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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쉽고 또 아쉽습니다. 한국 여자 배구 대표팀이 국제배구연맹(FIVB) 월드그랑프리 국제여자배구대회 2그룹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거든요. 한국은 31일 체코 오스트라바에서 열린 대회 2그룹 결승전에서 폴란드에 0-3으로 완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정말 선수들, 고생 많았습니다.원래 해마다 7월 31일은 한국 여자 배구 역사에 의미가 깊은 날입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때 동메달을 목에 건 날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올림픽 구기 종목에서 메달을 딴 건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몬트리올 올림픽 당시 한국 여자 배구 에이스는 이제 ‘여사님’이라는 호칭이 더 어울리는 조혜정(64)이었습니다. 그는 키 163.5㎝로 현대 배구에서는 세터라고 해도 ‘작다’는 평가를 받는 수준밖에 안 됐습니다. 그래도 조혜정은 180㎝가 넘는 상대 ‘블로킹 숲’을 뚫고 강스파이크를 날렸습니다. 그래서 외신 기자들이 붙여준 별명이 ‘날으는 작은 새(flying little bird)’. (맞춤법으로는 ‘나는 작은 새’가 맞지만 때론 일부러 맞춤법을 틀려야 할 때도 있는 법.) 그렇게 잘 나가던 한국 대표팀에 날벼락이 떨어집니다. 조혜정이 쿠바를 상대한 조별리그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다리를 다치고 만 것. 의사는 “뛰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얼음찜질을 하며 아쉬움을 삼키던 조혜정의 눈에 대표팀 막내 백명선(61)이 보였습니다. 조혜정은 백명선에게 ‘메달 따서 연금 받게 되면 뭐 할 거냐’고 지나가듯 물었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이랬습니다. “언니, 저 동생 여섯 명이에요. 제가 학비를 대야 해요.” 백미선과 부둥켜 안고 한참 눈물을 흘린 조혜정은 ‘숙적’ 일본과 맞붙은 준결승전에 출전했지만 부상을 극복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점프조차 제대로 하기 힘들었던 조혜정은 1세트만 뛰고 경기에서 빠졌습니다. 결국 한국은 일본에 0-3으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렇게 동메달을 놓고 결전을 치르게 된 3, 4위전 상대는 헝가리. 한국은 이 경기에서 3-1 역전승을 거두고 동메달을 차지했습니다. 당시 이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기사에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온 선수도 동생들 학비를 책임져야 했던 백명선, 이름이 제일 많이(3번) 나온 선수도 백명선이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여자 배구 대표팀 절반에게만 비행기 비즈니스석을 타게 한다고 팬들이 들고 일어서는 나라가 됐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촌스러워 보이기까지하는 이런 스토리가 없었다면 한국이 그리고 한국 배구가 이만큼 성장하지 못했을 겁니다. 올드 배구 팬이라면 잘 아실 것처럼 그 후 조혜정은 1979년 이탈리아 리그에 진출하면서 한국 여자 배구 1호 해외 진출 선수가 됐습니다. 2010년에는 프로배구 여자부 GS칼텍스 감독을 맡아 한국 4대 프로 스포츠 첫 번째 여성 감독으로 이름을 남겼죠. 지금까지도 프로 골퍼 조윤희(35)와 조윤지(26)의 엄마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혹시 백명선 ‘여사님’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아시는 분 계시나요? 아니, 정확하게는 동생 분들 소식이 궁금하네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경고: 이 기사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 신작 영화 ‘덩케르크’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 공군은 어디 있는 거야(Where‘s the bloody air-force)?” 최근 개봉한 영화 ‘덩케르크’에서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Luftwaffe)가 한바탕 폭탄을 쏟아 붓고 떠나자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 해변에 있던 영국 병사가 이렇게 말하죠.(영화 이름을 이렇게 바꾼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물러나라! 물러나라! 물러나라! 물러나라! 물러나라!) 정답은 ‘안개 속’이었습니다. 영화가 막을 내릴 즈음 영국 국민들이 귀환병들을 환영하는 와중에도 “대체 공군은 한 게 뭐 있냐”며 핀잔을 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영국 공군은 정말 많은 일을 했습니다. 이 영화가 소재로 삼은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을 통해 덩케르크 해변에 고립돼 있던 영국 원정군(BEF)과 벨기에군, 프랑스군 등 총 33만8226명이 영국 땅을 밟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전장에서 구해낸 건 당시까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살아 돌아올 수 있던 건 영국 왕립공군(RAF)이 하늘에서 독일 공군을 물리치며 바다 위를 오간 배 900여 척을 보호했기 때문이죠. 영국에서 작전을 전개한 건 1940년 5월 27일부터 6월 4일까지 9일간. 이 기간 영국 공군은 총 4882회(sorties) 출격했습니다. 그 결과 독일 공군기 240기를 격추시키는 동안 177기를 잃기도 했습니다. 그저 공중전 대부분이 해안에서 떨어진 안개 낀 바다 위에서 벌어져 해변에 있는 육군 병사들 눈에 잘 보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육군 병사들이 볼멘소리를 하거나 시민들이 공군에 불만을 품었던 게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닙니다. 당시 영국 공군 전투기 사령관을 맡고 있던 휴 다우딩 대장(1882~1970)이 “영국 본토 내에 전투기 전력을 유지해야 한다”며 이 작전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건 사실이니까요. 다우딩 대장은 다이나모 작전 시작 11일 전인 1940년 5월 16일 윈스턴 처칠 총리(1874~1965)에게 편지를 보내 “(독일로부터 침략을 당한) 프랑스가 아무리 끈질기게 요구한대도 앞으로 영국 해협을 건너는 전투기가 단 한 대도 없도록 보증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다우딩 대장이 프랑스를 혐오해 저런 주장을 폈던 건 아닙니다. 이미 프랑스에 건너가 있던 전투기를 너무 많이 잃었기 때문이죠. 당시 영국 공군 조종사 대부분은 ‘초짜’였던 반면 독일 공군에는 스페인 내전에서 경험을 쌓은 베테랑이 즐비했습니다. 어차피 독일이 영국으로 쳐들어 올 테니 그때를 대비하려면 전투기를 최대한 아껴야 한다는 게 다우딩 대장 주장이었습니다. 그는 같은 편지에 “(영국군이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패배할 경우) 유럽 대륙 전체를 독일이 차지하더라도 영국이 계속 싸워야 한다는 걸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략) 전투기 전력이 충분하고 해군 함대가 건재하다면 우방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우리 영국 혼자서도 전쟁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다우딩 대장은 막 세상에 나온 레이더가 군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은 선구자이기도 했죠. 그는 반대를 무릅쓰고 유럽 대륙 쪽에 있는 영국 남동부에 레이더망을 깔았습니다. 이 레이더망은 뜻밖의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영국은 독일군 암호를 해독해 출격 정보를 입수했지만 독일에서는 이 레이더 때문에 정보가 샌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러니 독일군은 암호 체계를 바꿀 생각을 하지 못했고 영국은 더더욱 성공적으로 독일을 상대할 수 있었습니다. 다우딩 장군은 그냥 레이더만 설치한 게 아니라 각지에 흩어진 레이더에서 얻은 정보를 한 데 모으는 중앙 사령부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이게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만 해도 전투기 조종사 중에는 ‘하늘의 돈키호테’를 자처하던 낭만주의자(로맨티스트)가 적지 않아 통제가 쉽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대성공. 그가 이렇게 시스템을 만들어 놓은 덕에 그해 7월 10일부터 10월 31일까지 열린 ‘영국 본토 항공전(Battle Of Britain)’은 영국의 승리로 끝날 수 있었죠. 특히 다우딩 장군이 개발을 지시한 것이나 다름없는 ‘스핏파이어(Spitfire)’는 이 항공전을 통해 “영국을 구한 전투기”라는 명성을 얻었습니다. 처칠이 다이나모 작전 이전에 프랑스로 보내려고 했지만 다우딩 장군이 ‘절대 못 보낸다’고 반대하던 전투기가 바로 스핏파이어였습니다.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전투기 조종사들 활약이 계속되자 처칠은 “인류 전쟁사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적은 사람들에게 이토록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Never in the field of human conflict have so many owed so much to so few)”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 역시 결국 다우딩 장군이 옳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던 겁니다.그전까지 무적을 자랑하던 독일 공군도 결국 이 항공전에서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일 군 수뇌부도 영국 본토를 침공하려던 ‘바다사자 작전’을 결국 포기하면서 독일이 손쉽게 승리할 것 같던 제2차 세계대전도 전환점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다우딩 장군이 다이나모 작전 때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영국 본토 항공전은 현재까지도 인터넷 문화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당시 영국 정부에서 “진정하고 하던 일 계속 하세요”라는 뜻으로 만든 ‘Keep Calm and Carry On’ 포스터(아래 사진)와 문구가 영어권에서 계속 큰 인기를 끌고 있으니까요.인터넷에서 ‘닥치고 ○○○’이라고 한국어로 쓴 거 보신 적 있으시죠? 그게 바로 이 표현을 과격하게(?) 번역한 겁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시느라 고생하셨다면 이제 닥치고 추천을 눌러주세요!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제일 쉬운 문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은? 잘 아시는 것처럼 이승만(1876~1965)이다. 조금 어려운 문제. 그럼 첫 국무총리는? 이번에는 광복군 참모장 출신인 이범석(1900~1972) 장군이 정답이다. 이제 제일 어려운 문제. 그럼 첫 번째 국무총리 후보자는 누구였을까. 이윤영 목사(1890~1975)가 주인공이다. 그러니까 대한민국 역사상 첫번째 국무총리 후보자는 인준 투표를 통과하지 못했다. 황해도에서 태어나 감리교 학교에서 공부한 이 대통령은 평안도 출신 감리교 목사인 이 목사를 1948년 7월 27일 총리 후보자로 지명하면서 ‘남북통일을 위한 인선’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 목사 카드를 꺼내든 게 불안했는지 국회에 나와 직접 대통령 교서(敎書)를 읽었다. 이 대통령은 이 교서에서 “모든 추천 명단이나 신문에 발표되는 것을 보면 가장 국무총리에 어울리는 분은 인촌 김성수(1891~1955) 신익희(1892~1956) 조소앙(1887~1958) 씨 등 세 분”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김성수는 “국무총리보다 덜 중요하지 않은 책임”을 맡겨야 하는 사람이라서 △신익희는 국회 부의장으로 이 대통령 본인이 대통령이 되면서 공석이 된 국회의장을 대신해 국회를 이끌어야 해서 △조소앙은 “불행히도 근자(近者)에 와서 총선거문제 이후로 노선이 갈려서” 총리로 지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 목사 인준인은 찬성 59표, 반대 132표로 부결됐다. 그러자 동아일보는 7월 30일 사설 ‘민중의 정치를 고조(高調)함’을 통해 “(이 대통령이 ‘이외의 인물’을 총리로 지명하겠다고 밝힌 데 대해) 총리의 인선은 반드시 국민적 기초 위에서 되어야 할 것이 상식이매, 이 상식을 이탈한 비밀과 의외가 있을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의 과도한 비밀은 드디어 이외의 파문을 초래하였으니 이윤영 씨의 인준 부결 소동은 이 땅, 이 겨레의 헌정사상 첫 페이지의 일대오점으로 국민의 통한이 이에 더 할 바 없다”고 비판했다. “대통령의 판단을 오도(誤導)하는 측근의 잡음을 의아(疑訝·의심)할 뿐”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 사설은 “이 대통령은 본인의 의사(意思)만이 민족의 원한 바라고 단정한다”며 “만약 일개인의 의사가 민의를 반영하는 것이라면 이 나라는 영웅이나 천재가 움직이는 나라요 민주의 힘으로 움직이는 나라가 아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이 대통령은 동아일보 예상대로 이 장군을 새 총리 후보자로 지명하면서 “여론상 이범석 씨의 명망이 가장 높으므로 민의에 따르겠다”고 했다. 이 장군에 대한 인준안은 그해 8월 2일 찬성 110표, 반대 84표로 통과됐다. 인준안 통과 후 이 대통령은 “장관 인선은 총리와 협의해 인격본위(人格本位)로 등용하겠다”고 밝혔다. 정말 이대로 됐을까. 이 장군은 국무총리 인준에 도움을 준 한국민주당 인사를 장관 자리에 추천할 때마다 이 대통령이 “그 자리는 내가 벌써 생각해 놓은 사람이 있다”, “왜 하필 그 사람이야?” “그 사람 언제부터 알고 지냈어?”라고 답했다고 훗날 회고했다. ‘코드 인사’라는 말은 노무현 정부 이후 등장한 신조어지만 대통령과 고향이 비슷한 사람 등 ‘자기 사람’을 총리나 장관에 앉히고 싶어 했던 건 정부 수립 때부터 계속된 일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1953년 오늘(7월 27일)은 유엔군과 북한군이 6·25전쟁 휴전협정서에 조인(調印)한 날입니다. 휴전을 하기로 했으면 이를 외부로 알릴 필요가 있을 터. 군대에서는 무전병이 이런 업무를 맡습니다. 당시 이 소식을 전한 무전병은 바로… (제목을 보고 다 아셨겠지만 모르시는 척!)송해 선생님(90)이었습니다. (사진 보고 다들 아셨겠지만) 네,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는 그 분이죠. 송 선생님은 그 동안 여러 방송에 출연해 “6·25 전쟁 당시 모스 부호로 전보를 치는 육군 통신대에서 근무했다. 그냥 모스 부호가 아니라 암호 된 모스 부호였다. 이 암호를 해독해 전보를 치면서 내용을 보니까 ‘22시(오후 10시)를 기해 모든 전투를 중단한다’는 휴전 전보였다. 내가 휴전 소식을 처음 전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모스 부호는 점(・)과 선(-)을 섞어서 글자를 조합하는 통신 수단입니다. 이 부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모스 부호를 접해도 무슨 뜻인지 알아채기가 쉽지 않지만 한번 배우면 계속 머릿속에 남아 있게 됩니다. 송 선생님은 “자동차 광고를 보는 데 모스 부호 소리가 들려 놀란 적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특정 업체 홍보처럼 비출까 봐 광고를 보여드릴 수는 없지만 간단한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찾으실 수 있습니다.)원래 북한에 있는 황해도 출신인 송 선생님은 6·25전쟁 당시 남쪽으로 건너와 한국군에서 근무했습니다. 월남 과정에서 바다를 건너 오면서 본명인 복희 대신 바다 해(海)를 예명으로 쓰기로 결정했다는 이야기도 널리 알려진 에피소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예명에 담은 겁니다.송 선생님은 금강선 관광을 처음 시작할 때는 ‘유람선 노래자랑’, 나중에는 전국노래자랑 평양편 진행을 맡아 북한을 찾았습니다. 그래도 누이 동생을 비롯한 가족은 만날 수는 없었다네요. 송 선생님은 “가족들이 제발 살아있기만을 기도한다”고 자주 말하곤 했죠. 하루 빨리 송 선생님을 비롯한 실향민들이 마음껏 고향을 찾을 수 있는 시대가 열리면 좋겠습니다.그럼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모스 부호로 쓴 ‘송해 선생님 건강하세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이 신발은 뭘로 만들었을까요? 제목을 읽고 들어오셨을 테니 이미 정답을 아실 터. ‘울트라 III 에코’라는 이름이 붙은 이 신발은 녹조(綠藻)로 만들었습니다. 네, ‘녹조라떼’라고 할 때 그 녹조 맞습니다. 정확하게는 중국 타이(太) 호에 잔뜩 끼었던 녹조가 원료입니다. 이 신발을 만든 건 ‘비보베어풋(Vivobarefoot)’이라는 영국 회사입니다. 이 회사는 원래 샌들이나 구두창에 쓰는 EVA(Ethylene-vinyl acetate·에틸렌초산비닐)로 ‘울트라 III’라는 워터슈즈를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석유 같은 화석 연료가 없으면 이 EVA를 만들 수가 없다는 것. 친환경 제품을 만들고 싶었던 비보베어풋은 녹조로 플라스틱 계통 소재를 만드는 미국 블룸(Bloom)사와 손잡았습니다. (녹조가 하천에 가득 낀 모습을 일컫는 영어 표현이 ‘bloom’입니다.) 이 미국 회사는 녹조 성분을 최고 60%까지 포함한 ‘블룸 폼(foam·아래 사진)’이라는 소재를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재는 요가 매트 등을 만드는 데 쓸 수 있다고 합니다. 녹조로 신발을 만드는 첫 단계는 이동 작업 차량을 녹조가 낀 하천으로 끌고 가는 것. 하천에서 녹조를 끌어올린 다음 화학 응고제를 뿌립니다. 그러면 녹조는 덩어리가 진 채로 이 차량에 달린 물탱크 아래 가라 앉죠. 공기를 주입해 덩어리를 물 위로 떠오르게 한 다음 햇볕에 잘 말리면 ‘녹조 수확’ 작업이 끝납니다. 수확이 끝나면 녹조에 있던 독성이 사라진 물을 원래 있던 하천으로 돌려보냅니다. 두 회사는 이 신발 한 켤레를 만들면 물 57갤런(약 216¤)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제품을 만들 때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는 점도 두 회사가 홍보하는 포인트 중 하나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일본에는 녹조를 가지고 비료(퇴비)를 만드는 미라이에(ミライエ)라는 회사도 있습니다. 이 회사 역시 홈페이지(아래 사진)를 통해 녹조(アオコ)를 즉석에서 비료를 만들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습니다. 녹조는 또 석유를 대체할 바이오 에너지로도 인기가 높습니다. 미국 에너지국(DOE)은 2010년 녹조(algae)를 바이오 연료로 바꾸는 방법을 찾는 연구에 8000만 달러(약 897억 원)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전기라고 안 될 게 있나요? 지난해 류원형 연세대 기계공학과 교수팀은 녹조에서 전자(電子)를 뽑아내 전기를 만드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연구팀은 이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어드밴스드 펑서녈 머터리얼스(Advanced Functional Materials)’에 싣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환경오염 물질인 녹조 같은 게 얼마든 많이 생겨도 괜찮다고 말씀드리려는 건 물론 아닙니다. 다만 이렇게 녹조를 이용하는 법도 있다는 걸 소개하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아무리 싫어도 녹조와 함께 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면 쓸모를 찾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일 테니까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아, 정말 김세진 감독이 김요한을 원했구나.’ 프로배구 남자부 OK저축은행이 지난달 19일 KB손해보험과 날개 공격수 김요한(32·사진)을 포함한 2대2 트레이드를 단행하자 배구 취재 기자 사이에서 이런 말이 들렸습니다. 김세진 OK저축은행 감독이 그 전에도 김요한을 데려오려고 KB손해보험과 트레이드 협상을 벌였다는 소문이 돌았었죠. 이번에는 반대였습니다. 이번에는 확실히 KB손해보험이 급했습니다. KB손해보험에서 김요한 카드를 들고 트레이드 협상을 벌인 건 OK저축은행뿐만이 아니었거든요. 최근 사석에서 만난 한 배구단 관계자는 “KB손해보험에서 먼저 삼성화재에 4대4 트레이드를 제안했다고 들었다”고 전했습니다. KB손해보험에서 김요한, 그리고 이번에 김요한과 같이 팀을 옮긴 이효동(28·세터)을 포함해 선수 4명 이름을 대면서 ‘원하는 숫자만큼 데려가고 그 숫자만큼 선수를 달라’고 요청했다는 겁니다. 이 관계자는 “결국 2대2 트레이드로 합의를 봤다. 그런데 도장을 찍기 직전에 김요한 몸값 때문에 협상이 틀어진 걸로 안다”고 했습니다. 김요한은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은 지난해 KB손해보험과 연봉 4억 원에 재계약했습니다. 문제는 이 연봉이 각종 옵션 등을 제외한 순수 보장액이라는 점. 삼성화재 쪽에서 ‘연봉 이외 금액은 부담하기 어렵다’는 뜻을 밝히면서 트레이드는 물거품이 됐습니다. 이 관계자는 “OK저축은행에서 김요한 몸값을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아는 게 없다”며 말을 아꼈습니다. 우리카드도 KB손해보험에서 트레이드를 진행했던 팀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른 배구 관계자는 “우리카드에서는 김요한보다 (지난 시즌을 마치고 군입대한 우리카드 주전 세터) 김광국(30)을 대신할 세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세터를 포함해 카드를 맞춰보고 있었는데 삼성화재에서 유광우(32·세터)가 오게 되면서 없던 일이 됐다”고 했죠. 삼성화재 주전 세터였던 유광우는 지난 시즌까지 우리카드에서 뛴 박상하(31·센터)가 FA 자격을 얻어 삼성화재와 계약하면서 그 보상선수로 우리카드 유니폼을 입게 됐습니다. KB손해보험에서 팀 간판이나 다름없던 김요한을 트레이드하려고 이렇게 애쓴 건 그만큼 변화가 절실하다고 판단했다는 뜻이겠죠? KB손해보험은 김요한 트레이드에 이어 경북 구미시에서 경기 의정부시로 연고지를 옮기면서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국가대표 세터 출신 최영준 사무국장도 최근 배구단 밖으로 자리를 옮긴 상태. 과연 KB손해보험이 이번 변화를 통해 ‘만년 하위권’ 이미지를 벗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그 시절 우리에게는 누구나 컴퓨터 안에 처음 갖게 된 ‘스케치북’이었습니다. 1984년 ‘PC 페인트브러시’라는 세상에 나온 ‘그림판’ 이야기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이듬해 윈도 1.0부터 계속 마이크로소프트(MS) 윈도와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윈도에서 더 이상 이 그림판을 볼 수 없게 됐습니다. 영국 일간 가디언 등 해외 언론은 마이크로소프트(MS)가 올 가을 윈도 10을 업데이트할 때부터 그림판을 업데이트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24일(현지 시간) 보도했습니다. 단, 윈도에서 언제 아예 빠질지는 아직 확정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MS는 이미 4월 윈도 업데이트 때 ‘그림판 3D(Paint 3D)’를 내놓으면서 작별을 예고한 상태였죠. 어도비 포토샵 같은 프로그램에 밀려 그림판은 ‘3류 그래픽 소프트웨어’가 된 지 오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발로 그린 것처럼 낮은 퀄리티를 조심하라’는 뜻인 ‘발퀄주의’ 해시태그가 붙은 게시물은 거의 대부분 그림판으로 작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예 ‘그림판으로 작업했냐’는 말을 퀄리티가 낮은 그래픽 작업을 비판하는 표현처럼 쓸 정도였죠.하지만 못 난 선비만 붓을 탓하는 법. 누군가에게 그림판은 이렇게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주는 스케치북이자 화구(畫具)이자 크리스마스 선물이었습니다.그러니 올 가을 윈도 10이 업데이트 시작을 알리면 잠깐 그림판과 함께 했던 추억을 떠올려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그림판아, 잘 가!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아래 그림에서 색깔이 다른 네모를 찾아보세요. 제 눈에는 오른쪽 하나가 전혀 다른 색으로 보입니다. 왼쪽에도 다른 색이 들어 있을까요? 글을 읽으면서 정답을 알아봅시다. ●호메로스는 색맹? 빅토리아 왕조 시대 영국 총리를 네 번 지낸 윌리엄 글래드스톤(1809~98)은 평생 책을 2만 권 넘게 읽은 걸로 유명합니다. 특히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광팬이었죠. 글래드스톤은 반복해 호메로스 작품을 읽다가 재미난 사실을 발견합니다. 당연히 푸르러야 할 에게해(海)를 호메로스는 ‘진한 와인 빛(wine dark)’이라고 표현했던 것. 물론 문학적인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녹색 꿀, 겁에 질린 녹색 얼굴 같은 표현이 계속 등장하면서 글래드스톤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그래서 호메로스 작품에 등장한 색깔을 직접 세봤습니다. 그랬더니 검은색 170번, 흰색 110번, 빨간색 13번을 제외하면 다른 색깔은 10번도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파란색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죠. 깊은 고민에 빠진 글래드스톤은 호메로스가 색맹이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대문호만 색맹이어서는 안 되겠죠? 그는 고대 그리스인들은 모두 색맹이었다고 가설을 세우게 됩니다. ●언어학의 반격 당연히 그럴 리가 있나요? 20세기 들어 언어학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밝혀냅니다. 사람이 직접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언어 체계가 재해석한 세상을 본다는 거죠. 이게 색깔하고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언어학자들은 고대 문서를 가지고 어떤 색깔이 언제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는지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거의 모든 언어에서 똑같은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고대 문서에 처음 등장한 건 검은색과 흰색이었습니다. 그 다음 빨간색이 나옵니다. 이어서 녹색과 노란색. 맨 마지막이 파란색이었던 겁니다. 언어학자들은 녹색과 파란색을 구분하지 않는 언어가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우리말도 그렇습니다. 푸른 하늘은 파란색에 가깝겠지만, 푸른 숲은 녹색에 가까우니까요. 파란색 또는 파랑은 순우리말이지만 녹색(綠)은 한자어입니다. ●힘바족(族) 사례 그렇다면 푸른색을 아예 구분하지 않는 언어가 있다면 어떨까요? 이를 알아보려고 언어학자들은 아프리카 나미비아 북부에 사는 힘바족을 찾아갔습니다. 그 다음 맨 처음에 등장한 그림 두 개를 주고 똑같은 질문은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힘바 족 사람들은 왼쪽에서는 손쉽게 다른 색깔을 찾아냈지만 오른쪽에서는 못 찾았습니다. 네, 왼쪽에도 다른 색깔이 섞여 있던 겁니다.왜 그럴까요? 어떻게 오른쪽에서는 못 찾으면서 왼쪽에서만 다른 색을 찾아낼 수 있는 걸까요? 다시 그림을 보시죠. 정답은 이들이 쓰는 ‘언어’ 때문입니다. 영어를 비롯해 현대 언어에서는 기본 색깔을 11가지로 구분합니다. 힘바족이 쓰는 말에는 기본 색깔이 5개뿐입니다. 이들은 색깔을 아래 그림처럼 구분합니다. 그러니까 힘바 족 사람들에게 왼쪽 그림에는 부로우(burou)에 둠부(dumbu)가 섞여 있는 거지만, 오른쪽 그림은 전부 부로우 뿐이었던 겁니다. 색약 또는 색맹 증상이 있는 분들 중에서도 왼쪽에서만 다른 색깔을 찾아내는 분들이 계십니다. 사실 포토샵 같은 컴퓨터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확인해 보면 왼쪽 그림에도 분명히 다른 색깔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확실히 세상을 자기 두 눈으로 똑바로 보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뇌에 비친 그림자를 보는 겁니다. 여전히 믿기지 않으신다고요? 색깔을 나타내는 낱말이 없다고 저렇게 다른 색을 못 보는 게 말이 되냐고요? 아래 드레스는 무슨 색으로 보이십니까? 검정과 파랑? 아니면 흰색과 금색? 서로 다른 색깔로 보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아도 어쩔 수 없습니다. 못 보는 건 정말 못 보는 겁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국보급 투수’ 선동열(54·사진)에게 7월 24일은 초대 야구 국가대표 전임 감독이 된 날로 기억될 터. 그런데 27년 전 오늘(1990년 7월 24일)은 달랐습니다. 당시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기사 제목에 따르면 쌍둥이에게 정복당했거든요. 제목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선동열은 이날 경기 전까지 전신 MBC 시절을 포함해 LG를 상대로 12연승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날 비가 오락가락하던 잠실 경기에서 1-1로 맞선 5회말 선동열이 마운드에 오를 때만 해도 긴장한 쪽은 4연패를 당하고 있던 LG였습니다. 선동열이 3이닝을 1안타 무실점으로 막고 LG 선발 김용수(57)도 5회초 1실점 한 걸 제외하면 무실점으로 버티면서 경기는 8회초까지 1-1 동점을 유지했습니다. 그때 8회말 LG 선두 타자 나선 박흥식(55·현 KIA 코치)이 풀카운트 접전 끝에 3루타를 뽑아내면서 분위기가 LG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LG를 상대로 무사 3루 위기를 맞은 건 천하의 선동열에게도 낯설었는지 그는 여기서 폭투를 범하고 맙니다. 그 사이 박흥식이 홈플레이트를 밟으면서 LG가 2-1로 앞서기 시작했고 이 득점은 결국 결승점이 됐습니다. 하지만 선동열을 상대로 12연패 정도 당한 걸로는 명함을 내밀기가 힘듭니다. LG의 영원한 동반자 롯데는 더했거든요. 롯데는 1988년 8월 11일부터 1995년 9월 26일까지 선동열에게 20연패의 수모를 당했죠. 1995년 기록이 끊긴 건 선동열이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에 입단하면서 롯데와 맞붙을 일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롯데는 1988년 6월 12일 끝내기 안타로 승리를 거둔 뒤로 선동열이 은퇴할 때까지 단 한 번도 그를 패전투수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1999년 11월 21일 선동열이 일본 나고야에서 은퇴를 선언했던 그날 부산 시내 술집에 삼삼오오 모인 롯데 팬들은 ‘제발 우리한테 한번만 진 다음에 은퇴하라’며 분루를 삼켰다나 뭐라나.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신문에는 창간 후 발행한 호수(號數)를 이르는 지령(紙齡·신문의 연령)이 붙어 있다. 예를 들어 2017년 7월 22일자 동아일보는 ‘2만9842호’다.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이 지령을 벗어나 신문을 발행하는 일이 잦았는데 그게 바로 ‘호외(號外)’다.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동아일보는 97년 전 오늘(1920년 7월 22일) 100호를 맞았다. 100단위 숫자를 기념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이날 신문 1면 가운데에는 일본 도쿄(東京)에 주문했던 윤전기(신문을 인쇄하는 기계)가 도착한 걸 자축하고, 지면 일부를 독자 참여 꼭지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밝힌 상자 기사가 실렸다. 그런데 결국 이날 신문은 세상에 나가지 못했다. 조선총독부가 1면 머리기사로 나간 사설 ‘학우회 순연강연회 해산령과 언론 압박’에 문제가 있다며 발매반포금지 조치를 내렸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조선총독부에서 문제 삼은 부분을 삭제하고 호외로 발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학우회’는 도쿄에 유학 중이던 조선 청년 18명이 만든 단체다. 이들은 여름방학을 이용해 1920년 7월 9일 부산 동래를 시작으로 조선 각지를 돌며 순회강연을 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들이 도쿄에서 출발할 때부터 소식을 전하는 등 이 강연을 적극 후원했다. 학우회는 부산을 시작으로 울산 김해 대구 통영 공주 청주 천안 등을 거쳐 그달 18일 서울 단성사에 도착했다. 이 자리에는 3000여 명이 모였다. 나중에 초대 재무장관이 되는 게이오(慶應)대 유학생 김도연(1894~1968)이 ‘조선 산업의 장려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강연을 시작하자 강연장은 조선총독부 성토대회장으로 바뀌었다. 결국 종로경찰서장이 강연을 중단시키고 해산을 명했다. 조선총독부는 학우회가 서울 이북에서 열려던 강연회도 모두 취소시켰다. 그러자 동아일보는 100호 기념호 1면 사설에 “무차별이니 일시동인(一視同仁)이니 선정덕정(善政德政)이니 하는 사(蛇·뱀)의 설(舌·혀)을 농(弄)하야 조선인을 기만치 말라”고 조선총독부를 규탄했다. 이날 신문이 발매반포금지 조치를 당한 이유다. 새로운 지식에 굶주렸던 당시 동포들은 과학 교육 여성 위생 등 다양한 주제로 열리는 강연회에 참석해 지적 허기를 달랬다. 동아일보는 이 강연회를 지상 중계하면서 지식 보급에 앞장섰다. 1920년 4월부터 1925년 말까지 약 5년 동안 동아일보에서 소개한 강연회 기사는 총 2097건이나 된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생수머신.’ 황재균(29·현 샌프란시스코)은 프로야구 롯데 소속이던 2015년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에서 우승한 뒤 이런 별명을 얻었습니다. 결승에서 그와 맞붙은 NC 테임즈(31·현 밀워키)가 근육을 키운 황재균 몸매에 대해 평가해 달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는데요. (왜, 진짜 별명은 이게 아니라고 말을 못하니!) 이전까지 생애 최다 홈런이 18개(2009년)였던 황재균은 2015년 전반기에만 홈런 22개를 몰아치며 ‘벌크업’ 효과를 과시했습니다. 황재균은 그해 전반기에 348타석에서 15.8타석마다 하나씩 홈런을 날렸습니다. 타석 당 홈런 비율은 6.3%. 하지만 후반기가 막을 열자 황재균은 고개 숙인 남자가 됐습니다. 그가 후반기에 첫 홈런을 터뜨린 건 82타석이 지난 뒤였죠. 황재균은 이 홈런을 포함해 후반기 238타석에서 홈런 4개를 추가하는 데 그쳤습니다. 홈런 비율은 1.7%로 내려갔습니다. 황재균은 2015 시즌이 끝난 뒤 포스팅(비공개 경쟁 입찰)을 통해 메이저리그 문을 두드렸지만 단 한 팀도 반응이 없었습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후반기 성적 부진을 그 이유 중 하나로 꼽았습니다. 이런 일을 겪은 건 황재균이 처음은 아닙니다. ‘홈런 더비(derby)의 저주’라는 말이 널리 쓰일 정도. 메이저리그에서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를 부르는 공식 명칭이 ‘홈런 더비’라 이런 이름이 붙은 겁니다. 홈런 더비 때는 문자 그대로 홈런만 쳐야 하기 때문에 스윙 폼이 커지게 마련이고 결국 후반기 성적도 나빠진다는 게 이 저주를 믿는 이들 주장입니다. 올해 메이저리그(MLB)에서는 ‘베이브 루스의 재림’이라는 소리까지 듣던 뉴욕 양키스 신인 타자 애런 저지(25)가 이 저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저지는 전반기 때 12.2타석마다 홈런을 하나씩 날렸지만(총 30개) 올해 홈런 더비에서 우승한 뒤 20일까지 31타석에서 홈런을 하나도 때리지 못했습니다. 타율도 전반기 0.329에서 후반기 0.115로 주저앉았습니다. 황재균이나 저지만 그런 게 아닙니다.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MLB 홈런 더비에 참가한 선수 82명 성적을 전·후반기로 나눠 비교해 보면 타율, 출루율, 장타력, OPS(출루율+장타력), 타석 당 홈런 비율이 모두 내려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리그 평균은 모두 조금씩이라도 올랐는데 말이죠. 그렇다면 저주가 실제로 존재하는 걸까요? 정말 타자들이 무조건 홈런을 치려고 커진 스윙 폼을 끝내 바로잡지 못하는 걸까요? 시즌 홈런왕이 되려는 타자는 홈런 더비에 나서지 말아야 하는 걸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OPS 기준으로 MLB 홈런 더비 참가자 82명 중 59명(72.0%)가 성적이 내려간 건 사실. 그런데 이들이 전반기에 ‘너무 잘 쳤다’는 걸 감안해야 합니다. 황재균이 정말 후반기에도 홈런 22개를 때려 갑자기 40홈런을 넘게 치는 타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저지도 홈런을 60개 이상 쳐내면서 MLB 신인 선수 최다 홈런 기록(49개)을 갈아 치우는 게 아주 당연한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전반기에 남들보다 정말 (홈런을) 잘 쳤기에 홈런 더비에 초대 받을 수 있었습니다. MLB 홈런 더비에 참가할 수 있는 선수는 해마다 8명(2014년은 10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또 후반기에 성적이 떨어졌다고 해도 리그 평균보다는 훨씬 높습니다. 후반기에도 ‘올스타급’ 기량은 유지한 겁니다. 자기 전반기 성적보다 떨어지는 게 문제였을 뿐이죠. 통계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평균으로 회귀한다(regression to the mean)’고 합니다. 전반기에는 이 타자들이 ‘운이 좋아서’ 타격 성적이 평균보다 ¤았지만 후반기에는 반대로 평균을 향해 성적이 내려갔던 겁니다. 사실 야구 선수 타격 기록은 평균회귀를 설명할 때 자주 쓰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운이 꼭 반년 동안에만 바뀌는 건 아닙니다. 신인상을 타면 이듬해 부진하다는 ‘2년차 징크스’도 세상만사가 평균으로 회귀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죠. 실제로는 첫 해 너무 잘하면 이듬해 조금만 성적이 떨어져도 ‘건방져졌다’는 평가가 따라다니지만 말입니다.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은지 평균회귀로 설명할 수 있는 일에 이런저런 구실을 대는 ‘회귀의 오류’라는 표현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전반기에 너무 잘한 게 진짜 자기 실력은 아닌 것처럼 후반기에 좀 못한 것도 진짜 실력은 아니니까요. 장마에 축 늘어지고, 무더위에 지쳐 슬럼프에 빠지셨나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곧 다시 평균으로 돌아갈 테고, 그건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뜻이니까요. 거꾸로 지금 정말 잘 나간다고 자만할 필요도 없다는 걸 ‘홈런 더비의 저주’가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새로 고용한 미대생 알바(아르바이트)가 심상치 않다’는 글이 인터넷에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이 사진에는 슈퍼마켓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미대생이 과자를 색깔별로 정리한 진열대가 담겨 있습니다. ‘묘한 안정감을 준다’는 게 누리꾼들 평가. 그런데 모두가 이런 색깔을 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학창시절 과학 시간에 배웠고, 어른이 되어서도 건강검진을 받을 때마다 검사 받는 것처럼 색맹 또는 색약이라고 해서 색깔을 남들하고 다르게 받아들이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그러면 이런 분들 눈에는 맨 처음에 슈퍼마켓 진열대가 어떻게 보일까요? 이렇게 보입니다. 아래 그림 같은 색각 이상 테스트 많이들 받아보셨을 겁니다. 25, 29, 45, 56, 6, 8이라고 쓴 왼쪽 숫자를 읽으실 수 있는 분이 대부분이지만 200명 중 1명꼴로 이 그림이 오른쪽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색약 또는 색맹은 망막에 있는 원추세포라는 녀석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해 생기는 증상입니다. 원추세포는 다시 세 종류로 나뉘는데 각각 빨강(적색), 녹색, 파랑(청색)을 구분하는 구실을 합니다. 어떤 세포가 색깔에 반응하지 못하는지에 따라 같은 색깔이 다르게 보입니다. 방송인 중에서는 신동엽 씨가 여러 번 색약이라는 사실을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신 씨는 얼마 전 방송에서 “색깔에 대한 개념이 일반 사람들하고 조금 다르다.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이해가 안 가는 게 단풍 구경이다. 내 눈에는 단풍이 지저분해 보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래 사진을 보면 어쩐지 이해가 가기도 하는 발언입니다. 신문은 글씨 위주라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지만 사진에 들어간 색깔이 다르게 보이는 것까지 막지는 못합니다. 아래 사진은 오늘자 동아일보 1면을 색맹 종류에 따라 구분한 겁니다. 색깔이 다양한 실제 풍경뿐 아니라 비교적 단순한 색을 쓰는 애니메이션도 색맹 또는 색약이 있으면 아래 사진처럼 다르게 보입니다. 지금까지 나온 사진은 해당 색깔을 완전히 볼 수 없는 걸 가정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개인마다 색깔이 어떻게 보이는지 추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같은 색약도 개인차가 큽니다. 만화가 이현세 씨도 색약인데요, 색약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에 색감이 독특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흔히들 생각하시는 것과 반대로 남들하고 색깔을 다르게 본다고 자동차 운전면허를 딸 수 없는 건 아닙니다. 실제 신호등을 보고 색을 맞출 수만 있으면 면허증을 받는 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또 색깔을 다르게 보는 분들 중에는 색깔 구분을 더 잘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보는 것보다 색을 더 여러 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 겁니다. 이를 근거로 “색각 이상은 진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죠. 진화의 산물이든 세포 이상이든 똑같은 색을 다르게 보는 이들도 200명 중 1명 정도는 있어야 사회가 좀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요? 남들하고 색깔을 다르게 보는 사람들보다 생각에 색안경을 끼고 남을 멋대로 재단하는 이들이 훨씬 더 문제 있는 분들일 테니 말입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퀴즈 하나. 인류 최초로 달에 발자국을 남긴 사람은? 잘 알려진 대로 정답은 ‘닐 암스트롱(1930~2012)’이다. 그러면 두 번째는 누구일까. 시사상식에 밝은 분은 버즈 올드린(87)이라고 답을 하실 터. 아폴로 11호를 타고 우주로 나간 두 사람은 협정 세계시(UTC) 기준 1969년 7월 20일, 한국시간으로는 이튿날인 21일 인류 최초로 달 착륙에 성공했다. 퀴즈 하나 더. 달을 처음 떠난 사람은 누구일까. 이번에는 올드린이 정답이다. 달착륙선인 ‘이글호’에서 조종사인 올드린이 앉는 자리가 더 안쪽이었기에 올드린이 나중에 내리고 먼저 탔어야 했다. 이런 구조 때문에 짓궂은 이들은 올드린을 인류 역사상 최고 ‘콩라인(2등을 뜻하는 인터넷 용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도 올드린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사령선인 컬럼비아호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87)는 아예 달을 밟아보지도 못했다. 대신 콜린스는 멋진 사진을 많이 찍기로 유명한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도 수작으로 손꼽히는 아래 사진을 남겼다. 사진이라면 올드린도 뒤지지 않는다. 그는 1966년 제미니 12호를 타고 나가 4시간 동안 우주유영(EVA)을 하면서 ‘셀카’를 찍었다(아래 사진). 이 사진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우주에서 찍은 셀카다. 달에서 처음 사진에 찍힌 사람도 올드린이다. 암스트롱이 입은 우주복에만 카메라가 달려 있었기에 암스트롱은 달에 첫발을 내딛고도 정작 자기가 나오는 ‘인증샷’을 남기지 못했다. 버즈 올드린이 쓴 헬멧 부분에 조그맣게 비친 게 전부다. 당시에는 TV 보급률이 지금처럼 높지 않았음에도 암스트롱이 달에 첫발을 내딛는 장면은 전 세계적으로 약 6억 명이 시청했다. 동아일보에서는 김남호 진철수 특파원이 미국 휴스턴 우주기지에 머물면서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날 하루만이 아니다. 동아일보는 그해 7월 11일부터 본격적으로 지면 곳곳을 달 탐사 관련 보도로 채웠다. 그달 12일자 동아일보는 “달 표면에 첫발을 내디딜 것을 상상만 해도 어마어마한 그 순간 월인(月人) 암스트롱은 무엇을 생각하고 지상의 우리들은 또 무엇을 느낄 것인가. 기자회견에서 암스트롱은 ‘달 표면에 내려선 첫 순간 무어라고 말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다만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대답하면서 굳은 표정이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암스트롱이 달에 첫 발자국을 남기기 전 남긴 말은 그 유명한 “이것은 한 사람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였다. 올드린이 달을 밟고 남긴 첫 마디는 “아름답다! 아름다워!”였다. 이들이 지구로 돌아온 그달 25일 동아일보 1면에는 서정주 시인(1915~2000)이 쓴 ’대우주의 님에게 - 미스터 앨드린(올드린) 宅(택) 잔디밭 옆에서‘라는 시를 실었다. “그 색시의/한 발톱에 턱도 대 보고/입술 부르르 떨고 내려오는/미스터 ’앨드린‘ 부러웁군/달아/너는/그저/그 시의 한 개 발톱이었던 것을/이쁜 때도 삼삼히 끼인/그 색시의 한 개 발톱이었던 것을… (후략)” 서 시인이 암스트롱이 아니라 올드린에 대한 시를 쓴 정확한 이유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암스트롱보다 올드린이 한국과 인연이 깊다. 미국 공군 조종사였던 올드린은 6·25 전쟁에 참전해 F86 세이버를 몰고 총 66회 출격해 옛 소련 전투기 두 대 격추한 전력이 있다. 미국 잡지 ’라이프‘ 1953년 6월 8일자에는 올드린이 격추한 미그15 전투기에서 조종사가 탈출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 암스트롱과 올드린 달에 첫발을 디딘 이후 아폴로 계획이 17호로 막을 내릴 때까지 총 12명이 달에 다녀왔다. 아폴로 17호가 달을 떠난 건 1972년 12월 14일. 그 후 인류는 45년이 다 지나도록 달에 가지 않고 있다. 아폴로 17호 선장이던 유진 서넌(1934~2017)이 현재까지 달에 발자국을 남긴 마지막 사람이다. 서넌 선장은 달을 떠나면서 바닥에다 딸 트레이시의 이름 약자인 ’TDC‘를 썼다. 인류가 달에 남긴 첫 번째 흔적은 작은 발자국이었지만 마지막 흔적은 크고 깊은 사랑이었던 셈이다. 마지막 퀴즈. 인류 역사상 두 번째로 달에 발걸음을 디딘 사람은? 이제 올드린이라는 이름을 떠올리게 되셨으리라 믿는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올해 5월 아시아나항공은 승무원 A 씨에게 ‘비행 금지’ 징계를 내렸습니다. 자기 딸을 ‘벙커’에서 쉬게 했다는 이유였죠. 문제가 생긴 건 건 5월 16일. A 씨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인천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근무 중이었습니다. 이 비행기에는 A 씨 남편과 중학생인 딸도 타고 있었습니다. 비행 중 딸이 “몸이 좋지 않다”고 하자 A 씨가 딸을 벙커로 데려간 겁니다. 아시아나 관계자는 “기내에서 응급환자가 발생했을 때도 승무원이 아닌 사람이 벙커에 들어온 전례가 없었다. A 씨가 사규를 위배했는지 정확하게 사실관계를 파악한 뒤 인사 조치할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벙커는 뭘까요? 벙커의 정식 명칭은 ‘승무원 휴식칸(Crew Rest)’입니다. 장거리 운항 중 승무원들이 교대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마련한 공간이죠. 아래 사진처럼 말입니다. 비행기를 수 없이 탔지만 이런 공간을 본 적 없으시다 고요? 그럴 수밖에 없죠. 승객은 볼 수 없는 곳에 숨어 있거든요. 아래 사진을 보시면 탑승석 위층에 있는 벙커로 가는 계단을 어떻게 숨겼는지 아실 수 있습니다. 물론 벙커로 가는 길이 꼭 저렇게만 생긴 건 아닙니다. 기종에 따라 벙커 위치가 다릅니다. 예를 들어 보잉 747-400은 비행기 꼬리날개 바로 앞에 벙커를 마련해두었습니다. 에어버스 A380은 탑승석 아래쪽이 벙커입니다. 이런 위치도 100% 맞는 건 아닙니다. 항공사에서 비행기를 구매할 때 규모나 위치를 별도로 지정하기 때문이죠. 벙커 인테리어 역시 기종에 따라 다릅니다. 아래 사진처럼요. 한 전직 승무원은 “벙커 안에는 인터폰과 에어컨이 있고 회사에 따라 영화를 볼 수 있는 모니터를 달아주기도 한다. 하지만 실내가 비좁고 잠을 청하는 시간이 짧기 때문에 비행 피로를 제대로 풀기는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모든 승무원이 동시에 쉬면 기내 서비스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벙커 침대 숫자는 탑승 승무원 숫자보다 적습니다. A씨가 탔던 비행기는 승무원 11명이 근무하는데 침대는 7대였습니다. A씨는 “딸을 벙커에 데리고 왔을 때는 6명이 휴식 중이라 침대 한 대가 비어 있었다. 동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휴식을 취하게 한 것”이라고 해명했죠. 사실 아시아나항공 벙커에 승무원이 아닌 사람이 들어간 게 A 씨 딸이 처음은 아닙니다. 검찰에서 2007년 김경준 전 BBK투자자문 대표(51)를 미국 로스엔젤레스(LA) 교도소에서 한국으로 송환할 때도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까지 김 전 대표가 벙커에 숨어 있었죠. 기내에서 김 씨를 본 사람들이 외부로 이 사실을 알릴까 봐 격리조치를 취했던 겁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휴대전화 사용이 불가능한 지점이 되어서야 김 전 대표는 이코노미석에 있는 자기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고 하네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삼겹살이 맛있다’는 건 83년 전 조상들도 알았습니다. 1934년 11월 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 ‘육류의 좋고 그른 것을 분간해 내는 법’에는 “도야지(돼지) 고기의 맛으로 말하면 소와 같이 부위가 많지 아니하나 뒤 넓적다리와 배 사이에 있는 세겹살(삼겹살)이 제일 맛이 있고 그다음으로는 목덜미 살이 맛이 있다”는 문장이 나옵니다. 한국 언론에 삼겹살이 등장한 건 이 기사가 처음입니다. 삼겹살이 맛있다는 건 미국 사람들도 압니다. 그저 한국을 찾은 미국인들이 삽겹살 맛에 반하고 돌아간다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삽겹살을 뜻하는 영어 표현 중에 ‘Raw Bacon’이라는 게 있습니다. 익히지 않은 베이컨이 삽겹살인 셈. 영국이나 캐나다에서는 베이컨을 보통 등심으로 만들지만 미국 사람들은 돼지 뱃살, 즉 삽겹살로 만들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네요. 요즘 미국 사람들이 얼마나 베이컨을 좋아하는지 미국에서 삼겹살은 역사상 최고가를 기록했습니다. 18일 미국 농무부(USDA)에 따르면 이달 7일 삽겹살 가격은 100파운드(약 45.4㎏)에 202.56 달러(약 22만7576 원)로 200 달러를 넘어 섰습니다. 2013년 4월 5일에 삼겹살 가격이 136.16 달러였으니 현재까지 48.8%가 오른 셈. 반면 등심(loin)은 86.25 달러에서 94.99 달러로 10.1% 상승에 그쳤습니다. 미국 사람들도 지방이 적어 담백한 맛이 나는 등심보다 지방이 풍부해 부드럽고 달콤한 삽겹살 맛에 점점 더 빠져들고 있는 셈이죠.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해 미국인은 2013년보다 베이컨을 14% 더 많이 샀다”며 “미국인도 베이컨이 건강에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맛에 이끌려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만족감 때문에 하는 행위)’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그럼에도 삼겹살은 역시 한국입니다. 축산물종합정보센터에 따르면 삼겹살 1㎏당 소비자가는 2013년 1만4233원에서 올해 2만1911원으로 53.9% 올랐습니다. 지난해에만 삼겹살 14만8746t을 해외에서 수입했음에도 가격 상승을 막지 못했죠. 미국은 한국이 돼지고기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입니다. 지난해 전체 돼지고기 수입량 31만8498t 중 3분의 1(10만6089t)이 미국에서 건너 왔습니다. 물론 가장 많이 수입한 부위는 삼겹살이었습니다. 그러니 미국에서 삼겹살 값이 오르는 걸 보고 ‘또 금(金)겹살을 먹겠구나’하는 걱정이 된 게 아주 기우만은 아닐 겁니다. 가격 더 오르기 전에 오늘 저녁 ‘삼소(삽겹살+소주)’ 어떠십니까.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컴퓨터 부품 중에서 요즘 제일 구하기 힘든 건 그래픽 카드입니다. 컴퓨터 부품은 시간이 흐르면 가격이 내려가는 게 일반적이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가격이 40만 원 이상 오르는 일도 있습니다. 그나마 주문을 하고 나서 2~3주 정도는 기다려야 제품을 받아볼 수 있죠.이렇게 그래픽 카드가 귀한 몸이 된 건 ‘비트코인(bitcoin)’, ‘이더리움(ethereum)’, ‘제트코인(Z Coin)’ 같은 가상화폐 때문입니다. 이런 가상화폐는 기본적으로 암호를 풀어야 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암호를 풀려면 ‘부동소수점 연산’을 해야 합니다. 컴퓨터에 쓰는 모든 부품 중에서 그래픽 카드 안에 들어 있는 그래픽처리장치(GPU)가 이 연산을 가장 잘합니다. 보통 컴퓨터에선 중앙처리장치(CPU)가 연산을 담당하죠. 하지만 이 부동수소수점 연산에는 GPU 여러 대를 쓰는 게 더 효율적입니다. CPU가 어려운 수학 문제를 빨리 푸는 장치라면 GPU는 쉬운 문제가 아주 많이 있을 때 빨리 푸는 능력이 있거든요. 이 때문에 가상화폐를 채굴(mining·암호를 푸는 과정)하는 사람들이 그래픽 카드를 대량 구매하면서 시장에 물량이 부족하게 된 거죠. 아예 채굴 공장을 차리기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그래픽 카드를 사기가 좀 수월해질지 모르겠습니다. 가상화폐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비트코인 가격 하락 추세를 보여서죠. 지난달 12일 2911달러까지 올랐던 비트코인 가격은 17일 현재 1925달러로 내려왔습니다. 물론 올해 1월 13일 780달러였던 것에 비하면 비트코인은 여전히 비쌉니다. 그래도 그래프 모양은 심상치 않습니다. 전형적인 ‘버블 붕괴’ 모양이거든요. 레프 톨스토이는 소설 ‘안네 카레리나’에 “행복한 가정은 서로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서로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고 썼지만 버블은 반대입니다. 경제적 거품을 뜻하는 버블은 서로 비슷한 모양으로 빠집니다. 미국 월가에서는 ‘하이먼 민스키 모델’을 거품 붕괴 모형으로 사용하는 일이 많습니다. 하이먼 민스키(1919~96)는 평생을 금융 불안정성(Financial Instability) 연구에 바친 미국 경제학자입니다. 이 연구는 원래 ‘주류 경제학’에서 크게 인정받지 못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재조명받았죠. 금융 불안정성 이론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고수익을 노린 고위험 투자가 점점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확대되면서 자본주의 금융 시스템은 결국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민스키는 아래 그래프 같은 사이클에 따라 거품이 빠진다고 분석했습니다. 어떻습니까. 비트코인 가격 추이가 이 모델을 따라가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으시나요? 게다가 갈수록 매도 물량이 늘고 있어 이 가격이 더욱 내려갈 확률도 높은 상황입니다. 이렇게 되면 비트코인은 정말 하이먼 민스키 모델을 그대로 따라갈지 모릅니다. 다만 모두가 이 분석에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 이미 이런 조정 단계를 여러 번 거쳤지만 비트코인 가격이 계속 올랐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죠. ‘마스터링 비트코인(Mastering Bitcoin)’이라는 책을 쓴 안드레아스 M 안토노풀로스 씨는 “비트코인 가격이 폭락한 이유는 가격이 너무 빨리 오른 것에 대한 조정 반응일 뿐”이라며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투자자들은 안심해도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과연 앞으로 가상화폐에 돈을 쓰는 건 합리적인 투자가 될까요? 아니면 거품 속으로 뛰어드는 투기에 그칠까요? 돈 버는 데 별 소질이 없는 저로선 그저 빨리 새 컴퓨터를 마련할 수 있도록 그래픽 카드 가격이나 좀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이 시간을 계기로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민주국가로서 그 주권을 확립하게 되었고 국제적 일원으로 당당히 국제사회에 등장하게 된 것이니 이날의 감격, 이날의 광영(光榮)이야 말로 자손만대에 영원히 빛날 획기적인 역사적 기념일로 맞이하게 되었다.” 건국헌법 공포식(公布式)이 열린다는 소식을 전한 1948년 7월 17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기사는 이런 문장으로 끝이 납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해마다 이날은 제헌절(制憲節)입니다. 헌법을 만든 날이라는 뜻인 제헌절은 지금도 대한민국 5대 국경일이지만 2008년부터 ‘빨간 날(공휴일)’에서는 빠졌습니다. 사실 문자 그대로 헌법을 제정한 날은 제1회 제헌절 닷새 전인 1948년 7월 12일입니다. 제헌 국회에서 이날 헌법을 통과시켰기 때문입니다. 당시 헌법 전문에도 “단기 4281년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고 나와 있고, 1987년 만든 현행 헌법에도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단, 법학적으로는 공포까지 모두 마무리해야 법 제정을 마무리한 것으로 봅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도 공포에 “이미 확정된 법률, 조약, 명령 따위를 일반 국민에게 널리 알리는 일”이라는 뜻이 있다고 밝혀두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7월 12일은 국회에서 헌법안을 통과한 날이고, 공포식이 열린 7월 17일이 실제로 헌법을 제정한 날이 되는 되는 셈입니다. 그러면 공포식 날짜로 왜 하필 7월 17일을 골랐을까요? 이날이 조선 왕조 창건일이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1335~1408)가 왕으로 즉위한 날이 1392년 음력 7월 17일이었거든요. 이에 역사적 연속성을 고려해 이날을 양력으로 바꿔 헌법을 공포했다는 겁니다. 7월 17일이 토요일이라 공포식에 내빈을 초청하기가 더 수월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후 대한한국 헌법은 현재까지 총 9차례 바뀌었습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까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 “대외무역은 국가의 통제하에 둔다” 등 사회주의적 성격이 강했던 건국 헌법 조문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헌법 제1장 처음 두 문장은 69년 전 오늘 공포한 첫 번째 헌법과 현행 헌법이 한 글자도 다르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프로야구 팬은 압니다. 볼카운트에 따라서 스트라이크존 크기가 달라진다는 걸 말이죠. 타자에게 제일 유리한 3볼 노(0)스트라이크 상황에서는 스트라이크존이 가장 넓고, 거꾸로 투수에게 가장 유리한 0볼 2스트라이크 때는 스트라이크 존이 가장 좁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부작위 편향(omission bias)’이라는 용어로 설명합니다. 부작위 편향을 한마디로 설명하면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심리 상태를 말합니다. 부작위(不作爲)라는 낱말은 법률적으로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일부러 하지 아니함(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책임이 따르는 행동을 피할 수 있으니까요. 원래 방금 투수가 던진 공이 볼인지 스트라이크인지 판정하는 건 구심(球審)에게 제일 중요한 임무. 그런데 3볼에서 볼을 선언하면 타자는 볼넷을 얻어 1루 베이스로 걸어가게 되고, 2스트라이크에서 스트라이크를 선언하면 타자는 삼진 아웃을 당합니다. 반대로 3볼에서 스트라이크를 선언하거나, 2스트라이크에서 볼을 선언하면 그냥 볼카운트만 바뀔 뿐입니다. 스크라이크존이 넓어지거나 좁아지는 이유죠. 부작위 편향과 비슷하지만 방향이 다른 개념으로 손실 회피 편향(loss aversion bias)이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손해를 피하려는 경향이 손실 회피 편향입니다. 2002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니얼 카너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83)는 사람들이 똑같은 금액을 얻을 때 느끼는 만족감보다 잃어버렸을 때 느끼는 상실감이 2배 더 크다는 걸 실험으로 증명했습니다. 일기예보 때도 이 손실 회피 편향이 작동합니다. 미국 오하이오주에 사는 에릭 플로에르(46)라는 컴퓨터 과학자는 2002년 연구를 통해 방송사 등에서 강수확률을 20%라고 발표했을 때 실제로 비가 온 경우는 5%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실제보다 강수확률을 부풀려서 발표한 겁니다. 이렇게 예상 강수확률은 실제보다 계속 높다가 70% 이상이 되어서야 실제와 비슷한 확률이 됩니다. 플로에르는 이런 현상에 ‘축축한 편향(wet bias)’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일기예보 때 이렇게 강수확률을 높게 발표하는 이유는 그게 ‘욕을 덜 먹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산이 없는데 비가 올 때가 우산을 들고 나왔는데 비가 오지 않을 때보다 더 당혹스러운 게 당연한 일. 우산이 없는 데 비가 올 때 ‘오늘 일기예보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더 많을 겁니다. 각종 산업 현장에서도 비에 대비를 해뒀는데 비가 오지 않는 편이 준비 없이 비가 내릴 때보다 손해가 적겠죠? 이런 이유로 일기예보를 발표할 때는 틀릴 줄 알면서도 강수확률을 높게 잡는다는 게 플로에르가 내린 결론입니다. 한국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기상청에서 내놓은 2012~2015년 장마기간 예보정확도를 따져 보면 비가 온다고 했는데 비가 오지 않아서 예보가 틀린 비율은 7.9%로 그 반대 경우 7.0%보다 12.3% 높았습니다. 또 한 전직 예보관은 “장마철에 비가 100㎜ 올 확률이 높다면 예측 강수량은 이보다 조금 높여서 예보하는 일이 많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500억 원짜리 슈퍼컴퓨터를 쓰고도 기상청이 항상 틀린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강수 예보가 14.9%(=7.0%+7.9%)가 틀렸다는 건 85.1%(=100%-14.9%)는 맞았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날씨를 예측하는 이들도 틀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어떻게 틀려야 사람들에게 피해를 덜 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또 틀렸다”고 비난하기 전에 한번쯤 그 고민을 알아줘도 나쁜 일은 아니지 않을까요?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 역사상 첫 승을 거둔 나라는 어디일까요? 정답은 미국입니다. 1930년 오늘(13일) 미국은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에 있는 에스타디오 파르케 센트랄에서 벨기에를 3-0으로 물리쳤습니다. 당시 월드컵에는 개막전 개념이 없어 이 경기와 같은 시각 프랑스-멕시코 경기도 열렸습니다. 이 경기에서는 프랑스가 4-1 승리를 거뒀습니다. 사상 첫 월드컵 경기에서 승리를 거둔 미국과 프랑스는 각기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월드컵 출범을 도왔습니다. 월드컵 이전에 전 세계 축구인들 이목을 가장 집중시킨 세계 대회는 올림픽이었습니다. 그런데 1932년 로스엔젤레스(LA)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미국에서 인기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축구를 올림픽 종목에서 제외했습니다. 대신 미식축구를 시범 종목으로 넣었죠. 이에 반발해 프랑스 출신인 쥘 리메 FIFA 회장(1873~1956)이 발벗고 나서 만든 대회가 바로 월드컵입니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통산 3회 우승을 차지하면서 이 트로피를 영구 보관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습니다. 이 트로피는 1983년 도난 당했고 범인 일당은 이 트로피를 녹여 금괴로 팔아버렸습니다. 이제 FIFA 월드컵은 각 나라 축구 대표팀이 서로 못 나가 안달인 대회지만 제1회 대회 때는 서로 ‘네가 가라, 우루과이’ 모드였습니다. 리메 회장이 사비를 털어 유럽 각국 축구협회를 찾아 다니며 “제발 선수들을 보내 달라고” 로비를 하고 다녀야 할 정도였습니다. 아직 항공 교통이 발달하기 전이라 유럽에서 남미에 있는 우루과이까지 배를 타고 가려면 몇 주씩 걸렸거든요. 지역 예선도 없어서 참가 신청만 하면 대회에 나설 수 있었는데도 축구 종주국인 잉글랜드를 비롯해 독일 이탈리아 같은 축구 강국이 모두 끝내 불참을 선언했습니다. 대신 프랑스와 루마니아, 벨기에, 옛 유고슬라비아 등 4개국이 참가하면서 첫 번째 대회는 ‘아메리카컵’이 아니라 ‘월드컵’으로서 구색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FIFA에서 유럽 여느 나라 대신 우루과이를 1회 대회 개최지로 선정한 이유는 뭘까요? 일단 1930년은 우루과이가 브라질로부터 독립한 지 100주년 되는 해였습니다. 또 당시 우루과이는 1924년 파리 올림핌과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2연패를 차지한 축구 강호였습니다. 게다가 우루과이 정부에서 다른 나라 선수들에게도 교통비, 숙박비를 비롯해 모든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했으니 FIFA로서는 우루과이를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 대회에는 지역 예선뿐만 아니라 없는 게 참 많았습니다. 심판이 부족해 각국 감독이 돌아가며 다른 나라 경기 때 선심을 맡았습니다. 울리세스 사우체도 볼리비아 대표팀 감독(1896~1963)은 아르헨티나-멕시코 경기 때 주심을 보기도 했습니다. 사우체도 감독은 이 경기에서 페널티킥을 3개 불었습니다. 보통은 3경기에 한 번만 불어도 페널티킥 선언이 많은 심판으로 손꼽힙니다. 볼리비아 선수들은 실제로 이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뛰었습니다. 그만큼 당시에는 월드컵에서 국가간 경쟁의식이 두드러지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대표팀에는 감독이 없었습니다. 프랑스는 리메 회장 모국이니까 리메 회장 체면을 생각해 대회에 참가하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단, 가스통 바루 대표팀 감독(1883~1958)은 개인적으로 대회 불참을 선언했습니다. 그래서 라울 카우드롱(1883~1958) 코치가 이 대회 때 대신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대회가 끝난 뒤에는 바루 감독이 자기 자리로 복귀했습니다. 이 대회 준우승팀 아르헨티나에는 주장이 없었습니다. 원래는 마누엘 페레이라(1905~1983)가 아르헨티나 대표팀 주장으로 이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페레이라는 당시 대학생이었는데 시험을 봐야 한다며 대회 도중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게 아르헨티나에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페레이라를 대신해 출전한 기예르모 스타빌레(1905~1966·사진)가 8골을 넣으면서 월드컵 초대 득점왕에 올랐거든요. 첫 번째 월드컵에는 공인구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서로 자기 나라 공을 쓰자고 목소리를 높이기 바빴습니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가 맞붙은 결승전 때는 결국 전반전에는 아르헨티나에서 만든 공, 후반전에는 우루과이에서 만든 공을 쓰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 공을 쓴 전반에 1-2로 밀렸지만 자기네 공을 쓴 후반전에 3골을 넣으면서 결국 4-2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 결승전에 아르헨티나 대표로 뛰었던 프란시스코 바라요는 2010년 8월 30일 100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습니다. 그는 100번째 생일이던 그해 2월 5일 FIFA와 인터뷰하면서 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순간으로 이 결승전 패배를 꼽았습니다. 바라요를 마지막으로 이 월드컵에 참가했던 선수는 그 누구도 현재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한국이 월드컵에 첫 출전한 건 이로부터 24년이 지난 1954년 스위스 대회 때부터였습니다. 당시 한국은 헝가리에 0-9로 패했습니다. 그러자 일부에서 “아시아나 아프리카 나라는 축구 수준이 너무 떨어진다. 월드컵에 나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에 대해 리메 회장은 “지금은 한국이 처참하게 무너졌다고 해도 수십 년 뒤에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그런 주장 자체가 월드컵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일축했습니다. 그 예상대로 한국은 이제 8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나라가 됐고, 월드컵은 미국프로미식축구리그(NFL)에 이어 두 번째로 TV 중계권료가 비싼 스포츠 이벤트가 됐습니다. 1930년 전 오늘 첫 경기를 치른 선수들은 월드컵이 이렇게 대단한 대회가 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요?}
1914년 오늘(11일)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19살짜리 투수가 있습니다. 이 투수는 데뷔전에서 클리블랜드 타선을 7이닝 2실점으로 막고 승리투수가 됐습니다. 데뷔 첫해 성적은 2승 1패, 평균자책점 3.91. 이 투수는 그 해 일정이 모두 끝난 10월 17일 헬렌 우드포드(1897~1929)하고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헬렌은 이 투수가 자기 데뷔 팀 연고 도시였던 보스턴에 도착한 첫날 커피숍에서 만난 점원이었습니다. 결혼 후 보스턴 선발 한 축을 꿰찬 이 투수는 18승 8패, 평균자책점 2.44로 1915 시즌을 마감했습니다. 1916년에는 23승 12패를 거두며 평균자책점(1.75) 리그 1위에 올랐습니다. 만 21세 이전에 아메리칸리그 평균자책점 1위에 오른 건 이 투수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그는 사실상 자신의 월드시리즈 데뷔전이었던 1916년 2차전에서 혼자 14이닝을 1실점으로 막으면서 완투승을 기록했습니다.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에서 14이닝 완투승을 거둔 건 지금까지도 이 투수 혼자입니다. 이 투수는 1917년에도 24승 13패를 기록하며 만 23세 이전에 2년 연속 23승 이상을 기록했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 이런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건 여전히 이 투수 한 명뿐입니다. 이 투수는 1918년 월드시리즈 때는 2승 무패, 평균자책점 1.06으로 보스턴 마운드를 이끌었습니다. 이 투수는 이해 4차전에서 8회 2실점하기 전까지 월드시리즈에서 29와 3분의 2 이닝 연속 무실점을 기록했습니다. 이 기록은 43년이 지난 1961년에야 깨졌습니다. 이 투수는 누구일까요? 정답은 조지 허먼 ‘베이브’ 루스입니다. 네, 메이저리그에서 통산 714홈런을 기록한 그 베이브 루스 맞습니다. 보통은 루스를 홈런왕으로 기억하는 분들이 많지만 그는 사실 메이저리그에서 94승 46패, 평균자책점 2.28을 남긴 에이스급 투수이기도 했습니다. 요즘 일본 프로야구 니혼햄에서 뛰는 오타니 쇼헤이(大谷翔平·23)가 투수와 타자를 겸해 ‘이도류(二刀流)’로 불리고 있는데 루스는 100년 전에 이미 리그 최고 투수이자 리그 최고 타자로 손꼽혔습니다. 지금은 오타니가 대단해 보이는 게 사실이지만 루스에게는 비할 바가 못 됩니다. 단, “투구는 좋아했지만 타격은 사랑했다”는 루스는 결국 나중에는 타격에만 전념하게 됩니다. 만약 투수도 계속했으면 어땠을까요? ‘야구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한국 팬들에게도 친숙한 야구 기자 레너드 코페트는 “만약 루스가 뛰던 시절에 지금처럼 지명타자 제도가 있었다면 루스는 투수로는 400승을 거두면서 타자로는 800홈런을 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수비는 하지 않고 타격에만 전념하는 지명타자 제도가 생긴 건 1973년입니다. 루스는 당시 최다였던 714홈런을 치고 은퇴했습니다. 재미있는 건 루스가 은퇴할 때까지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삼진을 가장 많이(1330개) 당한 타자도 루스였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루스는 “삼진을 먹을수록 나는 다음 홈런에 더 가까워진다”고 말했습니다. 삼진을 두려워하면 홈런을 칠 수 있을 만큼 강한 타구를 때릴 수 없다는 거였죠. 혹시 작은 손해가 두려워 어떤 일을 망설이고 계시지는 않나요? 그럴 때 루스를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루스는 데뷔 첫 타석도, 메이저리그 마지막 타석도 삼진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삼진왕이 아니라 홈런왕으로 기억합니다. 게다가 어떤 일을 잘하게 되는 첫 걸음은 분명 어떤 일에 실패해 보는 것입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