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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충남 공주시 공산성 등 옛 백제 문화재들도 이번 호우로 수해를 입었다. 16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집중호우 여파로 전국에서 문화재 피해가 34건 발생했다. 경북이 8건으로 제일 많았고, 충남 7건, 전남 6건, 전북 4건, 강원 3건 등이었다. 보물 1건, 사적 19건, 천연기념물 5건 등 피해 문화재 종류도 다양했다. 특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충남 공주시·부여군, 전북 익산시)의 피해가 극심했다. 백제시대 도읍지인 공주를 방어하기 위해 축성된 공주시 공산성의 누각 만하루는 지붕만 남긴 채 물에 잠겼다. 1984년 복원된 지 39년 만이다. 또 다른 누각인 공산정 부근의 성벽 일부도 유실됐다. 공산성 서쪽 문루(문 위에 세운 높은 다락) 금서루 하단 토사도 흘러내렸다. 문화재 당국은 피해 발생 지역 부근에 안전 펜스를 설치하고 추가 토사 유실을 막고 있다. 백제 왕릉과 왕릉급 무덤이 모여 있는 사적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흙더미가 무너졌다. 우리나라 구석기 시대에 사람이 살았음을 처음으로 알게 해 준 공주 석장리 유적은 발굴지가 침수됐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인근 석장리박물관의 출입을 통제하고 소장 유물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켰다”고 밝혔다. 백제의 사비기(538∼660년) 도읍이었던 부여의 피해도 심각하다. 왕릉급 무덤이 모여 있는 ‘부여 왕릉원’은 고분군 중 2호 무덤 일부가 유실됐다. 낙화암과 고란사가 있는 부여 부소산성에서는 군창지(군대에서 사용할 식량을 비축했던 창고 터) 경계와 탐방로 일부가 훼손됐다. 백제의 궁터인 사적 ‘익산 왕궁리 유적’(전북 익산시)도 침수됐다. 전남 영광군 ‘신천리 삼층석탑’은 석축이 약 10m 무너졌다. 신천리 삼층석탑은 고려시대 3층 석탑으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다. 석축은 석탑과 2m 거리에서 주위를 둘러싼 옹벽인데 집중호우로 석축 곳곳이 파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국가민속문화재인 ‘안동 하회마을’에선 가옥 4채의 담장이 파손됐다. 문화재청은 “피해 문화재를 응급 복구하고 있으며 긴급보수 신청을 받아 다음 달 중 보수 예산을 지원할 방침”이라고 밝혔다.공주·부여=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하느님이 남자와 여자를 다르게 만들었으니 지금처럼 각자의 본분에 맞게 살아야 하지 않겠소?” 1870년 여성 참정권을 주장하는 집회에 관한 보고서를 읽은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이 남긴 편지의 일부다. 어린 시절부터 엄격한 규율을 강조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영국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여성 참정권 운동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다. 빅토리아의 재위 기간 이뤄진 사법 개혁과 의회 선거 개혁, 교육 개혁은 그의 의지에 따른 결과물이 아니었다. 프랑스 공화정 수립에 자극을 받은 영국 내 급진 여론이 힘을 얻자 개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국 비평가인 저자 리턴 스트레이치(1880∼1932)가 대영제국의 최전성기에 재위한 빅토리아 여왕의 명과 암을 가감 없이 기록한 전기다.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이, 사회·정치적으로는 각종 인권개혁이 이뤄진 영국의 황금기를 일컬어 ‘빅토리아 시대’라고 명명할 정도로 영국인에게 사랑받는 여왕이지만, 저자는 찬양 일색의 전기를 거부한다. 빅토리아 여왕이 주변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 속에서 그가 맺은 다양한 이해관계를 분석하고, 애증의 관계인 인물들을 통해 생애를 복원했다. 여왕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부군 앨버트 공(1819∼1861)이다. 앨버트 공은 밤새 춤추기를 즐겼던 여왕을 책상 앞으로 이끌어내 각종 문화 정책을 펼쳤다. 1851년 5월 열린 영국의 만국박람회는 앨버트 공의 대표적 작품이다. 유리와 철로 지어진 건축물 ‘수정궁’을 선보여 세계에 영국의 위상을 선전한 것. 저자는 빅토리아 시대의 영광스러운 순간을 여왕의 공으로만 치켜세우지 않고, 그 시대를 일궈낸 다채로운 인물의 면면을 비춘다. 주변 사람들에게 남긴 편지에서 여왕은 언제나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저자는 이런 여왕에 대해 “국민은 본능적으로 빅토리아로부터 거부할 수 없는 진실성을 느꼈다. 이는 실제로 아주 사랑스러운 특징이었다”고 평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3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개막한 ‘캐릭터 라이선싱 페어 2023’에서 가장 주목받은 캐릭터 중 하나는 올해로 34세가 된 롯데월드의 대표 캐릭터 ‘로티’다. 이날 행사장 내 캐릭터 지식재산권(IP) 부스 576곳 가운데 로티 부스 앞은 유독 2030대 관람객들로 붐볐다. 행사에 참석한 한경원 롯데월드 디자인미디어팀장은 ‘로티의 성장’을 인기 비결로 꼽았다. 1989년생 로티는 2021년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롯데월드가 로티를 보고 자란 MZ세대(밀레니얼+Z세대)를 대상으로 한 30대 로티 캐릭터 ‘더 굿 바이브 로티’를 선보인 것. 어른이 된 로티는 롯데월드에서 퇴근한 뒤 자기만의 취미를 찾아 나가는 일상을 인스타그램에 공유하며 ‘어른이(어른과 어린이를 합친 신조어)’들의 공감을 샀다.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롯데월드 안에서 밖으로 세계관을 확장하자 맥주 등 다양한 상품에 로티 캐릭터를 널리 활용할 길이 열렸다. 롯데월드에 따르면 지난해 로티 캐릭터 IP로 벌어들인 매출액은 약 160억 원에 이른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관한 이번 행사에는 국내외 캐릭터 IP 기업 111개가 참가했다. 뽀로로와 타요를 만든 제작사 아이코닉스를 비롯한 대표적인 국내 캐릭터 IP 기업홍보관뿐만 아니라 신생 캐릭터를 발굴하는 ‘루키프로젝트’ 기획관에 신진 작가 50명이 함께 자리했다. 웹툰 IP를 활용한 상품화·영화화 사례 등을 전시한 ‘웹툰 특별관’은 올해 처음 선보였다. 행사에 참가한 IP 기업과 국내외 바이어를 이어주는 ‘1:1 비즈니스 매칭 프로그램’은 신진 작가들에게 놓칠 수 없는 기회다. 지난해 캐릭터 IP 기업 비엔(Bn)을 창업한 백관현 대표(37)는 개막 당일 오전에만 중국 바이어와 국내 바이어 2명에게 미팅 제안을 받았다. 동물 아홉 마리를 모티브로 제작한 비엔의 캐릭터 ‘베블팜’이 바이어들의 눈길을 끈 것. 백 대표는 “회사가 대전에 있다 보니 캐릭터 홍보는 물론 기업 미팅조차 쉽지 않았는데 이 행사를 통해 국내외에 캐릭터를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며 웃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13일 오전 기준 국내외 바이어 1032명이 매칭 참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또한 올해 행사에선 일본 캐릭터브랜드·라이선스협회 등과 함께 일본 공동관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지난해 루키프로젝트에 선보인 신진 캐릭터를 활용한 상품 판매 부스도 눈길을 끌었다. 조현래 한국콘텐츠진흥원 원장은 “상품 유통과 홍보에 어려움을 겪는 신진 작가들에게 힘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행사는 16일까지 열린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형형색색 화려하게 수놓인 꽃들 사이로 날아드는 나비들…. 김영이 국가무형문화재 자수장 전승교육사가 수개월에 걸쳐 한 땀 한 땀 수놓은 자수 작품이 일상가구 파티션으로 탄생했다. 리빙브랜드 메누하와 협업해 만든 이 가구는 지난달 26일부터 이달 6일까지 서울 강남구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에서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이 마련한 팝업스토어 ‘반짝 매장’에서 판매됐다. 이 매장에선 김 교육사의 작품을 비롯해 국가무형문화재 장인들의 전통 공예품 100여 점을 선보였다. 국가무형문화재 장인의 작품이 일상용품으로 우리 곁에 다가서고 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판로를 넓혀 박물관이나 전시장에서 볼 수 있었던 장인의 작품을 ‘살아 있는 유산’으로 되살리려는 시도다. 국립무형유산원은 지난달 12일부터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와디즈에서 국가무형문화재 소목장 이수자인 김동규 씨(47)와 류종대 가구 디자이너가 협업해 만든 ‘호롱불’ 100점을 한정 판매했다. 판매가 29만9000원인 ‘호롱불’은 2주 만에 완판됐다. 2021년 8월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들이 네이버 라이브 커머스에 직접 나와 상품 판매에 나선 데 이어 새로운 판로를 찾은 것이다. 김 씨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지 않으면 전통은 결국 잊혀진다. 외면당하지 않고 오늘날의 공간에 필요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한국 전통 가구를 세계 시장에 선보이는 것이 그의 최종 목표다. 그는 지난해 4월 리빙브랜드 구룸을 창업해 거실장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문갑 등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상품화에 소극적이던 장인들이 판매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이유는 뭘까. 팝업스토어 ‘반짝 매장’에 전통 보자기를 감싼 ‘조명 스탠드’를 선보인 구혜자 국가무형문화재 침선장 보유자(81)는 “전통 무형유산을 지키고 잇게 될 후배들을 위해 상품화에 도전했다”고 말했다. 그는 “샤넬, 루이뷔통 제품은 많은 돈을 주고서라도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지만 한국 전통 공예품에 대해선 관심이 부족하다”며 “장인들이 나서서 전통 공예품을 명품화해야 전통 공예가 일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다.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만든 것을 선호하는 이들이 늘면서 전통 공예품이 각광받고 있다”며 “장인이 손수 제작한 전통 공예품의 판로를 다각화하는 것은 전통을 향유하는 이들을 늘려 전통을 이어가고 향유하는 데 효과적이다”라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저는 앞으로 암과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음악을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2021년 1월, 20시간에 걸쳐 대장의 30cm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은 일본 작곡가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가 수술 직후 남긴 말이다. 2020년 말 직장암이 폐와 간, 림프에도 전이됐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5년. 남겨진 생의 시간을 담담히 받아들인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음악이었다. 올해 3월 28일, 71세에 세상을 떠난 사카모토가 생전 남긴 에세이다. 암 투병 중이던 지난해 7월부터 올 2월까지 일본 문예지 ‘신초(新潮)’에 연재된 칼럼을 엮었다. 책의 구성은 “시간은 말하자면 뇌가 만들어내는 환상”이라는 그의 말처럼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흐른다. 그는 암 진단을 받던 순간, 첫 수술을 받던 순간, 부모를 떠나보낸 순간 등 자신과 맺은 여러 인연들을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써 내려갔다. 시간의 흐름은 제각각이지만 모든 기억의 한가운데엔 ‘음악’이 있다. 병실에 누워 있던 그를 구원한 것 역시 음악이었다. “먹어야 할 약들은 산더미에, 몸도 좀처럼 자유롭게 쓸 수 없죠.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문득 음악에 마음을 뺏기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우울한 병실 안에서도 몸이 아프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투병 중에도 일기를 쓰듯 신시사이저와 피아노 건반을 치며 자신에게 찾아오는 음악의 순간을 기록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음원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12곡을 골라 올해 1월 17일 생일에 ‘12’라는 제목의 앨범을 발매했다. 음악이 그를 구원한 것처럼 그 역시 그런 음악을 남기고 싶어 했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이후 ‘어린이 음악 재생 기금’을 설립한 것이 대표적이다. 지진 피해를 입은 학교 1850곳의 망가진 악기들을 무상으로 수리하고, 악기를 교체하는 기금을 마련한 것. 그는 자신이 이 일을 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인간에게는 물과 식량뿐 아니라 음악도 필요하니까.” 지난해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엔 키이우에 사는 바이올리니스트 일리야 본다렌코와 자선앨범을 발매했다. 일리야는 키이우의 지하대피소에서 사카모토가 작곡한 ‘Piece for Illia’에 맞춰 바이올린을 연주한 음원을 녹음했다. 음원 수익은 우크라이나 지원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사카모토는 지원금보다 어느 지하대피소에 울려 퍼졌을 일리야의 바이올린 선율을 더 뜻깊게 여겼다. “저로서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인 일리야가 제가 쓴 곡을 아름다운 소리로, 진심을 다해 연주해 주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결실을 얻은 작업이었습니다.” 제목은 그가 음악감독으로 참여한 영화 ‘마지막 사랑’(1990년)에 나오는 대사다. 가장 마지막 장에는 장례식 때 틀어달라며 그가 남긴 33곡의 플레이리스트가 담겼다. 가장 마지막 문장은 ‘Ars longa, vita brevis(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히포크라테스의 잠언을 빌린 이 문장을 끝으로 그의 이야기는 마치지만, 그의 음악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저는 앞으로 암과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음악을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2021년 1월, 20시간에 걸쳐 대장의 30㎝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은 일본 작곡가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가 수술 직후 남긴 말이다. 2020년 말 직장암이 폐와 간, 림프에도 전이됐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5년. 남겨진 생의 시간을 담담히 받아들인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음악이었다. 신간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위즈덤하우스)는 올해 3월 28일 71세에 세상을 떠난 사카모토가 생전 남긴 에세이다. 암 투병 중이던 지난해 7월부터 올 2월까지 일본 문예지 ‘신초(新潮)’에 연재된 칼럼을 엮었다. 책의 구성은 “시간은 말하자면 뇌가 만들어내는 환상”이라는 그의 말처럼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흐른다. 그는 암 진단을 받던 순간, 첫 수술을 받던 순간, 부모를 떠나보낸 순간 등 자신과 맺은 여러 인연들을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써내려갔다. 시간의 흐름은 제각각이지만 모든 기억의 한가운데엔 ‘음악’이 있다. 병실에 누워 있던 그를 구원한 것 역시 음악이었다. “먹어야 할 약들은 산더미에, 몸도 좀처럼 자유롭게 쓸 수 없죠.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문득 음악에 마음을 뺏기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우울한 병실 안에서도 몸이 아프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투병 중에도 일기를 쓰듯 신시사이저와 피아노 건반을 치며 자신에게 찾아오는 음악의 순간을 기록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음원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12곡을 골라 올해 1월 17일 생일에 ‘12’라는 제목의 앨범을 발매했다. 음악이 그를 구원한 것처럼 그 역시 그런 음악을 남기고 싶어 했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이후 ‘어린이 음악 재생 기금’을 설립한 것이 대표적이다. 지진 피해를 입은 학교 1850곳에 망가진 악기들을 무상으로 수리하고, 악기를 교체하는 기금을 마련한 것. 그는 자신이 이 일을 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인간에게는 물과 식량뿐 아니라 음악도 필요하니까.” 지난해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엔 키이우에 사는 바이올리니스트 일리야 본다렌코와 자선앨범을 발매했다. 일리야는 키이우의 지하대피소에서 사카모토가 작곡한 ‘Piece for Illia’에 맞춰 바이올린을 연주한 음원을 녹음했다. 음원 수익은 우크라이나 지원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사카모토는 지원금보다 어느 지하대피소에 울려 퍼졌을 일리야의 바이올린 선율을 더 뜻깊게 여겼다. “저로서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인 일리야가 제가 쓴 곡을 아름다운 소리로, 진심을 다해 연주해주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결실을 얻은 작업이었습니다.” 제목은 그가 음악감독으로 참여한 영화 ‘마지막 사랑’(1990년)에 나오는 대사다. 가장 마지막 장에는 장례식 때 틀어달라며 그가 남긴 33곡의 플레이리스트가 담겼다. 가장 마지막 문장은 ‘Ars longa, vita brevis(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히포크라테스의 잠언을 빌린 이 문장을 끝으로 그의 이야기는 마치지만, 그의 음악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신라 최초의 사찰 ‘흥륜사(興輪寺)’ 터로 추정되는 경북 경주시 사정동 일대에서 고려시대 불교 공양구(供養具·부처에게 바치는 물건이나 물건을 바칠 때 사용하는 기구)를 비롯한 유물 54점이 출토됐다. 경주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지난달 중순 흥륜사지 서편 하수관로 설치를 위해 사전 발굴조사를 진행하던 중 출토된 고려시대 공양구 등을 4일 처음 공개했다. 이번에 출토된 유물 54점은 모두 지름 약 65㎝, 높이 62㎝에 이르는 솥 안에 담겨 있었다. 솥 안에서 발견된 유물은 청동 향완(香垸·그릇 모양 몸체에 나팔 모양의 높은 받침대가 있는 둥근 향로)과 향로, 촛대, 금강저(金剛杵·불교에서 악을 물리치는 무기) 등이었다. 특히 촛대 위에 얹는 촛농 받침 가운데 꽃문양으로 제작된 형태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김동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화재나 전쟁, 폐사 등 위기에 처한 승려들이 공양구를 지키기 위해 솥에 담아 묻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번 조사에서는 통일신라∼고려시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와 토기 조각을 비롯해 금동여래입상도 함께 출토됐다. 흥륜사는 불교를 널리 전하기 위해 신라에 온 승려 아도(阿道)가 세운 7개의 절 중 하나라는 기록이 삼국유사를 통해 전해진다. 이후 폐사됐다가 527년 법흥왕(?∼540)이 흥륜사를 크게 짓기 시작해 544년 완성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시대 화재로 소실됐다. 현재 흥륜사 터는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한편 이번 발굴조사 과정에서는 ‘영묘사(靈妙寺)’란 이름이 새겨진 기와 조각도 나왔다. 앞서 이 주변에서 ‘영묘지사(靈廟之寺)’가 새겨진 기와 조각이 나와 이곳이 흥륜사지가 아닌 영묘사지일 것이라는 의견이 학계에서 힘을 얻고 있다. 영묘사는 신라 선덕여왕이 630년대 창건한 사찰로 칠처가람(七處伽藍·신성한 7곳의 숲에 세워진 사찰 7곳) 중 하나로 꼽힌다.경주=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400여 개 조각으로 빛바랜 채 출토된 비단벌레 금동 장식과 금동 파편들…. 5세기 후반 조성된 신라 공주의 무덤에서 나온 유물 총 780점이 2014년 발굴 조사를 시작한 지 9년 만에 복원을 마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경북 경주시 쪽샘지구 44호분 발굴조사 과정에서 낱알로 발견된 비단벌레 금동 장식들은 말 위에 올려두는 ‘말다래’(말 탄 사람의 다리에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밑에 늘어뜨리는 판)의 일부였고, 구겨지고 잘린 채 출토된 금동 파편들은 공주가 저승 가는 길에 신으라고 머리맡에 묻어둔 금동 신발이었다.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4일 경주시 서라벌문화회관에서 열린 ‘쪽샘지구 44호분 발굴 성과 대국민 발표회’에서 연구·복원을 통해 완전한 형태로 재현한 ‘비단벌레 꽃잎장식 죽제(竹製) 말다래’를 최초로 선보였다. 신라에선 총 4점의 말다래 유물이 전해지는데, 천마도(天馬圖)가 아닌 다른 문양의 말다래가 나온 건 처음이다. 이날 조사단원 복장을 한 최응천 문화재청장은 “비단벌레 날개의 초록빛과 금동 장신구의 황금빛이 조합된 이 유물은 찬란했던 신라 공예기술의 진면목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말다래는 대나무 살을 엮어 만든 가로 80cm, 세로 50cm 크기 바탕 틀에 4겹의 직물을 덧댄 뒤 실제 비단벌레 딱지날개로 만든 나뭇잎 모양 장식과 금동 영락(瓔珞·달개) 장식 등을 화려하게 수놓은 형태였을 것으로 파악됐다. 비단벌레의 딱지날개로 만든 활짝 핀 꽃잎 모양의 금동 장식 총 50개가 말다래 1점에 장식돼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말다래 1쌍(2점)에 이러한 장식을 하기 위해 비단벌레 400마리가 필요하다고 한다. 현재 비단벌레는 천연기념물이다. 장신구의 크기가 작아 무덤의 주인은 키 130cm 내외, 나이는 10세 전후 공주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금동관 바로 아래에서는 직물로 엮은 머리카락 가닥도 일부 나왔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이를 토대로 공주가 직물을 머리에 엮은 이른바 ‘붙임머리’를 했을 거라고 봤다. 금동관과 함께 나온 직물을 분석해 홍색과 자색 등 세 가지 색으로 염색한 실을 엮어 만든 삼색경금(三色經錦)이 사용된 사실도 파악했다. 삼국시대 삼색경금이 나온 것 역시 처음이다. 순장의 흔적도 나왔다. 공주가 묻힌 내곽과 외부 매장 공간 사이에서 금귀걸이 4쌍과 ‘돌비늘’로 불리는 운모(雲母)가 나온 것. 묻힌 이가 불로장생하길 바라는 의미에서 시신 주변에 뿌린 운모가 공주가 매장된 내곽 밖 주변에 흩뿌려진 점으로 미뤄 최소 4명이 순장됐을 것으로 분석했다. 금귀걸이 4쌍은 순장된 이들의 것으로 추정됐다. 보존 처리를 모두 마친 금동 신발과 금 귀걸이, 금과 유리로 만든 가슴걸이 등 쪽샘지구 44호분 출토 유물 전부는 12일까지 경주 쪽샘유적박물관에서 공개된다.경주=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논과 밭, 바다를 비롯한 삶의 현장에서 불려지다가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민초의 소리를 되살리고 싶었어요.” 7인조 크로스오버 국악재즈밴드 ‘덩기두밥 프로젝트’에서 경기민요와 정가(正歌)를 넘나드는 보컬 김보라 씨(38)의 말이다. 국악 장단인 ‘덩기덕’과 재즈 추임새 ‘두비두밥’을 합친 밴드의 이름은 베이시스트 이원술 씨(51)가 지었다. 2021년 이 밴드를 기획한 계명국 음악감독(48·사진)은 “여러 크로스오버 국악밴드 중 우리만 할 수 있는 역할과 의미를 찾다가 전국 팔도 지역민을 통해 전해지는 토속(土俗)민요를 조명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 스튜디오에서 지난달 27일 만난 김 씨와 이 씨, 계 감독은 “지난해부터 전국 팔도를 유랑하며 잊혀진 지역 민요를 발굴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들이 재즈 선율로 되살려낸 토속민요는 전문 소리꾼들이 불러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통속(通俗)민요와 달리 지역민의 입을 통해 전해진 곡들이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돼 대대로 전승되거나 무대 위에서 공연되는 소리가 아니다 보니 오늘날엔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그들의 앨범에 수록된 ‘베틀노래’가 대표적이다. 이 노래는 강원 정선군에서 베를 짜는 아낙네들 사이에서 불리던 ‘부모 부음 민요’를 재즈로 재해석한 것이다. ‘시금시금 시어머니/부모 죽은 부고 왔소/예라 요년 방자할 년/짜던 베나 마주 짜구 가레미나’라는 노랫말에는 친정 부모의 부고가 왔는데도 시댁 눈치를 보느라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는 며느리의 설움이 담겼다. 이 노래를 발굴한 김 씨는 “10여 년 전 이 노래를 부른 90대 할머니의 녹취 음성을 듣고 언젠가 이 소리를 되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무런 반주 없이 담담하게 읊조리는 목소리에는 그 시절 시집살이로 인한 며느리의 한이 녹아 있었다”고 했다. “지난해 여름 ‘베틀노래’의 고장인 강원도에서 공연할 때 중년 여성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셨어요. 어릴 적 그분들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불렀던 소리가 여전히 그들 마음속에 살아 있다는 증거 아닐까요.”(김 씨) 팀명에 ‘프로젝트’가 붙었듯, 이들은 “노래 말고도 하고 싶은 일이 많다”고 했다. 이 씨는 “지역 공연 때 아이들을 만나 재즈와 민요를 함께 부르는 교육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더 많은 이들과 우리 민요를 기억하는 일을 하고 싶어서다. 계 감독은 “민요의 참뜻은 ‘평범한 이들의 노래’다. 국경을 초월해 세계 각국 민요를 우리 식으로 재해석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충무공 이순신 장군(1545∼1598)의 저술과 일화 등을 망라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역주본(사진)이 수정·보완돼 34년 만에 재출간됐다. 태학사가 최근 펴낸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전 4권’은 재단법인 석오문화재단이 기획했다. 이민웅 대구가톨릭대 석좌교수와 정진술 전 문화재전문위원 등 7명이 2년간 역주 작업에 참여했다. 전권을 합해 1784쪽, 각주만 5069개에 달한다. 이충무공전서는 충무공의 공훈을 알리기 위해 1795년 정조의 명으로 편찬된 14권의 책이다. 학계에선 “충무공과 임진왜란사 연구에 빠질 수 없는 귀중한 문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원본의 양이 방대해 지금까지 역주본은 사학자 노산 이은상 선생(1903∼1982)이 출간한 국역본 하나뿐이었다. 이 선생이 1960년 펴낸 첫 국역본은 미진한 점이 많다는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폐간됐다. 현존하는 역주본은 이 선생 사후인 1989년 성문각(成文閣)에서 고인의 원고를 정리해 양장본 상·하권으로 펴낸 것이다. 태학사는 “기존 완역본이 갖는 영웅주의 사관을 탈피해 명확한 사실 관계를 밝히는 데 힘썼다”고 밝혔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논과 밭, 바다 삶의 현장에서 불려지다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 우리의 소리를 되살리고 싶었어요.” 7인조 크로스오버 국악재즈밴드 ‘덩기두밥 프로젝트’의 보컬 김보라 씨(38)의 말이다. 경기민요와 정가(正歌)를 넘나드는 보컬답게 밴드 역시 재즈와 민요의 경계를 허문다. 국악 장단인 ‘덩기덕’과 재즈 장단 ‘두비두밥’을 합친 밴드의 이름은 베이시스트 이원술 씨(51)가 직접 지었다. 2021년 이 밴드를 기획한 계명국 음악감독(48)은 “요즘 크로스오버 국악밴드가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까지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일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며 “우리만 할 수 있는 역할과 의미를 찾다가 전국팔도 지역민을 통해 전해지는 토속민요(通俗民謠)를 조명하기로 했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27일 서울 강남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김 씨와 이 씨, 계 감독은 “지난해부터 전국팔도를 유랑하며 요즘은 잊힌 지역 민요를 발굴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이 재즈 선율로 되살려낸 토속민요는 전문 소리꾼들이 불러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통속민요(通俗民謠)와 달리 지역민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돼 대대로 전승되거나 무대 위에서 공연되는 소리가 아니다 보니 오늘날엔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베틀노래’가 대표적이다. 이 노래는 강원 정선군에서 베를 짜는 아낙네들 사이에서 불리던 ‘부모 부음 민요’를 재즈로 재해석한 것이다. ‘시금시금 시어머니/ 부모 죽은 부고 왔소/ 예라 요년 방자할 년/ 짜던 베나 마주 짜구 가레미나’라는 노랫말에는 친정 부모의 부고가 왔는데도 시댁 식구들의 눈치를 보느라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는 며느리의 설움이 담겼다. 이 노래를 발굴해 재즈로 재해석한 보컬 김 씨는 “10여 년 전 이 노래를 부른 90대 할머니의 녹취 음성을 듣고 언젠가 이 소리를 되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무런 반주 없이 담담하게 읊조리는 목소리에는 그 시절 시집살이를 겪은 며느리의 한이 녹아 있었다”고 했다. “지난해 여름 이 노래(베틀노래)의 고장인 강원도에서 공연할 때 객석에 앉아 계신 중년 여성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셨어요. 어릴 적 그분들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불렀던 소리가 여전히 그들 마음속에 살아 있다는 증거 아닐까요.” (보컬 김 씨) 신곡에 대해 묻자 김 씨는 “제주도민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마소 모는 소리’를 재즈로 재해석해보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말과 소를 몰며 농사를 짓던 제주도민들 사이에서 전해지던 이 소리에는 뚜렷한 노랫말이 없다. ‘으허어허 어허어 어허어 어러렷’ 하는 추임새가 노래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김 씨는 “가사 없이 울부짖는 추임새만으로 농민들의 고된 몸짓이 고스란히 전해진다”며 “이 소리를 어떻게 재즈로 풀어나갈지 아직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소리를 있는 그대로 뱉었던 옛 노래들도 언젠가 조명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팀명에 ‘프로젝트’가 붙었듯 이들은 “공연 말고도 하고 싶은 일이 더 많다”고도 했다. 이 씨는 “지역 공연 때 현지 아티스트와 아이들과 만나 재즈와 민요를 함께 부르는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음악의 경계를 허물고, 우리 민요를 기억하는 일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어서다. 계 감독은 “민요의 참뜻은 ‘평범한 이들의 노래’”라며 “언젠가 국경을 초월해 세계 각국 민요를 우리 식으로 재해석해보고 싶다”고 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그 사람이 나를 보자 뼛속까지 소름이 끼쳤다.” 2001년 8월 4일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 국제공항. 출입국 심사관 호세 멜렌데스페레스는 사우디아라비아 청년 무함마드 알 까흐타니를 마주한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짧은 머리에 단정한 차림새였지만, 그는 적의로 가득 찬 눈빛으로 멜렌데스페레스를 노려봤다. 심상찮은 신호를 감지한 멜렌데스페레스는 그가 귀국 항공권 없이 미국에 입국한 사실을 파악하고 입국을 철회했다. 훗날 9·11테러 조사위원회는 그가 9·11테러에 가담하려 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출입국 심사관의 예리한 관찰력이 잠재적 테러범의 입국을 막은 사례다. 인류학자이자 미국의 비언어연구센터 소장인 저자가 범죄자들이 범행 전 남긴 신호를 분석한 책이다. 미국 국방부의 의뢰로 9·11테러범들의 신체언어 분석 프로젝트에 참여한 저자는 “사전 예고나 단서 없이 진행되는 범죄는 드물다”고 강조한다. 책은 범죄자가 남긴 몸짓과 주변 환경 단서 등 범죄의 사전 징후를 정리했다. ‘시선 회피’는 범죄자들이 범행 전 보이는 신호 중 하나다. 미국 교통안전국의 한 폐쇄회로(CC)TV 분석관은 9·11테러 당시 비행기 납치범 3명이 공항 검색대를 지날 때 보안요원의 시선을 피하려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발견했다. 이후 미국은 공항 내 CCTV에 비언어 신호를 감지하는 경보 시스템을 개발했다. 고개를 숙인 채 주변을 서성이는 사람이 포착되면 즉각 원격경보가 울리는 식이다. 저자는 “커튼에 꽁꽁 싸인 집이 당신 주변에 있다면 그 집을 감시하라”고 권한다. 외부와 고립된 집은 아동학대의 신호일 수 있다는 분석이다. 6년간 세 딸을 성적으로 학대한 한 범죄자의 집은 2m 높이 담장 뒤에 숨어 있었다. 집의 모든 창문은 항상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진 채였다. 저자는 “비극은 이 같은 범행 신호들이 무시될 때 벌어진다”며 “이 책이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험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고종이 1907년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에 파견한 특사들은 ‘대한제국은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로 회의 참석을 거절당했다. 그러나 불가리아 공국을 비롯해 당시 ‘보호국’이었던 나라들도 참석했던 점에 미뤄 대한제국 역시 회의에 참가하고 헤이그 협약의 당사국이 될 자격이 충분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독립기념관이 29일 주최하는 학술 심포지엄 ‘한국 독립운동과 국제회의’에서 유바다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대한제국의 헤이그 평화회의 참가 자격 및 관련 협약 체결 과정에 대한 고찰’을 발표한다. 유 교수는 발표문에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렸던 평화회의 참가국 자격의 형평성을 따졌다. 유 교수에 따르면 1907년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에 참석한 44개국 가운데는 불가리아 공국과 쿠바가 포함됐다. 불가리아 공국은 1877∼1878년 벌어진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결과로 자치권을 얻었지만 여전히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종주권을 가진 나라였다. 쿠바 역시 미서전쟁(1898∼1902년)으로 독립했지만 미국에 의존하는 국제보호국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대한제국처럼 쿠바 역시 조약체결권이 없었다. 더구나 앞서 대한제국은 ‘제1차 헤이그 평화회의’(1899년)의 후속으로 1904년 헤이그에서 열린 외교관 회의에 주불공사 민영찬(1874∼1948)을 파견해 ‘병원선의 지불 면제에 관한 협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대한제국이 헤이그 협약의 당사자였다고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유 교수는 “대한제국은 1905년 외교권을 상실했지만 여전히 국가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교전권을 갖고 있었다”며 “전시국제법을 다루는 헤이그 평화회의에 참가할 자격이 충분했고, 헤이그 협약 당사국이 됐어야 했다”고 강조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1868∼1918)의 발의로 두 차례에 걸쳐 열린 헤이그 평화회의는 국제연맹과 유엔의 뿌리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한제국이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데에는 알려져 있는 것처럼 일본의 입김이 작용했다. 그러나 이상설과 이준, 이위종 등 ‘헤이그 특사’들은 세계 열강에 을사조약이 무효임과 한국이 주권 회복을 위해 분투하고 있음을 알렸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不作蘭花二十年(부작란화이십년·꽃을 그리지 않은 지 20년) 偶然寫出性中天(우연사출성중천·우연히 하늘의 본성을 그려내었네) … 此是维摩不二禪(차시유마불이선·바로 이것이 유마의 불이선이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말년에 그린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의 화제(畫題·그림 위에 쓰는 시문)다. 조선 문인화의 정수로 꼽히는 불이선란도(사진)가 보물로 지정된다. 문화재청은 “19세기 문화사를 상징하는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 세계를 종합적으로 대변하는 작품”이라며 27일 이 그림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이 작품은 1850년대 경기 과천 과지초당(瓜地草堂)에 살던 추사가 달준이라는 이에게 주려고 그린 작품이다. 화제에서 따와 ‘불이선란도’ 또는 ‘부작란도’라고 불린다. 옅은 담묵으로 난초를 그린 뒤 걸작임을 직감한 추사가 스스로 만족하며 즐거워했음을 알 수 있다. 북한 개성 출신 사업가로 문화재 수집가였던 손세기 씨(1903∼1983)의 장남 손창근 씨가 대를 이어 소장하다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날 문화재청은 부산 ‘기장 고불사 영산회상도’와 경기 ‘파주 보광사 동종’, 부천 ‘석왕사 소장 불조삼경’ 등 문화재 3건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환영합니다. 여러분은 재건된 돈덕전(惇德殿)에 초청된 첫 손님입니다.” 26일 서울 중구 덕수궁 돈덕전. 약 100년 만에 재건된 대한제국의 영빈관인 이 건물에 과거 조선과 수교했던 나라의 외교관들이 첫발을 내디디자 안내를 맡은 이석민 문화콘텐츠기업 온나무 대표가 인사했다. 미하엘 라이펜슈툴 주한 독일대사, 볼프강 앙거홀처 오스트리아대사, 프랑수아 봉탕 벨기에대사를 비롯해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헝가리, 덴마크 등 8개국 외교관들은 발굴조사 때 발견된 푸른색 타일을 재현해 만든 돈덕전 바닥에 올라선 뒤 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 5년간의 공사로 다시 세워진 돈덕전에 외빈이 초청된 건 처음이다. 이날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가 연 ‘100년의 역사, 100년의 우정―문화유산 공공외교의 장, 돈덕전’ 행사에는 1876∼1902년 조선과 수교했던 12개 나라(일본, 미국, 독일,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 중국, 벨기에, 덴마크) 가운데 영국 등 8개국 외교관과 한복을 입은 12개국 인플루언서 12명 등 30명이 참석했다. 권점수 덕수궁관리소장은 “돈덕전은 우리의 외교사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라며 “대한제국과 수교해 우정을 나눴던 12개국의 후예들이 재건된 돈덕전에서 다시 만나 친교를 다지자는 의미를 담았다”고 말했다. 이 대표가 돈덕전 내부를 소개하며 1883년 영국과 한국이 수교한 역사를 말했다. 폴 클레멘슨 주한 영국문화원장은 “영국과 한국이 수교한 지 140주년이 되는 해에 양국의 외교사를 간직한 돈덕전에 초청돼 기쁘다. 일제강점기 잃었던 건물을 재건한 한국의 역사는 놀랍다. 많은 한국인의 희생과 성실함이 있었기에 한국은 옛 문화를 지키는 나라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일본인 유학생 후루야 고노미(古家好·23) 씨는 “한국과 일본 사람들이 서로의 나라를 여행하며 좋은 관계를 맺었으면 좋겠다. 나도 일본 친구들에게 한국 문화를 알리겠다”고 했다. 돈덕전은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행사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1903년 서양식으로 건립됐다. 대한제국 시기 국빈급 귀빈을 맞이하는 영빈관으로 사용됐다. 1907년 순종이 이곳에서 즉위했다. 1921년과 1926년 사이 일제에 의해 철거됐으나 2017년 재건을 시작해 지난해 11월 외부 공사를 마쳤다. 문화재청은 내부 공사를 마무리하고 올해 9월 25일 돈덕전을 공식 개관할 계획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조선의 마지막 선상기(選上妓·궁중 잔치 때 출연하는 관기)였던 최순이는 모든 것이 휩쓸려가던 한국사의 격변기에 자신의 꿈과 예술을 지켜냈어요. 그가 있었기에 오늘날까지 궁중검무의 원형이 지켜질 수 있었습니다.” 신간 ‘궁으로 간 최순이’(지앤유)의 저자 양지선 경상대 인문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50·사진)가 23일 전화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는 책에서 국가무형문화재 진주검무를 전승한 관기 최순이(1892∼1969)의 삶을 조명했다. 진주검무 이수자인 양 교수가 ‘최순이’라는 이름을 접한 건 1990년. 국가무형문화재 진주검무 보유자이자 최순이의 마지막 제자였던 성계옥 진주민족예술보존회장(1927∼2009)을 만나면서다. 양 교수는 “이번 책을 통해 생전 기록을 남기지 못한 채 떠난 최순이의 생애를 입체적으로 복원하려 했다”고 말했다. 경남 진주에서 관기의 딸로 태어난 최순이는 9세 때 진주 교방(敎坊·관기를 양성하며 가무를 관장하던 기관)에 들어가 13세 때 진주 유일의 선상기로 발탁돼 궁에 입성했다. 1903년 고종이 주최한 연향(宴享) 무대에서 궁중검무를 선보이는 최고 예인이 됐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상황이 급변했다. 나라를 잃은 관기들이 모두 궁 밖으로 밀려나 생계를 잃은 것. 이때 관기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요정(料亭)을 차리거나 가정을 꾸리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하지만 22세 최순이는 낙향해 궁중에서 익힌 검무를 전승하는 ‘예기조합(藝妓組合)’을 결성하는 길을 택했다. 양 교수는 “최순이의 제자들은 자신들을 낮춰 부르는 ‘창기’라는 표현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예인으로 여겼다. 이는 스승이었던 최순이가 자신을 예술가로 여기는 자부심을 보여줬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최순이의 제자이자 국가무형문화재 진주검무 보유자였던 김수악(1926∼2009)은 생전 스승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요상시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그게 아니요. 말하자면 예술학교였습니다.” 수년간 최순이의 사료를 찾아 헤맸던 양 교수는 진주 개천문화예술제 40년사 편찬위원회가 1991년 발간한 ‘개천예술제 40년사’에서 최순이와 얽힌 이야기를 발견했을 때 “온몸에서 전율이 일었다”고 했다. 1952년 11월 국립국악원의 악사들이 진주에서 열리는 개천예술제 무대에 오르기 위해 진주의 한 여관에서 묵을 때였다. 60세였던 최순이가 늦은 밤 제자 7명을 이끌고 여관 문을 두드리며 “제자들을 위해 한 번만 궁중음악에 맞춰 춤출 기회를 달라”고 간청했다는 이야기였다. 예술을 대하는 최순이의 진심이 전해졌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국립국악원 소속 양금 연주가 김천흥 씨는 1967년 진주검무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한 조사에서 “궁중검무의 원형은 최순이를 통해 진주검무에 간직됐다”고 증언했다. 최순이는 당시 75세로 고령인 탓에 보유자로 지정되지 못한 채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양 교수는 “비록 그 자신은 꽃을 피우지 못했지만 최순이는 자신의 일생을 바쳐 진주검무라는 씨앗을 심은 예술가”라고 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925년 2월 말경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현 고마령에서 독립군인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가 국내 진입을 위한 작전 회의를 열던 중 일제 경찰의 기습을 받아 혈전 끝에 참의장 최석순 이하 42명이 전사한다. 고마령 전투 또는 고마령 참변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일본 군경이 밀정을 통해 정보를 탐지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기습은 한인 순사부장 고피득이 밀정 이죽파를 앞세워 진행됐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지만 1920년대 중국 남만주 일대에서 유격대를 이끌었던 독립운동가 홍석호(1891∼1925·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역시 밀고와 관련됐다는 의혹이 제기돼 왔다. 고마령 참변 직후 일본 군경이 작성한 한 문건에 “(참의부) 제2중대의 패배는 제1중대장 홍석호가 일본 관헌에게 밀고한 결과라고 한다”는 전언이 나오는 탓이다. 그러나 홍석호가 고마령 참변에 관련됐을 가능성이 없다고 본 논문이 학술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에 최근 발표됐다. 이상구 국가보훈부 보훈기록관리과 연구원은 논문 ‘홍석호의 항일무장투쟁과 고마령 참변 밀고설 검토’를 통해 지린성 기록보관소 자료에서 찾아낸 홍석호 관련 내용을 밝혔다. 이에 따르면 1925년 3월 28일 일본영사관은 중국 당국에 공문을 보내 “홍석호는 부하들을 모아 내지(內地)로 침입해 살인, 방화 등을 저질렀다. 신속히 이 범인을 귀 공서로 압송해 달라”고 요청했다. 공문에 따르면 홍석호는 1925년 3월 4일 중국 당국에 체포된 상태였다. 이 연구원은 “일본 군경은 남만주 지역 항일운동세력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밀고자를 앞세워 경찰력을 총동원했다”며 “홍석호가 밀고자라면 일본 측이 공문이 발송된 3월 28일까지 그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했을 리 없다”고 지적했다. 홍석호의 부대는 1924년 7, 8월 평안북도 초산군에서 밀정을 처단했다. 이 연구원은 “홍석호는 오히려 밀정 처단에 앞장섰다”며 “남만주 독립운동계에서 변절자는 고마령 참변 직후 일제에 투항한 통의부 제4중대장 출신의 홍기주였을 것”이라고 밝혔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928년 미국 뉴욕의 한 산부인과, 첫아이를 2년 전 잃고 두 번째 아이를 낳은 28세 여성 화가가 무표정한 얼굴로 우는 아이의 기저귀를 갈고 있었다. 화가는 우는 아이를 능숙하게 달래는 간호사 앞에 선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수시로 잠에서 깨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하루가 반복됐다. 역시 화가인 남편은 아이를 돌보지 않고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나도 예전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불안과 두려움이 그를 옥죄기 시작했다. 훗날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 고통 속에 울부짖으며 파괴되어 갔다.” 화가는 미국의 인물화 거장으로 꼽히는 앨리스 닐(1900∼1984)이다. 1974년 그의 나이 74세 때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선 회고전이 열렸다. 평론가들은 그가 만년에 그린 자화상에 대해 “어머니이자 연인, 화가로서 자신에 대해 남긴 최후의 증언”이라 평했다. 수십 년 전 예술과 양육 사이에서 길을 잃었던 닐이 끝내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기에 이뤄낸 일이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느라 아이를 비상계단에 두고 왔다는 소문과 ‘이기적인 여자’라고 손가락질하는 시선에 굴하지 않고 ‘아줌마 예술가’로 살기를 택했다. 만년의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만약 여러분이 아이를 키우는 동안 그림을 포기한다면, 영원히 그림을 포기하게 되는 거예요. 끊임없이 그려야 합니다.” 책은 예술과 양육이 양립할 수 있는지를 파고든다. 세계적인 여성 문인들의 전기를 써 온 저자가 20세기 초 태어나 엄마이자 예술가로서의 삶을 산 이들을 통해 양육자와 예술가 사이의 갈등과 방황을 고찰했다. 앨리스 닐뿐 아니라 노벨 문학상 수상자 도리스 레싱(1919∼2013)과 비평가 수전 손태그(1933∼2004) 등 여성 예술가들의 삶이 담겼다. 저자는 무엇보다 공동 양육자의 역할을 강조한다. 세계적인 공상과학 소설가 어설라 르 귄(1929∼2018)이 아이를 키우며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그의 글쓰기를 지지하며 함께 아이를 돌본 남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르 귄은 “한 사람이 두 가지 일을 풀타임으로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풀타임으로 해야 하는 일이다. 육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두 사람이라면 세 가지 일을 풀타임으로 할 수 있다”고 했다. 양육과 예술 사이에서 아이가 방해자이기만 한 건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건 ‘자기만의 방’이 완전히 무너지는 경험이지만, 어떤 이들은 거기서 나아가 그보다 크고 넓은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 노벨 문학상 수상자 토니 모리슨(1931∼2019)은 엄마가 되는 일에 대해 “내게 벌어진 가장 해방적인 일”이라고 했다. 시인 오드리 로드(1934∼1992)는 1963년 태어난 딸에 대한 시 ‘이제 나는 아이와 영원히 함께하므로’에서 “내 다리는 우뚝 선 탑이었고 그 사이로/새로운 세계가 지나가고 있었지”라고 썼다. 글쓰기와 양육 사이에서 길을 찾은 이들 가운데 일부는 아이의 존재를 통해 자신보다 더 큰 타자의 세계를 만난 경험을 작품에 녹여냈다. 책에는 저자의 이야기도 담겼다. 두 아이가 초등학생일 때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그는 아이들이 대학생이 됐을 무렵에야 집필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일과 양육 사이에서 길을 찾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928년 미국 뉴욕의 한 산부인과, 첫 아이를 2년 전 잃고 두 번째 아이를 낳은 28세 여성 화가가 무표정한 얼굴로 우는 아이의 기저귀를 갈고 있었다. 화가는 우는 아이를 능숙하게 달래는 간호사 앞에 선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수시로 잠에서 깨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하루가 반복됐다. 역시 화가인 남편은 아이를 돌보지 않고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나도 예전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불안과 두려움이 그를 옥죄기 시작했다. 훗날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 고통 속에 울부짖으며 파괴되어 갔다.”화가는 미국의 인물화 거장으로 꼽히는 앨리스 닐(1900~1984)이다. 1974년 그의 나이 74세 때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선 회고전이 열렸다. 평론가들은 그가 만년에 그린 자화상에 대해 “어머니이자 연인, 화가로서 자신에 대해 남긴 최후의 증언”이라 평했다. 수십 년 전 예술과 양육 사이에서 길을 잃었던 닐이 끝내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기에 이뤄낸 일이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느라 아이를 비상계단에 두고 왔다는 소문과 ‘이기적인 여자’라고 손가락질하는 시선에 굴하지 않고 ‘아줌마 예술가’로 살기를 택했다. 만년의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만약 여러분이 아이를 키우는 동안 그림을 포기한다면, 영원히 그림을 포기하게 되는 거예요. 끊임없이 그려야 합니다.”신간 ‘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돌고래)는 예술과 양육은 양립할 수 있는지를 파고든다. 세계적인 여성 문인들의 전기를 써 온 저자가 20세기 초 태어나 엄마이자 예술가로서의 삶을 산 이들을 통해 양육자와 예술가 사이의 갈등과 방황을 고찰했다. 앨리스 닐뿐 아니라 노벨문학상 수상자 도리스 레싱(1919~2013)과 비평가 수전 손택(1933~2004) 등 여성 예술가들의 삶이 담겼다.저자는 무엇보다 공동양육자의 역할을 강조한다. 세계적인 공상과학 소설가 어슐러 르 귄(1929~2018)이 아이를 키우며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그의 글쓰기를 지지하며 함께 아이를 돌본 남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르 귄은 “한 사람이 두 가지 일을 풀타임으로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풀타임으로 해야 하는 일이다. 육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두 사람이라면 세 가지 일을 풀타임으로 할 수 있다”고 했다.양육과 예술 사이에서 아이가 방해자이기만 한 건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건 ‘자기만의 방’이 완전히 무너지는 경험이지만, 어떤 이들은 거기서 나아가 그보다 크고 넓은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 노벨문학상 수상자 토니 모리슨(1931~2019)은 엄마가 되는 일에 대해 “내게 벌어진 가장 해방적인 일”이라고 했다. 시인 오드리 로드(1934~1992)는 1963년 태어난 딸에 대한 시 ‘이제 나는 아이와 영원히 함께하므로’에서 “내 다리는 우뚝 선 탑이었고 그 사이로/새로운 세계가 지나가고 있었지”라고 썼다. 글쓰기와 양육 사이에서 길을 찾은 이들 가운데 일부는 아이의 존재를 통해 자신보다 더 큰 타자의 세계를 만난 경험을 작품에 녹여냈다.책에는 저자의 이야기도 담겼다. 두 아이가 초등학생일 때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그는 아이들이 대학생이 됐을 무렵에야 집필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일과 양육 사이에서 길을 찾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시가 새겨진 보물 ‘이순신 장도(長刀)’(사진)가 국보로 승격된다고 문화재청이 22일 예고했다. 이 유물은 각각 길이 2m, 무게 5kg(칼집 포함)에 이르는 칼 두 자루로 충남 아산 현충사에 소장돼 있다. 실전보다는 의례용으로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칼날에 각각 ‘삼척서천산하동색(三尺誓天山河動色·석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과 ‘일휘소탕혈염산하(一揮掃蕩血染山河·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인다)’라는 충무공의 시가 새겨져 있다. 슴베엔 제작자의 이름과 1594년 제작됐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