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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과 교사들이 쌓아올린 마음의 벽은 아파트 콘크리트 벽보다 두껍다. 두꺼운 벽을 없애려는 노력에도 이들의 외로움은 더 커져만 간다. 연극 ‘철가방추적작전’은 서울 강남에 있는 한 중학교가 배경. 학교를 벗어나려는 청소년들과 이들을 학교로 데려오려 고군분투하는 교사가 중심인물이다. 학생이 학교 안팎에서 겪는 차별을 통해 계급화된 교육 시스템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김윤영 작가의 동명 단편소설을 각색했으며 올해 두산아트센터가 선보인 ‘아파트’ 시리즈 가운데 첫 작품이다. 겉으로 평범해 보이는 이 학교는 ‘아파트’라는 큰 가상의 벽으로 나뉘어 있다. 공공임대 아파트와 민간 아파트에 사는 학생들은 한 교실에 지내면서도 알게 모르게 서로를 ‘○○ 아파트 출신’으로 규정한다. 아파트 브랜드에 따라 학생의 계급도 결정된다. 누군가는 교실에서 잘 가르치는 학원을 고를 때, 다른 누군가는 돈을 잘 주는 배달 아르바이트를 고민한다. 배달 오토바이를 모는 학생이 “가게 사장님은 내가 어디 사는지 묻지 않고 똑같이 대해준다”고 말하는 장면이 아픈 여운을 남긴다. 역설적으로 관객은 교실 안에 묘하게 흐르는 이질감 속에서도 ‘사회의 축소판’을 보는 듯한 익숙함과 마주한다. 무거운 주제와 달리 작품은 ‘활극’을 연상시킬 정도로 역동적이다. 학생을 뒤쫓는 교사의 추격 장면은 박진감이 넘친다. 세련된 무대 연출과 배우들의 실감나는 중학생 연기는 2019년 한 중학교 교실을 가져다 놓은 듯 현장감이 뛰어나다. 때론 여느 학원, 청춘물처럼 유쾌한 웃음도 던진다. 극의 소재와 줄거리 자체는 상투적이지만 원작 소설이 탄생한 약 20년 전과 오늘날 교실 모습이 크게 달라지지 않음을 깨닫는 순간 씁쓸함은 커진다. 특히 어느 학생이든 동등하게 가르쳐 왔다고 자부한 교사 ‘봉순자’는 본인도 모르게 졸업앨범비 도난 사건의 범인을 임대 아파트 출신 ‘정훈’으로 생각한 장면에서 고개를 떨어뜨린다. 현실 사회의 폐부를 묵직하게 찌른 작품. 강지은 김효숙 이철희 전수지 등 출연. 다음 달 4일까지.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Space111. 전석 3만5000원. 14세 관람가. ★★★(★5개 만점)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습니다) ‘헬조선’ ‘흙수저’를 외치는 요즘 아이들의 마음속으로 한 발 다가갈 수 있는 지침서다. 정신건강의학 전문의이자 청소년 정신 치유 전문가인 저자는 수많은 아이들을 만났다. 그 결과 요즘 청소년의 마음고생을 “초등학교 때는 수치심을 배웠고, 중학생 때는 외로움에 시달렸고, 고등학생 때는 불안에 휩싸였다”고 정의 내렸다. 과도한 경쟁과 서열화에 지친 청소년의 심리를 폭넓게 분석했다. 저자는 어른 세대와는 너무도 다른 아이들의 심리 상태와 특징을 구체적으로 알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배고픔보다 외로움이 더 큰 상처다” “집밥보다 편의점 도시락이 더 맛있다” “포기는 빠르고, 다양하다”와 같은 쉽고 풍부한 사례와 키워드가 이해를 돕는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비명이 절로 나올 정도로 고통스럽지만 종아리 근육을 꼭 풀어줘야 해요. 의상을 갈아입을 땐 2, 3명씩 붙어 도와주느라 진짜 정신이 없어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을 떼어다 옮겨놓은 듯한 무대 디자인, 다채로운 원색의 의상·장신구와 백조들의 화려한 군무까지. 유니버설발레단(UBC)의 ‘백조의 호수’가 화려한 볼거리로 관객의 시선을 잡아끄는 동안 무용수들은 무대 뒤에서 ‘조용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들은 근육 경련이 생기지 않도록 몇 초의 휴식시간 동안 종아리, 허벅지 근육을 열심히 주무른다. 한쪽에서는 동료를 향해 ‘실수하지 않았으면…’ 하는 묵언의 응원 기도도 이어진다. 공연 중인 무용수가 집중할 수 있도록 무대 뒤편에서는 조용함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4년째 주역 ‘오데트’ 역을 맡고 있는 홍향기 발레리나(30)를 5일 만나 ‘백조의 호수’ 무대 뒤 이야기와 관전 포인트에 대해 알아봤다. 우선 그가 꼽은 조용한 전쟁의 순간은 2막 1장에서 솔로로 흑조 연기가 끝난 직후다. “오데트는 주로 왼쪽 다리로만 중심을 잡고 서 있거나 회전하거든요. 2막에서 흑조 파드되(2인무) 연기와 솔로 연기를 펼치고 난 뒤 한 다리로 연속 회전하는 푸에테 장면 이전에 딱 30초간 쉬는 시간이 주어져요. 비명을 지를 정도로 고통스럽지만 앉아서 계속 종아리를 주무르고 주먹으로 때립니다. 매년 공연 때마다 이 순간이 가장 고비죠.” 잠깐의 휴식이자 전쟁 같은 순간이 지나면 무용수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대로 돌아온다. 그는 “후반부로 갈수록 안무가 격렬해져 숨소리도 거칠어지지만 백조의 자태가 흔들리지 않도록 한결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화려한 소품, 의상이 활용되는 작품인 만큼 의상을 갈아입는 과정도 만만치 않다고 했다. 주연 외에 많게는 3, 4개 의상을 입는 무용수도 있기 때문에 여러 명의 스태프가 붙어 무대의상을 바꿔 입도록 분주하게 돕는다. 백조와 흑조를 오가며 달라지는 오데트의 표정 연기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는 “1막 등장장면에서는 최대한 애처로운 연기에 집중하다 2막에서 흑조를 연기할 땐 요염하면서도 도발적인 느낌을 표현하려 했다”고 밝혔다. 다른 배우들도 표정 연기에 공을 들여 발레단 내 ‘표정연기 특별훈련’도 진행됐다. 개인적으로 제일 애정이 가는 장면을 묻자 ‘솔로 파트’보다는 단원들이 함께 만드는 ‘1막 2장 호숫가 전경’ 장면이라고 답했다. “여러 무용수가 함께 만드는 웅장한 장면인데 무용수 한 명 한 명의 움직임과 숨결에 집중하면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어요. 올해 새로 추가한 흑조와 백조의 군무 장면은 물론 이번에 처음으로 바꾼 ‘새드엔딩’도 뭉클함을 선사할 겁니다.” 13일까지.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 1만∼10만 원.김기윤 기자 pep@donga.com}
“30년 넘게 무대에 올랐지만, 공연 직전까지 늘 배앓이와 대사를 까먹는 악몽에 시달려요. 많은 배우들이 이에 시달리는 걸 보면 일종의 직업병이죠. 그래서 연극 무대가 ‘늘 집처럼 편하다’는 말은 절반은 거짓말입니다. 하하.” TV와 스크린을 오가며 ‘마 부장’과 ‘악녀’ 역할로 각각 대중에게 존재감을 드러낸 배우 손종학(52)과 서이숙(52)이 연극 무대로 돌아왔다. 2일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에서 만난 두 사람은 10일 막을 올리는 ‘인형의 집: Part 2’ 막바지 연습에 한창이다. 무대에 복귀한 소감을 묻자 손종학은 “거창한 소감은 필요 없다. 운 좋게도 제 스케줄이 잘 맞아 무대로 돌아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서이숙은 “실은 둘 다 심리적 압박감 때문에 ‘장 트러블’로 고생하고 있다”며 “흔히 말하는 ‘군 입대 꿈’처럼 무대에서 머리가 하얘지거나 무대 의상을 잃어버리는 악몽과 매일 밤 싸우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들이 심혈을 기울이는 ‘인형의 집…’은 국내 초연 작. 페미니즘 연극의 고전으로 꼽히는 1879년의 ‘인형의 집’을 모티브로 미국 극작가 루커스 네이스가 2017년 새로운 스토리를 입혔다. 결혼 제도의 모순을 느끼고 가출한 여성 ‘노라’의 15년 뒤 모습을 상상해 극에 녹여냈다. 노라가 가출한 뒤 고생했을 거란 막연한 편견과 달리 작품에서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승승장구한다. 돈도 많이 벌고, 연하 애인과 사랑에 빠진다. 서이숙은 “극 초반 노라가 집에 돌아오는 장면에선 멋지고 당당한 여성을 표현할 것”이라고 했다. 이혼 절차를 마무리하기 위해 남편과 마주한 노라는 딸과 유모도 만나며 설전을 벌인다. 서이숙과 우미화 배우가 노라를 맡았고, 손종학과 박호산 배우가 남편 토르발트를 연기한다. 두 배우는 작품의 방점을 ‘소통’에 찍고 있다. 서이숙은 “사람들이 갈등하는 건 결혼 제도의 모순이나 가정 내 성적 불평등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 근본적으로 소통의 부재 때문”이라며 “서로 ‘대화하는 법’을 모르는 현대인에게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손종학은 “그동안 기득권 안과 밖에서 살아온 남성과 여성이 소통하지 못했던 상황들을 표현하려고 한다”며 “외국 작품임에도 한국 관객들에게 와 닿는 바가 더 클 수도 있다”고 했다. 15년 만에 만난 노라와 가족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에 두 배우는 “결말은 열려 있다”고 답했다. 제작진과 배우들은 실제 연습에서도 결말의 방향을 두고 끝없이 고민했다. 손종학은 “부부가 전혀 변하지 않을 수도 있고, 적어도 서로의 입장 정도는 이해했을 수도 있다”고 했다. 서이숙은 “대화를 나누고 소통하려 했다는 것만으로도 ‘첫출발’은 한 것”이라며 “관객들 역시 ‘저 남자의 생각이 과연 변했을까’ ‘사회적 장벽들이 사라졌을까’ 등의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작품 속 캐릭터에 이입해 말을 이어가던 두 배우는 “근데 살아보니 사람은 절대 쉽게 안 변하는 것 같다”며 크게 웃었다. 30년 넘게 배우로 살아온 두 사람에게도 절대 변하지 않는 습관이 있다. 연습 기간 중엔 맡은 캐릭터처럼 사는 것이다. 서이숙이 “작품의 화두가 소통인 만큼 어느 순간 술자리에서 말을 줄이고 남의 얘길 듣는 저 자신을 발견했다”고 하자, 손종학은 “어딜 가든 온전히 즐기질 못하고 늘 배역에 묶여 있는 게 배우들의 직업병이자 숙명”이라고 했다. 28일까지. 서울 강남구 엘지아트센터. 3만∼6만 원.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알아선 안 될 것을 알아버린 자, 혹은 남들보다 너무 빨리 진실을 마주한 자. 교회의 교리가 세상의 진리이던 시기에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는 수세기 동안 예술 작품의 소재로 쓰였다. 그만큼 모순적 시대상에 맞선 매력적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국립극단의 ‘갈릴레이의 생애’는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집필한 갈릴레이 이야기를 토대로 21세기 한국에 ‘인간 갈릴레이’를 되살려낸 작품이다. 연구가 종교 교리와 맞지 않아 재판정에 선 갈릴레이는 학자로서의 양심과 불합리한 현실 사이에서 고뇌한다. 그는 교회 권력에 굴복하는 듯하지만, 결국 마음에 묻어둔 진실을 책으로 써 세상 밖으로 이를 알리는 데 성공한다. 작품이 말하는 한 인물의 생애는 배우의 헌신적 연기로 완성됐다. 갈릴레이 배역의 배우 김명수는 구시대에 두 발을 딛고 있지만 가슴은 새 세상을 꿈꾸는 ‘경계인’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두 점 사이를 직선으로 연결할 수 없다면 이를 돌아서라도 연결하라”는 말이 그의 생애를 적확하게 표현한다. 극 초반부 갈릴레이가 고뇌하는 장면이 다소 늘어지기도 하지만, 4시간 분량의 원작을 압축한 점을 고려하면 이는 납득할 만하다. 역동적인 장면은 없으나 빼어난 무대 연출이 이를 보완한다. 원형의 무대 위를 도는 장치와 인물은 갈릴레이의 인생과 우주를 표현했다. 상단 스크린에는 그가 망원경으로 바라본 태양, 목성의 영상을 띄워 현장감을 더했다. 무대 중앙에 위치한 배 모양의 장치는 마치 관객을 우주 속 항해로 끌어들이는 듯하다. 김명수 이호재 강진휘 김정환 등 출연. 4월 28일까지.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 2만∼5만 원. 14세 관람가. ★★★(★5개 만점)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동아일보사가 해마다 식목일에 개최하는 ‘무궁화 묘목 나눠주기’ 행사가 올해도 5일 시민들을 찾아간다. 이날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동아미디어센터 앞에서는 무궁화 묘목 2만 그루를 시민에게 무료로 나눠 준다. 무궁화 보급 행사는 일제강점기 35년간 설움 받았던 나라의 꽃인 무궁화를 널리 알리고 가꾸기 위해 동아일보사가 1985년에 시작했다. 이 행사는 동아일보 창간 100주년을 맞는 2020년까지 계속된다. 이날 행사에는 영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활동 중인 인기 배우 이연희 씨와 김민종 씨가 참여해 묘목을 나눠 준다. 행사는 5일 오전 11시 반부터 오후 3시까지 열리며 배우 이연희, 김민종 씨는 낮 12시부터 오후 1시까지 스페셜 게스트로 참여한다. 묘목은 개인별 5그루, 단체는 10그루를 선착순으로 받아 갈 수 있다. 묘목을 소지한 관람객은 동아미디어센터 옆 일민미술관 신문박물관에 무료로 입장해 신문 제작 체험 이벤트에도 참여할 수 있다.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5번 출구와 지하철 1, 2호선 시청역 4번 출구(청계광장 방면)를 이용하면 행사 장소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동아일보사가 해마다 식목일에 개최하는 ‘무궁화 묘목 나눠주기’ 행사가 올해도 5일 시민들을 찾아간다. 이날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동아미디어센터 앞에서는 무궁화 묘목 2만 그루를 시민에게 무료로 나눠준다. 무궁화 보급 행사는 일제강점기 35년간 설움 받았던 나라의 꽃인 무궁화를 널리 알리고 가꾸기 위해 동아일보사가 1985년에 시작했다. 이 행사는 동아일보 창간 100주년을 맞는 2020년까지 계속된다. 이날 행사에는 영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활동 중인 인기 배우 이연희 씨와 김민종 씨가 참여해 묘목을 나눠준다. 행사는 5일 오전 11시 반부터 오후 3시까지 열리며 배우 이연희, 김민종 씨는 정오부터 오후 1시까지 스페셜 게스트로 참여한다. 묘목은 개인별 5그루, 단체는 10그루를 선착순으로 받아 갈 수 있다. 묘목을 소지한 관람객은 동아미디어센터 옆 일민미술관 신문박물관에 무료로 입장해 신문 제작 체험 이벤트에도 참여할 수 있다.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5번 출구와 지하철 1, 2호선 시청역 4번 출구(청계광장 방면)를 이용하면 행사 장소를 쉽게 찾을 수 있다. 02-2020-1780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수십만 병사와 장군들을 호령하는 삼국지 촉나라의 제갈량. 그는 무대 위에서 병사들 목말을 타고 전장의 말 위에 오르는 장면을 연출한다. 곁에서 그를 호위하는 8척 장신의 장군 조자룡. 그가 병사들에게 내뱉는 노랫말(판소리)은 어느 때보다 위엄이 넘친다. 그런데 뮤지컬 ‘적벽’에선 두 장수의 역할을 모두 여성 배우들이 맡는다. 공연 무대 위에서 ‘성역(性域)’이 사라지고 있다. 최근 성 역할 고정관념을 깨는 ‘젠더 프리·크로스 캐스팅’ 작품이 잇따라 막을 올렸다. 젠더 프리·크로스 캐스팅이란 기획 단계부터 역할에 성별을 따로 구분하지 않거나 배역을 남성, 여성이 번갈아가며 연기하는 것을 뜻한다. 연극 ‘함익’도 대표적인 케이스. 재벌 2세에 대학교수 신분으로 남부러울 것 없이 사는 30대 여성 함익. 그러나 정작 그녀의 마음은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다. 모든 걸 가졌지만 늘 심리적 고독으로 고뇌하는 자. 어디서 본 듯 익숙한 이 배역은 셰익스피어 고전 ‘햄릿’의 한국형 캐릭터다. 남성 배역으로 굳어져 있던 햄릿은 무대에서 여성으로 다시 탄생했다. 뮤지컬 ‘해적’은 심지어 모든 배역을 혼성으로 캐스팅했다. 무대에 등장하는 2명의 배우가 각각 1인 2역을 소화하며 기존 해적의 이미지에서 탈피했다. 연극 ‘B클래스’는 기존 캐스팅을 뒤집은 ‘성별 반전’ 사례라 할 수 있다. 2017년 초연 당시엔 남성 배우들만 무대에 올랐다. 하지만 이를 깨고 같은 배역에 여성 배우들을 캐스팅해 현재 남성과 여성 버전, 두 가지 형태로 공연된다. 최민우 프로듀서는 “사실 여성이 중심이 되는 무대를 먼저 만들고 싶었지만 ‘남자는 이렇고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지기로 했다”며 “성별에 따른 미세한 장면, 대사 차이는 있지만 큰 틀에서 작품이 말하는 메시지는 같음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배우들은 무대 위 이 같은 변화를 반기는 분위기다. 초기엔 역할 이입에 어려움을 표하던 이들도 배역의 성별 구분보다 내면적 인간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적벽’의 제갈량을 맡은 윤지수 배우는 “처음엔 ‘남성’이란 역할에만 집중해 연기하느라 다소 어색했지만, 이젠 극 중 하나의 캐릭터 자체로 받아들여 연기하니 훨씬 자연스러워졌다”고 말했다. 한국형 햄릿인 ‘함익’의 최나라 배우는 “나는 여성이니까 다르게 연기해야겠다는 생각은 없고 내면의 고독에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수년 전부터 늘어난 ‘젠더 프리’ 캐스팅은 성공적이란 평가가 많다. 하지만 기계적인 성 역할 전환에 앞서 작품의 질에 대한 고민이 동반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관객들의 젠더 프리 캐릭터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배역도 주변 인물로 한정돼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연 평론가인 원종원 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교수는 “젠더 프리 캐스팅 자체가 성 역할 고정관념 개선에 도움을 주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돼선 안 된다”며 “캐스팅이 관객의 흥미를 자극하고 극의 완성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평생 종잇조각만 붙들고 세상과 싸우는 미친 여자.” 사회와 단절돼 원고에만 매달려 사는 한 노파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에바 호프. 그녀는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을 상대로 원고 소유권을 놓고 30년 동안이나 소송을 이어왔다. 세상은 그녀가 손에 쥔 원고가 고인이 된 한 유명 작가의 미발표 작품이라는 사실에만 주목해 그녀를 ‘아집에 가득 찬 78세 노인네’ ‘원고에 미친 여자’로 몰아갔다. 그 누구도 그녀의 괴팍한 태도나 아집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뮤지컬 ‘호프(HOPE):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은 무엇이 한 노파의 삶을 이렇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한다. 작품은 유대계 독일 작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유작 반환 소송 실화를 모티브로 탄생했다. 실제 사건의 얼개를 토대로 가상 인물들을 만들어 ‘호프’라는 인간이 인생을 걸고 원고를 지키는 이유에 초점을 맞췄다. 수시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전쟁터, 법정, 경매장, 집 등으로 배경이 빠르게 전환하며 몰입도를 높인다. 다만 일부 장면 전환에서는 1인 다역을 소화하는 배우들이 급박하게 역할을 바꾸느라 다소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 아쉽다. 작품 속 주인공과 인물 간 갈등의 중심에는 늘 ‘원고’가 있다. 이 때문에 연출자는 아예 원고를 의인화해 ‘K’라는 배역으로 구현하는 신선함을 선보였다. 오직 호프의 눈에만 보이는 ‘K’는 주인공을 향해 “원고에서 벗어나 너 자신이 되어야만 한다”고 노래하며 주인공의 또 다른 내면의 목소리를 표현했다.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치유하며 삶을 견뎌나가는 호프의 모습은 삶을 견뎌내는 우리의 그것과 닮았다. 극 중 호프가 “잃어 본 사람은 알아”라고 읊조릴 때 눈물을 흘리는 관객들이 많다. 작품은 “그동안 읽히지 않았던 네 인생을 다시 찬찬히 읽어 보라”며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김선영 차지연 고훈정 조형균 등 출연. 5월 26일까지.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5만5000∼8만8000원. 13세 관람가. ★★★(★ 5개 만점)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잘된 웹툰이 감독, PD에게 선택돼 영상화되는 시기는 지났습니다. 웹툰 제작 단계부터 영상화를 고려한 ‘기획형 웹툰’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인기를 끌었던 한국형 좀비물 ‘킹덤’은 만화 ‘신의 나라’를 토대로 만들었다. 드라마 ‘시그널’ ‘싸인’의 김은희 작가, 양경일 작가와 뭉쳐 ‘신의 나라’를 기획한 윤인완 웹툰 작가는 만화의 영상화를 고민하던 중 원작의 선정성과 영상 구현의 어려움에 부딪혔다. 이때 떠오른 대안이 바로 웹툰. 윤 작가는 “웹툰 ‘신의 나라’를 만들고 이를 다시 드라마화하기로 했다”며 “웹툰 기획·제작 단계부터 영상을 고려한 사례”라고 설명했다. 그 결과 완성도와 볼거리에서 호평을 받은 ‘킹덤’이 탄생했다. 기획형 웹툰 시대를 열며 ‘한국형 마블’을 꿈꾸는 윤인완 작가를 그가 대표로 있는 서울 마포구 와이랩의 사무실에서 22일 만났다. 윤 작가는 사무실 곳곳에 펼쳐져 있는 인기 웹툰 ‘테러맨’ ‘신석기녀’ ‘부활남’ 그림을 가리키며 “만화의 제작·기획·교육까지 모든 게 한곳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스튜디오 곳곳에서는 연재 중인 인기 웹툰을 만들고 있었다. 그에게 만화는 곧 인생이다. 1996년 만화 ‘데자부―봄’으로 데뷔한 그는 양경일 작가와 함께 ‘신 암행어사’ ‘아일랜드’ 등 인기작을 쏟아냈다. 일본에서도 만화를 연재했고, 시장이 웹툰 위주로 재편되자 기획자로도 나섰다. 그는 “20년 이상 만화를 업으로 삼으며 잡지연재 시기부터 웹툰 전성시대까지 많은 굴곡을 겪었다”며 “최근 영화감독, 제작사, 배급사가 소재를 발굴하기 위해 먼저 웹툰을 찾는 걸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했다. 웹툰 속 독특한 세계관이나 탄탄한 구성으로 정평이 난 그는 주로 고전 소설에서 소재를 발굴한다. 여기에 시의성을 더해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테러방지법’과 ‘이슬람국가(IS)’가 이슈가 되던 때 탄생한 작품이 히어로물 ‘테러맨’이다. 그는 “스토리 구성에 있어 지켜야 할 모든 요소가 고전에는 이미 다 갖춰져 있다”며 “제 만화도 도스토옙스키나 카프카의 글처럼 언제 읽어도 날카로움과 놀라움을 주는 작품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윤 작가는 웹툰 속 캐릭터들이 연달아 인기를 끌면서 ‘한국형 마블 스튜디오’를 꿈꾸고 있다. 그는 “미국의 마블, DC코믹스를 따라 하는 거냐는 비판도 듣지만 불교의 윤회사상과 ‘초끈 이론’을 바탕으로 ‘슈퍼스트링 유니버스’라는 한국적 세계관을 구현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가 바라본 한국 웹툰의 미래는 장밋빛이다. 세계에 통할지 반신반의하던 ‘킹덤’의 성공을 보며 한국적인 내용일수록 ‘먹힌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한다. “웹툰 플랫폼 덕에 어느 때보다 글로벌 확장성이 커졌어요. 집, 카페에서 그린 작품이 일본, 태국, 말레이시아, 미국까지 1, 2주 내로 뻗어나가고 웹툰 원작 영화가 1000만 관객을 넘어선 시대죠. 할아버지가 되어도 평생 젊은 사람들과 함께 한국 웹툰, 만화를 만들고 싶습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조선 말기 무관부터 뱀파이어, 청와대 경호원, 군인, 복학생까지. 올해 초 공연들의 출연진을 살펴보면 유독 자주 눈에 띄는 이름이 있다. 13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배우 오종혁(36)은 “새로운 역할만 보면 무조건 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긴다”며 ‘열일(열심히 일)하는 배우’가 된 그 나름의 이유를 털어놨다. 오종혁은 어느덧 11년 차 배우다. 연극과 방송, 영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활동한 그지만 4월 막을 올리는 연극 ‘함익’은 만만치 않은 작품이다. 그는 복수심이 가득한 재벌 2세 출신 여교수 ‘함익’에게 인간적 순수함을 일깨우는 복학생 ‘연우’를 맡았다. 오종혁은 “화려한 외형만 중시하던 함익의 얼어있던 내면을 흔드는 캐릭터”라며 “물론 정신적으로 성숙하지만 실제 저보다 훨씬 어린 역할이라 쉽지 않다”면서 웃었다. 오종혁은 여전히 누군가에겐 아이돌 가수 ‘클릭비’로 더 친숙하다. 아이돌이란 단어가 나오자 그는 “아이돌은 늘 제약이 따르기 때문에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이었다”며 “답답해서 몰래 점도 봤더니 ‘1등 연예인감인데 성격은 정반대’라는 얘길 들었다”고 했다. 반면 공연계에 발을 들인 순간을 떠올리며 “배우들이 뿜어내는 밝고 활기찬 에너지에 반했다”고 했다. 그는 ‘공연 팬’을 자처할 정도로 무대를 끔찍하게 사랑한다. 열정적으로 무대에 오르는 그의 모습은 앞으로도 계속 볼 수 있을 듯하다. “마치 이명처럼 무대 위에서 ‘삐∼’ 소리가 나는 순간이 있어요. 관객과 배우가 한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실 때 드는 밀도가 꽉 찬 느낌이죠. 이 짜릿함에 중독되면 끊을 수가 없습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22일 오후 서울 중구 국립극장 창극단 연습실. 칼을 든 배우들이 연습실을 뛰어다니며 창(唱)을 뿜어냈다. 때론 절제된 동작을 표현하기 위해 파르르 손끝을 떨면서도 몸의 선은 꼿꼿하게 유지했다. 특히 중앙에 서 있는 두 배우가 움직일 때면 대만 경극의 대가인 우싱궈(吳興國) 연출가도 일어나 “따! 따! 따! 딴∼”이라고 박자를 외치며 몸소 경극 리듬을 표현했다. 다음 달 5일 막을 올리는 국립창극단의 ‘패왕별희’에서 항우와 우희를 맡아 막바지 연습 중인 정보권(27)과 김준수(28)를 만났다. ‘패왕별희’는 동명의 대만 경극을 원작으로 창극을 결합해 ‘초한지’의 항우, 유방, 우희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날 처음으로 음악에 맞춘 동작 연습을 끝낸 두 사람은 “경극에선 손동작 하나하나가 다 정해져 있어 모조리 외워야 한다”면서 “힘들 줄은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힘들다”며 웃었다. 이어 “판소리에 경극을 입혀 새로운 장르를 만드는 건 영광스러운 일이자 큰 압박”이라고 입을 모았다. 국립창극단원 김준수와 객원 멤버인 정보권은 중앙대 예술대학 1년 차 선후배다. 김준수가 “연인 역할에 몰입해야 해서 가끔 보권이를 ‘여보’라고 부른다”며 장난을 치자, 정보권은 “제발, 밖에선 그러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형·동생 같은 선후배에서 연인을 연기하는 두 사람은 눈빛만으로 의중을 알아챌 정도로 ‘찰떡 호흡’을 뽐낸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항우 역할은 ‘남성성의 끝판왕’이며 우희는 ‘여성성의 끝판왕’이다. 정보권은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라는 항우의 압도적 용맹함을 표현해야 하는데, 충청도 출신이라 그런지 연출의 요구처럼 내면의 기개와 날카로움을 끄집어내기가 쉽지 않다”며 웃었다. 김준수는 “영화 ‘패왕별희’(1993년)에서 장국영이 연기한 우희를 보며 여성의 선을 공부했다”며 “요즘엔 춤 선이 예쁘게 보이도록 다이어트를 할 정도로 힘들지만 누구든 쉽게 할 수 없는 역할인 만큼 더욱 매력적”이라고 답했다. 둘 다 고충을 토로했지만 우 연출은 “대만에서도 찾기 힘든 재목의 배우들”이라며 만족감을 표했다. 숱하게 무대에 오르며 ‘소리꾼 아이돌’이란 별명을 얻은 이들이지만 이번 작품은 큰 도전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창극의 자부심을 느끼는 계기가 됐다. 김준수는 “창극은 어떤 장르도 흡수할 수 있는 매력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정보권은 “내면을 토해내는 창극과 감정의 치우침 없이 모든 동작을 절제하는 경극이 만들어낸 두 전통예술의 시너지 효과가 놀랍다”고 말했다. 두 청년 소리꾼은 창극을 매개로 더 많은 관객과 만나고 싶어 한다. 이들은 “국악, 창극에도 다양한 시도가 있으니 먼저 유튜브에서 공연을 접하다 보면 젊은 세대도 우리 소리에 공감할 것”이라 권했다. 배우로서 개인적 욕심도 덧붙였다. 김준수는 “한국적인 것에 젖어 있었지만 앞으론 현대무용, 힙합 등과 결합한 새로운 장르에 도전해 보고 싶다”고 밝혔다. 정보권은 “뮤지컬처럼 창극에서도 유명 ‘넘버’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돈을 좇는 자, 신념에 매몰된 자, 자신의 음악에 갇힌 자…. 뮤지컬 ‘파가니니’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욕망을 저마다의 연주와 노래로 무대 위에 구현해냈다. 빼어난 바이올린 연주와 호소력 짙은 넘버는 관객의 ‘귀 호강’을 보장한다. 작품은 연주 실력이 너무나도 뛰어나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불렸던 음악가 니콜로 파가니니(1782∼1840)의 일대기를 그렸다. 그는 세간의 질투를 받으며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의혹을 받는다. 스스로 악마임을 고백하라는 교회, 자본의 강요에 시달린다. 어려서부터 불우한 환경 때문에 온전히 음악을 사랑할 수 없었던 그는 권력 집단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끝내 음악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지켜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고 울부짖으며 다시 바이올린 활을 잡는 그에게 궁극적 욕망은 오로지 음악이었다. 극 중 자본, 교회, 음악을 상징하는 배역 간의 대립 구도와 넘버가 몰입도를 높인다. 욕망을 위해 서로 뭉쳤다가도 금세 돌아서며 수시로 ‘적’을 만들어내는 전개가 흥미롭다. 무대 중앙에서 파가니니가 바이올린 연주를 펼칠 때면 수시로 무대 2층과 측면에서 다른 배우들이 복합적 장면을 연출한다. 파가니니를 악마로 몰아세우는 사업가 ‘콜랭’과 신부 ‘루치오’가 펼치는 호소력 짙은 넘버들이 듣는 재미를 더한다. 작품에선 ‘액터-뮤지션’으로 파가니니를 연기한 ‘KoN’(콘)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홀로 배역을 맡아 공연 때마다 바이올린 연주와 안정적 노래, 연기까지 병행해야 하기에 우려도 컸다. 하지만 보란 듯이 록클래식 버전의 파가니니 곡을 완벽히 연주하며 존재감을 뽐냈다. 파가니니와 콘 사이엔 재밌는 공통점도 있다. 실제 파가니니가 긴 손가락을 타고나 천재적 연주가 가능했던 것처럼 극 중 콘 역시 타고난 긴 팔을 활용해 ‘샬롯’을 뒤에서 감싸는 자세로도 바이올린을 안정적으로 연주할 수 있었다. 콘, 김경수, 서승원, 이준혁 출연. 31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3만3000원∼6만6000원. 8세 관람가. ★★★(★ 5개 만점)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늘 장엄한 무대 위에서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역할이 많았어요. 이젠 누군가를 살리기도 하고, 때론 밝은 모습의 생활 연기도 해보고 싶어요, 하하.” 뮤지컬 ‘영웅’에서 안중근 의사를 연기하는 배우 양준모(39)가 이런 농담을 던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가 그간 주로 맡았던 역할이 전봉준이나 고종, 흥선대원군 등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적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18일 서울 은평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안 의사 역할을 위해 애지중지 기른 수염을 쓰다듬으며 “저보다 어린 나이에 선조들이 나라를 걱정했던 마음을 떠올리면 늘 감격스럽다”며 “‘영웅’ 초연작을 보고 객석에서 눈이 붓도록 펑펑 울었다”고 했다. 그는 2010년 안 의사를 처음 맡은 뒤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의 안중근 단지동맹기념비 제막식에도 참석해 대표 넘버 ‘장부가’를 열창했을 정도로 애정이 각별하다. 그가 느낀 감격은 무대에 그대로 이어진다. 최근엔 공연 도중 울컥한 마음에 본인도 모르게 소소한 ‘애드리브 연기’를 하다 상대 배역을 당황케 한 적도 있다. “결사를 앞두고 ‘그날을 기약하며’라는 넘버를 부르는 장면에서 유독 짠한 마음이 들었어요. 노래하다 저도 모르게 상대 배우 어깨에 손을 올렸는데 예정에 없던 동작에 상대 배우가 깜짝 놀라더라고요. 또 하루는 사형을 앞둔 장면에서 일본인 간수 ‘지바’가 너무 고마웠어요. 저도 모르게 그의 두 손을 꼭 잡고 노래했습니다. 나중엔 언제 손을 놓을지 애매해졌죠.” 정통 성악을 전공한 그가 뮤지컬 배우로서 마음을 굳힌 건 2005년 평양에서 열린 가극 ‘금강’ 공연 이후다. 당시엔 동학군 역할을 맡았다. 강신일, 오만석 등과 무대에 올랐던 감동을 잊지 못했다. 양준모는 “성악 공부를 위해 계획된 유학 비자와 대학도 다 취소했고 ‘난 무대에 남아야겠다’는 결심이 섰다”고 털어놨다. 어느덧 16년 차 배우인 그는 무대 위 안 의사보다도 이름도 없이 사라진 무명 독립영웅들을 더 챙기게 됐다. 자신보단 동료, 선후배 배우들과의 ‘케미’에 더 신경 쓴다. 그는 “손가락을 자르며 결의를 다지는 ‘단지동맹’ 12인 영웅 중엔 실명이 밝혀진 이가 많지 않다는 걸 알았다”며 “‘나 안중근, 이 한 손가락’ 대신 ‘우리’라는 대사를 넣어 모두가 함께하는 행동임을 보여주자고 제작진에 건의해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양준모는 요즘도 관객들 반응을 살핀다. 다만 예전과 다르게 ‘양준모 잘한다’보다 ‘작품이 너무 좋다’는 후기에 더 눈길이 간다고. 그는 “제가 덜 돋보이더라도 관객들이 안 의사 주변의 수많은 영웅을 더 눈여겨봐 주셨음 한다”며 멋쩍은 웃음을 내비쳤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함께 작업한 한국 무용수들의 기술과 표현력은 정말 뛰어납니다. 작품을 접하는 관객들은 색다른 무용 국제 교류의 일원이 될 겁니다.”(페르난두 멜루 안무가) “한국 전통 무용의 선을 기반으로 한 동작에 대한 스웨덴 무용수들의 호기심이 엄청났어요. 이들의 열의와 에너지 덕분에 훌륭한 무대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장혜림 안무가) 국립현대무용단과 스웨덴 스코네스 댄스시어터가 양 단체의 안무 교류 프로젝트인 ‘스웨덴 커넥션Ⅱ’를 29일부터 31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무대에 올린다. 스웨덴 커넥션은 양국에서 선정한 두 안무가가 상대 단체 무용수와 함께 신작을 제작하는 형식이다. 앞서 스웨덴에선 2일부터 12일까지 ‘코리아 커넥션’이라는 제목의 공연이 진행됐다. 스코네스 댄스시어터의 브라질 출신 안무가 페르난루 멜루는 국립현대무용단과 협업한 작품 ‘두 점 사이의 가장 긴 거리’를 선보인다. ‘두 점…’은 신체적, 정신적 장벽들을 없애고 인류의 연결 필요성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그는 “한국 무용수들의 뛰어난 기술적 역량에 매료됐다”며 “관객은 춤을 통해 언어 외적인 상상력을 발견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움직임의 진짜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립현대무용단에서 파견한 안무가 장혜림은 ‘제(祭)’를 무대에 올린다. 한국 춤 승무의 북 치는 움직임을 차용해 팔의 움직임을 작품에 녹여냈다. 안전모와 헤드램프, 목탄 등이 상징적 소품으로 사용된다. 그는 “스웨덴 무용단의 다국적 무용수들에게 내면의 호흡, 순환과 같이 보이지 않는 개념과 한국 무용의 움직임을 이해시키는 게 쉽진 않았다”면서도 “충분한 토의를 거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동작을 끄집어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방인이 해석하는 자진모리, 휘모리, 타령장단과 한국 무용의 매력을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고 덧붙였다. 과거 무용계에서 단발적으로 진행됐던 국제 교류 움직임은 점차 확대되는 추세다. 국립현대무용단은 유럽 현대무용 플랫폼과 연계한 ‘스텝 업’ 프로젝트를 6월에 선보이고 브라질, 콜롬비아, 스페인 등 무용단과 공동 제작한 공연을 내년까지 올릴 예정이다. 앞서 국립무용단도 프랑스 샤이오국립극장과 ‘시간의 나이’를 공동 제작해 선보인 바 있다. 장 안무가는 “무용에는 정답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세계 무용수들이 다양하게 해석하고 함께 표현해낸 춤은 더욱 다채롭고 신선하게 느껴질 것”이라고 말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 이후에도 계속된 피해자와 유족의 현재진행형 고통을 잊지 않기 위해 무대에 섰습니다.” 연극 ‘고독한 목욕’의 남동진 배우(47)와 서지혜 연출(40)은 작품 대본을 처음 접한 순간 느꼈던 감정이 ‘부담감’이었노라 털어놨다. 이념 갈등으로 벌어졌던 이 실제 사건은 지금도 고통받는 피해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남 배우는 “아픈 역사를 무대에 옮기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워 처음엔 배역 제의를 거절했다”면서도 “대본을 계속 읽다 보니 오히려 이 아픔이 반복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 맡기로 했다”고 밝혔다. 8일 막을 올린 뒤 ‘고독한 목욕’은 관객의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13일 서울 용산구 국립극단에서 만난 두 사람은 “작품은 표면적으로 한 가족의 이야기지만, 결국 우리 사회 전체의 슬픔”이라며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지금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고 입을 모았다. 국립극단이 올해 첫 창작극으로 선보인 ‘고독한 목욕’이 소재로 삼은 인혁당 사건은 1960, 70년대가 배경. 인혁당 당원이란 누명을 쓰고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가 내려진 뒤 이튿날 새벽 사형을 당한 희생자에게 초점을 맞췄다. 국가의 거대한 폭력 앞에 무너져버린 일상을 담으려 애썼다. 준비 과정은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사건을 다룬 책과 자료를 읽고 치밀하게 공부했지만,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여건상 실제 피해자나 유족을 만날 수도 없었다. 서 연출은 “트라우마로 힘들어하는 분들에게 쉽사리 접근할 순 없었지만 ‘예술인들이 이 이야기를 다루려 하는 점을 높이 산다’는 답변을 전해 듣고 힘이 났다”고 했다. 남 배우도 “뵙진 못했어도 ‘나중에 꼭 작품을 보러 오시면 좋겠다’는 배우로서의 바람을 전했다”고 밝혔다. 극의 제목에는 치유와 고통의 의미를 동시에 녹여냈다고 한다. 남 배우는 “고문으로 고통받은 아버지를 떠올리며 상처를 목욕물로 닦아 치유하지만, 상처가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 장면은 유가족의 계속되는 고통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서 연출도 “고문, 꿈, 환상 등의 파편화된 기억으로 혼란스러워하는 한 인간의 모습에도 치유와 고통이 담겨 있다”고 덧붙였다. ‘고독한 목욕’은 제55회 동아연극상에서 ‘유인촌신인연기상’을 수상한 남 배우와 ‘작품상’을 수상한 서 연출이 손잡고 내놓은 올해 첫 작품이기도 하다. 서 연출은 “수상 뒤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라는 말처럼 주변에서 절 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제 마음가짐도 무거워져 겸손한 마음으로 사회에 필요한 목소리를 내려 한다”고 했다. 남 배우는 “나이를 먹었어도 권위 있는 신인연기상을 받아 새롭게 출발점에 선 기분”이라고 말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무대 위 두 남자가 서로를 노려본다. 아버지가 위독해 119 구급 신고를 했던 한 래퍼는 “잠깐만!”이라며 구급대원을 멈춰 세운다. “주말에 입원하면 병원비가 비싸니 3분만 지나고 월요일 오전 12시가 되면 응급실에 아버지를 들여보내 달라”는 부탁. 아버지가 고비를 넘기자 구급대원은 “넌 미쳤다”며 래퍼에게 화를 낸다. 감정이 격해진 두 사람은 서로에게 “넌 날 이해할 수 없다”며 힙합 비트에 맞춰 랩을 쏟아낸다. 이 공연은 홍익대 앞에 있는 힙합 공연장에서 펼쳐진 게 아니다. 엄연히 짜인 대본과 서사에 맞춰 곡을 입힌 뮤지컬 ‘무선 페이징’이다. 최근 이처럼 뮤지컬 무대는 ‘혼합(하이브리드) 장르’ 실험이 이어지고 있다. 주로 성악이나 가요 멜로디를 토대로 주요 넘버를 제작하던 틀을 깨고 힙합이나 민요, 재즈, 시조, 시 낭송 등과 결합하며 새로운 옷을 입고 있다. 6월 두산아트센터에서 정식 공연을 앞둔 ‘스웨그 에이지: 외쳐, 조선!’은 조선시대 시조를 기반으로 힙합 비트를 입혔다.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 등이 과거 어떻게 불렸을지 상상해 ‘랩 배틀’ 무대로 꾸민다. 뮤지컬과 랩을 결합한 라이브(주)의 ‘무선 페이징’은 해외 쇼케이스와 정기 공연을 논의 중이다. 22일부터 막을 올리는 뮤지컬 ‘아리 아라리’는 독특하게도 정선아리랑과 뮤지컬을 결합한 퍼포먼스 공연이다. 평생 뗏목꾼으로 살던 기목은 경복궁으로 정선의 목재를 싣고 떠난다. 그의 딸 아리는 한양으로 떠나 죽은 줄만 알았던 아버지 소식을 15년 만에 듣는다. 성인이 된 아리가 아버지를 만난 순간 “아리랑 고개, 고개로 넘어간다”라는 정선아리랑 곡조가 등장한다. 그 외에도 창작 아리랑, 나무꾼들의 목도 소리, 지게 춤 노래 등 다양한 전통 가락이 펼쳐진다. 특수 제작된 북과 꽹과리, 장구, 북을 든 사물놀이패가 무대를 메운다. 이 밖에도 살인 추리극 내용을 담고 있는 뮤지컬 ‘아서 새빌의 범죄’는 재즈를 뮤지컬에 녹인 사례. 쇼케이스를 실제 재즈 바에서 진행하기도 했다. 요소요소마다 삽입된 재즈 뮤지션들의 연주가 극의 전개와 오묘하게 맞아 떨어지며 색다른 매력을 낸다. 대학로에서 흥행 중인 뮤지컬 ‘아랑가’ 역시 뮤지컬과 창극의 경계를 허문 장르 혼합 뮤지컬이다. 뮤지컬의 장르 혼합 실험은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뮤지컬 본고장인 브로드웨이에선 철저히 힙합과 랩으로 구현한 뮤지컬 ‘인 더 하이츠’가 대중의 큰 호응을 받고 있으며, 세계 전통음악과 종교적 소재를 혼합한 뮤지컬 등 끊임없는 실험이 이어지고 있다. 원종원 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교수는 “대중문화 트렌드를 따라 가요, 성악을 기반으로 했던 뮤지컬이 점차 다양한 장르로 확장할 것”이라며 “음악 장르뿐만 아니라 관객 참여형, 실험형 뮤지컬 등 형식도 다양하게 바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시어마다 꾹꾹 눌려 담겨 있던 감정이 폭발한다. 일제강점기 한 청년이 쓴 시는 수십 년이 지나 무대 위에서 울부짖음으로 다시 태어난다. 뮤지컬 ‘윤동주, 달을 쏘다’는 조국의 참담한 현실에 괴로워하던 시인 윤동주(1917∼1945)의 생애와 시적 고뇌를 춤과 노래로 풀어낸 작품이다. ‘별 헤는 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비롯한 유명 작품들을 토대로 이야기를 구성한 뒤 대중적 멜로디를 입혔다. 2012년 초연부터 사랑받고 있으며, 올해는 라이브 밴드가 넘버를 직접 연주해 울림을 더한다. 가장 몰입감이 넘치는 부분은 배우가 시를 토해내는 장면. 이 순간 모든 배경음악이 사라지고 배우는 ‘팔복’ ‘서시’ ‘별 헤는 밤’ 등을 원문 그대로 읊조리거나 소리친다. 감옥 안에서 쓰러진 채 괴로워하며 시를 소리 내어 읽기도 한다. 대본을 집필한 한아름 작가는 “윤동주 시인의 유족이 시에 곡을 붙이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고, 저 역시 윤 시인의 시는 멜로디 없이 그대로 읽어야 서정성이 살 것 같다는 데 동의했다”고 말했다. 실존인물을 다룬 작품이 그렇듯, 긴 생애를 압축하는 과정에서 주요 사실이 나열식으로 짧게 언급되거나 배우에 따라 일부 시어와 대사의 전달력이 떨어지는 점은 다소 아쉽다. 그럼에도 감동이 짙은 때문인지 막이 내린 뒤 눈물을 닦느라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잊혀선 안 되는 일들을 예술과 감동으로 복습시켜 주고 싶다”는 제작진의 의도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박영수, 신상언, 김도빈, 강상준 출연. 17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3만∼9만 원. 8세 이상 관람가. ★★★☆(★ 5개 만점)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프리랜서 아나운서는 물론이고 지상파 TV 아나운서들까지 ‘유튜브 러시’가 이어지고 있다. 예능, 다큐 등에서 일반인 출연자의 강세가 계속되고, 다양한 방송 매체가 생겨나면서 이전에 비해 특정 방송에 전속된 아나운서들이 설 자리가 좁아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유튜브 채널을 개설한 지상파 방송사 소속 아나운서들은 주로 출퇴근길, 사무실 모습, 비하인드 스토리 등을 다루는 ‘브이로그’(비디오와 블로그의 합성어) 개인방송을 하고 있다. SBS 장예원 아나운서는 지난달 14일 ‘장폭스TV’를 개설해 콘텐츠 회의 모습부터 본인의 일상, 관심사 등을 담았다. MBC 임현주 아나운서는 ‘임아나채널’에서 여행, 먹방 등의 콘텐츠를 방송하고 있으며, KBS 김지원 아나운서는 ‘KBS 아나운서 3분 지원’ 채널에서 아나운서 합격 팁, 대기업 합격 팁 등 정보성 영상으로 화제를 모았다. 프리랜서 아나운서들의 경우 개인방송에서 보다 자유로운 소재를 택하고 있다. 서현진 전 MBC 아나운서는 ‘랜선 며느리’를 주제로 가족, 결혼 얘기와 함께 구독자의 연애 상담 콘텐츠도 다룬다. 차다혜 전 KBS 아나운서는 여행, 육아, 메이크업 등을 주제로 다수의 구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이는 1인 방송이 각광받고 종합편성채널, 케이블채널이 영역을 넓히면서 특정 방송사에만 출연하는 아나운서들이 대중과 만날 기회가 점차 줄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앞서 MBC는 지난달 25일 미디어데이에서 이 같은 위기감을 밝히며 정규 방송 외적인 활로를 펼치겠다고 밝힌 바 있다. SBS 역시 유튜브 채널을 ‘방송 플랫폼’으로 볼 것인지, 개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간주할 것인지를 놓고 논의 중이다. 권상희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대중이 지상파 방송 채널보다 모바일을 선호하는 상황에서 길어야 1시간 정도만 TV에서 노출되는 아나운서들의 활동 범위가 축소됐기 때문”이라며 “시간, 채널에 구애받지 않고 아나운서들이 대중이 원하는 내밀한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이 같은 정책은 방송사 차원에서도 강화될 것”이라고 설명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드르르륵, 드르르륵.” “위이이잉! 탕! 탕!” 8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카페에 들어서자 잔잔한 음악 대신 금속과 나무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귀에 박혔다. 한쪽에선 손님들이 치과에서나 사용할 법한 드릴을 잡고 ‘위이잉’ 소리를 내며 무언가에 열중해 있다. 이들 손에는 머그잔 대신 망치, 쇠막대기가 들렸다. 카페라기보다는 수공예 작업실로 보이는 이곳은 ‘반지 공방 카페’다. 직원 설명에 따라 기자도 반지를 만들어봤다. 손가락 둘레를 재고 얇고 긴 은막대를 고른 뒤 망치로 두드리며 동그란 모양으로 굽혔다. 평소 별로 써본 일이 없는 여러 공구를 들고 ‘나만의 것’을 만들다 보니 40여 분이 훌쩍 지났다. 모양이 잡히면 취향에 따라 세세한 장식이나 문구를 새기면 된다. 접착제와 은가루를 바른 양 끝을 가스 토치로 붙이면 끝. 욕심을 내 광까지 내면 1시간 만에 나만의 반지가 탄생한다. 취재차 해봤지만 생각보다 훨씬 뿌듯했다. 완성된 반지를 손에 끼웠다 빼 보며 자꾸 셔터도 누르게 됐다. 최근 ‘소만행(소소하게 만들며 느끼는 행복)’을 찾아 공방 카페를 찾는 이가 늘고 있다. 공방 카페는 대략 4, 5년 전부터 조금씩 들어서기 시작했지만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흐름을 타고 주목받고 있다. 1만∼3만 원 정도 비용으로 친구, 연인과 함께 또는 홀로 카페에서 뭔가를 만들며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매력. 카페 손님 임재훈 씨는 “본업과 무관하게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게 오히려 휴식이 된다”고 말했다. 카페를 운영하는 임익분 씨는 “과거엔 20, 30대가 주로 카페를 찾았다면 요즘은 40, 50대부터 부모님과 공방 카페를 찾는 아동 및 10대까지 연령대가 다양하다”고 말했다. 공방 카페에서 만들 수 있는 물건도 다양하게 진화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간단한 팔찌 등 30분이면 만들 수 있는 장신구 위주였지만, 근래에는 도자기나 미니어처처럼 짧게는 2시간부터 길게는 며칠씩 손님이 시간을 투자해 만들도록 하는 카페도 생겨났다. 대부분 고도의 기술은 필요 없어 어렵지 않게 따라 만들 수 있다. “재봉틀 소리를 들으며 옷감 작업에 집중하다 보면 일상의 스트레스도 사라져요.” 서울 마포구 연남동 ‘재봉틀 카페’는 2시간에 1만 원가량 요금을 내면 마치 PC방처럼 친구들과 재봉틀 앞에 앉아 대화하며 각종 소품을 만들 수 있다. 천에 문양을 달아 에코백을 만들거나 아예 옷을 만들기도 한다. 매주 사흘은 재봉틀 카페를 찾는다는 최정선 씨는 “재봉틀에 앉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했다. ‘재봉틀 카페’를 운영하는 김윤주 씨는 “재봉틀을 구매하기엔 부담스러워하는 직장인들이 잠시 ‘잡생각’을 떨치기 위해 이곳을 찾아 1∼2시간씩 작업을 하고 간다”고 말했다. 일반인들이 재봉틀로 직접 옷이나 소품을 만들어 사용하는 문화의 확산은 출판시장에서도 확인된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지난해 생활 공예·DIY 분야 도서 가운데 ‘옷 만들기’ 도서 매출의 비중이 2014년(7.2%)보다 두 배 이상(16.5%)으로 늘었다. 일본의 옷 만들기 강의를 정리한 번역서 ‘패턴 학교’(이아소) 시리즈 등이 꾸준히 인기를 모으고 있다. 최근에는 물건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본인이 먹는 샌드위치에 넣을 상추 등 채소를 직접 재배해 먹을 수 있도록 한 ‘식물공방 카페’도 등장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카페가 단순히 사람들을 만나 함께 커피를 마시는 곳에서 머물면서 무언가 창작하고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곳으로 변모하고 있다”며 “숍인숍(Shop In Shop·매장 안에 매장을 여는 것)이나 상이한 공간이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형태로 카페는 계속 진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김기윤 pep@donga.com·조종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