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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르르륵, 드르르륵” “위이이잉! 탕! 탕!” 8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카페에 들어서자 잔잔한 음악 대신 금속과 나무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귀에 박혔다. 한 쪽에선 손님들이 치과에서나 사용할 법한 드릴을 잡고 ‘위이잉’ 소리를 내며 무언가에 열중해있다. 이들 손에는 머그잔 대신 망치, 쇠막대기가 들렸다. 카페라기보다는 수공예 작업실로 보이는 이곳은 ‘반지 공방 카페’다. 직원 설명에 따라 기자도 반지를 만들어봤다. 손가락 둘레를 재고 얇고 긴 은 막대를 고른 뒤 망치로 두드리며 동그란 모양으로 굽혔다. 평소 별로 써본 일이 없는 여러 공구를 들고 ‘나만의 것’을 만들다 보니 40여 분이 훌쩍 지났다. 모양이 잡히면 취향에 따라 세세한 장식이나 문구를 새기면 된다. 접착제와 은가루를 바른 양 끝을 가스 토치로 붙이면 끝. 욕심을 내 광까지 내면 1시간 만에 나만의 반지가 탄생한다. 취재 차 해봤지만 생각보다 훨씬 뿌듯했다. 완성된 반지를 손에 끼웠다 빼 보며 자꾸 셔터도 누르게 됐다. 최근 ‘소만행’(소소하게 만들며 느끼는 행복)을 찾아 공방 카페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공방 카페는 대략 4, 5년 전부터 조금씩 들어서기 시작했지만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흐름을 타고 주목받고 있다. 1만~3만 원 정도 비용으로 친구, 연인과 함께 또는 홀로 카페에서 뭔가를 만들며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매력. 카페 손님 임재훈 씨는 “본업과 무관하게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게 오히려 휴식이 된다”고 말했다. 카페를 운영하는 임익분 씨는 “과거엔 20~30대가 주로 카페를 찾았다면, 요즘은 40, 50대부터 부모님과 공방 카페를 찾는 아동 및 10대까지 연령대가 다양하다”고 말했다. 공방 카페에서 만들 수 있는 물건도 다양하게 진화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간단한 팔찌 등 30분이면 만들 수 있는 장신구 위주였지만, 근래에는 도자기나 미니어처처럼 짧게는 2시간부터 길게는 며칠씩 손님이 시간을 투자해 만들도록 하는 카페도 생겨났다. 대부분 고도의 기술은 필요 없이 어렵지 않게 따라 만들 수 있다. “재봉틀 소리를 들으며 옷감 작업에 집중하다 보면 일상의 스트레스도 사라져요” 서울 마포구 연남동 ‘재봉틀 카페’는 2시간에 1만 원 가량 요금을 내면 마치 PC방처럼 친구들과 재봉틀 앞에 앉아 대화하며 각종 소품을 만들 수 있다. 천에 문양을 달아 에코백을 만들거나 아예 옷을 만들기도 한다. 매주 사흘은 재봉틀 카페를 찾는다는 최정선 씨는 “재봉틀에 앉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했다. ‘재봉틀 카페’를 운영하는 김윤주 씨는 “재봉틀을 구매하기엔 부담스러워하는 직장인들이 잠시 ‘잡생각’을 떨치기 위해 이곳을 찾아 1~2시간씩 작업을 하고 간다”고 말했다. 일반인들이 재봉틀로 직접 옷이나 소품을 만들어 사용하는 문화의 확산은 출판시장에서도 확인된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지난해 생활 공예·DIY 분야 도서 가운데 ‘옷 만들기’ 도서 매출의 비중이 2014년(7.2%)보다 두 배 이상(16.5%)으로 늘었다. 일본의 옷 만들기 강의를 정리한 번역서 ‘패턴 학교’(이아소) 시리즈 등이 꾸준히 인기를 모으고 있다. 최근에는 물건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본인이 먹는 샌드위치에 넣을 상추 등 채소를 직접 재배해 먹을 수 있도록 한 ‘식물공방 카페’도 등장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카페가 단순히 사람을 만나 함께 커피를 마시는 곳에서 머물면서 무언가 창작하고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곳으로 변모하고 있다”며 “숍인숍(Shop In Shop·매장 안에 매장을 여는 것)이나 상이한 공간이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형태로 카페는 계속 진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동물들의 말을 할 줄 아는 인간이 있다고? 한마디만이라도 동물의 말을 이해하는 박사님이라면, 우리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알아주실 거야. 다 같이 큰 정원이 있는 박사님의 집으로 가보자!” 귀엽고도 따뜻한 상상력에서 시작된 ‘둘리틀 박사의 모험’ 시리즈 12권이 ‘둘리틀 박사와 초록 카나리아’ ‘둘리틀 박사의 퍼들비 모험’을 끝으로 국내에 처음 완간됐다. 아동문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이 시리즈는 저자가 본인의 자녀들에게 편지로 전하던 이야기에서 시작됐다. 그가 단순하면서도 푸근한 느낌의 삽화를 직접 그렸으며, 모험 이야기에는 자녀들에게 전하고픈 동심과 애정이 묻어난다. 작품 속 둘리틀 박사의 동물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은 초판부터 전 세계 독자에게 큰 공명을 불러왔다. 인간 중심적 사고에 대해 경고하는 그의 부드러운 일침이기도 했다. 이 책을 보면서 자란 동물학자 제인 구달과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이 시리즈를 인생의 책으로 꼽으며 ‘둘리틀 키즈’임을 자처하고 있다. 특히 도킨스는 “현재 내 영웅이 찰스 다윈이라면 어린 시절의 영웅은 둘리틀 박사”라고 말할 정도다. 초록 카나리아는 이전 시리즈에서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작은 카나리아인 ‘피피넬라’의 이야기다. 새가 박사를 만나 힘차게 울부짖고(노래하고) 마침내 오페라 공연까지 마친다는 내용이다. 한 마리의 새에서 시작된 상상력은 한 인간의 생애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풍부하고 박진감 넘친다. 퍼들비 모험에서는 둘리틀 박사가 동물들의 언어를 배우며 그들을 돌보는 모습이 기록돼 있다. 다양한 종의 동물에 대한 촘촘한 묘사와 에피소드가 흥미를 끈다. 유쾌하면서도 다소 엉뚱한 둘리틀 박사의 모험은 사실 저자 휴 로프팅이 겪고 목격한 안타깝고 비참한 상황에서 탄생했다. 그는 1886년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에서 공학 학위를 받은 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전쟁의 비참함을 겪으며 그는 인간들로 인해 아무 죄도 없이 더욱 비참한 상황에 놓인 동물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군인이 다치면 치료를 받거나 적정한 보호 관리를 받지만 부상당한 말과 개들은 그저 길에 내버려질 뿐이었다. 그는 동물들의 눈에서 아픔을 읽었고, 아이들에게는 이 안타까움을 낙천적 이야기로 풀어내기로 했다. 모험 이야기에 큰 감동을 받은 건 작가의 자녀만은 아니었다. 독자들은 1928년 8번째 시리즈 이후 추가 연재를 요청했고, 결국 12권의 시리즈는 마무리된다. 둘리틀 박사의 이야기는 최근에도 끊임없이 모티브로 남아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2020년에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참여하는 할리우드 영화로 재탄생한다. 다만 둘리틀 박사의 모험 중에는 아프리카 인종이나 여성에 대한 편견이 담긴 시선이 있어 한계로 지적되기도 한다. 하지만 책의 편집자가 일러두었듯 “그 결점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해당 내용은 후대까지 감동을 전하고 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1990년대 미국 인기 드라마 ‘베벌리힐스의 아이들’에서 주연인 딜런 맥케이 역을 맡아 인기를 끌었던 배우 루크 페리가 4일(현지시간) 별세했다. 향년 52세. 미국 언론에 따르면 고인은 지난달 뇌졸중으로 입원해 투병하다가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페리는 1990년대 로스앤젤레스 베벌리힐스를 무대로 고교생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베벌리힐스의 아이들’에 출연하며 섀넌 도허티 등과 함께 세계적 스타덤에 올랐다. 당시 드라마는 1990년부터 10년간 시리즈로 이어졌으며 한국에서도 방영돼 큰 인기를 끌었다. 고인은 2017년 미국 드라마 ‘리버데일’을 비롯해 ‘제5원소’ 등 다수 작품에 출연했다. 루크 페리의 별세 소식을 접한 배우와 팬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글을 올리며 미국 전역에 애도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김기윤기자 pep@donga.com}
유명한 노래로 구성한 ‘주크박스’ 뮤지컬은 늘 위험부담이 따른다. 관객은 모든 넘버에서 원곡 가수와 배우의 가창력을 비교할 수밖에 없다. 노래를 소화하는 배우의 호흡과 감정 연기까지도 견주기 마련이다. 뮤지컬 ‘그날들’은 노련한 편곡에 맞춰 중후한 합창과 절도 있는 군무로 위험부담을 극복해냈다. 작품은 청와대 경호원들이 20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사라진 ‘그날’의 기억을 좇는 내용이다. 사랑과 우정, 잊혀진 소중한 가치 등 보편적 내용을 고 김광석의 노래 20여 곡의 노랫말에 비교적 매끄럽게 맞췄다. 2013년 초연 후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편곡은 관객에 따라 호불호가 나뉘지만 점수를 줄 만하다. 대체로 구슬픈 감성을 바탕으로 읊조리듯 노래하고 이따금씩 감성이 폭발하는 김광석 노래를 스토리에 맞게 이어 붙였다. 슬픈 단조의 선율도 밝은 분위기의 장조 화음으로 바꿔 경쾌한 느낌으로 표현했다. 감성이 정점에 달한 순간에는 통기타로만 연주한 원곡에 강한 비트를 입혀 감성을 극대화한다. 뮤지컬 무대가 보여줄 수 있는 격정을 다채롭게 표현했다. 배우들의 군무와 합창도 매력을 더한다. 무대 장치와 배경이 비교적 빠른 템포로 변하는데 그에 맞게 배우 10여 명이 나와 경호원, 군인 등을 연기하며 절도 있는 안무를 선보인다. 합창 역시 눈여겨볼 만하다. 사실 합창은 원곡과 비교될 수 있는 지점에서 위험부담을 상쇄하는 포인트다. 배우들이 무반주나 원곡대로 노래하는 장면에서는 가창력이 아쉬울 때도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을 2, 3명 이상이 합창으로 소화할 때는 웅장한 느낌을 준다. 시공간을 오가는 이야기는 자칫하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배우와 무대효과로 이를 충분히 짚고 넘어가며 이해를 돕는다. 극 중간중간 공감할 수 있는 유머 요소도 넣어 눈물을 흘리다 다시 웃음을 터뜨리는 관객들도 있다. 막이 내린 뒤에도 김광석 노래를 흥얼거리게 만든다. 유준상 엄기준 이필모 서현철 오종혁 등 출연. 5월 6일까지.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 6만∼13만 원. 8세 관람가. ★★★☆(★ 5개 만점)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출산 뒤에도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을까요? 이전보다 수백 배의 노력이 필요하겠죠. 발레리나로 무대에 오르면서 결혼과 출산은 결코 쉽게 엄두를 낼 수 없었어요.” 미국 현대무용의 대가 ‘마사 그레이엄’은 무용수가 무대에서 내려오는 일을 ‘고통스러운 죽음’으로 표현했다. 몸을 쓰는 무용의 특성상 그 죽음은 다른 장르에 비해 일찍 찾아온다. 발레리나도 마찬가지다.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지난달 22일 만난 황혜민(41), 강미선(36), 김유선(33)은 “결혼, 출산은 모든 발레리나의 공통적 고민인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황혜민은 2017년 은퇴 후 현재 출산을 준비 중이며, 강미선은 결혼 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김유선은 올해 7월 일반인과 결혼을 앞두고 있다. 결혼이 마냥 반갑기만 한 건 아니다. 결혼 후 집안일 등으로 이전처럼 연습시간을 확보하지 못하면 ‘몸이 무거워지고 처지는 느낌’을 받는 건 한순간이라고 한다. 때문에 이들은 발레 외에도 필라테스, 자이로토닉 등 운동에도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강미선은 “허리 꺾기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던 저도 결혼하고 나이를 먹으면서 꺾는 각도가 이전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근유연성 운동을 끊임없이 병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 ‘결혼=은퇴’가 관행이었던 발레계에는 현역 활동 중 결혼하는 발레리나가 점차 늘고 있다. 그럼에도 출산은 여전히 은퇴 이후의 고려 대상이다. 앞서 최태지 임성남 김순정 임혜경 박선희 발레리나가 출산 후 무대에 오른 적도 있지만 손에 꼽을 정도다. 이들은 “출산 후에는 골반을 비롯해 체형이 바뀌어 점프력이 낮아지고 다리를 길게 뻗는 동작에서도 상당한 차이가 난다”고 말했다. 일반인이 알아볼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발레리나들 사이에선 “동작이 이전과 달라진 것 같다”며 고민을 나누기도 한다. 모유 수유도 체형 변화 때문에 사실상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황혜민은 “먼저 출산을 경험한 선배들이 피눈물이 날 정도로 노력했다는 얘기를 듣고 쉽게 용기를 내진 못했다”고 밝혔다. 강미선과 김유선은 “아이를 낳고 나면 체력은 물론이고 몸의 선이 좋지 않게 변할까 걱정된다”고 했다. 평생 발레와 무대만을 바라보며 “은퇴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던 그들. 개인차가 있지만 대부분 결혼, 출산 시점과 맞물려 30대 후반부터 마흔 살 전후로 은퇴를 고려한다. 해외 발레단에는 정년을 정해 놓거나 ‘종신 무용수’를 두는 곳도 있다. 이들은 “여자 무용수로서 춤을 출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음을 알기에 매번 눈물 나도록 최선을 다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은퇴 후 울적한 마음에 한동안 발레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던 황혜민은 “여자 후배들에게 ‘결혼, 출산을 먼저 했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말도 하지만 저 역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무대 위 매 순간이 소중해 지금과 동일한 선택을 했을 것 같다”며 미소 지었다. 발레리나에게 결혼은 힘들기만 한 걸까. 연애와 결혼 이야기를 하던 이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함께 호흡을 맞추던 파트너와 결혼한 황혜민, 강미선은 걱정했던 것보단 장점이 많다고 했다. “저와 파트너가 함께 돋보일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게 됐죠. 같은 동작을 해도 더 힘차게 점프하며 서로를 끌어줬어요. 감정 연기는 훨씬 수월해졌고요.”(강미선) “발레단에서 일상을 함께하고, 연습이 끝난 뒤에도 편하게 작품 얘기를 주고받으니 시너지가 생겼어요.”(황혜민)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출산 뒤에도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을까요? 이전보다 수백 배의 노력이 필요하겠죠. 발레리나로 무대에 오르면서 결혼과 출산은 결코 쉽게 엄두를 낼 수 없었어요.” 미국 현대무용의 대가 ‘마사 그레이엄’은 무용수가 무대에서 내려오는 일을 ‘고통스러운 죽음’으로 표현했다. 몸을 쓰는 무용의 특성상 그 죽음은 다른 장르에 비해 일찍 찾아온다. 발레리나도 마찬가지다.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발레단(UBC)에서 지난달 22일 만난 황혜민(41), 강미선(36), 김유선(33)은 “결혼, 출산은 모든 발레리나의 공통적 고민인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황혜민은 2017년 은퇴 후 현재 출산을 준비 중이며, 강미선은 결혼 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김유선은 올해 7월 일반인과 결혼을 앞두고 있다. 결혼이 마냥 반갑기만 한 건 아니다. 결혼 후 집안일 등으로 이전처럼 연습시간을 확보하지 못하면 ‘몸이 무거워지고 처지는 느낌’을 받는 건 한순간이라고 한다. 때문에 이들은 발레 외에도 필라테스, 자이로토닉 등 운동에도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강미선은 “허리 꺾기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던 저도 결혼하고 나이를 먹으면서 꺾는 각도가 이전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근유연성 운동을 끊임없이 병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 ‘결혼=은퇴’가 관행이었던 발레계에는 현역 활동 중 결혼하는 발레리나가 점차 늘고 있다. 그럼에도 출산은 여전히 은퇴 이후의 고려 대상이다. 앞서 최태지 임성남 김순정 임혜경 박선희 발레리나가 출산 후 무대에 오른 적도 있지만 손에 꼽을 정도다. 이들은 “출산 후에는 골반을 비롯해 체형이 바뀌어 점프력이 낮아지고 다리를 길게 뻗는 동작에서도 상당한 차이가 난다”고 말했다. 일반인이 알아볼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발레리나들 사이에선 “동작이 이전과 달라진 것 같다”며 고민을 나누기도 한다. 모유 수유도 체형 변화 때문에 사실상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황혜민은 “먼저 출산을 경험한 선배들이 피눈물이 날 정도로 노력했다는 얘기를 듣고 쉽게 용기를 내진 못했다”고 밝혔다. 강미선과 김유선은 “아이를 낳고 나면 체력은 물론 몸의 선이 좋지 않게 변할까 걱정된다”고 했다. 평생 발레와 무대만을 바라보며 “은퇴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던 그들. 개인차가 있지만 대부분 결혼, 출산시점과 맞물려 30대 후반부터 마흔 살 전후로 은퇴를 고려한다. 해외 발레단에는 정년을 정해 놓거나 ‘종신 무용수’를 두는 곳도 있다. 이들은 “여자 무용수로서 춤을 출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음을 알기에 매번 눈물나도록 최선을 다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은퇴 후 울적한 마음에 한동안 발레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던 황혜민은 “여자 후배들에게 ‘결혼, 출산을 먼저 했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말도 하지만 저 역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무대 위 매순간이 소중해 지금과 동일한 선택을 했을 것 같다”며 미소 지었다. 발레리나에게 결혼은 힘들기만 한 걸까. 연애와 결혼 이야기를 하던 이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함께 호흡을 맞추던 파트너와 결혼한 황혜민, 강미선은 걱정했던 것보단 장점이 많다고 했다. “저와 파트너가 함께 돋보일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게 됐죠. 같은 동작을 해도 더 힘차게 점프하며 서로를 끌어줬어요. 감정 연기는 훨씬 수월해졌고요.”(강미선) “발레단에서 일상을 함께 하고, 연습이 끝난 뒤에도 편하게 작품 얘기를 주고받으니 시너지가 생겼어요.”(황혜민)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잠은 피로 해소, 체력 보충, 성장호르몬 분비 촉진 역할을 한다. 인간은 평생 3분의 1은 자는 데 시간을 보내고, 숙면은 삶의 질을 좌우한다. 잠을 방해하는 자기 전 스마트폰 검색은 지양하는 게 좋다는 정도는 누구나 아는 내용이다. 세계적 신경 과학자이자 수면 전문가인 저자는 잠에 대한 이 같은 상식이 오히려 비상식적이라고 지적한다. 잠을 인생 전체와는 무관한 별도의 시간인 것처럼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는 것. 잠을 줄이려는 현대인의 행동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일단은 자는 게 맞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인생에서 양적, 질적으로 가장 중요하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행위가 수면이라며 저자는 잠을 과학적으로 차근차근 풀어냈다. 수면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흔히 알려진 ‘취침 전 술 한잔’은 사실 잠자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잠을 방해한다. 알코올이 뇌에 들어올 때 온몸에 나타나는 진정 상태는 수면 상태와 명백히 다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수면을 방해한다. 밤에 시시때때로 잠을 깨게 만들고 램 수면 단계를 차단해 버린다. 강제로 잠에서 깨는 행위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한다. 인위적으로 수면을 중단하는 종은 동물 중 인간이 유일하다. 이는 산업화로 인해 노동자들이 시간에 맞춰 공장에 가도록 만든 사회 규율 때문이라고 봤다. 자연스럽게 잠에서 깼을 때와 사이렌, 자명종 소리로 기상할 때 몸의 상태는 천지 차이다. 심지어 알람 소리는 사람의 심혈관에 무리한 충격을 반복적으로 가한다고 말한다. 그는 “건강과 활력을 주는 가장 강력한 묘약과 하나가 되면 낮에 깨어 있는 느낌마저도 새로울 것”이라며 독자들을 수면의 세계로 초대한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배우 송혜교(사진)가 네덜란드 헤이그 ‘이준 열사(1859∼1907) 기념관’에 한글 간판과 안내판을 기증했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양학부 교수는 1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역사적인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송 씨가 비용을 대 또 다른 의미 있는 일을 시작했다”며 이 같은 사실을 공개했다. 서 교수는 또 “해외 독립운동 유적지에 제대로 된 한글 간판이 없거나 낡아서 교체가 필요한 곳이 꽤 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이들은 ‘기획 서경덕, 후원 송혜교’ 협력 프로젝트를 지속할 계획이다. 2013년에도 이준 열사 기념관에 헤이그 특사 3인(이준 이위종 이상설)의 청동 부조(가로세로 1.7×1.2m)를 제작해 기증했다. 또 해외 독립운동 유적지에 한국어 안내서를 만들어 배포하고, 이를 ‘한국의 역사’ 홈페이지에도 게시해 왔다. 서 교수는 “우리가 유적지를 자주 방문하는 것이 독립운동 유적지를 지켜나갈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며 관심을 당부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후덜덜…, 이놈의 비루한 몸뚱이.” 25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서울시무용단 연습실. 어느새 주위 시선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홀로 벌이는 중력과의 싸움. 온몸의 경련을 느끼면서도 넘어지지 않으려 애썼다. 스텝을 계속 바꿔도 쉼 없이 흔들리는 무게중심. 머리로는 알겠는데, 팔과 다리는 영화 ‘그래비티’ 속 궤도를 이탈한 우주선이었다. 이따금 눈에 들어오는 연습실 거울 속의 나. 뻣뻣한 몸이 원망스러웠다. 서울시무용단이 봄 정기공연을 약 100일 앞두고 본격적인 연습에 돌입했다. 무대 위 무용수의 우아한 동작은 언제나 찬사의 대상. 하지만 무대에 오르기까지 누구보다 격렬하게 땀을 흘리는 노력은 간과되곤 한다. 무용이 뭔지 ‘티끌’ 정도라도 맛볼 수 있다면. 25일 기자는 호기롭게 ‘일일 단원’으로 참여해 연습실 문을 두드렸다. 연습 1시간 전. 벌써 단원들은 검은색 연습복을 입고 스트레칭에 분주했다. 근데 왜 하나같이 검은색 옷을 입는 걸까. 어벙한 질문에 단원들의 답은 간단명료했다. “몸이 가장 슬림해 보이잖아요.” 오전 10시, 몸 풀기 수업인 ‘최현 기본’으로 연습이 시작됐다. 전통무용 대가인 최현 선생의 전통 춤 움직임을 응용해 만든 수업이란다. 이 과정을 도입한 정혜진 서울시무용단장은 “현대무용이 위로 솟는 느낌이라면, 한국무용은 중력에 따라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이라며 “둘을 융합해야 다채로운 안무와 작품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음악 없이 가볍게”라더니, 몸 풀다 영혼이 빠져나갈 뻔했다. 5분도 안 돼 엄지발가락부터 경련이 일어났다. 쓰지 않던 신체 근육을 혹사한 탓일까. 괜히 미열도 났다. 뭣보다 쉬어가는 타이밍인 줄 알았던 ‘찰나의 정지 동작’이 죽을 맛이었다. 30분쯤 쭈뼛거렸을까. 갑자기 정 단장이 “이제 자진모리로 가자”고 외쳤다. 머릿속에서 꽹과리가 울리며 불안감이 엄습했다. 역시나. 미친 장단을 따라 돌고 또 돌았다. 어지럼증을 느끼며 ‘내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라는 후회가 위장을 타고 오르기 직전, 음악이 멈췄다. 한 단원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제 ‘가벼운’ 몸 풀기는 끝났어요.” 이후 김성훈 안무가 지도 아래 본격적인 팀별, 개인별 안무 연습이 진행됐다. 솔직히 털어놓으면, 체험은커녕 흉내도 낼 수 없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동작인가 싶은 고난도 자세가 쏟아졌다. 김 안무가는 “무용은 몸으로 말하는 언어이니, 그게 한국어든 영어든 독창적인 외계어를 표현했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뭔 소린지 못 알아듣는 자신이 고마웠다. 그렇게 오후 5시까지 단원들은 쉼 없이 달렸다. 그러고도 몇몇은 오후 9시에도 연습을 멈출 줄 몰랐다. 눈길을 끄는 건 먹고 마시는 양. 쉬는 시간이면 정수기 앞에서 물을 몸에 쏟아 넣었다. 초콜릿도 자주 먹고, 식사량도 엄청 많았다. “끊임없이 수분, 당분, 에너지 보충을 안 하면 몸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다. 서울시무용단은 지난달 정 단장이 새로 부임한 뒤 “새 옷으로 갈아입는 작업”이 한창이다. 3월까지 대본 및 캐스팅 작업을 마치고, 새로 활용할 안무를 짠다. 4월부터 공연 안무를 반복하며 완성도를 높인다. 빡빡한 일정이지만 모든 단원이 한마음으로 뭉쳤다. 연습 도중 여성, 남성 단원이 나뉘어 춤추는 장면이 눈길을 끌었다. 정 단장은 “남녀의 거리감으로 ‘미투 운동’을 표현해 봤다”고 귀띔했다. 동작 하나에도 현실적 고민을 담는 과정이리라. 하지만 솔직히 설명을 듣지 않았다면 알 수 있었을까. 정 단장은 “설명 없이도 관객이 이해하도록 하는 게 바로 무용수들의 몫”이라 답했다. ‘창작무용의 산실’이라 불려온 서울시무용단의 하루는 그렇게 뜨겁게 흘러가고 있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후덜덜…, 이 놈의 비루한 몸뚱이.” 25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서울시무용단 연습실. 어느새 주위 시선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홀로 벌이는 중력과의 싸움. 온몸의 경련을 느끼면서도 넘어지지 않으려 애썼다. 스텝을 계속 바꿔도 쉼 없이 흔들리는 무게중심. 머리로는 알겠는데, 팔과 다리는 영화 ‘그래비티’ 속 궤도를 이탈한 우주선이었다. 이따금 눈에 들어오는 연습실 거울 속의 나. 뻣뻣한 몸이 원망스러웠다. 서울시무용단이 봄 정기공연을 약 100일을 앞두고 본격적인 연습에 돌입했다. 무대 위 무용수의 우아한 동작은 언제나 찬사의 대상. 하지만 무대에 오르기까진 누구보다 격렬하게 땀을 흘리는 노력은 간과되곤 한다. 무용이 뭔지 ‘티끌’ 정도라도 맛볼 수 있다면. 25일 기자는 호기롭게 ‘일일 단원’으로 참여해 연습실 문을 두드렸다. 연습 1시간 전. 벌써 단원들은 검은 연습복을 입고 스트레칭에 분주했다. 근데 왜 하나같이 검은 색을 입는 걸까. 어벙한 질문에 단원들의 답은 간단명료했다. “몸이 가장 슬림해 보이잖아요.” 오전 10시, 몸 풀기 수업인 ‘최현 기본’으로 연습이 시작됐다. 전통무용 대가인 최현 선생이 전통 춤의 움직임을 응용해 만든 수업이란다. 이 과정을 도입한 정혜진 서울시무용단장은 “현대무용이 위로 솟는 느낌이라면, 한국무용은 중력에 따라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이라며 “둘을 융합해야 다채로운 안무와 작품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음악 없이 가볍게”라더니, 몸 풀다 영혼이 빠져나갈 뻔했다. 5분도 안 돼 엄지발가락부터 경련이 일어났다. 쓰지 않던 신체 근육을 혹사한 탓일까. 괜히 미열도 지끈거렸다. 뭣보다 쉬어가는 타이밍인 줄 알았던 ‘찰나의 정지 동작’이 죽을 맛이었다. 30분쯤 쭈뼛거렸을까. 갑자기 정 단장이 “이제 자진모리로 가자”고 외쳤다. 머리 속에서 꽹과리가 울리며 불안감이 엄습했다. 역시나. 미친 장단을 따라 돌고 또 돌았다. 어지럽다가 욕지기가 올라왔다. 인간은 왜 존재하는지…. 후회가 위장을 타고 오르기 직전, 음악이 멈췄다. 한 단원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제 ‘가벼운’ 몸 풀기는 끝났어요.” 이후 김성훈 안무가 지도 아래 본격적인 팀별, 개인별 안무연습이 진행됐다. 솔직히 털어놓는다면, 체험은커녕 흉내도 낼 수 없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동작인가 싶은 고난이도 자세가 쏟아졌다. 김 안무가는 “무용은 몸으로 말하는 언어니, 그게 한국어든 영어든 독창적인 외계어를 표현했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뭔 소린지 못 알아듣는 자신이 고마웠다. 그렇게 오후 5시까지 단원들은 쉼 없이 달렸다. 그러고도 몇몇은 밤 9시에도 연습을 멈출 줄 몰랐다. 눈길을 끄는 건 먹고 마시는 양. 쉬는 시간이면 정수기 앞에서 물을 몸에 쏟아 넣었다. 초콜릿도 자주 먹고, 식사량도 엄청 많았다. “끊임없이 수분, 당분 에너지 보충을 안 하면 몸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다. 서울시무용단은 지난달 정 단장이 새로 부임한 뒤 “새 옷으로 갈아입는 작업”이 한창이다. 3월까지 대본 및 캐스팅 작업을 마치고, 새로 활용할 안무를 짠다. 4월부터 공연 안무를 반복하며 완성도를 높인다. 빡빡한 일정이지만 모든 단원이 한마음으로 뭉쳤다. 연습 도중 여성, 남성단원이 나뉘어 춤추는 장면이 눈길을 끌었다. 정 단장은 “남녀의 거리감으로 ‘미투 운동’을 표현해봤다”고 귀띔했다. 동작 하나에도 현실적 고민을 담는 과정이리라. 하지만 솔직히 설명을 듣지 않았다면 알 수 있었을까. 정 단장은 “설명 없이도 관객이 이해하도록 하는 게 바로 무용수들의 몫”이라 답했다. ‘창작무용의 산실’이라 불려온 서울시무용단의 하루는 그렇게 뜨겁게 흘러가고 있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여당 의원과 야당 총재의 비서가 왜 같은 방에 있죠?” 국회에서 여야 대립이 한창이던 어느 날, 런던 웨스트민스터 호텔 6층 13번 방에서는 때아닌 ‘여야 화합’이 이뤄진다. 아무도 몰래 방을 찾은 여당 유력 의원 ‘리처드’와 야당 총재의 비서 ‘제인’이 사랑을 속삭이는 순간, 제인은 방 테라스에서 한 남성의 시체를 발견한다. 이들은 살인 누명을 벗기 위해 경찰에 신고하고 싶어도 불륜 관계가 알려질까 두려워 알릴 수 없는 상황.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리처드의 직속 비서 ‘조지’가 나타난다. 하지만 리처드와 제인의 배우자까지 호텔에 깜짝 등장하며 상황은 점점 꼬여만 간다. 최근 극장가를 강타한 ‘코미디 코드’가 대학로 무대에서도 흥행을 이끌고 있다. 연극 ‘룸 넘버 13’은 영국 작품을 각색했는데, 극의 내용 자체가 흥미롭다. 하지만 이를 풀어가는 배우들의 빠른 호흡과 유머 코드가 더 돋보이는 연극이다. 객석에선 공연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막이 내린 뒤 “이것은 개그 프로인가, 연극인가”라는 영화 ‘극한직업’의 패러디 대사가 떠오를 정도다. 뭣보다 불륜 관계와 시체의 존재를 알고 있는 배우들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웃음 포인트다. 수상한 낌새를 챈 호텔 직원이나 외부 사람에게 시체가 발각되면 “과음해서 잠이 든 형”이라고 둘러댄다. 위기 때마다 온 힘을 다해 방 안을 뛰어다니며 시체를 숨기고,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일삼는 연기는 관객의 웃음을 이끌어내는 타율이 높다. 무대 공간을 활용한 구성도 돋보인다. 공연 내내 작품의 전체적 공간은 계속 13번 방이지만, 방에 설치된 옷장이나 테라스 등의 공간도 따로 설정했다. 이런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객석에선 보이지 않아 관객의 상상에 맡겨지는데, 방 안에서 벌어지는 긴박한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다만 일부 상황이 반복되고, 슬랩스틱 동작은 부자연스럽다. ‘웃음을 위한 웃음’이 예상되는 지점도 있다. 그럼에도 자신이 처한 상황처럼 식은땀을 흩뿌리는 배우들의 연기가 이를 웃음으로 극복해낸다. 잘되는 작품은 롱런하는 이유가 있다. 임수형 서지은 장민수 김용호 등 출연. 오픈런. 서울 종로구 대학로 스타시티 콘텐츠룸. 전석 3만 원. 13세 관람가. ★★★(★ 5개 만점)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뮤지컬 한류가 재시동을 걸고 있다. 한국 배우들이 출연한 작품이나 국내 창작 뮤지컬의 라이선스만을 수출하던 방식을 넘어 공동 제작, 제작 투자, 케이팝(K-pop)과 뮤지컬을 결합한 마케팅도 등장했다. CJ ENM은 뮤지컬 본고장인 미국 브로드웨이를 겨냥했다. 6월 공연할 ‘물랑루즈’의 제작자로 참여했다. 개발 초기 단계부터 투자해 한국 공연권은 물론 영국, 호주, 캐나다 등에서 공동 제작 권리를 갖는다. 뮤지컬 ‘어거스트 러쉬’는 자체 제작해 올해 시카고에서 선보인 뒤 내년 브로드웨이에 진출할 방침이다. 과거 한국 뮤지컬이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했다는 ‘훈장’을 달고 국내 관객들을 대상으로 실질적 수익을 냈던 방식과 차이가 있다. 뮤지컬 스타 발굴을 통해 해외 진출에 나서기도 한다. 오디컴퍼니는 케이팝과 뮤지컬을 결합한 ‘팝시컬(Popsical)’ 그룹 ‘티버드’와 ‘핑크레이디’를 선보였다.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는 “팝시컬 프로젝트의 활동 영역이 해외 무대로 넓어지면, 팝시컬 그룹에 관심 있는 해외 관객이 한국 뮤지컬에도 관심을 갖는 시너지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밝혔다. 해외 뮤지컬을 들여와 업그레이드한 뒤 해외에 역수출하기도 한다. EMK뮤지컬컴퍼니는 독일 극작가 미하엘 쿤체와 헝가리 작곡가 레바이 실베스테르가 만든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를 다시 제작해 헝가리로 수출한 바 있다. 아서왕 이야기를 바탕으로 창작한 ‘엑스칼리버’는 국내 공연 후 해외 진출을 준비 중이다. EMK뮤지컬컴퍼니는 모든 작품을 해외시장 진출을 염두에 두고 만든다는 전략이다. 뮤지컬 ‘라이온 킹’과 ‘스쿨 오브 락’을 국내로 들여온 에스앤코는 아시아권 국가의 도시별 월드투어를 기획하는 ‘투어 프로듀서’로 나서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이미 해외에 진출해 성공을 거두고 있는 국내 창작 뮤지컬의 경우, 완성도를 더 높이고 현지 관객과의 접점을 늘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 ‘라흐마니노프’ ‘빈센트 반 고흐’를 일본과 중국에 진출시킨 한승원 HJ컬쳐 대표는 “작품들이 더 흥행할 수 있게 계속 완성도를 높이는 작업이 중요하다”며 “온라인과 오프라인 창구도 만들어 실시간으로 현지 공연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제작사 ‘라이브’는 중국 배우와 제작진이 한국을 찾아 기획 단계부터 협업한 뮤지컬 ‘랭보’를 한국 초연 43일 만에 해외에 진출시켰다. ‘팬레터’, ‘마이 버킷리스트’ 역시 해외 진출에 성공했다. 원종원 순천향대 공연예술학과 교수는 “초창기 국내 뮤지컬은 한류 스타에 의존하고 진출하는 지역도 일본 위주였지만 최근에는 다양한 지역에서 선공연 하고 콘텐츠 개발, 자본 투자를 하는 등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며 “악보나 대본만 판매하는 식으로 수출 방식을 다변화하고 콘텐츠, 투자 등에 대한 새로운 실험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일본 도쿄(東京)는 대형 화재 때문에 완성됐다?” 고대 일본의 중심은 본래 교토(京都)였다. 당시 수도로 정해진 헤이안쿄(平安京)는 오늘날 교토의 모태가 됐다. 반면 도쿄(당시 에도) 일대는 산간지대 너머 펼쳐진 황야 지대로 말을 타는 무사들이 활개를 치는 곳이었다. 교토 사람들은 그들을 오랑캐라 무시했다. 도쿄엔 뒤늦게 가마쿠라(鎌倉) 막부가 들어섰고 본격적으로 도시의 틀을 갖춰 나갔다. 그러던 1644년 어느 날, 평화롭던 도쿄에 대형 화재가 발생하며 도쿄는 무너지는 듯했다. 하지만 도쿄 사람들은 되살아났다. 오히려 화재와 재해에 맞서길 택했다. 재난 이후 재건한 도시의 크기는 점차 거대해졌다. 저자는 대형 화재와의 싸움을 “에도의 꽃”이라고 표현할 정도다. 이후 개항, 메이지 유신 시대를 거치며 도쿄는 일본 문명개화의 중심지가 된다. 건축학, 공학 교수인 저자는 도쿄 재건의 역사를 두 권에 걸쳐 건축학적 측면에서 조명했다. 달팽이 모양의 수로 형태, 에도성 설계, 풍수지리적 입지 조건 등 도쿄를 바라본 저자의 식견이 흥미롭다. 글과 함께 풍부한 삽화도 돋보인다. 구체적 수치 자료도 덧붙여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황야 지대 작은 도시 에도가 오늘날 ‘메가시티’인 도쿄로 발돋움한 과정을 보면 격세지감이 절로 느껴진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발레는 잘 몰라도 제자리에서 한 발로 회전하는 ‘피루엣(Pirouette)’ 동작이 마냥 재미있었어요. 나중에는 동생과 겨루느라 발레 학원이 끝날 때까지 계속 뱅글뱅글 돌기만 하던 ‘팽이 소년’이었죠.” 입단 8년 만에 지난달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로 승급한 김기완(30)은 어린 시절부터 뱅글뱅글 돌기를 좋아해 ‘팽이 소년’으로 불렸다. 발레학원에 첫발을 들이던 순간을 떠올리며 “‘빌리 엘리어트’의 빌리처럼 자유롭고 막힘없는 몸짓, 정리되지 않은 동작을 보고 따라하며 희열을 느꼈다”며 “한 바퀴씩 돌던 동작이 두세 바퀴로 점점 늘어났고 손동작도 곁들이니 그게 곧 발레가 됐다”고 말했다. 발레에 빠져든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한 뒤 국립발레단에 입단했고 큰 키(188cm)와 다부진 체격을 자랑하는 무대 위 백조가 됐다. 수석무용수가 된 그는 본인만의 원칙에 더욱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매일 연습실에 도착하기 3시간 전부터 일어나 스트레칭과 맨몸 운동으로 몸을 푸는 ‘클래스’와 연습이 끝나고 하는 30분 마무리 운동에 가장 신경 쓰고 있습니다.” 추운 날씨에는 부상 위험이 크기 때문에 휴식시간에는 스키부츠처럼 발목을 감싸는 ‘텐트슈즈’를 늘 착용한다. 하반신 보온을 위해 노점에서 구매한 수면바지 스타일의 포근한 하의도 입고 다닌다. 그는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고생한 경험이 있어서 철저히 관리하려 애쓴다”며 “요즘 동료들이 ‘이 바지 어디서 샀느냐’며 부러워할 때 뿌듯하다”며 웃었다. 김기완을 얘기할 때면 동생 김기민(27)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함께 돌기를 겨루던 동생은 현재 러시아 마린스키무용단의 수석무용수로 활약하며 스타 무용수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지겨울 법도 할 동생 얘기에도 그의 입가엔 ‘아빠 미소’가 번졌다. 그는 “공연이 없어도 자주 영상통화하며 안부를 묻고 지낸다”며 “저는 동생이 맡았던 배역, 동생은 제가 맡았던 배역을 탐낼 정도로 서로에게 ‘1호팬’ 같은 존재”라며 각별한 형제애를 나타냈다. 수석무용수로서 느끼는 변화를 묻자 그는 단연코 ‘책임감’이라고 말했다. “현재 무용수로서 정점에 서있는 행복한 시기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힘든 점도 있지만 누구보다 무대 위에서 책임감을 가져야겠죠. 이전에는 제 동작에만 집중했다면 이젠 동료와의 호흡은 물론 관객들이 제 춤에 공감했는지도 살피게 되더라고요. 최근에는 무대장악력을 배우려 마이클 잭슨, 퀸의 무대 영상도 찾아보고 있습니다.” 무용수가 천직인 그는 아직 무대를 떠난 이후의 모습을 그려본 적이 없다. 다만 누구보다 오랜 시간 무용수로 남고 싶다는 포부를 내비쳤다. “발레리노가 오랜 기간 무대에 남아있는 경우는 정말 흔치 않아요. 1, 2년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마흔 살까지는 춤추며 살고 싶습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원로 배우의 성장기부터 임종을 앞두고 남긴 말씀까지 다양한 발언과 자료들을 기록합니다. 이 기록들이 언젠가는 후대 예술인들에게 귀중한 자산이 될 테니까요.” 국내 무대 위에서 벌어진 모든 것을 기록하고 모으는 이가 있다. 원로 배우, 연출가, 무대 제작자를 만나 직접 이야기도 듣고, 때론 이들이 남긴 작은 메모부터 대본까지 다채로운 기록물을 모은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자료원 김현옥 학예사(44)는 “해외에선 이미 공연 세부 분야별 기록관이 있을 만큼 관련 기록물을 중시하고 있다”며 “작은 자료도 후대 공연예술인들에겐 가장 큰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학예사는 1세대 공연기록 수집가다. 원로 예술인들을 인터뷰해 구술채록 자료를 만든다. 또 악보나 대본, 무대 의상 스케치 등도 모아 작품별, 시대별로 분류한다. 현재 예술자료원에선 예술인 300명의 구술채록 기록을 포함해 50만 점의 기록이 남아있다. 그가 가장 공을 들이는 작업은 구술채록이다. 원로예술인 한 명당 7∼8회씩 만나 10시간 이상 함께하며 그가 남긴 진솔한 말들을 기록하는 게 포인트다. 이를 나중에 접한 독자가 예술인의 신념과 생애를 통해 작품을 쉽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함이다. 김 학예사는 “예술가와 오래 대화한 끝에 나온 기록에서 예술가의 인간적인 면을 엿볼 수 있는 게 구술채록 자료의 매력”이라며 “같은 예술가라도 누구와 어느 시기에 작업했는지에 따라 작품의 특징이 달라지는 등 구술채록에서 발견할 수 있는 포인트가 많다”고 귀띔했다. 김 학예사가 만난 많은 근현대 예술가들의 모습은 대중에 알려진 바와 많이 달랐다고 한다. “전위예술의 대가인 무세중 선생님의 경우 늘 ‘내가 최초로 시도했다’고 뽐내는 모습이 알려져 있었죠. 근데 그가 성장 과정에서 겪은 부성, 모성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동안 선생님이 ‘내가 모든 걸 처음부터 다했다’고 말하는 행동이 당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편견이 많이 깨졌죠.” 이 밖에도 50년이 넘은 극단 ‘자유’의 이병복 무대미술가, 김정옥 연출가, 박정자 배우는 극단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지점이 모두 제각각 달랐다. 연간 공연되는 작품만 2만여 편인 요즘, 김 학예사에겐 아쉬운 점도 있다. 물리적으로 모든 공연을 다 기록할 수 없기에 대형 뮤지컬, 연극보다는 소규모 작품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는 “당장 성과가 드러나는 일은 아니지만 아무리 작은 무대라도 국내 곳곳에서 벌어졌거나 진행 중인 한국 공연예술의 단면을 촘촘하고 끈질기게 기록할 것”이라고 밝혔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대본의 대사와 숨결을 따라 역사 속 한 장면을 상상하면서 곡을 씁니다. 작가의 의도와 맞는 곡이 나올 때 제일 뿌듯하죠.”(오상준) “때론 극에 사용할 곡을 먼저 받아 들으며 영감을 받아요. 대본과 가사 내용을 붙이고, 최종적으로 제가 상상한 노래와 똑같은 곡이 나올 땐 정말 소름이 돋는답니다.”(한아름) 개막을 앞둔 뮤지컬 ‘윤동주, 달을 쏘다’(3월 5∼17일,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영웅’(3월 9일∼4월 2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을 비롯해 2015년 ‘뿌리 깊은 나무’까지 함께 호흡을 맞춘 한아름 작가(42)와 오상준 작곡가(51)는 자타 공인 뮤지컬계 ‘역덕’(역사극 덕후) 콤비다.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내며 역사 뮤지컬 대중화에 앞장섰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14일 만난 이들은 “오늘이 ‘밸런타인데이’보다는 안중근 의사가 사형 선고를 받은 날로 기억되면 좋겠다”며 역사 이야기에 여념이 없었다. 두 사람이 처음 호흡을 맞춘 건 약 10년 전. 역사를 좋아했던 한 작가와 역사에 큰 관심이 없던 오 작곡가가 뭉쳤다. 한 작가는 “선조들이 하늘에서 술 한잔 하며 ‘후손들이 내 이야기로 뮤지컬 공연을 하고 있다’며 껄껄 웃는 상상을 하면 고된 작업을 하다가도 힘이 난다”고 했다. 오 작곡가는 “많은 이들이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모르는 것에 충격을 받아 역사 공부를 시작했다”고 털어놨다. 두 사람에겐 어느덧 역사적 소명의식도 생겼다. 하지만 역사극이 보람차고 재미있기만 한 건 아니다. 한 작가는 “역사가 소재가 되면 늘 해석과 평가가 따르기에 어떤 짓눌림을 느낀다. 위인전 형태의 보편적 작품만을 만들 순 없어 끊임없이 새로운 사실을 찾는다”고 했다. 오 작곡가는 “곡이 잘 나오려면 실존 인물의 삶에 깊게 빠져들어야 한다”며 “아픈 역사를 생각하며 자주 울다 보면 작품이 끝난 뒤 그 인물에서 빠져나오는 게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때론 저희도 발랄한 디즈니 작품을 해보고 싶다”며 웃었다. 역사를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두 사람은 공감을 극대화하려고 애쓴다. 역사를 가르치기보다는 인물에 몰입할 수 있는 포인트를 작품 곳곳에 넣는다. 한 작가는 “‘윤동주, 달을 쏘다’에서는 윤동주가 여느 청년들처럼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다양하게 그렸다”며 “나라가 아무리 어려워도 청춘이 지닌 밝음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오 작곡가는 “어두운 장면에서도 단조 선율보다는 밝은 에너지를 주는 장조 선율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공연을 앞둔 소회도 남달랐다. 한 작가는 “단순히 시점에 맞춰 공연을 올리는 게 아니라 후손들에게 교과서보다 절절하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우리 역사를 전하고 싶다”고 밝혔다. 오 작곡가는 “이 시대에 기여하는 역할을 맡은 것만으로도 행복한 예술가”라고 말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원로 배우의 성장기부터 임종을 앞두고 남긴 말씀까지 다양한 발언과 자료들을 기록합니다. 이 기록들이 언젠가는 후대 예술인들에게 귀중한 자산이 될 테니까요.” 국내 무대 위에서 벌어진 모든 것들을 기록하고 모으는 이가 있다. 원로 배우, 연출가, 무대 제작자를 만나 직접 이야기도 듣고, 때론 이들이 남긴 작은 메모부터 대본까지 다채로운 기록물을 모은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자료원의 김현옥 학예사(44)는 “해외에선 이미 공연 세부 분야별 기록관이 있을 만큼 관련 기록물을 중시하고 있다”며 “작은 자료도 후대 공연예술인들에겐 가장 큰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학예사는 1세대 공연기록 수집가다. 원로 예술인들을 인터뷰해 구술채록 자료를 만든다. 또 악보나 대본, 무대 의상 스케치 등도 모아 작품별, 시대별로 분류한다. 최근엔 자료를 디지털 형식으로 변형해 저장하는 일도 맡았다. 현재 예술자료원에선 예술인 300명의 구술채록 기록을 포함해 7~8만 점의 기록이 남아있다. 그가 가장 공을 들이는 작업은 구술채록이다. 원로예술인 한명 당 7~8회씩 만나 10시간 이상 함께 하며 그가 남긴 진솔한 말들을 기록하는 게 포인트다. 이를 나중에 접한 독자가 예술인의 신념과 생애를 통해 작품을 쉽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함이다. 김 학예사는 “예술가와 오래 대화한 끝에 나온 기록에서 예술가의 인간적인 면을 엿볼 수 있는 게 구술채록 자료의 매력”이라며 “같은 예술가라도 누구와 어느 시기에 작업했는지에 따라 작품의 특징이 달라지는 등 구술채록에서 발견할 수 있는 포인트가 많다”고 귀띔했다. 김 학예사가 만난 많은 근·현대 예술가들의 모습은 대중에 알려진 바와 많이 달랐다고 한다. “전위예술의 대가인 무세중 선생님의 경우 늘 ‘내가 최초’ ‘독보적 존재’라고 뽐내는 모습이 알려져 있었죠. 근데 그가 성장 과정에서 겪은 부성, 모성에 대한 애착이나 우리나라에서 추방 받았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동안 선생님이 ‘내가 모든 걸 처음부터 다했다’고 말하는 행동이 당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편견이 많이 깨졌죠.” 이 밖에도 50년이 넘은 극단 ‘자유’의 이병복 무대미술가, 김정옥 연출가, 박정자 배우는 극단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지점이 모두 제각각 달랐다. 연간 공연되는 작품만 2만여 편인 요즘, 김 학예사에겐 아쉬운 점도 있다. 물리적으로 모든 공연을 다 기록할 수 없기에 대형 뮤지컬, 연극보다는 소규모 작품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는 “당장 성과가 드러나는 일이 아니지만, 아무리 작은 무대라도 국내 곳곳에서 벌어졌거나 진행 중인 한국 공연예술의 단면을 촘촘하고 끈질기게 기록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기윤기자 pep@donga.com}
숲은 인간을 품고, 인간은 숲에 기대 살아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인간은 산업화라는 미명 아래 숲의 모성적 성격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숲을 정복의 대상으로 봤다. 난개발과 무차별적인 벌목으로 둘의 관계는 금이 갔다. 책에는 인간과 숲의 일그러진 관계를 치유하려 모인 이들의 ‘환경 서사시’가 펼쳐진다. 저마다의 운명에 이끌려 숲을 찾은 다양한 등장인물이 등장한다. 감전 사고로 죽다 살아난 뒤 나무의 소리를 듣게 된 파티광 대학생, 비극적 운명의 나무 사진 100년 치를 물려받은 화가, 전투기가 격추당한 뒤 반얀나무 위에 떨어져 겨우 목숨을 구한 미 공군, 나무에서 떨어져 장애를 갖게 된 학생…. 이들은 숲의 속성을 배우며 인간의 파괴적 개발로 위기에 놓인 원시림의 참상을 목격한다. 저자는 인물들의 인생 이야기를 풀어내면서도 ‘숲이 불러들인’ 객체에 머물게 했다. 인물들이 끊임없이 관찰하고 느끼는 숲은 말 한마디 할 수 없어도 진짜 주인공이 된다. 나무껍질의 향, 나이테, 나무에서 싹이 움트는 모습에 대한 묘사는 평소 깨닫지 못한 숲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할 정도다. 환경보호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 의식을 가르치려 하지는 않는다. 치밀한 관찰을 통해 얻은 숲에 대한 식견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숲속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은 ‘영원한 가지들이 뻗고 영원 속으로 뿌리가 뻗으며 베어 쓰러져도 다시 움이 돋는’ 살아 있는 인간과도 같다. 작품은 러시아 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를 떠올리게 한다. 시베리아 원시림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사랑과 인생을 다룬 영화에서 숲은 역시 벌목으로 스러져 가면서도 잠시 손님으로 머무는 인간에게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준다. 숲은 두 작품에서 모두 인간들이 스스로 비극을 마주하도록 더 따뜻하게 인간을 품는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연극배우들이 80∼140분 동안 무대에서 끊임없이 쏟아내는 대사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최근 공연을 했거나 개막을 앞둔 4개 작품의 대본을 분석한 결과, 배역에 따라 개인당 A4용지 20장 분량으로, 8000자가량의 대사를 소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대 배역의 대사까지 다 암기하는 경우 분량은 A4용지 35장, 4만 자까지 늘어난다. 지문을 제외하고도 60장(A4용지)을 넘기는 작품도 있다.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대사를 소화하기 위해 처절할 정도로 온갖 노력을 다 하고 있다. 연극 ‘대학살의 신’의 최정원(50)은 “배우들이 모여 대본을 리딩한 내용을 녹음한 뒤 차 안이나 집에서 무한 반복해 듣다 보면 상대 배역의 대사까지 암기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같은 작품에서 남편 역을 맡은 남경주(55)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대본을 외우는 건 중요한 무대 위 약속”이라며 “다만 글자, 단어에 집중하기보다 대본의 중요 내용을 형광펜으로 표시하며 상대 배우와의 대사 호흡을 생각하는 게 암기에 더 효과적이다”고 말했다. 대사량이 많기로 유명한 연극 ‘레드’의 김도빈(37)은 “아내에게 상대역 연기를 부탁한 뒤 그 앞에 서서 연기를 펼치며 도움을 받는다”며 “암기가 약한 편이라 대사보다는 상대 배우와의 상황을 먼저 외우는 방법을 택했다”고 했다. 연극 ‘오이디푸스’에서 크레온 역을 맡아 오랜 시간 무대를 누비고 있는 최수형(40)은 “동선이 많은 역할이다 보니 대사 중간중간에 움직일 타이밍과 쉬어갈 음절, 동선까지 대본에 필기하는 방식으로 대사를 숙지한다”고 밝혔다. 대사를 외우는 데 ‘왕도는 없다’는 베테랑 배우도 많다. ‘레드’에서 약 20쪽 분량을 소화하는 정보석(57)은 “딱히 다른 방법 없이 자연스레 대사가 나올 정도로 그냥 달달달 외운다”며 “외울 때 대본에 뭔가 썼다가도 금세 지워 대본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편”이라고 했다. 22일 개막하는 연극 ‘자기 앞의 생’에서 로자 할머니를 연기하는 양희경(65)은 “다 외워질 때까지 무조건 반복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같은 역을 맡은 이수미(46)는 “선배들에게 대본 빨리 외우는 방법을 묻곤 하는데 뾰족한 대답을 못 들었다. 머릿속에서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장면, 장면을 떠올리며 반복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이어 “30년 이상 무대에 오른 선배들 가운데는 뇌가 적응해 대본을 카메라로 찍듯 ‘캡처’하는 분도 있는데 피나는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저도 알랭의 속물 같은 모습이 싫어요. 하지만 관객들도 유치한 말장난을 벌이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면 언젠가 겪었던 일처럼 공감하실걸요?” 연극 ‘대학살의 신’에서 권위적인 속물 변호사 알랭을 맡은 남경주(55)는 어떻게 하면 관객에게 더 얄밉게 보일지 고민한다고 털어놨다. 알랭의 아내 아네트를 연기하는 최정원(50)도 “고상하면서도 위선적인 모습을 표현하는 일이 쉽진 않지만, 살아보지 않은 누군가의 인생을 연기하고 전달하는 게 연기의 재미”라고 말했다. 서울 서초구 한 연습실에서 지난달 24일 만난 두 배우는 서로 조언하고 토론에도 열을 올리며 ‘속물 부부 케미’를 뿜어냈다. 동명의 영화를 각색한 이 작품은 한 가정집에서 네 배우가 나누는 대화로 채워진다. 자녀들 간의 싸움 때문에 모인 알랭, 아네트 부부와 미셸(송일국), 베로니크(이지하) 부부는 초반에는 고상하게 화해를 시도한다. 하지만 서로의 말에 기분이 상한 이들은 어느덧 부부끼리, 때론 상대 배우자와 의기투합해 유치한 말싸움을 벌인다. 숨겨 왔던 이기적 본성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게 포인트다. 최정원은 “제목인 대학살만큼이나 사람들은 남에게 많은 상처를 주고 산다”며 “자기 자식이 잘났다고 싸우는 부모와 이를 보고 자란 아이들도 결국 어른과 똑같아진다는 점을 꼬집는다”고 말했다. 남경주는 “대학살이 별다른 게 아니라 분별력 있는 성인들이 상대를 정신적으로 짓밟고 폭행하는 행위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뮤지컬계 터줏대감으로, ‘믿고 보는 배우’인 둘은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연극에 대한 애정도 크기에 주저 없이 함께하는 작품을 택했다. 최정원은 “연극은 지적 탐구에 대한 즐거움을 주고 배우로서 성장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뮤지컬 배우로 살면서도 연극은 놓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남경주는 “연극은 작가가 깊은 주제의식을 갖고 집필하기 때문에 연기하며 배우는 즐거움이 있다”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도 끝나면 보람을 진하게 느낀다”고 설명했다. 2017년 초연에 비해 캐릭터의 격정보다는 이성에 초점을 맞췄다. 작품의 주제의식이 차분한 어조에서 더 부각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남경주는 “더 속물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마구 소리치는 모습보다는 차분해지기로 했다”고 말했다. 최정원은 “초연 때 화를 많이 냈다면 이번에는 좀 더 논리적으로 대사를 뱉는 느낌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둘은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를 나타냈다. “남경주 선배는 연습 시간에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어요. 연기에 대한 선배의 무한한 애정과 존경심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답니다.”(최정원) “최정원 씨의 장점은 열정이에요. 무대를 장악하는 에너지와 자존감 높은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절로 힘이 난다니까요.”(남경주) 3월 24일까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4만∼6만 원.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