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인

황규인 기자

동아일보 스포츠부

구독 40

추천

이 세상 모든 질문이 스포츠였으면 좋겠다.

kini@donga.com

취재분야

2024-10-31~2024-11-30
스포츠일반25%
야구21%
사회일반11%
정치일반11%
인사일반7%
메이저리그7%
테니스7%
칼럼4%
각종 경기4%
농구3%
  • [황규인의 잡학사전]운동회 때 왜 청군·백군 나눌까

    “왜 운동회 때는 두 팀을 청군이랑 백군이라고 부르나요? 서로 반대되는 색을 쓰려면 청군 vs 홍군, 백군 vs 흑군 정도가 맞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 C로부터 ‘잡학사전’을 소개 받은 R 정말 감사합니다. ‘몰라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지만 알면 좋은 것을 찾아가는 재미’를 추구하는 잡학사전에 딱 어울리는 질문입니다. 사실 이상하기는 합니다. 미술시간에 배운 ‘보색(補色·반대색)’ 개념을 떠올려 보면 말씀하신 것처럼 ‘청군 vs 홍군’, ‘백군 vs 흑군’이 더 어울려 보입니다. 실제로는 초등학교 때부터 99.9% ‘청군 vs 백군’ 맞대결 구도지만요. 팀을 이렇게 나누는 이유는 ‘오방색(五方色)’ 때문입니다. 네, 박근혜 전 대통령 때문에 유명해진 낱말 그 오방색 맞습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오방색을 “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색”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다음 “동쪽은 청색, 서쪽은 흰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 가운데는 황색”이라고 설명이 이어집니다. 일단 이 그림을 보면 이해가 가시죠? 그런데 사실 이 그림은 원래 뒤집어 그려야 맞습니다. 동양에서는 보통 남쪽이 정방향을 뜻하니까요. 그러면 한번 그림을 뒤집어 보겠습니다. 이러면 왼쪽(좌측)에 동쪽(청색)이, 오른쪽(우측)에 서쪽(백색)이 오게 됩니다. 여기서 나온 그 유명한 표현이 바로 ‘좌청룡 우백호’입니다. 원래 이 표현은 남주작, 북현무로 이어지는데, 주는 ‘붉을 주(朱)’, 현은 ‘검을 현(玄)’을 쓰기 때문에 오방색과 뜻이 통합니다. 이런 구분이 있기에 예전에 차전놀이를 할 때도 팀을 동부, 서부로 나눴습니다. 색깔도 당연히 청색, 백색을 따랐습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아래 사진을 보시면 두 팀이 서로 머리끈 색깔이 청색과 백색인 걸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 전통이 이어져 운동회에서도 팀을 나눌 때 다른 색이 아니라 ‘청군 vs 백군’이 된 겁니다. 그러니 학교 선생님 여러분, 팀을 배치할 때 청군 백군을 엉뚱한 방향에 두시면 아니 됩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0-25
    • 좋아요
    • 코멘트
  • [데이터 비키니] ‘탈 원전’ 가능할까…원전 발전량 1위 프랑스, 한국은?

    정부는 현재 24기인 원자력발전소를 2038년까지 14기로 줄이는 ‘탈 원전 로드맵’을 확정해 24일 발표했습니다. 원전 10기가 줄어들면 발전량도 줄어 들 테고, 그러면 이렇게 부족한 전기를 다른 원료로부터 만들어야 할 터. 이게 가능한지 알아보려면 먼저 현재 한국이 원자력으로 어느 정도 전기를 생산하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겁니다.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따르면 2016년 원자력발전소를 운영하고 있는 나라는 총 31개국입니다. 이들 나라는 (동)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북미에 주로 분포하고 있습니다. 아래 그림처럼 말입니다.이 31개국 가운데 전체 발전량 중 원자력 발전량이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높은 국가는 프랑스입니다. 프랑스는 전체 전기 생산량 중 4분의 3에 약간 못 미치는 비율(72.3%)을 원자력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슬로바키아(54.1%), 우크라이나(52.3%), 벨기에(51.7%)가 전체 전기 생산량 중 과반을 원자력 에너지로 만들고 있습니다. 한국은 30.3%로 12위입니다.2011년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고를 겪은 일본은 전체 발전량 중 2.2%만 원자력에 의존하고 있죠.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를 경험한 우크라이나는 절반 이상을 원자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도 재미있는 부분입니다.그런데 나라마다 총 전기 생산량이 다르기 때문에 이 비율을 ‘절대 숫자’로 바꾸면 순위도 달라집니다. 이러면 한국은 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원자력 발전량이 많은 나라가 됩니다.제일 눈에 띄는 나라는 역시 미국. 31개 나라 중 유일하게 세 자리 수 원자로(100개)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답게 원자력 발전량도 압도적입니다. 그밖에 눈에 띄는 나라가 있다면 역시 독일이죠. 독일은 2011년 탈 원전을 선언한 뒤 원전 8곳이 가동을 멈추었지만 여전히 전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원자력 발전량이 많은 나라입니다.그렇다고 독일이 소위 신 재생에너지로 만드는 전기가 적은 것도 아닙니다. 세계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독일은 2015년 전체 전기 생산량 중 16.6%를 풍력(8.0%), 바이오연료(5.4%), 태양열(3.2%)로 만들었습니다. 지난해 원전 비율(13.1%)보다 더 많은 양입니다. 탈 원전이 아주 무모한 계획만은 아닌 겁니다.이번에도 비율을 절대 숫자로 바꾸면 2015년 독일이 신 재생에너지로 생산한 전기는 총 16만2487GWh(기가와트/시)입니다. 지난해 한국 원자력 발전량(15만42307 GWH)보다 더 많습니다. 그렇다고 한국이 무조건 독일을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다른 건 차치하고 풍력과 태양열은 국토 면적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독일(35만7114㎢)은 한국(10만339㎢)보다 3.6배 가까이 큰 나라입니다.여기에 탈(脫)석탄까지 변수로 넣으면 계산은 더욱 복잡해집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 과정을 통해 탈 원전, 탈 석탄, 신 재생에너지 확대의 에너지 전환 정책에 대한 국민의 공감대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게 의미 있는 성과”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2015년 IEA 자료를 보면 한국은 전체 발전량 중 42.8%를 석탄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원자력 비율(29.8%)까지 합치면 전체 전기 중 72.6%가 석탄과 원자력에서 나왔던 겁니다. 반면 소위 신재생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1.3%밖에 되지 않죠.물론 정부는 2038년까지 유예기간을 뒀습니다. 또 ‘장기적으로는’ 원전을 대체할 발전 방식을 찾는 게 맞다는 데도 동의하는 분들이 적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도, 그래도 말입니다. 정말 21년이라는 시간이 이 비율을 뒤집기에 충분한지 궁금한 것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아, 참고로 독일은 전체 전기 중 44.4%를 석탄으로 만들고 있습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0-25
    • 좋아요
    • 코멘트
  • [백 두 더 동아/10월 25일]‘김응룡 시구’에 ‘김인식 맞불’이 필요한 이유

    10월 25일은 프로야구 해태(현 KIA)에 각별한 날이다. 그저 올해 이날 후신인 KIA가 한국시리즈 1차전을 치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팀이 해태라는 이름으로 마지막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른 날이 바로 1997년 10월 25일이다.이 해만 그랬던 건 아니다. 해태가 프로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2연패에 성공한 날도 1987년 10월 25일이었다.여기서 끝이 아니다. 1986년에도 해태가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날은 10월 25일이었다.이렇게 10월 25일의 주인공은 해태였다. 당시 해태 감독석에 앉아 있던 건 김응용 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회장이었다. KIA에서 올해 한국시리즈 1차전 시구자로 김 회장을 선택한 게 KIA 팬 관점에서는 ‘참 잘했어요’인 이유다. 그러면 사흘 뒤(28일) 잠실구장에서 열리는 3차전 때 두산은 누구를 시구자로 초대하면 좋을까. 건강만 허락한다면 김인식 현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특보가 제격이다. 두산은 2001년 10월 28일 삼성을 꺾고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당시 두산 감독이 바로 김 특보였고, 삼성 지휘봉을 잡고 있던 게 바로 김 회장이었다. 김 회장을 한국시리즈에서 무릎 꿇게 만든 건 이해 김 특보가 유일하다.그런 인연 속에 과연 올해 KIA와 두산의 한국시리즈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증이 커져만 간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0-24
    • 좋아요
    • 코멘트
  • [데이터 비키니]체르노빌 사람들, 왜 “그래도 원전 필요하다” 할까?

    “에타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사고 25주년을 맞은 2011년 우크라이나를 찾았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입니다. 저 말 원래 뜻은 그냥 ‘여기는 우크라이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은 “우크라이나는 원래 문제가 많은 곳”이라는 의미로 저 말을 썼습니다. 처음 이 말을 들은 건 도착 이튿날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 숙소로 정한 호텔에서 저녁밥을 먹는데 전기가 나갔습니다. 그 뒤로 나흘 동안 이 식당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취재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면 초를 켜고 밥을 먹었죠. 그러자 한국인 식당 주인이 “체르노빌 원전에서 전기 생산이 중단된 뒤 잠깐씩 전기가 끊어질 때가 있는데 이번에는 오래 간다”며 저 표현을 알려줬습니다. ●우크라이나 전기 54%, 원자력 발전으로 충당 이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더 나빠졌을지 모릅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발전량이 더 줄어들거든요. 2011년에는 전체 발전량이 19만4337GWh(기가와트시)였는데 가장 최신 자료인 2015년에는 16만3682GWh로 19.1%가 줄었습니다. 현대 사회에 전기가 없으면 살기 힘든 건 어디나 마찬가지. 우크라이나 사람들도 해법을 찾으려 했겠죠? 네, 그래서 선택한 수단이 바로 ‘원자력’이었습니다. 네, 제대로 읽으신 거 맞습니다. 우크라이나는 2015년 전체 발전량 중 53.5%(8만7627GWh)를 원자력 발전으로 만들었습니다. IEA 홈페이지에 남아 있는 가장 옛날 자료(1990년 25.5%)와 비교하면 2배 넘게 올라간 비율이죠. 참고로 2011년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고를 경험한 일본의 지난해 원자력 발전 비중은 2.2%입니다. 이렇게 변했다는 건 원자력 발전량 자체도 늘었다는 뜻이겠죠? 물론 발전량 전체가 줄어든 걸 감당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1990년과 2000년 사이에 원자력 발전량 자체도 15% 늘었습니다. 사실 체르노빌 원전 4호기는 1986년 폭발했지만 1~3호기에서 완전히 발전을 멈춘 건 2000년이었습니다. 네, 인류 최악의 원전 사고를 경험한 그 발전소에서 14년 동안 더 전기를 만들었던 겁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현재도 원전 4곳에서 원자로 15기를 통해 전기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체르노빌 사고가 있기 전에 지은 거라 어쩔 수 없이 쓰고 있는 걸까요? 아닙니다. 우크라이나는 2000년대 들어 원자로 2기를 추가했습니다. 흐멜니츠키 발전소는 현재 원자로 2기를 추가 건설 중에 있죠. 건설 기간을 계산에서 빼면 원자로 15기 중 60%(9)가 체르노빌 사고 이후에 발전을 시작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또 국토 중앙에 위치한 치히린에 새 원자력 발전소를 새로 짓는 카드도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체르노빌 사람들 “그래도 원전 필요하다.” 이런 정책이 체르노빌 피해자들에게 큰 상처가 되고 있을까요?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원자력이 없으면 전기가 없다는 뜻”이라는 걸 이들도 받아들이고 있으니까요.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이 발전소 직원용으로 지은 계획도시 프리퍄티에 살던 신카렌코 한나 씨. 그는 그때까지 줄곧 국립 원자력병원으로 치료를 받으러 다녔습니다. 한나 씨는 “사람들은 25년이 지난 아직도 아픈 곳이 있냐고 묻는데 거꾸로 아프지 않은 곳이 있냐고 물었으면 좋겠다”면서도 “전기가 없으면 지금 나도 치료를 받고 있지 못할 거다. 원전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사고 당시 현장을 수습하러 발전소에 들어갔던 재향 군인들(위 사진)도 한 목소리였습니다. 한 달 동안 헬기를 타고 냉각 작업을 벌였다는 나이도노프 볼리디미르 씨는 “한 과학자가 엉뚱한 실험을 하려다 너무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이 사고는 원전 자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실수였다”고 말하기도 했죠.젊은 친구들 생각도 비슷했습니다. 국립 체르노빌 박물관은 체르노빌 사태 수습에 썼던 탱크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 탱크 위에 올라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던 올가 군(위 사진 가운데) 역시 “이 박물관은 똑같은 실수를 하지 말라고 경고를 주는 곳이지 원전을 포기하라고 만든 건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에너지 믹스’가 중요하다 취재한 지 6년도 더 지난 수첩을 꺼내 이 글을 쓰면서 “아몰랑, 원전은 꼭 필요해”라고 말하려는 건 절대 아닙니다. 저 역시 ‘장기적으로는’ 원전이 필요 없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대신 탈원전에 앞서 발전 연료를 다양하게 갖추는 ‘에너지 믹스’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IEA 홈페이지에 올라온 가장 최신 시점인 2015년 기준으로 우크라이나가 실제 발전에 사용한 연료별 비율은 아래 그림과 같습니다. 원자력과 석탄이 전체 발전에서 87.8%를 차지하고 있죠. 풍력(0.7%)이나 태양열(0.3%), 바이오연료(0.1%) 같은 소위 신재생에너지는 보기 힘든 수준. 볼로디미리 흐로이스만 우크라이나 총리(39)도 최근 신 재생에너지 분야 투자를 약속했지만 당장 원자력 의존도를 크게 줄이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면 탈원전을 선언한 2011년 독일은 어떤 비율로 전기를 생산하고 있었을까요? 이번에도 IEA 홈페이지 자료를 토대로 그린 자료입니다. 풍력(8.0%), 바이오연료(5.4%), 태양열(3.2%)만 더해도 16.6%로 원자력(17.6%)과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준비된’ 상태에서 탈원전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겁니다. 2015년이 되면 독일에서는 이 세 가지가 전체 전력 중 25.1%를 생산하게 됩니다. 독일은 이런 변화를 바탕으로 전기 ‘순수출국’이 되기도 했으니 탈핵이 자리잡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 이제 한국을 볼 차례. 역시 IEA 홈페이지 자료 기준입니다. 작아서 잘 보이지 않으실 테니 태양열(0.7%), 바이오연료(0.4%), 풍력(0.2%)입니다. 쓰레기를 태워서 얻는 전기와 민물과 썰물이 만드는 힘을 뜻하는 조력(潮力)으로 만드는 전기도 각 0.1%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탈원전을 선택하는 건 시기상조 아닐까요? 이런 사정을 잘 아셨을 테니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시민참여단도 “진행 중인 원전 건설을 중단하는 급격한 탈원전은 안 된다. 우선 원전 안전성을 높이고 신재생에너지 기술 개발에 힘쓰자. 그 뒤에 차분히 탈원전을 논의해도 늦지 않다”고 결론을 내리셨을 겁니다. 탈원전에도 확실히 준비가 필요합니다.● 석기시대는 왜 끝났을까 “석기시대는 돌멩이가 부족해서 끝난 게 아니다.” 셰이크 아흐메드 자키 야마니 전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은 “석유가 부족해서 석유시대가 끝나진 않을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학 기술 발전이 석기시대를 끝냈듯 석유도 마찬가지 운명을 맞이할 거라는 뜻이죠. 전기 자동차에 이어 전기 비행기 연구가 활발한 데서 알 수 있듯 이미 석유를 전기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전기를 만드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은 원자력입니다. 그게 어떤 기술이나 변화일지 모르지만 저는 “원자력이 위험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원자력 시대도 막을 내릴 것으로 기대합니다. 언젠가 원자력 발전을 비효율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과학 기술이 등장할지도 모르니까요. 아니, 꼭 그런 기술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동아시아는 정말 원자력발전소가 빽빽하게 들어선 지역이라 위험하다면 정말 위험하거든요. 한국에서만 원전이 사라진다고 안전을 보장받기 힘든 이유도 이 그림에 나타납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0-24
    • 좋아요
    • 코멘트
  • [데이터 비키니]‘메이드 인 독일’ 100점…한국-중국은 몇 점?

    얼마 전 중국에서 만든 폐쇄회로(CC)TV 카메라를 하나 샀습니다. 놀랐습니다. 1만5000원도 안 되는 제품이었는데 (제가 필요한 기능은) 안 되는 게 없더군요. 그냥 ‘싼 맛에 산다’고 생각했던 게 부끄러울 정도였습니다.그래도 (아직) 저만 그런 건 아닐 겁니다. 인류가 역사상 가장 많이 사용한 영어 표현은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일 테지만, 중국제라고 하면 ‘가격은 싸지만 품질은 떨어진다’는 이미지가 남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면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는 어떨까요? 이제는 한국 제품을 무시하는 사람이 없을까요? 얼마 전 한 일본 사이트에는 ‘삼성과 화웨이(華爲)를 인정하지 않는 녀석이 있을 때 일본이 망해가고 있다고 느낀다’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삼성을 무시하는 건 물론 이 중국 회사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겁니다.어쩐지 분하지만 일본제, 아니 좀더 우리가 흔히 썼던 표현으로는 ‘일제(日製)’에서는 여전히 첨단적인 느낌이 나고, 그래서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것도 분명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범위를 전 세계적으로 살펴보면 어떤 나라 제품이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있을까요? 시장 조사 업체 ‘스태티스타(statista)’에서 이 질문 해답 찾기에 나섰습니다. 스태티스타는 전 세계 42개국 4만3034명을 대상으로 나라별 △제품 품질 △가격 대비 성능(흔히 말하는 가성비) △독창성 △디자인 △기술 첨단도 등을 설문조사해 ‘메이드 인 ○○○ 파워랭킹(Made-In-Country-Index)’을 내놓았습니다. 스태티스타는 “이 42개국 사람들이 전 세계 인구 중 90%를 차지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결과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나라는 독일이었습니다. 독일을 100점으로 둘 때 일본은 81점(8위)을 기록했습니다. 한국은 56점으로 18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중국은 28점으로 30위. 어떻습니까? 평소에 여러분이 각 나라 제품이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비슷하게 나왔나요? 재미있는 건 유럽 국가 중에서 독일과 스위스를 빼고는 모두 유럽연합(EU)보다 파워랭킹이 낮다는 것. (스위스는 EU 회원국은 아닙니다.) 스태티스타는 “‘메이드 인 EU’는 제품 안정성 측면에서 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며 “EU 소속 국가보다 남미 등 다른 나라에서 더 좋은 평가를 받는 것도 특징”이라고 분석했습니다.스태티스타는 각 나라 사람들이 어떤 나라 제품을 1위로 꼽았는지도 공개했습니다. 한국인이 1위로 꼽은 나라는 독일이었습니다. 일본인은 일본을 꼽았고, 중국인은 중국을 꼽았습니다. 일본을 1위로 꼽은 나라는 7개국으로 독일(13개국), 미국(8개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았습니다. 중국을 1위로 꼽은 나라는 물론(?) 중국뿐이었습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0-23
    • 좋아요
    • 코멘트
  • [백 투 더 동아/10월 23일]1996년 백범 암살범 안두희 씨 피살

    ‘가장 존경하는 독립 운동가는?’ 이렇게 묻는 설문에서 1위를 하지 않으면 오히려 뉴스가 되는 인물이 바로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이다. 그랬으니 백범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 씨(1917~96·사진 왼쪽) 목숨을 노리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게 당연한 일. 1996년 오늘(10월 23일) 버스 기사 박기서 씨(당시 47·사진 오른쪽)가 마침내 그 뜻을 이루고야 말았다. ‘거사’를 계획하면서 박 씨가 선택한 무기는 나무 몽둥이(홍두깨)였다. 그는 시장에서 길이가 40㎝ 정도 되는 홍두깨를 사서 매직으로 ‘정의봉’이라고 쓴 다음 안 씨 집에 쳐들어가 그를 때려죽였다. 평소 백범 선생 책을 열심히 읽었다는 박 씨는 경찰에 자수한 뒤 “이 하늘 아래에서 (안 씨와)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안 씨가 (백범 선생 암살 배후가 누구였는지) 진실을 밝히지 않아 분개를 느껴 범행했다”고 말했다. 현역 군인 신분이던 안 씨가 백범 선생을 저격한 건 1949년 6월 26일. 당시 이승만 정권에서는 안 씨 단독범행이라고 발표했지만 그때부터 배후가 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안 씨는 1992년 4월 13일자 동아일보를 통해 김창룡 당시 특무대장(1920~56)의 사주를 받아 백범 선생을 암살했다고 증언했지만 이후 몇 차례 말을 바꾸면서 신빙성에 물음표가 따라 붙었다.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말 바꾸기에 분개한 박 씨가 안 씨 목숨을 빼앗으면서 정말 백범 선생 암살에 배후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누구였는지는 영영 역사 속에 묻히게 됐다. 물론 이미 시한부 선고를 받았던 안 씨가 끝내 진실을 밝히고 세상을 떠났을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사건으로 박 씨는 대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 받았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 시절인 1998년 3·1절 특사로 수감 1년 5개월 만에 출소했다. 박 씨는 이후에도 친일 성향 평론가 김완섭 씨(54) 구타 사건 등으로 언론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0-22
    • 좋아요
    • 코멘트
  • [황규인의 잡학사전]제왕절개에서 제왕은 정말 카이사르(시저)?

    지난달 제왕절개로 쌍둥이를 얻었습니다. (축하 댓글 미리 감사드립니다.) 제왕절개를 두 부분으로 나누면 ‘제왕(帝王)’과 ‘절개(切開)’가 됩니다. 절개라는 표현을 쓰는 건 산모 배를 가르는 수술을 하기 때문일 터. 그러면 여기 등장하는 제왕은 도대체 누구일까요?영어 표현에 힌트가 들어 있습니다. 제왕절개를 영어로는 ‘Caesarean(또는 Cesarean) Section’이라고 부릅니다. 이게 왜 힌트냐고요?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00~기원전 44) 그러니까 영어명 줄리어스 시저의 성(姓)을 알파벳으로 쓰면 ‘Caesar’거든요. 그저 우연이 아닙니다. ‘영어사전의 영어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옥스퍼드 사전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 방법으로 태어났다는 이야기에서 이 표현이 유래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그러면 제왕절개에서 제왕은 정말 카이사르인 걸까요? 아니니까 이 글을 쓰고 있겠죠?일단 카이사르가 제왕절개로 태어났다는 근거가 빈약합니다. 카이사르가 제왕절개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근거로 삼는 건 10세기에 세상에 나온 ‘수다(The Suda)’라는 백과사전입니다. 카이사르가 세상에 나온 지 1000년이 지난 다음 나온 이 책은 어머니가 임신 9개월째 숨졌지만 이 수술법 덕분에 카이사르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이 책은 라틴어로 ‘자르다’는 동사가 ‘caedere’였기 때문에 카이사르가 이런 이름을 얻게 됐다는 이야기도 소개하고 있습니다.심지어 많은 영웅이 알을 깨고 나오듯 카이사르가 죽어가는 어머니 배를 가르고 나왔다고 전하는 버전이 있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신화적 상상력이 너무 뛰어났다 스튜핏’입니다.일단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 코타(기원전 120~기원전 54)는 스무 살에 이 막내아들을 낳고도 46년을 더 살았습니다. 이게 중요한 사실인 이유는 예전에는 제왕절개를 하면 엄마는 죽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어차피 엄마는 죽을 테니 아이라도 살려보자’고 마지막 수단으로 선택하는 게 제왕절개였습니다.왜 엄마는 죽었을까요? 다른 모든 걸 떠나 당시 사람들은 지금처럼 마취하는 법을 몰랐습니다. 과학 시간에 배우는 대표적 마취제 ‘클로로포름’이 세상에 나온 게 1847년입니다. 흔히 돼지를 거세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던 스위스 사람 자코브 누페르가 1500년경 처음으로 아내와 아이를 모두 살리는 제왕절개에 성공했다고 하지만, 1881년만 해도 제왕절개를 시도한 산모 중 85%(영국 기준)가 숨졌습니다. 어떤 백과사전에는 카이사르가 제왕절개로 태어난 첫 번째 사람이라고 돼 있기도 합니다. 당연히 사실과 거리가 있습니다. 최소한 기원전 3세기에는 제왕절개로 사람이 태어난 기록이 있거든요. 카이사르 이전에도 사람들이 임신부 배를 가르면 아이는 살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게 확실합니다. 각종 신화에 제왕절개 형태로 태어난 신(神)이 등장한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게다가 카이사르는 이름이 아니라 성(정확히는 가문명·cognomen)입니다. 카이사르의 아버지 이름 역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3세)’였습니다. 할아버지 이름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2세)’입니다. 이렇게 가문명을 물려받았는데 갑자기 제왕절개 때문에 카이사르가 카이사르가 됐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카이사르 조상 중 누군가 이런 방식으로 태어났을 수는 있지만 그게 우리가 아는 그 카이사르는 아닌 겁니다.그러면 왜 제왕절개를 뜻하는 영어 낱말에 카이사르가 들어가게 된 걸까요? 위에서 보신 것처럼 라틴어로 ‘자르다’는 동사가 ‘caedere’였기 때문일 확률이 높습니다. 누마 폼필리우스 왕(기원전 753년~기원전 673년)이 통치하던 시절 로마는 이미 ‘렉스 카에사레아(Lex Caesarea)’라는 법령을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법령은 임신부가 숨지면 아이를 배속에서 꺼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법령을 만든 건 당시 사람들은 엄마와 아이가 땅에 같이 묻히는 걸 불경스럽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간혹 카이사르가 이 법을 처음 시행해 제왕절개를 제왕절개라고 부른다는 의견도 보이는데 이 역시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종합하자면 그냥 ‘(어머니 배를) 가른다’는 뜻으로 이 수술에 ‘Caesarea’를 썼는데 하필 카이사르가 제왕의 대명사다 보니까 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누군가 착각했을 개연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아마도 한국에 이 낱말을 전했을 일본에서도 ‘테이오우셋카이(帝王切開·제왕절개)’라고 쓰고, 독일어로도 ‘카이저’가 들어간 ‘카이저슈니트(Kaiserschnitt)“가 제왕절개를 뜻합니다. (카이저 자체가 카이사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참고로 ’서울 통계표‘에 따르면 지난해 신생아 중 41.5%가 제왕절개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는 서울시에서 자료를 공개하기 시작한 2007년(36.0%)과 비교하면 5.1%포인트 늘어난 숫자입니다.아, 마지막 보너스. 시저 샐러드(Caesar Salad)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시저 카르디니(1896~1956)가 요리법을 개발해 이런 이름이 붙었을 뿐 카이사르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0-19
    • 좋아요
    • 코멘트
  • [백 투 더 동아/10월 18일]‘마니또 놀이’ 한국에 처음 소개한 사람은 누구?

    ‘마니또 놀이’는 이제 직접 해본 적이 없는 사람도 대부분 어떻게 하는지는 알고 있는 ‘국민 게임’이 됐다. 하지만 1985년만 해도 낯선 놀이였다. 김순덕 동아일보 기자(현 논설주간)는 그해 오늘(10월 18일)자 신문에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 늘 관심을 두고 편지나 선물을 보내면서 격려하는 ‘마니또’ 놀이가 최근 여학생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다”며 이 놀이를 소개했다. 1920년 창간한 동아일보에 ‘마니또’라는 세 글자가 등장한 건 이 기사가 처음이었다. 이 기사는 한국 언론 역사상 처음으로 마니또 놀이를 소개한 기사일 개연성이 높다. 한국언론진흥재단 기사통합검색(KINDS) 서비스에서 찾아보면 다른 신문에는 동아일보보다 2년 늦은 1987년이 되어서야 이 낱말이 등장한다. 단, KINDS에서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기사는 찾을 수 없다. 동아일보를 제외한 두 회사 인터넷 홈페이지 검색 결과 업체명을 제외하면 2000년 이후에야 마니또라는 낱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럼 이 마니또는 무슨 뜻일까. 당시 동아일보는 “‘마니또’란 스페인어로 ‘애인’이라는 뜻으로 학생들 사이에는 ‘애인 같이 상대방을 생각하고 아껴주는 친구’를 의미한다”고 풀이했다. 그런데 스페인어로 애인을 뜻하는 낱말이라면 노비오(novio·남자친구), 노비아(novia·여자친구) 등을 먼저 떠올리는 게 보통이다. 한국말로 ‘자기야’처럼 부를 때는 ‘카리뇨(cari¤o)’가 일반적이다.그렇다고 저 문장이 사실과 다른 건 아니다. 은어, 속어, 인터넷 유행어 등을 풀이하는 서비스 ‘어반 딕셔너리(urbandictionary.com)’에 따르면 마니또(manito)에는 ‘나를 배신하지 않을 친구’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스피킹라티노닷컴(speakinglatino.com)이라는 사이트에서도 니카라과, 도미니카공화국, 멕시코에서 친구를 뜻하는 속어(slang)로 마니또를 쓴다고 소개하고 있다. 누가 어떻게 이렇게 널리 쓰이지 않는 낱말을 알게 돼 한국에 들여왔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세상 아주 없는 말을 지어내지는 않은 셈이다.또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이 기사가 1985년에 나온 덕에 마니또를 마니또로 쓸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듬해(1986년) 국립국어원에서 제정한 외래어 표기법은 “파열음 표기에는 된소리를 쓰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만약 이 말이 요즘 등장했다면 ‘마니토’라고 써야 했을 확률이 높다. 이탈리아에서 건너 온 아이스크림을 ‘젤라토’라고 써야 옳은 것처럼 말이다. 이 표기법에는 “이미 굳어진 외래어는 관용을 존중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기 때문에 일단 마니또를 마니또로 써도 무방하다. 그런데 왜 하필 스페인어였을까. 순전히 추측하건대 어쩌면 스페인어를 쓰는 볼리비아에서 건너 와 당시 인기를 끌던 가수 임병수 씨 영향도 있지 않았을까. 그저 ‘응답하라 1988’에서 ‘아이스크림 사랑’에 들어 있는 스페인어 가사를 유창하게 따라하던 성덕선(이혜리 분), 류동룡 때문에 생긴 착각일까. 물론 이 기사는 ‘아이스크림 사랑’이란 노래를 들으며 썼다. 이 노래에서도 마니또가 아니라 카리뇨를 부른다. “카리뇨 미오, 소모스 도스, 이 투, 이 요, 엘 파하로 이 라 플로르, 이 투, 이 요, 란사모스 엘 아모르, 이 투, 이 요, 디렉토 알 코라손, 알 코라손, 카리뇨 미오, 소모스 도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0-17
    • 좋아요
    • 코멘트
  • [황규인의 잡학사전] TV 화면 조정 시간에 뜨는 무지개는 뭘까

    “안녕하세요. 잡학사전에 궁금한 게 생겨서 질문드립니다. TV 화면 조정시간은 뭐 하는 시간인가요? 그리고 그때 뜨는 무지개 색 화면은 왜 그렇게 생긴 건가요? 그 조정시간마저 끝나면 나오는 ‘지지직’하는 소리랑 회색 점들이 튀는 그 화면도 궁금합니다.” - 경기 파주시 출신 S 씨 질문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모른다는 것마저 몰랐다”는 걸 알아가는 재미를 추구하는 이 꼭지에 참 잘 어울리는 질문입니다. (독자 여러분, ‘이게 궁금한 것 같기도 한데 직접 알아보기는 귀찮다’ 싶은 내용이 있으시면 언제든 kini@donga.com으로 e메일을 주시거나 페이스북 fb.com/bigkini를 찾아주시면 성심껏 취재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TV 화면 조정 시간에는 당연히 TV 화면을 조정했다 TV 화면 조정시간이 존재하는 건 여전히 많은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저장을 뜻하는 아이콘으로 플로피디스크 모양을 쓰는 것과 비슷한 이유입니다. 예전에는 정말 플로피디스크를 써서 자료를 저장했던 것처럼 옛날에는 정말 TV 화면을 조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진설명)어린이 여러분, 정말입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흔히 ‘디스켓’이라고 부르던 플로피디스크에 컴퓨터 데이터를 담는 일이 흔했습니다. 왼쪽부터 7인치, 5.25인치, 3.5인치 플로피디스크. 그 전에는 컴퓨터에서 자료를 저장할 때 카세트테이프도 썼는데 여러분은 카세트테이프도 뭔지 모르실 테니 패스. 잠깐 1981년 1월 7일자 동아일보에서 소개한 ‘올바른 컬러TV 시청법’ 기사를 보실까요? “(TV에서) 컬러가 나오지 않고 흑백으로 나올 때가 있는데 이런 때에는 수상기에 고장이 난 경우는 드물고 조정이 안 된 경우가 많다. … 컬러는 빨간색과 초록색 청색 등 세 가지 색깔로 배합돼서 나오는데 이것 역시 안내서나 수상기에 표시된 것을 보고 좌우로 적당히 돌려서 어울리는 색의 배합을 찾아야 한다.” 여기서 비밀이 하나 더 풀립니다. TV 화면이 빨강과 초록, 파랑을 기준으로 색을 표시한다는 사실입니다. 미술 시간에 공부를 열심히 하신 분은 기억하실 텐데요, 이 세 가지 색깔이 바로 ‘빛의 삼원색’입니다. 이 세 가지 색을 영어 머리글자를 따서 흔히 ‘RGB(Red, Green, Blue) 컬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RGB의 비밀 여기서 원색(原色)은 이 색깔을 비율을 달리해 섞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을 만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 색깔을 똑같은 비율로 섞으면 아래 그림처럼 나옵니다. 이 색깔 어디서 많이 보지 않으셨습니까? 네, 바로 TV 화면 조정 시간에 보던 그 무지개색이 바로 이 일곱 가지 색입니다. 이를 ‘테스트 패턴’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화면 조정 때 나오는 무지개 색하고 이 일곱 가지 색깔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건 TV 화면 조정 때는 보통 밝기(intensity)를 75%로 내보내기 때문입니다. 색깔 순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맨 왼쪽부터 번갈아서 가면서 파랑이 한 번은 들어갔다가 한 번은 빠집니다. 빨강은 맨 왼쪽부터 1, 2번에는 들어갔다가 3, 4번에는 빠지고 5, 6번에 들어갔다가 다시 7번에는 빠집니다. 녹색은 왼쪽 4개에는 들어가고 오른쪽 3개에서는 빠집니다. 이렇게 순서를 정한 건 이 세 가지 색 중에 하나만 빠져도 다른 색을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빨강과 녹색을 제아무리 섞어도 파랑, 시안, 하양, 마젠타는 만들 수 없습니다. 광원(光源) 단위 면적당 밝기를 나타내는 휘도(輝度·luminance)에 녹색이 끼치는 영향이 제일 크기 때문에 녹색을 제일 먼저 조정하고, 그다음 빨강 마지막으로 파랑을 조정하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줄은 ‘색 조화(color balance)’를 조절하는 구실을 합니다. 여기 등장하는 색깔은 모두 파랑이 없으면 만들 수 없는 색깔입니다. 만약 TV 수신기가 파랑을 표현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면 첫 줄과 두 번째 줄 사이에 구분이 사라지게 됩니다. 마지막 줄은 휘도 범위 조절용입니다. 밝기 대비가 잘 되는지 확인하는 영역인 것. 전문가가 아니면 정확하게 화면을 조정하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이 때문에 예전에는 이 줄에 있는 하얀색이 최대한 하얗게 나오도록 조절하라고 조언하는 전문가가 많았습니다.●그 동그라미는 왜? 그런데 테스트 패턴에는 저렇게 무지개 색으로만 된 것만 있는 건 아닙니다. 아래 그림처럼 한가운데 동그라미가 자리 잡고 있는 화면도 있었습니다. 이런 디자인은 그냥 제조사에서 ‘만들기 나름’입니다. 이렇게 도형을 넣으면 화면을 좀더 평면에 가깝게 조정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이건 무슨 소리일까요? 예전에 우리가 ‘브라운관(음극선관·CRT)’이라고 부르던 TV나 컴퓨터 모니터는 화면이 평면이 아니라 가운데가 볼록하게 튀어나온 모양이었습니다. 이런 화면에서는 ‘기하학적 왜곡(geometric distortion)’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래 그림 맨 왼쪽처럼 직선을 표현하고 싶어도 화면 조정 상태에 따라 서로 다르게 보일 수 있는 것. 그러니 화면 가운데 동그라미를 넣고 곳곳에 선을 넣어서 이 왜곡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화면을 조정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던 겁니다. 색깔뿐만 아니라 ‘모양’도 조정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아, TV 화면 조정 시간이나 그 시간이 끝나면 ‘삐~’하는 소리가 날 때가 있는데 그 소리는 ‘사인파(波)’입니다. 사인(sine)은 수학 시간에 배운 그 삼각함수 맞습니다. 소리 파형이 사인 함수 그래프 모양이라 사인파입니다. 사인파는 가장 단순하고 깔끔한 소리이기 때문에 이를 활용해 소리를 조정하라는 뜻에서 사인파를 내보내는 겁니다.●그 지지직거리는 화면은? 방송 종료 때 TV 화면 조정 시간이 끝나면 보통 아래 그림 같은 화면이 나왔습니다. 흔히 ‘백색 소음(white noise)’이라고 부르는 모습입니다. 주파수 형태가 ‘흰 빛’하고 똑같아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빛의 삼원색 모두 섞으면 흰색이 나오는 것처럼 모든 주파수 성분이 잡음을 모두 포함하고 있어서 이런 형태가 나타나는 겁니다. 이런 장면이 나오는 이유는 TV가 아무런 전파를 수신하지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TV는 원래 채널별로 각 방송국에서 내보내는 전파만 골라서 수신하도록 돼 있는데, 잡아야 할 전파가 사라졌으니 이런 화면이 보이는 겁니다. ● 그냥 처음에 조정해서 나오면 안 되나? 지금 생각해 보면 왜 이렇게 복잡하게 일을 처리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냥 처음에 TV를 설치할 때나 아니면 아예 TV를 생산할 때 한번에 끝내면 안 되는 걸까요? 여기서 주의하셔야 할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이제는 케이블TV나 인터넷(IP)TV 같은 커넥티드(connected) TV 보급률이 150%를 넘어선 상태. 하지만 원래 TV는 지금 라디오가 그런 것처럼 무선으로 전파를 직접 수신하는 형태였습니다. 집 옥상이나 지붕에 아래 사진 같은 TV 안테나를 설치하는 게 아주 일상적인 풍경이었죠. 당연히 지금처럼 TV가 항상 깨끗하게 나오던 것도 아닙니다. TV가 잘 나오지 않을 때는 지붕에 올라간 가족 한 명이 안테나를 이리 저리 돌리고, 방에 있는 가족이 ‘잘 나온다’, ‘아니다’고 알려주는 장면도 흔했습니다. 또 앞서 인용한 동아일보 기사도 “우리나라 방송국의 컬러 시스템이 통일돼 있지 않기 때문에 때에 따라서는 방송국 채널을 돌릴 때마다 조정할 필요가 생길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지금처럼 TV에 연결할 수 있는 전자장비가 흔하던 시절도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TV에 문제가 생긴다면 이 기사에 나온 그림을 TV로 보내 화면을 조절하는 것도 가능한 세상이 됐지만 당시에는 방송국에서 이런 화면을 내보내지 않으면 다른 수단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화면 조정 시간이 꼭 필요했던 겁니다. 방송국 관점에서 TV 화면 조정 시간은 중앙 방송국에서 각 송신소까지 전파를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지 시험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 시간에 서울에 있는 방송국에서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방송국 송신소와 이를 연결하는 중계소에서 기술 담담자도 조정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이제는 24시간 종일방송을 하는 방송사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별도로 화면 조정 시간이 없는 일이 흔합니다. 화면 조정 시간이 있는 경우에도 주로 ‘필러(filler)’라고 부르는 (보통 자연 환경을 촬영한) 영상을 내보내는 일이 많기 때문에 ‘테스트 패턴’은 더더욱 보기가 힘듭니다. 그러니까 이 데스트 패턴을 알고 있다는 것도 어쩌면 ‘아재 인증’으로 가는 길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시간이 가면서 같이 아재가 되는 건 피할 수 없지만 ‘설명충’은 저 혼자 되겠습니다. 그러니 궁금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kini@donga.com 또는 fb.com/bigkini 저를 찾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페이스북 친구 신청도 물론 환영합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0-16
    • 좋아요
    • 코멘트
  • [백 투 더 동아/10월 17일]박정희, 1972년 ‘10월 유신’ 발표

    1972년 오늘(10월 17일) 오후 7시.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나중에 ‘10월 유신’이라고 부르게 될 선언이었다. 그 내용은 이랬다. ①이날 오후 7시를 기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 활동의 중지 등 현행헌법의 일부 조항효력을 정지시킨다.②일부 효력이 정지된 헌법 조항의 기능은 비상 국무회의에 의해 수행되며 비상 국무회의의 기능은 현행헌법의 국무회의가 수행한다. ③비상 국무회의는 그해 12월 27일까지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 개정안을 공고하며 이를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이내에 국민투표에 부쳐 확정시킨다. ④헌법개정안이 확정되면 개정된 헌법 절차에 따라 늦어도 금년 연말 이전에 헌정을 정상화시킨다.박 전 대통령이 위헌적 요소가 다분한 이 선언을 발표하면서 명분으로 삼은 건 ‘평화통일’이었다. 그해 7월 4일 박 전 대통령과 김일성 당시 북한 내각 수상은 ‘7·4 남북 공동 성명’에서 자주, 평화, 민족적 대단결이라는 평화 통일 3대 원칙을 발표했다. 박 전 대통령은 “우리 헌법과 각종 법령 그리고 현 체제는 동서 양극체제 하의 냉전 시대에 만들어졌고 하물며 남북대화 같은 것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시기에 제정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국면에 처해서는 마땅히 이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로의 일대 유신적 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이 선언 말미에는 “만일 국민 여러분이 헌법 개정안에 찬성치 않는다면 나는 이것을 남북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국민의 의사표시로 받아들이고 조국통일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것임을 아울러 밝혀둔다”고 강조했다. 개헌 투표를 진행한 건 그해 11월 21일이었다. 이날 전체 유권자 중 91.9%가 투표에 참여했고 91.5%가 찬성표를 던졌다. 이 투표 결과가 액면가 그대로 국민 의사를 반영했다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 여지가 있다. 박 전 대통령은 10·17 특별선언 이후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에 따라 정치 집회 및 시위는 금지 됐다. 모든 언론 보도 내용은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다.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요컨대 이 투표는 개헌 반대 쪽 의견을 원천봉쇄한 가운데 진행됐던 셈이다. 새 헌법이 국민투표를 통과하면서 박 전 대통령은 국회의원 3분의 1과 모든 법관을 임명하고, 긴급조치권 및 국회해산권을 가지며, 임기 6년에 횟수 제한 없이 연임할 수 있게 됐다. 대통령 선거 방식도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선제로 바뀌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은 행정·입법·사법 3권을 모두 가진 채 종신 집권할 기틀을 마련했다.박정희 대통령은 그해 12월 23일 실시한 대통령 선거에 단독 출마해 통일주체국민회의 2357명의 100% 찬성으로 제8대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박 전 대통령은 1978년 7월 6일 실시한 제9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무효표 1표를 제외하고 2577표를 얻어 당선됐다. 하지만 임기 6년을 채우지는 못했다. 이듬해 10월 26일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유신체제도 막을 내렸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0-16
    • 좋아요
    • 코멘트
  • [백 투 더 동아/10월 14일]휴갓길 5시간 35분 단축…1975년, 영동고속도로 개통

    1975년 서울에서 강원 강릉시에 가려면 얼마나 걸렸을까. 정답은 11시간 20분이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던 ‘급행열차’를 타면 그랬다. 차로 가면 8시 30분이 걸렸다.지금은 어떨까. 13일 오후 2시 기준으로 T 내비게이션 어플리케이션은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사에서 강릉 경포대까지 2시간 55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5시간 35분이 줄어든 것이다. 이렇게 시간을 줄인 제일 큰 이유는 단연 영동고속도로 개통이었다. 신갈 분기점~강릉을 연결하는 영동고속도로는 강릉~묵호 사이에 놓였던 동해고속도로와 함께 1975년 오늘(10월 14일) 개통식을 열었다.지금도 고속도로가 완전히 문을 열기 전 취재진이 먼저 탐방기를 쓰는 게 관례. 동아일보 김정규 이재화 기자는 그해 7월 21일 마무리 공사가 진행 중이던 영동고속도로를 달린 뒤 “태백산맥 저쪽이 서울에 바짝 다가서고 있다”면서 “고속도로 주변에서는 벌써부터 많은 변화가 일고 있다”고 전했다. 두 기자가 주목한 것 중 하나는 땅값 폭등. 이들은 “횡성군 둔내면 일대의 땅값은 종전 평(3.3㎡)당 700원(밭)에서 2000원으로 3배, 평창군 도암(현 대관령) 봉평 진부 등 3개 면의 땅값도 최저 2배에서 10배까지 뛰어 올랐다”고 썼다. 당시 땅값이 오른 제일 큰 이유는 목장 건설 때문이었다. 이들은 “재벌급 8개 회사가 목장을 건립하겠다고 평창군에 알려왔다”고 전했다. 관광 시절도 땅값 상승을 부추겼다. “이밖에 쌍용그루웁(그룹)에서는 국제 규모의 용평 스키장과 호텔을 건립하고 있어 관광객을 맞을 채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기대가 큰 것은 동해안의 관광 개발이다. 아름다운 산과 맑은 바다와 호수로 널리 알려진 설악산이나 경포대 말고도 이 지역은 관광 개발 적(합)지가 곳곳에 널려있다.”맞다. 수도권 사람들에게 영동고속도로는 ‘휴가’로 가는 길목이다. 지금도 그렇다. 여름에는 동해 바다를 찾아 영동고속도로에 오르고 겨울에는 스키장이 기다리는 영동고속도로에 오른다. 지금하고 다른 것도 있다. 이때는 지금보다 건설 기술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산세가 너무 험준한” 대관령을 관통하는 터널을 뚫기는 무리였다. 그래서 대관령 구간은 구불구불 오르고 내리는 국도를 그대로 이용했다. 원래 시속 80㎞였던 제한 속도는 대관령 구간에서는 40㎞까지 줄기도 했다. 정부에서도 이런 구간에 돈을 받기는 미안했는지 둔내까지만 요금을 받았다. 지금은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2001년 대관령에 터널이 생기면서 이제는 구간단속구간을 마련할 정도가 됐다. 특정 지점에서 과속에 주의하라는 뜻으로 설치하는 ‘과속 단속 카메라’와 달리 구간단속구간은 해당 구간 전체에서 과속 우려가 있을 때 설치한다. 이제 대관령이 그만큼 운전자가 과속하고 싶은 유혹을 많이 느끼는 구간이 된 것이다.지금은 좀 낯선 풍경도 있었다. 1975년 7월 21일 동아일보는 “김영호 (당시) 횡성군수는 각 마을 청년들을 대상으로 고속도로 개통 후에 밀려들 도시의 퇴폐풍조를 막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면서 ‘우리 처지에 알맞는 풍조만 받아들이자’고 역설, 지방 청소년과 주민들의 상당한 호응을 받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내년 2월이면 평창 겨울올림픽을 찾은 전 세계인들이 이 고속도로를 달리게 된다. 이들에게 영동고속도로는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우리도 그들로부터 우리 처지에 맞는 어떤 풍조를 받아들여야 할까.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0-13
    • 좋아요
    • 코멘트
  • [백 투 더 동아/10월 13일]1990년 위기 몰린 노태우, 범죄와 전쟁 선포

    “저는 우리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동원해서 이를 소탕해나갈 것입니다.” 토요일이던 1990년 10월 13일, 노태우 당시 대통령(사진)은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새질서 새생활 실천모임’을 주재하는 자리에서 대(對) 국민 연설을 통해 이 같이 선언했다. 이제는 영화 제목으로도 유명한 ‘범죄와(의) 전쟁’은 그렇게 첫 포성을 울렸다. 사실 노 전 대통령은 1990년 6월 8일 이미 법질서 확립에 대한 비상한 결의를 표명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한 상태였다. 또 전임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도 삼청교육대 등으로 대표되는 강력한(?) 치안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아주 새삼스러운 내용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범죄와 전쟁이라는 카드를 꺼내든 건 국면 전환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국군보안사령부(현 국군기무사령부) 근무 중 탈영한 윤석양 이병(당시 24세)은 10월 4일 기자회견을 열고 “보안사에서 정치인 종교인 언론인 교수 재야인사 학생 등 1300명을 상대로 사찰을 벌이고 있다”고 폭로했다. 당시 윤 이병이 공개한 자료에는 사찰 대상자의 자택 구조, 진입 및 도주 경로, 친인척 주거지 등이 포함돼 있었다. 비상계엄 상황에서 이들을 즉시 체포할 수 있도록 미리 자료를 작성했던 것이다. 심지어 3당 합당을 통해 여당 정치인으로 변신한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대표 최고위원(제14대 대통령)도 이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이에 김 전 대통령은 “명색이 집권당 대표인 나까지 사찰 대상이라는 건 심각한 문제”라며 노태우 정권을 압박했다. 국민적 분노가 들끓은 게 당연한 일. 이를 무마하고자 노 전 대통령이 꺼낸 카드가 바로 ‘범죄와의 전쟁’이었다. 대통령 직접 지시 사항이었기 때문에 경찰은 당연히 성과를 내야했다. 그 과정에서 인권 침해 사례도 적지 않게 발생한 건 물론이다. 또 이 전쟁은 국면전환용 카드였기에 실적만큼 홍보도 중요했다. 그해 11월 15일자 동아일보는 “‘범죄와 전쟁’ 아닌 ‘홍보물과의 전쟁’”이라며 “경북도내 일선 시장·군수들은 ‘근무자세가 해이한 사람은 직위해제 시키겠다’는 김우현 지사의 경고에 따라 현수막과 입간판 등 가두 홍보물이 얼마나 설치됐는지 현장 확인을 하느라 야단”이라고 전했다. ‘범죄와의 전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이 전쟁 결과라) 전국의 폭력조직은 거의 와해되었으며 실질적으로 범죄발생 건수도 감소하기도 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 평가는 ‘2세대 조폭’에는 확실히 유효하다. 하지만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서 펴낸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3세대 조폭’은 기업 인수합병(M&A), 금융업, 건설업 등 경찰 단속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새 영토’를 구축한 상태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 부제처럼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모른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0-12
    • 좋아요
    • 코멘트
  • [백 투 더 동아/10월 11일]1990년 분단 이후 첫 남북통일축구

    “(1990년 10월) 11일 오후 3시 5분 평양 능라도 5·1 경기장. 박종환 한국팀 감독(앞줄 왼쪽)과 명동찬 북한 감독을 선두로 남북 선수단이 마주 잡은 손을 높이 치켜들고 입장, 15만 관중의 함성과 어우러져 재회의 기쁨과 통일의 염원이 가득했다. 분단 이후 처음 열린 이날 남북통일축구 1차전은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남북통일축구 1차전 소식을 전한 1990년 10월 12일자 동아일보 1면 사진과 사진 설명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일부). 물론 여기서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는 건 비유적 표현일 뿐 사실과는 다르다. 실제로는 북한이 2-1로 이겼다. 문제는 이기는 과정이었다. 양 팀은 1-1로 전·후반 90분 경기를 마쳤다. 그러나 북한 측 주심이 추가 시간에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안타깝고 어처구니없는 10초였다”고 소제목을 달고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밝은 낯으로 서로의 등을 토닥거리며 함께 통일의 한 걸음을 내디뎠다고 말하려는 순간 주심의 페널티킥 호각소리가 분위기를 깨고 말았다. 스탠드의 많은 관중과 본부 측의 북측 인사 및 선수, 한국 관계자들까지도 1-1의 무승부를 기꺼워하며 그대로 경기가 끝나기를 바라는 순간이어서 (북한 측) 장석진 주심의 페널티킥 선언은 5·1 경기장의 화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1-2로 역전된 순간 본부석의 김유순 북한체육위원회 위원장, 김형진 부위원장의 낯빛도 침통해졌다. 관중들의 호응도 크지 않아 보였다. 김형진 부위원장은 ‘무승부가 훨씬 좋은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시했고 경기장을 빠져나가던 한 평양 시민은 볼멘소리로 ‘개운치가 않다’고 했다.” 경기 결과 자체가 중요하지 않았는데 주심이 ‘과잉 충성’ 했다는 얘기였다. 선수들 역시 승부에 집착하지 않았다. 이 경기에서 전반 25분 선제골을 넣은 ‘야생마’ 김주성은 경기 직후 “화해 분위기를 고려해 내가 골을 넣은 후에는 사실상 골문을 열어줬다”고 말했다. 두 팀은 12일 뒤인 그달 23일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다시 맞붙었다. 이번에도 남한 황선홍이 선제골을 넣었다. 그래도 목표는 여전히 ‘무승부’였다. 1990년 10월 24일자 동아일보는 “한국 선수들은 (황선홍의 득점) 이후 더 이상 골을 욕심내지 않는 모습을 보였고 북한은 후반 들어 관중들의 일방적인 성원 속에 윤정수 김광민 김윤철 등이 몇 차례 결정적인 슈팅을 했으니 골로 연결되지는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결국 2차전에서 남한이 1-0으로 승리하면서 남·북한은 1승 1패로 남북통일축구 대회를 마쳤다. 당시 남·북한 축구 관계자 사이에서 이 대회를 정례화하자는 이야기가 오갔지만 다시 이 대회가 열린 건 12년이 지난 2002년이었다. 당시 한국미래연합 대표를 맡고 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02년 5월 12일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북한 축구 대표팀을 초청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김 위원장이 이를 수락하면서 부산 아시아경기 개막을 앞두고 있던 그해 9월 7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남·북 대표팀이 맞대결을 치렀다. 이 경기는 0-0 무승부. 2005년에도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평양에서 김 위원장을 만나 ‘광복 60주년 기념 축구 대표팀 맞대결’을 제안해 광복절 하루 전인 8월 14일 역시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남북통일축구대회가 열렸다. 남한의 3-0 승리. 그 후로 다시 12년이 흘렀지만 네 번째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아쉽게도 요즘 신문을 보고 있노라면 ‘남·북한 모두가 승자’인 경기를 다시 보려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 모양이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0-10
    • 좋아요
    • 코멘트
  • [백 투 더 동아/10월 9일]1983년 전두환 노린 북한 폭탄, 아웅산 묘지서 ‘쾅!’

    1983년 10월 9일은 동남아·대양주 순방을 떠난 전두환 당시 대통령(86)이 첫 방문지였던 버마(현 미얀마)에 도착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전 대통령 일행은 이날 오전 버마 수도 랑군(현 양곤)에 있는 ‘버마의 국부(國父)’ 아웅산 장군(1915~47)의 묘지를 참배할 예정이었다. 위 사진은 정부 각료들이 아웅산 묘지에서 대통령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장면이다.안타깝게도 이 사진은 이들이 이승에 남긴 마지막 사진이 됐다. 이 사진을 찍고 나서 바로 몇 초 후 북한에서 설치한 폭탄이 터졌기 때문이다. 맨 앞줄에 자리 잡은 8명 중 맨 왼쪽에 있는 이기백 당시 합동참모의장, 그리고 사진 뒤쪽 맨 왼편에 보이는 최재욱 청와대 공보 비서관 등 두 명 만 목숨을 건졌고 나머지는 모두 세상을 떠났다.북한에서 원래 노렸던 ‘타깃’은 물론 전 대통령이었다. 원래 전 대통령은 이날 10시 30분에 이 묘지에 도착할 예정이었지만 차량 정체로 도착이 늦어지면서 대통령 부부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전 전 대통령이 도착하기 전 북한 테러범들이 폭탄을 터뜨린 이유는 뭐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아웅산 묘지에 제일 먼저 도착한 이계철 당시 주 미얀마 한국 대사가 전 대통령과 비슷한 헤어스타일(?)이었던 걸 이유로 꼽는 이들이 많다. 안경까지 써 전 전 대통령과 더욱 비슷해 보이는 이 대사가 태극기가 펄럭이는 고급 승용차에서 내리자 버마 나팔수가 진혼곡(‘애국가’였다는 의견도 있다) 연주를 시작했고, 북한에선 이 나팔 소리를 테러 기점으로 잡았기 때문에 폭탄을 먼저 터뜨렸다는 것이다.함병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도착한 걸 보고 북한 공작원들이 전 대통령이 도착한 것으로 착각했다는 의견도 있다. 보통 비서실장은 대통령과 함께 움직이는데다 함 실장 역시 전 대통령과 헤어스타일(?)이 유사했기 때문이다. 이 설(說) 역시 버마 나팔수가 먼저 착각했고 북한에서 나팔 소리를 기점으로 폭탄을 터뜨린 것으로 설명한다.이 자리에서는 동아일보 사진부 소속이던 이중현 기자도 순직했다. 이 기자는 당시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취재차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에 파견 갔다 돌아온 지 한 달 만에 ‘풀(pool) 기자’로 대통령을 따라 나섰다가 변을 당했다. 동아일보는 사건 발생 사흘 후인 그달 12일자 지면을 통해 이 기자가 생전에 찍었던 사진을 간추려 소개했다. 그러면서 “폭발 마지막 순간까지 사진을 찍다 산화한 고 이 기자의 마지막 작품은 카메라가 부서져 싣지 못해 안타깝다”고 밝혔다. 이 기자는 출국 전 카메라 렌즈를 새 걸로 바꾸면서 “가장 깊이 있는 사진을 찍어 오겠다”고 주변에 말했지만 끝내 사진을 세상에 선보이지 못했다.1983년에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현재 동아일보 기자들 역시 이 기자의 얼굴을 알고 있다. 지금도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 14층 동아일보 편집국에는 다른 순직 기자 두 명과 함께 이 기자의 사진이 걸려 있어서다. 맨 위 사진 촬영 당시 앞줄에 서 있던 사람 중에서 합참의장이던 이기백 대장만 살아남은 건 그가 장교 정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육군사관학교에 전시 중인 이 옷에 붙어 있는 각종 금속제 휘장, 약장이 방탄복 구실을 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 이 사건 때 중상을 입은 이 대장을 긴급 후송한 인물이 훗날 특전사령관을 지내는 전인범 당시 중위(예비역 육군 중장)였다. 전 전 특전사령관은 올해 2월 ‘문재인 캠프’ 합류하려다 “우리 집사람이 비리가 있었다면 권총으로 쏴 죽였을 겁니다”라는 발언에 끝내 발목이 잡혔던 인물이기도 하다.심상우 의원은 국회의원으로는 유일하게 이 테러 때 목숨을 잃었다. 심 의원은 당시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자격으로 전 대통령과 동행했다. 민정당 총재가 바로 전 대통령이었다. 심 의원은 방송인 심현섭 씨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호남(광주) 출신인 심 씨가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돕는 등 보수적인 정치색을 드러냈던 게 이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0-08
    • 좋아요
    • 코멘트
  • [백 투 더 동아/10월 7일]공중에 매달린 고장난 케이블카…공포의 5시간

    “케이블카의 정지는 상징적이다. 차단된 의식의 흐름은 새로운 국면을 마련해 준다. 괄호로 묶여진 ‘어쩌면 의도’는 동일한 차원의 시간이 적용되어지지 않는 새로운 영역을 요구하는 챕터이다. 그리고 ‘오! 수정’의 전체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는 특권적인 챕터이다. 심리적 주관성이 닫히고 형이상학적인 시간의 차원이 열리게 되는 것은 정확히 케이블카가 멈추는 그 순간부터이다.”김영찬 씨는 200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가작 당선작 “수정의 이름으로 - ‘오! 수정’”에 이렇게 썼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영화적 상징일 뿐 현실에서 케이블카가 멈추는 건 참 곤혹스러운 경험이다. 1984년 10월 7일 서울 남산 케이블카를 탔던 승객 77명은 이 말을 절감할 것이다. 케이블카가 공중에서 5시간 동안 멈추는 바람에 “허기와 공포에 떨었기” 때문이다.당시 동아일보에 따르면 케이블카가 멈춘 건 이날 오후 2시 15분경이었다. 상하행선이 출발 1분 후 출발점에서 250m 지점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멈춰섰다. 처음에 케이블카 운행 업체는 정전 때문이라고 안내했지만 사실은 기계제품 고장이 문제였다.결국 회사 측은 케이블카가 멈춰서고 1시간 45분이 지난 오후 4시경부터 1인용 구명자루를 통해 탑승객을 한명씩 실어 내렸다. 이 과정에서 도르래가 기울어지면서 로프가 벗겨지는 바람에 38세 여성과 3세 남아의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다. 남산에 케이블카가 처음 다니기 시작한 건 1962년 5월 12일이었다. 개통식 소식을 전한 이튿날 동아일보에 따르면 당시 왕복 요금은 성인 기준으로 400환(40원)이었다. 당시 시내버스 요금이 5원이었으니 8배 비쌌던 것. 현재도 8500원으로 버스 요금 8배 수준이다.남산 케이블카는 개통 초기에 한번 타려면 2~3시간은 기다려야 할 만큼 인기였다. 그러다 1990년대 후반부터 내리막길을 걸었다. 다시 인기가 살아난 건 각종 연속극에 등장하면서 중국인 관광객들이 찾기 시작한 덕분. 현재까지 이 케이블카를 탄 사람은 연인원 1700만 명이 넘는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0-07
    • 좋아요
    • 코멘트
  • [황규인의 잡학사전]달은 사실 지구 주위를 돌지 않는다

    올 추석에는 ‘진짜 보름달’이 뜨지 않았다더니, 이번에는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게 아니라니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요? 사실 이 제목은 거짓말입니다. 달은 지구 주위를 도는 게 맞습니다. 아래 그림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제목을 왜 그렇게 지었냐고요? 그건 달이 지구를 도는 동안 지구도 태양 둘레를 돌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지구 관점에서 보면 달이 지구 둘레를 도는 게 맞지만, 태양 관점에서 보면 달은 지구 둘레를 돌지 않습니다.일단 ‘잡학사전의 본좌’라 할 수 있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이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볼까요?하늘색 선이 실제로 달이 지구 주위를 움직이는 경로입니다. 태양을 도는 지구에 ‘타고 있는’ 우리가 볼 때는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공전궤도 안팎으로 S라인을 그리면서 달이 따라오는 모양새입니다. 애니메이션으로 설명해 드리자면 지구가 까만 점선을 따라 움직일 때 달은 빨간 선 모양으로 움직입니다.여기서 퀴즈. 그러면 태양을 중심으로 달이 공전하는 궤도를 그리면 아래 그림 중에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까요?바로 위 애니메이션이 힌트였습니다.④가 정답입니다. 좁게 보면 S라인을 그리면서 안팎을 오가는 것 같지만 태양계로 범위를 넓혀 보면 원형에 가까운 모양새를 띄게 됩니다. 또 여러분이 이해하기 편하실 것 같아 S라인을 과장해 그리기도 했습니다. 보름 동안 실제 지구와 달이 태양 둘레를 보는 경로를 그려보면 이렇게 나타납니다.이제 또 여러분께 거짓말한 걸 사죄할 때가 됐습니다. 달이 지구하고 거의 비슷한 궤도로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게 거짓말은 아닙니다. 태양이 가만히 멈춰있는 것처럼 설명한 게 거짓말입니다.태양도 우리 은하계 중심을 기준으로 공전합니다. 자연스레 태양계에 속한 천체들도 태양을 따라 움직이겠죠? 우리는 보통 태양계를 볼 때 태양을 중심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보지만 실제 태양은 아래 그림 같은 각도로 움직입니다.그러면 태양계는 어떻게 따라 움직일까요? 아래 애니메이션이 정답입니다.태양이 돌면서 공전하는 게 아닙니다. 태양 공전 궤도(노란선)를 중심으로 카메라를 회전시키는 것처럼 만든 애니메이션입니다. 각 색깔 선은 행성별 이동경로. www.rhysy.net 캡처 멋있죠?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우리 은하는 또 대우주를 중심으로….요컨대 세상에 괜히 ‘우주적인 기적’이라는 표현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 우주적인 기적이 쌓이고 쌓여 이번 추석을 함께 보낸 그 분(들)과 만나게 된 겁니다. 그러니 혹시 추석에 보름달을 보고 소원을 빌지 못하셨다면 아래 보름달 사진을 보시면서 그 분(들) 안녕을 기원해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물론 여러분이 이 글을 읽게 되신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우주적인 인연’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소중한 인연 맺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들 평안하시고, 남은 연휴도 행복하게 보내세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혹시 이 우주적인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싶으시다면 페이스북 fb.com/bigkini에서 저를 찾아주시면 됩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0-05
    • 좋아요
    • 코멘트
  • [백 투 더 동아/10월 5일]보이스카우트, 한반도에 오다

    그 남색 유니폼은 동네 꼬마들 모두의 심장을 쿵쾅 뛰게 만들었다. 학교에 누군가 (보이) 스카우트 유니폼을 입고 오면 너나 할 것 없이 항건(스카프) 끝을 잡고 빙빙 돌리기 바빴다. ‘잼버리’라는 낯선 낱말 역시 스카우트 출신 얼굴에는 옅은 미소로 퍼진다. 인정하자. 그 시절 우리는 누구나 스카우트를 꿈꿨다.이렇게 한국 소년들 가슴에 ‘로망’으로 남은 스카우트는 언제 한반도에 들어왔을까. 정답은 1922년 오늘(10월 5일)이다.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고교) 체육 교사였던 조철호 선생(1890~1941)은 ‘조선소년척후단’을 조직하고 이날 발대식을 열었다. 동아일보에서는 그해 10월 7일자에 이 발대식 소식을 전했다.당시 동아일보는 조 선생이 “영국에서 처음 이(스카우트) 운동이 일어난 후 세계 각국에서 채용해 많은 효과를 얻었고 현재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회원이 800만 명이 이른다. 자유와 의를 존중하는 점에서는 오히려 압제적인 군대 교육보다 낫다는 평가가 있다”며 “더욱이 조선 소년 같이 나약한 소년은 크게 이런 운동을 장려해 용감하고 고상한 기풍을 기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보이스카우트를 처음 만든 건 로버트 베이든 포우엘 영국 육군 중장(1857~1941)이었다. 그는 1908년 ‘소년들을 위한 정찰법(Scouting for Boys)’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을 읽은 소년들이 자발적으로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스카우트 운동’이 벌어지게 된다.군인이 처음 이 운동을 시작한 만큼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스카우트 대원을 정말 소년 정찰병으로 활용하는 일도 있었다. 한반도에 처음 스카우트가 들어올 때 ‘척후단’이라는 썼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다 캠핑처럼 일상적인 야외 할동을 추구하는 바뀌면서 군대 색깔이 빠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아예 ‘요즘 군대는 (너무 편해서) 완전 보이스카우트야’ 같은 말을 들을 수 있는 정도가 됐다.기억력에 정말 자신 있는 스카우트 출신 독자라면 지금 한번 다음 구절을 얼마나 기억하고 계신지 확인해 보시라.나는 나의 명예를 걸고 다음의 조목을 굳게 지키겠습니다.첫째, 하느님과 나라를 위하여 나의 의무를 다하겠습니다.둘째, 항상 다른 사람을 도와주겠습니다.셋째, 스카우트의 규율을 잘 지키겠습니다.아, 물론 엄지로 새끼손가락을 잡고 나머지 세 손가락만 펴는 손 모양은 잊지 않으셨으리라 믿는다. 그럼 준비!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0-05
    • 좋아요
    • 코멘트
  • [황규인의 잡학사전]이씨 조선보다 먼저라 고조선이 아니라고?

    긴 글을 시작하기 전 먼저 세 줄 요약부터.1. 고조선은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기 전부터 고조선이었습니다.2. 음력을 양력으로 바꾸는 건 생각보다 어렵습니다.3. 우리가 단군 할아버지 얼굴을 알고 있는 데는 동아일보도 한 몫 거들었습니다.●고려 시대 책에 왜 고조선이 등장할까오늘은 개천절입니다. 개천절은 단군 할아버지가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터 잡으시고’ 고조선을 세우셨다는 날. 학창시절에 배운 것처럼 고조선은 원래 나라 이름이 조선이지만, 태조 이성계(1335~1408)가 세운 조선(1392~1910)과 구분하려고 앞에 옛 고(古)를 붙여서 고조선이라고 한다고 알고 계신다면 사실은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왜냐하면 조선 이전인 고려 시대 승려 일연(1206~1289)이 지은 ‘삼국유사’에 이미 고조선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정말입니다. 삼국유사 중 기이(紀異) 제1편 제목이 ‘고조선 왕검조선’입니다. 삼국유사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자료 중에서 단군(왕검)이 처음 등장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단군은 처음부터 조선이 아니라 고조선을 세운 셈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요? 일연이 정말 뛰어난 스님이라 자기가 세상을 떠나고 46년 뒤에 세상에 들어설 나라 이름이 조선이라는 걸 미리 예상한 걸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우리가 고조선이라고 부르는 시대는 크게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제는 많은 학자들이 ‘기자(箕子)조선은 실존하지 않았다’고 인정하지만, 기원전 194년 위만(衛滿)이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조선 정권을 장악했다는 건 정설입니다. 이렇게 나중에 위만조선이 들어섰기에 일연을 이를 단군(왕검)조선과 구분하려고 고조선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고조선은 이씨 조선보다 빨라서 고조선이 아니라 위씨 조선보다 빨라서 고조선입니다. ●개천절은 왜 ‘양력’ 10월 3일일까 아무 날짜나 골라서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정한 건 아닙니다. 함경도 지방 등에서는 음력 10월 3일에 단군 탄생일을 축하하는 ‘향산제(香山祭)’라는 제사를 올리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양력 10월 3일로 개천절 날짜를 못 박기 전에 대종교에서는 개천절을 음력으로 기념해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습니다(아래 사진). 그런데 왜 당시 정부에서는 음력을 양력으로 바꿔서 기념일로 정하지 않았을까요? 당시에는 음력을 양력으로 바꿔주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없어서 기원전 2333년 음력 10월 3일을 양력으로 바꾸기 어려웠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때도 사람들은 음력을 양력으로 바꿀 줄 알았습니다. 한글날이 10월 9일인 건 훈민정음 해례본을 펴낸 1446년 음력 9월 10일을 양력으로 바꾼 결과물입니다.문제는 과거로 갈수록 해(양력)와 달(음력)의 정확한 움직임을 계산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그런 이유로 한국천문연구원에서 제공하는 음양력 변환 서비스는 1391년까지만 계산할 수 있도록 돼 있습니다. 기원전 2333년은 이 해로부터도 3724년 전입니다. 그러면 날짜를 바꾸는 것 자체가 별 의미가 없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흔히 음력이라고 부르는 ‘시헌력’도 1644년이 되어서야 처음 쓰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게다가 개천절이 음력 10월 3일이라는 것도 100% 신뢰할 만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닌 게 사실. 그래서 당시 문교부에서는 ‘10월 3일이라는 날짜가 중요하다’고 결론짓고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삼았습니다.● 4350년 전 단군 할아버지 얼굴은 어떻게 알까이렇게 우리는 기원전 2333년 음력 10월 3일이 양력으로 언제인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단군 할아버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마음먹으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으실 터.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가장 객관적인 이유는 물론 ‘정부표준영정’ 때문입니다. 정부는 1978년 홍숙호 화백이 그린 단군 초상화를 표준영정으로 지정했습니다(아래 사진). 이 영정은 현재 서울 종로구 단군성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홍 화백도 무엇인가 보고 그렸겠죠?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전 동아일보를 보면 사람들이 단군 할아버지 얼굴을 계속 궁금해 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습니다.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동아일보는 열흘 뒤인 그달 11일부터 창간 첫 사업으로 ‘단군 영정 현상 공모’를 실시합니다. 동아일보에서는 이 영정을 그해 10월 3일 공개할 예정이었지만 그해 9월 26일 일제로부터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기에 해당 날짜에 신문을 펴내지 못했습니다. 대신 1922년 11월 21일(음력 10월 3일)자 지면에 단군 영정이 등장합니다. 이 기사는 단군 영정을 어디서 가져왔는지 밝히고 있지 않아 공모전 당선작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가져온 사진인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단, 이 영정은 국내 최고(最古) 단군 영정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부여천진전단군화상(扶餘天眞殿檀君畵像)’과 닮아 있습니다. 단군은 동아일보 창간호에도 등장합니다. 동아일보 창간 멤버였던 김동성 기자(1890~1969) 창간호 3면에 삽화(아래 그림)를 그렸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동아일보라고 쓴 띠를 두른 갓난아이가 단군유지(檀君遺趾)라는 액자를 잡으려 하고 있고 있습니다. 아, 한국 정부는 1948년 9월 25일 ‘연호에 관한 법률’을 제정함에 따라 단군기원, 즉 단기를 국가 공식 연호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1940~60년대 자료를 보다 보면 지금 우리가 쓰는 서기가 아니라 단기로 날짜를 표시한 건 그런 이유입니다. 단기를 사용하지 않게 된 건 1962년 이후입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0-03
    • 좋아요
    • 코멘트
  • [백 투 더 동아/10월 3일]독일 통일은 실수와 착각 때문?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국을 이뤄 승리한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는 패전국이던 독일 영토를 넷으로 나눠 점령했다. 기본적으로 아래 그림처럼 독일 영토를 나누되 소련 점령지 안에 있던 수도 베를린만 다시 4개국이 나눠 점령하는 방식이었다.그 후 미국 영국 프랑스는 자신들이 점령한 영토를 합쳐 새로운 독일 정부를 수립하자고 의견을 모았지만, 소련은 이를 거부했다. 그래서 세 나라가 점령한 지역은 서독이 됐고, 소련 점령지는 동독이 됐다. 이후 동독 정부는 자국 안에 있는 서독 영토인 서베를린으로 사람들이 건너가지 못하게 철조망을 쳤다. 이 철조망은 나중에 ‘베를린 장벽’이 됐다.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건 1989년 5월(이하 현지시간)이었다. 역시 사회주의 국가였던 헝가리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면서 오스트리아와 맞닿은 국경에 있던 철조망을 제거한 것. 이 소식을 들은 동독 주민 1000여 명이 서독으로 망명하려는 생각을 품고 헝가리로 여행을 떠났다. 이들이 국경을 넘을 때 헝가리 국경경비대가 묵인하면서 이들은 결국 서독으로 넘어갈 수 있었고, 그 후로 계속 동독 주민들은 국경을 넘어 서방 세계로 이동하게 된다. 이런 흐름이 이어지자 동독 정부는 민심을 수습하려 ‘여행 허가에 대한 출국 규제 완화’에 대해 발표했다. 당시 사회주의통일당 대변인 귄터 샤보프스키는 1989년 11월 9일 TV에 출연해 “외국 여행의 조건을 제시하지 않고 여행 허가를 신청할 수 있다. 경찰의 여권, 등록 부서는 모든 출국 비자를 지체 없이 발급하도록 지시한다. 동독 국민은 베를린 장벽을 포함하여 모든 국경 출입소에서 출국이 인정된다”고 발표했다. 사실 이건 착각이었다. 원래 그가 발표했어야 할 마지막 문장은 “국외 이주에 대해 동서독 국경 혹은 동서 베를린의 모든 검문소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잘못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 기자회견에서 ‘시행령이 언제부터 발표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지체없이’라고 답했다. 사실은 이튿날 아침부터 발효될 예정이었다.이 방송을 본 동베를린 시민들이 하나둘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왔다. 원래 이 법률은 여권과 비자를 발급하는 기준을 완화하겠다는 내용일 뿐 여권과 비자가 필요 없게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방송 내용만 보고 “국경이 지금 당장 개방됐다”고 받아들였다. 언론도 그렇게 보도했다. 이날 오후 10시경에는 1만 명이 넘는 이들이 국경 경비소로 몰려들었다. 이미 국경경비대에서 통행 허가증을 일일이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결국, 국경경비대는 조용히 현장에서 물러났다. 이튿날 새벽이 되자 동베를린 사람들은 아예 중장비를 가져와 베를린 장벽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국경 지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차를 몰고 온 사람들이 차례차례 국경을 넘었다. 그렇게 하룻밤 사이에 동서독 국경은 의미를 잃어버렸다.이날 이후 동독 군대와 경찰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동독 정부는 통제력을 상실했다. 결국 이듬해 3월 동독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자유선거를 실시했다. 이 선거에서 ‘가능한 한 가장 빨리 통일하자’고 주장한 ‘독일연합’이 승리하면서 통일에 가속도가 붙었다.결국 원래 동독 지역에 있던 5개 주(州)가 부활해 ‘독일연방공화국’에 가입하는 형식으로 통일 방안이 결정됐다. 이로써 법적으로 동독은 서독에 흡수된 게 아니라 공중분해 됐다. 독일 정부는 1990년 10월 3일 0시를 기해 공식적으로 ‘통일’을 선언했다. 독일이 공식적으로 다시 한 나라가 된 지 27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여전히 옛 서독 지역이 △소득 수준도 높고 △실업 수준은 낮고 △젊은 인구도 더 많다. 통일 당시 동독과 서독의 임금 격차는 약 1대3 수준이었다. 현재 남·북한은 최소로 잡아도 약 1대8 정도다. 많은 전문가가 한반도에 통일 국가가 들어선다면 독일보다 더한 후유증을 겪을 확률이 높다고 전망하는 이유다. 아직 남북통일의 길은 멀고 험해 보인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0-02
    • 좋아요
    • 코멘트
  • [백 투 더 동아/9월 30일]80년 전 신문에 실린 ‘야한 광고’

    사실 일제강점기 때 신문 광고는 엄청 ‘야했다.’한번 일제강점기 때 여성 제품 광고는 어떻게 생겼을지 상상해 보시라. 그러면 아래 ‘박가분’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기 쉬운 게 사실이다.그래서 80년 전 오늘(9월 30일) 동아일보에 실린 ‘중장탕(中將湯)’ 광고는 눈을 의심스럽게 만든다. (아마도 정구복 차림을 한) 여성이 맨 다리를 그대로 내놓은 채 야릇한 미소를 띄고 있기 때문이다.이 중장탕은 일본 도쿄(東京)에 있던 츠무라준텐도(津村順天堂·현 츠무라제약)에서 수출하던 제품이었다. 지금도 같은 이름으로 팔리고 있는데 이 회사 홈페이지에 따르면 △산전·산후 장애 △생리 불순 △냉증 △불면증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이렇게 사진이 등장하기 전에는 그림이 있었다. 1925년 5월 28일자 동아일보에는 ‘하루나’라는 피부질환치료제 광고가 나갔다. 아래 그림에서 보시는 것처럼 ‘벌거벗은 여성 상반신’이 디자인 콘셉트였다.이렇게 나체를 콘셉트로 하던 시대에 ‘누드 사진집’ 광고도 빠질 수 없었다. 이듬해 6월 17일자 지면에는 ‘여자의 나체미의 신 연구’라는 제목으로 일본에서 만든 서양 여성 누드집 광고가 실렸다.이렇게 ‘야한 시대’에 성병 약 광고까지 등장했다. 매독 치료제 ‘푸로다’는 아예 전면광고를 내걸었다.꼭 성병약이 아니더라도 사실 일제강점기에는 의약품 광고가 제일 많았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개화기부터 1930년대까지 신문·잡지 광고를 분석한 ‘근대 광고에 나타난 상품의 유형’ 자료를 보면 1930년대에는 전체 광고 1339건 중 66.5%(890건)가 의약품 광고였다. 1920년대에도 51.6%(898건 중 463건)가 마찬가지였다.의약품 광고가 많았다는 건 당연히 그 시절 사람들도 지금 우리처럼 자신이나 가족 건강을 챙겼기 때문. 그건 교육열도 마찬가지였다. 1938년 7월 13일에 실린 이노우에(井上) 통신영어학교 광고는 “윗사람이 되고 싶은 분, 입신출세(立身出世)를 희망하는 제군은 영어만은 꼭 배워두십시다”라고 외치고 있다.이 학교 역시 소재지는 도쿄였다. 그러면 당시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통신 수단으로 영어를 공부했을까. 정답은 ‘편지’였다. 영어 학습지를 풀어 도쿄로 보내면 첨삭지도해 보내주는 방식이었다. 당연히 시간이 적지 않게 걸렸을 테지만 이 회사는 신문에 꾸준히 1면 광고를 낼 만큼 성장을 계속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09-29
    • 좋아요
    • 코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