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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는 일본 봉건 시대 무사를 뜻하는 ‘사무라이’가 사실 한국어 ‘싸울아비’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글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2002년 개봉한 영화 ‘싸울아비’ 역시 이런 주장에 근거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런 주장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걸까.정답부터 말하자면 실제로 싸울아비가 변해 사무라이가 됐을 확률은 제로(0)에 가깝다. 싸울아비는 서울 배화여고 등에서 국어 선생님으로 일하면서 라디오 드라마 극본도 썼던 김영곤 작가(1926~1988)가 1960년대 만들어낸 표현이기 때문이다. 1962년 오늘(11월 20일)자 동아일보는 서울중앙방송(KA·현 KBS)에 사극 ‘강강수월래’를 연재하던 김 작가 인터뷰 기사를 내보냈다. 이 기사는 “옛날 武士(무사)를 ‘싸울아비’라는 현대어로 바꾸어 놓은 것만도 선생 아닌 작가로서의 자부심을 느낀다고 자랑 아닌 겸손을 앞세우고 있다”는 문장으로 끝난다.이 인터뷰를 통해 신라 시대를 배경으로 삼은 이 라디오 연속극에서 싸울아비라는 낱말을 처음 썼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에도 TV·라디오 연속극이나 소설, 영화 같은 픽션에서 싸울아비라는 낱말을 쓰면서 이 낱말이 원래 있던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 숫자도 늘어나게 됐다. 반면 일본에서 사무라이라는 낱말은 최소 16세기에 등장했다. 따라서 만약 두 낱말이 연관이 있다면 오히려 일본어 사무라이를 보고 싸울아비라는 낱말을 만들어 냈을 확률이 높다. 물론 실제 가능성은 희박한 이야기다.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일본어 사전 ‘고지엔(鑛辭苑)’에 따르면 사무라이는 ‘사부라푸(サブラフ)’의 연용형(連用形≒명사형) ‘사부라이(さぶらい)’가 변한 말이다. 같은 사전은 사부라이를 ‘주군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것 또는 그 사람’이라고 풀이한다. 사부라이를 한자로 적을 때는 모실 시(侍)를 쓰는 이유도. 사무라이 역시 마찬가지로 한자로 쓰면 ‘侍’다. 같은 사전은 사부라이가 원래 ‘헤이안(平安)시대(794~1185 또는 1192) 때 신노우(親王·태자를 제외한 일본 남자 왕족), 셋칸(攝關·일왕의 정치자문역인 섭정과 관백), 쿠교케(公卿家·권문세가)에서 집안일을 집행하는 자’를 뜻했다고 풀이하고 있다. 그러니까 어원을 따지자면 사무라이라는 낱말에 오히려 ‘싸운다’는 뜻이 없던 것이다. 헤이안 시대 중기가 되어서야 사부라이는 ‘무기를 들고 귀족의 경호를 담당하는 자’라는 뜻을 얻게 된다. 이후 쇼군(將軍)이 사실상 실권을 장악한 바쿠후(幕府·막부) 시대를 거치며 일본에서는 부시도(武士道·무사도)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발음이 [사무라이]로 바뀐 이 낱말은 “일반 서민(凡下·본게)과 구별되는 신분 호칭으로 기마(騎馬) 복장(服裝) 형벌(刑罰) 등에서 특권적인 대우를 받는 신분”을 뜻하는 단어로 변하게 된다. 그래서 이때도 반드시 ‘사무라이 = 무사’였던 건 아니다. 문관이 사무라이를 자처하며 칼(刀)을 차고 다녔다.결국 싸울아비가 변해 사무라이가 됐다는 건 멀리가도 너무 멀리 간 주장이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연기 됐다는 소식이 들린 뒤로 1992년 1월 21일자 동아일보 지면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돌아다니는 걸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날 동아일보 1면 머리기사는 원래 다음날 진행 예정이던 당시 후기대 입시 날짜를 2월 10일로 연기한다는 내용을 단독 보도했다. (당시에는 대입 시험을 전·후기로 나눠 치렀다.)이 기사는 곧잘 동아일보 사내에서 ‘단군 이래 최대 특종’라고 불리곤 한다. 생각해 보시라. 온 수험생, 학부모가 목을 매는 게 대입 시험이다. 그 시험 전날 누군가 시험지를 훔쳐갔다. 만약 15일 아침 한 신문에만 ‘수능 시험지 도난, 시험 연기’라는 기사가 실렸다면 어땠을까?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으니 이 기사에는 저런 평가가 따라다닐 만도 하다.그렇다면 어떻게 동아일보만 이 기사를 특종 보도할 수 있던 걸까. 정답은 ‘술’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국무총리실 출입 K 기자는 전날 과음으로 기자실에서 골아떨어진 바람에 이날 오전에 있던 기자 간담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당시 데스크가 간담회 내용을 보고 받으려고 전화를 할 때까지도 술이 덜 깬 상태. K 기자는 어떻게든 간담회 내용을 취재하려고 허둥지둥 기자실 문을 열고 뛰어 나갔다. 그때 자기보다 더 허둥지둥 총리실로 뛰어가던 모 국장이 눈에 띄었다. 여기서 K 기자의 센스가 빛을 발한다. 그는 이 국장에게 “그래서 어떻게 한대?”하고 물었다. 사실 K 기자는 아무 것도 모르고 던진 말이었지만 국장은 “뭘 어떡해. 시험 연기 해야지”라고 이실직고했다. 이 한마디에 힌트를 얻어 취재한 끝에 이 소식이 당시 석간이던 동아일보에 나올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전화위복이 아니라 ‘전주위복(轉酒爲福)’이라고 해야 할까. 술 좋아하는 걸로는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장도 뒤지지 않았다. 사회부장이 등장하는 건 교육과 경찰 모두 사회부 담당이기 때문. 점심시간 전에 한번 기사를 마감하고 점심 식사와 함께 반주를 즐기던 사회부장은 이 소식을 긴급 타전한 TV 자막에 놀라 ‘물 먹었다(낙종했다)’는 생각에 헐레벌떡 회사로 돌아왔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기사가 바로 같은 회사 정치부(국무총리실 출입 기자는 정치부 소속이다) 특종이었던 것.고백하자면 필자가 교육과학기술부(현 교육부)를 출입하던 기자 초년병 시절 K 기자가 담당 부장이었다. 어느 해인가 수능일 즈음 이 사건 취재 뒷이야기를 묻자 그는 농담 삼아 이렇게 답했다. “규인아, 단독 기사는 남의 ‘나와바리(출입처)’에서 쓰는 게 제일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기사를 다 네가 쓴 줄로 아는데 실제로 뒤치다꺼리는 원래 담당 부서에서 다 해주거든.”2015년 동아일보를 떠난 K 기자는 동해안 모처에 사는 목수로 변신해 배(船)를 지으면서 언젠가 자기 배를 타고 세계를 일주할 날을 꿈꾸며 살고 있다. 한때 ‘저수지 몇 개(분량)는 마셨을 것’이라던 그였지만 이제는 강원도까지 손님이 찾아오면 좋은 술을 한 두 잔 즐기는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K 선배, 지난 번 뵈려다 못 뵈었을 때 같이 마시려고 준비했던 와인이 아직도 제 차 트렁크에서 익어가고(?) 있습니다. 곧 찾아뵙겠습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해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날짜가 다가오면 ‘입시 추위(한파)’라는 낱말도 따라옵니다. 아예 “입시 추위가 어김없이 찾아온다”는 표현을 쓴 언론 기사도 쉽게 찾아볼 수 있죠. 날씨가 유독 따뜻할 것이라는 기상청 발표가 있을 때만 ‘올해는 예외’라는 식으로 기사 내용을 바꿀 뿐입니다.그러면 수능날은 정말 추웠을까요?이를 알아보려고 1993년 11월 16일 진행한 1994학년도 제2차 수능부터 지난해 11월 17일 치른 2017학년도 수능까지 총 24번의 수능일 서울 지역 기온 데이터를 수집해 정리했습니다. 그 결과는….수능일 날씨가 당일 평년 기온보다 추웠던 건 1999학년도 그리고 2015학년도뿐이었습니다. 아침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것도 24번 중 5번(20.8%)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니까 수능날은 사실 ‘별로 춥지 않았던’ 겁니다.오히려 1993년 11월 16일(19.2도), 2015년 11월 12일(21도)은 아예 이 날짜 역대 최고 기온 기록을 새로 쓰기도 했죠. 이러면 ‘입시 추위라는 게 전날보다 추워진다는 뜻이지 옛날 그 날짜하고 비교하는 게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듯 한데요. 그래서 수능 당일 평균 기온을 전날하고 비교해 봤습니다. 그랬더니….24번 중 3분의 2에 해당하는 16번은 전날보다 오히려 기온이 올랐습니다. 겨울에는 날짜가 지날수록 평균 기온이 떨어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재미있는 결과죠. 전체적으로 24년 동안 수능일에는 전날보다 0.8도 평균 기온이 올랐습니다.기온계는 이렇게 가리킨다고 해도 마음이 추우면 몸도 추운 법. 게다가 기상청은 올해 수능일인 내일(16일) 아침 최저 기온이 영하 3도까지 내려갈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오늘 아침 최저 기온(1.2도)보다 1.8도 낮은 기온입니다.그럼 수험생 여러분, 모두 따뜻하게 입으세요. 그리고 여러분 생각과 출제자 생각이 일치하고, 인생 최고 기억력을 발휘하는 하루 보내시기를 기원합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1929년 오늘(11월 16일)자 동아일보 3면에는 사랑을 이루지 못해 남녀가 동반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한 이야기가 실렸다. “지난 11일 밤 11시경 동래군 사상면 파출소에 벌거벗은 알몸둥이의 남녀 두 명이 들어온 것을 동 파출소에서 취조한 바에 의하면 여자는 부산부 미도리마치(綠町) 2초메(丁目) 23반치(番地) 후쿠오카야(福岡屋)에 있는 창기(娼妓) 마츠카와 하츠(松川ハツ·24)로 동행한 남자와 오래전부터 부부의 약속을 하였으나 황금이 원수로 뜻과 같이 되지 아니함을 비관해 그날 밤 8시경 가게를 떠나 낙동강 깊은 물에 정사(情死)코자 하였으나 첫겨울 찬바람에 추위를 견디지 못해 하려던 정사를 그만두고 그와 같이 파출소로 달려온 것이라더라.”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여기서 정사는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情事’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여 함께 자살하는 일(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뜻하는 ‘情死’다. 이 여인이 함께 목숨을 끊으려 했던 남성이 누구였는지 이 기사만 보면 알 수 없지만 당시 부산 지역에 일본 이름을 쓰는 창기가 있었다.미도리마치는 현재 부산시 서구 충무동 2, 3가에 해당하는 지역. 충무동 2, 3가라면 어디인지 감이 오지 않아도 개명 전 이름인 ‘완월동’이라고 하면 들어본 분이 적지 않을 터. 부산일보에 따르면 완월동은 1980년대까지 ‘동양에서 가장 큰 사창가’라고 불리던 지역이었다.부산에 일본식 유가쿠(遊廓·유곽)가 들어서기 시작한 건 강화도조약에 따라 부산항을 개항한 1876년 이후였다. 개항 후 7년이 지난 1883년 부산에는 유가쿠 9곳에 창기와 유녀(遊女) 94명이 있었다. 이후 계속 곳곳에 유가쿠가 들어서자 1907년 ‘성병과 풍기문란 예방’이라는 명목으로 이들 업소를 한 곳으로 모아 이주시켰다. 그곳이 바로 미도리마치였다. 1927년 부산 지역 신문에 미도리마치에서 일하는 창기를 소개하는 특집 기사가 나올 정도로 당시 유가쿠는 성황을 이뤘다. 여기서 일하던 창기는 대부분 일본 시골에서 부산으로 팔려온 이들이었다. 추정컨대 이렇게 낯선 땅으로 팔려온 여인 중 한 명이 가게를 드나들던 손님과 사랑에 빠진다. 둘은 미래를 약속했지만 “황금이 원수로”라는 구절에서 짐작할 수 있듯 가게 주인은 남성에게 ‘여인을 데려가려면 돈을 내 놓으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그래서 둘은 ‘차라리 같이 죽자’며 강물로 뛰어들었지만 초겨울 강물은 차디차기만 했다.그래서 결국 두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 결국 원수였던 황금을 물리치고 사랑을 이뤘을까? 아니면 우리 사랑은 찬 강물도 이기지 못한다며 서로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났을까? 이 두 사람만 특이했던 건 아니다. 동아일보에는 1935년까지 미도리마치에서 청춘 남녀가 정사에 성공하거나 미수에 그친 사례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들은 함께 목숨을 끊으려고 남의 권총을 빼앗기도, 독약을 마시기도,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기도 했다. ‘스시녀와 김치남’이라는 웹툰을 그리는 고마츠 사야카(小松淸香) 씨는 “성을 쉽게 사고파는 사회일수록 허무한 매춘보다 순수한 사랑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고 했다. 그 시절 미도리마치에서 목숨을 걸고 사랑하던 이들이라면 누구보다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미국 대통령 전용기를 미 공군에서는 VC-25라고 부른다는 잡학사전 기사를 읽었습니다. 이런 비행기 이름은 어떻게 짓는 건가요? 또 비행기가 아니더라도 K1, M16 등 무기 이름에 붙는 숫자는 어떤 의미인가요?” - 경기 파주시에 사는 S 씨좋은 질문 보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다른 분들도 이렇게 몰라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지만 그래도 알고 궁금하신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 kini@donga.com으로 e메일 보내주시면 성심껏 취재해 알려드리겠습니다.)●미 군용기 이름은 어떻게 붙일까?그럼 먼저 비행기부터 가볼까요? 정확히는 미군기에만 저런 스타일로 이름이 붙습니다. VC-25라는 이름 자체가 ‘미국 항공 및 우주 장비 명명법’에 따른 ‘제식명칭’이거든요. 여기서 제식(制式)은 군대에서 ‘제식훈련’할 때 그 제식입니다.미국에서 이 명명법을 도입한 건 1962년이었습니다. 그 전에 만든 비행기는 ‘F-86 세이버’처럼 지금 규칙하고 맞지 않는 게 많습니다. 이 명병법을 도입하기 전까지는 같은 기종도 육·해·공군에서 서로 부르는 이름이 다른 일이 많았습니다. 가장 예로 많이 드는 게 이제는 ‘F-4 팬텀 II’라고 부르는 기체였습니다. 미 해군에서는 이 비행기를 F4H라고 부르고 미 공군에서는 F-100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같은 비행기를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 효율이 떨어지는 게 당연한 일. 그래서 1961년 미국 국방장관이 된 로버트 맥나마라가 군용기 명명 규칙을 통일하라고 지시했죠. 그래서 도입한 게 바로 트라이서비스(Tri-Service) 혹은 MDS(Mission-Design-Series) 명명법이라고 부르는 시스템입니다.MDS를 하나씩 뜯어보면 임무(Mission) - 디자인(Design) - 시리즈(Series) 순서로 돼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냥 끝나도 복잡할 텐데 실제로는 좀 더 복잡한 방식으로 표기합니다. 아래처럼 말이죠.차근차근 뜯어보면 맨 앞에 나온 G는 현상, 그러니까 현재 상태를 가리킵니다. G는 영구 지상 설치, 그러니까 다시는 하늘을 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은 이 비행기가 정찰(Reconnaissance)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전투기(Fighter)라는 뜻. 여기까지가 임무(Mission)에 해당합니다.MDS는 개발(디자인) 순서 앞에 하이픈(-)을 넣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비행기는 원칙적으로 F-4니까 전투기 중 네 번째로 디자인을 시작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어서 시리즈가 나옵니다. C는 이 F-4 중에 세 번(A, B, C)째 버전이라는 뜻이고, 15는 세 번째(5, 10, 15) 생산 블록에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종합하면 세 번째 버전을 세 번째로 양산할 때 이 비행기를 만들었다는 뜻입니다.MC는 이 비행기 제조회사가 맥도널 더글라스라는 의미. 경우에 따라서는 ‘맥도널 더글라스 F-4 팬텀 II’처럼 제조 이름이 앞으로 나가기도 합니다. ‘팬텀 II’는 위에 나온 설명 그대로 사람들이 이 비행기를 부를 때 흔히 쓰는 별명(애칭)입니다. 그냥 팬텀이 아니라 팬텀 II인 건 미 해군에 원래 ‘FH 팬텀’이라고 부르던 비행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이렇게 각 부호를 표시할 때 쓰는 알파벳에는 아래 표와 같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그러면 ‘AH-64E 롱보우 아파치’는 어떤 비행기일까요? 정답은 일련번호 64번인 공격용(A) 헬리콥터(H)로 이 비행기 중에서 다섯 번째 버전입니다. 원래 AH-64는 그냥 ‘아파치 헬기’였는데 성능을 업그레이드하면서 애칭에 ‘롱보우(Longbow)’라는 표현을 더했습니다. 이렇게 현실에서는 쓸 수 있는 모든 부호를 다 쓰는 대신 ‘이 비행기를 특정하는 데 꼭 필요한 부호 + 별명’ 형태로 쓰는 일이 더 많습니다. 일련번호는 원칙적으로는 개발(디자인) 허가 순서를 따르지만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예를 들어 ‘T-50 골든이글’에서 50은 쉰 번째로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한국 공군 50주년 기념이라 50입니다. 임무가 바뀔 때 일련번호가 그대로 따라가는 일도 많습니다. T-50을 기반으로 개발 중인 공격기는 A-50입니다. T-50은 개발 초기에는 KTX-2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K는 한국(Korea)에서 만들었다는 뜻. 한국은 미국 영향을 받아 무기 이름에 이름을 붙일 때 이렇게 미국 스타일을 따르면서 K를 덧붙이고는 합니다. 단, K는 위치가 고정은 아닙니다. KF-16은 앞에 K를 쓰는데 F-15K는 뒤에 K가 붙습니다. (설마 TX-2가 무슨 뜻인지 모르시지 않겠죠? 여기서 X는 아직 실험·Experimenta 중인 기체라는 뜻입니다.)이렇게 임무에 따라 비행기를 구분하기 때문에 원형이 같은 비행기가 제식명칭은 다를 때가 있습니다. 보잉 747이 그렇습니다. 에어포스원은 위에서 보신 것처럼 VC-25이고, 핵전쟁 등이 일어났을 때 ‘공중지휘소’로 활용할 기종에는 E-4라는 제식명칭이 붙어 있습니다. 또 YAL-1이라고 부르던 탄도 미사일 요격기도 있었습니다. 미국 국방부에서 2014년 이 비행기 개발 계획을 취소하면서 YAL-1은 끝내 시제기를 뜻하는 Y를 떼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이 일련번호는 다른 기종과 구분하는 게 제일 큰 목적이기 때문에 특정 기종이 너무 유명하면 그 번호를 건너뛰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B-52가 폭격기 대명사라 미군에서 X-52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적은 없습니다. 서양에서는 13을 불길한 숫자로 생각하기 때문에 13도 기피 번호입니다. ●다른 무기에 붙는 숫자는?이 정도 되면 다른 무기에 붙는 숫자도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K1 전차는 한국(Korea)에서 처음 만든 전차라는 뜻입니다. 이 탱크 다음 모델은 K1A1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A는 ‘Alteration(개조, 변조)’라는 뜻입니다. 당연히 K1보다 K1A1이 성능이 더 뛰어나겠죠? 한국군이 1968년 이후 미군에서 지원받아 현역 군인이 썼고, 지금도 예비군 훈련을 가면 쓰는 소총 역시 M16A1이 제식명칭이었습니다. 현재는 M16A4까지 나온 상태죠. 이럴 때 M은 그냥 모델(Model)이라는 뜻입니다. M16 이전에 예비군의 동반자였던 칼빈(Carbine) 소총은 (다들 잘 아시는 것처럼) ‘에무완(M1)’입니다. 이런 보병 장비에도 우리가 이미 살펴본 영어 약자를 활용하기도 합니다. K1 기관단총에 이어 만들어서 이런 이름이 붙은 K2 소총은 XB1부터 XB7까지 거치고 나서야 K2가 됐죠. 이때 B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만든 B형 소총을 바탕으로 했다는 뜻입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나는 금년 6살 난 처녀애입니다. 내 이름은 박옥희이구요. 우리 집 식구라고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어머니와 단 두 식구뿐이랍니다. 아차 큰일났군, 외삼촌을 빼놓을 뻔했으니…”학창 시절 국어 선생님이 ‘1인칭 관찰자 시점’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예로 드는 작품이 바로 ‘사랑 손님과 어머니’다. (나중에 이를 영화로 만든 작품 제목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다.) 이 작품은 서울 사투리를 가장 잘 묘사한 작품으로도 손꼽히지만 정작 이 작품을 쓴 주요섭 선생은 평양에서 자랐다. 주 선생은 평양에서 숭실중학을 다니다 일본 도쿄(東京) 야오야마학원(靑山學院)에 편입한다. 3·1 운동 이후 귀국한 주 선생은 동아일보 평양 지국 기자로 잠시 일하다 중국 상하이(上海) 후장대로 건너가 공부를 계속했다.후장대 생활을 마치고 미국 스탠퍼드대로 건너 간 주 선생은 1930년 2월 6일부터 동아일보에 ‘미국 문명의 측면관(側面觀)’이라는 글을 8회에 걸쳐 실었다. 스탠퍼드대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그는 이후에도 ‘시험 철폐와 그 대책’ 시리즈를 20회, ‘의무교육을 목표’라는 시리즈를 12회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석사 학위를 따고 1931년 10월 귀국한 그는 아예 동아일보에 입사해 ‘신동아’ 편집 책임자가 된다. 주 선생이 동아일보에 입사하고 나서 6개월 뒤에는 김자혜 기자가 신동아에서 일하게 되는데 두 사람은 나중에 부부가 된다. 당시 주 선생은 이혼을 한번 경험한 뒤였다.당시 신동아 기자였던 고형곤 전 전북대 총장은 1991년 신동아에 “송진우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 사내에서의 남녀관계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엄격했다. 결국 두 사람의 결혼은 두 사람 모두가 퇴사를 한 후에야 이루어졌다”고 회상했다. 주 선생은 1934년 8월 회사를 떠나 중국 베이징(北京)에 있던 푸런(輔仁)대 교수가 된다.동아일보는 1934년 9월 28일자 석간 2면에 주 선생의 푸런대 부임 소식을 전했고, 주 선생도 1935년 2월 17일부터 156회에 걸쳐 장편 소설 ‘구름을 잡으려고’를 연재하는 등 이후에도 계속 동아일보에 글을 썼다. 동아일보와 주 선생의 인연이 끝난 건 그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1972년 오늘(11월 14일)이었다. 이 신안 주씨 가문에서 주 선생만 동아일보와 인연을 맺은 건 아니다. 그의 친형인 주요한 선생도 동아일보 기자로 일했다. 1913년 노벨 문학상은 탄 인도의 시성(詩聖) 라빈드라타느 타고르가 1929년 동아일보를 통해 당시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보낸 시 ‘동방의 등불’을 번역한 이가 바로 주요한 선생이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1977년 11월 11일. 서울 시내의 한 신문사 본사 TV 화면에는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이란과 맞붙은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2차전 경기가 나오고 있었다. 그때 전북 이리시(현 익산 시) 주재 기자가 전화를 걸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리는 쑥대밭이다. 서울은 무사한가?” 그는 전쟁이 난 줄 알았다.그날 이리역(현 익산역) 앞 삼남극장에선 오후 9시부터 한 인기가수의 ‘리사이틀 쇼우’도 열리고 있었다. 공연을 시작한 지 15분쯤 지났을 때 이 극장 지붕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사회를 보던 코미디언이 피투성이가 된 자기 몸을 돌보는 대신 그녀를 업고 병원으로 뛰지 않았다면, 이 가수는 ‘가장 콘서트를 많이 연 가수’로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을지 모른다.실제로는 전쟁이 난 게 아니라 다이너마이트, 전기뇌관을 싣고 가던 기차가 이리 역(현 익산 역)에서 폭발한 것이었다. 그 인기 가수는 1999년 총 공연횟수 8000회를 넘어선 하춘화 씨였다. 코미디언은 나중에 ‘콩나물 팍팍 무쳤냐?’는 유행어로 인기를 끈 이주일 씨였다. 하 씨가 이 씨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뜻에서 ‘내 쇼 사회자는 이주일이 아니면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려 이 씨를 ‘키워줬다’는 건 유명한 일화.시작은 급행료였다. 원래 화약을 싣고 오는 기차는 역내를 바로 통과시키는 게 원칙. 하지만 배차 직원들은 급행료로 주머니를 불리고 있었다. 이 기차는 인천에서 26시간을 달려 이리에 도착했지만 급행료를 내지 못해 40시간 넘게 역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지루했던 호송원 신무일 씨(당시 36)는 막걸리 한 되, 소주 한 병을 마시고 기차로 돌아왔다. 11월 화물칸 안은 술 기운과 닭털 침낭 만으로 버티기엔 너무 추웠다. 몸을 덥힐 건 촛불밖에 없었다. 신 씨는 스르르 잠이 들었고 잠결에 촛불을 발로 차고 말았다. 그 촛불 한 개로 56명이 숨지고, 1158명이 다쳤으며 역 반경 4㎞ 안에 있던 집 9530여 채(당시 이리시 전체 집 73%)가 부서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진짜 못 생겨서 진짜 죄송해야 할 쪽은 코미디언 이 씨가 아니었다. 폭약과 뇌관을 함께 실을 수 없는 운송 원칙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고, 뇌물을 주지 않으면 그렇게 위험한 열차를 이틀 가까이 역에 세워두게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그 열차 안에서 촛불까지 켤 수 있었던 1970년대 대한민국 아니었을까.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무를 작고 네모나게 썰어서 소금에 절인 후 고춧가루 따위의 양념과 함께 버무려 만든 김치(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는 어떻게 ‘깍두기’라는 이름을 얻게 됐을까.80년 전 오늘(1937년 11월 10일)자 동아일보는 김장철을 맞아 ‘지상 김장 강습’을 진행하면서 깍두기의 유래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3년 뒤 ‘조선 요리학’이라는 책을 펴내 홍선표 선생은 이 글에 “조선 정조(1752~1800)의 사위인 영명위(永明尉) 홍현주의 부인이 임금님에게 여러가지 음식을 새로이 만들어 드릴 때 처음으로 무를 썰어 깍두기를 만들어 드렸더니 대단히 칭찬하시고 잡수신 일로 여염가까지 전파하였다”며 “그때 이름을 각독기(刻毒氣)라 하였고 … 공주(충남 공주시)에 낙향해 깍두기를 만들어 먹은 까닭으로 공주에서부터 민간으로 시작된 관계로 오늘날까지 공주 깍두기가 유명한 것”이라고 썼다. 재미있는 건 깍두기를 처음 담근 사람이 “정조의 사위의 부인”이었다고 썼다는 것. 사위의 부인은 자기 딸이다. 홍현주가 다른 아내를 두었다는 기록도 없다. 따라서 이 글에 등장하는 ‘정조의 사위의 부인’은 홍현주와 혼인한 숙선옹주(1793~1836)였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면 숙선옹주가 정말 깍두기를 처음 만들었을까. 이에 대해 음식문화평론가 윤덕노 씨는 2011년 11월 25일자 동아일보에 쓴 ‘[윤덕노의 음식이야기]<106> 깍두기’에서 “(홍 선생이) 별다른 근거를 대지 않고 숙선옹주가 깍두기를 처음 만들었다고 써놓았다”며 “조선에서는 시집간 공주나 사대부 부인들이 궁중에 모여 음식을 만들어 왕실 어른들을 대접했다. 숙선옹주가 이때 음식솜씨를 자랑했을 수도 있다”고 했다.윤 평론가는 이렇게 ‘이때 음식솜씨를 자랑했을 수도 있다’고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여지를 남겨 놓았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먼저 숙선옹주가 홍선주와 가례를 치른 건 정조가 세상을 뜬 지 4년이 지난 1804년이다. 따라서 ‘시집 간 공주’가 다른 왕실 어른들을 대접할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정조 임금에게 깍두기를 대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미혼 때였다면 어땠을까. 시집가기 전 임금의 딸이 직접 요리를 할 수 있었는지 아닌지는 차치하더라도 정조가 세상을 떠날 때 숙선옹주는 한국 나이로 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말이 맞으면 숙선옹주가 여덟 살 전에 깍두기를 생각해 낸 ‘요리 신동’이었어야 하지만 역시나 관계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이 때문에 만약 숙선옹주가 정말 깍두기를 처음 만들었다 해도 이 무 김치 요리를 처음 먹은 임금은 아버지인 정조가 아니라 오빠인 순조(1790~1834)였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물론 윤 평론가가 쓴 것처럼 깍두기가 ‘서민들 허드레 김치’에서 발전했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그래서 여쭤본다. 여러분은 국밥을 드실 때 깍두기 국물을 넣으십니까. 아니 넣으십니까.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어느덧 올해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도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뜻인 천고마비는 가을을 대표하는 수식어. 하늘이 높은 건 누구나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직접 말을 키우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에 정말 말이 가을에 살이 찌는지는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말 그럴까요?일단 정답은 ‘네, 그렇습니다’입니다. 적어도 ‘렌츠런파크 서울’에서 경마에 참가하는 말(서울 경주마)은 확실히 가을에 몸무게가 늘어납니다. 경주마는 경주에 출전할 때마다 체중 검사를 받고, 한국마사회는 이 체중 검사 결과를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려두고 있습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 ‘파이선’을 가지고 마사회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서울 경주마 1757마리 가운데 미검마(未檢馬) 245마리를 제외한 1512마리의 몸무게 데이터를 수집했습니다. 경주마는 보통 한 달에 한 번 정도 경주에 출전하고, 이 1512마리는 총 1만9988번(평균 13.2번) 체중 검사를 받았습니다. 이 정도 데이터면 표본 숫자가 부족하다고는 할 수 없겠죠?실제 결과를 보면 8월에 472.5㎏이던 평균 몸무게는 가을이 시작되는 9월에는 473.7㎏로 1.2㎏ 늘어나고, 10월에는 다시 474.3㎏까지 올라갑니다. 11월이 되면 473.1㎏으로 내려오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름보다는 살이 찐 상태입니다.위에 있는 그래프를 보면 가늠할 수 있는 것처럼 계절별 몸무게 역시 가을이 제일 높습니다. 아예 3월부터 석 달씩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구분해 보면 가을 평균 몸무게가 473.7㎏으로 가장 많이 나갑니다.이전 계절보다 몸무게가 늘어난 비율을 살펴봐도 마찬가지. 전체 서울 경주마 가운데 63.1%가 여름 석 달보다 가을 석 달 평균 몸무게가 더 많이 나갔습니다. 요컨대 가을은 가장 많은 말이 가장 많이 살찌는 계절입니다. 사실 가을에는 말만 살이 찌는 건 아닙니다. 가을에는 식욕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식욕은 포만감을 느끼는 ‘포만중추’와 배고픔을 느끼는 ‘섭식중추’에서 조절합니다. 포만중추를 자극하는 요인 중 하나가 기온입니다. 체온이 일정 수준이 도달하면 포만중추가 우리 몸에 ‘그만 먹어도 된다’고 사인을 보내는 겁니다. 가을에는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기 때문에 더 많이 먹어야 포만중추가 자극을 받게 됩니다. 이건 다른 동물도 마찬가지인데 왜 하필 많고 많은 동물 중에 말이 살찐다고 하게 된 걸까요? 이 말을 처음 쓴 건 당나라 때 시인 두심언(?~708)이었습니다. 이 두심언의 손자가 바로 시성(詩聖) 두보(712~770)입니다. 유목민족이라 겨울이면 먹거리가 떨어지던 흉노는 가을걷이를 끝낸 중국 남쪽 지방을 침략해 물자를 빼앗아가기 일쑤였습니다. 두심언은 흉노의 침략을 막으러 북방으로 떠나던 친구 소미도에게 시를 지어 선물했습니다. 아래는 그 시 가운에 일부를 옮긴 것.여기서 두 번째 행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가 바뀐 말이 천고마비입니다. 구름이 걷히고 요사스런 별이 떨어졌다는 것 흉노를 물리쳤다는 뜻. 그렇게 흉노를 몰아내고 나면 전쟁에 지친 말도 다시 살이 오를 겁니다. 두시언은 이렇게 승리하고 돌아오라는 바람을 담아 친구에게 시를 선물했습니다. 이 시는 ‘수레를 타고 도읍으로 돌아오니, 같이 놀던 벗들 모두 나와 반기네(輿駕還京邑 朋遊滿帝畿·여가환경읍 붕유만제기), 개선하기로 한 약속 지키니, 봄 아침 햇살이 함께 노래하고 춤추네(方期來獻凱 歌舞共春輝(방기래헌개 가무공춘휘)’로 끝이 납니다.천고마비와 함께 가을을 상징하는 사자성어를 하나 더 꼽으라면 등화가친(燈火可親)일 터. 이 말을 21세기 식으로 번역하면 스마트폰 등불을 가까이하기 좋은 계절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껏 1900자 가까이 읽으셨으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 중 8% 정도는 PC 모니터로 읽고 계시겠지만) 스마트폰에서 눈 떼시고 가을 공기 한번 힘껏 들이켜 보세요. 그러면 가을 기운으로 우리 마음도 살이 찌지 않을까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25시간 동안 한국에 머물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에어 포스 원(AF)’을 타고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많이들 아시는 것처럼 미국 대통령 전용기 AF1은 그저 ‘(미국) 공군 1호기’라는 뜻입니다. 예비역 남성 분들은 군대에서 부대 최고 사령관이 타는 차를 ‘1호차’라고 불렀던 걸 기억하실 터. 그것과 100% 똑같은 명명법인데 그냥 영어로 AF1이 된 것뿐입니다. 그러면 AF1이 세상에 처음 등장한 건 언제였을까요?●관제사 착각 때문에 얻은 이름미 공군에서 대통령 전용기를 운영하기 시작한 건 1943년부터지만 처음부터 이 비행기를 AF1이라고 불렀던 건 아닙니다. 미 공군 수송기를 개조해 만든 첫 번째 미국 대통령 전용기에는 ‘게스 웨어 2(the Guess Where II)’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후 기체를 바꿀 때마다 대통령 전용기 이름도 △세이크리드 카우(Sacred Cow) △인디펜던스(independence) △컬럼바인(columbine)으로 바뀌었습니다. 사건이 생긴 건 1953년 어느 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컬럼바인을 타고 플로리다주로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비행기에는 미 공군(Air Force) 8610편이라는 편명이 붙어 있었는데 하필 근처에 미국 이스턴항공 8160편도 날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관제사가 두 비행기를 착각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당시 컬럼바인 조종사였던 윌리엄 드레이퍼 당시 미 공군 대령이 “앞으로 대통령 전용기를 다른 비행기와 착각하는 일이 없도록 ‘에어 포스 원’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하게 됩니다. 미 대통령 전용기를 공식적으로 AF1이라고 부르게 된 건 1959년부터입니다.AF1은 항공기 호출 부호(call sign)이기 때문에 미국 대통령이 어떤 미국 공군기를 타더라도 그 비행기가 곧 AF1이 됩니다. 사정상 공군기를 타지 못할 때는 육군 소속 비행기에 타면 ‘아미 원(Army One)’, 미 해군 비행기에 타면 ‘네이비 원(Navy 원)’입니다. 대통령이 육해공군을 막론하고 최고 통수권자이기에 이런 이름이 붙는 것.만약 군용기가 아니라 민항기에 탔을 때는 ‘이그제큐티브 원(Executive One)’이라고 부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 AF1 대신 흔히 ‘T버드’라고 부르는 원래 자기 전용기(위 사진)를 타고 다닐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습니다. 만약 정말 그랬다면 이 비행기는 AF1이 아니라 이그제큐티브 원이 됐을 겁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AF1이라고 부를 수 있는 비행기 숫자는 미군 공군에 있는 모든 비행기 숫자와 똑같습니다. 다만 맨 처음 사진으로 보신 것처럼 우리가 일반적으로 AF1이라고 부르는 비행기는 사실 따로 있습니다.●에어 포스 원은 쌍둥이다.미군에서는 ‘미국 항공 및 우주 장비 명명법’에 따라 비행기에 제식 명칭을 붙입니다. 비행기를 A-10, B-25, F-16처럼 부르는 거 보신 적 있죠? 보잉 747-200B를 개조해 만든 현재 AF1에는 VC-25라는 명칭이 붙어 있습니다. V는 VIP에서 따왔고, C는 수송기(Cargo)라는 뜻입니다.보잉에서 제작하고 미 공군에서 보유하고 있는 이 VC-25는 딱 두 대뿐입니다. 네, 한 대가 아니라 두 대입니다. 그러니까 미국 대통령 전용기는 한 대가 아니라 두 대인 겁니다. 2003년 하와이에 있는 미 공군 히캄 기지에서 찍은 아래 사진에서는 아직 착륙하지 않은 비행기가 AF1입니다. 그 비행기에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타고 있었거든요. 착륙해 있는 비행기에는 미국 대통령이 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때 호출 부호는 ‘SAM 28000’입니다. SAM은 ‘Special Air Mission(특별 항공 임무)’을 줄인 말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비행기에 미국 대통령이 타고 있지 않을 때는 ‘SAM 29000’이 됩니다.대통령 전용기가 두 대가 된 것도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부터입니다. 관제사가 착각했을 때 드레이퍼 대령이 몰고 있던 비행기는 ‘컬럼바인 2호(II)’였습니다. 쌍둥이 비행기는 ‘컬럼바인 3호(III)’였고요.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앤드루스 공군 기지에서 출발할 때는 전용기 두 대가 동시에 이륙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보안상 어떤 비행기에 대통령이 타고 있는지 외부에서 모르도록 하려는 목적입니다. 언제 어떤 비행기를 타는지도 랜덤이고, 때로는 목적지를 숨기려고 두 대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기도 합니다.●에어 포스 원은 ‘끝판왕’이다.AF1은 절대 그 누구도 격추할 수 없고, 격추해서도 안 되는 비행기입니다. 이 비행기가 전투기 호위를 받는 것도 모자라 미사일 방어 시스템 등 자체 방어 기능을 갖추고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미국 정부는 대통령이 AF1에 탑승할 때는 핵가방(Nuclear Football)을 비행기에 싣는 장면을 반드시 공개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처럼 말입니다.이 가방은 핵무기 컨트롤러를 담고 있어 이런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이 컨트롤러는 미국이 보유한 모든 핵미사일을 통제할 수 있는데요, 이 컨트롤러가 파괴 당하면 미국이 보유한 핵미사일은 미리 입력해둔 목표를 향해 자동으로 날아가게 됩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미군이 보유하고 있는 핵탄두는 4000개 수준입니다.그러니까 AF1을 격추시킨다는 건 전 세계를 멸망시키겠다는 것과 사실상 똑같은 뜻입니다. NYT는 “핵무기 4000두가 있으면 러시아, 리비아, 북한, 시리아, 이라크, 이란, 중국을 멸망으로 몰아넣고도 2897두가 남는다”고 설명했습니다. AF1은 그래서 ‘끝판왕’입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김장’은 월동 준비 필수 코스 가운데 하나였다. 2013년 유네스코(UNESCO)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김치를 담그고, 그렇게 담은 김치를 나눠 먹는 김장 문화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하기도 했다.하지만 김장 규모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김치 제조업체 J에서 주부 1175명을 설문 조사해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김장 계획이 있는 주부는 45%에 불과했다. 55%는 김장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는 것이다. 이 업체 관계자는 “최근 8년 동안 김장철마다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김포족(김장포기족) 비율이 50%를 넘어선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또 김장을 하기로 한 주부 중에서도 60%는 배추 20포기 이하로 김장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 나타났다.96년 전에는 ‘스케일’ 자체가 달랐다. 1921년 11월 8일자 동아일보는 당시 경성(서울) 지역 ‘김장 물가’를 전했는데 배추 가격은 “100통에 5원”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정현미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 학예연구관은 “배추 100통 정도를 김장량의 기본 단위로 봤던 것”이라고 설명했다.“경향(京鄕)을 막론하고 겨울 량식(양식)으로 중대한 진장(김장)도 립동(입동) 전후에는 하여야 되는 것이니 이제 경성 시내의 진장 시세를 대개 소개하면 백차(배추) 100통 보통 5원, 무 한 섬 보통 1원 50전이라 하여 고초(고추)는 한 말에 대개 70전 가량이오 기타 양염(양념)도 평년보다 별로히 고하(高下)가 업다(없다)하더라.”당시 5원은 금 3.65g을 살 수 있던 돈이었다. 이를 토대로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약 16만6900원 정도다. ‘서울시 물가정보’에 따르면 7일 현재 배추 한 포기는 2380원. 100포기면 23만8000원으로 올해가 14.3% 정도 더 비싸다. 단, 현재 우리가 먹는 배추는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가 1954년 개량에 성공한 품종이기에 당시 가격과 일대일로 비교하기는 무리다.김장 포기 숫자만 달라진 게 아니다. 1977년 11월 29일자 동아일보에는 ‘아파아트의 김장 ─ 뜰 있는 집은 얼마나 좋을까…’라는 독자 칼럼이 실렸다. 아파트 실내가 비좁아 김장하기가 어렵고 김칫독 묻을 곳을 찾기도 마땅찮다는 내용이었다.이 칼럼을 보내온 신현수 씨는 “남들은 다 아파트가 편리하다면서 옮겨가고 아파트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도 시종 뜰이 있는 집을 지켜 오신 부모님께 새삼 고마움을 느끼는 별난 마음이 되는 것도 아파트와 김장이 빚는 부조화 탓인가”라고 적었다. 이제는 전체 가구 중 48.1%(2015년 기준)가 아파트에 살지만 이런 부조화를 고민하는 이는 찾기 어렵다. 1993년 김치냉장고가 세상에 나온 효과가 컸다.1993년 1월 31일자 동아일보는 “김치냉장고는 김치를 오래 저장하고 싶다거나 김치는 즐겨 먹지만 김치 냄새가 냉장고에 배는 것을 싫어하는 소비자의 공통된 요구로 만들어진 것”이라며 “아파트, 연립주택 등으로 주거 형태가 바뀌면서 냉장고가 사계절 상품으로 자리를 굳혀감에 따라 냉장고 판촉전은 한겨울에도 뜨겁기만 하다”고 소개하고 있다. 물론 김치냉장고의 역기능(?)도 있다. 김치냉장고 보급이 ‘김포족’ 숫자도 늘린 것. 배추 재배 기술과 냉장 보관 기술이 더 발전하면 언젠가는 아예 김장하는 풍속 자체가 사라지지 않을지 걱정스러울 정도다.정 연구관은 “이 질문 대한 대답은 ‘아니다’라고 확신한다”면서 “갈수록 소외 계층을 위한 ‘사랑의 김장 나눔’ 행사가 많아지고 있다. 김장 풍속에 담긴 따스한 ‘정’을 나누는 문화가 가족에서 사회 전체로 퍼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은 그런 사람들”이라고 강조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어머니가 아들을 훌륭하게 키우면, 그 아들은 자기뿐 아니라 어머니의 존재도 역사에 남긴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그렇고, 어머니 홍주 백씨와 아들 석봉 한호가 그렇다. 백범 김구 선생에게도 어머니 곽낙원 여사(1859~1939·사진)가 있었다. 아니, 곽 역사는 백범 선생뿐 아니라 모든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의 어머니였다. 황해 장연군에서 태어난 곽 여사는 1922년부터 아들 내외와 함께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살았다. 그러다 1924년 며느리 최준례 여사가 숨을 거두자 우유를 먹이고 빈 젖을 물려가며 손자 둘을 키웠다.(이렇게 키운 둘째 손자 김신 선생은 1960년부터 3년간 공군참모총장을 지낸다.) 하지만 굶주리고 있는 건 비단 어머니를 여읜 세살 배기 하나가 아니었다. 백범 선생은 자서전 ‘백범일지’에 이렇게 썼다.“어머님께서는 청년, 노인들이 굶주리는 것을 애석히 여기셨지만 구제할 방법이 없었다. 두 손자마저도 상하이에서 키우기 힘들어 환국(還國)코자 하실 때, 어머님은 우리 집 뒤쪽 쓰레기통 안에 근처 채소상이 버린 배추 껍데기가 많을 것을 보고, 매일 저녁 밤 깊은 후 그런대로 먹을 만한 것을 골라 소금물에 담가두었다가 찬거리로 하기 위해 여러 항아리를 만들기도 하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하이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워지자 어머님께서는 네 살이 채 안된 신(信)이를 데리고 길을 떠나셨고, 나는 … 어머님께서 담아두신 우거지 김치를 오래 두고 먹었다.”당시 66세였던 곽 여사가 혼자 귀국길에 올랐지만, 이런 상황에서 노자(路資)를 넉넉히 드리기는 불가능했다. 백범일지는 이렇게 이어진다.“어머님께서 본국으로 돌아가실 때 여비를 넉넉히 드리지 못해, 겨우 인천에 상륙하시자 여비가 떨어졌다. 떠나실 때 내가 그런 말씀을 드린 바 없건만, 어머님은 인천 동아일보 지국에 가서 사정을 말씀하셨다. 지국에서는 신문에 난 상하이 소식을 보고 벌써 알았다면서 경성 갈 여비와 차표를 사서 드렸고, 경성에서 다시 동아일보사를 찾아가니 역시 사리원까지 보내드렸다고 했다.”당시 인천 동아일보 지국에서 봤다는 상하이 소식이 신문에 실린 게 바로 1924년 오늘(11월 6일)이다. “(곽 여사가) 근일에는 고국 생각이 간절하다고 그 아들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준비 중이라는데 상하이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 고국에는 가까운 친척도 한 사람 없는데 늙으신 이가 그대로 나아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만류하나 도무지 듣지 않고, 백골이나 고국강산에 묻히겠다고 하며 상하이를 떠나기로 작정하였다는데 아들의 만류함도 듣지 아니해 할 수가 없다 하며, 그 부인은 조선에 나간대도 갈 곳이 없으므로 그의 앞길이 매우 암담하다고 사람들은 매우 근심하는 중이라.”하지만 ‘고국강산에 묻히겠다’던 곽 여사는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일으킨 배후로 아들이 지목 당하자 다시 상하이로 건너와 ‘임정의 식모’를 자처했다. 곽 여사는 이후 임정이 여러 번 자리를 옮기던 중 병을 얻어 1939년 끝내 아들이 소원을 이루는 걸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아들의 소원은 물론 ‘대한 독립’이었다. 곽 여사는 처음에는 충칭(重慶)에 묻혔지만, 현재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들어 있다.곽 여사는 그렇게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동아일보와 백범 선생의 인연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졌다. 1940년 8월 10일 때 강제 폐간 당했던 동아일보가 1945년 12월 1일 중간(重刊)할 때도 백범 선생은 경세목탁(警世木鐸·‘세상을 깨우치는 목탁이 되어라’)이라는 붓글씨를 보내 이를 축하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이제는 이마저 길다. 그저 ‘삼소’라는 두 글자면 충분할 만큼 한국인 입맛을 사로잡은 조합이다. 그런데 어르신 중에는 어릴 때 삼겹살을 먹은 기억을 떠올리는 분들이 별로 없다. 젊은 세대는 의아하겠지만 ‘삼겹살’은 1994년 전까지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찾을 수 없던 낱말이었다. 그렇다고 그 전까지 이런 낱말을 아예 쓰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한국 언론에 삼겹살 관련 표현이 처음 등장한 건 1934년 오늘(11월 3일)자 동아일보였다. 당시 ‘육류의 조코(좋고) 그른 것을 분간해 내는 법’이라는 기사에는 “도야지(돼지) 고기의 맛으로 말하면 소와 같이 부위가 많지 아니하나 뒤 넓적다리와 배 사이에 있는 세겹살이 제일 맛이 있고 그 다음으로는 목덜미 살이 맛이 있다”는 문장이 나온다. 여기 나오는 ‘세겹살’이 바로 요즘 말하는 삼겹살이다.잠깐만 생각해 보면 삼겹살보다는 세겹살이 어법에 맞는 표현처럼 보이기도 한다. 삼겹살은 살코기와 지방이 세 번 겹쳐 있다는 뜻. 겹겹이 쌓인 건 한 겹, 두 겹, 세 겹이라고 세니까 삼겹살보다는 세겹살이 더 정확한 표현처럼 보이는 것.하지만 이 낱말이 동아일보 지면에서 자취를 감춘 지도 벌써 40년이 넘었다. 동아일보 지면에 세겹살이 마지막으로 등장한 건 1974년 12월 5일자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5면에 나간 ‘값싸고 영양가 높은 돼지고기 조리법’ 기사를 통해 ‘돼지고기 세겹살 조림’을 소개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삼겹살을 지금처럼 구워 먹은 게 아니라 조려 먹었다는 것. 당시에는 ‘삽겹살은 당연히 구워 먹는 것’이라는 생각이 희박했다는 증거다. 이 기사에는 또 “특히 싫어하는 사람이 많은 돼지고기”라는 구절도 등장한다. 적어도 1974년까지는 삼겹살은 물론 돼지고기도 그렇게 인기 있는 먹거리는 아니었다고 추론할 수 있는 대목이다.그러면 한국 사람들은 언제부터 삼겹살을 ‘즐기게’ 됐을까? 정답은 ‘정확히는 모른다’에 가깝다.2009년 이화여대 식품영양학과 박사학위 논문 ‘근대 이후 100년간 한국 육류구이 문화의 변화’(이규진)에 따르면 한우·돼지갈비, 주물럭 같은 고기구이는 ‘원조’를 추적할 수 있다. 하지만 삼겹살은 “1970년대 후반쯤 ‘우후죽숙처럼’ 생겨났지만 처음부터 정착하지는 못했고 여름철에는 비수기가 되는 등 적응기를 거친 것으로 보인다”고 짐작할 뿐이다.일부 음식평론가는 1970년대 일본에서 돈가스를 만들 때 쓸 등심과 안심만 수입해 가는 바람에 한국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은 먹지 않는) 삼겹살을 먹게 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돈육(돼지고기) 수출 현황을 보면 이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다는 게 축산경영학 전문가들 의견이다. 대한양돈협회 관계자는 “1975년 돼지 수출 물량이 8500t 정도였다. 당시 돼지 한 마리에서 생산할 수 있는 등심과 안심은 5㎏ 안팎이었다. 170만 마리를 잡아야 8500t다. 당시 한 해에 보통 돼지를 200만 마리 정도 잡았다. 그러면 85%를 수출했다는 거다. 이건 말이 안 된다”고 설명했다.한국 사람이 어떻게 삽겹살과 사랑에 빠지게 됐는지는 알 수 없어도 언젠가 사랑에 빠진 것만큼은 틀림없다. 1983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독자란에는 “요즘 광주 시내 주점가에는 ‘소주코너’라는 술집이 부쩍 늘었고 안주감으로 돼지 삼겹살 등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적어도 1980년대 초반부터는 ‘삼소’ 조합이 인기였던 것이다.사실 음식 유래 같은 것 좀 모르면 또 어떤가. 안도현 시인이 ‘퇴근길’이라는 시에서 노래했듯 “삽겹살에 소주 한잔 없다면/아, 이것마저 없다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 퇴근길에 삽겹살에 소주 한 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남자들은 왜 자기보다 잘난 여자를 싫어하나요?”인터넷 커뮤니티 같은 곳에 이런 궁금증이 올라오는 건 별로 드물지 않은 일. 구글에서 ‘자기보다 잘난 여자’로 찾아보면 검색 결과가 약 36만5000개가 나옵니다. 정말 남자들은 자기보다 잘난 여자를 싫어할까요? 물론 꼭 그런 건 아닙니다. 한 결혼정보회사는 올해 5월 전국 미혼 남녀 594명(남녀 각 297명)에게 ‘결혼 후 아내의 수입이 남편보다 더 많으면 어떤 생각이 들까’를 설문조사해 발표했습니다. 그 결과 남성 응답자 45.8%가 ‘자랑스러울 것 같다’고 답했습니다. ‘자존심 상한다’는 답변은 21.5%에 그쳤죠. 미혼 여성 예상은 반대였습니다. ‘남자가 자존심 상할 것’이라고 예상한 비율이 63.3%가 나왔고, 이런 현상을 자연스럽다고 생각한 건 아예 제로(0)였습니다. 이 결과만 놓고 보면 남성들은 실제로 자기보다 잘난 여성을 싫어하지 않는데, 여성들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정말 그럴까요?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조사 결과가 틀렸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남성 두뇌는 저렇게 물어보면 저렇게 답하도록 프로그래밍이 돼 있거든요. 요컨대 남성은 ‘상상할 때는’ 자기보다 잘난 여자를 매력적이라고 느낍니다.미국 버팔로대, 캘리포니아루터대, 텍사스오스틴대 공동 연구진은 남성이 자기보다 지적으로 뛰어난 여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려고 여러 심리학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첫 번째 실험은 남성 대학생 105명(평균 19.3세)에게 자기보다 수학 영어 실력이 높거나 낮은 같은 학교 여학생과 데이트하는 상황을 미리 만든 시나리오에 따라 ‘상상’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나서 이 여학생과 실제로 데이트할 의사가 있는지 1(전혀 없다)~7(매우 많다)점 사이로 대답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자기보다 점수가 높은 여학생과 실제로 데이트 하고 싶다는 의견이 5.21점으로 더 높았습니다.이게 실험 결과가 제가 위에 “남성은 ‘상상할 때는’ 자기보다 잘난 여자를 매력적이라고 느낀다”고 쓴 근거입니다.이제 남학생들이 실제로 여학생을 만날 차례. 이번 실험에는 평균 나이 18.8세인 남학생 90명이 참가했습니다. 이 남학생들은 ‘대인 관계 태도 연구(Study of Interpersonal Attitudes)’ 실험에 참가하면 심리학 수업 학점을 따게 된다고 소개 받은 상태입니다.실험 참가자 한 명이 연구실에 도착해 자리를 잡고 나면 곧 노크 소리가 들립니다. 이어서 여학생 등장. 연구진은 여학생에게 남학생 옆자리에 앉으라고 합니다. 여학생이 앉고 나면 연구진은 이 실험이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먼저 미국 대학원입학시험(GRE)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소개합니다.그런 뒤 연구원이 ‘시험지를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비우면 여학생이 자기는 이 동네에서 자란, 현재 남자친구가 없는 18세 1학년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합니다. 시험지가 도착하면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시험 문제를 풉니다. 그 동안 연구원은 의자 하나를 가져다 교탁 앞에 놓았습니다. 시험 시간이 끝나고 연구원이 ‘채점을 해오겠다’며 시험지를 들고 나갑니다. 그리고 나면 여학생은 ‘몇 학년이에요?’, ‘고향이 어디에요?’ 등을 친근하게 물어봅니다. 물론 이렇게 하도록 미리 지시를 받은 것.대화가 무르익을 즈음 연구원이 시험지 맨 위에 점수가 잘 보이도록 빨간 글씨로 서서 들고 옵니다. 남학생은 실제 결과에 관계없이 무조건 20점 만점에 12점을 받습니다. 여학생은 6점을 받을 때도 있고, 18점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자기보다 점수가 높은 여성과 낮은 여성을 ‘만들어내는’ 과정입니다. 연구원은 일부러 여학생 점수를 큰 소리를 발표합니다. 남학생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그리고 나서 연구원은 남학생에게 ‘다음 단계를 진행하려면 둘이 나란히 보고 앉아야 하니 의자를 앞으로 좀 가져와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게 진짜 실험입니다. 남학생이 의자를 어디에 놓았는지 몰래 측정했더니, 여학생이 점수가 낮을 때 남학생이 의자를 3.55인치(약 9㎝) 더 가까이 붙였습니다. 당연히 상대에게 매력을 느낄수록 의자를 더 가까이 붙였겠죠? 실제로 이 실험에서는 남학생들에게 역시 1~7점 사이로 여학생 매력을 평가해달라는 질문도 던졌는데요, 성적은 낮은 여학생이 평균 5.46점을 받을 때 성적이 높은 여학생은 이보다 0.34점 낮은 5.12점에 그쳤습니다. 확실히 남자는 자기보다 잘난 여자를 선호하지 않습니다.또 이 실험에서 제일 이상한 곳을 꼽으라는 질문에도 여학생이 점수가 낮을 때는 ‘(매력적인) 이 여성도 실험 멤버인 것 같다’는 답변을 골랐는데, 여학생 점수가 높을 때는 ‘내 점수가 잘못된 것 같다’는 답변을 제일 많이 골랐습니다.여기서 잠깐!남학생이 자기보다 성적이 뛰어난 여학생을 ‘덜 선호하는’ 건 사실이지만, 남학생은 데이트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모두 1~7점이 기준이었으니까 가운데는 4점. 점수가 낮은 여학생을 덜 선호했던 때는 4.69점이었고, 점수가 높은 여학생을 덜 선호했을 때도 5.12점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남학생이 속마음 깊숙한 곳까지 ‘쟤랑은 정말 데이트 한번도 하기 싫다’고 생각하는 여학생은 (없지 않다면) 진짜 드문 겁니다.그러니 ‘참 못 난 남자’를 짝사랑하고 계신 ‘알파걸’ 여러분 모두 조금 더 기운 내세요. 지금 ‘열폭’(열등감 폭발) 중인 그 ‘쪼다’가 정신 좀 차리면 여러분 마음 알아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남성 여러분, 저도 남자지만, 우리 참 속 좁다. 그렇죠?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경제상으로 우리 조선 사람이 아무리 군핍(窘乏·필요한 것이 없거나 모자라 군색하고 아쉽다)하다 하더라도 소비조합에 고본(股本·출자금) 10원 낼 금전은 있으니 우리도 곳곳에 이런 조합이 생겨야만 아주 절명(絶命·목숨이 끊어짐)을 면할 것이다.”동아일보는 1922년 11월 2일자 1면에 실린 ‘소비조합(消費組合)’이라는 기사를 통해 이렇게 강조했다. 이 기사는 “영국의 소비조합은 경탄할 만치 대규모로 경영한다”며 “그 시초로 말하면 1884년 록델(로치데일) 시에서 직조공 28인이 조직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요즘 협동조합 설립을 독려하는 단체에서 스페인 프로축구 팀 ‘FC바르셀로나’나 감귤(오렌지) 재배 협동조합 ‘선키스트’, 세계적인 비영리 통신사 ‘AP’ 등 협동조합 성공사례로 거론하는 것처럼, 창간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았던 동아일보 역시 ‘국제적인 시각’으로 협동조합을 소개한 것이다. 이 로치데일 협동조합은 많은 경제사학자들이 협동조합 시초로 꼽는 단체다.일제강점기 동아일보는 ‘경제적 독립운동’ 차원에서 협동조합 설립을 강조했다. 조선총독부에서 금용조합과 산업조합 등 식민 통치 목적으로 ‘관제조합’을 만들자 이에 대항하는 차원에서 자생적인 협동조합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것. 이후 동아일보는 1932년 창간 12주년 기념사업으로 ‘전조선협동조합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지금이라면 국가가 했어야 할 일을 동아일보가 했던 셈이다.“조합 수 총 97개, 조합원 총수 4만 여 명, 조합 자금 42만 원(현재 약 74억 원)이어서 단기간에 발전한 운동으로서는 다대한 수확을 보았다 하겠다. 더욱 전 조선에 유명한 평안협동조합과 기타 유수한 조합이 조사에서 설루(洩漏)되었는바 이것은 사정에 의한 것이니 만일 충분한 조사를 완성하면 사실상의 숫자는 이의 배(倍)나 되지 않을까 한다.”이렇게 자생적인 협동조합 설립 운동이 독립운동으로 번질 것을 우려한 조선총독부가 대대적인 해산 작업에 나서면서 이 시기 많은 협동조합이 명맥이 끊기게 된다.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협동조합 가운데 제일 유명한 협동조합을 꼽으라면 역시 ‘서울우유협동조합’이다. 1938년 7월 13일자 동아일보는 서울우유가 ‘경성우유동업조합’이라는 이름으로 이틀 전(1938년 7월 11일) 설립 인가를 받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해방 후에도 협동조합은 인기였다. 각 리(里)나 동(洞)마다 ‘이동(里洞)조합’이라는 이름으로 협동조합을 만드는 일이 흔했다. 1957년에는 이를 지원하는 협동조합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협동조합 설립을 사실상 억압하면서,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을 다시 만들기 전까지 한국에서 협동조합은 사실상 암흑기를 보내야 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이제 대세는 ‘월세’입니다. 지난해 말부터 부동산 중계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앱) ‘다방’에 올라온 다세대 다가구 및 오피스텔 매물 중 91.2%가 월세였습니다. 서정렬 영산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저금리 기조가 계속되면서 상대적으로 보증금이 낮은 원룸 시장에서 전세의 월세화가 훨씬 빠르게 나타나고 있는 데다 최근 1인 가구도 꾸준히 늘어난 복합적 결과”라고 분석했습니다.그러면 전 세계적으로 비교할 때 한국, 특히 월세는 얼마나 (비)쌀까요? 부동산 검색 업체 ‘렌트카페’에서 전 세계 30개 도시 월세 가격을 조사한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렌트카페는 이 30개 도시가 “‘모리기념재단 도시전략연구소’에서 선정한 ‘세계 도시 경쟁력 지수’에서 가장 흡인력이 높은(magnetic) 도시로 선정한 곳”이라고 소개했습니다.이에 따르면 서울에서는 한 달에 1500달러(약 168만 원)로 129㎡(39평)짜리 집을 빌릴 수 있습니다. 이는 이 30개 도시 중에서 다섯 번째로 넓은 면적입니다. 다른 도시도 살펴보면 터키 이스탄불이 같은 가격에 176㎡로 1위였고, 미국 뉴욕 맨해튼이 26㎡로 가장 적었습니다. 같은 월세로 빌릴 수 있는 면적을 실제 비율로 그려보면 아래 그림과 같습니다.그러니까 이스탄불에서 이 전체 면적에서 살 수 있을 때 맨해튼에서는 주황색 네모밖에 얻지 못하는 겁니다. 이건 ‘절대 숫자’로 계산했기 때문에 소득 수준을 고려하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구매력지수(PPP)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3만4985달러였습니다. 일본은 3만8239달러. 그러면 일본이 9.3% 더 높습니다.월세 1500달러 당 면적은 서울이 129㎡, 도쿄(東京)가 50㎡로 서울이 2.58배 크기 때문에 소득 수준을 감안해도 서울이 도쿄보다는 월세가 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은 지난해 전체 PPP 기준 1인당 GDP가 1만4440달러지만 지역별 편차가 큽니다. 예를 들어 베이징(北京)은 3만4039달러로 한국과 2.8% 차이밖에 나지 않습니다. 베이징에서 임대 가능 면적(133㎡)은 서울보다 3.1% 크니까 엇비슷한 가격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상하이(上海)는 1500달러에 158㎡로 서울보다 22.5% 더 큰 면적을 빌릴 수 있습니다. 지난해 상하이 PPP 기준 1인당 GDP는 3만3560달러로 한국이 4.2% 더 높았습니다. 따라서 상하이는 서울보다 월세가 저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이것도 어디까지나 면적만 따져서 그런 것.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는 1500달러로 서울하고 비교하면 45% 수준인 58㎡밖에 못 얻지만 그 집은 이렇게 생겼을지 모릅니다.제 아무리 숫자가 이렇게 나와도 마음에 드는 집은 모두 비싸기만 한 게 현실. 이 가을 이사를 꿈꾸는 모든 분들이, 가장 가고 싶은 집을, 가장 합리적인 가격에 얻을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부대찌개 종류 중 ‘존슨탕’이라는 게 있다. 음식 대부분이 그렇듯 100% 정확한 유래는 알기 힘들지만 1966년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재임 1963~69) 방한과 관계가 있다는 데 많은 학자가 동의하고 있다. 또 경기 화성 시 송산동의 ‘존슨 동산’ 역시 이 대통령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도널드 트럼트 대통령이 다음달 11일 방한하면 한국은 찾은 역대 11번째 미국 대통령이 된다. 이들 중 이런 식으로 자기 이름을 남기고 간 인물은 존슨 대통령이 유일하다. 51년 전 오늘(1966년 10월 31일) 방한한 그가 한국 땅을 밟고 있던 45시간 동안 그만큼 많은 일이 있었다는 방증이다.● 백악관의 쌀밥과 김치 그리고 베트남 파병존슨 대통령은 1961년부터 존 F 케네디(JFK) 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내다 1963년 JFK가 암살당하면서 대통령 자리를 이어받았다. (1964년 대선에선 공화당 후보 배리 골드워터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대통령이 됐다고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기 때문. 그 중 하나가 베트남 전쟁이었다.때마침 태평양 건너편에 이 전쟁을 경제 발전 토대를 마련하려는 나라가 있었다. 맞다. 바로 한국이었다. 두 나라 사이에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이런 관계는 마음이 변하기 전에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정을 나눠야 ‘비즈니스’가 성사되는 법.존슨 대통령은 1965년 5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을 미국으로 초청했다. 명분은 5·16군사정변 4주년. 존슨 대통령은 에어포스원을 한국으로 보내 박 대통령이 타고 오도록 했으며 워싱턴 중심가에서 카 퍼레이드까지 열어줬다. 나중에 공개된 백악관 문서에 따르면 존슨 대통령은 당시 정부 기관에 ‘빈틈없이’, ‘거창하게’ 박 대통령 환영 절차를 진행할 것을 명령했다. 또 각 신문에 박 대통령에 대한 기사를 크게 취급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백악관에는 쌀밥과 김치를 준비했고, 환영만찬장에서는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1965년 5월 20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당시 워싱턴을 떠나면서 “여기에 오기 전에 나는 자립경제 달성을 위한 한국 노력에, 또 공산 침략에 대항하여 자유를 수호키 위한 우리의 투쟁에 미국이 얼마나 관심과 이해를 가졌는지 의심했지만, 이제 나의 이 두 가지 의구(심)는 해소됐다”고 말했다.이후 한국에서 베트남 파병은 가속도를 냈다. 한국이 처음 베트남 전쟁에 파병한 건 1964년이지만 박 대통령 미국 방문 전까지는 의무(醫務)·건설지원단 등 비전투부대만 사이공(당시 남베트남 수도)을 찾았다. 국회가 전투부대(청룡부대) 파병 동의안을 가결시킨 건 1965년 8월 13일이었다. 이날 국회 본회의에는 여당(공화당)만이 단독으로 참석했다. ● “한국엔 반미주의자가 한 명도 없다.”이듬해 10월 존슨 대통령은 한국을 포함해 아시아 및 오세아니아 7개국 순방길에 올랐다. 인기 없는 전쟁을 수행 중인 미국 대통령이 다른 나라에서 환영받기는 쉽지 않은 일. 존슨 대통령은 가는 나라마다 ‘어제는 죄 없는 아이를 몇 명이나 죽였나?’, ‘존슨 고 홈(Go Home)’이라고 외치는 시위대와 마주해야 했다. 하지만 마지막 방문지였던 한국은 완전 딴판이었다. 1966년 10월 31일자 동아일보는 “존슨 대통령은 곧 박대통령과 검은 리무진차에 동승, 연도를 뒤덮은 180만을 훨씬 넘는 환영인파와 태극기 및 성조기 물결을 헤치며 서울로 들어왔다. 오후 4시 50분. 서울시청 앞 관장에 이른 존슨 대통령은 그곳에서 열린 ‘시민환영대회’에 참석. 수십 만 명이 참석한 대회… 존슨 대통령은 환영대회가 끝난 뒤 박 대통령과 함께 무개차(無蓋車·오픈카)를 타고 중앙청까지 퍼레이드”라고 전했다.다음날 동아일보는 존슨 대통령 일행이 이 환영행사에 무척 흐뭇해했다고 전했다. “빌 모어스 백악관 대변인은 ‘가장 크고 가장 성대하며 가장 열렬한 환영이었다’고 ‘가장’이란 최상급 수식어를 세 번씩이나 썼다”고 한다.열렬한 환영 분위기는 미국 기자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 홍종철 공보부 장관이 개최한 리셉션에서 미국 기자들은 “다른 나라처럼 데모도 없고 ‘존슨 고 홈’의 아우성이 없어 이상하다”고 노석찬 공보부 차관에게 물었다. 노 차관은 “한국엔 반미주의자가 단 한 사람도 없어서 그렇다”고 답했다. ● 낮의 외교, 밤의 외교존슨 대통령은 방문 이틀째였던 그해 11월 1일에는 경기 화성군 태안면 안녕리(현 화성시 안녕동)을 방문했다. 당시 동아일보 표현을 인용하면 이 마을은 “미국에서 원조를 받아 이룩한 ‘모범 부락’”이었다. 당시 태안면사무소는 존슨 대통령이 면 전체를 잘 굽어볼 수 있도록 전망대를 만들고 그 자리에 존슨동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이 자리에는 갓을 쓰고 도포를 쓴 ‘농군 대표’ 최시중 할아버지(당시 65)도 나와 있었다. 최 할아버지를 보자 존슨 대통령은 성큼 다가가 손을 내밀고 기념촬영을 했다.기념촬영을 마친 존슨 대통령을 최 할아버지에게 “미국에 가 보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최 할아버지는 긴 턱 수염을 쓸어내리며 “한번쯤 가보고 싶지만 오늘은 안 되겠다”며 웃었다. 그러자 존슨 대통령은 대신 최 할아버지에게 헬리콥터 10분 비행을 선물했다.이렇게 훈훈한 이야기에 ‘야화(夜話·밤 이야기)’가 빠지면 섭섭한 일. 이동원 당시 외무부 장관이 1992년 펴낸 책 ‘대통령을 그리며’에 따르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부대통령 자격으로 처음 만난 1961년부터 인연을 이어온 두 대통령은 ‘EDPS(음담패설)’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했다고 한다. 방한 때 존슨 대통령이 이 장관을 칭찬하자 박 대통령은 “낮의 외교도 잘하지만 밤의 외교는 더욱 능숙하다”고 대답했다. 이에 붙임성 좋기로 유명한 이 장관이 존슨 대통령에게 ‘기생 파티(!)’를 제안했다. 존슨 대통령이 숙소로 쓰던 워커힐 호텔 별채에서 방한 마지막 날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제안한 것. 존슨 대통령도 이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영부인 버드 여사가 눈치를 채는 바람에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이 장관은 회고했다.●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이렇게 존슨 대통령을 맞이한 이들 중 다수가 ‘동원 인력’이었다는 걸 부인하기는 쉽지 않다. 자료에 따라서는 275만 명을 동원했다는 기록도 찾을 수 있다. 참고로 당시 서울 인구는 350만 명이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원조해주지 않으면 먹고 살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던 당시 한국에서 미국 대통령의 위상은 지금하고는 또 달랐다. 당시라고 한국에 반미주의자가 단 한명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미국 대통령이 많은 한국인들에게 ‘슈퍼스타’였던 것도 사실이었을 터다.이 원조를 공짜로 얻어낸 건 물론 아니었다. 대통령 기록관에 따르면 박 대통령이 1965년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에 파병한 한국군 2000명이 미국 의회에서 원조안을 통과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한국에게는 미국이 필요했고, 미국 역시 한국이 필요했다. 아니, 존슨 대통령에게는 박 대통령이 필요했고, 박 대통령 역시 존슨 대통령이 필요했다. 하나를 받으려면 하나를 줘야 했다.2005년 공개된 ‘한국군 월남 증파에 따른 미국의 대한(對韓) 협조에 관한 주한 미대사 공한’(일명 브라운 각서)에 따르면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철수를 시작한 1973년까지 파병 장병이 국내로 송금한 돈은 총 1억9511만 달러에 달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 돈으로 경부고속도로를 깔았고, 한국 기업 역시 군수물자 납품 등으로 특수(特需)를 누렸다. KAIST가 문을 열게 된 것도 이 두 대통령의 우정(?) 덕분이었다.물론 베트남 전쟁 파병이 100%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파월 장병들이 이 전쟁에서 손에 피를 묻힌 덕에 한국 경제가 한 단계 도약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1964년 103달러였던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974년 541달러로 5배 이상 올랐다.과연 이번 트럼프 대통령 방한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무엇을 내주고 무엇을 얻게 될까.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아재’ 테스트 하나를 해보자. ‘휴거’는 무슨 뜻일까. ①휴먼시아에 사는 거지 ②세상에 종말이 찾아오는 것충격적이게도 요즘 일부 사람들은 휴거를 ①이라는 뜻으로 쓴다. (휴먼시아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서 지은 국민임대주택단지 브랜드 이름이다.) 하지만 1990년대를 몸소 경험한 이들에게 휴거는 역시 종말론이다.‘라이프성경사전’에 따르면 휴거(携擧)는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시 주를 믿고 죽은 성도들이 먼저 부활하고, 그때까지 살아 있는 성도들이 육체의 변화를 받아 공중으로 들어올려져서 주를 만나게 되는 종말적인 사건’을 뜻한다.이 풀이만 보면 신학과 시험에나 어울릴 법하지만 비기독교도 독자 중에서도 이 낱말을 알고 계신 분들이 적지 않을 거다. 19992년 다미선교회 ‘휴거 소동’을 지켜봤기 때문. 이 선교회는 1992년 오늘(10월 28일) 자정에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실제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 소동이 끝난 뒤 다미선교회는 11월 2일 각 신문에 사과 광고를 게재하는 한편 그달 10일까지 헌금 반환 신청을 받겠다고 밝혔다. 해산 당시 이 선교회 신도 숫자는 약 8000명 수준이었으며, 보관하고 있는 헌금은 25억 원 가량이었다.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는 표현에서 이름을 따온 이 선교회를 이끌던 건 이장림(당시 45·개명 후 이답게) 목사였다. 그는 1999년 세상이 멸망할 것인데 ‘요한계시록’에 7년 동안 짐승이 지배한다는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에, 1992년에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날짜를 10월 28일로 특정한 건 이 목사가 ‘어린 선지자’로 지목한 H군이었다. (H군은 나중에 정식 신학 교육을 받은 목사가 됐다.)그래도 이 목사가 ‘확신범’이었다면 휴거를 믿고 그에게 돈과 시간을 가져다 바친 이들이 덜 억울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 목사 본인은 휴거를 믿지 않았다. 휴거 예정일을 한달 가량 앞둔 그해 9월 24일 마약 복용 혐의로 검찰에 붙잡힌 그는 “사실은 나도 10월 28일 휴거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지는 않다”고 실토했다. 심지어 수색 결과 이 목사 집에서 1993년 5월 22일이 만기인 3억 짜리 환매조건부채권(RP)이 나오기도 했다. 1992년 10월 28일에 휴거가 발생할 것이라고 믿었다면 이런 투자를 할 리가 없었다. 이에 대해 이 목사는 “나는 이번 10월 28일의 휴거 대상자가 아니고 ‘환란시대’에도 지상에 남아 순교해야 할 운명”이라며 “이 돈은 그때 활동비로 쓰려고 준비해둔 것”이라고 해명했다. 결국 검찰은 이 목사를 사기 혐의로 구속했고, 법원은 그에게 징역 1년과 2만6000달러 몰수형을 내렸다. 이렇게 휴거 소동이 사기극으로 막을 내렸으니 당시 이 선교회 신도 모두 일상 생활로 돌아갔을까.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국제종교문제연구소’에서 펴내는 월간지 ‘현대종교’에 따르면 이 목사는 또 다른 선교회를 조직해 활동 중이며, 여전히 종말론을 믿는 이들은 그를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다고 한다.종교뿐 아니라 천제물리학 같은 과학 분야에서도 언젠가 우주가 생명을 다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매일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자세로 겸허하게 최선을 다해 사는 태도도 결코 나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종말론은 앞세워 돈이나 성(性) 등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그 사람과 관계를 끊는 게 구원을 얻는 길이 아닐까.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1987년 오늘(10월 27일) 정부는 개헌 찬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이 투표에는 유권자 72.2%가 참가해 그 중 93.1%가 찬성표를 던졌다. 이날 국민투표를 통과한 헌법이 바로 지금까지 우리가 쓰는 ‘대한민국 제6공화국’ 헌법이다. 이 제9차 개헌 핵심 뼈대는 ‘대통령 직선제 도입’이었다. 동아일보는 ‘직선제 헌법(直選制 憲法) 확정’이라는 제목으로 투표 결과를 보도하면서 대통령 선거를 12월 15일 진행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함께 전했다. 그만큼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국민들 열망이 컸다. 대통령 직선제야 말로 민주화의 표상이었기 때문이다.●민주화로 가는 길1987년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시작한 해였다.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이던 박종철 열사는 경찰에 끌려가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당해 1월 14일 숨졌다. 하지만 당시 치안본부(현 경찰청)는 이튿날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이 해명을 받아들일 수 없던 동아일보는 그달 16일 처음으로 고문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이튿날에는 ‘외상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고 복부 팽만이 심했으며 폐에서 수포음(거품 소리)이 전체적으로 들렸다’는 검안서 내용을 보도했다. 이 특종 보도로 치안본부는 ‘경관 두 명의 물고문으로 숨졌다’고 털어놓았다. 이후 동아일보는 그해 5월 22일 ‘치안본부 고위 간부들이 비밀회의를 열어 범인 축소, 사건 은폐 조작을 모의했다’, 다음날에는 ‘축소·은폐 조작을 법무부와 검찰 고위 관계자들이 이미 알고 있었다’고 잇달아 특종 보도를 내보냈다. 이 여파로 정부는 그달 26일 국무총리, 국가안전기획부장(현 국가정보원장), 내무부 장관(현 행정자치부 장관),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 등을 모두 바꾸는 개각을 단행했지만 사회적 분노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데모가 잇따르는 가운데 그해 6월 9일 이한열 열사(당시 연세대 경영학과 2년)가 경찰 최루탄에 맞아 결국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튿날 시청 앞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민들로 가득 찼다(6·10 민주항쟁).여기서 호헌(護憲)은 사전적으로 “헌법을 보호하여 지킨다”(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는 뜻. 하지만 여기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그해 4월 13일 ‘개헌 논의를 중단한다’고 발표한 담화 내용을 가리킨다. 민주화 열기에 위축된 여당(민주정의당)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위원(제13대 대통령)은 그해 6월 29일 서울 송파구 가락동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뼈대로 한 개헌 방향을 전 전 대통령에게 제안한다(6·29 선언). 이튿날 전 전 대통령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개헌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진행하게 됐다. 결국 새 헌법안이 통과되면서 대한민국 국민은 1972년 이후 15년 만에 다시 자기 손으로 대통령을 선출할 권리를 얻게 됐다. ● 대통령 간선제와 직선제이승만 박사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만든 건 국회였다. 제헌헌법은 대통령을 간선제로 뽑도록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발췌개헌’을 통해 대선 방식이 직선제로 바뀌면서, 1952년 8월 5일 대한민국 국민은 처음으로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을 뽑게 됐다.1960년 4·19 혁명으로 이 전 대통령이 물러난 뒤 정부 형태가 의원내각제로 바뀌면서 대선 방식도 국회 간선제로 바뀌었다. 이듬해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대통령중심제로 복귀하면서 다시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한다. 1971년 대선 승리로 3연임에 성공한 박 전 대통령은 1972년 ‘유신헌법(제4공화국 헌법)’을 통해 대선 방식을 간선제로 바꿨다. 유신헌법 제45조①은 ‘대통령의 임기가 만료되는 때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늦어도 임기만료 30일전에 후임자를 선거한다’고 돼 있었다. 최규하, 전두환 전 대통령 역시 이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 자리에 앉았다. 문제는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이 헌법 기구가 이름과 달리 통일을 목적으로 하지도 않았고, 주체적이지도 않았으며, 회의도 아니었다는 점. 이 기구는 그저 대통령이 ‘투표 형식’을 빌리기 위한 ‘거수기’에 지나지 않았다.통일주체국민회의는 제5공화국 헌법 도입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의원이 대통령을 뽑는 방식이 달라진 건 아니었다. 이날 국민투표에서 개헌안이 통과되면서 비로소 대통령 직선제가 뿌리내리게 됐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왜 운동회 때는 두 팀을 청군이랑 백군이라고 부르나요? 서로 반대되는 색을 쓰려면 청군 vs 홍군, 백군 vs 흑군 정도가 맞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 C로부터 ‘잡학사전’을 소개 받은 R 정말 감사합니다. ‘몰라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지만 알면 좋은 것을 찾아가는 재미’를 추구하는 잡학사전에 딱 어울리는 질문입니다. 사실 이상하기는 합니다. 미술시간에 배운 ‘보색(補色·반대색)’ 개념을 떠올려 보면 말씀하신 것처럼 ‘청군 vs 홍군’, ‘백군 vs 흑군’이 더 어울려 보입니다. 실제로는 초등학교 때부터 99.9% ‘청군 vs 백군’ 맞대결 구도지만요. 팀을 이렇게 나누는 이유는 ‘오방색(五方色)’ 때문입니다. 네, 박근혜 전 대통령 때문에 유명해진 낱말 그 오방색 맞습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오방색을 “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색”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다음 “동쪽은 청색, 서쪽은 흰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 가운데는 황색”이라고 설명이 이어집니다. 일단 이 그림을 보면 이해가 가시죠? 그런데 사실 이 그림은 원래 뒤집어 그려야 맞습니다. 동양에서는 보통 남쪽이 정방향을 뜻하니까요. 그러면 한번 그림을 뒤집어 보겠습니다. 이러면 왼쪽(좌측)에 동쪽(청색)이, 오른쪽(우측)에 서쪽(백색)이 오게 됩니다. 여기서 나온 그 유명한 표현이 바로 ‘좌청룡 우백호’입니다. 원래 이 표현은 남주작, 북현무로 이어지는데, 주는 ‘붉을 주(朱)’, 현은 ‘검을 현(玄)’을 쓰기 때문에 오방색과 뜻이 통합니다. 이런 구분이 있기에 예전에 차전놀이를 할 때도 팀을 동부, 서부로 나눴습니다. 색깔도 당연히 청색, 백색을 따랐습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아래 사진을 보시면 두 팀이 서로 머리끈 색깔이 청색과 백색인 걸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 전통이 이어져 운동회에서도 팀을 나눌 때 다른 색이 아니라 ‘청군 vs 백군’이 된 겁니다. 그러니 학교 선생님 여러분, 팀을 배치할 때 청군 백군을 엉뚱한 방향에 두시면 아니 됩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