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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만 되면 담배 냄새가 유독 심하게 납니다. 특히 손에 담배 냄새가 심하게 배어서 문제입니다. 이번 겨울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냄새를 덜 풍기려고 아예 담배를 이렇게 피우고 있습니다(아래 사진 참조). 겨울에 담배 냄새가 심한 이유가 따로 있나요?” ─ 서울 보라매 공원에 서식 중인 야구 소년 P네, 이상합니다. 악취는 보통 여름에 그러니까 기온이 높을수록 더 심하게 마련입니다. 쓰레기 냄새도 그렇고 땀 냄새나 발 냄새도 그렇습니다.이건 기본적으로 냄새가 ‘확산(擴散)’이라는 분자 운동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확산은 기체 분자가 다른 기체나 액체 속으로 스스로 퍼져나가는 현상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학창시절 과학 시간에 배운 것처럼 온도가 높을수록 확산 속도도 빠릅니다. 그래서 얼핏 생각하면 기온이 낮은 겨울에는 냄새가 적게 퍼져야 하고 자연스레 담배 냄새도 덜해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실제로 그렇습니다. 바깥에서는 겨울에 담배 냄새가 적게 납니다. 문제는 담배 냄새가 몸에서 나는 냄새라는 데서 비롯됩니다. 우리 몸은 피부를 통해 바깥으로 열에너지를 방출하고 있습니다. 겨울이 되면 열을 적게 내보냅니다. 그래야 바깥 기온이 낮아도 체온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냄새를 품고 있는 분자도 멀리 퍼지지 못한 채 피부 그리고 피부와 맞닿은 옷 속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다 따뜻한 실내로 들어오면 그제야 우리 몸이 열에너지를 내뿜고 냄새 분자도 확산을 시작합니다. 바깥에서 냄새를 품은 채 실내로 들어오는 셈입니다.게다가 겨울옷은 대부분 섬유 사이에 공기층을 만들어 보온 효과를 내는 방식입니다. 이 공기층 안에 우리 몸이 만들어낸 열은 물론 땀(습기)도 갇힙니다. 습기는 담배 냄새를 아주 잘 흡수합니다. (그래서 옷에서 밴 담배 냄새를 없애고 싶을 때는 습기가 많은 곳에 걸어두면 도움이 됩니다.) 이번에도 실내로 돌아오면 담배 냄새 분자가 퍼지게 됩니다. 담배를 쥐었던 손에도 온기와 습기가 있을 테니까 담배 냄새가 남는 원리가 이해가 가시죠? 담배 연기가 직접 들어가는 입안 역시 온기와 습기를 모두 품은 곳이니 더 설명하지 않아도 이유를 아시리라 짐작합니다.그래서 기본적으로 겨울철에 몸에 담배 냄새가 배는 걸 줄이시려면 바람이 많이 부는 곳에서 피우시는 게 좋습니다. 양치 또는 가글링도 담배를 피우고 나서 바로 하시는 편이 좋고요. 물론 아예 담배를 끊으시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만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되던가요.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전쟁통에도 아이는 태어난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청춘남녀가 만나면 사랑의 불꽃이 일게 마련이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일제강점기 조선인과 일본인 청춘 남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 국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서울의 일본인 사회가 커지면서 조선에서 일본인 남성과 조선인 여성이 만나는 경우도 늘어갔다. 그리고 그때도 지금처럼 모든 부부가 화목한 건 아니었다. 1924년 오늘(12월 19일)자 동아일보는 서울 용산경찰서에 도움을 청한 ‘꽃 같은 젊은 조선 여자’ 김매향 씨 사연을 다뤘다.당시 19세였던 그는 모토마치(元町·현 원효로)에서 일본인 남편 시마노 겐지(下野元治·31) 씨와 함께 살았다. 문제는 시마노 씨가 조선 사람이라고 속이고 결혼을 했다는 것. 게다가 가정폭력까지 저질렀다. 당시 동아일보는 “(남편이) 금수(禽獸) 같은 성욕을 마음대로 채우지 못하는 때는 무시로 구타하는 등 참기 어려운 고통은 날이 지날수록 커져 매향 씨가 여러 차례 집에서 도망쳤지만 그때마다 남편이 찾아 와 ‘같이 살지 않으면 너 죽고 나도 죽겠다’고 협박하기 때문에 용산서에 보호를 요청하려고 찾아왔다”고 전했다.이번에도 남편은 경찰서 안에까지 찾아와 매향 씨를 때렸다. 결국 경찰은 남편을 경찰서에 가두는 검속(檢束) 처분을 내리고 매향 씨는 돌려보냈다.이렇게 남편이 조선인이라고 속아 넘어간 건 매향 씨뿐만이 아니었다. 이로부터 보름 전(1924년 12월 4일자) 동아일보는 역시 19세였던 김도용 씨의 억울함을 전하고 있다.지금 서울 중구 오장동 인근인 하쓰네 초(初音町)에 살던 도용 씨는 경기 양주군 진접 면에 살던 야마자키 테츠조(山崎哲藏)라는 일본 사람과 결혼했다. 이번에도 중매쟁이는 결혼 전 야마자키 씨가 조선 사람이라고 속였다.문제는 이 중매쟁이가 사기 혐의로 경찰에 덜미가 잡히면서 발생했다. 두 사람 결혼 생활이 파탄을 맞자 야마자키 씨가 ‘결혼 비용 20원을 돌려 달라’며 도용 씨를 상대로 경성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것. 당시 동아일보는 “정조는 유린하도 혼수비를 청구(했다)”며 야마자키 씨를 비판했다.그렇다고 모든 조선인-일본인 부부가 이렇게 우여곡절을 경험한 건 아니다. 단, 이렇게 결혼한 부부는 남편이 조선인일 때도 자녀는 ‘일본인 같이 자라도록’ 일본 이름을 붙이는 등 일본식으로 키우는 게 일반적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문화사’)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한국 배구 역사상 어떤 인물이 가장 사랑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배구 팬마다 생각이 다를 터. 하지만 ‘애증(愛憎)’을 합쳐 따지면 신치용 프로배구 남자부 삼성화재 단장(62·사진)이 1위라는 데 별 이견이 없을 겁니다. 삼성화재 관계자는 18일 “신 단장이 모기업 정기 인사에 따라 단장 자리를 내놓고 상임고문으로 발령받았다”고 전했습니다.지난주 사석에서 신 단장과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이번 인사를 예견한 듯 “52년 만에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보통 회사원 정년을 감안하면 운 좋게 회사 생활을 오래했다. 일단은 배구 인생을 정리하고 싶다. 내가 배구 인생을 정리한다면 긴장하는 사람 많을 것”이라며 웃었습니다.마찬가지로 어떤 배구 스타일을 가장 좋아하는지도 배구 팬마다 의견이 다를 터. 하지만 ‘애증’을 합치면 ‘몰방(沒放)배구’가 1위라는 데 별 이견이 없을 겁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몰방을 ‘총포나 기타 폭발물 따위를 한곳을 향하여 한꺼번에 쏘거나 터뜨림’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여러분은 몰방 배구를 좋아하시나요? 삼성화재를 응원하시는 분들도 이 질문에 ‘네, 그렇습니다’하고 답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심지어 삼성화재 관계자도 저 표현을 썩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사석에서 만난 한 삼성화재 관계자는 “쇼핑몰에 갔더니 행사 이름이 ‘몰빵데이’더라. 그 업체하고 MOU(양해각서)를 체결해야 하나 고민했다”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죠. 몰방 배구에 찬성하든 안하든 ‘신치용 식 몰방 배구’가 참 대단한 스타일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거든요. 남자 배구 경기에서 한 선수가 올린 점수 상위 톱10을 뽑아보면 59점부터 49점까지 나옵니다. 한 선수가 한 경기에서 49점 이상을 기록한 건 총 33번. 이 중 20번(60.6%)을 삼성화재 선수가 해냈습니다. 몰방 배구에 비판적인 이들은 그냥 한 선수에게만 공을 띄우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폄하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숙적’ 현대캐피탈을 비롯해 사실상 한국 프로배구 팀 모두가 이 스타일을 따라했지만 2014~2015 시즌 OK저축은행 이전까지는 그 어떤 팀도 삼성화재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몰방 배구는 한국 배구가 꼭 넘어야 할 숙제 같은 존재였지만 그 누구도 쉽게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7시즌 연속 우승 가도를 달리던 삼성화재를 꺾은 OK저축은행 역시 외국인 선수 시몬(30·센터)을 중심으로 몰방 배구를 변형한 게 사실입니다. (전술적으로 조금 깊이 들어가면 OK저축은행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썼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몰방 배구가 아닌 스타일로 프로배구 V리그 챔피언에 오른 건 지난 시즌 현대캐피탈이 처음이었습니다. 현대캐피탈도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몰방 배구를 했다고 생각하는 팬도 계실 겁니다. 그런데 올해 챔프전에서 현대캐피탈 ‘에이스’ 문성민(31)은 공격 점유율 39.4%에 그쳤습니다. 그 전까지 12시즌 동안 챔프전 우승팀 에이스가 기록한 공격 점유율은 평균 49.5%였습니다.재미있는 건 10년 만에 현대캐피탈에 우승을 안긴 최태웅 감독(41)이 좋든 싫든 현역 시절 삼성화재 주전 세터로 몰방 배구를 집대성한 주인공이었다는 것. 현대캐피탈이 몰방 배구와 정반대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 ‘스피드 배구’를 지향한 걸 조금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프리드리히 헤겔이 주장한 ‘정반합’의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구시대적인 몰방 배구가 배구 인기를 깎아 먹지 않았냐고요? ‘하드코어’ 배구 팬이라면 그렇게 느끼셔도 무리가 아닙니다. 다만 캐주얼 팬 인기 척도라고 할 수 있는 TV 시청률을 보면 사실과 조금 다릅니다. 특히 신 단장이 감독이던 시절에는 외국인 선수 공격 점유율이 올라갈수록, 그러니까 몰방 배구가 성행하면 성행할수록 TV 시청률 오르고 반대면 반대였습니다. 한국 배구가 몰방 배구로 치우쳤던 게 바람직했는지 물으신다면 ‘아니오’라고 답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몰방 배구가 아니라 그 스타일을 무너뜨리지 못한 다른 팀이 문제였습니다. 많은 배구 지도자가 몰방 배구를 무너뜨릴 해법을 찾기보다 그 스타일을 따라잡으려 애썼습니다. 그저 더 비싸고, 더 몰방에 적합한 선수만 데려오려고 했지 다른 해법을 찾으려 하지 않았죠. 그리스 신화에서 오이디푸스가 자기가 어머니와 동침하고 아버지를 죽였다는 걸 부인하면 할수록 정말 그랬다는 증거만 나오는 것처럼 한국 배구 역시 몰방 배구라는 비극에 빠졌던 겁니다.그럴수록 ‘신치용 신화’는 더욱 굳건하게 한국 배구에 자리매김했습니다. 물론 신 단장 역시 자기 자리를 잃지 않으려 애쓰고 또 애썼습니다. 때로는 ‘독재’라는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자기부터 절대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를 ‘습관’이라는 낱말로 표현했습니다. 신 단장은 “어려운 과정을 이겨내고 우승해 본 선수들은 아니다. 그게 얼마나 짜릿한 경험인지를. 부임 초부터 힘든 훈련이 몸에 배게 했다. 지금은 선수들이 알아서 한다. 습관의 힘이 그렇게 무섭다”고 말했죠. 그래서 삼성화재에서 자기 팀 배구 스타일을 몰방 배구가 아니라 ‘시스템 배구’라고 불러달라는 건 무리한 요구가 아닐지 모릅니다. 외국인 공격수를 뒷받침하는 다른 선수들이 눈에 띄지 않아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절대 ‘삼성화재 왕조’를 만들지 못했으니까요. 이제는 삼성화재 코치가 된 고희진(37)은 현역 시절 “뭉쳐라, 팀워크는 모두를 춤추게 만든다. 버텨라, 기회는 오고 상대는 무너진다”라는 글을 자기 소셜네트워크(SNS) 자기소개로 쓰기도 했습니다. 프로배구에서 가장 사랑받는 팀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배구 팬마다 생각이 다를 터. 하지만 애증을 합치면 삼성화재가 1위라는 데는 별 이견이 없을 겁니다. 삼성화재에서 몰방 배구를 완성한, 아니 그 자신이 곧 몰방 배구와 동의어였던 신 단장의 ‘위대한 시절’이 이렇게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저는 소설이 아니라 개룡남(개천에서 용이 된 남자)의 자기계발서로 바꾸고 싶어요. 갈수록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고 말이 많잖아요? 이몽룡은 딱 개천에서 용이 된 남자죠. 지금은 소설보다 자기계발서가 훨씬 더 잘 팔리는 시대니까 소설보다 자기계발서가 나을 것 같아요.” “저는 춘향이가 이몽룡을 기다린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장원급제를 지금으로 따지면 행정고시 수석 합격 아닌가요? 이미 행정고시 합격한 변 사또가 내가 좋다는데 몇 년씩 연락이 오지 않는 구 남친(옛날 남자친구)을 기다리는 건 지금 시대하고 맞지 않아요. 이몽룡이 춘향이를 정말 사랑한다면 변 사또에게 갔다가 돌아가도 받아주지 않을까요?”2011년 11월 동아일보 공채 시험을 치른 수험생들이 ‘문제해결능력시험’에 써낸 답변을 추린 것이다. 이 시험에는 총 다섯 문제가 나갔는데 그 중 하나가 “춘향전에서 바꾸고 싶은 장면이 있다면 어떤 장면이고 어떻게 바꾸겠는가?”였다. 논리력, 상상력, 추리력 등을 알아보려는 문제인 만큼 정답은 없다. 여러분이라면 춘향전에서 어떤 걸 어떻게 바꾸고 싶으신가.당시 출제 과정에서 많고 많은 소설 작품 중 하필 ‘춘향전’을 고른 건 이 작품이 동아일보와 인연이 깊었기 때문. 동아일보는 1924년 오늘(12월 18일)자에 ‘춘향전 개작(改作)’ 현상공모 사고(社告)를 내보냈다. 응모 조건은 “시대, 인물 등을 일절 수의(隨意)로 개작하되 재래 춘향전의 경위를 손상치 말 것.”당시 1등 상금은 500원. 현재 돈으로 약 325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2등에는 200원, 3등(3명)에는 100원 등 총 1000원이 각각 상금으로 걸려 있었다. 당시 신문사 주최 공모전 상금은 보통 몇 십 원이 기본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물론 많지 못한 현상(상금)이지만 이만한 것도 조선 신문계에서는 처음이라 자랑이 아닌 것도 아니외다”라고 썼다. 동아일보에서 신춘문예를 사고를 처음 내보낸 게 이듬해(1925년) 1월 2일자였으니까 신춘문예보다 춘향전 개작 공모가 빨랐다. 신춘문예 소설 1등 상금도 50원으로 춘향전 개작 공모보다 적었다. (참고로 2018년 신춘문예 중편소설 상금은 3000만 원이다.) 동아일보가 이렇게 춘향전에 천착했던 이유는 뭘까.40년 넘게 춘향전을 연구한 설성경 연세대 명예교수는 2007년 펴낸 논문 ‘춘향전과 항일민족운동’에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이 춘향을 소재로 한 예술작품 발간, 춘향 사당 건립, 언론 보도 등을 통해 항일민족정신을 고취했음이 확인됐다”고 썼다. 당시 지식인들이 춘향의 절개를 민족의식과 연관시키는 작업을 활발히 진행했다는 것. 설 교수에 따르면 1912년부터 1935년까지 나온 춘향전은 총 27가지 버전에 이른다.그러면 동아일보에서 공모한 춘향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정답은 없다. 당선작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1925년 9월 24일 사고에서 “본사에서는 1000원의 상금(그리 많은 것은 아니나)을 걸고 춘향전의 개작을 모집하였더니 수십 편이나 되는 힘들인 원고를 얻었으나 불행히 국민 문학으로 추천할 만한 것이 없음으로 응모하신 여러분께는 심히 미안한 일이나 춘원 이광수 씨에게 청하여 춘향전을 쓰기로 하였다”고 발표했다. 이후 동아일보는 ‘일설(一說)춘향전’을 그해 9월 30일부터 1926년 1월 3일까지 총 96회에 걸쳐 연재했다. 이 작품에 대해 최주한 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는 “춘향전에서 능동적이고 저항적인 공동체적 유대의 전통을 재발견하고 이를 문학적으로 정전화하는 데 성공을 거둔 일설춘향전은 1920년대 제국의 민족지 구축 작업에 맞선 조선 국민문학의 실천으로서 당대의 문학사적 소임을 다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동아일보는 이와 함께 국문학자 김태준 선생(1905~49)의 ‘춘향전의 현대적 해석’이라는 논문을 1935년 1월 신년호부터 8일까지 연재하기도 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1923년 11월 8일, 지금의 서울 충무로 지역인 경성부 혼마치(本町)와 메이지초(明町·명동) 사이에 큰불이 났다. 2시간 넘게 불길이 번지면서 일본식 가옥 24채가 전소했고 다섯 채에도 불이 붙었다. 이튿날(1923년 11월 9일) 동아일보는 “(화재) 원인에 대해선 아직 충분한 조사가 없으나 그곳 2번지 지물상(指物商·널빤지로 만든 가구를 파는 가게 또는 그 주인) 다나카 마츠시(高田松藏) 씨 집 2층 난로에서 실화(失火·실수로 불을 냄) 된 것인 듯하다 하며 손해액도 아직은 알 수 없으나 최소 50만 원은 될 것이라고 한다”고 전했다. 당시 50만 원을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약 33억 원 정도 된다.그 이유가 밝혀진 건 그해 오늘(12월 14일)이었다. 이날 동아일보는 ‘혼마치 대화(大火)의 방화범’이라는 기사에서 “피고는 지금으로부터 8년 전 이 주소에 집 한 채를 얻어 ‘소목장이(나무로 가구나 문방구 따위를 짜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를 하던 바 요사이 금융의 공황으로 수백 원의 빚을 지고 매우 고생하는 통에 설상의 가상으로 지난달 7일 오후 11시경에는 직공으로 있는 이봉수 외 1명에게 품값을 내라는 독촉을 받고 더욱 마음이 상해 자기 친구 시라요시 시라토시(白水庄吉)와 함께 부근 일락정(一樂亭)에서 술을 먹고 다음 날(8일) 새벽 2시에 두 사람이 자기 집으로 돌아와 사정 이야기를 하다 친구가 돌아간 후 그는 자기 집에 불을 놓아 닛폰(日本)화재보험회사 상품 보험금 2000원과 가구 보험금 100원을 찾아 자기의 곤궁을 펴보려는 작정으로 자기 집에 불을 놓아 전소시키고 다시 그 불이 연소되어 그 부근에 있던 쇼타 오바타(小畑辰太郞) 씨 집 외 23집을 전소시키고 야마모토 구주루(山本九藏) 씨 집 외 4집을 반소(半燒)시켜 65만2000여 원을 손해를 낸 사실이더라”고 전했다.결국 다나카 씨는 3000원(현재 약 2000만 원) 정도 ‘보험사기’를 치려다 200배가 넘는 65만2000원(현재 약 42억 원)짜리 사고를 치고 만 것. 손해보험협회 등은 이 사건을 한국 역사상 첫 번째 보험사기 사건으로 보고 있다.재미있는 건 방화범으로 몰렸던 다나카 씨가 결국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점. 이듬해 3월 3일과 10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당시 검사는 49세였던 다카나 씨에게 징역 15년을 구형했지만, 판사는 결국 무죄를 선고했다. 그 정확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당시 동아일보 보도로는 확인할 수 없었다. 자세한 사정을 아시는 분은 e메일(kini@donga.com) 등으로 제보 부탁드린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예, 정말입니다. ‘기차는 좌측통행, 지하철은 우측통행’이 기본입니다. 국유철도운전규칙 제32조에는 ‘한 쌍의 선로에 있어서 열차의 진로는 좌측으로 하여야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반면 도시철도건설규칙 제5조는 ‘열차의 운전 진로는 오른쪽으로 한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지하철은 물론 자동차도 모두 오른쪽으로 다니는데 기차만 왼쪽으로 다니는 건 일제강점기 때 철도 노선을 짓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선 차량이 왼쪽 차선으로 다니는 거 알고 계시죠?맞습니다. 지하철 중에서 서울지하철 1호선은 예외입니다. 1호선은 왼쪽으로 다닙니다. 제일 먼저 지은 지하철 노선이 이 규칙을 어긴 건 경인·경부선과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국철’이라고 부르던 그 노선입니다. 같은 철로를 이용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 그런데 1호선과 2호선 성수지선이 만나는 지점에 신설동역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성수지선은 1호선 운행을 마친 열차가 정비를 받으러 향하는 군자차량사업소와 연결돼 있습니다. 1호선은 왼쪽으로 달리고 2호선은 오른쪽으로 달리니까 중간에 철로를 바꿔줘야 합니다. 신설동역에 지하 3층에 ‘유령역’이 있는 이유가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서울지하철 4호선에도 국철 구간이 있었습니다. 현재 남태령~오이도 역 구간. 이 중 금정 역 아래 노선(안산선)은 처음 만든 1988년부터 1994년까지는 1호선 구간이었습니다. 그러다 남태령~금정 역을 잇는 과천선을 만들면서 4호선과 연결하게 됐습니다. 4호선과 과천·안산선 사이에 통행 방향 문제가 생긴 게 당연한 일. 게다가 4호선은 직류로 전동차를 움직인 반면 국철 쪽은 교류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태령~선바위역 사이에 흔히 ‘꽈배기굴’이라고 부르는 입체 교차로를 만들었습니다. 서울하고 경기도 구간을 나눈 것. 4호선을 타고 있는데 남태령 역과 선바위 역 사이에서 “잠시 후 전력 공급 방식 변경으로 객실 안 일부 전등이 소등되며 냉·난방 장치가 잠시 정지되오니…”하고 안내 방송이 나오면 바로 그 구간을 지나고 계신 겁니다. 이 그림은 여러분 이해를 도우려고 과장되게 그린 겁니다. 실제로는 아래 그림 정도는 아니어도 부드럽게 움직입니다. 이 그림은 신설역을 출발한 우이신설선 열차가 선로 방향을 바꾸는 모습입니다. 우이신설선에서는 신설동역이 종점이라 양쪽 승강장에서 모두 열차를 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왼쪽 선로에서 출발한 열차고 있는데 이 열차는 다음 역인 보문역에 도착하기 전 이렇게 오른쪽으로 선로를 바꿉니다.지하철 진행 방향이 바뀌면 주로 열리는 문도 바뀝니다. 지하철역은 크게 철로가 가운데 있고 양 옆에 승강장이 있는 ‘상대식’과 철로가 양쪽에 있고 승장강이 가운데 있는 ‘섬식’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상대식은 열차가 달리는 방향 쪽 문이 열리고 섬식은 반대입니다. 상대식 승강장에서는 열차 진행 방향하고 같은 쪽 문이 열리고 상대식은 반대쪽 문이 열립니다.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서울교통공사에서 제공 받은 자료에 따르면 서울지하철 1~8호선 시내 구간에 있는 역 277곳 가운데 67.1%에 해당하는 186곳이 상대식입니다. 그러니까 1호선은 진행 방향 기준으로 왼쪽 문이 더 많이 열리고, 나머지 호선에서는 오른쪽 문이 더 많이 열립니다.수도권 지하철 전체 승강장 정보를 알아보려 서울시외 구간 역 관리를 담당하는 한국철도시설공단에도 정보공개를 청구했습니다. 하지만 ‘노선이 너무 많아 자료 수집이 어렵다’는 이유로 정보 공개를 꺼려 전체 결과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2013년 5월 22일자 동아일보는 그를 ‘민주화 운동사의 거룩한 영웅’이라고 불렀다. 이튿날에는 나중에 국가정보원장이 되는 이종찬 전 의원 발언을 통해 ‘그가 살아 있다면 대통령감’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바로 조영래 변호사(1947~90)였다.동아일보 객원편집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조 변호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그가 세상을 떠난 1990년 오늘(12월 12일)자 동아일보 부고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다음은 당시 기사 인용 부분.“그가 맡은 사건 중 대표적인 것은 경기 부천경찰서 성(性) 고문 사건의 권인숙 양 변론과 서울 마포구 망원동 수재민 집단 소송이라고 할 수 있다.그는 성고문 사건이 터지자 부천경찰서와 인천 소년교도소를 수십 차례 오가며 경찰관이 22세의 여대생을 대상으로 자행한 추악한 성고문 범죄를 폭로하고 5공(제5 공화국)이 무너진 뒤 고문 경관 문귀동을 마침내 법정에 세워 법의 심판을 받도록 했다.그가 직접 쓴 장문의 권 양 사건 변론요지서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권 양의 용기를 찬양하고 경찰·검찰 그리고 공안당국 등 권력기관의 부도덕성을 질타한 대표적 노작으로 꼽혀진다. ‘권 양,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그 성(姓)만으로 알고 있는 유명인사, 얼굴 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 … 목숨을 건 진실에의 열정 하나만으로 권 양은 끝내 이 불의한 세상의 온갖 권세를 이겨냈습니다. 국가 공권력에 의해 인간의 존엄성이 이처럼 여지없이 짓밟히는 사태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권 양이 그토록 밝히려고 노력했던 진실은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19)84년 서울의 대홍수 때 망원동 유수지의 배수갑문이 무너져 한강 물이 역류하면서 일대 5000여 가구가 물에 잠겼다. 그는 국가를 상대로 한 2400여 가구 수재민들의 소송을 맡아 3년의 법정 투쟁 끝에 승소로 이끌었다. 우리나라 사법사상 최초의 집단 소송이라고 할 수 있다.그는 헌법의 기본권과 관련된 사건은 아무리 작은 사건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직장에 다니는 미혼 여성 이경숙 씨가 교통사고로 다리를 심하게 다치자 1심 재판부는 스물다섯 (살)까지만 직장 봉급으로 손해배상액을 계산하고 나머지 쉰다섯 살까지는 일용잡금직노임으로 산정하는 판결을 내렸다.미혼 여성은 결혼하면 직장을 그만두는 관습에 따라 여성의 평균 혼인 연령인 스물다섯 살을 정년으로 본 판결이었다. 그는 이 씨를 설득해 2심 변론을 무료로 맡아 남녀불평등의 판례를 바꾸어 놓았다.”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 유명한 김지하의 ‘양심선언문’을 쓴 것도 사실 조 변호사였다. 서울 청계천 봉제공장에서 일하다 분신자살한 전태일을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이름으로 만든 ‘전태일 평전’을 세상에 남긴 것 역시 그였다. 조 변호사가 없었다면 2017년 대한민국은 지금과 크게 다른 모습이었을지 모른다.조 변호사가 운명을 바꾼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조 변호사는 법무법인 ‘김앤장’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운동권 후배가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하고도 시위 전력 때문에 판사 임용에서 탈락하자 김앤장 입사를 권했다. 이 후배는 고액 연봉을 주겠다는 제안을 뿌리치고 부산으로 내려가 사법시험 동기가 소개한 노무현 변호사와 합동법률사무소를 차린다. 맞다, 이 후배는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다.조 변호사가 숨지고 이틀이 지난 그해 12월 14일 서울 YWCA 강당에서 열린 영결식에는 1000여명이 참석했다. 계훈제 김근태 김문수 노무현 문익환 박원순 서경석 송건호 이소선 이재오 그리고 조갑제 등 당시 참석자 면면은 지금 봐도 화려하다. 조 선생은 추모사에서 “조변(辯·변호사)은 작은 것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아는 이였다. 그는 연탄 공장의 진폐증 환자, 스물다섯에 정년퇴직해야 했던 여자, 분신자살한 젊은 노동자, 이런 작은 이들의 문제 속에서 이 역사와 우리 사회를 알리는 의미를 뽑아냈다”고 평가했다. 조 변호사는 정말 그런 사람이었다. 1990년 1월 컬럼비아대 초청을 받아 미국에 머물던 중 당시 열여섯 살이던 아들에게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사진으로 된 엽서를 띄우며 이렇게 썼다.“아빠가 어렸을 때는 이 건물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 아빠는 네가 이 건물처럼 높아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 되거나 제일 유명한 사람,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작으면서도 아름답고,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건물이 얼마든지 있듯이… 인생도 그런 것이다. 건강하게, 성실하게, 즐겁게, 하루하루 기쁨을 느끼고 또 남에게도 기쁨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실은 그것이야말로 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처럼 높은 소망인지도 모르겠지만….”1990년 오늘 한국은 조영래를 잃었다.(김형만 ‘그들이 살았던 오늘’)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문제) 한국인 첫 번째 비행사는 누구일까?이 질문에 안창남 선생(사진)을 떠올리실 독자 분이 적지 않으실 터. 그 옛날 유행한 노랫말처럼 ‘하늘엔 안창남, 땅에는 엄복동’ 아닌가. (엄복동 선생은 당대를 대표하던 사이클 선수였다.)그런데 1992년 공군은 안 선생이 아니라 ‘오림하 이용근 이용선 이초 장병훈 한창호 등 6명이 우리나라 최초 비행사’라고 밝혔다. 이들은 임시정부 지원으로 1920년 2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州)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졸업한 뒤, 같은 주에 있던 한인 전투비행사 양성 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했다.안 선생이 일본 고쿠리(小栗) 비행학교를 졸업한 건 그해 11월이었으니 안 선생이 이들보다 아홉 달 늦었던 셈.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안 선생을 한국 최초 비행사라고 알고 있는 이유는 뭘까. 1922년 5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정답이 있다.당시 동아일보는 안 선생이 고국 방문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면서 “조선 사람으로서 조선에서 비행기를 탐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니까 안 선생은 한반도를 비행한 첫 번째 한국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기사에 “그는 작년부터 모국 방문 비행을 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계획 중이더니 이번에 여러 가지 준비가 되고 비행기까지 준비되었음으로…”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나중에 ‘금강호(金剛號)’라 부르게 되는 이 비행기를 마련한 것 역시 동아일보였다. 동아일보는 안 선생이 일본에서 비행사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자 ‘안창남 군 고국방문 비행후원회’를 조직하고 비행기 구입 자금 모금 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를 소개한 건 1921년 11월 27일자 ‘비행가를 위하여 2만 원’이라는 기사(아래 사진). 당시 2만 원은 금을 약 14.6㎏ 정도 살 수 있던 돈. 현재 금을 이만큼 사려면 약 6억4000만 원이 필요하다.실제로 안 선생이 경성(현 서울)에 도착한 건 그해 12월 5일이었고,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서 시범 비행을 선보인 건 닷새 뒤였다. 동아일보는 그해 오늘(12월 9일)자에 이튿날 열릴 비행을 앞두고 안내 기사를 내보냈다.이 기사는 “쾌활한 용사의 공중에 오르고 나리는 광경을 가까이 보는 이에게는 상당한 관람료를 받기로 당초에 후원회 위원회에서 결정했으나 본래 이번의 고국 방문 비행으로 말하면 민족적으로 응원하는 아래에 거행되는 것 일뿐 아니라 이번에 일반 과학에 관한 지식과 취미를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이에게 보급케 하고저함이 그 본의임으로 다시 협의한 결과 당일 비행장에서 한 푼의 입장료를 받지 않고 일반에 널리 공개하기로 결정하였음으로 전차비나 기찻삯만 가지면 누구든지 마음대로 와서 구경하게 되었더라”고 전하고 있다.당시 경성 인구 30만 명 중 5만 명이 여의도로 몰릴 만큼 이 비행은 인기를 끌었다. 동아일보는 그달 11일자 기사를 통해 다시 행사 소식을 전했다. 국토교통부 항공로별 교통량 분석에 따르면 올해 3분기에 한국 공항에서 뜨고 내리거나 한국 공역을 지나간 비행기는 하루 평균 2083대에 달한다. 41초에 한 대씩 머리 위로 비행기가 날아가는 셈이다. 한국인 비행사 숫자도 이제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지금 생각해 보면 비행사 한 명이, 비행기 한 대가 뭐 대단했을까 싶다. 하지만 당시 안 선생과 금강호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았다. 당시 동아일보는 비행기를 “20세기 과학문명의 자랑거리”로, 안 선생을 “귀신같은 재주를 가진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렇게 동아일보가 띄운 한국 첫 비행기는 민족적 자존심과 함께 하늘 높이 떠올랐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김민섭 찾기 프로젝트’는 결국 성공으로 막을 내렸다.이 프로젝트 주인공은 일본 후쿠오카(福岡)로 여행을 떠나기로 한 시간강사 김민섭 씨(사진 오른쪽). 갑작스레 사정이 생긴 그는 비행기 요금을 환불받으려 했지만 돌려받을 수 있는 금액이 2만 원 미만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이에 이 항공사 환불 정책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여권에 쓴 이름이 ‘KIM MIN SEOP’으로 똑같은 사람을 찾아 자기 항공권을 주겠다고 나선 것.결국 사흘 뒤 조건이 맞는 대학 휴학생 김민섭 씨가 나타났고, 이 김민섭 씨에게 졸업 전시 자금과 후쿠오카 여행 경비를 마련해 주는 ‘김민섭 씨 후쿠오카 보내기’라는 새로운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기사를 참조하시면 된다.이 프로젝트 성공을 지켜보며 기자도 ‘사람 찾기 프로젝트’를 한 건 진행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미션은 이오성(李午性) 선생과 맹용자(孟蓉子) 여사와 관련된 분을 찾는 것. 자손이나 친척, 지인도 OK다. 혹시 본인이 살아 계시다면 더욱 좋다.본인 생존 여부를 의심한 건 이 두 분이 1925년 오늘(12월 8일)자 동아일보에 결혼 광고를 내보냈기 때문이다. 광고에는 두 분 나이가 나와 있지 않지만 92년 전 결혼하셨으니 여전히 살아 계시기가 힘들었다고 판단한 것. (여전히 생존해 계시다면 기자의 무례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세요.) 이 광고에 따르면 이 선생은 원적(原籍)이 함남 북청군이며 일본 도쿄(東京)에 있는 도요(東洋)대를 졸업했다. 맹 여사는 서울 종로구 창신동이 원적으로 도쿄여자기예(技藝)학교 졸업생이다. 이 둘은 1925년 12월 8일 서울 광희문 예배당에서 결혼을 올렸다. 당시 주례는 김진호 목사였다. 이 부부가 유별나게 특이했던 건 아니다. 국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당시에는 이렇게 신문에 결혼광고를 내는 게 유행이었다. 그렇다면 이 유행을 만든 ‘트렌트 세터’는 누구였을까.동아일보 지면에 따지면 ‘조선 최초 페미니스트’라고 평가 받기도 하는 나혜석 화가(1896~1948)를 최초로 꼽을 수 있다. 나 화가는 동아일보 창간 후 열흘 째이던 1920년 4월 10일 동아일보에 김우영 변호사와 결혼한다는 광고(아래 사진)를 내보냈다.김 변호사나 나 화가를 아는 분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김진 전 서울대 교수(91)가 나 화가의 둘째 아들이고, 김건 전 한국은행 총재(1929~2015)가 셋째 아들이어서다. 또 올해 ‘아이 캔 스피크’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차지한 배우 나문희 씨(76)가 바로 나 화가의 종손녀(從孫女)다. 그러니까 나 화가가 나 씨의 고모할머니다. 다시 한번 부탁 말씀을 올린다. 이오성 선생, 맹용자 여사 부부를 아시는 분은 꼭 연락 부탁드린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얼핏 생각하면 좀 이상하기도 합니다. 올림픽에 그 나라는 출전을 금지하면서 그 나라 선수는 출전을 허용해도 괜찮다는 게 말이죠. 음주 운전은 금지했지만 술 마시고 운전하라는 뜻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조금만 따져 보면 그렇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6일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집행위원회에서 2018 평창 겨울 올림픽 참가 금지라는 징계를 내린 대상은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이지 러시아 선수단이 아닙니다. IOC에서 이날 발표한 보도자료(아래 사진)를 보시면 확실히 그렇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바로 그다음 줄이 러시아 선수 개개인은 (아래 제시할) 엄격한 조건 아래서 평창 올림픽에 초청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어서 이 선수들은 ‘러시아에서 온 올림픽 선수(OAR)’라고 부르게 된다는 문장이 등장합니다. 마지막은 러시아 대표팀 유니폼과 러시아 국기, 국가(國歌)를 쓸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대신 OAR라고 쓴 유니폼과 오륜기, 올림픽 찬가를 써야 합니다.이 보도자료 아래 나오는 ‘엄격한 조건’은 어떠한 이유로든 한 번이라도 도핑(약물을 써서 경기력을 끌어올리는 행위)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선수는 초청 대상에서 빼겠다는 게 뼈대입니다. IOC에서 ROC에 이런 징계를 내린 이유가 국가적으로 도핑을 저질렀기 때문이니 엄격하다기보다 당연한 조건입니다. 그러니까 도핑과 무관한 러시아 선수 또는 팀은 이번 올림픽에 참가하는 데 별 지장이 없습니다. 도핑 적발 경험이 없는 선수가 ‘나는 애국심 빼면 시체야. 우리나라(러시아)를 대표할 수 없는 상태로는 절대 올림픽에 나가지 않겠어’라고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셈이니까요.● 원래부터 올림픽 참가 선수는 ‘국가대표’가 아니었다.그러면 IOC에서 이렇게 ROC와 러시아 선수 개개인을 구분한 이유는 뭘까요?많은 사람이 흔히 착각하는 것과 달리 올림픽 경기는 개인 또는 팀 간 경쟁이지 국가 간 경쟁이 아닙니다(The Olympic Games are competitions between athletes in individual or team events and not between countries). IOC 올림픽 헌장 6조 1항에 분명히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아래 사진 참조).네, 그런데 우리가 올림픽에 참가하는 개인 또는 팀을 흔히 ‘국가대표’라 부르는 건 이 조항에 나온 것처럼 각 국가 올림픽 위원회(NOC·National Olympic Committee)에 자국 국적 선수 가운데 올림픽에 누구를 내보낼지 선택할 권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한국올림픽위원회가 2009년 대한체육회와 완전히 통합해 현재 대한체육회가 NOC 기능을 맡고 있습니다.)러시아를 대표하는 NOC가 바로 당연히 ROC입니다. 그런데 IOC에서 ROC에 자격 정지 처분을 내렸으니 러시아 국적 선수 중에는 누가 평창 올림픽에 나가야 할지 결정할 수 있는 단체가 일시적으로 사라진 셈이 됩니다. 그래서 IOC에서 러시아 선수를 올림픽에 ‘초청’하는 형식을 취하겠다는 겁니다.이런 일이 처음도 아닙니다. IOC는 쿠웨이트 정부가 쿠웨이트 올림픽 위원회 선거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2015년 이 나라 올림픽 위원회에 자격 정지 처분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쿠웨이트 사격 대표 페하이드 알디하니(51·아래 사진)는 개인 선수 자격으로 지난해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출전해 남자 더블트랩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국가대표 시스템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이렇게 NOC에 참가 선수 선발 권한을 준 건 1908년 런던 올림픽 때부터였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제는 IOC에서 정식 대회로 인정하지 않는 1906년 중간 올림픽(Intercalated Games) 때부터 올림픽에 참가하려는 선수는 NOC를 통해 참가 자격을 얻어야 하는 방식이 됐습니다. 그 전까지는 올림픽 참가를 희망하는 선수 또는 팀이 직접 올림픽 개최국에 가서 신고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래도 1896년 아테네(그리스), 1900년 파리(프랑스) 대회 때까지는 주로 유럽 선수가 참가하던 올림픽이 유럽 대륙 안에서 열리다 보니 참가자가 직접 개최국을 찾기가 그래도 상대적으로 수월했습니다. 문제는 1904년 대회가 대서양 건너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렸다는 것. 1900년 파리 대회 때 1224명이었던 올림픽 참가 선수가 1904년에는 650명으로 줄었습니다. 그러자 IOC는 올림픽 참가 선수 등록 방식을 바꿨고 1908년 런던 대회 때는 2024명으로 늘었습니다.이렇게 NOC를 거쳐야 하기 전에는 여러 나라 선수가 팀을 꾸려 올림픽에 출전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혼성국 팀은 3개 대회에서 금 8개, 은 5개, 동 4개 등 메달을 총 17개 따기도 했습니다. 올림픽 때는 ‘한국 = KOR’같은 IOC 국가 코드를 사용하게 되는데 이 혼성국 코드는 ‘ZZX’였습니다. 물론 지금은 쓰지 않는 코드입니다.●마라톤은 왜 42.195㎞를 뛸까여기까지 꼼꼼하게 읽어주신 분이 계실지 모르니 1908년 런던 올림픽 관련 ‘잡학’도 몇 가지 소개하죠.이 대회 때부터 NOC를 통해 선수가 올림픽에 나가게 됐으니 무엇을 또 처음 하게 됐을까요? 네, 개회식 때 선수단이 국기를 들고 입장하는 것도 이 대회가 처음이었습니다. 문제는 당시 핀란드가 러시아 제국에 속해 있었다는 것. 핀란드 선수단은 국기 없이 입장했죠. 국가대표 유니폼이 등장한 것도 이때 처음.이 대회는 1908년 4월 27일부터 그해 10월 31일까지 187일(6개월 4일) 동안 열렸습니다. 근대 올림픽 역사상 가장 오래 열린 대회가 1908 런던 올림픽이죠. 이렇게 대회가 길었던 이유 중 하나는 피겨스케이팅 때문. 피겨스케이팅은 물론 겨울 종목 자체가 올림픽에 등장한 게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첫 번째 겨울 올림픽은 이로부터 16년이 지난 1924년 프랑스 샤모니에서 처음 열렸습니다.이 대회 때는 올림픽 마라톤 선수가 42.195㎞를 뛴 첫 번째 대회이기도 합니다. (아직도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까지 거리가 42.195㎞라서 그렇게 뛴다고 알고 계시는 거 아니죠?) 당시 영국 왕가는 윈저성(영국 왕가 주말 별장)을 출발한 마라톤 선수가 주 경기장 안에 왕족이 앉아 있던 ‘귀빈석(Royal Box)’ 앞으로 골인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게 코스를 짜다 보니 딱 42㎞가 아니라 195m가 붙었습니다. 이후 1921년 국제육상경기연맹(IAF)에서 42.195㎞를 공식 거리로 확정했습니다.이 대회 마라톤 경기 때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표 찰스 헤퍼론(1878~1932)이 골인 지점까지 약 2.5㎞를 남겨뒀을 때까지 선두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관객이 샴페인병을 터뜨려 그에게 한잔 건넸고 이를 받아 마신 헤퍼론은 위경련을 일으켰습니다. 바닥에 한참을 나뒹굴고 나서야 다시 뛰기 시작한 페허론은 결국 3위로 골인했습니다. (나중에 선두가 실격당해 최종 은메달). 이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말이 ‘샴페인을 너무 빨리 터뜨렸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라나 뭐라나.거짓말이 하필 ‘새빨간’ 이유까지 말씀드리면 너무 긴 글이 되어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잡학사전’은 언제든 여러분 제보를 기다립니다. 궁금하기는 한데 직접 알아보기 귀찮다고 생각하시는 게 있으시면 언제든 kini@donga.com으로 e메일 보내주세요.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퀴즈. 아래는 위 사진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각 ○ 안에 알맞은 글자를 넣으시오.“2011년 결혼식을 마친 윌리엄 영국 ○○○(오른쪽)과 캐서린 ○○○○(왼쪽)이 런던 버킹엄궁 발코니에서 입을 맞추고 있다.”한국 언론에서는 보통 맨 처음 나오는 동그라미 세 개를 ‘왕세손’이라고 채운다. 케임브리지 공작 윌리엄이라고도 부르는 그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장손. 영어로는 보통 ‘Prince William’이라고 쓰지만 동양에서 왕의 장손을 왕세손이라고 부르던 걸 준용해 윌리엄도 왕세손이 된다. ‘Prince’가 꼭 ‘왕자’는 아닌 것이다.그러면 캐서린 뒤에는 왕세손의 아내를 부르는 호칭이 들어갈 터. 인터넷 포털 사이트 구글 검색 결과를 보면 ‘왕세손빈’이 1410개로 ‘왕세손비’(840개)보다 많다. 왕세손비나 왕세손빈 모두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을 수 없는 낱말이지만 역시 동양 왕실 전통에 따라 쓰면 왕세손빈(嬪)이 정답에 가깝다. 비(妃)는 보통 왕의 정실 아내를 뜻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윌리엄의 어머니를 흔히 ‘다이애나 비’라고 부르는 것도 100%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웨일스 공작부인 다이애나의 전 남편인 찰스 왕세자가 왕위에 오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왕세자의 아내를 뜻하는 낱말은 왕세자빈 또는 세자빈이다. 따라서 다이애나 비가 아니라 다이애나 빈이 맞다. 다이애나 빈은 영어로 흔히 ‘Princess Diana’니까 Princess도 꼭 공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추억 속 그 게임 ‘프린세스 메이커(Princess Maker)’가 꼭 ‘공주 만들기’가 아닐 수도 있는 이유다.별로 쓸 일도 없는 왕실 호칭을 원고지 넉 장 넘게 소개한 건 1989년 오늘(12월 6일)자에 실린 ‘英(영) 윌리엄 王子(왕자) 「失禮(실례)」 사진 말썽’ 기사 때문. 일단 여태 확인한 것처럼 제목부터 틀렸다. 이 기사 첫 줄은 “영국 런던의 대중 주간지 「더 피플」은 지난 11월 19일 찰스 황태자의 장남 윌리엄 왕자(7)와 차남 해리 왕자(5)가 학교 운동장에서 노는 장면을 숨어서 찍어 게재했다가 편집장이 해고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이다.황태자는 황제의 자리를 이을 아들을 뜻하는 낱말. 엘리자베스 2세는 황제가 아니기 때문에 웨일스 공 찰스는 황태자로 불릴 수가 없다. 영국은 황제국을 칭한 적이 없지만 영국 왕은 1876년부터 1947년까지 인도 제국 황제를 겸했다. 1947년 파키스탄이 독립하면서 인도 제국이 무너졌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1952년 즉위했기 때문에 황제였던 적이 없다. 단,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 언론에서 이 웨일스 공을 황태자로 부르는 게 일반적이었기에 이 기사만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찰스 왕세자로서는 애석하다면 애석(?)한 건 저 기사가 나오고 28년이 지나도록 두 아들을 왕자로 만들지 못했다는 점이다. 현재 69세인 찰스 왕세자가 영국 왕위에 오르면 1830년 65세로 왕이 된 윌리엄 4세를 넘어 영국 역사상 가장 많이 나이에 즉위한 왕이 된다. 그러니까 찰스는 이미 영국 역사상 최고령 왕세자다.그러면 1일(현지 시간) 결혼하겠다고 발표한 해리는 뭐라고 부르는 게 옳을까. 어쩐지 해리는 왕자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이름이지만 여왕 손자니까 그냥 왕손(王孫)이 가장 적합한 표현이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서울 종로구 평동 강북삼성병원 안에는 경교장(京橋莊·사진)이라는 건물이 들어서 있다. 한때 강북삼성병원 본관으로 쓰기도 했던 이 건물이 유명한 건 해방 후 귀국한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이 사저(舍邸)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백범 선생이 안두희(1917~96)에게 피살당한 곳도 경교장이었다.한때 ‘동교동’이 DJ(김대중), ‘상도동’이 YS(김영삼)를 뜻했던 것처럼 경교장은 곧 백범 선생과 임시정부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실제로 경교장은 임시정부 청사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45년 오늘(12월 4일)자 동아일보는 경교장에서 처음 열린 임시정부 국무회의 소식을 전했다.동아일보는 이날 1면 머리기사에 ‘동경(憧憬)턴 고국서 역사적 국무회의’라고 제목을 붙였다. 동경턴은 ‘동경하던’ 그러니까 ‘간절히 그리워하던’이라는 뜻이다.당시 동아일보는 이 기사에서 “조선의 장래를 축복하는 듯이 설후(雪後)에 쾌청(快晴)된”이라고 이 회의가 열린 그해 12월 3일 날씨를 전했다. 눈이 온 뒤 날이 개었다는 뜻이다. 이 기사는 “오전 11시가 지나서 역사적인 국무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기자들은 벽에 걸린 시계만 쳐다보며 초조하게 대기하고 있다”로 이어진다. 이날 회의는 오후 2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오랫동안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임시정부 요인에게 제일 큰 문제는 국내 정치 기반이 빈약하다는 점이었다. 당시 임시정부 대변인을 맡고 있던 조소앙 선생(1887~1958)은 국무회의 후 기자들과 만나 “오전에 국무회의가 개최되었으나 김구 주석 이하 선착한 일행이 지난 10일간 국내 정세와 지나온 40년간 국내의 역사를 읽었는데 작일(昨日·어제) 들어온 우리 일행은 아직 국내 역사를 읽지 못하고 방금 첫 페이지를 열어 놓았을 뿐”이라며 “함으로(이런 이유로) 기자 제씨(諸氏·여러분)가 궁금히 알고 듣고자 하는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못하겠다. 이 점에 있어서는 우리가 전부 독파(讀破)한 후 들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실제로는 국내 정치 문제보다 해외 발 폭풍이 더 컸다. 미국, 옛 소련, 영국 외무장관이 모스크바에서 모여 한국을 신탁통치 하기로 결정한 것. 임시정부는 신탁통치 반대(반탁) 운동을 벌이면서 국권을 되찾으려 애썼지만, 이런 활동이 미군정의 반발을 사면서 신탁통치 기간 3년 동안 형식적인 존재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임시정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냉정히 말해 김생민 씨(44·사진)는 전형적으로 ‘가늘고 길게’ 방송 경력을 이어가던 캐릭터었다. 올해로 데뷔 25년차 방송인이 됐지만 ‘약방의 감초’ 같은 존재였을 뿐 ‘그뤠잇(great)’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랬던 그가 올해 ‘김생민의 영수증’ 하나로 스타덤에 올랐다. 원래 팟캐스트 한 꼭지로 시작했던 ‘…영수증’은 “스튜핏(stupid)”, “돈은 원래 안 쓰는 것”이라는 유행어와 함께 성장하더니 어느덧 70분짜리 지상파 정규 방송이 됐다.사실 김 씨 같은 근검절약 캐릭터는 모순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누구나 조금이라도 더 돈을 아끼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 한 구석에 품고 있는 게 사실. 그러면서도 돈을 아껴보겠다는 다른 이를 향해서는 ‘짠돌이’, ‘자린고비’ 같은 평가를 서슴없이 내리기도 한다. 한 연예인은 지상파 TV 프로그램에 나와 “쿠폰, 할인카드, 적립카드를 내밀 때 끌렸던 이성이 확 싫어진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여파가 가시지 않았던 1998년에는 오히려 근검절약이 진짜 미덕일 수 있었을까. 그해 오늘(12월 1일)자 동아일보는 할인쿠폰이 있는 식당만 이용하고, 인터넷 경품 행사에 매일 응모하며, 무료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고, ‘패밀리 통화’ 요금제를 활용 가족간에 공짜로 전화를 주고 받는 ‘신세대 알뜰파’를 소개했다.이 기사는 ‘최저가 보상제도’를 실시하던 할인점 관계자가 “주변 점포보다 비쌀 경우 차액을 2배로 보상하고 있는데 100~200원 차이라도 영수증을 들고 와 보상금을 챙겨가는 모습에서 소비의식의 변화를 느낀다”고 말했다고 전했다.이 발언을 보고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했나’ 싶은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영수증’에 기자가 쓴 영수증을 보내면 분명 ‘스튜핏’ 소리를 들을 게 틀림없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해마다 7월 1일이면 음식을 일절 입에 대지 않는 여인이 있었다. 이 여인이 이날마다 곡기를 끊었던 건 연인 백석(白石·사진)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여인과 이 시인이 마지막으로 헤어진 건 1939년. 그 후 1996년 백석이 숨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여인도 1999년 세상을 떠났다. 백석은 1937년 함남 함흥 시에서 처음 만난 이 여인과 한 눈에 사랑에 빠져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라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백석은 시선(詩仙) 이백이 지은 시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따와 이 여인에게 ‘자야(子夜)’라는 호를 지어줬다. 운명을 예감했던 걸까. 자야오가는 서역으로 오랑캐를 정벌하러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 자야의 애끊는 심정을 고백한 시였다.“장안에 달 한 조각/집집마다 다음이질 소리/가을 바람 불어 그치지 않으니/모두가 옥문관(玉門關) 향하는 그리움이라/어느 날에나 오랑캐 물리치고/낭군은 돌아올 수 있을까.” - 자야오가 중 추(秋). (옥문관은 만리장성 서쪽 끝에 있는 관문)자야라는 호를 얻기 이전에 사람들은 이 여인을 진향(眞香)이라고 불렀다. 기명(妓名)이었다. 맞다. 서울에서 김영한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이 여인은 가세가 기울면서 열 여섯 살에 기생이 됐다. 진향은 잡지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할 만큼 문학적 재능을 갖춘 기생이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두 사람은 곧 서울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지만 백석의 부모는 아들이 기생과 함께 사는 걸 마뜩치 않게 생각했다.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로 스스로를 달랬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부모가 강제로 다른 여성과 결혼을 주선하자 백석은 자야에게 ‘함께 만주로 떠나자’고 제안했지만 자야는 자기가 연인의 인생을 가로막게 될 것을 염려해 거절했다. 결국 백석은 1939년 홀로 만주 창춘(長春)으로 떠났다. 그렇게 3년에 걸친 두 사람의 만남은 영영 막을 내리게 된다.서울에 남아 홀로 사랑을 이어가던 자야는 1951년 서울 성북동에 있던 청암장을 사들인다. 그리고 이곳을 요정(料亭)으로 탈바꿈시킨다. 삼청각, 선운각과 함께 한국 3대 요정으로 손꼽히던 대원각은 그렇게 문을 연다. 군사 독재 시절 ‘요정 정치’라는 낱말이 탄생한 곳이 바로 대원각이었다.평생 백석을 그리워하며 산 자야에게 애독하던 저자가 한 명 더 있었으니 바로 법정 스님이었다. 1996년 9월 26일자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자야는 1987년 미국 로스엔젤레스(LA)에서 법정 스님을 처음 만나 “아무 조건 없이 대원각을 시주할 테니 절로 만들어 스님이 운영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법정 스님은 “나는 일평생 주지 같은 일을 맡아본 적이 없을 뿐더러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라며 사양한다. 이후에도 자야는 시주 의사를 굽히지 않았고 1995년 법정 스님도 결국 주변의 권고에 못 이겨 시주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세운 절이 바로 나중에 법정 스님이 입적하게 되는 ‘길상사(吉祥寺)’다. 당시 동아일보는 “대지와 임야를 합쳐 7000여 평에 달하는 대원각이 시가 1000억 원 대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하지만 자야는 “없는 것을 만들어 드려야 큰일을 한 것이 되는데 있는 것을 드리니 아무에게도 내세울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자야가 이 건물을 시주한 대가로 받은 건 염주 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이었다.이듬해 1월 19일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 17층에서 ‘길상사 창건위원회’ 첫 공식 모임이 열렸고, 그해 12월 14일 개원식이 열렸다. 개원식에서 축사를 맡은 사람은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개원식을 2주 정도 앞두고 있던 1997년 오늘(11월 28일)자 동아일보는 자야가 남은 재산도 모두 사회에 환원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자야는 나중에 “1000억 원이라는 돈이 그 사람(백석)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말했다.길상사는 법정 스님이 불교에 귀의하려던(원래 그는 불교 신자가 아니었다) 자야에게 지어준 법명 길상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백석이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 시절 살았던 하숙집 주소가 ‘도쿄(東京) 기지초지(吉祥寺·길상사) 1895번지’였다.}
“스파이크 앞의 벽을 연다. 그러려고 세터가 있는 거야.” (만화 ‘하이큐!!’ 중)배구에서 세터가 해야 할 일을 이보다 잘 설명한 문장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배구 팬 중에는 세터를 ‘가위바위보 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양 날개와 가운데 중에서 어느 코스로 세트(토스)할 것인지 판단해 스파이크 앞의 벽 그러니까 블로킹 벽을 열어 공격 성공률을 끌어올리는 게 세터에게 제일 중요한 일이니까요.실제 결과도 그렇습니다. 27일 현재 기준으로 프로배구 2017~2018 도드람 V리그 남자부 경기에서 상대 블로커가 없거나 한 명일 때 공격 성공률은 55.9%로 2명 또는 3명일 때 47.4%보다 8.5% 포인트 높습니다. 확실히 ‘블로킹을 벗겨내면’ 공격 성공률이 올라갑니다. 그러면 이렇게 블로킹을 가장 잘 벗겨낸 선수는 누구일까요?현대캐피탈 팬 여러분 기뻐하세요. 여러분의 노홍렬 아니 노재욱(25·사진)이 주인공입니다. 노재욱이 현재까지 세트를 시도한 건 총 554번. 한국배구연맹(KOVO)에서는 이 중 540번에 대해 상대 블로커 숫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540번 중에서 상대 블로커가 한 명도 없던 건 42번(7.8%), 1명일 때는 205번(38.0%)이었습니다. 그러면 블로커가 0명 또는 1명인 경우(0+1)는 총 45.7%가 됩니다. KB손해보험에서 주전 세터 황택의(21) 뒤를 받치는 양준식(26)이 41.3%로 2위에 이름을 올렸고, 3위는 40.2%를 차지한 대한항공 한선수(32)가 차지했습니다. 세트를 100개 이상 기록한 세터 중에서 이 ‘0+1’ 비율이 40%를 넘긴 건 이 세 명뿐입니다.노재욱에 이어 이승원(24)이 4위에 오른 데서 눈치챌 수 있듯이 팀 순위에서도 현대캐피탈이 41.2%로 0+1 순위 1위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삼성화재가 승점 25점으로 2위 현대캐피탈(18점)에도 7점 앞선 채 1위를 달리고 있는 게 신기해 보이기도 합니다. 2위 현대캐피탈과 최하위(7위) OK저축은행(12점) 사이 승점 차이(6점)가 1, 2위간 승점 차이보다 오히려 적습니다.제일 큰 이유는 역시 외국인 선수 타이스(26). 리그 전체로 보면 상대 블로커가 3명일 때 공격 성공률은 41.2%밖에 되지 않지만 타이스는 블로커 3명을 앞에 두고도 공격 성공률 50.4%로 흔들리지 않는 면모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타이스가 괜히 ‘2단 공격’에서 강점을 보였던 게 아닙니다. 원문보기: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블로킹 벽에 아랑곳하지 않는 삼성화재가 블로킹 벽을 열려는 다른 팀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과연 삼성화재가 계속 상대 팀 블로킹 벽을 뚫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블로킹 벽을 여는 데 성공한 다른 팀이 결국 순위를 뒤집는데 성공할 수 있을까요? 상대 공격수를 잡아내고야 말겠다는 블로커처럼 매 경기 승점을 따내고야 말겠다는 각 팀도 힘껏 또 힘껏 점프하고 있습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1933년 오늘(11월 25일)자 동아일보 조간 2면은 ‘말코니 후작 일행 다섯 명이 부산항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당시 동아일보는 조·석간 동시 발행 체제였다.) 현행 외래어 표기법은 이 후작 이름을 ‘(구리엘모) 마르코니(1874~1937)’라고 쓰도록 규정하고 있다.그렇다. 1909년 무선통신을 발전시킨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탄 그 마르코니 후작이 식민지 조선에 도착했던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마르코니 후작을 ‘무전왕(無電王)’이라고 소개했다. 이날 기사 제목도 ‘무선왕 부부 근역에 제1보’였다.동아일보는 마르코니 후작 입국을 앞두고 1933년 11월 21일 조간 6면에 ‘24일에 경성에 오는 마르코니는 어떤 사람’이라는 기사 하(下)편을 내보내면서 “만일 마르코니가 없었던들 오늘날과 같은 무선 전신과 라디오를 가졌을까 생각할 때 말코니를 무선 전신왕이라 부르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의 남모를 수고와 노력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썼다.마르코니가 가장 감사 인사를 많이 받은 건 1912년 타이태닉호 침몰 때였다. 전체 탑승자(2239명) 가운데 31.8%(317명)가 살아남을 수 있던 건 무선 전신을 통해 SOS 신호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외신에서는 “마르코니가 타이타닉 생존자의 목숨을 구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평했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롱텀에볼루션(LTE)이나 와이파이(Wi-Fi) 역시 마르코니 후작이 없었다면 발전 속도가 더뎠을지 모른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 중에는 니콜라 테슬라(1856~1943)를 무선 통신의 아버지로 알고 계신 분도 적지 않을 것이다. 1943년 미국 대법원에서 결론을 내린 것처럼 테슬라가 마르코니보다 7년 앞서 1897년 무선통신에 대한 특허를 취득한 건 맞다. 하지만 실용화라는 측면에서는 마르코니 후작이 더 빨랐다. 마르코니 후작은 1901년에는 대서양을 사이에 둔 미국과 영국 사이에 무선통신을 성공시켰다. 1933년 동아일보에 실린 마르코니 후작 소개 기사 마지막 문장은 “우리에게도 장래에 조선의 마르코니가 생기기를 바라서 마지않습니다”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 내용과 100%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 스마트폰이 전 세계 곳곳에서 울리는 현재 이 바람이 어느 정도 이뤄졌다고 평가해도 무리가 아니지 않을까.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1924년 오늘(11월 24일자) 동아일보 5면에는 알파벳으로 쓴 기사가 나갔다(위 사진). 글씨가 너무 작아 보기가 힘드실 테니 일부를 좀 확대해 보면 아래와 같다.‘외국어에는 자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 가운데서도 ‘이 글을 어떤 언어로 썼는지도 모르겠다’고 느끼는 분이 적지 않으실 터다. 이 글은 ‘에스페란토’라는 언어로 쓴 ‘조선 에스페란티스토 연맹 선언’이다. 에스페란토는 루도비코 자라로 지멘호프 박사가 1887년 ‘만국 공통어’를 목표로 만든 인공 언어이고, 에스페란티스토는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은 가리킨다.도서출판 갈무리는 독일 출신 울리히 린스 박사가 쓴 ‘위험한 언어’를 2013년 펴내면서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인류에게 종족에 대한 저주받은 편견과 장벽을 제저하고, 진정한 사랑과 형제애로 하나가 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자애로운 인류 구성원들은 이미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를 강압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얼마나 불합리하고 황당한가를 고뇌하면서 지켜보았다. 모든 민족의 고유 언어는 각각의 민족을 위해 존재하고, 모든 인류를 위해서는 오직 에스페란토만이 존재해야 한다.”당시 동아일보에서 이 글을 실었던 건 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 선생(1888~1968)이 주필 겸 편집국장을 맡고 있었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벽초(碧初)라는 호는 “푸름을 처음 배운 사람”이라는 뜻. 여기서 푸르다(碧)는 건 에스페란토를 상징하는 녹색을 가리킨다.그 뒤로 홍 선생은 매주 월요일자 지면에 ‘에스페란토 란(欄)’을 만들어 내보낸다. 당시 이 꼭지를 담당한 기자는 바로 춘원 이광수(1892~1950)였다. 이듬해(1925년) ‘조선 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그러니까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카프(KAPF)’라고 배우는 단체가 문을 열었는데, KAPF는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라는 에스페란토 약자다. 동아일보는 1930년 총 100회에 걸쳐 에스페란토 강좌를 싣기도 했다.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이렇게 에스페란토 붐이 일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위험한 언어’는 “조선어를 사용하는 것이 큰 범죄 중 하나였던 시기에, 지식인들이 에스페란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며 “조선의 초기 에스페란토 운동은 모든 지식인들에게 이념적 운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진보적인 구국운동으로 여겨졌다”고 전하고 있다.이런 이유로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이 에스페란토를 배우는 걸 ‘중단시키기 불가능한 ’위험한 사상‘에 빠져드는 첫 걸음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었다.“ ”에스페란토를 보급하는 것은 일본에 대한 배신의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지도자를 체포하는 등) 조선어에 대한 억압이 시작되자 조선에서의 에스페란토 운동 역시 조용해질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우리는 단지 우연의 일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상 ’위험한 언어‘) 그럼 긴 글 읽어주셔서 Dankon(단콘·에스페란토로 ‘감사합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2011년 5월 27일자 동아일보 1면에는 이국종 아주대 교수(아주대병원 경기남부 권역외상센터장)가 당시 동아일보 기자를 꿈꾸던 이들에게 보낸 편지가 실렸다. 최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통해 귀순한 북한군 오모 씨 주치의를 맡으며 다시 언론 중심에 선 이 교수는 당시에도 ‘아덴만 여명 작전’을 통해 구출한 석해균 선장을 살려내며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던 상태였다. 이 교수는 당시 동아일보 수습기자 공채 사고(社告)로 나간 이 편지에 “빈약한 한국 현대사에서 자기 목에 칼이 들어오는 상황에서도 ‘뭔가 옳은 일’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구와 ‘이건 아니지 않은가’라는 정신에 입각한 ‘아닌 건 아닙니다’라고 기사를 내는 연론사에 여러분은 인생을 거는 것”이라며 “여러분은 다른 언론사 기자와 달리 단순한 현상만을 표현하기보다 배경까지 꿰뚫어 보는 시각을 가져야 하며 타인의 어려움이나 아픔을 마음속 깊이 느껴야 할 것”이라고 썼다. 그는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하는 분들만이 100년 역사에 빛나는 민족정론지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동아일보의 기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이 교수가 이렇게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신문‘이라고 동아일보를 평가한 데는 이유가 있다. 당시 석 선장 몸에서는 총알 네 발이 나왔는데 해경에서 수거한 건 세 발뿐이었다. 한 발이 행방이 묘한 상황이었던 것. 이 때문에 수많은 기자가 이 총알 행방을 쫓은 게 당연한 일. 이제는 잘 알려진 것처럼 이 총알은 이 교수가 석 선장을 구하러 날아갔던 오만에서 잃어버린 상태였다. 이 교수는 답답한 마음에 당시 취재현장을 지키던 동아일보 박민우 기자를 응급중환자실로 은밀히 불러 이 사실을 ’개인적으로‘ 털어놓았다. 하지만 이 총알 분실 사건이 개인적 실수가 아니라 관리 시스템에 구멍이 있어 생긴 일이었다고 판단한 박 기자는 이튿날(2011년 2월 2일) ’石(석) 선장 몸속서 뺀 총알 1개 오만서 잃어버렸다‘고 기사를 썼다.현재 동아일보 카이로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는 박 기자는 ”(기사가 나간 뒤) 돈독했던 나와 이 교수의 관계는 급랭했다. 기사가 나온 뒤 그와 첫 대면한 순간은 잊을 수가 없다. 이 교수가 (근처에 있던) 소화기를 복도에 내동댕이쳤다. 나는 동아일보 기자로서 들을 수 있는 온갖 ’욕‘을 소화하며 이 교수를 진정시켰다“고 회고했다.기자와 취재원은 이렇게 불편한 경험을 해도 사건이 끝나기 전까지는 계속 만날 수밖에 없다. 박 기자는 그 뒤로도 수술실에서 나오는 이 교수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또 쫓아 다녀야 했다. 박 기자는 ”며칠이 더 흐르자 이 교수가 미안했던지 평소 성격처럼 ’쿨하게‘ 사과를 건넸다“고 전했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졌다고 한다. 이 인연으로 박 기자가 이 교수에게 ’후배들이 들어오는데 편지 좀 써달라‘고 부탁했고, 환자 치료로 바쁜 와중에도 이 교수는 원고지 10장 분량으로 편지를 써 새벽 2시에 박 기자 e메일로 보냈다. 박 기자는 ”’간단하게 써주면 된다‘고 부탁했는데 ’진짜 제대로 된 편지‘를 보내서 놀랐다. 편지를 읽으면서 이 교수가 내게 ’기자는 말 한 마디로 사람도 죽일 수 있고, 살릴 수 있는 직업‘이라며 타이르듯 했던 얘기가 하나씩 떠올랐다“고 말했다.이 교수는 22일 브리핑 때 자신을 향한 근거 없는 비방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는 이 자리서 ”동아일보 박민우라는 기자가 있다. 석 선장 치료 때 단편적인 기사, 지엽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을 보고 백그라운드를 봐야 한다고 혼낸 적이 있다. 지금은 잘 성장해서 특파원으로 가 있다. 그런 기자가 많이 나오길 바란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만큼 두 사람이 허물없는 사이가 됐다는 방증이다.동아일보 기자 중 이 교수에게 가르침을 받은 건 박 기자 혼자만이 아니다. 이 교수는 그해 8월 11일 자기 편지를 받고 동아일보에 지원해 합격한 수습기자와 직접 만나 삶의 철학을 들려주기도 했다.당시 강의를 들었던 조건희 기자(사진 왼쪽)는 현재 동아일보 보건복지 담당으로 이번 JSA 귀순병 사건 때 이 교수 ’마크맨‘으로 활동하며 연일 의미있는 단독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한국에서 처음 ‘지방자치제도’를 시작한 건 언제일까. 언론에서는 주로 1952년 제1회 전국 시·읍·면의회의원 선거를 시초로 꼽는다. 물론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도 부군면협의회(府郡面協議會)라는 기초 의회 선거를 실시했다. 이 부군면협의회는 해방 이후인 1945년 2월까지 존속했다. 단, 5원 이상 국세를 낸 사람만 투표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보통선거 원칙을 어겨 민주적인 투표라고 보기는 어렵다. 1923년 기준 5원은 금 3.6g 정도를 살 수 있던 금액. 이를 21일 현재 서울 지역 금 소매가 기준으로 바꾸면 약 19만5000 원 정도다. 현재 근로소득세를 이만큼 내려면 월급이 290만 원 정도는 되어야 한다.‘선거’가 있으면 ‘광고’도 있다. 1923년 오늘(11월 22일)자 동아일보에는 이틀 전 실시한 제2회 부 및 지정면협의회원 총선거에서 경성부협의원으로 뽑힌 이규현 민용호 오긍선 방규환 한익교 이진호 유전 신승균 당선자의 당선사례가 실렸다. ‘국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이 합동 당선사례가 한국 신문에 등장한 첫 번째 선거 광고다. 이들은 모두 똑같이 “금반(今般) 경성부협의원 선거에 제(際)하여 유권자 제씨(諸氏)의 심후(深厚)하신 동정(同情)에 인하와 행(幸)히 당선의 영광을 몽(蒙)하였삽기 자(玆)에 지상으로 근(謹)히 사의(謝意)를 표하나니다”는 광고 문구를 쓰고 자기 이름을 적었다.당시 선거는 납세액 규정 때문에 지역 유지들 위주로 참여하는 ‘그들만의 리그’ 성격이 강했다. 이런 이유로 지역 유지들이 특정 후보를 추천하는 광고를 신문에 내보내기도 했다.맨 오른쪽 후보자는 마츠모토 고이치로(松本 耕一朗)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고 있다. 일본식 이름을 쓴다고 반드시 일본인라 보긴 어렵다. 다만 조선총독부에서 창씨개명을 강요할 수 있도록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한 게 1939년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마츠모토 후보는 일본인이었을 가능성이 이 있다. 당시 조선 거주 일본인도 선거권이 있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배구는 위 사진처럼 받고 띄우고 때리는 종목입니다. 배구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아는 것처럼 이렇게 공격 기회 한 번에 공을 터치할 기회가 총 세 번 있습니다. 이 세 번을 각각 1단, 2단, 3단이라고 부르죠. 그래서 이상합니다. TV 중계 때 아나운서가 해설위원이 ‘2단 공격’이라고 부르는 플레이가 실제로는 대부분 3단에 나오거든요. 세터 등이 진짜 2단에 공격할 때는 2단 공격이라는 말보다 ‘2단 패스 페인트(feint)’ 같은 표현을 더 많이 쓰고요. 도대체 이 3단 플레이를 2단 공격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뭘까요?여기서 말하는 ‘2단 공격’은 상대 공격을 (가까스로) 받아낸 다음이거나 서브 리시브가 흔들려 미리 약속한 플레이를 하기 힘든 상황에서 일단 공을 높게 띄운 다음 공격하는 걸 뜻합니다. KBSN에서 프로배구 2017~2018 도드람 V리그 중계 때부터 2단 공격을 설명할 때 ‘하이 볼’이라는 용어를 쓰는 건 아마 ‘공을 높게 띄운다’에 방점을 찍었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2단 공격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우니까 용어를 바꿀 생각을 했을 거고요.2단 공격이 실제로는 3단 공격이기 때문에 이단이 한자로 두 이(二)를 쓰는 ‘二段’이 아니라 다를 이(異)를 쓰는 ‘異段’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배구 관련 일본 사이트를 찾아보면 일본 사람들도 ‘니단(二段)’이라고 쓰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글로 쓸 때는 2단이든 이단이든 모두 상관없지만 확실히 숫자로 2단인 겁니다. 그러면 왜 이 3단 공격을 2단 공격이라고 부르게 된 걸까요? 정답은 배구 규칙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국제배구연맹(FIVB) 규칙에 따르면 블로킹은 터치 횟수에서 빠집니다. 그러니까 유효 블로킹 그러니까 상대 팀 스파이크가 우리 팀 블로커 손에 맞은 상태에서 공을 건져내면 그 순간이 1단입니다. 남은 터치 횟수가 아직 두 번 더 있기 때문에 선수 한 명이 공을 띄우고(2단) 공격수가 스파이크를 때리는 과정(3단)까지 진행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1976년 현재 내용으로 규칙을 바꾸기 전까지는 이런 경우에 블로킹이 첫 번째 터치였습니다. 그러면 이제 터치 기회가 두 번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공을 한번 띄우고(1단) 스파이크를 때리면 2단 공격이 됐습니다. 블로킹은 수비 행위라고 봤기 때문에 공격 시도만 따져서 2단 공격입니다. 이제 규칙은 바뀐 지 오래지만 그 의미는 여전히 살아남아서 실제로는 3단 공격을 2단 공격이라고 부르고 있는 겁니다. 2단 공격은 그 특성상 성공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19일까지 올 시즌 프로배구 남자부 경기 전체 공격 성공률은 딱 50%. 2단 공격 성공률은 이보다 8%포인트 낮은 42%입니다. 삼성화재가 현재 1위를 달리고 있는 이유 역시 2단 공격을 통해 찾을 수 있습니다. 삼성화재는 현재까지 팀 2단 공격 성공률 47.7%로 남자부 7개 팀 중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개인 2단 공격 성공률(2단 공격 시도 50개 이상 기준)을 살펴봐도 삼성화재 외국인 선수 타이스가 51.6%로 1위, 같은 팀 주장 박철우가 51.0%로 2위입니다. 삼성화재만 잘 나간다고 라이벌 팀 현대캐피탈 팬 여러분 너무 배 아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공격 범실까지 계산에 넣는 ‘공격 효율’을 따져 보면 2단 상황에서 제일 좋은 성적을 거둔 건 0.400을 기록한 현대캐피탈 외국인 선수 안드레아스였습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