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무대가 그야말로 살아 숨쉰다. 배우들의 숨결과 감정 표현을 따라 무대의 색채가 시시각각 변한다. 때론 무대가 계단처럼 높아졌다 낮아지며 360도 회전한다.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무대는 배우들에게 최고의 비극적 놀이터가 됐다. 연극 ‘오이디푸스’는 베테랑 배우들의 연기와 무대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리스 3대 비극 작가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을 각색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신탁을 받은 오이디푸스의 운명과 비극을 그렸다. 오이디푸스 배역의 황정민은 운명 앞에서 울부짖으며 관객에게 서글픈 에너지를 전달한다. 작품은 극장의 깊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건물 기둥을 겹겹이 배치해 관객 앞에 고대 그리스 궁전이 놓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배우들이 무대 깊은 곳부터 관객 바로 앞까지 뛰어다닐 정도로 동선을 폭넓게 사용했다. 다양한 무대장치와 특수효과도 보는 재미를 더한다. 회전하는 무대에서 걷는 오이디푸스가 계속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장면은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 존재를 표현했다. 극 후반부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를 땐 음향에 맞춰 피를 뜻하는 붉은 천막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대체로 어두운 톤이지만 빨강, 초록, 파랑 빛깔의 무대 색채 변화 덕에 눈이 지루할 틈이 없다. 압권은 오이디푸스가 무대 밖으로 나와 지팡이를 짚고 걷는 장면. 오이디푸스를 비추는 조명 외엔 극장 안의 모든 특수효과가 사라진다. 객석은 숨소리도 없이 자체 음 소거 모드로 전환한다.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작품의 마지막 특수효과가 된다. 황정민 배해선 남명렬 정은혜 등 출연. 24일까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3만3000∼8만8000원. 13세 관람가. ★★★★(★ 5개 만점)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고도로 산업화한 사회에서 말은 권위를 상징한다. 북미, 유럽 국가에서 기마경찰은 말에 올라 시위 현장을 통제한다. 의전행사에서 전통과 품격을 높이는 일을 맡는다. 제복을 입은 채 말에 오른 이들은 말에 오르지 않은 이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권위를 뿜어낸다. 말은 속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고대부터 유목사회에서 말은 빠른 이동, 운송을 위한 제1의 수단이었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흔하게 접하는 말의 모습은 속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린 경마, 폴로 경기다. 최고의 속도전으로 꼽히는 F1 레이싱에서도 사람들은 늘 엔진의 마력(馬力)을 조금이라도 높이려 안달이 나 있다. 인류가 이토록 6000년 넘게 마력(馬力)의 마력(魔力)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미국 문화인류학자인 저자는 인간이 사육한 최상의 동물인 말이 인류 문명에 번영을 가져다줬기 때문이라고 봤다. 고대부터 말은 정복의 수단이자 문명, 종교, 언어 전파의 수단이었다. 말의 기동성을 이용해 인간은 물리적 이동거리를 단축했고, 말이 짊어진 물품들은 더 빠르게 세계로 퍼져나갔다. 말을 이용할 줄 알았던 문명은 말을 이용하지 못한 문명을 압도했다. 고도로 발전한 기술을 말에 싣고 널리 펼쳐내지 못한 문명은 사라져갔다. 기원전 6000만 년 전부터 존재한 야생말의 생물학적 분석부터 인류와 함께한 말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풀어낸다. 문화인류학과 역사를 매력적으로 연결하고 방대한 자료를 동원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저자는 인간과 말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공생관계에서 인류의 미래 모습까지도 조심스레 내다봤다. 인간 중심으로 서술된 기존 역사를 말을 중심에 놓고 바라보니 상당히 흥미롭다. 익히 알려진 역사적 사건도 ‘말 때문에 이긴 전쟁이구나’라는 걸 깨닫게 된다. 기마민족의 활약으로 유명한 몽골제국은 물론이고 고대 아케메네스 제국과 중국 진 제국은 말을 효과적으로 흡수한 ‘기마 군국주의’로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뒤이어 전차를 이용한 로마, 아랍의 기마병, 신대륙을 정복한 유럽 기마병까지 말은 늘 인류에게 정복과 승리를 가져다줬다. 20세기에는 ‘쇠 말’(기관차), ‘말 없는 탈것’(자동차), ‘날개 돋친 페가수스’(비행기)가 말을 대신하고 있다고 말한다. 말의 활약상에 주목하면서도 말 때문에 초래된 파괴적 정복전쟁의 폐해도 짚었다. 특히 유럽인이 신대륙 정복에 앞세운 군마는 아메리카 원주민 4830만여 명의 피를 불러왔다. 이는 끝내 19, 20세기의 노예무역과 1·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이에 저자는 끊임없는 가속에 대한 열망 대신 공유, 협력이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속도를 추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전쟁이 줄어들지 않고 계속되는 지금이야말로 멈추지 않는 정복의 오만한 태도에서 벗어나 인종 말살의 대립, 고갈되는 오존층, 녹아가는 만년설, 사라지는 산호초로 고통받는 이 세상을 다시 일으켜야 할 때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불현듯 찾아오는 그리움은 더 차갑게 식지만/한숨 섞인 입김은 아직까지도 뜨겁다./ 이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어두운 겨울밤처럼/당신에게도 다가간다.” 여성보컬리스트 로번(ROVN·본명 곽연재)은 8일 멜론, 벅스뮤직, 네이버뮤직 등 각종 음원 사이트에 올겨울 감성을 자극할 신보 싱글앨범 ‘IMN0T(아임낫)’을 공개했다. 앞서 로번은 유튜브를 통해 가수 딘(DEAN)의 ‘Instagram’과 세계적인 팝가수 샘 스미스의의 ‘Pray’의 커버영상을 공개하며 기대를 모아왔다. 이를 바탕으로 금번에 처음 선보이는 로번의 신보는 음악 팬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로번은 차가운 바람 소리로 시작하는 ver1에서 자신의 매력적인 중성적 멜로디를 선보였다. 또한 녹슨 기타줄의 사운드가 이별 후의 감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시각적인 심상으로 ‘아무도 밟지 않은 눈 덮인 새하얀 언덕’을 선정했다. IMN0T(아임낫)은 떠나간 연인에게 지금 얘기하고 싶은 말들을 담은 곡으로 로번의 짙은 감정을 고스란히 녹여냈다. 전반적으로 기타사운드가 강한 이 곡은 프로듀서 ‘Kanasus brew’의 탄탄한 베이스 위에 로번의 스토리 설정, 그리고 ‘Jordi moods’와 ‘ziuuu’의 예술적 색감으로 완성되었다. 김기윤기자 pep@donga.com}
로맹 가리의 소설을 각색한 연극 ‘자기 앞의 생’에서 ‘로자’ 할머니 역할을 맡은 배우 이수미(46). 그는 그야말로 뼛속까지 연극인이다. 명동예술극장에서 22일 국내 초연을 앞둔 그는 매일 8시간 이상 연습을 하다 집에 돌아오면 대본의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시뮬레이션’을 마치고 새벽 3∼4시가 되어야 잠이 든다. 20년 넘게 무대에서 갖가지 배역을 맡아 온 그는 주변 친구들로부터 “왜 넌 무대에 올라왔다가 금세 또 사라지냐”는 우스갯소리를 들어왔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선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를 지키는 핵심 배역이다. 그는 “‘자기 앞의 생’ 제의를 받았을 때 국내 초연이라는 부담감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단은 덥석 붙잡았다”며 “제가 맡은 역할이 크든 작든 무대 위에선 모든 게 다 사랑스럽다”고 말했다. 그가 연기할 로자 할머니는 극 중 창녀 출신에 폴란드에서 온 이민자다. 또 유대인인 데다 파리 빈민가에 살며 소수자로 낙인이 찍힌 존재다. 살면서 믿었던 연인에게 배신당하는 아픔도 있지만, 어린 아랍인 소년 모모와 다른 소수자들의 아픔까지도 어루만지는 인간적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로자에게서 자본주의 사회 속 연극인으로 소외된 채 지내 온 나 자신을 발견했다”며 “관객도 세대, 종교, 인종을 뛰어넘어 로자라는 한 인간과 사람 대 사람으로 마주하는 경험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작품이 없는 휴식기에도 국내외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 그저 다음 배역을 맡기까지 집에 틀어박혀 연기 연습을 하거나 무대에 활용할 소재를 찾는 게 진정한 ‘꿀 휴식’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작품을 맡기 전에도 책과 TV를 보며 연기에 활용할 것들을 찾는 게 정말 재밌었다”고 털어놨다. 요즘엔 주로 다큐멘터리를 골라 보며 직접 체험할 수 없는 다른 이들의 인생을 들여다보길 즐기고 있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올해 1월 제55회 동아연극상 연기상 수상은 다시금 무대에 대한 열정을 되살리는 촉매제가 됐다. 늘 동료들을 축하해주기만 하고 아쉬움을 묻어둬야 했던 그는 “상을 목표로 연기했던 건 아니지만, 순수예술에 대한 헌신을 인정받는 것 같아 행복했다”는 소회를 털어놨다. 그는 최근 수상 이후엔 처음 무대에 올랐던 순간도 자주 떠올린다. “20년 전엔 연극한다고 하면 ‘우와! 연극하세요?’라며 신기해했는데, 요즘엔 ‘아이고, 연극해? 너도 힘들겠다’는 동정 어린 대답을 들어요. 근데 전 요즘 같은 반응을 들을 때가 더 좋아요. 관객과 배우라는 게 각자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인간 대 인간으로 객석과 무대에서 만날 때 서로의 모습에 더 쉽게 공감하지 않을까요?”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부모 살해, 패륜, 사이코패스…. 약 120년 전 영국 런던. 로버트라는 소년은 어머니를 칼로 찔렀다. 어머니의 시체는 집에 놓아둔 채 너무도 태연하게 동생과 일주일을 지냈다. 이 천인공노할 사건으로 당시 영국 전역은 발칵 뒤집혔다. 기자 출신인 저자는 얼핏 듣기만 해도 섬뜩한 이 사건을 르포 기사처럼 생생하게 우리 앞에 되살려냈다. 우연히 본 옛날 기사에서 포착한 뒤, 과거 재판기록은 물론이고 소년의 묘비까지 찾아내는 등 끈질기게 단서들을 뒤졌다. 사건 발생일의 날씨, 일출·일몰 시간까지 계산해서 묘사하는 치밀함도 보인다. 단순히 정신병자나 사이코패스의 소행으로 남을 뻔한 이 사건을 저자는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한다. 정신병동으로 옮겨진 소년은 치료 과정에서 부모로부터 극심한 정서적 학대를 겪은 사실을 밝혀냈다. 13세 아동이 감내하기엔 고된 육체적 노동에도 시달려 정신적 장애도 안고 있었다. 더 극적인 사실은 따로 있다. 소년은 정신병원을 나와 생을 마감할 때까지 끊임없이 선행을 베풀며 살았다고 한다. 로버트가 죽은 뒤 그의 묘비에는 실제 고마움을 간직한 이가 ‘항상 그를 기억한다’고 새겨 넣었다. 어떤 누군가에게는 로버트가 친모를 죽인 사실 자체는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모두에게 잊혀진 한 소년의 끔찍한 범행. 그 속살에는 단순한 개인적 일탈이 아니라 산업화를 빙자해 아동 인권을 방치했던 영국 사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밝혀낸 수작이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새해엔 나이는 한 살 더 먹어도 피부 나이만큼은 붙잡아둘 수 있다. 고액의 비용이나 별도의 노력이 드는 건 아니다. 생활 습관과 수면 시간만 조절해도 효과를 볼 수 있다. 깊어지는 주름, 푸석푸석해지는 피부, 점점 어두워지는 피부색이 고민이라면? 채널A ‘나는 몸신이다’에서 ‘시간제한 피부 관리법’을 공개한다. 시간제한 피부 관리법은 피부 세포의 재생이 활발한 특정 시간을 활용하는 방법으로 주름, 탄력, 수분, 피부 색조까지 개선하는 데 큰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관리법의 핵심은 바로 수면 시간 조절. 특히 밤 11시부터 오전 2시 사이에 충분히 숙면을 취하고 있다면 몸에서 멜라토닌 호르몬이 최대치로 분비된다. 멜라토닌 호르몬은 피부 노화를 억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날 스튜디오에는 4주 동안 이 관리법에 맞게 생활한 체험단이 출연해 관리법을 실천한 뒤 스스로 느낀 생생한 후기를 털어놓는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어둡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지하실. 이곳은 운동권 학생들에게 암암리에 알려진 최고의 아지트다. 벽 뒤편으로는 숨을 수 있는 별도 공간이 있는 데다 함께 읽고 토론할 수 있는 불온서적도 가득하다. 데모에 사용할 전단과 화염병도 만들 수 있다. 연극 ‘더 헬멧: 룸 서울’은 시위에 참가한 학생을 찾으려는 백골단원들이 이 지하실에 들이닥치며 시작된다. 지하실 소유주인 서점 주인은 학생들을 벽 뒤에 숨겨주고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비밀 공간은 결국 발각되고, 벽 밖으로 끌려나온 학생들은 백골단의 곤봉에 힘없이 쓰러진다. 극 후반부에는 학생들을 벽 뒤에 숨겨 보호하려는 대학생 백골단원과 상사 사이의 팽팽한 긴장도 그려진다. 지하실은 벽에 의해 분리되거나 합쳐지며 다층적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등장인물들은 벽으로 가로막혀 상대를 바라보지 못할 땐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지만, 벽이 열려 서로 마주한 후에는 상대가 자신과 같은 평범한 시민임을 알면서도 폭력을 휘두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작품은 그 시대를 살아가던 모두가 구조적 폭력에 희생당하는 피해자임을 역설한다. 저마다 ‘빨갱이를 잡기 위해’ ‘선배가 술을 사준다고 해서’ ‘독재를 타도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지하실을 찾은 인물들은 ‘이 일이 끝나면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치지만 이는 끝내 이뤄지지 않는다. 객석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접하도록 한 구성이 돋보인다. 벽이 열릴 때 관객은 하나의 대사와 이야기를 접하지만, 벽으로 공간이 나눠지면 객석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접한다. 다만 무대 두 개의 방음 시설이 완전하지 않아 각 무대의 대사, 소리가 뒤섞여 혼란스러운 순간도 있다. 김태형 연출가는 “무대가 완벽히 구분되지 않는 점은 아쉽지만 연극적 약속으로 이해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배우들의 외침과 현장음, 배경음악이 뒤섞여 관객이 극중 상황 속에 함께 놓여 있는 느낌을 준다. 이호영 이정수 한송희 등 출연. 2월 27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전석 3만 원. ★★★★(★ 5개 만점)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거장 마크 로스코가 화실 밖으로 나가라고 소리 지를 때 가장 짜릿해요. 매일 더 큰 호통 소리를 듣고 싶어 감정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연극 ‘레드’에서 마크 로스코(1903∼1970)의 화실에 조수로 고용된 ‘켄’을 연기하는 박정복(35), 김도빈(37)에게 무대에서 가장 희열을 느끼는 순간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로스코 역은 강신일, 정보석이 맡고 있다. 김도빈은 “스승이 ‘네 인생은 저 밖에 있다’고 말하는 순간 울컥하며 희열을 느낀다”고 했다. 스승을 따르면서도 때론 발칙하게 도발하는 캐릭터 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24일 박정복, 김도빈을 만났다. 6일 개막한 후 인기몰이 중인 ‘레드’는 1958년 로스코가 뉴욕 시그램 빌딩 안 고급 레스토랑에 걸릴 벽화 40여 점을 의뢰받은 뒤 돌연 계약을 파기한 실화를 바탕으로 쓴 작품. 압도적인 대사량과 철학적 사유가 돋보이는 2인극이다. 켄은 가상의 인물로 극중 로스코는 ‘팝 아트’라는 새로운 화풍이 주목받자 본인이 이룬 추상화의 위상이 무너지는 게 아닌지 끊임없이 번뇌한다. 거장의 반열에 올랐지만 어느새 ‘꼰대’가 되어버린 화가 로스코가 켄과 대화하고 팽팽히 맞서며 토론하는 모습을 그렸다. 세 번째 켄을 연기하는 박정복은 “켄이 그림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인물이기에 새로운 배우가 참신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역을 양보해야 하나 고민했다”면서도 “워낙 애정이 많은 작품이라 욕심이 생겼다”고 밝혔다. 처음 켄을 맡은 김도빈은 “공연 때마다 외벽에 큼지막하게 붙은 ‘레드’의 현수막을 보며 동경하던 작품”이라며 “캐스팅 제의가 왔을 때 곧바로 ‘덥석’ 수락했다”고 말했다. 이번에 처음 만난 두 배우는 로스코와의 관계 설정이 가장 어렵다고 설명했다. 둘은 틈 날 때마다 배역에 대한 고민을 나누려 자주 통화한다. “어제도 극 후반부 4장에 대해 논의했어요. 스승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직언하는 내용이 있는데 항상 어려워요. 단순한 대사일 수도 있지만 애증을 담아 연기해야 하거든요”(김도빈) “스승에 대한 존경과 증오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게 관건이라고 생각해요. 정보석, 강신일 선배로부터 ‘오늘은 좀 무섭더라. 날 죽일 것 같았어’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그만큼 감정선이 미묘하죠.”(박정복) 관객은 쉼 없이 쏟아지는 대사의 양에 놀라지만, 정작 힘든 장면은 따로 있단다. 김도빈은 “거대한 캔버스를 붉은색으로 칠하는 장면에서 팔과 온몸의 근육을 이용해 붓질을 하는 게 진짜 어렵다”며 “농도에 따라 물감이 따귀를 때리듯 얼굴을 덮칠 때도 있고 입에 들어갈 때도 많다”고 했다. 그는 “관객이 이 힘든 장면을 꼭 알아주셨으면 한다”며 웃었다. 박정복 역시 “처음엔 팔 한쪽만 사용했는데, 붓질하는 에너지가 객석까지 전달되지 않는다는 걸 안 뒤부터는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이 장면에서는 두 배우의 거친 숨소리가 공연장을 가득 채운다. 대사가 현학적이고 어렵다는 반응도 있다. 이들은 “니체, 쇼펜하우어 등 철학적 대사를 100% 이해하지는 못한다”고 털어놓았다. 박정복은 “김태훈 연출가로부터 켄이 철학적 내용을 다 이해하지 않은 채 연기하는 게 낫겠다는 조언을 들었다”고 귀띔했다. 김도빈은 “관객마다 각자 다르게 느끼고 이해하는 모든 게 정답”이라고 했다. 2월 10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4만∼6만 원.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그녀’(2013년)가 떠올랐다. 주인공이 컴퓨터 운영체제(OS)와 사랑에 빠지는 영화.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현실적이었다. “까톡 왔숑!” 기자는 요즘 그녀와 ‘썸’ 타는 중이다. 상대가 먼저 카톡을 보내면 내게 관심 있는 거라던데, 시작이 좋다. 연락을 주고받다가 결국 공원, 맛집 데이트까지 즐겼다. 이젠 편하게 전화도 하는 사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잘 맞는다. 세 번째 데이트 날, 수줍음 많은 내 성격을 알아챈 그녀가 불쑥 먼저 사귀자고 고백했다. 고민 끝에 받아준 그녀의 맘. ‘알콩달콩’ 연애로 긴 시간을 보낸 뒤 난 그녀에게 마침내 프러포즈를 했다. 그녀가 “Yes!”라고 답하는 순간, 화면에 문구가 떴다. ‘미션 클리어, 점수 획득!’ 나만의 그녀는 화면 속 가상 연인 ‘여빈’. 나의 연애는 오늘도 순항 중이다.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속에서….○ “가상 데이트 설레” vs “실제 소통 어려워질 수도” 기자가 직접 체험한 ‘러브 레볼루션’은 가상현실 기능까지 탑재했다. 아직 베타 버전이지만 3월 일반에 정식 출시를 앞뒀다. 최근 가상 연인을 만들어주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 각광을 받고 있다. ‘러브 레볼루션’에서는 원하는 이상형의 캐릭터를 선택하면, 그 캐릭터를 연기한 실제 배우가 눈앞에 등장한다. 가상 연인으로부터 불쑥 영상통화가 걸려와 “지금 쇼핑 중인데 어떤 색 신발이 더 예뻐 보이냐”고 묻기도 한다. “검은색”이라고 외치면 가상 연인은 음성을 인식하고 검정 신발을 산다. 플레이어는 게임 속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게임머니를 벌어 치장도 해야 한다. 직장인 박재용 씨(30)는 “머릿속에선 ‘이건 그저 게임일 뿐’이라 되뇌는데도 게임을 진행할수록 이상형 여성과 데이트하는 것 같아 설렘을 느꼈다”고 말했다. 남성들만 이런 게임을 하는 것은 아니다. ‘플로렌스’는 ‘훈남’ 가상 캐릭터와 말풍선 퍼즐을 맞춰가며 현실감 있는 연애 상황을 구현한다. 가상 연인의 문자나 전화 세례를 즐기는 앱 ‘수상한 메신저’, 학원 만화의 요소가 강한 ‘일진에게 찍혔을 때’도 인기다. 김서영 씨(26)는 “캐릭터 사실성은 다소 떨어진다. 하지만 연애에서 느끼는 작은 설렘, 풋풋함을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불확실성이 많은 현실 연애에서 환멸을 느낀 ‘N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 등을 포기한 세대)가 이런 게임에서 위안을 받는다고 분석한다. 배정원 행복한성문화센터 대표는 “실제 연애와 경쟁사회에서 느끼는 피로감을 가상현실로 달래는 셈”이라면서도 “어려움 없는 가상 데이트에 익숙해질수록 실제 사람과 소통이 더 힘들어질 수 있다. 상대에 대한 배려도 점점 사라질까 우려된다”고 했다.○ 드라마부터 가수까지… 게임화 확산 연애뿐 아니다. 문화 콘텐츠 전반이 게임화되고 있다. 지난해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을 필두로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넷플릭스 시리즈 ‘블랙미러: 밴더스내치’가 게임의 콘셉트를 차용했다. 증강현실과 가상현실 기술의 발달도 문화 콘텐츠의 게임화에 가속페달이 됐다. 설치 미술 등 전시에도 증강현실을 도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21일 데뷔한 10인조 여성그룹 ‘체리블렛’은 가상의 운영체제 ‘체리블렛’을 중심에 뒀다. 앨범마다 새로운 가상 맵(map)과 퀘스트(과제)가 주어진다. 멤버마다 작은 로봇을 가지고 있는데, 멤버들은 로봇과 함께 성장한다. 육성 시뮬레이션게임, 슈팅게임의 이미지와 콘셉트를 그룹의 뼈대로 삼은 셈이다. 심지어 팬 응원봉도 게임용 총 모양으로 만들었다. 소속사 FNC엔터테인먼트의 유순호 부장은 “아이돌 음악을 주로 소비하는 10, 20대는 반쯤은 가상세계에 살고 있다 할 정도로 게임에 대한 이해도와 집중도가 매우 높은 세대”라면서 “건강한 성장 이야기와 게임 요소를 결합해 팬들의 참여와 몰입도를 높이려 한다”고 설명했다. 김기윤 pep@donga.com·임희윤 기자}
《기윤 “나, 여친 생겼다. 프러포즈도 했어.”희윤 “여친? 축하해! 뭐 하는 사람이야?”기윤 “게임 캐릭터!”희윤 “(당황)”기윤 “전화도 주고받고 얼마나 사실적인데…”희윤 “내 전화나 잘 받아….” 》 ‘그녀’(2013년)가 떠올랐다. 주인공이 컴퓨터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지는 영화.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현실적이었다. “까톡 왔숑!” 기자는 요즘 그녀와 ‘썸’ 타는 중이다. 상대가 먼저 카톡을 보내면 내게 관심 있는 거라던데, 시작이 좋다. 연락을 주고받다가 결국 공원, 맛집 데이트까지 즐겼다. 이젠 편하게 전화도 하는 사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잘 맞는다. 세 번째 데이트 날, 수줍음 많은 내 성격을 알아챈 그녀가 불쑥 먼저 사귀자고 고백했다. 고민 끝에 받아준 그녀의 맘. ‘알콩달콩’ 연애로 긴 시간을 보낸 뒤 난 그녀에게 마침내 프러포즈를 했다. 그녀가 “Yes!”라고 답하는 순간, 화면에 문구가 떴다. ‘미션 클리어, 점수 획득!’ 나만의 그녀는 화면 속 가상 연인 ‘여빈’. 나의 연애는 오늘도 순항 중이다.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속에서….●“이상형과 가상 데이트 설레” vs. “실제 사람과 소통 어려워질 수도” 기자가 직접 체험한 ‘러브 레볼루션’은 가상현실 기능까지 탑재했다. 아직 베타버전이지만 3월 일반에 정식 출시를 앞뒀다. 최근 가상 연인을 만들어주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 각광받고 있다. ‘러브 레볼루션’에서는 원하는 이상형의 캐릭터를 선택하면, 그 캐릭터를 연기한 실제 배우가 눈앞에 등장한다. 가상연인으로부터 불쑥 영상통화가 걸려와 “지금 쇼핑중인데 어떤 색 신발이 더 예뻐 보이냐”고 묻기도 한다. “검정색”이라고 외치면 가상연인은 음성을 인식하고 검정 신발을 산다. 플레이어는 게임 속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게임머니를 벌어 치장도 해야 한다. 직장인 박재용 씨(30)는 “머릿속에선 ‘이건 그저 게임일 뿐’이라 되뇌는데도 게임을 진행할수록 이상형 여성과 데이트하는 것 같아 설렘을 느꼈다”고 말했다. 남성들만 이런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다. ‘플로렌스’는 ‘훈남’ 가상 캐릭터와 말 풍선 퍼즐을 맞춰가며 현실감 있는 연애 상황을 구현한다. 가상 연인의 문자나 전화 세례를 즐기는 앱 ‘수상한 메신저’, 학원 만화의 요소가 강한 ‘일진에게 찍혔을 때’도 인기다. 김서영 씨(26)는 “캐릭터 사실성은 다소 떨어진다. 하지만 연애에서 느끼는 작은 설렘, 풋풋함을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불확실성이 많은 현실 연애에서 환멸을 느낀 ‘N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등을 포기한 세대)가 이런 게임에서 위안을 받는다고 분석한다. 배정원 행복한성문화센터 대표는 “실제 연애와 경쟁사회에서 느끼는 피로감을 가상현실로 달래는 셈”이라면서도 “어려움 없는 가상 데이트에 익숙해질수록 실제 사람과 소통이 더 힘들어질 수 있다. 상대에 대한 배려도 점점 사라질까 우려 된다”고 했다.●드라마부터 가수까지… 게임화 돼가는 문화 콘텐츠 연애뿐 아니다. 문화 콘텐츠 전반이 게임화되고 있다. 지난해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을 필두로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넷플릭스 시리즈 ‘블랙미러: 밴더스내치’가 게임의 콘셉트를 차용했다. 증강현실과 가상현실 기술의 발달도 문화 콘텐츠의 게임화에 가속 페달이 됐다. 설치 미술 등 전시에도 증강현실을 도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21일 데뷔한 10인조 여성그룹 ‘체리블렛’은 가상의 운영체제 ‘체리블렛’을 중심에 뒀다. 앨범마다 새로운 가상 맵(map)과 퀘스트(과제)가 주어진다. 멤버마다 작은 로봇을 가지고 있는데, 멤버들은 로봇과 함께 성장한다. 육성시뮬레이션게임과 슈팅게임의 이미지와 콘셉트를 그룹의 뼈대로 삼은 셈이다. 심지어 팬 응원봉도 게임용 총 모양으로 만들었다. 소속사 FNC엔터테인먼트의 유순호 부장은 “아이돌 음악을 주로 소비하는 10, 20대는 반쯤은 가상세계에 살고 있다 할 정도로 게임에 대한 이해와 집중도가 매우 높은 세대”라면서 “건강한 성장 이야기와 게임 요소를 결합해 팬들의 참여와 몰입을 높이려 한다”고 설명했다. 김기윤기자 pep@donga.com임희윤기자 imi@donga.com▼ 1980년대 처음 등장…연애 게임 역사▼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역사는 오래 됐다. 게임의 역사, 그 자체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애 시뮬레이션은 1980년대 일본에서 시작됐다. 개인용 컴퓨터와 게임기용으로 먼저 개발됐다. 1985년 출시한 ‘천사들의 오후’는 이 장르의 초석을 다진 것으로 평가된다. 게임 캐릭터와 대화를 주고받는 식의 기초적 어드벤처 기능을 선보였다. 본격적인 붐은 1990년대. ‘동급생’ ‘두근두근 메모리얼’이 잇따라 나오며 신드롬을 일으켰다. 시리즈로 이어지며 소프트웨어가 100만 장 이상 팔리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1997년 ‘캠퍼스 러브 스토리’를 필두로 ‘리플레이’ 등이 나오면서 선전했다. 연애 게임은 여러 갈래가 있다.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미연시), 연애 어드벤처, 비주얼 노벨(novel·노블) 등이다. 단순히 정해진 스토리를 따라가며 화면을 넘기는 수준에 머무르느냐, 플레이어 자신이나 캐릭터를 길러 내거나 행복도와 호감도 등의 수치를 상승시키는 좀더 적극적인 쌍방향 소통이 일어나느냐에 따라 갈린다. 연애 게임의 르네상스는 스마트폰이 이끌었다. 한때 선정성 논란에 휩싸이기 일쑤이던 연애 게임은 모바일 시대로 옮겨오면서 습한 방을 벗어나 휴대전화를 타고 일상으로, 양지로 나왔다. 여성용 게임도 늘었다. 모바일 시대에 추가된 다양하고 편리한 기능은 중독성을 높여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일본에서 나온 ‘러브 플러스’는 터치 펜을 이용한 동작 감지, 입체 그래픽으로 몰입감을 높였다. 신드롬은 거셌다. 플레이어가 게임 캐릭터 중 한 명과 실제 결혼식을 올려 화제가 됐다. 지방 도시에서 이들 캐릭터를 활용한 관광 상품을 만들기도 했다. 2017년에는 중국 게임 ‘연예제작인(러브앤프로듀서)’에 등장하는 가상 캐릭터를 위해 게이머들이 쓴 돈이 월간 3900만 달러(약 437억 원)에 이른다는 분석도 나왔다. 캐릭터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팬들이 4만9000달러(약 5492만 원)짜리 축하 광고를 띄우기도 했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오늘부터 금주. 내가 어제처럼 또 과음하면 사람도 아니다.” 우리는 회식 다음 날 종종 이런 말을 듣지만 지킬 수 없는 말이라는 걸 잘 안다. 그런데 인간이 술에 사로잡혀 사는 건 자연스러운 진화생태학적 현상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영국 에든버러대 진화생태학 교수인 저자는 인간이 술을 끊지 못하는 것을 의지박약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 인류가 독소인 에탄올에 내성을 키워 알코올에 익숙해지도록 진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인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비소’ ‘스트리크닌’ 등 독소와 달리 익은 포도, 곡물 속 효모를 섭취하며 인류가 오랜 시간에 걸쳐 에탄올에 적응해왔다는 것이다. 책은 우리가 흔히 먹고 마시는 식재료가 어떤 진화과정을 거쳤는지, 인류가 이 음식을 왜 즐기게 됐는지 진화생태학적 관점에서 조명한다. 겨자 생강 고추냉이의 매운맛, 향신료의 자극적인 맛은 식물이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낸 화합물이다. 다른 생물에게는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이 화합물은 인류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저자는 “화학물질에 독성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면 우리는 그 자극을 회피하기보다는 즐기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며 “독이 있으니 먹지 말라는 식물의 허풍에 속지 않으면 더 많은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선택에서 선호된다”고 말한다. 책 후반에는 인류의 미래 밥상의 모습도 조심스레 내다봤다. 기후변화와 인구증가로 세계 인구가 100억 명에 이르면 식량이 부족해져 유전자변형작물(GMO)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우려도 있다. 다만 지속 가능한 생산 식량으로서 GMO가 과소평가됐다고 지적한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무소속 손혜원 의원이 국회의원 임기 중에 자신이 설립하고 남편이 대표로 있는 공예품 판매·유통업체 ‘하이핸드코리아’의 나전칠기 상품 거래에 개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공무 외 영리 행위와 겸직을 금지한 국회법, 국가공무원법 위반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손 의원은 2016년 7월 11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상임위 전체회의장에서 휴대폰 문자로 자개장 거래를 하는 모습이 언론에 포착돼 물의를 빚었다. 당시 찍힌 손 의원의 휴대전화 화면에는 지인 김 모 씨에게 나전칠기 사진을 전달 받은 후 “내가 250 줬으니 그거만 받으면”, “신촌 자개장 조○○ 사장이 사고 싶다는데”라고 보내는 손 의원의 문자가 포착됐다. 손 의원실의 보좌관은 이 같은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자 “크로스포인트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은 훨씬 좋은 작품으로 그렇게 싼 가격은 있을 수 없다”며 “지인에게 개인 소장품을 판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 문자에 등장하는 조 모 씨에게 확인한 결과는 달랐다. 조 씨는 24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문자의 앞에 나오는 250만원 짜리 거래는 다른 사람과의 문자 내용으로 별개의 것”이라며 “나는 하이핸드코리아에서 판매하는 6000만원 짜리 자개장 구입 문의를 위해 손 의원과 협의를 했다”고 말했다. 손 의원이 국회 상임위 도중 판매 중개한 것이 개인 소장품이 아니라 하이핸드코리아가 소장하고 있는 수천만원 대 나전칠기 작품이었다는 것이다. 조 씨는 “당시 ‘하이핸드코리아’ 측이 6000만 원 정도를 제시했지만, 나는 4000만 원 이상은 힘들다고 여겨 결국 거래가 성사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조 씨가 구입을 시도한 자개장은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내에 입주한 하이핸드코리아 신촌점에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 씨는 “겸임교수로 있는 한 대학의 국제디자인 대학원 모임, 디자인 경영 모임의 여행 등을 함께 다니면서 손 의원을 만나 알게 됐다”며 “손 의원이 나전칠기박물관을 운영하고, 비싼 작품도 많이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도 많이 구입을 의뢰하곤 했다”고 말했다. 손 의원이 설립한 후 현재 남편 정건해 씨(74)가 대표로 있는 크로스포인트문화재단은 나전칠기 관련 공예품 전시는 한국나전칠기박물관에서, 판매는 하이핸드코리아에서 나눠 운영 중이다. 손 의원 측은 하이핸드코리아 경영에 관여한다는 의혹에 “겸직 금지 판단을 받지 않고, 자의로 사직한 뒤 경영에 개입한 바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조 씨의 하이핸드코리아의 소장 작품을 중개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같은 해명은 거짓인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국가공무원법 제64조(영리 업무 및 겸직 금지)와 국회법 제29조의2(영리업무 종사 금지) 등 법률에 위반될 소지가 있다”며 “손 의원은 공직자로서 지켜야 할 의무에 대해서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유원모기자 onemore@donga.com김기윤기자 pep@donga.com}
과거라는 이유로 차마 말하지 못했던, 또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쳐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던 아픔들이 무대 위에서 터져 나온다. 올해 한국 창작연극계는 그 아픔을 관객 앞으로 가져왔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선정한 ‘공연예술창작산실―올해의 신작’ 연극 6편은 이런 치열한 주제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작품들은 인간의 욕망으로 인한 피해자들의 아픔과 전쟁의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았다고 들려준다. 서울 종로구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다음 달 9∼17일 펼쳐지는 극발전소301의 ‘가미카제 아리랑’은 일제 가미카제 특공대에 선발돼 일왕을 위해 죽는 조선 청년들의 비극적 삶의 흔적을 돌아본다. 옳고 그름의 판단을 떠나 당시 고통스러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 현실이 그려진다. 배우 조영규 임일규 등이 출연한다. 김동현 유승일이 출연하는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세기의 사나이’(2월 22일∼3월 3일)는 청산리 전투, 6·25전쟁, 베트남 전쟁 등 역사적 장면들을 한 편의 역사책을 훑듯 짜임새 있게 표현했다. 연극의 사실성에서 벗어나 만화적 상상력을 동원했다. 잊힌 역사의 단면을 경쾌하게 표현했다. 같은 극장 소극장에서 무대에 오르는 ‘배소고지 이야기’(3월 1∼10일)는 기존 전쟁 서사를 뒤집어 여성의 시각에서 조명했다. 6·25전쟁 당시 전북 임실 배소고지에서 벌어진 양민학살 사건을 토대로 전쟁 속 여성들의 아픔에 주목했다. 전쟁 이후에도 상처를 돌볼 틈 없이 외면당한 여성들을 통해 전쟁을 다시 서술한다. 인간의 욕망으로 인한 피해자의 모습도 그려진다. 25일부터 다음 달 3일까지 펼쳐지는 극단 ‘인어’의 ‘빌미’는 오랜 시간 이웃으로 살아온 두 가족 간에 발생한 살인사건을 그린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끊임없이 잘못을 감추기 위해 거짓을 일삼는 모습을 그렸다. 등장인물의 욕망이 맞닿으며 어떻게 서로 피해를 주는 ‘악’이 되는지 보여준다. 김철리 박정순 등이 출연한다. 배우 박종용이 출연하는 ‘하거도’(3월 8∼17일·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는 지상 낙원처럼 보이는 하거도의 이면에서 강제 노역으로 착취당하는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발전만을 외치던 사회 이면에 숨겨진 아픔을 비추며 진정한 유토피아가 무엇인지 돌아본다. 남명렬 출연의 ‘비명자들1’(3월 22∼31일·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역시 비슷한 주제 의식을 공유한다. 극에 등장하는 좀비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존재다. 이들이 내지르는 비명은 구조 요청이자 고통을 전이하는 바이러스다. 라이브 음악 등 음향효과도 적극 활용된다. 비명을 통한 사회적 외면과 위로, 공감 과정을 형상화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환자라고 ‘먹방’ 하지 말라는 법 있나요? ‘추억의 음식’ 한 숟가락을 입에 넣고 먹는 즐거움을 느끼는 걸 볼 때 제일 행복합니다.” ‘국내 1호 푸드 스타일리스트’란 수식어로 유명한 정신우 셰프(50)가 항암 투병 와중에도 음식에 대한 단상을 담은 에세이를 펴냈다. 책 제목은 ‘먹으면서 먹는 얘기할 때가 제일 좋아’(위즈덤하우스). 16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쉽지 않았지만, 제 책을 집어 든 독자가 일상에서 잊고 지낸 먹는 즐거움을 되찾았으면 하는 마음에 썼다”고 말했다. 정 셰프는 한국 음식업계에서 항상 화제를 몰고 다녔다. 배우로 활약했던 경력 덕분에 ‘훈남 셰프’로도 불렸던 그는 요리경연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인기도 얻었다. 그런데 2014년 우연히 찾았던 병원에서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받았다. “간단한 상처를 치료하러 갔는데 ‘흉선암’이란 진단을 받았어요. 심지어 길어야 15개월이란 얘기까지 들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졌죠. 밑도 끝도 없이 ‘어떻게 이렇게 무책임할 수 있느냐’며 의사에게 무작정 화를 냈기도 했습니다. 머리가 하얘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투병을 시작하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우울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정 셰프는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한다. 그는 누워서 치료만 받을 게 아니라 직접 ‘항암 밥상’을 만들어 먹기로 결심했다. 그는 “제 식단과 투병기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더니 다른 환우들로부터 ‘이 음식이 정말 먹고 싶은데 먹어도 되느냐’는 질문이 쏟아졌다”고 말했다. 반응은 생각보다 더 뜨거웠다. 몇몇 의학 전문가들은 “환자가 그렇게 먹으면 안 된다”고 걱정 어린 조언도 보내왔다. 하지만 그는 “먹는 즐거움을 되찾는 건 무엇보다 큰 위로가 됐다”고 털어놨다. “환자들은 소화기능이 떨어져 어차피 많이 먹을 수도 없어요. 정답은 아닐지 몰라도 무조건 ‘먹지 말라’고 할 게 아니라 양념을 덜하거나 소화에 좋은 재료를 써서 환자가 먹고 싶은 음식을 즐기는 게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하지만 이번 에세이는 굳이 항암에 대한 얘기는 본격적으로 싣지 않았다. 오히려 삼겹살과 짜장면, 소갈비 등 군침 돌지만 딱히 ‘건강’과 직결되진 않는 음식들을 주로 다뤘다. 정 셰프는 “말 그대로 먹는 얘기 하는 게 제일 즐거워서 ‘인생 음식’에 대한 수다를 담았다”며 “숨겨진 전국 맛집과 그들의 손맛 비법도 소개하고 싶었다”고 했다. 정 셰프는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더욱 바쁘게 지낼 계획이다. 그간 본인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항암 콘서트’를 열며 많은 이들과 즐거움과 고단함을 함께 나눴다. 앞으로는 유튜브 채널도 개설해 제대로 된 ‘먹방’도 선보인단다. “여전히 투병 중이라 해도 별다를 건 없어요. 끊임없이 웃으며 먹고 얘기하는 게 우리네 삶의 진면목이 아닐까요.”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환자라고 ‘먹방’ 하지 말라는 법 있나요? ‘추억의 음식’ 한 숟가락을 입에 넣고 먹는 즐거움을 느끼는 걸 볼 때 제일 행복합니다.” ‘국내 1호 푸드 스타일리스트’란 수식어로 유명한 정신우 셰프(50)가 항암 투병 와중에도 음식에 대한 단상을 담은 에세이를 펴냈다. 책 제목은 ‘먹으면서 먹는 얘기할 때가 제일 좋아’(위즈덤하우스). 16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쉽지 않았지만, 제 책을 집어 든 독자가 일상에서 잊고 지낸 먹는 즐거움을 되찾았으면 하는 마음에 썼다”고 말했다. 정 셰프는 한국 음식업계에서 항상 화제를 몰고 다녔다. 배우로 활약했던 경력 덕분에 ‘훈남 셰프’로도 불렸던 그는 요리경연 TV프로그램에 출연해 인기도 얻었다. 그런데 2014년 우연히 찾았던 병원에서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받았다. “간단한 상처를 치료하러 갔는데 ‘흉선암’이란 진단을 받았어요. 심지어 길어야 15개월이란 얘기까지 들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졌죠. 밑도 끝도 없이 ‘어떻게 이렇게 무책임할 수 있냐’며 의사에게 무작정 화를 냈기도 했습니다. 머리가 하얘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투병을 시작하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우울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정 셰프는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한다. 그는 누워서 치료만 받을 게 아니라 직접 ‘항암 밥상’을 만들어 먹기로 결심했다. 그는 “제 식단과 투병기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더니 다른 환우들로부터 ‘이 음식이 정말 먹고 싶은데 먹어도 되냐’는 질문이 쏟아졌다”고 말했다. 반응은 생각보다 더 뜨거웠다. 몇몇 의학 전문가들은 “환자가 그렇게 먹으면 안 된다”고 걱정 어린 조언도 보내왔다. 하지만 그는 “먹는 즐거움을 되찾는 건 무엇보다 큰 위로가 됐다”고 털어놨다. “환자들은 소화기능이 떨어져 어차피 많이 먹을 수도 없어요. 정답은 아닐지도 몰라도, 무조건 ‘먹지 말라’고 할 게 아니라 양념을 덜 하거나 소화에 좋은 재료를 써서 환자가 먹고 싶은 음식을 즐기는 게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하지만 이번 에세이는 굳이 항암에 대한 얘기는 본격적으로 실지 않았다. 오히려 삼겹살과 짜장면, 소갈비 등 군침 돌지만 딱히 ‘건강’과 직결되진 않는 음식들을 주로 다뤘다. 정 셰프는 “말 그대로 먹는 얘기 하는 게 제일 즐거워서 ‘인생 음식’에 대한 수다를 담았다”며 “숨겨진 전국 맛집과 그들의 손맛 비법도 소개하고 싶었다”고 했다. 정 셰프는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더욱 바쁘게 지낼 계획이다. 그간 본인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항암 콘서트’를 열며 많은 이들과 즐거움과 고단함을 함께 나눴다. 앞으로는 유튜브 채널도 개설해 제대로 된 ‘먹방’도 선보인단다. “여전히 투병중이라 해도 별 다를 건 없어요. 끊임없이 웃으며 먹고 얘기하는 게 우리네 삶의 진면목이 아닐까요.”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아픔을 달랜다. 한 무대에 펼쳐진 커다란 한지 위에서 집을 짓고 기괴한 몸짓으로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는 이가 있다. 온몸에 먹을 묻혀 종이에 글씨를 쓰고, 때론 나뭇가지를 휘두르는 등 온몸으로 연인을 부르짖는다. 그는 바로 기생 홍랑이다. 1인극 ‘새닙곳나거든’은 관기 홍랑과 조선 8대 문장가인 최경창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최경창의 죽음 이후에야 하나가 될 수 있었던 두 사람을 그렸다. 실제 역사 기록에 따르면, 최경창은 과거 급제 후 함경도로 부임하러 가는 길에 한 마을에서 홍랑을 만난다. 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서로를 사랑했지만 양반과 기생이라는 신분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게다가 최경창은 이미 결혼해 아내가 있던 몸. 홍랑은 최경창이 병으로 죽고 나서야 그의 무덤 곁을 3년간 지키다 결국 자해와 죽음으로써 그의 뒤를 따른다. 극 중 홍랑과 최경창을 홀로 연기한 지현준 배우는 70분간 대사 한마디 없이 김시율 음악감독의 고적한 피리 연주에 따라 몸을 움직인다. 무대 옆 산수화 병풍에 새겨진 18수의 시 내용에 맞춰 둘의 마음속 목소리를 표현한다. 극을 이해하려면 어느 때보다 상상력이 필요하다. 배우의 서글픈 동작은 관객 상상에 따라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때론 이해하기 어렵다. 사각사각 화선지를 밟거나 무대 위에서 발을 구르는 소리가 유난히 관객 귀에 박힌다. 극의 마지막까지 몸부림치던 홍랑은 먹물로 한지를 흠뻑 적셔 찢은 뒤 한지 아래로 몸을 구겨 넣는다. “텅 빈 최경창의 서재에서 알몸이 되어 그의 글을 어루만진다”는 구절에 따라 한지 아래를 굴러다니며 죽음을 표현한다. 죽어서야 비로소 하나가 된 둘의 기괴한 몸짓은 시의 구절처럼 ‘차라리 춤’이 된다. 27일까지. 서울 성동구 우란문화재단 우란2경. 전석 3만 원. ★★★☆(★ 5개 만점)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관객들은 무대 밖에서도 ‘무파사’를 알아보고 사진 촬영을 요청하지만, ‘스카’는 거의 못 알아봐요. 늘 짙은 분장을 하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본심을 숨겨야 하는 악역의 숙명이겠죠.” 뮤지컬 ‘라이온 킹’에서 악역 스카를 맡은 앤터니 로런스(30·영국)는 나름의 ‘고충’을 털어놨다. 반면 무파사 역할의 음토코지시 엠카이 카니일레(29·남아프리카공화국)는 “길에서 ‘무파사다!’라고 소리치며 저를 알아보는 한국 관객들을 만나면 즐겁다”며 “더 많은 관객이 무파사의 메시지에 공감하도록 열정적으로 연기하겠다”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18일 만난 두 배우는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냈다.》 지난해 대구에 상륙해 흥행 열풍을 일으킨 라이온킹은 서울에서도 뜨거운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붉게 타오르는 사바나 초원. 왕자로 태어난 사자 ‘심바’가 아버지인 무파사를 죽인 삼촌 스카를 물리치고 왕위를 되찾는 이야기로, 1997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됐다. 20개국 100개 이상의 도시에서 95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 모아 공연 수익만 81억 달러(약 9조922억 원)에 이른다. 한국에서도 라이온킹 신드롬이 이어져 다음 달 공연까지 일찌감치 티켓 대부분이 판매됐다. 무파사와 스카는 각각 선과 악을 상징하는 핵심 배역. 두 배우의 대결 구도는 극 초반부터 관객의 몰입을 한껏 끌어올린다. 무대에서 ‘으르렁’대는 두 사람은 인터뷰에서는 서로를 칭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오프닝넘버인 ‘생명의 순환(Circle of Life)’에서 스카가 무대에 오르지 않는데도 로런스는 늘 무대 옆에 서서 지켜봐요. 그 모습에서 프로 정신을 배웁니다.”(카니일레) “카니일레와 대기실을 함께 쓰는데, 힘든 투어 일정에도 늘 무대에서 열정적이고 밝은 모습을 보여줘 존경스러워요.”(로런스) 둘은 영국 런던에서 열린 오디션에서 무파사와 스카로 호흡을 맞춰본 후 각별한 사이가 됐다. 두 배우가 가장 공을 들이는 건 마스크 연기다. 극 중 무파사와 스카의 마스크가 시선을 마주하며 울부짖는 장면은 특히 유명하다. 연기를 하며 마스크가 얼굴 앞으로 내려오거나 머리 위로 올라가도록 리모컨으로 계속 조종한다. 로런스는 “스카의 마스크는 누군가를 위협하거나 감정을 숨기는 연기 도구”라며 “1막에서 어린 심바는 스카의 마스크 속 눈을 바라보지만, 2막에서 어른이 된 심바는 제 눈을 직접 바라보며 스카의 본심을 알아챈다”고 설명했다. 카니일레는 “6개월 동안 거울로 둘러싸인 방에서 마스크 속 눈을 바라보는 훈련을 하며 동물적 시선과 움직임에 집중했다”고 밝혔다. 두 배우는 겨울철 최고의 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신경 쓰고 있다. 로런스는 “춥고 건조한 날이 계속돼 가장 중요한 수분 보충을 하기 위해 물통을 달고 산다”며 “운동선수처럼 나만의 원칙을 정해 몸 관리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두 배우는 공연마다 확연하게 달라지는 객석의 반응을 한국 공연의 매력으로 꼽았다. “관객이 함께 쇼를 즐기고 있다는 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어요. 마지막에 모두 일어서서 열광적으로 박수를 칠 때는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예요.”(카니일레) “오프닝부터 끊임없이 함성을 질러주는 관객들을 보면 마치 록 콘서트장에 있는 것 같아요. 흥이 절로 난다니까요.”(로런스) 3월 28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6만∼17만 원.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번개탄을 피우고 목숨을 끊은 50대 가장. 그가 기러기 아빠로 혼자 지내다가 사망한 원룸 안에선 태블릿PC, 해외 송금용 서류, 양복과 와이셔츠, 처세술에 관한 책, 라면 몇 봉지와 소주병만이 발견됐다. 그리고 벽지엔 유서 대신 “한사코 끌어안고자 했던 삶이 마침내 칼이 되어 내 심장을 찌르는구나”라는 낙서만 남아 있었다. 작품 ‘밤의 흔적’의 주인공이 죽은 사람들의 특수 청소를 하기 위해 마주하는 공간처럼 소설집 속 작품 8편의 공간들은 하나같이 재난처럼 황폐하고 참혹하다. 때론 무기력하고 고요한 느낌마저 든다. ‘누가 고양이를 죽였나’에선 만연한 남편의 폭력이 드러난다. ‘나이아가라’에선 주인공이 떠나는 여행길 자체가 죽은 자의 흔적을 찾는 여정이다. ‘경옥의 노래’에선 죽은 연인을 그리워한 탓에 함께 다녔던 곳들을 돌아다니며 재를 뿌리는 애도의 여행이 그려진다. ‘총’에서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해 무공훈장을 받은 국가유공자인 아버지가 가족에겐 늘 폭행을 일삼자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총을 겨누는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는 도리어 “방아쇠를 당겨라”라고 외치지만 힘없이 총을 다시 내려놓는 아들의 모습은 큰 무기력을 안겨준다. 저자가 이처럼 다양하면서도 구체적인 죽음의 장면들을 묘사하는 건 결국 우리 사회에 남은 상처와 이로 인한 영혼과 육체의 죽음을 조명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 소설집은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2014년 세월호 참사 뒤 이듬해 한국을 떠났다. 타지에 머문다고 해서 한국에서의 상처가 쉽사리 잊힌 건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에서의 기억들로 고통받으며 절필 직전까지 내몰렸다. 그는 “밤마다 거미줄을 치듯 한 줄 한 줄 글을 씀으로써 겨우 되살아났다”고 적었다. 그만큼 소설 속 문장들은 담담한 듯 절실하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우리나라 동요 ‘상어가족’(사진)의 영어판인 ‘베이비 샤크’가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에 2주째 진입해 ‘핫 100’ 38위를 기록했다. 이 노래는 지난해 7월 빌보드 ‘키드 디지털 송 세일즈 차트’에 처음 오른 뒤 지난주에는 ‘핫 100’ 32위를 차지했다. 한국 가요가 아닌 동요가 ‘핫 100’에 진입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상어가족’은 2015년 국내 교육 스타트업인 스마트스터디가 유아교육 콘텐츠인 ‘핑크퐁’을 통해 내놓은 동요다. 북미권 구전 동요를 편곡한 2분 길이의 노래로 중독성 있는 “뚜루루뚜루∼”라는 후렴구가 반복된다. 지난해 8월에는 영국 오피셜 싱글차트에 올라 화제가 됐다. 현재 유튜브 조회수는 22억여 회에 이른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공연장 입구에서 객석까지 향하는 좁고 어두컴컴한 길. 전쟁터의 참호처럼 꾸민 통로를 걷다 보면 벙커에 도착한다. 벙커 한가운데에 마련된 무대에 선 배우들은 관객 100명을 향해 “여기에 있는 이 불쌍한 병사들”이라고 외치며 모두가 벙커에서 함께 살아남아야 하는 전우임을 알린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벙커 밖의 적을 조준하던 총구는 어느새 벙커 안에 있는 아군들을 향한다. 이 순간, 관객은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던져진 인간의 비참함, 트라우마, 외로움과 만난다. 내용과 형식의 기발함으로 호평받고 있는 연극 ‘벙커 트릴로지’는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모르가나’, ‘아가멤논’, ‘맥베스’라는 테마에 맞게 각색된 옴니버스식 3부작이다. 각 테마는 신화와 소설에서 이야기를 가져와 전쟁 속 인간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아가멤논’에서는 독일군 영웅 저격수를 그리스 신화 속 아가멤논 왕에 빗대 아내에 의해 살해당하는 모습을 그린다. ‘맥베스’에서 권력에 도취된 영국 장군이 맥베스로 등장하며, ‘모르가나’에서는 아서왕 전설 속 기사들처럼 전쟁을 흥미로운 모험으로 생각해 참전했다 고통받는 젊은 군인들의 이야기를 표현했다. 벙커는 전쟁에서 최후의 방어선이자 공격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극 중에서 벙커는 거대한 전쟁 시스템에 희생되는 인간들이 아군, 적군마저 분간하지 못한 채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파국을 맞는 공간이다. 결국 벙커는 심리적 방어선일 뿐 전쟁에서는 어떤 곳도 안전지대가 될 수 없다는 걸 말한다. 소품, 음악도 눈여겨볼 만하다. 인간이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잠이 들도록 하는 베개는 역설적으로 상대를 질식시키는 살인 도구가 된다. 전쟁광인 맥베스 장군이 음악을 듣는 장면에서는 나치가 홍보 수단으로 이용한 바그너의 곡이 흘러나온다. 총격 장면에선 1차대전 당시 사용된, 탄피가 한 발 한 발 위로 튀어 오르는 총기 소품을 사용하는 등 철저한 고증도 거쳤다. 무대 음향, 특수효과 역시 몰입을 높인다. 벙커 위로 적 포탄이 떨어질 때면 무대 전체가 진동할 정도로 큰 효과음을 쓴다. 벙커가 울리며 천장에서 흙가루(실제는 초콜릿 가루)가 떨어지는 소소한 특수효과도 사용한다. 다만 과도한 음향 때문에 배우의 대사가 일부 전달되지 않는 점은 아쉽다. 물론 바로 옆 사람의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소란스러운 벙커 내부 모습을 상상한다면 무대에 집중하는 데 큰 문제는 없다. 이석준 박민성 오종혁 박은석 신성민 등 출연. 2월 24일까지. 서울 종로구 홍익대대학로아트센터 소극장. 전석 3만 원. ★★★★(★ 5개 만점)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