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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은 육체를 가진 국가다. 대표팀이 취해야 할 스타일을 논의할 때 사람들은 종종 국가가 지향해야 할 자세를 논의하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 기자 출신 칼럼리스트 사이먼 쿠퍼는 이렇게 썼다. 그는 축구 칼럼리스트지만 비단 축구만 그런 건 아니다. ‘극일(克日·일본을 이김) 정신’이 없었다면 한국 스포츠가 단기간에 이렇게 성장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일본이 하는 건 우리도 다해야 했다. 일본은 1964년 도쿄(東京) 올림픽 때 ‘맛배기’로 유도를 정식종목에 포함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유도는 1972년 뮌헨 대회 때부터 한번도 올림픽 공식종목에서 빠지지 않고 있다. 한국도 88서울올림픽 개최권을 따내자 똑같은 길을 걷기로 작정했다. 서울 대회 때 태권도를 시범종목으로 포함시키는 데 성공했고, 1994년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를 통해 올림픽 공식종목으로 만들었다. ‘만들었다’는 낱말을 쓴 건 IOC에서 태권도를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한 게 김운용 당시 IOC 부위원장 겸 세계태권도연맹(WT) 총재 개인 능력으로 이룬 성과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번 성과가 전체 태권도인들의 단결된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김 총재의 IOC 내 정치적 역량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에서 볼 때 국내외 태권도 관계자들의 결집이 어떤 것보다 우선해서 이루어져야 할 과제”라고 평가했다.당시 IOC에서 올림픽 정식종목을 채택할 때는 서로 엇비슷한 종목 중 하나만 고르는 게 원칙이었다. 태권도가 올림픽 종식 종목이 되면서 일본에서 정식종목으로 밀던 가라테(空手道)가 밀렸다. 태권도 정식종목 채택이 극일인 이유다. 가라테는 ‘어젠다 2020’에 따라 개최국에서 정식종목 추가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된 2020년 도쿄 대회 때가 되어서야 정식종목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대한태권도협회에서 처음 올림픽 정식 종목 진입을 추진할 때는 세부종목을 겨루기(대전)와 품새로 나눌 방침이었다. 그러나 품새는 판정 시비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한 데다 ‘재미없다’는 의견이 우세했기에 겨루기에 다걸기(올인)하기로 방침을 바꿨다. 겨루기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IOC는 경기 중 선수가 다쳐 병원으로 실려 가는 일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머리 보호대와 가슴 보호구를 착용하고 경기를 하도록 규칙을 손질하고 나서야 태권도는 올림픽 정식종목이 될 수 있었다. 문제는 보호 장비 도입으로 인해 수비형 전술이 대세로 자리매김하면서 결국 겨루기 방식도 재미없다는 평가가 따라다니게 됐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태권도는 올림픽 퇴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2013년 올림픽 핵심종목(Core Sports)에 이름을 올리면서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 한 계속 올림픽 종목으로 남게 됐다. WT는 이 과정에서 링(경기장)을 좁혀 공격적인 경기 진행을 유도하고, 컬러도복을 도입하는 등 태권도를 관중 친화적인 스포츠로 탈바꿈시키려 공을 들였다. 한국은 올림픽 태권도에서 금메달 12개, 은메달 2개, 동메달 5개로를 ‘종주국 어드밴티지’를 확실히 누렸다. 한국 태권도 팬들 관점에서 안타까운 건 갈수록 이점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지난해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때는 출전 남자 선수 3명이 모두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대신 오혜리(29) 김소희(23·49㎏급)등 여자 선수 두 명이 금메달을 따면서 종주국 자존심은 지켰다.오혜리는 지난해 올림픽을 따낸 뒤 “태권도가 재미없다는 말을 듣는 건 다 안다. 그런 말이 모두 옛말이 될 수 있도록 흥미진진한 경기를 펼치는 데 저부터 앞장서겠다”며 “여러분이 태권도를 많이 아껴주실수록 태권도가 여러분이 더 좋아하는 경기 내용으로 변할 수 있다.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이 두 마리 닭 중에서 어느 쪽이 오골계일까요?정답은 ‘오른쪽’입니다. 많은 분들이 왼쪽을 고르셨을 거고, 오른쪽은 ‘과연 저게 닭은 맞나’ 궁금하셨겠지만 정말 오른쪽이 오골계입니다. 그럼 왼쪽은 뭐냐고요? ‘골’이 빠진 오계입니다. ‘까마귀 오(烏), 뼈 골(骨), 닭 계(鷄)’를 쓰는 오골계는 문자 그대로 뼈가 검은 닭이라는 뜻입니다. 뼈는 물론 피부와 내장도 검은색이지만 깃털까지 반드시 검은 건 아닙니다. 맨 처음 사진이나 아래 암탉처럼 깃털이 흰 오골계도 있습니다.이 오골계는 영어로 ‘silk fowl’이라고 부릅니다. silk는 잘 아시는 것처럼 ‘비단(실크)’이라는 뜻이고 fowl은 집에서 기르는 새를 뜻하는 ‘가금(家禽)’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깃털이 비단 같다는 뜻만 들어 있을 뿐 무슨 색인지는 들어있지 않은 겁니다. 굳이 따지자면 ‘실크색’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검은색보다는 베이지색처럼 밝은 색을 먼저 떠올리지 않으셨나요?‘오골계가 천연기념물인데 무슨 소리냐’고 묻고 싶은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오골계는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지만 1981년 전염병으로 몰사하면서 천연기념물에서 제외됐습니다. 이 닭은 흔히 ‘실크 오골계’라고 불렀습니다.‘내가 올 여름에도 오골계라고 까만 닭을 먹었는데 무슨 소리냐?’고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네, 잘못 들으신 겁니다. 그 닭이 오계입니다. 오계 중에서 충남 논산시 연산면 화악2길 38-5에서 키우는 닭은 천연기념물 제265호로 지정받은 상태입니다. 정식 명칭은 ‘연산오계’로 ‘골’은 어디에도 없습니다.이 두 닭은 깃털 색만 다른 게 아니라 품종 자체가 다릅니다. 대표적으로 오골계는 발가락이 다섯 개지만 오계는 네 개입니다. 사진을 보셨으니 볏 모양도 다르다는 걸 확인하셨을 겁니다. 오계는 적어도 조선 선조 때부터 한국에서 길렀고, 오골계는 일제강점기 때 한반도에 들어왔습니다.이런 이유로 대를 이어 연산오계를 키우고 있는 가문에서는 “‘동의보감’에도 오계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꼭 오골계가 아니라 오계라고 불러달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 까만 닭은 오골계가 아니라 오계입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1983년 9월 1일 미국 뉴욕을 출발해 앵커리지를 거쳐 서울을 향해 날아오던 대한항공 007편이 옛 소련 영토인 사할린 근처에서 사라졌다. 이미 당시 언론에서 조심스레 예측한 것처럼 이 B747 여객기는 소련 방공군 수호이(Su)15 요격기가 쏜 미사일을 맞고 추락했다. 그 결과 이 비행기에 타고 있던 269명(승객 246명, 승무원 23명)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은 항공 사고로 남아 있다.소련군이 미사일을 발사한 이유는 이 비행기가 자국 영토를 침범했기 때문이었다. 냉전이 한창이던 당시에는 미군 정찰기가 민항기로 위장해 소련 영공을 침범하는 일이 흔했다. 이 사할린 인근 상공을 아예 ‘공중 전쟁터’라 부를 정도였다. 이 때문에 당시 소련 정보부는 각 방공 부대에 미군 정찰기가 영공을 넘어 오면 격추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사실 이날도 이 지역을 정찰하던 미군 RC135 정찰기를 소련군 레이더가 포착한 상태였다. RC135도 B747처럼 보잉사에서 만든 B707을 개조한 비행기였다. RC135에 이어 곧바로 대한항공기가 레이더에 잡혔기 때문에 소련군에서 착각할 수 있던 상황이었다.소련에서 처음부터 곧바로 미사일을 쏜 건 아니었다. 소련군은 처음에 요격기 날개에 달린 경고등을 깜빡여 유도 착륙을 시도했지만 대한항공기에서 반응이 없었다. 이어 조명탄을 네 차례 발사했지만 마찬가지로 대한항공기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날 요격기를 조종한 켄나디 오시포비치 소령은 나중에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내가 조명탄이 아니라 철갑탄을 쐈다는 주장도 있는데 철갑탄을 쏠 때도 불꽃이 일기 때문에 밤에 식별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소련군에서 미사일을 발사하기 결정한 제일 큰 이유는 대한항공기가 고도를 높이면서 속력을 줄였기 때문이다. 소련군에서는 이를 공격 행위라고 판단했다. 전투기가 느린 속도로 여객기를 따라 가다가는 실속(失速)해 추락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었다. 전투기 비행 특성을 잘 아는 군 조종사가 대한항공 비행기를 몰고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 정말 민항기인 줄 몰랐을까 이날 이후 오시포비치 소령에게는 똑같은 질문이 따라다닌다. “격추한 비행기에 승객이 타고 있다는 걸 알았는가.” 대답도 똑같다. “몰랐다.” 오시포비치 소령은 “유도 착륙을 시도하려고 대한항공기 300m 옆까지 날아갔지만 창문 사이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겉모습은 여객기였지만 여객기를 개조한 정찰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문제는 당시가 어떻게든 상대를 ‘악마’로 만들어야 하는 냉전시대였다는 것. 1991년 3월 24일 동아일보 이낙연 도쿄(東京) 특파원(현 국무총리)은 오시포비치 소령이 일본 ‘TV 아사히’에 출연해 “당시 대한항공기는 항공등과 충돌방지등을 켜고 있었으며 이런 등을 켜는 것은 민항기”라며 “그 당시 자신은 대한항공기가 틀림없이 민간용 수송기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고 전했다.오시포비치 소령이 이 보도에 대해 해명한 건 6년 뒤였다. 1997년 9월 1일 동아일보 반병희 모스크바 특파원과 전화 인터뷰에서 “물론 충돌방지등이 켜져 있는 것을 봤다. 그러나 충돌방지등은 민항기뿐 아니라 수송기를 비롯해 다른 군용기도 밝힌다. 따라서 전투기가 아닌 것은 확실했지만 그렇다고 민항기였음을 알았다는 것은 아니다”며 “지상 귀환 후 결과를 조사하던 방공군 사령부에서 통보해줘 (민항기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당시 대한항공기가 꼬리날개에 있던 조명등을 켜지 않은 것도 오시포비치 소령을 착각하게 만들었다. 이 등을 켜 놓았다면 로고를 식별해 민항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겠지만 당시 대한항공기는 이 등을 끄고 운항 중이었다. 대한항공에서 ‘공중에서는 충돌 위험이 없다’는 이유로 이 등을 켜지 말라고 조종사들에게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두고 “전구 수명을 늘려 지출을 줄이려는 목적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오시포비치 소령은 “비행기에 표시된 어떤 표시나 글씨도 보지 못했다”고 주장하면서 “만약 사람이 탄 여객기라고 생각했다면 (미사일을) 쏘지 않았을 것이다. 여객기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면 상부에 보고하고 격추에 분명히 반대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왜 소련 하늘로 날아갔을까 오시포비치 소령은 사건 발생 후 30년이 지난 2013년까지도 “내가 격추한 비행기는 정찰기라고 아직도 확신한다. 대한항공기는 미군에서 격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그의 말을 모두 믿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확실한 건 이 대한항공기가 소련 영공에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이 비행기는 왜 적국 영공에 들어갔던 걸까. 당시 대한항공기는 천병인 기장(당시 45세)이 조종간을 잡고 있었다. 천 기장은 공군 시절 곡예비행단원으로 활동할 만큼 조종에 능했고, 대한항공 입사 후에도 대통령 전용기를 두 번 조종할 만큼 능력을 인정받았던 인물이었다. 엘리트 중 엘리트 조종사였던 것이다. 그랬던 천 기장이 수없이 다닌 항로를 이탈했던 이유는 뭘까.현재까지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는 가설은 좌표 입력 실수다. 당시 비행기는 관성항법장치(INS·Inertial Navigation System)에 의존해 항로를 결정했다. 이 장치를 쓰려면 출발지 좌표를 입력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처음에 이 좌표를 잘못 입력하면 갈수록 예정 항로를 크게 이탈하기 때문에 출발지로 돌아가 좌표를 수정해야 한다.출발지로 돌아가려면 기름을 버려야 한다. 비행기 연료탱크는 날개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예상 비행 거리를 다 채우지 못해 탱크에 연료가 필요 이상 많은 상태로 착륙하면 날개가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 당시 대한항공기가 앵커리지로 돌아간다면 연료 2만2500갤런(약 8만5172리터)을 버려야 했다. 이러면 회사 측에 1만9000 달러 정도 되는 손실을 안기게 된다.격추 당한 대한항공기 뒤에는 이 비행기보다 15분 늦게 앵커리기 공항을 이륙한 대한항공 015기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이 비행기를 조종했던 박용만 기장은 “천 기장이 앵커리지로 돌아갔을 경우 그의 신뢰성과 위신 문제, 회사 측으로부터의 처벌 등을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1988년 4월 18일자 동아일보는 전하고 있다.대한민국 최고 파일럿이 기초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은 심리가 있었던 데다, 대통령 전용기 기장 심사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걱정, 회사에서 징계도 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으로 천 기장이 수동으로 조종하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이다. 동아일보는 같은 기사에서 “대한항공이 연료를 절약하는 승무원들에게 보너스를 줘 왔다는 ‘입증되지 않은 시사(示唆·귀띔)’도 있다”고 보도했다.가장 유력한 가설이라고 해도 가설일 뿐이다. 유엔 산하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조사 결과 등을 종합하면 천 기장을 비롯한 조종사들이 INS가 아니라 나침반에 의존해 운행한 건 사실이지만 정확한 원인은 여전히 미스터리다.●이 사건, 그 후…이 사건으로 일어난 제일 큰 변화로 꼽을 만 한 건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개방이다. GPS는 미국 국방부에서 개발했으며 원래 군사용으로만 활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INS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고 판단한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은 GPS를 민간에게도 제공하겠다고 공표했다. 현재도 GPS 위성은 미국 공군에서 연간 7억5000만 달러 정도를 들여 관리하고 있지만 민간에서는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대한항공은 보잉사와 공동으로 새로운 기체 도색 디자인을 만들었다. 하늘색 디자인이 이때 등장했다. 그 뒤로 글꼴 모양을 바꾸는 등 사소한 부분은 손을 댔지만 큰 틀은 바뀌지 않았다. 대한항공은 1984년에 보잉 747-3B5 3대를 들어오면서 이 기체 디자인을 처음 적용했다. 안타깝게도 이 중 한 대가 1997년 8월 6일 괌에서 추락 사고를 일으키고 말았다.항공 업계에서는 큰 사고를 큰 겪은 편명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게 관례다. 이에 따라 대한항공은 김포공항과 뉴욕 존 F 케네디(JFK) 공항을 오가던 007편을 025·026편으로 바꿨다. 현재 인천공항과 JFK 공항을 연결하는 081·082편이 이 노선 후속 이름이다. ICAO는 사건 이듬해였던 1984년 국제민간항공협정을 개정하면서 민항기는 영공을 침범했다 하더라도 격추하지 못하도록 명시했다. 그러나 미 해군은 1988년 7월 3일 이란항공 여객기를 F14 전투기로 오인해 대공 미사일로 격추시켰다. 이로 인해 자신들이 맹비난하던 소련으로부터 역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한국 월드컵 축구 대표팀이 오늘(31일) 오후 9시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명운(命運)을 걸고 이란과 한판 맞대결을 벌입니다. 한국은 이 경기 전까지 4승 1무 3패로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A조 조별리그 2위에 올라 있습니다. 만약 오늘 한국이 이란(1위)을 꺾고, 3위 우즈베키스탄이 중국에 패하면 한국은 9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하죠.이제 한국은 월드컵에 못 나가면 이상한 나라가 됐지만 1986 멕시코 월드컵 이전만 해도 본선 진출은 언감생심이었습니다. ‘그 덕에’ 한국은 전 세계 211개 축구 대표팀 가운데 다섯 번째로 많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네, 제대로 읽으신 게 맞습니다. 한국 대표팀은 지금까지 총 506승을 거뒀는데 이는 전 세계 대표팀 가운데 5위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월드컵 본선에 못 나간 덕’이라고 말씀드린 건 그 때문에 메르데카컵, 박정희 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대통령배), 킹스컵 같은 아시아권 대회에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교적 쉬운 상대와 맞붙어 비교적 쉽게 승수를 쌓았다는 뜻입니다. 말레이시아에서 해마다 열리는 메르데카컵은 이제 열혈 축구팬이 아니면 이름도 알기 힘든 게 현실. 한국은 이 대회에 1960년부터 참가하기 시작해 1987년 마지막으로 국가대표팀을 보낼 때까지 총 97경기를 치러 62승(23무 12패)을 기록했습니다. 월드컵 지역 예선(81승)을 제외하면 한국 축구 대표팀이 승리를 많이 추가한 단일 대회가 바로 이 메르데카컵이죠. 이 대회에서 한국은 11번 우승했습니다.그 다음으로 승리를 많이 거둔 건 대통령배였습니다. 한때 ‘팍스컵’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이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은 52승을 추가했죠. 이 대회에는 각국 국가대표팀뿐 아니라 클럽팀이 참가하기도 했고, 한국은 청룡(대표팀) 백호(상비군) 등으로 나눠 여러 팀이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이 아시아경기에서 52승, 아시안컵 본선에서 32승을 거뒀다는 걸 참작하면 이 두 대회에서 얼마나 많이 이겼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태국에서 열리는 ‘킹스컵’에서도 25승을 추가했습니다.연도별로 보면 이들 대회에 집중했던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한국 대표팀이 승리를 많이 거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상대국별로 보면 한국이 제일 많이 이긴 나라는 일본(40승)입니다. 이어서 인도네시아와 태국을 상대로 각 31승을, 말레이시아에 25승을 거뒀죠. 그다음으로 많이 이긴 나라는 홍콩(22승), 싱가포르(20승) 등이었습니다. 오늘 맞붙는 이란과는 29번 맞붙어 9승 7무 13패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란을 상대로 최근 4연패에 빠져 있는 상황. 과연 한국은 이 사슬을 끊고 러시아행 티켓을 확보할 수 있을까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윤종신(48)은 한 동안 가수보다 예능인 이미지가 더 강했다. 그러나 최근 ‘좋니’가 히트하면서 음악 팬들은 그가 얼마나 위대한 발라드 가수였는지 새삼 확인하게 됐다. 이 노래로 그는 21년 만에 차트 1위를 차지했다. 그 전까지는 1996년 내놓은 ‘환생’이 그의 마지막 차트 1위곡이었다.‘좋니’는 애절한 가사, 절규하는 창법 등 발라드가 전성기를 달리던 1990년대 중반 스타일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윤종신은 ‘힙합 전성시대’에 “뒤끝 있는 예전 남자친구”(‘좋니’ 중)를 소재로 한 노래를 내놓은 이유에 대해 “더 나이 들면 이렇게 절규하는 발라드를 못 부를 것 같았다”고 말했다. ‘좋니’는 그저 듣기만 좋은 노래도 아니다. 이 곡은 31일 현재 금영노래방과 TJ미디어에서도 모두 인기곡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너무 잘 사는 척 후련한 척” 살아가던 옛날 남자친구들이 모인 어느 밤, 술기운에 “니가 조금 더 힘들었으면 좋겠다”던 시절이 떠올라 한 곡조 뽑지 않고는 못 견뎠기 때문이리라. 이 정도면 인정해야 한다. 발라드는 ‘2040 세대의 트로트’라고 말이다. ‘댄스 전성시대’였던 1990년대 중반 ‘발라드 역풍’이 일었던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당시 동아일보에서 이 역풍의 첨병으로 꼽은 노래는 이승환(52)의 ‘천일동안’이었다. 1995년 8월 31일 동아일보는 “‘천일동안’은 밝고 감미로움을 특징으로 하는 발라드에도 ‘뽕짝’의 진한 사연을 담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천일동안’은 김수희의 ‘애모’와 바탕정서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평이다”라고 전했다.당시 한 30대 팬은 “들을수록 깊은 맛이 나는 발라드인데 가사 대부분이 ‘요’로 끝맺어 애절함을 더한다”며 “이 노래를 들으면 어딘가 ‘허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이로부터 22년이 지나 ‘좋니’를 듣고 부르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이제 한국 대중가요 팬들은 발라드(ballad)하면 템포가 느린 노래를 떠올리지만 어원인 라틴어 ‘ballare’는 ‘춤을 춘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1980년대 조덕배(58), 이영훈(1960~2008), 유재하(1962~1987) 등이 완성했다는 평가를 듣는 이 한국형 발라드가 어원과 완전히 멀어진 건 아니다. 발라드를 들을 때마다 우리 마음속에서 추억이 춤을 추니 말이다.“보고 싶겠죠. 천일이 훨씬 지난 후에라도 역시 그럴 테죠. 잊지마요, 우리 사랑, 아름다운 이름들을 … 난 자유롭죠. 그날 이후로. 다만 당신이 궁금할 뿐이죠. 다음 세상에서라도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마요.” ─ 이승환 ‘천일동안’ 중에서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제발 ‘마술’이라고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발암물질 생리대가 문제가 된 뒤 한 언론사에서 촬영한 동영상에 한 학생이 남긴 말입니다. 많고 많은 낱말 중에서 마술이 왜 생리를 뜻하는 표현이 된 걸까요?정답은 ‘풍채 좋은 산타클로스가 붉은 옷을 입고 수염을 기른 것’하고 같은 이유입니다. 다이아몬드 반지가 결혼반지 대명사가 된 것도 마찬가지고요. 아, 한국 국가대표팀 경기가 있을 때마다 ‘대~한민국’을 외치는 것도 같은 이유죠. 그러니까 기업체 마케팅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1990년대 중반 생리대 제조업체 D사는 “한달에 한번 여자는 마술에 걸린다”를 광고 카피로 앞세웠습니다. 제품 이름에 ‘매직(magic)’이 들어가는 데서 착안한 것. 이 광고가 인기를 끌면서 그 뒤로 생리를 마술 또는 마법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죠. 언제부터 대중이 ‘생리=매직’이라고 널리 받아들이기 시작했는지 확인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2002년 세상에 나온 영화 ‘공공의 적’에 “여자는 왜 한 달에 한 번씩 그 매직에 걸린다 안 하요. 여자친구가 그날이 그날이어서 내가 대신 약국에 매직 사러 갔당께”라는 대사가 등장하는 걸 토대로 2000년대 초반에는 확실히 이런 표현을 언중(言衆)이 널리 쓰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래 대사에 여자친구는 세 글자 비속어로 나옵니다.)이 대사에도 ‘그날’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처럼 직접 언급하기 어쩐지 부끄러운 낱말을 다른 낱말로 바꿔 완곡하게 표현하는 건 퍽 일반적인 언어 현상입니다. 특히 생리를 뜻하는 낱말은 전 세계적으로 50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독일에서는 생리를 ‘딸기 주간(週間·Erdbeerwoche)’이라고 부르고, 미국인들은 ‘플로 이모(Aunt Flow)’라는 말을 씁니다. 바다 건너 영국하고 묘한 관계인 프랑스에는 “영국 군대가 도착했다(Les Anglais ont debarqu¤)”는 표현도 있다고 하네요. 사실 ‘생리’라는 낱말도 완곡한 표현입니다. 생리(生理) 그 자체는 “생물체의 생물학적 기능과 작용 또는 그 원리”(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라는 뜻입니다. 노벨 생리학상은 여성들이 한달에 한번 걸리는 마술에 대한 연구 공로로 받는 상이 아니지요. 그런데도 많은 한국 사람들은 ‘생리 = 월경(月經)’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리라는 표현을 월경이라는 뜻으로 이렇게 널리 쓰기 시작한 것도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닙니다. 1962년 신문 기사만 해도 “생리대 = 월경대”라고 별도로 설명할 정도였습니다. SBS ‘미운 우리 새끼’에 출연 중인 70대 어머니들은 생리를 자연스럽게 “멘스(menstruation)”라고 표현했죠.일본에서도 ‘세이리(生理)’를 ‘겟게이(月經)’와 같은 뜻으로 씁니다. 한자문화권에서 생리를 월경이라고 쓰는 건 한국과 일본뿐입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 동아일보에 ‘생리기(간)’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걸 보면 우리가 월경을 생리라고 부르는 건 일본 영향일 개연성이 큽니다.일본어로 생리를 뜻하는 표현 중에는 ‘안네(アンネ)’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건 한국에서 생리를 마법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생리용품 브랜드 중에 안네가 있었던 거죠. 이 브랜드가 이름을 이렇게 지은 건 안네 프랑크가 쓴 ‘안네 프랑크-소녀의 일기’에 생리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안네 프랑크는 생리에 관해 쓴 세계 최초의 작가”라는 평가도 존재합니다.그러니까 월경을 월경이라고 부르기가 어려워 생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생리를 생리라고 부르기도 참 어렵게 됐습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1910년 오늘(8월 29일)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날이다.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동아일보는 그해 오늘 3면에 ‘오늘!’이라는 사진 기사를 통해 나라를 빼앗긴 지 10년이 됐다는 사실을 상기키셨다. 당시 기사를 요즘 말에 가깝게 풀면 이렇다.“10년 전 오늘이 한국이 일본에 합병되던 날이올시다. 금년 8월 29일이 한일합병의 10주년 기념일이올시다. 사진은 한일합병조약에 양국 편에서 도장을 찍었던 곳이니 지금 총독관저 안에 있는 방이오, 그 방에 있는 사람은 한국 통감으로 합병조약을 체결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요, 왼편의 인물은 한국편으로 조약에 도장을 찍은 당시 한국 총리대신 이완용.”이 기사에 이완용 사진을 썼다는 것만 봐도 당시 그가 ‘매국노의 대명사’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이름을 올린 그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니, 이완용을 제외하면 나머지 매국노가 누구였는지 이름을 대기도 힘든 게 현실이다. 그만큼 지금은 더욱 더 ‘매국노 = 이완용’이다. 1926년 이완용이 숨을 거두자 동아일보는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횡설수설’을 통해 “이완용이 염라국 사람이 되었으니 (염라국마저 팔아먹을까 봐) 염라국의 장래가 걱정이 돼 마음이 편치 못하다”고 썼다. 당연히 일제는 이 기사를 삭제하도록 명했다.보기에 따라 재미있는 건 이완용은 친일파였지만 일본어를 제대로 할 줄 몰랐다는 점. 대신 조선 최초 근대식 교육 기관인 ‘육영공원’ 출신인데다 미국 주재 외교관을 지냈기에 영어는 아주 유창했다. 그래서 나라를 팔아먹을 때도 영어를 썼다. 그는 죽기 전 아들에게 “이제 미국이 초강대국이 될 것 같으니 친미파가 되거라”하고 유언을 남겼다. 이렇게 좋은 ‘촉’을 엉뚱한 데 쓰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SBS는 1980년대에 태어난 김지영 씨 다섯 명의 삶을 들여다 본 ‘SBS스페셜’을 26일 내보내면서 ‘세상 절반의 이야기’라고 부제를 달았습니다. ‘절반’? 아닙니다. 결혼생활에 있어 아내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을 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아내가 행복하면 남편도 행복하지만 그 반대는 아닙니다. 결혼생활 만족도를 결정하는 건 아내입니다.결혼생활을 하고 계신 분들은 따로 숫자가 필요 없이도 그 이유를 아실 터. 미국 보스턴대 데보라 카 교수(사회학) 연구진은 배우자의 결혼 생활 만족도가 본인 결혼 인생 만족도에 끼치는 영향력을 알아보려고 50세 이상 미국 부부 361쌍(722명)을 조사했습니다.이들은 논문 ‘행복한 결혼, 행복한 인생? 노후에 있어서 결혼 생활 만족도와 주관적인 웰빙(Happy Marriage, Happy Life? Marital Quality and Subjective Well-being in Later Life)’을 쓰면서 조사 참여자들에게 결혼생활 만족도를 1~4점으로 매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가장 만족스럽지 못할 때가 1점, 가장 만족스러울 때가 4점이었습니다.28일 ‘결혼과 가족 저널(Journal of Marriage and Family)’에 이들이 게재한 논문을 보면 부부 모두 결혼 생활 만족도가 1점이라고 답했을 때 남편의 인생 만족도는 평균 1.8점(6점 만점)이었습니다. 남편은 여전히 1점이지만 아내가 4점일 때 남편의 인생 만족도는 5.7점으로 3.9점 올라갑니다. 연구진은 이를 “남편이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 못해도 아내가 만족하면 높은 결혼 생활 만족도를 경험하게 되고 이 때문에 인생 만족도도 올라가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아내는 보통 남편보다 더 자기 인생에 만족하며 살지만 남편이 만족한다고 아내의 만족도가 이렇게 올라가지는 않습니다. 둘 모두 1점일 때 아내는 자기 인생이 2.5점이라고 답하는데 남편이 4점을 줘도 4.0점으로 1.5점 올라가는 데 그칩니다. 남편이 3.9점 올라갔으니까 상승률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겁니다.이에 대해 카 교수는 “주로 집안일을 하는 아내가 결혼생활에 만족하면 남편에게 많이 베푼다. 그러면 남편도 자기 인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자연스레 남편이 큰소리를 낼 일이 줄어들기 때문에 부부 사이도 좀더 원만해진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이 조사 결과에 따르면 남편은 참 이기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카 교수는 “남편이 아프면 아내는 스트레스를 받을 걸 알면서도 병간호를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내가 아플 때는 남편이 아니라 딸이 병간호를 맡는 일이 많다”고 전했습니다. 카 교수는 “결혼생활은 우리 인생에 있어 버퍼(buffer·물체에 가해지는 충격을 완화시키는 장치) 같은 존재”라고도 했습니다. “결혼생활이 원만하면 돈이나 건강 같은 문제를 풀어가는 데 있어 부부가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인생 만족도가 올라간다”며 “전체적으로 남편이 아내보다 결혼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 그럴수록 아내가 그만큼 헌신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죠. 이건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부부 사이에서도 역시 남편이 결혼생활에 더 만족합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과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성균관대 서베이리서치센터 공동 연구진이 지난해 6~11월 전국 18세 이상 105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남성은 72.2%가 결혼생활에 만족했지만 여성은 53.7%에 그쳤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이 좀처럼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건 김지영 씨들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회지표에 따르면 한국인의 삶에 대한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5.8점으로 OCED 35개 회원국 가운데 28위에 그쳤습니다. 그렇다고 김지영 씨를 행복하게 하는 길이 그저 남편들 인식 변화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인생은 어차피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 그 짐을 완전히 내려놓으라고 말하는 건 무책임한 일일 겁니다. 그래도 갈수록 김지영 씨들이 짐을 조금씩 덜 수 있는 세상은 만들어 가야 하지 않을까요?사실 김지영 씨들뿐 아니라 김지영 씨 남편들도 마찬가지였고, 마찬가지일 겁니다. 우리는 그저 결혼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늙어가고 싶었던 거고, 그냥 아이를 낳아서 키우고 싶은 게 아니라 그 아이랑 같이 잘 살고 싶은 거니까요.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요즘 방영 중인 tvN 주말 연속극 ‘명불허전’에는 조선 선조 시절 명의로 이름이 자자했던 허임(許任·1570~1647 추정)이 등장합니다. 허임은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명의 허준(許浚·1539~1615)도 인정한 침술의 대가였습니다. 선조 37년 임금이 침술에 대해 묻자 허준이 “신은 침을 잘 모릅니다만 허임이 평소 말하기를 경맥을 이끌어낸 다음에 아시혈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라고 답했을 정도였습니다.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명의 모두 허씨에 이름이 외자(한 글자)라니 신기하지 않나요? 한국 사람은 성(姓)을 제외하면 이름이 두 글자인 게 기본이지만 허씨 중에는 이렇게 유독 외자 이름인 인물이 많습니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許筠·1569~1618) 같은 옛날 사람은 물론 ‘농구 대통령’ 허재 국가대표팀 감독(52)도 이름이 외자입니다. 허 감독 큰아들인 농구 선수 허웅(24)도 그렇고, 역시 농구 선수인 허 감독 둘째 아들 역시 허훈(22)으로 이름이 외자입니다. 한글학회 이사장을 지낸 전 서울대 교수(언어학) 눈뫼 선생도 농구 선수하고 똑같이 허웅(1918~2004)입니다.방송인 중에서는 ‘의리’로 유명한 김보성 씨(51) 본명이 허석입니다. 김 씨는 데뷔 초에는 본명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거꾸로 본명이 이상룡인 방송인 허참 씨(69)도 예명을 외자로 지었습니다. 허씨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외자 이름이 많은 걸까요?● 외자 이름은 특권이었다여기서 퀴즈 하나. 조선 정조의 이름은? MBC 연속극을 통해 친숙해진 것처럼 이산(李¤)이 정답입니다. 이때 산은 계산한다고 할 때 산(算)과 같은 글자입니다. 세종대왕 이름은 이도(李¤)인데 이 ‘¤’ 역시 세종대왕 이름을 적을 때 말고는 거의 쓸 일이 없는 글자입니다. 조선 철종처럼 태어났을 때는 임금이 될 가능성이 낮았던 왕족은 즉위하면서 이름을 고치는 일도 많았습니다.임금 이름을 이렇게 특이한 글자로 지은 이유는 뭘까요?한자문화권에는 기휘(忌諱) 또는 피휘(避諱)라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휘(諱)는 이름이라는 뜻이고 기와 피를 합치면 ‘기피’가 됩니다. 요컨대 이름을 밝히는 걸 꺼리는 전통이 바로 기휘 또는 피휘인 겁니다. 여전히 부모님 등 웃어른 성함을 이야기할 때 ‘김 ○자, ○자’처럼 말해야 예의바르다는 말을 듣는 건 바로 이 전통 때문입니다. 예전 사람들이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호를 지어 부른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이 전통에 따라 임금이나 성현(聖賢) 이름은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불경죄에 속했습니다. 중국 당나라 태종 이름이 이세민(李世民)이라 불교에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세(世)를 빼고 관음보살이 됐고, 성현 중 성현이라 할 수 있는 공자 선생 이름이 공구(孔丘)라서 TK 지역에 있는 광역시 이름은 대구(大丘)에서 대구(大邱)로 바뀌었습니다.그런데 만약 일상적으로 쓰는 한자를 임금이 이름으로 쓰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의사소통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정조가 산(算)을 이름으로 썼다면 계산, 암산, 주산(珠算) 같은 말을 전부 쓸 수 없게 됩니다. 이름을 두 글자로 쓰면 이 부담이 더욱 커지겠죠? 그래서 사람들이 쓸 일이 별로 없는 한자를 골라 이름을 한 글자로 지었던 겁니다.여기서 시작해 왕조 시절에는 이름을 한 글자로 짓는다는 것 자체가 왕족만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허씨는 왕족도 아닌데 왜?허씨가 외자 이름을 쓰는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된 건 후삼국 시대 말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견훤과 한강 유역 패권을 두고 타투고 있던 왕건은 군량미가 떨어져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때 현재 서울 강서구·양천구 일대 호족이던 허선문(837~?)이 군량미는 물론 말과 군사까지 내주면서 왕건이 승리하도록 도왔습니다. 나중에 고려가 들어면서 왕건은 허선문의 공을 치하해 그에게 삼한공신(三韓功臣) 칭호와 함께 그가 본거지로 삼고 있던 공암(孔岩)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내렸습니다. 허선문은 공암 허씨(현재 양천 허씨) 시조가 됐습니다. 왕건은 그러면서 이 가문에 대를 걸러 외자 이름을 쓸 수 있는 특권을 줬습니다. 할아버지가 외자 이름을 쓰면 아버지는 건너 뛰고 손자가 다시 외자 이름을 쓸 수 있는 방식이었죠. 당시는 아직 호족 세력이 힘이 남아 있던 상태. 양천 허씨 가문은 “우리는 가야 김수로왕 때부터 왕족이었다”며 대대로 외자 이름을 쓰기로 결정합니다. 양천 허씨 가문이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건 가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김수로왕과 그의 비(妃) 허황옥(許黃玉)을 뿌리로 두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가문이 외자 이름을 쓰는 건 가문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수단인 겁니다.●그 부끄러운 전설은 사실일까?넓은 의미로 보면 배우 김수로 씨도 본명(김상중)과 이름이 같은 선배 연기자가 있어 피휘를 선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 씨는 광산 김씨로 이 본관은 김수로왕을 뿌리로 둔 ‘가야 계열’이 아니라 김알지를 뿌리로 하는 ‘신라 계열’입니다. 이런 역사 때문에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 그리고 이로부터 분파한 허씨는 뿌리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 집안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김수로왕과 왕비가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가야에 큰 불이 났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불을 끄려고 제 아무리 애를 써도 꺼지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하고 김수로왕이 불가에 소변을 보니 불이 꺼졌습니다. 이에 임금은 여기저기 소변을 뿌리고 다녔습니다. 그때 불똥이 수로왕 국부에 불똥이 튀었고, 남은 흉터는 결국 점이 됐습니다. 그 뒤로 두 사람 자손들은 고추에 점을 달고 태어난다고 합니다.물론 과학적으로는 신빙성이 떨어지는 이야기입나다만, 들리는 풍문에 아내 외도를 의심하던 양천 허씨 남편이 있었는데 아들이 태어나자 고추를 확인했고 점이 있어 안심했다나 뭐라나. 2015년 기준으로 33만 명이 못 되는 허씨는 그렇다고 쳐도 김씨는 김해 김씨만 446만 명에 육박하는데… 설마… 아니겠죠?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갓뚜기’ 이전에는 ‘갓양식품’이 있었다. 갓뚜기는 식품회사 ‘오뚜기’가 착한 기업이라며 누리꾼들이 맨 앞 글자를 ‘갓(god)’으로 바꿔 부르는 신조어. 갓양식품은 삼양라면을 만드는 회사를 같은 방식으로 바꾼 사례다.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해 보면 삼양식품이 아무 욕심 없이 한국 사람들 배고픔을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는 ‘삼양라면의 진실’이라는 글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삼양라면이 누리꾼들에게 이렇게 칭송받은 데에는 ‘쇠기름(우지·牛脂) 파동’의 억울한 피해자였다는 점도 한 몫 했다. 이 때문에 동정 여론이 일었던 것이다.삼양식품으로서는 진짜 억울할 만했다. 검찰은 1989년 11월 3일 삼양식품 등 대형 식품 업체 관계자들을 ‘보건범죄 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 ‘식품위생법’ 혐의로 구속 입건한다. 그러면서 이들이 “비누나 윤활유 원료로 사용하는 공업용 수입 쇠기름을 사용해 라면 등을 만들어 시판했다”고 발표했다. 이제는 많이들 아시는 것처럼 이 쇠기름을 공업용으로 분류한 건 미국 기준에 따른 것이었다. 미국 사람들은 내장과 사골을 먹지 않기 때문에 이를 식용으로 분류하지 않았던 것. 상황을 가정해 설명하자면 미국에서 김을 공업용으로 분류했다는 이유로 한국 국수에 들어간 김을 문제 삼는 것과 똑같은 케이스였다. 실제로 지금도 16등급 쇠기름 중 3등급 이상은 식용으로 쓰는 업체가 적지 않다.당시 검찰도 아주 자신이 있던 건 아니었다. 검찰은 사건 첫날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공업용 우지가 인체에 유해한지 여부는 규명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먹거리에 대한 우려는 늘 증폭되는 법. 당시 동아일보는 “수사 과정에서 너무 엄청난 사실이 밝혀지자 이로 인한 미증유(未曾有·지금까지 한 번도 없던 일)의 파문을 고려, 이를 제외한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삼양식품이 대법원 판결로 혐의를 완전히 벗는 데는 8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대법원은 1997년 8월 26일 삼양식품 등 관련회사와 회사 간부들에게 모두 무죄를 확정했다. 이 기간 삼양식품이 휘청거린 게 당연한 일. 이 회사 홍보관은 이 사태 이전 60%에 달했던 시장 점유율은 15%로 떨어졌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사건 이후 한동안 라면업계에서 동물성 기름이 자취를 감추고 식물성 팜유가 대세가 됐지만, 이제는 팜유로 면을 튀기면 발암물질이 더 많이 발생한다는 것이 밝혀졌다.이 파동은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 때문에 지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파동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삼양식품 경쟁사인 농심의 법률고문으로 활동 중인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이 쇠기름 파동으로 반사이익을 본 농심에서 김 전 실장에서 은혜를 갚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하지만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해당 업체뿐 아니라 관련 업계 전체 매출이 줄어드는 게 일반적이다. 따라서 농심에서 30년 가까이 지난 상태에서 김 전 실장에게 보은을 했다는 건 다른 증거가 없는 이상 개연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다.사실 삼양식품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좀더 밀접한 인연이 있다. 삼양식품 창업주 전중윤 회장은 1979년 총 11억 원을 들여 ‘명덕문화재단’을 만들었다. 당시 11억 원은 서울 대치동 은마아파트를 50채 넘게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이듬해 7월 전 회장을 비롯한 이 재단 설립자 전원이 사퇴하면서 이 재단을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양도하기로 결정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 재단이 해산한 2012년까지 이사장을 맡았다. 나중에 ‘한국문화재단’으로 이름을 바꾼 재단이 해산하면서 남은 자산 13억 원은 박 전 대통령의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설립한 육영재단으로 넘어갔다.이에 대해 한 주간지는 “삼양식품은 1961년 (박정희) 정부의 금전 도움을 받아 라면 제조 기계를 도입했고 이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며 “박(전희) 전 대통령에 대한 고마움이 절절했던 전 회장이 보은 차원에서 맏딸인 박 후보(박 전 대통령)에게 자신이 설립한 재단을 맡겼던 것으로 짐작된다. 사실상 기부행위라 봐도 무방하다”고 분석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코끼리하고 판다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실제 동물끼리 맞붙으면 무게가 5t 정도 나가는 아시아코끼리를 판다(최대 160㎏)가 상대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두 동물이 대표하는 인도(코끼리)하고 중국(판다)은 어떨까요? 당연히 맞붙지 않는 게 최선입니다.그런데 두 나라 군대는 요즘 두 달째 도클람이라는 곳에서 대치 중입니다. 중국에서 둥랑(洞朗)이라고 부르는 이 지역은 원래 중국과 부탄이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곳입니다. 중국이 6월부터 이 지역에 도로를 건설하기 시작하자 부탄에서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있는 인도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인도군이 출동해 도로 건설을 막자 이번에는 중국에서 인도가 자국 영토를 침범했다고 주장하고 나서기 시작했습니다.그 뒤로 두 나라 군대는 돌을 던지면서 몸싸움을 벌이는 등 갈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인도군이 무장 헬기를 국경 지대에 배치하자 중국에서는 인도와 맞닿은 시짱(西藏) 자치구에 ‘헬기 킬러’로 불리는 지대공 미사일 훙치(紅旗)-17을 가져다 놓기도 했습니다.지도에서 도클람 찾아보면 이 지역이 왜 문제가 되는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탄 인도 중국이 만나는 꼭짓점 부근에 이 지역이 자리 잡고 있거든요.지형을 3차원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구글 어스’ 도움을 받으면 이 지역이 왜 영토 분쟁 불씨를 안고 있는지 더욱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정말 딱 분쟁하기 좋은 지역에 도클람이 자리잡고 있죠.사실 지금까지 지도에 인도라고 나온 시킴 주(州)도 특이한 곳입니다. 네팔과 부탄 사이에 있는 이 주는 1975년까지는 인도 보호국이기는 했지만 엄연한 독립 왕국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도의 22번째 주가 된 지금도 이 지역에 가려면 별도로 출입 허가를 받아야 하죠. 중국은 2003년까지 인도에서 시킴을 병합한 걸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인도는 또 중국이 도클람을 차지하면 흔히 ‘닭의 목(Chicken’s Neck)‘이라고 부르는 ’실리구리 회랑‘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장 좁은 곳이 폭 17㎞밖에 되지 않는 이 회랑은 인도 본토와 북동부에 자리 잡은 7개 주(州)를 연결하는 구실을 합니다. 만약 중국이 이곳을 차지하게 되면 인도 땅은 두 동강 나게 됩니다.인도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영국령 인도 제국이던 시절에는 이런 회랑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아래 그림에서 회색 부분이 전부 인도였습니다.그러다 1947년 독립 과정에서 종교적인 이유 등으로 각기 다른 나라로 독립하면서 이 회랑이 생겼습니다. 이슬람교를 믿는 파키스탄은 원래 동·서 파키스탄으로 나뉘었는데 1791년 동파키스탄은 다시 방글라데시로 독립했습니다. 과연 두 나라는 언제까지 대립할까요? 외교 문제에 정통한 이들은 다음 달 3~5일까지 중국 푸젠(福建)성에서 열리는 브릭스(BRICs) 정상회의가 분수령이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 자리에는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도 참석할 예정입니다. 제아무리 중국이라도 손님을 모셔놓고 국경에서 치고받는 건 좀 모양새가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도로서도 손님으로서 예의를 갖출 필요가 있겠죠.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양쪽에서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낼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측합니다.두 나라는 1962년에도 영토 문제로 전쟁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이때는 중국이 이겼죠. 그 뒤 인도는 중국이 티베트를 침략하는 걸 묵인했고, 중국은 인도가 네팔과 부탄을 ’보호‘하는 걸 묵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됐습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거짓말이 탄로 나는 데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1971년 8월 24일자 1면에 “23일 낮 경인가도를 피로 얼룩지게 한 난동 무장괴한들은 북괴 무장공비가 아니라 인천 앞바다 공군관리하에 있는 실미도에 수용 중인 ‘군(軍) 특수범’들로 밝혀졌다”고 전했다. 군 특수범은 군 복무 중 중죄를 저질러 군 교도소에 수감 중인 이들을 뜻한다.박정희 정부는 이 사건이 일어난 전날에는 대간첩대책본부를 통해 “무장공비 21명이 서울 침투를 기도했다”며 “(인천에서 처음 발견된) 이들 무장공비들은 민간버스를 탈취 부평 소사를 거쳐 서울 노량진 유한양행 앞까지 진출했다 군경예비군에 의해 저지됐다”고 발표했다.대간첩대책본부장이던 김재명 중장은 이날 “최근 남북적십자 간에 가족 찾기 제의와 호응이 오가는 사이 지난 16일부터 21일까지 닷새 동안 전 휴전선에 걸쳐 북괴가 24명의 무장공비를 다섯 차례 침투시켜 그 중 10명을 사살하고 아군 4명이 전사했다”며 ‘무장공비 서울 침투설’에 무게를 더했다.이 발표가 어딘가 미심쩍었던지 당시 동아일보는 1면 머리기사 제목에 이들을 ‘무장괴한’이라고 표현했지만 제목부터 ‘공비’라는 낱말을 넣은 매체가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이들은 군특수범이 아니었다. 예비역 육군 준장이던 이세규 신민당 의원(1926~93)은 이들이 공군 산하 무장특공대였다고 폭로했다. 정부는 이 의원의 입을 막아보려 했지만 사실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이듬해 ‘10월 유신’ 이후 이 의원은 한 해 동안 일곱 차례 연행돼 고문에 시달렸다.)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는 1971년 9월 16일 국회에서 이들이 군 특수부대 요원이라고 신분을 공개했다. 김 총리는 “특수범이라고 주장했던 정부의 말을 바꾼 것은 자유로운 매스컴 활동 등으로 우리의 한마디 한마디가 북괴 측에 알려지고 있는 점을 감안, 어느 시기 동안 특수범이라고 은닉 발표하는 것이 불가피했으나 이제 그 시기가 지났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이어 “평상시나 전시(戰時)를 막론하고 어느 나라 어느 군대든 특수부대를 갖고 있다. 특수부대의 편성 목적, 시기, 훈련 과정 등은 공개회의에서 말할 수 없지만 국회 조사위원회에서 충분히 조사를 끝냈다”면서 “정치 목적으로 이 부대가 사용되지 않느냐는 의문에 대해 전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북한은 박정희 정권에 위협이 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도움을 주는 존재이기도 했다. 만약 북한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사건 첫날 박정희 정권은 이들이 누구였다고 발표했을까. 임지헌 서강대 교수(사학)는 이런 관계를 ‘적대적 공범자들’이라고 규정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북한 김일성이 서로 적대하면서도 도와주는 공범이었다는 것이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해마다 오늘(8월 23일)은 ‘야구의 날’입니다. 야구 팬 중에는 한국 국가대표팀이 베이징(北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게 2008년 8월 23일이라 이날을 야구의 날로 정했다고 알고 계신 분이 많습니다. 얼핏 속기 딱 좋은 얘기입니다.(참고로 원래는 12월 11일이 비공식 야구의 날이었습니다. 1981년 프로야구 창립총회를 열었던 게 이날이었거든요. 2012년까지 골든글러브 시상식을 이날 열던 건 그런 까닭입니다. 2013년 이후 골든글러브 시상식은 12월 둘째 화요일.)실제로 이날이 야구의 날이 된 건 1997년 ‘김영진 팬 서비스 사건’ 때문입니다. 사연인즉 이렇습니다. 이날 대구구장에서는 안방 팀 삼성이 쌍방울을 불러들여 더블헤더(연속경기)를 치렀습니다. 더블헤더 1차전에서 삼성이 9회초 수비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4-0으로 앞서고 있었습니다. 9회초에 쌍방울이 1점을 따라붙었지만 2사 1, 2루라 아웃 카운트 하나만 더 잡으면 경기가 끝나는 상황이었습니다.쌍방울 김성근 감독은 장재중(46)을 대타로 냈습니다. 볼카운트 1볼 2스트라이크에서 삼성 투수 김태한(48)이 던진 공이 낮게 떨어졌고 장재중은 헛스윙 삼진. 이 공을 받은 삼성 포수 김영진(45)은 팬 서비스 차원에서 공을 관중석으로 던졌습니다. 당시 이 경기를 생중계하던 SBS는 종료 자막을 내보냈고 한국야구위원회(KBO) 온라인 경기 상황에서는 투수 승패 기록까지 모두 나온 상태였습니다.이날 주인공 김영진. 그는 프로야구에서 통산 타율 0.155, 5홈런, 45타점을 남긴 채 2001년 한화를 마지막으로 유니폼을 벗었습니다. 그런데 쌍방울 더그아웃에서 장재중을 향해 ‘1루로 뛰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삼성 백인천 감독도 김영진에게 ‘공을 1루로 던지라’고 소리쳤지만, 공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다음이었습니다. 김동앙 주심은 그대로 경기종료를 선언하려고 했지만 이런 일을 그냥 넘어갈 김 감독이 아니었습니다. 김 감독은 본부석으로 들어가려던 심판진을 구장 안으로 밀치면서 격렬하게 항의했습니다.김 주심은 김 감독에게 퇴장 명령을 내린 뒤 4심 합의를 거쳐 오심을 시인했습니다. 뭐가 오심이었을까요? 김태한이 던진 공이 원바운드로 들어왔거든요. 야구 규칙에 익숙한 분들은 잘 아시는 것처럼 이때는 ‘스트라이크 아웃 낫아웃’ 상황이 됩니다. 이때 타자를 아웃시키려면 수비팀은 공을 잡고 타자를 태그하거나 1루로 공을 던져야 합니다. 하지만 삼성은 먹고 죽으려고 해도 공이 없는 상황. 김영진은 “심판이 삼진 콜 하는 걸 듣고 공을 던졌다”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심판진은 결국 타자 주자를 포함해 각 주자가 두 베이스씩 진루하도록 했습니다. 쌍방울이 2-4로 뒤진 상태에서 주자를 2, 3루에 두고 공격을 계속하게 된 겁니다. 쌍방울 다음 타자 최태원(47)이 2타점 적시타를 때려 4-4 동점이 됐고, 쌍방울은 이후 두 점을 더 뽑으면서 6-4로 경기를 가져가게 됩니다.삼성 쪽에서 생각하면 오심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패배를 당한 겁니다. 이렇게 황당한 패배를 당하면 다음 경기에도 영향을 주는 게 보통. 하지만 삼성은 이날 2차전에서는 10-5로 승리하면서 아쉬움을 털어버렸습니다. 물론 2차전에서 삼성은 김영진 대신 양용모(50)에게 포수 마스크를 씌웠습니다. 그러니까 이날 대구 더블헤더에는 △대낮부터 야구장을 찾은 팬에게 승리구를 선물하고 싶은 팬 서비스 정신 △야구 규칙의 복잡한 아름다움 △실수를 인정하는 겸손함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는 ‘좌절 금지’ 정신 △패배를 이기는 가장 빠른 길은 승리라는 투쟁심 등이 모두 녹아 있던 겁니다.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홍재형 당시 KBO 총재는 이날 상황을 보고 받은 뒤 이런 정신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에 시달리고 있던 국민에게 용기를 줄 것으로 판단해 이날을 야구의 날로 지정하라고 지시 했습니다 …. 라는 건 물론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이날 이런 일이 있던 건 사실이지만 8월 23일이 야구의 날이 된 건 베이징 올림픽 야구 금메달 때문이 맞습니다.2010년 낫아웃 규칙이 바뀌어 이제는 이런 장면을 볼 수가 없습니다. 당시 장재중은 타석 근처를 둘러싼 흙을 벗어나 더그아웃으로 걸어가던 중이었습니다. 현재 규칙에 따르면 장재중은 이 부분을 벗어난 순간 자동으로 아웃입니다. 당시에는 더그아웃에 들어가는 시점에 아웃 선언을 하게 돼 있었습니다.아, 8월 23일은 프로야구 팬 사이에서 아주 유명한 ‘캡처 사진’이 세상에 나온 날이기도 합니다. 류현진(30·LA 다저스)은 2012년 이날 문학 방문 경기 8회말 수비 때 병살타성 타구를 유도했지만 2루수 실책으로 1사 2, 3루가 되자 아래 사진 같은 표정을 지었습니다.사실 그렇습니다. 누구나 실수를 하고, 때로는 그 실수가 다른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엎질러진 물은 이미 엎질러진 물. 실수를 만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일일 겁니다. 류현진도 저 고통을 이겨냈기에 메이저리거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그럼 야구팬 여러분 모두, 지난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야구의 날 보내세요.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저는 원래 제 (남)동생하고 부모님 이웃집에 사는 걸 꿈꿨습니다. 하지만 결혼한 뒤 그게 얼마나 허황한 꿈인지 알게 됐습니다. 자매끼리 부모님 댁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건 어렵지 않아도 형제끼리는 매우 힘들죠. ‘화장실과 처가는 멀면 멀수록 좋다’던 속담은 정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실제 통계를 봐도 20~40대 기혼 부부는 10년 전보다 장모님 댁 = 처가하고 가까이에 살고 있습니다. 성균관대 서베이리서치센터에서는 2003년부터 해마다 ‘한국종합사회조사(KGSS)’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 조사 항목에는 어머니 그리고 배우자 어머니와 떨어져 사는 거리를 여덟 단계로 표시하는 설문항목이 들어 있죠. 0은 같은 집에 사는 경우고 7은 해외에 사는 사례입니다. 그래서 점수가 낮을수록 (배우자) 어머니하고 가까이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2006년 자료를 살펴보면 20~40대 부부는 처가(4.16점)보다 시댁(3.95점) 가까이에 살았습니다. 가장 최신 자료인 지난해에는 처가(3.94)가 시댁(3.99)보다 가까워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시댁은 10년 전보다 멀어진 반면 친정은 많이 가까워졌습니다. 다만 이 자료는 ‘걸어서 15분 미만 거리(2점)’, ‘차나 전철 등으로 1~3시간 미만 거리(5점)’처럼 등급을 구분했기 때문에 실제 거리가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이에 대해선 성균관대 연구진이 지난달 ‘보건사회연구’에 게재한 논문 ‘친정과의 거리와 자녀출산’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연구진은 한국노동패널(KLIPS) 자료를 이용해 2000년 이후 혼인(초혼)한 가구를 대상으로 분석을 시행했습니다.그 결과 신혼부부 55.6%가 친정과 10㎞가 못 되는 지점에 신접살림을 꾸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0~20㎞ 지점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부부도 12.1%였으니까 3분의 2 이상(67.7%)이 친정과 20㎞ 미만 지점에 사는 셈이네요. 이렇게 친정 가까이 사는 이유는 뭘까.예상하시는 것처럼 ‘육아’ 때문입니다. 육아정책연구소에서 내놓은 ‘전국보육실태조사- 가구조사 보고’에 따르면 친정 부모(21.9%)가 시부모(15.3%)보다 양육에 도움을 주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그러니 친정집 근처를 선호하는 거죠.연구진은 신혼부부가 친정과 얼마나 떨어져 사는지 다섯 등급으로 나눠 첫째아이 출산 시기 차이를 조사했습니다. 친정하고 제일 가까이 사는 신혼부부가 첫 번째 아이를 제일 먼저 낳았습니다. 그렇다고 멀리 살수록 아이를 늦게 갖지는 않았습니다.이에 대해 연구진은 “손쉽게 친정 부모의 자녀 돌봄 지원 가능성을 기대해 볼 수 있는 거리 내에서는 친정 부모와 가까운 범주에 거주할수록 자녀출산이 촉진되지만 현실적으로 일상적 방문 또는 돌봄 지원이 용이하지 않은 거리(여기서는 50㎞ 이상)에서는 거리에 따른 이용교통수단의 차이(및 이에 따른 방문소요시간의 차이) 등으로 친정 부모와의 절대적인 거리에 비례하는 형태로 자녀출산 속도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풀이해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게 우리가 사는 현실이지만 놀랍게도(?) 시부모는 한 낱말이지만 친정 부모는 한 낱말이 아닙니다. 따라서 ‘친정_부모’라고 띄어 쓰는 게 올바른 표기법입니다. 이 정도면 유부녀 여러분들 항의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이들이 외할아버지·할머니는 그냥 할아버지·할머니라고 불러도 친할아버지·할머니는 ‘○○동 할아버지·할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한 게 언제부턴데요? 아, ‘그래서 너는 어디 사느냐’고요? 네, 저도 아파트 바로 옆 동이 처가입니다. 본가는? N포털에 물어보니 45.6㎞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저도 몰랐는데 저 트렌드에 민감한(?) 남자였나 봅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는 생각은 누구나 한번 쯤 해보셨을 터. 특히 자기는 몰라도 자녀는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신 부모님들이 적지 않으실 것이다. 특히 자기 생각을 그림으로 나타내는 ‘비주얼 싱킹(Visual Thinking)’이 사고력 발달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늘면서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80년 전 조상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1937년 8월 22일자 동아일보는 ‘어린이 일요(日曜)’ 꼭지에서 ‘재미있고 쉽사리 되는 사생 잘하는 비결’을 소개했다. (사생·寫生은 ‘실물이나 경치를 있는 그대로 그리는 일’이라는 뜻.) 당시 동아일보는 “어디를 가든지 조그만 스켓치뿍(스케치북)과 연필은 잊지 말고 가지고 다니라”며 “시집간 누이가 오거든 경대 앞에 앉아 화장하는 것을 몰래 슬쩍 스케치 해보라. 나중에 누나가 보면 깔깔대고 웃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1934년 처음 지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어린이 일요’는 요즘 어린이에게 읽어줘도 부족하지 않은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해 10월 14일자는 “아침에는 다리가 네 개, 점심에 두 개, 저녁에 세 개인 것은?”이라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소개했다. 1937년 10일 10일에는 나뭇잎에 단풍이 드는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7월 28일자에는 나폴레옹이 못 건넌 도버 해협을 독일군이 건널 준비를 하고 있다는 무시무시한 소식(아래 사진)을 전하기도 했다. 자식들을 우리보다 하나라도 더 알고, 하나라도 더 나은 사람으로 키우고 싶은 마음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에 살던 부모님들 역시 같았던 셈이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야구보다 축구가 훨씬 위험합니다. 아, 이건 어디까지나 비밀번호(password) 이야기입니다. 21일 인터넷 사이트 계정(ID)과 비밀번호를 관리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드는 회사 ‘스플래시데이터(www.splashdata.com)’에 따르면 ‘축구(football)’는 전 세계 누리꾼들이 지난해 다섯 번째로 많이 쓴 비밀번호였습니다. 게다가 2014년 10위, 2015년 7위, 지난해 5위로 순위 상승도 가파릅니다. 반면 야구(baseball)는 2012년 10위, 2014년 8위, 2015년 10위를 거쳐 지난해에는 10위권 바깥으로 사라졌습니다.비밀번호를 정할 때 복잡한 조합을 요구하는 사이트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지만 지난해 사람들이 제일 많이 쓴 비밀번호는 여전히 ‘123456’이었습니다. 그다음은 ‘패스워드(password)’ 그 자체. 이어서 ‘12345’, ‘12345678’이 뒤를 이었습니다. 이렇게 숫자를 조합하는 패턴이 가장 흔한 비밀번호 10개 중 6개를 차지합니다.‘qwerty’가 꾸준히 인기인 것도 눈에 띕니다. qwerty는 컴퓨터 키보드에서 문자가 나오는 맨 첫 줄 맨 왼쪽 여섯 글자를 차례대로 친 겁니다. 이 때문에 이렇게 키를 배열한 키보드를 ‘쿼티(qwerty)식 키보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동물 중에서는 ‘원숭이(monkey)’하고 ‘용(dragon)’이 인기입니다. ‘letmein’은 ‘나를 들여보내 달라(Let Me In)’는 뜻. ‘trustno1’은 ‘신뢰도 제일(Trust No. 1)’이라는 뜻으로 썼겠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흔히 쓰기 때문에 뚫리기 딱 좋은 비밀번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iloveyou 역시 해커가 사랑하는 비밀번호로 손꼽을 만합니다. 영어 알파벳 대·소문자 각 26개, 숫자 10개, 특수문자 33개를 조합해 여덟 자리 비밀번호를 만든다고 하면 경우의 수는 700조 개 가까이 나옵니다. 그런데 실제로 비밀번호 유출 사례를 보면 사람들이 제일 많이 쓴 비밀번호 10개가 나머지 전체 조합보다 많은 일도 적지 않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렇게 흔한 비밀번호를 많이 쓰는 건 물론 외우기 쉽기 때문입니다. 비밀번호를 만들 때 대소문자와 특수문자, 숫자를 반드시 조합하라고 강제해도 사람들은 ‘P@$$w0rd’처럼 외우기 쉽게 만드는 게 대부분입니다. 이 역시 해커들이 사전(dictionary)에 넣고 공격 대상으로 삼는 낱말일 뿐입니다.이 때문에 보안 전문가들은 낱말이 아니라 문장으로 비밀번호를 설정하는 게 좋다고 조언합니다. 예를 들어 마음에 드는 여성을 찾은 남성이 있다면 ‘Ask@her4date(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하자)’ 같은 비밀번호를 쓰면 좋다는 이야기입니다. 너무 낯간지럽다고요? 아래 기사를 읽고 비밀번호로 인생을 바꾼 남성 스토리를 알게 되신다면 생각을 바꾸실지 모릅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요즘 일본은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 열기로 뜨겁습니다. 이 대회 개최 장소는 그 유명한 한신고시엔(阪神甲子園)구장. 이곳 이름을 따서 이 대회를 그냥 ‘고시엔’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구장 명칭에 들어 있는 것처럼 효고(兵庫) 현 니시노미야(西宮) 시에 있는 이 구장은 원래 일본 프로야구 한신이 안방으로 쓰는 곳입니다. 고시엔 기간에는 이 구장에서 경기를 치를 수 없기 때문에 예전에 한신은 이 대회가 열리는 약 20일 동안 모든 일정을 방문 경기로 소화해야 했습니다. 3주 동안 방문 경기만 치르면 성적에도 악영향을 주는 게 당연한 일. 열성적이기로 유명한 한신 팬들은 이 방문 연전을 ‘죽음의 원정(死のロード)’이라고 부르며 제도 개선을 요구하기도 했죠. 그래서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오사카에 돔구장이 문을 연 1997년 이후에 한신은 고시엔 기간 이 돔구장을 임시 안방으로 쓰게 됐습니다. 원래 오사카돔이라고 부르던 이 구장은 교세라(京セラ) 그룹과 명명권 계약을 맺으면서 2006년 7월 1일부터 ‘교세라돔 오사카’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야구팬들에게 교세라는 이 구장 이름으로 유명하지만, 주부들에게는 가볍고 강한 세라믹 칼(사진)로 유명한 회사입니다.교세라는 1959년 ‘교토 세라믹(京都セラミツク)’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자세히 보시면 현재 사명도 이 이름을 줄인 형태입니다. 이 회사를 세운 건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 명예회장(85). 그는 ‘회생 불능’ 판정을 받은 일본항공(JAL)을 살려낸 인물로도 유명합니다.이나모리 회장의 아내는 아사코(朝子) 여사. 아사코 여사 아버지는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1898~1959)입니다. 그러니까 우 박사가 이나모리 회장의 장인이 되는 셈입니다. 이나모리 회장은 한국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경기 수원 시에 있던 장인어른 실험장에 두 번 정도 방문한 적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그런데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우 박사는 씨 없는 수박을 처음 만든 사람이 아닙니다. 1950년 우 박사가 귀국했을 때까지도 한국에서는 육종학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습니다. 이에 우 박사는 씨 없는 수박을 만드는 ‘기적’을 통해 농업 기술 중요성을 홍보하려 했던 겁니다. 우 박사는 1935년 ‘종(種)의 합성’ 이론을 다룬 논문으로 일본 도쿄(東京)대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 이론은 진화론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결국 찰스 다윈(1809~82)이 쓴 ‘종의 기원’ 내용 일부를 수정하게 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씨 없는 수박 역시 이 이론을 토대로 일본인 교수가 처음 만든 겁니다.세계적인 농학자 우장춘 박사. 그는 자식들에게 양부(養父)를 따라 ‘스나가(須永)’라는 성(姓)을 붙여줬지만, 본인은 계속 우(禹)씨 성을 고집했습니다. 영어 논문에 이름을 쓸 때도 이름 장춘(長春)은 일본식으로 나가하루(Nagaharu)라고 했지만, 성은 우(U)로 적었습니다.우 박사가 이론적으로만 뛰어났던 것도 아닙니다. 그가 없었으면 우리가 먹는 김치도 지금과 전혀 다른 모양이었을지 모릅니다. 현재 우리가 먹는 배추는 우 박사가 만든 원예 1, 2호를 기초로 개량한 품종이고, 깍두기를 담글 때 쓰는 무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제주도에 감귤과 유채꽃 재배를 권한 것 역시 우 박사였습니다. 강원도에 감자가 흔해 짓궂은 누리꾼들이 ‘감자국(國)’이라고 놀릴 정도가 된 것도, 가을이면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을 떠올리는 것도 모두 우 박사 업적이죠. 1959년 우 박사가 십이지장궤양으로 병상에 눕자 정부는 문화포장을 수여했습니다. 우 박사는 훈장을 어루만지면서 “고맙습니다. 아버지 나라가 나를 알아줘서…”라고 감격해 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조금만 더 일찍 알아주지…”라며 서글프게 눈물을 흘렸다고 하네요.우 박사의 아버지는 우범선 씨(1857~1903). 그는 명성황후시해사건(1895년)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우 박사는 일본으로 망명한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런 출생 배경은 지금도 누군가 문제 삼을 소지가 다분한 게 사실. 해방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당시에는 더했습니다. 우 박사는 훈장을 받고 나서 사흘 뒤에 숨졌고, 수원 농촌진흥청에 묻혔죠. 우 박사 가문과 수원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나모리 회장은 나중에 수원을 대표하는 인물과 인연을 한 번 더 맺기도 했습니다. 주인공은 축구 선수 박지성(36). 그가 일본 프로축구 J리그에서 뛸 때 소속팀이었던 교토 퍼플 상가(현 교토 상가 FC)의 후원 기업 중 하나가 교세라입니다. (참고로 상가·サンガ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온 말로 ‘동료’라는 뜻입니다. 가게를 뜻하는 상가·商家하고는 관련이 없습니다.)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박지성이 네덜란드 리그에 진출하려 하자 이나모리 회장은 직접 박지성을 만나 잔류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가 네덜란드 에인트호번 행을 결정하자 이나모리 회장은 박지성과 다시 만나 “박 군, 언제든 돌아온다면 환영하겠다”고 말하며 아쉬워했습니다.어떻습니까. 세상만사는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얼기설기 엮여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하리….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6·25전쟁 이후 북한과 미국이 실제로 전면전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때는 언제일까. 많은 역사학자들이 1976년 8월 18일이라고 의견을 모은다. 이날은 그 유명한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벌어진 날이다. 이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는 한미 경비병과 노무자 5명이 남측 관측소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 가지를 자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북한군이 가지를 잘 치는 법을 알려주는 등 작업이 순조로웠다. 그때 북한군 박철 중위가 부하들을 데리고 와 ‘가지치기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아서 보니파스 미군 대위는 이를 묵살하고 작업을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박철이 북한군 30여 명을 추가로 불렀다. 이들은 손에 쇠몽둥이와 도끼를 들고 있었다. 북한군이 남쪽 사람들을 포위한 상태로 박 중위가 재차 작업중단을 요구했다. 이번에도 보니파스 대위가 요구에 따르지 않자 박 중위는 손목시계를 풀어 손수건으로 감싼 뒤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죽여!”보니파스 대위는 도끼에 머리가 찍혀 현장에서 즉사했다. 마크 바렛 중위 역시 북한군으로부터 습격당한 사병을 도우려다 사망했다. 미군 기동타격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북한군이 군사 분계선을 넘어간 다음이었다.당시 유엔군 사령관 리처드 스틸웰 미 육군대장은 일본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전투기 뒷자리에 탑승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은 이튿날(8월 19일) 군사정전위원회 개최를 요구했지만 북한은 불참했다. 그러면서 “미군이 나무를 자르는 것을 보고 경비병들이 제지하러 나섰다. 그 순간 갑자기 미군이 도끼를 던져 날아오는 도끼를 손으로 잡아 되던졌는데 보니파스 대위가 맞아 죽었다”고 주장하며 오히려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협상이 결렬되자 주한유엔군과 한국군은 6·25전쟁 이후 처음으로 준전시체제에 돌입했다. 북한군도 이에 맞서 북풍 1호를 발동해 전군 완전무장을 지시했다. 이렇게 양쪽이 맞서는 가운데 미군은 ‘폴 버니언 작전’을 세웠다. 표면적으론 ‘미루나무를 자른다’는 것이지만 북한이 도발해 온다면 휴전선을 넘어 개성을 탈환하고 연백평야 깊숙한 곳까지 진격한다는 내용이었다. 8월 21일 오전 7시. 한미 호송차량 23대가 북한 측에 사전 통보 없이 공동경비구역으로 진입했다. 미군 공병대원 16명은 전기톱과 도끼로 미루나무를 베어 내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미군 보병이 탄 다목적 헬기 20대와 공격용 헬기 7대가 떠 있었다. 그 위로는 B-52 폭격기 가 전투기 엄호를 받으며 선회 중이었다. 대구에는 핵미사일을 장착할 수 있는 F-111 편대가 미국 아이다호 주에서 날아와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에는 미드웨이급 항공모함과 순양함 5척이 대기 중이었다.북한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미루나무를 모두 자르는 순간 폴 버니언 작전은 끝이었다. 그러나 일꾼으로 위장해 현장을 엄호하고 있던 특전사 제1공수특전여단 대원 64명은 그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M16 소총으로 무장한 이들은 손에 도끼와 몽둥이를 들고 북한군 초소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차례로 북한군 초소 4곳을 파괴했다. 미군 트럭 운전병이 이들을 막아서려 하자 권총으로 위협하는 일도 있었다.이들이 미군과 맞서면서까지 북한 초소로 쳐들어 간 건 박정희 대통령의 분노 때문이었다. 이 사건을 처음 접한 뒤 박 대통령은 “우리도 참는 데 한계가 있다. 내 군화와 철모를 가져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이 특공대를 만든 것부터 박 대통령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만약 북한에서 반격한다면 박 대통령은 전쟁도 불사할 것처럼 보였다.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 특전사 대원들이 침입해 난장판을 만들자 북한군은 초소를 비우고 도망가고 말았다. 이날 북한군 부대 통신을 감청한 미군은 “그들은 겁을 먹고 있었다”고 했다. 상황이 모두 끝난 뒤 북한 측 군사정전위 수석대표 한주경 소장이 미국 측 수석대표에게 비밀 면담을 요청했다. 한 소장은 그 자리에서 유감을 표명한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했다. 미국은 논란 끝에 이 친서를 사과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이 사건 이후 북한이 직접 미국을 상대로 무력도발을 벌인 적은 없다. 방송에서는 미국을 맹비난해도 실제로 건드린 적은 없는 것. 미국 본토가 공격당한 9·11 테러 때는 오히려 테러리즘을 맹비난하면서 ‘우리가 한 일이 아니다’고 강조하기까지 했다. 북한은 이번에도 “괌을 공격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김정은 노동위원장이 “미국 놈들의 행태를 좀 더 지켜볼 것”이라고 말하면서 발을 빼는 분위기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정말입니다. 달걀 색깔로 ‘아재 테스트’가 됩니다.“나는 어릴 때 흰 달걀을 먹은 적이 있다. O 또는 X?”여기서 O를 선택하셨다면 ‘아재’입니다. 인정하셔야 합니다. 진짜 그렇습니다. 요즘 흰 달걀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요즘 ‘살충제 달걀’ 때문에 아주 난리가 났습니다. 그걸 핑계 삼아 제 주변에 (아주 드물게) 있는 1990년 이후 출생자에게 ‘흰 달걀’에 대해 물었더니 ‘그런 건 외국에나 있는 거 아닌가요?’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더군요. ‘부활절 때 흰 달걀에 그림 그려보지 않았냐’고 물어도 구석기 시대 사람처럼 쳐다보더군요. 요즘에는 파라핀에 담가서 색깔을 낸다고 합니다. (네, 저는 가톨릭 냉담자입니다.)그래서 자료를 뒤져 보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흰 달걀은 언제 우리 곁에서 사라졌을까?한국가금학회에서 펴낸 ‘1993 한국의 양계’에 해답이 들어 있었습니다. (가금·家禽은 집에서 기르는 거위, 닭, 오리 같은 날짐승을 뜻하는 낱말입니다.) 갈색산란계(褐色産卵鷄) 그러니까 갈색 달걀을 낳는 닭 사육 비율은 1991년 이미 98%에 달했습니다. 대한양계협회에 물어봤더니 현재 이 비율은 99%까지 올랐다고 합니다.1986년에 갈색 달걀을 낳는 닭을 키우는 비율이 이미 60%를 넘어섰으니 아직 나이가 30대 중반 이하이신 분들은 흰 달걀을 잘 보지 못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니 아재들만 ‘흰 달걀 전성시대’에 살았던 셈입니다.그러면 어떤 닭이 흰 달걀을 낳고, 어떤 닭이 갈색 달걀을 낳을까요? 알 낳는 닭은 크케 레그혼 같은 흰색 품종과 로드 아일랜드 레드, 뉴 햄프셔 같은 갈색 계통 품종으로 나뉩니다. 깃털 색이 그렇다는 뜻이죠. 깃털 색을 결정하는 색소가 달걀 껍데기 색깔도 결정합니다. 그래서 흰 닭은 흰 달걀을 낳고, 갈색 닭은 갈색 달걀을 낳습니다.백인종이라고 황인종보다 더 뛰어난 인종이 아닌 것처럼 달걀 색깔도 맛이나 영양분 등에서 의미 있는 차이를 만들어내지는 않습니다. 예전에 흰색 달걀이 많았던 건 흰 닭이 사료를 적게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생산비도 낮출 수 있었습니다.그러다 기술 발달에 따라 갈색 닭도 달걀 생산력이 올라가면서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양계협회 관계자는 “흰 닭은 보통 달걀 생산만 가능하지만 갈색 닭 품종은 달걀과 고기를 모두 얻을 수 있는 난육(卵肉) 겸용 품종이어서 농가에서 갈색 닭을 더 선호하기 시작했다”면서 “1980~90년대 달걀 유통업체에서 ‘토종 달걀’, ‘황금달걀’ 마케팅을 벌여 소비자들도 갈색 달걀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실제로 2003년 국립수의과학검역원, 양계협회, 우송대, 충남대 공동 연구진이 내놓은 논문 ‘난각색에 대한 한국 소비자 기호도 조사’에 따르면 9점 만점을 기준으로 했을 때 한국인들은 갈색 달걀에 6.27점을 준 반면 가장 흰 달걀에는 4.51점밖에 주지 않았습니다.연령대별로 봐도 20~30세를 제외하면 모두 제일 갈색 달걀을 제일 좋아했습니다. 가장 젊은 이 세대는 제일 흰 달걀에 제일 낮은 점수를 준 유일한 집단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확실히 젊은 세대에게 흰 달걀은 낯설다고 봐도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물론 갈색 달걀을 선호하는 게 전 세계적인 현상은 아닙니다. 독일 소재 육종 회사 로만 티어주흐트에서 추정한 자료에 따르면 아프리카, 유럽, 동아시아에서는 갈색 달걀을 선호하지만 라틴아메리카, 북아메리카, 중동에서는 흰 것을 선호하죠.그래도 색깔보다 더더욱 중요한 건 역시 신선도일 터. 다시 흰 달걀을 먹어 보고 싶은 마음 정도는 얼마든 포기할 수 있습니다. 갈색 달걀이라도 아무 걱정 없이 먹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신다면 아래 추천 버튼을 힘차게 눌러주세요!!!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해마다 광복절(8월 15일)이 되면 일본 정치인들이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참배할 것인지 아닌지 관심이 쏠립니다. 그때마다 따라오는 표현이 이 신사가 “A급 전범을 합사(合祀)했다”는 겁니다. 도대체 A급 전범은 뭐고, 합사는 무엇이기에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문제가 될까요?전범(戰犯)은 일단 ‘전쟁 범죄인’을 줄인 말입니다. A급 전범은 문자 그대로 그 중에서 A급(級)이라는 뜻입니다. A급이 있으면 있을 터. 실제로 B급 전범과 C급 전범도 있습니다. 그러면 A급 전범이 제일 나쁜 사람들이고 B, C로 내려갈수록 덜 나쁜 사람들일까요?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군은 이 전쟁과 관련된 동아시아 전범을 심판할 수 있도록 극동군사재판을 열었습니다. 이 재판에 필요한 조례를 만들면서 제5항 a, b, c조에 전범 분류 조항을 넣었습니다. 이 a~c조에 해당하는 전범이 바로 A~C급 전범입니다.이 조례에 따르면 △A급은 평화에 대한 죄(crimes against peace) △B급 통례의 전쟁 범죄(conventional war crimes) △C급은 비인도적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를 저지른 사람입니다.그러니까 혈액형 중에서 A형이 B형보다 더 품질(?)이 뛰어난 게 아니듯이 A급 전범이라고 꼭 BC급(보통 이렇게 붙여 씁니다) 전범보다 더 악랄한 건 아닙니다. 당연히 처벌도 ‘케바케(케이스 바이 케이스)’였습니다. A급 전범인데 징역형만 받은 사람도 있고, (보통 이렇게 붙여 씁니다) BC급 전범인데 사형을 선고받은 이들도 있습니다.그런데도 왜 A급 전범이 문제가 되는 걸까요? 이 조례가 스스로 증명하는 것처럼 어떤 급 전범이 되려면 일단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재판을 받으려면 기소를 해야 하죠. 극동군사재판에서는 A급 전범으로 분류 가능한 인물 중에서 고위 군사 지휘관과 정부 각료만 기소했습니다. 그 결과 실제로 전쟁을 기획하고, 주도한 인물이 A급 전범이 됐습니다.그러면 합사는 뭘까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합사는 ‘둘 이상의 혼령을 한 곳에 모아 제사를 지낸다’는 뜻입니다. 야스쿠니 신사 문제에서 합사는 ‘한 곳에 모아’에 방점이 찍힙니다. 현재 야스쿠니 신사 영새부(靈璽簿·죽은 이의 이름과 간단한 사항을 적은 책)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A급 전범 14명을 포함해 총246만6532 명. (야스쿠니 신사에는 전사자들 위패가 없습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한번 합사한 제신(祭神)을 빼는 것은 불가능하며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따라서 A급 전범을 합사했다는 건 이들을 원래 이 신사에서 메이지(明治) 시대 이후 제사를 올렸던 다른 전사자들과 똑같이 취급하겠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이들을 전범으로 규정한 극동군사재판 판결을 부인하는 행위고, 이건 침략 책임을 부인하는 행위가 됩니다. 사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 일본 정치인들이 여러 차례 이 신사를 참배했지만 1978년까지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해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자 동아일보는 ‘일본 우경화의 계절’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내며 비판했습니다. 1978년은 야스쿠니 신사에서 이 A급 전범을 합사한 해입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분명 일본 국왕(일왕)의 군대(황군)를 미화하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전쟁 당시 재임 중이던 히로히토(裕仁) 일왕조차 A급 전범을 합사한 1978년 이후로는 이 신사를 한번도 찾지 않았습니다. 그건 아키히토(明仁) 현재 일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왕가에서 보기에는 A급 전범 14명이 쓸데없이 전쟁을 벌여 자기들 목숨을 위태롭게 만든 존재일 테니까요.사정이 이런 데도 일본 보수 세력은 아소 다로(麻生太郞) 전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는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 같은 곳”이라고 발언하는 등 야스쿠니 신사를 옹호하기 바쁩니다. 그러니 이렇게 주장하고 싶습니다. “정말 그렇게 만들고 싶으면 말도 안 되는 논리 집어치우고 일단 A급 전범부터 분사(分祀)하라”고 말입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