠졌다’고 주장했다. 비난이 쇄도했고 그는 밴드를 탈퇴했다. ▷미투(#MeToo·나도 당했다)에 빗대 빌린 돈을 갚지 않았다는 ‘빚투’가 줄줄이 연예인을 강타하더니 학교폭력을 폭로하는 ‘학투’가 등장했다. 가수 효린 역시 옷과 돈을 빼앗겼다고 주장하는 피해자와 공방을 벌이고 있다. 케이블TV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 중이던 윤서빈은 일진이었다는 폭로가 나와 해당 프로그램과 소속사에서 퇴출됐다. 연예기획사들은 소속 연예인의 ‘학투 리스크’ 점검에 분주하다고 한다. ▷장차 높은 공직을 꿈꾸는 야심 찬 공무원들은 장래 인사청문회를 염두에 두고 일찍부터 자기 관리에 철저하다. 이제는 연예인을 꿈꾸는 청소년도 학창 시절 내내 수신제가(修身齊家)를 되새겨야 할지 모르겠다. 과거에도 ‘주먹 좀 썼다’ ‘동네 일진이었다’는 소문이 무성한 연예인들이 있었지만 아는 사람만 아는 ‘설’로 끝나 타격이 크지 않았다. 그런데 누구나 1인 미디어의 소유주가 된 SNS 시대는 다르다. 재능은 기본이고 인성까지 갖춰야지, 그러지 못하면 어디선가 평판을 ‘와르르’ 무너뜨릴 폭로가 나올 수 있다. 한편으론 청소년 시절 한때의 일탈에 대해 어디까지 책임을 물어야 할지 아리송한 것도 사실이다. ▷학교폭력 피해자는 일생 동안 후유증을 겪는다. 뇌의 전두엽이 스트레스로 손상되면 성인이 돼서도 우울 분노 등 부정적인 감정에 쉽게 빠진다. 이런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한 피해자가 화려한 삶을 살고 있는 가해자를 보면 상처가 덧나기 마련이다. 게다가 고양이를 사랑하는 연예인,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연예인이라는 등의 착한 이미지로 박수를 받으니 분노가 치밀어 올라 SNS란 무기로 ‘보복’을 생각하게 된다. ▷피해자들의 ‘당해봐야 안다’는 심리는 진심 어린 사과를 받지 못한 데서 비롯됐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그때 사과를 받았더라면…’이라고 썼다. 요즘 학교에선 학교폭력 가해자들이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든, 죄의식이 엷어서든 ‘잘못했다’ ‘미안하다’는 사과를 잘 하지 않는다. 청소년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는 연예인이다. ‘학투’에 휩싸인 연예인들이 과거 잘못에 대해 진정성 있게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이제라도 ‘착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으면 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AI’(인공지능)란 용어는 1956년 미국 다트머스대 인지과학자들이 뇌의 기능 연구를 정부에 제안할 때 처음 사용됐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어려운 수학 문제는 풀어도 개와 고양이 얼굴은 헷갈려 버벅거리던 AI가 최근 인간의 마음을 넘볼 정도가 됐다. 400만 년 동안 인간의 뇌에 쌓인 진화의 흔적을 빅데이터와 딥러닝 기술로 따라잡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곧 AI가 인간을 넘어서는 사회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AI는 인간을 학습하면서 성, 인종 등에 대한 인간의 편견까지 그대로 흡수했다. ▷아마존은 2014년부터 활용한 AI 채용 프로그램을 얼마 전 폐기했다. AI가 기존 남성 편향적인 데이터로 입사지원서를 걸러내다 보니 ‘여성’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지원서는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AI가 국민의 대출 연체, 공유자전거 대여 후 반납일자 등 신용정보를 취합해서 개개인의 신용점수를 매기도록 했다가 ‘빅브러더’ 논란을 낳았다. ▷이처럼 불안하게 성장하는 AI를 어떻게 만들고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국가 간 합의가 처음 이뤄졌다. 22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각료이사회는 ‘AI 이사회 권고안’을 36개국 회원국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국제적인 표준이 마련된 셈이다. AI 윤리 권고안에는 △AI는 인간 중심의 가치, 즉 민주주의와 다양성을 존중하도록 설계해야 한다 등 5개 항이 담겼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AI는 인간 사회에 절대 해를 끼치지 않도록 설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가 행인들을 칠 상황이라면 행인 중 누구를 구할 것인가.’ 자율주행차는 이런 문제를 스스로 풀 수 없으므로 미리 AI 알고리즘을 입력시켜야 한다. 이를 물은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랩의 ‘트롤리 딜레마’ 실험에 직접 참여해봤다. 점점 질문의 난도가 높아지며 선택 자체가 고통스러워 중단했다. 설문 참여자 200만 명의 응답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남성보다 여성, 한 명보다 여러 명, 나이가 어릴수록 구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자율주행차 시대엔 노인이면, 혼자 걸어 다니면, 심지어 비만이면 차에 치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것이다. ▷인간은 실수도 잦지만 상황에 따른 대처가 가능하다. 그러나 AI는 입력된 공식에 따라 실수 없이 정답에 해당하는 쪽으로 돌진한다. AI와 살아갈 사회가 유토피아일지, 디스토피아일지는 우리에게 달린 셈이다. AI는 인간의 뇌를 모방한다. 결국 선한 인간이 선한 AI를 만든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귀한 자식은 매를 주고, 미운 자식은 밥을 주라.’ 명심보감 금언(金言)을 새기며 자란 부모 세대는 당혹스러울 법하다. ‘맞고 컸지만 잘 자랐다’는 경험칙에도 반한다. 정부가 민법상 친권자의 징계권 범위에서 체벌을 제외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친권자는 보호 또는 교양을 위해 필요한 징계를 할 수 있다’는 민법 조항이 부모의 체벌을 허용하는 것처럼 해석되므로 이를 개정하겠다는 것이다. 현재는 자녀를 폭행한 부모를 아동복지법이나 아동학대특례법으로 처벌하려 해도 친권자의 징계권을 주장하면 형량이 줄어들기도 한다. ▷아동심리학자들은 ‘사랑의 매’는 없다고 본다. 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체벌을 하면, 그 행동을 즉각 멈추게 할 순 있다. 그러나 아이는 체벌의 순간 공포와 아픔을 피하려는 것뿐이다. 오히려 잘못된 행동을 멈췄을 때 칭찬을 해 줘야 이를 교정할 수 있다. 부모의 감정을 배제한 ‘회초리 5대’ 같은 체벌은 괜찮지 않을까. 아니라고 한다. 지금 내가 아이를 때리는 것이 ‘아이가 게임을 하는 행동’ 때문인지, ‘아이가 게임을 해서 짜증난 나의 감정’ 때문인지 매번 이성을 붙들어 매고 분별하기 어렵다. 더욱이 체벌이 잦고 강해지면 아이는 이를 배운다. 남을 때리고도 벌을 준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세계 54개국이 자녀 체벌을 금지하고 있다. 스웨덴이 가장 먼저 자녀 체벌을 금지한 것이 40년 전이니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일본은 내년 4월부터 자녀 체벌 금지를 명시한 아동복지법을 시행한다. 가정교육을 이유로 아버지들의 심한 폭력으로 아이들이 잇달아 사망하자 여론이 들끓었다. 체벌에 관대한 나라로는 프랑스가 꼽힌다. 몇 년 전 프랑스 출장 중에 길거리서 ‘찰싹’ 소리가 나도록 5세 안팎 아이 뺨을 때리는 엄마를 보고 식겁했던 기억이 있다. 지난해 말 프랑스에서도 자녀 체벌을 금지하는 법안이 하원을 통과했다. ▷2017년 아동학대 사건의 가해자 중 77%가 부모였다. 체벌이 학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부의 난데없는 체벌 금지 방침에 부모들이 움츠러드는 것도 사실이다. 당장 ‘아이에게 꿀밤을 줘도, 엉덩이를 한 대 때려도 경찰조사를 받게 되나’ ‘아이 보고 부모를 신고하란 것이냐’ 하는 반발이 나온다. 정부는 “법상 체벌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선언적인 의미”라고 설명한다. 사회통념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일어나는 체벌까지 일일이 처벌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아이를 때릴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음을 사회 전체가 되새기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