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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사랑하는 작곡가’라는 말이 정말 마음에 듭니다. 20년간 꿈꿔 오던 뮤지컬 ‘엑스칼리버’를 위해 ‘지킬 앤 하이드’에 버금가는 스펙터클한 곡들을 가져왔어요.” 뮤지컬을 잘 모르는 이라도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으로 시작하는 노래를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지금 이 순간’은 서정적 멜로디에 감정을 토해내는 배우의 열창으로 대중적 노래가 됐다. 이 곡을 만든 프랭크 와일드혼(60)이 ‘엑스칼리버’를 들고 한국을 찾았다. 그는 이번 작품에서 38개의 곡과 멜로디를 작곡했다. 뮤지컬 ‘웃는 남자’ ‘마타하리’ ‘드라큘라’ ‘몬테크리스토’ ‘데스노트’의 넘버도 작곡하며 한국에서의 흥행 신화를 써왔다.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3일 만난 그는 “‘엑스칼리버’는 제 아들이 ‘아서왕 신화’를 토대로 한 곡을 써달라고 계속 조르는 바람에 20년 전부터 꿈꿔 왔던 작품”이라며 “젊고 역동적인 한국 관객을 위해 100여 개의 곡 중 38개의 웅장한 멜로디를 엄선했다”고 했다. ‘엑스칼리버’는 색슨족의 침략에 맞서 혼란스러운 고대 영국을 지켜낸 신화 속 영웅 ‘아서왕’의 이야기다. 대규모 전투 장면, 압도적 규모의 무대, 변화무쌍한 캐릭터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와일드혼의 곡과 잘 맞아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수많은 아서왕 신화를 다룬 작품을 접하며 영감을 떠올렸어요. 시대적 고증은 물론이고 무대 위 시공간을 창조하기 위해 가이 리치 감독의 영화와 책을 보며 공부했죠.” 그의 곡들이 특히 한국에서 사랑받는 이유는 뭘까. 그는 한참 고민하더니 ‘번역가의 노력’과 ‘멜로디’라고 답했다. “제 곡의 감성을 한국 정서에 맞게 훌륭하게 번역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단순 직역이 아니라 음절, 운율, 상징성, 흐름까지 고려한 가사는 제가 들어도 좋더라고요. 곡을 만들 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멜로디’를 가장 중시하는데, 라흐마니노프부터 솔 넘치는 흑인음악까지 서정성을 강조한 것이 한국 관객에게 잘 와 닿는 것 같아요.” 그는 곡이 품은 감성을 잘 표현해내는 한국 배우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트리플 캐스팅’이라는 한국 뮤지컬만의 독특함에 대해 “아서왕을 맡은 배우 카이, 김준수, 도겸 모두 작품이 새롭게 해석되는 매력이 있다”고 했다. 이어 “‘드라큘라’를 함께한 김준수는 세계에서 공연되는 ‘드라큘라’의 트렌드를 바꿨을 정도로 작곡가에게도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배우”라고 했다. 한국에 대한 애정만큼 한국 뮤지컬계에 대한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한국 뮤지컬계는 젊고 현대적이지만 역사가 짧아 특징적인 색이 부족하다”며 “한국 작곡가들이 대중가요부터 클래식, 오페라까지 다양한 곳에서 영감을 받아 다채로운 색을 표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뮤지컬 작곡가의 숙명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작곡가는 본인만의 트렁크를 한 대씩 들고 다니며, 당장 곡이 쓰이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쌓아둬야 해요. 언제 제 곡이 ‘지금 이 순간’처럼 감동을 줄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죠?” ‘노루가 살던 개천’이란 아름다운 뜻의 녹천(鹿川)은 사실 죽은 물이다. 천 옆에는 인간의 배설물이 질펀하게 깔려 있고 공장 폐수가 흐른다. 주인공이 그토록 원했던 23평(약 76m²)짜리 아파트는 아이러니하게도 녹천 바로 옆에 있다. 무대 위에서 아파트와 녹천의 똥밭이 중첩되는 순간, 관객은 ‘어떻게 사는 게 맞느냐’고 자문한다. 연극 ‘녹천에는 똥이 많다’는 이창동 영화감독의 1992년 단편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1980년대 안락하게 살고 싶다는 일념으로 아파트 한 채만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홍준식의 이야기다. 그토록 원하던 아파트에 입주한 그는 거실에 소박하게 수족관을 하나 들여놓고 싶다는 소원을 안고 산다. 그런 그의 아파트에 꿈과 이상, 순수함을 상징하는 이복동생 ‘강민우’가 찾아들며 그의 가정과 신념이 흔들린다. 시궁창 같은 녹천에 살면서도 ‘아파트’에 만족하던 준식과 그의 부인은 “우리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냐”며 울부짖고 혼돈스러워한다. 관객에게 끊임없이 ‘삶의 방향’에 대해 질문한다. 작품은 이에 대한 답을 쉽사리 내놓지 않는다. 모든 인물이 걸어온 길을 보여줌으로써 삶의 방향을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드는 데 작품의 매력이 있다. 과거 준식의 부모가 차비를 아끼기 위해 나이를 속이거나 자식에게 시킨 도둑질마저 긍정하는 장면은 비참함보다는 연민을 느끼게 한다. 신유청 연출가는 “가야 할 방향도 모른 채 길 위에서 고개를 숙여 한숨을 내쉬던 그들(부모 세대)을 떠올렸다”고 밝혔다. 파노라마처럼 가로로 길게 꾸며 한국의 근대를 조망하는 듯한 무대 구성이 돋보인다. 무대 안에서는 똥밭, 공사장, 아파트 거실의 경계를 불명확하게 설정해 혼란스러운 개인과 사회를 표현했다. 주요 배역과 함께 무대를 구성하는 ‘1인 다역’의 ‘소리들’ 배역이 이따금씩 등장해 이야기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하지만 이마저도 삶의 가치를 놓고 혼란스러워하는 우리네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볼 수 있겠다. 8일까지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Space111. 3만5000원. 14세 관람가.★★★☆(★ 5개 만점)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동아일보 사설, 칼럼을 통해 독해와 글쓰기 능력을 배우는 ‘독해가 쏙! 생각이 톡!’(동아일보사·1만8000원·사진)이 출간됐다. 최근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87편을 엄선했다. 책은 글의 주제에 따라 크게 6장으로 나뉜다. 글마다 사회적 배경과 시사점을 설명하는 ‘톺아보기’, 키워드와 주제를 다룬 ‘클릭, 핵심 단어 찾아보기’ ‘주장은… 바로 이것!’ 등 코너를 마련해 이해를 돕는다. 아울러 ‘쟁점을 바라보는 여러 시각들’에서는 추가 쟁점을 소개하며 이슈를 폭넓게 이해하는 다양한 관점도 소개한다. 책은 고교생은 물론이고 취업을 준비하는 성인에게도 시사 현안을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지난 2년, 우리 사회는 좀 더 평등해졌을까? 저자들은 한마디로 “‘평등’을 내걸고 출범한 현 정권에서 불공정, 불평등의 골은 더 깊어졌다”고 답한다. 제목이 ‘평등의 역습’인 이유다. 언론계, 학계, 정계 출신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사회 전반에 걸친 정부 정책의 오류를 지적했다. 우려 섞인 조언도 담았다. 구성은 크게 전문가 좌담과 노동, 탈원전, 복지, 최저임금 등 세부 주제별 각론으로 나뉜다. 사회 전반의 문제를 고루 짚은 허심탄회한 좌담과 개별 사안에 대한 저자의 식견이 돋보인다. 현재의 오류를 통해 새롭게 배운다는 측면에서 이들은 책을 ‘실정(失政) 오답 노트’라 칭했다. 동아일보 논설위원,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 출신으로 책의 대표 저자인 이동관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명예총장은 정부가 평등, 공정, 정의라는 세 개념을 등치로 놓고 사회적 혼란을 조성한다고 봤다. 소득 양극화와 사회적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무너졌다는 것도 저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가 진단하는 ‘반기업 반재벌 정서’와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의 탈원전 정책 비판은 전문성을 더했다. 저자들은 조심스레 ‘다음’을 얘기한다. 다가올 총선, 대선에 앞서 보수 가치를 재정립하고 이를 토대로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새로운 논리가 필요하다는 것. 이를 ‘신(新)평등’으로 명명한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모던테이블, 고블린파티 등 5개 한국 현대무용단체의 작품 6편이 ‘코리안 댄스 페스티벌’을 통해 31일부터 6월 7일까지 영국 런던의 ‘더플레이스’에서 관객과 만난다. 작품 6편은 클래식과 현대무용을 결합해 한국만의 독특한 색채가 돋보이도록 구성했다. 이번 공연은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센터스테이지코리아’ 사업의 일환으로 한국의 현대무용을 2022년까지 유럽에 소개하기 위한 취지로 마련됐다. 첫 기점으로 ‘유럽 댄스하우스 네트워크’의 일원이자 영국 현대무용의 허브로 손꼽히는 더플레이스를 선택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정은이 형에게 “노래방 값을 대신 낼 테니 강제수용소를 하나 폐쇄하라”고 말한다. 김정은은 소주 몇 잔을 삼킨 뒤 “내가 국민들을 노예처럼 부린다고 하지만 너희 세계에서는 너희와 다른 모두가 노예”라고 항변한다. 도발적인 설정으로 시작하는 극에서 세상은 발칙하고 유쾌하게 뒤집힌다. 누군가는 “황당무계한 발상”이라며 비판하지만, 극작가 박본(32·사진)은 “연극은 허구를 창조하는 일”이라며 “진지하고 무거운 사건에 공감한다면 이런 상상과 유머마저도 슬프게 다가올 것”이라고 설명했다. 22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한국문학번역원 초청으로 한국을 찾은 그를 만났다. 한국계 독일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박본은 동네 형 같은 김정은과 ‘정신 차린 트럼프’의 모습이 담긴 희곡 ‘으르렁대는 은하수’로 2017년 베를린 연극제 작품상을 거머쥐었다. 대학에서 극작을 공부한 그는 앞서 희곡 ‘젊은 2D 슈퍼마리오의 슬픔’ ‘슬픔과 멜랑콜리’ 등으로 혁신상, 신진 극작가상을 타기도 했다. 어린 시절 잠시 부산에서 살았던 그는 줄곧 독일에서 자랐다. 아시아인으로서 정체성이 작품 활동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그의 이름 ‘본’은 독일어 ‘Bonn’으로 쓰이지만, 실은 뿌리 ‘本’자에서 따왔다. “독일에서는 어딜 가든 아시아인 외모로 규정된다는 점에서 어려움이 컸어요. 이민자 무리 안에서도 주류인 터키인과 구별되는 소수의 한국인이었죠. 독일 극단 안에서도 제 뿌리인 한국 관련 이야기를 기대하는 시각도 분명히 있거든요.” 1년에 한 번 정도 한국을 찾는 그는 “앞으로 연출할 ‘독일’ 프로젝트에 이어 ‘한국(The Korea)’이라는 주제를 담은 극 작업도 하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이어 “연극 안에서 현실 정치나 사회를 바꾸기보다는 가상의 예술 공간 안에서 재밌고 짓궂은 세계를 창조하며 ‘친절하면서 못된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국내 최대 연극축제인 ‘대한민국 연극제’가 다음 달 1일부터 연극의 메카인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열린다. 1983년 지방 연극의 활성화를 위해 시작된 이 연극제는 2016년부터 서울지회가 참여하며 대한민국 연극제로 탈바꿈했으며, 36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에서 열린다. ‘연극은 오늘, 오늘은 연극이다’라는 주제로 전국 예선에 참여한 총 132개 팀 가운데 경연작 16편이 선정됐다. 대구 극단 ‘온누리’의 ‘외출’을 시작으로 광주, 충남, 서울 등에서 참가한 극단의 공연을 소개한다. 아울러 일본, 카자흐스탄 등 해외 극단의 작품도 선보인다. 오태근 대한민국연극제 집행위원장은 “연극제가 블랙리스트와 미투 등으로 침체한 한국 연극계에 새로운 출발의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6월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예술극장 일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도권의 꿈은 현실이 된다.’ 2001년 한국 뮤지컬 산업의 터닝포인트가 된 ‘오페라의 유령’을 비롯해 ‘위키드’ ‘캣츠’ 그리고 최근 막을 내린 ‘라이온 킹’까지. 굵직굵직한 해외 뮤지컬이 국내 관객과 만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설도권 클립서비스 대표(56)에게서 나왔다. 그는 친형인 설도윤 설앤컴퍼니 대표(60)와 함께 까다롭기로 소문난 미국 브로드웨이, 영국 웨스트엔드의 제작진을 만났다. 한국행을 망설이던 이들도 결국 한국 공연을 결심했다.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던 오리지널 내한공연의 꿈도 이들의 손에서 현실이 됐다. 서울 강남구 클립서비스 사옥에서 22일 만난 설도권 대표는 “약 20년 전 뮤지컬계에 입문하며 좋은 공연을 소개하고, 공연시장 성장에 기여하길 꿈꿨다”며 “공연장과 점차 멀어지는 젊은 세대부터 중장년까지 모두를 사로잡는 공연문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가 오랜 시간 품던 꿈 중 하나는 최근 또 하나의 현실이 됐다. 부산에 뮤지컬 전용극장인 ‘드림씨어터’가 들어선 것. 마음껏 공연할 수 있는 공연장이 하나라도 더 필요한 공연계는 크게 반겼다. 최근 드림씨어터를 방문한 설 대표는 “일본에서 백팩을 메고 공연을 보러 온 손님이 ‘공연장이 좋아 다음 공연도 기대된다’는 말을 했다. 20년간 꿈꿔 온 공간에 대해 인정받는 것 같아 감격스러웠다. 기억에 남는 공연 한 편이 누군가의 인생에 큰 추억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이쯤 되면 만족할 법도 하다’는 생각은 오해였다. 그는 ‘공연 얼리어답터 5만 명’이라는 구체적인 꿈을 꾸고 있었다. “좋은 신작을 빠짐없이 챙겨 보는 ‘공연 얼리어답터’는 현재 5000명 이하로 추산돼요. 마니아층을 빼더라도 순수하게 초연을 선택하는 관객층이 5만 명이 될 정도로 시장을 키우고 싶어요. 공연이 문화생활이 아니라 생활문화의 한 코드가 돼야겠죠.” ‘오페라의 유령’으로 유명한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신작 ‘스쿨 오브 락’ 역시 그의 노력 끝에 다음 달 7일부터 서울 샤롯데씨어터에서 관객과 만난다. 그는 수준 높은 해외 뮤지컬을 소개하는 일이 전체 공연시장에도 도움이 된다고 봤다. “작품이 ‘별로’라고 비판하고, 지독하게 낮은 평점을 줘도 괜찮아요. 관객이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는 작품을 실시간으로 접하고, 아티스트들과 소통할 수 있다면 한국 공연의 수준도 높아질 거라 확신합니다. 지금도 가져오고 싶은 작품에는 끝이 없는걸요. 하하.” 6월 7일∼8월 25일. 서울 송파구 샤롯데씨어터. 6만∼16만 원. 8세 관람가.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저는 e메일 보내는 것조차 서툴 정도로 과학기술에 무지한 사람입니다. 다만 연극무대가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늘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을 뿐이죠.” 공연 때마다 ‘르파주 열풍’을 불러일으킨 로베르 르파주(62)가 배우이자 연출로 참여한 연극 ‘887’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그는 태양의 서커스 ‘카(KA)’,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등에서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이미지, 영상, 무대장치를 폭넓게 활용하며 ‘현대 연극의 혁신가’로 평가받는다. ‘기계 장치’라는 뜻의 창작집단 ‘엑스 마키나’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다. 27일 서울 중구 주한 캐나다대사관에서 만난 그는 과학기술을 연구해 혁신적으로 무대에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묻자 뜻밖의 답을 내놨다. “놀라시겠지만 저는 따로 과학기술을 공부해 본 적이 없어요, 하하. 다만 젊은 제작진들과 새로 나온 기술, 애플리케이션에 대해 끊임없이 토론하면서 신기술을 무대로 가져올 방법을 고민할 뿐입니다.” 이번 작품에서도 르파주는 머릿속 기억을 끄집어내듯 디테일한 장치로 무대를 꾸몄다. 그는 “시시각각 변하고 움직이는 무대 위의 아파트, 뇌의 이미지, 옛날 사진, 그림자 효과 등을 사용했다”며 “특히 미니어처를 활용한 고급 기술을 사용하면서도 단순한 인형극처럼 보이도록 만든 점이 포인트”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작품에서 “개인의 기억에서 비롯된 사회적 기억을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극은 르파주가 캐나다 퀘벡에서 열리는 ‘시의 밤’ 40주년 행사에 초청받아 시를 낭송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3쪽 분량의 시가 외워지지 않자 그는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익숙한 장소에 외워야 할 내용을 배치해 재조합하는 기억법을 활용한다. 극의 제목 ‘887’은 그가 살던 ‘퀘벡 시티 머리가 887번지’에서 따왔다. 시를 외우면서 그는 자연스레 1960, 70년대 가족과 이웃에 관한 기억을 떠올린다. 자전적 이야기는 사회적 기억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나아간다. 르파주는 “현재 기억에 비해 또렷한 어린시절의 이야기(history)에서 시작해 대문자 ‘H’로 시작하는 캐나다의 역사(History)까지 짚고 싶었다”며 “계급적 갈등과 마찰이 끊이지 않았던 캐나다 퀘벡의 아픈 모습을 극에 담았다”고 덧붙였다. 작품은 한국과 무관한 이역만리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는 “잘못을 잊고 기억을 잊은 듯 살아가는 이 시대의 한국, 세계 관객에게 기억에 대한 이야기는 중요한 시사점이 될 것”이라고 했다. 르파주는 연극이 당면한 위기에 대해서도 말했다. 넷플릭스 등 새로운 매체에 맞서 연극이 살아 있는 예술이 돼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무용, 춤, 음악, 문학 등 여러 예술 형태를 품고 있는 연극은 ‘모태 예술(Mother Art)’로서 타 장르처럼 다채로운 스토리텔링을 고민하고 변화해야 합니다. 집에서 쉽게 보는 넷플릭스와 비교해 차별화하려면 연극은 삶을 송두리째 바꿀 경험을 제공해야겠죠.” 29일부터 6월 2일까지.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 4만∼8만 원. 8세 관람가.김기윤 기자 pep@donga.com}
팀 쿡의 애플이 죽은 스티브 잡스의 애플을 능가할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본 비평가들의 분석은 잘못된 것으로 판명됐다. 2011년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난 뒤 애플은 세계 최초로 시가총액 1조 달러를 돌파했다. 시장 지배력은 더욱 강화됐다.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애플을 지켜본 미국 정보기술(IT) 전문매체 ‘와이어드닷컴’의 편집장이 팀 쿡의 경영철학, 성격, 성소수자로서의 삶 그리고 최고경영자(CEO)가 된 뒷이야기를 책에 녹여냈다. 생생한 팀 쿡의 발언과 주변인 취재를 묶어 애플의 속살을 들려준다. 저자는 책 전반에서 세상이 아직도 조용한 천재인 팀 쿡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애플이 팀 쿡 덕분에 혁신의 아이콘을 넘어 모범적 기업으로 탈바꿈했는데도 말이다. 팀 쿡이 묻는다. “잡스가 과연 애플을 맡길 후임자를 즉흥적으로 골랐을까요?”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비포장도로를 오가며 사목(司牧)하던 시절을 떠올리면 할 얘기가 끝이 없네요….” 23일 경북 안동교구청에서 만난 두봉(杜峰·본명 르네 뒤퐁·90) 주교는 천주교 안동교구 설정 50년을 뒤돌아보며 감회에 젖었다. 프랑스 출신인 그는 초대 안동교구장을 지냈다. 이날 함께 만난 권혁주 안동교구장(64)은 “신학생 때 처음 뵈었던 두봉 주교님이 맡았던 교구를 이어받아 함께 축하할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안동교구는 두봉 주교에 이어 1990년 박석희 2대 교구장이 임명된 뒤 2001년부터 권 주교가 책임지고 있다.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를 거쳐 1954년 처음 한국에 온 두봉 주교는 “교황청으로부터 ‘한국의 안동교구를 맡아 달라’는 지시를 듣고 정말 기뻤다”고 말했다. 그는 “친한 프랑스 친구 중 한 명이 6·25전쟁에서 전사해 한국은 제게 남다른 의미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두봉 주교는 부임 후 줄곧 ‘지역사회를 도와 함께 성장하는 천주교’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 뜻은 지금도 이어져 안동교구청은 ‘농촌사목’의 대명사가 됐다. 교구의 사정이 열악할수록 두봉 주교는 지역사회와 더욱 밀착했다. 안동이 유림의 본고장인 만큼 유학자들과 자주 교류했다. 직접 만나 보니 유림들은 예상보다 통하는 점이 많았다고 한다. “솔직히 유교는 시대와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유림들을 만나 보니 정말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살고 있더군요. 천주교와 맞닿아있는 지점이 많다고 느꼈죠. 다른 종교를 ‘타 종교’가 아닌 ‘이웃 종교’로 보는 바티칸의 정신과도 일치한다는 걸 새삼 확인했습니다.”(두봉 주교) 국내 16개 교구 중 가장 작은 교구를 꾸려온 만큼 고초도 많았다. 농촌사목은 곧 ‘가난한 교구’를 의미했다. 권 주교는 “신자는 5만여 명으로 늘어났지만 관할지역 인구가 178만 명에서 71만 명으로 줄었고, 본당의 수는 40개에서 17개로 줄었다”고 했다. 사람들이 도시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정치적 탄압을 받기도 했다. 1978년 농민들이 정부의 농업 정책에 반발할 때 두봉 주교도 집회에 참가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추방명령을 받았지만 당시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의 중재로 안동에 남을 수 있었다. 그는 “어려운 농민들을 위해 나섰기 때문에 천주교가 ‘믿을 만한 종교’라는 평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지역사회에서 얻은 신임은 ‘가난하지만 함께 나누는 신앙’으로 발전했다. 권 주교는 “가난은 함께 견디고 나누는 신앙생활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기쁘고 떳떳하게’라는 교구의 사목 표어는 안동교구의 정신을 담고 있다. “표어는 신앙인이 누리는 기쁨과 희망, 양심을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 기쁘고 떳떳하게 삽시다!”(권 주교)안동=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뮤지컬 무대에서는 ‘가수 남태현’의 모습을 지우려고 해요.” 소설 ‘파우스트’를 각색한 체코 뮤지컬 ‘메피스토’에서 악마 ‘메피스토’ 역을 맡은 남태현(25)은 가수의 색을 벗고 악마의 색을 입고 있다.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아이돌 가수로 저를 좋아하던 팬이든 저를 전혀 모르는 관객이든 누가 보더라도 뮤지컬 배우로서 악마 같은 모습을 선보이겠다”고 말했다. 무대에 오르기까지 그는 긴 여정을 거쳤다. 대형 기획사 연습생으로 대중에게 첫 모습을 드러낸 뒤 인기 아이돌로 데뷔했다. 이후 하고 싶은 음악을 위해 직접 밴드를 결성했다. 매력적 음색을 가진 보컬로 활약하며 곡, 가사도 썼다. ‘뮤지션’ 자격으로 TV 예능, 경연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며 가창력을 뽐내고 있다. 그런 그도 뮤지컬 제의를 받았을 때 첫 반응은 “못 할 것 같다”였다. 새로운 장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뮤지컬 ‘헤드윅’을 보고 언젠가는 도전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의를 받으니 제 발성이 뮤지컬과도 맞지 않을 것 같았고 연기도 하려니 부담스러웠죠.” 고민 끝에 그는 결국 도전을 택했다. 매력이 넘치는 ‘메피스토’ 배역 때문이었다. 남태현은 “첫 장면부터 강한 독백을 내뱉는 메피스토는 인간의 선함을 전면 부정하는 캐릭터”라며 “영화 다크나이트 속 ‘조커’, 만화 데스노트의 ‘류크’까지 다양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어 좋았다”고 했다. 다행히 연습을 반복하면서 뮤지컬 무대만이 갖는 뜨거움을 느꼈고 두려움도 자연스레 줄었다. 동료, 선배들과의 각별한 ‘케미’도 그의 첫 무대에 큰 힘이 되고 있다. 그는 “상대역 ‘파우스트’를 맡은 신성우, 김법래, 문종원 배우 같은 대선배들이 연습 때마다 상세하게 조언을 아끼지 않고 도와주시기에 절정의 호흡을 선보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뮤지컬 업계에서는 ‘연예인, 아이돌은 단순히 마케팅용’이라는 비판도 있다. 남태현 역시 이런 꼬리표를 잘 안다. 각오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 “두렵기도 하지만 제 딴에는 정말 이 무대에 모든 걸 걸었습니다.” 25일부터 7월 28일까지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 6만∼14만 원. 8세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객석에서 언제 추임새를 넣어야 하나 망설이지 말고, 흥에 따라 맘껏 추임새를 넣어 주세요. 관객이 소리에 푹 빠졌다는 걸 느끼는 순간 소리꾼의 흥도 폭발합니다!” 창극 ‘심청가’에는 두 명의 심청이 등장한다. 서울 중구 국립창극단 연습실에서 17일 만난 ‘어린 심청’ 역의 민은경(37)과 ‘황후 심청’ 역의 이소연 씨(35)는 이렇게 당부했다. 다음 달 5일 막을 올리는 국립창극단의 ‘심청가’는 지난해 첫 공연 후 올해로 두 번째다. 심청 역은 인당수에 빠지기 전과 후로 구분해 두 소리꾼이 한 캐릭터를 나누어 연기한다. 본래 완창으로 5∼6시간이 소요되는 판소리 ‘심청가’의 좋은 대목과 일부 장면을 선택해 2시간 30분으로 압축했다. 대명창 안숙선이 작창(作唱)과 도창을 맡았으며, 유수정 국립창극단 예술감독도 함께 도창으로 나선다. 이번 공연의 모토는 ‘과유불급’이다. 작품 속 여러 요소를 무리하게 담지 않으려 애썼다. 배우의 역량에 맞게 창극의 기본인 소리에 집중하자는 취지다. 제작진 역시 무대와 소품 등을 최소화했으며, 전통 국악기로만 라이브 연주를 선보여 소리꾼에 최적화된 무대를 꾸밀 예정이다. 민은경은 “두 번째 공연이라 잘하고 싶은 욕심이 더 커졌지만 결국 기본은 소리”라며 “제가 담을 수 있는 그릇 안에서 소리를 표현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이소연 역시 “심청이가 홀로 소리하는 부분은 철저히 개인 역량에 달려 있기 때문에 더 힘 있고, 깊이 있는 소리를 내야 한다”며 “창극 배우로서 훌륭한 소리꾼이 되는 게 먼저”라고 했다. 2013년 함께 창극단에 입단한 두 소리꾼은 평소 서로를 살뜰히 챙기는 언니, 동생 사이다. 다만 심청가에서는 언니인 민은경이 어린 심청을 맡고, 동생 이소연은 성인이 된 황후 심청을 연기한다. 민은경은 이를 “소리꾼으로서 서로가 가진 장점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타고난 목소리와 신체조건에 어떤 소리도 표현할 수 있는 소연이가 황후에 더 적합하다”고 했다. 이에 이소연은 “‘작은 고추가 맵다’라는 말처럼 언니의 소리에 강단과 소신이 담겨 있다. 소녀 같은 체구에도 무대를 장악하는 힘이 뛰어나다”고 말했다. 판소리의 다섯 바탕(춘향가, 흥부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을 공부하느라 “쉴 시간도 별로 없다”는 두 사람은 어느덧 중견 소리꾼이 됐다. 때문에 소리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대중과 쉽게 소통하는 접점을 찾아야 한다는 고민도 안고 있다. 이소연은 “무용에서 몸짓에 감정을 응축해 표현하는 법이 인상적이다”고 했다. 민은경은 “창극에서도 연극, 뮤지컬 등의 무대 디자인을 응용하면 대중이 소리를 더 친근하게 여길 것”이라고 했다. 한참 동안 판소리의 앞날을 논하던 두 사람은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왔다. “소리 공부에는 끝이 없어요. 다른 걸 신경 쓰면 자꾸 소리를 놓쳐요. 결국 기본부터 잘하는 게 답인 것 같아요.(웃음)” 6월 5일부터 16일까지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2만∼5만 원.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대본만 보고도 캐릭터의 옷차림새와 시대상을 떠올리는 이들이 있다. 배우들에게 모든 시공간을 입히는 무대의상 디자이너다. 고대 신화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캐릭터의 외형과 내면을 옷이라는 시각 언어로 표현한다. 이들의 손에서 탄생한 무대 의상은 극 중 배우에게 큰 무기이자 날개가 된다. 최근 공연했거나 개막을 앞둔 작품의 무대의상 디자이너 조문수(58), 이수원(45), 유미진 씨(38)는 “우스갯소리로 무대의상 디자인을 ‘출산한다’고 할 만큼 힘든 창작 과정”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식처럼 소중한 옷이 배우에게 입혀져 빛날 때 희열을 느낀다”고 했다. 무대의상은 과거 무대 디자인이라는 큰 범주에 포함됐다. 그 때문에 무대, 조명 디자인과 함께 의상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무대의상은 점차 개별 전문 분야로 구분됐고 최근 연극, 뮤지컬, 오페라, 창극, 어린이극 등 장르별로 분화되고 있다. 창작뮤지컬 ‘엑스칼리버’를 맡은 조문수 디자이너는 “의상 디자이너의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 프로그램북 한 면에 제 얘기가 가득 담겨 극의 이해를 돕는 걸 보면 감회가 남다르다”고 했다. 무대의상 디자인의 시작은 대본이다. 인물을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정보가 대본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최근 막을 내린 연극 ‘갈릴레이의 생애’의 이수원 디자이너는 “의상 의뢰를 받으면 대본부터 분석한다. 연출, 배우 상견례는 물론 대본 리딩에도 참석해 콘셉트를 잡고 끊임없이 자료 조사와 연구를 한다”고 설명했다. 이후 시제품 제작, 배우 피팅, 리허설을 거치며 의상이 수정된다. 사고를 대비해 여벌의 옷도 만든다. 대형 작품의 경우 작업에만 1년이 걸리기도 한다. 무대의상 디자인은 일반 패션디자인과 달리 ‘복합예술’의 특성을 갖는다. 옷 자체만 주목받기보다는 무대와의 조화를 고려해 배역을 빛나게 해야 한다. 조 디자이너는 “옷으로 배경을 설명하고 캐릭터를 완성하기 때문에 옷에 대한 태도가 패션디자이너와 다르다”고 했다. 작품별 특징에 따라 작업은 천차만별이다. 공연 중인 아동 뮤지컬 ‘로빈슨 크루소’를 맡은 유미진 디자이너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맡게 직관적, 동화적인 원색을 주로 사용했다. 캐릭터도 선명하게 드러내고 안무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엑스칼리버’에서는 70여 명이 등장하는 전투 장면을 위해 144벌의 옷을 제작했다. 무대의상 디자인 환경은 해외에 비해 아직 열악하다. 전공학과도 많지 않다. 예산 문제도 늘 발목을 잡는다. 그럼에도 이들이 끊임없이 옷감을 손질하는 이유는 뭘까. “첫 공연이 끝나는 그 순간 때문에 합니다. 힘든 것도 다 잊게 되거든요.”(조문수) “캐릭터에 나만의 영감을 표현할 자료나 이미지를 조사하고 퍼즐처럼 맞춰갈 때 가장 행복해요.”(이수원) “내가 만든 옷이 무대에 올랐을 때 ‘이렇게 아름다웠나’ 싶을 때가 있답니다.”(유미진)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남북 갈등은 이탈리아에도 있다? 1930년대 반파시즘 운동으로 이탈리아 남부 ‘알리아노’로 유배된 저자가 이탈리아 내 남북 갈등을 다룬 정치·사회 에세이집. 유배지에서 의사, 화가로 활동한 저자는 체험을 토대로 풍요로운 북부와 달리 척박한 남부의 모습을 생생히 그렸다. 책의 제목은 내용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문명세계를 상징하는 ‘그리스도’가 알리아노 인근의 문턱 ‘에볼리’에서 멈췄다는 의미로, 문명의 수혜를 받지 못한 ‘야생의 남부’를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책이 단순히 남북을 대조하거나 비극적 모습만을 강조하진 않는다. 오히려 문명과 대비되는 남부인의 일상을 꾸준히 관찰한 뒤 생명력 넘치는 존재로 표현했다. 계몽적 관점에서 야만을 재단하지 않았던 작가의 시각만으로도 참신한 맛이 있는 작품이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몸으로 이렇게 많은 걸 표현할 수 있었나 싶어 무용수인 저희도 매번 놀라요. 몸을 파괴하는 듯한 피지컬 무용의 ‘끝판왕’을 한번 느껴보세요.” 세계 최정상급 현대무용단으로 꼽히는 이스라엘 키부츠현대무용단에는 춤추는 ‘코리안 트리오’가 있다. 김수정(46), 석진환(36), 정정운 씨(24)다. 이들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일대에서 16일부터 열리는 제38회 국제현대무용제의 개막작 ‘Asylum(피난처)’ 공연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서울 대학로예술극장에서 15일 만난 이들은 “고국에서 ‘키부츠표’ 공연을 선보일 수 있어 영광”이라며 “지독하게 몸을 혹사하는 역동적 공연에 관객도 놀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외국에서 활약하는 무용수가 늘고 있지만 해외 무용단원이 되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그럼에도 코리안 트리오가 이스라엘로 향한 건 ‘호기심’ 때문이었다. 2012년 입단한 김수정은 “집요하게 몸동작을 쪼개고, 파고드는 이스라엘 무용을 체험하고 싶었다”고 했다. 국립현대무용단원으로 활동하던 석진환은 “몸이 만들어낼 수 있는 아름다움과 무용의 본질을 더 공부하고 싶었다”며 2015년 입단한 이유를 설명했다. 정정운은 호기심을 품고 도전해 무용단에서 2017년부터 활약하고 있다. 이들이 선보일 ‘피난처’는 처절함을 표현한다. 세계 초연작으로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한 유대인 출신 라미 베에르 예술감독의 자전적 이야기가 바탕이 됐다. 난민으로서 겪은 정체성 혼란과 불안, 핍박을 표현하기에 역동적이고 과도한 몸짓이 강조된다. “예술감독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턱을 들라’는 겁니다. 작은 동작에서도 턱을 치켜들고 팔, 다리 등 몸의 선을 최대한 크게 활용해요.”(김수정) 무용단에서 이들은 “서로 너무 다르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같은 한국 출신임에도 저마다 확고한 스타일을 춤에 녹여내기 때문이다. 김수정은 “한국 무용수가 개성이 강한 데다 핍박받은 역사로 인해 이스라엘인과 비슷한 정서적 공감대가 있다고 생각해 예술감독이 우리의 표현력을 좋아한다. 이는 스스로 끊임없이 한계에 도전할 동력이 된다”고 했다. 한국 공연 후 폴란드, 프랑스, 미국 공연을 이어가는 이들은 고된 일정에도 자신감을 내비쳤다. 무용단에서 체득한 ‘멘털 관리’ 덕분이다. 정정운은 “무용은 몸으로 말하는 예술이라지만 사실 정신이 지배한다”며 “‘머리가 심장’이라는 무용단의 정신을 늘 되새기며 춤출 것”이라고 말했다. 16, 17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3만∼7만 원.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배우 장현성(49)이 연극 ‘킬 미 나우’로 7년 만에 연극 무대에 돌아왔다. 늘 악역에 익숙한 그는 이번 작품에서 장애 아들을 돌보는 아버지 제이크 역할을 맡았다. 한때 촉망받는 작가였던 제이크는 17세 지체장애 아들 ‘조이’를 돌보려 작가로서의 성공을 포기한 채 인생을 헌신한다. 배우들은 장애, 죽음, 존엄사 등 결코 쉽지 않은, 묵직한 화두를 관객에게 던진다.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한창 연습 중인 그를 9일 만났다. 오랜만에 공연을 앞둔 그는 잠도 4시간으로 줄이고 살도 6kg이나 빠졌다고 했다. 다소 긴장한 기색을 내비치던 그는 작품 얘기를 시작하자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연극은 다른 매체보다 감정 소모가 훨씬 크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죠. 한 인간의 극단적 감정을 두 시간 안에 꽉꽉 뭉쳐서 진한 밀도로 표현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몸은 쉬어도 머리는 항상 작품 생각에 쉴 틈이 없어요. 상대와의 호흡도 맞춰 보려면 잠은 당연히…. 하하.” 바쁜 작품 활동 중에도 그가 연극에 참여한 건 “순전히 개인적 욕심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평소 좋은 연극을 접하면 혼자 ‘리스트’로 만들어 적어 둔다. ‘킬 미 나우’ 역시 그 리스트에 있던 작품이다. “2016년 초연을 접하고 피가 끓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공연 후 대본도 보여 달라고 할 정도로 ‘이 작품은 꼭 해야겠다’는 생각을 놓지 않았죠. 장애, 인간의 존엄성 등 사회적, 개인적 이슈를 던지는 복잡다단한 내용이지만 이를 잘 정돈해 표현하는 게 또 배우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장현성은 가족 구성원 모두가 사회에서 소외된 비극적 ‘대안가족’의 가장을 연기한다. 그의 생애나 경험을 통해 감정을 끌어내기 쉽지 않은 어려운 역할이기도 하다. 그는 “살면서 겪지 못한 어마어마한 비극을 연기해야 하는 저 역시 작품을 통해 인간 본질에 대한 숙연함을 배웠다”고 말했다. 아울러 극 중 장애에 대한 대사 때문에 의학적 정보를 찾아보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했다. 서울예대에서 연극을 공부한 그는 작품을 준비하며 대학 때 배운 ‘연극개론’ 책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는 “이 작품은 대학 때 배운 연극개론에 나온 내용 그대로 감정의 순도가 짙고 카타르시스를 통해 감정을 정화하는 연극의 본질에 충실한 이야기”라며 “배우의 흐름을 차근차근 따라가 카타르시스를 느껴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7월 6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4만∼5만5000원.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지독한 추남(醜男)인데 똑똑하고, 예쁜 여자인데 머리가 나쁘다? 그 추남과 미녀가 마주한다면? 편견으로 가득한 사회를 향해 연극 ‘추남, 미녀’는 이 같은 발칙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20세기 프랑스 파리에 사는 두 주인공 데오다와 트레미에르는 어렸을 때부터 남들보다 추하거나 예뻐서, 혹은 남들과 조금 달라서 자신을 오롯이 받아들이지 못한 채 산다. 극은 평균에서 조금 벗어난 이들의 성장 과정과 성인이 되어 만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관객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집중하게 된다. 벨기에 출신의 프랑스 작가 아멜리 노통브의 동명 소설을 세계에서 최초로 무대에 올렸다. 작품을 가장 잘 표현하는 수식어는 ‘톡톡 튀는 매력’이다. 이는 전적으로 20여 개의 캐릭터를 쉴 틈 없이 연기하는 두 배우 덕분이다. 데오다 역의 백석광과 트레미에르를 맡은 정인지는 주인공의 가족, 학교 친구 등 주변 인물을 90분 동안 유쾌하고 뻔뻔하게 소화한다. 빠른 배역 전환에도 전개가 비교적 자연스럽다. 특히 백석광은 추함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분장이나 우스꽝스러운 모습 대신 구부러진 신체로 심리적 위축을 표현하는 참신한 방식을 택했다. 다채로운 색으로 가득 찬 산뜻한 연출도 보는 맛을 더한다. 작품 속 핵심 키워드인 ‘새’와 ‘보석’을 표현하기 위한 다양한 시각, 영상 효과는 미셸 공드리 표 영화를 떠올리게 할 정도다. 원작의 맛도 살리며, 무대 미학을 감각적으로 구현했다. 뻔한 추남과 미녀의 로맨스와는 달라도 “겉모습보다 중요한 건 나 자신이야”라는 흔한 교훈적 메시지에서 크게 벗어나진 못했다. 그럼에도 봄처럼 따뜻하게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19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2만∼4만 원. 14세 관람가.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대학로의 터줏대감으로 17년간 연극계를 지키던 ‘설치극장 정미소’가 6월 공연을 끝으로 폐관한다. 경영난, 수익성 악화가 주된 이유다. 극장을 운영 중인 배우 윤석화 씨(63)는 “공연을 하고 싶어도 늘 무대가 없어 고민하던 수많은 연극인들을 위해 조그마한 공간이라도 맘껏 내주고 싶었다”며 “극장을 운영한다고 했을 때 임영웅 선생님이 ‘바보야, 미련하게 극장은 왜 하냐’며 나무라던 기억이 난다”고 답했다. 서울 종로구 이화장길에 위치한 설치극장 정미소는 2002년 윤 씨와 건축가 장운규 씨의 손에 탄생했다. 이들은 목욕탕으로 쓰다 남겨진 3층짜리 폐건물을 예술 공간으로 바꿔보자는 데 뜻을 모아 건물을 사들였다. 극장 이름인 ‘정미소’는 “쌀을 찧어내듯 예술의 향기를 피워내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개조된 건물은 소극장, 갤러리, 공연장 등 다양한 공간으로 쓰이며 실험적인 공연을 올리는 개성 있는 소극장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극장 내부와 천장에는 17년간 극장을 거친 작품과 박정자, 손숙 씨 등 원로배우의 작품 포스터가 붙어 있다. 문화공간으로 숨쉬어 온 세월이 짙게 묻어난다. 192석 규모의 정미소는 다른 소극장과 달리 무대의 높이가 6m가 넘기 때문에 다채로운 실험을 시도하는 작품들이 오를 수 있었다. 윤 씨가 월간지 ‘객석’ 발행인을 지낼 때 객석 사무실이 정미소 안에 있었다. 하지만 그가 개인 자금을 투자해도 수익성 악화를 개선하지 못해 2013년 객석을 매각했다. 정미소 역시 같은 운명에 처했다. 극장은 마지막 공연까지 약 한 달을 남겨두고 있다. 12일에는 박정자 씨의 ‘꿈속에선 다정하였네’가 공연을 마쳤다. 다음 달 11일부터 22일까지는 굿바이 공연으로 윤 씨의 모노드라마 ‘딸에게 보내는 편지’가 무대에 오른다. 극장이 가진 상징성 때문에 연극계에서는 정미소의 폐관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이은경 연극평론가는 “한태숙 연출가의 ‘서안화차’, 박상현 연출가의 ‘자객열전’ 등 숱한 의미 있는 작품들이 설치극장 정미소를 거쳐 갔다”며 “독특한 아우라를 갖고 있던 극장이 사라져 아쉽다”고 말했다. 황승경 연극평론가는 “대학로 연극계의 상징적 공간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17년간 극장을 지킨 윤 씨 역시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굉장히, 굉장히 어려웠다”며 “건물 매각 후에는 매입자가 연극에 엄청난 뜻을 갖고 있지 않는 이상 혹은 연극쟁이나 미친 사람이 아닌 이상 소극장이나 연극인을 위한 공간으로는 운영되지 않을 것 같다”며 웃었다. 겉으로는 유쾌한 그의 웃음 속에는 자식을 떠나보내는 듯한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정미소로 대표되는 대학로 소극장은 연극인들에게 애증이 담긴 존재다. 윤 씨는 “오랜 시간 소극장을 운영해 본 사람은 ‘극장을 지금이라도 불태워 버리고 싶다’고 농담할 정도로 늘 애증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는 시원섭섭한 감정을 담아 마지막 말을 했다. “영원한 건 없어요. 그래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해요.”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100명의 국민이 독립운동가에게 쓴 편지 모음집. 독립운동가 후손부터 현역 의원, 시민운동가 등 다양한 인물이 100명의 선열에게 감사와 존경을 담아 편지를 썼다. 모든 편지에는 독립운동가의 생애와 공적에 대한 짤막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어 100인의 위인전을 읽는 듯 흥미롭다. 함께 수록된 풍부한 자료 사진은 그들도 우리처럼 한 시대를 살아간 한 인간이었음을 보여준다. 책은 독립운동가의 삶을 되새기고 널리 기려야 한다는 당위적 메시지는 물론이고 독립운동가의 직계후손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생생한 내용도 담겼다. 임시정부 문화부장인 김상덕 열사의 아들인 김정륙은 “가난함에 술 한 잔도 망설이던 아버지 눈빛” “아버지 코끝에 맺힌 투명한 콧물” 등 애절한 가족의 이야기를 전한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