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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전 오늘(9월 28일)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 제목을 나중에 유행어가 된 말로 바꾸면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당시 동아일보는 데뷔 5년차 배우였던 이병헌() 인터뷰 기사를 내보내면서 <액션-코믹연기 “척척‘ 「전천후 게릴라」 꿈꾼다>고 제목을 붙였다.이 제목은 정말 현실이 됐다. 이제 이병헌은 역할과 장르를 불문하고 대한민국 최정상 배우로 손꼽힌다. 가수 싸이가 부른 ’I Luv It‘에서 브레이크 댄스 실력을 선보였던 그는 개봉을 앞둔 영화 ’남한산성‘에서는 ’현실주의자‘ 최명길(1586~1647) 역을 맡아 열연했다. 이병헌은 1995년 당시 동아일보 기자와 인터뷰에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스크‘의 짐 캐리처럼 표정만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연기를 시도해 보고 싶다“고 했다. 이 바람과 꼭 맞아떨어지진 않지만 그는 2009년 ’G.I. 조‘를 통해 할리우드에 데뷔하면서 ’할리우드 영화에서 무술하는 동양인 남성은 감정 표현과 대사가 거의 없다‘는 공식을 깨드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이미 한국과 일본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 배우였지만 할리우드에서는 조연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 영화 평론가는 ”많은 동양 배우들이 아시아 시장을 타깃으로 한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기 바쁘다. 그래서 정작 미국 주류인 백인 사회에서는 그 배우가 누군지 모르는 일도 허다하다. 이병헌은 조연이더라도 주류 시장을 공략한 영화 위주로 출연했다“며 ”이제 이병헌은 꼭 동양인이 아니어도 되는 배역에 캐스팅되는 배우로 성장했다“고 평했다. 이병헌은 2016년 아카데미 시상식 때 시상자로 무대를 밟기도 했다.당시 동아일보 기사가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이병헌은 데뷔 때만 해도 ”국어책을 읽는 듯한 대사, 딱딱한 표정연기가 동료 신인들 눈에도 우습게 보이던“ 배우였다. 그러나 이제는 영어 발음까지 좋은 배우로 성장했다. 역시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전략적으로 목표를 향해 노력하면 안 될 일도 되게 마련이다. 확실히 이제까지 이병헌의 배우 인생은 ’한국, 미국, 액션, 코믹, 성공적!‘이다.※기자에게는 자신이 기사로 쓴 인물과 함께 성장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보람이다. 기사 본문을 쓴 박원재 기자는 현재 동아닷컴 대표이사, 사진을 찍은 이훈구 기자는 동아일보 사진부장이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단언컨대 국회 회의록 어디에도 이보다 ‘섹시한’ 한 줄은 없다. 누구나 한번쯤 위정자들을 향해 내뱉고 싶었지만 차마 내뱉을 수 없던 그 말. 어쩌면 ‘장군의 아들’ 김두한 의원(1918~72·당시 한국독립당)이 아니었다면 국회 본회의에서 감히 외칠 수 없던 말. 그 말은 바로…. 그리고 김 의원은 정말 정일권 국무총리(1917~94),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1916~77·한국일보 사주) 등을 향해 똥물을 뿌렸다. 1966년 9월 22일, 나중에 역사가들이 ‘국회 오물투척사건’이라고 이름 붙인 순간이었다. 당시 동아일보에 따르면 김 의원은 똥을 양철통에 담은 뒤 마분지로 포장해 이를 들고 이날 오후 12시 45분경 질문자로 단상에 올랐다. 그 후 1시 5분경 “부정과 불의를 합리화시켜준 장관들을 심판하겠다”며 단상 앞에 나와 포장지를 풀었다. 그러면서 “이것은 밀수 사카린인데 국무위원들에게 맛을 보여줘야겠다”며 포장지 위에 있던 흰가루를 국무위원들에게 뿌리고 이어 똥을 뿌렸다. 이 마지막 발언에 김 의원이 똥을 준비한 이유가 드러난다. 바로 ‘밀수 사카린’이다. 당시 삼성 계열사였던 한국비료공업은 그해 5월 흔히 설탕 원료로 쓰는 사카린(새커린)을 일본에서 밀수하려다 덜미가 잡혔다. 새커린 2259포대(약 55t)를 건설 자재로 꾸미려다 들통이 난 것. 당시 박정희 정권은 밀수를 ‘5대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삼성과 유착 관계였던 군사정권은 밀수품을 압수하고 벌금을 부과하는 것으로 사태를 정리하려 했다. 그러자 국회에서 ‘특정재벌 밀수 사건에 관한 질문’ 안건을 통과시키며 조사에 나섰다. 김 의원이 똥을 뿌린 건 대정부 질문 이틀째였다. 김 의원은 사건 다음날 자택을 찾아간 동아일보 기자에게 “내가 던진 오물은 내각 국무위원 개인에게 던진 게 아니라 헌정을 중단했고 밀수 사건을 비호하고 있는 제3 공화국 정권에 던진 것”이라며 “문제의 오물은 순국선열의 얼이 서린 파고다 공원(현 탑골공원) 공중변소에서 퍼낸 것”이라고 했다. 충격이 컸던 만큼 효과도 확실했다. 정부에서는 정 총리를 비롯한 내각이 총사퇴했고, 이병철 당시 삼성 회장도 한국비료와 대구대를 국가에 헌납하면서 은퇴를 선언했다. (다만 이 회장은 2년 뒤 다시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동아일보 만평 ‘고바우 영감’은 이 만평 10주년 기념 지면(1969년 12월 30일자)에서 이 사건을 회상하면서 “적군 일개 대대를 섬명할 수 있는 것보다 더한 위력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김 의원도 책임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국회의원 자리를 잃고 서대문형무소에 구속·수감됐다. 형무소에서 할복 소동을 벌이기도 했던 그는 1년 뒤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이후 두 번 다시 ‘금배지’를 달지 못한 채 1972년 숨을 거뒀다. 공교롭게도 그가 세상을 떠난 1972년 11월 21일은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한 날이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가 KIA 투수 양현종(29)에 대해 작성한 스카우팅 리포트(사진)가 19일 프로야구 TV 중계화면에 잡혔습니다. 빠른 공(FB) 40, 커브(CB) 40, 슬라이더 50, 체인지업 40이라고 평가했네요. 이렇게 점수를 매기면 흔히 0~100점 사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는 20~80점 범위만 씁니다. 왜 그럴까요? 정답은 ‘정규분포’ 때문입니다. 네, 수학 시간에 배우는 그 정규분포 맞습니다. 평균을 50점, 표준편차를 10점으로 정규분포 그래프를 그리면 아래 그림처럼 나타납니다. 이때 비율은 해당 구역에 전체 표본 중 몇 %가 들어있는지를 나타냅니다. 20 아래와 80 너머에는 각 0.1%밖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20~80점만 써도 전체 표본 중 99.8%를 커버할 수 있는 거죠. 스카우트 사이에선 20~80점을 아래와 같은 뜻으로 씁니다. 80: 아주 뛰어남(Outstanding) 70: 뛰어남(Well-above-average) 60: 평균 이상(Above-average) 50: 메이저리그 평균(Major league average) 40: 평균 이하(Below-average) 30: 부족함(Well-below-average) 20: 매우 부족함(Poor) 팀에 따라서는 이 숫자를 10으로 나눠 2~8점을 기준으로 삼는 팀도 있습니다. 그래도 의미는 똑같습니다. 20~80점은 스카우트 사이에서 ‘링구아 프랑카(공용어)’입니다. 여기서 잠깐. 지금부터 길고 지루하게 역사적 배경과 20~80점이 야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설명할 예정입니다. 이런 내용은 알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1)아래 추천을 눌러주시고 다른 기사를 읽으시거나 2)천천히 스크롤을 아래로 내리시다가 마음에 드는 그림이 나오는 부분부터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누가 먼저 썼을까 아, 계속 읽기로 하셨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은 행운이 가득한 하루가 될 겁니다. 물론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처음부터 이런 기준을 썼던 건 아닙니다. 처음에는 당연히 ‘말’로 리포트를 적었습니다. 선수 스카우트라는 건 원래 주관이 많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법. 그냥 말로 하면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차리기가 더욱 어려울 겁니다. 그다음에는 평균을 A로 두고 평균보다 좋으면 A+, A++, A+++…, 나쁘면 A0, A00, A000…처럼 등급을 매기는 방식을 썼지만 헷갈리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럴 때는 확실히 숫자가 편합니다. 야구 역사학자들이 스카우트에 처음 숫자를 도입한 인물로 제일 많이 거론하는 건 브랜치 리키 전 브루클린(현 LA) 다저스 단장(1881~1965)입니다. 리키 단장은 마이너리그에서 메이저리그로 이어지는 현재 팜(farm·선수 육성) 시스템을 고안한 인물입니다. 타고난 능력을 뜻하는 ‘툴(tool·도구)’ 역시 리키 단장이 처음 사용한 개념입니다. 단, 리키 단장은 0~60점 범위를 썼습니다. 리키 단장 제자로 역시 다저스 살림을 맡았던 알 캄파나이스 단장(1916~98)은 60~80점 범위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학교 선생님처럼 생각했던 거다. 70점을 통과 기준으로 삼고 80점 이상이면 우등생, 60점 아래면 낙제생이라는 생각으로 접근했던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다가 1974년 메이저리그 17개 구단이 각출해 스카우트 사무국(MLB Scouting Bureau)을 만들면서 20~80 시스템이 자리를 잡게 되죠. 이 사무국 초대 수장을 맡았던 짐 윌슨 전 밀워키 단장(1922~86) 아이디어였습니다. 당시 부국장을 맡았던 돈 프리스 전 볼티모어 스카우트(90)는 “윌슨 국장과 ‘어떻게 하면 표준화된 평가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까 브레인스토밍을 하다가 이 개념을 떠올렸다. 세월이 흘러서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윌슨 국장이 먼저 세상을 떠나 물어볼 사람도 없다. 하늘에 가서 꼭 물어보겠다”며 웃었습니다. ●도대체 정규분포로 어떻게 평가할까? 물론 그렇다고 스카우트가 ’저 선수 커브는 메이저리그 평균보다 1 표준편차만큼 뛰어나니 60점을 줘야겠다‘고 평가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평가가 쌓이면 쌓일수록 정규분포를 향해 가는 방식입니다. 사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은 시행 횟수를 늘리면 점점 정규분포에 가까운 모양이 됩니다. 예를 들어 이론적으로 동전을 100번 던지면 앞면은 50번이 나와야 합니다. 단, 실제로 동전을 100번을 던졌다고 해서 꼭 50번이 나오라는 법은 없습니다. 실제로 앞면이 나오는 확률은 아래 그림처럼 분포합니다. 어떻습니까? 정규분포를 닮았죠? 여기서 중요한 건 우리가 동전을 던지면 앞면이 나올 확률이 2분의 1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찬가지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가 되려면 50점 그러니까 평균이 뭔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스카우트 사무국은 1989년부터 12일짜리 스카우트 양성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교육 과정 상당 부분을 이 50점을 보는 눈 기르기에 할당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 각 점수를 주는지 세세한 내용도 정해두고 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교육 방식은 이미 스타가 된 선수가 예전에 어떤 점수를 받았는지 되돌려보는 것. 또 스카우트 지망생은 유망주가 있다면 현재 스타인 어떤 선수와 비교해 보라는 지시도 받게 됩니다. 어떤 툴은 아예 객관적인 범위를 정해 놓고 모든 스카우트가 공통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아래 표는 스카우트닷컴에서 찾은 예시입니다. 이 표에는 20이 없습니다. 스카우트닷컴에서는 “어떤 항목이든 20을 받을 정도면 스카우트는 관심이 없다고 봐야 한다. 20을 쓰는 건 뚱뚱한 타자가 아주 발이 느릴 때 정도뿐”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스카우트가 야수를 평가하는 항목은 그 유명한 파이브(5)툴. 이 다섯 가지는 △타격 능력(Hitting Ability) △파워(Power) △스피드(Running Speed) △어깨(Arm Strength) △수비력(Fielding)입니다. 투수는 위에 나온 것처럼 빠른 공, 커브, 슬라이더 그리고 나머지 주요 구종에 대해 20~80점으로 점수를 매기게 됩니다. ●정규분포 또 언제 쓸까 정규분포는 야구 선수 스카우트 때처럼 평가 때 자주 씁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등에서 표준점수를 구할 때 쓰는 것 역시 정규분포입니다. ’등급제 수능‘에서는 성적이 상위 몇 %에 속하는지를 구하고(백분위) 이를 평균 50, 표준편차를 20으로 하는 정규분포에 대응해 표준점수를 구했습니다. 이 표준점수가 어떤 구간에 속하는지에 따라 등급을 결정했죠. 정규분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독일 출신 수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1777~1855)입니다. 가우스는 소행성을 찾다가 이 분포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정규분포를 ’가우스 분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혹시 포토샵 같은 프로그램으로 그래픽 작업을 하시다가 이미지를 흐리게 하는 ’가우시안(Gaussian) 필터‘ 같은 용어를 보신 적 있으신가요? 네, 이 필터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 역시 정규분포입니다.양현종 원본 사진(왼쪽)과 가우시안 필터를 적용한 사진. 동아일보DB 정규분포를 발견한 가우스에 대한 독일인들 자부심이 남다를 게 당연한 일. 독일에서 유로를 도입하기 전에 쓰던 10마르크 지폐에는 가우스와 함께 정규분포 그래프가 들어 있었습니다(아래 사진). ’학창시절에 정규분포를 야구 선수를 스카우트할 때 쓴다는 것만 알려줬어도 수학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했었을 텐데…‘하고 아쉬움이 드는 건 저 혼자만이 아니겠죠?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김지향 시인은 1977년 9월 20일자 동아일보에 ‘아파트 추첨과 불임수술“이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썼다. 여기서 아파트는 서울 반포 주공 2단지. 불임 수술이 등장하는 건 당시 주공(현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서 이 아파트 3800가구를 분양하면서 ①해외취업자로서 불임 시술자 ②불임 시술자 ③해외취업자 순서로 우선권을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김 시인은 이를 두고 ”해외토픽 감으로 전파를 타고 번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지적한 뒤 ”불임시술 조건은 주공이 그 본래의 사명에서 이탈한 일종의 월권행위며 젊은 이 나라 부부에게 내 집 마련의 기회를 박탈하는 처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역설적으로 풀이한다면 반포 아파트에는 앞으로 가정의 별이며 꽃이라 할 수 있는 어린이의 웃음소리를 듣기 힘들게 될 것이며 마치 양로원이나 인간 무덤을 방불케 할 것이니 이 얼마나 삭막한 풍경이겠는가. 안타깝기만 하다“고 썼다. 물론 김 시인 걱정은 기우였다. 이제 재건축을 통해 자취를 감춘 반포 주공 2단지는 마치 양로원이나 인간 무덤을 방불케 하는 삭막한 풍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어떻게든 아파트를 분양받겠다는 목표는 60대 남성들까지 기꺼이 수술대에 눕게 했다. 다음은 김 시인이 쓴 칼럼이 나간 다음 날 동아일보에 실린 독자 칼럼 ’불임만이 상책인가‘ 중 일부를 옮긴 것이다. ”불임시술을 하지 않아 이번 분양신청에서 4순위로 밀리고 나니 ’마이 호움(홈)‘의 꿈이 깨어지는 것 같아 속이 상한다. 10년 전에 남매를 낳은 후 나는 남편과 합심해 피임 등 여러 방법으로 가족계획을 하고 있다. 불임수술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솔선하여 가족계획을 하고 있는 선의의 무주택 서민을 감안하지 않은 이 원칙이 과연 공정한 것일까. 더구나 7자녀든 8자녀든 많은 아이를 갖고 있어도 불임시술만 하면 2순위로 올려주고 무자녀라도 하지 않으면 4순위로 떨어뜨리는 이 원칙 때문에 회갑을 넘긴 할아버지들이 수술을 받는 기현상까지 빚고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이러고도 불임시술이 인구 억제책의 보도(寶刀)가 될 수 있으며 주택분양의 대원칙이 될 수 있을까.“ 물론 중장년층 남성들이 꼭 자기가 살 집을 구하려고 불임수술을 받는 건 아니었다. ’분양권 전매‘는 그때도 유효한 돈벌이 수단이었던 것. 그해 9월 17일 동아일보 횡설수설은 ”세상이 각박하니 인심이 야박 서러운지, 인심이 야박하니 세상이 각박해지는지 알 수는 없으나 조금이라도 이득이 된다고 생각하면 남에게 뒤질세라 아귀다툼을 벌이는 풍토가 적지 않다“고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이어 ”아파트 입주 신청에 있어 불임 수술자에게 우선권을 주자 요즘 각 보건소에는 가족계획과는 별 상관이 없는 50, 60대의 노인들까지 몰려오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중략) 불임 수술자 중에는 자기가 입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례를 받고 대리 신청을 하기 위한 사람도 있는 모양이니 세상인심을 알 만하다“고 전했다. 이제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거꾸로 자녀가 많아야 아파트를 분양받기 유리한 세상. 그래도 결혼 전 정관수술을 받는 미혼 남성이 한둘이 아니다. 맞다. 옛날이라고 그저 아이를 많이 낳고 싶었던 건 아닌 것처럼, 지금 우리도 무조건 아이를 적게 낳고 싶은 게 아니다. 그렇다고 아이를 키우고 싶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아이들과 살고 싶다. 그것도 아주 잘 살고 싶다. 그때나 지금이나 위정자들은 이 지점을 늘 놓친다. 그래서 각종 정책에서 어린이는 늘 ’부모의 부속물‘이 되고 만다. 이 방향이 바뀌지 않는 한 젊은 세대는 ’아이를 낳지 않는 방식‘으로 윗세대에 대한 ’파업‘을 계속 이어갈지 모른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뉴욕) 양키스는 미키 맨틀 때문에 이기는 거야.”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 중에서 네, 그렇게 데릭 지터(43) 이전에 미키 맨틀(1931~95)이 있었습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 스위치 타자’(상대 투수에 따라 타석 방향을 바꾸는 타자)로 손꼽히는 맨틀은 1951년부터 1968년까지 양키스에서만 뛰었고, 그가 뛰는 동안 양키스는 월드시리즈에서 7번 우승했습니다. 맨틀은 여전히 통산 월드시리즈 최다 홈런(18개) 기록 보유자입니다. 올해 이승엽(41·삼성)이 그런 것처럼 맨틀도 1968년 먼저 은퇴를 예고한 뒤 경기를 치렀습니다. 그해 양키스가 속한 아메리칸리그 최강팀은 디트로이트였습니다. 이 팀 에이스 데니 맥클레인(73)은 현재까지 메이저리그 역사상 마지막 30승 투수로 남아 있습니다. 1968년 오늘(9월 19일) 두 선수는 디트로이트 안방 구장 ‘타이거 스타디움’에서 마지막 맞대결을 벌였습니다. 디트로이트가 6-1로 앞선 8회초 맨틀이 마지막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디트로이트 포수 짐 프라이스(76)가 마운드로 올라갔습니다. 경기장을 찾은 관중 9063명이 맨틀에게 기립박수를 보낼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준 것. 그때 맥클레인이 프라이스에게 말했습니다. “하나 선물하면 어떨까요?” 여기서 선물은 홈런이었습니다. 프라이스는 자기 자리로 돌아와 타석에 있던 맨틀에게 “선물 하나 드리겠다”고 말했습니다. 맨틀은 믿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그럴 만했습니다. 맥클레인은 투구 솜씨는 빼어났지만 사생활에는 문제가 있던 투수였으니까요. 맥클레인은 은퇴 후에 마약 소지, 횡령 등으로 교도소를 들락거렸는데 현역 시절에도 승부욕 때문에 괴팍한 행동을 벌이곤 했습니다. 하지만 프라이스가 빙긋이 웃으며 마운드를 바라보자 맨틀도 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몸쪽 높은 공으로 부탁해. 너무 빠르게는 말고.” 그해에 9이닝 당 볼넷을 1.7개밖에 내주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제구력을 자랑했던 맥클레인은 정말 그렇게 던졌습니다. 맨틀이 홈런성 파울을 두 번 날리자, 맥클레인은 더더욱 진심을 담아 느린공을 몸쪽 높게 던졌고, 맨틀은 결국 외야 관중석 2층에 떨어지는 대형 홈런을 날렸습니다. 프라이스는 2009년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맨틀이 베이스를 도는데 맥클레인이 박수를 치더라. 2루 베이스를 돌 때 (2루수) 댁 매컬리피(1939~2016)가 따라서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나중에는 모든 팀원들이 박수를 보냈다. 맨틀은 홈플레이를 밟고 나서 내게 고마워했다”며 “그런데 다음 타자 조 페피톤(77)이 ‘나도 하나 달라’고 얘기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당신은 미키 맨들이 아니잖아’하고 답했다. 그래도 맥클레인에게 얘기를 전했는데 머리 쪽으로 위협구가 날아오더라”며 웃었습니다. 이날 경기는 결국 디트로이트가 6-2로 이기면서 끝났고 맥클레인은 완투승으로 시즌 31번째 승리를 기록했습니다. 경기 후 인터뷰실로 들어오는 그에게 기자들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평소 언론과 사이가 나빴던 선수에게는 드문 일. “일부러 홈런을 맞아준 거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나는 전력을 다해 던졌지만 맨틀이 정말 잘 쳤다”“고 답했습니다. 맥클레인이 맨틀에게 홈런을 선물하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당시 그가 통산 534홈런으로 지미 폭스(1907~67)와 동률이었기 때문. 이 통산 535호 홈런으로 맥클레인은 메이저리그 통산 최다 홈런 역대 공동 3위(당시 기준)에서 단독 3위로 올라섰습니다. 맨틀은 이튿날 안방 경기에서 생애 마지막 홈런을 날리면서 통산 536홈런(현재 18위)으로 커리어를 마감했습니다. 맥클레인은 1975년 자서전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Nobody’s Perfect)‘를 펴내면서 이날 포수가 당시 디트로이트 주전 안방 마님이던 빌 프리한(76)이었다고 잘못 적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 에피소드가 세상에 나올 때마다 진짜 이날 포수였던 프라이스가 아니라 프리한이 등장하곤 하죠. 은퇴 후 18년 동안 TV 해설위원으로 활약한 프라이스는 ”그 전에도 그 이후로도 은퇴를 앞둔 위대한 타자에게 그런 선물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다른 선수들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미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한 상태였고 경기에서도 크게 이기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홈런을 치라고 공을 던진다고 다 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게 다 잘 맞아떨어진 날이었다“고 회상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런 우연이 바로 우리가 필연적으로 ’야구의 낭만‘을 사랑하는 이유일 겁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음식을) 먹고 난 뒤의 그릇을 씻어 정리하는 일”은 ‘설·거·지’라고 써야 맞습니다. 이번 기회에 꼭 기억에 두세요. 설거지는 ‘설거지’입니다. 절대 ‘설겆이’가 아닙니다!이렇게 강조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설거지를 설겆이라고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글 쓰는 게 직업인 기자 중에도 차고 넘칩니다.도대체 왜?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요? 그건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네, 제대로 읽으신 게 맞습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설거지를 설거지라고 마음 편히 못 쓰는 겁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받아쓰기를 잘해야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듣지만, 공부깨나 했다는 분 가운데서도 맞춤법이라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언어학적으로는 아예 학력이 높을수록 자주 틀리는 낱말이 따로 있습니다.설거지가 대표적으로 이런 낱말입니다. 설거지를 설거지라고 쓰면 ‘굳이’를 ‘구지’라고 쓰는 것처럼 낱말을 소리 나는 그대로 쓰는 듯한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받아쓰기 시험 때 이런 건 보통 오답이게 마련. 그래서 우리 머릿속에 들어 있는 언어 체계가 ‘세련되게’ 설겆이라고 쓰라고 잘못 지시하는 겁니다. 이런 현상은 넓은 의미에서 ‘과도(過度) 교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고치지 않아도 될 걸 과도하게 교정했다는 뜻입니다.이 과도교정 역시 비교적 흔한 언어 현상입니다. 과도 교정이 없었다면 ‘김치’도 세상에 없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요?원래 김치는 위에 나온 것처럼 썼습니다. 저 글자를 문자 그대로 읽으면 [딤채]가 됩니다. (김치냉장고 이름이 왜 그런지 아시겠죠?) 여기서 한국어에 구개음화 현상이 있다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굳이’를 [구지]로, ‘해돋이’를 [해도지]라고 발음하는 게 맞는 이유가 바로 구개음화 때문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딤채는 [짐채]가 됩니다. 그러다가 아래 아(ㆍ) 소리가 한국어에서 사라지면서 [짐치]가 됐습니다. 여기서부터 과도교정 현상이 일어납니다. [짐치]라는 소리만 듣고 이를 ‘김치’라고 적기 시작한 겁니다. 현대 한국어에는 ‘ㄷ구개음화’ 현상만 있지만 16세기에는 ‘ㄱ구개음화’ 현상도 있었거든요. 지금도 어떤 분들은 ‘길’을 [질], 엿기름을 [엿지름]이라고 발음하는 걸 들을 수 있는 건 이 때문입니다.이를 거꾸로 적용해서, 짐치를 짐치라고 쓰면 어쩐지 틀린 거 같으니까, 짐치를 김치라고 쓰게 된 겁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아예 소리도 [김치]로 바뀌었습니다. ‘질들이다’가 ‘길들이다’가 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사진설명)과도교정이 없었다면 어린 왕자와 여우는 서로를 ‘질들였을’ 겁니다. 파라마운트 홈페이지.아, 40대 이상 어르신 중에는 ‘학교에서 분명 설겆이라고 배웠는데 무슨 소리냐?’고 주장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맞습니다. 문교부(현 교육부)에서 1989년 맞춤법을 크게 흔들기 전까지는 설겆이가 표준어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습니다’로 써야 할 걸 ‘~읍니다’로 쓰는 분은 거의 안 계시잖아요? ‘~읍니다’가 ‘~습니다’로 바뀔 때 설겆이도 설거지가 됐습니다. 그러니 이제 설거지도 설거지라고 쓰십시다. 다시 한번 설거지는 설거지입니다!그런 의미에서 ‘설겆이’라고 쓰셨던 분이 오늘 설거지 당번을 맡아보시면 어떨까요? 설거지하러 가시기 전에 아래 추천 버튼 누르시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문. 다음 중 실제 존재하지 않는 학과는?①예수대 신학과②원광디지털대 얼굴경영학과③영남대 새마을국제개발학과④선문대 신학순결학과⑤전남과학대학 호텔조리김치발효과정답은 ①이다. 전북 전주시에 자리잡은 예수대는 건학이념으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를 내세우고 있지만 신학 전공은 따로 없다. 거꾸로 나머지 네 개 학과는 실제로 존재한다. 한 문제 더 풀어보자.문. 다음 중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대학 과제는?①수강생끼리 1만 원으로 데이트하기②부모님께 밥상 차려 드리기③부자에게 시집가는 법 토론하기④뮤지컬 출연하기⑤에로틱 판타지 소설 쓰기이번에 정답은 없다. 이 다섯 가지 모두 대학 교양 수업 과제로 실재로 나온 것들이다. 부모님께 밥상을 차려드리는 수업은 과목 이름부터 ‘밥상머리 교육(건양대)’으로 범상치가 않다. ‘뮤지컬 출연하기’는 물론 전문 배우로 대극장 무대에 서라는 건 아니다. 국민대 ‘체험 뮤지컬’ 수험생들은 직접 뮤지컬을 만들어 교내 공연을 진행한다. ⑤는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마광수 교수가 연세대 학새들에게 내준 과제로 유명하다.이렇게 이색적인 대학 교과목은 언제든 눈에 띄게 마련. 1995년 9월 18일자 동아일보는 미국 명문대에서 개설한 이색 과목을 소개했다.당시 소개한 과목은 △예일대 ‘근친성교의 이야기들’ △조지타운대 ‘게이와 레즈비언의 말할 수 없는 생활들’ △컬럼비아대 ‘인종, 성(性) 그리고 로큰롤의 정치학’ △코넬대 ‘집 없는 사람을 먹고 재우는 법’ △하버드대 ‘마녀 늑대인간 강신술(降神術·기도나 주문으로 신을 내리게 하는 술법)’등이었다. 이런 교과목을 개설한 데 대해 영아메리칸재단(YAF)은 “학문의 자유도 좋지만 이런 과목들을 배우기 위해 1년에 우리 아이들이 많게는 2만5000여 달러의 학비를 내야 하는 것이냐”고 비판했다고 당시 동아일보는 전했다.물론 그때 한국 대학에 딱딱한 교양 수업만 있는 건 아니었다. 1995년 서강대에는 ‘죽음에 이르는 심리’라는 교양 과목이 있었고, 단국대에는 뮤지컬은 아니지만 2시간 동안 노래를 부르는 ‘교양 합창’ 과목도 있었다. 서울대 ‘여성의 건강’은 ‘애인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려는’ 남학생이 앞다퉈 수강했다고 한다.시험 유형도 특이한 대학이 많았다. 아주대 토질역학 수강생들은 무박 3일 동안 400문제가 넘는 문제를 풀어야 ‘전공 필수’ 과목을 이수할 수 있었다. 시(詩) 100개를 외워 쓰는 문제를 내는 학교도 있었다. 교가 가사를 쓰라거나 자기 이름을 한자로 적는 문제를 내는 교수는 부지기수.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서울대 상대(현 경영대)에는 항상 ‘마케팅은 무엇인가’라는 시험 문제를 칠판에 적어주는 교수가 있었다. 수험생들도 당연히 이 문제를 준비해 왔는데 어느 해인가 교수가 칠판에 ‘대’부터 적는 게 아닌가. 학생들이 술렁거리는 사이 교수가 완성한 문제는 이랬다. ‘대체 마케팅은 무엇인가’ 그런데 학생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끝나지 않았다. 대체를 다른 것으로 바꾼다는 뜻을 가진 ‘代替’로 받아들였던 것. 이 소동은 교수가 문제 맨 앞에 ‘도’를 적어 넣어 ‘도대체 마케팅은 무엇인가’로 바꾸면서 끝났다나 뭐라나.어떤 의미에서 대학은 이렇게 엉뚱한 생각을 수용할 수 있어야 성장하는 법. 그래서 부탁드린다. 독자 여러분이 보고 들으신 가장 특이한 대학 관련 에피소드를 댓글로 달아주시라!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안녕하세요, 서울 중구 중림동에서 일하고 있는 독자 박상익이라고 합니다. 궁금한 게 있어서 e메일을 보냅니다. 제가 출퇴근길에 FM 라디오를 듣는데 주파수가 100.0(㎒)처럼 정수로 딱 떨어지는 게 없더라고요.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아, 먼저 정말 ‘잡학사전’이라는 꼭지 이름이 딱 걸 맞는 질문 감사드립니다. 이 기사 제목에서 보신 것처럼 이렇게 되는 제일 큰 이유는 FM 라디오 주파수 소수점이 모두 홀수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아래는 수도권에서 잡을 수 있는 FM 라디오 주파수를 정리한 그림입니다. 전부 다 홀수로 끝나죠? 또 지역에 따라 같은 채널이 다른 주파수를 쓰거나, 같은 주파수를 다른 채널이 쓰는 일도 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이번에 제일 큰 이유는 ‘정책’입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대한민국 주파수 분배표’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주파수 88~108㎒ 범위를 FM 방송에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FM 방송국당 채널 간격은 200㎑(0.2㎒)입니다. 그러면 각 라디오 채널은 아래 같은 방식으로 주파수를 사용하게 됩니다.이렇게 0.2㎒ 간격으로 채널을 나누니까 소수점 첫 번째 자리가 계속 홀수입니다. 왜 한쪽 끝을 쓰면 안 되냐고요? 그건 방송국에서 라디오 전파를 쏠 때 전파 강도가 아래 그래프처럼 분포하기 때문입니다. 0.2㎒ 간격일 때는 가운데를 선택하는 게 가장 강하게 전파를 보낼 수 있는 방식입니다. 이런 이유로 한국 FM 라디오 방송 주파수는 소수점 뒤에 첫번째 자리가 계속 홀수로 나옵니다. 이렇게 정한 건 정책이라 정책이 바뀌면 끝자리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컨대 나라에 따라 87.5㎒부터 FM 라디오 방송에 주파수를 할당하는 나라도 많습니다. 이런 나라에서 0.2㎒ 간격을 기준으로 하면 전부 짝수만 나올 겁니다. 또 채널 사이 간격을 0.1㎒로 정한 나라도 많습니다. 이러면 짝수와 홀수가 번갈아서 나오게 됩니다. 채널 간격을 좁히면 라디오 방송 숫자를 더 많이 늘릴 수 있지만 (현재 한국 방식으로는 100개가 한계입니다) 음질에서는 손해를 봅니다. 한국에서 이런 정책을 채택한 건 미국 때문일 개연성이 큽니다.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 역시 한국과 같은 방식으로 FM 채널을 배정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주한미군 방송인 AFKN(현 AFN Korea)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FM 방송을 시작한 매체이기도 하고요. AFKN은 1964년 10월 1일부터 FM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인을 주요 청취자로 삼은 첫 번째 FM 라디오 방송국은 1965년 문을 연 ‘서울FM’이었습니다. 중앙일보에서 운영하던 동양방송(TBC)이 1966년 이 회사를 인수해 동양FM으로 바꿨습니다. 이 채널은 1980년 언론 통폐합에 따라 KBS로 넘어가 현재 KBS 2FM이 됐습니다. 아, 그렇다고 모든 국내 FM 방송 주파수 100% 홀수로 끝나는 건 아닙니다. 자유 FM은 강원 인제군 송신소에서 106.6㎒로 방송을 내보냅니다. 이 라디오 채널은 국가정보원에서 하는 대북방송입니다. 북한은 홀·짝수를 모두 쓰는 방식으로 FM 라디오를 운영하고 있기에 이 주파수를 사용하는 겁니다. 참고로 1978년 이후 한국에서 AM 방송은 525.5~1606.6㎑ 주파수 대역을 사용하고 채널 간격은 9㎑입니다. AM은 일반적으로 FM 보다 음질이 떨어지지만 전파를 더 멀리 보낼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FM은 전파가 멀리 나가지 않기 때문에 위에서 보신 것처럼 지역에 따라 같은 주파수를 다른 채널이 쓸 수 있는 겁니다. 아, 그런데, 요즘도 AM 듣는 분이 계시기는 한 거죠? (‘항덕’ 여러분 손!)※ ‘잡학사전’ 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궁금하기는 한데 직접 알아보기는 귀찮은 내용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kini@donga.com으로 e메일 보내주시면 됩니다. 성의껏 취재해서 궁금증을 해소하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제보해주신 독자 박상익 씨께 감사드립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공을 던지고 싶다.”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야구공을 꼭 쥔 채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나한테 야구가 뭐냐고요? ‘최·동·원’ 이름 석자지.”최동원. 이렇게 많은 부산 사람들 심장을 뛰게 만드는 세 글자가 또 있을까.한 프로야구 롯데 팬은 말했다. “박정태가 롯데의 정신이라면 최동원은 롯데의 혼(魂)이라고.”그가 공을 던지고 나서야 사람들은 철완(鐵腕)이라는 낱말이 진짜 무슨 뜻인지 알게 됐다. 최동원은 1984년 한국시리즈 때만 롯데에 우승 트로피를 안겼던 게 아니다. 그는 실업리그 시절이던 1981년 ‘코리언시리즈’에서도 6경기에 모두 등판해 42와 3분의 1이닝을 던져 2승 1패 1세이브를 기록하며 롯데에 실업리그 마지막 챔피언 자리를 선물했다. 재미있는 건 4차전. 최동원은 이 경기에 선발 투수로 나와 7회까지 던졌다. 8회초 수비를 시작할 때는 1루수로 포지션을 바꿨지만 2사 만루 위기가 찾아오자 다시 마운드에 올라 경기를 매조지었다. 그래서 이 경기 기록이 1승 1세이브다. (현재 야구 규칙은 승리 투수가 된 선수에게 세이브를 주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이 시즌 메이저리그 입단 취소 파동을 겪기도 했던 최동원은 아마추어 선수만 참가할 수 있던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참가 문제로 1982년은 한국전력에서 보냈다. 다시 롯데로 돌아온 1983년 최동원은 208과 3분의 2이닝을 평균자책점 2.89로 막아냈다. 하지만 당시 롯데 타선은 팀 타율 0.244로 6개 팀 중 꼴찌였다. 최동원은 결국 9승 16패 4세이브로 시즌을 마감했다.그리고 드디어 대망의 1984 시즌이 개막했다. 최동원은 이해 정규리그에서 284와 3분의 2이닝을 던져 27승 13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2.40을 기록한다. 당시는 전·후기 리그 1위 팀이 한국시리즈에서 맞붙는 방식이었다. 전기 리그 1위 팀 삼성 지휘봉을 잡고 있던 김영덕 감독은 ‘져주기 게임’ 끝에 OB(현 두산)보다 만만해 보이는 롯데를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선택했다. 그러나 결과는….롯데의, 아니 최동원의 우승이었다. 롯데는 김 감독 판단처럼 약한 팀이었을지 몰라도 최동원은 아니었다. 1차전에서 완봉승을 최동원은 3차전에 다시 마운드에 올라 완투승을 따냈다. 5차전은 완투패. 6차전은 구원승. 7차전은 다시 완투승이었다. 그는 은퇴한 뒤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리는 역시 대가가 뒤따르더라. 그러나 후회한 적은 없다. 다시 그날로 돌아가도 난 1차전부터 7차전까지 던질 거다. 왜냐? 그게 최동원이니까.” 다만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마지막이 배신당하는 것임을 알았더라면 아마 그 자리에서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을 거다.” 최동원은 1984년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강병철 당시 롯데 감독이 1, 3, 5, 7차전 등판 예정 소식을 전하면서 “동원아, 우짜노…. 여까지 왔는데…”라고 말하자 시원하게 “알겠심더. 마, 함 해 보입시더”라고 답했다. 하지만 4년 뒤 트레이드 될 줄 알았다면 그렇게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란 얘기였다. 최동원은 “그래도 나는 롯데를 위해 1984년을 통째로 바쳤어요. 하지만, 그 대가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대가가…”라며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롯데에서 최동원을 내보내기로 결정한 건 선수회 파동 때문이었다. 최동원은 당시 프로야구 팀들이 선수들에 대해 제도적으로 신분을 보장하지 않은 채 ‘상품’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불만이 많았다.그래서 선수회를 결성해 힘을 모으려고 했다. 그러자 한국야구위원회(KBO)와 각 구단이 저지에 나서면서 최동원에게 미운 털이 박혔다. (최동원은 선수회 결성을 시도하면서 ‘법무법인 부산’을 찾아 자문했다. 당시 최동원과 상담한 변호사가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었다.)삼성 유니폼을 입게 된 최동원은 우리가 알던 그 최동원이 아니었다. 롯데에서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한 최동원은 미국으로 떠났다가 1989년 후반기에 복귀했지만 30이닝을 8경기에 나와 1승 2패를 기록하는데 그쳤고, 이듬해 평균자책점 5.28을 기록한 뒤 결국 프로야구 무대를 떠났다.최동원은 은퇴 이듬해였던 1991년 정치계에 입문했지만 낙선한 뒤 방송인으로 변신한다. 야구 해설위원으로 야구계에 돌아온 그는 한화에서 투수 코치로 류현진(30·LA 다저스)을 발굴하는 한편 퓨처스리그(2군) 감독을 맡기도 했다. 그가 프로야구 현장으로 돌아온 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롯데 팬들은 그가 다시 롯데 유니폼을 입을 수 있기를 꿈꿨지만 2009년 7월 4일 시구 때를 제외하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2009년 문을 연 ‘롯데 자이언츠 기념관’에 있는 최동원 자리도 처음에는 텅 빈 상태였다.최동원은 끝내 롯데와 화해하지 못한 채 2011년 9월 14일 지병이던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최동원이 하늘나라로 갈 때 입은 옷은 롯데 시절 입었던 하얀 유니폼이었다. 반면 롯데 관계자들은 별세 이튿날이 되어서야 겨우 빈소를 찾아 팬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 롯데는 최동원의 등번호(11번)을 영구결번했고, 안방 사직구장 앞에 최동원 동상이 들어설 때도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화해를 모색했다. 이제는 아들 최기호 씨가 한때 롯데 구단 프런트로 일할 만큼 관계를 회복한 상태다.“짧고 굵게 야구한 게 내하고 잘 맞는다“던 그는 세상도 그렇게 살고 돌아갔다. 요즘 잘 나가는 후배들을 보면서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을까. “롯데, 야 임마야, 이만하믄 됐다 그라지 말고 가을 끝까지 단디해라!”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학창 시절 과학 시간에 배운 것처럼 아프리카(사진 오른쪽)와 남아메리카는 원래 한 대륙이었습니다. (물론 원래는 모든 대륙이 하나였습니다.) 이것만 똑같은 게 아닙니다. 실제보다 작아 보인다는 것도 공통점이죠. 인터넷을 열심히 하시는 분이라면 ‘아프리카 실제 크기.jpg’ 등으로 유행한 아래 지도를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지도를 그리는 원리(투영법)를 잘 모르시는 분들은 이 그림을 처음 보시면 ‘아프리카가 이렇게 컸나’하고 놀라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공 모양인 지구를 평면에 펼치다 보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겁니다.세계 지도를 그릴 때 흔히 쓰는 ‘메르카토르 도법’은 각도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게 목적입니다. 원래 항해용 지도였기 때문이죠. 대신 방향과 거리는 물론 넓이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합니다. 이 도법으로 그린 위 지도에서 그린란드(약 217만 ㎢)는 아프리카(약 3037㎢)만 하고 비슷한 크기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프리카가 14배 더 큽니다. 그러니 아프리카가 얼마나 넓은지 모르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그러니 아시아어(語)가 따로 없는 것처럼 아프리카어도 마찬가지인데도 ‘아프리카 말’이라는 표현을 쓰는 걸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남아메리카 대륙 역시 같은 이유로 작아 보입니다. 남아메리카 대륙에는 그리스 노르웨이 뉴질랜드 독일 멕시코 미국(본토) 북한 스웨덴 스페인 아일랜드 영국 이탈리아 일본 쿠바 터키 포르투갈 폴란드 프랑스(본토) 핀란드 하와이 한국 등 21개 나라(주)를 모두 넣을 수 있습니다. 아래 그림처럼 말이죠.자세히 보시면 곳곳에 빈 공간이 남아 있습니다. 남아메리카 대륙 면적은 약 1784만 ㎢인데 이 21개 나라 면적을 모두 더하면 1570만3179 ㎢ 정도 나옵니다. 그러니까 남아메리카 대륙이 251만4783 ㎢ 더 넓은 겁니다. 이러면 이 남은 공간에 그린란드를 한 번 더 넣을 수 있습니다. 화면을 위로 올려 세계지도를 한번 다시 보세요. 도저히 말이 되는 것 같죠? 여태 지도에 속아 오셔서 그렇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속지 마세요. 다시는 속지 않겠다는 뜻으로 ‘추천’을 눌러주시면 제게도 큰 힘이 됩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황제는 사실 자기와 별 상관없는 전쟁터에 근위대(황제를 가까이에서 호위하는 부대)를 보내며 말했다. “가서 침략군을 격파하고 한반도에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고 돌아오라. 그리고 이길 때까지 싸워라. 이기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이 에티오피아 황제는 자기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타고 다니던 말 이름을 따 이 부대에 ‘칵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칵뉴는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한다”는 뜻.그 후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 에티오피아군 6037명(연인원)이 한국 땅을 밟았다. 이들은 253차례 싸워 253번 모두 승리했다. 한국전쟁기념재단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에티오피아군 121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다쳤지만, 포로로 잡힌 건 단 한 명도 없었다. 황제가 말한 것처럼 정말 이기거나 죽을 때까지 싸운 것이다.하일레 셀라시에 황제(1892~1975)가 6·25전쟁에 군대를 파견한 건 이탈리아에 침략당한 경험 때문이었다. 1936년 이탈리아군이 쳐들어오자 셀라시에 황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했지만 결국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는 영국으로 망명했고, 1941년 영국군이 이탈리아군을 에티오피아에서 몰아낸 뒤에야 권좌를 되찾을 수 있었다. 6·25 전쟁에 참전한 에티오피아 군인들이 싸워 이기고 돌아간 것만은 아니다. 이들은 월급을 모아 1952년 경기 동두천 시에 ‘보화(Bowha) 고아원(보육원)’을 설립해 전쟁고아를 보살폈다. 전쟁이 멈추고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간 것도 아니다. 에티오피아군은 셀라시에 황제 명령에 따라 휴전 후에도 한반도에 남아 전후 복구를 도왔다. 보화 고아원이 문을 닫은 것도 휴전 후 3년이 지난 1956년이었다. 셀라시에 황제는 1968년 5월 18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 초청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박 대통령은 당시 만찬 인사말을 통해 “폐하는 한국이 공산 침략을 당했을 때 충용(忠勇)스러운 장병들을 보내준 자유의 수호자”라고 평가했다. 셀라시에 황제는 사흘 뒤 한국을 떠나며 “꼭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지만 끝내 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문제는 그가 에티오피아 황가에서 시조로 삼고 있던 솔로몬 왕처럼 슬기롭게 나라를 다스리지 못했다는 점. 에티오피아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는데도 황제는 별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민심이 황제를 떠나자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80)은 1974년 공산주의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해 9월 12일 황제를 폐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공산주의 침략에 맞서 한국에 군대를 파견했지만 자국 내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난 것이다.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뒤 에티오피아는 한동안 한국보다 자신들이 맞서 싸웠던 북한과 더 가까운 나라가 되기도 했다. 내전 끝에 1991년 쫓겨 난 멩기스투가 북한에 몸을 숨겼다는 추측이 나올 정도였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건 “꼭 에티오피아에 답방을 가겠다”던 박정희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약속을 지킨 건 딸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다. 딸 박 전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에티오피아를 찾았다. 이에 앞서 이명박 전 대통령도 2011년 에티오피아를 찾았다. 에티오피아를 방문한 한국 정상은 이 전 대통령이 처음이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역시 이변은 없었습니다. 라파엘 나달(31·스페인·세계랭킹 1위)은 11일 미국 뉴욕 빌리 진 킹 내셔널 테니스센터에서 열린 US 오픈 테니스 대회 남자 단식 결승전에서 케빈 앤더슨(31·남아프리카공화국·32위)에 3-0(6-3, 6-3, 6-4) 완승을 기록했죠.이 우승은 나달의 개인 통산 16번째 메이저 대회 타이틀이었습니다. 이로써 나달은 로저 페더러(36·스위스·2위)가 보유하고 있는 메이저 대회 남자 단식 최다 우승 기록에 3개 차로 다가간 동시에 현역 3위인 노바크 조코비치(30·세르비아·6위)는 4개 차이로 따돌렸습니다. 어쩌면 이 세 선수는 우리 시대 최고가 아니라 역사상 최고 테니스 선수일지 모릅니다.한국 테니스 팬들은 이 셋을 한 데 묶어 ‘빅3’라고 부르기 좋아합니다. 앞선 세 차례 메이저 대회에서도 페더러(호주 오픈, 윔블던)와 나달(프랑스 오픈)이 우승했기 때문에 올해는 2011년 이후 처음으로 4대 메이저 대회 타이틀을 모두 빅3가 차지한 해가 됐습니다. 페더러가 2003년 윔블던에서 개인 통산 첫 번째 메이저 대회 타이틀을 따낸 뒤 열린 메이저 대회는 모두 58번. 이 중 이 세 선수가 우승 트로피를 가져간 게 81.0%(47번)입니다. 같은 기간 메이저 대회 남자 단식은 총 7366경기가 열렸습니다. 이 세 선수는 이 중 10.1%에 해당하는 743승을 챙겼습니다. 참고로 메이저 대회에 한 번에 단식에 참여하는 선수는 128명입니다. 또 이 세 선수는 지난해 11월 앤디 머리(30·영국·3위)에게 1위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 13년 동안 번갈아 가면서 랭킹 1위 자리를 지키기도 했습니다. 나달이 현재 자리를 시즌 끝까지 유지하면 개인 통산 네 번째로 연말 랭킹 1위로 한 해를 마감하게 됩니다.이 기간 빅3 다음으로 메이저 타이틀을 가장 많이 가져간 건 머리와 스탄타니슬라스 바브링카(32·스위스·8위)였습니다. 두 선수 모두 세 번씩 메이저 대회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죠. 그래도 랭킹 1위를 경험한 데다 전체 남자프로테니스(ATP)투어 성적에서 머리가 앞서기 때문에 해외 언론에서는 빅3에 머리를 포함해 ‘빅4’ 또는 ‘빅3.5’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머리를 포함해 빅4로 따져 보면 이 네 선수가 모두 출전한 ATP투어 대회는 총 100개. 이 중 88개 대회가 이 네 명 중 한 명이 우승하는 거로 끝났습니다. 이들이 우승하지 못한 12개 대회 중 메이저 대회는 총 세 번. 먼저 후안 마르틴 델 포트로(29·아르헨티나·24위)가 2009년 US 오픈에서 우승했습니다. 이어 바브링카가 2014년 호주 오픈, 2015년 프랑스 오픈 챔피언 자리에 올랐죠.빅3 사이 맞대결 전적에서는 나달이 49승 36패(승률 57.6%)로 앞서 있습니다. 이유는 역시 클레이 코트. ‘클레이 코트의 황제’ 나달은 클레이 코트에서 두 선수를 상대로 승률 75.7%(28승 9패)를 기록했습니다. 나달은 머리를 상대로는 클레이 코트에서 7승 2패(승률 77.8%)를 기록 중이죠.재미있는 건 나달과 페더러가 US 오픈에서 아직 단 한번도 맞대결을 벌인 적이 없다는 것. 만약 올해 대회에서 두 선수 모두 4강에 진출했다면 US 오픈 첫 맞대결을 벌일 수 있었지만 페더러가 8강에서 탈락하며 다음 기회를 기약하게 됐습니다. 통계적으로 계산하면 두 선수가 여태 US 오픈 4강에서 만났어야 확률은 39%지만 벌어지지 않은 건 벌어지지 않은 일입니다. 역시 비키니가 그렇듯 통계 데이터는 참 많은 걸 보여줘도 모든 걸 보여주지는 못합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정답은 없습니다. 그 어떤 프로야구팀도 신인 지명 회의(드래프트)에서 이승엽(41·삼성)을 지명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인 입단 방식’이 지금과 달랐던 겁니다.오늘(9월 11일)은 2018 프로야구 2차 신인 드래프트가 있는 날입니다. 한국 프로야구(KBO 리그)는 선수 보류(保留) 조항이 있는 폐쇄형 리그입니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 학교를 나온 선수가 프로야구 무대에서 뛰려면 드래프트를 거치거나 아니면 육성선수(옛 연습생)로 입단한 다음 정식선수로 신분을 바꿔야 합니다. 그런데 1995년까지는 ‘고졸 연고 자유계약’ 혹은 ‘연고지명’이라고 부르는 제도가 따로 있었습니다. 각 구단은 이 제도를 활용해 연고 지역 고교 3학년 선수하고는 지명 절차 없이 입단 계약을 맺는 게 가능했습니다. 그냥 계약만 하면 곧바로 입단입니다. 1995년 경북고를 졸업한 이승엽 역시 이 제도로 삼성에 입단한 케이스입니다. 프로야구 초창기에 이렇게 연고 지역 선수 영입 문호를 넓혀둔 건 물론 고교야구 인기를 프로야구로 연결하려는 의도였습니다. 1986년까지는 아예 대졸 선수도 연고 지역 고교를 졸업했다면 인원 제한 없이 1차 지명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연고 지역 선수를 무한정 영입할 수 있는 건 미국은 물론 고교 야구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일본에도 없는 제도였습니다.이 제도 원산지는 쿠바. 이용일 KBO 초대 사무총장은 대한야구협회(KBA) 부회장이던 1978년 쿠바야구협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나라(쿠바)에서는 모든 선수가 고향 팀에서만 뛴다. 그래서 야구가 국민 스포츠가 됐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전 총장은 이 논리로 1981년 정권 실세들을 설득했습니다. ‘반공’의 서슬이 시퍼렇던 그때 군사정권에서 공산주의자 피델 카스트로의 야구 제도를 받아들이게 만들었습니다. 1995년에도 대졸자는 드래프트를 거쳐야 했기에 이승엽이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2.5점만 더 받았어도 지명 절차가 필요했을지 모릅니다. 원래 이승엽은 고교를 졸업하면 한양대에 진학할 예정이었거든요. 무엇보다 아버지 이춘광 씨가 아들의 대학 진학을 바랐습니다. 이승엽은 심지어 고교 졸업 전에 한양대에서 미리 ‘예비 대학생’ 생활도 했습니다. 묘한 분위기가 퍼진 건 여름방학 이후 삼성이 적극적으로 러브콜을 보내면서부터.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낀 한양대는 수능 날 아침 야구부 관계자를 보내 이승엽이 고사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이승엽이 수능에서 37.5점을 받는 바람에 입학할 수 없게 됐습니다. 당시 체육 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하려면 최소 40점은 받아야 했거든요. 대학 진학보다 삼성 입단 쪽으로 마음이 기운 이승엽이 1교시 시험만 보고 고사장에서 당구장으로 도망쳐 생긴 일입니다. (이건 아버지 이춘광 씨 이야기. 이승엽 본인은 “1교시만 실력으로 보고 나머지 시간은 그냥 찍었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한양대에서 반발하자 이승엽은 일반 수험생 자격으로 입학시험을 치르겠다고 밝히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양대에서 희망하던 일이었을 뿐. 당시에는 이런 제도 때문에 이승엽 뿐만아니라 각 프로 구단에서 이런 식으로 대학에 가려던 선수를 빼 오는 일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야구위원회(KBO)는 1996년부터 고졸 선수도 드래프트를 거쳐야 하는 것으로 규정을 바꿉니다. 또 이렇게 지명 받은 선수가 대학 졸업 때까지 구단 보류권을 인정하게 제도를 손질하면서 지명을 받은 선수도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문제는 당시 2차 지명 인원 제한이 없었다는 것. 그 결과 이해 신인 드래프트 때 쌍방울은 28명을 지명했고, 삼성과 현대도 각 25명을 뽑았습니다. 한화와 해태(현 KIA)에서 지명한 숫자도 23명이나 됐습니다. 그렇게 8개 구단에서 180명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2차 지명이 끝났습니다. 최대 10명까지 지명할 수 있는 현재 제도를 적용하면 8개 구단인 당시는 80명이 한계였는데 100명(125%)을 더 뽑았던 겁니다. 결국 KBO는 이듬해 2차 지명 선수를 12명으로 줄였습니다.1995학년도 수능 때 이승엽만 일부러 시험을 망쳤던 건 아닙니다. 이승엽은 한양대에서 막내 생활을 함께하던 경남상고(현 부경고) 3학년 김건덕(1976~2016)에게도 “우리 수능 떨어지자(망치자)”고 제안을 합니다. 그래서 둘은 1번부터 5번까지는 1번, 6번부터 10번까지는 2번, 이런 식으로 답을 적었습니다. 김건덕도 시험을 망치고 아버지께 “지 시험 떨어졌으예”라고 이야기했지만 “니는 실업계(현 전문계)라 수능 커트라인은 의미가 없다”는 답을 듣고 말았습니다. 하릴없이 한양대로 돌아가 연습을 마치고 TV를 보는데 마침 친구가 삼성 입단식을 하는 장면을 보게 된 겁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이승엽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들려오는 한 마디. “친구야, 내는 인문계다.”김건덕은 청소년 대표팀 에이스를 지낸 유망주 중 유망주였지만 그런 투수들에게 으레 생기는 일처럼 어깨 부상이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는 대학 졸업반이던 1998년 신인 드래프트 대상자였지만 결국 이름을 불러주는 팀을 만나지 못해 유니폼을 벗어야 했습니다. 이후 아마추어 야구에서 지도자로 생활하다 지난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오늘도 누군가는 제일 먼저 이름이 불리고, 누군가는 100번째까지 기다려도 끝내 자기 이름을 듣지 못할 터. 그래도 열아홉, 스물셋은 아직 성패를 논하기에 너무 이른 나이입니다. 야구에서 실패했다고 인생에서 실패하는 것도 아닙니다. 국민 타자 이승엽도 시작은 실패한 투수였습니다. ‘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믿었기에 우리는 이승엽이 실패한 투수였다는 사실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마침표를 예쁘게 찍는 자만이 처음을 남깁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만약 1956년(대약진 운동 전)에 서거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중국 인민의 위대한 지도자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가 1966년(문화대혁명 전)에만 서거했어도 뛰어난 공이 조금 빛이 바랠지언정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1976년에 서거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 중국 최고지도자는 1981년 이렇게 말했다. 그가 이렇게 평가한 사람은 바로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 중국 초대 주석이었다. 41년 전 오늘자(9월 10일) 동아일보는 바로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난 소식을 전했다. 역사는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영웅인 동시에 1950년대 대약진 운동으로 수천만 명을 굶어죽게 만들고, 문화대혁명으로 중국 문화를 퇴보시킨 독재자였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덩샤오핑 시대에 등장했던 표현이 바로 ‘공7 과3(功七過三·공이 7할, 잘못이 3할)’이다.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가 내리막길을 걷게 된 배경 중 하나가 6·25전쟁이다. 전쟁 중반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북상하자 마오는 “순망치한(脣亡齒寒·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을 외치며 “중국 본토에서 미군과 싸우는 것보다 한반도에서 싸우는 게 낫다”면서 ‘인민지원군’ 60만 명을 파병했다. 마오쩌둥이 ‘인민해방군’이라는 공식 명칭 대신 파병 부대에 이런 이름을 붙인 건 중국 정부가 유엔과 직접 맞서는 모양새를 피하려는 의도였다. 물론 결과는 실패였다. 안세영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6·25전쟁) 참전 후유증을 가장 오래 겪은 나라는 아마 중국일 것”이라며 “국제사회에서 침략자라는 낙인을 피하지 못했고 중국은 죽(竹)의 장막에 갇히다 보니 극단적인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같은 과오를 범했다”고 평가했다. 이 때문에 중국은 제대로 국가를 발전시킬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한국으로서는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경제사학자 중에서는 중국이 문화대혁명(1966~76년)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면 당시 한국이 경제 발전을 이루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분석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마오쩌둥은 한국인들에게도 6·25전쟁 당시 북진 통일을 실패하게 만든 원흉인 동시에 경제 발전을 도운 ‘도우미’였던 셈이다. 6·25전쟁은 마오쩌둥 가족에게도 불행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 참전했던 큰아들 마오안잉(毛岸英·당시 28)이 1950년 11월 25일 평북 삭주군에서 미군기 폭격을 받아 숨졌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도 평북 회창군에 있는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부 열사릉원에 묻혀 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카탈루냐에 또 한번 독립운동이 불붙었습니다. 스페인 카탈루냐 자치 지방(comunidad aut¤noma) 의회는 6일(현지시간) 11시간에 걸친 논쟁 끝에 주민투표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카탈루냐 사람들은 10월 1일 분리독립에 대한 찬반을 묻는 주민 투표를 진행할 수 있게 됐죠. 스페인 헌법재판소는 2014년 분리독립 투표 때 이미 ‘카탈루냐 독립은 위헌’이라고 선언한 상태. 이번에 찬성표가 더 많이 나온다고 해도 실제로 독립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래도 찬성표가 더 많이 나오면 정치적인 명분을 얻을 수 있고, 이를 토대로 카탈루냐 지방에서 중앙 정부에 자치권을 더 많이 요구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런데 도대체 카탈루냐주 지방은 왜 이렇게 스페인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할까요? 스페인 북동부에 있는 카탈루냐 지방은 아라곤 왕국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반면 수도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한 중남부는 카스티야 왕국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469년 아라곤 왕 페르난도와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이 결혼하면서 현재 스페인의 토대를 마련하게 됩니다.이 결혼동맹은 ‘왕가의 사정’이었을 뿐 민초들은 이후에도 자치권을 인정받은 상태로 서로 다른 정체성을 지닌 채 살았습니다. 문제는 줄을 잘못 섰다는 것. 스페인에서는 1701~14년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났는데 카탈루냐는 왕이 되지 못한 쪽 편을 들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해 왕이 된 펠리페 5세는 1716년 카탈루냐 지방을 주(州)로 강등시켰죠. 그렇게 스페인 일원으로 자리 잡나 싶던 카탈루냐 지방에서 다시 분리주의 움직임이 일게 된 건 민족주의 바람이 휘몰아친 20세기 초반이었습니다. 그러다 1938년부터 1975년까지 독재 권력을 휘두른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이 지역 문화를 탄압하면서 독립 열망이 더욱 커지게 됐죠. 당시 카탈루냐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자연스럽게 모국어(카탈루냐어)로 대화를 주고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헌병대에 끌려가기까지 했습니다. 프랑코가 세상을 떠난 뒤 카탈루냐는 다시 자치권을 얻었지만 한번 떠난 마음이 쉽게 돌아올 리가 있나요? 마음이 떠났으면 이제 돈 문제가 따라올 차례. 카탈루냐는 지난해 지역총생산(GRP) 2236억2900만 유로(약 301조6286억 원)를 기록했습니다. 이는 스페인 국내총생산(GDP) 1조1138억5100만 유로 중 5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 스페인을 구성하는 17개 자치 지방 중 1위에 해당합니다. 당연히 세금도 그만큼 많이 내겠죠. 카탈루냐 사람들은 자기들이 낸 세금을 중앙 정부에서 카스티야 지방이나 상대적으로 빈곤한 남부 지방에만 쓰고 있다며 불만이 많습니다.유럽에서는 카탈루냐 이외에도 분리 독립을 꿈꾸는 지역이 적지 않습니다. 스페인 안에서는 카탈루냐뿐 아니라 바스크도 독립을 원하고 있습니다. 바스크 사람들 역시 프랑크 독재 정권에 시달렸고, 무장 단체 ETA(바스크 조국과 자유)가 최근까지도 계속 독립 투쟁을 벌였습니다.스코틀랜드 역시 카탈루냐 못지 않게 독립 열망이 큰 곳으로 유명합니다. 소설 ‘플랜더스의 개’로 친숙한 플라망(네덜란드어로 플란데런) 지방도 벨기에로부터 독립을 원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남부 왈롱 지방과 서로 떨어지고 싶어하는 겁니다. 벨기에는 네덜란드어를 쓰는 플라망 지방과 프랑스어를 쓰는 왈롱 지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플라망 지방을 분리 독립을, 왈롱 지방은 프랑스에서 합병하기를 희망하고 있죠.독일 바이에른 주는 텔레비전에서 독일 국가보다 바이에른 주가(州歌)를 먼저 연주할 정도로 지역색이 강합니다. 여기도 문제는 역시 돈. 당장 독일 연방 탈퇴 선언을 할 확률은 희박하지만 매년 자기들이 낸 세금 중 40억 유로(약 5조3990억 원) 정도를 가난한 지역에 지원하는 데 불만은 많은 상태입니다. 바이에른 주 정부는 독일(.de)과 별도로 인터넷 도메인(.bayern)도 마련한 상태입니다.이탈리아 역시 상대적으로 더 잘사는 북부가 불만입니다. 롬바르디아 주는 자기들만 별도 독립하는 게 아니라 아예 이탈리아 북부 연맹을 따로 만들자고 제안할 정도입니다. 롬바르디아주 동쪽에 있는 있는 베네토 주에서도 비슷한 목소리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베테노 주는 베네치아가 있는 곳입니다. 볼차노현도 이탈리아 북부에 자리 잡고 있지만 사정은 조금 다릅니다. 독일어 구사자가 75% 이상인 이 지역은 원래 오스트리아 영토였고, 다시 오스트리아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지중해 있는 섬 코르시카는 지리적으로 프랑스보다 이탈리아에 더 가깝고, 1767년까지는 제노바 공화국 영토였습니다. 그때부터 이 지역 사람들이 하도 반란을 많이 일으켜 제노바에서 프랑스에 넘기는(팔아버린) 바람에 프랑스령이 됐습니다. 이후 나폴레옹을 배출하면서 정서적으로 프랑스의 일원이 됐지만, 다시금 독립을 주장하는 이들이 고개를 들고 있죠.2008년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코소보는 현재 100개가 넘는 나라에서 독립국으로 승인한 사실상 독립 국가입니다. 단, 세르비아는 물론이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인 러시아와 중국이 독립을 인정하지 않아 아직 유엔에는 가입하지 못한 상태입니다.몰도바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자리 잡은 트란스니스트리아는 1991년 옛 소련 붕괴 때 몰도바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그 후 대통령을 뽑는 등 정부를 꾸려 사실상 독립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 지역 사람들은 몰도바에서 독립하면 러시아에서 합병해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러시아에서도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몰도바는 공식적으로 이 나라를 자국 안에 있는 자치 국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정말입니다. 마광수 교수(1951~2017)가 없었다면 우리는 여태 윤동주 시인(1917~45)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할지 모릅니다. 기형도 시인이 세상 빛을 보게 된 것도 마 교수 덕분입니다. 이제 윤 시인은 ‘국민 시인’이라고 불러도 모자람이 없는 인물. 하지만 1980년대 초반까지도 윤 시인은 이 정도 평가를 받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정부에서 1990년 광복절이 되어서야 윤 시인에게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는 게 그 방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윤 시인이 명성을 얻게 된 건 마 교수가 1983년 쓴 박사 논문 ‘윤동주 연구: 그의 시에 나타난 상징적 표현을 중심으로’ 덕분이었죠. 마 교수는 이 논문에서 국문학 역사상 처음으로 윤 시인의 모든 시를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쓴 시에 ‘부끄러움’이라는 정서에 깔려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대비 문제집에서 윤 시인 시를 해설한 내용은 거의 이 논문에서 따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마 교수는 이 논문에 “그의 시에 나타나는 자학적이며 자기부정적인 이미지의 대표적 보기를 들면 이 점이 분명해진다. 앞서 말했듯 ‘부끄러움’이란 시어가 나오는 작품이 10편이나 되는데, 이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시인들이 표피적 정서나 표피적 이데올로기(또는 사상)만을 좇는 경향과 비교해 보면 가히 파격적이리만큼 독특한 문학세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썼습니다.마 교수는 또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이상하게도 ‘투사’보다는 ‘유약하지만 솔직한 사람’을 한 시대의 상징적 희생물로 만드는 일이 많다. 윤동주는 바로 그러한 역사의 희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일제 말 암흑기, 우리 문학의 공백을 밤하늘의 별빛처럼 찬연히 채워주었다.”마 교수는 소설이나 에세이를 쓰는 산문 작가로 유명하지만 원래는 청록파 시인 박두진(1916~98)의 추천으로 등단한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1983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된 뒤 이듬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예심 심사위원을 지냈습니다. 응모작 3000편 중 15편 정도를 골라 본심에 올리는 게 그의 임무. 그해(1985년) 최종 당선작으로 뽑힌 게 바로 기 시인이 쓴 ‘안개’였습니다.그러나 마 교수는 이 시를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예심을 보던 중 어떤 응모작이 전혀 마음에 안 들어서 낙선작으로 던져 버리고 난 직후에 무슨 텔레파시 같은 육감이 느껴져서 던져버린 작품을 다시 집어 들고 보니 작자가 (내가 지도 교수로 있던 연세문학회 회원) 기형도 군이었다. 그래서 완전히 인맥으로 그의 시를 특별히 뽑은 것이다. 사실 공정한 심사위원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행위였다”고 말했습니다.마 교수는 끝까지 기 시인을 크게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2009년 여성동아를 통해 가수 조영남 씨와 대담을 하면서 “기형도는 난해해. ‘물속의 사막’, 이게 무슨 소리야.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는 시구가 있는 시 제목이 ‘빈집’이야. 무슨 연관이 있어?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알고나 기형도를 좋아하는 걸까. 어려운 글은 무조건 못쓴 글”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시구로 유명한 안도현 시인(52·우석대 교수)이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라는 시로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될 때도 마 교수가 예심 심사위원이었죠. 마 교수와 동아일보의 인연은 한양대 강사 시절이던 1977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는 그해 4월 11일자 동아일보에 ’세상을 그르치는 신념의 공해‘라는 칼럼을 실었습니다. 마 교수는 이 글에서 ”단발령을 내렸을 때 땅을 치며 통곡하던 유생(儒生)들의 애절한 신념, 그 편협한 선비주의적 신념의 잔재가 아직도 우리들에게는 미덕으로 남아 있다“면서 ”이 세상의 악과 불행은 ’이상의 결핍‘ 때문에 비롯되지 않는다. 되레 모든 악과 불행은 오로지 ’잘못된 이상‘, ’잘못된 신념‘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유약하지만 솔직한 사람‘이었던 마 교수가 일생을 떠받친 신념은 아마도 ”위선적인 성(性)문화를 바로 잡자“는 것이었을 터. 하지만 여전히 ’선비주의적 신념‘이 지배하던 시대는 쉽게 마 교수의 신념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는 희생양이 되어야 했습니다. 소설 ’즐거운 사라‘를 쓴 죄로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그는 최근까지도 ”사회적으로 학살당했다“며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마 교수는 우리에게 윤동주와 기형도를 남긴 채 자기 시집 제목 ’모든 것은 슬프게 간다‘처럼 떠났습니다.”현실적, 현실적으로 되어 나도 화장을 하고 싶다/분(粉)으로 덕지덕지 얼굴을 가리고 싶다/귀걸이, 목걸이, 팔찌라도 하여/내 몸을 주렁주렁 감싸 안고 싶다/현실적으로/진짜 현실적으로“ - 마 교수 시 ’나는 야한 여자다 좋다‘ 중에서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오늘(6일)은 전국 예비 대입 수험생들이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마지막 전국연합합력평가(모의고사)를 치르는 날. 이제는 대학 정원이 대입 희망자 숫자를 추월한 시대가 됐지만 그래도 저마다 희망 대학이 다르기 때문에 노력을 게을리 할 수는 없다. 이때 ‘대학 정원’은 입학 정원을 가리키는 말. 하지만 1980년대 초반에는 ‘대학 정원= 졸업 정원’인 시절도 있었다. 전두환 정권이 만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1980년 8월 30일 대학졸업제도를 마련했다. 문교부(현 교육부)는 그해 9월 5일 ‘학과별 최소졸업정원제’ 내용을 담은 교육개혁 시안을 발표했다. 졸업 정원보다 30% 가량 신입생을 더 뽑은 다음 학기가 끝날 때마다 일정 비율을 제적해 졸업 때 정원을 맞추는 방식이었다. 사실 ‘입학 문은 넓게, 졸업 문을 좁게’라는 방침은 선진국에서 대부분 채택하고 있는 대학 학사 방식이었다. 문제는 일률적으로 30%를 중도에 탈락시켜야 한다는 점. 학점도 무조건 상대평가 방식으로 매겨야 했다. 학생들은 서로 캠퍼스의 낭만을 나누는 친구가 아니라 네가 살아남으면 내가 죽어야 하는 경쟁자가 됐다. 나중에는 이 제도 때문에 중도 탈락할 것을 우려한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까지 있었다.결국 문교부는 1985년부터 초과 모집 비율을 대학이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도록 제도를 손질하면서 졸업정원제를 사실상 폐지했다. 1988년부터는 아예 입학정원제도 돌아갔다. 이와 함께 졸업정원제로 탈락한 학생이 다시 재입학할 수 있는 길도 열어주었다. 당초 정부 예상과 달리 이 제도가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대학에 면학 분위기를 조성해 시위를 막아보려는 의도 역시 군사정권에서 이 제도를 도입한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대학생이 늘어나면서 운동권 인재 풀(pool)이 넓어져 오히려 학생 운동이 사회 곳곳까지 침투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3일(현지 시간) 트위터에 “미국은 북한과 비즈니스를 하는 어떤 나라와도 무역을 끊을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트럼프 대통령은 이에 앞서 “중국이 북한에 더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이를 두고 미국이 중국 제재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사실 중국은 북한이 비즈니스를 하는 유일한 ‘주요 파트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5일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만든 웹사이트 ‘경제복합성 관측소(OEC·The Observatory of Economic Complexity)’에 따르면 2015년 기준으로 북한 전체 수입량 중 85.0%가 중국에서 오고, 전체 수출량 중 83.0%가 중국으로 나갑니다.중국 다음으로 북한과 교역을 많이 하는 나라는 인도(수입 비중 3.1%, 수출 비중 3.5%)였습니다. 특이한 건 서아프리카에 있는 나라 부르키나파소에서 북한 전체 수출액 중 1.2%(약 3280만 달러)를 수입한다는 사실인데요. 재미있는 건 부르키나파소는 ‘정직한 사람들의 나라’라는 뜻이라네요.품목별로 북한이 제일 많이 수입하는 건 석유(Refined Petroleum)로 2015년 한 해 동안 1억8600만 달러 어치를 사들였습니다. 제일 많이 수출하는 건 9억5100만 달러에 해당하는 석탄(Coal Briquettes)이었습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핵실험’을 하면 왜 ‘지진’이 날까요?정답은 ‘지하에서 폭탄을 터뜨려서’입니다. 1945년 처음 핵무기를 만든 뒤 70년 넘게 흐르는 동안 전 세계에서 이 무기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시험한 건 2000번 정도 됩니다. 이 중 4분의 3 정도가 지하 핵실험이었습니다.핵무기도 기본적으로 ‘폭탄’입니다. 폭탄은 폭발할 때 바깥으로 튀어나가려는 에너지로 적에게 피해를 입히는 무기. 땅속에서 이 에너지가 뻗어나가면서 땅이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핵실험을 하면 순간적으로 ‘인공 지진’이 일어나고 다른 지진과 마찬가지로 규모를 측정할 수 있게 되죠. 북한이 3일 강행한 6차 핵실험 규모는 기상청 발표 기준으로 5.7이었습니다.●리히터(릭터) 규모란 무엇인가 그러면 여기서 규모는 뭘까요? 학창시절 과학 시간에 공부를 열심히 하신 분이라면 이 순간 ‘리히터 규모’라는 낱말을 떠올리실 겁니다. 리히터 규모는 찰스 릭터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1900~85·아래 사진)가 1935년 처음 고안했습니다. 조상이 독일계라 예전에는 ‘Richter’라는 성(姓)을 ‘리히터’라고 적었죠. 그래서 많은 분에게 여전히 리히터 규모라는 표현이 익숙하지만 릭터 규모라는 말도 씁니다.리히터 규모는 진앙(震央)에서 100㎞ 떨어진 지점에서 측정합니다. 이때 지진계가 진폭 1mm인 파형을 그리면 리히터 규모 3입니다. 딱 100㎞ 떨어진 지점에 반드시 지진계가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기에 여러 곳에서 자료를 측정해 보정 과정을 거칩니다. 이런 이유로 발표 기관마다 규모가 다르거나 똑같은 지진에 대해 나중에 규모가 바뀌기도 합니다. 또 파형과 거리에 따라 다른 공식을 쓰는 것도 발표 기관마다 리히터 규모를 다르게 발표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그런데 왜 1mm일 때 규모가 1이 아니라 3일까요? 그건 지진계가 1000분의 1mm인 미크론을 단위로 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1mm는 1000미크론이 되겠죠? 눈치가 빠른 분은 이미 아시겠지만 리히터 규모는 상용로그값입니다. 수학 시간에 배운 것처럼 상용로그는 밑을 10으로 하는 로그값입니다. 10^3=1000이기 때문에 1mm일 때 규모가 3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리히터 규모가 1이 커지면 진폭은 얼마나 커질까요? 이걸 알아보려면 상용로그값이 1이 나오는 숫자를 찾아야겠죠? 그럼 10이 답이니까 10배가 정답입니다. 2 차이가 나면? 네, 이번에는 100배가 정답입니다. 수학 시간에 로그 같을 걸 배워서 뭐 하나 싶어도 다 쓸 데가 있던 겁니다.이렇게 지진계가 흔들리면 에너지가 나오겠죠? 이 에너지는 진폭 차이의 1.5제곱만큼 커집니다. 그래서 리히터 규모가 1 차이가 나면 언론에서는 보통 32배 차이가 난다고 표현합니다. 10의 1.5승이 31.6227766이거든요. 2 차이가 나면? 1000배 차이입니다. ((10^1.5)^2)=1000이니까요. 물론 수학 문제를 푸실 게 아니면 이걸 기억하고 계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그렇다고 이해하고 넘어가시면 그만입니다.●히로시마 몇 배는 어떻게 계산할까이렇게 공식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핵실험 파괴력을 다른 폭탄하고 비교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주로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첫 번째 원자폭탄 ‘리틀보이’와 비교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예를 들어 이번 북한 핵실험은 히로시마 원자폭탄 3~4배라는 평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건 어떻게 하는 걸까요?유용규 기상청 기상화산감시과장은 “‘규모 = 0.84 × TNT양(kt) 로그값 + 4.28’로 계산할 수 있다”며 “이를 역산하면 규모 5.7은 TNT 50kt에 해당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kt는 ‘킬로톤’이라고 읽죠. 1000t이 1kt입니다.히로시마에 떨어진 리틀보이는 보통 TNT 15kt로 환산합니다. 15×3=45, 15×4=60이니까 50kt인 이번 북한 핵실험 파괴력이 히로시마 원자폭탄 3~4배라는 평가가 자연스레 따라오는 겁니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은 이번 지진 규모를 6.3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기상청에서 얻은 공식에 넣어보면 TNT 290kt도 규모 6.3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번 북한 핵 실험은 리틀보이 보다 20배 가까이 파괴력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어느 쪽이 맞는지 알 수 없지만 북한이 너무 무모한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만큼은 틀림없습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북핵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ICBM’이라는 낱말이 등장합니다. 다들 잘 아시는 것처럼 ICBM은 ‘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에서 머리글자를 딴 표현입니다. 한국 언론에서는 흔히 이를 ‘대륙간탄도미사일’이라고 번역하죠. 그러니까 ICBM 자체에는 어디에도 핵무기라는 뜻이 들어있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도 ‘ICBM = 핵무기’ 공식이 성립하는 이유는 뭘까요?일단 낱말부터 차근차근 풀어보겠습니다. ‘대륙간’이라는 말은 ‘대륙 사이’라는 뜻이겠죠. 대륙 사이는 먼 거리를 뜻할 겁니다. ICBM은 사거리 5500㎞을 넘겨야 합니다. 미사일은 뭔지 아실 테니 이제 ‘탄도’라는 낱말이 남았습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탄도(彈道)는 ‘발사된 탄알이나 미사일이 목표에 이르기까지 그리는 선’이라는 뜻이죠. 이것만으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개념이 헷갈릴 때는 반대말을 알아보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탄도 미사일 반대말로는 ‘순항 미사일’을 꼽을 수 있습니다. 순항 미사일은 영어를 그대로 읽어 ‘크루즈 미사일(Cruise Missile)’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비행기처럼 제트 엔진과 날개를 가지고 하늘로 뜨는 힘, 즉 양력(揚力)을 이용해 목표까지 날아갑니다. 비행 중에 고도나 속도를 바꾸지 않고 순항(順航)한다 해서 순항 미사일입니다. 순항 미사일이 수평에 가까운 개념이라면 탄토 미사일은 수직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ICBM은 수직으로 발사했다가 30도로 기운 채 목표를 향해 날아갑니다. 인공위성 등을 쏘아 올리는 우주 로켓이 계속 하늘 높이 올라가는 데 반해 ICBM은 일정 고도에 도달하면 기울기 때문에 비행 궤적을 보고 발사체가 우주 로켓인지 ICBM인지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위 그래픽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ICBM은 대기권 바깥으로 나갔다가 들어옵니다. 이 대기권 재돌입이 바로 ICBM 핵심 기술입니다. 북한은 이미 미사일을 멀리 보내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ICBM 개발에 성공했느냐 아니냐는 논란은 이 대기권 재돌입 기술을 확보했느냐 그렇지 않으냐를 따지는 거죠.이렇게 높이 올라갔다가 떨어질 때 목표 지점에 정확히 도달하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미사일 정확도를 측정할 때는 CEP(Circular Error Probable·원형공산오차)라는 개념을 씁니다. CEP는 미사일 50% 착탄 반경을 가지고 측정합니다. 예를 들어 CEP가 100m라면 발사한 미사일 50%는 반지름 100m 안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최신 ICBM이 보통 기준으로 삼는 게 CEP 100m입니다.이 정도 정확도를 선보이려면 발사지점과 목표지점을 m 단위까지 정확하게 입력해야 하는 건 물론, 목표 지점 상공의 공기 밀도(온도에 따라 달라집니다)를 예상해 초속 3㎝ 이상 차이가 나지 않게 ICBM 속도를 측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이건 ICBM이 아니더라도 어렵고 또 어려운 일입니다. 아예 ‘탄도학’이라는 학문이 따로 있을 정도. 표준국어대사전은 이 학문을 “발사한 탄환이 날아가는 방식을 연구하는 학문. 중력, 공기 저항, 탄환의 회전, 풍력, 지구의 자전 따위를 고려하여야 하기 때문에 방대한 수치 계산이 필요하며 초기 컴퓨터 개발의 요인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죠.이렇게 멀리 또 정확하게 날아가는 미사일을 만들려면 돈이 아주 많이 들겠죠? 그래서 핵탄두를 쓸 정도가 아니면 일반적으로 ICBM을 만들지 않습니다. 세계에서 국방비를 제일 많이 쓰는 미국조차 2006년에야 비핵탄두 ICBM 개발을 시작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ICBM = 핵무기’가 되는 겁니다.핵무기 자체는 세계 2차 대전 때처럼 전략폭격기에서 쏠 수도 있고, 순항미사일에 탑재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대포로 쏘는 것도 가능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만들면 상대방이 요격하기가 너무 쉽다는 겁니다. 이 역시 ‘핵무기 = ICBM’인 이유입니다.핵탄두가 대기권으로 재돌입할 때 속도는 마하 25~30 정도(시속 30만600~36만720㎞)입니다. 대기권 안으로 들어온 뒤에도 마하 20 정도로 낙하합니다. 이에 비하면 ‘거북이’라고 할 수 있는 미 공군 SR71 블랙버드(최고 속도 마하 3.3)도 실전에서 한 번도 격추당한 적이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입니다. 게다가 상대방 방어용 미사일 전파를 교란하는 채프까지 뿌리기 때문에 대기권에 재돌입한 ICBM을 요격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그래서 그 전까지는 ICBM이 대기권에 도달하기 전에 요격하는 게 일반적인 ICBM 대응책이었습니다. 이 개념을 바꾼 게 바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죠. THAAD에서 맨 처음 T는 ‘Terminal’ 즉 맨 끝이라는 뜻입니다. 탄두가 재진입해 낙하하고 있는 최후 상황에서 요격을 맡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대부분 알고 계시겠지만 혹시 모르셨다면, 핵과 ICBM, 그리고 사드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제 아시겠죠?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