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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광복절(8월 15일)이 되면 일본 정치인들이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참배할 것인지 아닌지 관심이 쏠립니다. 그때마다 따라오는 표현이 이 신사가 “A급 전범을 합사(合祀)했다”는 겁니다. 도대체 A급 전범은 뭐고, 합사는 무엇이기에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문제가 될까요?전범(戰犯)은 일단 ‘전쟁 범죄인’을 줄인 말입니다. A급 전범은 문자 그대로 그 중에서 A급(級)이라는 뜻입니다. A급이 있으면 있을 터. 실제로 B급 전범과 C급 전범도 있습니다. 그러면 A급 전범이 제일 나쁜 사람들이고 B, C로 내려갈수록 덜 나쁜 사람들일까요?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군은 이 전쟁과 관련된 동아시아 전범을 심판할 수 있도록 극동군사재판을 열었습니다. 이 재판에 필요한 조례를 만들면서 제5항 a, b, c조에 전범 분류 조항을 넣었습니다. 이 a~c조에 해당하는 전범이 바로 A~C급 전범입니다.이 조례에 따르면 △A급은 평화에 대한 죄(crimes against peace) △B급 통례의 전쟁 범죄(conventional war crimes) △C급은 비인도적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를 저지른 사람입니다.그러니까 혈액형 중에서 A형이 B형보다 더 품질(?)이 뛰어난 게 아니듯이 A급 전범이라고 꼭 BC급(보통 이렇게 붙여 씁니다) 전범보다 더 악랄한 건 아닙니다. 당연히 처벌도 ‘케바케(케이스 바이 케이스)’였습니다. A급 전범인데 징역형만 받은 사람도 있고, (보통 이렇게 붙여 씁니다) BC급 전범인데 사형을 선고받은 이들도 있습니다.그런데도 왜 A급 전범이 문제가 되는 걸까요? 이 조례가 스스로 증명하는 것처럼 어떤 급 전범이 되려면 일단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재판을 받으려면 기소를 해야 하죠. 극동군사재판에서는 A급 전범으로 분류 가능한 인물 중에서 고위 군사 지휘관과 정부 각료만 기소했습니다. 그 결과 실제로 전쟁을 기획하고, 주도한 인물이 A급 전범이 됐습니다.그러면 합사는 뭘까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합사는 ‘둘 이상의 혼령을 한 곳에 모아 제사를 지낸다’는 뜻입니다. 야스쿠니 신사 문제에서 합사는 ‘한 곳에 모아’에 방점이 찍힙니다. 현재 야스쿠니 신사 영새부(靈璽簿·죽은 이의 이름과 간단한 사항을 적은 책)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A급 전범 14명을 포함해 총246만6532 명. (야스쿠니 신사에는 전사자들 위패가 없습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한번 합사한 제신(祭神)을 빼는 것은 불가능하며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따라서 A급 전범을 합사했다는 건 이들을 원래 이 신사에서 메이지(明治) 시대 이후 제사를 올렸던 다른 전사자들과 똑같이 취급하겠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이들을 전범으로 규정한 극동군사재판 판결을 부인하는 행위고, 이건 침략 책임을 부인하는 행위가 됩니다. 사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 일본 정치인들이 여러 차례 이 신사를 참배했지만 1978년까지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해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자 동아일보는 ‘일본 우경화의 계절’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내며 비판했습니다. 1978년은 야스쿠니 신사에서 이 A급 전범을 합사한 해입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분명 일본 국왕(일왕)의 군대(황군)를 미화하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전쟁 당시 재임 중이던 히로히토(裕仁) 일왕조차 A급 전범을 합사한 1978년 이후로는 이 신사를 한번도 찾지 않았습니다. 그건 아키히토(明仁) 현재 일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왕가에서 보기에는 A급 전범 14명이 쓸데없이 전쟁을 벌여 자기들 목숨을 위태롭게 만든 존재일 테니까요.사정이 이런 데도 일본 보수 세력은 아소 다로(麻生太郞) 전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는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 같은 곳”이라고 발언하는 등 야스쿠니 신사를 옹호하기 바쁩니다. 그러니 이렇게 주장하고 싶습니다. “정말 그렇게 만들고 싶으면 말도 안 되는 논리 집어치우고 일단 A급 전범부터 분사(分祀)하라”고 말입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6248’. 최근 일주일 동안 제 하루 평균 걸음걸이 숫자입니다. 요즘에는 따로 만보계 같은 도구를 쓰지 않아도 하루에 몇 걸음을 걸었는지 스마트폰이 자동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숫자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숫자는 한국 사람 평균보다 많을까요? 적을까요?14일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팀에 따르면 한국 사람은 하루에 평균 5755걸음을 걷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한국 사람 평균보다 8.6% 정도 더 걸어 다닌 셈입니다. 스탠퍼드대 연구팀 역시 스마트폰 데이터를 가지고 조사했습니다. 걸음걸이를 알려주는 특정 어플리케이션(앱) 데이터를 가지고 이 앱 사용자가 최소 100명이 넘는 전 세계 111개국 71만7527개국 하루 평균 걸음 숫자를 알아봤습니다. 누적 날짜 숫자로는 6800만 일이 넘는 ‘빅데이터’를 모은 겁니다.연구팀은 이 중에서 사용자가 1000명이 넘는 46개국 데이터를 국제학술지 ‘네이처’를 통해 공개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한국 사람들은 전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많이 걷습니다.당연한 얘기지만 나라별 평균이 높다고 그 나라 사람 건강이 좋아지는 건 아닙니다. 아래 있는 추천 버튼까지 다 누르셨다며 이제 밖에 나가서 걸으실 차례입니다. 스마트폰 화면 보시면서 걸으면 위험하니까 조심하시고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얼마 전 사석에서 만난 한 서울 소재 모 여대 여성학 교수님 말씀.“저 어릴 때 밥 먹을 때마다 엄마가 오빠 앞으로 맛있는 반찬 밀어다 주는 게 너무 싫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여성학을 공부하게 됐는지 몰라요. 근데 웃기는 건요 어느새 보니까 저도 딸은 놔두고 아들 앞으로 맛있는 반찬 밀고 있더라니까요.”‘딸 바보’들 전성시대에 이 교수님이 특이하신 걸까요? 아니면 여전히 저렇게 생각하는 어머니가 적지 않을 걸까요? 한번 데이터로 알아보겠습니다.● 확실히 딸을 원한다!이제 ‘그래도 아들 하나는 꼭 있어야 한다’는 말은 사극 대사처럼 들리는 시대가 됐습니다. 실제로 성균관대 서베이리서치센터에서 실시하고 있는 한국종합사회조사에 따르면 2008년에서 2012년 사이에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2012년 이후 줄곧 아들보다 딸을 선호하는 의견이 많이 나오거든요. 선호 자녀 성별을 물어본 가장 최신 자료인 2014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딸을 선호한 응답자가 아들을 선호한 응답자보다 64.6% 많았습니다.태어난 순서에 따른 성비를 봐도 아들을 선호하던 분위기가 빛이 바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010년대 초반만 해도 셋째 이상에서는 아들이 태어나는 비율이 더 높았습니다. 아이가 배 속에 있을 때 성별을 알아보고 딸이면 낳지 않았던 것. 2015년에는 셋째 이상 성비도 105.6으로 ‘자연 성비’ 범위를 유지하고 있죠. 원래 진화적으로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보다 더 많이 태어나기 때문에 성비가 103~107 사이에 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아예 직접 성별을 고를 수 있는 입양은 더 심합니다. 국내 가정에서 입양한 사례를 보면 20002년 이후 딸을 선택한 비율이 60%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죠. 한 입양기관 관계자는 “실제 입양 신청자 10명 중 9명은 딸을 원한다. 그나마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어서 이 정도 비율에 그치는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아들, 딸 똑같다?그러면 키울 때도 아들과 딸이 똑같을까요?통계적으로 이를 알아본 논문 ‘Transition of Son Preference: Evidence from Korea’가 지난달 26일 세상에 나왔습니다. 논문 제목은 영어지만 한양대 최자원 교수(경제학)와 한국외대 황지수 교수(국제통상학)가 연구에 참여했습니다. 연구진은 사교육비조사, 생활시간조사, 한국노동패널조사 같은 조사 결과를 활용해 첫 아이가 아들과 딸일 때 양육 스타일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조사했습니다.그 결과 첫 아이가 아들일 때 어머니가 복직할 확률은 9% 포인트 내려갑니다. 연구진은 이를 “딸보다 아들을 어머니가 직접 키우는 확률이 높은 것”이라고 분석했죠. 그러면서 “첫 아이가 아들일 때 둘째를 낳을 확률이 내려간다는 점을 고려하다면 더욱 놀라운 일”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자연스레 자녀가 아들일 때 어머니가 일주일에 일하는 시간도 줄어듭니다. 기본적으로 어머니가 계속 일을 하지 않으면 주당 근무시간이 제로(0)이기 때문입니다. 출산 후 2년을 기준으로 하면 아들을 낳은 어머니는 주당 근무시간이 1.44시간 줄고, 5년 후에는 2.05시간이 줄어듭니다.한국에서는 또 아들에게 딸보다 집안일을 절반 정도밖에 시키지 않습니다. 10~18세 아들이 1주일에 집안일을 평균 0.99시간 도울 때 딸은 1.89시간을 돕습니다. ‘평소에 집안일을 돕는다’는 비율도 아들은 27.8%로 딸(44.4%)보다 16.6%포인트 낮았죠. 또 아들은 학원비도 더 많이 씁니다. 중학생 국어, 영어, 수학 학원을 기준으로 아들은 한 달에 평균 26만2250원을 학원비로 쓰지만 딸은 23만2530원으로 아들보다 2만9700원이 적습니다. 또 아들을 가진 부모님은 딸을 가진 부모님보다 성적이 떨어졌을 때 학원비 지출을 더 많이 늘립니다. 아들을 낳은 부모는 딸을 낳은 부모보다 자식 ‘가방끈’이 0.3년 정도 더 길기를 기대하기도 했죠. 연구진은 아들과 딸이 모유 수유 기간에서도 차이가 나는지 조사했는데 이 부분에서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를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하네요.물론 학원비를 논할 정도로 자란 세대는 아직 남아선호사상이 남아 있을 때 태어난 친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1999년에 아들을 낳은 어머니는 딸을 낳은 어머니보다 7시간 적게 일했습니다. 아들과 딸이 집안일을 돕는 시간 차이도 1시간에서 0.7시간으로 줄어들었죠. 앞으로는 이런 구분이 점점 더 사라질 겁니다. 지금은 문자 그대로 남아선호사상이 과도기(in transition)를 지나고 있는 거니까요. 그마저 끝물입니다.그러니 교수님, 제가 보니까 아드님 팔 길더라고요. 그냥 반찬 그 자리에 놔둬도 잘 먹을 겁니다. 굳이 따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아, 그나저나 옛날에 그렇게 아들만 좋아해서 어떻게 됐을까요? 지난달 말 주민등록인구를 기준으로 20~24세 인구 중에서는 남성이 여성보다 20만3344명 많습니다. 25~29세도 16만1013명 차이입니다. 그러니 20대 남성 여러분, 힘내세요. 여러분이 연애를 못하는 건 꼭 여러분 잘못만은 아닙니다. ㅠㅠ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1999년 8월 24일 ‘옷 로비’ 청문회장. 온통 흰색 차림에 짙은 화장을 한 한 남자가 들어섰다. 그는 증인 선서 때 자기 이름을 ‘앙드레 김’이라고 소개했다. 그러자 목요상 당시 국회 법사위원장(82)으로부터 “본명을 밝히라”는 지적이 나왔다. 그는 자기 이름을 ‘김봉남(金鳳男)’이라고 수정했다. 이 장면은 당시 TV 전파를 타면서 화제가 됐다. 온 국민이 가장 세련된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가장 토속적인(?) 이름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특별검사(특검)제도를 도입한 이 로비 사건이 결국 흐지부지 끝나자 “검찰에서 밝혀낸 건 앙드레 김의 본명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당시 ‘김봉남’은 한국을 뒤흔든 세 글자가 됐다.이를 비아냥거리는 듯한 칼럼도 나왔다. 당시 한 매체는 “자기는 관계없이 얼떨결에 (청문회장에) 불려나온 듯 요상한 표정을 짓던 한국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 ‘봉남 킴’(앙드레 김)도 그중 한 사람이다. 엄밀히 말해 그들은 패션 디자이너가 아니다. 패션 디자이너란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입고 다니는 옷을 만드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며, 봉남이 형처럼 연예인과 일부 사모님들을 위해 파티옷, 결혼식옷과 같은 조명발 받는 공주옷을 만드는 사람은 ‘무대의상 디자이너’라 해야 옳다”고 주장했다.반면 동아일보는 1999년 8월 26일자 ‘기자의 눈’에 “선비는 호(號)로 작가는 필명(筆名)으로 부르는 것이 예의이듯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은 ‘앙드레 김’으로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썼다. 앙드레 김은 나중에 ‘신동아’와 인터뷰에서 “그것(기자의 눈)을 읽다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뭉클했다”고 회고했다. 앙드레 김은 그러면서 “그 기사를 써주신 기자님이 잘못 아신 부분이 있는데요. 저는 제 이름을 부끄러워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사람들이 제 이름을 가지고 말할 때 굉장히 실망스럽고 서글펐어요.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지상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해서 예명을 사용하는 게 이상할 것도 없고요. 연예인들 중에 예명으로 활동하는 사람들 많잖아요?”라고 덧붙였다.그는 또 ‘무대의상 디자이너’라는 평에 대해 “제가 화가 중에 김기창, 천경자 선생님 너무너무 존경하는데요. 돈이 없어서 아직 작품은 구입하지 못했지만요.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 돈을 벌어 꼭 그분들 작품 한점씩 사서 집에 걸어놓는 거예요. 저처럼 그분들 그림을 직접 갖지는 못해도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면 좋은 것 아닌가요? 의상도 마찬가지예요. 제 작품을 입지는 못하지만 쇼윈도에서, 패션쇼에서 그것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저런 옷을 입어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문화 아닌가요? 의상에는 꿈과 환상이 있어야 해요. 왜 꼭 입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반문하기도 했다.신동아와 앙드레 김의 인연은 이 인터뷰가 처음은 아니었다. 앙드레김은 당시로부터 33년 전인 1966년 2월호 신동아에 이런 에세이를 썼다. 당시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앙드레의 작품은 사치스럽다는 評(평)을 해주시는 분이 더러 있다. 그것이 어떤 性格(성격)의 評(평)이건 남의 見解(견해)엔 우선 謙虛(겸허)한 姿勢(자세)로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限定(한정)된 條件(조건)을 최대한 살려서 옷을 아름답게 만들어내려는 내 노력이 이런 식의 無責任(무책임)한 한마디로 處理(처리)된다는 것은 創作(창작)세계의 一角(일각)에 몸담고 있는 자로서의 自負心(자부심)으로 볼 때 여간 서운하고 억울한 노릇이 아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俗談(속담)이 있듯이 이 같은 천으로 보다 화사하게 또 때로는 ‘고저스’하게 옷을 지어낸다는 것이 어째서 ‘사치’인지 奢侈(사치)의 개념이 아리숭해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고저스: gorgeous)세상을 살다 보면 ‘최고’와 ‘가장 유명한’이 서로 아주 다른 의미가 될 때가 있다는 걸 깨닫곤 한다. 그런 점에서 앙드레 김은 이 두 수식어를 모두 써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대한민국 패션 디자인의 아이콘이었다. 옷만 보고도 또 말투만 듣고도 그게 누구인지 거의 전 국민이 알아차릴 수 있는 패션 디자이너를 과연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옷 로비 사건 때 ‘봉남이 형’이라고 부르며 그를 조롱하던 매체조차 그가 국내 최고의 디자이너라는 사실만큼은 부인하지 못했다.2010년 오늘(8월 12일)은 대한민국은 국내 최고이자 가장 유명했던 의상 디자이너 앙드레 김을 잃은 날이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평소에는 어디 뒀는지 까먹고 있다가 휴가철이 되면 급하게 찾게 되는 물건이 있으니….바로 여권입니다. 해외로 휴가를 떠나시는 분들에게는 공항으로 가기 전 꼭 챙기셔야 하는 물건이자, 해외로 못 나가시는 분들도 아쉬워 한번 찾아보게 되는 물건이죠.해외에서는 ‘여권=국적’으로 인식하는 일이 많습니다. 운동선수가 올림픽 등 세계 대회에 나가려고 국적을 바꾸는 걸 ‘Passport Swapping(여권 바꾸기)’이라고 부를 정도입니다.중국인에서는 자녀에게 홍콩 여권을 갖게 해주려는 중국인들이 홍콩으로 ‘원정 출산’을 떠나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중국 여권 소지자가 사전에 비자를 받지 않고 갈 수 있는 나라는 58개국(무비자 21개국, 도착비자 37개국)인데 홍콩 여권이 있으면 141개국(무비자 108개국, 도착비자 33개국)에 갈 수 있거든요. (도착비자는 해당 국가 입국심사대에서 발급 받는 비자를 뜻합니다.)그러면 한국 여권은 어떨까요? 패스포트인덱스(www.passportindex.org)에 따르면 올해 기준으로 한국 여권 소지자가 사전 비자 신청 없이 갈 수 있는 나라는 총 157개국입니다. 이는 독일 싱가프로(각 158개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숫자. 스웨덴 여권 소지자도 한국하고 똑같이 157개국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습니다.단, 한국은 비자가 아예 필요 없는 나라가 116개국으로 123개국 무비자인 스웨덴보다 적습니다. 따라서 스웨덴이 ‘여권 파워랭킹’ 3위라면 한국은 4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한국 여권은 전 세계에서 네 번째로 좋은 여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여기서 한 가지 더. 한국 여권 소지자는 지구 면적 11.5%를 차지하는 러시아(약 1709만8242㎢)에 갈 때 비자가 필요 없습니다. 반면 독일, 싱가포르, 스웨덴 여권 소지자 모두 비자를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한국 여권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땅을 비자 없이 갈 수 있는 여권입니다.그러면 북한은 어떨까요? 북한 여권 소지자는 38개 나라에 사전 비자 신청 없이 갈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 14번째로 나쁜 여권이 북한 여권입니다.여기까지 보시면서 재미있는 것 하나 찾으셨나요? 네, 여권 표지 색깔을 크게 구분하면 검은색, 녹색, 붉은색, 파란색 등 네 가지뿐입니다. 외교부 여권과 관계자는 “여권 표지에 사용하는 인쇄용지 표준 규격에 맞는 색상 스펙트럼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여권 표지 색깔도 제한적인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우리는 언제부터 지금 쓰는 시간을 쓰게 됐을까.1894년 갑오개혁을 떠올리셨다면 너무 멀리 가신 것. 일제강점기도 아까운 오답. 정답은‘ 1961년 8월 10일’이다. 박정희 정권은 5·16군사정변 성공 후 87일이 지난 이 날 표준시간을 30분 앞당겼다. 8월 10일 오전 0시를 오전 0시 30분으로 바꾸는 방식이었다.동아일보는 그해 8월 5일 표준시간 변경 소식을 전하면서 “현재의 표준자오선인 동경 127도 30분을 동경 135도로 변경하게 된 이유는 세계 각국에서 실시하는 표준시 제도가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통과하는 본초자오선을 표준으로 하는 국제 표준 시간을 기준으로 하여 정수(整數)의 시차로써 정하는 것을 관계로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반정수(半整數)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공항해 기상관측 등 시간 환산에 있어 일어나는 혼란을 시정키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삼는 그리니치 평균시(GMT·Greenwich Mean Time)는 1972년 1월 1일 협정세계시(UTC·Coordinated Universal Time)로 바뀌었다. UTC를 기준으로 현재 한국 표준시를 표시하면 UTC+9가 된다. 한국은 1961년 8월 9일까지는 UTC+8½을 썼다. 정수와 반정수가 등장하는 건 이 때문이다.이렇게 시간을 바꾸면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지 않았을까. 정답은 ‘아니다’였다. 그달 10일자 동아일보 석간은 “지금까지 서머타임으로 시곗바늘을 돌리느라 여러 차례 어리둥절했던 때문에 대부분이 무관심한 태도”라고 전했다. 한국은 1948~51년, 1955~60년 서머타임을 실시했다. 한국에서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표준시를 정한 건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같은 기사는 “어제까지 사용하던 127도 30분선은 구한말에 사용되었으나 (한일)합병 후 123도선으로 변경되었는데 해방 후 4287년 3월 21일 127도 30분선으로 복귀했다가 이번에 재개정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4287년은 단기(檀紀)로 서기 1954년을 뜻한다.이 기사처럼 1908년 대한제국에서 정한 첫 번째 한국 표준시는 동경 127도 30분 기준이었다. 그 후 1912년 동경 135도가 됐다가 1954년 춘분(春分)에 다시 127도 30분으로 돌아왔다. 그러다 1961년 다시 135도로 돌아간 뒤 56년 동안 이 기준을 유지하고 있다.그렇다고 표준자오선을 127도 30분으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동경 135도는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을 지난다는 게 제일 큰 이유다. 2013년만 해도 조명철 자유한국당 의원 등이 동경 127도 30분을 새 표준자오선으로 정하는 ‘표준시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북한도 2015년 8월 14일까지는 동경 135도를 표준자오선으로 삼았지만 다음 날부터 127도 30분을 기준으로 바꿨다. 그래서 현재 서울과 평양은 30분 시간 차이가 난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8월 9일은 한국 마라톤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날이다. 1936년 손기정 선생(1912~2002)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도, 그로부터 56년 뒤 황영조 현 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47)이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도 모두 8월 9일이었다. 손 선생이 마라톤 금메달을 땄다는 소식을 일본 라디오를 통해 들은 동아일보는 바로 호외를 발행해 뿌리는 한편 메가폰을 들고 가두선전으로 이 소식을 국민들에게 알렸다. ‘일장기 말소사건’ 주인공 이길용 기자(1899~?)는 1948년 ‘신문기자 수첩’(모던출판사)에 “회사 앞에 야심한 삼경(三更·오후 11시에서 오전 1시 사이)이건만 운집한 대군중 모두가 전파 일성에 환희 일색이요, 함성 환호뿐이다. … 목이 터지게 외치는 ‘손기정 만세!’ 소리는 기미년(1919년) 독립만세 소리에 방불한 바 있었다”고 썼다. 바르셀로나 대회 마라톤 우승도 극적이었다. 황 감독은 경기장 서쪽의 급경사 난코스였던 ‘몬주익 언덕’에서 골인 지점을 2.4㎞ 남기고 마지막 스퍼트로 2위 모리시타 고이치(森下廣一·49)를 따돌리고 우승했다. 그 뒤로 황 감독에게 붙은 별명이 ‘몬주익의 영웅’.이날 바르셀로나 올림픽 주경기장에는 손 선생이 직접 참석해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당시 손 선생은 남자 마라톤 경기일이 자신이 금메달을 땄던 그 날과 날짜가 같다는 사실을 알고 큰 기대를 품은 채 바르셀로나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손 선생은 1992년 올림픽 당시 동아일보에 보낸 특별 기고문에 “지난 56년간 나를 지탱해왔단 단 하나의 꿈이 바로 한국 마라톤의 올림픽 제패였다. 나이가 든 뒤엔 이 꿈이 더욱 절박해져 ‘꿈’ 정도가 아니라 ‘강박의식’처럼 늘 나를 짓누르곤 했다”고 회고했다. 이어 “황영조가 한국마라톤의 숙원인 10분벽을 깨고 2시간 8분대에 들어서는 순간 나의 뇌리에 죽기 전에 나의 꿈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전류처럼 흘렀다. 내가 굳이 이 나이에 이곳 바르셀로나까지 날아온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꿈을 이루어지는 순간을 보았다”고 썼다. 황영조에 이어 마라톤 은메달은 일본, 동메달은 독일 선수가 각각 차지했다. 손 선생은 “56년 전 이날 한국인인 내가 일본 국기를 달고 독일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그 세 나라 국기가 나란히 올라간다”며 감격해 했다. 황 감독은 시상식이 끝난 직후 손 선생을 찾아 목에 직접 금메달을 걸어줬다. 남자 마라톤은 보통 올림픽 마지막 경기로 열린다. 폐회식이 끝난 뒤 손 선생과 황 감독은 나란히 손을 잡고 주경기장을 한 바퀴 뛰었다. “한국이 금메달을 땄다. 한국이 또 올림픽 마라톤을 먹었다”고 외치며….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1936년 8월 9일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그가 남긴 첫 마디 “슬프다”그는 정말 슬펐다.42.195km를 쉼 없이 달려 제일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그가제일 먼저 한 일은 고개를 숙이는 것.시상대 위에서도 그는고개를 숙였다.독립 후, 그는 말했다.“독일 군악대가 연주하는 기미가요보다 운동장 한 구석에서 들려오는애국가 소리가 더 크게 들려 고개를 들 수 없었다.”※기미가요(君が代): 일본 국가(國歌)‘손긔졍.’2시간 29분 19초.당시 올림픽 최고기록으로 마라톤 정상을 차지한금메달리스트가 사인북에 쓴 세 글자일본 기자는 ‘왜 한자로 이름을 쓰지 않냐’고 물었다손기정이 답했다.“한글이 획수가 더 적다.”거짓말이었다.손기정의 거짓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우리나라 일장기가 나를 응원하였습니다.큰 기를 휘두르며 ‘6㎞ 남았다’고 외쳐….”“시상대에 우리가라 국가(기미가요)가 엄숙하게….”일본은 그를 데려다 선전 음반을 만들었다.이후 손기정은 점점 알아들 수 없는 목소리를 낸다.그때 들려오는 한마디 “크게 읽어.”손기정은 끝내 “내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우리나라 국민 전체의 승리”라고 말을 이었다.우리나라는 일본이었다.경성에 있던 한 신문사는 생각이 달랐다.동아일보는 그달 13일자 신문에서손기정 가슴에 있던 일장기를 지웠다.그로부터 12일 후에도 또 한번….이길용(당시 37세) 체육 주임기자.‘운수 좋은 날’을 쓴 소설가로 유명한 현진건 당시 사회부장 등.이 일로 동아일보 기자들이 차례로 서울 종로경찰서에 붙들려 갔다동아일보는 무기 정간(停刊) 처분을 받았다“여름이었으니까 유치창 안으로 속옷과 와이셔츠를 여러 차례 들여보냈지요.”“나오는 와이셔츠는 언제나….”“피투성이였습니다.”이 기자의 아내 정희선 여사그래도 이 기자는 굴하지 않았다.그는 이렇게 썼다.“이 나라의 아들은 손 선수를 왜놈에게 빼앗기는 것 같은 느낌에그 유니폼 일장 마크에서 엄숙하게도 충격을 받았다.”“면소니 군청이니 또는 조재소니 등등의 사진에는 반드시 일장기를 정면에 교체해 다는데이것을 지우고 싣기는 부지기수였다.”“이러한 우리로서 어찌 손기정 선수 유니폼에 선명했던 일장 마크를 그래도 실을 수 있을 것인가.”※신문기자 수첩(1948년)결국 동아일보는 279일 동안 정간 당했다가이듬해 6월 1일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다.하지만 이 기자는 해방이 될 때까지 다시 동아일보에서 일할 수 없었다.1945년 사업부 차장으로 복직한 이 기자는 1948년 야구대회를 만든다.단일 언론사 주최로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다.그가 없었다면 손기정뿐 아니라 메이저리그에서 한국을 빛낸 스타도 없었을지 모른다.단, 이 기자는 6·25전쟁 중 납북 돼 그 후 소식은 알 수가 없다.그렇다고 그가 완전히 잊혀진 건 아니다.한국체육기자연맹에서 그해 최고 체육기자에게 주는 상 이름은‘이길용 체육기자상’이다.그는 1948년 ‘신문기자 수첩’에 7쪽 분량으로 이렇게 후기를 남겼다.“세상이 알기로는 백림(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의 일장기 말살사건이이길용의 짓으로 꾸며진 것만 알고 있다.”“그러나 사내의 사시(社是)라고 할까. 전통이라고 할까.방침이 일장기를 되도록 아니 실었다. 우리는 도무지 싣지 않을 속셈이었던 것이다.”“동아일보에서 일장기를 지우는 건 차 마시고 밥 먹는 것처럼 흔한 항다반사(恒茶飯事)였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오늘은 24절기로 입추(立秋)였습니다. 문자 그대로 ‘가을에 들어서는 날’이었던 것. 그런데 오늘 저는 광화문 돌아다니면서 가을차림을 한 사람을 단 한 분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제 패션 감각에 문제가 있거나 (실제로 그렇기는 합니다) 아니면 24절기가 우리가 아는 것하고 좀 다르거나 둘 중 하나가 이유 아닐까요?●절기는 음력일까 양력일까?절기는 한국과 중국 같은 동양 문화에서 사용하기 때문에 음력(陰曆)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양력(陽曆) 기준입니다. 아시다시피 달이 차고지는 걸 기준으로 날짜를 세면 음력, 태양이 움직이는 걸 기준으로 하면 양력이라고 합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기도 한 절기는 태양이 황도(黃道·하늘에서 태양이 한 해 동안 지나가는 길)를 15도 움직일 때마다 하나씩 찾아옵니다. 황도를 한 바퀴 돌면 360도. 이를 24로 나누면 15도가 나오는 방식입니다. 실제로 해마다 양력 8월 7일경이 입추인 것처럼 절기 날짜가 양력으로 거의 고정돼 있는 건 양력 기준으로 절기를 정하기 때문입니다. 음력을 쓰던 옛날 사람들이 절기를 만든 이유는 간단합니다. 달을 기준으로 삼으면 날을 세는 데는 별 문제가 없지만 계절 변화를 예측할 수는 없거든요. 그러면 당연히 농사를 지을 때도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중국 주나라 때 화베이(華北) 지방 기후에 맞춰 날짜에 이름을 붙였는데 그게 바로 절기입니다.●지구는 태양보다 게으르다그러면 이 절기가 화베이 지방 기우를 따라 이름을 붙여 한국, 특히 남한 계절하고 맞지 않는 걸까요? 일단 반은 맞습니다. 화베이 지방 대표 도시인 베이징(北京)은 거의 북위 40도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37.5도에 있는 서울하고는 기후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근거로 한국에서는 절기를 한 달 씩 뒤로 미뤄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렇다고 화베이 지방도 절기에 따라 날씨가 딱딱 맞게 변하는 건 아닙니다. 이날 화베이 지방 대표 도시 베이징은 36도까지 올라갔습니다. 36도를 가을 날씨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베이징도 9월이 되면 평균 20도 안팎으로 온도가 내려갑니다. 진짜 가을은 입추가 지나고 한 달 정도 지난 다음에야 찾아오는 셈입니다. 이렇게 화베이 지방에서도 절기가 계절하고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양력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요? 예를 들어 입추는 하지(夏至)하고 추분(秋分) 한 가운데 날입니다. 하지는 북반구에서 태양이 제일 오래 떠 있는 날 = 낮이 제일 긴 날이고, 추분은 춘분(春分)하고 마찬가지로 밤과 낮의 길이가 똑같은 날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하지 때 해가 제일 오래 비추니까 제일 덥고 추분을 향해 가면서 점점 날씨가 내려갈 것 같습니다. 실제로는 지구가 뜨거워지고 식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루 중 해가 제일 높이 떠 있는 오후 12시가 아니라 오후 2~4시에 하루 최고 기온이 나타나는 것하고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입추 무렵에 우리는 1년 중 제일 덥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해마다 2월 4일경인 입춘(立春)에도 여전히 추위를 느끼는 것과 같은 맥락. ‘여름 더위가 그친다’는 처서(處暑)를 입추보다 늦게(8월 23일 무렵) 정해 놓은 이유이기도 합니다.●복날도 절기일까 아닐까?해마다 여름이면 ‘삼복더위’라는 표현도 들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삼복은 물론 초복, 중복, 말복을 뜻하는 말. 흔히 이 삼복도 절기라고 생각하고 쉽지만 실제로는 잡절(雜節)에 속합니다. 단, 복날을 정할 때는 24절기를 활용합니다. 하지가 지난 뒤로부터 세 번째 경일(庚日)이 초복이고, 네 번째가 중복입니다. 입추가 지나서 첫 번째 경일이 말복이고요. 여기서 경일이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로 10간을 따져 붙인 겁니다. 모든 해, 모든 달, 모든 일은 이 10간과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 12지지를 하나씩 써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임진왜란이 임진왜란인 이유는 일본(왜)이 조선으로 쳐들어 온 1592년이 임진년(壬辰年)이었기 때문입니다. 달과 일까지 범위를 넓혀 보면 오늘(양력 2017년 8월 7일)은 정유년 정미월 병인일입니다. 병인일에서 앞글자를 가져와 보면 입추인 오늘은 병일(丙日)이 됩니다. 그러면 나흘(4일) 뒤가 입후 추 첫번째 경일이고, 그날이 말복일 될 겁니다. 실제로 올해 말복은 8월 11일입니다.● 그래서 가을은 언제 오나?기상학적으로는 일평균 기온이 20도로 내려간 뒤 다시 올라오지 않는 첫날부터 가을입니다. 최근 30년(198년~2016년) 평균을 내보면 이런 날은 9월 21일입니다. 그래도 앞으로 한 달 보름 내내 ‘무덥다’고 느끼지는 않을 겁니다. 과연 언제부터 ‘그나마 좀 살 것 같다’고 느끼게 될지는 아래 기사를 참고해 주세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1993년 8월 7일 대전엑스포가 일반 관람객에게 문을 열었다. 개장에 앞서 그해 2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독자 편지 한 토막. “요즘 TV에서 대전엑스포의 ‘도우미’ 모집광고를 보았다. ‘도우미’라는 말을 들으면서 나는 그것이 일본어인 줄 착각했다. 어감 상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 뒤늦게 그 말의 뜻이 ‘도와주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아가씨’란 것을 알고 어이가 없었다. 한글이면 한글이고 한문이면 한문이지 국민학생(초등학생)들의 유치한 낱말놀이도 아니고 어떻게 국제적인 행사에 생전 듣고 보도 못한 낱말을 되지도 않게 맞추어 버젓이 광고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편지를 쓰신 분은 도우미가 대전엑스포가 끝나고 24년이 지나도록 사람들이 이렇게 널리 쓰는 낱말이 될 줄 상상도 못하셨을 터다. 당시만 해도 그만큼 도우미는 낯선 낱말이었다. 이제 도우미는 ‘도움’에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이’가 붙여 만든 낱말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으실 터. 그런데 당시 대전세계박람회(대전엑스포 공식 명칭) 조직위원회 공식보고서는 이 독자의 지적처럼 도우미가 ‘도와주고 해결해주는 우아한 미인’을 줄인 말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그러니 저렇게 불편해 하시는 분이 나온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와 별개로 도우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독자가 지적한 도우미 모집 광고를 통해 1주일간 2만2000 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려 경쟁률 30대1을 기록했다. 항공 승무원이나 비서로 이들을 특채하겠다고 발표한 회사가 있었기에 도우미 공모는 더 인기를 끌었다. 또 엑스포가 공식 개막한 뒤로도 전시관을 둘러보기보다 이들과 기념사진을 찍느라 바쁜 ‘짓궂은’ 남성 관객도 적지 않았다. 엑스포 자체도 인기였다. 그해 11월 7일 공식 폐장하기까지 총 1450만 명이 이 박람회를 관람했다. 대한민국 사람 3명 중 1명은 이 행사장에 다녀온 셈. 특히 당시 국민학교나 중학교 중에서는 가을 소풍 장소로 이 엑스포를 정한 곳이 대다수였다. 대전엑스포 공식 마스코트 꿈돌이는 몸에 여러 과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테두리를 두르고 있었다. 이 영향으로 당시 국민학생들 사이에는 훌라후프 품이 일어나기도 했다. 대전엑스포 당시 서울 동대문구에서 국민학교를 다녔던 K 씨(33·여)는 “당시 친구들 사이에서 훌라후프를 하다가 점프를 뛰는 기술을 ‘꿈돌이’라고 불렀다”고 회상했다. 이제 ‘국민MC’ 반열에 오른 방송인 강호동 씨도 대전엑스포를 통해 씨름 천하장사에서 방송인으로 탈바꿈했다. 강 씨는 개장 이튿날인 1993년 8월 8일 8시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2만8233명과 악수하면서 기네스 기록을 새로 썼다. 대전엑스포가 끝난 뒤 행사장은 1994년 8월 ‘엑스포과학공원’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찬란한 과거도 시간을 이길 수는 없는 법. 현재 이 공원은 대전시에서 ‘엑스포재창조사업’을 추진하면서 시설 철거 작업을 진행 중이다. 엑스포과학공원 관계자는 “1993년 엑스포 전시관이 들어 있던 자리에는 ‘기초과학연구원(IBS)’이 자리 잡게 된다”고 설명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여름마다 뉴스에 등장하는 그 이름 태풍. 이번에는 ‘노루’가 한반도로 찾아오네 마네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생뚱맞은 퀴즈 하나. 태풍은 한자로 어떻게 쓸까요?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아마 십중팔구는 클 태(太), 바람 풍(風)을 써서 ‘太風’이라고 쓰실 겁니다. 태풍은 정말 큰 바람이니까요. 제목을 보고 이게 아니라는 걸 아셨다면 또 다른 클 태(泰)를 써서 ‘泰風이라고 쓰나 보다’하고 짐작한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짜 정답은 ‘颱風’입니다. 여기서 颱는 ‘태풍 태’ 혹은 ‘몹시 부는 바람 태’입니다. 그러니까 颱라는 글자 자체가 태풍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겁니다. 태풍을 일본어로는 ‘台風(타이후)’, 중국어로는 ‘台風(타이펑)’이라고 쓰는데 台라는 글자 역시 뜻 자체가 태풍입니다.颱風(태풍)이라는 두 글자는 동아일보 창간 첫해였던 1920년 지면에 바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표현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현대어로 바꾼 부분에만 태풍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뿐입니다. 조선 고종 19년(1882년) 세 번째 기사에도 태풍을 뜻하는 표현은 ‘구풍(¤風)’이었습니다.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구풍을 “열대 지방에서 발생하는 열대성 저기압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돌개바람하고 비슷한 뜻이라고 풀이합니다. 요컨대 원래 구풍이라는 표현이 있었고 태풍은 비교적 ‘신조어’인 셈입니다. 태(颱)라는 글자는 청나라 초기 왕사진(1634~1711)이 지은 ‘향조필기(香祖筆記)’에 처음 등장합니다. 그는 대만 지역 기후를 설명하면서 “바람이 크고 맹렬한 것을 ‘구(¤)’라 하고, 더 심한 것을 ‘태(颱’‘라 한다(風大而烈者爲¤又甚者爲颱)”고 썼습니다. 단, 태는 1918년 세상에 나온 중화대자전(中華大字典)에도 실리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이 글자를 널리 쓰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재미있는 건 태풍을 뜻하는 영어 낱말이 ’typhoon‘으로 태풍하고 소리가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에 태풍이 typhoon이 된 건지 거꾸로 typhoon이 태풍이 된 건지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학자들이 동의하는 건 20세 초반에 일본에서 typhoon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颱風‘ 또는 ’台風‘이라고 쓰면서 태풍이 태풍이 됐다는 점입니다.이제는 한글도 손으로 쓰는 일이 드문 시대. 한자를 직접 쓸 일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래도 혹시 한자 연습을 하고 싶은 분이 계실지 몰라 태풍을 한 번 더 한자로 대문짝만하게 남겨 놓겠습니다. 태풍은 한자로 이렇게 씁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인류 역사상 ‘공식적으로’ 가장 오래 산 잔 루이즈 칼망 할머니가 1997년 오늘(8월 4일) 숨을 거뒀다. 칼망 할머니는 1875년 2월 21일 프랑스 부슈뒤론 주 아를에서 태어나 122년 164일을 살았다. 이 할머니는 이승만 전 대통령,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와 동갑내기. 두 사람은 1965년에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할머니는 이들보다 32년을 더 살았다. 공식적이라는 건 출생과 사망 기록이 정확하게 남아 있다는 뜻. 19세기만 해도 행정 체계가 제대로 자리잡히지 않아 태어난 날짜를 정확히 남기기 어려웠던 데다 전쟁 등으로 기록이 사라지는 일이 많았다. 2010년 일본에서 고령자 호적을 조사했을 때 200세인 인물이 ‘행방불명’인 사례도 있었다. 칼망 할머니는 출생 기록이 정확하게 남아 있다. 칼망 할머니는 1965년 90세가 되자 같은 동네에 사는 앙드레 라프레이 변호사(당시 48)에게 자신이 살던 아파트를 팔기로 했다. 할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었던 딸은 병으로 잃고 손자도 사고도 숨져 상속자가 없는 상태였다. 계약 조건은 라프레이 변호사가 할머니가 살아 있는 동안 2500프랑(현재 약 48만 원)을 매달 주면 할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아파트를 갖게 되는 것. 당시 할머니가 이미 90세였으니 변호사로서도 손해보는 장사는 아닌 것처럼 보였다. 문제는 이 할머니가 그 후로 32년을 더 살았다는 것. 결국 이 변호사가 할머니보다 먼저 1995년 숨지면서 아파트 소유권을 끝내 얻지 못했다. 오히려 변호사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변호사 가족들이 매달 양로원에서 머물고 있던 할머니에게 2500프랑을 지급해야 했다. 칼망 할머니는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를 직접 만난 적이 있다. 칼망 할머니 삼촌이 화구(畵具) 가게를 운영했는데 반 고흐가 그 가게 단골이었던 것. 이런 인연으로 칼망 할머니는 1990년 반 고흐 그림을 소재로 한 영화 ‘명화의 외출(원제 Vincent et moi)’에 특별 출연하기도 했다. 이로써 칼망 할머니는 역대 최고령(115세) 영화배우 타이틀도 갖게 됐다. 재미있는 건 이 할머니가 1896년 처음 담배를 배운 뒤 1992년까지 계속 흡연자였다는 것. 97년 동안 담배를 피운 것 역시 역대 최장 기록이 아닐까. 이 할머니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었을까. 현재 최고령자로 인정받고 있는 건 1990년 3월 10일 태어난 바이올렛 브라운 할머니(자메이카)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비행기 타기’. 휴가 때 제일 좋은 것도 이거고, 제일 나쁜 것도 이겁니다.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가는 건 설레는 일이지만 비좁은 비행기에 몇 시간씩 앉아 있어야 하는 건 생각만 해도 스트레스 받는 일이죠.여러분은 한번에 비행기를 어디까지 타보셨나요? 저는 직항으로는 미국 애틀랜타까지 가본 게 제일 멀리 날아간 경험입니다. 실제로 올해 1월 아에로멕시코에서 인천-멕시코시티 노선을 개설하기 전까지는 인천 공항에서 출발하는 직항 노선 중에 제일 노선 거리가 긴 게 애틀랜타 행이었습니다. 미국 뉴욕 JFK 공항까지 한번에 가는 비행기가 있는 데 무슨 소리냐고요? 아닙니다. 애틀랜타가 더 멉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지도는 보통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그립니다. 이 지도로 보면 뉴욕이 애틀랜타보다 더 멀어 보입니다(아래 사진 참조).그런데 지구는 2차원 평면이 아니라 3차원 구형입니다. 그래서 최단거리를 따져 보면 아래 그림처럼 뉴욕이 애틀랜타보다 가깝습니다.물론 비행기가 꼭 최단거리로 날아다니는 건 아닙니다. 위도마다 바람이 부는 방향이 다르죠(당연히 바람이 뒤에서 불어오는 편이 좋습니다.) 또 안전상의 이유로 일정 위도 이상으로는 비행기가 날지 못합니다. 그래서 실제 비행노선은 이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인천에서 애틀랜타까지는 보통 13시간 30분 거리. 그럼 전 세계에서 가장 긴 직항 노선 톱 10은 어디서부터 어디를 어떻게 날아다닐까요? 노파심에 말씀드리지만 아래 지도는 최단거리를 표시한 것으로 실제 비행노선은 다를 수 있습니다. 10위. 두바이(아랍에메리트) ↔ 휴스턴(미국)-항공사 및 편명: 에미레이트항공(EK211)-기종: 보잉 777-300ER-첫 운항: 2007년 12월 3일9위. 도하(카타르) ↔ 로스엔젤레스(LA·미국)-항공사 및 편명: 카타르항공(QR739)-기종: 보잉 777-200LR-첫 운항: 2016년 1월 1일8위. 지다(사우디아라비아) ↔ LA-항공사 및 편명: 사우디아항공(SV41)-기종: 보잉 777-300ER-첫 운항: 2014년 3월 31일7위. 두바이 ↔ LA-항공사 및 편명: 에미레이트항공(EK215, EK217)-기종: 에어버스 380-800(EK215), 보잉 777-200LR(EK217)-첫 운항: 2008년 10월 26일6위. 아부다비(아랍에미리트) ↔ LA-항공사 및 편명: 에티하드항공(EY171)-기종: 보잉 777-200LR-첫 운항: 2014년 6월 1일5위. 싱가포르 ↔ 샌프란시스코(미국)-항공사 및 편명: 싱가포르항공(SQ31), 유나이티드항공(UA1) -기종: 에어버스 350-900(SQ31), 보잉 787-9(UA1)-첫 운항: 2016년 10월 23일(SQ31), 2016년 6월 1일(UA1) 4위. 요하네스버그(남아프리카공화국) ↔ 애틀랜타-항공사: 델타항공(DL201)-기종: 보잉 777-200LR-첫 운항: 2009년 6월 1일3위. 시드니(호주) ↔ 댈러스(미국) -항공사: 콴타스항공(QF8)-기종: 에어버스 A380-800-첫 운항: 2014년 9월 29일2위. 오클랜드(뉴질랜드) ↔ 두바이-항공사: 에미레이트항공(EK449)-기종: 에어버스 A380-800-첫 운항: 2016년 3월 2일1위. 오클랜드 ↔ 도하-항공사: 카타르항공(QR921)-기종: 보잉 777-200LR-첫 운항: 2017년 2월 6일 꼼꼼하게 읽으신 분은 아시겠지만 현재 2위 오클랜드 ↔ 두바이 노선이 지난해 3월 2일 1위로 올라섰다가 올해 2월 1년도 1위를 지키지 못한 채 오클랜드 ↔ 도하 노선에 세계에서 제일 긴 직항노선 자리를 내줬습니다. 내년에는 다시 1위 자리가 바뀔 가능성이 높습니다. 싱가포르항공이 싱가포르에서 뉴욕 뉴어크 공항까지 날아가던 SQ21 노선을 부활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죠. 혹시라도 그냥 비행기에 타고 있는 게 정말 너무 너무 좋으신 분이 계진지요. 그렇다면 여기 나온 ‘기나 긴’ 노선에 한번 도전해 보시면 어떨까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모든 기업사채 동결’. 동아일보 1972년 8월 3일자 1면은 이렇게 큼지막한 제목을 달았다. 전날 오후 11시 40분 박정희 정권은 ‘경제의 성장과 안정에 관한 긴급명령 15호’를 발표한다. 나중에 ‘8·3조치’라고 부르게 되는 ‘사채 동결’ 조치였다. 이에 따라 모든 기업은 1972년 8월 2일 현재 보유하고 있는 모든 사채를 정부에 신고하면 월 이자 1.35%, 3년 거치 5년 분할 상환 방식으로 갚을 수 있었다. 1.35%를 연리로 바꾸면 16.2%. 당시 시중 사채 금리는 연리 40~50% 수준이었으니 기업들로서는 이자가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고 갚는 날도 최장 8년 뒤로 밀리는 셈이었다. 당시 연평균 15% 안팎이던 물가 상승률까지 감안하면 기업들은 사실상 무이자 혜택을 누리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박정희 정권에서 이런 반(反)시장적이고 초법적인 특혜를 기업에 준 이유는 뭘까. 한국 기업들은 외국에서 빌린 돈으로 공장을 지어 1960년대 고도성장을 이뤄냈다. 그러다 1971년 미국 정부는 달러를 은행에 가져가면 금으로 바꿔주면 ‘금 태환 정책’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이 ‘재채기’를 하자 한국은 ‘신종플루’에 걸리고 말았다.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면서 외국에서 돈을 빌린 기업들에 위기가 닥쳤다. 여기에 시설·운영자금을 사채 시장에서 끌어다 쓰던 기업들은 문자 그대로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몰렸다. 박정희 정권도 처음에는 이런 기업은 정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지만 이들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컸다. 그달 9일까지 기업에서 신고한 총 사채 액수는 3456억 원. 당시 통화량의 80%에 육박하는 수준이었다. 올 5월 시중 통화량(M2)이 2454조 원이니 현재로 따지면 2000조 가까이 사채가 돌고 있던 셈이었다. 8·3 조치 효과도 확실했다. 기업 부채비율은 1970년 313%에서 1973년 288%로 떨어졌다. 1972년 5.7%까지 내려왔던 한국 경제 성장률은 1973~1979년 평균 10.3%로 올랐다. 같은 기간 세계 경제 성장률은 4.1%였다. 또 당시 정부에서 단기금융법 상호신용금고법 신용협동조합법을 제정하면서 제2 금융권이 탄생해 금융시장도 전환점을 맞았다. 그러나 사채로 돈을 불리던 서민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당시 기업에서 신고한 사채 중 당시 서울 고급 주택 가격에 해당하는 300만 원 이상은 전체의 10%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서민들이 내 집 마련을 꿈꾸며 소소하게 ‘돈 놀이’를 하던 돈이었다. 금융시장이 척박했던 상태라 서민들이 돈을 불릴 수 있던 수단은 돈 놀이가 거의 유일하던 시절이었다. 8·3조치 후 길게는 8년까지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할 처지가 되자 자살자가 속출했다. 정부는 결국 30만 원 이하인 사채는 예외로 인정해 신고하지 않아도 되도록 했지만 불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불만을 잠재우려면 ‘주먹’이 필요했다. 이 발표 후 석 달이 지나지 않은 그해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 효력을 정지시켰다. ‘10월 유신’이었다. 이 조치에 대한 평가도 그만큼 엇갈린다. 8·3조치 후반 작업에 참여했던 최각규 전 경제부총리는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문제가 있는 조치다. 국민의 사적 재산권을 침해한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 비춰볼 때 정말 부득이하고 불가피했다. 이런 측면을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이 조치가 없었다면 1973년 제1차 오일쇼크를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반면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저서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에 “8·3조치로 우리 기업은 무채를 겁낼 줄 모르고 몸집을 불리는 차입경영과 그룹경영으로 치달았고 자본을 충실히 하고 자기 사업에만 집중하던 우량 기업들이 오히려 시장경쟁에서 밀려나는 계기가 됐다. 우리 경제는 구조조정으로 대외 경쟁력을 강화한 것이 아니라 사채동결이라는 편법에 의존함으로써 위기관리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썼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91) 남편인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96)이 2일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필립 공은 이날 영국 런던 버킹엄 궁전에서 열린 영국 왕실 해병대 퍼레이드에 참석하는 걸 마지막으로 공식 활동을 중단하기로 한거죠. 이 퍼레이드를 마지막으로 정한 건 그가 왕실 해병대 총사령관이기 때문입니다.남자 왕의 아내를 뜻하는 왕비는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여왕의 남편을 뜻하는 낱말 ‘국서(國¤)’는 참 낯설기만 합니다. 여왕의 남편으로 사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필립 공은 곧잘 “영국에서 자식에게 가문을 물려주지 못하는 남자는 나뿐”이라고 자조하곤 했습니다. 여기서 가문은 성씨로 바꿔도 무방합니다. 도대체 영국 왕실은 어떤 성(姓)을 쓸까요? 1917년까지 영국 왕족은 따로 성이 없었습니다. 가문이나 왕조 이름이 있으니 성을 쓰지 않아도 그 사람이 누군지 다 아니까요. 현재 영국 왕족인 ‘윈저’ 가문은 원래 독일에 뿌리를 둔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영국은 20세기 초반에 독일하고 제1차 대전을 치렀습니다. 가문 이름이 독일색이라 부담이 됐던 게 당연한 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아버지 조지 5세는 버크셔 주 윈저에 있는 성채(城砦) 이름을 따 가문 이름을 윈저로 바꿨습니다. 그러면서 “빅토리아 여왕(1819~1901) 후손들 성을 윈저로 한다. 단, 기혼이거나 결혼한 적이 있던 여성은 예외”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하기 전까지 영국 왕족들 성은 윈저였습니다. 필립 공 역시 그리스 왕족 출신이라 성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가문 명 역시 독일 느낌이 나는 ‘바덴버그’였습니다. 조지 5세가 뜻을 살려 영어로 번역한 게 ‘마운트배튼’. 필립 공은 자연스레 ‘필립 마운트배튼’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문제가 생긴 건 1952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즉위 때였습니다. 필립 공의 외삼촌인 루이스 마운트배튼 백작(1900~1979)이 여성이 남편 성을 따르는 관례에 따라 영국 왕가 명칭을 윈저에서 마운트배튼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거죠.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어머니인 메리 대왕대비는 이 소식을 듣고 대노해 윈스턴 처칠 총리(1874~1965)에게 ‘영국 왕가 이름은 계속 윈저가 될 것’이라고 알렸습니다. 그러면 마운트배튼은 아예 사라졌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1960년 여왕 부부는 둘 사이에서 나온 자손들에게는 다른 성을 주겠다고 결정을 내립니다. (왕인데 이 정도도 마음대로 못 할까요?) 그 뒤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필립 공을 뿌리로 둔 자손들은 ‘마운트배튼윈저’를 성으로 쓰게 됐습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찰스 왕세자는 자연스레 ‘찰스 마운트배트윈저’가 이름인 겁니다. 단, 왕이 되면 성을 바꿀 수 있습니다. 찰스 왕세자가 즉위한 뒤 “내 후손들은 마운트배튼윈저 대신 윈저만 성으로 쓰겠다”고 하면 줄줄이 성이 바뀌는 거죠. 마운트배튼을 써도 되고 다른 성을 써도 됩니다. 왜냐? 왕이니까요. 요컨대 필립 공 아들인 찰스 왕세자도 자식에게 가문을 물려줄 수 있지만 필립 공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필립 공이 저처럼 속 좁은 인간이었다면 ‘외삼촌만 아니었다면…’이라고 종종 떠올리지 않았을까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한국 제조업에는 거의 항상 ‘위기’라는 낱말이 따라다닙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실제로 올 2분기 제조업 평균 가동률은 71.6%. 2분기만 따지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에 시달렸던 1998년(66.4%) 이후 최저치입니다. 공장이 문을 열지 않거나 문을 열어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뜻이죠.하지만 최근 매킨지 글로벌 연구소에서 내놓은 연도별 제조업 부가가치 국가 순위를 보면 한국 제조업은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이 연구소에서 전 세계 75개국을 대상으로 제조업 부가가치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1985년 15위로 시작한 한국 1995년 9위, 2005년 8위, 2015년 5위로 계속 순위를 끌어올렸습니다. 순위 상승폭(10계단 상승)만 놓고 보면 같은 기간 8위에서 1위로 오른 중국보다 한국이 더 많이 올랐습니다. 물론 한국이 이 이상 순위를 끌어올리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이는 게 사실. 2015년 기준으로 부가가치를 살펴보면 1위 중국이 3억1660만 달러, 2위 미국 2억2070억 달러, 3위 일본 7680억 달러, 4위 독일 6680억 달러 순이었습니다. 한국은 3490억 달러로 오히려 6위 인도(3090억 달러)에 쫓기는 신세입니다.그래도 한국 제조업이 정말 잘해왔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1985년 한국에 앞섰던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같은 나라 모두 30년이 지난 뒤에는 한국보다 순위가 낮았죠. 선진국과 신흥국 사이에 끼인 ‘샌드위치 신세’라는 평가를 한국 제조업이 잘 이겨왔다는 뜻일 겁니다.오늘도 제조 현장에서 피땀 흘리고 계신 직장인 여러분, 모두 한 번 더 파이팅 입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 대사처럼 “희망은 좋은 것이고, 좋은 건 결코 사라지지 않으니”까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정말 이상합니다. 한국에서는 대한항공이 1999년 3월 28일을 기점으로 모든 노선에서 ‘금연’ 정책을 실시하면서 비행기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됐습니다. 네, 그 전까지는 비행기에서 담배를 피웠죠. 전 세계적으로 기내 금연 정책을 실시한 건 20년도 안 된 일입니다. 사실상 ‘글로벌 스탠더드’ 역할을 하는 미국 연방항공국(FAA)은 2000년부터 기내 흡연을 전면 금지했습니다. 러시아도 2001년 7월 1일자로 같은 정책을 채택했죠. 그런데 요즘 비행기 화장실에는 여전히 재떨이가 달려 있습니다. 끽연가 중에는 ‘잘 참고 있었는데 재떨이를 보니 괜히 한 대 피우고 싶더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적지 않습니다. 도대체 왜 금연구역인 비행기에 아직도 재떨이가 달려 있는 걸까요? 정답은 ‘담배를 피울 때 재를 떨고 꽁초를 버리라고’입니다. 사람들이 보통 재떨이를 쓰는 이유하고 똑같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누군가는 피웁니다. 그래서 담배를 피웠을 때 바닥에 담뱃재 흘리지 말고 꽁초도 아무 데나 버리지 말라고 재떨이가 있는 겁니다. 꽁초를 아무렇게나 버렸다가는 불이 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1973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프랑스 파리로 날아오던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피운 승객이 불이 덜 꺼진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버렸다가 불이 나 123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 발생했죠. 기내에 연기가 가득 찬 상태에서 기장이 비상착륙을 시도했지만 안타까운 결과를 막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FAA는 비행기 화장실에 의무적으로 재떨이를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2005년 첫 비행을 시작한 에어버스 A380 같은 최신 기종에도 재떨이가 달려 있는 이유입니다. 기내 흡연이 가능하던 때에 만든 오래 된 비행기라 재떨이가 달려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죠. FAA는 재떨이가 고장 난 경우에는 10일 이내에 수리를 마치도록 규정하고 있기도 합니다. 기내에 있는 재떨이가 절반 이상 고장 났다면 3일 안에 수리를 마쳐야 합니다. 2009년에는 영국 브리티시 에어웨이 항공사에서 기종에 맞는 재떨이를 구하지 못해 이륙이 지연된 일도 있었죠. 그러니까 비행기 안에서 담배가 너무 피우고 싶다면 꽁초는 꼭 재떨이에 버리고 벌금을 물면 됩니다. 한국에서는 ‘항공안전 및 보안에 관한 법률’에 따라 기내에서 담배를 피우면 5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연히 모두가 전 세계적인 기내 금연 정책에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 알렉산더르 쇼프만이라는 독일 사업가는 2004년 기내 흡연이 가능한 ‘스민트에어(Smoker’s International Airlines)‘ 설립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보잉 747 두 대를 사들여 독일 뒤셀도르프와 일본 도쿄(東京)를 오가는 노선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자금 조달 문제로 막판에 사업을 접고 말았습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본격 휴가철입니다. 인천공항 여객수가 지난달 30일 사상최대를 기록했고 문재인 대통령도 휴가를 떠났습니다. 하지만 휴가지에서는 “차라리 집에 있는 게 낫겠다”라는 불평이 쏟아진다고 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인파가 몰리며 바가지요금, 교통체증 등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극 성수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7말8초’에 휴가를 낼 수밖에 없는 사정, ‘d이슈’에서 알아보시죠. 김아연 기자 aykim@donga.com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여러분 모두 7월을 보내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특히, 서울에 사시는 분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이번 달(2017년 7월)은 1907년 기상청 관측을 시작한 뒤 ‘두 번째로 시원하지 않은 7월’이었습니다. 더우면 더운 거지 시원하지 않은 건 뭘까요? 기상청에서는 매일 기온을 재면서 평균값뿐 아니라 최고·최저값도 기록해 둡니다. 7월 월별 최저기온은 24.3도. 이달 1일부터 31일까지 최저온도를 모두 더한 다음 31로 나누면 24.3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아래 그래프에서는 주황색 네모 아래 부분을 모두 더하면 됩니다. 24.3도는 찌는 듯한 더위로 남아 있던 1994년 25.3도에 이어 기상 관측 109년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최저기온 기록입니다.(1908년부터 따지면 총 112년이 나오는데 3년이 빠진 건 1951~1953년에는 6·25전쟁으로 기상 관측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날 최저기온이 높다는 건 문자 그대로 그나마 조금이라도 시원한 걸 느낄 시간이 부족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계속 ‘덥다, 덥다’고 느낄 수밖에 없죠. 사실 올 7월 최고기온 평균은 30.4도로 공동 17위 수준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평균 기온(17시 현재) 27도로 역대 3위에 이름을 올릴 수 있던 건 이렇게 온도가 잘 내려가지 않은 탓이죠. 데이터로 볼 때도 적어도 7월 서울 날씨는 최고기온보다 최저기온에 더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지구 온난화 등으로 해마다 7월 온도가 올라가고 있다는 건 누구나 체감할 수 있는 사실. 1908년 7월 서울 평균 기온은 23.5도였으니까 112년 동안 3.5도가 올랐습니다. 아래 그래프도 이 사실을 증명합니다. 7월 월별 최저기온은 1908년 7월 20.4에서 올해 24.3도로 3.9도 올랐습니다. 아래 그래프를 보시면 그것도 꾸준히 올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월별 최고기온은 최저기온하고 1도 정도 차이가 나는 2.8도 오르는데 그쳤고 아래 그래프처럼 한 고비 꺾일 때도 있었습니다. (통계학에 익숙한 분들께 말씀드리면 상관계수도 최저기온 쪽이 높습니다.) 요컨대 이번 달은 더워서 더운 게 아니라 시원하지 않아서 더웠습니다. 8월에는 더울 때는 덥더라도 시원할 때는 좀 시원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1일그러진 ‘동대민국’-동대문 상인운영회 불법 갑질#.2서울 동대문 D의류상가 도매상인들은 자신들의 일터를 ‘동대민국(東大民國)’이라고 부릅니다. #.3상인운영회(운영회)라는 자치 조직이 특정 세력에 의해 사유화되면서 상인들을 상대로 ‘입점비’ ‘퇴점비’ 등을 뜯어내는 등 불법적인 관행이 10년 넘게 이어져 온 것이죠. #.4상인들은 평균 보증금 5000만 원, 월세 180만 원을 내며 4.23m²(약 1.25평) 크기 점포 한 칸을 얻어 장사하고 있습니다.임대 계약과 관리 권한을 위임받은 운영회가 중간 길목에서 상인들에게 전횡을 일삼는 구조이죠.#.5상인들은 운영회가 계약이나 규약 등 법적 근거도 없이 걷어가는 돈이 한 해 수천만 원에 달한다며 피해를 호소하고 있습니다.#.6운영회는 처음 입주하는 상인들에게 점포 보증금과는 별도로 500만~3000만 원의 ‘입점비’를 물려왔으며 매주 5만~15만 원의 홍보비와 명절 행사비용으로 한 해 50만~100만 원을 상인들로부터 받아왔습니다. #.7하지만 실제 집행 내용은 공개되지 않아 상인들은 “그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 알 길이 없다”고 했죠.한 상인은 “갈취 피해를 덜 당하려면 운영회 간부에게 고급 양주나 현금 등 수백만 원을 지속적으로 상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8경찰은 운영회의 이 같은 관행이 10년 넘게 이어져 온 것으로 파악하며 운영회가 상가 주인들로부터 일정 권한을 위임받았더라도 경비, 청소 등 일반적인 관리 수준을 넘어 별다른 법적 근거 없이 거액을 요구한 행위는 공갈죄에 해당할 소지가 크다고 말했습니다. 2017.07.31 (월)원본ㅣ구특교 · 김예윤 · 김배중 기자사진 출처ㅣ 동아일보 DB·뉴시스픽·뉴스1·픽사베이기획·제작 | 황규인 기자·신슬기 인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