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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움츠린 채 걷는 남성 옆으로 전화 거는 그림이 보이네요. 혹시 내 전화를 기다리는 친구는 없을지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부산 영도구 영선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1924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공룡알을 발견했다는 뉴스입니다. 원문을 먼저 옮겨 보겠습니다.一千萬年前의恐龍의卵◇『뉴욕』박물관아세아탐험대일행이 몽고『꼬비』사막에서 25개 발견세상에는 이상스럽게도 일천만년 전의 공룡(恐龍)의 알을 발견하엿다. 미국 뉴욕주 뉴욕 시에 있는 박물관(博物館)에서 온 제3차 아세아 탐험대(第三次亞細亞探險隊)『앤주로』박사일행이 몽고(蒙古)『꼬비』사막에서 오주일동안 모래가 탈듯한 더운날 더위를 무릅스고 탐험하야 공룡의 뼈와 공룡의알 을 발견하엿는데 이 알은 일천만년 전에 공룡이나아 논 것으로 기리가팔촌이요 둘레가칠촌이요 껍질이 두푼인데 원래 나은지가 일천만년이나 된 알이라 알 속은 모다 골고 그속이 전부 돌이 되엿스나 껍질은 새로나은 것가치 고읍다 한다. 일천만년이 지내도록 이럿케 껍질이 성한 리유는 고흔 모래 속에 일천만년동안 잇다가 모래가 다 날나간 후에 드러난 듯하다하며 알 속이 돌이 된리유는 알껍질터진 틈으로 물이 드러가서 화석(化石)이 된것이라한다 그런데 엇더케 일천만년이 된줄알앗느냐하면 그 엽헤잇는 공룡의 뼈를 해부하야 본즉 일천만년전에 그곳에서 살든공룡의 뼈이며 이곳저곳에 뭇친 공룡의 알을 차차 파내이어 스물다섯개가 나왓다한다. 이번에『앤주로』박사가 어든 공룡의 뼈와알을 합하면 륙십여개인데 공룡의 대가리가 칠십오개이요 공룡의 골속이 십사개이요 알이 이십오개이라하며 이럿케 일천만년이나된 공룡의 알을 엇기는 세계에 처음 잇는일이라한다 (사진: 땅에서 파내인 공룡의알).▶ 미국 뉴욕시의 박물관이 몽고 고비 사막을 5주 동안 뒤져 1000만 년 전 지구에 살던 공룡의 알 25개를 발견했다는 뉴스입니다. 알 하나의 길이가 8촌이고 둘레가 7촌이라고 하니 길이가 26센티미터에 둘레는 23센티미터 정도 되는 크기입니다. ▶ 고비 사막 현장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에서 우리는 알의 크기를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26센티미터라는 설명을 들어야 비로소 크기를 알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경험 하나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요즘 핫하다는 중국 이커머스 사이트를 통해 드론을 하나 샀습니다. 정식 드론을 날려보기 전에 개념을 좀 알고 싶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전문가용 드론의 1/100 가격에 수십 종류의 제품들이 사이트에서 반짝거리고 있었습니다.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동영상을 보면, 화려한 외관 뿐만 아니라 비행 모습도 아주 부드러운 제품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큰 기대를 안하고 그 중 중간 정도 가격의 드론을 주문해서 언박싱했습니다. ▶ 사진기자인 저도 이커머스의 광고 사진과 영상에서 본질을 정확하게 꽤 뚫지는 못했습니다. 저의 손에 도착한 드론은 완구 수준이었습니다. 본체 배터리를 충전하고 조종기에 알카 배터리를 넣은 후 하늘로 띄우니 정상 작동했습니다. 드론을 띄우려면 사전에 비행 및 촬영 신고를 해야한다기에 걱정을 좀 했었는데 기우였습니다. 소음도 아주 미세한 장난감이 하늘을 날고 있다고 해서 시비를 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너무 왜소한 외모에 처음 저를 현혹시켰던 광고 영상을 다시 보았습니다. 아, 저의 머릿속 기대와 실제 차이가 이렇게 컸던 이유는 광고 영상 속에 조종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화면 밖에서 조종기로 드론을 날리고, 화려한 조명을 쏴서 비행 모습을 촬영하니 그럴 듯하게 보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구매의 만족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저것 고민하느라 큰 에너지를 쓰지 않았고, 한달 동안 잘 연습할 수 있었으니까요. ▶ 신문에 실리는 사진을 찍는 사진기자들은 대체로 물건을 찍을 때 기준이 될만한 뭔가를 포함시켜 사진 찍습니다. 100원짜리 동전, 담배 라이터, 모나미 볼펜, 신용카드 등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정확하게 크기를 알고 있는 것을 같이 놓고 사진을 찍으면 뉴스가 되는 물건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게 됩니다.만약, 저 위의 공룡 알을 찍으면서 우리가 크기를 알고 있는 계란을 옆에 두고 찍는다면 공룡 알이 얼마나 신기한 크기인지 단박에 알 수 있을 겁니다. ▶피사체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도록 하는 쉬운 방법 중 하나는 사람을 등장시키는 겁니다. 몸의 크기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손의 크기도 알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물건의 크기를 쉽게 이해하게 됩니다.100년 전 신문에 실린 ‘박사가 공룡 알을 들고 있는 사진’은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의 얼굴을 보여주는 역할도 하지만 공룡 알의 크기를 가늠하게 하는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것은 이미지보다는 숫자입니다. 재원을 꼼꼼히 살핀다면 머릿속 기대와 실제가 일치할 겁니다. 하지만 그 재원은 화려한 이미지 뒤쪽에 아주 자그마한 글씨로 숨겨져 있습니다. 다시 들어간 사이트에서 결국 눈에 잘 안 띈다는 걸 알고 빠져나왔습니다. ▶오늘은 사진에 사람이나 일상에서 익숙한 물건이 들어가면 크기를 가늠하기 좋다는 생각에 100년 전 발견된 공룡 알 사진을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러시아 단체관광객들이 9일부터 12일까지 3박 4일 패키지 여행으로 북한을 다녀왔다. 2020년 코로나 19 발생 이후 북한을 여행한 첫 외국인들이다. 97명의 단체 여행객에 포함된 러시아 국영 매체 보스토크메디아 소속 기자가 ‘특파원의 눈으로 본 북한의 신기한 모습들’이라는 제목으로 북한 관광 체험기를 영상으로 다뤘다. 평양 시내와 원산 스키장을 둘러보았다고 하는데 이중 사진 촬영 관련된 몇 가지 특이점이 있어 이에 대한 설명을 좀 해보고자 한다. 우선 15일 우리나라 보도를 종합하면 아래와 같다. ▷사진을 찍어도 제지하지 않았다. 이 기자는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나라 가운데 하나인 북한에 들어가기 전 “비밀스러운 소문과 안전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며 북한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자유로운 사진 촬영에 대해 걱정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북한에 대한 두려움은 대부분 헛된 것”이라며 “사진을 찍어도 아무도 카메라나 휴대폰을 빼앗아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기자는 공항에서의 일화도 소개했는데, “단체관광객 가운데 일부는 평양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조심스럽게 사진기나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지만, 공항 직원 중 누구도 이를 방해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어른은 물론 아이들도 방문객에게 기꺼이 손을 흔들고 카메라를 부끄러워하지 않은 점은 주목할 만하다“고 평가했다.▷김일성·김정은 부자의 동상 촬영과 관련해 3개 수칙이 있었다. 우선, 측면이 아닌 정면을 촬영해야 한다. 둘째는 만수대 언덕의 김일성·김정일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면 ‘양손을 옆에 두는 엄격한 자세’를 취해야 하며 셋째, 사진 속에서 동상의 팔과 다리 등 신체가 잘리면 안 된다고 기자는 전했다.▷사진을 찍을 수 없는 곳이 있긴 있었다. 그는 “우리가 사진을 찍을 수 없었던 유일한 관광지는 주체사상탑 꼭대기였다. 여기서 탁 트인 평양 전망을 찍는 것은 안된다”고 밝혔다. 그는 또, “노동자와 농부, 군인과 군사시설에 대한 촬영도 금지됐다“▶ 왜 러시아 관광객의 카메라에 우호적으로 대했을까? 4년 만에 관광객들이 찾아온 것은 북한으로서는 환영할만한 일이다. 고립되지 않은 정상국가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데다 외화의 실핏줄이 돌 수도 있기 때문이다. 3박4일 일정의 1인당 관광 비용은 750달러(약 100만원)로 알려졌다. 게다가 러시아는 최근 급속히 북한과 가까운 관계를 복원하고 있는 혈맹이다. 러시아와 북한 관광은 2023년 9월 열린 김정은과 푸틴의 북러 정상회담을 계기로 재개됐다. 다음달 8~11일, 11~15일에도 러시아 관광객들이 북한을 방문할 예정이다. 북한 권력이 러시아에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가 인민들의 환영 모습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 김일성 김정일 동상을 왜 저렇게 찍으라고 하는 걸까? 내가 2003년 평양을 취재갔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건물 안에 있는 김부자 그림을 왼쪽 사이드에서 촬영했더니 안내원이 사진을 지우라고 했다. 신체의 비율이 왜곡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사이드에서 사진을 찍는 이유는 피사체도 잘 보이면서 피사체 뒤의 맥락도 함께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다. 한 장의 사진에서 주제와 배경을 다 보여주는 효율적인 앵글이 사이드에서 찍는 사진이다. 그런데 북한은 최고지도자의 몸과 얼굴이 왜곡되어 보이는 것을 피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이해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런 가이드라인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엄격한 자세를 취하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위대한 분들의 동상이니까 예의를 갖추라는 의미일까? 처음에는 아마 그런 뜻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상 앞에서 양손을 모으고 찍는 기념사진은 북한이 경직되어 있다는 사실만 확인시킬 뿐이다. 예외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동상 앞을 지키는 실무자의 입장에서는 엄격한 자세를 관광객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안전한 방법이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전세계가 이어져 있는 시대이다. 기발한 생각을 하는 젊은 외국인이 김부자 동상 앞에서 ‘창의적인’ 포즈를 취한 채 사진을 찍고, 그걸 SNS에 올린다고 가정해보자. 전 세계 네티즌들이 댓글을 달것이고 그에 대한 상부의 문책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실무자의 입장에서는 어제와 똑같은 사진이 오늘도 반복되어 촬영되고 기록되는 게 안전할 것이다. 똑같은 사진에는 어차피 똑같은 댓글이 달릴거고 그렇다면 그날 동상 앞을 지켰던 자기에겐 특별한 문책이 따르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노이즈가 없는 하루, 월급장이들의 어쩌면 평범한 바램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몸을 자르지 마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이유에서 북한이 사진을 찍으면서 최고지도자의 몸 전체가 나오는 사진을 선호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김일성이 나이가 들어가면서부터, 그리고 나이든 김정일이 대중들 앞에 얼굴을 드러내면서부터 북한의 사진가들은 최고지도자의 모습을 촬영하면서 얼굴을 클로즈업 하지 않았다. 대신 몸 전체 또는 무릎 아래 정도만 자르는 앵글을 주로 사용했다. 나이든 최고지도자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건강 정보를 노출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 정도만 할 뿐이다. 또 하나의 이유로 거론되는 것이 김정일이 직접 썼다는 이론서인 ”영화예술론“에서 ‘클로즈업으로 대상을 확대하기를 좋아하거나 인물들의 일부만을 보여주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사회 전반에 퍼졌다는 설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김정은 시대가 되면서 할아버지 아버지때와는 달리 클로즈업된 사진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배경은 아웃포커스되고 김정은만 부각시키는 방식의 촬영법이 반복되고 있다. 미니멀한 앵글을 좋아하는 지금의 세대에게 어필할 수 있는 사진이라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김정은 사진에서만 이런 촬영법이 통용될 뿐, 동상을 관리하는 현장에서는 옛날에 내려온 지침이 반복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 주체사상탑에서만은 촬영을 불허한 이유는 뭘까? 주체사상탑은 높이가 170m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추모비다. 엘리베이터로 150m까지 올라갈 수 있고 평양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가 있다. 외국에 포위되어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북한 입장에서는 시내가 한 눈에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공격에 취약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본다는 것은 공격한다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전체를 다 보여주는 사진에 대한 공포가 있다. 북한이 자기들의 인공위성을 띄우면서 해상도 낮은 지구 사진을 자랑하는 이유 역시 자신들도 외부의 적들을 감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해석할 수 있다. ▶ 동상 앞에서 ‘차렷’ 자세로 사진을 찍지 않아도 되는 날은 언제 올까? 구글에서 다 검색되는 평양 전경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북한의 가이드는 언제 사라질까? 북한에서는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사진이 밖에서 볼 때는 경직되고 오히려 이상한 사진으로 보이고 있다. 사진이 시작된 것은 한국이나 북한 모두 비슷한 시기일 것이다. 서울과 평양에서는 해방 전 이미 사진가 그룹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분단이 되면서 각각의 방식으로 사회와 사람들을 기록해오고 있다. 같은 카메라지만 남북한이 다른 방식으로 사진이 표현되고 있다. 남북한 사진의 시작은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힘차게 솟구치는 물소리가 들리는 듯해요. 호수는 여전히 얼어 있지만, 봄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네요.―경기 군포시 반월호수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신문에 실리는 사진을 신문사진, 보도사진이라고 부르고 그 과정을 포토저널리즘(photojournalism)이라고 부른다. 북한 신문에도 당연히 사진이 실린다. 그런데 북한 신문에 실리는 사진을 뭐라고 부르는 게 좋을지 생각해 본다. 신문사진이라는 표현은 가능할 것 같다. 보도사진이라는 표현과 포토저널리즘이라는 표현은 어떤가? 가능할까?선전선동사진, 프로파간다 사진, 홍보사진이라고 치부하고 들여다보지 않는 게 맞는 걸까? 신문사 사진기자는 북한에서 릴리즈하는 수많은 사진을 본다. 우리의 안보와 직결되는 남북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이기 때문에 유심히 보게 되며 필요하면 신문이나 인터넷에 보도한다. 미국 언론도 마찬가지이다. 미국 AP통신이 평양에 지국을 설치하고 운영하고 있지만 중요한 뉴스 현장은 지켜볼 수 없다. 그래서 김정은이 미사일이나 위성 발사를 참관하는 사진은 북한 공무원들이 촬영한 사진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런 경우, 미국 언론은 사진의 설명에 “이 사진은 독립적인 언론이 아닌 관영 언론이 촬영한 것입니다”라는 단서를 붙여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북한이 제공하는 사진에서 최근 이상한 현상 하나가 반복되고 있다. ‘모자이크 사진’ 이다. 사진에 등장하는 특정 인물이나 소재를 포토샵으로 뿌옇게 처리한 채 제공하는 방식이다. 모자이크 처리된 사진이 작년 2023년부터 간헐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쇼잉’을 즐기는 김정은과 그와 함께 사진에 등장하는 것이 영광으로 간주되는 북한 체제에서 이례적이다.▶ 우리나라의 기준에서 보면, 모자이크를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에 이상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1940년대 신문부터 꾸준히 북한 신문을 살펴본 기자의 눈에는 아주 특이한 현상이다. 미국 AP통신의 입장에서도 북한의 모자이크 사진은 특수한 형식의 사진이 분명하다. 합당한 이유에 대한 설명 없이 모자이크해서 제공한 사진을 AP통신은 전 세계로 전달하지 않는다. 우리는 AP 통신이 아닌 북한 노동신문의 PDF 파일에서 이미지를 잘라내서 제공하는 국내 언론을 통해서 제공 받을 뿐이다. ▶북한은 2월 12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신형 240mm 방사포탄을 개발하고 성능 점검을 위한 사격 시험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방사포는 전쟁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한국 수도권 타격을 위한 무기 체계로 알려져 있는데, 조선중앙통신이 보여준 사진에는 포의 앞부분이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다. 흥미로운 점은, 북한 내부의 주민들과 간부들이 볼 수 있는 노동신문 지면에는 신형 방사포의 사진을 바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과 연합뉴스 등을 통해 공개되는 조선중앙통신에만 사진을 공개했고, 그나마 포의 앞부분은 제대로 보이지 않게 처리했다. 대외용 퍼포먼스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국제 스포츠 대회 중계 화면에서 코카콜라 등의 상업 광고를 뿌옇게 처리하거나, 한국의 촛불시위 장면에서 광화문 높은 빌딩을 안보이도록 처리하는 것과 달리 2023년부터 1년째 발견되는 모자이크 사진의 공통점은 ‘군사·무기 분야’ 사진이다. 북한이 한국과 일본, 미국 등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 체계를 업그레이드하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사진을 통해 보여주면서, 실무 개발자의 얼굴이나 실제 무기의 일부분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사진기자와 편집자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볼 시간이다. 사진은 위험한 도구이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활용될 수 있지만, 자칫 적들에게 불필요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미사일과 위성 개발에 역할을 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여줄 경우, 미국의 제재 대상이 될 수 있고, 무기의 디테일을 보여줄 경우 전력을 노출시킬 수도 있다. 미제국주의라는 구호판은 불필요하게 미국을 자극할 수도 있다. 한국과만 대립을 해도 북한 내부적으로는 충분하니 그 부분은 안 보이게 처리하자. ▶지난 10여 개월 동안 북한이 이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모자이크 사진에 대해 살펴보았다. 잘 보여야 하는 시대이긴 하다. 북한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최고지도자의 사진이 잘 나오도록 최대의 노력을 한다. 앞에서 언급한, 2024년 1월 10일 군수공장 방문 사진의 예를 들어보자. 사진기자가 볼 때 군수공장의 내부는 비현실적으로 정갈하고, 조명 상태는 일반적인 공장 현장 조명과는 차이가 있다. 특히, 트럭에 올라 운전대를 잡고 있는 김정은의 얼굴은 드라마에서 사용하는 스팟 조명 형식이 비추고 있었다. 잘 보여주기 위한 장치가 고려된 것이다. 공장인지, 쇼룸인지 어떤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외부 세계가 관찰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가릴 것은 확실하게 가리기 시작했다. 안 보여줌으로써 정치를 하는 북한 사진. 우리는 그 현상을 뭐라 불러야 할까.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올해 초·중·고졸 학력 검정고시에 응시하는 수험생과 대리인들이 원서 접수 첫날인 13일 오전 서울 동작구 서울공업고등학교 체육관에 마련된 접수처에서 서류를 제출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16일까지 온라인으로, 19일까지 현장에서 검정고시 원서를 접수한다. 시험은 4월 6일 치러진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메가스터디학원 의약학전문관에서 열린 ‘의대 증원에 따른 입시 판도 분석 설명회’에서 학생과 학부모들이 2025학년도 의대 입시 전략을 듣고 있다. 이달 6일 정부의 의대 입학 정원 확대 발표 후 의대 진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관련 설명회에 수험생과 학부모의 발길이 이어지는 모습이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2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안양천 일대에 있는 황톳길에서 시민들이 맨발로 산책하고 있다. 영등포구는 건강을 위해 맨발로 걷는 시민이 늘자 최근 길이 600m 규모의 황톳길을 조성했다고 밝혔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도심 골목에 로봇 젖소가 등장했습니다. 이 일대가 조선시대 최대 목축지였다는 걸 로봇 소는 알까요?―서울 성동구 성수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우선 지난주에 올렸던 백년사진 No. 46 ‘사진은 어디서 배우는 게 좋을까? 백년 전의 고민’의 포스팅에서 오프라인 수업 말고 ‘통신 수업’이라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하다고 말씀드렸는데 ‘강과산’이라는 아이디로 접속하신 분께서 그 당시 통신은 우편을 뜻한다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전화는 전기통신이라고 표현했을거라고 하시면서요. 맞는 설명인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주에 고른 사진은 서울의 비, 서울의 봄 등 날씨 사진입니다. 100년 전 1주일 치 신문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사진이 없었던 한 주였습니다. 2월 8일자 신문입니다.2월 10일자 신문입니다.얼음이 녹은 한강 나루터에서 봄을 맞아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표모라는 표현이 낯설지 않으신가요? 표모라는 표현을 옛날 신문 DB에서 찾아보니, 1964년 1월 5일자 동아일보에도 표모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三冬에 봄철 같은 날씨가 연일 계속 三南지방에선 철아닌화신(花信)마저들려오고 漢江은 채 얼기도 전에 녹아내려 표모(漂母)들이 밀려 나왔다”. 지금은 쓰지 않는 말이지만 맥락으로 보면, 빨래하는 여인들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정말 뉴스가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일제 치하라는 시대 상황 때문에 사진을 실을 수 없었던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날씨 사진 때문에 자리를 잡지 못한 누군가의 얼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일제 강점기. 신문에서는 오늘날처럼 유명인의 얼굴이 별로 실리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관료 정치인들 얼굴이나 민족 지도자의 얼굴이나 어느 쪽도 활동 모습이 실리지 않았습니다. 신문이 유명인에 대해 다루지를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상상을 해봅니다. 우선 일제라고 하는 현실 권력을 실제로 운영하던 일본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분명 그들이 원하는 이미지나 내러티브가 있었을텐데 신문은 그들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습니다. 1919년에 있었던 3.1운동의 영향으로 일본이 문화정책이라는 회유책을 선택해서였을까요? 아니면 신문사의 소극적 저항 때문이었을까요? 그렇다고 우리 민족에게 의미 있는 인물들의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 역사가 기록하고 기억하는 민족지도자들이 1920년대에 분명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그들의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작년부터 제가 봤던 1923년도 신문에서 그나마 기억나는 얼굴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과 지방의 재산을 팔고 서울에서 아이스크림을 팔던 남성 정도였습니다. 오히려 다른 나라의 정치 지도자 등 국제적인 인물들의 얼굴 사진은 꽤 크게 실렸습니다. 어쩌면 이 부분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권력이 싫어하는 것을 보여주기엔 신문사와 국민들의 힘이 약했을 테니까요. 권력이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다 같이 보여주지 않고 있는 신문.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온 사진이 날씨와 풍경 사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 그러고 보니 신문 사진이라는 게 한 시대, 한 사회의 자화상이자 정체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식민시대라는 정체성, 독재시대라는 정체성, 민주사회라는 정체성 같은 거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보고 있는, 신문 속 얼굴들이 시간이 지나면 이 시대에만 통용되는 방법이고 빈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신문 지면에는 연탄가스를 마시고 사망한 시민들의 가족사진이나 주민등록증 사진이 실렸습니다. 민주화와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중요해지면서 이제는 귀성열차를 타러 가는 시민의 얼굴을 지면에 함부로 쓸 수 없습니다. 정치인의 모습은 매일매일 신문 지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00년 전에는 1주일 치 신문을 샅샅이 뒤져도 보이지 않던 얼굴들이었습니다. ▶ 얼굴을 드러낸다는 것이 위험한 시대가 있었던 거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얼굴들은 우리 시대의 상징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댓글을 통해 여러분의 생각을 공유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설 명절 즐겁게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살얼음 낀 수면 아래 잉어들이 붉은 지느러미를 흔들며 유영하고 있습니다. 봄이 오면 다시 자태를 뽐낼 준비를 하고 있는 걸까요?―부산 영도구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이번 주 고른 사진은 보도 사진이 아니고 광고지면입니다. 1924년 2월 2일자 동아일보 2면 하단에 광고가 여러 개 실렸습니다. 왼쪽부터 염색원료 자재판매, 전기치료원 소개, 사진학원 광고, 금산인삼조합 홍보, 도모예 호모 총판 등의 광고입니다. 맨 오른쪽 도모예 호모총판은 고무신을 메인 이미지로 사용했네요. 검색해보니 호모(護謨)는 고무를 뜻하는 프랑스어 ‘gomme’를 소리나는대로 사용하던 단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대 이후에 호모라는 표현 대신에 고무라는 원어 발음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설명도 검색이 됩니다. 고무가 한글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여러 광고 중 백년사진을 통해 오늘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광고는 사진학원 광고입니다. 100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사진이 어떻게 보급되고 있었는지, 사진을 배우고 싶은 사람은 어디에서 배울 수 있었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광고입니다. 삼각대 위에 설치되어 있을 대형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보기 위해 암막 속에 머리를 집어넣은 카메라맨의 모습을 그린 그림과 함께 광고 문구가 길게 쓰여 있습니다. 사진술 속성 교수실지 통신 속성실지과 통신과 공히 1개월간 속성으로 양성하여 사진사 됨을 보증함. 신입 제 규칙서 송증함. 원산부본정 조선사진전문학원강습 중에는 사진기 무료대부하는 특전이 있어 실습의 편리를 줌. 본원 졸업생으로 각지에서 단독개업자 오십여명인 데 모두 상당한 수익을 득하며 방금 강습생도 십여 명이 있어 나날이 발전의 영역에 도달하오니 제위는 주저치 말고 지금 속히 신입하여 만시지탄이 없게 하심을 희망함.지금의 표현으로 하자면, “사진기술을 속성으로 알려드립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속성. 오프라인과정과 온라인 과정 모두 1개월간 양성하여 사진사가 되는 것을 보증합니다. 신입생에게는 매뉴얼북을 제공합니다. 조선사진 전문학원.강습 기간 중에는 카메라를 무상으로 빌려드리는 특전이 있으니 실습은 편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본 학원을 졸업해서 사진관을 개업한 사람이 이미 50명이 넘는데 모두 고수익을 얻고 있습니다. 현재 수강생이 10여 명 있으며 계속 발전할 블루오션 시장이니 여러분께서는 주저하지 마시고 빨리 신청하셔서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아, 100년 전 서울에는 조선사진전문학원이 있어서 사진관을 개업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교육하고 있었군요. 그러고 보니 요즘에는 사진학원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스마트폰이라는 카메라와 익숙한 세대에게 단기속성 과정으로 카메라 기술을 가르친다는 건 어울리지 않는 사업 모델이긴 합니다. 제가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서울 시내에서 사진학원을 가끔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군대 사진병으로 가려고 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속성으로 사진을 가르친다는 학원이 서울 충정로에 있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저 광고에서 제가 주목했던 점은 ‘통신과’라고 표현된 지금의 온라인 강의가 100년 전에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강의실에 직접 오지 않고 사진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었는지, 게다가 전화로 수업을 했다면 통신 비용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가능했을지 무척 궁금합니다. ▶내친김에 1920년대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사진술’에 대한 기사를 좀 더 찾아보았습니다. 몇 가지 흥미로운 기사가 있어 소개하고 싶습니다. 1928년 9월 26일 기사입니다. 그때로부터 35년 전에 촬영된 서울 시내 전체 모습의 사진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기사입니다. 한반도에 사진이 도입된 시기를 1888년경으로 적시하고 있습니다. 한성순보 1884년 3월 14일자 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관은 김용원 씨가 개설한 촬영국이라는 상호의 사진관이 있었습니다. [最初로寫眞박힌 京城市街全圖 – 성곽이 아직도 튼튼하게 남아 있고 초가와 양옥집은 별로 없다“조선에 사진술이 들어오기는 대개 사십년 전, 1888년 경인 듯 하다는데 수입되던 당시에는 일반의 호기심을 자아내는 한편으로 무식한 사람들은 사진을 박히면 생면을 뺏어 간다하여, ‘렌즈’를 보면 도망하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에는 허가를 받지 아니하면 풍경사진도 마음대로 박지 못하였으므로 경성 시가의 사진도 부분적으로 박은 것은 있으나 전체 경성 시내의 사진을 볼 수 없었는데 경성부 부사편찬계에서는 최근에 모 일본인의 집으로부터 당시에 비밀리에 박아 두었던 경성 전경 사진을 구해 보관 중인데, 사진은 왜성대(倭城臺) 부근에서 박은 것인 듯하다하며 아직 성곽(城郭)이 튼튼히 남아 있고 지금과 같은 양옥도 보이지 않아 연대는 대략 35년 전으로 경성을 사진으로 박은 것은 이것이 최초인 듯하다 한다(사진은 35년 전의 대경성)▶ 여성을 대상으로 사진기술을 가르치는 강좌에 대한 기사도 있습니다. 1926년 4월 27일 기사입니다. 원문을 제가 현재의 표현으로 조금 바꾸었습니다. 한번 읽어보시죠. 화학원 안에 여자 사진부 설립 – 이는 여자에게 적당한 직업시내 안국동(安國洞) 근화녀학교(槿花女學校)에서는 시대 요구에 의하여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여자사진과(女子寫眞科)를 동교 안에 특설하고 지명의 기술자를 초빙하여 보통 학교 6학년 졸업 정도의 학생 50명을 모집하여 3개월 동안 가르친 뒤에 특히 연구과를 두어 보통과로 하여금 더욱 충실히 가르치기로 되어 한창 준비 중이라는데 오는 5월 10일까지 일반의 입학원서를 받고 이튿날인 11일부터 개학하리라는 바 이는 적어도 현재의 조선 여자들이 부르짓는 남녀평등과 여성의 권리를 어느 정도까지 확장함에는 여성의 경제적 능력이 필요한 이상 그 능력을 얻고자 함에는 무엇보다 실제 전문 지식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차츰 조선에서도 직업 부인들이 생기는 만큼, 직업 찾는 여성들도 많음으로 그에 응하여 무엇보다 여자에게는 합당한 사진술을 택하여 일반에게 주고자 그와 같이 설치하게 된 것이라더라.▶아래 기사도 흥미롭습니다. 서울시내 사진작가들의 모임에서 봄을 맞아 초보자들에게 사진 강습을 한다는 내용입니다. 1929년 2월 9일자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寫眞師協會講習시내 경성사진사협회(京城寫眞師協會)에서는 신춘사업으로 견습생을 위하여 사진 강습원(講習院)을 설치하고 오는 이월말일부터 시내 관철동 조선사진관(朝鮮寫眞舘)에서 사진술을 가르친다는바 강사는 신락균(申樂均)리완근(李完根)씨 등 오씨라더라.여기서 등장하는 신낙균 씨는 나중에 동아일보 사진기자가 되어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 당시 사진부장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 박주석 교수가 집필한 “한국사진사”(문학동네, 2021)에 정리된 신낙균의 일대기를 잠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899년 무관 종2품이었던 부친 신택희 공의 차남으로 출생. 부친이 을사조약 체결로 관직을 그만두고 경기 안성으로 낙향.인천공립상업학교에서 상업 실무 교육을 받았으나 적성이 맞지 않아 중도에 포기하고 낙향, 결혼 후 서울로 자리를 옮겨 ‘경성관립공업학교 염직과’를 1918년에 졸업. 이 과정에서 사진화학 즉, 현상과 인화를 정밀하게 습득. 1919년 3.1만세 운동 이후 안성에서 벌어진 3.29만세운동 사건에 가담해 수배 상태가 됨. 도피 도중 아마추어 사진가이던 매부 정욱진으로부터 사진술을 접함. 1922년 일본으로 유학. 동경정칙학교에서 1년간 영어 전공, 이후 동양대학교 문화학과에 재입학하여 2년간 문화사와 이론 공부. 1926년 동경사진전문학교 입학. 1927년 졸업 후 6년 만에 귀국. 그의 나이 28세에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YMCA) 초빙 사진과 교수로 취임. 당시 YMCA는 영어과, 일어과, 목공과, 철공과, 기계과, 염직과, 사진과 등의 실무교육을 하고 있었음. 1926년 경성사진사협회 결성. 1934년 동아일보 입사. 1933년 신설한 동아일보 사진부(당시 사진과)에 1934년 입사. 초대 과장 최복순에 이어 2대 사진과장으로 취임. 1936년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건’ 주도로 일제에 체포. 사진기자 서영호에게 일장기 말소를 직접 지시하고, 사진 제판 과정에서 동판에 청산가리를 뿌려 일장기를 완전히 삭제하도록 함. 백운선, 서영호 등 사진부 후배 기자들과 함께 구속. 사진수정의 발안자로 알려진 운동부 기자 이길용, 화가 이상범, 사회부장 현진건, 기자 장용서, 잡지부장 최승만 등도 구속. 1937년 9월 동아일보 퇴사. 안성과 인천 등지에서 취직 및 사업. 1955년 수원북중학교 화학과 공민 교사로 근무 중 교정에서 뇌일혈로 사망▶오늘은 100년 전 서울에서 사진기술을 가르치고 배우려던 열정과 비즈니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계신 사진기술에 관한 또 다른 역사가 있으시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종로구청에서 직원이 발급된 여권을 정리하고 있다. 겨울방학과 설 연휴 등으로 해외여행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최근 시민들의 여권 발급 신청이 늘고 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누군가 눈 위에 그려놓은 마음. 반려견도 그 따뜻한 ‘반려’의 마음을 느꼈는지 밟지 않고 피해 가려나 봅니다. ―경기 광명시 광명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서울역사박물관장(최병구)은 29일 2023년 서울미래유산 기록 사업의 결과를 묶은 조사보고서 『서울의 인장포』를 발간했다고 밝혔다. 서울미래유산기록 사업은 2020년부터 근현대 시민들의 생활사를 주제별로 정리하는 작업이다. 이번에 발간된 『서울의 인장포』는 네 번째 작업이며 그 전에 발간된 보고서는 ▴낙원떡집 ▴서울의 대장간 ▴서울의 이용원이었다. 서울역사발물관에서 작성한 보도자료와 참고이미지를 바탕으로 하되, 동아일보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사진을 추가해 근현대사의 한 단면을 ‘도장 가게’라는 키워드로 살펴보았다. ▶인장포는 말 그대로 인장을 제작하는 가게이다. 지금은 ‘컴퓨터 도장’이라고 불리는 기계 조각 인장이 등장했지만 그 전에는 사람이 직접 수작업으로 깍아서 도장을 만들었었는데 그 작업을 했던 가게에 대한 기록이다. ▶조선시대 한국의 인장은 크게 새보(璽寶), 관인(官印), 사인(私印)으로 구분된다. 개인이 사용하던 인장인 사인(私印)은 서화(書畫)의 낙관(落款)이나 서적의 장서인(藏書印) 정도에 그쳤다.인장이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의 일이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일본인의 경제활동을 합법적으로 보호하고, 조선인들의 경제활동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1914년에 「인간증명규칙」을 반포하며 강제 도입됐다. 국가차원에서 인감 사용을 강제하면서 인감 도장을 만드는 가게도 성업하게 된 것이다. ▶ 1974년에는 「국가기술자격법」의 시행으로 인장공예기능사(1급· 급·기능사보)자격시험 제도가 도입됐다. 하지만 응시 수요 감소로 인해 2004년에 폐지됐다. 2000년대 들어 컴퓨터 인장 제작과 서명 거래가 일반화되고, 공인인증서 도입 등을 거치며 인장업은 줄곧 사양산업의 길을 걷고 있다. 한편, 2000년대 이후 인장은 문화상품으로서의 가치를 확장하고 있다. ‘탯줄 도장’이나 ‘수제 도장’이라 불리는 캘리그래피 디자인 한글 인장이 대표적이다.▶ 이번 서울역사박물관의 조사 결과, 서울에서 1950년대부터 활동해 온 오래된 인장포 5곳과 인장 명장들이 새삼 조명을 받았다. 박인당(博印堂), 거인당(巨印堂), 옥새당(玉璽堂),여원전인방(如原篆印房), 인예랑(印藝廊) 등 5곳이다. ▶보고서는 서울 인장포의 특성으로 첫째, 도시화 과정에서 손재주 있는 지방 사람이 서울에 정착하면서 택한 업종 중에 하나라고 밝히고 있다. 6.25 전쟁이 끝나고 생계 수단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모였는데 이 중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 ‘사장님’이 될 수 있는 가장 쉬운 업종이 인장업이었던 것이다. 책상만 있으면 창업할 수 있는 업종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조사한 서울의 인상포 5곳 모두 1950년대 이후 상경한 지망민이 운영한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어려서부터 한자를 공부했고 손재주를 무기로 서울에 가게를 차릴 수 있었다. “서울에서 인장포 하는 사람들은 5·16 이후에 다 지방에서 온 거예요. 그때부터 서울에 회사가 많이 생기고 일이 많았으니까요. 반도호텔 근방이 다 회사였어요. 옛날에는 관공서에서 문서를 처리하는 데 사용하는 인장이 300~400종에 달했어요. 그래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좋았죠. 인장을 다 손으로 새길 때니까 인쇄 기술자보다 인장 기술자가 훨씬 벌이가 좋았어요.” 유태흥(남, 1941년생, 거인당) 인터뷰.▶서울 인장포의 두 번째 특성으로는 유사 업종과 공간을 공유한다는 점이다. 서울의 높은 임대료를 감당하며 내 점포를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인장포는 다른 업종과 공간을 공유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인장 작업에는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했는 데 인장업에서는 이를 ‘겹살이’라 부른다. 특히 유사 업종인 인쇄소, 문구점 등의 한쪽 공간을 이용해 영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도심에 있는 대형 문구점이나 창신동과 인현동의 인쇄소에는 ‘인장부’가 있었다.“1964년에 을지로5가에 있는 인쇄 가게 문 앞에 책상 하나 빌려서 독립을 했어요.”박호영(남, 1938년생, 박인당) 인터뷰“가게에 책상 하나씩 빌려주고 자릿세를 받았어요. 우리 집에 많을 때는 조각사가한 5~6명 있었어요. 그래서 1970년대부터는 도장은 안 새기고 그냥 세 받으면서재료만 취급했죠.“ 박순옥(남, 1930년생, 영광인재사) 인터뷰▶서울 인장포의 세 번째 특징은 도시 발전에 따라 부침을 겪었다는 점이다. 서울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30년 동안 압축성장을 했다. 1970년대 강남개발이 본격화하기 이전 서울의 주요 시설과 기업체는 사대문 안쪽 지역에 밀집했다.당연히 그 시기 서울의 인장포는 대표적인 상점가인 종로와 충무로 일대에 자리했다. 이후구로공단, 여의도 개발 등 굵직한 도시 개발을 쫓아 인장포도 이동해 영업을 이어갔다.“내가 인장 배우면서 처음 했던 곳은 다동 58번지였어요. 거기서 선생님하고 같이 일하다가 그 옆으로 옮기고, 또 옮기고 그랬죠. 또 구로공단 한일은행 바로 옆에 있다가 군대 갔다 와서 1977년에 대일사를 개업했어요. 거기서 2년 있다가 여의도 국민은행 본점이 있는 중앙빌딩으로 옮겼죠. 1980년에 여의도 처음 갔을 때만 해도 풀밭이었어요.” 조규호(남, 1957년생, 한국인장협회 회장) 인터뷰 1960년대 후반부터 서울에서는 현대식 고층 건물과 넓은 도로를 건설하고,주차장과 공원을 만들어 도심을 현대화·고도화하는 ‘도심재개발’ 사업이 전개됐다.이에 따라 도심의 저층 고밀 건물의 상가를 임차한 인장포들은 도심재개발과 함께잦은 이전을 하며 부침을 겪었다.“지금 영풍문고 짓기 전에 그 앞에 가게들이 쭉 있었어요. 그중 하나를 보증금 50만 원에 얻었어요. 공간은 한 평도 안 됐어요. 손님 하나 들어오면 꽉 차는 가게였어요. 그렇게 1년 반쯤 했는데 빌딩 짓는다고 가게를 비워달라고 하더라고요. 보증금 50만 원에 위로비 150만 원을 받아서 구몬빌딩에 480만 원짜리 가게를 얻었어요. 거기서 한 10년 했죠. 그런데 또 빌딩 짓는다고 비워달라는 거예요.” 박호영(남, 1938년생, 박인당) 인터뷰▶ 서울역사박물관 최병구 관장은 “인장은 우리나라와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 일부 국가의 특수한 문화임에도 불구하고, 독창성과 예술성을 지닌 수조각(手彫刻) 인장의 전승 단절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이번 조사를 통해 인장 세공 기술과 도구를 현장 조사 방식으로 생생하게 기록해냈다는 점에서 앞으로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전했다. 『 서 울 의 인 장 포 』 조 사 보 고 서 는 서 울 역 사 박 물 관 누 리 집(http://museum.seoul.go.kr)에서 열람할 수 있다. 구입은 서울책방(https://store.seoul.go.kr) 또는 서울역사박물관 내 기념품점에서 가능하다. (가격 14,000원, 문의 02-739-7033).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5일 서울 영등포구 신길5동 주민센터에서 폐종이팩을 반납한 주민이 두루마리 화장지를 받아 가고 있다. 영등포구는 재활용 활성화를 위해 폐건전지 20개를 모아 오면 새 건전지 2개로, 우유팩 등을 헹궈서 건조해 가져오면 3kg당 두루마리 화장지 1개로 교환해주는 사업을 한다고 밝혔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오늘은 두 장의 인물 사진을 준비했습니다. 우선 여성 두 명이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입니다. 제목은 ‘사회봉사하는 두 여자’입니다.기사를 읽어보니 유아사망율이 높은 조선의 상황을 걱정해 미국 감리교가 파견한 미국인 여의사 ‘로선복’(왼쪽)씨와 조선인 산파 ‘한신광’씨가 무료 진료 봉사를 이어가고 있다는 스토리입니다.다음 사진을 보겠습니다. 콧수염의 백인 남성이 카메라를 응시하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습니다. 제목을 보니 ‘영국 내각 조직의 대명을 수락한 노동당 수령 맥도날드씨’입니다. 영국 런던 발 기사인데, 로동당 총재 람제 맥도날드씨가 차기 영국 내각의 수장이 되었다는 뉴스입니다. ▶우선, 사진 속 모델들이 모두 정면을 바라보고 있지만 느낌이 완전히 다릅니다. 한 장은 봉사의 따뜻한 온도가 전달되는 반면, 남성의 사진은 지난주 한반도를 강타했던 한파만큼 서늘한 느낌을 줍니다. 당시 카메라 기술로도 충분히 웃는 모습을 촬영할 수 있었지만 차가운 표정으로 포즈를 취했었네요. 저 남성이 카메라를 보고 웃고 있었으면 어땠을까요? 좀 따뜻했을까요?▶100년이 지난 요즈음 출근하는 지하철역에는 4월에 치러지는 국회의원 선거에 나갈 예비후보들이 명함을 들고 시민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빠듯한 출근 시간이라 일단 명함을 건성으로 받은 후 지하철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며 들여다보게 됩니다. 후보자들 시선의 방향이 어떤가요? 여러분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나요? 아니면 허공이나 먼 곳을 바라보고 있나요? ▶정면을 바라보는 사진은 강한 감정을 전달합니다. 웃음도 차가운 표정도 모두 정면일 경우 강하게 뇌리에 남습니다. 몇 년 전 시리아 폭격으로 상처를 입었던 어린아이가 앰블란스 의자에 앉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정면을 보고 있는 사진이 지구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아프리카 구호 단체의 포스터에 등장하는 어린아이들도 우리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를 잊지 말아요”입니다. 국회의원에 나오려는 후보들은 거의 정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신인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감정을 건드리는 정면 샷은 때로는 보는 사람을 거북하게 하기도 합니다. 특히 광고에서 시선을 끌기 때문에 효과가 있다는 ‘3B’(Beauty, Baby, Beast – 미인, 아기, 애완동물)가 아닐 경우 보는 사람이 불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문에 실리는 인물 사진 중에서 정면을 바로 보는 사진은 할 얘기가 분명한 인터뷰 대상자이거나 본인이 만든 제품을 광고하거나 자랑거리가 있는 사람들 모습입니다. 정치인이나 권력자가 정면을 바라보는 것은, 처음 인사를 하러 세상에 나왔거나 아니면 권위를 강조하기 위한 장치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잘 생각해보시면 낯설고 나이 많은 남성이 우리를 바라본다면 때로는 위협을 느끼기도 할 겁니다. 그래서 다선 의원이나 인지도가 높은 인물들의 경우, 명함이나 포스터 속에서 이상향을 바라보듯이 시선 처리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는 카메라 밖을 바라봅니다. ▶꼭 정면을 보는 사진을 명함이나 포스터에 사용해야 할 경우 혹은, 그리고 본인이 3B의 요소가 주는 매력과 멀다고 느낄 경우 어떻게 해야할까요? 최소한 2024년 대한민국에서는 웃어야 할 것 같습니다. 100년 전 영국 노동당 당수 같은 무표정한 표정은 선거 필패의 요소가 되기 십상이니까요. 아무래도 지금은 유권자 우세 시장 아니겠습니까?▶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노련한 정치인들은 신문에 실리는 사진이 찍힐 때도 시선 처리를 잘합니다. 얼굴은 정면이지만 묘하게 눈은 독자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잘 보면, 카메라를 응시하는 시선이 아닙니다. 어쩌다 카메라를 본다고 하더라도 정면에 있는 사회자를 보거나 누군가와 소통하는 시선이지 카메라 기자들을 향해 포즈를 취하는 시선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정면을 응시하는 사진은 보는 사람에게 ‘나는 숨기는 게 없다, 정직한 사람이다’라는 메시지를 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1960년도 미국 대통령 토론회에서 케네디는 닉슨에 비해 카메라를 직접적으로 응시하는 시간이 훨씬 길었고 젊은 외모와 함께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줌으로써 승리했다는 고전적 증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론과 실제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시대도 다르고 문화 배경이 다르다면 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 지난주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과 김경율 비대위원 사진을 보면서 저는 어색함을 느꼈습니다. 당시 사진에 붙은 설명은 이랬습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17일 오전 서울 마포구 케이터틀에서 열린 국민의힘 서울시당 신년인사회에서 김경율 비대위원과 함께 주먹을 쥐고 있다”. 팔을 든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두 명의 중년 남성들. 두 사람의 시선은 뭔가를 강하게 말하고 있을 때의 시선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한 두 팔은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로 선출되었을 때처럼 승리의 순간에 어울립니다. 일반적인 행사 사진과는 거리가 있어 좀 더 로우키(low key)로 설정했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100년 전 신문에서 독자를 바라보던 세 사람의 시선을 주제로 지금의 정치 사진을 잠깐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댓글로 의견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전국적으로 동장군이 맹위를 떨치는 가운데 24일 오후 부산 동래구 복천동 고분군 산책로에 매화가 피어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요 며칠 한파 덕에 ‘눈고양이’가 장수하고 있네요. 오늘부터 추위가 누그러진다는데, 내일 또 볼 수 있을까요? ―서울 성동구 한양대 앞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2일 오전 서울 중구의 전통문화 복합공간인 ‘한국의 집’에서 KGC인삼공사 정관장 모델들이 ‘힘내라는 말 대신 정관장’ 행사를 알리기 위한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정관장은 28일까지 구매 금액대별로 ‘에브리타임 필름’ ‘청과세트’ ‘장수율지’ ‘한우세트’ 등을 제공하는 이벤트를 진행한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